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설] 5·18 40주년, 영성화와 대동정신 구현할 때 5ㆍ18 광주 민주화 운동이 올해로 40주년을 맞았다. 지난 40년간 5ㆍ18 광주 민주화 운동은 국회 청문회, 검찰 수사, 법원 판결 등을 통해 제 자리를 찾아왔다. 최초 발포 명령자 조사 등 일부 미흡한 사안이 남아 있지만, 그동안 노력을 통해 진상이 하나씩 규명되고 있다. 그럼으로써 5ㆍ18은 국가의 폭력에 항거한 학생들의 의거, 그리고 시민들의 궐기를 통해 이 사회에 민주주의가 뿌리내리도록 했다는 확고한 역사의 평가를 받고 있다.광주대교구장 김희중 대주교는 본지와의 40주년 인터뷰에서 “5ㆍ18은 거창한 정치적인 투쟁이 아니다”면서 “인권과 정의, 평화를 바탕으로 대동정신과 공동체 정신을 회복하고 남북이 언젠가 서로 자유롭게 합의하여 평화 통일을 이루는 징검다리를 놓자”고 제안했다. 성경에서 40은 특별한 의미가 있다. 홍수로 새 세상을 준비하는 데 40주야, 이스라엘이 가나안에 들어가는 데 40년, 모세가 시나이 산에서 하느님의 계명을 받기 위해 40주야 단식을 했고 예수님께서 승천하시기 전 40일 동안 지상에 머물렀다. 그래서 40이라는 숫자는 장차 성취할 중대한 사건을 위해 만반의 준비를 갖추는 시기를 의미한다.광주대교구는 전임 교구장 때부터 5ㆍ18정신의 영성화를 강조했고 이 정신에 따라 광주인권평화재단을 설립했다. 이를 통해 인권과 민주, 정의, 평화에 대해 의식을 가질 수 있도록 교육하고 연대, 나눔에 주력하고 있다. 이는 국민의 화합, 그리고 미래를 향한 발걸음을 떼는 데 큰 도움이 될 것이다. 진상은 진상대로 규명하되 대동정신 그리고 5ㆍ18정신의 영성화가 자리 잡을 수 있도록 힘을 모아야 할 것이다. 평화신문2020.05.13

십자군의 칼은 절규하는 무슬림과 그리스도인마저 처참히 살육[명작으로 보는 교회사 한 장면] (19) 구스타브 도레의 ‘안티오키아 학살’ 구스타브 도레, ‘안티오키아 학살’, 삽화, 1877년, 파리. 무슬림 세력에 대항한 십자군 632년 무함마드가 사망한 후 그를 추종하던 세력은 순식간에 아라비아 반도 주변의 이교도들을 소탕하고, 아라비아 반도 북서부에 위치한 비잔틴 제국과 가까운 타부크를 손에 넣었다. 그리고 636년 야르무크 전투에서 무슬림은 비잔틴 제국을 상대로 완승하면서 아나톨리아 남부의 지배권을 확보했다. 이것은 무함마드 이후, 이슬람이 그리스도교 지역인 비잔틴 영내로 진출할 것을 예고하는 것이었다. 그 후 계속해서 몇백 년에 걸쳐 무슬림 세력은 비잔틴 제국을 괴롭혔고, 안티오키아, 예루살렘 등 과거 비잔틴 제국의 땅이었던 메소포타미아 일대를 하나씩 점령했다. 아랍 무슬림들은 이제 아르메니아로 향했고, 동시에 이집트로도 진출하기 시작했다. 이집트 태생의 영국인 이슬람학자 밧 예올(Bat Ye’or)은 저서 「The Decline of Eastern Christianity Under Islam: From Jihd to Dhimmitude」에서 “성당으로 도망간 여성과 어린이들까지 모조리 살해당했다”고 적었다. 이에 비잔틴 제국의 요청에 따라 일어난 서방 교회의 십자군 결성은 나름대로 충분한 당위성이 확보되었다. 복자 우르바노 2세 교황의 성지 해방을 위한 제1차 십자군의 선포는 “하느님의 뜻”(Deus vult)으로 제시되었다. 십자군에 참가하는 사람들은 모든 빚을 탕감받고, 재산을 보호받으며, 죄를 용서받았다. 이런 혜택은 교황의 부름에 응답한 사람에 대한 대중의 지지에 따른 것이기도 했다. 따라서 참전하는 사람들의 의도는 모두 달랐다. 어떤 사람은 종교적인 열정과 하느님을 향한 사랑으로, 어떤 사람은 빚을 탕감받기 위해, 또 어떤 사람은 모험심에서, 어떤 사람은 약탈을 통해 한몫 잡으려는 의도 등 마음에 품은 의도들은 결코 고상하거나 원대하지만은 않았다. 1097년 십자군은 동로마 제국의 수도 콘스탄티노플에 집결했고, 거기서 알레시오 1세 콤메노의 도움으로 소아시아 반대쪽 해안을 통과했다. 그리고 3개월 후에는 시리아 해안에 도착했고, 9개월 후에는 드디어 아름다운 도시 안티오키아에 이르렀다. 1098년 6월 3일 십자군은 안티오키아를 차지하고 있던 무슬림들을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모두 죽이고 안티오키아를 차지했다. 과거 그들이 한 그대로, 이제 십자군이 그들에게 한 것이다. 삽화가, 독창적인 예술적 기조 확립소개하는 작품은 구스타브 도레(Gustave Dor, 1832~1883)의 삽화 ‘안티오키아 학살’(파리, 1877)이다. 구스타브 도레는 독학으로 그림을 공부하여 6살에 이미 재능을 보이기 시작했고, 12살에 자기가 그린 그림을 돌에 새겨 석판화를 제작했으며, 15살에 신문에 실었던 만평집과 삽화를 실은 책을 출판하였다. 1847~1854년 루브르 박물관에서 작품들을 보면서 그림을 공부했고, 많은 양의 캐리커처와 석판화를 제작하며 독창적인 예술적 기조를 확립했다. 그는 성경 이야기를 판화로 제작하고 많은 문학 작품에 삽화를 그렸다. 당시 프랑스의 자본가들 사이에서는 그의 작품을 소유하는 것이 유행할 정도였다고 한다. 절충적이고 다면체적인 도레의 예술은 여러 면에서 만화와 영화의 탄생에도 영향을 미친 것으로 평가된다. 그의 무한한 상상력과 그래픽 작품들은 20세기 위대한 영화감독들에게 도상학적인 중요한 영감을 주는 한편, 애니메이션 장편 영화에서도 월트 디즈니와 팀 버튼은 물론, ‘슈렉’의 장화 신은 고양이에 이르기까지 그의 삽화는 다양하게 힘을 발휘했다. 대표작으로 1872년에 발표한 런던의 빈민촌의 더럽고 참담한 삶을 묘사한 판화 ‘런던 순례’, 에드가 알란 포우의 ‘갈가마귀’가 있고, 삽화를 넣어 출판한 책들로 밀턴의 「실락원」, 단테의 「신곡」, 영어판 「구ㆍ신약 성경」, 불어판 세르반테스의 「돈키호테」 등이 있다. ‘안티오키아 학살’은 「십자군」이라는 역사서에 담긴 삽화다. 뺏고 뺏기는 안티오키아 공방전비잔틴 제국의 도시였던 안티오키아를 셀주크 왕조가 빼앗은 것은 1085년이었다. 안티오키아 성은 유스티니아누스 1세 황제 때, 동로마 제국의 건축 기술로 튼튼하게 잘 지은 성벽이었다. 1088년부터 안티오키아를 통치한 야기 시얀(Yaghi-Siyan)은 1097년 아나톨리아 반도로 들어온 십자군을 의식하고, 주변의 이슬람 세력에 도움을 요청한 상태였다. 야기 시얀은 안티오키아의 정교회 총대주교를 감옥에 가두고 그리스와 아르메니아 정교회 신자들을 모두 추방하는 한편, 그 수가 얼마 안 되는 시리아 정교회 신자들만 거주를 허락했다.십자군과 셀주크 무슬림군이 안티오키아를 두고 공방전을 벌인 것은 모두 두 차례다. 제1차는 이미 무슬림의 도시가 되어 버린 안티오키아를 차지하기 위해 십자군이 벌인 공성전으로 1097년 10월 21일 시작해 1098년 6월 2일 도시를 함락하면서 종료되었다. 제2차는 무슬림 군대가 십자군에 대항해 1098년 6월 7~28일 벌인 공성전으로 여기서도 십자군이 승리했다. 그 과정을 좀 더 들여다보면, 십자군이 처음 안티오키아 성 바깥 오론테스 강변에 모습을 보인 것은 1097년 10월 20일이었다. 군대를 이끈 장수는 3명으로 부용의 고드프루아, 타란토의 보에몽, 톨로사의 백작 레몽 4세였다. 고드프루아와 보에몽은 레몽의 직접 전투를 반대하며 공성전을 주장했다. 생각보다 길어진 공성전은 오히려 십자군을 괴롭혔다. 12월이 되자 고드프루아가 병으로 쓰러졌고, 충분했던 식량도 바닥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12월 말 보에몽과 플랑드르 백작 로베르가 병력 2만을 이끌고 식량 조달을 위해 남쪽으로 향하자, 포위 병력이 줄어든 틈을 타서 야기 시얀은 레몽의 야영지를 습격했다. 레몽이 물리치기는 했지만 피해는 적지 않았다. 보에몽과 로베르의 군대도 야기 시얀을 도우러 오던 다마스쿠스의 두카크의 군대와 충돌하여 결국 승리했으나 식량 조달에는 실패한 채 안티오키아로 돌아와야 했다. 안티오키아를 포위한 십자군의 야영지에는 식량 부족으로 기아가 발생하기 시작했고, 사람과 말이 차례로 죽어갔다. 전체 군인 7명 중 1명이 굶어 죽었고, 군마의 수도 급격히 줄었다. 굶주림을 견디다 못한 병사들은 적병의 사체와 죽은 말을 먹었다. 시리아의 그리스도인들과 추방되어 키프로스 섬에 있던 정교회의 총대주교가 약간의 식량을 보내준 것으로 기아를 해결하기란 역부족이었다. 1098년 1월, 기사와 병사 중에서 탈주자가 나오기 시작했고, 그중에 은수자 피에트로도 있어 그의 명성은 추락하고 말았다. 1098년 2월, 비잔틴 제국의 장수이자 황제의 특사로 십자군에 합류하여 아나톨리아 반도의 길 안내 및 여러 가지 조언을 해주던 타티키오스가 돌연 십자군을 떠났다. 알렉시우스 1세의 딸 안나 콤네나가 쓴 역사서에 따르면, 십자군이 계속해서 타티키오스의 조언을 거부했고, 보에몽과 십자군의 장수들은 그를 믿지 못해 암살을 계획하고 있다는 소문이 결국 그를 떠나게 했다고 전했다. 이에 보에몽은 타티키오스를 욕하며, 안티오키아를 함락해도 그 땅은 비잔틴에 줄 것이 아니라 자기가 차지하겠다고 주장했다. 십자군의 장수들 사이에서 이권 다툼이 시작된 것이다. 1098년 5월 말 모술의 영주 케르부가가 야기 시얀의 요청으로 대군을 이끌고 안티오키아로 온다는 소식이 들렸다. 십자군에게는 큰 위협이었고, 어떻게든 케르부가의 대군이 도착하기 전에 안티오키아를 함락시켜야만 했다. 보에몽은 야기 시얀에게 증오를 품고 있던 안티오키아의 한 수비대장을 매수했다. 수비대장은 성문을 열어주기로 했다. 약속한 시간에 성문이 열리자 십자군은 순식간에 시내로 들이닥쳤다. 굶주린 병사들에게 보이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십자군은 무슬림뿐 아니라, 그리스도인들까지 모조리 죽였다. 그림 속으로도레의 작품 속에는 안티오키아 성벽에 매달려 절규하는 무슬림과 그리스도인, 아기를 안은 여성 등이 있다. 날카로운 창끝은 힘없는 그들을 겨누고, 무장한 병사들은 아무것도 가진 것 없는 시민들을 살육하고 있다. 건물은 과거 비잔틴 제국의 영광을 대변하듯, 이런 처절한 상황 속에서도 아름답고 장엄하다. 이토록 아름다운 건물에서 믿기지 않는 싸움이 벌어진 것이다. 안티오키아 공방전은 이후 유럽에 전해져 전설이 되었고, 여러 무훈시의 소재가 되었다. 12세기에 널리 불리던 ‘안티오키아의 노래’(chanson d’Antioche)도 그중 하나다.구스타브 도레 삽화 ‘안티오키아 학살’, 1877년, 프랑스 파리. 김혜경 (세레나, 동아시아복음화연구원 상임연구원, 이탈리아 피렌체 거주) cpbc2020.09.22
[장현규 수녀의 사랑의 발걸음] 18. 선한 목자만 따라가면!프랑스 성요한 사도 수녀회 장현규(마리스텔라) 수녀프랑스에서 함께 사는 동료 수녀님들은 매년 여름이면 2주 정도 피정 겸 휴가를 떠난다. 원한다면 가족도 방문하는 시기가 이때다. 이때마다 내가 피정 겸 휴가로 머무는 곳은 프랑스 남쪽 시골 마을에 있는 수도원이다. 우리 수도회의 많은 수사님과 수녀님들도 이곳에 머물곤 한다. 자연을 벗 삼은 수도원의 마당에는 넓고 푸른 초원, 포도밭이 펼쳐져 있다.내가 이곳에 맨 처음 왔던 때는 1986년 12월, 그러니까 프랑스에 온 지 불과 몇 달 되지 않은 때였다. 막 예수님 탄생을 준비하는 성탄 시기였다. 프랑스에서 최고의 명절 또한 성탄절이기에, 이곳 수도원이 있는 시골 사람들도 최고의 축일을 보내고 있었다. 성탄의 기쁨은 도시인들의 그것과도 전혀 차이가 없었다. 그런데 프랑스에 막 당도했던 당시 나의 마음은 자못 쓸쓸했다.한창 추운 겨울이었던 그때. 이곳 들판에 하얗고도 살포시 내린 눈 속에서 푸른 풀들을 마주했다. 작은 한 순간이었지만, 문득 신비로운 자연의 움직임을 통해 주님께서 새 세상을 보여주시는 것처럼 여겨졌다. 눈을 돌려보니, 영화에서만 보던 양 떼들이 보였다. 회색빛의 작은 몸뚱이가 통통한 데다, 짧은 다리로 아장아장 걸어 다니는 모습이 아름답기까지 했다. 양 한 마리가 풀을 뜯어 먹는 모습도 이상하게 나의 눈길을 확 끌었던 기억이다. “주님은 나의 목자”(시편 22장)라는 말씀이 내 입에서 저절로 흘러나왔다.‘파아란 풀밭에 이 몸 뉘어 주시고~♬’ 이어서 요한복음 11장 ‘목자와 양들’의 말씀도 머릿속에 떠올랐다. 그 순간 성경 말씀이 바로 눈앞의 현실처럼, 그것도 잔잔히 펼쳐지는 광경이 내 안에 작고 놀라운 감동마저 가져다줬다. 수도자로서 새로운 삶을 막 시작한 나에게 일어난 작은 기쁨이자 체험이었다. 내 마음은 환해졌고, 푸르름으로 물드는듯했으며, 쓸쓸함은 금세 가셨다.나는 계속, 그리고 천천히, 편하게 풀을 뜯어 먹고 있는 양들을 바라봤다. 나는 가까이 다가가 등이라도 쓰다듬어 주고 싶었다. 착한 목자가 준비해놓은 넓은 물통에는 물이 가득했다. 양들이 목이 마르면, 언제라도 즉시 와서 흡족하게 물을 마셨다. 양치는 목자는 그들의 귀여운 모습을 바라보면서 양들의 행복감을 피부로 함께 느끼는 듯했다.그런데 이 모든 광경이 시편 23장의 이야기가 아닌가! “주님은 나의 목자, 나는 아쉬울 것 없노라. 푸른 풀밭에 나를 쉬게 하시고 잔잔한 물가로 나를 이끄시어 내 영혼에 생기를 돋우어 주시고 바른길로 나를 끌어 주시니 당신의 이름 때문이어라.”(시편 23,1-3) 그리고 마지막 6절의 말씀. “저의 한평생 모든 날에 호의와 자애만이 저를 따르리니 저는 일생토록 주님의 집에 사오리다.”해마다 성소자가 많이 줄고 있다. 그러나 선하시고 자비로우신 목자만을 따른다면 이처럼 큰 은혜와 행복이 따라온다는 사실을 나는 삶으로 깨닫고 있다. 시편의 말씀이 우리를 잘 인도해 주고 있다.프랑스에 와서 처음 마주했던 드넓은 초원과 귀여운 양 떼들이 보고 싶을 때면, 다시 이곳을 찾는다. 그리고 나는 다시 시편을 노래한다. 그러면 어느새 나는 초원의 양이 되고, 희망찬 푸름이 솟아오른다. 눈앞에 원대하게 펼쳐진 대자연을 보며, 내 안에 모든 언어는 사라지고, 평화로운 침묵만이 나를 포옹해준다. 이것이 수도자의 기쁨이다.프랑스 성요한 사도 수녀회 장현규(마리스텔라) 수녀cpbc2020.09.09

인장 받은 이 14만 4000명은 ‘모든 하느님 백성’ 상징적 표현요한 묵시록은 어떤 책이며, 어떻게 읽어야 하나 요한 묵시록은 많은 상징을 담은 환시를 통해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를 전달하는 책으로 교회의 권위 있는 주석과 주해를 바탕으로 대해야만 바르게 읽고 올바로 이해할 수 있다. 그림은 1125년에 제작한 스페인 타울 성 클레멘스 성당의 프레스코화로, 요한 묵시록에 등장하는 종말에 오실 그리스도 왕을 묘사하고 있다. 요한 묵시록은 읽기도, 이해하기도 어려운 책이라고 많은 신자가 말한다. 맞는 말이다. 요한 묵시록은 성경의 여느 책들과 완전히 다른 방식으로 주님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증언하고 있기 때문이다. 많은 상징을 담은 ‘환시’를 통해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1,1)를 전달하고 있는 책이어서 개인이 혼자서 요한 묵시록을 읽고 그 내용을 제대로, 올바르게 이해하기는 너무나 어렵다. 그래서 항상 교회의 권위 있는 주석과 주해를 바탕으로 「요한 묵시록」을 대해야지만 이 책을 바르게 읽고, 바르게 이해할 수 있다. 아울러 어렵게만 느껴지는 요한 묵시록의 상징이나 내용이 알게 모르게 친숙한 것이 많다. 일례로 미사 영성체 예식 전에 사제가 “보라! 하느님의 어린양”이라고 하는 말씀도 바로 묵시록(19,1)에 나오는 예수님의 ‘칭호’이다. 또 서울대교구장 염수정 추기경의 사목 표어 ‘아멘. 오십시오, 주 예수님’도 묵시록 22장 28절의 말씀이다. 신천지를 비롯한 유사 종교들이 요한 묵시록을 제시하면서 그리스도인들을 비롯한 현대인들을 현혹하고 있어 무엇보다 묵시록이 어떤 책인지 바로 아는 것이 중요하다. 따라서 요한 묵시록이 어떤 책인지 성서학자 허규 신부와 안소근 수녀, 성서신학자 박찬용 신부 등의 저서 내용을 중심으로 정리해 소개한다. ▨ 요한 묵시록은 어떤 책인가요한 묵시록은 신약성경의 마지막 책이면서 ‘환시’를 통해 종말에 드러날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1,1)를 전하는 책이다. 환시를 묘사하는 이야기 틀 안에서 종말의 구원을 강조하며 전달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여기서 ‘계시’ 또는 ‘묵시’ ‘묵시록’으로 번역된 헬라어 성경 본문은 ‘아포칼립시스’(Αποκαλυφιs)이다. 아포칼립시스는 ‘가려져 있는 것을 열어 보인다’는 뜻이다. 즉 알지 못하는 것을 알려준다는 것이다.교회는 요한 묵시록의 저자를 요한 사도라고 전통적으로 여겨오고 있다. 하지만 현대 성서학자들은 원래 팔레스티나 지역에 살다가 유다 전쟁(66~73년) 후 소아시아 지방으로 이주한 유다인 출신 순회 예언자 중 한 사람으로 추정한다. 그 이유는 요한 복음은 ‘그리스도께서 사람이 되셨다’는 육화의 그리스도론이 중심인데 반해 요한 묵시록에는 육화에 대한 언급이 전혀 없기 때문이다. 또 요한 묵시록은 로마의 황제 숭배 의식이 강요되는 도미티아누스 황제 통치 말기의 박해 상황을 잘 묘사하고 있다. 그래서 95년경에 쓰였을 것이라는 게 학계의 일반적 견해이다. ▨ 묵시문학성경에서는 구약의 다니엘서와 신약의 요한 묵시록이 묵시문학에 해당한다. 묵시문학에서는 한 인물에게 어떤 초월적인 내용이 전달된다. 그 내용은 시간적으로는 종말과 관련된 경우가 많고, 공간적으로는 천상의 세계를 보여 주는 경우가 많다. 또 계시받는 사람이 그 받은 내용을 바로 이해하지 못하고 천사나 다른 어떤 존재가 해석해 주는 경우가 많다. 묵시문학은 예언서와 유사하지만 뚜렷한 차이를 보인다. 예언서에서도 환시가 나타난다. 아모스도 예레미아 예언자도 환시를 보았다. 또 예언서도 ‘주님의 날’인 종말에 관해 말한다. 구약의 아모스와 즈카르야, 말라키 예언자도 종말을 주장한다. 하지만 묵시문학에서 말하는 종말은 예언서의 그것과 전혀 다른 의미이다. 예언서는 종말을 말하지만, 세상이 끝난 것은 아니다. 구약의 예언자들이 말하는 종말은 북이스라엘과 남유다 왕국의 멸망이다. 그러나 묵시문학에서의 종말은 현재의 세상과 전혀 다른 새로운 세상의 시작을 의미한다. 이 세상의 역사의 흐름이 단절되고 완전히 새로운 세상이 시작됨을 의미한다.묵시문학의 또 다른 특징은 상징을 통해 표현하고, 과거의 권위 있는 인물을 저자로 내세운다는 점이다. 요한 묵시록에서 환시를 통해 등장하는 여러 동물, 색깔과 숫자 등은 모두 무엇인가를 나타내는 상징이다. 또한, 일반적으로 묵시문학에서는 실제 저자가 아닌 인물을 저자로 내세운다. 요한 묵시록도 마찬가지이다. 묵시문학은 미래에 닥칠 종말에 대한 호기심을 충족시키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역사 전체를 하느님의 시각에서 새롭게 바라보게 함으로써 앞이 보이지 않는 현재를 하느님의 계획 일부로 이해하게 하는 데에 있다. ▨ 요한 묵시록 구성요한 묵시록은 ‘일곱 교회에 보낸 편지’(23장)와 ‘환시들’ (4,122,5)로 구성돼 있다. 일곱 교회는 숫자 7의 상징성 때문에 소아시아 전체 교회의 신자를 뜻한다. 일곱 교회에 보낸 편지의 주된 내용은 첫째, ‘니콜라오스파’(묵시 2,6)를 경계하라는 것이다. 이들은 “사도가 아니면서 사도라고 자칭하는 자들”(2,2), “사탄의 무리”(2,9), “발라암의 가르침을 고수하는 자들”(2,14), “이제벨이라는 여자”(2,20), “사탄의 깊은 비밀”(2,24)로 우상 숭배를 조장하고 불륜을 저지른다. 둘째로, 일곱 교회에 보낸 편지는 공통으로 ‘사람의 아들’을 나타내는 표현으로 시작한다. 이는 계시를 전하는 분이 누구인지 알려준다. 마지막으로, ‘승리하는 사람’에게, ‘믿음을 끝까지 지킨 이들’에게 주어지는 약속을 보여준다. 일곱 교회에 약속했던 말씀이 종말과 함께 실현되는 것으로 드러나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하느님의 약속은 반드시 이루어진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다. 요한 묵시록의 4장부터는 서로 이어져 있는 환시들을 연속적으로 보여준다. 그 시작은 ‘어좌에 앉은 분’과 ‘어린양’에 대한 환시이다. 어린양은 요한 묵시록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나타내는 전형적인 상징이다. 이 어린양은 어좌에 앉은 분으로부터 봉인된 두루마리를 건네받는다. 이 봉인된 두루마리는 요한 묵시록에서 환시를 시작하고 종말을 향해가는 중요한 요소이다. 두루마리에는 세상의 재앙과 선택받은 이들에 대한 환시가 소개된다. 신천지를 비롯한 유사종교와 사이비종교에서 자주 인용하는 ‘선택받은 이들에 대한 환시’는 하느님의 인장을 받은 14만 4000명에 대한 내용으로 시작한다. 이들은 이스라엘의 모든 지파에서 온 것으로 표현된다. 우선 여기에 사용된 14만 4000이라는 숫자는 실제적인 의미가 아닌 상징적인 의미로 이해해야 한다. 이 숫자는 두 번의 12와 1000으로(12×12×1000) 이뤄진다. 이것은 하느님의 백성을 나타내는 숫자이다. 결국, 몇 명인지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인장을 지닌 이들, 곧 하느님을 믿는 모든 이들이 구원될 것이라는 의미이다. 「요한 묵시록 바르게 읽기」 저자 허규 신부는 “우리에게 재앙을 소개하고 종말에 대한 두려움을 표현한 것이 아니라 믿음을 간직한 이들이 우상숭배에 대한 강요와 박해에서도 신앙을 간직할 수 있도록 종말의 희망을 통해 위로하는 것이 요한 묵시록이 기록된 목적”이라고 설명한다. 그러면서 “요한 묵시록의 저술 목적에 부합하도록 개별적인 내용과 상징을 이해하는 것이 필요하다”며 “요한 묵시록은 우리에게 희망과 위로를 통해 하느님의 구원을 계시하는 책”이라고 강조했다.리길재 기자 teotokos@cpbc.co.kr cpbc2020.03.18

색의 어우러짐에 따른 맛의 향연[사유하는 커피] (20)심상의 눈으로 커피 색을 느껴라 박영순 커피비평가협회장 커피잔 위로 모락모락 피어나는 김이 더욱 정겨운 계절이다. 하늘거리며 적막을 흔들다가 이내 힘에 부친 듯 공간으로 사라지는 향의 흔적들. 커피 향이 색깔을 띤다면 얼마나 좋을까? 커피의 본질이 색(color)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색은 만물의 원천인 ‘빛’과 인과관계에 있다. 커피가 거무튀튀하게 보여도 와인이나 브랜디를 담는 유리잔에 따르면 고운 색을 드러낸다. 잔을 기울여 가장자리를 얕게 만들면 불그스레하기도 하고 노르스름한 색상이 감지된다. 때론 희끄무레하고 여린 풀처럼 푸르레하다. 성질이 다른 커피, 유리, 공기가 만나 서로 경계를 이루는 인터페이스(interface)에서 본성이 반영된 현상을 감지하기가 더 쉬운 법이다. 무리의 한복판에 뭉쳐 있을 때보다 이질적인 영역과 맞닿은 지점에서 참모습을 드러내는 속성은 사람도 예외가 아니다. 위기에 처했을 때 어떻게 행동하는지를 보면 그 사람을 알 수 있다는 말이 같은 이치겠다. 향과 맛 역시 커피가 외부와 경계를 이루는 지점에서 더 잘 드러난다. 모든 조건을 같게 한 커피라고 할 때, 가장자리가 노란빛을 띤다면 상대적으로 산미가 두드러진다. 붉은빛이 우세하다면 더 저돌적으로 관능을 자극하고 꽃향기를 선물처럼 길게 남겨준다. 햇사과처럼 녹색이 감돈다면 토마토를 연상케 하는 식물체의 생동감이 입안을 꽉 잡아준다. 색의 어우러짐이 곧 맛의 향연이다. 우리는 이미 일상에서 색과 맛을 무의식적으로 연결해 표현하고 있다. 이채로운 맛을 경험하는 순간, “색다른 맛!”이라고 외치는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진화론에 따르면 생존과 관련된 정보는 수만 년 세월 속에서 DNA에 깊게 새겨졌다. 커피에서 장미 같은 진한 향이 느껴지면 붉은색, 잘 익은 오렌지처럼 새콤달콤하면 노란색, 박하만큼 화한 기분이 들면 흰색, 달고나가 떠오르면 갈색, 그리고 유칼립투스 향이 풍기면 녹색이 각각 떠오르는 것은 호모사피엔스 종이 오랜 세월 자연 속에서 체득한 결과물들이다. 색은 때론 몸에 해롭다는 사실을 경고해주기도 한다. 고인 물에 찌든 회색빛 흙을 연상케 하거나 아궁이를 훑은 손바닥처럼 거친 질감의 검댕을 떠올리게 하는 커피는 뱉어야 한다. 뇌가 유쾌하지 않은 색과 기억을 떠올리게 함으로써 삼키지 말도록 신호를 보내주는 것이다.색에 관한 이런 사연을 깊이 생각하다가 문득 인간을 아껴주는 절대자의 손길이 느껴졌다. 색은 빛에서 비롯된다. 빛을 과학으로만 풀어내면, 전기장과 자기장이 수직을 이루며 움직이는 파장이자 알갱이 같기도 한 입자이다. 때론 열을 발생시켜 에너지로서 면모를 보이기도 한다. 인간의 눈으로는 모든 빛을 볼 수 없고 특정 파장의 가시광선만 감지할 수 있다. 특정 물질이 빛을 모두 흡수하면 검은색으로 보이고 통과시키면 투명하게 보인다. 붉은색으로 감지되는 파장만을 반사한다면 그 물질은 붉은색으로 보인다. 색은 마치 지문처럼 물질의 고유한 특성을 표현하는 장치이기도 하다. 빛이 없으면 색이 없고, 색은 빛의 존재를 증언하다. 성경에 따르면 빛은 단지 태양에서 나와 낮과 밤을 가르는 장치에 불과한 게 아니다. 빛은 첫날 만들어지고 태양은 나흘째에야 창조된다. 어둠이 심연을 덮고 있던 태초(창세 1,3)에 빛이 생겨 빛과 어둠을 가른 것을 시작으로 만물의 모든 것에 경계가 생겼고, 그 지점을 색이 알기 쉽게 밝혀준다. 커피가 진한 갈색을 띠는 것은, 정작 그 색을 내는 빛의 파장만이 커피 안으로 들어가지 못하고 튕겨져 나오는 탓이다. 색으로 커피의 본성에 다가가려면 뉴턴처럼 과학의 눈으로 보지 말고 괴테처럼 심상의 눈으로 색을 느껴야 한다.박영순(바오로, 커피비평가협회장, 단국대 커피학과 외래교수) 평화신문2020.09.22

예수님께서는 왜 하필 베드로를 선택하셨을까[엉클 죠의 바티칸 산책] (10)예수님의 최고 지도자 양성법 프란치스코 교황이 성 베드로 대성전에 모셔진 베드로 사도 성상 앞에서 축일 예식을 거행하고 있다. 베드로 사도(성상)는 성 베드로 사도좌 축일에 중세 때 교황 전통 복장을 하고 순례자를 맞이 한다. 이 성상은 이탈리아 조각가 아르놀포가 13세기에 만들었다. 【CNS 자료 사진】 베드로 사도는 어떤 분일까요? 성경을 한두 번이라도 접해 본 적이 있는 비그리스도인에게 베드로를 아느냐고 물어보면, 십중팔구 이렇게 대답합니다. “예수님을 세 번 배신한 사람 아닙니까?” 베드로에겐 가장 아픈 말입니다. 성경의 맥락을 봐도 그럴까요? 2월 22일은 성 베드로 사도좌 축일입니다. 베드로는 가톨릭교회에서 가장 큰 산(山)입니다. 예수님의 지상 대리인이며 초대 교황입니다. 예수님의 ‘최고 지도자 양성’이라는 시각에서 베드로의 삶을 묵상해 봤습니다. 예수님은 왜 당신의 대리인으로 베드로를 선택하셨을까. 예수님은 어떻게 베드로를 최고 지도자로 양성하셨을까. 보통 사람 베드로에 대한 예수님의 큰 믿음첫 번째 화두, 왜 베드로였을까? 예수님은 공생활 초기 일찌감치 갈릴래아의 어부 베드로를 당신의 대리인으로 ‘찜’하셨습니다.(요한 1,42 참조) 당시 갈릴래아 어부는 배운 것도 별로 없고 변변한 사회적 배경도 없는 촌부, 그냥 보통사람입니다. 그러나 베드로에게는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믿음이 있었습니다.저는 이 대목에서 ‘마리아 사제운동(MMP)’을 창설하신 스테파노 곱비 신부를 떠올립니다. 예수님의 깊은 뜻을 어찌 알겠습니까마는, 곱비 신부가 ‘내적 담화’ 형식으로 받은 성모 마리아의 말씀을 정리해 놓은 책 「성모님께서 지극히 사랑하는 아들 사제에게」(가톨릭출판사)를 읽고 나서 예수님의 마음을 어느 정도 짐작할 수 있었습니다. 곱비는 MMP 활동을 하면서 큰 의문을 하나 갖고 있었습니다. ‘내가 이 운동을 하기에는 너무 부족하고 무능한데…. 성모님은 왜 나에게 이 일을 맡기셨을까?’성모님께서 1973년 복되신 동정 마리아 기념일에 곱비에게 응답하셨습니다. “아들아, 가장 적합하지 않은 도구라는 바로 그 이유 때문에 너를 택한 거다. 그래야 이 일을 너의 일이라고 말할 사람이 없지 않겠느냐? 마리아 사제운동은 오로지 나의 사업이어야 한다. 너의 약함을 통해 나의 강함을 드러내고, 아무것도 아닌 너를 통해 나의 능력을 드러낼 작정이다.” 오로지 ‘나의 사업’이어야 한다는 대목이 큰 울림을 줍니다. 스스로 똑똑하다고 여기는 사람들은 이런 일을 할 때 ‘자신의 사업’으로 착각하곤 합니다. 예수님이 천국의 열쇠를 베드로에게 맡긴 것이나, 성모님이 MMP 운동을 곱비에게 맡긴 것이나 그 취지가 같지 않나 생각됩니다. 두 번째 화두, 어떻게 양성하셨을까? 베드로는 예수님과 처음 만나 하룻밤을 묵은 날부터 로마에서 순교할 때까지 그야말로 형극의 길을 걸었습니다. 외부로부터의 박해와 수모도 고통이었겠지만, 내부에서 벌어진 일로 더 큰 상처를 받았을지도 모릅니다.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믿음이 없다고 지적하기도 하셨고, 심지어는 사탄이라고 질책하셨을 정도였으니 말입니다. 예수님은 왜 그렇게 혹독하게 하셨을까요? 유독 베드로에게만! 충분히 이해가 갑니다. 베드로의 기본 자질(믿음)은 출중하지만, 그것은 필요조건이지 충분조건이 아닙니다. 엄격한 훈육이 필요한 이유입니다. 예수님의 베드로 훈육은 독특합니다. 베드로 스스로 인간적인 결점(죄)을 티끌 하나 남지 않게 노출(고백)하도록 했습니다. 성경에 나오는 제자들의 실수 중 대부분은 베드로가 저지른 것입니다. 복음사가들이 다른 제자들의 실수를 의도적으로 기록하지 않았을 수도 있지만, 그렇더라도 열두 사도의 좌장답지 않게 베드로의 실수가 현저히 많습니다. 결점 노출의 프로세스라 봐야 할 것입니다. 용서를 통해 ‘성숙한 인간’이 되게 하시다세 번의 배신행위도 이런 프로세스의 한 과정이 아니었을까요? 예수님은 노출된 결점을 모조리 제거(용서)하여 베드로를 ‘성숙한 인간’으로 만드셨습니다. 결점의 발본색원! 혹독한 담금질이었습니다. 베드로에게는 이 과정이 무척 고통스러웠을 것입니다. 예수님의 베드로 훈육은 단순한 담금질이 아니라 치밀한 치유과정이었습니다.‘최후의 담금질’이 극적이고 감동적입니다. 베드로가 네로 황제의 박해를 피해 로마 외곽으로 피신하려 하자, 예수님께서 베드로 앞에 나타나셨다는 전승이 있습니다. 베드로가 예수님에게 “주님, 어디로 가시나이까?(Quo Vadis, Domine?)”라고 인사하자, 예수님이 “나는 로마로 간다”고 대답하셨습니다. 순간 베드로는 큰 충격을 받고 로마로 발길을 돌렸습니다. 로마 언덕 처형장에서 십자가형을 받을 때, 예수님처럼 똑바로 매달릴 자격도 없다면서 거꾸로 매달려 순교했습니다. 이백만(요셉, 주교황청 한국대사) 평화신문2020.02.19
![[수도 전통에 따른 렉시오 디비나] (3)교회의 가르침](//cpbc.co.kr/CMS/newspaper/2019/08/rc/760484_1.1_titleImage_1.jpg)
[수도 전통에 따른 렉시오 디비나] (3)교회의 가르침하느님 말씀, 영성의 마르지 않는 샘 허성준 신부 교회는 초세기부터 오늘날까지 그리스도인들의 삶에 있어서 성경이 매우 중요하다는 사실을 늘 강조해 왔다. 특별히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모든 신자가 그리스도교 생활의 완성과 사랑의 완덕에로 초대되었음을 지적하였다. 그리스도교의 완덕은 구체적으로 하느님의 말씀인 성경을 자주 읽고 묵상함으로써 가능하게 됨을 성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은 강조하였다. 사실 하느님의 말씀인 성경은 인간의 저술이라기보다는 오히려 하느님의 계시로 이루어진 책으로서, 이것은 구원을 얻는 지혜와 진리를 가르쳐 주고 동시에 올바르게 살아가는 길을 제시해주고 있다. 그래서 교회는 언제나 성경(聖經)과 성전(聖傳)을 신앙의 최고 규범으로 늘 간직해 왔다. 사실 하느님은 성경 안에서 당신 자녀들을 언제나 친절히 만나 주시고 또 기꺼이 그들과 말씀을 나누시는 분이시다. 이러한 하느님의 말씀은 교회를 지탱하는 힘이며, 영성생활의 마르지 않는 풍요로운 샘과 같다. 그래서 바오로 사도는 “하느님의 말씀은 살아있고 힘이 있으며, 어떤 쌍날칼보다도 더 날카롭습니다!”(히브 4,12)라고 고백하였다. 그리스도인으로서 성경을 떠나서는 온전한 신앙생활, 기도생활을 기대할 수 없다. 교회의 여러 문헌도 한결같이 하느님 말씀의 중요성을 강조하면서 성경 독서를 권고하였다. 「계시헌장」에서는 모든 그리스도교 신자들이 성경을 자주 읽고 배우도록 강력히 권고하면서, 여러 가지 방법으로 성경과 친숙해져야 함을 강조하고 있다.(25항) 「사제 직무와 생활에 관한 교령」에서도 사제들은 하느님의 말씀을 전해야 할 교역자이므로, 하느님의 말씀을 매일 스스로 읽고, 듣고, 실천함으로써, 참으로 더 완전한 주님의 제자가 되어야 함을 권고하고 있다.(13항)사제들이 하느님의 말씀을 가까이하지 않을 때, 사제생활 중에 심각한 위기가 언제 다가올지 모른다. 반면에 하느님의 말씀 안에서 참된 기쁨과 행복을 맛보게 된다면 그러한 기쁨과 행복은 자연스럽게 신자들에게도 전해지게 된다. 이런 측면에서 교회는 특별히 말씀을 선포하는 사제들에게 자신이 먼저 성경을 읽고 들으며 실천할 필요성에 대해서 강조하였다. 비오 10세 교황은 「가톨릭 사제들에게 보내는 권고(Haerent Animo)」에서, 오늘날 성직자 중에는 성경 독서나 영성 서적보다는 오히려 각종 잡다한 서적, 신문, 잡지 등을 더 좋아함으로써 교회의 참된 진리에서 벗어나는 자가 있음을 지적하였다. 교회는 수도자들에게도 다음과 같이 권면하고 있다. 수도자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뛰어난 지식을 얻기 위하여, 무엇보다도 먼저 매일 성경을 손에 잡고 그 말씀을 읽고 묵상해야 한다.(「수도 생활 교령」 6항) 평신도들도 여기에서 예외가 아니다. 「평신도 사도직에 관한 교령」에서도, 모든 평신도는 자신을 부르시는 그리스도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고 성령께 기꺼이 응할 수 있어야 함을 강조하였다.(33항) 성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은 「봉헌생활」에서 하느님의 말씀은 모든 그리스도인 영성의 첫째 원천임을 강조하였다. 하느님의 말씀은 살아계신 하느님과의 인격적 관계를 맺도록 도와준다. 이처럼 교회는 언제나 하느님 말씀의 중요성에 대해서 강조하였다. 오늘날 우리의 문제는 주님의 말씀을 너무 과소평가하고 신뢰하지 않으며, 신앙생활과 삶을 따로따로 사는 데 문제가 있는 것 같다. 이런 측면에서 렉시오 디비나에서는 언제나 하느님 말씀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다. 허성준 신부(성 베네딕도회 왜관수도원) 평화신문2019.08.20

이제 유튜브 선교가 대세… 교리 수업·성지 순례도 재밌는 영상으로!SNS로 선교하는 사람들 유튜브 채널 ‘제이슨티비’ 운영자 이재현씨가 ‘어서와 가톨릭은 처음이지?’ 콘텐츠를 통해 성당을 처음 방문하는 이들을 위해 직접 안내하는 모습. 제이슨티비 캡쳐 신앙 소통의 장 ‘제이슨티비’“찾아보니 가톨릭에 좋은 기도문이 엄청 많더라고요. 함께 공유하고 싶어서 녹음해 영상을 올리게 됐는데, 비신자와 개신교 신자분들도 많이 방문해주세요.”기도문을 낭독하고, 실시간 생방송으로 신자들과 소통해오고 있는 유튜브 채널 ‘제이슨티비’ 운영자 이재현(미카엘, 서울 잠실본당)씨는 “전에는 온라인에 종교와 성경 관련 콘텐츠를 검색하면 개신교 자료들이 많았는데, 최근엔 온라인으로 소통하는 가톨릭 유튜버와 청년들이 많아지면서 제 채널에 접속하시는 개신교 신자분들도 가톨릭을 이해하고 고정관념도 깨고 있다”고 했다. 이처럼 ‘온라인 선교사’들은 신앙 소통의 장을 넓혀가는 역할을 하고 있다. 누구나 방문, 접속할 수 있는 온라인을 통해 신자들끼리 일상을 나누며 기도 친구가 되고, 가톨릭교회를 잘 몰랐던 비신자들에겐 ‘온라인 교리교사’도 되고 있다.이씨는 “말기 암환자 분께서 제 영상 기도를 들으시고 편안히 잠을 이루셨다고 해주시고, ‘어서와 가톨릭은 처음이지?’ 영상을 본 개신교 신자분이 성당 방문을 고려하신다는 이야기를 들으며 뿌듯한 마음으로 제작하고 있다”고 했다.성지 풍경과 역사 전하는 ‘성지순례하는 남자’여행과 성지순례를 좋아해 국내 가톨릭 성지를 알리고자 영상을 제작하게 된 ‘성지순례하는 남자’ 운영자 이민호(베드로, 수원교구 평창본당)씨는 “그냥 성지 경관만 둘러보기보다 각 성지의 역사와 순교자들에 관해 이해하고 순례하시길 권장하는 마음으로 시작한 활동이 선교에도 한몫하게 된 것 같다”며 “신자분들은 영상을 보시며 반가워하고 순례 의지를 보이신다”고 했다. “비신자 분들은 ‘천주교 역사와 박해, 성지에 관해 좋은 자료가 됐다’고 하실 때 보람된다”고도 전했다.이씨는 성지마다 분위기에 맞는 음악과 함께 드론 촬영으로 성지를 감싸는 고즈넉한 느낌을 영상미 있게 표현해 비대면 시기 랜선 성지순례 도우미 역할도 톡톡히 하고 있다. 이씨는 “성지별로 심화된 내용으로 다시 영상을 제작하고, 전국 600곳이 넘는 공소를 순례하는 아이디어도 기획 중”이라며 “몇몇 교구와도 협력해 작업을 진행하고 있다”고 전했다.광주대교구 사제들의 ‘미카엘 잡학 사전’EBS 교육방송 ‘e지식채널’을 표방해 교리 지식을 쉽고 재미있게 전달해오고 있는 ‘미카엘 잡학사전’ 채널은 광주대교구의 젊은 동기 사제들이 인문학, 철학, 과학 지식을 교리와 접목한 영상을 제공하고 있다. 교리 지식 전달에 주안을 두고 있어 운영 사제들은 익명으로 활동 중이다. 채널 운영자 김 미카엘 신부는 “저희 영상을 통해 ‘가톨릭교회에 관한 여러 오해로부터 해방되었다’고 감사를 전하는 분들, 가톨릭 신앙에 관심을 갖고 예비 신자로 입교하신 분들, 정교회와 성공회, 개신교 등 타 교파 신앙인들의 격려 또한 많이 받고 있다”며 “ ‘올바른 성모 신심’, ‘사적 계시’, ‘기적’, ‘동성애에 관한 윤리신학적 입장’ 등을 주제로 한 콘텐츠에는 근본주의 개신교인들이나 극좌 페미니스트인들의 악플 테러를 받은 적도 있지만, 그들의 비판과 목소리도 최대한 삭제하지 않고 성실히 답해주고 있다”고 밝혔다. 온라인 활동을 통해 교리도 알리고, 교도권을 수호하는 데에도 젊은 사목자들이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이다.유쾌한 가톨릭 이야기 ‘성당오빠들’성당 예능을 표방하며 다양한 신앙 이야기와 콘텐츠를 유쾌한 영상으로 제작해 인기를 얻고 있는 유튜브 채널 ‘성당오빠들’ 운영자 강준희(미카엘)씨는 “‘저희 영상을 보고 냉담을 풀고 다시 성당에 나가게 됐다’, ‘개신교회를 다니지만, 덕분에 가톨릭에 많은 관심이 생겼다’고 할 때 우리가 정말 온라인 선교를 하고 있다고 생각이 든다”며 “현재는 다양한 가톨릭 온라인 채널과 협업해 방송하면서 더욱 성당 오빠들을 통해 ‘성당에서도 이렇게 즐거울 수 있구나’라는 인식을 더욱 알리고 싶다”고 전했다.‘미카엘 잡학사전’의 김 미카엘 신부는 “코로나, 비대면 시대에 미디어 매체를 적극 선용한다면 복음 전파와 함께 사제와 신자, 비신자 간의 거리도 더욱 좁힐 수 있을 것”이라며 “대신 온라인 매체 사목과 활동이 걸음마를 뗀 단계인 만큼 교회도 내용과 수익분배 등과 관련한 가이드라인을 마련하고, 신자들도 범람하는 콘텐츠들 안에서 교회의 올바른 내용을 잘 식별해 활용해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이정훈 기자 sjunder@cpbc.co.kr cpbc2020.10.14
[박현민 신부의 별별이야기] (41) 신비체험 믿어야 하나 말아야 하나 (상) 세례받은 지 몇 년 되지 않은 가타리나 자매가 성령 체험과 관련해서 궁금한 점이 있다고 메일을 보내왔다. 자매는 세례받은 지 얼마 안 되었지만, 워낙 작은 성당이다 보니 교우들과 금방 친해질 수 있어서 처음엔 정말 행복했다고 했다. 하지만 그 행복도 잠시뿐, 어느새 사람들과의 경계가 명확하지 않아 서로의 사생활이 너무 잘 드러나는 안 좋은 면도 경험하게 되었다. 결국, 가타리나 자매는 자신을 시기하고 질투하는 여인들로 인해 큰 상처를 받게 되었고 세례받은 지 1년도 채 안 되어 성당에 나가지 않게 되었다. 하지만 하느님을 만나 새 삶을 살게 되었다고 굳게 믿고 있던 터라 개인적으로는 신앙생활을 놓고 싶지는 않았다. 그래서 집에서 혼자 기도하고 성경을 읽으며 참신앙인으로 살려고 노력했다. 그러던 어느 날 가타리나 자매는 성령이 자신에게 내려오시는 영광스러운 체험을 했다고 고백했다. 기도할 때 켜놓은 촛불 속에서 성령을 만나게 된 것이다. 그러나 자매는 이 체험이 무엇인지를 알고 싶어 했고, 모든 천주교 신자들이 비슷한 성령 체험을 하는지도 궁금해했다. 자신은 하느님을 사랑하고 하느님도 자신을 사랑하신다는 것을 잘 아는데 성령 체험 이후 하느님의 마음을 도무지 모르겠다고 의문을 제기했다. 사실 가타리나 자매는 이 경험이 너무 특별해서 본당 신부님을 찾아가 자신의 체험에 관해 말씀드렸다. 그러자 본당 신부님은 누구에게도 이 체험에 관해 말하지 말라고 당부하셨다. 그 이유가 무엇인지 물었으나 신부님은 무조건 순명하라고 하시며 함구령만 내리실 뿐이었다. 신부님께서는 왜 자신의 경험을 타인에게 발설하지 말라는 말씀을 해주셨는지, 그리고 정말 이 신비한 체험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지 자매는 궁금한 점이 너무 많았다. 하지만 그 내용이 무엇이었는지에 대해서는 구체적으로 밝히지 않은 채 추상적인 질문으로만 끝을 맺었다. 따라서 본당 신부님이 비밀에 부치라는 신비한 성령 체험이 도대체 무엇인지에 관해서는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이 글을 읽다 보니 그동안 상담을 통해 만났던 수많은 형제자매 중 특별히 자신의 영적 체험을 나누어주셨던 분들이 머릿속에 스쳐 지나갔다. 이분들은 하나같이 보통 사람들이 들으면 도통 이해할 수 없을 뿐 아니라, 정신적으로 문제가 있거나 조현병 증상이 있는 것이 아닌가 하고 의심할 수 있는 경험들을 나누어 주셨던 분들이다.그중 몇 분의 사례를 들어보면 다음과 같다. 안나 자매는 위에서 소개한 가타리나 자매처럼 촛불을 켜고 기도를 할 때 성모님께서 촛농이 녹아 흐르는 모양 안에 나타나시면서 자신에게 영적 메시지를 전해주신다고 했다. 그런데 안나 자매는 이 영적 메시지를 주변 사람들에게 전해주어 성모님의 뜻을 사람들에게 알리라는 성모님의 계시를 받게 되었다. 지인들에게 자신의 체험을 널리 알리는 일을 하느님의 소명으로 받아들이게 된 이유가 여기에 있었다. 마침내 자신이 속한 레지오 마리애 단원들에게 먼저 자신의 영적 체험을 공개한 안나 자매는 성모님의 메시지를 전하는 사도의 삶을 시작하였다. 그러자 몇몇 단원들은 발현한 성모님의 모습을 직접 눈으로 보고 싶어 했고, 안나 자매는 촛농이 흘러내려 변한 성모님의 모습을 사진을 찍어 보여주었다. 그런데 사람들의 반응은 극명하게 둘로 나뉘었다. 한편에서는 흘러내린 촛농의 모습 안에서 성모님을 볼 수 없다고 하였고, 또 한편에서는 정말 성모님이 나타나셨다고 흥분을 감추지 않았던 것이다. 이에 안나 자매는 믿음이 없으면 성모님이 보이지 않는 법이라면서 의심을 하고 접근하는 자매들에게 영적인 가르침을 주었다. 결국, 안나 자매가 속한 레지오 팀은 서로 의가 갈라져 해체되고 말았다. <계속><영성심리학자, 성필립보생태마을 부관장> 평화신문2020.09.15

주님 부활 준비하는 은총의 시기… 극기와 희생 통해 수난에 동참사순 시기 의미와 전례, 그리고 중세 시대 사순 시기 음식 사순 시기는 하느님의 구원 신비를 드러내는 주님의 파스카를 준비하는 때이다. 그리스도인은 이 기간에 회개와 보속·절제와 희생의 삶을 살며 어려운 이웃에게 자선을 실천한다. 프란치스코 교황이 십자가의 길 기도를 바치고 있다. 【CNS 자료 사진】 주님의 부활에 동참하기 위해 회개하고 기도하는 사순 시기이다. 지난 호 ‘재의 수요일’ 전례 의미에 이어 사순 시기에 관해 정리했다. ▨ 사순 시기사순 시기는 주님의 수난과 희생을 기념하는 시기이다. 주님의 수난은 단순히 주님께서 당하신 고통 자체로서가 아니라 영광스러운 부활과 직접 연결돼 있다. 교회는 이 시기를 “파스카 신비의 경축을 준비하게 하는 때”(「전례 헌장」 109항)라고 한다. 사순 시기는 ‘재의 수요일’부터 파스카 성삼일 ‘주님 만찬 성목요일 미사’ 전까지 기간을 말한다. 이 기간에 ‘사순 제1주일’부터 ‘주님 수난 성지 주일’까지 모두 6번의 주일을 지내는데 주일은 사순 시기에 포함되지 않는다. 또 주님 수난 성지 주일부터 ‘성주간’이 시작되며, ‘주님 만찬 성목요일’ㆍ‘주님 수난 성금요일’ㆍ성토요일ㆍ파스카 성야의 3일간을 ‘파스카 성삼일’이라 해서 사순 시기와 구분한다.재의 수요일부터 주님 만찬 성목요일까지 통상 40일이라고 해서 ‘사순’(四旬)이라고 한다. 하지만 실제로는 38일간이다. ▨ 40의 성경적 의미사순 시기는 본래 40일을 의미하는 라틴말 ‘Quadragesima’(콰드라제시마)를 우리말로 옮긴 것이다. 성경에서 ‘40’은 하느님을 만나기 전 거치는 정화와 준비의 기간을 뜻한다. 하느님께서 홍수로 새 세상을 준비하실 때 40일간 비가 내렸다.(창세 7,6-24) 또 모세는 십계명을 받기 전 시나이 산에서 단식하며 40일간 지냈다.(탈출 24,12-18; 34,28) 이후 모세는 우상숭배를 하는 이스라엘 백성을 보고 십계명 판을 부순 후 다시 40일간 밤낮으로 기도한 후 십계명 판을 하느님께로부터 받았다.(신명 9,15-29) 아울러 엘리야는 하느님을 만나기 위해 40일간을 걸어서 호렙 산으로 갔다.(1열왕 19,8) 그리고 예수님께서도 요한 세례자에게 세례를 받으신 후 복음을 선포하시기 전에 광야에서 40일간 단식을 하며 악마의 유혹을 받으셨다.(루카 4,1-13; 마태 4,1-11; 마르 1,12-13) 이처럼 성경에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느님과 단절된 관계를 회복하기 위해 참회와 속죄로 자신을 정화하고 준비할 때 40일이라는 기간을 정해 놓고 행했다. 이 성경의 전통을 교회가 고스란히 받아들여 40일간 기도와 절제, 희생을 통해 주님의 부활을 준비하고 있다. ▨ 사순 시기 전례사순 시기는 하느님의 구원 신비를 총체적으로 드러내는 주님의 파스카를 준비하는 때다. 그래서 교회는 사순 시기 동안 대축일을 제외한 모든 미사 중에 부활의 기쁨을 노래하는 대표적인 환호인 ‘대영광송’과 ‘알렐루야’를 노래하지 않는다. 사제 제의 색도 통회와 보속을 상징하는 ‘자색’(보라)으로 바뀐다. 제단 꽃장식도 할 수 없다. 사순 시기 주일은 주님의 축일과 대축일에 우선 한다. 사순 주일과 겹치는 대축일은 토요일에 미리 거행된다. 특히 주님 수난 성지 주일부터 파스카 성야 미사까지의 성주간은 전례주년의 1순위라 할 만큼 가장 중요한 시간이다. 사순 시기 전례는 크게 두 가지 흐름으로 볼 수 있다. 하느님 자녀로 태어난 세례에 대한 회상과 준비, 그리고 참회와 보속이다. 사순 제1ㆍ2ㆍ6주일 미사 독서 주제는 해마다 모두 같다. 사순 시기 각 해의 고유한 주제를 보려면 사순 제3ㆍ4ㆍ 5주일의 독서들을 살펴보는 것이 도움된다. 2020년(가해)에는 사순 제3ㆍ4ㆍ5주일의 주제가 각각 생명의 물, 빛, 부활에 초점을 맞추며 요한복음에서 본문을 선택하고 있다. ▨ 사순 시기 생활사순 시기는 주님 부활을 준비하는 기간으로서 고행 자체에 강조점이 있는 것이 아니라 부활을 제대로 맞기 위한 준비, 즉 정화와 성화(聖化)의 시기이다. 따라서 그리스도인은 이 기간에 주님 부활을 준비하면서 몸과 마음을 깨끗이 하고 극기와 희생을 통해 기쁨 중에 주님의 수난에 참여해야 한다.교회는 전통적으로 부활 대축일을 잘 준비하기 위해 사순 시기 동안 회개와 보속, 기도의 삶을 살도록 권고한다. 그래서 그리스도의 수난에 동참하는 의미에서 ‘십자가의 길’ 기도를 자주 바치고, 자신의 죄를 뉘우치는 마음으로 단식과 금육, 기도와 희생을 실천한다. 하지만 교회는 이것만으로는 부족하다고 가르친다. 진정한 회개와 보속의 삶은 개인적이고 내적인 절제와 희생뿐 아니라 외적인 실천이 동반되어야 한다. 절제와 절약을 통해 모은 결실을 어려운 이웃들과 함께 나누는 자선이 뒤따라야 한다. “사순 시기의 보속이 단지 내적이고 개인적이어서는 안 되고 동시에 외적이고 사회적이어야 한다.”(「전례 헌장」 110항) 프란치스코 교황도 사순 시기 동안 “서로 용서하고 기도하며 가난한 이들에게 먹을 것과 입을 것, 쉴 곳을 찾아 주는 등 자비를 실천하자”고 강조하면서 “회개하기 매우 좋은 이 사순 시기를 헛되이 보내지 말자”고 당부한 바 있다. 사순 시기에는 판공성사를 통해 마음을 깨끗이 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맞이할 준비를 한다. 고해성사를 통해 잘못을 뉘우치고 용서를 청해 하느님과 화해를 이루고, 부활 축제의 기쁨을 누릴 마음의 준비를 하기 위함이다. ▨ 가난한 이들을 위한 음료 ‘맥주’유럽, 특히 독일에서는 사순 시기 동안 특별히 마시는 맥주가 있다. 바로 ‘bock bier’(복비어)이다. 맥아와 홉의 함량이 16%가 넘는 맑은 맥주와 흑맥주를 가리켜 복비어라 한다. 복비어는 다른 맥주보다 당과 단백질, 미네랄, 비타민 등이 많아 든든한 한 끼 식사가 됐다. 중세 때에는 사순 기간 내내 금식이 이어졌다. 그래서 중세 수도원에서는 춘궁기와 때를 같이하는 사순 시기 동안 농부들과 가난한 이들에게 복비어를 무료로 나눠 주었다. 일반적으로 음식이 부실했던 수도자들과 농민들에게 맥주는 단순히 술이 아니라 일종의 ‘영양식’이었던 것이다. 이렇게 중세 독일인들은 수도원에서 아침마다 나눠주는 복비어로 배고픔을 이겨내고 연명할 수 있었다. 또 중세 수도자들은 가난한 농민들뿐 아니라 병자들에게도 맥주를 규칙적으로 일정량 치료제로 공급했다. 당시 유일하게 살균 과정을 거친 위생적인 음료가 맥주였기 때문이다. 이에 당시 독일 사람들은 맥주를 ‘살바토르’(구세주)라 부르기도 했다. 그리고 ‘음료는 금식을 어기는 것이 아니다’( liqui da non fragunt ieuneum)라는 말이 나오기 시작했다. 지금도 독일에서 맥주를 가장 많이 소비하고 있는 바이에른 주에서는 맥주를 ‘흐르는 빵’이라고 하고, ‘살바토르’라는 상표를 붙여 생산 판매하고 있다. 복비어는 도수가 높고 단맛과 짙은 색깔로 ‘살찌는 음료’라는 인식이 있지만, 일반 우유보다 열량이 적다. 살아있는 효모는 피부 미용에도 좋다. 리길재 기자 teotokos@cpbc.co.kr 평화신문2020.02.26

미사 통해 받은 은총, 형제에게 사랑으로 베풀어야[미사의 모든 것] (4)주님의 가르침과 미사의 사회적 의미 나처음: 언해가 선물한 성경을 요즘 읽고 있어요. 그런데 성경을 읽을수록 헷갈려요. 예수님께서 ‘서로 사랑하라’ 하셨다가 ‘나는 세상에 불을 지르러 왔다’ 하시는 등 어떤 때는 이렇게 말씀하셨다가 또 어떤 때는 저렇게 말씀하시는 것 같아요.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무엇을 가르치셨나요?조언해: 교리교사인 내가 정리해 줄게. 복음서에 잘 나와 있지. “첫째는 이것이다. 이스라엘아 들어라. 주 우리 하느님은 한 분이신 주님이시다. 그러므로 너는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정신을 다 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 둘째는 이것이다.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 이보다 더 큰 계명은 없다.”(마르 12,29-31) 따라서 예수님의 가르침을 한 문장으로 정리하면 ‘하느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라’고 할 수 있지. 맞죠. 신부님!라파엘 신부: 그래. 언해가 예수님 말씀을 인용해 아주 잘 정리해 주었구나. 좀더 설명하면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하느님이 어떤 분이신가에 관해 늘 가르침을 주셨단다. 예수님의 생각과 마음속에는 항상 하느님의 일로 가득 차 있었어요. 그래서 우리에게 하느님이 계시다는 것, 그리고 하느님이 어떤 분이시라는 것, 하느님께서 얼마나 사랑 깊게 인간과 만물을 보살피시는가를 말씀하셨지. 예수님께서는 언제나 ‘하느님은 자비로우신 분’이시라고 가르치셨단다. 그리고 하느님께서는 약한 이, 자신의 초라함을 슬퍼하고 죄스러움을 아파하는 이에게는 참으로 아버지가 되어 주시는 분이심을 일깨워주셨지. 그러면서 예수님께서는 우리도 당신처럼 하느님을 생각하며 살기를 바라셨단다. 그래서 예수님은 오직 한 분이신 아버지의 자비 안에 살고 있는 우리는 모두가 한 형제라고 말씀하셨어. 그러니 서로 용서하고 사랑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가르치셨지. 그리고 반드시 잊어서는 안 될 예수님의 가르침이 있단다. 바로 ‘하느님의 나라가 우리 가운데 있다’(루카 17,21 참조)는 말씀이야. “하늘의 너희 아버지께서는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필요함을 아신다. 너희는 먼저 하느님의 나라와 그분의 의로움을 찾아라. 그러면 이 모든 것도 곁들여 받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내일을 걱정하지 마라. 내일 걱정은 내일이 할 것이다. 그날 고생은 그날로 충분하다.”(마태 6,32-34) 그러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어라”(마르 1,15)는 이 말씀이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가르침, 곧 기쁜 소식이란다. 나처음: 그러면 신부님, 예수님께서 늘 하느님을 염두에 두시고 사셨다는 것을 어떻게 증명할 수 있나요?라파엘 신부: 바로 ‘기도’이지. 예수님께서는 늘 기도하셨단다. 예수님께서는 기도 중에 아버지 하느님과 친밀하고 깊은 대화를 나누셨지. 그리고 때로는 지금 알려주는 기도처럼 하느님을 큰 소리로 부르며 기도하기도 하셨단다. “아버지, 하늘과 땅의 주님, 지혜롭다는 자들과 슬기롭다는 자들에게 이것을 감추시고 철부지들에게는 드러내 보이시니, 아버지께 감사드립니다. 그렇습니다, 아버지! 아버지의 선하신 뜻이 이렇게 이루어졌습니다.”(마태 11,25-26)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하느님의 자비에 힘입어 감사하는 마음으로 날마다 살 수만 있다면 어떤 생활을 하고 있든 삶의 의미를 반드시 찾게 될 것이라고 당신의 기도 모습을 통해 알려주시고 있지. 조언해: 그래서 기도가 신앙생활의 토대가 되는 것이군요.라파엘 신부: 그렇지. 예수님에 의해 아버지 하느님을 알고 신앙의 길을 가게 되면서 기도 생활도 아울러 시작되는 것이지. 기도는 예수님의 가르침대로 하느님을 생각하는 것으로부터 비롯돼요. 하느님의 자비를 생각하다 보면 예수님처럼 “아버지, 제 말씀을 들어 주셨으니 아버지께 감사드립니다. 아버지께서 언제나 제 말씀을 들어 주신다는 것을 저는 알고 있습니다”(요한 11,41-42)라고 고백하게 되지. 교회가 이처럼 공적으로 하느님께 감사 기도를 드리는 것이 바로 ‘미사’란다.나처음: 헉! 그럼, 미사가 기도의 으뜸이겠네요.라파엘 신부: 바로 그거야! 미사는 우리 안에 살아 계신 주님이신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하느님께 감사의 표시로 바치는 기도이니 기도 중의 으뜸이라고 할 수 있지. 신앙생활의 중심은 바로 예수님이야. 예수님께서 바로 우리를 구원하신 주님이시기 때문이야. 따라서 주님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은 그리스도인은 자기 삶의 중심이 예수님이라는 것을 결코 잊어서는 안 돼. 조언해: 그럼 미사의 중심도 당연히 예수님이겠네요.라파엘 신부: 빙고! 아는 만큼 보인다는 말이 미사에도 그대로 적용된단다. 미사에 대한 이해가 깊을수록 미사에 담긴 영적 보화를 더 잘 알아보고 얻을 수 있고, 그럼으로써 신앙이 성장하고 신앙생활도 풍요로워지지. 미사의 정신이 일상의 삶으로 이어질 때 살아 있는 신앙이 되고, 그 신앙이 세상을 변화시킬 수 있지. 이것이 미사의 힘이야. 조금 어려운 말이지만 교회는 미사의 중요성에 관해 공적으로 이렇게 설명하고 있단다. “미사에서 마치 샘에서처럼, 은총이 우리에게 흘러들고, 또한 교회의 다른 모든 활동이 그 목적으로 추구하는 인간 성화와 하느님 찬양이 가장 커다란 효과로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다.”(제2차 바티칸 공의회 「전례 헌장」 10항) 한마디로 미사를 통해 그리스도 안에서 인간 성화와 하느님 찬양이 실현된다는 뜻이지.나처음: 그런데 기도하고 미사에 참여한다고 해서 세상이 바뀌는 건 아니잖아요. 요즘 흐름을 보면 종교가 세상의 빛과 소금 역할을 하는 게 아니라 사회가 종교를 걱정하는 것 같은데요. 라파엘 신부: 좋은 질문이구나. 미사의 사회적 의미에 관해 설명해야겠구나. 예수님은 미사를 통해 우리뿐 아니라 모든 사람과 일치를 이루신단다. 예수님께서 마지막 만찬 때 제정하신 성체성사 곧 미사는 유다인과 다른 민족을 하나로 만드시고 이 둘을 가르는 장벽인 적개심을 허물고(에페 2,14 참조) 그리스도 안에서 서로 화해하신 ‘친교의 성사’이지. 화해로 이끄는 이 지속적인 힘만이 우리를 그리스도의 몸과 피에 참여하기에 합당하게 만들어요.(마태 5,23-24 참조) 이 말은 2006년 교황청 세계주교대의원회의 참가자들이 “성찬례 거행 덕분에, 분쟁을 겪고 있는 민족들이 하느님 말씀을 중심으로 모이고, 무조건 용서함으로써 화해하는 그분의 예언적 메시지를 들으며, 이 똑같은 빵과 잔을 나눌 수 있는 회개의 은총을 받아 올 수 있었다”고 고백한 감동적인 증언을 통해 다시금 확인할 수 있었지. 이처럼 교회는 “성찬례(미사)에 참여하는 모든 사람은 폭력과 전쟁, 그리고 오늘날 특히 테러리즘, 경제적 부패, 성적 착취로 얼룩진 이 세상에 평화를 이룩하고자 노력하여야 한다”고 가르치고 있단다.(베네딕토 16세 교황 권고 「사랑의 성사」 89항) 교회가 이러한 상황을 피상적으로 대처할 수 없는 것은 주님이신 예수님께서 모든 사람을 위해 피를 흘리시며 각 개인의 드높은 가치를 확언해 주셨기 때문이야. 따라서 그리스도인은 미사를 통해 받은 은총을 주님의 가르침대로 형제에게 사랑으로 베풀어야 할 의무가 있는 거야. 리길재 기자 teotokos@cpbc.co.kr cpbc2020.08.05
![[수도 전통에 따른 렉시오 디비나] (13)성 베네딕토](//cpbc.co.kr/CMS/newspaper/2019/11/rc/766018_1.1_titleImage_1.jpg)
[수도 전통에 따른 렉시오 디비나] (13)성 베네딕토정해진 시간에 홀로 꾸준히 성독 수행을 허성준 신부 유럽의 수호성인 베네딕토(St. Benedictus, 480~540)는 수도자들에게 매일의 삶 안에서 렉시오 디비나를 충실히 실천하기를 권고했다. 왜냐하면, 렉시오 디비나는 수도자들의 소명과 결코 분리될 수 없는 중요한 수행이었기 때문이다. 성인은 렉시오 디비나에 대해서 이미 이전의 여러 수도 규칙서들로부터 직ㆍ간접으로 많은 영향을 받았다. 중세 유럽에서는 거의 대부분의 수도자가 베네딕토 규칙서를 따르고 있었다. 렉시오 디비나는 성 베네딕도회 수도자들에 의해서 수도원 문화 안에서 훌륭하게 꽃필 수 있었다. 이제 베네딕토 성인이 제시하는 렉시오 디비나에 대한 몇 가지 중요한 점들을 살펴보고자 한다.첫째, 베네딕토 성인은 렉시오 디비나를 위한 고정된 시간의 필요성을 강조하였다. 한 예로 여름철(부활절~10월 1일)에는 제1시(오전 7시)부터 제4시(오전 10시)까지 노동 후에 하루 중 가장 좋은 시간일 수 있는 제4시부터 제6시(낮 12시)까지 렉시오 디비나 수행을 하도록 권고하고 있다. 이렇게 베네딕토 성인은 수도자들이 하루에 최소한 2시간에서 4시간을 렉시오 디비나 수행을 하도록 배려하였다. 그러나 구체적으로 성 베네딕도회 수도자들이 어떻게 렉시오 디비나 수행을 하였는지에 대해서는 정확히 알 수가 없다. 왜냐하면, 베네딕토 성인은 이에 대해서 명확하게 언급하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둘째, 베네딕토 성인은 점심 후에 수도자들로 하여금 낮잠이나 독서를 선택할 수 있도록 배려하였다. 그러므로 수도자는 식사 후에 몸의 피로 회복을 위해 자기 침대에서 완전한 침묵 중에 쉴 수 있었다. 그러나 동시에 만일 누가 독서를 하고자 한다면 다른 사람을 방해하지 않는 범위 내에서 그것을 허락하였다. 이것은 그 당시에 독서한다는 것이 당연히 천천히 작게 소리 내어 읽고 듣는 수행이었기 때문이다. 아무튼, 베네딕토 성인이 살던 당시에 수도자들의 성경 독서는 오늘날과 같이 묵독이 아니라 작게 소리 내어 읽고 듣는 수행이었다. 만약 이러한 수행이 고요한 시간에 공동 침실이나 다른 공동 장소에서 행해졌다면, 그것은 분명히 다른 사람들을 방해하였을 것이다. 그러므로 성 베네딕도회 수도자들은 고정된 시간이나 다른 여유로운 시간에 홀로 조용하게 독특한 렉시오 디비나 수행을 하였다. 셋째, 성 베네딕도회 수도자들은 렉시오 디비나 시간에 과연 무엇을 읽었을까? 베네딕토 성인은 이에 대해서도 명확하게 언급하고 있지 않다. 아마도 렉시오 디비나 시간에 주로 성경을 읽었을 것으로 추측해 볼 수 있다. 사실 베네딕토 규칙서에서는 성경 외에 다른 교부들 작품들도 제시되고 있지만 렉시오 디비나의 일차적인 자료는 언제나 성경이었다. 성경은 인간 삶의 가장 올바른 규범임을 성인은 강조하였다. 넷째, 베네딕토 성인이 살던 당시에 수도자들에게도 하루에 적어도 2~4시간 해야 하는 렉시오 디비나 수행은 그렇게 쉬운 것은 아니었을 것이다. 필자는 오랫동안 수도 전통에 따른 렉시오 디비나(성독) 피정 지도를 하면서 많은 사람을 만났다. 피정이 끝날 즈음에는 모두가 단순한 성독 수행에 대해 매우 기뻐하면서 앞으로 꾸준히 하겠다고 다짐하며 떠나갔다. 그러나 그 이후에 다시 만나게 되어, 성독 수행을 열심히 하고 있는지 물으면 십중팔구 거의 못하고 있다고 답한다. 렉시오 디비나는 이론이 아니라 수행이다. 수행은 남이 해줄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본인이 직접 열정을 갖고 행해야 한다. 그래서 베네딕토 성인은 렉시오 디비나를 위해 항구한 열정과 충실성을 특별히 강조하였던 것이다. 허성준 신부(성 베네딕도회 왜관수도원) 평화신문2019.11.05
![[시사진단] 사순절과 40(박현도, 스테파노, 명지대 중동문제연구소 인문한국 연구교수)](//cpbc.co.kr/CMS/newspaper/2020/04/rc/776892_1.0_titleImage_1.jpg)
[시사진단] 사순절과 40(박현도, 스테파노, 명지대 중동문제연구소 인문한국 연구교수) 코로나19 때문에 모든 것이 멈춰 섰지만, 사순절을 지나 우리는 주님 부활 대축일을 맞았다. 해마다 사순절은 십자가의 고통을 새기는 시기지만, 올해는 코로나가 불러온 전대미문의 사회적 거리 두기로 그 어느 때보다 찬찬히 삶을 되돌아볼 수 있었던 것 같다. 사순절은 40일 동안 삶과 죽음을 다시 생각해보는 시기다. 그런데 사순절은 재의 수요일부터 시작하기 때문에 부활 전까지 날짜를 가만히 세어보면 40일이 아니라 46일이다. 주일을 빼고 세는 등 이런저런 역사 속 이야기가 있긴 하지만, 아무튼 현재 우리의 사순절은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이후 재의 수요일부터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함께한 성목요일 만찬 직전까지의 날이다. 부활의 영광이 드러나는 파스카 성삼일을 사순 시기와 구별하기에 파스카 성삼일을 빼고 다시 세어보아도 40일이 넘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사순절이라고 하는 이유는 40이라는 숫자가 예수님께서 공생활을 시작하시기 전 40일 동안 광야에서 단식기도를 하셨다는 루카 복음(4,1-2) 기사처럼 그냥 지나치기 어렵게 상징적인 뜻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성경의 배경이 되는 중근동문화권에서 40은 완성과 성숙을 뜻하는 숫자였다. 고 조철수 박사를 따르면 고대 수메르문화에서 40이 악신을 쫓아내는 지하수 신의 숫자로 정결의 상징이었다. 이는 중동 전역에 퍼져 유다교, 그리스도교, 이슬람교에서도 40은 예외 없이 정결, 성숙, 완성의 상징으로 두루 쓰였다. 구약성경에 눈을 돌려보면 노아의 홍수 때 40일간 비가 왔고, 모세는 십계를 받기 전 40일간 단식했으며, 이집트를 탈출하여 가나안에 도착하기까지 40년간 광야 생활을 하였다. “정말 40일, 40년이었을까?”라고 굳이 물을 필요는 없다. 이슬람교의 경전 꾸란 46장 15절에 “그가 성년이 되고 나이 사십이 되면”이라고 쓰여 있는데, 여기서 40은 성숙, 완성, ‘많다’는 뜻이다. 무함마드가 25살 때 부부의 연을 맺은 아내 카디자는 40세였다. 생물학적인 나이를 나타낸 말이 아니라 그만큼 성숙한 여인이었다는 표현이었을 것이다. 무함마드는 40세 때 예언자가 되었다. 또 이슬람교 전승에 따르면 알라(이슬람교의 하느님)는 40일 동안 두 손으로 최초의 인간 아담을 빚을 원재료인 흙을 만들었다. 험담을 일삼는 사람의 기도는 40일 동안 들어주지 않고, 무함마드의 언행 전승 40개를 기억하는 사람은 부활의 날 뛰어난 학자로 삼는다. 맹인을 도와 40 발자국 거리를 함께 걷는 사람은 천국에 들어가고, 술을 마시고 하는 기도는 40일 동안 아무런 효과도 없으며, 40일 밤낮으로 기도해야만 마음과 혀에서 지혜의 샘이 솟는다. 산모는 아이를 낳고 40일이 돼야 일상생활로 돌아가고, 사람이 죽은 지 40일째 되는 날 우리로 치면 탈상을 한다. 641년 유서 깊은 도시 알렉산드리아를 점령한 무슬림 장군 아므르 이브닐 아스는 “4000개의 목욕탕이 있는 4000채의 집, 인두세를 낼 4만 명의 유다인, 400개의 유흥시설이 있는 도시를 점령하였습니다”라고 지도자에게 보고하였다. 이처럼 40을 10배, 100배로 늘려 ‘아주 많다’는 것을 표현하기도 하였다. 숫자 40의 뜻이 참으로 흥미롭다. “사십이불혹(四十而不惑)”(논어), “아사십부동심(我四十不動心)”(맹자)을 인용하며 굳건한 40세를 말하던 조상들처럼 지난 사순절 내내 우리 교회는 코로나에도 흔들리지 않았다. 성 베드로 광장에서 홀로 특별기도 예식을 집전한 우리 교황 프란치스코, 이웃을 위해 주일미사를 온라인으로 돌린 우리 주교회의. 참으로 아름다웠던 사순절이었기에 미사 없는 텅 빈 성당이라도 오늘 주님 부활 대축일은 더욱 뜻깊게 기쁘다. 이제 부활의 기쁨을 함께 나누며 정결한 40의 마음으로 코로나와 더욱 힘차게 싸워 이기자! 평화신문2020.04.0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