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 속 상징] 신발](//cpbc.co.kr/CMS/newspaper/2008/08/rc/263174_1.1_titleImage_1.jpg)
[성경 속 상징] 신발신을 벗는 것은 존경의 표시허영엽 신부(서울대교구 문화홍보국장)얼마 전 탈북자의 실상을 그린 영화가 개봉되어 많은 이들의 눈물샘을 자극했다. 북한 함경도 한 탄광마을 아버지와 어머니 그리고 열한 살 아들, 세 가족의 슬픈 이야기이다. 주인공 남자 어린이가 기차역 대합실에서 잠을 자면서 도둑 맞지 않기 위해 신발을 안고 자는 장면이 무척 인상적이었다. 신발을 신는 것은 발을 보호하기 위해서다. 다른 사람의 신발을 소유하는 것은 그 사람을 통제한다는 의미를 갖는다. 이처럼 발과 마찬가지로 신발도 소유와 권력의 상징으로 사용됐던 것이다. 그래서 신발 밑에 깔리는 것은 타인의 지배를 받는 것을 의미한다. 성경에서 신발은 가치 없는 물건을 상징했다. 세례자 요한은 자신을 소개할 때 예수님의 신발 끈을 풀어 드릴 자격조차 없는 사람이라고 말한다. "나보다 더 큰 능력을 지니신 분이 내 뒤에 오신다. 나는 몸을 굽혀 그분의 신발 끈을 풀어 드릴 자격조차 없다"(마르 1,7). 주인의 신을 드는 것은 하인이 하는 가장 천한 일중의 하나였다. 주인이 집 안에 들어갈 때 신을 잘 보관했다가 주인이 신을 신을 때 재빨리 준비해야 했다. 구약 시대에 노예들이 신발 한 켤레 값에 매매됐다.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다. '이스라엘의 세 가지 죄 때문에, 네 가지 죄 때문에 나는 철회하지 않으리라. 그들이 빚돈을 빌미로 무죄한 이를 팔아넘기고 신 한 켤레를 빌미로 빈곤한 이를 팔아넘겼기 때문이다'"(아모 2,6). 신발을 신는 것은 특별한 임무나 여행을 위한 준비를 의미하기도 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파견할 때 신발을 신으라고 지시하셨다. 신발은 신되 옷도 두 벌은 껴입지 말라고 이르셨다(마르 6,9). 여기서 신발을 신는 것은 그 사람이 노예가 아니라 자유인임을 의미하는 하나의 상징이 됐다. 신발을 신는 것은 자유민의 특권이었고 포로와 노예는 맨발로 다녀야 했기 때문이다. 신발을 벗는 행위가 법적 의미를 갖는 경우도 있었다. "옛날 이스라엘에는 구원하거나 교환할 때, 무슨 일이든 확정 짓기 위하여 자기 신을 벗어서 상대편에게 주는 관습이 있었는데, 이것이 이스라엘에서는 증거로 통하였다"( 룻기 4,7). 또한 루카복음에서 방탕한 아들이 돌아왔을 때 아버지는 그를 위해 가장 좋은 옷을 입히고 발에 신을 신겼다. "아버지는 종들에게 일렀다. '어서 가장 좋은 옷을 가져다 입히고 손에 반지를 끼우고 발에 신발을 신겨 주어라'"(루카 15,22). 이것은 아들이 집을 나가기 전에 지니고 있던 권리를 회복한 것을 의미한다. 신발은 점유와 정복의 상징이기도 했다. 그래서 신발을 벗는 것은 그 장소에 대한 존경의 표시였다. 하느님은 타오르는 떨기 나무속에서 나타나 모세에게 신을 벗으라고 요구하셨다. "주님께서 말씀하셨다. '이리 가까이 오지 마라. 네가 서 있는 곳은 거룩한 땅이니, 네 발에서 신을 벗어라'" (탈출 3,5). 성역에 들어갈 때 속세와의 접촉을 끊고 복종과 존경의 마음으로 들어가고 악에서 벗어남을 의미한다. 죄인인 인간은 신발을 벗고 겸손한 마음으로 하느님 앞에 예의를 갖추고 서야한다는 것이다.조은일2008.08.26
 뿌리- 구약성경에서 이스라엘과 연관도](//cpbc.co.kr/CMS/newspaper/2009/10/rc/312609_1.1_titleImage_1.jpg)
[성경 속 상징](62) 뿌리- 구약성경에서 이스라엘과 연관도허영엽 신부(서울대교구 문화홍보국장)성경시대는 농업사회였다. 그래서 그들 삶은 식물을 재배하는 능력에 의존했다. 식물 성장은 견고한 뿌리조직에 달려 있다. 뿌리의 1차 기능은 식물체를 고정하고 물과 물속에 녹아 있는 무기염류를 흡수하며 양분을 저장하는 것이다. 따라서 성경에서는 안정과 성장의 한 상징으로 깊게 뿌리 내린 식물 이미지를 사용한다. 또한 반대로 심판과 파괴를 위한 상징으로 말라버리고 뿌리가 뽑힌 식물 이미지를 자주 사용한다. 성경에서는 하느님을 신뢰하는 이들을 종종 물가에 심은 뿌리 깊은 나무에 비유한다. "그러나 주님을 신뢰하고 그의 신뢰를 주님께 두는 이는 복되다. 그는 물가에 심긴 나무와 같아 제 뿌리를 시냇가에 뻗어 무더위가 닥쳐와도 두려움 없이 그 잎이 푸르고 가문 해에도 걱정 없이 줄곧 열매를 맺는다"(예레 17,7-8). 뿌리가 튼튼한 나무는 무더운 날씨나 가뭄 중에도 잎사귀가 푸르게 남아 있으며, 계속해서 열매를 맺는다. 마찬가지로 의인들 믿음은 역경 속에서도 그들을 지탱시켜주며 하느님께서 그들을 위험으로부터 보호해주신다. 구약성경은 때때로 이스라엘과 연관지어 뿌리 이미지를 사용한다. "당신께서는 이집트에서 포도나무 하나를 뽑아 오시어 민족들을 쫓아내시고 그것을 심으셨습니다. 당신께서 자리를 마련하시니 뿌리를 내려 땅을 채웠습니다"(시편 80,9-10). 그런데 이스라엘이 하느님의 약속을 어겼을 때 하느님 심판이 그 민족의 생명력과 우월함을 빼앗아 그의 백성을 뿌리채 뽑아버리셨다. "주님께서는 이스라엘을 치셔서, 갈대가 물속에서 흔들리는 것처럼 만들어 놓으실 것입니다. 주님께서 그들의 조상들에게 주신 이 좋은 땅에서 이스라엘을 뽑아, 그들을 유프라테스 강 저쪽으로 흩어 버리실 것입니다. 그들이 아세라 목상들을 만들어 주님의 분노를 돋우었기 때문입니다"(1열왕 14,15). 그러나 이스라엘 역사에서 보면 하느님은 모진 심판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의 남은 자들을 보존하시며 기회를 다시 주신다. 그리고 예언자들을 통해서 이스라엘이 다시 영광을 회복하실 것이라고 약속하셨다. "내가 이스라엘에게 이슬이 되어 주리니 이스라엘은 나리꽃처럼 피어나고 레바논처럼 뿌리를 뻗으리라"(호세 14,6). 이처럼 예언자들은 하느님의 심판을 묘사하기 위해서 시들어 버렸거나 뿌리가 뽑혀 버린 식물 이미지를 자주 사용했다(호세 9,16). 예수님도 심판을 나타내시기 위해서 뿌리가 뽑힌 식물 상징을 사용하셨다(루카 3,9). 예수님께서는 열매 없는 무화과나무를 저주하심으로써 그 뿌리가 말라버리게 하셨다(마르 11,20-25). 이 나무는 예수님 당시 유다인들 세대를 대표했다. 그 뿌리가 말라버린 것은 이 세대가 곧 경험하게 될 심판을 예시적으로 보여준다. 식물 뿌리가 바로 그 식물의 생명으로 여겨졌기 때문에 성경은 때때로 어떤 사람이나 사물의 근원을 묘사하기 위해 이 이미지를 사용한다. 이사야에 따르면 종말의 가장 이상적인 왕은 이새의 '뿌리'로부터 나타날 것인데, 이것은 그가 다윗 혈통으로부터 나타날 것을 의미한다(이사 11,10). 사도 바오로는 하느님의 거룩한 백성을 뿌리에 묘사했다(로마 11,16). 그는 또한 돈을 사랑하는 것이 모든 종류의 악의 뿌리라고 경고했다(1티모 6,10). 조은일2009.10.13
![[성경 속 상징]56-태양- 구약성경에서는 영웅에 비유](//cpbc.co.kr/CMS/newspaper/2009/08/rc/304896_1.2_titleImage_1.jpg)
[성경 속 상징]56-태양- 구약성경에서는 영웅에 비유허영엽 신부(서울대교구 문화홍보국장)얼마 전 달이 해를 삼키는 우주쇼가 펼쳐졌다. 인도 서부 구자라트 주 수라트에서 시작한 개기일식은 중국과 동아시아 일부 지역에서 관측됐다. 우리나라에서는 해의 80∼90% 가량이 달로 가려지는 부분일식만 관측됐다. 한반도에 61년 만에 찾아온 가장 큰 부분일식이었다. 일식은 달이 태양을 가려 태양의 일부 또는 전체가 보이지 않는 현상이다. 지구 주위를 공전하는 달이 태양면을 가로지를 때 발생하므로 달 그림자는 지구 표면 위로 지나간다. 그림자의 안쪽 부분에는 태양빛이 비쳐지지 않기 때문에 태양면이 달에 의해 완전히 덮인 것처럼 보인다. 이것을 개기일식이라고 한다. 빛과 열을 발하는 태양의 힘은 선사시대 사람들에게도 알려져 있어 초월적 힘으로 숭배됐다. 매일 아침 어둠을 뚫고 떠오르는 태양은 이집트 사람들에게는 신비한 우주 질서의 증거였다. 바빌론에서 태양은 전쟁 영웅, 혹은 통치자를 상징했다. 우리나라에서도 태양은 일찍부터 영원함과 권좌, 특히 왕을 상징했다. 왕들의 탄생설화에는 태양이 자주 등장한다. 유교에서는 해를 임금, 부모, 남편에 비유한다. 태양은 어둠을 극복하는 희망으로 존재하며, 장생불사를 상징하기도 했다. 성경은 천지창조 넷째 날에 하느님 말씀으로 태양이 생겨났다고 전한다. "하늘의 궁창에 빛물체들이 생겨, 낮과 밤을 가르고, 표징과 절기, 날과 해를 나타내어라"(창세 1,14). 태양빛은 하느님의 업적을 드러내는 표지가 됐다. "찬란한 태양은 만물을 내려다보고 주님의 업적은 그분의 영광으로 가득 차 있다"(집회 42,16). 구약성경에는 태양을 영웅에 비유하는 대목도 나온다. "그 소리는 온 땅으로, 그 말은 누리 끝까지 퍼져 나가네. 그곳에 해를 위하여 천막을 쳐 주시니 해는 신방에서 나오는 신랑 같고 용사처럼 길을 달리며 좋아하네"(시편19,5-6). 또한 하느님의 마음에 드는 사람들을 떠오르는 태양에 비유하기도 하고, 영광스럽고 빛나는 것을 비유할 때도 태양의 이미지를 사용했다. "새벽빛처럼 솟아오르고 달처럼 아름다우며 해처럼 빛나고 기를 든 군대처럼 두려움을 자아내는 저 여인은 누구인가?"(아가 6,10). 예수님은 선과 악을 포용하는 하느님의 사랑을 태양에 비유하셨다. "그분께서는 악인에게나 선인에게나 당신의 해가 떠오르게 하시고, 의로운 이에게나 불의한 이에게나 비를 내려 주신다"(마태 5,45). 예수님의 모습이 천상의 모습으로 변화될 때도 해는 천국의 영광을 상징한다(마태 17,2).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대로 살아가는 의로운 사람들의 거룩한 삶도 태양빛에 비유되기도 했다. "그때에 의인들은 아버지의 나라에서 해처럼 빛날 것이다"(마태 13,43). 초대 교회는 주일을 예수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신 날이라 해서 주님의 날로 지냈다. 그래서 초대 교회 신자들은 떠오르는 태양을 향해 기도를 했으며, 동쪽을 향해 교회를 세운 예도 상당히 많다. 이처럼 그리스도교 신앙인들은 태양을 예수 그리스도의 대표적 상징으로 생각했다. 조은일2009.08.11
![[성경 속 궁금증] 60. 성경에서 뱀은 어떤 동물인가](//cpbc.co.kr/CMS/newspaper/2013/01/rc/437375_1.1_titleImage_1.jpg)
[성경 속 궁금증] 60. 성경에서 뱀은 어떤 동물인가가장 간교한 존재로 하느님의 저주 받아…신약에선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 상징'모세와 구리 뱀'(보우돈 작, 1654년). 2013년은 계사년(癸巳年), 12간지 중 여섯 번째 동물인 뱀의 해이다. 고대인들에게 뱀은 영물이었고 죽지 않는 영생의 상징이었다. 그래서 고대에는 뱀을 숭배하는 의식이나 뱀과 관련된 신화가 많다. 이집트 파라오의 왕관에도 뱀이 머리를 치켜든 상징이 새겨졌고, 뱀의 모양은 그림, 조각, 부적으로 사용되기도 했다. 다른 동물들은 죽어 시체를 남기지만 겨울 동면에서 깨어난 뱀은 허물을 벗고 거듭 태어나는 영원히 사는 존재라고 본 것이다. 그래서 뱀은 풍요와 다산, 불멸의 영원성을 상징한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뱀을 악의 화신으로 생각했다. 그러나 다신교 사회에서는 뱀을 신으로 숭배했다. 이집트인들은 뱀의 여신인 '부토'를 파라오를 보호하는 신으로 숭배했고, 가나안 지방의 대표적 신인 '바알'의 상징도 뱀이었다. 뱀은 성경에서 50여 차례나 언급되는데 그 역할도 다양하다. 성경에서 뱀은 아담과 하와가 하느님을 불신하고 불순명으로 원죄를 범할 때 처음 등장한다. 창세기는 뱀을 가장 간교한 존재라고 소개한다. "뱀은 주 하느님께서 만드신 모든 들짐승 가운데에서 가장 간교하였다. 그 뱀이 여자에게 물었다. '하느님께서 너희는 동산의 어떤 나무에서든지 열매를 따 먹어서는 안 된다고 말씀하셨다는데 정말이냐?"(창세 3,1). 뱀은 '동산의 모든 나무 열매를 따 먹어도 되지만 선악과만은 금지'하신 하느님 말씀을 교묘히 이용해 아담과 하와를 유혹한다. 하느님 말씀을 어기고 금단의 열매를 따 먹은 아담과 하와는 하느님을 피해 숨는다. 이 때문에 하느님의 저주를 받은 뱀은 사는 동안 줄곧 배로 기어 다니며 먼지를 먹어야 하는 가련한 존재가 됐다(창세 3,14-15). 이스라엘 백성의 광야생활에 등장하는 뱀은 무척 인상적이다. '죽음'의 상징이었던 뱀이 역설적으로 '구원'의 수단이 된 것이다. 모세의 지도 아래 이집트를 탈출한 이스라엘 백성은 광야의 고통을 겪으면서 하느님과 모세를 거슬러 대들고, 하느님께서는 불평하는 백성들에게 불 뱀을 보내신다. 많은 이스라엘 백성이 뱀에 물려 죽자 이스라엘 백성은 모세를 찾아와 하느님의 진노를 거둬주시도록 기도해달라고 간청한다. 하느님께서는 모세에게 구리 뱀을 만들어 그것을 기둥 위에 달아놓게 하셨다. 뱀에 물린 사람들이 구리 뱀을 쳐다보면 목숨을 건질 수 있었다(민수 21,4-9). 신약성경에서는 구리 뱀이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 그리스도의 상징이 됐다.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들어 올린 것처럼, 사람의 아들도 들어 올려져야 한다. 믿는 사람은 누구나 사람의 아들 안에서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려는 것이다"(요한 3,14-15). 예수님이 열두 제자를 파견하시며 "뱀처럼 슬기롭고 비둘기같이 순박하게 되어라"(마태 10,16)고 당부하신 말씀은 흥미롭다. 물론 신약성경의 이 부분을 제외하면 성경에서 뱀은 일관되게 부정적 의미로 언급되고 있다. 신약성경은 뱀을 죽음의 세력, 하느님에 의해 짓부숴져 사도들 발아래 밟히는 사탄으로 표현한다. "평화의 하느님께서 머지않아 사탄을 짓부수시어 여러분의 발아래 놓으실 것입니다"(로마 16,20). 뱀이 사탄이라고 할 때 사탄은 본래 고발자라는 뜻이다. 따라서 뱀의 역할은 인간 현실에 대한 고발자라고 할 수 있겠다. 허영엽 신부(서울대교구 문화홍보국장)황병훈2013.01.08
![[성경 속 상징]19-길](//cpbc.co.kr/CMS/newspaper/2008/09/rc/266919_1.1_titleImage_1.jpg)
[성경 속 상징]19-길인간이 알 수 없는 신비로운 세계 허영엽 신부(서울대교구 문화홍보국)서울의 거리 이름들이 일제 강점기에는 일본식으로 바꿔 부르다가 광복 이후에는 전부 우리 식으로 다시 바뀌었다. 충무로의 옛날 이름은 진고개였다. 광복 전에는 남산 주위에 일본인들이 많이 살았다. 남산 아래에 있는 진고개는 자연스레 일본인들의 주 생활 무대가 되었다. 일본 사람들은 진고개를 '혼마치'라고 불렀는데 일본 상인들의 삶터였다. 그들은 혼마치를 대대적으로 개발해 서울에서 제일가는 곳으로 만들려고 했다. 한편 해방이 되어 이 거리는 진고개라는 옛 이름 대신 충무로라는 새 이름을 갖게 됐다. 임진왜란 때 왜적을 물리치는 데 큰 공을 세운 충무공을 기리기 위해서였다. 이처럼 서울의 거리 이름에는 사연과 역사가 묻어있다. 길의 이미지는 성경에 매우 빈번하게 나타난다. 길이나 도로의 이미지는 근본적이고 윤리적인 주제들과 관련을 갖는다. 하느님과 인간의 행동 그리고 하느님의 구원의 특징에 대한 심오한 사상을 길에 비유해서 보여주기도 한다. 구약성경에서 길은 하느님의 뜻과 같이, 인간이 알 수 없는 신비로운 내적 세계를 의미한다. "내 생각은 너희 생각과 같지 않고 너희 길은 내 길과 같지 않다. 주님의 말씀이다"(이사 55,8). 또한 인간이 가야할 인생의 길을 의미한다. "사람의 발걸음은 주님께 달려 있으니 인간이 어찌 제 길을 깨닫겠는가?"(잠언 20,24) 이처럼 성경에서는 인생의 방향과 행로를 하나의 길로 묘사한다. 사람의 생애를 길을 따라서 걸어가는 것으로 묘사하는 것은 인간 존재의 역동적 특성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것은 결코 정적이지 않고 그 속에서 맺어진 개인적 선택들은 전체적인 인생 여정에 관계를 갖는다. 또한 하느님께 도달하는 길, 즉 율법과의 관련에 있어서 인간 삶의 방식, 생활 태도를 의미한다. "내 영혼에 생기를 돋우어 주시고 바른길로 나를 끌어 주시니 당신의 이름 때문이어라"(시편 23,3). 이스라엘 백성은 하느님의 길을 걸으라는 요청을 거듭 듣는다. 그러나 하느님은 생명의 길을 선택하느냐 죽음의 길을 선택하느냐를 최종적으로 인간의 자유로운 결정에 맡긴다. "이제 내가 너희 앞에 생명의 길과 죽음의 길을 놓아둔다"(예레 21,8). 두 개의 길인 의인의 길과 악인의 길(시편 1편)은 극명한 대조로 구성돼 있다. 이 주제는 세상 속에서 우리가 반드시 두 가지 길 사이에서 선택해야 함을 의미한다. 이런 주제는 특별히 유명한 모세의 마지막 고별 설교에서도 잘 나타난다. 모세는 그 설교에서 백성들 앞에 축복과 저주, 생명과 죽음을 제시한다. 신약에서는 좋은 길과 나쁜 길이라는 구약성경의 두 가지 길에 대한 더 분명한 의미로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고 언급한다(마태 7,13-14). 성경에서 길이라는 상징이 정점을 이루는 곳은 예수님 자신의 증언이다.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나를 통하지 않고서는 아무도 아버지께 갈 수 없다"(요한 14,6). 예수 그리스도 자신이 이제 길이 되신다. 예수님은 길에 머무르지 않고 길의 목적, 즉 생명이기도 하다. 예수님은 자기 자신을 통해 모든 인간을 위한 길을 열어주신 것이다. 그리스도의 길을 충실하게 걷는 사람은 천국에 들어가게 될 것이다.조은일2008.09.30
![[성경 속 상징]14-섬](//cpbc.co.kr/CMS/newspaper/2008/08/rc/262448_1.1_titleImage_1.jpg)
[성경 속 상징]14-섬복음을 심는 비옥한 땅의 이미지허영엽 신부(서울대교구 문화홍보국장)얼마 전 한 유명 가수가 뉴욕 타임즈에 독도 광고를 내서 큰 화제가 됐다. 한국과 일본 사이 바다는 동해이며, 동해에 있는 독도는 한국 땅이라는 내용이었다. 일본은 중학교 학습 지도요령 해설서에 독도를 일본의 영토라고 명기해 한동안 잠잠했던 독도 영유권 논란이 다시 일어나고 있다. 섬하면 사람들은 일반적으로 고독과 격리의 장소로 생각한다. 동시에 섬은 바다 한가운데에서 안전한 피난처라는 이미지도 갖고 있다. 섬은 지리적으로 볼 때 육지와 떨어진 외딴 곳이며 반드시 육지나 이웃 섬에 가기 위해서는 배와 같은 교통 수단이 있어야 한다. 그리고 그 섬의 자연환경에 적응해 살아가는 현실적 생활 방식 또는 생존 형태가 독특하게 형성된다. 또한 다른 문화가 섬에 들어오면 대부분 그 섬의 사정에 맞게 새로운 모습으로 변한다. 그래서 섬의 문화에는 폐쇄성과 독자성이 드러난다. 성경에 언급되는 섬이 몇 개 되지 않는 것은 이스라엘 사람들이 해양적인 사람들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일반적으로 이스라엘에서 지중해 연안과 섬들에 대한 지식은 소문에 의한 것들 뿐이었다. 구약성경에서 섬에 관한 언급은 주로 이사야서에 나타난다. 이사야 예언자에게 섬은 미지의 나라와 같은 이미지이다. 하느님께서는 각 나라에 흩어진 그의 백성들을 모으실 때 섬들에 있는 백성들도 부르실 것이다. "그날에 이러한 일이 일어나리라. 주님께서 당신 손을 두 번째로 다시 드시리니 아시리아와 이집트 파트로스와 에티오피아와 엘람 신아르와 하맛과 바다 섬들에 생존해 있는 당신 백성의 남은 자들을 속량하시려는 것이다"(이사 11,11). 또한 의인화된 섬은 하느님의 능력에 마치 사람처럼 반응한다. "섬들이 보고 두려워하며 땅 끝들이 무서워 떤다. 그들이 다가온다, 그들이 모여 온다"(이사 41,5). 섬이라 할지라도 하느님 영광을 선포하는 예언자들에 의해 하느님 구원 역사에 포함될 것이다. "나는 그들 가운데에 표징을 세우고 그들 가운데 살아남은 자들을 타르시스와 풋, 활 잘 쏘는 루드 투발과 야완 등 뭇 민족들에게 보내고 나에 대하여 아무것도 듣지 못하고 내 영광을 본 적도 없는 먼 섬들에 보내리니 그들은 민족들에게 나의 영광을 알리리라"(이사 66,19). 이사야 예언자에게 섬은 지구의 끝이다. 섬들은 여전히 하느님의 주권 아래 있지만 세상의 경계를 가르킨다. 신약성경에서 특별히 사도 바오로가 로마로 가는 길에 난파됐을 때 중요한 역할을 한 카우다(사도 27,16)와 몰타 섬(사도 28,1)이 등장한다. 몰타 섬은 죽음의 바다에서 구원된 섬이요, 새 생명의 복음을 위한 현장이 된다. 주님의 복음이 예루살렘에서 멀리 있던 섬에서 로마에까지 선포됐다. 크레타 섬에도 교회가 성공적으로 설립된 것을 볼 수 있다(티토 1,5). 초대교회의 선교를 통해 섬들을 향한 하느님의 선포 즉 이사야의 예언은 실현됐다. 따라서 섬은 성경에서 복음을 심는 비옥한 땅의 이미지가 됐다. 섬이 고난과 관련된 경우가 있는데 전승에 의하면 요한이 귀양갔던 파트모스 섬이다. 이 섬에는 아직도 요한의 발자취가 가득하다. 조은일2008.08.19
![[성경 속 상징] 10-칼](//cpbc.co.kr/CMS/newspaper/2008/07/rc/257632_1.1_titleImage_1.jpg)
[성경 속 상징] 10-칼하느님의 심판 혹은 말씀 허영엽 신부(서울대교구 문화홍보국장)성 베드로와 성 바오로 사도 대축일 전야인 6월 28일 저녁, 로마 성 바오로 대성전에 특별한 등(燈)이 켜졌다. '바오로의 해'가 시작되었음을 세계만방에 알리는 등불이다. 로마 성 바오로 대성전 앞에는 사도 바오로가 칼과 성경을 들고 있는 상이 서 있다. 이처럼 바오로의 성화에는 곧잘 칼이 등장한다. 바오로를 상징하는 칼은 그가 선포한 하느님 말씀의 능력과 생명력을 나타낸다. 칼은 옛날의 중요한 전쟁 무기였다. 그래서 성경에서도 칼은 주로 전쟁을 묘사하는 이야기에서 자주 나타난다. 칼에 맞아 쓰러진다고 하면 전쟁에서 패배를 뜻한다. "나는 이곳에서 유다와 예루살렘의 계획을 물거품으로 만들겠다. 그들을 원수들 앞에서 칼에 맞아 쓰러지게 하고, 그들의 목숨을 노리는 자들 손에 죽게 하겠다. 또한 그들의 시체는 하늘의 새들과 땅의 짐승들에게 먹이로 내어 주겠다"(예레 19,7). 이사야 예언자도 평화가 오는 것을 칼과 창을 농기구로 만드는 것에 비유했다. "그러면 그들은 칼을 쳐서 보습을 만들고 창을 쳐서 낫을 만들리라. 한 민족이 다른 민족을 거슬러 칼을 쳐들지도 않고 다시는 전쟁을 배워 익히지도 않으리라"(이사 2,4). 또한 칼을 사용하는 것을 사람들 사이의 유혈과 다툼으로 비유하기도 했다. "어찌하여 너는 주님의 말씀을 무시하고, 주님이 보기에 악한 짓을 저질렀느냐? 너는 히타이트 사람 우리야를 칼로 쳐 죽이고 그의 아내를 네 아내로 삼았다. 너는 그를 암몬 자손들의 칼로 죽였다. 그러므로 이제 네 집안에서는 칼부림이 영원히 그치지 않을 것이다. 네가 나를 무시하고, 히타이트 사람 우리야의 아내를 데려다가 네 아내로 삼았기 때문이다"(사무 하 12,9-10). 칼은 하느님의 심판을 상징한다. "주님의 칼은 피로 흥건하고 기름기로 덮여 있으며 어린 양과 숫염소들의 피에, 숫양들의 콩팥 기름에 젖어 있다"(이사 34,6). 잘못을 행하는 자를 벌주고 처형하는 정부의 권력을 칼의 이미지로 묘사되는 대목도 있다. "지배자는 그대의 이익을 위하여 일하는 하느님의 일꾼입니다. 그러나 그대가 악을 행할 경우에는 두려워하십시오. 그들은 공연히 칼을 차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들은 악을 저지르는 자에게 하느님의 진노를 집행하는 그분의 일꾼입니다"(로마 13,4). 칼이 상처를 입히기 때문에 해악과 상처를 사람들에게 끼치는 모든 것들을 상징하는 데 사용되기 했다. "저는 사자들 가운데에, 사람을 집어삼키려는 것들 가운데에 누워 있습니다. 그들의 이빨은 창과 화살, 그들의 혀는 날카로운 칼입니다"(시편 57,5). 함부로 말하는 사람의 말은 비수 같다. "이웃에게 해로운 거짓 증언을 하는 자는 방망이와 칼과 날카로운 화살과 같다"(잠언 25,18). 이사야 예언자는 하느님의 말씀을 칼에 비유했다. 하느님의 말씀이 인간의 삶을 관통하는 능력 때문에 칼에 비유되었던 것이다. "그분께서 내 입을 날카로운 칼처럼 만드시고 당신의 손 그늘에 나를 숨겨 주셨다. 나를 날카로운 화살처럼 만드시어 당신의 화살 통 속에 감추셨다"(이사 49,2). 하느님의 말씀은 인간의 마옴 가장 깊은 곳까지 미치며 삶을 변화시키는 결과를 우리의 삶에 가져오기 때문이다. "사실 하느님의 말씀은 살아 있고 힘이 있으며 어떤 쌍날칼보다도 날카롭습니다. 그래서 사람 속을 꿰찔러 혼과 영을 가르고 관절과 골수를 갈라, 마음의 생각과 속셈을 가려냅니다"(히브 4,12)조은일2008.07.08
![[성경 속 상징]9- 개구리](//cpbc.co.kr/CMS/newspaper/2008/07/rc/256716_1.1_titleImage_1.jpg)
[성경 속 상징]9- 개구리요한 묵시록에선 사탄 모습으로 허영엽 신부(서울대교구 문화홍보국장)중국 쓰촨성 대지진 발생 사흘 전 수십만 마리의 두꺼비떼가 진앙지와 가까운 단무마을 거리로 쏟아져 나왔다는 현지 언론 보도가 있었다. 두꺼비들이 지진이 일어날 것을 미리 알고 위험을 피하는 현상이었다는 추측도 있었다. 물론 두꺼비의 대규모 이동을 설명해줄 과학적 데이터는 없다. 그러나 예로부터 동물이 자연재해를 예측하는 능력이 있다고 사람들은 믿어왔다. 성경에 두꺼비에 대한 언급은 없다. 대신 두꺼비와 같은 개구리목[無尾目]에 속하는 양서류인 개구리에 대한 언급이 많다. '개구리가 얕게 월동하면 겨울이 따뜻하다'는 말이 있다. 날씨가 따뜻하면 개구리가 땅속 깊은 곳까지 들어가지 않고 겨울을 난다는 것이다. 청개구리는 얇은 피부가 습도에 민감해 시끄럽게 울어대며 기후변화에 반응한다고 한다. 일본에서도 청개구리를 천기(天氣)를 알리는 동물로 치는데 비 오는 것을 예지하는 능력이 25% 이상이라고 한다. 개구리도 자연의 움직임을 예지하는 능력이 뛰어남을 짐작할 수 있다. 개구리와 같은 양서류에서 가장 중요한 기관은 피부다. 피부는 보호와 위장 기능뿐만 아니라 중요한 호흡기관이며 삼투조절기관이다. 양서류는 물을 먹지 않고 피부를 통해 흡수한다. 그래서 독소나 오염물질 같은 환경적 위험요소에 매우 민감하다고 한다. 개구리의 눈은 움직이지 않기에 움직이는 사물만 인식한다고 한다. 이것은 처음 들어간 빛은 개구리의 시세포를 자극해 인지되지만 계속 비춰지는 빛, 즉 움직이지 않는 것은 인식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개구리는 코앞에 파리가 앉아 있어도 알아챌 수 없다. 근동 지방에서 개구리는 다산과 재생을 상징하는 동물이다. 이집트에서는 개구리를 숭배했지만 이스라엘 사람들은 개구리를 악한 세력으로 보았다. 구약성경에서 개구리는 이스라엘 민족이 이집트를 탈출하기 전에 하느님께서 이집트에 내리신 두번째 재앙으로 나온다. 나일강에서 개구리떼가 강을 나와 인가에 침입한 것으로 보인다. "주님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셨다. '파라오에게 가서,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하고 말하여라. '나의 백성을 내보내어 나를 예배하게 하여라. 네가 만일 내보내기를 거부한다면, 나는 개구리 떼로 너의 온 영토를 치겠다. 그러면 나일 강에 개구리들이 우글거릴 것이다. 그것들은 올라와 네 궁궐과 침실로, 네 침상 위로, 네 신하들과 백성의 집으로, 네 화덕과 반죽 통 속으로 들어갈 것이다. 그리고 개구리들은 너에게, 네 백성에게, 너의 모든 신하들에게 뛰어오를 것이다'"(탈출 7,26-29). 개구리가 강을 떠나 건조한 공기 속으로 나오자 몸이 말라붙어 죽게되고 악취가 진동하게 되었을 것이다. "주님께서는 모세가 청한 대로 해 주셨다. 개구리들이 집과 뜰과 들에서 죽어 갔다. 사람들이 그것들을 모아 무더기로 쌓아 놓으니, 땅이 악취를 풍겼다"(탈출 8,9-10). 성경에서 개구리는 이처럼 하느님의 징벌로 나타난다 (시편 78, 44-45). 요한 묵시록에서는 개구리가 사탄의 모습으로 그려지기도 했다. "그때에 나는 용의 입과 짐승의 입과 거짓 예언자의 입에서 개구리같이 생긴 더러운 영 셋이 나오는 것을 보았습니다"(요한 묵시록 16,13). 전래동화에서는 비오는 날이면 무덤이 떠내려 갈까봐 슬피우는 불효자 청개구리 이야기도 있다. 그러나 실제로는 비가 오기 전에는 습기가 많아져서 개구리의 피부가 젖으므로 기분이 좋아져서 개굴개굴 운다고 한다. 조은일2008.07.01
![[성경속 상징]6- 바위](//cpbc.co.kr/CMS/newspaper/2008/06/rc/253348_1.1_titleImage_1.jpg)
[성경속 상징]6- 바위신약에서는 예수 그리스도 상징허영엽 신부(서울대교구 문화홍보국장)아프리카 한 부족에게서 전해 내려오는, 급류를 건너는 비법이 있다고 한다. 그것은 어깨에 무거운 바위돌을 지고 건너는 것이다. 그렇게 하면 바위 무게로 급류에 쉽게 떠내려가지 않는다고 한다. 이때 바위는 생명을 지켜주는 중요한 도구가 된다. 고대 세계에서 바위는 견고함을 상징하고 보호와 안전 등을 제공한다. 항상 그 자리에 있는 바위는 고정적인 것, 변하지 않는 것의 이미지를 떠오르게 한다. 또한 감정에 흔들리지 않는 강인함의 표상이기도 하다. 옛날 사람들은 거대하고 괴이한 형태를 하고 있는 바위에게서 강렬한 인상을 받아 바위를 신처럼 숭배하기도 했다. 그런데 예배 대상은 바위 자체가 아니라 그 바위에서 생긴 신의 계시, 혹은 그곳에서 맺어진 신과의 계약이었다. 이처럼 고대 신화에서 바위는 신과 연관성을 갖는다. 성경에 등장하는 바위의 이미지들은 사막이 그 배경이 된다. 광야 한가운데 바위는 더위에 지친 여행자나 군인들에게 활력을 제공한다. 뜨거운 햇볕을 피할 수 있도록 신선한 그늘을 제공하기도 하고, 때로는 바위 사이에 샘물이 있어 갈증을 풀어 주기도 한다. " '이제 내가 저기 호렙의 바위 위에서 네 앞에 서 있겠다. 네가 그 바위를 치면 그곳에서 물이 터져 나와, 백성이 그것을 마시게 될 것이다.' 모세는 이스라엘의 원로들이 보는 앞에서 그대로 하였다"(탈출 17,6). 쫓기는 사람들이 바위틈에 몸을 피하기도 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자기들이 포위되어 위급하게 되었다는 것을 알고, 저마다 굴이나 덤불이나 바위틈, 또는 구덩이나 웅덩이를 찾아 몸을 숨겼다"(1사무 13,6). 다윗도 사울에게 쫓겨 도망자 신세가 됐을 때 안식처가 되신 하느님을 바위에 비유했다. "저의 하느님, 이 몸 피신하는 저의 바위 저의 방패, 제 구원의 뿔, 저의 성채, 저의 피난처, 저를 구원하시는 분. 당신께서는 저를 폭력에서 구원하셨습니다"(2사무 22,3). 이처럼 바위는 하느님을 상징한다. "그의 활은 든든히 버티고 그의 손과 팔은 날쌔었다. 이는 야곱의 장사의 손, 이스라엘의 목자요 바위이신 분의 이름 덕분이다"(창세 49,24). 구약에서 바위는 대부분 하느님과 연관되며 견고한 기초나 요새로서 또는 악인들을 막아주는 역할을 한다. 신약에서 바위는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한다. "모두 똑같은 영적 음료를 마셨습니다. 그들은 자기들을 따라오는 영적 바위에서 솟는 물을 마셨는데, 그 바위가 곧 그리스도이셨습니다"(1코린 10,4). 예수님이 사도 베드로를 반석에 비유한데서 바위의 상징이 중요하게 나타난다. "너는 베드로이다.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울 터인즉, 저승의 세력도 그것을 이기지 못할 것이다"(마태 16,18). 이 말씀에 따라 베드로 사도는 바위처럼 흔들리지 않는 신앙의 상징이 됐다. 초대교회에서는 주님의 말씀을 듣고 순종하는 사람을 바위(반석) 위에 지은 집에 비유하기도 했다. "그러므로 나의 이 말을 듣고 실행하는 이는 모두 자기 집을 반석 위에 지은 슬기로운 사람과 같을 것이다. 비가 내려 강물이 밀려오고 바람이 불어 그 집에 들이쳤지만 무너지지 않았다. 반석 위에 세워졌기 때문이다"(마태 7,24-25). 암브로시오 성인은 바위에서 흘러나온 물이 그리스도의 옆구리에서 흘러나온 피를 상징한다고 했다. 로마 카타콤바의 벽화나 석관의 부조에서도 모세가 바위를 쳐서 물이 흘러나오게 하는 모습이 많이 그려져 있다. 중세 초기 미술에서 그리스도를 나타내는 어린 양이 서있는 바위에서 샘이 흘러나오는 모습을 자주 그렸다. 우리도 바위처럼 단단한 그리스도 기초 위에 살아간다면 얼마나 행복하겠는가. 조은일2008.06.11
![[성경 속 상징]18-머리카락](//cpbc.co.kr/CMS/newspaper/2008/09/rc/266156_1.1_titleImage_1.jpg)
[성경 속 상징]18-머리카락머리카락을 미는 것은 슬픔의 표시허영엽 신부(서울대교구 문화홍보국장)옛 사람들은 종종 점치는 데에 머리카락을 사용했다. 아랍인들은 머리를 둥글게 미는 관습이 있었다. 그런데 그들이 바쿠스 신을 기리는 뜻으로 머리털 한 술을 정수리에 남겨 두었다. 우상 숭배자들은 수염도 둥글고 고르게 다듬었다. 그러나 유다인에게는 이것이 금기였다. 오늘날까지도 유다인은 수염 끝을 자연스럽게 자라도록 내버려 두지만 이슬람 교도들은 수염을 다듬는다. 친구가 죽었을 때 자기 머리카락를 잘라서 무덤 속에 던져 넣는 것도 오래된 미신이었다. 때로는 머리카락을 지옥 신들에게 바치는 제물로서 시신의 얼굴과 가슴에 올려놓는 관습도 있었다. 머리털은 성경에서 아주 중요한 상징이다. 머리털은 그 사람의 건강 상태를 보여준다. 레위기 13장에는 공동체의 건강을 진단하는 사람으로서 제사장의 역할이 소개된다. 여기에는 히브리인들의 생활에서 부정한 것과 질병을 머리털을 통해 어떻게 진단하는가를 자세히 설명하고 있다. 근심과 낭패의 표시나 혹은 개인적인 다툼에서 다른 사람의 머리털을 뽑는 행위는 고대 관습의 부정적인 면을 보여준다. 지나치게 머리가 많고 긴 것은 야만적인 것으로 간주했다. 구약성경 사무엘기는 당대 이스라엘에서 압살롬만큼 잘 생긴 사람은 없었다고 전한다. 그는 아마도 뭇 여성들에게 인기가 많았을 것이다. 그런데 그가 미남으로 칭찬받는 이유 중에 하나는 풍성한 머리카락 때문이었다(2사무 14,25-27). 반면에 머리카락이 없는 것은 부끄러움이었다. 엘리사는 베텔로 가는 도중 어린 아이들에게 대머리라고 놀림을 당한다(2열왕 2,23). 대체로 머리털은 긍정적 이미지를 지니고 있다. 적당히 긴 머리는 검은 머리와 마찬가지로 아름다움의 기준이었다. 머리털이 많은 것이 건강과 힘과 아름다움의 기준이라는 전제하에 우리는 머리털이 없는 불명예의 주제를 찾아볼 수 있다. 성경에서 머리카락을 민다는 것은 슬픔의 표시와 하느님의 백성에 대한 심판으로 생각했다(아모 8,10). 미가는 포로로 잡혀가는 유다의 자손들을 머리털 없는 독수리의 이미지에 비유한다(미카 1,16). 머리를 깎지 않고 자라게 두는 것은 나지르인이 지켜야 할 서약 중의 하나였다(민수 6,5). 그같은 머리 모양은 하느님께 대한 헌신으로 생각됐다(민수 6,9). 서원의 기간이 끝나거나 부정한 일이 일어났을 때 긴 머리카락을 잘랐다. 거룩함을 위해 구별됐다는 상징으로 육체적인 매력에 끌리지 않고 철저히 금욕 적으로 절제하겠다는 표지였다(민수 6,18). 성경에서 가장 유명한 나지르인이라 할 수 있는 삼손의 그 힘은 그의 머리털의 길이와 관련이 있었다(판관 16,17-22). 신약을 보면 바오로는 긴 머리카락이 여인에게는 표준이나 남자에게는 부끄러운 것이라고 했다(1코린 1,14-15). 화려하게 장식한다든지 해서 머리에 지나친 관심을 갖는 것은 외모에 치우친 세속적 마음을 나타내는 것으로 간주되기도 했다(1베드 3,3). 노인을 상징하는 백발은 완숙함이나 명예와 아름다움의 표시임을 보여준다(잠언 20,29). 백발은 초월적 차원에서 희고 빛나는 머리털을 가지신 하느님에 대한 성화에도 적용이 된다. 복음서에는 철저한 헌신의 표현으로 예수님 발에 기름을 붓고 머리털로 씻은 마리아의 모습이 소개된다(루카 7,36-50). 성경에서 머리털의 중요성은 가시적 현상으로 중요하고 동시에 그 머리털을 도덕적이고 영적인 문제들을 다룬다는 점에서 중요하고 또한 상징으로도 중요하다.조은일2008.09.23
![[성경 속 상징]17-신전(성전)](//cpbc.co.kr/CMS/newspaper/2008/09/rc/264767_1.1_titleImage_1.jpg)
[성경 속 상징]17-신전(성전)하느님을 만나는 거룩한 장소 허영엽 신부(서울대교구 문화홍보국장)고대 신전은 사람들 집회소가 아니고 신(神)들의 거주지였다. 당연히 신전은 사회에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다. 신전 건축양식은 종교에 따라 다양하다. 메소포타미아 문화의 신전은 정교하게 설계되고 장식돼 있다. 계단양식으로 된 신전 맨 꼭대기에는 신들이 기거하는 공간으로 특정한 제사장들만이 출입할 수 있었다. 고대 이집트에도 신전이 있었으나 당시 종교의 주된 관심사는 내세였기에 피라미드형 무덤들이 주요 성지이자 가장 친숙한 건축 유산이 됐다. 고대 이집트 신전은 우주의 구조를 나타내며, 또한 신들과 인간 사이의 종교적 관계를 나타낸다. 잉카인과 마야인 신전은 돌로 만들었는데 뛰어난 조각 기술을 엿볼 수 있다. 유다인들 성전도 우주의 의미를 담고 있으며 하늘과 땅, 지상과 지하를 수직으로 연결한다. 신전 계단은 하늘로 상승하는 의미와 신자의 영적 향상을 상징한다. 예루살렘 신전은 우주의 중심이었으며 신과 이스라엘 민족이 교류하는 장소였다. 구약성경에서 성전은 하느님이 거주하는 장소이며 인간이 하느님을 만나는 거룩한 장소였다. 솔로몬은 예루살렘 모리야 산에 주님의 집을 지었다(2역대 3,1). 그러나 이 성전은 B.C. 587년에 예루살렘이 바빌론에 함락되면서 불타 없어졌다. 바빌론 유배에서 풀려난 이스라엘 백성은 예루살렘에 돌아와 성전을 다시 지었다. 예루살렘 성전 재건은 에제키엘 예언서에 자세히 묘사돼 있다(에제 40,1-44,9). 이사야 예언자는 성전이 '모든 민족들을 위한 기도의 집'이라는 하느님의 말씀을 전한다(이사 56,7). 이로써 예루살렘 성전은 단순히 유대 민족의 종교적 예배의 중심지뿐 아니라 전 인류의 중심이 됐다. 그러나 재건된 성전도 A.D. 70년께 로마 군인들이 파괴해 그 웅장한 모습을 지금은 볼 수 없다. 거룩한 성전 건축에는 채석장에서 다듬은 돌을 사용했다. 그래서 건축 현장에서는 망치나 정이나 그 어떤 쇠 연장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1열왕 6,7). 성전이 완성되고 야훼의 언약궤가 성소로 운반된 후 구름이 주님의 집을 가득 채웠다. 성전의 구름은 하느님의 능력과 기운이 작용하는 장소임을 상징한다(1열왕 8,10-11). 그러나 중요한 것은 성전의 외적 형태가 아니다. 하느님이 이스라엘 백성과 함께 할 것인지를 결정하는 것은 오직 그들의 깨끗한 마음과 바른 행동이다(예레 7,3-15). 신약성경에서는 성전이 또 다른 새로운 의미로 전환된다. 진정한 성전은 이 세상의 돌로 지어지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몸으로 지어진다는 것이다(요한 2,19). 더 나아가 세례 받은 그리스도교 신자들 자신이 바로 하느님이 머무르시는 성전이 된다. "여러분이 하느님의 성전이고 하느님의 영께서 여러분 안에 계시다는 사실을 여러분은 모릅니까?"(1코린 3,16) 조은일2008.09.09
![[성경 속 상징]16- 포도주](//cpbc.co.kr/CMS/newspaper/2008/09/rc/263988_1.1_titleImage_1.jpg)
[성경 속 상징]16- 포도주생명의 액체이자 희생과 진실허영엽 신부(서울대교구 문화홍보국장)고혈압과 심장병 예방에 좋다는 의학적 보고가 보도되면서 인기를 끌고있는 붉은색 포도주는 우리나라 사람들에게도 매우 인기 있다. 국내 전체 포도주 소비의 90%가 붉은색 포도주라고 한다. 옛날 유다인들은 "와인은 약(藥) 중에서 으뜸가는 약"이라고 했다. "와인이 부족한 곳이라야 약품이 필요하다"는 속담도 있다. 그러나 와인이 심장질환의 예방에 효과가 있다고 해도 과도하게 마시면 그것은 바로 독이 돼 우리의 건강을 송두리째 망치게 된다. 물론 이 말은 와인에만 국한되는 말이 아니고 모든 술에 해당된다. "술은 적당히 가끔 마셔야 약이 된다"는 것은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귀담아 들어야 하는 금언이다. 고대 근동에서는 물이 귀해 포도주는 사치품이기보다는 필수품이었다. 그리스 로마 신화에서 포도주도 신과 연관되어 나타난다. 포도주는 생명의 액체이며, 희생과 진실과 활력을 상징한다. 성경에는 포도에 관한 이야기가 많이 나온다. 포도는 포도나무, 포도원, 포도주, 건포도, 포도즙 등 다양한 표현으로 등장하는 귀중한 식물이다. 특히 이스라엘 사람들은 포도를 평화와 축복 그리고 풍요와 다산의 상징으로 사용했다. 구약 성경에서 젖과 꿀이 흐르는 축복의 땅(가나안)을 포도에 비유하기도 했다. 또한 포도는 가나안 땅에서 밀과 보리, 무화과와 석류, 올리브 나무와 대추야자와 함께 축복받은 7가지 식물 중 하나였다(신명 8,7-10). 포도는 하느님 자비의 상징이기도 하다. 그래서 포도를 수확할 때 약간을 남겨놓고 바닥에 떨어진 포도는 줍지 않았다. 가지에 남은 포도와 땅에 떨어진 포도는 가난한 사람들 몫이었다(레위 19,10). 신약에서 하느님은 '포도원의 주인'이라 하고, 예수님은 '포도원의 참 포도나무'라고 표현한다. 예수님은 제자들과 친밀한 관계를 포도나무와 가지에 비유하기도 했다(요한 15,1-3 참조). 포도의 가장 큰 상징은 우리 죄를 속죄하시려고 예수님이 흘리신 피가 포도주로 표현됐다는 것이다. 예수님이 제자들과 함께 행한 최후 만찬에서 포도주는 언약의 피로 상징됐다(마태 26, 26-28). 포도주는 많은 상징적 의미를 갖고 있지만, 성찬 전례에서의 포도주는 그 이상의 의미를 지니고 있다. 미사 중에 거행되는 성체성사를 통해 새로운 계약을 맺기 위해 흘리시는 그리스도의 피에 대한 성사적 표지이다(마태 26, 27-29). 포도주에 소량의 물을 섞는 것은 유대인이나 그리스인이나 로마인들이 포도주 농도를 낮게 하거나 맛이 더 나도록 물을 섞어 마신 데서 유래한다(2마카 15,39). 그래서 예수님 시대에는 신 포도주에 물을 타서 노동자의 음료수로 마셨다. 로마병사가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께 드린 신 포도주는 당시 노동자들이 마시던 음료였던 것이다. 오늘날에도 미사주는 포도주를 사용하고 있으니 그리스도교 신자들에게 포도는 특별한 의미가 있다. 미사 중 포도주에 물을 조금 섞는 것은 인간과 예수 그리스도와 일치를 뜻한다. 또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의 신성과 인성의 일치뿐만 아니라, 인간이 하느님의 본성에 참여함을 의미하기도 한다(2베드 1,4), 전례 규정에 따르면 미사 때 사용되는 포도주는 다른 것이 섞이지 않은 순 포도주여야 한다. 조은일2008.09.02
[재미있는 가톨릭 교리] (6)성경의 배경굴곡 많은 이스라엘의 역사 성경은 이스라엘 역사를 배경으로 한다. 따라서 이스라엘 백성의 역사를 알면 성경을 바르게 이해할 수 있다. ▶성조시대 이스라엘 민족은 노아의 아들 셈족의 후손이다. 유목민이던 성조 아브라함은 하느님 부르심을 받아 가나안에서 정착생활을 시작했다. 아브라함과 그의 후손, 곧 이사악과 야곱 그리고 야곱의 열두 아들 시대를 성조시대라고 한다. 1아브라함 하느님은 아브라함에게 땅과 자손의 번영을 약속하셨고 그와 계약을 맺으셨으며, 아브라함은 계약에 충실했다. ②이사악 하느님과 아브라함의 계약은 아브라함의 아들 이사악에게 계승됐다. 이사악의 아들 중 맏아들의 권리는 형 에사우가 아닌 동생 야곱에게 계승됐다. ③야곱 야곱은 형 에사우의 복을 가로챈 탓에 하란으로 도망갔고, 그곳에서 라반의 딸들과 혼인해 열두 아들을 낳았다. 야곱은 하느님과 씨름해 승리함으로써 하느님께 이스라엘이라는 새 이름을 받았다. ④야곱의 열 두 아들 야곱의 열 두 아들 이름은 르우벤ㆍ시메온ㆍ레위ㆍ유다ㆍ이사카르ㆍ즈불룬ㆍ요셉ㆍ벤야민ㆍ단ㆍ납탈리ㆍ가드ㆍ아세르이다. 이들은 이스라엘 열 두 지파의 기원이 된다. ▶출애굽시대 야곱과 열두 아들은 "이집트 땅 고센지방에 머물게 되었다. 그들은 그곳에 소유지를 얻어 자식들을 많이 낳고 크게 번성하였다"(창세 47,27). 그러나 이집트의 억압이 심해지자 이스라엘 백성은 하느님께 부르짖었고 그 결과 하느님의 도우심으로 무사히 이집트를 탈출했다. 출애굽, 즉 이집트 탈출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느님의 구원 역사를 체험한 결정적 사건으로, 이스라엘 신앙의 근본이자 핵심이 된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를 기념하기 위해 세세대대로 파스카 축제를 지낸다. ▶광야 유랑시대 이스라엘 백성들은 사십 년 동안 광야에서 유랑생활을 하고, 시나이 산에서 하느님과 계약을 맺었다. 하지만 하느님 말씀을 거역하고 모세에게 반항하며 금송아지를 숭배해 계약을 깨뜨렸다. 그 후 그들이 저지른 죄를 반성하며 하느님 백성으로 새로 나는 성찰의 시간을 가졌다. ▶판관시대 광야 유랑생활을 마침 이스라엘 백성들은 여호수아의 지휘로 가나안에 들어갔다. 100~150여 년에 걸쳐 전쟁을 치르면서 그 땅을 점령했고 열두 지파별로 땅을 나눠 가졌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왕정 수립 전까지 판관시대를 거쳤다. 판관이란 정치ㆍ군사ㆍ종교 지도자를 말한다. ▶왕정시대 가나안에 정착한 이스라엘 백성들은 임금의 필요성을 깨달아 첫 왕조 사울 왕국(기원전 1020~1000년경), 다윗 왕국(기원전 1000년~961년경), 솔로몬 왕국(기원전 961~922년경)을 세웠다. ▶왕국 분열시대 이스라엘은 솔로몬 임금 사후(死後) 강제노역과 과중한 세금 때문에 생긴 갈등으로 북이스라엘과 남유다로 갈라졌다. 북이스라엘에서는 엘리야와 엘리사 등의 예언자가, 남유다에서는 미카와 스바니야 등의 예언자가 활동했다. ▶왕국 멸망과 바빌론 유배시대 북이스라엘은 기원전 721년 아시리아에 패망했다. 남유다는 기원전 597년과 587년 두 차례 공격을 받아 신 바빌로니아에 패망했다. 예루살렘이 함락되고 솔로몬 성전이 파괴됐으며 많은 지도자들이 바빌론에 유배를 갔다. ▶예루살렘 귀환과 왕국 재건시대 이스라엘 백성들은 기원전 538년 바빌론 유배에서 해방돼 예루살렘으로 귀환했고, 하까이, 예수아, 느헤미야 등을 중심으로 성전과 성벽을 재건했다. 그동안 하느님과의 계약에 불충실했던 자신들과 조상들의 삶을 반성하고 종교ㆍ사회적 개혁을 단행했다. ▶헬레니즘시대 기원전 333년 알렉산더 임금이 지중해 연안을 통일하면서 이스라엘은 그리스의 정치ㆍ경제ㆍ문화적 영향을 받게 된다. 기원전 167년까지 이스라엘을 지배했던 셀레우코스 왕국의 안티오코스 4세가 박해를 하자 이스라엘은 마카베오 가문을 중심으로 독립항쟁을 시작했다. 마침내 기원전 142년 유다 마카베오가 예루살렘 성전을 탈환, 이스라엘은 자주 독립국가로 인정받아 하스모네아 왕국을 건설했다. ▶로마시대 기원전 63년 폼페이우스가 예루살렘에 입성해 이스라엘은 다시 로마 지배를 받았다. 로마 최초의 황제 아우구스투스 재위 시절, 베들레헴에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탄생하셨다. 이스라엘은 기원후 70년 로마에 의해 완전히 함락됐다. 이때부터 이스라엘 백성은 '약속의 땅'에서 쫓겨나 전 세계로 흩어졌다. 제공=서울대교구 사목국조은일2011.07.05
![[출판] 책꽂이 -알기 쉬운 성경 등](//cpbc.co.kr/CMS/newspaper/2013/03/rc/444991_1.1_titleImage_1.jpg)
[출판] 책꽂이 -알기 쉬운 성경 등 알기 쉬운 사도신경 크리스토프 뒤포르 지음/이재정 옮김/가톨릭출판사/9000원 사도신경은 초대교회 때부터 전해온 가장 오래된 신앙고백이자 그리스도교 신앙의 종합으로 여겨진다. 그리스도인이 갖춰야 할 교회 신앙이 사도신경 안에 다 담겨있다. 그런 이유로 사도신경을 가르치고 전하는 일은 교회가 해야 할 교육 가운데 최우선이었다. 이 책은 프랑스 주교회의 교리교육위원장인 크리스토프 뒤포르(엑스 에 아를대교구장) 대주교가 쓴 사도신경 해설서로, 사도신경에 담긴 신앙적 의미를 상세히 설명하고 있다. 풍부한 예화와 비유로 '육신의 부활', '영원한 삶'과 같은 심오한 신학적 개념도 어렵게 느껴지지 않는다. 뒤포르 대주교는 "사도신경을 되새기며, 신앙 안에서 '예, 저는 믿습니다'라고 고백하는 은총이 여러분에게 주어지기를 기원한다"며 "신앙은 인간을 영원한 사랑의 원천으로 이끌어준다"고 말했다.죽음 전봉순 지음/바오로딸/9000원 '모든 인간은 죽는다'라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 진리다. 성경도 "사람은 단 한 번 죽게 마련"(히브 9,27)이며, "세상 모든 사람이 가는 길"(여호 23,14; 1열왕 2,2)이라고 설명한다. 죽음은 모두가 가는 길임에도 필연적으로 불안과 두려움이 뒤따른다. 죽음에 대한 물음은 언제나 삶의 문제로 이어진다. 죽음을 묵상하는 것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라는 삶의 지혜를 깨닫게 한다. 저자 전봉순(예수성심전교수녀회) 수녀는 성경 전반에 걸쳐 나타난 죽음과 관련된 부분만 연구했다. 죽음에 관한 이해와 정의를 성경을 기초로 이해하기 쉽게 성찰한다. 전 수녀는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을 믿는 이들에겐 죽음이 두려운 종말이 아니라 삶의 시작"이라며 "죽음과 부활은 살아 있는 사람을 위한 것"이라고 말했다.교회의 재산법 한동일 지음/성바오로/2만 원 교회법전 가운데 교회 재산을 다루는 제5권 '교회의 재산 제1254~제1310조'를 해설한 책이다. 교회가 재산법을 만든 취지는 재산의 부적절한 취득, 과도한 축적, 무분별한 관리를 경계하기 위해서다. 또한 하느님 나라 건설을 위해서만 사용돼야 할 현세적 재산의 보호와 충실한 사용, 현명한 양도를 위해 제정됐다. 책은 교회법전 제5권과 같은 구성을 따라 △제1부 교회법 입문 △제2부 재산 취득 △제3부 재산 관리 △제4부 계약 및 특히 양도 △제5부 신심 의사 총칙 및 신심 기금으로 이뤄졌다. 부록으로 교구와 수도회, 본당 사목구, 교황청 등의 재산 관리 원칙을 실었다. 교황청 라테라노대학에서 교회법 박사학위를 받고, 교황청 대법원 변호사로 활동하는 한동일 신부가 펴낸 첫 책이다. 철학의 멘토, 멘토의 철학 박승찬ㆍ노성숙 지음/가톨릭대학교출판부/2만 2000원 소크라테스,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에서부터 아우구스티누스, 토마스 아퀴나스, 데카르트, 칸트, 헤겔, 키에르케고어에 이르기까지 세계 지성사를 주도한 위대한 서양 철학자들의 생애와 철학사상, 철학사적 의미를 살펴봤다. 저자 박승찬(가톨릭대)ㆍ노성숙(한국상담대학원대학교) 교수는 "철학자들은 우리가 갖고 있던 생각이나 태도를 비판적으로 성찰하게 하고, 때론 자신과 타인과 세계를 새롭게 이해하도록 촉구한다"면서 철학자들을 인생의 멘토로 삼으라고 조언했다. 또 "철학자들 역시 좌절의 위기에서 자신의 멘토를 만나 성장한 경험이 있다는 사실을 눈여겨 볼 필요가 있다"면서 "이 책이 시대를 뛰어넘어 철학자들과 철학적 대화를 통해 삶을 새롭게 성찰하는 계기가 되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박수정 기자 조은일2013.03.27
![[성경 속 상징]97- 점- 점술과 주술 엄중히 금지](//cpbc.co.kr/CMS/newspaper/2010/12/rc/359970_1.1_titleImage_1.jpg)
[성경 속 상징]97- 점- 점술과 주술 엄중히 금지 허영엽 신부(서울대교구 문화홍보국장)2010년 남아공 월드컵 기간 중 세계 축구팬들 관심을 한데 모았던 스타 중 하나는 사람이 아닌 독일 오버하우젠 해양생물박물관 수족관 점쟁이 문어 파울이었다. 파울은 독일 대표팀 경기는 물론 결승전 결과까지 모두 맞혀 전 세계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파울은 월드컵 이후 세계 여러 수족관의 '영입 제의'를 받았다고 한다. 점술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분명 사람들을 잡아끄는 대단한 유혹이다. 먼 옛날부터 사람들은 온갖 방법으로 점을 보았다. 고대 근동인들은 생명이 피에 들어 있다고 보았다. 특히 내장기관인 간이 바로 그러한 피, 곧 생명 그 자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메소포타미아에서 가장 널리 쓰이던 점술은 희생 제물로 바친 짐승의 내장, 특히 간의 모양을 살피는 것이었다. 그들은 간을 잘 살피면 신들의 의도를 파악하고 미래를 예견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구약성경에도 점술이나 주술에 관한 이야기가 많이 등장한다. 이스라엘에서는 점술과 주술이 엄중히 금지됐다. 이스라엘 첫 임금 사울은 혼령과 인간 사이를 매개하는 영매와 점쟁이들을 나라 밖으로 몰아낸다(1사무 28,3). 또한 이스라엘인들은 자기들을 해칠 점술도, 마술도 없다고 생각했다. "정녕 야곱에는 점술이 없고 이스라엘에는 주술이 없다. 이제 야곱을 두고, 이스라엘을 두고 말하리라, 하느님께서 무엇을 하셨는지"(민수 23,23). 그러나 이스라엘에도 다른 곳들과 다름없이 점술과 주술이 번성했다. 이사야 예언자는 유다 땅에 점쟁이들과 주술사들이 가득하다고 한탄했다(이사 2,6; 8,19). 북부 이스라엘 왕국이 멸망한 이유에도 점이 있다. "더구나 그들은 자기 아들딸들을 불 속으로 지나가게 하고, 점괘와 마술을 이용하였다. 이렇게 그들은 주님의 눈에 거슬리는 악한 짓을 저지르는 일에 자신들을 팔아 주님의 분노를 돋우었다"(2열왕 17,17). 폭군으로 유명한 유다 므나쎄 임금도 영매와 점쟁이들과 어울린 대가로 하느님의 단죄를 받았다(2열왕 21,6). 반면 요시야 임금은 개혁을 단행하면서 율법대로 점쟁이들과 영매들을 대대적으로 제거했다. "요시야는 또 유다 땅과 예루살렘에서 눈에 뜨이는 대로, 점쟁이와 영매와 수호신들과 우상들과 온갖 혐오스러운 것들을 치워 버렸다"(2열왕 23,24). 율법에서는 점술을 비롯한 갖가지 주술이 명백히 금지된다. 점을 쳐서도 안 되고, 주술을 부려서도 안 된다고 규정하고 있다(레위 19,26). 왜냐면 점은 하느님 백성을 부정하게 만들기 때문이다(신명 18,9-14). 또 영매나 점쟁이들을 찾아가는 것 역시 우상을 숭배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중대한 죄였다. 신약성경에서는 점과 관련된 직접적 언급은 별로 없다. 초대교회 신자들 삶의 모습에서 점술은 전혀 볼 수 없다. 예수님의 능력을 체험한 신자들은 점술 같은 것을 찾을 필요성을 전혀 느끼지 않았을 것이다(사도 16,16-18). 그들은 주님을 신뢰하고 그분께 의지하는 것으로 충분했던 것이다. 교회에서는 점을 보거나 궁합을 맞춰보는 행위 등에 대해 원칙적으로 금하고 있다. 또 심심풀이로 점을 보거나 운세를 볼 때에도 상당한 주의가 필요하다. 이를 통해 자칫 신앙의 기본 자세가 훼손될 수 있기 때문이다.조은일2010.12.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