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글레 추기경 “우리는 모두 하느님 나라 선교사”교황청 인류복음화성 장관, 전교 주일 맞아 선교 강조 “선교 사명은 우리 각자의 마음속에 자리하고 있으며, 세례받은 모두는 각각 하느님 나라의 선교사입니다.”교황청 인류복음화성 장관 루이스 안토니오 타글레 추기경이 전교 주일(10월 24일)을 맞아 21일 바티칸에서 가진 기자회견에서 “거룩한 영성 안에 주님을 마주하는 것이야말로 선교이며, 이는 우리 자신에서 벗어나 온 세계와 주님을 나누는 주님과의 관계를 체험하는 일”이라며 선교의 의미를 전했다.타글레 추기경은 아시아와 아프리카를 비롯한 전 세계 선교 지역을 관할하는 인류복음화성을 이끌고 있다. 그는 “선교사란 사랑의 이야기를 전하며, 예수님과 함께 살고, 그리스도로부터 온정을 세상에 전하는 사람을 일컫는다”며 “우리는 우리에게 놀라운 감동을 주신 하느님과의 만남을 혼자 간직할 수 없다”며 선교 사명을 북돋웠다.타글레 추기경은 “성공적인 복음화를 향한 열쇠는 성령이시며, 성령은 사람들을 신앙의 삶으로 인도하신다”고 전했다.그러면서 “오늘날 유럽 또한 선교 지역이 되고 있다”면서 “우리는 복음화와 관련해 유럽뿐만 아니라, 전 세계에 대해 정말 우려하고 있다”고 유럽 교회에 대한 우려도 표명했다.타글레 추기경은 코로나19 팬데믹으로 인해 성사생활이 매우 어려워진 현실에 대해 “온라인으로 미사에 참여하고, 성경 공부 프로그램에 동참할 수 있도록 해준 기술의 진보에 감사하다”면서 “그럼에도 우리는 인공지능과 가상의 공간이 채워줄 수 없는 접촉과 만남을 필요로 하며, 그런 면에서 정서를 교류하고, 관계를 쌓을 수 있는 기술에 대해서는 여전히 부족하다”고 의견을 피력했다. 이정훈 기자 cpbc2021.10.27

교황청 경신성사성, 하느님 말씀 일깨우는 신앙생활 당부‘하느님의 말씀 주일’에 관한 공지 발표… 공동체 아침·저녁 기도 거행 등 성경 이해할 다양한 시도 강조 교황청 경신성사성은 24일 하느님의 말씀 주일을 맞아 전례 안에서 복음 선포의 방법과 말씀을 익히는 법을 안내하는 공지를 발표했다. 사진은 지난 6일 미사 중 프란치스코 교황이 성경을 들고 있는 모습. [CNS 자료사진] 교황청 경신성사성이 ‘하느님의 말씀 주일’(1월 24일)을 맞아 전례 안에서 복음을 선포하는 방법과 말씀을 익히는 법을 안내한 공지를 발표했다.경신성사성은 12월 17일 ‘하느님의 말씀 주일에 관한 공지’를 내고 “성경에 봉헌된 하루는 그저 하나의 연중행사가 아니라, 한 해 전체를 위한 행사여야 한다”며 주님 힘의 원천인 말씀을 일깨우는 신앙생활을 해줄 것을 당부했다.경신성사성은 공지를 통해 “하느님의 말씀 주일은 성경과 시간 전례, 성무일도의 시편 기도와 찬미가, 성경 독서 사이의 연계를 강화할 적절한 기회”라며 “이는 아침 기도와 저녁 기도의 공동체 거행을 권장함으로써 이뤄질 수 있다”고 밝혔다.경신성사성은 또 “교회가 「독서집」 안에 배정한 성경 독서들의 순서는 하느님 말씀 전체를 이해하는 길을 열어 준다”며 “말씀 전례의 구조와 목적에 대한 이해가 있으면, 신자 회중이 하느님의 구원 말씀을 받아들이는 데에 도움이 된다”고 설명했다.아울러 “기도하는 교회의 응답인 시편 화답송은 노래로 하는 것이 권장된다”면서 “모든 공동체 안에 시편 담당자의 역할을 증진해야 한다”고도 전했다. “말씀의 봉사자로 부름 받은 이들은 자신이 맡은 공동체가 성경에 맛들이게 해야 할 필요성을 절실히 느껴야 한다”고도 당부했다.경신성사성은 사제와 부제, 독서자가 말씀을 선포할 때에는 “모든 즉흥성을 지양하고 특별한 내적 외적 준비, 선포할 성경 본문에 대한 친숙함, 선포 방식에 대한 필수적인 연습이 요구된다”고 밝혔다.아울러 “하느님의 말씀 주일의 준비 기간 또는 그다음에 이어지는 기간에, 전례 거행에서 성경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교육 모임을 증진하는 것이 적절하다”며 “(이는) 한 해 동안 그리고 그 시기별로 다양한 성경 독서의 전례적 분배에 대한 기준과 주일과 평일 미사 독서 구성에 대하여 설명하는 기회가 될 수 있다”고 전했다.프란치스코 교황은 2019년 자의 교서 「그들의 마음을 여시어」(Aperuit Illis)를 발표하고, 매년 연중 제3주일을 ‘하느님의 말씀 주일’로 제정했다. 교황은 교서를 통해 “온 교회가 하나 된 지향으로 하느님의 말씀 주일을 거행하길 바란다”며 “이를 통해 하느님과 유대를 강화하고, 그리스도인 일치를 이루자”고 희망했다. 24일은 두 번째 하느님의 말씀 주일을 지내는 날이다. 이정훈 기자 sjunder@cpbc.co.kr cpbc2021.01.19

기도와 함께하는 해금 연주, 사람들 마음에 한 줄기 위로 됐으면[허영엽 신부가 만난 사람들] (33) 해금 연주자 정겨운 가타리나 해금 연주자 정겨운씨. 해금 연주자 정겨운(가타리나)씨를 처음 만난 것은 그녀가 청년성서모임 연수에서 봉사자로 활동할 때였다. 그 후 가타리나 자매가 악기를 메고 명동 사무실로 방문했다. 그때만 해도 그녀가 해금 연주자인 것을 몰랐다. 내가 연주를 부탁하자 1인 관중(?)을 앞에 놓고 해금을 꺼내 연주를 시작했다. 처음 보는 악기에 처음 들어보는 소리는 신비롭기까지 했다. 해금은 가르치는 곳도 찾기 어렵다는 그녀의 말에, 한번 홍보국 문화프로그램으로 해금을 가르쳐보라고 권유했다. 청년 신자들의 반응은 예상보다 뜨거웠고, 학기 마지막 날에는 항상 명동대성당 입구에서 해금 연주 버스킹을 했다. 코로나19로 모임이 규제받기 전까진 수강생들이 꾸준히 늘어났다. 내친김에 해금 연주단을 만들어보라 했는데 가능할 것 같다. 그녀는 서울대학교 음악대학에서 석사를 마치고 박사과정을 수료한 재원이다. 국가중요무형문화재 제1호 종묘제례악 전수자이기도 한 그녀는 한동안 부산시립국악관현악단 상임 단원을 역임하기도 했다. 현재는 국립외교원, 서울대 평생교육원, 선화예술고등학교, 국립국악중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친다. 그녀는 밴드와 공연을 하고, 바티칸 성 베드로 대성전에서 국악 연주를 하기도 하며 활동 영역을 넓히고 있다.▶언제 어떻게 신자가 되었나요?열심이신 부모님 덕분에 엄마 태중에서부터 성당에 다녔어요. 잘 기억나지 않지만, 제가 어렸을 때는 주일 아침에 디즈니 만화 동산을 포기하고 성당에 가야 하는 현실을 받아들이지 못하고(웃음) 매주 억지로 등 떠밀려 미사를 드리러 갔대요. 그러나 지금 생각하면 하루에 세 끼를 챙기는 것처럼, 주일 미사 참여를 자연스럽게 받아들일 수 있도록 조기 교육해주신 부모님께 감사한 마음이 듭니다.▶학창 시절엔 어떤 학생이었나요? 저는 세 자매 중 막내인데, 언니들은 소위 ‘천상 여자’들이지만 저는 망아지 같아 유난히 키우기 힘드셨대요. 초등학교 때 헌금하라고 용돈을 받으면 100~200원씩 따로 챙겨놨다가 미사 끝나고 오락실에 갔어요. 그 덕분에 오락실에서 주최한 펌프 대회에서 1등을 할 정도였어요. 그때 경품으로 엄청나게 큰 가정용 펌프를 받아왔었는데 그제야 전말을 알게 된 어머니께 엄청 혼이 났어요. 지금은 단아해 보이는 해금 연주자가 되어있지만 어렸을 때는 정말 못 말리는 딸이었던 것 같아요.▶지금 하는 일을 조금 자세하게 설명해주세요. 큰 언니는 한국무용을 전공했고 작은언니는 해금을 전공했다가 거문고로 전과를 했어요. 해금이 한 대 남아 있어 제가 자연스럽게 연주하게 되었어요. 막상 사회에 나와보니 해금과 아쟁을 구분하지 못하는 분들도 많았어요. 우리나라의 악기인데 우리나라 사람들이 잘 모른다는 게 아주 속상하더라고요. 그래서 해금으로 대중들과 가깝게 소통할 수 있는 음악을 직접 만들게 되면서 작곡도 하게 되었어요. 조금 고생스럽더라도 공연장에 관객을 초청하는 연주 형식보다는 제가 직접 찾아가서 연주하거나 야외에서의 버스킹 하는 걸 좀 더 선호해요. 해금을 알고, 좋아하게 되고, 직접 배우기도 하는 분들이 많아졌으면 좋겠어요. 저도 좋아하는 일을 하며 살다 보니 더 행복하기도 하고요.▶하느님께서 자신에게 주신 탈렌트가 있다면 무엇이라고 생각하는지요? 제 연주를 듣고 위로와 힘을 얻었다고 해주시는 고마운 분들이 계시는데요. 그럴 때마다 이건 내가 한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하셨다는 생각이 들어요. 저의 음악이 다른 이들의 마음을 움직이고 가만히 토닥여줄 수 있었다는 것은 제가 감히 할 수 있는 영역이 아닌 것 같아요.▶삶에서 가장 중요한 가치는 무엇이라 생각하시나요?요즘같이 빠르게 변화하는 세상 속에서 추구하기 어렵지만 ‘꾸준함’, ‘성실함’을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고 있어요. 저는 나약하고 부족하기 때문에 수없이 흔들리고 넘어지지만 좌절하지 않고 성실하게 앞으로 나아가려고 노력해요. 하느님께서는 성실하신 분이시라는 믿음만 있으면 인간사의 흥망성쇠는 크게 방해되지 않는 것 같아요.▶삶에서 가장 큰 시련을 겪을 때는 언제였나요?제가 제일 좋아하고 또 유일하게 할 수 있는 것이 해금인데요. 몇 년 전에 꼬리뼈 쪽 신경을 꽉 채울 정도의 큰 낭종이 생겨서 병원에 갔더니 의사 선생님께 ‘바닥에 앉지 마라’는 조언을 들었어요. 수술도 불가능해 좌절했어요, 전통음악을 연주할 때는 무조건 바닥에 앉아 연주해야 하기 때문에 해금을 그만두라는 말처럼 들렸어요. 요즘은 귀 쪽에도 낭종이 생겨서 두통으로 고생해요. 치료도 안 되고, 나아질 수 있는 상황도 아니어서 답답해요. 진통제를 먹으면서 의자에 앉거나 서서 연주를 계속하고 있어요. 언제 해금을 그만둘지 모르는 상황이지만 하느님께 모든 것을 의탁해요. ▶삶의 길잡이가 되어준 성경 말씀은?“나에게 힘을 주시는 분 안에서 나는 모든 것을 할 수 있습니다”(필리 4,13)라는 말씀을 제일 좋아해요. 이 말씀을 떠올리면 정말 모든 일을 해낼 수 있을 것 같은 힘을 얻기도 하고, 또 내가 모든 일을 해낼 수는 없어도 나에게 힘을 주시는 분이 내 안에 계시니 그것으로 충분하다는 위안도 들어요. ▶성서 모임에서는 어떤 것이 제일 기억에 남았나요? 모든 성서공부와 연수가 좋았어요. 하나만 꼽으라면 청년성서모임에서 탈출기 연수 봉사를 했을 때가 가장 기억에 남아요. 그 당시엔 경제적으로도 어렵고 미래가 불안해 음악을 그만두고 다른 길을 찾아볼까 고민하던 시기였거든요. 탈출기 봉사지도 사제 허영엽 신부님께서 “하느님께서 주신 탈렌트를 발견해내고 그것을 다른 이를 위해 쓰는 것이 진정한 행복이며 또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것이다”라는 말씀을 듣고 망치로 한 대 맞은 듯 다시 정신이 번쩍 들어 마음을 다잡았어요. 당시에 신부님을 통해 하느님의 목소리라고 확신이 들었거든요.▶언제 가장 기도를 열심히 하나요? 연주할 때마다 늘 속으로 기도를 해요. 해금이라는 악기는 워낙 예민하고 정해진 음정이 없어서 왼손의 미세한 힘으로 음정을 조절해야 해요. 명주실을 꼬아서 만든 현이라 온도와 습도에 약해서 조율해놨던 음정과 많이 달라져요. 농담으로 ‘해금은 정말 기도가 필요한 악기’라고 하거든요. 저는 ‘듣는 분들이 분심이 들 정도로 안 틀리게만 해주세요’라고 기도를 하기도 해요. 보통은 ‘한 음도 허투루 놓치지 않고 그 안에 하느님의 마음을 담아서 연주하게 해주세요’라고 기도하면 다른 기도는 몰라도 이 기도는 꼭 들어주시더라고요.정겨운씨는 작년 말부터 서울 목동성당에 소그룹을 만들어 2주에 한 번씩 기도 모임과 해금 수업을 하고, 거동이 불편해서 문화생활이 어려우신 장애인들께는 직접 찾아가 연주를 하는 등 다양하게 봉사하고 있다. 그녀는 나중에 여건이 된다면 공부를 좀 더 해서 음악 치료적인 방법으로 접근하고 싶은 계획이 있다고 한다. 현실적으로 주변에 좀 더 도움이 되는 봉사를 하고 싶다는 생각 때문이다. 자신의 재능을 너무나 잘 사용하고 있는 그녀는 자신이 필요하다는 곳에는 가능하면 마다치 않고 달려간다. 그녀가 건강하게 오랫동안 기도와 함께하는 해금 연주를 들었으면 좋겠다.허영엽 신부(서울대교구 홍보위원회 부위원장) cpbc2022.08.16

무너져가는 ‘공동의 집’ 복구에 지금 당장 나설 때 [무너져가는 집을 복구하여라!] <30-끝> 공동의 집 재건을 위하여 - ② 통합생태론 공동의 집 지구는 ‘아낌 없이 주는 나무’처럼 피조물에게 물과 공기, 흙을 내어주며 삶의 터전을 제공하고 있지만, 인간은 그에 대한 고마움보다는 필요에 의해 지구를 황폐화 하고 있다. 지구가 피조물을 위한 상생의 집이 되기 위해서는 하느님께서 인간에게 맡기신 창조질서에 대한 돌봄을 실천해야 한다. 현재 겪고 있는 기후 변화 위기와 신변종 바이러스가 전 세계적으로 창궐하고 있는 현상은 우리에게 ‘공동의 집’에 대한 돌봄이 그 어느 때보다도 시급하고 절실하다는 점을 분명히 드러내고 있다. 이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여러 분야에서 다양한 대안들이 제시되고 있다. 하지만 그 해결의 기본적인 방향은 프란치스코 교황께서 주창하신 ‘통합생태론’을 이해하는 데서 시작되어야 할 것이다. 교황은 이 이론에서 하느님의 창조사업은 의미론적으로 ‘세 가지 차원의 집’에 대한 원리, 즉 하느님의 모상인 ‘인간 생태’, 인간 공동체인 ‘사회 생태’, 모든 생명체를 포괄하는 ‘환경 생태’에 따라 이루어졌으며, 이 ‘세 가지 차원의 집’이 서로 긴밀히 연결되어 있음을 강조한다. 따라서 하느님의 창조질서에 따라 하느님께서 명하신 돌봄의 사명을 수행할 때, ‘세 가지 차원의 집’에 대한 통합적인 이해와 집들 간에 ‘상호 연관성’을 파악하는 것이 필요하다. 이러한 ‘통합생태론’의 바탕 하에 교황은 오늘날 지구 환경의 위기를 해결하기 위해서 단순히 경제, 혹은 ‘과학 기술의 패러다임’으로는 한계가 있음을 분명히 하셨다. 어쩌면 환경 생태의 위기를 온전히 과학 기술만으로 해결할 수 없다는 것은 그것의 한계를 드러내는 것이기보다 그만큼 지구환경 문제 해결이 복잡하고 쉽지 않음을 드러내는 것이다.폭압적인 인간 중심주의에서 벗어나야우선 환경 파괴는 인간과 하느님과의 관계에 보다 근원적인 원인이 있다. 베네딕토 16세 교황이 언급하신 것처럼 “내적인 광야가 엄청나게 넓어져서 세계의 외적인 광야가 점점 늘어가고 있다.”(「찬미받으소서」 217항) 전 세계 많은 숲과 산림의 파괴는 영적이고 정신적인 면에서 우리가 안정을 찾지 못하고 황폐함으로 내몰리고 있다는 증거이며, 강과 호수, 해양의 오염은 삶에 대한 허무주의적 태도가 물의 오염으로 투영되어 있음을 뜻한다. 우리는 아낌없이 내어주는 피조물들, 요컨대 물, 공기, 흙을 비롯한 다른 생명체들이 우리에게 삶의 터전을 제공하고 있기에 우리 생명이 유지되고 있다. 하지만 실버스타인의 그림 동화책 「아낌없이 주는 나무」의 주인공처럼, 우리는 아낌없이 내어주는 존재에 대한 고마움보다는 늘 자신의 필요 속에 갇혀 있다. 피조물들을 우리 마음대로 취급해도 괜찮다는 듯이, 그리고 철저하게 인간의 유익을 위해서 다른 생명체들이 존재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피조물에 대한 감사와 무상성에 대한 인식이 선행되어야 우리는 이러한 폭압적인 인간중심주의에서 벗어날 수 있다. 또한 “소비 대신 희생을, 탐욕 대신 관용을, 낭비 대신 나눔의 정신을, 단순한 포기가 아니라 주는 것을 의미하는 절제의 실천”(9항)이 가능하다. 사회공동체 안에서 불평등과 가난의 문제를 해결하지 않고는 환경파괴가 점점 더 심해진다는 사실을 우리는 세계 도처의 밀림파괴의 현장에서 목도할 수 있다. 즉 지구환경의 보호는 빈곤퇴치와 소외된 이들의 존엄 회복이라는 사회정의와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다. “어떤 지역이 오염된 이유를 알아내려면 사회의 기능, 경제, 형태, 유형, 현실이해 방식에 대한 분석이 필요합니다. 변화의 규모를 생각해 볼 때, 개별 문제에 대한 구체적인 별도의 답을 찾는 것은 더는 가능하지 않습니다. 반드시 자연계 자체의 상호작용과 더불어 자연계와 사회 체계의 상호 작용을 고려하며 포괄적인 해결책을 찾아야 합니다.”(139항) 사회 불평등과 환경파괴는 상호 악영향프란치스코 교황은 환경오염 문제가 발생할 때, 그 원인을 한 측면에서만 바라볼 것이 아니라 그 문제를 둘러싼 다양한 경제적 사회적 조건을 살펴야 한다고 강조한다. 한편, 오늘날 팬데믹에서 경험했듯이 그 피해는 누구에게나 똑같지 않다. 지구 환경이 파괴될 때에도 모든 사람이 똑같이 피해를 보는 것이 아니라, 사회적 피라미드의 기저에 놓인 사람들이 보다 많은 피해를 입게 된다. 이처럼 사회 불평등과 환경파괴는 상호적으로 악영향을 끼치며, 악순환을 반복한다. 이제 “무너져가는 집을 복구하여라”라는 주제하에 진행되어 온 연재를 마친다. 그간 필자는 창세기에서 하느님께서 인간에게 맡기신 ‘창조질서에 대한 돌봄’(창세 2, 15)의 사명을 제대로 실천하지 못함으로 말미암아 ‘세 가지 차원의 집’인 창조질서가 무너져가고 있는 현실을 조망해 보았다. 또한, 그것들을 어떻게 복구할 것인지에 대해 성경과 교회 가르침을 통해 피력해보았다. 우선 ‘하느님의 집’인 우리 영혼은 자신의 사명을 거부하고 하느님 아닌 것들을 ‘우상숭배’ 함으로써 황폐해졌다. 그리고 인간 공동체는 서로를 형제로 받아들이지 못하고 상대방이 받아 마땅한 것을 그에게 되돌려주지 않음으로써 ‘상생의 집’이 되어주는 사명을 등한히 하였다. 또한, 우리는 모든 생명체의 집이며 우주에서 보석처럼 찬란히 빛나는 지구를 훼손하여 위기에 직면하고 있다. 이렇게 무너져가는 집들을 재건하기 위해 하느님은 당신의 ‘구원경륜’를 펼치시며 이 세상을 구원하시기 위해 당신 외아들을 우리에게 내어주셨다.(요한 3,16) 그리고 교회는 ‘가톨릭 사회교리’를 통해 사회 공동체를 치유하고 무너져가는 지구를 재건할 올바른 방향성을 제시하였다. “종은 누가 그것을 울리기 전까지는 종이 아니다. 또한, 노래는 누가 그걸 부르기 전에는 노래가 아니다.” 우리가 아는 것들을 구체적인 삶의 현장에서 하나씩 실천하고 구현해 나가는 것이 더욱 절실히 요청되는 때이다. 김평만 신부(가톨릭중앙의료원 영성구현실장 겸 의과대학 인문사회의학과 교수) cpbc2022.06.22

움츠렸던 신앙생활, 기지개 켜자주님 부활 대축일 맞아 신앙생활 회복 노력신앙 서적 통해 신앙인으로 내적 힘 기르길 각 교구와 본당, 신심 단체 등이 코로나 이전의 신앙생활을 회복하기 위해 기지개를 켜고 있다. 주님 부활 대축일을 맞아 그동안 움츠렸던 신앙생활을 돌아보고, 신앙 서적들을 통해 신앙인으로 내적인 힘을 길러보는 건 어떨까.죽음 부활 영원한 생명 바로 알기 게르하르트 로핑크 신부 지음김혁태 신부 옮김 생활성서게르하르트 로핑크 신부가 죽음과 부활, 종말에 대해 다룬 책. 성경과 그리스도 신앙 전통, 위대한 신학자들의 사유와 인간 이성을 통해 ‘죽음’에 대한 표면적이고 그릇된 생각을 바로잡았다. 현대인에게 죽음과 부활, 영혼 불멸과 심판, 영원한 생명과 연옥-지옥, 피조물의 완성에 대한 답변을 제시했다. 로핑크 신부는 심판은 하느님이 우리에게 무자비한 선고를 내리고, 그에 따른 배상을 요구하시는 게 아니라고 설명한다. 하느님이 높은 자리에서 처벌과 배상을 하라는 판결문을 내리는 심판이 아니며, “본질에서 절대적 진리이신 하느님 앞에서 인간이 스스로 자기 자신을 심판한다”고 강조한다. 곧 우리 스스로가 판결을 내리는 것이며, 우리는 우리 자신 때문에 생겨난, 죽음에서 가차 없이 내 시야에 들어올 희생자들 앞에서 판결을 내려야 한다고 강조한다. 내가 도울 수 있었음에도 돕지 않았던 수많은 이들, 내가 위로할 수 있었음에도 위로하지 않았던 이들, 내가 내 목적만을 위해 이용했던 수많은 이들이 죽음에서 내 앞에 모여와 나를 바라본다는 것이다. 이처럼 죽음에서 하느님과의 만남은 곧 진리와의 만남이며, 세상에 대한 진리, 나 자신에 대한 진리와의 만남이 된다. 내가 믿는 부활- 삶의 신학 콜로키움 심상태 몬시뇰 외 12인 대화문화아카데미“부활한 삶을 살고 싶은가? 그 때를 먼 미래로 미루지 말라. 지금 당신의 몸을 쪼개도록 하라. 그분처럼 우리의 몸을 쪼개어 남에게 나누어줄 때 우리는 그분처럼 남에게 부활의 몸이 될 것이다. 부활의 삶은 ‘나’를 사라지게 하여 ‘세상’을 살리는 데 있다.”(이제민 신부, 부활의 삶을 살기 위하여)하느님과 인간의 관계, 인간과 인간의 관계, 자연과 인간의 관계에 관한 통찰…. 가톨릭과 개신교를 대표하는 13명의 신학자가 고백하는 ‘내가 믿는 부활신앙’에 관한 이야기를 담았다. 그리스도교 핵심 신앙인 부활이 지닌 참뜻은 무엇이며, 이 시대의 현대인들은 부활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고백해야 하는지에 대한 성찰을 담아냈다. 13명의 신학자와 목회자들이 2010년부터 2년 동안 토론한 결과물이다. 가톨릭에서는 심상태 몬시뇰, 서공석ㆍ정양모ㆍ이제민 신부, 최혜영ㆍ김승혜 수녀가, 개신교에서는 김경재ㆍ유경재ㆍ이계준 목사 등이 저자로 참여했다. 바로 오늘(성삼일- 부활묵상)기스베르트 그레샤케 신부 지음허찬욱 신부 옮김 성서와함께 “이 밤은 죽음의 사슬 끊으신 그리스도, 무덤의 승리자로 부활하신 밤”(‘부활 찬송’ 중에서)이 시대의 교의신학자 기스베르트 그레샤케 신부가 바티칸 라디오 독일 지부에서 한 성삼일과 부활에 관련된 강의 내용을 엮었다. △성목요일 : 일치- 하느님이 이끄시는 길 △성금요일 : 죽음 속에 생명이 있네 △성토요일 : 희망 속에서 견디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 아닙니다 △부활 : 우리는 모두 부활할 것입니다를 주제로 다뤘다. 그레샤케 신부는 예수의 죽음과 부활이 지나간 과거의 사건이 아니라 오늘 우리가 그 사건으로 들어가 구원의 힘을 체험할 수 있는 현재의 사건이라고 역설한다.“‘바로 오늘’은 단지 우리가 기념하는 성목요일에만 해당하는 말이 아닙니다. 하느님과 이루는 일치와 우리 서로 간의 일치를 매일 새로이 이루어가야 합니다. 예수님처럼 ‘남을 위한 존재’가 되어야 합니다. 예수님이 사셨던 타인을 위한 사랑의 삶 안으로 기꺼이 들어갈 때, 우리가 사는 매일이 성목요일이 될 것입니다. 모든 것을 새로이 변화시키고, 모든 것을 일치로 이끄는 그리스도의 사랑이 매일 드러날 것입니다.”(본문 중에서)새로운 시작, 부활이 왔다!안드레아 슈바르츠 지음ㆍ황미하 옮김바오로딸독일 작가 안드레아 슈바르츠가 쓴 부활 묵상서. 주님 부활 대축일을 축으로 재의 수요일, 사순 시기, 성주간, 성금요일, 부활 시기, 성령 강림 대축일 등 6장으로 구성했다. 부활을 앞두고, 일상에서 내게 도움이 되는 것을 새롭게 연습하고, 생기를 되찾아 더 활기차게 되어 신앙인으로서 새롭게 출발하도록 안내한다. 이지혜 기자 bonappetit@cpbc.co.kr cpbc2022.04.13

물질과 권력 숭배, 팬데믹보다 심각… 교회는 세속화된 세상 구원해야[팬데믹과 신앙, 믿음의 길을 찾아서] (1) 마산교구 원로사목자 이제민 신부 이제민 신부는 “예수님의 이름으로 복음을 전하면서 올바르게 전하고 있는지 많이 성찰해야 한다”고 말했다. 코로나19가 팬데믹에서 엔데믹으로 넘어가고 있다. 일상이 회복되면서 본당에선 다시 성가가 울려 퍼지고, 단체 모임도 재개됐다. 신앙생활이 제자리를 찾아가는 듯 보이지만, 코로나19 이전과 같을 수만은 없다. 모든 것을 멈춰 세우고 생활양식마저 바꿔놓은 전환기의 시대에 다시 모인 하느님 백성은 어떻게 달라져야 할까. 가톨릭평화신문은 창간 34주년을 맞아 ‘팬데믹과 신앙’을 주제로 신학자들을 만난다. 하느님 말씀을 학문적으로 연구하고 실천적으로 성찰해 온 이들의 진단과 전망 속에서 우리의 신앙을 돌아보고 교회가 나아갈 길을 모색해보고자 한다. KTX 마산역으로 마중 나온 이제민 신부는 역에서 도보로 5분 거리인 마산교구 주교좌 양덕동성당으로 안내했다. 평일 오후, 불이 꺼진 성당은 고요했다. 스테인드글라스를 통해 들어오는 빛에 눈이 익숙해지길 기다렸다. 주변 도로에서 들리는 차 소리가 아득했다. 스치는 옷깃이 내는 바스락거림조차 조심스러웠다. 신자석 맨 뒷자리에 이 신부와 나란히 앉았다. 그렇게 몇 분의 침묵이 흘렀을까. 낮은 목소리로 이 신부가 운을 뗐다. “전례 분위기엔 이런 고요함이 있어야 해요. 인간의 소리를, 나의 소리를 죽여야 그분의 소리를 비로소 들을 수 있는 거예요. 코로나로 텅 빈 성당을 어떻게 채울 것인가 고민하는데, 텅 빈 성당의 침묵을 잊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침묵은 종교의 근본적인 분위기라고 생각하거든요.” 그가 성당으로 먼저 온 이유였다. 잠시나마 창조의 원천으로 이끄는 침묵을 느끼게 해주며 텅 빈 성당이 위기가 아니라 기회일 수 있음을 보여줬다. “텅 빈 공간은 하느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시던 태초의 순간을 떠올리게 합니다. 그 순간에 잠기어 하느님의 숨결을 느끼게 합니다. …침묵하는 사람만이 그분의 음성을 들을 수 있고 그분께서 몸 바쳐 사랑하신 고통받는 이들의 음성을 들을 수 있을 것입니다.”(「포스트 코로나 시대의 우리」) 그는 책에서 “텅 빈 성당의 고요에서 코로나19가 극복된 일상이 새로 시작된다”고 썼다. 성당 근처 마산 가톨릭여성회관으로 자리를 옮겨 이야기를 이어갔다. 예수님이 만난 사람들 일상으로 속속 돌아가면서 텅 빈 성당은 신자들로 다시 채워지고 있다. 이 신부는 코로나19 이후를 이야기할 때 “가난하고 힘없는 이들이 여전히 삶의 변두리를 벗어나지 못하고, 고통받고 아픈 이들이 교회 안에서 자리할 곳이 없다면 코로나를 이겨냈다 한들 무슨 의미가 있겠느냐”고 되물었다. 그리고 예수님이 어떠셨는지를 떠올려보라고 했다. “예수님이 만난 사람이 누구였나요. 중풍 병자, 나병 환자, 과부 등 가난하고 아픈 이들이었고, 소외와 차별을 겪는 이웃이었죠. 예수님은 그 사람들에게 다가가 함께 해주셨어요.“ 아픈 이들은 예수님을 만나 병이 낫고 깨끗해졌다. 예수님의 치유는 육신의 병이 낫는 것 이상의 체험이다. 예수님께서 건네주시는 사랑으로 고통과 원망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예수님을 통해 생명의 원천이신 하느님께서 지금 함께 하신다는 걸 느끼며 새롭게 태어난 것이다. 이 신부는 “그럼 무엇이 더 필요하겠느냐”면서 “중풍에서, 나병에서 낫지 않아도 괜찮은 거다. 예수님을 통해 하느님을 알게 됐으니, 내가 어떤 사람이고 어떤 상태이든 상관없이 온전히 자유로운 삶을 살 수 있는 것”이라고 말했다. 그것이 부활의 삶이라고도 했다. “고통스러운 처지에서도 용기를 내 예수님께 찾아갔던 이들의 마음, 누구도 돌보지 않았던 이들에게 기꺼이 다가갔던 예수님의 마음, 우리는 그 마음이 어떠했는가를 살펴야 합니다.” 코로나19보다 더 심각한 질병, 물질과 권력 이 신부는 “코로나19라는 새로운 질병이 세상을 휩쓸었지만, 사실 우리는 그보다 더 무서운 병을 늘 앓고 있지 않았냐”면서 물질과 권력을 숭배하는 현대사회의 병을 지적했다. “코로나19로 모두가 어렵다고 하지만, 그 와중에 돈을 번 사람들은 또 얼마나 많은가요. 경제를 살려야 한다면서 더 불평등해졌어요. 경제를 우선할 때 낙수효과를 기대했지만, 어디 물이 떨어지던가요. 물 안 떨어지게 하려고 그릇을 더 크게 만들었죠. 그게 돈의 속성, 권력의 속성이에요.” 그는 경제의 어원을 되짚었다. 경제를 지칭하는 영어 이코노미(economy)는 집을 의미하는 그리스어 오이코스(Oikos)와 관리한다는 뜻의 노미아(nomia)를 합친 오이코노미아(Oikonomia)에서 유래했다. 이 신부는 “결국 집을 관리하고 가꾸는 것이 경제인데, 돈만 갖고는 되는 게 아니다”고 했다. “집에 아픈 사람이 있으면 보살펴야죠. 집을 잘 가꾼다는 건 소외받는 사람이 없도록 하는 것이에요. 그런데 경제를 한다면서 사람을 소외시키고 더 많이 아프게 하면 되겠어요. 다른 게 병이 아니라 그런 게 병이에요. 참 안타깝지요.” 세상을 구원하는 교회 이 신부는 “이러한 질병을 교회가 앓으면 세상엔 희망이 없다”고 했다. “교회는 물질과 권력에서 벗어난 삶이 있다는 것을 보여줘야 해요. 수도원의 삶이 하나의 상징이 될 수도 있겠고요. 물론 세상 경제가 어려우면 교회도 힘들죠. 그렇다고 교회가 살아남아야 한다며 경제 논리에 따라서 숫자놀음을 하면 되겠어요. 그럴수록 복음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이 신부는 덧붙여 프란치스코 교황이 지적한 ‘영적 세속성’을 언급했다. 영적 세속성은 신앙심의 외양 뒤에, 교회에 대한 사랑의 겉모습 뒤에 숨어서 주님의 영광이 아니라 인간적인 영광과 개인의 안녕을 추구한다.(「복음의 기쁨」 93항) “교회가 세속화되면 세상보다 더 속물인 거예요. ‘돈과 권력이 전부가 아니다’고 외치면서 정작 교회가 돈과 권력에 젖어 있지 않았나요. 세속화된 세상을 구원하는 건 결국 교회고, 종교입니다. 교황이 영적 세속성을 말한 건 비판이라기보다는 종교가 세상을 구원할 수 있다는 그 역할을 일깨운 것이라고 봐요.” 무신론에서 길어올린 신앙 이 신부는 유학 중이던 1980년 오스트리아 그라츠에서 사제품을 받았다. 1986년 독일 뷔츠부르크대학에서 기초신학을 전공하며 박사학위를 받았다. 한국에 돌아와선 광주가톨릭대에서 신학생들을 가르쳤고 여러 본당과 명례성지에서 사목했다. 그에겐 무신론자를 자처하던 신학생 시절이 있었다. 하느님을 공부하면서 ‘신은 없다’는 명제에 꽂혔다. 그렇게 신학과 신앙 사이에서 하느님에 관한 질문에 매달리며 유학을 떠났다. 신학자 칼 라너(1904~1984)를 알게 되고 제2차 바티칸 공의회 내용과 개념을 깨닫게 되면서 그는 ‘신은 있다 없다’의 고민에서 자유로워질 수 있었다. “칼 라너의 책을 보다가 ‘대부분의 그리스도인이 믿는 하느님은 고맙게도 존재하지 않는다’라는 문장을 봤어요. 충격이었죠. 내가 믿는 하느님을 다시 돌아보고 나는 어떻게 하느님을 고백할까를 생각하면서 하느님을 올바로 알기 위해 나아갈 수 있었지요.” 그는 인간의 언어로 하느님의 신비를 전하는 데 한계가 있음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신학자로서, 사제로서 그의 삶은 하느님 신비와 복음의 언어를 가능한 훼손하지 않고 전하기 위해 노력해 온 시간이었다. 그가 남긴 저서마다 말과 언어에 대한 성찰이 빠지지 않는 이유다. 엥기켄, 손안에 있다. 이 신부가 곱씹고 또 곱씹는 구절은 마르코복음 1장 15절 “하느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는 말씀이다. 성경에선 ‘가까이 왔다’로 번역된 그리스어 엥기켄은 ‘손안에 있다. 손이 닿는 곳에 있다’는 뜻이다. 이 신부는 “하느님께서 다스리는 왕국이 손이 닿는 곳에 와 있다는 말씀이야말로 예수님께서 전하시는 복음”이라고 말했다. “손을 내밀면 닿는 곳에 천국이 와 있습니다. 우리가 사는 현실에 하느님 나라가 있는 거예요. 온갖 질병을 앓는 사람, 슬픔과 괴로움으로 고통받는 이들 안에 있는 거고요. 예수님께선 그들과 함께하시면서 어떻게 하느님 나라를 살 수 있는지를 삶으로 보여주셨습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손을 뻗어 천국에 다가가지 않고 오히려 밀어내고 있지 않았나요.” 그는 「손 내미는 사랑」에서 “하느님 왕국을 체험하고 싶으면 밀어내지 말고 가까이 다가가라”고 했다. 보기 싫은 사람, 함께 하고 싶지 않은 사람을 밀어내는 건 자신도 모르게 천국을, 하느님을 밀어내는 것이다. “우리의 손은 어디를 향하고 있습니까? 남을 향하여 손을 펴지 못하는 것은 아닙니까? 생명을 일으키기 위해 우리는 손을 내밀어야 합니다. 손을 잡고 일으켜 세워야 합니다.”(「손내미는 사랑」) 언제 어디서나 함께하시는 하느님 믿어야 삶의 자리에서 부활을 체험하고, 천국을 살아야 한다는 그의 말은 논쟁을 불러일으키기도 했다. 사람들은 세상을 떠나서 가는 천국, 죽음 이후의 부활이 없는 것이냐고 그에게 따져 물었다. 이 신부는 “무엇이 있다 없다고 이야기하는 낡은 차원을 넘어서야 한다”고 했다. “살아서 가지 못하는 곳을 죽어서는 갈 수 있나요. 하느님을 믿는 그리스도인에겐 지금 이 시간이 하느님의 시간이고, 지금 이 공간이 하느님의 나라가 돼야 합니다. 만나는 사람 모두가 하느님께서 생명을 주신 소중한 존재인 것이에요. 그러면 내가 지금 천국을 살고 있는 것인데 정말 기쁘지 않겠어요.” 언제 어디서나 함께 하시는 하느님을 체험하고 지금 여기에서 찬미하며 기쁘게 살아갈 때 신앙의 뿌리는 단단해진다. 위기 속에선 더욱 깊이 뿌리를 내리게 된다. 복음을 전하는 여정엔 끝이 없어 이 신부는 매일 새벽 미사 전 성무일도 독서기도로 하루를 시작한다. 그는 “독서는 새벽에 해야 살이 되는 것 같다”고 했다. 읽고 또 읽고 듣고 또 들었던 성경 말씀이지만, 매일 미사 때 듣는 독서와 복음, 성무일도의 시편기도와 독서기도에 나오는 교부들의 말씀은 언제나 새롭다. 하루종일 묵상하기에도 버거울 정도다. 2019년 사목 일선에서 물러난 이 신부는 마산 성지여고 내 사제관에서 머물고 있다. 그동안 썼던 자료들과 매일의 묵상을 정리하며 지내고 있다. 이 신부는 최근 마르코복음 묵상집 「모든 사람이 나에게 복음」 1,2권을 펴냈다. 각 권 모두 500쪽이 넘는다. 내년에는 교리서도 다시 정리해볼 계획이라고 했다. 복음에 머물면서 복음을 제대로 전해야 한다는 일념은 그를 지치지 않게 하는 듯싶다. 그는 인터뷰 후 며칠 뒤 책 소식을 전하며 이렇게 문자를 보내왔다. “많은 그리스도인이 예수님이 전하신 복음과는 다른 복음을 전한다는 생각이 들 때가 많습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복음을 전한다는 데 그 예수님이 진짜 예수님이신지 많이 성찰해야 할 것입니다.” 박수정 기자 catherine@cpbc.co.kr cpbc2022.05.11

링컨이 미 남북전쟁에서 승리한 또 다른 비결[엉클 죠의 바티칸 산책] (30)성경에서 얻는 지혜 “우리가 휴대전화 다루듯, 그리고 그것을 언제나 지니고 다니듯 성경을 대한다면 무슨 일이 일어나겠습니까?” 프란치스코 교황이 삼종기도 중에 성경을 들어 보이며 ‘성경 읽기의 생활화’를 역설하고 있다. 【CNS 자료 사진】 노예 해방으로 유명한 미국 대통령 에이브러햄 링컨은 여러 가지 면에서 연구 대상입니다. 그 가운데 하나는 남북전쟁을 승리로 이끈 비결입니다. 초등학교 졸업 학력에, 군대 경력이라곤 민병대 부관(1832년 블랙호크 전쟁) 생활 몇 개월에 불과한 링컨이 전쟁을 직접 지휘했다고 하는데, 율리시스 그랜트 장군 등 육사 출신의 기라성 같은 군인들을 어떻게 통솔했을까, 이것은 큰 미스터리 가운데 하나입니다. 미국의 전략학 전문가 엘리엇 코언 교수(존스홉킨스대)의 진단입니다. “링컨은 법전서와 셰익스피어에 통달했고 성경에도 조예가 깊었다. 한순간만 깊게 생각해 보면 셰익스피어나 성경이 군사적 지식과도 상당한 관련이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즉 전쟁의 고통, 전사들의 다양한 개성, 그리고 전쟁 지도자가 내려야 하는 결정들이 고스란히 녹아 있는 것이다.” (「최고사령부」 엘리엇 코언, 이진우 역, 가산출판) 코언 교수의 진단 가운데 “성경에도 조예가 깊었다”는 말에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독실한 그리스도교 신자였던 링컨은 전쟁 지휘의 지혜를 구약 성경의 역사서에서 구했다는 사실은 유명한 이야기입니다. 성경, 군사학 교과서가 되기도 성경은 하느님 말씀을 기록한 경전이지만, 보는 시각에 따라 지혜의 보고입니다. 군사학적 시각에서 보면 성경은 군사학 교과서입니다. 고대 근동의 역사는 피비린내 나는 전쟁의 역사입니다. 전쟁에서 지면 민족 전체가 노예로 전락하는 상황이어서 전쟁술이 발달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여호수아기와 사무엘기 등 구약의 역사서는 온통 전쟁 이야기입니다. 여호수아의 가나안 정복과 다윗의 예루살렘 정복은 신학적 의미를 떠나 군사학적 차원에서도 흥미진진하지 않습니까. 마틴 J. 도헤티 등이 저술한 「성경 속의 전쟁들」(전의우 역, 포이에마)은 아이 전투에서부터 마사다 항전까지 모두 20개의 전쟁을 집중적으로 분석하고 있습니다. 군사학만이 아닙니다. 철학 역사학 법학 정치학 경제학 경영학 등 대부분 학문이 성경과 밀접한 관련이 있습니다. 경제학의 ‘보이지 않는 손’은 전지전능하신 성령과 같은 존재입니다. 수요공급의 법칙 등 경제학의 가격이론은 ‘보이지 않는 손’ 없이는 성립되지 않습니다. 복잡다단한 금리 환율 주가 등을 누가 정해줍니까. 바로 ‘보이지 않는 손’입니다. 정치학의 왕권신수설이나 사회계약설 모두 성경에 근거를 두고 있습니다. 문학 미술 음악 등 예술 분야는 말할 필요가 없습니다. 슈베르트의 ‘아베 마리아’를 듣는 그리스도교 신자와 비신자의 감동은 차원이 다릅니다. 불교 신자였던 시인 서정주는 문하생들에게 성경을 읽도록 권장했다고 합니다. 성경을 모르고 서양 문학을 알 수 없고, 서양 문학을 빼놓고 문학을 논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목포대학교에서 경제정책학을 강의할 때(2008년) 경험한 일입니다. ‘한강의 기적과 라인 강의 기적에 대해 분석하라’는 과제를 낸 적이 있는데, 중국과 베트남 학생들이 엉뚱한 내용의 리포트를 제출한 것을 보고 깜짝 놀랐습니다. 면담을 통해 알고 보니 그들은 ‘기적’의 의미를 잘못 알고 있더군요. 사전적 의미만 겨우 알고 있을 뿐 무에서 유를 창조한다는 신학적 의미는 전혀 모르고 있었습니다. 공산주의 국가에서 자란 학생들이라 ‘기적’에 대한 개념이 부족해서 생긴 해프닝이었습니다.종교 교리와 학문적 이론의 전개학문적 이론의 전개에서도 종교 교리의 차이에 따른 영향이 아주 큽니다. 이슬람 경제학은 자본주의 경제학과 근본적으로 다릅니다. 한 가지 예를 들면, 성경(신약)은 금리를 인정하고 있으나 코란은 금리를 인정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금융학과 금융기법이 다릅니다. 은행이 주택담보대출을 할 경우 주택 소유권을 넘겨받았다가 대출금(원금+이자)을 모두 회수한 시점에서 원래 집주인에게 되돌려 줍니다. 은행은 수수료 명목으로 대출금 이자를 받기 위해 이런 방법을 동원합니다. 지금은 이슬람 국가에서도 금리를 인정하는 금융상품이 많아졌지만, 원칙적으로는 그렇다는 것입니다. 경제학만 이러겠습니까. 다른 분야도 마찬가지일 것입니다.유신론자이든 무신론자이든, 그리스도교 신자이든 비신자이든, 성경을 알면 난해한 이론을 이해하는 데 큰 도움이 됩니다. 이유는 간단합니다. 그리스도교 문명권(유럽과 미국)에서 잉태된 학문이 세계 질서를 주도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지극히 현실적인 문제이기도 합니다. 이백만(요셉, 주교황청 한국대사) 평화신문2020.07.07

교만에 빠지면 ‘근원적인 정체성’ 깨닫을 수 없어[무너져가는 집을 복구하여라!] 6. 하느님의 구원경륜③- 인간은 초월적인 존재 인간은 천사처럼 존귀하게 빛나기도 하지만, 자아가 교만에 빠져 하느님께 순종하지 않을 경우 하느님과 올바른 관계를 맺을 수 없다. 그림은 삶의 첫 자리를 하느님께 내어드린 성모님의 신앙 태도를 볼 수 있는 안젤리코 작 ‘주님 탄생 예고’. 출처=가톨릭 굿뉴스 성경의 가르침대로 인간은 위대한 존재이지만 부서지기 쉬운 연약한 존재이며, 천사처럼 존귀하게 빛나기도 하지만 동물보다 더 하찮게 될 수도 있다. 이러한 양면적인 특성을 지닌 인간이 하느님의 집(모상)으로써 자기 자신을 깨닫고, 하느님의 부르심에 합당하게 응답할 수 있게 하는 핵심 요소는 무엇인가? 바로 인간의 초월적인 능력이다, 즉 인간은 ‘자의식’과 ‘자유의지’라는 초월적인 능력을 지녔다는 점에서 동물과 본질적으로 구별된다. 자의식과 자유의지 지닌 초월적인 존재2016년 구글 딥마인드(DeepMind)가 개발한 인공지능(AI) 바둑 프로그램 ‘알파고’가 이세돌 9단을 상대로 바둑 경기에서 승리한 사실이 세간에 큰 관심을 불러일으켰다. 알파고의 승리 결과는 바둑처럼 경우의 수가 많은 복잡한 게임이라 할지라도, 딥러닝을 탑재한 인공지능(AI)을 더 이상 이길 수 없다는 것을 증명한 사건이다. 하지만 인공지능의 능력이 아무리 출중해진다 해도 그것의 알고리즘을 만드는 것은 여전히 사람이다. 또한 인공지능이 구조적인 면에서 인간을 넘어설 수 없는 영역이 있다. 예를 들면 아주 복잡한 연산 문제가 있을 때, 사람은 그 답을 모른다는 사실을 즉각적으로 파악할 수 있다. 이에 반해 인공지능은 사람처럼 자신이 무엇을 알지 못하는지 빠른 답을 도출하지 못한다. 그 이유는 사람에게는 인공지능의 능력과는 차원이 다른 ‘메타인지’, 즉 자기 자신을 성찰할 수 있는 ‘초월적인 자아의식’이 있기 때문이다. 인공지능이 기능적인 능력 면에서 인간을 앞설 수는 있지만, ‘메타인지’를 가진 인간을 지배할 수는 없다. 따라서 우리가 가장 경계해야 하는 점은 ‘인공지능’의 득세나 과학발전 그 자체가 아니다. 오히려 하느님께서 부여하신 특별한 선물인 ‘초월적인 자의식’, 즉 ‘자아’가 교만에 빠져 하느님께 순종하지 않는 영적이고 윤리적인 불순종을 경계해야 한다. 인간이 하느님의 법이나 자연법을 따르지 않는다면 가치 중립적인 과학발전은 우리에게 독이 되어 우리 생존을 위협하게 될 것이다. 하느님은 인간에게 ‘자의식’ 외에 또 다른 영적인 능력인 ‘자유의지’를 선사하셨다. 인간은 아우슈비츠 수용소와 같은 열악한 환경에서도 타인을 위해 자기 목숨을 내어 놓는 고귀한 결단을 할 수 있는 존재이면서도, 자유의지를 남용하여 600만 명이나 되는 사람들을 가스실의 연기로 사라지게 하는 부조리한 선택을 할 수 있는 존재이기도 하다. 인간 이하의 형태로 떨어질 자유도, 자기 자신의 결단을 통해 더 높은 신적인 형태로 다시 태어날 자유도 모두 인간 자신에게 있다. 이렇게 인간은 한계 지워지지 않은 자기 자신의 자유의지에 따라 스스로의 본성을 확정해 가는 존재이다. 요컨대 인간은 자기 자신의 본질을 스스로 만들어 갈 영예와 의무를 처음부터 타고났다. 이토록 고귀한 자유의지를 올바로 행사할 수 있기 위해서는 내가 누구인지 자기 자신의 참된 정체성이 형성되어야 한다. 하느님과의 관계 안에서 부여되는 정체성한 인격의 주체로서 ‘초월적인 자의식’과 ‘자유의지’를 지닌 인간은 관계 안에서 자신의 정체성을 형성해 간다. 원래 정체성이란 개념은 영어로 아이덴티티(identity)라고 하는데 이는 ‘동일함’을 뜻하는 라틴어 이뎀(idem)에서 비롯되었다. 나의 정체성에 대한 물음, 즉 ‘나는 누구인가?’라고 할 때, 이것은 ‘나’라는 존재와 ‘무엇’이 동일시될 수 있는가에 대한 물음이다. 먼저 ‘나’라는 존재를 생각해보자. 어릴 적 ‘나’와 지금의 ‘나’는 외형이나 성격적인 면에서 분명히 다르지만 그때의 ‘나’와 지금의 ‘나’가 동일하다고 여기는 것은 자기 동일성을 갖게 하는 ‘자의식’이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자의식은 “내가 누구인가?”, 즉 ‘나’와 등가 되고 동일시되는 대상으로 나아간다. “나는 사제다”, “나는 부모다”, “나는 학생이다” 등등 나와 동일시되는 대상들이 여럿 있다. 하지만 이것은 직업이나 타인과의 관계, 신분 등을 나와 동일시하면서 부여하는 정체성이지, 나의 ‘근원적인 정체성’은 아니다. 그것은 하느님과의 관계 안에서 부여된다. 하느님께서 우리를 이 세상에 내실 때, 우리에게 영적인 존재로서 고유한 인격을 부여하셨다. 따라서 하느님과 우선적인 관계를 맺고 하느님을 우리 삶의 첫 자리에 모실 때, 그리고 하느님의 부르심을 깨닫게 될 때, ‘근원적인 정체성’이 형성된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은 자신의 정체성 혼란을 겪고 있다. 그 이유는 교만함 때문에 하느님과 올바른 관계를 맺지 못하여 ‘근원적인 정체성’이 형성되지 못한 결과이다.성경은 인간이 초월적인 존재임을 다음과 같이 언급하고 있다. “(인간을) 천사보다는 조금 못하게 만드시고, 영광과 존귀의 관을 씌워 주셨습니다.”(시편 8,6) 이 구절은 하느님과 소통하고 일치할 수 있도록 인간만이 영적인 존재로 창조되었음을 의미한다. 영적인 존재로 창조된 우리 자신을 잘 돌본다는 것은 하느님을 우리 영혼의 첫 자리에 모시고 하느님 앞에서 내가 누구인지 자신의 근원적인 정체성을 깨닫는 것이다. 성모님은 어린 나이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근원적인 정체성을 깨달았기에 다음과 같이 고백할 수 있었다. “주님의 종이오니 그대로 내게 이루어지소서.”(루카 1,38) 여기서 삶의 첫 자리를 하느님께 내어드리는 성모님의 신앙의 태도를 엿볼 수 있다. 김평만 신부(가톨릭중앙의료원 영성구현실장 겸 의과대학 인문사회의학과 교수) cpbc2021.12.29

그림자 회화 ‘카게에’ 거장이 전하는 사랑과 공생올해 98세 맞은 후지시로 세이지 국내 두 번째 전시... 예술의전당 한가람미술관에서10일부터 10월 12일까지 개최 후지시로 세이지의 작품 '승천' ‘사랑’과 ‘공생’의 메시지를 전하는 특별한 전시회가 올여름 한국을 찾아온다. 세계적인 그림자 회화 ‘카게에’의 거장 후지시로 세이지(藤城淸治, 98)의 ‘빛과 그림자의 판타지 展’이다. 그의 작품 세계를 주제별로 만나볼 수 있는 대규모 전시다.카게에는 밑그림을 그리고 잘라 셀로판지를 붙이고 조명을 스크린에 비춰 색감과 그림자로 표현하는 장르의 작품을 말한다. 밝은 빛과 어두운 빛의 밸런스, 오려 붙인 재료, 질감의 투과율까지 치밀하게 계산해서 완성하는 카게에는 라이팅 간판 광고의 효시이기도 하다. 후지시로 세이지는 이러한 독특한 장르를 이끌어온 일본의 대표적 예술가다. 후지시로 세이지는 일본이 가장 사랑하는 작가, 일본의 디즈니라는 찬사를 받으며 100회가 넘는 전시를 개최했다. 국내에는 2005년에 이어 이번이 두 번째 전시다. 이번 전시는 지난해 개최 예정이었지만 코로나19로 인해 올해로 연기됐다. 힘든 과정 끝에 개최되는 ‘빛과 그림자의 판타지 展’를 통해 그는 ‘사랑’과 ‘공생’의 메시지를 전하려 한다.제2차 세계대전 직후 초토화가 된 도쿄. 청년이었던 후지시로 세이지는 잿더미가 된 들판 어디서라도 구할 수 있는 골판지와 전구를 사용해 카게에를 만들기 시작했다. 전쟁이 끝난 이후에도 불에 타버린 일본은 여전히 정전이 잦았고 그런 환경 속에서 후지시로 세이지는 카게에를 만나 한 줄기 빛을 찾고 아름다움을 찾고 평화를 찾았다. ‘빛과 그림자의 판타지 展’은 후지시로 세이지의 혼이 깃든 초기의 흑백작품 ‘서유기 시리즈’부터 미야자와 겐지의 ‘은하철도의 밤’을 소재로 한 작품을 비롯해 평화와 사랑, 그리고 공생을 주제로 지금까지 접할 수 없었던 아름답고 신비로운 세계를 경험할 수 있도록 구성돼 있다. 특히 ‘성경’을 주제로 한 섹션에서는 ‘예수 탄생’, ‘겟세마니의 기도’, ‘승천’을 비롯해 ‘성녀 클라라의 빛’ 등을 선보일 예정이다. 후지시로 세이지는 “성경은 읽으면 읽을수록 그 크기와 무게에 압도돼 어떻게 시각적으로 호소할까 하는 고민 탓에 그 핵심을 파악하기가 힘들었다”며 “특히 11년의 세월에 걸쳐 완성한 ‘천지창조’를 작업하며 마음과 몸속에 서서히 성경의 메시지를 체화해 나갔다”고 말했다. 카게에 제작은 모든 것에 빛을 비춰서 생명을 불어넣는 수작업으로 흑과 백 속에서 그 원점을 찾을 수 있다. 카게에가 지닌 신비한 상징성은 흑과 백 속에서 분명하게 표현되기 때문이다. 후지시로 세이지는 “카게에 성화를 통해 만물을 지배하는 하느님의 위대함, 성경이 지닌 깊은 의미와 인생의 지침, 경고, 희망을 느낄 수 있어 감사하다”고 전했다. 그는 그러면서 “한국을 잘 알고 싶고 한국을 더 가까이하고 싶다”며 “생애 마지막 작품이라 여기며 온 힘을 다해 작업하고 있다”고 말했다. 이번 한국 전시에 큰 애정을 기울이고 있는 후지시로 세이지. 카게에가 국내에는 생소한 장르인 만큼 이번 전시는 관람객들에게 특별한 경험을 선사할 것으로 보인다.전시를 주최한 케이아트커뮤니케이션 강혜숙(클라라) 대표는 “평화, 사랑 공생의 작품 세계를 추구해 온 후지시로 세이지의 작품이 어려운 시기를 겪고 있는 국민에게 위로와 힘이 될 수 있길 바란다”고 전했다. 올해 98세를 맞은 후지시로 세이지가 일생의 과업으로 여겼다는 ‘성화’를 어떻게 빛과 그림자를 통해 펼쳐 보였는지 이번 전시를 통해 만나보자. 전시는 10일부터 10월 12일까지 예술의전당 한가람미술관에서 개최된다. 예술의전당 홈페이지(www.sac.or.kr)나 케이아트커뮤니케이션 홈페이지(www.kartco.co.kr)에서 자세한 내용을 확인할 수 있다. 문의 : 02-774-4980, 케이아트커뮤니케이션 도재진 기자 djj1213@cpbc.co.kr cpbc2021.06.02

제주 표착 확인 후 바로 조선 본토로 항해[신 김대건·최양업 전] (40) 제주 표착 김대건 신부 일행은 1845년 9월 28일 제주도에 표착했다. 사진은 성 김대건 신부 탄생 200주년 희년을 맞아 2021년 3월 12일 차귀도에서 제주교구장 문창우 주교 주례로 김대건 신부 제주 표착 재현 미사를 봉헌하고 있다. 라파엘호 제주 표착 페레올 주교와 다블뤼ㆍ김대건 신부 그리고 조선 신자 11명이 탄 라파엘호는 1845년 9월 28일 제주도에 표착했다. 아쉽게도 라파엘호에 있던 그 누구도 표착 장소에 관해 자세히 알려주지 않아 정확한 위치는 알 수 없다. 다만 해류에 따라 라파엘호가 표류했을 제주 서쪽 바다에는 비양도, 차귀도, 가파도 세 섬이 있는데 비양도에는 19세기 이전부터 지금까지 주민이 거주하고 있고, 차귀도에도 19세기 중반까지는 사람이 살았다고 한다. 그리고 차귀도와 마주하는 용수 포구에 제주 서부 지역에서 배를 수리하는 유일한 조선소가 있었다고 한다. 제주교구는 이러한 지리 환경 조건과 학자들의 항해학 연구 고증을 기반으로 1999년 제주 선교 100주년을 기념해 용수 포구에 김대건 신부 표착 기념지를 조성하고 성지로 선포했다.이후 라파엘호의 제주 표착과 관련한 여러 연구 글에 김대건 신부 일행이 차귀도와 용수 포구에 상륙했다고 단정적으로 표기되고 있다. 이러한 여러 글을 정리하면, 김대건 신부 일행이 표류 중에 한라산 정상을 보고 차귀도에 표착했고, 김 신부가 라파엘호에서 내려 주민들에게 물어 이곳이 제주도라는 사실을 확인했으며, 배를 용수 포구 조선소에 끌고 가 며칠간 수리를 하고 물과 음식을 준비해 한양을 향해 다시 출항했다고 한다. 이런 내용은 역사적 사실과 증명이 안 된 것이 혼재된 글이다. 역사적 사실은 김대건 신부 일행이 제주도에 표착했고, 그곳이 제주도인 것을 확인했으며, 이후 그곳을 떠났다는 것이다. 나머지는 추측성 글이다. 제주 표착과 관련한 페레올 주교와 다블뤼ㆍ김대건 신부 글 어디에도 김대건 신부가 주민에게 물어 제주도라는 사실을 확인했고, 배를 수리하고, 음식을 준비했다는 내용이 없다. 오히려 페레올 주교와 다블뤼 신부의 편지에는 복수형으로 “우리가 섬에 내려 주민들부터 상륙한 곳이 제주도라는 것을 알았다”며 여러 사람이 뭍에 내린 것으로 보고하고 있다. 또 두 선교사는 제주도를 떠나 육지를 향해 항해하면서 배 바닥에 물이 새어들고, 닻줄이 썩고 닳아서 끊어질까 봐 걱정하며, 이로 인해 또다시 표류하다 좌초되거나 체포될까 봐 두려워했다고 밝혔다. 라파엘호를 용수 포구 조선소에서 수리했다면 이런 걱정을 하지 않았을 것이다. 라파엘호는 제주도로 표류하기 전 이미 선원 출신의 조선 신자들에 의해 닻과 키를 수리했었다. (페레올 주교가 1845년 10월 25일 강경에서 파리외방전교회 신학교 바랑 지도 신부에게 보낸 편지, 다블뤼 신부가 1845년 10월 23일 충청도 공동 교우촌에서 동료 신부들에게 보낸 편지, 김대건 신부가 1845년 11월 20일 서울에서 리브와 신부에게 보낸 편지 참조) 또 라파엘호가 제주도에 표착하기 석 달 전인 1845년 6월 25일 영국 군함 사마랑호가 우도에 정박한 후 제주도 연안을 측량하고 7월 15일 떠났다. 사마랑호는 이후 거문도와 다도해 일대를 수심을 측량하고 다시 우도로 돌아와 7월 말께 일본으로 갔다. 이 일로 조정이 발칵 뒤집혔다. 해안 경비가 강화됐고, 한양으로 들어오는 모든 배를 엄격하고 세밀하게 검문했다. 영국 군함이 제주도를 떠난 지 얼마 안 돼 서양인 선교사 둘을 태운 정체불명의 배가 표착했는데 그 사실을 안 주민들이 잠잠했을 리 없다. 상식적이라면 해안 경비병이나 관가에 신고해 라파엘호를 검문했을 것이다. 더욱이 이 시국에 배를 포구까지 끌고 가 조선소에서 수리했다는 것은 이해가 안 된다.「제주 천주교회 100년사」에는 “그들은 1845년 9월 27일에 제주도를 발견하고는 그날 밤 혹은 다음 날 아침에 ‘자신들의 선교지에 왔다’는 기쁨에서 감사의 기도와 미사를 봉헌했을 것이 분명하다. 이를 폭넓게 해석한다면, 죽도(차귀도)와 용수 포구를 포함하는 제주도의 서쪽 해안은 한국인 최초의 성직자로 서품된 김대건 신부, 오랜 노력 끝에 조선에 입국한 제3대 조선교구장 페레올 주교와 성 다블뤼 신부가 처음으로 미사와 기도를 봉헌한 한국 천주교회 사적지로서의 의미를 지닌다고 할 수 있다”(57쪽)고 밝히고 있다. 이 단락은 역사적 사실과 함께 김대건 신부 제주 표착 기념 성지에 관한 사목적 판단을 담아 놓은 글이라 이해할 수 있다. 성 김대건 신부를 비롯한 한국 교회 순교 성인들을 현양하고, 이 성지를 순례하는 모든 이에게 이곳 성지가 지닌 의미를 새기고 묵상할 수 있도록 안내하는 사목적 배려가 드리운 설명인 것이다.정경으로 성경을 읽는 것과 역사와 문헌, 신학으로 성경을 읽는 것이 완전히 다르듯이 교회 사적지와 관련된 글 역시 관점에 따라 문맥(context)을 살펴 읽고 해석하고 이해해야 한다. 그 글에는 신앙과 신심에 기반을 둔 거룩한 의미와 가치가 내재해 있기 때문이다. 교회가 하는 일은 학문적 연구 성과와 함께 사목적 배려도 고려해야 한다. 그러나 주지주의를 따르는 것은 아니지만, 학자들과 연구자들의 글은 논거에 따라 담백하게 쓰여야 할 것이다. 한국 교회 성지와 순례지, 사적지 조성과 관련한 순교자 행적 연구에 있어 여러 견해가 충돌하는 것을 고려할 때 더욱 그렇다. 제주 떠나 강경으로제주도는 김대건 신부 일행을 태운 라파엘호가 육지로 쉽게 빠져나가도록 두지 않았다. 제주도는 용암이 바다로 흘러들어 해안선을 이루었기에 창칼의 끝처럼 뾰쪽한 암초들이 온 섬을 둘러싸고 있다. 그래서 제주 사람들은 해안선 앞바다를 ‘걸바당’이라고 한다. 아무리 작은 배라도 수심이 얕은 곳에 잘못 들어가면 암초에 부딪혀 부서지기 일쑤다. 다블뤼 신부는 “모든 섬 사이에 암초들이 굉장히 많이 있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가는 길에 있는 암초들을 모두 밀어내 주셨다. 한 번은 우리가 가는 길의 암초 중 하나가 바다 표면과 같은 높이로 있어서 우리가 방향을 크게 바꾸지 않는 한 다른 길로 갈 수 없는 상황이었다”(위의 편지 참조)고 설명했다. 조선 시대 제주 사람들은 육지로 나갈 때 주로 화북포(禾北浦)와 조천포(朝天浦)를 이용해 추자도나 소안도를 거쳐 전라도 영암 이진포(梨津浦), 해남 관두포(館頭浦), 충청도 강진 남당포(南塘浦)로 갔다. 제주도와 추자도 사이에는 대화탈도(大化奪島)와 소화탈도(小化奪島)가 자리하고 있다. 1702년 부임한 제주 목사 이경상의 「남환박물」에는 “이 두 섬 사이에는 해류가 교류해 파도가 세차게 일어나서 배들이 많이 표류하고 침몰하기 때문에 오가는 사람들이 매우 고통받는다”고 적혀있다. 해류를 따라 표류해 제주도에 표착한 라파엘호는 육지로 가기 위해 맞바람을 맞으며 바다를 거슬러 항해해야 했다. “북동풍은 거의 멈추지 않았다. 완전히 역풍인데 말이다. 어떻게 해야 할지? 우리는 본토를 따라 수없이 많은 섬 가운데로 거슬러 올라가기도 했다. 맞바람인데도 불구하고 우리는 하루에 4~8㎞는 앞으로 나아갔다. 어떤 때는 전혀 나가지 못하기도 했지만. 이런 식으로 보름이나 지나갔다.…우리의 형편없는 배로 더 올라가기에는 너무 늦었다는 데에 낙심하고 이 항구에서 상륙하기로 했다.…우리는 상해에서 출발한 지 6주 만인 10월 12일 주일 저녁 8시에 배에서 내렸다.”이처럼 다블뤼 신부는 1845년 10월 23일 충청도 공동 교우촌에서 동료 신부들에게 보낸 편지에서 제주도를 떠난 지 보름이 지난 10월 12일 강경에 상륙했다고 밝힌다. 역산하면 9월 28일 제주도를 떠났음을 알 수 있다. 김대건 신부 일행은 제주도 서쪽 어느 곳에 표착한 후 그곳이 제주도임을 알고 그날 바로 육지를 향해 출발한 것이다. 리길재 기자 teotokos@cpbc.co.kr cpbc2022.03.01
![[생활속의 복음] 사순 제2주일- “얘야, 너는 참 나를 닮았구나”](//cpbc.co.kr/CMS/newspaper/2022/03/rc/819908_1.0_titleImage_1.jpg)
[생활속의 복음] 사순 제2주일- “얘야, 너는 참 나를 닮았구나” 함승수 신부 이형기의 시 ‘낙화(落花)’ 중에 이런 문장이 있습니다. “가야 할 때가 언제인가를 분명히 알고 가는 이의 뒷모습은 얼마나 아름다운가.” 이 시의 화자는 온갖 세속적인 욕심과 집착을 떨쳐버리고 ‘떠나야 할 때’에는 떠나야 한다고 이야기합니다. 그 떠남 때문에 내가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답게 빛나는 그 순간은 사라지겠지만, 그 사라짐을 통해 소중하고 풍성한 열매를 맺게 될 것을 알기에 기쁘게 죽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오늘의 말씀은 그 ‘떠남’이 주제입니다. 제1독서인 창세기는 아브람의 떠남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하느님의 약속을 믿고 그분의 인도하심에 따라 자신이 평생 살아온 터전을 떠나왔던 그입니다. 하느님께서 그런 아브람에게 주변의 비옥하고 넓은 땅을 주시고 그의 자손이 하늘의 별들처럼 많이 번성하도록 은총을 베풀어 주시겠다고 약속하십니다. 당신 말씀이 이루어지리라는 굳은 믿음으로, 안락하고 편안한 삶을 포기하고 불확실성과 두려움이 가득한 미지의 땅으로 기꺼이 떠났던 그의 순명을 ‘의롭다’고 인정해주시고 합당한 선물을 베풀어 주신 것이지요. 여기서 ‘믿다’라고 번역된 히브리어 단어는 원래 ‘그렇게 생각하다’, ‘확신하다’, ‘전적으로 의지하다’라는 뜻입니다. 아브람이 기꺼이 떠날 수 있었던 것은 하느님께서 당신 약속을 반드시 이루시리라는 굳은 확신을 가지고 그분께 전적으로 의지했기에 가능했던 일임을 드러내는 대목입니다.한편, 오늘 복음에서는 예수님의 ‘떠남’이 모세와 엘리야의 입을 통해 간접적으로 언급됩니다. 그들이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서 이루실 일, 곧 세상을 떠나실 일”에 대해 말하고 있었다는 겁니다. 여기서 ‘떠나다’라고 번역된 그리스어는 ‘엑소더스’(Exodus)입니다. 구약성경 탈출기의 영어식 제목이기도 한 이 단어는 ‘탈출’, ‘해방’을 의미합니다. 즉 예수님께서 당신의 세상을 떠나시는 일이 멸망이나 끝이 아니라, 구속으로부터 해방되고, 억압으로부터 탈출해 참된 생명의 세상으로 건너가는 파스카 여정의 시작이라는 것입니다. 구약시대에 이스라엘이 이집트를 떠남으로써 억압에서 해방되어 하느님 백성으로서의 본모습을 되찾고 자유와 기쁨을 온전히 누리며 살게 되었듯이, 예수님께서도 세상을 떠나심으로써 당신께서 지상에 계실 때에는 감추어져 있던 본모습을 되찾고 당신 영광을 온전히 드러내시리라는 것이지요.예수님께서 세 제자 앞에서 거룩하게 변모하신 것은 그 영광을 맛보기로 미리 보여주시기 위함입니다. 제자들은 잠시 맛보았던 예수님의 참된 영광과 거룩함에서 힘을 얻어 예수님을 따르는 과정에서 겪게 될 고통과 시련, 두려움과 절망, 부당한 대우와 박해가 아무리 크더라도 포기하거나 절망하지 않고 이겨낼 것입니다. 또한 이 지상의 순례 여정 동안 주님을 닮은 거룩한 모습으로 변화되기 위해 노력하게 되겠지요. 주님의 영광스러운 변모는 그리스도교 신앙의 핵심 메시지를 담고 있습니다. 우리 모두 그분처럼 변화할 것이며, 우리는 이 세상에서 이미 그 변화의 과정 중에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만물을 당신께 복종시키실 수도 있는 그 권능으로, 우리의 비천한 몸을 당신의 영광스러운 몸과 같은 모습으로 변화시켜 주실 것”(필리 3, 21)이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변화되기 위해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주님의 말씀과 뜻을 잘 듣고 실천하는 것입니다.이 세상을 살아가는 동안 주님의 뜻을 충실히 따르며 살면 좋겠습니다. 세상 종말의 순간 주님 앞에 섰을 때, “얘야, 너는 참 날 닮았구나, 날 닮은 모습으로 정말 열심히 잘 살았구나”하는 칭찬을 들으면 좋겠습니다. 그것이 ‘그리스도인’인 우리가 누릴 수 있는 가장 큰 기쁨이자 영광일 것입니다.함승수 신부(서울대교구 수색본당 부주임) 평화신문2022.03.08
![[영화의 향기 with CaFF] (142)피부를 판 남자](//cpbc.co.kr/CMS/newspaper/2021/12/rc/815261_1.1_titleImage_1.jpg)
[영화의 향기 with CaFF] (142)피부를 판 남자살아있는 예술품으로 전시된 한 남자 흰 벽 사이로 한 사람이 서 있고, 두 사람이 정성스럽게 든 액자를 자리를 걸면서 영화는 시작된다. 괴테의 파우스트를 연상하게 하지만 좀 더 실제적이고, 체제와 예술을 비틀고 뒤집는 결이 다른 이야기이다. 한 남자의 기쁨과 슬픔, 고뇌와 허망함이 커다란 눈동자에 담겨 당황스럽게 몰입시키고, 작은 칸 너머로 보이는 장면과 네모 액자들이 우리의 조각난 시선과 정형화된 틀을 보게 한다.시리아의 평범한 청년 샘이 체포된다. 전날, 기차 안에서 연인 아비르의 사랑 고백을 듣고 기분이 좋아 외친 혁명과 자유라는 말이 죄라는 것이다. 한 군인의 도움으로 탈출은 하지만 시리아에 머물 수 없었던 그는 레바논으로 넘어간다. 2011년 시리아가 내전에 빠지면서 ISIS 요원들 때문에 시리아 난민조차 테러범으로 몰리며 많은 나라에서 비자를 내주지 않는 상황에서, 샘은 아비르가 어머니의 강권으로 벨기에인과 결혼해 유럽으로 떠났다는 것을 알게 된다.절망과 분노에 빠져있는 샘에게 천재라고 지칭되는 예술인 제프리는 하늘을 나는 양탄자를 주겠다며 그의 등을 사겠다는 제안을 한다. 고뇌도 잠시, 결국 그는 그것이 줄 자유와 사랑하는 아비르를 만날 수 있다는 희망에 승낙한다.그의 등엔 VISA와 소인이 찍힌 문신이 새겨지고 그는 작가의 작품으로서 전시되는 모든 곳에 가게 된다. 가난한 난민 지위의 인간이 상품의 형태로 탈바꿈하면서 오히려 인간성과 자유를 되찾았다고 말하는 제프리의 말은 자본주의 실상을 마주하게 한다. 자유를 외치다 자유를 잃어버린 샘은 또 다른 자유를 위해 등을 내주었지만, 고가의 작품이며 상품이 되면서 많은 규정에 메인다, 관객과 말도 섞을 수 없는 처지로 박제되어가는 현실은 반짝이는 눈빛으로 멋지게 춤추며 놀 줄 알던 한 청년을 점차 지쳐 무너뜨려 간다. 갈망하던 자유는 어디로 가고 의무만이 짐처럼 등에 얹혔다. 몇 군데 인용되는 성경의 비유도 당혹스럽다. 물을 포도주로 바꾼 예수님의 기적을 하찮은(?) 사람을 1100만 유로라는 엄청난 고가로 바꾼 제프리의 능력과 견주고, 성모영보 성화 속 천사와 성모님 사이로 나오는 샘이 경매상들의 거래 대상이 되며, 성모님의 ‘네’로 하느님이 인간이 되신 것처럼 샘의 ‘네’가 인간을 물질화시키는…. 자본주의 체제 안에서 돈이 많은 가치를 대체하고 바꿀 수 있음을 대면시킨다. 가엾게도 인간은 서로를 상품화시키면서 가치 있다는 착각을 한다. 인간은 인간 그 존재만으로 충분히 고귀하다. 이 귀함을 깨뜨리는 체재와 관념들에 감독은 도전장을 내밀고 있다. 2021년 12월 16일 개봉손옥경 수녀(성바오로딸수도회, 가톨릭영화제 프로그래머) cpbc2021.12.15

‘인간 존엄성’ 수호 위해 가톨릭 사회교리 적극 실천을[무너져가는 집을 복구하여라!] 25.사회 공동체 재건을 위하여- ④가톨릭 사회교리 교회는 인간이 하느님으로부터 양도할 수 없는 존엄성을 부여받았고, 능동적 주체로서 드높은 소명, 곧 창조의 협력이라는 소명에 합당하게 살아가라고 일깨운다. 남수단의 분쟁을 피해 난민 대열에 합류한 한 난민 가족의 모습. 가톨릭평화신문 DB 우리는 주님께서 행하신 ‘치유와 구원 활동’(「가톨릭교회 교리서」 1421항)을 교회를 통하여 이 시대에 펼쳐 가도록 사명을 부여받았다. 하지만 교회는 직접적으로 전염병을 예방하거나 치료하는 전문 기관도 아니며, 특정한 사회 정책 방향을 구체적으로 제시하고 실천하는 집행기관도 아니다. 이런 점에서 교회가 수행해야 할 대사회적인 사명은 구체적이고 특수한 것이기보다는 보편적인 특성을 지닌다고 할 수 있다. 교회는 ‘가톨릭 사회교리 문헌들’을 통해 정치, 경제, 인권, 노동, 평화, 환경, 생명 등 여러 분야에 걸쳐서 복음의 빛으로 그것들을 탐구하고 해석하는 가르침을 제시해왔다. 1891년 반포된 레오 13세 교황의 회칙인 「새로운 사태」(Rerum Novanum)를 시작으로 최근에 반포된 프란치스코 교황의 「모든 형제들」(Fratelli Tutti) 회칙에 이르기까지 교황의 대사회적인 가르침들이 이 문헌에 속한다. 교황청 정의평화평의회에서는 이러한 가르침들을 주제별로 정리해 2004년에 「간추린 사회교리」(Compendium of the Social Doctrine of the Church)로 출간함으로써 교황의 사회교리 문헌들이 체계적인 토대를 갖추게 되었다. 가톨릭 사회교리의 네 가지 주요 원리우리 사회가 약육강식이나 적자생존의 각축장이 아닌 서로를 존중하고 배려하는 ‘상생의 집’이 되려면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선사한 복음의 가치들이 회복되고 구현되어야 한다. 예수님은 복음의 핵심 가치들을 ‘참행복 선언’(마태 5,1-12)에서 제시하고 있는데, 곧 ‘충만한 삶’, ‘사랑과 형제애’, ‘평화’, ‘공정과 정의’ 등과 같이 모든 사람들이 누려야 하는 절대적으로 수호해야 할 가치들이다. 이 가치들에 근거하여 「가톨릭 사회교리」는 인간의 존엄성을 수호하고 인간의 구원과 사회 발전을 목적으로 교회가 수행해야 할 복음화의 방향성을 제시하고 있다. 특히 ‘가톨릭 사회교리’는 네 가지 주요 원리들을 정립했는데, 그것은 바로 ‘인간 존엄성(human dignity)의 원리’, ‘공동선(common good)의 원리’, ‘연대성(solidarity)의 원리’, 그리고 ‘보조성(subsidiarity)의 원리’이다. 이 주요 원리들은 인간과 우리 사회의 복음화를 위해 필요한 ‘성찰의 원칙이요, 판단 기준이며 행동지침’(「간추린 사회교리」 7항, 11항)이라 할 수 있다.사회교리 네 가지 주요 원리 중에 핵심은 ‘인간 존엄성의 원리’이다. 나머지 세 가지 원리인 공동선, 연대성, 보조성의 원리들은 인간 존엄성의 수호를 위한 수단적 성격을 띠고 있다. 교회는 인간이 하느님으로부터 양도할 수 없는 존엄성을 부여받았고, 능동적 주체로서 드높은 소명, 곧 창조의 협력이라는 소명에 합당하게 살아가라고 일깨운다. 요컨대, 교회는 온갖 도전에 맞서며 인간의 존엄성을 수호하려고 노력해 왔다.(「간추린 사회교리」 106~107항 참조) 인간이 존엄한 근거는 성경에서 분명하게 말하고 있다. 인간은 다른 피조물과 달리 하느님의 모상(imago Dei)으로 창조된 존재(창세 1,27)이다. 따라서 하느님의 모상인 인간은 삶 전체에 걸쳐 하느님을 찾고 갈망하며 하느님과 가장 심오한 방식으로 관계를 맺는 인격체이다. 이러한 면에서 ‘인간의 존엄성’은 국가나 사회가 부여한 것이 아니라 인간과 특별한 관계를 맺기 원하신 하느님께서 부여하신 것이다.(「간추린 사회교리」 108~109항 참조). 가장 핵심 원리는 ‘인간 존엄성의 원리’하느님께서 부여하신 인간의 존엄성을 수호하기 위해서는 각 개인의 노력과 더불어 그것이 보호될 수 있는 여건과 환경이 조성되어야 한다. 이를 위해 각 개인과 사회공동체는 각자의 선익만이 아니라 사회 공동체 전체적인 차원의 선익인 ‘공공선’을 추구해가야 한다. 특히 공공선의 추구는 여러 사회 공동체들이 존재하는 이유이자 목적이기도 하다. 또한 공동선은 “평화에 대한 노력, 국가 권력 기구, 건전한 사법 체계, 환경보호, 음식, 주거, 노동, 교육, 문화와 교통, 기본적인 의료혜택, 커뮤니케이션과 표현의 자유, 그리고 종교 자유의 수호”(「사목 헌장」 26항)와 같은 인간의 기본권과 밀접히 연결되어 있다. ‘공공선’의 추구와 더불어 인간의 존엄성이 신장되도록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등의 다양한 영역에서 사회조직들도 강화되고 활성화되어야 한다. 이를 위해서 상위조직들이 하위조직들을 지원하고 도와주는 ‘보조성의 원리’가 적용되어야 한다. 경험적으로 알 수 있듯이, “보조성을 부인하거나 사회 모든 구성원들의 평등이라는 미명하에 보조성을 제한한다면, 자유와 창의의 정신이 제약을 받고 때로는 훼손되기도 한다.”(「간추린 사회교리」 187항) 더불어 인간 존엄성의 수호라는 목적에 헌신하도록 사회 구성원들이 분열과 분리의 태도를 벗어나 합의점에 이르게 하는 ‘연대성’이 필요하다. 이것은 인간과 사회를 이어주는 유대 안에서 모든 사람이 가치를 공유하고 협력하게 하며 “공동선에 투신하려는 강력하고도 항구적인 결의”(사회적 관심, 38항)이기도 하다. 오늘날 인간의 가치는 ‘인간이 누구인가’가 중요지 않고 ‘무엇을 가지고 있으며 무엇을 하는가’가 더 중요한 세상이 되었다. 또한 우리 사회는 사회적인 약자들이 겪는 고통과 사회경제적인 불평등이 점차 심화되어가고 있다. 사회 공동체의 재건을 위해, 인간 존엄성 수호를 위해 ‘가톨릭 사회교리’에서 제시하는 가르침들을 적극적으로 배우고 이해하며, 실천해야 할 때다. 김평만 신부(가톨릭중앙의료원 영성구현실장 겸 의과대학 인문사회의학과 교수)cpbc2022.05.18

부부 적금 기부한 아내, 하늘에서 미소 짓는 남편장말순씨, 남편 고 박형동씨와 함께 시작한 7년 적금 5000만 원 어려운 사람들 위해 기부 장말순씨가 사단법인 올마이키즈에 기금을 전달한 뒤 기념 사진을 촬영하고 있다. “천국에 있을 남편도 무척 기뻐할 것이라고 믿습니다.”먼저 기부 제안했던 남편은 간암으로장말순(안나, 74, 인천교구 소사3동본당)씨가 남편과 함께 7년간 모은 적금 4000만 원을 해외 어린이 교육 후원단체 ㈔올마이키즈에 기부하며 남긴 말이다. 2월 24일 경기 부천시 올마이키즈 사무실에서 만난 장씨는 “남편과 이 자리에 함께하지 못해 아쉽다”면서도 “7년 만에 기부하니 마음의 빚을 갚은 것처럼 홀가분하다”고 밝혔다. “가난한 나라의 불쌍한 아이들을 돕자”고 먼저 제안했던 남편 고 박형동(힐라리오)씨는 안타깝게도 지난해 4월 간암으로 세상을 떠났다. 박씨의 시신은 고인의 뜻에 따라 의학 발전을 위해 가톨릭대학교 의과대학에 기증됐다. 장씨 역시 시신 기증을 서약했다. 이날 전달된 기금은 올마이키즈를 통해 열악한 환경에 처한 개발도상국 어린이를 위해 식수시설ㆍ학교 등을 건립하는 데 쓰일 예정이다. 완공된 시설에는 장말순ㆍ박형동 부부의 공로를 기리기 위해 이들의 세례명이 적힌 동판이 부착된다. 부부가 적금을 올마이키즈에 기부한 것은 이사장인 김영욱 신부가 본당 주임이던 시절 맺은 인연 때문이다. 소사3동본당 레지오와 연령회에서 오래도록 봉사해온 부부는 김 신부와 자연스레 가까운 사이가 됐다. 장씨는 “신부님이 어떻게 혼자 힘으로 해외 불쌍한 어린이를 다 도울 수 있겠냐”며 “저처럼 ‘개미 군단’ 후원자들이 도움을 드려야 한다”고 웃었다. 한편, 올마이키즈에 기부하고 남은 적금 1000만 원은 부부가 정기 후원해온 인천가톨릭사회복지회 산하 부천시장애인종합복지관에 전달했다.장씨는 어려운 이웃을 위한 기부를 결심한 이유에 대해 “어린 시절 겪은 아픔 때문”이라고 말했다. “아버지가 일찍 세상을 떠나 홀어머니 밑에서 힘들게 자랐다”며 그때 기억 때문에 늘 가난한 사람을 보면 도와주고 싶은 마음이 늘 생겼다”고 설명했다. 장씨는 그러면서 20년 전 있었던 일을 회고했다. “어느 날 라디오 아침 방송에서 할머니와 여동생과 사는 한 청년이 한 대학교 기계공학과에 합격해서 내일까지 등록금을 내야 하는데, 돈이 없어서 막막하다는 사연이 나왔어요. 가난 때문에 교육을 많이 못 받고 일찍부터 전자부품 조립회사에서 일하던 제겐 특히 안타까운 소식이었죠. 그래서 회사에서 등록금 낼 만큼 돈을 빌려서 부랴부랴 방송국으로 찾아갔어요. 그리고 PD를 만났고, 결국 그 청년과 전화 통화까지 했죠. 그런데 그 청년이 ‘방송을 들은 많은 분이 도움을 주셔서 등록금을 마련했고, 마음은 정말 감사하지만 제힘으로 해내겠다’고 완곡하게 사양하더라고요. 그래서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역곡성당에 들러 수녀님께 ‘도움이 필요한 어려운 학생들을 위해 써달라’며 드리고 왔어요. 그 뒤로 저희 부부는 암이나 백혈병 환자처럼 아프고 소외된 이웃을 위해 기부하고, 봉사 활동도 하게 됐답니다.” 작은 도움, 약자들에게 가난하고 소외된 이웃을 위해 사랑을 베푸는 부모의 모습은 자녀와 손주에게도 좋은 본보기가 됐다. 최근 영화 ‘특송’을 연출한 아들 박대민 감독 역시 꾸준히 기부를 이어오고 있다. 장씨는 “사실 돈이 갖고만 있으면 아무 소용이 없다. 정말 필요한 사람에 의해 쓰여야 하는 것”이라며 “저의 작은 도움으로 하느님의 피조물인 약자들이 행복해지길 바란다”고 말했다. “제가 제일 좋아하는 성경 구절이 바로 ‘너희가 내 형제들인 이 가장 작은 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해 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 준 것이다’(마태 25,40)입니다. 다른 신자분들도 이 구절을 제 사연을 떠올리며 작게나마 도움을 베풀 수 있다면 좋겠습니다.” 이학주 기자 goldenmouth@cpbc.co.kr cpbc2022.03.01

반려동물도 소중하지만, 자녀 양육하는 풍요로움 외면해선 안 돼교황은 왜 아이를 낳지 않고 반려동물 키우는 현실을 개탄했나 프란치스코 교황이 9일 바티칸 시스티나 성당에서 주님의 세례를 기념하는 미사 중 아기에게 세례를 주고 있다. 프란치스코 교황이 지난 5일 교황청에서 열린 수요 일반 알현에서 성 요셉을 주제로 강론하는 도중 부부들이 자녀를 갖지 않고 개나 고양이 같은 반려동물을 키우는 풍조에 대해 이기적이라고 개탄했다. 일부에서는 아기 낳기를 한없이 두려워하는 젊은 부부들을 설득하기엔 부족해 보인다는 지적이 나왔다. 교황은 왜 아이를 낳지 않고 반려동물을 키우는 현실을 지적했을까? 교회는 반려동물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교황 발언의 진정한 뜻은 무엇인지 살펴봤다. 교황의 말! 말! 말!교황은 최근 수요 일반 알현에 생물학적인 이유로 아이를 가질 수 없는 부부들을 초대했다. 이 자리에서 교황은 “부모가 되는 것을 두려워하지 마라”며 입양을 적극적으로 고려할 것을 촉구했다. 이어 “아이를 갖는 것은 항상 위험하지만, 아이를 갖지 않는 것이 더 위험하다”며 “세계의 많은 아이가 자신들을 돌봐줄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너무 많은 부부가 아이를 원치 않아 갖지 않거나, 더 원하지 않기 때문에 한 명만 낳고 있다. 그러나 그들은 강아지 두 마리, 고양이 두 마리를 기르고 있고, 강아지와 고양이가 아이들을 대체하고 있다”고 말했다. 아울러 “현대 문명사회가 늙어가고 인간성을 잃어가는 것은 부모가 되는 풍요로움을 잃어가고 있기 때문”이라며 “혼인한 이들은 아이를 갖는 것을 고려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교황이 아이를 낳지 않고 반려동물을 자식처럼 키우는 사회 풍조를 개탄한 건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2014년 이탈리아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문화적 타락의 또 다른 현상”이라며 “반려동물과의 정서적 관계는 부모와 자식 간 복잡한 관계보다 쉽다”고 꼬집었다. 교황은 반려동물을 무시했나?교회는 오래전부터 인간은 동물과의 관계를 창조주 하느님의 섭리에 따라 맺어왔다고 본다. 어떤 동물은 사람의 일을 도와주기도 하고, 어떤 동물은 위로가 되기도 하며, 어떤 동물은 인간의 양식이 되기도 한다. 주교회의가 사도좌가 추인해 한국어판으로 공식 발간한 「축복 예식」 21장 ‘동물 축복 예식’을 살펴보면 인간과 반려동물의 관계를 더욱 명확히 알 수 있다. ‘주님, 저희와 함께 살도록 가축들을 보내시어 자녀들을 위로해 주셨으니 찬미받으소서.’ ‘주님, 가장 비천한 피조물을 통해서도 저희를 하느님의 사랑으로 끊임없이 이끌어 주시니 찬미받으소서.’(청원 기도 중) 이는 반려동물이 자녀에게 위로가 되고 반려동물을 통해 하느님의 피조물인 반려동물을 통해 하느님 사랑으로 이끌어 주심을 청원하는 내용이다. “성경에서도 하느님께서는 사람으로 하여금 생물 하나하나의 이름을 짓도록 허락했다”(창세 2,19-20)라는 구절을 찾을 수 있다. 따라서 교회는 동물을 인간과 함께하는 중요한 존재로 보고 있다. 성경의 노아 이야기(창세 6―9장)를 살펴보면, 방주에 온갖 생명이 종류대로 짝지어 탔음을 알 수 있다. 인간에 의해 타락한 세상을 새롭게 하려는 하느님의 뜻은 노아뿐 아니라 모든 생명체를 향하고 있었고, 노아에게는 그들을 챙겨 방주에 태우는 임무가 주어졌다. 1980년 성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은 아시시의 성 프란치스코를 ‘동물의 수호성인’으로 선포했다. 프란치스코 성인은 ‘가난한 이들의 친구’라 불리는 청빈한 생활로 존경받아온 성인이자 동물과 자연 등 창조주의 생태계 모든 피조물에 대한 사랑이 남달랐던 것으로도 유명하다. 미국과 유럽 교회에서는 해마다 10월 4일 아시시의 성 프란치스코 기념일에 모든 동물을 축복하는 예식을 거행하고 있다. 한국에서도 최근 동물 축복을 하는 경우가 늘었다. 결국, 교황이 자녀를 갖지 않고 개나 고양이 같은 반려동물을 키우는 걸 개탄한 건 아이를 낳거나 기르는 부부의 중요성에 대한 가톨릭교회의 가르침을 반영한 것이지 반려동물이 중요하지 않거나 동물을 학대해도 된다는 뜻은 아니다. 교황 발언의 배경은교황은 지난해 말 이탈리아의 출생률이 발표되자 ‘이탈리아가 인구 통계학적인 겨울’에 직면해 있다고 말했다. 이탈리아 통계청(ISTAT)은 12월 14일 2020년 기준 신생아 수가 40만 4892명으로 1861년 이래 160년 만에 최저치를 기록했다고 밝혔다. 전년 대비 1만 5192명 감소했다. 이탈리아의 연간 신생아 수는 2009년부터 12년째 감소세다. 이탈리아 통계청에 따르면 2021년도 1∼9월 현재 신생아 수는 2020년보다 1만 2500명가량 준 것으로 집계됐다. 이탈리아에 거주하는 여성의 평균 출산율은 1.24명, 이탈리아인 혈통 여성의 출산율은 1.17명으로 각각 역대 최저치였다. 반면에 사망자 수는 74만 6146명으로 제2차 세계대전 이후 가장 많았다. 2020년 12월 31일 기준 이탈리아 총인구는 5925만 7000여 명이다. 현재와 같은 출생률과 사망률이 이어지면 이탈리아 인구는 급격하게 줄어들게 분명하다. 한국의 출산율 현주소 한국의 자연 인구 감소는 어제 오늘 일이 아니다. 국내 출생아 수는 지난 2015년 12월 이후 연속으로 줄고 있다. 가임기 여성 1명이 평생 낳을 평균 출생아 수를 나타낸 지표인 합계출산율은 지난 2015년 기준 1.24명에서 2020년 0.84까지 떨어졌다. 1971년 100만 명을 넘었던 신생아 수가 2002년 49만여 명으로 떨어지더니 2020년에는 27만 2000명으로 또 반토막 났다. 2021년 통계가 나오지 않았지만 출산율은 더 떨어졌을 게 분명하다. 국내 여성 1명이 가임기에 걸쳐 1명의 아이도 낳기 힘든 ‘초저출산 사회’다. 2017년 한국을 방문한 크리스틴 라가르드 당시 국제통화기금(IMF) 총재는 한국의 출산율을 보고 ‘집단자살사회(collective suicide society)’라고 직격탄을 날린 바 있다. 교황의 진정한 뜻은 무엇일까? 교황의 발언이 전해진 후 일부에서는 아기 낳기를 한없이 두려워하는 젊은 부부들을 설득하기엔 많이 부족해 보인다는 지적이 나왔다. 결혼도 않고, 자녀를 건사하거나 속앓이를 해 본 적이 없는 교황의 조언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기엔 젊은 세대의 현실이 너무 각박하다고도 했다. 하지만 2021년 5월 교황은 로마 콘실리아치오네 오디토리움에서 마리오 드라기 총리 등 이탈리아 공공ㆍ민간 부문 지도자들이 모인 회의에서 출산율 저하 문제를 논의하고 출산율을 높이기 위해 적극 노력을 하겠다는 뜻을 밝혔다. 프란치스코 교황의 “결혼한 부부들이 자녀보다 개나 고양이를 기르려고만 한다”는 지적은 자녀를 양육하고 가르쳐 가족을 완성하는 기쁨과 행복을 외면하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간절한 호소이며, 출산은 하느님 창조 사업이라는 것을 거듭 강조한 발언이다. 뚝뚝 떨어지는 출산율을 보면서 왜 교황이 이런 발언을 했는지 깊이 고민해야 한다. 국가는 출산과 양육, 자녀 교육이 심각한 경제적 부담으로 느껴지지 않도록 가정에 실질적 혜택을 확대해야 한다. 교회 역시 출산을 두려워하는 젊은 부부에게 용기를 불어넣고 교구와 본당 차원에서 그들을 도울 수 있는 실질적 방안을 모색하고 실행해야 한다. 이상도 기자 raelly1@cpbc.co.kr cpbc2022.01.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