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판]책꽂이- 미사 성제, 그리스도교 삶의 중심](//cpbc.co.kr/CMS/newspaper/2013/05/rc/454191_1.1_titleImage_1.jpg)
[출판]책꽂이- 미사 성제, 그리스도교 삶의 중심 ▨미사성제, 그리스도교 삶의 중심 (베네딕토 16세 지음/김한수 옮김/가톨릭대학교출판부/1만 2000원) 전임 교황 베네딕토 16세 미사 강론집으로 미사와 미사의 핵심인 성찬례의 참뜻을 일깨운 강론을 소개했다. '생명의 빵' '주일이 없이는 살아갈 수 없습니다' '성체성사: 사랑의 샘이자 배움터' '성찬 공동체인 교회' 등 목차만 훑어봐도 전임 교황이 강조하려는 것이 무엇인지 알 수 있다. 전임 교황은 2005년 이탈리아 전국 성체대회 폐막미사 강론에서 "주일 의무는 어깨에 짊어진 멍에가 아니라 성체를 통해 양식을 얻는 시간"이라며 "그리스도 안에서 형제자매들과 함께 친교를 체험하는 예식에 참여하는 일은 그리스도인에게 기쁨이 되고 꼭 필요한 것"이라고 했다. ▨교회사Ⅱ/1 (에른스트 다스만 지음/하성수 옮김/분도출판사/2만 원) 교회역사학자 에른스트 다스만(82) 신부의 「교회사」 3부작 가운데 두 번째 책이다. 분량이 많아 1,2권으로 나눠 발행됐고, 2권은 곧 나올 예정이다. 「교회사Ⅱ/1」은 4~6세기 교회사를 다뤘다. 콘스탄티누스 대제 시대부터 고대 후기가 끝날 때까지 역사를 장식한 교회 정치적 사건에 집중했다. 교회와 국가 간 논쟁, 교회와 사회 집단과 관계를 명쾌히 해석했다. 교황이나 황제를 중심으로 한 '위로부터 역사' 기술이 아닌 교부 문헌에 나오는 글을 중심으로 '아래로부터 역사'를 전개한 것이 특징이다. ▨하느님 말씀 2 (J.라레아 지음/전주교구 옮김/바오로딸/2만 원) 인도 살레시오수도회 J.라레아 신부가 쓴 다해 주일 말씀 해설 두 번째 권이다. 삼위일체 대축일부터 그리스도 왕 대축일까지 복음 해설을 담았다. 라레아 신부의 말씀 해설 책은 성경에 뿌리를 두고 성경말씀을 통해 하느님 뜻을 정확히 전달하고 있어, 강론을 준비하거나 성경을 가르치는 이들에게 필독서로 꼽힌다. 구약과 신약을 넘나들며 전례시기 특성과 의미를 이해하기 쉽게 풀어놨다. 교구 사제들이 번역했다. 전주교구장 이병호 주교는 "성경을 바탕으로 설교를 준비하는 데 도움을 주는 최고의 책"이라고 극찬했다. ▨오늘은 5월 18일 (서진선 지음/보림/1만 800원) 5ㆍ18 광주 민중항쟁을 다룬 동화. 초등학생 막내가 쓴 일기 형식으로 1980년 5월 광주 이야기를 풀어냈다. 친구들과 총싸움을 즐기던 막내는 동네에서 진짜 총을 든 군인들을 보게 된다. 총을 든 군인들이 멋있어 보였지만, 밤새 들려오는 총소리는 무섭기만 했다. 누나는 집을 나간 뒤 며칠 째 들어오지 않았고, 아빠 엄마는 누나를 찾으러 다니며 울기만 했다. 5ㆍ18 당시 고3이었던 동화작가 서진선(마리아 막달레나)씨는 "그때 처음으로 죽음과 가족들 슬픔을 목격했고 시간이 흘러 이제야 이야기보따리 하나를 풀어놓는다"고 말했다. ▨그분이 말씀해 주실 거야 (호세 마리아 살라베리 신부 지음/안영주 옮김/마리아회유지재단/8000원) '하느님의 종' 파우스티노(1946~1963) 생애를 그린 책이다. 스페인에서 태어난 파우스티노가 16년 7개월이라는 짧은 삶을 살면서 하느님 부르심에 응답하는 과정을 담았다. 파우스티노는 13세 때 성소를 발견하고, 마리아회에 입회하기로 결심한다. 그러나 일년 뒤 림프암에 걸려 혹독한 투병생활을 하다 숨을 거뒀다. 책은 파우스티노가 쓴 일기와 주변 사람들 증언을 통해 파우스티노가 지닌 신심을 보여 준다. 저자는 파우스티노를 가장 가까이서 지켜본 호세 마리아 살라베리 신부로, 그는 "파우스티노는 삶을 항상 기뻐했다"고 말했다. 박수정 기자 조은일2013.05.21
창조의 하느님: 그리스도교 창조론과 환경보호운동](//cpbc.co.kr/CMS/newspaper/2011/09/rc/388997_1.1_titleImage_1.jpg)
[조규만 주교의 하느님 이야기](14)창조의 하느님: 그리스도교 창조론과 환경보호운동인간, 환경 보전의 책임 지녀환경은 우리 시대 큰 화두다. 인간에게 행복한 미래를 가져다줄 것으로 기대했던 과학과 기술은 편리함만큼이나 재해와 두려움을 가져다주고 있다. 인간 이기심이 인류 파멸이라는 불행을 자초하고 있는 것이다. 최근 후쿠시마 원전 사고가 그 대표적 사례다. 이런 상황에서 교회는 환경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있고 또 앞장서야 한다. 그것은 그리스도교 창조론에 담겨 있는 하느님 뜻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일부 환경운동가들과 구별되는 입장도 지니고 있어야 한다. ▨ 그리스도교 창조론은 인간의 창조보전 책임을 말한다 하느님께서 보시기 좋게 창조한 세상을 재인식할 필요가 있다. 고금을 막론하고 사람들은 '나는 누구인가?''어디서 왔는가?'하는 세상과 인간 자신의 기원에 대한 해답을 갈구한다. 그리스도교 신앙과 신학이 그에 대한 답을 제시한 것이 창조론이다. 창조론은 과학기술이 발달하면서 한때 계몽주의와 대립하기도 했다. 이 때문에 교회는 지동설을 주장하던 자연과학자 갈릴레오를 단죄하기도 했다. 하지만 현대에 와서는 성경에 나타난 창조 진술이 과학적 지식과 아무런 관련 없이 종교와 믿음에만 상관하고 있다는 것이 분명해지면서 갈등이 잦아들고 있다. 환경이 파괴되고 있는 오늘날 우리는 창조신앙을 새롭게 이해할 필요가 있다. 인간은 하느님께서 아담에게 맡기신 에덴동산을 돌보고 관리할 책임이 있음을 깨달아야 하기 때문이다. 창세기는 '흙을 소재로 한 인간 창조'를 언급하고 있다. 황무지에서 첫 창조물로 인간이 생겨나고 인간은 흙으로 만들어짐으로써 인간과 흙이 밀접한 관계를 지닌 것으로 드러난다. 이러한 사고방식은 많은 신화에서도 볼 수 있다. 아담은 하느님 말씀을 거스른, 죄지은 구체적 개인이기도 하지만 종(種)으로서 인간 전체를 의미하기도 한다. 땅은 인간이 생활하는 환경을 말한다. 인간은 물질적인 것으로 만들어졌고(창세 2,7), 땅은 야생식물과 경작식물을 돋아나게 하고 인간과 동물이 생존할 수 있는 양식을 산출한다(창세 2,8-15). 여기서 가르치고자 하는 바는 인간은 물질과 연결된 존재이자 땅과 불가분의 관계를 지닌 존재라는 점이다. 동시에 인간은 인간 창조주의 호의와 은혜를 받은 존재로서 하느님 정원을 경작하고 돌봐야 할 의무를 지닌다. 하느님은 인간에게 어렵고 귀찮은 노동의 의무를 면제시키지 않는다. 여기서 인간 노동에 대한 본질적 철학을 엿볼 수 있다. 이 때 말하는 일이나 노동은 농사일이나 노동에만 한정된 것이 아니다. 인간의 삶 전 영역에서 하느님 이름으로 하는 모든 일, 인간이 하느님께서 창조하신 것을 유지하고 보전시켜 나가는 모든 일을 의미한다. 이러한 측면에서 인간은 분명 환경보전에 대한 책임을 지니고 있다. ▨ 그리스도교 창조론은 인간 중심을 강조한다 오늘날 생태주의 옹호자들은 성경의 인간 중심주의에 반론을 제기한다. 그들은 "자식을 많이 낳고 번성하여 땅을 가득 채우고 지배하여라. 그리고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땅을 기어 다니는 온갖 생물을 다스려라"(창세 1,28)는 성경 구절을 환경파괴 주범으로 지적하기도 한다. 그러나 그리스도교 국가가 성경에 근거해 자연과 환경을 파괴한 책임을 고백해야 한다면 그리스도교 국가가 아닌 다른 나라에서는 무엇을 근거로 환경을 파괴했는지 묻고 싶다. 성경은 창세기와 시편에서 하느님이 인간에게 세상을 다스리도록 하셨다고 표현했다. 이 지배권에는 봉사의 의미가 포함돼 있다. 창세기에서 인간이 동물에게 행사하는 다스림은 땅을 정복하는 것과는 구별된다. 동물을 다스리는 것도 결코 착취를 의미하지는 않는다. 때문에 오늘날 인간은 생태계 파괴에 책임이 있다. 하느님 선물과 인간 사명으로서 지배권은 인간이 땅을, 즉 세상을 돌보라는 것이었는데 오히려 자연을 파괴한 것이다. 성경의 인간 중심주의가 잘못이 아니라, 잘 다스리지 못한 인간에게 책임이 있다. 하느님께서 주신 인간 생명은 다른 살아 있는 피조물들에 주신 생명과는 전혀 다른 것이다. 모든 피조물을 다스리는 인간은 마치 우주의 절정과도 같고 모든 피조물 중에 최상의 것인 아름다움을 지닌 존재다. 토마스 아퀴나스 역시 영혼을 지닌 인간은 다른 혼을 지닌 생물보다 탁월하다고 했다. 교회는 인간 중심을 표명하지만 교회는 분명 인간 이외의 생명과 자연도 소중하게 여긴다. 창세기에서 아담과 하와는 낙원으로부터 추방당하고, 이후 인간은 생의 마지막 날까지 수고로움을 겪게 됐다. 그러나 하느님 뜻 안에서 우리는 은총을 발견할 수 있다. 여인은 '모든 살아 있는 것들의 어머니'라는 칭호를 받고, 그의 임신은 하느님에게서 받은 하나의 축복이 됐다. 하느님은 그들이 추방되는 순간에도 가죽으로 된 옷을 만들어 입혀 주신다. 이러한 은총은 카인과 아벨, 홍수설화에서도 발견된다. 결국 하느님을 창조주로 드러내는 창세기는 인간 범죄에도 불구하고 끊임없이 자비를 베푸시는 자비의 하느님, 은총의 하느님을 보여준다. 이는 하느님께서 세상과 인간을 창조하신 이유는 세상과 인간을 구원하시기 위함이란 것을 드러낸다. 정리=김은아 기자 euna@pbc.co.kr ※'조규만 주교의 하느님 이야기'는 평화방송 라디오(FM 105.3㎒)에서 매 주일 오후 6시 5분에 방송되며, 평화방송TV에서는 매주 화요일 오전 8시(본방송), 수요일 새벽 4시와 저녁 9시, 금요일 오후 4시, 주일 오후 6시에 재방송된다. 인터넷 다시 보기 www.pbc.co.kr조은일2011.09.06
 아버지이신 하느님; 아빠, 아버지](//cpbc.co.kr/CMS/newspaper/2011/09/rc/390163_1.1_titleImage_1.jpg)
[조규만 주교의 하느님 이야기](15) 아버지이신 하느님; 아빠, 아버지모든 인간들의 아버지 하느님 구약성경에서 복합적 요소를 지닌 신의 면모가 야훼 표상 안에 수용된 것과 같이 신약성경에서 단일적 성격을 띤 하느님 면모를 기대하기는 어렵다. 때문에 어느 때는 하느님 심판에 대해, 또 어느 때는 하느님 자비에 대해 언급한다. 또는 심원한 간격을 지닌 하느님, 가까이 계시는 하느님으로 언급되기도 한다. 아무도 보지 못한 하느님을 예수님께서는 친히 보여주시고 명백한 말씀으로 알려주신다. 따라서 예수 그리스도는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찬란한 빛이요, 하느님의 본질을 그대로 간직하신 분"(히브 1,3)이다. 그러므로 신약의 하느님은 누구든지 원하기만 하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만나 뵐 수 있는 분이 된다. 이러한 기록은 하느님은 오직 한 분밖에 안 계시다는 것을 분명하게 하는 한편 구약과 신약의 연속성을 보여준다. 예수님은 하느님을 아버지로 소개하신다. '전능하신 천주 성부'로 시작하는 신경과 하느님을 '나의 아버지'라고 가르치신 것에서 알 수 있다. 이처럼 하느님의 자기 계시가 예수 그리스도 생애와 말씀을 통해 직접적으로 이뤄졌다는 점은 새로운 사실이다. 그리고 바로 이러한 점이 이스라엘 민족에 의해 전수돼 온 하나의 신앙이 이스라엘 사람들 사상과 그리스도인들 사상으로 갈라지는 분기점이 된다. 야훼 하느님께서는 한때 이스라엘 민족을 당신 백성으로 삼았지만 이제는 그리스도를 믿고 따르는 자들을 당신 백성으로 만들었다. 신약의 하느님도 구약의 하느님처럼 말씀하시고 활동하시는 인격적 하느님이시다. 특히 하느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며 예배드림으로써 하느님 인격성은 더 새롭게 드러난다. 하느님은 예수님을 세례와 거룩한 변모를 통해 '하느님의 아들'로 불렀고, 예수님 또한 하느님을 '압바' 또는 '아버지'라고 불렀다. 특히 '압바'란 말은 아람어로서 일차적으로 가정에서 어린 아이가 아버지를 부를 때 사용하는 매우 정다운 호칭이다. '아버지'라는 단어에 주의를 기울여보자. 이 단어는 종교뿐 아니라 문화적으로도 오랜 역사를 통해 'genitore(생식적 차원에서 생명을 준 사람)'를 의미한다. 생명의 창조자, 생활의 부양자, 보증자인 것이다. 신이 아버지라는 사상은 아주 보편적이지만 구약에서는 하느님을 가리켜 '압바' '아버지'라고 부른 적이 없다. 구약에서도 이스라엘 백성은 스스로를 하느님 아들로 여겼다. 물론 여기서 '아들됨'은 신화적 의미에서가 아니다. 역사 안에서 구원 업적에 대한 구체적 체험을 바탕으로 인식된 것이다. 그래서 이스라엘 사람들은 그것을 특권으로 생각하고 즐겼다. 신약성경은 그 완성을 보여준다. 구약성경이 하느님을 아버지라고 생각해왔던 것을 신약성경은 바로 하느님이 아버지라고 확정지어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는 하느님을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누구나 직접적으로 접근할 수 있는 분으로 계시하는 것이다. 하느님의 이와 같은 모습은 루카복음 '잃었던 아들'의 비유에 구체적으로 잘 묘사돼 있다. 예수님 강생은 하느님 아버지로서의 사랑이 실제 사건이 되게 한 것이다. 특히 "나의 아버지께서는 모든 것을 나에게 넘겨주셨다. 그래서 아버지 외에는 아무도 아들을 알지 못한다. 또 아들 외에는, 그리고 그가 아버지를 드러내 보여 주려는 사람 외에는 아무도 아버지를 알지 못한다"(마태 11,27)라는 말씀은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이 말씀으로 하느님이 아들 예수님을 통해 모든 인간들 아버지이심이 선언됐기 때문이다. 이를 뒤집어 말하면 인간은 누구나 예외 없이 하느님 자녀라고 할 수 있다. 하느님 자녀가 되는 데는 옳은 사람, 옳지 못한 사람의 구별이 없다. 선한 사람 악한 사람, 여성과 남성의 차별도 있을 수 없다. 예수님은 오히려 대접받지 못한 당시 여성들에게 극히 이례적인 존경심을 갖고 대하셨고, 힘없는 어린이들에게도 마찬가지로 애정을 갖고 그들을 받아들였다. 병자나 소외된 인간일수록, 장애자일수록 그들을 위해 필요한 자로 처신하셨다. 하느님은 모든 인간의 의식주는 물론 머리카락 하나까지 돌보신다. 모든 인간이 예외없이 귀한 존재인 까닭이다. 때문에 가장 보잘 것 없는 사람일지라도 그에게 베푸는 선행은 하느님께서 세상 창조 때부터 준비한 상급으로 베풀어진다. 우리는 구약성경이 어렴풋이 보여준 하느님 부성을 예수님에게서 명료하게 보게 된다. 신약의 커다란 특징은 성부의 종말론적 계시가 예수님이라는 인격 안에서 구체적으로 드러났다는 점이다. 아버지로 계시된 하느님께 이제 누구나 온전한 신뢰 속에서 자신의 마음을 열어놓을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리고 하느님은 부성애로 인간을 감싸주시고 보살펴주시는 아주 자상한 분이라고 믿을 수 있게 된 것이다. 이런 점에서 주님의 기도는 하느님 아버지께 대한 소박한 신뢰성과 경외감을 동시에 잘 표현해주고 있는 좋은 예다. 하느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는 것은 하느님 권위와 주권을 자발적으로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전인적 행위로써 하느님께 대한 경외감을 심화시켜준다. 하느님은 만민의 심판관인 동시에 아버지로서 악에 대한 진노를 참지 않으시기 때문이다. 따라서 아버지로서 자비로운 하느님과 준엄한 하느님 모습을 분명하게 드러내신다. 그러므로 하느님 진노도 자비와 함께 인간에 대한 하느님 부성애라고 말할 수 있다. 즉 하느님 진노는 인간 죄에 대해 무관심할 수 없는 사랑의 한 측면이다. 하느님이 아버지라고 해서 하느님 정의와 공정성이 배제되는 것은 결코 아니다. 오히려 하느님을 경외함으로써 모든 행실에 있어서 하느님 자녀다운 모습을 드러내도록 촉구하고 있다. 정리=김은아 기자 euna@pbc.co.kr ※'조규만 주교의 하느님 이야기'는 평화방송 라디오(FM 105.3㎒)에서 매 주일 오후 6시 5분에 방송되며, 평화방송TV에서는 매주 화요일 오전 8시(본방송), 수요일 새벽 4시와 저녁 9시, 금요일 오후 4시, 주일 오후 6시에 재방송된다. 인터넷 다시 보기 www.pbc.co.kr조은일2011.09.20

마지막 날의 온유함[월간 꿈 CUM] 테마로 읽는 성경 - 온유 삽화 _ 김 사무엘 십자가는 예수께서 온전히 품으신 하느님의 온유함을 가장 극적으로 보여주는 사건입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위해 당신 생명까지 내어놓으시면서 하느님의 온유함에는 ‘여기까지만’이라는 한계가 없음을 알려주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십자가를 바라볼 때 예수님의 고통만이 아니라, 그를 통해 온 세상에 퍼져나가는 하느님의 온유함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의 두 팔은 십자가에 결박된 것이 아니라, 온 세상을 향해 뻗어 있는 것입니다. 이것을 프랑스 조각가 제르만 리시에(Germaine Richier, 1904~1959)는 잘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의 작품에는 십자가의 종목은 거의 감추어져 있고 횡목은 아예 없습니다. 예수님의 몸 자체가 십자가의 형태를 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예수님의 팔이 나무에 못 박혀 있지 않습니다. 예수님의 팔은 세상을 다 품에 안으려는 듯이 활짝 펼쳐져 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몸은 아래로 휘어 있습니다. 인간들에게 조금이라도 더 가까이 다가가려는 듯이 말입니다. 그 모습이 그대로 이어진다면 렘브란트의 그림처럼 아버지가 돌아온 아들을 품어 안는 형상이 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하느님의 온유함을 궁극적으로 체험할 때는 지금이 아닙니다. 하느님은 여기서 우리가 흘리는 눈물을 닦아주지 않으십니다. 눈물의 원인인 고통을 없애지도 않으시고, 그 까닭을 설명해 주지도 않으십니다. 다만 우리와 함께 눈물을 흘리실 뿐입니다. 내 눈에서 눈물이 흘러 밤낮으로 그치지 않는다.(예레 14,17) 당신께서 정하신 마지막 때가 오기 전까지는 말입니다. 이사야 예언자는 마지막 날에 있을 일을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분께서는 이 산 위에서 모든 겨레들에게 씌워진 너울과 모든 민족들에게 덮인 덮개를 없애시리라. 그분께서는 죽음을 영원히 없애 버리시리라. 주 하느님께서는 모든 사람의 얼굴에서 눈물을 닦아 내시고 당신 백성의 수치를 온 세상에서 치워 주시리라. 정녕 주님께서 말씀하셨다.(이사 25,7-8) 그때가 되면 하느님께서 친히 우리의 눈물을 닦아주실 것입니다. 그리고 더는 눈물 흘릴 일이 없게 될 것입니다. 의외로 성경에는 다른 이의 눈물을 닦아주는 장면이 나오지 않습니다. 오직 하느님의 이 마지막 행위를 위해 유보되어 있 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의 온유함을 결정적으로 드러내기 위해서 말입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그 놀라운 행위의 증인이자 수혜자가 될 것입니다. 성경의 마지막 책인 요한 묵시록도 이렇게 기록합니다. “어좌 한가운데에 계신 어린양이 목자처럼 그들을 돌보시고 생명의 샘으로 그들을 이끌어 주실 것이며 하느님께서는 그들의 눈에서 모든 눈물을 닦아 주실 것이다.”(묵시 7,17) “보라, 이제 하느님의 거처는 사람들 가운데에 있다. 하느님께서 사람들과 함께 거처하시고 그들은 하느님의 백성이 될 것이다. 하느님 친히 그들의 하느님으로서 그들과 함께 계시고 그들의 눈에서 모든 눈물을 닦아 주실 것이다. 다시는 죽음이 없고 다시는 슬픔도 울부짖음도 괴로움도 없을 것이다. 이전 것들이 사라져 버렸기 때문이다.”(묵시 21,3-4) 하느님께서 우리의 눈물을 닦아주시리라는 약속이 두 번이나 반복되며 더 풍성해지고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우리의 눈물을 닦아주신다는 말은 하느님과 우리 사이를 더는 어떤 베일도 가리지 않는다는 의미입니다. 말 그대로 얼굴과 얼굴을 마주하고 보게 된다는 뜻입니다. 그때 우리는 하느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우리와 함께 흘리 신 눈물까지 볼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이것은 하느님의 얼굴을 뵙기를 간절히바란 엘리야와 모세를 비롯한 그 누구도 할 수 없었던 일입니다. 죽음에 대한 승리가 아니라, 바로 이것이 마지막으로 이루어질 일입니다. 죽음의 패배는 이 궁극의 행복인 지복직관(至福直觀)으로 향하는 관문입니다. 그러니 지금 눈물을 흘리는 이들은 이에 대한 희망을 품고 살아가야 합니다. 행복하여라, 우는 사람들!(우리말 성경에는 ‘슬퍼하는 사람들’로 번역되어 있습니다) 그들은 위로를 받을 것이다.(마태 5,4) 예수께서는 아버지께서 하실 이 일을 가로채는 대신 최후의 만찬 때 제자들의 발을 닦아주심으로써 마지막에 있을 일을 미리 다른 형태로 보여주셨습니다. 그 또한 온유함의 표현입니다. 그런데 예수께서 발을 닦으셨을 때 제자들의 놀라움이 얼마나 컸습니까? 하지만 그 놀라움조차도 마지막 날에 하느님께서 우리의 눈물을 닦으실 일에 비하면 작을 것입니다. 글 _ 함원식 신부 (이사야, 안동교구 갈전마티아본당 주임, 성서신학 박사) 2025.08.14
![[전국 교구장 새해 사목교서] 서울대교구- 새로운 시대, 새로운 복음화-신앙의해](//cpbc.co.kr/CMS/newspaper/2012/12/rc/435834_1.2_titleImage_1.jpg)
[전국 교구장 새해 사목교서] 서울대교구- 새로운 시대, 새로운 복음화-신앙의해서울대교구장 염수정 대주교 하느님의 은총과 평화가 교구민 모두에게 충만하시기를 기원합니다. 전임 정진석 추기경님은 2011년도 사목교서를 통해 2020년을 전망하며 '새로운 시대, 새로운 복음화'를 말씀하셨습니다. 교황 베네딕토 16세는 자의교서 「믿음의 문」을 발표하고 신앙의 해를 선포하셨습니다. 저는 두 분의 뜻을 이어받아 올해를 신앙의 해에 초점을 맞추면서 새로운 복음화를 추진하고자 합니다. 새로운 복음화는 새로운 열정과 방법, 표현으로 시대적 상황과 조건에 맞는 복음화의 길을 모색하는 것입니다. 세상을 새롭게 복음화하기 위해서는 교회에 속한 이들이 먼저 그리스도의 복음으로 기쁨과 행복을 체험하면서 사랑과 친교의 공동체를 이뤄야 합니다. 우리는 세례성사를 통해 주님 초대에 감사한 마음으로 응하고 신앙을 살아갈 것을 다짐했습니다. 하지만 현재 우리가 성실히 신앙을 증거하는 삶을 사는지는 의문스럽습니다. 지난해 발간한 「서울대교구 본당사목 활성화를 위한 기초자료 수집 설문조사 보고서」에는 우리 신자들 신앙생활의 기초가 매우 약하다는 것이 드러났습니다. 초대교회 신자들이 그리스도께 대한 굳건한 신앙으로 사랑과 친교의 공동체를 이룬 것처럼 우리 교구는 새해 한 해 동안 '신앙의 기초'를 강화하는 데 초점을 맞추고자 합니다. 첫째, 성경을 통해 하느님께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우리는 구약성경을 통해 하느님께서 어떻게 세상 만물을 창조하고 당신 백성을 구원으로 이끄는지 알게 되며, 신약성경을 통해 구원자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과 행적, 죽음과 부활, 성령의 파견, 그리고 사도들의 놀라운 신앙 증거와 열정을 배우게 됩니다. 둘째, 기도를 통해 하느님과 더욱 가까워져야 합니다. 기도는 하느님과 나누는 대화입니다.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은 머무는 곳마다 하느님과 대화했고, 모세 역시 기도를 통해 하느님을 만났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아버지 하느님께 자주 기도했습니다. 또한 제자들에게 '주님의 기도'를 가르쳐주셨습니다. 초대교회 공동체 역시 기도하는 일에 전념했습니다. 셋째, 교회 가르침을 배워야 합니다. 하느님 뜻은 교회를 통해 분명히 드러났기에, 교회 가르침에 충실해야 합니다. 교회 가르침에 충실함으로써 우리는 신앙을 더욱 굳건히 다질 수 있습니다. 특히 「가톨릭교회교리서」는 교회가 2000년 동안 받아들이고 지키고 제공했던 소중한 가르침입니다. 넷째, 미사에 자주 참례해야 합니다. 미사는 그리스도교 생활의 원천이자 정점입니다. 그리스도의 몸을 받아먹는 우리는 그리스도와 친교와 일치를 이루며 그리스도 안에서 한 몸을 이룹니다. 일치의 성사인 성체성사를 더욱 정성껏 봉헌하기 위해 미사 전에 성실히 준비하는 시간을 가져야 합니다. 다섯째, 사랑의 실천을 통해 신앙이 열매를 맺어야 합니다. "사랑 안에 행동하는 믿음만이 중요할 따름"(갈라 5,6)이고 "믿음에 실천이 없으면 그러한 믿음은 죽은 것"(야고 2,17)입니다. 진정한 신앙인이 되려면 그리스도의 손과 발이 돼 세상에 나가 봉사함으로써 신앙을 증거해야 합니다. 조은일2012.12.25
![[특별기고] 폭력에 물든 인간, ‘자비의 하느님’을 전쟁에 끼워 맞췄다](https://img.cpbc.co.kr/newsimg/upload/2026/04/14/iHr1776129411757.jpg)
[특별기고] 폭력에 물든 인간, ‘자비의 하느님’을 전쟁에 끼워 맞췄다하느님의 이름으로 폭력을 정당화할 수 있을까? (손희송 주교)미국은 2월 28일 ‘장대한 분노’ 작전으로 이란을 대규모 공습한 이후 때마다 자신들의 전쟁 정당성을 위해 성경 말씀을 인용하고 있다. 교회는 이에 “전쟁에 하느님 이름을 사용하는 것은 중대한 죄에 해당한다”고 비판했지만, 미 정부는 멈추지 않고 있다. 아울러 전쟁 후 현재 세계 원유 수송의 약 20%가 지나가는 호르무즈 해협에서는 유조선들의 발이 묶인 상황이다. 12일 기준 해협에 머물고 있는 우리나라 선박은 26척, 선원은 173명에 이른다. 본지는 전쟁을 둘러싼 미 정부의 잘못된 발언에 대한 주교의 기고와 평소 선원들을 위해 사목해온 사제의 글을 통해 전쟁을 향한 어긋난 진실과 이면의 고통을 돌아봤다. 정리=박민규·박예슬 기자 2026년 3월 10일 미국 전쟁부 장관 피트 헤그세스는 기자단 브리핑에서 구약 성경의 시편을 근거로 미국과 이스라엘의 이란 공격으로 촉발된 전쟁을 정당화했다. 그는 시편 144편 1절에서 “나의 반석이신 주님께서는 찬미 받으소서, 내 손에 전투를, 내 손가락에 전쟁을 가르치시는 분”이란 표현을 인용했다. 그러자 예루살렘 라틴총대주교 피에르 바티스타 피자발라 추기경은 “전쟁을 정당화하기 위해 하느님의 이름을 사용하는 것은 중대한 죄에 속한다”라고 반박하면서 “하느님은 분쟁 속에 고통받고 죽어가는 이들과 함께 계시지, 종교를 정치적 목적에 이용하는 이들과 함께 계시지 않는다”라고 강조했다. 3월 25일에도 헤그세스는 공개적인 기도회에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모든 총알이 적에게 명중하게 하소서”라고 기도했다. 그러자 레오 14세 교황은 3월 29일 주님 수난 성지 주일 미사 강론에서 “피 묻은 손으로 올리는 기도는 하느님이 거절하신다. 예수님은 평화의 왕이며 전쟁을 거부하신다”라고 응대하셨다. 피트 헤그세스 미 국방장관은 지난 3월 기자단 브리핑에서 시편 구절을 인용해 전쟁 발발의 정당성을 부여했다. OSV 성경을 잘 살펴보면 하느님의 이름으로 전쟁을 정당화할 수 있느냐, 없느냐라는 질문의 배경에는 구약과 신약 성경의 관계를 어떻게 해석하느냐는 문제가 자리하고 있다. 구약 성경의 내용과 신약 성경의 내용이 서로 대립할 때 어느 쪽을 따라야 할까? 구약 성경과 신약 성경 모두 하느님을 계시하는 책이지만, 구약은 약속이고, 신약은 그 약속의 실현이다. 계시의 정점은 신약 성경이 증언하는 ‘예수 그리스도’이시고, 그 정점을 근거로 성경의 다른 내용들을 해석하는 것이 가톨릭의 전통적 성경 해석 원칙이다. 이런 원칙에 따르면, 신약 성경이 증언하는 예수님은 말씀과 행동으로 비폭력의 하느님을 선포하시고, 자신도 철저히 비폭력의 삶을 사셨기에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사람이라면, 하느님의 이름으로 전쟁을 정당화할 수 없다! 그러면 구약 성경에서 나타나는 하느님의 ‘폭력성’은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구약 성경에서는 하느님은 한없이 자비로운 모습이다가도 어떤 때는 폭력적이고 피를 요구하는 잔인한 모습으로 나타나기도 한다. 이런 부조화를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우선 성경의 특성을 알아야 한다. 성경은 하느님이 그 내용을 불러주시고 인간이 그 말씀을 듣고 쓴 것이 아니다. 성경은 하느님의 계시인 동시에 인간의 글이다. 말하자면 성경은 그 시대 인간의 문화와 생각을 바탕으로 쓰인 글로서 그 속에서 하느님의 본모습이 서서히 드러난다. 이런 전제하에 ‘라이문트 슈바거’라는 가톨릭 신학자(스위스 태생 예수회 소속 인스브루크 신학대학 교수, 1935~2004)는 성경에 드러난 하느님의 ‘폭력성’을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인간의 폭력성 인간에게는 폭력성이 내재해 있는데, 이것을 하느님께 투사시키고는 했다. 인간 자신이 폭력에 물들어 있어서 폭력의 눈으로 하느님을 바라보았고, 그래서 하느님 역시 잔인하게 폭력을 행사하는 분으로 나타났다. 그런데 구약 성경은 서서히 이런 생각에서 벗어나는 과정에 있다. 그래서 구약 성경에는 자비로운 하느님과 폭력적인 하느님 모습이 혼재해 있다. 이런 불명확함은 신약에 와서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끝이 난다. 예수님은 명시적으로 폭력에 폭력으로 맞대항하지 말라고 하셨고(마태 5,38-42 참조), 원수까지도 사랑하는 아버지 하느님을 선포하면서, 이를 근거로 자신을 박해하는 사람을 위해서도 기도하라고 가르치셨다.(마태 5,43-48 참조) 또한 그분은 체포되는 순간에 칼을 휘두르는 베드로를 만류하시면서 폭력을 거부하신다. “칼을 칼집에 도로 꽂아라. 칼을 잡는 자는 모두 칼로 망한다.”(마태 26,52) 십자가상에서는 자신을 못 박는 사람들을 용서해 달라고 아버지 하느님께 간청하셨다.(루카 23,34 참조) (참조 : 손희송,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비폭력과 원수 사랑의 하느님’, 「주님과 그분의 교회를 위하여」, 가톨릭대학교출판부, 15~42쪽) 미국의 보수 근본주의자들은 성경을 전체적으로 해석하지 않는다. 그래서 자기들 구미에 맞는 구절을 신약과 구약 가리지 않고 뽑아내어 자기 이익에 맞게 해석하고는 한다. 그러나 말과 행동으로 철저히 비폭력을 추구하셨던 예수님을 하느님 계시의 절정이라고 믿는 그리스도인이라면, 구약 성경의 일부 대목을 근거로 하느님의 이름으로 폭력과 전쟁을 정당화할 수 없다! 진정한 승자는 누구인가 3월 19일 베냐민 네타냐후 이스라엘 총리는 자신들이 시작한 전쟁을 정당화하기 위해 도덕적 우위만으로는 무자비한 적을 맞설 수 없다고 하면서, 역사학자 윌 듀런트(Will Durant)를 인용하여 “역사는 불행하게도 예수 그리스도가 칭기즈칸보다 우위에 있지 않음을 증명한다”고 말했다. 예수님을 구세주로 인정하지 않은 이스라엘 사람이기에 얼마든지 그렇게 말할 수 있다고 본다. 하지만 군사적으로 그렇게 막강했던 칭기즈칸의 제국은 지금 사라지고 없다. 그에 반해서 너무도 무력하게 십자가에 죽었던 예수의 추종자들이 모인 교회는 -때로는 세상에 큰 영향력을 발휘하면서- 과거에도 있었고, 지금도 앞으로도 계속 존속할 것이다. 그렇다면 과연 누가 역사의 승자인가? 주교회의 신앙교리위원회 위원장 손희송(의정부교구장) 주교박민규2026.04.14

강의로 배우는 ‘예수님과 함께 걷는 삶’한국CLC 이냐시오 영성강좌, 10월까지 6주간 진행 한국CLC(Christian Life Community in Korea, 그리스도인 생활 공동체)가 15일부터 이냐시오 영성강좌 ‘예수님과 인생을 걷다’를 연다. 10월 20일까지 6주간 매주 화요일 오후 2~4시 서울 영등포구 한국CLC 강의실(영등포구청역 4번 출구 인근)에서 진행된다. ‘예수님과 인생을 걷다’는 이냐시오 성인의 「영신수련」을 바탕으로 한 영성강좌다. 평신도들이 일상 안에서 하느님의 현존과 이끄심을 발견하고, 성경을 통해 예수님을 깊이 만나며 살아가도록 돕는다. 한국CLC는 그간 수원·대구·세종에서 ‘예수님과 인생을 걷다’를 진행했으며, 470여 명이 수강했다. 서울에서 마련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강좌는 △1강 ‘나는 왜 이 세상에 왔는가?’ △2강 ‘예수님 안에서 나를 보다-성찰’ △3강 ‘예수님을 통해 하느님 만나기-기도’ △4강 ‘진심으로 예수님을 사랑하는 길-관상’ △5강 ‘예수님의 선택-식별’ △6강 ‘예수님과 인생을 걷다’ 순으로 진행, 이냐시오 영성의 핵심 주제와 영적 훈련을 배우고 실천하도록 구성됐다. 이냐시오 영성을 전공한 한국CLC 회원 현재우(에드문도) 종교학 박사가 강사로 나선다. 참가자들은 「영신수련」의 ‘원리와 기초’를 통해 자신의 삶과 창조 목적을 돌아본다. 이어 일상 안에서 하느님을 발견하는 ‘성찰’, 성경을 통해 하느님과 친밀하게 만나는 ‘기도’, 예수님의 삶을 깊이 만나고 사랑하도록 이끄는 ‘관상’, 삶의 여러 선택 가운데 하느님 뜻을 찾아가는 ‘식별’을 차례로 배운다. 마지막 강의에서는 세상 속에서 예수님과 함께 살아가는 평신도 그리스도인의 삶을 모색한다. 한국CLC는 교황청 인준을 받은 국제 평신도 공동체로, 이냐시오 영성을 바탕으로 평신도들이 세상 안에서 그리스도를 따르며 살아가도록 영성교육과 사회사도직 활동을 펼치고 있다. 문의 및 접수: 02-2135-9398, 한국CLC 이학주 기자 goldenmouth@cpbc.co.kr이학주2026.09.09
![[출판] 아주 특별한 순간- 살아계신 하느님 만나는 '특별한 순간'으로 초대](//cpbc.co.kr/CMS/newspaper/2013/04/rc/447141_1.2_titleImage_1.jpg)
[출판] 아주 특별한 순간- 살아계신 하느님 만나는 '특별한 순간'으로 초대 일상의 삶에서 피정하도록 도와주는 안내서 아주 특별한 순간 V.안토니오 지음/류해욱 옮김/바오로딸/1만 1000원침묵치유피정 강사로 유명한 요셉 빌(인도 빈첸시오회, 1928~2008) 신부가 선종한 뒤 후임으로 안토니오(인도 빈첸시오회, 37) 신부가 임명됐다. 당시 안토니오 신부는 갓 서른을 넘겼을 때였다. 빌 신부 뒤를 이어 치유피정을 이끌기엔 너무 어리고 경험 없는 신부가 후계자가 된 것 아니냐는 우려가 컸다. 치유 은사를 받은 빌 신부는 전 세계를 다니며 '6일간의 침묵치유피정'을 지도했는데, 피정 중에 종종 치유기적이 일어나기도 했다. 게다가 빌 신부는 마음을 움직이는 강론으로 정평이 나 있었다. 그런 빌 신부 후임이었기에 안토니오 신부에 대한 우려와 불신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실제로 아일랜드에선 신자들이 그를 보고 "손자보다 어린 신부가 왔다"며 피정에 참가하지 않고 돌아가 버려 피정이 취소된 일이 있었다. 그러나 안토니오 신부에 대한 우려가 기우였다는 것이 밝혀지는 데에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안토니오 신부 피정에 참가한 이들은 한결같이 "성령께서 그분과 함께하신다는 것을 느낄 수 있다"고 말했다. '6일간의 침묵치유피정'은 매일 4번의 강의와 성체조배, 묵상, 미사로 이뤄진다. 엿새 동안 스무 번이 넘는 강의를 해야 하지만 안토니오 신부는 늘 원고 없이 성경 한 권만 들고 강단에 선다. 그는 성경에 담긴 하느님 뜻을 자신이 겪은 다양한 경험에 빗대 설명한다. 신자들 눈높이에 맞춘 강의는 명료하고 이해하기 쉬우며, 재미있고 감동적이다. 피정 참가자들은 "안토니오 신부님 강의를 들으면 왜 우리가 기도해야 하고, 왜 성숙한 신앙인이 돼야 하는지 명확해진다"면서 "인간을 너무나도 사랑하시는 하느님을 느낄 수 있다"고 말한다. 안토니오 신부는 확실히 신자들을 하느님께로 이끄는 방법을 알고 있는 듯하다. 신자들뿐만이 아니다. 성직자와 수도자들도 "안토니오 신부님 피정에선 살아계신 하느님을 만나게 된다"고 입을 모은다. 국내에선 피정 '전문가'로 손꼽히는 류해욱(예수회) 신부는 2년 전 안토니오 신부 피정에 참가한 뒤부터 안토니오 신부를 영적 멘토로 모시고 있다. 나이로 따지면 류 신부는 안토니오 신부의 아버지뻘이다. 류 신부는 정통 가톨릭교리에 어긋나지 않으면서도 역동적으로 신앙을 일깨워주는 안토니오 신부 강의에 감동해, 피정기간 내내 강의를 받아 적었다. 안토니오 신부 피정을 더 많은 이들과 나누고 싶어서 이를 책으로 펴냈다. 류 신부는 "이 책은 일상 삶에서 피정을 하기 위한 안내서"라면서 "깊은 묵상과 관상을 통해 나온 내용이기에 독자 스스로 성경 안으로 깊이 들어가 묵상과 관상을 하도록 이끌어 줄 것이다"고 말했다. 박수정 기자 catherine@pbc.co.kr ▶안토니오 신부는 4년 전부터 매년 여름 한국을 방문해 피정지도를 해왔다. 올해에도 2차례 피정을 할 예정이다. 1차는 8월 5~10일 경기도 의왕시 아론의 집에서, 2차는 8월 11~16일 부산 성 분도 은혜의 집에서 열린다. 문의 : http://club.ca tholic.or.kr/frbill, 6일간의 침묵피유피정 누리방조은일2013.04.09
![[출판] 책꽂이](//cpbc.co.kr/CMS/newspaper/2013/01/rc/438151_1.1_titleImage_1.jpg)
[출판] 책꽂이 주일ㆍ대축일 성경 묵상 다해 알베르 바누아 지음/오영민 옮김/나이테미디어/2만 원-----------------------------------------------전례주년 '다해'의 주일, 대축일 독서 해설집이다. 다해의 특징은 전례가 주로 루카복음을 중심으로 이뤄져 있다는 것이다. 다만 파스카 시기에는 요한복음이 중심이 된다. 또 독서에서는 코린토 신자들에게 보낸 첫째 서간(12,15장), 갈라티아 신자들에게 보낸 서간, 콜로새 신자들에게 보낸 서간, 히브리인들에게 보낸 서간(11,12장) 등을 통해 바오로 서간을 풍성하게 접할 수 있다. 저자 알베르 바누아(프랑스 예수회) 추기경은 이처럼 다해가 지닌 특성을 정확히 간파하며 이에 적절한 말씀 묵상을 담았다.마르코 복음서 이야기로 읽기송창현 지음/대구가톨릭대학교출판부/1만 5000원-------------------------------------------- 어떻게 하면 복음서를 쉽고 재미있게 읽을 수 있을까? 하는 물음에서 출발해 복음서를 '이야기'로 읽는 새로운 방법을 제시하며 이를 바탕으로 마르코복음서를 해설한 책이다. 교황청 성서대학과 예루살렘 성서ㆍ고고학연구소에서 성서학을 전공한 송창현(대구가톨릭대 교수) 신부는 "복음서가 하나의 이야기라는 특성을 이해하게 되면, 성경을 쉽고도 재미있게 읽을 수 있게 된다"고 했다. 또한 "복음서를 읽을 땐 신앙과 교회공동체와 관련성을 잃지 않아야 한다"며 신앙적 읽기와 학문적 읽기의 만남을 조언했다.아가페마르셀로 로시 지음/차동엽 옮김/오픈하우스/1만 2000원------------------------------------------------- 요한복음을 바탕으로 사랑의 참 가치를 일깨우고 있다. 저자 마르셀 로시(브라질) 신부는 "하느님은 사랑이시다"며 하느님 사랑을 찬미했다. 그는 사마리아의 여인, 라자로의 부활, 카나에서의 혼인 등을 통해 요한복음에 담긴 사랑의 의미와 모습을 묵상을 통해 알려준다. 또 하느님께 드리는 감사와 사랑의 기도도 실었다. 그는 "성경은 주님께서 우리에게 보내주신 사랑의 편지"라면서 "우리가 사랑하고 사랑받을 때 주님께서 우리에게 보내주신 이 편지를 읽고 또 읽는 것은 언제나 좋은 일"이라고 했다. 그레고리오 성가의 고대수사본-선 있는 악보를 중심으로 최호영 지음/가톨릭대학교출판부/1만 5000원-------------------------------------------------- 그레고리오 성가의 고대수사본(Paleographia) 가운데 국내 학계에선 학문적 성과를 찾아보기 어려운 '선 있는 악보'에 관한 논문 모음집이다. 저자는 독일 뮌헨 국립 음대에서 그레고리오 성가 교수 자격을 취득한 최호영(가톨릭대 교수) 신부다. 최 신부는 가톨릭 전례음악에서 첫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그레고리오 성가 연구에 천착해왔다. 이 책에선 그레고리오 성가의 연구 방법론, 기호학을 비롯해 고대수사본 베네벤토 34, 알비와 이리외, 그라츠 807, 몽펠리에 등을 다뤘다.식량의 제국 제니퍼 클랩 지음/정서진 옮김/이상북스/1만 6000원--------------------------------------------- 국제사회에서 '식량'을 둘러싼 전쟁은 이미 시작됐다. 마이크로소프트 창업주 빌 게이츠가 지난해 초 "정보혁명 다음은 농업혁명"이라고 선언한 가운데 초국적 기업들은 세계 식량시장 확보를 위해 민첩히 움직이고 있다. 이 책은 초국적 기업과 국제무역, 금융시장이 복잡하게 얽힌 세계 식량경제를 서술하며 왜 지금 식량이 세계무대에서 뜨거운 정치적 쟁점이 됐는지를 파헤친다. 또 선진국의 식량원조와 농산물 무역의 모순을 고발하며 식량 정의를 실현하기 위한 대안적 식량운동을 소개한다. 박수정 기자 조은일2013.01.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