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음] 김영걸 영화감독](//cpbc.co.kr/CMS/newspaper/2013/06/rc/459104_1.1_titleImage_1.jpg)
[부음] 김영걸 영화감독 한국 교회의 '숨은 기록자' 김영걸(안드레아) 영화감독이 12일 새벽 서울 금호동 자택에서 지병인 뇌출혈로 10년간 투병 끝에 선종했다. 향년 76세. 고인의 장례미사는 14일 서울 금호동성당에서 주임 송경섭 신부 주례와 황인국(서울대교구 동서울지역 교구장 대리)ㆍ박신언(학교법인 가톨릭학원 교구장 대리) 몬시뇰, 오태순(서울대교구 원로사목자) 신부, 김정수(대전교구 내동본당 주임) 신부 등 사제단 공동집전으로 봉헌됐으며, 유해는 화장돼 포천 천보묘원에 안장됐다. 유족으로는 부인 차억순(엘리사벳, 68)씨와 김광호(요한, 42)ㆍ안나(40)씨, 막내 김로사(35, 원죄 없으신 마리아 교육 선교수녀회) 수녀 등 1남 2녀가 있다. 1938년 평북 정주 태생인 고인은 해방 직후 가족과 함께 월남, 한양대에 다니던 중 자퇴하고 영화판에 뛰어든다. 1968년 '미니 아가씨'로 감독에 데뷔, 1969년 '한번 준 마음인데'로 10만 명을 동원하며 흥행에 성공을 거뒀다. 1972년 윤정희(데레사)씨, 이낙훈(프란치스코)씨 주연의 '목소리'를 제작하며 교회 영화로 시선을 돌린다. 이 영화는 6ㆍ25전쟁 당시 박해를 그린 영화로, 그의 시선이 교회로 향하는 결정적 계기가 됐다. 고인은 1970년대 말 영화진흥공사(현 한국영화진흥위원회)에 들어가 한국영화 발전을 위해 헌신하면서 윤정희씨 등과 함께 가톨릭연예인클럽을 만들고 조선교구 설정 150주년 기념행사나 한국 천주교 200주년 행사, 제44차 서울 세계성체대회 등 교회 내 많은 행사를 기록으로 남기는 데 이바지했다. 또 지방 곳곳을 찾아다니며 신앙선조들의 순교터와 교회 현장, 인물 들을 촬영하는 작업에 몰두하면서, 오기선(요셉) 신부 일대기를 담은 「다시 보고 싶은 오기선 신부」(오늘의말씀사) 등 숱한 화보집을 내기도 했다. 1988년 서울올림픽 직전엔 한국 종교를 세계에 알리는 해외홍보물 제작을 맡아 22분짜리 영상물을 제작했다. 이같은 활동을 통해 1970~90년대 초까지 교회 내 주요행사에 관한 영상자료는 거의 대부분 그의 손에서 나왔다. 이 공로를 인정받아 1997년 11월엔 한국 평협이 수여하는 제14회 가톨릭대상(문화부문)을 수상했다. 2012년엔 교회 곳곳에 아로새긴 그의 발자취와 흔적을 부인과 함께 집필한 저서 「천만번 다시 태어나도 당신을」(분도출판사, 비매품)을 펴내기도 했다. 최하원(그레고리오, 76) 감독은 "한마디로 신자다운 삶을 사셨고, 영화계에선 밝고 깨끗한 이미지로 남아 있다"며 "'목소리'라는 작품을 시작으로 교회적 주제를 다룬 작품을 제작하려고 애를 쓰시다 자신의 뜻을 이루시지 못했지만 1970~80년대에 풍부한 교회 영상물을 남겨 교회에 이바지하신 바가 크다"고 추모했다. 오세택 기자 sebastiano@pbc.co.kr조은일2013.06.18

32명의 부모가 전한 영유아 신앙 교육 이야기, 한 권의 책으로한국가톨릭문화연구원, 「하느님, 이렇게 키우면 될까요?」 출간 “놀이방 같은 유아실에서 장난치고 떠드는 아이들을 돌보며 복음 말씀과 강론에 집중하기는 쉽지 않습니다. 성전에서 미사 드리고 싶다고 청했지만 결국 봉사자에게 이끌려 유아실로 쫓겨나듯 옮겨갔습니다. 어느 날은 유아실에서도 아이들 좀 조용히 시키라고 하더군요. 성당은 ‘노 키즈 존인가’하는 생각마저 들었습니다.” 한국가톨릭문화연구원(원장 김민수 신부, 이하 한가문연)이 최근 영유아 자녀를 둔 부모 32명의 신앙 교육 체험담을 묶은 책 「하느님, 이렇게 키우면 될까요?」(바오출판사)를 펴냈다. 서울·대구대교구, 의정부·인천·수원·대전교구, 로마 한인성당에 이르기까지 전국의 학부모들이 자신의 본당과 이름을 밝히고 쓴 기록이다. 책은 아이를 데리고 미사에 참여하며 겪은 기쁨과 좌절, 유아실의 답답함, 따가운 시선과 비자발적 냉담의 위기를 가감 없이 담았다. 한 부모는 “그동안 교회에서 보기 어려웠던 영유아를 둔 청년 부모들은 투명 인간처럼 홀대받으며 ‘상처받은 이웃’으로 살아왔다”고 밝혔다. 그러나 이들은 교회를 떠나지 않았다. 아이에게 묵주를 쥐여주고 자장가 대신 성가를 불러주며 일상 속에서 신앙을 이어갔다. 그 이야기들이 32편의 글에 고스란히 담겼다. 한가문연은 그동안 세미나와 간담회를 잇달아 열며 한국 교회 안에서 영유아 신앙 교육의 필요성과 확산 방안을 논의해왔다. 부모들의 경험을 교회와 나누는 것이 영유아 신앙 교육의 현실을 이해하고 구체적인 사목 방안을 마련하는 데 도움이 될 것으로 보고, 지난해 전국 부모들의 체험담을 수집했다. 한가문연은 한국 교회 주일미사 참여율이 15.1%에 그치는 현실 속에서도 0∼4세 세례자가 꾸준히 증가한다는 통계를 근거로 영유아 신앙 교육이 교회의 미래를 좌우할 과제라고 짚는다. 그동안 첫영성체 이후에 집중돼 온 신앙 교육 관행에서 벗어나 가정에서부터 시작되는 신앙 교육의 중요성을 정면으로 제기했다. 이들의 글은 저출생과 탈종교화, 신앙 전수 단절이라는 위기 속에서 ‘비자발적 냉담’으로 내몰리는 청년 부모들의 현실을 교회가 더는 외면해서는 안 된다는 절박한 호소와 같다. 2027 서울 세계청년대회를 앞둔 시점에서 한국 교회가 함께 고민해야 할 목소리라는 평가다. 김민수 신부는 서문에서 “지금은 하느님의 뜻을 실현하기 위해 영유아 신앙 교육에 주목해야 할 결정적 순간, 곧 카이로스의 시기”라고 밝혔다. 공동 저자 정준교(스테파노) 다음세대살림연구소장은 “이 책은 한국 교회 최초의 영유아 신앙 교육 길잡이”라며 “부모들이 어렵게 기록한 경험담이 한국 교회의 영유아 신앙 교육과 영유아 사목을 위한 귀중한 자료가 되길 바란다”고 말했다. 박민규 기자 mk@cpbc.co.kr 박민규2026.07.15

영유아 부모들의 생생한 신앙 교육, 책으로 나왔다한국가톨릭문화연구원 펴낸 신간「하느님, 이렇게 키우면 될까요?」 7월 18일 서울 명동 가톨릭회관에서 열린 「하느님, 이렇게 키우면 될까요?」 출간 기념 미사와 간담회에 함께한 부모 저자와 자녀들이 발언하고 있다. “놀이방 같은 유아실에서 장난치고 떠드는 아이들을 돌보며 복음 말씀과 강론에 집중하기는 쉽지 않습니다.” 성전에서 미사에 참여하고 싶다고 청했지만, 결국 봉사자에게 이끌려 유아실로 쫓겨나듯 옮겨갔다는 한 부모의 고백이다. 한국가톨릭문화연구원(원장 김민수 신부, 이하 한가문연)은 영유아 자녀를 둔 부모 32명의 신앙교육 체험담을 묶은 책 「하느님, 이렇게 키우면 될까요?」(바오출판사)를 펴냈다. 서울·대구대교구, 의정부·인천·수원·대전교구와 로마 한인성당에 이르기까지 각지 학부모들이 자신의 본당과 이름을 밝히고 쓴 기록이다. 책은 아이를 데리고 미사에 참여하며 겪은 기쁨과 좌절, 유아실의 답답함, 따가운 시선과 비자발적 냉담의 위기를 가감 없이 담았다. 한 학부모는 “그동안 교회에서 보기 어려웠던 영유아를 둔 청년 부모들은 투명 인간처럼 홀대받으며 ‘상처받은 이웃’으로 살아왔다”고 밝혔다. 그러나 이들은 교회를 떠나지 않았다. 아이에게 묵주를 쥐여주고 자장가 대신 성가를 불러주며 일상 속에서 신앙을 이어갔다. 그 이야기들이 32편의 글에 고스란히 담겼다. 한가문연은 그동안 첫영성체 이후에 집중돼 온 신앙교육 관행에서 벗어나 가정에서부터 시작되는 신앙 교육의 중요성을 정면으로 제기했다. 신앙은 단순히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부모의 삶을 통해 자연스럽게 ‘물드는 것’이며, 가정은 첫 번째 교회이고 부모는 자녀의 첫 번째 신앙 교사라는 교회의 가르침을 부모들의 실제 경험으로 보여준다. 원장 김민수 신부는 서문에서 “지금은 하느님의 뜻을 실현하기 위해 영유아 신앙교육에 주목해야 할 결정적 순간, 곧 카이로스의 시기”라고 밝혔다. 7월 18일 서울 명동 가톨릭회관에서 열린 「하느님, 이렇게 키우면 될까요?」 출간 기념 미사와 간담회에서 영유아 신앙교육 경험담을 기고한 만뗄로(mantello) 성가공동체가 특송을 부르고 있다. 한가문연은 7월 18일 서울 명동 가톨릭회관에서 저자들과 함께 김민수 신부 주례로 출간 기념 미사를 봉헌하고 간담회를 열었다. 이날 간담회에서는 사전에 취합한 영유아 신앙 교육 제안들을 투표에 부쳤고, ‘영유아도 공동체 일원으로 함께 미사를 드리는 문화 조성’이 가장 많은 표를 얻었다. 간담회에 참석한 부모들은 아이들의 울음이나 움직임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는 공동체 분위기가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또 유아실을 단순한 놀이 공간이 아니라 신앙을 처음 체험하는 공간으로 바꾸자는 제안도 있었다. 아이들이 가지고 놀 수 있도록 제작된 전례 소품과 성당 모형 등을 비치해 자연스럽게 전례에 익숙해질 수 있도록 하고, 미사 놀이 교구와 감각 체험 프로그램, 스티커북·색칠하기 등 활동형 교재와 디지털 콘텐츠 개발이 필요하다는 의견도 이어졌다. 가톨릭 초등학교와 영유아 신앙교육의 연계 필요성도 제기됐다. 부모들은 영유아 신앙교육이 특정 가정만의 문제가 아니라 교회 공동체 전체가 함께 책임지고 고민해야 할 사목 과제라는 데 입을 모았다. 공동 저자 정준교(스테파노) 다음세대살림연구소장은 “부모들이 어렵게 기록한 경험담이 한국 교회의 영유아 신앙 교육과 영유아 사목을 위한 귀중한 자료가 되기를 바란다”며 “이들의 목소리가 영유아 신앙 교육 쇄신의 불씨가 돼 한국 교회 안에서 요원의 불길처럼 퍼져나가기를 기대한다”고 밝혔다. 박민규 기자 mk@cpbc.co.kr박민규2026.08.05
![[신앙단상] 불운이라 여겼던 순간의 은총](https://img.cpbc.co.kr/newsimg/upload/2026/03/11/Ech1773205078846.jpg)
[신앙단상] 불운이라 여겼던 순간의 은총 재작년 가을 어느 날, 나는 이상한 체험을 했다. 그날따라 유독 안 좋은 일이 연달아 생겼다. 가족 중 한 명이 병원에 입원했고, 진행 중이던 작품의 출판 과정에도 문제가 생겼다. 무거운 마음으로 차를 운전하는데, 편집부에서 계속 전화가 걸려 왔다. 평소에는 운전할 때 매우 조심하는 편이라 전화도 받지 않는다. 그러나 계속 이어지는 벨 소리에 잠깐 멍해진 사이 차선을 놓쳤다. 우회전 구간이 보여 급히 차선을 바꾸는 순간, 옆 차선에서 달려오던 차와 부딪쳤다. 차선 변경 전에 사이드미러로 흘깃 확인했지만, 그 차는 사각지대에 있어 미처 안 보였던 모양이다. ‘쾅!’하는 소리와 함께 에어백이 터졌다. ‘왜 자꾸 나한테 나쁜 일이 생기지?’ 그렇게 생각하는 순간, 귀에 또렷한 목소리가 들렸다. “아닌데? 보호해준 건데?” 나는 곧바로 ‘정말 그러네!’ 하고 수긍하며 “하느님, 감사합니다”라고 중얼거렸다. 차는 망가졌지만, 나도 상대방도 다치지 않았기 때문이다. 옆 차선에 큰 차가 달려올 수도 있고, 사고가 연쇄 추돌로 이어질 수도 있었다. 가벼운 충돌이라도 크게 다칠 수 있었고. 나는 차에서 내려 먼저 상대방의 안전을 확인했다. “바로 병원에 가셔서 검사하시고 조금이라도 아픈 데가 있으면 치료받으시라”고 말했다. 본의 아니게 폐를 끼쳐 죄송하다고 거듭 사과했다. 상대방도 언성을 높이지 않고 보험사에 연락한 덕에 사고는 원만히 처리되었다. 한숨 돌리고 나니 사고 직후 들었던 그 목소리가 새삼 신기했다. 머릿속 생각이라기에는 청각적으로 너무 생생했다. 이후 내가 미처 깨닫지 못한 사실을 누군가 알려 줬고, 그 덕분에 감사한 마음으로 상황을 차분히 수습할 수 있었다. 다음 날 한 동화작가 후배와의 전화를 통해서였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가 어제 사고 때 있었던 일을 털어놓았다. “언니, 그건 성령께서 말씀하신 게 아닐까요.” 신실한 천주교 신자인 후배가 말했다. “정말? 어머, 그런가 봐!” 무지에서 번쩍 깨어나는 느낌이었다. 어릴 때부터 나는 자연 만물 안에 존재하시는 하느님을 자주 느꼈던 것 같다. 나이가 들수록 우연처럼 보이는 오묘한 섭리에 감탄할 때도 많다. 그러나 ‘성령 체험’이라는 말은 어딘가 낯설었는데, 후배의 설명이 명쾌하게 마음에 와 닿았다. 교통사고는 분명 좋지 않은 일이다. 보험료가 올라 경제적 손실도 생겼다. 그러나 그 일을 통해 나는 한 가지를 배웠다. 눈앞에서 일어나는 일을 내가 좋고 나쁘다고 섣불리 판단해서는 안 됨을 지식이 아니라 몸으로 체득했다. 작년 연말에는 넘어져 오른팔이 부러졌다. 아프고 불편했지만, 불평하지 않았다. 아무리 조심해도 사고는 생길 수 있다. 이미 일어난 일은 일어난 일이고, 그 안에서 할 수 있는 일을 하면 된다고 생각했다. 병원에 다니며 많은 환자를 만났다. 산업재해로 치료받는 외국인 노동자들도 많았다. 그때부터 내 기도는 자연스럽게 환자들과 고통 중에 있는 사람들을 위해 바쳐졌다. 오른팔에 깁스해 운동을 못 하니 겨우내 아파트 계단 걷기를 했다. 날마다 묵주기도를 하며 25층 계단을 오르내리다 보니 기도 근육도 그만큼 더 생긴 것 같다. 꺾이고 아픈 만큼 겸손과 감사를 새로 배우는 시간. 올해 사순 시기가 내게는 그런 은혜의 시간이 되고 있다. cpbc2026.03.11

전염병에서 보호해주신 성모님 자비의 도시, 600년간 이어진 순례[중세 전문가의 간김에 순례] 88. 이탈리아 비첸차 몬테 베리코 성모 성지 해발 124m 비첸차 몬테 베리코 언덕 정상에 자리한 성모 성지. 1426·1428년 두 차례 성모 발현 후 성당이 세워졌고 이듬해 수도원이 들어섰다. 처음에는 성 비르지타의 구세주 수도회가, 1435년부터는 성모의 종 수도회가 성지를 지켜왔으며, 나폴레옹 시대인 1810년 한때 폐쇄됐다가 1835년 재건됐다. 출처=shutterstock 독일 유학 시절 베네치아를 자주 오갔습니다. 뮌헨대학이 주도적으로 베네치아 국제대학에서 강의를 개설할 수 있었기에 선생님, 학생들과 함께 섬에서 한주씩 머물며 세미나를 하던 기억이 납니다. 오가면서 가끔 베네토의 도시들을 들르곤 했는데, 그중 하나가 고대 로마 건축의 비례와 질서를 르네상스 시대의 생활 공간에 새롭게 구현한 ‘팔라디오의 도시’ 비첸차였습니다. 비첸차 교외에 있는 안드레아 팔라디오의 대표작 라 로톤다를 보러 갔을 때 맞은편 언덕 위에 성당 하나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성당이 정작 비첸차 사람들이 수백 년 순례하던 성모 성지인 줄은 몰랐습니다. 그땐 보고도 알아보지 못했던 겁니다. 몬테 베리코 성모 바실리카 정면. 길이 약 42m, 너비 27m로 1500명 이상을 수용할 수 있다. 1428년에 세운 작은 고딕 성당을 여러 차례 확장했으며, 현재의 돔을 얹은 바로크 성당은 카를로 보렐라가 옛 성당과 새 중앙 공간을 결합한 팔라디오의 구상을 더 큰 규모로 계승해 1688~1703년에 세웠다. 왼쪽의 붉은 벽돌 종탑은 19세기에 세웠다. 1904년, 성 비오 10세 교황에 의해 준 대성전으로 승격됐다. 150개의 아치 지나 만나는 바실리카 비첸차역을 나와 오른쪽으로 걷다 철길을 지나면 낮은 언덕길이 나타납니다. 팔라디오가 구상했다는 개선문을 지나 오르는 옛 순례길도 있지만, 요즘처럼 햇볕이 따가울 때는 수도원 회랑을 연상시키는 몬테 베리코 주랑길을 오르는 게 좋습니다. 18세기 중반에 로사리오 15단을 150개의 아치로 구현한 길을 오르다 보면, 회랑 끝 저편으로 몬테 베리코 성당의 흰 바로크 정면과 둥근 청록빛 돔이 모습을 드러냅니다. 조각과 기둥으로 장식된 밝은 석조 외벽 곁에는 붉은 벽돌의 높은 종탑이 서 있어 강한 대비를 이룹니다. 몬테 베리코 바실리카 본랑과 주 제대. 1688~1703년 조성된 바로크 공간은 높은 돔과 큰 아치, 대리석 기둥으로 넓은 중앙부를 이루고, 안쪽의 15세기 옛 고딕 성당과 연결된다. 정면의 성모 제대가 두 건축 공간을 잇는 중심축이며, 초기 소성당도 이곳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성모 제대 주변에는 초기 성당의 흔적이 남아 있으며, 옛 가대석에선 당시 비첸차의 풍경과 건축물을 표현한 정교한 목재 상감 장식도 볼 수 있다. 같은 곳에서 두 차례 발현하신 성모 몬테 베리코 성지는 올해로 성모 발현 600주년을 맞이했습니다. 성당 정문 위에 이곳의 기원에 대한 부조가 보입니다. 이야기는 1426년 3월 7일 아침으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비첸차 성벽 남쪽으로 펼쳐진 이 언덕에는 포도밭과 과수원이 있었습니다. 일흔 살의 빈첸차 파시니는 밭에서 일하던 남편에게 음식을 가져다주려고 언덕을 오르다가 성모 발현을 목격합니다. 당시 비첸차 지역은 20년에 걸쳐 되풀이된 페스트에 더해, 경제적 궁핍과 사회적 불안까지 짓눌리던 상황이었습니다. 성모님은 이 언덕에 성당을 세우면 도시에 희망이 생길 것이라고 하셨습니다만, 아무도 노파의 말을 믿지 않았습니다. 2년 뒤인 1428년 8월 1일, 같은 장소에서 두 번째 발현이 일어났습니다. 페스트가 이어지자 마침내 모두가 그녀 말에 귀를 기울였고, 불과 24일 만에 성당 공사가 시작됐습니다. 늘어나는 순례자 위해 확장된 성전 첫 고딕 성당이 세워지자 곧 순례자들이 찾아오기 시작했습니다. 1429년에는 성지를 돌보기 위한 수도원이 들어섰고, 1435년부터 지금까지 성모의 종 수도회(O.S.M) 수도자들이 순례자들을 맞이합니다. 순례자가 늘자, 성당도 계속 확장됐고, 팔라디오도 이 일에 동참했습니다. 팔라디오는 1562년경 중앙집중식 성당을 위한 새로운 설계를 내놓았으나 실현되지는 않았습니다. 대신 1578년 성모 제대 앞 좁은 공간을 넓히기 위해 기존 고딕 성당 북쪽에 약 12m 폭의 정방형 공간을 덧붙였습니다. 성당에 들어서면 높은 돔 아래 밝은 바로크 공간이 한꺼번에 펼쳐져 바깥에서 본 성당과는 또 다른 개방감을 느끼게 합니다. 순례자들의 발걸음은 성모 발현이 이뤄진 장소에 자리한 성모 제대를 향합니다. 팔라디오가 증축한 부분은 1688~1703년 더 큰 바로크 성당을 짓는 과정에서 사라집니다. 성모 제대 앞에 몰려드는 순례자들을 수용하기에는 성당이 좁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새로운 중앙 공간을 성모 제대에서 연결한다는 팔라디오의 기본 구상이 더욱 확대되어 오늘날 바실리카의 뼈대를 이루고 있습니다. 몬테 베리코 ‘자비의 성모’상. 1428년 무렵 니콜로 다 베네치아가 제작한 높이 약 1.7m의 채색 석상이다. 중세 후기 ‘자비의 성모’ 도상으로, 페스트로 고통받던 비첸차 공동체를 보호하는 성모의 자비를 드러낸다. 하느님 백성 품어 주시는 성모님의 망토 주 제대 위에는 두 팔로 큰 망토를 펼쳐 사람들을 감싸는 ‘자비의 성모(Mater Misericordiae)’상이 있습니다. 당시 발현의 장면을 재현했다기보다, 이곳에서 성모 발현의 의미를 드러냅니다. 자비의 성모는 중세 후기에 사랑받던 도상으로 처음에는 특정 수도회나 형제회 회원들이 망토 아래에 있는 모습이었지만, 차츰 성별·신분을 넘어 공동체 전체를 품는 모습으로 바뀌었습니다. 하느님의 백성이 모두 성모의 망토 아래 보호받는다는 ‘모두의 성모’가 된 것이죠. 14세기 흑사병 이후 성모의 망토는 전염병으로부터 사람들을 보호하는 상징으로 받아들여졌습니다. 15세기에는 하느님의 심판을 나타내는 ‘페스트의 화살’을 성모의 망토가 막아주는 도상까지 나타납니다. 실제로 몬테 베리코 성지는 페스트로 죽어가던 도시가 성모의 보호를 청하며 탄생한 곳입니다. 1630년 북이탈리아에 전염병이 또다시 번졌을 때도, 비첸차 시민들은 몬테 베리코의 성모님에게 보호를 청했습니다. 그래서 이 망토는 이 성지의 600년 역사를 압축한 상징처럼 보입니다. 성모 발현 당시 비첸차시는 사건을 조사해 발현과 초기 기적에 관한 증언을 기록했고, 그 문서는 지금도 시립도서관에 보존돼 있습니다. 하지만 발현이나 기적 자체보다 더 눈길을 끄는 사실이 있습니다. 루르드의 베르나데트나 파티마의 어린 목동들의 경우에서 그랬듯이, 600년 동안 이어진 이곳 순례도 결국 한 평범한 여인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는 데서 시작됐다는 점입니다. 성모님의 넓은 망토 아래 누구도 소외되지 않음을 느끼며, 오늘날 우리가 누구의 작은 목소리에 귀 기울여야 하는지를 생각해 봅니다. <순례 팁> ※ 베로나에서 기차로 약 30분, 베네치아에서 약 45분 소요. 비첸차 역에서 몬테 베리코 성지까지 도보 30분 또는 시내버스 18번. ※ 몬테 베리코 바실리카 미사 : 주일 및 대축일 7:00~12:00, 16:00~19:00(동절기 ~18:00) 매시간, 평일 7:00~11:00 매시간, 16:30, 18:00 (동절기 17:00). 주 제대 옆 몬타냐의 「피에타」, 옛 수도원 식당의 베로네세의 「성 대 그레고리오의 만찬」 놓치지 말 것. ※ 성 베네딕도회 왜관수도원이 마련한 2027 유럽 수도원 성지 순례. 문의 및 신청 : 분도출판사, 010-5577-3605(문자) 차윤석 cpbc2026.09.02

무슬림 사회 속 규제와 검열에도30년간 꺼지지 않은 가톨릭 등불[아시아 가톨릭 미디어를 가다] (3) 헤럴드 말레이시아 헤럴드 편집국이 위치한 쿠알라룸푸르대교구 사목센터 전경. 말레이시아는 이슬람을 국교로 하는 다민족·다종교 국가다. 인구 3240만 명 가운데 무슬림이 63.5%다. 불교 신자 18.7%, 그리스도교 신자가 9.1%로 뒤를 잇는다.(2020년 인구주택총조사 기준) 그리스도인 가운데서도 가톨릭을 믿는 이들은 120만 명 남짓으로 추산된다. 무슬림 사회에서 가톨릭 신자는 소수 공동체다. 이같은 현실에서 가톨릭 언론은 단순한 교회 소식지를 넘어선다. 흩어져 살아가는 신자들의 연결 고리이자, 교회 공동체의 존재를 확인해주는 등불이 돼주기 때문이다. 쿠알라룸푸르대교구 사목센터에 자리한 ‘헤럴드(HERALD)’ 말레이시아가 그런 역할을 해왔다. 4개 언어 지면으로 교회 일치 증언 쿠알라룸푸르 시내 한복판, 오래된 사목센터에 자리한 헤럴드 편집국은 그리 크지 않았다. 상주 직원은 패트리샤 페레이라 편집장과 산드라 앤 인바라즈 부편집장을 포함해 한 손에 꼽을 정도다. 취재 기자와 소셜미디어 담당자, 그래픽 디자이너, 회계 담당자가 편집국을 지키고 있다. 각 교구나 본당 주요 행사 소식이나 교리교육·성경 해설·외신·논평은 시민 기자단과 분야별 전문가들이 보내오는 기사와 기고로 꾸리고 있다. 인바라즈 부편집장은 “AI 활용이 보편화되면서 사실 확인에 더 많은 시간을 쏟고 있다”며 “이젠 뉴스 전달을 넘어 설명하고 교육하며 신앙을 나누는 기사에 더 집중하고 있다”고 말했다. 헤럴드는 ‘소식을 알리는 사람’, ‘선포자’란 뜻이다. 1994년 9월 8일 ‘복되신 동정 마리아 탄생 축일’에 창간한 헤럴드는 영어판 격주간지(12개면)로 출발했다. 초대 편집장은 로렌스 앤드류(예수회) 신부였다. 쿠알라룸푸르대교구에서 시작한 헤럴드는 이후 말레이반도(서말레이시아)와 보르네오섬 북부 사바·사라왁주(동말레이시아)까지 독자층을 넓히며 교구 신문을 넘어 말레이시아 가톨릭 공동체 전체를 잇는 매체로 자리 잡았다. 말레이시아 교회는 말레이반도에 쿠알라룸푸르대교구·페낭교구·말라카-조호르교구가 있으며 동말레이시아 사바주에 코타키나발루대교구·케닝아우교구·산다칸교구, 사라왁주에 쿠칭대교구·미리교구·시부교구 등 9개 교구로 이뤄져 있다. 특히 동말레이시아 지역은 말레이반도보다 가톨릭 공동체 기반이 뚜렷하다. 동말레이시아 일부 교구에는 가톨릭 신자 비율이 10%를 훌쩍 넘는다. 헤럴드는 영어 외에 중국어·타밀어·말레이어(바하사) 담당자를 두고 각 언어 지면을 함께 발행한다. 네 가지 언어를 한 신문에 담아 언어·문화가 다른 신자들이 하나의 교회 안에 있음을 지면으로 증언해 온 셈이다. 인바라즈 부편집장은 “언어는 번역 수단에 그치지 않고 교회 일치를 위한 핵심 도구”라고 강조했다. 헤럴드는 현재 총 32개 면을 발행하고 있으며 영어 19개 면을 중심으로 중국어 3개 면, 타밀어 2개 면, 바하사어 8개 면으로 구성돼 있다. 헤럴드 사무실은 전례주기에 맞춰 꾸민다. 올해 초 사순 시기에 맞춰 보라색 천과 나뭇가지로 만들어진 십자가상으로 장식한 사무실 입구. ‘알라’ 용어 사용으로 발행 중지 위기 헤럴드는 2001년 격주간지에서 주간지로 전환했다. 더 자주, 더 꾸준히 신자들에게 교회 가르침을 전하고, 신앙의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창을 제공하기 위한 선택이었다. 그해 웹사이트를 개설하며 새로운 독자층과 만날 길을 열었다. 그러나 헤럴드가 걸어온 길이 늘 순탄했던 건 아니다. 헤럴드가 말레이시아를 넘어 전 세계에 알려진 계기는 신문이 겪은 가장 큰 시련이었다. 헤럴드 말레이어 지면에 사용했던 ‘알라’(Allah)라는 단어가 발단이었다. 알라는 아랍어로 하느님, 곧 유일신을 뜻한다. 무슬림에게 ‘알라’는 신앙의 핵심 언어이자, 이슬람 공동체성을 드러내는 상징적 표현이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도 오래전부터 하느님을 가리킬 때 이 말을 사용해왔고, 말레이어 성경과 교회 전통 안에서도 ‘알라’는 하느님을 뜻했다. 창세기 1장 1절 ‘창조주 하느님’을 가리킬 때도, 마태오 복음 27장 46절 십자가에 매달린 예수 그리스도께서 “저의 하느님, 저의 하느님”을 부르짖을 때도 말레이어 성경은 하느님을 알라로 표기해왔다. 말레이시아 정부는 2007년 헤럴드 말레이어 지면의 ‘알라’ 사용을 문제 삼았다. 가톨릭 신자들이 쓰는 표현이 무슬림에게 혼란을 줄 수 있다는 이유에서였다. 논쟁은 헤럴드의 발행 허가 문제로까지 번졌다. 정기간행물은 정부의 출판 허가를 받아야 했고, 교회는 해마다 이를 갱신해야 했다. 알라 논쟁 직후 헤럴드의 허가 갱신은 지연됐고, 발행 중지 압박도 커졌다. 쿠알라룸푸르대교구는 법적 대응에 나섰고, 당시 편집장 앤드류 신부는 이 사안을 국제사회에 알렸다. 무슬림 사회에서 가톨릭 소수 공동체가 홀로 맞서기엔 힘든 싸움이라는 판단에서였다. 종교와 민족 정체성, 신앙과 출판의 자유가 맞물리며 알라 논쟁은 말레이시아 사회를 넘어 세계 교회의 관심사가 됐다. 쿠알라룸푸르 고등법원은 2009년 가톨릭교회의 손을 들어주며 헤럴드에 ‘알라’ 사용의 권리가 있다고 판결했다. 하지만 판결 직후 일부 성당과 가톨릭 시설을 향한 공격이 벌어졌다. 말레이시아 정부는 항소에 나섰고, 오랜 법정 다툼 끝에 2013년 항소법원은 고등법원 판결을 뒤집었다. 헤럴드는 결국 ‘알라’를 지면에 쓸 수 없게 됐다. 인바라즈 부편집장은 “이는 헤럴드지에만 해당되는 사안으로 미사나 전례, 성경에서 사용되는 것까지 막은 것은 아니었다”고 했다. 그럼에도 이 사건은 하느님을 부르는 말조차 공적 논쟁과 법적 제한의 대상이 될 수 있는 무슬림 사회 속 가톨릭 언론이 처한 현실을 보여줬다. 인바라즈 부편집장은 “말레이시아 정부는 인종(Race)·종교(Religion)·왕실(Royalty), 이른바 3R 문제에 민감하게 반응한다”며 “이와 관련된 표현이 사회적 갈등을 부추기거나 공공질서를 해칠 수 있다고 보고 강하게 검열하고 있다”고 말했다. 신앙의 자유·인권·사회 정의·사회적 약자를 위한 우선적 배려 문제는 가톨릭 사회 교리와 직결되는 주제지만, 3R 영역과도 맞닿아 있다. 헤럴드는 대립의 언어보다는 신중하고 절제된 표현을 택했다. 침묵하지 않되 갈등을 키우지 않고, 교회 가르침을 전하되 사회적 긴장을 불러일으키지 않는 균형을 지켜온 것이다. 헤럴드 편집국 직원들. 왼쪽부터 산드라 앤 인바라즈 부편집장, 레이첼 샤르마 행정 담당, 패트리샤 페레이라 편집장, 아만다 마 그래픽 디자이너. 팬데믹·독자 감소에도 교회 가치 실천 코로나19 팬데믹은 헤럴드의 또 다른 위기였다. 2020년 3월 이동 제한과 사회적 거리두기 영향으로 교회 공동체 일상도 멈췄다. 미사가 중단되고 신자들이 성당에 모일 수 없던 시기에 신문을 인쇄하고 배포하는 일도 어려워졌다. 헤럴드는 신문 인쇄를 멈추고 전면 온라인으로 전환하는 결단을 내렸고, 2022년 9월부터 종이신문을 다시 발행했다. 신문 독자가 줄고 제작비, 우편료 부담이 커진 상황에도 헤럴드가 인쇄를 재개한 것은 디지털 접근이 어려운 신자들과 종이신문을 기다리는 이들이 여전히 있었기 때문이다. 더불어 유튜브를 비롯해 다양한 SNS 플랫폼을 운영하며 여러 세대와 접점을 넓혀가고 있다. 2024년 창간 30주년을 맞은 헤럴드는 나무를 심었다. 프란치스코 교황이 회칙 「찬미받으소서」에서 강조한 ‘공동의 집 돌봄’에 응답하는 일이었다. 사바주 수카우의 로워 키나바탕간 야생동물보호구역에 나무 100그루를 심고, 신자들의 참여를 독려하는 생태 캠페인을 마련했다. 신문을 만들고 배포하는 일을 넘어 교회가 말하는 가치를 실천하는 시도였다. 30년 넘게 헤럴드는 신자들이 더 넓은 교회와 연결돼 있음을 알게 하고, 교회가 세상 안에서 무엇을 보고 말해야 하는지 식별하게 하며, 소수자의 자리에서도 신앙의 언어를 잃지 않도록 앞장서왔다. 말레이시아 가톨릭 공동체가 자신들의 언어와 전통을 잃지 않도록 헤럴드는 오늘도 네 개 언어로 목소리를 이어가고 있다. 말레이시아=박수정 기자 catherine@ 첫 여성 평신도 편집장 - 패트리샤 페레이라 “복음에 뿌리 둔 진실 전한다” 2021년 패트리샤 페레이라(Patricia Pereira) 편집장의 취임은 말레이시아 교회에 변화를 알리는 상징적 사건이었다. 헤럴드 창간을 이끌고 27년간 편집장을 맡아온 로렌스 앤드류(Lawrence Andrew, 예수회) 신부 이후 첫 여성 평신도 편집장이기 때문이다. 페레이라 편집장은 자신의 임명에 대해 “교회가 리더십과 식별, 선교 영역에서 평신도, 특히 여성의 역할을 새롭게 인식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인사였다”고 평가했다. “교회는 성직자만이 이끄는 공동체가 아니니까요. 가톨릭교회는 공동체 구성원 모두가 각자 역할을 맡아 함께 책임지는 공동체입니다.” 이는 말레이시아 사회에도 교회가 시대에 발맞춰 포용성을 넓히고, 여성의 역량과 리더십을 인정한다는 메시지를 줬다. 페레이라 편집장은 취임 후 ‘알리고, 양성하며, 영감을 준다’는 헤럴드 사명을 이어가며 현장 목소리를 더 많이 담으려 노력했다. 그는 “신자들의 생생한 삶의 경험, 공동체의 다양한 의견을 전하는 데 더 무게를 두는 변화를 추구했다”며 “스토리텔링의 렌즈가 다양해졌다”고 설명했다. 그는 대학에서 홍보학을 전공하며 교구와 본당 일을 돕곤 했다. 졸업 후엔 주말마다 헤럴드에서 번역하던 인연이 이어져 1996년 헤럴드 기자 겸 부편집장으로 합류했다. 2006년까지 10년간 기자로 일하다 일반 기업 카피라이터 겸 홍보 담당으로 자리를 옮겼다. 재정적 이유에 따른 선택이었지만, 성과와 속도를 중시하는 기업에서 여러 고객을 만나며 새로운 소통방식을 배웠다. 그러다 쿠알라룸푸르대교구 요청으로 2017년 다시 교회 현장으로 돌아와 교구 커뮤니케이션 및 대외 협력 업무를 맡았다. “일반 기업과 교회 기관의 가장 큰 차이는 ‘근본적 동기’에 있습니다. 기업은 수익과 성과를 좇지만, 교회는 사명·가치·사목적 돌봄을 지향하죠. 교회는 기업의 전문성과 효율성을, 기업은 교회의 인간 존엄성과 삶의 의미를 배우며 상호 보완할 수 있습니다.” 페레이라 편집장은 가톨릭 언론의 정체성을 “양심을 지닌 저널리즘”이라 설명하며 “단순히 사실을 보도하는 데 그치지 않고 복음에 뿌리를 두고 진실을 전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어 “가톨릭 언론은 사람들에게 정보를 주고 영감을 주며 성찰로 초대해 궁극적으로는 그리스도께로 이끄는 ‘전문 사도직’”이라고 덧붙였다. 헤럴드 역시 신문 독자 감소와 디지털화라는 세계 언론의 공통된 과제를 마주하고 있다. 그는 이를 위기가 아닌 새 도약의 기회로 바라봤다. 온라인 입지를 강화하고 젊은 세대와 소통하며 다양한 플랫폼을 활용해 기사를 보도하겠다는 구상이다. “헤럴드가 가톨릭 공동체에 유익한 정보를 제공하고 서로를 연결하며, 영감을 불어넣는 ‘신뢰받는 목소리’로 남길 바랍니다. 나아가 사회와도 의미 있는 대화를 이어가는 매체가 돼야 합니다. 우리의 최종 목표는 변화무쌍한 미디어 환경에서 단순히 살아남는 데 그치지 않습니다. 언제나 흔들림 없이 빛을 비추는 ‘희망과 진실의 등대’로 굳건히 서는 것입니다.” 말레이시아=박수정 기자박수정2026.06.10

책꽂이 나는 그림인가? 그림이 나인가? / 유안진 / 비지아이 「나는 그림인가? 그림이 나인가?」는 「지란지교를 꿈꾸며」의 저자 유안진(클라라, 서울대 명예교수) 시인이 미술을 전공한 딸 김문정(가타리나)씨의 1주기를 맞아 펴낸 작품집이다. 딸이 남긴 글과 일상적인 대화를 연결하고, 어린 시절 붓글씨부터 편지·판화·드로잉·퀼트·조각 붙이기 등을 한데 모았다. ‘화사철(畵史哲)’, 즉 그림에 모국의 생활문화사와 역사의식, 공동체 의식이라는 철학이 담겨 있어야 한다고 말했던 작가의 작품들도 확인할 수 있다. 김문정씨는 2025년 서울대교구 방배동성당 하랑갤러리에서 하느님께 봉헌할 첫 전시회를 준비하던 중 지병으로 46년의 짧은 생을 마쳤다. 그 새가 왜 거기 있었을까 / 전성호 / 레벤북스 언뜻 보면 시적이고 다른 한편으론 무척 딱딱한 제목의 이 책은 고등학교에서 과학을 가르치는 전성호(베르나르도)씨가 과학적인 시선으로 바라본 인문학적 세상 이야기다. 과학은 세상과 인간, 자기 자신을 올바르게 바라볼 수 있는 창이어야 한다고 믿는 저자는 과학 교사답게 물리학·화학·생명과학·천문학과 지구과학의 창으로 세상을 바라본다. 현미경을 통해 아주 작은 생물체 속에 숨겨진 우주의 질서를, 자그마한 휴대전화 화면 너머 실제 하늘에 펼쳐지는 광대한 우주의 크기와 그 안에 존재하는 천체들의 질서를 소개한다. 이를 통해 생명이란 무엇이고 왜 소중한지, 삶이란 왜 가치 있어야 하는지, 스스로에 대한 겸손함과 소중함을 깨우치게 한다. 본지에 연재했던 ‘과학과 신앙’ 칼럼을 발췌해 다듬었다. 대화가 필요한 순간 / 류지현 / 서교출판사 류지현(안나) 아나운서가 방송과 언론 현장에서 쌓은 경험을 바탕으로 말과 대화가 인간관계와 삶에 미치는 영향을 짚은 책이다. 말하기를 단순한 기술이 아닌 이해와 공감의 태도로, 대화를 일방적인 전달이 아닌 상호 작용의 과정으로 설명하며 현대사회에 필요한 커뮤니케이션의 기본 원칙과 실천 방법을 정리했다. 책은 △사람의 마음을 여는 △유능하게 보이는 △신뢰감 있어 보이는 △당신의 가치를 높여주는 대화의 기술을 중심으로 구성됐다. 직장 내 보고와 회의, 공식 발표와 강연, 일상적인 대화와 관계 회복 등 다양한 사례와 바로 활용할 수 있는 대응 방식을 함께 제시해 실용적이다. 스마트폰 메시지 대화 요령, 마음가짐과 목소리 관리 등에 대한 팁도 더했다. 범의 길 / 박흥식 / 꿈꿀자유 봉오골 전투와 청산리 전투의 영웅, 9척 장신에 사격의 명수인 홍범도 장군. 「범의 길」은 대한독립군 총사령관 홍범도 장군, 그리고 그와 함께 싸운 사람들의 이야기를 담은 영화 각본집이다. 영화 ‘탄생’을 비롯해 ‘역전의 명수’ ‘경의선’ ‘두 번째 스물’ 등을 만든 박흥식(프란치스코) 감독이 썼다. 시나리오는 영화 발표 전에 공개되는 경우가 없지만, 박 감독은 읽기 위한 시나리오 ‘레제스쩨나리오(Lese-szenario)’ 장르를 열었다. 한 편의 영화를 보듯 읽히는 시나리오에서 1920년 독립전쟁의 영웅 홍범도 장군의 일대기와 그 이면의 인간다운 모습을 확인할 수 있다. 무엇보다 그와 함께 싸웠으나 역사의 망각 속에 스러져간 또 다른 영웅들을 금강산 단발령, 두만강, 개마고원과 연해주 등에서 불러내 다시 뜨겁게 살아 숨 쉬게 한다. 윤하정 기자윤하정2026.05.06

‘헝가리 수호자’ 모신 성지, 치유 청하며 700년간 이어진 발걸음[중세 전문가의 간김에 순례] 92. 슬로바키아 마리안카 성모 탄생 바실리카 마리안카 성모 탄생 바실리카와 수도원. 1377~1380년 기존 성당 자리에 고딕 양식으로 세워졌으며, 1717~1735년 바로크 양식으로 대대적인 개축을 거쳤다. 2011년 베네딕토 16세 교황에 의해 준 대성전으로 승격됐다. 옛 성 바오로회 수도원에는 현재 겟세마니 위로자 형제회(CCG)의 총원이 자리하며, 성지와 순례자 사목을 맡아 피정의 집을 운영하고 있다. 10월은 묵주 기도 성월입니다. 성모송을 바치며 묵주알을 하나씩 넘기다 보면 단순한 기도가 반복되면서 어느새 하나의 길이 만들어집니다. 유럽의 오래된 성모 순례지도 비슷합니다. 처음부터 거대한 바실리카와 광장이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작은 성모상 하나, 그 앞에서 도움을 청했던 이름 없는 사람들의 발걸음과 기도가 쌓여 성지가 된 곳이 많습니다. 오늘 가볼 슬로바키아의 성지도 그런 곳입니다. 슬로바키아 수도 브라티슬라바를 방문하면 성 마르티노 대성당을 먼저 보게 됩니다. 합스부르크 시대 헝가리 국왕들의 대관식을 올리던 브라티슬라바 대교구의 주교좌 성당입니다. 그런데 새 국왕들이 대성당을 나와 곧장 향한 곳이 있습니다. ‘마리아의 계곡’이라고 불리는 마리안카(Marianka)로, 슬로바키아에서 가장 오래된 성모 순례지이자 옛 헝가리 왕국 최초의 성모 순례지로 꼽히는 곳이지요. 마리안카 성모 탄생 바실리카 주 제대와 본랑. 19세기 후반 대대적인 재고딕화 작업을 거쳐 1877년 네오고딕 날개제대가 새로 설치됐지만, 본랑 천장에는 18세기 바로크 양식의 화려한 치장 벽토 장식이 그대로 남아 있다. 천장화는 과거 이 성지를 맡았던 수도회의 주보인 첫 은수자 성 바오로의 생애, 특히 성 안토니오와의 만남과 노년기의 일화를 담았다. 은수자가 숨겨둔 성모자상, 200여 년 뒤 찾아 마리안카로 가는 길은 의외로 간단합니다. 브라티슬라바에서 광역버스로 20분이면 소카르파티아산맥 낮은 산자락에 자리한 마을에 닿습니다. 11세기 무렵 이 일대에는 배나무를 깎아 왕좌에 앉아 아기 예수를 안은 성모자상을 만들어 모시던 은수자가 살았습니다. 전쟁이 나서 성모상을 속이 빈 나무에 감추고 피신했는데, 세월이 흐르며 그 위치도 잊혔다고 합니다. 1300년 무렵 눈먼 이가 숲에서 들려오는 목소리를 따라 샘을 찾아왔다가 샘물로 눈을 씻은 뒤 시력을 되찾습니다. 눈을 뜬 그 앞에 오래전 사라졌던 성모자상이 보이는 게 아닙니까. 사람들은 성모자상을 나무 기둥 위에 모셨고, 성모 소성당이 들어섰으며 치유를 청하는 이들이 하나둘 찾아오기 시작했습니다. 마리안카 순례는 그렇게 시작되었습니다. 즉위한 헝가리 국왕이 성지 찾는 전통 생겨 1377년 앙주 가문 출신의 헝가리 국왕 러요시(루이) 1세는 이미 성모 신심이 자리 잡은 이곳의 성당과 그 주변을 첫 은수자 성 바오로회(OSPPE)에 맡깁니다. 사도 성 바오로가 아니라 이집트 사막에서 처음 은수 생활을 시작한 성 바오로의 영성을 따르는 수도회로, 지금도 동유럽 여러 성지에서 순례 사목을 맡고 있지요. 국왕의 후원으로 14세기 말 고딕 성당과 수도원이 세워지면서 본격적인 순례지로 성장합니다. 16~18세기 브라티슬라바는 헝가리 왕국의 정치 중심지였습니다. 브라티슬라바와 가까운 곳에 자리한 마리안카 수도원은 왕실과의 관계가 각별했습니다. 1647년 페르디난트 4세부터 새 국왕이 즉위한 뒤 마리안카 성모님을 찾아가는 전통이 생겼습니다. 합스부르크의 레오폴트 1세와 카를 6세도 이곳을 찾았지요. 마리안카 성모님은 ‘헝가리의 수호자’로 공경을 받았습니다. 성모 탄생 바실리카의 날개 제대와 성모자상. 1877년 대주교 건축가 요제프 폰 리페르트가 설계하고 빈의 조각가 요제프 라이머가 제작했다. 제대 중앙에 모셔진 높이 42㎝의 배나무 목조 성모자상은 13세기 말~14세기 전반 작품으로 추정된다. 화려한 성전 안에 모셔진 작은 목상 정류장에서 멀지 않은 곳에 붉은 지붕을 얹은 고딕 성당과 수도원이 있습니다. 성당 안에 들어서면 중세 고딕의 골격 위에 바로크와 19세기 네오고딕이 겹쳐 보입니다. 1717~1735년에는 바로크 양식으로 대대적으로 개축하면서 고딕 창 일부를 막고 버팀벽 사이에 작은 소성당과 측면 제대를 넣었으며, 천장에는 화려한 스투코와 은수자 성 바오로의 생애를 그린 그림을 더했습니다. 성 바오로회의 역사에서 이 산골의 순례지는 매우 중요한 곳이었습니다. 1540년 오스만 제국의 공격에 부다의 성 라우렌시오 수도원이 파괴되자 총장과 공동체가 마리안카로 피신합니다. 그 후로 18세기까지 수도회의 총회가 여기서 열렸고, 17세기에는 신학 대학까지 들어섰으니, 마리안카는 명실상부한 수도회의 중심지였습니다. 혁명의 시대를 거치며 쇠락하던 성당은 1877년 성당 창립 500주년을 맞아 대대적으로 복원됐습니다. 성 마르티노 대성당 복원에 참여했던 건축가와 예술가들이 나섰고, 지금의 네오고딕 날개 제대와 스테인드글라스도 이때 설치됐습니다. 주 제대 중앙에는 마리안카의 역사를 연 성모자상이 모셔져 있습니다. 42㎝ 크기의 작은 목상이라 화려한 날개 제대 안에서는 더욱 작아 보입니다. 하지만 국왕도, 수도자도, 일개 농부도 이 앞에서 무릎을 꿇었습니다. 세월이 흘러 성당의 모습은 바뀌어도 순례의 중심은 변하지 않았습니다. 지금도 성당 주보인 복되신 동정 마리아 탄생 축일과 가까운 주말에는 브라티슬라바와 서부 슬로바키아 각지에서 순례자들이 모여듭니다. 기적의 샘(위)과 바로크 양식의 거룩한 샘 소성당(아래). 붉은 사암 절벽 아래 3~4m 깊이의 수직 암굴에는 1696년 소성당 건립 때 만든 벽돌 아치와 맑은 지하 샘물이 있다. 순례자들이 물을 받을 수 있도록 파이프가 연결돼 있으며, 소성당 내부 프레스코화에는 성모자상 발견과 마리안카 초기 순례의 역사가 담겨 있다. 성모님 삶 묵상하며 그리스도의 수난 따라 걷는 길 바실리카 뒤편 숲길에 발을 디디면 1710~1729년에 세운 여섯 소성당이 이어집니다. 성모 탄생, 주님 탄생 예고, 마니피캇, 아기 예수의 성전 봉헌 등 성모님의 삶과 기쁨을 구현한 성당이지요. 그 길 끝으로 둥근 돔을 얹은 거룩한 샘 소성당이 자리합니다. 눈먼 이가 눈을 뜬 샘이 있는 곳입니다. 산비탈로는 십자가의 길도 이어집니다. 주님 수난을 재현한 실물 크기의 채색 목조상이 자리해 숲속을 걷다 보면 수난의 한 장면 안으로 들어선 듯한 느낌을 줍니다. 바실리카에서 성모님의 전구를 청하고, 숲으로 들어가 성모님의 삶을 묵상하며 샘물을 마시고, 마지막에는 예수님의 수난을 따라 그리스도께 향하는 길. 순례의 정신이 이 공간에 펼쳐져 있습니다. 누군가 숲속에서 성모상을 만들었고, 누군가 그 앞에 자신의 고통을 내려놓았으며, 또 다른 누군가가 그 이야기를 듣고 찾아왔습니다. 그렇게 작은 기도가 쌓이고 또 쌓여 성지가 만들어진 것이죠. 하느님께로 향하는 순례인 우리의 삶도 그렇게 만들어 가야 할 겁니다. <순례 팁> ※ 브라티슬라바 파트론카(Patrónka)에서 광역버스 215번을 타고 마리안카에서 하차(약 20분 소요). 바실리카(예수 성심제대 순교자 성 테오도라 성해)→성모 기쁨 소성당길→거룩한 샘 소성당→십자가의 길 (2~3시간 소요). ※ 바실리카 미사: 주일 및 대축일 08:00·09:30·11:00·18:30·20:00(학기 중), 평일 08:00·18:00. ※ 성 베네딕도회 왜관 수도원이 마련한 2027 유럽 수도원 성지 순례. 문의 및 신청: 분도출판사, 010-5577-3605(문자) cpbc2026.10.06

가난한 학생이 봉헌한 작은 선물 받아주신 ‘자애의 성모’ 성지[중세 전문가의 간김에 순례] 91. 독일 쾰른 장크트 마리아 임 카피톨 바실리카 쾰른 구도심에 자리한 장크트 마리아 임 카피톨(St. Maria im Kapitol). 쾰른의 12개 주요 로마네스크 성당 가운데 가장 큰 규모로, 두꺼운 석벽과 낮은 탑, 동·남·북 세 방향으로 펼쳐진 반원형 후진이 특징이다. 11세기에 조성된 이 독특한 구조는 라인 지역 로마네스크 건축의 선구적인 모델이 되었다. 1965년 성 바오로 6세 교황에 의해 준 대성전으로 승격됐다. 독일 쾰른대성당을 보면 쾰른을 다 본 듯합니다. 중앙역을 나서자마자 하늘을 찌를 듯한 두 첨탑이 그만큼 강렬하기 때문이겠죠. ‘간 김에 순례’ 10회에서 소개했듯 쾰른대성당은 동방 박사의 성해를 모신 곳으로 쾰른을 대표하는 순례지입니다. 대성당 순례를 했으면, 쾰른에서의 순례는 끝난 것일까요? 구도심에는 대성당 말고도 유서 깊은 로마네스크 성당 12곳이 남아 있습니다. 그중 가장 큰 성당이 장크트 마리아 임 카피톨입니다. 로마 시대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쾰른의 오랜 신앙사를 간직한 성당으로, 시대마다 달라진 신앙의 모습을 만날 수 있는 장소입니다. 장크트 마리아 임 카피톨 옛 베네딕도회 수녀원 회랑. 오늘날 성당 골격을 완성한 11세기 이다 아빠티사 시대 베네딕도회 수녀원이었던 공동체는 12세기 귀족 여성 중심으로 바뀌어 1802년 세속화될 때까지 존속했다. 현재 쾰른 대교구 성당이다. 로마 신전 자리했던 터에 봉헌된 성당 장크트 마리아 임 카피톨 성당은 대성당에서 남쪽으로 불과 800m 떨어진 곳에 있습니다. 대성당을 등지고 남쪽으로 10여 분 걸으면 닿습니다. 두 성당의 짧은 길 위에 로마 시대 유적부터 중세와 근현대 건축까지 쾰른의 2000년 역사가 압축돼 있습니다. 넓은 광장 위로 거대한 정면과 첨탑을 드러내는 대성당과 달리, 장크트 마리아 임 카피톨 성당은 구도심 건물과 옛 회랑 사이에 자리해 한눈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습니다. 두 개의 탑이 남아 있지만, 하늘로 치솟기보다 땅에 단단히 붙은 듯해 도심 한가운데 있으면서도 모르고 지나치기 쉽습니다. 성당의 정식 명칭을 우리말로 옮기면 ‘카피톨의 성모 마리아’입니다. 카피톨은 로마 제국의 주요 도시에 세워진 중심 신전으로, 유피테르·유노·미네르바를 모시며 로마의 국가 종교와 도시의 권위를 상징했습니다. 서기 1세기 쾰른이 ‘콜로니아’로 승격되자, 이 언덕에도 4.4m 높이의 기단 위에 33×29.5m 정도의 카피톨 신전이 들어섰습니다. 하지만 인간의 욕망으로 세운 제국은 모래성과도 같지요. 로마 제국이 기울고 프랑크족이 쾰른을 지배하면서 이곳의 주인도 바뀝니다. 프랑크 왕국의 실력자 페피누스 2세의 부인 플렉트루디스는 말년을 쾰른에서 보내며, 카피톨 신전의 폐허에 성모 마리아에게 봉헌한 성당을 세웁니다. 우상이 사라진 자리에 참믿음의 기틀이 세워진 겁니다. 10세기 중엽 이곳에 쾰른 대주교의 지원으로 베네딕도회 수녀원이 설립됩니다. 장크트 마리아 임 카피톨의 본랑과 레트너. 두꺼운 기둥과 둥근 아치, 평평한 목조 천장이 로마네스크 성당 특유의 단정한 리듬을 만든다. 정면의 화려한 석조 구조물은 16세기 초 제작된 레트너로 본랑과 성직자들의 가대석을 구분하던 가림막이다. 레트너 너머로 삼엽형 기대석과 제대 공간이 이어진다. 황실 지원으로 건축돼 전례 중심지로 성당 앞에 서면 첨탑 대신 두꺼운 석벽과 둥근 후진이 건물을 감싸고 있어서 로마네스크 건축 특유의 묵직하고 안정된 느낌을 줍니다. 서쪽의 상층 구조는 오늘날 아헨대성당을 연상시킵니다. 동·남·북 세 방향으로 둥근 가대석이 펼쳐져 하늘에서 보면 세잎클로버를 닮았습니다. 지금의 모습은 1040년 무렵에 이다 아빠티사가 황실의 지원을 받아 시작한 건축 사업에서 비롯됐습니다. 이다는 오토 2세 황제와 비잔틴 출신 황후 테오파누의 외손녀였고, 친오빠 헤르만 2세는 쾰른 대주교였습니다. 1049년에 성 레오 9세 교황이 직접 찾아와 십자가 제대를 봉헌했으니, 이곳이 평범한 수녀원 성당 이상의 위상을 지녔음을 보여줍니다. 12세기에 수녀원은 귀족 여성들의 의전공동체로 바뀝니다. 황실과의 관계보다 이미 강했던 귀족적 성격이 제도적으로 더욱 뚜렷해진 변화로 볼 수 있습니다. 장크트 마리아 임 카피톨은 도시 전례에서도 중요한 위치를 차지했습니다. 쾰른 대주교는 주님 성탄 대축일 전야 미사를 이곳에서 봉헌했고, 주님 공현 대축일에는 시의회가 이곳에서 출발해 대성당까지 동방 박사를 기리는 행렬에 참여했습니다. 후진의 히르츠 소성당과 ‘고통의 십자가’(좌), 헤르만 요제프 성모자상(우). 두 팔이 위로 갈라지는 Y자형 갈래 십자가는 1300년 무렵 호두나무로 제작한 것으로, 수난의 고통을 극적으로 표현했다. 현재의 강렬한 채색은 주로 15세기에 덧입혀진 것이다. 성모자상은 12세기 후반 제작된 작품으로, 성모와 아기 예수가 뺨을 맞댄 비잔틴계 ‘자애의 성모(Eleusa)’ 형식을 보여준다. 성모자상 앞에 놓인 사과 성당 안은 묵중한 기둥과 둥근 아치가 본랑을 차분하게 감쌉니다. 본랑 끝에는 성직자와 평신도의 공간을 구분하던 아름다운 레트너가 있고, 그 뒤로 제대 공간과 가대석이 펼쳐집니다. 가대석에 들어서면 사과 몇 알이 앞에 놓인 성모자상을 만납니다. 훗날 프레몽트레회에 입회한 성 헤르만 요제프는 가난한 학생 시절 이곳에서 기도하다가 자신이 가진 사과를 아기 예수께 내밀었습니다. 그러자 성모님이 아기의 손을 움직여 받아주었다고 하지요. 그 후로 쾰른 신자들은 성모상 앞에 사과를 봉헌합니다. 거대한 성당 안 성모자 앞의 소박한 사과는 중세 신앙의 색다른 모습을 보여줍니다. 성모님과 아기 예수를 신비로운 존재가 아니라, 자신의 작은 선물과 기도를 받아주는 가까운 존재로 받아들였던 것이죠. 더 안쪽의 히르츠 소성당의 Y자형 모양의 ‘고통의 십자가’에서는 그리스도의 수난을 내면 깊이 체험하려 했던 수난 신심도 엿볼 수 있습니다. 나치의 방해 속에도 교회 지켜낸 청년들 쾰른 사람들의 이런 개인 내면의 신심은 20세기에 함께 기도하며 서로를 지탱하는 공동체의 체험으로 이어집니다. 나치 정권은 청년들을 국가 조직에 편입시키기 위해 가톨릭 청년단체들부터 해산합니다. 하지만 나치의 감시와 압박 속에서도 이곳 지하 소성당에서는 1939년부터 매주 토요일 밤 젊은이들이 모여 독일어로 끝기도를 바쳤습니다. 전쟁으로 청년들은 전선으로 흩어지고 성당도 폭격으로 크게 파괴됐지만, 공동체의 기도는 끊이지 않았습니다. 지하 소성당의 기도는 전선에 있던 친구들과 시간 기도로 연결되었죠. 당시 보좌 신부이자 쾰른 청년사목 담당이었던 라인하르트 앙게넨트 신부는 이 젊은이들을 “쾰른의 젊은 교회”라 불렀습니다. 청년을 그저 교회를 이어갈 미래 세대로만 보지 않고, 바로 지금 교회를 살아 숨 쉬게 하는 주체로 바라본 것입니다. 2027년 서울 세계청년대회가 우리 젊은이들이 교회 안에서 자신의 목소리와 자리를 발견하는 계기가 되기를 기도합니다. <순례 팁> ※ 쾰른 대성당에서 장크트 마리아 임 카피톨까지 옛 시청사와 ‘비아 쿨투랄리스’를 따라 남쪽으로 이동(도보 10~12분, 약 800m, 지하철 U5 Heumarkt). ※ 미사: 주일 및 대축일 9:30(가족미사), 10:30, 평일 18:30(목) / 가이드 투어 (월 2회, 사전 예약). ※ 성 베네딕도회 왜관 수도원이 마련한 2027 유럽 수도원 성지 순례. 문의 및 신청: 분도출판사, 010-5577-3605(문자) 차윤석 cpbc2026.09.30

평신도 중심 언론, ‘1만 7000개 섬나라’ 인도네시아에 복음의 씨앗 뿌리다[아시아 가톨릭 미디어를 가다] (6) 인도네시아 독립언론 스사위넷(Sesawi.net) 교구나 주교회의에 속하지 않은 가톨릭 민간 독립 매체 이전 예수회원 모임에서 시작돼 2011년부터 교회 소식 전달 사무실 없이 대표 집에서 운영… 15년간 500여 명 필자 참여 지구촌 중 무슬림 인구가 가장 많은 인도네시아에서 가톨릭은 소수 종교다. 인도네시아 내무부가 발표한 2025년 말 통계에 따르면 전체 인구 2억 8831만여 명 가운데 무슬림은 87.15%다. 개신교인은 7.37%, 가톨릭 신자는 3.07%로 약 886만 명이다. 가톨릭교회는 작은 공동체이지만 인도네시아 전역에 뿌리내리고 있다. 1만 7000여 개 섬으로 이뤄진 광대한 땅에 10개 대교구와 29개 교구(군종교구 포함)가 있다. 가톨릭 신자가 다수인 플로레스섬 지역이 있는 반면, 일부 지역은 신자 비율이 1%에도 미치지 못할 만큼 지역별 편차도 크다. 수도 자카르타에서 멀리 떨어진 섬과 오지의 작은 공동체들은 전체 교회에 자신들의 소식을 알리기도 쉽지 않다. 온라인 가톨릭 매체 ‘스사위넷(Sesawi.net)’은 이 간극을 메우며 인도네시아의 섬과 섬, 지역 교회와 보편 교회를 잇고 있다. 스사위넷 홈페이지 홈 화면. 홈페이지 캡처 ‘스사위’는 인도네시아어로 ‘겨자’를 뜻한다. 복음서에 나오는 ‘겨자씨의 비유’에서 따온 이름이다. 작은 씨앗이 자라 큰 나무가 되듯 평범한 신자들의 작은 이야기를 세상에 전하겠다는 뜻을 담았다. 스사위넷은 이전 예수회원들의 모임 ‘스사위’에서 시작됐다. 이들은 성소 식별 끝에 수도회를 나왔지만, 이냐시오 영성에 따라 ‘하느님의 이름이 더욱 영광스럽게 되도록’ 평신도의 자리에서 복음을 전하자고 뜻을 모았다. 언론과 출판 분야에서 활동하던 이들이 주축이 돼 가톨릭 신앙의 눈으로 세상을 읽고 기록하기로 했다. 현 스사위넷 대표이자 편집장인 마티아스 하리야디씨가 중심이 돼 2011년 6월 출범시켰다. 스사위넷은 교구나 주교회의에 속하지 않은 민간 독립 매체다. 별도의 사무실 없이 하리야디 대표가 집에서 업무를 보고 있다. 재정 담당은 아내가 맡고 있고 IT 담당자를 별도로 두고 있다. 처음엔 네덜란드 자선 재단을 통해 사이트 운영비를 지원받았지만, 지원이 끊긴 뒤로는 하리야디 대표가 아내와 함께 사재를 털어 운영 중이다. 스사위넷에 올라오는 소식은 인도네시아 곳곳에 퍼진 필자들이 보내온다. 전문 기자가 아닌 사제·수도자·교리교사·청년·선교사들이다. 하리야디 대표는 “지난 15년간 스사위넷에 기사를 보내 온 사제와 수도자, 평신도는 500명이 넘는다”면서 “교회 구석구석까지 살아 있는 현장을 보여주기 위해 힘쓰고 있다”고 말했다. 글쓰기 훈련을 받지 않은 이들이 보내온 원고 중에는 기사 요건을 갖추지 못한 글도 적지 않다. 하리야디 대표는 이야기의 가치가 있다고 판단하면 추가 취재를 통해 사실 관계를 확인하고 교정·교열을 거쳐 기사를 내보냈다. 그는 “요즘은 AI 도움을 받아 문장을 다듬을 수 있어 편집 시간이 훨씬 줄었다”면서 “작은 소식도 외면하지 않고 전달하려 한다”고 말했다. 스사위넷 홈페이지에 게재되어 있는 기사. 홈페이지 캡처 스사위넷이 다루는 영역은 넓다. 교황과 보편 교회 소식부터 주교 임명과 사제서품, 교구·본당 행사, 수도회와 신학교, 가톨릭 학교와 청년 활동, 선교 현장과 부고까지 인도네시아 교회의 크고 작은 일을 전한다. 신앙 체험과 묵상, 성인과 순례지는 물론 교육·가족·문화·사회 문제도 가톨릭 신앙의 관점에서 조명한다. 홍수와 지진·산사태 같은 자연재해가 발생하면 피해 지역 교구와 공동체의 상황을 알리고 모금 계좌를 안내한다. 뉴스 전달을 넘어 지역 공동체와 후원자를 잇는 통로 역할도 하고 있다. 사람들 관심에서 멀어진 섬 곳곳의 신자들을 연결하고, 중앙 언론이 주목하지 않는 작은 공동체의 목소리를 기록할 수 있었던 것은 어느 교구에도 매이지 않았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상업 광고와 자극적인 콘텐츠가 넘쳐나는 시대에 가톨릭교회의 작은 독립 언론이 15년 동안 꾸준히 자리를 지켜온 것 자체로도 의미가 크다. 작은 겨자씨에서 출발한 스사위넷은 오늘도 인도네시아 교회 곳곳의 이야기를 전하며 지역 교회와 보편 교회를 잇는 나무로 자라고 있다. [인터뷰] 스사위넷 대표 겸 편집장 - 마티아스 하리야디 마티아스 하리야디 스사위넷 대표 겸 편집장. “스사위넷은 사업이 아닙니다. 제게 주어진 삶에 감사하며 하느님과 사회를 위해 봉사하는 일입니다.” 마티아스 하리야디 스사위넷 대표 겸 편집장은 매체를 운영하는 이유를 이렇게 설명했다. 그는 “돈을 벌기 위해서였다면 15년간 스사위넷을 운영할 수 없었을 것”이라며 “가톨릭 신자라면 누구나 자신의 이야기를 세상에 전할 수 있도록 문을 열어두는 것이 우리의 사명”이라고 말했다. 하리야디 대표는 1994년 사제품을 몇 달 앞두고 고심 끝에 수도회를 나왔다. 이후 인도네시아 최대 일간지 ‘콤파스’에 입사해 약 10년간 기자로 활동했다. 피데스 통신과 아시아 전문 매체 아시아뉴스 통신원으로서 인도네시아 교회 소식을 전하기도 했다. 현재도 아시아뉴스와 라디오 베리타스 아시아, 라이카스 뉴스 등에 기고하고 있다. 그러나 특종을 찾아다니고 마감 압박에 시달리는 기자 생활은 몸에 무리가 됐다. 2004년 심근경색으로 죽을 고비를 넘겼다. 하리야디 대표는 “‘하느님께서 제게 살 시간을 더 허락하신다면, 교회와 사회를 위해 무엇이든 하겠다’고 기도했다”면서 “몸을 좀 추스를 수 있게 된 뒤 제가 잘할 수 있는 일을 찾아 하기로 했다”고 회고했다. 옛 예수회 동료들과 함께 스사위넷을 시작하면서 하리야디 대표가 중요하게 여긴 것은 평범한 신자에게 글을 쓸 기회를 주는 일이었다. 그는 “문장이 매끄럽지 않고 사진의 질이 떨어지더라도 그 안에 가치 있는 이야기가 있다면 다듬어서 실었다”며 “겨자씨 같은 필자를 발굴한 것이 스사위넷의 가장 큰 성과”라고 말했다. 하리야디 대표는 “스사위넷이 독립 매체이다 보니 교구 기관지에서 다루기 어려운 문제를 비교적 자유롭게 보도하고 필요하면 교회를 향해 쓴소리도 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하지만 독립성이 사실을 충분히 확인하지 않은 폭로나 조회 수를 노린 선정주의를 뜻하는 것은 아니라고 강조했다. “스사위넷에 온갖 제보가 다 들어옵니다. 성직자의 부정부패나 성비위 문제도 듣게 됩니다. 조회 수를 바랐다면 그런 내용을 다뤘겠지요. 일부 유튜버나 인플루언서들은 돈을 바라며 선정적으로 접근합니다. 저는 그러한 보도가 교회와 사람들에게 미칠 영향을 먼저 고려하고 있습니다. 스사위넷이 15년간 버텨오고 교회 안팎에서 신뢰를 쌓아온 비결이기도 합니다.” 하리야디 대표는 “무언가를 시작하기는 쉽지만 유지하기는 어렵다”며 “비영리 매체이다 보니 오랫동안 함께할 사람을 구하기가 가장 힘들다”고 털어놨다. 현재 가장 큰 고민도 운영비보다는 후임자를 찾는 일이다. “같은 정신으로 이 일을 이어갈 사람이 필요합니다. 아직 그 사람이 누구일지는 모릅니다. 하지만 사람들에게 좋은 일을 한다면 하느님께서 누군가를 보내주시리라 믿습니다.” 인도네시아=박수정 기자 catherine@cpbc.co.kr박수정2026.09.09

시그니스 아시아, 공동선 향한 미디어 연대 나선다필리핀에서 ‘희망의 속삭임’ 주제로 총회 열고 가톨릭 언론인·커뮤니케이터 사명 되새겨 시그니스 아시아 총회 참가자들이 10월 21일 필리핀 마닐라대교구 주교좌 마닐라대성당에서 개막미사를 봉헌한 뒤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아시아 가톨릭 언론인과 커뮤니케이션 종사자들이 갈등 시대 속에서도 온유한 소통으로 세상과 대화하며, 신뢰와 평화의 메시지를 전달하기로 다짐했다. 아시아 가톨릭 언론인, 커뮤니케이션 종사자 모임인 시그니스 아시아는 10월 21~24일 필리핀에서 ‘희망의 속삭임’을 주제로 총회를 열고 가톨릭 언론인과 커뮤니케이터로서의 사명과 책임을 되새겼다. 참가자들은 24일 총회를 마치고 발표한 성명에서 “평화와 화합, 신뢰의 메시지를 전하는 네트워크를 구축하며 대화와 상호 협력을 이어가겠다”고 밝혔다. 또 모든 형태의 매체를 통해 공동선을 추구하며 사회적 약자의 목소리를 담아내는 데 헌신할 것을 약속했다. 이들은 특히 “전쟁과 갈등으로 수많은 생명이 목숨을 잃고, 굶주림과 가난으로 어린이들이 고통받으며, 폭력적 콘텐츠에 많은 젊은이가 중독되고, 가짜 뉴스가 확산하는 아시아의 현실을 마주하고 있다”면서 “사람들이 의미 있고 건설적인 미디어 활동에 참여하도록 이끄는 노력이 절실하다”고 말했다. 이어 “새로운 미디어 환경 속에서 희망의 선교사로서 부름 받았음을 인식하며 프란치스코 교황이 강조한 ‘온유한 소통’을 실천하는 희망의 전달자가 되겠다”고 선언했다. 시그니스 아시아는 교황 홍보 주일 담화에 맞춰 해마다 총회를 열고 아시아 지역 언론인과 커뮤니케이션 종사자의 활동을 격려하며, 서로 소통하고 연대하는 장을 만들어왔다. 올해 총회를 주관한 시그니스 필리핀은 △디지털 시대와 교회의 역할 △부르심과 정체성 △희망을 속삭이는 청년 △분열된 사회와 희망 건설 △행동하는 희망을 주제로 다양한 강연과 토론을 진행했다. 참가자들은 각국의 정치·사회적 현실과 교회 상황을 공유하며 매체 간 협력과 연대를 통한 상호 이행 방안을 모색했다. 이번 총회에는 아시아 지역 11개국에서 75명이 참석했으며, 한국에서는 시그니스 아시아 이사회 재무담당 이로물로(로물로) cpbc 미디어본부장과 KBS 가톨릭 교우회 회장 윤성도(가브리엘) PD가 참석했다. 시그니스(SIGNIS)는 언론과 출판, 미디어 등 커뮤니케이션 분야에 종사하는 가톨릭 신자로 이뤄진 평신도 단체다. 2026년 시그니스 아시아 총회는 8월 아프리카 르완다에서 열리는 시그니스 세계 총회로 대신할 예정이다. 필리핀=박수정 기자catherine@cpbc.co.kr박수정2025.10.29

사옥·직원 대신 협력·연대로 아시아 교회 소식 연결하는 태국의 허브[아시아 가톨릭 미디어를 가다] (4) 태국 ‘라이카스 뉴스’와 ‘주교회의 사회커뮤니케이션부(CSCT)’ 2019년 프란치스코 교황의 태국 사목 방문 당시 현장 취재에 나선 라이카스 뉴스 기자단. 라이카스 뉴스 제공 주교회의 아래 두 조직, CSCT·라이카스 CSCT, 태국 내 교회 소식 태국어로 전달 라이카스, 영어 뉴스 제작·해외 언론 대응 태국 중산층의 주거단지가 다수 들어서 있는 방콕 얀나와(Yan Nawa) 지역. 평범한 주거 지역처럼 보이는 이곳이 태국 교회의 구심점인 태국 주교회의가 자리한 곳이다. 이곳은 태국 교회의 중심인 동시에 ‘아시아 가톨릭 뉴스 통신사’ 태국 라이카스 뉴스(LICAS News)의 사무실이 위치한 곳이다. 다만 보통의 언론사처럼 이 사무실에 ‘라이카스 뉴스의 편집국’이 자리한 것은 아니다. 이곳은 그저 임직원들의 사무 공간일 뿐 라이카스에는 일반 언론사와 달리 ‘유형의 편집국’이 없다. ‘라이카스 뉴스’ 이름으로 ‘소유’하고 있는 것은 뉴스를 제공하는 온라인 홈페이지(www.licas.news)뿐이다. 이처럼 전 세계 그리스도인들에게 아시아 교회 소식을 전하는 ‘아시아 가톨릭 뉴스 통신사’로 자리매김한 라이카스의 ‘리더’ 피터 라차다 몬티안비치엔차이 상무이사(executive director)를 4월 24일 태국 주교회의 사회커뮤니케이션부(CSCT) 사무실에서 만났다. 라이카스 뉴스 라이카스 뉴스 피터 라차다 몬티안비치엔차이 상무이사가 4월 24일 방콕시 태국 주교회의 내 CSCT 스튜디오에서 열린 본지와의 인터뷰에서 기자의 질문에 답변하고 있다. CSCT 제공 교황 방문 소식 세계에 전한 ‘라이카스’ 해외 언론사들과 네트워크 유지·연대 지속 바티칸 뉴스에 기사 제공하는 등 큰 성장 팬데믹 때 협력사 배려로 운영 위기 극복 콘텐츠 공유 확대 위해 저작권 수익 포기 불교 신자 책임자 통해 객관적 시각 반영 과거 김수환 추기경은 가톨릭 미디어를 설립하는 일을 일컬어 ‘무형의 성전을 짓는 일과 같다’고 했다. 교회가 매체를 세워 복음 전파하는 일은 눈에 보이는 유형의 성전을 짓는 것만큼이나 사람들 마음속에 신앙과 사랑을 심어주는 영적이고 보이지 않는 성전을 짓는 중요한 사업으로 정의한 것이다. 실제 전 세계 가톨릭교회는 이처럼 매체를 설립해 복음 전파 사명을 열심히 수행하고 있다. 라이카스는 유형의 번듯한 사옥 없이 보편 교회 글로벌 네트워크를 통해 미디어 사명을 이어가고 있다. 편집국, 스튜디오, 심지어 자체 고용한 기자나 PD, 방송 실무 인력도 없다. 해외 뉴스 역시 각지에 지부를 만드는 ‘외형적 확장’ 대신 필리핀과 인도네시아를 비롯한 아시아 전역에서 활동하는 전문 기자와 사진작가·영상 제작자들이 자발적으로 제작해 보내온 콘텐츠를 복음의 기준으로 선별·편집해 홈페이지에 공개하는 방식으로 운영된다. “라이카스 뉴스는 태국 교회의 일원입니다. 다만 일반 언론과는 그 모습이 좀 다릅니다. 라이카스에 소속된 직원은 저를 포함해 우리나라와 아시아 다른 나라에서 일하는 이들 5명이 전부입니다. 주로 이들과 뉴스 제작에 관해 이야기합니다. 하지만 범위를 넓히면 필리핀과 인도네시아, 나아가 한국에서도 우리 사명에 공감해 가톨릭 콘텐츠를 만드는 사람이라면 모두가 라이카스의 일원이라고 할 수 있죠.” 2019년 프란치스코 교황의 태국 사목 방문 당시 현장 취재에 나선 피터 라차다 몬티안비치엔차이(맨 왼쪽) 상무이사와 라이카스 뉴스 기자단. 라이카스 뉴스 제공 프란치스코 교황 태국 방문 앞두고 설립 라이카스는 2019년 프란치스코 교황의 태국 사목 방문을 앞두고 각 교구와 주교회의 지원을 받아 설립됐다. 그 전까지 태국에서 가톨릭 관련 콘텐츠를 만드는 곳은 주교회의 사회커뮤니케이션부(CSCT)가 유일했다. 다만 CSCT는 태국 내 신자·비신자들을 대상으로 태국어 콘텐츠만을 제작해왔기에 영어로 가톨릭 콘텐츠를 만드는 데 한계가 있었다. 이에 영어에도 능통한 신자·비신자 언론인들을 모아 ‘라이카스 뉴스’를 설립하게 됐다. 라이카스 기자들은 CSCT의 노하우와 지원을 받아 교황이 방문하는 현장 곳곳을 누볐고, 이를 영어 기사로 작성해 교황의 태국 방문 소식을 전 세계에 전했다. 태국 교회라는 한 몸에 각기 다른 얼굴의 두 조직은 여전히 긴밀한 관계로 제 역할을 하고 있다. “외부에서 보면 제가 라이카스 뉴스 책임을 맡고 있기에 매체를 이끄는 사람처럼 보일 수 있지만, 저는 라이카스의 소유주가 아닙니다. 그저 교회로부터 임명된 관리자일 뿐이죠. 라이카스는 교회의 것입니다. 태국 교회 소식을 담당하는 건 CSCT입니다. 라이카스는 태국 소식을 영어로 전하거나 해외 언론에 대응하기도 하고 다른 지역 교회 소식을 태국으로 가져오는 역할을 맡고 있습니다. CSCT의 스튜디오나 인력을 빌려와 자체 콘텐츠를 만들기도 하고요. 사실 CSCT와 라이카스는 하나의 조직이라고 봐도 무방합니다.” 자체 제작·해외 제공 콘텐츠 묶는 플랫폼 라이카스 뉴스가 제작하는 콘텐츠는 CSCT의 인력과 자원으로 만든 자체 콘텐츠와 해외 언론과 협력해 제공받은 각 지역 교회의 뉴스 등으로 구분된다. 라이카스는 각자 언어로 제작된 기사와 콘텐츠를 한데 묶는 일종의 ‘영어 뉴스 플랫폼’이다. 이 온라인 기반 신생 언론사가 10년도 안 되는 짧은 기간에 아시아 전역과 세계를 무대로 하는 국제 미디어로 성장한 원동력도 여기에 있다. 태국 교회의 지원에 힘입어 피터 상무이사가 보편 교회와 세계 여러 곳을 다니며 가톨릭 언론인들과 열심히 교류해온 것도 라이카스 뉴스가 글로벌 네트워크를 형성하는 데 큰 힘이 됐다. 특히 태국 교회가 아시아주교회의연합회(FABC)의 허브 역할을 한다는 점은 교류의 물꼬를 트는 데 결정적이었다. 라이카스는 태국 교회의 ‘대외 창구’로서 타 아시아 지역 교회 언론사와 자연스럽게 대화를 이어갈 수 있었다. 이를 바탕으로 프란치스코 교황의 태국 방문 당시 협력했던 언론사들과 지금까지도 연대를 이어오며 현재 모습을 갖추게 됐다. 인도네시아의 가톨릭 매체인 ‘세사위(Sesawi)’, 인도의 ‘매터스 인디아(Matters India)’가 대표적이다. 필리핀에서 활동하는 가톨릭 언론인 조 토레스씨는 라이카스 뉴스의 필리핀 지역 담당으로 사실상 뉴스 편집장 역할을 맡고 있다. “라이카스 뉴스의 가장 큰 특징은 ‘공동체’를 통째로 조직 안으로 들여왔다는 것입니다. 일반 회사라면 직원을 고용하고, 기자재를 구매하면서 조직을 만들어가겠죠. 하지만 저희는 교회 사명을 중심으로 협력을 통해 전문성을 갖춘 이들과 연대하는 모델을 지향합니다. 이는 분명히 어려운 일이지만, 색다른 방식이기도 합니다.” 2019년 프란치스코 교황의 태국 사목 방문 당시 라이카스 뉴스 기자단이 취재를 하고 있는 모습. 라이카스 뉴스 제공 아시아 넘어 국제 미디어로 발돋움 라이카스 뉴스라는 이름에는 ‘희망(빛)의 이야기를 전하는 평신도’란 뜻이 담겨 있다. ‘LICAS’는 비슷한 발음의 그리스어 ‘라이코스(Laikos)’가 평신도를 의미하는 데에서 착안한 것으로, ‘아시아 가톨릭을 위한 빛(Light for Catholic in Asia)’을 줄인 말이다. 교회 일원인 동시에 언론이라는 정체성을 모두 담았다. “라이카스라는 이름에는 우리의 ‘사명’을 잊지 않겠다는 각오가 담겨 있습니다. 이는 우리의 첫 보도였던 교황님의 태국 방문 취재에서도 드러납니다. 무엇보다 교황님 방문을 둘러싼 사람들의 이야기를 전하는 데 집중했죠. 자카르타에서 교황님을 기다리고 있던 합창단 소녀들의 이야기를 전하는 식으로 말입니다. 지금도 라이카스 뉴스는 평신도의 시선에서 스스로 목소리를 낼 수 없는 이들의 이야기를 전하는 데 힘쓰고 있습니다.” 아시아의 대표 가톨릭 통신사로 자리 잡은 라이카스 뉴스는 2023년부터 보편 교회 소식이 하나로 집약되는 ‘바티칸 뉴스’에도 기사와 사진을 제공하고 있다. 동남아시아 교회는 물론, 인도·파키스탄 등 남아시아와 한국·일본·홍콩 등 아시아 교회 전체 소식이 라이카스 뉴스라는 허브를 통해 보편 교회로 전해지고 있는 셈이다. 피터 상무이사는 “2019년에 라이카스 뉴스가 만들어지고 몇 년 뒤 바티칸에도 뉴스를 제공하는 매체가 되리라고 누가 상상할 수 있었겠느냐”며 “오직 성령께서 도와주셨기에 가능했던 일이라 여긴다”고 말했다. 탄탄대로를 걸어온 것 같지만, 위기도 있었다. 창립 후 2년여 흘렀을 때 코로나19 팬데믹이 닥친 것이다. 위기와 함께 후원을 통해 지원받던 자금도 금세 바닥을 드러냈다. 해외 협력사에 당장 지급해야 할 원고료조차 줄 수 없을 정도였다. “절망 그 자체였습니다. 교회에 도움을 요청했지만, 마찬가지로 어려웠기에 ‘성령을 믿으라’는 말씀뿐이었죠. 실망한 마음에 필리핀에 전화를 걸었더니, 대금을 지급하지 않아도 괜찮으니 계속 서버를 운영해달라더군요. 그 어려운 상황에서도 그들은 한 성당의 지하에서 기사를 쓰고 있었죠. 협력사들이 라이카스 뉴스에 바라는 것은 ‘얼마를 줄 수 있느냐’가 아니었습니다. 오로지 ‘세상에 어떻게 우리 콘텐츠를 전할 것이냐’였던 거죠.” 2019년 프란치스코 교황의 태국 사목 방문 당시 현장에서 기념촬영을 하고 있는 라이카스 뉴스 임직원들. 오른쪽 세번째가 피터 라차다 몬티안비치엔차이 상무이사다. 라이카스 뉴스 제공 상업 이익 내려놓고 정체성 확립에 집중 라이카스 뉴스의 가장 큰 특징은 상업적 이익을 전혀 추구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창립 초기부터 저작권 수익을 전면 포기하고 ‘모든 콘텐츠를 공유하겠다’고 선언했다. 실제 라이카스는 저널리스트들이 제작한 사진과 기사를 무료로 제공하는 것을 원칙으로 하고 있다. 홈페이지에도 흔한 광고 하나 찾아볼 수 없다. 라이카스 구성원들 역시 별도 임금을 받지 않고 활동한다. 대부분 재원은 후원금과 소정의 교구 지원을 통해 마련한다. 기사나 사진을 제공하는 이들에게 소정의 대가를 지불하기는 하지만, 일반 단신·행사 기사에는 원고료를 지급하지 않는다. 비용을 지급하는 것은 기획 기사를 제공했을 때뿐이다. 단순히 긴 기사가 아니라 복음의 시각에서 사건과 소식의 전반을 깊이 있게 다룬 기획 기사의 경우, 기사의 깊이나 뉴스 가치에 따라 500~1000달러가량의 원고료를 지급하는 식이다. 이런 콘텐츠들은 홈페이지 내 ‘스포트라이트(Spotlight)’ 세션을 통해 별도로 소개되고 있다. ‘교회 언론’으로서 라이카스의 정체성을 드러내고, 이를 이어가기 위한 일종의 투자 차원이다. “단순히 ‘수녀님들이 나무를 심는다’는 식의 뉴스는 다루지 않습니다. 대신 기후변화로 농작물이 죽어가는 절망적인 현실, 그 속에서 수도자가 농민들과 연대해 희망을 일궈내는 과정에 집중해 콘텐츠를 만듭니다. 그 안에 존재하는 한계점도 가감 없이 보여주죠. 모든 것이 다 진실한 희망의 목소리를 전하는 과정입니다.” 신자 여부에 얽매이지 않고 연대 확대 비신자의 관점이 제작에 반영된다는 점도 특징이다. 이는 대다수 아시아 국가에서 가톨릭교회가 소수인 현실과 함께 전통 불교국가인 태국에서 서로의 관점에서 이해하고 공감할 기사와 콘텐츠 제작에 주력하고자 함이다. “라이카스가 처음 출발했을 당시 저희는 교황님 말씀, 특히 여성의 권리와 아동 보호에 관해 당부하신 말씀을 중점 보도했습니다. 이를 본 비신자께서 ‘기도 방식만 다를 뿐 교황 말씀은 저희도 귀담아 들어야겠네요’라고 했을 때 큰 희망을 느꼈습니다. 희망을 전하는 이야기라면 누구에게나 공감을 일으킬 수 있음을 깨달았죠. 지금도 저희 마케팅 최고 책임자(CMO)는 불교 신자입니다. 그가 콘텐츠 내용을 이해하지 못하거나 왜 다루는지 설득되지 않으면 글을 다시 쓰죠. 그는 마케팅뿐만 아니라 콘텐츠 제작에서도 객관적 시각을 제공합니다.” 유형의 공간과 자산보다 플랫폼과 함께하는 정신으로 무장한 라이카스 뉴스는 ‘연대가 곧 성장’임을 온몸으로 증명하고 있다. 라이카스 구성원들은 저출산으로 인한 인구통계학적 변화와 인공지능(AI) 시대 앞에서도 ‘복음 전파의 사명이 곧 가톨릭 언론의 미래’임을 증명하겠다는 각오로 오늘도 현장을 누비고 있다. “우리는 지금도 지역의 다양한 미디어 전문가들과 연대하는 것을 목표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분들을 통해 세상에서 스스로 목소리 내기 어려운 이들과 교감하고, 그들의 이야기를 세상에 전합니다. 이 일이 지속 가능하지 않을지도 모르지만 복음을 전한다는 우리 사명은 지속 가능하죠. 교회 언론이 사명을 잊는다면 모두의 정체성은 사라지는 겁니다.” 태국 주교회의 사회커뮤니케이션부(CSCT) 태국 방콕시내에 위치한 태국 주교회의 사회커뮤니케이션부 사무실과 스튜디오. 이곳은 라이카스 뉴스의 공식적인 사무실이 위치한 곳이기도 하다. 태국 교회 공식 가톨릭 미디어 1967년 창립·태국 교회 소식 자국 전달 주간지 등 출판물 발간·SNS 통해 소통 라이카스 뉴스와 ‘두 지붕 한 가족’ CSCT 취재 소식, 라이카스 통해 세계로 라이카스와 사무실·인력 함께 쓰는 관계 라이카스 뉴스가 전 세계 신자들에게 아시아 교회 소식을 전하는 데 특화돼 있다면, 태국 교회 소식을 자체적으로 전하는 역할은 태국 교회 공식 가톨릭 미디어인 태국 주교회의 사회커뮤니케이션부(CSCT)가 수행하고 있다. 1967년 창립된 CSCT는 사실상 태국 교회 내에선 ‘유일한’ 공식 가톨릭 미디어라 할 수 있다. CSCT는 태국어로 주간지와 월간 매거진, 가톨릭 서적 등을 발간해 교회 소식을 자국 신자들에게 전하고 있다. 또 태국어 팟캐스트·유튜브 방송 등 SNS 채널을 운영하며 다양한 매체를 통해 ‘기쁜 소식’을 전한다. 각 교구와 신자를 대상으로 한 미디어 교육도 주요 역할 중 하나다. 특히 CSCT가 운영하는 가톨릭 서점은 ‘소수 종교인’인 태국 그리스도인들에게 ‘만남의 광장’과 같다. 생명·AI 등 교회가 관심을 지닌 주요 사안에 대해 태국 사회에 가톨릭 사회 교리 등 교회 가르침을 전하는 것 역시 CSCT의 임무다. 올해로 19년째 CSCT에서 미디어 사목을 담당하고 있는 아누차 차이야데즈 신부는 “CSCT는 태국 교회의 미디어로서 온·오프라인 플랫폼을 통해 신자들이 일주일 내내 교회 소식을 접하도록 노력하고 있다”며 “비그리스도인이 많은 태국 사람들에게서 교회 사명과 공감을 이끌어내는 것 역시 우리 역할”이라고 소개했다. 태국 주교회의 사회커뮤니케이션부(CSCT) 담당 아누차 차이야데즈 신부가 4월 24일 방콕시 태국 주교회의 내 CSCT 스튜디오에서 열린 본지와의 인터뷰에서 질문에 답하고 있다. CSCT 제공 CSCT가 자국민을 위한 가톨릭 미디어라면, 라이카스 뉴스는 이를 기반으로 전 세계와 소통하는 창구로 볼 수 있다. 뉴스 성격이나 보도의 대상, 운영 방식은 다르지만, 태국 내 소식이 라이카스 뉴스를 통해 전 세계에 전해지기도 하고, CSCT 또한 보편 교회 소식을 라이카스 뉴스에서 바로 접하며 소통한다. 아누차 신부는 ‘두 지붕 한 가족’ 같은 두 매체의 관계에 대해 “라이카스와 CSCT는 특정 계약에 묶인 사이가 아니라 서로 마음과 마음이 연결된 관계”라며 “라이카스가 우리 사무실이나 인력을 빌려 쓰는 것 역시 비공식적으로 별도의 절차 없이 그때그때 판단에 따라 이뤄지기도 한다”고 말했다. 불교 신자가 대다수인 태국에서 대중에게 가톨릭교회를 소개하는 일은 CSCT의 가장 큰 임무이기도 하다. 아누차 신부는 “태국은 불교 문화권인 만큼 불교에서 비롯된 용어가 공식 언어로 많이 쓰인다”며 “예를 들어 일반적으로 ‘신부’를 칭할 때 ‘쿤퍼(father)’라 부르지만, 공식 석상에선 일종의 높은 스님에서 비롯된 용어인 ‘밧루앙(baat-luang)’으로 표기해야 하는 식인데 모두 불교 문화권의 비신자들에게 교회를 잘 설명하기 위한 노력의 일환”이라고 설명했다. CSCT가 발행하는 주간지 ‘우돔산 위클리(UDOMSARN WEEKLY)’ 지면. CSCT는 이러한 인쇄 매체를 통해 신자들에게 교회의 다양한 소식을 전하고 있다. CSCT의 최근 관심사는 젊은이 사목이다. 불교 문화가 주를 이루는 태국 사회에서 교회가 본당 공동체를 넘어 사목하는 것은 사실상 어려운 환경이다. 하지만 미디어를 통한 사목은 경계가 없기에 교회에 새로운 선교의 기회를 제공한다. CSCT는 다양한 매체 활용에 적극적인 젊은이들에게 복음의 매력을 전하고자 노력하고 있다. 아누차 신부는 “미디어 사목의 가장 큰 특징은 더 넓은 범위에서 복음을 전할 수 있고, 그 영향이 어디까지 미칠지 알 수 없다는 것”이라며 “우리는 하느님께서 채워주시는 것이 우리가 준비한 것보다 크고, 상상하지 못한 방식으로 이뤄짐을 알기에 당장 결과는 보이지 않을지라도 하느님이 주신 기회를 놓치지 않도록 계속 노력해나갈 것”이라고 강조했다. 태국 방콕=장현민 기자 memo@cpbc.co.kr장현민2026.06.24

측은지심으로 차린 ‘밥상의 문학’ 고통받는 이들을 향한 위로가 되다[빛과 소금, 이땅의 평신도] 문학을 통한 사도적 삶, 박완서 정혜 엘리사벳 - (5·끝) 너희가 그들에게 먹을 것을 주어라 박완서·김홍신 작가가 1993년 12월 27일 본지가 주최한 제1회 신춘평화문학상 응모작을 심사하며 대화하고 있다. 가톨릭평화신문 DB 작품 속 음식 통해 삶의 고단함 위로 권위주의 정권에 맞서 목소리 내고 유니세프·성 라자로 마을 등 후원 “부의금 받지 말라”던 평소 유언 따라 문학인장 대신 소박하게 가족장례식 ‘한국인은 밥심이다.’ 이 말을 문학 작품 안에서 가장 잘 그려낸 작가를 꼽으라면 단연 박완서다. 그의 작품에는 서민 가정의 밥상에 오르는 나물 반찬, 된장국 같은 소박한 음식부터 화려하면서도 기품 있는 양반가의 음식까지 작가 특유의 감각적인 언어로 묘사되어 있다. 제육을 몇 점 썰어 넣어 뚝배기에 끓인 호박김치찌개(대하소설 「미망」), 배불뚝이가 뒷짐을 진 것 같은 모습이 유머러스한 개성식 만두(등단 단편 「나목」), 비 오는 날 먹었던 메밀칼싹두기와 어린 시절 할머니가 해주셨던 수수팥떡(자전 수필 「호미」) 등 음식들은 각 작품 속에서 주인공과 시대적 배경을 긴밀히 묘사하는 장치로 쓰였을 뿐 아니라, 밥상을 대하는 것 자체가 삶의 고단함을 녹여주는 위로의 행위로 표현된다. 「대범한 밥상」이라든가 「후남아, 밥 먹어라」처럼 제목에 밥이 등장하는 소설 작품도 있다. 박완서에게 밥은 어릴 적 떠나온 고향을 떠올리는 그리움의 이름이자 푸근한 어머니의 품이다. 처마를 맞댄 이웃 간에 나누는 정(情)이며 따뜻한 위로다. 하나뿐인 아들을 잃은 고통에 몸부림칠 때 내 안에 오신 주님을 느낀 것이 바로 ‘밥’이었던 것도 우연이 아니다. 어머니의 손맛을 그리워하며 「엄마의 부엌 : 정확하고 완전한 사랑의 기억」을 펴낸 맏딸 호원숙(비아)은 ‘엄마의 치맛자락에 늘 희미하게 배어 있던 음식 냄새는 여지껏 나를 지탱해 주는 세상에서 가장 편안하고 안온한 사랑의 힘이 되었다’고 썼다. 생전 어느 강연회에서 가장 좋아하는 것이 무엇이냐는 청중의 질문에 박완서는 ‘밥’이라 대답했다. 또 그는 성경 가운데 음식에 관한 예수님의 일화를 좋아한다고 밝히기도 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히기 전에 행한 마지막 의식도 제자들과 식사를 나누는 것이었는데, 이 최후의 만찬이 가장 슬프고 숙연한 식사라면 가장 장엄한 대만찬은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오천 명을 배불리 먹인 기적의 만찬이라는 것이다. 기적에 앞서 예수님이 행하신 일은 인간이 느끼는 고통 중에 가장 큰 배고픈 서러움을 마음속 깊이 측은히 여기는 마음이었을 것이다. 이는 우리 사회가 전통적으로 인간이 타인에 대해 가져야 하는 마땅한 태도로 가르쳐 온 유교의 측은지심(惻隱之心)과 일맥상통하는 대목이다. 그는 또 만약 예수님을 실제로 만난다면 으리으리한 성찬이 아닌 소박한 집밥 한 상을 차려드리고 싶다고 말한다. 그분은 화려한 식탁이 아니라 정성이 담긴 음식이면 좋아하실 것이기 때문이다. 1993년 유니세프 친선대사 활동의 일환으로 방문한 에티오피아에서 아이들과 함께한 박완서 작가(뒷줄 서 있는 이). 박완서디지털문학관 제공 “가장 작은 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해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 준 것이다.”(마태 25,40) 생전의 박완서는 문인들 사이에서도 소박한 삶을 살았던 것으로 유명하다. 한국 문단의 거목이면서도 문단 행사에는 잘 나서지 않았다. 학연을 따지지도 않았다. 그런데도 따르는 후배 문인이 많았다. 소질이 있어 보이는 후배라면 적극적으로 추천하였으며 스스럼없이 후배들과 어울리기를 좋아했다. 그러면서도 세상 일에 목소리를 내는 데에는 주저함이 없었다. 1980년대 권위주의 정권에 맞섰던 자유실천문인협의회(현 한국작가회의)가 어려울 때마다 수백만 원씩 사비를 털어 재정을 도왔다. 출판사 ‘창비’가 정부에 의해 강제 폐간되었을 때에는 지식인 2853명이 서명한 문서를 소설가 황순원·이호철 등과 함께 당시 문화공보부에 내기도 했다. 생전에 “내가 죽으면 찾아올 후배 문인 중에 가난한 이들이 많으니 부의금을 받지 말라”고 당부해 2011년 1월 그의 빈소가 차려진 삼성서울병원 장례식장에는 ‘부의금은 정중히 사양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라는 안내문이 세워졌다. 애초 문학인장으로 치러지려던 장례식은 주위에 폐를 끼치지 말고 소박하게 치러달라는 고인의 바람대로 생전에 신앙생활을 하던 경기도 구리시 토평동성당에서 가족장으로 거행되었다. “천주교는 유명한 사람도 보통의 신자들과 똑같이 대하고 종교를 강요하지 않아 좋았다”는 그의 말처럼 평생 자신을 내세우지 않고 남을 감싸안았던 그의 모습 그대로 조용하면서도 남을 돕는 따뜻한 신앙인이었다. 1993년부터 유니세프 친선 대사로 활동했고, 한센인 자활 시설인 ‘성 라자로 마을’을 20년 넘게 후원하였으며 2006년 호암상 예술상 수상으로 받은 상금 중 일부를 이곳에 기부하기도 하였다. 또 ‘성 라자로 마을’로 인연을 맺은 고(故) 이경재 신부를 도와 은퇴 사제들을 위한 거주 시설인 ‘사제마을’의 초대 후원회장을 지내기도 하였다. 평생을 청빈하게 살며 신자들을 위해 봉사한 은퇴 사제들이 말년에는 편안한 시설에서 돈 걱정 없이 여유롭게 지내며 마지막까지 사목 봉사를 하는 데 전념할 수 있으면 좋겠다는 바람이었다. 2005년 4월 8일 바티칸에서 거행된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의 장례미사에 참석한 후 로마에서. 박완서 작가(가운데) 왼쪽이 한승수 전 국무총리, 오른쪽이 고 이해찬 전 국무총리다. 오른쪽 두 번째에 봉두완 전 앵커도 보인다. 박완서디지털문학관 제공 죄의 용서와 육신의 부활을 믿으며 영원한 삶을 믿나이다 지난 2005년 요한 바오로 2세 교황 장례미사에 대한민국 민관합동조문단의 일원으로 로마 바티칸에 다녀온 박완서는 소회를 이렇게 밝힌 바 있다. “교황을 애도하는 몇백만 조문객이 만들어내는 분위기는 비통하기만 한 것도 경건하기만 한 것도 아니었다. 성가는 영혼을 속세에서 해방시켜 들어 올리듯 황홀했고, 교황의 업적을 낭독하는 동안 광장에서 터져 나온 십여 차례의 박수와 환호성, (⋯) 그건 애도라기보다는 환호에 가까웠다. 슬픔과 환희가 이렇게도 잘 어울릴 수 있다는 것은 상상도 못해 본 참으로 놀랍고 아름다운 일이었다.” 매일 아침 저녁 명상하듯 기도 시간을 갖는다던 박완서는 2011년 1월 22일 평소처럼 명상을 하듯이 편안한 모습으로 주님의 품으로 돌아갔다. 장례미사에는 여러 문인 후배와 성직자, 수도자, 동료 신자와 유족들이 함께해 그의 마지막 길을 배웅했다. 그 가운데 생전에 깊은 교분을 나눈 이해인 수녀도 있었다. ‘수녀 시인’으로 유명한 이해인(클라우디아) 수녀는 박완서와 자매처럼 지내며 정을 나누었고 1988년 그가 가족을 연이어 잃는 고통을 겪을 때 수녀원으로 초대해 슬픔을 위로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선종 직후부터 장례일까지 내내 빈소를 지켰으며 ‘꽃이 된 기도’라는 송별시로 추모했다. ‘갑자기 오느라 작별인사 못했어요 / 너무 슬퍼하면 제가 미안하죠 / 거기도 좋지만 여기도 좋아요 / 항상 기도 안에 만납시다, 우리’(이해인 수녀의 ‘꽃이 된 기도’ 중) 2011년 1월 22일 선종한 박완서 작가. 한국가톨릭문인회 담당 조광호 신부가 장례미사에서 고인의 관에 성수를 뿌리며 고별예식을 주례하고 있다. 가톨릭평화신문 DB 생전에 ‘내가 죽었을 때 받고 싶은 대접은 천주교식의 장례미사’라고 했던 박완서 정혜 엘리사벳은 이제 다시 만날 수 없다는 절망보다, 큰 평화 안에서 다시 만날 수 있다는 희망을 우리에게 남겨주었다. 40살이라는, 당시로써는 다소 늦은 나이에 등단했지만 ‘머릿속에 늘 다음 작품을 생각하고 있다’며 ‘머릿속에 아무 생각이 없다면 주머니에 동전 한 푼 없는 것보다 더 비참할 것’이라던 박완서. 죽는 날까지 작가로서 ‘영원한 현역’으로 남고 싶어 했던 그는 이제 주님의 품에서 어떤 글을 쓰고 있을까. 정혜린 클라라(프리랜서 작가) 한국천주교 평신도사도직단체협의회·가톨릭평화신문 공동기획cpbc2026.02.11
![[일문일답] 쿠바카드 추기경 “그리스도교 '새 하늘·땅'과 유교 '대동' 닮아”](https://img.cpbc.co.kr/newsimg/upload/2026/08/12/IZY1786521633216.jpg)
[일문일답] 쿠바카드 추기경 “그리스도교 '새 하늘·땅'과 유교 '대동' 닮아”교황청 종교간대화부 장관 조지 쿠바카드 추기경 교황청 종교간대화부 장관 조지 쿠바카드 추기경이 6일 서울 여의도 모처에서 본지와 인터뷰하고 있다. 교황청 종교간대화부 장관 조지 쿠바카드 추기경은 “종교의 가장 큰 과제이자 초대는 바로 이기심의 극복이다. 인류는 시작부터 이기심을 극복하고 신과 이웃을 사랑하며 타인과 조화를 이루는 법을 배워왔다”며 “한국 청년들이 경쟁과 소외감에 피로감을 느끼는 이유는 사익 추구만을 해왔기 때문이다. 청년들은 경쟁을 넘어 협동과 연대, 모두와 함께 공유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고 강조했다. 쿠바카드 추기경은 지난 4~5일 서울 대흥동 서강대학교에서 열린 제1회 유교·그리스도교 국제 콜로키움 참석차 한국을 찾았다. 그는 6일 서울 여의도 모처에서 가진 본지와의 인터뷰에서 “한국 청년들이 피로감을 느끼는 데 공감한다”며 “이에 한국 사회와 교회는 전체를 위해 사고하는 평화의 메시지를 청년들에게 전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러면서도 “이미 한국은 위기 속에서도 하나 됨을 자각하고 실천하는 협동체의 저력을 이미 가지고 있다”며 “한국은 충분히 희망을 품고 미래로 향해 나아갈 수 있다”고 격려했다. 쿠바카드 추기경은 이번 콜로키움의 의의에 대해 “유교와 그리스도교는 서로 다른 언어로 표현하고 있지만, 현대 사회에 미치는 영향과 가르침의 핵심에는 공통점이 있다”며 “두 종교 모두 정의와 평화, 연민, 형제애의 세계를 지향하고 있다. 기초적인 지향점을 공유하면서도 서로 다른 점을 통해 상대방에게 배우기도 한다는 점에서 이번 만남은 매우 중요하다”고 설명했다. 다음은 쿠바카드 추기경과의 일문일답 ▷ 추기경께서 17년 전 주한 교황대사관 서기관으로 3년간 봉직하셨습니다. 오랜만에 한국을 찾으셨는데, 한국과 한국 가톨릭교회를 어떻게 기억하고 계시며, 이번 행사를 위해 한국에 다시 오신 소감은 어떠신가요. ▶ “한국은 제 마음속에 매우 특별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교황청 외교관으로서 두 번째로 발령받은 곳이었습니다. 초창기 부임지가 주는 신선함이 있습니다. 그 이후로도 세계 곳곳으로 임지를 옮겨 다녔지만, 오랜 세월이 지난 지금도 그 3년의 기억은 놀랍도록 생생하게 남아 있습니다. 그 시간이 의미 있었던 것은 외교 업무를 넘어 이전에 알던 것과는 너무나 다르고 풍요로운 문화, 사람, 전통을 만나는 특권을 누렸기 때문입니다. 저는 한국 가톨릭 신자들의 깊은 신앙을 직접 목도할 수 있는 특권을 얻었습니다. 한국인과 살며 일상을 함께 나누고, 신앙과 문화, 역사가 얼마나 긴밀하게 얽혀 있는지 본 것은 참으로 아름답고 저를 성장시키는 경험이었습니다. 17년 만에 다시 한국에 돌아오니 진심으로 기쁩니다. 한국 교회가 성장한 모습을 보니 흐뭇합니다. 제 영적, 개인적 여정에 깊은 발자취를 남겨준 이 나라와 사람들에게 여전히 감사하고 있습니다.” ▷ 아직 독자와 신자 분들께서 종교간대화부가 낯설 수 있습니다. 종교간대화평의회에서 부서 개편 이후 어떤 업무를 다루고 계시며, 교황청에서는 어떠한 역할을 기대하고 계시는지요. ▶ “부서로의 변경은 단순한 명칭 변경 이상의 의미를 지닙니다. 이는 프란치스코 교황님께서 도입하신 교황청의 폭넓은 개혁을 반영한 것으로, ‘부(Dicastery)’로 명명해 다양한 성성, 평의회, 법원 등을 동등한 지위로 격상시킨 것입니다. 우리 부서의 본질적인 사명은 변함없습니다. 가톨릭 신자들과 타 종교 신자들 간의 존중하고 건설적인 관계를 증진하는 것입니다(단, 유다교와의 대화는 ‘그리스도인일치촉진부’에 위임되어 있습니다). 종교 간 대화는 교회 삶의 변두리에 있는 외교적 활동이 아니라, 증거, 만남, 그리고 공동선을 위한 협력을 통해 수행되는 교회 복음화 사명의 필수적인 차원으로 이해됩니다. 교황령 「복음을 선포하여라(Praedicate Evangelium)」 제147~152조에 따라, 우리 부서는 다음과 같은 주요 책임을 지고 있습니다. 실질적으로 우리의 업무는 보편적이면서도 지역적입니다. 우리는 세계 주요 종교 전통의 대표자들과 제도적 대화를 유지하고, 주요 종교 축일에 메시지를 발표하며, 양자 위원회, 학술 세미나, 국제회의를 조직하고, 종교 간 참여를 위한 지침, 양성, 자료를 제공하여 주교회의를 동반합니다. 또한 종교간대화부는 형제애, 평화 구축, 종교의 자유, 피조물 보호, 인간 존엄성 수호를 증진하는 이니셔티브를 지원합니다.” 교황청 종교간대화부 장관 조지 쿠바카드 추기경이 4일 서울 대흥동 서강대학교 정하상관에서 열린 제1회 유교·그리스도교 콜로키움에서 기조연설하고 있다. ▷ 이번 콜로키움을 기획하게 된 배경에 대해 묻고 싶습니다. 교황청 관계자와 성균관 학자가 공식적으로 마주 앉는 첫 자리인 만큼 기대가 컸는데요. 이 행사가 추기경님의 기조연설의 주제인 ‘도덕적 지평’과 어떻게 연결이 될까요? ▶ “약 1년 전 종교간대화부 차관 인두닐 코디투와꾸 몬시뇰이 한국을 방문했을 때 시작됐습니다. 종교간대화부는 그에게 한국에서 첫 번째 유교-그리스도교 대화를 개최할 가능성을 모색해 달라고 요청했습니다. 그는 서강대학교, 한국 주교회의, 성균관, 주한 교황대사관에 접근했고, 모두가 함께 행사를 조직하는 데 동의했습니다. 콜로키움은 이 두 지혜 전통의 근본적인 가르침과 비전에 초점을 맞추어, 그것이 오늘날의 맥락에서 가지는 적실성을 검토하고자 했습니다. 즉, ‘새 하늘과 새 땅’이라는 그리스도교의 희망과 ‘대동(大同)’이라는 유교의 이상입니다. 뿌리내린 전통은 다르지만, 둘 다 정의, 평화, 연민, 형제애의 세계를 지향하고 있습니다.” ▷ 추기경님께서는 ‘새 하늘과 새 땅’과 ‘대동’을 모두 그 시대의 간절한 열망에서 탄생한 비전이라고 표현하셨습니다. 오늘날을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이 비전들이 삶 속에서 공동선, 평화, 조화를 이루기 위한 어떻게 이정표로써 작용할 수 있을까요? ▶ “질문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 질문은 우리가 이 콜로키움을 소집한 핵심 이유에 맞닿아 있습니다. 첫째, 두 비전 모두 안락함이 아닌 위기 속에서 탄생했습니다. ‘새 하늘과 새 땅’은 제국의 치하에서 고통받는 공동체들로부터, ‘대동’은 중국 주나라 질서의 붕괴와 전국시대의 혼란 속에서 나왔습니다. 이것은 오늘날에도 중요합니다. 이 비전들은 현실 도피로써 나타난 환상이 아니라 무너짐 속에서 단련된 응답입니다. 동시에 갈등과 불평등, 파편화된 우리 시대와 마찬가지로 절망이 존재하고 상황이 가장 어려울 때 희망을 유지하기 위한 것입니다. 둘째, 두 비전 모두 각자의 방식대로 변화를 위해서는 구조적 변화만이 아니라 내면의 회심이 필요하다고 주장합니다. 공자에게 도덕적 수양과 덕(德)으로 대표되는 리더십은 대동을 가능하게 하며, 그리스도인들에게 윤리적 삶은 그리스도를 통한 하느님과의 친교에서 흘러나옵니다. 두 전통 모두에서 사회의 재생(renewal)은 인간 마음의 재생과 분리될 수 없으며, 이는 법이나 기술만으로 우리를 구원할 수 있다는 가정에 대한 필요한 교정 역할을 합니다. 마지막으로, 이 비전들은 이 콜로키움 자체가 구현하고 있듯이 차이를 넘어선 동반자 관계로 우리를 부릅니다. 어느 한 전통이 다른 전통에 흡수되지는 않지만, 대화 속에서 서로의 맹점을 비춰주고 우리가 공유하는 도덕적 상상력을 확장하게 해줍니다. 이로써 우리가 가난한 이들을 어떻게 대우하고, 이민자를 환대하며, 피조물을 돌보고, 정의로운 제도를 구축할지 이끌어 줍니다. 요컨대, 이 비전들이 나침반 역할을 하는 이유는 두 종교 모두 위기 속에서 시험받았고, 유토피아를 규정하기보다는 우리를 도덕적으로 방향 지어줍니다. 재생의 뿌리를 인간의 마음에 두고, 대화를 통해 우리가 공유하는 하나의 인류 가족에 대한 책임을 심화하기 때문입니다.” ▷ 유교에서는 대동으로 나아가기 위해 인간의 이기심을 제어하고 수양하는 ‘소강(小康)’의 과정이 필요하다고 봅니다. 종교가 단순히 개인에게 위안을 주는 것을 넘어, 사회에서 어떤 방식으로 목소리를 내야 한다고 보십니까? ▶ “종교의 가장 큰 과제이자 초대하고자 하는 바는 ‘이기심의 극복’입니다. 인류의 시작부터 우리는 이기심을 극복하고 신과 이웃을 사랑하며 타인과 조화를 이루는 법을 배워왔습니다. 이기심은 자연스러운 본능이기에 이를 뛰어넘는 것은 어느 전통에서나 어려운 일입니다. 하지만 영적인 경계를 넘어 이기심을 내려놓는 것이 핵심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스스로 마음을 비우고 타인을 위해 목숨을 바치신 희생이야말로 이기심을 온전히 내려놓은 모범입니다. 오늘날 전쟁을 비롯한 사회의 많은 문제들은 결국 이기심에서 비롯됩니다. 이번 콜로키움은 그리스도교와 유교의 정신을 통합하여 이기심을 극복하자는 강력하고 중요한 메시지를 전 세계에 남길 것입니다.” 2일 서울 명동 서울대교구청에서 교구장 정순택 대주교와 환담하고 있는 조지 쿠바카드 추기경. ▷ 서양을 대표하는 그리스도교와 동아시아 문화를 대표하는 유교의 만남은 대단히 흥미롭습니다. 이번 콜로키움이 일회성 행사로 끝나지 않도록 교황청과 성균관은 어떤 지속적인 노력을 계획하고 계신지요? 아울러 종교간대화부가 다른 종교들과 어떻게 공감대를 모색하고 있는지도 궁금합니다. ▶ “우리가 극복해야 할 오해 중 하나는 그리스도교는 ‘서양 종교’인 반면 유교는 동양에 속한다는 생각입니다. 그리스도교의 기원은 의심할 여지 없이 아시아입니다. 성 요한 바오로 2세 교황님께서 「아시아의 교회(Ecclesia in Asia)」에서 상기시켜 주셨듯이, ‘예수님께서는 아시아의 땅인 성지에서 태어나시고 살다 가셨습니다’(「아시아의 교회」 5항). 교회 그 자체는 어느 특정 문화나 문명과 동일시되지 않습니다. 교회는 가톨릭, 즉 보편적입니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가 가르치듯, 교회는 ‘어떤 인종이나 국가, 특정한 생활 방식, 혹은 오래된 관습에 배타적이고 불가분하게 얽매여 있지 않습니다’(「사목 헌장」 58항). 이러한 이유로 그리스도교와 유교의 만남은 지혜, 덕, 조화, 그리고 인류의 번영을 추구하는 두 풍요로운 영적, 윤리적 전통 간의 대화로 이해되어야 합니다. 콜로키움이 결코 고립된 일회성 행사로 간주되어서는 안 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진정한 대화는 단 한 번의 학술회의로 측정되는 것이 아니라, 오랜 시간에 걸쳐 구축된 관계로 나타납니다. 프란치스코 교황님께서는 대화란 인내, 신뢰, 우정을 필요로 하는 ‘만남의 문화’임을 종종 상기시켜 주셨습니다. 따라서 교황청은 성균관과의 이러한 협력이 정기적인 학술 교류, 공동 프로젝트, 상호 방문, 출판 등을 통해 계속되기를 희망합니다. 이러한 지속적인 협력은 상호 이해를 성숙하게 하고, 인공지능과 생명윤리에서부터 교육, 평화 증진에 이르기까지 오늘날 우리 사회가 직면한 윤리적 질문들을 함께 다루는 데 필요한 신뢰를 창출합니다. 최종 성명서는 콜로키움 참가자들이 각자의 공동체 내에서 그리스도인과 유교인 간의 우정과 대화를 심화해야 한다고 명확히 밝히고 있습니다. 두 번째로, 종교간대화부는 지역 교회 및 인도네시아와 홍콩의 유교 학계와 협력하여 각각 인도네시아(2028년)와 홍콩에서 제2회 및 제3회 콜로키움을 조직할 것입니다.” ▷ 추기경님께서는 2일 명동대성당에서 “청년들에게 타 종교에 대한 환대와 만남을 두려워하지 말라”고 당부하셨습니다. 이번 학술대회의 의제인 유교의 ‘대동’과 그리스도교의 ‘새 하늘과 새 땅’이라는 이상이, 경쟁과 소외에 지친 한국의 청년들에게 2027 서울 세계청년대회(WYD)를 통해 어떻게 닿을 수 있다고 보십니까? ▶ “진정한 종교에는 ‘혐오자’가 없습니다. 무엇보다 자라나는 어린 세대에게 평화를 교육하는 것이 시급합니다. 경쟁에 내몰린 청년들이 피로감을 느끼는 이유도 결국 개인의 이익만을 추구하는 이기심 때문입니다. 이제는 경쟁을 넘어 협동과 연대, 모두와 함께 공유하는 법을 배워야 하며, 전체를 위해 사고하는 평화의 메시지를 청년들에게 전해야 합니다. 한국은 외국어로 ‘나의 집’이나 ‘나의 조국’이라고 말할 때, ‘우리 집’ ‘우리나라’라고 표현합니다. 이미 위기 속에서도 하나 됨을 자각하고 실천하는 협동체의 저력을 이미 가지고 있습니다. 이런 점에서 대한민국은 충분한 희망을 품고 미래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이준태 기자 ouioui@cpbc.co.kr 이준태 2026.08.12

청년·청소년 곁을 지킨 두 신부의 기록상처 입은 청춘의 좌절과 회복 담은 책 두 권 나란히 출간사회적으로 청년과 청소년을 지칭하는 연령대에는 차이가 있지만, 사용하는 한자는 ‘푸를 청(靑)’으로 같다. 노년을 뜻하는 ‘황혼’이라는 표현과 비교하면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그 찬란함이 와 닿을 것이다. 하지만 그 푸르른 시기가 유독 힘든 이들이 있다. 가정의 해체나 경제적·심리적 어려움으로 상처받고 좌절한 푸르른 이들을 따뜻하게 껴안고 섬세하게 복원해 온 사제들의 이야기가 나란히 출간됐다. 청춘이라는 레시피 / 이문수 신부 / 생활성서 ‘청년밥상문간’ 운영해 온 이문수 신부가 만난 청년 열여덟 명의 이야기 「청춘이라는 레시피」는 이문수(글라렛선교수도회) 신부가 만난, 개성도 사연도 다른 청년 열여덟 명의 이야기다. 이 신부가 청년들이 부담 없이 찾아갈 수 있는 김치찌개 맛집 ‘청년밥상문간’을 운영하고 있으니 ‘레시피’라는 단어가 딱 달라붙는다. 고단한 청년들에게 따뜻한 밥 한 끼를 먹이고자 2017년 서울 정릉동에 문을 연 ‘청년밥상문간’이 방송과 언론에 소개된 이후 이 신부는 산티아고 순례길을 함께 걷는 ‘청년희망로드’, 청년들의 목소리를 영화로 만들 수 있도록 지원하는 ‘2030청년영화제’, 어르신의 자서전을 청년의 손으로 만드는 출판 프로젝트 ‘세대공감잇다’ 등 다양한 활동으로 다채로운 청년을 만나고 있다. 이 신부는 그들을 통해 우리 사회 구석구석, 잘 보이지 않는 곳에 드리운 그림자를 만난다. “이미 주민센터와 노숙인 쉼터 등 여러 곳의 문을 두드렸지만, 이런저런 규정과 조건의 벽에 부딪혀 번번이 발길을 돌려야 했다는 그의 이야기는 우리 사회의 보이지 않는 그늘을 드러내 주었습니다.”(34쪽) 그러나 힘들고 어두운 이야기만 써내려가지는 않았다. 외롭고 어려운 상황에서도 성장과 성숙의 길을 걸어가는 빛나는 청춘들의 모습도 담았다. 이 신부가 청년들을 바라보는 시선에 사랑이 담겨 있기에 책은 청년들의 삶을 응원하는 따뜻한 마음과 애정 어린 메시지로 연결된다. “세상에 혼자뿐인 그가 용기를 잃지 않았다는 게 얼마나 고맙고 고마웠던지 남몰래 눈물짓습니다. 많이 외로웠을 테고 앞으로도 외로움이 사라지지 않을 것이기에 그의 소명과 분투에 응원을 보내며 저는 기도합니다.”(77쪽) 송원섭 신부와 별바라기 이야기 / 송원섭 신부 / 인생산책 가정 밖 청소년들이 겪는 심리·정서·경제적 자립의 현실 구체적으로 보여줘 이 책은 가정 밖 청소년의 자립을 돕는 현장에서 그들과 함께 걸어온 한 신부의 기록이다. 청소년자립지원관 ‘별바라기’의 관장 송원섭(인천교구) 신부는 가정해체·상처·외로움·삶의 무게 등으로 주저앉은 청소년들의 이야기를 통해 그들이 얼마나 무거운 짐을 지고 살아가는지 세상에 알리고자 한다. 그러나 그 속에서 발견한 용기와 희망, 회복과 변화의 순간 역시 놓치지 않았다. 열다섯 명의 ‘별’이 전하는 고백은 각자의 상처를 어떻게 보듬고 스스로를 이해하며 세상과 연결되어 나아갔는지, 자립의 본질이 무엇인지 제시한다. 송 신부는 특히 자립청소년들이 겪는 심리적·정서적·경제적 자립의 현실을 구체적으로 보여주며 독자들에게 단순한 지원을 넘어 따뜻한 동행을 제안한다. 자립이 단지 혼자 살아가는 기술이 아니라, 누군가의 기다림 속에서 가능해지는 회복의 여정임을 깨닫게 한다. “별바라기의 진짜 과업은 청소년들이 자기 자신을 믿게 하고, 다시 시작할 수 있다는 희망을 품게 하는 일이다. 이 여정은 오래 걸릴 수 있다. 때로는 되돌아가기도 한다. 그러나 그 길 위에서 함께 걸어주는 단 한 사람이 있다면, 다시 앞으로 나아갈 수 있다는 것도 우리는 믿고 있다.”(57쪽) 송 신부는 직접 청소년지도사·사회복지사 등 관련 자격증을 취득하며 자립지원관 제도 초기부터 시스템 구축에 기여했다. 또 자립지원관 업무 매뉴얼 개발과 청소년자활작업장 운영 모델 구상에도 적극 참여했다. 그 헌신을 인정받아 대한민국 국민포장을 받았다. 윤하정 기자 monica@cpbc.co.kr 윤하정2025.09.17

17세기 상본이 낳은 기적의 도시 독일 케벨라어 성모 성지[중세 전문가의 간 김에 순례] 42. 독일 케벨라어 성모 성지 케벨라어의 은총 소성당(앞)과 성모 마리아 바실리카(뒤). 브라반트의 셰르펜회벨 은총 소성당을 본떠 1654년에 육각형 돔 형식으로 세운 소성당으로, 지나가는 순례자가 바깥에서 위로의 성모님을 뵐 수 있도록 설계됐다. 바실리카는 첨탑이 90m인 네오고딕 양식의 순례자 성당으로 19세기에 건설됐다. 1923년 비오 11세 교황에 의해 준대성전으로 지정됐다. 우리 주변에서 상본(像本)을 자주 봅니다. 기도와 묵상을 돕는 이미지로, 사제서품식 때 출사표처럼 기념 성구를 넣어 신자들에게 선물로 주기도 하고, 축일 때 책과 함께 카드처럼 선물하기도 합니다. 이런 상본 문화는 14~15세기 유럽 라인강 지역에서 주로 시작됐습니다. 글을 모르던 이가 대다수였던 당시 성화나 상본은 한 장짜리 ‘가난한 이들의 성서(biblia pauperum)’였습니다. 신앙 교육 자재이자 하느님을 체험하는 수단이었죠. 특히 먼 길을 떠나온 순례자가 성지에서 구한 성화 한 장은 단순한 기념품이 아니었습니다. 성지를 자기 집으로 옮겨오는 특별한 일이었지요. 그 일은 때로 엄청난 기적을 낳았습니다. 바로 오늘 가볼 순례지인 케벨라어에서 말입니다. 케벨라어는 독일 북서부 라인강 하류 쪽 네덜란드 국경과 가까운 조그만 마을이었습니다. 작은 성모님 상본 하나로 거대한 순례의 파도가 일어나, 매년 80만 명이 찾는 ‘성모님의 도시’가 됐지요. 은총 소성당에 모셔진 1640년도 룩셈부르크 성지에서 가져온 ‘고통받는 이들의 위로자’ 원본 상본(왼쪽)과 1649년도 케벨라어 성지의 상본(오른쪽). 성모자상은 거의 비슷하나 배경이 된 도시와 소성당, 아래 문구가 다르다. 성모 마리아 바실리카의 주 제대. 1992년 새롭게 봉헌된 제대로 성녀 우르술라와 성 토마스의 성유물이 옮겨 안치되어 있다. 주변으로 슈툼멜(1859~1919) 공방이 제작한 벽화들이 보인다. 룩셈부르크의 고통받는 이들의 위로자 상본 신·구교 간의 30년 전쟁이 한창이던 1641년 성탄 무렵, 상인인 헨드리크 부스만은 케벨라어 들판에 세워진 십자가 앞에 기도하던 중 ‘여기에 나를 위한 작은 경당을 세워라’라는 신비로운 목소리를 듣습니다. 주변을 둘러봤지만 아무도 없었죠. 일주일 뒤 다시 그 앞에 이르렀을 때 같은 목소리를 듣습니다. 며칠 후에도 똑같은 일을 겪자 언젠가 소성당을 짓겠다고 맹세합니다. 몇 달 뒤, 부스만의 아내는 한밤중에 집 안에서 빛 속에 나타난 성모님과 소성당 환시를 봅니다. 그 모습은 얼마 전 길에서 만난 두 명의 병사가 보여준 작은 상본(약 7.5×11㎝) 속 성모님과 같았습니다. 병사들은 상관에게 전해줄 상본을 들고 있었는데, 그중 한 장을 팔려고 그녀에게 보여준 것이죠. 부스만은 처음에 반신반의했습니다. 하지만 그날 밤 자기 집이 환히 빛났다는 소문을 주위에서 듣고는 이 모든 일이 자신이 겪은 일과 이어져 있음을 느끼고, 결국 그 상관에게 상본을 사들입니다. 그 상본은 바로 전에 소개한 룩셈부르크의 ‘고통받는 이들의 위로자’(‘간 김에 순례’ 27회) 상본이었습니다. 케벨라어 본당 신부는 1642년 6월 1일 성령 강림 대축일 전 주일에 아내가 환시에서 본 모습대로 부스만이 세운 경당에 이 상본을 모십니다. 그날부터 인근 마을에서 많은 이가 모여들었고, 기적이 일어나면서 순례가 시작됐다고 합니다. 전쟁으로 불안한 시기였지만, 순례자의 수는 해마다 늘어났습니다. 교구는 순례자를 위해 촛불 소성당을 세웁니다. 각 지역의 순례자가 거대한 초를 가져와 봉헌하는 전통이 있는데, 장소가 턱없이 부족했기 때문입니다. 30년 전쟁이 절정에 치닫던 1643~1645년에 성당이 세워졌다는 사실은 당시의 신앙과 희생이 어떠한지 잘 보여주지요. 1647년 교구 시노드는 부스만의 진술을 확인하고 조사 후 케벨라어를 공식 순례지로 인준합니다. 이례적인 신속한 결정은 신자들의 자발적 성모 신심과 순례자의 폭발적 증가 덕분이었습니다. 이를 기점으로 새로운 케벨라어 상본이 독일·네덜란드·벨기에 등지로 퍼져나갑니다. 성모 마리아 바실리카 본랑. 길이 약 70m, 폭 28m의 삼랑식 구조 네오고딕 양식의 성당이다. 금별이 새겨진 천장과 제단 주변의 서사 패널이 인상적이다. 가대와 후진부터 측랑까지 구원사의 사건들로 벽화가 꾸며져 있다. 촛불 소성당. 순례자를 위해 처음 만든 소성당이다. 매년 주변의 순례자 행렬이 성당에 큰 초들을 봉헌해 왔는데, 촛불 아래 새겨진 문장은 이러한 행렬이 오랫동안 이어져 왔음을 보여준다. 특히 리스 공동체는 1643년에 케벨라어를 처음 조직적으로 순례해 초를 봉헌했다. 도심 속 위로와 희망의 장소 케벨라어 역에 가까워지면 회색 지붕들 위로 불쑥 솟은 첨탑이 눈에 들어옵니다. 90m 높이의 성모 마리아 바실리카입니다. 역과 가까운 도심 한복판에 은총 소성당과 촛불 소성당이 있고, 그 맞은편으로 성모 마리아 바실리카와 고해성사 소성당·성체성사 소성당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1654년 부스만의 경당 자리에 은총 소성당을 세우고 그곳에 상본을 모십니다. 은총 소성당은 바깥으로 반원형 시선창이 나 있어, 밖에서도 순례자가 위로자이신 성모님을 보며 기도할 수 있는 열린 구조로 설계되어 있습니다. 순례자들은 남쪽으로 난 세 개의 문으로 성당에 다시 들어와 제대 뒤 상본을 가까이서 볼 수 있지요. 한동안 상본은 부스만이 만든 나무판 위에 그대로 붙어있었으나, 1664년에 금세공 공방에서 봉헌한 은제 액자에 모십니다. 지금 액자는 1681년 외팅겐 공작이 봉헌한 것입니다. 케벨라어 은총 소성당 제대(위)와 바깥 시선창에서 본 은총의 상본(아래). 먼저 소성당 바깥에서 위로의 성모님을 뵙고, 내부에서 기도한 뒤, 제대 뒤쪽 통로로 성화를 좀 더 가까이 대면할 수 있다. 소성당은 천정 육각 볼트와 벽면을 활용해 구원사에서 성모님의 신학적 위치를 집약적으로 그린 벽화와 스투쿠로 장식되어 있다. 붉은 벽돌로 지어진 네오고딕 양식의 성모 바실리카는 1858년 착공해 1884년 완공됐습니다. 이 성당은 길이 약 70m, 폭 28m의 삼랑식 구조로 서쪽 첨탑은 90m에 달해 성지의 상징으로 우뚝 서 있습니다. 내부에 들어서면 장대한 벽화들이 제대 주변으로 펼쳐집니다. 프리드리히 슈툼멜과 그의 제자는 성모 마리아의 생애, 교회 구원사, 성경·전례 장면을 유기적으로 배치해 순례자들이 눈으로 구원의 서사와 그 안에서 성모님의 역할을 묵상하도록 했지요. 그 정점은 주 제대입니다. 제대 위 중앙에는 성모 마리아와 성 삼위를 주제로 한 조각과 화려한 장식이 놓여있고, 순례자의 시선은 자연스럽게 위쪽 ‘천상모후의 관을 쓰는 성모’ 장면으로 이어집니다. 바실리카 전체가 성체성사와 성모 신심을 하나로 묶어내고 있는 것이죠. 17세기 독일 라인강 지역은 인쇄술의 발전으로 종이 상본이 널리 퍼졌습니다. 케벨라어에서는 한 장의 상본이 은총의 상징이자 이 도시의 정체성이 되었고, 우리에게 순례의 길을 열어주었죠. 이 전통은 21세기 다른 모습으로 이어지는 듯합니다. 9월 7일 우리 교회는 카를로 아쿠티스를 성인품에 올렸습니다. 성인은 온라인으로 복음을 전한 ‘하느님의 인플루언서’였고, 그가 만든 웹사이트는 전 세계 순례자들의 가상 성체조배 공간이 되었습니다. 17세기 판화로 찍은 상본으로 성모 신심을 전했던 것처럼 21세기 성 카를로는 직접 코딩한 웹사이트라는 ‘디지털 상본’을 통해 성체의 기적을 사람들에게 전했던 것 같습니다. 매개는 다르지만, 목적은 같음을 케벨라어에서 느낍니다. <순례 팁> ※ 쾰른·뒤셀도르프·크레펠트에서 기차로 이동하면 좋다. 역에서 은총 소성당까지 도보 10분. ※ 성모 마리아 바실리카 미사: 주일과 대축일 8:15·10:00·11:45·18:45, 평일 10:00, 9월 8일 복되신 동정 마리아 탄생 축일을 크게 지낸다. ※ 유럽의 다른 순례지에 관한 알찬 정보는 「독일 간 김에 순례– 뮌헨과 남부 독일」(분도출판사 2025) cpbc2025.09.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