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활 속의 복음] 연중 제17주일 (마태 13,44-52)](//cpbc.co.kr/CMS/newspaper/2017/07/rc/689973_1.1_titleImage_1.jpg)
[생활 속의 복음] 연중 제17주일 (마태 13,44-52) 하늘 나라 향하는 마음의 눈 오늘은 연중 제17주일입니다. 성 요한 바오로 2세 교황님께서는 “신앙과 이성은 인간 정신이 진리를 바라보려고 날아오르는 두 날개와 같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인간의 마음 속에 진리, 곧 당신 자신을 알고자 하는 열망을 심어 놓으셨습니다”라고 가르쳐주셨습니다.(「신앙과 이성」, 1항) 그러므로 우리는 주님을 찾고 만날 수 있도록 부단한 노력을 기울여야 합니다.1. 듣는 마음(1열왕 3,9)토마스 아 켐피스는 「준주성범」에서 “주님께 대한 뜨거운 마음이 없으면 어디에 있다 해도 그다지 안전하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주님 안에 머무르지 않으면 변할 수는 있어도 나아질 수는 없을 것입니다”라고 설명하면서, “최상선(最上善)”을 얻기 위한 길을 제시해 줍니다.오늘 제1독서에서 솔로몬은 아버지 다윗 왕으로부터 “주 네 하느님의 길을 걸으면, 네가 무엇을 하든지 어디로 가든지 성공할 것이다”(1열왕 2,3 참조)라는 축복과 함께 왕위를 이어받았습니다. 하지만 그가 왕권을 공고히 하기에는 참으로 주변 상황이 만만치 않았습니다. 이런 와중에 솔로몬은 꿈에 나타나신 하느님께 “듣는 마음, 곧 분별력”(1열왕 3,9-11 참조)을 청했습니다. 이런 그의 마음을 하느님께서는 미쁘게 보시고 청하지 않은 축복도 허락하셨습니다.(1열왕 3,12-14 참조)2. 하느님을 사랑하는 이들(로마 8,28)얼마 전에 페루 리마에서 끝난 라틴아메리카 한국가톨릭선교사회(AMICAL) 연수회에 함께 했던 한 참석자는 “이번 만남을 통해 주님의 은총으로 각자가 처한 환경에 따른 어려움을 극복할 힘을 얻었습니다”라고 하면서 “예수님께서 아파하시는 그곳(선교지)으로 돌아갈 힘을 찾게 돼서 참으로 기쁩니다”라는 소감을 피력했다고 합니다. 오늘 제2독서에서 사도 바오로께서는 “하느님을 사랑하는 이들, 그분의 계획에 따라 부르심을 받은 이들에게는 모든 것이 함께 작용하여 선을 이룬다”(로마 8,28 참조)는 확신을 선포합니다. 결국 부르심을 받은 이들의 마음에는 하느님의 사랑이 부어졌기 때문에(로마 5,5 참조), 그분께서 원하신 뜻을 향하여 기꺼이 자신을 투신(投身)할 수 있는 용기와 힘을 낼 수 있게 됩니다.3. 보물과 진주(마태 13,44-46 참조)알폰소 마리아 데 리구오리 성인께서는 “하느님에 관한 것이 아니거나, 하느님을 위해 포기해야 하는 어떤 것에 대한 사랑이 우리 마음 안에 일어날 때”에는, 아주 단호하게 “사라져라! 여기에는 네가 있을 자리가 없다”는 태도를 취하도록 가르치셨습니다. 또한 “하느님을 기쁘게 해드릴 수만 있다면, 모든 것을 잃어버리게 해주십시오”라는 기도를 하도록 권고하셨습니다.오늘 복음을 통해 연상되는 이미지는 ‘감출 수 없는 기쁨’입니다. 남의 밭에서 일하던 중에 숨겨진 보물을 발견한 사람의 머릿속을 순식간에 채운 ‘독점적인(?) 기쁨과 밭의 구매 계획’은 너무나도 아슬아슬한 긴장감을 줍니다. 또한 오직 좋은 진주를 찾아 세상 방방곡곡을 돌아다녔던 상인이 고대하던 진품(珍品)을 발견했을 때 느낀 ‘천하를 얻은 듯한 감격과 진주 구매 계획’은 한 치의 의심할 여지도 없는 결연함을 보여줍니다. 과연 우리에게 하늘 나라는 이런 기쁨일까요?4. 하느님을 가진 사람성 아우구스티노께서는 “하느님을 가진 사람은 모든 것을 가진 사람이고, 하느님을 가지지 못한 사람은 아무것도 가지지 못한 사람입니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교형자매 여러분, 하느님께서는 우리들에게 하늘 나라로 향하는 길을 잘 분별하고 깊이 사랑하라고 초대하십니다. 그리하여 우리들이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기쁨으로 그 길을 따를 수 있도록 이끄십니다. 이제 우리에게는 그 길을 볼 수 있는 “마음의 눈(oculi mentis)”이 필요합니다.(「신앙과 이성」, 22항 참조) 부디 여러분 모두가 하늘 나라의 충만한 기쁨을 늘 고대하시길 바랍니다. 아멘. 서울대교구 화곡본동본당 주임 문채현2017.07.26
![[성경 속 도시] (70) 게제르](//cpbc.co.kr/CMS/newspaper/2015/12/rc/606750_1.0_titleImage_1.jpg)
[성경 속 도시] (70) 게제르솔로몬이 결혼 지참금으로 받은 땅 게제르 성문에는 방이 여섯 개 있었다. 그 방 하나에 있던 돌 욕조. 기원전 10세기. 출처=「성경 역사 지도」 도시가 형성하고 발전하는 주요 요소 중 하나는 교통이 얼마나 편리한지에 달려 있다. 게제르는 유다 평지의 북쪽 끝 부분 고지대에 있지만 주변이 탁 트여 사방의 전 지역을 내려다볼 수 있다. 이러한 전략적 중요성과 더불어 주변에는 아주 비옥한 농지가 풍부했고 풍성한 샘물도 있었다. 이처럼 게제르는 해안도로를 지나던 교통요충지로서 해안 평야 지대에서 유다 산지로 올라가는 중요한 통로였다. 기원전 2000년쯤부터 이 도시는 항상 높은 성벽과 튼튼한 성문으로 요새화돼 이집트와 아람, 그리고 메소포타미아의 주요 도시들을 연결하는 요충지로 발전했다. 게제르를 장악하는 것은 고대 국제무역로로 통제해 엄청난 경제적 이익을 가져올 수 있었기 때문에 주변의 여러 강대국도 모두 탐내던 도시였다. 성경에서도 게제르는 자주 언급돼 나온다. 게제르의 호람 왕은 여호수아의 정복 때 라키스 왕을 도우러 나왔다가 패배했다는 기록이 있다. “그때에 게제르 임금 호람이 라키스를 도우러 올라왔지만, 여호수아는 그와 그의 백성도 쳐서 생존자를 하나도 남기지 않았다”(여호 10,33). 기원전 13세기 말 게제르의 인구는 줄어들었고 도시는 축소될 수밖에 없었다.여호수아는 게제르를 정복하고 에프라임 지파에 속한 레위인 크핫의 나머지 자손들에게 나눠주었다. “크핫의 나머지 자손들, 곧 레위인 크핫 자손의 씨족들은 제비를 뽑아 에프라임 지파에서 성읍들을 받았다. 그래서 그들에게 에프라임 산악 지방에 있는 살인자의 도피 성읍 스켐과 거기에 딸린 목초지, 게제르와 거기에 딸린 목초지…”(여호 21,20-21). 이곳은 레위 사람들의 도시 가운데 하나로 언급돼 있기는 하지만, 실제적으로 이스라엘 사람들만 정착했다고 보기는 어렵다. 게제르는 필리스티아인과 이스라엘 사이의 완충 지역이었던 것으로 보이는데, 실제로는 최전방 지역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게제르가 성경의 사건에서 주목을 받게 된 것은 무엇보다 솔로몬 시대였다. 솔로몬은 게제르의 지리적 입지를 높이 평가했던 것으로 보인다. 해안도로와 북쪽으로 도로를 장악하기 위해 솔로몬 임금이 주님의 집과 자기 궁전과 밀로 궁을 짓고, 예루살렘 성벽과 하초르와 므기또와 게제르를 세우려고 백성들에게 부역을 시켰다(1열왕 9,15). 이집트의 왕 파라오는 게제르를 점령해서 성읍에 있는 가나안 사람을 죽이고 솔로몬에게 아내로 준 자신의 딸에게 이 도시를 선물했다. “이집트 임금 파라오가 올라와 게제르를 점령할 때, 그 성읍에 불을 지르고 그곳에 살던 가나안 사람들을 살해한 일이 있었다. 그는 솔로몬의 아내가 된 자기 딸에게 그 성읍을 지참금으로 주었는데…”(1열왕 9,16).결국 게제르는 이집트의 속국이 돼 고대 기록에는 게제르 왕들이 이집트 파라오에게 충성을 맹세했다고 전하고 있다. 이집트는 20년 동안 게제르의 왕을 4번이나 바꿨다.이곳은 고대 주요 문서에서도 빠짐없이 등장한다. 이는 게제르의 중요성을 말해주는 객관적 자료다. 고고학 발굴을 통해 현재 예루살렘에서 남서쪽으로 30㎞ 떨어져 있는 텔 엘-제제르(Tell el-Jezer)로 밝혀졌다. 발전을 거듭했던 게제르는 기원전 732년 아시리아에 의해 파괴된 후 다시는 사람들이 거주했던 흔적을 찾아볼 수 없다. 한 도시의 흥망성쇄를 보면 겸허한 마음이 절로 생긴다. 허영엽 신부(서울대교구 홍보국장) 평화신문2015.12.01
![[이창훈 위원의 예수님 이야기] (68) 예루살렘 입성(루카 19,28-40)](//cpbc.co.kr/CMS/newspaper/2018/06/rc/723761_1.0_titleImage_1.jpg)
[이창훈 위원의 예수님 이야기] (68) 예루살렘 입성(루카 19,28-40)수난과 죽음 향해 걸어가신 평화의 임금 예수님께서는 벳파게에서부터 나귀를 타고 올리브 산을 내려와 예루살렘에 입성하셨다. 사진은 해마다 주님 수난 성지 주일에 열리는 예루살렘 올리브 산의 성지 주일 행렬. 【CNS 자료사진】 루카복음에서 예수님의 활동 기록은 크게 셋으로 나눠 살펴볼 수 있습니다. 갈릴래아 활동기(4,14─9,50), 예루살렘 상경기(9,51─19,28), 예루살렘 활동기(19,29─24,53)입니다. 예루살렘 활동기의 첫 장면이 예루살렘 입성입니다. 예리코에서 사람들에게 미나의 비유를 말씀하신 후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으로 향하십니다. 예리코에서 예루살렘으로 가는 길은 오르막길입니다. 두 도시의 해발 고도 차는 거의 1000m나 됩니다. 그러니 “오르는 길”입니다. “앞장서서 예루살렘으로 오르는 길을 걸어가셨다”(19,28)는 표현에는 결연함 혹은 비장함이 묻어납니다. 예수님 일행은 드디어 올리브산 근처 벳파게와 베타니아 가까이에 이르렀습니다. 베타니아는 요한이 세례를 주던 곳, 그래서 예수님께서 세례를 받으신 곳으로 추정되는 요르단 강 동쪽 베타니아가 아니라 예루살렘에서 동쪽으로 3㎞쯤 떨어진 곳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곳에서 제자 두 사람을 보내며 “맞은 편 동네”에 가서 “아직 아무도 탄 적이 없는 어린 나귀 한 마리를” 풀어 끌고 오라고 분부하십니다. 누가 왜 나귀를 푸느냐고 묻거든 “주님께서 필요하시답니다” 하고 대답하라고 챙겨주십니다. 제자들이 가서 보니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대로였고, 또 예수님께서 대답하라는 대로 대답하고 나귀를 끌고 옵니다. 제자들은 나귀를 예수님께 끌고 와서 그 위에 자기들의 웃옷을 걸치고 예수님을 거기에 올라타시게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어린 나귀를 타고 올리브산을 내려오시고 그들은 예수님께서 가시는 길 앞에 자기들의 겉옷을 깔았습니다. 예수님께서 나귀를 타시는 것은 구약의 다윗 왕이 아들 솔로몬을 노새에 태워 데려와 임금으로 삼도록 한 것을 연상시킵니다.(1열왕 1,33-39) 또 길 위에 겉옷을 깔아 놓는 것은 예언자 엘리사 시대에 예후가 임금이 되자 신하들은 겉옷을 벗어 예후의 발밑 층계에 깔고 “예후께서 임금이 되셨다!” 하고 외친 것을 연상하게 합니다.(2열왕 9,13) 한마디로 나귀를 타신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은 바로 임금으로서 당신의 거룩한 도움 예루살렘에 입성하는 것을 나타낸다고 할 수 있습니다. 실제로 예수님께서 올리브산 내리막길에 가까이 이르시자 제자들은 예수님을 임금님으로 환호합니다. 루카 복음사가는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제자들의 무리가 다 자기들이 본 모든 기적 때문에 기뻐하며 큰 소리로 하느님을 찬미하기 시작하였다. 그들은 이렇게 말하였다. ‘주님의 이름으로 오시는 분, 임금님은 복되시어라. 하늘에 평화 지극히 높은 곳에 영광!’”(19,37-38)이 대목에서 특별히 주목할 것이 있습니다. 제자들이 기뻐하며 하느님을 찬미하며 예수님을 임금님으로 환호하는 이유입니다. 루카 복음사가는 “자기들이 본 모든 기적 때문”이라고 설명합니다. 제자들이 본 모든 기적은 무엇일까요? 예수님께서 하신 일들 곧 병자를 고쳐주고, 눈먼 이를 보게 하고, 악령 들린 이를 풀어주고, 가난하고 소외된 이들에게 포용하며 하느님 나라의 기쁜 소식을 선포하는 모든 것이 바로 제자들이 본 기적이었습니다. 루카 복음서에는 이를 요약해서 전하는 대목이 있는데 예수님께서 나자렛 회당에서 인용하신 이사야 예언서의 말씀이 그것입니다. “가난한 이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고 잡혀간 이들에게 해방을 선포하며 눈먼 이들을 다시 보게 하고 억압받는 이들을 해방시켜 내보내며, 주님의 은혜로운 해를 선포하게 하셨다.”(4,18-19)제자들은 예수님을 임금님으로 환호하면서 “하늘에 평화 지극히 높은 곳에 영광”이라고 노래하는데, 이는 예수님의 탄생 때에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느님께 영광 땅에서는 그분 마음에 드는 사람들에게 평화!”(2,14) 하고 하늘의 군대가 찬미하는 노래를 연상하게 합니다. 이를 통해 우리는 예수님께서 이스라엘의 임금으로 오셨음을 거듭 확인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바리사이 몇 사람이 예수님께 “스승님” 하고 부르면서 제자들을 꾸짖어달라고 청합니다. 너무 소란스러워서 그랬을까요? 아니면 제자들이 예수님을 임금님이라고 부르면서 환호하는 것이 못마땅해서일까요? 후자일 가능성이 더욱 클 것입니다. 그 바리사이들은 예수님을 “스승”으로서는 인정하면서도 이스라엘의 임금으로서는 인정하고 싶지 않았을 것입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예수님께서는 임금으로 오셨다는 사실입니다. 이 사실을 아무도 부인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이 임금이심을 부인하고 거부하여 예수님을 배척한다면 그때에는 “돌들이 소리를 지를 것”입니다. 돌들이 소리를 지른다는 말은 “벽에서 돌이 울부짖으면 골조에서 들보가 대답하리라”는 구약성경 하바쿡서 2장 11절의 말씀을 연상하게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이제 거룩한 도시 예루살렘에 임금으로 입성하십니다. 그러나 세상의 임금처럼 권세를 휘두르는 권력자 임금이 아니라 평화의 임금님으로 제자들의 환호 속에 소박하게 나귀를 타고 입성하신 것입니다. [생각해 봅시다]루카복음에서는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으로 가시기로 마음을 굳히시고 갈릴래아를 떠난 예루살렘 상경기가 예루살렘 입성으로 일단락됩니다. 그러나 그 여정은 단순히 예루살렘을 향한 여행이 아니라 갈릴래아에서 시작한 하느님 나라의 기쁜 소식을 선포하는 여정이었습니다. 그 여정이 예루살렘 입성으로 새로운 국면을 맞게 됩니다. 이에 대해서는 다음 호부터 살펴볼 것입니다. 그런데 잊지 말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하느님 나라의 복음을 선포하시면서 가시는 목적지 예루살렘은 또한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이 기다리는 곳이라는 사실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미 갈릴래아에서 두 차례, 그리고 갈릴래아를 떠나 예루살렘으로 향하는 도중에 한 차례 등 모두 세 차례에 걸쳐 당신의 수난과 죽음을 예고하셨습니다. 물론 당신의 부활까지도…. 하지만 제자들은 그 말씀이 무슨 뜻인지 몰랐습니다. 그저 자기들이 본 모든 기적 때문에 기뻐하며 예수님을 임금님으로 환호합니다. 분명한 것은 제자들은 예수님을 평화의 임금으로 환호했다는 사실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어떤 임금으로 환호하며 따르는지요? 미사 때마다 성체를 모시면서 어떤 임금으로 고백하며 맞아들이는지요?[알아보기]벳파게와 베타니아 : 베타니아는 올리브산 동쪽 산비탈에 비탈에 있습니다. ‘가난한 이의 집’이라는 베타니아는 예수님께서 친구처럼 대하시며 가깝게 지내신 라자로와 그의 두 여동생 마르타와 마리아가 사는 곳이었습니다. 오늘날 라자로의 무덤을 비롯해 가톨릭과 정교회의 기념 성당이 있지만 아랍인 마을이고 이스라엘이 친 분리 장벽으로 일반 순례객들이 순례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벳파게는 ‘익지 않은 무화과나무의 집’이라는 뜻으로, 베타니아와 예루살렘 사이에 있는 마을이지만 정확한 위치는 확실하지 않습니다. 학자들은 예루살렘에서 안식일에도 걸어 다닐 수 있는 거리(900m)에 있었으리라고 추측합니다. 벳파게로 추정되는 곳에는 프란치스코 수도회가 관리하는 성당이 있습니다. 해마다 주님 수난 성지 주일이면 이곳에서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 기념 행렬을 시작해 올리브 산을 내려오지요. 백영민2018.06.12
![[생활 속의 복음] 연중 제32주일 (마태 25,1-13)](//cpbc.co.kr/CMS/newspaper/2017/11/rc/701069_1.1_titleImage_1.jpg)
[생활 속의 복음] 연중 제32주일 (마태 25,1-13)집 안의 도둑을 보는 사랑의 지혜서울대교구 화곡본동본당 주임 정연정 신부 오늘은 연중 제32주일입니다. 예수의 성녀 데레사께서는 수도회원들에게 “세속을 떠나고 친척을 떠나고 이곳에 깊숙이 갇혀 살고 있으니 이제는 할 일 다 했고, 무엇과 싸울 필요도 없다고 생각할는지 모르겠습니다. 자매들이여, 잠을 자서는 아니 됩니다. 아시는 바와 같이 집 안 도적이 그중 나쁜 것이고, 그것이 바로 우리 자신인 것입니다”라고 강조하면서 ‘깨어 있음’을 권고하셨습니다. 지혜는 바래지 않고 늘 빛이 난다(지혜 6,12 참조)최근에 화제가 된 ‘김생민의 영수증’이라는 TV 프로그램이 있는데, 시청자가 보낸 한 달 치 영수증을 보면서 개그맨 김생민씨가 자신의 경험을 바탕으로 분석하고 평가하는 내용입니다. 그는 불필요한 소비에 대해서는 가차 없이 “스튜핏!(Stupid, 어리석어!)”이라고 따끔하게 지적하고, 아주 잘한 소비 행위에는 “그뤠잇!(Great, 훌륭해!)”라고 추켜세웁니다. 과연 우리가 진정으로 추구해야 할 ‘훌륭함’, 더 나아가서 ‘지혜로움’은 무엇일까요?오늘 제1독서는 지혜서의 내용입니다. 성서학자 질베(M. Gilbert) 신부님은 「솔로몬의 지혜2」에서 “지혜는 하느님의 영, 즉 ‘인간을 사랑하는 영’이다. 지혜를 받아들이는 사람은 지혜가 가지고 있는 하느님의 사랑도 체험할 수 있다”고 설명하면서, “인간은 다른 모든 것보다 더 좋아하는 절대적인 사랑으로 지혜를 사랑해야 한다”(지혜 6,12; 7,10; 8,2)고 새겨 주십니다. 모름지기 인간은 오직 하느님 안에서 지혜로운 삶을 찾을 수 있습니다.희망을 가지지 못하는 다른 사람들처럼 슬퍼하지 마십시오(1테살 4,13)요즘 제 주변에는 “이 상황에서 도대체 어떤 희망을 얘기할 수 있을까?” 하고 자문(自問)하게 되는 경우가 적지 않습니다. 이제 고작 쉰 살인데 대장암 때문에 선종하기를 기다리는 형제님, 얼마 전에 갑작스럽게 뇌종양 판정을 받고 꼬박 한나절 동안 수술을 받은 봉쇄 수도회 수녀님 등. 하지만 그 와중에도 두 달 동안이나 중환자실에서 죽음의 고비를 수없이 맞으셨다가 이제는 일반 병실로 옮겨온 형제님을 보면서, 저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희망을 말할 수 있다”는 강한 확신을 갖게 됐습니다.오늘 제2독서에서 바오로 사도께서는 테살로니카 교회 성도들에게 “함께 데려가실 것, 내려오실 것, 맞이할 것, 함께 있을 것”(1테살 4,14-17 참조)과 같은 미래적인 표현들로써 “그리스도인이 슬퍼하지 않는”(1테살 4,13 참조) 이유를 선포하십니다. 그래서 베네딕토 16세께서는 「희망으로 구원된 우리」에서 “우리는 미래가 있다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특징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미래가 확실한 실재라는 확신이 서야지만, 현재도 살 수 있는 법입니다”라고 깨우쳐 주셨습니다.깨어 있어라, 너희가 그 날과 그 시간을 모르기 때문이다(마태 25,13)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이른바 “열 처녀의 비유”를 통하여 하늘나라를 향한 우리의 마음가짐과 삶이 어떠해야 하는지에 대하여 가르쳐주십니다.2013년 4월 일반알현 때에 프란치스코 교황님께서는 오늘 복음과 관련해, “신랑은 주님이십니다. 신랑의 도착을 기다리는 때는, 주님께서 재림하시기 전에 우리 모두에게 당신의 자비와 인내를 베풀어 주시는 때이고 깨어남의 때입니다”라고 가르쳐 주시면서, “잠들어 있는 그리스도인의 삶은 기쁘지 않고 우울합니다. 그리스도인은 예수님을 만난 기쁨으로 행복해야만 합니다. 잠들지 맙시다!”라고 권고하셨습니다. 하느님, 저는 새벽부터 당신을 찾나이다(시편 63(62),2 참조)성 토마스 아퀴나스는 「신학대전」에서 “사랑, 지성 그리고 의지의 경향이 사람을 특정한 행위로 움직여 가게 하는 원리다”라고 설명합니다. 교형 자매 여러분, 우리는 하늘나라를 희망합니다. 이를 위해서 우리는 “등과 함께 기름도 그릇에 담아 가지고 있었고, ‘안 된다’고 했던”(마태 25,4.9 참조) 슬기로운 처녀들이 지녔던 ‘준비성(사랑)과 판단력(지성)과 지혜(의지)’를 배워야 합니다. 부디 여러분 모두에게 하늘나라를 향한 사랑의 지혜가 더욱 충만하기를 빕니다. 아멘. 문채현2017.11.09

수도서원 30주년 맞이, 주님 향한 세레나데 발표심재영 수사가 수도서원 30주년 기념 음반 1집 ‘당신을 사랑합니다’를 들어 보이고 있다. ‘그대를 보며 그댈 그리워하는 이 마음을 그댄 아나요. 사랑이 깊어가며 나의 마음은 한결같은데 목마른 그리움으로 그댈 찾아보지만, 그댄 어디에 있나요….’ 사랑에 빠진 연인들의 연애편지 문구 같다. 그런데 ‘그대’를 ‘하느님’으로 바꾸면 이처럼 애틋한 신앙고백이 있을까 싶다. 성바오로수도회 심재영(예로니모, 성바오로미디어 기획 제작 책임자) 수사가 작사한 ‘당신을 사랑합니다’(Song of Songs) 가사 일부다. 노래 중의 노래(Song of Songs)는 사실 성경에서 ‘솔로몬의 가장 아름다운 노래’라고 일컫는 아가서(3,1-4 참조)를 이르는 말로, 여기서 모티브를 가져왔다. 1987년 첫 서원을 한 심 수사는 올해 수도서원 30주년이자 환갑을 맞아 ‘당신을 사랑합니다’(성바오로미디어 / 1만 2000원)와 수도자의 노래인 ‘사랑은 아름다워라’(성바오로미디어 / 1만 2000원)라는 두 음반을 잇달아 발표했다. 음반에는 하느님을 향한 사랑 고백이 담겨 있다. 음반 제작에는 생활성가 가수 박소정(알비나)씨를 비롯해 첼리스트이자 음악감독 이보선 SMC 대표, 데빈 리, 작곡가 이병욱 교수, 이수나 수녀, 김다위씨 등이 참여했다. 수록곡 ‘하늘 아래 사람아’는 가족 수도회인 스승예수제자수녀회 이춘자(M. 임마꿀라따) 수녀 작품이다. ‘사랑의 꽃’은 고 이태석 신부 추모곡이며, ‘하늘 아래 사람아’는 바오로 가족 창립자이자 인터넷의 수호성인인 복자 야고보 알베리오네 신부 헌정곡이다. “수도생활을 돌아보니 감사하고 행복했던 순간, 사랑 가득한 기억, 고마운 얼굴이 떠오릅니다. 어떤 날은 넘어져 상처도 났고 마음속 다짐도 폭우 속 꽃잎처럼 흩어지기도 했어요. 저에게 사랑과 생명을 주신 주님께선 하느님 사랑이 무엇인지 알려주셨습니다. 우리가 사랑에 충실하면 사랑이 솟아올라 손길 닿는 모든 것을 변화시킬 수 있어요.” 1988년부터 가톨릭교리신학원의 ‘임의노래연구회’ 1&2집을 시작으로 이태석 신부의 ‘묵상’ 곡이 수록된 수원가대 갓등중창단 1집 ‘내 발을 씻기신 예수’, 교황청립 성음악 연구소 합창단과 함께한 전례 시기별 ‘그레고리안 성가 미사곡 1~7집’ 등 그의 손을 거친 음반만 150여 개에 이른다. 그렇지만 지금까지 자신의 음반을 낸 적이 없었다. 어린 시절 신심 깊은 큰어머니 손에 이끌려 성당에 나가기 시작한 그는 중학생 때 세례를 받은 후 복사단과 레지오 마리애 단원 등으로 열심히 활동했다. 집안에 천주교 신자가 없었는데 심 수사 덕분에 부모님과 5남매가 하느님 자녀로 거듭났다. 학창시절 가톨릭학생회 ‘셀(Cell)’ 모임에 참석했으며, 직장인 시절에는 점심시간에 늘 명동대성당 성모동산에서 기도하던 젊은이였다. 하느님께서는 끊임없이 기도하던 그를 수도회로 이끄셨다. 1991년부터 5년간 아프리카 나이지리아 선교사로 지낸 적도 있다. 아프리카의 극심한 말라리아와 선교지에서 몇 차례 죽음의 위기를 성모님의 보호로 살아난 은총에 감사하며 ‘거룩하신 어머니’, ‘평화의 묵주’라는 묵주기도 음반을 제작했다. 심 수사는 2010년 돌발성 난청으로 왼쪽 귀 청력을 잃고 한때 대인기피증과 우울증을 겪었다. 끊임없는 피정과 기도를 통해 어려움을 극복하고 하느님 사랑을 알아가는 방법을 깨달았다. “앞으로도 소임을 다해 하느님과 세상, 하느님과 인간, 인간과 인간 사이의 소통을 위해 노력하겠습니다. 진정 사랑과 평화만이 이 세상의 등불이기 때문입니다.” 글·사진=이힘 기자 lensman@cpbc.co.kr문채현2017.09.06
![[전영준 신부의 가톨릭 영성을 찾아서] (50) 12세기 ④ - 기사 수도회의 출현](//cpbc.co.kr/CMS/newspaper/2017/11/rc/701589_1.0_titleImage_1.jpg)
[전영준 신부의 가톨릭 영성을 찾아서] (50) 12세기 ④ - 기사 수도회의 출현칼과 십자가 들고 예루살렘 향한 외줄에 오르다 새로운 수도회의 출현은 가톨릭 교회가 하느님의 뜻을 헤아리고자 하는 시대의 요청에 응답하려는 방법이었습니다. 다양한 상황에 처한 시대적인 한계를 극복하고자 노력했던 수도자들의 응답들은 하느님의 뜻을 제대로 헤아렸던지 대부분 지금까지 유효했습니다. 하지만 때로는 응답이 변질되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십자군 원정에 참여한 수도회들은 수도 서약과 군사적 임무의 조화를 꾀했지만, 일부 수도 기사단들은 수도회로서의 본질을 저버리기도 했다. 십자군 전투 장면을 담은 그림. 【CNS】 성지 수호와 순례자 보호를 명분으로 출정한 십자군중세 중기 서방 교회 그리스도인들은 비교적 안정된 분위기 속에서 대중 신심 운동 중 하나로 예루살렘 성지를 순례했습니다. 비록 아랍 무슬림 세력이 7세기부터 팔레스타인 지역을 점령했지만, 서방 교회 그리스도인들은 방해받지 않고 예루살렘 성지를 순례할 수 있었고, 동방 교회 그리스도인들도 팔레스타인 지역에서 큰 어려움 없이 신앙 생활에 전념할 수 있었습니다.수니파 무슬림인 셀주크 왕조는 1037년 중앙 아시아에 제국을 설립하고, 1071년 팔레스타인 지역까지 세력을 확장하면서 순례 중인 그리스도인들에게 위협을 가했습니다. 정치적 위협을 느낀 동로마 비잔틴제국은 종교적인 이유를 앞세워 서방 교회에 도움을 요청했고, 교황 우르바누스 2세(Urbanus PP. II, 재임 1088~1099)는 1095년 클레르몽(Clermont) 교회 회의에서 예루살렘 성지를 수호하고 순례자들을 보호하자는 명분으로 제1차 십자군(Crusade) 원정(1096~1099)을 선언했습니다. 십자군 원정대는 1099년 예루살렘 성지를 점령하고 예루살렘 제국을 건설해 그리스도의 무덤을 지키는 성묘(聖墓) 수호자가 되었습니다.하지만 무슬림 세력이 예루살렘 제국을 위협하고 1187년 멸망시키자 서방 교회는 다시 제3차 십자군 원정(1184~1192)을 떠났으나 예루살렘 성지를 탈환하지 못했습니다. 제6차 십자군 원정(1228~1229)에서 신성로마제국 황제 프리드리히 2세(Friedrich II, 재위 1212~1250)는 외교력으로 예루살렘 성지를 회복했으나, 1244년 다시 빼앗겼습니다. 물론 제7차 십자군 원정(1248~1254) 및 제8차 십자군 원정(1265~1272)도 있었으나 예루살렘 성지를 회복하지 못했습니다. 결국 서방 교회는 1291년 팔레스타인 지역에서 십자군 점령 지역을 모두 빼앗겼습니다.수도 서약과 군사적 임무를 함께 수행하는 기사 수도회그리스도교와 이슬람교가 충돌했던 십자군 원정 시절에 그리스도교 안에서 ‘기사 수도회(Military Order)’라고 불린 특수한 수도회가 설립되었습니다. 기사 수도회는 수도자로서 수도 서약을 하고 청빈, 정결, 순명의 복음삼덕을 실천했으며, 순례자를 보호하고 성지를 수호하고자 중세 유럽 기사(騎士)처럼 무력 사용을 통해 무슬림 세력으로부터 그리스도 왕국을 지키는 군사적 임무도 함께 수행했습니다.첫 번째 기사 수도회는 1023년 아말피공국(Ducato di Amalfi)이 예루살렘 내 그리스도인 거주 지역에 세례자 요한에게 봉헌하며 설립한 아프거나 상처 입거나 가난한 순례자들을 돕는 병원을 운영하던 ‘구호 기사단(Knights Hospitaller)’에서 유래했습니다. 그런데 제1차 십자군 원정이 끝나던 1099년에 원정대는 요한 병원에서 순례자들을 보호하고 병자들을 간호할 목적으로 ‘예루살렘의 성 요한의 구호 형제회(Ordo Fratrum Hospitalis Sancti Ioannis Hierosolymitani)’를 발족시켰습니다. 이 형제회는 1120년 교황청 설립 ‘요한 기사 수도회’(Knights of Saint John)로 개편, 군인 수사와 간호 수사가 순례자들을 보호하고 간호했습니다.가장 대표적인 기사 수도회는 ‘성전 기사단(Knights Templar)’이었습니다. 제1차 십자군 원정 이후 예루살렘 도성 안 치안은 비교적 안정되었지만, 성지를 향해 오는 길목은 비적들로 들끓었습니다. 프랑스 기사 위그 드 파앵(Hugues de Payens, 1070~1136)은 1119년 순례자들을 보호할 기사 수도회를 설립하자고 제안했고, 동료 8명과 예루살렘 솔로몬 성전 터에서 성전 기사 수도회를 창설했습니다. 클레르보의 베르나르두스(Bernardus Claraevallensis, 1090~1153)는 저서 「새 군사들의 찬미에 관한 책(Liber de Laude Novae Militiae)」에서 수도 서약과 군사적 임무가 조화를 이룰 수 있다고 주장하면서 기사 수도회 이념의 정당성을 제시했습니다.이교도 선교로 목적을 확장한 기사 수도회또 다른 주요 기사 수도회는 독일 사람들이 주축이 된 ‘독일 기사단(Teutonic Knights)’입니다. 제3차 십자군 원정 시절 예루살렘 왕국 북쪽 아크레(Acre)에 위치한 원정대를 지원」하는 야전 병원에서 1190년 ‘예루살렘의 성모 마리아의 독일 형제회(Ordo Fratrum Domus Sanctae Mariae Teutonicorum Ierosolimitanorum)’가 발족됐는데, 1198년 독일 기사 수도회로 개편되었습니다. 독일 기사 수도회 일부 구성원들은 1211년부터 이교도 선교를 목적으로 동유럽 지역으로 진출했으나, 포악한 점령군으로 변했습니다.한편 리가(Riga)의 주교 알베르트 1세(Albert I, 재임 1199~1229)는 리보니아(Livonia) 지역의 그리스도인을 보호하고 이교도들을 선교하겠다는 목적으로 1202년 독일 군인수사들로 구성된 ‘리보니아의 그리스도 기사 수도회(Fratres Militiæ Christi Livoniae)’를 설립했고, 교황 인노켄티우스 3세(Innocentius PP. III, 재임 1198~1216)는 1204년 ‘칼의 기사 수도회(Knights of Sword)’ 설립을 승인했습니다. 하지만 칼의 기사 수도회는 그리스도인 보호보다 이교도 착취로 악명이 높았습니다. 결국 리투아니아(Lithuania)에서 치른 전투에서 크게 패한 후 1237년 살아남은 수사들은 독일 기사 수도회로 편입됐습니다.이외에도 이베리아반도에서 살았던 이슬람계 무어인(Moors)으로부터 그리스도교를 수호하고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Santiago de Compostela)를 순례하는 그리스도인을 보호하는 기사 수도회들이 설립됐습니다. 1146년 베네딕도회 규칙을 따른 포르투갈(Portugal)왕국의 ‘아비즈 기사 수도회(Military Order of Aviz)’, 1158년 시토회 규칙을 따른 카스티야(Castilla)왕국의 ‘칼라트라바 기사 수도회(Military Order of Calatrava)’와 1166년 레온(Len)왕국의 ‘알칸타라 기사 수도회(Order of Alcntara)’, 1170년 아우구스티누스 의전 사제단 규칙을 따른 레온 왕국과 카스티야 왕국의 ‘칼의 성 야고보 기사 수도회(Military Order of Saint James of the Sword)’가 설립됐습니다. 뒤늦은 1317년 시토회 규칙을 따른 아라곤(Aragon) 연합왕국의 ‘몬테사 기사 수도회(Order of Montesa)’도 설립됐습니다.1291년 십자군 원정대의 마지막 주둔지였던 아크레마저 무슬림 세력에 함락당하자 여러 기사 수도회들은 각기 다른 운명을 맞이했습니다. 요한 기사 수도회는 몰타 기사 수도회(Knights of Malta)로 재편해 병자를 돌보는 일을 계속 했습니다. 성전 기사 수도회는 설립 목적을 상실함으로써 1312년 빈(Vienne) 공의회에서 교황 클레멘스 5세(Clemens PP. V, 재임 1305~13014)가 해산시켰습니다. 독일 기사 수도회는 그리스도교를 전한다는 명분 아래에서 군사적 행동을 감행하면서 기사단 국가를 건설하려고 시도, 수도회로서의 본질을 저버렸습니다. 그 외의 기사 수도회도 수도회 모습을 상실하고 왕족과 귀족에 속한 기사단이 되기도 했습니다. 결국 십자군 원정은 교회 안팎에서 많은 결과를 가져왔으며, 하느님의 부르심에 대한 영적인 응답의 어려움을 새삼 느끼게 했습니다. <가톨릭대 신학대학 영성신학 교수> 백영민2017.11.14
![[성경 속 기도] (7) 솔로몬의 기도](//cpbc.co.kr/CMS/newspaper/2016/03/rc/625982_1.0_titleImage_1.jpg)
[성경 속 기도] (7) 솔로몬의 기도겸손한 마음으로 지혜를 청하다 솔로몬은 한 나라의 왕으로서 필요한 지혜와 능력을 청하는 기도를 항상 바쳤다. 율리우스 카롤스펠트 작, ‘솔로몬의 재판’. 출처=「아름다운 성경 솔로몬 하면 지혜의 왕으로 떠올린다. 그는 이스라엘 역사에서도 가장 화려하고 풍족한 삶을 살았던 인물이다. 솔로몬은 다윗과 밧 세바 사이에서 태어났다. “다윗은 자기 아내 밧 세바를 위로하고, 그에게 들어 잠자리를 같이하였다. 밧 세바가 아들을 낳자 다윗은 그의 이름을 솔로몬이라 하였다. 주님께서 그 아이를 사랑하셨다”(2사무 12,24). 다윗 왕에게는 왕위를 이어받으려던 나이 든 아들이 많이 있었다. 반면에 솔로몬은 많은 형제 가운데 아주 어린 동생이었기 때문에 왕위를 이어받을 것이라고는 생각조차 할 수 없었다. 더군다나 솔로몬의 어머니는 다윗이 불의하게 취한 여인인 밧 세바였다.그러나 어려움을 극복하고 다윗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른 솔로몬은 왕으로서 하느님을 사랑하는 일에 힘썼다. 솔로몬은 한마디로 ‘기도의 사람’이었다. 솔로몬의 기도는 지속적인 특징을 지니고 있다. 그의 기도 배경에는 바로 하느님께 대한 사랑이 있었다. “솔로몬은 주님을 사랑하여, 자기 아버지 다윗의 규정을 따라 살았다. 그러나 그도 여러 산당에서 제사를 드리고 향을 피웠다”(1열왕 3,3). 솔로몬은 하느님을 사랑하라는 첫째 계명을 잘 지켰고 아버지 다윗의 가르침에 순종했다. 한 나라의 왕으로서 하느님께서 주시는 지혜와 능력이 아니고서는 도무지 감당할 수 없는 자리임을 알고 하느님께 기도하기를 게을리하지 않았다. “임금은 제사를 드리러 기브온에 갔다. 그곳이 큰 산당이었기 때문이다. 솔로몬은 그 제단 위에서 번제물을 천 마리씩 바치곤 하였다”(1열왕 3,4). 솔로몬은 기브온에 있는 산당으로 기도하러 갔다. 기브온 산당은 이스라엘에서 가장 큰 산당이었다. 솔로몬이 기브온 산당에서 번제물을 천 마리씩 드렸다는 것은 하느님께 드리는 제사를 온 힘과 정성을 다해 드렸다는 의미이다.솔로몬은 하느님께 많은 백성을 잘 통치할 선과 악을 구별할 수 있는 지혜를 청하였다. 하느님께서도 솔로몬의 기도를 들으시고 응답해 주셨다. “‘그러니 당신 종에게 듣는 마음을 주시어 당신 백성을 통치하고 선과 악을 분별할 수 있게 해 주십시오. 어느 누가 이렇게 큰 당신 백성을 통치할 수 있겠습니까?’”(1열왕 3,9). “또한 하느님은 솔로몬이 구하지도 않은 부와 영광까지도 주시겠다고 약속하셨다. ‘또한 나는 네가 청하지 않은 것, 곧 부와 명예도 너에게 준다. 네 일생 동안 임금들 가운데 너 같은 사람이 없을 것이다’”(1열왕 3,13). 기도는 바로 이런 것임을 잘 보여주는 대목이다. 솔로몬의 기도에서 중요한 것은 그가 기도할 때 이미 주님의 응답을 믿었다는 것이다. 즉, 믿음으로 구하는 기도였기에 하느님께서 이루어 주실 줄을 믿었던 것이다. 그래서 솔로몬은 하느님께 먼저 감사를 드렸다. 이처럼 솔로몬의 기도 생활은 항상 겸손했다.기도는 겸손한 사람들의 몫이라 할 수 있다. 자신의 연약과 자신의 무지를 모르기 때문에 사람들은 기도의 필요성을 느끼지 않을 때가 많다. 자신이 부족하고 잘 알지 못하다고 생각하기에 하느님께 겸손한 마음으로 도움을 청하는 것이다. 자신의 부족함을 알고 자기 한계를 받아들이는 사람이야말로 하느님 보시기에 지혜로운 사람이 될 수 있다. 허영엽 신부(서울대교구 홍보국장) 평화신문2016.03.22
[이창훈 기자의 예수님 이야기](36) 예수님을 거부한 마을(루카 9,51-56)예루살렘 향해 사마리아 마을 거쳐가려 했으나…이번 호부터는 예수님의 예루살렘 상경기를 보게 됩니다. 예루살렘으로 향하는 길(9,51-56) 예루살렘 상경기는 “하늘에 올라가실 때가 차자,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으로 가시려고 마음을 굳히셨다”(9,51)는 내용으로 시작합니다. “하늘에 올라가실 때”란 거룩한 변모 기사의 “세상을 떠나실 일”(9,31)을 가리킵니다. 이는 그분의 수난과 죽음과 부활과 승천까지를 포함하는 일을 의미합니다. 이 일은 예루살렘에서 이루어져야 하기에(9,31 참조),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으로 가시려고 마음을 굳히신 것입니다. 지금까지 예수님의 주 활동 무대는 갈릴래아와 그 주변 일대였습니다. 하지만 이제 예루살렘을 향하시면서 예수님께서는 심부름꾼들을 앞서 보내시고, 그들은 예수님을 모실 준비를 하려고 사마리아인들의 한 마을로 들어갑니다.(9,52) 예수님 시대에 갈릴래아에서 예루살렘으로 가는 길은 크게 두 가지가 있었다고 하지요. 하나는 사마리아 지역을 거쳐 예루살렘으로 가는 길이고 다른 하나는 사마리아 지방을 피해 요르단 강 동쪽을 따라 내려와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는 길이었습니다. 사마리아를 통해 예루살렘으로 가는 데는 3~4일이면 됐지만 사마리아 지방을 피해 에둘러서 가면 훨씬 더 많은 시일이 걸렸습니다. 하지만 유다인들은 사마리아인들과 상종하는 것을 꺼렸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사마리아인들의 마을을 거쳐 가기로 작정하십니다. 유다인들이 사마리아인들에게 갖고 있는 편견을 부수고 두 집단 사이의 장벽을 허물기 위해서라고 봅니다. 아니면 예루살렘에서 이룰 일을 생각하면서 그 길을 서둘러 가고 싶으셨을 수도 있습니다. 심부름꾼을 먼저 보내신 것도 같은 맥락에서라고 볼 수 있겠지요. 그런데 사마리아 마을 사람들은 예수님을 맞아들이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 그들이 싫어하는 유다인들의 성도 예루살렘으로 가시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라고 루카는 기록합니다. 그러자 야고보와 요한 형제가 나섭니다. 하늘에서 불을 내려 예수님을 맞아들이지 않는 저 사마리아 사람들을 불살라 버리면 어떻겠느냐는 겁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돌아서서 그들을 꾸짖으셨고 일행은 다른 마을로 갑니다.(9,53-56) 야고보와 요한이 하늘에서 불을 내려 사람들을 불살라버리면 어떻겠냐고 예수님께 여쭌 것은 빈말이 아니었을 것입니다. 야고보와 요한 형제는 예수님을 따라다니면서 예수님께서 하신 놀라운 일들을 다 보았을 뿐 아니라 예수님께서 거룩하게 모습이 변해 엘리야와 모세와 함께 이야기하시는 것도 직접 목격했습니다.(8,28-36 참조) ‘천둥의 아들들’이라는 별명처럼 다혈질적인 그들은 구약의 위대한 예언자 엘리야와 함께 이야기를 나누신 자기들의 훌륭한 스승이 사마리아인들에게 거부당하자 화가 치밀어올랐을 것입니다. 그래서 불살라 버리자는 험악한 말까지 하고 있는 것입니다. 어쩌면 그들의 머릿속에는 엘리야 예언자가 사마리아 임금 휘하의 오십인 대장과 그 부하들을 불살라 버린 일화(2열왕 1,10-12)가 떠올랐을지 모릅니다. 하지만 이는 예수님께서 원하시는 바가 아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모세와 엘리야와 나눈 대화는 당신이 “세상을 떠나실 일”(9,31), 곧 구약의 이스라엘 백성이 이집트를 탈출했듯이, “당신의 죽음과 부활과 승천으로 새로운 탈출을 실현시키실”(「주석 성경」) 일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일을 이루시려고 예루살렘으로 가시는데 하늘에서 불이 내려오게 해 사람들을 불살라 버린다니 말이 안 되는 소리였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돌아서서 제자들을 꾸짖으시지요. 예수님의 예루살렘 상경기를 시작하면서 예수님께서 갈릴래아에서 하신 일과 앞으로 예루살렘에서 이루실 일이 사마리아 사람들이 예수님을 맞아들이지 않은 이 일화와 어떤 관계를 이루는지를 잠시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갈릴래아에서 하신 활동은 나자렛의 회당에서 이사야 예언서를 통해 선포하신 말씀에서 잘 드러납니다. “주님께서 나에게 기름을 부어 주시니 주님의 영이 내 위에 내리셨다. 주님께서 나를 보내시어 가난한 이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고 잡혀간 이들에게 해방을 선포하며 눈먼 이들을 다시 보게 하고 억압받는 이들을 해방시켜 내보내며 주님의 은혜로운 해를 선포하게 하셨다.”(루카 4,18-19) 이것이 예수님께서 갈릴래아 일대에서 하신 일, 달리 표현하면 하느님 나라의 기쁜 소식을 전하는 일(4,43)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갈릴래아에서 하느님 나라의 기쁜 소식을 전하시면서 당신의 수난과 죽음과 부활을 제자들에게 두 번이나 예고하십니다. 루카는 그 일을 이루시려고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으로 향하시는 첫머리에 사마리아 사람들이 예수님을 맞아들이지 않았다는 이야기를 전합니다. 이는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서 겪으실 일에 대한 복선을 깔아놓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화가 난 제자들이 하늘에서 불을 내려 반대자들을 불살라 버리자고 청하는 제자들을 꾸짖으시는 예수님의 모습은 앞으로 예수님께서 겪으실 배척과 반대에 대한 예수님의 태도를 암시하고 있다고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알아 둡시다 : 유다와 사마리아 예수님 시대에 유다 사람과 사마리아 사람들은 사이가 아주 좋지 않았습니다. 거기에는 역사적 이유가 있습니다. 사마리아는 원래 가나안 땅에 들어온 이스라엘 민족이 솔로몬 왕 이후 남쪽은 유다 왕국으로, 북쪽은 이스라엘 왕국으로 갈라진 후 기원전 890년쯤부터 북 이스라엘 왕국의 수도로 건설된 도시였습니다. 하지만 나중에는 북부 갈릴래아와 남부 유다 사이의 요르단 강 서쪽에 자리 잡고 있는 지역을 가리키게 됩니다. 사마리아인이나 유다인은 원래가 똑같은 유다인이었습니다. 하지만 기원전 722년 아시리아가 북부 이스라엘 왕국의 수도 사마리아를 함락시킨 후 이스라엘 사람들을 아시리아로 끌고 가고 대신에 아시리아 사람을 비롯한 다른 이방 민족들을 사마리아에 살게 하면서, 사마리아 지역에 살던 유다인들의 순수성이 훼손됐습니다. 게다가 야훼 신앙을 저버리고 우상 숭배에 빠져 지냄으로써 사마리아 사람들은 남쪽 유다인들에게 점점 멸시를 받게 됩니다. 그러다가 바빌론 유배(기원전 587~538) 이후 사마리아인들이 유다인들의 예루살렘 성전 재건을 반대하면서 앙금의 골이 더욱 깊어졌습니다. 사마리아인들은 나중에 예루살렘 성전 대신 사마리아의 그리짐 산에 성전을 세워 예배했는데, 이 성전을 유다인들이 파괴하면서 갈등이 더욱 심화됩니다. 이런 이유로 예수님 시대에 사마리아인들과 유다인들의 사이는 아주 좋지 않았지요. 문채현2017.10.26
![[아버지의 집, 아름다운 성당을 찾아서] (5)서울대교구 중계양업성당](//cpbc.co.kr/CMS/newspaper/2016/10/rc/656936_1.0_titleImage_1.jpg)
[아버지의 집, 아름다운 성당을 찾아서] (5)서울대교구 중계양업성당청동십자가 따라가 만난 아담한 하느님의 집 프랑스 고고학회 회장이며 미술사학자인 알랭 에르랑드 브랑당뷔르는 성당을 ‘빛과 색이 있는 건축물’이라고 정의했다. 브랑당뷔르의 말처럼 아름다운 성당 건축물을 짓기 위해선 우수한 설계자와 빼어난 조적공과 미장공, 솜씨 있는 예술가들이 필요하다. 하지만 아름다운 성당을 짓는 참 건축가는 바로 그 본당 신자들이다. 성당을 지을 빈터에 신자들의 기도로 만든 벽돌이 쌓아지고, 그들의 희생으로 빚은 성 미술품들이 공간을 채울 때 비로소 하느님의 집을 마련할 수 있기 때문이다.성당 건립하며 신자들 매일 묵주기도 바쳐 배추밭에 지어진 아담한 서울대교구 중계양업성당(주임 김주영 신부)이 아름다운 것은 3년 6개월간 신자들의 기도와 희생으로 손수 지은 성당이기 때문이다. 이 성당 터 안에 있는 모든 것에는 1년간 빈 병을 주어 모은 7만 원 돈을 봉헌한 할머니의 정성과 주일마다 폐품과 음식을 팔고, 매일 묵주기도를 바치고 성경을 필사한 신자들의 헌신적 희생이 배어있다. 불암산을 병풍처럼 두고 있는 중계양업성당은 아파트와 학교가 있는 주변 환경과 조화를 이루고 있다. 위압적이지도 않고 초라하지도 않다. 성당과 인도를 구분하는 얕은 담장엔 소나무를 비롯한 여러 수목으로 꾸며져 있다. 중계양업성당에선 ‘돌’과 ‘청동’ 그리고 ‘나무’와 ‘색유리화’라는 전통적인 성당 건축 재료를 모두 볼 수 있다. 성당에 들어서면 제일 먼저 청동 성미술품을 만나다. 성당 지붕 위 청동십자가가 설치돼 있어 처음 방문하는 이도 성당 찾기가 어렵지 않다. 조각가 한진섭(요셉) 작가의 작품으로 사방 어디에서 보아도 똑같은 모양으로 멀리서도 성당을 알아볼 수 있다. 한국 순교자 현양 정신 담아 정문에 들어서면 본당 수호자인 가경자 최양업(토마스) 신부의 청동상이 반갑게 맞아준다. 최태훈 조각가의 작품으로 복음을 선포하기 위해 힘있게 걸어가는 최양업 신부를 표현하고 있다. 이 작품은 최양업 신부의 주요 사목지였던 배티성지에도 설치돼 있다. 성당 출입문은 한국 교회에선 보기 드문 청동문으로 장식돼 있다. 역시 최태훈 조각가의 작품으로 좌측 문은 51가지 구약 성경 사건을, 우측 문은 52가지 신약 성경 주제를 담은 부조로 장식돼 있다. 좌ㆍ우측 둘의 성경 주제를 합치면 한국 순교 성인 103위와 같은 수다. 성당이 한국 순교자들을 현양하고 있음을 상징으로 보여준다. 청동은 인류가 발명한 최초의 합금이다. 솔로몬 성전에서 사제들의 몸을 씻는 정결례 물을 담는 제기의 재료로 사용됐다. 중계양업성당을 찾는 이들이 청동십자가를 따라 성당에 들어서면 본당 수호자인 최양업 신부의 청동상을 만나고 청동문을 통해 성당에 입장하도록 꾸며놓은 것은 어쩌면 솔로몬 성전의 청동 정결례 물통처럼 성당에 들어서기 전에 먼저 정결한 몸과 정화된 마음을 갖추라는 표지가 아닐까 싶다.성당에 들어서면 색유리화가 성전으로 안내한다. 김남용 작가가 ‘성령으로 가득한 성당’을 표현하고자 만든 작품이다. 전체적으로 단순하며 중간중간 둥근 모양의 포인트를 주어 현대적 감각을 느끼게 했다. 작가는 이 둥근 원을 예수님의 생애를 추상화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그의 색유리화 작품은 성전 양쪽 벽면 상단에도 절제된 형태로 장식돼 경내를 신비로운 빛으로 채운다.김남용 작가는 성전 입구의 공간을 성령으로 채우기 위해 솔로몬 왕이 성전 지성소 문을 향백나무로 장식했듯이 원목 성전문을 만들고 오른편 고해소 문도 색유리화에서 보여준 성령을 다시 나타내 같은 모양의 그림으로 장식했다. 성전 내부 온통 하얀 돌로 꾸며 성전은 돌로 꾸며져 있다. 성당 내부 마감은 백색 인조석이다. 경건한 분위기를 연출하기 위해 김송필 조각가가 직접 인조석을 제작해 하나하나 붙여 만들었다. 제대와 감실, 제대 십자가, 독서대, 해설대, 성수대, 사제석은 모두 통돌을 깎아 만들었다. 한진섭 작가가 우리나라에서 가장 좋은 익산 대리석으로 만든 이 성물들은 미사 전례의 장중함을 더해 준다. 아울러 성전 벽과 제단 모두를 하얀 돌로 통일해 미적으로나 시각적으로 조화를 꾀했다. 성전 내부가 빛을 상징하는 하얀색이어서 다소 밋밋해 보일 수 있지만, 한진섭 작가는 성전 정중앙 제단 십자가와 양측 벽면 십자가의 길 14처를 검은색 대리석으로 장식해 화룡점정의 포인트를 줬다. 그러면서 영적 에너지도 함께 느끼게 했다. 성당은 단순히 아름다워서만 되는 것이 아니라 기도를 하거나 미사를 올릴 때 마음의 평화가 찾아들어 하느님을 편안하게 만날 수 있어야 한다. 미술사가 고종희(한양대 실용미술과) 교수는 서울 중계양업성당에 대해 “그냥 지나친 구석이라곤 도무지 없는, 모든 것에 예술가의 혼이 배어있는 성당”이라며 “성당은 기도와 미사 전례를 통해 주님과 만나는 곳으로서 그 목적과 기능이 명확한 건축물인데 중계양업성당은 이같은 기능에 합당하게 지은 아름다운 성당”이라고 평가했다. 리길재 기자 teotokos@pbc.co.kr cpbc2016.10.19
![[허규 신부와 떠나는 신약 여행] 46. “우리는 그 증인입니다”(사도 3,15)](//cpbc.co.kr/CMS/newspaper/2017/04/rc/679732_1.0_titleImage_1.jpg)
[허규 신부와 떠나는 신약 여행] 46. “우리는 그 증인입니다”(사도 3,15)‘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 세상에 전한 제자들마솔리노 작 ‘불구자를 고친 성 베드로와 타비타의 소생’중 일부, 1424-25년쯤, 프레스코, 브란카치 경당, 산타 마리아 델 카르미네 성당, 피렌체, 이탈리아.성령 강림 후 베드로의 오순절 설교 예수님의 행적 요약하는 내용 담아 걷지 못하던 사람 일어나도록 치유 사도들 증언 통해 교회 형태 정착 모든 일이 하느님의 구원 계획이며 구약성경에 예언되어 있음을 전해복음서의 인물 중에서 베드로는 사도들의 으뜸이면서 인간적으로 공감할 수 있는 모습을 많이 보여주는 사도입니다. 예수님께 “스승님은 그리스도이십니다”(마르 8,29)라고 처음 고백하지만 뒤이은 예수님의 수난과 부활 예고를 이해하지 못하는 모습으로 그려지고 예수님을 세 번 부인하는 모습을 보여주기도 합니다. 하지만 사도행전이 전하는 베드로 사도의 모습은 사뭇 다릅니다. 그것을 잘 보여주는 예는 사도행전 초반에 담겨있는 베드로의 설교입니다. 사도행전이 전하는 베드로의 설교는 예수님의 사건을 요약하는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우리는 믿음의 중심이 되는 이런 내용을 ‘케리그마(kerygma)’라고 부릅니다. “이스라엘인 여러분, 이 말을 들으십시오. 여러분도 알다시피, 나자렛 사람 예수님은 하느님께서 여러 기적과 이적과 표징으로 여러분에게 확인해 주신 분이십니다. 하느님께서는 그분을 통하여 여러분 가운데에서 그것을 일으키셨습니다. 하느님께서 미리 정하신 계획과 예지에 따라 여러분에게 넘겨지신 그분을, 여러분은 무법자들의 손을 빌려 십자가에 못 박아 죽였습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그분을 죽음의 고통에서 풀어 다시 살리셨습니다. 그분께서는 죽음에 사로잡혀 계실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사도 2,22-24) 오순절의 성령 강림 이후에 전하는 ‘베드로의 오순절 설교’는 사도들이 이해한 예수님에 대한 내용입니다. 그리고 여기에서 중심이 되는 것은 ‘십자가 죽음과 부활’입니다. 이 모든 일은 하느님의 구원 계획안에 포함되는 것으로 이제 약속된 성령을 통해 지속됩니다. 베드로의 오순절 설교는 성령 강림의 의미를 가장 잘 드러내는 훌륭한 연설입니다. 또한, 구약성경의 여러 구절을 인용하는 것에서 당시의 사도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이라는, 준비된 하느님의 계획 안에 구약성경이 있었음을 강조합니다. 사도들은 단지 예수님의 복음을 선포하는 데에 그치지 않고 예수님의 활동을 이어갑니다. 그것을 잘 보여주는 예는 병자의 치유입니다. 베드로는 태어나면서부터 걸을 수 없었던 사람을 성전에서 치유합니다. “나자렛 사람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말합니다. 일어나 걸으시오.”(사도 3,6) 유다인들이 하느님의 거처라고 생각했던 성전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병자를 치유하는 베드로의 모습은 사도들을 통해 이 땅에서 예수님의 활동이 여전히 지속됨을 보여줍니다. 이 치유와 함께 있었던 솔로몬 주랑에서의 설교는 베드로의 오순절 설교와 비슷한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예수님을 다시 일으키셨고, 우리는 그 증인입니다.”(사도 3,15) 한 가지 독특한 점은 이 설교 안에서 죄의 용서에 대한 언급을 찾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회개하고 하느님께 돌아와 여러분의 죄가 지워지게 하십시오.”(사도 3,19). 사도들의 활동은 이처럼 예수님의 업적을 이어가는 모습으로 그려집니다. 사실 예수님의 말씀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제자들이었지만 부활과 성령 강림은 그들은 완전히 바꾸어놓는 계기가 됩니다. 사도들은 이 모든 일이 하느님의 계획에 따른 것이고 이미 구약성경에서 예언되었다는 사실을 사람들에게 선포합니다. 이 선포 안에서 가장 중심이 되는 것은 물론 구원을 위한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입니다. 이제 사도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에 대한 증인입니다. 이와 함께 생각해 볼 수 있는 것은 ‘교회’입니다. 성령 강림은 교회의 시작을 가시적으로 드러내는 사건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뽑으실 때부터 이미 교회는 준비되었지만, 그것이 가장 잘 드러나는 것은 성령 강림 이후입니다. 사도행전은 예수 그리스도의 증인인 사도들의 활동을 통해 교회가 자신의 모습을 찾아가는 것을 보여줍니다. 이런 내용은 니케아-콘스탄티노플 신경에서도 표현됩니다. “하나이고 거룩하고 보편되며 사도로부터 이어오는 교회를 믿나이다.” <가톨릭대 신학대학 성서학 교수>김지항2017.04.26
![[허규 신부와 떠나는 신약 여행] 47. “주 예수님, 제 영을 받아 주십시오”(사도 7,59)](//cpbc.co.kr/CMS/newspaper/2017/05/rc/680683_1.0_titleImage_1.jpg)
[허규 신부와 떠나는 신약 여행] 47. “주 예수님, 제 영을 받아 주십시오”(사도 7,59)죽음으로 예수 따른 ‘거룩한 순교’안니발레 카라치 작 ‘성 스테파노의 순교’, 1603-04년, 파리 루브르 박물관, 프랑스. 예수의 죽음·부활 선포한 제자들 유다인은 ‘하느님 모독’으로 여겨 초기 그리스도교인들 박해 시달려 출신 다른 신앙인들 간 갈등 발생 공동체 내부 결속 도울 부제 선발 일곱 부제 중 첫 순교자 스테파노 구약 통해 유다인·종교지도자 비판사도들이 중심이 되어 이끌어갔던 초기 교회 공동체는 다양한 모습과 함께 역동적으로 소개됩니다. 예수님의 활동은 사도들을 통해 지속되고 공동체는 자신들의 체험을 삶으로 이어갑니다. 하지만 이 시기에 항상 기쁜 일만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사도들의 활동과 신앙생활에 가장 큰 걸림돌이 되었던 것은 바로 ‘박해’입니다. 박해는 비단 초기 공동체의 활동 시작에만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신약성경이 기록될 당시에 공통적으로 배경이 된 것은 박해입니다. 신약성경은 모두 이러한 박해의 상황 속에서 기록되었다고도 말할 수 있습니다. 사도들이 잡혀가게 된 가장 큰 이유는 유다인들이, 종교 지도자들이 십자가형에 처한 예수의 이름으로 사람들을 가르치는 것 때문이었습니다. 하나의 사건이지만 사도들과 신앙인들에게 주는 십자가 사건의 의미와 종교 지도자들에게 주는 의미는 달랐습니다. 베드로와 사도들은 자신들을 박해하는 종교 지도자들에게 이렇게 선포합니다. “우리 조상들의 하느님께서는 여러분이 나무에 매달아 죽인 예수님을 다시 일으키셨습니다. 그리고 하느님께서는 그분을 영도자와 구원자로 삼아 당신의 오른쪽에 들어 올리시어, 이스라엘이 회개하고 죄를 용서받게 하셨습니다. 우리는 이 일의 증인입니다. 하느님께서 당신께 순종하는 이들에게 주신 성령도 증인이십니다.”(사도 5,30-32) 사도들의 복음 선포는 종교 지도자들을 격분하게 만듭니다. 그들이 예수님을 십자가형에 처한 가장 큰 이유는 하느님을 모독한 것인데 사도들은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을 하느님의 업적으로 선포하기 때문입니다. 이제 그리스도교와 유다교는 서로 구분됩니다. 초기 공동체가 지닌 외적인 어려움은 이렇듯 박해였습니다. 하지만 내적인 어려움도 있었습니다. 그것은 서로 다른 출신의 신앙인들을 하나의 공동체로 만드는 것이었습니다. 사도행전은 이렇게 전합니다. “그 무렵 제자들이 점점 늘어나자, 그리스계 유다인들이 히브리계 유다인들에게 불평을 터뜨리게 되었다. 그들의 과부들이 매일 배급을 받을 때에 홀대를 받았기 때문이다.”(사도 6,1) 이러한 문제를 해결해가면서 또 양적으로 커지는 공동체를 위해 새로운 제도들이 생겨납니다. 내부적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사도들과 공동체는 ‘부제’들을 뽑습니다. 이렇게 공동체는 “믿음과 성령이 충만한” 일곱 명의 부제를 뽑아 안수한 다음 그들에게 직무를 맡깁니다. 그리고 사도들은 복음 선포에 전념합니다. 공동체가 커가면서 생각지 못했던 새로운 문제들이 생겨나지만, 이것을 슬기롭게 풀어가는 과정을 통해 역설적으로 공동체는 더욱 성장했다고 사도행전은 기록합니다. 부제들 중에 우리에게 가장 잘 알려진 인물은 스테파노입니다. “은총과 능력이 충만한” 스테파노는 예수님의 죄목과 비슷하게 “모세와 하느님을 모독”한 죄로 최고 의회에서 신문을 받습니다. 이에 대한 대답처럼 기록되어 있는 스테파노의 설교는 사도행전에서 가장 긴 설교로, 구약성경의 내용을, 이스라엘의 역사를 요약하여 전합니다. 마치 구약의 내용을 통해 암시적으로 유다인들, 특히 종교 지도자들의 잘못을 드러내는 것 같습니다. 이 설교는 크게 두 가지의 주제로 요약될 수 있습니다. 하나는 모세를 중심으로 한 해방의 이야기입니다. 하느님께서 이스라엘을 어떻게 구원하셨는지, 어떻게 이집트에서 해방시켜 약속된 땅으로 이끌어가셨는지를 설명합니다. 다른 주제는 성전과 관련된 것입니다. 광야의 증언의 천막에서 시작된 하느님의 거처는 다윗과 솔로몬에 이르러 성전으로 세워집니다. 유다인들은 이렇게 하느님의 집을 지었지만 정작 하느님의 말씀을 귀담아듣지 않았다는 내용입니다. 이 설교로 스테파노는 순교합니다. 순교 당할 때 스테파노의 모습은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의 모습과 많이 닮았습니다. “주 예수님, 제 영을 받아주십시오. 주님, 이 죄를 저 사람들에게 돌리지 마십시오.” 루카복음이 전하는 십자가 위에서 하신 예수님의 말씀은 그대로 스테파노의 순교 때에도 표현됩니다. 루카는 첫 순교자인 스테파노의 죽음이 예수님을 따른 것임을 강조하는 듯합니다.<가톨릭대 신학대학 성서학 교수>김지항2017.05.05
![[안소근 수녀와 함께 떠나는 구약 여행] (56) “내 아들아, 아버지의 교훈을 들어라”(잠언 1,8)](//cpbc.co.kr/CMS/newspaper/2016/01/rc/616267_1.0_titleImage_1.jpg)
[안소근 수녀와 함께 떠나는 구약 여행] (56) “내 아들아, 아버지의 교훈을 들어라”(잠언 1,8)하느님 지혜로 이끄는 성공 비결서, 잠언 루카 조르다노 작, ‘솔로몬의 꿈’, 1693년, 스페인 마드리드미술관 소장. 고전적 지혜. 구약 성경의 지혜 문학 가운데 가장 오래된 책인 「잠언」은 대대로 전해진 오랜 가르침들을 담고 있습니다. 그 가르침들이 언제부터 시작되었을까요? 알 수 없습니다. 성경의 잠언집을 한 사람이 수집한 것도 아니지만, 한 사람이 모았다 해도 잠언들은 어느 한순간에 쓴 글들이 아니라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던 가르침들입니다. 속담이나 격언들에 대해서 처음 그 말을 한 사람을 찾아내는 것은 불가능하지요. 잠언도 마찬가지입니다.잠언 1장 1절에서는 “이스라엘 임금 다윗의 아들 솔로몬의 잠언”이라고 말합니다. 하지만 막상 뒷부분으로 가면 “현인들의 말씀”이라는 제목이 붙어 있는 부분도 있고(22,17; 24,23), “유다 임금 히즈키야의 신하들이 수집한 것”(25,1)으로 되어 있는 부분도 있으며, 심지어 외국인의 이름으로 된 “마싸 사람 야케의 아들 아구르의 말”(30,1)도 있습니다. 그런데도 책 전체의 표제를 “솔로몬의 잠언”이라고 하는 것은 솔로몬이 이스라엘의 지혜를 대표하는 인물이기 때문입니다. 잠언 외에도 「코헬렛」과 「지혜서」가 솔로몬을 저자로 내세우고 있고, 「아가」도 마찬가지입니다. 이 책들 가운데 실제로 솔로몬이 쓴 책은 없습니다. (잠언의 경우 혹시 정말 솔로몬 시대의 잠언이 여기에까지 전해진 경우가 있을 수도 있겠지요.) 하지만 다윗이 처음 왕조를 세우고 영토를 정복하고 예루살렘으로 수도를 정하는 등의 일들에 바빴다면 솔로몬 시대는 이제 어느 정도 틀이 잡힌 나라에서 문화와 경제가 발전한 시대였기에, 그리고 솔로몬 자신도 지혜로운 사람으로 유명했기에 이 책들이 솔로몬의 권위에 의지하는 것입니다.잠언의 내용을 한마디로 말한다면 인생의 지혜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다. 내용이 다양하다 보니 좀더 세속적이어서 “인생의 성공 비결”이라고 부를 수 있을만한 부분도 있습니다. 지혜로운 사람과 어리석은 사람, 부지런한 사람과 게으른 사람, 겸손한 사람과 오만한 사람 등을 대비시키면서 바른 인생길을 알려주는 가르침들을 제시하기도 합니다.그리고 이러한 가르침들의 바탕에 깔려 있는 것은 ‘인과응보’의 원칙입니다. 잠언은 의인은 복을 받고 악인은 벌을 받는다는 원칙을 믿는 고전적인 지혜를 대변합니다. “착한 이는 주님에게서 총애를 받고 교활한 자는 단죄를 받는다”(잠언 12,2). 이와 유사한 잠언들이 매우 많습니다. 흥부 놀부식의 가르침들입니다. 더구나 그 복과 벌은 모두 현세에서 이루어집니다. 초기의 지혜 문학에서는 아직 내세에 대한 희망이 분명하지 않기 때문입니다.정말로 의인은 복을 받고 악인은 벌을 받습니까? 더구나 현세에서, 그 원칙이 정확하게 성립됩니까? 꼭 그렇지는 않지요. 욥이 이 점에 대해 이의를 제기할 것입니다. 욥은 바로 잠언에 표현되어 있는 전통적인 가르침이 현실에서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것을 주장하고, 그래서 지혜 문학에서 잠언보다 더 늦은 시기의 단계를 보여주는 것입니다.잠언의 저자라고 현실을 모르는 것은 아닙니다. “제비는 옷 폭에 던져지지만 결정은 온전히 주님에게서만 온다”(잠언 16,33). 그러나 그가 역설하려 하는 것은 이 세상의 질서에 대한 믿음입니다. 하느님께서 계시기 때문에, 그 하느님께서 이 세상을 다스리시기 때문에 세상은 혼돈과 무질서일 수 없고 불의를 저지르는 사람이 끝까지 잘될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잠언의 저자를 보고 너무 순진하고 현실을 모른다고 말할 이들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세상을 제멋대로 굴러가게 내맡겨두지 않으시고 자연 질서와 이 세상의 정의를 지켜가시는 하느님을 경외하지 않는다면 과연 어떤 삶이 가능할까요. 잠언의 신앙은 우리가 딛고 서 있는 땅과도 같습니다. 앞이 보이지 않는 어둠에서라도, 발밑에 땅이 있다는 믿음이 우리의 발걸음을 가능하게 합니다. 그리고 우리가 아이들에게 바른 삶을 가르치려 할 때에 그러하듯이 잠언의 저자는 지혜의 스승으로서 아직 미숙한 그의 제자들에게 이러한 원칙에 대한 믿음을 가르칩니다. 때로는 열심히 노력한 끝에 실망을 겪게 되리라는 것을 알면서도, 하느님께 대한 믿음으로 선과 악에 대한 갚음을 생각하며 살아가라고 권고합니다. 속임수와 편법으로 성공하려 하지 말고, 부지런히 일하며 올바르게 행동하여 후회 없는 삶을 살라고 말합니다.마지막으로 주목할 것은 1─9장입니다. 이 부분에서는 ‘지혜’라는 여인의 초대와 ‘우둔함’이라는 여자의 초대를 제시하면서 선택을 촉구합니다. 지혜는 번잡한 길목을 지나다니는 사람들을 부르며 초대하며, 사람들에게 “너희는 와서 내 빵을 먹고 내가 섞은 술을 마셔라”(잠언 9,5)라고 초대합니다. 10장부터 이어지는 지혜의 가르침에 귀를 기울이라는 것입니다. 지혜는, 임금들이 세상을 잘 통치하는 것도, 하느님께서 세상을 질서 있게 창조하고 섭리하시는 것도 바로 그 지혜를 통해서라고 말합니다. 지혜는 하느님께 속하고 하느님께서 당신의 지혜로서 이 세상을 만드셨으니, 그 지혜의 길을 따라야 생명에 이르게 되리라고 말합니다. 이런 전제들이 앞에 붙어 있음으로써, 단순한 인생 성공 비결을 보여주는 것처럼 보이는 부분마저도 신앙생활의 가르침으로 변모됩니다. 축적된 인생의 경험만을 바탕으로 처세술을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을 경외하는 사람으로서 이 세상을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를 알려주는 책이 되기 때문입니다. 다른 말로 하면, 잠언의 첫 부분에 나오는 지혜의 초대는 잠언의 다양한 가르침들이 인간이 생명과 행복에 이르기 위하여 하느님의 뜻을 따라 걷도록 인도해 주는 지침임을 제시해 줍니다.<성 도미니코 선교수녀회, 대전가톨릭대 교수> 평화신문2016.01.26
[위대한 신앙의 신비,기도] (8) 구약에 나타난 기도- 다윗, 임금의 기도 백성들에게 기도의 모범된 다윗 구약 성경에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기도하는 법을 가르친 이들은 주로 백성의 지도자들, 곧 왕과 예언자들이었습니다. 교리서(2578~2580항) 는 임금의 기도에 대한 본보기로 다윗의 기도를 이야기합니다. 교리서는 다윗 임금의 기도를 이야기하기에 앞서, 하느님 말씀에 따라 다윗에게 기름을 부어 임금으로 세운 예언자 사무엘을 먼저 언급합니다. 사무엘은 어머니 한나에게서 주님 앞에 어떻게 나아가야 하는지를, 그리고 스승인 사제 엘리에게서는 어떻게 하느님의 말씀을 들어야 하는지를 배웠습니다. 사무엘의 어머니 한나는 마음이 쓰라려 흐느껴 울 정도로 간절한 마음으로 기도드립니다. 그리고 그 기도는 속마음을 털어놓는 기도였습니다. 하느님께서는 한나의 기도를 들으시고 아들(사무엘)을 주십니다. 그리고 한나는 기도하면서 주님께 약속한 대로 아들을 주님께 바칩니다(1사무 1장 참조). 사무엘은 이런 어머니에게서 어렸을 때부터 주님께 기도 바치는 법을 배웠을 것입니다. 하지만 주님 말씀을 듣는 법은 사제 엘리에게서 배웁니다. 그것은 “주님 말씀하십시오, 당신 종이 듣고 있습니다”(1사무 3,9) 하는 자세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기도의 몇 가지 중요한 자세를 확인할 수 있습니다. 편의상 순서를 매기자면 기도는 ① 간절한 마음으로 드려야 합니다. 간절함은 하늘을 울립니다. ② 속마음을 털어놓아야 합니다. 기도는 진솔해야 합니다. 또 진솔하지 않으면 간절함도 없습니다. 진솔하지 않은 기도를 간절하게 바친다는 것은 가식이고 위선입니다. ③ 마음을 열고 경청할 수 있어야 합니다. “주님 말씀하십시오. 당신 종이 듣고 있습니다”라는 응답은 내 뜻이 아니라 하느님의 뜻을 기꺼이 따르겠다는 것입니다. 여기에는 하느님께서는 만사를 좋게 이끄신다는 확신과 신뢰가 전제돼 있습니다. 교리서는 다윗을 “누구보다도 하느님 마음에 드는 훌륭한 임금”(2579항)이라고 소개합니다. 다윗은 “백성을 위하여 또 백성의 이름으로” 기도하는 목자입니다. 지도자의 첫째 덕목은 자신이 아닌 백성을 위해 사는 삶입니다. 이는 기도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다윗이 누구보다도 하느님 마음에 드는 훌륭한 임금인 것은 그가 도덕적으로 더할 나위 없서가 아닙니다. 하느님 뜻을 따르는 순명과 하느님께 바치는 찬미, 자신의 잘못을 뉘우치는 참회 때문입니다. 그래서 임금인 다윗의 순명과 찬미와 참회는 또한 백성에게 기도의 모범이 됩니다. 하느님의 뜻을 찾고 따르려는 자세,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베풀어 주시는 놀라운 은총에 대한 찬미, 그리고 잘못을 솔직하게 고백하고 겸손하게 뉘우치는 마음, 우리의 삶 자체가 이러한 기도의 삶으로 이루어진다면 우리 또한 ‘하느님 마음에 드는 자녀’가 될 것입니다. 하느님의 집, 기도의 집을 지어 바치겠다는 다윗의 뜻을 하느님께서는 물리치십니다. 그의 뜻은 아들 솔로몬이 현실로 만듭니다. 교리서는 솔로몬이 성전을 봉헌하면서 바친 기도(1열왕 8,10-61 참조)와 관련, 임금의 기도가 어떠해야 하는지를 제시합니다. 왕은 겸손한 자세로 그리고 간절한 마음으로 하늘을 향하여 두 손을 쳐들고 △자신과 온 백성을 위해 △미래의 후손들을 위해 △백성의 죄에 대한 용서와 매일의 필요를 위해 △백성의 마음이 온전히 주님을 향하도록 기도합니다. 지도자의 기도, 가장의 기도 역시 이런 기도이면 좋겠습니다. 이창훈 기자 changhl@pbc.co.kr 이창훈 기자 changhl@pbc.co.kr 백영민2016.07.20
![[안소근 수녀와 함께 떠나는 구약 여행] (65)“하느님께서는 인간을 불멸의 존재로 창조하시고”(지혜 2,23)](//cpbc.co.kr/CMS/newspaper/2016/04/rc/629720_1.0_titleImage_1.jpg)
[안소근 수녀와 함께 떠나는 구약 여행] (65)“하느님께서는 인간을 불멸의 존재로 창조하시고”(지혜 2,23)지혜에 귀 기울이고 영원한 생명 얻으라 헤르만 골 작,‘ 알렉산드리아의 파괴’, 불멸! 지금까지 구약 성경의 다른 부분에서는 나오지 않았던 주제입니다. 이렇게 새로운 주제가 나오는 것은 지혜서가 구약 성경의 책들 가운데 가장 작성 연대가 늦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전통적으로는 흔히 이 책을 “솔로몬의 지혜”라고 일컫지만, 솔로몬은 이 책의 저자일 수 없습니다. 내용상으로 볼 때 이 책의 앞부분은 헬레니즘 시대의 가치관과 유다교의 전통적 가치관 사이의 갈등을 반영하고 있습니다. 저자는 유다교와 그리스-헬레니즘 문화를 모두 잘 알고 있으며, 구약 성경을 인용할 때에도 그리스어로 번역된 70인역을 사용하고 그밖에도 그리스와 로마의 철학과 문학에도 정통한 것으로 나타나기 때문입니다. 이 책은 아마도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에서, 그리스식 교육을 받은 유다인들 사이에서 생겨난 것으로 보입니다. 작성 연대는 기원전 1세기 중반에서부터 로마가 알렉산드리아를 점령한 기원전 30년 사이가 됩니다.한동안 떠나 왔던 지혜문학으로 다시 돌아가 봅시다.의인은 복을 받고 악인은 벌을 받는다는 것이 잠언이 말하는 고전적인 지혜의 가르침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후에, 욥기와 코헬렛은 그 원칙에 의문을 품었습니다. 불행하게 살다 죽는 의인들도 있었기 때문입니다. 내세에 대한 희망은 아직 없었습니다. 여기에서 인간의 지혜는 한계에 부딪혔습니다. 이 세상의 질서는 인간의 능력으로는 파악할 수 없는 것으로 보였습니다. 그런데 지혜서에서는 이 벽을 넘어섭니다. 인간 지혜의 한계 문제에서 벽을 넘어설 수 있는 것은, 이미 집회서에서 말한 바와 같이 하느님께서 주시는 지혜에 의지하기 때문입니다. 집회서에서 벤 시라는, 하느님께서 홀로 지혜를 갖고 계시고 그 지혜를 율법을 통해 이스라엘에게 주셨다고 말했습니다(집회 24장 참조). 지혜서에서는 솔로몬을 주인공으로 내세우면서, 그가 하느님께 청하여 지혜를 받았음을 강조합니다. 솔로몬도 태어날 때에는 다른 사람들과 똑같은 인간이었지만(지혜 7장), 하느님께 기도를 올리자 인간 스스로의 능력으로는 도달할 수 없는 지혜가 그에게 주어졌습니다(지혜 9장). 솔로몬이 다른 무엇보다 지혜를 청했다는 이야기는 열왕기 상권 3장에 나오지요. 지혜서 9장에서는 그의 기도를 제시합니다. “당신께서 지혜를 주지 않으시고 그 높은 곳에서 당신의 거룩한 영을 보내지 않으시면 누가 당신의 뜻을 깨달을 수 있겠습니까?”(지혜 9,17).다음으로 인과응보 문제에 있어서, 지혜서는 불멸을 말합니다. 어떻게 하면 불멸을 누릴 수 있을까요? 지혜서의 대답은 지혜를 추구함으로써라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주시는 지혜를 받아들임으로써 인간은 불멸을 누리게 됩니다. 이제는 의인이 이 세상에서 복을 누리지 못하거나 아니면 일찍 죽는다 해도 그것 때문에 인과응보의 원칙이 뒤흔들리지는 않습니다. 그렇게 죽은 의인은 내세에서 복을 누릴 것이기 때문입니다. 욥기의 마지막에서는 욥이 잃어버렸던 재산을 되찾고 자녀들도 다시 얻게 되지요(욥 42장). 만일 이러한 회복이 없이 그대로 욥이 죽었다면 어떻게 될까요? 지혜서에 따르면 아무 문제가 없습니다. 내세에 대한 믿음이 없었을 때에는 오래 사는 것과 후손이 많은 것이 인간이 누릴 수 있는 최대의 복이었지만, 이제는 악인으로 오래 사는 것보다 의인으로 일찍 죽어 영원한 복을 누리는 것이 낫다는 결론이 나오게 됩니다(지혜 4장). 어리석은 이들의 눈에는 의인들이 죽은 것 같이 보일지라도 그들의 영혼은 하느님 안에 있다고 말하는 지혜서 3장은, 장례 미사 때와 순교자 축일에 읽는 독서이기도 합니다.그러면, 불멸은 얻기 어려운 것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여기서 지혜서는 창세기로 돌아갑니다. 하느님께서는 인간을 당신 모상대로 만드셨습니다. 그래서 인간은 본래 하느님의 본성을 닮아 불멸을 지니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인간이 죽는 것은 인간 스스로 죄를 지음으로써 죽음을 자신 안에 끌어들이기 때문입니다.이 세상에서 살고 또 죽어가는 인간들을 바라보면서는, 인간은 본래 사멸할 존재라고 생각하게 되지요. 다른 문화들의 신화에서도 신들과 인간의 차이는 신들은 죽지 않는 데 비하여 인간은 죽는다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사멸할 인간은 정말 힘써 노력해야만 간신히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있다고 여기기 쉽습니다. 그러나 지혜서가 말하는 것은 그와 다릅니다. “하느님께서는 죽음을 만들지 않으셨고 산 이들의 멸망을 기뻐하지 않으신다. 하느님께서는 만물을 존재하라고 만드셨으니 세상의 피조물이 다 이롭고 그 안에 파멸의 독이 없으며 저승의 지배가 세상에는 미치지 못한다”(지혜 1,13-14). 엄청난 말씀입니다. 그러나 알고 보면, 전혀 새로운 말씀은 아닙니다. 지혜서는 다른 곳이 아니라 창세기에서 그 근거를 찾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을 닮은 인간의 위대함과 죄에 떨어진 인간의 나약함, 인간의 그 두 모습 가운데 창세기는 인간의 선한 본성을 먼저 이야기합니다. 비록 죄로 손상되었다 하더라도 그것이 인간의 본래 모습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지혜서에서도, 지혜를 찾고 불멸을 얻는 것이 그렇게 어려운 일이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지혜는 “다정한 영”(지혜 1,6), 어원적으로 말하면 ‘인간을 좋아하는 영’입니다. 인간이 지혜를 찾기 전에 먼저 지혜가 인간에게 오고 싶어 합니다. 비뚤어진 생각과 간악한 마음으로 그 지혜의 길을 막지 않는다면(지혜 1,3-4), 지혜는 우리에게 옵니다. 이러한 가르침을 토대로 지혜서는, 성경 말씀 안에서 지혜에 귀를 기울이고 영원한 생명을 찾으려는 이들에게 영원한 희망을 말합니다. <성 도미니코 선교수녀회, 대전가톨릭대 교수> 평화신문2016.04.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