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작으로 보는 교회사 한 장면] (3) 피에로 델라 프란체스카의 ‘콘스탄티누스의 꿈’](//cpbc.co.kr/CMS/newspaper/2020/05/rc/779579_1.1_titleImage_1.jpg)
[명작으로 보는 교회사 한 장면] (3) 피에로 델라 프란체스카의 ‘콘스탄티누스의 꿈’이교도 어둠 걷어낼 천사의 빛 서양 미술사 최초 밤 풍경 작품 어둠 밝혀줄 빛을 그리스도교에 빗대 피에로 델라 프란체스카, ‘콘스탄티누스의 꿈’, 바치 경당, 성 프란체스코 대성당 내, 아레초 로마 제국의 역사에서 그리스도교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친 황제를 꼽으라면, 네로와 콘스탄티누스를 들 수 있을 것이다. 네로는 박해로 그리스도교의 수난과 동시에 내적인 성장을 촉진하는 시발점이 되었다면, 콘스탄티누스는 신앙의 자유와 교황의 세속적인 권한이 시작되는 계기를 마련해 주었다. 소개하는 작품은 피에로 델라 프란체스카(Piero della Francesca, 1416/1417~1492)의 프레스코화 ‘콘스탄티누스의 꿈’이다. 이탈리아 토스카나 주, 아레초 시에 있는 성 프란치스코 대성당 내 바치 경당(Capella Bacci)에 그린 교리교육용 연작 벽화 중 하나다. 작품의 내용은 콘스탄티누스가 막센티우스와 전투를 앞둔 날 밤으로 설정된다. 역사 비평이 아무리 이 꿈 이야기가 허구라고 해도, 정치는 그것을 기정사실로 했고, 화가들은 계속해서 이 주제의 그림을 그렸다. 그래야 콘스탄티누스가 로마 제국의 단독 황제가 되고, 그리스도교는 신앙의 자유와 함께 서방세계에서 ‘하느님의 뜻’이라는 명분을 얻어 뿌리를 내리게 되기 때문이다. 콘스탄티누스 콘스탄티누스와 막센티우스의 전투는 312년 10월 28일에 있었다. 이야기는 좀 더 앞에서부터 시작된다. 284년, 로마 제국의 황제가 된 디오클레티아누스(Valerius Diocletianus)는 방대한 제국의 원활한 통치를 위해 제국을 둘로 나누어 자기는 동쪽에, 서쪽에는 막시미아누스(Marcus Aurelius Valerius Maximianus)를 세워 통치하도록 하는 이른바 ‘이분통치’를 시작했다. 이것은 후에 ‘사분통치’로 이어졌다. 그런 가운데 그리스도교는 계속해서 확산되었고, 제국의 황실에까지 들어갔다. 디오클레티아누스의 아내와 딸이 그리스도교로 개종하기에 이른 것이다. 그렇지만 황제는 여전히 그리스도교에 냉소적이었고, 심지어 박해까지 했다. 305년, 로마 제국을 공동 통치하던 두 황제가 퇴위하고, 각자 부제(caesar)로 옹립했던 갈레리우스(Galerius Maximianus)와 콘스탄티우스(Flavius Valerius Constantius)가 뒤를 이었다. 이 콘스탄티우스가 콘스탄티누스의 아버지다. 콘스탄티누스(Flavius Valerius Constan tinus)는 군인이었던 아버지 플라비우스 발레리우스 콘스탄티우스와 어머니 헬레나 사이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293년 부제의 지위에 올랐을 때 콘스탄티우스 1세 클로루스라는 칭호를 얻고, 막시미아누스 황제 밑에서 일하기 위해 서로마로 갔다. 거기서 막시미아누스 황제의 의붓딸 테오도라와 결혼하기 위해 헬레나와 이혼했고, 어린 콘스탄티누스는 동로마 제국의 니코메디아(오늘날의 이즈미트)로 보내져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의 궁정에서 자랐다. 306년 서방의 정제가 된 지 얼마 안 된 콘스탄티우스 클로루스가 갑자기 죽었다. 콘스탄티누스는 아버지가 죽기 1년 전에 디오클레티아누스의 황궁에서 나와 믿음직한 장수로 갈리아, 잉글랜드를 평정하고 있었다. 그 사이, 콘스탄티누스도 막시미아누스의 딸 파우스타와 결혼했다. 그러니까 막시미아누스는 콘스탄티누스 부자(父子)에게 딸을 하나씩 준 공동의 장인이 된 셈이다. 콘스탄티누스가 계속해서 북방 지역 평정에 전념하고 있을 때 로마에서는 콘스탄티우스 사망 이후 막시미아누스의 아들 막센티우스가 아버지의 도움으로 세베루스를 몰아내고 황제의 자리를 차지했다. 막센티우스는 아들보다 사위를 더 챙긴다며 아버지에게 불만을 드러냈고, 막시미아누스 역시 권력에 대한 향수에 젖어 결국 부자(父子)는 서로를 배신했다. 아들에게 버림받은 막시미아누스는 갈리아로 와서 콘스탄티누스와 합류했지만, 결국 사위마저 배신하고 쓸쓸히 생을 마감했다. 밀비오 전투와 밀라노 칙령 로마 황제가 된 막센티우스는 폭군으로 시민들의 원성을 샀고, 로마는 제국의 패권을 의미하는 장이 되었다. 콘스탄티누스와 막센티우스가 결전을 피할 수 없게 된 것이다. 312년 콘스탄티누스는 4만 명의 병력을 이끌고 알프스를 넘어 로마 북쪽 삭사 루브라로 진격했고, 막센티우스는 안방에서 10만 명이 넘는 병사를 거느리고 콘스탄티누스를 맞았다. 수적으로 열세지만 사기가 충만했던 콘스탄티누스의 군대는 막센티우스를 밀비오 다리까지 몰아붙였다. 좁은 다리는 수적으로 많은 병사가 퇴각하는 데는 전혀 도움이 되지 못했다. 치고 들어오는 적에 밀려 말과 병사들이 뒤엉켜 좁은 다리는 아비규환을 방불케 했고, 그 와중에 막센티우스도 테베레 강에 빠져 죽었다. 열악한 조건에서 콘스탄티누스 군대의 사기가 어떻게 북돋우게 되었느냐에서부터 허구가 들어간 것으로 보인다. 전투를 앞두고 콘스탄티누스가 꿈을 꾸었는데, 천사가 “In hoc signo vinces”(이 표시로 승리하리라)라고 적힌 깃발과 함께 십자가를 들고 오는 장면을 보았다는 것이다. 전투는 예상대로 콘스탄티누스가 승리했고, 분할통치 시대의 막을 내리고 로마 제국의 단독 황제가 되었다. 그리고 이듬해인 313년에 밀라노에서 ‘종교 관용령’ 「밀라노 칙령」을 발표하여 그리스도교를 공인하였다. 당시 로마는 다신교 사회였기 때문에 유일신교였던 그리스도교와 유다교는 소수 종교로서 법적으로 금지된 종교였다. 「밀라노 칙령」은 이들에 대한 종교 자유의 선언이자, 그리스도교의 박해가 끝난 것을 의미했다. 또한, 서방 세계에서 그리스도교가 뿌리를 내리는 중대한 시발점이 되었다. 콘스탄티누스의 꿈 이제 작품 속으로 들어가 보자. 작품은 1452~ 1466년, 피에로 델라 프란체스카가 그린 ‘거룩한 십자가 전설’ 연작 중 하나다. 거기에는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찾아오는 장면’, ‘솔로몬을 방문한 사바의 여왕’, ‘채찍질 당하는 그리스도’, ‘주님 탄생 예고’(성모영보) 등이 있다. 이 시리즈는 작가의 최고 작품 중 하나이자, 초기 르네상스의 귀중한 자료기도 하다. ‘콘스탄티누스의 꿈’은 서양 미술사 최초로 밤 풍경을 그린 작품이자, 카라바조 이전, 밤 풍경을 가장 설득력 있게 조명한 최고의 작품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피에로 델라 프란체스카는 회화에 수학과 과학을 도입하여 균형 잡힌 구성, 계산을 통한 원근법을 구사한 인물이기도 하다. 동시에 단순한 형태와 부드러운 색채로 종교화에 새로운 지평을 열었다. 이 작품은 플랑드르 화풍이 가미된, 그러니까 바치 경당의 시리즈 후반부에 그린 것으로 추정된다. 이전의 작품과 확연히 다른, ‘빛’에 강한 의미를 부여하고 있기 때문이다. 빛의 변화에 따라 색을 잘 사용하여 밤의 깊이를 더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림 속 장면은 열린 막사가 대부분을 차지한다. 배경이 없었다면 막사가 아니라 어떤 무대로 착각할 수도 있겠다. 멀리 하늘이 밝아오는 걸로 봐서 새벽, 빛이 시작되는 시점으로 보인다. 막사의 붉은 지붕과 황금색 커튼이 황제의 막사라는 것을 암시한다. 막사 앞에는 두 병사가 양쪽에 서서 잠자는 황제를 지키고 있다. 이들은 눈을 크게 뜨고, 한 사람은 황제를 보고, 다른 한 사람은 관객을 보고 있다. 황제의 몸종은 침대 발치에 기대어 관객을 보고 있다. 몸종과 황제의 연관성은 침대 시트와 담요의 흰색과 붉은색이 몸종의 옷과 신발과 같은 색이다. 여기서 몸종의 역할은 관객의 시선을 끄는 것으로 해석된다. 천사는 왼쪽 위, 관객 쪽에서 막사로 향하고 있다. 한쪽 날개가 반사되어 크게 보이지만 손에 든 하얀 십자가는 매우 작다. 손가락은 잠든 황제를 가리킨다. 여기에서 주인공은 ‘빛’이다. 작은 십자가에서 시작된 빛이 병사들의 갑옷과 모자를 비추고 잠든 황제를 향한다. 병사들과 배경은 어둠 속에서도 깨어 있다. 화가에게 이 빛은 ‘신비’다. 제국 시대 이교도의 ‘어둠’에서 그리스도교의 ‘빛’으로 이동되는 것처럼 말이다. 천사의 등장은 그래서 더욱 극적이고, 본질적으로 ‘빛의 사건’이 되는 것이다. cpbc2020.05.20
![[이창훈 위원의 사도행전 이야기] (10) 최고의회에서 증언하다 (4,1-12)](//cpbc.co.kr/CMS/newspaper/2019/03/rc/748693_1.0_titleImage_1.jpg)
[이창훈 위원의 사도행전 이야기] (10) 최고의회에서 증언하다 (4,1-12)성령으로 가득차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복음 전하다 성전 솔로몬 주랑에서 예수님의 부활을 설교하다가 붙잡힌 베드로와 요한은 유다교 최고의회 앞에서 복음을 증언한다. 사진은 예루살렘 성전 서쪽벽과 황금돔. 태생 불구자였던 사람이 멀쩡하게 낫게 된 것을 보고 백성이 놀라서 경악한 데 따라 자연스럽게 이어지는 첫 번째 이야기가 지난 호에 살펴본 베드로의 솔로몬 주랑 설교(3,11-26)라면, 베드로와 요한이 최고의회에서 증언하는 이야기(4,1-22)는 그 후속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이야기 또한 두 부분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앞부분은 솔로몬 주랑 설교의 결과와 베드로의 최고의회 증언이고(4,1-12), 뒷부분은 최고의회 의원들의 결정입니다.(4,13-22) 이번 호에서는 앞부분을 살펴봅니다. 감옥에 갇힌 베드로와 요한베드로와 요한이 백성에게 말하고 있을 때 사제들과 성전 경비대장과 사두가이들이 와서는 두 사람을 붙잡아 감옥에 가두어 버립니다. 그 이유를 사도행전 본문은 이렇게 전합니다. “그들은 사도들이 백성을 가르치면서 예수님을 내세워 죽은 이들의 부활을 선포하는 것을 불쾌히 여기고 있었다.”(4,2) 여기서 “그들”은 사제들과 성전 경비대장 그리고 사두가이들을 말합니다. 이들은 모두 성전과 관련되는 이들입니다. 사제들은 성전에서 제사를 집전하는 이들이고, 성전 경비대장은 말 그대로 성전 경비를 담당하는 최고 책임자로 대사제 다음 가는 사제가 그 직책을 맡았다고 합니다. 사두가이 역시 성전에 대한 책임을 맡아 성전과 관련되는 일을 하는 이들입니다. 사두가이는 대사제나 영향력 있는 사제 가문 또는 부유한 상인 출신으로, 당시 이스라엘에서 귀족층을 형성하고 있었습니다. 특히 사두가이들은 바리사이들과 달리 부활이 없다고 믿었습니다. 이들이 못마땅해한 것은 두 가지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선 자기들의 활동 거점인 성전에서 갈릴래아 출신의 시골뜨기들이 허락도 없이 백성을 가르치고 있는 것 자체가 못마땅했을 것입니다. 게다가 이들은 자기들이 작당해서 사형에 처한 예수를 들먹이며 죽은 이들의 부활을 이야기하고 있었으니 더욱 못마땅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베드로와 요한을 붙잡아 이튿날까지 감옥에 가두었습니다. 이미 저녁때가 됐기 때문입니다. 저녁때가 됐다는 것은 최고의회에 이들을 데려갈 시간이 이미 지났음을 의미합니다. 그러니 감옥에 가두었지요. 주랑 설교로 확장된 신자 공동체그런데 베드로의 주랑 설교는 엄청난 반향을 불러일으켰습니다. 베드로의 설교를 듣고 믿게 된 사람이 장정만 5000명가량이나 됐으니까요.(4,4) 베드로의 오순절 설교 때에 믿고 신자가 된 사람이 3000명가량인 것(2,41)과 비교하면 3분의 2나 더 늘어난 숫자입니다. 하지만 학자들은 숫자 자체의 의미보다는 예루살렘의 그리스도인 공동체가 점점 커지고 있음을 묘사하는 것으로 이해해야 한다고 봅니다. 이튿날 유다 지도자들과 원로들, 율법학자들이 예루살렘에 모였는데, 그 자리에는 “한나스 대사제와 카야파와 요한과 알렉산드로스와 그 밖의 대사제 가문 사람들도 모두 있었다”고 루카는 기록합니다.(4,5-6) 이 모임은 ‘산헤드린’이라고 하는 유다교의 최고 통치기구인 최고의회였습니다. 한나스는 기원후 6~15년에, 카야파는 한나스의 사위로 기원후 18~36년에 각각 대사제를 지냈습니다. 한나스는 로마 당국에 의해 대사제직에서 물러난 후에도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했다고 합니다. 사도들이 불려간 최고의회에 한나스가 있었던 이유이기도 합니다. 예수님의 재판과 처형 때에 대사제 신분이었던 카야파는 현직 대사제였습니다. 요한과 알렉산드로스는 정체를 알 수 없는 인물들입니다. 이 최고의회 의원들이 베드로와 요한을 가운데 세워 놓고 묻습니다. “당신들은 무슨 힘으로, 누구의 이름으로 그런 일을 하였소?”(4,7) 여기서 “그런 일”은 베드로의 솔로몬 주랑 설교를 가리키기도 하고 또한 불구자를 낫게 한 착한 일을 가리키기도 합니다. 물음의 핵심은 “무슨 힘으로, 누구의 이름으로?”입니다. 베드로의 최고의회 증언루카는 “베드로가 성령으로 가득 차 그들에게 말하였다”(4,8)라면서 베드로의 말을 전합니다. 여기에서 이미 “무슨 힘으로?”에 대한 답이 나온 셈입니다. 바로 ‘성령의 힘’이지요. 베드로의 말은 세 부분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첫째, 신문의 성격에 관한 것입니다. 베드로는 이렇게 말을 시작합니다. “우리가 병든 사람에게 착한 일을 한 사실과 이 사람이 어떻게 구원받았는가 하는 문제로 오늘 신문을 받는 것이라면….”(4,9) 둘째, “누구의 힘으로”에 대한 답변입니다. “여러분 모두와 온 이스라엘 백성은 이것을 알아야 합니다. 나자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곧 여러분이 십자가에 못 박았지만 하느님께서 죽은 이들 가운데서 다시 일으키신 바로 그분의 이름으로, 이 사람이 여러분 앞에 온전한 몸으로 서게 되었습니다.”(4,10-11) 곧 십자가에 처형됐으나 부활하신 나자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그 일을 했다는 것입니다. 그 일이란 불구자였던 사람이 온전한 몸으로 서게 됐다는 것, 달리 말하면 “구원받았다”(4,9)는 것입니다. 이로써 베드로는 산헤드린 곧 최고의회의 질문에 대한 답을 했습니다. 셋째, 베드로의 답변은 그것으로 그치지 않고 그분이 어떤 분이신지를 더 설명합니다. ①구약성경 시편의 말씀처럼(시편 118,22) “너희 집 짓는 자들에게 버림을 받았지만,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신 분”입니다. ②“그분 말고는 다른 누구에게도 구원이 없는” 분입니다. 베드로는 이를 더욱 강조해서 이렇게 말합니다. “사실 사람들에게 주어진 이름 가운데서 우리가 구원받는 데에 필요한 이름은 하늘 아래 이 이름밖에 없습니다.”(4,12) 구원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에게서만 온다는 것입니다.생각해봅시다최고의회가 베드로에게 무슨 힘으로 누구의 이름으로 그런 일을 하느냐고 묻자 베드로는 성령으로 가득 차서 대답합니다. “나자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사도행전의 이 대목은 복음을 선포하는 이들, 사도직을 수행하는 이들이 절대로 놓쳐서는 안 될 두 가지를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성령의 능력으로’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가 그것입니다. 베드로 사도는 성령의 능력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복음을 선포하고 사도직을 수행하는 표본입니다. 베드로는 열두 사도 가운데 으뜸이었지만, 예수님께서 잡히셨을 때에 세 번이나 예수님을 모른다고 부인한 인물이었습니다. 그랬던 그가 용감하게 나서서 예수님의 부활을 선포하고 불구자를 고칠 수 있었던 것은 성령으로 가득 차 있었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을 했기 때문입니다.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 그리스도인들 또한 모든 일을 성령의 능력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평화신문2019.03.19
![[이창훈 위원의 사도행전 이야기] (56)성전 모독했다는 누명 쓰고 유다인들에게 붙잡히다](//cpbc.co.kr/CMS/newspaper/2020/03/rc/775353_1.2_titleImage_1.jpg)
[이창훈 위원의 사도행전 이야기] (56)성전 모독했다는 누명 쓰고 유다인들에게 붙잡히다 유다인들이 성전에서 바오로를 붙잡아 죽이려고 합니다. 로마 군대의 천인대장이 부하들을 데리고 가서 바오로를 구해내 군사들의 진지 안으로 데려갑니다. 성전 체포와 로마 군대의 개입(21,27-36) 정결 예식 기간인 이레가 거의 끝날 무렵이었습니다. “아시아에서 온 유다인들이 성전에서 바오로를 보고는 군중을 선동하여 그를 붙잡고”는 외칩니다. 내용은 바오로가 “이스라엘 백성과 율법과 성전을 거슬러 가르치는 사람”이라는 것입니다.(21,27-28ㄴ) 아시아에서 온 유다인들은 바오로에 관해 잘 알고 있었습니다. 바오로는 아시아의 수도 에페소에서 3년이나 지내면서 복음을 전했고 반대자들에 의해 심한 고초를 겪기도 했습니다. 에페소에서 바오로를 반대한 이들은 두 부류였습니다. 한 부류는 유다교의 율법에 충실한 유다인들이었고, 다른 한 부류는 에페소를 대표하는 아르테미스 여신을 팔아서 돈벌이하던 이들이었습니다.(19장 참조) 바로 그 유다인들이 성전에서 바오로를 보고 붙잡아 고발한 것입니다. 게다가 이 유다인들은 한술 더 떠서 바오로가 이방인인 “그리스인들까지 성전 안으로 데리고 들어와서 이 거룩한 곳을 부정한 곳으로 만들었다”(21,28ㄷ)라고 비난합니다. 사도행전 저자는 이 유다인들이 “전에 에페소 사람 트로피모스가 바오로와 함께 성안에 있는 것을 보고 바오로가 그를 성전 안으로 데리고 들어갔다고 생각한 것”(21,29)이라고 전합니다. 예루살렘 성전은 솔로몬 주랑이 있는 바깥뜰과 성전 안뜰로 엄격히 구별돼 있었습니다. 바깥뜰은 ‘이방인의 뜰’이라고 해서 이곳까지는 이방인들이 들어올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성전 안뜰 출입은 엄격히 제한됐습니다. 이방인이 안뜰에 들어오면 죽음을 면치 못할 것이라는 경고 표시가 곳곳에 있었습니다. 안뜰은 또한 여자들에게 허용되는 여인의 뜰과 여인들이 들어가지 못하는 이스라엘의 뜰로 구분돼 있었다고 하지요. 이스라엘의 뜰 안에 제단과 정결례 욕조와 본성전이 있었습니다. <그림 참조> 예루살렘 성전과 안토니오 요새 모형도. 예루살렘 성전과 안토니오 요새 모형도. 오른쪽 아래 사진은 로마 군사들이 바오로를 결박해 끌고 갔던 진지인 안토니오 요새. 예루살렘 성전 북쪽 바깥벽 서쪽 끝에 있다. 아시아 출신인 트로피모스는 바오로가 코린토에서 예루살렘으로 돌아올 때에 동행한 일행 중 한 사람이었습니다.(20,4) 사도행전 저자의 표현대로라면 트로피모스는 예루살렘 성전에 들어간 것이 아니라 단지 예루살렘 도성 안에 바오로와 함께 머물렀을 따름인데, 바오로를 고발한 유다인들은 바오로가 그를 성전 안에까지 데리고 간 것으로 잘못 생각한 것입니다. 예루살렘 교회 원로들의 조언을 따라 열성적인 유다인들의 비위를 거스르지 않기 위해 정결 예식까지 거행한 바오로라면, 굳이 이방인인 트로피모스를 성전에 데리고 들어갈 이유가 없었다고 봐야 할 것입니다. 하지만 바오로를 없애는 데 혈안이 돼 있던 열성 유다인들에게는 진실 혹은 사실 여부가 문제가 아니라 바오로를 없애는 것이 더 중요했나 봅니다. 아시아에서 온 유다인들의 고발로 도시가 소란스러워지고 백성이 몰려들어 바오로를 붙잡아 성전 밖으로 끌어내고는 죽이려고 매질을 시작합니다. 예루살렘에 소동이 일어났다는 보고가 현지에 주둔하고 있던 로마 군대의 천인대장에게 올라가고 천인대장은 곧장 부하들을 데리고 현장으로 달려갑니다. 천인대장과 군사들이 오는 것을 본 유다인들은 매질을 멈추지요.(21,31-32) 천인대장이란 수하에 1000명 이상의 부하를 거느리고 있는 로마 군대의 고위급 장교입니다. 예루살렘에서 천인대장이 머물고 있던 진지는 예루살렘 성전 북쪽 벽 서쪽에 붙어 있던 안토니오 요새를 가리키는데, 이 요새에는 성전 바깥뜰로 통하는 계단이 있어서 성전에 소동이 생기면 요새에 머물던 군사들을 즉각 투입할 수가 있었습니다. 천인대장은 쇠사슬 두 개로 바오로를 결박하게 한 다음 그가 누구이며 무슨 일을 했는지 군중에게 묻습니다. 하지만 군중이 여기저기서 외치는 바람에 소란스러워 진상을 파악하기 힘들게 되자 천인대장은 바오로를 진지 곧 안토니오 요새로 끌고 가라고 명령합니다. 요새로 통하는 계단에 이르자 군중이 난폭하게 구는 바람에 군사들은 바오로를 둘러메고 가야 했습니다. 그래도 군중은 큰 무리를 이루어 따라가며 “그자를 없애라” 하고 외쳐댑니다.(21,33-36)바오로는 3차 선교 여행을 마치고 예루살렘으로 돌아오는 길에 카이사리아에서 여러 날을 지낸 적이 있었습니다. 그때 유다에서 내려온 예언자 하가보스가 예루살렘에서 바오로가 결박을 당해 다른 민족 곧 이방인들에게 넘겨질 것이라고 예언했습니다.(21,11) 로마 군사들이 쇠사슬로 바오로를 결박한 것은 하가보스의 예언이 실현됐음을 보여줍니다. 또 큰 무리가 따라가며 바오로를 없애라고 외치는 모습은 마치 빌라도가 예수님을 심문할 때 군중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외친 광경을 연상케 합니다. 또 예수님께서 세 번째 수난 예고에서 “사람의 아들은 다른 민족 사람들에게 넘겨질 터인데…”(루카 18,32)라고 하신 말씀을 연상케 합니다. 이렇게 보면 바오로의 체포 장면은 바로 예수님의 수난과 처형 직전의 모습을 재현하는 듯합니다.천인대장의 심문과 바오로의 답변(21,37-40)진지 안으로 끌려 들어가던 바오로는 천인대장에게 “당신에게 말을 좀 해도 되겠소?” 하고 묻습니다. 바오로는 히브리 말이 아니라 당시에 이방인들 세계에서 통용되던 그리스 말로 천인대장에게 말을 건넨 것입니다. 바오로가 그리스 말로 이야기하는 것을 확인한 천인대장은 바오로에게 “얼마 전에 폭동을 일으켰다가 자객 사천 명을 이끌고 광야로 나간 그 이집트 사람이 아니오?” 하고 묻습니다.(21,37-38) 천인대장이 거론한 그 이집트 사람은 유다 역사가 플라비우스 요세푸스의 기록에 따르면 거짓 예언자였습니다. 그는 사람들을 모아 올리브 산으로 데리고 가서는 예루살렘 성을 무너뜨린 후 성안으로 쳐들어가 로마 군사들을 무찌르겠다고 호언장담합니다. 그러나 펠릭스 총독이 보낸 군사들에게 제압당하고 말지요. 천인대장의 말에 바오로는 자신은 유다 사람으로서 타르수스 출신이라고 밝히고는 군중에게 이야기할 수 있도록 허락해 달라고 청합니다. 천인대장이 허락하자 바오로는 층계에서 백성을 향해 이번에는 히브리말로 연설을 시작합니다.(21,39-40) 연설 내용은 다음 호에서 자세히 살펴봅니다. 생각해봅시다열성적인 유다인들은 같은 유다인이면서도 유다인의 율법을 무시하는 듯한 바오로의 행태가 지극히 못마땅했고 그를 죽이고 싶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바오로가 이방인 트로피모스를 성전에 데리고 들어가지도 않았는데 그에게 데리고 들어갔다고 올가미를 씌우려 합니다.신앙인이라고 자처하며 살아가면서도 우리는 때로는 내게 못마땅한 사람이 있으면 무슨 구실을 대서라도 그 사람과 함께하지 않으려 하거나 심지어 제거하려고까지 합니다. 그럴 때 우리는 열성 유다인들과 똑같은 일을 저지르는 것은 아닌지요. 한국평협 평신도사도직연구소장 alfonso84@hanmail.net cpbc2020.03.18
![[이창훈 위원의 사도행전 이야기] (14)사도들이 기적을 일으키다 (5,12-26)](//cpbc.co.kr/CMS/newspaper/2019/04/rc/750926_1.0_titleImage_1.jpg)
[이창훈 위원의 사도행전 이야기] (14)사도들이 기적을 일으키다 (5,12-26)사도들을 통해 드러난 하느님의 표징과 이적 사도행전에서 세 번째로 요약해서 전하는 초대 교회 모습에서는 베드로 사도의 역할이 두드러진다. 사진은 베드로 사도의 무덤 위에 세워진 바티칸 성 베드로 대성전 안. 【CNS 자료 사진】 루카는 사도들, 특히 베드로의 활동과 함께 다시 한 번 초대 교회 공동체 모습을 요약합니다.(5,12-16) 사도행전에서 첫 신자 공동체의 생활(2,42-47), 초대 교회 공동체 생활(4,32-37)에 이어 세 번째이자 마지막으로 전하는 공동체 생활 모습입니다. 초대 교회 공동체의 모습을 요약해서 전하는 세 번째 대목은 “사도들의 손을 통하여 백성 가운데에서 많은 표징과 이적이 일어났다”(5,12ㄱ)로 시작합니다. 신약성경에서 ‘표징과 이적’은 모두 16번 언급됩니다. 그 가운데 세 번은 부정적입니다. 즉 거짓 그리스도와 거짓 예언자들이 나타나 선택된 이들을 속이려고 표징과 이적들을 일으킨다는 것이지요.(마태 24,24; 마르 13,21; 2테살 2,9) 모두 종말에 앞서 거짓 표징과 이적으로 사람들을 현혹한다는 내용입니다. 하지만 표징과 이적이 믿음의 동기로 작용한다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대목도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카나에 가셨을 때 카파르나움에서 죽어가는 아들을 낫게 해달라는 왕실 관리의 청에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표징과 이적을 보지 않으면 믿지 않을 것이다.”(요한 4,48) 그러고는 “네 아들은 살아날 것이다”라는 말씀으로 왕실 관리의 아들을 낫게 해주십니다. 그 결과 그 왕실 관리와 온 집안이 믿었지요. 나머지 열두 번 언급되는 ‘표징과 이적’은 대부분 백성에게 믿음의 동기로 작용하는데, 사도행전에서 9번, 서간에서 3번 나옵니다. 초대 교회 모습을 세 번째로 요약하는 이 대목이 ‘사도들이 백성 가운데에서 많은 표징과 이적을 일으켰다’가 아니라 “사도들의 손을 통하여 백성 가운데에서 많은 표징과 이적이 일어났다”로 표현되고 있음을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런 표현은 공동체 모습을 요약해서 전하는 첫 번째 대목에서도 똑같이 나옵니다. “사도들을 통하여 많은 이적과 표징이 일어나므로….”(2,43) 많은 표징과 이적이 사도들을 ‘통하여’ 일어났다는 것은 표징과 이적을 일으키는 주체가 사도들이 아니라 바로 하느님이심을 나타냅니다. 이는 또한 예수님의 이름으로는 말하지도 가르치지도 말라는 최고의회 지도자들의 위협을 받고 풀려난 사도들이 “한마음으로 목소리를 높여” 간절하게 바친 기도를 하느님께서 들어주셨음을 드러냅니다. “이제 주님! 저들의 위협을 보시고, 주님의 종들이 주님의 말씀을 아주 담대히 전할 수 있게 해주십시오. 저희가 그렇게 할 때, 주님께서는 손을 뻗으시어 병자들을 고치시고, 주님의 거룩한 종 예수님의 이름으로 표징과 이적들이 일어나게 해 주십시오.”(4,30)루카는 “그들은 모두 한마음으로 솔로몬 주랑에 모이곤 하였다. 다른 사람들은 아무도 감히 그들 가운데에 끼어들지 못하였다”고 기록합니다.(5,12ㄴ-13ㄱ) 사도들이 솔로몬 주랑에 모인 것은 예수님께서 성전 솔로몬 주랑을 거닐곤 하셔서 예수님을 떠올리기 쉬운 곳이었기 때문일 것입니다.(요한 10,23; ‘사도행전 이야기’ 3월 17일자 1506호 참조) 다른 사람들이 감히 사도들 가운데 끼어들지 못한 것은 사도들을 통해 많은 이적과 표징이 일어나는 것을 보고 두려웠기 때문일 것입니다.(2,43 참조) 하지만 이 두려움은 단지 무서움이 아니라 사도들을 통해 표징과 이적을 일으키시는 주님께 대한 두려움 혹은 경외심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믿음을 불러일으키는 표징과 이적사도들을 통한 표징과 이적들은 한편으로는 두려움을 불러일으켰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사도들에 대한 존경심과 사도들이 전하는 하느님 말씀 곧 복음 말씀에 대한 믿음을 갖게 하는 동기도 되었습니다. 그래서 루카는 “백성은 그들을 존경하여, 주님을 믿는 남녀 신자들의 무리가 더욱더 늘어났다”(5,13ㄴ-14)고 합니다.루카가 세 번째로 요약해서 전하는 초대 교회 공동체 생활 모습에서는 첫 번째와 두 번째 요약 기사에서는 나오지 않는 내용이 나옵니다. 병자들의 치유에 관한 내용입니다. “사람들은 병자들을 한길까지 데려다가 침상이나 들것에 눕혀 놓고, 베드로가 지나갈 때에 그의 그림자만이라도 누구에겐가 드리워지기를 바랐다. 예루살렘 주변의 여러 고을에서도 많은 사람들이 병자들과 또 더러운 영에게 시달리는 이들을 데리고 몰려왔는데, 그들도 모두 병이 나았다.”(5,15-16)이 구절은 우선 예수님의 치유 활동과 관련된 복음서 대목들을 떠올리게 합니다. “사람들은 곧 예수님을 알아보고, 그 지방을 두루 뛰어다니며 병든 이들을 들것에 눕혀, 그분께서 계시는 곳마다 데려오기 시작하였다. 그리하여 마을이든 고을이든 촌락이든 예수님께서 들어가기만 하시면, 장터에 병자들을 데려다 놓고 그 옷자락 술에 그들이 손이라도 대게 해 주십사고 청하였다. 과연 그것에 손을 댄 사람마다 구원을 받았다.”(마르 6,55-56) “군중은 모두 예수님께 손을 대려고 애를 썼다. 그분에게서 힘이 나와 모든 사람을 고쳐 주었기 때문이다.”(루카 6,19)이 구절은 또 사도들 가운데서 베드로 사도의 위치가 어떠한지를 알게 해줍니다. 베드로 사도는 마치 예수님처럼 다른 사도들보다 더 권위를 지닌 사도로서 예루살렘 초대 교회 공동체의 중심인물로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루카복음서에서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에게 세 번이나 당신을 모른다고 할 것임을 예고하신 후 그러나 “네가 돌아오거든 네 형제의 힘을 북돋아 주어라”(루카 22,32)라고 하시는데, 사도행전의 이 대목은 베드로가 예수님의 이 말씀을 그대로 실행하고 있는 것처럼 나타납니다.생각해봅시다사도행전에서 세 번째로 요약해서 전하는 초대 교회 공동체 모습에는 첫 번째, 두 번째와 다른 특징이 보입니다. 하나는 병자들과 더러운 영에 시달리는 이들의 치유를 전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첫 번째와 두 번째 요약 기사에서는 음식을 함께 나누고 가진 것을 내놓고 공동으로 소유함으로써 공동체에는 궁핍한 이들이 없었다는 것이 강조됩니다. 이에 비해 세 번째 요약 기사에서는 병자들과 악령 들린 사람들의 치유가 부각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굶주림과 가난, 그리고 병고가 초대 교회 공동체의 주요 관심사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복음을 선포하고 하느님을 찬미하는 공동체에서는 적어도 궁핍한 이가 없어야 하고 질병으로 고통받는 이들이 우선으로 위안을 받아야 한다는 뜻으로 풀이할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2000년 전 예수님 시대나 초기 교회 공동체 시대와 마찬가지로 오늘날에도 가난하고 굶주리는 이들, 그리고 병고에 시달리는 이들이 사회로부터 가장 소외되고 외로운 사람들일 것입니다. 초대 교회 공동체의 모습은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이렇게 촉구하는 듯합니다. 적어도 교회 공동체 안에서만이라도 굶주리고 가진 것이 없다고 해서, 몸과 마음이 병들었다고 해서 소외되는 일은 없어야 한다고 말입니다. 평화신문2019.04.17
![[이창훈 위원의 사도행전 이야기] (18) 스테파노의 설교 (7,1-53)(1)](//cpbc.co.kr/CMS/newspaper/2019/05/rc/753564_1.0_titleImage_1.jpg)
[이창훈 위원의 사도행전 이야기] (18) 스테파노의 설교 (7,1-53)(1)“보이는 것에만 집착해 예수님 거부하지 않았는가” 스테파노는 최고의회 사람들에게 아브라함에게서 모세, 다윗과 솔로몬에 이르기까지 조상들의 역사를 설명하면서 예수님을 받아들이지 않은 그들의 완고함을 질타한다. 사진은 이스라엘 백성이 이집트를 탈출해서 거쳐 갔던 시나이 광야. 가톨릭평화신문 DB 지난 호에서 봤듯이 스테파노와 논쟁에서 진 사람들이 거짓 증인을 내세워 최고의회에서 스테파노를 고발하게 합니다. 최고의회 사람들의 시선이 일제히 스테파노에게 쏠리고 스테파노 얼굴은 천사 얼굴처럼 보였습니다.(6,8-15) 대사제가 “그게 사실이오?” 하고 묻고 스테파노는 긴 설교로 답변합니다.(7,1-53) 이 설교를 두 번으로 나눠 살펴봅니다. 스테파노의 설교는 사도행전에 나오는 설교 중 가장 깁니다. 스테파노는 이 설교에서 아브라함에서 시작하여 모세 그리고 다윗과 솔로몬에 이르기까지 이스라엘의 역사를 압축해서 전하면서 자신이 선포하는 예수님을 거부하는 이들을 비판합니다. 스테파노는 “부형 여러분, 들어보십시오”(7,2ㄱ)라는 말로 설교를 시작합니다. “부형(父兄)”이라는 표현은 그 자리에 여자가 없다는 것을 나타냅니다. 여자는 산헤드린, 곧 최고의회의 구성원이 될 수 없었다는 것을 암시하고 있지요. 스테파노는 아브라함이 메소포타미아에서 살 때에 “네 고향과 친족을 떠나 내가 너에게 보여줄 땅으로 가거라” 하시는 하느님의 말씀을 따라 하란에 자리를 잡았다고 말합니다.(7,2-3) 그런데 이것은 창세기에서 전하는 내용과 차이가 있습니다. 창세기에서는 아브라함이 “고향과 친족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내가 너에게 보여줄 땅으로 가거라” 하신 하느님 말씀을 들은 곳이 하란으로 나오기 때문이지요.(창세 11,31─12,5 참조) 「주석 성경」에서는 이 차이에 대해 스테파노가 창세기 말씀보다는 고대 이집트 알렉산드레아의 대표적인 유다인 철학자 필론(B.C. 15?~A.D.45?)과 역사가 요세푸스(37/38?~100?)가 전하는, 성경 이외의 전통을 따랐다고 풀이하고 있습니다. 어쨌거나 하느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땅은 바로 지금 예루살렘 성전이 있고 그 후손들이 살고 있는 가나안 땅이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그 땅을 아브라함에게 주신다고 약속하신 것이 아니라 아브라함의 후손들에게 주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또 아브라함과 할례의 계약을 맺어 주십니다. 아브라함 자신은 한 치의 땅도 상속 재산으로 받지 못했지만, 하느님의 약속을 믿고 말씀을 따랐으며 또 자식에게 계약의 할례를 베풀었습니다.(7,4-8) 아브라함은 당장 손에 넣은 것이 없었지만, 자신에게 또 후손들을 위해 하신 하느님 말씀에 충실했다는 것입니다. 스테파노의 설교라는 긴 이야기의 첫째 마당이 아브라함에 대한 이야기였다면, 둘째 마당은 요셉 이야기입니다.(7,9-16) 요셉은 아브라함의 손자 야곱 곧 이스라엘의 열두 아들 가운데 하나입니다. 따라서 이스라엘 민족의 열두 선조 가운데 하나입니다. 스테파노는 창세기를 인용하면서 “하느님께서 요셉과 함께 계셨다”고 말합니다.(7,9) 하느님께서 함께 계셨기에 요셉은 형제들의 시기로 이집트에 팔려가면서도 하느님께서 베푸시는 은총과 지혜로 이집트와 자기 온 집안을 다스릴 수 있었습니다. 요셉 이야기는 요셉이 이집트로 팔려가서 재상이 되고 형제들과 친족을 모두 이집트로 불러와 그곳에서 살다가 죽고 묻히는 데까지 이어집니다.이야기의 셋째 마당은 모세에 관한 것입니다.(7,17-44) 스테파노는 셋째 마당을 “하느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다짐하신 약속이 실현될 때가 다가오자”(7,17)라는 표현으로 시작합니다. 사백 년이라는 시간이 흘렀지만(7,6 참조) 하느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하신 약속을 잊지 않으시고 실현하신다는 것을 드러내는 표현이라고 하겠습니다. 그래서 모세는 하느님께서 일찍이 아브라함에게 하신 약속을 실현하시기 위해 택하신 도구라는 점이 부각됩니다. 스테파노는 모세가 죽지 않고 극적으로 살아남아 이집트 왕실에서 자라나게 된 과정, 마흔 살이 되어 이집트 사람을 죽이고 동족을 구하려다가 오히려 동족의 배반으로 미디안 땅으로 가서 살게 된 일, 다시 40년이 찼을 때 떨기나무 불길 속에서 주님의 목소리를 듣고 소명을 받아 이스라엘 백성을 이집트에서 이끌어낸 일, 시나이 산에서 하느님의 천사와 조상들 사이의 중개자가 되어 “살아 있는 말씀” 곧 율법을 전해 준 일, 그러나 조상들이 순종하지 않고 금송아지를 만들어 우상에게 희생제물을 바치던 일 등을 열거합니다. 그런데 학자들은 스테파노의 이 설교에서 모세가 예수님의 예형으로 제시된다고 봅니다. 예를 들면 모세를 두고 “말과 행동에 힘이 있었다”고 하는 묘사(7,22)는 엠마오의 제자들이 예수님에 대해 한 묘사(루카 24,19)와 같습니다. 모세가 동족을 도우려 했으나 오히려 “누가 당신을 우리의 지도자와 판관으로 세우기라도 했소?”라며 반대를 받은 것(7,27), 이적과 표징을 일으키며 백성을 이끌어낸 것(7,36), 모세를 지도자와 해방자(7,35), 예언자로(7,37), 또 살아 있는 말씀 곧 생명의 말씀을 전해주는 중개자로 여기는 것(7,38) 등도 모두 모세를 예수님의 예형으로 제시하는 표현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하지만 스테파노가 긴 설교로 이야기하는 핵심은 아브라함과 요셉과 모세로 이어지는 조상들의 위업을 전하려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이제부터 보게 되겠지만 때가 차서 하느님께서 해방자요 구원자로 보내주신 모세의 말을 듣지 않은 조상들의 불충을 지적하는 데 있습니다. 그리고 그 지적은 또 다른 목적을 띱니다. 이에 대해서는 다음 호에 계속 살펴보겠습니다. 생각해봅시다“네 고향과 친족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내가 너에게 보여줄 땅으로 가거라. 나는 너를 큰 민족이 되게 하고, 너에게 복을 내리며, 너의 이름을 떨치게 하겠다….”(창세 12,1-2) 이 말씀에 아브라함은 길을 떠납니다. 아브라함은 약속된 땅 가나안에 왔지만, 정작 자신은 그 땅을 한치도 상속 재산으로 받지 못했습니다. 그 땅은 아브라함을 위한 것이 아니라 아브라함 후손들의 몫이었습니다. 그 후손들 또한 400년이라는 긴 세월을 남의 나라에서 종살이를 하고 또 40년을 광야에서 헤맨 끝에 비로소 그 땅을 차지할 수 있었습니다. 말하자면 아브라함은 자기 눈앞에 보이지 않는 것을 희망하면서 하느님 말씀을 따랐던 것입니다. 그래서 바오로 사도는 로마 신자들에게 보낸 서간에서 “그는 희망이 없어도 희망하며…”(로마 4,18) 라고 썼습니다. 모세는 하느님의 부르심을 받고 이스라엘 백성을 이집트의 종살이에서 구해낸 위대한 영도자요 해방자였지만 정작 그 자신은 약속의 땅을 밟아 보지도 못했습니다. 그는 백성을 이끌고 죽을 고생을 해 가며 약속의 땅으로 인도하는 역할로 그쳤습니다. 자신은 먹지도 못하는 맛있는 죽을 실컷 쑤어서 남에게 준 것과 다를 바 없습니다. 인간적인 눈으로만 본다면 어리석기조차 한 아브라함과 모세는 눈앞에 보이는 것에만 집착하고 혈안이 돼 있는 오늘의 세태에 거꾸로 경종을 울리는 모범입니다. 그 경종의 극치가 하느님의 아들이 사람이 되어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님이십니다. 스테파노는 지금 그분을 선포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 신자인 우리는 어떤 분을 어떤 말과 행동으로 선포하는지요? cpbc2019.05.22
![[이창훈 위원의 사도행전 이야기] (36) 헤로데의 죽음, 바르나바와 사울의 사명 완수(12,18-25)](//cpbc.co.kr/CMS/newspaper/2019/10/rc/764591_1.0_titleImage_1.jpg)
[이창훈 위원의 사도행전 이야기] (36) 헤로데의 죽음, 바르나바와 사울의 사명 완수(12,18-25)죽음을 부른 헤로데의 오만함헤로데 아그리파 임금은 카이사리아에서 연설을 하다가 비참한 죽음을 맞이한다. 사진은 지중해변 도시 카이사리아 유적지의 일부. 야보고를 사형에 처하고 베드로까지 죽이려고 했던 헤로데 아그리파가 비참한 최후를 맞습니다.(12,18-23) 바르나바와 사울은 예루살렘에서 사명을 수행하고 안티오키아로 돌아갑니다.(12,24-25)카이사리아로 내려간 헤로데의 죽음(12,18-23) 무교절이 끝나면 베드로를 끌어내 사형에 처함으로써 유다인들의 환심을 사려고 했던 헤로데 아그리파의 계획이 수포로 돌아갔습니다. 하룻밤 사이에 베드로가 감쪽같이 사라졌기 때문입니다. 군사들 사이에는 적지 않은 소동이 일어나고 헤로데는 베드로를 찾지 못하자 파수병들을 문초한 뒤에 사형에 처하라고 명령을 내립니다. 그러고는 지중해변 도시 카이사리아로 내려가 그곳에서 지내지요.(12,18-19) 여기서 사도행전 저자 루카는 헤로데가 티로와 시돈 사람들에게 몹시 화가 나 있었고 그래서 티로와 시돈 사람들이 헤로데에게 가서 화평을 청했다고 전합니다. 헤로데가 왜 티로와 시돈 사람들에게 화가 나 있었는지에 대한 설명은 하지 않지만 두 도시 사람들이 헤로데에게 화평을 청한 이유에 대해서는 “그들의 지방이 임금의 영토에서 양식을 공급받고 있었기 때문”이라고 밝힙니다.(12,20) 말하자면 헤로데의 화가 계속해서 티로와 시돈 사람들에게 미치면 양식을 공급받지 못할까 봐 화평을 청했다는 것입니다. 구약성경 열왕기 상권을 보면, 티로와 시돈 사람들은 솔로몬 임금 때부터 유다 지방에서 식량을 공급받아 왔음을 알 수 있습니다.(1열왕 5,25) 티로와 시돈이 해안 도시들이어서 밀 같은 곡식이 부족했을 것입니다. 그러니 헤로데의 화를 풀어주지 못한다면 양식을 공급받지 못하리라는 것이 뻔하지요. 루카는 이어 “정해진 날에 헤로데는 화려한 임금 복장으로 연단에 앉아 그들에게 연설을 하였다”(12,21)고 전하는데, 이 문장에서 “정해진 날”이 무엇을 가리키는지가 확실하지 않습니다. 어떤 학자들은 로마 황제 클라우디우스(재위 41~54)가 브리타니카(지금의 영국)를 정복하고 개선한 것을 경축하는 날이라고 보기도 합니다. 클라우디우스 황제가 브리타니카를 정복하고는 44년 초에 로마로 개선했는데 헤로데 아그리파가 이를 경축하기 위해 정한 날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문맥으로는, 티로와 시돈 사람들이 헤로데에게 화평을 청했고 그래서 평화 조약을 체결하기로 정한 날 혹은 체결을 경축하는 날로 보는 것이 자연스러울 수 있습니다. 어쩌면 두 날이 겹쳐졌을지도 모르지요. 다시 본문으로 돌아옵니다. 정해진 그 날 헤로데가 연설을 하는데 군중이 “저것은 신의 목소리지 사람의 목소리가 아니다” 하고 외쳤고, 그러자 즉시 주님의 천사가 헤로데를 내리쳐서 그는 벌레들에게 먹혀 죽고 맙니다. 루카는 천사가 그를 내리친 이유로 그가 “영광을 하느님께 돌리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전하지요.(12,22-23) 이 대목은 헤로데 아그리파의 죽음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역사적으로 헤로데 아그리파는 기원후 44년 4월에 죽었다고 합니다. 유다인 역사가 요세푸스에 따르면, 헤로데는 심한 복통을 일으켜 닷새 동안 앓다가 죽습니다. 학자들은 그의 죽음을 두고 유다인들을 혹독하게 박해한 안티오코스 에피파네스 임금의 죽음과 흡사하다고 봅니다. 이와 관련, 구약성경 마카베오기 하권은 이렇게 전합니다. “하느님께서 보이지 않는 치명타를 그에게 가하셨고… 그는 내장에 극심한 통증을 느끼고 속으로 지독한 고통을 겪게 되었다.… 이 사악한 자의 눈에서는 구더기들이 기어 나오고, 극심한 고통 속에서도 살아 있기는 하지만 살은 썩어 문드러져 갔다.… 매우 비참한 죽음으로 삶을 마쳤다.”(2마카 9,5-28) 그리고 그런 비참한 죽음은 그의 “오만함”과 “초인적인 교만” 때문이라고 마카베오 하권은 전합니다. 헤로데 역시 자기를 칭송하는 군중의 소리에 하느님께 영광을 돌리지 않은 교만으로 비참한 최후를 맞이했음을 루카는 나타내고자 하고 있는 것입니다. 바르나바와 사울이 안티오키아로 돌아가다(12,24-25) 야고보 사도의 순교, 베드로의 기적적인 풀려남, 그리고 헤로데 아그리파의 죽음이라는 세 사건을 소개하고 난 루카는 다시 바르나바와 사울의 이야기로 돌아옵니다. 두 사람은 안티오키아 교회가 기근으로 어려움을 겪는 유다 지방의 형제들을 위해 모금한 구호 헌금을 전달할 대표로 보낸 사람들입니다.(11,30) 하지만 루카는 이 두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한 행적을 자세히 설명하기보다는 두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사명을 수행한 다음 마르코라고 하는 요한을 데리고 돌아갔다”(12,25)고 짧게 전합니다. 마르코라고 하는 요한 혹은 요한 마르코는, 지난 호에서 살펴본 것처럼, 베드로가 감옥에서 풀려나서 찾아간 집 주인 마리아의 아들이고(12,12) 베드로가 아들처럼 여기는 이로서 마르코복음의 저자로 전해지는 인물이기도 합니다. 요한 마르코를 다시 언급함으로써 사도행전 저자는 바르나바와 사울 외에 요한 마르코 또한 앞으로 역할을 하게 될 것임을 암시하고 있다고 하겠습니다. 그런데 루카는 이 소식을 전하기에 앞서 “하느님의 말씀은 더욱 자라면서 널리 퍼져 나갔다”(12,24)고 기술합니다. 말하자면, 야보고의 순교, 베드로의 풀려남, 헤로데의 죽음이라는 외적인 사건들 이면에서 하느님의 말씀이 계속 성장하고 퍼져 나가고 있음을 제시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도행전 저자의 이런 표현은 하느님 나라에 관한 예수님 말씀을 떠올리게 합니다. “하느님의 나라는 이와 같다. 어떤 사람이 땅에 씨를 뿌려 놓으면, 밤에 자고 낮에 일어나고 하는 사이에 씨는 싹이 터서 자라는데, 그 사람은 어떻게 그리되는지 모른다….”(마르 4,26-29)생각해봅시다1. “저것은 신의 목소리지 사람의 목소리가 아니다.” 헤로데의 연설에 군중이 외친 이 말은 황제나 왕을 신격화한 당시 이교 세계에서는 단순한 아첨이 아니었다고 합니다. 찬사를 나타내는 표현 방식이라는 것입니다. “새로운 길”(9,2)을 따르는 그리스도인들의 관점에서 본다면, 이런 표현은 하느님께 대한 모독이자 또한 인간의 오만함과 교만함의 표현이기도 합니다. 사도행전 저자는 바로 이런 관점에서 헤로데의 죽음을 언급하고 있는 것입니다. 구약성경 잠언의 말씀을 되새겨봅니다. “파멸에 앞서 마음의 오만이 있고 영광에 앞서 겸손이 있다.”(잠언 18,12) 2. “하느님의 말씀은 더욱 자라면서 널리 퍼져 나갔다.” 사도행전 저자가 짧게 전하는 이 구절은 깊이 생각할 여지를 줍니다. 사람들은 세상일에 파묻혀 지내면서 그것이 전부인 것처럼 여기고 살아갑니다. 그러는 사이에 하느님 말씀은 자라면서 널리 퍼져 나갑니다. 성령께서 하시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세상살이의 지혜만이 아니라 하느님의 말씀이 자라고 퍼져 나가는 것을 보고 깨달을 수 있는 마음의 눈과 귀입니다. cpbc2019.10.16
![[신앙단상]성탄을 기다리며(천향길 수녀, 성바오로딸 수녀회)](//cpbc.co.kr/CMS/newspaper/2018/11/rc/740062_1.0_titleImage_1.jpg)
[신앙단상]성탄을 기다리며(천향길 수녀, 성바오로딸 수녀회) 기다림은 희망입니다. 그리움 또는 설렘입니다. 성탄을 생각하면 어릴 적부터 그랬습니다. 공소가 있는 시골 마을에서도 대림절이면 동네 아이들이 모여 성극을 준비하고 성탄의 기쁨을 나누곤 했습니다. 먼 기억 속의 성극을 소환한 건 순전히 외가 방계 형제들을 만나는 자리였습니다.6년 전부터 11월 마지막 토요일이면 형제 모임이 있습니다. 첫 모임이 이태원에서 있었는데, 저는 연락도 없이 수녀원에 들어온 지 스무 해가 넘어 처음 보는 자리라 서먹서먹했습니다. 다들 저보다 머리도 희끗희끗하고, 오랜만이라 선뜻 말을 놓기도 어려웠습니다. 어색함을 떨치고자 초등학교 때 본 성극 중에 대사로 부른 노래가 아직 생각난다고 했더니 갑자기 어수선해졌습니다.“그때 내가 솔로몬 역할을 했었는데”, “난 아기”, “난 가짜 엄마”, “난 진짜 엄마”, “어, 나도 그 자리에 있었는데”, “나도 나도!!” 여기저기서 말문을 열더니 순식간에 분위기가 환해졌습니다. “하느님보다 엄마가 더 무섭다”는 동생이 있는가 하면 “신앙의 자유를 갖고 싶다”는 동생도 있었습니다. 그렇게 우리는 순식간에 세월을 뛰어넘어서 하나가 되었습니다.우리에겐 공통의 기억이 있었습니다. 거기 모인 형제 중 한 사람도 예외 없이 신앙생활을 하고 있었고요. 명절에 자식들이 다니러 가면 성체를 영하는지 영하지 않는지 눈여겨보신다는 친척 어른들의 모습이 눈에 선합니다. 1801년 이전부터 교우촌을 형성해 살아온 그곳은 현재 노인들만 집을 지키고 있습니다. 누구나 한 번쯤 공소 회장이라는 직분을 봉사했기에 길 가는 사람 아무에게나 “회장님” 하고 부르면 뒤를 돌아본다는 우스갯소리가 있습니다.그 시절, 우리는 넉넉하지 않았지만, 마음은 부유했고, 다들 신앙만큼은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잘 지키며 살아가는 걸 보면 역시 신앙은 최고의 유산인 것 같습니다. 냉담한 지 45년 만에 아버지의 품으로 돌아온 외숙부를 봐도 그렇고, 누가 하느님을 떠나 살더라도 언젠가는 아버지의 집으로 꼭 돌아오리라는 믿음이 있습니다. 아직도 사순절이면 바쁜 농번기에도 불구하고 매일 저녁 교우들이 모여 성로신공(聖路神功, 십자가의 길)을 바친다는 말씀이 기억납니다.방학이라 꾀를 부리고 싶어도 면제되지 않았던 기도생활, 새벽이면 조과를, 저녁이면 만과를 온 가족이 함께 바쳤던 시간이 향수로 남아 있습니다. 아기 예수님을 기다리며 판공을 준비하고 공소에 모여 축제를 준비하던 그때의 설렘으로 돌아가 성탄을 기다리고 싶습니다. 평화신문2018.11.28
![[이창훈 위원의 사도행전 이야기] (22) 복음이 사마리아에 전파되다Ⅰ (8,4-25)](//cpbc.co.kr/CMS/newspaper/2019/06/rc/756205_1.0_titleImage_1.jpg)
[이창훈 위원의 사도행전 이야기] (22) 복음이 사마리아에 전파되다Ⅰ (8,4-25)멸시의 땅, 사마리아에 전해진 복음 예루살렘 교회에 불어닥친 박해는 오히려 유다인들이 멸시하던 사마리아에 복음이 전해지는 계기가 된다. 사마리아 사람들은 예수님에 관한 복음을 받아들이고 구원의 기쁨으로 넘쳐난다. 사진은 사마리아 도시 스켐의 전경. 스켐은 요한복음 4장에 나오는 시카르로 추정되는 곳으로 ‘야곱의 우물’이라고 불리는 유적이 있다. 박해를 피해 흩어진 사람들 가운데 필리포스가 사마리아에 복음을 전하고 예루살렘에 있던 사도들도 사마리아로 내려옵니다. 그 이야기를 살펴봅니다. 필리포스의 사마리아 복음 선포(8,4-8)박해로 흩어진 예루살렘 교회 신자들은 남모르게 몸을 숨긴 것이 아니라 여기저기 다니며 말씀을 전합니다.(8,4) 일곱 봉사자 가운데 한 명인 필리포스는 사마리아의 고을로 내려가 그리스도를 선포합니다.(8,5) 군중은 “모두 한마음으로 그가 하는 말에 귀를 기울였다”(8,6)고 사도행전 저자는 전합니다. 그 이유는 크게 두 가지입니다. 그의 말이 울림을 주었고 그가 일으키는 표징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군중이 모두 한마음이 되어 어떤 사람의 말에 귀를 기울인다면, 그것은 그 사람의 말이 진실하고 사람들의 마음을 잡아끌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뿐 아니라 그 사람이 일으키는 표징을 보고 그 사람의 말이 믿을 만하다고 여겼기 때문일 것입니다. 필리포스가 일으킨 표징은 무엇일까요. 사도행전 저자는 “많은 사람에게 붙어 있던 더러운 영들이 큰소리를 지르며 나갔고, 또 많은 중풍 병자와 불구자가 나았다”(8,7)고 기록합니다. 이런 표징들은 전형적으로 예수님께서 일으키신 표징들입니다. 그 표징들은 바로 메시아 시대가 도래했음을 알리는 표징들입니다. 예수님께서 일으키신 이 표징들은 또한 사도들 특히 베드로를 통해서 계속됩니다.(5,15-16). 그리고 그 표징들이 이제 일곱 봉사자 가운데 한 사람인 필리포스를 통해서까지 드러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그 고을에는 큰 기쁨이 넘쳤다”고 사도행전은 전합니다.(8,8) 이 기쁨은 메시아 시대의 기쁨이요, 구원이 왔다는 기쁨이라고 학자들은 풀이합니다. 마술사 시몬의 등장(8,9-13)그런데 그 고을에는 시몬이라는 마술사가 살고 있었습니다. 그는 마술로 사마리아 사람들을 놀라게 하면서 자기가 큰 인물이라고 떠들어대고 있었습니다. 그는 오랫동안 마술로 사람들을 놀라게 했기 때문에 사람들은 “이 사람이야말로 ‘위대한 힘’이라고 하는 하느님의 힘이다” 하며 그의 말에 귀를 기울였습니다.(8,9-11)고대 세계에서는 마술로 사람들을 놀라게 하는 마술사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사도행전에서도 마술사 시몬 외에 바르예수라고 하는 마술사가 나옵니다.(13,6-8) 마술을 부리는 마술사 또는 요술사의 존재는 구약 시대에서부터 존재했습니다. 구약성경에는 마술 혹은 마술사라는 단어가 17번이나 나옵니다. 요술 또는 요술사라는 단어를 포함하면 42회나 언급됩니다. 주목할 것은 마술사 시몬이 사는 고을이 사마리아라는 사실입니다. 사마리아는 이스라엘이 솔로몬 임금 사후에 남유다와 북이스라엘로 갈라지면서 북 왕국 이스라엘의 수도가 된 도시 이름이자 북이스라엘 왕국 전체를 가리키는 지명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사마리아는 아시리아를 시작으로 바빌로니아 페르시아 등 이민족의 침입을 받으면서 이민족들의 문화와 다신 숭배 사상이 유입돼 이스라엘의 하느님께 대한 신앙의 순수함을 잃어버렸습니다. 사마리아의 이런 역사적 배경을 바탕으로 볼 때 마술사 시몬의 등장을 더 쉽게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유다인들은 그래서 사마리아인들을 좋지 않게 여겼고, 사마리아인들과 접촉하지 않으려고 했습니다. 이는 사마리아인들도 마찬가지였지요. 이런 사마리아 고을에 필리포스는 복음을 전했고 그곳 사람들은 구원의 기쁨으로 가득 찹니다. 구원의 기쁨에 넘친 그 고을 사람들은 하느님 나라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에 관한 복음을 전하는 필리포스를 믿게 되면서 세례를 받습니다. 마술사 시몬도 믿고 세례를 받지요. 그러면서 그는 필리포스 곁을 떠나지 않으면서 여러 표징과 큰 기적이 일어나는 것을 보고 놀라워합니다. (8,12-13)사도들과 마술사 시몬의 대면(8,14-25)“예루살렘에 있는 사도들은 사마리아 사람들이 하느님 말씀을 받아들였다는 소식을 듣고 베드로와 요한을 그곳에 보냈다”고 사도행전은 전합니다.(8,14) 베드로는 사도들 가운데 으뜸이었고, 요한은 예수님께서 가장 사랑하신 제자였습니다. 그렇다면 베드로는 다른 사도들의 협조나 승인을 받지 않고 독자적으로 사마리아로 내려갈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사도행전의 저자는 베드로와 요한이 독자적으로 행동한 것이 아니라 사도들에 의해 파견됐음을 분명히 합니다. 베드로가 사도들의 으뜸이지만 다른 사도들에 의해 파견되는 이 구절은 사도단의 단체적인 성격을 드러낸다고 할 수 있습니다. 베드로와 요한은 내려가서 사마리아 사람들이 성령을 받도록 기도합니다. 그들이 주 예수님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았지만, 그들에게는 아직 성령께서 내리지 않으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도들이 안수하자 그들은 성령을 받습니다. 예루살렘 교회에 내린 성령이 이제 사도들을 통해 사마리아인들에게도 내리게 된 것입니다.(8,15-17) 그런데 사도들의 안수로 사람들에게 성령이 내리는 것을 본 시몬은 사도들에게 돈을 갖다 바치면서 “저에게도 그런 권한을 주시어 제가 안수하는 사람마다 성령을 받을 수 있게 해주십시오” 하고 청합니다.(8,18-19) 말하자면 돈으로 성령을 사겠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돈으로 성직이나 성물을 사고파는 행위를 ‘시모니아’(simonia, 영어 simony)라고 하는데, 이 단어의 어원이 바로 마술사 시몬이 시도한 행위에서 비롯합니다. 시몬의 요청에 베드로는 이렇게 대답하지요. “그대가 하느님의 선물을 돈으로 살 수 있다고 생각하였으니, 그대는 그 돈과 함께 망할 것이오. 하느님 앞에서 그대의 마음이 바르지 못하니, 이 일에 그대가 차지할 몫도 없소. 그러니 그대는 그 악을 버리고 회개하여 주님께 간구하시오. 내가 보기에 그대는 쓴 쓸개즙과 불의의 포승 속에 갇혀 있소.” 그러자 시몬이 그런 일이 자신에게 일어나지 않도록 주님께 간구해 달라고 청하지요.(8,18-24) 베드로와 요한은 사마리아의 고을에서 주님 말씀을 증언하고 전파한 뒤에 예루살렘으로 돌아가면서 사마리아의 많은 고을에 복음을 전합니다.(8,25)생각해봅시다1. 사마리아 사람들이 필리포스에 의해 복음을 받아들이고 사도들을 통해 성령까지 받습니다. 신앙의 순수성을 잃었다고 유다인들에게서 멸시를 받던 사마리아에 복음이 선포되고 구원의 기쁨이 넘쳐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예루살렘을 넘어 땅끝까지 전파되는 첫 자리가 유다인들에게 멸시받던 사마리아입니다. 이것이 우리에게 주는 의미는 무엇일까요? 2. 복음이 선포되는 곳에는 그 복음을 순수한 마음으로 받아들이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마술사 시몬이 바로 그런 사람을 대표합니다. 그는 필리포스가 선포하는 말씀을 듣고 또 그가 일으키는 표징들을 보고 믿습니다. 하지만 그 믿음은 순수한 믿음이 아니라 자신의 사욕을 채우고자 하는 욕심이 들어 있는 믿음이었습니다. 마술사 시몬 이야기는 우리 믿음이 어떠한지를 성찰하게 해줍니다. 평화신문2019.06.25
![[이창훈 위원의 사도행전 이야기] (19) 스테파노의 설교(7,1-53)<2>](//cpbc.co.kr/CMS/newspaper/2019/05/rc/754054_1.0_titleImage_1.jpg)
[이창훈 위원의 사도행전 이야기] (19) 스테파노의 설교(7,1-53)성령을 거역하는 최고의회의 완고함 질타하다최고의회 사람들 앞에서 한 스테파노의 설교는 크게 두 부분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첫 부분은 아브라함과 요셉과 모세의 이야기로 이어지면서 이들이 하느님 말씀을 어떻게 따랐는지, 또 하느님께서 어떻게 함께하셨는지를 이야기합니다.(7,1-38) 둘째 부분은 이스라엘 백성의 불충과 성전에 관한 내용이 주를 이루면서 최고의회 사람들을 직접 겨냥합니다.(7,39-53) 이 둘째 부분을 중심으로 스테파노 설교를 계속 살펴봅니다. 이스라엘의 불순종(7,39-43) 하느님께서 지도자요 해방자이자 예언자로 보내주신 모세의 이야기를 하고 나서 스테파노는 모세의 인도로 이집트를 탈출한 “우리 조상” 곧 이스라엘 백성이 “모세에게 순종하려 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마음은 다시 이집트로 돌아가고 있었다”고 지적합니다.(7,39) 그래서 그들은 모세가 산에서 내려오지 않자 모세의 형 아론에게 자기들을 이끌어줄 신들을 만들어 달라고 요구하고 송아지를 만들어 희생제물을 바치며 즐거워하지요.(7,40-41; 탈출 32,1-6) 그들이 이렇게 우상을 숭배하자 “하느님께서는 그들을 외면하시고 그들이 하늘의 군대를 섬기게 내버려 두셨다”고 스테파노는 말합니다. 그리고 이스라엘이 광야 생활 40년 동안 하느님을 섬기기보다는 “몰록의 천막과 너희 래판 신의 별을, 곧 너희가 경배하려고 스스로 만들어 낸 상들을 떠메고 다녔다”고 아모스 예언서를 원용해 지적합니다. 그 결과 이스라엘은 유배 생활을 하게 됐다는 것입니다.(7,42-43; 아모 5,25-27) 몰록은 가나안과 페니키아 지방에서 섬기던 태양신을 가리키고 래판은 별신의 하나입니다. 하늘의 군대는 하늘에 있는 태양, 별, 달 같은 것들을 가리킵니다. 스테파노는 이 말을 통해 이스라엘의 조상들이 계속해서 우상을 섬기며 하느님을 배신했음을 지적하고 있는 것입니다. 아모스 예언서의 말은 또한 바로 이어오는 하느님 거처에 관한 이야기를 준비하는 역할을 합니다. 하느님의 거처(7,44-50) 스테파노는 이제 하느님의 성전으로 이야기 방향을 돌립니다. 이스라엘은 광야에서 모세가 만든 ‘증언 천막’ 곧 증언 궤를 모셔두는 ‘만남의 천막’을 가지고 다녔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광야 생활을 끝내고 가나안 땅에 들어와 다윗 시대까지 증언 천막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 안에 증언 궤가 있는 증언 천막은 하느님이 계신다는 상징이었습니다. 다윗 왕은 증언 천막 대신에 하느님의 거처를 새로 만들고자 했지만, 하느님을 위해 집을 지은 왕은 다윗이 아니라 그 아들 솔로몬이었습니다.(7.44-47) 그런데 스테파노는 여기까지 이야기하고 나서는 “그러나 지극히 높으신 분께서는 사람의 손으로 지은 집에는 살지 않으신다”(7,48)고 단언합니다. 그러고는 이사야 예언서의 말씀을 인용해 자기 말을 정당화합니다. “하늘이 나의 어좌요 땅이 나의 발판이다. 너희가 나에게 무슨 집을 지어주겠다는 것이냐?─주님께서 말씀하신다─또 나의 안식처가 어디 있느냐? 이 모든 것을 내 손이 만들지 않았느냐?”(7,49-50; 이사 66,1-2) 스테파노의 이 말은 예루살렘 성전에 대한 스테파노의 생각이 부정적임을 드러내는 것이라고 학자들은 풀이합니다. 실제로 당시 그리스계 유다인들 가운데 예루살렘 성전으로 순례를 하지 않더라도 율법을 잘 지키면 하느님을 섬길 수 있다고 생각한 이들이 있었다고 합니다. 스테파노 주변 그리스계 그리스도인들 가운데서도 정통 유다인들에 비해 성전의 중요성을 상대적으로 낮춰 보는 이들이 있었을 것입니다. 최고의회에서 스테파노를 고발한 거짓 증인들이 “이 사람은 끊임없이 이 거룩한 곳과 율법을 거슬러 말합니다. 사실 저희는 그 나자렛 사람 예수가 이곳을 허물고 또 모세가 우리에게 물려준 관습들을 뜯어고칠 것이라고, 이자가 말하는 것을 들었습니다”(6,14-15) 하고 말한 것도 성전을 낮춰보는 것에 대한 반발이라고 할 수 있겠지요. 어쨌거나 스테파노에게는 예루살렘 성전보다는 “여기 성전보다 더 큰 이가 있다”(마태 12,6)고 하신 예수님이 더욱 크고 중요함이 분명합니다. 성령을 거역하는 자들(7,51-53) 이사야 예언서를 인용하면서 “하느님께서는 사람 손으로 지은 집에는 살지 않으신다”고 주장한 스테파노는 이제 최고의회 의원들을 향해 “목이 뻣뻣하고 마음과 귀에 할례를 받지 못한 사람들이여” 하며 대놓고 질타합니다. 마음과 귀에 할례를 받지 못했다는 것은 마음을 열고 귀를 기울여 하느님 말씀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뿐 아니라 하느님의 영 곧 “성령을 거역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스테파노는 “여러분도 여러분의 조상들과 똑같다”고 비난합니다.(7,51) 스테파노는 최고의회 의원들이 조상들과 똑같다고 비난하는 이유를 적시합니다. “그들(조상들)은 의로우신 분께서 오시리라고 예고한 이들을 죽였습니다. 그런데 이제 여러분은 그 의로우신 분을 배신하고 죽였습니다.”(7,52) 최고의회 의원들이 조상들과 똑같다고 비난했지만, 그 어조는 더욱 강했습니다. 조상들은 의로우신 분이 오시리라고 예고한 예언자들을 죽였지만, 최고의회 의원들은 의로우신 분 자체를 죽였다고 지적하는 것입니다. 이런 말을 들은 최고의회 의원들은 어떻게 반응했을까요? 다음 호에 계속 살펴봅니다.생각해봅시다조상들의 불충과 하느님의 처소, 그리고 최고의회 의원들에 대한 맹렬한 질타로 이루어진 스테파노 설교의 두 번째 부분은 우리에게도 깊이 생각할 거리를 던집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모세의 인도로 이집트의 노예살이에서 풀려났지만, 광야에서 마음은 이집트의 옛 생활로 돌아갑니다. 어린양의 피를 문설주에 발라 죽음을 피하고 홍해 바다를 건너 탈출하는 이스라엘 백성의 출애굽 여정은 오늘의 우리에게는 옛 생활을 청산하고 물과 성령으로 새롭게 태어나는 세례성사의 여정에 해당합니다. 대탈출로 새 삶을 출발했지만, 광야에서 시련에 부닥치자 이스라엘 백성은 그만 옛 생활을 그리워하고 맙니다. 하느님은 눈앞에 보이지 않고 현실 삶은 고달프고, 그러니 뭔가 의지할 것이 있어야 했습니다. 그래서 우상을 만들어 섬깁니다. 우리는 어떤지요? 세례를 통해 하느님 자녀로 새롭게 태어나 새 출발을 했지만 삶은 여전히 팍팍합니다. 아니, 하느님을 몰랐을 때보다 더욱 힘든 것 같기도 합니다. 하느님께서 주신 사랑의 법을 따르며 살기보다는 지난날 살았던 방식대로 사는 것이 훨씬 편했던 것 같고, 그래서 자꾸만 그 길을 돌아봅니다. 이렇게 뒤돌아보는 일이 계속되면서 우리는 하느님 대신에 우상을 만들어 섬기기 시작합니다. 마음을 열고 말씀에 귀 기울이기보다는 목이 뻣뻣하고 마음과 귀에 할례를 받지 못한 사람이 되어 갑니다. 눈앞에 보이는 것만을 좇으려 하고 성령을 거역합니다. 어쩌면 지금 내가 살아가는 모습이 이렇지는 않은지요? 그렇다면 우리는 마음과 귀에 다시 할례를 받아야 합니다. 마음을 열어 성령을 받아들이고 귀를 기울여 말씀을 들을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 힘만으로는 쉽지 않습니다. 그분 도우심이 필요합니다. 간절한 마음으로 도움을 청하면 들어주실 것입니다. cpbc2019.05.29
![[호기심으로 읽는 성미술] (14) 주님 부활 (하)](//cpbc.co.kr/CMS/newspaper/2018/06/rc/724040_1.0_titleImage_1.jpg)
[호기심으로 읽는 성미술] (14) 주님 부활 (하)그리스도 부활은 인간 구원의 시작이자 완성 아나스타시스, 11세기, 시나이 산 성 가타리나 수도원, 이집트 5세기부터 13세기 고딕 시대 이전까지 보편적으로 그린 주님 부활 도상(圖像)은 크게 두 가지 유형으로 나타납니다. 하나는 이미 소개한 바 있는 ‘빈 무덤’을 주제로 한 도상입니다. 다른 하나는 주님께서 저승에 가시어 죽은 이들을 구해내시는 장면으로 주님 부활의 모습을 대신하고 있습니다. 이 시기 화가들이 주님의 부활을 직접 묘사하지 않은 이유는 주님의 부활 시점과 그 상황을 모르기 때문이었다고 설명했습니다. 그래서 이 시기 화가들은 르네상스 시대 작가들과 달리 주님 부활의 순간을 절대로 상상해 그리지 않고 오로지 복음서와 교회 전승 내용에 따라 주님 부활을 묘사했습니다. 아담과 하와를 구원하는 부활 도상 주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시고 묻히신 후 저승에 가시어 사흗날에 죽은 이들 가운데서 부활하신’ 후 죽은 자를 대표하는 아담과 하와를 구원하는 부활 도상을 ‘아나스타시스’(αναστασι?)라고 합니다. 우리말로 ‘부활’이라는 뜻입니다. 동방 교회에서는 때때로 ‘지옥에 내려가신 예수 그리스도’,?‘저승에 내려가심’이라고 부릅니다. 교회가 주님 부활 도상으로 이 모습을 즐겨 사용한 이유는 그리스도께서 ‘잠든 이들의 맏물’로 일으켜지셨기 때문입니다.(1코린 15,20) “‘잠든 이들의 맏물’이라는 표현은 그리스도의 부활과 죽은 이들의 부활을 시간적으로뿐 아니라 인과적으로도 연결시킵니다. 맏물이 있으면 그다음에 다른 소출이 있는 것처럼, 그리스도의 부활 다음에는 그리스도 안에 죽은 이들의 부활이 따르리라는 것입니다.”(「200주년 신약성서 주해」 902쪽) 이렇게 그리스도의 부활은 인간 구원의 시작이며 완성의 보증입니다.(2코린 1,22; 5,5 참조) 이 도상은 또한 “나는 부활이요 생명”(요한 11,25)이라는 주님의 말씀을 고백합니다. 부활하신 주님은 죽은 이를 깨우는 생명의 목소리이십니다. 주님께서는 “나를 믿는 사람은 죽더라도 살고, 또 살아서 나를 믿는 모든 사람은 영원히 죽지 않을 것”이라고 약속하십니다.(요한 11,26) 주님 부활 도상이 이렇게 발전하기 시작했고, 초대 교회 시기에는 ‘고래 뱃속에 사흘간 갇힌 요나’,?‘사자 굴에 던져진 다니엘’,?‘에제키엘의 환상’,?‘화덕 속의 세 젊은이’ 등으로 부활을 표현했습니다. 이러한 도상은 주로 부활을 희망하는 죽은 이들의 관과 무덤인 카타콤바의 벽화로 장식됐습니다. 아나스타시스 도상은 그리스와 로마의 영향을 많이 받은 성미술입니다.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저승의 지배자인 하데스와 팍스 로마나(Pax Romana)를 상징하는 승리자요 해방자인 로마 황제의 모습을 그린 그림에서 많은 영감을 받았다는 게 미술사학자들의 공통된 견해입니다. 현존하는 아나스타시스 성미술 작품 중 가장 오래된 것은 8세기 제작된 로마 포룸 로마눔에 있는 산타 마리아 안티쿠아 성당의 벽화라고 합니다. 하지만 이 작품은 많이 훼손되어 지면에서는 11세기에 그려진 이집트 시나이 산 성 가타리나 수도원의 아나스타시스 작품을 소개합니다. 주님 죽음과 부활이 있기에 인간 구원 가능 이 그림의 중심인물은 바로 부활하신 주님이십니다. 주님은 죽음을 이기신 분답게 위풍당당하게 서 계십니다. 왼손으로 십자가를 잡고 있는 주님의 표정에는 진지함과 위엄, 굳은 의지와 결단, 승리의 자신감이 서려 있습니다. 부활하신 주님의 손과 발에는 십자가 수난의 상처가 그대로 남아 있습니다. 토마스 사도를 비롯해 제자들에게 주님께서 직접 보여주신 바로 그 상처입니다. 이 거룩한 십자가의 상처를 그대로 보여주는 것은 부활하신 주님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 묻히셨던 바로 그분이심을 고백하고 있습니다. 주님은 분홍색과 흰색 옷을 입고 계십니다. 분홍색은 주님의 수난과 희생을, 흰색은 부활을 상징합니다. 세례 예식 때 세례를 받는 이들이 흰옷을 입는 전통도 같은 이유입니다. 그래서 바오로 사도는 “우리는 세례를 통해 그리스도와 함께 묻혔고 그분과 함께 부활했습니다”(로마 6,4 참조)라고 선포합니다. 주님의 두 발 아래에는 악마가 짓눌려 굴복하고 있습니다. 그 옆으로 부서진 지옥문들과 열쇠, 자물쇠, 못들이 나뒹굴고 있습니다. “그분께서 청동 문을 부수시고 쇠 빗장을 부러뜨리셨다”(시편 107,16)는 시편 노래처럼 부활하신 주님께서 지옥을 해방하셨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도상에서 부활하신 주님 오른편에는 아담과 하와가, 왼편에는 다윗과 솔로몬을 비롯한 구약의 왕들이 죽음에서 깨어나 무리를 지어 서 있습니다. 부활한 이들은 모두 얼굴에 기쁨이 가득합니다. 구약의 왕들 가운데 맨 앞줄에 있는 다윗과 솔로몬은 두 손을 주님께로 향하며 자신들을 일으켜 세워 영원한 새 생명을 주신 분이 바로 이 분이심을 알리고 있습니다. 다윗은 그리스도께서 세상에 오실 것임을 예언했고, 솔로몬은 왕이신 그리스도를 예시해 주었기에 맨 앞줄에 서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창조하신 첫 인류인 아담과 하와는 백발에 주름이 가득한 노인의 모습입니다. 하와는 주님께 공경의 예를 갖춰 손을 옷으로 가리고 있습니다. 아담은 부활하신 주님께서 입으신 것과 똑같은 옷 색깔을 안과 밖이 다르게 입고 있습니다. 하와는 파란색 속옷과 진홍색 겉옷을 입고 있습니다. 파란색은 인성을 상징한다고 여러 번 설명했습니다. 진홍색은 그리스도의 승리와 영광을 상징합니다. 이 도상에서 눈여겨볼 것이 있습니다. 바로 주님께서 아담을 무덤(관)에서 꺼내시는 모습입니다. 주님께서 손수 아담의 손목을 잡아 끌어올리시고 있습니다. 인간 스스로 죽음에서 깨어나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일으켜 세워주셔야만 부활할 수 있다는 것을 고백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참 하느님이시며 참 인간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인간 구원을 위해 강생하시고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셨기에 우리 모두의 부활도 가능하게 됐다는 것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리길재 기자 teotokos@cpbc.co.kr cpbc2018.06.13

[이창훈 기자의 예수님 이야기(44) 기도(루카 11,1-13)주님을 모신다 말하면서 표징은 입맛대로 청해고래에게 삼켜지는 요나를 표현한 스테인드글라스. 출처=가톨릭 굿뉴스루카 복음서의 문맥상 이번 호에서 다루는 내용은 지난 호에서 본 내용(루카 11,14-28)과 이어집니다. 이 점을 염두에 두면서 계속해서 살펴봅니다. 요나의 표징(루카 11,29-32) 예수님께서 벙어리 마귀를 쫓아내셨을 때에 사람들은 놀라워했지만, 더러는 예수님이 베엘제불의 힘을 빌려 마귀를 쫓아낸다고 말했고 또 하늘에서 내려오는 표징을 보여 달라고 요구한 이들도 있었습니다.(11,14-16) 예수님께서는 베엘제불의 힘을 빌려 마귀를 쫓아낸다는 비난과 관련해서는 예를 들며 구체적으로 대응하셨습니다만, 표징을 보여 달라는 요구에 대해서는 직접적인 언급은 하지 않으시고 “내가 하느님의 손가락으로 마귀들을 쫓아내는 것이면, 하느님의 나라가 이미 너희에게 와 있는 것이다”라고만 말씀하십니다.(11,17- 23 참조) 그런데 “군중이 점점 더 모여들자” 예수님께서는 비로소 표징을 보여 달라는 요구와 관련한 구체적인 답변을 하십니다. 그런데 답변이 대단히 부정적입니다. 먼저 “이 세대는 악한 세대다”라고 비판하십니다.(11,29) 왜 “이 세대가 악한 세대다”라고 말씀하셨을까요? 지난호에서 살펴본 것처럼 예수님께서 벙어리 마귀를 쫓아내는 것을 놀라워하면서도, 예수님께서 하느님의 손가락으로 마귀를 쫓아내는 것을 보면서도, 곧 예수님을 통해 하느님 나라가 이미 와 있는 것을 보면서도 그 표징인 예수님을 받아들이지 않고 자기들이 원하는 표징만을 예수님께 요구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어 “이 세대가 표징을 요구하지만 요나 예언자의 표징밖에는 어떠한 표징도 받지 못할 것”이라고 말씀하시면서 “요나가 니네베 사람들에게 표징이 된 것처럼, 사람의 아들도 이 세대 사람들에게 그러할 것”이라고 설명하십니다.(11,29-30) 요나는 구약의 예언자입니다. 요나는 큰 성읍 니네베로 가서 주민들을 회개시키라는 하느님 말씀을 듣지만, 그 분부를 피해 ‘땅끝’을 상징하는 타르시스라는 곳을 향해 배를 타고 달아납니다. 그러나 풍랑을 만나고 뱃사람들에 의해 바다 속에 내던져진 요나는 커다란 물고기 배 속에서 사흘을 지내다가 나와 다시 하느님의 분부를 듣고 니네베로 가서 회개를 선포합니다. 니네베 사람들은 모두 요나의 말에 회개해 악한 길에서 돌아서고 하느님께서는 그들에게 내리시려던 재앙을 거두시지요.(요나 1─4장 참조) 이런 요나서를 바탕으로 유추해 보면,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요나의 표징’을 두 가지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하나는 요나의 회개 선포를 듣고 니네베 사람들이 모두 회개한 것입니다. 따라서 니네베 사람들에게 요나가 회개(또는 회개 선포)의 표징이 됐듯이, 예수님 자신이 이 사악한 세대에 요나와 같은 표징이시라는 것입니다. 다른 하나는 요나가 큰 물고기 배 속에서 사흘을 지낸 것처럼, 예수님께서도 사흘 동안 땅 속에서 지내시리라는 것입니다. 곧 예수님께서 죽으셨다가 사흘 만에 부활하시리라는 것이지요. 물론 지금 예수님의 말씀을 듣는 청중에게는 예수님의 부활이 아직 미래의 일이지만, 루카 복음사가의 독자들에게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은 이미 일어난 사건이고 이는 요나가 물고기 배 속에서 사흘을 지낸 것에 상징적으로 비견될 수 있었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어 남방 여왕과 니네베 사람들을 언급하시면서 이 세대를 사악한 세대라고 하신 이유를 간접적으로 설명하십니다. ‘심판 때에 남방 여왕이 이 세대 사람들과 함께 되살아나 이 세대 사람들을 단죄할 것이고 니네베 사람들이 되살아나 이 세대를 단죄할 것이다. 남방 여왕은 솔로몬의 지혜를 들으려 땅끝에서 왔고, 니네베 사람들은 요나의 설교를 듣고 회개하였다. 그러나 솔로몬보다 또 요나보다 더 큰 이가 여기에 있다.’(11,31-32) 이 말씀은 솔로몬의 지혜를 들으려고 온 남방 여왕과 달리, 또 요나의 설교를 듣고 회개한 니네베 사람들과 달리 이 세대는 솔로몬이나 요나보다 더 큰 예수님의 말씀을 받아들이지 않기에 단죄를 받을 것이라는 심판의 말씀이자 경고의 말씀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여기서 남방 여왕은 솔로몬 치세 때에 솔로몬의 지혜에 대한 명성을 듣고 찾아온 스바 여왕을 말합니다.(1열왕 10,1-13 참조) 학자들은 스바가 기원전 900~450년쯤 인도와 교역을 통해 전성기를 맞은 아라비아 남쪽의 스바 왕국일 가능성이 크다고 봅니다. 솔로몬과 스바 여왕의 이야기는 또 옛 에티오피아인 아비시니아와 무슬림 전승에도 나오며, 무슬림 전승에 따르면 여왕의 이름은 발키스였다고 합니다.(「주석 성경」 열왕기 상권 10장 주석 참조) 니네베는 고대 앗시리아 왕국의 수도였습니다. 요나서에 따르면 니네베는 성읍을 가로질러 가는 데에만 사흘이 걸리고, 주민이 12만 명이나 되는 큰 성읍이었습니다.(요나 3,3; 4,11 참조) 기원전 8세기 초부터 7세기 초까지 번성했던 옛 니네베는 기원전 612년 몰락하고 맙니다. 오늘날 이슬람국가(IS)에 의해 황폐화한 이라크 북부 모술 인근 니네베 평원 지역에 위치해 있지요. 눈은 몸의 등불(11,33-36) 이어 예수님은 지극히 상식적인 그러나 그 뜻을 바로 파악하기에는 쉽지 않은 말씀을 연이어 하시는 것으로 루카는 기록합니다. 첫째는 ‘아무도 등불을 켜서 숨겨 두거나 함지 속에 놓지 않고 등경 위에 놓아 들어오는 이들이 빛을 보게 한다’는 말씀입니다.(11,33) 등불을 켜서 숨겨 두거나 덮어 두거나 하지 않는다는 것은 지극한 상식입니다. 왜 이런 상식적인 말씀하셨을까요? 여기서 ‘등불’은 솔로몬보다 더 지혜롭고 요나보다 더 위대한 예수님 자신을 가리킵니다. 등불이 가리키는 표징이 바로 예수님이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등불을 덮어 두지 않듯이 등불이신 예수님, 빛이신 예수님을 가리지 말아야 합니다. 예수님을 등불로, 빛으로 여기면서도 그 등불을 다른 것으로 가려 버린다면 얼마나 어리석은 짓이겠습니까? 둘째 말씀은 ‘네 눈은 네 몸의 등불이다. 눈이 맑을 때에는 온몸이 환하지만, 성하지 못할 때에는 온몸도 어둡다’는 것입니다.(11,34) 하지만 더욱 깊이 새겨야 할 것은 이어오는 “그러니 네 안에 있는 빛이 어둠이 아닌지 살펴보아라. 너의 온몸이 환하여 어두운 데가 없으면 등불이 그 밝은 빛으로 너를 비출 때처럼 네 몸이 온통 환할 것이다”(11,35-36)라는 말씀입니다. 첫째 말씀과 마찬가지로 여기서도 등불은 바로 예수님을 표상합니다. 그렇다면 이 말씀은 우리가 우리 안에 예수님을 제대로 모시고 있다면, 즉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그대로 실천하는 삶을 산다면(11,28 참조) 우리 온몸이 환하여 어두운 데가 없으리라는 것을 뜻합니다. 그러나 만일 우리가 빛이신 예수님을 모시고 산다고 하면서도 우리 몸이 환히 빛을 내지 못하고 어둡다면 그것은 우리가 실제로는 우리 안에 모시고 사는 것이 아님을 일깨우고 있는 것입니다. 생각해 봅시다그리스도 신자라고 자처하면서도 우리는 주님께서 주시는 표징을 받아들이기보다는 우리가 원하는 표징을 하늘로부터 내려 주시기를 주님께 요구하며 살아가지는 않는지요? 또 주님을 모시고 산다고 하면서도 우리 자신의 공명심과 이기심으로 참 빛이신 주님을 가리고 있지는 않는지요? 하루를 마치면서 적어도 잠깐이라도 “네 안에 있는 빛이 어둠이 아닌지 살펴보아라”(루카 11,35)고 하신 주님 말씀대로 우리 자신을 살펴보는 시간을 가져보는 것은 어떻겠습니까? 백영민2017.12.20

구약과 신약 잇는 믿음의 이야기 구약 외경 1 / 송혜경 원문ㆍ번역ㆍ주해 / 한님성서연구소 / 3만 5000원구약 외경(外經)은 구약성경 46권에 포함되지 않은 책들이다. 교회가 공식 인정한 정경(正經)은 아니지만, 교회 가르침에 위배되지 않는 경전이다.가톨릭 표준 성경도 아닌데 구약 외경을 알아야 하는 이유는? 구약과 신약을 잇는 가교가 되는 ‘하느님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국내에서 찾아보기 힘든 구약 외경을 번역하는 작업에 한님성서연구소가 돌입, 첫 권 「구약 외경 1」을 내놨다. 당대 ‘믿음의 선조’들의 다양한 문체와 경험을 담은 문헌을 두루 알려 하느님 역사를 제대로 일깨우기 위해서다.구약 외경이 만들어진 시기는 두 번째 예루살렘 성전이 존속하던 ‘제2성전기 후반’이다. 기원전 515~516년부터 기원후 70년까지다. 바빌론 유배지에서 돌아온 유다인들이 예루살렘에 다시 성전을 지은 때부터, 로마인들이 성전을 파괴한 시기까지인 ‘600년의 기간’이다. 이때는 구약이 완결되고, 신약이 기록되던 중간 시기이기도 하다. 당시 정치적 독립성을 잃은 채 살았던 유다인들은 ‘외세의 지배’와 더불어 그리스 문화를 비롯한 동서양 전통이 유입되던 이 시기에도 활발한 저술활동을 통해 풍성한 ‘믿음의 이야기’들을 집필했다.구약 외경은 아담과 하와의 생애, 에녹서, 열두 족장의 유언, 모세의 승천기 등으로 구성돼 있다. 이들은 묵시ㆍ시편 문학, 설화와 전설 등의 범주에 속한다. 서사시와 비극, 철학적 논고, 성경 이야기를 확대한 방대한 작품을 쏟아내며 유다 지역이 문학적으로도 풍성함을 이루는 데 지대한 영향을 끼친다.구약 외경은 다양한 신학적 개념들을 내포하고 있다. 악의 기원 문제, 메시아에 대한 희망, 부활과 사후 세계에 대한 관심 등이다. ‘악마 개념’이 거의 발견되지 않는 구약성경에 비해 외경은 악의 개념을 활발히 다룬다. 구약 외경의 에녹 1서, 희년서, 아담과 하와의 생애 등은 악마의 기원을 다각도로 제시하며 그들이 세상에서 하는 역할을 드러낸다. 하느님은 선이고, 사탄은 악이라는 유다교 문학의 전제가 분명히 다뤄진 것이다.천사의 무리가 지상에 내려와 사람의 딸들을 탐한 사건, 잘못을 저지르고 하늘에서 쫓겨나 아담에게 경배하라는 미카엘 대천사의 명령에 불복종하는 천사들의 타락 등 다양한 악의 기원이 구약 외경을 통해 전해진다. 사탄에게 작용한 것은 공통적으로 ‘교만’이었다.구약성경에서 이어지는 ‘메시아 사상’과 ‘부활과 내세 사상’도 눈에 띈다. 구약 외경에서 메시아는 범죄를 일삼는 이방인들을 예루살렘에서 몰아내고 성전을 정화하며 ‘정의’를 실현하는 존재다. 유다교 전통 안에서 죽은 이의 부활이나 죽음 이후의 삶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은 유배 이후부터이며, 부활과 내세의 개념을 발전시킨 것은 헬레니즘 시대 이후부터다. 솔로몬 시편 13장 11절이 “의인들의 생명은 영원하다. 죄인들은 파멸로 사라지고 말리라!”라고 하는 구절부터 희년서와 마카베오기 4서 등에 죽음 이후에 대한 희망 이야기가 등장한다.「구약 외경 1」은 구약성경의 시편과 흡사한 「솔로몬의 시편」부터 구약성경의 신학개념을 상당 부분 전승해 이야기를 펼치고 있는 「에녹 1서」 등 묵시ㆍ시편 문학과, 설화와 전설 형식의 「요셉과 아세넨」, 「예언자들의 생애」, 「아리스테아스의 편지」 등을 원문과 함께 상세한 역사적 배경과 주석을 달아 제작했다.유배 이후 유다인들은 자신들의 믿음을 기록으로 활발히 남겼다. 그들이 지닌 역사적 경험과 교훈, 하느님과 인간을 두고 숙고한 통찰의 열정이 구약 외경에 고스란히 담겨있다. 이정훈 기자 sjunder@cpbc.co.kr 평화신문2018.04.19
![[시사진단]슬픈 아라비아, 예멘](//cpbc.co.kr/CMS/newspaper/2018/07/rc/727539_1.0_titleImage_1.jpg)
[시사진단]슬픈 아라비아, 예멘박현도 (스테파노, 명지대 중동문제연구소 인문한국 연구교수) 구약성경 열왕기 상권 10장과 역대기 하권 9장에는 솔로몬의 명성을 들은 스바 왕국의 여왕이 많은 수행원을 거느리고 향료와 금, 은, 보화를 낙타에 실은 채 예루살렘을 방문했다는 기록이 나온다. 스바는 흔히 시바라는 이름으로 우리에게 더 알려진 왕국이다. 정확한 위치는 여전히 오리무중이지만, 요즘 난민 문제로 우리 국민의 관심이 쏠린 예멘이라는 설이 있다. 예멘은 스바의 여왕과 더불어 로마와 향료무역을 한 곳으로도 유명하다. 그래서 붙은 별명이 ‘아라비아 펠릭스(Arabia Felix)’다. 풍요로운 아라비아, 행복한 아라비아라는 뜻이다.아라비아 반도 남서쪽에 자리 잡은 예멘은 북쪽으로는 사우디아라비아와 동쪽으로는 오만과 국경을 맞댄 아랍국가다. 이슬람교를 따르고 수니파와 시아파의 비율이 약 60% 대 40%다. 국가 면적은 우리나라보다 5배나 크지만, 인구는 우리보다 적은 약 2700만 명이고, 국민 평균 연령은 19.5세로 무척 젊은 나라다. 25세 이하 인구가 전 국민의 60%를 차지한다. 젊은이가 압도적으로 많기에 발전 가능성이 크지만, 대다수 중동 국가들이 그렇듯 독재정치와 권력층의 부패로 경제가 부실해 아랍국가 중에서 가장 가난한 나라에 속한다. 국민소득은 1인당 1500달러에 불과하다.7세기에 이슬람화가 된 예멘은 1990년까지 완전한 통일국가를 이루지 못하였다. 산악지역과 사막 등 험한 지형 때문에 단합된 정치공동체를 만드는 것이 쉽지 않았다. 북쪽은 오스만제국, 남쪽은 영국이 지배했다. 제1차 세계대전에서 오스만제국이 패배한 후 북예멘은 자이디파 시아 왕정이 자리를 잡았다가 1962년 아랍민족주의에 바탕을 둔 공화정 혁명으로 무너진 뒤 내전을 거쳐 1968년 예멘아랍공화국이 들어섰다. 남예멘은 반영투쟁 끝에 1967년 사회주의를 채택한 예멘인민민주공화국이 들어섰다. 그러나 소련이 붕괴하면서 어려움에 부닥친 남예멘이 북예멘과 손을 잡아 1990년 통일 예멘공화국을 이루었다. 그러나 통일 예멘의 앞길은 순탄치 않았다. 북예멘의 살레 대통령이 통일대통령이 됐지만, 국민통합도, 민주정치에도 실패했다. 더욱이 북부 사으다 지역에 집중거주하고 있는 자이디파 시아의 후시반군이 강경보수 수니파의 공세에 불안감을 느끼면서 2004년부터 정부와 대치를 시작했다. 이처럼 종파분쟁까지 곁들인 정국이 이어지다가 2011년 튀니지에서 시작한 ‘아랍의 봄’ 민주화 시위가 예멘에서도 일어나 1978년 북예멘 대통령으로 시작해 통일 예멘의 유일한 대통령이 된 살레의 34년 독재정권이 무너졌다. 그러나 후시반군이 새로운 정부의 조치에 만족하지 못하고 2014년 9월 수도 사나를 이듬해 1월 대통령궁을 점령하자 연금 상태에 있던 하디 대통령이 수도를 탈출해 사우디아라비아에 도움을 요청하였고, 이에 사우디아라비아가 3월 19일 후시반군 공격을 시작하면서 예멘 전쟁의 막이 올랐다. 후시반군이 이란의 후원을 받는다고 믿고 있는 사우디아라비아는 이라크, 시리아, 레바논에 이어 예멘까지 이란이 영향력을 미치는 것을 받아들일 수 없기에 현재까지 예멘을 봉쇄하고 후시반군 지역에 공습을 가하고 있다. 지난달 제주도로 들어온 예멘 난민은 현재 조사가 진행 중이긴 하지만, 대부분 징집과 신변 위협을 피해 후시반군이 장악한 지역에서 도망쳐 나온 사람들로 알려졌다. 말레이시아로 피했다가 무비자와 에어아시아 제주 직항을 이용하여 우리나라로 들어온 것이다. 번성한 향료무역으로 ‘아라비아 펠릭스’로 불렸던 예멘이 이제는 폭탄과 목숨을 거래하는 ‘아라비아 미세라(Arabia Misera)’가 되었다. 슬픈 아라비아! 종전과 평화를 기원한다. 평화신문2018.07.17
![[시사진단] 트럼프의 예루살렘- 박현도(명지대 중동문제연구소 연구교수)](//cpbc.co.kr/CMS/newspaper/2017/12/rc/704701_1.0_titleImage_1.jpg)
[시사진단] 트럼프의 예루살렘- 박현도(명지대 중동문제연구소 연구교수)박현도(스테파노, 명지대 중동문제연구소 연구교수 ) 1995년 미국 상·하원 의회는 이스라엘의 수도가 예루살렘이라고 하면서 미국 행정부가 대사관을 1999년 5월 31일까지 예루살렘으로 옮겨야 한다는 ‘예루살렘 대사관법’을 압도적인 표차로 통과시켰다. 단, 미국의 안보에 위협이 된다고 판단하면 6개월마다 대통령이 유예할 수 있다고 했고, 이에 클린턴, 부시, 오바마 대통령은 그렇게 했다. 트럼프 대통령도 올 6월 1일 법안 준수를 유예했다. 그런데 6개월 시한이 다해 다시 결정의 시간이 돌아오자 지난 12월 6일 예루살렘을 이스라엘의 수도라고 선언하고, 대사관 이전 작업도 시작하겠다고 말했다.유다인들이 자신들의 영원한 고향이라고 여기는 예루살렘은 로마에 대항한 1차 독립 전쟁(66∼70년)에서 파괴되고, 2차 독립 전쟁(132∼135년)에서 아일리아 카피톨리나로 개명되는 수모를 겪은 곳이다. 로마는 예루살렘을 비롯해 유다인들이 살던 지방 이름도 시리아 팔라이스티나 속주로 바꿨다. 이 지역은 로마 지배를 거쳐 638년 아랍인들이 장악한 후 십자군 전쟁 때만 제외하고 1917년 12월 9일 영국군이 예루살렘을 점령할 때까지 1300여 년 동안 무슬림들이 지배했다.영국은 지배지에 평화를 일구지 못하고, 오히려 유다인들의 귀향길을 열어 줌으로써 문제를 복잡하게 만들었다. 로마에 패한 후 고향을 떠나야 했던 유다인들이 솔로몬 성전과 제2 성전이 있는 ‘시온’, 즉 예루살렘으로 돌아가 다시 나라를 세우겠다는 시온주의를 선포했는데, 영국이 이를 들어준 것이다. 1947년 11월 29일 유엔은 유다인과 아랍인의 땅 분할을 가결했지만 무슬림들이 거부했다. 영국은 이렇다 할 평화안을 내놓지도 못한 채 1948년 5월 14일 자정을 기해 이곳에서 완전히 손을 떼었고, 당일 오후 4시 이스라엘은 영국 몰래 독립을 선포했다. 그리고 이스라엘과 아랍의 전쟁이 시작됐다.1차 전쟁의 결과 예루살렘은 둘로 분할됐다. 서예루살렘은 이스라엘, 동예루살렘은 아랍인, 더 정확하게는 요르단이 차지했다. 동예루살렘은 구시가지가 있는 곳으로, 유다인들의 솔로몬 성전, 제2 성전이 세워졌던 성전산이 있다. 성전산에는 이슬람의 예언자가 천상 여행을 한 유적이라고 무슬림들이 믿는 바위돔성원과 아크사 모스크가 있다. 그래서 ‘고귀한 성소’라는 뜻인 알하람 앗샤리프라고 부른다. 그리스도인들에게 예루살렘은 예수 그리스도 최후의 수난처로, 십자가의 길, 골고타산, 성묘성당이 있는 곳이다. 성전이 장사치들의 소굴로 전락한 모습을 보고 분노한 예수가 “사고팔고 하는 자들을” 쫓아내시고 “환전상들의 탁자와 비둘기 장수들의 의자도 둘러엎으신” 곳이기도 하다.(마르 11,15) 과거 선배 신앙인들은 예루살렘을 라틴어로 ‘세상의 배꼽(Umbilicus mundi)’이라고 부르며 이곳을 중심으로 세계 지도를 그렸다.1967년 6월 이스라엘의 선제 공격으로 시작된 6일 전쟁에서 이스라엘이 동예루살렘을 점령해 지금까지 실효 지배하고 있다. 그러나 국제사회는 이를 인정하지 않는다. 1980년 이스라엘 의회는 ‘영원히 분리되지 않는’ 예루살렘을 수도로 선포했으나 이에 반발한 국제사회는 당시 13개국 대사관을 모두 예루살렘에서 다른 곳으로 이전했다. 그래서 현재 예루살렘에는 단 한 나라의 대사관도 존재하지 않는다. 전쟁으로 얻은 땅을 인정하지 않는다는 국제법을 따른 것이다. 그런데 이제 미국이 이스라엘 편에 확실히 섰으니 국제사회가 분노하는 것은 당연하다. 트럼프 대통령은 부시나 오바마와 달리 대통령 선거전에서 이스라엘의 수도가 예루살렘이라고 한 약속을 지켰다고 자찬했다. 그러나 국제법을 무시하고 애초에 하지 말아야 할 약속을 한 것이 문제다. ‘세상의 배꼽’이 ‘세상의 근심거리’가 되어 버렸다. 성전은 사라졌지만 장사꾼들은 여전하다. 평화신문2017.12.13

예수님 발자취를 따라 이스라엘 성지를 가다 (4·끝)‘인류 구원의 역사’는 지금도 흐른다 유다인들과 순례객들이 '통곡의 벽'에서 기도하고 있다. 성경을 낳고, 성경을 품은 중동의 작은 나라. 이스라엘은 ‘성경의 땅’이다.이스라엘 민족을 통해 인류사에 개입하신 하느님 섭리를 다룬 ‘하느님의 서사시’ 성경 말씀이 살아 숨 쉬는 곳이 이스라엘이다.이스라엘 남부 광활한 광야 지역에는 구약의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있고, 비옥한 평야와 갈릴래아 호수가 넘실대는 북부 지방에는 예수님 설교가 아직 귓전을 때리는 듯 잘 보존돼 있다. 이곳에서 ‘말씀’을 ‘현장’으로 만나는 순간, 누구나 가슴 뜨거운 전율을 느낄 수 있다. 많은 그리스도인이 이스라엘을 ‘성지 중의 성지’라 부르는 이유다.그러나 이스라엘 역사는 한시도 바람 잘 날 없는 침탈과 유배의 아픔을 간직하고 있다. 기원전 1000년 유다 민족의 12지파를 최초로 통일한 위대한 임금 다윗왕. 이어 가장 번성했던 솔로몬왕 통치로 찬란한 황금시대를 구가한 이스라엘 왕국은 그러나 통치 80여 년 만에 남북으로 분열된다. 유럽과 아프리카, 아시아를 연결하는 통로였던 이스라엘은 이후 3000년 가까이 페르시아, 그리스, 로마, 마케도니아, 십자군, 이슬람 민족, 터키, 대영 제국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이민족 국가들의 침탈과 유배의 아픔으로 얼룩지고 만다. 모세의 계약의 궤를 모셨던 ‘하느님의 지성소’ 예루살렘 성전은 붕괴와 재건을 반복한 끝에 이슬람 ‘황금 돔 사원’이 1500년째 자리하고 있다.예수님 시대 이후 2000년이 지난 오늘날. 도시 전체가 거대 박물관이 된 예루살렘은 ‘종교의 백화점’이다. 예루살렘 성전을 중심으로 길이 6㎞로 둘러쳐진 성곽 안 올드 시티(Old City)는 로마 가톨릭, 유다교, 무슬림이 각기 구역을 나눠 살아가는 ‘공존’과 ‘상생’의 터다. 2만 명의 사람들이 좁은 골목 안 3000여 개 크고 작은 상점과 주거지에 산다. 정오 기도 시간이면 이슬람 모스크 사원 스피커에서 울려 퍼지는 기도 소리와 성당 종소리가 혼재돼 묘한 분위기를 내기도 한다. 올드 시티 밖은 유럽 각지에서 ‘반유다주의’로 온갖 차별과 핍박을 받던 유다인들이 19세기 이후 정착해 뉴 시티(New City)를 형성하고 있다.‘신앙’은 기념과 기억이라고 했던가. 기원후 70년, 로마제국에 의해 멸망한 뒤 전 세계로 흩어졌던 유다인들이 1948년에 이르러 오늘의 이스라엘 국가를 다시 세우기까지, 특히 제2차 세계대전으로 전 세계 유다인의 3분의 2가 죽음으로 내몰리는 가운데서도 이들이 역사 속에서 결코 사라지지 않을 수 있었던 힘은 자신의 역사와 믿음을 지키는 ‘유다교 신앙’ 때문이었다. 이들은 철저한 율법의 가르침 아래 매주 토요일이면 온 가족이 ‘안식일’을 지킨다. 아무 일도 하지 않고, 전기도 쓰지 않고 오로지 메시아가 오길 기원하며 토라 경전을 외운다. 특히 오늘날에는 안식일에 가족 식사를 마치고 모세 오경 통독과 기도 후 저녁에 회당에 다시 모여 자정까지 남녀노소가 한데 모여 춤을 추는 방식으로 공동체 결속을 키우고 있다.순례 중 초대받은 예루살렘 시온산의 한 회당에서 ‘유다인의 신앙과 공동체성’을 확인할 수 있었다. 이들은 낮에는 회당 한편 강의실에서 ‘고시 공부’하듯 토라를 열심히 외우고 토론하느라 여념이 없었다. 그리고 저녁 늦은 시각. 다시 모인 이들은 회당 뜰에서 신 나는 리듬에 맞춰 연신 춤을 췄다. 하느님 아래에 사는 기쁨을 온몸으로 표현하는 시간이다. 어르신, 어린아이할 것 없이 다 같이 손잡고, 모였다가 흩어지길 반복하며 메시아 도래를 위해 찬양하는 모습이 생소하면서도 하나 된 마음이 한편으론 부럽게 다가오기도 했다.이스라엘은 전역이 ‘역사 현장’이요, ‘발굴터’다. 수십 미터 지하에서 신구약 속 역사가 언제 모습을 드러낼지 모르는 땅이다. 새 건물을 신축하다 이내 로마 시대, 혹은 그 이전의 유물과 요새가 대거 발견되곤 한다. 2009년 갈릴래아 막달라 지방에서 1세기 유다교 회당과 어업 공장터가 대규모로 발견된 데 이어, 2010년에는 나자렛에서 기원전 1000년 시대 주거지가 발굴됐다. 2015년에는 예루살렘 다윗 도시 바로 옆 주차장 부지 아래에서 ‘아크라(Acra)’라고 알려진 기원전 2세기 고대 그리스 요새 터가 발견됐다. 그리스왕 안티오코스 에피파네스가 기원전 168년 무력으로 예루살렘을 차지하고, 모든 유다교 활동을 금지하기 위해 예루살렘 성전을 통제하고자 지은 요새로, 고고학자들이 수세기에 걸쳐 찾던 곳이다. 고고학자들은 땡볕 아래에서 3년째 발굴터를 복원 중이다.유다인들은 아픈 과거를 절대 잊지 않는다. 오히려 유배와 학살, 핍박과 박해의 고통을 더 잘 보존하고자 애쓰고 있다. 유다인들은 밤낮으로 20m 높이 예루살렘 성전 ‘서쪽 벽’(통곡의 벽)에서 자신들의 본래 지성소였지만 현재는 이슬람 사원이 돼버린 ‘황금 돔 사원’ 성벽 밖에서 통곡하며 기도를 바친다. 그 옆에서 많은 순례객이 각자 자신의 소망을 종이에 적어 이곳 바위틈에 끼워 넣기도 한다.역사를 기리는 방법도 현대화되고 있다. 매일 밤마다 올드 시티 서쪽 요빠 성문(Jaffa Gate) 옆 야외에서 성벽을 스크린 삼아 수십 대의 빔프로젝터가 상영해주는 화려한 영상을 통해 이스라엘의 수천 년 역사를 감상할 수 있다. 전 세계 유다인의 모금으로 2005년 개장한 ‘야드 바쉠’ 홀로코스트 박물관에서는 유다인 학살의 아픈 역사를 관람할 수 있다.이스라엘 역사는 한 민족만의 발자취가 아니다. 모든 민족을 향한 ‘하느님의 구원 역사’가 드러난 것이 이스라엘의 역사 속에서다. 틀림없는 사실은 파괴와 복원을 반복한 예루살렘 성벽과 돌 바닥, 성당들은 여전히 하느님의 섭리, 예수님의 고뇌와 피땀을 온전히 품고 있다는 것이다. 오늘도 하늘엔 하느님이 창조한 태양이 뜨고, 땅 위엔 아들 예수님의 발자국이 짙게 남아있다. ‘하느님 역사’는 여전히 흐르고 있다.이스라엘=이정훈 기자 sjunder@cpbc.co.kr 평화신문2018.08.29

예수님 발자취를 따라 - 이스라엘 성지를 가다 (1) 주님 탄생 예고 기념 성당 내 동굴 앞 제대가 성스러운 모습을 하고 있다. 제대 앞에 라틴어로 ‘이곳에서 말씀이 사람이 되셨다(Verbum Caro Hic Factum est)’라고 씌어 있다. 믿음의 선조 아브라함과 이사악과 야곱의 후손들이 사는 ‘약속의 땅’. 하느님이 약속하신 젖과 꿀이 흐르는 풍요로운 ‘성지 중의 성지’. 4000년 역사 안에 이민족의 숱한 침략과 유배의 아픈 기억을 고스란히 간직한 나라.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과 구원의 기쁜 소식이 처음 울려 퍼진 땅. 이스라엘이다. 7월 24일~8월 1일 일주일간 타임머신을 타고 성경 속을 거닐듯 이스라엘을 다녀왔다. 이스라엘 관광청과 공동 기획으로 예수님의 발자취를 따라간 이스라엘 순례기를 4회에 걸쳐 연재한다. 이스라엘=이정훈 기자 sjunder@cpbc.co.kr이스라엘 북부 갈릴래아 지방의 작은 마을 나자렛. 성모 마리아가 천사를 만나 예수님 잉태 소식을 듣고, 이후 예수님이 유년 시절을 보낸 곳이다. 공관복음은 이 시기 예수님 이야기를 풍부히 다루고 있진 않지만, 예수님이 어린 시절 믿음을 다지며 생활하고, 공생활을 시작하기에 앞서 지혜를 쌓던 고향이다.2000년 전 이 작은 마을은 겨우 150명 남짓 살았을 것으로 추정되는 가장 가난한 동네였다. 믿음의 성지 예루살렘과는 150㎞ 떨어져 있고, 갈릴래아 호수에서 서남쪽으로 약 25㎞ 지점에 있다. 스코틀랜드의 저명한 화가 데이비드 로버트가 1830년쯤 이곳을 방문한 뒤 그린 나자렛 마을 전경 작품만 들여다봐도 당시 나직나직한 전통 가옥 몇 채만 눈에 들어올 정도였다. 그러나 오늘날 나자렛은 아랍인들이 주를 이루는 인구 8만 명의 제법 큰 도시로 성장했다.나자렛 마을은 해발 600m 언덕 분지 안에 집들이 빙 둘러 자리한 모습을 띠고 있다. 3~4층 높이의 제법 큰 건물들도 곳곳에 자리한 동네가 됐다. ‘주님 탄생 예고 기념 성당’은 나자렛 마을 가장 중심에 자리하고 있다. 자동차 한 대가 겨우 다닐만한 좁은 골목을 따라가다 보면 하늘을 찌를 듯한 대형 첨탑이 드리운 성당에 다다른다. 성모 마리아가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말씀하신 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루카 1,38)라며 성령으로 아기 예수를 잉태하리라는 하느님 말씀을 순수하게 받아들인 위대한 신앙 고백의 현장이다. 작고 가난한 유다인 마을에 주님의 천사가 찾아왔고, 마리아의 태중은 이내 찬란하게 빛날 분이 모셔진 성스러운 지성소가 된다. 하느님의 총애 속에 마리아는 ‘지극히 높으신 분’의 아들을 곧 잉태하게 됨을 기꺼이 받아들인다.‘주님 탄생 예고 기념 성당’은 ‘성모님의 집터’로 추정되는 동굴 위에 세워져 있다. 1969년 봉헌된 ‘주님 탄생 예고 기념 성당’ 마당은 전 세계 각국이 봉헌한 성모 성화로 둘러싸여 있다. 육중한 문을 열고 대성전에 들어가면 주님 탄생 예고 동굴 앞 제대가 성스러운 모습을 드러낸다. ‘이곳에서 말씀이 사람이 되셨다(Verbum Caro Hic Factum est)’. 제대 정면에는 말씀이 사람이 되신 육화의 신비가 라틴어로 쓰여 있다. 2층 본 성전을 따라 눈길을 올려다보니 첨탑 꼭대기에 성모 마리아의 순결함을 상징하는 백합과 아베 마리아(Ave Maria)를 뜻하는 무수히 많은 ‘A’와 ‘M’이 수놓아져 있다.그런데 마리아의 집이 동굴이라니. 의아할 법도 하지만, 이는 헤로데 대왕 시대의 전형적인 가정집 형태였다. 석회암으로 만든 작은 방과 부엌, 물 저장소, 곡식 창고 등이 1~2평 남짓한 공간에 자리하고 있다. 이처럼 작고 가난한 집에서 성가정을 이뤘을 2000년 전 소박한 예수님 가족이 눈앞에 그려진다.‘주님 탄생 예고 기념 성당’ 바로 옆에는 요셉의 집터 위에 세워진 ‘요셉 성당’이 자리하고 있다. 요셉과 마리아는 매우 가까운 거리에 살았던 모양이다. 어린 예수는 부모의 손을 잡고 얼마나 즐거운 마음으로 회당을 찾았을까. 또 어린 예수는 목수였던 아버지 요셉이 일하는 것을 얼마나 유심히 지켜봤을까. 물을 길어오는 어머니 마리아의 정성스러운 손길, 철없이 뛰어다니다 이따금 넘어지기도 했던 자신을 일으켜 세워 줬을 요셉과 마리아의 따스함은 얼마나 컸을까. 인근에는 예수님이 드나들었던 유다인 회당 자리의 성당과 마리아가 매일 우물을 길었다고 전해지는 곳에 세워진 가브리엘 성당이 있다.2010년 ‘주님 탄생 예고 기념 성당’ 바로 옆에서 예수님 시대 집터가 새롭게 발견됐다. 큰 규모는 아니지만, 잘 보존된 주거지가 발굴된 것은 이 지역에서 드문 일이다. 새로 발굴된 주거지에서는 기원전 1000년 솔로몬 시대 때 가옥의 벽면과 지하 3층 깊이 저수시설, 점토 항아리 등이 발견됐다.구약성경에는 거의 등장하지 않는 나자렛 마을이 이미 신약의 예수님 시기 이전부터 촌락을 이루고 있었음을 보여주는 현장이어서 의미가 크다. 이스라엘 문화재청은 이 집터에 국제마리아센터를 건립해 이곳을 방문하는 모든 이에게 예수님 시대와 그 이전의 집터를 생생히 감상하도록 돕고 있다. 예수님 관련 영상 감상실과 전시실, 나자렛 일대가 훤히 내려다보이는 아름다운 경당 등을 갖추고 있다.가장 가난하고 작은 마을 나자렛. 나타나엘이 “나자렛에서 무슨 좋은 것이 나올 수 있겠소?”(요한 1,41)하고 필립보에게 보인 시큰둥한 반응이 그럴 법하게도 다가올 만큼 보잘것없는 이곳에 주님의 천사가 찾아왔다. 그리고 성가정은 파스카 축제 때마다 머나먼 예루살렘을 다녀오는 신심 깊은 가족이었다.“아기는 자라면서 튼튼해지고 지혜가 충만해졌으며, 하느님의 총애를 받았다.”(루카 2,40) cpbc2018.08.07
![[시사진단] 예루살렘, 탄식의 도시 (박현도 스테파노, 명지대 중동문제연구소 교수)](//cpbc.co.kr/CMS/newspaper/2017/08/rc/692894_1.0_titleImage_1.jpg)
[시사진단] 예루살렘, 탄식의 도시 (박현도 스테파노, 명지대 중동문제연구소 교수)박현도 (스테파노, 명지대 중동문제연구소 교수) 현지 시각으로 지난 7월 14일 무슬림 합동 예배일인 금요일 오전 7시 예루살렘 성전산에서 이스라엘 국적의 아랍인 3명이 이스라엘 경찰관 2명을 총으로 죽였다. 범인들도 모두 사살됐다. 사건 발생 직후 이스라엘 당국은 성전산 출입을 봉쇄했고, 17년 만에 처음으로 팔레스타인 무슬림들의 예배가 취소됐다. 이스라엘은 한 걸음 더 나아가 안전 조치로 모스크로 들어가는 입구에 금속 탐지기와 보안 카메라를 설치했으나 무슬림들의 강력한 항의 때문에 이내 철수했다. 무슬림들이 보안 장치를 거부한 것은 이스라엘의 감시가 불편할 뿐만 아니라 성전산 소유권이 무슬림에게 있음을 명확히 하기 위해서다.유다인과 무슬림이 서로 소유권을 주장하는 이곳은 7세기 이래 십자군 시대를 제외하고는 무슬림의 땅이었으나 1967년 이른바 6일 전쟁 때 이스라엘이 요르단으로부터 빼앗았다. 그러나 이미 무슬림의 성지가 된 성전산을 강제로 접수하기는 위험이 너무 컸기에 운영은 요르단 정부의 지원을 받는 ‘와크프’라는 공공재단이 하고 이스라엘은 외곽 경비를 맡았다.성전산은 유다인과 무슬림 모두에게 성지다. 유다인의 믿음에 따르면 성전산은 구약성경에 나오는 모리야 산이다. 아브라함이 이사악을 번제물로 바치려고 한 곳으로, 솔로몬이 여기에 성전을 지었다고 한다. 성전이 있던 곳이라 성전산이라고 부른다. 바빌로니아 제국의 침략으로 무너진 성전을 페르시아 고레스 황제의 도움으로 재건하고, 이를 제2성전이라고 불렀다. 기원전 19년 헤로데가 성전을 증축했지만, 70년 로마군이 다시 파괴했다. 성전 붕괴와 함께 유다인은 예루살렘에서 쫓겨나 떠돌이 생활을 시작했고, 135년에는 로마 황제 하드리아누스가 예루살렘의 이름마저 아일리아 카피톨리나로 바꾸었다. 성전산은 로마, 비잔티움의 손을 거쳐 638년 아랍 무슬림이 차지했다.새 주인이 된 무슬림은 폐허가 된 성전산에 2개의 탁월한 종교건축물인 알아크사 모스크와 황금돔 바위 성원을 지었다. 코란과 전승에 따르면 예언자 무함마드는 메카에서 하룻밤 사이에 영험한 말 ‘부락’을 타고 천상 여행을 했다고 한다. 예언자가 간 곳은 코란에서 말하는 바 ‘가장 먼 곳에 있는 성원’인데, 이를 아랍어로 알아크사 모스크라고 한다. 아랍인 3명이 이스라엘 경찰관 2명을 죽인 곳이 바로 이 모스크 입구다. 또 아브라함이 이사악을 바친 곳이라고 믿는 바위를 안에 두고 만든 건축물이 황금돔 바위 성원이다. 무슬림들은 이슬람의 예언자 무함마드가 이 바위를 밟고 천상 여행을 했다고 믿는다. 무슬림들은 성전산을 ‘알하람 앗샤리프’, 즉 ‘고귀한 성소’라고 부른다. 예루살렘은 ‘쿠드스’(성스러운 도시)다.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모두 예루살렘을 향후 수도로 점지해두었기에 성전산은 성지가 아니라 화약고다. 국제 사회가 양측과 머리를 맞대고 솔로몬의 지혜를 짜내기 전에는 피비린내가 계속 진동할 수밖에 없는 구조다. 일부 극렬 유다인들은 무슬림 성지를 부수고 제3의 성전을 세우려고 벼르고 있다. 성전산에서 비무슬림이 기도하는 것을 막는 이유 중 하나다.유일신을 믿는 유다인과 무슬림이 모두 성소라고 부르는 곳은 평온과 사랑이 넘쳐야 하는데, 긴장과 증오와 폭력만이 난무한다. 그리스도교의 성지이기도 한 예루살렘이 더 이상 피로 물들기 전에 국제 사회가 나서야 하지만 묘수가 없다. 평화의 도시여야 할 예루살렘이 탄식의 도시가 된 지 이미 오래다. 차라리 이름 없는 도시로 바꿔 달라고 하느님께 매달리는 것이 가장 빠른 해결책일지도 모른다. 하느님을 믿는 사람들이 지닌 지혜와 인내의 한계를 뼈저리게 느낀다. 평화신문2017.08.23
![[이창훈 위원의 예수님 이야기] (74) 성전 파괴 예고와 재난의 시작 (루카 21,5-19)](//cpbc.co.kr/CMS/newspaper/2018/07/rc/728234_1.0_titleImage_1.jpg)
[이창훈 위원의 예수님 이야기] (74) 성전 파괴 예고와 재난의 시작 (루카 21,5-19)“너희는 인내로써 생명을 얻어라” 루카 21,19 소아시아(터키) 밀레토스 유적지. 성경학자들은 루카복음 21장 5절에서 36절(또는 38절)까지를 ‘종말론적 담화’라고 부릅니다. 세상 종말에 대한 예수님의 말씀이라는 것입니다. 이번 호에서는 성전 파괴 예고와 재난의 시작에 관한 대목을 살펴봅니다.성전 파괴 예고(21,5-6)몇몇 사람이 성전을 두고 “아름다운 돌과 자원 예물로 꾸며졌다”고 이야기하자 예수님께서는 “너희가 보고 있는 저것들이 돌 하나도 다른 돌 위에 남아 있지 않고 다 허물어질 때가 올 것이다” 하고 예루살렘 성전 파괴를 예고하십니다.(21,5-6)이스라엘 역사에서 예루살렘 성전이 파괴된 것은 모두 두 차례입니다. 첫 번째는 기원전 587년(또는 586년) 바빌로니아 제국이 예루살렘을 점령했을 때였습니다. 솔로몬 임금이 지은 예루살렘 성전이 불타버렸고 성전 기물들을 모두 노략질당했습니다. 기원전 538년(또는 537년) 바빌로니아로 유배됐던 이스라엘 사람들이 돌아오고 나서 유다 총독 즈루빠벨이 기원전 515년 파괴된 옛 성전 터에 새 성전을 지었습니다. 이를 제2성전이라고 부릅니다. 이 제2성전을 증ㆍ개축한 사람이 예수님께서 태어나실 당시 유다 지방을 비롯한 이스라엘 전 지역을 다스린 헤로데 대왕(재위 기원전 37~기원전 4)이었습니다. 에돔(이두메아) 출신인 헤로데 대왕은 유다인들의 환심을 사기 위해 기원전 20~19년에 제2성전의 증ㆍ개축 사업을 시작했습니다. 성전 구역만 기존의 두 배가 되는 대대적인 사업이었습니다. 이 성전은 기원후 64년에야 완공됐다고 하니,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서 성전을 정화하시며 사람들을 가르치실 때에도 부분적으로 공사가 진행되고 있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사람들이 예수님께 성전이 46년 걸려 지어졌다고 말한 것(요한 2,20)을 고려하면, 예수님 당시에 헤로데 성전은 이미 웅장한 모습을 드러냈을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이 성전이 완전히 허물어질 때가 올 것이라고 예고하십니다. 실제로 예루살렘 성전은 완공된 지 6년 후인 기원후 70년 티투스 장군이 이끄는 로마 군대에 의해 파괴되고 불에 타 일부 벽만 남습니다. 그 후 당시 로마 황제 베스파시아누스(재위 69~79)의 명령으로 벽마저도 허물어버렸는데 서쪽 벽 일부만 오늘날까지 남아 있습니다. 이를 ‘통곡의 벽’이라고 부르지요. 예수님 당시에는 예루살렘 성전 파괴란 미래의 일이었습니다만, 루카가 복음서를 집필했을 때는 이미 예루살렘 성전 파괴가 역사적 현실이 되고 난 다음이었습니다. 학자들은 루카복음이 집필 연도를 기원후 80년쯤으로 잡고 있으니 말입니다. 이를 고려하면서 그다음 부분을 살펴봅시다. 재난의 시작(21,7-19) 예루살렘 성전이 파괴될 것임을 예고하시는 예수님 말씀에 사람들은 “스승님, 그러면 그런 일이 언제 일어나겠습니까? 또 그 일이 벌어지려고 할 때에 어떤 표징이 나타나겠습니까?” 하고 묻습니다.(21,7) 이 질문은 예루살렘 성전 파괴가 언제 일어날 것이며 또 그때 어떤 표징이 나타날 것인가 하는 질문입니다. 하지만 예루살렘 성전이 지니는 의미를 생각할 때 예루살렘 성전 파괴는 유다인들에게는 파국, 곧 종말이나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따라서 이 물음은 종말의 때가 언제 올 것이냐 하는 질문으로 볼 수 있습니다. 이 질문에 예수님께서는 먼저 “너희는 속는 일이 없도록 조심하여라”고 말씀하시면서 “많은 사람이 내 이름으로 와서 ‘내가 그리스도다’ 또 ‘때가 가까웠다’ 하고 말할 것이지만 그들 뒤를 따라가지 마라”고 당부하십니다. 자신을 그리스도 곧 메시아라고 칭하는 거짓 예언자들이 나타나 종말이 가까웠다고 현혹하겠지만 속아 넘어가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또 “전쟁과 반란이 일어났다는 소문을 듣더라도 무서워하지 마라”고 하십니다.(21,8-9) 전쟁과 반란이 사회 혼란을 가져다주지만 그 자체가 종말의 표징은 아닌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어서 말씀하십니다. “민족과 민족이 맞서 일어나고 나라와 나라가 맞서 일어나며 큰 지진이 발생하고 곳곳에 기근과 전염병이 생길 것이다. 그리고 하늘에서는 무서운 일들과 큰 표징들이 일어날 것이다.”(21,10-11) 민족 간 또는 나라 간 전쟁, 큰 지진과 기근, 전염병, 하늘의 표징들은 묵시문학에서 종말과 관련해 사용하는 표현들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종말을 알리는 이런 일들이 일어나기에 앞서 “사람들이 너희에게 손을 대어 박해할 것”이라면서 그때에 제자들이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말씀하십니다. 박해는 제자들에게 예수님과 복음을 “증언할 기회”가 될 것입니다. 그렇지만 제자들은 변론할 말을 미리부터 준비해서는 안 됩니다. “어떠한 적대자도 맞서거나 반박할 수 없는 언변과 지혜를 내가 너희에게 주겠다”고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21,12-15) 제자들은 또 부모와 형제와 친척과 친구들에 의해 넘겨져 더러는 죽기까지 할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 때문에 모든 사람에게 미움을 받을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너희는 머리카락 하나도 잃지 않을 것”이라시면서 “너희는 인내로써 생명을 얻어라” 하고 당부하십니다.(21,16-19)[생각해 봅시다]예루살렘 성전 파괴 예고와 재난의 시작에 관한 예수님 말씀을 정리하면서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 성전 파괴와 함께 그리스도를 자처하는 거짓 메시아들이 나타나 종말이 왔다고 사람들을 현혹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실제로 기원후 1세기에는 이스라엘 땅에서 그런 이들이 있었습니다. 사도행전에서도 그런 인물을 우리는 셋이나 확인할 수 있습니다. 테우다스와 유다 그리고 자객 4000명을 이끌고 광야로 나간 이집트인이 그들입니다.(사도 5,26-37; 21,38)또 전쟁과 반란이 일어났다는 소문도 들리겠지만, 그 소문을 두려워해서는 안 된다고 말씀하십니다. 전쟁과 반란은 나라를 분열시키고 혼란에 빠뜨립니다. 역사 안에서는 늘 전쟁과 반란이 있었고 그로 인한 정치 사회적 혼란이 따랐습니다. 종말이 오기 전에 겪어야 할 일이지만 그것이 종말이 왔다는 표징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한 가지 더 주목해야 할 것은 종말이 오기 전에 그리스도의 제자들이 먼저 박해를 받으리라는 것입니다. 그때에 부모와 형제 친척과 친구에게서도 버림을 받고 더러는 죽기까지 할 것입니다. 하지만 제자들에게 박해는 또한 그리스도를 증언하는 기회가 될 것입니다. 그렇지만 자기 힘으로 어떻게 하려고 미리 나서지 말아야 합니다. 주님께서 “어떤 적대자도 맞서거나 반박할 수 없는 언변과 지혜를 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박해를 당할 때에, 심지어 죽임을 당할 때라도 그리스도의 제자들에게 요구되는 것은 ‘인내’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생명’을 얻을 것입니다.루카 복음사가가 복음서를 썼을 때는 이미 예루살렘 성전이 파괴된 후였고, 로마 제국 곳곳에서 그리스도인들에 대한 박해가 있었습니다. 이 시기에 루카는 비 유다계 그리스도인들로 이뤄진 자기 공동체 신자들에게 사회적 혼란과 박해의 어려움을 어떻게 극복해야 하는지를 예수님 말씀을 통해 제시하려고 했다는 것이 성경학자들의 일치된 해석입니다. 백영민2018.07.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