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들이 어떻게 기도했길래 하느님이 응답해 주셨나 성경 인물들의 기도 상·하 성경 인물들의 기도 상·하차동엽 지음/위즈앤비즈/2만 5000원무(無)에서 유(有)가 탄생하는 경우는 없다. 소설가들은 한 권의 소설을 쓰기 위해선 수십 수백 편의 소설을 ‘필사’한다고 한다. 그렇게 다른 작가의 작품을 통해 자신만의 세계를 만들어 간다. 미술가들은 또 어떠한가. 위대한 걸작들을 보고 익히면서 자기만의 화풍을 구축해 간다.기도도 마찬가지다. 기도할 줄 모른다면, 기도를 잘하고 싶다면 먼저 신앙 선배들이, 신앙 선조들이 바친 기도를 찾아보고 그 기도를 따라 해봐야 한다. 배움에 왕도가 없듯이 기도에도 왕도가 없다. 차동엽(인천교구) 신부가 펴낸 「성경 인물들의 기도」는 기도의 길을 닦은 성경 속 인물들의 갖가지 기도가 담겨 있다. 그들이 무슨 기도를 바쳤는지, 하느님께선 응답해 주셨는지, 기도의 결말은 어떠한지를 살펴봤다. 차 신부가 ‘기도 선배’인 성경 속 인물들을 통해 배운 기도와 기도 체험을 엮어낸 것이다. 기도와 믿음에 도(?)가 텄을 것 같은 차 신부지만, 그 역시 “기도를 기도답게 하고 싶었고 그러려면 기도 선배들에게 배우는 게 먼저였다”고 털어놨다. 책은 구약편과 신약편 2권으로 구성돼 있다. 구약편엔 아담와 카인, 모세, 여호수아, 솔로몬, 다니엘, 말라키 등 34명의 기도가 들어 있다. 신약편은 세례자 요한에서부터 예수님까지 19명의 기도를 담았다. 어떤 기도는 금세 하느님께 응답받았고 어떤 기도는 거절당하기도 했다. 응답을 받기까지 한평생 기다린 이들도 있다. 성경 인물들의 기도를 통해 세상만사 희로애락과 한 시대의 흥망성쇠를 엿볼 수 있다. 차 신부는 기도를 배우면서 시편 102편 말씀에서 깨달음을 얻었다. “주님께서… 헐벗은 이들의 기도에 몸을 돌리시고 그들의 기도를 업신여기지 않으시리라”(시편 102,17-18). 하느님 앞에 기도를 바치는 이들은 임금이나 예언자, 과부나 고아 할 것 없이 ‘헐벗은 이들’이 됐다. 그리고 이들의 기도는 애원이고 탄원이었으며 하소연이었다. 하느님께선 그 기도를 ‘업신여기지 않고’ 보듬어 주셨다. 차 신부는 “우리 시대 저마다의 애환과 고달픔을 속속 헤아려 주시는 주님 연민이 고동치는 듯하다”고 했다. ‘대체 성경 인물들 기도가 나와 무슨 상관이냐’고 되묻는 이들에게 차 신부는 “그들의 기도가 우리 기도를 한 단계 발전시켜 주는 영감이 되기를 바란다”고 했다. 인천교구장 최기산 주교는 책을 추천하며 “신앙 선배들은 우리에게 척박한 삶의 터에서 살아남는 생존 기도, 실전 기도를 가르쳐 준다”면서 “무작정 기도하기보다는 먼저 기도하는 법을 충실히 배우는 것이 상책”이라고 했다.박수정 기자 catherine@pbc.co.kr 백영민2016.04.27
[안소근 수녀와 떠나는 구약여행] “자기 조상 다윗의 마음과는 달리”(1열왕 15,3) 우상에 빠진 솔로몬, G.B. Venanzi. 열왕기에는 “다윗의 마음과는 달리” 또는 그와 비슷한 표현들이 자주 나옵니다. 그럴 수밖에 없습니다. 임금들을 평가하는 기준이 다윗인데 대부분의 임금들이 낙제했기 때문입니다. 그 첫 번째가 솔로몬입니다. 열왕기 저자는 솔로몬의 지혜와 영화에 대해 알고 있습니다. 그가 하느님께 지혜를 청하여 받았고 매우 부유했으며 7년에 걸쳐 성전을 지었다는 것도 압니다. “솔로몬 임금은 부와 지혜에서 세상의 어느 임금보다 뛰어났다”(1열왕 10,23). 하지만 그의 마음은 한결같지 못하였다고 말합니다(1열왕 11,4). 솔로몬을 부정적으로 보는 첫째 이유는 그가 외국 여자들을 아내로 맞아들였기 때문입니다. 여호수아와 판관 시대 이스라엘이 가나안에 들어가면서부터, 그 땅의 주민들과 혼인 관계를 맺는 것은 금지되어 있었습니다. 그들을 따라 다른 신들을 섬기게 될 위험 때문이었습니다. 그런데 솔로몬은 여러 나라의 수많은 여자를 데려왔고 그래서 한 분이신 하느님만을 사랑하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사실은 그것만이 아닙니다. 7년 동안 성전을 짓고 13년 동안 궁전을 지으면, 그 일은 누가 하고 그 비용은 누가 냅니까? 다 백성들입니다. 임금은 영화를 누려도 백성은 죽을 지경입니다. 그러다가 예언자 아히야가 예로보암의 반란을 예고하며, 열두 지파 가운데 열 지파가 솔로몬에게서 돌아서리라고 선언합니다(1열왕 11,26 이하). “한 분이신 하느님”을 중시하는 신명기계 역사가는 그것이 솔로몬이 이방 신들을 섬겼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북쪽의 열 지파와 남쪽의 두 지파가 갈라진 데에는 지역 감정이 작용합니다. 솔로몬이 조세와 부역을 공평하게 부과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티로 임금 히람에게 재목을 받고 북부 성읍 스무 개를 떼어 주었을 때 북부 주민들은 어떻게 느꼈을까요? 그가 이렇게 백성들의 불만을 키워 놓았기에, 그의 사후에 일어난 왕국 분열은 그의 탓이 컸습니다. 그러면, 솔로몬을 어떻게 평가할 수 있을까요? 외적으로는 이스라엘 역사상 최고의 번성기입니다. 다윗이 영토도 가장 넓게 확대해 놓았습니다. 솔로몬이 성전도 지었습니다. 그러나 이 성공은 그저 외적인 성공일 뿐이었습니다. 솔로몬의 마음이 한 분 하느님만을 섬기지 못했기에 신명기계 역사가의 눈에 그는 훌륭한 임금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자기 아버지 다윗과는 달리, 나의 길을 걷지 않고, 내 눈에 드는 옳은 일을 하지도 않았으며, 나의 규정과 법규를 지키지도 않았다”(1열왕 11,33). 이것이 흔히 위대하다고 생각하는 솔로몬에 대한 신명기계 역사가의 평가입니다. 솔로몬이 죽고 나니 아들 르하브암이 임금이 됩니다. 예로보암이 그를 찾아갑니다. 부역과 조세를 줄여 달라는 것입니다. 르하브함은 거부하고, 왕국은 분열됩니다. 예로보암은 북부의 열 지파와 함께 북왕국 이스라엘을 세우고, 르하브함에게는 남쪽의 두 지파만이 남습니다. 이후로 북왕국에서는 여러 차례 왕조가 바뀌게 되고, 남왕국에서만 다윗 왕조가 멸망 때까지 이어가게 될 것입니다. 여기서 예로보암의 금송아지 문제가 발생합니다. 북왕국 이스라엘에서 생각하니, 백성이 명절이면 예루살렘에 있는 솔로몬 성전으로 간다는 것입니다. 이래서는 아무래도 민심이 예루살렘으로 기울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예로보암은 베텔과 단에 성소를 세우고 금송아지를 하나씩 만들어 놓습니다. 본래 의도는 다른 신을 섬기려는 것이 아니라 거기서 야훼 하느님을 섬기려는 것이었다 하더라도, 백성은 쉽게 우상 숭배에 빠졌습니다. 여기서 또 평가를 해야 합니다. 제 생각에는 르하브암이 잘못했습니다. 집회서에서도 그는 우둔하고 지각이 없었으며 그의 정책 때문에 반란이 일어났다고 말합니다(47,23). 그때라도 백성의 부담을 줄여 주었더라면 솔로몬 통치 기간 동안 생겨난 불만을 잠재울 수 있었을 것 같습니다. 그런데 열왕기에서는 별로 르하브암을 탓하지 않습니다. 비난을 받는 것은 예로보암입니다. 베텔과 단의 성소 때문입니다. 신명기의 모토 “한 분이신 하느님”을 흐리게 한 그는 결코 좋은 평가를 받지 못합니다. 그 자신뿐만 아니라 그의 뒤를 이은 북왕국 이스라엘의 임금들은 모두 신명기계 역사가의 기준을 통과하지 못합니다. 예로보암을 따라갔기 때문입니다. 남왕국 유다에서도, 긍정적인 평가를 받는 임금은 히즈키야와 요시야 정도뿐입니다. 신명기계 역사가의 눈에 만점에 가까운 답안지는 요시야입니다. 요시야는 그의 할아버지와 아버지 시대에 만연했던 우상 숭배를 없애고, 점쟁이와 영매 등을 금지했습니다. “요시야처럼 모세의 모든 율법에 따라,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님께 돌아온 임금은, 그 앞에도 없었고 그 뒤에도 다시 나오지 않았다”(2열왕 23,25). 그는 종교적인 측면에 초점을 맞추지만, 당시의 상황에서는 종교적으로 이방 신들을 섬기지 않으려면 정치적으로도 독립을 추구해야 했습니다. 히즈키야와 요시야는 아시리아의 영향에서 벗어나려고 애쓴 임금들이기도 합니다. 평가 기준의 문제를 되짚어 봅시다. 열왕기 저자는 신명기의 가르침에 비추어 이스라엘의 왕정을 돌아봅니다. 그러기에 외적인 업적은 큰 의미를 갖지 않습니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 이것이 훌륭한 임금의 조건이었습니다. 군마를 늘리고 아내를 늘리고 금과 은을 모은 솔로몬은 훌륭한 임금일 수 없었습니다(신명 18,14-20 참조). 백영민2015.04.22
[안소근 수녀와 함께 떠나는 구약 여행] (21) “내가 집 지을 준비를 해 두어야 하겠다”(1역대 22,5).성전을 지었기에 ‘흠없는 왕들’로 기록 솔로몬이 지은 성전의 모형. “내가 집 지을 준비를 해 두어야 하겠다”(1역대 22,5).신명기에서부터 그리고 신명기계 역사서인 여호수아기, 판관기, 사무엘기, 열왕기를 거치면서 가장 중요한 주제가 “한 분이신 하느님”이었습니다. 이제 역대기로 가면 같은 시대의 역사를 기술하면서도 강조점이 옮겨갑니다. 왜 그럴까요?구약 성경의 역사서들에서, 신명기계 역사서가 첫 번째 계통이라면 두 번째 계통이 역대기계 역사서입니다. 역대기, 에즈라기, 느헤미야기가 여기에 속합니다. 이들 사이에 차이점도 있지만 대략 공통점이 많고 전체 줄거리가 이어지기 때문에 같은 역대기계의 책들이라고 부를 수 있습니다. 역대기는 아담부터 시작해서 키루스 칙령까지 이르고 에즈라기와 느헤미야기는 키루스 칙령에서 시작하여 유배에서 돌아온 후의 상황을 이야기하고 있으므로, 작성 연대는 빨라도 기원전 4세기가 될 것입니다.그러니 저자가 역대기를 썼을 때에는 이미 사무엘기와 열왕기가 있었습니다. 역대기 저자는 그 책들을 많이 참조했고, 많은 부분을 그대로 가져오기도 했습니다. 다른 책들도 참조했습니다. 왕조실록들이나 예언자들에 대한 기록도 사용했음이 본문에 나타납니다. 저자가 가장 많이 의존하는 것은 사무엘기와 열왕기이고 다른 자료들은 현재 남아 있지도 않으니, 역대기를 그 책들과 비교하면 역대기의 특징이 드러납니다. 이미 역사서가 있었는데 또 하나의 역사서를 쓴 이유가 무엇일까, 차이점이 무엇일까를 찾아보는 것입니다.신명기계 역사서는 신명기 다음에, 곧 오경 다음에 이어졌지만, 역대기는 아담부터 다시 시작합니다. 하지만 다윗 이전의 역사는 족보만으로 처리합니다. 족보는, 가장 짧게 역사를 줄여 놓는 방법이지요. 이 족보에서는 열두 지파 가운데 유다 지파와 레위 지파에 특별한 관심을 보이는 것이 나타납니다. 유다 지파는 물론 다윗 왕조 때문이고, 레위 지파는 사제와 레위인들을 중시하기 때문입니다. 사울은 족보와 죽음만 언급되고, 사무엘은 등장하지도 않습니다. 사울 왕국은 중요성을 띠지 않는 것입니다.가장 비교하기 좋은 부분은 다윗과 솔로몬에 관한 부분입니다. 역대기는 다윗과(1역대 10─29장) 솔로몬을(2역대 1─9장) 상세히 다룹니다. 다윗과 솔로몬은 신명기계에서도 물론 가장 중요했던 임금들입니다. 그러나 중요한 이유가 다릅니다. 다윗에게서는, 전쟁 기록과 예루살렘 점령, 그리고 나탄의 예언 등이 나오지만 무엇보다도 그가 성전 건축을 준비했다는 점이 강조됩니다. 22장에서부터, 그 자신은 전쟁을 하며 피를 많이 흘렸기 때문에 성전을 지을 수 없고 평온한 사람(평화의 사람)인 아들 솔로몬이 성전을 지을 것이라고 말하면서 그 아들을 위해 미리 준비를 합니다. 금과 은과 목재를 쌓아두는 것은 물론, 사제단과 레위인, 성가대, 성전 문지기, 창고 관리인 등도 모두 조직합니다. 성전은 짓기도 전에!열왕기와 역대기에서 가장 차이가 나는 부분은 솔로몬입니다. 열왕기에서 솔로몬은 훌륭한 임금이 아니었습니다. 한 분이신 하느님을 사랑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역대기에서 솔로몬은 대단히 훌륭한 임금입니다. 성전을 지었기 때문입니다. 역대기에서도 솔로몬의 지혜와 부귀영화에 대한 언급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가장 길게 서술되는 것은 성전 건축입니다.이와 더불어, 다윗과 솔로몬에게서 부정적인 사건들은 기록되지 않습니다. 기나긴 다윗의 왕위 등극 설화와 왕위 계승 설화, 역대기에는 그런 흔적이 없습니다. 물론 사무엘기와 열왕기에서도 그 부분에서 다윗은 흠 없는 사람으로 나오지만, 역대기에서는 다윗 주변에서 칼부림이 나타나지 않게 합니다. 밧 세바 이야기도 빠집니다. 솔로몬의 경우는 그가 집권 초기에 정적들을 처단한 것이나 그의 정략결혼, 그에 따른 우상 숭배에 대해서 말하지 않습니다. 성전을 준비하고 건축한 다윗과 솔로몬에게 오점이 되는 이야기들은 모두 삭제된 셈입니다.이후의 임금들에 대해서도, 성전을 보수하거나 전례를 개혁한 임금들은 긍정적 평가를 받습니다. 아사, 여호사팟, 요아스, 요탐, 히즈키야가 여기에 속합니다. 또한, 임금들과 별도로도 전례와 레위인들에 대해 자주 언급됩니다.시험 문제에 신명기계 역사서와 역대기계 역사서를 비교하라고 하면 대개 여기까지 잘 씁니다. 하지만 결정적인 부분은 빠졌습니다. 왜 이렇게 차이가 날까요?작성된 시대가 다르기 때문입니다. 가장 간단하게 말하면, 역대기가 작성된 시대에 성전이 중요했기 때문입니다. 유배에서 돌아온 이스라엘에는 이미 임금이 없었습니다. 왕정 시대에 중시되던 군사적, 정치적 업적들은 큰 의미를 갖지 못했습니다. 지금 이스라엘은 성전과 그 사제들을 중심으로 하는 공동체로 존속하고 있었습니다. 역대기가 작성된 시기 이스라엘의 정체성은 성전에 근거하고 있었고, 역대기는 그 성전의 중요성과 정당성을 다윗과 솔로몬으로부터 이끌어옵니다. 왕국이 무너지고 모든 것을 잃어버린 이스라엘에게, 그 성전이 그들 가운데 하느님께서 계심을 확인하는 자리가 되었던 것입니다. 역대기에서도 하느님께서 이스라엘을 다스리신다는 것은 중요하지만, 그 하느님의 통치는 이제는 다윗 왕조를 통해서가 아니라 성전에 모인 백성이 하느님을 찬미하는 가운데 확인되었습니다. 그래서 전례도 중요해집니다.“주님, 정녕 하늘과 땅에 있는 모든 것이 당신의 것이고, 나라도 당신의 것입니다[…]. 저희는 지금 당신을 찬송하고, 당신의 영화로운 이름을 찬양합니다”(1역대 29,11-12). 평화신문2015.05.06
[성경 속 도시] (64) 예루살렘 (상)하느님의 집, 첫 성전을 세운 곳 예루살렘은 유다교, 그리스도교, 이슬람교 모두의 주요 성지로 분쟁이 끊이지 않는 곳이다. 사진은 2014년 5월 프란치스코 교황이 통곡의 벽에서 기도하고 있는 모습. 【CNS 최고의 성지, 예루살렘은 늘 기대와 설렘을 주는 도시다. 예루살렘은 유다교, 그리스도교, 이슬람교 모두의 주요 성지로, 어떤 장소는 시간대별이나 구역별로 나눠 이들 세 종교가 관리한다. 예루살렘은 유다인들에게 역사와 종교와 민족 의식의 원천이고, 그리스도교 신자들에게는 가장 중요한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의 현장이다. 또 이슬람교도들에게도 예루살렘은 중요한 성지이다. 그래서 거대한 옛 도시 성벽으로 둘러싸여 있는 구시가지에는 유다인 지역과 아르메니아 지역, 그리스도교 지역, 무슬림 지역 등 4개 지역으로 구분돼 있다. 1948년 아랍과 이스라엘 전쟁 이후, 구시가지와 동(東)예루살렘은 트란스요르단에, 서(西)예루살렘은 이스라엘에 분할되었다가 1967년 이스라엘이 동예루살렘을 점령했다. ‘평화의 도시’라는 이름이 무색하게 예루살렘은 지금도 분쟁이 끊이지 않는 곳이다. 어디서나 기관총을 휴대한 군인들을 쉽게 볼 수 있고 출입 관리도 까다롭기로 유명하다. 그런데 예루살렘은 국제법상으로는 어느 나라에도 속해 있지 않은 도시다. 현재 이스라엘이 동예루살렘을 인위적으로 점령 중이다. 지형적으로 동쪽으로는 키드론 골짜기와 남쪽으로는 힌놈 골짜기의 가운데 솟은 구릉에 사람들이 모여 살았던 것은 기원전 약 3000년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산악 지형의 예루살렘은 외부 침입을 쉽게 막을 수 있는 성채를 중심으로 서서히 도시가 발전했다. 이스라엘이 가나안 정복 후 약속된 땅을 분배할 때 예루살렘은 본래 벤야민 지파에 속하였던 곳이다(여호 18,11-28 참조). 성경의 기록을 보면 예루살렘의 가장 유명한 지도자는 다윗왕이다. 기원전 약 1000년경 이스라엘의 선조 다윗 왕이 구릉에 위치한 ‘시온의 성’이라 불리던 도시를 정복한 후 유다인들은 이곳을 ‘다윗의 성’이라 불렀다. 다윗 임금이 부하들을 거느리고 예루살렘으로 가서 그 땅에 사는 여부스족을 치려 하자, 여부스 주민들이 다윗에게 말하였다.“‘너는 이곳에 들어올 수 없다. 눈먼 이들과 다리 저는 이들도 너쯤은 물리칠 수 있다.’ 그들은 다윗이 거기에 들어올 수 없으리라고 여겼던 것이다. 그러나 다윗은 시온 산성을 점령하였다. 그곳이 바로 다윗 성이다”(2사무 5,6-7). 그는 계약의 궤를 예루살렘으로 옮겼고 그의 아들 솔로몬은 예루살렘의 첫 성전을 건축했다. 그 이후 예루살렘은 이스라엘 민족과 역사에서 중요한 의미를 지니게 되었다. 서른 살에 이스라엘 임금이 된 다윗은 헤브론에서 7년 반 동안, 예루살렘에서 33년 동안 이스라엘과 유다를 다스렸다(2사무 5,3-5 참조). 다윗이 죽은 후 그의 아들 솔로몬 왕은 도시에 왕궁과 신전 및 성채를 새로이 건설하고 언약궤를 신전 안에 보관하였다. “또한 주님께서 우리 조상들을 이집트 땅에서 이끌어 내실 때에 그들과 맺으신 계약을 넣은 궤를 둘 곳을 여기에 마련하였소”(1열왕 8,21).예루살렘은 신약에서도 중요한 장소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지상 생활에서 시작하여 그분의 죽음과 부활과 승천이 이뤄진 장소이다. 성령 강림 후 사도들은 한동안 예루살렘에 머물면서 교회 공동체를 구성하여 복음을 선포하였다. “하느님의 말씀은 더욱 자라나, 예루살렘 제자들의 수가 크게 늘어나고 사제들의 큰 무리도 믿음을 받아들였다”(사도 6,7). 허영엽 신부(서울대교구 홍보국장) 평화신문2015.10.13
[안소근 수녀와 떠나는 구약 여행] (54) “먹어라, 벗들아. 마셔라, 사랑에 취하여라”(아가 5,9)연가, 알고 보니 하느님 창조에 대한 찬미가 12세기 윈체스터 성경에 나오는 그림. 솔로몬과 술람밋 연애 편지도 요약합니까? 불가능하지요. 아가도 마찬가지입니다. 아가는 사랑의 노래입니다. 더 이상 내용을 풀어 말할 수가 없습니다. 아가는 줄거리가 있는 이야기가 아니라 커다란 하나의 감탄사와 같기 때문입니다. 부분적으로는 사랑의 여정이 나타나기도 해서 사랑하는 남녀가 서로를 찾고, 서로의 찾음이 엇갈린 다음 마침내 서로를 만나 상대방의 아름다움에 경탄하고, 사랑의 합일이 이루어진 다음에는 다시 그 만남이 끝나는 모습이 그려지지만, 아가는 소설이 아닙니다.“솔로몬의 가장 아름다운 노래”(아가 1,1)라는 표제에 이어 즉시 적나라한 표현이 나옵니다. “아, 제발 그이가 내게 입 맞춰 주었으면!”(1,2). 성경에 이런 구절이 있었나 하고 깜짝 놀라시는 분들이 분명 있으실 것입니다. 옛날에도 많이 있었으니까요. 수천 년 전부터 아가를 읽어온 많은 이들이 이러한 애정 표현이 성경에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했습니다. 혹시 잘못 들어간 것은 아닐까, 아니면 다른 어떤 의미가 있는 것은 아닐까 생각했습니다.전통적으로는 아가가 겉으로는 남녀 간의 사랑을 노래하고 있지만, 사실은 ‘그런’ 사랑이 아니라 ‘다른’ 어떤 사랑에 대해 말하는 책이라고 여기는 이들이 많았습니다. 유다교에서는 아가의 주인공 남녀가 각각 신랑이신 하느님과 신부인 이스라엘을 나타낸다고 해석했습니다. 물론, 호세아와 예레미야, 에제키엘 같은 예언자들을 바탕으로 하는 해석입니다. 이전부터 하느님을 이스라엘의 신랑이시라고 불러왔기에, 아가를 읽으면서 자연스럽게 아가의 신랑 신부가 하느님과 이스라엘이라고 생각할 수 있었던 것이지요. 무리한 해석은 결코 아닙니다. 그리스도교의 해석도 기본 틀은 동일합니다. 이스라엘의 자리에 교회를 대입하면 됩니다. 교부들은 신랑이신 그리스도와 신부인 교회라는, 에페소 신자들에게 보낸 서간 5장 32절에도 나타나는 개념을 바탕으로 아가를 읽었습니다. 더 나아가서 베르나르도나 십자가의 성 요한, 아빌라의 데레사 같은 신비가들은 아가를 그리스도와 영혼 사이의 사랑 노래로 해석했습니다.특별한 인물이 하나 있었습니다. 5세기에 살았던 몹수에스티아의 테오도로는, 아가가 순전히 남녀 간의 사랑을 노래한 것이며 따라서 성령의 영감을 받은 책이 아니라고 주장했습니다. 그 주장은 단죄를 받았지요. 그런데 여기에서 잠시 생각을 해 봅시다. 몹수에스티아의 테오도로는 남녀 간의 사랑을 어떻게 평가했기에, 그 사랑을 주제로 하는 책이 성경이 될 수 없다고 여겼던 것일까요?아가에 대한 해석이 달라지기 위해서는 인간적 사랑에 대한 평가가 달라져야 했습니다. 그리고 그 일이, 르네상스와 종교 개혁, 계몽주의와 낭만주의의 시대에 이뤄졌습니다. 남녀 간의 사랑의 아름다움을 드러내놓고 말할 수 있게 되었을 때, 아가를 바라보는 시각도 바뀌었습니다.과연, 남녀 간의 사랑을 노래한 아가는 성경의 전통에서 벗어나 있었던 것일까요? 아가가 남녀 간의 사랑을 노래한 것이라서 성경에서 삭제해야 할까요? 그러면 창세기는 어떻게 할까요? 창세기에서는 모든 것이 하느님께서 보시기에 좋았다고 말합니다. 남녀의 사랑도 하느님 보시기에 좋았습니다. 하느님 보시기에 좋지 않았던 것은 아담이 혼자 있다는 사실이었고 그래서 그의 짝으로 하와를 만드신 것이었습니다. “이야말로 내 뼈에서 나온 뼈요 내 살에서 나온 살이로구나!”(창세 2,23). 이 말씀을 성경에서 뺄 수 없다면 아가도 뺄 수 없습니다. 아가의 토대는 구약 성경의 세계관의 바탕인 창조의 선성(善性)에 대한 믿음입니다. 창세기 2장 25절에서와 마찬가지로, 아가의 남녀는 알몸을 부끄러워하지 않습니다(아가에서 남자와 여자가 각각 상대방의 몸을 묘사하는 아가 4,1-7; 5,10-16; 7,2-10을 보십시오). 그들은 서로를 바라보며 끊임없이 “정녕 그대는 아름답구려”(1,15; 2,14; 4,1 등), “정녕 당신은 아름다워요”(1,16 등) 라고 경탄합니다. 궁극적으로 여기에서 긍정하는 것은 바로 창조의 선성입니다. 하느님께서 주신 선물의 아름다움을, 그 가치를 알아보고 경탄하는 것에서 죽음보다 강한 사랑이 생겨납니다. 여인의 입장에서 말한다면, “그대의 모습을 보게 해 주오 […]. 그대의 모습은 어여쁘다오”라는 연인의 목소리는(2,14) 벼랑 속에 숨어 있는 비둘기가 얼굴을 내밀고 밖으로 나오게 합니다. 서로의 가치를 인정하는 데에서 상대방에게 자신을 내어주는 것이 가능하게 되고, 남녀는 그 사랑 안에서, 바로 그 소위 세속적이고 육적인 사랑 안에서 하느님을 체험합니다.아가에서는 하느님을 직접적으로 언급하지 않는데, 하느님에 대한 언급으로 볼 수 있는 것은 8장 6절뿐입니다. 「성경」에서 “더할 나위 없이 격렬한 불길”이라고 번역된 구절은 한 단어로 되어 있고 그 마지막이 “야”인데, 이것은 최상급의 의미로 이해하여 이렇게 번역할 수도 있지만 “야훼의 불길”로 번역할 수도 있습니다. 이 두 번째 해석을 따른다면, 아가서 8장 6절은 인간적 사랑에 관한 아가의 신학 전체를 요약해 주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아가의 저자는 에덴동산에 살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는 이 세상에 이미 죄와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워졌음을 알고 있습니다. 인간의 근본적인 선성을 의심하게 하는 모든 어둠에도 불구하고 사랑의 모험을 시작할 수 있다면, 그것은 하느님의 불꽃인 그 사랑이 사랑에 따르게 마련인 자신의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태워 없애기 때문일 것입니다.<성 도미니코 선교수녀회, 대전가톨릭대 교수> 평화신문2016.01.12
[성경 속 도시] 성스러운 땅 모리야솔로몬이 주님의 집 지은 땅 예루살렘 모리야 산 위에 세워진 이슬람 황금돔 안에는 큰 바위가 있다. 이 바위는 아브라함이 이사악을 번제물로 바치려고 사용한 제단이라고 전해지고 있다. '모리야'라는 지명은 성경에 단 두 번 등장한다. 그런데 모리야는 성경에서 대단히 인상적인 장소다. 모리야는 이스라엘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이 하느님 말씀에 따라 외아들 이사악을 제물로 바친 곳이기 때문이다. "이런 일들이 있은 뒤, 하느님께서 아브라함을 시험해 보시려고 '아브라함아!' 하고 부르시자, 그가 '예, 여기 있습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그분께서 말씀하셨다. '너의 아들, 네가 사랑하는 외아들 이사악을 데리고 모리야 땅으로 가거라. 그곳, 내가 너에게 일러 주는 산에서 그를 나에게 번제물로 바쳐라"(창세 22,1-2). 여기서 모리야가 어디인지는 정확하게 알 수 없다. '번제'는 제물을 불에 태워서 드리는 제사를 뜻한다. 구약의 번제는 가축 중에서 소나 양, 염소 따위를 잡아 제단에다 피를 뿌리고 내장을 모두 빼내고 가죽을 벗긴 다음 제단 위에 올려놓고 불에 태워 그 연기가 위로 올라가게 하는 것이다(레위 1,3-9). 성경에서는 아브라함이 외아들 이사악을 번제로 드리기 위해 죽이려는 순간 천사가 아브라함을 막는다. "천사가 말하였다. '그 아이에게 손대지 마라. 그에게 아무 해도 입히지 마라. 네가 너의 아들, 너의 외아들까지 나를 위하여 아끼지 않았으니, 네가 하느님을 경외하는 줄을 이제 내가 알았다'"(창세 22,12). 모리야는 솔로몬과 관련해 성경에 한 차례 더 언급된다. 솔로몬이 왕위에 올랐을 때 그는 수도를 확장하기를 원했다. 그래서 그는 북쪽 언덕, 곧 옛 오르난의 타작마당 위에 궁전과 성전을 세우려 했다. "솔로몬은 예루살렘 모리야 산에 주님의 집을 짓기 시작하였다. 그곳은 주님께서 그의 아버지 다윗에게 나타나신 곳으로서, 본디 여부스 사람 오르난의 타작마당이었는데 다윗이 집터로 잡아 놓았다"(2역대 3,1). 솔로몬은 페니키아인들의 도움으로 예루살렘에 성전을 세웠다. "이스라엘 자손들이 이집트 땅에서 나온 지 사백팔십 년, 솔로몬이 이스라엘을 다스린 지 사 년째 되던 해 지우 달, 곧 둘째 달에 솔로몬은 주님의 집을 짓기 시작하였다"(1열왕 6,1). 역사적으로 예루살렘 성전은 구약시대의 솔로몬 성전, 즈루빠벨 성전, 헤로데 성전 등 3개가 건축됐다. 그리고 이 성전들은 모두 같은 자리에 세워졌다. 첫 번째 성전인 솔로몬 성전은 다윗왕의 아들 솔로몬에 의해 기원전 968년에 착공돼 기원전 961년에 완공된 것으로, 위치는 다윗왕이 환상에서 보았던 예루살렘 동쪽 모리야 산이었다. 전설에는 이 바위가 아브라함이 이사악을 번제물로 바치던 제단이라고 전해지고 있다. 다윗이 준비해 둔 금과 일부의 건축재료 외에 레바논에서 향백 재목를 공급받아 티로 왕 히람이 보낸 건축 기술자들과 3만 명의 이스라엘 인부들에 의해 건축됐다. 솔로몬 성전은 완공 이후 400년 동안 이스라엘의 종교와 생활의 중심으로 성역화됐으나 기원전 586년 신바빌로니아 네부카드네자르 왕의 예루살렘 침략 때 파괴됐다. 이스라엘 성지의 중심이 되는 이곳에 역사의 변화 속에서 지금은 '바위사원'이라 불리는 이슬람 사원이 세워져 있다. 멀리서도 한눈에 보이는 황금색 돔으로도 유명한 이 건물은 팔각형으로 웅장하게 지어져 있고 그 안에는 엄청나게 큰 바위가 있다. 무슬림은 이 바위를 딛고 마호메트가 하늘로 승천했다고 믿고 있다. 이 때문에 무슬림은 예루살렘을 사우디아라비아의 메카와 메디나에 이어 이슬람의 3대 성도로 여기고 있다. 허영엽 신부(서울대교구 홍보국장)cpbc2014.03.04
[안소근 수녀와 떠나는 구약 여행] (68) 사두가이와 바리사이권력에 타협한 사두가이·율법에 얽매인 바리사이 로마니노(1484?~1559?) 작, ‘바리사이 시몬의 집에 가신 예수님’. 복음서에는 사두가이와 바리사이가 계속해서 등장하지요. 이들은 유다교 내의 주요한 종교 집단들이었고, 그래서 예수님의 가르침은 자주 그들의 주장과 대비됩니다. 그런 의미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역사적 배경을 파악하고자 하는 뜻에서 이들을 살펴보고자 합니다.주로 사제들로 구성되어 있던 사두가이파는 기원후 70년 예루살렘 성전이 무너지면서 몰락했고, 이후로 그들에 대한 기록이 거의 남아 있지 않습니다. 사두가이라는 명칭은 솔로몬 시대의 대사제 차독의 이름에서 나온 것으로 보이지만, 사두가이들이 실제 차독의 후손이었는지는 분명치 않습니다. 모든 사제가 사두가이였던 것도 아니고, 지방의 사제들은 오히려 바리사이에 속한 경우도 많았습니다. 사두가이들은 주로 예루살렘의 귀족 계층에 속한 사제들이었습니다. 예루살렘에서 대사제는 산헤드린의 의장이었고, 일부 사제들은 귀족으로서 계속 정치에 개입하고 지배 계층을 형성하고 있었습니다.정치적인 면에서 그들은 백성의 지지를 받지 못했습니다. 비록 그들이 종교적인 면에서는 율법을 철저히 지키고 전통에 충실하고자 하였으나, 외세와 타협했던 그들의 정치적 입장은 열심한 유다인들이 보기에는 지나치게 개방적이었습니다. 외세의 임금들이 뇌물을 받고 야손과 메넬라오스 등을 대사제로 임명했을 때 사두가이는 이를 눈감아 주었습니다. 그러나 뇌물을 주고 대사제로 임명된 이들이나 하스몬 집안 출신의 대사제들은 백성들에게는 정당성을 인정받지 못하는 경우가 적지 않았습니다. 사두가이는 처음에는 셀레우코스 왕조와, 그 후에는 하스몬 왕조와, 마지막에는 로마인들과 손을 잡았습니다. 예수님의 재판 과정에서도 산헤드린은 로마 총독 빌라도와 같은 편에 서지요. 사두가이들은 자신들의 권력을 지키기 위하여 누구하고든 타협했습니다.교리적인 면에서 그들은 바리사이들이 중시했던 구전 전승을 거부하고 기록된 율법만을 존중했으며, 죽은 이들의 부활을 믿지 않았습니다. 히브리 성경에서 확인되지 않거나 불분명한 교리들을 거부했기 때문입니다. 구약과 신약의 중간기 유다교에서 발전했던 천사와 악마에 관한 여러 내용들도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사두가이가 신학적으로는 보수적이면서 정치적인 면에서는 현실적이었다는 점에서 그들은 모순적으로 보일 수 있는데, 내세를 인정하지 않는 그들의 신학이 그만큼 더 현세를 중시하게 했다고도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들이 중시했던 것은 오직 예루살렘에서 성전 예배를 유지하는 것이었고, 이를 통하여 기득권을 보전했습니다. 이것이 그들의 관심사였습니다. 어쨌든, 예루살렘 성전이 파괴되면서 그들은 기반을 완전히 잃고 말았습니다. 신약 성경에서 그들이 바리사이들에 비해 드물게 언급되는 것은, 신약 성경이 형성되던 시기에 이미 그들이 영향력을 잃은 상태였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예루살렘 성전이 1세기 이후에 다시 재건되지 않았으므로 이스라엘에서는 사제 계층이 다시 일어날 수 없었지만, 지금도 회당 예배의 몇 가지 역할들은 그들의 후손에게 유보되어 있다고 합니다.한편 바리사이라는 명칭은 ‘분리하다, 가르다’라는 히브리어와 아람어 동사에서 나온 것으로 생각됩니다. 이 이름은 아마도, 하스몬 왕조가 점점 더 세속화되어 감에 따라 바리사이들이 그들을 멀리하고 그들에게서 떨어져 나왔음을 의미할 것입니다.사두가이들과 달리 이들은 성문 율법 외에 구두로 전해진 율법도 존중하였고, 죽은 이들의 부활과 영혼의 불멸, 천사와 마귀의 존재 등을 믿었으며, 다윗 왕국을 다시 세울 메시아에 대한 희망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사두가이들에 비해 현세에 큰 비중을 두지 않았으며, 세속화되지 않고 경건하게 살고자 했습니다. 이들을 특징짓는 것은 무엇보다도 바로 구전 전승을 포함한 율법에 대한 열성이었습니다. 이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헬레니즘 시대 이래로 많은 유다인들은 전통적인 가르침을 버리고 그리스 문화와 종교를 따라가고 있었음을 염두에 두어야 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바리사이들을 처음부터 위선자라고 생각하는 것은 올바른 이해가 아닙니다. 그들은 말로써만이 아니라 실제 생활로도 율법을 준수하고자 노력하였고 그것이 하느님께 충실한 삶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습니다. 예수님께서 공생활을 하시던 기간에 팔레스티나에서 가장 영향력이 있던 종교 집단이 바로 바리사이들이었습니다. 실제로 그들은 많은 이들에게 존경을 받았으며, 그럴 만한 이유도 있었습니다.“복음서는 자주 바리사이들을 위선적이고 냉혹한 율법주의자들로 제시한다. … 그러나, 복음서들에 나타난 바리사이들의 모습은 부분적으로는 그리스도인들과 유다인들 간의 계속된 후대의 논쟁에서 영향을 받았다는 것은 인정해야 한다”(교황청 성서위원회, 「그리스도교 성경 안의 유다 민족과 그 성서」). 신약 성경에서는 예수님의 가르침과 바리사이의 가르침을 대비시킵니다. 율법에 대한 이러한 열성이 오도되어 율법을 지키지 못하는 이들을 배척할 때, 그리고 율법을 지킴으로써 스스로의 힘으로 구원을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하거나 인간적인 관습에 매이게 될 때 오히려 율법의 근본 정신을 거슬러 하느님과 인간에 대한 사랑을 손상시킬 수 있습니다. 이런 여러 요인 때문에 결과적으로 신약 성경에서는 예수님과 바리사이들 사이의 대립이 자주 나타나게 됩니다. 하지만, 성전이 완전히 무너진 다음 흩어진 이스라엘이 이천 년 동안 정체성을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은 율법과 일상의 여러 규범 때문이었고, 그 기틀을 마련한 것은 바리사이였습니다.<성 도미니코 선교수녀회, 대전가톨릭대 교수> 평화신문2016.05.03
[성경 속 도시] (41) 아나톳슬픔과 비애가 깃든 도시 아나톳은 예루살렘 북쪽 약 4.8km 지점에 있는 벤야민 지파의 지역 중에서 레위 지파에게 할당된 48개 성읍 중 하나였다. “아나톳과 거기에 딸린 목초지, 알몬과 거기에 딸린 목초지, 이렇게 네 성읍을 내주었다”(여호 21,18). 다윗을 도왔던 용사 아비에제르와(2사무 23,27) 예후(1역대 12,3)도 아나톳 출신이었다. 쫓겨난 에브야타르 사제들이 머물러 다윗이 사망하자 솔로몬은 이복형 아도니야와 왕위를 놓고 다투게 된다. 당시 대사제 에브야타르는 아도니야를 지지했다. 그러나 결국에는 솔로몬이 승리하자 아도니야는 죽임을 당하게 된다. “이제 저를 세우시어 아버지 다윗의 왕좌에 앉히시고, 말씀하신 대로 저에게 집안을 일으켜 주신, 살아 계신 주님을 두고 맹세합니다. 아도니야는 오늘 죽을 것입니다.” 그러고 나서 솔로몬 임금이 여호야다의 아들 브나야를 보내어 아도니야를 내려치게 하니, 아도니야가 죽었다”(1열왕 2,24-25). 그리고 아도니야 편에 섰던 대사제 에브야타르는 아나톳으로 쫓겨나게 된다. “임금은 에브야타르 사제에게 이렇게 말하였다. ‘아나톳에 있는 그대의 땅으로 가시오. 그대는 죽어 마땅한 사람이지만, 그대가 나의 아버지 다윗 앞에서 주 하느님의 궤를 날랐고, 또 아버지와 온갖 고난을 함께 나누었으므로 오늘 그대를 죽이지 않겠소’”(1열왕 2,26). 이때부터 이스라엘의 제관 계급은 ‘차독 가문’이 독식했고 ‘에브야타르’계 사제들은 출셋길이 막혔다. 아나톳에서 에브야타르 계열 사제들이 예루살렘 성전이 건축되는 것을 지켜보며 쫓겨난 제사장 가문의 슬픔과 비애를 맛보았다. 아나톳 출신 가운데 가장 유명한 사람은 예레미야 예언자다. 예레미야의 부친은 아나톳에 살고 있던 사제였다. 북이스라엘은 멸망했고 남쪽 유다는 주변 강대국의 힘에 눌려있는 신세였다. 유다도 멸망하는 것은 시간문제였다. 유다 백성들에게 이러한 ‘미래’를 예언하는 것이 예레미야의 사명이었다. 예레미야 예언자는 평생을 오해와 편견과 테러에 시달리며 살아야 했던 불행한 예언자였다. 그의 예언이 대부분 왕들의 정책을 정면으로 반대하는 것이었기 때문이었다. 특히 예레미야는 예루살렘 성전에 대해 매우 비판적이었다. 예레미야 예언의 핵심은 하느님 뜻을 따르라는 것이었다. 그는 ‘바빌로니아’에 대항하지 말라고 예언해서 많은 오해를 받기도 했다. 예레미야는 무모하게 전쟁을 하지 말라는 것이었는데 ‘요시야’의 뒤를 이은 ‘여호아하즈’, ‘여호야킴’, ‘여호야킨’, ‘치드키야’ 등 4명의 왕은 모두 예레미야의 예언을 무시한 채 전쟁을 일으켰다가 참패하고 만다. 결국 유다는 바빌로니아의 속국으로 전락하고 만다. 바빌론의 진격으로 파괴돼유다의 마지막 임금 ‘치드키야’는 (2열왕 24,17) 예레미야가 전쟁을 반대하자 그를 다시 감옥에 가둔다. 그가 감옥에 있을 때 예루살렘은 함락되었고 치드키야 왕은 두 눈이 뽑힌 채 바빌론으로 끌려가는 치욕을 당하게 된다. 아나톳은 바빌론이 예루살렘으로 진격할 때 대부분 파괴됐다(이사 10,30). 이스라엘 백성들이 바빌론에서 포로생활에서 돌아와 벤야민 지파에 의해 아나톳은 재건됐고 느헤미야 통치 때는 많은 사람이 거주했다(느헤 11,32). 이처럼 아나톳은 이스라엘 역사에서 특히 슬픔과 비운이 깃든 도시였다. 허영엽 신부(서울대교구 홍보국장) 평화신문2015.04.21
[성경 속 도시] (51) 아시리아이스라엘 왕국 멸망시킨 제국의 수도 아시리아 티글랏 3세와 수행원을 그린 아시리아 왕궁 벽화 사본. 기원전 8세기 것으로 현재 프랑스 파리 루브르박물관에 소장돼 있다. 출처=「성경 역사 지도」, 분도출판사 아시리아는 메소포타미아 북부 지역에서 일어난 아시리아 제국의 첫 번째 수도다. 초기에 ‘아시리아’라는 말은 티그리스 강 상류 지역을 부르는 말이었다. 나중에 아시리아는 바빌론처럼 나라의 이름이자 동시에 도시 이름으로, 그리고 사람 이름으로 자유롭게 사용되기도 했다.이곳은 지금의 이라크 모술 지역에서 티그리스 강을 따라 남쪽으로 약 100㎞ 정도 떨어진 거리에 있다. 아시리아인은 오랫동안 바빌로니아 세력 밑에서 지배를 받았다. 아시리아는 기원전 7세기에 바빌론과 이집트를 정복해 근동 최초의 통일 제국이 됐다. 북부 메소포타미아의 요충지에 자리 잡고 있는 아시리아는 티그리스 강변의 지정학으로 아주 좋은 위치에 있다. 아시리아인들은 북쪽과 동쪽은 강이 자연적인 방어를 해주고 있어 남쪽과 서쪽에 방어벽을 구축해 도시를 방어했다. 그러나 그들의 영화는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아시리아는 점령지 주민의 강제 이주 등 가혹한 통치를 강행해 저항을 많이 받았다. 기원전 612년에 메디아와 바빌론 연합군이 수도 니네베를 함락하였고, 이어 기원전 609년 아시리아는 완전히 멸망하였다. 오늘날 이라크 내에 있는 성경 속 도시들은 거의 구약 시대와 관련이 있다. 그중에서도 아시리아는 바빌론 다음으로 성경에서 자주 언급되고 있는 중요한 도시다. 창세기에 보면 에덴 동산에 대한 이야기에 아시리아를 흐르는 강에 대한 언급이 나온다. “셋째 강의 이름은 티그리스인데, 아시리아 동쪽으로 흘렀다. 그리고 넷째 강은 유프라테스이다”(창세 2,14).기원전 922년 솔로몬 왕의 죽음 이후 이스라엘은 솔로몬의 아들 르호보암 왕이 통치하는 남쪽의 유다 왕국과 여로보암이 통치하는 북쪽의 이스라엘로 분열됐다. 남쪽은 유다 지파와 베냐민 지파로 구성되었고, 북쪽은 나머지 열 지파로 구성되었다. 기원전 931년에 시작된 이 분열 왕국은 이스라엘 왕국이 기원전 722년 아시리아에 망하고, 유다 왕국이 이스라엘보다 나중인 기원전 586년에 바빌론에 멸망했다. 북쪽 이스라엘 왕국은 초대 왕인 여로보암 1세부터 호세아 왕까지 모두 19명의 왕이 다스렸다. 19대 호세아 왕 때 아시리아 왕인 사르곤의 침공을 받아 사마리아가 함락됐다. 그리고 사마리아 주민들은 아시리아로 끌려갔고 사르곤은 다른 지방 사람들을 사마리아로 이주시켰다. 사마리아로 옮겨온 이방인들은 정착해 원주민인 이스라엘 사람들과 동화됐다. “아시리아 임금은 바빌론과 쿠타와 아와와 하맛과 스파르와임에서 사람들을 데려다가, 이스라엘 자손들을 대신하여 사마리아 성읍들에 살게 하였다. 그리하여 그들은 사마리아를 차지하고 그 성읍들에서 살았다”(2열왕 17,24).그런데 이방인들이 이주해 올 때 이교 신앙도 함께 가지고 왔기에 사마리아에는 혼합 종교가 생겼다. 그래서 예수님 시대에 유다 사람들이 사마리아인을 경멸했던 것이다. 그리고 남쪽 유다의 요시아 왕은 아시리아를 도우려는 이집트군과 전투를 위해 출병했다가 전사했다. “요시야 시대에 이집트 임금 파라오 느코가 아시리아 임금을 도우려고 유프라테스 강을 향하여 올라갔다. 요시야 임금이 그와 맞서 싸우러 나가자, 파라오 느코는 므기또에서 요시야를 보고 그를 죽여 버렸다”(2열왕 23,29).바빌론 제국에 앞서 당대에 메소포타미아와 그 주위의 세계를 지배하며 호령했던 아시리아 제국이지만, 오늘날 그 모든 영광은 사라지고 그 화려한 유적마저 많이 도굴당했다. 그 흔적과 기록마저도 보존이 잘 안 돼 있어 권력 무상을 느끼게 한다. 허영엽 신부(서울대교구 홍보국장) 평화신문2015.06.30
[복음이야기] (35) 성전 (2)솔로몬 성전, 하느님께 바친 첫 성전 “이스라엘 자손들이 이집트 땅에서 나온 지 480년, 솔로몬이 이스라엘을 다스린 지 4년째 되던 해 지우 달, 곧 둘째 달(이야르 달, 4월 중순~5월 중순)에 솔로몬은 주님의 집을 짓기 시작하였다”(1열왕 6,1). 솔로몬 성전은 오늘날 예루살렘 구시가 동쪽 ‘하람 에슈 셰리프’ 지역에 터를 잡았다. 이후 즈루빠벨과 헤로데가 지은 성전도 이 솔로몬 성전 터 위에 재건됐다. 고고학자들은 솔로몬 성전 터가 오늘날 ‘황금 돔’으로 유명한 이슬람 엘 악사 모스크 자리이며 안에 있는 너른 바위 위에 계약의 궤를 모신 지성소가 있었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기원전 968년 하느님의 성전을 짓기 시작한 솔로몬은 7년 6개월 만에 완공했다(1열왕 6,37-38). 아이러니하게 솔로몬은 자신의 화려한 궁전을 짓는 데는 성전 공사 기간의 거의 두 배가 되는 13년이란 긴 시간을 쏟았다. 솔로몬은 성전을 짓기 위해 티로의 히람 임금과 평화조약을 맺고 건축 자재로 쓸 레바논의 향백나무와 방백나무를 수입했다. 또 히람의 건축 기술자와 그발의 석공들을 데려왔다. 솔로몬은 성전 건축 재료를 마련하기 위해 아도니람을 감독으로 한 부역꾼 3만 명과 짐꾼 7만 명, 채석장에서 돌을 떠내는 일꾼 8만 명, 감독 관리 3300명을 레바논에 보냈다(1열왕 5,15-32). 솔로몬 성전의 모습과 규모는 열왕기 상권 6─7장과 역대기 하권 3─4장, 에제키엘서 40─43장을 통해 자세히 살펴볼 수 있다. 솔로몬 성전은 기본적으로 가나안 신전 양식을 따라 지어졌다. 아마도 성전 건축에 고용됐던 티로인 건축공들의 영향 때문일 것이다. 솔로몬 성전은 동에서 서로 장방형으로 길게 지어졌는데 길이 60암마(1암마, 팔꿈치에서 가운뎃손가락 끝까지 길이, 통상 46~54㎝)로 약 28~32m, 너비 20암마(약 9~11m), 높이 30암마(약 13.5~16m) 규모였다. 성전은 채석장에서 미리 다듬어 온 돌로 지어졌다. 그래서 성전 터에는 망치나 정이나 그 어떤 쇠 연장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성전 외벽은 향백나무 널빤지로 덮고, 높이 5암마(약 2~2.7m) 되는 곁채를 붙여 지었다.성전은 안뜰과 바깥뜰로 나누어져 있고 안뜰에는 너비 20암마, 높이 10암마(약 4.5~5.5m) 크기의 네모난 청동 제단이 있었다. 성전의 모든 청동물은 티로 사람으로 납탈리 지파의 과부 아들인 히람의 작품이었다. 이 청동 제단과 성전 현관 사이에는 사제들의 몸을 씻을 정결례용 물을 담아놓는 지름 10암마, 높이 5암마, 둘레 30암마가 되는 바다 모형의 청동제 물통이 있었다. 이 바다 모형 물통은 3마리가 한 그룹이 된 청동 황소 12마리가 각각 동서남북 네 방향에서 받치고 있었다. 이 바다 물통은 3000밧(약 6만8100ℓ)의 물을 저장할 수 있었다. 이 황소 받침대는 이스라엘이 남북으로 갈라지면서 유다 아하스 왕이 떼어내 버렸다. 사제들은 피를 묻힌 채 성전 안으로 들어갈 수 없다는 율법에 따라 반드시 이 바다의 물로 몸을 정결하게 씻어야만 했다(2역대 4,1-10). 안뜰에서 성소 현관으로 들어가는 계단 입구 양편에는 35암마(약 16~19m) 높이의 청동 기둥이 서 있고 그 꼭대기에는 5암마 되는 기둥머리를 얹었다. 기둥 꼭대기에는 목걸이 모양의 사슬이 둘러쳐져 있고, 석류 장식 100개가 달려 있었다. 솔로몬은 성소 오른쪽 기둥을 ‘야킨’, 왼쪽 기둥을 ‘보아즈’라 불렀다(2역대 3,15-17).성소 현관은 정방향으로 좌우 길이와 너비가 똑같이 20암마였고, 현관의 깊이는 10암마였다. 성소는 40암마(약 18~21m) 크기로 네모난 격자창이 있고 사방에 성물과 제구들을 보관하는 곁채가 꾸며져 있었다. 성소 천장은 향백나무 널빤지로, 바닥은 방백나무 널빤지로 장식됐고, 10개의 등잔대와 향을 피우는 금 제단, 제사 빵을 위한 제사상이 놓여 있었다. 성소 가장 깊숙한 안쪽에는 계약궤를 모신 지성소가 자리했다. 지성소는 너비, 길이, 높이가 똑같이 20암마로 향백나무에 순금을 입혀 지었다. 지성소 안의 향백나무 제단과 올리브 나무로 만든 10암마 높이의 두 커룹도 모두 순금을 입혔다.지성소 입구 양쪽 문은 순금을 입힌 올리브 나무로 만들어졌고, 상인방과 문설주가 오각형을 이루었다. 두 올리브 나무문에는 커룹과 야자나무와 활짝 핀 꽃이 장식돼 있었다 (1열왕 6,14-36).이렇게 성전이 완공되자 솔로몬은 계약 궤를 시온의 다윗성에서 모셔와 이스라엘의 원로들과 12지파의 대표들이 모인 가운데 에타님 달(티쉬리 달, 9월 초~10월 중순) 축제 때 지성소 안 커룹들의 날개 아래에 안치했다. 솔로몬은 제단에서 하느님께 기도하고 백성을 축복한 다음 번제물과 곡식 제물, 친교 제물을 바치면서 성전 봉헌을 축하하는 축제를 14일간 벌였다(1열왕 8장). 솔로몬의 성전은 기원전 587년 바빌로니아 군대가 예루살렘을 함락할 때 남김없이 파괴됐다. 리길재 기자 teotokos@pbc.co.kr 평화신문2014.11.04
[성경 속 도시] (42) 바빌론유배 생활의 치욕과 비운 서려 바빌론 유배 생활을 담은 부조 복제품, 다윗 탑의 예루살렘 역사박물관. 출처=「성경 역사 지도」, 분도출판사 고대의 가장 유명한 도시 중 하나인 바빌론은 고대 메소포타미아 지역에 위치한 옛 도시다. 바빌론은 티그리스 강과 유프라테스 강 사이의 비옥한 초승달 지대의 남동쪽에 있었다. 현재는 이라크 바그다드 남쪽 80km 지점에 해당한다. 탐욕과 죄악의 도시기원전 2000년대 초기부터 1000년대 초기까지 남부 메소포타미아의 수도였고, 기원전 7세기와 6세기에는 신바빌로니아 제국의 수도였다. 바빌로니아는 활발한 정복 활동으로 마침내 전 메소포타미아를 지배하는 대국이 됐다. 이후 함무라비 대왕 등 위대한 왕들이 등장하면서 바빌론은 거의 역사상 최초로 ‘세계의 수도’라는 명성을 얻게 되었다. 바빌로니아가 망한 뒤 아시리아 등 강대국의 패권이 이어진 뒤에도 바빌론은 여전히 주요 대도시로서 건재했으며 아시리아가 망한 후 칼데아인들에 의해 신바빌로니아가 세워져 바빌론은 다시금 세계의 수도로 재등장한다. 성경에서 바빌론은 탐욕과 죄악으로 가득 찬 악의 도시와 같은 이미지가 강하다. 이스라엘 역사에서 가장 비참하고 치욕스러운 바빌론 유배 때문이라 추정한다. 유다인들은 자신들을 침략한 바빌로니아를 극렬하게 증오했다. 유다인들에게 바빌론은 억압, 독재, 우상숭배와 같은 뜻으로 사용됐다.솔로몬이 건축한 예루살렘 성전은 기원전 587년 바빌론 임금 네부카드네자르에 의해 철저히 파괴됐다(2열왕 25,1-21). 몇 년 뒤 그는 성전을 완전히 파괴하고 성 안의 보물을 모두 약탈해 가져갔다. 그리고 이스라엘의 임금 치드키야의 자녀들을 살해하고, 그를 바빌론으로 압송했다(2열왕 25,7). 예루살렘을 함락한 뒤 바빌론 임금의 친위대장 느부자르아단은 성전과 솔로몬 궁, 예루살렘의 모든 집을 불태우고 성벽을 허물었다. 아울러 성전의 금과 은, 청동으로 만든 성물을 약탈하고 스라야 수석 사제를 비롯한 성전 사제들과 대신들을 바빌론으로 압송해 하맛 땅 리블라에서 처형했다(2열왕 25,8-25). 이후 이스라엘 백성은 기원전 538년 바빌론을 멸망시킨 페르시아 임금 키루스의 칙령으로 해방돼 유배 생활 50년 만인 이듬해부터 본국으로 귀환했다(에즈 1─2장). 예루살렘으로 돌아온 이들은 옛 자리에 제단을 쌓고 하느님께 제사를 드렸고 성전 재건에 힘썼다. 그러나 이 재건 공사는 사마리아 귀족들의 방해로 16년간 중단해야 했다(에즈 4,1-24). 그래도 희망을 이스라엘 백성은 하느님과의 계약에 충실하지 않아서 나라가 멸망하는 비운을 맞았다(2역대 36,17-21). 그러나 바빌론 유배 생활을 통하여 이스라엘은 새롭게 정화됐다. 또 이사야, 예레미아, 에제키엘 등 대예언자들이 역사에 등장하여 예루살렘의 부흥과 메시아 출현 등 희망을 예언했다(이사 4,2-3; 예레 5,18). 신약의 경우, 일부 초기 그리스도교 작가들은 로마라는 명칭 대신 ‘바빌론’이라는 말을 일종의 암호처럼 사용했다. 신약의 요한 묵시록도 신도들을 박해하는 사악하고 억압적인 권력을 가리키는 의미로 바빌론이라는 말을 여러 차례 사용한다. 허영엽 신부(서울대교구 홍보국장) 김현진2015.04.28
[성경 속 도시] (65) 예루살렘 (하)정복·파괴·건설의 역사가 쳇바퀴처럼 험난한 구세사의 역사를 지닌 예루살렘 전경. 고고학적으로 예루살렘은 오랜 역사를 지니고 있다. 석기 시대부터 인류가 정착한 흔적이 발견되기도 했다. 예루살렘에는 기원전 4000년경부터 사람이 살았으며, 기원전 3000~2000년경에는 제법 큰 도시를 형성했던 것으로 보인다. 예루살렘은 이스라엘의 모든 생활 문화의 중심지요 위대한 왕의 성읍이었다. 그러나 강대국 사이에 있었던 예루살렘은 역사적인 우여곡절을 겪으며 수 세기 동안 정복당하고 파괴되며 다시 건설되기를 반복했다. 성경에서 예루살렘의 역사를 보면 이스라엘의 가나안 정복 직전 여부스족이 예루살렘에 거주했으나 베냐민과 유다 지파에 의해 일시적으로 점령됐다(판관 1,8). 그런데 이스라엘 민족은 여부스족과 함께 거주했다. “벤야민의 자손들은 예루살렘에 사는 여부스족을 쫓아내지 않았다. 그래서 여부스족이 오늘날까지 예루살렘에서 벤야민의 자손들과 함께 살고 있다”(판관 1,21). 이스라엘 역사에서 가장 발전했던 다윗 시대에 예루살렘은 완전히 정복, 통일 이스라엘 왕국의 수도가 됐다(1역대 11,7). 이어 솔로몬에 의해 요새로 강화되고 성전이 건립됐다(1열왕 9,15).예루살렘은 남쪽 유다의 르하브암 왕 때 이집트 왕 ‘시삭’의 침입을 받았다(2역대 12,2). 또 유다 임금 아마츠야 때 북이스라엘 왕 여호아스로부터 공격을 받기도 했다. 이스라엘 임금 여호아스는 아하즈야의 손자이며 요아스의 아들인, 유다 임금 아마츠야를 벳 세메스에서 사로잡아 예루살렘으로 데리고 왔다. 그리고 ‘에프라임 성문’에서 ‘모퉁이 성문’까지, 예루살렘 성벽 사백 암마를 무너뜨렸다”(2역대 25,23). 그리고 예루살렘은 기원전 586년 바빌론 왕 느부갓네살에게 함락된 뒤 약 70년간 황폐한 채로 바빌론 총독의 지배를 받았다(예레 25,11).페르시아 임금 키루스의 칙령으로 포로들이 귀환해 예루살렘 성전 재건을 시작했다(에즈 1,2). 그러다 기원전 333년에는 마케도니아 알렉산더 대왕이 예루살렘을 정복했다. 기원전 63년에는 로마의 폼페이우스에 의해 정복당하고, 기원후 70년 로마 장군 티투스에게 예루살렘은 함락됐다. 제2차 유다전쟁(135년) 때 하드리아누스는 다시 예루살렘을 함락하고 예루살렘 성전 자리에 주피터 신전을 건설하고 골고타 언덕 위에는 비너스 신전을 지어 유다교와 그리스도교를 동시에 말살하려 했다.그러나 313년 콘스탄티누스 황제에 의해 그리스도교가 공인되면서 예루살렘은 각광을 받고 그리스도교의 중심 도시로 재건됐다. 그러다가 무슬림들이 637년에 예루살렘을 정복하기 위해 예루살렘으로 진격했다. 1099년 십자군 군사들이 정복할 때까지 예루살렘은 이슬람 도시로 인식됐으며, 1517년에 투르크 족이 예루살렘에 침입해 도시의 성벽을 세웠다.예루살렘은 이슬람과 십자군의 몇 차례에 걸친 탈환 전쟁의 소용돌이에 휩싸였다. 1917년에 발발한 제1차 세계대전 직전까지 터키의 지배를 받다가 1923년 영국의 위임 통치를 거쳐 제2차 세계대전 후 이스라엘의 수도가 됐다. 예루살렘은 길고 험난한 구세사의 역사를 지니고 있는 도시이다. 성벽과 길바닥의 돌 하나하나가 수천 년의 역사를 증언하고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허영엽 신부(서울대교구 홍보국장) 평화신문2015.10.20
[복음 이야기] (36) 성전 (3)소박했지만 민족 부흥의 표지 즈루빠벨 솔로몬 성전은 오늘날 예루살렘 구시가 동쪽 ‘하람 에슈 셰리프’ 지역에 터했다. 이후 즈루빠벨과 헤로데가 지은 성전도 이 솔로몬 성전 터 위에 재건됐다. 유다인들은 성전 터가 오늘날 ‘황금 돔’으로 유명한 이슬람 엘 악사 모스크 자리이며 안에 있는 너른 바위 위에 계약의 궤를 모신 지성소가 있었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사진은 성전 터 위에 세워져 있는 엘 악사 모스크. 솔로몬이 지어 이스라엘 민족이 하느님께 처음으로 봉헌한 예루살렘 성전은 기원전 587년 바빌론(신바빌로니아 왕국) 임금 네부카드네자르에 의해 파괴됐다(2열왕 25,1-21). 예루살렘을 함락한 친위대장 느부자르아단은 성전과 솔로몬 궁, 예루살렘의 모든 집을 불태우고 성벽을 허물었다. 아울러 성전의 금과 은, 청동으로 만든 성물을 약탈하고 스라야 수석 사제를 비롯한 성전 사제들과 대신들을 바빌론으로 압송해 하맛 땅 리블라에서 처형했다. 그리고 이스라엘 백성들을 바빌론으로 유배시켰다. 이후 이스라엘 백성은 기원전 538년 바빌론을 멸망시킨 페르시아 임금 키루스의 칙령으로 해방되어 유배생활 50년 만인 이듬해부터 세스바차르의 지도로 성전 기물과 함께 본국으로 귀환했다(에즈 1-2장). 예루살렘으로 돌아온 이들은 옛 자리에 제단을 쌓고 하느님께 제사를 드렸고 저마다 예물을 바치며 성전 재건에 힘썼다. 하지만 이 재건 공사는 사마리아 귀족들의 방해로 키루스 임금과 크세르크세스 1세와 아르타크세르크세스 1세 시대까지 16년간 중단해야 했다(에즈 4장). 이방인들과 섞여 이스라엘 땅에 살던 사마리아인들이 성전 재건 공사에 동참하려 하자 이스라엘 원로들이 거절했고, 이에 화가 난 사마리아 귀족들이 성전 건축을 ‘반역 행위’로 몰아 페르시아 당국에 고발했기 때문이다.다리우스 임금 통치 2년째 기원전 520년 예언자 하까이와 즈카르야의 촉구로 대사제 예수아와 지방 장관 즈루빠벨은 다리우스 임금에게 성전 건축을 허락해 달라는 장계를 올렸다. 장계에는 ‘키루스 임금이 예루살렘 성전을 지으라고 허락했다’는 내용이 적혀 있었다. 이 장계를 읽은 다리우스 임금은 바빌론 문서고에서 키루스 칙령을 발견하고 성전 재건 공사를 그 해 허락했다. 성전 재건 공사는 순조롭게 진행돼 다리우스 재위 6년째인 기원전 515년 아다르달(2월 중순~3월 중순) 초사흗날에 완공해 봉헌식을 올렸다. 이날 봉헌식에는 황소 200마리와 숫양 200마리, 어린양 400마리를 제물로 바쳤고, 온 이스라엘을 위한 속죄 제물로 숫염소 12마리를 봉헌했다(에즈 6,1-22). 이 성전은 약 500년간 유지됐다. ‘즈루빠벨 성전’이라 불린 이 성전은 성경에 상세한 내용이 없어 그 규모와 구조에 대해 자세히 알 수 없지만 대략 가로세로 길이와 높이가 각각 60암마(28~32m)로 전해지며 솔로몬 성전보다 훨씬 소박했다. 즈루빠벨 성전이 솔로몬 성전에 비해 얼마나 소박했는지 성경은 “옛 성전을 보았던 많은 노인이 목 놓아 울었다”고 기록하고 있다(에즈 3,12).계약의 궤는 이미 바빌론 포로 시절에 없어졌고, 이후 다시 만들지 않았다. 그래서 즈루빠벨 성전의 성소에는 솔로몬 성전의 10개의 등잔대 대신 일곱 개의 가지를 가진 1개의 등잔대만 놓였고 제사상과 분향 제단이 마련됐다(1마카 1,21. 4, 49-51). 기원전 333년 페르시아를 멸망시킨 마케도니아의 알렉산드로스 대왕은 적의를 품고 예루살렘을 쳐들어갔으나 야두아 대사제의 환대를 받은 후 성전에 제물을 바치고 유다인의 특권을 인정했다. 하지만 알렉산드로스 대왕은 기원전 323년 바빌론에서 짧은 생애를 마감한다(1마카 1,1-7).이후 셀레우코스 왕조가 시리아와 팔레스티나 지역을 통치하게 됐고 안티오코스 4세(기원전 175~164)가 왕위에 오르면서 유다인을 박해했다. 안티오코스 4세는 기원전 167년 이집트를 침략하고 돌아가는 길에 예루살렘으로 가서 성전을 약탈하고 제우스 신상과 제단을 세웠다. 그리고 마구 살육을 저질렀다. 성경은 이날을 “이스라엘 곳곳에는 큰 슬픔이 일어 지도자들과 원로들은 탄식하고 처녀 총각들은 기운을 잃었으며 여인들의 아름다움은 사라졌다.…땅도 그 주민들 때문에 떨고 야곱의 온 집안은 수치로 뒤덮였다”(1마카 1,25-28)고 증언하고 있다.독립전쟁을 승리로 이끌고 예루살렘 성채를 회복한 마카베오는 기원전 164년 즈루빠벨 성전에 놓인 제우스 신상과 제단을 부수고 새 제단을 쌓아 성전을 정화했다. 유다인들은 이날을 기념해 ‘하누카’ 축제를 지금까지 지내고 있다. 비록 솔로몬 성전에 비해 그 규모와 화려함이 훨씬 뒤떨어졌지만 즈루빠벨 성전은 이스라엘 민족 부흥의 표지였으며, 이교도에 대한 저항의 중심으로 유다인들이 충심으로 아끼던 성전이었다. 즈루빠벨 성전은 이두메와 출신의 유다 왕 헤로데가 기원전 19년 유다인을 회유하기 위해 새 성전을 지으면서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리길재 기자 teotokos@pbc.co.kr 평화신문2014.11.11
[안소근 수녀와 떠나는 구약 여행] (55) “이스라엘을 그 교훈과 지혜와 관련하여 칭송하는 것은 마땅합니다”(집회서 머리글)인간, 하느님 지혜 앞에 무릎 꿇다 인간에게는 알고자 하는 갈망이 새겨져 있는 듯합니다. 그저 지금 알고 있는 것으로 만족하지 않고, 끊임없이 앎을 향하여 손을 내뻗습니다. 그 형태는 여러 가지로 나타날 수 있지만, 모든 문화에서 인간은 지혜를 추구했습니다. 성경에서도 ‘지혜문학’으로 분류되는 책들이 있습니다. 좁은 의미에서는 잠언, 욥기, 코헬렛, 집회서, 지혜서가 여기에 속합니다. 지혜에 대한 관심이 이 책들에만 나타나는 것은 아니지만, 이 책들은 처음부터 끝까지 거의 지혜에 관련된 문제들에 집중하고 있습니다.고대 근동의 다른 나라들에서도 지혜에 대한 추구는 크게 발전했었습니다. 열왕기 저자가 “솔로몬의 지혜는 동방 모든 이의 지혜와 이집트의 모든 지혜보다 뛰어났다”고 말한다면(1열왕 5,10), 이 말은 역으로 동방과 이집트의 지혜가 널리 알려져 있었으며 이스라엘이 그것을 알고 있었음을 보여 주는 것이겠지요. 더 늦은 시기에는 그리스와 로마에서도 지혜를 찾는 이들이 끊이지 않았고, 구약 성경 가운데에서도 가장 늦은 시기의 책인 지혜서에서는 이들의 영향도 나타납니다. 사실 지혜문학은 특정한 장소에 한정되지도 않고 특정한 시대에 한정되지도 않습니다. 다른 나라들에도 지혜문학이 발달했을 뿐만 아니라 구약 성경의 책들이 그 영향을 받아들일 수 있었던 것은, 그만큼 지혜문학에서 다루는 주제들이 보편적이고 국제적이기 때문이지요. 인간이 이 세상을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사회생활에서 성공하는 길은 무엇인가, 죽음과 고통은 인간의 삶에서 어떤 의미를 가지는가, 이런 문제들은 모든 시대 모든 장소의 사람들이 고민하는 문제들입니다. 또한 지혜문학이 이러한 문제들에 접근하는 방법도 보편적입니다.지혜문학의 특징으로 여러 가지를 들 수 있겠지만, 지금은 한 가지에만 초점을 맞추려 합니다. 그 가장 두드러진 특징은, 출발점이 인간 이성이라는 점입니다. ‘출발점’이라고 앞에 붙여놓은 것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끝까지 여기에만 머물지는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적어도 출발점에서, 토라가 하느님께서 모세에게 알려 주신 율법에서 출발하고 예언서가 하느님께서 예언자들에게 하신 말씀에서 시작하는 데에 비하여, 지혜문학은 인간 이성의 추구에서 시작합니다. 인간의 머리로 세상의 질서를 파악하려고 노력합니다. 하느님을 찾는 길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역사 안에서 당신 자신을 드러내시며 아브라함을 부르신 하느님, 이스라엘을 이집트에서 해방시키신 하느님에게서 출발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세상의 질서를 보면서 하느님을 감지합니다. 여기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되는 것이 창조 질서입니다. 우주와 자연 현상의 질서를 바라보며, 그 안에 하느님의 지혜가 깃들어 있음을 깨닫고 그로부터 이 세상을 만드신 하느님의 존재를 추론하는 것입니다.구약 성경 지혜문학의 첫 단계인 잠언은 주로 이렇게 세상의 질서를 파악하는 데에 집중합니다. 이러한 지혜를 ‘고전적 지혜’라 부릅니다. 다른 여러 나라의 지혜문학과 공통된, 아주 전형적인 지혜문학의 모습이 여기에 나타납니다. 이 세상의 질서에 관심을 집중하며, 인간의 행위에는 반드시 갚음이 있음을 역설합니다. 관심은 현세에 집중되어 있으며 선과 악에 대한 갚음도 현세 안에서 이루어진다고 봅니다.그런데, 이것으로 문제가 다 해결되지는 않습니다. 지혜문학의 출발점이었던 인간의 지혜로 이 세상의 질서를 파악해 보려고 노력하지만, 어디에선가는 분명 한계에 맞닥뜨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세상일이 원리원칙대로 되지 않는다는 것, 이 세상에서 언제나 착한 사람이 복을 받고 나쁜 사람이 벌을 받는 것은 아니라는 것, 살면서 언젠가는 체험하게 되는 일들입니다. 그래서 고전적인 지혜에 대하여 이의를 제기하게 됩니다. 구약 성경의 지혜문학 가운데서는 욥기와 코헬렛이 이 단계를 대변합니다. 잠언이 이 세상의 정돈되고 질서있는 영역에 머물렀다면, 욥기와 코헬렛은 세상의 끝까지 가서 그 한계선을 붙잡고 몸부림칩니다. 인간의 지혜에 한계가 있음을 확인하고 그 앞에서 무릎을 꿇는 것이 욥기와 코헬렛입니다.하지만 성경의 지혜문학은 여기에서 멈추지 않습니다. 인간의 능력으로는 지혜를 온전히 깨달을 수 없음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는 바로 그 한계선에서, 현인들은 하느님을 만납니다. 인간으로서는 파악할 수 없는 지혜를 알고 계신 분이 하느님이시며, 그 하느님께서 인간에게 당신의 지혜를 알려 주심을 발견합니다. 아니, 이스라엘의 조상들에게 이미 알려 주셨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위에서 지혜문학의 ‘출발점’이 인간 이성이라고 했지요. 말하자면 철학적 사고와 유사하게, 처음에는 인간의 머리로 지혜를 깨달으려고 했습니다. 이것이 성경의 지혜문학만이 아니라 주변 여러 나라의 지혜문학이 공통적으로 보여주는 특징이었습니다. 지혜문학의 출발점은 계시가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구약 성경 지혜문학의 특징은, 마지막에 가서 계시로 돌아온다는 점입니다. 하느님께서 이미 조상들에게, 구체적으로는 모세를 통하여 주셨던 율법을 통하여 인간의 능력으로는 알 수 없는 지혜를 알려 주셨음을 깨달은 다음, 집회서와 지혜서는 토라로 돌아갑니다. 참된 지혜는 멀리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토라 안에 있었음을 알았기 때문입니다.“주님을 경외함은 지식의 근원이다”(잠언 1,7). 구약 성경의 지혜문학은 이 말로 시작하여 이 말로 끝납니다. 인간의 이성을 출발점으로 하면서도 주님께 대한 경외심이 없이는 참된 지혜에 도달할 수 없음을 알았던 것이 구약 성경 지혜의 특징이었습니다. <성 도미니코 선교수녀회, 대전가톨릭대 교수 > 평화신문2016.01.19
[안소근 수녀와 떠나는 구약 여행] (50) “하느님을 진심으로 섬기고 그분께서 좋아하시는 일을 하여라”(토빗 14,8)선의·자선 베풀며 그날을 기다려라 앞을 보지 못했던 토빗은 하느님이 보내신 천사의 말대로 물고기의 쓸개를 바르고 눈을 뜨게 된다. 도메니코 페티 작, ‘토빗의 치유’. 이제부터 3주 동안 토빗기, 유딧기, 에스테르기를 읽을 것입니다. 그런데 주의할 점이 있습니다. 이 책들은 역사서들로 분류되지만 실제로는 역사적 사건에 대한 기록이라기보다 교훈적인 이야기들이라는 점입니다. 첫머리에서 구체적인 시대 배경들을 제시하고 있지만, 자세히 보면 전혀 정확하지 않습니다. 토빗기의 경우, 1장 4절에서 말하는 것처럼 토빗이 젊었을 때에 납탈리 지파가 다윗 집안에서 떨어져 나갔다고 한다면 이것은 기원전 10세기, 솔로몬 사후의 일입니다. 그때에 살았던 토빗이 기원전 8세기에 니네베로 유배를 갔다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또한, 14장 15절에서 말하는 것처럼 그의 아들 토비야가 기원전 612년에 니네베의 멸망을 보았다는 것 역시 매우 어려운 일이 됩니다. 당황하실 필요 없습니다. 이 책이 역사 기록이 아니라는 사실은 독자들에게도 명백했기 때문입니다. 이 책에서 저자는 귀신 이야기나 전설 등의 요소도 자유롭게 사용하면서 독자들에게 어떤 가르침을 전달하려 합니다.토빗기, 유딧기, 에스테르기는 몇 가지 공통점을 지니고 있습니다. 어떤 시대를 배경으로 줄거리가 전개되든, 이 책들의 작성 연대는 늦은 편입니다. 세 권 모두 외국에서의 삶 또는 이방인들과의 관계를 배경으로 하고 있습니다. 토빗은 아시리아로 유배를 갔고, 유딧도 아시리아와 전쟁 중에 포위되었으며, 에스테르는 페르시아에서 왕비가 됩니다. 그것은 아마도, 이 책들이 많은 유다인들이 외국 땅에 흩어져 살게 된 시대에 작성되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토빗기도 이야기 자체가 이스라엘 땅을 떠나 유배지에 있는 이들에게 어떻게 살아가야 할 것인지를 말하고 있으며 예루살렘으로 돌아갈 날과 예루살렘의 회복을 바라고 있다는 점을 고려할 때에 아마도 디아스포라를 배경으로 하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먼저 토빗기의 줄거리를 보아야 하겠습니다.아시리아의 니네베로 유배를 간 토빗은 친척과 동족들에게 자선을 베풀며 올바르게 삽니다. 그는 가난한 이들을 돌보고 죽임을 당한 동족의 시신을 묻어주기도 했지만, 불행히도 눈이 멀게 됩니다. 이에 토빗은 하느님께, 곤궁과 모욕을 벗어나도록 죽음을 주시기를 청합니다.같은 시기에, 메디아의 엑바타나에는 토빗의 친척인 라구엘의 딸 사라가 살고 있었습니다. 그녀는 일곱 번 결혼했지만 매번 아스모대오스라는 악귀가 남편들을 죽였습니다. 여종의 조롱을 받은 사라는 하느님께 자신의 목숨을 거두어 주시기를 청하고 있었습니다.바로 그때 하느님께서 그 둘의 기도를 들으시어 라파엘 천사를 파견하십니다. 토빗은 아들 토비야에게 라게스에 가서 자신이 맡겨 둔 돈을 찾아오도록 하는데, 라파엘 천사가 그에게 나타나 길잡이를 하겠다고 자청합니다. 그들은 강에서 물고기를 잡아 약을 마련하고, 엑바타나에 이르러 라파엘은 토비야에게 사라와 혼인하라고 권고합니다. 토비야는 물고기의 간과 염통을 태워 마귀를 쫓아내고 사라와 혼인을 하며, 토빗이 맡겨 놓은 돈도 찾아와 니네베로 돌아갑니다. 니네베에 돌아와 라파엘이 말한 대로 물고기의 쓸개를 아버지에게 바르자 토빗은 시력을 되찾았습니다. 라파엘은 자신의 정체를 밝히고 하느님께 올라갔습니다. 토빗은 다시 복을 누리다가 세상을 떠났고, 토비야도 영예를 누리며 살다가 죽기 전에 니네베가 멸망하는 것까지 보고 하느님을 찬미하였습니다.토빗기에서는 선행, 그중에서도 자선을 크게 강조합니다. 이유가 있습니다. 토빗이 “아시리아인들의 땅 니네베”에서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토빗 1,3). 유배를 가기 전, 그는 예루살렘 성전을 순례하며 십일조를 바치는 등 전례 규정을 열심히 준수했던 인물입니다. 그런데 아시리아로 끌려갔을 때에는, 성전에 갈 수가 없습니다. 유배지에서 그가 신앙을 실천하는 길이 선행이고 자선이었습니다. 그는 배고픈 이에게 먹을 것을 주고 헐벗은 이에게는 입을 것을 주며, 죽어서 던져져 있는 동족을 보면 그를 묻어주는 것으로 신앙을 증거했습니다. 이것이 그에게는 율법을 지키고 하느님께 충실하게 살아가는 길이었습니다. “자선을 베푸는 모든 이에게는 그 자선이 지극히 높으신 분 앞에 바치는 훌륭한 예물이 된다”(4,11)는 토빗의 가르침은 이러한 배경에서 이해할 수 있습니다. 토빗기에서 자선은 단순히 인도적인 덕행을 넘어서는 의미를 갖습니다. “자선은 사람을 죽음에서 구해 주고 암흑에 빠져들지 않게 해 준다”(4,10).이것은 토빗과 마찬가지로 팔레스티나 땅을 떠나 디아스포라에서 살아가던 당시의 수많은 유다인들에게 삶의 지침이 될 수 있었습니다. 토빗은 죽기 전에 아들 토비야에게도, 하느님께서 좋아하시는 의로운 일을 하고 자선을 베풀라는 유언을 남깁니다. 그리고 그는, 이국땅의 유다인들이 하느님께 충실하게 살아간다면 하느님께서 언젠가 그들에게 자비를 베푸시고 흩어진 이스라엘을 다시 예루살렘으로 불러 모아 주시리라고 믿습니다(13장의 기도 참조). 그는 “그날에 구원을 받고 하느님을 진심으로 생각하는 이스라엘의 모든 자손이 한데 모여 예루살렘으로 가서, 자기들에게 주어진 아브라함의 땅에서 영원히 안심하고 살 것”이라는 희망을 간직하고 있었고(14,7), 그래서 이를 위하여 하느님을 섬기고 선을 행하라고 권고했던 것입니다. “좋기도 하여라, 우리 하느님께 찬미 노래 부름이. 즐겁기도 하여라, 그분께 어울리는 찬양을 드림이. 주님께서는 예루살렘을 세우시고 이스라엘의 흩어진 이들을 모으신다”(시편 147,1-2).<성 도미니코 선교수녀회, 대전가톨릭대 교수> 평화신문2015.12.15
[성경 속 도시] (59) 그발여호수아가 밟아보지 못한 땅 성경을 영어로는 ‘바이블’(bible)이라 한다. 어원은 그리스어로는 ‘책들’을 의미하는 ‘타 비블리아’ (ta biblia)이다. 후에는 단순 명사인 ‘헤 비블리아’(he biblia)라는 말이 성경을 가리키는 그리스어 명사가 되었다.이집트 사람들은 나일 강변에서 갈대의 일종인 파피루스(Papyrus) 줄기를 종이로 가공해 지중해 연안의 다른 나라에 수출해서 많은 수입을 올렸다고 한다. 당시 지중해 무역을 독점했던 페니키아인은 비블로스(Biblos)항을 통해 파피루스를 수출했다. 이런 까닭으로 파피루스는 수출 항구의 이름에서 그리스어 ‘비블로스’라고도 불리게 되었다고 한다. 오늘날의 예베일(Jebeil)에 해당하는 곳이다.파피루스 수출 도시 ‘비블로스’ 파피루스 수출로 유명했던 도시인 ‘비블로스’가 그발이다. 그발은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도시 중 하나이다. 그발은 신석기 시대 후 사람들이 계속 거주해 온 곳으로, 페니키아 문명이 시작된 당시의 모습을 잘 보여주고 있다. 이곳에 도시가 만들어지기 시작한 것은 기원전 4500년쯤이며, 기원전 1200년 후에는 페니키아 3대 항구도시 중에 하나로 크게 성장했다. 지금도 중세의 성과 고대 거주지를 비롯해 유적지 곳곳에 서로 다른 시대의 기원을 두고 있는 건축물이 도시의 역사를 잘 드러내고 있다.그발은 ‘경계’, ‘가장자리’란 뜻을 가지고 있다. 이스라엘이 정복하지 못한 시돈과 티로와 함께 페니키아 3대 도시국가로 언급되고 있다. 오늘날에는 레바논의 수도 베이루트 북쪽 40㎞ 지점의 지중해변에 있는 도시다. 그발은 옛날부터 조선업이 발달했으며, 배를 수출하고 있었다. 그발 사람들은 우수한 건축 기술을 가지고 있었고 조선술, 항해술 등 기술도 발달했던 것으로 보인다. 예로부터 이곳은 돌과 재목을 다듬는 기술자들이 많았던 것 같다. “이렇게 솔로몬의 건축가들과 히람의 건축가들과 그발 사람들이 돌을 깎아 내고, 주님의 집을 지을 나무와 돌을 마련하였다”(1열왕 5,32).십자군 성채 남아 있어페니키아인들은 레바논에서 나는 백향목을 수출하고, 이집트산 파피루스를 사들여 그리스 등지에 파는 중계무역을 통해 부를 축적했다. 그발은 역사적으로 아시리아ㆍ페르시아ㆍ그리스ㆍ로마ㆍ이슬람 등의 반복된 침략과 지배를 받았으며, 1104년 십자군에게 점령당하기도 했다. 이처럼 여러 세력의 침략과 지배를 받는 동안 고대 유적들은 점차 파괴됐다. 그러다가 20세기 초 유적의 발굴로 페니키아 시대 및 로마 유적지를 중심으로 여러 시대의 유적들이 발견돼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됐다. 지금도 유적지 입구에는 십자군 점령기에 축조된 큰 규모의 성채가 있다. 또 신석기, 청동기 시대 주거지와 오벨리스크 신전 터, 로마 시대의 도로와 원형 극장, 십자군 시대 성벽까지 다양한 시대의 유적과 유물이 존재한다.성경에서는 여호수아가 죽기 전까지 정복하지 못한 땅으로 나타난다. “또 그발족의 땅, 헤르몬 산 아래 바알 가드에서 하맛 어귀까지 이르는 해 뜨는 쪽의 온 레바논이다”(여호 13,5). 그발은 다른 나라들과 동맹을 꾀해 이스라엘에 대항하는 적으로 등장한다. “그들은 한마음으로 흉계를 꾸미고 당신을 거슬러 동맹을 맺습니다. 에돔의 천막들과 이스마엘인들 모압과 하가르인들 그발과 암몬과 아말렉 필리스티아와 티로의 주민들도 함께”(시편 83,6-8). 그 옛날 해양국가로 조선업이 발달한 이곳 항구는 오늘날에는 초라한 항구로 남아 있다. 옛 항구 터에 아무런 항구 시설이 없어 화려했던 과거 역사의 흔적을 느낄 수 없는 것이 아쉽다. 허영엽 신부(서울대교구 홍보국장) 평화신문2015.08.26
[생활 속의 복음] 하느님의 일, 사람의 일연중 제24주일(마르 8,27-35) 박재식 신부(안동교구 사벌퇴강본당 주임) 올여름을 너무 힘들게 지냈습니다. 날씨도 무척 더웠고, 경제ㆍ정치 상황도 1997년 이후로 최악이 아니었나 생각합니다. 세월호 참사 1주기에 일어난 사회적 갈등, 예비군 사격 훈련장에서 벌어진 총기 난사사건, 새로운 신분 관계(갑과 을)의 현실, 메르스라는 바이러스의 공포로 서로가 믿음을 잃어버린 시간, 정치권과 정부기관의 부정부패ㆍ능력 부족(거짓 정보로 확인된 황병서의 숙청설 등), 민간인 사생활 사찰… 신뢰가 무너진 시간이었습니다. 게다가 요즘의 중국 경제 위기는 더욱 힘든 시간이 닥칠 것을 암시하고 있습니다. 이런 어려움의 근본은 어디부터일까요? 긍정적이고 희망적인 소식으로 하루와 한 해를 시작하기가 그렇게 힘든 것일까요? 만나는 사람마다 “힘들다”는 이야기뿐입니다. 이런 어려움이 발생하는 근본적 이유는 ‘신뢰를 바탕으로 서로 용서하고 돕고 살아야 한다’는 기본에 충실하지 않고 개인주의적 삶을 살기 때문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요즘 말로 ‘한창 잘 나갈 때’ 제자들에게 자신의 신원에 대해 질문하십니다. 그러자 제자들은 주변의 평가를 이야기하며 “스승님은 그리스도이십니다”(마르 8,29)라고 고백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최고의 평가를 접하시고는 자신의 수난을 예고하십니다. 그리고 ‘하느님의 일’과 ‘인간의 일’에 대해 말씀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이 진정 하느님 나라의 백성으로 살기를 원하셨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에서 사상과 이념보다 더욱 중요한 것은 진리를 실천하고 따르는 삶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우리는 인생의 행복과 불행을 여러 관점에서 이야기합니다. 성경은 인간이 하느님의 초대에 응답하면서 세상의 주인으로, 세상 창조사업의 협력자로 살아갈 때 인간으로서 존재 이유(창세 1,28)를 알고 행복을 느낀다는 사실을 보여줍니다. 이에 반해 상대와의 비교(카인과 아벨)나 물질적인 풍요ㆍ특권(다윗과 솔로몬)을 지향할 때는 죄를 범하거나 눈물을 흘리며 살아가게 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하느님의 일’은 하느님께서 주시는 사랑과 자비에 감사를 드리며 하느님의 모상(image)으로서 실상(reality)인 하느님을 닮아가는 모든 행동과 생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에 반해 ‘인간의 일’은 ‘허상’인 인간을 중심으로 인간관계를 맺어가는 것입니다. 추석을 준비하는 시골 어르신들은 정말 바쁘게 움직입니다. 자식들을 위한 선물도 준비해야 하고, 주변 사람들의 긍정적 평가를 기대하면서 한 해 노동을 마무리해야 합니다. 그러다 보니 타인의 이목과 관점에 따라 행동해야 하는 괴로움을 겪기도 합니다. 한 해를 마무리하면서 신뢰와 용서 그리고 하느님을 중심에 두고 살았는지 되돌아보기보다 외적으로 드러나는 성과와 사회적 성공이라는 평가에 집중하게 되는 것입니다. 앙드레 지드는 자신의 소설 「좁은 문」에 등장하는 제롬처럼 ‘허위의 탈’ 속에 자신을 감추지 말고, 진리를 따라서 정당한 사실에 근거를 두고 살아가는 것이 행복한 삶이라고 이야기합니다. 저는 ‘하느님의 일’을 행하면서 살아가는 사람이 멋지고 행복하다고 생각합니다. ‘인생의 행복과 멋’을 생각하면 두 사람의 운동선수가 떠오릅니다. 한 사람은 축구선수 차범근입니다. 뛰어난 운동 실력으로 유명하지만 저는 1980년 레버쿠젠과의 경기에서 자신에게 고의적이고 치명적인 반칙을 한 위르겐 겔스도르프 선수를 용서한 일이 먼저 생각납니다. ‘용서’라는 ‘하느님의 일’을 실천했기 때문입니다. 또 다른 인물은 핸드볼 선수 윤경신입니다. 지금까지도 독일 핸드볼 리그(분데스리가)에서 전설로 불리는 선수입니다. 그의 진정한 전설은 10여 년간 활약한 소속팀 ‘굼머스바흐’ 가 재정난으로 힘들어할 때 타 팀으로 이적하지 않고 모금 활동을 하고 자신의 집과 차를 담보로 잡히면서까지 구단을 살려낸 일입니다. 두 사람은 돈과 명예를 추구하기보다는 ‘용서와 신뢰’라는 하느님의 일을 행한 멋진 사람입니다. 하느님의 일은 진정한 인간의 행복입니다. 행복하십시오. 교우 여러분! cpbc2015.09.09
[성경 속 도시](35) 기브온약삭빠른 동맹으로 전쟁의 화 면해 예리코 평원. 뒤로는 유다 산악 지형. 출처=「성경 역사 지도」,분도출판사 기브온은 솔로몬이 하느님께 번제물을 드리고 지혜를 선물 받게 된 중요한 장소이기도 했다. “임금은 제사를 드리러 기브온에 갔다. 그곳이 큰 산당이었기 때문이다. 솔로몬은 그 제단 위에서 번제물을 천 마리씩 바치곤 하였다”(1열왕 3,4). 기브온은 기원전 12세기 이후 언덕을 둘러싸고 있었던 거대한 성벽으로 도시를 이뤘다. 이곳에서는 성벽 내 사람들을 위한 거대한 지하 물 저장고가 발견되기도 했다. 고대 가나안에서는 비가 오지 않는 여름에는 특별히 물 저장소를 만들어 주거지 주위에 뒀다. 기원전 8~7세기께 기브온은 유다 왕국의 포도주를 책임지는 도시가 된 것으로 보인다. 이 시대에 발견된 포도주 공장 지역에서는 63개의 포도주 저장용 장소가 있었다. 기브온은 성경 여러 곳에서 언급되지만 가장 인상적인 부분은 역시 여호수아와 관련된 대목이다. 여호수아가 이끄는 이스라엘 군대가 아이성을 정복하자 기브온 주민은 여호수아가 예리코와 아이에서 한 일을 듣고서, 이스라엘과 동맹을 맺었다. 그런데 동맹을 맺는 과정에서 기브온 주민들은 이스라엘의 종을 자처하면서 남루한 옷차림으로 먼 고장에서 왔다고 거짓말을 한다. 여호수아는 그들과 평화롭게 지내기로 하고 그들을 살려 준다는 계약을 맺었다. 사흘 후 여호수아는 기브온 사람들의 정체를 알게 됐지만 이미 주님의 이름으로 조약을 맺은 백성이었기에 기브온과 전쟁을 할 수는 없었다. 어찌 되었든 기브온과 동맹을 맺은 이스라엘은 중앙 산악지를 장악하게 되어 가나안에 대해 더욱 큰 지배력을 가지게 됐다. 이 소식을 들은 예루살렘 왕 아도니 체덱은 큰 충격을 받는다. 그는 이스라엘에 대항하기 위해 가나안 남쪽 지역의 왕들과 동맹을 맺었다. “그리하여 예루살렘 임금, 헤브론 임금, 야르뭇 임금, 라키스 임금, 에글론 임금, 이렇게 아모리족의 다섯 임금과 그들의 모든 군대가 모여 올라와서, 기브온을 향하여 진을 치고 싸움을 걸었다”(여호 10,5). 기브온 사람들은 길갈 진영으로 여호수아에게 전갈을 보내 도움을 청했다. 계곡 위에 있는 기브온의 지형 탓에 이곳을 공격하려는 연합 군대들은 계속 아래쪽에 진영을 갖췄다. 하지만 여호수아는 길갈에서 야간에 병력을 이동시켰고 공격을 감행했다. “여호수아는 길갈을 떠나 밤새도록 올라가서 그들에게 갑자기 들이닥쳤다”(여호 10.9). 고대 군사 전문가들은 여호수아가 새벽에 아침 해를 등지고 아직 잠들어 있는 군대를 기습적으로 공격해 섬멸했다고 설명하기도 한다. 또 한 번 여호수아의 뛰어난 군사 지략과 결단력이 드러난 전투였던 것이다. 여호수아의 가나안 정복 전쟁은 가나안의 도시 국가들에게 상당한 두려움을 줬다. 여호수아와 조약을 맺은 것으로 정복 전쟁의 희생을 피한 기브온은 베냐민 지파의 땅이 됐고(여호 18,25), 레위 지파의 도시가 됐다. “또 벤야민 지파에서는 기브온과 거기에 딸린 목초지, 게바와 거기에 딸린 목초지, 아나톳과 거기에 딸린 목초지, 알몬과 거기에 딸린 목초지, 이렇게 네 성읍을 내주었다”(여호 21,17-18). 허영엽 신부(서울대교구 홍보국장) 평화신문2015.01.28
[성경 속 도시](55) 단종교적 독립 위해 금송아지 숭배 도시 단의 포장된 광장과 돌로 쌓은 성벽. 이곳은 북이스라엘의 첫 번째 왕인 예로보암이 베텔과 함께 금송아지를 둔 곳이다. 발췌=「성경 역사 지도」, 분도출판사 이스라엘 사람들이 자주 사용하는 “브에르 세바에서 단까지”라는 표현은 이스라엘의 남쪽 끝은 브에르 세바요, 북쪽 끝은 단이었기 때문이다. 우리가 쓰는 “백두에서 한라까지”라는 표현과 유사하다.단은 구약시대 이스라엘의 전통적 북쪽 경계 도시로 팔레스타인 북단의 도시다. 원래 이름은 ‘라이스’였다. “그 성읍 이름을 이스라엘에게서 난 저희의 조상 단의 이름을 따서 단이라고 지었다. 그 성읍의 본래 이름은 라이스였다”(판관 18,29). 요르단 강의 원류단이 전통적으로 가나안의 도시로 발달할 수 있었던 것은 단에서 헤르몬 산의 눈이 녹아 맑은 샘으로 솟아나며 요르단 강의 원천을 이루었기 때문이다. 요르단 강의 이름은 원래 ‘단으로부터 흘러내려 온다’는 뜻인데, 세 군데의 원류 중에서 단의 샘이 가장 규모가 크기 때문에 유래된 것으로 보인다. 풍부한 물과 주변의 기름진 땅 덕분에 이미 신석기시대부터 주거지가 형성되기 시작했고 근처에서 가장 중심적인 도시로 성장했다. 단 지파는 원래 지중해 연안 지역을 분배받았지만 정착해 있던 필리스티아 민족에 밀려 세력을 확장하지 못하고 가나안의 전통적인 도시였던 라이스를 정복한 후, 도시 이름을 자신들의 지파 이름을 따 단이라고 부르게 되었다.“그러나 단의 자손들은 자기들의 영토를 잃어버리게 되었다. 그래서 그들은 레셈으로 올라가 싸워서 그곳을 점령하였다. 그곳을 칼로 쳐서 차지하고 그곳에 살게 된 것이다. 그리고 그 레셈을 자기들의 조상 단의 이름을 따서 단이라고 하였다(여호 19,47). 성경에서 단이 처음 등장하는 곳은 아브람이 롯을 구출하는 장면에서다. “아브람은 자기 조카가 잡혀갔다는 소식을 듣고, 자기 집에서 태어나서 훈련받은 장정 삼백십팔 명을 불러 모아 단까지 쫓아갔다”(창세 14,14). 결국 아브람은 롯은 물론 빼앗겼던 재물과 친척을 다 찾아왔다. 이 밖에도 단은 성경에서 자주 등장한다. 특히 유명한 것은 솔로몬 사후 남북이 분리돼 북이스라엘의 첫 번째 왕인 예로보암은 정치적으로 분리된 북이스라엘의 종교적 독립을 위해 남쪽 경계인 베텔과 북쪽 경계인 단에 금송아지 성전을 건축한 사건이다. “그래서 임금은 궁리 끝에 금송아지 둘을 만들었다. 그리고 백성에게 이렇게 말하였다. ‘예루살렘에 올라가는 일은 이만하면 충분합니다. 이스라엘이여, 여러분을 이집트 땅에서 데리고 올라오신 여러분의 하느님께서 여기에 계십니다.’ 그러고 나서 금송아지 하나는 베텔에 놓고, 다른 하나는 단에 두었다”(1열왕 12,28-29). 따라서 단은 남북 왕국이 분열된 후 예로보암에 의해 금송아지를 숭배하던 장소로 유명하다. 그 이후 유다의 아사왕이 다마스쿠스에 사는 아람 임금 벤 하닷을 끌어들여 단을 점령했다. “벤 하닷은 아사 임금의 말을 듣고, 군대의 장수들을 그에게 보내어 이스라엘 성읍들을 치게 하였다. 그는 이욘과 단과 아벨 벳 마아카와 온 킨네렛, 그리고 납탈리 전 지역을 쳐부수었다”(1열왕 15,20). 오늘날 여름철 피서지오늘날 이곳은 이스라엘 국립공원으로 우기 때만 되면 많은 물이 단에서부터 솟아나와 요르단 강으로 흘러들어 간다. 특히 여름철에는 많은 이스라엘인이 피서를 즐기는 곳으로 유명하다. 허영엽 신부(서울대교구 홍보국장) 평화신문2015.07.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