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소근 수녀와 떠나는 구약 여행] (58) “허무로다, 허무!”(코헬 1,2)](//cpbc.co.kr/CMS/newspaper/2016/02/rc/619615_1.0_titleImage_1.jpg)
[안소근 수녀와 떠나는 구약 여행] (58) “허무로다, 허무!”(코헬 1,2)주님 경외하며 작은 행복에 만족하라 유스투스 판 겐트 작 ‘솔로몬 스무 살 젊은이가 코헬렛을 이해하기는 어려울지 모릅니다. 열 살 어린이라면 아무리 설명해 주어도 아마 공감에 이르지 못할 것 같습니다. 그러나 환갑이 지나고 칠순이 지나면 좋아지는 책이 코헬렛입니다. 그래서, 솔로몬이 썼다고 전해지는 여러 책 가운데서도 코헬렛은 솔로몬이 노년에 썼다고 하는 것일까요? 코헬렛에는 산전수전을 다 겪은 현인의 지혜가 담겨 있습니다.욥과 코헬렛은 서로 대비되면서도 사실은 많은 공통점을 지니고 있습니다. 욥은 자신이 누리던 복을 다 잃었을 때에 이 세상의 질서에 대해, 하느님의 정의에 대해 항변했습니다. 반면 코헬렛은 세상에서 누릴 수 있는 것은 모두 누려 보았습니다. 코헬렛 역시 솔로몬을 저자로 내세우고 있는데, 실제 저자가 솔로몬인 것은 아니지만, 이 저자는 온 세상을 돌아다니며 많은 업적도 이루었고 누구보다 뛰어난 지혜도 깨달았고 많은 부를 모으기도 했으며 그 어느 것도 잃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결국 그는 “허무로다 허무! 모든 것이 허무로다!”(코헬 1,2; 12,8)라는 결론에 도달하고 맙니다. 코헬렛에서 가장 유명한 구절이지요. 욥과 같은 불행을 당하지 않았어도, 현세에서 얻을 수 있는 모든 것을 다 얻었다 하더라도 결국 인간은 비슷한 결론에 도달하게 마련인 모양입니다.코헬렛이 모든 것이 허무하다고 말하는 이유는, 애쓰고 수고한 사람에게 그대로 그 보람이 돌아가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말하자면, 투자에 대해 확실하게 열 배의 수익이 있다면 사람들은 정말 빚을 얻어서라도 투자를 할 것입니다. 힘이 드는 일이라 하더라도, 좋은 결과를 얻을 것이 명백하다면 수고를 할 것입니다. 하지만 노력의 결과가 확실치 않다면? 아니, 이득이 없음이 확실하다면? 그렇다면 작은 수고조차 하려 하지 않을 것입니다.온 세상을 다니며 많은 경험을 쌓아 본 코헬렛은, 태양 아래에서 애쓰는 모든 일이 바람을 잡는 일이라고 말합니다. 수고하며 애쓰는 것에 대해 그만큼의 이득이 있을 것인지 알 수 없다는 말입니다. 지혜가 있으면 어리석은 것보다는 낫겠지만, 그나마 죽으면 모든 것이 사라지고 맙니다. 죽음, 이것이 코헬렛에게는 넘어설 수 없는 장벽이었습니다. 잠언에서와 마찬가지로 코헬렛에게도 내세에 대한 희망은 아직 뚜렷하지 않습니다. 그러니 평생 무엇인가 이루려고 노력을 하고 또 실제로 무엇을 이룬다 해도 그것은 어느 순간 나에게 아무 의미를 갖지 못하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코헬렛은 “삶을 싫어하게 되었다”고까지 말합니다(2,17). 욥과 같은 고통 때문에 삶을 혐오하는 것이 아니라, 지상의 행복을 최고도로 누리고 있으면서도 그 모든 것이 헛되이 사라져 갈 것임을 보는 것입니다.그런데 다른 한편으로 코헬렛은 놀랍게도 우리에게 인생을 즐기라고 말합니다. 즐겁게 음식을 먹으며 즐기고, 사랑하는 아내와 행복하게 살고, 젊었을 때는 젊음을 즐기라고 초대합니다. 모두 현세적이고 일시적인 작은 행복들입니다. 그 모든 것이 사라져 갈 것임을 알면서도 그것을 즐기라고 말합니다. 그는 영원한 생명에 대해서, 천국의 끝없는 행복에 대해서 말하지 않습니다. 말할 수가 없습니다. 그것은 그가 알 수 있는 영역 밖의 것이기 때문입니다. 코헬렛은 누구보다도 인간의 한계를 잘 알았던 사람입니다. 임금의 권력을 갖고 있고 엄청난 보화를 갖고 있고 뛰어난 지혜를 갖고 있다 하더라도 인간은 유한하다는 것을 깨달은 것이 코헬렛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오늘 우리에게 주어지는 작은 행복들을 즐기라고 말합니다. 그것이 덧없는 인생에 주어진 하느님의 선물이기 때문입니다. 코헬렛은 이 즐거움이 영원한 가치, 최고의 가치라고 믿지 않습니다. 그저, 그것이 지상에서 인간에게 허락된 몫이라고 알기에 영원하지 않은 그 즐거움이 사라지기 전에 그 즐거움을 누리라고 말하는 것입니다.욥기와 코헬렛은 비슷한 단계의 신학을 보여 줍니다. 여기에서 인간의 지혜는 한계에 부딪힙니다. 잠언에서는 이 세상의 질서를 말했고 인간이 어느 정도는 그 질서를 파악할 수 있다는 믿음을 전제하고 있었지만, 욥기와 코헬렛은 인간이 알 수 있는 영역보다는 알 수 없는 영역을 바라보며 인간의 한계를 절감합니다.그리고 욥기에서와 마찬가지로 코헬렛은, 인간 앞에 놓인 벽 앞에서 믿음을 선택합니다. 벽 너머에는 무엇이 있을까요? 코헬렛은 자신에게 알도록 허락된 그 영역 너머로 손을 내뻗으려 하지 않습니다. “하느님께서는 하늘에 계시고 너는 땅 위에 있으니”(5,1). 코헬렛은, 인간이 모든 것을 알 수는 없어 그에게는 인생이 온통 고생처럼 보일지라도 하느님께서는 “모든 것을 제때에 아름답도록 만드셨다”(3,11)고 믿습니다. 인간이 그 하느님의 영원하신 계획을 깨달을 수 없음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으면서도 코헬렛은 그런 믿음으로 자신이 파악할 수 없는 영역은 하느님께 맡기고 그분께서 주시는 작은 즐거움들에서 행복을 찾습니다. 지상과 천상, 현세와 내세의 모든 것을 아는 사람의 믿음이 코헬렛의 믿음보다 더 가치 있다고 단언할 수 있을까요? 인간 지혜의 한계를 인정하기에 “책을 많이 만들어 내는 일에는 끝이 없고 공부를 많이 하는 것은 몸을 고달프게 한다”(12,12)고 하면서 오히려 “하느님을 경외하고 그분의 계명을 지켜라”(12,13)라고 권고했던 코헬렛은 진정한 신앙인이었습니다.<성 도미니코 선교수녀회, 대전가톨릭대 교수> 평화신문2016.02.16
![[전영준 신부의 가톨릭 영성을 찾아서] (18) 4세기 ⑤ - 니사의 그레고리우스의 신비 사상](//cpbc.co.kr/CMS/newspaper/2017/03/rc/676700_1.0_titleImage_1.jpg)
[전영준 신부의 가톨릭 영성을 찾아서] (18) 4세기 ⑤ - 니사의 그레고리우스의 신비 사상갈망과 열망으로 사랑한다면 신비체험도 가능카파도키아의 3대 교부 중 한 분이며 바실리우스의 친동생이었던 니사의 그레고리우스(Gregorius Nyssenus, 335/40~394 이후)는 수도 생활 신학뿐 아니라, 신비 생활 신학 정립에 탁월한 기여를 했습니다. 그레고리우스는 오리게네스의 제자로서 오리게네스 예찬자였지만 4세기 삼위일체 교리 형성 과정에서 신 플라톤 사상의 영향으로 불거진 이단 논쟁을 극복하는 가운데 오리게네스와 닮은 듯하면서도 닮지 않은 신비 신학을 구축했습니다. 오히려 그레고리우스는 삼위일체 교리 논쟁의 영향으로 필론 및 중기 플라톤 사상과 닮은 부정신학의 관점에서 신비 신학을 전개했습니다.니사의 그레고리우스.수도 생활에 대한 권고 친형님이었던 바실리우스는 평신도 그리스도인으로서 결혼 생활을 하는 친동생 그레고리우스에게 동정 생활을 주제로 한 작품 저술을 부탁했습니다. 따라서 그레고리우스는 저서 「동정론(De Virginitate)」에서 하느님께서 정욕 없이 당신의 모상을 닮은 인간을 창조하셨다는 창조 신학의 관점으로 동정의 가치를 조명했습니다. 특히 그레고리우스는 삼위일체 신비가 동정 생활의 기초 원리라고 강조했습니다. 이후 그레고리우스는 저서 「마크리나의 생애(Vita Macrinae)」에서 큰누이 마크리나를 완덕에 다다른 완벽한 수도자의 모델로 소개하면서 수도자가 완덕에 다다르기 위한 통합적인 영적 여정을 제시했습니다. 결국 수도 생활을 후원하던 바실리우스 사망 이후에 그레고리우스는 수도자를 돌보고 후원하는 일을 도맡게 되었습니다. 또한 그레고리우스는 저서 「히포티포시스(Hypotyposis)」에서 수도자의 영적 여정 및 수도 공동체의 올바른 생활을 언급했습니다. 특히 그레고리우스는 수도 공동체가 신비 생활로 나아갈 것을 격려했습니다. 상승의 여정으로서의 신비체험 325년 (제1차) 니케아 공의회는 그레고리우스가 오리게네스 신비 사상의 부족한 점을 극복하고 자신의 신비 사상을 펼치는 데 큰 영향을 끼쳤습니다. 먼저 니케아 공의회가 재확인한 무로부터의 창조 교리는 인간 영혼이 하느님과 본질이 같아서 합일할 수 있다고 주장한 오리게네스의 신비 사상을 정면으로 반박할 수 있었습니다. 즉, 인간 영혼도 피조물이기에 창조주와 피조물 사이에서는 저절로 일치할 수 있는 길이 없다는 것입니다. 오히려 창조주께서는 피조물 세상으로 건너오실 수 있으며, 강생의 신비가 신비체험의 열쇠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인간 영혼이 할 수 있는 일은 하느님을 열렬히 사랑하는 것뿐입니다. 한편 니케아 공의회와 381년 (제1차) 콘스탄티노플 공의회 사이에서 지속됐던 삼위일체 교리 논쟁은 그레고리우스가 자신의 신비 사상을 전개할 방향을 정립하는 데 영향을 주었습니다. 이 시기에 아리우스주의(Arianism)는 성부만 유일하게 신의 본질을 지녔고, 성자는 신과 동일한 본질을 지니지 못한 피조물이라고 주장했습니다. 또한 에우노미우스주의(Eunomianism)도 태어난 적이 없는 성부의 본질과 태어난 성자의 본질은 같을 수 없다고 주장하면서 아리우스주의에 동조했습니다. 그레고리우스는 저서 「에우노미우스 논박(Contra Eunomium)」에서 에우노미우스(Eunomius, 325?~394)가 성자와 성령의 존재를 거부하는 은유법을 사용할 뿐 아니라 성경과 공의회의 전통적인 용어를 포기했다고 주장했습니다. 결국 삼위일체 논쟁이 거듭될수록 그레고리우스는 삼위일체 신비는 적극적인 설명보다는 우회하는 설명이 더 적절하다고 느꼈습니다. 따라서 그레고리우스는 자신의 신비 사상에서 초월적 존재인 ‘하나’로 수렴하는 신 플라톤 사상의 영향으로 상승의 여정을 전개했으며, 삼위일체 신비를 통한 하느님 인식의 문제를 부정신학적 방법론으로 접근했습니다. 부정신학적 신비체험 그레고리우스는 저서 「모세의 생애(De vita Moysis)」와 「아가 강해(In Canticum canticorum homiliae)」에서 그리스도인의 완덕과 영혼의 영적 상승을 묘사하면서 자신의 신비 사상을 제시했습니다. 먼저 그레고리우스는 「아가 강해」에서 솔로몬의 지혜서로 불리는 세 권의 성경인 「잠언」, 「코헬렛」 및 「아가」를 인간의 성장 시기와 대조하여 유년기, 청년기, 성숙기에 적용하여 인간 영혼이 걷는 상승의 세 단계로 묘사했습니다. 그런데 그레고리우스에 따르면, 세 번째 단계는 최종 목적지인 관상의 상태가 아니라 이제야 본격적으로 하느님을 만나러 가는 신비체험의 시작점이라는 것입니다. 즉 끊임없이 나아가도 인간 영혼은 하느님을 만날 수 없지만, 하느님의 활동이 인간으로 하여금 하느님을 조금 알 수 있게 한다는 것입니다. 한편 그레고리우스는 「아가 강해」를 통해 하느님을 찾는 여정에서 인간 영혼이 빛, 구름, 및 어둠의 세 길을 걸어간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모세의 생애」에선 이 세 개의 길을 모세의 중요 생애와 비교, 설명했습니다. 첫 번째 빛의 단계는 불타는 떨기 속에서 모세에게 나타나신 하느님에 관한 일화를 통해 설명했습니다. 인간 영혼에게 비춰진 신비스러운 진리의 빛은 인간이 파악할 수 없는 하느님이시라는 것입니다. 두 번째 구름의 단계는 홍해를 건넌 모세가 시나이 산에서 하느님과 계약을 맺는 일화를 통해 설명합니다. 구름에 휩싸인 산을 오른다는 것은 하느님을 관상하기 시작한다는 것입니다. 세 번째 어둠의 단계는 하느님을 만나는 순간으로 설명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어둠 속에서 자신을 계시하시기에 인간 영혼은 가시적인 모든 것을 버려야만 어둠 속에 하느님을 뵐 수 있습니다. 물론 그레고리우스의 부정신학적 신비 사상은 처음부터 불가지성(不可知性, 지성으로는 알 수 없음)만을 강조하지 않았습니다. 그레고리우스는 하느님께서 알려주시는 빛에서 시작하여 모든 것을 포기하는 어둠으로 옮겨갔습니다. 또한 영혼의 거울, 영적 감각, 내재하시는 말씀의 세 가지 측면을 통한 체험을 언급하면서 가지성(可知性)의 경계를 넘나들기도 했습니다. 결국 인간의 지적 활동으로 인식할 수 없는 하느님이시라도 인간 영혼이 갈망과 열정으로 하느님을 사랑한다면 하느님과 일치하는 신비체험은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그레고리우스는 삼위일체 교리 논쟁에서 인간의 이성이 하느님을 온전히 파악하지 못하고 왜곡시킬 수 있다는 점을 목격했습니다. 그레고리우스는 인간이 안다는 것을 포기할 때 오히려 체험할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레고리우스는 부정신학적인 방법론으로 하느님께 다가가는 영적 여정을 주장하고 싶었습니다. 그러므로 그레고리우스의 부정신학적 신비 사상은 훗날 여러 세기를 걸쳐 많은 영성신학자들에게 영향을 끼침으로써 ‘부정-신비 신학’의 계보를 만들었습니다. <가톨릭대 신학대학 영성신학 교수> cpbc2017.03.30
![[전영준 신부의 가톨릭 영성을 찾아서] (11) 3세기 ②-오리게네스의 신비사상](//cpbc.co.kr/CMS/newspaper/2017/02/rc/670916_1.0_titleImage_1.jpg)
[전영준 신부의 가톨릭 영성을 찾아서] (11) 3세기 ②-오리게네스의 신비사상그리스도인의 영적 여정에 방향을 제시하다 오리게네스는 구약성경의 「아가」를 영성적 관점에서 해석하며 인간 사이에 사랑의 감정에 대한 비유적 언어로 신비체험과 애덕과의 깊은 관계를 쉽게 설명했다. 알렉산드리아 학파에 속한 알렉산드리아의 오리게네스(Origenes, 185~254)는 우의적 의미를 추구하던 성경 해석 방법을 어떻게 영성 생활 발전에 적용했는지 보여주는 대표적인 인물이었습니다. 탁월한 성경 주석가였던 오리게네스는 성경 본문을 문자적 의미, 윤리적 의미, 영적 의미로 해석하면서 그리스도인의 영적 여정을 체계적으로 설명했습니다. 특히 오리게네스는 그리스도인이 아직 살아있는 동안에 하느님과 일치하는 체험을 이론적으로 체계화하여 제시한 첫 번째 그리스도교 신비 사상가였습니다.하느님과 일치하는 신비체험사실 그리스도교 영성 생활은 그리스도인이 최선을 다해 노력해야 하는 수덕 생활의 측면도 있지만, 결코 인간의 노력만으로 완성되지 않습니다. 때로는 하느님께서 은총으로 그리스도인을 이끌어 주셔야 하는 신비 생활의 측면도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은 하느님 은총의 도움 속에서 하느님께 가까이 나아가는 ‘신비체험’(mysticism)을 하게 됩니다. 신비체험은 사도 베드로(사도 10,9-16 참조)와 사도 바오로(2코린 12,1-4 참조)의 경험에서처럼 ‘무아경’ 속에서 ‘환시’나 ‘말씀’을 동반하는 경우도 있지만, 신비체험의 과정은 말로 설명하기 어려운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따라서 그리스도교 2000년 역사 안에 수많은 신비 체험가들이 있었던 만큼 그들의 신비체험 과정을 설명하려던 수많은 신비 사상가들도 있었습니다.오리게네스의 신비사상은 기본적으로 플라톤 사상과 중기 플라톤 사상의 영향으로 ‘영혼 선재(先在) 사상’과 ‘삼분법’의 색채를 띠었습니다. 오리게네스는 인간 영혼이 이미 신의 영역에 존재했었기 때문에 인간 영혼과 신의 본질이 같은 ‘동족’(同族) 관계를 이룬다고 강조했습니다. 즉, 본질이 같은 두 물질은 서로 섞이기도 쉬울 뿐 아니라 서로를 이끄는 성질도 있기 때문에, 인간 영혼은 하느님과의 일치를 간절히 원할 뿐 아니라 하느님과의 일치가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다만 오리게네스는 물질적 차원에서 사는 인간 영혼이 초월적 차원에 존재하는 신을 향해 상승의 여정을 걸어가야만 하느님과 일치한다고 설명했습니다.상승의 여정으로서의 신비체험먼저 오리게네스는 저서 「아가 강론」(Homiliae in Canticum Canticorum) 서문에서 구약성경 시대 이스라엘 백성의 역사를 배경 삼아서 인간이 하느님을 만나러 가는 상승의 여정을 일곱 단계로 구분하여 묘사했습니다. 즉, 모세와 이스라엘 자손들은 홍해를 건넌 후에 첫 번째 노래를(탈출 15,1), 이스라엘 백성들은 브에르에 있는 제후들이 판 우물에서 두 번째 노래를(민수 21,17), 모세는 요르단 강둑에서 세 번째 노래를(신명 32,1), 판관 드보라는 가나안 임금의 손에서 이스라엘 자손들을 구한 후에 네 번째 노래를(판관 5,2), 다윗은 자신의 원수들과 사울의 손아귀를 벗어난 후에 다섯 번째 노래를(2사무 22,2), 이사야 예언자는 여섯 번째 포도밭 노래를(이사 5,1), 마지막으로 아름다운 영혼은 더 높게 올라가 신랑과 함께 일곱 번째 노래인 「아가」를 부른다는 것입니다. 결국 세례성사를 받은 그리스도인은 여러 어려움을 극복하며 영적 여정을 무사히 통과하여 하느님과의 일치 속에서 기쁨의 노래를 부르게 됩니다.또한 오리게네스는 저서 「아가 주해」(Commen tarium in Canticum Canticorum) 서문에서 세상 학문 분야와 솔로몬 왕의 작품으로 여기는 구약성경을 짝지어 ‘정화’, ‘조명’, ‘일치’의 단계를 거치는 상승의 여정을 설명했습니다. 즉, 덕행의 습득을 다루는 ‘윤리학’과 창조질서에 순응하며 세상 본성을 다루는 ‘자연학’ 및 천상적인 것을 다루는 ‘형이상학’은 삶의 규범을 다루는 「잠언」과 헛되거나 유익한 것을 구별하는 지혜를 다루는 「코헬렛」 및 천상을 향한 신랑과 신부의 사랑을 다루는 「아가」와 각각 짝을 이룬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영성 생활을 갈망하는 그리스도인은 「잠언」에서 계명을 배우고, 「코헬렛」에서 영원한 것에 마음을 두며, 「아가」에서 하느님 사랑에 빠지는 상승의 여정을 걷습니다.사랑-신비사상이렇게 오리게네스는 구약성경의 「아가」를 영성적인 관점에서 해석하면서 인간 영혼이 하느님과 일치하는 과정을 다루는 신비사상을 펼쳤습니다. 즉, 「아가」에 등장하는 ‘신랑’을 그리스도로, ‘신부’를 인간 영혼으로 해석하면서 그리스도인이 하느님을 향하는 상승의 여정을 신부가 신랑을 찾는 과정으로 비유했습니다. 이후 「아가」를 바라보는 오리게네스의 시각에 영향을 받은 많은 영성가들과 영성신학자들은 그리스도교 신비체험과 「아가」를 연관 지어 묵상하고 주석하면서 ‘영적 혼인’의 개념을 발전시켰습니다.게다가 「아가」에 나타난 인간 사이에 사랑의 감정에 대한 비유적 언어 때문에, 오리게네스는 신비체험과 애덕과의 깊은 관계를 쉽게 설명할 수 있었습니다. 사랑의 주제를 강조한 오리게네스의 신비사상은 ‘사랑-신비사상’ 혹은 ‘신부-신비사상’이라고 일컬어지면서 훗날 ‘혼인-신비사상’ 계보의 시작이 되었습니다.그리스도 중심적 신비사상한편 오리게네스는 플라톤 사상의 한계를 극복하고 그리스도 중심적인 신비사상을 전개했습니다. 오리게네스는 「아가 주해」 제4권에서 하느님께서 모세를 바위 굴 안에 넣고 뒷모습만 볼 수 있게 하신 것처럼(탈출 33,22-23), 그리스도께서 바위틈을 통해 하느님을 알려 주셔서(아가 2,14 참조) 그리스도인이 하느님과 일치할 수 있다고 강조했습니다.또한 오리게네스는 「아가 주해」 제2권에서 다섯 개의 영적 감각 기관에 감지되는 그리스도가 ‘하느님 말씀’이라고 주장했습니다.(아가 1,12 참조) 즉, 그리스도는 영적 청각에 들리는 ‘말씀’이시고, 영적 미각으로 맛보는 ‘생명의 빵’이시며, 영적 후각이 냄새 맡는 ‘말씀의 향기’이시고, 영적 촉각으로 느끼는 육신을 취하신 ‘생명의 말씀’이시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다른 감각 기관으로 느낀 각기 다른 대상은 결국 동일한 하느님 말씀입니다. 따라서 하느님 말씀에서 퍼지는 거룩한 은총의 향기를 맡을 수 있는 후각을 지닌 영혼만이 완전히 정화되어 성화됨으로써 하느님과 일치할 수 있습니다.사실 창조주이신 하느님의 본질과 피조물인 인간 영혼의 본질이 결코 같을 수 없기 때문에, 오리게네스의 신비사상은 훗날의 시각에서 보면 오류를 지녔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리게네스는 그리스도의 도움으로 인간 영혼이 하느님과 일치하는 수동적인 측면과 하느님에 대한 사랑에 고무되어 상승의 여정을 걷는 능동적이며 실천적인 측면을 균형 있게 언급함으로써 알렉산드리아 학파를 대표하는 신비 사상가로 오래 기억되었습니다. <가톨릭대 신학대학 영성신학 교수> cpbc2017.02.08
![[허규 신부와 떠나는 신약여행] (21) 사마리아인들은 예수님을 맞아들이지 않았다(루카 9,53)](//cpbc.co.kr/CMS/newspaper/2016/10/rc/657735_1.0_titleImage_1.jpg)
[허규 신부와 떠나는 신약여행] (21) 사마리아인들은 예수님을 맞아들이지 않았다(루카 9,53)이방인들에게도 두 팔 벌리신 예수님 유다인과 사마리아인은 오랫동안 적대적인 관계였다. 하지만 네 복음서 중 루카 복음에서는 나병 환자를 고쳐준 사마리아인 이야기 등 사마리아인에 대한 긍정적 기록을 남기고 있다. 그림은 반 고흐 작 ‘착한 사마리아인의 비유’, 1890년, 네덜란드 암스테르담 국립미술관. 가톨릭 굿뉴스 제공 “하늘에 올라가실 때가 차자,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으로 가시려고 마음을 굳히셨다”(루카 9,51). 루카 복음은 이제 갈릴래아를 떠나 예루살렘으로 향해 가시는 예수님에 대해 이렇게 표현합니다. 제자들이 예수님보다 먼저 사마리아 마을로 가지만 사마리아 사람들은 예수님을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사마리아는 역사적으로 유다인들과는 적대적인 관계에 있었습니다. 그들의 반목의 역사는 이스라엘 사람들의 유배 시기 이전으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솔로몬 왕 이후 이스라엘은 남과 북으로 분열됩니다. 북쪽 지역은 북이스라엘로, 남쪽은 남유다로 서로 다른 왕국을 세웁니다. 이스라엘의 분열된 왕국은 모두 시간 차이를 두긴 하지만 비극의 역사로 끝납니다. 기원전 722년경 북이스라엘은 아시리아에 의해 점령당합니다. 아시리아는 사마리아에 살던 이들을 이주시키며(2열왕 17,6) 정책적으로 그 땅에 이방인들이 살도록 합니다(2열왕 17,24). 이러한 과정에서 사마리아는 이방 종교의 영향을 받고 또 민족의 순수한 혈통을 지키지 못했다는 비난을 받게 됩니다. 그 이후 이스라엘의 정통을 이어가고자 했던 남유다 역시 바빌론의 침략으로 성전을 잃고 유배를 경험하게 됩니다(기원전 587년경). 비슷한 역사적인 배경을 가졌던 이들이지만 유배 이후 유다인들과 사마리아인들의 갈등은 점점 커지고, 기원전 450년경 사마리아는 자신들의 땅 그리짐 산에 성소를 세우게 됩니다. 이런 사건 이후로 유다인들과 사마리아인들은 종교적으로도 서로 다른 길을 걷게 되고, 유다인들은 이런 이유로 사마리아인들을 이방인처럼 취급하게 됩니다. 같은 민족이었지만 전쟁과 침략을 거치면서 서로 다른 민족처럼 반목하는 역사를 보여줍니다. 예수님 시대에도 이러한 상황은 마찬가지였습니다. 유다인들과 사마리아인들은 상종하지 않았습니다. 또한 사마리아인들을 이방인으로 여긴 유다인들은 갈릴래아에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갈 때에도 사마리아 지역을 통과하는 것이 가장 빠른 길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그 지역을 지나지 않았을 정도입니다. 신약 성경에서 사마리아 지역에 예수님에 대한 복음이 선포됐다고 처음 전하는 것은 사도행전 8장 4-25절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그렇기에 예수님께서 사마리아를 지나서 예루살렘으로 가시고자 했다는 루카 복음의 이야기는 특별해 보입니다. 당시의 일반적인 여정과는 맞지 않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루카 복음만이 이 이야기를 전합니다. 그리고 유독 루카는 사마리아인들에 대해 호의적인 태도를 가진 복음서이기도 합니다. 착한 사마리아 사람의 비유(루카 10,29-37)나 예수님께서 고쳐주신 열 명의 나병 환자 중에 사마리아 사람만이 유일하게 돌아와 감사를 드렸다는 내용(루카 17,11-19)은 루카 복음이 전하는 고유한 이야기입니다. 루카의 고유한 이야기들은 다른 복음서와 구분되는 특징을 잘 드러냅니다. 루카 복음은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하기 위해 기록된 복음서입니다. 더욱이 복음서의 저자가 바오로 사도의 동반자였던 루카라는 점을 생각한다면, 복음서의 초점이 이방인들에게 맞춰져 있다는 것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루카 복음은 복음서의 시작에서부터 유다인들이 아닌 모든 이들을 복음 선포의 대상으로 삼습니다(루카 4,16-30 참조). 혈통이나 출신에 의해서가 아니라 믿음에 의해서 구원받을 수 있다는 것을 강조합니다. 예수님께서 사마리아를 지나고자 했다는 루카의 이야기는 부정적으로 끝납니다. 비록 그들이 아직은 예수님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지만, 이 이야기는 예수님께서 사마리아에서도 복음을 선포하길 원하셨다는 사실을 알려줍니다. 루카는 예수님의 복음 선포는 모든 이들에게 열려 있다는 것을 강조합니다. 누구든지 믿음을 통해 구원될 수 있다는 선포는 혈통을 중시했던 유다인들에게는 불편한 것이지만 이방인들에게는 새로운 기쁜 소식입니다. <가톨릭대 성신교정 성서학 교수> 평화신문2016.10.26
 2세기 ① - 사도 교부 시대 영성 생활](//cpbc.co.kr/CMS/newspaper/2016/12/rc/665837_1.0_titleImage_1.jpg)
[전영준 신부의 가톨릭 영성을 찾아서](6) 2세기 ① - 사도 교부 시대 영성 생활그리스도로 무장한 그리스도인 공동체 유배지에서 기적을 행한 죄로 닻에 묶인 채 흑해에 빠져 순교한 클레멘스 1세를 그린 피에르레오네게치 작 ‘성클레멘스의 순교’. 그동안 우리는 신약 성경을 통해서 초세기 그리스도인 영성 생활을 엿보았습니다. 그리고 이제 우리는 초세기 말엽에서 2세기 중엽 사이에 위치한 사도 교부 시대 영성을 살펴보려고 합니다. 물론 사도 교부 시대 작품들은 그렇게 많지 않지만, 그나마 남아있는 작품들을 통해서 지금으로부터 2000여 년 전에 그리스도인이 어떻게 영성 생활을 실천했는지 가늠해 볼 수 있을 것입니다.사도 교부는 열두 사도들의 직제자이었거나 사도들의 가르침을 직간접적으로 받았습니다. 사도 교부는 지역 교회 주교로서 사목 활동을 하면서, 신자들을 격려하고 신자들 사이에 발생한 문제를 해결하려는 사목적인 저술 활동도 겸했습니다. 로마의 교황 클레멘스(Clemes Romanus, ?~96/97), 안티오키아의 주교 이냐티우스(Ignatiua Antiochenus, 105?~135?), 스미르나의 주교 폴리카르푸스(Polycarpus Smyrnensis, ?~167), 및 히에라폴리스의 주교 파피아스(Papias Hierapolitanus, 60?~120?) 등이 이에 해당합니다.한편 비슷한 시기에 익명이나 가명 혹은 잘 알려지지 않은 저자가 저술한 몇몇 작품들도 사도 교부 시대에 속한 작품으로 간주되어 이 당시 상황을 짐작하는 데 도움을 줍니다. 「열두 사도들의 가르침-디다케(Didache ton dodeka apostolon)」, 「바르나바의 편지(Epistula Barnabae)」, 「헤르마스 목자(Pastor Hermae)」 및 「솔로몬의 송가(Odae Salomonis)」 등이 이에 해당합니다.그리스도 중심적인 영성사도 교부 시대 영성의 첫 번째 특징은 그리스도 중심적인 영성입니다. 예수님을 메시아로 인정하지 않았던 유다교와는 달리 예수님을 구세주 그리스도로 믿고 고백하는 그리스도교는 일부 나타났던 유다교화의 굴레에서 벗어나기 위해 당분간 교회 분위기를 하느님 중심보다 그리스도 중심으로 이끌어 가야 했을 것입니다.“우리의 자녀들은 그리스도 안에서 교육되어야 할 것입니다. 그들은 주님과 함께 순수한 사랑의 힘과 겸손의 능력을 배워야 하고 순수한 정신으로 그분 안에서 거룩하게 살고 있는 모든 것을 구원하시는 그분께 대한 아름답고 큰 경외심을 가진 자가 되어야 합니다.”(클레멘스, 「고린토인들에게 보낸 편지」 21,8)“우리가 지금까지도 유다교를 따라서 살아간다면 이는 우리가 은총을 받지 않았다고 고백하는 것이 됩니다. 하느님과 가까운 사람들인 예언자들도 예수 그리스도를 따라 살았습니다.”(이냐티우스, 「막네시아인들에게 보낸 편지」 8,1~2)“누가 여러분에게 유다교에 관하여 가르치려 할 때 여러분은 귀를 기울이지 마십시오. 할례받지 않은 사람에게서 유다교에 관해 듣는 것보다 할례받은 사람에게서 그리스도교에 관해 듣는 것이 더 낫습니다. 하지만 예수 그리스도에 관해 말하지 않는다면, 둘 다 제게 있어서 사람들의 이름을 적어놓은 묘비나 죽은 자들의 묘소에 불과합니다.”(이냐티우스, 「필라델피아인들에게 보낸 편지」 6,1)전례 중심적인 영성두 번째 특징은 전례 중심적인 영성입니다. 예루살렘 모교회 신자들은 공동체 안에서 빵을 떼어 나누어 먹으면서 날마다 성찬례를 거행했습니다. 이후 주님의 복음이 전달된 모든 곳에서 그리스도인은 성찬례를 거행하며 전례 안에서 그리스도의 현존을 실현하고 체험했습니다. 그러나 교회 안에서 발생한 이단자들은 성찬례와 성찬례를 통해 오는 주님의 은총을 거부했습니다. 따라서 사도 교부들은 각지에 있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성찬례 안에서 그리스도와 일치할 수 있다는 점을 널리 알려야 했을 것입니다.“이 빵조각이 산들 위에 흩어졌다가 모여 하나가 된 것처럼, 당신 교회도 땅끝들에서부터 당신 나라로 모여들게 하소서. … 주님의 이름으로 세례받은 이들이 아니면, 아무도 여러분의 감사(례)에서 먹지도 마시지도 말아야 합니다.”(「디다케」 9,4~5)“심지어 천상 존재들, 영광의 천사들 그리고 눈에 보이는 통치자들과 볼 수 없는 통치자들이라도 그리스도의 성혈을 믿지 않는다면 그 또한 심판받을 것입니다. … (예수 가현 이단자들은) 성체와 기도를 멀리합니다. 저들은 성체가 우리 구원자 예수 그리스도의 살임을 고백하지 않습니다. 성체야말로 우리의 죄를 (사하기) 위해서 수난하신 그리스도의 살이요, 아버지께서 자애로이 일으키신 그리스도의 살인데도 말입니다.”(이냐티우스, 「스미르나인들에게 보낸 편지」 6,1; 7,1)“그 한 덩이 빵으로 말하면 불사의 약입니다. 죽지 않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영원히 살게 하는 해독제입니다.”(이냐티우스, 「에페소인들에게 보낸 편지」 20,2)수덕 생활 실천의 영성이 시대 영성의 세 번째 특징은 수덕 생활을 실천하는 영성입니다. 이미 바오로 사도도 나쁜 악습을 끊어버리고, 좋은 덕행을 증진시키도록 수덕 생활 실천을 권고한 바 있습니다(갈라 5,13-26 참조). 특히 사도 교부들은 수덕 생활이 이념 논쟁과 이단사상을 극복하기 위한 좋은 방법이라고 여겼습니다. 따라서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를 본받아 성덕을 완성하기 위하여 수덕 생활의 여정을 걸어야 했을 것입니다.헤르마스는 저서를 환시, 계명, 비유의 세 부분으로 구성했는데, 거의 모든 부분에서 덕행과 악습을 비교 나열하면서 윤리 도덕적인 실천을 권고했습니다(「목자」, 셋째 환시; 여섯째~여덟째, 열두째 계명; 아홉째 비유 참조). 도덕적인 완성 없이는 그리스도의 성덕을 본받을 수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가 의로운 것에 뜻을 둔다면 그의 영예는 하늘에 쌓이고, 그가 하는 모든 일은 분명히 주님의 마음에 들 것이다. 그러나 마음속으로 악한 것에 뜻을 두고 있는 이들, 특히 이 세상 것을 얻기 바라고 부를 자랑하며, 앞으로 선을 위해 온 힘을 기울이지 않는 이들은 스스로 죽음과 속박을 부른다.”(「목자」, 첫째 환시, 1,8)폴리카르푸스도 ‘의로움’이라는 주제로 글을 쓴다고 밝히면서, 그리스도인의 윤리 도덕적인 삶을 강조했습니다. “어떤 사람이 이 덕들을 갖추고 있다면, 그는 의로움에 관한 계명을 완성한 것입니다. 사실 사랑을 갖춘 사람은 모든 죄에서 멀리 떨어져 있습니다.”(「필리피인들에게 보낸 편지」, 3,3) 따라서 그는 여러 곳에서 악습과 덕행 목록을 비교 나열했습니다.(「필리피인들에게 보낸 편지」 2,2; 4,3; 5,2;6,1; 12,2 참조)새로운 종교적 신념을 확립하려면, 이념적인 무장뿐 아니라 실천이 따라야 합니다. 그러므로 사도 교부들은 그리스도로 무장한 그리스도인이 공동체로는 전례 안에서, 개인으로는 수덕 생활 안에서 영적 여정을 걸어야 한다고 강조했던 것입니다. 백영민2016.12.28

그들이 어떻게 기도했길래 하느님이 응답해 주셨나 성경 인물들의 기도 상·하 성경 인물들의 기도 상·하차동엽 지음/위즈앤비즈/2만 5000원무(無)에서 유(有)가 탄생하는 경우는 없다. 소설가들은 한 권의 소설을 쓰기 위해선 수십 수백 편의 소설을 ‘필사’한다고 한다. 그렇게 다른 작가의 작품을 통해 자신만의 세계를 만들어 간다. 미술가들은 또 어떠한가. 위대한 걸작들을 보고 익히면서 자기만의 화풍을 구축해 간다.기도도 마찬가지다. 기도할 줄 모른다면, 기도를 잘하고 싶다면 먼저 신앙 선배들이, 신앙 선조들이 바친 기도를 찾아보고 그 기도를 따라 해봐야 한다. 배움에 왕도가 없듯이 기도에도 왕도가 없다. 차동엽(인천교구) 신부가 펴낸 「성경 인물들의 기도」는 기도의 길을 닦은 성경 속 인물들의 갖가지 기도가 담겨 있다. 그들이 무슨 기도를 바쳤는지, 하느님께선 응답해 주셨는지, 기도의 결말은 어떠한지를 살펴봤다. 차 신부가 ‘기도 선배’인 성경 속 인물들을 통해 배운 기도와 기도 체험을 엮어낸 것이다. 기도와 믿음에 도(?)가 텄을 것 같은 차 신부지만, 그 역시 “기도를 기도답게 하고 싶었고 그러려면 기도 선배들에게 배우는 게 먼저였다”고 털어놨다. 책은 구약편과 신약편 2권으로 구성돼 있다. 구약편엔 아담와 카인, 모세, 여호수아, 솔로몬, 다니엘, 말라키 등 34명의 기도가 들어 있다. 신약편은 세례자 요한에서부터 예수님까지 19명의 기도를 담았다. 어떤 기도는 금세 하느님께 응답받았고 어떤 기도는 거절당하기도 했다. 응답을 받기까지 한평생 기다린 이들도 있다. 성경 인물들의 기도를 통해 세상만사 희로애락과 한 시대의 흥망성쇠를 엿볼 수 있다. 차 신부는 기도를 배우면서 시편 102편 말씀에서 깨달음을 얻었다. “주님께서… 헐벗은 이들의 기도에 몸을 돌리시고 그들의 기도를 업신여기지 않으시리라”(시편 102,17-18). 하느님 앞에 기도를 바치는 이들은 임금이나 예언자, 과부나 고아 할 것 없이 ‘헐벗은 이들’이 됐다. 그리고 이들의 기도는 애원이고 탄원이었으며 하소연이었다. 하느님께선 그 기도를 ‘업신여기지 않고’ 보듬어 주셨다. 차 신부는 “우리 시대 저마다의 애환과 고달픔을 속속 헤아려 주시는 주님 연민이 고동치는 듯하다”고 했다. ‘대체 성경 인물들 기도가 나와 무슨 상관이냐’고 되묻는 이들에게 차 신부는 “그들의 기도가 우리 기도를 한 단계 발전시켜 주는 영감이 되기를 바란다”고 했다. 인천교구장 최기산 주교는 책을 추천하며 “신앙 선배들은 우리에게 척박한 삶의 터에서 살아남는 생존 기도, 실전 기도를 가르쳐 준다”면서 “무작정 기도하기보다는 먼저 기도하는 법을 충실히 배우는 것이 상책”이라고 했다.박수정 기자 catherine@pbc.co.kr 백영민2016.04.27
![[안소근 수녀와 떠나는 구약여행] <19>](//cpbc.co.kr/CMS/newspaper/2015/04/rc/567120_1.0_titleImage_1.jpg)
[안소근 수녀와 떠나는 구약여행] “자기 조상 다윗의 마음과는 달리”(1열왕 15,3) 우상에 빠진 솔로몬, G.B. Venanzi. 열왕기에는 “다윗의 마음과는 달리” 또는 그와 비슷한 표현들이 자주 나옵니다. 그럴 수밖에 없습니다. 임금들을 평가하는 기준이 다윗인데 대부분의 임금들이 낙제했기 때문입니다. 그 첫 번째가 솔로몬입니다. 열왕기 저자는 솔로몬의 지혜와 영화에 대해 알고 있습니다. 그가 하느님께 지혜를 청하여 받았고 매우 부유했으며 7년에 걸쳐 성전을 지었다는 것도 압니다. “솔로몬 임금은 부와 지혜에서 세상의 어느 임금보다 뛰어났다”(1열왕 10,23). 하지만 그의 마음은 한결같지 못하였다고 말합니다(1열왕 11,4). 솔로몬을 부정적으로 보는 첫째 이유는 그가 외국 여자들을 아내로 맞아들였기 때문입니다. 여호수아와 판관 시대 이스라엘이 가나안에 들어가면서부터, 그 땅의 주민들과 혼인 관계를 맺는 것은 금지되어 있었습니다. 그들을 따라 다른 신들을 섬기게 될 위험 때문이었습니다. 그런데 솔로몬은 여러 나라의 수많은 여자를 데려왔고 그래서 한 분이신 하느님만을 사랑하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사실은 그것만이 아닙니다. 7년 동안 성전을 짓고 13년 동안 궁전을 지으면, 그 일은 누가 하고 그 비용은 누가 냅니까? 다 백성들입니다. 임금은 영화를 누려도 백성은 죽을 지경입니다. 그러다가 예언자 아히야가 예로보암의 반란을 예고하며, 열두 지파 가운데 열 지파가 솔로몬에게서 돌아서리라고 선언합니다(1열왕 11,26 이하). “한 분이신 하느님”을 중시하는 신명기계 역사가는 그것이 솔로몬이 이방 신들을 섬겼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북쪽의 열 지파와 남쪽의 두 지파가 갈라진 데에는 지역 감정이 작용합니다. 솔로몬이 조세와 부역을 공평하게 부과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티로 임금 히람에게 재목을 받고 북부 성읍 스무 개를 떼어 주었을 때 북부 주민들은 어떻게 느꼈을까요? 그가 이렇게 백성들의 불만을 키워 놓았기에, 그의 사후에 일어난 왕국 분열은 그의 탓이 컸습니다. 그러면, 솔로몬을 어떻게 평가할 수 있을까요? 외적으로는 이스라엘 역사상 최고의 번성기입니다. 다윗이 영토도 가장 넓게 확대해 놓았습니다. 솔로몬이 성전도 지었습니다. 그러나 이 성공은 그저 외적인 성공일 뿐이었습니다. 솔로몬의 마음이 한 분 하느님만을 섬기지 못했기에 신명기계 역사가의 눈에 그는 훌륭한 임금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자기 아버지 다윗과는 달리, 나의 길을 걷지 않고, 내 눈에 드는 옳은 일을 하지도 않았으며, 나의 규정과 법규를 지키지도 않았다”(1열왕 11,33). 이것이 흔히 위대하다고 생각하는 솔로몬에 대한 신명기계 역사가의 평가입니다. 솔로몬이 죽고 나니 아들 르하브암이 임금이 됩니다. 예로보암이 그를 찾아갑니다. 부역과 조세를 줄여 달라는 것입니다. 르하브함은 거부하고, 왕국은 분열됩니다. 예로보암은 북부의 열 지파와 함께 북왕국 이스라엘을 세우고, 르하브함에게는 남쪽의 두 지파만이 남습니다. 이후로 북왕국에서는 여러 차례 왕조가 바뀌게 되고, 남왕국에서만 다윗 왕조가 멸망 때까지 이어가게 될 것입니다. 여기서 예로보암의 금송아지 문제가 발생합니다. 북왕국 이스라엘에서 생각하니, 백성이 명절이면 예루살렘에 있는 솔로몬 성전으로 간다는 것입니다. 이래서는 아무래도 민심이 예루살렘으로 기울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예로보암은 베텔과 단에 성소를 세우고 금송아지를 하나씩 만들어 놓습니다. 본래 의도는 다른 신을 섬기려는 것이 아니라 거기서 야훼 하느님을 섬기려는 것이었다 하더라도, 백성은 쉽게 우상 숭배에 빠졌습니다. 여기서 또 평가를 해야 합니다. 제 생각에는 르하브암이 잘못했습니다. 집회서에서도 그는 우둔하고 지각이 없었으며 그의 정책 때문에 반란이 일어났다고 말합니다(47,23). 그때라도 백성의 부담을 줄여 주었더라면 솔로몬 통치 기간 동안 생겨난 불만을 잠재울 수 있었을 것 같습니다. 그런데 열왕기에서는 별로 르하브암을 탓하지 않습니다. 비난을 받는 것은 예로보암입니다. 베텔과 단의 성소 때문입니다. 신명기의 모토 “한 분이신 하느님”을 흐리게 한 그는 결코 좋은 평가를 받지 못합니다. 그 자신뿐만 아니라 그의 뒤를 이은 북왕국 이스라엘의 임금들은 모두 신명기계 역사가의 기준을 통과하지 못합니다. 예로보암을 따라갔기 때문입니다. 남왕국 유다에서도, 긍정적인 평가를 받는 임금은 히즈키야와 요시야 정도뿐입니다. 신명기계 역사가의 눈에 만점에 가까운 답안지는 요시야입니다. 요시야는 그의 할아버지와 아버지 시대에 만연했던 우상 숭배를 없애고, 점쟁이와 영매 등을 금지했습니다. “요시야처럼 모세의 모든 율법에 따라,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님께 돌아온 임금은, 그 앞에도 없었고 그 뒤에도 다시 나오지 않았다”(2열왕 23,25). 그는 종교적인 측면에 초점을 맞추지만, 당시의 상황에서는 종교적으로 이방 신들을 섬기지 않으려면 정치적으로도 독립을 추구해야 했습니다. 히즈키야와 요시야는 아시리아의 영향에서 벗어나려고 애쓴 임금들이기도 합니다. 평가 기준의 문제를 되짚어 봅시다. 열왕기 저자는 신명기의 가르침에 비추어 이스라엘의 왕정을 돌아봅니다. 그러기에 외적인 업적은 큰 의미를 갖지 않습니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 이것이 훌륭한 임금의 조건이었습니다. 군마를 늘리고 아내를 늘리고 금과 은을 모은 솔로몬은 훌륭한 임금일 수 없었습니다(신명 18,14-20 참조). 백영민2015.04.22
![[안소근 수녀와 함께 떠나는 구약 여행] (21) “내가 집 지을 준비를 해 두어야 하겠다”(1역대 22,5).](//cpbc.co.kr/CMS/newspaper/2015/05/rc/569494_1.0_titleImage_1.jpg)
[안소근 수녀와 함께 떠나는 구약 여행] (21) “내가 집 지을 준비를 해 두어야 하겠다”(1역대 22,5).성전을 지었기에 ‘흠없는 왕들’로 기록 솔로몬이 지은 성전의 모형. “내가 집 지을 준비를 해 두어야 하겠다”(1역대 22,5).신명기에서부터 그리고 신명기계 역사서인 여호수아기, 판관기, 사무엘기, 열왕기를 거치면서 가장 중요한 주제가 “한 분이신 하느님”이었습니다. 이제 역대기로 가면 같은 시대의 역사를 기술하면서도 강조점이 옮겨갑니다. 왜 그럴까요?구약 성경의 역사서들에서, 신명기계 역사서가 첫 번째 계통이라면 두 번째 계통이 역대기계 역사서입니다. 역대기, 에즈라기, 느헤미야기가 여기에 속합니다. 이들 사이에 차이점도 있지만 대략 공통점이 많고 전체 줄거리가 이어지기 때문에 같은 역대기계의 책들이라고 부를 수 있습니다. 역대기는 아담부터 시작해서 키루스 칙령까지 이르고 에즈라기와 느헤미야기는 키루스 칙령에서 시작하여 유배에서 돌아온 후의 상황을 이야기하고 있으므로, 작성 연대는 빨라도 기원전 4세기가 될 것입니다.그러니 저자가 역대기를 썼을 때에는 이미 사무엘기와 열왕기가 있었습니다. 역대기 저자는 그 책들을 많이 참조했고, 많은 부분을 그대로 가져오기도 했습니다. 다른 책들도 참조했습니다. 왕조실록들이나 예언자들에 대한 기록도 사용했음이 본문에 나타납니다. 저자가 가장 많이 의존하는 것은 사무엘기와 열왕기이고 다른 자료들은 현재 남아 있지도 않으니, 역대기를 그 책들과 비교하면 역대기의 특징이 드러납니다. 이미 역사서가 있었는데 또 하나의 역사서를 쓴 이유가 무엇일까, 차이점이 무엇일까를 찾아보는 것입니다.신명기계 역사서는 신명기 다음에, 곧 오경 다음에 이어졌지만, 역대기는 아담부터 다시 시작합니다. 하지만 다윗 이전의 역사는 족보만으로 처리합니다. 족보는, 가장 짧게 역사를 줄여 놓는 방법이지요. 이 족보에서는 열두 지파 가운데 유다 지파와 레위 지파에 특별한 관심을 보이는 것이 나타납니다. 유다 지파는 물론 다윗 왕조 때문이고, 레위 지파는 사제와 레위인들을 중시하기 때문입니다. 사울은 족보와 죽음만 언급되고, 사무엘은 등장하지도 않습니다. 사울 왕국은 중요성을 띠지 않는 것입니다.가장 비교하기 좋은 부분은 다윗과 솔로몬에 관한 부분입니다. 역대기는 다윗과(1역대 10─29장) 솔로몬을(2역대 1─9장) 상세히 다룹니다. 다윗과 솔로몬은 신명기계에서도 물론 가장 중요했던 임금들입니다. 그러나 중요한 이유가 다릅니다. 다윗에게서는, 전쟁 기록과 예루살렘 점령, 그리고 나탄의 예언 등이 나오지만 무엇보다도 그가 성전 건축을 준비했다는 점이 강조됩니다. 22장에서부터, 그 자신은 전쟁을 하며 피를 많이 흘렸기 때문에 성전을 지을 수 없고 평온한 사람(평화의 사람)인 아들 솔로몬이 성전을 지을 것이라고 말하면서 그 아들을 위해 미리 준비를 합니다. 금과 은과 목재를 쌓아두는 것은 물론, 사제단과 레위인, 성가대, 성전 문지기, 창고 관리인 등도 모두 조직합니다. 성전은 짓기도 전에!열왕기와 역대기에서 가장 차이가 나는 부분은 솔로몬입니다. 열왕기에서 솔로몬은 훌륭한 임금이 아니었습니다. 한 분이신 하느님을 사랑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역대기에서 솔로몬은 대단히 훌륭한 임금입니다. 성전을 지었기 때문입니다. 역대기에서도 솔로몬의 지혜와 부귀영화에 대한 언급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가장 길게 서술되는 것은 성전 건축입니다.이와 더불어, 다윗과 솔로몬에게서 부정적인 사건들은 기록되지 않습니다. 기나긴 다윗의 왕위 등극 설화와 왕위 계승 설화, 역대기에는 그런 흔적이 없습니다. 물론 사무엘기와 열왕기에서도 그 부분에서 다윗은 흠 없는 사람으로 나오지만, 역대기에서는 다윗 주변에서 칼부림이 나타나지 않게 합니다. 밧 세바 이야기도 빠집니다. 솔로몬의 경우는 그가 집권 초기에 정적들을 처단한 것이나 그의 정략결혼, 그에 따른 우상 숭배에 대해서 말하지 않습니다. 성전을 준비하고 건축한 다윗과 솔로몬에게 오점이 되는 이야기들은 모두 삭제된 셈입니다.이후의 임금들에 대해서도, 성전을 보수하거나 전례를 개혁한 임금들은 긍정적 평가를 받습니다. 아사, 여호사팟, 요아스, 요탐, 히즈키야가 여기에 속합니다. 또한, 임금들과 별도로도 전례와 레위인들에 대해 자주 언급됩니다.시험 문제에 신명기계 역사서와 역대기계 역사서를 비교하라고 하면 대개 여기까지 잘 씁니다. 하지만 결정적인 부분은 빠졌습니다. 왜 이렇게 차이가 날까요?작성된 시대가 다르기 때문입니다. 가장 간단하게 말하면, 역대기가 작성된 시대에 성전이 중요했기 때문입니다. 유배에서 돌아온 이스라엘에는 이미 임금이 없었습니다. 왕정 시대에 중시되던 군사적, 정치적 업적들은 큰 의미를 갖지 못했습니다. 지금 이스라엘은 성전과 그 사제들을 중심으로 하는 공동체로 존속하고 있었습니다. 역대기가 작성된 시기 이스라엘의 정체성은 성전에 근거하고 있었고, 역대기는 그 성전의 중요성과 정당성을 다윗과 솔로몬으로부터 이끌어옵니다. 왕국이 무너지고 모든 것을 잃어버린 이스라엘에게, 그 성전이 그들 가운데 하느님께서 계심을 확인하는 자리가 되었던 것입니다. 역대기에서도 하느님께서 이스라엘을 다스리신다는 것은 중요하지만, 그 하느님의 통치는 이제는 다윗 왕조를 통해서가 아니라 성전에 모인 백성이 하느님을 찬미하는 가운데 확인되었습니다. 그래서 전례도 중요해집니다.“주님, 정녕 하늘과 땅에 있는 모든 것이 당신의 것이고, 나라도 당신의 것입니다[…]. 저희는 지금 당신을 찬송하고, 당신의 영화로운 이름을 찬양합니다”(1역대 29,11-12). 평화신문2015.05.06
![[성경 속 도시] (64) 예루살렘 (상)](//cpbc.co.kr/CMS/newspaper/2015/10/rc/597703_1.0_titleImage_1.jpg)
[성경 속 도시] (64) 예루살렘 (상)하느님의 집, 첫 성전을 세운 곳 예루살렘은 유다교, 그리스도교, 이슬람교 모두의 주요 성지로 분쟁이 끊이지 않는 곳이다. 사진은 2014년 5월 프란치스코 교황이 통곡의 벽에서 기도하고 있는 모습. 【CNS 최고의 성지, 예루살렘은 늘 기대와 설렘을 주는 도시다. 예루살렘은 유다교, 그리스도교, 이슬람교 모두의 주요 성지로, 어떤 장소는 시간대별이나 구역별로 나눠 이들 세 종교가 관리한다. 예루살렘은 유다인들에게 역사와 종교와 민족 의식의 원천이고, 그리스도교 신자들에게는 가장 중요한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의 현장이다. 또 이슬람교도들에게도 예루살렘은 중요한 성지이다. 그래서 거대한 옛 도시 성벽으로 둘러싸여 있는 구시가지에는 유다인 지역과 아르메니아 지역, 그리스도교 지역, 무슬림 지역 등 4개 지역으로 구분돼 있다. 1948년 아랍과 이스라엘 전쟁 이후, 구시가지와 동(東)예루살렘은 트란스요르단에, 서(西)예루살렘은 이스라엘에 분할되었다가 1967년 이스라엘이 동예루살렘을 점령했다. ‘평화의 도시’라는 이름이 무색하게 예루살렘은 지금도 분쟁이 끊이지 않는 곳이다. 어디서나 기관총을 휴대한 군인들을 쉽게 볼 수 있고 출입 관리도 까다롭기로 유명하다. 그런데 예루살렘은 국제법상으로는 어느 나라에도 속해 있지 않은 도시다. 현재 이스라엘이 동예루살렘을 인위적으로 점령 중이다. 지형적으로 동쪽으로는 키드론 골짜기와 남쪽으로는 힌놈 골짜기의 가운데 솟은 구릉에 사람들이 모여 살았던 것은 기원전 약 3000년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산악 지형의 예루살렘은 외부 침입을 쉽게 막을 수 있는 성채를 중심으로 서서히 도시가 발전했다. 이스라엘이 가나안 정복 후 약속된 땅을 분배할 때 예루살렘은 본래 벤야민 지파에 속하였던 곳이다(여호 18,11-28 참조). 성경의 기록을 보면 예루살렘의 가장 유명한 지도자는 다윗왕이다. 기원전 약 1000년경 이스라엘의 선조 다윗 왕이 구릉에 위치한 ‘시온의 성’이라 불리던 도시를 정복한 후 유다인들은 이곳을 ‘다윗의 성’이라 불렀다. 다윗 임금이 부하들을 거느리고 예루살렘으로 가서 그 땅에 사는 여부스족을 치려 하자, 여부스 주민들이 다윗에게 말하였다.“‘너는 이곳에 들어올 수 없다. 눈먼 이들과 다리 저는 이들도 너쯤은 물리칠 수 있다.’ 그들은 다윗이 거기에 들어올 수 없으리라고 여겼던 것이다. 그러나 다윗은 시온 산성을 점령하였다. 그곳이 바로 다윗 성이다”(2사무 5,6-7). 그는 계약의 궤를 예루살렘으로 옮겼고 그의 아들 솔로몬은 예루살렘의 첫 성전을 건축했다. 그 이후 예루살렘은 이스라엘 민족과 역사에서 중요한 의미를 지니게 되었다. 서른 살에 이스라엘 임금이 된 다윗은 헤브론에서 7년 반 동안, 예루살렘에서 33년 동안 이스라엘과 유다를 다스렸다(2사무 5,3-5 참조). 다윗이 죽은 후 그의 아들 솔로몬 왕은 도시에 왕궁과 신전 및 성채를 새로이 건설하고 언약궤를 신전 안에 보관하였다. “또한 주님께서 우리 조상들을 이집트 땅에서 이끌어 내실 때에 그들과 맺으신 계약을 넣은 궤를 둘 곳을 여기에 마련하였소”(1열왕 8,21).예루살렘은 신약에서도 중요한 장소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지상 생활에서 시작하여 그분의 죽음과 부활과 승천이 이뤄진 장소이다. 성령 강림 후 사도들은 한동안 예루살렘에 머물면서 교회 공동체를 구성하여 복음을 선포하였다. “하느님의 말씀은 더욱 자라나, 예루살렘 제자들의 수가 크게 늘어나고 사제들의 큰 무리도 믿음을 받아들였다”(사도 6,7). 허영엽 신부(서울대교구 홍보국장) 평화신문2015.10.13
![[안소근 수녀와 떠나는 구약 여행] (54) “먹어라, 벗들아. 마셔라, 사랑에 취하여라”(아가 5,9)](//cpbc.co.kr/CMS/newspaper/2016/01/rc/613996_1.0_titleImage_1.jpg)
[안소근 수녀와 떠나는 구약 여행] (54) “먹어라, 벗들아. 마셔라, 사랑에 취하여라”(아가 5,9)연가, 알고 보니 하느님 창조에 대한 찬미가 12세기 윈체스터 성경에 나오는 그림. 솔로몬과 술람밋 연애 편지도 요약합니까? 불가능하지요. 아가도 마찬가지입니다. 아가는 사랑의 노래입니다. 더 이상 내용을 풀어 말할 수가 없습니다. 아가는 줄거리가 있는 이야기가 아니라 커다란 하나의 감탄사와 같기 때문입니다. 부분적으로는 사랑의 여정이 나타나기도 해서 사랑하는 남녀가 서로를 찾고, 서로의 찾음이 엇갈린 다음 마침내 서로를 만나 상대방의 아름다움에 경탄하고, 사랑의 합일이 이루어진 다음에는 다시 그 만남이 끝나는 모습이 그려지지만, 아가는 소설이 아닙니다.“솔로몬의 가장 아름다운 노래”(아가 1,1)라는 표제에 이어 즉시 적나라한 표현이 나옵니다. “아, 제발 그이가 내게 입 맞춰 주었으면!”(1,2). 성경에 이런 구절이 있었나 하고 깜짝 놀라시는 분들이 분명 있으실 것입니다. 옛날에도 많이 있었으니까요. 수천 년 전부터 아가를 읽어온 많은 이들이 이러한 애정 표현이 성경에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했습니다. 혹시 잘못 들어간 것은 아닐까, 아니면 다른 어떤 의미가 있는 것은 아닐까 생각했습니다.전통적으로는 아가가 겉으로는 남녀 간의 사랑을 노래하고 있지만, 사실은 ‘그런’ 사랑이 아니라 ‘다른’ 어떤 사랑에 대해 말하는 책이라고 여기는 이들이 많았습니다. 유다교에서는 아가의 주인공 남녀가 각각 신랑이신 하느님과 신부인 이스라엘을 나타낸다고 해석했습니다. 물론, 호세아와 예레미야, 에제키엘 같은 예언자들을 바탕으로 하는 해석입니다. 이전부터 하느님을 이스라엘의 신랑이시라고 불러왔기에, 아가를 읽으면서 자연스럽게 아가의 신랑 신부가 하느님과 이스라엘이라고 생각할 수 있었던 것이지요. 무리한 해석은 결코 아닙니다. 그리스도교의 해석도 기본 틀은 동일합니다. 이스라엘의 자리에 교회를 대입하면 됩니다. 교부들은 신랑이신 그리스도와 신부인 교회라는, 에페소 신자들에게 보낸 서간 5장 32절에도 나타나는 개념을 바탕으로 아가를 읽었습니다. 더 나아가서 베르나르도나 십자가의 성 요한, 아빌라의 데레사 같은 신비가들은 아가를 그리스도와 영혼 사이의 사랑 노래로 해석했습니다.특별한 인물이 하나 있었습니다. 5세기에 살았던 몹수에스티아의 테오도로는, 아가가 순전히 남녀 간의 사랑을 노래한 것이며 따라서 성령의 영감을 받은 책이 아니라고 주장했습니다. 그 주장은 단죄를 받았지요. 그런데 여기에서 잠시 생각을 해 봅시다. 몹수에스티아의 테오도로는 남녀 간의 사랑을 어떻게 평가했기에, 그 사랑을 주제로 하는 책이 성경이 될 수 없다고 여겼던 것일까요?아가에 대한 해석이 달라지기 위해서는 인간적 사랑에 대한 평가가 달라져야 했습니다. 그리고 그 일이, 르네상스와 종교 개혁, 계몽주의와 낭만주의의 시대에 이뤄졌습니다. 남녀 간의 사랑의 아름다움을 드러내놓고 말할 수 있게 되었을 때, 아가를 바라보는 시각도 바뀌었습니다.과연, 남녀 간의 사랑을 노래한 아가는 성경의 전통에서 벗어나 있었던 것일까요? 아가가 남녀 간의 사랑을 노래한 것이라서 성경에서 삭제해야 할까요? 그러면 창세기는 어떻게 할까요? 창세기에서는 모든 것이 하느님께서 보시기에 좋았다고 말합니다. 남녀의 사랑도 하느님 보시기에 좋았습니다. 하느님 보시기에 좋지 않았던 것은 아담이 혼자 있다는 사실이었고 그래서 그의 짝으로 하와를 만드신 것이었습니다. “이야말로 내 뼈에서 나온 뼈요 내 살에서 나온 살이로구나!”(창세 2,23). 이 말씀을 성경에서 뺄 수 없다면 아가도 뺄 수 없습니다. 아가의 토대는 구약 성경의 세계관의 바탕인 창조의 선성(善性)에 대한 믿음입니다. 창세기 2장 25절에서와 마찬가지로, 아가의 남녀는 알몸을 부끄러워하지 않습니다(아가에서 남자와 여자가 각각 상대방의 몸을 묘사하는 아가 4,1-7; 5,10-16; 7,2-10을 보십시오). 그들은 서로를 바라보며 끊임없이 “정녕 그대는 아름답구려”(1,15; 2,14; 4,1 등), “정녕 당신은 아름다워요”(1,16 등) 라고 경탄합니다. 궁극적으로 여기에서 긍정하는 것은 바로 창조의 선성입니다. 하느님께서 주신 선물의 아름다움을, 그 가치를 알아보고 경탄하는 것에서 죽음보다 강한 사랑이 생겨납니다. 여인의 입장에서 말한다면, “그대의 모습을 보게 해 주오 […]. 그대의 모습은 어여쁘다오”라는 연인의 목소리는(2,14) 벼랑 속에 숨어 있는 비둘기가 얼굴을 내밀고 밖으로 나오게 합니다. 서로의 가치를 인정하는 데에서 상대방에게 자신을 내어주는 것이 가능하게 되고, 남녀는 그 사랑 안에서, 바로 그 소위 세속적이고 육적인 사랑 안에서 하느님을 체험합니다.아가에서는 하느님을 직접적으로 언급하지 않는데, 하느님에 대한 언급으로 볼 수 있는 것은 8장 6절뿐입니다. 「성경」에서 “더할 나위 없이 격렬한 불길”이라고 번역된 구절은 한 단어로 되어 있고 그 마지막이 “야”인데, 이것은 최상급의 의미로 이해하여 이렇게 번역할 수도 있지만 “야훼의 불길”로 번역할 수도 있습니다. 이 두 번째 해석을 따른다면, 아가서 8장 6절은 인간적 사랑에 관한 아가의 신학 전체를 요약해 주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아가의 저자는 에덴동산에 살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는 이 세상에 이미 죄와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워졌음을 알고 있습니다. 인간의 근본적인 선성을 의심하게 하는 모든 어둠에도 불구하고 사랑의 모험을 시작할 수 있다면, 그것은 하느님의 불꽃인 그 사랑이 사랑에 따르게 마련인 자신의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태워 없애기 때문일 것입니다.<성 도미니코 선교수녀회, 대전가톨릭대 교수> 평화신문2016.01.12
![[성경 속 도시] <8>성스러운 땅 모리야](//cpbc.co.kr/CMS/newspaper/2014/03/rc/499151_1.2_titleImage_1.jpg)
[성경 속 도시] 성스러운 땅 모리야솔로몬이 주님의 집 지은 땅 예루살렘 모리야 산 위에 세워진 이슬람 황금돔 안에는 큰 바위가 있다. 이 바위는 아브라함이 이사악을 번제물로 바치려고 사용한 제단이라고 전해지고 있다. '모리야'라는 지명은 성경에 단 두 번 등장한다. 그런데 모리야는 성경에서 대단히 인상적인 장소다. 모리야는 이스라엘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이 하느님 말씀에 따라 외아들 이사악을 제물로 바친 곳이기 때문이다. "이런 일들이 있은 뒤, 하느님께서 아브라함을 시험해 보시려고 '아브라함아!' 하고 부르시자, 그가 '예, 여기 있습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그분께서 말씀하셨다. '너의 아들, 네가 사랑하는 외아들 이사악을 데리고 모리야 땅으로 가거라. 그곳, 내가 너에게 일러 주는 산에서 그를 나에게 번제물로 바쳐라"(창세 22,1-2). 여기서 모리야가 어디인지는 정확하게 알 수 없다. '번제'는 제물을 불에 태워서 드리는 제사를 뜻한다. 구약의 번제는 가축 중에서 소나 양, 염소 따위를 잡아 제단에다 피를 뿌리고 내장을 모두 빼내고 가죽을 벗긴 다음 제단 위에 올려놓고 불에 태워 그 연기가 위로 올라가게 하는 것이다(레위 1,3-9). 성경에서는 아브라함이 외아들 이사악을 번제로 드리기 위해 죽이려는 순간 천사가 아브라함을 막는다. "천사가 말하였다. '그 아이에게 손대지 마라. 그에게 아무 해도 입히지 마라. 네가 너의 아들, 너의 외아들까지 나를 위하여 아끼지 않았으니, 네가 하느님을 경외하는 줄을 이제 내가 알았다'"(창세 22,12). 모리야는 솔로몬과 관련해 성경에 한 차례 더 언급된다. 솔로몬이 왕위에 올랐을 때 그는 수도를 확장하기를 원했다. 그래서 그는 북쪽 언덕, 곧 옛 오르난의 타작마당 위에 궁전과 성전을 세우려 했다. "솔로몬은 예루살렘 모리야 산에 주님의 집을 짓기 시작하였다. 그곳은 주님께서 그의 아버지 다윗에게 나타나신 곳으로서, 본디 여부스 사람 오르난의 타작마당이었는데 다윗이 집터로 잡아 놓았다"(2역대 3,1). 솔로몬은 페니키아인들의 도움으로 예루살렘에 성전을 세웠다. "이스라엘 자손들이 이집트 땅에서 나온 지 사백팔십 년, 솔로몬이 이스라엘을 다스린 지 사 년째 되던 해 지우 달, 곧 둘째 달에 솔로몬은 주님의 집을 짓기 시작하였다"(1열왕 6,1). 역사적으로 예루살렘 성전은 구약시대의 솔로몬 성전, 즈루빠벨 성전, 헤로데 성전 등 3개가 건축됐다. 그리고 이 성전들은 모두 같은 자리에 세워졌다. 첫 번째 성전인 솔로몬 성전은 다윗왕의 아들 솔로몬에 의해 기원전 968년에 착공돼 기원전 961년에 완공된 것으로, 위치는 다윗왕이 환상에서 보았던 예루살렘 동쪽 모리야 산이었다. 전설에는 이 바위가 아브라함이 이사악을 번제물로 바치던 제단이라고 전해지고 있다. 다윗이 준비해 둔 금과 일부의 건축재료 외에 레바논에서 향백 재목를 공급받아 티로 왕 히람이 보낸 건축 기술자들과 3만 명의 이스라엘 인부들에 의해 건축됐다. 솔로몬 성전은 완공 이후 400년 동안 이스라엘의 종교와 생활의 중심으로 성역화됐으나 기원전 586년 신바빌로니아 네부카드네자르 왕의 예루살렘 침략 때 파괴됐다. 이스라엘 성지의 중심이 되는 이곳에 역사의 변화 속에서 지금은 '바위사원'이라 불리는 이슬람 사원이 세워져 있다. 멀리서도 한눈에 보이는 황금색 돔으로도 유명한 이 건물은 팔각형으로 웅장하게 지어져 있고 그 안에는 엄청나게 큰 바위가 있다. 무슬림은 이 바위를 딛고 마호메트가 하늘로 승천했다고 믿고 있다. 이 때문에 무슬림은 예루살렘을 사우디아라비아의 메카와 메디나에 이어 이슬람의 3대 성도로 여기고 있다. 허영엽 신부(서울대교구 홍보국장)cpbc2014.03.04
![[안소근 수녀와 떠나는 구약 여행] (68) 사두가이와 바리사이](//cpbc.co.kr/CMS/newspaper/2016/05/rc/633483_1.0_titleImage_1.jpg)
[안소근 수녀와 떠나는 구약 여행] (68) 사두가이와 바리사이권력에 타협한 사두가이·율법에 얽매인 바리사이 로마니노(1484?~1559?) 작, ‘바리사이 시몬의 집에 가신 예수님’. 복음서에는 사두가이와 바리사이가 계속해서 등장하지요. 이들은 유다교 내의 주요한 종교 집단들이었고, 그래서 예수님의 가르침은 자주 그들의 주장과 대비됩니다. 그런 의미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역사적 배경을 파악하고자 하는 뜻에서 이들을 살펴보고자 합니다.주로 사제들로 구성되어 있던 사두가이파는 기원후 70년 예루살렘 성전이 무너지면서 몰락했고, 이후로 그들에 대한 기록이 거의 남아 있지 않습니다. 사두가이라는 명칭은 솔로몬 시대의 대사제 차독의 이름에서 나온 것으로 보이지만, 사두가이들이 실제 차독의 후손이었는지는 분명치 않습니다. 모든 사제가 사두가이였던 것도 아니고, 지방의 사제들은 오히려 바리사이에 속한 경우도 많았습니다. 사두가이들은 주로 예루살렘의 귀족 계층에 속한 사제들이었습니다. 예루살렘에서 대사제는 산헤드린의 의장이었고, 일부 사제들은 귀족으로서 계속 정치에 개입하고 지배 계층을 형성하고 있었습니다.정치적인 면에서 그들은 백성의 지지를 받지 못했습니다. 비록 그들이 종교적인 면에서는 율법을 철저히 지키고 전통에 충실하고자 하였으나, 외세와 타협했던 그들의 정치적 입장은 열심한 유다인들이 보기에는 지나치게 개방적이었습니다. 외세의 임금들이 뇌물을 받고 야손과 메넬라오스 등을 대사제로 임명했을 때 사두가이는 이를 눈감아 주었습니다. 그러나 뇌물을 주고 대사제로 임명된 이들이나 하스몬 집안 출신의 대사제들은 백성들에게는 정당성을 인정받지 못하는 경우가 적지 않았습니다. 사두가이는 처음에는 셀레우코스 왕조와, 그 후에는 하스몬 왕조와, 마지막에는 로마인들과 손을 잡았습니다. 예수님의 재판 과정에서도 산헤드린은 로마 총독 빌라도와 같은 편에 서지요. 사두가이들은 자신들의 권력을 지키기 위하여 누구하고든 타협했습니다.교리적인 면에서 그들은 바리사이들이 중시했던 구전 전승을 거부하고 기록된 율법만을 존중했으며, 죽은 이들의 부활을 믿지 않았습니다. 히브리 성경에서 확인되지 않거나 불분명한 교리들을 거부했기 때문입니다. 구약과 신약의 중간기 유다교에서 발전했던 천사와 악마에 관한 여러 내용들도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사두가이가 신학적으로는 보수적이면서 정치적인 면에서는 현실적이었다는 점에서 그들은 모순적으로 보일 수 있는데, 내세를 인정하지 않는 그들의 신학이 그만큼 더 현세를 중시하게 했다고도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들이 중시했던 것은 오직 예루살렘에서 성전 예배를 유지하는 것이었고, 이를 통하여 기득권을 보전했습니다. 이것이 그들의 관심사였습니다. 어쨌든, 예루살렘 성전이 파괴되면서 그들은 기반을 완전히 잃고 말았습니다. 신약 성경에서 그들이 바리사이들에 비해 드물게 언급되는 것은, 신약 성경이 형성되던 시기에 이미 그들이 영향력을 잃은 상태였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예루살렘 성전이 1세기 이후에 다시 재건되지 않았으므로 이스라엘에서는 사제 계층이 다시 일어날 수 없었지만, 지금도 회당 예배의 몇 가지 역할들은 그들의 후손에게 유보되어 있다고 합니다.한편 바리사이라는 명칭은 ‘분리하다, 가르다’라는 히브리어와 아람어 동사에서 나온 것으로 생각됩니다. 이 이름은 아마도, 하스몬 왕조가 점점 더 세속화되어 감에 따라 바리사이들이 그들을 멀리하고 그들에게서 떨어져 나왔음을 의미할 것입니다.사두가이들과 달리 이들은 성문 율법 외에 구두로 전해진 율법도 존중하였고, 죽은 이들의 부활과 영혼의 불멸, 천사와 마귀의 존재 등을 믿었으며, 다윗 왕국을 다시 세울 메시아에 대한 희망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사두가이들에 비해 현세에 큰 비중을 두지 않았으며, 세속화되지 않고 경건하게 살고자 했습니다. 이들을 특징짓는 것은 무엇보다도 바로 구전 전승을 포함한 율법에 대한 열성이었습니다. 이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헬레니즘 시대 이래로 많은 유다인들은 전통적인 가르침을 버리고 그리스 문화와 종교를 따라가고 있었음을 염두에 두어야 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바리사이들을 처음부터 위선자라고 생각하는 것은 올바른 이해가 아닙니다. 그들은 말로써만이 아니라 실제 생활로도 율법을 준수하고자 노력하였고 그것이 하느님께 충실한 삶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습니다. 예수님께서 공생활을 하시던 기간에 팔레스티나에서 가장 영향력이 있던 종교 집단이 바로 바리사이들이었습니다. 실제로 그들은 많은 이들에게 존경을 받았으며, 그럴 만한 이유도 있었습니다.“복음서는 자주 바리사이들을 위선적이고 냉혹한 율법주의자들로 제시한다. … 그러나, 복음서들에 나타난 바리사이들의 모습은 부분적으로는 그리스도인들과 유다인들 간의 계속된 후대의 논쟁에서 영향을 받았다는 것은 인정해야 한다”(교황청 성서위원회, 「그리스도교 성경 안의 유다 민족과 그 성서」). 신약 성경에서는 예수님의 가르침과 바리사이의 가르침을 대비시킵니다. 율법에 대한 이러한 열성이 오도되어 율법을 지키지 못하는 이들을 배척할 때, 그리고 율법을 지킴으로써 스스로의 힘으로 구원을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하거나 인간적인 관습에 매이게 될 때 오히려 율법의 근본 정신을 거슬러 하느님과 인간에 대한 사랑을 손상시킬 수 있습니다. 이런 여러 요인 때문에 결과적으로 신약 성경에서는 예수님과 바리사이들 사이의 대립이 자주 나타나게 됩니다. 하지만, 성전이 완전히 무너진 다음 흩어진 이스라엘이 이천 년 동안 정체성을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은 율법과 일상의 여러 규범 때문이었고, 그 기틀을 마련한 것은 바리사이였습니다.<성 도미니코 선교수녀회, 대전가톨릭대 교수> 평화신문2016.05.03
![[성경 속 도시] (41) 아나톳](//cpbc.co.kr/CMS/newspaper/2015/04/rc/566937_1.0_titleImage_1.jpg)
[성경 속 도시] (41) 아나톳슬픔과 비애가 깃든 도시 아나톳은 예루살렘 북쪽 약 4.8km 지점에 있는 벤야민 지파의 지역 중에서 레위 지파에게 할당된 48개 성읍 중 하나였다. “아나톳과 거기에 딸린 목초지, 알몬과 거기에 딸린 목초지, 이렇게 네 성읍을 내주었다”(여호 21,18). 다윗을 도왔던 용사 아비에제르와(2사무 23,27) 예후(1역대 12,3)도 아나톳 출신이었다. 쫓겨난 에브야타르 사제들이 머물러 다윗이 사망하자 솔로몬은 이복형 아도니야와 왕위를 놓고 다투게 된다. 당시 대사제 에브야타르는 아도니야를 지지했다. 그러나 결국에는 솔로몬이 승리하자 아도니야는 죽임을 당하게 된다. “이제 저를 세우시어 아버지 다윗의 왕좌에 앉히시고, 말씀하신 대로 저에게 집안을 일으켜 주신, 살아 계신 주님을 두고 맹세합니다. 아도니야는 오늘 죽을 것입니다.” 그러고 나서 솔로몬 임금이 여호야다의 아들 브나야를 보내어 아도니야를 내려치게 하니, 아도니야가 죽었다”(1열왕 2,24-25). 그리고 아도니야 편에 섰던 대사제 에브야타르는 아나톳으로 쫓겨나게 된다. “임금은 에브야타르 사제에게 이렇게 말하였다. ‘아나톳에 있는 그대의 땅으로 가시오. 그대는 죽어 마땅한 사람이지만, 그대가 나의 아버지 다윗 앞에서 주 하느님의 궤를 날랐고, 또 아버지와 온갖 고난을 함께 나누었으므로 오늘 그대를 죽이지 않겠소’”(1열왕 2,26). 이때부터 이스라엘의 제관 계급은 ‘차독 가문’이 독식했고 ‘에브야타르’계 사제들은 출셋길이 막혔다. 아나톳에서 에브야타르 계열 사제들이 예루살렘 성전이 건축되는 것을 지켜보며 쫓겨난 제사장 가문의 슬픔과 비애를 맛보았다. 아나톳 출신 가운데 가장 유명한 사람은 예레미야 예언자다. 예레미야의 부친은 아나톳에 살고 있던 사제였다. 북이스라엘은 멸망했고 남쪽 유다는 주변 강대국의 힘에 눌려있는 신세였다. 유다도 멸망하는 것은 시간문제였다. 유다 백성들에게 이러한 ‘미래’를 예언하는 것이 예레미야의 사명이었다. 예레미야 예언자는 평생을 오해와 편견과 테러에 시달리며 살아야 했던 불행한 예언자였다. 그의 예언이 대부분 왕들의 정책을 정면으로 반대하는 것이었기 때문이었다. 특히 예레미야는 예루살렘 성전에 대해 매우 비판적이었다. 예레미야 예언의 핵심은 하느님 뜻을 따르라는 것이었다. 그는 ‘바빌로니아’에 대항하지 말라고 예언해서 많은 오해를 받기도 했다. 예레미야는 무모하게 전쟁을 하지 말라는 것이었는데 ‘요시야’의 뒤를 이은 ‘여호아하즈’, ‘여호야킴’, ‘여호야킨’, ‘치드키야’ 등 4명의 왕은 모두 예레미야의 예언을 무시한 채 전쟁을 일으켰다가 참패하고 만다. 결국 유다는 바빌로니아의 속국으로 전락하고 만다. 바빌론의 진격으로 파괴돼유다의 마지막 임금 ‘치드키야’는 (2열왕 24,17) 예레미야가 전쟁을 반대하자 그를 다시 감옥에 가둔다. 그가 감옥에 있을 때 예루살렘은 함락되었고 치드키야 왕은 두 눈이 뽑힌 채 바빌론으로 끌려가는 치욕을 당하게 된다. 아나톳은 바빌론이 예루살렘으로 진격할 때 대부분 파괴됐다(이사 10,30). 이스라엘 백성들이 바빌론에서 포로생활에서 돌아와 벤야민 지파에 의해 아나톳은 재건됐고 느헤미야 통치 때는 많은 사람이 거주했다(느헤 11,32). 이처럼 아나톳은 이스라엘 역사에서 특히 슬픔과 비운이 깃든 도시였다. 허영엽 신부(서울대교구 홍보국장) 평화신문2015.04.21
![[성경 속 도시] (51) 아시리아](//cpbc.co.kr/CMS/newspaper/2015/06/rc/579136_1.0_titleImage_1.jpg)
[성경 속 도시] (51) 아시리아이스라엘 왕국 멸망시킨 제국의 수도 아시리아 티글랏 3세와 수행원을 그린 아시리아 왕궁 벽화 사본. 기원전 8세기 것으로 현재 프랑스 파리 루브르박물관에 소장돼 있다. 출처=「성경 역사 지도」, 분도출판사 아시리아는 메소포타미아 북부 지역에서 일어난 아시리아 제국의 첫 번째 수도다. 초기에 ‘아시리아’라는 말은 티그리스 강 상류 지역을 부르는 말이었다. 나중에 아시리아는 바빌론처럼 나라의 이름이자 동시에 도시 이름으로, 그리고 사람 이름으로 자유롭게 사용되기도 했다.이곳은 지금의 이라크 모술 지역에서 티그리스 강을 따라 남쪽으로 약 100㎞ 정도 떨어진 거리에 있다. 아시리아인은 오랫동안 바빌로니아 세력 밑에서 지배를 받았다. 아시리아는 기원전 7세기에 바빌론과 이집트를 정복해 근동 최초의 통일 제국이 됐다. 북부 메소포타미아의 요충지에 자리 잡고 있는 아시리아는 티그리스 강변의 지정학으로 아주 좋은 위치에 있다. 아시리아인들은 북쪽과 동쪽은 강이 자연적인 방어를 해주고 있어 남쪽과 서쪽에 방어벽을 구축해 도시를 방어했다. 그러나 그들의 영화는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아시리아는 점령지 주민의 강제 이주 등 가혹한 통치를 강행해 저항을 많이 받았다. 기원전 612년에 메디아와 바빌론 연합군이 수도 니네베를 함락하였고, 이어 기원전 609년 아시리아는 완전히 멸망하였다. 오늘날 이라크 내에 있는 성경 속 도시들은 거의 구약 시대와 관련이 있다. 그중에서도 아시리아는 바빌론 다음으로 성경에서 자주 언급되고 있는 중요한 도시다. 창세기에 보면 에덴 동산에 대한 이야기에 아시리아를 흐르는 강에 대한 언급이 나온다. “셋째 강의 이름은 티그리스인데, 아시리아 동쪽으로 흘렀다. 그리고 넷째 강은 유프라테스이다”(창세 2,14).기원전 922년 솔로몬 왕의 죽음 이후 이스라엘은 솔로몬의 아들 르호보암 왕이 통치하는 남쪽의 유다 왕국과 여로보암이 통치하는 북쪽의 이스라엘로 분열됐다. 남쪽은 유다 지파와 베냐민 지파로 구성되었고, 북쪽은 나머지 열 지파로 구성되었다. 기원전 931년에 시작된 이 분열 왕국은 이스라엘 왕국이 기원전 722년 아시리아에 망하고, 유다 왕국이 이스라엘보다 나중인 기원전 586년에 바빌론에 멸망했다. 북쪽 이스라엘 왕국은 초대 왕인 여로보암 1세부터 호세아 왕까지 모두 19명의 왕이 다스렸다. 19대 호세아 왕 때 아시리아 왕인 사르곤의 침공을 받아 사마리아가 함락됐다. 그리고 사마리아 주민들은 아시리아로 끌려갔고 사르곤은 다른 지방 사람들을 사마리아로 이주시켰다. 사마리아로 옮겨온 이방인들은 정착해 원주민인 이스라엘 사람들과 동화됐다. “아시리아 임금은 바빌론과 쿠타와 아와와 하맛과 스파르와임에서 사람들을 데려다가, 이스라엘 자손들을 대신하여 사마리아 성읍들에 살게 하였다. 그리하여 그들은 사마리아를 차지하고 그 성읍들에서 살았다”(2열왕 17,24).그런데 이방인들이 이주해 올 때 이교 신앙도 함께 가지고 왔기에 사마리아에는 혼합 종교가 생겼다. 그래서 예수님 시대에 유다 사람들이 사마리아인을 경멸했던 것이다. 그리고 남쪽 유다의 요시아 왕은 아시리아를 도우려는 이집트군과 전투를 위해 출병했다가 전사했다. “요시야 시대에 이집트 임금 파라오 느코가 아시리아 임금을 도우려고 유프라테스 강을 향하여 올라갔다. 요시야 임금이 그와 맞서 싸우러 나가자, 파라오 느코는 므기또에서 요시야를 보고 그를 죽여 버렸다”(2열왕 23,29).바빌론 제국에 앞서 당대에 메소포타미아와 그 주위의 세계를 지배하며 호령했던 아시리아 제국이지만, 오늘날 그 모든 영광은 사라지고 그 화려한 유적마저 많이 도굴당했다. 그 흔적과 기록마저도 보존이 잘 안 돼 있어 권력 무상을 느끼게 한다. 허영엽 신부(서울대교구 홍보국장) 평화신문2015.06.30
![[복음이야기] (35) 성전 (2)](//cpbc.co.kr/CMS/newspaper/2014/11/rc/537838_1.0_titleImage_1.jpg)
[복음이야기] (35) 성전 (2)솔로몬 성전, 하느님께 바친 첫 성전 “이스라엘 자손들이 이집트 땅에서 나온 지 480년, 솔로몬이 이스라엘을 다스린 지 4년째 되던 해 지우 달, 곧 둘째 달(이야르 달, 4월 중순~5월 중순)에 솔로몬은 주님의 집을 짓기 시작하였다”(1열왕 6,1). 솔로몬 성전은 오늘날 예루살렘 구시가 동쪽 ‘하람 에슈 셰리프’ 지역에 터를 잡았다. 이후 즈루빠벨과 헤로데가 지은 성전도 이 솔로몬 성전 터 위에 재건됐다. 고고학자들은 솔로몬 성전 터가 오늘날 ‘황금 돔’으로 유명한 이슬람 엘 악사 모스크 자리이며 안에 있는 너른 바위 위에 계약의 궤를 모신 지성소가 있었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기원전 968년 하느님의 성전을 짓기 시작한 솔로몬은 7년 6개월 만에 완공했다(1열왕 6,37-38). 아이러니하게 솔로몬은 자신의 화려한 궁전을 짓는 데는 성전 공사 기간의 거의 두 배가 되는 13년이란 긴 시간을 쏟았다. 솔로몬은 성전을 짓기 위해 티로의 히람 임금과 평화조약을 맺고 건축 자재로 쓸 레바논의 향백나무와 방백나무를 수입했다. 또 히람의 건축 기술자와 그발의 석공들을 데려왔다. 솔로몬은 성전 건축 재료를 마련하기 위해 아도니람을 감독으로 한 부역꾼 3만 명과 짐꾼 7만 명, 채석장에서 돌을 떠내는 일꾼 8만 명, 감독 관리 3300명을 레바논에 보냈다(1열왕 5,15-32). 솔로몬 성전의 모습과 규모는 열왕기 상권 6─7장과 역대기 하권 3─4장, 에제키엘서 40─43장을 통해 자세히 살펴볼 수 있다. 솔로몬 성전은 기본적으로 가나안 신전 양식을 따라 지어졌다. 아마도 성전 건축에 고용됐던 티로인 건축공들의 영향 때문일 것이다. 솔로몬 성전은 동에서 서로 장방형으로 길게 지어졌는데 길이 60암마(1암마, 팔꿈치에서 가운뎃손가락 끝까지 길이, 통상 46~54㎝)로 약 28~32m, 너비 20암마(약 9~11m), 높이 30암마(약 13.5~16m) 규모였다. 성전은 채석장에서 미리 다듬어 온 돌로 지어졌다. 그래서 성전 터에는 망치나 정이나 그 어떤 쇠 연장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성전 외벽은 향백나무 널빤지로 덮고, 높이 5암마(약 2~2.7m) 되는 곁채를 붙여 지었다.성전은 안뜰과 바깥뜰로 나누어져 있고 안뜰에는 너비 20암마, 높이 10암마(약 4.5~5.5m) 크기의 네모난 청동 제단이 있었다. 성전의 모든 청동물은 티로 사람으로 납탈리 지파의 과부 아들인 히람의 작품이었다. 이 청동 제단과 성전 현관 사이에는 사제들의 몸을 씻을 정결례용 물을 담아놓는 지름 10암마, 높이 5암마, 둘레 30암마가 되는 바다 모형의 청동제 물통이 있었다. 이 바다 모형 물통은 3마리가 한 그룹이 된 청동 황소 12마리가 각각 동서남북 네 방향에서 받치고 있었다. 이 바다 물통은 3000밧(약 6만8100ℓ)의 물을 저장할 수 있었다. 이 황소 받침대는 이스라엘이 남북으로 갈라지면서 유다 아하스 왕이 떼어내 버렸다. 사제들은 피를 묻힌 채 성전 안으로 들어갈 수 없다는 율법에 따라 반드시 이 바다의 물로 몸을 정결하게 씻어야만 했다(2역대 4,1-10). 안뜰에서 성소 현관으로 들어가는 계단 입구 양편에는 35암마(약 16~19m) 높이의 청동 기둥이 서 있고 그 꼭대기에는 5암마 되는 기둥머리를 얹었다. 기둥 꼭대기에는 목걸이 모양의 사슬이 둘러쳐져 있고, 석류 장식 100개가 달려 있었다. 솔로몬은 성소 오른쪽 기둥을 ‘야킨’, 왼쪽 기둥을 ‘보아즈’라 불렀다(2역대 3,15-17).성소 현관은 정방향으로 좌우 길이와 너비가 똑같이 20암마였고, 현관의 깊이는 10암마였다. 성소는 40암마(약 18~21m) 크기로 네모난 격자창이 있고 사방에 성물과 제구들을 보관하는 곁채가 꾸며져 있었다. 성소 천장은 향백나무 널빤지로, 바닥은 방백나무 널빤지로 장식됐고, 10개의 등잔대와 향을 피우는 금 제단, 제사 빵을 위한 제사상이 놓여 있었다. 성소 가장 깊숙한 안쪽에는 계약궤를 모신 지성소가 자리했다. 지성소는 너비, 길이, 높이가 똑같이 20암마로 향백나무에 순금을 입혀 지었다. 지성소 안의 향백나무 제단과 올리브 나무로 만든 10암마 높이의 두 커룹도 모두 순금을 입혔다.지성소 입구 양쪽 문은 순금을 입힌 올리브 나무로 만들어졌고, 상인방과 문설주가 오각형을 이루었다. 두 올리브 나무문에는 커룹과 야자나무와 활짝 핀 꽃이 장식돼 있었다 (1열왕 6,14-36).이렇게 성전이 완공되자 솔로몬은 계약 궤를 시온의 다윗성에서 모셔와 이스라엘의 원로들과 12지파의 대표들이 모인 가운데 에타님 달(티쉬리 달, 9월 초~10월 중순) 축제 때 지성소 안 커룹들의 날개 아래에 안치했다. 솔로몬은 제단에서 하느님께 기도하고 백성을 축복한 다음 번제물과 곡식 제물, 친교 제물을 바치면서 성전 봉헌을 축하하는 축제를 14일간 벌였다(1열왕 8장). 솔로몬의 성전은 기원전 587년 바빌로니아 군대가 예루살렘을 함락할 때 남김없이 파괴됐다. 리길재 기자 teotokos@pbc.co.kr 평화신문2014.11.04
![[성경 속 도시] (42) 바빌론](//cpbc.co.kr/CMS/newspaper/2015/04/rc/568187_1.1_titleImage_1.jpg)
[성경 속 도시] (42) 바빌론유배 생활의 치욕과 비운 서려 바빌론 유배 생활을 담은 부조 복제품, 다윗 탑의 예루살렘 역사박물관. 출처=「성경 역사 지도」, 분도출판사 고대의 가장 유명한 도시 중 하나인 바빌론은 고대 메소포타미아 지역에 위치한 옛 도시다. 바빌론은 티그리스 강과 유프라테스 강 사이의 비옥한 초승달 지대의 남동쪽에 있었다. 현재는 이라크 바그다드 남쪽 80km 지점에 해당한다. 탐욕과 죄악의 도시기원전 2000년대 초기부터 1000년대 초기까지 남부 메소포타미아의 수도였고, 기원전 7세기와 6세기에는 신바빌로니아 제국의 수도였다. 바빌로니아는 활발한 정복 활동으로 마침내 전 메소포타미아를 지배하는 대국이 됐다. 이후 함무라비 대왕 등 위대한 왕들이 등장하면서 바빌론은 거의 역사상 최초로 ‘세계의 수도’라는 명성을 얻게 되었다. 바빌로니아가 망한 뒤 아시리아 등 강대국의 패권이 이어진 뒤에도 바빌론은 여전히 주요 대도시로서 건재했으며 아시리아가 망한 후 칼데아인들에 의해 신바빌로니아가 세워져 바빌론은 다시금 세계의 수도로 재등장한다. 성경에서 바빌론은 탐욕과 죄악으로 가득 찬 악의 도시와 같은 이미지가 강하다. 이스라엘 역사에서 가장 비참하고 치욕스러운 바빌론 유배 때문이라 추정한다. 유다인들은 자신들을 침략한 바빌로니아를 극렬하게 증오했다. 유다인들에게 바빌론은 억압, 독재, 우상숭배와 같은 뜻으로 사용됐다.솔로몬이 건축한 예루살렘 성전은 기원전 587년 바빌론 임금 네부카드네자르에 의해 철저히 파괴됐다(2열왕 25,1-21). 몇 년 뒤 그는 성전을 완전히 파괴하고 성 안의 보물을 모두 약탈해 가져갔다. 그리고 이스라엘의 임금 치드키야의 자녀들을 살해하고, 그를 바빌론으로 압송했다(2열왕 25,7). 예루살렘을 함락한 뒤 바빌론 임금의 친위대장 느부자르아단은 성전과 솔로몬 궁, 예루살렘의 모든 집을 불태우고 성벽을 허물었다. 아울러 성전의 금과 은, 청동으로 만든 성물을 약탈하고 스라야 수석 사제를 비롯한 성전 사제들과 대신들을 바빌론으로 압송해 하맛 땅 리블라에서 처형했다(2열왕 25,8-25). 이후 이스라엘 백성은 기원전 538년 바빌론을 멸망시킨 페르시아 임금 키루스의 칙령으로 해방돼 유배 생활 50년 만인 이듬해부터 본국으로 귀환했다(에즈 1─2장). 예루살렘으로 돌아온 이들은 옛 자리에 제단을 쌓고 하느님께 제사를 드렸고 성전 재건에 힘썼다. 그러나 이 재건 공사는 사마리아 귀족들의 방해로 16년간 중단해야 했다(에즈 4,1-24). 그래도 희망을 이스라엘 백성은 하느님과의 계약에 충실하지 않아서 나라가 멸망하는 비운을 맞았다(2역대 36,17-21). 그러나 바빌론 유배 생활을 통하여 이스라엘은 새롭게 정화됐다. 또 이사야, 예레미아, 에제키엘 등 대예언자들이 역사에 등장하여 예루살렘의 부흥과 메시아 출현 등 희망을 예언했다(이사 4,2-3; 예레 5,18). 신약의 경우, 일부 초기 그리스도교 작가들은 로마라는 명칭 대신 ‘바빌론’이라는 말을 일종의 암호처럼 사용했다. 신약의 요한 묵시록도 신도들을 박해하는 사악하고 억압적인 권력을 가리키는 의미로 바빌론이라는 말을 여러 차례 사용한다. 허영엽 신부(서울대교구 홍보국장) 김현진2015.04.28
![[성경 속 도시] (65) 예루살렘 (하)](//cpbc.co.kr/CMS/newspaper/2015/10/rc/598943_1.0_titleImage_1.jpg)
[성경 속 도시] (65) 예루살렘 (하)정복·파괴·건설의 역사가 쳇바퀴처럼 험난한 구세사의 역사를 지닌 예루살렘 전경. 고고학적으로 예루살렘은 오랜 역사를 지니고 있다. 석기 시대부터 인류가 정착한 흔적이 발견되기도 했다. 예루살렘에는 기원전 4000년경부터 사람이 살았으며, 기원전 3000~2000년경에는 제법 큰 도시를 형성했던 것으로 보인다. 예루살렘은 이스라엘의 모든 생활 문화의 중심지요 위대한 왕의 성읍이었다. 그러나 강대국 사이에 있었던 예루살렘은 역사적인 우여곡절을 겪으며 수 세기 동안 정복당하고 파괴되며 다시 건설되기를 반복했다. 성경에서 예루살렘의 역사를 보면 이스라엘의 가나안 정복 직전 여부스족이 예루살렘에 거주했으나 베냐민과 유다 지파에 의해 일시적으로 점령됐다(판관 1,8). 그런데 이스라엘 민족은 여부스족과 함께 거주했다. “벤야민의 자손들은 예루살렘에 사는 여부스족을 쫓아내지 않았다. 그래서 여부스족이 오늘날까지 예루살렘에서 벤야민의 자손들과 함께 살고 있다”(판관 1,21). 이스라엘 역사에서 가장 발전했던 다윗 시대에 예루살렘은 완전히 정복, 통일 이스라엘 왕국의 수도가 됐다(1역대 11,7). 이어 솔로몬에 의해 요새로 강화되고 성전이 건립됐다(1열왕 9,15).예루살렘은 남쪽 유다의 르하브암 왕 때 이집트 왕 ‘시삭’의 침입을 받았다(2역대 12,2). 또 유다 임금 아마츠야 때 북이스라엘 왕 여호아스로부터 공격을 받기도 했다. 이스라엘 임금 여호아스는 아하즈야의 손자이며 요아스의 아들인, 유다 임금 아마츠야를 벳 세메스에서 사로잡아 예루살렘으로 데리고 왔다. 그리고 ‘에프라임 성문’에서 ‘모퉁이 성문’까지, 예루살렘 성벽 사백 암마를 무너뜨렸다”(2역대 25,23). 그리고 예루살렘은 기원전 586년 바빌론 왕 느부갓네살에게 함락된 뒤 약 70년간 황폐한 채로 바빌론 총독의 지배를 받았다(예레 25,11).페르시아 임금 키루스의 칙령으로 포로들이 귀환해 예루살렘 성전 재건을 시작했다(에즈 1,2). 그러다 기원전 333년에는 마케도니아 알렉산더 대왕이 예루살렘을 정복했다. 기원전 63년에는 로마의 폼페이우스에 의해 정복당하고, 기원후 70년 로마 장군 티투스에게 예루살렘은 함락됐다. 제2차 유다전쟁(135년) 때 하드리아누스는 다시 예루살렘을 함락하고 예루살렘 성전 자리에 주피터 신전을 건설하고 골고타 언덕 위에는 비너스 신전을 지어 유다교와 그리스도교를 동시에 말살하려 했다.그러나 313년 콘스탄티누스 황제에 의해 그리스도교가 공인되면서 예루살렘은 각광을 받고 그리스도교의 중심 도시로 재건됐다. 그러다가 무슬림들이 637년에 예루살렘을 정복하기 위해 예루살렘으로 진격했다. 1099년 십자군 군사들이 정복할 때까지 예루살렘은 이슬람 도시로 인식됐으며, 1517년에 투르크 족이 예루살렘에 침입해 도시의 성벽을 세웠다.예루살렘은 이슬람과 십자군의 몇 차례에 걸친 탈환 전쟁의 소용돌이에 휩싸였다. 1917년에 발발한 제1차 세계대전 직전까지 터키의 지배를 받다가 1923년 영국의 위임 통치를 거쳐 제2차 세계대전 후 이스라엘의 수도가 됐다. 예루살렘은 길고 험난한 구세사의 역사를 지니고 있는 도시이다. 성벽과 길바닥의 돌 하나하나가 수천 년의 역사를 증언하고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허영엽 신부(서울대교구 홍보국장) 평화신문2015.10.20
![[복음 이야기] (36) 성전 (3)](//cpbc.co.kr/CMS/newspaper/2014/11/rc/539063_1.0_titleImage_1.jpg)
[복음 이야기] (36) 성전 (3)소박했지만 민족 부흥의 표지 즈루빠벨 솔로몬 성전은 오늘날 예루살렘 구시가 동쪽 ‘하람 에슈 셰리프’ 지역에 터했다. 이후 즈루빠벨과 헤로데가 지은 성전도 이 솔로몬 성전 터 위에 재건됐다. 유다인들은 성전 터가 오늘날 ‘황금 돔’으로 유명한 이슬람 엘 악사 모스크 자리이며 안에 있는 너른 바위 위에 계약의 궤를 모신 지성소가 있었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사진은 성전 터 위에 세워져 있는 엘 악사 모스크. 솔로몬이 지어 이스라엘 민족이 하느님께 처음으로 봉헌한 예루살렘 성전은 기원전 587년 바빌론(신바빌로니아 왕국) 임금 네부카드네자르에 의해 파괴됐다(2열왕 25,1-21). 예루살렘을 함락한 친위대장 느부자르아단은 성전과 솔로몬 궁, 예루살렘의 모든 집을 불태우고 성벽을 허물었다. 아울러 성전의 금과 은, 청동으로 만든 성물을 약탈하고 스라야 수석 사제를 비롯한 성전 사제들과 대신들을 바빌론으로 압송해 하맛 땅 리블라에서 처형했다. 그리고 이스라엘 백성들을 바빌론으로 유배시켰다. 이후 이스라엘 백성은 기원전 538년 바빌론을 멸망시킨 페르시아 임금 키루스의 칙령으로 해방되어 유배생활 50년 만인 이듬해부터 세스바차르의 지도로 성전 기물과 함께 본국으로 귀환했다(에즈 1-2장). 예루살렘으로 돌아온 이들은 옛 자리에 제단을 쌓고 하느님께 제사를 드렸고 저마다 예물을 바치며 성전 재건에 힘썼다. 하지만 이 재건 공사는 사마리아 귀족들의 방해로 키루스 임금과 크세르크세스 1세와 아르타크세르크세스 1세 시대까지 16년간 중단해야 했다(에즈 4장). 이방인들과 섞여 이스라엘 땅에 살던 사마리아인들이 성전 재건 공사에 동참하려 하자 이스라엘 원로들이 거절했고, 이에 화가 난 사마리아 귀족들이 성전 건축을 ‘반역 행위’로 몰아 페르시아 당국에 고발했기 때문이다.다리우스 임금 통치 2년째 기원전 520년 예언자 하까이와 즈카르야의 촉구로 대사제 예수아와 지방 장관 즈루빠벨은 다리우스 임금에게 성전 건축을 허락해 달라는 장계를 올렸다. 장계에는 ‘키루스 임금이 예루살렘 성전을 지으라고 허락했다’는 내용이 적혀 있었다. 이 장계를 읽은 다리우스 임금은 바빌론 문서고에서 키루스 칙령을 발견하고 성전 재건 공사를 그 해 허락했다. 성전 재건 공사는 순조롭게 진행돼 다리우스 재위 6년째인 기원전 515년 아다르달(2월 중순~3월 중순) 초사흗날에 완공해 봉헌식을 올렸다. 이날 봉헌식에는 황소 200마리와 숫양 200마리, 어린양 400마리를 제물로 바쳤고, 온 이스라엘을 위한 속죄 제물로 숫염소 12마리를 봉헌했다(에즈 6,1-22). 이 성전은 약 500년간 유지됐다. ‘즈루빠벨 성전’이라 불린 이 성전은 성경에 상세한 내용이 없어 그 규모와 구조에 대해 자세히 알 수 없지만 대략 가로세로 길이와 높이가 각각 60암마(28~32m)로 전해지며 솔로몬 성전보다 훨씬 소박했다. 즈루빠벨 성전이 솔로몬 성전에 비해 얼마나 소박했는지 성경은 “옛 성전을 보았던 많은 노인이 목 놓아 울었다”고 기록하고 있다(에즈 3,12).계약의 궤는 이미 바빌론 포로 시절에 없어졌고, 이후 다시 만들지 않았다. 그래서 즈루빠벨 성전의 성소에는 솔로몬 성전의 10개의 등잔대 대신 일곱 개의 가지를 가진 1개의 등잔대만 놓였고 제사상과 분향 제단이 마련됐다(1마카 1,21. 4, 49-51). 기원전 333년 페르시아를 멸망시킨 마케도니아의 알렉산드로스 대왕은 적의를 품고 예루살렘을 쳐들어갔으나 야두아 대사제의 환대를 받은 후 성전에 제물을 바치고 유다인의 특권을 인정했다. 하지만 알렉산드로스 대왕은 기원전 323년 바빌론에서 짧은 생애를 마감한다(1마카 1,1-7).이후 셀레우코스 왕조가 시리아와 팔레스티나 지역을 통치하게 됐고 안티오코스 4세(기원전 175~164)가 왕위에 오르면서 유다인을 박해했다. 안티오코스 4세는 기원전 167년 이집트를 침략하고 돌아가는 길에 예루살렘으로 가서 성전을 약탈하고 제우스 신상과 제단을 세웠다. 그리고 마구 살육을 저질렀다. 성경은 이날을 “이스라엘 곳곳에는 큰 슬픔이 일어 지도자들과 원로들은 탄식하고 처녀 총각들은 기운을 잃었으며 여인들의 아름다움은 사라졌다.…땅도 그 주민들 때문에 떨고 야곱의 온 집안은 수치로 뒤덮였다”(1마카 1,25-28)고 증언하고 있다.독립전쟁을 승리로 이끌고 예루살렘 성채를 회복한 마카베오는 기원전 164년 즈루빠벨 성전에 놓인 제우스 신상과 제단을 부수고 새 제단을 쌓아 성전을 정화했다. 유다인들은 이날을 기념해 ‘하누카’ 축제를 지금까지 지내고 있다. 비록 솔로몬 성전에 비해 그 규모와 화려함이 훨씬 뒤떨어졌지만 즈루빠벨 성전은 이스라엘 민족 부흥의 표지였으며, 이교도에 대한 저항의 중심으로 유다인들이 충심으로 아끼던 성전이었다. 즈루빠벨 성전은 이두메와 출신의 유다 왕 헤로데가 기원전 19년 유다인을 회유하기 위해 새 성전을 지으면서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리길재 기자 teotokos@pbc.co.kr 평화신문2014.11.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