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예수 그리스도의 행적](//cpbc.co.kr/CMS/newspaper/2011/08/rc/386752_1.1_titleImage_1.jpg)
[재미있는 가톨릭교리](11) 예수 그리스도의 행적하느님 사랑 이웃 사랑 몸소 보여줘예수님께서는 공생활을 하는 동안 한 곳에 머무르지 않고 이스라엘 곳곳을 다니면서 수많은 행업의 발자취를 남기셨다. ▶기적 활동 예수님께서 행하신 기적은 이 세상 모든 사람들을 구원하시려는 하느님 구원 의지와 능력을 드러내고, 예수님은 눈으로 볼 수 없는 하느님을 보여주는 '하느님의 계시자'라는 사실을 나타낸다. 이처럼 기적은 '표징'으로서 자리한다. 1)치유 기적 예수님은 나병 환자, 중풍 병자, 하혈하는 부인, 귀 먹고 말 더듬는 이, 벳사이다의 눈먼 이 등을 치유하셨다. 예수님은 안식일인데도 시몬의 병든 장모, 손이 오그라든 사람 등을 고쳐주셨다. 예수님은 기적을 통해 단지 아픈 몸만이 아니라 병든 마음까지 치유해주셨다. 이는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마태 9,2)는 말씀에 잘 나타나 있다. 예수님은 치유 기적을 행하시면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믿음의 중요성을 강조하신다. 이는 예수님께서 치유된 사람에게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마르 5,34)고 말씀하신 데서 살펴볼 수 있다. 2)구마 기적 예수님은 안식일에 카파르나움 회당에서 더러운 영이 들린 사람을 치유하셨고, 게라사인들 지방에서 더러운 영이 들린 사람을 고쳐주셨다. 예수님은 마귀 들려 말 못하는 이와 더러운 영이 들린 시리아 페니키아 여인의 딸을 치유하셨다. 우리는 구마 기적을 통해 인간 자신이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 행업에 힘입어 죄나 악의 힘을 물리칠 수 있다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 죄나 악은 마귀나 사탄 또는 더러운 영이 아닌 온전히 인간의 인식과 자유 의지를 통해 들어오기 때문이다. 3)소생 기적 예수님은 회당장의 어린 딸, 과부의 외아들, 베타니아 마을의 마르타와 마리아의 형제 라자로를 살리셨다. 이는 당신 자신이 부활의 그리스도, 영원한 생명의 그리스도라는 것을 미리 보여주고 알려주신 것이다. 4)자연 기적 예수님은 카나의 혼인잔치에서 포도주가 떨어지자 물독 여섯 개를 물로 채우고 이를 포도주로 변화시키셨다. 예수님은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오천 명도 넘는 이들을 배불리 먹이셨다. 이 모든 자연 기적은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 능력을 엿보게 한다. 5)성경에 나타난 기적에 대한 올바른 이해 고대인들은 기적을 신들이나 영들의 권능과 현존을 강하게 체험하는 것으로 이해했다. 성경 저자들과 이스라엘 백성들은 기적을 신들과 영들이 아닌 하느님의 권능과 현존을 더 뚜렷하게 감지하는 사건으로 받아들였다. 신약의 기적들은 구약의 기적들과 연관성을 갖는데, 신약에서는 하느님께서 인간을 구원하시기 위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친히 역사(役事)하신다는 결정적 의미를 담고 있다. 성경에서 기적은 '신앙을 가진 이들이 하느님 구원 행위의 표징으로 이해하는 괄목할만한 사건들'을 가리키며, 예수 그리스도의 기적이란 '결정적 구원의 약속을 알려주고 그 약속이 이미 실현되기 시작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성전 정화 예수님은 성전을 하느님 아버지 집이자 기도의 집으로 거룩히 여기셨다. 당시 성전에는 환전상과 장사꾼들이 있었다. 예수님은 성전을 '강도들의 소굴'로 만들어버린 그들 행태에 분개해 그들을 모두 성전에서 쫓아내셨다. 유다인들이 예수님께 표징을 요구하자 예수님은 성전을 허물면 사흘 안에 다시 세우겠다고 말씀하셨다. 예수님의 이같은 말씀은 성경에 기록된 것처럼 당신의 몸, 곧 성전이 십자가 죽음에서 사흘 만에 부활하리라는 것을 염두에 두고 하신 것이다. ▶가난하고 소외된 이들과 함께하는 삶 예수님께서는 가난한 이와 굶주린 이, 세리와 창녀들, 당시 사회에서 죄인들로 취급됐던 병자들, 존중받지 못했던 어린이와 여자들, 특별히 고아와 과부들을 가까이 하셨다. 예수님은 사랑이신 하느님, 선한 사람들뿐 아니라 악한 사람들까지 품으시는 자애로우신 하느님, 의인들보다도 죄인을 부르러 오신 하느님, 잃었던 아들을 되찾고 기뻐하시는 하느님을 당신 전 생애를 통해 증거하셨다. 교회 역시 예수 그리스도의 모범을 따라 가난한 이들을 도와주고 소외된 이들을 돌보며, 억압받는 이들을 해방하는 사명을 충실하게 수행해야 한다. 이는 그리스도인의 본질적 사명인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을 실천하는 것이며, 정의와 평화가 넘치는 하느님 나라를 건설하는 일이다. 제공=서울대교구 사목국조은일2011.08.16
[생활 속의 복음] 그리스도왕 대축일(성서주간)- 에수님이 세상 왕들과 다른 점은?이기양 신부(서울대교구 10지구장 겸 오금동본당 주임)오늘은 전례력상 올해의 마지막 주일인 연중 제34주일이며, 동시에 권능과 신성과 지혜와 힘과 영예를 받기에 합당한 그리스도가 만물의 왕이심을 선포하는 대축일입니다. 오늘의 가르침처럼 예수님은 과연 우리 왕이실까요? 예수님은 이 세상 왕들처럼 화려한 옷을 입거나 번쩍이는 왕관을 쓰신 적이 없습니다. 세상 임금들이 축복과 환호 속에서 태어났던 것과 달리 예수님은 아무도 없는 외딴 마구간에서 태어나셨습니다. 또한 왕에게는 언제나 그럴듯한 고관대작들이 온갖 감언이설로 갖은 찬사와 산해진미를 바치는 반면, 예수님 주변에는 가난한 사람, 고통 받는 사람, 천대 받는 죄인들이 득실거렸습니다. 세상 임금들이 권위로 백성을 억누르고 살았다면, 예수님께서는 "너희 가운데에서 높은 사람이 되려는 이는 너희를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마르 10,43)는 말씀처럼 낮은 자의 모습으로 사셨고 최후만찬 석상에서는 제자들의 발을 몸소 씻어 주시면서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할지를 온몸으로 가르쳐주셨습니다. 오늘날 세상 모든 왕들의 명성과 업적은 사라졌지만 예수님의 삶과 가르침은 우리 안에 길이 살아 있습니다. 지금도 예수님에 관한 말씀은 성경으로 기록되어 세상 역사를 바꾸는 '생명의 책'으로 남아 있으며, 그를 따르는 수많은 사람들은 예수님을 왕을 넘어서 우리의 구원자요, 영원한 생명을 주시는 분으로 믿고 고백하며 살아갑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만이 참 왕이시며 영원한 생명을 주시는 분임을 믿고 가르치기 위해 교회는 그리스도왕 대축일을 지내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 그리스도왕 대축일은 예수님처럼 살아가는 것이 참된 길임을 다시 한번 깨우쳐줍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하면 예수님처럼 살 수 있을까요? 미국에서 가장 존경받는 대통령으로 길이 기억되는 인물이 아브라함 링컨입니다. 어린 시절 링컨은 집이 너무 가난해서 초등교육조차 제대로 받을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어머니는 어린 링컨에게 성경을 통해 끊임없이 하느님 말씀을 들려주었고, 하느님 말씀을 살아가는 사람이 되기를 원했습니다. 링컨은 대통령에 취임하면서 "남을 심판하지 마라. 그래야 너희도 심판받지 않는다."(마태 7,1)는 말씀을 택했고 일생을 하느님 안에서 사신 분입니다. 링컨에게는 에드윈 스탠턴이라는 정적(政敵)이 있었습니다. 스탠턴은 당시 가장 유명한 변호사였는데 한 번은 두 사람이 함께 사건을 맡게 된 적이 있었습니다. 이 사실을 모르고 법정에 앉아 있던 스탠턴은 링컨을 보자마자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저 따위 시골뜨기와 어떻게 같이 일을 하라는 겁니까?"하며 나가 버렸습니다. 이렇듯 스탠턴이 링컨을 얕잡아 보고 무례하게 행동한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습니다. 세월이 흘러, 대통령이 된 링컨은 내각을 구성하면서 가장 중요한 국방부장관 자리에 바로 스탠턴을 앉혔습니다. 참모들은 링컨의 이런 결정에 놀랐습니다. 왜냐하면 링컨이 대통령에 당선되자 스탠턴은 "링컨이 대통령이 된 것은 국가적 재난"이라고 공격했기 때문입니다. 모든 참모들이 재고를 건의하자 링컨은 "나를 수백 번 무시한들 어떻습니까? 그는 사명감이 투철한 사람으로 국방부 장관을 하기에 충분합니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래도 스탠턴은 대통령님의 원수가 아닙니까? 원수를 없애버려야지요!" 참모들 말에 링컨은 웃으며 말했습니다.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원수는 마음 속에서 없애 버려야지요! 그것은 '원수를 사랑으로 녹여 친구로 만들라'는 말입니다. 예수님도 원수를 사랑하라고 하셨습니다." 링컨이 암살자의 총에 맞아 숨을 거두었을 때 스탠턴은 링컨을 부둥켜안고 통곡하며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여기, 가장 위대한 사람이 누워 있습니다." 과연 링컨은 자기를 미워했던 원수까지도 용서하고 사랑한 진정한 승리자였습니다. 연중 제34주일은 성서주간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그리스도를 왕으로 고백하고 따라 살 수 있는 힘을 그분의 삶을 기록한 성경을 통해서 얻습니다. 그리스도의 부르심에 따라 우리를 창조하신 하느님과 일치를 이루는 길은 성경 말씀을 읽어 마음에 새기고 실천할 때 가능하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겠습니다. ▲ 지난 3년 동안 '생활 속의 복음'을 연재해주신 이기양(요셉) 신부님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교회력으로 새해가 시작되는 대림 제1주일(29일자)부터 인천교구 홍승모(미카엘, 강화본당 주임 겸 인천가톨릭대 교수) 신부님께서 집필해 주십니다.조은일2009.11.17

아버지의 온유함[월간 꿈 CUM] 테마로 읽는 성경 (4) 성경은 주로 하느님을 아버지, 남성으로 표현하고 어머니, 여성으로 드러내는 부분은 적습니다. 그런데 이것은 성차별 때문이 아닙니다. 만일 그렇다면 하느님의 여성성은 성경에서 아예 제거되었을 것입니다. 사실 하느님께는 우리 인간과 같은 성이 없습니다. 하느님께서는 결코 인간의 모습이 아니시다. 그분께서는 남자도 여자도 아니시다. 하느님께서는 성을 구별할 여지가 없는 순수한 영이시다.(「가톨릭 교회 교리서」 370항) 그런데도 굳이 아버지라는 표현을 사용하는 이유는 있습니다. 아버지와 어머니는 모두 부모로서 동등합니다. 하지만 몸소 태중에 자녀를 품은 어머니와 자녀의 관계가 친밀성을 강조하기에 적합하다면, 몸 밖에서 자녀를 낳은 아버지와 자녀의 관계는 구분을 잘 드러낼 수 있습니다. 인간이 하느님과 구분되는 독립적인 존재라는 점, 여기에 인간의 자유가 들어갈 자리가 있습니다. 우리는 부모의 집착이 심한 경우, 즉 자신과 자녀를 일체화할 때 자녀가 독립적인 인격체로서의 자유를 누리지 못하고 부모의 의지를 실현하는 도구가 되어 불행해지는 것을 봅니다. 그리고 하느님을 아버지로 표현하는 것은 범신론과의 차별화 때문에도 중요합니다. 예를 들어, 힌두교에서는 창조주와 피조물이 구분되지 않고 융합되어 있습니다. 즉, 내가 신이고 신이 곧 나인 것입니다. 이러한 신관에서는 하느님의 초월성이 드러나지 않습니다. 그래서 구원관도 하느님의 은총에 의한 구원이 아니라 스스로 도를 닦아 해탈에 이르는 구원을 말합니다. 물론 하느님을 아버지로 부른다고 해서 그분이 인간 아버지와 같다는 말은 아닙니다. 누구도 하느님과 같은 아버지일 수는 없습니다. 그래서 어떤 이들은 ‘하느님 아버지’라는 표현을 들으며 하느님께 대한 거부감을 느낍니다. 자기 아버지의 부정적인 면이 생각나서 그런 것이죠. 성경은 하느님께서 우리의 아버지와 다른 분이시라고 합니다. 내 아버지와 어머니가 나를 버릴지라도 주님께서는 나를 받아 주시리라.(시편 27,10) 하느님의 온유함은 인간 아버지의 온유함을 아득히 넘어서고 있습니다. 따라서 인간 아버지의 이미지를 하느님께 적용하려 해서는 안 됩니다. 하느님께서 어떤 아버지이신지 알기 위해 우리는 예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아무도 하느님을 본 적이 없다. 아버지와 가장 가까우신 외아드님 하느님이신 그분께서 알려 주셨다. (요한 1,18) 예수님은 하느님을 ‘아빠’라고 부르셨습니다. “아빠! 아버지! 아버지께서는 무엇이든 하실 수 있으시니, 이 잔을 저에게서 거두어 주십시오.” (마르 14,36) ‘아빠’는 어린이의 언어입니다. 아버지를 세상에서 가장 강하며 자신을 위해 무엇이든 할 수 있는 슈퍼맨으로 신뢰하는 어린이가 사용하는 용어입니다. 그리고 루카 15장에서 예수님은 ‘자비로운 아버지’의 비유를 통해 하느님 아버지의 온유함을 가장 훌륭히 보여주십니다. 자신이 살아있음에도 마치 죽은 것처럼 유산을 요구하여 받아 떠나서 탕진하고 돌아온 아들을 맞이하는 아버지의 모습에서 우리가 어떠한 죄를 얼마나 크게 자주 짓는다 하더라도 우리를 용서하시고 다시 받아들이시는 하느님의 모습을 봅니다. 하느님의 온유함에는 한계가 없습니다. 이 비유에서 특히 주목할 부분은 20절입니다. 그가 아직도 멀리 떨어져 있을 때에 아버지가 그를 보고 가엾은 마음이 들었다. 그리고 달려가 아들의 목을 껴안고 입을 맞추었다.(루카 15,20) 어떻게 아버지가 돌아오는 아들을 가장 먼저 발견할 수 있었을까요? 아마 아버지는 아들이 떠난 날부터 매일 동구 밖을 쳐다보고 있었을 것입니다. 제발 아들이 무사히 돌아오기만을 바라면서 말입니다. 이 아버지의 마음을 가득 채운 것은 원망이 아니라 염려였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아들이 돌아와서 용서를 청하기 훨씬 전에 아버지는 이미 그를 용서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하느님의 용서는 우리의 회개를 앞섭니다. 우리는 그 용서를 받아들이기만 하면 됩니다. 회개, 즉 돌아감은 하느님의 마음을 움직여 용서를 끌어내기 위해서가 아니라 이미 주어지고 있는 용서를 받아들이는 데 필요한 것입니다. 부활 후 제자들을 만나는 예수. 의정부교구 마재 성가정 성지 그리고 부활하신 예수께서는 갈릴래아 호숫가에서 다시 만난 제자들을 이렇게 부르십니다. “얘들아, 무얼 좀 잡았느냐?” (요한 21,5) 여기 사용된 ‘얘들아’라는 의미의 그리스어 ‘파이데이아’는 7세 미만의 어린이들을 가리킵니다. 가장 어둡고 고통스러운 순간에 당신을 배신하고 버린 괘씸한 제자들이지만, 하느님 아버지의 온유함을 그대로 품은 예수님의 눈에는 마냥 그들이 무섭고 어찌해야 할 바를 몰라서 도망쳐 버리고만 가련한 어린아이들로만 보이는 모양입니다. 하느님은 이렇게 온유한 우리의 아버지이십니다! 글 _ 함원식 신부(이사야, 안동교구 갈전마티아본당 주임, 성서신학 박사) 1999년 사제서품 후 성경에 대한 전문적인 연구를 위해 프랑스로 유학, 파리 가톨릭대학교(Catholique de Paris)에서 2007년 ‘요나서 해석에서의 시와 설화의 상호의존성’을 주제로 석사학위를, 2017년 ‘욥기 내 다양한 문학 장르들 사이의 대화적 관계’를 주제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cpbc2025.07.25
![[20세기를 빛낸 신학자들]<11>한스 우르스 폰 발타사르(중)](//cpbc.co.kr/CMS/newspaper/2013/07/rc/465269_1.1_titleImage_1.jpg)
[20세기를 빛낸 신학자들]한스 우르스 폰 발타사르(중)역사의 중심인 십자가 사건, 삼위일체 주님 사랑의 표현 그리스도 중심으로 역사를 새롭게 해석한 발타사르.발타사르는 예수 그리스도를 역사의 규범과 기준으로 제시한 다음, 역사를 그리스도 중심으로 새롭게 해석했다. 발타사르는 역사를 그리스도교 이전의 역사, 예수의 시대, 역사의 완성인 십자가 사건으로 나눴다. 그리스도교 이전의 역사는 '하느님의 오랜 인내의 시간'으로 또 다시 두 부분, 성경 밖의 역사와 구약이라고 부르는 성경의 역사로 구분된다. 발타사르는 성경 밖 역사에서 인류가 완성을 추구하며 문명 형성에 큰 도움을 받았던 세 가지 요소를 지적한다. 그것은 신화와 철학과 종교다. 그리스도교 이전의 역사, 하느님의 오랜 인내의 시간 신화에서 인간의 완성은 수직적 차원, '위로부터 빛의 개입'으로 이뤄진다고 여겨진다. 그러나 신화는 인간과 세상을 오직 신들의 실재로부터 해석하고 파악하기에 환상에 머문다. 이에 대한 반동으로 철학이 등장한다. 철학에서 인간의 정신은 자신의 비극적 한계를 벗어나 불멸을 얻으려고 시도하기에 구원은 존재 자체를 향한 열정(에로스)으로 나타난다. 하지만 철학은 초월적 이성이 도약하는 양식을 신과 인간의 차이를 망각할 정도로 그 유사성을 크게 받아들여, 기도와 예배가 없는 독백의 차원에 머문다. 신화와 철학의 이런 한계를 극복하기 위한 시도로 종교가 나타나는데, 종교는 신화와 철학, 곧 무한한 것과 유한한 것을 잇는 다리 역할을 한다. 유한한 것을 무한한 것에서 해석하는 신화적 종교(Vergil)는, 인간이 신에게 받은 사명을 순종으로 이행함으로써 구원이 이뤄진다고 주장한다. 다른 한편으로 모든 가치를 자신의 비전(das Eine)으로 통합하는 철학적 종교(Plotin)는 구원을 하나의 신비로, 곧 신에게 온전히 참여하는 모습으로 제시한다. 발타사르는 성경 밖 역사를 신화와 철학과 종교로 나눠 해석한 다음 성경의 역사인 이스라엘의 역사를 다룬다. 이스라엘은 특별한 지위를 차지하며 성경 밖 역사를 탁월하게 넘어선다. 왜냐하면 이스라엘은 하느님의 무조건적 사랑으로 선택됐고, 스스로 완성을 추구하고 시도한 성경 밖 역사와 달리 역사 안에서 하느님 구원의지를 체험하기 때문이다. 아울러 이스라엘은 하느님과 맺는 모든 관계를 위한 세계 역사적 모델이다. 이스라엘이 하느님과 맺은 계약은 특히 하느님과 인간의 긴밀한 관계를 잘 나타낸다. 하느님에게 선택받고 무조건적 사랑을 받은 이스라엘은 이제 그 응답으로 하느님만을 사랑해야 한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하느님께서 부르실수록 그분에게서 멀어져 갔다(호세 11,2 참조). 하느님께선 이스라엘을 가까이 하려 많은 예언자를 보내셨고, 마침내 하느님 종의 모습 안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신비를 암시하신다. 결국 구약은 다가오는 구원자를 향하며 점점 메시아 기대 사상으로 충만해진다. 역사의 상승, 하느님의 영원한 사랑의 결과 그리스도교 이전의 역사에서 분명하게 드러난 사실을 발타사르는 이렇게 지적한다. 인류의 역사는 그리스도의 구원 사건과 무관하게 도도히 흐르는 역사가 아니다. 역사는 시간적으로 뒤늦게 일어났던 그리스도의 사건과 직간접적으로 관계를 맺고 있을 뿐만 아니라, 그 사건을 미리부터 암시하고 있다. 역사를 수평적으로 보면, 그리스도의 사건을 향해 점진적으로 상승하고 있다. 역사는 단계적으로(신화→철학→종교→구약) 상승하면서 그리스도께로 향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역사의 이런 상승 운동은 역사 자체의 힘에 의한 것은 아니다. 역사가 자신의 힘으로 완성을 향해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는 뜻이다. 달리 말하면 역사의 완성인 그리스도의 사건은 점진적으로 상승하는 역사 운동의 결과물이 아닌데, 그리스도의 사건은 인류 역사가 자신의 힘으로는 결코 실현할 수 없는, 질적으로 완전히 새로운 사건이기 때문이다. 오히려 역사의 상승 운동은 질적으로 완전히 새로운 그리스도의 사건에 의해, 그리고 더 근본적으로 이 사건 안에서 계시된 삼위일체 하느님 신비에 의해 이뤄진 것이다. 하느님께서 당신 아들을 통해 성령 안에서 계시하신 인류를 향한 보편적 사랑은 인류 역사를 그 사랑 안으로 단계적으로 끌어당겼으며, 그렇기에 역사는 점진적으로 그리스도를 향해 상승했던 것이다. 바로 이런 의미에서 발타사르의 역사관 한가운데에는 삼위일체이신 하느님의 영원한 사랑이 자리 잡고 있다. 예수님의 시간을 이해하려면 발타사르가 그리스도론의 해석학적 길잡이로 제시하는 '사명'의 개념을 살펴보아야 한다. 사명은 예수님 인격만이 아니라 그 행적에도 깊이 관련된다. 예수님께선 하느님께 받은 일정한 사명을 지니고 세상에 파견되신다. 예수님 안에서 인격과 사명은 절대적으로 하나가 된다. 예수님께서 사명을 지니고 이 세상에 파견되신 근본 이유는, 그분이 이미 영원 안에서 성부에게서 나시기 때문이다. 곧 예수님의 사명은 영원에서 이뤄지는 성자 출현의 결과다.예수님의 시간, 하느님께서 끌어당기시는 시간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생애 전체를 하느님께서 맡겨주신 사명을 기꺼이 그리고 의식적으로 완수하는 데 헌신하신다. 발타사르는 항상 예수님의 절대적 사명의식을 강조한다. 당신의 사명을 철저하게 의식하셨다는 것이다. 그렇게 사명을 철저히 의식할 수 있었던 것은 성령의 도움 때문이다. 성령께서는 영원에서 성부와 성자를 중개하고 사랑으로 서로를 완전히 일치시키듯이, 구원역사 안에서도 하느님의 구원의지와 계획을 예수님에게 전달함으로써 예수님께서 당신의 사명을 분명히 의식하고 실행할 수 있었다. 이런 사명의식을 바탕으로 예수님의 시간을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다. 예수님 시간은 수평적인 측면에서 보면, 이스라엘 구원역사의 연장선 상에 있다. 그러나 지상에서 예수님 시간은 이전과는 질적으로 다른 새로운 시간이다. 예수님께서는 일생 동안 하느님 구원의지와 계획을 알리고 또한 직접 실현하는 사명을 철저하게 완수하셨다. 말하자면 예수님을 통해 하느님의 영원이 이 세상 시간 안으로 들어온 것이다. 예수님의 시간은 하느님께서 친히 이 세상에 개입하신 시간이다. 따라서 예수님의 삶은 결국 하느님에 의해 결정된 때, 십자가 죽음의 순간을 향해 달려간다. 이 죽음은 하느님 구원의지로 결정된 죽음이며 또한 궁극적으로 하느님 영광을 계시하는 죽음이기에, 예수님은 십자가를 피하지 않고 오히려 순종으로 받아들였다. 이렇게 예수님의 생애 전체가 하느님의 구원계획으로 이뤄졌기에, 발타사르는 예수님 시간을 하느님께서 '끌어당기시는 시간'이라고 부른다. 십자가 사건, 역사의 완성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분명 구원역사의 중심이다. 이 십자가에서 역사가 완성된다. 십자가 사건은 '우리를 위한' 사건이다. 유한한 인간의 근본 문제인 죽음을 극복하기 위해 하느님께선 인간의 죄를 그리스도 안에서 종말론적으로 심판한 사건이다. 이 십자가 사건에서 모든 사람의 죄가 낱낱이 밝혀진다. 인간의 절망적 상황과 죽음이 십자가 사건에서 극복됐다고 말할 수 있는 이유를 발타사르는 세 가지로 든다. 첫째, 예수님께서는 십자가 죽음을 통해 인간을 죽음으로 이끈 모든 죄를 온전하게 심판하심으로써 그야말로 세상의 모든 죄를 대신 짊어지시기 때문이다. 둘째, 예수님께서 성금요일에 저승에 내려가시어 하느님에게서 이미 영원히 버림받았던 과거의 모든 사람에게 구원의 복음을 선포하시고 그들을 해방하시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는 죄로 인해 버림받은 자들과 연대해 그들의 저주를 이겨내신다. 셋째,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부활로 죽은 이들을 심연에서 일으키신다. 부활로 죽음을 극복, 구원을 결정적으로 선포하신다. 따라서 인류는 십자가 사건을 통해 이제 하느님께 가까이 다가설 수 있게 됐다. 십자가는 과거와 현재의 실제적인 죄만이 아니라, 미래에 범할 수 있는 모든 죄까지도 받아들이고 이겨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발타사르에게 역사는 십자가에서 완성된다. 그러나 발타사르는 이 완성 사건이 영원하신 삼위일체 사랑의 신비에서 비롯한다고 생각한다. 세상과 화해하려는 성부의 의지가 성자의 사명 안에서 실현된다. 성자께서는 십자가에 이르기까지 성부께 순종하시면서 당신의 사명을 모두 완수하신다. 이런 구원활동에서 성령께서는 성부의 뜻을 성자에게 전달해 성부와 성자를 결합시키신다. 성부께서 세상 모든 죄를 당신 아들에게 짊어지게 하시는 그 희생적 사랑 안에서, 동시에 성자께서 성령 안에서 성부의 모든 뜻을 완수하는 동일한 희생적 사랑 안에서, 세상은 하느님과 결합하고 하나 된다. 성령 안에서 이루어지는 성부와 성자의 상호 희생적 사랑은 인간의 모든 죄악보다 더 강하고 더 힘이 세다. 이렇게 이 세상에서 일어난 구원과 완성의 사건인 십자가 사건이 단지 '삼위일체 하느님의 사랑의 표현'이라면, 십자가는 결국 삼위일체의 신비를 계시한다. 김선태 신부(전주교구 화산동본당 주임, 신학박사)조은일2013.07.23
![[조규만 주교의 하느님 이야기] (16) 아버지이신 하느님 : 사랑의 하느님](//cpbc.co.kr/CMS/newspaper/2011/09/rc/390846_1.1_titleImage_1.jpg)
[조규만 주교의 하느님 이야기] (16) 아버지이신 하느님 : 사랑의 하느님하느님 사랑은 용서와 희생2009년 6월 29일 베드로 사도 축일을 기해 교황 베네딕토 16세는 세 번째 회칙 「진리 안의 사랑」을 발표했다. 교황은 이 회칙에서 "사랑은 하느님께서 인류에게 주신 최고의 선물로 하느님의 약속이며 우리의 희망"이라는 놀라운 말씀을 하셨다. 바로 이 사랑이 우리가 영원히 살 수 있도록 하는 생명의 빵이다. 좋은 것일수록 짝퉁(모조품)이 많다. 교황은 그 점을 주의하라고 당부했다. 사랑이 가장 중요한 진리라는 것을 깨달으면 우리는 사랑이신 하느님을 많이 닮게 된다. 교황은 이미 첫 번째 회칙으로 「하느님은 사랑이시다」를 선포하며 사랑이신 하느님이 그리스도교 신앙의 핵심이라고 강조했다. 대부분 가요나 시, 소설이 사랑을 주제로 다룰 정도로 사랑은 오늘날 인간들이 끊임없이 추구하는 주제이며 그리스도교 신앙도 첫 번째, 두 번째 계명으로 사랑을 이야기한다. 많은 경우 상대방을 통해 자신이 사랑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상대방을 사랑함으로써 즐거움을 찾고 그렇게 해서 사랑이 시작된다. 그 사랑의 정상은 아가페적 사랑일 것이다. 바오로 사도는 사랑을 다음과 같이 표현한다. "사랑이 없으면 모두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사랑은 오래 참습니다. 사랑은 친절합니다. 사랑은 시기하지 않습니다. 사랑은 자랑하지 않습니다. 사랑은 교만하지 않습니다. 사랑은 무례하지 않습니다. 사랑은 사욕을 품지 않습니다. 사랑은 성을 내지 않습니다. 사랑은 앙심을 품지 않습니다. 사랑은 불의를 보고 기뻐하지 아니하고 진리를 보고 기뻐합니다. 사랑은 모든 것을 덮어주고 모든 것을 바라고 모든 것을 견디어냅니다."(1코린 13, 3-7) 이 말씀에 비춰 나를 바라보면 자신이 없어진다. '하느님이 사랑이시다'고 할 때 하느님에 대해 조금밖에, 내가 사랑하는 정도밖에 알지 못하는 셈이다. 우리는 어떤 사랑을 살고 있으며 어떤 사랑을 체험하고 있을까? 분명 사랑 체험을 한 사람은 하느님 사랑, 사랑이신 하느님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다른 이의 체험을 통해서도 하느님에 대해 간접적으로나마 이해할 수 있다. 구약성경은 이스라엘 사람들이 체험한 하느님 사랑 이야기이고, 신약성경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이스라엘 사람들이 체험한 하느님 사랑 이야기다. 우리는 성경을 통해 하느님을 이해할 수 있다. 예수님이 가르쳐 주신 하느님을 마음과 힘과 생명을 다해 사랑해야 한다.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사랑하는 외아들을 우리를 위해 아낌없이 제물로 바치신 사랑의 하느님이시다. 또 사람이 되시고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기꺼이 돌아가실 만큼, 우리의 양식인 빵이 되실 만큼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에 희망이 되신다. 하느님 사랑 자체를 가장 잘 이해하게 하는 것은 바로 사랑이다. 사랑은 은총을 보다 적극적이고 긍정적으로 이해하는 기점이 된다. 성숙한 사랑은 다른 사람을 있는 그대로 받아주고 상대방을 위해 자신을 희생하고 헌신하는 것이다. 바오로 사도가 말한 사랑이 아직까지는 가장 근접한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사랑하는 마음에는 논리적 이성이 끼어들지 못한다. 계산도 이익도 따지지 않으며 이성이 알지 못하는, 이해하지 못하는 이유와 논리가 있다. 하느님께 바탕을 두지 않는 사랑은 영원할 수 없다. 인간을 충만하게 하고 온전한 본연의 상태로 이끌어 해방시키는 사랑이 하느님께서 베푸시는 은총이다. 그것은 순수하게 무상으로 베풀어지는 사랑이다. 사랑은 본질적으로 강요될 수 없으며 자유를 바탕으로 한다. 사랑이 결여될 때 나타나는 현상이 고독이다. 고독은 한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 수용되지 못할 때 생겨난다. 권력도 사랑에 대치된다. 권력이란 한 사람이 다른 이를 지배하는 것이기에 개방되도록 만들어진 인간 본질에 반하는 것이다. 은총은 이러한 인간의 불능성에 대한 해답이다. 사랑의 한 가지 행위로 은총과 깊이 관련되는 용서가 있다. 용서는 사랑의 가장 뚜렷한 행위다. 예수님은 탕자를 용서하시는 아버지 모습을 통해 하느님을 소개하고 싶어 하셨다. 아버지 뜻을 철저하게 따른 예수님은 7번씩 70번까지 용서하라고 자신 있게 권유할 수 있었다. 과연 우리는 우리에게 잘못을 한 이를 용서할 수 있을까? 날마다 주님의 기도를 바치는 우리들의 반성거리가 아닐 수 없다. '용서'라는 사랑이 사람을 얼마나 변화시키는지 우리는 잘 알고 있다. 성경에 나오는 자케오, 야곱의 우물가 사마리아 여인, 막달라 여자 마리아, 무엇보다 바리사이파 사람 시몬 집에서 베풀어진 향연에서 마리아 모습이 대표적이다. 많이 사랑하는 사람은 많이 용서받을 뿐 아니라 많이 용서하는 사람이다. 많이 용서받기 위해서도 많이 용서할 필요가 있다. 하느님이 인간을 사랑하시는 분이라는 사실을 극명하게 보여준 '탕자의 비유'는 끊임없는 인간의 잘못에도 불구하고 결코 포기하지 않고 끊임없이 용서하시는 하느님 모습이다. 탕자의 아버지는 이미 탕자를 용서했다. 날마다 동네 어귀에서 아들을 기다리는 것은 아들을 용서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탕자의 귀향과 '하느님 제가 하늘과 아버지에게 죄를 지었습니다'는 죄 고백은 아버지가 용서했다는 것을 확인하는 절차에 불과하다. 귀향과 죄 고백 때문에 아버지가 아들을 용서한 것은 아니다. 간음하다 현장에서 들킨 여인에게 예수님은 "나는 네 죄를 묻지 않겠다"고 말씀하셨다. 그 여인이 죄를 고백했는지, 회개했는지, 어떤 결심을 했는지 성경은 알려주지 않는다. 먼저 예수님이 '용서'를 말씀하셨다. 용서받은 사람은 용서할 수 있다. 용서받기 위해서라도 용서해야 한다. 하느님은 사랑이시고 우리를 용서하는 분이시며 우리를 위해 자신의 아들을 희생 제물로 바치신 분이다. 우리는 그분의 사랑을 잘 알지 못한다. 우리 사랑이 작고 작은 사랑밖에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사랑이신 하느님은 참으로 큰 신비다. 정리=임영선 기자 hellomrlim@pbc.co.kr ※'조규만 주교의 하느님 이야기'는 평화방송 라디오(FM 105.3㎒)에서 매 주일 오후 6시 5분에 방송되며, 평화방송TV에서는 매주 화요일 오전 8시(본방송), 수요일 새벽 4시와 저녁 9시, 금요일 오후 4시, 주일 오후 6시에 재방송된다. 인터넷 다시 보기 www.pbc.co.kr조은일2011.09.27
![[조은나의 시사진단] 청년을 기다리며](https://img.cpbc.co.kr/newsimg/upload/2026/08/11/l6I1786431639983.jpg)
[조은나의 시사진단] 청년을 기다리며사무엘 베케트의 연극 ‘고도를 기다리며’에서 블라디미르와 에스트라공은 매일 같은 나무 밑에서 고도를 기다린다. 고도가 누구인지, 언제 오는지 모르면서도 그 자리를 떠나지 못한다. 청년을 기다리는 한국 교회의 모습도 이 장면과 닮았다. 문제는 청년이 오지 않는 데만 있지 않다. 교회가 여전히 같은 시간, 같은 공간, 같은 방식으로 청년을 기다리는 데 있다. 「한국 천주교회 통계 2025」에 따르면, 2025년 영세자는 6만 4073명이었고, 20~24세가 20.1%로 가장 많았다. 특히 남성 영세자의 96.8%가 군종교구 소속이었다. 청년은 분명 교회로 들어오고 있다. 그러나 전역 뒤 지역 본당으로 이어지는 통로가 없으니 그들의 신앙 여정은 군복과 함께 벗겨지고 있다. 본당의 예비신자 교리가 교중 미사 중심의 시간표에 있는 현실에서 교대 근무자와 주말 노동자, 취업 준비생은 시작부터 참여하기 어렵다. 세례 후에도 이름을 불러주는 공동체보다 봉사 요청을 먼저 만나는 경우가 적지 않다. 요사이 청년들의 목소리는 구체적이다. 성경 공부와 기도, 교리 교육과 각종 활동을 직접 운영할 수 있도록 청년을 양성해달라는 요구가 있다. 반면 일부 청년회에서는 미사 후 각자 귀가하고, 경우에 따라 모여도 공동체적 관계보다 음주와 회식만 남는다는 피로가 나온다. 이 의견을 전체 청년의 의견으로 일반화할 수는 없다. 그러나 대학가와 직장 문화에서도 친교 중심 회식이 적어지는 현실에서 청년 사목이 친교 모임만으로 관계를 만들고자 한다면 시대의 현실과 교회의 본질적 공동체성을 함께 상실하게 된다. 청년들은 삶의 의미를 발견하고, 신앙에 기초한 관계를 경험하기 위해 성당을 찾는다. 따라서 교회는 청년들에게 가톨릭 신앙의 고유성이 충실히 담긴 양질의 사목을 제공해야 한다. 물론 청년은 성사의 소비자가 아니며, 교회 역시 종교서비스의 제공자로 한정될 수 없다. 그러나 청년이 교회에서 기대하는 것은 일상에서도 경험할 수 있는 회식이나 단순한 친목이 아니라 복음과 성사, 기도와 식별, 신앙 안에서 형성되는 관계다. 그러므로 청년 사목의 ‘질’은 행사의 규모나 횟수가 아니라, 청년이 살아계신 그리스도를 만나고 교회 공동체의 주체로 성장하도록 얼마나 충실히 동반하는가에 달려있다. 이에 군종교구와 지역 교회를 잇는 전역자 연계 절차를 제도화하고, 대리구나 지구 단위의 청년 사목 전담팀과 거점 공간을 마련해야 한다. 본인의 동의를 받아 전역 후 실제 생활권의 본당을 안내하고, 첫 연락과 곁에서 동반하는 마중물 역할 또한 구성돼야 한다. 본당에 담당 사제가 없다고 청년 교리와 성경 공부를 접지 않도록, 사제가 교리와 성사의 방향을 책임지는 가운데 평신도 청년 교리교사와 동반자를 체계적으로 양성해야 한다. 이들은 새 영세자와 함께 성경을 공부하고 미사에 참여하며, 여가와 문화 활동도 신앙의 공동체성 안에 함께 할 수 있다. 세례는 일회적 행사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에 결합되는 성사적 사건이다. 청년 역시 행사에 즉시 투입할 봉사 인력이 아니라 세례로 그리스도의 사명에 참여하는 교회의 주체다. 이제 한국 교회가 물어야 할 것은 “청년은 언제 오는가?”가 아니다. “이미 온 청년이 복음과 성사 안에서 성장하고 서로를 동반하도록 누가 양성할 것인가?”이다. 기다림만 가득한 나무 밑을 떠나, 청년과 함께 신앙의 여정을 나아가야 한다. cpbc2026.09.16
한국가톨릭출판사협, 가톨릭 정신 책으로 알린다 19~23일 서울 코엑스 서울국제도서전 참가, 다양한 책 판매 및 체험공간 마련 한국가톨릭출판사협의회(회장 김수영 신부)는 19~23일 서울 코엑스에서 열리는 2013 서울국제도서전에 참가한다. 가톨릭출판사, 바오로딸, 분도출판사, 생활성서, 성바오로, 성서와함께 등 협의회 회원 출판사 6곳과 서울ㆍ수원ㆍ인천 가톨릭대출판부, 한국교회사연구소가 함께한다. 매년 열리는 서울국제도서전에 가톨릭계 출판사가 협의회 이름으로 가톨릭도서 부스를 공동으로 차려 참가하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그동안은 각 출판사가 개별 참가했다. 협의회는 가톨릭 도서 부스 주제를 '책, 사람 그리고 하느님-책을 통한 소통'으로 정했다. 출판사별로 부스 공간을 나누지 않고 영성ㆍ심리, 기도ㆍ묵상, 성경, 성인전, 문학, 아동 등 6개 분야로 나눠 관람객들이 각 출판사에서 나온 책을 분야별로 다양하게 접할 수 있도록 배려했다. 6개 분야에 들지 않더라도 출판사를 대표하는 주요 도서들도 전시, 판매한다. 이 밖에도 미디어관을 운영해 가톨릭교회가 제작한 DVD, 음반 등 영상물을 소개하며 상담, 성경쓰기, 성화 퍼즐맞추기 등 체험 공간도 마련한다. 협의회는 이번 도서전 참가가 가톨릭교회 출판 현황과 성과를 일반인에게 알리는 좋은 기회가 될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협의회 회장 김수영(분도출판사 사장) 신부는 "서울국제도서전이 선교의 작은 씨앗이 되기를 바란다"면서 "가톨릭 고유의 정신을 책을 통해 알릴 수 있게 돼 기쁘다"고 말했다. 협의회는 도서전에서 판매한 수익금 전액을 다문화 가정을 위해 쓸 예정이다. 수익금으로 대구가톨릭근로자회관, 광산구다문화가족지원센터, 성빈센트다문화가정센터, 성가누리, 루이즈의 집에 한국어 교재와 책을 선물한다. 한편 협의회는 저자와의 만남 행사로 홍성남(서울대교구 영성생활상담소장) 신부를 초청했다. 속 시원한 상담으로 인기를 끌고 있는 홍 신부는 22일 오후 6시 행사장 이벤트B홀에서 '자기 마음 돌보기'를 주제로 강의한다. 도서전 관람을 원하는 이들은 10일까지 서울국제도서전 누리방(www.sibf.or.kr)을 통해 관람객 사전 등록을 하면 무료로 입장할 수 있다. 사전 등록이 아닌 일반 입장료는 일반 3000원, 초ㆍ중ㆍ고ㆍ대학생 1000원이다. 박수정 기자 조은일2013.06.04

청년들, 바오로 사도 따라 전도여행서울 서원동본당 청년, 특별한 여름캠프에 호응서울대교구 서원동본당(주임 김찬회 신부) 청년들이 '사도 바오로 전도여행'을 다녀왔다. 본당 청년회는 14~15일 서울과 경기 일대 지정 장소에서 미션을 수행하는 형식의 여름캠프를 진행, 청년들에게 큰 호응을 얻었다. '나는 훌륭히 싸웠고, 달릴 길을 다 달렸으며, 믿음을 지켰습니다'(2디모 4,7)를 주제로 한 이번 캠프는 바오로 사도가 여러 곳을 누비며 복음을 전파한 것에 착안했다. 청년회는 캠프 목적지를 경기도 가평의 한 펜션으로 정한 뒤 절두산ㆍ남한산성ㆍ구산 성지를 비롯해 보라매ㆍ서울숲 공원, 남산 등을 미션 장소로 지정했다. 그리고 청년들이 십자가의 길 기도하기, 체조하기, 사진찍기, 깃발 꾸미기 등 각 장소에서 정해진 미션을 성공해야 다음 장소로 이동하도록 했다. 스마트폰 세대답게 스마트폰을 십분 활용한 점도 눈에 띈다. 모든 미션 지령과 답을 문자를 통해 주고 받았고, 성경 구절 맞추기 문제는 '성경' 애플리케이션을 활용토록 했다. 캠프에 참가한 80명은 5인 1조가 돼 청년회가 마련한 자동차로 이동했다. 관광버스를 타고 단체로 움직이는 기존 캠프에 식상했던 청년들은 공중파 예능 방송을 방불케 하는 프로그램에 환호했다. 청년들은 "여러 곳을 다니며 미션을 수행하다 보니 혈혈단신 먼 길을 떠났던 사도 바오로 성인의 고충을 온몸으로 이해할 수 있게 됐다"면서 "재미와 감동을 모두 갖춘 최고의 캠프였다"고 입을 모았다. 청년회 정희수(예로니모) 회장은 "3주 동안 미사 시간마다 캠프 홍보를 했는데, 그동안 전혀 단체 활동을 하지 않던 청년들이 30여 명이나 신청했다"면서 "색다른 캠프에 많은 관심을 보였고, 벌써 교리교사와 청년단체 활동을 하겠다는 청년들이 생겼다"고 말했다. 캠프 기획단계부터 청년들과 함께 한 임창재 보좌신부는 "청년공동체 일치와 화합을 위해 고심 끝에 마련한 캠프가 성공적으로 끝나 기쁘다"면서 "이번 캠프를 통해 청년공동체가 한층 활성화되길 바란다"고 말했다. 박수정 기자 catherine@pbc.co.kr조은일2012.07.17

남성적이면서 여성적인 온유함[월간 꿈 CUM] 테마로 읽는 성경 (3) 렘브란트(Rembrandt Harmenszoon van Rijn, 1606~1669)의 ‘돌아온 탕자’(The Return of the Prodigal Son), 262×205, 캔버스에 유화,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 에르미타슈미술관. 아들의 어깨를 짚은 아버지의 손을 보면 한쪽은 남자의 손, 다른 쪽은 여자의 손이다. 예수께서 직접 가르쳐 주신 단 하나의 기도로서 그리스도교의 가장 핵심적인 기도인 주님의 기도는 이렇게 시작합니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예수님은 우리도 당신처럼 하느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도록 가르쳐 주셨습니다. 고대 근동의 많은 신들은 남신과 여신으로 나뉘어 결혼도 하고 출산도 하는 것으로 묘사되었습니다. 심지어 신들 사이에서 불륜도 일어나죠. 인간의 세상을 신의 세계에 투영한 결과입니다. 하지만 비록 우리가 하느님을 아버지라고 부른다고 하더라도, 유일한 하느님의 성을 그처럼 남성이나 여성으로 규정할 수는 없습니다. 굳이 그러한 신관을 따른다면, 홀로 예수님을 낳은 하느님은 자웅동체가 되고 말 것입니다. 그런데 하느님은 남성도 여성도 아니지만, 그분께는 남성성과 여성성이 함께 있습니다. 하느님에게서 여성성을 제거하게 되면, 우리는 하느님의 분노하시고 심판하시는 모습만 보게 될 것입니다. 그렇지만 성경은 하느님께서 여성적인 온유함을 갖고 계심을 잘 보여줍니다. 신약성경에서 하느님의 여성적 온유함을 가리키는 데 사용된 대표적 그리스 단어 하나를 봅시다. 오이크티르모스(οἰκτιρμός). 이 단어는 연민을 뜻하는데, 모태(母胎)와 관계있습니다. 즉, 어머니가 자기 몸 안에 품었던 아이의 삶이 어떠하든지 항상 연민의 시선으로 바라보듯이, 하느님도 비록 우리가 죄인이어도 그렇게 바라보신다는 말입니다. 호세아서의 말씀을 들어봅시다. “에프라임아, 내가 어찌 너를 내버리겠느냐? 이스라엘아, 내가 어찌 너를 저버리겠느냐? 내가 어찌 너를 아드마처럼 내버리겠느냐? 내가 어찌 너를 츠보임처럼 만들겠느냐? 내 마음이 미어지고 연민이 북받쳐 오른다.”(호세 11,8) 마지막 문장은 직역하면, ‘내 모태가 요동친다’입니다. 하느님은 자녀를 바라보는 어머니의 심정으로 당신 백성을 바라보고 계십니다. 다른 말씀도 들어봅시다. “내가 에프라임에게 걸음마를 가르쳐 주고 내 팔로 안아 주었지만 그들은 내가 자기들의 병을 고쳐 준 줄을 알지 못하였다. 나는 인정의 끈으로, 사랑의 줄로 그들을 끌어당겼으며 젖먹이처럼 들어 올려 볼을 비비고 몸을 굽혀 먹여 주었다.”(호세 11,3-4) “보라, 내가 예루살렘에 평화를 강물처럼 끌어들이리라. 민족들의 영화를 넘쳐 흐르는 시내처럼 끌어들이리라. 너희는 젖을 빨고 팔에 안겨 다니며 무릎 위에서 귀염을 받으리라. 어머니가 제 자식을 위로하듯 내가 너희를 위로하리라. 너희가 예루살렘에서 위로를 받으리라.”(이사 66,12-13) 성경에는 하느님의 여성성을 드러내는 말씀이 놀랄 정도로 많습니다. 하느님은 심지어 인간에게서 여성성 혹은 모성이 사라진다 해도 당신의 여성성은 영원하리라고 말씀하십니다. “여인이 제 젖먹이를 잊을 수 있느냐? 제 몸에서 난 아기를 가엾이 여기지 않을 수 있느냐? 설령 여인들은 잊는다 하더라도 나는 너를 잊지 않는다.”(이사 49,15) 신약성경에는 예수께서 가엾이 여기셨다는 표현이 종종 나옵니다. 이 표현도 본디 모태가 요동치는 것을 가리킵니다. 그리고 예수께서는 멸망을 향해 달려가는 예루살렘을 두고 이렇게 한탄하십니다.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예언자들을 죽이고 자기에게 파견된 이들에게 돌을 던져 죽이기까지 하는 너! 암탉이 제 병아리들을 날개 밑으로 모으듯, 내가 몇 번이나 너의 자녀들을 모으려고 하였던가? 그러나 너희는 마다하였다.”(마태 23,37) 루카 복음 15장에 수록된 자비로운 아버지의 비유를 아실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도 하느님의 남성성뿐 아니라 여성성이 보입니다. 복음은 아버지가 재산을 모두 탕진하고 거지꼴로 돌아온 둘째 아들을 보고 가엾은 마음이 들었다고 합니다.(루카 15,29 참조) 이 표현은 직역하면 ‘모태로부터 연민을 느꼈다’입니다. 그래서 바로크 시대의 네덜란드 화가 렘브란트는 이 장면을 그린 성화에서 하느님의 남성성과 여성성을 동시에 표현하고 있습니다. 아들의 어깨를 짚은 아버지의 두 손을 자세히 보시면, 한쪽은 굵고 투박한 남자의 손이고 다른 쪽은 가늘고 섬세한 여자의 손이라는 사실을 알아차릴 수 있습니다. 그렇다고 온유함이 여성들만의 전유물이라는 말은 아닙니다. 남성적인 온유함도 있습니다. 하느님은 남성적인 온유함을 특히 아가서에서 신랑의 비유를 통해 드러내십니다. “나의 애인이여, 그대의 모든 것이 아름다울 뿐 그대에게 흠이라고는 하나도 없구려.”(아가 4,7) 당신의 신부인 우리 인간을 바라보는 하느님의 시선이 얼마나 부드럽고 따스한지요. 글 _ 함원식 신부(이사야, 안동교구 갈전마티아본당 주임, 성서신학 박사) 1999년 사제서품 후 성경에 대한 전문적인 연구를 위해 프랑스로 유학, 파리 가톨릭대학교(Catholique de Paris)에서 2007년 ‘요나서 해석에서의 시와 설화의 상호의존성’을 주제로 석사학위를, 2017년 ‘욥기 내 다양한 문학 장르들 사이의 대화적 관계’를 주제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cpbc2025.07.15

“왜 프란치스칸은 화폐 사용을 거부했는가”국내외 연구자들, 다양한 관점으로 6월 29일~7월 1일 서울 정동 프란치스코 교육회관에서 열린 제27차 프란치스칸 영성 학술발표회 셋째 날 작은형제회 신우창 신부가 발제하고 있다.작은형제회 제공 제27차 프란치스칸 영성 학술발표회가 6월 29일~7월 1일 사흘간 서울 정동 프란치스코 교육회관에서 열렸다. 발표회는 ‘복음적 삶’을 주제로 국내외 프란치스칸 연구자들이 프란치스칸 영성의 핵심인 복음적 권고와 카리스마를 신학적·성경적·역사적 관점에서 재조명한 자리였다. 첫째 날 미국 성보나벤투라 대학교의 마이클 F. 쿠사토(Michael F. Cusato, 작은형제회) 신부는 ‘서원인가, 카리스마인가? 프란치스칸 삶 이해의 출발점’ 주제 발표를 통해 “프란치스칸 소명의 중심은 모든 수도자에게 공통으로 부여된 청빈·정결·순명의 서원이 아니라 프란치스코와 그 동료들이 함께 나눴던 고유한 카리스마에 있다”면서 “프란치스칸 영성의 본질은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삶이며, 그 삶 안에서 청빈·정결·순명이 구체적으로 드러난다”고 설명했다. 아울러 쿠사토 신부는 「인준받지 않은 수도규칙」을 분석하며 ‘작음(minoritas)’이야말로 프란치스칸 카리스마의 핵심이라고 밝혔다. 그는 “성 프란치스코와 초기 형제들이 스스로를 단순히 ‘가난한 형제들’이 아니라 ‘작은형제들(Friars Minor)’이라 부른 것은 사회의 가장 낮고 소외된 이들과 함께 살아가겠다는 복음적 선택을 의미한다”고 했다. 이어 “이때 가난은 목적이 아니라 작은 이들과 함께하는 삶의 결과”라며 “사회적 약자와 함께 살아가는 삶이야말로 프란치스칸 정신의 본질”이라고 거듭 설명했다. 아울러 “초기 프란치스칸 공동체가 화폐 사용을 거부하고 노동과 탁발을 선택한 것은 금욕주의가 아니라, 화폐 가치를 조작해 서민을 착취하던 당시 경제 질서에 동참하지 않으려는 사회적 연대의 실천이었다”고 설명했다. 권웅용(작은형제회) 신부는 이어진 논평에서 ‘카리스마’와 ‘서원’이 단순한 선후 관계가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서 서로 연결된 두 차원이라는 점을 짚었다. 권 신부는 “쿠사토 신부의 논지를 더욱 풍성하게 하기 위해서는 카리스마와 서원, 작음과 가난의 관계를 보다 상호적인 관점에서 바라볼 필요가 있다”며 “카리스마 없는 서원은 형식주의에 머물 수 있고, 서원 없는 카리스마는 개인적 영감에 머물 위험이 있다”고 했다. 둘째 날 발표에서는 복음삼덕의 성경적 토대와 현대적 의미를 조명했다. 이용호(작은형제회) 신부는 아시시 성프란치스코 대성당의 프란치스코 알레고리를 통해 청빈·정결·순명의 상징성을 해석했고, 김미정(사도 성 안드레아 수녀회) 수녀는 “시노달리타스 시대에 평신도 역시 복음적 권고를 자신의 삶 안에서 실천해야 한다”고 제안했다. 김영선(마리아의 전교자 프란치스코회) 수녀는 복음삼덕의 성경적 기초를 중심으로 프란치스칸 영성이 성경 안에서 어떻게 형성됐는지 설명했다. 청빈과 정결, 순명의 세 서원을 각기 다른 시각에서 되짚은 셋째 날에는 신우창(작은형제회) 신부가 성녀 클라라의 가난을 통해 복음적 청빈의 의미를 재조명했고, 박성호(작은형제회) 신부는 보나벤투라와 올리비의 사상을 비교하며 프란치스칸 정체성과 가난의 의미를 분석했다. 최성욱(부산가톨릭대 신학대학 운영본부장) 신부는 현대 성 윤리의 관점에서 정결의 의미를 해석했고, 오수록(작은형제회) 수사는 성 프란치스코의 순명과 다산 정약용의 효 사상을 비교해 동서양의 윤리 전통을 연결했다. 이번 학술발표회는 프란치스칸 영성을 단순히 수도자의 서원으로 이해하는 데 머물지 않고, 복음을 살아가는 모든 그리스도인의 삶과 연결했다. 참가자들은 프란치스칸 카리스마의 본질이 ‘작은 이들과 함께하는 복음적 삶’임을 재확인하며, 오늘날 교회와 사회 안에서 복음의 가치가 어떻게 구현될 수 있는지 성찰했다. 박민규 기자 mk@cpbc.co.kr박민규2026.07.0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