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창훈 소장의 사도행전 이야기] (69) 에필로그<4>- 사도행전에 비춰본 바오로의 생애와 서간③](//cpbc.co.kr/CMS/newspaper/2020/06/rc/781470_1.1_titleImage_1.jpg)
[이창훈 소장의 사도행전 이야기] (69) 에필로그- 사도행전에 비춰본 바오로의 생애와 서간③교회 공동체가 나아갈 방향 제시한 ‘바오로의 편지’ 바오로의 2차 선교 여행 경로. 출처=「성경 역사 지도」(분도출판사) 예루살렘 사도 회의의 결정을 가지고 안티오키아로 돌아와 지내던 바오로와 바르나바는 두 번째 선교 여행을 떠나기로 합니다. 그러나 두 사람은 첫 번째 선교 여행 때와 달리 서로 갈라져서 여행을 떠납니다. 바오로가 신약성경 바오로 서간으로 전해지는 편지들을 쓰기 시작한 것도 이 두 번째 선교 여행 때부터입니다. 바오로의 2차 선교 여행「주석 성경」 ‘연대표’에 따르면, 바오로의 2차 선교 여행은 50~52년까지 약 3년 동안에 이뤄집니다. 바르나바가 마르코를 데리고 키프로스로 떠나자 바오로는 실라스를 데리고 “시리아와 킬리키아를 두루 다니며 그곳 교회들을 굳건하게” 만듭니다.(15,40-41) 이 지역들은 바오로가 회심 후 처음 예루살렘에 올라가서 복음을 선포하다가 유다인들의 박해를 피해 고향 타르수스로 돌아갈 때 거쳐 가면서 선교 활동을 했던 지역이기도 합니다.(갈라 1,21 참조) 이렇게 내륙을 거쳐 올라간 바오로는 데르베를 거쳐 리스트라에 당도합니다. 이 고을들은 바오로가 1차 선교 여행 때에 선교한 곳들이었습니다. 리스트라에서 티모테오를 제자로 삼은 바오로는 계속해서 1차 선교 여행 때 방문했던 도시들인 이코니온과 피시디아의 안티오키아를 거쳐 서쪽으로 가고자 했습니다. 서쪽으로 계속 간다면 에페소가 주도(州都)인 아시아에 이르게 됩니다. 하지만 성령께서 아시아에 말씀을 전하는 것을 막아 바오로 일행은 북쪽으로 올라가 갈라티아 북부 지방(오늘날 터키 수도 앙카라 부근)까지 갔다가 다시 서쪽으로 방향을 바꾸어 프리기아를 관통해 계속 나아갑니다. 아시아 속주의 북쪽에 있는 미시아 지방에 이르러서는 북쪽 비티니아로 가려고 했지만, 이번에는 예수님의 영께서 허락하지 않아 미시아를 가로질러 에게 해 연안 도시인 트로아스로 내려옵니다.(16,1-8)트로아스에서 지내던 어느 날 밤 바오로는 마케도니아로 건너와 달라는 환시를 보고는 트로아스를 떠나 사모트라케 섬을 거쳐 유럽 본토인 마케도니아의 네아폴리스에 도착해 그곳에서 10여㎞ 떨어진 필리피로 갑니다. 바오로는 이곳에서 티아티라 출신의 자색 옷감 장수인 리디아에게 세례를 주는 등 선교 활동을 펼치다가 감옥살이를 하고 감옥을 지키던 간수와 그 가족을 개종시킨 후 필리피 행정관들의 요청으로 필리피를 떠납니다.(16,11-40) 필리피는 바오로가 유럽 대륙에서 처음으로 교회를 세운 곳입니다. 또 필리피 교회는 이후 바오로의 선교 활동을 물심양면으로 적극 후원합니다.필리피를 떠난 바오로는 암피폴리스와 아폴로니아를 거쳐 마케도니아 최대의 항구도시이며 마케도니아 주도(州都)인 테살로니카에 머무르면서 선교 활동을 계속합니다. 하지만 테살로니카의 유다인들에게 거센 반발을 사고 위험에 처하자 그곳을 떠나 베로이아로 갑니다. 테살로니카의 유다인들이 베로이아까지 쫓아와 군중을 선동해 자극하는 바람에 바오로는 그동안 함께했던 실라스와 티모테오를 남겨 두고 먼저 아테네로 옵니다.(17,1-15)아테네에서 실라스와 티모테오를 기다리면서 바오로는 유다인 회당에서, 또 광장에서 토론하면서 복음을 전하고 나중에는 아레오파고스에서 아테네 시민들을 대상을 열띤 선교를 합니다. 하지만 바오로는 아테네에서 선교 활동의 별다른 결실을 보지 못합니다. 실라스와 티모테오와 내려온 후 바오로는 티모테오를 테살로니카 교회로 보내고(1테살 3,1-5 참조) 자신은 실라스와 코린토로 건너갑니다. 테살로니카 교회에 보낸 애정과 권고코린토에서 바오로는 폰투스 출신으로 천막 만드는 일을 생업으로 하는 유다계 그리스도 신자들인 아퀼라와 프리스킬라 부부를 만납니다. 생업이 같아서 바오로는 그들과 함께 지내면서 안식일이면 회당에서 토론하며 유다인들과 그리스인들에게 복음을 전하려고 노력합니다. 그러던 차에 마케도니아에 갔던 티모테오가 코린토로 내려와 바오로에게 테살로니카 교회에 관한 소식을 전합니다. 테살로니카 신자들이 바오로를 그리워하며 바오로의 가르침을 충실히 따르고 있다는 소식이었습니다. 이 소식을 들은 바오로는 테살로니카 교회에 편지를 써 보내는데 이 편지가 바로 ‘테살로니카 신자들에게 보낸 첫째 서간’입니다. 신약성경 27권 가운데서 바오로의 이름으로 전해지는 서간 가운데 바오로의 친서가 몇 권이 되는지에 대해 학자들 사이에 의견이 엇갈립니다만, 적어도 7권은 바오로가 직접 쓴 편지라는 데는 견해가 일치합니다. 테살로니카 신자들에게 보낸 첫째 서간은 그 가운데서 첫 번째 편지로 50~51년쯤에 쓴 것으로 추정합니다. 서간에는 자신이 직접 세웠지만 제대로 돌보지 못하고 박해를 피해 떠나야 했던 테살로니카 교회 신자들에 대한 바오로의 염려와 애정, 신자로서 지켜야 할 것들에 대한 권고와 당부 등이 생생히 담겨 있습니다. 티모테오가 마케도니아에서 코린토로 내려온 이후 바오로는 더욱 복음 선포 활동에 매진합니다. 바오로는 1년 6개월 동안 코린토에서 지내면서 교회를 세운 후에 코린토를 떠나 아시아의 주도(州都) 에페소로 갑니다. 그러나 그곳에 오래 머물지 않습니다. 코린토를 함께 떠난 프리스킬라와 아퀼라 부부를 에페소에 남겨 둔 채 바오로는 카이사리아를 거쳐 예루살렘에 올라가 그곳 교회에 인사한 후 안티오키아로 내려옵니다.(18,5-22) 이로써 바오로는 2차 선교 여행을 마칩니다. 분열하는 코린토 교회에 당부안티오키아에서 얼마를 지낸 바오로는 다시 길을 떠납니다. 세 차례의 선교 여행 중 가장 긴 3차 선교 여행을 시작한 것입니다. 바오로의 3차 선교 여행은 53~58년 사이에 이루어집니다. 바오로는 내륙을 거쳐 북쪽으로 올라가 소아시아의 갈라티아와 프리기아를 차례로 거쳐 가면서 자신이 앞선 두 차례의 선교 여행 때에 세운 교회들을 찾아 신자들을 격려하고는 소아시아의 서쪽 끝에 있는 에페소에 도착해 그곳에서 27개월을 지내며 선교 활동을 펼칩니다. 바오로가 에페소에 있을 때 바다 건너 코린토에서 걱정스러운 소문이 들려옵니다. 코린토 교회 신자들이 ‘바오로 편’이니 ‘아폴로 편’이니 ‘케파 편’이니 심지어 ‘그리스도 편’이니 하면서 분열돼 있다는 것입니다. 그뿐 아니라 불륜, 근친상간, 신자들 간의 법정 고발, 성찬례 모임에서의 불미스러운 일, 죽은 이들의 부활에 대한 그릇된 이해 등 신자 생활과 교리에 관한 좋지 못한 이야기들도 함께 전해 듣습니다. 자신이 18개월이라는 꽤 오랜 기간을 보내며 힘들여 세운 코린토 교회의 이런 사정을 접한 바오로는 자신의 동료이자 협력자인 티모테오를 코린토로 파견하면서 그편에 코린토 상황에 대한 자신의 견해를 밝히고 신자들에게 당부하는 내용의 편지를 써 보냅니다. 이것이 바오로 서간 중 ‘코린토 신자들에게 보낸 첫째 서간’입니다. 이 편지는 54년 봄쯤에 쓴 것으로 추정합니다. 바오로는 이 서간에 앞서 편지 한 통을 코린토 교회에 써 보냈는데, 안타깝게 전해지지 않고 있습니다. 그런데 코린토 교회의 사정이 심상치가 않았습니다. “하느님의 말씀으로 장사하는”(2코린 2,17) 가짜 선교사들이 코린토에 와서 바오로의 사도직을 부정하며 신자들을 부추기고 있었습니다. 소식을 들은 바오로는 직접 코린토로 건너갑니다. 그의 두 번째 코린토 방문이었습니다.(2코린 13,2 참조) 하지만 바오로는 오히려 모욕만 당하고 에페소로 돌아와야 했습니다. 그는 “괴롭고 답답한 마음으로 많은 눈물을 흘리며”(2코린 2,4) 코린토 교회에 편지를 씁니다. 이 편지가 ‘코린토 교회에 보낸 세 번째 편지’입니다. ‘눈물 편지’라고도 하는 이 세 번째 편지는 바오로가 ‘코린토 신자들에게 보낸 둘째 서간’ 10─13장을 이루고 있습니다. 한국평협 평신도사도직연구소장 alfonso84@hanmail.net cpbc2020.06.17

청소년에 의한 청소년을 위한 축제인천교구 청소년사목국 청소년부, 제26회 바다의 별 축제 ‘제26회 바다의 별 축제’에 참가한 청소년들이 경품 룰렛을 돌리고 있다. 인천교구 청소년사목국 청소년부(담당 유동식 신부)는 1월 18일~19일 인천교구청에서 제26회 바다의 별 축제를 개최했다. 청소년과 그 가족까지 초대한 이번 축제에는 모두 400여 명이 참가했다.올해 축제는 두 번째 ‘성서의 해’를 맞아 ‘성경 골든벨’과 ‘성경경시대회’, ‘성경 암송대회’ 등 짜임새 있는 성경 관련 프로그램으로 구성됐다. 또 올해는 처음으로 바다의 별 축제와 8월에 열리던 ‘청소년 전례음악 축제’를 하나로 합쳐 진행됐다. 교구 내 상동ㆍ가좌동ㆍ주안8동ㆍ중2동 등 4개 본당과 교구에서 활동하는 청소년 밴드들은 ‘제16회 청소년 전례음악 축제’에서 멋진 무대를 선보였다.교구청 마당에는 다채로운 판매 부스와 체험 부스가 마련됐다. 참가자들은 룰렛을 돌려 경품을 받고, 묵주 팔찌와 간식을 사는 등 즐거운 추억을 쌓았다. 또 인천가톨릭대 신학생과 부제를 만나 성소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기도 했다. 이틀간의 축제는 19일 교구장 정신철 주교가 주례한 공동체 미사로 막을 내렸다. 바다의 별 축제에 처음 참가한 권주연(헬레나, 15, 상동본당)양은 “생각 이상으로 재미있다”며 큰 만족감을 표했다. 권대용(요한 세례자, 16, 주안8동본당)군도 “다양한 부스를 체험하며 색다른 재미를 느꼈다”고 밝혔다.축제를 직접 기획하고 준비한 청소년 봉사자들은 잇따른 호평에 뿌듯해 했다. 홍보영상을 찍은 김두열(안드레아, 19, 인천가톨릭대학교 한국순교성인본당)군은 “교구 축제에 이바지해 보람을 느낀다”며 “이번 계기로 신앙심이 더 깊어졌다”고 했다. 이어 “중고등부 복사를 오래 해왔는데, 이제 새해에는 교리교사가 되고 싶다”고 포부를 밝혔다. 수도자를 꿈꾸는 손혜원(아가페, 19, 구월1동본당)양도 “축제를 준비하며 수도 성소를 키웠다”며 “내년에 꼭 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 수녀회에 입회하겠다”고 다짐했다.교구 청소년부 담당 유동식 신부는 “청소년들이 온전히 스스로 힘으로 축제를 준비하는 데 큰 의미가 있다”며, 이를 통해 ‘또래 사도’를 양성할 수 있다고 강조했다. 청소년의 축제 마당인 ‘바다의 별 축제’는 1994년에 시작해 26년째 이어오고 있다. 축제 수익금은 가톨릭대 인천성모병원과 가톨릭관동대 국제성모병원에 전달돼 외국의 아픈 어린이를 치료하는 데 쓰인다.이학주 기자 goldenmouth@cpbc.co.kr 평화신문2020.01.29

당신은 주님의 어머니, 교회의 어머니, 나의 어머니입니다가톨릭교회와 성모 공경 교회가 성모 마리아를 공경하는 이유는 주님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어머니이시기 때문이다. 그러나 단순히 그분이 주님의 어머니이시기에 공경하는 것은 아니다. 성모님은 누구보다도 하느님께 순종했으며 당신의 외아드님이신 주님을 목숨을 다해 사랑하신 분이셨기에 공경한다. 성모 마리아를 ‘살아있는 복음’이라고 한다. 주님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전 생애가 성모님과 결합해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교회는 성모님을 각별히 공경해 왔다. 성모 마리아 공경은 교회 전례력에서도 잘 드러난다. 가톨릭교회는 전례주년 한 해 동안 두 달(5월 성모 성월, 10월 묵주 기도 성월)을 성모님께 봉헌하고, 3번의 대축일과 2번의 축일, 12번의 성모 기념일을 지낸다.5월 성모 성월과 13일 파티마의 복되신 동정 마리아 기념일을 맞아 가톨릭교회가 왜 성모님을 공경하는지 살펴본다.성모 공경 이유가톨릭교회가 성모 마리아를 공경하는 단 한 가지 이유는 주님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어머니이시기 때문이다. 그러나 단순히 그분이 주님의 어머니이시기 때문에 공경하는 것은 아니다. 마리아께서 누구보다도 하느님 말씀에 순종하셨고(루카 1,38 참조), 당신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여 사랑하셨기 때문이다. 성경은 성모 마리아를 ‘은총이 가득한 이’(루카 1,28)로 증언하고 있다. 구약성경은 하와의 후손이며 다윗의 자손으로 하느님께 성실한 소박하고 순진한 동정녀가 ‘임마누엘’이라 불리게 될 메시아를 낳을 것이라고 예언한다. 시온의 딸로 메시아의 어머니로 초대된 분이 바로 성모 마리아이시다. 신약성경은 성모 마리아를 믿음으로 복되신 분이며, 주님과 함께 계시는 주님의 어머니시며, 세세 대대로 찬양받으실 분으로 증언하고 있다. 성모님은 동정녀의 몸으로 성령으로 인해 아들을 잉태할 것이라는 하느님의 불림을 받고서 순종으로 응답했으며, 평생 하느님의 뜻을 전적으로 믿고 따르는 신앙인으로서 인류와 교회의 표상이 됐다. 또 성모님은 곤란한 처지에 놓인 이웃을 위해 아들에게 도움을 청해 주님의 첫 신원을 드러내는 기적을 행하게 하신 분이시다. 아울러 성모님은 사람들을 당신 외아들에게로 인도하며 십자가에 못 박힌 아들의 죽음을 지키셨다. 그리고 무엇보다 주님께서 부활 승천하신 후 당신을 중심으로 주님의 제자들을 모아 함께 기도하시면서 성령을 받고 그리스도를 통해 성취된 하느님의 인류 구원 역사를 선포하신 분이시다. 그래서 성경은 엘리사벳의 입을 빌려 성모님께 “당신은 여인들 가운데에서 가장 복되십니다”(루카 1,42)라고 고백하고 있다. 교회의 고백 가톨릭교회는 성모 마리아를 신앙인의 모범이며, 그리스도를 통해 이룩된 하느님 가족인 교회 공동체의 모습을 대표적으로 구현한 인물로 공경한다. 그래서 교회는 성모님을 ‘교회의 어머니’라고 고백한다. 교회는 “원죄 없으신 하느님의 어머니이시며 평생 동정이신 마리아는 지상 생애의 여정이 끝난 다음 그 영혼과 육신이 천상의 영광 안에 받아들여졌다”고 믿을 교리로 선포한다.교회는 또 성모님이 ‘인류를 위한 중개자’라고 밝힌다. “카나의 혼인 잔치에서 당신의 전구로 구세주 예수님의 첫 기적을 이끌어 내신 성모님은 교회의 시작을 도와주기 위해서 성령의 은혜를 당신의 기도로 간청하셨고, 천상에서도 계속하시어 당신의 수많은 전구로 우리에게 영원한 구원의 은혜를 얻어주신다.”(「교회 헌장」 58~62항 참조, 「주님의 어머니, 신앙인의 어머니」 254쪽) 성모님의 중개는 ‘성인들의 통공’이라는 맥락 안에서 이루어진다. 신자들이 성인과 복자, 신심 깊은 이들에게 기도의 도움을 청하듯이 성모님께 전구를 청하는 것이다. 그래서 일부 신학자들은 ‘중개자’라는 말 대신 ‘영적 모성’이란 말을 쓴다. 유일한 구원의 중개자이신 주님과 구분하기 위함이다. 성모 성월교회가 성모 성월을 제정한 것은 인간 구원을 위해 끊임없이 전구하시는 성모님 은혜에 감사하기 위해서다. 중세 스페인 중부 카스티야 왕국의 알폰소 10세(1221~ 1284) 임금은 5월의 아름다움과 성모님께서 베푸시는 영적 풍요로움을 처음 결부시켜 5월 한 달간 성모님을 위해 기도하자고 권고했다. 이때부터 5월을 성모의 달로 기념하는 관습이 생겨나 유럽 교회 안에 퍼지기 시작했다.성모 성월이 정착된 시기는 17세기 말이다. 1677년 이탈리아 피렌체를 중심으로 5월을 성모님께 봉헌하는 축제가 열렸다. 신자들은 ‘성모호칭기도’를 바치고, 성모님께 장미화관을 봉헌하는 등 다채로운 행사를 열었다. 1854년 비오 9세 교황이 ‘복되신 동정 마리아의 원죄 없으신 잉태’ 교리를 선포한 이후 성모님을 위한 갖가지 행사가 유럽 교회 전역으로 퍼져 나갔으며 성모 성월 행사는 공적으로 거행되기 시작했다.한국 교회도 성모 성월 행사를 화려하고 장엄하게 거행하고 있다. 본당마다 성모 성월을 뜻있게 보내고자 성모상을 더욱 아름답게 꾸미고, ‘성모의 밤’ 행사 등을 마련한다.파티마의 성모와 성모 발현의 의미 성모 마리아는 1917년 포르투갈 수도 리스본에서 자동차로 한 시간 남짓 거리에 있는 작은 도시 파티마에서 5개월간 여섯 차례에 걸쳐 발현했다. 성모님은 루치아와 그녀의 사촌 히야친타, 프란치스코 등 세 명의 어린 목동에게 발현해 죄인들의 회개와 세계 평화를 위해 묵주 기도를 매일 바치라고 당부했다. 성모님은 그 대가로 티 없이 깨끗하신 성모 성심을 통해 많은 영혼이 구원받고, 세계 전쟁을 예방하며, 러시아의 회개와 세계 평화를 약속하셨다. 1930년 포르투갈 주교들은 파티마의 성모 발현을 공식 인정했고, 1942년 비오 12세 교황은 성모님의 요청대로 러시아를 특별히 언급하면서 세상을 성모의 티없는 성심께 봉헌했다. 그리스도교 신앙의 근원은 주님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이다. 성모 발현은 신비 체험의 하나이다. 따라서 성모 발현은 그리스도를 통해 전해진 공적 계시와 구별해야 한다. 성모 발현을 통한 사적 계시의 옳고 그름의 근거는 예수 그리스도의 공적 계시에 있다. 이미 성경에서도 거짓 예언을 주의하라고 이야기한 바 있다. 사적 계시는 개인적이지만 개인을 위한 것이 아니라 공동체를 위한 것이다. 새로운 발현이나 사적 계시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드러난 공적 계시와 모순되는 것일 수 없고, 공적 계시를 보완해주는 것일 수도 없다. 이미 드러난 공적 계시를 특정 시대, 특정 상황에 새롭게 강조하는 것뿐이다. 그래서 교회는 성모 발현을 인정하는 데 매우 신중하다. 성모님은 그리스도와 우리를 중개하시는 분이시다. 성모님이 주님보다 우위일 수는 없다. 성모 마리아의 메시지는 그리스도 신앙을 위한 것이다. 성모 발현 목격자가 성모님보다 두드러져서는 안 된다. 발현 메시지가 교회 가르침에 어긋난다면 올바른 발현으로 받아들일 수 없다. 발현 장소의 공적 공경과 메시지 선포는 교회가 인정한 후에만 가능하다. 리길재 기자 teotokos@cpbc.co.kr cpbc2020.05.06
[박현민 신부의 별별 이야기] (33)생각과 마음으로 짓는 죄 (중) 엠마 자매는 성인들이나 순교자들처럼 극단적인 상황에서 하느님이나 이웃을 먼저 생각하지 않고 자신의 구원과 생명을 먼저 생각했다는 점에서 수치심과 죄의식을 느꼈다. 보통의 사람들은 신경증적인 과도한 죄의식이라 생각할 수 있지만, 엠마 자매에게는 심각한 고민이 아닐 수 없었다. 엠마 자매에게 있어서는 숨은 것도 다 보시는 하느님 앞에서 생각으로 짓는 죄는 그 어떤 행동적인 죄보다 더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었다. 마음으로 짓는 죄는 드러나지 않기에 오히려 더 무섭고 중대한 죄의 원천이며 뿌리일 수 있기 때문이다. 어느 날 엠마 자매는 드디어 본당 신부님을 찾아 고해성사했다. 신부님께서는 자신의 상상은 죄가 아니라는 충격적인 말씀을 하셨다. 이유는 알 수 없었지만, 성사를 받고 집에 돌아오는 마음은 한결 편하고 가벼웠다. 하지만 하루 이틀 시간이 지나면서 다시 불안과 죄의식이 밀려왔다. 머리에 떠오르는 상상은 점점 이전보다 더 끔찍한 딜레마 상황들로 펼쳐졌으며, 자신은 죄인이라는 단죄의 목소리가 들려와 한순간도 숨을 쉴 수가 없었다. 이런 생각이 죄가 아니라는 신부님의 말씀을 믿고 안심하고 싶었지만, 도저히 믿어지지 않았다. 성경이나 교리에서는 생각으로 죄를 짓지 말라고 했는데, 신부님은 생각이 죄가 아니라니….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더 이상 안 되겠다 싶은 마음에 엠마 자매는 해외에서 영성이나 윤리 혹은 성경을 전공하셨다는 박사 신부님들이나 성령이 충만하여 치유나 분별의 은사를 받으셨다는 피정지도 신부님들을 찾아다녔다. 그런데 참 이상하게도 이 신부님들도 모두 자신의 마음 안에 떠오르는 생각들은 죄가 아니라고 하셨다. 그 이유를 물어보았지만 이해할 수 없는 답변뿐이었다. 자기 생각은 죄가 아니라 망상이라는 말은 더더구나 이해가 안 되었다.엠마 자매는 교회에서 권위를 가진 신부님들의 말씀을 무시할 수도 없었고, 그렇다고 이해되지도 않는 말을 무조건 믿고 따를 수도 없었다. 자기 생각이 망상이라면 사람들이 생각으로 짓는 죄도 모두 망상이란 말인가? 생각으로 짓는 죄와 망상의 차이는 무엇인가? 질문이 꼬리를 물고 일어났다. 엠마 자매는 결국 자신이 망상증 환자인지 아닌지 확인해 보기 위해 정신과 병원을 찾았다. 정신과 의사는 신부님들과는 달리 자신이 망상이 아닌 강박적 생각을 하고 있다고 말했다. 그러나 엠마 자매에게는 그 말이 그 말이었다. 망상이든 강박이든 마음의 평화를 가져다주지 못한다는 점에서는 별반 차이가 없었다.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는 부정적인 생각이 왜 죄가 아닌지를 설명해 주지 않는 해석들은 모두 공허했다. 게다가 생각으로 짓는 죄를 범하지 않는 방법에 대해서는 누구도 도움을 주지 못했다. 의사가 약을 먹으면 해결된다고 하였지만, 그 역시 말이 안 되었다. 왜냐하면, 약을 먹어 생각하지 않는다면, 그건 손과 발을 잘라 행동으로 죄를 짓지 않게 하는 것과 별반 다름이 없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또한, 약을 먹어 생각하고는 있지만, 그것을 느끼지 못한다면(즉 생각으로 죄를 짓고는 있지만, 그 상황을 인지하지 못한다면-메타인지), 실제적인 죄를 느끼지 못한다고 해서 죄가 없어지는 것이 아니니 그 역시 문제의 해결이 아니라고 보였다. 엠마 자매는 결론적으로 자기 생각이 죄가 아니라는 명확한 믿음이 생기지 않는 상황에서 차라리 생각으로 죄를 짓지 않는 방법을 찾는 것이 자신이 치유될 가장 빠른 방법이라고 생각했다. 마지막으로 어떻게 하면 생각으로 죄를 짓지 않을 수 있는지를 물으러 엠마 자매는 상담실을 찾았다. <계속><영성심리학자, 성필립보생태마을 부관장> 평화신문2020.07.14

그리스도의 말씀 선포하는 말씀 전례의 절정[미사의 모든 것] (19)복음 봉독 복음 봉독은 말씀 전례의 정점으로, 사제와 부제만이 봉독할 수 있다. 복음 봉독에 앞서 봉독자와 신자들은 이마와 입술, 가슴에 십자 표시를 하는데 이는 복음 말씀을 머리에 새기고 입으로 고백하며 가슴에 담아 실천하겠다는 뜻이다. 【CNS 자료 사진】 나처음: 지난번 말씀 전례의 요소와 예식을 설명하면서 “복음 봉독은 말씀 전례의 정점”이라고 했는데 정확히 복음이 뭔가요?라파엘 신부: 복음은 주님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드러난 하느님 계시의 말씀이란다. ‘말씀’은 영원부터 하느님과 함께 계셨고, 영원으로부터 바로 하느님이셨단다.(요한 1,1 참조) 그 영원한 말씀은 우리를 하느님과 화해시켜 구원하시고자 사람이 되셨지. 바로 주님이신 예수 그리스도이시란다. 아버지 하느님의 말씀으로 참하느님이시며 참인간이신 예수 그리스도는 하느님과 인간 사이의 유일한 중개자이시지. 예수 그리스도의 생애는 ‘강생’(잉태와 탄생-하느님께서 사람이 되시다)과 ‘파스카’(수난, 십자가에 달리심, 돌아가심, 묻히심, 저승에 가심, 부활, 승천) 신비에 비추어 보아야 해요. 신약 성경 가운데 예수 그리스도의 생애와 말씀을 담은 마르코, 마태오, 루카, 요한 네 복음서는 “예수님께서 메시아시며 하느님의 아드님이심을 믿고, 또 그렇게 믿어서 그분의 이름으로 생명을 얻게 하려는 것”(요한 20,31)이라고 저술 목적을 분명히 밝히고 있지. 복음서는 “우리의 구원자, 사람이 되신 말씀의 삶과 가르침에 관한 으뜸가는 증언이기 때문에”(「계시 헌장」 18항) 모든 성경의 핵심일 뿐 아니라 교회 안에서 특별한 위치를 차지해. 그래서 체사리아 성녀는 “복음서보다 더 훌륭하고 소중하며 더 빛나는 교리는 없습니다. 우리 주님이시며 스승이신 그리스도께서 당신의 말씀으로 가르치시고 행동으로 실현하신 것을 직접 보고 간직하기 바랍니다”라며 신자들에게 복음서를 가까이하길 권면했단다. 나처음: 복음 봉독은 전례 안에서도 특별한 권위가 있겠네요.라파엘 신부: 교회는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들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명령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여라”(마태 28,19-20)는 주님의 명에 따라 세상 끝날까지 복음을 선포하고 있지. 그래서 교회를 ‘말씀의 집’이라고 표현하기도 해. 말씀의 집에서 가정 먼저 주의를 기울여야 할 것은 바로 전례란다. 전례는 하느님께서 지금 여기에 있는 당신 백성에게 말씀하시는 탁월한 장소란다. 그리스도께서 당신 말씀 안에 현존하시어 교회에서 당신의 말씀을 듣고 응답하기 위해 모인 이들에게 친히 말씀하신단다. 이런 이유로 그리스도의 말씀이 성전 안에서 장엄하게 선포하기 위해 말씀 전례 복음은 사제와 부제만이 봉독하게 되어 있단다. 조언해: 복음 봉독 때 미사 참여자들이 일어서는 것도 직접 우리에게 하시는 주님의 말씀을 듣기 위함이겠군요. 라파엘 신부: 그렇지. 복음을 선포하러 오시는 그리스도께 대한 존경과 환영을 드러내며 주님의 말씀을 경건히 경청하고 실천하겠다는 표현으로 모든 미사 참여자들이 일어서지. 교회는 다른 독서에 견주어 특별한 영예의 표시로 복음에 가장 큰 경의를 드리라고 가르치고 있어요. 그래서 복음 선포를 하도록 정해진 봉사자는 축복을 받거나 기도를 바치며 복음 선포를 준비하고, 신자들은 환호함으로써 그리스도께서 거기에 현존하시며 신자들에게 말씀하신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고백하지. 조언해: 이때 모든 이들이 독서대를 향해 서는 것도 그리스도의 복음에 특별한 공경을 표하는 것이군요.라파엘 신부: 말씀 전례 예식을 자세히 보면 복음이 봉독 되기까지 여러 예식과 기도가 행해지는 것을 알 수 있어요. 먼저 모든 이들이 복음을 듣기 위해 일어서고, 복음 환호송이 불리는 동안 향을 쓸 경우 사제는 향로에 향을 넣지. 그다음에 복음 봉사자인 사제와 부제가 주례 사제 앞에 나아가 깊은 절을 하면서 낮은 목소리로 “축복하여 주십시오”라며 축복을 청한단다. 주례 사제는 “주님께서 그대의 마음과 입술에 머무시어 그대가 복음을 합당하고 충실하게 선포하기를 빕니다”라며 십자 성호를 그으며 축복해요. 그러면 복음 봉사자는 “아멘”하고 응답하고, 향로와 촛불을 든 봉사자들과 함께 독서대로 향한단다. 복음 봉사자 없이 주례 사제가 복음을 봉독할 때는 손을 모으고 제대에서 허리를 굽히고 “전능하신 하느님, 제 마음과 입술을 깨끗하게 하시어 합당하게 주님의 복음을 선포하게 하소서”라며 속으로 기도한 후 독서대로 향하지.나처음: 복음을 봉독할 때 이마와 입술, 가슴에 십자가를 긋는 이유가 뭐예요.라파엘 신부: 복음 봉사자인 사제나 부제가 독서대에 서면 먼저 교우들에게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라며 인사를 하지. 그러면 교우들은 “또한 사제(부제)의 영과 함께”라고 화답해요. 이 인사는 12~13세기께 미사에 도입된 예식으로 현존하시는 그리스도께서 친히 복음을 선포하신다는 것을 알려주는 것이란다. 그런 다음 복음 봉사자는 “(○○○)가(이)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라며 선포되는 복음 말씀을 알려주면서 책과 이마와 입술, 가슴에 십자 표시를 한단다. 복음 명칭을 알리는 관습은 700년 이전부터 미사에 도입되었어요. 여기서 우리가 주목할 것은 복음서의 참저자는 하느님이시고, 복음사가는 오직 그 말씀을 전달하는 사람이기에 “(마르코, 마태오, 루카, 요한)가(이)이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라고 말하는 것이야. 복음 봉사자가 복음서에 십자 성호를 긋는 것 역시 복음이 주님의 말씀임을 드러내기 위함이란다. 복음 봉사자와 교우들이 함께 이마와 입술, 가슴에 십자 성호를 긋는 것은 11세기 이후 미사에 도입됐는데 ‘복음을 믿고’(이마) ‘고백하며’(입) ‘실천한다’(가슴)는 뜻을 포함하고 있단다. 이렇게 십자 성호를 그으면서 “주님, 영광 받으소서”라고 응답하는 것은 7세기께 동방 교회 전례에서 도입된 예식으로 주님을 환영하며 영광을 드리는 마음을 표현한 것이란다. 향을 피우는 경우에는 복음서에 분향한 후 복음을 선포하지. 그리고 주님 수난 성지 주일과 성 금요일의 수난 복음 봉독 때에는 복음 전 인사, 십자 표시, 분향, 촛불 등이 모두 생략돼요. 스스로 죄인이 되어 고통을 받으시는 그리스도를 묵상하고 일시적으로나마 주님께 영광을 드리는 것을 보류하는 것이지. 또 파스카 성야 때에는 부활초가 있기 때문에 복음서 옆에 촛불 봉사자를 세우지 않는단다. 복음 봉독이 끝나면 복음 봉사자가 독서 봉독 때와 같이 “주님의 말씀입니다”라고 하고, 교우들은 모두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라고 환호해. 로마 전례에서는 이후 복음 봉사자가 존경의 표시로 복음서에 입을 맞추지만, 한국 주교회의는 우리 정서에 맞게 고개를 숙여 경건하게 절을 하도록 정했단다. 복음 봉사자는 이때 “이 복음의 말씀으로 저희 죄를 씻어 주소서”라며 속으로 기도지.조언해: 미사 복음은 어떻게 정해지나요.라파엘 신부: 지난번 말씀 전례 독서와 복음이 어떻게 정해지는지 설명했는데 다시 간단히 알려줄게. 주일 미사 복음은 3년 주기(가해, 나해, 다해)로, 평일 미사 복음은 2년(홀수해, 짝수해) 주기로 배분돼 있단다. 연중 주일에는 공관복음을 기준으로 가해에는 ‘마태오 복음서’, 나해에는 ‘마르코 복음서’, 다해에는 ‘루카 복음서’를 낭독해. 이중 나해의 마르코 복음서는 분량이 짧기에 연중 제17~21주일에는 ‘요한 복음서’로 보충하고 있단다. 요한 복음서는 앞의 연중 시기뿐 아니라 성삼일과 주님 부활 대축일, 부활 팔일 축제 등과 같은 특수 시기에 봉독된단다. 리길재 기자 teotokos@cpbc.co.kr cpbc2020.11.24

‘젖과 꿀이 흐르는 땅’, 다른 누군가에겐 ‘고난의 땅’ [엉클죠의 바티칸 산책] (16) 2000년 전 갈릴래아는 프란치스코 교황이 지난해 11월 세계 가난한 이의 날을 맞아 로마 시내 행려자와 가난한 이들을 바티칸으로 초대해 함께 점심을 먹고 있다. 현대 사회의 가난한 이들 형편은 성경 속 갈릴래아 주민이나 소작농의 그것과 다를 게 없다. 【CNS 자료사진】 하느님은 백성들의 삶이 가장 절박한 곳에 가장 먼저 가신다고 하였습니다. 2000년 전 갈릴래아 백성의 삶은 어떠하였을까요. 한마디로 말해 죽지 못해 살았습니다. 성경은 당시의 상황을 담백하게 묘사하고 있습니다. “어둠 속에 앉아 있는 백성이 큰 빛을 보았다.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운 고장에 앉아 있는 이들에게 빛이 떠올랐다.”(마태 4,16)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워진 땅 백성들은 ‘어둠 속’에 앉아 있었고, 갈릴래아는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던 땅이었습니다. 당시 사회상을 사실적으로 전해주는 예수님의 말씀과 예화가 성경 곳곳에서 발견됩니다. 신앙적 해석이 아닌 현실적 설명 또는 경제사적 분석을 시도해 보겠습니다. 먼저 ‘빵의 기적’에 대한 증언입니다. “저 군중이 가엾구나. 벌써 사흘 동안이나 내 곁에 머물렀는데 먹을 것이 없으니 말이다. 길에서 쓰러질지도 모르니 그들을 굶겨서 돌려보내고 싶지 않다.”(마태 15,32) ‘사흘 동안’이라는 말이 무겁게 다가옵니다. 군중 가운데 상당수가 사흘 동안이나 굶었다는 이야기 아닙니까. 빵의 기적을 일으킬 때마다 여자와 아이들을 제외한 장정만 4000~5000명이 모였다고 하니 전체 인원은 줄잡아 1만 5000명 수준이었을 것입니다. 굶주린 인파가 구름처럼 모인 것이지요.성경에는 ‘빵의 기적’이 두 번 소개됩니다. 실제로는 더 많았을 것입니다. 하루 세끼 해결을 못 하는 절대 빈곤층이 얼마나 많았는지를 짐작할 수 있습니다. 우리 속담에 “사흘 굶으면 포도청 담장도 넘는다”는 말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40일 단식도 하셨지만, 보통 사람들은 사흘 굶으면 눈이 뒤집힙니다. 예수님의 제자들도 예외가 아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밀밭 사이를 지나가시게 되었다. 그런데 그분의 제자들이 배가 고파서, 밀 이삭을 뜯어 먹기 시작하였다.”(마태 12,1) 얼마나 배가 고팠으면 길 가다 말고 밀이삭을 뜯어 먹었을까. 그것도 안식일에! 명색이 예수님 제자라는 분들이 이 정도였으니, 장삼이사 백성들은 어떠했을지…. ‘포도밭 소작인의 비유’(마태 21,35-38)는 사회상의 한 단면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충격적인 사건입니다. 사건 개요는 포도밭 소작인들이 소작료를 받으러 온 주인의 종(마름)과 아들을 살해한 다음 포도밭을 차지하려 했다는 내용입니다. 소작농들의 범죄는 단순 살인사건이 아니라 전형적인 하극상입니다. 또 포도밭 갈취 시도는 단순한 절도 행위가 아니라 경제 기본질서(사유재산권)를 파괴하려 한 공안 범죄입니다. 예수님이 억지로 지어낸 이야기는 아닐 것입니다. 비슷한 종류의 사건이 종종 일어났다고 유추할 수 있습니다. 극심한 빈부 격차모든 범죄에는 동기가 있습니다. 소작농이 이런 끔찍한 죄를 저지른 동기가 과연 무엇이었을까요. 이것이 중요합니다. 사건의 발단은 과다한 소작료였을 것입니다. 소작료 분쟁은 갈릴래아만의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산업화 이전의 농경사회에서는 동양이나 서양 어디서나 있었습니다. 소작료 분쟁이 대규모로 조직화할 경우 소작쟁의나 농민 폭동 또는 농민 전쟁으로 비화하기도 했습니다. 소작료는 보통 50%였습니다. 소작인이 수확량의 절반을 지주에게 바치는 것이지요. 악덕 지주들은 최고 70~80%를 받기도 했습니다. 갈릴래아에는 1%의 사람(지주)이 농토의 50%를 소유하고 있었답니다. 땅 한 평 없는 소작농이 너무 많았습니다. 부익부 빈익빈, 빈부격차가 극에 달했습니다.백성들은 지주에게 소작료만 낸 게 아니었습니다. 세리(로마 제국)에게는 세금을, 제사장에게는 성전세(십일조)를 내야 했습니다. 소작료 세금 성전세, 그들에게는 살인적인 삼중고였습니다. 가뭄과 홍수 등 자연재해로 수확량이 대폭 줄어든 때에도 지주들은 소작료를 깎아주지 않았고, 세리들도 자신들의 몫을 챙겨갔습니다. 더구나 세금이나 소작료를 제때 내지 않을 경우 그 처벌이 매우 엄했고 난폭했습니다. 백성들의 삶이 어떠했을지 짐작이 갑니다. 갈릴래아는 기득권층에게는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었지만, 백성들에게는 ‘죽음의 그림자’가 어른거리는 고난의 땅이었고, 예수님에게는 세상에서 가장 낮은 땅이었습니다. 지금은 수려한 풍광만 남아 있고, 백성들의 굴곡진 삶은 흔적조차 없습니다. 갈릴래아를 찾는 수많은 순례자가 이런 사실을 아는지 모르는지…. 이백만(요셉, 주교황청 한국대사) 평화신문2020.03.31

“기도는 아름다운 시간 낭비… 겸손한 마음으로 끈질기게”「주님, 날마다…」 펴낸 조규만 주교 기도문 의미 깨닫고 더욱 기도에 임하길 주님, 날마다 기도하게 하소서 / 조규만 주교 지음 / 기쁜소식 그리스도인은 기도하는 사람이다. 기도로 아버지 하느님을 만나 시시콜콜한 이야기도 건네고, 아이가 부모에게 무언가를 달라고 떼쓰듯 매달리기도 하고, 감사한 마음을 전하기도 한다. 하느님을 매일 사랑할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은 신앙생활의 핵심인 기도하는 것이다.원주교구장 조규만 주교가 최근 「주님, 날마다 기도하게 하소서」를 펴냈다. 성호경, 주님의 기도부터 묵주기도, 십자가의 길 기도에 이르기까지 30여 개의 가톨릭교회 주요 기도문에 관한 설명과 의미, 기도하는 법에 관해 상세히 풀어놓은 책이다. 기도문을 습관적으로 입으로만 낭송해왔던 신자들과 ‘가톨릭에는 기도문이 왜 이렇게 많지?’ 하는 새 신자들에게도 제격인 기도 안내서다.11월 20일 원주교구청에서 만난 조규만 주교는 “‘주님의 기도’가 왜 ‘나’의 아버지가 아니라, ‘우리’ 아버지로 표현되는지, 묵주기도가 어떻게 예수님 생애를 담고 있는지 우리가 기도문의 의미를 알고 바친다면 더욱 마음을 담아 기도에 임할 수 있을 것”이라며 책 출간 취지를 전했다.실제 우리는 미사 때에나 기도문을 낭송할 때 입으로만 외우는 경우가 많다. 물론 모든 기도가 하느님을 만나는 통로가 되지만, 앵무새처럼 바치는 기도는 마치 아무 생각 없는 되뇜이다. 조 주교는 “사랑하는 사람과 대화할 때 매번 아무 생각 없이 이야기하면 상대방이 대화할 맛이 안 나듯 하느님께 기도할 때에는 마음을 다해 기도해야 한다”며 “특히 가톨릭 기도문은 교회의 오랜 역사와 전통과 많은 이의 희망을 집약하고 있는 만큼 그 의미를 잘 알고 바쳐야 한다”고 조언했다.모든 일의 시작과 끝인 성호경은 그리스도인을 드러내는 십자가 표징이다. 이 땅에서 아버지 뜻이 이뤄져 하느님 나라가 펼쳐지길 비는 ‘주님의 기도’에서 ‘우리(Our)’ 아버지라고 부르는 것은 모두가 서로 형제자매임을 의미한다. 그리스도인의 신분증과 같은 ‘신경’을 통해 영원한 삶을 향한 믿음을 바치고, ‘통회 기도’, ‘봉헌 기도’는 죄의 용서와 하느님 사랑을 일깨우도록 이끈다. 성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이 ‘복음의 요약’이라고 한 묵주기도에 관해서도 예수님 생애부터 성모님 승천에 이르는 각 신비의 내용을 자세히 안내하고 있다. 성경, 준주성범, 동양사상 등을 곁들여 설명한 조 주교의 기도 강론집과 같다. 영어 기도문도 함께 수록해 이해를 돕고 있다.조 주교는 “기도하는 시간은 아름다운 시간 낭비”라며 “기도하지 않으면 모든 일을 자기가 한 것으로 여길 뿐만 아니라, 삶의 항해가 목표를 잃고 표류할 수 있다”고 조언했다. 조 주교는 “기도로 하느님을 더 알고 사랑하는 만큼 이웃을 향한 마음도 넓어진다”며 하느님과 나와의 관계, 나와 이웃과의 관계, 나 자신과의 관계의 중요성을 재차 설명했다. 원주교구는 ‘기도의 맛’을 신자들에게 전하기 위해 2020년을 ‘기도의 해’로 정하고 배론성지에 은총의 성모 마리아 기도학교를 건립해 운영하고 있다. 이어 2021년을 ‘자선의 해’로 보낸다.“연옥 영혼들을 위해 기도하고, 남이 나로 인해 범한 죄까지 생각하며 기도한다는 면에서 가톨릭교회 기도문은 철학적이기까지 합니다. 생각과 마음의 지평을 넓혀주는 것이 교회 전통과 역사를 지닌 우리 기도문입니다. 우리는 끈질기게, 겸손한 마음으로 매일 기도해야 합니다. 이 세상에서 하느님을 만나고 대화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기도뿐입니다. 하느님께 나의 소중한 시간을 아름답게 낭비합시다.”이정훈 기자 sjunder@cpbc.co.kr 문채현2020.12.01
시인의 신앙 여정,?수필로 엮어자박자박, 봄밤 / 이채현 지음 / 작가와비평봄밤을 자박자박 거닐 듯 삐뚤빼뚤 걸어가는 어린아이의 신앙 여정을 담아낸 이채현(스텔라, 57) 시인의 수필집. 삶의 신앙 여정을 운율에 담아 수필로 풀어냈다. 고 김수환 추기경의 어록, 성경 구절, 요셉의원을 지켰던 고 선우경식 원장을 다룬 신문 지면, 가톨릭 성가 ‘보았나 십자가의 주님을’ 등 삶에서 만난 신앙의 묵상 거리를 글의 소재로 끌어다 썼다. △묻고 싶은 것이 너무 많은, 하나 스스로 찾아야 하는 △사랑하지 못하는 마음을 바꾸어 사랑할 수 있게 된다면 △나는 맨 나중에 온 이 사람에게도 당신에게서처럼 품삯을 주고 싶소 등 모두 4부로 구성했다. 순수하면서도 깊고, 때론 갈팡질팡하며 하늘을 향해 삿대질도 하는 저자의 걸음마 같은 신앙 여정을 동행하다 보면 어느새 마음은 하늘 언저리에 닿아있다. “소와 사자가 서로 깊이 친해졌을 무렵 서로를 위해 각기 가장 좋은 것을 주고 싶어, 소는 사자에게 여물을 사자는 소에게 고깃덩이를 주었다 하나 먹을 수 없었음을. 이 얘기는 말한다. 사랑은 내가 좋아하는 것을 주는 것이 아니라 네가 원하는 것을 주어야 함을, 내가 원하는 대로 하라고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네가 원하는 것을 기꺼이 찾아 해주려는 것이어야 함을.”(‘그럴 때면 항상 한 치를 더 자라던 꽃이 아니더냐’ 중에서) 이 시인은 1988년 이화여대 국어국문학과를 졸업하고, 프리랜서 작가로 활동하고 있다. 시집으로 「그대에게 그런 나였으면」,「하늘에서 꽃이 내리다」등이 있다. “겨울에서 봄으로 가며, 새침데기처럼 토라지기도 하고 / 가다가 드러누워 떼도 쓰고 / 하늘에 허공에 삿대질도 하고 // 허허 벌판에서, 밟혀 아픈 잡초의 망막함 / 광풍 폭우 뇌진에 그래도 사람들 찾는 / 그 사랑 어찌 해야 할지 몰라 두리번두리번…”(‘저자의 말’에서) 이지혜 기자 문채현2020.08.05
반드시 마스크 쓰고 증상 의심되면 대송주교회의, ‘미사에 참여하는 신자들이 지켜야 할 수칙’ 공지 주교회의는 3월 26일 신자들과 함께하는 공동체 미사 재개를 준비하는 전국 교구와 본당에 ‘미사에 참여하는 신자들이 지켜야 할 수칙’을 공지했다. 이 수칙은 코로나19 중앙사고수습본부와 중앙방역대책본부, 각 지방자치단체와 교구에서 발표한 코로나19 감염 예방 수칙 내용을 바탕으로 주교회의 사무처가 정리한 것이다.주교회의는 미사가 재개되더라도 코로나19 증상이 의심되면 미사에 참여하지 말라고 신자들에게 당부했다. 주교회의는 △확진 여부와 관계없이 발열, 기침, 인후통, 숨 가쁨, 감기, 기관지염, 폐렴 같은 호흡기 증상과 설사, 근육통, 피로감 등의 코로나19 감염 증상이 있는 신자 △최근 2주 이내에 해외여행력이 있는 신자 △고령자(65세 이상), 임산부, 만성질환자 등과 같이 코로나 19에 감염될 경우 건강에 위협을 받을 수 있는 신자 △면역력이 약한 어린이에 대해 미사 참여 의무를 관면했다. 주교회의는 주일 미사에 참석할 수 없는 신자들은 집에서 방송 미사와 묵주기도, 성경 봉독(말씀 전례), 선행 등으로 미사 참례 의무를 대신하도록 권고했다. 주교회의는 또 미사 참여자에게도 감염자가 확인될 경우 역학 조사에 대비해 성당 입구에 마련된 장부에 이름과 세례명, 전화번호 등을 반드시 써넣으라고 당부했다. 더불어 △모든 신자는 미사 시간 내내 마스크를 착용하고, 성체를 모시는 순간에만 마스크를 벗는다 △미사 중 회중이 함께하는 성가나 기도문 합송은 되도록 피한다 △미사 도중 기침이나 재채기를 할 때에는 마스크를 착용해도 옷소매로 입과 코를 가린다 △미사 중에 손을 잡지 않으며, 악수 등 신체 접촉을 피한다 △개별 성체 분배 때에는 ‘아멘’을 침묵 중에 각자 속으로 한다 △신자들은 양형 영성체를 하지 않는다 △성경과 성가집은 공용이 아닌 개인의 것을 사용하며, 헌금 봉투 등의 물품을 공동으로 사용하지 않는다 등의 수칙을 준수해 달라고 요청했다. 백영민 기자 heelen@cpbc.co.kr 평화신문2020.04.01
![[사도직현장에서]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cpbc.co.kr/CMS/newspaper/2020/08/rc/786036_1.0_titleImage_1.jpg)
[사도직현장에서]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김재덕 신부(대전교구 대화동본당 주임) 김재덕 신부 저에게는 하느님께서 주신 아주 특별한 선물이 있습니다. 결정적인 순간에 하느님 말씀이 생각나서, 그 말씀을 실천하게 되는 은총입니다. 하루는 본당 자매님께 전화가 왔습니다. “신부님, 저희 아버님이 곧 돌아가실 것 같은데요, 오셔서 대세 좀 주세요.” 전화를 받자마자 수녀님과 함께 병원으로 갔습니다. 대세를 받으실 형제님께서는 몸을 거의 움직이지 못할 정도로 많이 쇠약해지신 상태였습니다. “형제님, 안녕하세요? 저는 따님 본당 신부에요. 대세 받기를 원한다셔서 왔습니다. 대세를 받으려면…”이라고 말하며 천주교 4대 교리를 설명했습니다. 그리고 난 뒤 “형제님, 하느님 믿으시겠어요?”라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그 형제님께서는 눈도 못 뜨신 상태로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마세요.” 얼마나 당황했는지 모릅니다. 그래서 다시 여쭸습니다. “형제님, 대세 받으려면 하느님 믿으신다고 말씀하셔야 해요. 하느님 믿으실 거죠?” 그러자 그 형제님이 대답하셨습니다. “시답잖은 얘기 그만하세요.” 결국, 따님께 설득해달라고 부탁했지만, 끝까지 천주교 신앙을 받아들이지 않으셔서 대세를 드리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며칠 뒤, 다시 그 자매님께 “아버님께서 곧 돌아가실 것 같다며 대세를 부탁한다”는 전화가 왔습니다.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하게 되었습니다. 천주교 신앙을 명확하게 거부하셨는데, 대세를 주는 것이 망설여졌습니다. 그때 갑자기 성경 말씀이 생각났습니다. “예수님께서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중풍 병자에게 말씀하셨다. 얘야, 용기를 내어라.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마태 9,2)왜 갑자기 이 말씀이 생각이 났을까 하고 고민하던 중에,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 예수님께서도 중풍 병자를 데려간 사람들의 믿음을 보고 중풍 병자의 죄를 용서해 주셨는데, 내가 지금 왜 이러고 있지? 하느님 감사합니다! 저 지금 가겠습니다.’그리고 병원으로 달려가 의식이 없는 형제님께 대세를 주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자매님의 믿음을 보고 형제님께 대세를 줍니다.”김재덕 신부(대전교구 대화동본당 주임) 평화신문2020.08.25
![[수도 전통에 따른 렉시오 디비나] (19)능동적인 독서의 수행](//cpbc.co.kr/CMS/newspaper/2019/12/rc/769117_1.1_titleImage_1.jpg)
[수도 전통에 따른 렉시오 디비나] (19)능동적인 독서의 수행눈으로 보고, 소리 내 읽고, 귀로 듣고 허성준 신부 렉시오 디비나에 있어 귀고 2세의 문헌이 중요하지만, 그가 제시하는 첫 번째 단계인 성경 독서에 대한 것은 고대 수도승들의 전통에서 행했던 단순한 성경 독서의 수행과는 약간 거리가 있다. 한 예로 귀고는 독서를 설명하면서 라틴어 단어 ‘inspectio’를 사용했는데, 이 단어의 뜻은 관찰, 조사, 고찰을 의미한다. 귀고에게 독서란 본문을 주의 깊게 관찰하거나 혹은 조사하고, 고찰하는 것을 의미한다. 특별히 이 점은 고대 수도자들이 온 마음으로 성경을 소리 내어 읽고 암기했던 수행과는 차이가 있다. 그래서 필자는 가능하면 귀고의 4단계 전체적인 도식은 받아들이지만, 그의 견해보다는 더 원천적으로 고대 수도승 전통의 문헌들로부터 그 근거를 가져오고자 한다. 전통적으로 고대의 수도승들은 성경을 읽을 때, 오늘날과 같이 단순히 눈과 머리만 이용해서 대충 그리고 빨리 읽지 않았다. 그들은 천천히 눈으로 본 내용을 입술로 작게 소리 내어 읽고 직접 귀로 듣고 또 그것을 기억과 마음에 간직하였다. 이것은 우리의 전 존재를 활용하는 능동적인 독서의 수행이다. 사실 고대에서 의사들은 종종 환자들에게 걷고 달리는 운동과 같은 하나의 훈련으로서 독서의 처방을 내주기도 하였다. 그것은 독서가 인간의 다양한 기능을 사용하는 전인적인 운동이었기 때문이었다. 성경에도 그 옛날 독서는 오늘날과 같은 묵독이 아니었다는 증거를 볼 수 있다. 사도행전에 나오는 필리포스의 이야기는 그 하나의 예이다. 에티오피아 고관이 예루살렘에 왔다가 돌아가는 길에 마차에 앉아서 이사야 예언서를 읽고 있었다. 그때 필리포스가 가까이 다가가니, 그가 이사야서를 읽고 있는 것을 들었다고 한다.(사도 8,26-30) 즉 그 당시 독서는 소리 내어 읽고 듣는 것이었다.사막 교부들의 금언집에도 다음과 같은 예가 나온다. 어느 날 세 명의 수도승들이 한 원로를 찾아가서 저마다 자기들의 수행에 대해서 말씀드리기 시작하였다. 한 형제가 “스승님, 저는 구약과 신약을 모두 암기하였습니다!”라고 자랑스럽게 말하였다. 그러자 원로는 즉시 그에게 “어지간히 시끄러웠겠소!”라고 대답하였다고 한다. 왜냐하면, 그 당시에 말씀을 읽고 묵상한다는 것은 당연히 성경을 소리 내어 읽고 암송하는 수행이었기 때문이다.아우구스티노 성인 시대에도 일반적으로 독서는 소리 내 행하였다는 사실을 우리는 「고백록」에서 발견하게 된다. 어느 날 아우구스티노가 암브로시오 성인을 방문했을 때, 그가 책을 읽고 있었는데 혀로는 소리 내지 않고, 눈으로 책장을 젖히고, 마음으로 그 뜻을 새겨 나가는 것을 보고 무척 놀랐다고 전하고 있다. 이러한 근거는 오늘날 독서학에서도 근거로 제시되고 있다. 「베네딕도 규칙서」에서도 여름철 동안 식사 후에 형제들은 침묵 중에 휴식을 취하든지, 아니면 개인적으로 독서를 원하는 사람은 독서를 하되 남을 방해해서는 안 된다고 주의를 주고 있다.(48,4-5). 이것은 그 당시 독서를 한다는 것이 작게 소리 내어 읽고 듣는 수행이었기 때문이었다. 성경을 눈으로 보고, 본 내용을 천천히 입으로 작게 소리 내고, 소리 낸 내용을 다시 자신의 귀로 귀 기울여 듣는 전인적인 독특한 독서 수행이 바로 수도승 전통에서 전해준 훌륭한 영적 유산이다. 이것은 성경 독서 시간에 본문을 구조 분석하는 방법과는 차이가 있다.허성준 신부(성 베네딕도회 왜관수도원) 평화신문2019.12.17

인노첸시오 3세 교황, 1209년 작은 형제들 회칙 인준 [예수 그리스도와 복음의 인격 그리고 프란치스칸 영성]-6 인노첸시오 3세 교황은 1209년 작은 형제들의 수도회 회칙과 생활을 구두로 인준했다. 첫 번째 추종자들과 수도회 인준프란치스코가 포르치운쿨라에서 첫 번째 형제들을 받아들이게 된 것은 바로 몇 주 후의 일이었다. 그들 중 첫 번째 사람은 아시시의 부유한 젊은이인 퀸타발레(Quintavalle)의 베르나르도였다. 그는 프란치스코를 자기 집에 초대하여 (우연히도 그의 집은 아직 아시시에 남아 있다) 저녁 식사를 함께하였다. 밤에 프란치스코는 그 친구의 집에서 묵었는데, 베르나르도는 프란치스코가 밤새도록 기도하고 있었던 것을 알아차렸다. 그다음 날 아침 베르나르도는 과감한 결정을 내렸다. 프란치스코와 함께 그는 아시시 광장에 있는 성 니콜라오 성당으로 가서, 함께 하느님의 뜻을 찾기 위해 복음서를 들춰보았다. 세 번이나 성경을 펼쳤는데 다음의 구절들이 나왔다. “네가 완전한 사람이 되려거든, 가서 너의 재산을 팔아 가난한 사람에게 주어라. 그러면 네가 하늘에서 보물을 차지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와서 나를 따라라.” (마태 19.21); “길을 떠날 때에 아무것도 가져가지 마라.” (루카 9,3);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루카 9,23) 이 성경 말씀들은 프란치스코가 시작한 복음 운동에 있어서 삶과 회칙의 근간을 이루게 되었다. 같은 해인 1208년 4월에 두 명의 형제가 더 프란치스코와 베르나르도의 삶에 가담하였는데, 그들은 대성당 참사위원이었던 베드로 카타니(Pietro Cattani)와 에지디오(Egidio 혹은 Giles)였다. 이날은 4월 23일이었다. 그들이 합류하자마자 그들은 둘씩 짝지어 설교 여행을 떠났다. 프란치스코와 에지디오는 안코나(Ancona)의 마르키아(혹은 마르케-Marches)로 갔다.인노첸시오 3세 교황의 수도회 인준1209년 프란치스코는 형제들을 위해 간단한 회칙을 써 주었다. 이것은 주로 앞에서 인용한 복음 내용과 비슷한 복음 구절들로 구성되었다. 그는 대담히도 동료들을 데리고 로마에 가 인노첸시오 3세 교황을 만나 자신들의 생활양식을 인준해줄 것을 청하기로 결심하였다. 이것은 참으로 용감한 행동이었다. 인노첸시오 3세 교황은 그런 평신도 설교자 그룹에 대해서 의심스럽게 바라보았다. 사실 교황은 그런 사람들을 많이 보았다. 왜냐하면, 이런 그룹의 사람들 대부분은 이단적인 모습을 보였기 때문이다. 그들은 복음을 설교하였고, 제도 교회의 성직자에 대해 직접적으로 반대되는 측면에서 복음적 가치들을 살았다. 교회의 성직자들은 비윤리적으로 복음을 설교하는 것에 대해서와 추문이 될 만한 그들의 예식들에 대해서 비난하였다. 당시 많은 이단 그룹이 있었는데, 특히 프랑스 남부 지방과 이탈리아 북부 지방에 많이 있었다. 이들 중 카타리파 이단이 가장 위험한 그룹이었다. 마치 평신도가 교회의 제도에 대항하여 치솟아 오르는 것 같았다. 그러나 인노첸시오 3세 교황은 통찰력이 뛰어난 정치가였을 뿐만 아니라 교회의 머리였다. 그는 성 바오로의 요한(Giovanni Colonna de San Paolo)추기경이 데리고 온 이 거지 그룹에 대해서 많은 의구심을 품었지만, 그 후 프란치스코가 이단에 빠지지 않고 평신도들과 성직자들 사이에서 순수한 개혁을 시도하는 데 있어서 도구가 될 것이라고 판단하였다.(전통에 의하면 교황이 꿈에서 교회를 어깨로 떠받치고 있는 사람을 보았다고 하는데, 그 사람이 바로 프란치스코이다.) 그래서 인노첸시오 3세 교황은 작은 형제들의 수도회의 회칙과 생활을 구두로 인준해 주었다. 프란치스코는 자신의 형제들을 작은 형제들이라고 불렀는데, 그는 형제들이 그리스도와 사도들의 모범을 따라 진정한 형제들로서, 그리고 진정한 의미의 미천한 이들(minores)로서 살 것이라고 믿었기 때문이었다.12명의 형제로 구성된 이들은 기쁨에 넘쳐 아시시로 되돌아왔다. 그들은 오르테(Orte)에서 잠시 머문 후, 포르치운쿨라에서 약간 떨어진 리보 토르토(Rivo Torto)에 정착하였다. 이곳에서 그들은 나환우들을 돌보는 일을 하며 몇 달간 극도의 가난 속에서 살았다. 성녀 클라라의 합류와 클라라회의 시작포르치운쿨라 성당에서 있었던 또 다른 중요한 역사적 사건 하나는 1211년에 일어났다. 3월 18일에서 19일로 이어지는 밤에 클라라가 아시시의 자기 집에서 뛰쳐나와 그 도시 성문을 열어내고는 포르치운쿨라로 향하였다. 이 계획은 귀도 주교의 허락 하에, 클라라와 프란치스코 사이에서 조심스럽게 꾸며졌던 것 같다. 그날은 주님 수난 성지 주일이어서, 클라라는 대성당에서 거행되었던 그리스도의 영광스러운 예루살렘 입성 기념 미사에 참여하였다. 클라라는 모든 사람이 잠든 틈을 타, 집을 나올 계획을 실행하였던 것이다. 몇 달 동안 클라라는 프란치스코를 비밀리에 만나 자기도 이 운동에 가담하고 싶다고 말했다. 그래서 그들은 결국 그들의 계획을 실행에 옮기기로 결정하였다. 호명환 신부(작은형제회)cpbc2020.08.19

코로나19의 고통, 인류 사랑하시는 하느님의 눈빛 찾아야 할 때[특별기고] 고통에 대한 오해와 진실 / 김혜윤 수녀(미리내성모성심수녀회 총원장) 인간은 고통, 특히 약한 이들과 정의로운 이들까지 무차별적으로 덮치는 코로나19 사태와 같은 환난 속에서 ‘하느님은 왜?’라는 의문을 갖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하느님은 그 어느 때보다 강한 사랑과 연민으로 우리를 지켜보시며 함께 아파하고 계신다. 스페인 세베로 오코아병원 의료진이 바이러스에 감염돼 사망한 동료 간호사의 장례식장에서 부둥켜안고 울고 있다. 【CNS】 하느님은 왜?불과 몇 달 사이에 고통의 땅이 되어버린 지구촌 곳곳에서 절박하게 터져 나오는 탄식은 ‘왜?’라는 질문입니다. 왜 하느님은 이토록 고통스러운 상황을 허락하시는지? 면역력 약한 노약자들과 비위생적 환경에 노출될 수밖에 없는 가난한 이들이 누구보다 먼저 감염되고 죽어가는 상황을 목격하면서 도대체 이 비극을 누가 주도하고 있는지? 질문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사실, 하느님에 대한 논의 중 가장 불편한 것 중의 하나가 ‘신정’(神正, 하느님의 정의)에 대한 것입니다. 인간을 사랑한다면서, 실제적으로는 불의한 고통과 괴로움에 몰아넣고 공포와 위협으로 무기력하게 하며, 비참과 혐오에 지쳐 복종하게 하고 그렇게 모욕적이게 길들이는 듯한 하느님을 과연 ‘정의로운 분’이라고 할 수 있는가? 또 교회는 이러한 기만과 위선을 조직적으로 유지하는 장치이며, 종교는 고통으로 무감각해진 이들을 그저 버티게 하는 ‘아편’에 지나지 않는 것은 아닌지, 의구심에 휩싸이게 될 때가 종종 있기 때문입니다.하느님 탓이 아니다답부터 말씀드리자면 하느님은 정의로운 분이시고 구원자이신 분 맞습니다. 그분은 일관되게 세상과 인류를 사랑하시고, 인간 하나하나를 누구보다 잘 이해하시며 끊임없이 소통하기를 원하시는 분이십니다. 세상과 인간을 창조하시고 축복하신 분이시니 당연히 인간 친화적이고 자연 친화적일 수밖에 없는 분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사랑하는 이들에게 벌주는 것을 본성적으로 싫어하는 분이십니다. 인간의 죄로 인해 어그러진 관계를 회복하시기 위해 외아드님 예수 그리스도의 수난과 죽음까지 허락하신 분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코로나19를 통한 현재의 고통은 하느님께서 허락하신 것이 아니라 인간 스스로 자초한 재앙임을 인식할 필요가 있습니다. 야만과 착취, 신자유주의적 부조리와 계급주의적 불평등, 그로 인한 사회악이 초래한 참극입니다. 고통에 대한 교리적 이해가톨릭교회의 진리를 종합하고 있는 「가톨릭교회 교리서」는 고통으로부터 인간을 해방하는 마술 같은 처방을 내주는 매뉴얼이 아닙니다. 구원의 실체란 고통으로부터의 물리적 탈출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이 어떤 분이신지 정확히 알고 그 관계성을 사는 것임을 선포하는 것이 그리스도교 신앙의 핵심이기 때문입니다. 가톨릭교회는 다만, 고통이 인간의 피할 수 없는 실존적 조건임을 인정하고(「가톨릭교회 교리서」 164, 272, 309, 1505, 1521항 참조), 고통의 신비야말로 인간이 진정한 구원에 이르는 은총임을 강조합니다.(성 요한 바오로 2세 교황 교서 「구원에 이르는 고통」 Salvifici Doloris, 이하 SD, 1984) 그리고 동시에 하느님께서 직접 이 고통의 현실에 현존하시며 그 문제를 해결해주심을 알려줍니다.(SD 10항, 30항 등) 고통에 대한 성경적 이해성경 전체는 고통의 현장에서 부르짖으며 구원을 갈망한 이스라엘과 그들을 만나주신 하느님에 대한 신앙의 진술이며 고백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교회는 성경을 “커다란 고통에 관한 책”(SD 6항)이라고까지 규정합니다.원죄 이야기: 성경은 창세기부터 죄와 고통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원죄에 대한 신학을 제시한 창세기 3장은 죄란 ‘인간이 하느님처럼 되려 하는 것’(창세 3,5 참조), 즉 ‘인간 스스로 하느님이 되어 하느님이 더는 필요 없게 되는 것’, 그래서 ‘하느님을 망각하고 인간의 역사에서 지워버리는 것’을 의미함을 알려줍니다. 하느님을 잊어버리고 저버리며 그렇게 멀어지게 될 때 생기는 문제를 성 아우구스티노는 “하느님을 소외시킬 때 인간은 탐욕에 휩쓸리게 된다”고 간파한 바 있습니다. 신학자 폴 틸리히 역시 “하느님을 소외시킬 때 궁극에는 인간 자신이 소외된다”고 일갈하였습니다. 인간 스스로 하느님의 자리에 올라 탐욕적 본능으로 세상에 군림할 때 필연적으로 도래하게 되는 결과는 생태적 무질서와 파괴, 인간성 훼손임을 이미 신학은 예견해온 것입니다. 무엇보다 생명의 원천이신 하느님과의 단절은 생명 자체가 차단되는 상황, 즉 고통과 억압이 지배하는 죽음의 현실을 초래하고 만다는 것을 성경은 엄중히 경고합니다. 바로 이러한 비극을 원치 않으셨던 분이 하느님이시기에, 원죄 설화는 인간의 범죄에도 불구하고 아담을 보호하시고 살려두시는 모습으로 마무리됩니다.(창세 3,21; 4,1) 욥기의 신학: 성경은 고통에 대한 유다인들의 전통적 사고인 ‘신명기적 사고’를 기저에 두고 전개됩니다. 이 사상은 고통을 ‘죄로 인한 벌’로 인식하는 ‘인과율적(因果律的) 논리’라고 할 수 있는데, 이 사고로는 무죄한 이들의 고통이나 선하게 살았지만 불시에 고통을 마주하게 된 이들의 문제를 합리적으로 설명하지 못한다는 한계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결국, 신명기적 사고는 전통사상으로서의 위상을 서서히 상실해갔고 그 대안으로 제작된 책이 욥기입니다. 욥기는 불현듯 들이닥친 비극에 ‘왜?’라는 질문을 던지고, 종국에는 하느님을 만나 그 답을 찾는 내용으로 되어있습니다. ‘고통은 왜?’에 대한 답을 ‘하느님과의 올바른 관계’에서 찾은 것이고, 불현듯 다가온 고통을 하느님을 직접 만나게 되는 은총으로 이해합니다.고통의 순기능우리 앞에 던져진 모든 삶의 문제는 답을 가지고 있다고 합니다. 많은 학자가 코로나19 사태에 대한 다양한 의견을 내놓는 상황에서 거의 한목소리로 동의하는 것은 코로나19로 이제 세계사회의 거대한 구조변경이 시작되었고, 앞으로의 역사는 코로나 이전과 이후로 나뉠 것이라는 전망입니다. 이렇게 중대한 역사적 전환기에 서 있는 인류가 다시 신앙의 본질을 언급하며 구원의 길을 모색하는 이유는 그리스도교 신자들이 과학적으로 무지해서도, 종교라는 위험한 아편에 빠져있어서도 아닙니다. 고통과 죽음이 돌이킬 수 없는 인간의 실존이라면, 이제 중요한 것은 이 시간을 통한 배움이고 진정성 있는 변혁이기 때문입니다. 불확실성이 주는 공포와 불안에 휘말려 점점 더 치명적인 어둠에 지배당하지 않으려면 우리는 궁금해해야 하고 질문해야 합니다. 이 위기가 아니라면 절대 묻지 않았을 바로 그 삶의 본질을 똑똑히 배워야 합니다. 고통이 가르쳐준 진실 일반적으로 악과 고통은 상호성을 가진 것으로 알려졌지만, 고통을 악과 동일시할 수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고통이 그 어느 인간적 체험보다 굵직한 통찰과 영적 갈망을 주고, 삶의 중심을 하느님께 옮기게 하는 계기가 된다면 그것은 자체로 귀한 은총이며 선물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평범한 일상이 막히고 금지되어 갇혀버린 이 낯선 변화 속에서, 모든 문제의 원인을 하느님께 전가한 채 더욱 왜곡된 혼란에 빠지는 것보다 훨씬 더 비장하게 집중해야 할 일은, 인류를 그 어느 때보다도 강한 사랑과 연민으로 지켜보시며 아파하시고 안쓰러워하시는 하느님의 눈빛을 찾아내는 일입니다. ‘잘못’은 하느님께 있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을 ‘잘못’ 이해하고 그분의 뜻을 ‘잘못’ 해석하여 ‘잘못’ 실행한 인간에게 있음을 민감하게 포착할 필요가 있기 때문입니다. 어쩌면 우리의 미래는 이 시간을 통해 고통의 진실을 배운 자와 그렇지 못한 자로 구별되어 진행될지도 모릅니다. 고통의 밑바닥까지 내려가 지내야 했던 지난 몇 달간, 혹독하게 학습하고 단련한 통찰로 다시 겸손하게 시작하는 것, 눈물과 뭉클한 감동, 웃음과 슬픔을 체험하며 그 대가로 회복한 인간 본연의 존엄과 품격으로 주변을 보듬는 것, 그런 멋짐과 근사함을 온전히 발휘하며 사는 것, 이것이 지금 우리에게 바라시는 하느님의 뜻입니다. 이제는 정말 잊지 말고 견고하게 기억해야 하는. cpbc2020.04.16
강원도 양양 일곱 형제의 애틋한 사모곡그리운 어머니 / 양양 송전칠형제회 엮음 / 서교출판사 ‘어머니’는 모든 자녀에게 아낌없이 주는 큰 나무 같은 존재다. 어머니가 준 흘러넘치는 사랑과 돌봄, 신앙심은 자식들 가슴에 고스란히 새겨져 평생 아름드리 숲을 이룬다.1955년 열아홉에 강원도 양양댁에 시집온 이순남(데레사, 2019년 선종) 여사는 일곱 아들을 낳고, 모두 주님 안에 사랑으로 키웠다. 아무리 자식을 많이 낳던 때였다 해도 아들만 일곱을 본 ‘양양 칠 형제 집안’을 이끌었다. 먹고 살기 힘든 시절, 억척같이 시골 논밭을 일구면서도 이순남 여사는 가족과 이웃을 참사랑으로 대했다.형제들의 어머니는 걸인들을 내치는 법 없이 손에 밥 한 움큼, 뜨끈한 국물 한 사발이라도 건넸고, 교통사고로 크게 다친 긴급한 상황에서도 “다른 사람이 뭐라 해도 그 사람을 용서해주라”며 자녀들을 타이르는 사랑의 모범이었다. 고된 일과 속에도 새벽마다 묵주기도를 바치고, 이 여사의 성경 필사 완필 의욕은 손가락 관절염도 꺾지 못했다. 2019년 1월 선종하기 전까지도 성경을 손에서 놓지 않고, 주일을 지켰던 어머니 이야기를 형제들과 며느리, 손자들이 합심해 엮었다.큰 사랑과 신앙의 빚을 진 어머니를 그리며 함께했던 지난날을 회고하는 자식들의 노래다. 어려워도 자녀들의 생일이면 꼭 따뜻한 새 밥을 차려준 이야기, 집에서 양양성당까지 4㎞가 넘는 길을 걸어서 교리교육을 받으며 하느님 자녀로 거듭나 신앙을 전수한 어머니의 이야기가 펼쳐진다. 고계연(베드로, 둘째, 가톨릭언론인협의회) 회장과 고봉연(춘천교구 임당동본당 주임, 여섯째) 신부를 비롯한 자녀들의 어머니를 향한 애틋한 마음이 가슴을 따스하게 만든다.어머니의 선종 1주기를 맞아 펴낸 「그리운 어머니」는 일곱 형제 성가정 이야기이기도 하지만, 모든 위대한 어머니를 떠올리게 하는 따스한 ‘사랑의 교과서’이기도 하다. 이정훈 기자 sjunder@cpbc.co.kr 평화신문2020.03.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