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 이야기] (28) 사두가이보수적 성향의 오만한 상류층 집단 사두가이는 대사제 등 이스라엘 고위 성직과 관료직을 독점한 유다교 정파이다. 사진은 조토가 그린 ‘가야파 앞에 서신 예수’ 프레스코화 오늘날 ‘통곡의 벽’이라 불리는 예루살렘 성전 서쪽 벽을 정면으로 바라볼 수 있는 유다인 지구는 예수님 시대 당시 사두가이가 주류를 이루던 상류층 거주 지역이었다. 이들은 주로 고급 관료와 고위직 사제, 대상, 지주들이었다. 사두가이는 기원전 2세기부터 서기 1세기까지 활동하던 유다교 유력 당파로 다윗과 솔로몬 시대 때 대사제였던 사독(2사무 8,17; 1열왕 1,34)을 따르는 사람들이었다. 이들은 이방인뿐 아니라 율법을 철저히 지키지 않는 유다인과 자신들을 구분하기 위해 ‘분리된 자’로 스스로 칭했던 바리사이처럼, ‘정의를 따르는 사람’ ‘의로운 사람’이란 뜻의 ‘사두가이’라 자랑했다. 사두가이는 마카베오 가문이 세운 하스모네아 왕조의 후원을 받으며 귀족 정치집단으로 성장했다. 그들은 기원전 109년 사마리아를 정복한 하스모네아 왕조 요한 히르카노스 1세(기원전 134~104년)와 손을 잡은 후 서기 70년 아브월(7~8월) 9일 예루살렘 성전 멸망 때까지 부와 상류층 특권을 누렸다. 자연히 그들은 사회 변화보다 현상 유지에 더 관심이 있었고, 종교적으로는 보수적 성향을 나타냈으며, 정치적으로는 항상 힘있는 외세에 협력했다.예수님 시대 당시 유다인 사회의 두 주류였던 사두가이와 바리사이는 ‘이방인 세계에서 어떻게 하느님의 백성을 보호할 것이냐’는 질문에 근원적이고 본질적인 시각차를 보여 원수처럼 냉랭했다. 사두가이는 모세 오경에 나오는 율법을 문자 그대로 받아들이고 살았다. 바리사이와 달리 모세 오경을 폭넓게 해석할 수 있는 구전 전승을 철저히 거부했다. 그래서 성경에 대한 해석도 바리사이와 사뭇 달랐다. 예를 들어 ‘보상법’을 다룬 레위기 24장 19-20절 규정(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갚는다)에 대해 바리사이는 눈이면 눈에 대한 가치를 계산해 가해자에게 형벌을 줘야 한다고 생각한 반면 사두가이는 문자 그대로 가해자의 눈을 도려내야 한다고 주장했다. 사두가이는 또 안식년 규정을 엄격히 지켜 노예 해방이나 부채 면제 등을 엄격히 실시할 것을 요구했다. 상류층이 주류를 이룬 사두가이는 대중의 지지를 받지 못하였지만 바리사이는 일반 대중의 지지를 얻었다. 또 바리사이들은 서로 우의가 있으며 조화로운 공동체를 이뤘지만 사두가이는 서로 간에도 야비한 행동을 하며 마치 이방인 대하듯 무례했고, 신분이 낮은 자들에게는 오만하고 냉엄했다. 사두가이는 율법에 부활에 대한 언급이 없어서 죽은 자의 부활이나 천사, 영혼의 존재 등을 거부했다. 따라서 그들은 내세의 보상이나 형벌을 믿지 않았다. 따라서 현세의 삶을 중시하고 인간의 자유 의지와 책임을 강조했다. 인간은 자신의 행동에 상응하는 보상과 징벌을 현세에서 받는다고 믿은 사두가이들은 현 사회에서 자기들이 누리는 지위와 부가 하느님께서 내려주신 축복의 표지라고 여겼다.복음서에서 사두가이에 대한 언급은 그리 많지 않다. 마르코(12,18)와 루카(20,27) 복음서에서 각각 한 번, 마태오 복음서에서 세 번(3,7; 16,1-12; 22,23-33) 나온다. 또 사도행전에는 사두가이가 예수님과 사도들의 적대자, 핍박자, 예수님과 사도들을 죽음에 이르게 한 대사제의 추종세력으로 등장하며 그리스도교 교리를 반박하는 자들로 묘사되고 있다(사도 4,1; 5,17; 23,6-8 참조).예수님 시대 사두가이들은 성전과 밀접하게 관련된 사람들이었다. 성전에서 제사를 담당했던 고위 성직자들이요 귀족 정치인들이었다. 그들은 예루살렘 성전을 순례하는 유다인들에게 십일조를 거둬 성전 재정을 관장했다. 사두가이는 예수님께 대해서만은 바리사이와 같은 노선을 취했다. 예수님의 가르침이 불변의 율법을 파괴한다고 여겼을 뿐 아니라 메시아 사상을 용인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또 예수님의 활동은 로마인과 그들의 관계를 곤란하게 만들 우려가 있어 사두가이들은 예수님을 철저하게 반대했다. 사두가이는 그들의 주요 활동 무대였던 예루살렘 성전이 서기 70년 로마에 의해 파괴된 후 정치적 영향력을 발휘할 수 없어 자연히 그 정체성도 함께 사라졌다.리길재 기자 teotokos@pbc.co.kr 평화신문2014.09.17
신약의 비유 착한 사마리아 사람의 비유사회적 이념으로 편을 가르려는 시선 비판 사마리아인이 다친 여행자를 말에서 내리게 돕는 모습. 성화는 빈센트 반 고흐의 「착한 사마리아 사람」. 루카 10,25-37이 비유 역시 가장 많이 알려지고 사랑받는 비유다. 예화에 속하는 이 비유는 가장 큰 계명, 즉 영원한 생명을 얻기 위한 계명에 대한 율법 교사와의 논쟁으로 시작된다. 율법에서 가장 큰 계명이 사랑의 이중계명임을 확인한 율법 교사는 예수께 누가 이웃인지 묻는다. 이 질문은 실제로 “영역을 어디까지 정해야 하는지”를 의미하는 것이다. 그에 대한 대답으로 이 비유가 주어진다.도움의 손길 건넨 진정한 이웃한 여행자가 예루살렘에서 예리코로 내려가는 길에서 강도를 만나 초주검이 된다. 이 길은 옛날부터 험하고 위험하기로 소문난 곳이었다. 예루살렘은 해발 820m이고 예리코는 해발 250m로 1000m 이상 고도차가 나고 거리는 약 27㎞ 떨어져 있다.이 초주검 상태가 의식을 잃고 죽은 것처럼 보인 것인지, 위급하지만 도움이 필요한 상황인지에 따라 해석이 조금 다를 수 있다. 왜냐하면 율법에 의하면(레위 21,1-2; 에제 44,25-27) 어떤 사람이 시신을 만지면 일주일 동안 부정한 상태가 되며, 특히 사제는 가족의 시신을 제외하고는 어떤 시신도 만질 수 없었고, 가족의 시신을 만졌을 경우에도 일주일 동안 부정한 상태가 된다. 그러나 사마리아인이 그를 도왔고 사제와 레위인이 멀찍이 돌아간 것으로 보아 적어도 그는 시체처럼 보이지는 않았을 것이다.처음 등장한 인물은 사제다. 사제는 여행자를 보고는 길 반대편으로 지나가 버린다. 환자의 상태를 살피지도 않고 멀찍이 돌아간 것은 명백한 도움 거절이다. 그 다음 등장한 인물은 레위인인데 그 역시 길 반대편으로 지나간다. 사제도 레위 부족에 속한 사람이지만 첫 번째 사제직을 맡은 아론의 후손이고, 레위인들의 역할은 제사 동안에 사제를 돕는 일이었다. 이 두 사람은 사람의 생명을 살리는 것이 모든 율법 규율에 앞선다는 것을 알면서도 관여하지 않았다.그 다음에 등장하는 사람이 사마리아 사람이다. 유다인들은 사마리아 사람들을 변절자로 여겼고 경멸의 대상으로 생각했다. 그 이유는 이스라엘의 역사 안에서 왕국이 둘로 갈라진 시점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솔로몬 왕의 사후 이스라엘은 남 유다 왕국과 북 이스라엘 왕국으로 분리되어 약 200년간 함께 존속한다. 기원전 722년 아시리아에 의해 먼저 북 이스라엘 왕국(사마리아)이 멸망하는데 아시리아 왕은 기존의 거주민들을 유배시키고 이방인들을 거주시키는 민족 혼합정책을 썼다. 유다인들은 그때부터 사마리아 사람들을 이방인이거나 이방인들보다는 조금 더 가깝지만 절대 동족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사마리아인도 역시 사마리아 모세오경을 갖고 있었기 때문에 핑계를 대고 그냥 지나칠 수 있었다. 그렇지만 그는 가엾은 마음이 들어 여행자를 치료하고 여관으로 옮겨 돌본 다음 떠나면서 두 데나리온을 주인에게 맡기고 돈이 더 들면 돌아와서 갚겠노라고 이야기한다.사마리아 사람의 이 행위는 상당한 위험을 무릅쓴 것이다. 환자를 돌보면서 본인도 강도를 만날 수 있었고, 또 민족적인 감정에서 다른 사람에게 강도로 오인될 수도 있었다. 그러나 그는 당시 치료약으로 쓰이던 올리브유와 포도주로 치료하고, 여관으로 옮겨 돌보아준다. 그가 떠나면서 맡긴 두 데나리온은 일반 노동자의 이틀 품삯으로, 환자가 여관에서 1~2주일 정도 머물며 봉사를 받을 수 있는 금액이었다.이웃을 내 몸처럼 사랑하라이 비유를 말씀하신 예수께서는 율법 교사에게 “누가 이웃이 되어주었느냐?”고 물으신다. 사제와 레위인의 행동 때문에 이 비유를 듣기 힘들었을 율법 교사는 차마 “사마리아인”이라고 대답하지 못하고 “그에게 자비를 베푼 사람”이라고 대답한다.이 비유의 앞에 나오는 율법 교사의 질문 “누가 저의 이웃입니까?”라는 질문은 “누가 이웃이 아닌가?”라는 의미도 포함되어 있다. 당시 유다인들은 자기 동족과 유다교로 개종한 사람들만 이웃으로 생각하였다. 그러나 유다인들은 사마리아인들을, 그리고 바리사이들은 죄인들을 이웃으로 생각하지 않았다. 예수께서는 이 비유를 통해서 누가 이웃이고 누가 이웃이 아닌지 사람들을 구별하려는 시도는 잘못된 것이며, 그보다 “나를 필요로 하는 사람에게 이웃이 되어주었는가?”를 물어야 한다고 가르치신다.그리스도교 신학과 윤리는 하느님 사랑과 이웃을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는 계명에 근거한다. 첫 번째 규범은 고대의 셰마(신명 6,4-5)에 근거하는데, 이는 유다교 전승의 규범적이고 신앙 고백적 선언이다. 두 번째는 사도 바오로가 다시 취하는데, 그는 이웃을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는 계명이 구약의 모든 윤리적 가르침의 요약이라고 생각하였다(로마 13,8-10; 갈라 5,14). 다른 곳에서는 이 계명이 그리스도교 전통의 “지고한 법”(야고 2,8)으로 칭해지는데, 이것이 이 비유의 가장 매력적인 측면이다. 경계를 정하기 위해 이웃 사랑과 관련된 율법을 도구화하려는 의도에 반해, 예수의 관점에서 그분의 진정한 의도는 사람을 구별하려는 어떠한 시도도 용납하지 않으신다. 이웃 사랑은 하느님 사랑에서 영감을 받고, 이웃 사랑을 통해 하느님 사랑을 실천하는 것이다. 백영민2014.10.08
예언자 엘리야가 거짓 예언자들과 싸워 하느님 증거한 산[사진으로 떠나는 이스라엘 성지기행] 21. 카르멜 산하느님의 포도밭 카르멜 산 정상에서 바라본 이즈르엘 평원. 우리말 '포도밭'을 뜻하는 히브리말 '케렘'에서 유래한 카르멜(하느님의 포도밭)산은 지중해 연안을 끼고 카이사리아에서 하이파 만까지 이스라엘 북서부로 길게 뻗어 있다. 해발 546m 최고봉에서 동쪽으로 이즈르엘 평원이, 서남쪽으로 샤론 평야가 펼쳐져 있다. 팔레스타인 지역 대부분 산은 '민둥산'인데 카르멜산은 숲으로 우거져 있다. 또 남서면의 가파른 언덕 곳곳에는 동굴들이 많아 고대 구약시대 때부터 주거지와 은신처로 이용됐다(아모 9,3). 이 동굴들에선 기원전 4000년대, 신석기 시대에서 청동기 시대로 넘어가는 시기의 팔레스타인 지역민들 집터와 무덤들이 발굴됐다. 카르멜산은 고대 가나안 사람들로부터 신성한 산으로 여겨졌다. 그들은 이 산에 산당을 짓고 제단을 세웠다. 기원전 15세기부터 12세기까지 이곳을 지배했던 이집트 파라오 투트모세 3세와 람세스 2세, 람세스 3세는 문헌에 '거룩한 산'이라 기록했다. 구약성경도 카르멜 산이 우상숭배의 중심지였고, 엘리야 예언자가 바알의 거짓 예언자 450명과 아세라 예언자 400명과 대결해 참 하느님을 증명한 장소라고 기록하고 있다(1열왕 18, 20-40). 솔로몬 사후 이스라엘이 남북으로 갈라졌을 때 예로보암이 북이스라엘의 첫 번째 왕이 됐다. 불안정한 정국을 겪던 북이스라엘은 제6대 오므리 왕 때에 가서 겨우 왕정을 확립했다. 기원전 860년 오므리의 아들로 왕위에 오른 아합은 지중해 시돈의 공주 이제벨과 정략 결혼해 국력을 강화했다. 이제벨 공주가 시집올 때 시돈의 신인 '바알과 아세라' 신앙을 들여와 북이스라엘에 퍼뜨렸다. 사실 바알 신앙은 모세 시대 이전부터 가나안 땅에 퍼져 있었다. 이스라엘 초대 왕인 사울의 아들도 '바알의 사람'이란 뜻을 가진 '에스바알'(1역대 8,33)이었다. 이스라엘 탈출 사건을 통해 하느님의 현존을 체험한 이스라엘 민족이 '폭풍과 비의 신'인 바알과 '풍요의 여신' 아세라의 우상에 현혹된 것은 아마도 정착민으로 유목과 함께 농경생활을 시작하면서 무엇보다 풍요를 염원했기 때문일 것이리라. 해발 482m 지점 카르멜산 등성에는 엘리야 예언자가 '무흐라카'(불의 제단)를 쌓아 바알의 거짓 예언자와 대결했다는 장소가 있다(1열왕 18, 20-40). 유다인들은 12개 돌로 쌓은 이 '엘리야 제단'에 순례를 왔고, 초대교회 신자들도 이 산을 경건히 여겨 570년부터는 은수자들이 들어와 수도생활을 하기 시작했는데 이것이 가르멜 수도원의 기원이 됐다. 무슬림들도 이곳을 찾아와 엘리야 예언자에게 경의를 표하고 기도 촛불을 밝혔으며, 십자군들도 엘리야 제단이 있던 터에 성당을 세웠다. 이 성당은 오스만 튀르크 군에 의해 폐허가 됐으나 19세기 초반 남자 가르멜 수도원이 들어와 지금까지 성지를 보존하고 있다. 글ㆍ사진=리길재 기자 teotokos@pbc.co.kr평화방송여행사 협찬 02-2266-1591~2cpbc2014.04.01
[복음 이야기] (20) 종교적 평등으로 이뤄진 이스라엘 열두 지파신앙·율법 통해 지파간 평화·단합 이뤄 프란치스코 교황이 지난 5월 중동지역 사목방문 때 이스라엘 랍비들로부터 이스라엘 민족의 상징인 메노라(촛대)를 선물받고 있다. 【CNS】 성경시대 이스라엘은 열두 지파의 혈맹 공동체였다. 열두 지파의 분할은 야곱이 마지막으로 열두 아들을 축복했을 때에 기원한다. (창세 49,1-28) 야곱은 첫 부인 레아에서 맏아들 르우벤과 시메온, 레위, 유다, 이사카르, 즈불룬을, 라헬에게서 요셉과 벤야민을 낳았다. 또 라헬의 몸종 빌하에게서 단과 납탈리를, 레아의 몸종 질파에게서 가드와 아세르를 낳았다.(창세 35,23-26) 열두 명의 아들을 낳은 야곱은 또 이집트 피난살이 때 요셉이 온의 사제 포티 페라의 딸 아스낫에게서 낳은 므나쎄와 에프라임(창세 46,20)을 자기 아들로 삼아 상속재산을 받게 했다.(창세 48,5-7)야곱의 자손들은 이집트에서 오랫동안 살다가 종살이 처지로 몰락한 후 모세의 인도로 시나이 산에서 십계명을 받고 40년간 광야생활 끝에 가나안 땅 팔레스티나 지역을 점령하고 정착해 한 민족을 이루게 된다. 이 시기를 기원전 13세기 말로 추정한다. 민수기에 따르면 가나안 정착과 함께 지파별로 땅을 나눌 때 사제 가문인 레위 지파는 영토 할당에서 빠지고, 요셉의 몫은 두 아들 므나쎄와 에프라임으로 분할돼 열두 지파의 땅을 나눴다.(민수 1,5-15. 20-43) 이후 이스라엘은 왕정시대가 시작될 때까지 약 200년 동안 지파 체계를 유지했다. 열두 지파의 장로들은 하느님 신앙과 율법을 통해 지파 간의 평화와 단합을 이뤘고, 기원전 12세기 말경 실로에 ‘계약의 궤’가 안치되면서 이곳을 중심으로 지파 간의 문제를 조정, 해결했다. 사울과 다윗, 솔로몬의 왕정 시대 이후 이스라엘은 이스라엘과 유다 두 왕국으로 나뉘었다. 이스라엘은 북부 열개 지파로 왕국을 이뤘으나 기원전 722년에 아시리아에 점령된 후 완전히 멸망했다. 유다 왕국도 신흥국가인 바빌로니아의 공격으로 기원전 587년 예루살렘 함락과 함께 멸망했다. 이후 이스라엘 민족은 바빌론 유배(기원전 587~539년)와 페르시아, 그리스, 로마, 이슬람 제국의 지배를 받으며 전 세계 곳곳에 뿔뿔이 흩어져 1948년 5월 14일 이스라엘 건국을 선포할 때까지 2000년 넘게 나라 없는 민족으로 살았다. 그러나 이스라엘 민족은 자신의 혈통과 가문을 중시했다. 복음서 저자들은 예수님께서 다윗 가문 출신임을 잊지 않고 기록하고 있다. 이스라엘이 고대 다른 민족과 근본적으로 달랐던 것은 확고한 율법으로 민족 공동체를 운영한 사실이다. 성전에 봉사하는 사제들을 제외하고는 세속의 모든 유다인들이 평등했다. “그들이 히브리 사람입니까? 나도 그렇습니다. 그들이 아브라함의 후손입니까? 나도 그렇습니다”(2코린 11,22)라고 한 바오로 사도의 말도 바로 모든 유다인은 평등하다는 대원리에 입각한 고백이다. 유다인들은 가장 가난한 사람이라도 성전 앞뜰에서 하느님을 향해 두 팔을 벌리고 기도할 때에는, 하느님의 눈에 자기나 헤로데나 평등하게 비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이러한 평등 정신은 성경 곳곳에서 찾을 수 있다. 학자들은 이것을 ‘초자연적 계획에 따라 지상의 계급 제도를 전복하려는 혁명적 흐름’이라고 풀이한다. “주 너희 하느님께서 너희에게 주시는 땅 어느 성에서 너희 동족 가운데 가난한 이가 있거든, 가난한 그 동족에게 매정한 마음을 품거나 인색하게 굴어서는 안 된다. 오히려 너희 손을 활짝 펴서, 그가 필요한 만큼 넉넉히 꾸어 주어야 한다.”(신명 15,7-8) “억울한 이를 먼지에서 일으켜 세우시고 불쌍한 이를 거름에서 들어 올리시는 분. 그를 귀족들과 당신 백성의 귀족들과 한자리에 앉히시기 위함이다.”(시편 113,7-8) 신약 시대에도 이 종교적 평등주의 원리는 유다 사회를 그대로 관통하고 있었다. 성모 마리아는 친척 엘리사벳에게 “통치자들을 왕자에서 끌어내리시고 비천한 이들을 들어 높이셨다”(루카 1,52) 고 노래했다.예수님은 산상 설교(마태 5-7장)를 통해 하느님 나라의 참 행복을 선언하시면서 이스라엘 민족과 유다 사회의 뿌리인 하느님 앞에서의 평등 사상을 갈파하셨다. 예수님은 부유한 자와 권세 있는 자는 실상 불행한 자들이며 가난한 사람은 땅의 상속자요 영원히 축복받을 것이라 가르치고 계신다.리길재 기자 teotokos@pbc.co.kr 평화신문2014.06.18
[생활속의 복음] "하늘 나라가 가까이 왔다"대림 제2주일ㆍ인권주일(마태 3,1-12)조재형 신부(서울대교구 성소국장) 대림 제2주일입니다. 대림 제2주일은 인권주일이기도 합니다. 우리에게 오시는 주님은 모든 사람의 인권을 지켜주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오늘 대림 제2주일을 지내면서 소외된 이웃들, 가난한 이웃들, 굶주린 이웃들, 장애인들, 버려지는 생명들을 위해서 기도해야겠습니다. 우리들이 늘 가지고 다니는 것들이 있습니다. 어떤 것들이 있을까요? 남자들과 여자들은 가지고 다니는 것들이 조금 다른 것을 봅니다. 여성들은 대부분 가방을 가지고 다닙니다. 그 가방 안에는 정말 많은 것이 들어 있습니다. 저는 남자이기 때문에 여자들이 가지고 다니는 것들은 잘 모릅니다. 남자들은 보통은 지갑, 열쇠, 손수건 같은 것들을 지니고 다닙니다. 남자와 여자들이 함께 가지고 다니는 것들이 있습니다. 무엇일까요? 저는 '휴대폰'이라고 생각합니다. 요즘 새로 나온 '스마트폰'은 단순히 전화를 걸고 받는데 익숙한 분들에게는 그 기능이 하도 복잡해서 이해하기 힘들 정도입니다. 예전에 휴대폰은 전화를 걸고 받는 것이었습니다. 그 다음에 추가된 기능은 음악을 듣고, 사진을 찍는 정도였습니다. 그런데 지금의 스마트폰은 손안에 있는 컴퓨터와 같은 기능을 하고 있습니다. 전자우편은 기본이고, 각종 기능을 내려받을 수 있어서 원하는 것은 거의 다 할 수 있을 정도입니다. 오늘의 성경 말씀은 이스라엘 백성의 희망과 꿈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스마트폰의 다양한 기능은 이스라엘 백성의 꿈과 희망에 비하면 아주 작은 것처럼 느껴집니다. 이사야 예언자는 '이사이의 그루터기에서 새싹'이 나올 것이라고 말을 합니다. 솔로몬 왕이 죽은 다음 이스라엘은 북이스라엘과 남유다로 분열됐고, 그 두 나라는 강대국에 의해 모두 멸망했습니다. 나라를 잃어버린 이스라엘 백성은 뿔뿔이 흩어졌고 마치 거대한 나무가 쓰러져서 그루터기만 남은 것과 같이 돼버렸습니다. 암울하고 어두운 시대에 이사야 예언자는 놀라운 꿈을 이야기합니다. 이사이의 그루터기에 새싹이 돋을 것이고 그 싹이 자라나 커다란 나무가 될 것이라고 말을 합니다.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것은 하느님의 영이라고 말합니다. 하느님의 영은 아브라함에게 강한 믿음을 주셔서 새로운 민족이 될 수 있게 했습니다. 하느님의 영은 모세에게 놀라운 지도력을 주셔서 파라오의 압제를 벗어나 이스라엘 백성을 약속의 땅으로 인도할 수 있게 했습니다. 하느님의 영은 다윗에게 용기를 주셔서 거인 골리앗을 이길 수 있게 했습니다. 하느님의 영은 솔로몬에게 지혜를 주셔서 이스라엘 왕국을 발전시켰습니다. 그 하느님의 영은 '지혜와 슬기의 영이며 경륜과 용맹의 영'이었습니다. 하느님의 영이 함께하면 늑대가 어린양과 함께 놀고, 어린아이가 사자와 함께 놀 수 있게 만든다고 말을 합니다. 이것은 놀라운 꿈이고, 이것은 어떠한 과학과 기술로도 이룩할 수 없는 새로운 질서입니다. 하느님의 영을 받기 위해서 우리가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오늘 복음에서 요한 세례자는 말해주고 있습니다. 우리 안에 있는 거짓된 영들을 버려야 합니다. 무엇을 버려야 할까요? 나는 할 수 없다는 열등감을 버려야 합니다. 열등감은 우리를 하느님께로 갈 수 없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우리 모두는 하느님의 모상을 닮은 소중한 존재입니다. 우리의 상처를 곪게 하는 미움과 분노를 버려야 합니다. 미움과 분노는 우리의 육체까지도 상하게 하기 때문입니다. 욕심을 버려야 합니다. 욕심은 바닷물을 마시는 것과 같습니다. 요한 세례자는 이러한 행위를 '회개'라고 말했습니다. 우리가 거짓된 영들을 버릴 수 있다면 우리는 하느님의 영을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변화될 것입니다. 과학과 기술은 새로운 기능의 제품을 만들 수 있지만 사람의 영혼을 바꿀 수는 없습니다. 하느님의 영은 낡은 영혼을 새롭게 변화시켜 줍니다. 하느님의 영은 이웃의 아픔을 보듬고, 살아 있는 모든 것을 소중하게 여길 수 있도록 이끌어 줍니다. 이것이 바로 이사야 예언자가 보았던 꿈이었습니다. 그 꿈은 우리에게 오시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지혜와 슬기, 경륜과 용맹의 영'으로 현실이 되게 했습니다. 그것이 바로 '하느님의 나라'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대림시기를 지내는 우리에게 다음과 같이 요청합니다. 우리 모두는 하느님의 영을 받을 수 있다고 말을 합니다. 하느님의 영만이 우리를 변화시킬 수 있다고 말을 합니다. "우리는 성경에서 인내를 배우고 위로를 받아 희망을 간직하게 됩니다. 인내와 위로의 하느님께서 여러분이 그리스도 예수님의 뜻에 따라 서로 뜻을 같이하게 하시어, 한마음 한목소리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느님을 찬양하게 되기를 빕니다"(로마 15,4-6). cpbc2013.12.03
[복음이야기] (24) 대사제와 사제들(상)이스라엘 전통의 옹호자, 민족의 양심 역할 이스라엘 왕조시대 예루살렘 성전에는 2만여 명의 사제가 활동했다고 한다. 하느님께 제물을 바치는 데 꼭 필요한 중개자요 제례의식의 관리자인 사제의 지위는 존중되고 존경받을 수밖에 없었다. 사제는 모세 시대에 탄생하고 왕정시대 예루살렘 성전이 지어지면서 중요한 지위를 차지했다. 사제의 역할은 바빌론 유배에서 귀환한 후 더욱 커졌다. 사제는 이스라엘 전통의 옹호자로서 민족의 살아있는 양심의 역할을 했고, 유다교는 이스라엘의 절대적인 배경과 제도가 되고 또한 존재 이유가 되었기 때문이다. 사제 집안이라 해서 모두 사제가 되는 것은 아니었다. 사제는 흠 없는 온전한 신체를 가진 자여야 했다. “너희 후손 대대로, 몸에 흠이 있는 사람은 자기 하느님에게 양식을 바치러 가까이 오지 못한다. …몸에 흠이 있기 때문에 그는 휘장으로 오거나 제단으로 다가와서 나의 이 거룩한 곳들을 더럽혀서는 안 된다”(레위 21,16-23). 이 율법에 따라 하스모네아 왕조의 히르카노스는 귀를 베인 당일로 대사제직을 내놓아야 했다.사제로 선출되면 율법에 따라 세밀한 축성 예식을 거쳐 성별됐다. 성경은 사제 성별과 임직 예식을 자세히 기록해 놓았다. 사제 임직자는 몸을 정결하게 물로 씻은 후 흰옷을 입고 머리에 성별 기름을 발랐다. 그런 다음 속죄 제물로 바칠 황소 한 마리와 숫양 두 마리를 끌고 와 도살하기 전 안수를 하고 모두 번제물로 바쳤다. 주례 사제는 임직식에 쓸 두 번째 숫양의 피를 임직자의 오른쪽 귓불과 오른손 엄지, 오른발 엄지에 바른다. 그러면 임직자는 굳기름과 떼낸 양의 오른쪽 넓적다리 위에 누룩 없는 과자 하나와 기름을 섞어 만든 빵 과자 하나, 부꾸미 하나를 놓고 그것을 손으로 흔들어 바친 후 제단 위에서 불살라 연기로 봉헌했다. 이것이 구약의 사제서품 예식이다(레위 8장). 대사제의 축성 의식은 일반 사제의 성별의식보다 훨씬 장엄하고 화려했다. 대사제에게 부어지는 기름은 최상의 올리브 열매에서 짜낸 것으로 값비싼 향료를 섞어 극히 향기로웠다. 율법에 따른 희생제는 7일간 바쳐졌다.대사제는 율법상 순결을 옹호하는 최고 책임자이므로 엄한 규율을 지켰고 과부나 이혼한 여인, 또 몸 파는 전력을 가진 여인과 결혼할 수 없었다. 또 죽은 짐승의 고기는 일체 먹을 수 없었고, 성무를 수행하기 전에는 포도주를 마실 수 없었다. 그리고 시체를 멀리해야 했고, 수염은 한 오라기라도 깎아서는 안 됐다. 대사제의 옷은 화려했다. 일상복은 속옷을 입고 흰옷에 넓은 허리띠를 세 번 감고 삼각 모자를 쓴 간소한 차림새다. 성무를 집행할 때는 수놓아 뜬 속옷과 에폿, 가슴받이, 겉옷을 입고 두건과 띠를 했다. 가슴받이에는 이스라엘 12 지파의 이름이 각각 새겨져 있는 12개의 보석이 달려 있었다(탈출 39장 참조). 대축제 때에는 두건 대신 ‘주님(야훼)께 영광’이란 글이 새겨진 삼중 금관을 썼으며 대속죄일 때에는 흰옷만 입었다. 호화로운 이 대사제의 옷은 로마인에게 빼앗겨 안토니아 요새에 보관했다가 대축제일 때만 허가를 받아 입을 수 있었다. 대사제는 온갖 특권을 누렸지만, 지위가 낮은 사제들은 성전에서 생활할 수 없었고 희생으로 바친 짐승의 고기나 빵을 먹을 수도 없었다. 그들 역시 생존을 위해 노동을 해야 했다. 율법에 따라 부정을 범해 죄지은 사제에게는 특별한 형벌이 가해졌고, 사제의 아내나 딸로서 품행이 바르지 않는 이는 엄한 채찍을 받았다.모든 사제는 성소 안에서 맨발로 다녀야 했다. 성소 바닥은 정결례 목욕물이나 희생 제물의 피를 씻은 물로 항상 젖어 있어 이질과 같은 전염병에 늘 노출돼 있었다. 이스라엘의 사제들은 레위 지파에서 배출됐다. 그러나 최고 제관인 대사제의 직무는 모세의 형인 아론과 그 일족에게 맡겨졌다. 기원전 10세기 다윗왕 시절 아론의 후예로 엘아자르의 자손인 차독(공동번역 성경은 ‘사독’)이 대사제로 임명돼 솔로몬에게 기름을 부어 왕위에 올린 후(1열왕 1,39) 그 일족은 기원전 2세기 초까지 예루살렘 성전의 대사제 지위를 독차지했다. 이들은 차독(사독)의 후예들이라 해서 ‘사두가이’라 자칭하며 성전 대사제직을 누렸고, 레위인들은 이들의 복사 역할밖에 못 했다. 이처럼 소수 가문에서 사제들이 선출되면서 자기를 뽐내고 다른 이를 업신여기는 폐쇄적 특권의식이 생겨났다. 이 때문에 그들은 레위인들과 신분이 낮은 자들에게 증오의 대상이 됐다.그러나 예수님 시대 사두가이파는 혈통과 역사로 볼 때 차독의 후예라고 볼 수 없다는 게 학자들의 일반적 견해다. 마카베오 가문의 유다 독립전쟁 승리 후 비 차독 가문에 속한 하스모네아 왕조가 대사제직을 차지했고, 이후에도 차독 일족은 대사제직에서 배제됐기 때문이다. 사두가이파라는 말은 이후 예루살렘 성전의 대사제들과 사상적으로 같은 맥락에 서 있는 사람을 지칭하는 말로 변했다는 것이다. 로마 지배를 받던 예수님 시대 대사제는 유다인의 눈에는 위엄이 넘치는 중대한 인물이었지만 로마인들에겐 한낱 정치적 이용 수단에 불과했다. 리길재 기자 teotokos@pbc.co.kr 평화신문2014.07.22
하느님 지성소 모셨던 이스라엘 민족의 '심장'[사진으로 떠나는 이스라엘 성지기행] 4. 예루살렘 성전과 다윗 도성예루살렘은 다윗 왕이 여부스족으로부터 빼앗아(2사무 5,9) 정치ㆍ종교의 중심지인 새 왕국의 수도로 정하고 세운 도성이다. 지금의 예루살렘 성곽은 오스만 튀르크 제국 슐레이만 2세가 1532년부터 1539년까지 복원한 것이며 다윗 도성은 이 성곽 밖에 위치한다. 가운데 황금돔 모스크 자리가 바로 모리야 산이다. 유다인들은 하느님의 지성소를 모셨던 성채를 '평화의 도시''평화의 근원'이란 뜻의 히브리말 '예루살라임'이라 부른다. 우리에게 라틴말 '예루살렘'으로 더 친숙하게 알려진 도시이다. 예루살렘은 이스라엘 중앙 산악지대 기혼 샘이 있는 키드론 골짜기 서쪽 해발 760m 고지에 자리잡고 있다. 동으로 유다 광야, 서로 쉐펠라 목초지, 남으로 베들레헴, 북으로 벤야민 산지가 있다. 3000여 년 전인 기원전 1000년께 다윗이 천혜의 요새인 이곳에 도성을 세워 유다 바알라에서 '하느님의 궤'를 모셔왔다(2사무 6장 참고). 다윗은 아브라함이 외아들 이사악을 번제물로 바치려 했던(창세 22, 1-22) 모리야 산에 집터를 정해 '시온'이라 했고, 솔로몬이 그곳에 주님의 집을 지어(2역대 3,1) '주님의 계약 궤'를 모셨으며(2역대 5,2-7.10),'주님의 영광'이 성전에 가득 찼다(1열왕 8,1-66). 예루살렘 성전은 유다인들에게 모든 시대를 통해 삶의 중심이 됐다. 토라(모세오경)에 따라 이스라엘 모든 남자는 해마다 과월절(파스카)과 수확절(오순절), 추수절(초막절)에 예루살렘 성전을 순례했다(탈출 23,14-17 참조). 또 예루살렘을 향해 무릎을 꿇고 하루 3번씩 기도하는(다니 6, 11) 풍습이 생겨났고, 회당도 예루살렘 성전을 향해 지어졌다. 예수의 부모도 해마다 파스카 축제 때 예루살렘으로 순례를 가곤 했고, 예수도 12세 되던 해 토라에 따라 예루살렘 축제에 참가했다(루카 2, 41-42). 베네딕토 16세 전임 교황은 "일 년에 세 번 성전에 감으로써 이스라엘은 순례 중에 있는 하느님 백성, 언제나 하느님을 향해 길을 가는 백성이 되며, 유일한 성전에서 하느님과 만남으로써 다시 한 번 자신의 정체성과 단일성을 받아들이는 백성으로 머물 수 있었다"(「나자렛 예수」 2권, 168쪽)고 설명한다. 다윗 도성과 예루살렘 성전은 기원전 586년 바빌론 군대에 의해 모두 파괴됐고, 유다인들은 포로로 끌려가 바빌론에서 70년간 종살이를 했다(2열왕 25장). 바빌론 유배에서 돌아온 이후 즈루빠벨과 예수아가 나서 기원전 515년에 성전을 재건했으나 가장 중요한 계약 궤를 안치하지 못했다(에즈 5,1-6,18). 왜냐하면, 예레미야 예언자가 성전이 파괴되기 전에 신탁을 받고 천막과 계약 궤를 들고 모세가 하느님의 상속 재산을 본 느보 산으로 올라가 어느 동굴에 숨기고 입구를 막아 버렸는데 그 길을 찾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2마카 2,4-8). 기원전 37년 로마에 의해 유다 왕이 된 헤로데는 즈루빠벨의 성전을 부수지 않고 새 성전을 짓기 시작해 46년의 긴 공사 끝에 완공됐다. 헤로데 성전은 다시 한번 이스라엘 민족의 중심지가 됐다. 하지만 이 성전은 겨우 6년 만에 폐허가 됐다. 66~70년에 일어난 제1차 유다 항쟁을 진압한 로마 티투스 황제에 의해 예수의 예언대로 "돌 하나도 다른 돌 위에 남아 있지 않고"(루카 21,6) 완전히 파괴됐다. 이스라엘 전승에 의하면 이날은 유다력 '아브'(8월) 달의 9일째 되는 날로 바로 기원전 586년에 솔로몬의 성전이 바빌론군에 의해 불타 없어진 바로 그날이었다. 유다인들은 솔로몬 성전과 헤로데 성전이 똑같이 파괴된 이 운명의 날을 기억하기 위해 통곡의 벽에서 예레미야의 애가를 읽으며 성전 파괴를 슬퍼하며 메시아 도래를 기도하고 있다. 리길재 기자 teotokos@pbc.co.krcpbc2013.07.16
[복음 이야기] (18) 유다인 결혼 풍속하느님 뜻과 일치하는 일부일처제 따라 유다인의 오랜 종교적 전통은 하느님의 뜻과 자연법에 일치하는 남녀의 이상적 결합을 ‘일부일처제’로 여겨왔다. 사진은 베들레헴 가타리나 성당에서 거행되고 있는 혼인성사 장면. 유다인의 오랜 종교적 전통은 하느님의 뜻과 자연법에 일치하는 남녀의 이상적 결합을 ‘일부일처제’로 여겨왔다. 창세기에 나오는 여인의 창조이야기(창세 2,21-24)에서 그 근거를 찾을 수 있다. 특히 “남자는 아버지와 어머니를 떠나 아내와 결합하여 둘이 한몸이 된다”(창세 2,24)는 말씀에서 일부일처 혼인제도에 관한 성경의 가르침을 명확히 읽을 수 있다.가정생활의 교훈서인 토빗기는 일부일처 혼인 이야기만을 하고 있다. 또 예언자 호세아와 예레미야, 이사야, 에제키엘은 일부일처의 이상을 ‘하느님과 이스라엘 간 계약의 표상’(예레 2,2; 에제 16,8; 호세 2,9; 말라 2,14)으로 묘사했다. 예수님 시대에도 사두가이들은 자기들이 일부일처제도를 지키는 것을 크게 자랑했고, 대사제는 반드시 아내를 한 사람만 둬야 했다. 예수님께서도 부부가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도덕적으로 전 생애를 통해 완전히 결합해야 한다고 가르치셨다. 혼인에 대한 여러 가르침과 비유를 통해 볼 때 예수님께서 명확하게 일부일처를 지지하고 계심을 알 수 있다. 그래서 교회도 한 남자와 한 여자가 부부로 맺은 사랑을 ‘성사’로 인정하고 있다. 하지만 유다인 공동체에서 일부다처 관습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성경에서 카인의 자손 라멕은 두 아내를 둔 자로 처음으로 소개된다. (창세 4,19) 솔로몬(1열왕 11,1)과 기드온(판관 8,30-31), 사무엘의 아버지 엘카나(1사무 1,2)도 여러 아내를 뒀다.또 아내가 임신하지 못할 때 “자식을 많이 낳고 번성하여라” (창세 1,28)는 성경 말씀을 따라 부득이 첩을 두는 일도 있었다. 그 대표 인물이 아브라함이다. 첩을 뜻하는 히브리말 ‘필레게쉬’가 유다인들이 쓰지 않는 외래어임을 고려, 노예제도가 축첩 관습을 조장했을 것이라는 게 학자들의 공통된 견해다.성경 시대 결혼 풍속은 ‘조혼’이 일반적이었다. 랍비들은 “자식의 목덜미를 누르고 있는 동안 아들을 결혼시키라”고 가르쳐 18살을 남자의 결혼 적령으로 여겼다. 여자들은 이보다 훨씬 빨라 율법은 ‘12살 중반’이 출가 적령이라고 한다. 이 관습을 따라 동정녀 성모 마리아께서도 성령의 인도로 결혼 적령인 12살 무렵 약혼해 10대 중반에 예수님을 낳으셨다. (외경 「야고보 원복음」 참고)유다인 가정은 족장과 판관 시대 때부터 이어진 풍속을 따라 아버지가 자녀의 결혼 여부는 물론 아들의 신붓감도 결정했다. 하지만 성경 시대에도 배우자를 스스로 정하는 경우도 있었나 보다. 그래서 탈무드는 “아내를 고르기 전에 심사숙고하라. 미모를 생각하지 마라. 왜냐하면, 그것은 지나가 버리는 것이기 때문이다. 가족을 생각하라”고 가르치고 있다. 남자의 아버지나 신랑이 직접 신부를 선택하면 결혼 준비를 위해 ‘약혼’을 한다. 약혼 기간은 대략 1년간이었다. 구약의 율법은 이 약혼 기간을 결혼한 배우자가 갖는 권리와 의무를 거의 동등하게 인정했다. 그래서 약혼 기간에 낳은 아이를 적자로 인정했고, 약혼한 남자가 죽으면 과부로 취급됐다. 정혼한 여자가 부정을 의심받으면 ‘쓴 물의 시험’(민수 5,11-31)을 받았다. 그리고 간음한 사실이 드러나면 돌로 쳐죽임을 당했다.성경 시대 유다인들은 하느님에 대한 신앙을 지키기 위해 이민족 여인과 결혼해 우상을 섬기는 죄를 범하지 않으려고 동족과 결혼하는 것을 관습처럼 여겼다. (탈출 34,16) 그래서 아브라함은 아들 이사악의 신부로 동족 가운데서 레베카를 찾았고, 야곱도 외삼촌 라반의 딸 라헬 즉 외사촌과 결혼했다. 그러나 예외도 있었다. 아브라함은 이집트인 여종 하가르에게서 첫아들 이스마엘을 낳았고(창세 16,15), 모세는 미디안인 이트로의 딸 치포라(탈출 2,21)와 에티오피아 여인(민수 12,1)을 아내로 맞았다. 다윗의 증조모 룻은 모압인(룻 1,4)이고, 다윗이 간음해 얻은 아내 밧 세바도 히타이트 출신 이방인(2사무 11,3)이었다.사실 구약 율법이 절대적으로 금한 혼인은 이방인과의 결혼이 아니라 ‘근친혼’이다. “너희 가운데 누구든지 자기 살붙이를 가까이하여 그의 치부를 드러내서는 안 된다.…”(레위 18, 6-18) 이 금령을 어기는 자는 사형에 처했다.(레위 20,11) 혈족과 근친혼에 관한 이 세밀한 금령은 예수님 시대에도 효력이 있었다. 성경 시대 이스라엘의 젊은이들은 자기 맘대로 결혼할 수 없었을 뿐 아니라 원치 않는 결혼도 해야만 했다. 어떤 사람이 자식 없이 죽으면, 그의 형제나 상속자가 죽은 이의 아내와 혼인하여 그의 후사를 일으켜 주어야 했다.(신명 25,5-10; 마태 22,24) 이를 히브리말로 ‘레비라’라 하는데 이 율법의 의무는 매우 엄격했다. 만약 이 레비라 규정을 지키지 않으면 죽은 이의 아내는 원로들 앞에서 결혼할 남자의 신을 벗기고 얼굴에 침을 뱉으며 “자기 형제의 집안을 세우지 않는 사람은 이렇게 된다”(신명 25,9)고 저주를 퍼부었다. 예수님께서는 레비라 결혼 풍속을 들어 부활 논쟁 시비를 건 사두가이들에게 “하느님께서는 산 이들의 하느님이시다” 하고 꾸짖으셨다.(마태 22, 23-33)리길재 기자 teotokos@pbc.co.kr 평화신문2014.06.03
[복음이야기] 이스라엘의 절기- 유다력하느님 자비 빌고 관용 드러내는 '축제' 이스라엘의 한 해 절기는 가톨릭교회의 전례력처럼 율법으로 정해진 축제일을 지키는 '유다 종교력'에 따라 규정됐다. 유다인의 일상생활에 중요한 구실을 한 이 축제들은 파종제와 추수제 등과 같은 계절적 풍속에 구세사의 위대한 사건을 기념하는 종교적 축제를 연계시킨 것이 특징이다. 또 유다인의 축제 대부분은 죄에서 벗어나 하느님의 자비를 비는 '회개'의 성격이 강한 것이 다른 민족의 여느 축제와 다른 점이다. 이는 '살아 계신 하느님과의 만남'(탈출 19,17)이라는 축제의 진정한 의미를 되살리기 위한 호소이다. 유다인의 축제는 종교력에 따라 대축제와 소축제로 구분된다. 대축제는 가장 중요한 축제로 △과월절(파스카, 무교절, 유월절) △오순절(추수절, 주간절) △초막절(장막절)이 있다. 신명기 16장 16-17절에 따르면 유다인 가운데 모든 남자는 해마다 세 번씩, 곧 무교절과 주간절과 초막절에 주 하느님께서 선택하신 곳(예루살렘 성전)에 가서 하느님께 예물을 바쳐야 한다. 그래서 유다인들은 이 대축제를 '순례축제'라 불렀다. 소축제는 역사적 사건이나 관습에 기원을 둔 기념일로 초여름 양털을 깎는 행사(창세 31,19; 38,12)와 아다르 달(2월 중순~3월 중순) 14~15일 이틀간 유다인 왕비 에스테르가 페르시아 왕 크세르크세스를 움직여 유다인의 원수를 제거하고 동족을 구한 사건을 기념해 지내는 '푸림절'(에스 9,17-32) 등이 있다. 또 마카베오 형제들이 예루살렘을 탈환해 성전을 봉헌한 것을 기념해 키슬레우 달(11월 중순~12월 중순) 25일부터 8일 동안 지낸 '제단 봉헌 축일(하누카)'(1마카 4,36-59)이 있다. 마카베오 형제들이 니카노르 장군을 무찌른 것을 기념한 아다르 달 13일은 '승전 기념일'(1마카 7,49)로 지냈다. 이외에 유다인은 율법에 따라 '정한 때'라 불리는 안식일과 관련된 축제를 지냈다. 이 공식 축제는 △안식일(탈출 16,23) △매달 초하룻날(민수 28,11) △첫째 달 초하룻날(탈출 40,2-16) △칠월 초하룻날(레위 23,24-25) △안식년(레위 25,1-7) △희년(레위 25,8-22) 등이 그것이다. 유다인들이 신성하게 여기는 숫자 '7'과 연관된 이 축제들은 하느님의 무한한 관용과 자비를 드러내는 축제로 종교적, 사회적, 인도적, 경제적 사면이 시행됐다. 율법은 안식년에 유다인 노예들, 특히 부채 때문에 팔려온 사람들을 해방시킬 것을 명했다. 동시에 이 해에는 모든 부채도 면제됐다. 또한 이 해에는 토지도 한 해 동안 완전히 휴식을 줘야 했다. 안식년을 일곱 번 보내고 난 50년째인 희년에는 모든 노예는 예외 없이 해방됐다. 또한 가난한 사람이 부채를 갚기 위해 부자에게 팔았던 토지는 율법이 엄격하게 정한 가격으로 반환됐다. 유다인은 또 율법에 따라 '금식일'을 정해 지켰다. '정한 때'에 지내는 금식일은 재앙을 막기 위해 회개와 속죄의 뜻으로 금식하는 티쉬리 달(9월 중순~10월 중순) 10일의 '속죄일'(욤 키푸르, 레위 16장, 민수 29,7-11)이 있다. 또 관습에 따라 바빌론 임금 네부카드네자르에 의해 예루살렘 성전이 불타 파괴된 것(2열왕 25,9; 예레 52,12-13)을 애도해 다섯째 달(7월 중순~8월 중순) 7일을 금식일로 지키고 있다. 유다인은 달 이름을 두고 3가지 체계를 따랐다. 첫째 가나안식 달 이름으로 바빌론 유배 이전까지 사용했다. 구약성경은 그 가운데 과월절과 관련된 '아빕 달'(탈출 13,4; 탈출 23,15; 신명 16,1)과 솔로몬 성전 봉헌과 연관된 '지우 달'(1열왕 6,1),'에타님 달'(1열왕 8,2),'불 달'(1열왕 6,38)'을 전하고 있다. 이 네 달 이름 뜻은 모두 농사 절기와 관련되는데 봄의 첫 달 아빕은 '푸른 밀 싹'을, 지우는 봄의 화려한 색을 가리키는 '찬란함' 또는 '밝음'을, 가을의 에타님은 '흐르는 개울'을, 불은 '소출' 또는 '가축'을 뜻한다. 하지만 가나안식 달 이름은 왕정시대 초 상업과 수공업이 발달하면서 거의 사용하지 않고 첫째 달, 둘째 달 등 숫자로 달 이름을 부르기 시작했다. 숫자로 달 이름을 부르는 방식은 바빌론 유배 이후에도 상당히 늦은 시기까지 사용됐고, 구약성경은 이 체계를 가장 많이 인용하고 있다. 숫자 달 이름은 춘분을 기점으로 정한다. 구약 성경은 가나안식 네 달이 어느 달인지 숫자로 밝히는데 아빕은 '첫째 달'(춘분이 낀 달), 지우는 '둘째 달'(춘분 다음 달), 에타님은 '일곱째 달'(추분이 낀 달), 불은 '여덟째 달'(추분 다음 달)이다. 마지막 달 이름은 바빌론식으로 바빌론 유배 이후 이 체계를 사용하기 시작했고 랍비 시대에 와서 완전히 정착됐다. 바빌론식 달 이름은 △니산 △이야르 △시반 △탐무즈 △압 △엘룰 △티쉬리 △마르케쉬반 △키슬레우 △테벳 △스밧 △아다르 순이다. 리길재 기자 teotokos@pbc.co.kr cpbc2014.03.11
[제2회 신앙체험 수기- 가작 수상작] 해바라기글=노중호 신부(수원교구 서부본당 주임) 그림=문채현 준비운동 “내가 달릴 길을 다 달려 주 예수님께 받은 직무 곧 하느님 은총의 복음을 증언하는 일을 다 마칠 수만 있다면, 내 목숨이야 조금도 아깝지 않습니다”(사도 20,24). 어떻게 하면 이렇게 고백할 수 있을까? 너무 궁금해집니다. 인생의 산과 바다, 어떤 우여곡절을 지나야만 이 경지에 이를 수 있을지 호기심까지도 듭니다. 2000년 전에 혹시 기네스북이 있었다면 다니신 거리로만 따져도 바오로 사도가 기네스북의 원조가 되실 것 같습니다. 한순간도 쉴 틈 없이 사도의 발걸음 하나하나가 복음 선포의 길이었습니다. 지치지 않는 그 열정의 원천은 다마스쿠스로 가는 길에서 만난 부활하신 예수님이십니다. 이를 통해 바오로 사도는 예수님을 박해하는 자에서 증거하는 자로 변신합니다. ‘여우도 굴이 있고 하늘의 새들도 보금자리가 있지만 사람의 아들은 머리 기댈 곳조차 없다’고 말씀하신 스승 예수 그리스도의 삶을 그대로 본받은 모습이셨습니다. 이제는 저의 차례입니다. 이 시간, 이 글을 통해 하느님께서 나의 삶의 자리에서 어떻게 이끄셨는지, 섭리 안에 쫓아가며 달려야 할 길을 서투르지만 차근차근 달려가려고 합니다.전반전“한 처음에 하느님께서는 하늘과 땅을 창조하셨다”(창세 1,1). 제가 처음으로 하느님을 알게 된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면 아버지의 어머니, 바로 할머니가 계십니다. 할머니께서는 몸이 약하셔서 예전부터 병을 많이 앓으셨습니다. 특별히 ‘속앓이’를 하셨는데 그 고통은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로 극심했습니다. 하늘이 노랗게 되고, 땅이 돌고 오장육부가 끊어진다고 말씀을 들었지만 제가 이해할 수 없는 영역의 고통입니다. 한해의 마무리가 될 즈음 연말이 되면 너무 아프셔서 쓰러질 지경이셨습니다. 어느 때는 젊은 새댁이 속병을 앓다가 죽었다고 동네 사람들이 모두 모여 장사를 지낼 준비를 할 정도로 살아도 살아 있는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묏자리와 관까지 맞추셨습니다. 그런데 무당을 불러 한 상 거하게 차리고 굿판을 펼치면 신기하게도 할머니께서는 벌떡 일어나셨습니다. 심지어는 다 죽어가던 할머니께서 일어나시어 굿을 구경 온 동네 사람들의 시중을 들 정도였습니다. 이렇게 생사를 오가며 굿을 하는 것도 한두 번으로 끝나지 않고, 집안의 형편까지 어려워 죽을 판에, 매년 반복되는 죽음에 이르는 고통 속에 할머니께서는 말씀하셨습니다. “나 죽기 전에 성당이나 나가 보고 죽을래요.” 무속과 불교가 뿌리 깊은 동네에서 참으로 놀라운 말씀이었습니다. 동네에서 천주교 성당을 다니는 분은 한 분이셨습니다. 그 할아버지 한 분의 도움으로 그 날로 바로 예비신자 교리를 다니셨고, 힘들고 어려운 모든 교리와 기도를 외우신 다음 참으로 어렵게 세례성사를 받으셨습니다. 미사와 첫영성체를 하신 할머니께서는 그다음은… 참으로 놀랍게도 할머니의 속앓이는 씻은 듯이 없어지고 아주 건강해지셨습니다. 아멘입니다. 할머니의 기적을 체험한 할아버지, 아버지, 작은아버지, 고모 등 모든 가족이 악습을 끊고 천주교 신앙의 발걸음을 걷게 됩니다. 다른 가정은 신부님과 수녀님께서 또는 선교사나 봉사자분들의 도움으로 신앙생활을 하게 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런데 저희 가정은 아버지께서 농담으로 말씀하십니다. “우리는 마귀가 선교했어.” 그렇게 무속 집안에서 천주교 신앙의 꽃을 피웠습니다. 1784년, 이 황무지 땅에 지혜로운 조상들이 천주 신앙을 받아들임과 비슷한 길을 걸었구나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시어머니의 배턴을 받은 며느리, 곧 저의 어머니의 특기 사항은 ‘담 넘기’였습니다. 외할머니께서는 너무 순하시고 선하셨는데, 딸이 주일마다 어디를 가는 것 같아 주일에는 특별히 많은 집안일을 시키셨습니다. 그렇게라도 집안에 묶어두시려고 하셨나 봅니다. 그렇지만 어머니께서는 더 정성껏 빨리빨리 다해 놓으시고 외할머니께서 대문을 지키면 뒤뜰의 담을 넘으셨습니다. 공세리성당…. 하느님의 집으로 가는 달음질이었습니다. 제가 커서 자동차를 운전할 때가 되어 외할머니댁인 둔포에서 공세리성당까지 가 보게 되었는데 자동차로도 거리가 꽤 멀었습니다. 그런데도 어머니께서는 그 먼 길을 달리고 또 달리셨습니다. “나는 훌륭히 싸웠고 달릴 길을 다 달렸으며 믿음을 지켰습니다”(2티모 4,7). 어머니께서는 그렇게 하느님 사랑에 흠뻑 빠지십니다. 어머니께서는 학창 시절 수녀원 가실 준비도 하셨는데, 그때 운명적인 만남을 갖게 됩니다. 영화나 드라마에서처럼 낭만적인 연애 이야기를 기대하며 “아버지와 어머니는 어떻게 만나셨어요?” 언젠가 여쭈어 봤는데, “응, 성당에서 교리 공부하다가 만났어!”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좀 재미없다 시시하다 생각했는데 “그럼 연애 편지는 어떻게 쓰셨어요?” 여쭈어 보았더니 천주교 교리 문답을 주거니 받거니 하셨다고 합니다. 못 말립니다. 그래서 그 신앙적 차원으로 볼 때도 어머니께서는 저와 형의 첫 번째 교리 선생님이셨습니다. 예전에 영어 조기교육 열풍이 불었는데, 저희 형제는 교리 조기교육 열풍이었나 봅니다. 그래서 어려운 교리가 쉽게 다가왔습니다. 저와 형이 원하든 원하지 않든 그렇게 저절로 자연스레 하느님을 알게 되었습니다. 순수 우리나라 말에 ‘나도 모르는 사이에 점점…’이라는 뜻의 ‘시나브로’가 있습니다. 그 말처럼이었습니다. 어머니는 성가정의 성모 마리아와 같으셨습니다. 그렇게 준비시키셨나 봅니다. 하느님께서는….너무나도 지혜로우셨던 할아버지께서는 집안의 가장으로서 화목한 가정으로 이끄셨습니다. 싸움이 일어나고 마음이 닫히게 되어 서로 말하는 것도 꺼려질 때, 할아버지께서는 그날 밤 온 가족을 안방으로 불러 모으셨습니다. 농번기에는 너무나도 많은 농사로 인해 몸과 마음이 모두 지치기 때문에 화목했던 가정이 싸움이 일어나는 것이 당연하다고 말씀하시며, 할머니, 아버지, 어머니, 형 그리고 저의 모든 이야기를 들으셨습니다. 이상하게도 신기하게도 할아버지께서 이끄시는 가족 대화 시간이 지나면 불같이 화났던 마음이 사그라지고, 힘들었던 마음도 위안이 되며 평안해졌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 너희는 모두 나에게 오너라. 내가 너희에게 안식을 주겠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를 메고 나에게 배워라”(마태 11,28-29)고 말씀하셨는데, 우리의 삶이 얼마나 고되고 힘겨운지 벌써 잘 아신 것 같습니다. 세상의 멍에가 아니라 따뜻하고 부드럽고 하느님께 영광을 올리는 예수님의 멍에를 메고 배우라는 말씀을 기억하게 하셨습니다. 일하는 소가 참된 주인을 만나고 주인과 만남의 연결고리인 멍에를 제대로 멜 때 세상의 밭을 잘 일구어낼 수 있습니다. 할아버지께서는 가족 대화 시간이 끝나면 꼭 묵주기도를 봉헌하셨습니다. 그래서 아직도 동그란 묵주를 보면 동그랗게 둘러앉아 기도하던 가족의 자리가 생각납니다. 그렇게 행복함도 오래가지 않아, 할아버지께서는 간암 선고를 받으셨습니다. 청천벽력, ‘마른 하늘에 날벼락’이라는 표현도 적합하지 않았습니다. 지혜로 말하면 솔로몬과 같으셨고, 가장으로 말하면 나자렛 성가정의 요셉과 같으셨던 할아버지께서는 처음에 간암이라는 소식을 받아들이기 힘들어하셨습니다. 온몸이 앙상하게 나뭇가지처럼 마르고, 배는 복수가 너무 차서 숨 쉬는 것조차 힘겨워하셨습니다. 극심한 고통의 나날이셨는데 하루는 할아버지께서는 저를 부르셔서 “중호야, 할아버지가 너무 아파. 할아버지를 위해서 성가 좀 불러 줄래?” 말씀하셨습니다. 가슴이 아프고, 놀라고, 눈물이 눈을 가려서 도통 성가책이 보이지 않았지만 그래도 용기를 내었습니다. 울먹이는 소리였지만 할아버지 위해서 가톨릭 성가를 처음부터 끝까지 아는 성가를 부르기 시작했습니다. 수많은 성가 중에 할아버지께서는 50번을 참 좋아하셨습니다. “주님 나의 목자 아쉬울 것 없노라, 파란 풀밭에 이 몸 뉘어 주시고, 고이 쉬라 물터로 주 나를 이끌어 주네.” 할아버지 손을 잡고 이 성가를 부르면 신비롭게도 할아버지께서는 허덕이고 가빠졌던 숨이 평안해지고, 고통으로 짓눌렸던 얼굴과 온몸이 갓난아기처럼 순하게 변모되셨습니다. 그렇게 할아버지를 하느님 품으로 보내드렸습니다.경기중할아버지께서 하느님 품으로 돌아가시면서까지도 유언으로 “내가 하느님 품에 가서도 성호가 신부님이 되길 기도할게!”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서 형은 이미 집안에서 준비된 신부님이셨습니다. 저는 초등학교 3학년 때부터 복사를 서면서 신부님의 하얀 제의를 보고는 ‘나도 신부님 되면 좋겠다’라는 생각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가족들에게 표현하기 조심스러웠고, 제 안에서 저 스스로 종이 접듯 접어야 했습니다. 누나가 있는 것도 아니고, 동생이 있는 것도 아니고, 오로지 형과 저 둘뿐인 집안에서 형이 먼저 신학교에 입학해서 사제의 길을 걷기 때문에 더욱 그러하였습니다. 그런데 청개구리 심보는 어쩔 수 없나 봅니다. 용기를 내어 어머니께 말씀드렸더니 너무 의외로 어머니께서는 “형 때 보니깐 교구청에 가면 예비신학생 모임으로 학사님들과 신부님들께서 잘해 주시고, 맛있는 곰탕에 깍두기도 주시더라, 맛있게 먹고 와!” 도대체 이런 말씀은 어떻게 할 수 있는 건지, 지금 생각해도 어머니의 내공에 많은 점수를 드리고 싶습니다. 안성에 있는 안법고등학교에서 일곱 명의 친구들과 예신 모임을 다녔습니다. 너무나도 신이 났습니다. 우리 다 같이 신학교 가자고 손을 맞대고 파이팅을 외치기도 하였습니다. 고3, 이제 신학교 입학 1년도 남지 않았던 봄, 예신 모임을 룰루랄라 다니던 7총사 중 한 명의 친구가 자꾸 다리가 아프다고 하였습니다. 같은 반이었고 제 뒤에 앉았기에 저는 수업 시간에도 선생님 몰래 친구의 저린 다리를 주물러주었습니다. 그런데 어느날부터 자주 결석을 하더니 병원에 입원하였다는 소식이 전해졌습니다. 병문안을 친구들과 같이 갔는데, 친구의 어머니께서는 퇴원해서 기도원에서 치료받는다고 하셨습니다. 병명은 골수암이었는데, 잘못된 기도원으로 가서 친구는 고통 속에서 하늘나라에 가게 되었습니다. 꼭 같이 신부님 되자고 약속했었는데 그렇게 허망하게 친구를 보내야 했습니다. 아버지와 할머니께서 이 소식을 아시게 되었고, 또한 제가 신학교에 가는 것을 원한다는 이야기까지 듣게 되셔서 할머니께서는 고모들, 작은아버지까지 5남매를 총출동시키셨습니다. 온 가족이 제 앞에 둘러앉으셔서 모두 반대의 목소리를 내셨습니다. 형이 먼저 신학교에 갔고, 아버지 어머니는 누가 모시게 될 것이냐로 시작하여 모두 걱정의 소리이셨습니다. 온 가족의 이야기를 모두 듣고 저는 단호하게 말씀드렸습니다. “제가 비록 육적으로 효도를 못 해도, 영적으로는 누구보다도 지극한 마음으로 효도하겠습니다.” 그 다음은 더 이상 아무도 이야기하지 못하셨습니다. 그렇게 파란만장한 끝에 신학교에 입학했고, 2008년 8월 22일 주님의 제단 앞에 엎드리며 예수 그리스도와 혼인하게 되었습니다. 평화의 사도, 가난한 이들의 벗, 예수님을 가장 많이 사랑했던 프란치스코 성인은 지금으로부터 벌써 800년 전, 1200년대에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제가 할 수 있는 것은 최선을 다하게 해주시고, 제가 할 수 없는 것은 체념할 줄 아는 용기를 주시며, 이 둘을 구분할 수 있는 지혜를 주소서.” 부푼 꿈을 간직하고 보좌 신부 3년, 오전동ㆍ하안ㆍ상대원 본당의 소임을 마치고 첫 주임을 나가게 되었습니다. 안산의 원곡본당입니다. 그렇게 동고동락을 하던 안산에서의 3년 차인 2014년은 유난히 아픔과 상처가 많은 해였습니다. 천상병 시인은 ‘귀천’이라는 시에서 죽음을 ‘이 세상 소풍 끝내는 날’이라고 표현했지만, 소풍이라고는 도대체 받아들일 수 없는 고통의 연속이 벌어졌습니다. 하물며 죽음에서 다시 살아나야 하는 부활은 얼마나 더 깨지고, 아파하고, 희생하고, 우리가 수없이 변화되어야 이루어지는 것인지 뼈저리게 알게 되는 시간의 연속이었습니다. 부활 대축일을 준비하는 성주간 수요일 그날을 기억합니다. 2014년 4월 16일…. 다시 생각하는 것조차 너무 아픔이고 죽음이어서 다시 꺼내기가 힘들지만, 그래도 다시 용기를 내고 말씀을 전해야 합니다. 꼭 그래야만 합니다. 아이들과 약속하였기 때문입니다. 보좌 신부 생활을 마치고 처음으로 주임 신부의 소명을 받고 저는 오자마자 수원교구 사제 체육대회 때 농구를 하다가 십자인대가 파열되어서 생전 처음 휠체어와 목발 신세를 지며 불편하게 미사를 봉헌해야 했습니다. 그런데 실망하거나 기분 상해 있을 수가 없었습니다. 옆의 복사 친구들이 “신부님 괜찮으세요? 휠체어 타는 것 재미있으시죠?” 너무나도 따뜻한 관심과 사랑으로 장난도 치며 잘 도와주었기 때문입니다. 휠체어를 탈 때는 밀어주고, 목발을 짚을 때는 잡아주고, 저는 한순간도 불편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렇게 정이 팍팍 들었습니다. 이제는 실명을 거론해도 될 것 같습니다. 성주간 주님 수난 성지 주일에 십자가 행렬을 할 때도, 중고등부 학생 미사를 할 때도 늘 밝고 명랑한 ‘장준형 사무엘’이 있었습니다. 복사 단장이어서 동생들을 잘 챙기고, 복사 배정표를 잘 계획했으며, 빠지는 친구가 있으면 ‘제가 하면 되지요’ 하고 허허 웃으며 대신 복사를 섰던 학생이었습니다. 중고등부 주일학교 임원으로서 학생회를 이끌고 따르는 후배들이 많아 말 그대로 인기쟁이었습니다. 특출나게 잘 생겼고, 본당의 모든 신자분에게 인사도 잘하여서 사랑을 너무나도 많이 받는 학생이었습니다. 또한 예비신학생이었기 때문에 훗날 거룩한 미사성제를 집전할 신부님이 되실 분이었습니다. 전례의 꽃이고, 1년 중 가장 중요한 파스카 성삼일을 준비하며, 성목요일 주님 만찬 미사부터 복사단장만이 할 수 있는 향 복사를 하기로 약속하고 연습을 앞두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준형이가 안 옵니다. 축구도, 농구도, 배드민턴도, 장난도 하며 정말 잘 지냈기에 이번에도 장난스레 말하며 ‘왜 안 와? 왜 이렇게 늦어?’ 혼내 보려고 합니다. 그런데도 안 옵니다. 중고등부 교감 선생님께 “준형이가 안 오네요”하고 말씀드리니 선생님께서는 장난꾸러기 준형이는 평소에도 늦잠 자고 늦게 올 때가 있었다며, 그렇지만 늦어도 꼭 오는 아이이니 기다리면 온다고 하였습니다. 준형이와 가장 친한 친구는 “바닷물 차갑다. 그만 놀고 돌아와라”라는 카톡 프로필 글을 써서 눈물바다를 만들기도 하였습니다. 본당 공동체가 눈물로서 기다림의 고리기도를 하였습니다. 준형이는 약속을 지켰습니다. 드디어 왔습니다. 언제나 그랬듯이 두 발로 껑충껑충 뛰어오며 “신부님 늦었어요, 늦어서 죄송해요”라고 머리를 긁적이며 올 줄 알았는데 들것에 실려 온몸에 따뜻함은 다 사라지고 싸늘하게 누워서 왔습니다. ‘왜 이러셔야 했습니까? 무엇이 잘못되었습니까?’ 고려대 안산병원 장례예식장에 빈소가 차려지는데, 저에게는 눈물도 허락되지 않았습니다. 가슴을 치고 또 치고, 오열하고 싶은데 눈물까지 흘리면 모든 것이 무너져 버릴 것 같아 이를 악물었습니다. 학생증 사진으로 영정 사진을 만드는데, 도통 준형이와 영정사진이라는 말이 어울리지 않았습니다. 어둠과 죽음의 그늘 속에서 제가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주일학교 모든 친구가 “이 나라에서는 못 살겠습니다. 이민 가려고 합니다.” 모든 것에 포기였고, 절망뿐이었습니다. 차가운 진도 바닷속에서 일주일 내내 추위 속에서 꽁꽁 지내 왔을 준형이인데, 정부의 장례 절차가 준비되어 있지 않았고, 다른 실종자 가족들의 상황 때문에 장례 예식장에 와서도 6일이나 냉동고에 있어야 했습니다. 매 순간 연도와 미사와 많은 조문객이 오셨고, 7일째 되는 날 화장을 하여 하늘나라에 보내야 하는 어쩔 수 없는 상황이 되었습니다. 내일이면 화장을 하여 장례를 지내야 하는 그때, 진도에서 연락이 왔습니다. 지금 준형이로 알고 있었던 학생은 DNA 확인 결과 다른 반 친구였습니다. 헛구역질이 납니다. ‘두 번 죽이는 꼴’이라는 말도 표현조차 되지도 않습니다. “내 자식도 못 알아봤다….” 대성통곡을 하시며 아버지와 이모와 이모부는 일주일 내내 한숨 주무시지 못한 몰골로 바로 6시간 진도의 길로 다시 내려가셔야 했습니다. “찾아올게요. 내가 바다에 들어가서라도 우리 아들 찾아올게요.” 준형이 아버지의 울부짖음 속에 그렇게 보름이 지난 5월 1일 노동자의 성 요셉 축일에 준형이는 진짜 우리 곁에 왔습니다. 그날은 본당의 날이었습니다. “성령의 불을 끄지 마십시오. 모든 것을 분별하여, 좋은 것은 간직하고, 악한 것은 무엇이든지 멀리하십시오”(1테살 5,19-22). 신자들에게 말했습니다. 특별히 가장 큰 아픔을 겪고 있는 유가족과 주일학교 친구들에게 말했습니다. “이민 가려는 생각이나, 욕하고 피하려는 것이나, 쓰러져서 주저앉아 있는 것보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을 하자,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에서부터 하자, 그래야만 준형이의 죽음이 헛되이 되지 않는 것이니….” 장례를 두 번 해야 하는 상황에서 안산의 장례 예식장 전체가 포화 상태였습니다. 그래서 성당 대강당에 빈소를 차리고, 끊임없이 연도를 하였습니다. 아이들은 생전 처음 하는 연도도 이제 곧잘 하였습니다. 다음날 성당에서 장례 미사를 하며 하느님 품 안에 잘 보내 주려고 제의방에서 제의를 갈아입고 미사 입당을 하였습니다. 그런데 저는 제대에 오르기 전 보았습니다. 가슴이 너무 아프고, 눈앞에 아른거려 한동안 서 있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을, 할 수 있는 일을 아이들이 먼저 하고 있었습니다. 준형이가 사고 나기 전 주까지 주일 미사 때 학생회 밴드로 앉아 있던 빈 의자에 베이스 기타와 꽃바구니가 올려져 있었습니다. 장례 미사지만 여느 때와 같이 슬픔으로 보내고 싶지 않다는 교사들과 아이들의 의견으로 평소 청소년 미사처럼 경쾌하게 학생회 밴드 미사곡으로 하였습니다. 준형이는 전혀 악기 연주를 못 하였던 학생이었습니다. 그렇지만 ‘남아로 태어나 악기 하나는 해야 멋진 사람이지’라는 친구의 말에 독학을 하였습니다. 베이스 기타는 밴드 가운데 전자 기타나 드럼처럼 화려하지 않습니다. 낮은 음이지만 묵묵히 리듬과 박자를 맞추며 가장 기본이 되는, 밴드의 감초 역할을 합니다. 준형이의 삶이 베이스 기타였음을 이제야 깨닫게 됩니다. 고별식 때 장준형 사무엘이 가장 좋아했던 ‘사랑한다는 말은’ 성가를 불렀습니다. “사랑한다는 말은 가시덤불 속에 핀 하얀 찔레꽃…. 어둠 속에서도 훤히 빛나고 절망 속에서도 키가 크는 한 마디의 말, 그 얼마나 놀랍고도 황홀한 고백인가 우리가 서로 사랑한다는 말은….” 장례미사에서 육안으로 보기에 베이스 기타는 빈 의자에 그냥 올려져 있었지만, 영안으로 보기에 그 소리가 들렸습니다. 좋아했던 성가처럼 준형이는 우리 곁에서 베이스 기타를 멋지게 연주해주고 있었습니다. “하늘아, 위에서 이슬을 내려라. 구름아, 의로움을 뿌려라. 땅은 열러 구원이 피어나게 하여라”(이사 45,8). 후반전 세상은 폭우나 소나기를 좋아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돈, 명예, 빠름…. 우리가 최고로 여기는 것들은 수없이 많고, 감각적이고, 큰 성과를 얻어야 성공한 것으로 오해하며 살고 있습니다. 그러나 생텍쥐페리의 어린 왕자가 말해주듯, ‘소중한 것은 눈에 보이지 않습니다.’ 아직 이 세상을 살아갈 수 있는 것은 하늘에서 의인을 이슬처럼 우리가 모르는 사이에 우리 가운데 허락하시기 때문입니다. 저는 안산에서 3년의 임기를 마치고 하남의 서부본당으로 소임지가 바뀌었습니다. 새로운 둥지에서 새로운 신자들과 함께 지내며, 하느님께서 어떻게 이끄시는지 그 섭리에 대해 묵상하게 됩니다. 신앙적 질풍노도의 시기를 아직도 겪고 있고, 앞으로도 겪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위기’라는 말은 ‘위험 더하기 기회’라고 하는데 고통이 있으면 은총이 더욱 크다는 진리를 한 걸음 한 걸음 배우는 중입니다. 성경을 읽다가 성경의 맨 끝, 요한 묵시록에서 재미난 부분을 읽게 되었습니다. “네가 어디에서 추락했는지 생각해 내어 회개하고, 처음에 하던 일들을 다시 하여라”(묵시2,5). 이 진실을 받아들이든 받아들이지 않든 우리 모두는 하느님의 천사였습니다. 날개를 잃어버리고 잊어버려 추락했습니다. 날개는 가벼움, 깨끗함, 거룩함이지 않을까 생각됩니다. 삶의 무게에 너무 짓눌려서, 죄의 더러움으로 얼룩져서, ‘살다 보니 어쩔 수 없지’라는 세상과의 타협과 안주로 날개를 부러뜨렸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그 천상의 날개를 회복, 부활시켜야 함을 다시 기억하고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하남의 서부본당은 아주 작고 아담한 공동체입니다. 오자마자 성당 벽면의 곰팡이가 먼저 보였습니다. 그래서 누구한테 시키지 않고 소수정예 아이들과 벽면에 하얀 페인트칠을 하였습니다. 그리고 해바라기를 그렸습니다. 해바라기가 햇빛을 보며 고개를 향하고 꽃을 피우듯이, 우리도 빛의 자녀들이기에 하느님께로 향하는 마음을 성당 벽면에 표현하였습니다. 유치원 같기도 하고, 어설프기도 하지만 우리 아이들이 손수 그린 벽화이기에 모든 신자분이 행복해하셨습니다. 그렇게 ‘해야 할 일을, 할 수 있는 일들’을 우리는 합니다. 마무리로 성당 입구 돌판에 ‘천당 같은 우리 성당’이라고 썼습니다. “언제나 기뻐하십시오. 끊임없이 기도하십시오. 모든 일에 감사하십시오.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살아가는 여러분에게 바라시는 하느님의 뜻입니다”(1테살 5,16-18) 노중호 신부(수원교구 서구본당 주임)문채현2015.04.30
[성경 속 도시]스켐야곱의 가나안 첫 정착지, 요셉이 묻힌 땅 오늘날 '나블루스'라 불리는 스켐의 사마리아인들이 속죄절에 양들을 죽어 번제물로 바치고 있다. 【CNS 자료사진】 '여행'. 생각만 해도 가슴이 설레는 단어다. 여행을 떠나면 일상을 벗어난다. 그리고 우리를 수 천 년 전의 사람들과 그들의 삶으로 인도한다. 그러면 길 위의 돌멩이 하나 그냥 지나칠 수 없다. 평화신문 지면을 빌려 세 번째로 여행할 곳은 신성한 도시 '스켐'이다. 사마리아 지방에 위치한 스켐은 예루살렘에서 북쪽으로 약 65㎞ 떨어져 있고 나자렛으로 가는 길에 있다. 스켐은 '목덜미'라는 뜻인데, 그리짐 산과 에발 산을 양쪽 어깨에 메고 있는 듯한 모양새 때문인 것 같다. 스켐은 이집트에서 시리아로, 메소포타미아에서 지중해 연안으로 통하고 팔레스티나를 관통하는 곳으로 교통의 중심지이자 전략적 요충지였다. 이집트에서 요르단과 시리아를 가려면 예루살렘을 거쳐 스켐까지 외길이고 스켐에서 갈라지기 때문이다. 그래서 스켐은 예로부터 대상들이 모여드는 요지였다. 스켐은 연평균 강우량이 적당해서 고대로부터 농사짓기에 알맞은 곳이었다. 평지를 둘러싼 산비탈에는 포도, 무화과나무, 올리브나무가 경작됐고, 목축에도 좋은 풀밭이 많이 있었다(창세 37,12-13). 고고학자들에 따르면 스켐에는 기원전 4000년께부터 사람들이 살았다고 한다. 스켐의 넓은 성전과 큰 성문들은 기원전 18~17세기께 힉소스인들에 의해 세워졌다. 그러다 스켐은 기원전 1550년께 이집트인들에 의해 파괴됐다. 이집트 점령 이후 도시의 규모는 축소됐다. 스켐은 아브라함부터 예수님에 이르기까지 여러 성경 이야기의 배경이 된다. 성경에서 스켐의 역사는 아브라함과 함께 시작한다. 스켐은 가장 먼저 아브라함이 하느님의 부르심을 받고 가나안 땅에 오는 장면에 등장한다. "아브람은 그 땅을 가로질러 스켐의 성소 곧 모레의 참나무가 있는 곳에 다다랐다. 그때 그 땅에는 가나안족이 살고 있었다"(창세 12,6). 스켐의 성소에 나타나신 주님께서 아브람 후손에게 가나안 땅을 주겠다고 약속했고, 아브람은 주님을 위해 그곳에 제단을 쌓았다(창세 12,7 참조). 야곱은 외삼촌 라반을 떠나 형 에사오와 헤어져 가나안 땅에 들어온 후 스켐에 정착했고(창세 33,18), 야곱의 딸 디나가 스켐의 족장 하모르의 아들에게 겁탈당했을 때 오빠 시메온과 레위가 스켐에 들어가 남자들을 모조리 죽였다(창세 34장 참조). 이집트를 탈출한 이스라엘은 가나안을 차지한 뒤 요셉의 유골을 스켐에 안치했다(여호 24,32). 이후 스켐은 요셉의 맏아들인 므나쎄 지파의 땅이 됐다(여호 17,1-7). 여호수아는 죽음을 앞두고 열두 지파를 스켐에서 소집한다. "여호수아는 이스라엘의 모든 지파를 스켐으로 모이게 하였다. 그가 이스라엘의 원로들과 우두머리들과 판관들과 관리들을 불러내니, 그들이 하느님 앞에 나와 섰다"(여호수아 24,1). 이후 스켐은 12지파의 종교적 중심지로 억울한 죄인들이 피신할 수 있는 성읍 중 하나로 뽑혔다(여호 20,7). 솔로몬 왕이 사망한 후 이스라엘이 남북으로 갈라졌을 때(기원전 931년) 북 이스라엘 왕권을 장악한 느봇의 아들 예로보암은 스켐을 첫 번째 수도로 삼았다(1열왕 12,25). 그러다 그는 곧 그의 가족이 거주하는 티르차에 새 수도를 세운다(1열왕 14, 17). 기원전 722년 아시리아는 북이스라엘을 멸망시키고 스켐의 주민들을 잡아갔다. 그리고는 이방인들을 이곳에 이주시켰다. 이후 남쪽 유다인들은 스켐이 속한 사마리아를 '이방인의 땅'으로 취급했다. 기원전 4세기께 마케도니아의 알렉산드로스 대왕은 사마리아를 점령하고 요충지인 스켐을 군사 기지로 만들었다. 이후 기원전 123년께 유다의 새 왕조인 하스모네아 왕조의 요한 히르카노스 1세에 의해 스켐은 완전히 파괴됐다. 기원전 72년 로마는 스켐을 재건해 '플라비아 네아폴리스'라고 불렀고, 아랍인들은 자신들의 발음에 따라 지금까지 '나블루스'라고 한다. 스켐은 오늘날 유다인에게 예루살렘처럼 거룩하게 여기는 중요한 도시이다. 1948년부터 요르단에 속했던 스켐은 1967년 '6일 전쟁'으로 이스라엘 땅이 됐다. 스켐은 오늘날 성지 순례자들이 많이 찾는 곳은 아니지만, 성경의 역사에서 매우 중요한 도시이다.허영엽 신부(서울대교구 교구장 수석비서) cpbc2014.01.14
눈물 흘리며 기도하고 승천하신 예수의 생애 마지막 사건 현장[사진으로 떠나는 이스라엘 성지기행] 5.올리브산하느님은 이스라엘 민족을 '푸른 올리브나무'(예레 11,16)라 했다. 유다인들은 자신을 올리브나무에 비유하며 하느님의 보호 아래 있음을 자랑했다(시편 52,10). 사진은 겟세마니 성당 정원에 있는 올리브나무. 올리브산은 예루살렘 동쪽 키드론 골짜기 건너편에 있는 동산으로 안식일에도 걸어갈 수 있을 만큼 가까이 있다(사도 1,12 참고-유다 율법은 안식일에 1km 이상 걷지 못함). 구약 시대 때부터 이 산을 히브리 말로 '하르 하 자이팀'(올리브산)이라 부른 것으로 보아 예부터 이곳에 올리브나무가 무성했음을 알 수 있다. 올리브산은 신ㆍ구약의 역사가 얽힌 곳이다. 다윗은 압살롬 반역을 피해 도망가던 길에 이곳을 지나갔고(2사무 15,30-32), 그의 아들 솔로몬은 말년에 여기에다 모압의 우상 크모스와 암몬인의 우상 몰록을 위해 산당을 지었다(1사무 11,7). 이후 유다 임금 요시야는 올리브 산의 이 산당들을 허물고(2열왕 23,13-14) 종교개혁을 단행했다. 또 예언자 즈카르야는 '주님의 날'에 올리브 산에서 벌어질 일(즈카 14,4)을 생생하게 전해준다. 신약성경에서 올리브산은 예수의 생애 마지막 한 주간과 관련돼 집중적으로 등장한다. 예수께서 이곳을 통해 예루살렘으로 입성하시고(루카 19, 29), 예루살렘을 바라보며 멸망을 예고하며 눈물을 흘리셨고(루카 19,41-44), 종말에 관해 설교하셨다(마르 13,3-13; 마태 24,3-14; 루카 21,7-19). 예수께서는 낮엔 예루살렘 성전에서 가르치고 밤에 올리브산에 올라가 쉬셨고(루카 22, 37-38), 최후 만찬 후 제자들을 데리고 이곳에서 피땀을 흘리며 하느님께 기도한 후 체포되셨다(마르 14,26-50; 마태 26,31-56; 루카 22,31-53; 요한 13,36-38; 18,1-11). 그리고 예수께서 부활하신 후 이 올리브산에서 승천하셨다(사도 1,6-12). 콘스탄티누스 대제의 그리스도교 신앙 자유 선언 이후 올리브 산에는 4세기 중엽부터 성당들이 지어졌는데 대표적인 4대 성당이 겟세마니 성당과 주님 눈물 성당, 주님의 기도 성당, 주님 승천 경당이다. 리길재 기자 teotokos@pbc.co.krcpbc2013.07.23
[성경속 궁금증] 89. 성경에서 우상숭배를 왜 매매춘에 비유했을까?우상숭배는 배우자 배신하고 간음하는 것과 같아야콥 빌렘스 데 베트 1세, '우상들에게 제물을 바치는 솔로몬', 1640년께, 유화, 릴미술관, 프랑스. 성경에서 하느님은 특별히 이스라엘을 선택하셔서 당신의 백성으로 삼으셨다. 하느님과 이스라엘 백성의 관계는 신뢰를 바탕으로 하고 있다. 하느님은 이스라엘 백성을 종살이로부터 구원하시고 광야 생활 동안 줄곧 함께 하셨으며 가나안 땅을 향해 인도하셨다. 이스라엘 백성은 가나안 땅에 들어갔을 때 원주민들의 문화에 종교적 측면에서 영향을 받았다. 그 가운데 농경사회의 다산과 풍요를 기원하는 종교 의식이 가장 큰 영향을 줬다. 반면에 이스라엘 사람들은 광야에서 엄격하고 절제된 생활을 해왔다. 그래서 처음에는 가나안 사람들의 퇴폐적 종교 의식에 강력한 혐오감을 느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이스라엘 사람들은 유혹에 빠지게 된다. 가나안 종교의 형태는 하느님께 대한 신앙에 도전이 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율법에서는 이 퇴폐적인 의식을 금지한다. "이스라엘의 딸은 신전 창녀가 되어서는 안 되고, 이스라엘의 아들은 신전 남창이 되어서는 안 된다. 너희는 창녀의 해웃값이나 남창의 몸값을, 주 너희 하느님의 집에 어떤 서원 제물로도 가져와서는 안 된다. 주 너희 하느님께서는 둘 다 역겨워하신다"(신명 23,18-19). 특히 사람들이 다른 잡신들을 섬기느라 하느님을 잊어버리고 하느님을 예배하는 일을 소홀히 하는 것에 대해 엄중히 경고하는 말씀이 뒤따른다. "너희는 주 너희 하느님을 경외하고 그분을 섬기며, 그분의 이름으로만 맹세해야 한다. 너희는 너희 주위에 있는 민족들의 신들 가운데 그 어떤 신도 따라가서는 안 된다"(신명 6,13-14).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은 하느님의 사랑을 배신해서는 안 되며 하느님을 적당히 사랑해서도 안 된다. 온 마음과 온 뜻과 온 힘을 다하여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 사실은 우상숭배에 빠진 이스라엘은 하느님을 완전히 버리고 잊은 것이 아니었다. 하느님을 배반하지 않았지만 동시에 이교도의 신을 숭배하는 꼴이 돼버려 종교적 혼합주의가 됐다. 실제로 가나안 지역에서 이스라엘의 가장 큰 신앙적인 문제는 종교 혼합주의였다. 이스라엘 백성은 때에 따라서 하느님도 믿고 바알 신도 믿는 태도가 문제였다. 예언자들은 이스라엘 신앙의 순수성을 훼손시키는 이러한 우상숭배적 의식을 강력하게 단죄하고 나선다. "나는 바알들의 축제일 때문에 그 여자를 벌하리라. 그 여자는 바알들에게 분향하고 귀걸이와 목걸이로 단장한 채 애인들을 쫓아갔다. 그러면서 나를 잊어버렸다. 주님의 말씀이다"(호세 2,15 등). 이처럼 성경에서는 하느님을 배신하는 행위를 곧잘 창녀의 매매춘에 비유해서 사용했다. 곧 한 분뿐이신 하느님께 등을 돌리고 다른 신들을 섬기는 행위, 배우자를 배신하고 간음하는 것과 같은 것이라는 것이다. "이스라엘이 시팀에 머물러 있을 때, 백성이 모압의 여자들과 불륜을 저지르기 시작하였다. 이 여자들이 저희 신들에게 드리는 제사에 백성을 부르자, 백성은 거기에서 함께 먹으며 그들의 신들에게 경배하였다"(민수 25,1-2). cpbc2013.10.15
[성경속 궁금증] 87. 성경에서 순례는 어떤 의미인가?구약에선 계약의 궤 안치된 예루살렘 순례… 그리스도인 삶 자체가 주님 향한 순례 여정자크 스텔라, '엠마우스의 순례자들', 17세기께, 유화, 낭트 미술관, 프랑스. "윤형중 신부님께서 돌아가시기 전까지 서소문 성지에 관해 걱정이 태산이셨어요. 이곳 순교자에 대해 관심을 갖고 성지를 개발하지 못한 것을 굉장히 안타까워하셨지요. 그런데 시간이 흘러 서울대교구장님이 이렇게 관심을 두시니 참 다행입니다. 윤형중 신부님이 열심히 하늘나라에서 전구하고 계신가 봐요." 절두산 순교성지에서 만난 나이 지긋하신 어느 수녀님께서 나에게 다가와 하신 말씀이다. 서울대교구는 지난 9월 2일 교구 내 성지들을 묶어 '서울대교구 성지순례길'을 선포했다. 교구가 순례길을 공식 선포하기는 1831년 조선대목구 설정 이후 이번이 처음이다. 그리고 지난 10일에는 한국 주교단이 서울대교구 성지순례에 나섰다. 성신교정 성당 김대건 신부 유해 앞에서 기도를 바치고 온종일 걸어서 순례하고 절두산 성지에서 마침 미사를 봉헌했다. 주교님들과 수도자들, 신자들이 함께한 감격스러운 날이었다. 성지순례는 하느님과 관련된 성스런 땅을 방문하여 예배를 드리는 것으로 경신행위의 하나다. 순례의 기원은 뚜렷하지 않지만 유다교에서 이스라엘 남자들이 유월절과 오순절 및 초막절 등 매년 3번씩 예루살렘의 성전에 가서 그들이 수확한 곡식을 바치던 데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인다. 그 후 그리스도교 시대에 들어오면 순례는 신에 대한 흠숭의 의미뿐 아니라 회개하는 행위나 성인에 대한 존경의 행위로 인식됐다. 이스라엘 안에 많은 순례 장소가 있었다. 대부분 이 장소들은 거룩한 역사와 관계가 있는 성소들이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곳으로 그들의 하느님을 찾아갔다(창세 35,1-7). 구약에서는 하느님을 만나는 장소에 제단을 쌓고 하느님을 불렀다. "그는 그곳을 떠나 베텔 동쪽의 산악 지방으로 가서, 서쪽으로는 베텔이 보이고 동쪽으로는 아이가 보이는 곳에 천막을 쳤다. 그는 그곳에 주님을 위하여 제단을 쌓고, 주님의 이름을 받들어 불렀다"(창세 12,8). 여러 중요성을 지닌 성소들, 특히 스켐(여호 24,25), 베텔(1사무 10,3), 브에르세바(아모 5,5)에서는 순례 집회가 오랫동안 지속됐다는 것이 확인됐다. 계약의 궤가 안치돼 있던 실로의 성소에서는 매년 하느님의 축제가 거행됐다. "그들은 마침내 말하였다. '그래, 해마다 실로에서 주님의 축제가 열리지!' 실로는 베텔 북쪽, 베텔에서 스켐으로 올라가는 큰길 동쪽으로, 르보나 남쪽에 있었다"(판관 21,19). 그런데 다윗이 계약의 궤를 예루살렘에 옮기고 솔로몬의 성전이 세워진(1열왕 5-8) 이후 유다인들에게 예루살렘 순례가 가장 중요한 장소가 됐다. 신약에서는 예수님께서 부활하심으로써 그분의 인격이 새 성전이 되셨다.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가 제자들 예배의 중심이 되셨다. 그리하여 지상에 더이상 성소로서의 장소가 없어지고 만다(요한 2,19-21). 이때부터 하느님의 백성의 삶 자체가 진정한 종말론적 순례가 됐다. "사실 땅 위에는 우리를 위한 영원한 도성이 없습니다. 우리는 앞으로 올 도성을 찾고 있습니다"(히브 13,14).교회는 초대교회부터 그리스도 삶이나 성인들의 삶 안에서 드러난 그리스도의 현존 장소를 순례하는 것을 중요하게 생각했다. 오늘날도 순례는 신자들에게 신앙과 기도 안에 친교를 보여 주는 기회를 제공하며 주님을 향해 여행하는 기회가 된다. cpbc2013.09.24
[평화화랑] 이춘복, 이승희 개인전 서양화가 이승희(61)씨와 한국화가 이춘복(마리아, 64, 서울 오류동본당)씨는 10~16일 서울 명동 평화화랑 제1ㆍ2전시실에서 개인전을 갖는다. ▨이춘복 5번째 '빛 중의 빛-하느님 아버지'전 요한묵시록 4장과 8장을 조형적으로 표현한 5번째 개인전이다. 알파이며 오메가인 주님을 빛으로 묘사, 천상의 모습을 형상화하는 데 주력했다. 성경을 읽고 깊이 묵상하는 가운데 삼위일체와 성모, 열두 사도, 대천사와 천사들, 천상 가족을 떠올렸고 성령의 도움과 기도로 붓을 들었다. 이씨는 당뇨합병증으로 눈 초점이 잘 맞지 않고 귀도 잘 들리지 않는 시련 속에서 몇 번이나 포기하려고 하다가 주님 은총으로 다시 붓을 움직였다. 시련 중에도 희망을 버리지 않고 기도하는 이들, 하느님 자비에 감사하는 이들을 통해 아버지 현존에 가까이 다가가 함께 공감하는 장으로 5년 만에 전시회를 마련했다. 출품작 38점은 '영적 상처 치유' '기도' '빛 중의 빛' 등 다섯개 소주제로 분류했다. 마침 하느님 자비주일(7일)을 지내는 시점이라 공감대가 더 클 것으로 기대된다. ▨이승희 10번째 '꽃' 주제전 이승희 작가는 '꽃'을 10번째 개인전 주제로 삼았다. 그만큼 꽃에 대한 애정이 깊다. 양귀비, 솔로몬, 카사블랑카… 낯선 꽃이름이 술술 흘러나오는 게 하루이틀 된 공부가 아니다. 그렇다고 이름 있는 꽃만 그리는 것도 아니다. 하룻밤만 피고 지는 달맞이꽃도 작가에겐 최고 소재다. "꽃만 그리는 게 얼마나 좋은지 지루할 틈이 없다"는 작가는 "내 그림이 조금이라도 쉬어갈 수 있는 일상의 쉼표가 됐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오세택 기자조은일2013.04.02
[마르코와 함께 쓰는 나의 복음서] 마르코 복음서 입문'구원자 예수 그리스도' 이방인들에게 선포 이번 호부터 평화방송 TV 강좌 '윤일마(성 바오로딸 수녀회) 수녀의 신나는 성경공부-마르코와 함께 쓰는 나의 복음서' 연재를 통해 독자들을 살아 숨 쉬는 신앙의 삶으로 초대합니다. '마르코와 함께 쓰는 나의 복음서'는 기존의 해설과 지식 위주의 성경 강좌에서 벗어나 함께 성경을 읽으며 주요 상황에 맞는 그림과 모형, 지도를 통해 성경을 완전히 이해하도록 도울 것입니다.마태오 복음사가를 비유하는 사람 그림(왼쪽 상단), 요한 복음사가를 비유하는 독수리 그림(오른쪽 상단), 루카 복음사가를 비유하는 황소 그림(왼쪽 하단)과 마르코 복음사가를 비유하는 사자 그림. 성경을 읽고 쓰고 공부하면 예수님과 함께 살아온 삶을 되돌아보고, 감사해야할 일이 많았음을 보게 된다. 하느님과 만나는 여정을 시작하겠다. 성경은 구약과 신약으로 나뉜다. 구약의 주인공은 하느님이시다. 구약에는 아브라함, 모세 등 다양한 인물이 등장한다. 모두 하느님의 영광을 높이기 위한 조연자다. 신약의 주인공은 예수님이시다. 구약의 주제는 계약, 신약의 주제는 부활이다. 성경은 창세기부터 요한묵시록까지며 창세기가 처음 쓰인 시기는 기원전 10세기 중반이고 마지막 요한묵시록이 쓰인 시기는 기원후 95년경이다. 성경은 하느님 말씀이 들어 있는 신앙의 진리가 담긴 책이다. 성경은 영원히 목마르지 않은 생명수를 전해준다. 이스라엘 역사에서 가장 처음에 나오는 역사는 원역사다. 원역사에는 태고사와 성조사가 있다. 태고사에는 천지창조, 노아의 방주와 바벨탑 이야기가, 성조사에는 아브라함과 이사악과 야곱과 요셉의 이집트 생활까지 나온다. 탈출 시대는 성경에서 핵심적인 부분 중 하나다. 하느님과 이스라엘 백성이 맺는 시나이 계약이 들어 있는 탈출 19~40장이 가장 중요하다. 이스라엘 백성은 계약을 통해 모든 민족 가운데 하느님의 소유가 된다. 거룩한 백성으로 새롭게 태어나는 계약을 맺는다. 모세가 죽고 여호수아가 가나안으로 입성하며 판관 시대가 시작된다. 판관 시대는 이스라엘 전체 역사에서 200년 동안 지속된다. 판관 시대가 끝나면 왕정 시대가 도래한다. 판관 시대가 끝나서 왕정 시대가 온 것은 아니다. 이스라엘 백성의 주인은 하느님이시건만, 백성이 자기들에게 왕을 달라고 하자, 하느님이 허락주시어 왕정 시대가 시작됐다. 첫 번째 왕은 사울, 두 번째는 다윗, 세 번째는 솔로몬이다. 가장 위대한 왕은 다윗이다. 다윗은 메시아의 가문과 직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스라엘 왕국은 솔로몬 왕이 죽은 후 북부 이스라엘과 남부 유다로 갈라진다. 북부 이스라엘은 B.C 722년 아시리아에 의해 멸망했다. 남부 유다는 B.C 587년 바빌론의 유배라는 아픔을 겪는다. 멸망과 유배의 근본 이유는 하느님을 저버리고 우상을 섬긴 결과라고 볼 수 있다. 남부 유다가 바빌론으로 유배를 가기까지 이스라엘 역사상 가장 많은 예언자가 출연한다. 성경에서 첫 예언자는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이다. 성경에 나오는 예언자들 가운데 위대한 예언자는 모세와 엘리야다. 엘리야는 죽지 않고 승천했으며, 유다 전승에서 보면 모세는 죽지 않았다는 이야기도 있다. 이들은 구약뿐 아니라 신약에도 나온다. 타볼산에서 예수님이 영광스러이 변모하실 때에도 모세와 엘리야가 등장한다. 묵시문학에서는 메시아가 오실 때에는 분명히 모세와 엘리야를 대동할 것이라고 한다. 예언자가 북부이스라엘에서 활동했는지, 남부 유다에서 활동했는지, 또 바빌론 유배 전에 활동했는지, 유배 기간 동안에 활동했는지, 유배 이후에 활동했는지를 구분하면 정확한 메시지를 파악할 수 있다. 이스라엘 백성이 바빌론에서 유배생활을 하고 있을 때 키루스 황제가 '너희 나라로 돌아가라'고 하자, 이스라엘 백성은 자기네 나라로 돌아간다. 그러나 남은 사람도 있고, 제3국을 선택해 떠난 사람도 있다. 이스라엘로 돌아온 사람들은 고향에 가면 잘 살 줄 알았는데 나아지지 않았다. 그때 출연한 예언자들이 성전을 지으라고 한다. 예언의 시대가 끝나고 재건 시대가 시작되고 이스라엘 백성은 잘 살아보려고 애를 썼지만 독립된 국가로 살아본 적이 없다. 메시아가 와서 구원해줬으면 좋겠다는 갈망을 하게 된다. 이스라엘 백성이 기다리는 메시아는 이집트를 탈출해 홍해를 건널 때 마른 땅을 밟고 건너게 해 준 메시아다. 지금 이렇게 고생을 하는데 그 메시아가 와서 우리를 구해줬으면 좋겠다는 염원을 갖는다. 그러나 메시아는 가난한 모습으로 오셨고, 배척을 당해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셨다. 복음은 기쁜 소식이라는 뜻이다. 복음은 마태오, 마르코, 루카, 요한, 네복음서가 있다. 마르코가 가장 먼저, 요한이 제일 마지막에 쓰였다. 이스라엘은 유다와 갈릴래아, 사마리아로 나눠져 있다. 유다는 예수님이 태어나고 돌아가신 지역, 갈릴래아는 예수님이 성장하고 선교를 시작한 곳이다. 마르코복음서를 보면 예수님은 1장 14절~10장 45절까지 갈릴래아에 사셨다. 10장 46절부터 시작되는 수난과 죽음, 부활의 무대는 유다 지방이다. 사마리아는 유다와 갈릴래아 사이에 있는 곳이다. 사마리아인들은 722년경 아시리아에 의해 패망한 후 그때 남아 있던 유다인과 이방인의 후손들이다. 마르코ㆍ마태오ㆍ루카 세 복음서는 갈릴래아를 중심으로 이뤄진 예수님의 공생활과 부활을 비슷한 시각으로 다루었다 해서 공관복음서라고 한다. 예수님 말씀과 행적을 바라보는 시각이 같다는 의미다. 마르코복음서는 십자가 수난으로 세상을 구원한 메시아 하느님의 아들을 선포하는 내용이다. 마르코복음서는 이방인을 위해 쓰였다. 마르코는 이방인에게 나자렛 사람은 이스라엘 한 민족뿐 아니라 하느님의 아들로서 인류를 죄와 죽음에서 해방하려 오신 구원자이심을 선포하는 데 초점을 맞춘다. 정리=이지혜 기자 bonaism@ ※방송시간 : (화) 오전 8시, (수) 새벽 1시/오후 1시 40분, (금) 밤 8시, (토) 밤 10시 ※교재 문의: grace@paul ine.or.kr, 02-944-0945퇴사자22013.06.18
[성경속 궁금증] 80. - 성경에서 층계는 어떤 의미가 있나요하늘과 땅 연결… 하늘에 닿으려 바벨탑 건설고대인들에게 하늘과 땅을 연결하는 것은 층계였다. 고대에는 신들이 하늘로 승천할 때 층계를 통해 오른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구약에 보면 사람들은 하늘에 도달하기 위해 바벨탑을 쌓았다. 그림은 브뤼겔, '바벨탑', 1563, 비엔나, 미술사 박물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사람들은 하늘을 우러러보며 동경해왔다. 인간은 결국에는 하느님께 돌아간다는 기대가 하늘을 바라보며 살아가게 하는 것은 아닐까. 고대인들에게 하늘과 땅을 연결하는 것은 층계였다. 고대에는 신들이 하늘로 승천할 때 층계를 통해 오른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신전에는 층계가 있었다. 층계는 인간이 욕망에서 해방돼 하늘에 도달할 때까지 걸어가야 하는 인생의 길을 상징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구약에 보면 사람들은 하늘에 도달하기 위해 바벨탑을 쌓았다. "그들은 서로 말하였다. '자, 벽돌을 빚어 단단히 구워내자.' 그리하여 그들은 돌 대신 벽돌을 쓰고, 진흙 대신 역청을 쓰게 되었다. 그들은 또 말하였다.'자, 성읍을 세우고 꼭대기가 하늘까지 닿는 탑을 세워 이름을 날리자. 그렇게 해서 우리가 온 땅으로 흩어지지 않게 하자'"(창세 11,3-4). 옛날부터 사람들은 하늘에 도달하고 싶어 했다. 그래서 하늘에 오르기 위해 높은 탑을 지어놓고는 수백 개의 층계를 만들기도 했다. 구약의 야곱은 아버지 집에서 나와서 먼 외삼촌 집으로 향하던 날 밤에 꿈속에서 층계를 보았다. "야곱은 브에르 세바를 떠나 하란으로 가다가, 어떤 곳에 이르러 해가 지자 거기에서 밤을 지내게 되었다. 그는 그곳의 돌 하나를 가져다 머리에 베고 그곳에 누워 자다가, 꿈을 꾸었다. 그가 보니 땅에 층계가 세워져 있고 그 꼭대기는 하늘에 닿아 있는데, 하느님의 천사들이 그 층계를 오르내리고 있었다"(창세 28,10-12). 야곱이 꿈에서 본 층계는 하느님과 연결되어 나타난다. 층계 위로는 천사들이 오르락내리락하면서 천상과 지상을 부지런히 왕래하고 있었고 층계는 지상에서 하늘에까지 통하는 길을 의미한다. 하늘에 닿는 층계로 하느님께 나아갈 길을 발견한 것이다. 또한, 구약에서는 '하늘의 문'과 '하느님의 집'이라는 의미의 '베텔'이 등장한다. "두려움에 싸여 말하였다. '이 얼마나 두려운 곳인가! 이곳은 다름 아닌 하느님의 집이다. 여기가 바로 하늘의 문이로구나.' 야곱은 아침 일찍 일어나, 머리에 베었던 돌을 가져다 기념 기둥으로 세우고 그 꼭대기에 기름을 부었다. 그러고는 그곳의 이름을 베텔이라 하였다. 그러나 그 성읍의 본 이름은 루즈였다"(창세 28,17-19). 솔로몬 왕좌에 있던 층계도 같은 의미가 있다. "그 왕좌에는 층계가 여섯 개 있었고, 왕좌 등받이 윗부분은 둥글었다. 왕좌 양쪽에는 팔걸이가 있고 그 팔걸이 옆에는 사자가 두 마리 세워져 있었다"(1열왕 10,19). 하늘은 인간의 머리 위에서 아득하게, 구름과 빛과 헤아릴 수 없는 심원 속에 있다. 영혼의 고양, 정신의 상승, 승천은 인간이 가장 옛날부터 가지고 있던 소원 중 하나이다. 유다인들은 악을 저질렀다고 해도 속죄를 통해 원래의 깨끗한 상태로 되돌아갈 수 있다고 믿었다. 유다인들은 또 인생을 일종의 '계단'같은 것으로 봤다. 인간은 그 사다리를 오를 수도 있고 내려갈 수도 있다. 많은 교부는 성경에 근거, 야곱의 층계를 인간이 하늘로 오를 수 있게 해주는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관련시키고 있다.cpbc2013.07.16
식목일/ 나무와 숲이 갖는 의미와 중요성숲, 우리 생명의 보호막 5일은 식목일이다. 식목일은 1949년 국가공휴일로 지정된 뒤 공휴일과 비공휴일을 오가다 2006년 비공휴일이 됐다. 하지만 지구 온난화 등으로 지구촌 환경문제에 관한 관심이 높아진 요즘, 나무와 숲에 대한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는다. 유엔사막화방지협약 자료에 의하면 관개와 산림벌채, 환경오염 등으로 지구상에서 매년 600만㏊(여의도의 7185배)의 숲과 토지가 사막화되고 있다. 환경 전문가들은 "숲이 사라지면 지표 반사율이 증가하고, 냉각화돼 강우량이 줄어 사막화는 더 빠른 속도로 진행된다"며 "점차 산소가 부족해져 야생동물이 멸종 위기에 이르고 물 부족현상으로 작물재배가 불가능해 극심한 식량난에 빠진다"고 우려한다. 산불도 숲을 사라지게 하는 원인 가운데 하나다. 담배꽁초나 불장난 등으로 산에 불을 내는 행위는 단 몇 분 만에 몇십 년 자란 나무를 잿더미로 만들어 버린다. 황창연(성 필립보 생태마을 관장) 신부는 환경에세이 「북극곰 어디 가야 하나」에서 "산불이 일어나면 나무와 산에 사는 동물이 죽을 뿐 아니라 사람 병을 고치는 약초까지도 없애버린다. 산림 파괴는 인간 삶의 파괴로 이어지는 연결 고리"라고 말했다. 숲이 주는 혜택은 어마어마하다. 숲 1㏊(3025평)는 300명에게 산소를 공급할 수 있다. 우리나라 산림 면적이 630만㏊이므로, 19억 명이 마실 수 있는 산소를 내뿜는 셈이다. 숲은 또한 경제발전의 원동력이다. 홍수ㆍ가뭄을 조절하고 풍년을 안겨준다. 우리나라 국민이 1년에 쓰는 물의 양이 320억 톤인데, 우리나라 산에 저장된 물의 양이 180억 톤이다. 따라서 숲이 없으면 물을 구하기 어려워지고, 물이 없으면 풍요로운 삶을 기대할 수 없다. 성경에 따르면, 사막의 땅 중동 레바논도 2000년 전 솔로몬 시대에는 숲이 울창한 지역이었다. "또 레바논에서 나는 향백나무와 방백나무와 자단나무도 보내 주십시오. 나는 임금님의 종들이 레바논에서 나무를 잘 벤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2역대 2,7). "…임금은 이 방패들을 '레바논 수풀 궁'에 두었다"(2역대 9,16). 울창한 숲도 자연환경이 변하고 관리를 소홀히 하면 언제든지 사막으로 변할 수 있다는 얘기다. 필리핀 주교회의는 1988년 사목교서를 통해 "원래 30만㏊였던 원시림이 겨우 1만㏊만 남아 있다. 이 숲에 살던 몇몇 아름다운 동물들은 어디로 갔는가?"하고 우려한 바 있다. 교황 베네딕토 16세는 2010년 세계 평화의 날 담화에서 "평화를 이루려면 피조물을 보호하십시오. 모든 사람이 하느님과 인간과 피조물 전체의 불가분의 관계를 깨달으면 선의의 사람들이 추구하는 평화는 더욱 쉽게 이뤄질 것입니다"라고 강조했다. 나무를 아끼고 사랑하는 것은 결국 하느님 창조질서 보전을 위한 길이다. 이힘 기자 lensman@pbc.co.kr조은일2013.04.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