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소근 수녀와 떠나는 구약 여행] (55) “이스라엘을 그 교훈과 지혜와 관련하여 칭송하는 것은 마땅합니다”(집회서 머리글)](//cpbc.co.kr/CMS/newspaper/2016/01/rc/615111_1.0_titleImage_1.jpg)
[안소근 수녀와 떠나는 구약 여행] (55) “이스라엘을 그 교훈과 지혜와 관련하여 칭송하는 것은 마땅합니다”(집회서 머리글)인간, 하느님 지혜 앞에 무릎 꿇다 인간에게는 알고자 하는 갈망이 새겨져 있는 듯합니다. 그저 지금 알고 있는 것으로 만족하지 않고, 끊임없이 앎을 향하여 손을 내뻗습니다. 그 형태는 여러 가지로 나타날 수 있지만, 모든 문화에서 인간은 지혜를 추구했습니다. 성경에서도 ‘지혜문학’으로 분류되는 책들이 있습니다. 좁은 의미에서는 잠언, 욥기, 코헬렛, 집회서, 지혜서가 여기에 속합니다. 지혜에 대한 관심이 이 책들에만 나타나는 것은 아니지만, 이 책들은 처음부터 끝까지 거의 지혜에 관련된 문제들에 집중하고 있습니다.고대 근동의 다른 나라들에서도 지혜에 대한 추구는 크게 발전했었습니다. 열왕기 저자가 “솔로몬의 지혜는 동방 모든 이의 지혜와 이집트의 모든 지혜보다 뛰어났다”고 말한다면(1열왕 5,10), 이 말은 역으로 동방과 이집트의 지혜가 널리 알려져 있었으며 이스라엘이 그것을 알고 있었음을 보여 주는 것이겠지요. 더 늦은 시기에는 그리스와 로마에서도 지혜를 찾는 이들이 끊이지 않았고, 구약 성경 가운데에서도 가장 늦은 시기의 책인 지혜서에서는 이들의 영향도 나타납니다. 사실 지혜문학은 특정한 장소에 한정되지도 않고 특정한 시대에 한정되지도 않습니다. 다른 나라들에도 지혜문학이 발달했을 뿐만 아니라 구약 성경의 책들이 그 영향을 받아들일 수 있었던 것은, 그만큼 지혜문학에서 다루는 주제들이 보편적이고 국제적이기 때문이지요. 인간이 이 세상을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사회생활에서 성공하는 길은 무엇인가, 죽음과 고통은 인간의 삶에서 어떤 의미를 가지는가, 이런 문제들은 모든 시대 모든 장소의 사람들이 고민하는 문제들입니다. 또한 지혜문학이 이러한 문제들에 접근하는 방법도 보편적입니다.지혜문학의 특징으로 여러 가지를 들 수 있겠지만, 지금은 한 가지에만 초점을 맞추려 합니다. 그 가장 두드러진 특징은, 출발점이 인간 이성이라는 점입니다. ‘출발점’이라고 앞에 붙여놓은 것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끝까지 여기에만 머물지는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적어도 출발점에서, 토라가 하느님께서 모세에게 알려 주신 율법에서 출발하고 예언서가 하느님께서 예언자들에게 하신 말씀에서 시작하는 데에 비하여, 지혜문학은 인간 이성의 추구에서 시작합니다. 인간의 머리로 세상의 질서를 파악하려고 노력합니다. 하느님을 찾는 길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역사 안에서 당신 자신을 드러내시며 아브라함을 부르신 하느님, 이스라엘을 이집트에서 해방시키신 하느님에게서 출발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세상의 질서를 보면서 하느님을 감지합니다. 여기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되는 것이 창조 질서입니다. 우주와 자연 현상의 질서를 바라보며, 그 안에 하느님의 지혜가 깃들어 있음을 깨닫고 그로부터 이 세상을 만드신 하느님의 존재를 추론하는 것입니다.구약 성경 지혜문학의 첫 단계인 잠언은 주로 이렇게 세상의 질서를 파악하는 데에 집중합니다. 이러한 지혜를 ‘고전적 지혜’라 부릅니다. 다른 여러 나라의 지혜문학과 공통된, 아주 전형적인 지혜문학의 모습이 여기에 나타납니다. 이 세상의 질서에 관심을 집중하며, 인간의 행위에는 반드시 갚음이 있음을 역설합니다. 관심은 현세에 집중되어 있으며 선과 악에 대한 갚음도 현세 안에서 이루어진다고 봅니다.그런데, 이것으로 문제가 다 해결되지는 않습니다. 지혜문학의 출발점이었던 인간의 지혜로 이 세상의 질서를 파악해 보려고 노력하지만, 어디에선가는 분명 한계에 맞닥뜨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세상일이 원리원칙대로 되지 않는다는 것, 이 세상에서 언제나 착한 사람이 복을 받고 나쁜 사람이 벌을 받는 것은 아니라는 것, 살면서 언젠가는 체험하게 되는 일들입니다. 그래서 고전적인 지혜에 대하여 이의를 제기하게 됩니다. 구약 성경의 지혜문학 가운데서는 욥기와 코헬렛이 이 단계를 대변합니다. 잠언이 이 세상의 정돈되고 질서있는 영역에 머물렀다면, 욥기와 코헬렛은 세상의 끝까지 가서 그 한계선을 붙잡고 몸부림칩니다. 인간의 지혜에 한계가 있음을 확인하고 그 앞에서 무릎을 꿇는 것이 욥기와 코헬렛입니다.하지만 성경의 지혜문학은 여기에서 멈추지 않습니다. 인간의 능력으로는 지혜를 온전히 깨달을 수 없음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는 바로 그 한계선에서, 현인들은 하느님을 만납니다. 인간으로서는 파악할 수 없는 지혜를 알고 계신 분이 하느님이시며, 그 하느님께서 인간에게 당신의 지혜를 알려 주심을 발견합니다. 아니, 이스라엘의 조상들에게 이미 알려 주셨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위에서 지혜문학의 ‘출발점’이 인간 이성이라고 했지요. 말하자면 철학적 사고와 유사하게, 처음에는 인간의 머리로 지혜를 깨달으려고 했습니다. 이것이 성경의 지혜문학만이 아니라 주변 여러 나라의 지혜문학이 공통적으로 보여주는 특징이었습니다. 지혜문학의 출발점은 계시가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구약 성경 지혜문학의 특징은, 마지막에 가서 계시로 돌아온다는 점입니다. 하느님께서 이미 조상들에게, 구체적으로는 모세를 통하여 주셨던 율법을 통하여 인간의 능력으로는 알 수 없는 지혜를 알려 주셨음을 깨달은 다음, 집회서와 지혜서는 토라로 돌아갑니다. 참된 지혜는 멀리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토라 안에 있었음을 알았기 때문입니다.“주님을 경외함은 지식의 근원이다”(잠언 1,7). 구약 성경의 지혜문학은 이 말로 시작하여 이 말로 끝납니다. 인간의 이성을 출발점으로 하면서도 주님께 대한 경외심이 없이는 참된 지혜에 도달할 수 없음을 알았던 것이 구약 성경 지혜의 특징이었습니다. <성 도미니코 선교수녀회, 대전가톨릭대 교수 > 평화신문2016.01.19
![[안소근 수녀와 떠나는 구약 여행] (50) “하느님을 진심으로 섬기고 그분께서 좋아하시는 일을 하여라”(토빗 14,8)](//cpbc.co.kr/CMS/newspaper/2015/12/rc/609266_1.0_titleImage_1.jpg)
[안소근 수녀와 떠나는 구약 여행] (50) “하느님을 진심으로 섬기고 그분께서 좋아하시는 일을 하여라”(토빗 14,8)선의·자선 베풀며 그날을 기다려라 앞을 보지 못했던 토빗은 하느님이 보내신 천사의 말대로 물고기의 쓸개를 바르고 눈을 뜨게 된다. 도메니코 페티 작, ‘토빗의 치유’. 이제부터 3주 동안 토빗기, 유딧기, 에스테르기를 읽을 것입니다. 그런데 주의할 점이 있습니다. 이 책들은 역사서들로 분류되지만 실제로는 역사적 사건에 대한 기록이라기보다 교훈적인 이야기들이라는 점입니다. 첫머리에서 구체적인 시대 배경들을 제시하고 있지만, 자세히 보면 전혀 정확하지 않습니다. 토빗기의 경우, 1장 4절에서 말하는 것처럼 토빗이 젊었을 때에 납탈리 지파가 다윗 집안에서 떨어져 나갔다고 한다면 이것은 기원전 10세기, 솔로몬 사후의 일입니다. 그때에 살았던 토빗이 기원전 8세기에 니네베로 유배를 갔다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또한, 14장 15절에서 말하는 것처럼 그의 아들 토비야가 기원전 612년에 니네베의 멸망을 보았다는 것 역시 매우 어려운 일이 됩니다. 당황하실 필요 없습니다. 이 책이 역사 기록이 아니라는 사실은 독자들에게도 명백했기 때문입니다. 이 책에서 저자는 귀신 이야기나 전설 등의 요소도 자유롭게 사용하면서 독자들에게 어떤 가르침을 전달하려 합니다.토빗기, 유딧기, 에스테르기는 몇 가지 공통점을 지니고 있습니다. 어떤 시대를 배경으로 줄거리가 전개되든, 이 책들의 작성 연대는 늦은 편입니다. 세 권 모두 외국에서의 삶 또는 이방인들과의 관계를 배경으로 하고 있습니다. 토빗은 아시리아로 유배를 갔고, 유딧도 아시리아와 전쟁 중에 포위되었으며, 에스테르는 페르시아에서 왕비가 됩니다. 그것은 아마도, 이 책들이 많은 유다인들이 외국 땅에 흩어져 살게 된 시대에 작성되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토빗기도 이야기 자체가 이스라엘 땅을 떠나 유배지에 있는 이들에게 어떻게 살아가야 할 것인지를 말하고 있으며 예루살렘으로 돌아갈 날과 예루살렘의 회복을 바라고 있다는 점을 고려할 때에 아마도 디아스포라를 배경으로 하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먼저 토빗기의 줄거리를 보아야 하겠습니다.아시리아의 니네베로 유배를 간 토빗은 친척과 동족들에게 자선을 베풀며 올바르게 삽니다. 그는 가난한 이들을 돌보고 죽임을 당한 동족의 시신을 묻어주기도 했지만, 불행히도 눈이 멀게 됩니다. 이에 토빗은 하느님께, 곤궁과 모욕을 벗어나도록 죽음을 주시기를 청합니다.같은 시기에, 메디아의 엑바타나에는 토빗의 친척인 라구엘의 딸 사라가 살고 있었습니다. 그녀는 일곱 번 결혼했지만 매번 아스모대오스라는 악귀가 남편들을 죽였습니다. 여종의 조롱을 받은 사라는 하느님께 자신의 목숨을 거두어 주시기를 청하고 있었습니다.바로 그때 하느님께서 그 둘의 기도를 들으시어 라파엘 천사를 파견하십니다. 토빗은 아들 토비야에게 라게스에 가서 자신이 맡겨 둔 돈을 찾아오도록 하는데, 라파엘 천사가 그에게 나타나 길잡이를 하겠다고 자청합니다. 그들은 강에서 물고기를 잡아 약을 마련하고, 엑바타나에 이르러 라파엘은 토비야에게 사라와 혼인하라고 권고합니다. 토비야는 물고기의 간과 염통을 태워 마귀를 쫓아내고 사라와 혼인을 하며, 토빗이 맡겨 놓은 돈도 찾아와 니네베로 돌아갑니다. 니네베에 돌아와 라파엘이 말한 대로 물고기의 쓸개를 아버지에게 바르자 토빗은 시력을 되찾았습니다. 라파엘은 자신의 정체를 밝히고 하느님께 올라갔습니다. 토빗은 다시 복을 누리다가 세상을 떠났고, 토비야도 영예를 누리며 살다가 죽기 전에 니네베가 멸망하는 것까지 보고 하느님을 찬미하였습니다.토빗기에서는 선행, 그중에서도 자선을 크게 강조합니다. 이유가 있습니다. 토빗이 “아시리아인들의 땅 니네베”에서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토빗 1,3). 유배를 가기 전, 그는 예루살렘 성전을 순례하며 십일조를 바치는 등 전례 규정을 열심히 준수했던 인물입니다. 그런데 아시리아로 끌려갔을 때에는, 성전에 갈 수가 없습니다. 유배지에서 그가 신앙을 실천하는 길이 선행이고 자선이었습니다. 그는 배고픈 이에게 먹을 것을 주고 헐벗은 이에게는 입을 것을 주며, 죽어서 던져져 있는 동족을 보면 그를 묻어주는 것으로 신앙을 증거했습니다. 이것이 그에게는 율법을 지키고 하느님께 충실하게 살아가는 길이었습니다. “자선을 베푸는 모든 이에게는 그 자선이 지극히 높으신 분 앞에 바치는 훌륭한 예물이 된다”(4,11)는 토빗의 가르침은 이러한 배경에서 이해할 수 있습니다. 토빗기에서 자선은 단순히 인도적인 덕행을 넘어서는 의미를 갖습니다. “자선은 사람을 죽음에서 구해 주고 암흑에 빠져들지 않게 해 준다”(4,10).이것은 토빗과 마찬가지로 팔레스티나 땅을 떠나 디아스포라에서 살아가던 당시의 수많은 유다인들에게 삶의 지침이 될 수 있었습니다. 토빗은 죽기 전에 아들 토비야에게도, 하느님께서 좋아하시는 의로운 일을 하고 자선을 베풀라는 유언을 남깁니다. 그리고 그는, 이국땅의 유다인들이 하느님께 충실하게 살아간다면 하느님께서 언젠가 그들에게 자비를 베푸시고 흩어진 이스라엘을 다시 예루살렘으로 불러 모아 주시리라고 믿습니다(13장의 기도 참조). 그는 “그날에 구원을 받고 하느님을 진심으로 생각하는 이스라엘의 모든 자손이 한데 모여 예루살렘으로 가서, 자기들에게 주어진 아브라함의 땅에서 영원히 안심하고 살 것”이라는 희망을 간직하고 있었고(14,7), 그래서 이를 위하여 하느님을 섬기고 선을 행하라고 권고했던 것입니다. “좋기도 하여라, 우리 하느님께 찬미 노래 부름이. 즐겁기도 하여라, 그분께 어울리는 찬양을 드림이. 주님께서는 예루살렘을 세우시고 이스라엘의 흩어진 이들을 모으신다”(시편 147,1-2).<성 도미니코 선교수녀회, 대전가톨릭대 교수> 평화신문2015.12.15
![[성경 속 도시] (59) 그발](//cpbc.co.kr/CMS/newspaper/2015/08/rc/589505_1.0_titleImage_1.jpg)
[성경 속 도시] (59) 그발여호수아가 밟아보지 못한 땅 성경을 영어로는 ‘바이블’(bible)이라 한다. 어원은 그리스어로는 ‘책들’을 의미하는 ‘타 비블리아’ (ta biblia)이다. 후에는 단순 명사인 ‘헤 비블리아’(he biblia)라는 말이 성경을 가리키는 그리스어 명사가 되었다.이집트 사람들은 나일 강변에서 갈대의 일종인 파피루스(Papyrus) 줄기를 종이로 가공해 지중해 연안의 다른 나라에 수출해서 많은 수입을 올렸다고 한다. 당시 지중해 무역을 독점했던 페니키아인은 비블로스(Biblos)항을 통해 파피루스를 수출했다. 이런 까닭으로 파피루스는 수출 항구의 이름에서 그리스어 ‘비블로스’라고도 불리게 되었다고 한다. 오늘날의 예베일(Jebeil)에 해당하는 곳이다.파피루스 수출 도시 ‘비블로스’ 파피루스 수출로 유명했던 도시인 ‘비블로스’가 그발이다. 그발은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도시 중 하나이다. 그발은 신석기 시대 후 사람들이 계속 거주해 온 곳으로, 페니키아 문명이 시작된 당시의 모습을 잘 보여주고 있다. 이곳에 도시가 만들어지기 시작한 것은 기원전 4500년쯤이며, 기원전 1200년 후에는 페니키아 3대 항구도시 중에 하나로 크게 성장했다. 지금도 중세의 성과 고대 거주지를 비롯해 유적지 곳곳에 서로 다른 시대의 기원을 두고 있는 건축물이 도시의 역사를 잘 드러내고 있다.그발은 ‘경계’, ‘가장자리’란 뜻을 가지고 있다. 이스라엘이 정복하지 못한 시돈과 티로와 함께 페니키아 3대 도시국가로 언급되고 있다. 오늘날에는 레바논의 수도 베이루트 북쪽 40㎞ 지점의 지중해변에 있는 도시다. 그발은 옛날부터 조선업이 발달했으며, 배를 수출하고 있었다. 그발 사람들은 우수한 건축 기술을 가지고 있었고 조선술, 항해술 등 기술도 발달했던 것으로 보인다. 예로부터 이곳은 돌과 재목을 다듬는 기술자들이 많았던 것 같다. “이렇게 솔로몬의 건축가들과 히람의 건축가들과 그발 사람들이 돌을 깎아 내고, 주님의 집을 지을 나무와 돌을 마련하였다”(1열왕 5,32).십자군 성채 남아 있어페니키아인들은 레바논에서 나는 백향목을 수출하고, 이집트산 파피루스를 사들여 그리스 등지에 파는 중계무역을 통해 부를 축적했다. 그발은 역사적으로 아시리아ㆍ페르시아ㆍ그리스ㆍ로마ㆍ이슬람 등의 반복된 침략과 지배를 받았으며, 1104년 십자군에게 점령당하기도 했다. 이처럼 여러 세력의 침략과 지배를 받는 동안 고대 유적들은 점차 파괴됐다. 그러다가 20세기 초 유적의 발굴로 페니키아 시대 및 로마 유적지를 중심으로 여러 시대의 유적들이 발견돼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됐다. 지금도 유적지 입구에는 십자군 점령기에 축조된 큰 규모의 성채가 있다. 또 신석기, 청동기 시대 주거지와 오벨리스크 신전 터, 로마 시대의 도로와 원형 극장, 십자군 시대 성벽까지 다양한 시대의 유적과 유물이 존재한다.성경에서는 여호수아가 죽기 전까지 정복하지 못한 땅으로 나타난다. “또 그발족의 땅, 헤르몬 산 아래 바알 가드에서 하맛 어귀까지 이르는 해 뜨는 쪽의 온 레바논이다”(여호 13,5). 그발은 다른 나라들과 동맹을 꾀해 이스라엘에 대항하는 적으로 등장한다. “그들은 한마음으로 흉계를 꾸미고 당신을 거슬러 동맹을 맺습니다. 에돔의 천막들과 이스마엘인들 모압과 하가르인들 그발과 암몬과 아말렉 필리스티아와 티로의 주민들도 함께”(시편 83,6-8). 그 옛날 해양국가로 조선업이 발달한 이곳 항구는 오늘날에는 초라한 항구로 남아 있다. 옛 항구 터에 아무런 항구 시설이 없어 화려했던 과거 역사의 흔적을 느낄 수 없는 것이 아쉽다. 허영엽 신부(서울대교구 홍보국장) 평화신문2015.08.26
![[생활 속의 복음] 하느님의 일, 사람의 일](//cpbc.co.kr/CMS/newspaper/2015/09/rc/592106_1.0_titleImage_1.jpg)
[생활 속의 복음] 하느님의 일, 사람의 일연중 제24주일(마르 8,27-35) 박재식 신부(안동교구 사벌퇴강본당 주임) 올여름을 너무 힘들게 지냈습니다. 날씨도 무척 더웠고, 경제ㆍ정치 상황도 1997년 이후로 최악이 아니었나 생각합니다. 세월호 참사 1주기에 일어난 사회적 갈등, 예비군 사격 훈련장에서 벌어진 총기 난사사건, 새로운 신분 관계(갑과 을)의 현실, 메르스라는 바이러스의 공포로 서로가 믿음을 잃어버린 시간, 정치권과 정부기관의 부정부패ㆍ능력 부족(거짓 정보로 확인된 황병서의 숙청설 등), 민간인 사생활 사찰… 신뢰가 무너진 시간이었습니다. 게다가 요즘의 중국 경제 위기는 더욱 힘든 시간이 닥칠 것을 암시하고 있습니다. 이런 어려움의 근본은 어디부터일까요? 긍정적이고 희망적인 소식으로 하루와 한 해를 시작하기가 그렇게 힘든 것일까요? 만나는 사람마다 “힘들다”는 이야기뿐입니다. 이런 어려움이 발생하는 근본적 이유는 ‘신뢰를 바탕으로 서로 용서하고 돕고 살아야 한다’는 기본에 충실하지 않고 개인주의적 삶을 살기 때문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요즘 말로 ‘한창 잘 나갈 때’ 제자들에게 자신의 신원에 대해 질문하십니다. 그러자 제자들은 주변의 평가를 이야기하며 “스승님은 그리스도이십니다”(마르 8,29)라고 고백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최고의 평가를 접하시고는 자신의 수난을 예고하십니다. 그리고 ‘하느님의 일’과 ‘인간의 일’에 대해 말씀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이 진정 하느님 나라의 백성으로 살기를 원하셨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에서 사상과 이념보다 더욱 중요한 것은 진리를 실천하고 따르는 삶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우리는 인생의 행복과 불행을 여러 관점에서 이야기합니다. 성경은 인간이 하느님의 초대에 응답하면서 세상의 주인으로, 세상 창조사업의 협력자로 살아갈 때 인간으로서 존재 이유(창세 1,28)를 알고 행복을 느낀다는 사실을 보여줍니다. 이에 반해 상대와의 비교(카인과 아벨)나 물질적인 풍요ㆍ특권(다윗과 솔로몬)을 지향할 때는 죄를 범하거나 눈물을 흘리며 살아가게 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하느님의 일’은 하느님께서 주시는 사랑과 자비에 감사를 드리며 하느님의 모상(image)으로서 실상(reality)인 하느님을 닮아가는 모든 행동과 생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에 반해 ‘인간의 일’은 ‘허상’인 인간을 중심으로 인간관계를 맺어가는 것입니다. 추석을 준비하는 시골 어르신들은 정말 바쁘게 움직입니다. 자식들을 위한 선물도 준비해야 하고, 주변 사람들의 긍정적 평가를 기대하면서 한 해 노동을 마무리해야 합니다. 그러다 보니 타인의 이목과 관점에 따라 행동해야 하는 괴로움을 겪기도 합니다. 한 해를 마무리하면서 신뢰와 용서 그리고 하느님을 중심에 두고 살았는지 되돌아보기보다 외적으로 드러나는 성과와 사회적 성공이라는 평가에 집중하게 되는 것입니다. 앙드레 지드는 자신의 소설 「좁은 문」에 등장하는 제롬처럼 ‘허위의 탈’ 속에 자신을 감추지 말고, 진리를 따라서 정당한 사실에 근거를 두고 살아가는 것이 행복한 삶이라고 이야기합니다. 저는 ‘하느님의 일’을 행하면서 살아가는 사람이 멋지고 행복하다고 생각합니다. ‘인생의 행복과 멋’을 생각하면 두 사람의 운동선수가 떠오릅니다. 한 사람은 축구선수 차범근입니다. 뛰어난 운동 실력으로 유명하지만 저는 1980년 레버쿠젠과의 경기에서 자신에게 고의적이고 치명적인 반칙을 한 위르겐 겔스도르프 선수를 용서한 일이 먼저 생각납니다. ‘용서’라는 ‘하느님의 일’을 실천했기 때문입니다. 또 다른 인물은 핸드볼 선수 윤경신입니다. 지금까지도 독일 핸드볼 리그(분데스리가)에서 전설로 불리는 선수입니다. 그의 진정한 전설은 10여 년간 활약한 소속팀 ‘굼머스바흐’ 가 재정난으로 힘들어할 때 타 팀으로 이적하지 않고 모금 활동을 하고 자신의 집과 차를 담보로 잡히면서까지 구단을 살려낸 일입니다. 두 사람은 돈과 명예를 추구하기보다는 ‘용서와 신뢰’라는 하느님의 일을 행한 멋진 사람입니다. 하느님의 일은 진정한 인간의 행복입니다. 행복하십시오. 교우 여러분! cpbc2015.09.09
 기브온](//cpbc.co.kr/CMS/newspaper/2015/01/rc/552360_1.0_titleImage_1.jpg)
[성경 속 도시](35) 기브온약삭빠른 동맹으로 전쟁의 화 면해 예리코 평원. 뒤로는 유다 산악 지형. 출처=「성경 역사 지도」,분도출판사 기브온은 솔로몬이 하느님께 번제물을 드리고 지혜를 선물 받게 된 중요한 장소이기도 했다. “임금은 제사를 드리러 기브온에 갔다. 그곳이 큰 산당이었기 때문이다. 솔로몬은 그 제단 위에서 번제물을 천 마리씩 바치곤 하였다”(1열왕 3,4). 기브온은 기원전 12세기 이후 언덕을 둘러싸고 있었던 거대한 성벽으로 도시를 이뤘다. 이곳에서는 성벽 내 사람들을 위한 거대한 지하 물 저장고가 발견되기도 했다. 고대 가나안에서는 비가 오지 않는 여름에는 특별히 물 저장소를 만들어 주거지 주위에 뒀다. 기원전 8~7세기께 기브온은 유다 왕국의 포도주를 책임지는 도시가 된 것으로 보인다. 이 시대에 발견된 포도주 공장 지역에서는 63개의 포도주 저장용 장소가 있었다. 기브온은 성경 여러 곳에서 언급되지만 가장 인상적인 부분은 역시 여호수아와 관련된 대목이다. 여호수아가 이끄는 이스라엘 군대가 아이성을 정복하자 기브온 주민은 여호수아가 예리코와 아이에서 한 일을 듣고서, 이스라엘과 동맹을 맺었다. 그런데 동맹을 맺는 과정에서 기브온 주민들은 이스라엘의 종을 자처하면서 남루한 옷차림으로 먼 고장에서 왔다고 거짓말을 한다. 여호수아는 그들과 평화롭게 지내기로 하고 그들을 살려 준다는 계약을 맺었다. 사흘 후 여호수아는 기브온 사람들의 정체를 알게 됐지만 이미 주님의 이름으로 조약을 맺은 백성이었기에 기브온과 전쟁을 할 수는 없었다. 어찌 되었든 기브온과 동맹을 맺은 이스라엘은 중앙 산악지를 장악하게 되어 가나안에 대해 더욱 큰 지배력을 가지게 됐다. 이 소식을 들은 예루살렘 왕 아도니 체덱은 큰 충격을 받는다. 그는 이스라엘에 대항하기 위해 가나안 남쪽 지역의 왕들과 동맹을 맺었다. “그리하여 예루살렘 임금, 헤브론 임금, 야르뭇 임금, 라키스 임금, 에글론 임금, 이렇게 아모리족의 다섯 임금과 그들의 모든 군대가 모여 올라와서, 기브온을 향하여 진을 치고 싸움을 걸었다”(여호 10,5). 기브온 사람들은 길갈 진영으로 여호수아에게 전갈을 보내 도움을 청했다. 계곡 위에 있는 기브온의 지형 탓에 이곳을 공격하려는 연합 군대들은 계속 아래쪽에 진영을 갖췄다. 하지만 여호수아는 길갈에서 야간에 병력을 이동시켰고 공격을 감행했다. “여호수아는 길갈을 떠나 밤새도록 올라가서 그들에게 갑자기 들이닥쳤다”(여호 10.9). 고대 군사 전문가들은 여호수아가 새벽에 아침 해를 등지고 아직 잠들어 있는 군대를 기습적으로 공격해 섬멸했다고 설명하기도 한다. 또 한 번 여호수아의 뛰어난 군사 지략과 결단력이 드러난 전투였던 것이다. 여호수아의 가나안 정복 전쟁은 가나안의 도시 국가들에게 상당한 두려움을 줬다. 여호수아와 조약을 맺은 것으로 정복 전쟁의 희생을 피한 기브온은 베냐민 지파의 땅이 됐고(여호 18,25), 레위 지파의 도시가 됐다. “또 벤야민 지파에서는 기브온과 거기에 딸린 목초지, 게바와 거기에 딸린 목초지, 아나톳과 거기에 딸린 목초지, 알몬과 거기에 딸린 목초지, 이렇게 네 성읍을 내주었다”(여호 21,17-18). 허영엽 신부(서울대교구 홍보국장) 평화신문2015.01.28
 단](//cpbc.co.kr/CMS/newspaper/2015/07/rc/584406_1.0_titleImage_1.jpg)
[성경 속 도시](55) 단종교적 독립 위해 금송아지 숭배 도시 단의 포장된 광장과 돌로 쌓은 성벽. 이곳은 북이스라엘의 첫 번째 왕인 예로보암이 베텔과 함께 금송아지를 둔 곳이다. 발췌=「성경 역사 지도」, 분도출판사 이스라엘 사람들이 자주 사용하는 “브에르 세바에서 단까지”라는 표현은 이스라엘의 남쪽 끝은 브에르 세바요, 북쪽 끝은 단이었기 때문이다. 우리가 쓰는 “백두에서 한라까지”라는 표현과 유사하다.단은 구약시대 이스라엘의 전통적 북쪽 경계 도시로 팔레스타인 북단의 도시다. 원래 이름은 ‘라이스’였다. “그 성읍 이름을 이스라엘에게서 난 저희의 조상 단의 이름을 따서 단이라고 지었다. 그 성읍의 본래 이름은 라이스였다”(판관 18,29). 요르단 강의 원류단이 전통적으로 가나안의 도시로 발달할 수 있었던 것은 단에서 헤르몬 산의 눈이 녹아 맑은 샘으로 솟아나며 요르단 강의 원천을 이루었기 때문이다. 요르단 강의 이름은 원래 ‘단으로부터 흘러내려 온다’는 뜻인데, 세 군데의 원류 중에서 단의 샘이 가장 규모가 크기 때문에 유래된 것으로 보인다. 풍부한 물과 주변의 기름진 땅 덕분에 이미 신석기시대부터 주거지가 형성되기 시작했고 근처에서 가장 중심적인 도시로 성장했다. 단 지파는 원래 지중해 연안 지역을 분배받았지만 정착해 있던 필리스티아 민족에 밀려 세력을 확장하지 못하고 가나안의 전통적인 도시였던 라이스를 정복한 후, 도시 이름을 자신들의 지파 이름을 따 단이라고 부르게 되었다.“그러나 단의 자손들은 자기들의 영토를 잃어버리게 되었다. 그래서 그들은 레셈으로 올라가 싸워서 그곳을 점령하였다. 그곳을 칼로 쳐서 차지하고 그곳에 살게 된 것이다. 그리고 그 레셈을 자기들의 조상 단의 이름을 따서 단이라고 하였다(여호 19,47). 성경에서 단이 처음 등장하는 곳은 아브람이 롯을 구출하는 장면에서다. “아브람은 자기 조카가 잡혀갔다는 소식을 듣고, 자기 집에서 태어나서 훈련받은 장정 삼백십팔 명을 불러 모아 단까지 쫓아갔다”(창세 14,14). 결국 아브람은 롯은 물론 빼앗겼던 재물과 친척을 다 찾아왔다. 이 밖에도 단은 성경에서 자주 등장한다. 특히 유명한 것은 솔로몬 사후 남북이 분리돼 북이스라엘의 첫 번째 왕인 예로보암은 정치적으로 분리된 북이스라엘의 종교적 독립을 위해 남쪽 경계인 베텔과 북쪽 경계인 단에 금송아지 성전을 건축한 사건이다. “그래서 임금은 궁리 끝에 금송아지 둘을 만들었다. 그리고 백성에게 이렇게 말하였다. ‘예루살렘에 올라가는 일은 이만하면 충분합니다. 이스라엘이여, 여러분을 이집트 땅에서 데리고 올라오신 여러분의 하느님께서 여기에 계십니다.’ 그러고 나서 금송아지 하나는 베텔에 놓고, 다른 하나는 단에 두었다”(1열왕 12,28-29). 따라서 단은 남북 왕국이 분열된 후 예로보암에 의해 금송아지를 숭배하던 장소로 유명하다. 그 이후 유다의 아사왕이 다마스쿠스에 사는 아람 임금 벤 하닷을 끌어들여 단을 점령했다. “벤 하닷은 아사 임금의 말을 듣고, 군대의 장수들을 그에게 보내어 이스라엘 성읍들을 치게 하였다. 그는 이욘과 단과 아벨 벳 마아카와 온 킨네렛, 그리고 납탈리 전 지역을 쳐부수었다”(1열왕 15,20). 오늘날 여름철 피서지오늘날 이곳은 이스라엘 국립공원으로 우기 때만 되면 많은 물이 단에서부터 솟아나와 요르단 강으로 흘러들어 간다. 특히 여름철에는 많은 이스라엘인이 피서를 즐기는 곳으로 유명하다. 허영엽 신부(서울대교구 홍보국장) 평화신문2015.07.29
[안소근 수녀와 떠나는 구약 여행] <18>
신명기, 이스라엘 임금 규정
율법 익히며 계명 지킬 것 강조
역경 속에서도 하느님 율법 따른 다윗이스라엘의 가장 칭송받는 왕으로 꼽혀하느님, 다윗 왕조와 함께할 것 약속지금도 평화의 임금 기다리는 유다인 이제부터는 좀더 이스라엘 역사를 가까이 놓고 성경을 읽어야겠습니다. 판관기만 해도 도식적이거나 전설적인 부분들이 적지 않았지만, 사무엘기와 열왕기는 한 걸음 더 역사 기록에 근접하기 때문입니다. 그와 더불어 진행 속도도 느려지겠습니다.이스라엘 역사상 최초의 임금은 사울이었습니다. 왕정을 반대하던 사무엘이 어쩔 수 없이 하느님의 뜻에 따라 사울을 기름 부어 임금으로 세웠습니다. 그러나 첫술에 배부르랴. 사울의 왕국은 이스라엘 중북부를 중심으로 몇몇 지파들이 결합하여 생겨난 것으로서, 사울은 주로 군사 지도자의 모습을 보입니다. 사무엘기 상권 15장 28절에 따르면 그가 다스린 것도 두 해 동안에 불과했습니다.그의 통치가 무너진 이유에 대해서, 사무엘기에서는 하느님께서 그를 배척하셨다고 말합니다. 두 가지 사건이 있었습니다. 첫 번째는 사울이 필리스티아인들과 전투를 하기 전에, 사제가 아니면서 사무엘을 기다리지 않고 자기 손으로 제사를 바쳤던 것이었습니다(1사무 13장). 이에 사무엘은 사울의 왕국이 더 이상 서 있지 못하리라고 말합니다.두 번째는 아말렉과 전쟁을 하면서 아말렉인들을 전멸시키고 그들의 소와 양을 완전히 멸하지 않고 하느님께 제사를 바친다는 명목으로 소와 양들을 살려 두었던 것이었습니다. 이때에 사무엘이 유명한 말을 남깁니다. “주님의 말씀을 듣는 것보다 번제물이나 희생 제물 바치는 것을 주님께서 더 좋아하실 것 같습니까? … 임금님이 주님의 말씀을 배척하셨기에 주님께서도 임금님을 왕위에서 배척하셨습니다”(1사무 15,22-23).여호수아기, 판관기와 같은 신명기계 역사서의 신학이 나타납니다. 영토를 정복하고 다른 민족들의 침입을 막아내기 위하여 가장 중요한 것이 한 분이신 하느님을 사랑하고 율법을 지키는 것이었듯이, 왕조를 위해서도 가장 중요한 것은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순종하는 것입니다.하느님께서 사울을 내치셨으니, 사무엘은 가서 다윗을 기름 부어 임금으로 세웁니다. 그 후에 다윗은 열두 지파의 통일 왕국을 세우고 수도를 예루살렘으로 옮겨 명실상부한 이스라엘 전체의 임금이 됩니다. 다윗은 이스라엘 역사에서 가장 이상적인 임금이며 이후의 임금들을 평가하는 잣대였습니다. 성경의 어떤 책에서도 다윗은 가장 훌륭한 임금으로 표현되지만, 신명기계 역사서에서 다윗은 한 분이신 하느님을 사랑하고 율법을 지키라는 그 명을 따랐기에 훌륭한 임금이었습니다.그런데 다윗의 통치는 그 앞뒤에 붙은 이야기들이 깁니다. 사무엘기 상권 16장부터 하권 5장까지를 ‘다윗의 왕위 등극 설화’라고 합니다. 사울과의 갈등 속에 다윗이 임금이 되는 이야기입니다. 얼마 더 지나서는 사무엘기 하권 9─20장과 열왕기 상권 1─2장에 “다윗의 왕위 계승 설화”가 있습니다. 다윗의 아들들 가운데 여러 사건을 거쳐 솔로몬이 임금이 되기까지의 이야기입니다. 왕위 등극 설화와 왕위 계승 설화가 이렇게 많은 분량을 차지하고 있는 것을 보면, 다윗의 일생은 참 파란만장했습니다.그런데 이 이야기들에서 다윗은, 그 모든 역경 속에서도 하느님께 흠 없이 충실했던 인물로 나타납니다. 물론 그가 죄가 없었다는 것은 아닙니다. 역대기에서보다 더 솔직하게 사무엘기는 밧 세바 사건과 같은 다윗의 잘못을 분명하게 밝힙니다(2사무 11─12장). 하지만 다윗은 사울의 왕위를 찬탈하거나 그의 집안에 맞서 일어나지 않았고, 오히려 사울의 죽음을 애도하고 이스 보셋을 죽인 이들을 벌합니다. 사무엘기에 따르면, 먼저 하느님께서 사울을 배척하셨고 그다음에 하느님께서 다윗을 선택하셨습니다.하느님의 선택에 확인 도장을 찍는 것이 사무엘기 하권 7장, 나탄의 예언입니다. 다윗이 하느님께 집(성전)을 지어 드리려 하자 하느님께서 나탄을 통하여 다윗에게 말씀하십니다. 주님께서 다윗에게 집안을 일으켜 주시겠고, 그의 후손의 왕좌를 영원히 튼튼하게 해 주시겠다는 것입니다.다윗 왕조와 영원히 함께하시겠다는 약속, 중요한 장면입니다. 다윗 왕조가 존속하던 때에는 이 약속이 다윗 왕조의 정통성을 지탱해 주었고, 기원전 587년에 바빌론에 의하여 왕국이 멸망한 다음에도 이 약속에 대한 믿음은 살아남았습니다. 하느님은 다윗의 후손에게 영원한 왕좌를 약속하셨으며 하느님의 약속은 한 왕조의 붕괴로 무너지고 끝날 수 없다는 것, 여기서 메시아 희망이 발전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본래 ‘메시아’라는 단어는 ‘기름 부음 받은 이’를 뜻하여 임금을 지칭했습니다. 그러나 더 이상 이스라엘에 임금이 존재하지 않게 된 때에도 이스라엘은 이 약속을 믿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이 나탄의 예언이 온전히 실현되었다고 믿고, 유다인들은 지금도 이 약속이 유효하다고 믿기에 평화의 임금이 오시기를 기다리고 있습니다.마지막, 다윗의 왕위 계승 설화에서는 다윗의 여러 아들이 죽고 죽이는 역사가 전해집니다. 암논이 죽고, 압살롬이 죽고, 아도니야가 임금이 되려다가 실패하고 결국은 솔로몬이 임금이 됩니다. 이 모두가 다윗이 죽기 전에 일어난 일들입니다. 한 부분만 보겠습니다. 압살롬의 반란을 피해 가던 다윗은 이렇게 말합니다. “그분께서 ‘나는 네가 싫다’하시면, 나로서는 그저 그분 보시기에 좋으실 대로 나에게 하시기를 바랄 뿐이오”(2사무 15,26). 내가 임금이라 해도 왕정은 절대적인 것이 아닙니다. 나의 왕좌에 대해 그분 보시기에 좋으실 대로 하시기를 바라는 것, 이것이 주님께 선택받은 다윗 임금의 자세였습니다. “네 왕좌가 영원히 튼튼하게 될 것이다” (2사무 7,16). 평화신문2015.04.14
 사마리아](//cpbc.co.kr/CMS/newspaper/2014/12/rc/545249_1.0_titleImage_1.jpg)
[성경 속 도시](32) 사마리아사마리아인은 왜 사마리아인이 되었나 사마리아는 예수님 시대 이스라엘 중부 지방인 팔레스티나를 가리키던 지역명이다. 북쪽으로는 갈릴래아, 남쪽으로는 유다와 경계를 이루고 있다. 그리고 서쪽에 지중해가 있고 동쪽으로 요르단 강이 흐른다. 이스라엘이 팔레스타인을 정복했을 당시 사마리아에서 전략적으로 중요한 지역은 가나안족이 차지하고 있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산지에 발판을 마련했으나 이웃 평원이나 골짜기에 있던 가나안의 핵심적 거점들은 다윗왕 시대에 와서야 차지할 수 있었다. 북이스라엘의 수도 사마리아 지역은 요셉의 가문, 곧 에프라임 지파와 므나쎄 분파에게 할당된 곳이었다. 지금의 나불루스 근처에 있던 고대 세켐 지방이 중심지였다. 이 지역은 당시에 도로들의 교차점이자 정치적 중심지이기도 했다. 북이스라엘의 오므리 왕이 세메르에게 은 두 달란트를 주고 매입해 그 산 위에 건축한 성을 산 주인이었던 세메르의 이름을 따서 사마리아라고 부르게 되었다. “그는 사마리아 산을 세메르에게서 은 두 탈렌트로 산 뒤, 그 산을 요새로 만들고 자기가 세운 성읍의 이름을, 산의 본래 소유자인 세메르의 이름을 따서 사마리아라고 하였다”(1열왕 16,24). 구약 시대에 열두 부족이 가나안 땅을 분할 소유할 때 에프라임족과 므나쎄족이 후에 사마리아 지방이라 불리게 될 부분을 소유하였다. 사울, 다윗, 솔로몬 등의 시대에 남북은 통일돼 있었다. 그런데 기원전 10세기에 솔로몬 왕이 죽은 뒤 사마리아는 북왕국, 즉 이스라엘 왕국과 남쪽의 유다 왕국과 갈라지게 됐다. 이스라엘 왕국의 첫 수도는 티르자에 있었고 이어 오므리왕 시대에는 당시 세켐에서 사마리아로 옮겨졌다. 북왕국은 대체로 남쪽의 유다 왕국보다 세력이 더 강했으며 경제적으로도 번영을 누렸다. 그러나 그 뒤에 여러 강대국의 입김에 사마리아는 많은 고통을 겪으며 살아야 했다. 잡혼 성행하자 유다인이 사마리아인 멸시본래 사마리아인은 이스라엘 민족의 한 분파였다. 그런데 기원전 722년께 북이스라엘이 아시리아에 점령당한다. 황제였던 사르곤 2세는 주민 3만여 명을 포로로 잡아갔고, 이스라엘 열두 지파 중 열 개 지파가 사라지게 됐다. 그리고 사마리아에는 각지에서 몰려온 이민족을 이주시켜 자리 잡고 살도록 하는 식민지 정책으로 잡혼을 실시했다. 사마리아 지역은 종족 간 피가 섞이게 됐고, 그래서 유다인은 사마리아 지역 사람들을 이방인이라 부르고 원수지간처럼 지냈다. 이후 유다인은 사마리아인을 이스라엘 사람으로 보지 않았고 경멸했다. 유다인은 예수님께서 사마리아인에게조차 말을 거는 것을 보고 충격을 받았을 정도였다(요한 4,8-9). 그러다 기원전 587년 남쪽 유다 왕국도 바빌론에게 멸망하게 된다. 나중에 바빌론에서 본토로 귀환한 유다인이 예루살렘 성전을 재건하던 무렵부터 유다인과 사마리아인과의 반목과 대립은 더 심해졌다. 사마리아 사람들이 참된 율법의 수호자로 자처하면서 즈루빠벨 성전 재건을 방해했기 때문이었다. 지금도 사마리아인은 오직 구약 성경의 오경만을 그들의 유일한 경전으로 여기고 세켐이나 그리심 산 중턱 등에 오늘날까지 일부 남아 있다. 현재 사마리아는 요르단의 북서부로 편입돼 있다. 허영엽 신부(서울대교구 홍보국장) 평화신문2014.12.16
![[안소근 수녀와 떠나는 구약 여행]](//cpbc.co.kr/CMS/newspaper/2014/12/rc/543089_1.0_titleImage_1.jpg)
[안소근 수녀와 떠나는 구약 여행]<2> 구약 시대의 역사이집트 탈출, 이스라엘 민족에 결정적 사건 외세 침입에 왕정 요구하지만 혼란 지속 기원후 70년, 예루살렘 함락되는 아픔 겪어이스라엘의 역사 오늘은 나무가 아닌 숲만을 보는 날입니다. 두 주에 나누면 앞부분을 잊어버리실까봐, 무리가 가더라도 한 회에 끝내겠습니다. 앞으로 천천히 살펴보게 될 구약 시대 전체의 역사를 한번 맛보기로 훑어 놓으려는 것입니다. 앞으로 천천히, 자세히 다시 다룰 것이므로 이번에는 흐름만 보시면 됩니다. 창세기의 아브라함, 이사악, 야곱 이야기는 역사적으로 확인할 내용들이 아닙니다. 그저 말할 수 있는 것은 이스라엘의 선조들이 기원전 2000년대에 떠돌이 유목 생활을 했다는 것입니다. 창세기에 그려진 성조 시대의 모습은 대략 기원전 1800년 정도의 생활상에 해당하는 듯합니다. 역사적으로 연대를 따질 수 있는 것은 이집트 탈출에서부터입니다. 물론 이것도 정확하게는 나오지 않지만, 기원전 1200년대에 모세의 인도로 이스라엘의 선조들이 이집트를 떠나 가나안 땅으로 들어갔을 것입니다. 모든 이스라엘인이 이집트에서부터 올라온 것은 아니었다고 생각되지만 이 사건은 하나의 민족으로서 이스라엘이 형성되는 데에 결정적인 역할을 하게 됩니다. 탈출기에서는 야훼와 이스라엘 사이의 특별한 관계가 맺어진 것도 이 때부터라고 전해 줍니다. 그러나 모세는 하느님께서 이스라엘에게 주시기로 약속한 땅에 들어가지 못하고 요르단 강 동쪽에서 세상을 떠납니다. 모세의 후계자 여호수아가 이스라엘 백성을 이끌고 요르단을 건너 하느님께서 약속하신 땅으로 들어가, 그 땅을 정복하고 열두 지파에게 분배합니다. 여호수아가 세상을 떠난 때부터 왕정이 설립되던 때까지의 판관 시대는(기원전 1200~1030년쯤), 왕정으로 넘어가기 이전의 과도기였습니다. 이때의 이스라엘은 열두 지파로 나뉘어 있어서, 아주 견고한 통일을 이루고 있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판관은 일시적인 지도자로서, 세습되는 것도 아니었습니다. 판관기는 이민족들의 침입을 받을 때마다 하느님께서 판관을 일으키시어 이스라엘을 구해 주셨다고 전하지만, 필리스티아와 같이 계속 이스라엘을 침범하는 세력들에 맞서기 위해서 백성은 다른 민족들과 같은 왕정을 요구합니다. 이스라엘에서 왕정은 찬반 논란이 그치지 않은 제도였습니다. 그러나 당시 상황에서 왕정을 세우지 않을 수는 없는 일. 처음에는 벤야민 지파의 사울이 임금으로 뽑힙니다. 하지만 그의 왕국은 오래 계속되지 못하고, 기원전 1010년쯤 유다 지파의 다윗이 왕위에 올라 온 이스라엘을 다스리는 통일 왕국을 이루고 수도도 예루살렘으로 정합니다. 이어서 970년쯤에는 그의 아들 솔로몬이 임금이 되어, 왕국이 크게 번성하게 됩니다. 하지만 외적으로 번성했던 그 왕국은 분열의 요인들을 내포하고 있었고, 그가 세상을 떠난 다음 933년에는 왕국이 둘로 분열됩니다. 솔로몬의 신하였던 예로보암이 반란을 일으켜 북왕국 이스라엘을 세우고, 솔로몬의 아들 르하브암은 남왕국 유다만을 다스리게 되는 것입니다. 이후로 남왕국 유다에서는 왕국이 멸망할 때까지 다윗 왕조가 이어졌지만, 반란으로 시작한 북왕국 이스라엘에서는 여러 차례 반란이 거듭되고 왕조가 바뀌었습니다. 이제부터가 이스라엘 역사를 공부하실 때 복잡한 부분입니다. 도표를 보시기 바랍니다. 왕정이 설립된 이후 이스라엘의 역사는 온통 외세에 시달려온 역사였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역사의 흐름을 알기 위해서는, 기원전 8세기 이래 메소포타미아와 팔레스티나 지역을 지배했던 큰 세력이 누구인지를 파악하시면 됩니다. 기원전 8세기에는 아시리아가 패권을 잡았습니다. 그리고 이 아시리아가 기원전 722년에 북왕국 이스라엘을 멸망시켰습니다. 아시리아의 뒤를 이어 큰 세력이 되었던 것은 바빌론이었습니다. 기원전 587년에는 바빌론이 남왕국 유다를 멸망시켰습니다. 다윗 왕조가 무너지고 예루살렘 성전도 불에 탔습니다. 이스라엘의 역사를 뒤흔드는 최대의 사건이었습니다. 많은 이들이 바빌론으로 유배를 갔습니다. 그 후 페르시아가 바빌론을 무너뜨리자, 페르시아 임금 키루스는 바빌론에 끌려와 있던 유다인들을 팔레스티나로 돌아가게 했습니다. 유배에서 돌아온 시기의 중요한 인물은 에즈라와 느헤미야였습니다. 그들의 활동에 힘입어 성전이 재건되었고, 이스라엘은 미약하나마 그 성전을 중심으로 하는 공동체를 형성하였습니다. 기원전 333년에는 마케도니아의 알렉산드로스 대제가 즉위하여 짧은 시간에 페르시아도 꺾고 광대한 제국을 이룩하였습니다. 그의 후계자들 사이에서 제국의 영토를 나누어 지배하는 과정에서 이스라엘은 기원전 160년대에 어려움을 겪게 됩니다. 헬레니즘 문화를 강요하던 이들은 유다교를 금지시켰고, 이에 저항하여 일어난 마카베오 형제들은 일시적으로나마 독립을 쟁취하고 하스몬 왕조를 세웁니다. 그러나 이 하스몬 왕조의 내분으로 기원전 63년에 로마군을 끌어들이게 되어 결국은 다시 외세의 지배를 받게 됩니다. 기원후 66년에는 독립을 위한 항쟁이 일어났지만 로마군에 진압되고, 기원후 70년에는 예루살렘이 함락되고 성전이 파괴됩니다. 이스라엘의 역사를 최소한으로 요약해 보았습니다. 성경의 하느님은 전쟁 한번 겪지 않은 평화와 번영의 역사를 통해서가 아니라 바로 이렇게 끊임없이 죽음을 체험한 역사 안에서 생명을 주시는 당신을 알게 하십니다. 이 역사의 모든 순간은 하느님을 알아가는 시간이었습니다. “주님, 당신 백성에 대한 호의로 저를 기억하소서”(시편 106,4). 백영민2014.12.03

안소근 수녀와 떠나는 구약 여행<2>구약 시대의 역사 이집트 탈출, 이스라엘 민족에 결정적 사건외세 침입에 왕정 요구하지만 혼란 지속기원후 70년, 예루살렘 함락되는 아픔 겪어오늘은 나무가 아닌 숲만을 보는 날입니다. 두 주에 나누면 앞부분을 잊어버리실까봐, 무리가 가더라도 한 회에 끝내겠습니다. 앞으로 천천히 살펴보게 될 구약 시대 전체의 역사를 한번 맛보기로 훑어 놓으려는 것입니다. 앞으로 천천히, 자세히 다시 다룰 것이므로 이번에는 흐름만 보시면 됩니다.창세기의 아브라함, 이사악, 야곱 이야기는 역사적으로 확인할 내용들이 아닙니다. 그저 말할 수 있는 것은 이스라엘의 선조들이 기원전 2000년대에 떠돌이 유목 생활을 했다는 것입니다. 창세기에 그려진 성조 시대의 모습은 대략 기원전 1800년 정도의 생활상에 해당하는 듯합니다.역사적으로 연대를 따질 수 있는 것은 이집트 탈출에서부터입니다. 물론 이것도 정확하게는 나오지 않지만, 기원전 1200년대에 모세의 인도로 이스라엘의 선조들이 이집트를 떠나 가나안 땅으로 들어갔을 것입니다. 모든 이스라엘인이 이집트에서부터 올라온 것은 아니었다고 생각되지만 이 사건은 하나의 민족으로서 이스라엘이 형성되는 데에 결정적인 역할을 하게 됩니다. 탈출기에서는 야훼와 이스라엘 사이의 특별한 관계가 맺어진 것도 이 때부터라고 전해 줍니다.그러나 모세는 하느님께서 이스라엘에게 주시기로 약속한 땅에 들어가지 못하고 요르단 강 동쪽에서 세상을 떠납니다. 모세의 후계자 여호수아가 이스라엘 백성을 이끌고 요르단을 건너 하느님께서 약속하신 땅으로 들어가, 그 땅을 정복하고 열두 지파에게 분배합니다. 여호수아가 세상을 떠난 때부터 왕정이 설립되던 때까지의 판관 시대는(기원전 1200~1030년쯤), 왕정으로 넘어가기 이전의 과도기였습니다. 이때의 이스라엘은 열두 지파로 나뉘어 있어서, 아주 견고한 통일을 이루고 있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판관은 일시적인 지도자로서, 세습되는 것도 아니었습니다. 판관기는 이민족들의 침입을 받을 때마다 하느님께서 판관을 일으키시어 이스라엘을 구해 주셨다고 전하지만, 필리스티아와 같이 계속 이스라엘을 침범하는 세력들에 맞서기 위해서 백성은 다른 민족들과 같은 왕정을 요구합니다.이스라엘에서 왕정은 찬반 논란이 그치지 않은 제도였습니다. 그러나 당시 상황에서 왕정을 세우지 않을 수는 없는 일. 처음에는 벤야민 지파의 사울이 임금으로 뽑힙니다. 하지만 그의 왕국은 오래 계속되지 못하고, 기원전 1010년쯤 유다 지파의 다윗이 왕위에 올라 온 이스라엘을 다스리는 통일 왕국을 이루고 수도도 예루살렘으로 정합니다. 이어서 970년쯤에는 그의 아들 솔로몬이 임금이 되어, 왕국이 크게 번성하게 됩니다. 하지만 외적으로 번성했던 그 왕국은 분열의 요인들을 내포하고 있었고, 그가 세상을 떠난 다음 933년에는 왕국이 둘로 분열됩니다. 솔로몬의 신하였던 예로보암이 반란을 일으켜 북왕국 이스라엘을 세우고, 솔로몬의 아들 르하브암은 남왕국 유다만을 다스리게 되는 것입니다. 이후로 남왕국 유다에서는 왕국이 멸망할 때까지 다윗 왕조가 이어졌지만, 반란으로 시작한 북왕국 이스라엘에서는 여러 차례 반란이 거듭되고 왕조가 바뀌었습니다.이제부터가 이스라엘 역사를 공부하실 때 복잡한 부분입니다. 도표를 보시기 바랍니다. 왕정이 설립된 이후 이스라엘의 역사는 온통 외세에 시달려온 역사였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역사의 흐름을 알기 위해서는, 기원전 8세기 이래 메소포타미아와 팔레스티나 지역을 지배했던 큰 세력이 누구인지를 파악하시면 됩니다. 기원전 8세기에는 아시리아가 패권을 잡았습니다. 그리고 이 아시리아가 기원전 722년에 북왕국 이스라엘을 멸망시켰습니다. 아시리아의 뒤를 이어 큰 세력이 되었던 것은 바빌론이었습니다. 기원전 587년에는 바빌론이 남왕국 유다를 멸망시켰습니다. 다윗 왕조가 무너지고 예루살렘 성전도 불에 탔습니다. 이스라엘의 역사를 뒤흔드는 최대의 사건이었습니다. 많은 이들이 바빌론으로 유배를 갔습니다. 그 후 페르시아가 바빌론을 무너뜨리자, 페르시아 임금 키루스는 바빌론에 끌려와 있던 유다인들을 팔레스티나로 돌아가게 했습니다. 유배에서 돌아온 시기의 중요한 인물은 에즈라와 느헤미야였습니다. 그들의 활동에 힘입어 성전이 재건되었고, 이스라엘은 미약하나마 그 성전을 중심으로 하는 공동체를 형성하였습니다.기원전 333년에는 마케도니아의 알렉산드로스 대제가 즉위하여 짧은 시간에 페르시아도 꺾고 광대한 제국을 이룩하였습니다. 그의 후계자들 사이에서 제국의 영토를 나누어 지배하는 과정에서 이스라엘은 기원전 160년대에 어려움을 겪게 됩니다. 헬레니즘 문화를 강요하던 이들은 유다교를 금지시켰고, 이에 저항하여 일어난 마카베오 형제들은 일시적으로나마 독립을 쟁취하고 하스몬 왕조를 세웁니다. 그러나 이 하스몬 왕조의 내분으로 기원전 63년에 로마군을 끌어들이게 되어 결국은 다시 외세의 지배를 받게 됩니다. 기원후 66년에는 독립을 위한 항쟁이 일어났지만 로마군에 진압되고, 기원후 70년에는 예루살렘이 함락되고 성전이 파괴됩니다.이스라엘의 역사를 최소한으로 요약해 보았습니다. 성경의 하느님은 전쟁 한번 겪지 않은 평화와 번영의 역사를 통해서가 아니라 바로 이렇게 끊임없이 죽음을 체험한 역사 안에서 생명을 주시는 당신을 알게 하십니다. 이 역사의 모든 순간은 하느님을 알아가는 시간이었습니다.“주님, 당신 백성에 대한 호의로 저를 기억하소서”(시편 106,4). 평화신문2014.12.03
![[안소근 수녀와 떠나는 구약 여행] (41) “그들을 올라가게 하여라”(2역대 36,23)](//cpbc.co.kr/CMS/newspaper/2015/10/rc/596463_1.0_titleImage_1.jpg)
[안소근 수녀와 떠나는 구약 여행] (41) “그들을 올라가게 하여라”(2역대 36,23)귀향했으나 예전의 유다가 아니었기에… “페르시아 임금 키루스는 이렇게 선포한다. 주 하늘의 하느님께서 세상의 모든 나라를 나에게 주셨다. 그리고 유다의 예루살렘에 당신을 위한 집을 지을 임무를 나에게 맡기셨다. 나는 너희 가운데 그분 백성에 속한 이들에게는 누구나 주 그들의 하느님께서 함께 계시기를 빈다. 그들을 올라가게 하여라”(2역대 36,23).한 시대를 시작하기 위하여 오늘은 또 역사 공부를 해야 하겠습니다. 위에 인용한 것은 역대기의 마지막 부분과 에즈라기의 첫 부분에 실려 있는 키루스 칙령의 내용입니다.에제키엘은 언젠가 예루살렘이 회복되리라고 예고했고, 제2이사야는 해방이 가까웠음을 선포했습니다. 이제 그 날이 왔습니다. 기원전 539년에 바빌론을 무너뜨린 페르시아 임금 키루스가, 바빌론에 유배가 있던 유다인들에게 귀향을 허락한 것입니다. 바빌론에 비해서 페르시아는 정복 민족들에게 관용적이었다고 했지요. 무력으로 그들을 내리누르는 것보다, 적당히 풀어주면서 자기편으로 만드는 것이 더 쉽고 비용도 적게 들었다고 합니다. 제국의 넓이를 생각하면 그럴 법도 했겠습니다.엄밀하게 말해서, 키루스가 역대기나 에즈라기에 나온 그대로의 칙령을 반포했을 것으로는 보이지 않습니다. 사실로 말하면 키루스에게 유다는 너무 작은 땅입니다. 그러나 그는 다른 민족들의 종교 자유를 제한하는 바빌론의 금령들을 폐지했고 바빌론이 여러 나라의 신전에서 빼앗아 온 신상과 기물들을 되돌려 주었습니다. 여러 나라에서, 신전을 다시 지음으로써 재건을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배경에서 유다인들도 고향으로 돌아와 예루살렘 성전과 도성을 재건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에즈라기 6장 3-5절에서는 페르시아 왕실에서 성전 건축 비용을 대어 주도록 했다고까지 말합니다.귀향이 반갑지만은 않아하지만, 돌아가라고 한다고 모두 신이 나서 즉시 바빌론을 떠나온 것은 결코 아닙니다. 그렇게 상상했다면 바빌론 유배에 대해 잘못 생각하고 있는 것입니다. 유배 간 이들은 바빌론의 한 지역에 모여 살면서 정착을 했고, 유다의 상황이 오히려 어려웠습니다. 서울 시내에서도, 수십 년간 장사를 한 가게가 재개발로 철거될 상황이 되면 사람들은 떠나가기 어려워합니다. 머나먼 바빌론에서 50년간 땅을 가꾸고 일을 해왔다면 어떻겠습니까?페르시아 왕실은 세스바차르에게 예루살렘 성전 기물들을 되돌려줄 임무를 맡겼습니다(에즈 5,15 참조). 세스바차르가 어떤 사람인지는 잘 알 수 없습니다. 그와 함께 귀향한 이들의 수도 정확히 알 수 없지만 분명 그리 많은 수는 아니었고, 이들은 예루살렘의 재건을 크게 진척시키지도 못했습니다. 도성이 워낙 많이 파괴되어 있었을 뿐만 아니라, 유배에서 돌아온 이들과 유배를 가지 않고 유다 땅에 남아있던 이들 사이에 적지 않은 충돌도 있었습니다. 문제는 땅입니다. 지배 계층과 기술자들이 유배를 간 다음, 바빌론은 그들이 소유하고 있던 땅을 유배를 가지 않은 가난한 이들에게 나누어 주었습니다. 가진 것이 아무것도 없던 이들이 바빌론 정복자들로부터 땅을 받으면, 어떻게 될까요? 당연히 그들은 바빌론에 절대 충성하는 백성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50년이 지나 본래 땅 주인이 돌아옵니다. 더 늦게 돌아온 이들도 적지 않습니다. 그러면 그 땅은 누구의 것이 되어야 할까요? 좀더 시간이 지나고 나면, 유배 전의 땅 주인은 더 이상 그 땅에 대한 권리를 주장할 수 없게 됩니다. 이 문제는, 유배가 끝난 다음 정복 세력이 아니라 유다인들 자체 안에서 있었던 분열과 갈등의 상황을 보여 주는 대표적인 예입니다.성전 재건축하고 도성 성벽도 재건이후의 역사는 더 간단히 요약하고 다음 주부터 더 자세히 다루겠습니다. 기원전 520년에는 다윗 왕조의 후손인 즈루빠벨과 사제 예수아의 지도로 또 한 집단이 귀환합니다. 기원전 520~518년에는 예언자 하까이와 즈카르야가 성전 재건을 독려하였고, 기원전 515년에는 소위 제2성전이라고 하는 재건된 성전의 봉헌이 있었습니다. 이 성전은 솔로몬 성전처럼 화려하지는 못했지만, 귀향 후 공동체의 중심이 됩니다.기원전 5~4세기의 상황에 대해서는, 에즈라와 느헤미야의 활동 외에는 별로 알려져 있지 않습니다. 페르시아의 고위 관리가 되어 있었던 느헤미야는 기원전 445년에 예루살렘에 돌아와 도시의 성벽을 재건합니다. 여러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느헤미야는 이 일을 완수했고, 그 후 약 십여 년 동안 예루살렘에 머뭅니다. 그 후 얼마 동안 페르시아에 갔다가 다시 예루살렘에 돌아온 것으로 보입니다.한편, 사제이며 율법학자였던 에즈라는 주로 종교적인 영역에서 활동하였습니다. 그가 예루살렘에 돌아온 때가 언제인지는 분명하게 말할 수 없습니다. 에즈라기 7장 7절에서는 “아르타크세르크세스 임금 제칠년”이라고 말하는데, 그가 아르타크세르크세스 1세라면 그 해는 기원전 458년일 것이고(느헤미야가 활동하기 전) 그렇지 않고 일부 학자들이 주장하는 대로 아르타크세르크세스 2세라면 기원전 398년이 됩니다(느헤미야가 활동한 다음). 성경에서는 에즈라가 느헤미야보다 먼저 왔다고 말하는데, 묘사된 상황을 보면 아무래도 느헤미야가 먼저 온 것 같은 느낌을 받기 때문입니다. 어떤 경우이든, 에즈라가 한 일은 종교적인 개혁으로서 “하느님의 법”을 선포하는 것이었습니다. 에즈라와 느헤미야의 활동이 있었던 다음, 알렉산드로스 대왕이 등장하기까지 유다에는 큰 변동이 없었습니다.<성 도미니코 선교수녀회, 대전가톨릭대 교수> 평화신문2015.10.06
![[성경 속 도시] (47) 야포](//cpbc.co.kr/CMS/newspaper/2015/06/rc/574218_1.0_titleImage_1.jpg)
[성경 속 도시] (47) 야포이방인 선교의 문 활짝 열어 현대의 야포 항구 모습. 출처=「성경 역사 지도」, 분도 출판사 ‘아름답다’라는 뜻을 가지고 있는 야포는 이스라엘에서 가장 오래된 항구로 지금도 아름다운 절경을 자랑한다. 현재 야포는 텔아비브의 지중해 해안 남쪽 지역을 말하는데 전략적으로도 중요한 곳이었다. 이스라엘에서는 항만 조건이 좋지 않은 지중해변에서 오랜 시간 동안 항구 도시로서 기능을 담당했다. 또 야포는 이집트 고대 문서에도 기록이 남아 있을 정도로 역사가 깊은 도시이다. 야포는 새롭게 하이파 항구가 발전하면서 서서히 그 기능을 잃었다. 주민들도 비좁은 야포 시내에서 벗어나 북쪽에 새로 형성된 ‘봄의 언덕’이라는 뜻을 가진 텔아비브에 자리를 잡았다. 원래 단 지파의 영토야포는 성경에 여러 번 언급돼 나온다. 야포는 본래 구약 시대에 단 지파 영토로 분배받은 땅이었다. “메 야르콘, 라콘, 그리고 야포 맞은쪽 지역이 들어 있다”(여호 19,46). 그러나 이스라엘 민족은 가나안 땅에 들어왔을 때 처음에는 야포를 정복하지 못했던 것으로 보인다. 지금은 항구로서의 기능을 많이 상실했지만 솔로몬이 예루살렘 성전과 궁궐을 지을 때 티로 임금 히람에게 레바논산에서 나는 향백나무와 방백나무, 자단나무 등을 베어 보낼 것을 청했다. 그래서 레바논에서 벤 나무들을 뗏목으로 엮어 바다로 야포 항구까지 보내면 예루살렘으로 가져갔다(2역대 2,1-16). 야포는 요나 예언자가 니느웨에 가라는 하느님 명령에 불복하고 타르시스로 도망하기 위해 배를 탔던 곳이기도 하다. “그러나 요나는 주님을 피하여 타르시스로 달아나려고 길을 나서 야포로 내려갔다. 마침 타르시스로 가는 배를 만나 뱃삯을 치르고 배에 올랐다. 주님을 피하여 사람들과 함께 타르시스로 갈 셈이었다”(요나 1,3).기원전 147년에 대사제 요나탄이 코일레 시리아 총독인 아폴로니우스와 전쟁을 하는 대목에서도 야포가 등장한다. “요나탄이 야포 앞에 진을 쳤지만, 아폴로니우스의 주둔군이 야포에 있었으므로 그 성읍 주민들은 그에게 성문을 열어 주지 않았다. 요나탄의 군대가 그곳을 공격하자, 성읍 주민들이 두려워서 성문을 열어 주었다. 그리하여 요나탄이 야포를 점령하였다”(1마카 10,75-76). 신약에서는 베드로 사도가 죽은 여제자 타비타를 살린 장소로 유명하다. “야포에 타비타라는 여제자가 있었다. 이 이름은 그리스 말로 번역하면 도르카스라고 한다. 그는 선행과 자선을 많이 한 사람이었는데…”(사도 9,36). 타비타는 그리스도교 신자로서 착한 일과 자선 사업을 많이 했던 믿음의 여인이었다. 그래서 그녀의 집에는 가난하고 불쌍한 사람들을 열성으로 도와줬다. 타비타가 죽자 베드로 사도가 달려가 그녀를 살렸다. 이 일이 알려지자 주위 사람들에게 깊은 감명을 주어 그리스도께 대한 신앙을 갖는 이들도 많이 늘어났다(사도 9,37-42). 베드로 사도, 환시를 보다 베드로 사도는 한동안 야포에서 무두장이 시몬의 집에 머무르다 어느날 기도 중에 환시를 보았다. 이 환시는 이방인을 향한 선교의 문이 크게 열린 계기가 됐다. “내가 야포 시에서 기도하다가 무아경 속에서 환시를 보았습니다. 하늘에서 큰 아마포 같은 그릇이 내려와 네 모퉁이로 내려앉는데 내가 있는 곳까지 오는 것이었습니다”(사도 11,5). 사도 베드로는 예루살렘 교회에 자신을 통해 하느님께서 이방인들에게도 세례를 주고 성령을 받게 했다는 자신의 체험을 보고 했다(사도 11,1-18). 그 후 예수님 복음이 예루살렘에서 이방인들을 향해 사방으로 퍼져나가 야포는 그리스도교의 중요한 중심지가 됐다. 허영엽 신부(서울대교구 홍보국장) 평화신문2015.06.02
![[복음이야기] (39) 성전 (6·끝)](//cpbc.co.kr/CMS/newspaper/2014/12/rc/542730_1.0_titleImage_1.jpg)
[복음이야기] (39) 성전 (6·끝)번제물 바치고 기도하러 당신 집으로 성전은 기도 공간이었을 뿐 아니라 이스라엘의 정치, 행정, 법률, 종교 문제를 의결하는 본거지였다. 사진은 이스라엘국립박물관에 있는 헤로데 성전 모형도. 리길재 기자 예루살렘 성전 안에서 수천 명의 사제와 수만의 유다인은 무엇을 했을까? 그 답은 시편에서 찾을 수 있다.“내가 번제를 드리러 당신 집에 왔사옵니다. 서원한 것 바치러 왔사옵니다.… 숫양을 살라 향내 피우며 푸짐한 번제물을 드리고 염소와 함께 소를 드리옵니다”(공동 번역 시편 66,13.15). “거룩한 당신의 궁전 향하여 엎드려 인자함과 성실함을 우러르며 당신의 이름 받들어 감사 기도드립니다. 언약하신 그 말씀, 당신 명성보다 크게 펴졌사옵니다.…야훼여, 모든 일 나를 위해 하심이오니, 이미 시작하신 일에서 손을 떼지 마소서. 당신의 사랑 영원하시옵니다”(공동 번역 시편 138,2.8).시편 노래처럼 유다인들은 ‘희생’과 ‘기도’를 위해 성전을 찾았다. 성전 예식 중 제일은 희생의 피를 흘리는 ‘번제’였다. 이 번제 예식은 하느님 축복에 대한 ‘감사’와 자신의 잘못에 대한 ‘속죄’의 뜻이 담겨 있었다. 아울러 이 번제로써 하느님과 결합하려는 ‘희망’을 드러냈다. 하느님과 아브라함의 계약도 이 희생의 표지인 번제로 체결됐다.그러나 이스라엘의 예언자들은 형식적인 희생 제사만으로는 하느님을 기쁘게 할 수 없다(이사 58장 참조)고 강조했다. 그들은 하느님께서 좋아하시는 사람은 ‘겸손한 자’ ‘하느님의 말씀을 두려워하는 자’라고 가르쳤다. 야곱이 하느님의 축복을 받은 것은 그가 진심으로 통회하고 하느님께 간절히 기도를 드렸기 때문이라고 일깨웠다. 실제로 유다인들은 희생 제사를 바치기 위해서뿐 아니라 기도하기 위해 성전을 찾았다. 오늘날 예루살렘 통곡의 벽 앞에서 기도하는 수많은 순례자처럼 예수님 시대에도 환전상과 희생 제물을 파는 장사꾼들의 틈바구니에서 두 팔을 벌리고 입술을 떨며 기도에 몰두하는 유다인이 많았다. 아침마다 사제들은 하루도 거르지 않고 어린양의 희생을 바친 뒤 이스라엘인의 뜰 안 계단에 올라 “쉐마 이스라엘”(이스라엘아, 들어라! 주 우리 하느님은 한 분이신 주님이시다. 신명 6,4)을 외친 후 율법의 한 구절을 선포했다. 오후 3시에도 사제들은 성전에서 간단한 의식을 거행한 후 “주님께서 그대에게 당신 얼굴을 비추시고 그대에게 은혜를 베푸시리라. 주님께서 그대에게 당신 얼굴을 들어 보이시고 그대에게 평화를 베푸시리라”(민수 6, 25-26) 하며 이스라엘을 축복했다.토라(모세오경)에 따라 이스라엘의 모든 남자는 해마다 과월절(파스카)과 수확절(오순절), 추수절(초막절)에 예루살렘 성전을 순례했다(탈출 23,14-17 참조). 또 예루살렘을 향해 무릎을 꿇고 하루 3번씩 기도하는(다니 6,11) 풍습이 생겨났다.성전은 기도 공간이었을 뿐 아니라 이스라엘의 정치, 행정, 법률, 종교 문제를 의결하는 본거지였다. 바로 그 장소가 성전 안에 있던 최고 의회 ‘산헤드린’이다. 산헤드린의 수석 사제들과 원로들, 율법 학자들은 “이 성전을 허물어라. 그러면 내가 사흘 안에 다시 세우겠다”(요한 2,19)고 하신 예수님의 말씀을 ‘하느님 모독’ 죄로 단죄하고 사형에 처하기로 했다(마르 14,53-64).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산헤드린의 판결처럼 하느님을 모독한 것이 아니라 ‘나의 집’ ‘모든 민족들을 위한 기도의 집’ ‘아버지의 집’이라 말씀하시며 ‘강도의 집’으로 만든 환전상과 장사꾼을 몰아내고 성전을 정화하셨다(마르 11,15-19).유다인들은 산헤드린 의원들처럼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님을 보고 “성전을 허물고 사흘 안에 다시 짓겠다는 자야, 너 자신이나 구해 보아라. 네가 하느님의 아들이라면 십자가에서 내려와 보아라”며 모독했다(마태 27,39-40). 예수님께서 숨을 거두실 때 성전 지성소의 휘장이 위에서 아래까지 두 갈래로 찢어졌다 (마태 27, 51). 성서학자들은 예수님의 십자가 희생으로 인해 예루살렘 성전이 하느님 현존의 표지로서 더 이상 제 역할을 하지 못한다는 사실을 드러낸 것이라고 해석한다. 헤로데 성전은 서기 70년 로마군에 의해 예수님의 예언대로 “돌 하나도 다른 돌 위에 남아 있지 않고”(루카 21,6) 완전히 파괴됐다. 이스라엘 전승에 의하면 이날은 유다력 ‘아브’(8월) 달의 9일째 되는 날로 바로 기원전 586년에 솔로몬의 성전이 바빌론군에 의해 불타 없어진 바로 그날이었다. 유다인들은 솔로몬 성전과 헤로데 성전이 똑같이 파괴된 이 운명의 날을 기억하기 위해 오늘도 통곡의 벽에서 예레미야의 애가를 읽으며 성전 파괴를 슬퍼하며 메시아 도래를 기도하고 있다. 리길재 기자 teotokos@pbc.co.kr 평화신문2014.12.02
![[복음 이야기] (37) 성전 (4)](//cpbc.co.kr/CMS/newspaper/2014/11/rc/540247_1.0_titleImage_1.jpg)
[복음 이야기] (37) 성전 (4)예수가 ‘강도의 소굴’이라 탄식한 성전 헤로데 성전은 유다인을 회유할 정치적 목적으로 지어졌다. 사진은 유일하게 남아있는 헤로데 성전의 서쪽 벽으로, ‘통곡의 벽’으로 불리는 이곳은 오늘날 유다인 최고의 기도 장소이다. 예수님께서 기도하신 성전은 이스라엘 백성이 세 번째로 지은 ‘헤로데 성전’이다. 에돔 땅 이두메아 출신의 헤로데는 로마 제국의 지원으로 이스라엘의 왕이 된 후 유다인들을 회유하기 위해 순전히 정치적인 목적으로 기원전 19년 낡은 즈루빠벨 성전을 허물고 새 성전을 짓기 시작했다. 헤로데는 1만 8000여 명의 노동자를 동원해 성전 터를 솔로몬 옛 성전 터의 2배로 넓히고 비용을 아끼지 않고 무한정 재료를 투입, “이 집의 새 영광이 이전의 영광보다 더 크리라”(하까 2,9)는 하까이 예언자의 말을 실현하려 했다.헤로데는 자신이 짓는 성전이 성스러운 자리가 되도록 제사장 1000명을 훈련시켜 석공으로 참여시켰다. 또 성전 공사로 인해 하느님께 봉헌하는 제사가 하루라도 중단되는 일이 없도록 배려했다. 헤로데의 이러한 노력으로 성전의 주요 건축물은 10년이 채 안 돼 기원전 9년경에 대부분 지어졌으나 서기 64년에 가서야 공사가 마감됐다. 따라서 예수님은 공생활 중에 아직 완공되지 않은 헤로데 성전을 보신 것이다.성전의 설계와 구조는 솔로몬 성전을 본뜬 것이었으나 헤로데는 에제키엘 예언자가 환시 중에 본 미래의 성전, 영광 속에 부흥하는 이스라엘의 성전(에제 40-43장)을 그대로 지었다. 한마디로 헤로데 성전은 웅장하고 사치스럽다 할 정도로 화려했다. 어느 정도 화려했나 하면 정교하게 조각된 흰 대리석으로 지붕 처마를 장식하고 지붕에는 황금 쇠판을 입히고 번쩍이는 금침을 박아 새들이 앉지 못하도록 했다. 이 모습을 유다 역사학자 플라비우스 요세푸스는 “아침 해가 비치면 성전 지붕은 흰 눈이 빛나듯 찬란했다”고 기록했다. 헤로데 성전은 동서 300m, 남북 450m로 상당히 넓었다. 바위를 부숴 평탄 작업을 한 후 큰 돌로 성벽을 쌓아 사방으로 둘렀다. 성전으로 통하는 문은 도시 서편에 4개, 남과 북에 1개, 동쪽에 2개를 두었다. 유다인들은 예루살렘 동문 중 지금도 남아있는 ‘황금 문’을 통해 주로 성전에 출입했다. 예수님께서도 수난 주간에 올리브 산을 가셨을 때 이 황금 문을 통과했을 것이라고 학자들은 추정하고 있다. 황금 문을 통해 성전에 들어서면 길이 225m의 장방형 광장이 나온다. 바로 ‘이방인의 뜰’이다. 불신앙인과 이단자, 추방된 자, 상중에 있는 자, 율법에 따라 부정한 상태에 있는 자들이 머물 수 있는 장소다. 요세푸스는 이방인의 뜰을 ‘외성전’이라 불렀다. 이방인의 뜰 둘레에는 기둥들이 줄지어 서 있었고 비와 햇볕을 피할 수 있었다. 기둥은 보통 20암마(약 9~11m)였고, 지붕은 삼목으로 덮고 땅에는 아름다운 포석을 깔아 놓았다. 이곳은 모든 이에게 개방된 장소였지만 막대기를 휴대할 수 없었고 더러운 신발을 신은 채 들어갈 수 없었다. 또 부정한 이방인의 화폐를 쓸 수 없었고 침을 땅에 뱉는 것도 금지됐다. ‘성전 앞뜰’인 이곳은 율법학자들이 토론을 벌이는 장소였고, 랍비들이 사람들을 가르치는 장소였다. 또 환전상들이 순례자들에게 율법이 규정한 화폐를 바꾸어 주고, 번제물과 희생 제물을 바치러 온 사람들에게 비둘기와 참새를 파는 상인들의 호객 소리와 희생 제물로 바쳐질 짐승들의 울음소리로 늘 소란스러웠다.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집 앞 거룩한 문턱에서 벌어지는 아비규환의 이 광경을 보시고 “나의 집은 기도의 집이 될 것이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그런데 너희는 이곳을 ‘강도의 소굴’로 만들어 버렸다”고 화를 내시며 끈으로 채찍을 만들어 장삿꾼과 짐승들을 몰아내셨다(루카 19,45-48; 마태 21,12-17; 마르 11,15-19; 요한 2,13-22). 이후 예수님께서는 날마다 이곳 이방인의 뜰에서 사람들을 가르치시면서 “이 성전을 허물어라. 그러면 내가 사흘 안에 다시 세우겠다”(요한 2, 19) 하시면서 당신 수난을 예고하셨다. 헤로데 성전의 성소는 이방인의 뜰보다 높은 곳에 동에서 서로 향해 서 있었다. 그래서 이방인의 뜰에서 성소의 외벽에 도달하려면 15계단을 오르지 않으면 안 되었다. 이 계단을 오른 뒤 성전에 들어가는 문 앞 기둥에는 헬라어와 라틴말로 다음과 같은 내용의 비문이 새겨져 있었다. “이방인이 이보다 더 앞에 나가는 것을 엄히 금한다. 체포되는 자는 스스로 책임을 져야 하며 그 결과는 죽음이다.” 리길재 기자 teotokos@pbc.co.kr 평화신문2014.11.18
![[성경 속 도시] (37) 에벤 에제르](//cpbc.co.kr/CMS/newspaper/2015/03/rc/557991_1.0_titleImage_1.jpg)
[성경 속 도시] (37) 에벤 에제르주님께 감사하며 기념비를 세우다 에벤 에제르는 이스라엘의 아펙 근처의 한 마을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아펙에 진을 치고 있던 필리스티아인을 맞아 이곳에서 전투를 벌였으나 패배했다. 당시 이스라엘의 가장 위협적인 세력은 필리스티아인들이었다. 필리스티아인들은 주로 지중해 해안 평야가 정착지였고 이스라엘 백성은 주로 중앙 산지에 정착하였다. 해안 평야에 정착한 필리스티아인들과 산지에 정착한 이스라엘 백성은 자주 충돌했다. 이 두 민족끼리 치른 중요한 전쟁이 사론 평야와 에브라임 산지의 경계 지역인 아펙과 에벤 에제르에서 일어났다. 이 전쟁들은 이스라엘의 국가 체제를 크게 변화시켰다. “그리하여 사무엘의 말은 그대로 온 이스라엘에 전해졌다. 이스라엘은 필리스티아인들과 싸우러 나가 에벤 에제르에 진을 치고, 필리스티아인들은 아펙에 진을 쳤다”(1사무 4,1). 전쟁에서 패한 이스라엘 지도자들은 실로로 사람을 보내어 그곳에서 ‘계약 궤’를 전쟁터로 가져오게 했다. 이 계약 궤란 양편에 황금의 두 천사가 날개를 편 상(像)이 놓여 있는 네모난 상자를 말한다. 구약 시대 모세가 받은 십계 판을 이 상자에 담아 성막에 보관했다. 왕조 시대 이전에는 전쟁의 수호신 등으로 이해하고 있었다. 이집트를 탈출한 이스라엘은 40년간 광야 생활을 하게 된다. 광야는 위험한 곳으로 식량과 물 부족 등의 고통을 겪어야 했다. 또 이민족의 침입과 질병 역시 광야에서 이스라엘이 부딪쳐야 할 두려움이었다. 이렇게 해서 그들은 자신들의 역사 속에서 주님의 도움 없이는 생존 자체가 불가능함을 깨닫게 된다. 이런 역사적 상황에서 계약 궤는 이스라엘의 정신적 구심점이 되었다. “그리하여 백성은 실로에 사람들을 보내어, 거기에서 커룹들 위에 좌정하신 만군의 주님의 계약 궤를 모셔 왔다. 엘리의 두 아들 호프니와 피느하스도 하느님의 계약 궤와 함께 왔다”(1사무 4,4). 이스라엘은 계약 궤가 승리를 가져다줄 것으로 생각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두 번째 전쟁에서도 대패했다. 설상가상으로 계약 궤마저 탈취당하고 말았다. “필리스티아인들이 이렇게 싸우자, 이스라엘은 패배하여 저마다 자기 천막으로 도망쳤다. 이리하여 대살육이 벌어졌는데, 이스라엘군은 보병이 삼만이나 쓰러졌으며, 하느님의 궤도 빼앗기고 엘리의 두 아들 호프니와 피느하스도 죽었다”(1사무 4,10-11).그 후에 필리스티아인들이 하느님의 궤 때문에 벌을 받게 되고(1사무 5, 1-12 참조) 우여곡절 끝에 이스라엘은 다시 계약 궤를 되찾아 온다. 본래 주님의 계약 궤 상자는 시나이 산에서 제작된 후, 길갈에 안치됐고 이는 다시 베델, 실로를 거쳐, 잠시 필리스티아인들에게 빼앗겼다(1사무 4,11). 그후 다윗 시대에는 예루살렘에, 그리고 솔로몬은 성전 지성소(1열왕 6,19)에 이를 안치했다. 이스라엘이 계약 궤를 되찾은 후 예언자 사무엘은 기념비를 세우고 ‘에벤 에제르’라고 불렀다. “사무엘은 돌을 하나 가져다가 미츠파와 센 사이에 세우고, “주님께서 여기에 이르기까지 우리를 도우셨다”하며, 그 돌의 이름을 에벤 에제르라 하였다”(1사무 7,12). 이처럼 하느님의 구원 역사가 있을 때 이것을 기념하고 후대에 기억하기 위해 돌로 기념비를 세우는 일은 구약에 자주 나타난다. 에벤 에제르는 이스라엘이 필리스티아인을 이긴 후 도움을 주신 하느님께 감사하며 세운 기념비의 이름이며, 이후에 그곳 지명이 된 경우다. 허영엽 신부(서울대교구 홍보국장) 평화신문2015.03.03
![[생활속의 복음] 지혜로운 사람](//cpbc.co.kr/CMS/newspaper/2014/07/rc/520795_1.0_titleImage_1.jpg)
[생활속의 복음] 지혜로운 사람연중 제17주일 (마태 13,44-52) 조재형 신부(서울데교구 성소국장) 많은 사람이 휴가를 떠나는 계절입니다. 지친 몸과 마음을 위해 잠시 휴가를 가는 것도 필요합니다. 시원한 강물이 흐르는 계곡, 가슴이 뻥 뚫릴 것 같은 바다, 모든 것을 품에 안고 있는 산을 향해 휴가를 가는 것도 좋습니다. 어떤 분들은 피정을 떠나기도 하고, 어떤 분들은 농촌 봉사활동을 가기도 하고, 어떤 분들은 밀린 작업을 하기도 합니다. 어떤 분들은 책을 읽기도 합니다. 선택은 우리들의 몫입니다. 고인이 되신 최인호씨는 ‘낯익은 타인들의 도시’라는 소설을 발표했습니다. 가톨릭 신자인 최인호씨는 서울교구 주보에 ‘말씀의 이삭’을 3년간 연재하기도 했습니다. 소설가로서, 신앙인으로서, 길을 찾는 구도자로서 그분의 글은 많은 사람에게 감동을 주었습니다. 우리 모두는 언젠가 이 세상을 떠나야 합니다. 무엇 때문에 죽었다는 말을 듣기보다는 무엇을 하다가 죽었다는 말을 듣는 것이 더욱 의미 있고 가치 있는 일이 아닐까 생각합니다.어떤 분들은 낯익은 이 세상에서 소중한 것들을 간직하면서 세상을 떠나기도 하고, 어떤 분들은 낯익은 이 세상에서 소중한 것들을 버리고 세상을 떠나기도 합니다. 무소유를 이야기했던 법정 스님은 낯익은 이 세상을 떠나면서 버리고 떠나는 것이 얼마나 행복한지를 보여주었습니다. 모든 이를 위해 모든 것이 되고자 하셨던 김수환 추기경님은 마지막 길에도 망막을 나누어 주셨습니다. 나눔이 소유보다 더 행복하다는 것을 보여주었습니다. 이분들은 이 세상이라는 밭에서 소중하고, 가치 있는 보물을 발견하였고, 그 보물을 얻기 위해서 다른 모든 것들을 기꺼이 포기하였습니다. 오늘 제1독서에서 우리는 솔로몬의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솔로몬의 선택을 칭찬하시면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네가 그것을 청하였으니, 곧 자신을 위해 장수를 청하지도 않고, 자신을 위해 부를 청하지도 않고, 네 원수들의 목숨을 청하지도 않고, 그 대신 이처럼 옳은 것을 가려내는 분별력을 청하였으니, 자, 내가 네 말대로 해 주겠다. 이제 너에게 지혜롭고 분별하는 마음을 준다.” 솔로몬은 낯익은 이 세상에서 지혜라는 보물을 발견하였고, 하느님께 그 지혜를 청하였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하늘나라는 밭에 숨겨진 보물과 같다.” 우리가 사는 이 세상에는 많은 보물이 묻혀 있습니다. ‘진실, 사랑, 나눔, 무소유, 희생, 봉사, 겸손, 양보’라는 보물들입니다. 이 보물은 세상의 눈으로 보면 보잘것없어 보이기도 하고, 짐처럼 느껴지기도 합니다. 예수님께서 분명히 말씀하십니다. 이 보물을 발견한 사람은 가진 것을 다 팔아 그 보물을 삽니다. 그 보물을 간직한 사람은 이미 이 세상에서 하느님 나라를 사는 것입니다. 오늘의 제2독서에서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말을 합니다. “하느님께서는 미리 뽑으신 이들을 당신의 아드님과 같은 모상이 되도록 미리 정하셨습니다. 그리하여 그 아드님께서 많은 형제 가운데 맏이가 되게 하셨습니다. 그렇게 미리 정하신 이들을 또한 부르셨고, 부르신 이들을 또한 의롭게 하셨으며, 의롭게 하신 이들을 또한 영광스럽게 해 주셨습니다.”며칠 전 책을 읽다가 함께 나누고 싶은 생각이 들어서 적어놓은 글이 있습니다.“인내로 키가 크고 겸손으로 고개 숙이며 열정으로 열매 맺는 해바라기의 삶을 배운다면 다가오는 가을이 결코 외롭지 않으리.” 여름이 긴 것 같지만, 가을이 멀지 않았음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우리의 인생이 끝없이 긴 것 같지만, 어느새 귀밑머리는 하얗게 변하고 해가 서산에 걸린다는 것을 또한 알고 있습니다. 더 늦기 전에 가장 소중한 것을 찾을 수 있는 지혜를 하느님께 청하십시오. 그토록 소중한 것을 찾았으면 잘 간직하고 지켜내야겠습니다. 우리는 병 때문에, 돈 때문에, 욕심 때문에, 나이가 많기 때문에 이 세상을 떠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진정 지혜로운 사람은 사랑을 하다가, 가진 것을 나누다가, 가난한 이들과 함께하다가 이 세상을 떠날 것입니다. 지혜로운 사람은 세상이라는 바다에서 떠밀려 가지 않습니다. 지혜로운 사람은 세상이라는 바다를 거슬러 올라갑니다. cpbc2014.07.23
![[복음 이야기] (47) 가상칠언 (상)](//cpbc.co.kr/CMS/newspaper/2015/04/rc/563261_1.0_titleImage_1.jpg)
[복음 이야기] (47) 가상칠언 (상)십자가 위 마지막 메시지는 자비와 희망 골고타 언덕의 ‘주님 무덤 성당’. 리길재 기자 네 복음서는 모두 예수님의 십자가형 죽음을 상세하게 보도하고 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희생으로 맺은 하느님과의 새로운 계약은 ‘인간의 구원’이다. 구원은 인간의 영과 마음, 육신 모두를 궁극의 원래 자리. 즉 원죄 이전의 하느님과 하나 된 관계로 되돌아가는 것이다. 이 구원은 예수님의 피로 맺는 새 계약인 ‘성체성사’를 통해 오늘 우리 삶의 자리에서 실제로 이루어지고 있다. 네 복음서가 전하는 주님의 수난 이야기를 살펴보면 예수님께서 십자가 위에서 최후를 맞으시기 전 마지막으로 일곱 가지 말씀을 하셨다. 이 ‘가상칠언’(架上七言)은 속죄와 구원으로서의 예수님의 죽음을 웅변한다. “아버지, 저들을 용서해 주십시오. 저들은 자기들이 무슨 일을 하는지 모릅니다”(루카 23,34).예수님께서 십자가 위에서 처음 하신 말씀이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십자가형으로 이끈 이들의 용서를 하느님께 청하신다. 그리스도의 자비가 드러나는 말씀이다. 처형장에 있던 로마 백인대장이 예수님께서 숨을 거두시는 것을 보고 “이 사람은 하느님의 아드님이셨다”(마르 15,39)고 고백하는 것으로 보아 로마인이던 유다인이던 예수님의 참모습을 알지 못했던 것 같다. 따라서 그들의 죄에 대한 용서를 예수님께서 청하고 계신 것이다. 예수님을 알지 못한 무지에 대한 고백은 예루살렘 성전 솔로몬 주랑에서 한 베드로 사도의 오순절 설교에서 잘 드러난다. “여러분은 거룩하고 의로우신 분을 배척하고 살인자를 풀어달라고 청한 것입니다. 여러분은 생명의 영도자를 죽였습니다.…나는 여러분도 여러분의 지도자들과 마찬가지로 무지한 탓으로 그렇게 하였음을 압니다”(사도 3,14-17). 바오로 사도도 자신의 무지를 고백하면서 하느님의 무한한 자비를 선포한다. “나는 전에 그분을 모독하고 박해하고 학대하던 자였습니다. 그러나 내가 믿음이 없어서 모르고 한 일이기 때문에, 하느님께서는 나에게 자비를 베푸셨습니다”(1티모 1,13).그리스도의 용서는 교회의 삶으로 곧장 받아들여졌다. 스테파노는 자기를 돌로 치는 사람들을 위해 “주님, 이 죄를 저 사람들에게 돌리지 마십시오”(사도 7,60)라고 기도했다. 베네딕토 16세 교황은 “주님께서 용서해 달라고 청했던 이유로 무지를 내세우신 것은, 그리고 무지가 우리를 회개로 인도하는 문이라고 보시는 것은, 모든 시대와 모든 이에게 위로의 원천이 된다”고 설명했다. “너는 오늘 나와 함께 낙원에 있을 것이다”(루카 23,43)라는 말씀은 예수님께서 함께 처형되는 오른편 강도에게 하신 말씀이다. ‘낙원’을 뜻하는 성경 본문의 헬라어 ‘파라데이소스’(παραδεισο)는 원래 ‘페르시아 왕의 정원’을 뜻하는 말로 아름드리나무로 우거진 숲과 맑은 물이 풍부하게 흐르는 선망의 동산이었다. 이 낙원을 구약의 창세기는 ‘에덴동산’(창세 2,10)으로, 바오로 사도는 ‘셋째 하늘’(2코린 12,2)로 표현하는데 이는 새 하늘 새 땅이 열릴 때 하느님에게서 나와 하늘에서 내려오는 거룩한 도성 새 예루살렘(묵시 21,2)을 뜻한다. 강도가 예수님께 이끌려 그분과 함께 바로 천국 낙원에 들어간 것은 누구나 구원받을 수 있다는 희망의 상징이다. 주님은 조롱 한가운데에서도 언제든지 당신께 청하는 것을 들어주시고 하느님과 함께하는 참 구원으로 이끌어 주시겠다는 약속이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 희망과 위안을 준다. 그래서 베네딕토 16세 교황은 예수님과 함께 천국에 들어간 오른편 강도에 대해 “그는 예수님의 신비를 알아차렸기에 곧바로 아버지와의 친교를 누릴 수 있었다”고 말했다. “저의 하느님, 저의 하느님, 어찌하여 저를 버리셨습니까?”(마태 27,46; 마르 15,34). 마태오와 마르코 복음은 모두 예수님께 9시께 십자가 위에서 큰 목소리로 이렇게 부르짖으셨다고 한다. 두 복음서는 예수님의 절규를 히브리어와 아람어가 섞인 그대로 전하고 다시 헬라말로 번역한다. “엘리 엘리 레마 사박타니?” 이 외침은 여느 버림받은 자의 탄신이 아닌 구원을 청하는 참된 메시아의 외침이다. 예수님의 수난사 전체를 관통하는 이 외침은 시편 22편에도 나오는 메시아 수난에 관한 모든 예언을 완성하는 주님의 기도이다. 그래서 아우구스티노 성인은 시편 주해를 통해 이 부르짖음을 ‘새로운 기도’라며 “그리스도께서 머리이시며 동시에 몸으로서 기도하신다”고 풀이했다. 리길재 기자 teotokos@pbc.co.kr 평화신문2015.04.01
![[안소근 수녀와 떠나는 구약여행] <20>](//cpbc.co.kr/CMS/newspaper/2015/04/rc/568374_1.0_titleImage_1.jpg)
[안소근 수녀와 떠나는 구약여행] “이스라엘의 병거이시며 기병이시여!”(2열왕 2,12) ‘엘리야의 승천’. 작자 미상. 임금들은 옳은 길을 벗어나기가 쉬운 모양입니다. 그래서 사무엘기와 열왕기에서 임금들이 있는 곳에는 예언자들도 있습니다. 특히 임금이 잘못할 때에 예언자들의 역할이 중요해집니다. 임금들이 하느님 위에 올라서지 못하도록 옆에서 찌르는 것이 예언자들입니다. 그러니 임금들에게는 예언자들의 말이 달갑지 않기도 했을 것입니다. 아합과 엘리야, 히즈키야와 이사야, 치드키야와 예레미야. 북 왕국 이스라엘에서나 남 왕국 유다에서나, 임금과 예언자 사이의 갈등은 왕국이 멸망할 때까지 계속됩니다.성경에 예언서들을 남긴 문서 예언자들 이전에 활동한 가장 중요한 예언자 두 사람이 북 왕국 이스라엘의 엘리야와 엘리사입니다. 임금들의 역사를 이어가던 열왕기에서는, 상권 17장부터 하권 8장까지에 걸쳐 이 두 예언자에 대해 전해줍니다.엘리야 시대의 임금은 오므리의 아들 아합이었습니다. 임금에 대한 신명기계 역사가의 평가 기준은 여기서도 문제가 됩니다. 처음부터 다윗 왕조를 거슬러 일어난 예로보암이 세운 북 왕국 이스라엘에서는 이백 년 사이에 아홉 왕조가 일어서고 무너지고 했는데, 그 가운데 오므리 왕조는 상당히 강성했습니다. 그래서 아시리아의 문서들에서 북 왕국 이스라엘을 가리켜 “오므리의 집안”이라고 부르기도 했습니다. 오므리 집안은 솔로몬과 비슷한 점이 있습니다. 오므리는 수도를 티르차에서 사마리아로 옮겨 왔고 주변 국가들과의 관계도 개선했습니다. 특히 친 페니키아 정책을 써서 지중해 무역을 위해서 도움을 받았습니다. 이스라엘 스스로는 별로 바다로 진출한 민족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또한 오므리는 친 페니키아 정책의 일환으로 아들 아합을 시돈의 공주 이제벨과 결혼시켰습니다. 그러나 그 결과는, 이교 신들에 대한 숭배가 이스라엘에 퍼지고 사마리아에 그 신을 위한 신전이 세워지기에 이릅니다. 오므리와 아합에 대한 신명기계 역사가의 평가는 이제 설명할 필요도 없겠습니다. 물론 북 왕국 이스라엘의 임금들이 모두 부정적인 평가를 받은 것도 사실이지만, 그 가운데서도 아합은 이스라엘의 신앙을 위태롭게 한 임금이었습니다.엘리야는 이렇게 우상 숭배에 물든 이스라엘에 가뭄을 선포합니다. 가뭄이 시작되고 3년이 지난 다음 엘리야가 아합을 찾아가자 아합은 “당신이 바로 이스라엘을 불행에 빠뜨리는 자요?”(1열왕 18,17)라고 말합니다. 심판을 선고한 엘리야가 이스라엘을 멸망시키는 것입니까? 아닙니다. 이스라엘을 불행에 빠뜨리는 것은 한 분이신 하느님을 버린 아합 임금과 그의 집안입니다. 그래서 엘리야는 카르멜 산 위에서 홀로 바알의 수많은 예언자와 대결하여, 주님께서 참 하느님이심을 모든 이들 앞에서 드러냅니다. 그는 “주님께서 하느님이시라면 그분을 따르고 바알이 하느님이라면 그를 따르십시오”(1열왕 18,21)라고 요구했습니다. 엘리야, “나의 하느님은 야훼”라는 이름대로 그는 하느님은 오직 한 분, 야훼이심을 주장한 것입니다.엘리야와 관련된 또 한 가지 중요한 사건은 나봇의 포도밭 사건입니다(1열왕 21장). 아합은 자신의 왕궁 곁에 있는 나봇의 포도밭을 빼앗고 싶지만 집안의 상속 재산을 파는 것은 하느님께서 금하시는 일이기 때문에 나봇은 그 포도밭을 팔지 않습니다. 이스라엘에서 임금은 하느님 아래, 율법 아래 있어야 한다는 것, 여러 차례 나타났던 주제입니다. 그러나 이제벨은 이스라엘 여자가 아니기에 하느님을 두려워하지 않고 임금이 폭력으로 그 포도밭을 빼앗을 수 있다고 여깁니다. “이스라엘에 왕권을 행사하시는 분은 바로 당신이십니다”(1열왕 21,7). 임금은 무엇보다 위에 있다는 생각입니다.이제벨이 나봇을 죽인 다음 엘리야가 나타나 아합에게 심판을 선고하는 이 사건은, 다윗이 우리야를 죽이고 밧 세바를 차지했을 때에 나탄이 나타나 개입했던 경우와 유사합니다(2사무 11─12장 참조). 두 경우 모두 임금이 이웃 주민의 소유를 탐내고, 그를 죽이도록 편지를 보내며, 죽인 다음에는 그의 아내 또는 포도밭을 차지합니다. 그러나 이때에 예언자가 나타나 임금에게 하느님의 심판을 선포하고, 임금은 잘못을 뉘우칩니다. 임금과 하느님, 임금과 예언자의 관계를 보여주는 이야기들입니다.그 후 엘리야는 모세처럼 호렙 산에서 하느님을 만난 다음 예후를 이스라엘 임금으로 세우고 엘리사를 자신의 뒤를 이을 예언자로 세우고, 그 밖에도 많은 이적을 행하였습니다. 그가 불 병거를 타고 하늘로 올라갈 때 엘리사는 “나의 아버지! 나의 아버지! 이스라엘의 병거이시며 기병이시여!”(2열왕 2,12)라고 외쳤습니다. 이 말은 북 왕국 이스라엘에서 엘리야가 했던 역할을 한마디로 말해 줍니다. 일찍이 여호수아가 통수권을 받을 때에 하느님께서 하셨던 말씀처럼(여호 1,7-8 참조) 이스라엘이 죽고 사는 것은 한 분이신 하느님만을 사랑하는 데에 달려 있습니다. 임금들이 한 분이신 하느님께 충실하지 못하여 이스라엘을 위험으로 몰고 갈 때에, 이스라엘을 지킨 것은 군대가 아니라 이스라엘의 병거이며 기병인 예언자들이었습니다.이어서 열왕기에서는 북 왕국 이스라엘이 멸망하기까지의 역사와 그 후 남 왕국 유다가 기울어간 역사를 전해 줍니다. 그 역사는 예언자들과 함께 살펴보겠습니다. 백영민2015.04.29
![[빛과 소금 - 20세기 이땅의 평신도] <3> 국채보상운동의 선구자 서상돈](//cpbc.co.kr/CMS/newspaper/2015/07/rc/583346_1.0_titleImage_1.jpg)
[빛과 소금 - 20세기 이땅의 평신도] 국채보상운동의 선구자 서상돈억척 꼬마 심부름꾼서철순은 1859년 처가가 있는 대구로 두 아들을 데리고 이사했다. 정착한 곳은 대구성 남문 밖 뽕나무골 부근이었다. 남문 밖 앞밖거리(현재 계산동)라는 상설시장을 끼고 있으며 5일마다 성시되는 큰 장(현재 동산동 일대) 입구로 각처의 상인 출입이 빈번한 장소였다. 앞밖거리는 동네 사람 대부분이 봇짐장수 등짐장수를 해서 먹고 사는 동네였다. 서상돈은 어려서부터 그곳에서 뼈가 굵었다. 그는 쫄래쫄래 그들 뒤를 따라다니며 장사가 어떻게 이루어지는지를 보면서 자랐다. 고난을 딛고 점포 심부름꾼으로 상돈에게 첫 번째 불행이 찾아들었다. 병석에 누워 있던 아버지가 그토록 그리워하던 형제들을 만나보지도 못하고 눈을 감으셨다. 1859년 서상돈은 그의 나이 9세 때 소년가장이 된 것이다. 대구는 조선 후기 이래 낙동강을 배경으로 경상도 내륙 지방의 상업 중심지 성격이 강했다. 이런 배경에서 대 상인층의 형성이 다른 지역에 비해 광범위하게 이루어졌다. 어머니는 부잣집의 빨래며 찬모일까지 안 해 본 일이 없었다. 그래서 어머니 손등은 거북이처럼 굳었고 싯누런 쇠못이 박혀 있었다. 여자가 경제 활동을 할 수 없는 상황에서 서상돈은 언제까지나 어머니께 의지할 수만은 없었다. 어서 돈을 벌어 고생한 어머니를 호강시켜 드리고 싶었다. 상돈은 불과 13세에 외할아버지 김후상의 도움으로 한 가게에 취직했다. 일이 다 결정된 후 상돈은 자신의 결심을 말했다. “어머니. 이제부터는 제가 돈을 벌어 올 테니 어머니는 그저 편하게 사세요.” “상돈아. 아직은 에미가 일 할 수 있느니라.” “아니어요. 이미 외할아버지를 찾아가 취직한 걸요.” “취직? 네가?” “네. 어떤 점포에 심부름꾼으로 들어갔어요.” 어머니는 상돈의 손을 잡고 눈시울을 적실 뿐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했다. 소년은 앞밖거리의 한 점포에 심부름꾼으로 취직했다. 그는 성실하고 진실한 심부름꾼이었다. 점포 주인들은 상돈을 “억척 꼬마 심부름꾼”이라 부르며 대견해 했다. 주인은 무척이나 그를 신뢰했으나 그곳에서 잔뼈가 굵은 최동철은 늘 그를 시기했다. 사사건건 상돈을 눈엣가시처럼 미워하던 최동철은 기회를 보아 상돈을 모함했다. “일전에 수금한 돈을 슬쩍 빼돌리는 것 같아 요.” “동생에게 과자를 사주는 것을 보았어요.” 처음에 주인은 최동철의 거짓말에 반신반의했으나 모함이 계속되자 상돈을 의심하기 시작했다. “오늘 보세요. 그놈은 틀림없이 수금을 떼먹고 도망갈 거예요” 끝내 상돈의 정직함이 밝혀지긴 했지만 그는 마음 깊이 상처를 입었다. 세상이 무서웠으나 어머니는 최동철을 용서하라고 그에게 일렀다. “네게 악행을 저지르는 자가 너의 스승이다. 예수님은 십자가에 못 박히시면서도 그들을 용서하지 않았느냐?” 그는 이때부터 행상을 시작했다. 언제까지나 남의 심부름만을 해주면서 돈을 벌 수는 없었다. 장사를 시작하려고 해도 그에게는 밑천이 없었다. 하지만 상돈은 타고난 장사꾼이었다. 장사를 처음 시작할 때 밑천이 없는 그는 동생 상정을 대신 가게에 맡겼다. “상정아. 형아 믿지? 형아가 후딱 이것들 팔고 우리 상정이 데리러 올게.” “알았어. 형. 걱정하지 마.” 점포 주인들은 억척 심부름꾼이던 서상돈에게 기꺼이 물건을 내주었다. 그는 동생 상정을 생각하면서 열심히 물건을 팔았다. 그렇게 해서 집안의 가장 노릇을 하며 장사할 밑천도 벌었다. 누구보다 열심히 일하는 그에게도 보부상으로서 클 기회가 왔다. 1868년경 그의 나이 18세쯤이었다. 이는 대구천주교회 원로회장 서용서(김수환 추기경의 외할아버지)의 후원과 보부상의 거두인 최철학의 지원, 그리고 외사촌형 김종학 등 천주교인들의 후원 등에 힘입은 바 크다. 취급 품목은 소금·건어물·일용잡화 등으로 아직은 재래시장을 전전하는 신세였다. 삽화 문채현 봇짐장수와 등짐장수 조선 시대 상인이라 하면 가장 많은 수를 차지한 보부상을 빼놓을 수 없다. 보부상은 장돌뱅이, 장도림, 장꾼, 항아장수, 봇짐장수, 등짐장수 등 여러 가지 이름으로 불리었다. 이들은 하루하루 먹고살기가 바빴다. 직업의 특성상 가정을 이루고 사는 것이 힘들어서 병들거나 죽어도 돌보아줄 사람이 없는 외로운 처지였다. 때문에 이들은 일찍부터 임방을 만들어 자신들끼리 힘을 합쳤고 이를 기반으로 대규모의 상단을 형성했다. 이제는 버려진 말처럼 된 ‘동무’라는 말도 원래는 보부상이 서로를 부르는 호칭이었다. 보상은 정교하고 비교적 값이 비싼 잡화 등속을 보자기에 싸서 들고 다니거나 혹은 질빵에 걸머지고 다니며 시장 혹은 농촌 가옥 마루에 보자기를 끌러놓고 판매하였으므로 일명 ‘봇짐장수’라고도 하였다. 이에 비해 부상은 주로 조잡한 일용품을 취급하였는데, 재래의 농업 생산을 주로 하는 사회에서의 유치한 가내수공업품을 지게에 얹어 등에 짊어지고 다녔으므로 속칭 ‘등짐장수’라고 불렀다. 질을 걷네 질을 걷네/ 등금장사가 질을 걷네/ 날이 났네 날이 났네 등금등금 날이 났네/ 밭을 매네 밭을 매네/처녀 다섯이 밭을 매네/ 날난신을 다지나 팔아/ 처녀 다섯을 사가지고/ 삼으리라 삼으리라 예수님이 앞장서고 상돈이 뒤따르니 위 노래는 경상남도 창원시 마산합포구 구산면에서 밭을 맬 때 부르는 노동요의 일부다. 1994년 창원군에서 발행한 「창원군지」 1669~1670쪽에 실려 있는데, 최재남이 1994년 창원시 마산합포구 구산면 심리에서 박경님(여, 85)에게서 채록한 것이다. 「혜상공국서」에 의하면 세상 안에 지극히 미천하고 누추하여 살아서 이익 없고 죽어도 손해 없는 자가 보부상이다. 오죽하면 밭매는 사람이 종놈으로 삼겠다고 할까. 보부상이 되는 사람들은 살아서 이익 없고 죽어도 손해 없는 자들이다. 보부상이 되는 계층은 먼저 농민 중 생활고로 토지에서 이탈된 자들이다. 상돈이 등짐장사를 하면서 걸었던 그 길들. 그 길 어디에나 예수님이 앞서 걸으셨다. 봉놋방에서 눈을 뜨면 서상돈은 가장 먼저 어머니를 생각했다. 새벽이면 일어나 옷차림을 단정히 하고 기도하던 어머니의 성스러운 모습을. 그 모습은 그의 뇌리에 각인되다시피 했다. 그 때문에 상돈은 어떤 유혹에도 지지 않을 수 있었다. 어머니는 새벽이면 항상 성경을 읽으셨다. 상돈은 어머니가 어디쯤을 읽는지 잘 안다. “들에 핀 나리꽃들이 어떻게 자라는지 지켜보아라. 그것들은 애쓰지도 않고 길쌈도 하지 않는다.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솔로몬도 그 온갖 영화 속에서 이 꽃 하나만큼 차려입지 못하였다.…이 믿음이 약한 자들아! 그러므로 너희는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차려입을까?’하며 걱정하지 마라.” 기도로 시작하는 하루 상돈은 어렴풋이 어머니의 성경 읽는 소리를 새 소리와 함께 들으며 뒤척거렸다. 곧 뒤이어 어머니가 그들 형제를 잠에서 깨우신다. 아침기도 시간이었다. 상정은 투덜거리면서도 부엌으로 나가 “엇! 추워! 엇! 추워!” 하면서 고양이 세수를 하고 기도하기 위해 앉곤 했다. 아버지는 벌써 큰 집에 가서 할머니께 아침 문안을 드리고 돌아오신다. 상돈은 온 가족이 둘러앉는 아침의 이 기도 시간을 사랑했다. 매일 아침의 기도 시간은 신비스러울 정도로 아름답고 평화로웠다. 기도를 마치고 나면 가슴이 무언가로 충만해지곤 했다. 예수님이 그의 길을 인도해주시리라는 것, 그 믿음은 평생 그를 지켜준 힘이었다. <계속> 백영민2015.07.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