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순례길 못 걷는 요즘… 하느님 안에서 ‘영적 순례’ 떠나야산티아고에서 온 편지 - 멈춰있는 까미노 인적 끊긴 까미노. 코로나19로 사라진 순례자들모두 멈춰있다. 산티아고 순례길은 지금 가는 길을 멈추고 그 자리에 서 있다. 완전히 정지되어 있다. 코로나바이러스 때문에 모두 숨을 죽이고 있다. 깊은 침묵 가운데로 정적만이 흐른다. 이런 일은 처음이다. 정말 낯설다. 사람의 발길이 끊어지니 모든 것이 낯설다. 3월 14일에는 갈리시아 지방이, 15일에는 이곳 카스티아-레온 지방을 비롯한 전체 스페인이 멈췄다. 기나긴 겨울이 지나고 생명이 꽃피는 봄이 왔건만, 만물이 움직이는 역동적인 계절이 왔건만, 까미노 위에는 아직도 멈춤의 침묵만이 흐르고 있다. 순례자들의 발걸음 소리가 침묵 속으로 사라졌다. 한겨울만 빼놓고 내내 분주했던 라바날 델 까미노 우리 마을도 조용하다. 거의 3개월 만인 6월 2일, 아침 미사 때 처음으로 여성 순례자가 성당에 찾아왔다. 정말 얼마 만인가! 너무나 반가웠다. 우리는 정말로 순례자를 환영했다. 순례자가 선물인 사실을 오늘 처음으로 절실히 깨달았다. 코로나바이러스 때문에 일정한 간격으로 떨어져서 인사만 하고 이야기를 나눴다. 나는 지금까지 여기 살고 있으면서, 순례자들을 자신 있게 초대했다. “가던 길을 멈추세요. 여기에는 용기가 필요합니다. 멈추세요. 멈춰야 보입니다. 그러면 놀라운 선물을 발견할 것이에요.” 그리고 약속한다. “아무리 시간이 없더라도 걱정하지 마세요. 날아갈 겁니다. 산티아고까지 날아갈 겁니다.” 그런데 지금 나 자신이 멈춤을 실제로 살고 있다. 나 자신이 이렇게 진짜 멈추게 될지는 몰랐다. 함께 사는 수도 형제가 말했다. “어떻게 보면 주님이 우리에게 베푼 안식년”이라고. 멋진 생각의 전환이다. 멈춤은 ‘침묵’과 같은 말이다. 공허한 부동의 침묵이 아니라 꽉 찬 멈춤의 침묵이다. 삶이 순해지고 겸허해지는 깊은 멈춤의 침묵 속에서, 우리의 근원을 생각하고 내적으로 그곳에 되돌아가는 때다. 적극적인 능동적인 멈춤이 바로 침묵이다. 수도 형제들도 내내 달려왔던 분주함을 떠나 각자 침묵과 고요함 속에서 삶의 뿌리를 향해 내적인 길을 걷고 있다. 멈춤의 침묵 가운데 나를 비롯한 모든 것이 근원으로, 만물의 뿌리로, 원천으로 돌아간다. 멈췄을 때만 우리는 걸어온 우리 길을 되돌아볼 수 있다. 앞으로만 갈 때는 보지 못한다. 아니, 볼 시간도 되돌아봐야 할 생각도 없다. 왜냐하면, 가는 데만 정신이 팔려 있었기 때문이다. 한 순례자가 이렇게 말했다. “내가 멈춰서, 지나온 길을 뒤돌아보니 곳곳에 물구덩이들이 많았다. 아~ 이 물웅덩이들이 지난날 내가 무수히 흘렸던 눈물이구나! 물웅덩이가 아니라 내가 흘린 눈물의 웅덩이구나.” 얼마나 많은 밤이 홀로 지새운 긴 밤이었나. 왜 한숨이 나는 걸까. 웃고 있어도 눈물이 난다. 실패와 고난의 굴곡을 지나왔다. 잊고 지냈던 지친 마음을 만난다. 정말 먼 길을 걸어왔구나. 한편 나 자신이 참 대견하기도 하다. 나를 위로한다.공동선 위해 돌아보고 기도해야 멈춤은 우리가 사는 사회와 세계를 깊이 보게 된다. 선진국이라는 미국이나 유럽 여러 나라가 굉장한 하드 파워와 소프트 파워를 가지고 있다고 생각을 했는데 막상 여러 가지 위기 앞에 부딪히니까 휘청거리고 있다. ‘인간 안보’라는 굉장히 중요한 화두가 던져졌다. 안보라고 하는 것을 ‘군사적 우위’에서만 생각했었다. 이제는 인류를 지켜내는 일, 인간의 생명을 지키는 일이 최우선적이며, 어떤 사회든지 그걸 지켜내기 위해서 의료와 보건 등 공공체제, 공공성의 체제가 작동을 해야 한다. 특히 공동선을 위한 정치 지도자와 정부의 헌신과 노력이 절실히 필요하다.우리는 멈췄을 때 기도하기 위해 두 손을 모을 수 있다. 우선 기도 안에서 나 자신을 위로할 수 있다. 나를 만드신 주님께서 기도 안에서 나를 위로하신다. 그리고 나를 넘어 다른 이를 위한 기도를 한다. 기도의 연대 안에서 우리는 하나가 될 수 있다. 코로나바이러스로 인해 매일 죽음의 소식을 듣는다. 그 죽음 안에서 나의 죽음도 미리 체험한다. 기도할 수밖에 없다. 나약한 인간이라는 사실을 다시금 자각하게 된다. 결국 ‘나’라는 존재는 빈손으로 이 세상에 왔다가 다시 빈손으로 이 세상을 떠날 것이다. 우리보다 먼저 앞서 근원으로 돌아가는 영혼을 위해 기도한다. 사랑하는 이를 떠나보낸 가족들의 아픔과도 함께한다. 묵주를 손에 들고 오늘도 멈춰서 투병 중인 모든 이들과 그들을 돌보는 모든 이들을 위해 기도한다. 영적 멈춤으로 다시 하느님께 걸어가라결국, 멈춤의 침묵 가운데 더 강렬하게 확신하는 것은 우리 모두 ‘순례자’라는 사실이다. 우리는 늘 우리를 기다리고 계시는 어떤 분을 만나러 가고 있다. 길이 누구인지 알고 그 길의 목적지가 어디인지를 알게 된다. 길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이분이 우리가 걸어가는 길이며 우리를 목적지인 하느님 아버지께 인도하신다. 엠마오 가는 길에서 두 제자는 이렇게 청을 한다. “저희와 함께 묵으십시오. 저녁때가 되어 가고 날도 이미 저물었습니다.”(루카 24,29) 예수님을 알아본 후 두 제자는 이렇게 서로 이야기한다. “길에서 우리에게 말씀하실 때나 성경을 풀이해 주실 때 속에서 우리 마음이 타오르지 않았던가!”(루카 24,32) 가장 암울했을 때 가장 고통스러웠을 때 가장 힘들었을 때 그리스도께서 내 옆에서 함께 걸어주셨다는 것을 깨닫는다. 순례자이신 그리스도께서 말씀하신다. “나는 아버지에게서 나와 세상에 왔다가 다시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 간다.”(요한 16,28) 우리도 하느님에게서 와서 하느님께 다시 돌아가는 순례자다. 우리 존재의 근원은 사랑이신 하느님이시다. 까미노, 곧 길은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멈춤은 우리 베네딕도회의 정주(Stability, 定住) 서원과 매우 비슷한 것 같다. 끊임없이 움직이는 ‘순례’와 한 곳에 머무는 ‘정주’가 만난다. 정주는 구체적인 한 수도원에 온전히, 그것도 죽을 때까지 머무는 것이다. 한마디로 말해서, 구체적인 공동체에 완전히 뿌리내리는 것이다. 어떤 환상이나 생각이 아니라 인내와 정성으로 구체적인 현실에 굳게 서 있는 것이다. 수도원을 방문하는 순례자들은 순례 안에서 정주를 만나고 정주 안에서 순례를 발견한다. 참으로 놀라운 경험이다. 순례란 길이신 그리스도를 통하여 근원이신 하느님 안에 내가 더욱 깊이 서 있는 정주하는 것임을, 동시에 정주는 길이신 그리스도를 통하여 근원이신 하느님을 향해 걸어가는 영적 순례임을 발견한다. 영적 멈춤은 우리 인생에서 무엇이 가장 중요한가를 알게 한다. 하느님 안에 내가 굳건히 멈춰 있을 때만 나는 모든 것을 소유한 것이다. 다시 앞을 향해 순례 여정을 걸어갈 수 있다. 하느님 앞에 겸손해진다. 하느님 안에서만이 우리는 움직이고 숨 쉬고 살 수 있다. 하느님 안에서만 우리의 생명도 죽음도 다 있다. 아빌라의 대 데레사 성녀의 기도를 우리 기도로 모신다.아무것도 너를 어지럽히지 않게 Nada te turbe아무것도 너를 놀라게 하지 마라 nada te espante 모든 것이 다 지나가지만 Todo se pasa하느님은 변치 않으시는 분 Dios no se muda인내가 la paciencia모든 것을 얻게 하리니 todo lo alcanza하느님을 소유한 사람은 quien a Dios tiene부족한 것이 아무것도 없으니 nada le falta오직 하느님으로 넉넉하도다 solo Dios basta cpbc2020.06.17

잃어버린 영혼 되찾아야 인간도 피조물도 산다[특별기고] 코로나19 사태에 돌아보는 질병의 의미 / 문종원 신부 신종 코로나바이러스로 많은 사람이 고통을 겪고 있다. 매일 늘어나는 사망자 숫자를 보면서 그것이 내 문제일 것 같아 불안하고 두렵다. 갈수록 더 큰 두려움이 매일 자라고 있다. 정부와 국민은 전에 겪어 보지 못한, 엄청난 파괴력을 지닌 이 신종 바이러스와 싸우고 있다.질병이 우리에게 주는 메시지는 무엇인가사실 인류 출현 후 지금까지 인간은 이렇게 낯선 것들과 격렬하게 싸워왔다. 이처럼 질병과 질병으로부터 오는 고통은 어느 한정된 사람만의 문제가 아니다. 우리는 모두 병에 걸리고, 심지어 어떤 사람은 매일 병에 시달린다. 그리고 결국에는 대부분 병으로 죽게 된다. 이러한 현실에 직면해 인간은 의미를 찾으려고 애쓴다. 우리 또한 코로나19 사태와 관련해 다음과 같은 거대한 질문 앞에 서보면 어떨까.질병은 무슨 의미가 있으며, 그것이 우리에게 주는 메시지는 무엇인가? 아니면 질병은 우리 삶에 전혀 의미가 없는 것인가? 그것은 어쩌다 운 없이 생긴, 의미나 목적이 없는 불행한 것인가? 질병에 대해 어떻게 생각해야 회복에 도움이 되는가? 영적으로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는가? 또한, 그리스도인들은 다음과 같은 질문으로 씨름한다. 하느님 권능이 세상에 드러난다고 할 때, 이 권능과 질병은 어떤 관계가 있는가? 우리가 병에 걸릴 때 하느님께서는 관심을 두고 보시는가?살아 있는 모든 것은 계속해서 공격을 받고 있다. 그러나 우리의 면역 체계가 계속해서 아주 빠르게, 그리고 효과적으로 바이러스, 박테리아, 암세포를 퇴치하기 때문에 우리는 몸에서 벌어지고 있는 생화학적 전투를 인식하지 못한다. 우리 몸에 방어력이 없으면 AIDS 같은 면역 결핍증에 걸리듯, 이러한 공격자들은 재빠르게 우리 몸에 침투한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건강한 사람이라도 한두 가지 병을 갖고 있다는 것이다. 건강과 병은 아주 가까운 이웃처럼 벽 하나를 사이에 두고 마주하고 있다.현대 문화 안에서 우리는 건강을 지향하고, 질병에 대해 몹시 두려워하며 할 수 있는 한 피하면서, 건강한 삶을 살려고 한다. 그러나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때때로 병은 완전함으로 나아가는 길에서 특별한 역할을 한다는 것이다. 여기서 영혼의 문제가 대두한다. 치유는 몸과 정신의 건강을 회복하는 것뿐만 아니라 타락하지 않은 건강한 영혼을 드러내는 것이다. 이러한 치유가 궁극적 치유라는 것이 신약성경의 믿음이다.물질 만능주의가 불러온 바이러스 감염병그러나 현대 사회는 영혼을 그렇게 중요시하지 않는다. 보이는 것이 전부라고 생각한다. 보이지 않는 것은 아무 가치가 없는 것으로 취급한다. 물질 만능주의, 경제 중심 사회에서 인간은 경제적 유익을 위해서 자연에 속한 피조물을 파괴하고 있다. 이러한 파괴가 결국에는 인간 파괴로 돌아온다. 현대 사회에서 유행하는 바이러스 감염병은 인간이 자연을 파괴하고 자연 영역 안으로 들어가 동물 안에 서식하는 바이러스들을 만남으로써 생긴다. 그러다 결국 인간의 탐욕이 인간 서로를 살해하는 지경까지 이르렀다.우리가 사는 이 시대는 지금까지 지구에서 일어난 것 가운데 가장 급진적인 변화를 겪고 있다. 지난 200년에 걸쳐 산업 문명은 공기, 토양, 바다, 화학 작용, 물의 순환, 그리고 열 균형에 이르는 모든 영역을 가차 없이 훼손시켜 왔다. 지구의 중요한 생명 체계를 파괴하고 있다. 생태 위기는 경제적, 인종 간의, 계층 간의 갈등 그리고 세계 곳곳에서 일어나는 전쟁과 결합하여 날로 심각해지고 있다. 서로 뒤얽혀 있어 얼핏 보아선 알 수 없는 이러한 재앙은 개개인의 발달을 크게 망가뜨리고 있다. 서구화된 사회에서 정신적으로 성숙한 성인은 거의 볼 수 없게 되었고, 그래서 지혜로운 노인도 거의 존재하지 않게 되었다. 따라서 인류 초기의 자연과의 친밀감이나 개개인의 독특한 특성, 곧 혼(soul)과 멀어진 채 우리 삶은 멀리 표류하고 있다. 생태적, 정치적, 경제적인 것에서부터 교육적이고 영적인 것에 이르기까지 전 세계적으로 지구에서 행해지는 인간 활동이 문제를 일으키고 있다.인간은 고통 겪으며 자신이 어떤 존재인지 깨달아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잃어버린 영혼을 되찾아야 한다. 그래야 인간도 살고 다른 피조물들과 어울려 살 수 있다. 몸이 치유되는 것과 똑같이, 우리가 영혼이라고 부르는 내면의 존재를 돌보는 것이 중요하다. 인류의 지혜로운 선조들은 영혼과 내면의 삶에 주의를 기울였고, 영혼을 돌보거나 배려해 왔다. 영혼을 돌보라고 말한 첫 번째 사람은 소크라테스였다. 그는 부와 명예와 명성을 얻으려고 하지 말고, 지혜와 진리를 찾고 영혼의 완성을 위해 끊임없이 노력해야 한다고 역설했다. 소크라테스의 믿음은 영혼에 대해 강조한 예수님 말씀이 떠오르게 한다. “사람이 온 세상을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슨 소용이 있겠느냐? 사람이 제 목숨을 무엇과 바꿀 수 있겠느냐?”(마태 16,26) 잘 가꿔진 정원에서 나무가 왕성하게 자라는 것처럼 영혼도 잘 돌봐야 건강을 유지할 수 있다. 그래야 영혼의 믿음이 성장하고 치유의 근원인 내면의 중심을 향하게 된다. 인간은 고통을 겪으면서 자신이 어떤 존재인지, 지구 상에서 어떻게 존재해야 할지를 깨달아 왔다. 심리적 통찰력과 영적 깨달음은 고통 없이는 거의 실현될 수 없기 때문이다. 이러한 사실은 바오로 사도가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기 때문에 삶이 온전히 변화되었다(갈라 2,19 참조)고 말한 부분에서 잘 볼 수 있다. 모든 고통이 영적, 심리적 성장으로 이끌지는 않지만, 많은 경우에 깨달음은 고통을 통해서 온다. 절망 속에서 느낀 고통도 하느님의 놀라운 은총에 의해 지혜로 변모된다. 문종원 신부(서울대교구) cpbc2020.04.01

붉은 색 도포 입은 예수 그리스도… 성화의 토착화 추구[붓을 통한 신앙 전파] 2. 성 베네딕도회 앙드레 부통 신부 부통 신부는 프랑스 야수주의를 연상시키는 강렬한 색채를 자유롭게 사용했다. 그림은 부통 신부가 안동교구 청송성당 제대 벽에 그린 ‘그리스도 왕’ 벽화. 1960년대 중반에 시작된 앙드레 부통(Andr Bouton OSB, 1914~1980) 신부의 한국 체류는 우연한 계기로 이루어졌다. 당시 예루살렘에서 벽화 작업을 하던 그는 독일 상트 오틸리엔 수도원 올라프 그라프 신부와 만나면서 한국에서의 예술 선교를 결심하게 되었다. 주로 아시아 국가의 선교를 담당했던 올라프 신부는 예루살렘 성모승천대수도원 지하성당에 전시되어 있던 부통 신부의 그림과 동판화 작업을 보고 그림을 통한 선교를 펼쳐 달라고 부탁하며 그를 한국으로 초대했다. 이를 계기로 부통 신부는 성 베네딕도회 왜관수도원에 머물며 10여 년간 전국의 성당, 수도원, 학교, 병원 등에 벽화를 제작했다.그림값 받지 않고 춤추듯 빠르게 그려 부통 신부가 한국에 온 1960년대는 한국에 진출해 있던 성 베네딕도 수도회가 1952년 왜관으로 이전하여 새로이 수도원을 건립하고 국내 교회 건축 및 교회 미술 분야에서 활약했던 시기였다. 따라서 그의 벽화 작업은 같은 시기 왜관수도원의 알빈 슈미트 신부에 의해 활발하게 진행되었던 교회 건축과 더불어 적극적으로 실행될 수 있었다. 그는 해마다 10여 점의 작품을 제작했다.부통 신부의 벽화 제작 과정을 본 주민들의 증언에 따르면 그는 본당 신부의 요청이 있을 때에 식사와 믹스커피만 대접받고 그림을 그렸으며 별도의 그림값은 받지 않았다고 한다. 부통 신부의 벽화 제작을 지켜봤던 이들은 그가 ‘마치 춤을 추듯이 빠르게 그림을 그렸다’고 증언하고 있다. 그래서 그는 힘을 들이지 않고 너무 쉽게 그림을 그린다는 평가를 받기도 했다. 부통 신부가 한국에 남긴 대표적인 벽화 작품으로는 대전 대흥동주교좌성당의 벽화 10점(현재 두 점만 남아 있음)과 청송성당의 벽화(현재 소실), 서울 프란치스코회 경당의 벽화(현재 소실) 등이 있다. 그의 작품 중 다수가 지워지거나 성당 신축으로 소멸됐고, 왜관ㆍ상주ㆍ성주 지역 약 20여 곳의 성당과 공소에 작품이 남아 있다. 다행히 프랑스 위스크수도원에 보관된 그의 유품 중에는 한국에서 제작한 벽화의 제작 과정과 완성작이 담긴 사진과 컬러 슬라이드 필름이 간단한 메모와 함께 보관되어 있어 현재 소실된 벽화의 이미지를 부분적으로나마 확인할 수 있다.앙드레 부통 신부는 성화의 토착화를 추구했다. 그는 벽화를 제작할 때 각 나라의 풍광과 현지인들의 모습을 그려 넣어 보다 적극적인 소통을 유도하고자 노력했다. 현재 남아 있는 그의 벽화에는 예수 그리스도와 성모 마리아, 성인의 모습이 모두 그의 해석에 따른 한국인 모습으로 그려졌다. 아울러 그는 교복 입은 학생들, 짧은 단발머리에 한복 차림을 한 어린 소녀들을 배경에 함께 등장시키거나 인근의 풍경을 작게 그려 넣어 성화에 현장감을 더하고자 했다. 현재 소실되었지만, 청송성당의 예수상과 가톨릭대학교 병원 성주분원 진료실의 ‘한복을 입은 아폴린 성녀상’ 등 앙드레 부통 신부가 남긴 벽화 곳곳에서 한국적인 표현으로 완성된 그의 화풍을 엿볼 수 있다. 생동감 있고 강렬한 색채 주로 사용부통 신부는 1966년 6월 7일에 축성된 청송성당 제대 벽과 창쪽 벽에 벽화를 그렸다. 성당 신축으로 소실됐지만 남아 있는 사진 자료를 통해 제대 쪽 벽에 한복을 입고 옥좌에 앉은 왕의 모습으로 표현된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재현한 벽화를 확인할 수 있다. 벽화 정중앙에 자리 잡은 예수 그리스도는 검은 머리카락에 한국인의 이목구비를 하고 붉은색 도포와 전통 신발을 신고 오색의 산을 밟고 있다. 도포 흉배(胸背)에는 한자로 王中王(왕중왕)이 세로로 쓰여 있다. 예수 그리스도의 한 손에 펼쳐 든 성경에는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라”라는 말씀을 한글로 적어 넣었다. 한글과 한자를 이용한 성경 메시지는 벽화 양옆과 하단의 가장자리에도 적혀 있다. 제대를 향하고 선 방향에서 왼쪽에는 한자로 정의(正義), 자비(慈悲), 진리(眞理), 평화(平和)가 위에서 아래로 한 단어씩 쓰여 있고, 오른쪽에는 天主의從(천주의 종), 主의羔羊(주의고양), 豫言者(예언자), 王中王(왕중왕)이 역시 같은 방식으로 나열되어 있다. 부통 신부의 벽화에는 프랑스의 야수주의를 연상시키는 생동감 있고 강렬한 색채가 주로 등장한다. 그는 고유색에 얽매이지 않고 자신의 감각에 따라 과감하게 색을 사용했다. 강렬한 원색을 거침없이 사용할 뿐만 아니라 보색대비를 이용해 명암을 처리하는 등 파격적인 색채를 구사했다. 모든 성화가들과 마찬가지로 부통 신부 역시 성경에 기초해 작품 주제를 결정했다. 그는 예수님의 어린 시절과 성모님의 일생, 성가정 그리고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신비를 주요 주제로 다루었다. 예수 부활상 주제로 한 벽화 주로 그려또한, 그는 그리스도교에 비해 압도적으로 교세가 강한 불교에 대해 깊은 관심을 가지고 이를 자신의 벽화에 융합시키고자 노력했다. 따라서 부통 신부의 벽화에 등장하는 원색 중심의 강렬한 색채에서 사찰 건축의 단청이나 탱화, 한복의 대범한 색 조합, 민속신앙에서 사용되는 색채 등과의 영향 관계를 생각해볼 수 있겠다. 부통 신부는 당시 한국인의 87%가 비그리스도교인이며 그중 다수가 불교 신자임을 고려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에서 부처의 이미지를 떠올릴 수 있도록 표현하고자 했다. 그는 불교의 덕목이기도 한 선행과 자비 그리고 영생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수 있도록, 대부분의 그리스도교 신자들이 십자고상을 선호했음에도 불구하고 예수 부활상을 주제로 한 벽화를 주로 제작했다. 그는 자신의 성화가 하느님과 인간이 서로 만나게 하는 매개체인 동시에 그리스도교의 교리를 시각적으로 설명하는 역할을 할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즉 자신의 벽화를 통해서 언어만으로는 전달하기 어려운 그리스도교의 진리와 신비를 감각적으로 체험할 수 있는 전례 공간을 이루어내고자 했다. 평화신문2019.08.07
![[명작으로 보는 교회사 한 장면] (8)엘 그레코의 ‘성 마르티노와 걸인’](//cpbc.co.kr/CMS/newspaper/2020/07/rc/782392_1.0_titleImage_1.jpg)
[명작으로 보는 교회사 한 장면] (8)엘 그레코의 ‘성 마르티노와 걸인’입고 있던 망토 잘라 헐벗은 걸인에게 주는 자선의 손길 엘 그레코(El Greco), ‘성 마르티노와 걸인’, 1597/1599, 미국 워싱턴 주 National Gallery of Art 소장. 성체성사와 나눔 실천그리스도교 신앙의 중심은 ‘성체성사’다. 성체성사가 주는 가장 큰 메시지는 ‘나눔’이다. 로마 제국에 의한 박해 시기에도 그리스도인들은 소위 ‘도무스 에클레시에’(Domus Ecclesiae, 가정 교회)에 모여, 프라치오 파니스(Fractio Panis, 빵 나눔)로 그리스도교의 생명을 이어갔다. 한 마디로 그리스도교는 태생부터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의 다락방에서 제정하신 ‘성체성사(마지막 만찬)’에 깊이 내재된 ‘나눔’을 실천함으로써 세상에서의 생명력을 드러내는 동시에 존재 이유를 상기해 왔다. 성체성사를 제정하시던 날, 주님께서는 만찬을 먼저 하지 않으셨다. 먼저 하신 것은 제자들의 발을 닦아주신 일이다. 순위를 알려주신 것이다. 이에 초대 교회 그리스도교 공동체는 ‘자선’을 공동체의 존재 이유와 동일시했다. 그리스도교 공동체는 세상 속에서 고립된 어떤 집단이 아니라, 모든 사람을 향해 열려 있는 보편적인 신앙 집단으로, 수는 적어도 온 인류 안에 흩어져 살고 있고, 그 안에서 빛과 소금으로 존재한다고 인식했다. 그리스도인은 하느님이 자신을 사랑하신 그 사랑으로 이웃을 사랑하며, 그것을 통해 하느님과 하나 되는 신앙인의 성소를 완성한다고 믿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에게 이웃 사랑은 윤리적인 덕목을 넘어 하느님의 자녀로서 그분의 생명을 사는 실존적인 의미를 지닌 것으로 간주하였다. 그리고 그것을 실천하며 가르친 탁월한 주교들이 교회가 뿌리를 내리기 시작할 때부터 있었다. 바로 같은 시대에 밀라노의 성 암브로시우스와 투르의 성 마르티노다. 엘 그레코이 작품은 엘 그레코(El Greco, 1541~1614)의 ‘성 마르티노와 걸인’이다. 1597~1599년 엘 그레코가 스페인 톨레도에 머물 때 그린 것으로 추정된다. 엘 그레코는 그리스 크레타 섬에서 태어났다. 원래 이름은 도미니코스 테오토코풀로스(Δομνικο Θεοτοκπουλο)로 스페인에서 40여 년 넘게 활동한 화가며 조각가다. ‘엘 그레코’라는 이름은 ‘그리스 사람’이라는 이탈리아식 표현이다. 그는 비잔틴 회화를 배우다가, 20세 무렵, 포스트 르네상스 미술의 중심지였던 이탈리아로 건너가 베네치아에서 티치아노, 틴토레토, 조르조네 등 베네치아 학파의 색채의 풍성함을 배우고, 코레조를 통해 명암에 의한 서정적인 분위기를 배웠다. 로마로 가서는 원색적인 느낌의 선명한 색채, 명암에 의한 극적인 대조, 특정 부위를 강조하는 듯한 인체 등 이탈리아 매너리즘 화풍을 배웠는데, 대표적으로 미켈란젤로의 작품을 접하며 신체를 조각처럼 묘사하는 법을 배웠다. 베네치아 학파와 미켈란젤로의 특징은 그의 작품에 지속적으로 영향을 미쳤다. 그는 1577년 스페인 궁정에서 유능한 화가를 구한다는 소식을 듣고 톨레도로 돌아왔지만, 펠리페 2세의 마음을 얻지는 못하고 톨레도와 마드리드를 중심으로 활동하며 종교적인 주제의 독창적인 작품을 선보이기 시작했다. 엘 그레코는 종교개혁으로 힘든 시기에 스페인 가톨릭교회의 옹호자임을 자처하며 반종교개혁의 이념이 반영된 작품을 그렸다. 그것이 ‘자선’ 혹은 ‘선행’을 주제로 한 것들이다. ‘다섯 솔라(sola, ‘오직’이라는 뜻)’로 알려진 ‘오직 성경(Sola Scriptura)’, ‘오직 그리스도(Solus Christus)’, ‘오직 은혜(Sola Gratia)’, ‘오직 믿음(Sola Fide)’, ‘오직 하나님의 영광(Soli Deo Gloria)’이라는 종교개혁의 정신에 맞서, ‘세례의 물은 지옥의 불을 끄고, 자선은 연옥의 불을 끈다’는 가톨릭교회의 오랜 가르침을 그림으로 표현했다. ‘오르가스 백작의 매장’(1586/1588)과 ‘성 마르티노와 걸인’(1597/1599)은 가톨릭교회에서 중요하게 생각하는 ‘사랑과 자선’을 실천한 사람에 대한 하느님의 관심과 그에 대한 기적을 담은 내용이다. 성 마르티노엘 그레코가 소개하는 성 마르티노(Martinus Turonensis, 316~397)는 프랑스를 대표하는 성인이다. 콘스탄티누스 황제 시절에 태어나 테오도시우스 황제 시절에 활동했던 인물이다. 투르의 주교를 지냈기 때문에 흔히 ‘투르의 성 마르티노’로 알려져 있다. 그는 헝가리 솜버트헤이에서 태어났다. 아버지가 로마군 소속 기마 부대 보조군의 고위 장교로 이탈리아 북부 티치눔(오늘날의 파비아)에 주둔하는 바람에 마르티노는 어린 시절을 파비아에서 살았고, 성년이 된 후에는 프랑스에서 살았다. 마르티노의 생애에 대해서는 같은 시대에 살았던 술피키우스 세베루스(Sulpicius Severus, 363?~420)가 기록하여 후대에 전했다. 그가 남긴 대표적인 작품이 「성 마르티노의 생애」다. 그리고 후에 세 통의 친필 편지를 포함하여 자료들을 더 보충하여 「대화 (Dialogi)」(404)로 다시 한 번 성인을 세상에 알렸다. 성 마르티노의 제자이기도 한 만큼, 그가 소개하는 성인에 관한 미담은 많은 사람의 입으로 회자되었다. 가족들 가운데 가장 먼저 세례를 받은 이야기, 오랜 군인 생활에도 불구하고 사람을 죽일 수가 없다며 무장하지 않고 전쟁의 선봉에 서기를 자처한 최초의 양심적 병역 거부자였다는 이야기, 성소를 깨닫고 프랑스 투르 지방으로 가서 삼위일체 그리스도교 신앙의 지지자였던 힐라리오를 만나 그의 제자가 되고 아리우스파 이단을 극복하도록 한 이야기, 힐라리오가 투르의 주교로 있는 동안 그가 세운 수도원을 통해 지역 복음화에 일조한(361년) 이야기 등이 있다. 그중 가장 많이 알려진 일화가 여기에 소개하는 엘 그레코 그림의 내용이다. 마르티노가 로마 군인으로 갈리아에서 복무하던 시절, 어느 추운 겨울날 아미앵의 성문에 이르렀을 때 추위에 떨고 있는 한 걸인을 만났다. 측은한 마음이 들어 그 자리에서 걸치고 있던 외투의 절반을 뚝 잘라 걸인에게 주었다. 그날 밤, 마르티노는 꿈속에서 자기가 준 외투를 걸친 예수님을 만났다. 예수님이 옆에 있는 천사에게 “마르티노는 아직 예비신자에 불과한데, 나에게 이 옷을 입혀주었다”고 말씀하시는 것이다. 그리고 꿈에서 깨어나 보니 잘라졌던 외투가 원래 모양대로 온전한 상태로 되돌아와 있는 것을 보았다. ‘성 마르티노의 기적의 망토’(cappa Sancti Martini)는 중요한 유물로 간주돼 그것을 관리하는 사제를 별도로 둘 정도였다. 그리고 이 ‘망토 지킴이’ 사제를 일컬어 작은 외투를 의미하는 단어 카펠라(capella)에서 파생된 ‘카펠라누(cappellanu)’라고 불렀다. 오늘날 경당 혹은 소성당을 말하는 영어 단어 채플(chapel)은 여기서 유래한 말이다.마르티노는 세례를 받고 은수자, 설교자로 활동하다가 371년에 투르의 주교로 임명되어 죽을 때까지 봉사했다. 주교가 된 후, 그는 여전히 남아 있는 로마제국의 신전과 제단, 우상 신상들을 제거하고, 자신의 선행과 자선과 겸손함으로 그리스도교가 뿌리내리도록 하는데 크게 기여했다. 교구 내에 수도 공동체를 세우는 일도 게을리하지 않았다. 또 죄수와 이단자들에 대한 국가와 교회의 강력한 처벌에도 반대했다. 그는 죄는 미워하되 사람을 미워해서는 안 된다는 가르침을 가장 먼저 실천한 주교였다. 작품 속으로이 작품은 성 마르티노가 망토를 잘라서 걸인에게 주는 순간을 묘사했다. 길쭉하게 왜곡된 것 같은 인물의 형태, 독특한 공간 배치, 극적이고 불안정한 색채와 강한 명암 대비로 인해 마치 조각처럼 보이는 가운데 강한 영성을 품어내는 듯한 이미지다. 매너리즘과 회화에서 조각 같은 이미지를 지향했던 미켈란젤로의 영향을 엿볼 수 있다. 공간 표현에서 원근법을 크게 강조하지 않고 추상적인 느낌이 들도록 배치한 것도 매너리즘의 특징 중 하나지만, 비잔틴 회화의 영향도 간과할 수 없을 것이다.2019년 가을, 나는 산티아고 순례길을 걸었다. 대 야고보 사도의 유해를 찾아가는 성묘길 거의 모든 도시에서 성 마르티노를 만난 것 같다. 순례자가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로 가는 여정에 투르(tours)가 있어 성 마르티노를 만나고 떠나는 것만이 아니라는 것이다. 순례의 여정 안에서 계속해서 그를 만나게 되고, 기억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리스도교는 태생부터 순교 영성, 순례 영성, 자선이 별개가 아니라는 것처럼.엘 그레코는 대부분 화가가 ‘사랑’을 의미하는 붉은색 계열을 사용하는 것과 달리, 초록색 톤으로 쓰고 있다. 초록은 ‘희망’이다. 그는 그리스도인의 ‘자선’이야말로 일그러진 우리 시대의 유일한 ‘희망’이라고 말하고 싶었던 것 같다. 엘 그레코(El Greco), ‘성 마르티노와 걸인’, 1597/1599, 미국 워싱턴 주 National Gallery of Art 소장.김혜경 (세레나, 동아시아복음화연구원 상임연구원, 피렌체 거주) cpbc2020.06.30
![[교부들의 사회교리] (30)난민에 대한 사랑](//cpbc.co.kr/CMS/newspaper/2019/07/rc/757969_1.0_titleImage_1.jpg)
[교부들의 사회교리] (30)난민에 대한 사랑 최원오 신부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에는 헐벗고 집 없는 사람들이 넘쳐납니다. 수많은 전쟁 포로들이 우리 집 문을 두드리고 있습니다. 외국인들과 추방당한 이들도 적지 않으니, 그 울부짖음을 어디서든 들을 수 있습니다. 그들은 하늘 아래 허공을 집으로 삼고, 처마 아래와 골목길과 외딴 공터를 거처로 삼습니다. 그들은 부엉이나 올빼미처럼 폐허 속에 웅크립니다. 옷이라고는 구멍 난 누더기이며, 할 일이라곤 자비로운 이들의 선의를 바라는 것뿐입니다. 식사라고는 먼저 온 사람들이 떨어뜨리는 부스러기요, 음료는 동물들과 뒤섞여 마시는 샘물입니다. 잔은 그들의 손 움큼이요, 창고는 주머니도 없이 주워담아야 하는 그들의 옷자락이고, 식탁은 웅크린 무르팍입니다. 침대는 맨땅이요, 목욕탕은 하느님께서 모두에게 주신 아무런 가림막도 없는 강이나 웅덩이입니다. 이 야만적인 떠돌이 생활은 처음부터 시작된 것이 아니라, 그들의 불행과 가난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단식하는 그대, 이 사람들을 도와주십시오. 그대의 불행한 형제들에게 자비를 베푸십시오. 그대의 배에서 덜어낸 것을 가난한 이들에게 주십시오. 하느님에 대한 두려움이 공정한 정의가 되게 하십시오. 그대의 탐식과 그대 형제들의 굶주림, 이 두 가지 상반되는 악을 그대의 지혜로운 절제로 치유하십시오.” (니사의 그레고리우스, 「사랑해야 하는 가난한 이들」 1,5-6)이 세상의 떠돌이들가난과 폭력에서 벗어나기 위해 고향과 조국을 떠난 이들이 세상 곳곳에서 고달픈 피난살이를 이어가고 있다. 셔츠 한 자락으로 어린 자녀를 품어 안고 가로지르기에는 이 세상의 물살과 장벽이 너무 거칠고 가파르다. 대한민국은 난민에게 가장 야박한 국가 가운데 하나다. ‘글로벌 대한민국’을 내세우면서도 난민들의 비극은 언제까지 딴 세상 남의 일이어야 하는가? 니사의 그레고리우스(335~394) 교부는 이 문제에 대한 분명한 해답을 준다. 인간다운 권리를 누리지 못하는 난민들을 맞아들이고 도움을 베풀되 우리 힘으로 해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의 단식으로 그들의 배고픔을 덜어주고, 우리의 검소함으로 그들의 궁핍을 채워주며, 우리 배와 마음에 가득한 것들을 덜어내어 가난한 이들을 구제하자는 것이다. 이 자비의 실천은 남에게 떠넘길 수 없을뿐더러, 반드시 우리의 단식과 절제, 우리의 희생과 연대를 요구한다.우리가 맞서야 하는 대상은 난민이 아니라 탐욕우리 신앙의 두 기둥은 성경과 성전(聖傳)이다. 외로운 떠돌이의 벗이 되어 주시고 가난한 나그네와 당신을 동일시하시는 주님의 성경 전통과, 가난과 전쟁에 떠밀린 난민과 외국인들을 주님처럼 맞아들이고 환대하는 교부 전통에 맞서서 난민 반대를 외치며 노골적으로 거부하는 일은 그리스도인이라는 이름을 달고는 할 수 없는, 그리스도에 맞서는 행위이다. 난민들은 더 이상 외국인도 아니고 이방인도 아니다. 성도들과 함께 한 시민이며 하느님의 한가족이기 때문이다.(에페 2,19) 이주민들은 국내에 침투한 적이 아니라, 더불어 살아가야 하는 새로운 가족, 새로운 백성이다. 정말 우리가 맞서 싸워야 할 대상은 가냘픈 희망을 움켜쥐고서 낯선 세상에 뿌리내리려 몸부림치는 이주민들이 아니라 우리 안에 이글거리는 불의와 탐욕, 부정과 부패임을 그레고리우스는 일깨워준다.최원오(빈첸시오, 대구가톨릭대 유스티노자유대학원장) 평화신문2019.07.16

참된 평화·통일 기도하며 구현한 대희년 정신[한국전쟁 70년, 갈등을 넘어 화해로] (18)2000년 새날 새삶을 여는 미사 2000년 대희년을 맞아 강원도 철원군 월정리역 광장에서 춘천교구 주최로 열린 민족의 화해와 일치를 위한 기도의 날 전국대회는 과거사를 공동 참회하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이 땅에 참된 평화와 통일이 이뤄지길 기도하는 자리였다. 가톨릭평화신문 DB 한국 교회가 2000년 대희년을 앞두고 던진 화두는 ‘대희년의 정신을 어떻게 구현해 새로운 모습으로 거듭날 수 있을까’였다. 여기에는 민족의 화해와 용서도 포함돼 있었다.한국 주교회의는 1998년 10월 가을 정기총회에서 희년 정신을 구현하기 위해 ‘새날 새삶’ 운동을 전개하기로 했다. 이 운동의 네 가지 기본 틀은 △개인 차원의 ‘나부터 새롭게’ △가정 차원의 ‘참된 가정 이루기’ △사회 차원의 ‘좋은 이웃 되어주기’ △민족과 국가 차원의 ‘함께 가요 우리’였다. 특히, 민족의 화해를 이루고 함께 가겠다는 한국 교회의 노력과 의지는 2000년 6월 25일 강원도 철원군 월정리역 광장에서 봉헌된 민족의 화해와 일치를 위한 기도의 날 전국대회를 기점으로 들불처럼 번져갔다. 새날 새삶을 여는 미사이날 미사가 시작되기 전 50년 전 전쟁이 발발했던 시각(새벽 4시)에 맞춰 평화의 종이 울려 퍼졌다. 평화의 종이 50차례 울릴 때마다 미사 참여를 위해 자정부터 월정리역 광장에 모인 7000여 신자들은 프란치스코 성인의 ‘평화의 기도’로 응답했다. 한반도에 진정한 평화가 깃들기를 바라는 마음은 제대를 비롯한 곳곳에 스며 있었다. 전국 각지에서 퍼온 흙 250부대로 쌓은 ‘평화의 제대’에서 미사가 봉헌됐다. 제단에는 산불로 타버린 남한의 소나무와 북한산 주목을 엮어 만든 5m 크기의 대형 십자가가 우뚝 서 남북이 하나가 됨을 상징적으로 드러냈다. 평화의 종 또한 ‘칼을 쳐서 보습을 만들고, 창을 쳐서 낫을 만드는’(이사 2,4) 성경 말씀에 따라 한국전쟁 때 사용한 포탄과 탄피를 녹여 만들었다.미사는 공동 참회 예식으로 시작했다. 주교단과 사제단, 신자들은 한국 교회가 200년 역사 속에서 저지른 과오를 고백했다. 한국 교회가 분단과 냉전, 독재정권 하에서 교회의 안위만을 우선한 처신, 가족 이기주의와 무관심, 약자에 대한 냉대, 참 신앙인답게 살지 못한 점 등을 공개적으로 참회하고 하느님께 용서를 청했다. 춘천교구장 장익 주교는 미사 강론을 통해 “우리가 예수님을 닮은 참된 인간애로 살아갈 때 남북이 서로의 담을 헐어버리고 하나의 새로운 민족으로 다시 태어날 것”이라며 “우리가 먼저 나를 내어주는 사랑의 삶으로 바꿔나가자”고 호소했다. 김수환 추기경은 “통일의 길은 우리 마음에서부터 열려야 한다”며 “평화 통일을 위해 그리스도를 닮은 자기 희생과 헌신적인 사명감을 갖자”고 당부했다.김수환 추기경을 비롯한 14명의 주교와 신자들은 미사 끝 무렵 동이 트는 북녘 하늘과 땅을 향해 십자가를 그으며 하느님의 이름으로 북녘 동포들을 축복했다. 이날 미사는 남북한이 서로 화해하고 용서하며 이 땅에 희년 정신을 구현하는 첫걸음을 뗀 역사적인 순간이었다. 감격에 겨워 눈물을 흘리는 이들도 적지 않았다. 우리 민족이 지난 50년간 가슴 속에 품었던 원한을 털어내고 화해와 평화의 새날 새삶을 여는 미사는 많은 이들에게 큰 감동을 줬다. 한반도 평화를 한마음으로 기도한 보편 교회민족 화해와 일치를 위한 기도의 날 전국대회가 열리기 전부터 한반도에는 평화의 훈풍이 불어오고 있었다. 같은 해 6월 13일 평양에서 김대중(토마스 모어) 대통령과 김정은 국방위원장의 역사적인 만남이 이뤄져 6ㆍ15 공동 선언이 발표됐다. 종교계와 시민사회도 대결과 반목으로 일관해온 50여 년의 분단 역사를 허물고 화해와 협력을 향한 첫걸음을 시작했다는 점에서 일제히 환영의 뜻을 표명했다. 한국의 주교들도 정상회담이 민족의 참다운 화해와 통일의 물꼬를 트는 계기가 되기를 기원했다. 남북 정상회담을 앞두고 서울대교구장 정진석 대주교는 북한 방문에 대한 희망을 피력하기도 했다. 정 대주교는 2000년 5월 23일 서울대교구 주교좌 명동대성당에서 봉헌된 주님 부활 대축일 미사에서 “평양교구장 서리의 직분을 갖고 있으면서도 서울에서만 대축일 미사를 봉헌해 아쉽다”며 가까운 시일 내에 평양에서 미사를 봉헌하는 것이 성사되도록 하느님께 기도하고 있다”고 밝혔다. 성 요한 바오로 2세 교황도 역사적인 남북 정상회담의 성공을 기원하는 특별 담화를 발표했다. 성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은 그해 6월 11일 바티칸에서 주일 낮 삼종기도를 마치고 발표한 특별 담화를 통해 “남북한 간의 대화를 지지하는 모든 사람과 함께 회담 성공을 기원한다”며 “남북한 간 대화와 교류가 양측 주민들의 화해와 반세기 이상 헤어져 있던 이산가족들의 재회, 한반도 전체의 안정과 번영을 촉진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한다”고 말했다. 교황이 특정 국가의 정상회담과 관련해 특별 담화를 발표하는 것은 극히 이례적인 일로, 이는 한반도의 평화와 통일에 대한 교황의 각별한 관심을 반영하는 것이었다. 성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은 1984년 103위 시성식과 1989년 세계성체대회 때 방한해 분단의 현장을 직접 목격하고 한반도의 평화를 기원한 바 있다.멀고도 가까운 한반도 평화민족 화해와 일치에 대한 열기는 쉽사리 사그라지지 않았다. 이날 전국대회를 통해 한국 교회는 민족의 화해와 일치를 위해 북녘 동포를 돕는 사랑을 구호가 아닌 구체적 실천으로 표현해 나갈 것을 다짐했다. 미사 헌금은 북한 동포 돕기를 위해 사용됐으며, 이날 행사에서 한국 교회는 북녘 땅 3개 시·9개 도와 결연을 맺고 대북지원사업을 다채롭게 펼치는 계기를 마련했다. 또한, 행사를 기점으로 주교회의 민족화해위원회 위원들이 북한을 직접 방문하고, 대북지원 사업 창구 단일화 방안을 모색하는 등 한국 주교회의 차원에서 대북지원 사업을 활발히 펼치기 시작했다. 그 성과로 각종 씨앗과 의료물품 보내기, 옥수수 2000t 지원 등 적극적이고 폭넓게 사업을 전개했다. 민족화해센터 설립도 대희년 다음 해인 2001년에 결정됐다.행사를 주최한 춘천교구는 후속 사업으로 교구 모든 본당에 ‘남북 한 식구 한 삶 위원회’를 조직, 매달 25일에 민족 화해와 일치를 위한 미사를 봉헌하고 있다. 또 ‘한솥밥 한식구’운동 등 북녘 동포 돕기 사업을 지금껏 이어오고 있다. 하지만 한반도 평화의 기류는 오래가지 못했다. 2002년 6월 29일 북한의 북방 한계선 침범과 기습 공격으로 교전이 발생해 대한민국 해군 6명이 전사하고 18명이 부상하는 제2연평해전이 일어났다. 이어 2006년 10월 9일 북한의 첫 핵실험, 2008년 금강산 관광객 박왕자씨 피살사건, 2010년 연평도 포격 등으로 남북 관계는 급격히 경색됐다. 남북 교류는 줄어들고 북한에 대한 인도적 식량 지원마저 단절될 위기에 놓였다. 하지만 한국 교회는 대북 지원과 민족의 화해와 일치를 위한 기도 운동을 계속하며 평화에 대한 희망의 끈을 놓지 않았다. 백영민 기자 heelen@cpbc.co.kr cpbc2020.05.27
![[수도 전통에 따른 렉시오 디비나] (18)귀고의 영적 사다리](//cpbc.co.kr/CMS/newspaper/2019/12/rc/768712_1.2_titleImage_1.jpg)
[수도 전통에 따른 렉시오 디비나] (18)귀고의 영적 사다리독서·묵상·기도·관상 순으로 하는 성독 허성준 신부 렉시오 디비나(Lectio Divina)는 수도승들에게 중요한 영적 수행 가운데 하나였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우리는 초기 수도승들이 어떻게 구체적으로 그러한 수행을 했는지 알 수 없다. 왜냐하면, 렉시오 디비나 수행에 대해 많은 수도 교부가 강조했지만, 그것을 구체적으로 언급한 문헌들을 찾아볼 수 없기 때문이다. 아마도 그 당시 수도승들은 누구든지 렉시오 디비나 수행에 대해서 너무나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따로 그것을 구체적으로 설명하는 자료들을 남기지 않았던 것 같다. 그러나 다행스럽게 중세를 거치면서 성독에 대한 중요한 자료 하나를 발견하게 되었다. 12세기 카르투시오회의 제9대 원장이었던 귀고 2세(?~1188)는 그의 저서 「수도승의 사다리」(The Ladder of Monks)에서 매우 체계적이고 일목요연하게 렉시오 디비나를 설명하였다. 그러므로 렉시오 디비나를 언급할 때 귀고의 문헌은 매우 중요하며, 렉시오 디비나에 대한 많은 글은 거의 귀고의 개념을 직ㆍ간접으로 인용하고 있다. 귀고는 렉시오 디비나를 지상에서 천상으로 올라가는 ‘영적 사다리’에 비유하면서 다음과 같이 네 개의 단계, 즉 △독서(Lectio) △묵상(Meditatio) △기도(Oratio) △관상(Contemplatio)의 단계로 설명하였다. 이러한 과정은 수도승들을 지상에서 천국으로 오르게 하는 하나의 영적 사다리를 만들어 준다고 보았다. 영적 사다리의 첫 번째 단계인 ‘독서’는 복된 삶의 감미로움을 추구하는 단계이다. 두 번째 단계인 ‘묵상’은 그것을 깨닫는 단계이며, 세 번째 단계인 ‘기도’는 그것을 청하는 단계이고, 마지막 네 번째 단계인 ‘관상’은 그것을 맛보는 단계를 말한다. 귀고는 이것을 쉽게 음식의 비유로 설명하였다. 독서는 음식 자체를 입에 넣는 단계이고, 묵상은 그것을 씹어 분해하는 단계이다. 그리고 기도는 그것의 맛을 느끼는 단계이고, 관상은 그것으로 인해 기쁘고 새롭게 되는 감미로움 그 자체를 말한다. 귀고 2세는 이러한 단계들이 서로 긴밀히 연결되어 있음을 지적하였다. 묵상 없는 독서는 쉽게 메마름에 떨어질 수 있고, 독서가 없는 묵상은 쉽게 오류에 빠질 수 있다. 그리고 묵상 없는 기도는 냉담해질 수 있고, 기도 없는 묵상은 참된 영적인 열매를 맺을 수가 없다. 기도가 열정적일 때 관상에 이르는 것이지, 기도 없이 관상에 이르는 경우는 거의 희박하고 그것은 기적에 가깝다고 보았다. 귀고는 독서의 단계를 하느님의 말씀을 듣는 단계로 보았고, 묵상과 기도 그리고 관상의 단계는 하느님 말씀에 대한 응답의 단계로 보았다. 이것은 기도의 리듬인 들음과 응답의 관계를 잘 함축하고 있다. 비록 그가 렉시오 디비나에 대한 점진적인 발전의 단계와 그리고 각 단계의 긴밀성을 언급했지만 이러한 단계가 영성생활에서 반드시 필연적으로 어떤 연속적인 단계로 적용되지는 않는다는 것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모든 사람이 반드시 독서의 단계에서 묵상의 단계로 그리고 기도와 관상의 단계로 나아갈 수 없음을 귀고도 인정하였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이러한 단계들이 렉시오 디비나 수행을 하는 수도자로 하여금 성경 안에 현존하시는 하느님과의 깊은 만남을 가능케 하였다는 사실이다. 이러한 면을 직시할 때, 우리는 수도자들이 성독 수행 안에서 하느님과의 깊은 만남을 통해 어떻게 자신들의 삶을 풍요롭게 하였는가를 조금이나마 알 수 있다. 허성준 신부 (성 베네딕도회 왜관수도원) 평화신문2019.12.11
![[명작으로 보는 교회사 한 장면] (1) 루카 조르다노의 ‘세네카의 죽음’](//cpbc.co.kr/CMS/newspaper/2020/05/rc/778675_1.1_titleImage_1.jpg)
[명작으로 보는 교회사 한 장면] (1) 루카 조르다노의 ‘세네카의 죽음’ 폭군 네로에 맞선 거장 철학자, 죽음 앞에서도 당당 루카 조르다노, ‘세네카의 죽음’(1684년), 캔버스에 유화(155×188cm), 루브르박물관, 파리. ‘명작으로 보는 교회사의 한 장면’이라는 주제로 교회 역사에서 의미 있는 순간이 되었던 한 장면에 머물러 이야기를 나누어 보려고 한다. 가능한 연대기 순으로 하겠지만 때로는 현재 우리에게 필요한 것과 맞추어 과거의 그 순간을 꺼내 보기도 하겠다. 역사는 흐르는 것이라, 흘러온 만큼 또 흘러갈 것이기 때문이다. 코로나19는 발전을 향해 무한 질주하던 현 인류에게 ‘공동의 집’ 지구가 힘들다고, 그만 달리라고 제동을 건 사건이라는 생각을 해본다. 불편해진 여러 가지 상황이 그대로 생활이 될 공산이 커지고 있다. 날마다 늘어나는 코로나19에 감염된 확진자와 사망자에 대한 정보를 이름이 아닌, 숫자로 확인하는 일상에서 생사의 경계에 선 우리가 오늘 무엇을 해야 할지 이정표가 되어주는 그림이 있어 소개한다. 이것은 또 네로 황제의 그리스도교 박해의 정점에서 일어난 한 사건에 주목하고 있어 그 의미가 더욱 크다고 하겠다. 화가 루카 조르다노 프랑스 파리 루브르박물관에 소장된 루카 조르다노(Luca Giordano, 1634~1705)의 ‘세네카의 죽음’이다. 철인의 죽음을 받아들이는 초연함과 그의 주변에서 한 마디도 놓치지 않으려는 듯한 제자들의 움직임이 큰 울림을 주는 작품이다. 그림을 그린 루카 조르다노는 바로크 시대 나폴리학파의 대표 화가다. 알려진바, 르네상스의 중심지는 피렌체이고 포스트-르네상스의 중심지가 로마라면 1600년대 바로크의 중심지는 나폴리였다. 카라바조, 존 로렌조 베르니니는 당시 나폴리의 분위기를 대변하는 인물이다. 그는 “Luca Fapresto”(루카 파프레스토), 즉 ‘루카는 빨리하는 사람’이라는 별명을 가졌다. 아무리 큰 제단화라도 하루 이틀을 넘기지 않을 만큼 신속하게 잘 그렸다고 한다. 라파엘로, 티치아노, 베로네세, 피에트로 다 코르토나는 물론 카라바조까지 훌륭한 선배들의 영향을 여러모로 받아 화사하면서도 묵직한 자신만의 화풍을 만들었다. 주제도 성경과 신화, 역사적인 사건 등 가리지 않고 화폭에 담았다. 그는 3000점이 넘는 작품을 남겼고 나폴리, 로마, 피렌체, 마드리드, 파리 등 곳곳에 있다. 루브르에만도 ‘세네카의 죽음’ 외에 ‘동정녀의 결혼식’(1688), ‘목동들의 경배’(1688), ‘막달레나에게 나타나신 그리스도’ 등 9점이 있다. 스토아학파의 철인(哲人) 작품 속에 등장하는 세네카(Lucius Annaeus Seneca, B.C.4~A.D.65)는 키케로(Cicero, B.C.106~43)와 함께 로마 철학을 대표하는 인물이다. 1세기 중엽 대표적인 스토아학파 철인(哲人)으로 폭군 네로의 스승이기도 하다. 그는 스페인 코르도바에서 태어나 일찌감치 로마의 정계로 진출하여 제국의 말단 공무원부터 원로원의 의원이 될 때까지 관직을 두루 거쳤다. 그 과정에서 다섯 명의 황제를 경험하였다. 아우구스투스, 티베리오, 칼리굴라, 클라우디우스, 그리고 네로다. 그는 연설을 잘했고, 훌륭한 연설로 사람을 움직이는 자를 황제들은 싫어했다. 폭군 칼리굴라는 그의 목숨을 노렸고, 황제가 먼저 살해당했다. 클라우디우스는 조카딸과 간통했다는 혐의로 그를 코르시카로 추방했다. 하지만 그는 거칠고 힘든 환경 속에서 자연과학과 철학에 더욱 정진했다. 8년 만에 네로의 어머니 아그리피나에 의해 복권되어, 54년, 네로가 16살에 황제가 되자, 그는 황제의 스승이며 로마의 최고 지성인으로 제국의 실질적인 통치자로 부상하였다. 세네카가 네로에게 영향력을 발휘하던 때, 로마 제국은 근래 없는 평화의 시기를 맞았다. 그 시기에 국가 재정과 법률 개혁을 단행했고, 문화적으로도 라틴 문학이 꽃을 피웠다. 네로는 스승의 가르침대로 선정을 베풀어 주인이 노예들을 함부로 다루지 못하게 했다. 그 시기 네로도 시와 음악에 자질을 보이던 밝은 소년이었다. 나름대로 시도 잘 썼다고 한다. 훗날 로마를 불태운 것이 시상이 떠오르지 않았기 때문이라는 이야기가 나올 정도였다. 그런 네로를 변하게 한 것은 어머니가 정치적인 맞수가 되면서부터였다. 59년, 21살이 된 네로는 존속살해라는 비극을 시작으로 폭군이 되어갔다. 스승의 충고는 거슬렸다. 세네카는 ‘관용’이 로마 황제의 자질이라는 편지를 남기고 정계를 떠났다. 하지만 네로의 광기(狂氣)는 64년의 로마 방화와 그리스도인 박해로 이어졌고, 세네카는 황제 암살 모의에 동조했다. 네로 역시 가까이 있는 세네카보다 멀리 있는 세네카가 더 두려웠던 참이다. 연설의 힘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황제 암살 모의가 발각되고, 세네카는 황제로부터 자결 명령을 받아야 했다. 그때 세네카의 나이 69세였다. 세네카는 철학에서 흔한 주제인 존재론이나 인식론 등에는 관심이 없었다. 스토아 철학은 금욕적인 삶과 이성을 발휘하여 자연과 세계의 법칙에 따르는 것이 특징이다. 더욱이 살아온 시대가 힘겨웠던 만큼 세네카는 주어져 버린 인간의 삶과 도덕에 천착했다. “인생살이처럼 어려운 것도 없다. 그래서 우리는 사는 법을 배울 수밖에 없다”고 말하며, 많은 실용서를 내놓았다. 「서간집」, 「대화」 등의 저서와 「분노에 대하여」, 「행복한 삶에 대하여」, 「인생의 짧음에 대하여」 등의 논술서 등이다. 그의 저서들은 훗날 단테와 ‘제2의 세네카’로 불린 몽테뉴를 비롯하여 루소, 흄 등에 이르기까지 두루 영향을 미쳤다. 화를 다스리는 법과 덕에 관한 것, 죽음에 관한 내용은 그리스도교의 가르침과 크게 다르지 않다. 그의 종교관과 도덕철학은 네로 이후 계속되는 제국의 박해 속에서 많은 호교론자들에게도 영향을 미쳤다. 최후의 순간에도 시대의 진리 전해 이제 작품으로 들어가 보자. 빛은 현자를 비추고 있다. 그가 중심이다. 그는 광풍이 몰아치는 시대에 치열하게 살았고 그 속에서 사색했다. 그렇기에 평소 가르치던 대로 “죽음을 당당하게 받아들이는” 모습이다. 원로원으로부터 ‘로마의 적’이라는 선언을 받고 비 오는 새벽에 신하의 집으로 도망갔다가 죽은, 전혀 황제답지 못했던 네로의 죽음과는 대조적이다. 배경은 시대를 반영하듯 사방이 어둡다. 어둠 속에서 제자들은 서둘러 현자에게 집중하고 있다. 스승의 허름한 몸은 영적인 힘으로 지탱되고, 그의 가르침은 계속된다. 그래서 이 작품의 부제가 ‘철인의 작별’이다. 배경 속 기둥은 스토아철학의 흔들리지 않는 자세를 의미한다. 왼쪽 끝, 붉은 옷을 입고 공책에 뭔가 열심히 받아 적고 있는 사람 뒤, 어둠 속에 있는 사람은 황제의 자결 명령서를 들고 온 사람으로 보인다. 그의 담담한 표정이 앞에서 벌어지고 있는 상황과 대조를 이룬다. 노쇠한 철인의 죽음 앞에서도 시대의 어둠을 걷어내려는 듯 젊은 학도들의 열기가 발목 동맥을 자르고 밴드를 쥔 의사의 손에 들어간 힘과 복받치는 슬픔을 압도한다. 루카 조르다노, ‘세네카의 죽음’(1684년), 캔버스에 유화(155×188cm), 루브르박물관, 파리. 김혜경(세레나, 동아시아복음화연구원 상임연구원, 피렌체 거주) cpbc2020.05.06

손목 수술 후 마주한 십자가 고통… 깊어진 주님 사랑을 화폭에손목 골절로 붓을 놓았던 심순화 화백의 부활 심순화 작 ‘라뿌니’, 2018년. 심 화백이 손목 수술을 받고 시련을 이겨낸 후 그린 작품으로 마리아 막달레나가 주님의 빈 무덤 앞에서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만나는 장면을 담고 있다. 새들은 바람이 강하게 부는 날 집을 짓는다고 한다. 그래야 무너지지 않기 때문이다. 이처럼 시련으로 담금질한 삶은 비록 질그릇같이 투박하지만 아름답다. 순탄한 인생은 쉬이 고비에 좌절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교회에도 ‘고통 없이 영광 없고, 죽음 없이 부활 없다’는 말이 전해온다.20년째 한국화풍의 성화를 그려온 심순화(가타리나) 화백에게도 뜻하지 않은 시련이 닥쳤다. 4년 전, 오른 손목뼈와 관절이 부러져 붓을 놓아야만 했다. 재활과정에서 고통의 영성을 깨달은 그는 다치기 전보다 더 왕성한 작품 활동을 하고 있다. 어두운 밤 같은 고통에서 벗어난 심씨를 만났다. 이학주 기자 goldenmouth@cpbc.co.kr서울 용산에 있는 당고개순교성지 하늘정원은 어머니의 품처럼 평화롭고 아늑했다. 넓게 깔린 푸른 잔디와 고풍스러운 한옥이 영혼의 샘터같이 평온하다. 심 화백은 한옥 툇마루에 앉아 고요를 즐기고 있었다. 그는 해마다 주님 부활 대축일 성화를 담은 도록을 부활 선물로 건넸다. 그의 그림은 친근했다. 갓 쓰고 흰 두루마기를 입은 주님과 고운 한복 차림인 성모 마리아 등. 성경 속 인물들이 한국 전래 동화에 주인공으로 나올법한 모습으로 그려졌다. “저는 어린이들을 무척 좋아해요. 성화 작업도 어린이들이 신앙을 더 친숙하게 받아들이게 하려고 시작했죠. 그래서 우리와 같은 모습으로 그렸어요. 성모님을 보세요. 따뜻하고 선한 우리 어머니들을 닮았죠.” 그의 그림 배경색은 대부분 밝고 환한 노란빛이다. 하느님의 빛, 희망의 색이다. 단아하고 따스한 그의 성화는 국내뿐 아니라 해외에서도 높은 평가를 받는다. 베네딕토 16세 교황과 프란치스코 교황이 그의 작품을 소장하고 있다. 그림을 인연으로 두 교황을 알현한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성미술 화가로 사는 삶이 순탄하지만은 않았다. 2016년 4월 겪은 사고로 전환점을 맞았다. 의정부교구의 한 성지에서 야외 작업을 하던 때다. 오랜 시간 의자에 올라 담벼락에 문양을 그리다 지친 터였다. 의자에서 내려오다 그만 발을 헛디디고 말았다. 떨어지며 손으로 땅을 짚는 순간, 손목뼈와 관절이 으스러졌다. 태어나서 처음 느끼는 강렬한 고통이 팔을 휘감았다. 하필 다친 손목이 오른쪽이었다. 고통에 신음하며 병원에 실려가던 중 불안과 절망이 엄습했다. ‘다시는 그림을 못 그리게 되는 걸까?’ 불현듯 그해 1월에 성 베네딕도회 왜관수도원이 의뢰한 성모화가 떠올랐다. 독일 뮌스터슈바르작수도원 설립 1200주년 기념 선물이었다. 죄송함과 자책감에 가슴이 아려왔다. 수술 후 손목에는 뼈를 고정하기 위한 나사못 5개가 박혔다. 못 자국을 보니 문득 십자가에 매달린 예수님이 떠올랐다. 손목에서 시작된 통증은 팔을 타고 몸 전체로 퍼졌다. 그는 고통에 몸부림치며 자비의 기도를 간절히 바쳤다. 그러던 중 비로소 깨달았다. 지금 나도 이렇게 아픈데, 십자가에 못 박힌 주님의 고통은 감히 상상조차 못 하겠구나. 그토록 그분이 우리 인간을 사랑하셨구나.“사실 다치기 전에는 예수님께서 고통스러워하거나 피 흘리는 모습을 별로 그리고 싶지 않았어요. 사실 그릴 수가 없었다는 게 맞을 것 같아요. 내가 느껴보지 못했으니, 그 고통을 그릴 자신이 없었던 거죠.” 사고로 성화에 대한 그의 열망은 시커멓게 퉁퉁 부은 손목 앞에 차갑게 식었다. 몸 일부가 아니라 멋대로 갖다 붙여놓은 막대기인 듯, 팔은 감각이 없었다. 제구실을 못 하는 오른손이 야속하기만 했다. 붓을 잡을 엄두가 나지 않았다. 그러나 독일 수도원에 보낼 성모화 생각이 머리에서 떠나지 않았다. 약속을 지키고 싶다. 그런데 이 손으로 과연 해낼 수 있을까. 난생처음 왼손으로 선 긋는 연습을 시작했지만 녹록지 않았다. 완치까지 5개월은 더 남은 시점. 다시 오른손에 기대를 걸어보기로 했다. 그리고 성모 마리아께 청했다. 제 손은 몽당연필이 됐으니 성모님이 손을 잡고 함께 그려달라고. 움직이지 않는 손가락 위에 살짝 걸친 붓은 힘없이 떨어지기 일쑤였다. 붓질한 지 5분 만에 기진해 쓰러질 때도 잦았다. 그때마다 찢어질 듯한 통증에 온몸이 떨렸다. 속에서는 울음이 올라왔다. 과연 이 고통의 끝이 올까. 매일 밤 엎드려 주님과 성모님께 기도하며 마음을 다잡았다. “여기서 못 해내면 더는 그림을 그릴 수 없다는 생각으로 힘을 짜내 그렸습니다. 그리하니 평소 속도대로라면 두세 달 걸렸을 작업을 다친 손으로 한 달여 만에 완성할 수 있었어요. 가로 130cm, 세로 160cm가 넘는 작품을 말이죠.”이렇게 완성된 ‘자비의 모후화’는 심 화백에게 다시 그림을 그릴 수 있다는 희망을 심어줬다. 기적이자 부활이었다. 기쁨에 찬 심 화백은 가장 먼저 죽음을 이겨낸 주님 부활을 화폭에 담았다. 마리아수도회가 의뢰한 ‘성모님의 생애’ 연작 중 하나다. 제목은 ‘라뿌니’. 마리아 막달레나가 주님의 빈 무덤 앞에서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만나는 장면이다. 손바닥 상처를 내보이며 인자하게 웃는 주님 얼굴은 “네 고통을 나도 안다”라고 말하는 듯하다. 성녀는 그에 화답하듯 미소를 지으며 스승을 그윽이 바라본다. 그 모습에 심 화백이 겹쳐 보이는 것은 우연일까. “피 흘리는 그 모습이 이제 무섭기는커녕 친근감 있게 다가왔어요. 비로소 예수님의 상처를 제대로 바라볼 수 있게, 그분에게 더 가까이 다가갈 수 있게 된 거죠.” 다시 붓을 든 그는 더 기쁘고 편하게 성화를 그려냈다. 고통을 겪는, 고통을 이겨낸 주님을 그릴 때가 특히 좋았다. 그분과 가장 가깝게 느껴지는 순간이었다. 고통을 이겨낸 그의 작품에 담긴 맛과 향은 더 진해졌다. 완치된 2017년 ‘고통이 빛이 되어’를 주제로 성화전을 열어 큰 호응을 얻었다. 올해 들어 수원교구 주보에 연재하는 성화도 인기가 많다. 따로 작품을 사고 싶다는 요청도 온다. “지금은 그림을 그리는 것 자체만으로 행복해요. 다치고 나선 잘 그려야 한다는 욕심을 버렸거든요. 그래서 부담감 없이 그냥 자유롭게, 그리고 싶은 대로 그려요. 돌이켜보니 예수님이 당신을 보라고, 조금 더 가깝게 느끼라고 잠시나마 고통을 주신 것 같습니다.” cpbc2020.05.06
![[명작으로 보는 교회사 한 장면] (5) 반 다이크의 ‘테오도시우스의 성당 출입을 막는 암브로시우스’](//cpbc.co.kr/CMS/newspaper/2020/06/rc/781122_1.0_titleImage_1.jpg)
[명작으로 보는 교회사 한 장면] (5) 반 다이크의 ‘테오도시우스의 성당 출입을 막는 암브로시우스’학살 자행한 황제는 성당에 “못 들어갑니다” 반 다이크, ‘테오도시우스의 출입을 막는 암브로시우스’, 내셔널 갤러리, 런던 392년, 테오도시우스(Flavius Theodosius, 347~395) 황제는 그리스도교를 국교로 선포했다. 그의 치세가 379년부터 사망하는 395년까지라는 점을 고려하면, 거의 치세 말기에 시행한 정책이라고 할 수 있다. 정치적으로, 테오도시우스의 죽음과 함께 로마 제국은 다시 동ㆍ서로 분리되고 영원히 이별하고 만다. 하지만 그가 추진한 강력한 그리스도교 부흥 정책은 이후 중세기를 예고하는 중대한 변곡점이 되었다. 이렇게 그리스도교를 옹호하고 부흥시킨 테오도시우스 황제가 대성당 출입을 금지당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오늘 소개하는 작품은 바로 그 사건을 다룬 것이다. 루벤스 이후 가장 뛰어난 플랑드르 화가로 알려진 안톤 반 다이크(Antoon van Dyck, 1599~1641)가 그린 ‘테오도시우스의 성당 출입을 막는 암브로시우스’다. 안톤 반 다이크작품은 1824년 런던의 내셔널 갤러리 측이 개인 수집가로부터 구입하였다. 저자 반 다이크는 오늘날 벨기에의 안트베르펜에서 태어나, 일찌감치 개인 공방을 운영할 만큼 패기 넘기는 화가였다. 그러다 루벤스(Peter Paul Rubens)를 만나면서 공방을 접고 그의 밑으로 들어가 공부했다. 루벤스가 “내 제자 중 최고”라고 할 정도로 뛰어났다. 그는 스승의 그림을 따라 그리며, 점차 스승을 넘어서는 감정 표현을 보여주었다. 스승이 격정적이고 화려하다면, 반 다이크는 서정적이고 섬세하고, 세련되며 우아하다는 평을 받았다. 그는 후에 이탈리아로 건너가 티치아노, 베로네세 등 베네치아 화풍을 연마하며 데생에 구애받지 않은 파스텔톤의 부드러운 구도와 선미한 색채로 성경, 신화, 역사적 사건 등을 넘나들며 스승을 능가하는 재능을 보였다. 1620년 10월, 반 다이크는 21살에 영국으로 건너갔다. 이후 영국과 유럽 대륙을 오가며 초상화 작가로 활동하다가, 1632년 영국으로 건너가 찰스 1세의 궁정 화가가 되었다. 초상화 분야에서 그는 과거 티치아노에 버금가는 명성을 떨쳤다. 그 결과 영국 화단은 물론, 17세기 유럽 바로크 미술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대표적인 화가 중 한 사람이 되었다. 반 다이크가 ‘테오도시우스의 성당 출입을 막는 암브로시우스’(1619~1620년)라는 그림을 그리게 된 계기는 같은 제목의 그림을 몇 해 전(1617~1618년)에 스승이 그리는 것을 보며 도와준 적이 있었다. 당시 스무 살의 반 다이크는 루벤스의 작품들을 모방하는 것으로 공부하고 있었고, 거기서 특징적인 디테일에 주목한 바 있었다. 두 작품은 너무도 비슷해서 디테일을 보지 않으면 똑같은 것으로 착각하기에 십상이다. 테오도시우스와 암브로시오 작품 속에 등장하는 테오도시우스 황제는 콘스탄티누스 다음으로 공경받는 인물이다. 디오클레티아누스 치세 때인 286년부터 약 1세기가 넘는 402년까지 제국의 수도는 밀라노였다. 그러니까 테오도시우스와 암브로시우스 시절의 밀라노는 제국의 힘이 집중되어 있던 곳이었다. 거기에서 그리스도교는 두 파로 나뉘어 부딪히고 있었다. 325년 니케아 공의회를 통해 한 차례 정리했음에도 불구하고, 아리우스파는 계속해서 교회를 흔들고 있었다. 그런 혼돈의 시대에 세례도 안 받고, 성직자 신분도 아닌 암브로시오가 집정관으로 양 진영의 중재자로 나섰다가 양쪽의 만장일치로 주교가 되었다. 주교가 된 후, 그는 아리우스파를 설득하여 정통 그리스도교로 전향하도록 하는 한편 전례와 성직을 공고히 하고, 교회의 사회봉사에 힘썼다. 전쟁 중에 발생한 환자들을 돌보는 데 교회를 적극 개방하여 민중의 지지를 크게 얻었다. 테오도시우스 황제도 그리스도교가 뿌리를 내리는 데 크게 기여했다. 380년, 황제는 니케아 공의회 결정을 옹호하며, 자신이 병환 중에 바치던 니케아 신경을 모든 신자가 바치도록 칙령으로 발표하기까지 했다. 칙령에서 황제는 성부, 성자, 성령의 삼위일체 교리를 믿는 사람들을 ‘보편적 그리스도인’이라며, ‘가톨릭’이라는 말을 했다. ‘가톨릭’이라는 명칭이 정식으로 처음 문서에 등장한 것이다. 그리고 이듬해인 381년, 황제는 제1차 콘스탄티노폴리스 공의회를 소집하여 아리우스파를 이단으로 단죄하고, 그들의 집회를 금했다. 그리고 모두 정통 가톨릭교회로 개종하라는 명을 내렸다. 그는 동물을 제물로 바치는 제사를 엄격히 금하고, 동ㆍ서로마에서 비그리스도교 의식을 모두 금하는 것은 물론, 제국의 전역에서 공적이든 사적이든 모든 형태의 이교 숭배를 불법으로 규정했다. 테살로니카 학살그런 테오도시우스 황제가 암브로시우스 주교와 부딪히는 사건이 발생한 것이다. 사건은 390년 그리스의 테살로니카에서 있었다. 주민 폭동이 일어났는데, 진압하던 로마군 수비대장 하나가 다툼 끝에 살해당하고, 분노한 주민들은 황제와 황후의 초상화까지 내려 흙탕물에 집어 던지며 모욕을 가했다. 밀라노에 있던 테오도시우스는 이 소식을 듣고 격분하여 군대를 보내 무차별적인 대량 학살을 자행했다. 암브로시우스는 주민들의 말을 들어봐야 한다며 황제를 만류했지만, 황제는 이를 무시하고 테살로니카 주민 7000여 명을 모두 죽였다. 암브로시우스는 분개하며, 즉시 황제에게 서한을 보내 테살로니카 학살에 대한 책임을 물어 공식적으로 참회할 것과 당분간 성당 출입을 금했다. 그러나 황제는 여전히 주교의 말을 무시하고 부활절에 측근들을 대동하여 대성당으로 향했다. 이 소식을 들은 암브로시우스는 성당 문 앞까지 나와 들어가려는 황제를 막았다. 단호한 주교의 태도에 황제는 하는 수 없이 발길을 돌려야 했다. 그해 성탄절, 테오도시우스는 다시 성당을 찾았고, 주교는 이번에도 입구에서 황제를 막았다. 진정한 회개와 통회, 보속을 하지 않았다는 이유에서였다. 결국, 황제는 자신의 명령이 잘못되었음을 시인하고 머리에 베옷을 두르고 땅에 엎드려 용서를 청했다. 이에 암브로시우스는 가벼운 보속을 주고, 성당 출입을 허락했다. 황제는 부활절에서 성탄절 전까지 성당 출입을 하지 못하다 성탄절이 되어서야 비로소 주교의 용서를 받고 성체성사에 참여할 수 있었다. 이 사건은 그리스도교가 공인된 지 불과 70여 년 만에 이루어진 것인데, 벌써 인권을 말할 수 있다는 것에 놀라지 않을 수 없다. 역사가들은 주교의 권위가 황제를 누를 만큼 성장했다며 교권과 속권이 부딪힌 첫 번째 사례로 도래할 종교와 권력의 관계를 암시한다고도 하고, 멀리 ‘카노사의 굴욕’을 예견한다고도 평했다. 하지만 이 사건 자체만 놓고 봤을 때, 이런 예단보다는 더 중요한 ‘교회가 국가 폭력에 침묵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처음부터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지를 보여준 사례라고 할 수 있다. 암브로시우스 주교는 주민들의 권리, 그들의 주장에 먼저 귀를 기울여야지 강자의 힘으로 찍어 눌러서는 안 된다고 목소리를 낸 것이다. 테살로니카 주민들의 인권과 생명권을 옹호하고 나선 최초의 행동하는 성직자였다. 이후 교회의 권위가 황제의 권위보다 우위에 설 수 있었던 동력은 바로 여기에 있었다. 비록 더 먼 훗날, 교황이 권력의 중심이 되면서 퇴색한 부분이 없잖아 있었어도, 그 출발은 인간을 우선적으로 선택한 것에 있었다. 작품 속으로 “못 들어갑니다.” 암브로시우스의 서슬 퍼런 목소리가 들릴 것만 같다. 반다이크는 포르치아나 대성당의 현관에서 맞닥트린 두 사람의 긴장감 도는 순간을 포착했다. 암브로시오 교부는 문 앞에서 손으로 황제를 저지하고 있다. 금색의 세련된 장식이 들어간 전례복을 입은 주교가 대성당으로 들어오는 황제를 막아선 것이다. 형태와 구성이 자유롭고 붓질이 넓으며, 톤이 약간 어둡다. 주교의 심리를 묘사하는 듯하다. 인물의 구성과 자세, 귀티 나는 의상의 질감 표현과 대조적으로 시선 처리는 매우 극적이다. 황제는 간절하고 주교는 단호하다. 두 사람의 미묘한 감정 표현이 탁월하다. 반다이크(Van Dyck), “테오도시우스의 출입을 막는 암브로시우스”, 내셔널 갤러리, 런던김혜경(세레나, 동아시아복음화연구원 상임연구원, 피렌체 거주) cpbc2020.06.10
![[제7회 신앙체험수기] 장려상/ 신앙의 거미열차](//cpbc.co.kr/CMS/newspaper/2020/03/rc/775370_1.0_titleImage_1.jpg)
[제7회 신앙체험수기] 장려상/ 신앙의 거미열차최점순 (헬레나, 서울대교구 용산본당) 일러스트=최단비 “나의 주님, 나의 하느님. 대대로 찬미와 영광을 올립니다.”인생의 향기를 가득 실은 기차가 칙칙폭폭 달려간다. 들녘엔 벚꽃이 휘날린다. 내일이 김 토마스 시아버님의 기일에 7남매 형제들이 모이는 날이다. 문경은 선조들이 천주교 박해를 피해 숨어들어 옹기를 구워 팔아 생활을 했던 곳이다. 구교우 집안에서 태어나신 시아버지는 윗대 어른들로부터 신앙을 물려받아 자식들과 함께 사셨다. 손바닥만 한 구리 십자가를 벽에 걸어 놓고 가족들이 기도드리던 것은 조선 시대에 외국인 신부님이 선물로 주셨다고 했다. 문경 가은이 우리나라 3대 석탄광산이라 땅속에 무연탄을 개발하였다. 사람들이 등 따시게 살았었고 외국 수출도 일등공신이었다. 시골 가는 기차에서 그날의 기억으로 걸어 들어갔다. “형님, 저, 기차 탔어요.”큰동서는 내가 온다는 문자를 받고 유모차를 끌고 역전으로 나왔다. 도회지로 흩어졌던 형제들도 모두 도착했다. 장성한 조카와 손녀들이 넙죽넙죽 절을 했다. 고희를 넘긴 자매 같은 다섯 동서가 반가운 재회를 했다. 점심은 팔도 산해진미로 솜씨 발휘를 했다. 큰형님이 가꾸어 놓은 텃밭에서 냉이와 달래를 캐어 된장국도 끓였다. 대가족이 대청마루에 둘러앉아 모처럼 만에 한솥밥을 맛있게 먹고 성당으로 산책하러 나갔다. 옛날에는 성당으로 가는 길이 구불구불한 논둑길이었다. 지금은 고속도로처럼 뚫려 차들이 씽씽 달린다. 성당 마당에는 변함없이 성모상과 제대 위에 예수님의 십자고상을 모셔놓았다. 수녀님이 낯선 손님들 방문에 깜짝 놀라시며 반가워하셨다. 예수님이 잃어버렸던 양을 찾아 어깨에 메고 환하게 웃으시는 성화에서 시아버지의 얼굴이 겹쳤다. 시아버지는 멀고도 가까운 이웃들을 평생 형제자매로 섬기며 사셨다. 고향 산천의 풍경들과 향수가 서려 있는 기차역, 기와집들, 단골 미용실이 말을 걸어왔다.그 옛날 7남매 형제들이 번성하여 후손들이 40~50명은 족히 넘을 것 같다. 당시에 시아버지는 주일이 되면 하던 일손을 멈추었다. 온 가족이 주일 교중 미사를 드리기 위해 성당으로 향했다. 그분은 증조할머니를 바소쿠리에 짊어지고 앞장을 섰다. 뒤를 따라 아들 며느리, 딸 사위, 손자들로 줄이 이어졌다. 비가 오면 찰흙이 검정고무신에 달라붙어 걸음을 뗄 수가 없었고, 풀숲에 숨어 있던 독사에게 물렸던 아픈 기억도 아렸다. 제일 앞자리에 담요를 깔고 증조할머님을 앉혀드렸다. 혹시 자식들이 빠진 사람이 있나 일일이 인원 파악을 하셨다. 이런 우리 집안 분위기를 동네 사람들은 무척 부러워했다. 대가족이 화목하게 사는 비법이 있는지 물으면 “천주님 덕분”이라고 하셨다. 탄광촌에 취직하러 온 뜨내기 사람들을 따뜻하게 받아들여 대부도 서 주고 영세를 시켰다. 젊은 부부들이 너도나도 아기를 안고 업고 몰려드니 성당 안은 콩나물시루가 되었다. 내가 미사 중에 꾸벅꾸벅 졸면 옷자락을 살짝 당겼다. 돌아보면 시아버님이 빙그레 웃으셔서 얼굴이 홍당무가 되기도 했다. 시댁 가족들은 위계질서를 존중하며 신앙생활을 하며 화목하게 살았다. 겸손한 자세로 성실하게 사는 일상이 하느님의 뜻대로 사는 길이라고 배웠다. 이런 문화를 보고 불교 신자 부모 밑에서 성장한 내가 천주교에 대해 좋게 받아들이게 되었다. 마음의 자세도 스펀지에 물이 스미듯이 시나브로 젖어들었다.1980년 12월에 서울로 이사를 왔다. 딸은 다섯 살, 아들은 10개월이었다. 1960~70년대에 남편은 군대에 가서 특수 작전 수행 중 돌이킬 수 없는 큰 사고를 당했다. 전쟁의 기억처럼 시간이 지날수록 어둠 속으로 함몰되었다. 그런 모습을 지켜보던 부모님의 가슴 위에 다듬잇돌을 올려놓은 것처럼 무겁고 아픈 손가락이 되었다. 남편이 20대에 운동신경이 발달해서 국가대표 사이클 선수였던 프라이버시도 허물어졌다. 매일 아픈 다리와 씨름하는 날들이 힘겨워 “죽고 싶다”는 말만 되풀이했다. 보다 못한 가족들이 환경을 좀 바꿔보자고 권유를 했다. 마침 막내 시동생이 중장비 회사에 다녔기에 도움을 받아 서울로 이사할 계획을 세웠다. 시아버지는 우리가 서울로 이사 간다는 말을 듣고 불안해서 괴나리봇짐을 걸머지고 버스에 올라타셨다. 다음날 제일 먼저 경로당에 가서 성당이 어디에 있는지 장소를 알아 오셨다. “새 아가, 새 아가, 신앙생활을 열심히 해라. 저기, 산꼭대기에 성당이 하나 있다고 한다. 아기들 데리고 꼭 찾아가거라. 주님께서 반드시 너희 앞날에 축복을 주실 것이다. 내 말 잘 알아들었지?” 당부하셨다. 긴 겨울이 꼬리를 감추고 봄바람이 훈훈하게 불었다. 아들은 업고 딸을 걸려서 산꼭대기에서 찾은 성당은 무덤들이 즐비했다. 삶과 죽음이 공존하는 언덕 밑에 71위 무덤에 묘비가 새겨져 있었다. 영어로 출생지, 나이, 이름, 사망한 날짜가 적혀 있었다. 풍선처럼 부푼 내 기대는 허망하게 무너졌다. 봄비가 부슬부슬 내리니 낡은 성당 천장에서 빗물이 뚝뚝 떨어졌다. 한참 후에 신자들에게 들은 이야기는 한국 천주교회 초석을 놓은 프랑스 선교사들의 묘지였다. 평생 한국인들의 영혼 구령을 위해 살다가 돌아가신 후에 이곳에 묻혔다고 했다. 그때부터 나는 선교사들의 일생을 곰곰이 마음속에 되새김질했다. 만약에, 어디엔가 천국이 있다면 이곳이 아닐까 싶었다. 내가 시골 출신이라 서울 생활에 익숙하지 않았다. 이웃들을 내 마음처럼 믿어주고 받아주었지만, 오히려 순진한 나를 이용만 했다. 어디에도 끼지 못하는 이방인처럼 30대 중반에 세끼 밥을 먹기도 어려운 현실은 아득했다. 자식들의 앞날을 위해 어떻게 살 것인가? 인생에 무엇이 제일 중요한가? 돈을 많이 벌어 부귀영화를 꿈꾸어 볼까? 아니면, 가난하게 살아도 자식들에게 올바른 가치관으로 신앙을 물려 줄 것인가? 긴 장고 끝에 내 발걸음은 선교사들의 무덤으로 향했다. 이국땅에서 평생을 헌신한 삶이 여기서 안식을 누리고 있었다. 무덤 잔디 사이의 잡풀을 뽑아주며 인생에 대해 질문을 드렸다. 인간이 유한한 존재라는 것을 생각하니 자기중심적인 욕망들은 떨어졌다. 내가 선택할 수 있는 우선순위는 첫째 자식들을 위해 초·중·고등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이사나, 주민등록도 옮기지 않기로 했다. 둘째 아파트 평수를 늘리기 위해 부평초처럼 떠돌지 않기로 했다. 나는 성경 창세기를 공부하는 중이었다. 아브라함의 종이 이사악의 신부를 데려오는 과정을 통해 하느님을 신뢰하는 절대적인 믿음을 느꼈다. 내 가족의 꿈을 실현해 주실 수 있는 주님을 믿고 그곳을 바라보며 달동네에 눌러살았다.서울에는 박해하던 친정엄마도 없고, 남편도 서서히 모르핀에서 빠져나왔다. 직장에서 자주 이직을 하였으나 들어오는 수입으로 입에 풀칠은 했다. 토요일에는 아이들과 손을 잡고 어린이 미사를 드리며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결혼할 때 관면 혼배를 했지만, 신앙에 대한 교리는 잘 몰랐다. 딸은 시골에서 유아 영세를 시켰고, 아들은 내가 교리를 받고 영세할 때에 나란히 유아세례를 받았다. 내 생에 이런 날이 다 있다니, 혹시 꿈은 아닌지 볼을 꼬집어보기도 했다. 주일학교 어린이 미사에 몇 년 동안 다니다가 딸과 아들이 첫영성체를 했다. 그 날의 의젓한 모습은 온 세상을 다 얻은 듯이 기뻤다. “주님, 감사합니다.” 하루에도 수백 번 감사노래를 불렀다. 내 믿음은 봄볕을 받은 새싹처럼 무럭무럭 자라고 미래에 대한 희망으로 가득 찼다. 매일 새벽 미사 드리며 성체를 모실 수 있었고 복음 말씀도 가슴에 새겼다. 남들 보기에 우리 사는 형편이 기쁘거나 즐거울 조건을 하나도 갖추지 않았는데도 말이다. 어느새 현실에 대한 두려움이 사라지고 아버지의 품은 항상 따사롭고 든든했다. 내가 선천적으로 단순, 순박해서 주님께서 지혜와 용기를 주셨다고 생각되었다. 달동네에 말뚝을 깊게 박고 어린아이처럼 현실적인 문제를 모두 주님께 의탁 드렸다. 이런 선택이 내 인생의 황금기를 맞이하고 있었다. 하늘과 가까운 판자촌에는 놀이터가 없었지만, 우리 아이들에게는 넓은 성당 마당이 있었고 주일학교 친구도 많이 생겼다. 딸과 아들이 무럭무럭 성장해서 3, 4학년에 올라갔다. 나는 감사한 마음으로 주일학교 자모회 봉사활동, 구역장, 군종후원회 지회장, 레지오 마리애에 입단하고 성령 세미나를 몇 번 받은 후에는 변화되었다. 특히 지인의 추천으로 성 프란치스코의 회개하는 삶과 영성적인 면에 감동받았다. 성인의 발자취를 따라 3회원으로 입회를 했다. 양성교육을 받고 1년 후에 유기 서약을 받게 되니 수도자가 된 기분이었다. 세속에 살면서 ‘복음에서 삶으로, 삶에서 복음으로’ 여정으로 매일 시간 전례를 바치고 프란치스칸의 정체성을 확립하게 되었다. 산비탈 미끄러운 골목길에 꼬마들이 연탄재로 툭툭 공차기를 했다. 이웃 사람들이 누구네 집 밥그릇 숟가락이 몇 개인지 훤하게 알았다. 대문을 열어놓아도 도둑이 가져갈 것이 없었다. “주님, 당신은 제가 가족을 사랑하는 것보다 더 우리 가족을 사랑하시고, 제가 우리 형편을 아는 것보다 더 잘 알고 계시지요? 아이들이 바르게 성장할 수 있도록 축복해주십시오”라는 한 가지 청원만 드렸다. 배운 것도 가진 것도 없는 내 처지만, 부모님에게 물려받은 건강한 몸이 큰 재산이었다. “주님, 제 노동력을 봉헌합니다. 받아 주십시오.” 매일 제대 청소와 제의방 성물들을 닦고 주일학교 교사들에게 밥을 해주었다. 엄마가 성당에서 일하는 동안 딸, 아들을 넓은 마당에 풀어놓았다. 또래 친구들과 성직자 묘지 봉분 사이로 숨바꼭질하며 놀았다. 간식이란 말은 모르기 때문에 배가 고프면 밥 달라고 달려왔다. 아침에 준비해 간 전기밥솥을 꽂아 놓고 점심, 저녁을 먹이는 동안 3학년에 올라가서 아들이 첫영성체를 한 후에 복사를 섰다. 긴 복사 옷을 입고 아들이 미소를 지으며 신부님 뒤를 촐랑촐랑 따랐다. 제대 뒤에 앉아 양손을 모으고 바들바들 떨었다. 중3 때까지 복사를 서다가 졸업을 했다. 친구 20명과 한국순교복자성직수도회 예신학교에 입학을 했다. 예신 고3에 올라갔을 때에는 친구들은 모두 떠나고 아들 혼자 남았다. 그리고 성당 전례부에서 고등학교 졸업 때까지 봉사했다. 고슴도치 엄마는 자식이 복사 서는 모습만 보아도 가슴이 벅차올랐다. 내가 40대에 부인병인 종양이 생겨서 종합병원에서 큰 수술 후에 퇴원했다. 아침까지 온몸에 약 기운이 퍼져 비몽사몽 했다. 어디선가 은은하게 들려오는 소리, 아들이 새벽 미사에 읽을 성경 말씀을 연습하는 중이었다. 내가 평소에도 가끔 들었지만, 수술용 마취에 취해 필름이 붙었다가 끊겼다가 했다. 예수님께서 고향 마을 회당에서 두루마리를 펴시고 읽으셨던 대목이다. 이사야 예언서 61장 1절 “주님의 영이 내 위에 내리셨다. 주님께서 나를 보내시어 가난한 이들에게 해방을 선포하며 눈먼 이들을 다시 보게 하고 억압받는 이들에게 해방을 시켜 내보내며 주님의 은혜로운 해를 선포하게 하셨다.” 아들이 이 성경 구절을 읽는 순간 큐피드의 화살처럼 가슴에 꽂혔다. 수십만 개의 은하수가 한꺼번에 머리 위로 쏟아지고 귀가 뻥 뚫렸다. 이 소리가 어디에서 들려오는가? 내가 죽지 않고 살아났단 말인가? 청량하게 낯익은 목소리는 아들 방에서 또박또박 들렸다. 배에 수술한 부위가 실밥에 당겨 일어서지도 못하고 무릎을 질질 끌며 배밀이로 방문에 귀를 대고 들었다. “주님, 이 복음 말씀을 평생 들을 수 있도록 자비를 베푸소서. 저는 오늘 이 말씀이 제게 이루어지시길 믿습니다.” 얼마 후에 아들은 예신학교 3년을 졸업하고 가톨릭대학교 신학대학에 들어갔다.“사랑하는 아들을, 당신께 봉헌 드립니다.” 아들이 신학교에 입학하는 날이다. 친구와 어깨동무하고 교리실로 들어갔다. 나는 성모상 앞에서 입학 시간을 기다리며 마음을 졸이던 중이었다. 그때 아들 친구 한 명이 달려와서 안절부절못했다. 내가 “무슨 일이야, 어서 말해봐!” “어머니, 큰일 났어요” 했다. 불길한 예감이 적중하듯이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여러 명이 학사님 축하 헹가래를 하다가 땅에 떨어졌다”고 했다. 예수님이 가시관을 쓰시고 피를 흘리시던 상황을 재현해놓은 듯, 흰 와이셔츠와 검은 양복 위로 장미꽃처럼 검붉은 피가 줄줄 흘렀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해맑게 웃었건만 얼굴이 백지장같이 엄마 발 앞에 푹 쓰러졌다. 나는 고장 난 형광등처럼 번뜩번뜩 떠오르는 화살기도로, “주님, 이 고통을 당신께 의탁합니다.” 김OO 베드로 형제님의 도움으로 차에 태워 가까운 병원으로 달려갔다. 찢어진 머리를 몇십 바늘을 꿰매고 아랍인 양머리처럼 붕대를 칭칭 감고 입학식장에 10시까지 도착했다. 입학식을 마치고 다시 구급차에 실려 병원으로 갔다. “뇌 손상을 지켜보자”는 의사 선생님의 말씀, 수많은 검사는 피를 말리며 죽음의 문턱까지 들락거렸다.‘복은 홀로 오고 고통은 쌍으로 온다’는 말처럼, 남편이 스트레스를 견디지 못해 병이 재발했다. 현실적인 어려움과 육신을 갉아먹는 통증에 희망을 잃고 온종일 벽만 바라보았다. 나는 일상을 접고 성당에 홀로 앉아 주님의 뜻이 어디에 있을까? 그이는 결혼할 당시에 성격도 좋고 누구보다 자상하고 따뜻한 사람이었다. 보훈처에서 상이군인들에게 지원해주는 혜택으로는 부족했다. 수시로 후유증에 시달리며 전쟁 같은 날이 이어졌다. 온몸에 박힌 파편들이 몸 구석구석을 돌아다니며 힘들게 했다. 수족을 절단해야 하는 위기에 내몰려 모르핀을 맞지 않으면 견디기가 힘들었다. 아, 내 생에 죄가 있다면 친정엄마의 반대에도 천주교 신자인 남편과 결혼을 했다는 것이다. 서울 올라와서 예수님을 믿고 사는 것이 행복한데도 친정엄마를 뵐 면목이 없어 결혼한 후 10년 동안 발길을 끊었다. 비단이 씨실과 날실이 직조되듯이, 삶의 여정도 때로는 명암이 엇갈리고 고통과 기쁨이 직조되어 인격적으로 성장하는 것 같다. 거미열차 앞에 가족들이 모였다. 고향 방문 기념으로 조카가 ‘문경 석탄박물관’ 입장표를 사주었다. 폐광을 개발하여 관광객을 유치하기 위해 거미열차를 운영하며 탄광 굴속으로 안내했다. 표를 받아 순서를 기다리는 동안 나는 추억문을 열었다. 45년 전에 시아버지는 약혼한 나를 성당으로 데리고 갔다. 대자, 대모를 세우고 남편과 관면혼배를 시키셨다. 주례 신부님이 신랑 신부에게 혼인 서약과 사랑의 증표로 반지를 교환하고 혼배 미사를 올렸다. 1년 후에 딸이 태어났고 3년 후에 아들이 태어났다. 시아버지는 손자 이름을 밝을 명(明)으로 짓고 해와 달처럼 비추라는 뜻이라고 하셨다. 내게는 천주교 미사 전례가 낯설었다. 시집살이하는 동안 신앙과 믿음이 무엇인지도 모르면서 가족들을 따라 성당에 다녔다. 어릴 적 친정엄마에게 예수 믿는다고 혹독한 박해를 받았던 기억이 옹이처럼 박혀 있었다. 신앙이란 무엇일까? 지난 역사가 말해준다. 박해를 받을수록 신자들은 목숨을 바쳐 순교의 꽃을 피우며 후손들에게 물려주었다. 지금도 유년시절에 즐겁게 예배당에 다녔던 그리움을 간직하고 산다. 친정 동네 언덕배기에 작은 예배당이 하나 있었다. 동네 사람들이 모두 예배당 신자들이었다. 성탄절에 또래 친구들을 따라가면 돌사탕과 라면땅을 주었다. 그러나 큰오빠가 결혼한 후 집안 분위기가 완전히 살벌하게 바뀌었다. 도회지에서 선생님을 하던 올케는 열렬한 개신교 신자였다. 부모님이 물려주신 문전옥답을 한 떼기씩 팔아 십일조와 감사 헌금을 내면서부터 탄탄했던 살림살이가 거덜이 났다. 그 후에 올케는 큰오빠와 대구로 이사하였고 시부모님 집에는 오지도 않고 소식이 끊겼다. 그때부터 친정엄마는 가족 중에 누구라도 예수를 믿는다는 말만 들어도 입에 거품을 물고 경기를 했다. “이 때려죽일 년, 너, 예배당에 또 갈거야. 대답해.” 내게는 친정엄마가 가혹한 박해자였다. 나이가 어려도 예수님을 믿으면 평화가 온다는 것을 조금은 알고 있었다. 서슬 퍼렇게 다그쳐도 나는 “예수님을 믿겠다”는 말을 했다. 대답이 땅에 떨어지기 전에 날벼락을 쳤다. 양동이의 얼음물을 머리에 덮어씌우고 밖으로 쫓아냈다. 딸이라도 예수 믿는다고 하면 절대로 용서할 수 없었다. 다음날 성경과 찬송가를 소죽 끓이는 아궁이에 불살라 버렸다. 엄마의 오랜 박해는 시간이 갈수록 모질어졌다. 동지섣달 문밖에서 추위에 떨다가 손발이 동상에 걸리면 콩비지로 부기를 뺐다. 모녀는 갈등의 골이 나날이 깊어졌다. 우연히 지인의 소개로 남편을 알게 되어 사귀다가 결혼하기로 했다. 딸이 예수 귀신에게 홀렸다며 무당을 불렀다. 무당은 바가지를 대문 앞에 엎어놓고 예수 귀신 쫓아낸다면서 “예수 귀신 썩 물러가라”고 말을 하며 칼을 던져서 꽂아 놓았다. 거미열차는 벌집같이 구멍이 숭숭 뚫린 내 마음을 끌고 캄캄한 터널로 향했다. 하루에도 수십 번씩 굴속을 들락거리며 관광객들을 과거와 현재가 교차하는 지점으로 데려다 주었다. 그 시절 광부들의 생활상을 재현해놓은 얼굴에 탄가루로 분칠한 모습이 펼쳐졌다. 갱 바닥에 앉아 양은 도시락으로 허기를 달래며 석탄을 캐내는 과정은 코끝이 쨍했다. 비좁은 양쪽 벽에는 모형 왕거미들이 까만 눈알을 빤짝거리며 꼼지락, 꼼지락 “투 둑, 투 둑” 소름이 확 돋았다. 광부들의 생활상을 해설하는 방송은 흐릿하게 들리고 숨이 막혀 죽을 것 같은 두려움이 현실처럼 느껴졌다. 어린 시절 엄마의 박해가 악몽처럼 되살아났다. 굴곡진 내 인생을 반영하듯이 두려움과 공포가 엄습했다. “주님, 살려주세요.” 발버둥 칠수록 깊은 수렁으로 빨려들었다. 순간, 어디선가 빛의 속도로 내 몸을 포근하게 감싸주었다. 남편의 홀벌이로는 네 식구 먹고살기도 빠듯했다. 학원을 보내는 일은 꿈도 꾸지 못했다. 대신에 아이들이 성장하는 데 좋은 환경을 제공하는 안내자 역할을 하기로 하고 인격 형성에 도움이 될 신앙교육을 골고루 접할 기회를 주었다. 주보에 나오는 어린이 피정 프로그램을 잘 활용해서 여름 방학, 겨울 방학에 몇 군데를 신청했다. 비용은 적게 들이고 교육의 효과는 최고로 얻을 수 있었다. 결국은 우리 아이들의 인성교육은 교리 선생님들이나, 피정을 지도하시는 선생님 덕분이었다. 그분들의 따뜻한 관심과 사랑에 힘입어 구김살 없이 정서적으로 잘 자랄 수 있었다. 주님의 선하신 은총으로 아이들은 도시 환경에 적응을 잘했다. 하지만 남편이 수시로 발병을 하니 회사에 오랫동안 근무를 못 하고 자주 이직을 하게 되어 안정적인 생활을 못 했다. 내가 집에서 할 수 있는 부업, 인형 눈을 붙이기, 전자부품 끼우기, 시장에 물건 나르기 등등 일거리를 찾아서 밤낮으로 열심히 했다. 억척 똑순이로 살다 보니 사람이 죽으라는 법은 없었다. 쨍하고 해 뜨는 날이 찾아왔다. 1980년대 성령 세미나가 유행처럼 번졌다. 지인의 권유로 남편과 나는 OO대학 마리아홀에서 아이린 조지 여사의 세미나에 참석했다. 미사 중에 신자들의 뜨거운 환성이 터져 나왔다. 남편도 온몸에 신비한 변화가 느껴진다고 했다. 그날 성령의 은혜로 영적, 육적 치유를 받았고 세상을 다 얻은 듯이 만사형통이 될 듯했다. 그러나 사람의 욕심대로 두 마리 토끼는 잡을 수 없었다. 그날 이후로 남편의 말과 행동이 180도로 돌변했다. 불같은 열정으로 성당에 봉사와 직장 동료, 친척들, 지인들 아기 돌잔치까지 뛰어다니며 챙겼다. 특히 어려운 직원들이 부모상을 당하면 월급봉투를 통째로 불우이웃돕기라며 기부를 했다. 남편은 새 생명을 다시 얻었다는 감사함에 물불을 가리지 않고 솔선수범했다. 그러나 월급 수입이 1000원이면 지출은 3000원을 쓰고도 모자랐다. 과도한 씀씀이 때문에 가계에 주름이 생기고 부부 갈등의 원인이 되었다. “오늘 걱정은 오늘만 하고, 내일 걱정은 내일 하라는 말씀을 읽어보지 못했느냐?” 성경을 내 얼굴에 들이밀었다. 나는 아무리 좋은 일이라도 형편에 맞게 정도껏 해야지. 그이는 내 말을 귓전으로 흘리고 아낌없이 주는 나무처럼 퍼주고 쏟아주며 수십 년을 살았다. 우리 집을 덮었던 먹구름이 서서히 걷혔다. 모든 일이 순조롭게 돌아간다는 안도의 숨을 쉬는 중이었다. 여름 방학을 앞두고 아들이 신학교 1, 2학기에 연극을 했다. 열광하는 관객들 앞에서 무대 뒤 난간으로 떨어져서 허벅지가 부러졌다. 깁스한 다리에 목발을 짚고 신학생 세 명의 부축을 받으며 대문을 열었다. 이를 어쩌나, 주님 이를 어쩝니까? 방학 동안 엄마 어깨에 부축하고 병원을 오가며 물리 치료를 다녔다. 학교로 복학을 한 후에 부러진 다리가 덜 낳은 상태로 군에 입대했다. 자식이 고된 훈련을 어떻게 견디는지 기도만이 숨 쉴 수 있었다. 마침 내가 군종후원회 지회장 10년 만에 군종교구장 정명조 주교님을 모시고 전방에 위문 방문을 갔다. 대대장 뒤에 까까머리에 군복을 입고 씩씩하게 걸어왔다. 낯익은 모습을 보니 가슴이 벌렁벌렁 뛰었다. 먼저 엄마를 발견한 아들이 입은 귀에 걸고 눈을 찡긋했다. “주님, 당신은 저보다 아들을 더 사랑하시고 잘 돌보십니다. 감사합니다.” 군 복무를 마치고 자랑스럽게 제대했다. 주님의 은혜로 복학한 후 4, 5학년에 독서직, 시종직, 부제품을 받았다. 거룩한 부르심을 받은 아들이 주님의 크신 자비에 힘입어 9년 만에 잠실 실내체육관에서 사제품을 받기 위한 준비를 했다. 동기 사제 26명과 주님의 뜻대로 자신을 온전히 봉헌하기 위해 땅에 엎드려 있다. 추기경님과 주교님들, 수백 명 선배 신부님들, 새 신부님들, 부모ㆍ형제 지인들이 지켜보는 앞에서 엄숙한 사제 서품식을 했다. 그동안 지도 교수님들과 본당 신자들, 지인들, 학교 선후배 선생님들의 한결같은 사랑과 기도 덕분이었다. 나는 신부 부모님 석에 앉아 장엄한 광경을 바라보며 주님, 감사합니다. 저는 당신의 부르심을 받기 전에는 온갖 허물로 누벼놓은 부끄러운 삶을 살았음을 고백하고 회개를 했다. 주님께서는 제 남은 인생을 더 겸손하고 낮은 자세로 기도하라고 큰 선물을 주셨음을 감사를 드렸다. 아들 신부가 강남에 있는 성당에 첫 발령을 받았다. 출가한 몸이라 부모가 아무리 보고 싶어도 얼굴 한번 볼 기회가 없었다. 엄마 손으로 따끈한 밥 한 끼를 해 먹이지 못하는 마음은 늘 안타까웠다. 어느 주일 날, 몰래 그 성당에 찾아가서 기둥 뒤에 숨어서 미사를 드렸다. 치마 입은 남자가 되어 수단 자락을 휘날리며 뜨거운 열정으로 강론하는 모습에 꽂혔다. 내 삶 속에 밀려드는 고통이나 슬픔, 기쁨이나 행복을 담담하게 받아들이기가 버거웠다. 미사를 드리다가 갑자기 몸과 마음이 사시나무 떨리더니 깊은 심연 속으로 몰입되었다. 성모님이 사촌 엘리사벳을 방문한 후에 불렀던 마니피캇이 은은하게 성전 안을 가득히 채웠다. 한 참 후에 정신을 차렸다. 아들 신부가 미사 중에 기둥 뒤에 숨어 있는 엄마를 알아보았다. 신자들과 인사를 나눈 뒤에 점심을 사주었다. 밥맛이 꿀맛 같았던 기억은 언제나 생생하다. 보좌 신부 2년을 마치고 소임을 받고 새 부임지로 갔다. 사제 아들을 둔 엄마의 새가슴은 살얼음판을 걷는 심정으로 자나 깨나 조마조마했다. 시집살이 어디 다른 데가 있을까? 새벽에 전화벨이 길게 울렸다. 허둥지둥 달려가서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네, 신부님 어머님이세요? 네, 여기 OO성당인데요. OOO 신부님이 장례 미사를 드리다가 쓰러졌어요. 전화기를 손에 든 채 지진에 직격탄을 맞은 듯이 혼줄을 놓아버렸다. “주님이시여, 주님이시여, 제가 무엇을, 더 어디까지 해야 합니까?” 남편이 “여보, 누구 전화야?” “잘못 걸린 전화에요.” 남편을 평소처럼 출근을 시켰다. 사제는 누구이며 무엇을 위해 사는가? 주님의 부르심을 받아 영혼 구령을 위해 사람들을 섬기라는 사제직이다. 주님, 이 고통을 당신께 봉헌합니다. 저는 주님을 의심하지 않겠습니다. 제 뜻대로 하지 마시고 당신의 뜻대로 하소서. 이번에도 주님의 뜻이 있을 거야. 미카엘, 라파엘, 가브리엘 천사들을 부르며 어둠을 몰아냈다. 모심기하던 아낙네같이 부스스한 몰골로 병원으로 달려갔다. 병실 문에 걸린 팻말에는 절대 금식, 절대 안정이라고 적혀있었다. 문을 살짝 열었다. 아들은 고열에 시달리다가 실눈을 떴다. “괜찮니? 엄마다. 엄마. 모두가 내 기도가 부족한 탓이다.” 아기처럼 엄마 가슴에 얼굴을 파묻었다. 거듭되는 시련 앞에 사제 엄마의 수천, 수만 번의 주모경은 골수를 녹여내는 기도로도 역부족이었다. 그날 이후 사제, 성직자들은 많은 신자의 기도로 살아간다는 말이 뼛속까지 느껴졌다. 벌써, 사제품을 받은 햇수가 15년 차를 넘기고 보니 초심을 잃지 않도록 간절한 엄마의 기도는 다시 첩첩산중으로 향한다. 어느 해인가. 친정엄마가 85세가 되었을 때 치매로 서울에서 치료를 받게 되었다. 평생 불교 신자였던 엄마가 천주교 교리를 받아들이는 것은 무리였다. 그러나 하느님께서 내 기도에 응답하셨다는 확신이 섰기에 이 기회를 놓치면 평생 후회할 것 같았다. 서울로 모시고 온 다음 날부터 체중 85㎏인 엄마를 껴안고 모녀는 예비자 교리를 받기 위해 일 년 동안 행복한 동행을 했다. 세례받기 일주일 앞두고 주모경, 영광송, 세례명 ‘마리아’ 귀에 딱지가 생기도록 외워도 소귀에 경 읽기였다. 본당 보좌 신부님이 아무리 가르쳐드려도 진전이 없었다. 어머님의 신앙 교리를 잘 시켜드리라는 말씀을 하시고 세례를 주셨다. 천지개벽이 일어났다. 매일 밤, 잠꼬대는 “제 엄마를 구원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제 남편도 구원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머리에 꽃을 꽂은 여자처럼 벽에 걸린 십자가만 보아도 기뻐서 눈물이 쏟아졌다. 나를 그토록 박해했던 엄마가 세례를 받으시고 예수님의 성체를 모시다니…. 주님, 당신은 정말 사랑이시고 자비로우십니다. 모녀의 50년간 쌓인 앙금을 털어내는 회개는 가슴에 박혔던 옹이도 쏙 빠졌다. 이제 주님의 자녀로 새롭게 태어난 엄마와 마주 앉아 옛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가슴이 먹먹했다. 첫영성체를 입에 받아 모시고 엄마가 처음 한 말은 “예수님이, 부처님보다 힘이 더 센 것 같다”고 했다. 몇 년 후에 마리아 세례명을 달고 편안한 모습으로 영원한 안식에 들었다. 지난 수십 년을 돌이켜보니 나를 힘들게 했던 시간들은 모두가 축복의 징검다리가 되었다. 혹독한 신앙의 박해를 통해 기도드리며 예수님께 한 발씩 가까이 갈 수 있었다. 엄마와 남편의 영혼 구원을 위해 바친 40년간 기도와 미사, 성사, 성체조배는 영성적으로 성장시켰다. 그 시간들이 밑거름이 되어 주님과의 사랑의 거리를 한 뼘 간격으로 좁힐 수 있었다. 돈이 많은 것이 행복의 조건은 아닌 것 같다. 나의 주님과 동행하며 사는 삶이 진정한 행복이 아닐까 싶다. 자식 이기는 부모가 없다는 말처럼, 내 딸이 엄마의 반대에도 불교 신자인 사위를 만나 결혼을 했다. 사위 사랑은 장모님이라 했던가? 결혼을 반대했던 마음이 무색할 정도로 겪을수록 정감이 가고 어디다 내놓아도 부족함이 없는 속이 꽉 찬 사람이었다. 그리고 연년생 외손주들이 삼남매가 태어났다. 나는 맞벌이하는 딸을 대신해서 사랑스러운 손주들을 키웠다. 그 옛날 시어머니가 손주들을 유아 영세시키는 모습이 떠올랐다. 손자들에게 유아 영세와 첫영성체 시키는 일은 내 몫이었다. 불교 신자인 사돈댁의 구원을 위해 몇 년 동안 기도로 마음의 준비를 했다. 사돈 내외분을 찾아뵙고 손주들에게 유아 세례를 시킬 수 있도록 동의를 구했다. 손주 3명을 한 번에 유아 세례를 시켰던 벅찬 감동은 세월이 흘러도 잊을 수 없다. 몇 년 동안 손주들을 데리고 토요일 저녁 주일 미사를 드렸다. 큰 손녀딸이 3학년에 올라가서 첫영성체를 한 후에 복사를 섰다. 복사 옷을 입고 머리 꽁지를 망으로 씌우니 앙증맞다. 신부님 뒤를 따라 제대 위에 올라갔다. 미사 중에 야무지게 종을 땡, 땡 치는 모습을 보고 눈물이 글썽거렸다. 오래전에 아들이 복사 섰던 그 날의 설렘으로 가슴이 두근두근했다. 어쩌면 이리도 사랑스러운지 마음이 뿌듯했다. 아이들 3명을 태우고 폭설을 뚫고 달리는 도로 빙판은 차바퀴가 찌직, 헛돌았다. 손녀가 복사 시간에 맞추어 갈 수 있도록 도와주십시오. 브레이크와 액셀러레이터를 번갈아 밟으며 힘차게 달려갔다. 거미열차는 탄광 지하 수백㎞를 돌아 나왔다. 시아버지가 손수 지으신 고택에는 서까래가 나팔을 불고 뒤란에는 파란 이끼가 영토를 넓혔다. 사랑채 방문을 여니 어두침침한 방에 흑백사진이 벽에 걸렸다. 추억을 고스란히 품고 있는 장독대와 텃밭에는 봄볕을 받아 파랗게 쏙쏙 올라왔다. 마당 한쪽 우물을 덮은 뚜껑 위에는 두레박이 주인처럼 덩그러니 입을 벌리고 있다. 목을 쭉 빼고 우물 속을 들여다보니 파란 하늘이 통째로 들어앉았다. 시아버지의 휘하에 다섯 동서가 손톱이 빠지도록 밭에 돌을 골라냈던 아린 기억들이 찰랑찰랑 속삭였다. 신앙의 거미열차는 객실을 수없이 늘리며 먼 길을 달려왔다. 주님의 섭리 안에 증조할아버지부터, 시아버지와 7남매의 자식들, 아들 손주들까지 5세대를 이어왔다. 김 토마스 시아버지가 신앙의 뿌리를 튼튼하게 심어 주지 않았다면, 내게 오늘 같은 영광스러운 일이 어찌 있었을까? 대대 물려주신 녹슨 구리 십자가는 하느님이 동행해 주셨다는 증거가 되었다. 바통을 물려받은 자식들도 미래를 향해 칙칙폭폭 힘차게 달릴 것이다. “나의 주님, 나의 하느님, 만세 대대로 찬미와 영광 올립니다.” 아멘최점순 헬레나(서울대교구 용산본당) cpbc2020.03.18

부활시기, 마음에 꽃피울 ‘시의 향연’화살시편/ 김형영 지음 / 문학과 지성사 / 9000원 외 시(詩)는 세상을 그리는 글이다. 가톨릭 신자 시인들이 그려낸 글은 곧 주님이 창조한 피조물을 새롭게 예찬한 작품이 되겠다. 봄과 함께 찾아온 부활시기, 이들의 작품들을 만나보자.김형영(스테파노) 시인에게 창조의 원동력은 성경적 상상력과 직관의 힘에 있다. 그는 성경 구절 표현과 자신의 삶을 자유로이 조화시켜 작품으로 승화시켜왔다. 한국가톨릭문인회장을 지내기도 한 그는 사도행전에 표현된 스테파노의 순교를 읽고, ‘하늘을 우러러 님을 보았기에 / 자신을 괴롭히는 돌팔매를 / 온몸으로 받아낸 순교의 꽃이여’라며 노래했다. 그는 ‘화살시편’이라 이름 붙인 30여 편을 비롯해 작품 70여 편으로 삶과 신앙의 접점을 찾고 있다.한참 고향의 추억을 반추하던 차갑부(토마스 아퀴나스) 시인은 문득 어머니에게 한 마디 부르짖는다. ‘서울 가려는 막내아들 손을 잡고 / 언제 또 올 거냐고 물으시던 어머니 / 당신은 언제 또 올 것인지 한 말씀만 하소서’라고.2011년 등단한 시인의 문체는 섬세하다. 프라하의 밤을 올려다보며 그곳의 “성당 석탑이 하늘을 찔러 성스러운 별을 만들고 있다”고 읊고, 달리듯 흘러가는 시간을 보며 “세월은 물고기를 미끼로 사람을 낚고 있다”고 적었다. 교육학자로서 30여 년 한결같이 대학 강단에 서왔던 시인은 올해 정년을 맞았다. 그는 고향과 자연, 신앙으로 쓴 작품들로 자신의 생애를 그려내고 있다.“아, 내 안에 노래가 있었구나!” 2001년 가톨릭평화신문 신춘문예를 통해 등단한 정주연(베로니카) 시인은 어느 날 자신의 깊은 내면에 세상을 향한 아름다운 시상이 자리하고 있음을 깨닫는다. 그는 자신의 시상을 눈물과 한숨이 변해 터져 나온 ‘나의 기쁜 소리’라고 했다.시인은 “아, 봄은 가벼워지는 것”이란다. 촉촉이 젖은 봄 씨앗의 풍경 다음, 만물이 생의 절정에 이른 여름을 지나, 차창을 때리는 낙엽의 가을에 폭신한 눈 이불 덮은 겨울에 이르기까지, 사계절이 시인의 손끝에서 더욱 생명력을 발휘하고 있다. 이정훈 기자 sjunder@cpbc.co.kr cpbc2019.05.02

주님 부활은 우리도 부활할 수 있다는 희망의 근거주님 부활 대축일 / 예수님께서는 실제로 부활하셨나 빈 무덤이 예수 그리스도께서 부활했다는 직접적인 증거는 아니더라도 부활의 중요한 징표임은 분명하다. 이스라엘 예루살렘의 주님 무덤 성당. 가톨릭평화신문 DB “주님, 주님은 누구십니까?”(사도 9,5) 바오로 사도가 회심 전 그리스도인을 박해하기 위해 다마스쿠스로 가던 길에 부활하신 예수님을 목격하고 한 질문이다. 예수님의 부활은 그리스도교 신앙의 근본 토대이다. 주님의 부활은 신앙으로 완전히 이해할 수 있고, 더욱이 바오로 사도처럼 부활하신 주님을 직접 보았던 사람들이 역사적으로 증언하고 있다. 주님 부활 대축일을 맞아 예수님께서 실제로 부활하셨는가? 라는 물음에 대한 성경의 답과 부활 시기 전례에 대해 정리했다.주님의 부활은 빈 무덤과 목격 증인들의 증언에 기초한다. ▨ 빈 무덤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리스도를 보았던 여인들이 “주간 첫날 매우 이른 아침”(마르 16,2) 예수님께서 묻히신 무덤에 갔다가 무덤이 비어 있는 것을 목격했다. 빈 무덤이 예수 그리스도께서 부활했다는 직접적인 증거는 아니더라도 부활의 중요한 징표임은 분명하다. 그래서 네 복음서는 주님 부활의 첫 표징으로 ‘빈 무덤’을 소개한다. 네 복음서는 주님께서 실제로 십자가 위에서 돌아가셨고, 사도들뿐 아니라 대사제 가야파와 많은 유다인뿐 아니라 로마 총독 빌라도와 로마 군인들조차 예수님의 무덤이 어디에 있는지 분명히 알고 있었다고 명시하고 있다. 주님의 무덤은 골고타 근처에 바위를 깎아 만든 아리마태아 출신 요셉의 새 무덤이었다. 그곳은 무덤이 즐비한 채석장으로 예루살렘 성벽 밖에서(히브 13,12) 도성에 가까운(요한 19,20) 성문에 이르는 큰길(마태 27,39; 마르 15,22)에 있었다. 주님의 시신이 안치된 무덤 입구는 큰 돌로 봉인됐고, 성전 경비병들이 지켰다.사실 주님의 부활을 직접 목격한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렇지만 빈 무덤은 여러 사람이 목격했다. 마리아 막달레나와 야고보의 어머니 마리아, 살로메와 베드로 사도를 비롯한 제자들이다. 심지어 예수님을 죽인 주동자들인 수석 사제들과 원로들은 예수님의 시신이 없어졌다는 경비병들의 보고에 ‘제자들이 훔쳐 갔다고 소문을 퍼뜨려라’고 지시한다(마태 28,11-15). 이는 수석 사제들과 원로들마저 무덤이 비었음을 인정한 것이다. ▨ 부활하신 주님의 목격자들 부활하신 주님은 사람들에게 직접 나타났다. 복음서와 사도행전, 코린토 신자들에게 보낸 첫째 서간은 부활하신 주님께서 ‘지상에서’ 40일 동안 사도들에게 여러 번 나타나시어 하느님 나라에 관한 말씀을 하시고, 베드로와 제자들에게 수위권과 사명을 부여하셨으며, 함께 음식을 나누셨다고 증언하고 있다. 마리아 막달레나와 베드로를 비롯한 열두 사도, 엠마오의 제자 등이 부활한 예수를 만났다. 또 바오로 사도는 부활하신 주님께서 한 번에 500명이 넘는 형제들에게 나타났다(1코린 15,6)고 증언하고 있다.부활하신 주님은 시ㆍ공간을 넘어 원하는 곳에, 원하는 때에 나타나셨다. 부활하신 주님께서 시ㆍ공간의 제약을 뛰어넘는다는 것은 부활이 물리적ㆍ역사적 차원을 넘어서는 초월적 사건임을 알려준다. 초월적 사건이란 하느님께서 일으키신 사건으로, 신앙의 신비에 속하는 것이다. 그래서 「가톨릭교회 교리서」는 “빈 무덤이라는 표징과 부활하신 예수님을 사도들이 만났다는 사실로 부활이라는 역사적 사건이 확인되지만, 역사를 초월하고 넘어선다는 면에서 부활은 여전히 신앙의 신비의 핵심에 머물러 있다”(646~647항)고 가르치고 있다. 무엇보다 극적인 것은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이들이 놀라운 영적 변화를 일으켜 “주님께서 부활하셨다”고 모든 이에게 선포한 사실이다. 그 증거는 예수님 부활의 첫 선포자인 베드로 사도의 오순절 설교(사도 2,14-36)에서 확인할 수 있다. 베드로 사도는 시편 16편 9-11절을 인용하면서 다윗의 시신이 남아 있는 무덤은 부활이 일어나지 않았다는 증거이듯, 주님의 빈 무덤은 “예수님을 하느님께서 다시 살리셨고 우리는 모두 그 증인”(사도 2,32)이라고 선언하고 있다. ▨ 부활은 그리스도인의 희망바오로 사도는 주님의 죽음과 부활에 비춰 그리스도인의 죽음과 부활을 이해했다. 그는 주님께서 부활했기에 우리도 부활할 수 있다고 선포했다.(1코린 15,12-13 참조) 그리스도와 그리스도인은 한 몸을 이루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주님의 부활은 우리도 부활할 수 있다는 희망의 근거가 된다.주님의 부활은 그리스도의 재림을 예시한다. 하느님 안에서 완성될 종말에 희망을 거는 그리스도인은 ‘지금 여기’의 삶에 충실한 가운데 종말에 궁극적으로 완성될 하느님 나라에 희망을 둔다. 이 희망은 그리스도인에게 죽는 순간까지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을 실천하도록 이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은 현재의 삶의 자리에서 부활을 사는 것이다. 따라서 부활은 매일 일어나는 사건이다. ▨ 부활 시기가톨릭교회는 주님의 부활을 기념해 주님 부활 대축일 파스카 성야부터 부활의 신비를 완성하는 성령 강림 대축일까지 50일간을 부활 시기로 지낸다. 올해는 4월 12일부터 5월 31일까지다. 교회는 이 시기 부활 팔일 축제와 주님 부활 대축일부터 40일 되는 날에 주님 승천 대축일(지역 교회에 따라서 부활 제7주일에 지내기도 함)을, 그리고 주님께서 부활하신 지 50일이 되는 날에 성령 강림 대축일을 지낸다. 부활 시기 전례의 특징은 ‘알렐루야’를 노래하며 하느님께 감사와 기쁨을 드러내는 데 있다. 사순 시기에 금지했던 ‘대영광송’과 ‘알렐루야’를 다시 노래한다. 사제는 ‘기쁨’과 ‘새로 태어남’을 나타내는 백색 제의를 입는다. 부활하신 주님을 상징하는 부활초는 평일에도 전례를 거행할 때마다 제대 옆에 켜 둔다. 또 부활 시기에는 부활한 그리스도를 찬미하며 부활 삼종기도를 서서 바친다. 한편, 부활 제2주일부터 부활 제7주일까지는 주일 복음과 제1독서의 주제가 일치한다. 제1독서는 사도행전을, 제2독서는 전례력으로 가해인 올해엔 베드로의 첫째 서간을 읽는다. 복음은 요한 복음을 봉독한다. 리길재 기자 teotokos@cpbc.co.kr cpbc2020.04.08
[일치 기도 주간 담화] “그들은 우리에게 각별한 인정을 베풀었다”한국 그리스도교 신앙과 직제 협의회, 2020년 그리스도인 일치 기도 주간 담화문? 평화를 빕니다.매년 1월 18일에서 25일까지는 그리스도인 일치 기도 주간입니다. 이 주간에 온 세상 그리스도인들은 내부의 분열을 극복하고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 되고자 함께 기도합니다. 나아가, 그리스도인의 일치를 통하여 우리는 세상의 많은 아픔을 이겨 나가는 새롭고 평화로운 방법을 터득하기도 합니다. 올해 그리스도인 일치 기도 주간 자료집은 몰타섬과 고조섬에 있는 그리스도 교회들(‘함께하는 몰타 그리스도인들’: Christians Together in Malta)이 마련하였습니다. 사도행전 27장과 28장에 기록된 바오로 사도와 몰타인들의 만남은 우리 모두에게 익숙한 이야기입니다. 몰타인들은 복음의 전래를 경축할 뿐만 아니라, 오늘날 온 세상에 닥친 위기를 극복하고자 사람 사이에 있어야 할 선한 마음과 행동을 찾았습니다. 이 이야기는 불의한 권력에 의해 고소당한 바오로 사도가 수인으로 로마에 압송되면서 시작됩니다. 백인대장과 군사들은 권력과 권위를, 선원들은 기술과 경험을 가졌지만, 자연의 무서운 힘 앞에서 탑승자들은 두려움에 떨 수밖에 없는 상황입니다. 탈출을 모의하는 선원들과 수인들을 그들의 결백과는 무관하게 비상시에 즉결 처형할 계획을 세운 군인들을 통하여 집단들 사이의 불신과 의심이라는 또 다른 위기가 고조됩니다. 그러나 놀랍게도 바오로 사도는 풍랑 속에서 평화의 중심으로 두각을 드러냅니다. 그의 운명이 자신이 섬기는 하느님 손안에 있음을 알고 있는 사도의 격려와 믿음으로 모든 사람이 용기를 얻게 되었고 마침내 목숨도 건질 수 있었습니다. 몰타섬에 도착한 276명은 섬사람들의 각별한 환대를 받습니다. 비가 내리고 추운 날씨 때문에 섬사람들이 피워 놓은 불 가는 혼란과 공포, 위기와 고통에서 살아난 그들에게 특별한 안식처가 됩니다. 섬사람들의 친절과 환대는 그들에게 여정을 이어갈 힘을 채워 줍니다. 복음을 전하는 여정을 담은 사도행전의 이 기록은 오늘날 인류가 맞닥뜨린 위기에 대해서도 말하고 있습니다. 현재 유럽 여러 나라에는 많은 이민자와 난민이 모여들고 있습니다. 자연재해, 전쟁, 빈곤 때문에 고향을 떠난 사람들은 정치와 경제, 냉랭한 대우로 또 다른 위험에 놓여 있습니다. 난제는 이것이 유럽만의 문제가 아니라 전 지구적 과제라는 점입니다. 모두의 위기를 인류가 어떻게 극복할 수 있을지 고민하는 가운데, 우리 그리스도인은 사도행전의 이야기가 보여 주듯이 무관심과 냉랭한 힘과 결탁할 것인지, 모든 사람에게 “각별한 인정과 친절”을 보이며 하느님의 사랑을 증언할 것인지 결정해야 합니다. 환대는 그리스도인의 일치를 추구하고 있는 우리에게 매우 필요한 미덕입니다. 환대를 실천하려면 우리는 어려움에 놓인 이들을 너그럽게 대해야 합니다. 바오로 사도와 그의 동료들에게 각별한 인정을 보여 준 몰타섬 사람들은 그리스도를 알지 못하였지만, 바로 그들의 각별한 인정 덕분에, 분열되었던 사람들이 서로 가까워졌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의 일치는 무엇보다도 서로를 환대하는 데서, 그리고 우리와 다른 언어, 문화, 신앙을 지닌 사람들과 사랑으로 만나는 데서 드러날 것입니다. 환대와 친절은 비단 다른 문화와 다른 나라 사람들에게만 필요한 것이 아닙니다. 우리나라 안에서 빈부 격차를 줄이는 일, 대결 위주의 남북 관계를 청산하는 동시에 북한 동포들을 돕는 일, 정의롭고 공평한 제도를 통하여 모든 불의를 종식하는 일에도 우리의 각별한 관심이 필요합니다. 인류는 지금까지 보지 못한 길을 가고 있습니다. 현재 인류가 당면한 고통과 난제들은 수 세기 전 인류가 저지른 착취와 정복의 제국주의가 빚어낸 많은 잘못에서 비롯하였습니다. 여기에는 한반도의 분단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2020년 그리스도인 일치 기도 주간은 각별한 인정과 친절한 마음이 가져올 변화에 대해서 말하고 있습니다. 성경 안에서만 회자하는 기적이 아니라 현실에 있는, 아니 반드시 있어야만 할 인간됨에 대해서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이 바오로처럼 굳은 믿음으로 변화하도록 준비해야 합니다. 2020년 그리스도인 일치 기도 주간 동안, 인류를 향한 하느님의 뜻을 발견하고 그 뜻에 기꺼이 따라 사는 우리가 될 수 있도록, 주님께 용기와 힘과 지혜를 주시기를 간절히 기도합시다. 2020년 1월 18일 한국천주교회 김희중 대주교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 이홍정 총무 한국정교회 암브로시오스 대주교 대한예수교장로회 김태영 총회장 기독교대한감리회 윤보환 감독회장 직무대행 한국기독교장로회 육순종 총회장 구세군한국군국 김필수 사령관 대한성공회 유낙준 의장주교 기독교대한복음교회 이양호 총회장 기독교대한하나님의성회 유영희 총회장 기독교한국루터회 김은섭 총회장cpbc2020.01.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