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아, 제발 누가 내 말을 들어 주었으면!(욥 31,35)[월간 꿈CUM] 테마로 읽는 구약 성경 – 듣기 (01) 렘브란트, 성전에서 아기 예수님을 안은 시메온, 1669년, 캔버스에 유채, 98x79cm, 국립미술관, 스톡홀름, 스웨덴 우리 시대에는 말이 끊이지 않습니다. 적어도 새벽 시간만큼은 티브이도 말을 멈추었던 예전과 달리 지금은 밤낮 없이 말과 말 사이의 틈새를 찾아보기 어렵습니다. 그야말로 말이 넘쳐난다고 표현할 수 있을 정도입니다. 그런데 이 말의 대부분은 티브이, 라디오, 공공장소의 확성기 등을 통해 흘러나오는 일방적인 말입니다. 그들은 우리의 말을 들어주지도, 응답하지도 않습니다. 소통을 위한 말이 아니죠. 그래서 우리가 고독, 불행, 정신적 충격 등에서 벗어나는 데 별 도움을 주지 못합니다. 이처럼 들음이 없어 대화로 나아갈 수 없는 말은 단순한 정보전달 이상을 넘어서기 어려운 한계를 지닙니다. 성경에서 하느님은 당신 백성에게 들으라고 말씀하기를 멈추지 않으십니다. “이스라엘아, 들어라!”(신명 6,4) 말씀에 귀를 기울이는 것은 생명을 낳는 행위이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말씀은 우리에게 생명을 줍니다. 그리고 우리는 말씀을 통해서 존재할 수 있습니다. 즉, 말씀은 살아있음의 증거입니다. “그러자 죽은 이가 일어나 앉아서 말을 하기 시작하였다.”(루카 7,15) 또한, 말씀은 우리보다 먼저 있으며, 우리가 자신의 기원이 아님을 보여줍니다. 요한 복음서는 하느님을 말씀과 동일시하며, 창세기는 하느님께서 말씀을 통해 세상과 인간을 창조하셨다고 합니다. 그리고 갓 태어난 아기가 그러하듯이, 인간은 말씀을 듣고 응답함으로써 인간답게 되어갑니다. 그러니 말씀은 인간의 표지인 동시에 신의 표지인 것입니다. 나의 말을 들어줄 누군가가 있다는 것은 값진 선물입니다. 그런데 성경에는 이 선물을 받지 못한 인물들이 등장합니다.지 않은 지독한 시련을 겪게 됩니다. 이런 욥을 위로하기 위해 세 친구가 찾아오지만, 그들은 정작 자신의 무죄함을 주장하는 욥의 말은 들어주지 않습니다. 욥은 흠 없고 올곧은 인물입니다.(욥 1,1) 그런데 그는 자신의 의로움에 합당하지 않은 지독한 시련을 겪게 됩니다. 이런 욥을 위로하기 위해 세 친구가 찾아오지만, 그들은 정작 자신의 무죄함을 주장하는 욥의 말은 들어주지 않습니다. “생각해 보게나, 죄 없는 이 누가 멸망하였는가?”(욥 4,7) 고통 중에 있는 이와 하느님의 의로우심을 잘 알고 있다는 생각에 갇힌 이들이 만나면 진정한 대화가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그들은 참으로 듣지 않기 때문입니다. 고통받는 이가 하는 말과 무관하게 그들의 입술에는 이미 정해진 답이 준비되어 있습니다. 오직 하느님을 정당화하려는 목적만을 가진 그들에겐 말이 너무 많아서 들음이 들어설 자리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들의 만남은 대화보다는 자백을 강요하는 심문에 가깝게 됩니다. 이것은 고통받는 이에게는 쓸모없는 말일 뿐입니다. 욥은 제발 자기 말을 들어달라고 부르짖습니다. 내 말을 귀담아듣게나. 그것이 바로 자네들이 나를 위로하는 것이네. 참아 주게나, 내가 말을 하게. 내 말이 끝난 뒤에 비웃어도 좋네.(욥 21,2-3) 하지만 욥의 친구들은 그의 말을 들어주지 않습니다. 우리도 우리의 마음을 어지럽히는 불편한 말 앞에서 귀를 닫곤 하죠. 자신을 보호하고 평정심을 유지하기 위해서 말입니다. 이들의 모습이 욥에게 어떻게 비치는지 보십시오. 그러나 자네들은 거짓을 꾸며 내는 자들, 모두 돌팔이 의사들일세. 아, 자네들이 제발 입을 다문다면! 그것이 자네들에게 지혜로운 처사가 되련마는.(욥 13,4-5) 마치 손을 댈수록 환자를 더욱 고통스럽게만 하는 돌팔이 의사처럼 친구들이 말을 하면 할수록 위로가 아니라 괴로움만 더해집니다. 이제 욥의 말을 들어줄 분은 하느님밖에 남아 있지 않습니다. 나는 전능하신 분께 여쭙고 하느님께 항변하고 싶을 따름이네.(욥 13,3) 과연 하느님께서는 욥에게 귀를 기울여주실까요? 네! 하느님께서는 욥의 말을 다 들어주십니다. 어떻게 알 수 있느냐고요? 성경 전체에서 가장 아름다운 구절가운데 하나인 하느님께서 욥에게 하시는 말씀이 이렇게 시작하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 욥에게 폭풍 속에서 응답하셨다.(우리말 성경에는 ‘말씀하셨다’로 번역되어 있습니다)(욥 38,1) 응답은 들음을 전제합니다. 그래서 하느님의 말씀을 들으며 욥은 깨닫습니다. 창조주 하느님께서 하나의 피조물에 불과한 그에게까지 몸을 낮춰 말씀을 다 들어주셨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이제 욥은 절망에서 벗어나 다시 살아갈 수 있게 됩니다. 이것은 하느님께서욥의 말을 들어주시고, 욥이 하느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였기에 가능한 일입니다. 세상 사람 그 누구도 우리 말을 들어주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하느님만은 우리 말을 들어주십니다. 하지만 우리도 하느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글 _ 함원식 신부 (이사야, 안동교구 갈전마티아본당 주임, 성서신학 박사) 1999년 사제서품 후 성경에 대한 전문적인 연구를 위해 프랑스로 유학, 파리 가톨릭대학교(Catholique de Paris)에서 2007년 ‘요나서 해석에서의 시와 설화의 상호의존성’을 주제로 석사학위를, 2017년 ‘욥기 내 다양한 문학 장르들 사이의 대화적 관계’를 주제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삽화 _ 김 사무엘 경희대학교 미술교육과를 졸업했다. 건축 디자이너이며, 제주아마추어미술인협회장으로 활동하고 있다. 제주 중문, 강정, 삼양 등지에서 수채화 위주의 그림을 가르치고 있으며, 현재 건축 인테리어 회사인 Design SAM의 대표이다. cpbc2026.07.07

성경 속 꽃들의 속삭임수선화는 ‘영원한 생명’ 금잔화는 ‘성모님의 후광’… 50년간 정원 가꿔온 원예가의 영적 여정 기도의 정원 / 마거릿 로즈 릴리 / 신지현 옮김 / 성서와함께 “예수 탄생 예고 장면에 등장하는 수선화는 하느님의 사랑이 이룬 위업과 죽음을 넘어선 영원한 생명을 상징한다. 한편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영광스러운 날 아침에 수선화가 일제히 꽃을 피웠다는 전설이 있다. 여기서 드러나는 다시 태어남은 죽음 이후의 영원한 삶을 암시한다.”(122쪽) 수선화·아네모네·베고니아·칼라·백합·작약·옥잠화⋯. 겉모습은 헷갈리지만 이름은 익숙한 이들 꽃은 일상에서는 물론이고 제단에서도 자주 볼 수 있다. 성경 곳곳에도 피어 있다. 「기도의 정원」은 원예가인 마거릿 로즈 릴리가 정원을 가꾸며 체험한 영적 여정을 담은 책이다. 성 베네딕도회 봉헌 회원으로 원예업계에서 50년 가까이 활동한 저자는 피정 등에서 받은 수많은 질문에 답하며 이 책을 썼다. 꽃, 허브와 과수, 풀과 화초, 나무 등 네 가지 범주로 나눠 그리스도교 예술과 건축에서 비유를 통해 자주 등장하는 식물, 각종 전설과 설화에 언급된 식물을 중점적으로 소개한다. 각 식물이 지닌 상징과 의미를 설명하고, 전례에 사용되는 식물 가운데 이교도적 의미가 있는 경우 해당 식물의 그리스도교적 상징을 재정립해 오해를 바로잡았다. “먼저 ‘부활 백합(Resurrection lily)’이라는 이름에 대한 혼란부터 바로잡도록 하자. 영어권에서는 이 이름을 가진 식물이 여럿 있으며, 각각 다른 이름도 몇 개씩 가지고 있다. 하지만 그 어떤 것도 실은 백합과에 속하지 않는다. 그러나 모두 그리스도를 통한 새 생명과 주님의 부활을 상징하는 데 쓰일 수 있다. ‘부활 백합’으로 가장 널리 알려진 꽃은 우리말로 상사화다.”(143쪽) “금잔화속 식물에 ‘마리아의 황금꽃(Mary’s gold)’이라는 이름을 붙인 사람은 12세기 독일의 수녀인 빙엔의 성녀 힐데가르트다. (중략) 초기 그리스도인들은 이 귀한 꽃을 성모님께 바치는 기도의 봉헌물로 삼았으며, 6세기 이후에는 금잔화의 황금빛 꽃잎으로 성모님의 머리 뒤에 비치는 후광을 표현했다.”(223쪽) 저자는 “성경은 에덴동산에서 겟세마니, 그리고 세상의 종말까지 수천 년에 걸쳐 하느님께서 역사하시는 모습을 전하고 있다”며 “기도의 정원을 매만지고 꾸미는 일은 하느님의 피조물을 매개로 창조주이신 하느님께 더 가까이 다가가고, 우리의 믿음을 상징적으로 표현하는 작업”이라고 전했다. 책에는 정원을 가꾸는 데 필요한 실용적인 정보도 적혀 있다. 메리 스프레이그가 그린 소박하면서도 화사한 세밀화가 보는 즐거움을 선사하고, 가톨릭 전례 꽃꽂이를 배우며 본당에서 꽃 봉사를 담당하는 번역가 신지현씨가 맞갖게 우리글로 옮겼다. 마거릿 로즈 릴리는 성 프란치스코 피정센터 명예 정원관리장을 지냈으며, 미국 미시간주 랜싱교구의 주교 관저와 은퇴 사제관의 조경 사업에도 참여했다. 「정원사를 위한 가톨릭 식물연감」을 펴냈고, 각종 온라인 매체에 정원 가꾸는 법과 영성에 대한 글을 게재하고 있다. 윤하정 기자 monica@cpbc.co.kr윤하정2026.02.03

말씀의 위로[월간 꿈CUM] 테마로 읽는 구약 성경 – 위로 (09) 두초, 그리스도의 탄생, 1308~1311년, 패널에 템페라, 43.5x44.5cm, 국립미술관, 미국 워싱턴 D.C. 예수께서 이 세상을 떠나시면서 우리에게 주신 선물은 성령만이 아닙니다. 항상 우리와 동반할 말씀도 남기셨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하느님의 위로가 교회를 통해서뿐 아니라 말씀을 통해서도 주어진다고 합니다. “성경에 미리 기록된 것은 우리를 가르치려고 기록된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성경에서 인내를 배우고 위로를 받아 희망을 간직하게 됩니다.”(로마 15,4) 하느님께서는 인간을 창조하신 이래 홀로 버려두신 적이 한 번도 없습니다. 구약 시대에 다양한 방식으로 당신 백성의 역사에 개입하셨고, 신약 시대에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당신을 믿는 이들을 찾아오신 하느님께서는 오늘도 말씀을 통해 우리에게 오십니다. 말씀을 통해 우리를 일으켜 세우시고, 위로하시며, 지탱해 주십니다. 그래서 말씀은 우리가 살아갈 희망을 줍니다. 히브리서는 이 희망을 우리가 거센 파도에 목적지를 잃고 표류하더라도 자포자기하지 않게 해주는 ‘영혼의 닻’(히브 6,19)이라고까지 표현합니다. 성경은 말씀에서 희망을 얻은 이들의 이야기를 전하고 있습니다. 미디안족의 약탈이 두려워 숨어서 추수하던 힘 없는 가문 출신의 젊은 기드온이 이스라엘 백성을 이끌고 맞서 싸울 희망을 품게 한 것은 바로 하느님의 이 말씀입니다. “너의 그 힘을 지니고 가서 이스라엘을 미디안족의 손아귀에서 구원하여라. 바로 내가 너를 보낸다.”(판관 6,14) 위로에 탁월한 힘을 발휘하는 말씀은 단연코 시편입니다. 사람이 평소 살아오면서 상상조차 해 보지 못한 큰 고통을 겪으면 말문이 막힙니다. 고통에 말을 빼앗겼다고 표현하는 편이 더 적절할지도 모르겠네요. 그러면 하느님께 어떻게 기도해야 할지도 모르게 됩니다. 이럴 때 도와주는 말씀이 바로 시편입니다. “예로부터 내려오는 당신 계명을 기억하며 주님, 저는 위안을 받습니다.”(시편119,52) 그렇습니다. 신앙의 전통 안에서 대대로 전해 내려온 시편 말씀을 통해 우리는 하느님께 위로를 청하고 또 받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시편 저자와 함께 소리 높여 부르짖습니다. “제 눈이 당신 말씀을 기다리다 지쳐 제가 아룁니다. 언제 저를 위로하시렵니까?”(시편 119,82) 혹시 이 말씀이 거칠다 생각된다면, 다음의 아름다운 말씀도 있습니다. “암사슴이 시냇물을 그리워하듯 하느님, 제 영혼이 당신을 이토록 그리워합니다. 제 영혼이 하느님을, 제 생명의 하느님을 목말라합니다. 그 하느님의 얼굴을 언제나 가서 뵈올 수 있겠습니까?”(시편 42,2-3) 그런데 시편보다 더 큰 위로의 힘을 가진 말씀이 있습니다. 바로 자신이 말씀 자체인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입니다. 특히 자비에 관한 예수님의 말씀이 가장 큰 위로를 줍니다. 말씀을 통해 자신이 위로받을 수도 있지만, 말씀으로 다른 형제자매를 위로할 수도 있습니다. 위로가 필요한 이에게 다음과 같은 말씀을 읽어 주십시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친히, 또 우리를 사랑하시고 당신의 은총으로 영원한 격려와 좋은 희망을 주신 하느님 우리 아버지께서, 여러분의 마음을 격려하시고 여러분의 힘을 북돋우시어 온갖 좋은 일과 좋은 말을 하게 해 주시기를 빕니다.”(2테 살 2,16-17) 지금까지 성경이 말하는 위로, 곧 하느님께서 주시는 위로에 대하여 살펴보았습니다. 우리는 무자비한 주인 앞에 서서 전전긍긍하는 종이 아닙니다. 하느님은 비탄과 고뇌에 빠진 당신 백성을 염려하십니다. 그래서 그들을 위로하시기 위해 모든 일을 다 하십니다. 당신 아드님을 보내주시기까지 말입니다. 예수님을 만난 사람은 위로받습니다. 실의에 빠져 울고 있던 마리아 막달레나가 예수님을 뵙고 ‘라뿌니’(요한 20,16)라며 기쁨의 환성을 질렀던 것처럼 말입니다. 예수께서 승천하신 뒤에도 하느님의 위로는 멈추지 않습니다. 위로자 성령께서 언제까지나 우리와 함께 계시기 때문입니다. 성령의 위로는 어떤 상황에서도 빼앗기지 않는 내적 기쁨을 줍니다. 물론 세상 마지막까지 일점일획도 없어지지 않을 위로의 말씀도 우리에게 주어져 있습니다. 하느님과 우리 사이는 거래 관계가 아닙니다. 하느님께서 주시는 위로는 우리의 노력으로 값을 치름으로써 얻어내는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위로는 우리 아버지신 하느님께서 자녀들의 행복을 바라시기에 거저 주시는 선물입니다. 우리는 이 선물을 잘 받아들이기만 하면 됩니다. 그리고 우리는 하느님께 받은 위로를 혼자만 간직할 것이 아니라, 그 위로가 절실한 다른 이들과도 함께 나눠야 합니다.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는 것이 맞는 도리 아니겠는지요. 글 _ 함원식 신부 (이사야, 안동교구 갈전마티아본당 주임, 성서신학 박사) 1999년 사제서품 후 성경에 대한 전문적인 연구를 위해 프랑스로 유학, 파리 가톨릭대학교(Catholique de Paris)에서 2007년 ‘요나서 해석에서의 시와 설화의 상호의존성’을 주제로 석사학위를, 2017년 ‘욥기 내 다양한 문학 장르들 사이의 대화적 관계’를 주제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삽화 _ 김 사무엘 경희대학교 미술교육과를 졸업했다. 건축 디자이너이며, 제주아마추어미술인협회장으로 활동하고 있다. 제주 중문, 강정, 삼양 등지에서 수채화 위주의 그림을 가르치고 있으며, 현재 건축 인테리어 회사인 Design SAM의 대표이다.2026.05.20

가톨릭·개신교 학자 공동집필한 신약성경 입문 신약성경 입문 / 다니엘 마르그라 / 김건태·백운철 신부 등 옮김 / 수원가톨릭대학교 출판부 “하느님 아들의 생애를 이야기한다는 것은 단지 그분의 말씀을 전한다기보다는 인류 역사의 틀에 그분의 생애를 삽입하는 것을 말한다. 이야기로 기술하는 것은 강생의 논리에 부응하며, 하느님께서 인간의 희망과 불행의 총체적 난국인 이 세상에 어떻게 들어오시는지를 보여준다. 복음은 사람들 가운데 사람이 되신 하느님의 역사이다. 역사의 망각은 그리스도교 신앙을 유심론적 일탈에 빠지게 하여, 구속 신화의 구체화와 예수님의 도래를 혼동하게 할 것이다.”(44쪽) 「가톨릭교회 교리서」는 “성경 전체는 그리스도에 대하여 말하고 있으며, 성경 전체가 그리스도 안에서 완성된다”라고 말한다. 그중에서도 신약성경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하느님의 구원사와 그리스도께서 완성하신 새로운 계약에 대한 믿음과 체험을 서술한 책이다. 그래서 신약은 그리스도교 신앙의 원천이라 할 수 있다. 신약성경 전반을 이해할 수 있도록 돕는 「신약성경 입문」이 출간됐다. 우리에게 가장 친숙한 신약은 때로 어떻게 읽어야 할지 막막하게 느껴진다. 복음서와 사도행전·서간·묵시록에 이르기까지 서로 다른 책들이 어떠한 역사적 배경 안에서 기록된 것인지, 구약과는 어떤 연속성을 지니고 있으며, 신약을 통해 오늘날 우리는 어떠한 가르침을 얻어야 하는지 한눈에 파악하기 쉽지 않기 때문이다. 또 신약성경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리스도의 삶과 가르침이 어떻게 기억되고 전해졌으며, 초기 그리스도교 공동체 안에서 어떤 방식으로 기록되었는지 살펴볼 필요가 있다. 즉 구약에서 신약으로 이어지는 흐름을 파악하고, 하느님 구원의 역사가 어떻게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완성되었는지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 이 책은 프랑스어권 가톨릭·개신교 학자들이 공동 집필한 입문서로, 신약성경 27권을 역사적 배경과 집필 당시의 상황, 문학적 구성, 신학적 목적 등 여러 관점을 통해 균형 있게 살펴본다. 성경 각 권은 고전적으로 인정받아온 문집, 곧 공관복음과 사도행전, 바오로 문학, 요한계 전승, 가톨릭서간에 따라 규합되었다. 각각 문학적 소개로 시작하여 저술의 역사적 배경을 설명함으로써 독자들이 신약성경을 이해할 수 있는 토대를 마련하고 있다. 용어 해설을 더해 독자들의 이해를 돕는다. 책임 저자 다니엘 마르그라는 스위스 로잔대학교에서 신약성경 교수로 재직했고, 전통적인 역사비평 방법론에 설화적 방법을 접목해 성경 본문 주해의 새로운 장을 연 인물로 평가받는다. 가톨릭과 개신교의 여러 신학대학에서 강의하며 다수의 저서를 남겼다. 윤하정 기자윤하정2026.04.21

렘브란트의 ‘마리아의 엘리사벳 방문’ [월간 꿈CUM] 성화로 읽는 신약 성경 (02) 렘브란트, 마리아의 엘리사벳 방문, 1640, 나무판에 유채, 56.5x47.9cm, 디트로이트 미술관, 디트로이트, 미국 렘브란트 반 레인(Rembrandt van Rijn, 1606~1669)은 1606년 7월 15일에 네덜란드 레이던에서 제분업자인 아버지 하르멘 헤리츠 반 레인과 귀족 출신 어머니 코르넬리아 반 사위트브로에크 사이에서 여덟 번째 아들로 태어났다. 부유한 부모 덕분에 그는 일곱 살에 라틴어 학교에 입학하여 고전과 성경과 칼뱅주의 교리 등을 배우고, 열네 살에 레이던대학 철학과에 입학하여 성경 문헌과 인문학을 익혔지만, 그림에 온 마음을 빼앗겼던 그는 1621년경에 학업을 그만두고, 이탈리아에서 유학한 레이던의 화가 야콥 반 스와넨부르흐(Jacob van Swanenburgh, 1571~1638)의 도제로 들어가 3년간 그림을 배우고, 1624년에는 암스테르담의 화가 피에테르 라스트만(Pieter Lastman, 1583~1633)의 공방에서 조수로 6개월을 보낸다. 렘브란트의 스승들은 공교롭게도 모두 가톨릭 화가이다. 그의 부모가 칼뱅교로 개종했지만, 어머니의 친척들은 가톨릭을 고수했고, 친척들의 주선으로 가톨릭 화가를 스승으로 모실 수 있었기 때문이다. 개신교는 우상숭배라며 성상을 파괴하고 성화를 불태웠지만, 가톨릭은 성화를 더욱 장려했기 때문에 개신교 신자인 렘브란트가 성화를 많이 그리게 된 이유가 여기에 있다. 렘브란트는 19살 때, 한 살 아래인 리벤스(Jan Lievens, 1607~1674)와 함께 1625년에 고향인 레이던에 공방을 차렸다. 관습에 얽매지 않은 두 젊은 화가의 명성은 주변에 금세 퍼졌고, 빛과 어둠을 통해 양감을 나타내는 키아로스쿠로를 이용한 그림들을 본격적으로 그렸으며, 노인을 모델로 레이던 화가들의 정교한 회화를 구사하고, 성경에 대한 자기만의 해석으로 프로테스탄트의 신앙을 유감없이 발휘했다. 렘브란트 인생에서 전환점은 1628년에 콘스탄테인 호이헨스를 만나면서부터다. 인문주의자였던 호이헨스는 오라녜 가문의 프레데릭 헨드릭 총독의 비서로 1632년에서 1646년 사이에 헤이그 궁의 예배당을 꾸미는 중개인 역할을 했다. 렘브란트는 그에게서 7개로 구성된 연작을 주문받았다. 렘브란트는 1632년 6월에 암스테르담으로 이주하여 화상인 헨드리크 오일렌부르크의 집에서 지냈고, 1634년에 화상의 조카이자, 사망한 시장의 딸인 사스키아와 결혼하고, 1635년에 아내의 막대한 재산으로 호화로운 집을 산다. 렘브란트의 황금기는 암스테르담으로 이주한 1632년부터 1642년까지이다. 화가가 출세하고 돈을 많이 벌려면 그림의 주문과 제자가 많아야 한다. 이 시기에 렘브란트는 재력가들의 초상화를 많이 그렸고, 1635년에는 거대한 창고를 빌려, 그곳을 공방으로 개조하여 제자들을 많이 받았다. 또한 렘브란트가 1633년부터 1639년에 그린 「그리스도의 수난」 연작은 렘브란트를 단숨에 대가의 반열에 올려놓았다. 네덜란드 최고 권력가인 프레데릭 헨드릭 총독의 경당에 이 연작을 그렸기 때문이다. 그런데 렘브란트가 1640년에 그렸고, 루카복음 1장 39-56절이 배경이며, 미국 디트로이트 미술관에 소장되어 있는 ‘마리아의 엘리사벳 방문’을 보면 의아한 게 한두 개가 아니다. 왜 마리아는 걸음을 서둘러 유다 산골로 달려가지 않고, 마부를 거느리고 말을 타고 여행했을까? 왜 흑인 시녀가 마리아에게 녹색 망토를 입히는 것일까? 왜 마리아는 베일을 쓰지 않고 왕관 모양의 모자를 쓰고 있는 것일까? 왜 사제 즈카르야는 궁궐 같은 집에서 나와 계단으로 내려오는 것일까? 왜 공작새는 등을 돌리고, 닭들은 마리아를 향해 환호하듯 달려가는 것일까? 왜 배경에 예루살렘 성전이 암흑 속에 감추어져 있을까? 이 모든 의문의 해답은 왕의 대관식으로 해결된다. 대관식에서는 왕이 될 사람이 말을 타고 입장하면 먼저 왕의 이름을 발표하고 왕관을 씌우고 망토를 입힌다. 왕이 왕좌에 오르면 사제는 이를 공인한다. 그러면 백성은 만세삼창을 한다. 마리아의 모습은 소녀의 모습이 아니라 여왕의 자태다. 마리아는 말을 타고 입장하고, 엘리사벳은 마리아에게 ‘하느님의 어머니’라고 칭하며, 마리아는 왕관처럼 생긴 모자를 쓰고 망토를 입고 계단으로 오른다. 이에 사제 즈카르야는 여왕을 공적으로 인준하고 닭들은 기뻐 춤추며 환호한다. 왜 공작새가 등을 돌리고, 닭들이 환호하며 마리아에게로 달려가는 것일까? 마리아의 노래에 묘사된 대로 그분은 부유한 자들을 내치시고 가난한 이를 들어 올리신 분이기 때문이다. 왜 엘리사벳은 강아지 줄을 꼭 붙들고 마리아를 애절하게 바라보는 것일까? 그것은 마치 식탁에서 떨어지는 빵 부스러기라도 원하는 가나안 여인처럼 여인 중에 가장 복되신 마리아의 은총 부스러기라도 원하는 모습이다. 그러나 마리아의 영광은 땀과 눈물의 결실이다. 마리아가 들고 있는 손수건에서 떨어지는 두 개의 물방울은 눈물방울일 수도 있고, 땀방울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마리아는 믿음으로 아픔을 이겨냈기에 모든 이의 칭송을 받을 수 있었다. 비록 천상 예루살렘은 암흑 속에 감추어져 있지만, 주님의 뜻이 꼭 이루어지리라 믿으셨으니 마리아는 모든 여인 중에 가장 복된 분이시다. 우리가 주님의 얼굴을 맞대고 보는 날에 감추어진 것은 모두 나타나기 때문이다. 글 _ 손용환 신부 (요셉, 원주교구 북평본당 주임) 1992년 사제 서품. 원주교구 소속으로 16년간 군 사목을 한 후 홍익대학교에서 미술사를 전공하였으며, 현재 북평본당 주임으로 있다. 저서로 「오색의 기도」 「하느님의 가장 좋은 선물」 「사제의 향기」 「맹 신부」 「어리석음의 승리」 「천주교 군종교구사」 등이 있다.cpbc2026.04.13

14년 집념으로 완필한 ‘붓글씨 성경’대전 노은동본당 82세 복진을(도미니코)씨 복진을(도미니코, 맨 왼쪽)씨와 김유정 신부(가운데)가 대전 노은동성당 로비 성경 필사본 앞에서 촬영하고 있다. 제자 도움으로 필사본 책 7권으로 엮어 본당 입구 전시 “매일 먹 갈고 화선지에 붓 내리며 주님 안에 머문 시간” “주변 친구들이 하나둘 세상을 떠나고 요양원 신세를 질 때마다 조바심이 나고 마무리를 할 수 있을지 의구심이 들곤 했습니다. 하지만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다’(요한 15,5)라는 말씀을 되뇌며 주님 안에 머물러 있는 시간을 가지려 노력했습니다. 먹을 갈고 화선지에 붓을 내리는 시간은 그야말로 주님 안에 머문 시간이었습니다.” 복진을(도미니코, 82, 대전 노은동본당)씨는 펜으로도 필사하기 힘든 73권의 방대한 분량의 성경 구절을 매일 먹을 갈아 붓글씨로 완필하며 말씀 속 주님과 함께했다. 2012년 1월부터 2025년 12월까지 하루 2시간, 2장씩을 꼬박 바쳐 장장 14년에 걸쳐 완성해냈다. 80대 고령에도 육체적 한계를 신앙심과 인내로 극복해 낸 결과물이다. 복씨가 붓글씨로 성경을 필사하게 된 것은 우연찮은 계기에서 비롯됐다. 젊은 시절 서예에 자신 있었지만, 교직에 종사하는 30년 동안 먹과 벼루를 꺼내 들지 않았다. 그러던 중 2006년 정년퇴임 후 가보지 못한 곳을 가보고 가족과의 시간을 보내던 그는 자신의 은사로부터 한 요청을 받았다. 묘비 비문을 써달라는 것이었다. 고민 끝에 붓을 다시 집어들었다. 복씨는 “깊이 숨어있던 벼루와 먹, 붓을 찾아 고생 끝에 화선지에 비문을 써서 가져다 드렸는데, 장 속에 넣으려니 아쉬운 생각이 들었다”면서 “붓글씨 재능을 살려 하느님께 의미 있는 무언가를 봉헌하겠다고 결심했고, 그렇게 눈에 익은 신약 성경부터 필사를 시작했다”고 말했다. 시작은 특별하지 않았지만, 붓으로 말씀을 적어 내려간 14년은 신앙인으로서 은총을 받게 된 시간이었다. 복씨는 “하루하루 먹을 갈고 화선지를 펼쳐 필사하는 단순한 반복이었지만, 그 시간만큼은 성경에 나오는 인물과 같이 살아있는 느낌이 들고 하느님과 단둘이 만나는 기도의 시간이 됐다”고 고백했다. 이어 “때로는 힘에 부쳐 완성하지 못할 것이란 생각이 들기도 했지만, 모두 주님의 크신 은총임을 깨닫고 제 과업이라고 생각했다”며 “우리 신앙 선조들이 다 필사본으로 성경을 전파하고 했을 텐데, 이분들의 노고에 대해서도 크게 공감하게 됐다”고 말했다. 개인의 기나긴 필사 순례는 주변인들의 마음까지 감화시켰다. 자칫 창고에만 놓일 뻔한 필사본이 제자의 도움으로 제본까지 마치게 된 것이다. 제자의 지인이었던 25년 경력의 인쇄소 직원이 화선지 뒷면에 종이를 일일이 덧대는 ‘배접’ 방식을 제안했고, 마침내 수만 장의 화선지는 7권의 거대한 성경책으로 엮이게 됐다. 복씨는 필사본이 교회에도 도움이 됐으면 하는 바람을 내비쳤다. 현재 노은동성당(주임 김유정 신부) 출입문에는 그의 필사본이 전시돼있다. 그는 “개인적으로 보관하고 있는 것보다 저의 작은 노력이 본당이나 교구의 뜻대로 쓰이길 바란다”고 전했다. 성경 필사를 준비하고 있는 이들에게도 응원의 메시지를 보냈다. “매일매일 성경을 필사하는 시간은 참으로 행복한 시간이었습니다. 필사 도중에 ‘마무리 지을 수 있을까?’ 걱정도 많았지만, 완필했다는 것은 결국 하느님께서 건강을 허락해주신 것 아니겠습니까. 주님 은총에 한없이 감사드릴 뿐입니다.” 이준태 기자 ouioui@cpbc.co.kr이준태 2026.03.10

위로, 제자의 사명[월간 꿈CUM] 테마로 읽는 구약 성경 – 위로 (08) 삽화: 김 사무엘 하느님의 위로를 체험한 사람은 그 위로를 형제들과도 나눌 수 있게 됩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느님께서는 찬미 받으시기를 빕니다. 그분은 인자하신 아버지시며 모든 위로의 하느님이십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환난을 겪을 때마다 위로해 주시어, 우리도 그분에게서 받은 위로로, 온갖 환난을 겪는 사람들을 위로할 수 있게 하십니다.(2코린 1,3-4) 바오로 사도의 예를 봅시다. 그는 육체적, 정신적, 영적으로 큰 고난과 시련을 겪었습니다. 나는 수고도 더 많이 하였고 옥살이도 더 많이 하였으며, 매질도 더 지독하게 당하였고 죽을 고비도 자주 넘겼습니다. 마흔에서 하나를 뺀 매를 유다인들에게 다섯 차례나 맞았습니다. 그리고 채찍으로 맞은 것이 세 번, 돌질을 당한 것이 한 번, 파선을 당한 것이 세 번입니다. 밤낮 하루를 꼬박 깊은 바다에서 떠다니기도 하였습니다. 자주 여행하는 동안에 늘 강물의 위험, 강도의 위험, 동족에게서 오는 위험, 이민족에게서 오는 위험, 고을에서 겪는 위험, 광야에서 겪는 위험, 바다에서 겪는 위험, 거짓 형제들 사이에서 겪는 위험이 뒤따랐습니다. 수고와 고생, 잦은 밤샘, 굶주림과 목마름, 잦은 결식, 추위와 헐벗음에 시달렸습니다.(2코린 11,23-27) 그뿐만 아니라 바오로 사도는 동료들의 배신 때문에도 고통을 겪었습니다. 데마스는 현세를 사랑한 나머지 나를 버리고 테살로니카로 가고, 크레스켄스는 갈라티아로, 티토는 달마티아로 갔습니다. … 구리 세공장이 알렉산드로스가 나에게 해를 많이 입혔습니다. … 나의 첫 변론 때에 아무도 나를 거들어 주지 않고, 모두 나를 저버렸습니다.(2티모 4,10. 14. 16) 모든 고통은 바오로 사도를 짓누르고, 지치게 하고, 슬프게 만들었습니다.하지만 그를 완전히 굴복시킬 수는 없었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내 곁에 계시면서 나를 굳세게 해 주셨습니다. 나를 통하여 복음 선포가 완수되고 모든 민족들이 그것을 듣게 하시려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나는 사자의 입에서 구출되었습니다.(2티모 4,17) 바오로 사도는 고통 중에 위로를 받았습니다. 나는 위안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나는 우리의 그 모든 환난에도 기쁨에 넘쳐 있습니다.(2코린 7,4) 주님께서 그와 함께 계셨기 때문입니다.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사시는 것입니다.(갈라 2,20) 이렇게 바오로 사도는 하느님의 위로를 직접 체험했습니다. 그가 체험한 위로는 단순한 위안이 아니라, 고뇌에 저항하게 하고 시련과 두려움에 맞서 싸우게 하는 힘입니다. 그리고 바오로 사도는 자신 또한 위로자가 되어, 이렇게 위로를 시작합니다. 우리는 이 보물을 질그릇 속에 지니고 있습니다. 그 엄청난 힘은 하느님의 것으로, 우리에게서 나오는 힘이 아님을 보여 주시려는 것입니다.(2코린 4,7) 우리는 사도행전이 전하는 바오로 사도의 눈부신 업적을 읽으며 그의 능력에 경탄합니다. 그런데 바오로 사도는 코린토 신자들에게 부서지기 쉬운 질그릇과 같은 자신의 나약함을 고백하고 있습니다. 이로써 그들 또한 나약함을 인정하도록 초대합니다. 그리고 코린토 신자들이 그에게서 보는 것은 자신의 힘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주신 위로의 힘이라는 사실을 증언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바오로 사도는 자신이 위로의 힘의 산증인이 됨으로써 다른 이들도 위로를 받아들이도록 격려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두고 바오로 사도는 하느님의 위로가 교회를 통하여 오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누가 약해지면 나도 약해지지 않겠습니까?(2코린 11,29) 지체인 형제자매들이 머리인 그리스도를 모시고 하나의 몸을 이룬 것이 교회입니다. 그러니 한 지체가 약해지면 다른 지체도 약해지게 마련입니다. 예를 들면, 다리에 문제가 생겨 걸을 수 없게 되면 몸 전체의 건강이 상하게 되죠. 하지만, 반대로 한 지체가 강해지면 다른 지체도 강해집니다. 예를 들어, 장 건강이 좋아지면 몸 전체의 영양 상태가 개선됩니다. 강한 지체를 통해 다른 지체가힘을 얻는 것,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의 위로가 바오로 사도를 통해 코린토 신자들에게 주어진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바오로 사도는 하나의 역설을 말합니다. 내가 약할 때에 오히려 강하기 때문입니다.(2코린 12,10) 이 말씀은 우리의 약함은 단점이나 결점이 아니라는 의미입니다. 이 말씀은 오히려 우리가 약할 때 위로를 받아 진정으로 강해질 수 있다는 진리를 선포하고 있습니다. 글 _ 함원식 신부 (이사야, 안동교구 갈전마티아본당 주임, 성서신학 박사) 1999년 사제서품 후 성경에 대한 전문적인 연구를 위해 프랑스로 유학, 파리 가톨릭대학교(Catholique de Paris)에서 2007년 ‘요나서 해석에서의 시와 설화의 상호의존성’을 주제로 석사학위를, 2017년 ‘욥기 내 다양한 문학 장르들 사이의 대화적 관계’를 주제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삽화 _ 김 사무엘 경희대학교 미술교육과를 졸업했다. 건축 디자이너이며, 제주아마추어미술인협회장으로 활동하고 있다. 제주 중문, 강정, 삼양 등지에서 수채화 위주의 그림을 가르치고 있으며, 현재 건축 인테리어 회사인 Design SAM의 대표이다.cpbc2026.04.13

시편과 예언서의 위로[월간 꿈CUM] 테마로 읽는 성경 _ 위로 (06) 삽화: 김 사무엘 시편은 불행, 병고, 죽음과 같이 인간이라면 누구도 피할 수 없는 비극적인 현실을 충실히 반영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시편은 하느님의 위로를 청하는 기도를 담고 있는데, 때로는 반항으로까지 보이는 하느님께 대한 부르짖음도 들어있습니다. 하지만 이것은 불경스러운 행위가 아니라, 그 본질은 간청입니다. 간청은 하느님의 존재, 권능, 선하심을 전제할 때만 가능하죠. 그리고 시편이 궁극적으로 보여주는 것은 헛된 메아리로 되돌아오는 인간의 부르짖음이 아닙니다. 하느님께서는 그 부르짖음에 위로로 응답하십니다. 곤경 속에서 내가 주님을 불렀더니 주님께서 응답하시고 나를 넓은 곳으로 이끄셨네.(시편 118,5) 이 위로의 체험은 찬양으로 이어집니다. 제가 당신을 찬송하니 당신께서 제게 응답하시고 제게 구원이 되어 주셨기 때문입니다.(시편 118,21) 시편 기도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는 하느님께 대한 신뢰입니다. 하느님께서 우리의 피신처와 힘이 되시어 어려울 때마다 늘 도우셨기에 우리는 두려워하지 않네, 땅이 뒤흔들린다 해도 산들이 바다 깊은 곳으로 빠져든다 해도.(시편 46,2-3) 시편이 우리 자신의 기도가 되면, 우리 또한 시편 저자가 했던 것과 같은 체험을 하게 됩니다. 시편 저자가 비참한 상황에서 하느님께서 이루신 구원역사를 떠올리고 그분께 신뢰를 두어 위로를 얻게 되었듯이, 시편을 읽다 보면 지금 겪고 있는 고통 뒤에 가려져 있던 우리의 기억이 깨어납니다. 우리의 삶 전체를 관통하고 있는 하느님의 조건 없는 사랑에 대한 기억이 말이죠. 그 순간 이미 위로는 시작됩니다. 유배 중이던 이스라엘 백성은 하느님의 자비와 위로에 대한 믿음으로 고통과 두려움을 극복하는 데 어려움을 겪고 있었습니다. 이들은 나라가 멸망하기 직전까지도 회개하지 않고 하느님의 집인 성전이 있는 예루살렘에 위험이 닥칠 리 없다고 큰소리쳤습니다. 하지만 막상 유배를 겪고서야 자신들의 죄를 깨달았습니다. 그러고는 자신들의 죄 때문에 하느님께 버림받았다는, 하느님께서 자신들을 떠나버리셨다는 절망감에 사로잡혔습니다. 이에 하느님께서는 예언자들을 통해 당신 자신을 계시함으로써 백성을 격려하기를 멈추지 않으셨습니다. 정녕 주님께서는 너를 소박맞아 마음 아파하는 아내인 양 퇴박맞은 젊은 시절의 아내인 양 다시 부르신다. 너의 하느님께서 말씀하신다. “내가 잠시 너를 버렸지만 크나큰 자비로 너를 다시 거두어들인다. 분노가 북받쳐 내 얼굴을 잠시 너에게서 감추었지만 영원한 자애로 너를 가엾이 여긴다.” 네 구원자이신 주님께서 말씀하신다.(이사 54,6-8) 여기서 하느님은 당신과 이스라엘 사이의 계약을 인륜으로 맺어진 관계 가운데 가장 굳건한 혼인 관계에 비유하십니다. 그러니 비록 이스라엘이 죄를 지었다고 해도 하느님과의 관계가 단칼로 자르듯이 단절될 수 없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하느님은 더 나아가 당신과 이스라엘의 계약을 훨씬 강한 결속력을 가진 관계, 절대로 떼어 낼 수 없는 천륜의 관계에 비유하십니다. 바로 탯줄로 이어진 모자 관계 말입니다. 여인이 제 젖먹이를 잊을 수 있느냐? 제 몸에서 난 아기를 가엾이 여기지 않을 수 있느냐? 설령 여인들은 잊는다 하더라도 나는 너를 잊지 않는다.(이사 49,15) 너희는 젖을 빨고 팔에 안겨 다니며 무릎 위에서 귀염을 받으리라. 어머니가 제 자식을 위로하듯 내가 너희를 위로하리라. 너희가 예루살렘에서 위로를 받으리라.(이사 66,12-13) 이렇게 당신께서 결코 이스라엘을 버리지 않으신다는 확신을 심어주시면서 하느님은 예루살렘을 회복시킬 뿐 아니라 이전보다 더욱 번성하게 해주실 것을 반복해서 약속하십니다. 환성을 올려라, 아이를 낳지 못하는 여인아! 기뻐 소리쳐라, 즐거워하여라, 산고를 겪어 보지 못한 여인아! 버림받은 여인의 아들들이 혼인한 여인의 아들들보다 많을 것이다. 주님께서 말씀하신다.(이사 54,1) 너 가련한 여인아, 광풍에 시달려도 위로받지 못한 여인아. 보라, 내가 석류석을 너의 주춧돌로 놓고 청옥으로 너의 기초를 세우리라. 너의 성가퀴들을 홍옥으로, 너의 대문들을 수정으로, 너의 성벽을 모두 보석으로 만들리라.(이사 54,11-12) 우리는 고아가 아닙니다. 우리는 하느님 아버지라는 표현에 익숙하지만, 하느님께서는 우리의 어머니이기도 하십니다. 어떤 경우라도 젖먹이를 잊을 수 없는 어머니처럼 하느님은 우리를 그렇게 돌보십니다. 하느님의 사랑은 영원합니다. “산들이 밀려나고 언덕들이 흔들린다 하여도 나의 자애는 너에게서 밀려나지 않고 내 평화의 계약은 흔들리지 아니하리라.” 너를 가엾이 여기시는 주님께서 말씀하신다.(이사 54,10) 글 _ 함원식 신부 (이사야, 안동교구 갈전마티아본당 주임, 성서신학 박사) 1999년 사제서품 후 성경에 대한 전문적인 연구를 위해 프랑스로 유학, 파리 가톨릭대학교(Catholique de Paris)에서 2007년 ‘요나서 해석에서의 시와 설화의 상호의존성’을 주제로 석사학위를, 2017년 ‘욥기 내 다양한 문학 장르들 사이의 대화적 관계’를 주제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삽화 _ 김 사무엘 경희대학교 미술교육과를 졸업했다. 건축 디자이너이며, 제주아마추어미술인협회장으로 활동하고 있다. 제주 중문, 강정, 삼양 등지에서 수채화 위주의 그림을 가르치고 있으며, 현재 건축 인테리어 회사인 Design SAM의 대표이다.cpbc2026.02.12

위로받을 자격[월간 꿈CUM] 테마로 읽는 성경 _ 위로 (05) 삽화 성경은 바빌론에 포로로 끌려 온 당신 백성을 위로하고자 하시는 하느님의 열망이 그분의 마음에서부터 솟아오른다고 합니다. 에프라임아, 내가 어찌 너를 내버리겠느냐? 이스라엘아, 내가 어찌 너를 저버리겠느냐? 내가 어찌 너를 아드마처럼 내버리겠느냐? 내가 어찌 너를 츠보임처럼 만들겠느냐? 내 마음이 미어지고 연민이 북받쳐 오른다.(호세 11,8) 그렇다면 유다 백성은 하느님의 위로를 받아들여 해방되기 위해서 무엇을 해야 할까요? “너희는 광야에 주님의 길을 닦아라. 우리 하느님을 위하여 사막에 길을 곧게 내어라.”(이사 40,3) 하느님의 거처, 성전이 있는 예루살렘을 바라보고 그곳에서 오실 하느님을 맞이할 준비를 해야 합니다. 예루살렘과 바빌론 사이를 가로막고 있는 광야를 하느님의 영광이 지나오실 수 있는 길로 변화시켜야 합니다. 이것은 출애굽 사건 때처럼 하느님께서 다시 한번 당신 백성을 이끌고 광야를 건너시리라는 믿음을 지니고 기도하는 일입니다. 훗날, 이 말씀은 메시아의 오심을 준비하는 세례자 요한의 입에 담기게 됩니다. 기쁜 소식을 전하는 시온아 높은 산으로 올라가라. 기쁜 소식을 전하는 예루살렘아 너의 목소리를 한껏 높여라. 두려워 말고 소리를 높여라. 유다의 성읍들에게 “너희의 하느님께서 여기 오신다” 하고 말하여라.(이사 40,9) 우리말 성경에는 ‘너희의 하느님께서 여기 계시다’로 번역되어 있지만, 이어지는 ‘보라, 주 하느님께서 권능을 떨치며 오신다’를 고려할 때, ‘계시다’보다 ‘오신다’가 더 자연스러운 번역 같습니다. 그런데 하느님께는 승전하고 개선하는 위풍당당한 임금과 같은 모습만이 아니라, 양 떼를, 특히 가장 약한 양들을 조심스레 돌보는 자상한 목자와 같은 모습도 있습니다. 보라, 주 하느님께서 권능을 떨치며 오신다. 당신의 팔로 왕권을 행사하신다. 보라, 그분의 상급이 그분과 함께 오고 그분의 보상이 그분 앞에 서서 온다. 그분께서는 목자처럼 당신의 가축들을 먹이시고 새끼 양들을 팔로 모아 품에 안으시며 젖 먹이는 어미 양들을 조심스럽게 이끄신다.(이사 40,10-11) 이렇게 위로하시는 하느님은 당신 백성의 ‘고엘’(구원자)이십니다. “모든 인간이 나 주님이 너를 구해주는 이요 너의 구원자(고엘)가 야곱의 장사임을 알게 되리라.”(이사 49,26) 히브리어 ‘고엘’은 법적인 용어인데, 혈족 가운데 억울한 죽임을 당한 사람의 복수를 해주거나, 자손을 남기지 못하고 죽은 사람의 아내와 결혼하여 대를 이어주거나, 가난한 사람의 빚을 대신 갚아주는 등의 의무를 맡은 사람을 가리킵니다. 하느님께서는 당신이 ‘고엘’이라고 선언하심으로써 마치 이스라엘과 혈연관계에 있는 듯 말씀하십니다. 그러니 어찌 이스라엘을 돌보지 않고 불행을 두고만 보실 수 있겠습니까? 그리고 하느님께서는 ‘고엘’이시기에 이스라엘의 배신으로 깨어진 계약을 어떤 조건도 대가도 요구하지 않으시고 그냥 회복시켜 주십니다. 이스라엘이 그 계약을 복원시키기 위한 어떤 일도 한 적이 없는데 말입니다. 그런데 인간 ‘고엘’은 의무감 때문에 혈족을 돕지만, 하느님께서 이스라엘을 구원하시는 동기는 연민입니다. 예수님의 비유에 등장하는 착한 사마리아 사람이 오직 ‘가엾은 마음’(루카 10,33) 때문에 도와준 것처럼 말입니다. 당신 백성의 고통이 하느님의 마음에 연민을 불러일으킨 것입니다. “내가 잠시 너를 버렸지만 크나큰 자비로 너를 다시 거두어들인다. 분노가 북받쳐 내 얼굴을 잠시 너에게서 감추었지만 영원한 자애로 너를 가엾이 여긴다.”(이사 54,7-8) 이렇게 하느님의 연민에 기반하여 맺어진 새 계약은 시나이 계약과 다릅니다. 시나이 계약이 계약의 양쪽 당사자 모두에게 의무를 지우는 쌍무계약(雙務契約)이었다면, 이 새 계약에서는 오직 하느님만 의무를 지십니다. 다시 말하자면, 이 계약은, 신실하신 하느님께서 당신의 의무를 저버리실 리는 없으니, 이스라엘이 무슨 짓을 해도 깨어지지 않는 영원한 계약입니다. 연민의 하느님께서 주시는 위로를 받아들이기 위한 자격과 조건은 없습니다. 다만 구원으로써 위로하실 의지와 능력이 있는 하느님께 대한 믿음으로 그것을 받아들이기만 하면 됩니다. 이것은 참으로 기쁜 소식이 아닐 수 없습니다. 하늘아, 환성을 올려라. 땅아, 기뻐 뛰어라. 산들아, 기뻐 소리쳐라. 주님께서 당신 백성을 위로하시고 당신의 가련한 이들을 가엾이 여기셨다.(이사 49,13) 욥을 위로하고자 찾아온 친구들은 이 연민의 하느님을 알지도 못하고 닮지도 않았습니다. 그들은 오직 정의의 하느님만을 보았습니다. 그렇기에 상과 벌을 내리시는 일에 틀림이 없는 하느님을 옹호한답시고 욥이 겪는 지독한 불행의 책임을 그 자신에게 돌림으로써 위로 대신 오히려 고통만 가중한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제 탓으로 고통을 겪었는데도, 막상 고통받고 있는 당신 백성을 보신 하느님의 마음은 분노가 자리할 틈조차 없이 연민으로 가득 찼는데 말입니다. 고통 중에 있는 사람은 누구나 하느님의 위로를 받을 수 있습니다. 글 _ 함원식 신부 (이사야, 안동교구 갈전마티아본당 주임, 성서신학 박사) 1999년 사제서품 후 성경에 대한 전문적인 연구를 위해 프랑스로 유학, 파리 가톨릭대학교(Catholique de Paris)에서 2007년 ‘요나서 해석에서의 시와 설화의 상호의존성’을 주제로 석사학위를, 2017년 ‘욥기 내 다양한 문학 장르들 사이의 대화적 관계’를 주제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삽화 _ 김 사무엘 경희대학교 미술교육과를 졸업했다. 건축 디자이너이며, 제주 아마추어 미술인 협회장으로 활동하고 있다. 제주 중문, 강정, 삼양 등지에서 수채화 위주의 그림을 가르치고 있으며, 현재 건축 인테리어 회사인 Design SAM의 대표이다.cpbc2026.01.28

성경 원문으로 다시 듣는 예수님의 목소리 히브리어·그리스어로 풀어본 구약·신약 핵심 낱말 100여 개 예수님이 사용하신 히브리어 낱말 - 예수님 제자들이 사용한 그리스어 낱말 / 잔프랑코 라바시 추기경 / 박영식 신부 옮김 / 생활성서 신앙인에게 가장 중요한 책은 성경이다. 구약 성경은 전체 30만 5441개의 단어로 구성되었으며, 사용된 용어는 5750개에 달한다. 신약 성경에는 13만 8020개의 단어와 5433개의 어휘가 사용되었다. 그러나 그 원문을 보면 당연하게도 한국어는 물론이고 오늘날 세계 공용어인 영어 단어조차 존재하지 않는다. 하지만 가톨릭 신자라면 제대로 알거나 정확하게 구분하지는 못해도 ‘라틴어·히브리어·그리스어·아람어’ 등의 표현이 낯설지 않을 것이다. 학자들은 예수님 시대 팔레스티나 지역에서 모두 네 개의 언어가 사용됐을 것으로 추정한다. 로마 제국의 언어인 라틴어와 공용어인 그리스어, 지역 언어인 히브리어와 아람어다. 구약 성경은 대체로 히브리어로 작성됐고, 신약 성경은 그리스어로 표기됐다. 히브리어의 경우 유다인들의 바빌론 유배 이후 사어(死語)화되어 고대 근동 지역 언어였던 아람어로 대체되어 갔다. 예수님과 제자들도 아람어를 썼으나, 예수님께서 나자렛 회당에서 이사야 예언서를 읽으셨다는 성경의 기록을 참고하면 히브리어를 사용하셨음을 추론할 수 있다. 한국천주교회는 2005년 작업을 마친 공용 번역본을 가톨릭 성경으로 사용하고 있다. 인류의 발전과 함께 어휘는 풍부해지고 문법적으로도 정밀해졌다. 성경이 저술된 시대와 오늘날의 어휘에 큰 차이가 있는 이유다. 게다가 번역이라는 과정까지 거치며 문화적·사회적인 원인으로 각 언어의 성경에는 원문이 갖는 의미와 조금은 이질적인 표현도 있을 수 있다. 세례자 요한에게 세례 받는 예수님을 묘사한 뉴욕 밸리 스트림에 있는 축복받은 성체 교회의 스테인드글라스. OSV 「예수님이 사용하신 히브리어 낱말」은 30여만 개의 단어로 구성된 구약 성경에서 핵심적인 55개의 어휘를 골라 설명한다. 인류의 시작인 ‘아담’에서 시작해 창조의 단어인 ‘바라’, 발음할 수 없는 하느님의 이름 ‘야웨’(야훼), 오늘날 가장 필요한 개념인 평화 ‘샬롬’ 등 낱말의 히브리어 표기와 발음·의미·사용 빈도 등을 설명한다. 이 과정에서 히브리어의 다른 낱말이나 비슷한 뜻의 그리스어 낱말까지 소개한다. 이는 현대 어휘가 표현할 수 없는 더 많은 의미가 구약 성경의 히브리어에 담겨 있기 때문이며, 이를 통해 성경에 등장하는 인물들의 생각과 행동을 더욱 가까이 들여다볼 수 있다. 또한 이 어휘들은 나자렛과 카파르나움의 회당에서, 예루살렘 성전에서, 특별히 안식일과 축제일들에 전달된 예수님의 목소리를 지금의 우리에게 들려준다. “‘메시아’라는 단어를 모르는 사람이 있을까요? 하지만 메시아가 히브리어 형용사/명사 [마시아흐]의 우리말 음역임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을 것입니다. 구약 성경에 39회 등장하는 이 단어는 직역하면 ‘기름부음 받은 이’, 곧 ‘성별된 이’를 뜻합니다. 이 용어의 그리스어 번역이 [크리스토스]이며, 여기에서 그리스도Cristo가 파생되었습니다.”(131쪽) 함께 출간된 「예수님 제자들이 사용한 그리스어 낱말」은 신약 성경 속 주요 메시지를 담은 50여 개의 어휘를 폭넓게 설명한다. 그리스도교의 가장 큰 주제인 ‘아가페’에서 시작해 예수님을 상징하는 진리 ‘알레테이아’, 사도를 뜻하는 ‘아포스톨로스’, 예수님의 때와 시간을 의미하는 ‘호라’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주제와 낱말을 다룬다. 구약 성경에 사용된 히브리어와의 연관성과 차이점, 그리스 철학과의 관계, 변형된 낱말의 의미 등도 소개한다. “그리스어는 서구의 많은 어휘들을 생산한 언어이고, 현대 서양은 고전 형태나 ‘헬레니즘’으로 정의된 그리스어의 문화유산을 이어받았습니다. 사실, 오늘날 영어가 널리 통용되는 것과 마찬가지로 로마 제국 시대 민중들 사이에서는 그리스어가 라틴어보다 더 널리 사용되었으며, ‘공통’의 언어라는 의미의 ‘코이네’라 불리기도 했습니다. (중략) 신약 성경을 구성하는 스물일곱 권의 책들도 그리스어로 집필되었습니다.”(8쪽) 성서학자인 잔프랑코 라바시 추기경이 집필했다. 저자는 이탈리아 밀라노의 세텐트리오날레 신학교에서 성경 주석학을 가르쳤고, 교황청 성서위원회 위원 등을 역임하며 150권이 넘는 방대한 저술 활동을 이어오고 있다. 가톨릭대학교 총장 및 교황청 성서위원회 위원 등을 지낸 서울대교구 박영식(성사전담) 신부가 우리말로 옮겼다. 윤하정 기자 monica@cpbc.co.kr윤하정2026.01.06

계약의 하느님[월간 꿈 CUM] 테마로 읽는 성경 _ 위로 계약은 히브리어로 ‘브리트’입니다. 그런데 이 단어에는 하나의 역설이 숨어있습니다. 계약은 한편으로는 하느님의 순수한 열망에서 비롯되며, 은총에 의한 선택입니다. 모든 인간 가운데 일부를 자유롭게 선택하시어 일방적으로 주신 선물입니다. “나는 나와 너 사이에, 그리고 네 뒤에 오는 후손들 사이에 대대로 내 계약을 영원 계약으로 세워, 너와 네 뒤에 오는 후손들에게 하느님이 되어 주겠다.”(창세 17,7) 그렇지만 계약은 하느님께서 선택하신 백성의 동의, 부르심에 대한 사랑의 응답, 신뢰와 포기에 대한 요청을 담고 있기도 합니다. (모세는) 계약의 책을 들고 그것을 읽어 백성에게 들려주었다. 그러자 그들은 “주님께서 말씀하신 모든 것을 실행하고 따르겠습니다.” 하고 말하였다.(탈출 24,7) 하느님과 이스라엘의 계약에 관한 여러 성경 본문은 기본적으로 봉건 군주와 봉신 사이의 관계를 엄격히 규정한 히타이트 문서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입니다. 그런데 고대 근동의 영향을 받은(성경은 근동의 문서들 가운데 후대에 기록된 것이기에 이 현상은 당연합니다) 성경의 다른 본문들이 단순한 모방에서 그치지 않고 하느님 신앙 안에서 재해석하여 독창성을 부여하였듯이, 이 본문들도 계약을 군주와 신하 관계의 법적 엄정함을 넘어서 하느님과 희로애락을 함께 나누는 삶의 차원으로까지 확장합니다. 그래서 계약의 백성은 단지 율법 준수의 의무를 지는 것뿐 아니라 하느님께 불평할 권리까지 가지는 것입니다. 주님, 언제까지 마냥 저를 잊고 계시렵니까? 언제까지 당신 얼굴을 제게서 감추시렵니까?(시편 13,2) 또한, 하느님께 부르짖음과 회개, 찬양과 감사도 드릴 수 있는 것입니다.하느님과 이스라엘의 계약 관계는 혼인으로도 표현됩니다. 나는 너를 영원히 아내로 삼으리라. 정의와 공정으로써 신의와 자비로써 너를 아내로 삼으리라. 또 진실로써 너를 아내로 삼으리니 그러면 네가 주님을 알게 되리라.(호세 2,21-22) 여기 하느님과의 계약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단어들이 등장합니다. 먼저 우리말 성경에 ‘신의’로 번역된 ‘헤세드’는 호의, 충실, 진실, 성실, 자애, 사랑의 의미를 모두 품고 있는 풍부한 단어입니다. 이 ‘헤세드’는 마치 관계의 문을 여는 열쇠와 같아 함께 하는 삶, 나누는 삶을 가능케 합니다. 우리말 성경에 ‘공정’으로 번역된 단어는 ‘미쉬파트’인데, 이 단어는 특히 약자를 향한 정의를 강조합니다. 그러니 하느님과 계약을 맺는 것은 약자를 돌보시는 하느님의 호의에 동참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말 성경에 ‘진실’로 번역된 단어는 ‘에무나’인데, 땅에 견고히 박힌 말뚝처럼 우리를 지탱해 줄 변치 않는 진실을 가리킵니다. 그러니 하느님과의 계약은 신뢰할 만합니다. 그리고 이 구절에는 나오지 않지만, 하느님의 계약을 표현하는 데 사용되는 단어가 하나 더 있습니다. ‘아하브.’ 우리말 성경에는 종종 사랑으로 번역됩니다. 이 단어는 배타적인 사랑을 의미합니다. 그러니 계약에는 하느님과 당신 백성이모든 것에 앞서 서로를 사랑하고, 오직 서로에게만 충실할 의무가 따릅니다. 이사야 예언자가 전하는 위로의 메시지는 하느님과 이스라엘의 계약에 근거하고 있습니다. 계약에 충실하신 하느님은 이스라엘을 버리실 수 없습니다. 시온은 “주님께서 나를 버리셨다. 나의 주님께서 나를 잊으셨다.” 하고 말하였지. 여인이 제 젖먹이를 잊을 수 있느냐? 제 몸에서 난 아기를 가엾이 여기지 않을 수 있느냐? 설령 여인들은 잊는다 하더라도 나는 너를 잊지 않는다.(이사 49,14-15) 이사야 예언자는 유배 중인 백성에게 ‘두려워하지 말라’고 반복해서 외칩니다. 이미 놀라운 권능으로 이집트에서 종살이하던 당신 백성을 구원하신 하느님께서 이제 새 출애굽 사건을 일으키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신다. 그분은 바다 가운데에 길을 내시고 거센 물 속에 큰길을 내신 분, 병거와 병마 군대와 용사들을 함께 나오게 하신 분. 그들은 쓰러져 다시는 일어나지 못하고 꺼져 가는 심지처럼 사그라졌다. 예전의 일들을 기억하지 말고 옛날의 일들을 생각하지 마라. 보라, 내가 새 일을 하려 한다. 이미 드러나고 있는데 너희는 그것을 알지 못하느냐? 정녕 나는 광야에 길을 내고 사막에 강을 내리라.(이사 43,16-19) 이사야의 논리를 요약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계약의 하느님은 당신 백성을 구원할 의지를 갖고 계시다. 그리고 하느님은 당신 백성을 구원할 능력이 있음도 이미 보여주셨다. 그러니 포로 신세로부터의 해방이 가까이 왔다. 하느님의 위로는 공허한 말이 아닙니다. “이처럼 내 입에서 나가는 나의 말도 나에게 헛되이 돌아오지 않고 반드시 내가 뜻하는 바를 이루며 내가 내린 사명을 완수하고야 만다.”(이사 55,11) 글 _ 함원식 신부 (이사야, 안동교구 갈전마티아본당 주임, 성서신학 박사) 1999년 사제서품 후 성경에 대한 전문적인 연구를 위해 프랑스로 유학, 파리 가톨릭대학교(Catholique de Paris)에서 2007년 ‘요나서 해석에서의 시와 설화의 상호의존성’을 주제로 석사학위를, 2017년 ‘욥기 내 다양한 문학 장르들 사이의 대화적 관계’를 주제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삽화 _ 김 사무엘 경희대학교 미술교육과를 졸업했다. 건축 디자이너이며, 제주 아마추어 미술인 협회장으로 활동하고 있다. 제주 중문, 강정, 삼양 등지에서 수채화 위주의 그림을 가르치고 있으며, 현재 건축 인테리어 회사인 Design SAM의 대표이다. 2025.12.12

WYD 앞두고 청소년사목 ‘자기주도형’으로서울대교구, 체험·나눔 중심 신앙교육 ‘나다’ 확산성경 나눔·경청 중심… 청소년 신앙 주체성 키운다 2027 서울 세계청년대회(WYD)가 본당 청소년 사목에 활력을 불어넣을 기회로 주목받는 가운데, 서울대교구가 청소년사목 새 방법론 ‘나다(I AM)’를 WYD 교육과 연계해 도입하는 청사진을 내놨다. 청소년을 신앙의 주체로 세우겠다는 계획이다. 이를 위해 교구 청소년국 중고등부(담당 김준휘 신부)는 3일 서울 주교좌 명동대성당 문화관 꼬스트홀에서 교구장 정순택 대주교와 함께하는 ‘청소년을 위한 WYD 교육과 연계한 나다(I AM) 설명회’를 열었다. 정 대주교는 “청소년들이 피동적으로 교리를 듣는 방식에서 벗어나 자기 주도적으로 체험하고 나누게 하며, 사목자는 청소년과 만나는 접점을 늘리는 것이 핵심”이라고 강조했다. ‘나다’는 청소년들이 주일학교의 기존 일방적·수동적 교육 대상자에서 벗어나 능동적 참여자로 전환하는 게 특징이다. 학년의 장벽을 넘어 적은 인원으로 구성된 연령 통합 모임 안에서 체험과 성경 나눔에 참여해 다양한 인간관계를 경험하고 신앙을 키워나가도록 한다. 교리교사 역할도 경청하는 동반자로 변화한다. 교리교사는 전문 교리 지식을 갖추고 교안을 작성해 수업을 준비해야 했다. 하지만 ‘나다’는 성경을 매개로 삶을 나누고, 열린 질문으로 구성된 성경 나눔 교재 ‘말씀 길잡이’를 활용한다. 청소년들의 이야기를 잘 들어주고 나눔이 원활하게 함께할 의지만 있다면 청년·학부모 누구나 모임 봉사자가 될 수 있다. 사제도 이를 총괄하는 코디네이터인 동시에 모임 봉사자로 경청하고 동반한다. 설명회에서 나다를 시범 도입한 교리교사들이 효과를 설명했다. 박지은(안젤라, 행운동본당)씨는 “교사가 저 1명에 학생도 7명이라 운영에 어려움을 겪었는데, 나다 덕에 청년과 학부모들을 모임 봉사자로 투입해 도움을 얻었고, 교안 작성 부담도 줄었다”고 밝혔다. 채승병(미카엘, 혜화동본당)씨도 “10주간 시범 운영 결과 14명이던 학생 수가 26명으로 증가했다”고 했다. 정릉4동본당 교사들은 “대화의 질이 향상되고, 적은 인원이 오히려 영적으로 밀착하게 됐다”고 전했다. 학생들도 “성경을 더 열심히 읽게 되고, 교사들과 소통도 늘었다”고 했다. 교구는 서울 WYD를 계기로 본당에서 나다가 더 많이 활용될 수 있도록 적극적으로 보급할 예정이다 청소년국장 장원석 신부는 “그간 청소년 사목 현장에서 모아온 작은 불꽃들이 2027 서울 WYD라는 큰 여정과 함께 활활 타오르는 시간이 올 것”이라며 사목자와 교사들의 동참을 당부했다. 교구 청소년국은 오는 10월부터 2027년 5월까지 본당 청소년을 대상으로 제공되는 ‘WYD 영성 교육’ 커리큘럼 전반에 나다 방법론을 적용해 알릴 계획이다. 이학주 기자 goldenmouth@cpbc.co.kr이학주2026.07.07

누가 총성 위에 성경을 얹었나?… 트럼프는 왜 전쟁에 하느님 말씀 들이밀까배경엔 미국 내 시민종교와 강력한 복음주의 기독교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이 2026년 2월 24일 워싱턴 국회의사당에서 국정연설을 하고 있다. OSV 미국 정치 지도자들이 전쟁이나 군사 행동을 수행하는 과정에서 성경 구절을 인용하는 장면들이 심심치 않게 목격된다. 최근 피터 헤그세스 미 국방장관이 전쟁 상황 브리핑 자리에서 시편 구절을 인용하며 군사 행동의 정당성을 강조해 또다시 논란을 일으켰다. 전쟁 속 총성 위에 성경을 얹는 미국의 정치적 수사는 단순한 개인 신앙 표현이 아니라, 미국 내 뿌리 깊은 정치 구조와 맞닿아 있다는 분석이다. 미국 정치학자 로버트 벨라는 이에 대해 ‘시민종교(civil religion)’라는 개념으로 설명했다. 그는 미국 사회에서 종교 언어가 공적 영역에서 기능하는 방식에 대해 “미국의 시민종교는 국가의 역사와 정치 행위를 초월적 의미와 연결시키는 역할을 한다”고 분석한 바 있다. 실제 미국 대통령 연설에서 반복되는 “God bless America”(미국에 신의 축복을)와 같은 표현은 국가 정책을 단순한 정치 선택이 아니라, 도덕적 사명으로 인식하게 만드는 장치로 작동해왔다. 외교사학자 앤드루 프레스턴 역시 비슷한 맥락에서 “미국 외교 정책은 오랫동안 종교적 언어와 깊이 결합돼 왔으며, 지도자들은 이를 통해 국제 문제를 선과 악의 서사로 설명해왔다”고 지적했다. 이러한 서사는 특히 전쟁 상황에서 더욱 강하게 드러난다. 전문가들은 “전쟁은 도덕적 정당화가 필요한 행위이며, 종교 언어는 이를 가장 강력하게 뒷받침하는 수단이 된다”고 설명한다.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을 둘러싼 미국 정치에서 전쟁과 종교 언어의 결합은 점점 더 뚜렷해지고 있다. 군사 행동과 정치적 갈등을 설명하는 자리에서 성경 구절과 기도가 등장하고, 심지어 전쟁 상황 중에 백악관 안에서 목회자들이 대통령을 둘러싸고 기도하는 장면까지 연출되면서 논란이 이어지고 있다. 미군 내 일부 지휘관들은 “전쟁은 주님의 계획”이며 “트럼프는 기름부음 받은 지도자”라는 극단적 언급까지 서슴치 않는다. 대표적인 장면은 2020년 6월 워싱턴의 세인트존스 교회 앞에서 연출됐다. 당시 트럼프 대통령은 시위 진압 직후 성경을 들고 서 있는 모습을 공개하며 강경 대응을 정당화하는 메시지를 던졌다. 정치적 갈등 상황 속에서 종교 상징이 결합된 이 장면은 ‘권력과 성경의 결합’이라는 비판을 낳았다. 트럼프 2기 들어 이러한 흐름은 전쟁 상황과 더욱 직접 연결되는 모습으로 나타나고 있다. 2025년 이란 핵시설 공습 발표 직후 그는 “God bless America, God bless Israel”이라고 말하며 군사 행동을 종교적 축복의 언어로 연결시켜 마무리했다. 이어 2026년 초에는 백악관 집무실에서 복음주의 목회자들이 대통령을 둘러싸고 안수기도를 하는 장면이 공개되기도 했다. 이 자리에서 한 목사는 “우리 대통령에게 우리나라를 ‘주님 아래 하나의 나라’로 다시 이끌 힘을 계속 주십시오”라고 기도한 것으로 알려졌다. 전쟁 국면에서 국가 권력과 종교 의례가 결합된 장면이 계속 연출되고 있는 것이다.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이 지난 2월 미국 주도로 설립한 ‘평화위원회’ 첫 회의에서 여러 국가 지도자들과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하지만 이 위원회는 가자지구 통치와 재건을 감독하기 위해 설립된 기구여서 비판을 받고 있다. OSV 이같은 흐름의 배경에는 미국 정치에서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복음주의 기독교가 자리하고 있다. 복음주의는 성경의 권위를 강조하고 개인의 회심과 선교를 중시하는 개신교 흐름으로, 미국 유권자들 가운데 상당한 비중을 차지한다. 이들은 정치적 선택에서도 신앙적 가치와 세계관을 중요하게 반영하는 경향이 강하며, 특히 이스라엘과 중동 문제를 성경적 맥락에서 해석하는 경우가 많다. 미국에서의 정치와 종교의 결합은 이른바 ‘정치 문화 + 지지층 결집 + 전쟁 정당화’에 가장 좋은 3축 구조가 되고 있다. 정치 상황에서는 도덕적 정당성에, 전쟁 때에는 ‘선과 악의 싸움’으로 단순화해 전쟁은 정의의 발로이며, 신의 계획이라는 서사 구조를 만드는 데 성경이 이용되는 상황으로 이어지는 것이다. 미국 내 정치사회학자들은 “특히 미국 정치에서 복음주의 기독교 유권자층은 핵심적인 동원 기반이며, 종교 언어는 이들에게 강한 정체성과 결속을 제공한다”고 분석하고 있다. 특히 중동 문제와 이스라엘 정책과 관련해 성경적 해석이 결합되면서 정치인들의 종교적 표현은 단순한 수사를 넘어 정치 전략으로 기능하게 된 셈이다.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이 2025년 1월 20일 미국 제47대 대통령에 취임하면서 성경 앞에 선서를 하고 있다. OSV 미국 내 일부 언론들도 교회와 정치가 결합한 현 트럼프발 전쟁 시대를 “교회와 정치가 결합한 성스러운 전쟁(holy war)으로 묘사되고 있다”고 비판하고 있다. 미 매체 LA Times는 “미국 역사상 가장 비그리스도교적 대통령 중 하나로 평가받는 트럼프가 계속 자신을 예수님의 외투로 감싸고 있다”며 “이번 사순 시기에는 어느 때보다 더 트럼프와 그를 둘러싼 현실을 회개해야 할 때”라고 지적했다. 전쟁을 일으키는 이들의 기도와 포탄 쏟아지는 전장에서 평화를 염원하는 이들의 기도는 다른 걸까? 가톨릭교회는 이러한 흐름에 분명한 선을 긋는다. 예루살렘 라틴 총대교구 피에르바티스타 피자발라 추기경은 3월 15일 “전쟁을 정당화하기 위해 하느님의 이름을 사용하는 것은 가장 큰 죄”라고 지적하면서 “전쟁은 정치적 이해관계의 산물일 뿐 신앙의 문제가 아니다”라고 강조했다. 피자발라 추기경은 이러한 표현을 “하느님이 아니라 인간의 욕망을 말하는 유사 종교적 언어”라고 규정했다. 그러면서 “하느님은 고통받는 이들, 억압받는 이들, 침묵 속에서 희생되는 이들과 함께 계신다”고 거듭 강조했다. 미국 교회 지도자들도 계속 우려를 표해왔다. 시카고대교구장 블레이즈 쿠피치 추기경은 3월 7일 전쟁이 영화나 게임처럼 소비되는 현실을 비판하며 “이는 인간의 고통을 가리고 사회를 폭력에 무감각하게 만든다”고 지적했다. 가톨릭교회는 하느님의 이름으로 폭력을 정당화하는 것에 분명한 반대 입장을 천명하고 있다. 신앙은 인간의 양심을 일깨우고 평화를 향하도록 이끌어야 하지만, 권력과 결합될 때는 오히려 폭력을 합리화하는 수단으로 변질될 수 있기 때문이다. 이정훈 기자 sjunder@cpbc.co.kr 이정훈2026.03.19

위로하시는 하느님[월간 꿈 CUM] 테마로 읽는 성경 _ 위로 (03) 삽화 _ 김 사무엘 위로하여라, 위로하여라, 나의 백성을. 너희의 하느님께서 말씀하신다. 예루살렘에게 다정히 말하여라. 이제 복역 기간이 끝나고 죗값이 치러졌으며 자기의 모든 죄악에 대하여 주님 손에서 갑절의 벌을 받았다고 외쳐라.(이사 40,1-2) 제2 이사야 예언자(전통적으로 이사야서는 기록 시기에 따라 세 부분으로 나뉘는데, 1-39장을 제1 이사야서, 40-55장을 제2 이사야서, 56-66장을 제3 이사야서라고 부릅니다)가 나라가 망한 뒤 이방 땅으로 유배를 끌려간 유다 백성에게 전한 하느님의 말씀입니다. 이사야 예언자를 통해 뿌리 뽑힌 당신 백성을 염려하고 위로하시려는 하느님의 말씀을 전해 들은 이들이 어찌 감동하지 않았겠습니까? 이 말씀의 배경은 기원전 540년경입니다. 기원전 587년 신바빌로니아에 의해예루살렘이 정복당해 나라의 주권을 잃은 지 한 세대 이상의 시간이 흐른 상태입니다. 특히 철저히 파괴되어 여전히 황폐해진 상태로 남아 있는 성전은 유다 백성에게서 하느님을 다시 만날 수 있으리라는 희망마저 빼앗아 갔습니다. 성전은 하느님께서 당신 백성 가운데 머무시는 처소로 여겨졌기 때문입니다. 유배를 끌려간 유다 백성은 고향에서 추방당한 고통을 겪었으며 이방 땅에서 자신들의 문화와 종교마저 박탈당하는 시련을 맛보았습니다. 유다 포로들의 비탄을 시편 137편이 증언합니다. 바빌론 강 기슭 거기에 앉아 시온을 생각하며 우네. 거기 버드나무에 우리 비파를 걸었네. 우리를 포로로 잡아간 자들이 노래를 부르라, 우리의 압제자들이 흥을 돋우라 하는구나. “자, 시온의 노래를 한가락 우리에게 불러 보아라.” 우리 어찌 주님의 노래를 남의 나라 땅에서 부를 수 있으랴?(시편 137,1-4) 이들은 더는 시온의 노래, 즉 하느님을 찬양하는 노래를 부를 수 없었습니다. 이방 땅에서 하느님을 찾을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믿음이 심각하게 위협받는 이 극단적인 시련의 시기에 이사야 예언자의 선포가 이루어집니다. 이방 신들의 땅에서 예언자는 이 세상의 주권을 가진 유일한신은 하느님뿐이심을 선포합니다. 그리고 바로 그 하느님께서 이스라엘과 계약을 맺으셨기에, 하느님께서는 당신 백성에게 씌워진 바빌론의 멍에를 벗겨주시고 고향으로 돌아가게 해 주실 것이라고 선포합니다. 예언자의 이 선포를 통해 하느님은 고통 중에 있는 유다 백성을 위로하십니다. 예언자의 선포가 ‘위로하여라, 위로하여라’라는 하느님의 말씀으로 시작하는 사실에 주목합시다. 이 말씀은 현재형입니다. 하느님께서 바로 지금 당신의 말씀을 듣는 이들에게 직접 반복해서 약속하고 계십니다. 그들을 위로하기 위해 움직이시겠다고 말입니다. 약속에 충실하신 하느님께서는 당신 백성의 해방을 위해서 한 이방 임금을 이용하십니다. 기원전 538년 페르시아 제국의 키루스 임금이 바빌로니아를 정복하고 포로로 끌려와 있던 유다 백성을 고향으로 돌려보내 준 것입니다. 그뿐만 아니라 키루스는 놀랍게도 예루살렘 성전의 재건을 돕기까지 합니다. 이 역사적 사건은 하느님께서 온 세상의 하느님이심을 드러냅니다. 그리고 이 사건은 바빌로니아보다 강한 페르시아조차 하느님의 도구라면, 당연히 유다가 바빌로니아에 멸망한 것이 하느님의 패배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바빌로니아가 유다의 죄를 심판하기 위한 하느님의 도구였다는 사실의 강력한 증거가 됩니다. 이렇게 이사야의 예언, 즉 하느님의 약속은 그대로 실현되었습니다. 이것은 하느님의 위로는 그저 연민을 드러내는 부질없는 말 몇 마디가 아니라 실제로 절망으로부터의 구원을 이루어 내는 힘이 있음을 보여줍니다. 앞의 글에서 위로를 가리키는 히브리어에는 안도의 한숨을 쉬게 한다는 의미가 있다고 말씀드렸습니다. 하느님의 위로로 유다 백성은 안도의 한숨을 쉴 수있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숨은 곧 생명입니다. 들숨과 날숨의 이어짐이 생명을 줍니다. 그래서 우리는 죽음을 숨이 끊어졌다고 표현하죠. 창세기는 하느님께서 흙덩이에 숨을 불어넣으시자, 사람이 되었다고 합니다. 이사야 예언자는 이렇게 말합니다. 하늘을 창조하시고 그것을 펼치신 분 땅과 거기에서 자라는 온갖 것들을 펴신 분 그곳에 사는 백성에게 목숨을, 그 위를 걸어 다니는 사람들에게 숨을 넣어 주신 분 주 하느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다.(이사 42,5) 하느님의 위로는 숨조차 제대로 쉴 수 없는 죽음의 고통을 겪던 유다 백성에게 생명을 돌려주었습니다. 글 _ 함원식 신부 (이사야, 안동교구 갈전마티아본당 주임, 성서신학 박사) 1999년 사제서품 후 성경에 대한 전문적인 연구를 위해 프랑스로 유학, 파리 가톨릭대학교(Catholique de Paris)에서 2007년 ‘요나서 해석에서의 시와 설화의 상호의존성’을 주제로 석사학위를, 2017년 ‘욥기 내 다양한 문학 장르들 사이의 대화적 관계’를 주제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삽화 _ 김 사무엘 경희대학교 미술교육과를 졸업했다. 건축 디자이너이며, 제주 아마추어 미술인 협회장으로 활동하고 있다. 제주 중문, 강정, 삼양 등지에서 수채화 위주의 그림을 가르치고 있으며, 현재 건축 인테리어 회사인 Design SAM의 대표이다.2025.11.11

헛된 위로[월간 꿈CUM] 테마로 읽는 성경 _ 위로 (02) 삽화 _ 김 사무엘 인간의 위로는 종종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욥의 경우를 봅시다. 욥은 흠 없고 올곧으며 하느님을 경외하고 악을 멀리하는 이였습니다.(욥 1,1 참조) 하느님께서도 욥을 땅 위에 다시 없을 사람으로 인정할 정도였습니다.(욥 1,8 참조) 그런데 사탄은 욥의 의로움에 불순한 동기가 숨어있을 수 있다고, 즉, 의로운 행위의 결과로 주어지는 복 때문에 욥이 그렇게 행하는 것은 아닌지 의심합니다. 만일 그렇다면, 하느님께서 인간의 이익을 위한 욕망에 이용당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느님은 사탄에게 욥에 대한 시험을 허락하십니다. 그 결과 욥은 재산을 잃고, 자녀를 잃고, 건강마저 잃습니다. 이렇게 고통 중에 있는 욥을 친구 엘리파즈, 빌닷, 초바르가 찾아옵니다. 방문의 목적은 위로입니다. 욥의 세 친구가 그에게 닥친 이 모든 불행에 대하여 듣고, 저마다 제 고장을 떠나왔다. 그들은 테만 사람 엘리파즈와 수아 사람 빌닷과 나아마 사람 초바르였다. 그들은 욥에게 가서 그를 위안하고 위로하기로 서로 약속하였다.(욥 2,11) 친구들이 고통 중에 있는 욥 앞에서 첫 번째로 취한 태도는 침묵입니다. 그들은 이레 동안 밤낮으로 그와 함께 땅바닥에 앉아 있었지만, 아무도 그에게 말 한마디 하지 않았다. 그의 고통이 너무도 큰 것을 보았기 때문이다.(욥 2,13) 때로는 침묵이 가장 좋은 위로 혹은 유일한 위로일 수도 있습니다. 그렇지만 친구들은 욥의 고통에 공감해 주는 것만으로는 만족할 수 없어 결국 입을 열어 말하기 시작합니다. 친구들은 욥의 고통이 어디서 비롯되었는지 알려주려 합니다. 그들의 생각에 욥은 죄를 지어서 하느님의 벌을 받았습니다. 그러니 욥이 자신의 죄를 깨닫고 회개하여 하느님의 용서를 받으면 고통은 사라지는 것입니다. 하지만 욥은 친구들의 의견에 동의할 수 없습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지은 죄가 떠오르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니 친구들의 말은 오히려 욥의 고통을 가중할뿐입니다. 친구들은 욥을 위로하는 데 실패합니다. “자네들은 모두 쓸모없는 위로자들이구려.”(욥 16,2) 이제 하느님께서 직접 등장하십니다.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변호자를 자처하며 위로자 대신 고발자가 되어버린 친구들을 비난하시고, 욥의 의로움을 인정하십니다. “이 모든 것은 너희가 나의 종 욥처럼 나에게 올바른 것을 말하지 않았기 때문이다.”(욥 42,8) 비록 하느님께서 욥의 고통의 원인을 밝히지는 않으시지만, 적어도 친구들의 말처럼 자신의 죄 때문에 겪는 고통은 아니라고 하십니다. 그리고 욥의 자녀와 재산을 이전보다 더 풍성하게 돌려주심으로써 그를 위로하십니다. 이렇게 욥기는 진정 위로할 수 있는 분은 오직 하느님뿐이심을 보여줍니다. 하느님께서 욥을 위로하신 다음 그제야 가족과 친구들이 욥을 위로한답시고 몰려오는 장면은 해학적입니다. 그의 형제들과 자매들과 옛 친구들이 모두 그의 집에 와서 그와 함께 음식을 먹었다. 그리고 주님께서 그에게 들이닥치게 하셨던 모든 불행에 대하여 그를 동정하고 위로하며, 저마다 은전 하나와 금 고리 하나를 그에게 주었다.(욥 42,11) 시편은 위로자를 찾을 수 없는 절망적인 현실을 말합니다. 모욕이 제 마음을 바수어 저는 절망에 빠졌습니다. 동정을 바랐건만 허사였고 위로해 줄 이들을 바랐건만 찾지 못하였습니다.(시편 69,21) 코헬렛도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나는 또 태양 아래에서 자행되는 모든 억압을 보았다. 보라, 억압받는 이들의 눈물을! 그러나 그들에게는 위로해 줄 사람이 없다. 그 억압자들의 손에서 폭력이 쏟아진다. 그러나 그들에게는 위로해 줄 사람이 없다.”(코헬 4,1) 이것은 코헬렛 저자 개인만의 말이 아니라, 기원전 587년 나라의 멸망과 바빌론 유배를 겪은 유다 백성 전체의 절망적 부르짖음을 대변하는 것입니다. 같은 시대를 배경으로 하는 애가도 정복당하고 파괴된 예루살렘과 성전을 두고 한탄합니다. “시온이 두 손을 내뻗었건만 위로해 줄 이 아무도 없다오.”(애가 1,17) “그들은 제가 탄식하는 것을 듣건만 아무도 저를 위로해 주지 않습니다.”(애가 1,21) 어떤 사람에게서도 위로를 찾을 수 없어 절망에 빠진 이들을 누가 위로할 수 있을까요? 오직 한 분 하느님만이 참으로 위로하실 수 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고통, 버려짐, 죽음에 의미를 부여하심으로써 위로해 주십니다. 글 _ 함원식 신부 (이사야, 안동교구 갈전마티아본당 주임, 성서신학 박사) 1999년 사제서품 후 성경에 대한 전문적인 연구를 위해 프랑스로 유학, 파리 가톨릭대학교(Catholique de Paris)에서 2007년 ‘요나서 해석에서의 시와 설화의 상호의존성’을 주제로 석사학위를, 2017년 ‘욥기 내 다양한 문학 장르들 사이의 대화적 관계’를 주제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삽화 _ 김 사무엘 경희대학교 미술교육과를 졸업했다. 건축 디자이너이며, 제주 아마추어 미술인 협회장으로 활동하고 있다. 제주 중문, 강정, 삼양 등지에서 수채화 위주의 그림을 가르치고 있으며, 현재 건축 인테리어 회사인 Design SAM의 대표이다.2025.10.23

창세기 속 여성 ‘대등한 존재’로 번역한 선종완 신부 선종 50주기 학술심포지엄 한국 최초 근대 성서학자 재평가 사목 유산 조명, 시복 추진 속도 서울대교구 총대리 겸 시복시성위원회 위원장 구요비 주교를 비롯한 선종완 라우렌시오 신부 선종 50주기 학술 심포지엄 참가자들이 기념사진을 찍고 있다. 말씀의성모영보수녀회 제공 “사람이 저홀로 있음이 좋지 않으니, 그와 대등(對等)한 돕는 이를 만들어 주겠노라.” 1958년 한국인 최초로 히브리어 구약 성경 본문을 우리말로 옮긴 선종완(라우렌시오, 1915~1976) 신부는 창세기의 여자를 남자와 ‘대등한 존재’로 해석했다. 이는 20년 뒤 서구 여성신학계에서 나온 ‘그에게 어울리는 짝’이라는 표현보다도 한 걸음 앞선 여성 시각의 번역이라는 주장이 제기됐다. 또 선 신부가 학력과 경제적 형편 때문에 수도 생활의 기회를 얻기 어려웠던 여성들을 위해 1960년 ‘말씀의성모영보수녀회’를 설립한 것은 한국 가톨릭교회가 교육 사업을 통해 실천해온 복음 정신의 연장선이라는 평가도 나왔다. 선 신부 선종 50주기를 맞아 11일 경기 과천 말씀의성모영보수녀회 본원에서 ‘말씀으로 산 사제, 선종완 라우렌시오 신부’를 주제로 열린 학술 심포지엄에서다. 주제 발표를 맡은 이환진(감리교신학대학교 명예교수) 목사는 선 신부를 4세기경 불가타(대중 라틴어 성경)를 번역한 성 예로니모 사제 학자에 빗대 ‘동아시아의 예로니모’라고 불렀다. 이 목사는 “성경을 번역하기 위해 말씀의성모영보수녀회를 설립하고 수녀들과 함께 성경을 번역한 선 신부는 성 예로니모를 닮았다”면서 “성인이 바울라 성녀의 헌신으로 불가타를 번역할 수 있었던 것처럼, 그의 성경 번역 역시 수녀들의 헌신이 없었다면 불가능했다”고 강조했다. 이어 “동아시아 성경 번역 전통에서 이렇게 여성과 함께 번역하면서 여성 시각의 번역 성경을 내놓은 번역가는 찾기 어렵다”며 “‘그와 대등한 돕는 이’(창세 2,18)라는 번역이 대표적인 예”라고 말했다. 현재 가톨릭 성경은 해당 히브리어 본문 표현을 ‘그에게 알맞은 협력자’라고 번역하고 있다. 이민석(대건 안드레아) 한국교회사연구소 책임연구원은 “선 신부는 말씀의성모영보수녀회를 설립해 성경을 삶 속에서 실천하는 공동체적 모델을 제시했다”며 “이는 성경을 학문적 연구 대상에 머무르게 하지 않고 교회 공동체 안에서 살아 있는 규범으로 구현하고자 한 시도”라고 역설했다. 이어 “그는 배우지 못한 여성들도 수도자의 삶을 살아갈 수 있길 바라며 성경 번역으로 얻은 수익금으로 수녀회를 설립했다”며 “의료 봉사·교육·사회사업 때문에 학력 등을 입회 자격으로 요구했던 여느 수도회와 달리, 초등학교 졸업 정도의 학력만 갖추면 받아들여 수련을 받게 했다”고 했다. 그러면서 “이는 선 신부가 신학교에 다녔던 일제강점기, 한국 교회가 학생들의 어려운 사정을 고려해 무료 교육을 시행하고자 한 분위기와 연관이 있을 것”이라며 “선 신부의 생애는 용소막이라는 굳건한 신앙 공동체와 한국 가톨릭교회의 신학교 교육이라는 역사적·제도적 기반 속에 형성된 결과”라고 풀이했다. 주원준(토마스 아퀴나스) 한님성서연구소 수석연구원은 선 신부의 1948~1952년 로마·예루살렘 유학 시절 육필 노트 44권과 구약 성경 번역본 「선종완역」 연구 결과를 발표했다. 이 노트에는 히브리어·그리스어뿐만 아니라 아람어·수메르어·아카드어·이집트어 등 고대 근동 언어를 체계적으로 학습한 내용과 발굴 유물을 스케치한 기록이 담겨 있다. 주 연구원은 이를 토대로 “선 신부는 가톨릭과 개신교를 통틀어 고대 근동학과 본문 비평을 가장 먼저 수용한 ‘한국 최초의 근대적 성서학자’라고 칭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또 “「선종완역」은 한국 최초의 근대적 성서 입문서”라며 “가톨릭 전승에 충실하면서도 ‘야훼’나 ‘판관기’ 등 수많은 번역어를 참신하게 제시한 연구서”라고도 말했다. 이날 심포지엄은 말씀의성모영보수녀회와 선종완신부시복추진위원회가 마련했다. 선 신부의 제자인 서울대교구 총대리 겸 시복시성위원회 위원장 구요비 주교가 축사를 맡았다. 선 신부는 말년에 원주교구 소속이었으나 1976년 서울 명동 성모병원(현 가톨릭회관 건물)에서 선종했으므로, 그의 시복시성 안건의 관할 주교는 서울대교구장 정순택 대주교다. 정 대주교는 올해 초 선 신부의 시복시성 추진 요청을 받아들였으며, 청구인인 말씀의성모영보수녀회 총원장 정복례 수녀가 수녀회 소속 노경숙 수녀를 안건 청원인으로 지명한 것을 승인했다. 이학주 기자 goldenmouth@cpbc.co.kr이학주2026.07.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