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진짜 행복의 길 찾은 추기경님 영성 지켜나가겠습니다빈소 이모저모·추모 물결 늦은 밤까지 연도를 바치려는 신자들이 줄지어 서 있다. 주교단 가슴에 남은 추기경주교회의 의장 이용훈 주교는 4월 29일 명동대성당 문화관 꼬스트홀에서 미사를 주례하면서 “평생 제대로 충분한 휴식 한 번 취하지 않으시면서도, 방대한 분량의 책을 쓰신 것은 주님께 나아가기 위한 노력을 형제자매, 교우들과 나누기 위함이셨다”면서 “돌아가시기 전 4~5개월은 보행이 힘들 정도로 고생하셨지만, 그런 중에도 누가 면담 요청을 해도 반갑게 맞이하며 주님께 가까이 가는 길을 알려주신 선한 목자이시자, 하느님의 사람이셨다”고 추모했다.전 춘천교구장 김운회 주교는 조문 후 “추기경님께서 서울대교구장이시던 2002년 제가 서울 보좌주교에 임명됐고, 이후에 끝까지 보좌해드리지 못하고 춘천교구장으로 서울을 떠나면서 자주 찾아뵙지 못해 늘 빚진 마음으로 살아왔다”면서 “입원하신 중에도 의식이 있으실 때 통화했지만, 전에도 늘 전화드리면 ‘잘 있다’, ‘괜찮다’며 기쁘게 받아주시던 모습이 떠오른다”고 전했다.광주대교구장 김희중 대주교도 “주교단이 협의해야 하는 과정에서 여러 가지 의견이 오갈 때마다 추기경님께서 지혜와 경륜으로 잘 정리해주시곤 했다”면서 “당신이 갖고 계신 모든 지혜와 물질적인 것, 그리고 각막까지, 몸과 마음을 다 주고 떠나신 모습이 참 거룩하고 아름답게 다가온다”고 말했다.눈물의 입관 예절4월 30일 오후 5시. 투명 유리관에 3일 동안 모셔졌던 정 추기경은 삼나무 관으로 옮겨졌다. 제의를 입은 고인의 손에는 묵주가 쥐어져 있었다. 이내 추기경의 문장이 새겨진 묵직한 뚜껑이 닫히고, 그 위에 성경이 올려졌다.염수정 추기경이 주례한 입관 예절에는 유가족과 주한 교황대사 알프레드 슈에레브 대주교와 최창무(전 광주대교구장) 대주교, 청주교구장 장봉훈 주교 등 주교단과 사제단, 유가족도 차례로 고인에게 성수를 뿌리고, 영원한 안식을 기원했다. 비공개로 진행된 고인의 입관 예절에 참여한 이들은 애써 눈물을 참으며 마지막 모습을 지켜봤다.정 추기경의 사촌 동생 정광(시몬, 81) 고려대 국어국문학과 명예교수는 “추기경님과 형제처럼 가깝게 지내며 모든 걸 의논했는데, 이제 그럴 수도 없고, 명절에 뵙기도 어렵게 됐다”며 애통해 했다.5촌 조카 정준영(그레고리오)씨는 “어린 조카들이 방문하면 무척 예뻐해 주셨는데, 자랑스러운 추기경님의 주님 안에서의 평안을 늘 기도하겠다”고 전했다.‘모든 이에게 모든 것’이 되는 영성6ㆍ25전쟁의 참상을 겪고, 발명가가 아닌 사제가 된 정 추기경의 삶은 그야말로 ‘야훼 이레’ 여정이었다. 평생 강론과 서적으로 참된 신앙의 가치를 전해온 추기경은 병상에서 “항상 행복하세요. 행복하게 사는 것이 하느님의 뜻입니다”란 유언을 남겼다. 오로지 주님 안에 살면서 이웃을 위해 시간과 가진 것을 모두 내어주는 것이 행복에 이르는 길임을 몸소 보여온 진리와도 일맥상통한다. 정 추기경은 사목표어대로 ‘모든 이에게 모든 것’이 될 때에야 비로소 내가 행복해진다는 주님의 가르침을 이 시대에 남겼다. 장례 기간 내내 빈소 현장은 추기경이 남긴 영성을 다시 기억하고 되새기는 장소가 됐다.서울대교구 정순택 주교는 “물질문명의 발달 속에 우리는 안락하고 편안하고, 많이 가지는 데에서 행복을 찾아왔지만, 추기경님께서는 행복이란 많이 소유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나누는 데 있다는 나눔의 영성을 이 시대에 전해주셨다”면서 “집안의 할아버지께서 계실 때와 안 계실 때 차이가 크듯이 언제든 달려가 상의 드리고, 의견을 구할 어른의 빈자리가 매우 크게 느껴진다”고 말했다.서울대교구 총대리 손희송 주교는 “앞서 민주화를 위해 애쓰셨던 김수환 추기경님에 이어, 정 추기경님은 가치관이 매우 혼란스러운 상황에서 생명과 가정, 나눔의 가치를 더욱 드높이셨다”며 “오로지 주님 뜻을 따르고, 이웃을 사랑하며 나누고, 자기 시간과 가진 바를 나누는 것에서 진짜 행복의 길을 찾은 추기경님의 영성을 우리가 주목해 지켜나가야 할 것”이라고 전했다.청주교구서도 장례 미사 봉헌전국 교구는 교구 누리집에 정 추기경 선종 소식을 전하며, 일제히 추모 기도를 요청했다. 본당별로 미사 중 추기경을 기억하는 강론과 기도도 이어졌다.1일 청주교구에서도 제2대 교구장을 지낸 정진석 추기경의 장례 미사가 봉헌됐다. 청주교구는 서울대교구 장례 미사 시간에 맞춰 내덕동주교좌성당에서 미사를 봉헌했다. 충주 교현동성당을 비롯해 충주지구 각 본당도 일제히 장례 미사를 봉헌했다. 청주교구는 장례 기간 내내 본당별로 미사 전후 연도도 바쳤다.정 추기경이 청주교구에 부임한 첫해인 1970년 사제품을 받은 김유철(원로사목자) 신부는 미사 강론에서 “더는 아픔도, 고통도 없는 하느님 나라에 도달하셨으니, 추기경님께는 영광의 순간이기에 ‘추기경님, 수고하셨습니다’라는 말씀과 함께 진심으로 경하드린다”고 추모했다.정 추기경이 청주교구장 주교 재임 시절 교구 복음화에 함께 헌신한 최동식(베드로) 전 교구 평협 회장은 “추기경님께서는 교구 운영이나 교세 확장 등 모든 면에서 탁월하셨고 깊이를 가지고 계셨던 한국 가톨릭교회의 큰 별이셨다”고 회고하고 “이제 하느님 곁으로 가셨으니 하느님 안에서 영원한 생명을 누리시길 바란다”고 기원했다. 이정훈 기자 sjunder@cpbc.co.kr cpbc2021.05.04

잠비아 신자들에게 사랑 전하는 늦깎이 선교사 ‘파더 킴’원주교구 김한기 신부의아프리카 잠비아 선교 이야기 4년째 아프리카 잠비아 선교사로 활동 중인 김한기 신부가 미사 후 아이들과 함께 환하게 웃으며 사진을 찍고 있다. 김한기 신부 제공 사제로 살아온 지 35년째이던 2017년 9월. 만 64세의 사제는 커다란 짐가방에 제의와 소지품을 바리바리 싸들고 혈혈단신 지구 반대편으로 향하는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불과 5~6년 뒤면 사목자로서 은퇴를 앞두었던 원주교구 김한기 신부가 선교지로 가장 가난한 이들과 함께 살기 위해 출발한 것이다. 김 신부가 아프리카 잠비아행을 결정했을 때, 뒤늦게 소식을 들은 친형이 눈이 휘둥그레지며 말했다. “아니, 가족들과 한 마디 상의도 없이 결정했어?” 이미 하느님과 상의를 마친 뒤였다.가난의 땅 아프리카에서 그를 맞이한 것은 낡은 공소와 화장실도 없는 방 한 칸짜리 공동 사제관이었다. 오래된 성당 건물은 흙먼지 날리는 황무지에 있었고, 성당이든 가정집이든 비가 조금이라도 내리치면 금세 물이 줄줄 새기 일쑤였다. 입맛에 맞지도 않는 옥수수를 빻아 만든 음식으로 끼니를 때워야 하는 나날이 시작됐고, 성당과 사제관은 15㎞나 떨어져 누군가의 도움 없이는 성당 출퇴근(?)도 어려웠다. 그러나 사제는 별이 쏟아지는 깜깜한 밤하늘을 바라보며 결심했다.“하느님, 제가 이들에게 주님 사랑만은 꼭 남기고 고국으로 돌아가겠습니다!” 4년째 잠비아 신자들에게 사랑을 전하고 있는 ‘늦깎이 선교사’ 김 신부가 최근 일시 귀국한 소식을 듣고, 7월 29일 원주교구에서 만났다.최고령 피데이 도눔 사제교구 사제를 해외 선교지로 파견하는 ‘피데이 도눔’(Fidei Donum) 사제 가운데 김 신부는 현재 한국 교회 최고령이다. 원주교구 사제단 130여 명 가운데에도 위에서 30번째 안에 드는 선배 사제의 피데이 도눔 신청에 주변에서도 적잖이 놀랐다. 누구도 결정하기 어려운 아프리카 선교 사제를 자처한 것은 그의 말대로 “뜻깊은 사목으로 멋진 피날레를 장식해봐야겠다”는 생각에서였다.그의 바람은 적중했다. 모래판 위의 작은 공소는 김 신부의 도착과 동시에 본당으로 승격됐다. 잠비아 은돌라교구 성 마티아스 물룸바본당이 된 것이다. 가자마자 작은 성당을 리모델링하는 데에 그치지 않고, 신자들을 위한 번듯한 교육관을 올리고, 공동 사제관 건축에 신자들 일자리 창출까지. 교육관 이름은 뜻깊게도 ‘성 김대건 홀’로 했다. 4년 동안 김 신부의 본당은 늘 공사 중이었다. 그 덕에 얼굴은 전보다 더 그을었지만, 미소만큼은 더 깊어졌다. 땡볕 아래 가가호호 방문하며 활발한 선교 사목을 펼친 이에게 주님이 주신 ‘훈장’과도 같달까. 김 신부는 두 차례 말라리아에 걸리는 어려움도 겪었다.“꼭 우리 1940~1950년대 모습이죠. 그들의 삶은 우리가 상상하기조차 힘듭니다. 다행히도 4년 전 처음 저를 마주한 신자들은 환한 미소로 반겨줬어요. 그전까지 본당이 공소였으니까 신부님 만나고, 미사 한 번 하려면 한 달은 족히 기다려야 했거든요.”모든 것이 따뜻한 후원자들 덕분수도 루사카에서도 서울에서 부산만큼 떨어진 버남꾸바 마을에 자리한 본당. 이 마을에서 동양인은 김 신부가 유일하다. 어딜 가든 아이들이 졸졸 따라오며 ‘파더 킴~’하고 부르면, 먹을 것 잔뜩 들은 김 신부의 주머니는 절로 열린다. 그런 아이들이 성당에서 세례받고, 주님의 자녀가 될 때엔 기쁨이 두 배가 된다. 김 신부는 영어와 잠비아 벰바어를 섞어가며 “Thank you, children”(아이들아, 고맙다), “Natotela Saana”(벰바어로 고마워요) 하며 화답해준다.“작년부터는 아이들을 더 많이 돕고 있어요. 초등학교 아이들 500명에게 매달 200콰차(잠비아 화폐, 약 1만 원)씩 주고 있고요. 중고등학생과 대학생들도 학비 절반을 후원합니다. 어려운 가정뿐만 아니라, 장애인 30여 명도 매달 기도와 성금으로 지원합니다. 모두 저를 보고 후원해주는 지인과 한국 신자분들 덕분입니다. 저는 그저 사랑의 다리 역할을 해줄 뿐입니다.”성 마티아스 물룸바본당과 관할 공소 2곳의 신자 수는 1000명에 달한다. 김 신부가 본당의 기초를 닦고, 공동체 모습을 갖춘 덕에 신자 수가 크게 늘었다. 성당 부지 한켠에 공동 화장실도 짓고, 울타리도 두르고, 한국에서 루르드 성모상을 공수해 작은 성모 동굴도 완성했다. 곳곳이 김 신부가 직접 발품을 팔아 채워넣은 자재들이다. 2018년 본지 사랑 나눔 코너 ‘사랑이 피어나는 곳에’를 통해 모금된 독자들의 성금 3000여만 원도 큰 힘이 됐다. 매달 아이들에게 전할 후원금을 봉투에 넣는 일은 똘똘한 복사 아이들과 함께한다. 신자들은 새 교육관에서 기도하고, 성경 모임, 구역 회합을 하고 있다. 그들에겐 기적 같은 일이 현실이 된 것이다.김 신부는 매일같이 잠비아 선교지 소식을 페이스북과 온라인 카페에 올린다. 김 신부는 “SNS의 힘이 정말 크다는 것을 실감한다”며 “제 글을 읽고 많은 분이 후원해주시는데, 주님께서는 정말 생각지 못한 때에 필요한 것을 채워주신다”며 웃음 지었다.김 신부의 ‘성 마티아스성당 in 잠비아’ 카페에는 김 신부 주관으로 마을에서 처음 거행된 성체 행렬 모습부터 아이들이 주님의 자녀가 되는 모습, 환자 가정 방문 등 그간 게재한 글과 사진이 수백 개 된다.사서 고생이 아니라, 사서 보람물과 전기 등 모든 게 부족한 잠비아인들이 가난의 굴레에서 벗어나기란 참으로 어렵다. 주일 헌금은 2만 5000원 남짓. 1년 본당 수입은 150만 원이 안 된다. 미사를 하다 전기가 나가면 손전등 몇 개를 드리워야 하고, 돈을 빌려주면 당연한 듯 갚지 않는 이들도 종종 있다. 대부분 자급자족 농부로 살아가는 신자들은 낡은 지붕 아래 흙바닥에서 먹고 잔다. ‘그래, 물고기를 잡아줄 것이 아니라, 잡는 방법을 알려주자!’김 신부는 본당 인근 부지를 우리 돈 100만 원에 샀다. 신자들 손으로 최근 건물을 하나 세웠다. 작은 구멍가게와 우리네 방앗간 같은 곡물 빻는 공간을 만들었다. 김 신부가 귀국한 동안 주문했던 옥수수 빻는 기계가 마침 도착해 신자들이 김 신부에게 영상을 전달해왔다. “신자들이 재배한 옥수수를 모두 가져와 빻아 판매하면 수익이 생길 겁니다. 가게에도 물품을 들여와 수익을 분배할 거고요. 최근엔 신자 두 가정을 선정해 양계업도 지원하기 시작했습니다. 병아리 150수를 사서 3~4개월 정도 닭으로 성장시키면 10배의 수익을 낼 수 있어요. 이런 가정을 늘려갈 겁니다.”본당에는 여전히 신자들을 위한 어머니 역할을 해줄 수녀도 없다. 우리와 같은 행정 시스템은 꿈도 꾸기 어렵지만, 김 신부는 함께 사목하는 보좌 신부에게 선배로서 늘 조언해주고, 신자들이 본당 안에서 일하도록 고용을 창출해주고 있다.선교 사제로 남은 1년의 꿈김 신부의 임기는 내년 9월까지 딱 1년 남았다. 은돌라교구와 원주교구가 맺은 공식 파견 기간이 5년이다. 그때까지 김 신부는 본당 인근 버려진 학교 운영을 재개하고, 새 성전을 건립할 큰 과제를 해낼 계획이다.“본당 인근에 프란치스코전교봉사수녀회가 운영하다 문을 닫은 학교가 있어요. 아이들이 뿔뿔이 흩어졌는데, 그곳을 다시 가꿔 문을 열고 싶습니다. 가톨릭 이념 안에 아이들이 학업의 기쁨을 이어가길 소망합니다. 또 현재 쓰고 있는 낡은 성당 옆에 새 성전을 지을 생각입니다. 2억여 원이 드는 쉽지 않은 과정이지만, 이들이 더욱 멋진 주님의 집에서 살아가길 바라는 마음입니다.”김 신부는 “경제적으론 어려워도 미사에 참여한 이들이 기쁘게 춤추며 매 주일 2시간 넘게 전례에 참여하는 모습은 저 또한 배울 점”이라며 “남은 기간 이들이 영적으로 더욱 깊어지도록 도울 것”이라고 밝혔다.김 신부는 오히려 “말할 수 없는 기쁨과 보람을 느끼면서 ‘좀더 빨리 선교 사제로 이곳에 왔더라면 좋았을 텐데’ 하는 생각이 들곤 한다”면서 “선교란 언어와 복음 선포 이전에 그들과 더불어 사는 것이며, 사랑을 느끼게 해주고, 따뜻함을 선사하는 것임을 알게 됐다”고 했다. 선교에는 나이가 따로 없었다. 김한기 신부 선교 후원 계좌 : 301-9219-2817-21, 농협. 이정훈 기자 sjunder@cpbc.co.kr cpbc2021.08.04

앵베르 주교, 조선에서 직접 사제 양성하려 했으나 기해박해로 물거품[신 김대건·최양업 전] (17)조선에서의 사제 양성 이번 호에서는 제2대 조선대목구장 앵베르 주교가 최양업ㆍ김대건과 별도로 조선 교회 안에서 신학생들을 선발해 사제로 양성하려 했던 계획을 살펴보기로 하자. 앵베르 주교 앵베르 주교는 1838년 11월 30일 파리외방전교회 신학교 지도 신부들에게, 다음날인 12월 1일에는 교황청 포교성성 장관 지아코모 필리포 프란소니(Giacomo Filippo Fransoni) 추기경에게 편지를 썼다. 앵베르 주교는 이 두 편지에서 조선인 사제 양성을 위해 자신이 하는 일에 관해 보고했다. 마카오에 있는 3명의 조선 신학생(당시 앵베르 주교는 최방제가 선종한 사실을 몰랐다)이 사제가 되어 귀국하기까지 너무 많은 시간이 걸리기에 조선에서 직접 사제를 양성하겠다는 계획이었다. 앵베르 주교는 포교성성 장관 추기경과 파리외방전교회 장상들에게 자신이 조선에 입국한 직후부터 이미 신학생들을 선발해 양성하고 있다고 밝힌다. “제가 아주 열망하는 일은 현지인 사제를 갖는 일입니다. 모방 신부가 작년에 마카오로 보낸 세 명의 소년에게 기대를 걸고 있지만, 너무 오랜 세월이 흘러야 합니다. 통킹 지방에서 베리트의 명의주교님이 한 것처럼, 또 우리 전교회 초창기의 다른 대목구장들이 한 것처럼 저도 이곳에 도착하자마자 사제가 될 만한 중년 몇 명을 물색하게 했습니다. 주님께서는 고맙게도 제가 몇 명의 적합한 사람을 뽑을 수 있게 해 주셨습니다. …아멜 신부님이 한문으로 번역한 책으로 신학 공부를 하게 했습니다. 그리하여 한 3년만 있으면 서품식을 거행할 희망을 품고 있습니다.”(1838년 11월 30일 파리외방전교회 신학교 지도 신부들에게 쓴 편지에서)“저는 젊고 평판이 좋은 회장들 네 명을 가려 뽑아 그들에게 라틴어 공부를 시킬 작정입니다. 두 사람은 8개월간 라틴어 읽기를 배워서 아주 유창하게 말합니다. 이제 11월 1일부터는 한문으로 쓰인 신학 공부에 전념하고 있습니다. 이들을 교육하기가 저에게 고된 일이나 이런 수고는 매우 즐겁습니다. 10명쯤 가르쳤으면 좋겠으나 찾을 수가 없으며 박해의 위험 때문에 이렇게 많은 사람을 모아 놓을 수도 없습니다.”(1838년 12월 1일 교황청 포교성성 장관 추기경에게 쓴 편지에서) 앵베르 주교가 선발한 신학생 4명앵베르 주교는 앞의 두 편지에서 자신이 선발한 네 명의 신학생을 소개한다. 하지만 편지가 발각돼 신학생들이 노출될 것을 염려해 그들의 이름을 밝히진 않았다. 앵베르 주교는 자신이 선발한 4명의 신학생 가운데 첫째는 연락원으로 북경을 오갔으며 모방ㆍ샤스탕 신부와 앵베르 주교를 조선으로 안내한 사람으로 나이는 42세로 독신이며, 1801년 박해 때 순교한 정 아우구스티노의 아들이라고 했다. 둘째는 32세 홀아비로 1784년에 조선 사람 중에 첫 번째로 북경에서 세례를 받은 후 조국에 천주교를 도입한 이 베드로의 손자라고 했다. 나머지 두 명은 26세, 20세 청년이라고만 밝히고 있다. 앵베르 주교가 밝힌 첫째 인물은 의심할 여지 없이 바로 정하상(바오로, 1795~1839)이다. 둘째 인물은 앵베르 주교가 이승훈 베드로의 손자라고 밝힌 것을 근거로 교회사학자들은 ‘이재의 토마스’라고 인정한다. 이재의는 앵베르 주교의 복사로 일하면서 주교의 사목 활동을 도왔다. 그는 기해박해 순교자들의 자료를 수집해 현석문이 「기해일기」를 쓰는 데 도움을 줬다. 그는 또 김대건 부제의 조선 입국을 돕고, 김대건 부제와 함께 라파엘호를 타고 상해로 가서 페레올 주교와 다블뤼 신부 등과 함께 귀국하는 등 김대건 신부를 아낌없이 도우며 교회 재건에 힘쓴 인물이다. 하지만 앵베르 주교가 밝힌 둘째 인물이 이재의라고 단정하기에는 의문이 있다. 이재의는 1785년생이다. 앵베르 주교가 위의 편지에서 둘째 인물을 32세 홀아비라고 했는데, 1838년 이재의는 53세였다. 나이 차이가 나도 너무 난다. 정하상보다 10살이나 위이다.또 앵베르 주교가 선발한 26세, 20세 신학생들은 이문우(요한)와 최형(베드로)이라는 주장도 있다.(「가톨릭대학교 신학대학 150년사」 54쪽, 각주 129 참조) 이문우(1810~1840)는 앵베르 주교에게 회장으로 임명돼 지방을 순회하며 전교에 힘썼다. 1839년 기해박해 때 옥에 갇힌 교우들을 돕고 박해 상황을 앵베르 주교에게 보고하던 중 체포돼 1840년 2월 1일 당고개에서 순교했다. 1838년 그의 나이는 28세였다. 최형(1814~1866)은 최방제의 형으로 모방 신부의 복사로 교회 일에 헌신했다. 또 김대건 부제와 함께 라파엘호를 타고 페레올 주교와 다블뤼 신부의 입국을 도왔다. 1839년 기해박해 때 체포됐으나 석방된 후 제4대 조선대목구장 베르뇌 주교의 명으로 교회 서적 출판 책임자로 일하다 1866년 병인박해 때 체포돼 서소문 밖 형장에서 순교했다. 1838년 그는 24세였다. 이문우와 최형은 모두 성인품에 올랐다.따라서 앵베르 주교가 조선에서 직접 선발한 4명의 신학생 중 정하상을 제외한 3명은 누구인지 좀더 연구해 볼 과제이다.신학생 교육과 기해박해 앵베르 주교는 선발한 신학생들을 어디서 교육했을까? 바로 자신이 거처하던 한양 후동 주교관이다. 이 집 주인은 정하상이었다. 한국 교회 첫 주교관이자 신학교였다. 1837년 12월 16일 조선에 입국해 12월 31일 한양에 도착한 앵베르 주교는 6년간 중국과 티벳 국경 지대인 목평에서 신학교를 세워 신학생을 양성한 경험을 바탕으로 조선에 신학교를 운영하기로 했다. 그는 우선 정하상과 이승훈의 손자로 알려진 32세 홀아비를 신학생으로 선발했다. 1838년 여름까지 8개월간 라틴어를 배운 둘은 유창하게 라틴말을 하게 됐다. 앵베르 주교는 이들에게 그해 11월부터 아멜 신부가 중국인 신학생들을 위해 한문으로 번역한 페르쇼 주교의 「교의 및 윤리 신학」을 교재로 신학을 가르쳤다. 「교의 및 윤리 신학」은 가톨릭 교리와 윤리, 우상 숭배와 미신에 관한 교회 가르침, 개신교의 오류 등에 관해 문답식으로 해설한 책이다. 앵베르 주교는 또 20대 청년 2명을 선발해 라틴어를 가르쳤고, 1839년에는 15~16세 소년 3명을 신학생으로 선발해 마카오로 유학을 보낼 계획이었다. 하지만 앵베르 주교의 이러한 사제 양성 계획은 1839년 기해박해로 물거품이 되고 만다. 앵베르 주교와 모방ㆍ샤스탕 신부뿐 아니라 교회 지도자들이 대다수가 순교하면서 조선 교회가 풍비박산됐기 때문이다.앵베르 주교의 계획은 어떻게 가능했나 앵베르 주교는 신앙의 자유가 없는 조선에서 정규 신학교를 운영하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판단하고, 소년이 아닌 교회 안에 명망 높은 중년 독신 남성들을 선발해 라틴어 읽기와 신학을 간단히 가르쳐 사제품을 주려고 했다. 앵베르 주교는 무슨 근거로 이러한 계획을 세우고 시도했을까? 당시 보편 교회는 트리엔트 공의회 교령에 따라 신학교 운영과 사제 서품에 관한 상세한 규칙이 확립돼 있었다. 트리엔트 공의회는 사제품을 받으려면 삭발례를 받은 이후부터 수문품, 독서품, 구마품, 시종품, 차부제품, 부제품의 6단계를 거쳐야만 했다. 또 차부제는 만 22세, 부제는 23세, 사제는 25세 이전에 서품할 수 없다고 명시했다. 그리고 신학원에 입학한 신학생들은 문법, 성가, 교회 전례력 계산법과 다른 유용한 과목을 배워야 했다. 그리고 성경, 교회 서적, 성인들의 강론, 성사 집행, 전례 예식 양식을 배우고 익혀야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앵베르 주교는 조선인 사제 양성을 위해 파격적인 계획을 세우고 시행한다. 그는 앞의 두 편지에서 다음의 근거를 제시하면 자신의 정당성을 밝힌다. 앵베르 주교는 두 편지에서 “통킹에 계셨던 베르트 명의주교님과 우리의 첫 대목구장들의 모범을 따라서” 조선에 도착하자마자 나이 든 남자 후보자를 물색했다고 한다. 베리트의 명의 주교는 파리외방전교회 설립자 가운데 한 사람인 피에르 랑베르 드라 모트(1624~1679) 주교이다. 포교성성 직할 선교단체인 파리외방전교회 설립자들과 지역 교회의 첫 대목구장들은 선교 지역의 교회가 빨리 자립할 수 있도록 현지인 사제들을 양성해 동포들에게 선교 활동할 벌이게 하는 ‘특별 권한’을 교황청으로부터 받았다. 특별 권한 중 하나가 대목구장이 라틴어를 읽을 수 있는 능력만 갖춘 현지인 지망자를 사제로 서품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에 파리외방전교회 「선교사 활동 지침서」(모니타)는 선교지에서 신학교 교육을 받지 않고 특정 선교사에게 개별적으로 교육을 받은 검증된 교리교사(회장)에게도 사제 서품 가능성이 주어진다고 규정했다. 앵베르 주교는 이를 근거로 조선 교회 장래를 위해 일차적으로 덕망있는 회장들을 선발 교육해 사제품을 주어 교회를 안정화하고, 별도로 어린 신학생들을 선발해 마카오 등지에서 정규 신학 교육을 받게 한 다음 사제품을 줘 자립 교회로 성장시킨다는 두 가지 방안을 시행한 것이다. 앵베르 주교가 한문 신학 서적으로 조선인 신학생들을 교육한 것도 우리 문화와 전통을 존중하는 깊은 이해에서 비롯된 것이라 할 수 있다. 리길재 기자 teotokos@cpbc.co.kr cpbc2021.08.17
![[수도 전통에 따른 렉시오 디비나] (30)수도 전통 안에서의 묵상](//cpbc.co.kr/CMS/newspaper/2020/03/rc/774873_1.0_titleImage_1.jpg)
[수도 전통에 따른 렉시오 디비나] (30)수도 전통 안에서의 묵상옛 수도자들, 끊임없이 암송하며 되새겨 허성준 신부 묵상(meditatio)이란 무엇인가? 오늘날 적지 않은 사람들이 묵상을 추리나 혹은 상상하는 것으로 생각하고 있는 것 같다. 이것은 오늘날 널리 알려진 이냐시오 묵상법이나 가르멜 묵상법, 슐피즈 묵상법과 같은 상상과 추리를 요구하는 수많은 추론적 묵상 방법들의 영향 때문인 듯하다. 그러나 묵상의 본래 의미는 그러한 의미가 아니었다. 이 점에서 수도 전통에서는 구조화되지 않고 체계화되지 않은 단순한 묵상 방법을 제시하였다. 어원적으로 볼 때, 라틴어 medita tio(메디타시오, 묵상)는 하느님의 말씀을 내면으로 받아들인다는 뜻인 그리스어 μελτη(멜레테)에서 왔으며, 이것은 다시 어떤 것을 작게 소리 내어 중얼거림을 뜻하는 히브리어 haga(하가)에서 왔다. 그러므로 고대나 중세 때 수도자들이 묵상한다고 하면, 그것은 당연히 성경 본문을 작게 소리 내 암송하며 마음으로 그 구절의 충만한 의미를 배우는 것을 의미하였다. 「사막 교부들의 금언집」에는 멜레테가 암송으로 자주 사용되고 있다. 즉 고대 수도자들에게 있어 묵상은 오늘날과 같이 내적으로 말씀을 복잡하게 숙고하는 것이 아니라, 눈으로 본 것을 입술로 소리 내어 읽고 듣는 수행이었다. 대개 독수도승들은 독방에 홀로 있을 때, 큰소리로 말씀을 암송하는 묵상 수행을 하였다. 이삭 압바는 요한 카시아누스에게 시편의 한 구절인 “하느님, 어서 저를 구하소서, 주님, 어서 저를 도우소서”(시편 70,2)라는 말씀을 끊임없이 암송하는 수행을 권했으며, 대 파울루스 압바는 “저를 불쌍히 여기소서”를 끊임없이 암송하는 묵상을 하였다. 여기에 몇 가지 예가 있다. 어느 날 암모에스 압바와 비씨미우스 압바는 아킬레스 압바를 뵙기 위해 그의 은거처를 방문하였다. 그런데 그들이 그의 은거처 가까이 왔을 때 아킬레스 압바는 창세기 46장 3절(야곱아, 이집트로 내려가는 것을 두려워하지 말라)을 오랫동안 묵상하였다. 그들은 아킬레스 압바의 암송하는 묵상 소리를 듣고는 그를 방해하지 않기 위해 그의 은거처 앞에서 오랫동안 기다린 후에 문을 두드렸다고 한다. 또한, 필사가였던 네세르의 이시도루스 압바도 자주 필사하다가 눈을 들어 속으로 “예수님, 저를 불쌍히 여기소서. 예수님, 저를 도우소서. 내 주님, 당신을 찬미하나이다”라고 끊임없이 암송하는 묵상을 하였다. 수도 전통에서 묵상의 의미는 기억된 성경 본문에 대한 반복 혹은 암송을 뜻했다. 이에 대해 드 보궤 신부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이것은 오늘날 우리의 묵상과 같이 전적으로 내면적인 행위가 아니라, 입과 정신 모두를 사용하는 과정으로서 암송과 같다. 이것은 생각이나 느낌을 형성할 뿐만 아니라, 무엇보다도 먼저 어떤 본문을 암송하는 것을 뜻한다.” 그래서 「파코미우스 규칙서」를 따르는 수도자들은 한순간도 성경 말씀이 그들을 떠나지 않도록 암송하는 묵상 수행을 게을리하지 않았다. 그들은 일하는 동안에도 성경의 어떤 구절을 중얼거림이나 암송의 형식으로 계속 묵상하였다. 이렇게 수도자들은 성경의 한 말씀을 온전히 자기의 것이 되도록 그 말씀을 끊임없이 되새기고 맛보았다. 바로 이 되새김이 수도 전통 안에서 행해진 독특한 묵상 방법이다. 고대 수도 전통 안에서 성경에 대한 묵상과 되새김은 동일한 용어로서 정확하게 구분할 수 없었다. 그래서 고대 수도 전통 안에서 묵상은 종종 ‘되새김(ruminatio)’으로 사용되기도 하였다.허성준 신부(성 베네딕도회 왜관수도원) 평화신문2020.03.11

커피의 향과 맛이 주는 행복[사유하는 커피] (16)커피의 영혼과 인간 영혼이 빚어내는 하모니 박영순(바오로, 커피비평가협회장) 커피의 신비로운 효능과 소중함을 강조하려고 커피 애호가들이 자주 사용하는 단어가 ‘영혼(靈魂)’이다. ‘졸음을 쫓고 영혼을 밝게 하는 커피’, ‘영혼의 향기를 담아낸 수 커피’라는 식이다. ‘커피의 영혼이 인류를 위로한다’며 커피에 영혼을 부여하기도 한다. 커피와 인간 사이에 보이지 않는 긍정적인 힘이 작용하기를 바라는 마음이 실려 있는 듯하다. 종교에 호의적이지 않은 사람도 커피를 영혼에 빗대는 것에는 거부감이 없어 보인다. 그러나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영혼을 언급하는 것이란 쉽게 발심(發心)하는 게 아니겠다. 영혼은 사전적으로 “육체에 깃들어 마음의 작용을 맡고 생명을 부여한다고 여겨지는 비물질적 실체”(국립국어원)로 풀이된다. 불교에서 영혼은 ‘해탈에 이르지 못한 자의 헛된 망상’, 유교에서는 기(氣)의 작용으로 생겨난 혼백이다. 원불교는 죽을 때 떠나는 영혼이 다시 이 세상에 새 몸을 받아 태어난다고 본다. 자이나교는 생명체뿐 아니라 모든 사물에 영혼이 있다는 애니미즘의 관점을 가진다. 구약과 신약 성경에서 영혼은 266차례 언급되는데, 영혼을 ‘인간 그 자체’ 또는 ‘생명이 있는 존재’로 바꿔 읽어도 문맥을 이해하는 데 큰 어려움은 없다. 영혼에 대한 논의는 ‘영’과 ‘혼’으로 나눠 더 깊은 사유로 들어갈 수 있다. 그러나 영혼이란, 현재로선 과학자들에게는 영역을 넘어서 논할 수도, 상상할 수도 없는 대상이다. 철학에서 다루는 영혼은 과학과 종교 사이에 있다. 플라톤은 영육이원론을 설파하면서 영혼은 감각의 세계인 육체와 달리 불멸한다고 봤다. 아리스토텔레스에게 영혼은 육체를 떠나 존재할 수 없다. 영혼은 곧 그 생명체의 본질이다. 토마스 아퀴나스는 영혼은 살아 있는 동안 육체와 일체를 이루지만, 숨지면 단독으로 존재한다며 영혼의 세계로 사유의 지평을 열어 놨다.그리스도인에게 영혼은 믿음의 시작이자 끝이다. 하느님께서 흙의 먼지로 당신과 같은 형상을 빚은 후 코에 ‘생명의 숨’(영혼)을 넣음으로써 인간을 생명체로 만들었다. 베드로의 첫째 서간은 믿음의 목적은 영혼의 구원이라고 적었고, 재림하실 예수가 구원해주실 대상이 바로 인간의 영혼인 것이다.‘소울’(Soul)이 영혼의 의미를 담기에는 부족함이 많다. 영혼의 어원은 히브리어로 ‘네페쉬’(Nephesh)에서 헬라어 ‘프쉬케’(Psyche), 라틴어 ‘아니마’(Anima)로 이어졌다. 단순히 ‘정신’이나 ‘혼’으로 풀이해 소울이라고 적기에는 담지 못하는 게 많다. 근대로 접어들어 영혼은 데카르트의 코지토(Cogito, 사유)와 헤겔의 가이스트(Geist, 정신)로 풀이되면서, ‘영혼은 마음(mind)’이라는 은유로 소통하기도 한다. 라틴어 성경의 아니마가 17세기 예수회 선교사들에 의해 중국으로 전해져 신비함을 뜻하는 ‘영’과 사람이 죽은 뒤에 남는 넋을 의미하는 ‘혼’을 합한 영혼으로 번역됐다. 한국에서 “영혼은 신령하여 불사불멸하는 체(體)이니, 육신과 합하여 그 생명이 되는 것’(「천주교 요리문답」)으로 풀이됐다. 예수회는 식물에도 식물적 기능의 원천이 되는 ‘식물의 혼’(생혼)이 있다고 봤다. 나무의 본성과 본질이 농축돼 있는 씨앗, 곧 커피 원두에 영혼이 있다고 보는 것은 결코 애니미즘으로 치부할 일이 아니다.커피 향미에 행복함을 느끼는 것은 단지 뇌가 만들어낸 정신 활동 때문만이 아닐 수 있다. 아직 과학의 영역을 넘어선 탓이라 상상할 수밖에 없지만, 그것은 인간 영혼과 커피 영혼이 어우러지며 빚어내는 하모니일 수 있다.박영순(바오로, 커피비평가협회장, 단국대커피학과 외래교수) 평화신문2020.08.25
![[신앙단상] 더 높은 곳을 바라보아라(유송자, 데레사, 국제 가톨릭 형제회)](//cpbc.co.kr/CMS/newspaper/2020/12/rc/792674_1.1_titleImage_1.jpg)
[신앙단상] 더 높은 곳을 바라보아라(유송자, 데레사, 국제 가톨릭 형제회) 제가 속한 AFI(국제가톨릭형제회)는 그리스도를 증거하고 복음적 삶을 이루는 데 일생을 봉헌하기로 서약한 평신도 공동체입니다. 회원들은 교육이나 상담, 사회복지, 사회운동과 사회개발, 의료복지 등의 분야에서 활동하며 교회와 세상 안에서 다양한 사도직을 수행합니다. 꽤 오래전, AFI 국제생활 체험을 위해서 벨기에 브뤼셀에서 지낼 때, 단체의 국제 비서처가 있는 스위스 제네바를 방문할 일이 있었습니다. 우리는 함께 머물던 한 한국 회원과 단체의 국제 비서로 일하던 다른 AFI 회원을 방문했습니다. 당시 로마에서 추기경 회의를 하셨던 故 김수환 추기경께서도 회의를 마치신 후, AFI 국제 비서처를 방문하셨으므로 우리는 함께 산책을 나갔습니다.“오, 밤송이 좀 보세요! 아름이 벌어지고 있어요!” “와! 그러네! 밤알이 떨어지려고 해!”유럽에는 밤나무가 귀해서 오랜만에 보는 밤송이가 더욱 반가웠던지, 어린아이들처럼 들떠서 외치는 AFI들 사이로, “더 높은 곳을 바라보아라” 하시는 김수환 추기경님의 특유한 저음의 음성이 들려왔습니다.김 추기경님의 말씀대로 더 높은 곳을 바라보니, 밤나무 잎 사이로 눈부시게 빛나는 파란 하늘, 먼 곳에 은색 선을 그리며 지나가는 작은 물체가 보였습니다. 코앞에 매달린 밤송이에 홀려서 그 이상 높게도 넓게도 보지 못했던 우리들은 “아! 비행기…” 하며 머쓱하게 웃고 말았습니다.그 후, 저는 가끔 가슴이 막힐 것 같거나 삶이 답답해질 때, “더 높은 곳을 바라보아라” 하신 추기경님의 말씀을 떠올리곤 합니다. 더 높은 곳이란, 다만 빛나는 은색 줄을 긋고 지나가는 비행기나 파란 하늘이 아니었습니다. 하늘보다 더 높은 곳에 계신 ‘빛의 근원을 바라보라’고 하신 말씀임을 깨달은 것은 한참이 지난 후입니다.“한 처음에 말씀이 계셨다. 말씀은 하느님과 함께 계셨는데 말씀은 하느님이셨다. 그분께서는 한처음에 하느님과 함께 계셨다. 모든 것이 그분을 통하여 생겨났고 그분 없이 생겨난 것은 하나도 없다. 그분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그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었다. 그 빛이 어둠 속에서 비치고 있지만 어둠은 그를 깨닫지 못하였다.”(요한 1,1-5)해마다 예수님 성탄 날에 봉독되는 이 성경 말씀을 듣고 있으면 “더 높은 곳을 바라보아라”라고 하시던 故 김수환 추기경님의 음성도 함께 들리는 듯합니다.빛과 생명으로 오시는 예수님의 성탄을 준비하며, 하늘보다 더 높은 곳을 바라보고, 더 높은 곳을 향하여 살아갈 수 있는 지혜와 용기를 주시도록 기도합니다. 또한, 그 높은 곳이 바로 내 주변의 가장 낮은 곳에서, 가난하고, 병들고, 억압받으며, 힘없는 소외자로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는 곳임을 깨달을 수 있는 은총을 주시도록 간구합니다. cpbc2020.12.08
“미사 재개와 함께 신천지 추수꾼 잠입”… 각별한 주의 당부유사종교대책위, ‘신천지 전도 활동 및 추수꾼 식별법’ 공지 한국천주교유사종교대책위원회(위원장 이금재 신부)는 미사 재개와 함께 신천지 추수꾼들의 가톨릭 신자 포섭 활동이 우려된다며 본당과 교회 기관, 신자들의 각별한 주의를 당부했다. 유사종교대책위는 최근 ‘본당(기관)에서 은밀하게 진행되는 신천지 전도 활동 및 추수꾼 식별법’이란 제목의 글을 통해 “계속해서 본당에서 은밀하고도 비밀스럽게 전도활동을 하는 신천지 추수꾼은 신분을 감추고 있기 때문에 전도 방식과 용어를 통해 식별할 수밖에 없다”며 경계를 요청했다. 본당에서 함께 활동했던 교우라도 오랫동안 연락이 없다가 갑자기 만남을 청하거나, 제삼자인 누군가를 소개한 경우, 어떤 모임이나 공부·활동에 가자고 설득하는 경우가 대표적인 추수꾼 활동 사례이다. 또 ‘비진리’, ‘거짓 목자와 참 목자’, ‘영계와 육계’, ‘초림과 재림’, ‘이긴 자와 실상의 인물’ 등 교회 안에서 사용하지 않는 용어들을 사용하는 이는 신천지 교인으로 의심해야 한다. 아울러 교회 밖에서 모임이나 문화 공연, 취미 활동, 심리상담 등에서 친분을 맺은 이들이 서서히 종교 이야기를 꺼내거나, 성경 공부를 하자고 할 때에 의심 없이 따라가선 안 된다. 유사종교대책위는 본당에서 덕망이 있거나, 주요 직책을 맡은 사람이라 하더라도 “누구에게 알리지 말고 일대일 성경공부를 하자”라는 식으로 접근한다면, 반드시 본당 사제나 기관장, 수도자에게 알리고 확인해볼 것을 요청했다. 또 신천지인들의 예배 복장인 상의 흰색, 하의 검은색 계통의 옷을 수시로 착용하고, 신천지 예배가 있는 수요일과 주일에 본당 미사나 활동에 참여하지 않는 이도 조심스럽게 살펴봐야 한다고 알렸다.실제 본당에 잠입한 신천지 교인들의 이중활동은 심심찮게 적발돼왔다. 모 본당에서는 청년 전례 담당자가 사제와 대화 중 신천지 신도임이 밝혀져 그날로 성당에 나오지 않았고, 또 다른 본당에서는 예비신자 교리교육자가 예비신자들에게 신천지 성경을 가르치다 적발돼 쫓겨난 사례도 있다. 코로나19 사태 이후 신천지는 모든 공식 행사와 복음방 활동을 중지한 상황이지만, 최근 젊은이들이 많이 몰리는 역 주변에서는 여전히 추수꾼들의 거리전도가 이어지고 있다.유사종교대책위원장 이금재 신부는 “코로나19 사태 이후 지금은 각 본당이 미사 때마다 개인정보를 확인하고 있기에 추수꾼 활동이 수면 아래에 있지만, 언제든 적절한 때에 이들이 기지개를 펼 것이기에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 신부는 또 “코로나19 사태 이후 비대면이 생활화된 사회에서 교회는 신자들이 지닌 삶의 고민과 어려움, 가정과 직장에서 느끼는 상처를 치유하고 보듬는 사목으로 신자들과 함께해야 한다”면서 “단순히 신천지 교인을 색출하는 작업이 아니라, 그들의 상처와 어려움마저도 우리가 잘 보듬을 수 있는 포괄적인 형태의 사목이야말로 우리 모두를 신천지로부터 보호하는 방법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이정훈 기자 sjunder@cpbc.co.kr 평화신문2020.05.13
“네가 너의 아들과 너의 손자에게 들려줄 수 있도록”(탈출 10,2)프란치스코 교황 성하의 제54차 홍보 주일 담화(요약)세상을 살아가는 우리는 세상과 세상일을 바라보면서 서로 연결된 실타래처럼 우리가 서로 엮여 있음을 알게 됩니다. 인간은 이야기꾼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자신에 관한 이야기를 하는 유일한 존재인 인간은 직물을 엮어내듯 이야기를 엮어냅니다. 그렇다고 해서 모든 이야기가 다 좋은 이야기는 아닙니다. 창세기를 보면, 뱀이 우리에게 ‘하느님처럼 될 것이다’라고 유혹했던 것처럼 악으로부터 위협도 받습니다. 오늘날에도 많은 이야기가 우리를 현혹하고 있고, 행복해지려면 더 많이 소유하고 소비해야 한다고 유혹하고 있습니다. 폭력과 거짓에 사로잡혀 입증되지 않은 정보들을 짜깁기하고 증오의 말을 하는 것은 다른 이들의 존엄을 빼앗는 행위입니다. 나쁜 이야기는 수명이 오래가지 않지만, 좋은 이야기는 오랜 세월이 지나가도 여전히 삶에 자양분이 됩니다. 따라서 우리에게는 아름답고 참되고 좋은 이야기를 받아들이는 지혜와 거짓되고 사악한 이야기를 거부할 용기가 필요합니다. 성경은 모든 이야기 가운데에서 첫째이고 하느님과 인류의 위대한 사랑을 이야기합니다. 그 성경의 중심에 바로 예수님이 계십니다. 예수님의 이야기는 우리를 향한 하느님 사랑과 하느님을 향한 우리의 사랑을 완성에 이르게 합니다. 그러기에 사람들은 이 이야기의 가장 중요한 사건들, 곧 성경의 의미를 가장 잘 전달하는 사건들을 말하고 기억하도록 부름을 받습니다. 이번 홍보 주일 담화의 제목은 탈출기에서 뽑은 “네가 너의 아들과 너의 손자에게 들려줄 수 있도록”(탈출 10,2)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신앙의 선조와 맺은 계약을 기억하시고, 표징과 기적을 통해 선조들을 종살이로부터 해방하셨습니다. 이 이야기는 이집트에서 탈출이라는 경험을 통해 그 후손들에게 주님을 대대로 알게 합니다. 이렇듯 하느님께서는 삶의 이야기를 통하여 우리와 소통하십니다. 복음서는 예수님을 알려주는 이야기인데, 우리가 예수님을 닮도록 이끌어 줍니다. 예수님께서는 일상의 삶에서 나온 짧은 이야기를 통해 하느님에 관해 말씀하셨습니다. 듣는 사람을 변화시키는 예수님의 이야기는 과거의 유산이 아니라, 언제나 시의적절한 우리의 이야기입니다.인간의 어떤 이야기도 보잘것없거나 하찮은 것은 없습니다. 하느님께서 이야기가 되셨기에 모든 사람의 이야기는 하느님의 이야기가 됩니다. 모든 이야기 안에 우리 이야기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하느님께 우리 이야기를 들려드리는 것은 우리와 함께하는 사람들도 그분께 맡기는 것입니다. 그럴 때 우리는 주위에 있는 형제자매들에게 다가갈 수 있는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단순히 이야기를 전하고 자신을 알리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눈에 비친 우리의 모습을 기억하고 성령께서 마음에 새겨 주신 것을 증언하며 놀라운 이야기를 품고 있다는 사실을 모든 이에게 드러내 보여 주는 것입니다. 성모님은 하느님의 말씀을 당신 품 안에서 엮으셨고 하느님의 놀라운 일을 당신 삶으로 이야기하신 분입니다. 바로 여기에 우리가 성모님께 도움을 청하는 이유가 있습니다. 프란치스코cpbc2020.05.22
![[수도 전통에 따른 렉시오 디비나] (32)수도 전통 안에서의 되새김②](//cpbc.co.kr/CMS/newspaper/2020/03/rc/775883_1.0_titleImage_1.jpg)
[수도 전통에 따른 렉시오 디비나] (32)수도 전통 안에서의 되새김②보는 게 아니라 씹어 먹어야 하는 책 허성준 신부 수도 전통 안에서 있었던 묵상으로서의 되새김 수행은 베네딕도 성인 이후에도 계속 강조되었다. 그래서 12세기의 안셀모 성인은 “독서자는 자기의 구원자이신 분의 선(善)을 맛보아야 하고, 그분의 말씀을 되씹어야 한다”고 말하였다. 그는 또한 되새김의 과정을 다음과 같이 아주 자세히 묘사하였다. “당신은 그분 말씀의 벌집을 씹고, 그 맛을 빨아들여라. 그것은 그 어떤 수액보다도 더 달콤하다.… 생각으로 씹고 이해로써 빨아들이고 사랑과 환희로써 들이켜라!” 그 어떤 수액보다도 더 달콤한 말씀의 벌집을 씹고 빨아들이라는 권고이다. 베르나르도 성인 역시 수도자들이 순결한 반추 동물과 같이 말씀을 끊임없이 되뇌어야 함을 강조하였다. “우리가 성경을 달콤하게 반추함으로써 우리의 내장은 채워지게 된다.”이렇게 중세까지 수도 전통 안에 묵상의 과정으로서의 되새김 수행이 면면히 이어져 내려오다가, 중세에서 근대로 넘어오는 큰 분기점인 르네상스를 거치면서 합리적이고 체계적인 묵상 방법들이 널리 퍼지게 되었다. 사실 어휘에서 볼 수 있듯이 고대나 중세까지만 해도 ‘묵상’(meditatio)과 ‘되새김’(ruminatio)은 별 구분 없이 사용되었다. 그러나 중세 말 스콜라 학문의 영향으로 인해 묵상에 이성적이고 추리적인 요소들이 많이 첨가되면서 점점 더 묵상과 되새김 수행 사이에 균열이 생기게 되었다. 이제 묵상은 단순히 성경 말씀을 되새김하는 것이 아니라 더 지성적인 의미들을 내포하게 되었다. 그래서 본래의 묵상의 개념이었던 되새김은 이제 ‘생각하는 것’(cogitatio), ‘고려하는 것’(consideratio), ‘연구하는 것’(studium)과 같은 의미들로 대체되었다. 더욱이 근세로 넘어오는 큰 분기점인 르네상스를 거치면서 더 합리적이고 체계적인 묵상 방법들이 널리 퍼지게 되면서 점점 더 묵상과 되새김이 분리되어 버렸고, 그 이후에 되새김 수행은 거의 잊히게 되었다. 이로써 오랫동안 수도 전통 안에서 단순하게 그리고 독특하게 행해져 오던 성경 묵상에 대한 구체적인 수단인 되새김 수행이 잊히게 되었는데, 이점은 수도승 영성의 크나큰 불행 중의 하나임을 필자는 매우 안타까워하고 있다. 그래서 오늘날 수도 전통을 따르고 있는 수도자들마저도 그러한 방법이 무엇인지, 심지어 수도승 전통 안에서 그러한 방법이 있었는지조차도 모르는 기(奇)현상을 종종 목격하게 된다. 수도자들은 끊임없이 성경 본문을 암송하고 반복하고 되씹으면서 헛된 세상의 가치에 휩쓸리지 말고 온갖 유혹으로부터 자신을 지키어, 하느님의 말씀 안에 온전히 머물러 있어야 한다. 이 점에서 장 르끄레르 신부는 이러한 끊임없는 반복과 되새김 수행이 수도자들의 내적 생활을 훨씬 더 풍요롭게 만들 수 있다고 강조하였다. 베네딕도 16세 교황은 수도자들의 이러한 독특한 묵상 방법인 되새김 수행에 대해서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우리도 사막의 수도교부들처럼 말씀을 끊임없이 되뇌어야 함”을 강조하면서 ‘ruminating’(반추) 용어를 직접 사용하시기도 하였다. 장익 주교는 언제가 주교회의 성서위원회 위원장으로 있을 때, 다음과 같이 의미 있는 말을 하였다. “성경은 안경을 쓰고 들여다보는 책이 아니라 씹어 먹어야 하는 책입니다. 그리고 여유 있는 사람이 하는 게 아닙니다. 유식해서 시간이 있어서 하는 게 아닙니다. 고대 채록자들 역시 생활이 바빴고 배우지 못한 사람들이 많았지만, 그들은 하느님의 말씀을 알아듣고 구원을 찾았던 이들입니다.”허성준 신부(성 베네딕도회 왜관수도원) 평화신문2020.03.25

성경 속 사탄 발전사, 한 권에 집약사탄, 악마가 된 고발자/ 송혜경 지음 / 한님성서연구소 / 1만 5000원 사탄은 왜 생겼을까? 악마는 대체 어떤 존재인가? 선(善)을 알기 위해선 악(惡)의 개념도 알아야 한다.한님성서연구소 수석연구원 송혜경(비아) 고대 근동학 박사가 성경 속 사탄 발전사를 연구한 산물을 책 한 권에 집약했다.고발자, 기소자를 뜻하는 히브리어 ‘사탄’은 본래 선악 개념과는 무관했다. 이는 히브리어 구약성경에도 나타난다. 이스라엘 백성을 저주해달라는 모압 임금의 청을 수락하고 여행길에 오른 이방인 예언자 발라암의 앞길을 막은 것은 주님이 보낸 사탄이었다. 하느님은 욥기에서 ‘사탄’에게 욥이 얼마나 올곧은 사람인지 시험하도록 허락한다. 두 경우, 사탄은 주님의 임무를 수행하는 고발자요, 천사다.구약 외경을 거쳐 신약에 이르면, 사탄에 ‘악마’의 개념이 깃든다. 고발자 역할을 하는 천사에서 인간을 유혹하는 악의 수장으로 개념이 진화한 것이다. 이는 이스라엘 민족의 믿음과 역사와도 연관된다. 히브리어 성경에서 악마 개념이 발달하지 않은 것은 좋든 나쁘든 모든 세상일이 하느님 뜻에 따라 이뤄진다는 유일신 사상에 근거한다. 그러나 이스라엘인들은 왕국의 멸망과 바빌론 유배라는 연이은 극한의 고통을 겪으면서 악을 새로운 눈으로 바라보게 된 것이다.악마라는 존재로 인해 세상 죄악과 온갖 고통이 생겨나게 됐다는 ‘악신 개념’은 제2성전기 후반의 유다교 문학, 즉 구약 외경과 쿰란 문헌들에도 속속 나타나기 시작한다. 구약 외경 가운데 하나인 「에녹 1서」는 천사들 가운데 일부가 세상에 내려와 타락하면서 하느님 뜻을 어겼고, 이들이 일으킨 천상계 균열로 인해 지상에 악을 가져왔음을 최초로 밝힌다.저자는 신약의 복음서가 전하고 있는 예수님과 사탄의 관계를 면밀히 들여다본다. 예수님이 사탄과 어떻게 대립했는지, 복음서별로 사탄을 묘사하는 데 어떤 차이점이 있는지, 나아가 바오로 서간과 이어지는 신약 성경 속 사탄 개념의 발전사를 깊이 파헤치고 있다.악은 현대사회에도 다양한 모습으로 존재한다. 결국, 저자는 모든 세상 악과 두려움을 물리칠 유일한 방법은 ‘완전한 사랑’, ‘하느님의 빛’임을 분명히 확인시켜주고 있다. 이정훈 기자 cpbc2019.04.03

도가의 술법 익혔던 김건순의 사람들, 일제히 천주교로 전향[정민 교수의 한국 교회사 숨은 이야기] 69. 김건순의 개종과 여주 교회 김건순의 사람으로 도가의 술법을 익혔던 이중배와 원경도는 1800년 3월 여주 정종호의 집에서 주님 부활 대축일을 지냈다. 이들은 개를 잡고 술을 많이 장만해서 길가에 모여 큰 소리로 알렐루야와 부활삼종경을 외우고, 바가지를 두드려 가며 기도문을 노래했다. 이들의 부활 축제는 온종일 노상에서 계속되었다. 그림=탁희성 화백 천당 가는 법을 얻었소김건순의 추종자였던 정원상은 1797년 10월에, 8월 중순 과거 시험을 보러 상경했던 김건순이 돌아온다는 소식을 듣고 이중배와 함께 그의 집을 찾았다. 당시 김건순의 집에는 이중배, 원경도와 서양화가 이희영과 그의 조카 이현, 김치석, 김이백, 김익행, 성명순 등이 주인이 돌아오길 기다리고 있었다. 이들은 진작부터 도가의 법술을 함께 익히고, 둔갑술과 장신술 공부를 같이 하며, 바다 섬에서 새로운 세상의 건설을 꿈꾸고 있었다.근 두 달 만에 이들과 만난 김건순은 새 소식을 기대하며 모인 그들 앞에서 갑자기 몸을 돌려 벽을 향해 앉더니, 알지 못할 주문을 한동안 외웠다. 차고 있던 칼을 풀고는 이렇게 선언했다. “이번 과거 시험을 보러 간 길에 서양국의 도인과 만났소, 그에게서 죽어 천당 가는 법을 얻었고, 약살법(若撒法, 요사팟)이란 별호까지 받았소. 이제까지 익혔던 육임(六壬)의 법술과는 결별하고, 이제부터 그 도를 힘껏 배우려 하오. 이 자리에서 차고 있는 칼들을 풀고 정도를 함께 행합시다.” 이희영의 공초에 따르면 당시 이들은 섬에 들어가기를 원한다는 표식으로 각자 작은 칼을 차고 있었다. 이후 김건순은 십자가를 그어 보이며 밤새도록 천주교 교리를 강론하였다. 칼을 끌러 맹세하자거나, 벽을 향해 앉아 주문을 외우는 등의 행동에는 여전히 술법하는 부류들의 분위기가 남아 있다. 이들은 김건순에 대한 충성도가 대단히 높은 집단이었다. 이후 이들은 일제히 천주교 신자로 전향했다. 애초에 김건순과 주문모 신부의 만남은 어떻게 이루어졌을까? 주문모 신부는 1797년 가을, 김건순의 자자한 명성을 들었다. 그는 노론 최고 명문가의 적장자였다. 그런 그가 천주교에 입교할 경우 교회는 든든한 배경 하나를 더하고, 날개를 얻게 될 것이었다. 달레는 「조선천주교회사」에서, “그는 천주교에서 마술의 비밀과 특별한 비방(方)을 얻을 줄로 생각하고 그것을 연구하기 시작하였다”고 썼는데, 당시 자신들이 강이천(姜彛天, 1768~1801) 등과 계획하고 있던 해도거병(海島擧兵)의 일에 서학이 도움이 될 것으로 믿었던 듯하다.남곽선생(南郭先生) 주문모와 해상진인(海上眞人) 김건순김건순이 서학에 관심이 높다는 소식을 전해 들은 주문모 신부는 1797년 8월 초에 같은 여주 출신인 벽동의 정광수 편에 서신을 주어 김건순에게 만남을 청했다. 편지를 받은 김건순이 기뻐하며 말했다. “이 사람이 나왔다는 말을 이미 들어 알고 있었소. 한번 보고 싶었는데 먼저 문안 편지를 받으니 참으로 다행이오.” 김건순은 겉봉에 ‘주선생전답상서(周先生前答上書)’라고 쓴 답장을 보냈다. 주문모 신부는 답신을 받고 김건순의 높은 학식과 유려한 문장에 크게 놀랐다. 이 내용은 「사학징의」 중 정광수의 공초에 나온다. 얼마 뒤 김건순은 8월 21일에 열리는 감시(監試)의 응시를 구실로 8월 13일경 상경하였고, 상경 이틀 뒤인 8월 15일, 추석날 저녁에 그는 수각교(水閣橋) 인근 창동(倉洞) 강완숙의 집으로 주문모 신부를 찾아왔다. 수각교는 현 중구 남대문로4가 1번지에 있었던 다리다. 주 신부가 그에게 천주교를 믿으라고 권하자, 그는 신부를 협객의 부류로 여겨, 도리어 천주교인 수십 가구를 모아 섬으로 함께 들어가 천주교를 포교하는 것은 어떠냐고 말했다. 자신은 그 섬에서 무기를 마련하고 큰 배를 만들어 청나라로 쳐들어가 선대의 치욕을 씻겠다고 했다. 터무니없는 계획에 놀란 신부가, 자신이 조선에 건너와서 포교하는 것은 영혼을 구원하려는데 있다며 천주교의 주요 교리를 설명하기 시작했다. 김건순은 그제서야 기뻐하며 새벽녘에 돌아갔다. 주 신부는 다시 장문의 설득 편지를 써서 정광수 편에 보냈고, 두 사람은 시험이 끝난 뒤인 8월 26일에 한 번 더 회동했다. 주문모 신부는 남쪽 성곽 즉 남대문 근처 창동 강완숙의 집에 머물렀으므로 이후 김건순과 강이천 등에게 남곽선생이란 은어로 불렸다. 하지만 얼마 못 가 김건순과 강이천 등이 해상진인(海上眞人), 서방의인(西方義人), 남곽선생 운운하면서 해랑적(海浪賊)의 변을 꾀하고 있다는 유언비어가 걷잡을 수 없이 퍼졌고, 11월 11일 정조는 진사 강이천을 붙잡아 들여 사학의 죄로 추국한 뒤 유언비어 유포죄를 물어 제주도로 유배 보냈다. 이때 김건순은 주모자였음에도 정국에 미칠 파장이 너무 클 것을 염려해 문제 삼지 않고 그저 덮어버렸다.정조는 한 해 뒤인 1798년의 「일득록(日得錄)」에서 강이천의 무리를 유배형에 처한 까닭을 밝히면서 “김건순은 명현(名賢) 김상헌의 총손(孫)이니, 10대까지 용서한다는 뜻에서 놓아두고 죄를 묻지 않았다. 이 또한 세신(世臣)을 온전하게 보전하려는 고심이었다”고 말했다. 이 일로 김건순은 신앙을 갖겠다고 선언한 지 불과 석 달이 못 되어, 그의 천주교 개종 소식에 경악한 집안의 집중적인 감시와 관리 속에 놓이게 되었다. 김건순의 신앙생활임금으로서는 아무리 붙잡으려 해도 잡히지 않던 주문모의 이름이 강이천 등의 공초에서 언급되는 데 긴장했지만, 김건순을 혐의 선상에서 아예 배제해버림으로써 겉으로는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문제를 덮고 말았다. 하지만 남인들의 종교였던 천주교에 노론 최고 명문가의 종손이 자발적으로 세례를 받고 천주교 신자가 된 것은 파장이 큰 사건이었다.달레는 「조선천주교회사」에서 “영세한 뒤 김건순 요사팟의 행동은 항상 굳건하고 점잖고 나무랄 데가 없었다. 그의 겸손은 그의 공로와 맞먹었다. 그는 모든 교우들의 사랑과 존경을 받았고, 그 덕의 광채는 미리부터 그를 박해의 희생자로 지목하였다. 이런 환경에서 그의 부모 친척과 친구들이 그가 추적되지 않게 해줄 나약한 말 한마디를 얻어 내려고 얼마나 노력했을지는 상상하기 어려울 것이다”라고 썼다.1797년 10월에 여주로 돌아온 자리에서 김건순은 좌중에게 요사팟이란 별호까지 받았노라고 말했다. 하지만 김건순이 주문모 신부에게 정식으로 세례를 받은 시점은 이때가 아니라 두 해 뒤인 1799년 6월 6일의 일이었다. 「추안급국안」의 1801년 3월 17일 자 이희영의 공초에 관련 증언이 남아 있다. 당시 김건순이 주문모 신부에게 세례를 받을 때, 신부는 손에 작은 금 항아리를 들고, 그 속에 물을 채워 여러 번 김건순의 이마에 물을 찍어 바르면서 성경을 외우는 것을 이희영 자신이 직접 입회하며 목격했노라고 말한 것이다. 세례를 행한 장소는 송현(松峴) 홍익만의 집이었다. 달레는 정약종이 김건순 요사팟과 협력하여 천주교의 모든 진리를 순서 있고 체계 있게 설명하는 「성교전서(聖敎全書)」의 저술에 착수했다가, 책이 절반 정도 완성되었을 때 신유박해가 일어났다고 썼다. 이로 보아 김건순은 가문의 격렬한 반대와 차단에도 불구하고, 교계 핵심 인사들과 지속적으로 왕래하며 뛰어난 문장과 식견을 바탕으로 정약종, 황사영과 함께 교회 내 최고의 이론가로 발돋움하고 있었음을 알 수가 있다. 여주 교회의 부활절 부흥회여주 교회의 성장도 대단했다. 특별히 김건순의 사람으로 도가의 술법을 익혔던 이중배, 원경도, 정종호 등의 활약이 눈부셨다. 이중배는 이전까지 직선적 성격에 거칠고 난폭한 성격을 지녀 불의한 행동도 거리낌 없이 하던 협객이나 술사에 가까운 사람이었다. 그는 김건순을 따라 천주교인이 되어 마르티노라는 세례명으로 세례를 받은 뒤 완전히 딴사람이 되었다. 여주 읍내에 살던 원경도는 그의 사촌이었다. 이들은 모두 온 가족이 함께 신앙을 받아들였다.1800년 3월 부활절 때 두 사람은 정종호의 집에 가서 함께 주님 부활 축일을 지냈다. 이들은 이날 개를 잡고 술을 많이 장만해서 길가에 모여 큰 소리로 알렐루야와 부활삼종경을 외우고, 바가지를 두드려 가며 기도문을 노래했다. 이들의 부활 축제는 온종일 노상에서 계속되었다. 일종의 공개적인 부흥회를 열었던 셈인데, 전후로 달리 예를 찾기 힘들 만큼 참으로 대담하기 짝이 없는 행동이었다. 외교인의 신고로 이 소식을 접한 여주 목사 김희조(金熙朝)는 너무도 놀라 즉각 포졸을 보내 이들을 붙잡아 들였다. 이들은 결국 신유박해가 일어나기 한 해 전에 여주 감옥에 갇혔다. 이 일로 여주와 양근 일대에 검거 선풍이 불면서 양근의 정약종은 터전을 버리고 상경을 결심해야만 했다. 평소 이들의 기질이 잘 드러난 사건이었다. 원경도의 아우 원경신(元景信)과 원경도의 외종 김치석(金致錫), 처사촌 최재두(崔在斗), 최재두의 처삼촌, 그리고 윤유일의 부친 윤생원 등도 다 함께 신앙생활을 했던 사람들이다. 이후 이들은 10월까지 반년 넘게 감옥에 있으면서 보름마다 온몸이 너덜너덜해질 지경으로 혹독한 고문과 회유를 받아, 일부 배교를 선언하고 풀려났지만, 대부분 뜻을 굽히지 않았다. 특별히 옥중에서 이중배가 행한 치유의 은사는 이제껏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고 있다. 그의 손이 닿기만 하면 병이 모두 나았으므로 그가 갇혀 있던 여주 감옥은 인산인해로 몰려드는 병자들의 행렬에 옥문이 무슨 장마당 같았다고 했다. 관속 중에서도 무거운 병을 나은 사람이 여럿 있었으므로 관장도 이를 막지는 못했다. 놀란 옥졸들이 의술의 비결을 묻자 그는 이렇게 대답했다. “독특한 처방은 없소, 천주를 섬기기만 하면 되오, 의술을 배우고 싶은가? 먼저 천주를 믿으시오.” 옥졸들이 책이 다 탔는데 어찌 배우는가 묻자, 이중배는 “내 마음속에 타지 않은 책들이 있다네. 얼마든지 가르쳐 주겠네.” 그의 이 같은 질병 치유 능력은 종교적 이적 외에 앞서 본 술사(術士)로서의 그의 역량과도 무관치만은 않으리라고 본다. 이들은 해가 바뀌면서 신유박해가 일어나자 서울로 압송되었다가, 1801년 3월 13일 다시 여주로 끌려와 읍성 밖에서 참수되었다. 원경도가 28세, 이중배와 정종호는 50세가량이었다. 여주 교회는 김건순을 정점으로 한 상당히 조직적이고 충성도가 높은 신앙 집단이었다. 정민 베르나르도(한양대 국문학 교수)cpbc2021.09.29
코로나19 재확산으로 공동체 미사 다시 중단 광주·대구·의정부·춘천·인천·군종교구, 교구 전역 또는 일부 지역에서 중단… 방송 미사 등 대송 권고 코로나19 전국 확산으로 사회적 거리 두기가 강화되면서 신자들과 함께하는 미사를 잠정 중단하는 교구가 다시 늘고 있다. 8월 31일 현재 교구 전역이나 일부 지역에서 신자들과 함께하는 미사를 잠정 중단한 교구는 광주ㆍ대구대교구, 의정부ㆍ대전ㆍ춘천ㆍ인천ㆍ군종교구이다. 광주대교구는 “8월 27일부터 9월 10일까지 광주광역시 본당과 기관의 미사와 모임을 중단한다”고 8월 27일 공지했다. 광주대교구는 광주광역시가 사회적 거리 두기 3단계에 준하는 행정명령을 발령함에 따라 비대면 온라인 종교 활동만 허용하고 그 외 모임과 활동은 일절 금지돼 이같이 결정했다고 밝혔다. 다만 전남지역 본당은 실내 50인, 실외 100인 미만 미사 참여, 본당 신부 재량에 따라 미사 중단 가능 등 기존 지침을 유지하기로 했다.대구대교구는 8월 29일부터 9월 5일까지 모든 본당과 기관, 성지, 성모당 등에서 ‘신자들과 함께 하는 평일미사’를 중단한다고 밝혔다. 대구시는 사회적 거리두기가 2단계로 격상됨에 따라 지역사회의 안전과 건강을 위해 9월 6일까지 대면 종교행사를 제한해줄 것을 강력히 권고했다.의정부교구는 8월 26일 공지를 통해 “8월 27일부터 추후 공지가 있을 때까지 신자들과 함께하는 모든 미사와 본당과 기관의 모든 소모임과 행사는 중단한다”고 발표했다. 아울러 주일 미사에 참여하지 못하는 신자들을 위해 교구장 주례 주일 미사를 유튜브에서 생중계한다고 알렸다. 의정부교구는 주일 미사에 참여할 수 없는 신자들은 대송으로 집에서 방송 미사, 묵주 기도, 성경 봉독, 주님의 기도 서른세 번, 선행 등으로 미사 참여 의무를 대신하면 된다고 밝히고, 본당 사제들은 신자들을 위해 매일 미사를 빠짐없이 봉헌해 주기를 당부했다.춘천교구는 8월 27일 긴급 공지를 발표하고 11일까지 춘천교구 서부지구 내 모든 본당에서 일제히 미사를 중단키로 했다. 서부지구는 포천ㆍ운천ㆍ일동ㆍ이동ㆍ솔모루ㆍ가산ㆍ철원ㆍ김화ㆍ갈말ㆍ내촌본당 등 10곳이다. 아울러 교구는 가평ㆍ미원ㆍ주문진ㆍ청평ㆍ현리본당도 미사를 중단한 상태다. 이외 본당은 본당 사제의 결정에 따라 상황에 대응하도록 했다. 정규 미사 외 각종 대면 모임 활동과 행사도 금지했다. 춘천교구는 해당 본당 신자들에게 묵주기도 5단을 바치고, 그 주일에 해당하는 독서와 복음을 읽으며, 신령성체 기도를 바치고, 가톨릭평화방송TV 미사에 참여하는 대송에 임해달라고 신자들에게 요청했다.인천교구도 8월 28일 “인천광역시 내의 모든 본당은 30일부터 별도 해제 시까지 모든 미사를 중단한다”고 알렸다. 또 “부천시내 모든 본당은 8월 31일부터 9월 6일까지 모든 미사를 중단한다”고 했다. 김포지구와 시흥·안산지구는 강화된 사회적 거리두기 방역수칙을 준수하며 미사를 봉헌할 수 있고, 교구 주보는 계속 발행된다고 밝혔다. 교구장 정신철 주교는 인천 관내 본당 신부들에게 “미사가 중단됨으로 영적 어려움을 겪을 교우들을 위해 전화를 통한 사목적 돌봄을 제공하고, 휴대폰 문자ㆍSNS 등으로 사목 서한과 강론(말씀 묵상글)을 보내주길 바란다”고 당부했다. 아울러 “가능한 유튜브 등 인터넷 방송을 통해 실시간 미사를 봉헌해달라”고 주문했다. 한편, 서울대교구를 비롯한 대부분의 교구에서는 신자들과 함께하는 미사를 제외한 모든 신심 활동과 소모임을 중단하기로 했다. 서울대교구는 8월 27일 공지를 통해 27일부터 미사 외 레지오 회합, 성경 공부, 단체 회합, 교육 등 모든 소모임을 중단하라는 내용의 강화된 지침을 각 본당에 전달했다. 이에 따라 혼인과 장례 미사는 허용되지만, 참여 인원은 49명까지로 제한된다. 단, 신자들과 함께하는 미사는 평일에도 허용된다.청주교구도 8월 25일부터 미사를 제외한 모든 대면 소모임 활동을 전면 금지했다. 그리고 미사 중에 성가 자제, 큰 소리로 말하는 행위를 금해줄 것을 공지했다. 이상도 기자 raelly1@cpbc.co.kr cpbc2020.09.02

‘모든 이에게 모든 것’이 되고자 최선을 다한 영적 아버지정진석 추기경의 삶과 신앙 정진석 추기경은 계성보통학생 시절 명동대성당 보좌이던 노기남 신부의 새벽 미사 복사를 하면서 신앙심을 키웠다. 사진은 정 추기경이 2008년 5월 성소 주일을 맞아 서울 혜화동 가톨릭대 성신교정을 방문한 주일학교 초등부 아이들과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있다. ‘모든 이에게 모든 것(Omnibus Omnia, 1코린 9,22)’고 정진석(니콜라오, 향년 90세)추기경은 하느님의 충실한 종으로서 ‘모든 이에게 모든 것’이 되고자 하루하루를 최선을 다해 산 사제였다. 6·25전쟁 중 죽음의 참상에서 하느님의 부르심을 깨달은 정 추기경은 사제수품 성구 “나 너를 사랑하는 줄을 너 알으시나이다(요한 21,15-제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을 주님께서 아십니다)”를 평생 가슴에 지닌 채 하느님과 인간을 사랑하는 데 지치지 않기 위해 헌신한 착한 목자였다. 젊은 시절 발명가를 꿈꿨던 서울대 공학도. 그러나 모든 이에게 참 행복을 주는 봉사하는 이가 되기로 결심하고 사제의 길을 택한 사람. 39세에 주교가 된 뒤 서울대교구와 청주교구의 교구장직을 40년 넘게 수행하며 막중한 사목적 현안을 두루 살핀 추기경. 세월이 흘러도 여전히 많은 사제와 신자들의 ‘영적 아버지’이자, 왕성한 집필 활동으로 끊임없이 하느님 사랑의 가르침을 전하며 교회의 큰 어른으로 살아온 정진석 추기경의 삶과 신앙을 정리했다.명동 토박이 효자 추기경제12대 서울대교구장을 지낸 정 추기경은 주교좌 명동대성당과 누구보다 각별한 인연을 지닌 인물이다. 그는 명동 토박이이다. 정 추기경 스스로 “나는 혼인성사와 병자성사를 제외하고 세례ㆍ견진ㆍ성체ㆍ고해ㆍ성품성사를 명동대성당에서 받았다”고 할 만큼 명동대성당은 그의 영적ㆍ육적 고향과 같은 곳이다. 정진석 추기경은 1931년 12월 그의 본가와 외가 모두 4대째 내려오는 구교우 집안 출신의 아버지 정원모(갈리스토)씨와 어머니 이복순(루치아) 여사 사이에서 태어났다. 추기경의 부모는 명동대성당에서 혼배를 하고, 서울 수표동에서 가구공장을 하던 추기경의 외가에 가정을 꾸렸다. 불행히도 정 추기경은 평생 아버지 얼굴을 본 적이 없다. 부친이 1931년 ‘조선 공산당 재건 국내공작위원회 사건’의 핵심인물로 구속돼 3년간 옥고를 치른 후 가족을 두고 만주로 떠났다. 부친은 1944년 ‘공산주의자협의회 사건’으로 재구속돼 경기도경에서 수사를 받고 광복을 맞아 석방된 후 월북했다. 그래서 정 추기경은 중1 때 생물학 시간에 수정(受精)을 배우기 전까지 “스스로 아버지 없이 태어난 사람”으로 생각했다고 한다. 어머니 이복순 여사는 나눔의 정신을 몸소 실천하던 독실한 신자였다. 이웃의 가난한 아기들이 젖동냥을 오면 주저 없이 젖을 물렸다. 그러나 돌림병을 옮길까 봐 외아들에게 줄 다른 쪽 젖은 물리지 않았다. 홀어머니의 각별한 사랑으로 성장한 정 추기경은 소문난 ‘효자’다. 정 추기경은 로마 유학 시절을 제외하고 선종할 때까지 어머니를 평생 모시고 살았다. 정 추기경은 “수호성인인 루치아 성녀처럼 내가 죽으면 필요한 사람에게 안구를 기증하라”는 어머니의 유언을 지키기 위해 주변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안구 적출 수술을 지켜보았고, 당신의 마지막 날까지 하루도 빠짐없이 어머니와 모든 연령을 위해 미사를 봉헌할 만큼 효심이 깊었다. 정 추기경은 태어나 나흘 만에 유아 세례를 받고 기도 소리를 자장가 삼아 자란다. 그는 계성보통학생 시절 명동대성당 보좌이던 노기남 신부의 새벽 미사 복사를 하면서 신앙심을 키웠다. 그는 새벽마다 홀로 골목길을 걸으며 무서움을 떨치기 위해 목에 십자가를 걸치고 “나는 꼬마 주교님이다!”를 외치며 성당 복사를 서러 새벽을 깨웠다. 그는 단 하루도 복사에 빠지지 않아 노 신부에게 십자가를 상으로 받았다. 노기남 신부가 1942년 한국인 첫 주교로 수품될 때 복사를 섰던 까까머리 소년은 56년 후 같은 장소에서 제12대 서울대교구장이 됐고, 8년 후 추기경이 됐다. 하느님의 부르심가장 부지런한 복사로, 일본 어린이들만 드나들던 어린이 도서관에 숨어 들어가 위인전에 빠진 꼬마 독서광으로 유년 시절을 보낸 정 추기경은 중학생 시절 독서회 회원들과 마르크스 사상에 심취해 “하느님은 없다”며 무신론에 빠져 한때 성당을 멀리했다. 그러던 중 1947년 명동대성당에서 무신론과 유물론의 오류를 지적하고 하느님의 존재를 명쾌하게 설명한 윤형중 신부의 사순 특강을 듣고 통회하고 신앙을 회복하는 극적 체험을 했다. 1950년 서울대 공대에 진학한 정 추기경은 6·25전쟁을 겪으면서 무수한 죽음을 통해 ‘삶의 의미’를 깨닫는다. 서울 수복 전날 밤 골방에서 함께 숨어있던 육촌 동생 미카엘이 폭탄 파편에 맞아 바로 옆자리에 숨졌다. 1ㆍ4 후퇴 때 국민방위군으로 소집돼서 마산까지 걸어갈 때였다. 덕소 근처에서 얼어있는 한강을 건너는데, 정 추기경이 지나간 다음에 얼음이 깨져서 뒤에 오던 사람들이 많이 죽었다. 추기경이 막 건너간 다음이다. 또 의성쯤 갔을 때는 추기경 바로 앞에 간 사람들이 지뢰를 밟아 죽었다. 낙동강 전투 때 뿌려놓았던 지뢰였다.이렇게 무수한 죽음을 목격하면서 정 추기경은 “하느님께서는 왜 나를 살리셨을까?”하는 물음에 빠졌다. 이 물음은 정 추기경이 사제 성소를 받는 큰 동기가 됐다. 하느님의 부르심을 깊이 성찰한 그는 ‘모든 이에게 행복을 전하는 사제가 되자!’고 결심하고 어린 시절부터 희망해 왔던 발명가의 꿈을 접고 사제의 길을 택했다. 통찰력을 가진 사제정 추기경은 서울대신학교를 졸업하고 1961년 3월 18일 명동대성당에서 사제품을 받았다. 정 추기경은 사제 수품 당시를 이렇게 회고했다. “나는 그때 감히 내가 거룩한 사제가 된다는 것이 너무 두려웠습니다. 그리고 사제품을 받기 위해 땅에 엎드려 기도하는 동안 한국전쟁 때 죽을 고비를 넘기던 일들이 마치 영화의 순간처럼 스쳐 지나갔습니다. 그때 많은 죽을 고비에서 제가 죽지 않고 살아난 것은 이유가 있었습니다. 사제가 되라는 하느님 뜻이었습니다. 이제 나의 인생은 덤으로 받은 삶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사제 서품 미사 중 죄 많은 내가 어떻게 성스러운 사제직을 수행할 수 있을지, 감정이 북받쳐 많이 울었습니다. 감격스럽고 또한 동시에 두렵기도 했습니다. 시간이 많이 흘렀지만 나는 그날을 잊을 수가 없습니다.” 서울 중림동약현본당 보좌로 사제직의 첫발을 내디딘 정 추기경은 소신학교인 성신고 교사로 7년을 재직한 뒤 교황청립 우르바노대학교 대학원에 유학해 교회법 석사 학위를 받고 귀국과 동시에 1970년 성 바오로 6세 교황으로부터 주교로 임명됐다. 그가 39살 나이에 교구장 주교로 임명된 날이 바로 전쟁 발발일인 6월 25일이었다. 청주교구장으로 28년간 재임한 후 그는 1998년 성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으로부터 제12대 서울대교구장 겸 평양교구장 서리로 임명됐다. 이후 2006년에는 베네딕토 16세 교황으로부터 한국 교회의 두 번째 추기경으로 서임됐다. 정 추기경의 사목 통찰력은 주교 서품 당시 인사말에서 “이상과 현실을 그리스도의 정신 안에서 조화시키고 실천해 나가겠다”고 밝혔을 때부터 드러났다. 정 추기경은 청주교구장으로 28년간 재임하면서 한국 천주교회 내에서 △지역 복음화율 △신자 대비 본당 수 △신자 대비 사제 수 등에 있어서 가장 높은 성장을 기록했다. 정 추기경은 교회의 양적 성장과 함께 질적 성장의 중요성을 인지했다. 그래서 1998년부터 서울대교구장으로 재임하면서 새 복음화 시대에 대비한 시노드를 개최했다. 정 추기경은 시노드 개최뿐 아니라 후속 작업을 무리 없이 사제단과 신자들과의 조화와 일치 속에서 차근차근 실천에 옮겼다. 아울러 △지역장 대리구제 △복음화 2020운동 △공동 사목 등을 한국 천주교회 사상 최초로 시행했다. 한반도 통일을 대비해 의정부교구를 과감하게 신설 분할하고, 미래 교회의 주인공인 청소년과 젊은이들과 인간 생명을 수호하는 일에 아낌없이 투자하는 결단성을 보여줬다. 이처럼 무성한 숲을 위해 차근차근 간벌하고, 한 그루 한 그루 나무를 심어 새 숲을 가꾸는 조림꾼처럼 당장은 성과가 눈에 띄지 않지만, 미래에 풍성한 결실을 거둬들이는 사목 스타일이 정 추기경의 참모습이다. 학자이며 저술가정 추기경은 학자답게 방대한 독서량으로 유명하다. 그의 해박한 지식과 넓은 이해심의 바탕에는 어릴 때부터 책과 함께한 학덕이 깔려있다. 초등학생 시절 새벽 미사 복사를 마치면 어머니가 챙겨준 도시락으로 아침을 대신하고 학교와 인근 소공동 어린이 도서관에서 책을 읽었다. 은퇴 후 병석에 눕기 전에까지 매일 새벽 4시에 일어나 아침기도 시간까지 2시간여를 독서와 저술로 보내고 있다. 이렇게 매일 책에만 할애한 새벽의 2시간이 저서 51권 역서 14권, 전집 등 총 65권의 책으로 결실을 보았다. 정 추기경은 목자요 교회법 학자답게 ‘복음’과 ‘교회의 가르침’을 충실하게 따르고 지켜온 인물이다. 그는 무릇 사제란 “유한한 가치를 몽땅 버리고 구원의 품에 안겨 파릇파릇한 새싹을 싸늘한 수의로 휘감은 뜨거운 송장의 길을 스스로 택한 어리석은 자라야 한다”고 가르치며 스스로 세상에 어리석은 하느님의 충실한 종이 되길 원했다. 특히 서울대교구장 시절 배아줄기세포 연구 논란과 관련, 국민의 냉소적 시선에도 불구하고 “배아에서 줄기세포를 얻는 방법이 윤리적으로 어긋난다”며 한국 가톨릭교회의 입장을 분명히 했다. 탁월한 신심가 정 추기경은 너그럽고 겸손하며 후덕한 인격자로 널리 알려져 있다. 아무리 바빠도 상대의 얘기를 다 들어주고 “또 물어볼 것 없어?”라고 말할 만큼 항상 온화하고 소탈한 목자다. 하지만 일 처리에 있어선 늘 적극적이고 미래를 내다보는 실천적 통찰력으로 결단력 있게 추진해와 ‘정중동’(靜中動)의 표상으로 인정받아 왔다.정 추기경은 사목 표어대로 자신을 필요로 하는 모든 사람을 때를 가리지 않고 만나주는 어진 목자였다. 성당과 길거리에서 만난 신자들에게 일일이 축복해 주고 손을 잡아주었다. 청주교구장 시절 기자들이 밤늦은 시간 약속을 하지 않고 찾아가 교회와 사회 현안에 대해 질문해도 싫은 기색 한번 비치지 않고 응대해주기도 했다. 정 추기경의 겸손은 그의 신심에서 비롯된 삶의 태도였다. 정 추기경은 성체 신심과 순교 영성이 깊은 분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정 추기경은 성체대회와 순교자 현양 행사를 열어 신자들에게 성체성사의 신비를 실천하고 복음에 합당한 생활을 할 것을 권고해 왔다. 첫영성체를 준비하다 순교한 동정녀 마리아 고레티 성녀와 최양업 신부를 각별히 공경해온 정 추기경은 늘 신자들에게 이들을 소개하며 “육신의 절제와 자기 희생, 순교 정신으로 자신을 봉헌해야 한다”고 가르쳤다. 사제를 사랑한 목자정 추기경은 은퇴 후 혜화동 주교관에 머물면서 신학생에게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는 하느님의 질문을 매일매일 마음에 새기며 살아야 한다”며 “주님께서 여러분을 선택하셨으니 끝까지 지켜 주실 것이라는 믿음을 가져야 한다”고 격려했다. 그러면서 “하느님은 여러분의 부족한 점도 당신 영광으로 바꿔 주시는 분이라는 것을 믿고 어떤 상황에서든 절망하지 말고 용기를 가져 달라”고 당부했다. 또 “인생이라는 먼 길을 가는 우리에게 그 최종 목적지와 주의사항을 알려주는 길잡이가 곧 성경”이라며 늘 성경을 가까이할 것을 권고했다. 정 추기경은 첫 본당 임지로 떠나는 새 신부에게는 “강론 준비를 철저히 해 달라” “신자들에게 기도하는 모습을 보여달라”는 당부를 잊지 않았다.리길재 기자 teotokos@cpbc.co.kr cpbc2021.04.28

“삼위일체 하느님의 역동적 사랑은 영원히 계속된다”[예수 그리스도와 복음의 인격 그리고 프란치스칸 영성] 36. 삼위일체와 관계성의 영성 프란치스코 성인은 “덕은 하느님의 속성이므로 완덕의 삶을 살아갈 것”을 형제들에게 권고했다. 사진은 프란치스코회 수도자들이 촛불을 밝히고 기도하고 있다. 【CNS 자료 사진】 9. 삼위일체와 관계성의 영성- ⑤‘기도와 헌신(신심)의 영’과 삼위일체적 삶프란치스칸 신비주의자 알칸타라의 성 베드로는 ‘헌신의 영’이 악 혹은 죄의 보편적 원인을 이겨내는 데 필요한 것이라 하면서 바오로 사도의 로마서 말씀을 인용한다. “나의 내적 인간은 하느님의 법을 두고 기뻐합니다. 그러나 내 지체 안에는 다른 법이 있어 내 이성의 법과 대결하고 있음을 나는 봅니다. 그 다른 법이 나를 내 지체 안에 있는 죄의 법에 사로잡히게 합니다.”(로마 7,22-23)알칸타라의 성 베드로도 이 ‘헌신(신심)의 영’을 덕을 행하고 살아가는 데 있어서의 핵심으로 간주했다. 덕을 살아간다는 것은 하느님 안에서 그분 사랑의 힘을 깨어 인식하며 그 힘으로 살아가는 것을 의미한다. 왜냐하면 ‘덕’은 그 자체로 다 하느님 당신의 속성이기 때문이다. 프란치스코에게서도 이런 이해가 있었음을 엿볼 수 있는 내용이 두 편의 그의 글에 나타난다. 하나는 ‘지극히 높으신 하느님께 드리는 찬미’이고, 다른 하나는 ‘덕들에 바치는 인사’이다. 프란치스코가 하느님을 찬미하며 드리는 영예(덕)들이 거의 고스란히 덕들에 바치는 인사에 등장하고 있기 때문이다.결국 ‘기도와 헌신(신심)의 영’ 안에서 살아간다는 것은 프란치스코가 형제들에게 다른 무엇보다도 간곡히 부탁하고 있는 ‘주님의 영과 그 영의 거룩한 활동을 간직하며 사는 것’과 비슷한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아울러 삼위일체이신 하느님 사랑의 힘으로 모든 존재와 연결된 우리 존재의 엄연한 현실을 항상 마음에 새기는 가운데 이를 우리 삶에 구체적으로 실현하며 살아가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바로 이런 삶의 자리에서 우리는 통교하시는 삼위일체 하느님과의 만남, 혹은 ‘그리스도와의 인격적 만남’에 들어서는 것이고, 이러한 삶의 자리로의 초대가 매일 매 순간 우리 각자에게 주어지고 있는 것이다.그런데 이렇게 살아가려는 우리의 의지를 꺾는 장애물이 늘 우리 주변에 산재해 있다. 나는 물론이고 가까이 있는 이들의 약점과 결점, 이로 인한 서로 간 상처를 주고받음, 우리 정신 안에 뿌리 깊게 고정된 인과응보적 사고방식과 상거래식 계산적 사고방식 등으로 인한 개인들과 집단들, 국가들의 갈등과 전쟁 등등의 어둠이 늘 우리 주변을 맴돌고 있는 것도 우리의 엄연한 현실이다. 하지만 여기서 우리가 반드시 잊지 말아야 할 것이 있다. 이런 상황에서도 삼위일체 하느님의 창조하고 구원하며 역사를 완성해가는 ‘역동적 사랑의 흐름’은 오늘도, 어제도, 내일도, 영원히 계속되고 있다는 사실을 말이다. 그래서 우리는 모든 것을 성호를 그으며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시작하고 마치고자 하는 것이다. 이는 우리가 ‘내 존재성’이 아니라 ‘하느님 존재성’으로 살아간다는 사실을 우리 자신에게 시시각각 의식적으로 상기시키는 것이다. 우리의 존재적 약함과 현실의 어려움을 넘어서는 데 있어 꼭 필요한 것은 이런 하느님 섭리에 ‘내어 맡김’과 ‘확신’을 마음 한가운데 품고 살아가는 것이다. 프란치스코는 인준 받지 않은 「수도 규칙」 21장에서 이렇게 말한다. “우리는 성부와 성자와 성령이신 전능하신 주 하느님께 집과 거처를 항상 마련해 드립시다. 그분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앞으로 일어날 이 모든 악에서 벗어나 사람의 아들 앞에 설 수 있는 힘을 지니도록 늘 깨어 기도하여라.… 그리고 우리는 우리 영혼의 목자이시며 보호자이신 그분께’ 달려갑시다. 그분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나는 착한 목자이다. 나는 내 양들을 먹인다. 나는 내 양들을 위하여 내 목숨을 내놓는다.’… ‘너희가 내 안에 머무르고 내 말이 너희 안에 머무르면, 너희가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청하여라. 너희에게 그대로 이루어질 것이다.’ ‘두 사람이나 세 사람이라도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그들 가운데 나도 함께 있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언제나 너희와 함께 있다.’ ‘내가 너희에게 한 말은 영이며 생명이다.’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역설이겠지만, 어찌 보면, 우리의 약함과 한계적 상황이 오히려 우리에게는 하느님과 일치하여 덕을 살아갈 수 있게 하는 자극제요 촉매제가 될 수 있고, 또 그것이 분명하다는 것이 성경 전통의 증거다.사제가 미사 집전 전에 드리는 기도 중에는 “하느님의 사제여, 지금 드리는 이 미사를 당신의 첫 번째 미사처럼, 당신의 마지막 미사처럼, 당신의 유일한 미사처럼 드리십시오!”라는 기도가 있다. 이 기도에 드러나는 염원에는 하느님 사랑과 그 섭리에 대한 확신과 내어 맡김의 영이 깃들어 있다. 사실 지금 드리는 미사는 어떤 미사이건 사제 자신이 드리는 미사가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친히 드리시는 미사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모든 신자와 사제는 미사를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시작하고 마치는 것이다. 호명환 신부(작은형제회)cpbc2021.03.31
![[대구대교구 사목교서] 복음의 기쁨을 함께 살아가는 공동체 -하느님 말씀을 따라-](//cpbc.co.kr/CMS/newspaper/2020/12/rc/792282_1.2_titleImage_1.jpg)
[대구대교구 사목교서] 복음의 기쁨을 함께 살아가는 공동체 -하느님 말씀을 따라-대구대교구장 조환길 대주교 친애하는 교구민 여러분에게 하느님께서 풍성히 강복하시길 빕니다.지난 3년간은 성모당 봉헌 100주년을 맞으며 ‘새로운 서약, 새로운 희망’이라는 모토를 내걸고 초대 교구장이셨던 안세화 드망즈 주교님께서 ‘루르드의 복되신 동정 마리아’께 도움을 청했던 원의와 정신으로 다시 새롭게 살아가고자 하였습니다. 공교롭게도 성모당 봉헌 100주년을 기념하는 마지막 해인 ‘치유의 해’에 우리는 전대미문의 신종 코로나 바이러스 감염증-19로 고통을 받았으며 신자들과 함께하는 미사가 중단되는 초유의 사태를 경험하면서 신앙생활의 위기를 느끼기도 하였습니다. 코로나 바이러스 감염증-19 때문에 고통과 죽음의 위협을 받았지만, 한편으로는 결국 하느님께서 우리를 치유해 주시고 구원해 주신다는 은혜를 느낀 한 해였다고 생각합니다. 급격한 변화를 겪고 있는 세상과 함께 오늘날 교회도 큰 위기에 직면해 있습니다. 교회 현실과 미래에 대한 걱정은 사실 어제오늘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개인주의적인 가치관과 문화, 물질의 소유와 성공에 대한 욕망이 지배하는 오늘날 이 시대 사람들의 삶의 모습은 교회가 초대교회 때부터 복음적 가치관으로 이겨내야만 했던 도전들이었습니다. 앞으로도 이러한 현상은 쉽게 사라지지 않을 것입니다.그래서 교회는 복음을 전하기 위해 더욱 매진해야 할 것입니다. “복음은 끊임없이 우리를 기쁨으로 초대”(「복음의 기쁨」 5항)할 것이라는 프란치스코 교황님의 말씀을 기억하면서 다시 새롭게 살고자 노력한다면 그 “신앙의 기쁨이 더디지만 분명하게”(「복음의 기쁨」 6항) 지역사회를 복음화하게 될 것이라고 믿습니다.교구 설정 120주년을 바라보면서 2030년까지 ‘복음의 기쁨을 함께 살아가는 공동체’를 만들어가기 위해 말씀, 친교, 전례, 이웃사랑, 선교라는 다섯 가지 핵심가치를 매 2년씩 중점적으로 실천하며 살기를 제안합니다. 앞으로 10년 동안보다 구체적이고 체계적인 계획 아래, 서로가 신뢰하고 소통하면서 살아갑시다. 그 첫 번째 2년 동안(2021~2022년)은 ‘하느님 말씀을 따라’라는 주제로 살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예수님을 구세주 그리스도로 믿어 고백하고, 그분의 가르침을 따라 사는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느님이 주신 모든 생명의 가치를 어떻게 보존하고 풍성하게 할지, 그리스도인으로서 어떻게 세상을 살아갈지 늘 고심해야 합니다. 이 모든 질문의 답은 바로 복음 말씀 안에 있습니다. 말씀으로 힘과 희망을 얻어 다시 일어서야 합니다. 신앙과 영성으로 나아가기 위해 그 기본인 성경을 가까이하고, 알아듣는 교육과 양성이 무엇보다 우선되어야 할 것입니다. 이 목표를 이루기 위해 2년 동안 교구, 대리구, 본당 차원에서 무엇을 실천할지 고민하고, 교우들은 각자의 위치에서 노력해주시길 부탁드립니다. cpbc2020.12.02
외경 포함한 구약성경 입문서 나왔다구약성경 입문/ Th. 뢰머 외 공저 / 김건태 옮김/ 수원가톨릭대학교출판부/ 3만 5000원 마카베오기 3─4권, 에즈라기 3─4권, 희년서, 에녹서, 열두 성조의 유훈.가톨릭교회에서는 구약성경 외경으로 여기지만, 정교회라고도 하는 동방교회에서는 경전으로 인정하는 구약성경이다. 이 일곱 권의 동방교회 성경을 포함시켜 구약성경을 소개하는 입문서가 나왔다. 수원가톨릭대학교출판부가 최근 펴낸 「구약성경 입문」이 그것이다. 동방교회에서만 경전으로 인정하는 외경 구약성경까지 포함하는 구약성경 입문서가 국내에 소개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이 책은 가장 최근의 구약성경 연구 결과들을 모은 것으로, 불어권 전문가들로 구성된 22명의 현대 가톨릭 성서학자들이 공동 집필한 것을, 주교회의 성서위원회 위원 및 총무로 있는 김건태 신부가 1년여 간의 작업 끝에 우리말로 옮겼다. △오경 △예언서 △성문서△제2경전 △동방 교회의 구약성경 등 전체 5부로 이뤄진 이 책은 오경과 예언서 부분만 800쪽에 이르는 방대한 분량이다. 책을 번역한 김건태 신부는 “그동안 외경으로 여겨왔던 동방교회의 구약성경들을 과감하게 받아들여 연구, 소개하는 것은 교회 일치 차원에서도 매우 뜻깊다”고 의미를 부여했다. 동방교회는 39권의 히브리어 성경 외에 가톨릭의 제2경전(토빗기, 유딧기, 마카베오 상ㆍ하권, 지혜서, 집혜서, 바룩서)과 가톨릭에서 외경으로 여기는 마카베오기 3―4권, 에즈라기 3―4권, 희년서, 에녹서와 열두 성조의 유훈 등의 작품들도 7개 교파에 따라 정경으로 받아들이고 있다. 예컨대 그리스 정교회의 경우 히브리어 성경 39권 외에 토빗기, 유딧기, 지혜서, 집회서까지 포함시켜 43권을 구약성경 경전으로 인정하고 있다. 김 신부는 「구약성경 입문」이 “신학을 연구하는 이들은 물론 신학생과 성경 공부에 관심있는 평신도들에게도 유용한 책이 되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윤재선 기자 평화신문2019.05.02

하느님이 부여한 인간의 근원적 가치와 역할을 고찰하다 교황청 성서위 문헌 「성서 인간학…」 공동 저자 겸 번역자 박영식 신부, 주님이 주신 인간의 책무 강조 “어느 때보다 인간 존재에 관한 근원적 성찰이 절실합니다. 이기심과 탐욕, 방종한 삶의 결과가 결국 자연 파괴와 전쟁, 바이러스 창궐로 이어지고 있지 않습니까? 우리는 주님께서 창조하고 맡기신 이 세상에 대한 책임을 새롭게 성찰해야 합니다.”교황청 성서위원회가 최근 문헌 「성서 인간학 - 사람이 무엇이기에?」(한국천주교주교회의)를 발간했다. 위원회 소속 성서학자 20여 명이 5년간 집필해 공동으로 펴냈다. 창세기 2~3장의 내용을 중심으로 성경 전체와 방대한 교회 문헌을 총동원해 인간 존재성을 깊이 고찰해내 눈길을 끈다. 태초에 창조주가 부여한 인간의 근원적 가치와 역할, 책임을 다룬 ‘하느님의 인문학’과 같은 문헌이다.지난해까지 10년 동안 교황청 성서위원회 위원을 역임하며, 이번 문헌의 공동 저자이자 우리말 역자로 참여한 박영식(서울 반포4동본당 주임) 신부는 “현대 세계에서 가장 심각한 문제들에 대한 답은 결국 ‘사람이란 무엇인가?’라는 주제로 초점이 모아진다”고 강조했다. 그는 “프란치스코 교황님께서는 5년 전 위원들에게 이 같은 주제를 다뤄줄 것을 권유하셨고, 그 결과 성경을 통해 인간학을 다룬 문헌이 탄생하게 됐다”고 밝혔다.하느님은 인류에게 만물이 공존하는 동산을 맡기셨다. 하느님이 특별한 숨을 불어넣어 창조된 인간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원의 희망을 얻은 위대한 존재다. 그렇기에 인간은 노동과 기도로, 불의보다는 선의로 모든 피조물과 조화를 이루는 주님 창조사업에 동참하는 특별한 책무를 지닌다.제1~4장까지 총 346항으로 구성된 문헌은 인간 창조부터 하느님과 사람 사이의 관계, 인류 구원의 역사를 세밀히 언급한다. 사람에 관한 하느님 계시의 아름다움과 복잡성을 숙고하도록 이끄는데, 특히 최근 코로나19 대유행을 겪는 지구촌 인류에 인류 존재 이유를 근원적으로 돌아보도록 이끈다.박 신부는 “인간의 역사는 하느님과의 계약의 역사이며, 사람은 하느님의 일을 수용하면서 자신이 무엇인지를 이해하는 존재”라며 “이번 문헌은 인간 문제에 대한 해답을 제시하는 것에 국한하지 않고, 인간의 존엄성과 인간관계, 인간의 운명 등 성경이 말하는 전체적 전망을 제시하고 있다”고 말했다.“사실 우리는 인간이 어떻게 창조됐고, 어디로 가는지 등 인간에 대한 이해가 너무 부족합니다. 하느님께서 큰 사랑으로 우리를 만드셨는데, 정작 자기 자신은 물론 이웃을 사랑하지 않고, 무관심과 업신여김으로 서로 짓누르는 현실이 가슴 아픕니다. 하느님이 창조하신 대로 인간성을 회복하는 것, 창조 목적에 따라 우리 사명을 다시 받아들이고 그 뜻에 따라 살도록 노력하는 것이 시급합니다.”박 신부는 “인간은 흙과 같은 미약한 존재이지만, 하느님 숨으로 창조된 매우 복되고 위대한 존재임을 깊이 인식할수록 그에 대한 책임을 더욱 자각하고, 주님 영광에 참여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박 신부는 “인간과 자연을 둘러싼 이 문헌의 주제는 교황님의 관심사이자, 교회의 화두”라며 인류가 귀 기울이고 참여해야 할 과제이기에 이웃 종교인과 비신자들도 읽어 보길 권했다. 이정훈 기자 sjunder@cpbc.co.kr 평화신문2020.05.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