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거짓 교사와 불경자 경계하고 거룩한 사람이 돼라[리길재 기자의 성경에 빠지다] (92) 베드로의 둘째 서간 베드로의 둘째 서간은 그리스도인들에게 거짓 교사와 불경한 자들을 경고하고 거룩한 사람이 되라는 부르심을 받은 대로 주님의 재림 날까지 흠 없이 깨끗하게 살라고 권고하고 있다. 엘 그레코, ‘베드로 사도의 눈물’, 1580, 톨레도 대성당, 스페인. 베드로의 둘째 서간(이하 베드로 2서)의 가장 중요한 자료는 ‘유다 서간’(이하 유다서)입니다. 특히 2장 1절에서 3장 3절까지의 내용은 유다서를 중점적으로 이용한 내용입니다. 하지만 베드로 2서는 원본문인 유다서에 매여 있지 않고 내용상 독자적인 강조점을 지니고 있습니다. 그 예로 베드로 2서는 주님의 재림이 지체되는 것과 관련해 제기되는 이의를 부각하지만, 유다서에서는 이 문제 자체가 언급되지 않고 있습니다. “이러한 여러 표지는 베드로 2서가 유다교 전통에 깊이 뿌리를 내리고 있으면서도 유다서보다 후대의 집단에서 유래한다는 사실을 보여줍니다. (⋯) 그래서 이 서간은 유다서에서 나타나는 배타적 경향과 바오로계 서간에서 볼 수 있는 개방적 경향을 조화시키려는 사목적 노력의 결과로, 곧 초대 교회의 여러 성향을 종합하려고 애쓴 데에서 유래하는 것으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주석 성경」 931~932쪽) 베드로 2서는 글쓴이가 주님의 거룩한 변모 때에 그 곁에 있었던(1,16) 시몬 베드로 사도라고 밝힙니다.(1,1) 그러면서 자기 죽음이 가까웠다(1,14)면서 유언 형식으로 이 서간을 쓴다는 것을 간접적으로 알립니다. 하지만 베드로 2서에는 누구에게 이 서간을 보내는지 명확하게 나오지 않습니다. 베드로의 첫째 서간(이하 베드로 1서) 수신자와 같다면 소아시아 5개 교회에 보낸 편지였을 것이고, 그렇지 않다면 모든 그리스도인에게 전한 글일 수도 있습니다. 문제는 베드로 2서는 베드로 1서와 문체가 너무 다르다는 것입니다. 두 서간에서 같은 낱말은 100개뿐이지만, 다른 낱말은 599개나 됩니다. 또 주님의 재림에 관한 내용도 차이를 보입니다. 이는 두 서간이 꽤 긴 시차를 두고 쓰였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 증거로 베드로 2서는 교회의 첫 세대가 이미 세상을 떠났다고 밝히고 있습니다.(3,4) 이는 베드로 2서를 쓴 이가 그 세대에 속하지 않음을 알려주고 있습니다. 그리고 베드로 2서가 유다 서간을 인용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그보다 훨씬 후대에 쓰인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무엇보다 베드로 2서는 성경 경전을 언급하고 있습니다. 다른 사도들이나 예언자들을 글과 마찬가지로 바오로 사도의 서간들이 이미 신자들에게 성경으로 읽히고 있다는 것입니다.(3,15-16) 이런 이유로 성경학자들은 베드로 2서가 125년께 헬레니즘 세계의 디아스포라에 살던 유다계 그리스도인에 의해 쓰였을 것으로 추정합니다. 그리고 교회 역사가 에우세비우스에 따르면 베드로 2서는 이집트 알렉산드리아 교회에서 가장 먼저 성경으로 받아들여졌다고 합니다. 헬라어 신약 성경은 ‘Πετρου Β(페트로 베타)’, 라틴어 대중 성경 「불가타」는 ‘Petri Ⅱ’, 한국 천주교 주교회의가 펴낸 우리말 「성경」은 ‘베드로의 둘째 서간’으로 표기합니다. 베드로 2서는 모두 3장으로 구성돼 있습니다. 베드로 2서는 그리스도인의 소명을 말합니다. 그리스도인은 하느님의 본성에 참여하는 생활을 하면서(1,4) 거룩한 사람이 되라는 부르심을 받은 이입니다. 이 삶은 사도들의 증언과 성령의 감도를 받은 말씀에 바탕을 둡니다.(1,21) 그리고 그리스도인은 주님의 재림을 깨어 기다리는 사람들입니다.(3,14-18) 베드로 2서는 ‘거짓 교사들’을 경고합니다. 그들은 문란한 교리와 생활을 조장하고 퍼뜨리는 자들입니다.(2,1-22) 그들은 이단자들로 구약의 타락한 천사들, 소돔과 고모라의 주민들처럼 벌을 면치 못할 것입니다. 더불어 베드로 2서는 ‘불경한 자들’을 단죄합니다.(2,1) 이들은 그리스도교로 개종했다가 그리스도교 신앙을 부정하게 된 자들입니다. 그리고 거짓 자유를 퍼뜨려 신앙 공동체를 타락시키려고 하는 자들입니다.(2,19) 이들은 두 가지 이단에 빠진 자들입니다. 첫째, 자기들을 구원해 주신 주님을 부정하고 천사들을 멸시하기 때문에 ‘신학적 이단자들’입니다.(2,10-11) 둘째, 방탕한 생활을 하면서 끊임없이 죄를 저지르기 때문에 ‘도덕적 이단자들’입니다.(2,14) 성경학자들은 베드로 2서가 이단자로 단죄하는 ‘거짓 교사’와 ‘불경한 자’가 바로 ‘영지주의자들’이라고 주장합니다. 이들은 자신들이 뛰어난 지식과 완전한 자유를 천부적으로 타고났다고 자부하면서 육체를 멸시하고 방탕한 생활을 했기 때문입니다. 베드로 2서는 주님의 재림이 왜 늦어지는지 과감하게 제기합니다. “그분의 재림에 관한 약속은 어떻게 되었소? 사실 조상들이 세상을 떠나고 나서도, 창조 이래 모든 것이 그대로 있지 않소?”라고 묻습니다.(3,4) 베드로 2서는 이러한 신앙의 결핍을 단호히 단죄하고 구약 노아 시대의 홍수가 앞으로 닥쳐올 마지막 심판의 예형이라고 설명합니다.(3,6) 그러면서 지금의 세상은 불로 파멸되고 그 자리에 ‘의로움이 깃든 새 하늘과 새 땅’이 들어서게 될 것이라 합니다.(3,10-15) 그리고 무엇보다 주님께 시간 개념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주님께는 하루가 천 년 같고 천 년이 하루 같습니다”라고 합니다.(3,8) 그래서 주님의 재림이 지체된다고들 하지만 그것은 그분의 사랑에서 오는 인내 때문이라고 설명합니다. 주님께서는 모든 이가 회개할 시간을 주고 싶어 하십니다. 그러므로 이제부터 종말이 오기까지 모두 거룩하게 살아야 한다고 강조합니다. 리길재 선임 기자 teotokos@cpbc.co.kr 리길재 선임2024.10.08

강추위를 견뎌낸 화초 앞에서[월간 꿈CUM] 꿈CUM 수필 바야흐로 완연한 봄입니다. 작년 겨울은 정말 길고 추웠습니다. 근래에 보기 드물게 1월 한 달 내내 영하 10도 안팎의 한파가 계속되었으니까요. 폭설로 인한 피해는 또 어땠습니까. 당사자들의 아픔을 뉴스로 바라보고만 있는 것도 미안할 정도였지요. 그토록 엄청난 추위가 어느 순간 확 풀려 움츠렸던 어깨를 활짝 펴게 해 줍니다. 저는 계절의 변화에서 유난히 하느님의 권능을 느끼곤 합니다. 인간이 만든 대형 히터를 수천수만 대 돌린다 해도 어찌 이토록 단번에 온도를 높일 수 있겠습니까. 저는 작년 겨울, 은근히 고집을 부려본 게 있습니다. 베란다의 화초를 거실로 들여 놓느냐, 그냥 두느냐, 하는 문제였는데 결국은 그냥 두었습니다. 덩치 큰 화분들이 힘에 부쳐 엄두가 나지 않았던 이유도 있고, 내일은 조금 풀릴 거야, 내일은, 내일은, 하고 기대하면서 세월을 보낸 것입니다. 정확히 말하면 게으름을 부렸던 것이지요. 그래도 한 오라기 연민은 있었던지, 화분을 창 쪽에서 거실 쪽으로 조금 끌어주고, 신문지로 몸통을 둘러주기도 하면서, 제발 우리의 전통적인 날씨 삼한사온이 회생되기를 기대해 보았던 것입니다. 그리고 또 하나 마음 쓴 것이 있지요. 일주일에 한 번씩 흠뻑 주던 물을, 화분이 얼까봐 햇빛 좋은 대낮으로만 한 모금씩 주면서 겨울을 난 것입니다. 그러다가 입춘 절기를 맞았습니다. 저는 궁금하기 짝이 없었지요. 저것들이 죽었을까, 살았을까…. 자꾸만 베란다로 나가 살펴보는데, 군자란은 워낙 강해서 진초록 잎이 끄떡없는 것 같고, 문주란은 시원찮아 보였습니다. 너부죽한 연초록 잎이 축 늘어져 아무래도 얼어버린 것 같았습니다. 저는 아침마다 거실 문을 빵긋 열고 그것들을 바라보며 혼자 중얼거리곤 했지요. ‘어떡하지? 30년도 넘게 길러온 저것이 죽게 된다면? 그건 순전히 나의 잘못인데, 미안해서 어쩌지?’ 마침내 3월이 왔습니다. 햇살 좋아 쾌적한 어느 날, 모처럼 베란다 청소를 하러 나갔다가 저는 깜짝 놀랐습니다. 아니, 이럴 수가! 춘란 화분에 하얀 꽃이 납작 피어 있는 것입니다. 몇 해 전, 고향 선산에서 몇 그루 캐어다 심은 것인데, 그동안 꽃도 보여주지 않아 거의 팽개쳐 둔 것 중 하나가 꽃을 피운 것입니다. 그뿐이 아닙니다. 덩치 큰 동양란 화분에도 꽃대가 죽죽 두 개나 올라와 있었습니다. 와, 와, 고마워라…. 저는 너무 미안하고 고마워서 청소하려던 것도 잊은 채 꽃들과 눈 맞추고 한참을 쪼그리고 앉아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행여나 하고 문주란 화분들도 살펴보았습니다. 다음 순간, 저는 쾌재를 불렀습니다. 어느새 속에서 또르르 말린 새잎들이 쏘옥 올라와 있었습니다. 아, 그 강추위를 견디며 살아 있었던 것입니다. 갑자기 하느님 생각이 났습니다. 하찮은 식물도 생명이기에 제 마음이 이렇게 쓰이는데, 하느님께선 자신의 자녀인 우리에게 얼마나 마음을 쓰이실까.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귀염둥이, 너는 나의 사랑이다’라고 말씀하시며 연민 그득한 눈으로 한 사람 한 사람을 소중하게 바라보시는 하느님. 그분이야말로 오죽이나 우리를 잘 보살펴 주실까요. 성경 말씀이 또렷이 들려왔습니다. “그분께서 당신 천사들에게 명령하시어 네 모든 길에서 너를 지키게 하시리라. 행여 네 발이 돌에 차일세라 그들이 손으로 너를 받쳐 주리라.”(시편 91,11-12) 이어서 또 하나의 생각에 머물렀습니다. 좁은 화분의 공간을 온 우주로 여기며, 악조건 속에서도 있는 힘을 다해 꽃을 피워내고 잎을 피워낸 화초들. 그 수고와 열정에 고개가 숙여졌습니다. 지금은 사순시기입니다. 지난겨울 폭설로, 구제역으로, 그 밖에도 제가 감히 상상할 수도 없는 어려움을 당해, 홀로 광야를 거닐며 고독을 견뎌내고 있는 모든 이웃들! 주님, 그들이 주님 보살핌 안에서 힘차게 다시 일어설 수 있도록 힘과 용기를 주소서. 글 _ 안 영 (실비아, 소설가, 수원교구 분당성요한본당) 1940년 전남 광양시 진월면에서 출생했다. 1965년 「현대문학」을 통해 등단했으며, 장편소설 「영원한 달빛, 신사임당」 「만남, 그 신비」, 소설집 「가을, 그리고 山寺」 「가슴에 묻은 한마디」 「비밀은 외출하고 싶다」, 수필집 「아름다운 귀향」 「나의 기쁨, 나의 희망」 「나의 문학, 나의 신앙」, 시집 「한 송이 풀꽃으로」, 동화 「배꽃마을에서 온 송이」 등을 펴냈다. 2023년 9월, 장편소설 「만남, 그 신비」로 ‘황순원 문학상 작가상’을 수상했다. 한국소설가협회, 한국여성문학인회, 가톨릭문인협회 회원이다.cpbc2026.05.07

주님께 희망 두고 형제적 사랑 실천 당부[리길재 기자의 성경에 빠지다] (91) 베드로의 첫째 서간 베드로의 첫째 서간은 세상 안에서 여러 박해를 겪는 그리스도인들에게 구원자이신 주님께 희망을 걸고 형제적 사랑을 실천하며 살아갈 것을 권고하고 있다. 루벤스, 성 베드로 사도, 1610~1612, 프라도 미술관, 마드리드, 스페인. 베드로의 첫째 서간(이하 베드로 1서)은 소아시아에 있는 로마의 5개 속주, 곧 북부 흑해 변의 폰토스·중부 지방의 갈라티아·동부의 카파도키아·서부의 아시아·북부 폰토스의 서쪽 지방 비티니아에 흩어져 나그네 살이를 하는 ‘선택된 이들’에게 보낸 편지입니다. ‘흩어져’라는 말은 헬라어로 ‘διασποραs(디아스포라)’라 하는데 이 단어는 ‘팔레스티나 땅 밖에 사는 유다인’을 가리킵니다. 이처럼 베드로 1서는 얼른 보면 디아스포라 유다계 그리스도인에게 보낸 서간이라 생각할 수 있지만 “이방인과 나그네로 사는 여러분”(2,11)이란 말에 주목하면 비유다계 그리스도인도 포함돼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따라서 베드로 1서는 소아시아 지역 그리스도인 공동체 곧 유다계와 이방계 그리스도인 모두에게 보낸 사목 서간이라 하겠습니다. 그래서 성경학자들은 베드로 1서를 ‘가톨릭 서간’으로 분류합니다. 베드로 1서는 글쓴이가 교회 원로이며 그리스도께서 겪으신 고난의 증인(5,1)인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 베드로(1,1)라고 밝힙니다. 그러면서 실바누스가 이 서간을 받아썼고, 마르코가 곁에 있었다고 합니다.(5,12-13) 베드로의 둘째 서간도 이 사실을 증언합니다.(2베드 3,1) 하지만 다수의 성경학자는 이 서간의 저자가 베드로 사도일 수 없다고 주장합니다. 그 이유로 첫째, 베드로 사도는 이스라엘 갈릴래아 베싸이다 출신 어부로 아람어를 사용했기에 헬라어에 능통하지 않다는 점. 둘째, 이 서간을 소아시아에 있는 로마의 5개 속주에 흩어져 사는 그리스도인에게 보냈는데 베드로 사도가 이 지역에서 복음을 선포했을 가능성이 낮다는 점을 듭니다. 그러나 이러한 추정을 그대로 수용할 만한 이유도 딱히 부족합니다. 베드로 사도가 헬라어를 모국어로 하는 실바누스에게 받아쓰게 했고, 예수님과 사도 시대 당시 갈릴래아 지방에서도 헬라어가 통용됐기에 베드로 사도가 전혀 헬라어를 하지 못했다고 단정할 순 없기 때문입니다. 아울러 베드로 1서에 나오는 소아시아 5개 교회는 바오로 사도의 협력자들이 세운 신앙 공동체이긴 합니다만 베드로 사도가 소아시아에 복음을 선포하지 않았다는 어떠한 증거도 없습니다. 베드로 사도가 이 서간을 쓰지 않았다고 결정적으로 제시하는 논거는 베드로 1서에 글쓴이가 예수님께서 공생활을 하실 때 직접 그분과 함께 생활했다는 사실이 조금도 드러나지 않고 있다는 점입니다. 베드로 1서가 예수 그리스도의 수난과 죽음을 서술할 뿐 ‘하느님 나라’나 ‘사람의 아들’처럼 예수님의 핵심 가르침을 언급조차 하지 않는다는 것이죠. 하지만 “여러분은 그리스도를 본 일이 없지만, 그분을 믿기에, 이루 말할 수 없는 영광스러운 기쁨 속에서 즐거워하고 있습니다”(1,8)는 요한 복음서 20장 29절을, “갓난아이처럼 영적이고 순수한 젖을 갈망하십시오. 그러면 그것으로 자라나 구원을 얻을 것입니다”(2,2)는 한 마르코 복음서 10장 15절을, “이교인들 가운데에 살면서 바르게 처신하십시오. 그래야 악을 저지르는 자들이라고 여러분을 중상하는 그들도 여러분의 착한 행실을 지켜보고, 하느님께서 찾아오시는 날에 그분을 찬양하게 될 것입니다”(2,12)는 마태오 복음서 5장 16절의 예수님 말씀을 반영하고 있습니다. 오늘날 성경학자들은 일반적으로 베드로 사도가 64년 네로 황제의 박해가 있기 직전에 자신의 구술을 근거로 실바누스에게 신자들을 격려하는 회람 서신을 보낼 것을 부탁했고, 베드로 사도가 순교한 얼마 뒤인 70~80년 사이 베드로 1서가 집필됐을 것으로 봅니다. 헬라어 신약 성경은 ‘Πετρου Α(페트로 알파)’, 라틴어 대중 성경 「불가타」는 ‘Petri Ⅰ’, 한국 천주교 주교회의가 펴낸 우리말 「성경」은 ‘베드로의 첫째 서간’으로 표기합니다. 베드로 1서는 5장으로 구성돼 있습니다. 하인과 노예의 처신(2,18-25)에 관해 자세히 설명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이 서간을 받은 소아시아 5개 교회 구성원들이 전반적으로 사회 신분이 낮은 자들이었음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베드로 1서는 다섯 가지 권고로 내용을 이룹니다. 먼저 이교 출신 그리스도인들에게 옛 생활 방식을 완전히 끊어 버리고 그리스도께 희망을 품고 영적 성전의 한 부분이 되라고 촉구합니다.(1,13─2,10) 이어 이교인들 사이에 취해야 할 처신과 함께 신자들의 의무, 국가 권력에 대한 의무, 주인에 대한 종의 의무, 부부 사이의 의무를 제시하며 형제적 사랑을 실천할 것을 당부합니다.(2,11─3,12) 아울러 그리스도께서 보여주신 본보기를 실천하기 위해 죄와 단절하고 주님의 재림을 기다리며 사랑과 봉사로 신앙 공동체 생활에 충실할 것을 권면합니다.(3,13─4,11) 그리고 임박한 박해에 대해 선을 행하면서 자기 영혼을 성실하게 창조주께 맡기라고 합니다.(4,12-19) 마지막으로 공동체 지도자들에게 하느님의 양 떼를 잘 치고 모범이 될 것과 젊은이들에게 겸손하고 깨어있길 권고합니다.(5,1-11) 베드로 1서는 이처럼 그리스도인이 세상에서 수행해야 하는 사명을 강조합니다. 그리스도인에게 요구되는 하느님을 위한 봉사는 먼저 교회 안에서 실행돼야 하며 가정과 사회 안에서도 실천돼야 한다고 가르칩니다. 그러면서 그리스도를 사랑과 신뢰의 마음으로 따르고 복음을 선포하며 주님을 적극적으로 섬기는 삶을 살아갈 것을 당부합니다. 리길재 선임기자 teotokos@cpbc.co.kr 리길재 선임2024.10.01
가톨릭 신앙 안에 AI 활용 방안 모색수원교구 사제단, 교구청 직원 교육 한국 교회 안에서도 AI를 사제들의 사목과 직원들의 업무에 어떻게 적용할지 교육하고 나누는 자리가 속속 생겨나고 있다. 수원교구 홍보국은 3일 수원교구청에서 교구 사제단과 홍보국 직원 대상 ‘생성형 AI 활용’ 교육을 하고, AI가 가톨릭 신앙 안에서 어떻게 활용될 수 있는지 모색했다. 교육은 디지털 프리스쿨 ‘에이블런’ 소속 김지아 강사가 ‘생성형 AI’의 개념 정리부터 ChatGPT 원리 및 활용법, 다양한 생성형 AI 소개·체험하기 등을 진행했다. 김 강사는 △종교 교육 및 콘텐츠 제작(강론 작성 보조, 신앙 교육자료 제작, 성경 요약 및 해설) △개인 신앙 생활 지원(성경 묵상 도우미, 개인 맞춤형 기도문 작성) △공동체 운영(공지 및 주보 자동 생성, 이메일·문자 자동화, 행사 기획 도우미) △선교 도구 활용(다국어 번역, SNS 콘텐츠 생성, 문화 콘텐츠 생성) 등 종교활동 안에서도 생성형 AI를 다양하게 활용할 수 있다고 강조했다. 다만 신학적 오류 가능성과 신성·거룩함의 자동화 우려, 편향된 해석을 주의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교육에 참석한 사제들은 ‘다양한 AI 툴’을 활용해 ‘회의록 요약 문서 작성, 이미지 생성, 특정 문서를 바탕으로 한 PPT 제작, 동영상 제작, 배경음악 제작’ 등을 해보며 높은 관심을 보이면서 “본당 사목, 특히 청소년 사목 부문에서 활용할 만한 부분이 많아 보인다”고 소감을 전했다. 교육에는 교구 사제단 20여 명이 참석했다. 가톨릭교회는 AI 기술의 잠재력을 긍정적으로 평가하면서도 인간 존엄성과 공동선을 중심에 둔 윤리적 사용을 강조하고 있다. 프란치스코 교황 역시 2024년 세계 평화의 날 담화 ‘인공지능과 평화’에서 AI가 평화와 형제애·공동선의 도구가 되어야 함을 강조하며 이를 위한 국제적 협력과 윤리적 성찰을 촉구한 바 있다. 이상도 선임기자 raelly1@cpbc.co.kr이상도 선임2025.07.10

성모 마리아는 ‘하느님의 어머니’이자 ‘교회의 어머니’성경과 교부들의 가르침·교의사적 흐름 따라 제시한 마리아론 마리아와 교회 Ⅰ / 기스베르트 그레사케 신부 / 조한규 신부 옮김 / 가톨릭대학교출판부 10월은 묵주 기도 성월이다. 묵주 기도는 그리스도의 구세사적 업적을 성모님과 함께 관상하는 것이며, 성모님을 통해 그분의 신비를 묵상하는 기도다. 가톨릭교회에서 ‘마리아’만큼 자주 언급되는 주제도 드물다. 거의 모든 달에 성모님과 관련된 축일이나 기념일이 있을 정도다. 특히 한국 가톨릭교회에서 마리아는 매우 중요한 분이다. 레지오 마리애 등의 성모 신심 단체가 활발하게 활동 중이고, 어느 성당이나 입구에 커다란 성모상이 자리하고 있으며, 신자들의 집에도 십자가상과 함께 성모상을 모시고 있다. 그래서 때로는 ‘천주교는 마리아를 믿는다’는 어처구니없는 오해와 공격도 받는다. 하지만 많은 신앙인이 성모 마리아가 진정 누구시고, 어떤 분이기에 교회가 그토록 공경하고 자주 언급하는지 잘 알지 못한다. 2014년 독일에서 출간된 「마리아와 교회」는 그 해답을 입체적으로 서술한 책이다. 독일의 신학자 기스베르트 그레사케(1933~) 신부가 마리아에 관한 성경과 교부들의 가르침, 교의사적 흐름을 구체적이고 포괄적으로 제시함으로써 가톨릭교회 내의 올바른 마리아론을 제시한다. 특히 초기 교회가 이해했던 마리아의 모습, 마리아의 삶과 신앙이 교회에 어떤 영향을 주었는지 다양한 시각으로 접근해 마리아론과 교회론의 관계를 바르게 규명하려고 노력했다. “서방에서도 어머니인 교회와 어머니인 마리아 사이의 매우 긴밀한 관계가 부각되었다. 서방에서는 교회가 신앙을 전달하면서 마리아가 낳은 그 ‘몸’의 지체, 즉 ‘온전한 그리스도’의 지체를 낳는다는 사실을 중요하게 생각했다.”(287쪽) 한글 번역본을 펴낸 서울대교구 조한규(가톨릭대학교 교수) 신부는 “교회는 마리아가 하느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낳은 분이기에 ‘하느님의 어머니’라고 고백하고 동시에 성경이 예수님의 십자가 밑에 마리아가 있었다고 증언함으로써(참조: 요한 19,25) 마리아는 교회의 어머니가 됐다”며 “그래서 성 아우구스티누스는 마리아가 그리스도인들의 어머니라 말한다”고 설명했다. 더불어 “마리아와 교회의 관계는 그리스도교가 자리매김하던 초기부터 서로 밀접한 관계였고, 따라서 초기 교회의 시작과 정착 과정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마리아에 대한 이해가 중요하다”며 “마리아에 대한 올바른 이해, 더 나아가 마리아론이 교회론에 어떤 영향과 결과를 미쳤는지를 이해한다면, 신학의 영역이 발전하는 것은 물론이고 신앙의 영역도 풍요로워질 것”이라고 전했다. 한글 번역본은 방대한 독일어 원서를 두 권으로 나누었다. 이번에 출간된 제1권은 총 7개의 장으로 구성된다. 제1장은 성경에서 증언하는 마리아에 대해, 제2장은 초기 교회 교부들이 이해한 마리아에 대해, 제3장은 마리아의 동정성에 대해, 제4장은 원죄 없이 잉태되심에 대해, 제5장은 마리아의 승천에 대해, 제6장은 지혜라는 개념을 통해 마리아를 바라보고, 마지막 제7장에서는 비가톨릭교회에서 바라보는 마리아에 대해 서술한다. 제2권은 2025년 2월 출간될 예정이다. 기스베르트 그레사케 신부는 독일 뮌스터대학교와 로마 그레고리오대학교에서 철학·신학·교회음악을 공부했고, 대학에서 신학을 가르치며 수많은 저서를 남겼다. 조한규 신부는 독일 본대학교에서 신학 박사학위를 받은 뒤 2015년부터 가톨릭대학교 신학대학에서 조직신학을 가르치고 있다. 윤하정 기자 monica@cpbc.co.kr신문취재팀 윤하정2024.10.08

믿음과 사랑 속에 그리스도인의 참삶을 살아야[리길재 기자의 성경에 빠지다] (93) 요한의 첫째·둘째·셋째 서간 요한의 첫째·둘째·셋째 서간은 ‘하느님은 사랑이시다’는 신앙 고백을 바탕으로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사랑과 믿음의 참삶을 충실하게 살아갈 것을 그리스도인들에게 권고하고 있다. 콘스탄츠의 마스터 하인리히, ‘예수님 품에 기대어 쉬고 있는 요한 사도’, 14세기 초반, 목재, 안트베르펜 왕립미술관, 벨기에. 신약 성경은 사도 시대 때부터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자기 나름으로 해석해 교회의 분열을 일으키는 이단자들이 적지 않았음을 보여줍니다. 초대 교회 때부터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이러한 자들로 인해 교회는 심각한 위기를 겪고 오고 있습니다. 요한의 첫째·둘째·셋째 서간도 이러한 배경에서 쓰였습니다. 요한의 서간들은 신앙의 순수성을 위협하는 이단을 퍼뜨리는 자들을 ‘그리스도의 적’(1요한 2,18.22; 4,3; 2요한 7), ‘거짓 예언자’(1요한 4,1), ‘거짓말쟁이’(1요한 2,22), ‘속이는 자’(2요한 7)라고 규정합니다. 이들은 세례를 받은 그리스도인으로서 교회의 일원이었으나(1요한 2,19) 이젠 그리스도에게서 유래하지 않는 교리를 퍼뜨려(2요한 10) 믿음을 충실히 지키는 신자들을 탈선시키려고 애쓰고 있습니다.(1요한 2,26; 3,7) 요한의 서간들은 이들이 세상에서 나와 이 세상에만 속한 자들로서(1요한 4,5) ‘사람을 속이는 영’이 이끄는 대로 행동한다고 비난합니다.(1요한 4,6) 교회를 위협하는 이들은 신비주의에 빠진 ‘영지주의자들’입니다. 이들은 하느님을 뵙고(1요한 3,6; 3요한 11), 그분과 일치를 이루며 살고 있으며(1요한 2,3), 빛 속에 있기에(1요한 2,9) 하느님을 완전히 안다(1요한 2,4)고 자처합니다. 이는 교회 가르침에 명백히 반대되는 주장이며 행위입니다. 이들은 그리스도의 강생을 부인하면서(1요한 4,2; 2요한 7) 예수님이 그리스도가 아니며(1요한 2,22) 하느님의 아드님도 아니라고 가르칩니다.(1요한 4,15) 그러면서 자기들은 죄가 없다(1요한 1,8. 10)며 계명(1요한 2,4)과 형제애를 실천하는 일에 전혀 마음을 쓰지 않습니다.(1요한 2,9) 요한의 서간들은 영지주의자들을 경계하며 사람이 되신 하느님의 아드님께 대한 믿음을 고백(1요한 2,2; 4,2; 2요한 7)하고, 그리스도인들에게 처음에 받은 가르침을 충실하게 실천할 것을 권면합니다.(1요한 1,1; 2,7; 3,11; 2요한 5.6) 그래서 요한의 첫째 서간은 “내가 여러분에게, 곧 하느님 아드님의 이름을 믿는 이들에게 이 글을 쓰는 까닭은, 여러분이 영원한 생명을 지니고 있음을 알게 하려는 것입니다”(5,13)라고 밝힙니다. 헬라어 신약 성경은 ‘Ιωαννη Α·Β·Γ’(요안네 알파·베타·감마), 라틴어 대중 성경 「불가타」는 ‘Ioannis Ⅰ·Ⅱ·Ⅲ’, 한국 천주교 주교회의가 펴낸 우리말 「성경」은 ‘요한의 첫째·둘째·셋째 서간’으로 표기합니다. 성경학자들은 동일 인물이 요한의 세 서간을 썼다고 봅니다. 세 서간의 문체나 담긴 가르침이 매우 비슷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누가 이 서간들을 썼는지는 분명하지 않습니다. 요한 2·3서는 글쓴이 자신을 단지 ‘원로’라고 밝힐 뿐입니다. 그리고 요한 1서에선 글쓴이 자신을 ‘예수님을 직접 뵌 목격 증인’(1,1-3; 4,14)이라고 소개합니다. 오늘날까지 교회의 전승은 요한 사도가 이 서간들을 썼다고 합니다. 요한의 첫째 서간(이하 요한 1서)은 총 5장으로 구성돼 있습니다. 이 서간의 핵심 주제는 ‘하느님과의 친교’입니다. 요한 1서는 하느님과 나누는 친교의 기준을 세 단계로 제시합니다. 첫째 단계는 ‘죄를 끊어 버리는 것’입니다.(1,5─2,28) 하느님과 나누는 친교는 하느님의 빛에 동참하는 것입니다. 이를 위해선 우선 죄에서 벗어나 빛 속에서 살아야 합니다. 그런 다음 사랑의 계명을 준수하고, 그리스도의 적이 나타나고 항구히 주님께 대한 믿음을 지키는 것입니다. 둘째 단계는 ‘의로움을 실천하는 것’입니다.(2,29─4,6) 하느님 아드님의 모범을 따라 의로움을 실천하고,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믿음에 따라 영을 식별합니다. 셋째 단계는 ‘사랑과 믿음을 실천하는 것’입니다.(4,7─5,12) 사랑은 하느님에게서 내려와 믿음 안에 뿌리를 내립니다. 하느님의 아드님께 대한 믿음은 사랑의 뿌리입니다. 요한 1서는 ‘하느님은 사랑이시다’(4,8)라고 고백합니다. 이는 신약 성경의 핵심 가르침입니다. 사랑은 자신을 내어 줌과 동시에 친교이며 나눔입니다. 사랑은 아버지 하느님과 성자 하느님을 하나로 결합시킬 뿐 아니라 당신을 따르는 그리스도인들과도 하나가 됩니다. 요한의 둘째 서간(이하 요한 2서)은 12절, 요한의 셋째 서간(이하 요한 3서)은 13절로 구성돼 있습니다. 요한 2서는 그리스도인은 진리를 아는 사람으로 하느님 아버지께서 내리셨고 또 교회 안에서 처음부터 전해 온 계명의 빛을 받으며 그 진리에 따라 살아가며 다른 이들을 사랑해야 한다고 권고합니다. 이는 요한 1서의 주제와 같은 내용입니다. 요한 3서 역시 진리에 따른 삶은 사람들을 잘못된 길로 유인하는 자들의 자세와 대비되는 것이라며 선교사들에게 협조할 것을 당부합니다. 이처럼 요한의 서간들은 그리스도인이 실천해야 할 참삶을 제시합니다. 이 참삶은 하느님과 친교를 나누는 삶입니다. 이 친교의 삶은 사랑의 실천에서 시작합니다. 하느님께서 사랑이시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그리스도인의 참삶의 기준은 ‘믿음’과 ‘사랑’입니다. 이는 성령을 알아볼 수 있는 기준입니다. 그래서 요한의 서간들은 모든 희망을 그리스도께 걸라고 당부합니다. 그러면서 교회를 분열하는 신앙의 위기가 닥쳤을 때 죄를 끊어버리고 그리스도께 대한 믿음의 증인이 될 것임을 선언한 세례 때의 신앙 고백을 충실하게 실천할 것을 요구합니다. 리길재 선임기자 teotokos@cpbc.co.kr리길재 선임2024.10.15

조정래 신부가 들려주는 묵주기도의 참의미한 사제의 묵주 기도 / 조정래 신부 / 가톨릭평화방송·평화신문 한 사제의 묵주 기도 / 조정래 신부 / 가톨릭평화방송·평화신문 심순화 작가의 한복 입은 성모님 그림 수록 출간 기념 염미숙 작가 전시회 9일까지 개최 cpbc 가톨릭평화방송·평화신문 사장 조정래 신부가 「성모님과 함께하는 한 사제의 묵주 기도」를 펴냈다. 묵주기도는 가톨릭 신자들에게 가장 익숙한 기도 가운데 하나다. 갓 세례를 받은 새내기 신자부터 레지오 마리애 단원, 성직자나 수도자까지 모두에게 보편적이면서도 의미를 지니는 특별한 기도다. 다양한 형태로 묵주를 몸에 지니고 다니는 신자도 많다. 그에 반해 묵주기도의 의미와 바치는 방법을 정확히 알지 못하는 경우도 있다. 묵주 알을 굴리면서도 분심으로 자책한 경험은 다들 있을 것이다. 조 신부는 “그것도 시간과 마음을 봉헌하는 소중한 기도지만, 묵주기도는 단순히 정해진 기도문을 반복하는 것을 넘어 예수님 탄생부터 수난·죽음·부활 그리고 영광에 이르는 구원 신비를 성모님의 눈을 통해 깊이 헤아리는 기도”라고 설명했다. 성경 말씀을 바탕으로 예수님 생애를 깊이 묵상하고, 성모님의 모범을 따르며 전구를 청하는 기도라는 것이다. 책은 먼저 묵주기도, 즉 로사리오의 뜻과 바치는 방법을 소개한다. 이어 각 신비, 각 단에 대한 조 신부의 묵상과 기도가 그림과 함께 펼쳐진다. 갓을 쓰고 한복을 입은 한국적인 모습의 성모님과 예수님, 천사들의 모습은 심순화(가타리나) 작가의 작품이다. “주님, 비록 잘 준비된 그럴듯한 장소와 사람이 아니더라도 하느님께서 개입하시고 함께하신다면 그 모든 부족함마저도 귀하고 훌륭하게 쓰임을 받는다는 것을 알아듣게 하소서.”(환희의 신비 3단 ‘마리아께서 예수님을 낳으심을 묵상합시다’ 중) 조 신부는 “순례의 여정에 긴 시간 계속 묵주기도를 드렸고 그때 떠오른 묵상들을 정리해 보았다”며 “묵상인지 상상인지, 아니면 개인적인 생각인지 구별하기는 힘들지만, 나름대로 각 신비의 한 단, 한 단마다 어떤 묵상을 해야 할지, 무슨 마음을 가져야 할지, 또 어떤 기도를 드리고 어떤 결심을 해야 할지 함께 나누고자 한다”고 전했다. 출간을 기념해 9일까지 서울 중구 가톨릭평화방송·평화신문 사옥 지하 1층 역사전시실에서 전시회도 열린다. 로사리오의 신비를 화폭에 담은 염미숙(마리스텔라) 작가의 작품을 책과 함께 만날 수 있다. 염 작가는 “바다의 별 성모님을 중심에 두고 환희·빛·고통·영광의 신비를 표현했다”며 “시각적인 작품을 통해 기도의 신비가 더욱 깊은 울림으로 다가오길 바란다”고 말했다. 윤하정 기자 monica@cpbc.co.kr 윤하정2025.12.31

맛과 멋[생활속의 복음] 연중 제5주일 마태 5,13-16 윌리엄 홀먼 헌트 작, ‘세상의 빛’ 1851~1853년 소문난 식당을 검색하여 줄을 서서 대기하면서까지 ‘먹고 싶게 만드는 맛’, 노을과 석양을 무대로 펼쳐진 장관을 관망하려고 일출·일몰 시각에 방문하는 불편을 감수하면서까지 ‘보고 싶게 만드는 멋’이 있다. 적당한 양념을 배합한 조리 방식이, 적절한 조명을 지원한 관찰 각도가 맛과 멋을 돋운다. ‘맛’있는 음식, ‘멋’있는 풍경은 ‘다시 찾고 싶게 만드는 매력’을 발산한다. 맛과 멋은 사치와 허영의 영역이 아니라 활력과 행복의 일부다. 일반적으로 음식과 경치에 적용되는 맛과 멋은 인간관계를 포함한 사회생활 전반에 반영될 수 있다. ‘맛’없는 관계는 지속되지 않으며, ‘멋’없는 모임과 조직에 사람이 찾아오지 않는다. 이 맛과 멋을 대표하는 주제어가 바로 소금과 빛이다. ‘맛’ 내는 양념의 기본은 ‘소금’이다. 양념 이외에 다양한 용도로 활용되는 소금은 세상 시작부터 존재하였다. 하느님에 의해 창조된 ‘바다’(창세 1,10 참조)를 기점으로 소금은 피조물 ‘내부에’ 포함되어 있다. 생명체의 필수 구성 성분인 염분의 적정량을 조절함으로써 생명이 유지된다. 하느님은 ‘안에 있는 소금’(세상의 소금)으로 창조된 생명을 유지한다. ‘멋’ 내는 조명의 본질은 ‘빛’이다. 조명 이외에 다양한 기능을 발휘하는 빛은 세상 시작부터 존재하였다. 하느님에 의해 창조된 ‘빛’(창세 1,3 참조)은 피조물 ‘외부에’ 위치하면서 사물을 비추고 사물을 통해 반사된다. 생명체의 성장과 생활에 필수 요소인 빛은 강약을 조절함으로써 생명을 보호한다. 하느님은 ‘밖에 있는 빛’(세상의 빛)으로 창조된 생명을 보존한다. 제자들에게 “세상의 소금”(마태 5,13), “세상의 빛”(마태 5,14)을 각인시키는 복음 말씀은 그리스도인에게 세상 안에서 소금과 빛의 역할을 적극적으로 실행하라는 소명을 제시한다. 그런데 이에 앞서 소금과 빛은 ‘우리 안팎에서 이미 존재하는 하느님’, 곧 우리를 위해 ‘우리 안에 소금’, ‘우리 밖에 빛’으로 활동하고 있는 하느님을 소개한다. 주 식재료 ‘안에’ 숨은 양념과 주 풍경 ‘밖에’ 숨은 조명이 맛과 멋을 내듯, 하느님은 ‘숨어 있는 방식으로’(마태 6,6 참조) 인생의 맛과 멋을 선사한다. ‘제맛을 잃어버린 소금’과 ‘함지 속에 놓인 등불’은 하느님이 전달하는 맛과 멋을 외면하는 상태를 의미한다. 소금과 빛은 두 가지의 공통분모를 가진다. 하나는 고정된 형체를 취하지 않는 특성이다. 소금은 고체 형질로부터 변형하여 녹음으로써, 빛은 발광체로부터 분산하여 비춤으로써 자기 역할을 실현한다. 다른 하나는 균형 잡힌 정량으로 작용하는 특성이다. 소금과 빛이 과도하거나 부족하면 양념과 조명의 목적을 달성할 수 없다. 소금과 빛처럼 하느님은 ‘보이지 않게’(없는 듯이 있게), ‘적은 양으로도 깊고 세련되게’ 맛과 멋을 선사한다. ‘우리 안에 소금’처럼 있는 하느님을 통해 ‘사는 맛’이, ‘우리 밖에 빛’처럼 있는 하느님을 통해 ‘사는 멋’이 구현되면 좋겠다. 이 맛과 멋의 체험이 ‘하느님 안에 머무르는 생명’(1요한 4,16 참조)이다. 이를 직설적으로 표현하는 성경 구절은 다음과 같다. “우리는 그분 안에서 살고 움직이며 존재합니다.”(사도 17,28) cpbc2026.02.03

그리스도교 신앙의 핵심, 부활을 믿나이다[저는 믿나이다] (56·끝) 죽은 이들의 부활과 내세의 삶을 기다리나이다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시는 날 죽은 이들이 부활하여 심판받을 것이며 하느님 나라의 영광으로 충만한 새 하늘 새 땅이 열릴 것이다. 미켈란젤로 부오나로티, ‘최후의 심판’, 프레스코화, 1536~1541년, 바티칸 시스티나 경당. “죽은 이들의 부활과 내세의 삶을 기다리나이다.” 니케아-콘스탄티노폴리스 신경의 마지막 고백문입니다. 삼위일체 하느님께 대한 신앙 고백을 하는 모든 그리스도교 신경은 마지막 날에 이루어질 죽은 이들의 부활과 영원한 삶에 대한 선언으로 절정에 이릅니다. 교회가 죽은 이들의 부활을 믿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참으로 죽은 이들 가운데서 부활하셨기 때문입니다. 죽은 이들의 부활에 대한 신앙은 처음부터 그리스도교 신앙의 핵심 내용입니다. 죽은 이들의 부활을 믿지 않는 이들에게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질타했습니다. “여러분 가운데 어떤 사람들은 어째서 죽은 이들의 부활이 없다고 말합니까? 죽은 이들의 부활이 없다면 그리스도께서 되살아나지 않으셨을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되살아나지 않으셨다면, 우리의 복음 선포도 헛되고 여러분의 믿음도 헛됩니다. 그러나 이제 그리스도께서는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되살아나셨습니다. 죽은 이들의 맏물이 되셨습니다.”(1코린 15,12-14. 20) 예수님께서는 죽은 모든 이가 부활하여 심판을 받을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무덤 속에 있는 모든 사람이 그의 목소리를 듣는 때가 온다. 그들이 무덤에서 나와 선을 행한 이들은 부활하여 생명을 얻고 악을 저지른 자들은 부활하여 심판을 받을 것이다.”(요한 5,29) 죽은 이들은 어떻게 부활할 것인가요? 바오로 사도는 말합니다. “죽은 이들이 어떻게 되살아나는가? 그들이 어떤 몸으로 되돌아오는가? 하고 묻는 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어리석은 사람이여! 그대가 뿌리는 씨는 죽지 않고서는 살아나지 못합니다. 그리고 그대가 뿌리는 것은 장차 생겨날 몸체가 아니라 밀이든 다른 종류든 씨앗일 따름입니다. 죽은 이들의 부활도 이와 같습니다. 썩어 없어질 것으로 묻히지만 썩지 않는 것으로 되살아납니다. (⋯) 죽은 이들이 썩지 않는 몸으로 되살아나고 우리는 변화할 것입니다. 이 썩지 않는 것을 입고 이 죽는 몸은 죽지 않는 것을 입어야 합니다.”(1코린 15,35-37.42. 52-53) 교회는 모두가 이해하도록 더 구체적으로 설명합니다. “그리스도께서는 당신 자신의 육신을 지니고 부활하셨다. ‘내 손과 내 발을 보아라. 바로 나다.’(루카 24,39) 그러나 예수님께서 지상 생활로 돌아오셨다는 것은 아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그분 안에서 모든 사람이 지금 가지고 있는 자신의 육신을 지니고 부활할 것이다. 그러나 이 육신은 ‘영적인 몸’(1코린 15,44)으로, 영광스러운 몸과 같은 모습으로 변화될 것이다.”(필리 3,21 참조)(「가톨릭교회 교리서」 999) “그리스도와 함께 부활하려면 그리스도와 함께 죽어야 하고, ‘이 몸을 떠나 주님 곁에 살기’(2코린 5,8) 위하여 떠나야 한다. 죽음이라는 이 ‘떠남’에서 영혼은 육신과 분리된다. 그 영혼은 죽은 이들이 부활하는 날 육체와 다시 합쳐질 것이다.”(「가톨릭교회 교리서」 1005) 그러면 언제 죽은 이들이 부활할까요? 예수님께서는 “마지막 날에”(요한 6,39-40), “세상 끝 날에” 이루어질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은 죽은 이들의 부활이 그리스도의 재림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음을 알려줍니다. 가톨릭교회는 모든 사람은 죽자마자 그 불멸의 영혼 안에서 산 이와 죽은 이의 심판자이신 그리스도의 ‘개별 심판’으로 영원한 갚음을 받는다고 합니다. 이러한 대가는 연옥에서 정화를 거치거나, 곧바로 하느님 나라로 들어가거나, 곧바로 지옥에서 영원한 벌을 받는 것입니다. 지옥의 주된 고통은, 하느님과 영원히 단절되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꼭 새겨야 할 교회 가르침이 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아무도 지옥에 가도록 예정하지 않으신다는 것입니다. 자유 의사로 하느님께 반항하고 죽을 죄를 짓고 끝까지 그것을 고집하는 사람만이 지옥에 가게 되리라는 것입니다. 이에 교회는 미사와 일상 기도를 통해 “아무도 멸망하지 않고 모두 회개하기를”(2베드 3,9) 바라며 하느님의 자비를 빌고 있습니다. 주님께서 재림하시어 최후의 심판을 하시는 날 새 하늘과 새 땅이 열릴 것이라고 신약 성경은 말합니다. 이날 모든 것이 변화할 것입니다. 모든 이가 부활할 뿐 아니라 교회 역시 천상 영광 안에서 완성될 것입니다. 이날 하느님께서는 영원한 생명을 통해 “모든 것 안에서 모든 것이 되실”(1코린 15,28) 것입니다. 니케아-콘스탄티노폴리스 신경은 신약 성경의 마지막 책인 요한 묵시록과 마찬가지로 “아멘”으로 끝맺습니다. 히브리말 ‘아멘’은 견고함, 신뢰, 성실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아멘’은 우리에 대한 하느님의 성실과 하느님에 대한 우리의 신뢰를 의미합니다. “신경 끝의 ‘아멘’은 첫머리의 ‘저는 믿나이다’라고 하는 말마디를 되풀이하고 확인하는 것이다. ‘믿는다’는 것은 하느님의 말씀과 약속과 계명에 대하여 ‘아멘’이라고 말하는 것이며, 무한한 사랑과 완전한 성실성의 ‘아멘’이신 분께 전적으로 신뢰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매일매일의 그리스도인의 삶은 세례 때 ‘저는 믿나이다’라고 한 신앙 고백에 대한 ‘아멘’이 될 것이다.”(「가톨릭교회 교리서」 1064) 부족한 긴 연재 글을 인내로이 읽어주신 독자 여러분께 감사드립니다. 아우구스티노 성인의 말씀으로 연재를 마칩니다. “신경은 여러분에게 거울과 같은 것이 되어야 합니다. 여러분이 믿는다고 고백한 모든 것을 정말 여러분이 믿고 있는지 그 거울에 자신을 비추어 보십시오. 그리고 날마다 여러분의 믿음 안에서 기뻐하십시오.”(「설교집」 58,11,13) 리길재 전문 기자 teotokos@cpbc.co.kr리길재 전문2025.12.16

요한 묵시록 (01)[월간 꿈CUM] 신약이 내게 말을 건네다 미켈란젤로, 최후의 심판(Last Judgement), 프레스코화, 13.7×12.2m, 1534~1541년, 시스티나 성당, 로마 바티칸 Q. 묵시문학이란 무엇을 말합니까? (1) 정의 : 묵시(默示)라는 말은 그리스어 ‘아포칼립시스’(Apokalypsis)에서 유래된 것으로, ‘덮개를 벗김’ 또는 ‘숨은 것을 드러내 보임’을 뜻합니다. 묵시문학의 작품들은 세상 마지막에 대한 것이기보다는 ‘하느님 진노의 크신 날’을 기술하고 있으며, 이날을 묘사하는 문학적인 양식을 묵시문학이라고 부릅니다. 묵시문학 안에서 유다인들은 시대를 현세와 앞으로 다가올 세대로 구분하여 생각하였는데, 그들에게 있어서 현세는 악으로 얼룩져 있어서 도저히 구원받을 수 없으며 개혁도 불가능한 세계이기에 오직 파괴와 소멸만이 이 세계의 운명이라고 규정짓고 있습니다. 이러한 세계관으로부터 마지막 세계를 기다리는 희망이 싹트게 되는 것입니다. 앞으로 다가올 미래의 세계는 하느님이 직접 다스리는 시대로 선과 의가 완전히 실현되는 세상이며, 평화와 번영과 정의가 확립되는 세상으로서, 이곳에서 그들은 하느님께서 약속하신 지위를 누리게 될 것입니다. 이 새로운 세계는 오직 하느님께서 직접 이 세상의 사건에 개입하심으로써만 가능합니다. 따라서 하느님이 이 역사에 직접 개입하시는 날, 곧 주님의 재림의 날은 악의 자식들에게는 공포와 파괴와 심판의 무서운 날이 될 것이지만, 주님의 자녀들에게는 영광의 날이 될 것입니다. 이러한 꿈이 악의 자식들에게 알려지지 않도록 하기 위하여 독특한 방법을 동원하여 글을 쓰게 되는 데, 이러한 문학 형태가 묵시문학입니다. 묵시문학은 기원전 200년부터 기원후 100년 사이에 그 절정을 이루었습니다. (2) 특성 ① 하느님의 메시지를 독자들에게 선포하고 역사의 흐름 안에서 적용, 심화시키는 과정에서 상징을 사용합니다. 예를 들면 꿈, 천체전도, 동물, 숫자, 색채 등을 사용합니다. ② 묵시문학의 저자들은 항상 일인칭으로 말하지만, 자신의 본이름은 나타나지 않습니다. 오히려 자신들이 줄 수 없는 권위를 자신의 작품에 주기 위해서 구약의 유명한 예언자들의 이름(엘리야, 에녹, 아브라함) 또는 사도 베드로, 사도 바오로 등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저자의 메시지가 인정을 받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③ 이 시대가 끝나기 전에 내릴 재앙들을 열거, 때로는 종말이 오기 전에 예전에 없었던 고통의 때가 올 것이라고 말합니다.(다니 12,1) 요한 묵시록에서 언급한 일곱교회 중 하나인 티아티라 교회의 유적 Q. 요한 묵시록은 어떤 성경입니까? 많은 사람이 요한 묵시록을 두려움을 안겨 주는 책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반대입니다. 요한 묵시록은 희망을 안겨 주는 책입니다. 요한 묵시록은 바로 환난과 박해 속에서 신음하며 외치는 교회 공동체의 신자들에게 보내는 하느님의 대답입니다. 비록 박해로 점철된 순간이라 할지라도 하느님의 때, 하느님의 시간, 하느님의 계획은 존재함을 알리는 성경입니다. Q.요한 묵시록의 저자는 누구입니까? 요한 묵시록의 저자는 자신을 요한이라 부릅니다.(1,1.4.9; 22,8) 이 요한은 교회 전승에 의하면 제베대오의 아들 사도 요한입니다. 2세기부터 이렇게 인식되어 왔습니다. 그래서 요한 묵시록의 저자를 사도 요한이라고 생각해 왔습니다. 그러나 연구에 의하면 사도 요한이 아닐 가능성이 큽니다. 당시에는 문학작품을 과거의 중요한 인물에게 바치는 습관이 있었는데, 특히 묵시문학 작품을 쓸 때 그렇게 했습니다. 따라서 요한 묵시록의 저자가 자기를 요한이라고 부르고 있을지라도 사도 요한은 아닐 것입니다. 저자는 달리 알려진 바 없는 ‘요한’이라는 이름의 ‘초기 그리스도교 예언자’라고 결론짓는 것이 가장 무난합니다. Q. 요한 묵시록의 집필 시기는 언제입니까? 요한 묵시록은 황제인 자기를 세상의 ‘주인’으로 가르치며 강요했던 로마 황제 도미시아누스 통치 말년, 즉 서기 90년부터 100년 사이에 기록되었을 것입니다. 글 _ 박정배 신부 (베네딕토, 수원교구 용인본당 주임) 1992년 사제서품. 수원교구 성소부장과 수원가톨릭대학교 영성지도, 수리산성지 전담 신부 등을 역임했으며 양지본당, 광북본당, 샌프란시스코 한인본당, 신둔본당, 철산본당 주임을 지냈다.2025.10.23

군사독재에 맞선 민주투사 “예수님 따르는 구도자로 살겠다” 결심[빛과 소금, 이땅의 평신도] 도시 빈민의 대부, 제정구 바오로 - (2) 민주투사의 회심 제정구(오른쪽)와 정일우 신부. 교련 반대 시위로 수배·도피하다 제적 청계천 판자촌 교회서 야학교사 활동 민청학련사건으로 15년 형 받고 투옥 옥에서 하느님 섭리 깨닫고 성경 통독 아내와 함께 정일우 신부에게 세례받아 서울대 문리대 1급 데모꾼 “군사독재를 막지 못하면 조국의 주인이 아닌 이방인이 될 겁니다.” 나는 동기들보다 나이가 든 탓에 1학년을 마치고 입대해 만기제대한 후 1971년에 복학했다. 이 무렵 군사독재 정권은 교련을 필수 과목으로 지정해 군국주의를 강화하고자 했다. 나는 교련 반대 시위의 연사로 자주 나선 탓에 문리대의 1급 데모꾼으로 낙인찍혔다. 시위가 격화되자 정부는 위수령을 발동해 서울의 10개 대학에 휴교령을 내리고 군인을 주둔시키는 한편, 데모 가담자들을 잡아들였다. 나 역시 수배돼 도피하다 학교에서 제적당했다. 이듬해 중앙정보부에 끌려가 석 달 동안 구금당했다가 무사히 풀려났지만, 곧바로 ‘문제아 길들이기’ 코스에 붙들려가 3박 4일간 죽도록 두들겨 맞았다. 그러나 억울하거나 슬프지 않았다. 원망하거나 앙심을 품지도 않았다. 그간 내가 휘둘렀던 주먹다짐을 고스란히 되돌려받는 것이라 여겼다. 못된 싸움꾼에게 속수무책으로 당했던 이들의 아픔을 온몸으로 느끼며⋯. 1973년 3월에 복적됐지만, 상황은 나아지지 않았다. 급기야 1974년 4월에 민청학련사건이 터져 긴급조치 4호 위반으로 제적·구속됐다. 중앙정보부로 이송돼 무자비한 구타와 잠을 재우지 않는 살인적 고문을 당했다. 일주일간 모든 것을 다 털린 후에야 구치소로 갈 수 있었다. 동지들을 지키지 못했다는 참담함과 부끄러움에 몸부림쳤다. 그때부터 나는 사람 이름을 외우지 않게 됐다. 마침내 형이 선고되던 날, 내 목소리가 재판정에 쩌렁쩌렁하게 울려 퍼졌다. “나는 재판장님과 마찬가지로 밥 굶고 발 부르터가며 애국했는데, 왜 이 자리에 서 있는 겁니까? 제가 죽어서 나라가 잘되리라 생각하시면 사형에 처해주십시오. 기꺼이 죽겠습니다.” 파월장병 출신인 삼성장군 재판장은 내게 15년 형을 선고했다. 골목대장 날건달이 군사독재 정권에 맞서 싸우는 민주투사로 공인된 날이었다. 서울대 캠퍼스에서 학우들과 시국을 논의하는 제정구(오른쪽에서 두번째). 청계천 판자촌 야학교사 나는 개신교에 대해 거부감을 가지고 있었다. 캠퍼스에는 최루탄과 돌멩이가 교차하고 있는데, 개신교 서클은 이웃을 사랑하라며 태평스럽게 전교했다. 나는 엄중한 현실에 무감각한 개신교인들이 소인배적인 야바위꾼으로 보였다. 그러던 차에 나 대신 어머니가 경찰서에 연행돼 고초를 겪는 일이 벌어졌다. 그때 동생 정무가 다니던 복음교회의 장성환 목사가 많이 위로해줬다. 이후 그와 사회 현실을 토론하면서 예수쟁이에 대한 혐오가 점차 사라졌다. 그는 내게 청계천 송정동 판자촌의 활빈교회 야학교사를 권했다. 나는 그곳에서 김진홍 목사를 만나 더럽고 낮은 곳에 있는 청계천의 하느님이 참 하느님이라고 느꼈다. 1973년 초 활빈교회로 이사한 후 그에게 세례받았다. 인생을 바꾼 정일우 신부와의 만남 그해 말, 내 일생을 바꿔놓은 일이 벌어졌다. 미국인 신부가 청계천에 발을 들여놓았던 것이다. 유창한 한국말로 자신을 정일우(John V. Daly, S.J.)라고 소개한 그는 1960년에 예수회 신학생으로 한국에 와서 3년간 실습한 후 미국으로 돌아가 1966년에 사제품을 받았다고 했다. 이듬해 다시 한국에 돌아와 서강대에서 철학을, 예수회 신학원에서 영성신학을 가르쳤다. 그러다 복음을 입으로만 살고 있다는 생각이 들어 한 달간 청계천 체험을 나왔다고 했다. 나는 그를 의심의 눈초리로 바라봤다. 번듯한 예수회 신부이자 대학교수가 왜 판자촌에 왔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종교인의 동정심이거나 객기 정도로 보였다. 그러나 그것도 하느님의 섭리였던가. 당장 그가 묵을 곳이 없어 내가 기거하던 기도실에서 함께 지내야만 했다. 아홉 살 연상인 그와 마음이 통했다. 그는 사흘 뒤에 방을 얻어 나갔는데, 그때부터는 내가 그의 작은 방에 가서 함께 지내는 날이 많았다. 1974년 1월에 김 목사가 긴급조치 반대 성명서 사건으로 체포되자 불똥이 내게 튀었다. 체포조가 활빈교회에 들이닥쳤다. 나는 속옷 바람으로 답십리까지 달아나 정일우 신부에게 도움을 청했다. 그는 나를 서강대 사제관에 숨겨주었다. 그때 책상 앞에 걸려있던 십자가가 눈에 띄었다. 교회에서 보던 밋밋한 모양이 아니라 실제 예수님이 매달려있는 십자가였다. 머리에는 가시관을 쓰고, 벌어진 양손과 한데 모은 발에는 못이 박혔으며, 병사가 창으로 찔러서 죽음을 확인했다는 옆구리에는 핏자국이 있었다. 섬뜩했다. 1960년대 청계전 1973년 청계천 판자촌 모습. 수형생활, 하느님을 향해 나아간 시간 며칠 뒤 사제관에서 나왔지만, 결국 석 달 뒤에 민청학련사건으로 체포되고 말았다. 15년 형을 받고 교도소에 갇혀 육체와 정신이 무기력하게 파괴돼가던 어느 날이었다. 쥐 한 마리가 화장실 홈통을 타고 내 방에 나타났다. 쥐와 눈이 마주치는 순간, 나뭇등걸 같던 몸이 생명체를 발견한 기쁨에 꿈틀거렸다. 불현듯 성경 구절이 떠올랐다. 이스라엘 민족이 이집트에서 탈출해 광야에서 40여 년간 떠돌던 시련, 그리고 예수님이 광야에서 사탄의 유혹을 받으며 40일간 겪었던 고난이 선명했다. 눈이 번쩍 뜨였다. ‘맞아! 하느님께서 나를 황량한 광야로 이끄신 거야. 역사 속에서 반드시 거쳐야만 하는 단련의 시간으로 말이야.’ 하느님의 인도로 판자촌에 들어갔고, 감옥에 갇혔다는 확신이 들었다. 광야에서 해야 할 일이 있었다. 그날부터 성경을 통독하기 시작했다. 무의미하고 무기력하던 날이 하느님과 함께하는 날로 바뀌었다. 수형생활이 하느님을 향해 나아가는 시간이 됐다. 나는 1975년 2월에 형집행정지로 석방됐다. 예수님 음성 듣고 가톨릭으로 개종 출소한 직후 정 신부의 제안으로 치악산에서 열흘간 피정했다. 허름한 여인숙의 탁자 위에 놓인 십자고상이 촛불에 빛났다. 축 늘어진 예수님 모습은 섬뜩함이 아니라 애처로움으로 다가왔다. 가련한 그의 모습이 답답하게 보였다. 나는 수석 사제나 율법학자와 같이 그를 시험해보고 싶었다. 아니, 도발해 그를 움직이고 싶었다. “당신이 진정 하느님의 아들이라면 왜 이런 수모를 당하는 겁니까? 어서 십자가에서 내려와 이 썩어빠진 세상을 뒤엎어 새 하늘과 새 땅을 만들어 달란 말입니다.” 그때였다. 묵직한 음성이 방을 가득 채웠다. “나도 땀이 핏방울처럼 되어 땅에 떨어질 때까지 아버지께 청했다. 이 잔을 거두어 달라고 말이다. 그러나 내 뜻이 아니라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지길 바랐지.” 나는 급히 되물었다. “도대체 그 뜻이 뭔데 이런 끔찍한 일을 당한단 말입니까?” “아담과 하와가 하느님께 죄를 짓고 낙원에서 추방된 뒤 하늘 나라는 굳게 닫히고 말았다. 이제 내가 사람의 죄를 모두 짊어지고 가는 거야. 누구든 회개하고 나를 통해 하느님을 찾는 사람은 구원받을 수 있게 된 거지. 그게 바로 아버지의 뜻이란다.” “⋯⋯.” “썩어빠진 세상을 뒤집어엎어 달라는 건 가당치 않아. 나는 세상을 심판하러 온 것이 아니라 구원하러 왔거든. 내 제자가 되려면 네 십자가를 짊어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는 사실을 기억하거라.” 내가 가야 할 길이 환히 보였다. 내 십자가를 지고 빈손으로 따르다 하나의 밀알로 죽는 길이었다. 지난날의 과오와 죄악이 낱낱이 떠올랐다. 옛일을 하나하나 곱씹고 통렬히 뉘우치며 가슴을 쳤다. 어느새 탁자 위에는 촛농이 수북이 쌓였고, 창밖은 훤해지고 있었다. 개종을 결심했다. 전에 받은 개신교 세례는 신앙적 결단이 아니라 그곳에 동화해야겠다는 조급증 때문이었다. 더욱이 청계천의 하느님을 통해 사회운동의 성과물을 내고 싶다는 철부지 같은 생각이 앞섰다. 부끄러웠다. 1977년 1월에 아내와 함께 정 신부에게 세례받았다. 예수님의 뒤를 따라 가난하고 힘없는 이들과 동행하며 사람의 길을 발견하리라 다짐했다. 구도자로 살아갈 것을 결심했다. 하느님의 부르심에 응답한 사무엘의 말을 읊조리며⋯. “말씀하십시오. 당신 종이 듣고 있습니다.”(1사무 3,10) 김문태 힐라리오 (한국평단협 수석부회장, 문학박사) 한국천주교 평신도사도직단체협의회·가톨릭평화신문 공동기획cpbc2025.12.16

사도들의 정통 신앙 계승한 교회의 아버지, 교부[저는 믿나이다] (35) 교부는 누구인가 교부들은 사도들로부터 이어오는 신앙을 해설하고 정통 교리를 수호함으로써 교회 성장과 발전에 이바지했다. 베르니니 작 ‘사도좌’, 1657~1666년, 금도금 청동, 바티칸 성 베드로 대성전. 그리스도교 신앙은 성령 강림 후 성령으로 가득 찬 사도들이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신 예수께서 바로 그리스도이시다”라고 선포한 기쁜 소식에서 시작됩니다. 교회가 전하는 ‘사도들의 신앙’은 “성령께서 영감을 주신 성경 안에서, 교부들의 증언이 언제나 살아 있는 전통 안에서, 성령께서 도우시는 교회의 교도권 안에서, 성령께서 우리에게 그리스도와 친교를 이루게 하시는 성사의 전례 안에서 말씀과 상징을 통하여, 우리를 위하여 성령께서 전구해 주시는 기도 안에서, 교회를 이루는 은사와 직무 안에서, 사도적 삶과 선교적 삶의 표징들 안에서, 성령께서 당신의 거룩함을 드러내고 구원 사업을 계속하시는 성인들의 증거 안에서”(「가톨릭교회 교리서」 688) 계승되고 지켜지고 있습니다. 사도들이 선포한 복음은 로마 제국의 경계를 넘어 땅 끝까지 전해졌습니다. 그리고 유다인뿐 아니라 많은 민족이 복음을 받아들여 세례를 통해 그리스도인이 됐습니다. 이에 사도들과 그들의 제자이며 고대 교회 저술가인 교부들은 그리스도교 신앙을 유다교 지역과 문화를 뛰어넘어 전 세계로 확산시키기 위해 당대 유행하던 헬레니즘 철학 사고 체계를 도입합니다. 이 과정에서 베드로 사도의 오순절 설교처럼 그리스도교 신앙의 중심이 되는 복음 내용(케리그마, Kerygma)이 ‘믿을 교의’(도그마, Dogma)로 발전하게 됩니다. 교부(敎父, Patres Ecclesiae, Father of the Church)는 문자 그대로 ‘교회의 아버지’를 뜻합니다. 좀더 신학적으로 표현하면 ‘교회의 영적 아버지’라고 할 수 있지요. 일반적으로 교회의 영적 아버지는 사도들의 후계자인 주교들을 가리킵니다. 하지만 지금 여기서 말하고자 하는 교부는 주교가 아니더라도 사도들로부터 이어오는 신앙을 해설하고 정통 교리를 수호함으로써 교회 성장과 발전에 이바지한 고대 그리스도교 저술가들을 일컫습니다. 이들은 교회의 스승으로 성경의 언어와 문화로 주님의 삶과 가르침을 생생하게 느끼며 살았던 신앙의 오랜 증인들입니다. 이들은 모진 박해와 세상 거짓에 맞서 기꺼이 자신을 불사르며 복음의 진리와 거룩한 삶의 가치를 지켜낸 성인들입니다. 그리고 하느님 백성을 섬기고 돌보는 일을 천직으로 여겼던 목자들입니다.(한국교부학연구회 「그리스도교 신앙 원천」 머리말 참조) 고대 저술가들 가운데 ‘교부’로 인정받고 불리기 위해선 다음 네 가지 기준을 충족시켜야 합니다. 첫째, ‘고대성’을 지녀야 합니다. 가톨릭교회는 일반적으로 첫 교부를 제4대 교황 클레멘스 1세(재위 88~97년)로, 마지막 교부를 다마스쿠스의 성 요한(650?~749?)으로 봅니다. 따라서 1세기 말 사도 시대 이후부터 7~8세기까지를 ‘교부 시대’라 합니다. 적어도 이 시기 안에 활동해야 교부의 자격이 됩니다. 둘째, ‘정통 교리’입니다. 그 가르침이 정통 교리에 부합해야만 합니다. 셋째, ‘생활과의 조화’입니다. 그 가르침이 실제 생활과 조화를 이뤄야 합니다. 신앙과 생활이, 가르침과 삶이 조화를 이루지 못하고 이단에 빠지거나 윤리적으로 고결하지 못한 삶으로 추문을 일으킨 자는 교부라 불릴 수 없습니다. 넷째, ‘교회의 승인’입니다. 교회가 그를 교부로 선포하거나 그의 저서가 교회 문헌에 직접 인용돼야 합니다. 로마 교회를 중심으로 하는 서방 교회의 대표적인 교부는 성 암브로시오(339~397)와 성 아우구스티노(354~430), 헬라어 성경을 라틴어로 번역한 성 예로니모(347~419), 그레고리오 대교황(540?~604)입니다. 또 동로마 제국의 수도인 콘스탄티노플을 중심으로 하는 동방 교회의 대표적인 교부는 성 대 바실리오(329~379)와 성 나지안즈의 그레고리오(329?~390?), 성 요한 크리소스토모(344/354?~407), 성 알렉산드리아의 아타나시오(295?~373)입니다. 바티칸 성 베드로 대성전에는 사도좌를 바치고 있는 네 교부의 청동상이 있습니다. 앞쪽은 서방 교회 교부를 대표하는 성 암브로시오와 성 아우구스티노이며, 뒤쪽은 동방 교회 교부를 대표하는 성 요한 크리소스토모와 성 알렉산드리아의 아타나시오입니다. 동·서방 교부들이 사도좌를 받들고 있는 것은 성령 안에서 항상 일치를 이뤄야 한다는 교회 가르침을 표현한 것이라고 합니다. 교부들은 사도로부터 이어온 정통 신앙을 해설하고 수호하며 후대에 계승해 줌으로써 교회에 풍요로움을 더해 준 이들이라 했습니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교부들의 가르침을 중요하게 여겨 “거룩한 교부들은 이 성전(聖傳)이 살아 있음을 증언하고, 믿고 기도하는 교회의 관습과 생활 안으로 이 성전의 풍요로움이 흘러들어온다고 가르친다”고 밝힙니다.(「계시 헌장」 8) 따라서 교부들의 가르침은 교회의 소중한 영적 자산이자 보화입니다. 특히 초기 교부들은 유다이즘과 그리스도의 인성을 부정하는 가현설, 영지주의에 맞서 예수 그리스도의 온전한 신성과 인성을 옹호하는데 크게 공헌합니다.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는 참하느님이시며 참인간이시다’라는 신앙 고백을 성경과 사도 전승으로 증명했을 뿐 아니라 신앙의 유산으로 계승하였습니다. 리길재 전문기자 teotokos@cpbc.co.kr리길재 전문2025.07.09
![[금주의 성인] 다니엘 (7월 21일)](https://img.cpbc.co.kr/newsimg/upload/2025/07/15/QSk1752562244664.jpg)
[금주의 성인] 다니엘 (7월 21일)연대 미상, 출생 및 선종지 미상, 예언자, 구약인물 다니엘 성인. 굿뉴스 다니엘서는 구약 성경 예언서로, ‘다니엘’이란 이름은 아람어와 히브리어에서 ‘하느님께서 판결(심판)하신다’ 또는 ‘하느님께서 바르게 하신다’라는 뜻입니다. 다니엘서에 따르면, 다니엘은 유다 임금 여호야킴이 바빌론으로 끌려갈 때 함께 갔습니다. 그는 네부카드네자르·벨사차르·다리우스·키루스 임금 치하에서 궁중의 조언자로 그리고 포로로 끌려 온 유다 민족을 위한 예언자로 활동했습니다. 다니엘서를 포함해 구약 성경이 담고 있는 다니엘에 관한 내용은 다소 일관되지 못하고, 역사성도 부족합니다. 그래서 다니엘은 바빌론 유배 시대의 역사적 인물이 아니라 이스라엘의 지혜문학에서 형성된 상징적 인물로 여겨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상징적 인물의 기원도 분명하지 않습니다. 이렇듯 다니엘서 저자가 정확하게 누구인지는 모르나, 하시딤(Hasidim, ‘경건한 자들’이란 뜻)에 속한 사람 중 한 명으로 여겨집니다. 사후(死後)의 상선벌악(賞善罰惡)과 육신의 부활에 대한 교의를 처음으로 분명하게 표명한 것은 다니엘서 저자의 최대 업적으로 평가할 수 있습니다. 다니엘은 바빌론 정부가 하수인을 만들기 위해 유다 왕족이나 귀족 자녀들을 모아 교육할 때, 그 대상자로 뽑힌 사람 중 하나입니다. 그들은 이름까지 바꾸며 강제로 바빌론 문화를 익혀야만 했습니다. 바빌론의 내시장은 다니엘과 세 명의 동료에게 다른 이름을 지어주었는데, 다니엘은 벨트사차르라고 불렸습니다. 내시장은 그들을 임금의 시종으로 발탁했습니다. 다니엘은 나중에 네부카드네자르 임금의 꿈을 정확히 해석해 임금의 총애를 받게 됩니다. 그들에게 닥친 첫 번째 시련은 궁중에서 지내면서 율법에 어긋나는 부정한 음식과 술을 강요당한 것이었으나 다니엘은 내시장에게 간청해 슬기롭게 이를 극복할 수 있었습니다. 최대 시련은 임금이 금으로 만든 바빌로니아의 수호신, 마르두크 신상 앞에 절하라는 명령을 내린 것이었습니다. 모두가 이 명령을 따를 때, 다니엘과 동료는 결코 우상을 섬기지 않았습니다. 이에 그들은 타오르는 불가마 속으로 던져졌습니다. 그러나 주님의 천사가 내려와 그들을 구해주었다고 합니다. 세 젊은이는 가마 속에서 유유히 걸으며 하느님을 찬미하고 영광을 드렸습니다. 임금은 그 모습에 깜짝 놀라며 천사를 보내 당신의 종들을 몸소 구하시는 하느님을 찬미하고 세 젊은이에게 높은 벼슬을 내렸습니다. 가톨릭교회는 전통적으로 7월 21일을 성 다니엘의 축일로 기념합니다.cpbc2025.07.16
![[책꽂이] 「수험생을 위한 100일 은총 성경 쓰기」 외 3권](https://img.cpbc.co.kr/newsimg/upload/2024/08/20/HAI1724137079392.png)
[책꽂이] 「수험생을 위한 100일 은총 성경 쓰기」 외 3권 수험생을 위한 100일 은총 성경 쓰기 / 생활성서 2025학년도 대학수학능력시험이 오는 11월 14일 치러진다. 석 달이 채 남지 않았다. 수험생은 물론이고 이를 지켜보는 가족과 지인들의 마음도 초조할 수밖에 없다. 「수험생을 위한 100일 은총 성경 쓰기」는 은총과 지혜의 원천인 성경을 필사하며 묵묵히 수험생의 여정에 동참하도록 돕는다. ‘성경 쓰기’는 단순해 보이지만 그 안에는 단순한 필사를 넘어서는 중요한 의미가 담겨 있다.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 성경 안에서 사랑으로 당신 자녀들과 만나시며 그들과 함께 말씀을 나누신다”(「계시 헌장」 21항)라는 교부들의 가르침대로, 성경을 쓴다는 것은 곧 하느님과 적극적으로 대화를 나누는 행위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특별한 지향을 갖고 성경 필사를 하면 혼자서는 지치기 쉬운 마음을 하느님께 온전히 맡겨 드리고 그분의 목소리에 귀 기울일 수 있다. 더구나 가족을 위해 바치는 진심 어린 기도에 담긴 마음을 가장 잘 아시는 분은 하느님이심을 잊지 말자. 청진상륙작전 / 김정선 / 서교출판사 6·25전쟁 당시 인천상륙작전의 기만작전 중 하나인 청진상륙작전을 소재로 70여 년간 묻혀 있던 비화를 엮은 소설이다. 신학생 출신인 최병해(마르코, 1914~1994) 중령은 1950년 9월 15일 인천상륙작전에 사흘 앞서 이뤄진 청진상륙작전의 유일한 생존자다. 이 작전에서 최 중령이 이끈 특공대 500명은 전원 사망했다. 지원을 약속했던 미군의 함포사격도, 후속부대도 없었기 때문이다. 그해 10월 최 중령은 미주리호 함상에서 한국군 가운데 최초로 미국 대통령이 수여한 동성훈장을 받았지만, 죽은 부하들을 떠올리며 바다에 버렸다. 같은 이유로 한국군에서 수여한 금성충무무공훈장과 종군기장도 받지 않았다. 70년이 지난 2020년에야 최 중령의 유가족인 세 딸(최효선 수녀 등)에게 이 훈장들이 전달됐다. 저자는 “세 자매가 선친에 대한 전기문을 써달라며 그동안 모은 자료들을 주섬주섬 꺼냈다”며 “조국을 위해 산화한 최병해 중령과 500인의 지워진 영웅들이 이룬 청진상륙작전이 현대사에 선명한 한 줄로 기록되기를 바란다”고 전했다. 겪어보면 안다 / 김홍신 / 해냄 굶어보면 안다, 밥이 하늘인 걸 코 막히면 안다, 숨 쉬는 것만도 행복인 걸 일이 없어 놀아보면 안다, 일터가 낙원인 걸 불행해지면 안다, 아주 작은 게 행복인 걸 … 「겪어보면 안다」는 소설가 김홍신(리노)이 인생을 살아가며 수없이 경험하고 깨달은 삶의 소회를 엮은 책이다. 작가의 139번째 출간작이자 4년 만에 선보이는 산문집으로, ‘아프고 잃고 떠나보낸 뒤 비로소 깨달은 인생의 참된 행복’을 주제로 40여 편의 이야기를 정리했다. 환경이 변하고 세대가 달라져도 사는 일에 대한 고민은 크게 다르지 않은 세상에서, 따뜻한 옆집 할아버지 같은 노작가의 진솔한 고백이 깊은 감명을 선사한다. 별다올 아침 산책 / 오세윤 / 북나비 저자 오세윤(토마스 아퀴나스)의 표현을 빌리자면 80여 년 세상 한 번 어지럽게 산 남자의 삶에 대한 수필이다. 1938년생인 저자는 38선 인접 북녘 바다 마을에서 태어나 해방을 맞았고, 공산 정권을 피해 월남했다 전란의 생지옥을 겪었으며, 어렵게 학업을 이어가 소아과 의사로 한평생을 살았다. 굴침스레 살아내며 보고 느끼고 사랑하며 산 세상을 글로 엮어 꾸준히 펴내고 있다. 이번 책에서도 사람 사는 이야기, 살아야 할 의미에 대해 썼다. 윤하정 기자 monica@cpbc.co.kr윤하정2024.08.23

예수의 신성·인성 결합과 삼위일체 교리 제시[저는 믿나이다] (43) 테르툴리아누스와 오리게네스 3세기 호교 교부 테르툴리아누스와 오리게네스는 삼위일체 하느님 안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과 인성의 결합을 제시한 위대한 신학자들이다. 테르툴리아누스(왼쪽), 오리게네스 중세 삽화. 3세기 그리스도교는 로마 황제의 조직적 박해에도 불구하고 성장을 거듭했습니다. 사도들의 후계자인 지역 교회 주교들을 중심으로 교계제도가 든든히 뿌리내리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예비 신자 교육 기간도 3년으로 굳어지고 있었습니다. 또 2세기 때부터 활발히 진행되었던 성경 정경 목록 작업도 어느 정도 마무리되었습니다. 이처럼 3세기 교회는 많은 순교자를 배출하면서도 주님이신 예수 그리스도와 삼위일체 하느님, 그리고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에 대한 신앙 규범을 확정하기 위해 열띤 토론을 벌였습니다. 이 시기 성경 정경과 사도들의 전승에 기초해 삼위일체 하느님과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신앙 규범의 기초를 다지는 데 큰 역할한 두 인물이 있습니다. 바로 호교 교부들인 서방의 테르툴리아누스와 동방의 오리게네스입니다. 최초의 서방 호교 교부인 퀸투스 셉티미우스 플로렌스 테르툴리아누스(155~230?/240?)는 그리스도론에 있어 서방이 동방보다 몇 세기 앞서는 큰 신학 업적을 남깁니다. 그는 삼위일체 하느님에게 ‘성삼’(Trinitas), ‘위격’(persona)이라는 신학 용어를 처음으로 사용했습니다. 그래서 라틴 교부 가운데 아우구스티누스 다음으로 뛰어난 신학자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평신도였던 그는 안타깝게도 몬타누스주의 이단에 빠졌을 뿐 아니라 극단적인 윤리 생활과 지나친 엄격주의를 강조해 배우자 사별 후 재혼하는 것도 간음이며, 박해를 피해 숨는 것도 배교이며, 배교·살인·간음 등 대죄는 교회도 사해줄 수 없다고 가르쳤습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인의 보편 사제직을 강조해 반 교계제도를 주장했습니다. 교회는 이를 ‘테르툴리아누스주의’라 부르며 이단으로 단죄했습니다. 하지만 몬타누스주의 이단에 빠지기 전 초기 그는 신학 저술을 통해 교회의 신앙 규범 틀 안에서, 유일하신 하느님의 본질 안에서 아버지·아들·영이라는 고유한 실재가 구체적으로 드러내며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을 입증하는 데 노력했습니다. “오직 하느님은 한 분뿐이시며 모든 것에 앞서서 발하신 그분의 말씀으로, 무에서 만물을 만드신, 세상의 창조주 외에는 다른 하느님이 없다고 믿어진다. 이 말씀은 그분의 아들로 불리며, 하느님의 이름으로 이스라엘 백성의 선조들에 의해 여러 모습으로 보여졌으며, 예언자들 안에서 항상 그 말씀이 들렸고, 마지막 날에 하느님 아버지의 영과 권능으로 인하여 동정녀 마리아에게 내려오셨으며, 그분의 태중에서 육이 되셨고, 그분께 잉태되어 나셨으며 예수 그리스도가 되셨으며, 그 다음에 새로운 율법과 하늘나라에 대한 새로운 약속을 설교하시고 기적을 행하셨고,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시고, 사흗날에 부활하셨으며, 하늘에 올라 성부 오른편에 앉으셨으며, 믿는 이들을 움직이시는 대리자 성령의 힘을 보내셨고, 영광 속에 다시 오시리니, 성인들은 영원한 생명과 천상 약속의 열매를 누리도록 받아들이고 불경한 이들은 영원한 불로 단죄하시기 위함이며, 육의 회복과 함께 영혼과 육 둘의 부활이 이루어질 것이라 믿어진다.”(테르툴리아누스, 「이단자들의 규정」 13, ‘신앙의 규범’, 황치헌 신부 역, 「고대 교회사 사료 편람」 289쪽) 아울러 테르툴리아누스는 예수 그리스도의 위격 안에 두 본성 곧 ‘신성’과 ‘인성’이 항구하게 결합하여 실재한다고 강조했습니다. “육이 영이 되거나 영이 육이 되지 않는다. 물론 육과 영은 온전히 하나의 주체 안에 있을 수 있다. 이들로부터 예수가, 육으로부터 인간이, 영으로부터 하느님이 존재한다.”(테르툴리아누스, 「프락세아스 반박」 27.; 「교부들의 그리스도론」 460쪽) 이러한 테르툴리아누스의 신학은 삼위일체 하느님께 대한 325년 니케아 공의회와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과 인성에 대한 451년 칼체돈 공의회의 교의 선포에 기초를 제공합니다. 서방 라틴 교회에서 테르툴리아누스가 활동하던 시기 동방에서는 오리게네스(185~253)가 호교 교부로서 이집트 알렉산드리아에서 맹활약을 펼쳤습니다. 그는 어릴 때 아버지 레오니데스가 순교하자 그 역시 순교를 갈망했습니다. 그래서 신학과 철학 등 학문 연구에 몰두하면서도 고신 극기에 힘썼습니다. 자주 단식하고, 맨바닥에서 자고, 두 벌의 옷을 갖지 않고 신발도 신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철저한 금욕 생활을 위해 스스로 거세를 했습니다. 이 일로 그의 사제품은 무효가 되고, 파문까지 받아 교회에서 내쫓기게 됩니다. 그는 로마 데치우스 황제 박해 때 체포돼 모진 고문을 겪고 옥살이를 했습니다. 그의 200여 편 저술 가운데 가장 대표하는 책이 「원리론」입니다. 하느님, 세상, 인간, 성경 등 네 권으로 구성된 이 책은 가장 오래된 신학 교과서로 고대 교회 「신학대전」으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오리게네스 신학의 중심은 ‘아버지 하느님’입니다. 영이며 빛이며 절대적 원리이신 아버지 하느님께서 세상을 창조하시고 보존하시며 다스리는 분이시며, 성부의 선하신 형상인 ‘둘째 하느님’이신 성자는 성령과 함께 성부와 피조물 사이의 중재자 역할을 하는 분이라고 가르칩니다. 그는 또 그리스도 안에 하느님의 로고스인 ‘신성’과 예수의 영혼과 육신으로 구성된 ‘인성’이 결합해 있다고 강조합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라는 한 위격 안에 신성과 인성이 밀접하게 결합해 있기에 신성과 인성의 속성들을 서로 교환해 적용할 수 있다는 ‘신인 속성 교환’ 이론을 새롭게 제시했습니다. 오리게네스는 이 신인 속성 교환 이론에 따라 성모 마리아를 ‘하느님의 어머니’라고 부를 수 있다고 합니다. 마리아는 인간 예수를 낳았지만, 그리스도의 신성과 인성의 속성들이 한 위격 안에서 서로 교환되기에 하느님의 어머니가 된다고 합니다. 리길재 전문기자 teotokos@cpbc.co.kr리길재 전문2025.09.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