[재미있는 가톨릭 교리] (6)성경의 배경굴곡 많은 이스라엘의 역사 성경은 이스라엘 역사를 배경으로 한다. 따라서 이스라엘 백성의 역사를 알면 성경을 바르게 이해할 수 있다. ▶성조시대 이스라엘 민족은 노아의 아들 셈족의 후손이다. 유목민이던 성조 아브라함은 하느님 부르심을 받아 가나안에서 정착생활을 시작했다. 아브라함과 그의 후손, 곧 이사악과 야곱 그리고 야곱의 열두 아들 시대를 성조시대라고 한다. 1아브라함 하느님은 아브라함에게 땅과 자손의 번영을 약속하셨고 그와 계약을 맺으셨으며, 아브라함은 계약에 충실했다. ②이사악 하느님과 아브라함의 계약은 아브라함의 아들 이사악에게 계승됐다. 이사악의 아들 중 맏아들의 권리는 형 에사우가 아닌 동생 야곱에게 계승됐다. ③야곱 야곱은 형 에사우의 복을 가로챈 탓에 하란으로 도망갔고, 그곳에서 라반의 딸들과 혼인해 열두 아들을 낳았다. 야곱은 하느님과 씨름해 승리함으로써 하느님께 이스라엘이라는 새 이름을 받았다. ④야곱의 열 두 아들 야곱의 열 두 아들 이름은 르우벤ㆍ시메온ㆍ레위ㆍ유다ㆍ이사카르ㆍ즈불룬ㆍ요셉ㆍ벤야민ㆍ단ㆍ납탈리ㆍ가드ㆍ아세르이다. 이들은 이스라엘 열 두 지파의 기원이 된다. ▶출애굽시대 야곱과 열두 아들은 "이집트 땅 고센지방에 머물게 되었다. 그들은 그곳에 소유지를 얻어 자식들을 많이 낳고 크게 번성하였다"(창세 47,27). 그러나 이집트의 억압이 심해지자 이스라엘 백성은 하느님께 부르짖었고 그 결과 하느님의 도우심으로 무사히 이집트를 탈출했다. 출애굽, 즉 이집트 탈출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느님의 구원 역사를 체험한 결정적 사건으로, 이스라엘 신앙의 근본이자 핵심이 된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를 기념하기 위해 세세대대로 파스카 축제를 지낸다. ▶광야 유랑시대 이스라엘 백성들은 사십 년 동안 광야에서 유랑생활을 하고, 시나이 산에서 하느님과 계약을 맺었다. 하지만 하느님 말씀을 거역하고 모세에게 반항하며 금송아지를 숭배해 계약을 깨뜨렸다. 그 후 그들이 저지른 죄를 반성하며 하느님 백성으로 새로 나는 성찰의 시간을 가졌다. ▶판관시대 광야 유랑생활을 마침 이스라엘 백성들은 여호수아의 지휘로 가나안에 들어갔다. 100~150여 년에 걸쳐 전쟁을 치르면서 그 땅을 점령했고 열두 지파별로 땅을 나눠 가졌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왕정 수립 전까지 판관시대를 거쳤다. 판관이란 정치ㆍ군사ㆍ종교 지도자를 말한다. ▶왕정시대 가나안에 정착한 이스라엘 백성들은 임금의 필요성을 깨달아 첫 왕조 사울 왕국(기원전 1020~1000년경), 다윗 왕국(기원전 1000년~961년경), 솔로몬 왕국(기원전 961~922년경)을 세웠다. ▶왕국 분열시대 이스라엘은 솔로몬 임금 사후(死後) 강제노역과 과중한 세금 때문에 생긴 갈등으로 북이스라엘과 남유다로 갈라졌다. 북이스라엘에서는 엘리야와 엘리사 등의 예언자가, 남유다에서는 미카와 스바니야 등의 예언자가 활동했다. ▶왕국 멸망과 바빌론 유배시대 북이스라엘은 기원전 721년 아시리아에 패망했다. 남유다는 기원전 597년과 587년 두 차례 공격을 받아 신 바빌로니아에 패망했다. 예루살렘이 함락되고 솔로몬 성전이 파괴됐으며 많은 지도자들이 바빌론에 유배를 갔다. ▶예루살렘 귀환과 왕국 재건시대 이스라엘 백성들은 기원전 538년 바빌론 유배에서 해방돼 예루살렘으로 귀환했고, 하까이, 예수아, 느헤미야 등을 중심으로 성전과 성벽을 재건했다. 그동안 하느님과의 계약에 불충실했던 자신들과 조상들의 삶을 반성하고 종교ㆍ사회적 개혁을 단행했다. ▶헬레니즘시대 기원전 333년 알렉산더 임금이 지중해 연안을 통일하면서 이스라엘은 그리스의 정치ㆍ경제ㆍ문화적 영향을 받게 된다. 기원전 167년까지 이스라엘을 지배했던 셀레우코스 왕국의 안티오코스 4세가 박해를 하자 이스라엘은 마카베오 가문을 중심으로 독립항쟁을 시작했다. 마침내 기원전 142년 유다 마카베오가 예루살렘 성전을 탈환, 이스라엘은 자주 독립국가로 인정받아 하스모네아 왕국을 건설했다. ▶로마시대 기원전 63년 폼페이우스가 예루살렘에 입성해 이스라엘은 다시 로마 지배를 받았다. 로마 최초의 황제 아우구스투스 재위 시절, 베들레헴에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탄생하셨다. 이스라엘은 기원후 70년 로마에 의해 완전히 함락됐다. 이때부터 이스라엘 백성은 '약속의 땅'에서 쫓겨나 전 세계로 흩어졌다. 제공=서울대교구 사목국조은일2011.07.05
![[성경 속 궁금증] (5) 유다인은 왜 사마리아 사람들을 경멸했나?](//cpbc.co.kr/CMS/newspaper/2011/09/rc/388989_1.1_titleImage_1.jpg)
[성경 속 궁금증] (5) 유다인은 왜 사마리아 사람들을 경멸했나?순수 혈통 보존 못했기 때문유다인들은 혼혈민족이라는 이유로 사마리아인들을 멸시했다. 그림은 빈센트 반 고흐가 그린 '착한 사마리아인'(1890년). 예수님 시대 이스라엘 땅 제일 북쪽에는 갈릴래아가 있었고, 중간에는 사마리아, 남쪽에는 유다 지역이 자리 잡고 있었다. 북쪽 갈릴래아에서 남쪽 유다 지역으로 가는데 사마리아 땅을 통과하면 사흘밖에 걸리지 않지만 유다인들은 사마리아 땅을 밟지 않고, 요르단 강을 건너 두 배나 되는 먼 길을 돌아다녔다. 당시 유다인들은 사마리아 사람들과 접촉하거나 대화하는 것이 금지돼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우리가 이방인 지역이라 알고 있는 사마리아 지역도 본래는 유다인들 땅이었다. 사마리아인들도 이스라엘 중부 팔레스티나 지방에 살았던 이스라엘 민족의 한 분파였다. 어쩌다 유다인들과 사마리아인들은 그토록 적대시하게 됐을까. 본래는 통일 왕국이었던 이스라엘은 솔로몬 왕 이후 북이스라엘 왕국과 남유다 왕국으로 분열됐다. 사마리아는 북이스라엘 왕국의 수도였으며, 오늘날 북이스라엘을 부르는 통칭이기도 하다. 사마리아는 지정학적으로 중요한 교통 요지였으며, 주변 평지보다 100m 정도 솟아오른 해발 430m에 있는 천혜의 요새 도시였다. 또 왕궁을 상아로 꾸미고 값비싼 향유를 맘껏 쓸 정도로 경제적 번영을 누리기도 했다(아모 6,4-6). 이러한 사마리아가 기원전 8세기 아시리아에 점령당한다. 아시리아는 타민족 정복정책으로 정복한 민족의 씨를 말려버리는 정책을 사용했는데, 그 방법으로 타민족과 혼인, 즉 혼종(混種)정책을 썼다. 북이스라엘 왕국을 정복한 아시리아는 북이스라엘 유다인들 일부를 자기들이 정복한 타지역으로 강제 이주시키고, 타정복지 민족들을 북이스라엘로 이주시켜 서로 혼인하게 했다. 그래서 북이스라엘 왕국에서는 순수한 혈통 유다인들은 자취를 감추고, 예수님 시대 이방인이라 일컬어지던 혼혈민족 사마리아인들이 그 자리를 차지하게 됐다. 순수한 혈통을 지닌 유다인들은 남쪽 유다왕국 후손들뿐이었다. 이 유다인들은 사마리아인들을 약속받은 땅을 공유하는 자신들 민족으로 더 이상 받아들이지 않았다. 순수한 혈통을 보존하지 못한 사마리아인들을 심지어 '개 같은 놈'이라 부르며 멸시하고 천대했다(요한 4,1-42). 사마리아인들 역시 아시리아 임금 보호를 받으며 나라를 유지한 유다왕국 유다인들이 자신들을 이방인처럼 대하자 원한을 품었고, 결국 유다인과 사마리아인들은 원수지간처럼 지내게 됐다. 그러다 기원전 587년 유다왕국도 바빌로니아에게 멸망당하고, 유다인들은 유배 후 반세기만에 고향 예루살렘으로 돌아온다. 하지만 당시 예루살렘은 성벽조차 제대로 남지 않은 폐허가 된 도시였다. 귀향한 유다인들은 예루살렘 재건을 위해 성전 재건 작업을 시작한다. 이때 사마리아인들이 자신들도 성전 건설 작업에 참여하게 해달라고 요청한다. 하지만 유다인들은 사마리아인들이 거룩한 성전 건설 작업에 함께할 수 없다고 거절한다. 이 사건으로 유다인들과 사마리아인들 사이에 놓인 적개심의 골은 더 깊어졌다. 사마리아인들은 유다인들을 계속 적대시했고, 유다인들은 사마리아인들을 미친 백성, 비열한 백성으로 철저히 무시하고 천대했다. 이러한 관계가 예수님 시대까지 이어진 것이다. 허영엽 신부(서울대교구 문화홍보국장) 퇴사자22011.09.06
![[출판] 하느님의 길, 인간의 길](//cpbc.co.kr/CMS/newspaper/2010/12/rc/360826_1.0_titleImage_1.jpg)
[출판] 하느님의 길, 인간의 길하느님과 인간의 눈높이로 풀어쓴 이스라엘 역사정진석 추기경 지음/가톨릭출판사/1만4000원 서울대교구장 정진석 추기경이 이스라엘 역사를 하느님과 인간의 눈높이로 풀어쓴 「하느님의 길, 인간의 길」을 펴냈다. '성경을 토대로 살펴본 이스라엘 예언자들과 임금들'을 부제로 달았다. 「하느님의 길, 인간의 길」은 변천과 흥망을 반복한 이스라엘 역사 안에서 하느님이 선택한 민족에게 약속한 것을 구현하는 섭리와 사랑의 흔적을 기록했다. 기원전 933년 솔로몬에 이어 임금이 된 르하브암이 무거운 세금과 강제노역에 허덕이는 백성들의 요구를 묵살하자, 북쪽 열 지파가 예로보암을 북쪽 이스라엘 왕국의 임금으로 세우면서 이스라엘은 남북으로 갈렸다. 이후 엘리야를 비롯해 나탄, 스마야, 아히야 예언자들이 나타나 종교 부패와 사회 불의를 비판하지만, 임금들은 대부분 우상을 숭배하며 악행을 서슴지않는다. 결국 북쪽 이스라엘은 기원전 722년, 남쪽 유다는 기원전 587년에 멸망하고 이스라엘인들은 바빌론으로 유배를 간다. 이 책은 다윗과 솔로몬 시대 이후 남북으로 분열된 이스라엘이 멸망하기까지 과정과 원인을 담았다. '이스라엘의 영도자들' '남북 분열 초기 임금들과 예언자들' ' 바빌론의 침략과 예루살렘 함락' 등 모두 12장으로 짜여졌다. 하느님의 길을 보여주며 충고하는 예언자들과 그 충고를 무시한 채 인간의 길을 걸어간 이스라엘 임금들의 삶을 보여준다. 시대 흐름에 따라 연대와 특징을 정리하고, 독자들 이해를 돕기 위해 그림과 지도를 실었다. "이집트를 탈출한 이스라엘 자손들은 광야에서 육체적 고난과 배고픔을 참지 못했습니다.(중략) 이집트의 노예로 살면서 그들의 우상 숭배를 보고, 듣고 체험했던 세대는 비록 물질적 혜택이 없는 광야에서라도 주님을 마음껏 경배할 수 있는 자유인의 영적 풍요로움을 인식하지 못한 것입니다."(19쪽) 정 추기경은 하느님께 선택된 이스라엘 민족들은 흥망성쇠의 길을 걸었지만, 그 길에는 사랑의 끈으로 연결된 하느님의 구원 손길이 머물고 있음을 분명하고 사실적으로 전달해준다. "아브라함의 손자 야곱은 하느님과 씨름하여 이스라엘이라고 불리게 되었습니다. 이 이름은 '하느님께서 당신을 강하게 드러내시기를!'이라는 뜻입니다."(15쪽) 정 추기경은 머릿말에서 "갈등과 증오로 인한 전쟁이 정의라는 명분을 내세워 잔인무도한 살상과 인종 말살의 만행을 날마다 자행하고 있는 것이 오늘의 현실이다"고 개탄하면서, "인간은 작디작은 시공간을 점유하고 있는 작은 먼지에 불과하지만, 그 유한함 속에서도 우주를 인식하고 그 근원을 생각할 수 있는 위대한 존재다"고 말했다. 이어 정 추기경은 "하느님께서 보여주신 길을 걸어가라고 충고하는 예언자들과 그 충고를 경시하고 인간의 길을 걸었던 이스라엘 임금들을 살펴보면서 우리는 하느님의 길을 걸어야 한다는 교훈을 얻는다"며 하느님께서 인류를 창조하고 구원하시는 경륜을 이스라엘 역사를 통해 조금이나마 헤아릴 수 있기를 기대했다. 부제 때부터 1년에 한 권씩 책을 내고 있는 정 추기경은 교회법 해설서 15권을 저술한 교회법 권위자로, 올해로 역서를 포함해 모두 49권의 책을 펴냈다. 이지혜 기자 bonaism@pbc.co.kr 이지혜2010.12.14
창조의 하느님: 탈신화 작업](//cpbc.co.kr/CMS/newspaper/2011/08/rc/388160_1.1_titleImage_1.jpg)
[조규만 주교의 하느님 이야기](13)창조의 하느님: 탈신화 작업하느님에게서 모든 것 시작 이번 호에서는 '성경에 나타나는 창조 이야기'를 통해 창조주 하느님을 알아보겠다. 구약에서 창조에 관한 기록은 창세기 1-2장을 비롯해 이사야서 40-55장, 시편 8, 19, 24, 44, 74-75, 90, 95, 104, 136, 148-150장, 잠언 8,22-31, 전도 3,18-22, 욥기 30-40, 2마카 7,28 등에서 찾을 수 있다. 구약성경의 창조기록은 자연과학적 증명을 시도하는 게 아니다. 구약 작가들 관심은 세상과 인간의 창조과정이 아니라 이스라엘의 하느님이 창조주라는 점을 강조하는 데 있다. 창세기 1-3장 창조 이야기를 살펴보면 서로 다른 두 이야기가 연결돼 있음을 알 수 있다. 두 창조 이야기는 주제가 같지만 배경과 문체, 서술방식, 기록자 등이 다르다. 문헌 가설에 의하면 1,1-2a 이야기는 제관계 문헌에 속하고 2,4b-3,24는 야훼스트계 문헌에 속한다. 이스라엘의 창조관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과 바빌론에 있을 때 형성됐다. 야훼스트계 문헌은 솔로몬(기원전 962~922) 시대 유다 지방에서, 제관계 문헌은 유다왕국이 멸망(기원전 587)하고 바빌론으로 끌려간 시기에 쓰였기 때문이다. 이스라엘에서 하느님을 우주 창조주로 고백한 것은 상당한 후기에 들어서다. 이스라엘은 하느님을 창조주로서가 아니라 계약의 주님으로 체험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유일신론과 계약, 두 가지가 곧 구약성경의 일차적 자료이고 모든 다른 자료는 이 두 자료에서 나왔다. 야훼에 대한 이스라엘의 전적 신뢰는 바로 하느님이 우주 창조주요, 절대자라는 신앙에 뿌리를 둔다. 하느님이 우주 창조주라는 신앙은 구체적으로 체험한 구원행위를 통해 얻게 됐다. 이스라엘은 어떻게 하느님이 우주와 인간의 창조주라는 인식에 도달했을까? 몇 가지 가설이 있다. 우선 아담에서부터 입에서 입으로 전승됐다는 주장이다. 그렇긴 해도 창세기가 인류 역사만큼 오랫동안 구전됐다는 주장은 신빙성이 없다. 두 번째는 하느님이 영감을 통해 자구적으로 직접 계시하셨다는 주장이다. 가장 편리한 설명인 만큼 가장 신빙성 없는 설명일 수 있다. 성경에서 볼 수 있는 모순되고 반복된 진술은 하느님을 변덕쟁이로 보이게 만든다. 세 번째는 하느님이 창조주라는 것은 역사적 원인론적 진술이라는 설명이다. 가장 설득력 있는 주장이다. 이는 결과에서 원인에 대한 진상과 해명을 찾는 고고학적 방법과 같다. 이를테면 뱀이 배를 땅에 붙이고 기어 다니는 것과 인간이 고통스럽게 일해야 하는 것은 모두 하느님 심판 때문이라고 결론짓는 것이다. 창세기의 창조 진술은 역사적 기원론과 신화적 기원론이 혼합된 형태다. 제관계 문헌은 몇 가지 특징이 있다. 하느님 말씀에 따라 세상이 창조되고 존재한다는 믿음이다. 족보를 중시하고 설화를 교훈적 목적으로 사용한다. 창세기 홍수설화에서 중요한 것은 사건 자체가 아니라 하느님 능력과 계약으로 나타나는 하느님 자비다. 이런 관점에 따라 하느님, 세상 창조, 인간 창조, 제의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창조 제7일의 도식을 살펴보겠다. 1)창조주 하느님 창조신앙은 구원신앙의 시작이요, 구원은 창조의 완성이다. 제관계 문헌은 하느님은 아무도 견줄 수 없는 독특한 분이라는 신앙고백에서 시작한다. 하느님 말씀에 의한 창조는 매우 고도로 발전된 형태의 창조다. 창조 진술에는 △만들기나 행위 △생식과 출생 △투쟁 △말 등 4가지 방식이 있다. 진흙으로 사람을 창조한 것과 같은 '행위를 통한 창조'는 원시적 형태에 속하지만, '말씀에 의한 창조'에는 신적 위격의 헤아릴 수 없는 신비가 드러나 있다. 2)세상 창조 제관계 문헌은 6일간의 창조 작업이 창조적 분리로 이뤄지고 있음을 전하고 있다. 무질서한 상태에서 체계적 질서가 마련되며, 이는 하느님과 하느님이 아닌 것을 구별해내는 작업이다. 이스라엘 핵심 사건인 출애굽도 갈대바다(홍해) 분리로 이뤄지는 것이다. 창세기는 창조주와 창조물의 깊은 간격과 차이를 말하고자 한다. '한 처음'이라는 단어는 모든 것에 앞서 있는 절대적 시작을 말한다. 영원하신 하느님이 곧 처음이자 마침(묵시 22,12)이라는 신앙을 엿볼 수 있다. 하늘과 땅의 시작이 있었다는 사실을 말하려는 게 아니라 하느님에게서 모든 것이 시작됐음을 선포하는 것이다. '하늘과 땅'은 우주 일체를 의미한다. 성체성사에서 빵과 포도주가 일체의 음식을 의미하는 것과 같다. 낮과 밤, 하늘과 땅, 물과 바다 세 가지 분리작업으로서 첫 사흗날의 창조가 완료된다. 창조적 작업으로서 분리는 혼돈을 극복한다. '초목의 창조'는 새로운 창조과정으로 접어듦을 의미한다. '해, 달, 별들의 창조'는 고대 동방지역에서 신으로 여겼던 천체를, 창공을 장식하는 창조물에 지나지 않는다고 표현한 것이다. 창세기는 천체 숭배를 우상으로 간주한다. '물고기와 새, 짐승들의 창조'에는 축복이 따라 붙는다. 동물 창조는 식물 창조와 다르다. 동물 창조는 인간 창조를 향한 준비 단계를 마련하는 것이다. 정리=이힘 기자 lensman@pbc.co.kr ※'조규만 주교의 하느님 이야기'는 평화방송 라디오(FM 105.3㎒)에서 매 주일 오후 6시 5분에 방송되며, 평화방송TV에서는 매주 화요일 오전 8시(본방송), 수요일 새벽 4시와 저녁 9시, 금요일 오후 4시, 주일 오후 6시에 재방송된다. 인터넷 다시 보기 www.pbc.co.kr퇴사자22011.08.30
![[재미있는 가톨릭 교리] (4)성경은 무엇인가](//cpbc.co.kr/CMS/newspaper/2011/06/rc/380856_1.1_titleImage_1.jpg)
[재미있는 가톨릭 교리] (4)성경은 무엇인가성령으로 쓰인 하느님 말씀 우리는 성서(聖書)와 성경(聖經)이라는 말을 함께 사용한다. 성서는 '거룩한 글(책)', 성경은 '거룩한 경전'이라는 뜻인데, 두 명칭에 큰 차이가 있는 것은 아니다. 둘 다 '성령의 감도로 쓰인 하느님 말씀'을 가리킨다. 그런데 공동번역을 사용할 때는 주로 성서라고 했으나, 2005년 새 번역 「성경」 발간 이후 경전(經典)이라는 의미를 강조하기 위해 성경이라고 일컫는다.7세기께 이집트에서 기록된 후리어 성경사본(Freer Gospels)의 표지 그림. 마태오와 루카 두 사도가 성경을 들고 있다. ▶1100여 년에 걸쳐 기록돼 성경의 원저자는 하느님이다. 하느님 계시로 하느님을 알게 된 사람들이 하느님께서 그들에게 베푸신 구원 역사를 성령의 감도를 받아 기록한 것이 성경이기 때문이다. 구약성경은 이스라엘 백성이 체험한 하느님의 구원 역사를 기록한 것이고, 신약성경은 초대교회 공동체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체험한 하느님의 구원 역사를 기록한 것이다. 성령의 감도를 받아 성경을 기록한 사람이 구체적으로 누구인지 한마디로 말하기는 어렵다. 성경에 기록된 이야기는 오랜 세월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는 구전(口傳) 단계를 거치다가 글로 쓰이기 시작했고, 글로 쓰인 기간 역시 장구하며, 기록과 편집에 참여한 저자와 편집자 역시 많기 때문이다. 따라서 구약성경은 이스라엘 백성 전체가 기록했고, 신약성경은 초대교회 공동체 전체가 기록했다고 말할 수도 있다. 구약은 기원전 950년께부터 쓰이기 시작했고, 신약은 기원후 150년께 마무리됐기에 성경은 대략 1100년이라는 오랜 세월에 걸쳐 기록됐다고 할 수 있다. 구약은 솔로몬 임금(기원전 961-922년)이 다스리던 기원전 950년께부터 단편적으로 작성되기 시작했다. 기원전 587-538년 바빌론 유배시기 무렵에 단편적으로 작성된 문헌들이 낱권 책들로 엮어졌다. 이어 기원전 200년께 어느 정도 성경 형태를 갖췄다. 이 무렵 히브리어로 된 구약성경이 그리스어로 번역됐다. 이것이 바로 「칠십인역」이다. 물론 구약성경 가운데 가장 후대에 집필된 제2경전 지혜서 같은 경우는 기원전 1세기, 더 나아가 기원전 30년께 기록됐다고도 추정한다. 신약은 기원후 51년 바오로 사도의 테살로니카 1서를 시작으로 기록됐다. 요한계 문헌이 비교적 후대인 기원후 100년 전후에 기록됐고, 베드로 2서는 기원후 100~130년께 기록됐다고 한다. ▶성경은 어떤 과정을 거쳐 기록됐나? 이슬람교 경전인 코란은 6세기에 마호메트가 하느님 계시를 받아 하느님께서 불러주시는 대로 기록한 것이라고 한다. 그러나 성경은 하느님께서 직접 처음부터 끝까지 기록하신 것도 아니고, 어떤 한 사람이 하느님께서 불러주시는 대로 창세기부터 요한묵시록까지 대필한 것도 아니다. 성경은 오랜 세월 많은 사람을 거쳐 형성됐다. 구약과 신약 모두 구전→문서화→편집→정경화 과정을 거쳐 오늘의 형태를 갖췄다. 구약의 형성과정은 아래와 같다. ①구전 하느님의 구원 역사는 오랜 세월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는 구전 과정을 거쳤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느님께서 하신 말씀과 행적을 후손들에게 이야기했다. 아브라함과 이사악과 야곱의 성조들이 어떻게 부르심을 받았는지, 이집트 종살이에서 어떻게 해방됐는지, 약속의 땅에 어떻게 정착했는지 등 그들 역사 안에서 하느님과 함께했던 사건을 이야기로 엮어 전했다. ②문서화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던 하느님의 구원 역사는 시대를 달리하고 여러 사람들을 거치면서 내용이 달라지기 시작했다. 서로 다른 전승들이 생겨난 것이다. 이에 이스라엘 백성들은 기원전 950년께부터 하느님의 구원 역사를 글로 작성해 고정하는 문서화 작업을 시작했다. ③편집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고 글로 작성된 하느님의 구원 역사는 시대를 달리하고 여러 사람들을 거치면서 수집ㆍ정리되는 가감첨삭 편집 과정을 거쳤다. 구전 및 문서 전승을 종합해 하느님 말씀을 정리한 것이다. ④정경화(正經化) 오랜 세월에 걸쳐 글로 기록되고 편집된 하느님의 구원 역사는 바른 경전인지 아닌지 식별하는 정경화(正經化) 작업을 거쳤다. 교회는 하느님 말씀과 행적을 기록한 책들이 성령의 감도를 받아 쓰인 것인지 신중하게 검토한 다음 경전으로 받아들였다. 제공=서울대교구 사목국 김원철2011.06.21
[조규만 주교의 하느님 이야기] (11) 예언자들의 하느님끊임없이 사랑 고백하는 하느님 예언자들이란 흔히 잘못 알고 있는 것처럼 점쟁이나 미래를 미리 알려주는 사람이 아니다. 그들은 하느님 말씀을 전해주는 사람들이다. 예언자(Prophetes)는 하느님 대변인이다. 성경에서 하느님 체험을 전하는 예언자들을 시대별로 찾아보자. 1) 엘리야 솔로몬 왕 이후 이스라엘은 남북으로 갈린다. 북쪽 이스라엘을 다스리는 아합이 역겨운 죄를 거듭 짓는 가운데 엘리야라는 예언자가 등장한다. 엘리야 예언자의 가장 큰 활약은 바알 예언자 450명과 대결이다(1열왕 18장). 이 대결의 승리로 엘리야는 하느님이야말로 참으로 주님이심을 백성들에게 알린다. 바알 예언자의 후원자였던 이제벨 왕비로부터 도망 다니던 엘리야가 하느님을 만나는 장면은 매우 상징적이어서 우리가 묵상할 것이 많다. 엘리야가 하느님을 만날 때 크고 강한 바람이 산을 할퀴고, 바위를 부수고, 지진과 불이 지나간 다음 조용하고 부드러운 소리가 들려왔다. 폭풍, 지진, 불은 하느님의 부정적ㆍ파괴적 활동을, 조용하고 부드러운 바람은 하느님의 창조적ㆍ구원적 활동을 뜻한다. 침묵 속에서 하느님을 만나는 것은 하느님은 조용한 일상사 안에서 만날 수 있는 분이라는 뜻이다. 2) 엘리사 밭을 갈고 있다가 엘리야의 부름을 받는다. 부모님께 작별인사를 하고, 소를 잡아 제사를 지낸 다음 엘리야를 따른다(1열왕 19,19-21). 복음에서도 예수님이 어느 청년을 부른다. 한 청년은 아버지 장례 핑계를 댄다. 주님은 말씀하신다. "죽은 자의 장례는 죽은 자에게 맡기라." 그리고 부모님과 작별인사를 핑계 대는 청년에게 말한다.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다보는 자는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자격이 없다." 엘리사는 또 이스라엘을 침략하려는 아람 임금의 군인들 눈을 멀게 하여 사로잡은 다음 대접해 보내서 다시는 침략하지 않도록 했다(2열왕 6,8-23). 이는 오직 사랑만이 원수를 친구로 만들어준다는 것을 알려준다. 3) 아모스 남쪽 유다 왕국 백성인 아모스는 북쪽 이스라엘로 가서 설교하라는 명령을 받는다. 그가 이스라엘로 간 것은 일치의 표지다. 이는 이스라엘 백성뿐 아니라 온 민족이 하느님 백성이라는 사실을 알려준다. 아모스의 하느님은 불굴의 사랑과 정열을 지니신 하느님이다. 아모스를 통해, 벌을 내리면서도 동시에 구원을 베풀기 원하며 회개를 호소하는 하느님 사랑을 읽을 수 있다. 4) 호세아 호세아는 자신의 삶을 통해 하느님 사랑을 보여준 예언자다. 그는 하느님 말씀에 따라 창녀 고메르와 결혼한다. 창녀와 결혼하고 또 그가 부정을 저질렀음에도 다시 아내로 맞아들이는 일은 누가 봐도 어리석은 행동이다. 호세아는 그런 행동을 통해 당신 백성에 대한 주님 사랑 역시 그런 놀라온 사랑이라는 것을 보여준다. 호세아는 바보 같은 사랑의 대명사다. 호세아의 사랑은 끊임없이 배신하는 이스라엘 백성을 또 끊임없이 용서하는 하느님 사랑을 대변한다. 5) 이사야 엄청난 사건들을 계획하고 주재하는 주인공은 바로 주님이라는 것을 보다 분명히 한 예언자가 이사야다. 이사야는 모든 민족에 대한 주권을 지닌 하느님은 당신을 절대적으로 신뢰하는 모든 이들을 보호한다고 선언했다. 이는 유일신 사상을 주창한 것이다. 이사야는 야훼 하느님이 모든 민족은 물론 역사와 창조를 지배하는 분이라고 했다. 또 주님은 과거의 하느님인 동시에 현재의 하느님이며, 또 앞으로 올 모든 세대의 하느님임을 선언했다. 6) 예레미야 모든 민족들 움직임 속에서 주님 손길을 볼 수 있다는 사상은 예레미야를 통해서도 드러난다. 예레미야가 이스라엘인에게 바빌론에 정착해 가정을 꾸리라고 권고한 것은 야훼가 바빌론에도 현존하고 계심을 강력하게 시사한다. 이는 사람들이 야훼를 진심으로 찾기만 하면 어디에서나 그분을 발견할 수 있다는 신앙에 바탕을 둔 것이다. 이처럼 이스라엘 백성들은 예언자들에 의해 하느님이 온 세상에 한 분뿐인 유일신임을 이해하게 된다. 7) 요나 '하느님은 오직 이스라엘 백성들만의 하느님이다'는 선민의식에 사로잡힌 요나는 이방인 니네베 사람들에게 가서 회개를 촉구하라는 하느님 뜻을 거스르고 달아난다. 요나는 물에 던져져 큰 물고기 뱃속을 통해 니네베에 도착하고도 하느님께서 니네베 사람들을 향한 재앙을 거둔 뜻을 헤아리지 못했다. 요나서의 절정은 시들어버린 아주까리 나무를 놓고 벌어진 하느님과 대화다. 하느님은 요나를 설득하신다. "너는 수고하지도 않고 키우지도 않은 아주까리를 그토록 동정하는구나. 그렇다면 내가 '보기 좋게' 창조한 저 많은 니네베 사람들을 어찌 동정하지 않겠느냐?" 이 말을 들은 요나는 비로소 야훼 하느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뿐 아니라 이방인 니네베 사람들에게도 자애로운 하느님이심을 깨닫게 된다. 하느님은 예언자들을 통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당신 사랑을 전하셨다. 또 이스라엘을 통해 세상 모든 민족에 대한 당신 사랑을 전하신다. 하느님은 사도를 통해 교회를 세웠고, 사도들을 통해 세상을 구원하신다. 주님께서는 교회 구성원인 그리스도인들이 세상의 빛과 소금이 돼야 한다고 말씀하신다.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도 하느님은 여전히 자애로우시다. 예언자 요나를 설득하시는 하느님 마음을 이해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정리=서영호 기자 amotu@pbc.co.kr ※'조규만 주교의 하느님 이야기'는 평화방송 라디오(FM 105.3㎒)에서 매 주일 오후 6시 5분에 방송되며, 평화방송TV에서는 매주 화요일 오전 8시(본방송), 수요일 새벽 4시와 저녁 9시, 금요일 오후 4시, 주일 오후 6시에 재방송된다. 인터넷 다시 보기 www.pbc.co.kr조은일2011.08.16

일본 대지진, 함께 슬퍼하며 돕는 게 우선자연재해와 하느님을 묻다 - 성서학 박사 김건태 신부 인터뷰(수원교구 분당 이매동 성바오로본당 주임) 김건태(수원교구 분당 이매동 성바오로본당 주임, 사진) 신부의 사제관 문을 두드렸다. 안타까움과 새삼 심해지는 갈증, 그리고 누군가의 입을 빌어서라도 빨리 얘기를 해줘야 할 것 같은 조바심 때문이다. 일본을 강타한 대지진과 쓰나미. 믿기지 않는 자연의 파괴력에 인간은 무력하기만 하다. 개신교의 유명한 목사는 이를 두고 "우상숭배, 무신론, 물질주의에 대한 하느님 경고"라고 말해 파문이 일었다. 여기에 누리꾼들은 비난을 퍼부으며 "당신들이 믿는 하느님은 선하신 분인데, 왜 이런 재앙을 허락하는가?"하고 묻고 있다. 김 신부는 파리가톨릭대에서 에제키엘과 아모스 등 구약시대 예언자들의 '법과 정의'를 연구한 성서학 박사다. 김 신부는 결론부터 내놨다. "구약의 참된 예언자들은 이스라엘 백성이 고난에 빠졌을 때 위로와 희망을 주고, 분열이 일어났을 때는 일치의 길을 보여줬다"며 "지금은 일본인들이 겪는 고통 속에 계신 주님을 보면서 기도와 후원으로 그들을 돕는 게 중요하다"고 말했다. '고통(자연재해)과 하느님'이라는 거대 담론을 갖고 김 신부와 나눈 우문현답(愚問賢答)이다. -엄청난 자연재해가 일어날 때마다 사람들은 하느님을 인간 이성(理性)의 법정에 세우려고 한다. 인도네시아 쓰나미, 아이티 대지진 때도 그랬다. "어디 자연재해뿐인가. 불행이 엄습하거나 사랑하는 사람의 갑작스런 죽음에도 하느님을 원망하며 이유를 묻는다. 하느님은 이런 일이 있을 때마다 이성의 법정에 끌려나와 추궁(?)을 당하신다. 고통과 하느님 선성(善性)은 늘 제기돼 온 문제다. 하지만 신학과 철학은 모든 이들을 만족시킬만한 답을 갖고 있지 못하다. 그럼에도 '하느님 경고' 운운하는데는 동의할 수 없다. 비통에 잠겨 있는 피해지역 주민들이라면 모를까, 제3자가 말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다. 아울러 자연재해 앞에서 신을 책망하는 것은 역설적으로 신의 존재를 인정한다는 뜻 아니겠는가." -하느님은 노아의 홍수, 소돔과 고모라 멸망처럼 놀라운 자연현상을 통해 당신 뜻을 드러내시지 않았는가. "맞다. 하지만 모든 자연현상을 하느님 뜻이요, 개입이라고 단정할 근거는 없다. 지질학적으로 보면 지진은 지각판이 움직이는(판구조운동) 것이다. 판구조운동은 많은 인명피해를 초래하지만 한편으로는 화산활동으로 땅속 이산화탄소를 대기 중으로 내뿜어 지구 온도를 일정하게 유지시켜 준다고 한다. 구약은 오랜 세월 구전돼오다 BC 10세기 솔로몬왕 시대부터 글로 기록되기 시작했다. 창세기 저자들은 당시의 숱한 자연현상을 하느님 징벌 또는 개입으로 판단했다. 고구려인들도 달무리 현상에 놀라 땅에 엎드려 하늘의 뜻을 헤아리지 않았는가. 지구는 살아 숨쉬는 거대한 생명체다." -구약의 욥이 극심한 고통에 절규할 때 그의 세 친구들은 하느님께 벌 받은 것이라며 회개를 종용하던데. "명백한 잘못이다. 욥기를 다시 읽어봐라. 주님은 욥을 구원하신 뒤 세 친구 가운데 한 명인 엘리파즈에게 '너와 너의 두 친구에게 내 분노가 타오르니, 너희가 나의 종 욥처럼 나에게 올바른 것을 말하지 않았기 때문이다'(욥 42,7)하고 꾸짖으셨다. 진정한 친구라면 욥의 고통을 위로하며 도울 방법을 찾았어야 했다. 세 친구 주장을 이해하려면 고대 근동 사람들의 인과응보 사상을 살펴봐야 한다. 그들은 '이에는 이, 눈에는 눈'이라는 동태복수법(同態復讐法)이 정의라고 생각했다. 그런 관념으로 하느님 뜻을 헤아렸다. 그러나 그게 하느님 정의라고 똑부러지게 말할 수 없다. '노아의 홍수' 사건에도 흥미로운 구절이 있다. 주님께서 홍수가 끝나자 '사람의 마음은 어려서부터 악한 뜻을 품기 마련 내가 다시는 사람 때문에 땅을 저주하지 않으리라. 이번에 한 것처럼 다시는 어떤 생물도 파멸시키지 않으리라'(창세 8,21)하고 생각하셨다는 기록이다. 주님께서 후회를 하셨다는 건데, 자신의 행위에 후회를 하시는 분을 어떻게 절대자라고 말할 수 있나. 창세기 저자들이 그렇게 해석해 기록한 것이다." -인간 이성의 한계를 지적하는 것인가. "과학기술이 아무리 발전해도 분명한 한계가 있다. 어느 의사가 불임(不姙) 원인 10가지 가운데 9가지를 해결한 뒤 나머지 1개를 들여다보니까 거기서 또 10개 원인이 튀어 나오더라며 하느님의 생명창조 신비에 감탄했다. 그렇다고 하느님을 신비의 영역에만 모셔둬서는 안 된다. 하느님은 우리에게 이성이라는 귀한 선물을 주셨기에, 우리는 신앙을 전제로 한 이성을 발휘해 그분을 더 명확하게 알아가야 한다. 갈릴레오 갈릴레이 사건만 하더라도 중세교회는 지동설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그때 성경해석과 교리는 지구가 우주 중심에 정지해 있는 거였다. '한 세대가 가고 또 한 세대가 오지만 땅은 영원히 그대로다'(코헬렛 1,4)라는 말씀도 있지 않은가. 그러나 과학이 지동설을 명백히 입증해냈다. 그래서 교회도 그 사실을 인정하고 갈릴레이를 복권시켰다. 신앙과 이성은 함께 가는 것이다." -참 예언자로 살아야하는 그리스도인들은 무엇을 해야 하나. "예언자 에제키엘은 이스라엘 백성이 바빌론 유배의 고난을 조상 탓으로 돌리자 '너희는 어찌하여 아버지가 신 포도를 먹었는데, 자식들의 이가 시다'는 속담을 말해 대느냐?'(에제 18,2)는 주님 질책을 전했다. 예언자는 고난을 당하는 사람에게는 위로와 희망을 전하고, 불의가 만연한 곳에서는 정의를 외치고, 분열이 일어나면 일치를 위해 몸을 던져야 한다. 예언자는 점쟁이가 아니다. 지금 종교 지도자들이 해야 할 일은 국민들이 일본인들을 위해 기도하도록 권하고, 그들에게 희망과 용기를 줄 수 있는 방법을 찾는 것이다. 더욱이 일본은 가장 가까운 이웃이다. 이웃의 고통에 동참하는 것은 신앙을 떠나 인간의 기본적 도리다." 김 신부는 또 "인간은 자연재해로 인한 고통에 직면해서는 하느님을 찾으면서 왜 물, 공기 같은 혜택은 당연한 것인양 감사하지 않는지 모르겠다"고 안타까워했다. "당연한 것은 없다. 인간이 보고, 듣고, 걷는 게 당연한 일인가? 병원 수술실이나 중환자실에 가봐라. 그건 당연한 게 아니다. 매사 감사하며 살아야 한다. 감사하는 마음으로 일본을 도와야 한다. 그러면 훗날 한일 관계도 좋아질 것이다." 김 신부는 1981년 사제품을 받았다. 파리가톨릭대에서 박사학위(87년)를 받고 돌아와 오랫동안 수원가톨릭대에서 사제를 양성했다. 김원철 기자 wckim@pbc.co.kr김원철2011.03.22
![[성경 속 상징]73- 기둥 - 우주 하느님의 위대한 능력](//cpbc.co.kr/CMS/newspaper/2010/01/rc/321844_1.1_titleImage_1.jpg)
[성경 속 상징]73- 기둥 - 우주 하느님의 위대한 능력허영엽 신부(서울대교구 문화홍보국장)기둥은 건물 지붕의 하중을 초석에 전달하는 구조물이다. 기둥은 공간을 형성하는 기본 뼈대가 되는데, 기둥 높이는 건축물 높이를 결정하는 역할을 한다. 한국에서는 신석기시대 수혈(竪穴) 안 가장자리에 구멍을 파서 세우거나 바닥에 직접 세워 그 윗부분의 구조물을 지탱하게 한 것이 기둥의 시작이라고 한다. 서양의 기둥 형태는 시대와 나라에 따라 다양하다. 이집트에는 기원전 27세기 경부터 이미 훌륭한 돌기둥이 있었다. 이집트 신전에 사용된 기둥은 기둥머리에 꽃봉오리나 파피루스를, 기둥 몸에는 풀잎을, 밑동에는 상형문자 등을 새겨넣은 것이 특징이다. 기둥과 지주, 나무 줄기는 모두 같은 상징적 가치를 지닌다. 집과 우주를 동일시하여 집의 중심에 있는 기둥을 우주의 축으로 보는 민족도 있다. 고대 독일 작센족은 신성한 나무 기둥이 우주를 지탱하는 우주 기둥의 의미를 갖는다고 여겼다. 고대 그리스인들은 헤라클레스의 기둥이 하늘을 떠받치고 있다고 생각했다. 이집트의 돌 사각기둥인 오벨리스크는 태양신이 앉는 장소로 간주됐다. 신왕국 이후에는 두 개씩 기둥을 쌍으로 만들어 태양과 달의 상징으로 삼았다. 수메르 사람들은 하늘의 출입구에 심어져 있는 두 그루의 나무를 상징하기 위해 신전 입구에 두 그루의 종려나무를 심거나 두 개의 기둥을 만들었다. 탈무드에 나오는 솔로몬 신전 앞 두 기둥은 태양과 달을 의미하고 있다. 성경에서도 "땅이며 그 모든 주민이 뒤흔들려도 내가 세운 그 기둥들은 굳건히 서 있다"(시편 75,4)는 표현처럼 기둥은 우주의 상징으로 나온다. 또한 하느님은 땅을 바닥째 뒤흔드시어 그 기둥들을 요동치게 하시는 분인데(욥기 9,6), 이는 하느님의 위대한 능력을 나타내는 것이다. 솔로몬이 성전 앞 복도 입구에 세운 두 개의 청동기둥은 특별한 의의를 갖는다(1열왕 7,15-22). 성경의 기둥에는 건물을 지탱하는 기능을 갖는 기둥과 함께 기념비 역할을 하는 기둥도 등장한다. "생전에 압살롬은 '내 이름을 기억해 줄 아들이 없구나.'하며 기념 기둥 하나를 마련하여 세워 두었는데, 그것이 '임금의 골짜기'에 있다. 그가 이 기념 기둥을 자기 이름으로 불렀기에, 오늘날까지도 그것이 '압살롬의 비석'이라 불린다"(2사무 18,18). 또한 하느님은 예레미아 예언자를 기둥에 비유하셨는데 이는 신앙을 지탱하는 힘과 능력을 상징하는 것이다. "오늘 내가 너를 요새 성읍으로, 쇠기둥과 청동 벽으로 만들어 온 땅에 맞서게 하고, 유다의 임금들과 대신들과 사제들과 나라 백성에게 맞서게 하겠다"(예레 1,18). 신약성경에는 사도 바오로가 야고보와 케파와 요한을 기둥 같이 여긴다는 표현이 등장한다(갈라 2,9). 이것은 다른 사람들을 도와주는 어떤 사람이나 조직을 기둥으로 묘사하는 상징적 용법의 단순한 예가 아니다. 이는 그리스도교 공동체를 하느님께서 현존하시는 새로운 성전으로 여겼던 초대교회의 이해와 관련이 있다. 성경에서 가장 유명한 두 개의 기둥은 땅에 기초를 둔 것이 아니다. 광야에서 이스라엘과 함께하신 하느님의 현존은 낮에는 구름 기둥, 밤에는 불 기둥의 형태를 취하였는데, 그 기둥들은 백성들을 인도하고 길을 밝게 비추어 주었다(탈출 13,21-22). 이처럼 기둥에 대한 성경의 언급들은 거룩한 분위기를 느끼게 한다. 조은일2010.01.05
![[조규만 주교의 성모님 이야기] (14) 마리아의 동정 출산은 하느님 기적](//cpbc.co.kr/CMS/newspaper/2010/07/rc/344906_1.1_titleImage_1.jpg)
[조규만 주교의 성모님 이야기] (14) 마리아의 동정 출산은 하느님 기적 가르침과 성덕에 있어서 모범이 되고 교회 교리를 정립한 고대 그리스도교 저술가들을 교회는 '교부' 혹은 '교회의 아버지'라고 부른다. 교부학에서 교부는 8세기까지 교회에 가르침을 준 주교와 사제들을 주로 지칭한다. 그래서 토마스 데 아퀴노는 13세기 신학자이기에 교부라고 부르지 않는다. 또 교회 가르침을 올바르게 전해줬다는 정통성을 확보해야 하고, 교회에서 인준을 받아야 하며, 성덕이 출중하고 거룩해야 한다. 이 교부들을 교회는 지역적으로, 시대적으로 구분한다. 지역적으로는 로마를 중심으로 문헌을 라틴어권에서 남긴 이들을 라틴 교부라고 부르고, 그리스권역에서 활동한 교부들을 그리스 교부 혹은 동방 교부, 시리아어권 교부들은 시리아 교부라고 부른다. 시대적으로는 서기 100년께에서 300년 사이를 초창기, 300년에서 450년까지를 중기 혹은 전성시대 교부들, 450년에서 700년까지를 말기 혹은 쇠퇴기 교부라고 부른다. 당시 교부들 이름을 보면 우리에게 아주 익숙한 이들이 많다. 유스티노, 이레네오, 이냐시오, 안아티오키아의 이냐시오, 클레멘스, 치프리아노, 요한 크리소스토모, 다마소, 레오 등이다. 또한 성인은 아니지만 오리게네스, 테르툴리아누스처럼 유명한 교부들도 있다. 저자는 모르지만 책으로만 교부들 가르침이 남아 있는 경우도 있다. 「디다케(Didache)」라는 책은 열두 사도들의 가르침이라는 말이 있지만, 저자는 정확히 알지 못한다. 「바르나바의 편지(Letter of Barnabas)」라는 초기 그리스도교 그리스어 저술도 있고, 「솔로몬의 송가(Odae Salomonis)」 같은 찬미가도 있지만 이 역시 지은이를 알 수 없다. 당시 교부들은 초대 교회공동체에 문제가 생기거나 이단이 등장하면 답을 찾다가 신학을 발전시켰다. 교부들은 325년 니체아공의회에서 성부와 성자와 관계에 대해, 381년 콘스탄티노플공의회에서 성령과 삼위일체에 대해, 431년 에페소공의회에서 '하느님의 모친' 성모 마리아에 대해, 451년 칼체돈공의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과 인성이 어떻게 결합돼 있는지에 대한 문제를 놓고 논박하고 답변을 했다. 안티오키아의 이냐시오 교부는 「에페소교회에 보내는 편지」, 「스미르나교회에 보내는 편지」 등을 통해 성모에 관한 가르침을 남긴다. 안티오키아의 이냐시오 교부는 특히 교부들 가운데 최초로 성모 마리아의 동정성을 주제로 내세우면서 하느님의 신적 모성과 성모의 동정성에 대해 언급했다. 예수 수난과 죽음이 신비인 것처럼 동정 탄생도 신비로서 사람들에게는 감춰져 있는 것이라고 가르쳤다. 외경인 「야고보복음」, 「토마스복음」 등에도 동정성에 관한 대목이 있다. 「야고보복음」은 특히 성모에 관한 이야기가 많이 등장한다. 「야고보복음」의 내용을 정리하면, 마리아가 3살 때 성전에 봉헌된 이야기를 비롯해 요셉이 사제들로 말미암아 배필로 선출된 이야기, 대사제 즈카르야가 벙어리가 되고 마리아가 엘리사벳을 방문하는 이야기 등이 나타난다. 마리아의 임신 사실을 알게 된 요셉이 두려워하면서 고민하자 천사가 꿈에 성령으로 말미암은 잉태임을 알려주며 마리아를 보호하는 이야기, 사제가 마리아의 임신 사실을 알고 요셉을 문책하고 마리아에게 쓴 물을 먹이면서 결백을 시험하는 이야기, 베들레헴 방문, 동굴에서 출산, 동방박사들의 방문, 동방박사들 이름도 나온다. 어떤 부분은 성경과 겹치고, 어떤 부분은 너무 황당하게 꾸며져 성경에서 제외됐다. 「야고보복음」 같은 외경을 보고 내릴 수 있는 결론은 마리아는 하느님 구원 계획에 의해 미리 선택됐고, 성모가 예수를 잉태한 것은 하느님 은총이며, 마리아 동정성은 하느님 섭리에 의해 요셉에 맡겨져 있다는 점이다. 또 마리아의 예수 잉태가 요셉과 관계없이 성령으로 말미암은 것이라는 점은 마태오복음이나 루카복음에서도 똑같이 언급한다. 또 출산 때도 동정이 보존됐다는 것은 동정 출산이 하느님의 기적이며 하느님의 행위라는 것을 의미한다. 또 유스티노 교부는 당시 하와와 성모 마리아를 대조하면서 이방인 티폰과 성모에 관한 논쟁을 벌인다. 아담과 하와가 불순명함으로써 인류를 하느님과 등지게 했지만, 성모 마리아는 하느님 말씀에 순명함으로써 하느님과 관계를 회복시켰다는 것이다. 유스티노 교부의 대조로 말미암아 예수 그리스도를 새 아담, 혹은 둘째 아담이라고 표현하고, 성모를 새 하와, 혹은 둘째 하와로 표현하기도 한다. 정리=오세택 기자 sebastiano@pbc.co.krcpbc2010.07.27
![[성경 속 상징]70- 열둘(12)- 일곱이나 열처럼 완전함 나타내](//cpbc.co.kr/CMS/newspaper/2009/12/rc/319598_1.1_titleImage_1.jpg)
[성경 속 상징]70- 열둘(12)- 일곱이나 열처럼 완전함 나타내 허영엽 신부(서울대교구 문화홍보국장)"열두 가지 재주 가진 사람이 조석을 굶는다"는 속담이 있다. 재주가 무척 많은데 끼니를 걱정해야 한다는 말이다. 우리 선조들은 예로부터 12라는 숫자를 가장 크고 많다는 의미로 사용했다. 집이 크면 열두 대문, 산이 커서 1만2000봉, 발이 길어 열두 발 상모라 불러왔다. 이처럼 우리 민족은 숫자 12를 행운의 수로 생각했다. 그런데 반대로 바빌로니아에서 12는 불운을 나타내는 숫자다. 성경에서도 열둘(12)이라는 수는 하나의 상징으로서 가장 중요한 숫자들 중 하나이다. 성경에서 이 숫자의 중요성은 이스라엘 열두 지파에서 왔다. 이스라엘 열두 지파는 이스라엘 백성 전체를 가리킨다. 예수님께서는 열두 제자를 뽑아 사도로 삼으셨는데, 온 인류의 전체 구원을 위해서였다. 성경에서 열둘이라는 숫자도 일곱이나 열처럼 완전함, 전체를 나타내는 숫자이다. 일 년이 열두 달로 이뤄져 있는 것도 같은 의미이다. 모세는 이집트 탈출 후에 열두 지파 수를 따라 시나이 산 위에 열두 개 기둥을 세웠다. "모세는 주님의 모든 말씀을 기록하였다. 그는 다음 날 아침 일찍 일어나 산기슭에 제단을 쌓고, 이스라엘의 열두 지파에 따라 기념 기둥 열둘을 세웠다"(탈출 24,4). 여호수아는 이스라엘 백성을 이끌고 요르단 강을 건너는 것을 기념하기 위해 돌 열두 개로 기념비를 세웠다. "여호수아는 요르단 강 한복판, 계약 궤를 멘 사제들의 발이 서 있던 곳에 돌 열두 개를 세워 놓았다. 그것들은 오늘날까지 거기에 있다"(여호 4,9). 대사제 예복 가슴받이에는 열 두개 보석이 있었으며, 그 위에는 각 지파 이름이 새겨져 있었다. "이 보석들은 이스라엘 아들들의 이름에 따라, 곧 그들의 이름 수대로 열둘이 되었다. 인장 반지를 새기듯 각자의 이름을 새겨 열두 지파가 되게 하였다"(탈출 39,14). 솔로몬은 이스라엘에 열두 지방관을 두었고, 솔로몬의 여러 건축 사업에는 열둘이라는 숫자와 치수들이 항상 포함됐다(1열왕 4,7). 엘리야는 바알의 예언자와 싸울 때도 야곱의 자손들 지파 수대로 돌을 열두 개 가져왔다(1열왕 18,31). 열둘이라는 숫자의 중요성은 신약성경에도 나타난다. 우선 예수님께서 열두 명의 제자들을 선택하신 데서 잘 나타난다(마르 3,13-19). 여기서 12의 의미는 이스라엘 전체 구원을 상징한다. 오천 명을 먹이신 기적에서도 열둘의 상징은 의미심장하다. "그리고 남은 빵 조각과 물고기를 모으니 열두 광주리에 가득 찼다"(마르 6,43). 또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그들이 언젠가는 열두 옥좌에 앉아 이스라엘의 열두 지파를 다스리게 될 것이라고 약속하셨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사람의 아들이 영광스러운 자기 옥좌에 앉게 되는 새 세상이 오면, 나를 따른 너희도 열두 옥좌에 앉아 이스라엘의 열두 지파를 심판할 것이다.'"(마태 19,28). 열둘이라는 상징이 가장 빈번하게 나타나는 곳은 역시 요한묵시록이다. 하늘에 큰 표징과 태양을 입고 발 밑에 달을 두고 머리에 열두 개 별로 된 관을 쓴 여인이 나타난다(묵시 12,1). 또 열두 성문의 열두 천사, 도성 성벽의 열두 초석, 어린 양의 열두 사도 이름 등이 등장한다(묵시 21,14). 그 밖에도 12라는 숫자가 수없이 나타난다.조은일2009.12.15

새달 6일부터 헨델 성음악과 구약성경 강좌 여는 허영한 교수성경 인물들 성격 완벽한 표현에 감탄 올해는 음악의 어머니로 불리는 헨델(Georg Friderich Handel, 1685 ~ 1759) 서거 250주년이다. 그래서 이를 기념하는 연주회가 그 어느 때보다 풍성한 한 해다. 만일 누군가 '헨델의 오라토리오'를 외쳤다면 열에 아홉, 아니 열에 열 명 모두 '메시아'를 떠올릴 것이다. 메시아는 하이든의 천지창조, 멘델스존의 엘리야와 함께 세계 3대 오라토리오로 꼽히는 헨델의 대표작이다. 그러나 헨델이 메시아 이외에도 40여 곡이 넘는 오라토리오를 작곡했고 그 곡들 또한 메시아에 버금가는 수준을 자랑하고 있다는 것을 아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헨델=메시아'라는 공식에 사로잡혀 메시아 이외 오라토리오곡들은 그 가치를 제대로 평가받지도, 빛을 발하지도 못하고 있는 것이다. 해외에서조차도 메시아 이외 오라토리오곡을 접하기 쉽지 않다. 이 곡들은 '솔로몬' '삼손' '이집트의 이스라엘인' 등 구약성경 말씀을 담은 것이 대다수다. 그렇기에 4월 6일부터 시작하는 '허영한 교수의 헨델의 성음악과 구약성경' 강좌가 눈에 띌 수밖에 없다. 강좌를 기획한 허영한(요셉, 한국예술종합학교) 교수는 "명색이 교수라는 나조차도 그동안 헨델의 다른 오라토리오에 대해서 잘 알지 못했다"면서 "우연찮게 헨델의 음악을 다시 듣게 되면서 뒷통수를 얻어 맞은 기분이 들었다"고 말했다. 그는 지난해 안식년을 보내며 헨델의 오라토리오에 새롭게 눈을 떴다. '솔로몬' '삼손' '여호수아' '에스터' 등 곡들이 메시아에 견줘도 전혀 손색 없는 작품이었다. 허 교수는 오라토리오들을 들으면서 한동안 손을 놓은 성경을 다시 펼치게 됐다. 오라토리오들이 구약성경 인물들 이야기를 담고 있기 때문이다. 가사는 고스란히 성경구절이다. "헨델 때문에 성경을 다시 읽게 됐습니다. 음악을 들으며 성경말씀과 가사를 비교해보고 헨델이 구약성경 인물들을 어떻게 음악으로 표현했는지 생각하다보면 성경이 술술 읽히죠. 성경을 이렇게 재미있게 읽은 적이 없었어요. 음악으로 상황을 묘사하고 인물들 성격을 완벽하게 표현한 헨델의 천재성에 들을 때마다 감탄하고 있습니다." 허 교수는 헨델의 성음악과 성경말씀을 혼자만 알고 있을 수가 없어서 직접 나섰다. 때마침 올해가 헨델 서거 250주년이라 강좌 개설 시기도 딱 맞아 떨어졌다. 허 교수는 "오라토리오 가사가 영어로 돼 있어 음악공부, 성경공부에 더해 영어공부까지 1석 3조가 될 것이다"면서 "많은 이들이 함께 하길 바란다"고 말했다. 강좌는 4월 6일부터 매주 월요일 오후 8시 서울 마포 트리니타스음악원에서 12주 과정으로 진행된다. 오라토리오에 관한 일반적 지식에서부터 메시아, 솔로몬, 삼손, 이집트의 이스라엘인, 에스터 등을 살펴본다. 수강료 : 10만 원. 강의문의 : 02-336-3170, 트리니타스음악원 박수정 기자 catherine@pbc.co.kr박수정2009.03.24
![[성경속 상징]45-황금- 교부들은 하느님 왕권으로 여겨](//cpbc.co.kr/CMS/newspaper/2009/05/rc/293550_1.1_titleImage_1.jpg)
[성경속 상징]45-황금- 교부들은 하느님 왕권으로 여겨허영엽 신부(서울대교구 문화홍보국장)이스라엘 옛 시가지로 불리는 곳에 통곡의 벽으로 잘 알려진 서쪽 벽이 있다. 지금도 많은 유다인들이 이곳에서 기도를 하고 있는 모습은 무척 인상적이다. 그런데 그 위에는 마호메트의 승천을 기념한 이슬람의 바위돔 사원이 자리잡고 있다. 황금으로 만든 지붕 때문에 황금사원이라고도 불리는 이곳은 메카, 메디나와 함께 이슬람 3대 성지로 꼽힌다. 고대 인도에서 황금은 불사의 상징이었다. 고대 이집트인들은 태양이 순금으로 돼있다고 믿었다. 고대인들이 태양이 황금으로 만들어졌다고 믿고 숭배했던 이유는 오로지 황금만이 스스로 빛을 만들어서 뿜어낸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스스로 광채를 발하고 영원히 색이 변하지 않는 황금의 성질은 모든 것이 변하고 없어지는 세상에서 시간을 초월한다고 믿었다. 황금이야말로 모든 물질과 생명의 가치 위에 군림한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성경에서 아카시아 나무로 만들어진 언약궤는 모두 순금으로 덮여 있었다. "너는 그것을 순금으로 입히는데, 안팎을 입혀라. 그 둘레에는 금테를 둘러라"(탈출 25,11). 솔로몬 성전은 하느님의 집으로서 황금 광채로 빛나고 있었다. 솔로몬은 성전 전체를 금으로 덮었다(1열왕 6,20-30). 그러나 황금 자체는 거룩한 것이 아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황금을 신성시해 금송아지를 만든 것은 죄에서 생겨난 오류였다. 그런데 황금이 지극히 거룩한 것의 상징이 되는 경우도 있다. "금보다, 많은 순금보다 더욱 보배로우며 꿀보다 생청보다 더욱 달다네"(시편 19,11) 그러나 성경에서 황금이 부정적으로 취급되는 경우도 많았다. 귀금속은 현세의 덧없는 재화에 불과하다. 황금보다 더 귀한 것은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이라 가르친다(1베드 1,7). 이처럼 황금은 극히 현세적이며 무상한 것이다. 또한 심판날에 불의 시련을 당할 귀금속에 황금이 포함돼 있다. "그 기초 위에 어떤 이가 금이나 은이나 보석이나 나무나 풀이나 짚으로 집을 짓는다면, 심판 날에 모든 것이 드러나기 때문에 저마다 한 일도 명백해질 것입니다. 그날은 불로 나타날 것입니다. 그리고 저마다 한 일이 어떤 것인지 그 불이 가려낼 것입니다"(1코린 3,12-13). 세상 종말에 사람의 아들이 머리에 금관을 쓰고 나타나실 것으로 묘사한다(묵시 14,14). 교부들은 황금을 하느님 왕권의 상징으로 보았다. 동방 박사들이 아기 예수님께 드린 선물도 황금이었다. "그리고 그 집에 들어가 어머니 마리아와 함께 있는 아기를 보고 땅에 엎드려 경배하였다. 또 보물 상자를 열고 아기에게 황금과 유향과 몰약을 예물로 드렸다"(마태 2,11). 중세 회화에서 황금색 밑바탕은 극히 일반적으로는 초현세적이며 눈에 보이지 않는 존재를 암시한다. 제사장 의복이나 제사도구에 사용된 황금은 영원한 영광의 반영이라 풀이된다. 민간 풍습이나 전승에서는 아기 예수가 황금 관을 쓰거나 황금 조랑말을 타고 있다고 한다. 그리스도교는 황금을 무조건 숭배하지 않았지만, 황금의 속성을 중시했다. 박사들은 가지고 온 세 가지 귀한 예물, 즉 황금과 유향과 몰약을 아기 예수님께 드렸다. 성경에서 금은 신성한 본성을 상징하며 아기 예수님께서 신성한 본성을 가지셨음을 의미한다. 조은일2009.05.05
[출판]안셀름 그륀 신부의 「친구」 발간 솔로몬의 '아가(雅歌)'에는 경이로운 말씀이 있다. "사랑은 죽음처럼 강하고, …큰 물도 사랑을 끌 수 없고, 강물도 휩쓸어가지 못한답니다"(아가 8,6-7). 친구에 대한 사랑 또한 죽음을 뛰어넘는다. 그래서 '우정은 신앙의 기초'라고도 하고, 세상이 차갑고 어두울수록 친구가 사무친다. 세상살이가 너무도 힘들어 어둠에 갇혀 있다고 느낄 때 문득 거기 있는 사람, 시샘도 질투도 없이 기뻐하는 사람, 내 어깨 위 십자가 한 끝을 말없이 떠받쳐주는 사람…. 그 친구로 인해 우리는 온전히 '인간이 된다'. 안셀름 그륀(성 베네딕도회 뮌스터슈바르작수도원 재무 담당) 신부의 저서 「친구」가 최근 출간됐다. 음악평론가이자 번역가인 이용숙씨가 우리말로 옮겼다. 이 책은 우정의 가치에 대한 다채로운 에피소드를 자신의 체험에 녹여 풀어주면서 우정이 머금은 풍요로움을 전해준다. 낯선 이들이 서로에게 조심스레 다가가는 모습, 친구에게 마음을 열어 보이는 방법, 우정으로 영혼이 치유받는 과정, 언젠가 맺은 우정을 오래 지키는 길이 이 책에 담겨 있다. 그렇다고 해서 지은이가 체계적으로 우정론을 정립하거나 전개하려는 건 아니다. 그저 철학과 신학, 문학에서 우정에 관해 이야기한 선학들의 목소리를 되살려낼 뿐이다. 이 가운데는 특히 수도원에서 회원들끼리 각자의 우정관과 우정에 대한 소망들에 나눈 대화가 소복하게 쌓여 있다.(분도출판사/7500원)오세택 기자 sebastiano@pbc.co.kr오세택2009.04.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