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그리스도의 말씀 선포하는 말씀 전례의 절정[미사의 모든 것] (19)복음 봉독 복음 봉독은 말씀 전례의 정점으로, 사제와 부제만이 봉독할 수 있다. 복음 봉독에 앞서 봉독자와 신자들은 이마와 입술, 가슴에 십자 표시를 하는데 이는 복음 말씀을 머리에 새기고 입으로 고백하며 가슴에 담아 실천하겠다는 뜻이다. 【CNS 자료 사진】 나처음: 지난번 말씀 전례의 요소와 예식을 설명하면서 “복음 봉독은 말씀 전례의 정점”이라고 했는데 정확히 복음이 뭔가요?라파엘 신부: 복음은 주님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드러난 하느님 계시의 말씀이란다. ‘말씀’은 영원부터 하느님과 함께 계셨고, 영원으로부터 바로 하느님이셨단다.(요한 1,1 참조) 그 영원한 말씀은 우리를 하느님과 화해시켜 구원하시고자 사람이 되셨지. 바로 주님이신 예수 그리스도이시란다. 아버지 하느님의 말씀으로 참하느님이시며 참인간이신 예수 그리스도는 하느님과 인간 사이의 유일한 중개자이시지. 예수 그리스도의 생애는 ‘강생’(잉태와 탄생-하느님께서 사람이 되시다)과 ‘파스카’(수난, 십자가에 달리심, 돌아가심, 묻히심, 저승에 가심, 부활, 승천) 신비에 비추어 보아야 해요. 신약 성경 가운데 예수 그리스도의 생애와 말씀을 담은 마르코, 마태오, 루카, 요한 네 복음서는 “예수님께서 메시아시며 하느님의 아드님이심을 믿고, 또 그렇게 믿어서 그분의 이름으로 생명을 얻게 하려는 것”(요한 20,31)이라고 저술 목적을 분명히 밝히고 있지. 복음서는 “우리의 구원자, 사람이 되신 말씀의 삶과 가르침에 관한 으뜸가는 증언이기 때문에”(「계시 헌장」 18항) 모든 성경의 핵심일 뿐 아니라 교회 안에서 특별한 위치를 차지해. 그래서 체사리아 성녀는 “복음서보다 더 훌륭하고 소중하며 더 빛나는 교리는 없습니다. 우리 주님이시며 스승이신 그리스도께서 당신의 말씀으로 가르치시고 행동으로 실현하신 것을 직접 보고 간직하기 바랍니다”라며 신자들에게 복음서를 가까이하길 권면했단다. 나처음: 복음 봉독은 전례 안에서도 특별한 권위가 있겠네요.라파엘 신부: 교회는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들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명령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여라”(마태 28,19-20)는 주님의 명에 따라 세상 끝날까지 복음을 선포하고 있지. 그래서 교회를 ‘말씀의 집’이라고 표현하기도 해. 말씀의 집에서 가정 먼저 주의를 기울여야 할 것은 바로 전례란다. 전례는 하느님께서 지금 여기에 있는 당신 백성에게 말씀하시는 탁월한 장소란다. 그리스도께서 당신 말씀 안에 현존하시어 교회에서 당신의 말씀을 듣고 응답하기 위해 모인 이들에게 친히 말씀하신단다. 이런 이유로 그리스도의 말씀이 성전 안에서 장엄하게 선포하기 위해 말씀 전례 복음은 사제와 부제만이 봉독하게 되어 있단다. 조언해: 복음 봉독 때 미사 참여자들이 일어서는 것도 직접 우리에게 하시는 주님의 말씀을 듣기 위함이겠군요. 라파엘 신부: 그렇지. 복음을 선포하러 오시는 그리스도께 대한 존경과 환영을 드러내며 주님의 말씀을 경건히 경청하고 실천하겠다는 표현으로 모든 미사 참여자들이 일어서지. 교회는 다른 독서에 견주어 특별한 영예의 표시로 복음에 가장 큰 경의를 드리라고 가르치고 있어요. 그래서 복음 선포를 하도록 정해진 봉사자는 축복을 받거나 기도를 바치며 복음 선포를 준비하고, 신자들은 환호함으로써 그리스도께서 거기에 현존하시며 신자들에게 말씀하신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고백하지. 조언해: 이때 모든 이들이 독서대를 향해 서는 것도 그리스도의 복음에 특별한 공경을 표하는 것이군요.라파엘 신부: 말씀 전례 예식을 자세히 보면 복음이 봉독 되기까지 여러 예식과 기도가 행해지는 것을 알 수 있어요. 먼저 모든 이들이 복음을 듣기 위해 일어서고, 복음 환호송이 불리는 동안 향을 쓸 경우 사제는 향로에 향을 넣지. 그다음에 복음 봉사자인 사제와 부제가 주례 사제 앞에 나아가 깊은 절을 하면서 낮은 목소리로 “축복하여 주십시오”라며 축복을 청한단다. 주례 사제는 “주님께서 그대의 마음과 입술에 머무시어 그대가 복음을 합당하고 충실하게 선포하기를 빕니다”라며 십자 성호를 그으며 축복해요. 그러면 복음 봉사자는 “아멘”하고 응답하고, 향로와 촛불을 든 봉사자들과 함께 독서대로 향한단다. 복음 봉사자 없이 주례 사제가 복음을 봉독할 때는 손을 모으고 제대에서 허리를 굽히고 “전능하신 하느님, 제 마음과 입술을 깨끗하게 하시어 합당하게 주님의 복음을 선포하게 하소서”라며 속으로 기도한 후 독서대로 향하지.나처음: 복음을 봉독할 때 이마와 입술, 가슴에 십자가를 긋는 이유가 뭐예요.라파엘 신부: 복음 봉사자인 사제나 부제가 독서대에 서면 먼저 교우들에게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라며 인사를 하지. 그러면 교우들은 “또한 사제(부제)의 영과 함께”라고 화답해요. 이 인사는 12~13세기께 미사에 도입된 예식으로 현존하시는 그리스도께서 친히 복음을 선포하신다는 것을 알려주는 것이란다. 그런 다음 복음 봉사자는 “(○○○)가(이)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라며 선포되는 복음 말씀을 알려주면서 책과 이마와 입술, 가슴에 십자 표시를 한단다. 복음 명칭을 알리는 관습은 700년 이전부터 미사에 도입되었어요. 여기서 우리가 주목할 것은 복음서의 참저자는 하느님이시고, 복음사가는 오직 그 말씀을 전달하는 사람이기에 “(마르코, 마태오, 루카, 요한)가(이)이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라고 말하는 것이야. 복음 봉사자가 복음서에 십자 성호를 긋는 것 역시 복음이 주님의 말씀임을 드러내기 위함이란다. 복음 봉사자와 교우들이 함께 이마와 입술, 가슴에 십자 성호를 긋는 것은 11세기 이후 미사에 도입됐는데 ‘복음을 믿고’(이마) ‘고백하며’(입) ‘실천한다’(가슴)는 뜻을 포함하고 있단다. 이렇게 십자 성호를 그으면서 “주님, 영광 받으소서”라고 응답하는 것은 7세기께 동방 교회 전례에서 도입된 예식으로 주님을 환영하며 영광을 드리는 마음을 표현한 것이란다. 향을 피우는 경우에는 복음서에 분향한 후 복음을 선포하지. 그리고 주님 수난 성지 주일과 성 금요일의 수난 복음 봉독 때에는 복음 전 인사, 십자 표시, 분향, 촛불 등이 모두 생략돼요. 스스로 죄인이 되어 고통을 받으시는 그리스도를 묵상하고 일시적으로나마 주님께 영광을 드리는 것을 보류하는 것이지. 또 파스카 성야 때에는 부활초가 있기 때문에 복음서 옆에 촛불 봉사자를 세우지 않는단다. 복음 봉독이 끝나면 복음 봉사자가 독서 봉독 때와 같이 “주님의 말씀입니다”라고 하고, 교우들은 모두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라고 환호해. 로마 전례에서는 이후 복음 봉사자가 존경의 표시로 복음서에 입을 맞추지만, 한국 주교회의는 우리 정서에 맞게 고개를 숙여 경건하게 절을 하도록 정했단다. 복음 봉사자는 이때 “이 복음의 말씀으로 저희 죄를 씻어 주소서”라며 속으로 기도지.조언해: 미사 복음은 어떻게 정해지나요.라파엘 신부: 지난번 말씀 전례 독서와 복음이 어떻게 정해지는지 설명했는데 다시 간단히 알려줄게. 주일 미사 복음은 3년 주기(가해, 나해, 다해)로, 평일 미사 복음은 2년(홀수해, 짝수해) 주기로 배분돼 있단다. 연중 주일에는 공관복음을 기준으로 가해에는 ‘마태오 복음서’, 나해에는 ‘마르코 복음서’, 다해에는 ‘루카 복음서’를 낭독해. 이중 나해의 마르코 복음서는 분량이 짧기에 연중 제17~21주일에는 ‘요한 복음서’로 보충하고 있단다. 요한 복음서는 앞의 연중 시기뿐 아니라 성삼일과 주님 부활 대축일, 부활 팔일 축제 등과 같은 특수 시기에 봉독된단다. 리길재 기자 teotokos@cpbc.co.kr cpbc2020.11.24

‘젖과 꿀이 흐르는 땅’, 다른 누군가에겐 ‘고난의 땅’ [엉클죠의 바티칸 산책] (16) 2000년 전 갈릴래아는 프란치스코 교황이 지난해 11월 세계 가난한 이의 날을 맞아 로마 시내 행려자와 가난한 이들을 바티칸으로 초대해 함께 점심을 먹고 있다. 현대 사회의 가난한 이들 형편은 성경 속 갈릴래아 주민이나 소작농의 그것과 다를 게 없다. 【CNS 자료사진】 하느님은 백성들의 삶이 가장 절박한 곳에 가장 먼저 가신다고 하였습니다. 2000년 전 갈릴래아 백성의 삶은 어떠하였을까요. 한마디로 말해 죽지 못해 살았습니다. 성경은 당시의 상황을 담백하게 묘사하고 있습니다. “어둠 속에 앉아 있는 백성이 큰 빛을 보았다.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운 고장에 앉아 있는 이들에게 빛이 떠올랐다.”(마태 4,16)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워진 땅 백성들은 ‘어둠 속’에 앉아 있었고, 갈릴래아는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던 땅이었습니다. 당시 사회상을 사실적으로 전해주는 예수님의 말씀과 예화가 성경 곳곳에서 발견됩니다. 신앙적 해석이 아닌 현실적 설명 또는 경제사적 분석을 시도해 보겠습니다. 먼저 ‘빵의 기적’에 대한 증언입니다. “저 군중이 가엾구나. 벌써 사흘 동안이나 내 곁에 머물렀는데 먹을 것이 없으니 말이다. 길에서 쓰러질지도 모르니 그들을 굶겨서 돌려보내고 싶지 않다.”(마태 15,32) ‘사흘 동안’이라는 말이 무겁게 다가옵니다. 군중 가운데 상당수가 사흘 동안이나 굶었다는 이야기 아닙니까. 빵의 기적을 일으킬 때마다 여자와 아이들을 제외한 장정만 4000~5000명이 모였다고 하니 전체 인원은 줄잡아 1만 5000명 수준이었을 것입니다. 굶주린 인파가 구름처럼 모인 것이지요.성경에는 ‘빵의 기적’이 두 번 소개됩니다. 실제로는 더 많았을 것입니다. 하루 세끼 해결을 못 하는 절대 빈곤층이 얼마나 많았는지를 짐작할 수 있습니다. 우리 속담에 “사흘 굶으면 포도청 담장도 넘는다”는 말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40일 단식도 하셨지만, 보통 사람들은 사흘 굶으면 눈이 뒤집힙니다. 예수님의 제자들도 예외가 아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밀밭 사이를 지나가시게 되었다. 그런데 그분의 제자들이 배가 고파서, 밀 이삭을 뜯어 먹기 시작하였다.”(마태 12,1) 얼마나 배가 고팠으면 길 가다 말고 밀이삭을 뜯어 먹었을까. 그것도 안식일에! 명색이 예수님 제자라는 분들이 이 정도였으니, 장삼이사 백성들은 어떠했을지…. ‘포도밭 소작인의 비유’(마태 21,35-38)는 사회상의 한 단면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충격적인 사건입니다. 사건 개요는 포도밭 소작인들이 소작료를 받으러 온 주인의 종(마름)과 아들을 살해한 다음 포도밭을 차지하려 했다는 내용입니다. 소작농들의 범죄는 단순 살인사건이 아니라 전형적인 하극상입니다. 또 포도밭 갈취 시도는 단순한 절도 행위가 아니라 경제 기본질서(사유재산권)를 파괴하려 한 공안 범죄입니다. 예수님이 억지로 지어낸 이야기는 아닐 것입니다. 비슷한 종류의 사건이 종종 일어났다고 유추할 수 있습니다. 극심한 빈부 격차모든 범죄에는 동기가 있습니다. 소작농이 이런 끔찍한 죄를 저지른 동기가 과연 무엇이었을까요. 이것이 중요합니다. 사건의 발단은 과다한 소작료였을 것입니다. 소작료 분쟁은 갈릴래아만의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산업화 이전의 농경사회에서는 동양이나 서양 어디서나 있었습니다. 소작료 분쟁이 대규모로 조직화할 경우 소작쟁의나 농민 폭동 또는 농민 전쟁으로 비화하기도 했습니다. 소작료는 보통 50%였습니다. 소작인이 수확량의 절반을 지주에게 바치는 것이지요. 악덕 지주들은 최고 70~80%를 받기도 했습니다. 갈릴래아에는 1%의 사람(지주)이 농토의 50%를 소유하고 있었답니다. 땅 한 평 없는 소작농이 너무 많았습니다. 부익부 빈익빈, 빈부격차가 극에 달했습니다.백성들은 지주에게 소작료만 낸 게 아니었습니다. 세리(로마 제국)에게는 세금을, 제사장에게는 성전세(십일조)를 내야 했습니다. 소작료 세금 성전세, 그들에게는 살인적인 삼중고였습니다. 가뭄과 홍수 등 자연재해로 수확량이 대폭 줄어든 때에도 지주들은 소작료를 깎아주지 않았고, 세리들도 자신들의 몫을 챙겨갔습니다. 더구나 세금이나 소작료를 제때 내지 않을 경우 그 처벌이 매우 엄했고 난폭했습니다. 백성들의 삶이 어떠했을지 짐작이 갑니다. 갈릴래아는 기득권층에게는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었지만, 백성들에게는 ‘죽음의 그림자’가 어른거리는 고난의 땅이었고, 예수님에게는 세상에서 가장 낮은 땅이었습니다. 지금은 수려한 풍광만 남아 있고, 백성들의 굴곡진 삶은 흔적조차 없습니다. 갈릴래아를 찾는 수많은 순례자가 이런 사실을 아는지 모르는지…. 이백만(요셉, 주교황청 한국대사) 평화신문2020.03.31

“기도는 아름다운 시간 낭비… 겸손한 마음으로 끈질기게”「주님, 날마다…」 펴낸 조규만 주교 기도문 의미 깨닫고 더욱 기도에 임하길 주님, 날마다 기도하게 하소서 / 조규만 주교 지음 / 기쁜소식 그리스도인은 기도하는 사람이다. 기도로 아버지 하느님을 만나 시시콜콜한 이야기도 건네고, 아이가 부모에게 무언가를 달라고 떼쓰듯 매달리기도 하고, 감사한 마음을 전하기도 한다. 하느님을 매일 사랑할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은 신앙생활의 핵심인 기도하는 것이다.원주교구장 조규만 주교가 최근 「주님, 날마다 기도하게 하소서」를 펴냈다. 성호경, 주님의 기도부터 묵주기도, 십자가의 길 기도에 이르기까지 30여 개의 가톨릭교회 주요 기도문에 관한 설명과 의미, 기도하는 법에 관해 상세히 풀어놓은 책이다. 기도문을 습관적으로 입으로만 낭송해왔던 신자들과 ‘가톨릭에는 기도문이 왜 이렇게 많지?’ 하는 새 신자들에게도 제격인 기도 안내서다.11월 20일 원주교구청에서 만난 조규만 주교는 “‘주님의 기도’가 왜 ‘나’의 아버지가 아니라, ‘우리’ 아버지로 표현되는지, 묵주기도가 어떻게 예수님 생애를 담고 있는지 우리가 기도문의 의미를 알고 바친다면 더욱 마음을 담아 기도에 임할 수 있을 것”이라며 책 출간 취지를 전했다.실제 우리는 미사 때에나 기도문을 낭송할 때 입으로만 외우는 경우가 많다. 물론 모든 기도가 하느님을 만나는 통로가 되지만, 앵무새처럼 바치는 기도는 마치 아무 생각 없는 되뇜이다. 조 주교는 “사랑하는 사람과 대화할 때 매번 아무 생각 없이 이야기하면 상대방이 대화할 맛이 안 나듯 하느님께 기도할 때에는 마음을 다해 기도해야 한다”며 “특히 가톨릭 기도문은 교회의 오랜 역사와 전통과 많은 이의 희망을 집약하고 있는 만큼 그 의미를 잘 알고 바쳐야 한다”고 조언했다.모든 일의 시작과 끝인 성호경은 그리스도인을 드러내는 십자가 표징이다. 이 땅에서 아버지 뜻이 이뤄져 하느님 나라가 펼쳐지길 비는 ‘주님의 기도’에서 ‘우리(Our)’ 아버지라고 부르는 것은 모두가 서로 형제자매임을 의미한다. 그리스도인의 신분증과 같은 ‘신경’을 통해 영원한 삶을 향한 믿음을 바치고, ‘통회 기도’, ‘봉헌 기도’는 죄의 용서와 하느님 사랑을 일깨우도록 이끈다. 성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이 ‘복음의 요약’이라고 한 묵주기도에 관해서도 예수님 생애부터 성모님 승천에 이르는 각 신비의 내용을 자세히 안내하고 있다. 성경, 준주성범, 동양사상 등을 곁들여 설명한 조 주교의 기도 강론집과 같다. 영어 기도문도 함께 수록해 이해를 돕고 있다.조 주교는 “기도하는 시간은 아름다운 시간 낭비”라며 “기도하지 않으면 모든 일을 자기가 한 것으로 여길 뿐만 아니라, 삶의 항해가 목표를 잃고 표류할 수 있다”고 조언했다. 조 주교는 “기도로 하느님을 더 알고 사랑하는 만큼 이웃을 향한 마음도 넓어진다”며 하느님과 나와의 관계, 나와 이웃과의 관계, 나 자신과의 관계의 중요성을 재차 설명했다. 원주교구는 ‘기도의 맛’을 신자들에게 전하기 위해 2020년을 ‘기도의 해’로 정하고 배론성지에 은총의 성모 마리아 기도학교를 건립해 운영하고 있다. 이어 2021년을 ‘자선의 해’로 보낸다.“연옥 영혼들을 위해 기도하고, 남이 나로 인해 범한 죄까지 생각하며 기도한다는 면에서 가톨릭교회 기도문은 철학적이기까지 합니다. 생각과 마음의 지평을 넓혀주는 것이 교회 전통과 역사를 지닌 우리 기도문입니다. 우리는 끈질기게, 겸손한 마음으로 매일 기도해야 합니다. 이 세상에서 하느님을 만나고 대화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기도뿐입니다. 하느님께 나의 소중한 시간을 아름답게 낭비합시다.”이정훈 기자 sjunder@cpbc.co.kr 문채현2020.12.01
시인의 신앙 여정,?수필로 엮어자박자박, 봄밤 / 이채현 지음 / 작가와비평봄밤을 자박자박 거닐 듯 삐뚤빼뚤 걸어가는 어린아이의 신앙 여정을 담아낸 이채현(스텔라, 57) 시인의 수필집. 삶의 신앙 여정을 운율에 담아 수필로 풀어냈다. 고 김수환 추기경의 어록, 성경 구절, 요셉의원을 지켰던 고 선우경식 원장을 다룬 신문 지면, 가톨릭 성가 ‘보았나 십자가의 주님을’ 등 삶에서 만난 신앙의 묵상 거리를 글의 소재로 끌어다 썼다. △묻고 싶은 것이 너무 많은, 하나 스스로 찾아야 하는 △사랑하지 못하는 마음을 바꾸어 사랑할 수 있게 된다면 △나는 맨 나중에 온 이 사람에게도 당신에게서처럼 품삯을 주고 싶소 등 모두 4부로 구성했다. 순수하면서도 깊고, 때론 갈팡질팡하며 하늘을 향해 삿대질도 하는 저자의 걸음마 같은 신앙 여정을 동행하다 보면 어느새 마음은 하늘 언저리에 닿아있다. “소와 사자가 서로 깊이 친해졌을 무렵 서로를 위해 각기 가장 좋은 것을 주고 싶어, 소는 사자에게 여물을 사자는 소에게 고깃덩이를 주었다 하나 먹을 수 없었음을. 이 얘기는 말한다. 사랑은 내가 좋아하는 것을 주는 것이 아니라 네가 원하는 것을 주어야 함을, 내가 원하는 대로 하라고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네가 원하는 것을 기꺼이 찾아 해주려는 것이어야 함을.”(‘그럴 때면 항상 한 치를 더 자라던 꽃이 아니더냐’ 중에서) 이 시인은 1988년 이화여대 국어국문학과를 졸업하고, 프리랜서 작가로 활동하고 있다. 시집으로 「그대에게 그런 나였으면」,「하늘에서 꽃이 내리다」등이 있다. “겨울에서 봄으로 가며, 새침데기처럼 토라지기도 하고 / 가다가 드러누워 떼도 쓰고 / 하늘에 허공에 삿대질도 하고 // 허허 벌판에서, 밟혀 아픈 잡초의 망막함 / 광풍 폭우 뇌진에 그래도 사람들 찾는 / 그 사랑 어찌 해야 할지 몰라 두리번두리번…”(‘저자의 말’에서) 이지혜 기자 문채현2020.08.05
반드시 마스크 쓰고 증상 의심되면 대송주교회의, ‘미사에 참여하는 신자들이 지켜야 할 수칙’ 공지 주교회의는 3월 26일 신자들과 함께하는 공동체 미사 재개를 준비하는 전국 교구와 본당에 ‘미사에 참여하는 신자들이 지켜야 할 수칙’을 공지했다. 이 수칙은 코로나19 중앙사고수습본부와 중앙방역대책본부, 각 지방자치단체와 교구에서 발표한 코로나19 감염 예방 수칙 내용을 바탕으로 주교회의 사무처가 정리한 것이다.주교회의는 미사가 재개되더라도 코로나19 증상이 의심되면 미사에 참여하지 말라고 신자들에게 당부했다. 주교회의는 △확진 여부와 관계없이 발열, 기침, 인후통, 숨 가쁨, 감기, 기관지염, 폐렴 같은 호흡기 증상과 설사, 근육통, 피로감 등의 코로나19 감염 증상이 있는 신자 △최근 2주 이내에 해외여행력이 있는 신자 △고령자(65세 이상), 임산부, 만성질환자 등과 같이 코로나 19에 감염될 경우 건강에 위협을 받을 수 있는 신자 △면역력이 약한 어린이에 대해 미사 참여 의무를 관면했다. 주교회의는 주일 미사에 참석할 수 없는 신자들은 집에서 방송 미사와 묵주기도, 성경 봉독(말씀 전례), 선행 등으로 미사 참례 의무를 대신하도록 권고했다. 주교회의는 또 미사 참여자에게도 감염자가 확인될 경우 역학 조사에 대비해 성당 입구에 마련된 장부에 이름과 세례명, 전화번호 등을 반드시 써넣으라고 당부했다. 더불어 △모든 신자는 미사 시간 내내 마스크를 착용하고, 성체를 모시는 순간에만 마스크를 벗는다 △미사 중 회중이 함께하는 성가나 기도문 합송은 되도록 피한다 △미사 도중 기침이나 재채기를 할 때에는 마스크를 착용해도 옷소매로 입과 코를 가린다 △미사 중에 손을 잡지 않으며, 악수 등 신체 접촉을 피한다 △개별 성체 분배 때에는 ‘아멘’을 침묵 중에 각자 속으로 한다 △신자들은 양형 영성체를 하지 않는다 △성경과 성가집은 공용이 아닌 개인의 것을 사용하며, 헌금 봉투 등의 물품을 공동으로 사용하지 않는다 등의 수칙을 준수해 달라고 요청했다. 백영민 기자 heelen@cpbc.co.kr 평화신문2020.04.01
![[사도직현장에서]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cpbc.co.kr/CMS/newspaper/2020/08/rc/786036_1.0_titleImage_1.jpg)
[사도직현장에서]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김재덕 신부(대전교구 대화동본당 주임) 김재덕 신부 저에게는 하느님께서 주신 아주 특별한 선물이 있습니다. 결정적인 순간에 하느님 말씀이 생각나서, 그 말씀을 실천하게 되는 은총입니다. 하루는 본당 자매님께 전화가 왔습니다. “신부님, 저희 아버님이 곧 돌아가실 것 같은데요, 오셔서 대세 좀 주세요.” 전화를 받자마자 수녀님과 함께 병원으로 갔습니다. 대세를 받으실 형제님께서는 몸을 거의 움직이지 못할 정도로 많이 쇠약해지신 상태였습니다. “형제님, 안녕하세요? 저는 따님 본당 신부에요. 대세 받기를 원한다셔서 왔습니다. 대세를 받으려면…”이라고 말하며 천주교 4대 교리를 설명했습니다. 그리고 난 뒤 “형제님, 하느님 믿으시겠어요?”라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그 형제님께서는 눈도 못 뜨신 상태로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마세요.” 얼마나 당황했는지 모릅니다. 그래서 다시 여쭸습니다. “형제님, 대세 받으려면 하느님 믿으신다고 말씀하셔야 해요. 하느님 믿으실 거죠?” 그러자 그 형제님이 대답하셨습니다. “시답잖은 얘기 그만하세요.” 결국, 따님께 설득해달라고 부탁했지만, 끝까지 천주교 신앙을 받아들이지 않으셔서 대세를 드리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며칠 뒤, 다시 그 자매님께 “아버님께서 곧 돌아가실 것 같다며 대세를 부탁한다”는 전화가 왔습니다.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하게 되었습니다. 천주교 신앙을 명확하게 거부하셨는데, 대세를 주는 것이 망설여졌습니다. 그때 갑자기 성경 말씀이 생각났습니다. “예수님께서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중풍 병자에게 말씀하셨다. 얘야, 용기를 내어라.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마태 9,2)왜 갑자기 이 말씀이 생각이 났을까 하고 고민하던 중에,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 예수님께서도 중풍 병자를 데려간 사람들의 믿음을 보고 중풍 병자의 죄를 용서해 주셨는데, 내가 지금 왜 이러고 있지? 하느님 감사합니다! 저 지금 가겠습니다.’그리고 병원으로 달려가 의식이 없는 형제님께 대세를 주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자매님의 믿음을 보고 형제님께 대세를 줍니다.”김재덕 신부(대전교구 대화동본당 주임) 평화신문2020.08.25
![[수도 전통에 따른 렉시오 디비나] (19)능동적인 독서의 수행](//cpbc.co.kr/CMS/newspaper/2019/12/rc/769117_1.1_titleImage_1.jpg)
[수도 전통에 따른 렉시오 디비나] (19)능동적인 독서의 수행눈으로 보고, 소리 내 읽고, 귀로 듣고 허성준 신부 렉시오 디비나에 있어 귀고 2세의 문헌이 중요하지만, 그가 제시하는 첫 번째 단계인 성경 독서에 대한 것은 고대 수도승들의 전통에서 행했던 단순한 성경 독서의 수행과는 약간 거리가 있다. 한 예로 귀고는 독서를 설명하면서 라틴어 단어 ‘inspectio’를 사용했는데, 이 단어의 뜻은 관찰, 조사, 고찰을 의미한다. 귀고에게 독서란 본문을 주의 깊게 관찰하거나 혹은 조사하고, 고찰하는 것을 의미한다. 특별히 이 점은 고대 수도자들이 온 마음으로 성경을 소리 내어 읽고 암기했던 수행과는 차이가 있다. 그래서 필자는 가능하면 귀고의 4단계 전체적인 도식은 받아들이지만, 그의 견해보다는 더 원천적으로 고대 수도승 전통의 문헌들로부터 그 근거를 가져오고자 한다. 전통적으로 고대의 수도승들은 성경을 읽을 때, 오늘날과 같이 단순히 눈과 머리만 이용해서 대충 그리고 빨리 읽지 않았다. 그들은 천천히 눈으로 본 내용을 입술로 작게 소리 내어 읽고 직접 귀로 듣고 또 그것을 기억과 마음에 간직하였다. 이것은 우리의 전 존재를 활용하는 능동적인 독서의 수행이다. 사실 고대에서 의사들은 종종 환자들에게 걷고 달리는 운동과 같은 하나의 훈련으로서 독서의 처방을 내주기도 하였다. 그것은 독서가 인간의 다양한 기능을 사용하는 전인적인 운동이었기 때문이었다. 성경에도 그 옛날 독서는 오늘날과 같은 묵독이 아니었다는 증거를 볼 수 있다. 사도행전에 나오는 필리포스의 이야기는 그 하나의 예이다. 에티오피아 고관이 예루살렘에 왔다가 돌아가는 길에 마차에 앉아서 이사야 예언서를 읽고 있었다. 그때 필리포스가 가까이 다가가니, 그가 이사야서를 읽고 있는 것을 들었다고 한다.(사도 8,26-30) 즉 그 당시 독서는 소리 내어 읽고 듣는 것이었다.사막 교부들의 금언집에도 다음과 같은 예가 나온다. 어느 날 세 명의 수도승들이 한 원로를 찾아가서 저마다 자기들의 수행에 대해서 말씀드리기 시작하였다. 한 형제가 “스승님, 저는 구약과 신약을 모두 암기하였습니다!”라고 자랑스럽게 말하였다. 그러자 원로는 즉시 그에게 “어지간히 시끄러웠겠소!”라고 대답하였다고 한다. 왜냐하면, 그 당시에 말씀을 읽고 묵상한다는 것은 당연히 성경을 소리 내어 읽고 암송하는 수행이었기 때문이다.아우구스티노 성인 시대에도 일반적으로 독서는 소리 내 행하였다는 사실을 우리는 「고백록」에서 발견하게 된다. 어느 날 아우구스티노가 암브로시오 성인을 방문했을 때, 그가 책을 읽고 있었는데 혀로는 소리 내지 않고, 눈으로 책장을 젖히고, 마음으로 그 뜻을 새겨 나가는 것을 보고 무척 놀랐다고 전하고 있다. 이러한 근거는 오늘날 독서학에서도 근거로 제시되고 있다. 「베네딕도 규칙서」에서도 여름철 동안 식사 후에 형제들은 침묵 중에 휴식을 취하든지, 아니면 개인적으로 독서를 원하는 사람은 독서를 하되 남을 방해해서는 안 된다고 주의를 주고 있다.(48,4-5). 이것은 그 당시 독서를 한다는 것이 작게 소리 내어 읽고 듣는 수행이었기 때문이었다. 성경을 눈으로 보고, 본 내용을 천천히 입으로 작게 소리 내고, 소리 낸 내용을 다시 자신의 귀로 귀 기울여 듣는 전인적인 독특한 독서 수행이 바로 수도승 전통에서 전해준 훌륭한 영적 유산이다. 이것은 성경 독서 시간에 본문을 구조 분석하는 방법과는 차이가 있다.허성준 신부(성 베네딕도회 왜관수도원) 평화신문2019.12.17

인노첸시오 3세 교황, 1209년 작은 형제들 회칙 인준 [예수 그리스도와 복음의 인격 그리고 프란치스칸 영성]-6 인노첸시오 3세 교황은 1209년 작은 형제들의 수도회 회칙과 생활을 구두로 인준했다. 첫 번째 추종자들과 수도회 인준프란치스코가 포르치운쿨라에서 첫 번째 형제들을 받아들이게 된 것은 바로 몇 주 후의 일이었다. 그들 중 첫 번째 사람은 아시시의 부유한 젊은이인 퀸타발레(Quintavalle)의 베르나르도였다. 그는 프란치스코를 자기 집에 초대하여 (우연히도 그의 집은 아직 아시시에 남아 있다) 저녁 식사를 함께하였다. 밤에 프란치스코는 그 친구의 집에서 묵었는데, 베르나르도는 프란치스코가 밤새도록 기도하고 있었던 것을 알아차렸다. 그다음 날 아침 베르나르도는 과감한 결정을 내렸다. 프란치스코와 함께 그는 아시시 광장에 있는 성 니콜라오 성당으로 가서, 함께 하느님의 뜻을 찾기 위해 복음서를 들춰보았다. 세 번이나 성경을 펼쳤는데 다음의 구절들이 나왔다. “네가 완전한 사람이 되려거든, 가서 너의 재산을 팔아 가난한 사람에게 주어라. 그러면 네가 하늘에서 보물을 차지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와서 나를 따라라.” (마태 19.21); “길을 떠날 때에 아무것도 가져가지 마라.” (루카 9,3);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루카 9,23) 이 성경 말씀들은 프란치스코가 시작한 복음 운동에 있어서 삶과 회칙의 근간을 이루게 되었다. 같은 해인 1208년 4월에 두 명의 형제가 더 프란치스코와 베르나르도의 삶에 가담하였는데, 그들은 대성당 참사위원이었던 베드로 카타니(Pietro Cattani)와 에지디오(Egidio 혹은 Giles)였다. 이날은 4월 23일이었다. 그들이 합류하자마자 그들은 둘씩 짝지어 설교 여행을 떠났다. 프란치스코와 에지디오는 안코나(Ancona)의 마르키아(혹은 마르케-Marches)로 갔다.인노첸시오 3세 교황의 수도회 인준1209년 프란치스코는 형제들을 위해 간단한 회칙을 써 주었다. 이것은 주로 앞에서 인용한 복음 내용과 비슷한 복음 구절들로 구성되었다. 그는 대담히도 동료들을 데리고 로마에 가 인노첸시오 3세 교황을 만나 자신들의 생활양식을 인준해줄 것을 청하기로 결심하였다. 이것은 참으로 용감한 행동이었다. 인노첸시오 3세 교황은 그런 평신도 설교자 그룹에 대해서 의심스럽게 바라보았다. 사실 교황은 그런 사람들을 많이 보았다. 왜냐하면, 이런 그룹의 사람들 대부분은 이단적인 모습을 보였기 때문이다. 그들은 복음을 설교하였고, 제도 교회의 성직자에 대해 직접적으로 반대되는 측면에서 복음적 가치들을 살았다. 교회의 성직자들은 비윤리적으로 복음을 설교하는 것에 대해서와 추문이 될 만한 그들의 예식들에 대해서 비난하였다. 당시 많은 이단 그룹이 있었는데, 특히 프랑스 남부 지방과 이탈리아 북부 지방에 많이 있었다. 이들 중 카타리파 이단이 가장 위험한 그룹이었다. 마치 평신도가 교회의 제도에 대항하여 치솟아 오르는 것 같았다. 그러나 인노첸시오 3세 교황은 통찰력이 뛰어난 정치가였을 뿐만 아니라 교회의 머리였다. 그는 성 바오로의 요한(Giovanni Colonna de San Paolo)추기경이 데리고 온 이 거지 그룹에 대해서 많은 의구심을 품었지만, 그 후 프란치스코가 이단에 빠지지 않고 평신도들과 성직자들 사이에서 순수한 개혁을 시도하는 데 있어서 도구가 될 것이라고 판단하였다.(전통에 의하면 교황이 꿈에서 교회를 어깨로 떠받치고 있는 사람을 보았다고 하는데, 그 사람이 바로 프란치스코이다.) 그래서 인노첸시오 3세 교황은 작은 형제들의 수도회의 회칙과 생활을 구두로 인준해 주었다. 프란치스코는 자신의 형제들을 작은 형제들이라고 불렀는데, 그는 형제들이 그리스도와 사도들의 모범을 따라 진정한 형제들로서, 그리고 진정한 의미의 미천한 이들(minores)로서 살 것이라고 믿었기 때문이었다.12명의 형제로 구성된 이들은 기쁨에 넘쳐 아시시로 되돌아왔다. 그들은 오르테(Orte)에서 잠시 머문 후, 포르치운쿨라에서 약간 떨어진 리보 토르토(Rivo Torto)에 정착하였다. 이곳에서 그들은 나환우들을 돌보는 일을 하며 몇 달간 극도의 가난 속에서 살았다. 성녀 클라라의 합류와 클라라회의 시작포르치운쿨라 성당에서 있었던 또 다른 중요한 역사적 사건 하나는 1211년에 일어났다. 3월 18일에서 19일로 이어지는 밤에 클라라가 아시시의 자기 집에서 뛰쳐나와 그 도시 성문을 열어내고는 포르치운쿨라로 향하였다. 이 계획은 귀도 주교의 허락 하에, 클라라와 프란치스코 사이에서 조심스럽게 꾸며졌던 것 같다. 그날은 주님 수난 성지 주일이어서, 클라라는 대성당에서 거행되었던 그리스도의 영광스러운 예루살렘 입성 기념 미사에 참여하였다. 클라라는 모든 사람이 잠든 틈을 타, 집을 나올 계획을 실행하였던 것이다. 몇 달 동안 클라라는 프란치스코를 비밀리에 만나 자기도 이 운동에 가담하고 싶다고 말했다. 그래서 그들은 결국 그들의 계획을 실행에 옮기기로 결정하였다. 호명환 신부(작은형제회)cpbc2020.08.19

코로나19의 고통, 인류 사랑하시는 하느님의 눈빛 찾아야 할 때[특별기고] 고통에 대한 오해와 진실 / 김혜윤 수녀(미리내성모성심수녀회 총원장) 인간은 고통, 특히 약한 이들과 정의로운 이들까지 무차별적으로 덮치는 코로나19 사태와 같은 환난 속에서 ‘하느님은 왜?’라는 의문을 갖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하느님은 그 어느 때보다 강한 사랑과 연민으로 우리를 지켜보시며 함께 아파하고 계신다. 스페인 세베로 오코아병원 의료진이 바이러스에 감염돼 사망한 동료 간호사의 장례식장에서 부둥켜안고 울고 있다. 【CNS】 하느님은 왜?불과 몇 달 사이에 고통의 땅이 되어버린 지구촌 곳곳에서 절박하게 터져 나오는 탄식은 ‘왜?’라는 질문입니다. 왜 하느님은 이토록 고통스러운 상황을 허락하시는지? 면역력 약한 노약자들과 비위생적 환경에 노출될 수밖에 없는 가난한 이들이 누구보다 먼저 감염되고 죽어가는 상황을 목격하면서 도대체 이 비극을 누가 주도하고 있는지? 질문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사실, 하느님에 대한 논의 중 가장 불편한 것 중의 하나가 ‘신정’(神正, 하느님의 정의)에 대한 것입니다. 인간을 사랑한다면서, 실제적으로는 불의한 고통과 괴로움에 몰아넣고 공포와 위협으로 무기력하게 하며, 비참과 혐오에 지쳐 복종하게 하고 그렇게 모욕적이게 길들이는 듯한 하느님을 과연 ‘정의로운 분’이라고 할 수 있는가? 또 교회는 이러한 기만과 위선을 조직적으로 유지하는 장치이며, 종교는 고통으로 무감각해진 이들을 그저 버티게 하는 ‘아편’에 지나지 않는 것은 아닌지, 의구심에 휩싸이게 될 때가 종종 있기 때문입니다.하느님 탓이 아니다답부터 말씀드리자면 하느님은 정의로운 분이시고 구원자이신 분 맞습니다. 그분은 일관되게 세상과 인류를 사랑하시고, 인간 하나하나를 누구보다 잘 이해하시며 끊임없이 소통하기를 원하시는 분이십니다. 세상과 인간을 창조하시고 축복하신 분이시니 당연히 인간 친화적이고 자연 친화적일 수밖에 없는 분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사랑하는 이들에게 벌주는 것을 본성적으로 싫어하는 분이십니다. 인간의 죄로 인해 어그러진 관계를 회복하시기 위해 외아드님 예수 그리스도의 수난과 죽음까지 허락하신 분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코로나19를 통한 현재의 고통은 하느님께서 허락하신 것이 아니라 인간 스스로 자초한 재앙임을 인식할 필요가 있습니다. 야만과 착취, 신자유주의적 부조리와 계급주의적 불평등, 그로 인한 사회악이 초래한 참극입니다. 고통에 대한 교리적 이해가톨릭교회의 진리를 종합하고 있는 「가톨릭교회 교리서」는 고통으로부터 인간을 해방하는 마술 같은 처방을 내주는 매뉴얼이 아닙니다. 구원의 실체란 고통으로부터의 물리적 탈출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이 어떤 분이신지 정확히 알고 그 관계성을 사는 것임을 선포하는 것이 그리스도교 신앙의 핵심이기 때문입니다. 가톨릭교회는 다만, 고통이 인간의 피할 수 없는 실존적 조건임을 인정하고(「가톨릭교회 교리서」 164, 272, 309, 1505, 1521항 참조), 고통의 신비야말로 인간이 진정한 구원에 이르는 은총임을 강조합니다.(성 요한 바오로 2세 교황 교서 「구원에 이르는 고통」 Salvifici Doloris, 이하 SD, 1984) 그리고 동시에 하느님께서 직접 이 고통의 현실에 현존하시며 그 문제를 해결해주심을 알려줍니다.(SD 10항, 30항 등) 고통에 대한 성경적 이해성경 전체는 고통의 현장에서 부르짖으며 구원을 갈망한 이스라엘과 그들을 만나주신 하느님에 대한 신앙의 진술이며 고백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교회는 성경을 “커다란 고통에 관한 책”(SD 6항)이라고까지 규정합니다.원죄 이야기: 성경은 창세기부터 죄와 고통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원죄에 대한 신학을 제시한 창세기 3장은 죄란 ‘인간이 하느님처럼 되려 하는 것’(창세 3,5 참조), 즉 ‘인간 스스로 하느님이 되어 하느님이 더는 필요 없게 되는 것’, 그래서 ‘하느님을 망각하고 인간의 역사에서 지워버리는 것’을 의미함을 알려줍니다. 하느님을 잊어버리고 저버리며 그렇게 멀어지게 될 때 생기는 문제를 성 아우구스티노는 “하느님을 소외시킬 때 인간은 탐욕에 휩쓸리게 된다”고 간파한 바 있습니다. 신학자 폴 틸리히 역시 “하느님을 소외시킬 때 궁극에는 인간 자신이 소외된다”고 일갈하였습니다. 인간 스스로 하느님의 자리에 올라 탐욕적 본능으로 세상에 군림할 때 필연적으로 도래하게 되는 결과는 생태적 무질서와 파괴, 인간성 훼손임을 이미 신학은 예견해온 것입니다. 무엇보다 생명의 원천이신 하느님과의 단절은 생명 자체가 차단되는 상황, 즉 고통과 억압이 지배하는 죽음의 현실을 초래하고 만다는 것을 성경은 엄중히 경고합니다. 바로 이러한 비극을 원치 않으셨던 분이 하느님이시기에, 원죄 설화는 인간의 범죄에도 불구하고 아담을 보호하시고 살려두시는 모습으로 마무리됩니다.(창세 3,21; 4,1) 욥기의 신학: 성경은 고통에 대한 유다인들의 전통적 사고인 ‘신명기적 사고’를 기저에 두고 전개됩니다. 이 사상은 고통을 ‘죄로 인한 벌’로 인식하는 ‘인과율적(因果律的) 논리’라고 할 수 있는데, 이 사고로는 무죄한 이들의 고통이나 선하게 살았지만 불시에 고통을 마주하게 된 이들의 문제를 합리적으로 설명하지 못한다는 한계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결국, 신명기적 사고는 전통사상으로서의 위상을 서서히 상실해갔고 그 대안으로 제작된 책이 욥기입니다. 욥기는 불현듯 들이닥친 비극에 ‘왜?’라는 질문을 던지고, 종국에는 하느님을 만나 그 답을 찾는 내용으로 되어있습니다. ‘고통은 왜?’에 대한 답을 ‘하느님과의 올바른 관계’에서 찾은 것이고, 불현듯 다가온 고통을 하느님을 직접 만나게 되는 은총으로 이해합니다.고통의 순기능우리 앞에 던져진 모든 삶의 문제는 답을 가지고 있다고 합니다. 많은 학자가 코로나19 사태에 대한 다양한 의견을 내놓는 상황에서 거의 한목소리로 동의하는 것은 코로나19로 이제 세계사회의 거대한 구조변경이 시작되었고, 앞으로의 역사는 코로나 이전과 이후로 나뉠 것이라는 전망입니다. 이렇게 중대한 역사적 전환기에 서 있는 인류가 다시 신앙의 본질을 언급하며 구원의 길을 모색하는 이유는 그리스도교 신자들이 과학적으로 무지해서도, 종교라는 위험한 아편에 빠져있어서도 아닙니다. 고통과 죽음이 돌이킬 수 없는 인간의 실존이라면, 이제 중요한 것은 이 시간을 통한 배움이고 진정성 있는 변혁이기 때문입니다. 불확실성이 주는 공포와 불안에 휘말려 점점 더 치명적인 어둠에 지배당하지 않으려면 우리는 궁금해해야 하고 질문해야 합니다. 이 위기가 아니라면 절대 묻지 않았을 바로 그 삶의 본질을 똑똑히 배워야 합니다. 고통이 가르쳐준 진실 일반적으로 악과 고통은 상호성을 가진 것으로 알려졌지만, 고통을 악과 동일시할 수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고통이 그 어느 인간적 체험보다 굵직한 통찰과 영적 갈망을 주고, 삶의 중심을 하느님께 옮기게 하는 계기가 된다면 그것은 자체로 귀한 은총이며 선물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평범한 일상이 막히고 금지되어 갇혀버린 이 낯선 변화 속에서, 모든 문제의 원인을 하느님께 전가한 채 더욱 왜곡된 혼란에 빠지는 것보다 훨씬 더 비장하게 집중해야 할 일은, 인류를 그 어느 때보다도 강한 사랑과 연민으로 지켜보시며 아파하시고 안쓰러워하시는 하느님의 눈빛을 찾아내는 일입니다. ‘잘못’은 하느님께 있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을 ‘잘못’ 이해하고 그분의 뜻을 ‘잘못’ 해석하여 ‘잘못’ 실행한 인간에게 있음을 민감하게 포착할 필요가 있기 때문입니다. 어쩌면 우리의 미래는 이 시간을 통해 고통의 진실을 배운 자와 그렇지 못한 자로 구별되어 진행될지도 모릅니다. 고통의 밑바닥까지 내려가 지내야 했던 지난 몇 달간, 혹독하게 학습하고 단련한 통찰로 다시 겸손하게 시작하는 것, 눈물과 뭉클한 감동, 웃음과 슬픔을 체험하며 그 대가로 회복한 인간 본연의 존엄과 품격으로 주변을 보듬는 것, 그런 멋짐과 근사함을 온전히 발휘하며 사는 것, 이것이 지금 우리에게 바라시는 하느님의 뜻입니다. 이제는 정말 잊지 말고 견고하게 기억해야 하는. cpbc2020.04.16
강원도 양양 일곱 형제의 애틋한 사모곡그리운 어머니 / 양양 송전칠형제회 엮음 / 서교출판사 ‘어머니’는 모든 자녀에게 아낌없이 주는 큰 나무 같은 존재다. 어머니가 준 흘러넘치는 사랑과 돌봄, 신앙심은 자식들 가슴에 고스란히 새겨져 평생 아름드리 숲을 이룬다.1955년 열아홉에 강원도 양양댁에 시집온 이순남(데레사, 2019년 선종) 여사는 일곱 아들을 낳고, 모두 주님 안에 사랑으로 키웠다. 아무리 자식을 많이 낳던 때였다 해도 아들만 일곱을 본 ‘양양 칠 형제 집안’을 이끌었다. 먹고 살기 힘든 시절, 억척같이 시골 논밭을 일구면서도 이순남 여사는 가족과 이웃을 참사랑으로 대했다.형제들의 어머니는 걸인들을 내치는 법 없이 손에 밥 한 움큼, 뜨끈한 국물 한 사발이라도 건넸고, 교통사고로 크게 다친 긴급한 상황에서도 “다른 사람이 뭐라 해도 그 사람을 용서해주라”며 자녀들을 타이르는 사랑의 모범이었다. 고된 일과 속에도 새벽마다 묵주기도를 바치고, 이 여사의 성경 필사 완필 의욕은 손가락 관절염도 꺾지 못했다. 2019년 1월 선종하기 전까지도 성경을 손에서 놓지 않고, 주일을 지켰던 어머니 이야기를 형제들과 며느리, 손자들이 합심해 엮었다.큰 사랑과 신앙의 빚을 진 어머니를 그리며 함께했던 지난날을 회고하는 자식들의 노래다. 어려워도 자녀들의 생일이면 꼭 따뜻한 새 밥을 차려준 이야기, 집에서 양양성당까지 4㎞가 넘는 길을 걸어서 교리교육을 받으며 하느님 자녀로 거듭나 신앙을 전수한 어머니의 이야기가 펼쳐진다. 고계연(베드로, 둘째, 가톨릭언론인협의회) 회장과 고봉연(춘천교구 임당동본당 주임, 여섯째) 신부를 비롯한 자녀들의 어머니를 향한 애틋한 마음이 가슴을 따스하게 만든다.어머니의 선종 1주기를 맞아 펴낸 「그리운 어머니」는 일곱 형제 성가정 이야기이기도 하지만, 모든 위대한 어머니를 떠올리게 하는 따스한 ‘사랑의 교과서’이기도 하다. 이정훈 기자 sjunder@cpbc.co.kr 평화신문2020.03.25
[생활속의 복음] 대림 제3주일, 자선 주일 -주님의 오심을 기쁘게 기다리는 방법 사제들과 레위인들은 요한이 사제인 즈카르야의 아들임을 알고 있었는데 하느님의 놀라운 은총으로 태어난 그야말로 메시아라고 여겼던 듯합니다. 요한이 ‘메시아’로서 백성들을 ‘정화’하기 위해 세례를 베풀었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그들의 생각을 꿰뚫고 있었던 요한은 서슴지 않고 분명한 어조로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다”라고 고백합니다.그러자 그들은 ‘엘리야’냐고 묻습니다. “주님의 크고 두려운 날이 오기 전에 내가 너희에게 엘리야 예언자를 보내리라”(말라 3,23)라는 예언대로, 요한이 세상 종말이 일어나기 전에 사람들을 회개시켜 파멸에 이르지 않도록 이끄는 그 ‘엘리야’인지를 물은 것입니다. 그러나 요한은 아니라고 합니다.그러자 그들은 마지막으로 요한이 ‘그 예언자’인지를 묻습니다. “주 너희 하느님께서 너희 동족들 가운데에서 나와 같은 예언자를 일으켜 주실 것이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야 한다”(신명 18,15)라고 모세가 예언한 그 ‘대 예언자’인지를 물은 것입니다. 그러나 요한은 이번에도 아니라고 합니다.그 대신 이사야서를 인용하여 자신이 실천할 ‘소명’이 무엇인지를 설명합니다. 자신은 사람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제대로 맞이하여 구원받을 수 있도록 육체적, 정신적, 영적으로 준비시키는 역할을 하는 사람이라고 밝힌 것입니다. 그러나 요한에게 질문하던 이들은 어떤 일을 하기 위해서는 그 일을 해도 되는 ‘자격’을 먼저 갖추어야 한다고 생각했기에 하느님의 뜻을 열심히 따르는 행동 안에서 자신이 하느님께 받은 자격, 즉 ‘소명’이 드러난다고 여기는 요한의 사고방식을 납득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요한이 ‘성경에 기록되어’ 합당한 자격을 갖춘 예언자도 아니면서 왜 제멋대로 사람들에게 ‘세례’를 주느냐고 따지나, 요한은 자신이 세례를 베푸는 이유에 대해 이렇게 설명합니다.“너희 가운데에는 너희가 모르는 분이 서 계신다.”(요한 1,26)우리 곁에 ‘메시아’가 이미 오셔서 ‘우리가 모르는 모습으로’ 계시는데 우리 눈이 어두워 그분을 알아보지 못하고 있기에, 우리가 죄의 ‘어둠’에서 벗어나 ‘빛’으로 오시는 그리스도를 알아보도록 이끌어주려 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께서 비춰주시는 ‘진리의 빛’을 받아들이고, 주님께서 나를 구원하시리라는 희망을 간직한 채 살아가면, 어려움과 고통이 닥치더라도 ‘언제나 기뻐하고 끊임없이 기도하며 모든 일에 감사하는’ 자세로 살 수 있게 됩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그렇게 살기를 바라시기에 당신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이 세상에 보내주신 것이지요.호주의 젊은 시인 에린 핸슨이 쓴 ‘아닌 것’이라는 제목의 시가 있습니다. “당신의 나이는 당신이 아니다 당신이 입는 옷의 크기도 / 몸무게나 / 머리 색깔도 당신이 아니다 당신의 이름도 / 두 뺨의 보조개도 당신이 아니다 당신은 당신이 읽은 모든 책이고 / 당신이 하는 모든 말이다… 당신은 당신이 믿는 것들이고 / 당신이 사랑하는 사람들이며 당신 방에 걸린 사진들이고 / 당신이 꿈꾸는 미래이다 당신은 많은 아름다운 것들로 이루어져 있지만 / 당신이 잊은 것 같다 당신 아닌 그 모든 것들로 / 자신을 정의하기로 결정하는 순간에는”‘하느님의 자녀’이며 ‘그리스도인’임을 결정하는 요소는 재산이나 사회적 지위가 아닙니다. 하느님을 닮은 그분의 ‘모상’으로 창조된 우리가 세속적이고 물질적인 것들로 자신을 정의하려고 하면, 하느님께서 내 안에 심어주신 고유한 아름다움을, 내가 추구해야 할 고귀한 삶을 잃고 맙니다. 요한 세례자처럼, 하느님께서 나에게 맡기신 고유한 소명을 깨닫고 실천함으로써 내가 하느님께 사랑받는 자녀이며,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충실히 실천하는 그분의 제자임이 드러날 것입니다. 그것이 주님의 ‘다시 오심’을 기쁘게 기다리는 방법입니다.함승수 신부(서울대교구 수색본당 부주임) 평화신문2020.12.08

한국의 첫 영세자 이승훈, 천당지옥설·위천주론 내세워 배교 선언 [정민 교수의 한국 교회사 숨은 이야기] 55. 이승훈의 「벽이문(闢異文)」과 「유혹문((?惑文)」 정약종의 「주교요지」 하권 첫면에 실린 천지창조 관련 항목에 나오는 ‘누지불이’ 대목. 「벽이문」과 천당지옥설이승훈은 교회사에서 늘 뜨거운 감자였다. 그는 평생 배교 행동을 반복했고, 이를 확인하는 「벽이문(闢異文)」과 「벽이시(闢異詩)」, 그리고 「유혹문((?惑文)」을 남겼다. 이 글의 진의를 두고도 당시부터 많은 논란이 있었다. 이글에서는 이승훈의 「벽이문」과 「유혹문」에 대해 살펴보겠다.이승훈은 1785년 3월, 을사추조 적발 직후 배교를 선언하면서 전향서인 「벽이문」과 「벽이시」를 지었다고 1791년 11월 8일 의금부 공초에서 밝힌 바 있다. 이승훈의 공초 기록은 「조선왕조실록」 해당 일자 기사에 나온다. 공초에는 당시 진산 사건 직후 홍낙안이 북경에서 서학책을 사온 일과 교리서를 간행한 일, 그리고 반회 모임 등 세 가지 죄목을 걸어 이승훈을 저격하자, 이승훈이 조목별로 해명한 내용을 담고 있다. 세 가지 죄목에 대해 하나하나 해명한 뒤, 이승훈은 자신의 배교가 확정적임을 강조하기 위해, 을사추조 적발 당시 형조판서 김화진에게 올렸다는 「벽이문(闢異文)」의 일부 내용을 인용하여 소개했다. 이승훈은 「벽이문」의 전문을 평택 임소에 두고 와서 전체 글을 기억하지 못한다면서 글 속의 세 문장만을 발췌했다. 해당 구절은 다음과 같다. “천하의 학술은 삿되고 바름을 떠나 이로움과 해로움이 있은 뒤라야 사람들이 반드시 마음을 기울인다. 앞서 서학에서 천당과 지옥의 주장을 없게 했더라면 사람들이 이것 보기를 어찌 패관잡설보다 아래로 보지 않았겠는가?” “서양에서 온 학문은 반드시 천당과 지옥을 위주로 삼아 천하의 억만 생령(生靈)을 속인다.” “서학에는 가짜 천주[僞天主]가 횡행한다는 주장이 있다. 요망하고 허탄하며 망녕되기가 이와 같은 것이 없다. 이미 하늘이라고 말해놓고 가짜가 있다 함은 어찌된 것인가? 내가 반드시 그 주장을 가지고 그 주장을 깨뜨려 보겠다.”그 내용은 천주교의 천당지옥설과 가짜 천주가 횡행한다는 위천주론의 주장에 관한 비판으로 요약된다. 처음 두 문장에서는 사학(邪學)에 사람들의 마음이 쏠린 이유를 천당과 지옥에 대한 주장으로 그들을 현혹시켰기 때문이라고 했다. 이승훈은 글에서 천주교가 천당지옥설로 혹세무민한다며 그 주장의 허망함을 설파하려 했던 듯하다. 천주교의 이단성이 바로 천당지옥설에 있고, 이것이 불교에서 말하는 천당지옥의 주장과 다를 바 없다는 식의 논리를 펼쳤을 것으로 추정된다. 사실 서학의 천당지옥설은 전래 이래 중국에서 천주교를 불교의 아류로 보아 배척하게 만든 중요한 근거였다. 「칠극」의 제7장에서 천당지옥설에 대한 논의를 자세히 변증하여 불교와의 차별성을 부각시킨 것도 사실은 이 때문이다. 위천주의 실체세 번째 문장에 나오는 위천주(僞天主), 즉 가짜 천주가 횡행한다는 주장도 논란거리다. 위천주는 구체적으로 누구를 가리키나? 이승훈의 위 언술만 보면 진짜 천주와 가짜 천주가 있고, 세상에 가짜가 횡행하니 현혹되면 안 된다는 서학의 교리 주장이 이치상 모순된다는 비판을 담고 있다. 「벽이문」에서 이승훈은 이 가짜 천주에 대한 서학의 허황된 주장을 서학의 논리로 격파한 내용을 담았다고 말했다. 위천주란 용어는 안정복의 「천학문답」 30번째 문답에 그대로 나온다. 근래에 어떤 상사생(上舍生)이 공자에게 올리는 석전(釋奠)에 참석하려 하자, 천주학을 하는 그의 벗이 이를 말리면서, 형상을 꾸며놓고 제사를 올리면 마귀가 와서 먹지 공자의 귀신이 와서 흠향하지 않는다며, 조상에게 제사 지내는 것도 마찬가지라고 한 말을 인용했다. 안정복의 글 속에 나오는 천주학을 하는 벗은 홍낙안이 다른 글에서 쓴 것처럼 이승훈을 특정한 것이 분명하다. 안정복은 서학에서 천주상을 걸어놓고 예배 드리는 것은 형상을 본뜬 것으로 일종의 마귀라 하면서, “마귀의 변환을 헤아릴 수 없는 것이 또한 선을 꾸며 세상을 미혹시켜 낮은 백성을 어리석게 만듦이 있다. 서사(西士)가 여기에 미혹되어 높이 떠받드니 어찌 가소롭지 않겠는가? 그들의 주장을 들어보면, 거짓 천주가 있다고 한다. 이 또한 마귀의 장난이다. 가짜로 거짓 천주라 일컫는다면, 가짜 형상에 기대어 부칠 수 없는 것이 아닌가?”라고 비판했다. 그럼에도 위천주에 대한 언급이 워낙 짧아 위천주의 실체는 여전히 모호하다. 위천주는 적(敵) 그리스도(Antichrist)인가? 아니면 성경에 나오는 타락한 천사장 루시퍼나 악마의 우두머리 베엘제불인가? 이승훈이 1785년 당시의 수준에서 위천주에 대한 논의를 펼쳤다면 그것은 당시 기본 서학서의 범위를 벗어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런 점에서 마태오 리치의 「천주실의」 중 [4.7]에 나오는 다음 단락이 주목된다. “예전 천주께서 천지를 만드실 때에 여러 신의 무리를 만드셨는데, 그 가운데 하나의 큰 신이 있어 이름을 노제불아(輅齊拂兒), 즉 루시퍼(Lucifer)라 하였다. 자기가 이처럼 영명한 것을 보고는 문득 오만해져서 이렇게 말했다. ‘내가 천주와 더불어 동등하다고 말할 만하다.’ 천주께서 노하시어 그를 따르는 수만의 신과 나란히 변화시켜 마귀가 되게 하고, 내려보내 지옥에 두었다. 이로부터 천지의 사이에 처음으로 마귀와 지옥이 있게 되었다.”이 루시퍼의 이야기가 정약종의 「주교요지」 하편 1장에는 ‘누지불이’로, 명도회장을 지낸 김기호 요한이 1879년에 쓴 「구령요의(救靈要義)」에는 ‘누지뿌리’란 이름으로 똑같이 나온다. 루시퍼는 9품 천신 중 상품 천신이었다가 스스로 천주와 동등하다고 여기는 교만으로 인해 지옥에 떨어져 마귀 집단의 리더가 되어, 독살 많은 배암의 형상으로 나타난다고 했다. 이승훈이 위천주의 개념을 천당지옥설과 묶어서 말했으니, 위천주란 바로 이 루시퍼처럼 천주의 권능을 참칭한 마귀를 가리킨 것으로 본다. 또 마태오복음 24장 5절과 루카복음 21장 8절 등에 말세의 징조로 “장차 많은 사람이 내 이름을 내세우며 나타나서 ‘내가 그리스도다!’ 하고 떠들어대면서 수많은 사람들을 속일 것이다”라고 한 대목이 있는데, 이 거짓 그리스도는 예수를 믿는다고 하는 자 중에서 스스로 그리스도의 자리에 올라있는 자를 가리킨다. 테살로니카 신자들에게 보낸 둘째 서간 2장 4절에도 “하느님의 성전에 자리 잡고 앉아서 자기 자신을 하느님이라고 주장”하는 가짜 악의 세력에 관한 이야기가 나온다. 이 또한 위천주와 관련이 있어 보인다. 하지만 이에 대한 깊은 논의는 신학의 영역에 속하는 문제여서 필자가 다룰 수 있는 범위를 넘어선다. 한편 척사파의 선두에 섰던 홍낙안은 「노암집(魯巖集)」 제4책에 실린, 1791년 11월 11일에 쓴 「이승훈의 무고로 인해 변명하여 진술한 상소(因李承薰誣供陳卞疏)」에서 이승훈의 「벽이문」이 당시 아비와 아우가 부르는 대로 받아적은 글이라 진정성이 전혀 없다고 잘라 말했다. 더 나아가 “글 가운데서 천당과 지옥을 배척한 것은 과연 불교의 천당과 지옥이 아니었던가? 이른바 위천주란 것은 혹 저들의 학문 중에서 배척하는 마귀가 아니었던가? 이것을 고집하여 주장한다면 그가 말하는 진짜 천주와 진짜 천당지옥은 진실로 그대로 있는 셈이다. 어찌 더욱 흉악하고 교활하지 않은가?”라고까지 말했다. 어쨌거나 홍낙안 또한 위천주를 마귀로 본 것은 같다. 또 하나의 배교 선언 「유혹문」1785년에 썼다고 한 「벽이문」 이후, 1795년에도 이승훈은 서학이 이단임을 밝히는 또 한편의 배교문인 「유혹문((?惑文)」을 지었다. 유혹이란 미혹됨을 깨우친다는 뜻이다. 「유혹문」에 관한 내용은 신유박해 당시 「추안급국안」 1801년 2월 10일 자 기록에 한번 나온다. “을묘년(1795)에 예산에서 귀양살이할 때 사학 중 지극히 요사스럽고 참혹한 말을 세 단락으로 나눠서 쪼개고 격파하여 「유혹문」을 지었습니다. 그 글 가운데 하늘이 사람이 되어 내려왔다는 말은 지극히 요망하고 너무도 허탄하니, 어찌 빠져 미혹될 이치이겠습니까? 조금 문자를 아는 자는 역상(曆象)의 방법이 교묘함을 가지고 미혹되었고, 어리석은 부류는 천당지옥설로 미혹되었으므로, 이를 쪼개어 부수려는 뜻으로 수천백 언의 글을 지었던 것입니다.”이 진술에 따르면 「유혹문」은 천주교 교리를 세 부분으로 나누어 허구성을 밝힌 글이었다. 그중 하나가 예수 강생(降生)의 신비에 관한 부분이었다. 이는 대단히 요망한 논리인데도 식자층은 그네들의 역상(曆象) 즉 역법과 천문학에 대한 지식 때문에 빠져들었고, 일반 백성들은 천당지옥설에 이끌려 현혹되었으므로, 자신이 수천 마디의 글로 이를 논파하려 했다는 것이다. 이승훈의 「유혹문」이 앞선 「벽이문」의 골격을 바탕으로 더 자세히 부연하여 서학을 배격한 장문의 논설이었음을 보여준다. 이승훈은 최초의 영세자였지만, 1785년 을사추조 적발 직후 배교를 선언하며 「벽이문」과 「벽이시」를 지었고, 두 해 뒤인 1787년의 정미반회 사건과 1791년 평택 현감 당시 공자 사당에 배례를 거부한 일로 다시 논란의 중심에 섰다. 그러다 1795년 주문모 실포 사건 직후 예산에 귀양 가서는 또다시 전향서인 「유혹문」을 써서 배교의 최전선에 섰다. 그가 쓴 「벽이시」에 대해서는 다음 회에 따로 쓰겠다. 정민 베르나르도(한양대 국문학 교수)cpbc2021.06.09
![[생활속의 복음] 연중 제32주일, 평신도 주일 - 평신도, 파견되는 사도들](//cpbc.co.kr/CMS/newspaper/2020/11/rc/790327_1.0_titleImage_1.jpg)
[생활속의 복음] 연중 제32주일, 평신도 주일 - 평신도, 파견되는 사도들 임상만 신부 오늘은 평신도 주일이다. 그리스어로 ‘하기오스’, ‘크리스티아노스’라는 말에 어원을 두고 있는 평신도라는 말은 ‘거룩한 백성’, ‘하느님께 경건하게 예배드리는 자들’이라는 뜻으로 사용되고 있다. 신약 성경에서는 ‘하느님의 사랑과 구원을 받은 신자’(로마 1,7), ‘아버지 하느님께 복받을 사람들’(마태 25,34), ‘예수님께 속한 사람들’(로마 1,6) 등 신앙 안에서 이미 복을 받은 사람들을 지칭하고 있다. 그러나 수많은 평신도에 대한 정의 가운데 진정한 의미 하나를 선택한다면, “언제나 기뻐하고, 끊임없이 기도하고, 모든 일에 감사하는”(1테살 5,6-8) 모습으로 일상을 살아가는 사람들이라고 할 수 있다. 평신도들은 대체로 주일에 성당에 모여 미사를 봉헌하고 흩어져 한 주간을 세상 속에서 사회인으로서 열심히 살아가는 사람들이다. 그러나 올바른 평신도의 삶은 교회 안에서뿐만 아니라 미사가 끝나고 서로 흩어진 후에 각자의 생활 현장에서 그리스도인으로서 주어진 사명의 열매를 맺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초대 교회의 모습은 평신도들이 각자 신앙의 공동체에서 흩어진 후에 자신의 생활터전에서 수행하는 사명이 무엇인지를 명확하게 보여주고 있다. “한편 흩어진 사람들은 이곳저곳 돌아다니며 말씀을 전하였다. 필리포스는 사마리아의 고을로 내려가 그곳 사람들에게 그리스도를 선포하였다. 군중은 필리포스의 말을 듣고 또 그가 일으키는 표징들을 보고, 모두 한마음으로 그가 하는 말에 귀를 기울였다.”(사도 8,4-6)하느님께서 주일마다 평신도들을 당신 교회로 모으시는 것은 그들이 함께 모여 미사와 전례만을 행하기 위함만이 아니라 그곳에서 평신도들의 사명을 재확인하고 다시 세상으로 흩어지는, 아니 ‘파견’되는 주님의 사도가 되도록 이끌어 주시는 섭리라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오늘의 평신도들은 주님의 신비체인 교회에서 지체로서 공적 예배와 신앙 고백을 통해 신앙의 성장과 더불어 그것을 발판으로 하여 세상에 나아가 많은 영혼을 그리스도께로 인도해야 할 책임을 주님으로부터 부여받은 사명자들인 것이다. 바오로 사도는 교회를 ‘그리스도의 몸’이라고 하였다(에페 1,23). 이 말은 모든 신자가 그리스도 신비체인 교회의 지체로서 다 중요하며 각자가 고유한 기능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 말씀은 ‘평신도’이기에 교회의 모든 일을 성직자들에게 맡기고 자신들은 어떠한 책임을 지지 않아도 되는 비조직적 구성원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런 까닭에 신학자 칼 라너 신부는 교회론을 통하여 평신도라는 말이 교회에서 사라져야 교회가 정상화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이는 평신도라는 말이 하느님 말씀을 실천하고 전파해야 하는 모든 책임을 사목자에게 전가시키고 자신들은 이 책임을 회피하는 용어로 오해될 수 있기 때문이다.예수님께서는 오늘 복음을 통하여 하늘나라에 들어가기 위한 방법을 비유로 알려주셨다. 등과 기름을 “준비하고 있던 처녀들은 신랑과 함께 혼인 잔치에 들어가고, 문은 닫혔다”(마태 25,10ㄴ)는 말씀이다. 등을 가지고 있는 것만으로 안심한 어리석은 처녀들은 결국 잔치에 들어가지 못한 것이다. 우리도 평신도 사도로서의 복음적 삶과 선포를 통하여 등에 기름을 채우고 잔치에 들어가도록 해야 하겠다.“나에게 ‘주님, 주님!’ 한다고 모두 하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이라야 들어간다.” (마태 7,21)임상만 신부(서울대교구 상도동본당 주임) 평화신문2020.11.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