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소근 수녀와 떠나는 구약 여행] <18>
신명기, 이스라엘 임금 규정
율법 익히며 계명 지킬 것 강조
역경 속에서도 하느님 율법 따른 다윗이스라엘의 가장 칭송받는 왕으로 꼽혀하느님, 다윗 왕조와 함께할 것 약속지금도 평화의 임금 기다리는 유다인 이제부터는 좀더 이스라엘 역사를 가까이 놓고 성경을 읽어야겠습니다. 판관기만 해도 도식적이거나 전설적인 부분들이 적지 않았지만, 사무엘기와 열왕기는 한 걸음 더 역사 기록에 근접하기 때문입니다. 그와 더불어 진행 속도도 느려지겠습니다.이스라엘 역사상 최초의 임금은 사울이었습니다. 왕정을 반대하던 사무엘이 어쩔 수 없이 하느님의 뜻에 따라 사울을 기름 부어 임금으로 세웠습니다. 그러나 첫술에 배부르랴. 사울의 왕국은 이스라엘 중북부를 중심으로 몇몇 지파들이 결합하여 생겨난 것으로서, 사울은 주로 군사 지도자의 모습을 보입니다. 사무엘기 상권 15장 28절에 따르면 그가 다스린 것도 두 해 동안에 불과했습니다.그의 통치가 무너진 이유에 대해서, 사무엘기에서는 하느님께서 그를 배척하셨다고 말합니다. 두 가지 사건이 있었습니다. 첫 번째는 사울이 필리스티아인들과 전투를 하기 전에, 사제가 아니면서 사무엘을 기다리지 않고 자기 손으로 제사를 바쳤던 것이었습니다(1사무 13장). 이에 사무엘은 사울의 왕국이 더 이상 서 있지 못하리라고 말합니다.두 번째는 아말렉과 전쟁을 하면서 아말렉인들을 전멸시키고 그들의 소와 양을 완전히 멸하지 않고 하느님께 제사를 바친다는 명목으로 소와 양들을 살려 두었던 것이었습니다. 이때에 사무엘이 유명한 말을 남깁니다. “주님의 말씀을 듣는 것보다 번제물이나 희생 제물 바치는 것을 주님께서 더 좋아하실 것 같습니까? … 임금님이 주님의 말씀을 배척하셨기에 주님께서도 임금님을 왕위에서 배척하셨습니다”(1사무 15,22-23).여호수아기, 판관기와 같은 신명기계 역사서의 신학이 나타납니다. 영토를 정복하고 다른 민족들의 침입을 막아내기 위하여 가장 중요한 것이 한 분이신 하느님을 사랑하고 율법을 지키는 것이었듯이, 왕조를 위해서도 가장 중요한 것은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순종하는 것입니다.하느님께서 사울을 내치셨으니, 사무엘은 가서 다윗을 기름 부어 임금으로 세웁니다. 그 후에 다윗은 열두 지파의 통일 왕국을 세우고 수도를 예루살렘으로 옮겨 명실상부한 이스라엘 전체의 임금이 됩니다. 다윗은 이스라엘 역사에서 가장 이상적인 임금이며 이후의 임금들을 평가하는 잣대였습니다. 성경의 어떤 책에서도 다윗은 가장 훌륭한 임금으로 표현되지만, 신명기계 역사서에서 다윗은 한 분이신 하느님을 사랑하고 율법을 지키라는 그 명을 따랐기에 훌륭한 임금이었습니다.그런데 다윗의 통치는 그 앞뒤에 붙은 이야기들이 깁니다. 사무엘기 상권 16장부터 하권 5장까지를 ‘다윗의 왕위 등극 설화’라고 합니다. 사울과의 갈등 속에 다윗이 임금이 되는 이야기입니다. 얼마 더 지나서는 사무엘기 하권 9─20장과 열왕기 상권 1─2장에 “다윗의 왕위 계승 설화”가 있습니다. 다윗의 아들들 가운데 여러 사건을 거쳐 솔로몬이 임금이 되기까지의 이야기입니다. 왕위 등극 설화와 왕위 계승 설화가 이렇게 많은 분량을 차지하고 있는 것을 보면, 다윗의 일생은 참 파란만장했습니다.그런데 이 이야기들에서 다윗은, 그 모든 역경 속에서도 하느님께 흠 없이 충실했던 인물로 나타납니다. 물론 그가 죄가 없었다는 것은 아닙니다. 역대기에서보다 더 솔직하게 사무엘기는 밧 세바 사건과 같은 다윗의 잘못을 분명하게 밝힙니다(2사무 11─12장). 하지만 다윗은 사울의 왕위를 찬탈하거나 그의 집안에 맞서 일어나지 않았고, 오히려 사울의 죽음을 애도하고 이스 보셋을 죽인 이들을 벌합니다. 사무엘기에 따르면, 먼저 하느님께서 사울을 배척하셨고 그다음에 하느님께서 다윗을 선택하셨습니다.하느님의 선택에 확인 도장을 찍는 것이 사무엘기 하권 7장, 나탄의 예언입니다. 다윗이 하느님께 집(성전)을 지어 드리려 하자 하느님께서 나탄을 통하여 다윗에게 말씀하십니다. 주님께서 다윗에게 집안을 일으켜 주시겠고, 그의 후손의 왕좌를 영원히 튼튼하게 해 주시겠다는 것입니다.다윗 왕조와 영원히 함께하시겠다는 약속, 중요한 장면입니다. 다윗 왕조가 존속하던 때에는 이 약속이 다윗 왕조의 정통성을 지탱해 주었고, 기원전 587년에 바빌론에 의하여 왕국이 멸망한 다음에도 이 약속에 대한 믿음은 살아남았습니다. 하느님은 다윗의 후손에게 영원한 왕좌를 약속하셨으며 하느님의 약속은 한 왕조의 붕괴로 무너지고 끝날 수 없다는 것, 여기서 메시아 희망이 발전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본래 ‘메시아’라는 단어는 ‘기름 부음 받은 이’를 뜻하여 임금을 지칭했습니다. 그러나 더 이상 이스라엘에 임금이 존재하지 않게 된 때에도 이스라엘은 이 약속을 믿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이 나탄의 예언이 온전히 실현되었다고 믿고, 유다인들은 지금도 이 약속이 유효하다고 믿기에 평화의 임금이 오시기를 기다리고 있습니다.마지막, 다윗의 왕위 계승 설화에서는 다윗의 여러 아들이 죽고 죽이는 역사가 전해집니다. 암논이 죽고, 압살롬이 죽고, 아도니야가 임금이 되려다가 실패하고 결국은 솔로몬이 임금이 됩니다. 이 모두가 다윗이 죽기 전에 일어난 일들입니다. 한 부분만 보겠습니다. 압살롬의 반란을 피해 가던 다윗은 이렇게 말합니다. “그분께서 ‘나는 네가 싫다’하시면, 나로서는 그저 그분 보시기에 좋으실 대로 나에게 하시기를 바랄 뿐이오”(2사무 15,26). 내가 임금이라 해도 왕정은 절대적인 것이 아닙니다. 나의 왕좌에 대해 그분 보시기에 좋으실 대로 하시기를 바라는 것, 이것이 주님께 선택받은 다윗 임금의 자세였습니다. “네 왕좌가 영원히 튼튼하게 될 것이다” (2사무 7,16). 평화신문2015.04.14
[성경 속 도시](32) 사마리아사마리아인은 왜 사마리아인이 되었나 사마리아는 예수님 시대 이스라엘 중부 지방인 팔레스티나를 가리키던 지역명이다. 북쪽으로는 갈릴래아, 남쪽으로는 유다와 경계를 이루고 있다. 그리고 서쪽에 지중해가 있고 동쪽으로 요르단 강이 흐른다. 이스라엘이 팔레스타인을 정복했을 당시 사마리아에서 전략적으로 중요한 지역은 가나안족이 차지하고 있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산지에 발판을 마련했으나 이웃 평원이나 골짜기에 있던 가나안의 핵심적 거점들은 다윗왕 시대에 와서야 차지할 수 있었다. 북이스라엘의 수도 사마리아 지역은 요셉의 가문, 곧 에프라임 지파와 므나쎄 분파에게 할당된 곳이었다. 지금의 나불루스 근처에 있던 고대 세켐 지방이 중심지였다. 이 지역은 당시에 도로들의 교차점이자 정치적 중심지이기도 했다. 북이스라엘의 오므리 왕이 세메르에게 은 두 달란트를 주고 매입해 그 산 위에 건축한 성을 산 주인이었던 세메르의 이름을 따서 사마리아라고 부르게 되었다. “그는 사마리아 산을 세메르에게서 은 두 탈렌트로 산 뒤, 그 산을 요새로 만들고 자기가 세운 성읍의 이름을, 산의 본래 소유자인 세메르의 이름을 따서 사마리아라고 하였다”(1열왕 16,24). 구약 시대에 열두 부족이 가나안 땅을 분할 소유할 때 에프라임족과 므나쎄족이 후에 사마리아 지방이라 불리게 될 부분을 소유하였다. 사울, 다윗, 솔로몬 등의 시대에 남북은 통일돼 있었다. 그런데 기원전 10세기에 솔로몬 왕이 죽은 뒤 사마리아는 북왕국, 즉 이스라엘 왕국과 남쪽의 유다 왕국과 갈라지게 됐다. 이스라엘 왕국의 첫 수도는 티르자에 있었고 이어 오므리왕 시대에는 당시 세켐에서 사마리아로 옮겨졌다. 북왕국은 대체로 남쪽의 유다 왕국보다 세력이 더 강했으며 경제적으로도 번영을 누렸다. 그러나 그 뒤에 여러 강대국의 입김에 사마리아는 많은 고통을 겪으며 살아야 했다. 잡혼 성행하자 유다인이 사마리아인 멸시본래 사마리아인은 이스라엘 민족의 한 분파였다. 그런데 기원전 722년께 북이스라엘이 아시리아에 점령당한다. 황제였던 사르곤 2세는 주민 3만여 명을 포로로 잡아갔고, 이스라엘 열두 지파 중 열 개 지파가 사라지게 됐다. 그리고 사마리아에는 각지에서 몰려온 이민족을 이주시켜 자리 잡고 살도록 하는 식민지 정책으로 잡혼을 실시했다. 사마리아 지역은 종족 간 피가 섞이게 됐고, 그래서 유다인은 사마리아 지역 사람들을 이방인이라 부르고 원수지간처럼 지냈다. 이후 유다인은 사마리아인을 이스라엘 사람으로 보지 않았고 경멸했다. 유다인은 예수님께서 사마리아인에게조차 말을 거는 것을 보고 충격을 받았을 정도였다(요한 4,8-9). 그러다 기원전 587년 남쪽 유다 왕국도 바빌론에게 멸망하게 된다. 나중에 바빌론에서 본토로 귀환한 유다인이 예루살렘 성전을 재건하던 무렵부터 유다인과 사마리아인과의 반목과 대립은 더 심해졌다. 사마리아 사람들이 참된 율법의 수호자로 자처하면서 즈루빠벨 성전 재건을 방해했기 때문이었다. 지금도 사마리아인은 오직 구약 성경의 오경만을 그들의 유일한 경전으로 여기고 세켐이나 그리심 산 중턱 등에 오늘날까지 일부 남아 있다. 현재 사마리아는 요르단의 북서부로 편입돼 있다. 허영엽 신부(서울대교구 홍보국장) 평화신문2014.12.16
[안소근 수녀와 떠나는 구약 여행]<2> 구약 시대의 역사이집트 탈출, 이스라엘 민족에 결정적 사건 외세 침입에 왕정 요구하지만 혼란 지속 기원후 70년, 예루살렘 함락되는 아픔 겪어이스라엘의 역사 오늘은 나무가 아닌 숲만을 보는 날입니다. 두 주에 나누면 앞부분을 잊어버리실까봐, 무리가 가더라도 한 회에 끝내겠습니다. 앞으로 천천히 살펴보게 될 구약 시대 전체의 역사를 한번 맛보기로 훑어 놓으려는 것입니다. 앞으로 천천히, 자세히 다시 다룰 것이므로 이번에는 흐름만 보시면 됩니다. 창세기의 아브라함, 이사악, 야곱 이야기는 역사적으로 확인할 내용들이 아닙니다. 그저 말할 수 있는 것은 이스라엘의 선조들이 기원전 2000년대에 떠돌이 유목 생활을 했다는 것입니다. 창세기에 그려진 성조 시대의 모습은 대략 기원전 1800년 정도의 생활상에 해당하는 듯합니다. 역사적으로 연대를 따질 수 있는 것은 이집트 탈출에서부터입니다. 물론 이것도 정확하게는 나오지 않지만, 기원전 1200년대에 모세의 인도로 이스라엘의 선조들이 이집트를 떠나 가나안 땅으로 들어갔을 것입니다. 모든 이스라엘인이 이집트에서부터 올라온 것은 아니었다고 생각되지만 이 사건은 하나의 민족으로서 이스라엘이 형성되는 데에 결정적인 역할을 하게 됩니다. 탈출기에서는 야훼와 이스라엘 사이의 특별한 관계가 맺어진 것도 이 때부터라고 전해 줍니다. 그러나 모세는 하느님께서 이스라엘에게 주시기로 약속한 땅에 들어가지 못하고 요르단 강 동쪽에서 세상을 떠납니다. 모세의 후계자 여호수아가 이스라엘 백성을 이끌고 요르단을 건너 하느님께서 약속하신 땅으로 들어가, 그 땅을 정복하고 열두 지파에게 분배합니다. 여호수아가 세상을 떠난 때부터 왕정이 설립되던 때까지의 판관 시대는(기원전 1200~1030년쯤), 왕정으로 넘어가기 이전의 과도기였습니다. 이때의 이스라엘은 열두 지파로 나뉘어 있어서, 아주 견고한 통일을 이루고 있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판관은 일시적인 지도자로서, 세습되는 것도 아니었습니다. 판관기는 이민족들의 침입을 받을 때마다 하느님께서 판관을 일으키시어 이스라엘을 구해 주셨다고 전하지만, 필리스티아와 같이 계속 이스라엘을 침범하는 세력들에 맞서기 위해서 백성은 다른 민족들과 같은 왕정을 요구합니다. 이스라엘에서 왕정은 찬반 논란이 그치지 않은 제도였습니다. 그러나 당시 상황에서 왕정을 세우지 않을 수는 없는 일. 처음에는 벤야민 지파의 사울이 임금으로 뽑힙니다. 하지만 그의 왕국은 오래 계속되지 못하고, 기원전 1010년쯤 유다 지파의 다윗이 왕위에 올라 온 이스라엘을 다스리는 통일 왕국을 이루고 수도도 예루살렘으로 정합니다. 이어서 970년쯤에는 그의 아들 솔로몬이 임금이 되어, 왕국이 크게 번성하게 됩니다. 하지만 외적으로 번성했던 그 왕국은 분열의 요인들을 내포하고 있었고, 그가 세상을 떠난 다음 933년에는 왕국이 둘로 분열됩니다. 솔로몬의 신하였던 예로보암이 반란을 일으켜 북왕국 이스라엘을 세우고, 솔로몬의 아들 르하브암은 남왕국 유다만을 다스리게 되는 것입니다. 이후로 남왕국 유다에서는 왕국이 멸망할 때까지 다윗 왕조가 이어졌지만, 반란으로 시작한 북왕국 이스라엘에서는 여러 차례 반란이 거듭되고 왕조가 바뀌었습니다. 이제부터가 이스라엘 역사를 공부하실 때 복잡한 부분입니다. 도표를 보시기 바랍니다. 왕정이 설립된 이후 이스라엘의 역사는 온통 외세에 시달려온 역사였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역사의 흐름을 알기 위해서는, 기원전 8세기 이래 메소포타미아와 팔레스티나 지역을 지배했던 큰 세력이 누구인지를 파악하시면 됩니다. 기원전 8세기에는 아시리아가 패권을 잡았습니다. 그리고 이 아시리아가 기원전 722년에 북왕국 이스라엘을 멸망시켰습니다. 아시리아의 뒤를 이어 큰 세력이 되었던 것은 바빌론이었습니다. 기원전 587년에는 바빌론이 남왕국 유다를 멸망시켰습니다. 다윗 왕조가 무너지고 예루살렘 성전도 불에 탔습니다. 이스라엘의 역사를 뒤흔드는 최대의 사건이었습니다. 많은 이들이 바빌론으로 유배를 갔습니다. 그 후 페르시아가 바빌론을 무너뜨리자, 페르시아 임금 키루스는 바빌론에 끌려와 있던 유다인들을 팔레스티나로 돌아가게 했습니다. 유배에서 돌아온 시기의 중요한 인물은 에즈라와 느헤미야였습니다. 그들의 활동에 힘입어 성전이 재건되었고, 이스라엘은 미약하나마 그 성전을 중심으로 하는 공동체를 형성하였습니다. 기원전 333년에는 마케도니아의 알렉산드로스 대제가 즉위하여 짧은 시간에 페르시아도 꺾고 광대한 제국을 이룩하였습니다. 그의 후계자들 사이에서 제국의 영토를 나누어 지배하는 과정에서 이스라엘은 기원전 160년대에 어려움을 겪게 됩니다. 헬레니즘 문화를 강요하던 이들은 유다교를 금지시켰고, 이에 저항하여 일어난 마카베오 형제들은 일시적으로나마 독립을 쟁취하고 하스몬 왕조를 세웁니다. 그러나 이 하스몬 왕조의 내분으로 기원전 63년에 로마군을 끌어들이게 되어 결국은 다시 외세의 지배를 받게 됩니다. 기원후 66년에는 독립을 위한 항쟁이 일어났지만 로마군에 진압되고, 기원후 70년에는 예루살렘이 함락되고 성전이 파괴됩니다. 이스라엘의 역사를 최소한으로 요약해 보았습니다. 성경의 하느님은 전쟁 한번 겪지 않은 평화와 번영의 역사를 통해서가 아니라 바로 이렇게 끊임없이 죽음을 체험한 역사 안에서 생명을 주시는 당신을 알게 하십니다. 이 역사의 모든 순간은 하느님을 알아가는 시간이었습니다. “주님, 당신 백성에 대한 호의로 저를 기억하소서”(시편 106,4). 백영민2014.12.03
안소근 수녀와 떠나는 구약 여행<2>구약 시대의 역사 이집트 탈출, 이스라엘 민족에 결정적 사건외세 침입에 왕정 요구하지만 혼란 지속기원후 70년, 예루살렘 함락되는 아픔 겪어오늘은 나무가 아닌 숲만을 보는 날입니다. 두 주에 나누면 앞부분을 잊어버리실까봐, 무리가 가더라도 한 회에 끝내겠습니다. 앞으로 천천히 살펴보게 될 구약 시대 전체의 역사를 한번 맛보기로 훑어 놓으려는 것입니다. 앞으로 천천히, 자세히 다시 다룰 것이므로 이번에는 흐름만 보시면 됩니다.창세기의 아브라함, 이사악, 야곱 이야기는 역사적으로 확인할 내용들이 아닙니다. 그저 말할 수 있는 것은 이스라엘의 선조들이 기원전 2000년대에 떠돌이 유목 생활을 했다는 것입니다. 창세기에 그려진 성조 시대의 모습은 대략 기원전 1800년 정도의 생활상에 해당하는 듯합니다.역사적으로 연대를 따질 수 있는 것은 이집트 탈출에서부터입니다. 물론 이것도 정확하게는 나오지 않지만, 기원전 1200년대에 모세의 인도로 이스라엘의 선조들이 이집트를 떠나 가나안 땅으로 들어갔을 것입니다. 모든 이스라엘인이 이집트에서부터 올라온 것은 아니었다고 생각되지만 이 사건은 하나의 민족으로서 이스라엘이 형성되는 데에 결정적인 역할을 하게 됩니다. 탈출기에서는 야훼와 이스라엘 사이의 특별한 관계가 맺어진 것도 이 때부터라고 전해 줍니다.그러나 모세는 하느님께서 이스라엘에게 주시기로 약속한 땅에 들어가지 못하고 요르단 강 동쪽에서 세상을 떠납니다. 모세의 후계자 여호수아가 이스라엘 백성을 이끌고 요르단을 건너 하느님께서 약속하신 땅으로 들어가, 그 땅을 정복하고 열두 지파에게 분배합니다. 여호수아가 세상을 떠난 때부터 왕정이 설립되던 때까지의 판관 시대는(기원전 1200~1030년쯤), 왕정으로 넘어가기 이전의 과도기였습니다. 이때의 이스라엘은 열두 지파로 나뉘어 있어서, 아주 견고한 통일을 이루고 있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판관은 일시적인 지도자로서, 세습되는 것도 아니었습니다. 판관기는 이민족들의 침입을 받을 때마다 하느님께서 판관을 일으키시어 이스라엘을 구해 주셨다고 전하지만, 필리스티아와 같이 계속 이스라엘을 침범하는 세력들에 맞서기 위해서 백성은 다른 민족들과 같은 왕정을 요구합니다.이스라엘에서 왕정은 찬반 논란이 그치지 않은 제도였습니다. 그러나 당시 상황에서 왕정을 세우지 않을 수는 없는 일. 처음에는 벤야민 지파의 사울이 임금으로 뽑힙니다. 하지만 그의 왕국은 오래 계속되지 못하고, 기원전 1010년쯤 유다 지파의 다윗이 왕위에 올라 온 이스라엘을 다스리는 통일 왕국을 이루고 수도도 예루살렘으로 정합니다. 이어서 970년쯤에는 그의 아들 솔로몬이 임금이 되어, 왕국이 크게 번성하게 됩니다. 하지만 외적으로 번성했던 그 왕국은 분열의 요인들을 내포하고 있었고, 그가 세상을 떠난 다음 933년에는 왕국이 둘로 분열됩니다. 솔로몬의 신하였던 예로보암이 반란을 일으켜 북왕국 이스라엘을 세우고, 솔로몬의 아들 르하브암은 남왕국 유다만을 다스리게 되는 것입니다. 이후로 남왕국 유다에서는 왕국이 멸망할 때까지 다윗 왕조가 이어졌지만, 반란으로 시작한 북왕국 이스라엘에서는 여러 차례 반란이 거듭되고 왕조가 바뀌었습니다.이제부터가 이스라엘 역사를 공부하실 때 복잡한 부분입니다. 도표를 보시기 바랍니다. 왕정이 설립된 이후 이스라엘의 역사는 온통 외세에 시달려온 역사였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역사의 흐름을 알기 위해서는, 기원전 8세기 이래 메소포타미아와 팔레스티나 지역을 지배했던 큰 세력이 누구인지를 파악하시면 됩니다. 기원전 8세기에는 아시리아가 패권을 잡았습니다. 그리고 이 아시리아가 기원전 722년에 북왕국 이스라엘을 멸망시켰습니다. 아시리아의 뒤를 이어 큰 세력이 되었던 것은 바빌론이었습니다. 기원전 587년에는 바빌론이 남왕국 유다를 멸망시켰습니다. 다윗 왕조가 무너지고 예루살렘 성전도 불에 탔습니다. 이스라엘의 역사를 뒤흔드는 최대의 사건이었습니다. 많은 이들이 바빌론으로 유배를 갔습니다. 그 후 페르시아가 바빌론을 무너뜨리자, 페르시아 임금 키루스는 바빌론에 끌려와 있던 유다인들을 팔레스티나로 돌아가게 했습니다. 유배에서 돌아온 시기의 중요한 인물은 에즈라와 느헤미야였습니다. 그들의 활동에 힘입어 성전이 재건되었고, 이스라엘은 미약하나마 그 성전을 중심으로 하는 공동체를 형성하였습니다.기원전 333년에는 마케도니아의 알렉산드로스 대제가 즉위하여 짧은 시간에 페르시아도 꺾고 광대한 제국을 이룩하였습니다. 그의 후계자들 사이에서 제국의 영토를 나누어 지배하는 과정에서 이스라엘은 기원전 160년대에 어려움을 겪게 됩니다. 헬레니즘 문화를 강요하던 이들은 유다교를 금지시켰고, 이에 저항하여 일어난 마카베오 형제들은 일시적으로나마 독립을 쟁취하고 하스몬 왕조를 세웁니다. 그러나 이 하스몬 왕조의 내분으로 기원전 63년에 로마군을 끌어들이게 되어 결국은 다시 외세의 지배를 받게 됩니다. 기원후 66년에는 독립을 위한 항쟁이 일어났지만 로마군에 진압되고, 기원후 70년에는 예루살렘이 함락되고 성전이 파괴됩니다.이스라엘의 역사를 최소한으로 요약해 보았습니다. 성경의 하느님은 전쟁 한번 겪지 않은 평화와 번영의 역사를 통해서가 아니라 바로 이렇게 끊임없이 죽음을 체험한 역사 안에서 생명을 주시는 당신을 알게 하십니다. 이 역사의 모든 순간은 하느님을 알아가는 시간이었습니다.“주님, 당신 백성에 대한 호의로 저를 기억하소서”(시편 106,4). 평화신문2014.12.03
[안소근 수녀와 떠나는 구약 여행] (41) “그들을 올라가게 하여라”(2역대 36,23)귀향했으나 예전의 유다가 아니었기에… “페르시아 임금 키루스는 이렇게 선포한다. 주 하늘의 하느님께서 세상의 모든 나라를 나에게 주셨다. 그리고 유다의 예루살렘에 당신을 위한 집을 지을 임무를 나에게 맡기셨다. 나는 너희 가운데 그분 백성에 속한 이들에게는 누구나 주 그들의 하느님께서 함께 계시기를 빈다. 그들을 올라가게 하여라”(2역대 36,23).한 시대를 시작하기 위하여 오늘은 또 역사 공부를 해야 하겠습니다. 위에 인용한 것은 역대기의 마지막 부분과 에즈라기의 첫 부분에 실려 있는 키루스 칙령의 내용입니다.에제키엘은 언젠가 예루살렘이 회복되리라고 예고했고, 제2이사야는 해방이 가까웠음을 선포했습니다. 이제 그 날이 왔습니다. 기원전 539년에 바빌론을 무너뜨린 페르시아 임금 키루스가, 바빌론에 유배가 있던 유다인들에게 귀향을 허락한 것입니다. 바빌론에 비해서 페르시아는 정복 민족들에게 관용적이었다고 했지요. 무력으로 그들을 내리누르는 것보다, 적당히 풀어주면서 자기편으로 만드는 것이 더 쉽고 비용도 적게 들었다고 합니다. 제국의 넓이를 생각하면 그럴 법도 했겠습니다.엄밀하게 말해서, 키루스가 역대기나 에즈라기에 나온 그대로의 칙령을 반포했을 것으로는 보이지 않습니다. 사실로 말하면 키루스에게 유다는 너무 작은 땅입니다. 그러나 그는 다른 민족들의 종교 자유를 제한하는 바빌론의 금령들을 폐지했고 바빌론이 여러 나라의 신전에서 빼앗아 온 신상과 기물들을 되돌려 주었습니다. 여러 나라에서, 신전을 다시 지음으로써 재건을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배경에서 유다인들도 고향으로 돌아와 예루살렘 성전과 도성을 재건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에즈라기 6장 3-5절에서는 페르시아 왕실에서 성전 건축 비용을 대어 주도록 했다고까지 말합니다.귀향이 반갑지만은 않아하지만, 돌아가라고 한다고 모두 신이 나서 즉시 바빌론을 떠나온 것은 결코 아닙니다. 그렇게 상상했다면 바빌론 유배에 대해 잘못 생각하고 있는 것입니다. 유배 간 이들은 바빌론의 한 지역에 모여 살면서 정착을 했고, 유다의 상황이 오히려 어려웠습니다. 서울 시내에서도, 수십 년간 장사를 한 가게가 재개발로 철거될 상황이 되면 사람들은 떠나가기 어려워합니다. 머나먼 바빌론에서 50년간 땅을 가꾸고 일을 해왔다면 어떻겠습니까?페르시아 왕실은 세스바차르에게 예루살렘 성전 기물들을 되돌려줄 임무를 맡겼습니다(에즈 5,15 참조). 세스바차르가 어떤 사람인지는 잘 알 수 없습니다. 그와 함께 귀향한 이들의 수도 정확히 알 수 없지만 분명 그리 많은 수는 아니었고, 이들은 예루살렘의 재건을 크게 진척시키지도 못했습니다. 도성이 워낙 많이 파괴되어 있었을 뿐만 아니라, 유배에서 돌아온 이들과 유배를 가지 않고 유다 땅에 남아있던 이들 사이에 적지 않은 충돌도 있었습니다. 문제는 땅입니다. 지배 계층과 기술자들이 유배를 간 다음, 바빌론은 그들이 소유하고 있던 땅을 유배를 가지 않은 가난한 이들에게 나누어 주었습니다. 가진 것이 아무것도 없던 이들이 바빌론 정복자들로부터 땅을 받으면, 어떻게 될까요? 당연히 그들은 바빌론에 절대 충성하는 백성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50년이 지나 본래 땅 주인이 돌아옵니다. 더 늦게 돌아온 이들도 적지 않습니다. 그러면 그 땅은 누구의 것이 되어야 할까요? 좀더 시간이 지나고 나면, 유배 전의 땅 주인은 더 이상 그 땅에 대한 권리를 주장할 수 없게 됩니다. 이 문제는, 유배가 끝난 다음 정복 세력이 아니라 유다인들 자체 안에서 있었던 분열과 갈등의 상황을 보여 주는 대표적인 예입니다.성전 재건축하고 도성 성벽도 재건이후의 역사는 더 간단히 요약하고 다음 주부터 더 자세히 다루겠습니다. 기원전 520년에는 다윗 왕조의 후손인 즈루빠벨과 사제 예수아의 지도로 또 한 집단이 귀환합니다. 기원전 520~518년에는 예언자 하까이와 즈카르야가 성전 재건을 독려하였고, 기원전 515년에는 소위 제2성전이라고 하는 재건된 성전의 봉헌이 있었습니다. 이 성전은 솔로몬 성전처럼 화려하지는 못했지만, 귀향 후 공동체의 중심이 됩니다.기원전 5~4세기의 상황에 대해서는, 에즈라와 느헤미야의 활동 외에는 별로 알려져 있지 않습니다. 페르시아의 고위 관리가 되어 있었던 느헤미야는 기원전 445년에 예루살렘에 돌아와 도시의 성벽을 재건합니다. 여러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느헤미야는 이 일을 완수했고, 그 후 약 십여 년 동안 예루살렘에 머뭅니다. 그 후 얼마 동안 페르시아에 갔다가 다시 예루살렘에 돌아온 것으로 보입니다.한편, 사제이며 율법학자였던 에즈라는 주로 종교적인 영역에서 활동하였습니다. 그가 예루살렘에 돌아온 때가 언제인지는 분명하게 말할 수 없습니다. 에즈라기 7장 7절에서는 “아르타크세르크세스 임금 제칠년”이라고 말하는데, 그가 아르타크세르크세스 1세라면 그 해는 기원전 458년일 것이고(느헤미야가 활동하기 전) 그렇지 않고 일부 학자들이 주장하는 대로 아르타크세르크세스 2세라면 기원전 398년이 됩니다(느헤미야가 활동한 다음). 성경에서는 에즈라가 느헤미야보다 먼저 왔다고 말하는데, 묘사된 상황을 보면 아무래도 느헤미야가 먼저 온 것 같은 느낌을 받기 때문입니다. 어떤 경우이든, 에즈라가 한 일은 종교적인 개혁으로서 “하느님의 법”을 선포하는 것이었습니다. 에즈라와 느헤미야의 활동이 있었던 다음, 알렉산드로스 대왕이 등장하기까지 유다에는 큰 변동이 없었습니다.<성 도미니코 선교수녀회, 대전가톨릭대 교수> 평화신문2015.10.06
[성경 속 도시] (47) 야포이방인 선교의 문 활짝 열어 현대의 야포 항구 모습. 출처=「성경 역사 지도」, 분도 출판사 ‘아름답다’라는 뜻을 가지고 있는 야포는 이스라엘에서 가장 오래된 항구로 지금도 아름다운 절경을 자랑한다. 현재 야포는 텔아비브의 지중해 해안 남쪽 지역을 말하는데 전략적으로도 중요한 곳이었다. 이스라엘에서는 항만 조건이 좋지 않은 지중해변에서 오랜 시간 동안 항구 도시로서 기능을 담당했다. 또 야포는 이집트 고대 문서에도 기록이 남아 있을 정도로 역사가 깊은 도시이다. 야포는 새롭게 하이파 항구가 발전하면서 서서히 그 기능을 잃었다. 주민들도 비좁은 야포 시내에서 벗어나 북쪽에 새로 형성된 ‘봄의 언덕’이라는 뜻을 가진 텔아비브에 자리를 잡았다. 원래 단 지파의 영토야포는 성경에 여러 번 언급돼 나온다. 야포는 본래 구약 시대에 단 지파 영토로 분배받은 땅이었다. “메 야르콘, 라콘, 그리고 야포 맞은쪽 지역이 들어 있다”(여호 19,46). 그러나 이스라엘 민족은 가나안 땅에 들어왔을 때 처음에는 야포를 정복하지 못했던 것으로 보인다. 지금은 항구로서의 기능을 많이 상실했지만 솔로몬이 예루살렘 성전과 궁궐을 지을 때 티로 임금 히람에게 레바논산에서 나는 향백나무와 방백나무, 자단나무 등을 베어 보낼 것을 청했다. 그래서 레바논에서 벤 나무들을 뗏목으로 엮어 바다로 야포 항구까지 보내면 예루살렘으로 가져갔다(2역대 2,1-16). 야포는 요나 예언자가 니느웨에 가라는 하느님 명령에 불복하고 타르시스로 도망하기 위해 배를 탔던 곳이기도 하다. “그러나 요나는 주님을 피하여 타르시스로 달아나려고 길을 나서 야포로 내려갔다. 마침 타르시스로 가는 배를 만나 뱃삯을 치르고 배에 올랐다. 주님을 피하여 사람들과 함께 타르시스로 갈 셈이었다”(요나 1,3).기원전 147년에 대사제 요나탄이 코일레 시리아 총독인 아폴로니우스와 전쟁을 하는 대목에서도 야포가 등장한다. “요나탄이 야포 앞에 진을 쳤지만, 아폴로니우스의 주둔군이 야포에 있었으므로 그 성읍 주민들은 그에게 성문을 열어 주지 않았다. 요나탄의 군대가 그곳을 공격하자, 성읍 주민들이 두려워서 성문을 열어 주었다. 그리하여 요나탄이 야포를 점령하였다”(1마카 10,75-76). 신약에서는 베드로 사도가 죽은 여제자 타비타를 살린 장소로 유명하다. “야포에 타비타라는 여제자가 있었다. 이 이름은 그리스 말로 번역하면 도르카스라고 한다. 그는 선행과 자선을 많이 한 사람이었는데…”(사도 9,36). 타비타는 그리스도교 신자로서 착한 일과 자선 사업을 많이 했던 믿음의 여인이었다. 그래서 그녀의 집에는 가난하고 불쌍한 사람들을 열성으로 도와줬다. 타비타가 죽자 베드로 사도가 달려가 그녀를 살렸다. 이 일이 알려지자 주위 사람들에게 깊은 감명을 주어 그리스도께 대한 신앙을 갖는 이들도 많이 늘어났다(사도 9,37-42). 베드로 사도, 환시를 보다 베드로 사도는 한동안 야포에서 무두장이 시몬의 집에 머무르다 어느날 기도 중에 환시를 보았다. 이 환시는 이방인을 향한 선교의 문이 크게 열린 계기가 됐다. “내가 야포 시에서 기도하다가 무아경 속에서 환시를 보았습니다. 하늘에서 큰 아마포 같은 그릇이 내려와 네 모퉁이로 내려앉는데 내가 있는 곳까지 오는 것이었습니다”(사도 11,5). 사도 베드로는 예루살렘 교회에 자신을 통해 하느님께서 이방인들에게도 세례를 주고 성령을 받게 했다는 자신의 체험을 보고 했다(사도 11,1-18). 그 후 예수님 복음이 예루살렘에서 이방인들을 향해 사방으로 퍼져나가 야포는 그리스도교의 중요한 중심지가 됐다. 허영엽 신부(서울대교구 홍보국장) 평화신문2015.06.02
[복음이야기] (39) 성전 (6·끝)번제물 바치고 기도하러 당신 집으로 성전은 기도 공간이었을 뿐 아니라 이스라엘의 정치, 행정, 법률, 종교 문제를 의결하는 본거지였다. 사진은 이스라엘국립박물관에 있는 헤로데 성전 모형도. 리길재 기자 예루살렘 성전 안에서 수천 명의 사제와 수만의 유다인은 무엇을 했을까? 그 답은 시편에서 찾을 수 있다.“내가 번제를 드리러 당신 집에 왔사옵니다. 서원한 것 바치러 왔사옵니다.… 숫양을 살라 향내 피우며 푸짐한 번제물을 드리고 염소와 함께 소를 드리옵니다”(공동 번역 시편 66,13.15). “거룩한 당신의 궁전 향하여 엎드려 인자함과 성실함을 우러르며 당신의 이름 받들어 감사 기도드립니다. 언약하신 그 말씀, 당신 명성보다 크게 펴졌사옵니다.…야훼여, 모든 일 나를 위해 하심이오니, 이미 시작하신 일에서 손을 떼지 마소서. 당신의 사랑 영원하시옵니다”(공동 번역 시편 138,2.8).시편 노래처럼 유다인들은 ‘희생’과 ‘기도’를 위해 성전을 찾았다. 성전 예식 중 제일은 희생의 피를 흘리는 ‘번제’였다. 이 번제 예식은 하느님 축복에 대한 ‘감사’와 자신의 잘못에 대한 ‘속죄’의 뜻이 담겨 있었다. 아울러 이 번제로써 하느님과 결합하려는 ‘희망’을 드러냈다. 하느님과 아브라함의 계약도 이 희생의 표지인 번제로 체결됐다.그러나 이스라엘의 예언자들은 형식적인 희생 제사만으로는 하느님을 기쁘게 할 수 없다(이사 58장 참조)고 강조했다. 그들은 하느님께서 좋아하시는 사람은 ‘겸손한 자’ ‘하느님의 말씀을 두려워하는 자’라고 가르쳤다. 야곱이 하느님의 축복을 받은 것은 그가 진심으로 통회하고 하느님께 간절히 기도를 드렸기 때문이라고 일깨웠다. 실제로 유다인들은 희생 제사를 바치기 위해서뿐 아니라 기도하기 위해 성전을 찾았다. 오늘날 예루살렘 통곡의 벽 앞에서 기도하는 수많은 순례자처럼 예수님 시대에도 환전상과 희생 제물을 파는 장사꾼들의 틈바구니에서 두 팔을 벌리고 입술을 떨며 기도에 몰두하는 유다인이 많았다. 아침마다 사제들은 하루도 거르지 않고 어린양의 희생을 바친 뒤 이스라엘인의 뜰 안 계단에 올라 “쉐마 이스라엘”(이스라엘아, 들어라! 주 우리 하느님은 한 분이신 주님이시다. 신명 6,4)을 외친 후 율법의 한 구절을 선포했다. 오후 3시에도 사제들은 성전에서 간단한 의식을 거행한 후 “주님께서 그대에게 당신 얼굴을 비추시고 그대에게 은혜를 베푸시리라. 주님께서 그대에게 당신 얼굴을 들어 보이시고 그대에게 평화를 베푸시리라”(민수 6, 25-26) 하며 이스라엘을 축복했다.토라(모세오경)에 따라 이스라엘의 모든 남자는 해마다 과월절(파스카)과 수확절(오순절), 추수절(초막절)에 예루살렘 성전을 순례했다(탈출 23,14-17 참조). 또 예루살렘을 향해 무릎을 꿇고 하루 3번씩 기도하는(다니 6,11) 풍습이 생겨났다.성전은 기도 공간이었을 뿐 아니라 이스라엘의 정치, 행정, 법률, 종교 문제를 의결하는 본거지였다. 바로 그 장소가 성전 안에 있던 최고 의회 ‘산헤드린’이다. 산헤드린의 수석 사제들과 원로들, 율법 학자들은 “이 성전을 허물어라. 그러면 내가 사흘 안에 다시 세우겠다”(요한 2,19)고 하신 예수님의 말씀을 ‘하느님 모독’ 죄로 단죄하고 사형에 처하기로 했다(마르 14,53-64).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산헤드린의 판결처럼 하느님을 모독한 것이 아니라 ‘나의 집’ ‘모든 민족들을 위한 기도의 집’ ‘아버지의 집’이라 말씀하시며 ‘강도의 집’으로 만든 환전상과 장사꾼을 몰아내고 성전을 정화하셨다(마르 11,15-19).유다인들은 산헤드린 의원들처럼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님을 보고 “성전을 허물고 사흘 안에 다시 짓겠다는 자야, 너 자신이나 구해 보아라. 네가 하느님의 아들이라면 십자가에서 내려와 보아라”며 모독했다(마태 27,39-40). 예수님께서 숨을 거두실 때 성전 지성소의 휘장이 위에서 아래까지 두 갈래로 찢어졌다 (마태 27, 51). 성서학자들은 예수님의 십자가 희생으로 인해 예루살렘 성전이 하느님 현존의 표지로서 더 이상 제 역할을 하지 못한다는 사실을 드러낸 것이라고 해석한다. 헤로데 성전은 서기 70년 로마군에 의해 예수님의 예언대로 “돌 하나도 다른 돌 위에 남아 있지 않고”(루카 21,6) 완전히 파괴됐다. 이스라엘 전승에 의하면 이날은 유다력 ‘아브’(8월) 달의 9일째 되는 날로 바로 기원전 586년에 솔로몬의 성전이 바빌론군에 의해 불타 없어진 바로 그날이었다. 유다인들은 솔로몬 성전과 헤로데 성전이 똑같이 파괴된 이 운명의 날을 기억하기 위해 오늘도 통곡의 벽에서 예레미야의 애가를 읽으며 성전 파괴를 슬퍼하며 메시아 도래를 기도하고 있다. 리길재 기자 teotokos@pbc.co.kr 평화신문2014.12.02
[복음 이야기] (37) 성전 (4)예수가 ‘강도의 소굴’이라 탄식한 성전 헤로데 성전은 유다인을 회유할 정치적 목적으로 지어졌다. 사진은 유일하게 남아있는 헤로데 성전의 서쪽 벽으로, ‘통곡의 벽’으로 불리는 이곳은 오늘날 유다인 최고의 기도 장소이다. 예수님께서 기도하신 성전은 이스라엘 백성이 세 번째로 지은 ‘헤로데 성전’이다. 에돔 땅 이두메아 출신의 헤로데는 로마 제국의 지원으로 이스라엘의 왕이 된 후 유다인들을 회유하기 위해 순전히 정치적인 목적으로 기원전 19년 낡은 즈루빠벨 성전을 허물고 새 성전을 짓기 시작했다. 헤로데는 1만 8000여 명의 노동자를 동원해 성전 터를 솔로몬 옛 성전 터의 2배로 넓히고 비용을 아끼지 않고 무한정 재료를 투입, “이 집의 새 영광이 이전의 영광보다 더 크리라”(하까 2,9)는 하까이 예언자의 말을 실현하려 했다.헤로데는 자신이 짓는 성전이 성스러운 자리가 되도록 제사장 1000명을 훈련시켜 석공으로 참여시켰다. 또 성전 공사로 인해 하느님께 봉헌하는 제사가 하루라도 중단되는 일이 없도록 배려했다. 헤로데의 이러한 노력으로 성전의 주요 건축물은 10년이 채 안 돼 기원전 9년경에 대부분 지어졌으나 서기 64년에 가서야 공사가 마감됐다. 따라서 예수님은 공생활 중에 아직 완공되지 않은 헤로데 성전을 보신 것이다.성전의 설계와 구조는 솔로몬 성전을 본뜬 것이었으나 헤로데는 에제키엘 예언자가 환시 중에 본 미래의 성전, 영광 속에 부흥하는 이스라엘의 성전(에제 40-43장)을 그대로 지었다. 한마디로 헤로데 성전은 웅장하고 사치스럽다 할 정도로 화려했다. 어느 정도 화려했나 하면 정교하게 조각된 흰 대리석으로 지붕 처마를 장식하고 지붕에는 황금 쇠판을 입히고 번쩍이는 금침을 박아 새들이 앉지 못하도록 했다. 이 모습을 유다 역사학자 플라비우스 요세푸스는 “아침 해가 비치면 성전 지붕은 흰 눈이 빛나듯 찬란했다”고 기록했다. 헤로데 성전은 동서 300m, 남북 450m로 상당히 넓었다. 바위를 부숴 평탄 작업을 한 후 큰 돌로 성벽을 쌓아 사방으로 둘렀다. 성전으로 통하는 문은 도시 서편에 4개, 남과 북에 1개, 동쪽에 2개를 두었다. 유다인들은 예루살렘 동문 중 지금도 남아있는 ‘황금 문’을 통해 주로 성전에 출입했다. 예수님께서도 수난 주간에 올리브 산을 가셨을 때 이 황금 문을 통과했을 것이라고 학자들은 추정하고 있다. 황금 문을 통해 성전에 들어서면 길이 225m의 장방형 광장이 나온다. 바로 ‘이방인의 뜰’이다. 불신앙인과 이단자, 추방된 자, 상중에 있는 자, 율법에 따라 부정한 상태에 있는 자들이 머물 수 있는 장소다. 요세푸스는 이방인의 뜰을 ‘외성전’이라 불렀다. 이방인의 뜰 둘레에는 기둥들이 줄지어 서 있었고 비와 햇볕을 피할 수 있었다. 기둥은 보통 20암마(약 9~11m)였고, 지붕은 삼목으로 덮고 땅에는 아름다운 포석을 깔아 놓았다. 이곳은 모든 이에게 개방된 장소였지만 막대기를 휴대할 수 없었고 더러운 신발을 신은 채 들어갈 수 없었다. 또 부정한 이방인의 화폐를 쓸 수 없었고 침을 땅에 뱉는 것도 금지됐다. ‘성전 앞뜰’인 이곳은 율법학자들이 토론을 벌이는 장소였고, 랍비들이 사람들을 가르치는 장소였다. 또 환전상들이 순례자들에게 율법이 규정한 화폐를 바꾸어 주고, 번제물과 희생 제물을 바치러 온 사람들에게 비둘기와 참새를 파는 상인들의 호객 소리와 희생 제물로 바쳐질 짐승들의 울음소리로 늘 소란스러웠다.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집 앞 거룩한 문턱에서 벌어지는 아비규환의 이 광경을 보시고 “나의 집은 기도의 집이 될 것이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그런데 너희는 이곳을 ‘강도의 소굴’로 만들어 버렸다”고 화를 내시며 끈으로 채찍을 만들어 장삿꾼과 짐승들을 몰아내셨다(루카 19,45-48; 마태 21,12-17; 마르 11,15-19; 요한 2,13-22). 이후 예수님께서는 날마다 이곳 이방인의 뜰에서 사람들을 가르치시면서 “이 성전을 허물어라. 그러면 내가 사흘 안에 다시 세우겠다”(요한 2, 19) 하시면서 당신 수난을 예고하셨다. 헤로데 성전의 성소는 이방인의 뜰보다 높은 곳에 동에서 서로 향해 서 있었다. 그래서 이방인의 뜰에서 성소의 외벽에 도달하려면 15계단을 오르지 않으면 안 되었다. 이 계단을 오른 뒤 성전에 들어가는 문 앞 기둥에는 헬라어와 라틴말로 다음과 같은 내용의 비문이 새겨져 있었다. “이방인이 이보다 더 앞에 나가는 것을 엄히 금한다. 체포되는 자는 스스로 책임을 져야 하며 그 결과는 죽음이다.” 리길재 기자 teotokos@pbc.co.kr 평화신문2014.11.18
[성경 속 도시] (37) 에벤 에제르주님께 감사하며 기념비를 세우다 에벤 에제르는 이스라엘의 아펙 근처의 한 마을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아펙에 진을 치고 있던 필리스티아인을 맞아 이곳에서 전투를 벌였으나 패배했다. 당시 이스라엘의 가장 위협적인 세력은 필리스티아인들이었다. 필리스티아인들은 주로 지중해 해안 평야가 정착지였고 이스라엘 백성은 주로 중앙 산지에 정착하였다. 해안 평야에 정착한 필리스티아인들과 산지에 정착한 이스라엘 백성은 자주 충돌했다. 이 두 민족끼리 치른 중요한 전쟁이 사론 평야와 에브라임 산지의 경계 지역인 아펙과 에벤 에제르에서 일어났다. 이 전쟁들은 이스라엘의 국가 체제를 크게 변화시켰다. “그리하여 사무엘의 말은 그대로 온 이스라엘에 전해졌다. 이스라엘은 필리스티아인들과 싸우러 나가 에벤 에제르에 진을 치고, 필리스티아인들은 아펙에 진을 쳤다”(1사무 4,1). 전쟁에서 패한 이스라엘 지도자들은 실로로 사람을 보내어 그곳에서 ‘계약 궤’를 전쟁터로 가져오게 했다. 이 계약 궤란 양편에 황금의 두 천사가 날개를 편 상(像)이 놓여 있는 네모난 상자를 말한다. 구약 시대 모세가 받은 십계 판을 이 상자에 담아 성막에 보관했다. 왕조 시대 이전에는 전쟁의 수호신 등으로 이해하고 있었다. 이집트를 탈출한 이스라엘은 40년간 광야 생활을 하게 된다. 광야는 위험한 곳으로 식량과 물 부족 등의 고통을 겪어야 했다. 또 이민족의 침입과 질병 역시 광야에서 이스라엘이 부딪쳐야 할 두려움이었다. 이렇게 해서 그들은 자신들의 역사 속에서 주님의 도움 없이는 생존 자체가 불가능함을 깨닫게 된다. 이런 역사적 상황에서 계약 궤는 이스라엘의 정신적 구심점이 되었다. “그리하여 백성은 실로에 사람들을 보내어, 거기에서 커룹들 위에 좌정하신 만군의 주님의 계약 궤를 모셔 왔다. 엘리의 두 아들 호프니와 피느하스도 하느님의 계약 궤와 함께 왔다”(1사무 4,4). 이스라엘은 계약 궤가 승리를 가져다줄 것으로 생각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두 번째 전쟁에서도 대패했다. 설상가상으로 계약 궤마저 탈취당하고 말았다. “필리스티아인들이 이렇게 싸우자, 이스라엘은 패배하여 저마다 자기 천막으로 도망쳤다. 이리하여 대살육이 벌어졌는데, 이스라엘군은 보병이 삼만이나 쓰러졌으며, 하느님의 궤도 빼앗기고 엘리의 두 아들 호프니와 피느하스도 죽었다”(1사무 4,10-11).그 후에 필리스티아인들이 하느님의 궤 때문에 벌을 받게 되고(1사무 5, 1-12 참조) 우여곡절 끝에 이스라엘은 다시 계약 궤를 되찾아 온다. 본래 주님의 계약 궤 상자는 시나이 산에서 제작된 후, 길갈에 안치됐고 이는 다시 베델, 실로를 거쳐, 잠시 필리스티아인들에게 빼앗겼다(1사무 4,11). 그후 다윗 시대에는 예루살렘에, 그리고 솔로몬은 성전 지성소(1열왕 6,19)에 이를 안치했다. 이스라엘이 계약 궤를 되찾은 후 예언자 사무엘은 기념비를 세우고 ‘에벤 에제르’라고 불렀다. “사무엘은 돌을 하나 가져다가 미츠파와 센 사이에 세우고, “주님께서 여기에 이르기까지 우리를 도우셨다”하며, 그 돌의 이름을 에벤 에제르라 하였다”(1사무 7,12). 이처럼 하느님의 구원 역사가 있을 때 이것을 기념하고 후대에 기억하기 위해 돌로 기념비를 세우는 일은 구약에 자주 나타난다. 에벤 에제르는 이스라엘이 필리스티아인을 이긴 후 도움을 주신 하느님께 감사하며 세운 기념비의 이름이며, 이후에 그곳 지명이 된 경우다. 허영엽 신부(서울대교구 홍보국장) 평화신문2015.03.03
[생활속의 복음] 지혜로운 사람연중 제17주일 (마태 13,44-52) 조재형 신부(서울데교구 성소국장) 많은 사람이 휴가를 떠나는 계절입니다. 지친 몸과 마음을 위해 잠시 휴가를 가는 것도 필요합니다. 시원한 강물이 흐르는 계곡, 가슴이 뻥 뚫릴 것 같은 바다, 모든 것을 품에 안고 있는 산을 향해 휴가를 가는 것도 좋습니다. 어떤 분들은 피정을 떠나기도 하고, 어떤 분들은 농촌 봉사활동을 가기도 하고, 어떤 분들은 밀린 작업을 하기도 합니다. 어떤 분들은 책을 읽기도 합니다. 선택은 우리들의 몫입니다. 고인이 되신 최인호씨는 ‘낯익은 타인들의 도시’라는 소설을 발표했습니다. 가톨릭 신자인 최인호씨는 서울교구 주보에 ‘말씀의 이삭’을 3년간 연재하기도 했습니다. 소설가로서, 신앙인으로서, 길을 찾는 구도자로서 그분의 글은 많은 사람에게 감동을 주었습니다. 우리 모두는 언젠가 이 세상을 떠나야 합니다. 무엇 때문에 죽었다는 말을 듣기보다는 무엇을 하다가 죽었다는 말을 듣는 것이 더욱 의미 있고 가치 있는 일이 아닐까 생각합니다.어떤 분들은 낯익은 이 세상에서 소중한 것들을 간직하면서 세상을 떠나기도 하고, 어떤 분들은 낯익은 이 세상에서 소중한 것들을 버리고 세상을 떠나기도 합니다. 무소유를 이야기했던 법정 스님은 낯익은 이 세상을 떠나면서 버리고 떠나는 것이 얼마나 행복한지를 보여주었습니다. 모든 이를 위해 모든 것이 되고자 하셨던 김수환 추기경님은 마지막 길에도 망막을 나누어 주셨습니다. 나눔이 소유보다 더 행복하다는 것을 보여주었습니다. 이분들은 이 세상이라는 밭에서 소중하고, 가치 있는 보물을 발견하였고, 그 보물을 얻기 위해서 다른 모든 것들을 기꺼이 포기하였습니다. 오늘 제1독서에서 우리는 솔로몬의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솔로몬의 선택을 칭찬하시면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네가 그것을 청하였으니, 곧 자신을 위해 장수를 청하지도 않고, 자신을 위해 부를 청하지도 않고, 네 원수들의 목숨을 청하지도 않고, 그 대신 이처럼 옳은 것을 가려내는 분별력을 청하였으니, 자, 내가 네 말대로 해 주겠다. 이제 너에게 지혜롭고 분별하는 마음을 준다.” 솔로몬은 낯익은 이 세상에서 지혜라는 보물을 발견하였고, 하느님께 그 지혜를 청하였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하늘나라는 밭에 숨겨진 보물과 같다.” 우리가 사는 이 세상에는 많은 보물이 묻혀 있습니다. ‘진실, 사랑, 나눔, 무소유, 희생, 봉사, 겸손, 양보’라는 보물들입니다. 이 보물은 세상의 눈으로 보면 보잘것없어 보이기도 하고, 짐처럼 느껴지기도 합니다. 예수님께서 분명히 말씀하십니다. 이 보물을 발견한 사람은 가진 것을 다 팔아 그 보물을 삽니다. 그 보물을 간직한 사람은 이미 이 세상에서 하느님 나라를 사는 것입니다. 오늘의 제2독서에서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말을 합니다. “하느님께서는 미리 뽑으신 이들을 당신의 아드님과 같은 모상이 되도록 미리 정하셨습니다. 그리하여 그 아드님께서 많은 형제 가운데 맏이가 되게 하셨습니다. 그렇게 미리 정하신 이들을 또한 부르셨고, 부르신 이들을 또한 의롭게 하셨으며, 의롭게 하신 이들을 또한 영광스럽게 해 주셨습니다.”며칠 전 책을 읽다가 함께 나누고 싶은 생각이 들어서 적어놓은 글이 있습니다.“인내로 키가 크고 겸손으로 고개 숙이며 열정으로 열매 맺는 해바라기의 삶을 배운다면 다가오는 가을이 결코 외롭지 않으리.” 여름이 긴 것 같지만, 가을이 멀지 않았음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우리의 인생이 끝없이 긴 것 같지만, 어느새 귀밑머리는 하얗게 변하고 해가 서산에 걸린다는 것을 또한 알고 있습니다. 더 늦기 전에 가장 소중한 것을 찾을 수 있는 지혜를 하느님께 청하십시오. 그토록 소중한 것을 찾았으면 잘 간직하고 지켜내야겠습니다. 우리는 병 때문에, 돈 때문에, 욕심 때문에, 나이가 많기 때문에 이 세상을 떠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진정 지혜로운 사람은 사랑을 하다가, 가진 것을 나누다가, 가난한 이들과 함께하다가 이 세상을 떠날 것입니다. 지혜로운 사람은 세상이라는 바다에서 떠밀려 가지 않습니다. 지혜로운 사람은 세상이라는 바다를 거슬러 올라갑니다. cpbc2014.07.23
[복음 이야기] (47) 가상칠언 (상)십자가 위 마지막 메시지는 자비와 희망 골고타 언덕의 ‘주님 무덤 성당’. 리길재 기자 네 복음서는 모두 예수님의 십자가형 죽음을 상세하게 보도하고 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희생으로 맺은 하느님과의 새로운 계약은 ‘인간의 구원’이다. 구원은 인간의 영과 마음, 육신 모두를 궁극의 원래 자리. 즉 원죄 이전의 하느님과 하나 된 관계로 되돌아가는 것이다. 이 구원은 예수님의 피로 맺는 새 계약인 ‘성체성사’를 통해 오늘 우리 삶의 자리에서 실제로 이루어지고 있다. 네 복음서가 전하는 주님의 수난 이야기를 살펴보면 예수님께서 십자가 위에서 최후를 맞으시기 전 마지막으로 일곱 가지 말씀을 하셨다. 이 ‘가상칠언’(架上七言)은 속죄와 구원으로서의 예수님의 죽음을 웅변한다. “아버지, 저들을 용서해 주십시오. 저들은 자기들이 무슨 일을 하는지 모릅니다”(루카 23,34).예수님께서 십자가 위에서 처음 하신 말씀이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십자가형으로 이끈 이들의 용서를 하느님께 청하신다. 그리스도의 자비가 드러나는 말씀이다. 처형장에 있던 로마 백인대장이 예수님께서 숨을 거두시는 것을 보고 “이 사람은 하느님의 아드님이셨다”(마르 15,39)고 고백하는 것으로 보아 로마인이던 유다인이던 예수님의 참모습을 알지 못했던 것 같다. 따라서 그들의 죄에 대한 용서를 예수님께서 청하고 계신 것이다. 예수님을 알지 못한 무지에 대한 고백은 예루살렘 성전 솔로몬 주랑에서 한 베드로 사도의 오순절 설교에서 잘 드러난다. “여러분은 거룩하고 의로우신 분을 배척하고 살인자를 풀어달라고 청한 것입니다. 여러분은 생명의 영도자를 죽였습니다.…나는 여러분도 여러분의 지도자들과 마찬가지로 무지한 탓으로 그렇게 하였음을 압니다”(사도 3,14-17). 바오로 사도도 자신의 무지를 고백하면서 하느님의 무한한 자비를 선포한다. “나는 전에 그분을 모독하고 박해하고 학대하던 자였습니다. 그러나 내가 믿음이 없어서 모르고 한 일이기 때문에, 하느님께서는 나에게 자비를 베푸셨습니다”(1티모 1,13).그리스도의 용서는 교회의 삶으로 곧장 받아들여졌다. 스테파노는 자기를 돌로 치는 사람들을 위해 “주님, 이 죄를 저 사람들에게 돌리지 마십시오”(사도 7,60)라고 기도했다. 베네딕토 16세 교황은 “주님께서 용서해 달라고 청했던 이유로 무지를 내세우신 것은, 그리고 무지가 우리를 회개로 인도하는 문이라고 보시는 것은, 모든 시대와 모든 이에게 위로의 원천이 된다”고 설명했다. “너는 오늘 나와 함께 낙원에 있을 것이다”(루카 23,43)라는 말씀은 예수님께서 함께 처형되는 오른편 강도에게 하신 말씀이다. ‘낙원’을 뜻하는 성경 본문의 헬라어 ‘파라데이소스’(παραδεισο)는 원래 ‘페르시아 왕의 정원’을 뜻하는 말로 아름드리나무로 우거진 숲과 맑은 물이 풍부하게 흐르는 선망의 동산이었다. 이 낙원을 구약의 창세기는 ‘에덴동산’(창세 2,10)으로, 바오로 사도는 ‘셋째 하늘’(2코린 12,2)로 표현하는데 이는 새 하늘 새 땅이 열릴 때 하느님에게서 나와 하늘에서 내려오는 거룩한 도성 새 예루살렘(묵시 21,2)을 뜻한다. 강도가 예수님께 이끌려 그분과 함께 바로 천국 낙원에 들어간 것은 누구나 구원받을 수 있다는 희망의 상징이다. 주님은 조롱 한가운데에서도 언제든지 당신께 청하는 것을 들어주시고 하느님과 함께하는 참 구원으로 이끌어 주시겠다는 약속이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 희망과 위안을 준다. 그래서 베네딕토 16세 교황은 예수님과 함께 천국에 들어간 오른편 강도에 대해 “그는 예수님의 신비를 알아차렸기에 곧바로 아버지와의 친교를 누릴 수 있었다”고 말했다. “저의 하느님, 저의 하느님, 어찌하여 저를 버리셨습니까?”(마태 27,46; 마르 15,34). 마태오와 마르코 복음은 모두 예수님께 9시께 십자가 위에서 큰 목소리로 이렇게 부르짖으셨다고 한다. 두 복음서는 예수님의 절규를 히브리어와 아람어가 섞인 그대로 전하고 다시 헬라말로 번역한다. “엘리 엘리 레마 사박타니?” 이 외침은 여느 버림받은 자의 탄신이 아닌 구원을 청하는 참된 메시아의 외침이다. 예수님의 수난사 전체를 관통하는 이 외침은 시편 22편에도 나오는 메시아 수난에 관한 모든 예언을 완성하는 주님의 기도이다. 그래서 아우구스티노 성인은 시편 주해를 통해 이 부르짖음을 ‘새로운 기도’라며 “그리스도께서 머리이시며 동시에 몸으로서 기도하신다”고 풀이했다. 리길재 기자 teotokos@pbc.co.kr 평화신문2015.04.01
[안소근 수녀와 떠나는 구약여행] “이스라엘의 병거이시며 기병이시여!”(2열왕 2,12) ‘엘리야의 승천’. 작자 미상. 임금들은 옳은 길을 벗어나기가 쉬운 모양입니다. 그래서 사무엘기와 열왕기에서 임금들이 있는 곳에는 예언자들도 있습니다. 특히 임금이 잘못할 때에 예언자들의 역할이 중요해집니다. 임금들이 하느님 위에 올라서지 못하도록 옆에서 찌르는 것이 예언자들입니다. 그러니 임금들에게는 예언자들의 말이 달갑지 않기도 했을 것입니다. 아합과 엘리야, 히즈키야와 이사야, 치드키야와 예레미야. 북 왕국 이스라엘에서나 남 왕국 유다에서나, 임금과 예언자 사이의 갈등은 왕국이 멸망할 때까지 계속됩니다.성경에 예언서들을 남긴 문서 예언자들 이전에 활동한 가장 중요한 예언자 두 사람이 북 왕국 이스라엘의 엘리야와 엘리사입니다. 임금들의 역사를 이어가던 열왕기에서는, 상권 17장부터 하권 8장까지에 걸쳐 이 두 예언자에 대해 전해줍니다.엘리야 시대의 임금은 오므리의 아들 아합이었습니다. 임금에 대한 신명기계 역사가의 평가 기준은 여기서도 문제가 됩니다. 처음부터 다윗 왕조를 거슬러 일어난 예로보암이 세운 북 왕국 이스라엘에서는 이백 년 사이에 아홉 왕조가 일어서고 무너지고 했는데, 그 가운데 오므리 왕조는 상당히 강성했습니다. 그래서 아시리아의 문서들에서 북 왕국 이스라엘을 가리켜 “오므리의 집안”이라고 부르기도 했습니다. 오므리 집안은 솔로몬과 비슷한 점이 있습니다. 오므리는 수도를 티르차에서 사마리아로 옮겨 왔고 주변 국가들과의 관계도 개선했습니다. 특히 친 페니키아 정책을 써서 지중해 무역을 위해서 도움을 받았습니다. 이스라엘 스스로는 별로 바다로 진출한 민족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또한 오므리는 친 페니키아 정책의 일환으로 아들 아합을 시돈의 공주 이제벨과 결혼시켰습니다. 그러나 그 결과는, 이교 신들에 대한 숭배가 이스라엘에 퍼지고 사마리아에 그 신을 위한 신전이 세워지기에 이릅니다. 오므리와 아합에 대한 신명기계 역사가의 평가는 이제 설명할 필요도 없겠습니다. 물론 북 왕국 이스라엘의 임금들이 모두 부정적인 평가를 받은 것도 사실이지만, 그 가운데서도 아합은 이스라엘의 신앙을 위태롭게 한 임금이었습니다.엘리야는 이렇게 우상 숭배에 물든 이스라엘에 가뭄을 선포합니다. 가뭄이 시작되고 3년이 지난 다음 엘리야가 아합을 찾아가자 아합은 “당신이 바로 이스라엘을 불행에 빠뜨리는 자요?”(1열왕 18,17)라고 말합니다. 심판을 선고한 엘리야가 이스라엘을 멸망시키는 것입니까? 아닙니다. 이스라엘을 불행에 빠뜨리는 것은 한 분이신 하느님을 버린 아합 임금과 그의 집안입니다. 그래서 엘리야는 카르멜 산 위에서 홀로 바알의 수많은 예언자와 대결하여, 주님께서 참 하느님이심을 모든 이들 앞에서 드러냅니다. 그는 “주님께서 하느님이시라면 그분을 따르고 바알이 하느님이라면 그를 따르십시오”(1열왕 18,21)라고 요구했습니다. 엘리야, “나의 하느님은 야훼”라는 이름대로 그는 하느님은 오직 한 분, 야훼이심을 주장한 것입니다.엘리야와 관련된 또 한 가지 중요한 사건은 나봇의 포도밭 사건입니다(1열왕 21장). 아합은 자신의 왕궁 곁에 있는 나봇의 포도밭을 빼앗고 싶지만 집안의 상속 재산을 파는 것은 하느님께서 금하시는 일이기 때문에 나봇은 그 포도밭을 팔지 않습니다. 이스라엘에서 임금은 하느님 아래, 율법 아래 있어야 한다는 것, 여러 차례 나타났던 주제입니다. 그러나 이제벨은 이스라엘 여자가 아니기에 하느님을 두려워하지 않고 임금이 폭력으로 그 포도밭을 빼앗을 수 있다고 여깁니다. “이스라엘에 왕권을 행사하시는 분은 바로 당신이십니다”(1열왕 21,7). 임금은 무엇보다 위에 있다는 생각입니다.이제벨이 나봇을 죽인 다음 엘리야가 나타나 아합에게 심판을 선고하는 이 사건은, 다윗이 우리야를 죽이고 밧 세바를 차지했을 때에 나탄이 나타나 개입했던 경우와 유사합니다(2사무 11─12장 참조). 두 경우 모두 임금이 이웃 주민의 소유를 탐내고, 그를 죽이도록 편지를 보내며, 죽인 다음에는 그의 아내 또는 포도밭을 차지합니다. 그러나 이때에 예언자가 나타나 임금에게 하느님의 심판을 선포하고, 임금은 잘못을 뉘우칩니다. 임금과 하느님, 임금과 예언자의 관계를 보여주는 이야기들입니다.그 후 엘리야는 모세처럼 호렙 산에서 하느님을 만난 다음 예후를 이스라엘 임금으로 세우고 엘리사를 자신의 뒤를 이을 예언자로 세우고, 그 밖에도 많은 이적을 행하였습니다. 그가 불 병거를 타고 하늘로 올라갈 때 엘리사는 “나의 아버지! 나의 아버지! 이스라엘의 병거이시며 기병이시여!”(2열왕 2,12)라고 외쳤습니다. 이 말은 북 왕국 이스라엘에서 엘리야가 했던 역할을 한마디로 말해 줍니다. 일찍이 여호수아가 통수권을 받을 때에 하느님께서 하셨던 말씀처럼(여호 1,7-8 참조) 이스라엘이 죽고 사는 것은 한 분이신 하느님만을 사랑하는 데에 달려 있습니다. 임금들이 한 분이신 하느님께 충실하지 못하여 이스라엘을 위험으로 몰고 갈 때에, 이스라엘을 지킨 것은 군대가 아니라 이스라엘의 병거이며 기병인 예언자들이었습니다.이어서 열왕기에서는 북 왕국 이스라엘이 멸망하기까지의 역사와 그 후 남 왕국 유다가 기울어간 역사를 전해 줍니다. 그 역사는 예언자들과 함께 살펴보겠습니다. 백영민2015.04.29
[빛과 소금 - 20세기 이땅의 평신도] 국채보상운동의 선구자 서상돈억척 꼬마 심부름꾼서철순은 1859년 처가가 있는 대구로 두 아들을 데리고 이사했다. 정착한 곳은 대구성 남문 밖 뽕나무골 부근이었다. 남문 밖 앞밖거리(현재 계산동)라는 상설시장을 끼고 있으며 5일마다 성시되는 큰 장(현재 동산동 일대) 입구로 각처의 상인 출입이 빈번한 장소였다. 앞밖거리는 동네 사람 대부분이 봇짐장수 등짐장수를 해서 먹고 사는 동네였다. 서상돈은 어려서부터 그곳에서 뼈가 굵었다. 그는 쫄래쫄래 그들 뒤를 따라다니며 장사가 어떻게 이루어지는지를 보면서 자랐다. 고난을 딛고 점포 심부름꾼으로 상돈에게 첫 번째 불행이 찾아들었다. 병석에 누워 있던 아버지가 그토록 그리워하던 형제들을 만나보지도 못하고 눈을 감으셨다. 1859년 서상돈은 그의 나이 9세 때 소년가장이 된 것이다. 대구는 조선 후기 이래 낙동강을 배경으로 경상도 내륙 지방의 상업 중심지 성격이 강했다. 이런 배경에서 대 상인층의 형성이 다른 지역에 비해 광범위하게 이루어졌다. 어머니는 부잣집의 빨래며 찬모일까지 안 해 본 일이 없었다. 그래서 어머니 손등은 거북이처럼 굳었고 싯누런 쇠못이 박혀 있었다. 여자가 경제 활동을 할 수 없는 상황에서 서상돈은 언제까지나 어머니께 의지할 수만은 없었다. 어서 돈을 벌어 고생한 어머니를 호강시켜 드리고 싶었다. 상돈은 불과 13세에 외할아버지 김후상의 도움으로 한 가게에 취직했다. 일이 다 결정된 후 상돈은 자신의 결심을 말했다. “어머니. 이제부터는 제가 돈을 벌어 올 테니 어머니는 그저 편하게 사세요.” “상돈아. 아직은 에미가 일 할 수 있느니라.” “아니어요. 이미 외할아버지를 찾아가 취직한 걸요.” “취직? 네가?” “네. 어떤 점포에 심부름꾼으로 들어갔어요.” 어머니는 상돈의 손을 잡고 눈시울을 적실 뿐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했다. 소년은 앞밖거리의 한 점포에 심부름꾼으로 취직했다. 그는 성실하고 진실한 심부름꾼이었다. 점포 주인들은 상돈을 “억척 꼬마 심부름꾼”이라 부르며 대견해 했다. 주인은 무척이나 그를 신뢰했으나 그곳에서 잔뼈가 굵은 최동철은 늘 그를 시기했다. 사사건건 상돈을 눈엣가시처럼 미워하던 최동철은 기회를 보아 상돈을 모함했다. “일전에 수금한 돈을 슬쩍 빼돌리는 것 같아 요.” “동생에게 과자를 사주는 것을 보았어요.” 처음에 주인은 최동철의 거짓말에 반신반의했으나 모함이 계속되자 상돈을 의심하기 시작했다. “오늘 보세요. 그놈은 틀림없이 수금을 떼먹고 도망갈 거예요” 끝내 상돈의 정직함이 밝혀지긴 했지만 그는 마음 깊이 상처를 입었다. 세상이 무서웠으나 어머니는 최동철을 용서하라고 그에게 일렀다. “네게 악행을 저지르는 자가 너의 스승이다. 예수님은 십자가에 못 박히시면서도 그들을 용서하지 않았느냐?” 그는 이때부터 행상을 시작했다. 언제까지나 남의 심부름만을 해주면서 돈을 벌 수는 없었다. 장사를 시작하려고 해도 그에게는 밑천이 없었다. 하지만 상돈은 타고난 장사꾼이었다. 장사를 처음 시작할 때 밑천이 없는 그는 동생 상정을 대신 가게에 맡겼다. “상정아. 형아 믿지? 형아가 후딱 이것들 팔고 우리 상정이 데리러 올게.” “알았어. 형. 걱정하지 마.” 점포 주인들은 억척 심부름꾼이던 서상돈에게 기꺼이 물건을 내주었다. 그는 동생 상정을 생각하면서 열심히 물건을 팔았다. 그렇게 해서 집안의 가장 노릇을 하며 장사할 밑천도 벌었다. 누구보다 열심히 일하는 그에게도 보부상으로서 클 기회가 왔다. 1868년경 그의 나이 18세쯤이었다. 이는 대구천주교회 원로회장 서용서(김수환 추기경의 외할아버지)의 후원과 보부상의 거두인 최철학의 지원, 그리고 외사촌형 김종학 등 천주교인들의 후원 등에 힘입은 바 크다. 취급 품목은 소금·건어물·일용잡화 등으로 아직은 재래시장을 전전하는 신세였다. 삽화 문채현 봇짐장수와 등짐장수 조선 시대 상인이라 하면 가장 많은 수를 차지한 보부상을 빼놓을 수 없다. 보부상은 장돌뱅이, 장도림, 장꾼, 항아장수, 봇짐장수, 등짐장수 등 여러 가지 이름으로 불리었다. 이들은 하루하루 먹고살기가 바빴다. 직업의 특성상 가정을 이루고 사는 것이 힘들어서 병들거나 죽어도 돌보아줄 사람이 없는 외로운 처지였다. 때문에 이들은 일찍부터 임방을 만들어 자신들끼리 힘을 합쳤고 이를 기반으로 대규모의 상단을 형성했다. 이제는 버려진 말처럼 된 ‘동무’라는 말도 원래는 보부상이 서로를 부르는 호칭이었다. 보상은 정교하고 비교적 값이 비싼 잡화 등속을 보자기에 싸서 들고 다니거나 혹은 질빵에 걸머지고 다니며 시장 혹은 농촌 가옥 마루에 보자기를 끌러놓고 판매하였으므로 일명 ‘봇짐장수’라고도 하였다. 이에 비해 부상은 주로 조잡한 일용품을 취급하였는데, 재래의 농업 생산을 주로 하는 사회에서의 유치한 가내수공업품을 지게에 얹어 등에 짊어지고 다녔으므로 속칭 ‘등짐장수’라고 불렀다. 질을 걷네 질을 걷네/ 등금장사가 질을 걷네/ 날이 났네 날이 났네 등금등금 날이 났네/ 밭을 매네 밭을 매네/처녀 다섯이 밭을 매네/ 날난신을 다지나 팔아/ 처녀 다섯을 사가지고/ 삼으리라 삼으리라 예수님이 앞장서고 상돈이 뒤따르니 위 노래는 경상남도 창원시 마산합포구 구산면에서 밭을 맬 때 부르는 노동요의 일부다. 1994년 창원군에서 발행한 「창원군지」 1669~1670쪽에 실려 있는데, 최재남이 1994년 창원시 마산합포구 구산면 심리에서 박경님(여, 85)에게서 채록한 것이다. 「혜상공국서」에 의하면 세상 안에 지극히 미천하고 누추하여 살아서 이익 없고 죽어도 손해 없는 자가 보부상이다. 오죽하면 밭매는 사람이 종놈으로 삼겠다고 할까. 보부상이 되는 사람들은 살아서 이익 없고 죽어도 손해 없는 자들이다. 보부상이 되는 계층은 먼저 농민 중 생활고로 토지에서 이탈된 자들이다. 상돈이 등짐장사를 하면서 걸었던 그 길들. 그 길 어디에나 예수님이 앞서 걸으셨다. 봉놋방에서 눈을 뜨면 서상돈은 가장 먼저 어머니를 생각했다. 새벽이면 일어나 옷차림을 단정히 하고 기도하던 어머니의 성스러운 모습을. 그 모습은 그의 뇌리에 각인되다시피 했다. 그 때문에 상돈은 어떤 유혹에도 지지 않을 수 있었다. 어머니는 새벽이면 항상 성경을 읽으셨다. 상돈은 어머니가 어디쯤을 읽는지 잘 안다. “들에 핀 나리꽃들이 어떻게 자라는지 지켜보아라. 그것들은 애쓰지도 않고 길쌈도 하지 않는다.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솔로몬도 그 온갖 영화 속에서 이 꽃 하나만큼 차려입지 못하였다.…이 믿음이 약한 자들아! 그러므로 너희는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차려입을까?’하며 걱정하지 마라.” 기도로 시작하는 하루 상돈은 어렴풋이 어머니의 성경 읽는 소리를 새 소리와 함께 들으며 뒤척거렸다. 곧 뒤이어 어머니가 그들 형제를 잠에서 깨우신다. 아침기도 시간이었다. 상정은 투덜거리면서도 부엌으로 나가 “엇! 추워! 엇! 추워!” 하면서 고양이 세수를 하고 기도하기 위해 앉곤 했다. 아버지는 벌써 큰 집에 가서 할머니께 아침 문안을 드리고 돌아오신다. 상돈은 온 가족이 둘러앉는 아침의 이 기도 시간을 사랑했다. 매일 아침의 기도 시간은 신비스러울 정도로 아름답고 평화로웠다. 기도를 마치고 나면 가슴이 무언가로 충만해지곤 했다. 예수님이 그의 길을 인도해주시리라는 것, 그 믿음은 평생 그를 지켜준 힘이었다. <계속> 백영민2015.07.22
[안소근 수녀와 떠나는 구약 여행]“땅을 나누는 일을 마쳤다”(여호 19,51)유혹의 산에서 내려다본 예리코 전경. 이번에는 좀 다른 주제를 생각해 보겠습니다. 여호수아기가 역사적 사실을 그대로 전해주는가 하는 문제입니다. 고고학이고 역사학이고 나는 관심 없다, 그저 성경에 나오는 말씀만 그대로 믿겠다 하신다면, 그것도 쉬운 일은 아닙니다. 여호수아기와 판관기가 서로 다른 얘기를 한다면 무엇을 믿으시겠습니까? 여호수아기는 일사불란합니다. 열두 지파는 하나로 똘똘 뭉쳐 가나안 전체를 착착 정복했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판관기는 다릅니다. 지파들이 각각 산발적으로 조금씩 영토를 정복합니다. 정복하지 못한 지역도 여기저기에 많이 흩어져 있습니다(판관 1,27-35). 또, 여호수아기 안에도 이스라엘이 남아 있는 가나안 주민들과 그냥 같이 사는 모습이 나타납니다(여호 23-24장, 스켐). 여호수아 시대에 이미 다 정복한 것 같은 땅을 다윗이나 솔로몬이 다시 정복하기도 합니다. 예를 들어 여호 12,10에서는 예루살렘도 이미 정복되는데, 2사무 5,6-9에서는 다윗이 여부스인들의 도성이던 예루살렘을 정복합니다. 어찌하시겠습니까? 그다음, 천문학. 성경과 자연과학의 문제에 있어 창조와 진화 문제 다음으로 유명한 갈릴레이 사건이 여호수아기와 관련됩니다. 여호 10,12-13에서 하느님께서 여호수아의 기도를 들으시고 해를 멈추셨다고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해를 멈추려면 해가 움직이고 있어야 하지요. 그래서 천동설이 옳고 지동설은 틀리고, 갈릴레이는 재판을 받았습니다. 그래도 지구는 돕니다. 이제 고고학입니다. 성서 고고학이 처음 발전하기 시작했을 때 열심한 고고학자들은 성경의 내용을 학문적으로 증명하고 싶어 했습니다. 그 마음이야 십분 이해하지요. 그런데 증명이 되지 않았습니다. 여호수아기에 따르면 여호수아가 예리코의 성벽을 무너뜨렸습니다. 기원전 13세기가 될 것입니다. 그런데 고고학 연구 결과, 예리코는 그 시대에 성벽의 흔적이 없습니다. 아이는 기원전 3천년대에 파괴되었습니다. 여호수아가 예리코나 아이에 갔을 때에는 무너뜨릴 것이 없었다는 뜻입니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이스라엘의 가나안 영토 정복에 대하여 새로운 가설들이 나오게 되었습니다. ‘새로운’이라고 하지만 벌써 50년이 지나서 이제는 낯설지 않게 된 가설들입니다. 일단, 군사 정복이 없었다고 할 수는 없겠습니다. 열두 지파의 통일된 군사행동이라는 것은 이 시대에 아직 어려웠을 듯합니다. 좀더 장기간에 걸쳐 점진적으로 이루어졌기는 하겠지만 인구의 이동과 정착은 있었던 것이 분명하며, 모든 이스라엘인들이 이집트에서 올라온 것은 아니라 하더라도 적어도 요르단을 건너와서 팔레스티나 중부를 거쳐 스켐까지를 정복하는 데에서는 여호수아의 역할이 있었으리라고 생각됩니다. 평화적 침투 가설도 있습니다. 기원전 12세기에 팔레스티나에서 유목민들이 농민으로 정착하게 되었다는 사실은 고고학적으로 확인됩니다. 이를 근거로, 이스라엘이 작은 무리들로 이 땅에 침투해 들어가 자리를 잡았으리라고 추정할 수 있는 것입니다. 영토 정복을 사회학적으로 접근하기도 합니다. 1960년대부터 한동안 많이 제기되었던 가설입니다. 당시의 가나안은 매우 계층화된 사회였는데, 거기에서 하층민들이 그 체제를 피하여 산간지대로 옮겨가 정착했다는 것입니다. 이들이 외부에서 온 다른 이들과 손을 잡았다고 보기도 합니다. 결론은 한 마디로 나오지 않습니다. 이스라엘이 그 땅을 차지한 과정은 여호수아기가 말하듯이 체계적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서서히, 군사 정복과 소규모의 평화적 이주 그리고 가나안 도시국가들 자체 내의 사회적 변화 등 여러 요인이 작용하여 이루어졌을 것입니다. 여호수아기는 그 과정을 단순화하여, 여호수아라는 한 인물을 중심으로 묶어 이집트 탈출에 연결짓습니다. 영토 정복과 영토 분배, 그 모든 것이 여호수아를 통해서 이루어졌다고 말합니다. 여호 13,1-7에서 밝히듯이 여호수아기도 아직 정복하지 못한 지역이 남아 있었다는 것을 압니다. 그러나 여호수아가 영토를 열두 지파에게 분배한다는 것은, 그 땅을 주시겠다던 하느님의 약속이 성취되었음을 나타냅니다. “주님께서는 이렇게 이스라엘 백성의 조상들에게 주시겠다고 맹세하신 모든 땅을 그들에게 주셨다.… ” 이리하여 주님께서 이스라엘 집안에 하신 그 모든 좋은 말씀이, 하나도 빠지지 않고 다 이루어졌다”(여호 21,43.45). 어느 지파에게 어느 땅을 나누어 주는가 하는 문제는, 우리에게는 크게 중요하지 않게 보입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후손들은 여호 13-21장에서 자기 집안의 이름을 찾습니다. 우리에게 이 땅이 주어졌다는 것, 그것은 하느님께서 약속을 지키셨음을 의미합니다. 이스라엘이 여호수아처럼 하느님께 충실하게 살아간다면 하느님께서는 언제라도 그 땅을 주실 분이심을 보여 줍니다. 여호수아기는 말하자면 그 약속의 보증과 같습니다. 히브리어로 ‘여호수아’라는 이름은, 그리스어로 옮기면 ‘예수’가 됩니다. 그런 여호수아에 대해, 후대인 기원전 2세기의 집회서 저자는 이렇게 말합니다. “눈의 아들 여호수아는 전쟁에서 용감하였고 예언자로서는 모세의 후계자였다. 그는 자기 이름이 뜻하는 대로 그분께서 뽑으신 이들 가운데 위대한 구원자가 되어… 이스라엘에게 상속의 땅을 차지하도록 해 주었다”(집회 46,1). 백영민2015.03.18
[복음 이야기](41) 예수님 족보 (하)말씀이 사람이 되시어 오시다 예수님의 족보는 그리스도의 육화 신비 안에서 이해돼야 한다. 그림은 베첼리오 티치아노, 성모와 아기 예수, 16세기, 유화 캔버스, 페슈 미술관, 이탈리아. 예수. 메시아이신 주님의 이름이다. 이 이름은 성모 마리아께서 예수를 잉태하기 전 천사가 일러준 이름이다(루카 2,21). “보라 이제 네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터이니 그 이름을 예수라 하여라”(루카 1,31). 천사가 알려준 주님의 이름 예수는 우리말로 “야훼는 구원이시다” 또는 “야훼께서 구원하신다”는 뜻이다. 신앙고백과 같은 말뜻을 지닌 이 이름을 많은 유다인들이 사랑했다. 이 이름은 가나안 정복 때 아모리족을 물리치기 위해 해와 달을 멈추게 한(여호 10,12) 여호수아뿐 아니라 집회서의 저자로 예루살렘 출신 엘아자르와 시라의 아들이(집회 50,27), 그리고 서기 37년부터 70년 사이 4명의 이스라엘 대사제가 사용했다. 또 루카 복음서에는 예수님의 조상 중에도 엘리에제르의 아들이 이미 이 이름을 갖고 있었다(루카 2,29).주님이신 예수님은 신학자 로마노 과르디니 신부의 표현처럼 ‘단지 영 속에서가 아니라 육 속에서 당신의 역사와 당신이 걸으셔야 할 길을 이룩하셨다.’ 그 영원한 시작과 ‘시간 안에 육체로 있음’ 사이에는 육화의 신비가 있다(과르디니, 「주님」, 바오로딸 참조). 그래서 마태오와 루카는 복음서에 ‘예수님의 족보’를 서술해 말씀이 사람이 되심을 증언하고 있다. 마태오 복음에서는 예수님의 족보가 아브라함에서 다윗과 일련의 유다 왕을 거쳐 요셉까지 42명의 이름이 이어진다(마태 1,1-17). 루카 복음은 예수님을 기점으로 조상을 거슬러 올라가며 열거해 다윗과 유다, 야곱, 이사악, 아브라함뿐 아니라 태고 시대 노아, 라멕, 에녹을 거쳐 아담까지 77명의 인물을 나열하고 있다(루카 3, 23-38). 두 족보를 비교하면 다소 차이가 나는 것을 쉽게 알 수 있다. 마태오는 다윗 왕조의 이름이 족보로 내려오지만, 루카는 나탄에서부터 스알티엘까지 다윗의 아들이지만 왕조가 아닌 다른 아들을 통해 족보가 내려온다. 아울러 스알티엘의 아들 즈루빠벨 후대가 또 갈라진다. 마태오 복음에는 즈루빠벨이 아비훗을 낳고 그 후손이 요셉의 아버지 야곱까지 내려가고 있으나, 루카 복음에는 즈루빠벨의 아들 레사에서 요셉의 아버지 엘리까지 서술되고 있다. 이렇게 예수님의 족보가 차이 나는 것에 대해 성경학자들은 마태오 복음은 법률상 요셉의 족보를, 루카는 혈통상 마리아의 족보를 따랐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또 장남이 대를 잇지 못하고 죽었을 경우 형제 중 미혼인 한 사람이 형수와 결혼해 첫 아들을 낳아 죽은 형제의 이름을 이어받게 했던 이스라엘의 대를 잇는 전통 방식인 ‘레비라식 결혼법’(신명 25,5-10 ‘후손에 관한 규정’)에 따라 친부와 법적 아버지의 이름이 섞여 있기 때문이라고 주장한다. 즉 다윗의 아들 솔로몬에서 내려온 마탄이 에스파 사이에서 야곱을 낳았고(마태오 복음), 다윗의 아들 나탄에서 내려온 후손 마탓이 형 마탄이 죽은 후 에스파와 결혼해 아들 엘리를 낳아(루카 복음), 야곱과 엘리는 아버지는 다르나 어머니가 같은 동복형제고, 엘리가 아들이 없이 죽어 야곱이 엘리의 부인을 아내로 삼아 요셉을 낳았기에 친부인 야곱과 법적 아버지인 엘리의 아름이 족보에 등재됐다는 것이다. 따라서 마태오와 루카의 족보를 서로 틀리거나 다른 것이 아니라고 한다. 또 족보에는 타마르(창세 38장)와 라합(여호 2장), 룻(룻 1-4장), 우리야의 아내 밧 세바(2사무 11장) 등 4명의 여인이 나온다. 타마르와 라합은 가나안 사람, 룻은 모압인, 밧 세바는 히타이트 사람으로 4명 모두 이방인이다. 이들은 모두 이방 여인과 결혼하지 말라는 이스라엘 율법을 깨고 유다인과 결혼해 아들을 낳았다. 이 네 여인이 예수님의 족보에 들어가 있는 것은 온 인류가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 사업에 동참하고 있음을 드러내는 것이다.이처럼 예수님의 족보에 이어져 내려오는 이름들은 하느님께서 인간들의 죄를 짊어지시고 인류의 역사 속으로 들어오시어 당신께 주어진 길을 걸으신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드러내 준다. 로마노 과르디니 신부는 구세주 강생의 의미를 다음과 같이 웅변했다. “그분은 인류의 역사 속에 있는 모든 위대한 것, 강성한 것, 혼란된 것, 가련한 것, 어두운 것 그리고 악한 것들 위에 현존하시면서 그분께 들이닥칠 이 모든 것들을 당신의 성심 안에 받아들이시어 이 모든 것을 책임지고 감당해내고자 우리에게 내려오신 것이다.”리길재 기자 teotokos@pbc.co.kr 평화신문2015.01.06
[복음이야기] <38> 성전 (5)“이 얼마나 장엄한 성전입니까” 출처=「더 원스탑 바이블 가이드」, 생활성서 이방인의 뜰을 지나 헤로데 성전 경내로 들어가는 문은 오직 유다인에게만 개방됐다. 그러나 유다인 여인들도 성전 경내 첫 구역인 ‘여인의 뜰’까지만 허용됐다. 성모 마리아와 성 요셉이 아기 예수에게 할례를 베풀고 율법에 따라 정결례를 거행하고 아기 예수를 봉헌하기 위해 예루살렘 성전에 왔을 때 시메온과 예언자 한나를 만난 곳도 이 여인의 뜰이라 학자들은 추정한다. 유다 여인들이 성전 경내에 들어갈 수 있는 유일한 공간이기 때문이다. 여인의 뜰에는 나팔 모양의 헌금함이 13개 있었다. 순례자들은 이 헌금함에 성전 세를 바치고 돈과 값비싼 물품들을 봉헌했다. 예수님은 이 여인의 뜰에서 헌금함 맞은쪽에 앉으시어 사람들이 헌금함에 돈을 넣는 모습을 보고 계셨다. 큰돈을 넣는 많은 부자 가운데 가난한 과부 한 사람이 와서 렙톤 두 닢을 넣는 모습을 보셨다. 예수님 시대 유다 사회에서 과부는 남편의 재산을 관리할 수 없었기에 다른 이의 자선에 의존해 궁핍하게 살아야 했다. 가난한 과부의 헌금을 지켜본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저 가난한 과부가 헌금함에 돈을 넣은 다른 모든 사람보다 더 많이 넣었다. 저들은 모두 풍족한 데에서 얼마씩 넣었지만, 저 과부는 궁핍한 가운데에서 가진 것을, 곧 생활비를 모두 다 넣었기 때문”이라며 하느님께 삶 전체를 내놓는 과부의 모습을 닮으라고 가르치셨다(마르 12,41-44; 루카 21,1-4 참조). 여인의 뜰 사면 모퉁이에는 4개의 큰 방이 있고 양편으로 회랑이 있었다. ‘가운데 뜰’로 불린 이 방들은 나지르인들과 회복한 병자(요한 5,1-16 참조)를 위한 방과 제단용 나무와 포도주를 보관하는 방으로 사용됐다. 여인의 뜰에서 15개 계단을 올라가면 ‘이스라엘인의 뜰’로 들어가는 아름다운 청동문이 있었다. 20명의 장정이 달라붙어 힘겹게 열어야 할 만큼 육중했던 이 문은 ‘니카노르 문’이라 불렸다. 이 니카노르 문이 열리면 예루살렘의 하루가 시작됐다. 니카노르 문을 통해 유다의 남자들만 제물을 바치러 ‘이스라엘인의 뜰’ 안으로 들어올 수 있었다. 이 뜰은 상징적으로 종교상 유다의 남성이 여성보다 더 우월하다는 것을 드러내는 장소였다. 이 뜰 너머에 ‘사제의 뜰’(제관의 뜰)이 있었다. 이곳부터 실제로 ‘성소’였다. 사제의 뜰에는 희생제물을 도살하는 장소와 제물을 위한 제단과 정결 예식을 위한 청동 물두멍이 있었다. 하느님께 바쳐질 희생 짐승들은 8개 말뚝에 묶여 도살했기에 늘 피비린내와 지방과 내장을 태우는 악취로 가득했다. 대사제는 사제의 뜰 난간 중앙에 마련된 작은 계단 위에서 이스라엘을 축복했다.성전은 사제의 뜰에서 12계단 위에 솟아 있었다. 이방인의 뜰과는 30암마(약 13.5~16m)의 표고 차가 났다. 성소는 솔로몬 성전의 성소 크기와 똑같이 40암마(약 18~21m) 크기였다. 너비 역시 똑같이 20암마로 성소와 지성소는 휘장으로 구분돼 있었다(마태 27,51; 마르 15,38; 2역대 3,14). 성소 입구에 기둥이 있었다. 헤로데는 이 기둥 꼭대기에 로마를 상징하는 황금 독수리를 장식하려 했으나 이를 반대하는 폭동이 일어나 결국 실패하고 말았다. 성전 문은 향백나무에 황금을 입히고 하느님의 창조를 상징하는 황금 포도나무를 새겨넣었다. 이 포도나무 때문에 로마 군인들은 “이스라엘의 진짜 신은 술의 신인 디오니소스(바쿠스)”라고 조롱했다. 성전에는 유다 최고의회인 산헤드린이 열리는 방과 성결례의 물을 길어다 놓은 방이 있었다. 둘레에는 사제들의 숙소와 사무실로 쓰인 3층으로 된 38개의 방이 이었다. 또 창을 내 실내를 아주 밝게 한 성소에는 즈루빠벨 성전에서 사용했던 일곱 가지 촛대와 하루에 2번 바치는 황금 향단 등 성물이 있었다. 이 촛대는 예루살렘을 멸망시킨 티투스 장군이 전리품으로 가져왔는데 지금도 로마의 포로로마노 앞에 있는 서 있는 개선문에 그 장면이 새겨져 있다. 성소 안에는 어둡고 영원한 정적에 잠겨 있는 지성소가 있었다. 이 지성소 안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1년에 단 한 번 대사제만이 이곳에 들어가 눈으로 볼 수 없는 존재를 향해 떨리는 마음으로 향을 피웠다. 유다인들에게 있어 이 성전보다 더 장엄한 것이 없었다. 예수님의 제자들도 모든 유다인이 그렇듯이 “얼마나 대단한 돌들이고, 얼마나 장엄한 건물들입니까”(마르 13,1)라며 감탄했었다. 리길재 기자 teotokos@pbc.co.kr 평화신문2014.11.25
[20세기를 빛낸 신학자들] (75)요셉 피츠마이어 (하)>75< 피츠마이어 신부가 살고 있는 미국 조지타운대 예수회 공동체. 지난 호에서도 언급했듯 신약성경의 아람어적 배경에 대한 피츠마이어 신부의 연구는 고대 유다교를 공부하는 학자들에게는 보고(寶庫)와 같다. 특히 「‘사람의 아들’이라는 신약성경의 호칭에 대한 문헌학적 고찰」(The New Testament Title ‘Son of Man’ Philologically Considered)이라는 논문은 초기 그리스도교의 중요한 개념과 용어들이 생겨난 배경이 되는 유다교를 이해하는 데 큰 기여를 했다. 쿰란 동굴에서 발견된 욥기 타르굼에 대한 피츠마이어 신부의 연구와 아람어 서간학에 대한 연구는 제2 성전기와 초기 랍비 시대 유다인의 사고와 역사를 이해하는 데 열쇠 역할을 했다. 그래서 유다인 학자 로렌스 쉬프만은 피츠마이어 신부를 두고, 사도행전 5장 34절에 나오는 “온 백성에게 존경을 받는 율법 교사”라고 평했다. 사제로서 사목적 관심과 배려피츠마이어 신부의 학문적 업적은 여기에서 그치지 않는다. 그의 연구 활동은 대학에 국한되지 않았다. 가톨릭 사제로서 그는 신자들을 향한 사목적인 관심과 배려 또한 잊지 않았다. 성경에 관한 지식을 일반 성직자와 수도자, 평신도들에게도 나눠주기 위해 노력했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가 폐막하기 이전인 1964년 조지타운대학교에서 여름방학을 이용해 성경 강좌를 개최하는 ‘여름 성경연구소’를 만들었고, 그 후 25년간 이 연구소를 이끌었다. 2013년 이 연구소는 설립 50주년을 기념해 그 이름을 ‘조지타운대학교 요셉 피츠마이어 성경 연구소’로 바꿨다. 가톨릭 교회 내 일반 신자들에게 성경 지식을 나누고자 하는 피츠마이어 신부의 관심은 일반 신자들이 쉽게 참조할 수 있는 주석서를 편찬할 의향을 품게 했다. 그의 바람은 같은 뜻을 지녔던 다른 두 가톨릭 성경학자들과 협력을 통해 결실을 맺게 됐다. 미국 가톨릭 성서학계의 세 거장이라고 할 수 있는 이들이 같은 목적을 위해 뜻을 함께한 것이다. 예수회의 피츠마이어 신부, 슐피츠회의 레이몬드 브라운 신부, 가르멜회의 롤랜드 머피 신부는 「예로니모 성경 주석서」(The Jerome Biblical Commentary, 1968)와「신 예로니모 성경 주석서」(The New Jerome Biblical Commentary, 1990)를 편찬했다. 이외에도 피츠마이어 신부는 여러 본당 단체들의 부탁이 있을 때마다 강의했는데, 팔순을 넘어서도 계속했다고 한다. 종교간 대화 활동그는 또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정신에 따라 교파를 초월해 신학적 대화를 하도록 이끌어내는 데 훌륭한 역할을 했다. 그는 1979년부터 1988년까지 교황청 일치평의회 자문위원으로서 다양한 개신교 교파들과 대화에 참여했다. 이 가운데 가장 두드러진 업적을 꼽는다면 1999년 10월 31일 독일 아우크스부르크에서 가톨릭 교회와 루터 교회 대표자들이 ‘의화론에 관한 공동 선언’에 서명을 하게 된 기념비적 사건이다. 의화론(義化論)은 가톨릭 교회와 루터교 간의 오랜 쟁점이었다. 루터교는 믿음(신앙)으로만 구원받는다고 주장했고, 가톨릭 교회는 믿음과 함께 선행을 실천해야 구원받는다고 가르쳤다. 두 교회는 공동 선언을 통해 “구원은 하느님의 자유로운 선물이며, 이는 선행을 통해서가 아니라 은총과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통해 온다. 그러나 성령께서 주시는 은총은 인간에게 선행할 힘을 주고 또 그렇게 하도록 부르신다”고 합의했다. 공동 선언이 발표된 날은 1517년 마르틴 루터가 독일의 비텐베르그 성당 문에 95개의 주제문을 붙였던 날과 같은 날이다. 공동 선언이 이뤄질 수 있었던 것은 두 교회가 35년간 신학 대화를 주고받은 결과였다. 피츠마이어 신부는 신약 성경 학계의 주도적인 가톨릭 학자로서 거의 30여 년에 걸쳐 가톨릭 교회와 루터 교회 간 대화에 참여했다. 평가와 인간적 면모 지금까지 살펴본 요셉 피츠마이어 신부의 생애는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이전부터 현재까지 약 60년에 이르는 가톨릭 성서학계의 역사를 요약하는 것과 같다. 그는 공의회 이전까지 이뤄진 가톨릭 성경학자들의 연구에 바탕을 두는 동시에 19세기 이후 개신교 성경학자들이 성경 연구에 적용한 방법들을 성경 연구에 도입했다. 이제는 그의 뒤를 이어 훨씬 더 많은 가톨릭 성경학자들이 학문적인 성경 연구에 참여하고 있다. 피츠마이어 신부처럼 학문적인 성경 연구가 가능하도록 길을 열어준 학자들 덕분에 성경 연구에 바탕을 둔 초교파적 신학 대화의 문이 그전보다는 훨씬 더 넓게 열리게 됐다. 그리고 피츠마이어 신부와 같은 학자들의 노력과 더불어 가톨릭 교회 안에서 성경에 대한 관심이 고조됐고, 성경에 대한 지식에 목마른 수천 명의 남녀 수도자들과 평신도들이 피츠마이어 신부가 세운 여름 성경 연구소로 밀려들었다. 피츠마이어 신부를 아주 가까이에서 지켜본 이들의 증언에 따르면 그는 거의 수도자처럼 생활한다. 매일 새벽 네 시에 일어나 미사를 드리고, 저녁 8시 30분이면 잠자리에 들었다. 학문하는 자세에 있어서 피츠마이어 신부는 아주 정확하고 꼼꼼했다. 논문을 쓸 때 사용하는 일차 자료와 이차 자료를 모두 두 번씩 반복 확인했다고 한다. 이렇게 정확성을 중요하게 생각했기 때문에 본의 아니게 학문적 논쟁에 참여하게 된 경우도 있었다. 그리고 국제적인 모임을 통해 세계의 여러 나라 사람들을 만나고, 세상의 여러 곳을 방문하는 것을 아주 좋아했다.이와 함께 그는 성경 연구만큼이나 요리를 즐겼다. 이제 만 94세가 된 피츠마이어 신부는 워싱턴 D.C.에 있는 예수회 대학 조지타운대 예수회 공동체에서 살고 있다. 평생을 교육자로서 가르치고, 미래의 학자들을 길러내는 일에 열정을 쏟았던 그의 모든 노력은 이제 그의 가르침을 받았던 많은 후학을 통해, 하느님 말씀을 어떻게 구체적인 삶의 현장에서 실천하며 살아야 하는지를 여름 성경연구소를 통하여 배웠던 수많은 평신도와 성직자, 수도자의 삶의 통해 이어질 것이다. 피츠마이어 신부가 뿌린 씨앗은 온 세상 곳곳에서 오십 배, 백 배의 열매를 맺고 있을 것이다.요셉 피츠마이어 신부의 저서 중 한국에 번역된 책은 다음과 같다. 「바울의 신학」(솔로몬, 1996). 「바울로의 신학」(분도출판사, 2001), 「로마서를 통한 영신수련」(바오로딸, 2000), ‘예수의 동정 잉태와 신약 성서’(「신학전망」제 36호, 92~116쪽)김영선 수녀(마리아의 전교자 프란치스코회) 평화신문2015.01.20
[복음 이야기] (34) 성전 (1)‘하느님께서 늘 함께하신다’는 표징 하느님께서는 집을 짓고 특정한 신상을 만들어 숭배하는 것을 금하셨다. 사진은 판관이나 왕이 사용했던 천개를 재건한 모습. 출처=「성경 역사 지도」, 분도출판사 “만군의 주님, 당신의 거처가 얼마나 사랑스럽습니까! 주님의 앞뜰을 그리워하며 이 몸은 여위어 갑니다. …행복합니다. 당신의 집에 사는 이들! 그들은 늘 당신을 찬양하리니. 셀라. …정녕 당신 앞뜰에서 지내는 하루가 다른 천 날보다 더 좋습니다. 저의 하느님 집 문간에 서 있기가 악인의 천막 안에 살기보다 더 좋습니다”(시편 84,1-11).이와 같이 시편은 20회 이상이나 성전의 아름다움과 신심 깊은 모든 유다인의 성전에 대한 애착을 노래하고 있다. 유다인에게 성전은 삶의 핵이며 중심이었다.이스라엘에 있어 성전은 오직 하나뿐이었다. 유다 역사학자 플라비우스 요세푸스는 “유일신에게는 오직 하나의 성전, 즉 하느님께서 그렇듯이 모든 사람에게 공통인 오직 하나의 성전이 있을 뿐”이라고 강조했다. 그래서 사마리아인들이 게리짐 산에 세운 성전을 “하느님이 싫어하시는 이단자의 것”이라고 유다인들은 경멸했다.유다인에게 성전은 하느님께서 이스라엘 민족과 늘 함께하신다는 ‘현존의 표징’이었다. 이 성전을 구약성경에선 히브리말로 ‘미케다쉬’와 ‘헤칼’로, 신약성경에선 헬라말로 ‘이에론’ ‘나오스’ ‘오이코스’라고 표현했다. 가톨릭 교회는 이 성전을 ‘그리스도의 몸과 교회’라는 의미로 받아들이고 있다.족장 시대 유다인들은 하느님을 위한 특별한 성전을 지을 필요가 없었다. 하느님께서는 언제 어디서든 자신이 원하는 곳에 나타나시고 족장들은 하느님께서 현시하신 곳에 희생 제단이나 돌기둥으로 기념하는 것으로 족했다(창세 28,22). 그러나 이스라엘이 민족 단위로 성장하면서 한 분이신 하느님을 섬기며 민족 전체가 모일 수 있는 구심점이 필요하게 됐다. 이집트 탈출 후 40년간의 광야 생활과 가나안 정복 이후 판관 시대에는 계약의 궤를 모신 ‘성막’이 그 역할을 했다(탈출 25장 참조). 특히 판관 시대(기원전 1250~1050년께)에는 성막이 정치ㆍ종교ㆍ사회 문제를 해결하는 구심점이었다. 이 성막이 있었던 ‘길갈’(여호 4,20)ㆍ‘스켐’(여호 24,1)ㆍ‘실로’(1사무 1,3)는 이스라엘의 중심이 됐다.왕정 시대로 통일 왕국을 건설한 다윗은(기원전 1010~970년) 성전을 건축(2사무 7,2)하려 했다. 그는 건축 자재를 구하고 보물을 모으며 성전 터를 사는 등 만반의 준비를 했으나 전쟁터에서 많은 사람을 죽여 하느님께로부터 성전 건축의 허락을 받지 못했다(1역대 22,8; 2사무 24,18-25). 그래서 그의 아들 솔로몬이 기원전 968년에 성전 건축을 시작해 7년 후에 완공했다(1열왕 6,37-38). 따라서 유다인이 봉헌한 하느님의 첫 성전은 예수님 탄생 1000년 전에 지어졌다.사실 율법은 집을 지어 우상 숭배하는 것을 금하고 하느님께서 선택하신 곳에서 번제물과 희생제물을 바치도록 명하고 있다(신명 12장 참조). 그래서 다윗이 성전을 지으려 했을 때 나탄 예언자는 다윗에게 하느님의 계시 말씀을 다음과 같이 전했다. “주님이 이렇게 말한다. 나는 이집트에서 이스라엘 자손들을 데리고 올라온 날부터 오늘까지, 어떤 집에서도 산 적이 없다. 천막과 성막 안에만 있으면서 옮겨 다녔다. 내가 이스라엘의 모든 자손과 함께 옮겨 다니던 그 모든 곳에서, 내 백성 이스라엘을 돌보라고 명령한 이스라엘의 어느 지파에게, 어찌하여 나에게 향백나무 집을 지어 주지 않느냐고 한 마디라도 말한 적이 있느냐?”(2사무 7,5-7)며 성전을 짓지 말라고 하셨다. 또 이사야 예언자는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다. “하늘이 나의 어좌요 땅이 나의 발판이다. 너희가 나에게 지어 바칠 수 있는 집이 어디 있느냐? 나의 안식처가 어디 있느냐?”(이사 66,1) 하고 하느님께 어떤 집을 지어 드릴 수 있는지 반문한다. 첫 그리스도교 순교자 스테파노도 “지극히 높으신 분께서는 사람의 손으로 지은 집에는 살지 않으십니다. 이는 예언자가 말한 그대로입니다. 하늘이 나의 어좌요 땅이 나의 발판이다. 너희가 나에게 무슨 집을 지어 주겠다는 것이냐? 또 나의 안식처가 어디 있느냐? 이 모든 것을 내 손이 만들지 않았느냐”(사도 7,48-50)며 성전을 중시하지 않았다.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이스라엘 민족의 전통을 존중하시면서 성전에 가서 유다인들과 같이 성부이신 하느님께 기도하셨다. 리길재 기자 teotokos@pbc.co.kr 평화신문2014.10.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