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강의로 배우는 ‘예수님과 함께 걷는 삶’한국CLC 이냐시오 영성강좌, 10월까지 6주간 진행 한국CLC(Christian Life Community in Korea, 그리스도인 생활 공동체)가 15일부터 이냐시오 영성강좌 ‘예수님과 인생을 걷다’를 연다. 10월 20일까지 6주간 매주 화요일 오후 2~4시 서울 영등포구 한국CLC 강의실(영등포구청역 4번 출구 인근)에서 진행된다. ‘예수님과 인생을 걷다’는 이냐시오 성인의 「영신수련」을 바탕으로 한 영성강좌다. 평신도들이 일상 안에서 하느님의 현존과 이끄심을 발견하고, 성경을 통해 예수님을 깊이 만나며 살아가도록 돕는다. 한국CLC는 그간 수원·대구·세종에서 ‘예수님과 인생을 걷다’를 진행했으며, 470여 명이 수강했다. 서울에서 마련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강좌는 △1강 ‘나는 왜 이 세상에 왔는가?’ △2강 ‘예수님 안에서 나를 보다-성찰’ △3강 ‘예수님을 통해 하느님 만나기-기도’ △4강 ‘진심으로 예수님을 사랑하는 길-관상’ △5강 ‘예수님의 선택-식별’ △6강 ‘예수님과 인생을 걷다’ 순으로 진행, 이냐시오 영성의 핵심 주제와 영적 훈련을 배우고 실천하도록 구성됐다. 이냐시오 영성을 전공한 한국CLC 회원 현재우(에드문도) 종교학 박사가 강사로 나선다. 참가자들은 「영신수련」의 ‘원리와 기초’를 통해 자신의 삶과 창조 목적을 돌아본다. 이어 일상 안에서 하느님을 발견하는 ‘성찰’, 성경을 통해 하느님과 친밀하게 만나는 ‘기도’, 예수님의 삶을 깊이 만나고 사랑하도록 이끄는 ‘관상’, 삶의 여러 선택 가운데 하느님 뜻을 찾아가는 ‘식별’을 차례로 배운다. 마지막 강의에서는 세상 속에서 예수님과 함께 살아가는 평신도 그리스도인의 삶을 모색한다. 한국CLC는 교황청 인준을 받은 국제 평신도 공동체로, 이냐시오 영성을 바탕으로 평신도들이 세상 안에서 그리스도를 따르며 살아가도록 영성교육과 사회사도직 활동을 펼치고 있다. 문의 및 접수: 02-2135-9398, 한국CLC 이학주 기자 goldenmouth@cpbc.co.kr이학주2026.09.09

사제 예술가 40여 년 미공개 작품들만 엄선-인천교구 조광호 신부 성화소품전 13~26일 서울 명동 평화화랑 숨가쁜 40여 년이었다. 사제이자 화가, 교육자로 살아온 세월들. 지난 10여 년간 씨앗을 뿌리고 물을 주며 키운 인천가톨릭대 조형예술대학에서도 '교육공무원법상' 정년퇴직했다. 그리고 안식년. 인천가톨릭대에 겸임교수로 적을 두고 있지만, 안식년이어서 강의를 하지 않고 작업에만 몰두하는 조광호 신부는 "지금처럼 행복한 때가 없었다"고 말한다. 그간 200주년 행사와 출판, 미술교육으로 교회행정에만 매달려온 세월을 돌이켜보고 세상으로부터 스스로를 성찰하며 인천 송도에 있는 작업실, 가톨릭조형예술연구소에서 화업에만 몰두할 수 있어서다. 작업실을 들고날 때마다 구상(요한 세례자) 시인이 생전에 건넨 '징심묘관(澄心妙觀)'이라고 쓰인 서각을 보며 '마음을 맑게 하며 진리, 그 본질을 들여다보려' 하는 게 요즘 일상이다. 구상과 비구상, 회화와 조각, 유리화, 도예 등 장르를 넘나들며 자유분방하면서도 사제로서 성찰이 녹아있는 작업을 해온 조 신부는 13~26일 서울 명동 평화화랑(02-727-2336)에서 성화 소품전을 연다. 지난 40여 년간 작품활동을 하며 전시회에 내지 못하고 소장해온 작품 중 교회미술계열 작품만 골라 신앙의 해 사순시기 작품전으로 기획했다. 출품작은 예수 수난과 죽음, 부활을 주제로 한 미공개 회화 20여 점과 유리화 30여 점, 판화 20여 점, 도자기 30여 점 등 100여 점과 그간 써온 해묵은 작업 메모와 스케치 자료까지 망라했다. 교회미술에 관한 한 조 신부는 확고한 미학적 성찰을 하고 있다. '선취(先取)된 개념'으로 작업을 해선 안된다는 것이다. 교회에선 이야깃거리, 즉 스토리텔링(storytelling)이 있어야만 성화로 보는데 그것만 성화는 아니라는 견해다. "흔히들 작가들이 선취된 개념으로 성경을 해석하고 설명하고 풀어가는데 이게 아닙니다. 고정관념에 사로잡히지 않고 무한히 확장되는 신앙적 내면의 표현이 나온다면 그게 구상이든 추상이든 무슨 문제가 되겠습니까?" 이제 조 신부는 안식년을 기점으로 필생의 작업을 기획하고 있다. '예수의 구세사'를 형상화하는 작업이다. 일단 그림이 100점 이상 완성되면 출판사와 함께 그림성경을 펴낸다는 구상이다. 그리고 "작가로서 복음적, 구세사적 작업과 함께 자유로운 작업을 하며 살고 싶다"고 꿈을 전했다. 오세택 기자sebastiano@pbc.co.kr조은일2013.03.05
![[출판]이달의 교계잡지](//cpbc.co.kr/CMS/newspaper/2013/05/rc/455628_1.1_titleImage_1.jpg)
[출판]이달의 교계잡지▨가톨릭 디다케 신앙의 해 신앙의 핵에서는 '안락사, 악인가 선인가?'를 다뤘고, 신앙의 뼈대 공의회 바로 맞추기에서는 '제1차 콘스탄티노플 공의회'에 관해 알아봤다. 성경꼭지에서는 '예수님의 발자국 따라 밟기'와 '띵호아 모세오경'을 실었다.(서울대교구 청소년국/3500원) ▨가톨릭 비타꼰 특집으로 신흥종교단체 신천지교회를 다루며 피해사례와 가톨릭교회 대처 방안을 실었다. 이승환 기자와 함께 떠나는 신앙여행에서는 대전교구 공세리 성지성당을 방문했고, 영성의 빛에서는 천주교 사도직회(팔로티회)를 소개했다.(마리아의 아들수도회/4000원) ▨경향잡지 경향 돋보기에서는 '정전 60년, 한반도 한민족'을 주제로 △정전 60년, 절반의 성공 한국과 위기 국가 북한(조한범) △북한의 3차 핵실험, 더욱 불안해진 정전 질서(고유환) △남북한 평화를 위한 교회의 노력(이기헌)을 게재했다.(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3300원) ▨교회와 역사 최초의 외국인 신부 주문모 신부가 미사를 봉헌한 기념 경당이 있는 초남이성지, 사적 제288호로 지정된 전동성당 등 전주시 일대 성지 순례기를 실었다. 한마음한몸운동본부와 한국교회에서는 최재선 본부 이사와 김기준 전 사무국장을 인터뷰했다.(한국교회사연구소/3000원) ▨그물 민족화해의 길을 특집으로 다루며 '어느 북한 이탈 주민의 호소'를 싣고 북한 이탈 주민의 현실과 고충을 살펴봤다. 지난 호에 이어 '일치의 영성을 살아가는 주교들'을 소개하며 포콜라레운동에 참여하는 주교들의 삶과 신앙을 소개했다.(마리아사업회/3000원) ▨레지오 마리애 레지오 영성으로 △예수님을 모르는 이들에게 선교합시다(여형구) △레지오 마리애와 두 분의 교황님(맥그리거/구자륭) △레지오 단원의 소명은 무엇입니까?(서철) △교회 선교에 있어 사제와 평신도(죠셉 머피/이재호)를 다뤘다. 도란도란에서는 '레지오 입단기'를 실었다.(한국레지오마리애협의회/비매품) ▨말씀지기 매일 복음과 말씀 해설을 영한대역으로 실었다. 아침뜨락에서는 김종오(예수성심전교수도회) 신부가 '불완전함을 안고 산다는 것'을 기고했고 영성에세이는 △새 복음화를 향한 부르심 △가족 같은 본당에서 시작하는 새 복음화를 다뤘다.(가톨릭출판사/3000원) ▨사목정보 '중남미교회 얼마나 알고 계십니까?'를 특집주제로 △라틴아메리카 가톨릭교회의 역사와 현실(김항섭) △기초 교회공동체와 해방신학이 세계교회에 끼친 영향(유혜숙) △종들의 종!(백남해) △중남미 가톨릭교회를 주목한다-한국교회의 중남미 선교를 게재했다.(미래사목연구소/1만 원) ▨생활성서 특집으로 '신앙의 해에 아브라함을 만나다'를 주제로 △아브라함에게서 배운다(방교원) △신앙의 해에 아브라함을 만나야 하는 이유(손희송) △지도와 사진으로 보는 아브라함의 신앙 여정(편집부)을 실었다. 밀양 송전탑 반대 촛불집회 100회 현장을 찾아갔다.(생활성서사/3900원) ▨성서와 함께 10주년을 맞는 민들레 국수집 서영남 대표를 만나 이야기를 들었다. 창세기 궁금해요에서는 '선조들은 정말 그렇게 오래 살았어요?'를 다뤘고, '배워봅시다 성경의 언어'에서는 아브라함, 야훼, 아멘 등 히브리어로 쓰인 이름과 주요 표현을 알아봤다.(성서와함께/3000원) ▨소년 특집기사로 '신부님이 되고 싶어요!'를 게재하며 사제가 되기 위한 과정과 방법을 자세히 소개했다. 예수님이 살던 곳 꼭지에서는 '시온산에서'를 다뤘고 성경 속 인물이야기에서는 '하느님의 심부름꾼인 오바드야'에 관해 알아봤다.(가톨릭출판사/4000원) ▨야곱의 우물 표지 이야기에서는 1인 NGO 문화운동단체 '문화를 생각하는 사람들' 이종수(라우렌시오) 사무국장을 만나 인터뷰했다. 청년공감에서는 '우리의 소원은 통일?'을 주제로 탈북 청년의 이야기와 탈북자 현실과 미래에 관한 대학생 견해를 실었다.(바오로딸/2800원) ▨참 소중한 당신 '영원한 달빛 신사임당'을 특집 주제로 △교육의 천년 대안을 생각하며(안영) △불멸의 영혼, 신사임당(이명희) △시대를 앞서 간 여성, 신사임당(최제영) △가정의 소중함을 새삼 깨닫게 해주는 사임당(편집부)을 실었다. 표지 인물로 재즈 피아니스트 진보라를 만났다.(사단법인 미션3000/3500원) 박수정 기자조은일2013.05.29
![[조규만 주교의 성모님 이야기] (20) 교부들의 중세기 문헌에 나타난 성모님 모습](//cpbc.co.kr/CMS/newspaper/2010/09/rc/350484_1.1_titleImage_1.jpg)
[조규만 주교의 성모님 이야기] (20) 교부들의 중세기 문헌에 나타난 성모님 모습조규만 주교(서울대교구 서서울지역 교구장 대리)8세기 중엽부터 루터 종교개혁 이전까지인 중세기 교부들의 문헌에 나타난 성모님의 모습에 대해 살펴보기로 하자. 이 시대는 이미 성모님이 하느님의 어머니요, 동정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잉태했다는 것이 제2차 니케아공의회(787년)에서 확정된 시기라서 이와 관련된 내용은 더는 언급되지 않는다. 중세기는 베르나르도, 알베르토, 토마스 데 아퀴노, 보나벤투라, 둔스 스코투스 등 대 신학자들이 대거 등장한 시기이기도 하다. 이 시기 성모님에 관한 논의는 주로 원죄에서 자유로운 성모 마리아의 무죄한 잉태와 마지막 생애, 즉 승천에 관한 것이었다. 또 하느님과 인간의 중재자로서 성모 마리아의 역할에 대한 의견이 분분하던 때이기도 하다. 베네딕도회 베다 주교는 성모가 천사와 많은 사람에게 찬양을 받았다는 점을 주목하고 그분은 어느 여인보다 고귀한 분이라고 찬양한다. 성모를 하느님의 어머니, 예수 그리스도 인류 구원사업의 첫 번째 협력자라고 말하지만 결코 여신은 아님을 강조한다. 베다 주교는 비잔틴교회가 성모를 여왕으로 찬양했던 것과 달리 지상에서의 그분 삶의 겸손을 찬양하고 있다. 하느님의 어머니로 특별한 권한을 지니고 예수 그리스도를 잉태해 많은 이들에게 축복과 찬양을 받았지만 결코 지상의 것에 마음을 두지 않고 오직 하느님 뜻에 마음을 쏟았던 겸손과 사랑을 찬양하는 것이다. 베다 주교는 하와에게서 교만을 보고 성모에게서 순종을 본다고 비교해 설명한다. 그는 더 나아가 성경에 근거해 성모와 교회의 유사점을 끌어낸다. 성모와 교회 모두 동정이요, 어머니라고 강조한다. 또한 성경(루카 1,41)에 근거해 성모가 엘리사벳을 방문할 때, 요한 세례자가 모태에서 성화됐다는 입장을 보이고 있다. 이는 성모가 주님의 어머니로 당연히 원죄로부터 성화됐음을 암시하는 것이다. 뛰어난 마리아론 학자이며 서방교회 마리아론에 많은 영향을 준 암브로시오 아우트페르트는 마리아의 승천 축일, 봉헌 축일 등에 관한 많은 글을 남겼다. 당시는 예수 그리스도와 관련된 축일보다 성모승천, 정결례 축일 등이 더 강조됐다. 그는 성모를 순교자의 왕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어머니, 더 나아가 예수를 사랑하는 데 멈추지 않고 모든 이들을 사랑한 우리의 어머니라고 불렀다. 중세 후기 성모의 승천과 무죄한 잉태에 관한 논쟁은 더 활기를 띈다. 이 시대 대부분 신학자들은 예수 그리스도만이 원죄없이 태어나신 분으로, 이 세상 어떤 이도 원죄를 면죄 받을 수 없다고 주장한다. 성모 역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구원을 받았으며, 원죄없이 태어나신 분이라는 점을 받아들이지 못했다. 반면 프란치스코회 둔스 스코투스는 성모가 원죄없이 잉태됐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논쟁은 둔스 스코투스를 지지하는 프란치스코회와 토마스 데 아퀴노를 지지하는 도미니코회 간 대결로 치닫게 했다. 한편 이 시대 대중들의 마리아 신심은 하느님을 엄격한 아버지로, 성모를 자애로운 대왕대비로 간주하는 외경에 바탕을 둔 허황된 성모 신심이 횡행했다. 토마스 데 아퀴노의 스승인 알베르토는 당시 예수와 성모를 동격으로 이해하는 분위기에 경종을 울린다. 하느님과 인간인 성모 사이에는 무한한 차이가 있음을 역설하며, 성모가 하느님 은총을 주는 것이 아니라 그분을 통해 은총이 전해지는 것임을 인지해야 한다고 말한다. 가장 모범적 신학자인 토마스 데 아퀴노 역시 스승의 가르침을 따르고 있다. 그는 「신학대전」에서 성모의 원죄없는 잉태에 반대 의견을 보이고 있다. 성모가 구원자의 모친이 됐을 때 원죄가 사해졌다는 것이다. 성경은 지극히 거룩한 성모가 출산 전은 물론 출산 후에도 동정이라고 말한다. 이는 성자의 권위를 위해, 그 어머니의 영예를 위해서도 합당한 일이다. 동정이 아니라고 말하는 것 자체가 하느님으로서, 인간으로서 완벽성을 지닌 예수 그리스도의 명예를 훼손하는 것이다. 또 혼인한 동정녀에게서 아이가 태어나야 혼인도, 동정도 중요한 것임을 보여주는 것이다. 정리=백영민 기자 heelen@pbc.co.kr조은일2010.09.15
[생활 속의 복음]대림 제4주일-마리아의 순종과 성탄 이기양 신부(서울대교구 10지구장 겸 공동사목 오금동본당 주임)「죄와 벌」,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 등으로 알려진 도스토예프스키라는 러시아 소설가가 있습니다. 임종을 앞둔 도스토예프스키는 자식들을 불러 앉히고 부인에게 루카복음 15장 '되찾은 아들의 비유'를 읽어 달라고 했습니다. 그는 눈을 감고 깊은 명상에 잠긴 채 이 말씀을 들은 다음, 자녀들에게 이런 유언을 남기고 하느님께로 돌아갔다고 합니다. "얘들아, 방금 들은 것을 절대로 잊지 마라. 하느님을 무조건 신뢰하여라. 그분의 자비를 결코 의심하지 마라. 나는 너희를 사랑하지만, 내 사랑은 하느님의 무한한 사랑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니다. 하느님은 당신께서 창조하신 모든 사람을 사랑하신다." 하느님 중심으로 살지 않았던 사람이라면 자식들에게 자기의 재산이나 무덤 관리에 대해서 유언을 했을 터이지만 일생을 하느님 안에서 살고 하느님에 대한 소설을 썼던 그였기에 하느님을 가장 귀중한 유산으로 자녀들 가슴에 깊이 남길 수 있었던 것입니다. 성탄을 앞두고 일생을 하느님 안에서 사셨던 성모 마리아를 만납니다. 어느 날 문득 가브리엘 천사가 마리아에게 나타나 인사를 드리며 "보라, 이제 네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터이니 그 이름을 예수라 하여라"(루카 1,31)는 말씀을 전달합니다. 깜짝 놀란 마리아가 "저는 남자를 알지 못하는데, 어떻게 그런 일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루카 1,34)하고 반문합니다. "성령께서 너에게 내려오시고 지극히 높으신 분의 힘이 너를 덮을 것이다.…하느님께는 불가능한 일이 없다"(루카 1,35-37)고 알리자 "보십시오.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말씀하신 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루카 1,38)며 주님의 뜻을 받아들였고, 인류를 구원 할 메시아를 이 세상에 낳으셨습니다. 이와는 반대로 아담과 하와는 하느님의 뜻을 따르지 않고 자신들의 욕망을 좇았다가 힘든 인생살이와 죽음을 벌로 받고 에덴동산에서 쫓겨났습니다. 아담과 하와의 불순종이 이 세상에 죽음과 저주를 가져왔다면 성모 마리아의 순종은 구세주 탄생으로 이어져 이 세상에 축복과 구원을 가져다줬습니다. 오늘 복음은 하느님의 뜻을 따르는 삶은 축복과 구원이지만 자기 욕망을 따르는 삶의 결과는 죽음과 저주라는 것을 명확하게 말해줍니다. 이것은 비단 아담과 하와 시대뿐만 아니라 어떤 경우에도 똑같다는 것을 성경 전체가 우리에게 가르치고 있습니다. 그 대표적인 사람이 이스라엘 첫 번째 임금 사울입니다. 사울은 하느님의 큰 은총 속에 이스라엘 첫 번째 임금으로 뽑혀 영광의 자리에 올랐지만 하느님께 감사드리지 못하고 결국 자기 욕망을 좇다가 안타까운 최후를 맞이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이러한 모습은 과거 성경 시대 인물들에게서만 보이는 것이 아니라 지금 우리 시대에도 똑같이 되풀이 되고 있습니다. 우리 시대는 마치 아담과 하와 시대를 방불케 합니다. 하느님을 떠나 스스로 서보려고 자기를 믿고 욕망을 추구하다가 죽음의 길로 떨어졌고, 노예 같은 인생을 살 수 밖에 없었던 아담과 하와의 어리석은 모습들이 지금도 곳곳에서 드러나는 것이 현실입니다. 이런 죽음 문화를 상생 문화로 변화시킬 수 있는 방법을 오늘 성모 마리아께서 보여주셨습니다. 내 지식과 경험을 떠나 성모 마리아처럼 하느님의 뜻을 받아들이고 실천할 때 생명과 축복의 길이 열린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겠습니다. 신약성경을 보면 예수님께서는 많은 환자들의 소망을 들어주셨습니다. 소경이 눈뜨기를 청하면 볼 수 있게 해주셨고, 나병 환자가 고쳐주시기를 청하면 손으로 만져서 치유해 주셨지요. 예수님은 죄를 짓고 죽음에 처한 여인을 용서해 주셨고, 세 번씩이나 당신을 배반했던 베드로를 교회의 반석으로 품어주셨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청하는 사람을 결코 거절하지 않으셨습니다. 신앙인으로 산다는 것은 삶의 중심을 하느님 말씀에 두고 현실에 최선의 노력을 다하는 삶이라는 것을 생활에서 체험하는 한 주간이 되시기 바랍니다.조은일2008.12.16
![[조은나의 시사진단] 청년을 기다리며](https://img.cpbc.co.kr/newsimg/upload/2026/08/11/l6I1786431639983.jpg)
[조은나의 시사진단] 청년을 기다리며사무엘 베케트의 연극 ‘고도를 기다리며’에서 블라디미르와 에스트라공은 매일 같은 나무 밑에서 고도를 기다린다. 고도가 누구인지, 언제 오는지 모르면서도 그 자리를 떠나지 못한다. 청년을 기다리는 한국 교회의 모습도 이 장면과 닮았다. 문제는 청년이 오지 않는 데만 있지 않다. 교회가 여전히 같은 시간, 같은 공간, 같은 방식으로 청년을 기다리는 데 있다. 「한국 천주교회 통계 2025」에 따르면, 2025년 영세자는 6만 4073명이었고, 20~24세가 20.1%로 가장 많았다. 특히 남성 영세자의 96.8%가 군종교구 소속이었다. 청년은 분명 교회로 들어오고 있다. 그러나 전역 뒤 지역 본당으로 이어지는 통로가 없으니 그들의 신앙 여정은 군복과 함께 벗겨지고 있다. 본당의 예비신자 교리가 교중 미사 중심의 시간표에 있는 현실에서 교대 근무자와 주말 노동자, 취업 준비생은 시작부터 참여하기 어렵다. 세례 후에도 이름을 불러주는 공동체보다 봉사 요청을 먼저 만나는 경우가 적지 않다. 요사이 청년들의 목소리는 구체적이다. 성경 공부와 기도, 교리 교육과 각종 활동을 직접 운영할 수 있도록 청년을 양성해달라는 요구가 있다. 반면 일부 청년회에서는 미사 후 각자 귀가하고, 경우에 따라 모여도 공동체적 관계보다 음주와 회식만 남는다는 피로가 나온다. 이 의견을 전체 청년의 의견으로 일반화할 수는 없다. 그러나 대학가와 직장 문화에서도 친교 중심 회식이 적어지는 현실에서 청년 사목이 친교 모임만으로 관계를 만들고자 한다면 시대의 현실과 교회의 본질적 공동체성을 함께 상실하게 된다. 청년들은 삶의 의미를 발견하고, 신앙에 기초한 관계를 경험하기 위해 성당을 찾는다. 따라서 교회는 청년들에게 가톨릭 신앙의 고유성이 충실히 담긴 양질의 사목을 제공해야 한다. 물론 청년은 성사의 소비자가 아니며, 교회 역시 종교서비스의 제공자로 한정될 수 없다. 그러나 청년이 교회에서 기대하는 것은 일상에서도 경험할 수 있는 회식이나 단순한 친목이 아니라 복음과 성사, 기도와 식별, 신앙 안에서 형성되는 관계다. 그러므로 청년 사목의 ‘질’은 행사의 규모나 횟수가 아니라, 청년이 살아계신 그리스도를 만나고 교회 공동체의 주체로 성장하도록 얼마나 충실히 동반하는가에 달려있다. 이에 군종교구와 지역 교회를 잇는 전역자 연계 절차를 제도화하고, 대리구나 지구 단위의 청년 사목 전담팀과 거점 공간을 마련해야 한다. 본인의 동의를 받아 전역 후 실제 생활권의 본당을 안내하고, 첫 연락과 곁에서 동반하는 마중물 역할 또한 구성돼야 한다. 본당에 담당 사제가 없다고 청년 교리와 성경 공부를 접지 않도록, 사제가 교리와 성사의 방향을 책임지는 가운데 평신도 청년 교리교사와 동반자를 체계적으로 양성해야 한다. 이들은 새 영세자와 함께 성경을 공부하고 미사에 참여하며, 여가와 문화 활동도 신앙의 공동체성 안에 함께 할 수 있다. 세례는 일회적 행사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에 결합되는 성사적 사건이다. 청년 역시 행사에 즉시 투입할 봉사 인력이 아니라 세례로 그리스도의 사명에 참여하는 교회의 주체다. 이제 한국 교회가 물어야 할 것은 “청년은 언제 오는가?”가 아니다. “이미 온 청년이 복음과 성사 안에서 성장하고 서로를 동반하도록 누가 양성할 것인가?”이다. 기다림만 가득한 나무 밑을 떠나, 청년과 함께 신앙의 여정을 나아가야 한다. cpbc2026.09.16

마지막 날의 온유함[월간 꿈 CUM] 테마로 읽는 성경 - 온유 삽화 _ 김 사무엘 십자가는 예수께서 온전히 품으신 하느님의 온유함을 가장 극적으로 보여주는 사건입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위해 당신 생명까지 내어놓으시면서 하느님의 온유함에는 ‘여기까지만’이라는 한계가 없음을 알려주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십자가를 바라볼 때 예수님의 고통만이 아니라, 그를 통해 온 세상에 퍼져나가는 하느님의 온유함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의 두 팔은 십자가에 결박된 것이 아니라, 온 세상을 향해 뻗어 있는 것입니다. 이것을 프랑스 조각가 제르만 리시에(Germaine Richier, 1904~1959)는 잘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의 작품에는 십자가의 종목은 거의 감추어져 있고 횡목은 아예 없습니다. 예수님의 몸 자체가 십자가의 형태를 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예수님의 팔이 나무에 못 박혀 있지 않습니다. 예수님의 팔은 세상을 다 품에 안으려는 듯이 활짝 펼쳐져 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몸은 아래로 휘어 있습니다. 인간들에게 조금이라도 더 가까이 다가가려는 듯이 말입니다. 그 모습이 그대로 이어진다면 렘브란트의 그림처럼 아버지가 돌아온 아들을 품어 안는 형상이 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하느님의 온유함을 궁극적으로 체험할 때는 지금이 아닙니다. 하느님은 여기서 우리가 흘리는 눈물을 닦아주지 않으십니다. 눈물의 원인인 고통을 없애지도 않으시고, 그 까닭을 설명해 주지도 않으십니다. 다만 우리와 함께 눈물을 흘리실 뿐입니다. 내 눈에서 눈물이 흘러 밤낮으로 그치지 않는다.(예레 14,17) 당신께서 정하신 마지막 때가 오기 전까지는 말입니다. 이사야 예언자는 마지막 날에 있을 일을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분께서는 이 산 위에서 모든 겨레들에게 씌워진 너울과 모든 민족들에게 덮인 덮개를 없애시리라. 그분께서는 죽음을 영원히 없애 버리시리라. 주 하느님께서는 모든 사람의 얼굴에서 눈물을 닦아 내시고 당신 백성의 수치를 온 세상에서 치워 주시리라. 정녕 주님께서 말씀하셨다.(이사 25,7-8) 그때가 되면 하느님께서 친히 우리의 눈물을 닦아주실 것입니다. 그리고 더는 눈물 흘릴 일이 없게 될 것입니다. 의외로 성경에는 다른 이의 눈물을 닦아주는 장면이 나오지 않습니다. 오직 하느님의 이 마지막 행위를 위해 유보되어 있 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의 온유함을 결정적으로 드러내기 위해서 말입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그 놀라운 행위의 증인이자 수혜자가 될 것입니다. 성경의 마지막 책인 요한 묵시록도 이렇게 기록합니다. “어좌 한가운데에 계신 어린양이 목자처럼 그들을 돌보시고 생명의 샘으로 그들을 이끌어 주실 것이며 하느님께서는 그들의 눈에서 모든 눈물을 닦아 주실 것이다.”(묵시 7,17) “보라, 이제 하느님의 거처는 사람들 가운데에 있다. 하느님께서 사람들과 함께 거처하시고 그들은 하느님의 백성이 될 것이다. 하느님 친히 그들의 하느님으로서 그들과 함께 계시고 그들의 눈에서 모든 눈물을 닦아 주실 것이다. 다시는 죽음이 없고 다시는 슬픔도 울부짖음도 괴로움도 없을 것이다. 이전 것들이 사라져 버렸기 때문이다.”(묵시 21,3-4) 하느님께서 우리의 눈물을 닦아주시리라는 약속이 두 번이나 반복되며 더 풍성해지고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우리의 눈물을 닦아주신다는 말은 하느님과 우리 사이를 더는 어떤 베일도 가리지 않는다는 의미입니다. 말 그대로 얼굴과 얼굴을 마주하고 보게 된다는 뜻입니다. 그때 우리는 하느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우리와 함께 흘리 신 눈물까지 볼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이것은 하느님의 얼굴을 뵙기를 간절히바란 엘리야와 모세를 비롯한 그 누구도 할 수 없었던 일입니다. 죽음에 대한 승리가 아니라, 바로 이것이 마지막으로 이루어질 일입니다. 죽음의 패배는 이 궁극의 행복인 지복직관(至福直觀)으로 향하는 관문입니다. 그러니 지금 눈물을 흘리는 이들은 이에 대한 희망을 품고 살아가야 합니다. 행복하여라, 우는 사람들!(우리말 성경에는 ‘슬퍼하는 사람들’로 번역되어 있습니다) 그들은 위로를 받을 것이다.(마태 5,4) 예수께서는 아버지께서 하실 이 일을 가로채는 대신 최후의 만찬 때 제자들의 발을 닦아주심으로써 마지막에 있을 일을 미리 다른 형태로 보여주셨습니다. 그 또한 온유함의 표현입니다. 그런데 예수께서 발을 닦으셨을 때 제자들의 놀라움이 얼마나 컸습니까? 하지만 그 놀라움조차도 마지막 날에 하느님께서 우리의 눈물을 닦으실 일에 비하면 작을 것입니다. 글 _ 함원식 신부 (이사야, 안동교구 갈전마티아본당 주임, 성서신학 박사) 2025.08.14
![[특별기고] 폭력에 물든 인간, ‘자비의 하느님’을 전쟁에 끼워 맞췄다](https://img.cpbc.co.kr/newsimg/upload/2026/04/14/iHr1776129411757.jpg)
[특별기고] 폭력에 물든 인간, ‘자비의 하느님’을 전쟁에 끼워 맞췄다하느님의 이름으로 폭력을 정당화할 수 있을까? (손희송 주교)미국은 2월 28일 ‘장대한 분노’ 작전으로 이란을 대규모 공습한 이후 때마다 자신들의 전쟁 정당성을 위해 성경 말씀을 인용하고 있다. 교회는 이에 “전쟁에 하느님 이름을 사용하는 것은 중대한 죄에 해당한다”고 비판했지만, 미 정부는 멈추지 않고 있다. 아울러 전쟁 후 현재 세계 원유 수송의 약 20%가 지나가는 호르무즈 해협에서는 유조선들의 발이 묶인 상황이다. 12일 기준 해협에 머물고 있는 우리나라 선박은 26척, 선원은 173명에 이른다. 본지는 전쟁을 둘러싼 미 정부의 잘못된 발언에 대한 주교의 기고와 평소 선원들을 위해 사목해온 사제의 글을 통해 전쟁을 향한 어긋난 진실과 이면의 고통을 돌아봤다. 정리=박민규·박예슬 기자 2026년 3월 10일 미국 전쟁부 장관 피트 헤그세스는 기자단 브리핑에서 구약 성경의 시편을 근거로 미국과 이스라엘의 이란 공격으로 촉발된 전쟁을 정당화했다. 그는 시편 144편 1절에서 “나의 반석이신 주님께서는 찬미 받으소서, 내 손에 전투를, 내 손가락에 전쟁을 가르치시는 분”이란 표현을 인용했다. 그러자 예루살렘 라틴총대주교 피에르 바티스타 피자발라 추기경은 “전쟁을 정당화하기 위해 하느님의 이름을 사용하는 것은 중대한 죄에 속한다”라고 반박하면서 “하느님은 분쟁 속에 고통받고 죽어가는 이들과 함께 계시지, 종교를 정치적 목적에 이용하는 이들과 함께 계시지 않는다”라고 강조했다. 3월 25일에도 헤그세스는 공개적인 기도회에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모든 총알이 적에게 명중하게 하소서”라고 기도했다. 그러자 레오 14세 교황은 3월 29일 주님 수난 성지 주일 미사 강론에서 “피 묻은 손으로 올리는 기도는 하느님이 거절하신다. 예수님은 평화의 왕이며 전쟁을 거부하신다”라고 응대하셨다. 피트 헤그세스 미 국방장관은 지난 3월 기자단 브리핑에서 시편 구절을 인용해 전쟁 발발의 정당성을 부여했다. OSV 성경을 잘 살펴보면 하느님의 이름으로 전쟁을 정당화할 수 있느냐, 없느냐라는 질문의 배경에는 구약과 신약 성경의 관계를 어떻게 해석하느냐는 문제가 자리하고 있다. 구약 성경의 내용과 신약 성경의 내용이 서로 대립할 때 어느 쪽을 따라야 할까? 구약 성경과 신약 성경 모두 하느님을 계시하는 책이지만, 구약은 약속이고, 신약은 그 약속의 실현이다. 계시의 정점은 신약 성경이 증언하는 ‘예수 그리스도’이시고, 그 정점을 근거로 성경의 다른 내용들을 해석하는 것이 가톨릭의 전통적 성경 해석 원칙이다. 이런 원칙에 따르면, 신약 성경이 증언하는 예수님은 말씀과 행동으로 비폭력의 하느님을 선포하시고, 자신도 철저히 비폭력의 삶을 사셨기에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사람이라면, 하느님의 이름으로 전쟁을 정당화할 수 없다! 그러면 구약 성경에서 나타나는 하느님의 ‘폭력성’은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구약 성경에서는 하느님은 한없이 자비로운 모습이다가도 어떤 때는 폭력적이고 피를 요구하는 잔인한 모습으로 나타나기도 한다. 이런 부조화를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우선 성경의 특성을 알아야 한다. 성경은 하느님이 그 내용을 불러주시고 인간이 그 말씀을 듣고 쓴 것이 아니다. 성경은 하느님의 계시인 동시에 인간의 글이다. 말하자면 성경은 그 시대 인간의 문화와 생각을 바탕으로 쓰인 글로서 그 속에서 하느님의 본모습이 서서히 드러난다. 이런 전제하에 ‘라이문트 슈바거’라는 가톨릭 신학자(스위스 태생 예수회 소속 인스브루크 신학대학 교수, 1935~2004)는 성경에 드러난 하느님의 ‘폭력성’을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인간의 폭력성 인간에게는 폭력성이 내재해 있는데, 이것을 하느님께 투사시키고는 했다. 인간 자신이 폭력에 물들어 있어서 폭력의 눈으로 하느님을 바라보았고, 그래서 하느님 역시 잔인하게 폭력을 행사하는 분으로 나타났다. 그런데 구약 성경은 서서히 이런 생각에서 벗어나는 과정에 있다. 그래서 구약 성경에는 자비로운 하느님과 폭력적인 하느님 모습이 혼재해 있다. 이런 불명확함은 신약에 와서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끝이 난다. 예수님은 명시적으로 폭력에 폭력으로 맞대항하지 말라고 하셨고(마태 5,38-42 참조), 원수까지도 사랑하는 아버지 하느님을 선포하면서, 이를 근거로 자신을 박해하는 사람을 위해서도 기도하라고 가르치셨다.(마태 5,43-48 참조) 또한 그분은 체포되는 순간에 칼을 휘두르는 베드로를 만류하시면서 폭력을 거부하신다. “칼을 칼집에 도로 꽂아라. 칼을 잡는 자는 모두 칼로 망한다.”(마태 26,52) 십자가상에서는 자신을 못 박는 사람들을 용서해 달라고 아버지 하느님께 간청하셨다.(루카 23,34 참조) (참조 : 손희송,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비폭력과 원수 사랑의 하느님’, 「주님과 그분의 교회를 위하여」, 가톨릭대학교출판부, 15~42쪽) 미국의 보수 근본주의자들은 성경을 전체적으로 해석하지 않는다. 그래서 자기들 구미에 맞는 구절을 신약과 구약 가리지 않고 뽑아내어 자기 이익에 맞게 해석하고는 한다. 그러나 말과 행동으로 철저히 비폭력을 추구하셨던 예수님을 하느님 계시의 절정이라고 믿는 그리스도인이라면, 구약 성경의 일부 대목을 근거로 하느님의 이름으로 폭력과 전쟁을 정당화할 수 없다! 진정한 승자는 누구인가 3월 19일 베냐민 네타냐후 이스라엘 총리는 자신들이 시작한 전쟁을 정당화하기 위해 도덕적 우위만으로는 무자비한 적을 맞설 수 없다고 하면서, 역사학자 윌 듀런트(Will Durant)를 인용하여 “역사는 불행하게도 예수 그리스도가 칭기즈칸보다 우위에 있지 않음을 증명한다”고 말했다. 예수님을 구세주로 인정하지 않은 이스라엘 사람이기에 얼마든지 그렇게 말할 수 있다고 본다. 하지만 군사적으로 그렇게 막강했던 칭기즈칸의 제국은 지금 사라지고 없다. 그에 반해서 너무도 무력하게 십자가에 죽었던 예수의 추종자들이 모인 교회는 -때로는 세상에 큰 영향력을 발휘하면서- 과거에도 있었고, 지금도 앞으로도 계속 존속할 것이다. 그렇다면 과연 누가 역사의 승자인가? 주교회의 신앙교리위원회 위원장 손희송(의정부교구장) 주교박민규2026.04.14

술이 너희를 멸하리라![월간 꿈CUM] 700년 전의 설교 _ 대 바실리우스 (03) 에페소 고대도시 유적. 바오로 사도는 에페소 신자들에게 보낸 편지에서 “술에 취하지 마십시오”(에페 5,18)라고 경고했다. 전염병은 공기 자체가 부패하여 사람들의 몸에 조금씩 스며들기 때문에 시간이 흘러야 사람들이 전염병의 해로운 영향을 경험하게 됩니다. 그러나 술의 해로운 영향은 즉시 나타납니다. 술 취한 사람들은 자신의 영혼을 파괴하여 온갖 오명과 오점으로 낙인찍힌 뒤에도 자신의 육체마저도 망가뜨립니다. 그들은 성적 쾌락에 지나치게 탐닉하기 때문에 몸이 나른하고 쇠약해질 뿐만 아니라, 쾌락으로 인해 그들의 몸에 가해지는 부담 때문에 축 늘어진 채 활력 없는 몸을 짊어지고 다닙니다. 그들은 사방에서 “술에 취하지 마십시오”(에페 5,18) “술은 방탕을 낳고, 술에 취하는 것은 오만을 낳습니다”(잠언 20,1 참조)라고 외치는 교사들의 소리에 아무런 관심도 기울이지 않습니다. 그들은 인간이 아닌 진흙이 될 위험에 처해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술과 완전히 섞여서 술과 함께 썩고, 매일 숙취로 인한 술 냄새를 풍기고, 거기에다 술을 토해 내기 때문에, 완전히 쓸모없는 그릇처럼 되었습니다. 이사야 예언자가 그런 백성을 다음과 같이 애도합니다. “아침 일찍부터 독한 술을 찾아다니고 저녁까지 거기에 머무르는 자들에게 화가 있으리라. 술이 너희를 멸하리라! 그들은 비파와 피리 소리에 맞춰 술을 마셔 대면서 주님의 업적에는 관심도 기울이지 않고 주님의 손이 이루신 일은 생각도 하지 않는다.”(이사 5,11-12 참조) 예언자가 탄식하는 사람들이 바로 이런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하느님의 놀라운 일들을 깊이 생각할 기회를 자신에게 주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들에게는 눈을 들어 하늘을 우러러보고 하늘의 아름다운 경관을 관찰하고, 존재하는 모든 것이 질서 정연하게 배열된 것을 연구하며, 이 같은 좋은 질서로부터 창조주를 그려낼 여유가 없습니다. 번역 _ 노성기 신부 (루포, 광주대교구 나주 본당 주임, 교부학 박사) 광주가톨릭대학교와 대학원을 거쳐, 로마 아우구스티누스 대학에서 교부학 박사학위를 받았으며, 영국 안셀름 대학에서 영성상담 지도자과정을 수료했다. 광주대교구 풍암동 성당 주임신부를 거쳐 2001년부터 광주가톨릭대학교 교수, 2010년부터 2018년까지 같은 대학교 총장으로 봉직했다. 이어 2020년 2월까지 목포가톨릭대학교 총장을 역임했으며, 노대동 본당 주임을 거쳐, 현재 나주 본당 주임 신부로 사목하고 있다. 공저 「내가 사랑한 교부들」 「왁자지껄 교회 이야기」 「교부 문헌 용례집」, 옮긴 책 「교부들의 성경 주해 : 마태오 복음서 1-13장」 「교부들의 성경 주해 : 여호수아기」, 공역 「세계 교회사 여행 Ⅰ, Ⅱ」 등이 있다.cpbc2026.10.30
![[가톨릭 문화산책]<11> 묵주기도와 함께하는 가톨릭미술(3)](//cpbc.co.kr/CMS/newspaper/2013/04/rc/446039_1.1_titleImage_1.jpg)
[가톨릭 문화산책] 묵주기도와 함께하는 가톨릭미술(3)12살 소년 예수, 원로 율법학자도 감탄케 한 슬기로움 드러내 뉘른베르크에서 태어난 알브레히트 뒤러(1471~1528)의 '율법학자들 가운데 선 예수'는 루카복음 2장을 그린 작품이다. 요셉과 마리아는 파스카 축제를 지내고자 12살밖에 되지 않은 어린 예수를 데리고 예루살렘으로 갔으나 아들을 잃었다가 사흘 뒤 성전에서 찾는다. 성전에서는 무슨 일이 생긴 걸까? 그림은 온통 사람들로 빽빽하다. 뒤러는 성전에서 어린 예수가 율법학자들과 열띤 논쟁을 펼치는 모습을 원근법적 공간 개념을 고려하지 않은 채 인물 흉부의 인상과 동작에만 초점을 맞춰 표현한다. 인물의 성격과 감정은 얼굴 묘사와 손동작을 통해 생생히 전달된다. 작품 : 알브레히트 뒤러 작, '율법학자들 가운데 선 예수' (65×80㎝, 1506년, 마드리드 티센-보르네미사 미술관) ● 환희의 신비 5단 : 마리아께서 잃으셨던 예수님을 성전에서 찾으심을 묵상합시다 ● 묵상 단어 : 잃어버림, 찾으심, 기쁨 #소년 예수의 가르침 그림 중앙에 건강하게 윤기 흐르는 모발을 가진 12살 소년 예수가 있다. 주변에는 율법학자 여섯 명이 아무것도 없는 배경에 원형으로 배열돼 그려진다. 시선은 소년 예수의 얼굴에 초점이 맞춰 있다. "'너희는 내 얼굴을 찾아라'하신 당신을 제가 생각합니다. 주님, 제가 당신 얼굴을 찾고 있습니다"(시편 27,8). 화면 전체를 지배하는 소년 예수는 마치 제자들에게 뭔가 설명하는 선생님처럼 손가락을 하나하나 꼽으며 자기 생각을 풀어놓는다. 예수의 슬기로움에 율법학자들은 놀라움과 호기심을 보인다. 예수와 같은 위치에서 쭈글쭈글하고 주름진 피부에 기이한 얼굴로 표현된 율법학자는 혼란스럽고 날카로운 인상이다. 이 율법학자의 심리는 거칠고 굽은 손마디에서 확인할 수 있다. 반듯한 논리로 자신의 생각을 하나하나 풀어놓는 소년 예수의 손동작과는 대조적이다. "사흘 뒤에야 성전에서 찾은 예수는 율법교사들의 말을 듣기도 하고 그들에게 묻기도 하고 있었다"(루카 2,46). 어린 예수를 잃은 부모는 슬픔에 빠져 사흘이나 찾아 헤매다가 성전에서 예수를 발견하고 기뻐한다. 잃었던 예수를 다시 찾았다는 데서 우리는 예수의 부활을 상기할 수 있다. "사람의 아들은 죄인들의 손에 넘겨져 십자가에 못 박히셨다가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셔야 한다고 말씀하셨다"(루카 24,7). #각기 다른 개성의 율법학자들 율법학자들 얼굴은 활기찬 모습에서 무기력함과 우울함, 날카로움까지 각양각색이다. 젊고 깨끗한 예수 얼굴과는 대조적으로 튀어나온 턱과 두꺼운 입술, 깊게 팬 주름투성이의 예수 오른편 율법학자는 세상의 온갖 때에 찌든 모습이다. 그는 소년 예수의 말이 한낱 어린아이의 말에 불과하다는 듯 오히려 예수에게 무엇인가 말하려 한다. 그러나 예수의 손과 마주한 그의 손동작은 예수의 지혜로움 때문인지 불안해 보인다. 이와 달리 다른 율법학자들은 소년 예수의 말에 감탄하며 경청하거나 그 말이 옳은지를 확인하려 한다. 왼쪽 아래 율법학자는 책을 완전히 덮고 예수의 말만 경청한다. 성경 구절이 적힌 종이를 머리에 붙이고 있는 것으로 미뤄 율법대로 살아가는 경건한 사람임을 알 수 있다. 권위를 가질 법한 위치의 이 율법학자는 소년 예수의 말에 푹 젖어 눈을 떼지 못한다. 소년 예수 역시 맑고 티 없는 눈빛으로 자신의 말을 듣는 율법학자와 시선을 마주하며 교감한다. 오른쪽 아래 길고 흰 수염을 가진 노장의 율법학자는 성경을 펼쳐 들고 예수의 말을 확인이라도 하려는 듯 맞은편 동료에게 눈길을 비춘다. 그의 얼굴에선 내성적이며 우울한 성격이 읽힌다. 이 율법학자의 우울한 빛과는 달리 왼쪽 위 율법학자는 젊고 날카로운 눈으로 성경을 뒤적이며 소년 예수의 말을 확인한다. 오른쪽과 왼쪽 구석에 있는 두 인물은 두려움과 경계의 눈빛을 띨 뿐 무관심한 표정이다. 예수를 둘러싼 율법학자들은 율법의 전통과 토라를 따르지만, 예수의 가르침(Didaskalis)에 어찌할 바를 몰랐다. "그의 말을 듣는 이들은 모두 그의 슬기로운 답변에 경탄하였다"(루카 24,47). 노장의 현인들은 놀라움과 경이로움, 두려움과 불편함을 드러낸다. 그러나 예수의 권한은 "새롭고 권위 있는 가르침이다"(마르 1,27). 과연 우리는 예수의 말씀에 어떤 표정과 동작을 취할 것인가? #마음의 동작, 손 소년 예수의 손에서 율법학자들의 다양한 동작의 손에 이르기까지 어느 한 손도 움직임이 헛되지 않다. 손 동작은 단지 감상자의 눈을 즐겁게 하거나 공간을 채우기 위한 것이 아니다. 동작은 등장 인물의 마음 상태를 명확히 드러낸다. 제각기 다른 표정과 손동작이지만 그들의 일치점은 인생 경험을 나타내는 손마디, 그리고 성경 내용과 성전의 신성한 공간을 신뢰하는 손이다. 이 그림에는 얼마나 많은 손이 표현되어 있는가! 우리는 얼마나 복음적 봉사를 손으로 할 수 있을까? 인사하는 손과 안내하는 손, 포옹하는 손, 사랑하는 손 등 다양한 손 동작이 예수의 메시지와 일치할 때 비로소 '그리스도교적 행동'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마음-머리-손과 예수의 말씀 간의 일치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작품 : 렘브란트 작, '성전에 예수님을 봉헌함' (60×48㎝, 1631년, 헤이그 마우리츠호이츠 왕립미술관) ● 환희의 신비 4단 : 마리아께서 예수님을 성전에 바치심을 묵상합시다 ● 묵상 단어 : 봉헌, 빛, 마음 속 생각 빛은 태양이나 다른 어떤 발광체에서 나오는 게 아니라 바로 아기 예수에서 흘러나온다. 예수를 품에 안은 시메온은 눈부시게 환한 그 빛을 쳐다보며 감동한다. 이 빛은 시메온이 간절히 바라던 희망의 빛이다. 이 표현은 바로 예수가 이방인들에게는 주님의 길을 밝히는 계시의 빛이 되고, 이스라엘 백성에게는 영광의 빛이 된다는 의미다. 기다리던 메시아는 이스라엘 백성만을 위해 온 게 아니라 만민에게 구원의 문을 여는 '위로의 빛'과 '영원의 빛'으로 온다는 뜻이다. 하느님 아들임에도 우리를 위해 가장 나약하고 죄인의 모습으로 성전에 봉헌된 예수! 구원의 빛, 위로의 빛, 영광의 빛으로 온 예수를 시메온과 한나처럼 마음 깊이 받아들여야 하지 않을까? 윤 인 복 교수(아기예수의 데레사, 인천가톨릭대 대학원 그리스도교미술학과) 조은일2013.04.02
![[출판]이달의 교계잡지](//cpbc.co.kr/CMS/newspaper/2013/04/rc/450989_1.1_titleImage_1.jpg)
[출판]이달의 교계잡지▨가톨릭 디다케 '미워도 다시 한 번'을 특집 주제로 △요셉이 형제를 받아들인 이유(정성종) △용서를 위한 예식(박종인) △미움과 용서(권희진) △기도와 기다림, 그리고 그 안에 있는 나(김보금) 등을 다뤘다. '신앙의 해 신앙의 핵'에서는 교황 탄생을 살펴봤고 '끄덕끄덕 전례전례'에서는 시작예식을 설명했다.(서울대교구 청소년국/3500원) ▨가톨릭 비타꼰 특집으로 교황 프란치스코 탄생을 다루며 △위대한 교황 프란치스코 △교황님 힘내세요 △교황 프란치스코, 우리에게 기도를 청하다 등을 게재했다. '감사합니다. 잊지 않겠습니다'에서는 과달루페 외방선교회 이만우(77) 신부를 만났고 '영성의 빛'에서는 파티마의 성모 프란치스코 수녀회를 소개했다.(마리아의 아들수도회/4000원) ▨경향잡지 '경향 돋보기'에서는 다문화가정 문제를 살펴보며 △오늘날의 다문화를 어떻게 볼 것인가(서종남) △다문화 문제, 어떻게 해결할까?(김용순) △다문화라는 말이 가장 싫어요(옥현진)를 다뤘다. '세상 속 신앙 읽기'에서는 신앙생활을 하다 성직자와 수도자에게 상처받는 신자들 문제를 어떻게 해결해야 하는지를 알려줬다.(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3300원) ▨교회와 역사 '한마음한몸운동본부와 한국교회'에서는 한마음한몸운동 발의 단계에 함께했던 장익 주교와 최재선ㆍ김기준씨를 인터뷰해 한마음한몸운동본부 역사를 들었다. '다블뤼 비망기'에서는 대구 감영 순교자들이 처형당한 내용과 이시임 안나의 어린 아들 종악이 참혹하게 옥사하는 사건을 다뤘다.(한국교회사연구소/3000원) ▨그물 우리나라에 포콜라레 운동을 처음 소개한 수원교구 원로사제 심영택 신부를 만나 이야기를 들었다. 포콜라레 운동 회장 엠마우스가 긴장이 고조되는 한반도 상황을 안타까워하며 보낸 서한 내용을 소개했고, 포콜라레운동의 일치 영성을 살아가는 국내외 주교들의 친교모임을 소개했다.(마리아사업회/3000원) ▨레지오 마리애 레지오 영성으로 △성모님의 등에 업혀 사는 삶(이용훈) △성 베드로와 레지오 마리애 영성(맥그리거/구자륭) △영혼의 밤(홍기선) △교회 선교에 있어 사제와 평신도(죠셉머피/이재호)를 실었다. '걷고 기도하고 사랑하라!'에서는 광주대교구 곡성본당 옥터성지를 찾아갔고 '궁금해요, 가톨릭교회 교리!'에서는 가톨릭교회에 왜 교황이 있는지를 알아봤다.(한국레지오마리애협의회/비매품) ▨말씀지기 '아침뜨락'에서는 서울대교구 영성생활상담소장 홍성남 신부가 집착을 버리고 긍정적으로 세상을 바라보며 사는 삶의 지혜를 일러줬다. '영성에세이'에서는 △위대한 사건, 구원 △당신의 구원을 보여주소서를 게재했다. 매일 묵상으론 그날의 말씀과 해설을 영한대역으로 실었다.(가톨릭출판사/3000원) ▨사목정보 특집으로 '20대에게 생기(生氣)를…'을 다루며 △대한민국 20대, 절망과 희망의 경계에서(한지혜) △청년 Power Up, 성당이 돕는다(김진홍) △가톨릭학생회는 동아리가 아닙니다. 교회입니다-대전교구 대학사목부 등을 실었다. 미래사목 대안에서는 △청년 소공동체, 그리스도의 제자 되기(김민수) △가톨릭교회의 종교간 대화에 대한 입장과 한국교회의 종교간 화해와 협력(한미숙) 등을 게재했다.(미래사목연구소/1만 원) ▨생활성서 '신앙의 해에 마리아를 만나다'를 특집으로 마리아 영성을 짚어보고 '신앙의 해에 더욱 성모님을 생각하는 이유'(손희송)를 살펴봤다. 세계 곳곳에서 발현한 성모님의 여러 모습도 함께 실었다. '만나고 싶었습니다'에서는 지난해 5월 세례받은 임권택(바오로, 77) 영화감독을 인터뷰했다.(생활성서사/3900원) ▨성서와 함께 '세상 속에서 예수님과 함께'를 주제로 청년 좌담회를 마련해 이 시대를 살아가는 2030 청년들의 신앙과 삶의 이야기를 들어봤다. '성경과 영성'에서는 전영준 신부가 성경묵상이 어떤 과정을 거쳐 체계화 됐는지를 설명했다. '탈출기를 처음 읽는데요'에서는 파스카 축제에 관해 알아봤다.(성서와함께/3000원) ▨소년 왜관 성 베네딕도 수도원에서 운영하는 다문화 가족센터를 탐방해 다문화사회에서 함께 살아가기 위한 방법을 일깨웠다. 이달의 가톨릭 소식에서는 교황 프란치스코 선출을 다뤘고, 부모님과 함께 보는 영화로는 '피노키오, 당나귀 섬의 비밀'을 추천했다. 그림동화는 '열 명의 마리아와 꼬마 천사'를 실었다.(가톨릭출판사/4000원) ▨야곱의 우물 표지 이야기로는 성 빈센트 다문화 가정센터에서 이주민 자녀를 돌보는 성 빈센트 드 뽈 자비의수녀회 수녀 4명을 만나 이야기를 들었다. '초대교회의 삶과 영성'에서는 백인대장 코르넬리우스(사도 10,1-2) 삶과 신앙을 살펴봤다. 매일 성경묵상은 심흥보(서울 삼성동본당 주임)ㆍ김현준(서울 양천본당 주임)ㆍ황태종(제주 교정사목부) 신부가 맡았다.(바오로딸/2800원) ▨참 소중한 당신 특집으로 '프란치스코! 성인과 새 교황'을 다루며 △프란치스코 성인을 빼닮은 교황 탄생(편집부) △개혁의 십자가 짊어진 새 교황(차동엽) △신앙의 해와 프란치스코 교황님(김영식) 등을 실었다. '아름다운 사람들'에서는 생명문화연구가 이광호(베네딕토)씨를 인터뷰했고, 수제 쿠키를 만드는 장애인보호작업장 '느루'를 찾아갔다.(사단법인 미션3000/3500원) 박수정 기자 catherine@pbc.co.kr조은일2013.04.30
![[생활 속의 복음]삼위일체 대축일-삼위일체, 사랑의 신비는 우리의 표양](//cpbc.co.kr/CMS/newspaper/2012/05/rc/416223_1.1_titleImage_1.jpg)
[생활 속의 복음]삼위일체 대축일-삼위일체, 사랑의 신비는 우리의 표양서광석 신부(전주교구 신풍본당 주임)오늘 삼위일체 대축일 복음에서 예수님은 "나는 하늘과 땅의 모든 권한을 받았다.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들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명령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여라. 보라, 내가 세상 끝 날까지 언제나 너희와 함께 있겠다"고 하신다. 성삼위 각각의 위격과 본성은 동일하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이신 하느님은 유일하신 분이시기 때문이다. 그러나 성삼위께서 한 위격이면서 하느님은 한 분이시라는 삼위일체의 진리는 인간의 지성으로 이해하기란 불가능하다. 오직 신앙으로만 믿을 수 있다. 성 아우구스티노가 "성부와 성자, 성령이 계시는데 어떻게 서로 높고 낮음이 없으며, 한 분이 다른 분으로 되시고, 또 이 낳으신 분과 낳음을 받으신 두 분으로부터 성령이 나셨다면 어찌 선후관계가 없겠는가?"하는 고민을 하며 해변을 거닐었다. 그때 한 꼬마 아이가 백사장에서 조개껍데기로 바닷물을 작은 모래집에 퍼 담고 있었다. "얘야 뭐하니?"하는 성인의 물음에 아이는 "제가 바닷물을 모두 퍼서 이 모래집에 담으려고요"하고 답했다. 그러자 성 아우구스티노는 "어떻게 이 엄청난 바닷물을 조개껍데기로 다 퍼서 그 모래집에 담겠느냐?"고 말했다. 아이는 "그러면 당신은 어떻게 인간의 작은 머리로 그 엄청난 삼위일체이신 하느님을 이해하겠다고 하십니까"하고 반문했다. 자신의 어리석음을 깨달은 성 아우구스티노가 바닷가를 다시 보니 아이는 보이지 않았다. 성인의 일화처럼 우리는 성삼위의 신비를 완전히 이해할 수는 없다. 그러나 성경에 기록된 인류구원 역사 과정에서 삼위일체 관계를 살펴볼 수 있다. 하느님 안에서의 관계인 성삼위 신비와 하느님과 인간 관계가 성경에 드러나는 것이다. 인류구원 역사에서 하느님인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서는 우리와 함께하신다. 하느님께서는 죄를 짓고 당신을 등진 인류를 회두하여 화해시키시고, 당신과 일치시키신다. 인간 수준과 조건에 맞추시어 단계적으로 당신을 계시하신다. 하느님이신 성부께서는 천지를 창조하셨고, 죄를 짓고 떠나간 인류를 구원할 계획을 세우셨다. 그리하여 성부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유일신 하느님에 대해 계시하신다. 자연, 초자연적 방법이나 예언자를 통해 인간과 관계를 맺으시고 소통했음이 구약에 기록돼 있다. 신약에서 하느님이신 성자께서는 성부의 구원계획에 따라 세상에 오신다. 인간 곁에 직접 함께 계심으로써 성부와 인간, 인간과 인간관계를 회복시켜 구원계획을 완성하신다. "너희는 가서(…)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그들에게 세례를 베풀라"(마태 28,19 참조)고 하신 성자의 말씀에서 삼위일체 신비가 더 구체적으로 나타난다. 하느님이신 성자 예수께서는 이 세상에서 떠나신 다음에도 사람들과 관계를 유지하셨다. 하느님이신 성령께서 다른 위격을 취하심은 당연하다. 그분은 성부와 성자의 사랑으로서 교회 안에 항상 존재하시어 인간을 성화시키시며 인간 곁이 아닌 인간 안으로 들어오신다. 하느님과 전 교회 구성원이 서로 사랑하여 일치를 이루게 하시는 것이다. 우리는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일치로 모인 하느님 백성이다. 시간적 선후나 지위의 높고 낮음이 없으신 하느님이신 성부와 하느님이신 성자와 하느님이신 성령께 다 같은 흠숭과 사랑을 드려야 한다. 그리고 삼위일체이신 하느님은 서로 다른 위격으로 구별되지만 사랑으로 완전한 일치를 이루신다. 그리스도인은 이 성삼위 신비인 사랑의 일치를 신앙의 근본 원리로 삼아야 한다. 우리는 사랑의 하느님을 거부할 수 없고 이웃사랑을 외면할 수 없다. 하느님이신 성부께서는 매개를 통해 우리와 관계를 맺으셨고, 하느님이신 성자는 우리 곁에 계시고, 하느님이신 성령께서 우리 안에 계시기 때문이다. 사랑하라고 명하시는 하느님께서는 우리 안에, 즉 양심에 존재하신다. 우리의 양심을 거슬러 사랑의 계명을 거부하는 행위는 곧 하느님을 거부하는 행위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성경에서 "사람의 아들을 거슬러 말하는 자는 용서받을 것이다. 그러나 성령을 거슬러 말하는 자는 현세에서도 내세에서도 용서받지 못할 것이다"(마태 12,32)고 가르치신다.조은일2012.05.29
![[재미있는 가톨릭 교리]<17> 믿음의 여인, 성모 마리아](//cpbc.co.kr/CMS/newspaper/2011/10/rc/391473_1.1_titleImage_1.jpg)
[재미있는 가톨릭 교리] 믿음의 여인, 성모 마리아하느님의 어머니, 교회의 어머니 하느님의 구원 역사 안에서 성모 마리아의 삶이 가지는 의미와 중요성을 성경 말씀과 교회 전승을 통해 살펴볼 수 있다. ▶성경 가르침 하느님께서는 인간을 구원하고자 당신 외아들을 인간으로 출생시키는 계획을 세우고 한 여인을 선택하셨다. 마리아는 하느님께 대한 신앙과 그분 말씀에 대한 순명으로 하느님의 인류 구원사업에 협력키로 결정하셨다. 예수님 출생 이야기에서 우리는 인간 구원을 향한 하느님의 주도적 행위와 마리아의 도구적 역할을 살펴볼 수 있다. 마리아는 하느님 뜻을 받아들이고 이에 응답함으로써 온 세상을 구원할 구세주 메시아, 예수님 어머니가 되셨다. 카나의 혼인잔치에서 포도주가 떨어지자 마리아는 예수님께 알렸다. 예수님께서는 "아직 저의 때가 오지 않았습니다"(요한 2,4)하고 대답하셨지만, 마리아는 사람들에게 "무엇이든지 그가 시키는 대로 하여라"(요한 2,5)하고 일러주면서 예수님의 첫 번째 기적을 준비하셨다. 마리아가 일꾼들에게 당부한 말씀은 예수님 뜻을 무시하거나 자신의 뜻을 강요하기 위함이 아니라 예수님 뜻에 자신을 온전히 내맡기면서 예수님 영광을 준비하고, 제자들 믿음을 더욱 일깨워줄 계기를 마련했다고 할 수 있다. 마리아와 형제들은 예수님이 군중과 말씀하고 계실 때 밖에 서서 사람을 시켜 예수님을 불렀다. 예수님께서는 어머니 마리아와 형제들과 누이들이 찾고 있다는 말을 듣고 군중에게 "누가 내 어머니고 누가 내 형제들이냐?"(마태 12,48하고 반문하셨다. 그리고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사람이 내 형제요 누이요 어머니다"(마태 12,50)하고 말씀하셨다. 예수님의 반문과 대답은 혈연 관계보다 영적 관계가 더 중요하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예수님의 참 가족은 혈연 관계가 아니라 하느님 뜻을 따르고 실행하는 삶에서 비롯되기 때문이다. 마리아는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실 때 그분 곁에 서 계시면서 예수님 수난과 고통, 죽음의 여정에 함께하셨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돌아가시기 전에 마리아를 사랑하는 제자의 어머니로, 사랑하는 제자를 어머니의 아들로 세우셨다. 마리아는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돌아가신 다음부터 사랑하는 제자 집에 머무셨다. 예수님께서 특히 애제자에게 마리아를 '어머니'로 모시도록 당부하신 내용은 제자들을 통해 신앙을 갖게 되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하시는 요청으로 이해할 수 있다. 따라서 교회는 마리아를 예수님의 어머니로서 공경할 뿐 아니라 제자들 공동체인 교회의 어머니로서 공경한다. ▶교회 가르침 교회는 마리아께서 하느님의 특별하신 은총과 예수 그리스도의 공로로 잉태되신 첫 순간부터 원죄에 물들지 않았고, 죽기까지 죄를 범하지 않는 강복을 누리셨다고 고백한다. 이는 마리아가 처녀로 예수님을 잉태했다는 것을 말하지 않고 마리아가 영원한 하느님 계획에 따라 원죄 없이 태어나셨다는 것을 의미한다. 교회는 마리아의 평생 동정성을 고백한다. 마리아는 예수님을 낳기 전에도, 낳을 때에도, 낳은 후에도 항상 동정을 지키신 평생 동정녀라는 것이다. 마리아의 평생 동정성에 대한 교의는 마리아께서 성령으로 말미암아 동정녀 몸으로 예수님을 출산했다는 교의에 기초한 것이다.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고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이사 7,14)하는 성경 말씀처럼 마리아는 성령께서 내려 오시고 지극히 높으신 분의 힘을 받아 동정녀 몸으로 예수님을 잉태하셨다. 교회는 마리아가 지상 생활을 마치고 하늘에 오르셨다고 고백한다. 이를 몽소승천(夢召昇天)이라고도 한다. 몽소승천이란 마리아가 하느님 부르심으로 하늘에 들어 올림을 받은 것, 곧 영원한 생명의 영광에 가장 먼저 참여하게 된 것을 가리킨다. 예수 그리스도의 승천과 마리아의 승천에는 구별돼야 하는 것이 하나 있다. 예수 그리스도는 스스로 하늘에 오르셨지만 마리아는 예수 그리스도의 공로에서 비롯된 하느님의 부르심으로 승천하셨다는 사실이다. 마리아의 승천으로 우리 모두는 승천의 영광을 희망하게 됐다. 교회는 마리아를 '하느님의 어머니','천주의 모친'으로 고백하고 공경한다.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를 온전한 인성과 신성을 갖춘 참 인간이며 참 하느님으로 고백하기에, 참 인간이며 참 하느님인 예수 그리스도를 낳은 마리아를 하느님의 어머니, 하느님의 모친, 천주의 모친으로 고백하고 공경하는 것이다. 제공=서울대교구 사목국조은일2011.10.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