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약이 되게 할 것인가, 독이 되게 할 것인가[사유하는 커피] (9)섭리 깨는 행동이 ‘양식’을 ‘독’으로 만든다 박영순 커피비평가협회장 존재하는 것은 무엇이든 가치가 있다. 이 명제는 과연 옳은 것일까?“주님께서는 만물을 창조하셨고 주님의 뜻에 따라 만물이 생겨나고 창조되었습니다”(묵시 4,11)라는 성경 말씀에서 어렵지 않게 답을 얻을 수 있다. 창조론을 부정한 진화생물학자 스티븐 제이 굴드는 한 걸음 더 나아가 “존재하는 것은 무엇이든 옳다”고까지 역설했으니, 종교적으로나 과학적으로 이 말에 이의를 제기하긴 힘들겠다. 하지만 당장 코로나19를 끄집어내 “수십만 명의 목숨을 앗아간 것이 주님의 뜻인가?”라고 묻는다면, 상황이 달라진다. 코로나19를 생명체로 볼 수 있느냐에 대해서 이견이 있지만, 어쨌든 존재하는 모든 것에 좋은 의미를 부여할 순 없을 듯 보인다. 국내에서만 매년 25명가량이 산행 중 야생 독초를 채취해 먹고 목숨을 잃고 있다. 자연은 인류에게 선물이 아니란 말인가? 독성으로 치자면, 커피나무도 뒤지지 않는다. 식물의 독성분은 대부분 알칼로이드인데, 카페인(Caffeine)이 그중 하나다. 알칼로이드는 ‘~인(~ine)’으로 끝나는 물질들로 질소를 포함하고 있다. 모르핀, 니코틴, 퀴닌, 에메틴, 아코니틴 등 알칼로이드는 중추신경에 작용함으로써 일정 농도 이상이라면 포유동물에 치명적이다. 남아프리카에 자생하는 지프바르(gifblaar)는 잎사귀 2~3장만으로 양 1마리의 생명을 앗아간다. 소크라테스가 마신 독배는 독성분이 있는 당근을 달여 만든 즙이었다고 전해진다.알칼로이드는 동시에 인류에게 축복이기도 하다. 세계적으로 1억 2500만 명 이상이 커피에 의지해 생계를 이어가고 있다. 잠을 쫓고 피로를 잊기 위해 커피를 마시는 사람들까지 따지면 전 세계 성인 인구의 절반가량이 카페인을 요긴하게 활용하고 있다. 커피나무의 형제들을 보면 유독식물과 약용식물을 가르는 기준이 모호해진다. 진화론에 따르면, 커피나무는 1400만 년 전 카메룬의 치자나무에서 분화해 커피의 본성을 갖게 됐다. 치자나무의 껍질에 들어 있는 퀴닌 역시 독성이 강한데, 말라리아 특효약으로 개발되면서 인류의 생명을 구하는 약용식물로 대접받고 있다. 식품의약품안전처가 식용을 금지한 리우토근은 에메틴 성분 덕분에 아메바성 이질 치료제로 사용되면서 수많은 목숨을 구하고 있다. 커피의 성분들은 치매와 암 치료에 유용한 것으로 보고되고 있다. 이처럼 치자나무에서 갈라진 커피나무의 가족(科)들은 독이면서 약으로 존재한다. 하나의 나무가 환경에 따라 새로운 특성을 획득하거나 다양하게 분화하는 것을 진화의 방향이라고 진화론자들은 설명한다. 여러 시대를 거치면서 먹는 주체와 방식이 이 식물들을 진화시키는 동력이 됐을 수도 있다. 창조론의 견해는 이와 다르다. 모든 식물은 천지 창조 사흘째 날 생겼다. 창세기 때 식물의 모든 다양성은 완성됐으며, 인류의 요구와 쓰임에 따라 존재가 확인될 뿐이다. “구글에서 검색되지 않으면 있어도 있는 게 아니다”는 풍자와 맥락이 유사하다. 커피나무와 인류의 관계는 창세기 1장 29절 “이제 내가 온 땅 위에서 씨를 맺는 모든 풀과 씨 있는 모든 과일나무를 너희에게 준다. 이것이 너희의 양식이 될 것이다”는 말씀에 설정돼 있다. 그런데 왜 종종 ‘양식’이 ‘독’으로 작용할까?한 잔의 커피를 앞에 두고, “주님의 말씀을 어기고 선악과를 따 먹은 인류의 행동에서 답을 찾을 수 있다”는 생각을 한다. 코로나19 바이러스가 진화에 의해 생겨난 게 아니다. 박쥐들이 사는 자연의 세계를 깨뜨리면서 인류에게 옮겨졌고, 생존하기 위해 돌연변이를 통해 저항하고 있을 뿐이다. 섭리를 깨는 행동이 양식을 독으로 만든다. 하느님은 본디 악한 것을 창조하지 않으시므로, 존재하는 모든 것은 가치를 찾아야 한다.박영순(바오로, 커피비평가협회장, 단국대 커피학과 외래교수) 평화신문2020.06.30
![[생활속의복음] 연중 제30주일 - 하느님과 올바른 관계로 초대하시는 주님](//cpbc.co.kr/CMS/newspaper/2019/10/rc/765021_1.0_titleImage_1.jpg)
[생활속의복음] 연중 제30주일 - 하느님과 올바른 관계로 초대하시는 주님 한민택 신부 예수님을 따르는 ‘참 제자’ 됨의 길에서 넘어야 할 관문은 겸손의 문입니다. 겸손은 하느님과 올바른 관계를 맺도록 인도해주는 덕목입니다. 겸손함은 강자 앞에서 자신을 낮추고 굽신거리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 앞에서 자신이 얼마나 나약하고 부족한 죄인인지 인정하는 것이며, 그럼에도 나를 받아주시는 하느님 아버지의 사랑과 자비를 받아들이는 것입니다.창세기에서 요한 묵시록에 이르기까지 성경 곳곳에는 인간이 얼마나 나약하고 죄 많은 존재인지에 대한 깊은 통찰이 담겨 있습니다. 성경을 죄인의 이야기로 가득한 책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의 궁극적인 메시지는 인간의 죄악이 아니라, 그러한 인간을 받아주고 용서하시는 하느님 아버지의 자비와 사랑이 결국 승리하며, 인간과 세상을 구원한다는 ‘기쁜 소식’입니다.신앙은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것이며, 하느님과 새로운 관계로 들어서는 것입니다. 하느님을 ‘아빠’라고 부르며 하느님의 자녀, 고귀한 인격으로 자기 자신을 경험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과 만나며 그러한 경험을 한 사람은 자신이 자격이나 권리가 있어서가 아니라 오직 하느님의 은총으로 그렇게 된 것임을 고백합니다.참 제자가 되는 길에서 넘어야 할 유혹 중 하나는 마치 내가 계명을 지키고 선을 행하며 열심히 기도를 올려 하느님 앞에 설 자격이나 권리를 갖추었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의 바리사이와 같은 모습입니다. 그는 자신이 얼마나 나약한 죄인인지 알지 못하며, 율법만으로는 의로움에 이를 수 없다는 것도 알지 못합니다. ‘거룩한 삶’을 사는 그는 겉으로는 하느님과 올바른 관계를 맺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그가 하느님과 맺는 관계는 왜곡되어 있었고, 그로 인해 타인뿐 아니라 자기 자신과의 관계 또한 왜곡되어 있었습니다. 그것은 의로움이 오직 하느님의 은총으로 거저 주어지는 것이며, 공로나 자격으로 그분께 요구할 수 없는 것임을 망각했기 때문입니다. 하느님과의 올바른 관계는 자신이 부족한 죄인이며 쓸모없는 종임을 인정하는 것에서 시작됩니다. 그것이 우리를 자유롭게 하며, 하느님의 무한한 사랑을 경험하게 합니다.참 제자 됨의 길에서 빠지기 쉬운 또 다른 유혹은 시련과 실패, 두려움과 비참함 속에서 좌절하고 절망하는 것입니다. 살다 보면 종종 삶에 위기가 닥칩니다. 그때마다 그동안 쌓아온 신앙생활이 물거품이 되는 것처럼, 하느님께서 계시지 않는 것처럼 느끼기도 합니다. 그런데 주변을 돌아보면 그러한 시련이 모든 사람에게 생기는 것을 알게 됩니다. 시련이 자연스럽게 생겨난다는 것을 알고 시련 안에서 견디어내는 법을 배울 수 있다면, 시련은 우리에게 하느님과의 관계를 새롭게 맺도록 하는 계기가 되어줄 것입니다. 시련은 우리 자신의 나약함과 죄악을 인정하도록, 하느님의 은총만이 그리스도를 통해 나를 구하실 수 있다는 것을 인정하도록 겸손의 덕을 다져줍니다.나의 신앙이 타인에 대한 단죄나 하느님 은총의 장애물이 되지 않도록, 나의 나약함이 신앙을 포기하는 것이 아니라 더욱 성장하는 계기가 되도록, 나를 비우고 버리는 삶의 길로 주님은 우리를 초대하고 계십니다.한민택 신부(수원가톨릭대 교수, 이성과신앙연구소 소장) 평화신문2019.10.22

빛으로 오신 구세주 예수, 경배의 순례 행한 동방박사들‘주님 공현 대축일’ 유래와 의미 살펴보기
동방교회에서 시작된 주님 공현 대축일은 아기 예수가 동방 박사를 통해 자신이 메시아임을 세상에 드러낸 사건을 기념하는 날이다. 피터 폴 루벤스 ‘동방 박사의 경배’, 1617~18년경. 5일은 주님 공현 대축일이다. 공현(公顯)은 ‘나타내어 보여줌’이라는 뜻으로, 아기 예수께서 동방 박사들을 통해 당신 자신이 메시아임을 세상에 드러낸 사건을 기념하는 날이다. 동방 박사들이 아기 예수께로 이끄는 별을 따라 경배의 순례 여정을 시작했듯이, 그리스도인은 빛으로 오신 구세주를 닮기 위해 주님을 향해 나아가야 한다. 주님 공현 대축일의 유래와 의미를 알아본다. 주님 공현 대축일의 유래와 의미 주님 공현 대축일의 의미를 알려면 우선 성탄 시기 전례력이 어떻게 구성돼 있는지 살펴보는 것이 중요하다. 전례력에 있어 성탄 시기의 특징은 연속적으로 지정된 축일들이다. 이 축일 중 가장 중요한 축일이라 할 수 있는 것이 12월 25일 주님 성탄 대축일과 1월 6일 주님 공현 대축일이다. 선교 지역인 한국 교회는 사목상 편의에 따라 1월 2~8일 사이의 주일에 주님 공현 대축일을 지내고 있다. 아울러 주님 성탄 대축일 다음 주일은 예수, 마리아, 요셉의 성가정 축일, 1월 1일 천주의 성모 마리아 대축일, 주님 공현 대축일 다음 주일을 주님 세례 축일로 지내고 성탄 시기를 마무리한다. 주님 공현 대축일은 동방 교회에서 시작했다. 이집트에서 활동하던 영지주의자(주님의 인성을 부정한 이단)들이 1월 6일에 주님의 세례를 기념한 데서 유래했다. 로마와 갈리아를 중심으로 한 서방 교회에서는 제1차 니케아 공의회(325년) 이후 4세기부터 주님 공현 대축일을 기념했다. 주님 공현은 헬라어 ‘에피파네이아’(επιφανεια)에서 파생된 말로 ‘드러나게 나타나거나 밝혀지는 것’ ‘스스로를 드러내는 것’ ‘유명한 존재로 나타남’ 등을 의미한다. 초대 교회는 신이 개입된 기적같은 사건이나, 황제나 왕이 올 때 사용하던 이 용어를 받아들여 ‘인간의 모습으로 나타나심을 기리는 주님 성탄’을 드러내는 교회 용어로 사용했다. 이런 이유로 동방 교회에서는 지금도 1월 6일 주님 공현 대축일에 주님 성탄을 기념하고 있다. 하지만 서방 교회는 주님 성탄 대축일을 별도로 지내고, 주님 공현 대축일에는 동방 박사들이 탄생한 구세주를 경배하기 위해 베들레헴에 온 것과 이방 민족들 모두에게 당신 자신을 드러낸 주님을 기념하고 있다. 따라서 주님 공현 대축일 전례는 ‘그리스도께서 이방인의 빛으로 널리 계시되었다’는 사실에 집중되고 있다. 구약의 독서(이사 60,1-6)를 통해 하느님께서 이스라엘을 불러 당신의 백성으로 삼으셨지만, 신약(에페 3,2.3ㄴ.5-6)에 와서 유다인들에게 약속된 복음 선포가 이방인들에게도 전파된다는 것을 알려준다. 그래서 복음(마태 2,1-12)은 구세주의 탄생을 알리는 베들레헴의 별빛은 그리스도인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어둠 속에서 염원하는 모든 이를 위한 구원의 빛임을 선포한다. 동방 박사들은 누구“예수님께서는 헤로데 임금 때에 유다 베들레헴에서 태어나셨다. 그러자 동방에서 박사들이 예루살렘에 와서, ‘유다인들의 임금으로 태어나신 분이 어디 계십니까? 우리는 동방에서 그분의 별을 보고 그분께 경배하러 왔습니다’ 하고 말하였다. 이 말을 듣고 헤로데 임금을 비롯하여 온 예루살렘이 깜짝 놀랐다. … 그들은 임금의 말을 듣고 길을 떠났다. 그러자 동방에서 본 별이 그들을 앞서 가다가, 아기가 있는 곳 위에 이르러 멈추었다. 그들은 그 별을 보고 더없이 기뻐하였다. 그리고 그 집에 들어가 어머니 마리아와 함께 있는 아기를 보고 땅에 엎드려 경배하였다. 또 보물 상자를 열고 아기에게 황금과 유향과 몰약을 예물로 드렸다.”(마태 2,1-11)동방 박사의 경배는 네 복음서 중 마태오 복음서에만 나온다. 마태오 복음서를 보면, 동방 박사들은 별의 인도로 아기 예수를 경배하기 위해 베들레헴을 찾아왔다. 이들이 아기 예수를 찾아온 것은 모든 민족을 대표해 그리스도를 경배하고, 예물을 드리기 위해서였다. 예수는 다윗의 자손인 메시아로, 임마누엘로 세상에 왔지만 헤로데 왕과 이스라엘 백성들은 구세주가 오심을 알아보지 못했다. 성경에서 동방 박사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은 최초의 이방인으로 등장한다.삼왕이라 불리는 동방에서 온 이 세 사람을 공동 번역 성경에서는 ‘박사’, 200주년 기념 신약성경에서는 ‘점성가’라고 번역했다. 동방 박사라고 번역되어 사용되었던 그리스어 ‘마고이’의 단수, 마고스는 본래 ‘현자’, 또는 ‘해몽가’라는 뜻이다. 전승에 따르면 세 명의 박사는 멜키오르, 발타사르, 가스파르로 불린다. 마태오가 복음서에서 이들이 온 곳을 동방이라고 한 것은 당시 메소포타미아나 페르시아 등 팔레스티나 동쪽 지역에서 성행한 점성술을 염두에 뒀기 때문이라고 전해진다.동방 박사들은 예수님을 경배하고, 황금ㆍ유향ㆍ몰약을 선물로 바쳤다. 황금은 ‘왕권’, 유향은 ‘그리스도의 신성’, 몰약은 ‘인류를 위해 죽으실 그리스도의 희생’을 상징하는 예물이다. 신학자 칼 라너 신부는 “황금은 ‘우리의 사랑’, 유향은 ‘우리의 그리움’, 몰약은 ‘우리의 고통’”이라고 표현했다. 이들의 유해는 5세기 말경에 콘스탄티노플에서 밀라노의 성 에우스토르지오 성당으로 옮겨졌다고 전해진다. 1162년에 프리드리히 1세 황제에 의해 독일의 쾰른 주교좌성당에 옮겨졌다. 아기 예수의 탄생과 동방 박사들의 경배 장면은 많은 성미술 작품에 남아있다. 이지혜 기자 bonaism@cpbc.co.kr 평화신문2020.01.02

[수도 전통에 따른 렉시오 디비나) (2)렉시오 디비나의 다양한 시도오랜 수도 전통 안에서 이어온 영적 수행 허성준 신부 오늘날 렉시오 디비나에 대한 여러 개인적인 접근법들이 많이 소개되고 있다. 이것은 아마도 신자들의 영적인 갈증이 커졌고 성경에 대한 지적인 접근의 한계 때문인지도 모른다. 그래서 그 하나의 대안으로 렉시오 디비나에 대한 관심이 그 어느 때보다도 사람들에게 크게 호감을 주고 있는 것 같다. 이것은 매우 반갑고 고무적인 일이지만, 문제는 이러한 개인적인 접근법들이 너무 지적인 측면을 강조함으로 인해서 단순하게 말씀에로 나아가던 전통적인 방법을 간과할 위험이 있을 수도 있다는 사실이다. 사실 렉시오 디비나는 오늘날 몇몇 개인들에 의해서 반짝 일어난 접근이 아니라, 수도회의 오랜 역사 안에서 전해져온 중요한 영적인 수행으로서 그 뿌리가 매우 깊다. 고대에서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수도승 전통을 간직하고 있는 수도자들은 이러한 수행을 통해 영적인 보화를 말씀으로부터 직접 발견하고 체험하였다. 이것은 단순히 말씀에 대한 지적인 접근법이 아니라 오히려 마음으로 접근하는 단순한 방법이다. 이에 대해서 교회는 언제나 고대로부터 전해져 온 렉시오 디비나 수행의 중요성에 대해서 강조하였다. 성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은 1999년 1월, 「미국 교회에 보내는 사도적 권고」에서 교회의 오랜 전통 안에 있었던 기도를 동반한 독서인 렉시오 디비나에 대해서 강조하였다.(31항) 또한, 2001년 한국 주교단이 성 요한 바오로 2세 교황 알현(AD LIMINA, 사도좌 방문) 때, 교황은 특별히 렉시오 디비나의 고대의 전통(The ancient tradition of Lectio divina)에 대해서 언급하면서, 복음화의 가장 강력한 무기 중의 하나로 이것을 강조하였다. 베네딕도 16세 교황도 여러 곳에서 자주 렉시오 디비나의 고대의 수행(the ancient tradition of Lectio divina)에 대해서 강조하였다. 그리고 2008년 제15차 세계 주교 시노드에서도 하느님의 말씀에 대해서 강조하면서, 역시 교회의 오랜 전통 안에 있었던 렉시오 디비나에 대해서 다루었다. 교황청 그리스도인 일치촉진평의회 의장으로 재직했던 발터 카스퍼 추기경은 성경에 대한 무지는 바로 그리스도에 대한 무지임을 강조하면서, 교회의 오랜 전통인 기도로 충만한 독서인 렉시오 디비나에 대해서 강조하였다. 「계시헌장」에서도 모든 그리스도인은 성경을 읽을 때, 하느님과 인간의 대화가 이루어지도록 기도가 따라야 함을 강조하였다. 오랜 수도 전통 안에서 수도자들이 순수하고 단순한 마음으로 하느님의 말씀에로 다가가는 성경에 대한 접근이 바로 렉시오 디비나 수행이었다. 고대 수도 전통으로부터 전해져온 렉시오 디비나 수행은 현재 소개되고 있는 다양한 개인적인 렉시오 디비나 방법들과 차이가 있다. 그래서 본인은 고대 수도전통으로부터 전해진 렉시오 디비나 수행을 특별히 ‘성독’(聖讀)이라고 번역하여 사용하고 있다. 그것은 다음과 같은 네 가지 이유 때문이다. ①성독을 한자로 옮기면 聖讀이 되는데, 즉 한자 자체가 성스러운 독서라는 의미를 잘 드러내고 있다. ②성경 독서의 줄임말이 성독이다. ③성독(聲讀)은 소리 내어서 읽는 독서를 함축하고 있다. ④성독은 내가 하는 독서라기보다는 오히려 성령의 이끌림에 의해 하는 독서이다. 성독은 정확히 개인적인 성경에 대한 접근 방법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오랜 수도 전통 안에서 전해져온 영적인 보화인 렉시오 디비나를 의미한다. 허성준 신부(성 베네딕도회 왜관수도원) cpbc2019.08.13

옛것에서 새것을 꺼내다… 우리 시대에 맞게 현대화[토마스 머튼의 영성 배우기] 35. 관상에 관한 머튼의 공헌과 평가 <상>그림=하삼두 스테파노 지금까지 우리는 토마스 머튼이 이해한 기도와 관상에 대해 살펴보았다. 이번 호부터는 머튼의 관상에 대한 이해가 오늘날의 영성에 어떤 공헌을 하였는가에 대해 평가하고자 한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토마스 머튼은 지금까지의 관상한 개념을 ‘종합하고 이를 우리 시대에 맞게 현대화’한 인물이다. 그렇다고 머튼이 처음부터 관상에 대한 새로운 개념을 제시한 것은 아니었다. 그의 초기 작품은 토미즘에 바탕을 둔 관상에 대한 전통적인 이해를 지적인 면에서 다루었다. 그러나 자신의 관상 체험이 깊어질수록 전통적인 관상에 대한 묘사에 한계를 느끼기 시작했다. 그리고 사막 수도승의 관상에 대한 이해를 바탕으로 하여 동양의 사상의 영향 아래에서 관상적 체험을 종합하고 자신의 시대 언어로 발전시켜 나갔다. 이러한 머튼의 변화 과정에 대해 앞으로 3회에 걸쳐 머튼의 주요 저서를 중심으로 좀 더 구체적으로 살펴보고자 한다.초기에는 전통적인 그리스도교의 관점과 비슷머튼이 관상에 대한 종합적이고 현재적인 비전을 갖게 된 것은 지적(知的)인 전망으로부터 존재론적이고 경험적인 관점으로의 변화와 깊이 관련되어 있다. 이 변화는 관상의 영성에 대해 기록된 그의 초기 작품들과 후기 작품들을 비교할 때 분명해진다. 가령, 그의 초기 소책자 「관상이란 무엇인가?」(What is Contemplation?, 1950)에서 머튼은, 관상을 “초자연적인 사랑과 하느님의 지식에 대한 직관이 하느님에 의해 영혼의 정점 안으로 주입되는 것”으로 묘사하고 있으며, “대부분의 그리스도인은 지상에서 순수한 관상가들이 결코 될 수 없다”고 주장했다. 이러한 정의는 관상에 대한 전통적인 그리스도교의 관점과 매우 가깝다. 가령, 십자가의 성 요한은 관상을 “영혼을 깨어나게 하는 하느님의 주입된 사랑의 지식이며 동시에 한 단계 한 단계 상승하여 창조주 하느님께 도달할 때까지 사랑으로 불타오르게 되는 것”으로 정의하고 있다. 머튼은 이 소책자에서 관상의 본성에 대해 다루었으며, 성경과 성 토마스 아퀴나스 그리고 십자가의 성 요한의 기초 위에서 관상적 기도를 위한 실천적 지침을 제안하였다. 그는 ‘주입된’ 혹은 ‘순수한 관상’(infused, or pure contemplation)과 ‘획득된 관상’(acquired contemplation) 사이를 구분하였다. 그리고 오직 전자만이 참된 관상으로 간주될 수 있으며, 이것은 그리스도인 삶의 가장 높은 목표인 하느님과의 신비로운 일치와 상응하는 것이라고 여겼다. 머튼의 저서 「진리를 향한 상승」(The Ascent to Truth, 1951)은 전통적인 관상에 대한 그의 분명한 관심의 결과였다. 그의 의도는 성 토마스 아퀴나스의 스콜라 신학과 십자가의 성 요한의 신비주의적인 통찰과 교회, 성경, 전례와 계시의 지적인 유산에 기초하여 신비 신학의 교의적 본질을 연결시키는 것이었다. 교의적 전망에서 종교적 체험의 전망으로 변화머튼에게 있어 전통적인 그리스도교 신비주의는 이성적이고 지적인 것이었다. 1950년대 중반 이후의 그의 글들과 사상에서 머튼의 관상을 향한 조직신학적 접근은 변화를 맞이한다. 예를 들어, 「요나의 표징」(The Sign of Jonas, 1953)의 서문에서 그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저는 「진리를 향한 상승」을 쓸 때, 비록 그것이 신학자들에 의해 널리 알려진 보편적이고 확실하며 받아들일 만한 것이라 할지라도, 기술적인 전문용어들을 일반인들은 이해하지 못하고 있고, 종교적 체험에서 가장 개인적이고 가장 필수적인 것을 전하지 못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제가 「요나의 표징」에서 초점을 맞추고자 하는 것은 이러한 교의적인 것이 아니라, 구체적인 현실을 깨닫게 하는 영성 생활에 미치는 영향이기에 저 자신의 영혼의 상태에 관하여 제 방식대로 표현하는 것을 이해해 주시리라 믿습니다.”이러한 진술은 그가 교의적인 전망으로부터 개인적인 종교적 체험의 전망으로 변화되었음을 보여 주고 있다.또 다른 예는 그의 저서 「인간은 섬이 아니다」(No Man Is an Island, 1955)에서 발견할 수 있다. 이 책의 머리말에서 그는 관상적 삶에 대한 자신의 체험과 그 체험에 관한 숙고들을 나눔으로써 믿음의 문제들에 접근하고 있다고 체험의 중요성을 더 분명히 드러내고 있다. 그는 “관상은 신적인 것들의 체험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설명할 수는 없지만 체험할 수 있는 이 위대한 신비 속으로 들어갑니다”라고 언급했다. 그가 관상 안에서 체험의 가치를 깨달았다고 하여 전통적인 가톨릭 관상을 무시한 것은 아니다. 오히려 그는 이 전통의 가치를 재발견하고 발전시키고 있으며, 그 자신의 관상적 체험 안으로 그것을 종합하였다.머튼에 따르면, “전통은 살아 있고 활동적이다… 오래된 전통은 항상 매우 새롭기도 하다. 그것은 각 세대에 다시 태어나며, 새롭고 특별한 방식으로 살아 있고 적용되어 항상 활기를 되찾고 있기 때문이다.”(「인간은 섬이 아니다」 226)그러나 머튼은 ‘진정 살아 있는 전통적 내용이 텅 비워진’ 전통주의에 대해 저항하라고 경고를 했다. cpbc2020.03.04
[사도직현장에서] 기저귀를 빨면서도 감사한 나날들 박경옥(모니카, 서울 가톨릭 여성의 집 원장) 박경옥 원장 여성의 집에는 문제를 가진 여성들의 발길이 끊이질 않았다. 가출 부녀자는 심한 가정폭력을 피해 어린 자녀를 업고 찾아왔다. 손에는 조그만 지갑 외에 본인의 옷은 물론, 아기가 입고 먹을 것도 없었다. 막막했다. 교육을 받는 동안 이곳에 머물 수는 있었지만 계속 함께 살 수는 없었다. 파출 일을 해도 문제였다. 아기를 업고 일터로 가는 여성들을 볼 때마다 마음이 아팠다. 이런 이유로 돌보게 된 아이가 두 명이었다. 그 아이들을 돌보며 주님께 물었다. “젊은 여성들이 어떻게 해서라도 살아보겠다고 용기를 냈는데, 어떻게 도와줄 수 있을까요?” 그리고 아기들을 위해 보육할 곳을 만들었다. 성경에 ‘아가페’(사랑)란 말에서 이름을 따 ‘아가방 탁아원’(1982년 개원)이라고 지었다. 당시 한국에선 24시간 보육하는 곳은 그 어디에도 없었다. 언론에서도 관심을 보였다. 기사를 보고 무작정 상경하는 이들이 늘어났다. 이유는 다양하고도 비슷했다. 일부 여성은 돌려보냈지만 그럴 수 없는 이들도 많았다. 하지만 오랜 기간 머물게 해줄 공간도 없었다. 문제는 당장 의식주에 필요한 모든 도움을 줘야 한다는 것이었다. 식사는 물론, 잘 곳과 생활에 필요한 옷과 침구, 유아용품을 제공해야 했다.가장 먼저 아기 엄마를 교육한 후 침실이 제공되는 일자리를 찾아 소개했다. 일자리는 교회가 운영하는 수도원, 기도의 집, 병원과 신학교였다. 함께 데려온 아기는 아가방 탁아원에 일정 기간 맡아주며, 부모로서 책임감을 느끼게 하도록 대가를 지불하게 했다. 아가방 탁아원에 처음 들어온 5명의 아기에게 분유를 먹이고, 이유식을 만들어 먹였다. 천 기저귀도 빨아야 했다. 생각보다 많은 일손이 필요하게 됐고, 회원들과 가까운 대림동본당 신자들이 와서 빨래를 도왔다. 아기들이 깨끗한 기저귀를 사용할 수 있음에 감사한 나날이었다.박경옥 원장(모니카, 서울 가톨릭 여성의 집) 평화신문2020.03.04
[장현규 수녀의 사랑의 발걸음] 9. 하느님은 우리의 쉼, 우리 피난처프랑스 성요한사도수녀회 장현규(마리스텔라) 수녀 세상을 뒤흔들고 있는 코로나19 바이러스가 우리 수녀원도 비켜가지 않았다. 함께 사는 동료 수녀 10명 중 7명의 확진자가 나왔다. 모두의 기도와 걱정 속에 다행히 수녀님들은 완쾌됐다. 그간 프랑스는 계속 바깥출입이 제한됐다. 내가 줄곧 해오던 환자들을 만나는 것도 사실상 힘들다. 대신 산책 정도만 가능해 매일 거리를 나가 걷기 운동을 하고 있다. 걷기는 건강에 좋다.수녀원 옆 대성당을 향해 걷는 동안 성전에서 기도하고 싶어졌다. 코로나바이러스가 프랑스에 확산되기 시작할 때 수녀원이 운영하는 양로원 어르신들은 곧장 격리 상태에 들어갔다. 미사가 중단된 탓에 수녀원 성당도 굳게 잠겼다. 기도가 필요했다. 인근 대성당에 도착하니 마침 현시대의 성체가 나를 맞아주셨다. 그 앞에선 신자들이 기도하고 있다. 이런 위기 상황에서도 기도하는 이들의 모습이 어찌나 아름다워 보이는지.이럴 때 더욱 필요한 것은 기도다. 나도 기도하는 이들 안에 들어가 하느님 아버지의 자비로우신 도움을 간청했다. “이 아픔의 날들이 빨리 지나가게 해주세요.” 내가 만나온 수많은 환자도 떠올렸다. 고개를 돌려보니, 성당 안 조금 외진 구석에서 한 신부님이 신자들의 고백을 듣고 계셨다. 내 마음도 함께 숙연해졌다. 하느님께서도 우리의 고백을 들어주시겠지.특히 젊은이 몇몇이 ‘성체 현시대’ 앞에서 기도하다가 고해성사를 하기 위해 신부님께로 계속 가고 있었다. 작은 모습일 수 있지만, 나는 이 젊은이들의 경건한 믿음에 마음 깊이 감동을 하였다. 이 시련의 때가 하느님의 사랑과 자비 안에 더 깊이 들어가는 ‘회심의 시기’임을 다시금 느꼈다.지난 사순 시기는 특히 이탈리아의 코로나바이러스 확진자와 사망자 수가 급격히 높아질 때였다. 그때 잘 아는 형제님에게서 전화가 걸려왔다. 프랑스의 확진자 수도 연일 올라가고 있었던 터라 내 안부가 궁금하셨던 것이다. 동료 수녀님들의 확진과 완쾌 소식을 전하며 마음을 나눴다. 그럼에도 우리 수녀들은 긴장 상태에 있었다.수화기 넘어 형제님은 안타까운 소식을 전했다. 이탈리아에서는 사제 60명이 환자들을 돌보다가 감염되어 선종하셨다는 슬픈 소식을 처음으로 듣게 됐다. 동료 수녀님들께 이 고통스러운 소식을 전했을 때, 모두 아무 말 없이 침통해 했다. “나는 착한 목자다. 착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내놓는다.”(요한 10,11) 이탈리아 신부님들은 입원한 환자들에게 가까이 다가갔다고 한다. 위급한 중에도 환자를 찾아가 고해성사와 병자성사를 집전하고, 성체도 영해 주시다가 자신들도 감염된 것이다. 그들의 모습을 성경이 대변해주고 있다. “아버지께서는 내가 목숨을 내놓기 때문에 나를 사랑하신다. 그렇게 하여 나는 목숨을 다시 얻는다.”(요한 10,18)신부님들이 고통으로 신음하는 환자들을 위로했던 그 순간, 그들은 얼마나 큰 예수님의 사랑을 느꼈을까. 마지막까지 예수님 닮은 모습을 지켰던 신부님들이 천국에 가셨길 기도드린다. 60명의 신부님은 착한 목자, 아버지로서의 소명을 다 하시고 지금은 자신들의 생명까지 바치며 사랑하던 신자들과 부활의 크나큰 기쁨 안에 인자한 아버지 집에서 살고 계실 것이다.시편은 노래한다. “하느님께서 우리의 피신처와 힘이 되시어 어려울 때마다 늘 도우셨기에 우리는 두려워하지 않네, 땅이 뒤흔들린다 해도 산들이 바다 깊은 곳으로 빠져든다 해도 바닷물이 우짖으며 소용돌이치고 그 위력에 산들이 떤다 해도.”(시편 46,1-3)복음서는 이에 대한 믿음을 굳건히 해준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다. 나를 믿는 사람은 죽더라도 살고, 또 살아서 나를 믿는 모든 사람은 영원히 죽지 않을 것이다.”(요한 11,25-26) cpbc2020.06.24
![[인천교구 사목교서] 성서의 해 Ⅱ -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이들이 오히려 행복하다”(루카 11,28)](//cpbc.co.kr/CMS/newspaper/2019/11/rc/767591_1.3_titleImage_1.jpg)
[인천교구 사목교서] 성서의 해 Ⅱ -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이들이 오히려 행복하다”(루카 11,28) [인천교구 사목교서] 성서의 해 Ⅱ -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이들이 오히려 행복하다”(루카 11,28)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거룩하고 살아있는 말씀인 성서를 통해 하느님께서 주시는 지혜와 힘과 은총이 여러분 안에 가득하기를 기도합니다. 저는 올해, ‘두 번째 성서의 해’를 지내고자 합니다.성서를 가까이하지 않으면 주님의 말씀을 알 수 없고, 우리의 신앙도 성장할 수 없습니다. 신앙생활 안에서 성서를 읽고, 묵상하며, 삶 안에서 주님의 말씀을 실천하는 것은 무척 중요합니다. 우리가 성서를 읽는 이유는, 학식의 증대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와의 친밀함을 더하고, 기도하기 위해서입니다. 기도하는 마음으로 성서를 읽고, 자신이 묵상한 성서 본문의 내용으로 기도할 때, 우리는 하느님의 뜻을 점차 알아가게 될 것입니다. 즉 주님의 말씀을 읽고, 들으면서 우리는 주님의 말씀을 경청하게 되고, 주님 말씀에 대한 응답으로 주님께 말씀을 드리는 기도를 바치게 됩니다. 그렇게 우리가 성서를 읽는 순간이 하느님을 향한 거룩한 시간으로 변화하게 될 것입니다.또한, 우리는 주님의 말씀을 듣고 기도하면서, 성서를 통해 우리 자신이 어떤 삶을 살아야 하는지를 자연스럽게 생각하게 됩니다. 성서는 우리의 일상 안에서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를 선택할 수 있도록 우리를 초대합니다. 그리고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삶으로 우리를 이끌어 줍니다. 비록 인간적인 나약함과 부족함으로 이 초대에 응하지 않을 때도 있지만, 그럼에도 포기하지 않고 성서를 읽고 기도할 때에 하느님께서는 우리 안에 점차 “그리스도의 마음”(1코린 2,16)이 형성되도록 이끌어 주실 것입니다. 그러한 의미에서 여러분 모두가 다음의 세 가지를 실천하며 새로운 한 해를 보냈으면 합니다.첫 번째, 기도하는 마음으로 성경을 읽도록 합시다. 교회는 전통적으로 성경을 읽는 방법으로 ‘거룩한 독서 Lectio Divina’ 방법을 제시하였습니다. 독서와 묵상, 기도, 그리고 하느님과의 일치는 거룩한 독서의 근본 요소입니다.두 번째, 주님의 말씀을 실천하기 위해 노력합시다. 읽고 들었던 주님의 말씀에 머무는 것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생활의 변화’, ‘자신의 변화’를 이룰 수 있도록 말씀의 실천이 뒤따라야 합니다. 세 번째, 말씀을 선포하는 선교사가 되도록 노력합시다. 내 안에 살아계신 주님을, 주님의 말씀을 전할 수 있어야 합니다. 성서를 통해 듣고, 느끼고 체험한 나의 신앙을 이웃들에게 전하는 말씀의 선교사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하느님께서 주신 새로운 2020년 한 해, 교구의 모든 형제자매가 주님의 말씀 안에서, 주님의 말씀을 통해 세상을 살아갈 힘을 얻게 되시기를 기도합니다. 평화신문2019.11.27
![[생활속의복음] 연중 제2주일-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하느님의 어린양](//cpbc.co.kr/CMS/newspaper/2020/01/rc/771054_1.1_titleImage_1.jpg)
[생활속의복음] 연중 제2주일-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하느님의 어린양 임상만 신부 창세기 3장을 보면, 태초에 아담과 하와가 선과 악을 알려는 욕심으로 금지된 열매를 따 먹자 눈이 열려 자기들이 알몸인 것을 알고는 무화과나무 잎을 엮어서 두렁이를 만들어 입었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부끄러운 알몸을 가릴 수 없었기에 주 하느님 앞을 피하여 동산 나무 사이에 숨는다. 이 모습을 불쌍히 보신 하느님께서는 사람과 그의 아내에게 가죽옷을 만들어 입혀 주셨다는 이야기가 나온다. 인간이 죄를 지어 얻은 부끄러움을 하느님께서 친히 이들에게 옷을 입히심으로써 덮어주시고, 당신과의 관계가 완전히 끝나지 않았음을 상기시켜 주시는 내용이다.성경에 분명히 아담과 하와의 부끄러움을 나뭇잎으로는 가릴 수 없어 하느님께서 친히 가죽옷을 입히셨다는 내용이 나온다. 그런데 이 가죽은 동물의 희생이 아니면 얻을 수 없다. 다시 말하면 동물의 피 흘림으로 마련된 가죽옷으로만 비로소 인간이 지은 죄의 부끄러움을 가릴 수 있었다는 것이다. 이런 이유로 이스라엘 백성들은 매번 태어난 지 1년 정도의 어린 양을 제단에 희생 제물로 바치면서 하느님의 자비와 죄 사함을 구하는 제사를 드렸다. 그들 모두가 제단에서 흘린 ‘어린양의 피’가 아니면 도무지 용서받을 수 없는 죄인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때가 되면 죄인들을 위하여 하느님께서 친히 완전한 속죄와 죄 사함의 희생 제물을 마련하실 것이란 믿음으로 메시아, ‘하느님의 어린양’을 목매어 기다리고 있었다. 오늘 복음에 보면, 요한 세례자는 예수께서 다가오시자 “보라,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하느님의 어린양이시다”라고 증언한다. 구약에서 예언된 하느님의 자비가 예수를 통해 이미 이루어지고 있음을 선포한 것이다. 예수께서 인류의 모든 죄를 속죄하기 위해 하느님께서 마련하신 희생 제물, 흠 없는 어린 양으로 세상에 오셨고, 장차 십자가에 속죄의 제물로 희생하실 것에 대한 증언이다. 그러므로 요한은 어린양의 희생 제물로 주어진 죄 사함을 얻기 위해 먼저 죄를 떠나 회개해야 하고, 하느님께 돌아왔다는 표시로서 세례를 받으라고 요구한다. 그러나 당시의 세례는 큰 죄를 지은 유다인이 공동체에서 쫓겨났다가 다시 돌아오거나, 이방인들이 유다교로 개종할 때 받는 ‘죄인들을 위한 정결례’ 형식이었기에 일반 유다인들은 거의 세례를 받지 않았고 따라서 요한의 세례도 마땅치 않게 생각했다. 자신들은 죄로 인한 해당 사항이 없다는 이유였다. 요한은 유다인들에게 하느님 앞에 누구도 죄 없는 사람은 없으므로 그들도 이방인들과 똑같이 회개하고 그 표시로 세례를 받으라 요구한다. 그리고 곧 오시어 물과 성령으로 세례를 주실 예수를 증언하고 있다. 이에 바오로 사도는 “우리가 유다인으로서 나은 점이 있습니까? 전혀 없습니다. 사실 우리는 이미 앞에서 유다인들이나 그리스인들이나 다 같이 죄의 지배 아래 있다고 고발하였습니다. 이는 성경에 기록된 그대로입니다. ‘의로운 이가 없다. 하나도 없다’”(로마 3,9-10)고 하면서 누구나 할 것 없이 주님의 세례를 받는 것이 유일한 죄 사함의 길임을 강조하고 있다.예수께서 우리가 지은 죄의 부끄러움을 덮을 수 있도록 어린양으로 희생되셨다. 당신은 죄가 없으심에도 ‘죄인들을 위한 세례’를 스스로 받으심으로 우리도 세례를 통해 죄 사함의 은총을 얻을 수 있게 하셨다. 그러므로 우리가 살 수 있는 길은 오직 예수를 믿는 길밖에는 없다. 누구든지 자기 죄를 대신하여 예수께서 어린양으로 희생되셨음을 믿는 사람, 십자가에서 흘리신 피로 인해 죄 사함 얻음을 믿는 사람은 그리스도를 입게 되어 하느님과 올바른 관계를 회복하여 구원에 이르기 때문이다. 임상만 신부(서울대교구 상도동본당 주임) 평화신문2020.01.15

주님이시며 생명을 주시는 진리의 영성령 강림 대축일, 성령은 어떤 분이신가 베첼리오 티치아노의 ‘성령 강림’. 1570년 경 작품. 유화. 베네치아 구원의 성모성당. 31일은 주님 부활 대축일을 지낸 지 만 50일째 되는 날이다. 교회는 주님께서 부활하신 후 50일째 되는 이 날에 성령께서 사도들에게 강림하신 것(사도 2,1-13)을 기념해 ‘성령 강림 대축일’을 지낸다. 부활 제7주간이 끝나는 날인 이날은 주님께서 우리에게 성령을 부어 주심으로써 ‘그리스도의 파스카’를 완성하신다. 그래서 교회는 성령 강림 대축일로 ‘부활 시기’를 끝내고 다음 날부터 ‘연중 시기’로 들어간다. 삼위일체(三位一體)의 세 위격 가운데 성부(聖父) 하느님과 주님이신 성자(聖子) 예수 그리스도는 누구이신지 분명하다. 하지만 성령(聖靈)은 친숙하면서도 조금은 낯설다. 성령 강림 대축일을 맞아 모든 그리스도인이 주님 안에서 성령을 따르는 새로운 삶의 열매를 맺을 수 있길 희망하며, 성령께서 어떤 분이신지를 소개한다. 글은 「가톨릭교회 교리서」와 교황청 국제신학위원회 위원으로 활동하고 있는 박준양(가톨릭대학교 신학대학 교수) 신부의 「성령론」(가톨릭대학교출판부) 내용을 중심으로 정리했다. 성령 강림신약성경 사도행전 2장은 성령 강림 사건을 자세히 증언하고 있다. 성령 강림은 크게 네 가지 사건으로 전개된다. 때와 장소는 주님께서 부활하신 그해 오순절 날 예루살렘의 한 가옥 위층 방이다. 오순절은 유다인들이 이른 봄에 이집트 탈출을 기념하는 과월절 곧 파스카 축제를 지낸 뒤 50일째 되는 날로 봄보리와 밀 등 햇곡식을 거두어 하느님께 봉헌하는 감사제 날이다. 또 오순절은 이스라엘 백성이 시나이 산에서 하느님과 맺은 계약을 기념하는 날이기도 하다. 사도행전은 성령께서 강림한 장소를 명확히 밝히고 있지 않지만, 교회 전승은 시온 산에서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마지막 만찬을 했던 집의 위층 방이라고 전하고 있다. 주님의 어머니이신 마리아와 사도들은 주님 승천 사건 이후 자기들이 묵고 있던 이 집으로 돌아와 위층 방에서 한마음으로 기도에 전념하고 있었다. 그 방에는 120명가량이 성모님과 사도들과 함께 있었다. 이들은 유다 이스가리옷의 빈자리를 대신할 사도로 마티아를 제비뽑기로 선정했다. 성령께서는 오순절 날 이 방에 모인 모든 이에게 불혀 모양으로 강림하셨다. 성령으로 가득 찬 그들은 모두 성령께서 주시는 능력대로 각기 다른 언어들로 말하기 시작했다. 그때에 예루살렘에는 오순절 축제를 지내기 위해 세계 모든 나라에서 온 독실한 유다인들이 모여 있었다. 그들은 성령으로 가득 찬 주님의 제자들이 각기 자기 지방 말을 하는 것을 듣고는 놀라워했다.베드로 사도 역시 성령으로 가득 차 예루살렘의 유다인들에게 “여러분이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인 예수님께서 부활하셨고, 하느님께서 그를 주님과 메시아로 삼으셨습니다”라고 설교한 후, 예수 그리스도와 성령의 이름으로 3000여 명에게 세례를 주며 첫 신자 공동체를 설립했다. 사도행전은 이처럼 성령께서 강림한 오순절이 바로 교회 설립일이며, 주님의 복음을 모든 민족에게 선포하는 성령의 사명이 바로 교회 안에서 성취된다는 것을 상기시켜주고 있다. 그래서 교회는 오순절에 성모님과 사도들에게 강림하신 성령은 이제 교회 안에 머무시며 교회를 거룩하게 하시고, 종말까지 하느님 백성인 교회를 이끌어 아버지 하느님께 인도하신다고 고백한다. (「가톨릭교회 교리서」 제747항 참조). 성령은 어떤 분이신가 1. 성령은 생명을 주시는 하느님이시다.성령은 성부와 성자와 본질이 같으신 하느님이시다. 성령은 성부 하느님의 영이시며, 성자 그리스도의 영이시다. 성령의 현존과 활동은 삼위일체이신 하느님의 인간 구원 경륜 전체에서 이루어진다. 창조주이신 성부 하느님께서는 인간을 만드실 때 당신의 숨을 인간에게 불어넣으시어 생명을 주셨다. 그래서 욥은 “하느님의 영이 저를 만드시고 전능하신 분의 입김이 제게 생명을 주셨답니다”(욥 33,4)라고 고백한다. 또 시편 저자는 “당신께서 그들의 숨을 거두시면 그들은 죽어 먼지로 돌아갑니다. 당신의 숨을 내보내시면 그들은 창조되고 당신께서는 땅의 얼굴을 새롭게 하십니다”(시편 104,29-30)라고 찬미한다. 성령께서는 그리스도의 강생과 부활을 통해 인간에게 구원의 생명을 선물하신다. 예수님의 지상 삶에 동반했던 영과 부활하신 그리스도에 의해 주어진 영은 같은 성령이시기 때문이다. 그래서 구원은 성령을 통해 그리스도 안에서 실현된 하느님의 생명에 참여하는 것이다. 성령께서 인간에게 주시는 생명은 썩어 없어질 육적인 생명이 아니라 우리로 하여금 하느님의 자녀가 되게 하는 살아 있는 생명이다. 그 생명 안에 사는 이는 ‘사랑, 기쁨, 평화, 인내, 친절, 착함, 신용, 온유, 절제’(갈라 5,22-23)와 같은 성령의 열매를 얻을 수 있다. 그래서 교회는 “주님이시며 생명을 주시는 성령을 믿나이다. 성령께서는 성부와 성자에게서 발하시고, 성부와 성자와 더불어 영광을 흠숭을 받으신다”고 고백한다.(니케아-콘스탄니토폴리스 신경 참조)2. 성령은 진리의 영이시다. 성령께서는 ‘진리의 영’이시다. 예수님께서는 “내가 아버지께 청하면, 아버지께서는 다른 보호자를 너희에게 보내시어, 영원히 너희와 함께 있도록 하실 것이다. 그분은 진리의 영이시다”(요한 14,16)라고 알려주셨다. 우리말로 ‘진리의 영’으로 옮겨진 성경 본문의 헬라어는 ‘파라클레토스’(παρακλητοs)이다. 파라클레토스는 진리의 영이라는 뜻뿐 아니라 보호자, 협력자, 인도자, 중재가, 위로자 등의 의미를 포함하고 있다. 따라서 파라클레토스는 성령께서 하시는 다양한 역할을 잘 드러내 보여준다. “우리에게 생명의 힘을 주시는 파라클레토스 성령께서는 내가 불능의 상태에 빠져 있을 때에 ‘보호자’로서 나를 감싸 주시고 위험에서 보호하시며, 또한 내가 어려움에 빠져 도움이 필요한 순간에 나를 도와주시는 ‘협조자’이자 ‘협력자’이시다. 그분께서는 또한 내가 어디로 가야 할지 모를 때, 그 방향조차 보이지 않는 순간에 나를 올바른 방향으로 이끄시는 ‘인도자’이자 ‘안내자’이시다. 그리고 성령께서는 내가 억울한 일을 당해 위기의 순간 봉착했을 때 내가 모든 것을 고백해 말할 수 있는 ‘상담자’이시며, 또한 나를 위해 말씀해주시는 ‘변호자’이시다. 따라서 그분께서는 나를 격려하는 ‘지지자’이고 ‘옹호자’이며 ‘대변자’이신 것이다. 마지막으로 성령께서는 내가 슬픔과 두려움과 절망에 빠져 좌절해 있을 때 나를 위로해주시면서 나를 위해 탄식하고 대신 기도해주시는 ‘위로자’이시다.(박준양, 「성령론」 292쪽)3. 성령은 교회의 영혼이시다. 성령께서는 교회에 생명력을 불어넣어 주시고 인도하시는 ‘교회의 영혼’이시다.(성 요한 바오로 2세 교황 회칙 「생명을 주시는 주님」 참조)그리스도인이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받아들이고 그분의 인격과 업적을 체험하는 것은 성령의 이끄심이다. 성령께서는 인간의 쇄신을 통해 구원을 현실로 이루는 분이시다. 따라서 그리스도께 구원을 받고 성령 안에서 새사람이 된 인간이야말로 삼위일체이신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존재이다. 그래서 성령께서는 교회 안에서 활동하실 뿐 아니라 교회의 경계를 넘어온 우주 안에서 활동하시면서 예수 그리스도의 강생과 생애와 죽음과 부활에 함께하신다. 이처럼 성령은 우리 모두를 하느님과 인간 사랑에 대한 열정으로 이끌어주는 분이다. 성령이 동반하지 않는 신앙은 빈 껍데기나 마찬가지다. 성령과 함께하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거룩한 독서, 기도, 묵상, 성체조배, 미사와 같은 교회의 모든 신앙 행위를 통해 성령의 은총을 구해야 한다. 리길재 기자 teotokos@cpbc.co.kr cpbc2020.05.27

미사 참여하는 ‘꽃 신자’ 만개한 춘천 소양로본당SNS 통해 헌금 모아 꽃 봉헌 교우들 이름 적어 본당 장식... 미사 중단 후 50여 일째 고리 묵주기도로 연대 이어가 춘천교구 소양로성당이 신자들이 봉헌한 꽃으로 장식됐다. 코로나19로 미사가 중단됐지만, 김현준 주임 신부는 꽃 신자들과 함께 미사를 봉헌하고 있다. 소양로본당 사진제공 춘천교구 소양로성당(주임 김현준 신부)에 꽃이 만개했다.‘성당 안에 웬 꽃이?’ 할 수 있지만, 성전 무릎틀 자리와 제단 위에 만개한 꽃들은 모두 신자들이 봉헌한 것이다. 코로나19 사태로 한 달 넘게 미사에 참여하지 못한 신자들이 답답한 심경에 마음만 졸이기보다 아름다운 꽃을 봉헌해 미사에 대신 참여시키고 있는 것이다.카네이션, 안개꽃, 난, 장미 화분 등 다양한 꽃들이 소양로본당 성전에 가득하다. 미사 참여의 어려움이 이어지면서 본당에서 낸 아이디어로 성당이 꽃밭이 된 것이다. 주일학교 학생들의 이름부터 가족 단위, 입원 중인 신자들의 이름까지 꽃마다 교우들의 이름도 빼곡히 적혔다. 제대 앞은 본당 설립 70주년 기념 성경 필사본이 자리하고 있다.본당은 SNS를 통해 신자들이 1~3만 원씩 헌금으로 꽃을 봉헌하도록 했고, 교우 120여 명이 참여했다. 주임 김현준 신부는 매일 꽃 신자(?)들이 자리한 가운데 미사를 봉헌해오고 있다. 덕분에 꽃으로 아름답게 장식된 가운데, 주님 부활 대축일 미사도 봉헌할 수 있었다.신자들은 꽃 봉헌 외에도 ‘고리 묵주기도’를 통해 영적으로 연대하고 있다. 지난해 5월 성모 성월에 모든 본당 신자가 팀을 이뤄 참여하는 고리 묵주기도를 했던 경험을 바탕으로, 이번 미사 중단 기간에도 똑같이 각 가정에서 일사불란하게 매일 묵주기도를 바치고 있다. 고리 묵주기도는 교구 공동체 미사가 중단된 2월 26일부터 지금까지 50여 일째 지속되고 있다. 묵주기도 지향은 △코로나19 속 가족 건강과 안전 △본당, 지역 사회, 국가가 시련을 딛고 일어나기 위하여 △사순 시기 신심 실천 등 다양하다. 특히 올해 설립 70주년을 맞은 뜻깊은 시기에 본당 미사 참여 대신 대송을 해야 하는 상황에서 신자들이 빠짐없이 매일 시간대별 묵주기도를 끊이지 않고 이어오고 있다.본당 사제는 매일 강론과 말씀, 봉헌된 꽃 사진을 교우들에게 전송해주고, 신자들은 고리 묵주기도를 완료할 때마다 매일 사제에게 이를 전달해오고 있다. 전례의 어려움 속에도 꽃 봉헌과 고리 묵주기도로 소통하는 본당 신앙생활을 지속하고 있는 것이다. 간혹 성체 조배 등 기도하러 성당 오는 신자들도 자신이 봉헌한 꽃을 사진으로 담아 가며 본당과 함께하는 마음을 되새기고 간다.김현준 신부는 “코로나19 상황의 어려움이 따르지만, 이 같은 사목을 통해 긍정적으로 즐겁게 기도하며 영적으로 연대하고 있다”며 “위급한 상황에서도 비대면 전례와 기도를 얼마든지 신자들과 해낼 수 있음을 느꼈으며, 미사 재개 때까지 ‘꽃 신자’들과 미사 전례를 이어갈 것”이라고 전했다. 이정훈 기자 sjunder@cpbc.co.kr cpbc2020.04.16

알쏭달쏭한 비유 속에 사랑이 담겨 있네성경 연구 바탕 예수님 비유 해설, 시대 분위기, 성경 원어 곁들여
성경 영화 ‘I am the bread of life’ 중 예수가 사람들에게 하느님 뜻을 전하고 있는 모습. 비유 속에 담긴 예수님 사랑 성서와 함께 / 정규한 신부 지음 / 1만 원예수님은 ‘비유의 달인’이었다. 예수님 비유는 고통과 번민, 죄의 유혹에 갇힌 수많은 양들을 위한 가장 효율적이고도 강력한 ‘하느님 메시지’ 전달 방식이었다.예수님은 왜 “수확 때까지 밀과 가라지를 모두 자라도록 내버려 두라”(마태 13,24-30)고 했을까. 온종일 일한 사람과 1~2시간 일한 사람에게 같은 품삯을 준, 선한 ‘포도나무밭 주인 이야기’(마태 20,1-16)는 왜 들려줬을까. 아버지는 왜 재산을 몽땅 탕진하고 돌아온 작은아들을 환대(루카 15,11-32)했을까. 예수의 비유는 상식과 통념을 넘어선다.정규한(예수회) 신부의 「비유 속에 담긴 예수님 사랑」은 성경 연구를 바탕으로 한 ‘예수님 비유 해설집’이다. 당시 시대 분위기와 함께 성경 원어를 곁들인 설명이 눈에 쏙쏙 들어온다.가라지는 우리 논밭의 ‘잡초’ 같은 존재. 고대 중동에서도 원수진 사람 밀밭에 가라지 씨를 뿌려 앙갚음할 정도였다. 밀은 선(善)이자 의인으로, 가라지는 악인으로 여겨졌다. 그럼에도 예수가 밀과 가라지를 함께 자라도록 두라고 한 뜻은 수확, 즉 ‘최후의 심판’은 하느님이 하실 일이라는 것이다. ‘심판’보다 ‘공존’에 초점을 맞춰 살라는 뜻이다. 교회는 죄인을 받아들이고, 사람들을 심판하지 말아야 하며, 인내와 회개로 세상의 악을 줄이는 데 힘써야 한다는 교훈을 내포한다. 가라지는 악에 대한 ‘하느님 자비의 표지’이다.재산을 탕진하고 돌아온 자식을 버선발로 뛰어 나가 잔치까지 벌여줄 아버지가 얼마나 될까. ‘돌아온 탕자의 비유’는 회개한 자녀에 대한 드넓은 아버지 하느님의 사랑 방식을 깨우쳐주는 일화다. 감히 아버지 유산을 미리 청구한 것도 모자라 이방인 고장으로 도망가 살다니. 작은아들의 모습은 당시 유다 사회에서도 용납하기 어려운 일이었다. 마치 아버지 존재를 벗어나 상식 밖의 행동으로 살아가는 이들을 보여주는 듯하다.“아버지, 제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습니다.” 하지만 결국 작은아들은 깊이 회개했고, 아버지는 껴안고 입을 맞춘 뒤 가장 좋은 옷과 반지, 신발을 건넸다. 누구나 자신의 잘못을 진정 뉘우친 자는 기다렸다는 듯 달려 나와 기뻐하는 하느님을 만날 수 있다.일한 시간만큼 정당한 대가를 받는 것은 당연지사. 그러나 예수는 ‘선한 포도밭 주인’은 종일 일한 사람이든 적은 시간을 일한 사람이든 똑같은 품삯을 준다. 인력시장에서 아무도 데려가지 않는 남은 일꾼들마저 포용한 포도밭 주인에게 불평이 쏟아진 것. 우리는 노력에 대한 응당한 대가를 받지 못하면 쉽게 불평한다. 결국 무한한 하느님 사랑을 받고 포도밭에서 일할 수 있게 된 인간들은 비교심리와 시기심으로 대가를 바라며 불만을 터뜨리곤 한다. 예수님은 이 같은 비유를 통해 하느님 나라에서 꼴찌도 첫째가 될 수 있는 ‘하느님 셈법’을 알려준다.우리는 하느님 뜻을 다 알 수 없는 존재다. 예수님이 온갖 비유법을 동원했던 것은 세상의 언어로 하느님 말씀을 알아듣게 전하기 위해서였다. 저자는 “복음은 곧 사랑 이야기”라며 “하느님의 참사랑을 실천하는 일꾼이 되자”고 일러준다. 이정훈 기자 sjunder@cpbc.co.kr 평화신문2018.06.12

이제는 성당도 코로나19 안전지대 아니다감염 확산으로 의정부교구 원당성당 일시 폐쇄… 미사 외 본당 내 소모임·식사 자제 권고 잇따라 의정부교구 원당성당이 7일 코로나19 확진자 발생으로 일시 폐쇄됐다. 원당성당에서 발생한 코로나19 확진자의 최초 감염 경로가 ‘방문판매’에서 비롯된 것으로 밝혀져 신자 개인의 주의가 더욱 요구된다. 굳게 닫힌 정문 뒤로 마당에 임시 설치됐던 선별진료소와 성모상이 보인다. 이정훈 기자 sjunder@cpbc.co.kr 의정부교구 원당본당 신자들의 코로나19 감염이 방문판매업체를 다녀온 확진 신자에 의해 전염되었다는 사실이 역학조사를 통해 확인되면서 본당 내 소모임과 행사를 전면 중단하거나 각별한 주의를 기울일 것을 당부하는 교구가 잇따르고 있다.의정부교구는 원당성당에서 8명의 코로나19 확진자가 발생한 것과 관련해 각 본당은 소모임과 행사를 전면 중단하도록 하는 등 방역 수칙과 전례 지침을 더욱 엄격하게 지켜주길 당부했다. 의정부교구는 8일 교구장 이기헌 주교 명의의 공문을 통해 별도의 교구 지침이 있을 때까지 본당의 모든 소모임과 행사를 중단하고, 본당 사제들은 미사 이외에 불필요한 모임과 식사 등은 가급적 자제할 것을 권고했다. 아울러 지구장 신부들은 해당 지구 본당들을 보살피고 각 본당 신부들의 사목적 결정에 도움을 주길 바란다고 당부했다. 이기헌 주교는 “교구 내 본당에서 코로나19 감염이라는 우려스러운 일이 현실로 일어난 것에 대해 교구장으로서 안타까운 마음과 함께 책임을 통감한다”며 “확진을 받은 신자들의 빠른 쾌유를 기도드린다”고 밝혔다. 대전교구는 8일 본당 내 소모임과 행사를 전면 중단했다가 천주교는 대상이 아니라는 정부 방침을 확인하고 10일 이를 해제했다. 대신 방역 지침을 철저히 준수하면서 모임을 가져 달라고 당부했다. 인천과 수원ㆍ춘천교구는 9일, 마산교구는 10일 본당 내 방역에 철저히 하고 소모임 등을 자제할 것을 촉구하는 긴급 지시를 내렸다. 인천교구는 공지를 통해 “정규 예배 외 모임·행사 금지, 단체 식사 금지, 상시 마스크 착용 등의 핵심 방역 수칙을 준수해야 한다”는 내용의 정부가 개신교회에 내린 지시문을 소개하고 “위와 같은 결정사항은 개신교회에 국한되지만, 천주교회도 조심해야 할 필요가 있다”고 밝혔다. 춘천교구는 교구 지침을 통해 현행 방역 수칙을 철저히 지키고, 교구와 지구 단위 월 회합 및 교육 모임, 음식 나눔은 별도의 지침이 있을 때까지 중단할 것을 권고했다. 춘천교구는 “전 세계적 전염병 대처와 위험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의료계와 정부의 행정적 지침만으로는 부족하며 국민 모두의 성실한 이행이 있어야 한다"고 강조하면서 “사제들은 교우들이 가정에서 신앙생활을 지속하도록 이끌어 주길 바란다”고 당부했다. 마산교구도 “각 본당에서는 다시 한 번 경각심을 가지고 마스크 착용, 발열 체크, 거리 두기, 음식나눔 금지 등의 ‘기본 방역 지침’을 잘 준수해 주기 바란다”고 공지했다. 앞서 광주대교구는 1일과 5일 광주광역시와 전라남도의 사회적 거리 두기 2단계 격상에 맞춰 본당과 기관의 미사ㆍ모임을 전면 중단했고, 서울대교구 역시 3일 공지를 통해 미사 외에 불필요한 모임과 식사 등은 가급적 자제할 것을 당부했다. 한편, 정부는 10일 오후 6시를 기해 전국 개신교회를 대상으로 강화된 방역 조치를 시행했다. 이로써 개신교회 내 정규 예배를 제외한 각종 대면 모임 활동과 행사가 전면 금지됐다. 또 자체적으로 진행하는 수련회, 기도회, 부흥회, 구역 예배, 성경 공부 모임, 성가대 연습 모임 등도 할 수 없게 됐다. 아울러 교회 내에서 음식을 제공하거나 여러 사람이 모여 단체로 하는 식사도 금지됐다. 이밖에 개인 신상정보가 담긴 QR코드 기반의 전자출입명부 시스템을 도입해 출입자를 체계적으로 관리하고 수기로 출입명부를 작성할 때도 이름과 전화번호 등을 정확히 쓰도록 했다. 정부는 만약 방역 수칙을 제대로 지키지 않다가 적발될 경우 교회 책임자 및 이용자에게는 300만 원 이하의 벌금, 위반 정도가 심한 경우 집합금지 명령을 통해 교회 운영을 제한한다는 방침이다. 이와 관련해 중앙방역대책본부 정은경 본부장은 8일 정례브리핑에서 “향후 집단 발병 사례나 위험도를 분석해 필요하면 확대 조정이 가능할 것”이라고 밝혀 종교기관에서 코로나19 확진자가 연속해서 나올 경우 강화 조치를 성당이나 사찰에도 확대 적용할 수 있다는 점을 분명히 했다. 이상도 기자 raelly1@cpbc.co.kr cpbc2020.07.15

예수님도 재테크에 관심이 많으셨습니다[엉클죠의 바티칸산책] (31)예수님의 ‘돈 담론’ 예수 그리스도는 끝없이 부(富)를 쌓기만하는 사람들에게 탐욕을 버리고 가진 것을 나누라고 가르치신다. 그분이 싫어하는 것은 돈 그 자체가 아니라 돈에 대한 탐욕이다. 【CNS 자료 사진】 예수님에게 돈은 무엇이었을까. 예수님은 왜 돈 이야기를 그리 많이 하셨을까? 복음서에는 돈 이야기가 정말 많습니다. 이것은 그리스도교의 큰 특징 가운데 하나입니다. 비교종교학자들의 말을 들어보면, 불교와 이슬람교의 경우 주요 경전에 돈 이야기가 거의 없습니다. 불자들이 가장 많이 읽는 금강경에는 돈 이야기가 일절 없다고 하더군요. 이슬람교는 교리로 금리를 인정하지 않으니 돈 이야기가 많이 나올 수 없습니다. 복음서는 어떤가요?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예화의 절반 이상이 돈(재물)에 관한 내용입니다. 복음서 전반에 걸쳐 헌금, 세금, 이자, 환전상, 은행 등 돈과 관련된 단어가 많이 나옵니다. 구체적이고 실무적인 금융 이야기 예수님은 당시 기준으로 상당한 수준의 금융 전문가였음이 분명합니다. 돈의 생리와 메커니즘을 꿰뚫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직접 돈 이야기를 하십니다. 다른 종교의 창시자들과 대조적인 모습입니다. 예수님의 ‘돈 담론’은 구름 잡는 선문답이 아닙니다. 매우 구체적이고 실무적입니다. 예수님 말씀 속에 등장하는 화폐 단위를 보면 알 수 있습니다. 500원 정도 되는 동전(렙톤)에서부터 4억 원 정도 되는 거액(탈렌트)에 이르기까지 다양합니다. 가난한 과부의 헌금(마르 12,41-44) 예화를 읽을 때마다 놀라움을 금할 수 없습니다. “가난한 과부 한 사람이 와서 렙톤 두 닢을 넣었다. 그것은 콰드란스 한 닢인 셈이다.” 렙톤은 그리스 동전이고 콰드란스는 로마 동전입니다. 예수님은 서민들이 많이 사용했을 푼돈까지도 잘 알고 있었고, 로마 화폐와 그리스 화폐의 환율까지 말해 주십니다. 얼마나 자상하고 꼼꼼한 금융 전문가이신가! 2000년 전 갈릴래아는 금융업이 꽤 발달했습니다. 나자렛 근방의 세포리스는 왕립은행이 있던 국제도시였습니다. 갈릴래아 호숫가의 티베리아스도 세포리스에 버금가는 도시였습니다. 금융을 모르고는 사목 활동(복음 선포)이 어려웠을 것입니다. 가는 곳마다, 만나는 사람마다, 금융에 대한 관심이 많았을 터이니 말입니다. 부자들은 물론이고 부자가 되려고 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재테크가 중요한 화제가 될 수밖에 없습니다. 설교나 연설을 할 때 드는 예화는 생활 속의 소재라야 설득력이 있습니다. 성경에 양(羊) 이야기와 돈 이야기가 많이 나오는 것은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의 생활 속에서 양과 돈이 그만큼 중요했다는 의미입니다.돈에 대한 예수님의 가르침을 정리해 보겠습니다. 첫째, 돈의 중요성과 저축의 필요성입니다. 되찾은 은전 이야기(루카 15,8-10)가 여기에 해당합니다. 티끌 모아 태산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하찮은 은전 한 닢도 무시해서는 안 되지요. “어떤 부인이 은전 열 닢을 가지고 있었는데 한 닢을 잃으면, 등불을 켜고 집안을 쓸며 그것을 찾을 때까지 샅샅이 뒤지지 않느냐?” 예수님은 되찾은 은전 한 닢을 되찾은 양 한 마리처럼 귀히 여겼습니다. 둘째, 적극적인 재테크입니다. 탈렌트의 비유(마태 25,14-30)는 목표 수익률 100%의 공격적인 재테크입니다. 예화 속의 주인은 종에게 금융기관(대금업자)의 수익률보다 높은 수익을 기대하고 있습니다. 세 번째, 맹목적 저축에 대한 경고입니다. 어리석은 부자의 비유(루카 12,16-21)는 돈 자체에 탐닉하는 수전노가 되지 말라는 가르침입니다. 곳간이 미어터지게 재물을 모은들 뭐 합니까. 하느님은 언제든지 주인의 목숨을 거두어 갈 수 있는데! 네 번째, 나눔의 미덕입니다. 예수님은 부자들에게 나눔이 참행복임을 가르칩니다. 부자와 라자로의 비유(루카 16,19-31)는 나눔을 모르는 부자의 비참한 말로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돈에 대한 탐닉을 경계하라 예수님은 돈을 싫어하신 게 아니라 돈에 대한 탐닉을 싫어했습니다. 부자를 미워하신 게 아니라 나눔을 모르는 부자를 미워했습니다. “부자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낙타가 바늘구멍으로 빠져나가는 것이 더 쉽다.”(마태 19,24) 사람들은 이 말씀을 들어 예수님이 부자들을 미워한 게 아니냐고 생각하지만, 그것은 오해입니다. 돈을 벌어 부자된 것이 죄가 아니라 모은 돈을 나누지 않는 것이 죄입니다. 낙타와 바늘구멍? 전지전능한 하느님이신데 이게 무슨 문제가 되겠습니까. 하느님은 좁은 바늘구멍을 커다란 터널로 늘려 줄 수 있는 분입니다. 자캐오가 그 모범적 사례입니다(루카 19,1-10). 예수님의 가르침입니다. “돈을 피하지 말고 부딪혀라. 그러나 돈에 사로잡히지 마라.” 이백만(요셉, 주교황청 한국대사) 평화신문2020.07.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