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종교구 사목교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발자취를 따라”](//cpbc.co.kr/CMS/newspaper/2019/12/rc/769247_1.1_titleImage_1.jpg)
[군종교구 사목교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발자취를 따라”군종교구장 유수일 주교 올해의 사목표어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발자취를 따라”로 정했습니다. 모든 그리스도인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삶을 본받아야 할 공통의 소명을 지니고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당신의 모든 백성에게 “나를 따라라”고 명하고 계십니다. 그래서 주님을 따르는 것이 우리 모든 그리스도인의 공통 소명입니다.저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발자취를 따라감에 있어 길잡이가 될 복음 말씀을 마르코복음 1장 32-39절에서 찾았습니다. 이 복음 말씀은 예수 그리스도의 지상 생활 곧 복음 선포의 삶이 세 개의 기초 위에서 이루어졌음을 알려줍니다. 첫째, 기도 생활이 주님의 삶에서 최우선을 차지했습니다. 기도가 우리 삶의 가장 중요한 기초요, 주님을 따라감에 있어 역시 가장 중요한 기초임을 깨닫게 해줍니다. 주님을 따르는 이들은 기도의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주님과의 친밀함과 일치의 관계, 주님의 뜻에 절대 순종하는 것, 주님의 가르침과 명에 충실할 수 있게 해주는 힘이요 길이 되어 줍니다.둘째, 복음을 선포하는 것이 주님의 발자취를 따라가는 삶에서 중요한 기초가 되고 있습니다. 복음 선포와 관련해 한 가지 강조하는 것은 복음 곧 구원의 말씀이 무엇인지를 알아야 한다는 점입니다. 그러므로 무엇보다도 성경 말씀을 읽고, 듣고, 쓰고, 외우고, 공부하고, 묵상하는 삶을 추구해야 하겠습니다. 이 노력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발자취를 보다 충실히 따르게 해줍니다.셋째, 모든 사람, 특히 여러 이유로 고통받는 이들을 사랑하고 돌보아주는 것이 주님의 삶의 발자취를 따라가는 우리의 공통 소명임을 깨닫도록 합시다. 희생을 포함한 무한한 사랑, 항구한 사랑, 순수한 사랑을 보여주신 우리 주님의 사랑을 본받으면서 우리도 무한한, 항구한 그리고 순수한 사랑의 실천으로 나가도록 합시다. 이 사랑이 모든 사람, 모든 피조물 특히 고통받는 이들에게 실천되기를 노력하고 그래서 성령님의 도우심을 늘 청하도록 합시다. “나를 따라라”(요한 21,19)는 단순히 당신이 맡기신 복음전파의 일을 수행하는 것만이 아니고 당신 때문에 받을 수 있는 박해와 고문과 심지어 죽음의 고통까지 받아들이는 삶을 살아야 한다는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우리도 주님이 밟아 가신 그 고통의 길을 충실히 따라갈 때 영광의 축복을 누리게 된다는 사실을 기억하도록 합시다. 그 영광은 바로 구원의 영광입니다.우리가 공통으로 밟아가야 할 길인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발자취’를 충실히 따라가도록 합시다. 이 따름이 충실하면 할수록 우리 각자의 덕망은 증가하고, 이는 하느님과 교회에 대해서만이 아니고 세상에 대해 국가에 대해서도 위대한 기여를 하게 된다고 저는 믿습니다. 평화신문2019.12.18
![[교리 상식] 성경 속 동물](//cpbc.co.kr/CMS/newspaper/2018/01/rc/709064_1.0_titleImage_1.jpg)
[교리 상식] 성경 속 동물고대시대부터 동물은 인간의 사냥 대상이 되기도 하고, 때로는 우상숭배 대상이 되기도 했습니다. 이는 동서양을 막론하고 세계 곳곳에 역사 흔적으로 남아 있죠. 우리나라 단군신화에는 곰과 호랑이가 등장하는데, 이는 곰을 숭배한 부족과 호랑이를 숭배한 부족을 의미합니다. 이집트에서도 고양이 얼굴에 여인의 몸을 하고 있는 바스트(bast)를 사랑과 자비, 다산과 풍요의 여신으로 숭배했습니다. 이처럼 특정 동물에 영적 힘이 들어 있다고 생각하면서 그것을 숭배하는 것을 토테미즘(totemism)이라 하는데, 이러한 형태의 원시종교들은 인간 이상의 어떤 힘에 의지하려는 인간 본능에서 나온 것으로 신앙심(信仰心)과는 다릅니다. 성경에도 많은 동물이 등장합니다. 말, 낙타, 늑대, 메추라기 같이 실제 존재하는 동물뿐 아니라 용(龍), 불말(火馬) 같은 상상의 동물도 등장하죠. "그들이 이야기를 하면서 계속 걸어가는데, 갑자기 불 병거와 불 말이 나타나서 그 두 사람을 갈라놓았다. 그러자 엘리야가 회오리바람에 실려 하늘로 올라갔다"(2열왕 2,11). 특정 동물은 하느님과도 밀접한 관계를 갖습니다. 어떤 동물은 하느님 대리자로 악마들과 투쟁하는가 하면 아담과 하와에게 선악과를 따서 먹으라고 유혹하는 뱀 같이 악마 앞잡이로 활동하기도 합니다. 때로는 악마 모습이 동물로 묘사되죠. "그때에 나는 용의 입과 짐승의 입과 거짓 예언자의 입에서 개구리같이 생긴 더러운 영 셋이 나오는 것을 보았습니다"(묵시 16,13). 또한 성경에서는 정결한 짐승과 부정한 짐승에 대한 언급을 아주 중요하게 다루고 있다(레위 11장 참조). 창세기는 인간과 동물의 관계를 인간과 하느님과의 관계와 병행해 제시합니다. 따라서 인간과 짐승의 관계에 윤리적 의미를 부여하고 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인간에게 동물들을 다스리도록 위임하셨다(창세 1-2). 따라서 동물은 성경 여러 곳에서 믿음과 충성, 헌신의 상징으로 표현됐습니다. 또 성경에는 동물을 인생에 비유하고 상징하는 경우도 많습니다. 죽은 개는 천한 인생을 상징했죠. "그때 츠루야의 아들 아비사이가 임금에게 말하였다. '이 죽은 개가 어찌 감히 저의 주군이신 임금님을 저주합니까? 가서 그의 머리를 베어 버리게 해 주십시오.'"(2사무 16,9). 일반적으로 개는 경멸과 부정적 이미지를 갖고 있었죠. 바오로 사도는 이단 교리를 주장함으로써 신자들을 유혹하는 가짜 사목자를 개들이라 칭하며 경고합니다. "개들을 조심하십시오. 나쁜 일꾼들을 조심하십시오. 거짓된 할례를 주장하는 자들을 조심하십시오"(필리 3,2). 성경은 종종 인간에게 지혜를 가르칠 때 동물 이미지를 사용합니다. "너 게으름뱅이야, 개미에게 가서 그 사는 모습을 보고 지혜로워져라"(잠언 6,6). 예수님께서는 동물을 하느님 나라를 비유하는 데 사용하기도 했습니다(마태 13,47). 성경은 동물을 하느님을 은유적으로 비유하고 상징하는 데 사용합니다. 하느님은 사자나 표범에 비유되고(호세 13,7), 새끼를 날개 아래 모으는 암탉에도 비유됐습니다.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예언자들을 죽이고 자기에게 파견된 이들에게 돌을 던져 죽이기까지 하는 너! 암탉이 제 병아리들을 날개 밑으로 모으듯, 내가 몇 번이나 너의 자녀들을 모으려고 하였던가? 그러나 너희는 마다하였다"(마태 23,37). 성경의 동물은 그 종류만큼이나 아주 다양하고 재미있는 싱징으로 그려집니다. 허영엽 신부의 [성경 속 상징] 중 백영민2018.01.23

하느님 자비와 사랑의 실현, 성탄의 진짜 의미 되새겨보자 동방박사의 경배, 안드레아 만테냐, 1495~1505년, 게티 박물관(미국 로스앤젤레스). 사람아, 그대의 품위를 깨달으라 / 발터 카스퍼 지음 / 김혁태 옮김 / 생활성서 / 2016예수, 탄생과 어린 시절/ 송봉모 지음 / 바오로딸 / 2013‘주님 성탄 대축일’을 맞아 신앙 서적을 통해 성탄의 의미를 되새겨보는건 어떨까?「사람아, 그대의 품위를 깨달으라」는 발터 카스퍼 추기경의 대림 성탄 강론 모음집이다. 세계적인 교의신학자인 카스퍼 추기경은 성탄은 하느님 자비와 사랑의 실현이자, 실체라고 강조한다. 하느님의 사랑을 바탕으로, 이 시대에 다가오는 자비의 하느님을 이야기한다. 이 시대에 일어나는 다양한 사건 안에 예수님이 어떻게 다가오시는지, 그 예수님을 우리는 어떻게 만나야 하는지를 설명한다. 우리가 얼마나 행복하고 사랑받는 존재인지를 거듭 강조한다. 인간은 누구나 다 자비를 입을 자격이 있고, 사랑받을 자격이 있는 존재다. 우리도 다른 이들에게 자애로운 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귀띔한다. “그리스도인이여, 그대의 품위를 깨달으십시오. 그대가 하느님의 본성에 참여하게 되었음을 명심하십시오.”(레오 대교황) 그는 레오 대교황의 강론을 인용하며, 인간이 하느님의 본성에 참여하게 되었음을 거듭 강조했다. 카스퍼 추기경은 ‘왜 하느님께서 사람이 되셨는가?’라는 질문에 “인간을 홀로 버려두지 않으시고 우리와 함께 계시기로 작정하셨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신앙인의 삶이 무엇인지 묻는 신앙인들에게 희망과 기쁨으로 하느님을 만나고, 하느님과 함께하는 삶을 제시한다.예수회 송봉모 신부의 「예수, 탄생과 어린 시절」은 예수의 생애를 쉽고 깊이 있게 다룬 해설서다. 성서학자인 송 신부는 예수의 탄생부터 돌아가시고 부활하시기까지 삶의 단계를 따라가며 그동안 성서학계에서 이뤄낸 예수의 생애에 대한 학문적 연구 결과를 바탕으로 이 책을 집필했다. 루카와 마태오 복음서에 나오는 예수 탄생 이야기가 왜 차이가 나는지, 복음서는 예수의 공생활 이전의 삶에 왜 침묵하는지 등 성경을 읽으며 의문이 드는 내용도 다뤘다. 예수의 족보와 함께, 임신 소식을 들은 요셉의 반응, 예수님의 성장 환경, 예수님이 열두 살 때 일어난 일도 다뤘다.저자는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신 것은 단순히 우리에게 윤리의식을 심어주기 위해서가 아니라고 강조한다. 우리를 죄에서 해방시키고 우리 안에 하느님의 모상을 회복시켜 주시기 위해서다. 우리 안에 예수님의 인품이 형성되도록 노력해 예수를 닮아야 한다는 것이다.“주님께서 말씀하신다. 내가 벌거벗은 채 태어난 것은 네 자신을 포기해야 함을 알리기 위해서이며/ 내가 가난하게 태어난 것은 네가 나를 유일한 부로 여기게 하기 위해서이고/ 내가 구유에 태어난 것은 네가 모든 환경이 거룩하다는 것을 배우게 하기 위해서이다.”(람베르트 노벤의 ‘내가 태어난 것은’ 중에서) 이지혜 기자 bonaism@cpbc.co.kr 평화신문2019.12.17
![[신앙단상] 적응과 포기(양상윤 신부, 성 빈첸시오 아 바오로 전교회 중화관구)](//cpbc.co.kr/CMS/newspaper/2019/12/rc/769089_1.5_titleImage_1.jpg)
[신앙단상] 적응과 포기(양상윤 신부, 성 빈첸시오 아 바오로 전교회 중화관구) 제가 필리핀으로 오기 전까지 경험해온 성탄절은 입김이 나오는 추운 날씨에 대부분의 나무가 앙상한 가지를 드러내 놓고 산타클로스 할아버지의 빨간 털모자와 털코트가 전혀 어색하지 않은 한겨울 풍경이었습니다.하지만 필리핀에서 맞은 첫 성탄절은 달랐습니다. 거리에서 들리는 캐럴은 한국과 별반 다르지 않지만 보이는 나무들이 모두 초록색이고, 한낮에는 여전히 30℃를 웃도는 무더운 날씨에 모두가 여름옷을 입고 있지만, 오직 산타클로스 할아버지만 털모자와 털코트를 입고 있는 아주 새롭고 신기하다 못해 어색하기까지 한 풍경이었습니다. 필리핀에 살기 시작하면서 신기하고 어색한 것이 성탄절뿐이었겠습니까? 날씨, 언어, 음식, 문화 등 많은 것들이 새롭고, 신기하고, 어색하고 낯설었습니다. 하지만 낯선 것들도 자주 접하다 보면 익숙해지는 법, 시간이 흐르다 보면 하나둘씩 적응되고 편안해집니다. 물론 단지 시간이 흐른다고 저절로 해결되는 것이 아니라 그 시간 속에서 수많은 시행착오와 노력이 있어야 합니다. 특히나 노력함에 있어서 새로운 것을 배우고 익히려는 노력도 중요하지만, 그동안 내가 익숙했던 것들을 포기하기 위한 노력 또한 중요한 것 같습니다. 아무리 새로운 것을 배우고 익힌다 해도 익숙했던 날씨, 음식, 문화 등을 포기하지 못하고 계속 고집하거나 그 속에 머무르려고 한다면 결코 새로운 것에 적응하거나 익숙해질 수 없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물론 쉬운 일은 아닙니다, 예를 들어 오랫동안 살면서 필리핀 음식에 대해 전혀 거부감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아플 때 당기는 음식은 여전히 한국 음식입니다. 또한, 한국에 살 때 그렇게 추위를 싫어했음에도 불구하고 문득문득 코끝이 찡하도록 추운 겨울 날씨가 그리울 때가 있습니다. 머리로는 잊은 듯해도 이미 몸속 깊이 배어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신앙생활도 이와 같은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단지 신앙생활을 오래 한다고 해서 저절로 우리들의 신앙이 성숙해지는 것은 아닐 것입니다. 열심한 단체 활동, 자선활동, 성경 공부, 피정 등을 통해서 신앙적으로 부족했거나 몰랐던 것들을 채우고 배워가는 것과 더불어 내 안에 이미 배어 있는 이기심이나 시기심, 부정적인 욕심 등 좋지 않은 나를 하나씩 포기할 때 우리의 신앙은 더욱 성숙해지고 참다운 하느님의 자녀, 예수님의 제자에 한 걸음 더 가까이 다가갈 수 있을 것입니다. 2019년이 저물어 가고 2020년이 다가오고 있습니다. 이맘때가 되면 많은 사람이 새해 계획을 세웁니다. 올해에는 ‘무엇무엇을 하겠다’는 계획과 더불어 ‘무엇무엇을 포기하겠다’는 계획과 결심을 세워보는 것도 좋을 듯싶습니다. 평화신문2019.12.17

주님 얼굴은 해처럼 빛나고… ‘하느님의 아들’ 선언하고 드러내‘주님의 거룩한 변모 축일’(8월 6일) 의미와 유래 주님의 거룩한 변모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도래한 하느님 나라의 권능을 보여준다. 그림은 라파엘로가 1581~1520년에 그린 ‘주님의 거룩한 변모’ 작품으로 바티칸 박물관에 소장돼 있다. 교회는 8월 6일에 ‘주님의 거룩한 변모 축일’을 지낸다. 높은 산으로 올라가신 주님께서 베드로와 야고보, 요한이 보는 앞에서 영광스러운 모습으로 변모하고 엘리야와 모세와 이야기를 나눈 사건(마태 17,1-9; 마르 9,2-10; 루카 9,28-36)을 기념하는 날이다. 주님께서는 이 사건을 통해 제자들에게 구세주로서 자신의 신원을 명확하게 보여줌으로써 당신께 대한 제자들의 믿음과 확신을 더욱 확고하게 하셨다. 주님의 거룩한 변모 축일을 맞아 이 축일의 의미와 유래를 소개한다. 내용은 「가톨릭교회 교리서」와 「주석 성경」, 베네딕토 16세 교황의 「나자렛 예수」 등을 참고했다. 리길재 기자 teotokos@cpbc.co.kr 베드로의 고백과 초막절 마태오와 마르코, 루카 복음서에 따르면 주님의 거룩한 변모 사건이 있기 전 베드로 사도가 카이사리아 필리피 지방에서 주님께 “스승님은 살아 계신 하느님의 아드님 그리스도이십니다”(마태 16,16; 마르 8,30; 루카 9,20)라고 고백합니다. 주님께서는 베드로의 고백을 듣고 처음으로 제자들에게 당신의 수난과 부활을 예고하신 다음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고 가르치십니다. 그리고 엿새 뒤 주님께서는 제자들 가운데 베드로와 야고보, 요한만을 데리고 높은 산으로 오르셔서 그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영광스러운 모습으로 변모하십니다. 이 세 제자는 예수님께서 수난을 당하시기 전 올리브 산에서 번민 중에 기도하실 때 다시 한 번 주님과 동행합니다. 이런 이유로 베드로의 고백과 예수님의 거룩한 변모는 주님의 수난과 부활을 예시하는 두 이정표라고 하겠습니다. 예수님께서 산에 오르시는 데는 특별한 이유가 있습니다. 하느님을 특별히 가까이 모실 수 있는 장소가 바로 산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일생에서 산은 떼려야 뗄 수 없는 공간입니다. 예수님께서 유년시절을 보냈던 나자렛은 산동네입니다. 주님께서 세례 후 유혹을 당하고, 참행복을 선언하며, 거룩한 신성을 드러내 보이시고, 밤새워 기도하며, 십자가에 매달렸던 곳 모두 산이었습니다. 전승에 따르면 주님께서 거룩하게 변모하신 장소는 ‘타보르 산’이라고 합니다. 그러면 일련의 두 사건은 언제 일어났을까요. 학자들은 유다인의 두 축제에 주목합니다. ‘속죄일’(욤 키푸르)과 그다음 엿새 뒤에 한 주간 동안 계속되는 ‘초막절’(수콧) 입니다. 베드로의 고백은 속죄일에 있었다고 합니다. 일 년에 단 한 번 속죄일 때 예루살렘 성전의 지성소에서 대사제가 “야훼” 하느님의 이름을 소리 내어 부를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스승님은 살아 계신 하느님의 아드님 그리스도이십니다”라고 한 베드로의 고백은 이 속죄일을 배경으로 해석해야 한다고 합니다.‘주님의 거룩한 변모’는 속죄일 엿새 뒤 거행하는 초막절과 관련돼 있습니다. 초막절은 하느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이집트에서 해방시키시고 40년 광야 생활 동안 지켜주신 은혜를 기념하며 장차 오실 주님을 마중하는 희망의 축제입니다. 이 축제 동안 주님께서 당신의 수난과 부활을 예고하시고 거룩하게 변모하신 것은 하느님의 구원 역사를 완성하고 모든 피조물이 서로 화해할 것임을 보여주는 의미를 담고 있다고 풀이할 수 있겠습니다. 복음서가 전하는 주님의 거룩한 변모 이제 복음서가 전하는 주님의 변모 이야기를 본격적으로 살펴봅시다. 주님의 거룩한 변모는 기도 중에 일어납니다. 아버지 하느님과 말씀을 나누는 동안 일어난 일이 세 제자의 눈에 보이게 나타난 것입니다. 이처럼 주님의 거룩한 변모 축일이 우리에게 다시 한 번 확인시켜주는 것은 바로 기도의 중요성입니다. 주님께서는 기도를 통해 당신의 구원사업을 이끌어 나갔습니다. 특별히 어떤 중대한 일을 행하기 전이나 어떤 위기에 처했을 때 주님은 반드시 아버지와 대화하는 시간을 따로 가졌습니다. 주님의 거룩한 변모도 마찬가지입니다. “주님의 얼굴은 해처럼 빛나고 그분의 옷은 빛처럼 하얘졌다.”(마태 17,2) “그 얼굴 모습이 달라지고 의복은 하얗게 번쩍였다.”(루카 9,29; 마르 9,3 참조) 세 복음서가 전하는 거룩하게 변하신 모습입니다. 빛은 주님 자신의 내면에서부터 나온 빛입니다. 주님은 빛에서 온 빛 자체이시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 빛에서 온 빛이신 것은 아버지 하느님과 같은 존재이시기 때문입니다. 거룩한 변모 때 하얗게 빛나는 주님의 옷은 우리의 미래를 예시해 줍니다. 흰옷은 하늘에 있는 존재, 곧 천사들과 하느님께 선택받은 이들이 입는 옷입니다.(묵시 7,9.13 참조) 그래서 세례성사 때 영세자는 흰옷을 입습니다. 그리스도인은 세례를 통해 주님과 함께 빛을 옷 삼아 입게 되었고, 우리 스스로 빛이 된 것입니다. 흰옷을 입은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의 모습으로 바뀌어 가고 있으며 또 바뀌어 가야 합니다. 그리스도의 모습으로 변화하는 것은 창조된 우리 본연의 모습을 되찾는 일이자, 지금 여기서 이미 시작된 우리의 현실이며, 부활 때 충만하게 누릴 구원 은총을 미리 맛보는 일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주님의 거룩한 변모는 십자가 수난과 죽음의 결과인 주님의 부활과 세상 마지막 날에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그리스도인의 영광을 미리 보여줍니다. “내가 사랑하는 아들” 주님께서 거룩하게 변모하실 때 구름 속에서 “이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라”(마태 17,5)라는 소리가 났습니다. 구름은 하느님 현존의 표징입니다. 구름 속에서 난 소리는 주님의 세례 장면을 떠올립니다. 그때도 하늘에서 “너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다”(마르 1,11)라는 소리가 들려왔습니다. ‘하느님의 아들’이라는 칭호는 구약에서는 천사, 선택된 백성, 이스라엘의 왕들을 지칭해 하느님과의 친밀한 관계를 강조하는 말이었습니다. 신약에서는 주님의 세례(마태 3,17) 때와 거룩한 변모 (마태 17,5) 때에 “내가 사랑하는 아들”이라는 소리가 들려왔고, 니코데모와의 대화 중에 예수께서 자신을 “하느님의 외아들”(요한 3,16)이라고 하시면서 당신의 신성을 선언하시고 믿음을 요구하십니다.(요한 3,18) 또 십자가에 달리신 주님을 보고서 백인대장이 “이 사람이야말로 정말 하느님의 아들이었구나”(마르 15,39) 했고, 바오로 사도는 주님의 신성을 증거하는 말로 하느님의 아들이라는 칭호를 씁니다. “거룩한 신성으로 말하자면 죽은 자들 가운데서 부활하심으로써 하느님의 권능을 나타내어 하느님의 아들로 확인되신 분입니다.”(로마 1,4)이처럼 주님의 거룩한 변모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 도래한 하느님 나라의 권능을 보여줍니다. 주님께서는 모세와 엘리야 두 구약의 증인들과 말씀을 나누면서 반드시 거쳐야 할 고난의 길이 영광에 이르는 길임을 알려주십니다.(루카 24,26-27 참조) 세 제자는 이 장면을 목격하면서 주님을 통해 진정한 초막절, 곧 메시아 시대가 왔음을 체험한 것입니다. 그래서 사순 제2주일 복음이 주님의 거룩한 변모에 관한 내용인 것도 이러한 이유입니다. 주님의 거룩한 변모 이야기는 세 제자가 “침묵을 지켜 자기들이 본 것을 그때에는 아무에게도 알리지 않았다”(루카 9,36)는 설명으로 끝이 납니다. 제자들의 침묵은 베드로가 예수님을 “하느님의 아들 그리스도”라고 고백했을 때 예수님께서 내리신 함구령을 그대로 지킨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이 함구령은 예수님의 부활과 승천 이후에 풀립니다. 루카 복음서 저자는 제자들이 예수님을 하느님의 아들 그리스도 곧 메시아로 선포하기 시작한 것은 성령 강림 이후부터라고 합니다.(사도행전 2장 참조)왜 8월 6일인가교회는 주님의 거룩한 변모 축일을 ‘성 십자가 현양 축일’(9월 14일) 40일 전날에 지냅니다. 주님의 거룩한 변모는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기 40일 전에 일어난 사건이라고 보기 때문입니다. 서방 교회에서는 9세기 중반 나폴리와 독일, 스페인 지역을 중심으로 이 축일을 처음 기념했고, 10세기부터 로마와 프랑스 등지로 급속히 퍼져 나갔습니다. 이후 1457년 갈리스도 3세 교황이 전례력에 도입해 보편 교회가 이 축일을 지내게 됐습니다. cpbc2020.08.04

돌아앉아 벽 보고 식사하는 교황님의 혼밥(?)[엉클 죠의 바티칸 산책] (12) 프란치스코 교황의 인기 비결 프란치스코 교황은 매일 아침 산타 마르타의 집 경당에서 미사를 봉헌하는 것으로 하루를 연다. 경당 벽면에 아기 예수를 안고 있는 성모상이 부착돼 있다. 【CNS 자료 사진】 광이불요(光而不曜)! 노자가 도덕경에서 제시한 지도자의 최고 덕목입니다. ‘밝게 빛나지만, 그 빛으로 남의 눈을 어지럽게 하지 않는다’는 의미이지요. 불교에서 이야기하는 해탈이 이런 것일까요? 광이불요나 해탈, 보통 사람들로서는 범접할 수 없는 수준의 경지입니다.동서양 철학을 섭렵한 석학이자 개신교 신학자인 도올 김용옥이 유튜브에서 성경을 해설하는 강의를 최근 들은 적 있습니다. 김용옥은 메이렐레스 감독의 영화 ‘두 교황’을 극찬하면서 프란치스코 교황님에 대해 “해탈하신 분”이라고 말하더군요. 저는 잠시 생각에 잠겼습니다. 그동안 관념적으로만 알고 있던 해탈의 개념이 실증적으로 다가왔습니다. 교황청 대사로서 교황님과 함께 생활하다시피 하는 상황에서, 저명한 인문학자가 교황님을 해탈하신 분이라고 말하는 것을 들었으니 말입니다.3월 13일은 교황청 국경일입니다. 한국으로 치면 개천절과 같은 국가 기념일(공휴일)이지요. 교황청의 국경일은 좀 특이합니다. 교황이 바뀔 때마다 국경일 날짜가 달라집니다. 교황 선출일이 국경일이기 때문입니다. 아르헨티나의 베르골료 추기경이 2013년 3월 13일 제266대 교황으로 선출되었고, 베르골료는 자신의 교황 이름을 프란치스코로 정했습니다. 프란치스코 교황님은 대체 어떤 분이신가? 시쳇말로 인기 비결이 무엇일까? 교황님을 알 수 있는 ‘상징적인 장면’ 세 가지를 소개합니다. 첫째, 산타 마르타의 집에서의 소박한 삶입니다. 교황님은 사도궁 관저를 놔두고 교황청 사제들의 기숙사(공동 숙소)인 산타 마르타의 집에서 살고 있습니다. 엘리베이터에서, 구내 경당에서, 구내식당에서 교황청 사제들은 물론이고 외부 인사들과 수시로 만납니다. 교황님 특유의 소통이 자연스럽게 이루어집니다. 교황님이 구내식당에서 식사하시는 모습이 무척 인상적입니다. 식당 입구에서 좀 떨어진 구석에 전용 식탁이 있는데, 음식을 식판에 손수 담아 와서 홀(hall)을 등지고 벽을 향해 앉아 음식을 드십니다. 홀을 보고 식사할 경우 불편해 할 수도 있는 사제들을 배려한 것이겠지요. 산타 마르타의 집에서의 생활은 교황님의 소통과 배려가 어떤 것인지를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둘째, 간절한 성모 신심입니다. 교황님은 성 베드로 대성전에서 미사를 집전할 때 발다키노(baldacchino, 天蓋) 아래 중앙 제대 한쪽 기둥에 성모상을 모셔놓고 미사 전과 미사 후에 성모님께 기도드립니다. 기도하는 모습이 간절하다 못해 처연해 보일 때가 많습니다. 일반적인 전례에서는 좀처럼 보기 드문 광경이지요. 전임 교황들도 이렇게 하지 않았답니다. 교황님은 해외 순방을 할 때 로마에서 출발하기 전 성모 마리아 대성전(산타 마리아 마조레 대성전)에 들러 성모님께 출국 기도를 드립니다. 귀국했을 때에도 이곳에 들려 성모님께 귀국 기도를 드립니다. 셋째, 특유의 기도 방식입니다. 교황님은 손님들을 만날 때 축복 기도를 해주신 다음 반드시 “나를 위해서도 기도해 주세요!”라고 부탁합니다. 일반알현 때나 삼종기도 때도 세상의 평화를 위해 먼저 기도하신 다음, 회중에게 “나를 위해서도 기도해 주세요!”라고 마무리합니다. 좀 특이하지 않습니까? 아마 성모님께도 그렇게 하실 것 같습니다. “성모님이 천사의 말을 경청하셨듯이, 저도 하느님 백성의 말을 경청하겠습니다. 성모님이 하느님 말씀에 순명하셨듯이 저도 하느님 말씀에 순명하겠습니다. 성모님처럼 경청과 순명의 삶을 살겠습니다. 저를 위해서도 기도해 주세요.” 성모님과 같은 경청과 순명! 교황님의 모든 것이 이 한마디에 담겨 있는 것 같습니다. 교황님은 성모님 앞에서 전구의 기도를 하는 게 아니라 다짐의 기도를 하는 게 아닐까요? 누구나 좋은 말을 할 수는 있지만 실행하기는 무척 어렵습니다. 세상에는 말과 행동이 다르고, 앎과 삶이 다른 지도자가 얼마나 많습니까. 교황님은 그런 교활한 위선자들과는 거리가 아주 먼 분입니다. 프란치스코 교황님은 배려와 소통, 경청과 순명, 언행일치와 지행합일에서 세상 모든 사람에게 모범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백만(요셉, 주교황청 한국대사) 평화신문2020.03.04
![[대전교구 사목교서] “소통과 친교를 이루는 교구 공동체” - 교구 시노드 정신이 뿌리내리는 해](//cpbc.co.kr/CMS/newspaper/2019/11/rc/767604_1.2_titleImage_1.jpg)
[대전교구 사목교서] “소통과 친교를 이루는 교구 공동체” - 교구 시노드 정신이 뿌리내리는 해 [대전교구 사목교서] “소통과 친교를 이루는 교구 공동체” - 교구 시노드 정신이 뿌리내리는 해 우리 교구는 지난 4년간 시노드의 여정을 함께 걸었습니다. 우리는 시노드를 통해 성령의 인도하에 함께 걸어가는 교회의 신비를 체험하였습니다. 「복음의 기쁨」과 ‘순교자들의 삶’은 교회의 모습을 성찰하도록 이끄는 나침반이었고, ‘공동합의성’의 정신은 대전교구 쇄신을 위한 지침이었습니다. 새로운 시대의 사목을 여는 2020년을 ‘소통과 친교의 해’로 선포합니다! 2020년은 지난 4년간 함께 걸어온 ‘교구 시노드 정신이 뿌리내리는 해’가 될 것입니다. 지나친 성직주의를 지양하고 교회 내 하느님 백성의 책임과 활동을 보장하여, 교회의 변화된 모습이 기쁜 소식으로 선포되는 한 해를 만들어 갑시다.교회는 하느님의 말씀과 성령의 인도하에 하느님 백성 모두가 경청하고 서로를 위하며 복음 선포를 위해 나아갑니다. 이것이 「교회의 삶과 사명 안에서 공동합의성」의 정신입니다. 이는 세례를 받은 모든 그리스도인 안에 심어진 ‘신앙 감각’을 존중하며 지금의 현상과 의미를 함께 식별하는 데서 실현됩니다. 하느님 백성인 사제ㆍ수도자ㆍ평신도들은 공동합의성을 통해 자신의 영역을 넘어 갈라진 교회와의 일치, 더 나아가 교회와 세상이 성령의 인도하에 함께 완성을 향해 걸어가야 합니다. 교회의 본질은 선교입니다. 선교는 하느님 말씀으로부터 주어지는 기쁨을 나눔에서 시작됩니다. 따라서 복음 선포를 위한 첫 번째 단계는 성경의 말씀에 경청하고 말씀의 힘이 우리 생각과 마음과 행동을 이끌도록 우리 자신을 비우는 데 있습니다. 또한, 성사 참여를 통해 하느님 현존 앞에 자신을 가다듬는 시간이 절실하게 요청됩니다. 대전교구 신앙의 못자리인 순교자들의 삶은 선교의 뛰어난 모범입니다. 성 김대건 신부님과 하느님의 종 가경자 최양업 토마스 신부님의 탄생 200주년이 되는 2021년도 잘 준비해 갑시다. 초기 한국교회가 보여준 사제와 평신도의 협력, 낯선 이들에 대한 환대와 약자에 대한 우선적 배려, 복음 묵상과 성찰 및 기도의 철저한 생활화는 공동합의성의 주요정신이 실현된 사례로 볼 수 있습니다. 이것이 대전교구 시노드를 통해 우리가 함께 확인한 교회의 나아갈 길입니다. 새해에도 우리 교구 하느님 백성이 새로운 사람, 새로운 응답, 새로운 교회로 나아가는 해로 만들어 갑시다. 저는 새로운 복음화의 여정 안에서 사제, 수도자, 평신도가 서로를 돕는 ‘하느님 백성’의 일원임을 잊지 않는 공동체가 되기를 바랍니다. ‘하느님 백성’ 모두가 각자의 소명과 역할을 통해 풍성한 은총을 체험하는 교구 공동체가 되기를 희망합니다. 특별히 평신도의 다양한 사목적인 참여를 활짝 여는 교구 공동체가 되기를 바랍니다. 평화신문2019.11.27
![[이창훈 위원의 사도행전 이야기] (23) 필리포스와 에티오피아 내시 (8,26-40)](//cpbc.co.kr/CMS/newspaper/2019/07/rc/756850_1.0_titleImage_1.jpg)
[이창훈 위원의 사도행전 이야기] (23) 필리포스와 에티오피아 내시 (8,26-40)성령의 말씀에 귀 기울여 구원의 기쁨 얻다 필리포스의 복음 선포 여정 예루살렘 북쪽 사마리아에서 복음을 전한 필리포스의 복음 선포 활동이 계속 이어집니다. 필리포스는 에티오피아 여왕의 시종에게 복음을 전하고 세례를 준 후에 지중해 연안 일대에서 복음을 전합니다. 일곱 봉사자 중 한 사람인 필리포스가 예루살렘을 떠나 사마리아로 간 것은 예루살렘 교회에 대한 박해 때문이었습니다. 그런데 그가 에티오피아 여왕의 시종을 만나게 된 것은 ‘주님의 천사’를 통해서였습니다. 천사가 그에게 “일어나 예루살렘에서 가자로 내려가는 길을 따라 남쪽으로 가라. 그것은 외딴길이다”(8,26)라고 알려줬습니다. 가자는 오늘날 팔레스타인 자치지구의 중심 도시 가자를 말합니다. 사도행전 본문에서는 가자로 내려가는 길이 남쪽이라고 하지만 가자는 예루살렘에서 서남쪽으로 70㎞가량 떨어져 있는 지중해 연안 도시입니다. 가자는 본래 구약에 나오는 필리스티아인들의 도시였습니다. 오늘날 팔레스타인(라틴어로 팔레스티나)이라고 부르는 지명이 바로 이 필리스티아에서 나왔습니다. 구약 시대에는 가자, 아스돗, 아스클론, 갓, 에크론 이 다섯 도시가 필리스티아인들의 중심 도시였습니다.(여호 13,3 참조)주님의 천사 말에 필리포스는 일어나 길을 가다가 ‘에티오피아 여왕 칸다케’의 모든 재정을 관리하는 고관 내시를 만납니다. 그는 하느님께 경배를 드리러 예루살렘에 왔다가 돌아가면서 수레에 앉아 이사야 예언서를 읽고 있었습니다. 성령께서는 필리포스에게 수레에 바짝 다가서라고 이르십니다.(8,27-29)‘칸다케’는 여왕의 이름이 아니라 이집트 왕을 가리키는 ‘파라오’나 로마 황제를 가리키는 ‘카이사르’처럼 에티오피아 여왕을 가리키는 명칭입니다. 에티오피아는 아프리카 나일강 상류 청나일강의 발원지가 있는 나라입니다. 에티오피아의 고관 내시가 하느님께 경배를 드리러 예루살렘을 다녀갈 뿐 아니라 이사야 예언서를 읽고 있었다는 것은 아프리카 땅 에티오피아에도 이스라엘의 하느님 야훼께 대한 신앙이 있었음을 보여줍니다. 실제로 유다인들은 이집트뿐 아니라 에티오피아에서도 디아스포라를 이루어 살았습니다. 기원전 7세기에 활동한 스바니아 예언자가 “에티오피아 강 너머에서 나의 숭배자들, 흩어진 이들이 선물을 가지고 나에게 오리라”(스바 3,10)고 예언한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을 것입니다. 성령의 지시에 따라 필리포스가 달려가 보니 그 내시는 이사야 예언서를 읽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필리포스가 “지금 읽으시는 것을 알아듣습니까?” 하고 묻자 그는 “누가 이끌어 주지 않으면 어떻게 알아들을 수 있겠느냐”며 필리포스에게 올라와 자기 곁에 앉으라고 청합니다. 내시가 읽던 성경 구절은 다음과 같은 말씀이었습니다. “그는 양처럼 도살장으로 끌려갔다. 털 깎는 사람 앞에 잠자코 서 있는 어린 양처럼 자기 입을 열지 않았다. 그는 굴욕 속에 권리를 박탈당하였다. 그의 생명이 이 세상에서 제거되어 버렸으니 누가 그의 후손을 이야기하랴?”(8,30-33) 이사야서 53장 7-8절을 인용한 이 성경 구절은 예수님의 죽음을 가리키는 말씀이었습니다. 하지만 내시로서는 이 말씀이 누구를 두고 하는 말인지 이해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필리포스에게 이 말씀이 누구를 두고 하는 말인지 알려 달라고 청합니다.(8,34) “필리포스는 입을 열어 이 성경 말씀에서 시작해 예수님에 관한 복음을 그에게 전하였다”고 사도행전 저자는 기록합니다.(8,35) 이 대목은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엠마오로 가는 제자들에게 나타나셔서 “모세와 모든 예언자로부터 시작하여 성경 전체에 걸쳐 당신에 관한 기록들을 그들에게 설명해 주셨다”고 한 루카 복음 24장 27절을 떠올리게 합니다. 예수님께서 엠마오의 두 제자에게 설명하신 것을 이제 필리포스가 에티오피아의 고관 내시에게 그대로 따라 하고 있는 것입니다. 엠마오의 두 제자가 예수님의 말씀을 들으면서 마음이 불타올랐듯이(루카 24,32), 내시가 필리포스의 설명을 들었을 때도 똑같은 심정이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물이 있는 곳에 다다르자 내시는 필리포스에게 말합니다. “여기에 물이 있습니다. 내가 세례를 받는 데에 무슨 장애가 있겠습니까?” 두 사람은 물로 내려갔고, 필리포스는 내시에게 세례를 줍니다.(8,36-38)그런데 성경 본문에는 8장 37절이 빠져 있습니다. 각주에 보면 37절에 “‘마음을 다하여 믿으시면 받을 수 있습니다” 하고 필리포스가 대답하자 “‘나는 예수님께서 하느님의 아드님이심을 믿습니다’ 하고 그가 말하였다”라는 부분이 특히 2세기 이후에 서방에서 손으로 베껴 쓴 사본들에 들어 있다고 합니다. 그리고 이는 세례 예식 때에 사용하는 아주 오래된 전례문이라고 학자들은 해석합니다. 내시가 필리포스에게 세례를 받고 두 사람이 물에서 올라오자 “주님의 성령께서 필리포스를 잡아채듯 데려가셨다”(8,39ㄱ)고 사도행전 저자는 전합니다. 필리포스가 내시에게서 갑자기 사라졌음을 의미하는 이 표현은 엠마오의 두 제자가 “눈이 열려 예수님을 알아보았다. 그러나 그분께서는 그들에게서 사라지셨다”는 루카복음의 구절(루카 24,31)을 연상하게 합니다. 이 표현은 또한 필리포스가 내시에게 예수님에 관한 복음을 설명하고 세례를 준 것이 모두 성령께서 하신 일임을 알리고 있습니다. 내시는 “그를 더 이상 보지 못하였지만 기뻐하며 제 갈 길을 갔다”(8,39ㄴ)고 사도행전 저자는 전합니다. 사마리아의 고을이 필리포스의 말을 듣고 또 그가 일으키는 표징을 보고 구원이 기쁨에 넘쳤듯이, 내시는 필리포스에게서 예수님에 관한 복음을 전해 듣고 세례를 받아 구원의 기쁨으로 제 길을 갑니다. 사도행전의 이 이야기는 필리포스가 “아스돗에 나타나 카이사리아에 이르기까지 모든 고을을 두루 다니며 복음을 전하였다”는(8,40) 서술로 마무리됩니다. 아스돗은 가자 북쪽에 있는 해안 도시이고, 카이사리아는 그보다 더 북쪽에 있는 역시 해안 도시로, 필리포스의 집이 있는 곳이기도 합니다. 일곱 봉사자의 한 사람으로서 예수님의 복음을 전한 필리포스는 카이사리아에 집이 있고 네 딸을 둔 가장이기도 합니다.(사도 21,8-9)생각해봅시다필리포스와 에티오피아 내시 이야기는 두 가지 관점에서 우리에게 생각할 거리를 줍니다. 우선 내시에게 복음을 전하고 세례를 준 필리포스는 성령께 열려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성령께서 하시는 말씀을 들을 수 있었고 에티오피아의 고관에게 복음을 전하고 세례를 줄 수 있었습니다. 그는 또한 성령께 열려 있었기에 성령께서 이끄시는 대로 팔레스티나의 해안 지방을 두루 다니며 복음을 선포할 수 있었습니다. 한 마디로 복음 선포자는 성령께 열려 있어야 합니다. 에티오피아의 고관 내시는 하느님을 경배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가 에티오피아에서 온 유다인인지 아니면 이방인으로서 유다교로 개종한 사람인지는 알 수 없습니다. 또 그것이 중요하지도 않습니다. 중요한 것은 하느님을 경배하고 하느님의 뜻을 헤아리려고 노력하는 사람이라는 사실입니다. 그가 필리포스에게 복음을 전해 듣고 세례를 받아 구원의 기쁨을 안고 제 갈 길을 갈 수 있었던 것은 하느님을 경배하고 하느님의 뜻을 추구하려는 마음을 지녔기 때문입니다. 참으로 올바른 마음으로 진리를 찾고 선을 추구하는 이들에게는 하느님께서 가까이 계심을 에티오피아 고관 내시는 우리에게 일깨우고 있습니다 평화신문2019.07.02
![[사도직현장에서] 오순절의 기적](//cpbc.co.kr/CMS/newspaper/2019/10/rc/764516_1.0_titleImage_1.jpg)
[사도직현장에서] 오순절의 기적박태순 (마리아, 제주교구 우도공소 선교사) 박태순 선교사 선교사인 내게는 강론을 할 기회가 일주일에 두 번 찾아온다. 매주 수요일, 그리고 기상 악화로 갑자기 도항선 운항이 중단되는 주일이다. 공소 예절 시간에 강론을 한다. 강론은 우도 신자들에게 거의 유일한 영혼의 양식이기 때문에 항상 자비의 하느님께 의탁의 기도를 드린 후 원고를 쓰고 교정을 거듭하며 철저하게 준비한다. 공소 예절을 시작하기 직전에도 ‘하느님 자비의 초상화’ 앞에서 오순절의 기적이 일어나는 강론을 할 수 있기를 의탁하는 기도를 드리며, 끝난 후에도 감사의 기도를 잊지 않는다. 성경 15독과 영성 일기 17년, 향심기도 3년과 관상기도 10년이 도움이 되고는 있다. 강론 준비를 하다 보면 처음에는 희미하게 보이던 복음 말씀도 환하게 보이며 성령의 인도 안에서 어느 사이에 강론이 기승전결(起承轉結)에 딱 맞게 완성되어 있으니 참으로 신비스럽다. 그리고 지금까지 61회 강론을 하면서 단 한 번도 보지 않고 막힘없이 술술~~ 자신 있게, 확실하게, 힘 있게, 여유 있게, 기분 좋게 하였다. 끝난 다음에도 충만감과 행복감이 밀물처럼 밀려오고 오순절의 기적이 일어나고 있으니 이 또한 신비스럽지 아니한가?“감동하여 눈물을 흘렸다”는 공소 회장님, “꼭 자신에게 하는 말 같다”며 “강론에 꽂혔다”는 시몬 형제님, “신자들에게 길을 밝혀주는 강론”이라는 요셉 형제님, “좋은 강론 계속 듣게 오래오래 계시라”는 베네딕토 형제님, “영혼을 살찌게 한다”는 가브리엘 형제님, “강론을 직접 듣지 못할 때에는 녹음해 달래서 꼼꼼하게 몇 번을 듣는다”며 “유튜브(YouTube)에도 올리라”는 율리안나 자매님, “강론을 들었는데도 녹음을 해서 또 몇 번 더 듣는다”는 필립보 형제님, “자신에게 한 말 같아 밤새 잠을 못 잤다”는 골롬바 할머니….이러한 오순절의 기적은 기도하며 의탁하는 한 계속 이어질 것이다. 그리하여 우도 신자들의 갈 길을 환하게 밝혀주는 등불이 되고, 메마른 영혼을 촉촉이 적셔주는 단비가 되기를 소망한다. 박태순(마리아, 제주교구 우도공소 선교사) 평화신문2019.10.15

추상적 개념·종교적 경계 넘어 체험의 영역으로[토마스 머튼의 영성 배우기] 36. 관상에 관한 머튼의 공헌과 평가<2> 그림=하삼두 스테파노 지난 호에서 우리는 전통적 관상을 배운 토마스 머튼이 서서히 변화되어 가는 모습을 살펴보았다. 이제 1950년대 후반과 1960년대 머튼의 저서들, 가령, 「내적 체험」, 「새 명상의 씨」, 「수도승적 기도의 사조」, 「활동의 세상 안에서 관상」 등의 저서를 통해 어떻게 그가 자신의 전통을 ‘종합’하고 다른 종교적 전통, 특히 동양의 관상 전통들의 영향 아래에서 우리 시대의 언어로 관상을 ‘현대화’하게 되었는지 좀 더 구체적으로 알아보자.추상적 하느님 넘어 사랑의 친밀한 포옹으로먼저, 「내적 체험 : 관상에 관한 기록」(1959)이라는 저서는 대부분 1958년 ‘루이빌 영적 체험’ 후 1959년에 기록되었다. (실제로 이 책은 1968년 「내적 체험」이 출판되었지만, 1959년에 기록된 텍스트에 몇몇 부분을 수정하거나 첨가했다). 머튼 자신의 관상 체험이 관상에 대한 새로운 이해에 영향을 미쳤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머튼은 관상이라는 주제에 대해, 초기 전통적인 가톨릭 저술들에 따르는 관점으로 표현했던 관상에 대한 자신의 견해를 이 책에서 수정하고 있다. 이 책이 기록되는 동안 1959년 7월 12일, 머튼은 자신의 일기에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이번 주에 나는 「관상이란 무엇인가?」를 다시 썼다…. 이전의 나의 지나치게 단순화된 모든 생각이 얼마나 빈약했던가….” 그는 또한 “많은 선(禪) 불자들이 나의 장황하고 어떤 면에서는 지나치게 공허한 책이었던 「진리를 향한 상승」을 읽었다”고 후회하고 있다.그는 「관상이란 무엇인가?」 는 관상적 삶에 대해 개발되지 않고 미성숙한 전망에서 기록되었고, 「진리를 향한 상승」 역시 참된 관상은 말들과 개념들을 초월한다는 사실에 대한 설명이 부족했기 때문에 한계점을 깨달은 것이다. 그래서 머튼 학자 윌리엄 샤논은 1959년 텍스트는 초기 머튼과 후기 머튼 사이의 ‘다리’역할을 했다고 주장한다.또한, 이 책 제목에 붙은 ‘체험’이라는 단어는 관상에 대한 신학적인 접근에서 체험적인 접근으로 나아가고 있음을 시사하고 있다. 내적 체험에서 그는 논리와 이성을 두드러지게 강조하는 조직신학적 접근으로 넘어가기 시작한 것이다. 이제 그는 관상가는 추상적인 하느님을 넘어, 사랑의 친밀한 포옹으로 ‘자기 자신을 드러내는 하느님의 체험에 관심을 갖는 사람’이라는 것을 깨닫게 된 것이다. 앞선 두 책의 접근 방식과는 달리, 그는 관상에 대해 다음과 같이 이해하고 있다. “관상 체험은 어떤 단계적인 과정을 통해 도달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당신이 ‘보는 것’ 혹은 ‘보이지 않는’ 어떤 것입니다. 그것은 혜성처럼 갑자기 당신에게 나타나 그곳에 있습니다.” 동양 종교에서도 관상적 체험의 보편성 발견토마스 머튼은 획득된 관상과 주입된 관상 사이에 전통적인 구분을 피하고 있는데, 그 이유는 이러한 나눔의 타당성은 신학자들이 뜨겁게 논쟁해 왔기 때문이었다. 오히려, 그는 관상을 ‘본성적 관상과 신학 혹은 하느님에 대한 관상으로 나누는 희랍 교부들의 구분’에 기초해 묘사하고 있다. 게다가, 그는 하느님 사랑을 향한 숨겨진 증인으로 세속에서 살아가는 ‘활동적 관상가들’을 존중하고 있다.그는 이 책에서 “‘이 세상에서’ 관상적 삶의 가장 중요한 개발은 남녀의 작은 그룹들의 성장입니다… 그들은 그리스도입니다. 그리고 그들이 현존하는 곳에 그리스도께서도 현존합니다… 물론 이것은 그리스도인의 삶의 엄격한 관상적인 관점입니다”라고 언급하고 있다. 내적 체험은 교회의 교부들, 성경, 라인강 지방과 스페인 지역의 신비주의자들, 현대 심리학과 실존주의 철학에 기초한 전통적인 관상의 개념들에 대한 머튼의 깊은 이해를 보여 주고 있다. 또한, 이 책에서 처음으로 머튼은 ‘동양 종교에 관한 생각’을 구축하고 있다. 선(禪) 불교와 도교와 같은 비그리스도교 전통에 관한 그의 발견과 경험 사이의 연결점을 찾고 있다. 그는 동양의 관상적 전통들이 서구의 관상적 전통에 상당 부분 기여할 수 있다고 보았다. 그래서 그는 “동양 종교의 지식과 진가 안에서 우리가 성장해 나갈 때, 우리는 다양한 형태의 관상의 깊이와 풍부함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라고 언급하고 있다. 「내적 체험」이라는 저서를 통해 관상에 대한 그의 견해는 종교적 경계를 넘어, 내면의 자아에 집중하는 것으로부터, 내면의 영적 체험을 통하여 우주적 실재에로 깨어나는 것으로 확장되었다. 게다가 관상적 체험의 보편성을 발견함으로써, 초기의 관상에 대한 로맨틱한 환상이 사라지고, 더 경험적이고 부드러우며 다양하고 풍부해진 모습을 이 책에서 볼 수 있다. cpbc2020.03.11
![[전주교구 사목교서] “믿음은 들음에서 옵니다”(로마 10,17) - 교구 설정 100주년을 향한 새로운 복음화-](//cpbc.co.kr/CMS/newspaper/2018/12/rc/741889_1.0_titleImage_1.jpg)
[전주교구 사목교서] “믿음은 들음에서 옵니다”(로마 10,17) - 교구 설정 100주년을 향한 새로운 복음화-김선태 주교(전주교구장) 지난해 ‘교구 설정 100주년을 향한 새로운 복음화’를 교구의 중장기 목표로 제시했습니다. 이를 위해 지난해를 ‘신앙 쇄신의 해’로 정했습니다. 그리고 실천 사항으로 ‘성경 읽기, 교회의 가르침 배우기, 성찬례 참여, 기도, 사랑의 실천’을 제안했습니다. 그런데 신앙 쇄신은 단기간의 노력으로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여기에는 인내와 계속되는 노력이 필요합니다. 따라서 지난해 제안했던 다섯 가지를 앞으로 한 해에 한 가지씩 집중적으로 강조하려고 합니다. 2019년에는 첫 번째 요소인 성경 말씀에 역점을 두고 신앙생활을 합시다. 성경은 곧 하느님의 말씀입니다. 하느님께서 성경 안에서 우리에게 끊임없이 말씀하시고 궁극적으로는 당신의 ‘유일한 말씀’을 하신다면, 우리는 그 말씀을 들어야 합니다. 이제 하느님의 말씀인 성경을 어떻게 읽어야 하는지를 생각해 볼 차례입니다. 성경을 올바로 해석하기 위해 특히 두 가지 점에 주의해야 합니다. 그 하나는 성경을 ‘성령의 도우심’으로 읽고 해석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성경은 ‘죽은 문자’가 될 위험이 있습니다. 나머지 하나는, 성경을 “전체 교회의 살아 있는 전통”(계시헌장 12항)에 비추어서 읽고 해석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교회 공동체에서 벗어난 개인주의적 성경 해석은 쉽게 오류에 떨어집니다. 따라서 이런 위험에 빠지지 않기 위해서 성경을 반드시 교회라는 ‘우리’ 안에서 함께 읽어야 합니다.성경 말씀으로 우리의 신앙을 쇄신하기 위한 구체적인 실천 사항으로 다음 몇 가지를 제안합니다. 첫째, 전례 거행이 없을 때에도 하느님의 말씀을 담고 있는 책이 성당 안에서 눈에 보이게 공경을 받을 수 있도록 성경을 모셔둡시다. 둘째, 개인적인 차원에서 매일 성경 읽기를 생활화합시다. 셋째, 본당 차원에서 ‘거룩한 독서’(lectio divina)를 시행합시다. 넷째, 본당 차원에서 어르신들을 위한 성경공부를 지속적으로 시행합시다. 다섯째, 지구 차원에서 성경 연수나 특강을 시행합시다. 여섯째, 지구 차원이나 교구 차원에서 ‘성서주간’에 성경 축제를 마련합시다. 일곱째, 교구 차원에서 말씀 피정을 마련합시다. 마지막으로 전주가톨릭신학원이 전주와 군산에서 운영하는 성서연수과에 등록하여 하느님의 말씀인 성경을 배웁시다.성경은 성전과 함께 “신앙의 최고 규범”(계시헌장 21항)입니다. 앞으로 계속 성모님처럼 주님의 말씀을 귀담아듣고 마음에 간직하며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그럴 때 세상이 줄 수 없는 기쁨을 충만하게 누릴 것입니다. 그리하여 하느님을 불필요하다거나 낯설다고 느끼는 사람들에게 그 기쁨을 나누어 교회와 세상을 새롭게 복음화할 수 있을 것입니다. 평화신문2018.12.19
![[명작으로 보는 교회사 한 장면] (7)토마스 콜레의 ‘로마 제국의 멸망’](//cpbc.co.kr/CMS/newspaper/2020/06/rc/782017_1.0_titleImage_1.jpg)
[명작으로 보는 교회사 한 장면] (7)토마스 콜레의 ‘로마 제국의 멸망’몰락의 불길로 뒤덮인 로마, 사람들 비명과 절규가 들리는 듯 토마스 콜레, ‘로마 제국의 멸망’. 캔버스에 유화(100×161㎝), 1836년, New York Gallery of Fine Arts 소장. 서로마 제국의 멸망395년 로마 황제 테오도시우스 1세는 약해진 황제의 통치력으로는 더 이상 로마 제국을 혼자서 통치할 수 없다고 생각하여 제국을 동서로 나누어 통치하도록 유언했다. 서로마 제국은 이때 만들어졌다.서로마 제국의 영토는 서쪽으로는 이베리아반도와 아프리카 북부, 북쪽으로는 갈리아와 브리타니아, 게르마니아, 그리고 본토인 로마를 포함한 이탈리아 반도였으나, 이민족의 침입으로 게르마니아 방위선이 무너져 국경지대는 점차 줄어들고 있었다.서로마 제국은 호노리우스 치세에 이르러 알라리크의 로마 약탈과 같은 크고 작은 야만족의 계속되는 공격을 받았고, 훈족의 아틸라 역시 그중 하나였다. 내부적으로는 군인 황제들의 권력 다툼 속에서 훌륭한 장수들이 많이 암살을 당하는 바람에 야만족들을 막아줄 장수가 부족하게 되고, 이에 이탈하는 병사들이 많아져 결국 이민족들을 용병으로 쓰기 시작했다. 특히 게르만 용병들에게는 이민족의 군대라는 지위보다는 제국의 정규군으로 편입시키기까지 했다. 5~9세기에 걸쳐 지중해를 향한 이민족들의 방대한 이동은 이런 상황 속에서 시작되었다. 5세기에 접어들어 아시아 지역에서 발흥한 흉노족은 몽골 지역에서부터 서진하여 로마 제국의 변방까지 밀고 들어 왔다. 날렵한 기마병들을 처음 본 제국의 용병들은 기마병들에 밀려 제국의 영내로 들어오기 시작했다. 아시아의 이민족들이 서진한 이유에 대한 역사학자들의 의견은 다양하다. 정치적인 이유를 들기도 하고, 최근의 헌팅턴 같은 교수는 기후 변화를 들기도 했다. 아무튼, 그로 인해 제국의 변방에 있던 게르만, 슬라브, 반달족, 동고트, 서고트 등의 여러 민족은 동-서 로마 제국의 방대한 영토에서 무수한 전쟁을 일으키며 어떤 민족은 로마까지 밀고 들어오기도 했다. 476년 게르만족의 용병대장 오도아케르는 결국 서로마 제국을 장악하고, 마지막 황제 로물루스 아우구스투스를 강제로 폐위시키기에 이르렀다. 서로마 제국은 이렇게 멸망하였다. 서로마 멸망의 원인서로마 제국 멸망 당시 조시무스는 “로마 제국이 망한 건 전통적으로 섬기던 신들을 버리고 그리스도교를 받아들였기 때문”이라고 했다. 이에 당시 교회의 교부들은 즉각 반발했고, 설득력 있는 글과 설교로 맞섰다. 로마 제국 말기의 정치적인 무능과 사회-문화에 걸친 방대한 도덕적 해이를 그리스도교의 탓으로 돌리는 데 가만히 있지 않은 것이다. 476년 오도아케르에 의한 로마 황제의 폐위가 있기 오래전부터 로마는 거의 1세기가 넘게 이민족들의 침입을 받았고, 쇠망의 길은 기정사실이 되어가고 있었다. 410년 게르만족의 침입으로 로마가 함락되고 약탈당하는 것을 본 아우구스티누스 성인은 「신국론(De civitate Dei)」을 써서, 제국의 쇠퇴 원인이 그리스도교가 아니라고 반박했다. 그리스도교를 수용하기 이전, 이교 시대에도 멸망을 예견하는 여러 가지 크고 작은 사건들이 있었다는 것이다. 갈리아족과 다키아족의 침입과 같은 외부적인 요인이 있었고, 네로 황제의 로마 방화와 같은 내부적인 요인이 있었다는 것이다. 공화정 시대 말기에도 호라티우스는 “로마인들이 날이 갈수록 사악해져 간다”고 한탄했고, 네로 황제 시절, 세네카는 “이제 로마 제국은 병들어 남은 것은 사멸밖에 없다”고 했음을 상기시켰다. 이미 오래전부터, 공화정이 무너지면서부터, 그러니까 제국이 설립되면서부터 멸망은 예견된 일이라고 본 것이다. 그러면서 오히려 그리스도교를 진심으로 받아들이지 않고 비도덕적인 생활을 이어가는 이교도들 때문에 제국이 망했다고 했다. 5세기 초, 그리스도인 작가 살비아누스 역시 「신정론(De gubernatione Dei)」에서 로마 제국 쇠망의 원인은 죄악과 부정부패가 만연한 로마 사회에 대한 하늘의 심판이라고 했다. 연작 ‘제국의 과정’소개하는 그림은 ‘제국의 과정’이라는 제목의 5개 연작 중 하나로, ‘로마 제국의 멸망’이라는 작품이다. 영국에서 태어나 미국에서 활동한 토마스 콜레(Thomas Cole, 1801~1848)의 1833~1836년 작이다. 그는 19세기 중반 미국에서 꽃을 피운 예술 운동 ‘허드슨 강 학파’의 설립자 겸 대표 주자 중 한 사람이다. 허드슨 강 학파는 콜레의 작품들에서 보듯이, 주제의 폭이 방대하지만, 낭만주의와 자연주의를 고수하며 사실적, 구체적으로 묘사하는 특징이 있다. 우화적이고 상징적인 ‘건축가의 꿈’, ‘인생 항해’‘,성경과 종교에 관한 ‘에덴동산’, ‘십자가와 세계에 관한 연구 시리즈’, 역사적인 내용을 담은 ‘시작’, ‘귀환’, ‘과거’, ‘제국의 과정 시리즈’와 같은 것이 그 예다. 1829년 콜레는 이탈리아를 여행한 바 있다. 이후 그의 작품들은 대부분 로마를 중심 주제로 삼고 있다. 대표작인 ‘건축가의 꿈’도 그렇고, 소개하는 ‘제국의 과정’도 그렇다. 이 그림은 ‘제국의 과정’이라는 큰 주제 안에 ‘야만국가’, ‘목가국가 혹은 목자국가’, ‘제국의 완성’, ‘제국의 멸망’, ‘황폐’라는 5개 연작 중 하나다. 네 번째 해당하는 ‘제국의 멸망’은 앞에 있는 세 번째 ‘제국의 완성’과 뒤에 있는 다섯 번째 ‘황폐’와 같은 연장선에 있어 하나만 따로 떼어 언급하기가 곤란해 최대한 간략하게 말하기로 한다. 우선 세 작품의 원근법과 시선이 거의 동일하다. 강을 중심에 놓고 제국이 세워지고, 멸망하고, 황폐화된 과정을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배경 분위기도 ‘제국의 완성’에는 해가 뜨고, ‘멸망’에는 폭풍이 몰려오고, ‘황폐’에는 노을이 지고 있다. 똑같은 풍경을 각기 다른 시대로 구분하여 표현하고 있다. 강변에는 로마로 추정되는 도시가 있고, 그것이 성장하고 쇠퇴한다는 내용이다. 감정은 강물의 움직임에 고스란히 담겨있다. 오른쪽 배경에 있는 절벽과 꼭대기에 아슬아슬하게 걸쳐 있는 큰 바위가 세 작품이 같은 도시를 이야기하고 있음을 증명한다. 같은 도시의 흥망성쇠를 말해주고 있다. 작품 속으로이제 작품 ‘파괴(Destruction)’, 곧 ‘로마 제국의 멸망’ 속으로 들어가 보자. 세 번째, 다섯 번째 그림과 비교하면 극적이고 혼란스런 엄청난 행위들이 집약되어 있다. 벌어지는 행위는 도시를 약탈하고 파괴한다. 강은 정면에 있고 물의 움직임은 거세다. 적들이 배를 타고 이동하며 도시의 방어선을 뚫고 들어와 도시를 불태우고, 시민들을 폭행하고 죽인다. 강에는 죽은 자와 산 자가 함께 던져지고, 승리의 행렬을 잇던 다리는 끊어졌다. 사람들은 다리의 난간에 매달려 있다. 다리 위, 건물 위, 회랑의 기둥 위, 어느 곳 할 것 없이 인파로 가득하고, 모두 아우성이다. 사람들의 절규와 탄식이 캔버스 밖으로 터져 나올 것 같다. 기둥은 깨지고, 오른쪽의 큰 건물 뒤에서 폭발할 듯 터져 나오는 불길은 곧 도시를 집어삼킬 것 같다. 바로 앞 오른쪽에는 그간 숭배해 오던 영웅의 동상이 몸통만 보르게제 검투사 같은 자세로 서 있다. 머리는 바닥으로 떨어져 깨졌다. 예측할 수 없는 미래를 향해 앞으로 전진하려는 듯, 우람한 체구가 처량하기만 하다. 그림은 455년 반달족에 의한 로마 약탈을 이야기하고 있다. 결국, 콜레는 기번과 달리, 로마 제국의 원인을 수많은 내부적인 원인에서가 아니라, 단 한 가지 외부적인 원인, 이민족의 침입에서 찾았던 것이다. 토마스 콜레, ‘로마 제국의 멸망’. 캔버스에 유화(100×161cm), 1836년, New York Gallery of Fine Arts 소장.김혜경(세레나, 동아시아복음화연구원 상임연구원, 이탈리아 피렌체 거주) cpbc2020.06.24

성경 속 인물 심리에서 지혜의 삶을 배운다영성 심리가 홍성남 신부 성경 인물과 함축적 메시지 심리학적 관점으로 재해석 나로 사는 걸 깜박했어요 나로 사는 걸 깜박했어요 홍성남 신부 지음 / 가톨릭출판사 / 1만 2000원만약 예수님이 자신의 고통에만 얽매여 하느님께 불평만 하는 인물이었다면? 마리아가 하느님 아들을 낳게 될 것이란 천사의 말에 두려움으로 고민하다 거절했다면?그랬다면 하느님의 구원사업이 빛을 못 봤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예수님과 마리아는 절대 그런 인물이 아니었다. 어떤 마음을 지닌 이들이었기에 그것이 가능했던 것일까?성경과 심리학이 만났다. 영성 심리가이자 사제로서 수많은 이들의 응어리진 마음을 신앙과 영성의 힘으로 치유해오고 있는 홍성남(가톨릭영성심리상담소 소장, 서울대교구) 신부가 신간 「나로 사는 걸 깜박했어요」를 통해 성경 인물과 함축된 메시지를 심리학적으로 분석했다. 루카복음에 나오는 인물의 심리, 얽히고설킨 상황들을 현대 심리학 관점에서 재해석해 올바른 신앙관을 심어주는 책이다. 2일 가톨릭영성심리상담소에서 만난 홍 신부는 “성경은 하나지만, 읽는 사람들은 각기 다른 성장 환경과 심리적 상황을 지녔다. 무의식중에 성경을 주관적으로, 혹은 병적으로 왜곡해 해석하는 경우를 바로 일러주려고 책을 쓰게 됐다”고 말했다.즈카르야는 아내 엘리사벳이 아들을 잉태할 것이란 말을 받아들이지 못했다. 장황한 이유로 이의를 제기했던 즈카르야에겐 겸손보다 교만이 컸다. 즈카르야의 모습을 통해 홍 신부는 “모르는 것에 직면했을 때 아는 척하기보다 자신이 무지함을 겸허히 인정할 수 있어야 한다”고 겸손의 은총을 되새겨준다.흔히 과거의 상처에 얽매여 현실을 개탄할 때가 많다. 그러나 예수님에겐 그런 ‘피해 증후군’이 없었다. ‘과거 집착’은 자신이 행할 하느님 일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음을 잘 알았으며, 말씀을 전하는 데 늘 지혜롭고 당당했다.당차게 하느님 뜻을 받아들인 마리아는 온갖 고통 중에도 하느님 뜻에 따르며 기쁜 마음으로 아들 예수님을 도왔다. 요한 세례자는 자신의 권력과 명예욕보다 믿음을 중시하며 겸손하고 창조적인 성격의 ‘성취형 인간’이었다. 그랬기에 뒤에 오실 메시아를 기쁘게 전했다. 이들은 모두 ‘진짜 나’로 살아갈 줄 아는 ‘건강한’ 이들이었다.홍 신부의 해석은 우리에게 마음 돌보는 법을 제시해 준다. 자신의 문제를 직시하고 인정하는 방법, 내적 갈등 중에 생각하기를 잠시 멈추는 법, 건강한 죄책감으로 창조적인 삶을 사는 법, ‘나만의 광야’에서 기도하는 법 등 다양한 자가 심리치유법이 연이어 등장한다.홍 신부가 말하는 ‘마음이 건강한 사람’은 균형된 삶을 사는 이다. “우리 삶은 영적ㆍ정신적ㆍ육체적 영역이 적절한 균형을 이뤄야 합니다. 영적 영역만 추구하면 허황된 망상에 젖어들 수 있고, 너무 배제하면 유물론에 빠지기 쉽습니다. 육체적 삶만 추구하면 원초적인 생활이 돼버리죠. 늘 말씀과 기도 안에 균형을 이뤄야 합니다.”만약 하느님이 내 기도를 들어주지 않으신다면? 하느님께 화를 내고, 원망하는 것은 도덕적으로 어긋난 듯 보이지만, 심리학에서는 “그럴 땐 맘껏 화풀이하라”고 가르친다. 쌓인 불만이 해소돼야 비로소 마음의 문이 열리는 인간의 보편적 기질을 반영한 것이다.홍 신부는 “분노가 꽉 차 있으면 하느님께서 내 안에 들어오고 싶어도 못 들어오신다”며 “내 안에 있는 어둠마저 나의 일부로 여기고 돌봐야 건강한 생활로 나아갈 수 있다”고 말했다. 아울러 “답답하고 힘들 땐 기도 중에 주님께 원망도, 할 말도 마음껏 해야 한다”며 “자기 기도를 끝냈다고 곧장 일어나지 말고 성령이 응답해주실 시간을 줘야 한다. 김수환 추기경님은 성체조배 때 답답한 마음을 호소하고 3시간 동안 주님 응답을 기다리셨다”고 전했다.홍 신부는 치유자로서 교회 역할도 피력했다. “심리 치유적 관점에서 현재 남북 정상회담이 불러온 평화의 바람이야말로 ‘한반도 트라우마’를 치유할 절호의 기회”라는 것이다.“우리 국민은 역사적으로 거대한 심리적 트라우마 속에 살아왔습니다. 6ㆍ25전쟁의 고통, 군부독재로 인한 이념 갈등, 1997년 IMF 트라우마 등이 그것이죠. 남북 평화협정은 이 모든 이념 갈등과 경제적 트라우마에서 벗어나 평화의 마음을 안착시킬 기회입니다. 교회가 남북한 국민들의 마음을 돌보고 대화하는 치유자 역할을 하면 좋겠습니다. 정책적 노력은 정부에 맡기고, 교회가 한반도 아픔을 위해 기도하고 국민을 치유하는 장을 만들어 간다면 성령의 도우심으로 고착된 ‘한반도 트라우마’를 해소할 수 있을 겁니다.” 이정훈 기자 sjunder@cpbc.co.kr 백영민2018.05.08
![[영화의 향기 with CaFF] (44) 파비안느에 관한 진실](//cpbc.co.kr/CMS/newspaper/2019/12/rc/768169_1.1_titleImage_1.jpg)
[영화의 향기 with CaFF] (44) 파비안느에 관한 진실엄마와 딸 사이 숨겨진 진실과 오해 영화 ‘파비안느에 관한 진실’ 포스터. 영화 ‘파비안느에 관한 진실’(La Vrit, The Truth, 2019)은 가족, 그중에서도 엄마와 딸에게 초점을 맞춘 이야기다. 프랑스에서 영화배우로 성공적인 삶을 살아온 엄마 파비안느와 미국에서 시나리오 작가로 활동하는 딸 뤼미르가 그들이다.회고록 출간을 앞두고 기자와 인터뷰를 하고 있는 파비안느의 모습으로 영화는 시작된다. 그리고 그녀가 인터뷰하는 동안, 그녀의 딸 뤼미르가 남편과 딸을 데리고 파비안느를 찾아온다. 회고록 출간을 축하하기 위해서다.뤼미르는 엄마의 회고록에 줄을 쳐가면서 열심히 읽는다. 그리고 엄마에게 따진다. 여기에 진실은 없다고. 뤼미르가 어릴 때, 엄마는 학교에 데리러 온 적이 없는데, 파비안느는 딸을 기다리는 것이 기쁨이었다고 회고한 것이다. 딸에게 엄마의 애정이 필요할 때, 항상 옆에 있어주었던 것은 죽은 사라였다. 뤼미르는 회고록에 사라에 대해 한마디도 언급하지 않은 것에 대해서도 신랄하게 비판한다. 하지만 파비안느는 뤼미르에게 “기억을 믿지 말라”고 말할 뿐이다.기억은 늘 상대적이다. 나에게 중요한 것이 상대에게는 하찮은 것일 수도 있다. 둘의 기억은 다르다. 과연 누구의 기억이 맞는 것일까? 우리의 기억은 믿을 수 있는 것일까? 진실과 거짓의 간극은 얼마나 될까?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 사이에는 얼마나 많은 것들이 있는 것일까?예기치 않은 상황이 생기고, 뤼미르는 파비안느의 매니저 역할을 하게 된다. 두 사람은 함께 시간을 보내며 서로 다른 기억의 파편들 속에서 진실에 가까워진다.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은 액자 구조를 그 진실에 다가가는 장치로 사용하고 있다. 파비안느는 현재 출연 중인 SF 영화 속에서 병 때문에 우주에 나가 살고 있는, 그래서 늙지 않는 엄마를 둔 딸의 역할을 한다. 늙어가는 딸로서 여전히 젊은 엄마를 바라보는 역할이다. 그 역할은, 현실에서 여배우인 파비안느를 엄마로 둔 뤼미르의 역할이기도 하다.엄마와 딸은 영화 촬영이 끝날 때까지 함께 지내면서 몰랐던 서로의 마음을 알게 된다. 그리고 조금씩 서로를 받아들이게 된다. 내가 좋아하는 모습으로 바뀌어서가 아니라 있는 그대로의 상대를 말이다.이 영화에는 미움과 갈등이 있지만 따뜻한 시선이 있다. 중요한 것은 언어가 아닌 마음이고, 서로를 어루만지는 일이라는 것을 영화는 말하는 듯하다.육체의 옷을 입고 살아가는 우리는 보이는 것에 마음을 빼앗기게 될 때가 많다. 하지만 보이는 것보다 보이지 않는 것을 통해 볼 때 더 많은 것을 보게 되는 게 아닐는지. 그래서 이 성경 구절이 떠오르는 건지도 모르겠다. “보이는 것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것을 우리가 바라보기 때문입니다. 보이는 것은 잠시뿐이지만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합니다.”(2코린 4,18) 12월 5일 개봉 cpbc2019.12.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