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돈이 안 되더라도 교회에 꼭 필요한 서적은 만들어야30주년 맞은 출판사 ‘기쁜소식’ 전갑수 사장 기쁜소식 전갑수 사장은 1989년부터 30년 동안 출판사를 운영하며 신자들에게 책을 통해 선교해왔다. “이런 책 내면 밥 먹고 살아요?”기쁜소식 전갑수(베르나르도, 65) 사장이 종종 듣는 말이다. 출판사를 운영한 지 올해로 30년, 전 사장은 “문 닫지 않고 살아온 게 기적”이라고 했다.1989년 12월 8일, 성경을 통한 그리스도인 재복음화에 뜻을 두고 기쁜소식을 설립했다. 당시 프랑스 유학을 마치고 온 안병철 신부(서울대교구)를 만나 ‘성서못자리’ 교재를 펴낸 게 첫 출판물이었다. 그가 신자 재복음화에 관심을 가진 건 1984년 교황 요한 바오로 2세 방한과 한국 천주교회 200주년 기념대회 및 103위 시성식을 마치면서였다. 당시 가톨릭 신자는 폭발적으로 양적 팽창했지만 정작 교회에서는 신자 증가에 따른 예비자 교리반 운영 대책은 없었다. 출석 확인 도장만 받으면 세례와 견진성사를 받던 시절이었다. 당시 가톨릭출판사 직원이었던 전 사장은 한 노 사제가 신자 재교육의 필요성에 대해 절박하게 했던 말을 마음에 담았다. 신자 재복음화를 목표로 책을 통한 선교, 책을 통한 신자 재복음화를 목표로 기쁜소식은 항해를 시작했다. 첫 출판물 성서못자리 교재는 모두 23권으로, 완간하는 데 12년이 걸렸다. 지금까지 15만 부가 팔렸다. 거꾸로 말하면 15만 부를 파는 데 30년이 걸렸다. “15만 부, 많은 거 같죠? 15만 부를 30년으로 나누면, 1년에 5000권입니다. 한 달에 400권 판 거죠. 책값을 평균 8000원으로 치면, 한 달에 320만 원입니다. 원가를 뺀 수익 20%면 64만 원이 남죠. 직원이 9명인데….” 지금까지 밥 먹여 준 건 안 팔릴 줄 알았는데 팔린 책들 덕분이었다. 그가 기쁜소식의 역사를 기적이라고 하는 이유다. 2005년 기쁜소식은 십자가의 성 요한(1542~1591)의 저작 4권(어둔밤ㆍ가르멜의 산길ㆍ사랑의 산 불꽃ㆍ영가)을 선보였다. 스페인 유학 중 신비신학의 꽃으로 불리는 성 요한의 영성에 매료된 방효익(수원교구) 신부가 우리말로 옮겼다. 방 신부는 여러 곳의 교계 출판사에 출간 의뢰를 했지만 모두 책이 팔리지 않는다고 망설이는 것을 보고 좌절하던 차에 우연히 전 사장을 만났다. “영성 서적은 안 나간다는 게 고정 관념이었죠. 기절할 뻔했습니다. 책을 출간하자마자 6000질이 나갔어요. ‘십자가의 성 요한 책이 한국말로 나올 줄 꿈에도 몰랐다’면서 개신교 목사들이 1000질을 사갔어요. 미국에 있는 한국인 목사한테도 연락이 왔죠.”영성에 목마른 신자들 갈증 풀어줘 그는 한국 교회 신자들이 영성에 목말랐다는 걸 알았다. 영성에 대한 갈증을 풀어줄 다양한 영성을 소개하고 싶은 열정이 커졌다. “영성 서적을 낼 때마다 망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은 있습니다. 여태껏 해보니 ‘죽기 아니면 살기’로 달려드니 살더라고요.”2012년부터 펴내고 있는 가르멜 총서도 그의 역작이다. 가르멜 영성의 대가인 예수의 대 데레사 성녀, 아기 예수의 데레사 성녀, 십자가의 성 요한, 에디트슈타인 성녀, 삼위일체의 엘리사벳 성녀 저서를 중심으로 총 100편을 목표로 출간을 이어가고 있다. 한국 교회에서 가르멜 영성의 독보적인 영성신학자인 윤주현(가르멜수도회 한국관구장) 신부가 기획 번역하고 있는 이 총서 역시 큰 사랑을 받고 있다. 지금까지 기쁜소식이 출간한 교재와 단행본은 600여 종이 넘는다. 종별 발행 부수는 평균 2000부 이상이다. 달력을 비롯해 기도문, 축복장, 사목 계획서 등 본당 행정에 필요한 각종 문서도 제작한다. 주교회의가 편찬한 「한국 천주교 성지순례」도 기쁜소식 기획으로 나왔다.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이 책자를 들고 다니며 순례할 신자들을 위해 비닐 가방을 만든 것도 그의 아이디어였다.그는 “2000년대가 영성의 시대였다면 지금은 문화 복음화 시대로, 함께 어우러져 주고받는 시대”라며 “늘 책을 통한 선교를 고민하겠다”고 밝혔다.전 사장은 “기쁜소식을 사랑해주신 주교님과 신부님, 수녀님, 사무장과 사무원들과 어려운 여건에도 기쁜소식을 지켜온 가족들에게 머리 숙여 감사드린다”며 “언제나 기뻐하십시오, 끊임없이 기도하십시오, 모든 일에 감사하십시오”(1테살 5,16-18)라는 말씀을 가슴에 안고 새로운 30년을 향해 최선을 다해 뛰겠다”고 고마움을 표했다.30주년 행사는 없다. 직원들과 함께 소박한 감사 미사를 봉헌한다. 이지혜 기자 bonaism@cpbc.co.kr 평화신문2019.11.27
연재를 시작하며](//cpbc.co.kr/CMS/newspaper/2019/01/rc/742794_1.1_titleImage_1.jpg)
[이창훈 위원의 사도행전 이야기](1)연재를 시작하며땅 끝까지 복음 선포한 사도들의 여정왜 사도행전인가 성경을 펼쳐보면 사도행전은 신약성경 27권 가운데 네 복음서와 21권의 서한 사이에 있습니다. 차례만 놓고 본다면, 사도행전은 네 복음서와 서간들을 연결한다고 할 수 있겠지요. 실제로 사도행전은 복음서와 서간을 연결하는 역할을 합니다. 어떤 의미에서냐고요? 복음서들은 모두 예수님에게 집중합니다. 예수님의 가르침과 행적, 그분의 삶과 죽음과 부활에 초점을 맞추고 있지요. 복음서들은 예수님이 누구이신지를 제시하려는 것이 목적이기 때문입니다. 지난 2년 동안 루카복음의 예수님 이야기를 통해서 살펴보고자 한 것이 바로 이것이었습니다. 한마디로 예수님은 그리스도, 곧 인간을 구원하기 위해 사람이 되신 하느님의 아들이시라는 것입니다. 반면에 신약성경에서 21권에 이르는 서간들은 예수님을 그리스도라고 믿고 고백하며 예수님의 가르침을 따라 살아가는 신자 공동체나 개인에게 보내는 편지들입니다. 이 신자 공동체들을 교회라고 부르지요. 주목할 것은 편지의 수신인이 되는 신자 공동체들은 예수님께서 태어나시고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시면서 활동하시고 수난당하시고 죽으시고 부활하신 땅에 있는 공동체들이 아니었다는 사실입니다. 그 공동체들은 소아시아 곧 오늘날 터키 지역을 비롯해서 그리스와 로마까지 지중해 인근 지역 곳곳에 산재해 있었습니다. 이 교회들은 어떻게 해서 생겨났을까요? 바로 사도들의 복음 선포 활동을 통해서입니다. 사도들은 누구인가요? 예수님께서 하느님 나라의 기쁜 소식을 전하는(루카 5,43) 활동을 시작하시면서 당신을 따르는 제자들 가운데 친히 뽑으신 12명입니다. 이들은 집과 가족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라다니면서 사도, 곧 파견될 사람으로서 제자 교육을 받은 이들입니다. 이들은 서로 높은 자리를 차지하려 다투기도 했지만(루카 9,46; 22,24), 예수님 생전에 마귀를 쫓아내고 질병을 고치는 힘과 권한을 받아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는 활동을 했던 이들입니다.(루카 9,1-6) 하지만 공관복음서들에 따르면, 열두 사도는 결정적인 순간에 곧 예수님께서 붙잡혀 수난하시고 죽으실 때에 모두 예수님을 떠나고 말았습니다. 예수님께서 사도들 가운데 으뜸으로, 반석으로 세우신 시몬 베드로마저도 예수님을 세 번이나 모른다고 부인했지요. 그뿐 아니라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나타나셨을 때도 이들은 믿지 못했습니다. 루카 복음사가는 “너무 기쁜 나머지 아직도 믿지 못하고 놀라워하는데”라는 이상한(?) 표현으로 그들의 태도를 묘사했지요. (루카 24,41) 이런 사도들이 어떻게 복음을 선포하고 로마 제국의 곳곳에 교회를 세울 수 있었을까요? 그 이야기를 성경에서 유일하게 사도행전이 전하고 있습니다. 신약성경의 다른 부분들, 예컨대 바오로 사도의 서간들에서 관련된 이야기가 전혀 없는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사도행전만큼 사도들의 복음 선포 활동을 자세하게 또 박진감 넘치게 전하는 성경 본문은 다른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습니다. 사도행전은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기쁜 소식이 온 세상에 선포되는 과정을 다루는 유일하고 대표적인 책인 셈입니다. ‘예수님 이야기’에 이어 ‘사도행전 이야기’를 살펴보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예수님 이야기가 예수님이 누구이신지를 알고자 하는 데 초점이 있다면, 사도행전 이야기는 예수님이 맡기신 사명, 곧 복음 선포 활동이 어떻게 펼쳐지고 있는지에 초점을 두고 있기 때문입니다. 또 이런 점에서 ‘예수님 이야기’의 소재가 된 루카복음과 ‘사도행전 이야기’의 소재가 되는 사도행전은 일관성과 연속성을 지닌다고 하겠습니다. 이 일관성과 연속성은 루카복음을 쓴 저자와 사도행전을 쓴 저자가 동일한 사람이라는 점에서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성경학자들 사이에서는 루카복음의 저자와 사도행전의 저자가 동일인이라는 데에 반대하는 의견을 찾아보기 힘듭니다. ‘사도행전 이야기’에서는 사도행전의 저자를 루카복음의 저자와 동일 인물인 루카로 전제하면서 이야기를 풀어갑니다. ‘루카복음 이야기’와 마찬가지로 ‘사도행전 이야기’ 또한 사도행전 본문에 대한 주석이나 주해를 하려는 것이 아님을 분명히 말씀드립니다. 그럴 능력도 없습니다. 다만 본문을 통해서 사도들이 어떤 방식으로, 어떤 태도로 복음을 선포하고 있는지, 또 사도들의 복음 선포로 형성된 교회의 삶이 어떠한지를 주목하고자 합니다. 그리고 그것이 2000년이 지난 오늘의 우리에게 어떤 의미를 지니는지를 살펴보고자 합니다. 이를 통해 오늘날 교회 안에서, 또 신자들 안에서, 나아가 세상 안에서 활동하시는 성령께 어떻게 마음을 열고 귀를 기울일 수 있는지를 성찰하고자 합니다. 알아보기엘 그레코 작 ‘사도 베드로와 바오로’. 에르미타주 미술관. 사도행전이란=사도행전 본문에 들어가기에 앞서 사도행전의 구성과 집필 연도에 대해 간단히 알아봅니다. 전체 28장 31절로 이루어져 있는 사도행전은 학자마다 조금씩 차이가 있지만 크게 2부, 혹은 4부로 나눌 수 있습니다. 이런 구분은 사도행전 전체의 흐름을 좀 더 쉽게 파악할 수 있도록 해준다는 점에서 의미를 지닌다고 하겠습니다. 2부로 나눌 때 제1부는 예루살렘을 시작으로 팔레스티나(오늘의 이스라엘 땅과 팔레스타인 자치지구 일대)에서 펼쳐지는 사도들의 복음 선포 활동을 다룹니다(1,1―12,25). 여기서는 사도들, 그 가운데서도 특히 베드로의 활동이 중심이 됩니다. 제2부는 바오로 사도의 선교 활동 그리고 예루살렘에서 체포되어 로마로 압송되기까지입니다(13,1―28,31). 4부로 나누면 1부는 성령 강림과 갓 태어난 예루살렘 교회의 모습(1,1―5,42), 2부는 박해를 받으면서 성장하는 교회(6,1―12,25), 3부는 바오로 사도의 선교 활동(13,1―21,16), 마지막 4부는 바오로 사도의 체포와 로마 압송(21,17―28,31)으로 구분할 수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사도행전의 집필 연대와 관련, 학자들은 루카복음이 쓰인 이후에 사도행전이 쓰였다는 점에서 의견이 일치합니다. 이는 사도행전 첫머리에서 확실하게 유추할 수 있습니다. 학자마다 약간씩 차이가 있습니다만, 사도행전은 루카복음이 쓰인 직후인 기원후 80~90년 사이에 쓰였다는 것이 대체적인 견해입니다. 김현진2019.01.02
엠마오로 가는 길에서(루카 24,13-35)](//cpbc.co.kr/CMS/newspaper/2018/12/rc/741246_1.0_titleImage_1.jpg)
[이창훈 위원의 예수님 이야기](90)엠마오로 가는 길에서(루카 24,13-35)엠마오로 가는 제자들에게 나타나신 예수님 이야기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주님을 어디에서 만날 수 있는지를 일깨워준다. 말씀(성경)과 성찬례에서다. 그림은 렘브란트작, 엠마우스에서의 만찬 【CNS 자료사진】‘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에게 나타나신 예수님’ 이야기는 네 복음서 가운데서도 루카복음에만 나오는 대표적인 부활 발현 이야기입니다. “바로 그날”(25,13), 그러니까 여자들이 빈 무덤을 보고 제자들에게 돌아가 예수님의 시신이 없어졌다고 이야기하던 그날 제자들 가운데 두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예순 스타디온 떨어진 엠마오로 가고 있었습니다. 그때에 예수님께서 가까이 다가가 그들과 함께 걸으셨습니다만, 그들은 눈이 가리어 알아보지 못했습니다.(25,13-16) 한 스타디온은 약185m, 예순 스타디온은 약 11㎞의 거리에 해당합니다. 엠마오는 예루살렘에서 11㎞ 정도 떨어진 마을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무슨 얘기를 나누고 있느냐고 물으시자 클레오파스라는 제자가 “예루살렘에 머물렀으면서 이 며칠 동안 그곳에서 일어난 일을 혼자만 모른다는 말입니까?” 하고 반문합니다. 클레오파스의 반문은 예수님의 재판과 십자가 처형이 예루살렘에 모르는 사람이 없을 만큼 큰 사건이었음을 가리킵니다. 예수님께서 재차 물으시자 그들이 이야기를 꺼내는데 바로 ‘나자렛 사람 예수님’에 관한 이야기였습니다. 그 이야기는 두 부분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우선, 그분은 “하느님과 온 백성 앞에서 행동과 말씀에 힘이 있는 예언자”(24,19)로서 “이스라엘을 해방하실 분이라고 기대”되던 분이었는데 수석 사제들과 지도자들이 그분을 십자가형에 처하게 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일이 일어난 지 벌써 사흘째가 됐다는 것입니다.(24,19-21). 정리하면 ‘나자렛 사람 예수님은 말씀과 행동에 힘이 있는 예언자로서 이스라엘을 해방하실 분으로 기대했는데 그만 십자가형을 받아 죽고 말았다는 것입니다. 그 일이 사흘째가 됐다는 표현에는 그들이 바라던 기대가 물거품이 되고 말았다는 체념과 좌절감이 묻어난다고 할 수 있습니다. 두 번째 부분은 반전의 조짐에 관한 것입니다. 자기들과 함께 있었던 여자들이 새벽에 무덤에 갔다가 시신을 찾지 못하고 와서 하는 말이 천사들이 나타나서 그분이 살아 계시다고 말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동료 몇 사람이 무덤에 가서 보니 여자들이 말한 대로였다는 것입니다.(24,22-24) 두 제자의 말에는 예수님의 부활이 믿기지 않는다는 느낌이 풍겨납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이 어리석은 자들아! 예언자들이 말한 모든 것을 믿는 데에 마음이 어찌 이리 굼뜨냐? 그리스도는 그러한 고난을 겪고서 자기의 영광 속에 들어가야 하는 것이 아니냐?” 하고 질책에 가까운 탄식을 하십니다.(24,25-26) 예수님께서는 한 번은 갈릴래아에서(9,22), 또 한 번은 예루살렘을 향해 가시는 도중에(18,32-33), 자신이 고난을 겪은 후에 다시 살아날 것이라고 분명히 말씀하셨는데, 이를 제자들에게 다시 일깨우고 계시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어 “모세와 모든 예언자부터 시작하여 성경 전체에 걸쳐 당신에 관한 기록들을” 두 제자에게 설명해 주십니다.(24,27) 모세는 구약의 율법 즉 모세 5경(창세기ㆍ탈출기ㆍ레위기ㆍ민수기ㆍ신명기)을, 모든 예언자는 구약의 예언서 전체를 가리킵니다. 구약성경의 주요 부분인 율법서와 예언서뿐 아니라 시편까지도 포함하는 구약 성경 전체에 걸쳐 당신에 관한 기록을 설명해 주셨다는 것입니다. 그러는 가운데 어느덧 두 제자의 목적지 엠마오 마을에 이르렀습니다. 예수님께서 더 가시려는 듯이 보이자 그들은 예수님께 하룻밤을 함께 묵어 가시라고 청을 드렸고 예수님께서는 그 청을 받아들여 그들과 함께 집에 들어가십니다. 그들과 함께 식탁에 앉으시자 “빵을 들고 찬미를 드리신 다음 떼어서 두 제자에게 나누어주십니다. 그러자 그들은 “눈이 열려” 예수님을 알아봅니다.(24,28-31ㄱ) 두 제자는 길에서 예수님을 보고도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식탁에 앉아 빵을 떼어 감사를 드리고 두 제자에게 나눠주실 때에 비로소 눈이 열려 예수님을 알아보게 된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서 사라지십니다. 그들은 “길에서 우리에게 말씀하실 때나 성경을 풀이해 주실 때 속에서 우리 마음이 타오르지 않았던가!” 하고 서로 이야기합니다.(24,31ㄴ-32) 눈이 열려 예수님을 알아본 다음에야 그들은 오는 길에서 느꼈던 것을 좀더 분명히 깨달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들은 곧바로 예루살렘으로 돌아갑니다. 가서 보니 열한 제자와 동료들이 “주님께서 되살아나시어 시몬에게 나타나셨다” 하고 말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들도 길에서 겪은 일과 빵을 떼실 때에 예수님을 알아보게 된 일을 이야기해 주었다고 루카 복음사가는 전합니다.(24,33-35) 생각해 봅시다 엠마오 이야기는 그 내용 자체도 감동적이지만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 그리스도 신자들에게도 여러 가지를 깊이 성찰하게 해줍니다. 우선 두 제자는 예수님과 함께 길을 가며 대화를 나누면서도 그분이 누구이신지를 알아보지 못합니다. 다만 대화를 나누는 가운데 그들은 속에서 뭔가 뜨거운 것이 올라옴을 느꼈을 따름입니다. 그런데 식탁에서 빵을 나누는 순간에 그들은 예수님을 알아봅니다. 학자들은 예수님께서 두 제자와 함께 식탁에 앉아 빵을 떼어 감사를 드리신 후 제자들에게 나눠주시는 것이 바로 성찬의 식탁, 곧 성찬례를 나타낸다고 풀이합니다. 그 말씀은 성찬례 안에서 비로소 제자들은 그분이 예수님을 확인할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같은 맥락에서 학자들은 두 제자가 뒤늦게 “길에서 우리에게 말씀하실 때나 성경을 풀이해 주실 때에 속에서 우리 마음이 타오르지 않았던가” 하고 서로 얘기를 나누는 모습을 통해 말씀의 식탁 곧 말씀 전례를 이야기합니다. 우리는 살아 있는 하느님 말씀인 성경을 통해서 또한 주님을 만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말씀의 식탁(성경)과 성찬의 식탁(성찬례)은 우리 그리스도 신자들이 살아 계시는 주님을 만나뵙는 중요한 두 자리입니다. 우리 삶에서 주님이 계시지 않는다고 느낄 때, 주님께 대한 우리의 기대와 희망이 물거품이 된 것처럼 느껴질 때 우리가 의지해야 할 곳이 있습니다. 바로 성경과 성찬례입니다. 말씀 안에서, 성찬례 안에서 우리는 우리에게 다가오시고 우리의 마음을 뜨겁게 채워주시는 그분을 만나뵐 수 있고 새 희망과 용기를 얻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꼭 필요한 것이 있습니다. 주님과 함께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주님이 계시지 않은 것처럼 보일 때도, 나를 버리고 떠나시는 것처럼 보일 때에도 우리는 기도해야 합니다. 어떻게? “저희와 함께 묵으십시오.”cpbc2018.12.12

믿음과 순명으로 성가정 위해 헌신한 ‘교회의 아버지’복되신 동정 마리아의 배필 성 요셉 대축일 요셉 성인은 마리아와 함께 구세주의 강생 신비에 동참한 최초의 인물이다. 그는 성모 마리아와 예수 그리스도의 성가정을 침묵과 순명으로 보호한 성실한 아버지로 ‘구세주의 보호자’ ‘교회의 아버지’ ‘성직자와 수도자, 가난한 이, 노동자, 임종자의 수호성인’으로 공경받고 있다. 그림은 요셉 성인이 헤로데의 박해를 피해 성모 마리아와 아기 예수를 데리고 이집트로 피신하고 있는 장면을 묘사한 조토의 프레스코 작품으로 이탈리아 아시시 성 프란치스코 대성당에 설치돼 있다. 프란치스코 교황이 가장 사랑하고 공경하는 성인은 누구일까? 바로 성모 마리아와 그의 배필이신 요셉 성인이다. 성 요셉에 대한 프란치스코 교황의 사랑과 공경은 곳곳에 드러난다. 우선 교황 문장이 그 증거다. 프란치스코 교황의 문장 방패 중앙에는 예수회를 상징하는 ‘IHS’라는 라틴말이 크게 새겨져 있다. IHS는 ‘인류의 구원자 예수’(Iesus Hominum Salvator)를 뜻하는 라틴어의 머리글자다. 이 문장을 중심으로 왼편의 별은 ‘성모 마리아’를, 오른편 포도 모양의 ‘나르드 꽃’은 요셉 성인을 상징한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또 2013년 3월 19일 복되신 동정 마리아의 배필 성 요셉 대축일에 제266대 교황으로 즉위했다. 교황은 즉위 미사 강론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를 구세주이신 주님으로 고백하는 그리스도인뿐 아니라 모든 인류가 하느님께로부터 받은 소명, 즉 하느님의 모든 피조물을 보호하는 ‘수호자’로서의 임무를 수행할 것임을 밝혔다. 그러면서 프란치스코 교황은 이 모든 수호자로서의 소명을 성모 마리아와 예수 그리스도의 성가정을 침묵과 순명으로 보호한 요셉 성인의 삶에서 찾아 수행할 것임을 웅변했다. 복되신 동정 마리아의 배필 성 요셉 대축일을 맞아 ‘교회의 아버지’인 요셉 성인에 관해 알아본다. 구세주의 보호자 성 요셉요셉 성인의 행적은 마태오 복음서와 루카 복음서 1─2장에만 나온다. 그는 처녀의 몸으로 성령으로 아들을 잉태한 마리아를 아내로 맞아들임으로써 주님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강생에 동참해 구세주의 보호자가 된다. 복음서는 요셉 성인을 ‘의로운 사람’(마태 1,19), ‘하느님의 뜻을 따르려는 경건한 사람’(마태 1,20─2,15 참조), 또 ‘신심 깊은 사람’(루카 2,22-24 참조)으로 묘사한다. 요셉은 의로운 사람이다. 그는 마리아의 임신 소식을 세상에 드러내지 않고 남몰래 파혼하기로 작정할 만큼 신중하고 과묵한 사람이다. 그는 또 겸손한 하느님의 종이다. “두려워하지 말고 마리아를 아내로 맞아들여라”(마태 1,20) 하는 천사의 말을 들은 후 의심을 풀고 마리아와 혼인하고 예수님의 아버지가 된다. 요셉은 아울러 정결한 남편이다. 요셉은 “보아라, 동정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고 하리라”는 천사의 말을 듣고 “아내가 아들을 낳을 때까지 잠자리를 같이하지 않았다.”(마태 1,23-25) 이로써 요셉은 마리아와 함께 구세주의 강생 신비에 동참한 최초의 인물이 된다. 요셉은 또 성실한 아버지이다. 그는 법적인 아버지로서 아들에게 ‘예수’라는 이름을 지어주고(마태 1,21-25), 할례를 시키고(루카 2,21), 성전에 봉헌(루카 2,22)했다. 그리고 아내와 아들을 보호하기 위해 이집트 피난(마태 2,13-15)을 마다치 않았고, 나자렛으로 돌아와 성가정을 보살피며 가장으로서의 사명을 수행한다.(루카 2,51-52) 요셉 성인은 다윗 가문(마태 1,1; 루카 1,27) 사람으로 목수(마태 13,55) 일을 하였다. 고향은 베들레헴(루카 2,4 참조)이었으나 나자렛에서 생활(마태 2,13-15)했다. 그의 아버지는 ‘야곱’(마태 1,16) 또는 ‘엘리’(루카 3,23)이다. 마태오 복음에서는 예수님의 족보가 아브라함에서 다윗과 일련의 유다 왕을 거쳐 요셉까지 42명의 이름이 이어진다.(마태 1,1-17) 루카 복음은 예수님을 기점으로 조상을 거슬러 올라가며 열거해 다윗과 유다, 야곱, 이사악, 아브라함뿐 아니라 태고 시대 노아, 라멕, 에녹을 거쳐 아담까지 77명의 인물을 나열하고 있다.(루카 3, 23-38)이렇게 예수님의 족보가 차이 나는 것에 대해 성경학자들은 마태오 복음은 법률상 요셉의 족보를, 루카는 혈통상 마리아의 족보를 따랐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또 장남이 대를 잇지 못하고 죽었을 경우 형제 중 미혼인 한 사람이 형수와 결혼해 첫 아들을 낳아 죽은 형제의 이름을 이어받게 했던 이스라엘의 대를 잇는 전통 방식인 ‘레비라식 결혼법’(신명 25,5-10 ‘후손에 관한 규정’)에 따라 친부와 법적 아버지의 이름이 섞여 있기 때문이라고 주장한다. 요셉 성인에 대한 신심 초기 교회부터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성모 마리아는 신자들로부터 특별한 공경을 받아온 반면, 요셉 성인은 성령으로 잉태되신 예수님의 양부, 즉 법적 아버지라는 이유로 4세기경에 가서야 동방교회 신자들의 공경 대상이 된다. 서방교회에서는 이보다 훨씬 더 늦은 15세기에 가서야 성 요셉 축일을 전례력에 도입해 요셉 성인을 공경하기 시작했다. 요셉 성인은 1870년에 비오 9세 교황에 의해 가톨릭교회 수호성인으로, 이후 레오 13세와 비오 12세 교황을 비롯한 역대 교황들에 의해 ‘아기 예수의 수호자’ ‘마리아의 수호자’ ‘성가정, 성직자, 수도자, 가난한 이, 노동자, 임종자, 동정녀, 환자의 수호성인’으로 선포됐다. 성 요한 23세 교황은 요셉 성인을 제2차 바티칸공의회의 보호자로 선언했고, 성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은 1989년 사도적 권고 「구세주의 보호자」를 통해 “요셉 성인은 마리아와 동일한 사랑의 보호자였으며 인간의 노동을 속량의 신비에 더욱 근접시켰다”고 천명했다.교회의 성미술 작가들은 요셉 성인을 묘사할 때 검은 옷 또는 주홍색 옷을 입은 모습을 전통적으로 그려왔다. 검은색은 모든 색을 품고 있다. 한평생 예수님과 성모 마리아의 신비를 품고 살았던 요셉 성인에게 딱 어울리는 색이다. 성직자와 수도자들이 검은 옷을 입고 있듯 의로운 사람인 요셉 성인은 검은 옷을 입고 세상의 것을 모두 버리고 하느님의 구원사업에 협력한 것이다. 주홍색은 ‘순교’를 상징한다. 성모 마리아의 푸른색 망토는 성자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올 새로운 ‘희망’을 예고해 준다면, 요셉 성인의 주홍색 겉옷은 성가정의 보호자인 요셉의 충실한 순명을 드러낸다. 요셉 성인을 공경해야 하는 이유 아빌라의 대 데레사 성녀는 “성부 성자 성령께서 삼위일체를 이루듯 성자와 성모 마리아, 성 요셉께서는 나자렛 성가정 안에서 이타적인 삼위일체의 삶을 살았다. 따라서 이 세상에서 삼위일체적 삶을 살기 위해서는 요셉 성인을 공경하고 나자렛 성가정을 본받아야 한다”고 강조했다.요셉 성인의 삶은 ‘하느님께서 더하신다’ ‘하느님을 돕다’는 그의 이름의 뜻대로 돕는 이의 삶이었다. 마리아를 아내로 맞아들여 지켜주고, 예수에게 충실한 아버지가 되어준 것은 자기 희생과 봉헌이 없이는 불가능한 삶이었다. 이처럼 요셉 성인은 하느님께서 하고자 하시는 모든 일에 자신을 온전히 열어 놓은 사람이다. 그의 순명으로 하느님의 구원 계획은 이 시대에도 계속되고 있기 때문이다. 리길재 기자 teotokos@cpbc.co.kr cpbc2020.03.11

아기 예수를 하느님께 봉헌한 것 기리며 구원 역사 실현 선포‘주님 봉헌 축일’(2월 2일) 의미와 전례 주님 봉헌 축일은 성모 마리아의 정결례와 아기 예수를 하느님께 봉헌하고 속량하는 예식을 기념하는 세 가지 의미를 지닌다. 서미경 작 ‘주님의 입당’, 목판 템페라, 2004년, 서울 성 니콜라스 대성당. 교회는 구약의 정결례 규정에 따라 성모 마리아와 성 요셉이 아기 예수를 성전에 봉헌하고 비둘기 한 쌍을 번제물과 속죄물로 바친 것을 기념해 주님 성탄 대축일부터 40일째 되는 날인 2월 2일을 ‘주님 봉헌 축일’로 지낸다. 이날을 기념해 주님 봉헌의 의미와 전례를 살펴본다. 리길재 기자 teotokos@cpbc.co.kr 주님 봉헌 축일이란 루카 복음서는 성모 마리아와 성 요셉이 모세의 율법에 따라 정결례를 거행할 날이 되자 아기를 예루살렘 성전으로 데리고 올라가 주님께 봉헌했다(2,22)고 한다. 구약 이스라엘 백성의 정결례(레위 12,1-8)법은 사내아이를 낳은 산모는 40일간, 여자아이를 낳은 산모는 80일간 불결한 것으로 여겼다. 산모는 이날이 지난 다음 예루살렘 성전에 가서 번제물로 일 년 된 어린 양 한 마리와 속죄 제물로 비둘기 한 마리를 하느님께 바쳐야 다시 정결하게 되는 것으로 여겼다. 양 한 마리를 바칠 형편이 안 될 만큼 가난한 경우 비둘기 두 마리를 가져다가 한 마리는 번제물로, 한 마리는 속죄물로 바쳐야 했다. 이를 ‘가난한 이의 제물’이라 하는데 성모 마리아도 그렇게 했다. 눈여겨볼 대목은 성 요셉의 행동이다. 모세 율법에 따르면 출산으로 인해 남편이 부정하게 되지는 않는다. 따라서 성 요셉은 정결례를 치를 필요가 전혀 없는데도 성모 마리아와 함께 예루살렘으로 가서 그 예를 행했다. 요셉이 성모 마리아에게 얼마나 신실했는지 보여주는 대목이다. 아울러 그의 행동은 구약의 엘카나와 한나 부부가 실로에 있는 주님의 집에 어린 자식 사무엘을 바친 것(1사무 1,24-28)을 상기시킨다.또 “이스라엘 자손들 가운데에서 맏아들, 곧 태를 맨 먼저 열고 나온 첫아들은 모두 나에게 봉헌하여라. 사람뿐 아니라 짐승의 맏배도 나의 것이다”(탈출 13,1)라는 하느님의 명에 따라 유다인들은 외아들이든 장남이든 아들을 처음으로 얻으면 하느님의 차지로 여겼다. 그래서 하느님 차지인 첫아들을 부모가 사서 기른다는 뜻으로 유다인들은 첫아들을 낳으면 한 달 안에 성전 비용으로 5세켈(20데나리온)을 바쳤다. 이를 ‘속량법’이라고 한다. 속량법에 따르면 부모나 아이가 예루살렘 성전으로 갈 필요 없이 어디서든 사제에게 속량값으로 5세켈을 치르기만 하면 됐다. 그런데도 성모 마리아와 성 요셉은 아기 예수를 데리고 함께 예루살렘 성전으로 가서 외아들의 속량값을 치르고 예수를 하느님께 봉헌했다. 이날 성모 마리아와 성 요셉은 정결례와 더불어 아기 예수를 하느님께 봉헌하고 속량하는 세 가지 예식을 한 것이다. 성모 마리아는 정결례 예식을 마치기에 앞서 율법에 따라 아기가 태어난 지 여드레가 되는 날 할례를 베풀고 이름을 ‘예수’라고 지었다.(루카 2,21) 이 이름은 아기가 잉태되기 전에 천사가 일러 준 것으로 예수는 우리말로 ‘하느님이 구원하신다’는 뜻이다. 한편, 성전에서 아기 예수를 두 팔에 받아 안은 시메온은 이 아기가 ‘다른 민족들에게는 계시의 빛’이며 ‘당신 백성 이스라엘에게는 영광’이라고 찬미한다.(루카 2,34-25) 이는 하느님의 구원이 예수를 통해 유다인뿐 아니라 모든 민족에게 실현될 것임을 선포한 말이다. 시메온은 더불어 성모 마리아께 이 아이 때문에 당신 영혼이 칼에 꿰찔릴 것이라는 지극히 개인적인 예언(루카 2,34-35)을 한다. 베네딕토 16세 교황은 이 고통의 신탁이 “그리스도교 신앙의 깊은 정서의 원형”이라고 한다. “그리스도교 신앙은 인간과 함께 고통을 겪고 그러한 방식으로 우리를 연민으로 이끄시는 하느님을 선포”하기 때문이다.(「나자렛 예수-유년기」 121쪽 참고)주님 봉헌 축일 전례 교회는 일찍부터 주님 봉헌 축일을 지내왔다. 예루살렘 교회는 4세기 말부터 이 축일을 기념했다. 아기 예수께서 하느님 아버지의 성전에 처음으로 들어가고 그 안에서 시메온과 한나를 만난 사건을 기념해 ‘만남의 축일’이라 부르며 촛불 행렬을 했다. 예수께서 “계시의 빛”이라고 한 시메온의 찬미를 드러내기 위해 촛불을 밝힌 것이다. 이 예식이 5세기 중엽 로마 교회에도 알려지기 시작해 서방 교회에 전파됐다. 서방 교회에서는 동방 교회처럼 ‘만남의 축제일’ 또는 ‘성 시메온의 날’로 지냈다. 중세 후반에는 촛불 행렬 때문에 ‘성촉절(聖燭節)’이라 불리기도 했다. 이후 성모 신심과 성모 축일이 발달하면서 1969년까지 ‘성모 취결례(取潔禮)’로 지냈다. 오랫동안 주님 축일을 성모 축일로 지내온 것이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전례 개혁으로 이 축일의 본뜻을 되찾아 1970년부터 ‘주님 봉헌 축일’로 지내고 있다. 이날 행렬에 사용되는 초를 축복하던 전통은 한 해 동안 사용할 초를 축복하는 관습으로 정착됐다. 그래서 이날 교회와 가정에서 사용할 초를 축복한다. 초는 자신을 태워 어둠을 밝힌다. 교회는 일찍부터 ‘세상의 빛’(마태 5,14)이신 그리스도를 상징하는 표지로 초를 사용해왔다. 이날 교회에서 초를 봉헌하는 것은 주님께서 하느님께 봉헌되셨듯이 우리도 주님과 하나가 돼 나 자신을 봉헌하자는 뜻에서다. 이처럼 주님 봉헌 축일은 예수 성탄의 의미를 다시 한 번 일깨워준다. 축성 생활의 날성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은 1997년에 주님 봉헌 축일을 ‘축성 생활의 날’로 제정하고, 자신을 주님께 봉헌한 수도자들을 위한 날로 삼았다. 교황청 수도회성은 해마다 맞는 축성 생활의 날에 모든 신자가 특별히 수도 성소를 위해 기도하고, 축성 생활을 올바로 이해하기를 권고하고 있다. 봉헌의 성경 의미는 ‘따로 떼어 놓는 것’(탈출 12,13)이다. 인간이 제물을 따로 떼어서 하느님께 드리면 하느님께서는 봉헌된 제물과 이를 봉헌한 인간 모두를 거룩하게 축성하신다. 따라서 봉헌은 인간 중심으로 보면 내어 놓음이지만 하느님 중심으로 보면 ‘축성’이다. 그러기에 축성 생활은 교회에 생명과 성덕을 가져오는(「교회 헌장」 44항) 생활이기에 이날을 ‘축성 생활의 날’이라 한다. 평화신문2020.01.29

기도와 묵상은 하느님과 온전한 일치를 위한 준비[토머스 머튼의 영성 배우기] 21. 기도에 대한 새로운 이해 토마스 머튼은 기도를 이미 우리 안에 계신 그분과의 편안한 휴식으로써 안식과 같다고 보았다. 이는 기도의 목표인 관상의 상태에 도달함과 깊이 연결되어 있다. 머튼에게 있어서 기도와 묵상 (Meditation)은 “자신의 존재의 심오한 곳에 현존하시는 하느님을 찾고 신앙과 경이와 사랑으로 예수님의 이름을 부르며 그곳에서 하느님과 만나는 준비”였다. 다시 말해, 성독, 기도, 묵상은 관상의 은총을 받기 위한 도구요, 준비 작업으로서 최종 목표는 하느님과의 온전한 일치에 있다. 하느님께서 세상을 엿새 동안 창조하신 다음, 이렛날에는 쉬셨던 것처럼 기도를 포함한 우리의 모든 활동은 ‘하느님 안에서의 쉼’이 그 목표다. 아담과 하와가 죄를 범하기 전에 하느님과 함께 낙원에 머물며 아무런 부끄럼 없이 서로를 있는 그대로 바라보며 본래 인간의 모습으로 살았던 것처럼, 기도는 모든 ‘나의 것’을 멈추고, ‘이미’ 우리와 함께하시는 하느님의 신비 속에 들어가 그분을 발견하고 그분과 함께 낙원에서의 편안한 쉼을 얻을 때 완성되는 것이다. 따라서 기도는 하느님과 함께 쉬는 기쁨이요 평화로운 시간이며, 하늘의 시간속으로 들어가는 은총의 때이다. 의무감에서 혹은 무수한 자신의 바람을 아뢰며 기계적인 기도를 바치고 있는 우리에게 머튼은 기도에 대한 본래의 의미를 일깨워 주고 있다.그런데 토마스 머튼이 처음부터 기도에 대해 이렇게 이해를 하였을까? 그렇지 않다. 머튼 역시 우리와 같이 처음에는 기도는 무엇인가 필요한 것을 전능하신 하느님께 청하는 것이라고 여겼다. 그의 자서전적 저서 「칠층산」에서 머튼은 자신이 처음 기도한 때는 1933년 로마 성지 순례 중 예수 그리스도를 묘사한 비잔틴 모자이크를 바라보며 영적인 체험을 하였고, 이 체험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가 과연 누구인가 궁금해졌으며, 신약성경을 사서 읽었고, 돌아가신 아버지가 자신에게 나타나는 체험 후, 처음으로 기도하였다고 고백하고 있다. “돌이켜 보면 그때 나는 생전 처음으로 진정한 기도, 곧, 입술과 지성과 상상뿐이 아니고 생명과 존재의 밑바탕에서 우러나오는 기도, 어둠 속에 숨어 계신 하느님께서 오시어 나의 의지를 속박하고 있는 이 많은 무서운 것들에서 풀려나도록 도와주시기를 간청하는 기도를 바치기 시작하였다.”(「칠층산」 p247-248) 그러나 머튼이 이렇게 처음으로 기도를 바쳤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삶은 예전보다 더 방탕해졌고 더 타락했다. 아직 그에게 기도는 마음의 위안을 얻기 위한 도구에 불과했던 것이다. 젊은 시절 머튼의 기도에 대한 다른 에피소드는 우리에게 기도하는 모습이 믿지 않는 이들에게 귀감이 됨을 보여 준다. 그가 내면에서 “미사에 가라, 미사에 가라!”라는 음성을 듣고 처음으로 자발적인 마음으로 그리스도의 성체 성령 성당에 갔다. 그때 그의 눈에 띈 것은 열대여섯 살가량 된 소녀가 무릎을 꿇고 진시하고 조용하게 기도드리는 모습이었다. 그는 이때 처음으로 사람들이 성당에 가는 진정한 목적은 기도를 바치기 위함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고 아주 깊은 인상을 받았다고 고백하였다. 이러한 다른 이가 기도하는 모습을 통한 감동과 변화는 하바나(쿠바의 도시)의 성 프란치스코 성당에서도 일어났다. 미사 중 사도신경을 노래하는 쿠바 어린이들의 신앙고백을 듣고 그는 “내가 하느님의 현존을 목격하여 갑자기 그 눈 부신 빛 속에 서 있는 느낌이었으며, 마치 천국이 내 바로 앞에 있는 것 같았다”고 묘사하였다. 이는 우리가 조용하고 진지하게 기도하는 모습은 다른 이들을 기도로 초대할 수 있다는 것을 느끼게 해 준다. 그러나 이러한 기도와 미사를 봉헌하는 이들의 모습을 보고 천국을 느꼈다고 해서 그것이 머튼 자신의 기도 진보에는 영향을 미치지 못하였다. 그는 이렇게 고백한다. “하바나의 성 프란치스코 성당에서 미사 중에 내가 이 빛을 보았다고 해서 내가 그 사정을 분명하게 이해했거나 기도에 매우 진보했었다고 생각하지는 마라. 내 기도는 대체로 염경기도 상태에 머물러 있었다.”(「칠층산」 p585)다른 이가 기도하는 모습은 우리에게 감흥을 줄 수는 있지만 결국 자신이 기도하지 않으면 진정 기도의 깊은 영적 영역으로 들어가지 못하는 것이다. 평화신문2019.11.20
사제 발자취 따라 가는 세계 40개국 순례세계 일주 성지 순례 1·2/ 염봉덕 신부 지음/ 들숨날숨/ 각 1만 5000원 염봉덕(부산교구 원로사목자) 신부가 지난 40여 년간 다닌 세계 40개국 순례기를 엮었다.염 신부는 1982년 로마 연수를 시작으로, 미국 뉴욕 한인본당에서 교포사목 등을 하면서 세계 곳곳을 다닐 기회가 많았다. ‘성경의 땅’ 이스라엘은 물론이고, 세계의 모든 성모 성지와 남미 여행지까지. 수많은 명소에, 세계 성인들의 흔적이 고스란히 간직된 성지들을 다녀온 이야기가 책에 가득 담겼다. 그리고 여행 때마다 남겨진 신앙 단상과 사진 자료들을 책에 실었다. 책에는 바티칸부터 김대건 신부의 발자취를 따라 다녀온 중국의 북경과 상해, 바오로 사도의 선교지 그리스와 터키, 한반도의 자랑인 백두산과 금강산 등 수많은 성지와 여행지가 망라돼 있다. 염 신부는 여행지마다 다니며 겪었던 일화와 교회사, 신학적 내용과 기록들을 소개하고 있다. 책에는 또 사제로서 겪은 사목 경험과 지인들이 쓴 여행 기고문, 염 신부가 번역 출간했던 미국의 베스트셀러 「그리스토퍼의 하루에 3분 묵상」에서 엄선한 묵상 글 20여 편도 수록돼 읽는 재미를 더해준다.염 신부는 “사제가 되지 않았다면 세계 일주와 성지 순례가 불가능했을 것”이라며 “저 혼자 보고 경험한 세계 각지의 모습과 이야기를 많은 이와 나누고 싶었다”고 출간 동기를 밝혔다. 그러면서 “각기 처한 사정과 시간적 여유가 없는 탓에 세계 여행에 엄두를 내지 못하는 많은 이가 책을 통해 세계 일주를 하는 경험을 하면 좋겠다”고 말했다.염수정 추기경은 추천사에서 “사제의 순례기를 통해 교우들이 하느님과 더욱 가까워지고, 신앙생활에도 큰 도움이 되길 바란다”고 했고, 부산교구장 손삼석 주교도 “성지에 대한 정보뿐만 아니라, 염 신부님의 체험과 신학적 통찰을 곁들여 보여주고 있다”며 좋은 안내 책자가 되길 기원했다. 구입 문의 : 02-2279-9581, 들숨날숨 이정훈 기자 평화신문2019.06.12

청각장애인 신자들 위한 ‘에파타준본당’ 성전 건립서울대교구 첫 청각장애인 성당… 20년 이상 ‘셋방살이 신앙생활’ 해오다 25일 새 성전 봉헌 서울대교구 첫 청각장애인 성당인 ‘에파타준본당’ 새 성전 조감도. 서울대교구에 청각장애인을 위한 성당이 건립됐다.서울대교구 에파타준본당(주임 박민서 신부)은 25일 오전 11시 서울 성동구 마장동 781-3 현지에서 교구장 염수정 추기경 주례로 새 성전 봉헌식을 거행한다. 한국 교회에서 청각장애인을 위한 성당은 2011년 건립된 인천교구 청언본당에 이어 두 번째이다. 이로써 서울대교구는 청각장애인 사목에 새로운 전기를 맞게 됐다.대지면적 892㎡, 연면적 약 2600㎡에 지하 2층, 지상 6층 규모인 새 성전은 지하 2층 기계식 주차장(24대 수용), 지하 1층 다목적 홀, 1층 만남의 방과 카페, 2층 사제 집무실과 사무실 및 교리실, 3층 대성전(350석 규모)과 소성전, 성체조배실, 4층 성가대석과 작은 피정의 집, 5~6층 본당 사제관 및 손님 사제관 등을 갖췄다. 설계는 (주)무한종합건축사사무소가, 시공은 다산건설엔지니어링(주)가 맡았다.특히 대성전은 청각장애인 신자들이 사제와 수화 통역자가 잘 보이도록 좌석이 뒤로 갈수록 기울기가 높아지는 경사식 구조로 지어졌다. 아울러 제대 벽면 십자가 아래에도 대형 LED 전광판을 설치해 신자들이 전례의 모든 흐름을 자막과 방송으로 볼 수 있도록 편의를 더했다. 성당 내 작은 피정의 집은 해외와 전국에서 피정과 강의를 듣고자 찾아오는 신자들을 위해 특별히 만든 숙식 공간이다.성전 외벽은 예수님의 다섯 상처인 오상(五傷)을 표현한 스테인드글라스로 빛나며, 성전 입구에는 귀먹고 말 더듬던 이를 “에파타!”(열려라) 하고 치유하신 예수님의 부조가 신자들을 반긴다. 성전 입구 외벽에 주임 박민서 신부가 붓으로 직접 쓴 요한복음 6장 말씀 600자가 새겨진 것도 특징이다.새 성전 건립은 청각장애인 신자들의 오랜 바람이었다. 에파타준본당의 모체인 서울가톨릭농아선교회는 1957년 서울 돈암동에서 시작한 이후 20년 이상 수유동 툿찡 포교 베네딕도수녀회 서울수련원 건물에서 ‘셋방살이 신앙생활’을 해왔다. 신자들은 100여 명을 겨우 수용하는 작은 성당에서 미사에 참여하고, 성경공부, 단체활동, 다과모임을 제대로 할 수 있는 공간도 매우 부족했다.이에 2011년부터 두 팔 걷고 나선 박민서 신부는 꼬박 8년간 전국 150여 곳 성당을 다니며 성전 건립 기금 마련을 위해 힘썼다. 신자들도 자선 바자와 음악회 때마다 함께 도왔고, 성전 건립을 위해 매일 묵주기도를 바쳐왔다. 서울가톨릭농아선교회는 설립 60주년이던 2017년 준본당으로 승격, 이듬해 에파타준본당으로 명칭을 변경했다.일반 본당과 달리 속인주의(屬人主義) 공동체인 에파타준본당 신자 수는 500여 명. 청각장애인 신자들은 새 성전에서 더욱 기쁜 신앙생활을 이어갈 수 있게 됐다. 평화신문2019.08.16
![[평신도 영성 나는 평신도다] (32)평신도를 통한 한국 교회의 쇄신, 그 대안은 복음화 2 - 위기의 대안으로서의 평신도의 삶](//cpbc.co.kr/CMS/newspaper/2019/07/rc/757910_1.0_titleImage_1.jpg)
[평신도 영성 나는 평신도다] (32)평신도를 통한 한국 교회의 쇄신, 그 대안은 복음화 2 - 위기의 대안으로서의 평신도의 삶그리스도인은 두 배로 열심히 살아야 그리스도인은 가정생활과 사회생활에 충실해야 하지만 기본적인 신앙생활도 열심히 해야 하기에 남들보다 더 부지런히 생활해야 한다. 성경 읽기 모임을 하고 있는 신자들. 가톨릭평화신문 DB 최근 월간 가톨릭 비타꼰에서 대구대교구 김정우 신부의 저서 「포스트모던 시대의 그리스도교 윤리」를 인용한 글을 보았습니다. 책 내용을 정리해 보면 이렇습니다. “과거 유럽에서 생활할 때 당시 교회에 대한 세 가지 표현들을 들었다. 첫째는 ‘유럽 교회는 늙었고 한국 교회는 젊다’는 것이고, 둘째는 ‘하느님은 좋지만 교회는 싫다’는 것이고, 셋째는 ‘유럽 교회는 늙은 것이 아니라 지쳤다’는 것이다. 그런데 2000년이라는 오랜 시간이 지나 유럽 교회가 이런 말들을 듣게 되었다면, 문제는 이제 200년밖에 지나지 않은 한국 교회가 이런 말들을 듣게 될지 모른다는 징후가 여기저기 감지되고 있다는 것이다. 그 이유는 신영성(유사영성)의 피해가 늘어가는 것과 함께 냉담자 증가, 예비신자 감소, 주일 미사 참여자의 감소, 청소년들의 신앙생활 기피와 주일학교의 침체 등과 같은 난제들을 한국 교회가 겪고 있기 때문이다.” 김정우 신부님은 다른 저서 「새 복음화를 위한 윤리적 과제」에서도 “신앙적인 성향의 퇴조라는 서구에서 시작된 ‘그리스도교의 위기’가 한국 교회에도 나타나고 있다”고 지적하셨습니다.이 위기를 어떻게 타개해 나가야 할까요. 시작은 평신도 한 명 한 명에서부터 출발해야 합니다. 신앙은 관념이 아니고 생활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고 구원받았다면 구원받은 사람으로서의 삶의 모습이 드러나야 합니다. 절망에 빠졌던 사람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희망을 갖게 됐다면, 그것은 그 사람이 구원받았다는 증거입니다. 그리고 그 희망을 갖고 꾸준히 감사하며 살아갈 때 그 삶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할 수 있게 됩니다.복음 선포는 삶의 증거, 생활의 증거가 매우 중요합니다. 그리고 그것이 우선돼야 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이 세상 사람들에게 복음을 선포하려면 먼저 자신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구원받은 구체적 삶 즉, 새로운 생명을 얻어 새로운 삶을 살아가는 모습을 보여 줘야 합니다. 이것이 생활의 증거입니다.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단순히 선포만 하신 것에 그치지 않고 많은 이들에게 자비와 사랑을 베푸시는 기적을 행하셨습니다. 직접 모든 것을 보여 주시고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신 것입니다. 평신도 그리스도인들은 예수 그리스도와 같이 생활 안에서 실천해야 합니다.평신도에게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신앙행위와 더불어 그리스도적인 사상을 갖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가정과 직장에서 삶의 방법과 내용이 하느님께서 기뻐하실 만한지, 그렇지 못하다면 그 내용과 원인이 무엇인지 알아내고 끊임없이 새롭게 바꿔나갈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그러자면 자신의 삶에서 잘못된 점들을 솔직히 인정하고 그것을 과감히 바꾸겠다는 결심과 결단이 필요합니다. 자신을 바꾸는 결단은 누구에게나 힘든 일입니다. 그래서 용기가 필요합니다. 용기 있는 사람은 믿음이 있는 사람입니다. 자신의 믿음이 무엇을 위한 것인지 확신하는 사람이라면 자신의 잘못된 점을 과감히 바꾸기 위해 용기를 낼 수 있습니다. 용기를 갖고 결단을 내려 하느님께서 기뻐하시는 삶을 살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한다면 하느님 은총의 폭은 그만큼 넓어집니다.평신도 신앙생활은 확고한 믿음을 바탕으로 용기를 갖고 끊임없이 새로운 삶을 살아가는 회개의 삶입니다. 자신의 잘못을 알고 뉘우치는 것에 그치면 진정한 회개라 할 수 없습니다. 행동을 바꿔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 평신도들을 죄의 사슬에서 벗어나게 해 주셨습니다. 그럼에도 올바른 신앙생활을 방해하는 잘못된 인식, 환경, 습관 등이 많습니다. 그 장애를 스스로 발견하고 하나씩 제거해 나가는 것이 복음화를 위한 첩경입니다. 그와 함께 평신도 그리스도인들은 비그리스도인보다 부지런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평신도 그리스도인들은 비그리스도인들과 같은 세상 안에서 살면서 그들과 같은 현실의 삶에 충실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직장에 다니거나 아니면 돈을 벌기 위해 무엇이든 해야 합니다. 가정생활도 충실히 해야 합니다. 사회생활 안에서 좋은 인간관계도 맺어야 합니다. 그뿐만 아니라 삶을 유지하기 위하여 해야 할 일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인으로서 해야 할 기본적인 신앙행위도 해야 합니다. 기도해야 하고 성경도 읽어야 하고 공부도 해야 하고 공동체 생활도 해야 하고 성사생활과 전례에도 참여해야 합니다. 선교도 해야 하고 나눔을 실천하며 봉사도 해야 합니다. 이처럼 그리스도인으로서 해야 할 기본적인 신앙행위들이 많습니다. 이러한 것들을 제대로 잘하려면 남들보다 부지런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남들보다 잠도 덜 자야 하고 취미 생활이나 여가 활동도 줄이거나 하지 않아야 합니다. 본인에게는 고통이고 고행입니다. 귀찮거나 힘들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신앙행위를 잘해야만 본인이 복음화될 수 있는 것입니다. 평신도들의 복음적 삶은 우리 교회와 세상의 복음화와 직접적인 관계가 있습니다. 복음화는 평신도 그리스도인들의 신앙 생활화에서부터 시작되는 것입니다. 세상은 쉽게 변하지 않습니다.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므로 복음의 말씀으로 교회를 쇄신시키고 세상을 변화시키자면 평신도들의 자기 복음화가 선행되어야 합니다.정치우(안드레아, 새천년복음화학교 교장) 평화신문2019.07.16
![[평신도 영성 나는 평신도다] (24) 이 시대에 요구되는 평신도 영성 5 - 가난](//cpbc.co.kr/CMS/newspaper/2019/05/rc/753465_1.0_titleImage_1.jpg)
[평신도 영성 나는 평신도다] (24) 이 시대에 요구되는 평신도 영성 5 - 가난당신 행복의 첫 번째는 재물입니까? 그리스도인은 재물에 대한 탐욕을 갖기보다 늘 삶의 중심에 하느님을 두고 살아야 한다. 그림은 조토 디 본도네 작 ‘아버지의 재산을 포기하며 옷을 벗는 프란치스코’ 부분, 1297~1299년, 아시시 성 프란치스코 대성당, 이탈리아. 불교에서는 ‘무소유’를 말합니다. 세상 이치를 비롯해 모든 것이 ‘공’(空)이기에 어떤 것을 소유한다는 것 자체가 무의미한 일이라는 것입니다. 석가모니도 해탈 후 첫 설법에서 “모든 고통은 집착에서 온다”고 했습니다.그럼 그리스도교에선 소유를 어떤 관점으로 볼까요. 예수님은 재물에 탐닉하는 것이 얼마나 위험하고 헛된 것인지를 지속적으로 경고하고 있습니다. 어리석은 부자의 비유(루카 12,16-21), 부자와 라자로의 비유(루카 16,19-31) 등이 그 예입니다. 예수님은 더 나아가 지상 재물에 초연한, 자유로운 삶을 살아갈 것을 권고합니다.(루카 14,33; 12,33-34 참조)가난을 실천하여라 세상 안에서 살아가는 평신도가 듣기에는 참으로 난감한 말씀입니다. 세속에서 살아가는 평신도가 과연 가난을 실천할 수 있을까요? 더 나아가 가난 그 자체가 선(善)일까요? 물질적으로 가난한 사람은 오히려 부자보다 더 탐욕스러울 위험은 없을까요? 물질적 가난에 찌든 사람은 삶의 고단함 때문에 하느님 영광을 추구하는 것이 더 어렵지 않을까요? 실제로 예수님은 부자들을 당신 활동과 사업에서 제외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 주변에는 니코데모, 아리마태아의 요셉, 신심 깊은 여성들, 자캐오 등 ‘부자’들이 많았습니다. 어부였던 베드로도 자신의 배를 ‘소유’하고 있었고, 그 배로 고기를 잡았습니다.(마르 4,35-41 참조) 구약성경에서도 빈곤은 하나의 극복해야 할 악(惡)입니다.(신명 15,4 참조)성경은 우리에게 돈 벌지 말고, 궁핍하게 살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가장 부자이신 하느님이 우리에게 ‘너희는 궁핍하게 살아라’고 명령하실 리 없습니다. 그런데 이 세상 모든 것을 다 가진 최고의 부자이신 하느님은 정작 가장 가난한 분입니다. 하느님은 우리를 위해 모든 것을 다 내어주셨습니다. 평신도에게 가난의 영성이 필요한 것도 이 때문입니다. 모든 것을 내어주시는 하느님의 모범을 따라야 하기 때문입니다.적게 가지고 있건, 많이 가지고 있건 돈에 대한 염려는 하느님께 향하지 못하게 합니다. 물론 돈을 벌어 자신을 잘 돌보는 것 자체는 나쁜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나쁜 것이 아니라고 해서 가장 좋은 것은 또한 아닙니다. 나쁘지 않지만 첫 번째로 소중한 것은 아니라는 말입니다. 자신만 사랑하고, 자신만 돌보면 하느님을 사랑할 수 없게 됩니다. 재물에 아등바등하지 않는 사람은, 지금 좀 어려움도 있고 불편함이 있어도, 자신의 길 위에 하느님이 함께하고 계신다는 확신을 얻을 수 있습니다. 하느님과 함께 살아가면 그 무엇도 두렵지 않게 됩니다. 열심히 노력해서 어떤 것을 소유하는 것은 좋은 것입니다. 문제는 그 소유물들을 하느님의 뜻대로 사용하는가, 소유를 하느님의 영광으로 돌릴 수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물질적 소유가 행복의 전부 아냐 무엇보다도 진정한 행복은 물질적 소유에 의해 담보될 수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물론 물질적 소유는 삶을 풍요롭게 하고 몸을 편안하게 하는 데 도움을 줄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는 욕심 없는 사람에게 한정된 이야기입니다. 만약 욕심 있는 사람에게 물질적 소유가 주어진다면 그것은 유혹이고 마귀입니다.재산에 대한 애착을 가질 때 만약 폭풍이 닥치면 우리는 재산을 잃을까 안절부절 해합니다. 잃을 것이 없으면 도둑이 무섭지 않습니다. 만약 우리가 하느님만 생각한다면 재산이 없어져도 상관없습니다. 핵심은 하느님을 중심에 모시며 살아가느냐, 그렇지 않느냐에 있습니다.빈 그릇에 물이 담깁니다. 재물에 대한 욕심을 덜어낼 때 우리는 하느님께서 선물하시는 진정한 해방을 마음에 담을 수 있습니다. 박경리의 「토지」 마지막 부분에 이런 구절이 있습니다. “그 순간 서희는 자신을 휘감은 쇠사슬이 요란한 소리를 내며 땅에 떨어지는 것을 느낀다.” 재물에 대한 욕심을 덜어낼 때 우리는 몸을 휘감은 쇠사슬이 요란한 소리를 내며 땅에 떨어지는 모습을 볼 수 있을 것입니다.정치우(안드레아, 새천년복음화학교 교장) cpbc2019.05.21
‘복음의 기쁨’ 선포하는 교회 공동체 건설 전국 교구장, 2019년 사목교서 발표… 쇄신 통한 변화와 평화 실천도 권고 2019년 한국 천주교회의 사목 방향을 가늠할 전국 교구장 주교들의 사목교서가 전례력으로 새해가 시작되는 대림 제1주일을 맞아 일제히 발표됐다. 새해 한국 교회의 비전과 사목 과제, 교회 안팎 현안에 대한 교구 차원의 사목적 대응도 담겼지만, 보편 교회의 사목적, 선교적 흐름도 잊지 않았다. 가장 눈에 띄는 건 역시 ‘복음의 기쁨’과 ‘선교’였다. 서울대교구장 염수정 추기경은 “복음을 선포하지 않는 교회란 있을 수 없다”며 복음의 기쁨을 선포하는 교회 공동체를 건설하겠다는 사목 의중을 드러냈다. 광주대교구장 김희중 대주교도 “교회의 사명은 복음의 기쁨 속에서 감사하는 마음으로 살아가는 그리스도인 한 사람 한 사람을 통해서 시작된다”며 가정과 본당의 공동체성을 회복하고 강화해 달라고 당부했다. 춘천교구장 김운회 주교 또한 “사랑으로 하나 된 공동체를 위해 신앙의 기쁨을 나눌 것”을 권고했다. 그리스도인의 기본 덕인 믿음ㆍ희망ㆍ사랑의 ‘향주덕’ 실천 또한 놓치지 않았다. ‘믿음의 해’ ‘희망의 해’에 이어 ‘사랑의 해’로 선포한 원주교구장 조규만 주교는 “사랑은 하느님이 베풀어주시는 천국을 선물로 받을 수 있는 손”이라며 가족과 이웃에 대한 사랑 실천을 거듭 당부했다. ‘신망애를 통한 본당 공동체의 영적 쇄신2, 희망의 해’를 보내는 부산교구 교구장 서리 손삼석 주교도 “‘우리는 희망으로 구원 받았습니다’(로마 8,24)라는 말씀이 삶 안에 굳게 자리매김 되도록 노력해 주님의 선물인 희망을 배우고 실천해 나가자”고 권고했다. ‘성경’도 중요한 열쇳말이 됐다. 말씀하시는 하느님에 대한 전인적이며 올바른 응답이 신앙이기에 성경을 읽고 묵상할 것을 거듭 당부한다. 새해를 ‘성서의 해’로 선포한 인천교구장 정신철 주교는 성경을 매일 읽는 습관을 기르고 묵상하며, 성인전이나 교부들의 글을 읽기를 권했다. 전주교구장 김선태 주교도 “성경과 교회의 가르침, 성찬례, 기도, 사랑 실천은 내적 쇄신과 새로운 복음화를 위한 핵심 요소”라며 올해는 특히 성경 말씀에 역점을 두고 신앙생활을 하자고 당부했다. ‘쇄신’ 또한 중요한 주제어로 떠올랐다. 대구대교구장 조환길 대주교는 “우리 교구는 지난 교구 시노드의 결의사항을 다시 점검하고 평가하는 가운데 교구 쇄신위원회를 발족했다”며 “현재 활동 중인 두 소위원회의 활동에 큰 결실이 있기를 소망한다”고 기원했다. 교구 시노드를 진행 중인 대전교구 교구장 유흥식 주교는 “시노드에서 논의된 교구의 모든 상황이 ‘쇄신’을 통한 ‘변화’로 실행에 옮겨야 한다”고 주문했다. 설정 50주년을 맞는 안동교구 교구장 권혁주 주교도 “‘내가 모든 것을 새롭게 만든다’(묵시 21,5)는 말씀 아래 쇄신 운동을 펼쳐 새롭게 출발하고자 한다”면서 교구 쇄신에 방점을 찍었다. ‘평화’ 실천도 이어질 전망이다. 의정부교구장 이기헌 주교는 “주님께서는 2018년 우리 민족에게 평화와 기쁨을 선사하셨다”면서 민족화해 사목의 심화ㆍ발전을 당부했다. 마산교구장 배기현 주교도 “평화의 길을 끝까지 걸어갈 수 있는 원동력은 하느님의 사랑이며, 그 한 걸음 한 걸음의 구체적 내용은 우리가 서로 용서하는 것”이라며 사랑과 평화가 넘치는 삶을 살아가기를 호소했다. 오세택 기자 sebastiano@cpbc.co.kr 평화신문2018.11.28
‘복음의 기쁨’ 선포하는 교회 공동체 건설 전국 교구장, 2019년 사목교서 발표… 쇄신 통한 변화와 평화 실천도 권고 2019년 한국 천주교회의 사목 방향을 가늠할 전국 교구장 주교들의 사목교서가 전례력으로 새해가 시작되는 대림 제1주일을 맞아 일제히 발표됐다. 새해 한국 교회의 비전과 사목 과제, 교회 안팎 현안에 대한 교구 차원의 사목적 대응도 담겼지만, 보편 교회의 사목적, 선교적 흐름도 잊지 않았다. 가장 눈에 띄는 건 역시 ‘복음의 기쁨’과 ‘선교’였다. 서울대교구장 염수정 추기경은 “복음을 선포하지 않는 교회란 있을 수 없다”며 복음의 기쁨을 선포하는 교회 공동체를 건설하겠다는 사목 의중을 드러냈다. 광주대교구장 김희중 대주교도 “교회의 사명은 복음의 기쁨 속에서 감사하는 마음으로 살아가는 그리스도인 한 사람 한 사람을 통해서 시작된다”며 가정과 본당의 공동체성을 회복하고 강화해 달라고 당부했다. 춘천교구장 김운회 주교 또한 “사랑으로 하나 된 공동체를 위해 신앙의 기쁨을 나눌 것”을 권고했다. 그리스도인의 기본 덕인 믿음ㆍ희망ㆍ사랑의 ‘향주덕’ 실천 또한 놓치지 않았다. ‘믿음의 해’ ‘희망의 해’에 이어 ‘사랑의 해’로 선포한 원주교구장 조규만 주교는 “사랑은 하느님이 베풀어주시는 천국을 선물로 받을 수 있는 손”이라며 가족과 이웃에 대한 사랑 실천을 거듭 당부했다. ‘신망애를 통한 본당 공동체의 영적 쇄신2, 희망의 해’를 보내는 부산교구 교구장 서리 손삼석 주교도 “‘우리는 희망으로 구원 받았습니다’(로마 8,24)라는 말씀이 삶 안에 굳게 자리매김 되도록 노력해 주님의 선물인 희망을 배우고 실천해 나가자”고 권고했다. ‘성경’도 중요한 열쇳말이 됐다. 말씀하시는 하느님에 대한 전인적이며 올바른 응답이 신앙이기에 성경을 읽고 묵상할 것을 거듭 당부한다. 새해를 ‘성서의 해’로 선포한 인천교구장 정신철 주교는 성경을 매일 읽는 습관을 기르고 묵상하며, 성인전이나 교부들의 글을 읽기를 권했다. 전주교구장 김선태 주교도 “성경과 교회의 가르침, 성찬례, 기도, 사랑 실천은 내적 쇄신과 새로운 복음화를 위한 핵심 요소”라며 올해는 특히 성경 말씀에 역점을 두고 신앙생활을 하자고 당부했다. ‘쇄신’ 또한 중요한 주제어로 떠올랐다. 대구대교구장 조환길 대주교는 “우리 교구는 지난 교구 시노드의 결의사항을 다시 점검하고 평가하는 가운데 교구 쇄신위원회를 발족했다”며 “현재 활동 중인 두 소위원회의 활동에 큰 결실이 있기를 소망한다”고 기원했다. 교구 시노드를 진행 중인 대전교구 교구장 유흥식 주교는 “시노드에서 논의된 교구의 모든 상황이 ‘쇄신’을 통한 ‘변화’로 실행에 옮겨야 한다”고 주문했다. 설정 50주년을 맞는 안동교구 교구장 권혁주 주교도 “‘내가 모든 것을 새롭게 만든다’(묵시 21,5)는 말씀 아래 쇄신 운동을 펼쳐 새롭게 출발하고자 한다”면서 교구 쇄신에 방점을 찍었다. ‘평화’ 실천도 이어질 전망이다. 의정부교구장 이기헌 주교는 “주님께서는 2018년 우리 민족에게 평화와 기쁨을 선사하셨다”면서 민족화해 사목의 심화ㆍ발전을 당부했다. 마산교구장 배기현 주교도 “평화의 길을 끝까지 걸어갈 수 있는 원동력은 하느님의 사랑이며, 그 한 걸음 한 걸음의 구체적 내용은 우리가 서로 용서하는 것”이라며 사랑과 평화가 넘치는 삶을 살아가기를 호소했다. 오세택 기자 sebastiano@cpbc.co.kr 평화신문2018.11.28
![[제7회 신앙체험수기] 특별상 / 야훼이레 하느님을 체험하며](//cpbc.co.kr/CMS/newspaper/2020/02/rc/773964_1.3_titleImage_1.jpg)
[제7회 신앙체험수기] 특별상 / 야훼이레 하느님을 체험하며[학교법인 가톨릭학원상] 이정희 데레사(전주교구 지곡본당) 삽화=장희원 이삭은 제가 첫 번째로 안아본 손주이기에 유난히 예뻐했습니다. 딸이 적령기에 결혼은 했는데 아이가 좀 늦어지자 시댁에서 이렇게 덕담을 해주신다고 했습니다. “넌 아직도 밥값을 못하냐?” 초조한 마음이 들었는지 딸과 사위는 신앙생활을 더욱 성실하게 했고 신앙 안에서 만난 부부답게 기도를 열심히 했습니다.드디어 첫 아들을 낳자 미리 지어놓은 이름이라며 “이삭” 하고 불렀을 때 부모의 그 모습이 어찌나 예쁜지 가족 모두가 기뻐했습니다. 세례명과 이름을 같게 지었다며 이튿날 출생 신고를 하고 행복해하는 딸의 가정에 이런 날이 올 줄은 꿈에도 생각지 못했습니다.이삭은 건강하게 잘 자라며 여동생 이다가 태어나고 그의 엄마가 오래도록 근무하던 성심유치원에 다니게 되었습니다. 딸은 아이들 다 낳았으니 전공을 살리고 싶다며 어린이집을 설립하고 성심유치원 수녀님과 자모들의 격려와 응원 속에서 영아 전담 어린이집을 운영하게 되었습니다. 어린이집 이름을 ‘이삭몬테소리어린이집’이라고 지은 것도 아들 이삭에 대한 애착이 컸기 때문이었습니다. 친가나 시가에서도 많은 사랑을 받았고 예쁘고 아름다운 가정을 이루고 살아가는 이 부부에게 계속 덕담을 해줬습니다.“아들, 딸 낳아 자녀 문제 해결했으니 너희는 이제 돈 벌 일만 남았구나.”덕담이 축복이 되어 국가 지정 영아 전담 어린이집으로 선정되었고, 지역에서 손꼽는 영아전담시설로 자리 잡게 되었을 때였습니다. 이삭이 여섯 살 되던 해. 상상도 못 했던 끔찍한 일이 벌어졌습니다. 체육관에 갔다 오던 이삭이 교통사고를 당한 것입니다. 그날 체육관 승합차 기사가 결근하여 사범이 대신 차를 운전하다가 운전 미숙으로 사고를 냈다고 했습니다. 이삭이를 집 앞에 내려주고 차 앞으로 돌아서 집으로 들어가는 이삭이가 보이지 않아 잘 들어갔으려니 하고 아무 생각 없이 그냥 지나갔다는 것입니다. 그래도 들어가는 이삭이를 확인 못 한 실수를 깨닫고 뒤를 돌아보니 피투성이의 아이가 쓰러져있어 응급실로 옮기며 가족에게 전화해서야 알게 되었습니다. 시간이 많이 지체되어 출혈이 심했고 뇌와 심장을 밟고 지나가 아이가 사경을 헤매고 있었을 때 저도 병원에 도착했습니다. 제발 생명만은 살려달라고 애원하는 부모의 기도를 들으며 응급실은 눈물바다가 되었습니다. 응급조치를 급히 끝내고 대학병원으로 옮기는 중에도 아이는 의식이 없었습니다. 이 글을 쓰면서도 그 당시 일어났던 상황들이 하나도 빠짐없이 눈앞에 어른거려 제 가슴을 울려주고 있습니다. 제힘으로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었고 오직 생명의 주관자이신 하느님의 섭리에 맡기는 길밖에 없다는 것을 뼛속 깊이 느끼는 시간이었습니다. 그 순간 주님께서는 제게 말씀으로 강한 힘을 주셨습니다. 남편이 오랜 투병생활 끝에 세상을 뜰 때에도 이렇게 뜨거운 영적 체험을 해보지는 못했던 것 같았습니다.“그 아이에게 손대지 마라. 그에게 아무 해도 입히지 마라. 네가 너의 아들, 너의 외아들까지 나를 위하여 아끼지 않았으니, 네가 하느님을 경외하는 줄을 이제 내가 알았다.”(창세 22,12)정신이 번쩍 들었습니다. 하느님께서 이삭이의 생명을 살려주신다는 확신이 들었습니다. 그때부터 기운이 솟아나고 용기가 났습니다. 대학병원에서 뇌수술 일정이 정해지고 이삭이의 마지막을 보려고 달려온 가족들이 모두 넋을 잃고 있는데 시간은 어느덧 새벽이 밝아오고 있었습니다. 그때 제가 가족들에게 말했습니다. “이삭이의 생명은 하느님께서 주관하고 계십니다. 그리고 치료는 의료진에서 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여기 있어 보아도 할 수 있는 것은 기도밖에 없습니다. 이제 돌아가셔서 기도 많이 해 주시고 각자 생업에 임하십시오. 제가 남아서 보호자로서의 역할을 하고 상태를 전달하겠습니다.” 그리고 이삭이의 부모에게 따로 일렀습니다. “평정심으로 돌아가 아무 일 없었다는 듯이 어린이집 아이들과 교사들 그리고 자모들을 대하여라. 시설을 운영하려면 표정관리도 중요하다. 원장의 불안한 표정은 아이를 맡기는 자모에게도 안정을 줄 수 없다.” 이렇게 해서 가족들을 모두 돌려보내고 저 혼자 남아 이삭이의 보호자가 되었습니다.어떤 장애를 입어도 좋으니 생명만은 살려달라고 애원하는 부모의 기도를 들어주신 하느님 은총으로 두 번의 뇌수술 끝에 아이는 생명을 건지면서 시신경이 크게 손상되어 전맹의 시각장애를 입게 되었습니다. 뇌 역시 성장을 멈추고 중복장애를 가지게 되었지만, 다리와 심장은 치료가 잘 되어 회복할 수 있었습니다. 걷게 된 것만으로도 주님의 크신 은혜라고 감사드리며 휠체어와 이별할 때는 병실에서 가족 파티를 열었습니다.아이를 간병하며 일 년간 병원생활을 하고 퇴원 후 우리 집에서 한동안 통원 치료를 하며 지내게 되었습니다. 저에게는 이때가 일생을 통해서 가장 소중한 시간이었습니다. 신앙생활을 하면서도 그저 형식적이요 율법적이었던 자신을 발견하면서 깊이 회개하게 되었습니다.“옷이 아니라 너희 마음을 찢어라. 주 너희 하느님에게 돌아오너라. 그는 너그럽고 자비로운 이 분노에 더디고 자애가 큰이 재앙을 내리다가도 후회하는 이다.”(요엘 2,13)천주교 신자라고 드러내면서 주님의 십자가는 아랑곳없이 겉으로 보이는 활동에만 전전하며 얼마나 교만한 삶을 살아왔는지 부끄럽기 그지없는 저에게 주님께서는 이 말씀을 주시며 내적 치유와 함께 위로를 주셨습니다. 형식적으로 바라만 보던 십자가의 예수님을 가슴으로 만나며 동참할 수 있게 된 것도 이 시기였습니다.그러면서도 순간순간 견디기 힘들었던 십자가는 제게 내공을 키워주는 힘과 용기가 되었기에 더욱 감사할 수 있었습니다. 참담하게 무너져가는 딸의 가정을 지켜보면서 극복할 힘을 주시기를 간절히 애원할 때에 믿음이 굳건해 짐을 느끼게 되었습니다. 심신이 지칠 대로 지쳐 살맛을 잃어 가는 부모와 그 틈바귀에서 소외당하고 있는 어린 손녀가 불쌍하여 눈물도 많이 흘렸습니다. 이삭이한테서 모든 희망을 잃었다고 생각하는 그의 아빠는 어디에서도 위로를 받지 못하고 인생길을 헤맸습니다. 안 피우던 담배를 피우고 새벽에 휙 어딘가를 나갔다가 만취되어 들어오기도 했습니다. 제가 좋은 말씀을 전해주어도 “어머니는 한 다리 건넜으니 제 마음을 이해 못 해요” 하면서 부정적이었습니다. 저는 기도 중에 가슴을 치며 통곡했습니다.그때 사랑이신 주님께서는 또다시 한 말씀으로 제 눈물을 닦아 주셨습니다. “아브라함이 눈을 들어보니, 덤불에 뿔이 걸린 숫양 한 마리가 있었다. 아브라함은 가서 그 숫양을 끌어와 아들 대신 번제물로 바쳤다. 아브라함은 그곳의 이름을 ‘야훼이레’라 하였다. 그래서 오늘도 사람들은 ‘주님의 산에서 마련된다’고들 한다.” (창세 22,13-14)주님은 이 가정을 그대로 두시는 분이 아니심을 알아차리게 되면서 필요한 모든 것을 예비해 주시는 야훼이레 하느님을 가슴 깊이 깨닫게 되었습니다. 병원생활과 간병생활을 마치고 가정이 안정을 찾는 데는 3년이라는 세월이 걸렸습니다. 이삭이의 부모도 많은 것이 변했지만, 신앙 안에서 믿음으로 살아가는 삶은 그대로여서 기특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저 역시 야훼이레 하느님께 맡기는 삶을 살다 보니 아무 걱정이 없어져 버렸습니다. 외가인 우리 집에서 몸조리를 마친 이삭이를 부모에게 데려다 주는 날, 서운했지만 잘 적응해 나갈 수 있도록 가족과 함께 기도하면서 잔치를 열었습니다.세월이 흘러 이삭이가 다친 지도 8년이 되는 해였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이삭이가 보고 싶어 방문했더니 사위의 얼굴이 활짝 펴있고 미소가 계속 흐르고 있었습니다. 이유를 물으니 제가 놀라 쓰러질 것 같은 답변을 듣게 되었습니다. 진정 “어메이징 그레이스”였습니다. 딸이 임신했다는 것입니다. 제왕절개 수술로 막내를 낳던 날 단산 수술을 권하는 의사에게 거절했다고 했습니다. 혼인강좌 때 자연 피임 외에 의료 기술이나 기구를 이용한 피임은 교리에 어긋난다고 들었기 때문이었답니다. 그래서 이런 결과를 가져왔다며 부부가 기쁨에 넘쳐 있었습니다. 얼마 후 초음파 검사를 했는데 아이가 쌍둥이라고 했습니다. 또 한참 지나서 아들 쌍둥이라고 하며 기뻐했습니다. 산모가 노산이라서 위험을 안고 출산했는데 뜻밖에 건강하게 태어났고 형 이삭이를 쏙 빼다 닮은 것이 신기할 정도였습니다. 이름도 이사야서 40장에서 독수리 같은 힘, 솟아나는 샘을 따다가 큰 쌍둥이는 ‘힘’, 작은 쌍둥이는 ‘샘’이라고 지었습니다. 아이들 4명이 북적거리는 딸의 가정을 보면서 동화 속의 한 장면을 그려 볼 때가 많이 있습니다. 맹아학교를 졸업하고 그 학교에서 신설한 전문대에 다니고 있는 이삭이는 언제나 이 가정의 중심을 차지하고 있습니다. 가정에서 일어나는 모든 이벤트를 이삭이의 취향에 맞춰 진행하고 있는 모습을 보면 참으로 대견스럽습니다. 쌍둥이는 신앙생활이 몸에 젖어 있고 성경을 많이 읽게 하는 부모의 교육이 제 마음을 기쁘게 해 줍니다. 이제는 어린 쌍둥이가 제게 종알거리는 말로 위로를 받으며 살고 있습니다. “할머니, 하느님께서 저희 가정을 많이많이 사랑하셔서 예수님하고 같이 살게 해 주셨어요. 이삭이 형이 바로 예수님이에요. 저희 쌍둥이는 예수님의 오른쪽 눈과 왼쪽 눈이 되어 줄 거예요” 하면서 이삭이를 부축하는 모습이 너무 귀엽습니다. 이삭이의 사고를 겪으며 여러 가지 질병이 찾아와 고생하던 사위는 건강을 회복하고 본당 활동을 열심히 하고 있습니다. 딸도 쌍둥이와 그의 아빠가 티셔츠를 세트로 입고 자전거로 학교 운동장을 달리는 모습을 보며 아들을 번제물로 바치라고 하신 하느님의 말씀에 순종한 아브라함처럼 쌍둥이를 예비해 주신 주님의 사랑에 무한 감사를 드리며 살고 있습니다. 저는 이삭이를 간병하면서 큰 자산을 얻었습니다. 올해로 신앙생활 60년을 맞아 74세 할머니가 되어서야 예수님의 십자가를 통하지 않고는 부활을 기대할 수 없다는 믿음의 확신을 가지게 된 것입니다. 깨달음을 주신 주님께 큰 감사를 드립니다. 성서 백주간 모임을 지속적으로 하며 생명의 양식을 얻고 숨 쉬는 순간들이 기도가 되기를 원하며 살게 되었습니다. 이 양식과 호흡으로 에너지를 충전하여 군산 지역에 하나밖에 없는 호스피스 병동에서 자원 봉사자로 활동하게 되었습니다. 저의 남은 삶은 말씀과 기도와 봉사가 삼위일체 되어 주님 앞에 예쁘게 봉헌되기를 소망하면서 이웃에 장애인을 둔 많은 가정이 주님께서 주시는 야훼이레 축복으로 행복해지기를 기도하며 살고 싶습니다. 긴 시간을 병원에서 보내면서 혼자 있는 시간도 많았습니다. 이삭이가 중환자실에 있을 때, 잠들어 있을 때 저는 성경을 읽었습니다. 그 시간 저를 위로해 주는 것은 말씀밖에 없었습니다. 그 옛날 베드로에게 하신 말씀이 지금 저에게 하시는 말씀으로 다가왔습니다. 바리사이에게 하신 말씀이 저를 꾸짖으시는 말씀으로 다가왔습니다. 고통을 겪으면서도 그 고통 속에 교훈이 담겨 있음을 알아차리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큰 자산을 무엇으로 얻을 수 있을까? 부자가 된 것처럼 행복했습니다. “너희는 앞으로 일어날 이 모든 일에서 벗어나 사람의 아들 앞에 설 수 있는 힘을 지니도록 늘 깨어 기도하여라.”(루카 21,36) 이 말씀을 들으며 무심코 흘려보내던 시간이 깨어 기도하는 시간이고 싶어졌습니다. 모든 것을 주님의 손에 맡기고 보니 이렇게 좋은 것들을 이삭이의 사고가 아니었다면 몰랐을 것입니다. 이삭이가 마지막으로 입원해 있던 병원에서 호스피스 자원봉사를 하게 된 것도 야훼이레 축복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모든 치료가 끝나고 죽음을 준비하는 말기 암 환우들에게 필요한 봉사를 해드리면서 제 앞날을 바라보기도 했습니다. 죽음은 삶의 완성이요 새로운 삶의 시작이라는 영적 지지를 하면서 환우들을 얼싸안고 울기도 많이 울었습니다. ‘힐링 시낭송’ 봉사를 할 때에는 이삭이에게 동화를 읽어주고 동요를 불러주던 추억이 되살아나서 환우들이 이삭이로 보일 때도 있었습니다. 그때 ‘말벗 되어 드리기’ 봉사를 하면 환우들의 마음이 열리고 하느님의 자녀가 되고 싶다는 고백을 하셨습니다. 많은 환우에게 비상 세례를 드리면서 세상 어떤 것과도 바꿀 수 없는 참 행복을 누리게 되었습니다. 이제는 예수님의 십자가에 동참하고 계신 환우들을 한 분이라도 하늘나라로 인도하는 것이 저의 사명이 되었습니다. “제 전화는 24시간 열려있습니다. 언제라도 마음이 결정되면 연락해주세요” 하면서 명함을 드리고 오면 한밤중이나 새벽에 연락이 올 때가 있습니다. 기쁜 마음으로 달려가서 대세를 드리고 장례 예절도 안내해 드리면 가족들이 신자가 되는 경우도 많습니다. 그러던 중 2020년 교구장 사목 교서가 발표되면서 저는 더욱 힘을 얻게 되었습니다. 제 활동과 관계가 깊은 말씀이었기 때문입니다. “내가 너희에게 명령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여라.”(마태 28,20) 인생길 걸어가며 힘들고 어려운 고비를 넘길 때에 함께 해준 도반도 많고 스승도 많았지만, 우리 주님 한 분 만난 것은 제 생애 최고의 행운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제 인생 마지막 혁명이었습니다. 어디든 주님 손만 잡고 간다면 두려움도 없고 걱정도 없습니다. 이토록 큰 은혜를 혼자만 누리기가 아까워 주님을 모르는 사람들에게 전하는 일이 큰 기쁨이 되었습니다. 이삭이와 함께했던 병원에서 호스피스 병동 환우들과 함께하는 시간은 제 일상 중에 가장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습니다. 교구장님 사목 교서의 말씀대로 저는 이 병원에 하느님 나라를 건설하는 데 열심히 협력하고 싶습니다. 주님께서 축복해주신 야훼이레 하느님을 체험한 믿음 하나로 제 몸이 움직일 수 있는 그 날까지 병원에서 환우들을 위하여 봉사하리라 다짐하면서 타임머신을 타고 18년 전 기억 속을 여행해 보았습니다. 그때 이삭이를 간병하면서 쓴 시 한 편으로 이글을 마칩니다.이삭을 위하여 이삭! 너와 나의 만남은 내 삶 속에 가장 밝은 빛이었지 네가 무럭무럭 자라며 이쁜짓 한 번 할 때마다 너의 밝은 빛은 내 마음속에 환하게 퍼져 나갔지 이렇게 고작 여섯 해 도대체 너의 빛은 어디로 갔단 말이냐? 풀밭에서 사마귀를 잡았다고 바닷가에서 조개껍질을 주웠다고 경이롭고 신기해하던 너의 맑은 눈동자 지금도 내 마음에 가득히 차오르는구나 그러나 이삭 빛은 여전히 있는 거란다. 어둠은 빛의 부재일 뿐 실제로는 없는 거란다 허상으로 있는 어둠에 매이지 말고 여전히 있는 네 빛을 비추어라 살아가면서 세상의 오염으로 빛이 없어졌다고 느껴지거든 너 스스로 빛이 되거라 너의 삶이 하늘 아버지의 가장 좋은 선물이거든 이웃에게 주는 또 하나의 따뜻한 선물이 아니겠느냐? 사랑하는 이삭 모리야 제단에서 분향같이 올려지는 기도의 향기 속에 곱게 곱게 자라서 가지고 온 하늘씨앗 충실히 가꾸는 하늘 사람되거라 이정희(데레사, 전주교구 지곡본당) cpbc2020.02.26
![[성당에 처음입니다만] (34) 연옥이 뭐예요](//cpbc.co.kr/CMS/newspaper/2019/11/rc/766008_1.2_titleImage_1.jpg)
[성당에 처음입니다만] (34) 연옥이 뭐예요죽은 영혼들이 정화하는 ‘연옥’ 연옥은 하느님 은총 속에 죽었으나 천국을 누릴 수 있을 정도로 깨끗하지 못한 영혼들이 천국을 누리기 위해 정화 과정을 거치는 상태를 말한다. 그림은 단테 신곡에 나오는 연옥 이미지. 나처음: 미사 중에 신자 한 분이 나와서 ‘연옥 영혼’을 위해 기도합시다라며 기도를 바치던데 연옥이 뭔가요. 난생처음 듣는 말이어서 지금도 그 단어가 머리에 맴돌고 있어요.조언해: 연옥(燃獄)은 천국 또는 천당이라고 하는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기 전에 생전에 지은 죄에 따른 벌을 정화하는 곳이야. 가톨릭교회만이 연옥 교리를 갖고 있는데 나는 개인적으로 착한 자는 천국에 가고 나쁜 사람은 지옥에 떨어진다는 이분법적인 심판보다 정화의 시기를 거쳐 하느님 나라에 갈 수 있다는 희망이 있어 연옥 교리가 참 인간적이고 하느님의 자비를 드러내는 교리라고 생각해.라파엘 신부: 언해가 연옥에 관해 간단명료하게 잘 설명해 주었구나. 가톨릭교회는 11월을 ‘위령 성월’이라 하여 세상을 떠난 이들, 특별히 연옥 영혼들을 위해 기도한단다. 교회가 죽은 이들을 위해 기도하는 이유는 현세에서 신앙생활을 하는 신자들(지상 교회)뿐 아니라 이미 하느님 나라 영광 중에 살아있는 성인들(천상 교회)과 연옥에서 정화 중인 이들(정화 중인 교회)이 함께 친교를 이루고 있는 신앙 공동체이기 때문이란다. 연옥을 이해하려면 죽음 이후의 내세에 관한 가톨릭교회의 가르침을 잘 알아야 하겠지. 가톨릭교회는 ‘사말(四末) 교리’라 하여 죽음, 심판, 지옥, 천국에 관해 설명하면서 죽음이 끝이 아니라 새로운 삶의 시작이라고 가르친단다. 그 이유는 참 하느님이시며 참 인간이신 예수님께서 죽으셨다가 부활하시어 승천하셨기 때문이다. 교회는 ‘죽음’을 원죄의 결과라고 정의해. 죽음은 창조주 하느님의 뜻과 어긋나는 것으로 죄의 결과로 세상에 들어왔지. 하지만 이 죽음은 주님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소멸이 아니라 구원이라는 새 삶의 시작으로 바뀌었단다. 죽음 후에는 ‘심판’이 반드시 따라요. 심판은 죽음 직후에 이루어지는 ‘개별 심판’(사심판)과 세상 마지막 날에 있을 ‘최후 심판’(공심판)으로 나뉜단다. 개별 심판은 각 개인의 지상 생활의 행실과 믿음을 결산하는 것이야. 그 결과 천국, 연옥, 지옥에 드는 것이지. 최후 심판은 예수님께서 재림하실 때 있게 될 총체적 심판이야. 이 심판의 기준은 ‘얼마나 사랑하고 살았느냐’가 될 것이라고 주님께서 우리에게 가르쳐 주셨지. ‘천국’은 하느님과의 완전한 일치, 궁극적인 만남이라고 설명해. 하느님과 일치된 삶을 통해 완전한 행복을 누리는 것이지. 반면 ‘지옥’은 하느님과의 완전한 단절을 뜻해. 하느님의 사랑에 대한 최종적 거부로 하느님과 영원히 결별한 상태를 말한단다. 그 결과는 고통과 괴로움이야.천국과 지옥은 ‘이미’ 이 세상에서 경험할 수 있단다.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이미’ 시작한 천국은 ‘아직 완성되지 않았지만’ 우리는 성경과 성사, 그리고 기도를 통해 하느님과 친교를 이루며 천국의 행복을 미리 경험하고 있단다. 지옥도 일상에서 맛보고 있지. 미움과 분노, 다툼, 시기 등을 통해 하느님과 이웃을 사랑하지 않고 등지면 얼마나 지옥 같은지 모두 체험하고 있지.‘연옥’은 죽음 후의 정화를 의미해. 하느님 은총 속에 죽었으나 천국을 누릴 수 있을 정도로 깨끗하지 못한 영혼들이 천국을 누리기 위해 정화 과정을 거치는 상태를 말하지. 한자어 연옥은 우리말로 ‘불감옥’을 뜻하지만, 이는 단지 라틴말 ‘Purgatorium’(푸르가토리움, 정화하다)을 은유적으로 표현한 거란다. 왜 금과 은이 불에 단련돼 불순물을 제거해야 하듯, 완전하지 못한 인간이 하느님과 하나 되기 위해 생전에 지은 죄를 뉘우치고, 하느님의 자비와 용서를 구하는 상태가 바로 연옥이라고 해. 이 연옥 상태에서 인간은 자신을 온전히 하느님께 개방하고 정화하면서 하느님의 무한한 사랑에 기대어 하느님과의 일치를 희망한단다. 교회의 아름다운 전통 중 하나가 이 연옥 영혼들을 위해 기도를 바치는 거란다. 죽은 이들이 영원한 행복에 이르게 하도록 기도로 연옥 영혼들에게 도움을 주는 것이지. 그래서 교회는 특별히 11월을 위령 성월로, 또 11월 2일을 위령의 날로 정하고 세상을 떠난 이들을 위해 기도하고 있어요. 리길재 기자 teotokos@cpbc.co.kr 평화신문2019.11.05

“힘든 이웃 마음 열고 생명의 힘 불어넣어요”서울 자양동본당 생명분과
광진구청과 업무협약 체결
자살 위험자 가정방문 등
구체적 생명 수호 활동 진행 서울대교구 자양동본당 생명분과장 김해주(오른쪽)씨와 봉성체회장 한춘자(왼쪽)씨가 가정방문을 해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어르신, 잘 지내셨어요?” “혼자 있으면 아무것도 안 하고 싶은데, 이렇게 찾아와줘서 고마워요. 요즘도 무서워서 밤에는 불을 켜고 자요. 여기 내가 그린 그림 좀 봐요.” 서울 광진구 자양동의 한 주택. 홀로 사는 어르신 집 인근에 있는 자양동본당(주임 남일오 신부) 생명분과 위원들이 방문했다. 남편을 먼저 떠나보내고 당뇨합병증에 우울증을 앓는 박복식(베로니카, 73) 할머니가 이들을 반갑게 맞이한다. 벽에는 할머니가 그려 놓은 그림 작품들이 걸려있다. 꽃과 나무, 고향 집을 그렸다. 박 할머니에게 붓을 들려준 사람은 생명분과장 김해주(엘리사벳, 59)씨다. 그는 지난겨울, 우울증으로 삶의 의욕을 잃은 할머니를 휠체어에 태워 화방에 가서 미술 도구를 사왔다. 미술에 재능이 있던 할머니는 김씨를 통해 삶의 활기를 얻었고, 서서히 치유되고 있다. 이처럼 자양동본당 생명분과는 지역사회 안에서 생명 지킴이 역할을 톡톡히 하고 있다. 20여 명 위원이 △자살 △낙태 △안락사 △사형 4개 팀으로 나뉘어 활동하고 있다. 생명수호활동을 거시적인 주제로 나눴지만, 실천은 일상적이고 구체적이다. 본당은 2017년 광진구청과 MOU를 체결하고, 본당 전 신자를 대상으로 자살예방 지킴이 교육을 실시했다. 광진구 보건소 자살예방과에서 자살 위험에 있는 대상자들을 연결해주면, 분과 위원들이 정기적인 전화 및 가정방문을 통해 사례 관리를 한다. 낙태 반대 운동의 일환으로는 1년에 두 차례 바자를 열어 미혼모 대안학교인 자오나학교와 낙태 화해 피정을 여는 착한목자수녀회에 후원 물품과 후원금을 보낸다. 생명분과 소속인 봉성체 봉사자들은 몸이 아픈 환자들의 가정의 문턱을 넘나들며, 용기와 힘을 북돋아 준다. 교도소에 가톨릭 잡지 후원도 하고 있다. 또 성당에는 생명나무도 설치돼 있다. 신자들이 생명나무에 기도 지향을 적어놓으면 매달 마지막 주 토요일 미사 때 기도 지향들을 모아 봉헌한다. 본당 신자들은 생명분과가 너무 추상적이고 눈에 드러나지 않는다는 불만도 호소했지만, 광진구청과 업무협약을 맺으면서 본당의 생명수호 활동이 지역사회와 동반해야 한다는 것을 알게 됐다. 생명분과장 김해주씨는 몇 년 전 우울증으로 자살 시도까지 했다가 기적처럼 구조돼 살아났다. 그는 자신이 이렇게 살아있는 것은 “이 땅에서 할 일이 있는 것”이라며 “누구보다 죽고 싶었던 마음을 잘 알기에 힘들어하는 이들이 마음의 문을 열도록 도와줄 수 있다”고 말했다. 이어 그는 “이웃 중에 우울증을 앓고 자살을 생각하는 분들이 많고, 삶의 의욕을 잃은 분들을 예수님께 인도하면 생명의 힘을 얻는다”고 밝혔다.생명분과는 전 신자 「생명의 복음」 필사운동과 함께 사형수들에게 편지ㆍ성경 보내기, 아름다운 죽음을 맞이하는 존엄사에 대한 교육을 실시할 예정이다. 이지혜 기자 bonaism@cpbc.co.kr 평화신문2019.08.20
외적 욕심보다 내적 영성에 눈떠야 할 때탐욕 안셀름 그륀 지음 / 황미하 옮김 / 바오로딸 / 1만 5000원과유불급(過猶不及)의 교훈은 성경에 숱하게 등장한다. 예레미야 예언자는 “정녕 낮은 자부터 높은 자에 이르기까지 모두 부정한 이득만 챙긴다”(예레 6,13)며 사제, 통치자, 부자의 탐욕을 공개적으로 비난했다. 시편도 “제 마음을 잇속이 아니라 당신 법으로 기울게 하소서”(시편 119,36)라고 노래했다. 성경은 탐욕이 복음을 왜곡시킨다고 끊임없이 전하고 있다. 자본주의는 돈과 권력을 마음껏 탐하도록 부추겼고, 가부장적 사회는 사람마저 소유하고 그 위에 군림해도 된다는 인식을 심어줬다. 인간의 허기는 정신적인 것에서 비롯되는 법. 우리는 마음 안에 일어나는 탐욕을 자라도록 내버려두기만 했지, 무력하게 만들 생각은 없었다. ‘세계적 영성가’ 안셀름 그륀 신부의 시선이 ‘탐욕’에 이르렀다. 그는 외적 소유에만 집착한 채 내적 영성을 지닐 욕심을 지니지 못하는 풍조를 꼬집는다. 더 가지려는 욕망은 개인을 고통으로 이끌기도 하고, 공동체 근간을 무너뜨리기도 한다. 뉴스에 등장하는 사건 사고의 깊은 내면을 들여다보면 대부분 누군가의 탐욕이 원인인 경우가 많다. 저자는 탐욕을 마구잡이로 근절하기보다, 내면의 욕심과 대화하고, 상대화시켜 내적 자유와 평정심에 이르는 방법을 제시해주고 있다. 그륀 신부는 늘 가난한 이들을 도와주고, 우리의 가장 큰 갈망을 채워주시는 분을 바라보는 두 가지 일만은 절대 놓치지 말고 살아야 한다고 당부한다. 이정훈 기자 sjunder@cpbc.co.kr문채현2018.12.27
![[이창훈 위원의 사도행전 이야기] (30) 베드로가 코르넬리우스가 보낸 사람들을 만나다(10,9-23ㄱ)](//cpbc.co.kr/CMS/newspaper/2019/08/rc/761109_1.0_titleImage_1.jpg)
[이창훈 위원의 사도행전 이야기] (30) 베드로가 코르넬리우스가 보낸 사람들을 만나다(10,9-23ㄱ)“하느님께서 만드신 것을 속되다고 하지 마라”베드로는 환시를 보고 코르넬리우스가 보낸 사람들을 만난다. 사진은 야포 바닷가에 있는 베드로 사도 기념 성당.베드로의 환시는 지난 호에 살펴본 코르넬리우스의 환시와 밀접히 연결돼 있습니다. 두 환시를 매개로 마침내 베드로와 코르넬리우스가 만나게 됩니다. 이번 호에서는 베드로가 본 환시 내용과 함께 코르넬리우스가 보낸 사람들을 베드로가 맞아들이기까지를 살펴봅니다. 베드로가 환시를 보다(10,9-16) 코르넬리우스가 환시를 본 다음 날이었습니다. 그가 보낸 사람들이 야포 가까이에 이르렀을 무렵에 야포 무두장이 시몬의 집에 묵고 있던 베드로는 낮기도를 바치려고 옥상에 올라갑니다. 점심때여서 사람들은 음식 준비를 하고 있었고 베드로는 배가 고팠습니다. 그러다가 그는 무아경에 빠집니다.(10,9-10) 무아경 속에서 베드로는 환시를 봅니다. 하늘이 열리고 큰 아마포 같은 그릇이 내려와 네 모퉁이로 땅 위에 내려앉았습니다. 그 안에는 네발 달린 짐승들과 땅의 길짐승들과 하늘의 새들이 모두 들어 있었습니다. 그런데 “베드로야, 일어나 잡아먹어라” 하는 소리가 들려왔고, 베드로는 “주님, 절대 안 됩니다. 저는 무엇이든지 속된 것이나 더러운 것은 한 번도 먹지 않았습니다” 하고 대답합니다. 그러자 다시 두 번째로 “하느님께서 깨끗하게 만드신 것을 속되다고 하지 마라” 하는 소리가 들려왔습니다. 이런 일이 세 번 거듭되고 나서 그 그릇은 갑자기 하늘로 들려 올라갔습니다.(10,11-16) 이것이 베드로가 본 환시의 내용입니다. 여기서 몇 가지 눈여겨볼 것이 있습니다. 우선, 큰 그릇에 담긴 것들인데, 네발 달린 짐승과 길짐승과 하늘의 새들입니다. 이것들이 하늘로부터 내려왔다고 하는 것은 하느님께서 만드신 것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다음으로, “일어나 잡아먹어라” 하는 소리에 대한 베드로의 반응입니다. 베드로는 “주님, 절대 안 됩니다. 저는 무엇이든지 속된 것이나 더러운 것은 한 번도 먹지 않았습니다” 하면서 완강히 거부합니다. 구약성경 레위기 11장은 정한 짐승과 부정한 짐승을 자세히 열거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를 토대로 유다인들은 정한 음식과 부정한 음식을 철저히 가렸습니다. 베드로 역시 유다인으로서 정한 음식과 부정한 음식에 관한 규정을 철저히 지켰고 그래서 “잡아먹어라” 하는 소리가 들려왔을 때 “속된 것이나 더러운 것은 한 번도 먹지 않았습니다” 하면서 완강히 거부한 것입니다. 베드로가 “주님” 하고 응답한 것은 “잡아먹어라” 하는 소리를 주님의 음성으로 받아들이고 있음을 보여 줍니다. 셋째로, “하느님께서 만드신 것을 속되다고 하지 마라” 하는 두 번째 소리입니다. 이 두 번째 소리는 베드로에게 정한 음식과 부정한 음식에 대한 지금까지의 관념에서 벗어날 것을 촉구하는 소리라고 할 수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이런 일이 세 번이나 반복됐다는 점입니다. 성경에서 셋은 완전함을 뜻하는 숫자라고 합니다. “하느님께서 만드신 것을 속되다고 하지 마라”는 당부의 말씀이 세 번이나 계속됐다는 것은 정(淨)ㆍ부정(不淨)으로 차별해서는 안 된다는 하느님의 뜻이 그만큼 강하다는 것을 시사한다고 학자들은 풀이합니다. 코르넬리우스의 사람들을 만나다(10,17-23ㄱ) 하지만 베드로는 자신이 본 환시가 어떤 의미인지 아직 알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어리둥절해 하면서 환시가 무슨 뜻일까 하고 곰곰이 생각하고 있는데, 마침 코르넬리우스가 보낸 사람들이 시몬의 집을 찾아와서는 베드로라고 하는 시몬이 묵고 있는지를 묻습니다. 그리고 성령께서는 베드로에게 “지금 세 사람이 너를 찾고 있다. 그러니 일어나 내려가서 주저하지 말고 그들과 함께 가거라. 내가 그들을 보냈다” 하고 이르십니다.(10,17-21) 이 대목도 찬찬히 살펴보면 몇 가지 점이 눈에 뜨입니다. 우선 환시를 본 베드로가 환시 내용에 대해 궁금해하는 시점과 코르넬리우스가 보낸 사람들이 베드로를 찾는 시점이 절묘하게 일치합니다. 그리고 바로 그 순간에 성령께서 베드로에게 찾아온 사람들을 만나라고 이르십니다. 다음으로, 베드로가 환시를 본 내용과 성령께서 베드로에게 이르신 말씀이 묘하게 짝을 이루고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일어나 잡아먹어라”(10,13) 하는 소리와 “일어나 내려가서… 그들과 함께 가거라”(10,20) 하신 말씀이 짝을 이루고, “하느님께서 깨끗하게 만드신 것을 속되다고 하지 마라”(10,5)는 “내가 그들을 보냈다”(10,20)와 짝을 이룹니다. 결국, 코르넬리우스가 환시를 보고 사람들을 보내고 베드로가 환시를 보고 코르넬리우스가 보낸 사람들을 만나고 하는 모든 것이 바로 하느님께서, 곧 성령께서 하시는 일이라는 것을 사도행전의 저자는 이야기하고 있다고 하겠습니다. 이제 베드로는 성령께서 이르신 대로 내려가서 사람들을 만납니다. 코르넬리우스가 보낸 세 사람을 만나는 순간 베드로는 그들이 이방인들임을 직감했을 것입니다. 두 사람은 코르넬리우스의 하인이고 한 사람은 그의 부하로 로마 군인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러고는 무슨 일로 자기를 찾아왔는지 묻지요.(10,21) 베드로의 물음에 그들은 이렇게 대답합니다. “의롭고 하느님을 경외하는 사람으로 온 유다 민족에게 좋은 평판을 받는 코르넬리우스 백인대장이, 선생님을 집으로 모셔다가 말씀을 들으라는 지시를 거룩한 천사에게서 받았습니다.” 그러자 베드로는 그들을 맞아들여 그곳에 묵게 합니다.(10,22-23ㄱ) 베드로는 이방인들의 말을 듣고 나서는 그제야 자신이 본 환시가 무슨 뜻인지 깨달았을 것입니다. 그것은 하느님께서 좋게 만드신 것을 두고 정한 음식, 부정한 음식으로 가려서는 안 되듯이, 주님의 복음을 전하는 일에서 유다인과 이방인을 가려서는 안 된다는 뜻이었던 것입니다. 베드로가 그들을 맞아들여 묵게 한 것은 그날 카이사리아까지 가는 것이 불가능했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서 베드로는 자신이 본 환시와 성령께서 하신 말씀을 더욱 깊이 되새기고 곱씹어보지 않았을까요?생각해봅시다“일어나 잡아먹어라” 하는 소리에 베드로는 완강히 거부합니다. “주님, 절대 안 됩니다. 저는 무엇이든 속된 것이나 더러운 것은 한 번도 먹지 않았습니다.”(10,14) 그러자 하늘에서 다시 두 번째로 소리가 들려옵니다. “하느님께서 깨끗하게 만드신 것을 속되다고 하지 마라.”(10,15) 이 소리는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을 떠올리게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조상들의 전통과 관련하여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과 논쟁을 벌이신 후 군중들에게 “입으로 들어가는 것이 사람을 더럽히지 않는다. 오히려 입에서 나오는 것이 사람들을 더럽힌다”(마태 15,11)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을 따라다니면서 분명히 예수님에게서 이런 가르침을 배웠을 것입니다. 하지만 주님 승천 후 주님의 복음을 전하는 과정에서 베드로는 다시 옛 전통에 젖어 있었습니다. 하늘에서 두 번째로 들려온 목소리는 베드로에게 이를 깨우치는 말씀이었습니다. “하느님께서 깨끗하게 만드신 것을 속되다고 하지 마라.” 우리도 살아가면서 자주 되새기며 우리 삶을 성찰하는 토대로 삼아야 할 말씀입니다. cpbc2019.08.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