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소근 수녀와 떠나는 구약 여행]<15>](//cpbc.co.kr/CMS/newspaper/2015/03/rc/560907_1.0_titleImage_1.jpg)
[안소근 수녀와 떠나는 구약 여행]“땅을 나누는 일을 마쳤다”(여호 19,51)유혹의 산에서 내려다본 예리코 전경. 이번에는 좀 다른 주제를 생각해 보겠습니다. 여호수아기가 역사적 사실을 그대로 전해주는가 하는 문제입니다. 고고학이고 역사학이고 나는 관심 없다, 그저 성경에 나오는 말씀만 그대로 믿겠다 하신다면, 그것도 쉬운 일은 아닙니다. 여호수아기와 판관기가 서로 다른 얘기를 한다면 무엇을 믿으시겠습니까? 여호수아기는 일사불란합니다. 열두 지파는 하나로 똘똘 뭉쳐 가나안 전체를 착착 정복했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판관기는 다릅니다. 지파들이 각각 산발적으로 조금씩 영토를 정복합니다. 정복하지 못한 지역도 여기저기에 많이 흩어져 있습니다(판관 1,27-35). 또, 여호수아기 안에도 이스라엘이 남아 있는 가나안 주민들과 그냥 같이 사는 모습이 나타납니다(여호 23-24장, 스켐). 여호수아 시대에 이미 다 정복한 것 같은 땅을 다윗이나 솔로몬이 다시 정복하기도 합니다. 예를 들어 여호 12,10에서는 예루살렘도 이미 정복되는데, 2사무 5,6-9에서는 다윗이 여부스인들의 도성이던 예루살렘을 정복합니다. 어찌하시겠습니까? 그다음, 천문학. 성경과 자연과학의 문제에 있어 창조와 진화 문제 다음으로 유명한 갈릴레이 사건이 여호수아기와 관련됩니다. 여호 10,12-13에서 하느님께서 여호수아의 기도를 들으시고 해를 멈추셨다고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해를 멈추려면 해가 움직이고 있어야 하지요. 그래서 천동설이 옳고 지동설은 틀리고, 갈릴레이는 재판을 받았습니다. 그래도 지구는 돕니다. 이제 고고학입니다. 성서 고고학이 처음 발전하기 시작했을 때 열심한 고고학자들은 성경의 내용을 학문적으로 증명하고 싶어 했습니다. 그 마음이야 십분 이해하지요. 그런데 증명이 되지 않았습니다. 여호수아기에 따르면 여호수아가 예리코의 성벽을 무너뜨렸습니다. 기원전 13세기가 될 것입니다. 그런데 고고학 연구 결과, 예리코는 그 시대에 성벽의 흔적이 없습니다. 아이는 기원전 3천년대에 파괴되었습니다. 여호수아가 예리코나 아이에 갔을 때에는 무너뜨릴 것이 없었다는 뜻입니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이스라엘의 가나안 영토 정복에 대하여 새로운 가설들이 나오게 되었습니다. ‘새로운’이라고 하지만 벌써 50년이 지나서 이제는 낯설지 않게 된 가설들입니다. 일단, 군사 정복이 없었다고 할 수는 없겠습니다. 열두 지파의 통일된 군사행동이라는 것은 이 시대에 아직 어려웠을 듯합니다. 좀더 장기간에 걸쳐 점진적으로 이루어졌기는 하겠지만 인구의 이동과 정착은 있었던 것이 분명하며, 모든 이스라엘인들이 이집트에서 올라온 것은 아니라 하더라도 적어도 요르단을 건너와서 팔레스티나 중부를 거쳐 스켐까지를 정복하는 데에서는 여호수아의 역할이 있었으리라고 생각됩니다. 평화적 침투 가설도 있습니다. 기원전 12세기에 팔레스티나에서 유목민들이 농민으로 정착하게 되었다는 사실은 고고학적으로 확인됩니다. 이를 근거로, 이스라엘이 작은 무리들로 이 땅에 침투해 들어가 자리를 잡았으리라고 추정할 수 있는 것입니다. 영토 정복을 사회학적으로 접근하기도 합니다. 1960년대부터 한동안 많이 제기되었던 가설입니다. 당시의 가나안은 매우 계층화된 사회였는데, 거기에서 하층민들이 그 체제를 피하여 산간지대로 옮겨가 정착했다는 것입니다. 이들이 외부에서 온 다른 이들과 손을 잡았다고 보기도 합니다. 결론은 한 마디로 나오지 않습니다. 이스라엘이 그 땅을 차지한 과정은 여호수아기가 말하듯이 체계적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서서히, 군사 정복과 소규모의 평화적 이주 그리고 가나안 도시국가들 자체 내의 사회적 변화 등 여러 요인이 작용하여 이루어졌을 것입니다. 여호수아기는 그 과정을 단순화하여, 여호수아라는 한 인물을 중심으로 묶어 이집트 탈출에 연결짓습니다. 영토 정복과 영토 분배, 그 모든 것이 여호수아를 통해서 이루어졌다고 말합니다. 여호 13,1-7에서 밝히듯이 여호수아기도 아직 정복하지 못한 지역이 남아 있었다는 것을 압니다. 그러나 여호수아가 영토를 열두 지파에게 분배한다는 것은, 그 땅을 주시겠다던 하느님의 약속이 성취되었음을 나타냅니다. “주님께서는 이렇게 이스라엘 백성의 조상들에게 주시겠다고 맹세하신 모든 땅을 그들에게 주셨다.… ” 이리하여 주님께서 이스라엘 집안에 하신 그 모든 좋은 말씀이, 하나도 빠지지 않고 다 이루어졌다”(여호 21,43.45). 어느 지파에게 어느 땅을 나누어 주는가 하는 문제는, 우리에게는 크게 중요하지 않게 보입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후손들은 여호 13-21장에서 자기 집안의 이름을 찾습니다. 우리에게 이 땅이 주어졌다는 것, 그것은 하느님께서 약속을 지키셨음을 의미합니다. 이스라엘이 여호수아처럼 하느님께 충실하게 살아간다면 하느님께서는 언제라도 그 땅을 주실 분이심을 보여 줍니다. 여호수아기는 말하자면 그 약속의 보증과 같습니다. 히브리어로 ‘여호수아’라는 이름은, 그리스어로 옮기면 ‘예수’가 됩니다. 그런 여호수아에 대해, 후대인 기원전 2세기의 집회서 저자는 이렇게 말합니다. “눈의 아들 여호수아는 전쟁에서 용감하였고 예언자로서는 모세의 후계자였다. 그는 자기 이름이 뜻하는 대로 그분께서 뽑으신 이들 가운데 위대한 구원자가 되어… 이스라엘에게 상속의 땅을 차지하도록 해 주었다”(집회 46,1). 백영민2015.03.18
 예수님 족보 (하)](//cpbc.co.kr/CMS/newspaper/2015/01/rc/548666_1.0_titleImage_1.jpg)
[복음 이야기](41) 예수님 족보 (하)말씀이 사람이 되시어 오시다 예수님의 족보는 그리스도의 육화 신비 안에서 이해돼야 한다. 그림은 베첼리오 티치아노, 성모와 아기 예수, 16세기, 유화 캔버스, 페슈 미술관, 이탈리아. 예수. 메시아이신 주님의 이름이다. 이 이름은 성모 마리아께서 예수를 잉태하기 전 천사가 일러준 이름이다(루카 2,21). “보라 이제 네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터이니 그 이름을 예수라 하여라”(루카 1,31). 천사가 알려준 주님의 이름 예수는 우리말로 “야훼는 구원이시다” 또는 “야훼께서 구원하신다”는 뜻이다. 신앙고백과 같은 말뜻을 지닌 이 이름을 많은 유다인들이 사랑했다. 이 이름은 가나안 정복 때 아모리족을 물리치기 위해 해와 달을 멈추게 한(여호 10,12) 여호수아뿐 아니라 집회서의 저자로 예루살렘 출신 엘아자르와 시라의 아들이(집회 50,27), 그리고 서기 37년부터 70년 사이 4명의 이스라엘 대사제가 사용했다. 또 루카 복음서에는 예수님의 조상 중에도 엘리에제르의 아들이 이미 이 이름을 갖고 있었다(루카 2,29).주님이신 예수님은 신학자 로마노 과르디니 신부의 표현처럼 ‘단지 영 속에서가 아니라 육 속에서 당신의 역사와 당신이 걸으셔야 할 길을 이룩하셨다.’ 그 영원한 시작과 ‘시간 안에 육체로 있음’ 사이에는 육화의 신비가 있다(과르디니, 「주님」, 바오로딸 참조). 그래서 마태오와 루카는 복음서에 ‘예수님의 족보’를 서술해 말씀이 사람이 되심을 증언하고 있다. 마태오 복음에서는 예수님의 족보가 아브라함에서 다윗과 일련의 유다 왕을 거쳐 요셉까지 42명의 이름이 이어진다(마태 1,1-17). 루카 복음은 예수님을 기점으로 조상을 거슬러 올라가며 열거해 다윗과 유다, 야곱, 이사악, 아브라함뿐 아니라 태고 시대 노아, 라멕, 에녹을 거쳐 아담까지 77명의 인물을 나열하고 있다(루카 3, 23-38). 두 족보를 비교하면 다소 차이가 나는 것을 쉽게 알 수 있다. 마태오는 다윗 왕조의 이름이 족보로 내려오지만, 루카는 나탄에서부터 스알티엘까지 다윗의 아들이지만 왕조가 아닌 다른 아들을 통해 족보가 내려온다. 아울러 스알티엘의 아들 즈루빠벨 후대가 또 갈라진다. 마태오 복음에는 즈루빠벨이 아비훗을 낳고 그 후손이 요셉의 아버지 야곱까지 내려가고 있으나, 루카 복음에는 즈루빠벨의 아들 레사에서 요셉의 아버지 엘리까지 서술되고 있다. 이렇게 예수님의 족보가 차이 나는 것에 대해 성경학자들은 마태오 복음은 법률상 요셉의 족보를, 루카는 혈통상 마리아의 족보를 따랐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또 장남이 대를 잇지 못하고 죽었을 경우 형제 중 미혼인 한 사람이 형수와 결혼해 첫 아들을 낳아 죽은 형제의 이름을 이어받게 했던 이스라엘의 대를 잇는 전통 방식인 ‘레비라식 결혼법’(신명 25,5-10 ‘후손에 관한 규정’)에 따라 친부와 법적 아버지의 이름이 섞여 있기 때문이라고 주장한다. 즉 다윗의 아들 솔로몬에서 내려온 마탄이 에스파 사이에서 야곱을 낳았고(마태오 복음), 다윗의 아들 나탄에서 내려온 후손 마탓이 형 마탄이 죽은 후 에스파와 결혼해 아들 엘리를 낳아(루카 복음), 야곱과 엘리는 아버지는 다르나 어머니가 같은 동복형제고, 엘리가 아들이 없이 죽어 야곱이 엘리의 부인을 아내로 삼아 요셉을 낳았기에 친부인 야곱과 법적 아버지인 엘리의 아름이 족보에 등재됐다는 것이다. 따라서 마태오와 루카의 족보를 서로 틀리거나 다른 것이 아니라고 한다. 또 족보에는 타마르(창세 38장)와 라합(여호 2장), 룻(룻 1-4장), 우리야의 아내 밧 세바(2사무 11장) 등 4명의 여인이 나온다. 타마르와 라합은 가나안 사람, 룻은 모압인, 밧 세바는 히타이트 사람으로 4명 모두 이방인이다. 이들은 모두 이방 여인과 결혼하지 말라는 이스라엘 율법을 깨고 유다인과 결혼해 아들을 낳았다. 이 네 여인이 예수님의 족보에 들어가 있는 것은 온 인류가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 사업에 동참하고 있음을 드러내는 것이다.이처럼 예수님의 족보에 이어져 내려오는 이름들은 하느님께서 인간들의 죄를 짊어지시고 인류의 역사 속으로 들어오시어 당신께 주어진 길을 걸으신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드러내 준다. 로마노 과르디니 신부는 구세주 강생의 의미를 다음과 같이 웅변했다. “그분은 인류의 역사 속에 있는 모든 위대한 것, 강성한 것, 혼란된 것, 가련한 것, 어두운 것 그리고 악한 것들 위에 현존하시면서 그분께 들이닥칠 이 모든 것들을 당신의 성심 안에 받아들이시어 이 모든 것을 책임지고 감당해내고자 우리에게 내려오신 것이다.”리길재 기자 teotokos@pbc.co.kr 평화신문2015.01.06
![[복음이야기] <38> 성전 (5)](//cpbc.co.kr/CMS/newspaper/2014/11/rc/541487_1.0_titleImage_1.jpg)
[복음이야기] <38> 성전 (5)“이 얼마나 장엄한 성전입니까” 출처=「더 원스탑 바이블 가이드」, 생활성서 이방인의 뜰을 지나 헤로데 성전 경내로 들어가는 문은 오직 유다인에게만 개방됐다. 그러나 유다인 여인들도 성전 경내 첫 구역인 ‘여인의 뜰’까지만 허용됐다. 성모 마리아와 성 요셉이 아기 예수에게 할례를 베풀고 율법에 따라 정결례를 거행하고 아기 예수를 봉헌하기 위해 예루살렘 성전에 왔을 때 시메온과 예언자 한나를 만난 곳도 이 여인의 뜰이라 학자들은 추정한다. 유다 여인들이 성전 경내에 들어갈 수 있는 유일한 공간이기 때문이다. 여인의 뜰에는 나팔 모양의 헌금함이 13개 있었다. 순례자들은 이 헌금함에 성전 세를 바치고 돈과 값비싼 물품들을 봉헌했다. 예수님은 이 여인의 뜰에서 헌금함 맞은쪽에 앉으시어 사람들이 헌금함에 돈을 넣는 모습을 보고 계셨다. 큰돈을 넣는 많은 부자 가운데 가난한 과부 한 사람이 와서 렙톤 두 닢을 넣는 모습을 보셨다. 예수님 시대 유다 사회에서 과부는 남편의 재산을 관리할 수 없었기에 다른 이의 자선에 의존해 궁핍하게 살아야 했다. 가난한 과부의 헌금을 지켜본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저 가난한 과부가 헌금함에 돈을 넣은 다른 모든 사람보다 더 많이 넣었다. 저들은 모두 풍족한 데에서 얼마씩 넣었지만, 저 과부는 궁핍한 가운데에서 가진 것을, 곧 생활비를 모두 다 넣었기 때문”이라며 하느님께 삶 전체를 내놓는 과부의 모습을 닮으라고 가르치셨다(마르 12,41-44; 루카 21,1-4 참조). 여인의 뜰 사면 모퉁이에는 4개의 큰 방이 있고 양편으로 회랑이 있었다. ‘가운데 뜰’로 불린 이 방들은 나지르인들과 회복한 병자(요한 5,1-16 참조)를 위한 방과 제단용 나무와 포도주를 보관하는 방으로 사용됐다. 여인의 뜰에서 15개 계단을 올라가면 ‘이스라엘인의 뜰’로 들어가는 아름다운 청동문이 있었다. 20명의 장정이 달라붙어 힘겹게 열어야 할 만큼 육중했던 이 문은 ‘니카노르 문’이라 불렸다. 이 니카노르 문이 열리면 예루살렘의 하루가 시작됐다. 니카노르 문을 통해 유다의 남자들만 제물을 바치러 ‘이스라엘인의 뜰’ 안으로 들어올 수 있었다. 이 뜰은 상징적으로 종교상 유다의 남성이 여성보다 더 우월하다는 것을 드러내는 장소였다. 이 뜰 너머에 ‘사제의 뜰’(제관의 뜰)이 있었다. 이곳부터 실제로 ‘성소’였다. 사제의 뜰에는 희생제물을 도살하는 장소와 제물을 위한 제단과 정결 예식을 위한 청동 물두멍이 있었다. 하느님께 바쳐질 희생 짐승들은 8개 말뚝에 묶여 도살했기에 늘 피비린내와 지방과 내장을 태우는 악취로 가득했다. 대사제는 사제의 뜰 난간 중앙에 마련된 작은 계단 위에서 이스라엘을 축복했다.성전은 사제의 뜰에서 12계단 위에 솟아 있었다. 이방인의 뜰과는 30암마(약 13.5~16m)의 표고 차가 났다. 성소는 솔로몬 성전의 성소 크기와 똑같이 40암마(약 18~21m) 크기였다. 너비 역시 똑같이 20암마로 성소와 지성소는 휘장으로 구분돼 있었다(마태 27,51; 마르 15,38; 2역대 3,14). 성소 입구에 기둥이 있었다. 헤로데는 이 기둥 꼭대기에 로마를 상징하는 황금 독수리를 장식하려 했으나 이를 반대하는 폭동이 일어나 결국 실패하고 말았다. 성전 문은 향백나무에 황금을 입히고 하느님의 창조를 상징하는 황금 포도나무를 새겨넣었다. 이 포도나무 때문에 로마 군인들은 “이스라엘의 진짜 신은 술의 신인 디오니소스(바쿠스)”라고 조롱했다. 성전에는 유다 최고의회인 산헤드린이 열리는 방과 성결례의 물을 길어다 놓은 방이 있었다. 둘레에는 사제들의 숙소와 사무실로 쓰인 3층으로 된 38개의 방이 이었다. 또 창을 내 실내를 아주 밝게 한 성소에는 즈루빠벨 성전에서 사용했던 일곱 가지 촛대와 하루에 2번 바치는 황금 향단 등 성물이 있었다. 이 촛대는 예루살렘을 멸망시킨 티투스 장군이 전리품으로 가져왔는데 지금도 로마의 포로로마노 앞에 있는 서 있는 개선문에 그 장면이 새겨져 있다. 성소 안에는 어둡고 영원한 정적에 잠겨 있는 지성소가 있었다. 이 지성소 안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1년에 단 한 번 대사제만이 이곳에 들어가 눈으로 볼 수 없는 존재를 향해 떨리는 마음으로 향을 피웠다. 유다인들에게 있어 이 성전보다 더 장엄한 것이 없었다. 예수님의 제자들도 모든 유다인이 그렇듯이 “얼마나 대단한 돌들이고, 얼마나 장엄한 건물들입니까”(마르 13,1)라며 감탄했었다. 리길재 기자 teotokos@pbc.co.kr 평화신문2014.11.25
![[20세기를 빛낸 신학자들] (75)요셉 피츠마이어 (하)](//cpbc.co.kr/CMS/newspaper/2015/01/rc/551087_1.0_titleImage_1.jpg)
[20세기를 빛낸 신학자들] (75)요셉 피츠마이어 (하)>75< 피츠마이어 신부가 살고 있는 미국 조지타운대 예수회 공동체. 지난 호에서도 언급했듯 신약성경의 아람어적 배경에 대한 피츠마이어 신부의 연구는 고대 유다교를 공부하는 학자들에게는 보고(寶庫)와 같다. 특히 「‘사람의 아들’이라는 신약성경의 호칭에 대한 문헌학적 고찰」(The New Testament Title ‘Son of Man’ Philologically Considered)이라는 논문은 초기 그리스도교의 중요한 개념과 용어들이 생겨난 배경이 되는 유다교를 이해하는 데 큰 기여를 했다. 쿰란 동굴에서 발견된 욥기 타르굼에 대한 피츠마이어 신부의 연구와 아람어 서간학에 대한 연구는 제2 성전기와 초기 랍비 시대 유다인의 사고와 역사를 이해하는 데 열쇠 역할을 했다. 그래서 유다인 학자 로렌스 쉬프만은 피츠마이어 신부를 두고, 사도행전 5장 34절에 나오는 “온 백성에게 존경을 받는 율법 교사”라고 평했다. 사제로서 사목적 관심과 배려피츠마이어 신부의 학문적 업적은 여기에서 그치지 않는다. 그의 연구 활동은 대학에 국한되지 않았다. 가톨릭 사제로서 그는 신자들을 향한 사목적인 관심과 배려 또한 잊지 않았다. 성경에 관한 지식을 일반 성직자와 수도자, 평신도들에게도 나눠주기 위해 노력했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가 폐막하기 이전인 1964년 조지타운대학교에서 여름방학을 이용해 성경 강좌를 개최하는 ‘여름 성경연구소’를 만들었고, 그 후 25년간 이 연구소를 이끌었다. 2013년 이 연구소는 설립 50주년을 기념해 그 이름을 ‘조지타운대학교 요셉 피츠마이어 성경 연구소’로 바꿨다. 가톨릭 교회 내 일반 신자들에게 성경 지식을 나누고자 하는 피츠마이어 신부의 관심은 일반 신자들이 쉽게 참조할 수 있는 주석서를 편찬할 의향을 품게 했다. 그의 바람은 같은 뜻을 지녔던 다른 두 가톨릭 성경학자들과 협력을 통해 결실을 맺게 됐다. 미국 가톨릭 성서학계의 세 거장이라고 할 수 있는 이들이 같은 목적을 위해 뜻을 함께한 것이다. 예수회의 피츠마이어 신부, 슐피츠회의 레이몬드 브라운 신부, 가르멜회의 롤랜드 머피 신부는 「예로니모 성경 주석서」(The Jerome Biblical Commentary, 1968)와「신 예로니모 성경 주석서」(The New Jerome Biblical Commentary, 1990)를 편찬했다. 이외에도 피츠마이어 신부는 여러 본당 단체들의 부탁이 있을 때마다 강의했는데, 팔순을 넘어서도 계속했다고 한다. 종교간 대화 활동그는 또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정신에 따라 교파를 초월해 신학적 대화를 하도록 이끌어내는 데 훌륭한 역할을 했다. 그는 1979년부터 1988년까지 교황청 일치평의회 자문위원으로서 다양한 개신교 교파들과 대화에 참여했다. 이 가운데 가장 두드러진 업적을 꼽는다면 1999년 10월 31일 독일 아우크스부르크에서 가톨릭 교회와 루터 교회 대표자들이 ‘의화론에 관한 공동 선언’에 서명을 하게 된 기념비적 사건이다. 의화론(義化論)은 가톨릭 교회와 루터교 간의 오랜 쟁점이었다. 루터교는 믿음(신앙)으로만 구원받는다고 주장했고, 가톨릭 교회는 믿음과 함께 선행을 실천해야 구원받는다고 가르쳤다. 두 교회는 공동 선언을 통해 “구원은 하느님의 자유로운 선물이며, 이는 선행을 통해서가 아니라 은총과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통해 온다. 그러나 성령께서 주시는 은총은 인간에게 선행할 힘을 주고 또 그렇게 하도록 부르신다”고 합의했다. 공동 선언이 발표된 날은 1517년 마르틴 루터가 독일의 비텐베르그 성당 문에 95개의 주제문을 붙였던 날과 같은 날이다. 공동 선언이 이뤄질 수 있었던 것은 두 교회가 35년간 신학 대화를 주고받은 결과였다. 피츠마이어 신부는 신약 성경 학계의 주도적인 가톨릭 학자로서 거의 30여 년에 걸쳐 가톨릭 교회와 루터 교회 간 대화에 참여했다. 평가와 인간적 면모 지금까지 살펴본 요셉 피츠마이어 신부의 생애는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이전부터 현재까지 약 60년에 이르는 가톨릭 성서학계의 역사를 요약하는 것과 같다. 그는 공의회 이전까지 이뤄진 가톨릭 성경학자들의 연구에 바탕을 두는 동시에 19세기 이후 개신교 성경학자들이 성경 연구에 적용한 방법들을 성경 연구에 도입했다. 이제는 그의 뒤를 이어 훨씬 더 많은 가톨릭 성경학자들이 학문적인 성경 연구에 참여하고 있다. 피츠마이어 신부처럼 학문적인 성경 연구가 가능하도록 길을 열어준 학자들 덕분에 성경 연구에 바탕을 둔 초교파적 신학 대화의 문이 그전보다는 훨씬 더 넓게 열리게 됐다. 그리고 피츠마이어 신부와 같은 학자들의 노력과 더불어 가톨릭 교회 안에서 성경에 대한 관심이 고조됐고, 성경에 대한 지식에 목마른 수천 명의 남녀 수도자들과 평신도들이 피츠마이어 신부가 세운 여름 성경 연구소로 밀려들었다. 피츠마이어 신부를 아주 가까이에서 지켜본 이들의 증언에 따르면 그는 거의 수도자처럼 생활한다. 매일 새벽 네 시에 일어나 미사를 드리고, 저녁 8시 30분이면 잠자리에 들었다. 학문하는 자세에 있어서 피츠마이어 신부는 아주 정확하고 꼼꼼했다. 논문을 쓸 때 사용하는 일차 자료와 이차 자료를 모두 두 번씩 반복 확인했다고 한다. 이렇게 정확성을 중요하게 생각했기 때문에 본의 아니게 학문적 논쟁에 참여하게 된 경우도 있었다. 그리고 국제적인 모임을 통해 세계의 여러 나라 사람들을 만나고, 세상의 여러 곳을 방문하는 것을 아주 좋아했다.이와 함께 그는 성경 연구만큼이나 요리를 즐겼다. 이제 만 94세가 된 피츠마이어 신부는 워싱턴 D.C.에 있는 예수회 대학 조지타운대 예수회 공동체에서 살고 있다. 평생을 교육자로서 가르치고, 미래의 학자들을 길러내는 일에 열정을 쏟았던 그의 모든 노력은 이제 그의 가르침을 받았던 많은 후학을 통해, 하느님 말씀을 어떻게 구체적인 삶의 현장에서 실천하며 살아야 하는지를 여름 성경연구소를 통하여 배웠던 수많은 평신도와 성직자, 수도자의 삶의 통해 이어질 것이다. 피츠마이어 신부가 뿌린 씨앗은 온 세상 곳곳에서 오십 배, 백 배의 열매를 맺고 있을 것이다.요셉 피츠마이어 신부의 저서 중 한국에 번역된 책은 다음과 같다. 「바울의 신학」(솔로몬, 1996). 「바울로의 신학」(분도출판사, 2001), 「로마서를 통한 영신수련」(바오로딸, 2000), ‘예수의 동정 잉태와 신약 성서’(「신학전망」제 36호, 92~116쪽)김영선 수녀(마리아의 전교자 프란치스코회) 평화신문2015.01.20
![[복음 이야기] (34) 성전 (1)](//cpbc.co.kr/CMS/newspaper/2014/10/rc/536652_1.0_titleImage_1.jpg)
[복음 이야기] (34) 성전 (1)‘하느님께서 늘 함께하신다’는 표징 하느님께서는 집을 짓고 특정한 신상을 만들어 숭배하는 것을 금하셨다. 사진은 판관이나 왕이 사용했던 천개를 재건한 모습. 출처=「성경 역사 지도」, 분도출판사 “만군의 주님, 당신의 거처가 얼마나 사랑스럽습니까! 주님의 앞뜰을 그리워하며 이 몸은 여위어 갑니다. …행복합니다. 당신의 집에 사는 이들! 그들은 늘 당신을 찬양하리니. 셀라. …정녕 당신 앞뜰에서 지내는 하루가 다른 천 날보다 더 좋습니다. 저의 하느님 집 문간에 서 있기가 악인의 천막 안에 살기보다 더 좋습니다”(시편 84,1-11).이와 같이 시편은 20회 이상이나 성전의 아름다움과 신심 깊은 모든 유다인의 성전에 대한 애착을 노래하고 있다. 유다인에게 성전은 삶의 핵이며 중심이었다.이스라엘에 있어 성전은 오직 하나뿐이었다. 유다 역사학자 플라비우스 요세푸스는 “유일신에게는 오직 하나의 성전, 즉 하느님께서 그렇듯이 모든 사람에게 공통인 오직 하나의 성전이 있을 뿐”이라고 강조했다. 그래서 사마리아인들이 게리짐 산에 세운 성전을 “하느님이 싫어하시는 이단자의 것”이라고 유다인들은 경멸했다.유다인에게 성전은 하느님께서 이스라엘 민족과 늘 함께하신다는 ‘현존의 표징’이었다. 이 성전을 구약성경에선 히브리말로 ‘미케다쉬’와 ‘헤칼’로, 신약성경에선 헬라말로 ‘이에론’ ‘나오스’ ‘오이코스’라고 표현했다. 가톨릭 교회는 이 성전을 ‘그리스도의 몸과 교회’라는 의미로 받아들이고 있다.족장 시대 유다인들은 하느님을 위한 특별한 성전을 지을 필요가 없었다. 하느님께서는 언제 어디서든 자신이 원하는 곳에 나타나시고 족장들은 하느님께서 현시하신 곳에 희생 제단이나 돌기둥으로 기념하는 것으로 족했다(창세 28,22). 그러나 이스라엘이 민족 단위로 성장하면서 한 분이신 하느님을 섬기며 민족 전체가 모일 수 있는 구심점이 필요하게 됐다. 이집트 탈출 후 40년간의 광야 생활과 가나안 정복 이후 판관 시대에는 계약의 궤를 모신 ‘성막’이 그 역할을 했다(탈출 25장 참조). 특히 판관 시대(기원전 1250~1050년께)에는 성막이 정치ㆍ종교ㆍ사회 문제를 해결하는 구심점이었다. 이 성막이 있었던 ‘길갈’(여호 4,20)ㆍ‘스켐’(여호 24,1)ㆍ‘실로’(1사무 1,3)는 이스라엘의 중심이 됐다.왕정 시대로 통일 왕국을 건설한 다윗은(기원전 1010~970년) 성전을 건축(2사무 7,2)하려 했다. 그는 건축 자재를 구하고 보물을 모으며 성전 터를 사는 등 만반의 준비를 했으나 전쟁터에서 많은 사람을 죽여 하느님께로부터 성전 건축의 허락을 받지 못했다(1역대 22,8; 2사무 24,18-25). 그래서 그의 아들 솔로몬이 기원전 968년에 성전 건축을 시작해 7년 후에 완공했다(1열왕 6,37-38). 따라서 유다인이 봉헌한 하느님의 첫 성전은 예수님 탄생 1000년 전에 지어졌다.사실 율법은 집을 지어 우상 숭배하는 것을 금하고 하느님께서 선택하신 곳에서 번제물과 희생제물을 바치도록 명하고 있다(신명 12장 참조). 그래서 다윗이 성전을 지으려 했을 때 나탄 예언자는 다윗에게 하느님의 계시 말씀을 다음과 같이 전했다. “주님이 이렇게 말한다. 나는 이집트에서 이스라엘 자손들을 데리고 올라온 날부터 오늘까지, 어떤 집에서도 산 적이 없다. 천막과 성막 안에만 있으면서 옮겨 다녔다. 내가 이스라엘의 모든 자손과 함께 옮겨 다니던 그 모든 곳에서, 내 백성 이스라엘을 돌보라고 명령한 이스라엘의 어느 지파에게, 어찌하여 나에게 향백나무 집을 지어 주지 않느냐고 한 마디라도 말한 적이 있느냐?”(2사무 7,5-7)며 성전을 짓지 말라고 하셨다. 또 이사야 예언자는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다. “하늘이 나의 어좌요 땅이 나의 발판이다. 너희가 나에게 지어 바칠 수 있는 집이 어디 있느냐? 나의 안식처가 어디 있느냐?”(이사 66,1) 하고 하느님께 어떤 집을 지어 드릴 수 있는지 반문한다. 첫 그리스도교 순교자 스테파노도 “지극히 높으신 분께서는 사람의 손으로 지은 집에는 살지 않으십니다. 이는 예언자가 말한 그대로입니다. 하늘이 나의 어좌요 땅이 나의 발판이다. 너희가 나에게 무슨 집을 지어 주겠다는 것이냐? 또 나의 안식처가 어디 있느냐? 이 모든 것을 내 손이 만들지 않았느냐”(사도 7,48-50)며 성전을 중시하지 않았다.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이스라엘 민족의 전통을 존중하시면서 성전에 가서 유다인들과 같이 성부이신 하느님께 기도하셨다. 리길재 기자 teotokos@pbc.co.kr 평화신문2014.10.29
![[복음 이야기] (28) 사두가이](//cpbc.co.kr/CMS/newspaper/2014/09/rc/529477_1.0_titleImage_1.jpg)
[복음 이야기] (28) 사두가이보수적 성향의 오만한 상류층 집단 사두가이는 대사제 등 이스라엘 고위 성직과 관료직을 독점한 유다교 정파이다. 사진은 조토가 그린 ‘가야파 앞에 서신 예수’ 프레스코화 오늘날 ‘통곡의 벽’이라 불리는 예루살렘 성전 서쪽 벽을 정면으로 바라볼 수 있는 유다인 지구는 예수님 시대 당시 사두가이가 주류를 이루던 상류층 거주 지역이었다. 이들은 주로 고급 관료와 고위직 사제, 대상, 지주들이었다. 사두가이는 기원전 2세기부터 서기 1세기까지 활동하던 유다교 유력 당파로 다윗과 솔로몬 시대 때 대사제였던 사독(2사무 8,17; 1열왕 1,34)을 따르는 사람들이었다. 이들은 이방인뿐 아니라 율법을 철저히 지키지 않는 유다인과 자신들을 구분하기 위해 ‘분리된 자’로 스스로 칭했던 바리사이처럼, ‘정의를 따르는 사람’ ‘의로운 사람’이란 뜻의 ‘사두가이’라 자랑했다. 사두가이는 마카베오 가문이 세운 하스모네아 왕조의 후원을 받으며 귀족 정치집단으로 성장했다. 그들은 기원전 109년 사마리아를 정복한 하스모네아 왕조 요한 히르카노스 1세(기원전 134~104년)와 손을 잡은 후 서기 70년 아브월(7~8월) 9일 예루살렘 성전 멸망 때까지 부와 상류층 특권을 누렸다. 자연히 그들은 사회 변화보다 현상 유지에 더 관심이 있었고, 종교적으로는 보수적 성향을 나타냈으며, 정치적으로는 항상 힘있는 외세에 협력했다.예수님 시대 당시 유다인 사회의 두 주류였던 사두가이와 바리사이는 ‘이방인 세계에서 어떻게 하느님의 백성을 보호할 것이냐’는 질문에 근원적이고 본질적인 시각차를 보여 원수처럼 냉랭했다. 사두가이는 모세 오경에 나오는 율법을 문자 그대로 받아들이고 살았다. 바리사이와 달리 모세 오경을 폭넓게 해석할 수 있는 구전 전승을 철저히 거부했다. 그래서 성경에 대한 해석도 바리사이와 사뭇 달랐다. 예를 들어 ‘보상법’을 다룬 레위기 24장 19-20절 규정(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갚는다)에 대해 바리사이는 눈이면 눈에 대한 가치를 계산해 가해자에게 형벌을 줘야 한다고 생각한 반면 사두가이는 문자 그대로 가해자의 눈을 도려내야 한다고 주장했다. 사두가이는 또 안식년 규정을 엄격히 지켜 노예 해방이나 부채 면제 등을 엄격히 실시할 것을 요구했다. 상류층이 주류를 이룬 사두가이는 대중의 지지를 받지 못하였지만 바리사이는 일반 대중의 지지를 얻었다. 또 바리사이들은 서로 우의가 있으며 조화로운 공동체를 이뤘지만 사두가이는 서로 간에도 야비한 행동을 하며 마치 이방인 대하듯 무례했고, 신분이 낮은 자들에게는 오만하고 냉엄했다. 사두가이는 율법에 부활에 대한 언급이 없어서 죽은 자의 부활이나 천사, 영혼의 존재 등을 거부했다. 따라서 그들은 내세의 보상이나 형벌을 믿지 않았다. 따라서 현세의 삶을 중시하고 인간의 자유 의지와 책임을 강조했다. 인간은 자신의 행동에 상응하는 보상과 징벌을 현세에서 받는다고 믿은 사두가이들은 현 사회에서 자기들이 누리는 지위와 부가 하느님께서 내려주신 축복의 표지라고 여겼다.복음서에서 사두가이에 대한 언급은 그리 많지 않다. 마르코(12,18)와 루카(20,27) 복음서에서 각각 한 번, 마태오 복음서에서 세 번(3,7; 16,1-12; 22,23-33) 나온다. 또 사도행전에는 사두가이가 예수님과 사도들의 적대자, 핍박자, 예수님과 사도들을 죽음에 이르게 한 대사제의 추종세력으로 등장하며 그리스도교 교리를 반박하는 자들로 묘사되고 있다(사도 4,1; 5,17; 23,6-8 참조).예수님 시대 사두가이들은 성전과 밀접하게 관련된 사람들이었다. 성전에서 제사를 담당했던 고위 성직자들이요 귀족 정치인들이었다. 그들은 예루살렘 성전을 순례하는 유다인들에게 십일조를 거둬 성전 재정을 관장했다. 사두가이는 예수님께 대해서만은 바리사이와 같은 노선을 취했다. 예수님의 가르침이 불변의 율법을 파괴한다고 여겼을 뿐 아니라 메시아 사상을 용인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또 예수님의 활동은 로마인과 그들의 관계를 곤란하게 만들 우려가 있어 사두가이들은 예수님을 철저하게 반대했다. 사두가이는 그들의 주요 활동 무대였던 예루살렘 성전이 서기 70년 로마에 의해 파괴된 후 정치적 영향력을 발휘할 수 없어 자연히 그 정체성도 함께 사라졌다.리길재 기자 teotokos@pbc.co.kr 평화신문2014.09.17

신약의 비유 착한 사마리아 사람의 비유사회적 이념으로 편을 가르려는 시선 비판 사마리아인이 다친 여행자를 말에서 내리게 돕는 모습. 성화는 빈센트 반 고흐의 「착한 사마리아 사람」. 루카 10,25-37이 비유 역시 가장 많이 알려지고 사랑받는 비유다. 예화에 속하는 이 비유는 가장 큰 계명, 즉 영원한 생명을 얻기 위한 계명에 대한 율법 교사와의 논쟁으로 시작된다. 율법에서 가장 큰 계명이 사랑의 이중계명임을 확인한 율법 교사는 예수께 누가 이웃인지 묻는다. 이 질문은 실제로 “영역을 어디까지 정해야 하는지”를 의미하는 것이다. 그에 대한 대답으로 이 비유가 주어진다.도움의 손길 건넨 진정한 이웃한 여행자가 예루살렘에서 예리코로 내려가는 길에서 강도를 만나 초주검이 된다. 이 길은 옛날부터 험하고 위험하기로 소문난 곳이었다. 예루살렘은 해발 820m이고 예리코는 해발 250m로 1000m 이상 고도차가 나고 거리는 약 27㎞ 떨어져 있다.이 초주검 상태가 의식을 잃고 죽은 것처럼 보인 것인지, 위급하지만 도움이 필요한 상황인지에 따라 해석이 조금 다를 수 있다. 왜냐하면 율법에 의하면(레위 21,1-2; 에제 44,25-27) 어떤 사람이 시신을 만지면 일주일 동안 부정한 상태가 되며, 특히 사제는 가족의 시신을 제외하고는 어떤 시신도 만질 수 없었고, 가족의 시신을 만졌을 경우에도 일주일 동안 부정한 상태가 된다. 그러나 사마리아인이 그를 도왔고 사제와 레위인이 멀찍이 돌아간 것으로 보아 적어도 그는 시체처럼 보이지는 않았을 것이다.처음 등장한 인물은 사제다. 사제는 여행자를 보고는 길 반대편으로 지나가 버린다. 환자의 상태를 살피지도 않고 멀찍이 돌아간 것은 명백한 도움 거절이다. 그 다음 등장한 인물은 레위인인데 그 역시 길 반대편으로 지나간다. 사제도 레위 부족에 속한 사람이지만 첫 번째 사제직을 맡은 아론의 후손이고, 레위인들의 역할은 제사 동안에 사제를 돕는 일이었다. 이 두 사람은 사람의 생명을 살리는 것이 모든 율법 규율에 앞선다는 것을 알면서도 관여하지 않았다.그 다음에 등장하는 사람이 사마리아 사람이다. 유다인들은 사마리아 사람들을 변절자로 여겼고 경멸의 대상으로 생각했다. 그 이유는 이스라엘의 역사 안에서 왕국이 둘로 갈라진 시점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솔로몬 왕의 사후 이스라엘은 남 유다 왕국과 북 이스라엘 왕국으로 분리되어 약 200년간 함께 존속한다. 기원전 722년 아시리아에 의해 먼저 북 이스라엘 왕국(사마리아)이 멸망하는데 아시리아 왕은 기존의 거주민들을 유배시키고 이방인들을 거주시키는 민족 혼합정책을 썼다. 유다인들은 그때부터 사마리아 사람들을 이방인이거나 이방인들보다는 조금 더 가깝지만 절대 동족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사마리아인도 역시 사마리아 모세오경을 갖고 있었기 때문에 핑계를 대고 그냥 지나칠 수 있었다. 그렇지만 그는 가엾은 마음이 들어 여행자를 치료하고 여관으로 옮겨 돌본 다음 떠나면서 두 데나리온을 주인에게 맡기고 돈이 더 들면 돌아와서 갚겠노라고 이야기한다.사마리아 사람의 이 행위는 상당한 위험을 무릅쓴 것이다. 환자를 돌보면서 본인도 강도를 만날 수 있었고, 또 민족적인 감정에서 다른 사람에게 강도로 오인될 수도 있었다. 그러나 그는 당시 치료약으로 쓰이던 올리브유와 포도주로 치료하고, 여관으로 옮겨 돌보아준다. 그가 떠나면서 맡긴 두 데나리온은 일반 노동자의 이틀 품삯으로, 환자가 여관에서 1~2주일 정도 머물며 봉사를 받을 수 있는 금액이었다.이웃을 내 몸처럼 사랑하라이 비유를 말씀하신 예수께서는 율법 교사에게 “누가 이웃이 되어주었느냐?”고 물으신다. 사제와 레위인의 행동 때문에 이 비유를 듣기 힘들었을 율법 교사는 차마 “사마리아인”이라고 대답하지 못하고 “그에게 자비를 베푼 사람”이라고 대답한다.이 비유의 앞에 나오는 율법 교사의 질문 “누가 저의 이웃입니까?”라는 질문은 “누가 이웃이 아닌가?”라는 의미도 포함되어 있다. 당시 유다인들은 자기 동족과 유다교로 개종한 사람들만 이웃으로 생각하였다. 그러나 유다인들은 사마리아인들을, 그리고 바리사이들은 죄인들을 이웃으로 생각하지 않았다. 예수께서는 이 비유를 통해서 누가 이웃이고 누가 이웃이 아닌지 사람들을 구별하려는 시도는 잘못된 것이며, 그보다 “나를 필요로 하는 사람에게 이웃이 되어주었는가?”를 물어야 한다고 가르치신다.그리스도교 신학과 윤리는 하느님 사랑과 이웃을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는 계명에 근거한다. 첫 번째 규범은 고대의 셰마(신명 6,4-5)에 근거하는데, 이는 유다교 전승의 규범적이고 신앙 고백적 선언이다. 두 번째는 사도 바오로가 다시 취하는데, 그는 이웃을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는 계명이 구약의 모든 윤리적 가르침의 요약이라고 생각하였다(로마 13,8-10; 갈라 5,14). 다른 곳에서는 이 계명이 그리스도교 전통의 “지고한 법”(야고 2,8)으로 칭해지는데, 이것이 이 비유의 가장 매력적인 측면이다. 경계를 정하기 위해 이웃 사랑과 관련된 율법을 도구화하려는 의도에 반해, 예수의 관점에서 그분의 진정한 의도는 사람을 구별하려는 어떠한 시도도 용납하지 않으신다. 이웃 사랑은 하느님 사랑에서 영감을 받고, 이웃 사랑을 통해 하느님 사랑을 실천하는 것이다. 백영민2014.10.08

예언자 엘리야가 거짓 예언자들과 싸워 하느님 증거한 산[사진으로 떠나는 이스라엘 성지기행] 21. 카르멜 산하느님의 포도밭 카르멜 산 정상에서 바라본 이즈르엘 평원. 우리말 '포도밭'을 뜻하는 히브리말 '케렘'에서 유래한 카르멜(하느님의 포도밭)산은 지중해 연안을 끼고 카이사리아에서 하이파 만까지 이스라엘 북서부로 길게 뻗어 있다. 해발 546m 최고봉에서 동쪽으로 이즈르엘 평원이, 서남쪽으로 샤론 평야가 펼쳐져 있다. 팔레스타인 지역 대부분 산은 '민둥산'인데 카르멜산은 숲으로 우거져 있다. 또 남서면의 가파른 언덕 곳곳에는 동굴들이 많아 고대 구약시대 때부터 주거지와 은신처로 이용됐다(아모 9,3). 이 동굴들에선 기원전 4000년대, 신석기 시대에서 청동기 시대로 넘어가는 시기의 팔레스타인 지역민들 집터와 무덤들이 발굴됐다. 카르멜산은 고대 가나안 사람들로부터 신성한 산으로 여겨졌다. 그들은 이 산에 산당을 짓고 제단을 세웠다. 기원전 15세기부터 12세기까지 이곳을 지배했던 이집트 파라오 투트모세 3세와 람세스 2세, 람세스 3세는 문헌에 '거룩한 산'이라 기록했다. 구약성경도 카르멜 산이 우상숭배의 중심지였고, 엘리야 예언자가 바알의 거짓 예언자 450명과 아세라 예언자 400명과 대결해 참 하느님을 증명한 장소라고 기록하고 있다(1열왕 18, 20-40). 솔로몬 사후 이스라엘이 남북으로 갈라졌을 때 예로보암이 북이스라엘의 첫 번째 왕이 됐다. 불안정한 정국을 겪던 북이스라엘은 제6대 오므리 왕 때에 가서 겨우 왕정을 확립했다. 기원전 860년 오므리의 아들로 왕위에 오른 아합은 지중해 시돈의 공주 이제벨과 정략 결혼해 국력을 강화했다. 이제벨 공주가 시집올 때 시돈의 신인 '바알과 아세라' 신앙을 들여와 북이스라엘에 퍼뜨렸다. 사실 바알 신앙은 모세 시대 이전부터 가나안 땅에 퍼져 있었다. 이스라엘 초대 왕인 사울의 아들도 '바알의 사람'이란 뜻을 가진 '에스바알'(1역대 8,33)이었다. 이스라엘 탈출 사건을 통해 하느님의 현존을 체험한 이스라엘 민족이 '폭풍과 비의 신'인 바알과 '풍요의 여신' 아세라의 우상에 현혹된 것은 아마도 정착민으로 유목과 함께 농경생활을 시작하면서 무엇보다 풍요를 염원했기 때문일 것이리라. 해발 482m 지점 카르멜산 등성에는 엘리야 예언자가 '무흐라카'(불의 제단)를 쌓아 바알의 거짓 예언자와 대결했다는 장소가 있다(1열왕 18, 20-40). 유다인들은 12개 돌로 쌓은 이 '엘리야 제단'에 순례를 왔고, 초대교회 신자들도 이 산을 경건히 여겨 570년부터는 은수자들이 들어와 수도생활을 하기 시작했는데 이것이 가르멜 수도원의 기원이 됐다. 무슬림들도 이곳을 찾아와 엘리야 예언자에게 경의를 표하고 기도 촛불을 밝혔으며, 십자군들도 엘리야 제단이 있던 터에 성당을 세웠다. 이 성당은 오스만 튀르크 군에 의해 폐허가 됐으나 19세기 초반 남자 가르멜 수도원이 들어와 지금까지 성지를 보존하고 있다. 글ㆍ사진=리길재 기자 teotokos@pbc.co.kr평화방송여행사 협찬 02-2266-1591~2cpbc2014.04.01
![[복음 이야기] (20) 종교적 평등으로 이뤄진 이스라엘 열두 지파](//cpbc.co.kr/CMS/newspaper/2014/06/rc/515115_1.0_titleImage_1.jpg)
[복음 이야기] (20) 종교적 평등으로 이뤄진 이스라엘 열두 지파신앙·율법 통해 지파간 평화·단합 이뤄 프란치스코 교황이 지난 5월 중동지역 사목방문 때 이스라엘 랍비들로부터 이스라엘 민족의 상징인 메노라(촛대)를 선물받고 있다. 【CNS】 성경시대 이스라엘은 열두 지파의 혈맹 공동체였다. 열두 지파의 분할은 야곱이 마지막으로 열두 아들을 축복했을 때에 기원한다. (창세 49,1-28) 야곱은 첫 부인 레아에서 맏아들 르우벤과 시메온, 레위, 유다, 이사카르, 즈불룬을, 라헬에게서 요셉과 벤야민을 낳았다. 또 라헬의 몸종 빌하에게서 단과 납탈리를, 레아의 몸종 질파에게서 가드와 아세르를 낳았다.(창세 35,23-26) 열두 명의 아들을 낳은 야곱은 또 이집트 피난살이 때 요셉이 온의 사제 포티 페라의 딸 아스낫에게서 낳은 므나쎄와 에프라임(창세 46,20)을 자기 아들로 삼아 상속재산을 받게 했다.(창세 48,5-7)야곱의 자손들은 이집트에서 오랫동안 살다가 종살이 처지로 몰락한 후 모세의 인도로 시나이 산에서 십계명을 받고 40년간 광야생활 끝에 가나안 땅 팔레스티나 지역을 점령하고 정착해 한 민족을 이루게 된다. 이 시기를 기원전 13세기 말로 추정한다. 민수기에 따르면 가나안 정착과 함께 지파별로 땅을 나눌 때 사제 가문인 레위 지파는 영토 할당에서 빠지고, 요셉의 몫은 두 아들 므나쎄와 에프라임으로 분할돼 열두 지파의 땅을 나눴다.(민수 1,5-15. 20-43) 이후 이스라엘은 왕정시대가 시작될 때까지 약 200년 동안 지파 체계를 유지했다. 열두 지파의 장로들은 하느님 신앙과 율법을 통해 지파 간의 평화와 단합을 이뤘고, 기원전 12세기 말경 실로에 ‘계약의 궤’가 안치되면서 이곳을 중심으로 지파 간의 문제를 조정, 해결했다. 사울과 다윗, 솔로몬의 왕정 시대 이후 이스라엘은 이스라엘과 유다 두 왕국으로 나뉘었다. 이스라엘은 북부 열개 지파로 왕국을 이뤘으나 기원전 722년에 아시리아에 점령된 후 완전히 멸망했다. 유다 왕국도 신흥국가인 바빌로니아의 공격으로 기원전 587년 예루살렘 함락과 함께 멸망했다. 이후 이스라엘 민족은 바빌론 유배(기원전 587~539년)와 페르시아, 그리스, 로마, 이슬람 제국의 지배를 받으며 전 세계 곳곳에 뿔뿔이 흩어져 1948년 5월 14일 이스라엘 건국을 선포할 때까지 2000년 넘게 나라 없는 민족으로 살았다. 그러나 이스라엘 민족은 자신의 혈통과 가문을 중시했다. 복음서 저자들은 예수님께서 다윗 가문 출신임을 잊지 않고 기록하고 있다. 이스라엘이 고대 다른 민족과 근본적으로 달랐던 것은 확고한 율법으로 민족 공동체를 운영한 사실이다. 성전에 봉사하는 사제들을 제외하고는 세속의 모든 유다인들이 평등했다. “그들이 히브리 사람입니까? 나도 그렇습니다. 그들이 아브라함의 후손입니까? 나도 그렇습니다”(2코린 11,22)라고 한 바오로 사도의 말도 바로 모든 유다인은 평등하다는 대원리에 입각한 고백이다. 유다인들은 가장 가난한 사람이라도 성전 앞뜰에서 하느님을 향해 두 팔을 벌리고 기도할 때에는, 하느님의 눈에 자기나 헤로데나 평등하게 비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이러한 평등 정신은 성경 곳곳에서 찾을 수 있다. 학자들은 이것을 ‘초자연적 계획에 따라 지상의 계급 제도를 전복하려는 혁명적 흐름’이라고 풀이한다. “주 너희 하느님께서 너희에게 주시는 땅 어느 성에서 너희 동족 가운데 가난한 이가 있거든, 가난한 그 동족에게 매정한 마음을 품거나 인색하게 굴어서는 안 된다. 오히려 너희 손을 활짝 펴서, 그가 필요한 만큼 넉넉히 꾸어 주어야 한다.”(신명 15,7-8) “억울한 이를 먼지에서 일으켜 세우시고 불쌍한 이를 거름에서 들어 올리시는 분. 그를 귀족들과 당신 백성의 귀족들과 한자리에 앉히시기 위함이다.”(시편 113,7-8) 신약 시대에도 이 종교적 평등주의 원리는 유다 사회를 그대로 관통하고 있었다. 성모 마리아는 친척 엘리사벳에게 “통치자들을 왕자에서 끌어내리시고 비천한 이들을 들어 높이셨다”(루카 1,52) 고 노래했다.예수님은 산상 설교(마태 5-7장)를 통해 하느님 나라의 참 행복을 선언하시면서 이스라엘 민족과 유다 사회의 뿌리인 하느님 앞에서의 평등 사상을 갈파하셨다. 예수님은 부유한 자와 권세 있는 자는 실상 불행한 자들이며 가난한 사람은 땅의 상속자요 영원히 축복받을 것이라 가르치고 계신다.리길재 기자 teotokos@pbc.co.kr 평화신문2014.06.18
![[생활속의 복음] "하늘 나라가 가까이 왔다"](//cpbc.co.kr/CMS/newspaper/2013/12/rc/486052_1.0_titleImage_1.jpg)
[생활속의 복음] "하늘 나라가 가까이 왔다"대림 제2주일ㆍ인권주일(마태 3,1-12)조재형 신부(서울대교구 성소국장) 대림 제2주일입니다. 대림 제2주일은 인권주일이기도 합니다. 우리에게 오시는 주님은 모든 사람의 인권을 지켜주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오늘 대림 제2주일을 지내면서 소외된 이웃들, 가난한 이웃들, 굶주린 이웃들, 장애인들, 버려지는 생명들을 위해서 기도해야겠습니다. 우리들이 늘 가지고 다니는 것들이 있습니다. 어떤 것들이 있을까요? 남자들과 여자들은 가지고 다니는 것들이 조금 다른 것을 봅니다. 여성들은 대부분 가방을 가지고 다닙니다. 그 가방 안에는 정말 많은 것이 들어 있습니다. 저는 남자이기 때문에 여자들이 가지고 다니는 것들은 잘 모릅니다. 남자들은 보통은 지갑, 열쇠, 손수건 같은 것들을 지니고 다닙니다. 남자와 여자들이 함께 가지고 다니는 것들이 있습니다. 무엇일까요? 저는 '휴대폰'이라고 생각합니다. 요즘 새로 나온 '스마트폰'은 단순히 전화를 걸고 받는데 익숙한 분들에게는 그 기능이 하도 복잡해서 이해하기 힘들 정도입니다. 예전에 휴대폰은 전화를 걸고 받는 것이었습니다. 그 다음에 추가된 기능은 음악을 듣고, 사진을 찍는 정도였습니다. 그런데 지금의 스마트폰은 손안에 있는 컴퓨터와 같은 기능을 하고 있습니다. 전자우편은 기본이고, 각종 기능을 내려받을 수 있어서 원하는 것은 거의 다 할 수 있을 정도입니다. 오늘의 성경 말씀은 이스라엘 백성의 희망과 꿈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스마트폰의 다양한 기능은 이스라엘 백성의 꿈과 희망에 비하면 아주 작은 것처럼 느껴집니다. 이사야 예언자는 '이사이의 그루터기에서 새싹'이 나올 것이라고 말을 합니다. 솔로몬 왕이 죽은 다음 이스라엘은 북이스라엘과 남유다로 분열됐고, 그 두 나라는 강대국에 의해 모두 멸망했습니다. 나라를 잃어버린 이스라엘 백성은 뿔뿔이 흩어졌고 마치 거대한 나무가 쓰러져서 그루터기만 남은 것과 같이 돼버렸습니다. 암울하고 어두운 시대에 이사야 예언자는 놀라운 꿈을 이야기합니다. 이사이의 그루터기에 새싹이 돋을 것이고 그 싹이 자라나 커다란 나무가 될 것이라고 말을 합니다.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것은 하느님의 영이라고 말합니다. 하느님의 영은 아브라함에게 강한 믿음을 주셔서 새로운 민족이 될 수 있게 했습니다. 하느님의 영은 모세에게 놀라운 지도력을 주셔서 파라오의 압제를 벗어나 이스라엘 백성을 약속의 땅으로 인도할 수 있게 했습니다. 하느님의 영은 다윗에게 용기를 주셔서 거인 골리앗을 이길 수 있게 했습니다. 하느님의 영은 솔로몬에게 지혜를 주셔서 이스라엘 왕국을 발전시켰습니다. 그 하느님의 영은 '지혜와 슬기의 영이며 경륜과 용맹의 영'이었습니다. 하느님의 영이 함께하면 늑대가 어린양과 함께 놀고, 어린아이가 사자와 함께 놀 수 있게 만든다고 말을 합니다. 이것은 놀라운 꿈이고, 이것은 어떠한 과학과 기술로도 이룩할 수 없는 새로운 질서입니다. 하느님의 영을 받기 위해서 우리가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오늘 복음에서 요한 세례자는 말해주고 있습니다. 우리 안에 있는 거짓된 영들을 버려야 합니다. 무엇을 버려야 할까요? 나는 할 수 없다는 열등감을 버려야 합니다. 열등감은 우리를 하느님께로 갈 수 없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우리 모두는 하느님의 모상을 닮은 소중한 존재입니다. 우리의 상처를 곪게 하는 미움과 분노를 버려야 합니다. 미움과 분노는 우리의 육체까지도 상하게 하기 때문입니다. 욕심을 버려야 합니다. 욕심은 바닷물을 마시는 것과 같습니다. 요한 세례자는 이러한 행위를 '회개'라고 말했습니다. 우리가 거짓된 영들을 버릴 수 있다면 우리는 하느님의 영을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변화될 것입니다. 과학과 기술은 새로운 기능의 제품을 만들 수 있지만 사람의 영혼을 바꿀 수는 없습니다. 하느님의 영은 낡은 영혼을 새롭게 변화시켜 줍니다. 하느님의 영은 이웃의 아픔을 보듬고, 살아 있는 모든 것을 소중하게 여길 수 있도록 이끌어 줍니다. 이것이 바로 이사야 예언자가 보았던 꿈이었습니다. 그 꿈은 우리에게 오시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지혜와 슬기, 경륜과 용맹의 영'으로 현실이 되게 했습니다. 그것이 바로 '하느님의 나라'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대림시기를 지내는 우리에게 다음과 같이 요청합니다. 우리 모두는 하느님의 영을 받을 수 있다고 말을 합니다. 하느님의 영만이 우리를 변화시킬 수 있다고 말을 합니다. "우리는 성경에서 인내를 배우고 위로를 받아 희망을 간직하게 됩니다. 인내와 위로의 하느님께서 여러분이 그리스도 예수님의 뜻에 따라 서로 뜻을 같이하게 하시어, 한마음 한목소리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느님을 찬양하게 되기를 빕니다"(로마 15,4-6). cpbc2013.12.03
![[복음이야기] (24) 대사제와 사제들(상)](//cpbc.co.kr/CMS/newspaper/2014/07/rc/520507_1.1_titleImage_1.jpg)
[복음이야기] (24) 대사제와 사제들(상)이스라엘 전통의 옹호자, 민족의 양심 역할 이스라엘 왕조시대 예루살렘 성전에는 2만여 명의 사제가 활동했다고 한다. 하느님께 제물을 바치는 데 꼭 필요한 중개자요 제례의식의 관리자인 사제의 지위는 존중되고 존경받을 수밖에 없었다. 사제는 모세 시대에 탄생하고 왕정시대 예루살렘 성전이 지어지면서 중요한 지위를 차지했다. 사제의 역할은 바빌론 유배에서 귀환한 후 더욱 커졌다. 사제는 이스라엘 전통의 옹호자로서 민족의 살아있는 양심의 역할을 했고, 유다교는 이스라엘의 절대적인 배경과 제도가 되고 또한 존재 이유가 되었기 때문이다. 사제 집안이라 해서 모두 사제가 되는 것은 아니었다. 사제는 흠 없는 온전한 신체를 가진 자여야 했다. “너희 후손 대대로, 몸에 흠이 있는 사람은 자기 하느님에게 양식을 바치러 가까이 오지 못한다. …몸에 흠이 있기 때문에 그는 휘장으로 오거나 제단으로 다가와서 나의 이 거룩한 곳들을 더럽혀서는 안 된다”(레위 21,16-23). 이 율법에 따라 하스모네아 왕조의 히르카노스는 귀를 베인 당일로 대사제직을 내놓아야 했다.사제로 선출되면 율법에 따라 세밀한 축성 예식을 거쳐 성별됐다. 성경은 사제 성별과 임직 예식을 자세히 기록해 놓았다. 사제 임직자는 몸을 정결하게 물로 씻은 후 흰옷을 입고 머리에 성별 기름을 발랐다. 그런 다음 속죄 제물로 바칠 황소 한 마리와 숫양 두 마리를 끌고 와 도살하기 전 안수를 하고 모두 번제물로 바쳤다. 주례 사제는 임직식에 쓸 두 번째 숫양의 피를 임직자의 오른쪽 귓불과 오른손 엄지, 오른발 엄지에 바른다. 그러면 임직자는 굳기름과 떼낸 양의 오른쪽 넓적다리 위에 누룩 없는 과자 하나와 기름을 섞어 만든 빵 과자 하나, 부꾸미 하나를 놓고 그것을 손으로 흔들어 바친 후 제단 위에서 불살라 연기로 봉헌했다. 이것이 구약의 사제서품 예식이다(레위 8장). 대사제의 축성 의식은 일반 사제의 성별의식보다 훨씬 장엄하고 화려했다. 대사제에게 부어지는 기름은 최상의 올리브 열매에서 짜낸 것으로 값비싼 향료를 섞어 극히 향기로웠다. 율법에 따른 희생제는 7일간 바쳐졌다.대사제는 율법상 순결을 옹호하는 최고 책임자이므로 엄한 규율을 지켰고 과부나 이혼한 여인, 또 몸 파는 전력을 가진 여인과 결혼할 수 없었다. 또 죽은 짐승의 고기는 일체 먹을 수 없었고, 성무를 수행하기 전에는 포도주를 마실 수 없었다. 그리고 시체를 멀리해야 했고, 수염은 한 오라기라도 깎아서는 안 됐다. 대사제의 옷은 화려했다. 일상복은 속옷을 입고 흰옷에 넓은 허리띠를 세 번 감고 삼각 모자를 쓴 간소한 차림새다. 성무를 집행할 때는 수놓아 뜬 속옷과 에폿, 가슴받이, 겉옷을 입고 두건과 띠를 했다. 가슴받이에는 이스라엘 12 지파의 이름이 각각 새겨져 있는 12개의 보석이 달려 있었다(탈출 39장 참조). 대축제 때에는 두건 대신 ‘주님(야훼)께 영광’이란 글이 새겨진 삼중 금관을 썼으며 대속죄일 때에는 흰옷만 입었다. 호화로운 이 대사제의 옷은 로마인에게 빼앗겨 안토니아 요새에 보관했다가 대축제일 때만 허가를 받아 입을 수 있었다. 대사제는 온갖 특권을 누렸지만, 지위가 낮은 사제들은 성전에서 생활할 수 없었고 희생으로 바친 짐승의 고기나 빵을 먹을 수도 없었다. 그들 역시 생존을 위해 노동을 해야 했다. 율법에 따라 부정을 범해 죄지은 사제에게는 특별한 형벌이 가해졌고, 사제의 아내나 딸로서 품행이 바르지 않는 이는 엄한 채찍을 받았다.모든 사제는 성소 안에서 맨발로 다녀야 했다. 성소 바닥은 정결례 목욕물이나 희생 제물의 피를 씻은 물로 항상 젖어 있어 이질과 같은 전염병에 늘 노출돼 있었다. 이스라엘의 사제들은 레위 지파에서 배출됐다. 그러나 최고 제관인 대사제의 직무는 모세의 형인 아론과 그 일족에게 맡겨졌다. 기원전 10세기 다윗왕 시절 아론의 후예로 엘아자르의 자손인 차독(공동번역 성경은 ‘사독’)이 대사제로 임명돼 솔로몬에게 기름을 부어 왕위에 올린 후(1열왕 1,39) 그 일족은 기원전 2세기 초까지 예루살렘 성전의 대사제 지위를 독차지했다. 이들은 차독(사독)의 후예들이라 해서 ‘사두가이’라 자칭하며 성전 대사제직을 누렸고, 레위인들은 이들의 복사 역할밖에 못 했다. 이처럼 소수 가문에서 사제들이 선출되면서 자기를 뽐내고 다른 이를 업신여기는 폐쇄적 특권의식이 생겨났다. 이 때문에 그들은 레위인들과 신분이 낮은 자들에게 증오의 대상이 됐다.그러나 예수님 시대 사두가이파는 혈통과 역사로 볼 때 차독의 후예라고 볼 수 없다는 게 학자들의 일반적 견해다. 마카베오 가문의 유다 독립전쟁 승리 후 비 차독 가문에 속한 하스모네아 왕조가 대사제직을 차지했고, 이후에도 차독 일족은 대사제직에서 배제됐기 때문이다. 사두가이파라는 말은 이후 예루살렘 성전의 대사제들과 사상적으로 같은 맥락에 서 있는 사람을 지칭하는 말로 변했다는 것이다. 로마 지배를 받던 예수님 시대 대사제는 유다인의 눈에는 위엄이 넘치는 중대한 인물이었지만 로마인들에겐 한낱 정치적 이용 수단에 불과했다. 리길재 기자 teotokos@pbc.co.kr 평화신문2014.07.22

하느님 지성소 모셨던 이스라엘 민족의 '심장'[사진으로 떠나는 이스라엘 성지기행] 4. 예루살렘 성전과 다윗 도성예루살렘은 다윗 왕이 여부스족으로부터 빼앗아(2사무 5,9) 정치ㆍ종교의 중심지인 새 왕국의 수도로 정하고 세운 도성이다. 지금의 예루살렘 성곽은 오스만 튀르크 제국 슐레이만 2세가 1532년부터 1539년까지 복원한 것이며 다윗 도성은 이 성곽 밖에 위치한다. 가운데 황금돔 모스크 자리가 바로 모리야 산이다. 유다인들은 하느님의 지성소를 모셨던 성채를 '평화의 도시''평화의 근원'이란 뜻의 히브리말 '예루살라임'이라 부른다. 우리에게 라틴말 '예루살렘'으로 더 친숙하게 알려진 도시이다. 예루살렘은 이스라엘 중앙 산악지대 기혼 샘이 있는 키드론 골짜기 서쪽 해발 760m 고지에 자리잡고 있다. 동으로 유다 광야, 서로 쉐펠라 목초지, 남으로 베들레헴, 북으로 벤야민 산지가 있다. 3000여 년 전인 기원전 1000년께 다윗이 천혜의 요새인 이곳에 도성을 세워 유다 바알라에서 '하느님의 궤'를 모셔왔다(2사무 6장 참고). 다윗은 아브라함이 외아들 이사악을 번제물로 바치려 했던(창세 22, 1-22) 모리야 산에 집터를 정해 '시온'이라 했고, 솔로몬이 그곳에 주님의 집을 지어(2역대 3,1) '주님의 계약 궤'를 모셨으며(2역대 5,2-7.10),'주님의 영광'이 성전에 가득 찼다(1열왕 8,1-66). 예루살렘 성전은 유다인들에게 모든 시대를 통해 삶의 중심이 됐다. 토라(모세오경)에 따라 이스라엘 모든 남자는 해마다 과월절(파스카)과 수확절(오순절), 추수절(초막절)에 예루살렘 성전을 순례했다(탈출 23,14-17 참조). 또 예루살렘을 향해 무릎을 꿇고 하루 3번씩 기도하는(다니 6, 11) 풍습이 생겨났고, 회당도 예루살렘 성전을 향해 지어졌다. 예수의 부모도 해마다 파스카 축제 때 예루살렘으로 순례를 가곤 했고, 예수도 12세 되던 해 토라에 따라 예루살렘 축제에 참가했다(루카 2, 41-42). 베네딕토 16세 전임 교황은 "일 년에 세 번 성전에 감으로써 이스라엘은 순례 중에 있는 하느님 백성, 언제나 하느님을 향해 길을 가는 백성이 되며, 유일한 성전에서 하느님과 만남으로써 다시 한 번 자신의 정체성과 단일성을 받아들이는 백성으로 머물 수 있었다"(「나자렛 예수」 2권, 168쪽)고 설명한다. 다윗 도성과 예루살렘 성전은 기원전 586년 바빌론 군대에 의해 모두 파괴됐고, 유다인들은 포로로 끌려가 바빌론에서 70년간 종살이를 했다(2열왕 25장). 바빌론 유배에서 돌아온 이후 즈루빠벨과 예수아가 나서 기원전 515년에 성전을 재건했으나 가장 중요한 계약 궤를 안치하지 못했다(에즈 5,1-6,18). 왜냐하면, 예레미야 예언자가 성전이 파괴되기 전에 신탁을 받고 천막과 계약 궤를 들고 모세가 하느님의 상속 재산을 본 느보 산으로 올라가 어느 동굴에 숨기고 입구를 막아 버렸는데 그 길을 찾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2마카 2,4-8). 기원전 37년 로마에 의해 유다 왕이 된 헤로데는 즈루빠벨의 성전을 부수지 않고 새 성전을 짓기 시작해 46년의 긴 공사 끝에 완공됐다. 헤로데 성전은 다시 한번 이스라엘 민족의 중심지가 됐다. 하지만 이 성전은 겨우 6년 만에 폐허가 됐다. 66~70년에 일어난 제1차 유다 항쟁을 진압한 로마 티투스 황제에 의해 예수의 예언대로 "돌 하나도 다른 돌 위에 남아 있지 않고"(루카 21,6) 완전히 파괴됐다. 이스라엘 전승에 의하면 이날은 유다력 '아브'(8월) 달의 9일째 되는 날로 바로 기원전 586년에 솔로몬의 성전이 바빌론군에 의해 불타 없어진 바로 그날이었다. 유다인들은 솔로몬 성전과 헤로데 성전이 똑같이 파괴된 이 운명의 날을 기억하기 위해 통곡의 벽에서 예레미야의 애가를 읽으며 성전 파괴를 슬퍼하며 메시아 도래를 기도하고 있다. 리길재 기자 teotokos@pbc.co.krcpbc2013.07.16
![[복음 이야기] (18) 유다인 결혼 풍속](//cpbc.co.kr/CMS/newspaper/2014/06/rc/512639_1.0_titleImage_1.jpg)
[복음 이야기] (18) 유다인 결혼 풍속하느님 뜻과 일치하는 일부일처제 따라 유다인의 오랜 종교적 전통은 하느님의 뜻과 자연법에 일치하는 남녀의 이상적 결합을 ‘일부일처제’로 여겨왔다. 사진은 베들레헴 가타리나 성당에서 거행되고 있는 혼인성사 장면. 유다인의 오랜 종교적 전통은 하느님의 뜻과 자연법에 일치하는 남녀의 이상적 결합을 ‘일부일처제’로 여겨왔다. 창세기에 나오는 여인의 창조이야기(창세 2,21-24)에서 그 근거를 찾을 수 있다. 특히 “남자는 아버지와 어머니를 떠나 아내와 결합하여 둘이 한몸이 된다”(창세 2,24)는 말씀에서 일부일처 혼인제도에 관한 성경의 가르침을 명확히 읽을 수 있다.가정생활의 교훈서인 토빗기는 일부일처 혼인 이야기만을 하고 있다. 또 예언자 호세아와 예레미야, 이사야, 에제키엘은 일부일처의 이상을 ‘하느님과 이스라엘 간 계약의 표상’(예레 2,2; 에제 16,8; 호세 2,9; 말라 2,14)으로 묘사했다. 예수님 시대에도 사두가이들은 자기들이 일부일처제도를 지키는 것을 크게 자랑했고, 대사제는 반드시 아내를 한 사람만 둬야 했다. 예수님께서도 부부가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도덕적으로 전 생애를 통해 완전히 결합해야 한다고 가르치셨다. 혼인에 대한 여러 가르침과 비유를 통해 볼 때 예수님께서 명확하게 일부일처를 지지하고 계심을 알 수 있다. 그래서 교회도 한 남자와 한 여자가 부부로 맺은 사랑을 ‘성사’로 인정하고 있다. 하지만 유다인 공동체에서 일부다처 관습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성경에서 카인의 자손 라멕은 두 아내를 둔 자로 처음으로 소개된다. (창세 4,19) 솔로몬(1열왕 11,1)과 기드온(판관 8,30-31), 사무엘의 아버지 엘카나(1사무 1,2)도 여러 아내를 뒀다.또 아내가 임신하지 못할 때 “자식을 많이 낳고 번성하여라” (창세 1,28)는 성경 말씀을 따라 부득이 첩을 두는 일도 있었다. 그 대표 인물이 아브라함이다. 첩을 뜻하는 히브리말 ‘필레게쉬’가 유다인들이 쓰지 않는 외래어임을 고려, 노예제도가 축첩 관습을 조장했을 것이라는 게 학자들의 공통된 견해다.성경 시대 결혼 풍속은 ‘조혼’이 일반적이었다. 랍비들은 “자식의 목덜미를 누르고 있는 동안 아들을 결혼시키라”고 가르쳐 18살을 남자의 결혼 적령으로 여겼다. 여자들은 이보다 훨씬 빨라 율법은 ‘12살 중반’이 출가 적령이라고 한다. 이 관습을 따라 동정녀 성모 마리아께서도 성령의 인도로 결혼 적령인 12살 무렵 약혼해 10대 중반에 예수님을 낳으셨다. (외경 「야고보 원복음」 참고)유다인 가정은 족장과 판관 시대 때부터 이어진 풍속을 따라 아버지가 자녀의 결혼 여부는 물론 아들의 신붓감도 결정했다. 하지만 성경 시대에도 배우자를 스스로 정하는 경우도 있었나 보다. 그래서 탈무드는 “아내를 고르기 전에 심사숙고하라. 미모를 생각하지 마라. 왜냐하면, 그것은 지나가 버리는 것이기 때문이다. 가족을 생각하라”고 가르치고 있다. 남자의 아버지나 신랑이 직접 신부를 선택하면 결혼 준비를 위해 ‘약혼’을 한다. 약혼 기간은 대략 1년간이었다. 구약의 율법은 이 약혼 기간을 결혼한 배우자가 갖는 권리와 의무를 거의 동등하게 인정했다. 그래서 약혼 기간에 낳은 아이를 적자로 인정했고, 약혼한 남자가 죽으면 과부로 취급됐다. 정혼한 여자가 부정을 의심받으면 ‘쓴 물의 시험’(민수 5,11-31)을 받았다. 그리고 간음한 사실이 드러나면 돌로 쳐죽임을 당했다.성경 시대 유다인들은 하느님에 대한 신앙을 지키기 위해 이민족 여인과 결혼해 우상을 섬기는 죄를 범하지 않으려고 동족과 결혼하는 것을 관습처럼 여겼다. (탈출 34,16) 그래서 아브라함은 아들 이사악의 신부로 동족 가운데서 레베카를 찾았고, 야곱도 외삼촌 라반의 딸 라헬 즉 외사촌과 결혼했다. 그러나 예외도 있었다. 아브라함은 이집트인 여종 하가르에게서 첫아들 이스마엘을 낳았고(창세 16,15), 모세는 미디안인 이트로의 딸 치포라(탈출 2,21)와 에티오피아 여인(민수 12,1)을 아내로 맞았다. 다윗의 증조모 룻은 모압인(룻 1,4)이고, 다윗이 간음해 얻은 아내 밧 세바도 히타이트 출신 이방인(2사무 11,3)이었다.사실 구약 율법이 절대적으로 금한 혼인은 이방인과의 결혼이 아니라 ‘근친혼’이다. “너희 가운데 누구든지 자기 살붙이를 가까이하여 그의 치부를 드러내서는 안 된다.…”(레위 18, 6-18) 이 금령을 어기는 자는 사형에 처했다.(레위 20,11) 혈족과 근친혼에 관한 이 세밀한 금령은 예수님 시대에도 효력이 있었다. 성경 시대 이스라엘의 젊은이들은 자기 맘대로 결혼할 수 없었을 뿐 아니라 원치 않는 결혼도 해야만 했다. 어떤 사람이 자식 없이 죽으면, 그의 형제나 상속자가 죽은 이의 아내와 혼인하여 그의 후사를 일으켜 주어야 했다.(신명 25,5-10; 마태 22,24) 이를 히브리말로 ‘레비라’라 하는데 이 율법의 의무는 매우 엄격했다. 만약 이 레비라 규정을 지키지 않으면 죽은 이의 아내는 원로들 앞에서 결혼할 남자의 신을 벗기고 얼굴에 침을 뱉으며 “자기 형제의 집안을 세우지 않는 사람은 이렇게 된다”(신명 25,9)고 저주를 퍼부었다. 예수님께서는 레비라 결혼 풍속을 들어 부활 논쟁 시비를 건 사두가이들에게 “하느님께서는 산 이들의 하느님이시다” 하고 꾸짖으셨다.(마태 22, 23-33)리길재 기자 teotokos@pbc.co.kr 평화신문2014.06.03
![[복음이야기]<9> 이스라엘의 절기- 유다력](//cpbc.co.kr/CMS/newspaper/2014/03/rc/500208_1.1_titleImage_1.jpg)
[복음이야기] 이스라엘의 절기- 유다력하느님 자비 빌고 관용 드러내는 '축제' 이스라엘의 한 해 절기는 가톨릭교회의 전례력처럼 율법으로 정해진 축제일을 지키는 '유다 종교력'에 따라 규정됐다. 유다인의 일상생활에 중요한 구실을 한 이 축제들은 파종제와 추수제 등과 같은 계절적 풍속에 구세사의 위대한 사건을 기념하는 종교적 축제를 연계시킨 것이 특징이다. 또 유다인의 축제 대부분은 죄에서 벗어나 하느님의 자비를 비는 '회개'의 성격이 강한 것이 다른 민족의 여느 축제와 다른 점이다. 이는 '살아 계신 하느님과의 만남'(탈출 19,17)이라는 축제의 진정한 의미를 되살리기 위한 호소이다. 유다인의 축제는 종교력에 따라 대축제와 소축제로 구분된다. 대축제는 가장 중요한 축제로 △과월절(파스카, 무교절, 유월절) △오순절(추수절, 주간절) △초막절(장막절)이 있다. 신명기 16장 16-17절에 따르면 유다인 가운데 모든 남자는 해마다 세 번씩, 곧 무교절과 주간절과 초막절에 주 하느님께서 선택하신 곳(예루살렘 성전)에 가서 하느님께 예물을 바쳐야 한다. 그래서 유다인들은 이 대축제를 '순례축제'라 불렀다. 소축제는 역사적 사건이나 관습에 기원을 둔 기념일로 초여름 양털을 깎는 행사(창세 31,19; 38,12)와 아다르 달(2월 중순~3월 중순) 14~15일 이틀간 유다인 왕비 에스테르가 페르시아 왕 크세르크세스를 움직여 유다인의 원수를 제거하고 동족을 구한 사건을 기념해 지내는 '푸림절'(에스 9,17-32) 등이 있다. 또 마카베오 형제들이 예루살렘을 탈환해 성전을 봉헌한 것을 기념해 키슬레우 달(11월 중순~12월 중순) 25일부터 8일 동안 지낸 '제단 봉헌 축일(하누카)'(1마카 4,36-59)이 있다. 마카베오 형제들이 니카노르 장군을 무찌른 것을 기념한 아다르 달 13일은 '승전 기념일'(1마카 7,49)로 지냈다. 이외에 유다인은 율법에 따라 '정한 때'라 불리는 안식일과 관련된 축제를 지냈다. 이 공식 축제는 △안식일(탈출 16,23) △매달 초하룻날(민수 28,11) △첫째 달 초하룻날(탈출 40,2-16) △칠월 초하룻날(레위 23,24-25) △안식년(레위 25,1-7) △희년(레위 25,8-22) 등이 그것이다. 유다인들이 신성하게 여기는 숫자 '7'과 연관된 이 축제들은 하느님의 무한한 관용과 자비를 드러내는 축제로 종교적, 사회적, 인도적, 경제적 사면이 시행됐다. 율법은 안식년에 유다인 노예들, 특히 부채 때문에 팔려온 사람들을 해방시킬 것을 명했다. 동시에 이 해에는 모든 부채도 면제됐다. 또한 이 해에는 토지도 한 해 동안 완전히 휴식을 줘야 했다. 안식년을 일곱 번 보내고 난 50년째인 희년에는 모든 노예는 예외 없이 해방됐다. 또한 가난한 사람이 부채를 갚기 위해 부자에게 팔았던 토지는 율법이 엄격하게 정한 가격으로 반환됐다. 유다인은 또 율법에 따라 '금식일'을 정해 지켰다. '정한 때'에 지내는 금식일은 재앙을 막기 위해 회개와 속죄의 뜻으로 금식하는 티쉬리 달(9월 중순~10월 중순) 10일의 '속죄일'(욤 키푸르, 레위 16장, 민수 29,7-11)이 있다. 또 관습에 따라 바빌론 임금 네부카드네자르에 의해 예루살렘 성전이 불타 파괴된 것(2열왕 25,9; 예레 52,12-13)을 애도해 다섯째 달(7월 중순~8월 중순) 7일을 금식일로 지키고 있다. 유다인은 달 이름을 두고 3가지 체계를 따랐다. 첫째 가나안식 달 이름으로 바빌론 유배 이전까지 사용했다. 구약성경은 그 가운데 과월절과 관련된 '아빕 달'(탈출 13,4; 탈출 23,15; 신명 16,1)과 솔로몬 성전 봉헌과 연관된 '지우 달'(1열왕 6,1),'에타님 달'(1열왕 8,2),'불 달'(1열왕 6,38)'을 전하고 있다. 이 네 달 이름 뜻은 모두 농사 절기와 관련되는데 봄의 첫 달 아빕은 '푸른 밀 싹'을, 지우는 봄의 화려한 색을 가리키는 '찬란함' 또는 '밝음'을, 가을의 에타님은 '흐르는 개울'을, 불은 '소출' 또는 '가축'을 뜻한다. 하지만 가나안식 달 이름은 왕정시대 초 상업과 수공업이 발달하면서 거의 사용하지 않고 첫째 달, 둘째 달 등 숫자로 달 이름을 부르기 시작했다. 숫자로 달 이름을 부르는 방식은 바빌론 유배 이후에도 상당히 늦은 시기까지 사용됐고, 구약성경은 이 체계를 가장 많이 인용하고 있다. 숫자 달 이름은 춘분을 기점으로 정한다. 구약 성경은 가나안식 네 달이 어느 달인지 숫자로 밝히는데 아빕은 '첫째 달'(춘분이 낀 달), 지우는 '둘째 달'(춘분 다음 달), 에타님은 '일곱째 달'(추분이 낀 달), 불은 '여덟째 달'(추분 다음 달)이다. 마지막 달 이름은 바빌론식으로 바빌론 유배 이후 이 체계를 사용하기 시작했고 랍비 시대에 와서 완전히 정착됐다. 바빌론식 달 이름은 △니산 △이야르 △시반 △탐무즈 △압 △엘룰 △티쉬리 △마르케쉬반 △키슬레우 △테벳 △스밧 △아다르 순이다. 리길재 기자 teotokos@pbc.co.kr cpbc2014.03.11
![[제2회 신앙체험 수기- 가작 수상작] 해바라기](//cpbc.co.kr/CMS/newspaper/2015/04/rc/568792_1.3_titleImage_1.jpg)
[제2회 신앙체험 수기- 가작 수상작] 해바라기글=노중호 신부(수원교구 서부본당 주임) 그림=문채현 준비운동 “내가 달릴 길을 다 달려 주 예수님께 받은 직무 곧 하느님 은총의 복음을 증언하는 일을 다 마칠 수만 있다면, 내 목숨이야 조금도 아깝지 않습니다”(사도 20,24). 어떻게 하면 이렇게 고백할 수 있을까? 너무 궁금해집니다. 인생의 산과 바다, 어떤 우여곡절을 지나야만 이 경지에 이를 수 있을지 호기심까지도 듭니다. 2000년 전에 혹시 기네스북이 있었다면 다니신 거리로만 따져도 바오로 사도가 기네스북의 원조가 되실 것 같습니다. 한순간도 쉴 틈 없이 사도의 발걸음 하나하나가 복음 선포의 길이었습니다. 지치지 않는 그 열정의 원천은 다마스쿠스로 가는 길에서 만난 부활하신 예수님이십니다. 이를 통해 바오로 사도는 예수님을 박해하는 자에서 증거하는 자로 변신합니다. ‘여우도 굴이 있고 하늘의 새들도 보금자리가 있지만 사람의 아들은 머리 기댈 곳조차 없다’고 말씀하신 스승 예수 그리스도의 삶을 그대로 본받은 모습이셨습니다. 이제는 저의 차례입니다. 이 시간, 이 글을 통해 하느님께서 나의 삶의 자리에서 어떻게 이끄셨는지, 섭리 안에 쫓아가며 달려야 할 길을 서투르지만 차근차근 달려가려고 합니다.전반전“한 처음에 하느님께서는 하늘과 땅을 창조하셨다”(창세 1,1). 제가 처음으로 하느님을 알게 된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면 아버지의 어머니, 바로 할머니가 계십니다. 할머니께서는 몸이 약하셔서 예전부터 병을 많이 앓으셨습니다. 특별히 ‘속앓이’를 하셨는데 그 고통은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로 극심했습니다. 하늘이 노랗게 되고, 땅이 돌고 오장육부가 끊어진다고 말씀을 들었지만 제가 이해할 수 없는 영역의 고통입니다. 한해의 마무리가 될 즈음 연말이 되면 너무 아프셔서 쓰러질 지경이셨습니다. 어느 때는 젊은 새댁이 속병을 앓다가 죽었다고 동네 사람들이 모두 모여 장사를 지낼 준비를 할 정도로 살아도 살아 있는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묏자리와 관까지 맞추셨습니다. 그런데 무당을 불러 한 상 거하게 차리고 굿판을 펼치면 신기하게도 할머니께서는 벌떡 일어나셨습니다. 심지어는 다 죽어가던 할머니께서 일어나시어 굿을 구경 온 동네 사람들의 시중을 들 정도였습니다. 이렇게 생사를 오가며 굿을 하는 것도 한두 번으로 끝나지 않고, 집안의 형편까지 어려워 죽을 판에, 매년 반복되는 죽음에 이르는 고통 속에 할머니께서는 말씀하셨습니다. “나 죽기 전에 성당이나 나가 보고 죽을래요.” 무속과 불교가 뿌리 깊은 동네에서 참으로 놀라운 말씀이었습니다. 동네에서 천주교 성당을 다니는 분은 한 분이셨습니다. 그 할아버지 한 분의 도움으로 그 날로 바로 예비신자 교리를 다니셨고, 힘들고 어려운 모든 교리와 기도를 외우신 다음 참으로 어렵게 세례성사를 받으셨습니다. 미사와 첫영성체를 하신 할머니께서는 그다음은… 참으로 놀랍게도 할머니의 속앓이는 씻은 듯이 없어지고 아주 건강해지셨습니다. 아멘입니다. 할머니의 기적을 체험한 할아버지, 아버지, 작은아버지, 고모 등 모든 가족이 악습을 끊고 천주교 신앙의 발걸음을 걷게 됩니다. 다른 가정은 신부님과 수녀님께서 또는 선교사나 봉사자분들의 도움으로 신앙생활을 하게 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런데 저희 가정은 아버지께서 농담으로 말씀하십니다. “우리는 마귀가 선교했어.” 그렇게 무속 집안에서 천주교 신앙의 꽃을 피웠습니다. 1784년, 이 황무지 땅에 지혜로운 조상들이 천주 신앙을 받아들임과 비슷한 길을 걸었구나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시어머니의 배턴을 받은 며느리, 곧 저의 어머니의 특기 사항은 ‘담 넘기’였습니다. 외할머니께서는 너무 순하시고 선하셨는데, 딸이 주일마다 어디를 가는 것 같아 주일에는 특별히 많은 집안일을 시키셨습니다. 그렇게라도 집안에 묶어두시려고 하셨나 봅니다. 그렇지만 어머니께서는 더 정성껏 빨리빨리 다해 놓으시고 외할머니께서 대문을 지키면 뒤뜰의 담을 넘으셨습니다. 공세리성당…. 하느님의 집으로 가는 달음질이었습니다. 제가 커서 자동차를 운전할 때가 되어 외할머니댁인 둔포에서 공세리성당까지 가 보게 되었는데 자동차로도 거리가 꽤 멀었습니다. 그런데도 어머니께서는 그 먼 길을 달리고 또 달리셨습니다. “나는 훌륭히 싸웠고 달릴 길을 다 달렸으며 믿음을 지켰습니다”(2티모 4,7). 어머니께서는 그렇게 하느님 사랑에 흠뻑 빠지십니다. 어머니께서는 학창 시절 수녀원 가실 준비도 하셨는데, 그때 운명적인 만남을 갖게 됩니다. 영화나 드라마에서처럼 낭만적인 연애 이야기를 기대하며 “아버지와 어머니는 어떻게 만나셨어요?” 언젠가 여쭈어 봤는데, “응, 성당에서 교리 공부하다가 만났어!”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좀 재미없다 시시하다 생각했는데 “그럼 연애 편지는 어떻게 쓰셨어요?” 여쭈어 보았더니 천주교 교리 문답을 주거니 받거니 하셨다고 합니다. 못 말립니다. 그래서 그 신앙적 차원으로 볼 때도 어머니께서는 저와 형의 첫 번째 교리 선생님이셨습니다. 예전에 영어 조기교육 열풍이 불었는데, 저희 형제는 교리 조기교육 열풍이었나 봅니다. 그래서 어려운 교리가 쉽게 다가왔습니다. 저와 형이 원하든 원하지 않든 그렇게 저절로 자연스레 하느님을 알게 되었습니다. 순수 우리나라 말에 ‘나도 모르는 사이에 점점…’이라는 뜻의 ‘시나브로’가 있습니다. 그 말처럼이었습니다. 어머니는 성가정의 성모 마리아와 같으셨습니다. 그렇게 준비시키셨나 봅니다. 하느님께서는….너무나도 지혜로우셨던 할아버지께서는 집안의 가장으로서 화목한 가정으로 이끄셨습니다. 싸움이 일어나고 마음이 닫히게 되어 서로 말하는 것도 꺼려질 때, 할아버지께서는 그날 밤 온 가족을 안방으로 불러 모으셨습니다. 농번기에는 너무나도 많은 농사로 인해 몸과 마음이 모두 지치기 때문에 화목했던 가정이 싸움이 일어나는 것이 당연하다고 말씀하시며, 할머니, 아버지, 어머니, 형 그리고 저의 모든 이야기를 들으셨습니다. 이상하게도 신기하게도 할아버지께서 이끄시는 가족 대화 시간이 지나면 불같이 화났던 마음이 사그라지고, 힘들었던 마음도 위안이 되며 평안해졌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 너희는 모두 나에게 오너라. 내가 너희에게 안식을 주겠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를 메고 나에게 배워라”(마태 11,28-29)고 말씀하셨는데, 우리의 삶이 얼마나 고되고 힘겨운지 벌써 잘 아신 것 같습니다. 세상의 멍에가 아니라 따뜻하고 부드럽고 하느님께 영광을 올리는 예수님의 멍에를 메고 배우라는 말씀을 기억하게 하셨습니다. 일하는 소가 참된 주인을 만나고 주인과 만남의 연결고리인 멍에를 제대로 멜 때 세상의 밭을 잘 일구어낼 수 있습니다. 할아버지께서는 가족 대화 시간이 끝나면 꼭 묵주기도를 봉헌하셨습니다. 그래서 아직도 동그란 묵주를 보면 동그랗게 둘러앉아 기도하던 가족의 자리가 생각납니다. 그렇게 행복함도 오래가지 않아, 할아버지께서는 간암 선고를 받으셨습니다. 청천벽력, ‘마른 하늘에 날벼락’이라는 표현도 적합하지 않았습니다. 지혜로 말하면 솔로몬과 같으셨고, 가장으로 말하면 나자렛 성가정의 요셉과 같으셨던 할아버지께서는 처음에 간암이라는 소식을 받아들이기 힘들어하셨습니다. 온몸이 앙상하게 나뭇가지처럼 마르고, 배는 복수가 너무 차서 숨 쉬는 것조차 힘겨워하셨습니다. 극심한 고통의 나날이셨는데 하루는 할아버지께서는 저를 부르셔서 “중호야, 할아버지가 너무 아파. 할아버지를 위해서 성가 좀 불러 줄래?” 말씀하셨습니다. 가슴이 아프고, 놀라고, 눈물이 눈을 가려서 도통 성가책이 보이지 않았지만 그래도 용기를 내었습니다. 울먹이는 소리였지만 할아버지 위해서 가톨릭 성가를 처음부터 끝까지 아는 성가를 부르기 시작했습니다. 수많은 성가 중에 할아버지께서는 50번을 참 좋아하셨습니다. “주님 나의 목자 아쉬울 것 없노라, 파란 풀밭에 이 몸 뉘어 주시고, 고이 쉬라 물터로 주 나를 이끌어 주네.” 할아버지 손을 잡고 이 성가를 부르면 신비롭게도 할아버지께서는 허덕이고 가빠졌던 숨이 평안해지고, 고통으로 짓눌렸던 얼굴과 온몸이 갓난아기처럼 순하게 변모되셨습니다. 그렇게 할아버지를 하느님 품으로 보내드렸습니다.경기중할아버지께서 하느님 품으로 돌아가시면서까지도 유언으로 “내가 하느님 품에 가서도 성호가 신부님이 되길 기도할게!”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서 형은 이미 집안에서 준비된 신부님이셨습니다. 저는 초등학교 3학년 때부터 복사를 서면서 신부님의 하얀 제의를 보고는 ‘나도 신부님 되면 좋겠다’라는 생각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가족들에게 표현하기 조심스러웠고, 제 안에서 저 스스로 종이 접듯 접어야 했습니다. 누나가 있는 것도 아니고, 동생이 있는 것도 아니고, 오로지 형과 저 둘뿐인 집안에서 형이 먼저 신학교에 입학해서 사제의 길을 걷기 때문에 더욱 그러하였습니다. 그런데 청개구리 심보는 어쩔 수 없나 봅니다. 용기를 내어 어머니께 말씀드렸더니 너무 의외로 어머니께서는 “형 때 보니깐 교구청에 가면 예비신학생 모임으로 학사님들과 신부님들께서 잘해 주시고, 맛있는 곰탕에 깍두기도 주시더라, 맛있게 먹고 와!” 도대체 이런 말씀은 어떻게 할 수 있는 건지, 지금 생각해도 어머니의 내공에 많은 점수를 드리고 싶습니다. 안성에 있는 안법고등학교에서 일곱 명의 친구들과 예신 모임을 다녔습니다. 너무나도 신이 났습니다. 우리 다 같이 신학교 가자고 손을 맞대고 파이팅을 외치기도 하였습니다. 고3, 이제 신학교 입학 1년도 남지 않았던 봄, 예신 모임을 룰루랄라 다니던 7총사 중 한 명의 친구가 자꾸 다리가 아프다고 하였습니다. 같은 반이었고 제 뒤에 앉았기에 저는 수업 시간에도 선생님 몰래 친구의 저린 다리를 주물러주었습니다. 그런데 어느날부터 자주 결석을 하더니 병원에 입원하였다는 소식이 전해졌습니다. 병문안을 친구들과 같이 갔는데, 친구의 어머니께서는 퇴원해서 기도원에서 치료받는다고 하셨습니다. 병명은 골수암이었는데, 잘못된 기도원으로 가서 친구는 고통 속에서 하늘나라에 가게 되었습니다. 꼭 같이 신부님 되자고 약속했었는데 그렇게 허망하게 친구를 보내야 했습니다. 아버지와 할머니께서 이 소식을 아시게 되었고, 또한 제가 신학교에 가는 것을 원한다는 이야기까지 듣게 되셔서 할머니께서는 고모들, 작은아버지까지 5남매를 총출동시키셨습니다. 온 가족이 제 앞에 둘러앉으셔서 모두 반대의 목소리를 내셨습니다. 형이 먼저 신학교에 갔고, 아버지 어머니는 누가 모시게 될 것이냐로 시작하여 모두 걱정의 소리이셨습니다. 온 가족의 이야기를 모두 듣고 저는 단호하게 말씀드렸습니다. “제가 비록 육적으로 효도를 못 해도, 영적으로는 누구보다도 지극한 마음으로 효도하겠습니다.” 그 다음은 더 이상 아무도 이야기하지 못하셨습니다. 그렇게 파란만장한 끝에 신학교에 입학했고, 2008년 8월 22일 주님의 제단 앞에 엎드리며 예수 그리스도와 혼인하게 되었습니다. 평화의 사도, 가난한 이들의 벗, 예수님을 가장 많이 사랑했던 프란치스코 성인은 지금으로부터 벌써 800년 전, 1200년대에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제가 할 수 있는 것은 최선을 다하게 해주시고, 제가 할 수 없는 것은 체념할 줄 아는 용기를 주시며, 이 둘을 구분할 수 있는 지혜를 주소서.” 부푼 꿈을 간직하고 보좌 신부 3년, 오전동ㆍ하안ㆍ상대원 본당의 소임을 마치고 첫 주임을 나가게 되었습니다. 안산의 원곡본당입니다. 그렇게 동고동락을 하던 안산에서의 3년 차인 2014년은 유난히 아픔과 상처가 많은 해였습니다. 천상병 시인은 ‘귀천’이라는 시에서 죽음을 ‘이 세상 소풍 끝내는 날’이라고 표현했지만, 소풍이라고는 도대체 받아들일 수 없는 고통의 연속이 벌어졌습니다. 하물며 죽음에서 다시 살아나야 하는 부활은 얼마나 더 깨지고, 아파하고, 희생하고, 우리가 수없이 변화되어야 이루어지는 것인지 뼈저리게 알게 되는 시간의 연속이었습니다. 부활 대축일을 준비하는 성주간 수요일 그날을 기억합니다. 2014년 4월 16일…. 다시 생각하는 것조차 너무 아픔이고 죽음이어서 다시 꺼내기가 힘들지만, 그래도 다시 용기를 내고 말씀을 전해야 합니다. 꼭 그래야만 합니다. 아이들과 약속하였기 때문입니다. 보좌 신부 생활을 마치고 처음으로 주임 신부의 소명을 받고 저는 오자마자 수원교구 사제 체육대회 때 농구를 하다가 십자인대가 파열되어서 생전 처음 휠체어와 목발 신세를 지며 불편하게 미사를 봉헌해야 했습니다. 그런데 실망하거나 기분 상해 있을 수가 없었습니다. 옆의 복사 친구들이 “신부님 괜찮으세요? 휠체어 타는 것 재미있으시죠?” 너무나도 따뜻한 관심과 사랑으로 장난도 치며 잘 도와주었기 때문입니다. 휠체어를 탈 때는 밀어주고, 목발을 짚을 때는 잡아주고, 저는 한순간도 불편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렇게 정이 팍팍 들었습니다. 이제는 실명을 거론해도 될 것 같습니다. 성주간 주님 수난 성지 주일에 십자가 행렬을 할 때도, 중고등부 학생 미사를 할 때도 늘 밝고 명랑한 ‘장준형 사무엘’이 있었습니다. 복사 단장이어서 동생들을 잘 챙기고, 복사 배정표를 잘 계획했으며, 빠지는 친구가 있으면 ‘제가 하면 되지요’ 하고 허허 웃으며 대신 복사를 섰던 학생이었습니다. 중고등부 주일학교 임원으로서 학생회를 이끌고 따르는 후배들이 많아 말 그대로 인기쟁이었습니다. 특출나게 잘 생겼고, 본당의 모든 신자분에게 인사도 잘하여서 사랑을 너무나도 많이 받는 학생이었습니다. 또한 예비신학생이었기 때문에 훗날 거룩한 미사성제를 집전할 신부님이 되실 분이었습니다. 전례의 꽃이고, 1년 중 가장 중요한 파스카 성삼일을 준비하며, 성목요일 주님 만찬 미사부터 복사단장만이 할 수 있는 향 복사를 하기로 약속하고 연습을 앞두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준형이가 안 옵니다. 축구도, 농구도, 배드민턴도, 장난도 하며 정말 잘 지냈기에 이번에도 장난스레 말하며 ‘왜 안 와? 왜 이렇게 늦어?’ 혼내 보려고 합니다. 그런데도 안 옵니다. 중고등부 교감 선생님께 “준형이가 안 오네요”하고 말씀드리니 선생님께서는 장난꾸러기 준형이는 평소에도 늦잠 자고 늦게 올 때가 있었다며, 그렇지만 늦어도 꼭 오는 아이이니 기다리면 온다고 하였습니다. 준형이와 가장 친한 친구는 “바닷물 차갑다. 그만 놀고 돌아와라”라는 카톡 프로필 글을 써서 눈물바다를 만들기도 하였습니다. 본당 공동체가 눈물로서 기다림의 고리기도를 하였습니다. 준형이는 약속을 지켰습니다. 드디어 왔습니다. 언제나 그랬듯이 두 발로 껑충껑충 뛰어오며 “신부님 늦었어요, 늦어서 죄송해요”라고 머리를 긁적이며 올 줄 알았는데 들것에 실려 온몸에 따뜻함은 다 사라지고 싸늘하게 누워서 왔습니다. ‘왜 이러셔야 했습니까? 무엇이 잘못되었습니까?’ 고려대 안산병원 장례예식장에 빈소가 차려지는데, 저에게는 눈물도 허락되지 않았습니다. 가슴을 치고 또 치고, 오열하고 싶은데 눈물까지 흘리면 모든 것이 무너져 버릴 것 같아 이를 악물었습니다. 학생증 사진으로 영정 사진을 만드는데, 도통 준형이와 영정사진이라는 말이 어울리지 않았습니다. 어둠과 죽음의 그늘 속에서 제가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주일학교 모든 친구가 “이 나라에서는 못 살겠습니다. 이민 가려고 합니다.” 모든 것에 포기였고, 절망뿐이었습니다. 차가운 진도 바닷속에서 일주일 내내 추위 속에서 꽁꽁 지내 왔을 준형이인데, 정부의 장례 절차가 준비되어 있지 않았고, 다른 실종자 가족들의 상황 때문에 장례 예식장에 와서도 6일이나 냉동고에 있어야 했습니다. 매 순간 연도와 미사와 많은 조문객이 오셨고, 7일째 되는 날 화장을 하여 하늘나라에 보내야 하는 어쩔 수 없는 상황이 되었습니다. 내일이면 화장을 하여 장례를 지내야 하는 그때, 진도에서 연락이 왔습니다. 지금 준형이로 알고 있었던 학생은 DNA 확인 결과 다른 반 친구였습니다. 헛구역질이 납니다. ‘두 번 죽이는 꼴’이라는 말도 표현조차 되지도 않습니다. “내 자식도 못 알아봤다….” 대성통곡을 하시며 아버지와 이모와 이모부는 일주일 내내 한숨 주무시지 못한 몰골로 바로 6시간 진도의 길로 다시 내려가셔야 했습니다. “찾아올게요. 내가 바다에 들어가서라도 우리 아들 찾아올게요.” 준형이 아버지의 울부짖음 속에 그렇게 보름이 지난 5월 1일 노동자의 성 요셉 축일에 준형이는 진짜 우리 곁에 왔습니다. 그날은 본당의 날이었습니다. “성령의 불을 끄지 마십시오. 모든 것을 분별하여, 좋은 것은 간직하고, 악한 것은 무엇이든지 멀리하십시오”(1테살 5,19-22). 신자들에게 말했습니다. 특별히 가장 큰 아픔을 겪고 있는 유가족과 주일학교 친구들에게 말했습니다. “이민 가려는 생각이나, 욕하고 피하려는 것이나, 쓰러져서 주저앉아 있는 것보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을 하자,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에서부터 하자, 그래야만 준형이의 죽음이 헛되이 되지 않는 것이니….” 장례를 두 번 해야 하는 상황에서 안산의 장례 예식장 전체가 포화 상태였습니다. 그래서 성당 대강당에 빈소를 차리고, 끊임없이 연도를 하였습니다. 아이들은 생전 처음 하는 연도도 이제 곧잘 하였습니다. 다음날 성당에서 장례 미사를 하며 하느님 품 안에 잘 보내 주려고 제의방에서 제의를 갈아입고 미사 입당을 하였습니다. 그런데 저는 제대에 오르기 전 보았습니다. 가슴이 너무 아프고, 눈앞에 아른거려 한동안 서 있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을, 할 수 있는 일을 아이들이 먼저 하고 있었습니다. 준형이가 사고 나기 전 주까지 주일 미사 때 학생회 밴드로 앉아 있던 빈 의자에 베이스 기타와 꽃바구니가 올려져 있었습니다. 장례 미사지만 여느 때와 같이 슬픔으로 보내고 싶지 않다는 교사들과 아이들의 의견으로 평소 청소년 미사처럼 경쾌하게 학생회 밴드 미사곡으로 하였습니다. 준형이는 전혀 악기 연주를 못 하였던 학생이었습니다. 그렇지만 ‘남아로 태어나 악기 하나는 해야 멋진 사람이지’라는 친구의 말에 독학을 하였습니다. 베이스 기타는 밴드 가운데 전자 기타나 드럼처럼 화려하지 않습니다. 낮은 음이지만 묵묵히 리듬과 박자를 맞추며 가장 기본이 되는, 밴드의 감초 역할을 합니다. 준형이의 삶이 베이스 기타였음을 이제야 깨닫게 됩니다. 고별식 때 장준형 사무엘이 가장 좋아했던 ‘사랑한다는 말은’ 성가를 불렀습니다. “사랑한다는 말은 가시덤불 속에 핀 하얀 찔레꽃…. 어둠 속에서도 훤히 빛나고 절망 속에서도 키가 크는 한 마디의 말, 그 얼마나 놀랍고도 황홀한 고백인가 우리가 서로 사랑한다는 말은….” 장례미사에서 육안으로 보기에 베이스 기타는 빈 의자에 그냥 올려져 있었지만, 영안으로 보기에 그 소리가 들렸습니다. 좋아했던 성가처럼 준형이는 우리 곁에서 베이스 기타를 멋지게 연주해주고 있었습니다. “하늘아, 위에서 이슬을 내려라. 구름아, 의로움을 뿌려라. 땅은 열러 구원이 피어나게 하여라”(이사 45,8). 후반전 세상은 폭우나 소나기를 좋아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돈, 명예, 빠름…. 우리가 최고로 여기는 것들은 수없이 많고, 감각적이고, 큰 성과를 얻어야 성공한 것으로 오해하며 살고 있습니다. 그러나 생텍쥐페리의 어린 왕자가 말해주듯, ‘소중한 것은 눈에 보이지 않습니다.’ 아직 이 세상을 살아갈 수 있는 것은 하늘에서 의인을 이슬처럼 우리가 모르는 사이에 우리 가운데 허락하시기 때문입니다. 저는 안산에서 3년의 임기를 마치고 하남의 서부본당으로 소임지가 바뀌었습니다. 새로운 둥지에서 새로운 신자들과 함께 지내며, 하느님께서 어떻게 이끄시는지 그 섭리에 대해 묵상하게 됩니다. 신앙적 질풍노도의 시기를 아직도 겪고 있고, 앞으로도 겪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위기’라는 말은 ‘위험 더하기 기회’라고 하는데 고통이 있으면 은총이 더욱 크다는 진리를 한 걸음 한 걸음 배우는 중입니다. 성경을 읽다가 성경의 맨 끝, 요한 묵시록에서 재미난 부분을 읽게 되었습니다. “네가 어디에서 추락했는지 생각해 내어 회개하고, 처음에 하던 일들을 다시 하여라”(묵시2,5). 이 진실을 받아들이든 받아들이지 않든 우리 모두는 하느님의 천사였습니다. 날개를 잃어버리고 잊어버려 추락했습니다. 날개는 가벼움, 깨끗함, 거룩함이지 않을까 생각됩니다. 삶의 무게에 너무 짓눌려서, 죄의 더러움으로 얼룩져서, ‘살다 보니 어쩔 수 없지’라는 세상과의 타협과 안주로 날개를 부러뜨렸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그 천상의 날개를 회복, 부활시켜야 함을 다시 기억하고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하남의 서부본당은 아주 작고 아담한 공동체입니다. 오자마자 성당 벽면의 곰팡이가 먼저 보였습니다. 그래서 누구한테 시키지 않고 소수정예 아이들과 벽면에 하얀 페인트칠을 하였습니다. 그리고 해바라기를 그렸습니다. 해바라기가 햇빛을 보며 고개를 향하고 꽃을 피우듯이, 우리도 빛의 자녀들이기에 하느님께로 향하는 마음을 성당 벽면에 표현하였습니다. 유치원 같기도 하고, 어설프기도 하지만 우리 아이들이 손수 그린 벽화이기에 모든 신자분이 행복해하셨습니다. 그렇게 ‘해야 할 일을, 할 수 있는 일들’을 우리는 합니다. 마무리로 성당 입구 돌판에 ‘천당 같은 우리 성당’이라고 썼습니다. “언제나 기뻐하십시오. 끊임없이 기도하십시오. 모든 일에 감사하십시오.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살아가는 여러분에게 바라시는 하느님의 뜻입니다”(1테살 5,16-18) 노중호 신부(수원교구 서구본당 주임)문채현2015.04.30
![[성경 속 도시]<3>스켐](//cpbc.co.kr/CMS/newspaper/2014/01/rc/492333_1.1_titleImage_1.jpg)
[성경 속 도시]스켐야곱의 가나안 첫 정착지, 요셉이 묻힌 땅 오늘날 '나블루스'라 불리는 스켐의 사마리아인들이 속죄절에 양들을 죽어 번제물로 바치고 있다. 【CNS 자료사진】 '여행'. 생각만 해도 가슴이 설레는 단어다. 여행을 떠나면 일상을 벗어난다. 그리고 우리를 수 천 년 전의 사람들과 그들의 삶으로 인도한다. 그러면 길 위의 돌멩이 하나 그냥 지나칠 수 없다. 평화신문 지면을 빌려 세 번째로 여행할 곳은 신성한 도시 '스켐'이다. 사마리아 지방에 위치한 스켐은 예루살렘에서 북쪽으로 약 65㎞ 떨어져 있고 나자렛으로 가는 길에 있다. 스켐은 '목덜미'라는 뜻인데, 그리짐 산과 에발 산을 양쪽 어깨에 메고 있는 듯한 모양새 때문인 것 같다. 스켐은 이집트에서 시리아로, 메소포타미아에서 지중해 연안으로 통하고 팔레스티나를 관통하는 곳으로 교통의 중심지이자 전략적 요충지였다. 이집트에서 요르단과 시리아를 가려면 예루살렘을 거쳐 스켐까지 외길이고 스켐에서 갈라지기 때문이다. 그래서 스켐은 예로부터 대상들이 모여드는 요지였다. 스켐은 연평균 강우량이 적당해서 고대로부터 농사짓기에 알맞은 곳이었다. 평지를 둘러싼 산비탈에는 포도, 무화과나무, 올리브나무가 경작됐고, 목축에도 좋은 풀밭이 많이 있었다(창세 37,12-13). 고고학자들에 따르면 스켐에는 기원전 4000년께부터 사람들이 살았다고 한다. 스켐의 넓은 성전과 큰 성문들은 기원전 18~17세기께 힉소스인들에 의해 세워졌다. 그러다 스켐은 기원전 1550년께 이집트인들에 의해 파괴됐다. 이집트 점령 이후 도시의 규모는 축소됐다. 스켐은 아브라함부터 예수님에 이르기까지 여러 성경 이야기의 배경이 된다. 성경에서 스켐의 역사는 아브라함과 함께 시작한다. 스켐은 가장 먼저 아브라함이 하느님의 부르심을 받고 가나안 땅에 오는 장면에 등장한다. "아브람은 그 땅을 가로질러 스켐의 성소 곧 모레의 참나무가 있는 곳에 다다랐다. 그때 그 땅에는 가나안족이 살고 있었다"(창세 12,6). 스켐의 성소에 나타나신 주님께서 아브람 후손에게 가나안 땅을 주겠다고 약속했고, 아브람은 주님을 위해 그곳에 제단을 쌓았다(창세 12,7 참조). 야곱은 외삼촌 라반을 떠나 형 에사오와 헤어져 가나안 땅에 들어온 후 스켐에 정착했고(창세 33,18), 야곱의 딸 디나가 스켐의 족장 하모르의 아들에게 겁탈당했을 때 오빠 시메온과 레위가 스켐에 들어가 남자들을 모조리 죽였다(창세 34장 참조). 이집트를 탈출한 이스라엘은 가나안을 차지한 뒤 요셉의 유골을 스켐에 안치했다(여호 24,32). 이후 스켐은 요셉의 맏아들인 므나쎄 지파의 땅이 됐다(여호 17,1-7). 여호수아는 죽음을 앞두고 열두 지파를 스켐에서 소집한다. "여호수아는 이스라엘의 모든 지파를 스켐으로 모이게 하였다. 그가 이스라엘의 원로들과 우두머리들과 판관들과 관리들을 불러내니, 그들이 하느님 앞에 나와 섰다"(여호수아 24,1). 이후 스켐은 12지파의 종교적 중심지로 억울한 죄인들이 피신할 수 있는 성읍 중 하나로 뽑혔다(여호 20,7). 솔로몬 왕이 사망한 후 이스라엘이 남북으로 갈라졌을 때(기원전 931년) 북 이스라엘 왕권을 장악한 느봇의 아들 예로보암은 스켐을 첫 번째 수도로 삼았다(1열왕 12,25). 그러다 그는 곧 그의 가족이 거주하는 티르차에 새 수도를 세운다(1열왕 14, 17). 기원전 722년 아시리아는 북이스라엘을 멸망시키고 스켐의 주민들을 잡아갔다. 그리고는 이방인들을 이곳에 이주시켰다. 이후 남쪽 유다인들은 스켐이 속한 사마리아를 '이방인의 땅'으로 취급했다. 기원전 4세기께 마케도니아의 알렉산드로스 대왕은 사마리아를 점령하고 요충지인 스켐을 군사 기지로 만들었다. 이후 기원전 123년께 유다의 새 왕조인 하스모네아 왕조의 요한 히르카노스 1세에 의해 스켐은 완전히 파괴됐다. 기원전 72년 로마는 스켐을 재건해 '플라비아 네아폴리스'라고 불렀고, 아랍인들은 자신들의 발음에 따라 지금까지 '나블루스'라고 한다. 스켐은 오늘날 유다인에게 예루살렘처럼 거룩하게 여기는 중요한 도시이다. 1948년부터 요르단에 속했던 스켐은 1967년 '6일 전쟁'으로 이스라엘 땅이 됐다. 스켐은 오늘날 성지 순례자들이 많이 찾는 곳은 아니지만, 성경의 역사에서 매우 중요한 도시이다.허영엽 신부(서울대교구 교구장 수석비서) cpbc2014.01.14

눈물 흘리며 기도하고 승천하신 예수의 생애 마지막 사건 현장[사진으로 떠나는 이스라엘 성지기행] 5.올리브산하느님은 이스라엘 민족을 '푸른 올리브나무'(예레 11,16)라 했다. 유다인들은 자신을 올리브나무에 비유하며 하느님의 보호 아래 있음을 자랑했다(시편 52,10). 사진은 겟세마니 성당 정원에 있는 올리브나무. 올리브산은 예루살렘 동쪽 키드론 골짜기 건너편에 있는 동산으로 안식일에도 걸어갈 수 있을 만큼 가까이 있다(사도 1,12 참고-유다 율법은 안식일에 1km 이상 걷지 못함). 구약 시대 때부터 이 산을 히브리 말로 '하르 하 자이팀'(올리브산)이라 부른 것으로 보아 예부터 이곳에 올리브나무가 무성했음을 알 수 있다. 올리브산은 신ㆍ구약의 역사가 얽힌 곳이다. 다윗은 압살롬 반역을 피해 도망가던 길에 이곳을 지나갔고(2사무 15,30-32), 그의 아들 솔로몬은 말년에 여기에다 모압의 우상 크모스와 암몬인의 우상 몰록을 위해 산당을 지었다(1사무 11,7). 이후 유다 임금 요시야는 올리브 산의 이 산당들을 허물고(2열왕 23,13-14) 종교개혁을 단행했다. 또 예언자 즈카르야는 '주님의 날'에 올리브 산에서 벌어질 일(즈카 14,4)을 생생하게 전해준다. 신약성경에서 올리브산은 예수의 생애 마지막 한 주간과 관련돼 집중적으로 등장한다. 예수께서 이곳을 통해 예루살렘으로 입성하시고(루카 19, 29), 예루살렘을 바라보며 멸망을 예고하며 눈물을 흘리셨고(루카 19,41-44), 종말에 관해 설교하셨다(마르 13,3-13; 마태 24,3-14; 루카 21,7-19). 예수께서는 낮엔 예루살렘 성전에서 가르치고 밤에 올리브산에 올라가 쉬셨고(루카 22, 37-38), 최후 만찬 후 제자들을 데리고 이곳에서 피땀을 흘리며 하느님께 기도한 후 체포되셨다(마르 14,26-50; 마태 26,31-56; 루카 22,31-53; 요한 13,36-38; 18,1-11). 그리고 예수께서 부활하신 후 이 올리브산에서 승천하셨다(사도 1,6-12). 콘스탄티누스 대제의 그리스도교 신앙 자유 선언 이후 올리브 산에는 4세기 중엽부터 성당들이 지어졌는데 대표적인 4대 성당이 겟세마니 성당과 주님 눈물 성당, 주님의 기도 성당, 주님 승천 경당이다. 리길재 기자 teotokos@pbc.co.krcpbc2013.07.23
![[성경속 궁금증] 89. 성경에서 우상숭배를 왜 매매춘에 비유했을까?](//cpbc.co.kr/CMS/newspaper/2013/10/rc/478431_1.0_titleImage_1.jpg)
[성경속 궁금증] 89. 성경에서 우상숭배를 왜 매매춘에 비유했을까?우상숭배는 배우자 배신하고 간음하는 것과 같아야콥 빌렘스 데 베트 1세, '우상들에게 제물을 바치는 솔로몬', 1640년께, 유화, 릴미술관, 프랑스. 성경에서 하느님은 특별히 이스라엘을 선택하셔서 당신의 백성으로 삼으셨다. 하느님과 이스라엘 백성의 관계는 신뢰를 바탕으로 하고 있다. 하느님은 이스라엘 백성을 종살이로부터 구원하시고 광야 생활 동안 줄곧 함께 하셨으며 가나안 땅을 향해 인도하셨다. 이스라엘 백성은 가나안 땅에 들어갔을 때 원주민들의 문화에 종교적 측면에서 영향을 받았다. 그 가운데 농경사회의 다산과 풍요를 기원하는 종교 의식이 가장 큰 영향을 줬다. 반면에 이스라엘 사람들은 광야에서 엄격하고 절제된 생활을 해왔다. 그래서 처음에는 가나안 사람들의 퇴폐적 종교 의식에 강력한 혐오감을 느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이스라엘 사람들은 유혹에 빠지게 된다. 가나안 종교의 형태는 하느님께 대한 신앙에 도전이 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율법에서는 이 퇴폐적인 의식을 금지한다. "이스라엘의 딸은 신전 창녀가 되어서는 안 되고, 이스라엘의 아들은 신전 남창이 되어서는 안 된다. 너희는 창녀의 해웃값이나 남창의 몸값을, 주 너희 하느님의 집에 어떤 서원 제물로도 가져와서는 안 된다. 주 너희 하느님께서는 둘 다 역겨워하신다"(신명 23,18-19). 특히 사람들이 다른 잡신들을 섬기느라 하느님을 잊어버리고 하느님을 예배하는 일을 소홀히 하는 것에 대해 엄중히 경고하는 말씀이 뒤따른다. "너희는 주 너희 하느님을 경외하고 그분을 섬기며, 그분의 이름으로만 맹세해야 한다. 너희는 너희 주위에 있는 민족들의 신들 가운데 그 어떤 신도 따라가서는 안 된다"(신명 6,13-14).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은 하느님의 사랑을 배신해서는 안 되며 하느님을 적당히 사랑해서도 안 된다. 온 마음과 온 뜻과 온 힘을 다하여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 사실은 우상숭배에 빠진 이스라엘은 하느님을 완전히 버리고 잊은 것이 아니었다. 하느님을 배반하지 않았지만 동시에 이교도의 신을 숭배하는 꼴이 돼버려 종교적 혼합주의가 됐다. 실제로 가나안 지역에서 이스라엘의 가장 큰 신앙적인 문제는 종교 혼합주의였다. 이스라엘 백성은 때에 따라서 하느님도 믿고 바알 신도 믿는 태도가 문제였다. 예언자들은 이스라엘 신앙의 순수성을 훼손시키는 이러한 우상숭배적 의식을 강력하게 단죄하고 나선다. "나는 바알들의 축제일 때문에 그 여자를 벌하리라. 그 여자는 바알들에게 분향하고 귀걸이와 목걸이로 단장한 채 애인들을 쫓아갔다. 그러면서 나를 잊어버렸다. 주님의 말씀이다"(호세 2,15 등). 이처럼 성경에서는 하느님을 배신하는 행위를 곧잘 창녀의 매매춘에 비유해서 사용했다. 곧 한 분뿐이신 하느님께 등을 돌리고 다른 신들을 섬기는 행위, 배우자를 배신하고 간음하는 것과 같은 것이라는 것이다. "이스라엘이 시팀에 머물러 있을 때, 백성이 모압의 여자들과 불륜을 저지르기 시작하였다. 이 여자들이 저희 신들에게 드리는 제사에 백성을 부르자, 백성은 거기에서 함께 먹으며 그들의 신들에게 경배하였다"(민수 25,1-2). cpbc2013.10.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