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창훈 위원의 사도행전 이야기] (36) 헤로데의 죽음, 바르나바와 사울의 사명 완수(12,18-25)죽음을 부른 헤로데의 오만함헤로데 아그리파 임금은 카이사리아에서 연설을 하다가 비참한 죽음을 맞이한다. 사진은 지중해변 도시 카이사리아 유적지의 일부. 야보고를 사형에 처하고 베드로까지 죽이려고 했던 헤로데 아그리파가 비참한 최후를 맞습니다.(12,18-23) 바르나바와 사울은 예루살렘에서 사명을 수행하고 안티오키아로 돌아갑니다.(12,24-25)카이사리아로 내려간 헤로데의 죽음(12,18-23) 무교절이 끝나면 베드로를 끌어내 사형에 처함으로써 유다인들의 환심을 사려고 했던 헤로데 아그리파의 계획이 수포로 돌아갔습니다. 하룻밤 사이에 베드로가 감쪽같이 사라졌기 때문입니다. 군사들 사이에는 적지 않은 소동이 일어나고 헤로데는 베드로를 찾지 못하자 파수병들을 문초한 뒤에 사형에 처하라고 명령을 내립니다. 그러고는 지중해변 도시 카이사리아로 내려가 그곳에서 지내지요.(12,18-19) 여기서 사도행전 저자 루카는 헤로데가 티로와 시돈 사람들에게 몹시 화가 나 있었고 그래서 티로와 시돈 사람들이 헤로데에게 가서 화평을 청했다고 전합니다. 헤로데가 왜 티로와 시돈 사람들에게 화가 나 있었는지에 대한 설명은 하지 않지만 두 도시 사람들이 헤로데에게 화평을 청한 이유에 대해서는 “그들의 지방이 임금의 영토에서 양식을 공급받고 있었기 때문”이라고 밝힙니다.(12,20) 말하자면 헤로데의 화가 계속해서 티로와 시돈 사람들에게 미치면 양식을 공급받지 못할까 봐 화평을 청했다는 것입니다. 구약성경 열왕기 상권을 보면, 티로와 시돈 사람들은 솔로몬 임금 때부터 유다 지방에서 식량을 공급받아 왔음을 알 수 있습니다.(1열왕 5,25) 티로와 시돈이 해안 도시들이어서 밀 같은 곡식이 부족했을 것입니다. 그러니 헤로데의 화를 풀어주지 못한다면 양식을 공급받지 못하리라는 것이 뻔하지요. 루카는 이어 “정해진 날에 헤로데는 화려한 임금 복장으로 연단에 앉아 그들에게 연설을 하였다”(12,21)고 전하는데, 이 문장에서 “정해진 날”이 무엇을 가리키는지가 확실하지 않습니다. 어떤 학자들은 로마 황제 클라우디우스(재위 41~54)가 브리타니카(지금의 영국)를 정복하고 개선한 것을 경축하는 날이라고 보기도 합니다. 클라우디우스 황제가 브리타니카를 정복하고는 44년 초에 로마로 개선했는데 헤로데 아그리파가 이를 경축하기 위해 정한 날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문맥으로는, 티로와 시돈 사람들이 헤로데에게 화평을 청했고 그래서 평화 조약을 체결하기로 정한 날 혹은 체결을 경축하는 날로 보는 것이 자연스러울 수 있습니다. 어쩌면 두 날이 겹쳐졌을지도 모르지요. 다시 본문으로 돌아옵니다. 정해진 그 날 헤로데가 연설을 하는데 군중이 “저것은 신의 목소리지 사람의 목소리가 아니다” 하고 외쳤고, 그러자 즉시 주님의 천사가 헤로데를 내리쳐서 그는 벌레들에게 먹혀 죽고 맙니다. 루카는 천사가 그를 내리친 이유로 그가 “영광을 하느님께 돌리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전하지요.(12,22-23) 이 대목은 헤로데 아그리파의 죽음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역사적으로 헤로데 아그리파는 기원후 44년 4월에 죽었다고 합니다. 유다인 역사가 요세푸스에 따르면, 헤로데는 심한 복통을 일으켜 닷새 동안 앓다가 죽습니다. 학자들은 그의 죽음을 두고 유다인들을 혹독하게 박해한 안티오코스 에피파네스 임금의 죽음과 흡사하다고 봅니다. 이와 관련, 구약성경 마카베오기 하권은 이렇게 전합니다. “하느님께서 보이지 않는 치명타를 그에게 가하셨고… 그는 내장에 극심한 통증을 느끼고 속으로 지독한 고통을 겪게 되었다.… 이 사악한 자의 눈에서는 구더기들이 기어 나오고, 극심한 고통 속에서도 살아 있기는 하지만 살은 썩어 문드러져 갔다.… 매우 비참한 죽음으로 삶을 마쳤다.”(2마카 9,5-28) 그리고 그런 비참한 죽음은 그의 “오만함”과 “초인적인 교만” 때문이라고 마카베오 하권은 전합니다. 헤로데 역시 자기를 칭송하는 군중의 소리에 하느님께 영광을 돌리지 않은 교만으로 비참한 최후를 맞이했음을 루카는 나타내고자 하고 있는 것입니다. 바르나바와 사울이 안티오키아로 돌아가다(12,24-25) 야고보 사도의 순교, 베드로의 기적적인 풀려남, 그리고 헤로데 아그리파의 죽음이라는 세 사건을 소개하고 난 루카는 다시 바르나바와 사울의 이야기로 돌아옵니다. 두 사람은 안티오키아 교회가 기근으로 어려움을 겪는 유다 지방의 형제들을 위해 모금한 구호 헌금을 전달할 대표로 보낸 사람들입니다.(11,30) 하지만 루카는 이 두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한 행적을 자세히 설명하기보다는 두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사명을 수행한 다음 마르코라고 하는 요한을 데리고 돌아갔다”(12,25)고 짧게 전합니다. 마르코라고 하는 요한 혹은 요한 마르코는, 지난 호에서 살펴본 것처럼, 베드로가 감옥에서 풀려나서 찾아간 집 주인 마리아의 아들이고(12,12) 베드로가 아들처럼 여기는 이로서 마르코복음의 저자로 전해지는 인물이기도 합니다. 요한 마르코를 다시 언급함으로써 사도행전 저자는 바르나바와 사울 외에 요한 마르코 또한 앞으로 역할을 하게 될 것임을 암시하고 있다고 하겠습니다. 그런데 루카는 이 소식을 전하기에 앞서 “하느님의 말씀은 더욱 자라면서 널리 퍼져 나갔다”(12,24)고 기술합니다. 말하자면, 야보고의 순교, 베드로의 풀려남, 헤로데의 죽음이라는 외적인 사건들 이면에서 하느님의 말씀이 계속 성장하고 퍼져 나가고 있음을 제시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도행전 저자의 이런 표현은 하느님 나라에 관한 예수님 말씀을 떠올리게 합니다. “하느님의 나라는 이와 같다. 어떤 사람이 땅에 씨를 뿌려 놓으면, 밤에 자고 낮에 일어나고 하는 사이에 씨는 싹이 터서 자라는데, 그 사람은 어떻게 그리되는지 모른다….”(마르 4,26-29)생각해봅시다1. “저것은 신의 목소리지 사람의 목소리가 아니다.” 헤로데의 연설에 군중이 외친 이 말은 황제나 왕을 신격화한 당시 이교 세계에서는 단순한 아첨이 아니었다고 합니다. 찬사를 나타내는 표현 방식이라는 것입니다. “새로운 길”(9,2)을 따르는 그리스도인들의 관점에서 본다면, 이런 표현은 하느님께 대한 모독이자 또한 인간의 오만함과 교만함의 표현이기도 합니다. 사도행전 저자는 바로 이런 관점에서 헤로데의 죽음을 언급하고 있는 것입니다. 구약성경 잠언의 말씀을 되새겨봅니다. “파멸에 앞서 마음의 오만이 있고 영광에 앞서 겸손이 있다.”(잠언 18,12) 2. “하느님의 말씀은 더욱 자라면서 널리 퍼져 나갔다.” 사도행전 저자가 짧게 전하는 이 구절은 깊이 생각할 여지를 줍니다. 사람들은 세상일에 파묻혀 지내면서 그것이 전부인 것처럼 여기고 살아갑니다. 그러는 사이에 하느님 말씀은 자라면서 널리 퍼져 나갑니다. 성령께서 하시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세상살이의 지혜만이 아니라 하느님의 말씀이 자라고 퍼져 나가는 것을 보고 깨달을 수 있는 마음의 눈과 귀입니다. cpbc2019.10.16
[신앙단상]성탄을 기다리며(천향길 수녀, 성바오로딸 수녀회) 기다림은 희망입니다. 그리움 또는 설렘입니다. 성탄을 생각하면 어릴 적부터 그랬습니다. 공소가 있는 시골 마을에서도 대림절이면 동네 아이들이 모여 성극을 준비하고 성탄의 기쁨을 나누곤 했습니다. 먼 기억 속의 성극을 소환한 건 순전히 외가 방계 형제들을 만나는 자리였습니다.6년 전부터 11월 마지막 토요일이면 형제 모임이 있습니다. 첫 모임이 이태원에서 있었는데, 저는 연락도 없이 수녀원에 들어온 지 스무 해가 넘어 처음 보는 자리라 서먹서먹했습니다. 다들 저보다 머리도 희끗희끗하고, 오랜만이라 선뜻 말을 놓기도 어려웠습니다. 어색함을 떨치고자 초등학교 때 본 성극 중에 대사로 부른 노래가 아직 생각난다고 했더니 갑자기 어수선해졌습니다.“그때 내가 솔로몬 역할을 했었는데”, “난 아기”, “난 가짜 엄마”, “난 진짜 엄마”, “어, 나도 그 자리에 있었는데”, “나도 나도!!” 여기저기서 말문을 열더니 순식간에 분위기가 환해졌습니다. “하느님보다 엄마가 더 무섭다”는 동생이 있는가 하면 “신앙의 자유를 갖고 싶다”는 동생도 있었습니다. 그렇게 우리는 순식간에 세월을 뛰어넘어서 하나가 되었습니다.우리에겐 공통의 기억이 있었습니다. 거기 모인 형제 중 한 사람도 예외 없이 신앙생활을 하고 있었고요. 명절에 자식들이 다니러 가면 성체를 영하는지 영하지 않는지 눈여겨보신다는 친척 어른들의 모습이 눈에 선합니다. 1801년 이전부터 교우촌을 형성해 살아온 그곳은 현재 노인들만 집을 지키고 있습니다. 누구나 한 번쯤 공소 회장이라는 직분을 봉사했기에 길 가는 사람 아무에게나 “회장님” 하고 부르면 뒤를 돌아본다는 우스갯소리가 있습니다.그 시절, 우리는 넉넉하지 않았지만, 마음은 부유했고, 다들 신앙만큼은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잘 지키며 살아가는 걸 보면 역시 신앙은 최고의 유산인 것 같습니다. 냉담한 지 45년 만에 아버지의 품으로 돌아온 외숙부를 봐도 그렇고, 누가 하느님을 떠나 살더라도 언젠가는 아버지의 집으로 꼭 돌아오리라는 믿음이 있습니다. 아직도 사순절이면 바쁜 농번기에도 불구하고 매일 저녁 교우들이 모여 성로신공(聖路神功, 십자가의 길)을 바친다는 말씀이 기억납니다.방학이라 꾀를 부리고 싶어도 면제되지 않았던 기도생활, 새벽이면 조과를, 저녁이면 만과를 온 가족이 함께 바쳤던 시간이 향수로 남아 있습니다. 아기 예수님을 기다리며 판공을 준비하고 공소에 모여 축제를 준비하던 그때의 설렘으로 돌아가 성탄을 기다리고 싶습니다. 평화신문2018.11.28
[이창훈 위원의 사도행전 이야기] (22) 복음이 사마리아에 전파되다Ⅰ (8,4-25)멸시의 땅, 사마리아에 전해진 복음 예루살렘 교회에 불어닥친 박해는 오히려 유다인들이 멸시하던 사마리아에 복음이 전해지는 계기가 된다. 사마리아 사람들은 예수님에 관한 복음을 받아들이고 구원의 기쁨으로 넘쳐난다. 사진은 사마리아 도시 스켐의 전경. 스켐은 요한복음 4장에 나오는 시카르로 추정되는 곳으로 ‘야곱의 우물’이라고 불리는 유적이 있다. 박해를 피해 흩어진 사람들 가운데 필리포스가 사마리아에 복음을 전하고 예루살렘에 있던 사도들도 사마리아로 내려옵니다. 그 이야기를 살펴봅니다. 필리포스의 사마리아 복음 선포(8,4-8)박해로 흩어진 예루살렘 교회 신자들은 남모르게 몸을 숨긴 것이 아니라 여기저기 다니며 말씀을 전합니다.(8,4) 일곱 봉사자 가운데 한 명인 필리포스는 사마리아의 고을로 내려가 그리스도를 선포합니다.(8,5) 군중은 “모두 한마음으로 그가 하는 말에 귀를 기울였다”(8,6)고 사도행전 저자는 전합니다. 그 이유는 크게 두 가지입니다. 그의 말이 울림을 주었고 그가 일으키는 표징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군중이 모두 한마음이 되어 어떤 사람의 말에 귀를 기울인다면, 그것은 그 사람의 말이 진실하고 사람들의 마음을 잡아끌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뿐 아니라 그 사람이 일으키는 표징을 보고 그 사람의 말이 믿을 만하다고 여겼기 때문일 것입니다. 필리포스가 일으킨 표징은 무엇일까요. 사도행전 저자는 “많은 사람에게 붙어 있던 더러운 영들이 큰소리를 지르며 나갔고, 또 많은 중풍 병자와 불구자가 나았다”(8,7)고 기록합니다. 이런 표징들은 전형적으로 예수님께서 일으키신 표징들입니다. 그 표징들은 바로 메시아 시대가 도래했음을 알리는 표징들입니다. 예수님께서 일으키신 이 표징들은 또한 사도들 특히 베드로를 통해서 계속됩니다.(5,15-16). 그리고 그 표징들이 이제 일곱 봉사자 가운데 한 사람인 필리포스를 통해서까지 드러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그 고을에는 큰 기쁨이 넘쳤다”고 사도행전은 전합니다.(8,8) 이 기쁨은 메시아 시대의 기쁨이요, 구원이 왔다는 기쁨이라고 학자들은 풀이합니다. 마술사 시몬의 등장(8,9-13)그런데 그 고을에는 시몬이라는 마술사가 살고 있었습니다. 그는 마술로 사마리아 사람들을 놀라게 하면서 자기가 큰 인물이라고 떠들어대고 있었습니다. 그는 오랫동안 마술로 사람들을 놀라게 했기 때문에 사람들은 “이 사람이야말로 ‘위대한 힘’이라고 하는 하느님의 힘이다” 하며 그의 말에 귀를 기울였습니다.(8,9-11)고대 세계에서는 마술로 사람들을 놀라게 하는 마술사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사도행전에서도 마술사 시몬 외에 바르예수라고 하는 마술사가 나옵니다.(13,6-8) 마술을 부리는 마술사 또는 요술사의 존재는 구약 시대에서부터 존재했습니다. 구약성경에는 마술 혹은 마술사라는 단어가 17번이나 나옵니다. 요술 또는 요술사라는 단어를 포함하면 42회나 언급됩니다. 주목할 것은 마술사 시몬이 사는 고을이 사마리아라는 사실입니다. 사마리아는 이스라엘이 솔로몬 임금 사후에 남유다와 북이스라엘로 갈라지면서 북 왕국 이스라엘의 수도가 된 도시 이름이자 북이스라엘 왕국 전체를 가리키는 지명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사마리아는 아시리아를 시작으로 바빌로니아 페르시아 등 이민족의 침입을 받으면서 이민족들의 문화와 다신 숭배 사상이 유입돼 이스라엘의 하느님께 대한 신앙의 순수함을 잃어버렸습니다. 사마리아의 이런 역사적 배경을 바탕으로 볼 때 마술사 시몬의 등장을 더 쉽게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유다인들은 그래서 사마리아인들을 좋지 않게 여겼고, 사마리아인들과 접촉하지 않으려고 했습니다. 이는 사마리아인들도 마찬가지였지요. 이런 사마리아 고을에 필리포스는 복음을 전했고 그곳 사람들은 구원의 기쁨으로 가득 찹니다. 구원의 기쁨에 넘친 그 고을 사람들은 하느님 나라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에 관한 복음을 전하는 필리포스를 믿게 되면서 세례를 받습니다. 마술사 시몬도 믿고 세례를 받지요. 그러면서 그는 필리포스 곁을 떠나지 않으면서 여러 표징과 큰 기적이 일어나는 것을 보고 놀라워합니다. (8,12-13)사도들과 마술사 시몬의 대면(8,14-25)“예루살렘에 있는 사도들은 사마리아 사람들이 하느님 말씀을 받아들였다는 소식을 듣고 베드로와 요한을 그곳에 보냈다”고 사도행전은 전합니다.(8,14) 베드로는 사도들 가운데 으뜸이었고, 요한은 예수님께서 가장 사랑하신 제자였습니다. 그렇다면 베드로는 다른 사도들의 협조나 승인을 받지 않고 독자적으로 사마리아로 내려갈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사도행전의 저자는 베드로와 요한이 독자적으로 행동한 것이 아니라 사도들에 의해 파견됐음을 분명히 합니다. 베드로가 사도들의 으뜸이지만 다른 사도들에 의해 파견되는 이 구절은 사도단의 단체적인 성격을 드러낸다고 할 수 있습니다. 베드로와 요한은 내려가서 사마리아 사람들이 성령을 받도록 기도합니다. 그들이 주 예수님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았지만, 그들에게는 아직 성령께서 내리지 않으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도들이 안수하자 그들은 성령을 받습니다. 예루살렘 교회에 내린 성령이 이제 사도들을 통해 사마리아인들에게도 내리게 된 것입니다.(8,15-17) 그런데 사도들의 안수로 사람들에게 성령이 내리는 것을 본 시몬은 사도들에게 돈을 갖다 바치면서 “저에게도 그런 권한을 주시어 제가 안수하는 사람마다 성령을 받을 수 있게 해주십시오” 하고 청합니다.(8,18-19) 말하자면 돈으로 성령을 사겠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돈으로 성직이나 성물을 사고파는 행위를 ‘시모니아’(simonia, 영어 simony)라고 하는데, 이 단어의 어원이 바로 마술사 시몬이 시도한 행위에서 비롯합니다. 시몬의 요청에 베드로는 이렇게 대답하지요. “그대가 하느님의 선물을 돈으로 살 수 있다고 생각하였으니, 그대는 그 돈과 함께 망할 것이오. 하느님 앞에서 그대의 마음이 바르지 못하니, 이 일에 그대가 차지할 몫도 없소. 그러니 그대는 그 악을 버리고 회개하여 주님께 간구하시오. 내가 보기에 그대는 쓴 쓸개즙과 불의의 포승 속에 갇혀 있소.” 그러자 시몬이 그런 일이 자신에게 일어나지 않도록 주님께 간구해 달라고 청하지요.(8,18-24) 베드로와 요한은 사마리아의 고을에서 주님 말씀을 증언하고 전파한 뒤에 예루살렘으로 돌아가면서 사마리아의 많은 고을에 복음을 전합니다.(8,25)생각해봅시다1. 사마리아 사람들이 필리포스에 의해 복음을 받아들이고 사도들을 통해 성령까지 받습니다. 신앙의 순수성을 잃었다고 유다인들에게서 멸시를 받던 사마리아에 복음이 선포되고 구원의 기쁨이 넘쳐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예루살렘을 넘어 땅끝까지 전파되는 첫 자리가 유다인들에게 멸시받던 사마리아입니다. 이것이 우리에게 주는 의미는 무엇일까요? 2. 복음이 선포되는 곳에는 그 복음을 순수한 마음으로 받아들이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마술사 시몬이 바로 그런 사람을 대표합니다. 그는 필리포스가 선포하는 말씀을 듣고 또 그가 일으키는 표징들을 보고 믿습니다. 하지만 그 믿음은 순수한 믿음이 아니라 자신의 사욕을 채우고자 하는 욕심이 들어 있는 믿음이었습니다. 마술사 시몬 이야기는 우리 믿음이 어떠한지를 성찰하게 해줍니다. 평화신문2019.06.25
[이창훈 위원의 사도행전 이야기] (19) 스테파노의 설교(7,1-53)성령을 거역하는 최고의회의 완고함 질타하다최고의회 사람들 앞에서 한 스테파노의 설교는 크게 두 부분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첫 부분은 아브라함과 요셉과 모세의 이야기로 이어지면서 이들이 하느님 말씀을 어떻게 따랐는지, 또 하느님께서 어떻게 함께하셨는지를 이야기합니다.(7,1-38) 둘째 부분은 이스라엘 백성의 불충과 성전에 관한 내용이 주를 이루면서 최고의회 사람들을 직접 겨냥합니다.(7,39-53) 이 둘째 부분을 중심으로 스테파노 설교를 계속 살펴봅니다. 이스라엘의 불순종(7,39-43) 하느님께서 지도자요 해방자이자 예언자로 보내주신 모세의 이야기를 하고 나서 스테파노는 모세의 인도로 이집트를 탈출한 “우리 조상” 곧 이스라엘 백성이 “모세에게 순종하려 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마음은 다시 이집트로 돌아가고 있었다”고 지적합니다.(7,39) 그래서 그들은 모세가 산에서 내려오지 않자 모세의 형 아론에게 자기들을 이끌어줄 신들을 만들어 달라고 요구하고 송아지를 만들어 희생제물을 바치며 즐거워하지요.(7,40-41; 탈출 32,1-6) 그들이 이렇게 우상을 숭배하자 “하느님께서는 그들을 외면하시고 그들이 하늘의 군대를 섬기게 내버려 두셨다”고 스테파노는 말합니다. 그리고 이스라엘이 광야 생활 40년 동안 하느님을 섬기기보다는 “몰록의 천막과 너희 래판 신의 별을, 곧 너희가 경배하려고 스스로 만들어 낸 상들을 떠메고 다녔다”고 아모스 예언서를 원용해 지적합니다. 그 결과 이스라엘은 유배 생활을 하게 됐다는 것입니다.(7,42-43; 아모 5,25-27) 몰록은 가나안과 페니키아 지방에서 섬기던 태양신을 가리키고 래판은 별신의 하나입니다. 하늘의 군대는 하늘에 있는 태양, 별, 달 같은 것들을 가리킵니다. 스테파노는 이 말을 통해 이스라엘의 조상들이 계속해서 우상을 섬기며 하느님을 배신했음을 지적하고 있는 것입니다. 아모스 예언서의 말은 또한 바로 이어오는 하느님 거처에 관한 이야기를 준비하는 역할을 합니다. 하느님의 거처(7,44-50) 스테파노는 이제 하느님의 성전으로 이야기 방향을 돌립니다. 이스라엘은 광야에서 모세가 만든 ‘증언 천막’ 곧 증언 궤를 모셔두는 ‘만남의 천막’을 가지고 다녔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광야 생활을 끝내고 가나안 땅에 들어와 다윗 시대까지 증언 천막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 안에 증언 궤가 있는 증언 천막은 하느님이 계신다는 상징이었습니다. 다윗 왕은 증언 천막 대신에 하느님의 거처를 새로 만들고자 했지만, 하느님을 위해 집을 지은 왕은 다윗이 아니라 그 아들 솔로몬이었습니다.(7.44-47) 그런데 스테파노는 여기까지 이야기하고 나서는 “그러나 지극히 높으신 분께서는 사람의 손으로 지은 집에는 살지 않으신다”(7,48)고 단언합니다. 그러고는 이사야 예언서의 말씀을 인용해 자기 말을 정당화합니다. “하늘이 나의 어좌요 땅이 나의 발판이다. 너희가 나에게 무슨 집을 지어주겠다는 것이냐?─주님께서 말씀하신다─또 나의 안식처가 어디 있느냐? 이 모든 것을 내 손이 만들지 않았느냐?”(7,49-50; 이사 66,1-2) 스테파노의 이 말은 예루살렘 성전에 대한 스테파노의 생각이 부정적임을 드러내는 것이라고 학자들은 풀이합니다. 실제로 당시 그리스계 유다인들 가운데 예루살렘 성전으로 순례를 하지 않더라도 율법을 잘 지키면 하느님을 섬길 수 있다고 생각한 이들이 있었다고 합니다. 스테파노 주변 그리스계 그리스도인들 가운데서도 정통 유다인들에 비해 성전의 중요성을 상대적으로 낮춰 보는 이들이 있었을 것입니다. 최고의회에서 스테파노를 고발한 거짓 증인들이 “이 사람은 끊임없이 이 거룩한 곳과 율법을 거슬러 말합니다. 사실 저희는 그 나자렛 사람 예수가 이곳을 허물고 또 모세가 우리에게 물려준 관습들을 뜯어고칠 것이라고, 이자가 말하는 것을 들었습니다”(6,14-15) 하고 말한 것도 성전을 낮춰보는 것에 대한 반발이라고 할 수 있겠지요. 어쨌거나 스테파노에게는 예루살렘 성전보다는 “여기 성전보다 더 큰 이가 있다”(마태 12,6)고 하신 예수님이 더욱 크고 중요함이 분명합니다. 성령을 거역하는 자들(7,51-53) 이사야 예언서를 인용하면서 “하느님께서는 사람 손으로 지은 집에는 살지 않으신다”고 주장한 스테파노는 이제 최고의회 의원들을 향해 “목이 뻣뻣하고 마음과 귀에 할례를 받지 못한 사람들이여” 하며 대놓고 질타합니다. 마음과 귀에 할례를 받지 못했다는 것은 마음을 열고 귀를 기울여 하느님 말씀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뿐 아니라 하느님의 영 곧 “성령을 거역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스테파노는 “여러분도 여러분의 조상들과 똑같다”고 비난합니다.(7,51) 스테파노는 최고의회 의원들이 조상들과 똑같다고 비난하는 이유를 적시합니다. “그들(조상들)은 의로우신 분께서 오시리라고 예고한 이들을 죽였습니다. 그런데 이제 여러분은 그 의로우신 분을 배신하고 죽였습니다.”(7,52) 최고의회 의원들이 조상들과 똑같다고 비난했지만, 그 어조는 더욱 강했습니다. 조상들은 의로우신 분이 오시리라고 예고한 예언자들을 죽였지만, 최고의회 의원들은 의로우신 분 자체를 죽였다고 지적하는 것입니다. 이런 말을 들은 최고의회 의원들은 어떻게 반응했을까요? 다음 호에 계속 살펴봅니다.생각해봅시다조상들의 불충과 하느님의 처소, 그리고 최고의회 의원들에 대한 맹렬한 질타로 이루어진 스테파노 설교의 두 번째 부분은 우리에게도 깊이 생각할 거리를 던집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모세의 인도로 이집트의 노예살이에서 풀려났지만, 광야에서 마음은 이집트의 옛 생활로 돌아갑니다. 어린양의 피를 문설주에 발라 죽음을 피하고 홍해 바다를 건너 탈출하는 이스라엘 백성의 출애굽 여정은 오늘의 우리에게는 옛 생활을 청산하고 물과 성령으로 새롭게 태어나는 세례성사의 여정에 해당합니다. 대탈출로 새 삶을 출발했지만, 광야에서 시련에 부닥치자 이스라엘 백성은 그만 옛 생활을 그리워하고 맙니다. 하느님은 눈앞에 보이지 않고 현실 삶은 고달프고, 그러니 뭔가 의지할 것이 있어야 했습니다. 그래서 우상을 만들어 섬깁니다. 우리는 어떤지요? 세례를 통해 하느님 자녀로 새롭게 태어나 새 출발을 했지만 삶은 여전히 팍팍합니다. 아니, 하느님을 몰랐을 때보다 더욱 힘든 것 같기도 합니다. 하느님께서 주신 사랑의 법을 따르며 살기보다는 지난날 살았던 방식대로 사는 것이 훨씬 편했던 것 같고, 그래서 자꾸만 그 길을 돌아봅니다. 이렇게 뒤돌아보는 일이 계속되면서 우리는 하느님 대신에 우상을 만들어 섬기기 시작합니다. 마음을 열고 말씀에 귀 기울이기보다는 목이 뻣뻣하고 마음과 귀에 할례를 받지 못한 사람이 되어 갑니다. 눈앞에 보이는 것만을 좇으려 하고 성령을 거역합니다. 어쩌면 지금 내가 살아가는 모습이 이렇지는 않은지요? 그렇다면 우리는 마음과 귀에 다시 할례를 받아야 합니다. 마음을 열어 성령을 받아들이고 귀를 기울여 말씀을 들을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 힘만으로는 쉽지 않습니다. 그분 도우심이 필요합니다. 간절한 마음으로 도움을 청하면 들어주실 것입니다. cpbc2019.05.29
[호기심으로 읽는 성미술] (14) 주님 부활 (하)그리스도 부활은 인간 구원의 시작이자 완성 아나스타시스, 11세기, 시나이 산 성 가타리나 수도원, 이집트 5세기부터 13세기 고딕 시대 이전까지 보편적으로 그린 주님 부활 도상(圖像)은 크게 두 가지 유형으로 나타납니다. 하나는 이미 소개한 바 있는 ‘빈 무덤’을 주제로 한 도상입니다. 다른 하나는 주님께서 저승에 가시어 죽은 이들을 구해내시는 장면으로 주님 부활의 모습을 대신하고 있습니다. 이 시기 화가들이 주님의 부활을 직접 묘사하지 않은 이유는 주님의 부활 시점과 그 상황을 모르기 때문이었다고 설명했습니다. 그래서 이 시기 화가들은 르네상스 시대 작가들과 달리 주님 부활의 순간을 절대로 상상해 그리지 않고 오로지 복음서와 교회 전승 내용에 따라 주님 부활을 묘사했습니다. 아담과 하와를 구원하는 부활 도상 주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시고 묻히신 후 저승에 가시어 사흗날에 죽은 이들 가운데서 부활하신’ 후 죽은 자를 대표하는 아담과 하와를 구원하는 부활 도상을 ‘아나스타시스’(αναστασι?)라고 합니다. 우리말로 ‘부활’이라는 뜻입니다. 동방 교회에서는 때때로 ‘지옥에 내려가신 예수 그리스도’,?‘저승에 내려가심’이라고 부릅니다. 교회가 주님 부활 도상으로 이 모습을 즐겨 사용한 이유는 그리스도께서 ‘잠든 이들의 맏물’로 일으켜지셨기 때문입니다.(1코린 15,20) “‘잠든 이들의 맏물’이라는 표현은 그리스도의 부활과 죽은 이들의 부활을 시간적으로뿐 아니라 인과적으로도 연결시킵니다. 맏물이 있으면 그다음에 다른 소출이 있는 것처럼, 그리스도의 부활 다음에는 그리스도 안에 죽은 이들의 부활이 따르리라는 것입니다.”(「200주년 신약성서 주해」 902쪽) 이렇게 그리스도의 부활은 인간 구원의 시작이며 완성의 보증입니다.(2코린 1,22; 5,5 참조) 이 도상은 또한 “나는 부활이요 생명”(요한 11,25)이라는 주님의 말씀을 고백합니다. 부활하신 주님은 죽은 이를 깨우는 생명의 목소리이십니다. 주님께서는 “나를 믿는 사람은 죽더라도 살고, 또 살아서 나를 믿는 모든 사람은 영원히 죽지 않을 것”이라고 약속하십니다.(요한 11,26) 주님 부활 도상이 이렇게 발전하기 시작했고, 초대 교회 시기에는 ‘고래 뱃속에 사흘간 갇힌 요나’,?‘사자 굴에 던져진 다니엘’,?‘에제키엘의 환상’,?‘화덕 속의 세 젊은이’ 등으로 부활을 표현했습니다. 이러한 도상은 주로 부활을 희망하는 죽은 이들의 관과 무덤인 카타콤바의 벽화로 장식됐습니다. 아나스타시스 도상은 그리스와 로마의 영향을 많이 받은 성미술입니다.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저승의 지배자인 하데스와 팍스 로마나(Pax Romana)를 상징하는 승리자요 해방자인 로마 황제의 모습을 그린 그림에서 많은 영감을 받았다는 게 미술사학자들의 공통된 견해입니다. 현존하는 아나스타시스 성미술 작품 중 가장 오래된 것은 8세기 제작된 로마 포룸 로마눔에 있는 산타 마리아 안티쿠아 성당의 벽화라고 합니다. 하지만 이 작품은 많이 훼손되어 지면에서는 11세기에 그려진 이집트 시나이 산 성 가타리나 수도원의 아나스타시스 작품을 소개합니다. 주님 죽음과 부활이 있기에 인간 구원 가능 이 그림의 중심인물은 바로 부활하신 주님이십니다. 주님은 죽음을 이기신 분답게 위풍당당하게 서 계십니다. 왼손으로 십자가를 잡고 있는 주님의 표정에는 진지함과 위엄, 굳은 의지와 결단, 승리의 자신감이 서려 있습니다. 부활하신 주님의 손과 발에는 십자가 수난의 상처가 그대로 남아 있습니다. 토마스 사도를 비롯해 제자들에게 주님께서 직접 보여주신 바로 그 상처입니다. 이 거룩한 십자가의 상처를 그대로 보여주는 것은 부활하신 주님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 묻히셨던 바로 그분이심을 고백하고 있습니다. 주님은 분홍색과 흰색 옷을 입고 계십니다. 분홍색은 주님의 수난과 희생을, 흰색은 부활을 상징합니다. 세례 예식 때 세례를 받는 이들이 흰옷을 입는 전통도 같은 이유입니다. 그래서 바오로 사도는 “우리는 세례를 통해 그리스도와 함께 묻혔고 그분과 함께 부활했습니다”(로마 6,4 참조)라고 선포합니다. 주님의 두 발 아래에는 악마가 짓눌려 굴복하고 있습니다. 그 옆으로 부서진 지옥문들과 열쇠, 자물쇠, 못들이 나뒹굴고 있습니다. “그분께서 청동 문을 부수시고 쇠 빗장을 부러뜨리셨다”(시편 107,16)는 시편 노래처럼 부활하신 주님께서 지옥을 해방하셨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도상에서 부활하신 주님 오른편에는 아담과 하와가, 왼편에는 다윗과 솔로몬을 비롯한 구약의 왕들이 죽음에서 깨어나 무리를 지어 서 있습니다. 부활한 이들은 모두 얼굴에 기쁨이 가득합니다. 구약의 왕들 가운데 맨 앞줄에 있는 다윗과 솔로몬은 두 손을 주님께로 향하며 자신들을 일으켜 세워 영원한 새 생명을 주신 분이 바로 이 분이심을 알리고 있습니다. 다윗은 그리스도께서 세상에 오실 것임을 예언했고, 솔로몬은 왕이신 그리스도를 예시해 주었기에 맨 앞줄에 서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창조하신 첫 인류인 아담과 하와는 백발에 주름이 가득한 노인의 모습입니다. 하와는 주님께 공경의 예를 갖춰 손을 옷으로 가리고 있습니다. 아담은 부활하신 주님께서 입으신 것과 똑같은 옷 색깔을 안과 밖이 다르게 입고 있습니다. 하와는 파란색 속옷과 진홍색 겉옷을 입고 있습니다. 파란색은 인성을 상징한다고 여러 번 설명했습니다. 진홍색은 그리스도의 승리와 영광을 상징합니다. 이 도상에서 눈여겨볼 것이 있습니다. 바로 주님께서 아담을 무덤(관)에서 꺼내시는 모습입니다. 주님께서 손수 아담의 손목을 잡아 끌어올리시고 있습니다. 인간 스스로 죽음에서 깨어나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일으켜 세워주셔야만 부활할 수 있다는 것을 고백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참 하느님이시며 참 인간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인간 구원을 위해 강생하시고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셨기에 우리 모두의 부활도 가능하게 됐다는 것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리길재 기자 teotokos@cpbc.co.kr cpbc2018.06.13
[이창훈 기자의 예수님 이야기(44) 기도(루카 11,1-13)주님을 모신다 말하면서 표징은 입맛대로 청해고래에게 삼켜지는 요나를 표현한 스테인드글라스. 출처=가톨릭 굿뉴스루카 복음서의 문맥상 이번 호에서 다루는 내용은 지난 호에서 본 내용(루카 11,14-28)과 이어집니다. 이 점을 염두에 두면서 계속해서 살펴봅니다. 요나의 표징(루카 11,29-32) 예수님께서 벙어리 마귀를 쫓아내셨을 때에 사람들은 놀라워했지만, 더러는 예수님이 베엘제불의 힘을 빌려 마귀를 쫓아낸다고 말했고 또 하늘에서 내려오는 표징을 보여 달라고 요구한 이들도 있었습니다.(11,14-16) 예수님께서는 베엘제불의 힘을 빌려 마귀를 쫓아낸다는 비난과 관련해서는 예를 들며 구체적으로 대응하셨습니다만, 표징을 보여 달라는 요구에 대해서는 직접적인 언급은 하지 않으시고 “내가 하느님의 손가락으로 마귀들을 쫓아내는 것이면, 하느님의 나라가 이미 너희에게 와 있는 것이다”라고만 말씀하십니다.(11,17- 23 참조) 그런데 “군중이 점점 더 모여들자” 예수님께서는 비로소 표징을 보여 달라는 요구와 관련한 구체적인 답변을 하십니다. 그런데 답변이 대단히 부정적입니다. 먼저 “이 세대는 악한 세대다”라고 비판하십니다.(11,29) 왜 “이 세대가 악한 세대다”라고 말씀하셨을까요? 지난호에서 살펴본 것처럼 예수님께서 벙어리 마귀를 쫓아내는 것을 놀라워하면서도, 예수님께서 하느님의 손가락으로 마귀를 쫓아내는 것을 보면서도, 곧 예수님을 통해 하느님 나라가 이미 와 있는 것을 보면서도 그 표징인 예수님을 받아들이지 않고 자기들이 원하는 표징만을 예수님께 요구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어 “이 세대가 표징을 요구하지만 요나 예언자의 표징밖에는 어떠한 표징도 받지 못할 것”이라고 말씀하시면서 “요나가 니네베 사람들에게 표징이 된 것처럼, 사람의 아들도 이 세대 사람들에게 그러할 것”이라고 설명하십니다.(11,29-30) 요나는 구약의 예언자입니다. 요나는 큰 성읍 니네베로 가서 주민들을 회개시키라는 하느님 말씀을 듣지만, 그 분부를 피해 ‘땅끝’을 상징하는 타르시스라는 곳을 향해 배를 타고 달아납니다. 그러나 풍랑을 만나고 뱃사람들에 의해 바다 속에 내던져진 요나는 커다란 물고기 배 속에서 사흘을 지내다가 나와 다시 하느님의 분부를 듣고 니네베로 가서 회개를 선포합니다. 니네베 사람들은 모두 요나의 말에 회개해 악한 길에서 돌아서고 하느님께서는 그들에게 내리시려던 재앙을 거두시지요.(요나 1─4장 참조) 이런 요나서를 바탕으로 유추해 보면,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요나의 표징’을 두 가지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하나는 요나의 회개 선포를 듣고 니네베 사람들이 모두 회개한 것입니다. 따라서 니네베 사람들에게 요나가 회개(또는 회개 선포)의 표징이 됐듯이, 예수님 자신이 이 사악한 세대에 요나와 같은 표징이시라는 것입니다. 다른 하나는 요나가 큰 물고기 배 속에서 사흘을 지낸 것처럼, 예수님께서도 사흘 동안 땅 속에서 지내시리라는 것입니다. 곧 예수님께서 죽으셨다가 사흘 만에 부활하시리라는 것이지요. 물론 지금 예수님의 말씀을 듣는 청중에게는 예수님의 부활이 아직 미래의 일이지만, 루카 복음사가의 독자들에게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은 이미 일어난 사건이고 이는 요나가 물고기 배 속에서 사흘을 지낸 것에 상징적으로 비견될 수 있었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어 남방 여왕과 니네베 사람들을 언급하시면서 이 세대를 사악한 세대라고 하신 이유를 간접적으로 설명하십니다. ‘심판 때에 남방 여왕이 이 세대 사람들과 함께 되살아나 이 세대 사람들을 단죄할 것이고 니네베 사람들이 되살아나 이 세대를 단죄할 것이다. 남방 여왕은 솔로몬의 지혜를 들으려 땅끝에서 왔고, 니네베 사람들은 요나의 설교를 듣고 회개하였다. 그러나 솔로몬보다 또 요나보다 더 큰 이가 여기에 있다.’(11,31-32) 이 말씀은 솔로몬의 지혜를 들으려고 온 남방 여왕과 달리, 또 요나의 설교를 듣고 회개한 니네베 사람들과 달리 이 세대는 솔로몬이나 요나보다 더 큰 예수님의 말씀을 받아들이지 않기에 단죄를 받을 것이라는 심판의 말씀이자 경고의 말씀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여기서 남방 여왕은 솔로몬 치세 때에 솔로몬의 지혜에 대한 명성을 듣고 찾아온 스바 여왕을 말합니다.(1열왕 10,1-13 참조) 학자들은 스바가 기원전 900~450년쯤 인도와 교역을 통해 전성기를 맞은 아라비아 남쪽의 스바 왕국일 가능성이 크다고 봅니다. 솔로몬과 스바 여왕의 이야기는 또 옛 에티오피아인 아비시니아와 무슬림 전승에도 나오며, 무슬림 전승에 따르면 여왕의 이름은 발키스였다고 합니다.(「주석 성경」 열왕기 상권 10장 주석 참조) 니네베는 고대 앗시리아 왕국의 수도였습니다. 요나서에 따르면 니네베는 성읍을 가로질러 가는 데에만 사흘이 걸리고, 주민이 12만 명이나 되는 큰 성읍이었습니다.(요나 3,3; 4,11 참조) 기원전 8세기 초부터 7세기 초까지 번성했던 옛 니네베는 기원전 612년 몰락하고 맙니다. 오늘날 이슬람국가(IS)에 의해 황폐화한 이라크 북부 모술 인근 니네베 평원 지역에 위치해 있지요. 눈은 몸의 등불(11,33-36) 이어 예수님은 지극히 상식적인 그러나 그 뜻을 바로 파악하기에는 쉽지 않은 말씀을 연이어 하시는 것으로 루카는 기록합니다. 첫째는 ‘아무도 등불을 켜서 숨겨 두거나 함지 속에 놓지 않고 등경 위에 놓아 들어오는 이들이 빛을 보게 한다’는 말씀입니다.(11,33) 등불을 켜서 숨겨 두거나 덮어 두거나 하지 않는다는 것은 지극한 상식입니다. 왜 이런 상식적인 말씀하셨을까요? 여기서 ‘등불’은 솔로몬보다 더 지혜롭고 요나보다 더 위대한 예수님 자신을 가리킵니다. 등불이 가리키는 표징이 바로 예수님이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등불을 덮어 두지 않듯이 등불이신 예수님, 빛이신 예수님을 가리지 말아야 합니다. 예수님을 등불로, 빛으로 여기면서도 그 등불을 다른 것으로 가려 버린다면 얼마나 어리석은 짓이겠습니까? 둘째 말씀은 ‘네 눈은 네 몸의 등불이다. 눈이 맑을 때에는 온몸이 환하지만, 성하지 못할 때에는 온몸도 어둡다’는 것입니다.(11,34) 하지만 더욱 깊이 새겨야 할 것은 이어오는 “그러니 네 안에 있는 빛이 어둠이 아닌지 살펴보아라. 너의 온몸이 환하여 어두운 데가 없으면 등불이 그 밝은 빛으로 너를 비출 때처럼 네 몸이 온통 환할 것이다”(11,35-36)라는 말씀입니다. 첫째 말씀과 마찬가지로 여기서도 등불은 바로 예수님을 표상합니다. 그렇다면 이 말씀은 우리가 우리 안에 예수님을 제대로 모시고 있다면, 즉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그대로 실천하는 삶을 산다면(11,28 참조) 우리 온몸이 환하여 어두운 데가 없으리라는 것을 뜻합니다. 그러나 만일 우리가 빛이신 예수님을 모시고 산다고 하면서도 우리 몸이 환히 빛을 내지 못하고 어둡다면 그것은 우리가 실제로는 우리 안에 모시고 사는 것이 아님을 일깨우고 있는 것입니다. 생각해 봅시다그리스도 신자라고 자처하면서도 우리는 주님께서 주시는 표징을 받아들이기보다는 우리가 원하는 표징을 하늘로부터 내려 주시기를 주님께 요구하며 살아가지는 않는지요? 또 주님을 모시고 산다고 하면서도 우리 자신의 공명심과 이기심으로 참 빛이신 주님을 가리고 있지는 않는지요? 하루를 마치면서 적어도 잠깐이라도 “네 안에 있는 빛이 어둠이 아닌지 살펴보아라”(루카 11,35)고 하신 주님 말씀대로 우리 자신을 살펴보는 시간을 가져보는 것은 어떻겠습니까? 백영민2017.12.20
구약과 신약 잇는 믿음의 이야기 구약 외경 1 / 송혜경 원문ㆍ번역ㆍ주해 / 한님성서연구소 / 3만 5000원구약 외경(外經)은 구약성경 46권에 포함되지 않은 책들이다. 교회가 공식 인정한 정경(正經)은 아니지만, 교회 가르침에 위배되지 않는 경전이다.가톨릭 표준 성경도 아닌데 구약 외경을 알아야 하는 이유는? 구약과 신약을 잇는 가교가 되는 ‘하느님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국내에서 찾아보기 힘든 구약 외경을 번역하는 작업에 한님성서연구소가 돌입, 첫 권 「구약 외경 1」을 내놨다. 당대 ‘믿음의 선조’들의 다양한 문체와 경험을 담은 문헌을 두루 알려 하느님 역사를 제대로 일깨우기 위해서다.구약 외경이 만들어진 시기는 두 번째 예루살렘 성전이 존속하던 ‘제2성전기 후반’이다. 기원전 515~516년부터 기원후 70년까지다. 바빌론 유배지에서 돌아온 유다인들이 예루살렘에 다시 성전을 지은 때부터, 로마인들이 성전을 파괴한 시기까지인 ‘600년의 기간’이다. 이때는 구약이 완결되고, 신약이 기록되던 중간 시기이기도 하다. 당시 정치적 독립성을 잃은 채 살았던 유다인들은 ‘외세의 지배’와 더불어 그리스 문화를 비롯한 동서양 전통이 유입되던 이 시기에도 활발한 저술활동을 통해 풍성한 ‘믿음의 이야기’들을 집필했다.구약 외경은 아담과 하와의 생애, 에녹서, 열두 족장의 유언, 모세의 승천기 등으로 구성돼 있다. 이들은 묵시ㆍ시편 문학, 설화와 전설 등의 범주에 속한다. 서사시와 비극, 철학적 논고, 성경 이야기를 확대한 방대한 작품을 쏟아내며 유다 지역이 문학적으로도 풍성함을 이루는 데 지대한 영향을 끼친다.구약 외경은 다양한 신학적 개념들을 내포하고 있다. 악의 기원 문제, 메시아에 대한 희망, 부활과 사후 세계에 대한 관심 등이다. ‘악마 개념’이 거의 발견되지 않는 구약성경에 비해 외경은 악의 개념을 활발히 다룬다. 구약 외경의 에녹 1서, 희년서, 아담과 하와의 생애 등은 악마의 기원을 다각도로 제시하며 그들이 세상에서 하는 역할을 드러낸다. 하느님은 선이고, 사탄은 악이라는 유다교 문학의 전제가 분명히 다뤄진 것이다.천사의 무리가 지상에 내려와 사람의 딸들을 탐한 사건, 잘못을 저지르고 하늘에서 쫓겨나 아담에게 경배하라는 미카엘 대천사의 명령에 불복종하는 천사들의 타락 등 다양한 악의 기원이 구약 외경을 통해 전해진다. 사탄에게 작용한 것은 공통적으로 ‘교만’이었다.구약성경에서 이어지는 ‘메시아 사상’과 ‘부활과 내세 사상’도 눈에 띈다. 구약 외경에서 메시아는 범죄를 일삼는 이방인들을 예루살렘에서 몰아내고 성전을 정화하며 ‘정의’를 실현하는 존재다. 유다교 전통 안에서 죽은 이의 부활이나 죽음 이후의 삶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은 유배 이후부터이며, 부활과 내세의 개념을 발전시킨 것은 헬레니즘 시대 이후부터다. 솔로몬 시편 13장 11절이 “의인들의 생명은 영원하다. 죄인들은 파멸로 사라지고 말리라!”라고 하는 구절부터 희년서와 마카베오기 4서 등에 죽음 이후에 대한 희망 이야기가 등장한다.「구약 외경 1」은 구약성경의 시편과 흡사한 「솔로몬의 시편」부터 구약성경의 신학개념을 상당 부분 전승해 이야기를 펼치고 있는 「에녹 1서」 등 묵시ㆍ시편 문학과, 설화와 전설 형식의 「요셉과 아세넨」, 「예언자들의 생애」, 「아리스테아스의 편지」 등을 원문과 함께 상세한 역사적 배경과 주석을 달아 제작했다.유배 이후 유다인들은 자신들의 믿음을 기록으로 활발히 남겼다. 그들이 지닌 역사적 경험과 교훈, 하느님과 인간을 두고 숙고한 통찰의 열정이 구약 외경에 고스란히 담겨있다. 이정훈 기자 sjunder@cpbc.co.kr 평화신문2018.04.19
[시사진단]슬픈 아라비아, 예멘박현도 (스테파노, 명지대 중동문제연구소 인문한국 연구교수) 구약성경 열왕기 상권 10장과 역대기 하권 9장에는 솔로몬의 명성을 들은 스바 왕국의 여왕이 많은 수행원을 거느리고 향료와 금, 은, 보화를 낙타에 실은 채 예루살렘을 방문했다는 기록이 나온다. 스바는 흔히 시바라는 이름으로 우리에게 더 알려진 왕국이다. 정확한 위치는 여전히 오리무중이지만, 요즘 난민 문제로 우리 국민의 관심이 쏠린 예멘이라는 설이 있다. 예멘은 스바의 여왕과 더불어 로마와 향료무역을 한 곳으로도 유명하다. 그래서 붙은 별명이 ‘아라비아 펠릭스(Arabia Felix)’다. 풍요로운 아라비아, 행복한 아라비아라는 뜻이다.아라비아 반도 남서쪽에 자리 잡은 예멘은 북쪽으로는 사우디아라비아와 동쪽으로는 오만과 국경을 맞댄 아랍국가다. 이슬람교를 따르고 수니파와 시아파의 비율이 약 60% 대 40%다. 국가 면적은 우리나라보다 5배나 크지만, 인구는 우리보다 적은 약 2700만 명이고, 국민 평균 연령은 19.5세로 무척 젊은 나라다. 25세 이하 인구가 전 국민의 60%를 차지한다. 젊은이가 압도적으로 많기에 발전 가능성이 크지만, 대다수 중동 국가들이 그렇듯 독재정치와 권력층의 부패로 경제가 부실해 아랍국가 중에서 가장 가난한 나라에 속한다. 국민소득은 1인당 1500달러에 불과하다.7세기에 이슬람화가 된 예멘은 1990년까지 완전한 통일국가를 이루지 못하였다. 산악지역과 사막 등 험한 지형 때문에 단합된 정치공동체를 만드는 것이 쉽지 않았다. 북쪽은 오스만제국, 남쪽은 영국이 지배했다. 제1차 세계대전에서 오스만제국이 패배한 후 북예멘은 자이디파 시아 왕정이 자리를 잡았다가 1962년 아랍민족주의에 바탕을 둔 공화정 혁명으로 무너진 뒤 내전을 거쳐 1968년 예멘아랍공화국이 들어섰다. 남예멘은 반영투쟁 끝에 1967년 사회주의를 채택한 예멘인민민주공화국이 들어섰다. 그러나 소련이 붕괴하면서 어려움에 부닥친 남예멘이 북예멘과 손을 잡아 1990년 통일 예멘공화국을 이루었다. 그러나 통일 예멘의 앞길은 순탄치 않았다. 북예멘의 살레 대통령이 통일대통령이 됐지만, 국민통합도, 민주정치에도 실패했다. 더욱이 북부 사으다 지역에 집중거주하고 있는 자이디파 시아의 후시반군이 강경보수 수니파의 공세에 불안감을 느끼면서 2004년부터 정부와 대치를 시작했다. 이처럼 종파분쟁까지 곁들인 정국이 이어지다가 2011년 튀니지에서 시작한 ‘아랍의 봄’ 민주화 시위가 예멘에서도 일어나 1978년 북예멘 대통령으로 시작해 통일 예멘의 유일한 대통령이 된 살레의 34년 독재정권이 무너졌다. 그러나 후시반군이 새로운 정부의 조치에 만족하지 못하고 2014년 9월 수도 사나를 이듬해 1월 대통령궁을 점령하자 연금 상태에 있던 하디 대통령이 수도를 탈출해 사우디아라비아에 도움을 요청하였고, 이에 사우디아라비아가 3월 19일 후시반군 공격을 시작하면서 예멘 전쟁의 막이 올랐다. 후시반군이 이란의 후원을 받는다고 믿고 있는 사우디아라비아는 이라크, 시리아, 레바논에 이어 예멘까지 이란이 영향력을 미치는 것을 받아들일 수 없기에 현재까지 예멘을 봉쇄하고 후시반군 지역에 공습을 가하고 있다. 지난달 제주도로 들어온 예멘 난민은 현재 조사가 진행 중이긴 하지만, 대부분 징집과 신변 위협을 피해 후시반군이 장악한 지역에서 도망쳐 나온 사람들로 알려졌다. 말레이시아로 피했다가 무비자와 에어아시아 제주 직항을 이용하여 우리나라로 들어온 것이다. 번성한 향료무역으로 ‘아라비아 펠릭스’로 불렸던 예멘이 이제는 폭탄과 목숨을 거래하는 ‘아라비아 미세라(Arabia Misera)’가 되었다. 슬픈 아라비아! 종전과 평화를 기원한다. 평화신문2018.07.17
[시사진단] 트럼프의 예루살렘- 박현도(명지대 중동문제연구소 연구교수)박현도(스테파노, 명지대 중동문제연구소 연구교수 ) 1995년 미국 상·하원 의회는 이스라엘의 수도가 예루살렘이라고 하면서 미국 행정부가 대사관을 1999년 5월 31일까지 예루살렘으로 옮겨야 한다는 ‘예루살렘 대사관법’을 압도적인 표차로 통과시켰다. 단, 미국의 안보에 위협이 된다고 판단하면 6개월마다 대통령이 유예할 수 있다고 했고, 이에 클린턴, 부시, 오바마 대통령은 그렇게 했다. 트럼프 대통령도 올 6월 1일 법안 준수를 유예했다. 그런데 6개월 시한이 다해 다시 결정의 시간이 돌아오자 지난 12월 6일 예루살렘을 이스라엘의 수도라고 선언하고, 대사관 이전 작업도 시작하겠다고 말했다.유다인들이 자신들의 영원한 고향이라고 여기는 예루살렘은 로마에 대항한 1차 독립 전쟁(66∼70년)에서 파괴되고, 2차 독립 전쟁(132∼135년)에서 아일리아 카피톨리나로 개명되는 수모를 겪은 곳이다. 로마는 예루살렘을 비롯해 유다인들이 살던 지방 이름도 시리아 팔라이스티나 속주로 바꿨다. 이 지역은 로마 지배를 거쳐 638년 아랍인들이 장악한 후 십자군 전쟁 때만 제외하고 1917년 12월 9일 영국군이 예루살렘을 점령할 때까지 1300여 년 동안 무슬림들이 지배했다.영국은 지배지에 평화를 일구지 못하고, 오히려 유다인들의 귀향길을 열어 줌으로써 문제를 복잡하게 만들었다. 로마에 패한 후 고향을 떠나야 했던 유다인들이 솔로몬 성전과 제2 성전이 있는 ‘시온’, 즉 예루살렘으로 돌아가 다시 나라를 세우겠다는 시온주의를 선포했는데, 영국이 이를 들어준 것이다. 1947년 11월 29일 유엔은 유다인과 아랍인의 땅 분할을 가결했지만 무슬림들이 거부했다. 영국은 이렇다 할 평화안을 내놓지도 못한 채 1948년 5월 14일 자정을 기해 이곳에서 완전히 손을 떼었고, 당일 오후 4시 이스라엘은 영국 몰래 독립을 선포했다. 그리고 이스라엘과 아랍의 전쟁이 시작됐다.1차 전쟁의 결과 예루살렘은 둘로 분할됐다. 서예루살렘은 이스라엘, 동예루살렘은 아랍인, 더 정확하게는 요르단이 차지했다. 동예루살렘은 구시가지가 있는 곳으로, 유다인들의 솔로몬 성전, 제2 성전이 세워졌던 성전산이 있다. 성전산에는 이슬람의 예언자가 천상 여행을 한 유적이라고 무슬림들이 믿는 바위돔성원과 아크사 모스크가 있다. 그래서 ‘고귀한 성소’라는 뜻인 알하람 앗샤리프라고 부른다. 그리스도인들에게 예루살렘은 예수 그리스도 최후의 수난처로, 십자가의 길, 골고타산, 성묘성당이 있는 곳이다. 성전이 장사치들의 소굴로 전락한 모습을 보고 분노한 예수가 “사고팔고 하는 자들을” 쫓아내시고 “환전상들의 탁자와 비둘기 장수들의 의자도 둘러엎으신” 곳이기도 하다.(마르 11,15) 과거 선배 신앙인들은 예루살렘을 라틴어로 ‘세상의 배꼽(Umbilicus mundi)’이라고 부르며 이곳을 중심으로 세계 지도를 그렸다.1967년 6월 이스라엘의 선제 공격으로 시작된 6일 전쟁에서 이스라엘이 동예루살렘을 점령해 지금까지 실효 지배하고 있다. 그러나 국제사회는 이를 인정하지 않는다. 1980년 이스라엘 의회는 ‘영원히 분리되지 않는’ 예루살렘을 수도로 선포했으나 이에 반발한 국제사회는 당시 13개국 대사관을 모두 예루살렘에서 다른 곳으로 이전했다. 그래서 현재 예루살렘에는 단 한 나라의 대사관도 존재하지 않는다. 전쟁으로 얻은 땅을 인정하지 않는다는 국제법을 따른 것이다. 그런데 이제 미국이 이스라엘 편에 확실히 섰으니 국제사회가 분노하는 것은 당연하다. 트럼프 대통령은 부시나 오바마와 달리 대통령 선거전에서 이스라엘의 수도가 예루살렘이라고 한 약속을 지켰다고 자찬했다. 그러나 국제법을 무시하고 애초에 하지 말아야 할 약속을 한 것이 문제다. ‘세상의 배꼽’이 ‘세상의 근심거리’가 되어 버렸다. 성전은 사라졌지만 장사꾼들은 여전하다. 평화신문2017.12.13
예수님 발자취를 따라 이스라엘 성지를 가다 (4·끝)‘인류 구원의 역사’는 지금도 흐른다 유다인들과 순례객들이 '통곡의 벽'에서 기도하고 있다. 성경을 낳고, 성경을 품은 중동의 작은 나라. 이스라엘은 ‘성경의 땅’이다.이스라엘 민족을 통해 인류사에 개입하신 하느님 섭리를 다룬 ‘하느님의 서사시’ 성경 말씀이 살아 숨 쉬는 곳이 이스라엘이다.이스라엘 남부 광활한 광야 지역에는 구약의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있고, 비옥한 평야와 갈릴래아 호수가 넘실대는 북부 지방에는 예수님 설교가 아직 귓전을 때리는 듯 잘 보존돼 있다. 이곳에서 ‘말씀’을 ‘현장’으로 만나는 순간, 누구나 가슴 뜨거운 전율을 느낄 수 있다. 많은 그리스도인이 이스라엘을 ‘성지 중의 성지’라 부르는 이유다.그러나 이스라엘 역사는 한시도 바람 잘 날 없는 침탈과 유배의 아픔을 간직하고 있다. 기원전 1000년 유다 민족의 12지파를 최초로 통일한 위대한 임금 다윗왕. 이어 가장 번성했던 솔로몬왕 통치로 찬란한 황금시대를 구가한 이스라엘 왕국은 그러나 통치 80여 년 만에 남북으로 분열된다. 유럽과 아프리카, 아시아를 연결하는 통로였던 이스라엘은 이후 3000년 가까이 페르시아, 그리스, 로마, 마케도니아, 십자군, 이슬람 민족, 터키, 대영 제국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이민족 국가들의 침탈과 유배의 아픔으로 얼룩지고 만다. 모세의 계약의 궤를 모셨던 ‘하느님의 지성소’ 예루살렘 성전은 붕괴와 재건을 반복한 끝에 이슬람 ‘황금 돔 사원’이 1500년째 자리하고 있다.예수님 시대 이후 2000년이 지난 오늘날. 도시 전체가 거대 박물관이 된 예루살렘은 ‘종교의 백화점’이다. 예루살렘 성전을 중심으로 길이 6㎞로 둘러쳐진 성곽 안 올드 시티(Old City)는 로마 가톨릭, 유다교, 무슬림이 각기 구역을 나눠 살아가는 ‘공존’과 ‘상생’의 터다. 2만 명의 사람들이 좁은 골목 안 3000여 개 크고 작은 상점과 주거지에 산다. 정오 기도 시간이면 이슬람 모스크 사원 스피커에서 울려 퍼지는 기도 소리와 성당 종소리가 혼재돼 묘한 분위기를 내기도 한다. 올드 시티 밖은 유럽 각지에서 ‘반유다주의’로 온갖 차별과 핍박을 받던 유다인들이 19세기 이후 정착해 뉴 시티(New City)를 형성하고 있다.‘신앙’은 기념과 기억이라고 했던가. 기원후 70년, 로마제국에 의해 멸망한 뒤 전 세계로 흩어졌던 유다인들이 1948년에 이르러 오늘의 이스라엘 국가를 다시 세우기까지, 특히 제2차 세계대전으로 전 세계 유다인의 3분의 2가 죽음으로 내몰리는 가운데서도 이들이 역사 속에서 결코 사라지지 않을 수 있었던 힘은 자신의 역사와 믿음을 지키는 ‘유다교 신앙’ 때문이었다. 이들은 철저한 율법의 가르침 아래 매주 토요일이면 온 가족이 ‘안식일’을 지킨다. 아무 일도 하지 않고, 전기도 쓰지 않고 오로지 메시아가 오길 기원하며 토라 경전을 외운다. 특히 오늘날에는 안식일에 가족 식사를 마치고 모세 오경 통독과 기도 후 저녁에 회당에 다시 모여 자정까지 남녀노소가 한데 모여 춤을 추는 방식으로 공동체 결속을 키우고 있다.순례 중 초대받은 예루살렘 시온산의 한 회당에서 ‘유다인의 신앙과 공동체성’을 확인할 수 있었다. 이들은 낮에는 회당 한편 강의실에서 ‘고시 공부’하듯 토라를 열심히 외우고 토론하느라 여념이 없었다. 그리고 저녁 늦은 시각. 다시 모인 이들은 회당 뜰에서 신 나는 리듬에 맞춰 연신 춤을 췄다. 하느님 아래에 사는 기쁨을 온몸으로 표현하는 시간이다. 어르신, 어린아이할 것 없이 다 같이 손잡고, 모였다가 흩어지길 반복하며 메시아 도래를 위해 찬양하는 모습이 생소하면서도 하나 된 마음이 한편으론 부럽게 다가오기도 했다.이스라엘은 전역이 ‘역사 현장’이요, ‘발굴터’다. 수십 미터 지하에서 신구약 속 역사가 언제 모습을 드러낼지 모르는 땅이다. 새 건물을 신축하다 이내 로마 시대, 혹은 그 이전의 유물과 요새가 대거 발견되곤 한다. 2009년 갈릴래아 막달라 지방에서 1세기 유다교 회당과 어업 공장터가 대규모로 발견된 데 이어, 2010년에는 나자렛에서 기원전 1000년 시대 주거지가 발굴됐다. 2015년에는 예루살렘 다윗 도시 바로 옆 주차장 부지 아래에서 ‘아크라(Acra)’라고 알려진 기원전 2세기 고대 그리스 요새 터가 발견됐다. 그리스왕 안티오코스 에피파네스가 기원전 168년 무력으로 예루살렘을 차지하고, 모든 유다교 활동을 금지하기 위해 예루살렘 성전을 통제하고자 지은 요새로, 고고학자들이 수세기에 걸쳐 찾던 곳이다. 고고학자들은 땡볕 아래에서 3년째 발굴터를 복원 중이다.유다인들은 아픈 과거를 절대 잊지 않는다. 오히려 유배와 학살, 핍박과 박해의 고통을 더 잘 보존하고자 애쓰고 있다. 유다인들은 밤낮으로 20m 높이 예루살렘 성전 ‘서쪽 벽’(통곡의 벽)에서 자신들의 본래 지성소였지만 현재는 이슬람 사원이 돼버린 ‘황금 돔 사원’ 성벽 밖에서 통곡하며 기도를 바친다. 그 옆에서 많은 순례객이 각자 자신의 소망을 종이에 적어 이곳 바위틈에 끼워 넣기도 한다.역사를 기리는 방법도 현대화되고 있다. 매일 밤마다 올드 시티 서쪽 요빠 성문(Jaffa Gate) 옆 야외에서 성벽을 스크린 삼아 수십 대의 빔프로젝터가 상영해주는 화려한 영상을 통해 이스라엘의 수천 년 역사를 감상할 수 있다. 전 세계 유다인의 모금으로 2005년 개장한 ‘야드 바쉠’ 홀로코스트 박물관에서는 유다인 학살의 아픈 역사를 관람할 수 있다.이스라엘 역사는 한 민족만의 발자취가 아니다. 모든 민족을 향한 ‘하느님의 구원 역사’가 드러난 것이 이스라엘의 역사 속에서다. 틀림없는 사실은 파괴와 복원을 반복한 예루살렘 성벽과 돌 바닥, 성당들은 여전히 하느님의 섭리, 예수님의 고뇌와 피땀을 온전히 품고 있다는 것이다. 오늘도 하늘엔 하느님이 창조한 태양이 뜨고, 땅 위엔 아들 예수님의 발자국이 짙게 남아있다. ‘하느님 역사’는 여전히 흐르고 있다.이스라엘=이정훈 기자 sjunder@cpbc.co.kr 평화신문2018.08.29
예수님 발자취를 따라 - 이스라엘 성지를 가다 (1) 주님 탄생 예고 기념 성당 내 동굴 앞 제대가 성스러운 모습을 하고 있다. 제대 앞에 라틴어로 ‘이곳에서 말씀이 사람이 되셨다(Verbum Caro Hic Factum est)’라고 씌어 있다. 믿음의 선조 아브라함과 이사악과 야곱의 후손들이 사는 ‘약속의 땅’. 하느님이 약속하신 젖과 꿀이 흐르는 풍요로운 ‘성지 중의 성지’. 4000년 역사 안에 이민족의 숱한 침략과 유배의 아픈 기억을 고스란히 간직한 나라.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과 구원의 기쁜 소식이 처음 울려 퍼진 땅. 이스라엘이다. 7월 24일~8월 1일 일주일간 타임머신을 타고 성경 속을 거닐듯 이스라엘을 다녀왔다. 이스라엘 관광청과 공동 기획으로 예수님의 발자취를 따라간 이스라엘 순례기를 4회에 걸쳐 연재한다. 이스라엘=이정훈 기자 sjunder@cpbc.co.kr이스라엘 북부 갈릴래아 지방의 작은 마을 나자렛. 성모 마리아가 천사를 만나 예수님 잉태 소식을 듣고, 이후 예수님이 유년 시절을 보낸 곳이다. 공관복음은 이 시기 예수님 이야기를 풍부히 다루고 있진 않지만, 예수님이 어린 시절 믿음을 다지며 생활하고, 공생활을 시작하기에 앞서 지혜를 쌓던 고향이다.2000년 전 이 작은 마을은 겨우 150명 남짓 살았을 것으로 추정되는 가장 가난한 동네였다. 믿음의 성지 예루살렘과는 150㎞ 떨어져 있고, 갈릴래아 호수에서 서남쪽으로 약 25㎞ 지점에 있다. 스코틀랜드의 저명한 화가 데이비드 로버트가 1830년쯤 이곳을 방문한 뒤 그린 나자렛 마을 전경 작품만 들여다봐도 당시 나직나직한 전통 가옥 몇 채만 눈에 들어올 정도였다. 그러나 오늘날 나자렛은 아랍인들이 주를 이루는 인구 8만 명의 제법 큰 도시로 성장했다.나자렛 마을은 해발 600m 언덕 분지 안에 집들이 빙 둘러 자리한 모습을 띠고 있다. 3~4층 높이의 제법 큰 건물들도 곳곳에 자리한 동네가 됐다. ‘주님 탄생 예고 기념 성당’은 나자렛 마을 가장 중심에 자리하고 있다. 자동차 한 대가 겨우 다닐만한 좁은 골목을 따라가다 보면 하늘을 찌를 듯한 대형 첨탑이 드리운 성당에 다다른다. 성모 마리아가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말씀하신 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루카 1,38)라며 성령으로 아기 예수를 잉태하리라는 하느님 말씀을 순수하게 받아들인 위대한 신앙 고백의 현장이다. 작고 가난한 유다인 마을에 주님의 천사가 찾아왔고, 마리아의 태중은 이내 찬란하게 빛날 분이 모셔진 성스러운 지성소가 된다. 하느님의 총애 속에 마리아는 ‘지극히 높으신 분’의 아들을 곧 잉태하게 됨을 기꺼이 받아들인다.‘주님 탄생 예고 기념 성당’은 ‘성모님의 집터’로 추정되는 동굴 위에 세워져 있다. 1969년 봉헌된 ‘주님 탄생 예고 기념 성당’ 마당은 전 세계 각국이 봉헌한 성모 성화로 둘러싸여 있다. 육중한 문을 열고 대성전에 들어가면 주님 탄생 예고 동굴 앞 제대가 성스러운 모습을 드러낸다. ‘이곳에서 말씀이 사람이 되셨다(Verbum Caro Hic Factum est)’. 제대 정면에는 말씀이 사람이 되신 육화의 신비가 라틴어로 쓰여 있다. 2층 본 성전을 따라 눈길을 올려다보니 첨탑 꼭대기에 성모 마리아의 순결함을 상징하는 백합과 아베 마리아(Ave Maria)를 뜻하는 무수히 많은 ‘A’와 ‘M’이 수놓아져 있다.그런데 마리아의 집이 동굴이라니. 의아할 법도 하지만, 이는 헤로데 대왕 시대의 전형적인 가정집 형태였다. 석회암으로 만든 작은 방과 부엌, 물 저장소, 곡식 창고 등이 1~2평 남짓한 공간에 자리하고 있다. 이처럼 작고 가난한 집에서 성가정을 이뤘을 2000년 전 소박한 예수님 가족이 눈앞에 그려진다.‘주님 탄생 예고 기념 성당’ 바로 옆에는 요셉의 집터 위에 세워진 ‘요셉 성당’이 자리하고 있다. 요셉과 마리아는 매우 가까운 거리에 살았던 모양이다. 어린 예수는 부모의 손을 잡고 얼마나 즐거운 마음으로 회당을 찾았을까. 또 어린 예수는 목수였던 아버지 요셉이 일하는 것을 얼마나 유심히 지켜봤을까. 물을 길어오는 어머니 마리아의 정성스러운 손길, 철없이 뛰어다니다 이따금 넘어지기도 했던 자신을 일으켜 세워 줬을 요셉과 마리아의 따스함은 얼마나 컸을까. 인근에는 예수님이 드나들었던 유다인 회당 자리의 성당과 마리아가 매일 우물을 길었다고 전해지는 곳에 세워진 가브리엘 성당이 있다.2010년 ‘주님 탄생 예고 기념 성당’ 바로 옆에서 예수님 시대 집터가 새롭게 발견됐다. 큰 규모는 아니지만, 잘 보존된 주거지가 발굴된 것은 이 지역에서 드문 일이다. 새로 발굴된 주거지에서는 기원전 1000년 솔로몬 시대 때 가옥의 벽면과 지하 3층 깊이 저수시설, 점토 항아리 등이 발견됐다.구약성경에는 거의 등장하지 않는 나자렛 마을이 이미 신약의 예수님 시기 이전부터 촌락을 이루고 있었음을 보여주는 현장이어서 의미가 크다. 이스라엘 문화재청은 이 집터에 국제마리아센터를 건립해 이곳을 방문하는 모든 이에게 예수님 시대와 그 이전의 집터를 생생히 감상하도록 돕고 있다. 예수님 관련 영상 감상실과 전시실, 나자렛 일대가 훤히 내려다보이는 아름다운 경당 등을 갖추고 있다.가장 가난하고 작은 마을 나자렛. 나타나엘이 “나자렛에서 무슨 좋은 것이 나올 수 있겠소?”(요한 1,41)하고 필립보에게 보인 시큰둥한 반응이 그럴 법하게도 다가올 만큼 보잘것없는 이곳에 주님의 천사가 찾아왔다. 그리고 성가정은 파스카 축제 때마다 머나먼 예루살렘을 다녀오는 신심 깊은 가족이었다.“아기는 자라면서 튼튼해지고 지혜가 충만해졌으며, 하느님의 총애를 받았다.”(루카 2,40) cpbc2018.08.07
[시사진단] 예루살렘, 탄식의 도시 (박현도 스테파노, 명지대 중동문제연구소 교수)박현도 (스테파노, 명지대 중동문제연구소 교수) 현지 시각으로 지난 7월 14일 무슬림 합동 예배일인 금요일 오전 7시 예루살렘 성전산에서 이스라엘 국적의 아랍인 3명이 이스라엘 경찰관 2명을 총으로 죽였다. 범인들도 모두 사살됐다. 사건 발생 직후 이스라엘 당국은 성전산 출입을 봉쇄했고, 17년 만에 처음으로 팔레스타인 무슬림들의 예배가 취소됐다. 이스라엘은 한 걸음 더 나아가 안전 조치로 모스크로 들어가는 입구에 금속 탐지기와 보안 카메라를 설치했으나 무슬림들의 강력한 항의 때문에 이내 철수했다. 무슬림들이 보안 장치를 거부한 것은 이스라엘의 감시가 불편할 뿐만 아니라 성전산 소유권이 무슬림에게 있음을 명확히 하기 위해서다.유다인과 무슬림이 서로 소유권을 주장하는 이곳은 7세기 이래 십자군 시대를 제외하고는 무슬림의 땅이었으나 1967년 이른바 6일 전쟁 때 이스라엘이 요르단으로부터 빼앗았다. 그러나 이미 무슬림의 성지가 된 성전산을 강제로 접수하기는 위험이 너무 컸기에 운영은 요르단 정부의 지원을 받는 ‘와크프’라는 공공재단이 하고 이스라엘은 외곽 경비를 맡았다.성전산은 유다인과 무슬림 모두에게 성지다. 유다인의 믿음에 따르면 성전산은 구약성경에 나오는 모리야 산이다. 아브라함이 이사악을 번제물로 바치려고 한 곳으로, 솔로몬이 여기에 성전을 지었다고 한다. 성전이 있던 곳이라 성전산이라고 부른다. 바빌로니아 제국의 침략으로 무너진 성전을 페르시아 고레스 황제의 도움으로 재건하고, 이를 제2성전이라고 불렀다. 기원전 19년 헤로데가 성전을 증축했지만, 70년 로마군이 다시 파괴했다. 성전 붕괴와 함께 유다인은 예루살렘에서 쫓겨나 떠돌이 생활을 시작했고, 135년에는 로마 황제 하드리아누스가 예루살렘의 이름마저 아일리아 카피톨리나로 바꾸었다. 성전산은 로마, 비잔티움의 손을 거쳐 638년 아랍 무슬림이 차지했다.새 주인이 된 무슬림은 폐허가 된 성전산에 2개의 탁월한 종교건축물인 알아크사 모스크와 황금돔 바위 성원을 지었다. 코란과 전승에 따르면 예언자 무함마드는 메카에서 하룻밤 사이에 영험한 말 ‘부락’을 타고 천상 여행을 했다고 한다. 예언자가 간 곳은 코란에서 말하는 바 ‘가장 먼 곳에 있는 성원’인데, 이를 아랍어로 알아크사 모스크라고 한다. 아랍인 3명이 이스라엘 경찰관 2명을 죽인 곳이 바로 이 모스크 입구다. 또 아브라함이 이사악을 바친 곳이라고 믿는 바위를 안에 두고 만든 건축물이 황금돔 바위 성원이다. 무슬림들은 이슬람의 예언자 무함마드가 이 바위를 밟고 천상 여행을 했다고 믿는다. 무슬림들은 성전산을 ‘알하람 앗샤리프’, 즉 ‘고귀한 성소’라고 부른다. 예루살렘은 ‘쿠드스’(성스러운 도시)다.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모두 예루살렘을 향후 수도로 점지해두었기에 성전산은 성지가 아니라 화약고다. 국제 사회가 양측과 머리를 맞대고 솔로몬의 지혜를 짜내기 전에는 피비린내가 계속 진동할 수밖에 없는 구조다. 일부 극렬 유다인들은 무슬림 성지를 부수고 제3의 성전을 세우려고 벼르고 있다. 성전산에서 비무슬림이 기도하는 것을 막는 이유 중 하나다.유일신을 믿는 유다인과 무슬림이 모두 성소라고 부르는 곳은 평온과 사랑이 넘쳐야 하는데, 긴장과 증오와 폭력만이 난무한다. 그리스도교의 성지이기도 한 예루살렘이 더 이상 피로 물들기 전에 국제 사회가 나서야 하지만 묘수가 없다. 평화의 도시여야 할 예루살렘이 탄식의 도시가 된 지 이미 오래다. 차라리 이름 없는 도시로 바꿔 달라고 하느님께 매달리는 것이 가장 빠른 해결책일지도 모른다. 하느님을 믿는 사람들이 지닌 지혜와 인내의 한계를 뼈저리게 느낀다. 평화신문2017.08.23
[이창훈 위원의 예수님 이야기] (74) 성전 파괴 예고와 재난의 시작 (루카 21,5-19)“너희는 인내로써 생명을 얻어라” 루카 21,19 소아시아(터키) 밀레토스 유적지. 성경학자들은 루카복음 21장 5절에서 36절(또는 38절)까지를 ‘종말론적 담화’라고 부릅니다. 세상 종말에 대한 예수님의 말씀이라는 것입니다. 이번 호에서는 성전 파괴 예고와 재난의 시작에 관한 대목을 살펴봅니다.성전 파괴 예고(21,5-6)몇몇 사람이 성전을 두고 “아름다운 돌과 자원 예물로 꾸며졌다”고 이야기하자 예수님께서는 “너희가 보고 있는 저것들이 돌 하나도 다른 돌 위에 남아 있지 않고 다 허물어질 때가 올 것이다” 하고 예루살렘 성전 파괴를 예고하십니다.(21,5-6)이스라엘 역사에서 예루살렘 성전이 파괴된 것은 모두 두 차례입니다. 첫 번째는 기원전 587년(또는 586년) 바빌로니아 제국이 예루살렘을 점령했을 때였습니다. 솔로몬 임금이 지은 예루살렘 성전이 불타버렸고 성전 기물들을 모두 노략질당했습니다. 기원전 538년(또는 537년) 바빌로니아로 유배됐던 이스라엘 사람들이 돌아오고 나서 유다 총독 즈루빠벨이 기원전 515년 파괴된 옛 성전 터에 새 성전을 지었습니다. 이를 제2성전이라고 부릅니다. 이 제2성전을 증ㆍ개축한 사람이 예수님께서 태어나실 당시 유다 지방을 비롯한 이스라엘 전 지역을 다스린 헤로데 대왕(재위 기원전 37~기원전 4)이었습니다. 에돔(이두메아) 출신인 헤로데 대왕은 유다인들의 환심을 사기 위해 기원전 20~19년에 제2성전의 증ㆍ개축 사업을 시작했습니다. 성전 구역만 기존의 두 배가 되는 대대적인 사업이었습니다. 이 성전은 기원후 64년에야 완공됐다고 하니,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서 성전을 정화하시며 사람들을 가르치실 때에도 부분적으로 공사가 진행되고 있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사람들이 예수님께 성전이 46년 걸려 지어졌다고 말한 것(요한 2,20)을 고려하면, 예수님 당시에 헤로데 성전은 이미 웅장한 모습을 드러냈을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이 성전이 완전히 허물어질 때가 올 것이라고 예고하십니다. 실제로 예루살렘 성전은 완공된 지 6년 후인 기원후 70년 티투스 장군이 이끄는 로마 군대에 의해 파괴되고 불에 타 일부 벽만 남습니다. 그 후 당시 로마 황제 베스파시아누스(재위 69~79)의 명령으로 벽마저도 허물어버렸는데 서쪽 벽 일부만 오늘날까지 남아 있습니다. 이를 ‘통곡의 벽’이라고 부르지요. 예수님 당시에는 예루살렘 성전 파괴란 미래의 일이었습니다만, 루카가 복음서를 집필했을 때는 이미 예루살렘 성전 파괴가 역사적 현실이 되고 난 다음이었습니다. 학자들은 루카복음이 집필 연도를 기원후 80년쯤으로 잡고 있으니 말입니다. 이를 고려하면서 그다음 부분을 살펴봅시다. 재난의 시작(21,7-19) 예루살렘 성전이 파괴될 것임을 예고하시는 예수님 말씀에 사람들은 “스승님, 그러면 그런 일이 언제 일어나겠습니까? 또 그 일이 벌어지려고 할 때에 어떤 표징이 나타나겠습니까?” 하고 묻습니다.(21,7) 이 질문은 예루살렘 성전 파괴가 언제 일어날 것이며 또 그때 어떤 표징이 나타날 것인가 하는 질문입니다. 하지만 예루살렘 성전이 지니는 의미를 생각할 때 예루살렘 성전 파괴는 유다인들에게는 파국, 곧 종말이나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따라서 이 물음은 종말의 때가 언제 올 것이냐 하는 질문으로 볼 수 있습니다. 이 질문에 예수님께서는 먼저 “너희는 속는 일이 없도록 조심하여라”고 말씀하시면서 “많은 사람이 내 이름으로 와서 ‘내가 그리스도다’ 또 ‘때가 가까웠다’ 하고 말할 것이지만 그들 뒤를 따라가지 마라”고 당부하십니다. 자신을 그리스도 곧 메시아라고 칭하는 거짓 예언자들이 나타나 종말이 가까웠다고 현혹하겠지만 속아 넘어가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또 “전쟁과 반란이 일어났다는 소문을 듣더라도 무서워하지 마라”고 하십니다.(21,8-9) 전쟁과 반란이 사회 혼란을 가져다주지만 그 자체가 종말의 표징은 아닌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어서 말씀하십니다. “민족과 민족이 맞서 일어나고 나라와 나라가 맞서 일어나며 큰 지진이 발생하고 곳곳에 기근과 전염병이 생길 것이다. 그리고 하늘에서는 무서운 일들과 큰 표징들이 일어날 것이다.”(21,10-11) 민족 간 또는 나라 간 전쟁, 큰 지진과 기근, 전염병, 하늘의 표징들은 묵시문학에서 종말과 관련해 사용하는 표현들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종말을 알리는 이런 일들이 일어나기에 앞서 “사람들이 너희에게 손을 대어 박해할 것”이라면서 그때에 제자들이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말씀하십니다. 박해는 제자들에게 예수님과 복음을 “증언할 기회”가 될 것입니다. 그렇지만 제자들은 변론할 말을 미리부터 준비해서는 안 됩니다. “어떠한 적대자도 맞서거나 반박할 수 없는 언변과 지혜를 내가 너희에게 주겠다”고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21,12-15) 제자들은 또 부모와 형제와 친척과 친구들에 의해 넘겨져 더러는 죽기까지 할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 때문에 모든 사람에게 미움을 받을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너희는 머리카락 하나도 잃지 않을 것”이라시면서 “너희는 인내로써 생명을 얻어라” 하고 당부하십니다.(21,16-19)[생각해 봅시다]예루살렘 성전 파괴 예고와 재난의 시작에 관한 예수님 말씀을 정리하면서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 성전 파괴와 함께 그리스도를 자처하는 거짓 메시아들이 나타나 종말이 왔다고 사람들을 현혹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실제로 기원후 1세기에는 이스라엘 땅에서 그런 이들이 있었습니다. 사도행전에서도 그런 인물을 우리는 셋이나 확인할 수 있습니다. 테우다스와 유다 그리고 자객 4000명을 이끌고 광야로 나간 이집트인이 그들입니다.(사도 5,26-37; 21,38)또 전쟁과 반란이 일어났다는 소문도 들리겠지만, 그 소문을 두려워해서는 안 된다고 말씀하십니다. 전쟁과 반란은 나라를 분열시키고 혼란에 빠뜨립니다. 역사 안에서는 늘 전쟁과 반란이 있었고 그로 인한 정치 사회적 혼란이 따랐습니다. 종말이 오기 전에 겪어야 할 일이지만 그것이 종말이 왔다는 표징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한 가지 더 주목해야 할 것은 종말이 오기 전에 그리스도의 제자들이 먼저 박해를 받으리라는 것입니다. 그때에 부모와 형제 친척과 친구에게서도 버림을 받고 더러는 죽기까지 할 것입니다. 하지만 제자들에게 박해는 또한 그리스도를 증언하는 기회가 될 것입니다. 그렇지만 자기 힘으로 어떻게 하려고 미리 나서지 말아야 합니다. 주님께서 “어떤 적대자도 맞서거나 반박할 수 없는 언변과 지혜를 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박해를 당할 때에, 심지어 죽임을 당할 때라도 그리스도의 제자들에게 요구되는 것은 ‘인내’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생명’을 얻을 것입니다.루카 복음사가가 복음서를 썼을 때는 이미 예루살렘 성전이 파괴된 후였고, 로마 제국 곳곳에서 그리스도인들에 대한 박해가 있었습니다. 이 시기에 루카는 비 유다계 그리스도인들로 이뤄진 자기 공동체 신자들에게 사회적 혼란과 박해의 어려움을 어떻게 극복해야 하는지를 예수님 말씀을 통해 제시하려고 했다는 것이 성경학자들의 일치된 해석입니다. 백영민2018.07.24
[생활 속의 복음] 연중 제17주일 (마태 13,44-52) 하늘 나라 향하는 마음의 눈 오늘은 연중 제17주일입니다. 성 요한 바오로 2세 교황님께서는 “신앙과 이성은 인간 정신이 진리를 바라보려고 날아오르는 두 날개와 같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인간의 마음 속에 진리, 곧 당신 자신을 알고자 하는 열망을 심어 놓으셨습니다”라고 가르쳐주셨습니다.(「신앙과 이성」, 1항) 그러므로 우리는 주님을 찾고 만날 수 있도록 부단한 노력을 기울여야 합니다.1. 듣는 마음(1열왕 3,9)토마스 아 켐피스는 「준주성범」에서 “주님께 대한 뜨거운 마음이 없으면 어디에 있다 해도 그다지 안전하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주님 안에 머무르지 않으면 변할 수는 있어도 나아질 수는 없을 것입니다”라고 설명하면서, “최상선(最上善)”을 얻기 위한 길을 제시해 줍니다.오늘 제1독서에서 솔로몬은 아버지 다윗 왕으로부터 “주 네 하느님의 길을 걸으면, 네가 무엇을 하든지 어디로 가든지 성공할 것이다”(1열왕 2,3 참조)라는 축복과 함께 왕위를 이어받았습니다. 하지만 그가 왕권을 공고히 하기에는 참으로 주변 상황이 만만치 않았습니다. 이런 와중에 솔로몬은 꿈에 나타나신 하느님께 “듣는 마음, 곧 분별력”(1열왕 3,9-11 참조)을 청했습니다. 이런 그의 마음을 하느님께서는 미쁘게 보시고 청하지 않은 축복도 허락하셨습니다.(1열왕 3,12-14 참조)2. 하느님을 사랑하는 이들(로마 8,28)얼마 전에 페루 리마에서 끝난 라틴아메리카 한국가톨릭선교사회(AMICAL) 연수회에 함께 했던 한 참석자는 “이번 만남을 통해 주님의 은총으로 각자가 처한 환경에 따른 어려움을 극복할 힘을 얻었습니다”라고 하면서 “예수님께서 아파하시는 그곳(선교지)으로 돌아갈 힘을 찾게 돼서 참으로 기쁩니다”라는 소감을 피력했다고 합니다. 오늘 제2독서에서 사도 바오로께서는 “하느님을 사랑하는 이들, 그분의 계획에 따라 부르심을 받은 이들에게는 모든 것이 함께 작용하여 선을 이룬다”(로마 8,28 참조)는 확신을 선포합니다. 결국 부르심을 받은 이들의 마음에는 하느님의 사랑이 부어졌기 때문에(로마 5,5 참조), 그분께서 원하신 뜻을 향하여 기꺼이 자신을 투신(投身)할 수 있는 용기와 힘을 낼 수 있게 됩니다.3. 보물과 진주(마태 13,44-46 참조)알폰소 마리아 데 리구오리 성인께서는 “하느님에 관한 것이 아니거나, 하느님을 위해 포기해야 하는 어떤 것에 대한 사랑이 우리 마음 안에 일어날 때”에는, 아주 단호하게 “사라져라! 여기에는 네가 있을 자리가 없다”는 태도를 취하도록 가르치셨습니다. 또한 “하느님을 기쁘게 해드릴 수만 있다면, 모든 것을 잃어버리게 해주십시오”라는 기도를 하도록 권고하셨습니다.오늘 복음을 통해 연상되는 이미지는 ‘감출 수 없는 기쁨’입니다. 남의 밭에서 일하던 중에 숨겨진 보물을 발견한 사람의 머릿속을 순식간에 채운 ‘독점적인(?) 기쁨과 밭의 구매 계획’은 너무나도 아슬아슬한 긴장감을 줍니다. 또한 오직 좋은 진주를 찾아 세상 방방곡곡을 돌아다녔던 상인이 고대하던 진품(珍品)을 발견했을 때 느낀 ‘천하를 얻은 듯한 감격과 진주 구매 계획’은 한 치의 의심할 여지도 없는 결연함을 보여줍니다. 과연 우리에게 하늘 나라는 이런 기쁨일까요?4. 하느님을 가진 사람성 아우구스티노께서는 “하느님을 가진 사람은 모든 것을 가진 사람이고, 하느님을 가지지 못한 사람은 아무것도 가지지 못한 사람입니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교형자매 여러분, 하느님께서는 우리들에게 하늘 나라로 향하는 길을 잘 분별하고 깊이 사랑하라고 초대하십니다. 그리하여 우리들이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기쁨으로 그 길을 따를 수 있도록 이끄십니다. 이제 우리에게는 그 길을 볼 수 있는 “마음의 눈(oculi mentis)”이 필요합니다.(「신앙과 이성」, 22항 참조) 부디 여러분 모두가 하늘 나라의 충만한 기쁨을 늘 고대하시길 바랍니다. 아멘. 서울대교구 화곡본동본당 주임 문채현2017.07.26
[성경 속 도시] (70) 게제르솔로몬이 결혼 지참금으로 받은 땅 게제르 성문에는 방이 여섯 개 있었다. 그 방 하나에 있던 돌 욕조. 기원전 10세기. 출처=「성경 역사 지도」 도시가 형성하고 발전하는 주요 요소 중 하나는 교통이 얼마나 편리한지에 달려 있다. 게제르는 유다 평지의 북쪽 끝 부분 고지대에 있지만 주변이 탁 트여 사방의 전 지역을 내려다볼 수 있다. 이러한 전략적 중요성과 더불어 주변에는 아주 비옥한 농지가 풍부했고 풍성한 샘물도 있었다. 이처럼 게제르는 해안도로를 지나던 교통요충지로서 해안 평야 지대에서 유다 산지로 올라가는 중요한 통로였다. 기원전 2000년쯤부터 이 도시는 항상 높은 성벽과 튼튼한 성문으로 요새화돼 이집트와 아람, 그리고 메소포타미아의 주요 도시들을 연결하는 요충지로 발전했다. 게제르를 장악하는 것은 고대 국제무역로로 통제해 엄청난 경제적 이익을 가져올 수 있었기 때문에 주변의 여러 강대국도 모두 탐내던 도시였다. 성경에서도 게제르는 자주 언급돼 나온다. 게제르의 호람 왕은 여호수아의 정복 때 라키스 왕을 도우러 나왔다가 패배했다는 기록이 있다. “그때에 게제르 임금 호람이 라키스를 도우러 올라왔지만, 여호수아는 그와 그의 백성도 쳐서 생존자를 하나도 남기지 않았다”(여호 10,33). 기원전 13세기 말 게제르의 인구는 줄어들었고 도시는 축소될 수밖에 없었다.여호수아는 게제르를 정복하고 에프라임 지파에 속한 레위인 크핫의 나머지 자손들에게 나눠주었다. “크핫의 나머지 자손들, 곧 레위인 크핫 자손의 씨족들은 제비를 뽑아 에프라임 지파에서 성읍들을 받았다. 그래서 그들에게 에프라임 산악 지방에 있는 살인자의 도피 성읍 스켐과 거기에 딸린 목초지, 게제르와 거기에 딸린 목초지…”(여호 21,20-21). 이곳은 레위 사람들의 도시 가운데 하나로 언급돼 있기는 하지만, 실제적으로 이스라엘 사람들만 정착했다고 보기는 어렵다. 게제르는 필리스티아인과 이스라엘 사이의 완충 지역이었던 것으로 보이는데, 실제로는 최전방 지역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게제르가 성경의 사건에서 주목을 받게 된 것은 무엇보다 솔로몬 시대였다. 솔로몬은 게제르의 지리적 입지를 높이 평가했던 것으로 보인다. 해안도로와 북쪽으로 도로를 장악하기 위해 솔로몬 임금이 주님의 집과 자기 궁전과 밀로 궁을 짓고, 예루살렘 성벽과 하초르와 므기또와 게제르를 세우려고 백성들에게 부역을 시켰다(1열왕 9,15). 이집트의 왕 파라오는 게제르를 점령해서 성읍에 있는 가나안 사람을 죽이고 솔로몬에게 아내로 준 자신의 딸에게 이 도시를 선물했다. “이집트 임금 파라오가 올라와 게제르를 점령할 때, 그 성읍에 불을 지르고 그곳에 살던 가나안 사람들을 살해한 일이 있었다. 그는 솔로몬의 아내가 된 자기 딸에게 그 성읍을 지참금으로 주었는데…”(1열왕 9,16).결국 게제르는 이집트의 속국이 돼 고대 기록에는 게제르 왕들이 이집트 파라오에게 충성을 맹세했다고 전하고 있다. 이집트는 20년 동안 게제르의 왕을 4번이나 바꿨다.이곳은 고대 주요 문서에서도 빠짐없이 등장한다. 이는 게제르의 중요성을 말해주는 객관적 자료다. 고고학 발굴을 통해 현재 예루살렘에서 남서쪽으로 30㎞ 떨어져 있는 텔 엘-제제르(Tell el-Jezer)로 밝혀졌다. 발전을 거듭했던 게제르는 기원전 732년 아시리아에 의해 파괴된 후 다시는 사람들이 거주했던 흔적을 찾아볼 수 없다. 한 도시의 흥망성쇄를 보면 겸허한 마음이 절로 생긴다. 허영엽 신부(서울대교구 홍보국장) 평화신문2015.12.01
[이창훈 위원의 예수님 이야기] (68) 예루살렘 입성(루카 19,28-40)수난과 죽음 향해 걸어가신 평화의 임금 예수님께서는 벳파게에서부터 나귀를 타고 올리브 산을 내려와 예루살렘에 입성하셨다. 사진은 해마다 주님 수난 성지 주일에 열리는 예루살렘 올리브 산의 성지 주일 행렬. 【CNS 자료사진】 루카복음에서 예수님의 활동 기록은 크게 셋으로 나눠 살펴볼 수 있습니다. 갈릴래아 활동기(4,14─9,50), 예루살렘 상경기(9,51─19,28), 예루살렘 활동기(19,29─24,53)입니다. 예루살렘 활동기의 첫 장면이 예루살렘 입성입니다. 예리코에서 사람들에게 미나의 비유를 말씀하신 후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으로 향하십니다. 예리코에서 예루살렘으로 가는 길은 오르막길입니다. 두 도시의 해발 고도 차는 거의 1000m나 됩니다. 그러니 “오르는 길”입니다. “앞장서서 예루살렘으로 오르는 길을 걸어가셨다”(19,28)는 표현에는 결연함 혹은 비장함이 묻어납니다. 예수님 일행은 드디어 올리브산 근처 벳파게와 베타니아 가까이에 이르렀습니다. 베타니아는 요한이 세례를 주던 곳, 그래서 예수님께서 세례를 받으신 곳으로 추정되는 요르단 강 동쪽 베타니아가 아니라 예루살렘에서 동쪽으로 3㎞쯤 떨어진 곳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곳에서 제자 두 사람을 보내며 “맞은 편 동네”에 가서 “아직 아무도 탄 적이 없는 어린 나귀 한 마리를” 풀어 끌고 오라고 분부하십니다. 누가 왜 나귀를 푸느냐고 묻거든 “주님께서 필요하시답니다” 하고 대답하라고 챙겨주십니다. 제자들이 가서 보니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대로였고, 또 예수님께서 대답하라는 대로 대답하고 나귀를 끌고 옵니다. 제자들은 나귀를 예수님께 끌고 와서 그 위에 자기들의 웃옷을 걸치고 예수님을 거기에 올라타시게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어린 나귀를 타고 올리브산을 내려오시고 그들은 예수님께서 가시는 길 앞에 자기들의 겉옷을 깔았습니다. 예수님께서 나귀를 타시는 것은 구약의 다윗 왕이 아들 솔로몬을 노새에 태워 데려와 임금으로 삼도록 한 것을 연상시킵니다.(1열왕 1,33-39) 또 길 위에 겉옷을 깔아 놓는 것은 예언자 엘리사 시대에 예후가 임금이 되자 신하들은 겉옷을 벗어 예후의 발밑 층계에 깔고 “예후께서 임금이 되셨다!” 하고 외친 것을 연상하게 합니다.(2열왕 9,13) 한마디로 나귀를 타신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은 바로 임금으로서 당신의 거룩한 도움 예루살렘에 입성하는 것을 나타낸다고 할 수 있습니다. 실제로 예수님께서 올리브산 내리막길에 가까이 이르시자 제자들은 예수님을 임금님으로 환호합니다. 루카 복음사가는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제자들의 무리가 다 자기들이 본 모든 기적 때문에 기뻐하며 큰 소리로 하느님을 찬미하기 시작하였다. 그들은 이렇게 말하였다. ‘주님의 이름으로 오시는 분, 임금님은 복되시어라. 하늘에 평화 지극히 높은 곳에 영광!’”(19,37-38)이 대목에서 특별히 주목할 것이 있습니다. 제자들이 기뻐하며 하느님을 찬미하며 예수님을 임금님으로 환호하는 이유입니다. 루카 복음사가는 “자기들이 본 모든 기적 때문”이라고 설명합니다. 제자들이 본 모든 기적은 무엇일까요? 예수님께서 하신 일들 곧 병자를 고쳐주고, 눈먼 이를 보게 하고, 악령 들린 이를 풀어주고, 가난하고 소외된 이들에게 포용하며 하느님 나라의 기쁜 소식을 선포하는 모든 것이 바로 제자들이 본 기적이었습니다. 루카 복음서에는 이를 요약해서 전하는 대목이 있는데 예수님께서 나자렛 회당에서 인용하신 이사야 예언서의 말씀이 그것입니다. “가난한 이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고 잡혀간 이들에게 해방을 선포하며 눈먼 이들을 다시 보게 하고 억압받는 이들을 해방시켜 내보내며, 주님의 은혜로운 해를 선포하게 하셨다.”(4,18-19)제자들은 예수님을 임금님으로 환호하면서 “하늘에 평화 지극히 높은 곳에 영광”이라고 노래하는데, 이는 예수님의 탄생 때에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느님께 영광 땅에서는 그분 마음에 드는 사람들에게 평화!”(2,14) 하고 하늘의 군대가 찬미하는 노래를 연상하게 합니다. 이를 통해 우리는 예수님께서 이스라엘의 임금으로 오셨음을 거듭 확인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바리사이 몇 사람이 예수님께 “스승님” 하고 부르면서 제자들을 꾸짖어달라고 청합니다. 너무 소란스러워서 그랬을까요? 아니면 제자들이 예수님을 임금님이라고 부르면서 환호하는 것이 못마땅해서일까요? 후자일 가능성이 더욱 클 것입니다. 그 바리사이들은 예수님을 “스승”으로서는 인정하면서도 이스라엘의 임금으로서는 인정하고 싶지 않았을 것입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예수님께서는 임금으로 오셨다는 사실입니다. 이 사실을 아무도 부인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이 임금이심을 부인하고 거부하여 예수님을 배척한다면 그때에는 “돌들이 소리를 지를 것”입니다. 돌들이 소리를 지른다는 말은 “벽에서 돌이 울부짖으면 골조에서 들보가 대답하리라”는 구약성경 하바쿡서 2장 11절의 말씀을 연상하게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이제 거룩한 도시 예루살렘에 임금으로 입성하십니다. 그러나 세상의 임금처럼 권세를 휘두르는 권력자 임금이 아니라 평화의 임금님으로 제자들의 환호 속에 소박하게 나귀를 타고 입성하신 것입니다. [생각해 봅시다]루카복음에서는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으로 가시기로 마음을 굳히시고 갈릴래아를 떠난 예루살렘 상경기가 예루살렘 입성으로 일단락됩니다. 그러나 그 여정은 단순히 예루살렘을 향한 여행이 아니라 갈릴래아에서 시작한 하느님 나라의 기쁜 소식을 선포하는 여정이었습니다. 그 여정이 예루살렘 입성으로 새로운 국면을 맞게 됩니다. 이에 대해서는 다음 호부터 살펴볼 것입니다. 그런데 잊지 말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하느님 나라의 복음을 선포하시면서 가시는 목적지 예루살렘은 또한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이 기다리는 곳이라는 사실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미 갈릴래아에서 두 차례, 그리고 갈릴래아를 떠나 예루살렘으로 향하는 도중에 한 차례 등 모두 세 차례에 걸쳐 당신의 수난과 죽음을 예고하셨습니다. 물론 당신의 부활까지도…. 하지만 제자들은 그 말씀이 무슨 뜻인지 몰랐습니다. 그저 자기들이 본 모든 기적 때문에 기뻐하며 예수님을 임금님으로 환호합니다. 분명한 것은 제자들은 예수님을 평화의 임금으로 환호했다는 사실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어떤 임금으로 환호하며 따르는지요? 미사 때마다 성체를 모시면서 어떤 임금으로 고백하며 맞아들이는지요?[알아보기]벳파게와 베타니아 : 베타니아는 올리브산 동쪽 산비탈에 비탈에 있습니다. ‘가난한 이의 집’이라는 베타니아는 예수님께서 친구처럼 대하시며 가깝게 지내신 라자로와 그의 두 여동생 마르타와 마리아가 사는 곳이었습니다. 오늘날 라자로의 무덤을 비롯해 가톨릭과 정교회의 기념 성당이 있지만 아랍인 마을이고 이스라엘이 친 분리 장벽으로 일반 순례객들이 순례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벳파게는 ‘익지 않은 무화과나무의 집’이라는 뜻으로, 베타니아와 예루살렘 사이에 있는 마을이지만 정확한 위치는 확실하지 않습니다. 학자들은 예루살렘에서 안식일에도 걸어 다닐 수 있는 거리(900m)에 있었으리라고 추측합니다. 벳파게로 추정되는 곳에는 프란치스코 수도회가 관리하는 성당이 있습니다. 해마다 주님 수난 성지 주일이면 이곳에서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 기념 행렬을 시작해 올리브 산을 내려오지요. 백영민2018.06.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