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앙인에게 건네는 위로와 희망의 가르침 묵시록에 담긴 메시지 꼼꼼히 풀어내 요한 묵시록 바르게 읽기 요한 묵시록 바르게 읽기 허규 신부 지음 / 성서와함께 / 1만 5000원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를 묘사한 성경의 마지막 책, 요한 묵시록.그러나 안타깝게도 요한 묵시록은 많은 이들에게 ‘읽기 난해한 성경’으로 오해받고 있다. 어떻길래?요한 묵시록은 저자가 환시 중에 본 계시를 다양한 상징 언어로 표현했다. 하늘, 별, 천둥, 번개 등 천체와 관련된 상징부터 어린양, 사자, 뱀 등 각종 짐승이 저마다 의미를 지닌다. 신약에선 유일하게 용(龍)까지 등장한다. 이 밖에도 인간의 육체, 색깔, 숫자 등 다양한 표징이 각기 다르면서도 같은 의미로 혼용돼 나온다. 어떤 상징은 구약에도 등장하는 것과 같지만, 어떤 표현은 다른 성경에서 찾기 어렵다. 이 때문에 요한 묵시록 환시를 두고 ‘모자이크식 환시’라고 부르기도 한다.허규(가톨릭대 신학대학 교수) 신부의 「요한 묵시록 바르게 읽기」는 요한 묵시록의 배경과 본문 해석, 풀이를 망라한 길잡이다. 문학 유형 상 ‘묵시문학’에 속하는 요한 묵시록은 환시를 이용해 초월적 세상과 현실을 구분한다. 종말과 심판이나 전쟁의 이미지를 많이 쓴다. 저자는 요한 묵시록이 예언서냐 아니냐를 두고 가질 수 있는 의문, 종말과 심판이란 강력한 주제를 잘못 받아들여 왜곡해 해석하는 경우, 저술 시기 등과 관련해 꼼꼼히 풀이해 답해준다. 요한 묵시록이 악에 대한 심판과 벌을 강조하다 보니 더러는 요한 묵시록을 두고 미래를 예견하거나 종말의 시기를 점치고자 쓰인 책으로 오해하기도 한다. 그러나 요한 묵시록은 그보다 신앙을 간직한 이들에게 주어지는 상을 더 강조한다. 어떤 상황에서도 희망을 잃지 않고 신앙을 지킨다면 하느님의 약속이 반드시 이뤄지리라는 위로와 희망의 가르침이 요한 묵시록의 가르침이다. 이정훈 기자 문채현2018.10.17
![[동유럽 신앙 역사를 순례하다] <3> 1000년 수도원 품은 오스트리아](//cpbc.co.kr/CMS/newspaper/2019/10/rc/765005_1.1_titleImage_1.jpg)
[동유럽 신앙 역사를 순례하다] <3> 1000년 수도원 품은 오스트리아중세의 화려함과 수도원 영성 공존… 종교 문화의 요람되다 10만여 권의 장서를 소장하고 있는 멜크수도원 도서관 모습. 다양한 분야 서적과 1200년된 필사본 등 방대한 서적이 있으며, 열람도 가능하다. 초가을 기운이 감돌던 9월 25일 아름다운 예술의 도시 오스트리아 빈. 국립오페라극장에서 흘러나오는 연주 소리에 귀 기울이는 사람들 사이로 관광객을 태운 마차들의 말발굽 소리가 중세에 온 듯한 착각을 불러올 때쯤. 북적북적한 빈 도심에서 높이 140m 첨탑의 위용을 드러낸 오스트리아 교회의 중심 빈대교구 슈테판대성당 앞에 다다르자 고개가 절로 꺾인다.그리스도교 초기부터 신앙이 전파돼 오늘에 이르는 오스트리아 교회는 현재 세계적인 신학자요, 저술가로도 유명한 빈대교구장 크리스토프 쇤보른 추기경과 2012년 전 세계에 보급된 청년 교리서 「유캣(YOUCAT)」(오스트리아 주교회의 발간)으로도 잘 알려진 나라다.문화와 예술, 믿음으로 보편교회에 기여하며 현대 신앙의 위기에 맞서 해법을 제시하고 있는 오스트리아 교회는 1000년 역사의 수도원들을 품고 있는 곳이기도 하다. 수 세기 동안 나라의 흥망성쇠를 함께하고, 오늘날 새로운 방식으로 영성을 전하고 있는 ‘성 베네딕도회 멜크수도원’과 ‘성 아우구스티노회 노이부르크수도원’이다.영성과 학문의 천 년 전당, 멜크수도원도나우 강을 따라 서쪽으로 약 80㎞ 떨어진 작은 마을 멜크. 2000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된 자연경관 사이로 커다란 요새와 같은 웅장함을 자랑하는 멜크수도원이 순례객들을 빨아들이고 있었다.수도원 입구부터 반대편까지 거리가 300m가 넘고, 일곱 개의 중앙 정원을 갖춘 멜크수도원은 궁전으로 착각할 만큼 화려하다. 그도 그럴 것이 멜크수도원은 본래 성(城)이었다. 오스트리아를 세운 바벤베르크 왕가의 레오폴드 2세가 1089년 자신의 성을 베네딕도회에 기증하면서 설립됐다.‘Absit glorirari nisi in crvce’(나는 십자가 외에는 아무것도 자랑하고 싶지 않습니다). 수도원 꼭대기 금빛 십자가 아래 라틴어로 적힌 바오로 사도의 말씀이 이곳이 수도원임을 잘 알려주고 있다.멜크수도원은 오스트리아 신학 발전과 영성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신성로마제국 시절, 마리아 테레지아 여왕의 아낌없는 재정 지원으로 전성기를 누렸고, 15세기에는 독일어권 수도자들의 수도생활 회복 운동의 중심지였다.‘기도하고 일하라’는 베네딕도회 영성 아래 수도자들은 거대한 수도원을 신앙과 문화의 요람으로 발전시켰다. 신성로마제국의 황제들을 배출한 합스부르크 왕가의 거대한 초상화가 걸린 긴 복도를 지나면 멜크 마을이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발코니에 다다른다. 바로 옆 출입문 뒤로 10만여 권의 서적과 고문서를 소장하고 있는 도서관이 모습을 드러낸다. 법률ㆍ의학ㆍ철학ㆍ신학 서적과 1200년 된 필사본 등 방대한 장서가 꽂힌 서가를 관람할 수 있다.1000년 전 나라를 지킨 성이었던 이곳은 오늘날 ‘그리스도교 영성의 요새’가 됐다. 신자ㆍ비신자 영신수련 피정 프로그램, 본당 사목, 끊이지 않는 문화 예술 공연과 순례로 연간 500만 명의 사람들을 불러모으고 있다. 수도원이 운영하는 명문 사립 중고등학교에는 학생 900여 명이 수학 중이며, 입학 희망자들은 늘 정원을 초과한다. 수도원은 루마니아, 코소보, 아프리카 부르키나파소에 학교와 유치원도 운영 중이다. 사제는 30명 정도지만, 학교와 박물관 등에서 일하는 이들이 350명에 이른다.시대와 발맞춰 나아가는 노이부르크수도원빈 도심 인근에 자리한 ‘성 아우구스티노회 노이부르크수도원’은 오스트리아의 수호성인 레오폴드 3세가 1114년 아내 아녜스와 함께 설립했다. 레오폴드 3세는 당시 이곳을 거대한 왕실 궁전으로 쓰려 했지만, 계획이 변경돼 1133년 아우구스티노회에 기증했다. 그 탓에 본래 계획의 4분의 1 크기로 지어졌다. 합스부르크 왕가를 상징하는 왕관 돔을 쓴 수도원은 왕족이 쓰려던 화려한 공간과 소박한 수도원 공간을 함께 갖추고 있다.아우구스티노회는 하느님 탐구와 설교 분야 발전에 크게 기여한 수도회다. 이곳 노이부르크수도원 또한 대중 전례 운동과 성서사도직 단체를 조직해 운영하며 중세 때부터 과학과 신학연구소 역할을 했다. 1900년대 내내 수도원은 피우스 파르쉬 수사가 펼친 전례 개혁 운동으로 교회 발전에 기여한다. 파르쉬 수사는 ‘노이부르크 수도원 성서사도직’을 설립해 보급형 성경과 입문서를 출판해 실용적인 전례 자료를 전파하는 데 공헌했다.수도원은 중세 시대 제작된 금세공으로는 가장 오래된 보물인 ‘베르둔 제단’을 비롯해 오스트리아 ‘대공의 관’, 성 레오폴드 3세의 유물을 비롯해 장서 3만여 권을 소장한 도서관 등 1000년 역사를 품고 있다.오늘날 수도원은 ‘믿음, 와인, 문화’라는 기치 아래 영성 전파에 힘쓰고 있다. 수도원은 세계 지역 교회 26개 본당 사목을 맡고 있다. 오스트리아에서 가장 오래되고 규모가 큰 900년 된 와인 양조장과 포도밭 운영으로 세계적인 와인도 생산하고 있다. 종교 문화와 예술 발전을 위해 수도원은 각종 예술품을 수집 및 전시 중이며, 이에 수도원의 큰 공간을 박물관으로 조성해놨다. 성미술 작품 4만여 점을 소장하고 있으며, 젊은 예술가들의 작품을 대상으로 매년 ‘성 레오폴드 평화상’을 공모해 시상하는 등 1000년 수도원은 시대에 발맞춘 변화와 노력으로 영성 전파에 노력하고 있다. 이정훈 기자 sjunder@cpbc.co.kr 평화신문2019.10.22
서울대교구, 가톨릭 문화아카데미 설립문화·예술 통해 하느님과 더 친숙해지는 계기 마련서울대교구 문화홍보국(국장 유환민 신부)이 ‘가톨릭 문화아카데미(원장 유환민 신부)’를 설립했다. 전례, 문화, 영성, 인문학 등 다양한 형태로 문화와 신앙을 나누는 장이다. 3월 개강한 가톨릭 문화아카데미는 △명사 특강 △문화 영성 프로그램 △청년문화학교 △가톨릭미술 아카데미 △청년문화학교 문화강좌로 구성돼 있다. 아카데미 설립을 기념해 마련한 명사 특강은 3월 20일부터 5월 29일까지(10주) 매주 수요일 오후 2시 서울 명동 가톨릭회관 1층, 교구청 501호에서 열린다. 강사로는 한비야(비아) 월드비전 세계시민학교장, 정호승(프란치스코) 시인, 방송인 이인혜(데레사)씨, 허영엽(교구 홍보위원회 부위원장) 신부, 양영은(아녜스) 기자가 참여한다. 신청은 온라인(http://naver.me/xItM05BF)을 통해 받고, 선착순 무료다. 문화 영성 프로그램은 헬로우 기도, 가톨릭 영성서적 그룹지도자 양성, 영화와 영성, 청년 성경통독으로 이뤄져 있다. 청년 대상인 인문학강좌 ‘청년문화학교’는 8기 수강생을 모집하고 있으며 3월 21일부터 6월 20일까지(12주) 매주 목요일 저녁 7시 30분 교구청 501호에서 열린다. 신청은 온라인(http://naver.me/xaFRY2gX)으로 하면 된다. 직접 만들고 체험하는 청년문화학교 문화강좌도 마련돼 있다. 초충도(草蟲圖) 실기를 비롯해 스테인드글라스 부활 촛대 만들기, 해금으로 드리는 기도, 도자기 성물 만들기 수업이 준비돼 있다. 가톨릭 문화아카데미는 프랑스 베르나딘 대학교의 교회학교 프로그램을 벤치마킹한 것. 가톨릭 문화아카데미 원장 유환민 신부는 “문화와 예술을 배우고 익히고 감상하며 하느님께 닿을 길을 찾는 즐겁고 유쾌하지만 동시에 진지한 신앙학교”라고 소개했다. 프로그램 문의 및 신청은 문화홍보국 홈페이지(http://cc.catholic.or.kr)를 통해 하면 된다. 이지혜 기자bonaism@cpbc.co.krcpbc2019.03.27

다양한 소재의 대담하고 실험적인 작품에 그리스도교적 메시지 녹여내[한국 가톨릭 미술 여성 작가들]나희균 크리스티나 화백 빛, 자연, 물성의 탐구. 나희균(크리스티나, 1932~) 화백의 작품을 대하면서 떠올리게 되는 단어들이다. 그의 작품은 평면 작업에서 네온, 금속을 이용한 입체 작품까지 다양하고도 혁신적이다. 이번 글은 주교회의 문화예술위원회 주관, 한국 가톨릭 미술가 동영상 기록 사업으로 진행했던 나희균 화백과의 인터뷰 내용을 중심으로 다루고자 한다.나희균 화백은 경기여고 재학시절 미술반 활동을 계기로 1950년 서울대 미대 회화과에 입학했다. 입학하고 얼마 되지 않아 6ㆍ25전쟁이 발발하면서 피란 생활과 집안이 몰락하는 어려움을 겪었다. 하지만 그는 대학 재학 중이던 1953년 제2회 국전에서 작품 ‘가족’으로 입선해 재능을 인정받았고, 1954년 졸업 후 형부의 도움으로 프랑스 유학길에 올라 파리 에콜데 보자르에서 3년간 수학하고 귀국했다. 나 화백이 파리에 체류하던 시기에는 파블로 피카소, 앙리 마티스, 조르주 루오, 조르주 브라크, 페르낭 레제와 같은 현대 미술의 거장들이 활동했던 시기였고, 많은 회고전이 열리고 있었다. 당시 20대 중반이던 그는 여러 거장의 작품을 직접 감상하면서 견문을 넓힐 수 있었다. 나 화백은 인터뷰에서 “당시 조르주 브라크의 장인적인 마티에르와 시적인 표현을 많이 좋아했다”고 회고했다. 그는 또한 파리 유학 시기에 가톨릭에 입교해 1958년 세례를 받았다. 나 화백은 1959년 서울대 회화과 동기인 안상철 화백과 혼인해 서양화가와 동양화가로서 예술적 동반자의 길을 함께 걸었다. 우리나라 최초의 서양화가인 고희동이 이들의 혼인 주례를 선 일화는 유명하다. 우리나라 최초의 여성 서양화가인 나혜석의 조카이기도 한 나희균 화백은 대담하고 실험 정신이 돋보이는 작품들을 꾸준히 선보였다.그의 여러 작품 중에서도 특히 1970~80년대의 네온 작품들이 눈길을 끈다. 나 화백이 네온을 사용하게 된 것은 그리스 태생의 미국 여성 작가 바르다 크리사(Varda Chryssa) 작품을 접하면서였다. 그는 “상업용으로만 쓰일 수 있다고 믿었던 네온이 예술적으로도 쓰일 수 있음을 깨닫고 충격을 받아 자신도 한번 표현해보고 싶다는 생각으로 작업을 시작했다”고 한다. 나 화백은 ‘빛이 어둠을 밝히고 사람에게 참으로 어떤 희망을 줄 수 있다’는 점이 매력이 있어서 네온을 다루게 되었지만, 깨지기도 쉽고 오래 보관하기도 힘들어 매사에 조심해야 하는 네온 작업을 위해서는 많은 어려움을 감내해야 했다. 그는 어둠 속에서 켜진 네온의 환하고 밝은 불빛은 사람들을 희망의 길로 인도해주는 상징과 같다고 하며 네온 작업으로 완성된 ‘성체등’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성당에 가면 감실에 빨간 등이 켜져 있죠. 그래서 네온을 사용할 수 있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네온의 색은 몇 가지로 한정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빨간색과 주황색으로 성체와 성작, 물고기 모양을 만들어 보았습니다. 사람이 길을 잃으면 어둠 속에서 헤매게 되죠. 그런데 빛이 보이면 희망을 얻는다는 의미를 가질 수 있는 것 같습니다. 크고 작은 네온들을 사용하면서, 의도한 것은 아니지만 큰 사람들이 작은 사람들을 지탱해주는 세상의 모습을 그려보게 됩니다. 물론 작품을 할 때는 그런 생각은 전혀 하지 않았고 선과 파이프의 조화만을 생각하며 작업했죠.” 1988년 작품인 ‘무명 순교자들을 위하여’ 역시 그리스도교 주제를 다룬 그의 대표작이다. 나 화백은 평신도에 의한 신앙의 전파와 박해에도 불구하고 신앙을 지켜낸 우리나라 순교자들과 교회 역사, 그중에서도 이름조차 알려지지 않은 무명의 순교자들이 보여준 깊은 신앙에 경의를 표하며 이를 작품으로 표현하고자 했다. 그리고 작가는 당시 쉽게 접할 수 있었던 건축자재, 파이프, 철판, 동선 등을 이용해 그림을 떠나서 보다 자유로운 표현을 추구할 수 있었다.“이 작품을 만들 때 정말 고생스러웠지요. 종이에 실제 크기대로 본을 그려서 종로상가 철공소에서 철판을 사와 집에서 모양대로 잘라서 구멍을 뚫어 붙이고 파이프를 끼우고 하면서 리드미컬하게 표현했죠. 어떤 사람은 악기냐고 묻기도 하는데… 내가 음악을 좋아해서 리드미컬한 작품이 나오지 않았을까 생각합니다.” 나희균 화백의 작품은 그리스도교 주제에 국한되어 있지 않다. 그는 빛, 자연, 물질에 대한 탐구를 화두로 다양한 실험적인 작품을 선보였다. 하지만 나 화백의 작업방식 안에는 그리스도교의 메시지가 담긴 작품들이 공존하고 있다. 나희균 화백은 ‘아브라함의 하느님’(1997)으로 1998년 제3회 가톨릭 미술상 회화 부문 본상을 받았다. 작가는 ‘아브라함과 이사악, 야곱의 하느님’이라는 말에 강렬한 인상을 받아 이를 그림으로 완성했다. 한지에 동양화 물감으로 그린 이 작품에서 아브라함은 3개의 천막, 이사악은 번제의 장작, 야곱은 우물로 각각의 상징을 나타내고 있다.나 화백이 성당에 남긴 첫 작품은 그가 70대에 들어서 작업한 춘천교구 운천성당 십자가의 길 14처이다. 구상적 표현의 회화로 완성된 이 작품에 대해 그는 “당시 많이 서툴고 제대로 그리는 것이 어려웠다”고 회고했다. 그는 “글씨나 그림은 그 사람 자체이다. 신앙의 메시지는 자연스럽게 우러나는 것이지 십자가를 그렸다고 존경받는 것은 아니다”라며 성미술에 있어서 신앙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한때 신앙생활에 어려움도 있었다”는 나 화백은 “로마노 과르디니의 저술을 통해 기도에 대해 묵상하고 신앙생활을 지탱할 수 있다”고 고백했다. 그는 “신앙도 화초와 같아서 물을 주고 키워야 자랄 수 있고 내버려 두면 시들게 된다”며 “성경과 교회사에 대해 꾸준히 공부할 것”을 권했다. 그리고 “자신의 신앙이 우러나와서 작업할 수 있게 되었을 때 진정한 성미술이 완성될 수 있다”는 메시지를 그의 작품을 통해 전해주고 있다.나 화백은 2017년 첫 부부전인 ‘오브제의 재발견, 안상철ㆍ나희균의 입체 작품전’과 2018년 환기재단 선정 작가전 ‘빛의 공간, 그리고 자연’전에 이어 2019년 4월에 14번째 개인전을 열어 왕성한 작품 활동을 펼치고 있다. 정수경 교수(인천가톨릭대 대학원 그리스도교미술학과) 평화신문2019.12.04

성경의 장과 절, 언제 만들어졌을까?유다인들 끊어 읽기 쉽게 구분하기 시작두루마리 화선지에 붓으로 신약성서를 필사한 모습. 가톨릭평화신문 DB문: 성경의 장 절 구분은 처음부터 있었던 것인가요, 아니면 나중에 추가된 것인가요. 답: 우리가 지금 보는 성경은 각 권마다 장과 절로 나뉘어 있어서 찾아보기가 편리합니다. 그러나 장 절 표기는 성경이 씌어질 때 함께 이뤄진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성경을 찾아보기 쉽도록 나중에 붙여진 것입니다. 성경의 장 절 구분 역사에 대해서 알아봅니다. 성경의 장 절 표기 구분 역사는 신약성경과 구약성경이 조금 차이가 납니다. 먼저 신약성경의 경우 2~3세기부터 성경 연구자들이 복음서를 중심으로 구분하기 시작해 5~6세기에 이르면서 복음서들은 318 부분으로, 서간서들은 254 부분으로 구분되기도 했다고 합니다. 이에 앞서 4세기에 필사된 바티칸 사본에서는 마태오 복음을 68장, 마르코 복음은 48장 등으로 구분돼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런 구분은 완전하지 못했고 그래서 실제로 이용하는 데 불편한 점이 무척 많았습니다. 오늘날 우리가 볼 수 있는 것과 같은 신약성경의 장 구분은 1205년 스티브 랑톤(1150~1228)이 창안했다고 합니다. 파리 대학 교수 출신으로 나중에 영국 캔터베리 대주교가 된 랑톤의 장 구분은, 불가타역 성경에 채택됐습니다. 불가타역은 성 예로니모(347~420)가 신구약 성경 전체를 당시 라틴어로 번역한 성경으로, 16세기 트렌토공의회에서 가톨릭 교회의 공식 성경으로 채택한 성경이지요. 그런데 신약성경에서 오늘날 우리가 보는 것과 같은 절이 구분된 것은 훨씬 후대인 1500년대 중반의 일입니다. 인쇄업자인 로베르 에티엔(1503~1559)이 파리에서 그리스어와 라틴어로 된 신약성경을 출판하면서 기존에 구분된 장에 다시 절을 구분했습니다. 전해지는 말로는 당시 에티엔은 말을 타고 리옹에서 파리로 여행하면서 절을 구분했다고 합니다. 구약성경의 경우에 유다인들은 이미 오래 전부터 회당에서 읽기 쉽게 주제별로 문단을 나누거나 한 줄을 띄우거나 해서 구분했습니다. 이런 흔적은 1947년 사해 동굴에서 발견된 꿈란 사본에서 볼 수 있는데 이 사본들이 기원전 1세기에서 기원후 1세기 사이에 사용되던 것이라는 점에서 그만큼 그 구분이 오래됐다고 할 수 있습니다. 유다인들은 회당에서 회중 앞에서 히브리어 성경을 낭독할 때에 통역자가 아람어로 번역할 수 있도록 일정하게 끊어서 낭독했는데 이것이 나중에 절을 구분하는 것으로 발전하게 됐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후 6세기에 와서는 구약성경의 절 구분에 해당하는 표시들이 히브리어 성경 본문에 첨가됐습니다. 그러나 구약성경에서 오늘날과 같은 장 구분은 히브리 성경이 아니라 라틴어 불가타역 성경을 통해서 이뤄졌고, 그 주역은 위에서 언급한 스티븐 랑톤 대주교입니다. 랑톤 대주교는 신약성경을 장으로 구분했을 뿐 아니라 구약성경도 숫자 형태로 장을 구분했습니다. 이 구분은 1330년에는 필사본 히브리어 성경에, 1516년에는 인쇄본 히브리어 성경에도 적용됐습니다. 그리고 앞에서 이야기한 인쇄업자 로베르 에티엔은 랑톤 대주교의 장 구분을 바탕으로 신약성경의 절을 구분하면서 구약 성경의 경우 전해져오던 절 구분 표시들을 받아들였습니다. 이런 과정을 거쳐서 1571년에는 인쇄된 히브리어 구약성경에서 처음으로 절이 구분돼 출판됐습니다. 따라서 성경의 장 절 구분과 관련해서 랑톤 대주교와 로베르 에티엔 두 사람의 이름을 기억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들 덕분에 우리는 편리하게 성경의 해당 본문을 찾아 읽을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알아 둡시다 성경의 장 절을 표시하는 방법은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그러나 한국 천주교회에서는 새 번역 「성경」을 편찬하면서 성경 구절 표기 원칙을 다음과 같이 정했습니다. 예컨대 창세기 5장을 줄여서 표기할 때는 '창세 5'로, 창세기 3장 15절을 줄여서 표기할 때는 '창세 3,15'로 각각 표기합니다. 또 창세기 3장 5절부터 10절까지로 절이 이어질 때는 붙임표를 써서 '창세 3,5-10'으로, 창세기 4장부터 6장까지로 장이 이어질 때는 줄표를 써서 '창세 4─6'으로 표기합니다. 이에 관한 자세한 내용은 「성경」 '일러 두기' 10항에 나와 있습니다. 성경 장 절을 표기할 때 이 원칙을 잘 새겨두었다가 틀리지 않게 표기하면 좋겠습니다. 이창훈 기자 changhl@cpbc.co.kr김지항2017.11.23
[한상숙 수녀의 중독 치유 일기] (34·끝)“청하여라, 너희에게 주실 것이다. 찾아라, 너희가 얻을 것이다. 문을 두드려라, 너희에게 열릴 것이다”(루카 11,9)한 잔의 유혹 이기는 힘, 주님께 구하자 성경 말씀이 머리에서 가슴으로 내려오게 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회복을 돕는 교과서인 ‘12단계 12전통’의 전 단계에서 강조하는 것은 “나의 무기력함을 높으신 분께 전적으로 맡기고 그분만이 중독에서 벗어날 수 있게 하신다는 것을 믿고 맡기기로 결정했는가?” 하는 질문의 연속이다. 각자가 믿는 높으신 분의 힘으로 ‘중독이라는 늪’에서 벗어날 수 있음을 믿는 것이다. 수많은 다짐과 결심을 해도 스스로 중독자임을 인정하지 않고 자신의 약함과 한계를 믿지 않기 때문에 재발이 반복되는 것이다. 상담하면 대부분 술을 잠시 멈추면 스스로 조절할 수 있을 것이라고 기대하고 있다. 중독에 대해 잘 이해하지 못하면 가족들도 “일주일에 한 번만 조금 마시라”고 권유하는 경우가 매우 흔하다. 모든 중독은 뇌에 영향을 주었기 때문에 ‘조금’이라도 허용하면 곧바로 재발한다. 멈추거나 조절하는 기능을 완전히 잃었다는 인간적인 무기력함을 인정하고 한 잔도 입에 대지 말아야 중독이라는 늪에서 빠져나올 수 있다. 그러나 한 잔의 유혹을 견딜 힘이 쉽게 생기지 않기 때문에 어려운 시간을 견디어야 한다. 하느님께 신뢰를 두고 그분께서 계획한 삶에 목적을 두는 삶으로 완전히 바뀌어야 한다.1986년 부천성모병원에서 중독자 가족모임을 시작하면서 대학병원에서 중독이라는 병을 치료로 접근했던 것도 놀라운 하느님의 계획이었고 그분의 손길이었다. 다른 질병과 다르게 이 병에는 완전한 치료제가 없기 때문이다. 선배 수녀님들은 이들과 함께 고통의 길을 걷다 보면 하느님께서 회복의 기쁨으로 바꿔주신다는 것을 믿고 함께 엠마오의 길을 가는 것이 전부였다. 동반하는 여정에서 어떤 분은 놀라운 감동으로 새 힘을 얻기도 하여 더 먼 길을 걸어가고, 어떤 분은 실망하여 중간에 돌아간다. 개인의 중독이 가정을 병들게 하고 물질의 풍요로움이 인간을 더 고독하고 외롭게 만들기에, 수도회는 수많은 종류의 중독이 늘어날 것을 예상하여 오랜 기간 투신해왔다. 20여 년이 지난 지금 국가는 중독이라는 문제를 이슈화하기 시작했고 중독전문병원들이 늘어나면서 낮 병동 프로그램을 진행하는 센터들, 다양한 중독자모임이 급증했다.우리나라에도 다양한 중독의 원인과 고리를 끊을 수 있는 방법과 연구들이 진행되고 있음은 참으로 반가운 일이다. 그동안 우리의 수고와 모험을 놀랍게도 하느님은 기뻐하셨고 높은 회복률을 유지하는 기관으로 잘 성장시켜주셨다. 사도들에게 더 깊은 곳에 그물을 치기를 바라셨듯이 소비녀들에게도 가난한 이들에게 끊임없이 내리기를 바라시고 계신다. 홍수처럼 쏟아지는 정보, 순간의 만족과 편리함을 추구하는 다양한 욕구들은 더욱더 인간을 외롭게 하고 불안감과 무기력함을 가중시키는 세상을 살고 있다. 우리를 유혹하는 물질과 행위에서 스스로 조절할 수 있다는 착각에서 벗어나 매 순간 짧은 시간이라도 하느님께 청하여 찾고, 문을 두드리면 예수님께서 기꺼이 문을 열어 주실 것이다. 부천성모병원 알코올의존치료센터 상담 : 032-340-7215~6 ※‘한상숙 수녀의 중독 치유 일기’는 이번 호로 마칩니다. 집필해 주신 수녀님과 애독해 주신 독자 여러분께 감사드립니다. 평화신문2019.07.23

‘토닥토닥’ 낙태 여성들 영성·심리적 치유 도와 ‘라헬의 포도원’ 치유 피정 진행하는 로렌스 케틀 신부(카푸친 작은 형제회 한국관구장) 아일랜드 더블린 출신의 로렌스 케틀(59) 신부. 카푸친 작은 형제회 한국관구장인 그에겐 낙태의 아픔을 경험한 친구가 있다. 같은 아일랜드 출신인 베르나데트 굴딩 여사다. 로렌스 신부는 굴딩 여사와의 인연으로 낙태 후 고통받는 여성들에게 관심을 두게 됐다. 낙태로 인한 죄책감에 벗어나지 못해 스스로 벌 받을 방법을 끊임없이 찾았던 굴딩 여사는 신앙으로 낙태의 상처를 극복했다. 현재 아일랜드에서 ‘라헬의 포도원’이라는 피정 프로그램을 통해 낙태로 상처받은 여성들의 치유를 돕고 있다. 2001년 한국에 선교사로 온 로렌스 신부는 굴딩 여사의 도움으로 2011년 10월, 한국에서 첫 라헬의 포도원 피정을 시작했다. 강화도 외딴곳에 있는 한 수도원을 통째로 빌렸다. 낙태 경험이 있는 여성들은 2박 3일간 절망과 상처, 긴장으로 겹겹이 쌓인 낙태의 고통을 털어놨다. 하느님과 아이, 자기 자신과 화해하는 시간이다. “낙태한 여성은 자신이 생명을 없앴다는 죄책감으로 괴로워합니다. 낙태 후 자존감이 낮아지고 우울증이 찾아오지요. 남편, 새 자녀와의 관계가 원활하지 못하고 직장생활에 어려움을 겪습니다.”낙태한 여성들은 고해성사를 하지만 심리ㆍ영적으로도 치유가 잘 안 된다. 이 고통에 대한 비난과 판단없이 편안하게 털어놓을 사람과 공간이 없다. 로렌스 신부는 “자책하는 것을 멈추고, 자신을 용서할 수 있어야 본격적인 치유가 일어난다”고 설명했다. “낙태는 태어나지 않은 순수한 생명을 죽이는 분명한 죄입니다. 그러나 천편일률적인 기준으로 죄인이라고 판단할 수는 없습니다. 자유의지로 선택한 낙태보다 강요된 낙태가 많습니다. 사회적 이유, 가족의 강요 등 여러 환경으로 낙태를 강제로 당한 경우가 많습니다.”로렌스 신부는 “치유 과정을 겪으면 남편과 다른 인간관계에서 긍정적인 결과를 얻을 수 있다”고 말했다. “죽은 아이와의 관계가 풀렸기에 살아 있는 사람과의 관계가 새롭게 형성된다”고 설명했다.외국인 사제로서 한국 여성의 낙태로 인한 고통에 귀 기울여온 그는 “한국 여성의 고통이 더 이해하기 어렵거나 특별히 다르지 않다”고 말한다. “한국이든, 아일랜드든 낙태로 인해 슬퍼하는 마음은 같습니다. 같은 여성이고 엄마이지요. 슬픔과 좌절, 상처도 같아서 여성의 분노와 상처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슬픔에 대한 치유의 필요성도 국적에 따라 다르지 않지요.”로렌스 신부는 “위기 상황에 임신한 어머니의 감정과 두려움에 더 관심을 기울이면 더 많은 아기를 구할 수 있다”고 강조했다. 그는 “낙태에 대한 잘못된 진실, 낙태한 여성들이 고백하는 고통을 통해 낙태가 가져오는 결과를 알 수 있다”고도 덧붙였다. 또 “낙태를 예방하기 위해 교육은 필수적인 열쇠 중 하나”라면서 “젊은이들에게 인간은 수정되는 순간부터 존엄하며, 생명에 대한 책임을 가르쳐야 한다”고 강조했다. 오는 10월 20회째를 맞는 라헬의 포도원 피정에 참가 신청한 여성들은 30대부터 70대까지 다양하다. 평신도 생명운동가 강인숙(프리스카)씨와 나효숙(클레멘시아)씨가 봉사자로 피정을 함께 돕는다. 라헬의 포도원(Rachel’s Vineyard)1986년 미국의 심리치료사인 데레사 버크 박사가 낙태 경험이 있는 여성들의 치유를 위해 시작한 가톨릭 피정 프로그램이다. 미국을 비롯해 프랑스, 이탈리아, 러시아, 호주 등 전 세계 40여 개국에서 진행되고 있다. 라헬의 포도원은 자식을 잃고 울부짖는 구약성경의 여인 ‘라헬’(예레 31,15)에서 이름을 따왔다. 한국에서는 1년에 세 차례 비공개로 진행된다. 이지혜 기자 bonaism@cpbc.co.kr 평화신문2019.08.07

행복한 부모 되는 법 알려드려요서울대교구 사목국, ‘태교 교실’ 운영… 9월부터 하반기 교육 태교 교실 참가자들이 감통분만 실습을 하고 있다. 서울대교구 사목국 제공 지난 4월 11일 모두 12쌍의 부부가 상기된 표정으로 서울 명동 가톨릭회관 대강당에 모였다. 서울대교구 사목국이 가정 공동체의 성장을 돕기 위해 준비한 ‘태교 교실’에 참가한 부부들이었다. 태교 교실은 태교가 왜 필요하고 어떻게 하면 되는지, 좋은 부모란 어떤 부모인지, 행복한 부부가 되기 위해서는 어떤 노력을 해야 하는지, 그리고 어떻게 하면 힘들지 않게 출산을 하는지를 배우는 자리다. 그동안 태교 교실에서는 사랑의 시튼 수녀회에서 개발한 워크북 「행복한 아이, 행복한 부부, 행복한 부모, 행복한 출산」을 토대로 교육을 진행했다. 지난 석 달 동안 한 달에 2번씩 모두 6차례 교실이 열렸고 이제 7월에 열릴 교육 2번만 남아 있다. 첫 시작은 행복한 아이를 만드는 일이었다. 한국과 동양, 서양의 태교는 무엇이 다른지 알려주고 엄마가 먹고 생각하는 것, 엄마의 감정에 영향을 주는 아빠의 태도도 다 태교에 해당한다는 점을 강조했다. 그다음은 행복한 부부와 행복한 부모가 되는 길이다. 행복한 부부는 아이가 열 달 동안 엄마 배 속에 있는 동안 부부 사이에 무슨 대화를 해야 하는지, 상호 의사소통의 방법, 임신기간 성생활은 어떻게 하는지를 알려주는 시간이다. 행복한 부모는 부부 공동 육아의 중요성과 더불어 2살 이전에 아이를 돌보는 게 얼마나 아이에게 큰 영향을 주는지 확인하는 자리다. 행복한 출산은 진통을 줄여 출산하는 방법을 배우는 시간이다. 평소 남편이 아로마 기름으로 임신한 아내를 마사지하는 방법과 진통이 왔을 때 아로마 기름 마사지로 통증을 감소시켜주는 방법을 실습으로 구체적으로 배우게 된다. 그동안 태교 교실에 참가한 12쌍의 부부는 태아와 대화하고 태어날 아이에게 편지를 썼고 아이가 태어났을 때 설치할 모빌을 만들었다. 그리고 태교 강의를 듣고 워크북에 나온 대로 행복한 아이를 위해 같이 성경을 읽고 묵상하고 기도했다. 이 중 4쌍은 7월 출산을 앞두고 있다. 강의가 진행될수록 이들에게 큰 변화가 왔다. 교육을 주관한 서울대교구 사목국 김경순(아녜스) 수녀는 “태교 교실은 부모들이 태아에게 편지를 쓰고 아이에게 줄 모빌을 만드는 등 구체적인 의사소통과 체험, 학습하는 과정”이라며 “묵상, 기도가 정말 아이를 위해서 큰 도움이 됐다는 게 참석자들의 공통된 반응”이라고 소개했다. 태교 교실은 상반기에 이어 하반기 교육을 준비하고 있다. 하반기 교육은 4개월간 진행하던 프로그램을 1개월 2회 교육으로 단축해 9~12월 서울대교구청 별관과 영성센터에서 진행된다. 일정은 짧아졌지만, 행복한 아이, 행복한 부부, 행복한 부모, 행복한 출산 등 4개 워크북 강의와 실습은 그대로 진행된다. 김경순 수녀는 “젊은 부부들이 넉 달이라는 기간 때문에 참여를 꺼리는 점을 감안해 더 많은 사람이 참여할 수 있도록 기간을 단축했다”며 “압축적으로 강의를 진행할 계획인 만큼 많은 사람이 참여하길 바란다”고 밝혔다. 문의: 02-727-2085, 서울대교구 사목국 행정지원팀 이상도 기자 평화신문2019.07.03

‘사제의 꿈’ 위해 월남… 전쟁의 고통 속에 옮겨 다닌 피란지 신학교[한국전쟁 70년, 갈등을 넘어 화해로] (3)1926년생 박정일 주교가 기억하는 한국전쟁 컴퓨터에 정리해 놓은 자료 사진을 보여 주며 한국전쟁 당시 상황을 설명하고 있는 박정일 주교. 한국전쟁 중에도 가톨릭교회의 사제 양성은 계속됐다. 북한의 덕원신학교는 폐쇄됐지만, 남한의 서울신학교는 전쟁 발발 후 6개월간 휴교한 뒤 1951년 1월 제주로, 같은 해 5월 부산으로 옮겨가며 ‘피란지 신학교’를 열었다. 그 와중에 새 사제도 탄생했다. 1950년 10월 28일에는 대구에서 4명, 11월 21일에는 서울에서 8명이 사제품을 받았다. 1953년 7월 27일 휴전 협정이 체결되기까지 모두 41명이 하느님 부르심에 응답했다. 1952년 4월과 8월 두 차례에 걸쳐 신학생 7명을 프랑스(4명)와 이탈리아(3명)로 유학을 보냈다. 교회가 사제 양성을 얼마나 중요하게 여겼는지를 엿볼 수 있다.전쟁 당시 신학생이었던 박정일(전 마산교구장) 주교는 1926년 평안남도 평원에서 태어났다. 뒤늦게 성소를 발견한 그는 초등학교 교사를 그만두고 1948년 9월 덕원신학교에 입학했다. 북한 공산 정권의 탄압으로 이듬해 덕원신학교는 폐쇄됐다. 박 주교는 사제가 돼야겠다는 일념 하나로 홀로 월남했다. 그리고 신학교를 따라 대구로, 제주로, 부산으로 옮겨 다녔고 유학생으로 선발돼 1952년 8월 14일 로마행 비행기에 올라탔다. 그가 기억하는 70년 전 이야기를 듣기 위해 인터뷰를 청했다. 박 주교는 구순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로 건강했다. 목소리는 단단했고, 거동에도 불편함이 없었다. 한국전쟁 당시 일어난 사건의 연도와 날짜도 정확히 기억했다. -올해 아흔다섯이시죠. 한국전쟁 당시엔 스물다섯 청년이셨습니다.“그렇게 되나요. 이제 어디 가서 나이 자랑을 해도 되지 않을까 싶네요. 그 당시 이야기…. 할 이야기가 아주 많아요. 아이고 그 시절 참 고생 많았죠.”-한국전쟁 전, 덕원신학교에 다니셨지요.“우리 부모님은 신자가 아니셨어요. 신학교에 간다니까 어머니 반대가 특히 심했어요. 3년간 엄청나게 싸웠습니다. 가출도 했었어요. (웃음) 그러다 제가 병이 났는데 어머니는 ‘저 녀석이 신학교 못 가게 하니까 앓아눕는구나!’ 하면서 신학교 입학을 허락하셨죠. 학기 시작 피정 때 평양교구장 홍용호 주교님이 오셔서 30분간 강론을 하셨는데, 말씀을 너무 잘하셔서 놀랐던 기억이 생생합니다.”-신학교에 가겠다는 결심은 언제 하셨는지요.“평양에서 숭인상업학교 다니면서요. 세례도 그때 받았고요. 백민관 신부를 상업학교에서 만났죠. 백 신부는 이미 천주교 신자였어요. 토요일마다 백 신부랑 기림리성당에 가서 놀았는데 홍도근 신부님이 계셨습니다. 전기 박사로 불리던 분이라 재주가 많으시고 재밌으셨어요. 그분을 보며 신부가 돼야겠다 생각했어요.”-덕원신학교 생활은 1년도 채 못하셨죠.“1949년 5월 7일이었어요. 아침에 일어났는데 분위기가 이상했어요. 밤사이 경찰들이 신학교 옆 베네딕도 수도원에 들이닥쳐 아빠스님과 독일 신부님, 수사님, 교수 신부님들을 모두 잡아갔다는 거예요. 창밖을 보니 경찰이 두세 명씩 짝지어서 신학교 주변을 감시하고 있었습니다. 무서웠죠. 5일간 숙소에 갇혀 지냈습니다.”-언제 풀려나셨습니까.“5월 13일에 경찰이 학교를 폐쇄하니 모두 집으로 가라고 했습니다. 짐을 챙기는데 묵주나, 성상, 성경은 가져가면 안 된다고 했어요. 학교에 있던 성작이나 성광 같은 성물은 부제와 상급생들이 주방에 근무하는 분들을 통해서 몰래 밖으로 옮겨 놨다고 하더라고요. 신학생들은 짐을 싸서 다음날 평양 주교관으로 갔지요.”-홍용호 주교님도 납치당하고 당시 평양도 어수선하지 않았습니까.“김필현 신부님께서 홍 주교님 대신 교구 책임을 맡고 계셨습니다. 신학생들을 보고는 안타까운 표정을 지으셨어요. 여기선 학업을 계속할 수 없으니 가능하면 월남해서 공부를 계속 하라고 말씀해주셨습니다.”사제의 꿈을 버릴 수 없던 박 주교는 고향으로 돌아와 남몰래 월남 계획을 짰다. 수소문 끝에 평양에서 월남을 돕는 신자를 소개받았다. 1950년 2월 말이었다. 첫 시도는 무참히 실패했다. 평양에서 해주까지 갔지만, 정치보위부원에 발각돼 두 달 넘게 유치장에 갇혔다. 심문과 폭행, 굶주림을 견디고 나니 겨우 풀려났다. 그때가 5월 초 봄이었다. 6월엔 전쟁이 났다. 그는 청년들을 강제 징집하는 북한군에 끌려갔지만, 용케 도망쳤다. 한동안 산에서 숨어 지내다가 신학교 소식이 궁금해 무작정 평양으로 향했다. -그때 평양에서 서울로 오신 거군요.“중공군이 몰려오던 때라 평양도 피란민들로 가득했습니다. 고향으로 다시 돌아갈 상황이 아니었죠. 관후리성당에선 캐롤 몬시뇰이 신자들에게 확인서를 써줬습니다. ‘이 사람은 그리스도 신자인데 편의를 봐주면 고맙겠다’는 내용이었어요. 저도 그 쪽지 도움을 받았습니다. 지나가던 미군에게 쪽지를 보여주고 차량을 얻어 타 대동강을 건넜습니다. 그 뒤론 하염없이 걸었죠. 어딜 가든 도로와 주변 논밭엔 시체들이 있었습니다.”-서울까지 얼마나 걸리신 겁니까.“12월 초 평양을 떠났는데 12월 23일 서울에 도착했어요. 이틀 뒤 명동성당에서 성탄 미사를 봉헌했습니다. 믿기지 않았죠. 그날 성당에서 덕원신학교 신학생이던 황춘홍 신부를 만났어요. 황 신부가 혜화동에 신학교가 있고 신학생도 있다고 알려줬어요. 곧장 달려갔지요. 혜화동에서 정의채 몬시뇰과 김진하 신부도 만났습니다. 그제야 살았다는 느낌이 들었습니다.”-서울신학교 학생이 되신 건가요. “정규만 신부님이 학장이셨는데, 저를 반갑게 받아주셨습니다. 남아있는 신학생들과 함께 영등포역에서 피란 열차를 타고 대구로 갔습니다. 대구에 가니 신학생 30명이 주교관 옆 부속 건물에 모여있었습니다. 1951년 새해를 대구에서 맞았어요.”신학교는 신학생들의 안전을 위해 제주로 피란하기를 결정했다. 그러나 막상 제주도 안전하지 못했다. 무장 공비들이 시도때도없이 출몰해 약탈과 납치, 살인을 일삼았다. 신학생들도 죽을 고비를 몇 번이나 넘겼다. 신학교는 다시 부산 영도로 옮겼다. 박 주교는 “그제야 생활이 좀 안정됐다”고 회고했다. 그리고 이듬해 박 주교는 로마 우르바노대학교로 유학을 떠났다.-부모님은 영영 못 만나신 겁니까.“1951년 여름에 인천에서 만났어요. 아버지와 어머니, 여동생 셋만 월남했더라고요. 형들과 형수님 그리고 조카들까지 이동하긴 어려웠던 거죠. 아버지께서 해주에서 밀선을 구해 인천으로 오셨습니다. 남쪽에 오자마자 저를 찾으셨는데 ‘이놈이 살아있다면 분명 신학교에 있을 거다’라고 생각하셨답니다. 답동성당에 가서 우리 아들이 신학생인데 확인 좀 해달라고 하셨고, 부산 신학교에 있던 제게 연락이 닿은 겁니다. 그 길로 인천으로 가서 부모님을 뵈었죠.”-다시 만난 부모님을 두고 유학을 떠나기 쉽지 않으셨을 것 같습니다.“꼭 사제가 돼야 한다고 고집을 부렸어요. 예수님께서 나를 따르려면 모든 걸 버리라고 하셨으니까요. 그래도 철이 없었던 것 같아요. 겨우 만난 아들을 다시 떠나 보내야 하는 부모님 마음을 헤아리지 못했죠. 그래도 제가 로마로 떠나고 2년 뒤 부모님께선 부산에서 세례를 받으셨어요. 감사한 일이지요.”그는 “신학생이었기에 전쟁 중에 부모님도 만날 수 있었고, 신자들에게 도움도 많이 받았다”고 했다. 이어 “전쟁의 비참함이야 말하지 않아도 다 알지 않느냐”면서 “살아있는 우리가 할 일은 평화를 위해 끊임없이 기도하는 일뿐이다”고 강조했다. “전쟁은 없어야 합니다. 절대로 일어나선 안 됩니다. 평화를 위해선 더 많은 기도가 필요합니다.” 한국전쟁 70년을 기억하는 구순의 주교는 조용히 두 손을 모았다. 박수정 기자 catherine@cpbc.co.kr cpbc2020.01.15
![[평신도영성 나는 평신도다] (17)한국 교회 평신도 사도직의 현주소 5 : 신앙을 통해 현실 안에서 세속적 가치 극복하기(상)](//cpbc.co.kr/CMS/newspaper/2019/04/rc/749768_1.0_titleImage_1.jpg)
[평신도영성 나는 평신도다] (17)한국 교회 평신도 사도직의 현주소 5 : 신앙을 통해 현실 안에서 세속적 가치 극복하기(상)삶의 순간마다 손을 뻗어 주님의 손을 잡자 하느님을 바라보며 사는 것은 성당에서 온종일 살라는 말이 아니다. 직장에서도 학교에서도 집에서도 하느님은 늘 함께하시기에 우리는 간단히 손을 뻗어 그 손을 잡기만 하면 된다. CNS 자료 사진 많은 분이 영적인 삶을 살아가기가 힘들다고 합니다. 늘 하느님과 함께 현존하는 그 삶이 어렵다고 합니다. 그 삶을 어렵게 만드는 장애물에는 무엇이 있을까요. 많은 것을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갑자기 찾아온 병으로 고통받을 수 있습니다. 성당에 다니자마자 갑자기 집안에 우환이 생겨서 성당에 나오기 힘든 경우도 있습니다. 사업이 어려워지거나 실직을 당해 신앙생활에 소홀할 수도 있습니다. 이처럼 갑작스럽게 찾아오는 고통은 평신도들의 신앙을 흔들리게 합니다.그런데 고통이 근본적으로 안고 가야 하는 것이라면 거기엔 고통보다 더 높은 그 어떤 가치가 있는 것이 틀림없습니다. 하느님은 우리에게 왜 고통을 허락하실까요? 고통보다 더 높은 가치가 있기 때문에 허락하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하느님의 아들이십니다. 그런 분이 왜 고통을 받았겠습니까? 예수님이 받으실 만한 고통의 높은 가치가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래서 고통을 허락하시는 것입니다.왜 고통을 받아야 하나의인이 왜 고통을 받아야 하는가에 대한 문제는 예수님 탄생 이전까지 구약성경의 가장 큰 주제였습니다. 그 해답이 예수님에 이르러 주어집니다. 고통보다 높은 가치가 있는 것이 아버지의 뜻입니다. 예수님께서 그 완성된 모범을 보이십니다.의인이 왜 고통을 받아야 할까요? 의인은 고통을 받아야 한다는 것이 해답입니다. 악인은 고통을 받으려고 하지 않습니다. 마지막까지 손해 안 보려고 극악하게 발버둥 치며 자신을 합리화합니다. 그리고 자신의 고통을 덜기 위해 다른 사람에게 그 고통을 전가합니다. 자연히 고통을 받을 확률이 낮아집니다. 의인이니까 고통을 받는 것입니다.고통은 젊은이와 늙은이 사이의 구별이 없습니다. 가난한 자뿐 아니라 부자에게도 어김없이 찾아옵니다. 여러분은 부자가 행복할 것 같은가요? 고통이 전혀 없어 보이는가요? 권력자가 행복할 것 같은가요? 오히려 권력 있는 자가 권력 없는 사람보다 더 심각한 내면의 병을 앓고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행복은 외적인 것에서 주어지지 않습니다.우리가 고통과 관련해 통찰력을 얻을 수 있는 것은 오직 그리스도의 계시를 통해서입니다. 계시를 통해 우리는 몇 가지 알 수 있는 것이 있습니다. 고통은 구원의 역사에 있어서 그리스도와 일치하도록 돕는다는 점입니다. 어떤 고통이든 마찬가지입니다. 두통이든 교통사고로 인한 부상이든, 빈정거림을 받든, 그 고통은 모두 그리스도와의 일치를 돕습니다.또 신앙적 차원에서 고통은 하느님에 대한 우리의 사랑을 보여주는 속죄의 수단이 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이 세상에 와서 고통을 받으신 이유는, 하느님과 일치하는 모범을 보여주시기 위해서, 그리고 수많은 인간이 저지른 죄를 속죄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래서 우리를 죄와 죽음으로부터 해방시켜주셨습니다. 평신도는 이러한 진리를 믿고 선포하는 사람입니다. 평신도는 하느님을 바라보고, 그리스도의 고통을 받아들이는 사람들입니다.그런데 하느님을 바라보며 산다는 말은 성당에 와서 온종일 있으라는 말이 아닙니다. 산속에 들어가서 평생 하느님만 바라보며 살라는 말이 아닙니다. 하느님은 계시지 않는 곳이 없습니다. 직장에도 계시고, 학교에도 계시고, 이웃의 표정 속에서도 살아 계십니다. 버스 정류장에 혼자 앉아 있는데 옆에 어떤 사람이 와서 길을 물어본다면 그 사람의 눈빛 속에도 하느님이 계시는 것입니다. 들에 핀 꽃 한 송이에도, 기름 잔뜩 묻은 차량 정비공의 손에도 하느님이 계십니다. 세상 모든 것 안에서 하느님을 발견하고 항상 하느님과 함께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늘 우리 옆에 계시는 분 하느님 빼고 학교에 가고, 하느님 빼고 직장 일을 하고, 하느님 빼고 이웃과 대화하는 데서 모든 문제가 발생합니다. 하느님은 사막에 가야 찾을 수 있는 분이 아닙니다. 예루살렘 성지에만 존재하시는 분도 아닙니다. 하느님은 늘 우리 옆에 서 계십니다. 평신도는 간단히 손만 뻗어서 그 손을 잡기만 하면 됩니다. 성경을 읽다가 아름다운 시 한 편을 발견했습니다.하늘은 하느님의 영광을 이야기하고 창공은 그분 손의 솜씨를 알리네. 낮은 낮에게 말을 건네고 밤은 밤에게 지식을 전하네.말도 없고 이야기도 없으며 그 목소리조차 들리지 않지만 그 소리는 온 땅으로, 그 말은 누리 끝까지 퍼져 나가네.(시편 19,1-4)정치우(안드레아, 새천년복음화학교 교장) 평화신문2019.04.03

사랑과 자비 베풀며 참된 왕이신 예수 그리스도 기억하자‘온 누리의 임금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왕 대축일’ 전례 안내 가톨릭교회는 전례력으로 한해를 마무리 하는 마지막 주일인 연중 제34주일에 ‘온 누리의 임금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왕 대축일’을 지낸다. 주님께서는 인간을 구원하려는 성부의 뜻을 이루려고 지상에서 하느님 나라를 시작하셨고, 교회는 그 신비 안에서 이미 현존하는 그리스도의 나라이다. 이 나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받아들임으로써 들어갈 수 있다. 사진은 독일 성 베네딕도회 마리아 라크 수도원 성당 제단에 설치돼 있는 그리스도왕 모자이크. 가톨릭교회는 전례력으로 한 해를 마무리하는 마지막 주일인 연중 제34주일을 ‘온 누리의 임금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왕 대축일’로 지낸다. 전례력은 가톨릭교회의 달력으로 주님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하느님의 구원 업적이 드러난 사건들을 한 해 동안 기념해 거행하는 시간 구조이다. 교회가 전례력을 만들어 시간 흐름에 따라 하느님의 구원 신비를 기념하는 이유는 그리스도인들이 전례를 통해 예수 그리스도를 닮아가도록 하는 데 있다.‘온 누리의 임금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왕 대축일’을 맞아 이날의 의미와 전례 안에서 주님의 어떤 모습을 닮아야 할지를 살펴본다.신앙 고백가톨릭교회는 ‘주님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죽은 이들 가운데서 부활하시고 하늘에 올라 전능하신 천주 성부 오른편에 앉으시며 왕으로서 영광을 받으시고 세상 마지막 날에 산 이와 죽은 이를 심판하러 재림하신다’고 신앙 고백을 한다. 이 믿음은 주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시어 수난을 당하시기 전 올리브 산에서 제자들을 따로 모아 ‘최후의 심판’에 관해 일러주시면서 “사람의 아들이 영광에 싸여 모든 천사와 함께 오면, 자기의 영광스러운 옥좌에 앉을 것”(마태 25,31)이라고 하신 말씀에 근거한다.‘그리스도왕’은 성경 곳곳에서 드러난다. 먼저, 주님께서는 다윗의 후예로서 왕의 혈통을 이어받은 분이시다.(마태 1,1-17) 그리고 동방 박사들의 입을 통해 태어난 아기 예수께서 ‘유다인들의 임금’이 선포된다.(마태 2,2) 주님께서는 “너희는 내 나라에서 내 식탁에 앉아 먹고 마실 것이며, 옥좌에 앉아 이스라엘의 열두 지파를 심판할 것”(루카 22,30)이라며 스스로 당신의 왕권을 드러내시기도 했다. 또 주님께서는 ‘유다인의 왕’(요한 18,37)으로 고발되어 조롱받으시고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다. 그리고 ‘유다인의 왕 나자렛 예수’(마르 15,26)라는 십자가 죄명패가 이를 재확인시켜줬다.하지만 주님의 왕국은 지상 영화를 위한 권력이 아니다. 그리스도 왕국은 복음 선포를 통해 지상에 펼쳐지지만(사도 1,8) 그 완성은 미래에 있고(1코린 15,24-25), 영원히 지속되며(루카 1,33), 진리를 증언하는 것(요한 18,37)이다. 그래서 교회는 주님의 왕국을 “진리와 생명의 나라요, 거룩함과 은총의 나라요, 정의와 사랑과 평화의 나라”라고 고백한다.(제2차 바티칸 공의회 「교회 헌장」 36항)교회는 그리스도왕이 다스리는 ‘하느님 나라’의 표징이다. 주님께서는 인간을 구원하시려는 성부의 뜻을 이루시려고 지상에서 하느님 나라를 시작하셨다. 교회가 “신비 안에서 이미 현존하는 그리스도의 나라이다.”(「가톨릭교회 교리서」 763항) 이 나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받아들이는 것으로 들어갈 수 있다. 지상의 하느님 나라는 그리스도께서 영광스럽게 다시 오실 때 비로소 천상 영광 안에서 완성된다. 그동안 이 나라는 지상의 순례 길 위에서 박해를 견디고 하느님의 위로를 받으며 ‘예수가 그리스도이시다’라는 복음을 선포하면서 땅끝까지 확장된다.(사도 1,8 참조) 그리스도인은 이를 위해 하느님 나라가 완전히 도래하여 영광스러운 교회가 완성될 때까지 자신의 신원과 역할, 의무를 다해야 한다. 이는 하느님께 대한 헌신과 이웃을 위한 자비의 실천으로 드러나야 한다. 그래서 교회는 그리스도인들에게 그리스도왕이 다스리는 하느님 나라의 백성으로서 세상의 죄악에 맞서 끊임없이 싸우고, 인간이 행하는 일과 만들어 내는 문화에 그리스도의 가치를 불어넣음으로써 세상의 제도와 환경이 하느님의 정의에 부합하도록 이끌어 가야 한다고 가르친다. 이것이 그리스도의 왕권에 동참하는 그리스도인의 왕직이라고 한다.(「교회 헌장」 36-38항)전례 의미‘온 누리의 임금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왕 대축일’은 비오 11세 교황이 1925년 12월 11일 회칙 「Quas Primas」(꽈스 프리마스, ‘처음의 것’ 또는 ‘그리스도왕 대축일에 관하여’)를 통해 제정했다. 비오 11세 교황은 ‘그리스도의 신성’을 고백한 니케아 공의회 1600주년을 기념해 무신론과 세속주의를 경계하고, 그리스도께서 하느님 나라의 참된 왕이심을 기억하고, 그리스도의 왕권이 온 세상에 충만하기를 기원하는 뜻에서 이날을 선포했다. 1925년 제정 당시에는 11월 1일 ‘모든 성인 대축일’ 전 주일인 10월 마지막 주일에 이 축일을 지내도록 했다. 모든 성인과 함께 주님의 왕권과 영광을 널리 세상에 전하기 위해서였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를 통해 전례를 개혁한 교회는 ‘하느님 나라의 도래’ 즉 그리스도왕의 재림과 온 누리의 임금이신 그리스도의 축일 의미를 강화하기 위해 1970년부터 연중 마지막 주일로 옮겨 이날을 지내고 있다.3년 주기의 이날 복음과 독서는 그리스도를 ‘인류의 목자’(가해: 마태 25,31-46; 에제 34,11-12.15-17; 1코린 15,20-26.28), ‘영원하신 왕’(나해: 요한 18,33-37; 다니 7,13-14; 묵시 1,5-8), ‘십자가 위에 계신 왕’(다해: 루카 23,35-43; 2사무 5,1-3; 콜로 1,12-20)으로 표현한다. 감사송은 그리스도 왕국의 특징을 진리와 생명의 나라, 거룩함과 은총의 나라, 정의와 사랑과 평화의 나라로 묘사한다. 주님께서 선포하신 복음의 핵심어는 ‘하느님 나라’이다. 그리스도인은 주님께서 다시 오실 때 완성될 하느님 나라를 이미 지상에서 살기 위해 예수께서 마련해 주신 새로운 삶을 사는 사람들이다. 이 새로운 삶은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직접 가르쳐 주신 ‘최후의 심판’(마태 25,31-45) 내용에 구체적으로 나타난다. 그리스도왕께서 마련해 주신 새로운 삶의 가치 질서이다. 굶주린 이, 목마른 이, 헐벗은 이 등 어려움에 처한 불행한 사람들, 특별히 가난한 사회 약자를 자비로이 보살피며 사는 삶이다. 성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은 이러한 사랑과 자비의 삶이 복음 정신의 핵심이라고 강조했다. 리길재 기자 teotokos@cpbc.co.kr 평화신문2019.11.20

하느님을 ‘아빠’로 여기는가예수-우리의 발걸음을 아빠 하느님께로/ 송봉모 지음/ 바오로딸/ 1만 6000원 “그러므로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여라. ‘하늘에 계신 저희 아버지! 아버지의 이름을 거룩히 드러내시며…’”(마태 6,9)예수님이 하느님을 ‘아버지’라고 부르자, 이를 본 유다인들은 하나같이 ‘아니, 어찌 하느님을 아빠라고 부른담?’ 하고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유다인들은 전통적으로 죄 많은 인간의 입술로 지극히 거룩하신 하느님의 이름을 부르는 것을 불경한 일로 여겼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높고 멀리 계시는 것으로 여겼던 하느님을 당장 바로 곁에 계신 분, 인격적으로 가깝고 애정 깊은 아버지로 여기도록 처음 일깨운 분이셨다.송봉모(예수회) 신부가 펴낸 「예수 - 우리의 발걸음을 아빠 하느님께로」는 예수님처럼 하느님을 나와 더욱 가까운 아빠로 여기도록 만들어주는 책이다. 하느님을 머나먼 하늘나라의 다가가기 어려운 분이 아니라, 가까이서 내게 은총을 주고, 너른 품을 제공해주는 아빠로 여기도록 돕는다. 더불어 ‘주님의 기도’의 의미와 함께, 아빠를 닮기 위한 가르침인 예수님의 ‘행복 선언’에 관한 강론이 담겨 있다.주님의 기도와 성경 구절마다 나오는 ‘아버지’를 ‘아빠’로 고쳐 발음해보자. 하느님께 한 걸음 더 다가간 느낌이 들 것이다. 하느님은 우리가 언제든 어리광 피울 수 있고, 힘들고 아플 때 매달릴 수 있는 ‘아빠’다. 실제 마태오ㆍ루카 복음서는 그리스어로 하느님을 ‘파테르’, 곧 ‘아빠’라고 썼다.간혹 구약의 하느님과 신약의 하느님을 다르게 보는 이들이 있다. 특히 구약의 하느님을 심판자이자, 꾸짖는 아버지로 여기기도 한다. 그러나 구약의 하느님은 분노하는 아버지가 아니라, ‘격정’하는 분이시다. 송 신부는 “하느님의 격정은 우리의 선을 위한, 하느님과 우리 관계를 회복시키려는 돌봄의 행동”이라며 우리도 모르게 잘못 인식하고 있는 ‘율법주의적 태도’를 돌아볼 것을 권한다. ‘하늘의 아빠’는 돌봄과 자비를 베푸는 참 아버지이신 것이다. 루카복음에 등장하는 ‘되찾은 아들들의 비유’에서 아빠는 집에 있는 큰아들이든, 집을 나가 고생하다 돌아온 작은아들이든 기쁜 마음으로 품에 안아 맞아주지 않는가.예수님은 우리가 아버지 하느님 나라에 헌신하는 사람이 되길 바라셨다. 예수님은 산상설교를 통해 우리가 주님의 성품을 지니며 ‘성화’ 될 수 있음을 가르치셨다. 바로 ‘행복 선언’이다. 우리는 마음이 가난하기 위해 교만하지 않을 줄 알아야 하며, 남의 고통에 함께 슬퍼할 줄 아는 마음을 지녀야 한다. 그러면 하느님 아버지께서 그 사람의 눈물을 닦고 위로해주신다. 예수님의 가르침을 따른다면, 아빠의 이름은 거룩히 빛날 것이다. 이정훈 기자 평화신문2019.05.22
![[영화의 향기 with CaFF] (5) 바울](//cpbc.co.kr/CMS/newspaper/2019/01/rc/742847_1.0_titleImage_1.jpg)
[영화의 향기 with CaFF] (5) 바울주님 뜻이라면 죽음조차 유익하다는 사도영화 ‘바울’ 스틸컷.“그리스도는 내 삶의 전부이니 죽는 것도 유익하다”는 바오로 사도. 그는 많은 시련에도 담대하게 맞서며 “그리스도를 믿고 그리스도를 위하여 고난까지 겪는 특권을 받았다”고 말한다. 육체는 약해졌지만 영혼은 희망과 확신으로 가득 차, 목숨을 건 것에 오히려 감사하는 바오로 사도의 가르침을 담은 영화 ‘바울’은 우리에게 큰 울림으로 다가온다. 바울과 사울, 바오로 모두 같은 인물이다. 종교 영화에 나오는 성인의 이름이나 지역 명칭은 음역하는 과정에서 다소 차이가 난다. 바오로는 그리스 이름이고, 히브리어로는 사울이다. 이 칼럼에서는 본래 발음을 존중한 가톨릭 성경(천주교중앙협의회 발행, 2005)을 기준으로 했다. 영화 ‘바울’은 선교여행을 마치고 성전에서 체포된 바오로 사도가 유다인들의 시기와 모략으로 다시 구속된 후 로마 시민권자로서 황제의 판결을 자청하고, 로마 지하 감옥으로 이송된 후 마지막 처형되기까지를 소개하고 있다. 영화는 감옥에 갇힌 바오로가 자신의 임무를 완수하기 위해 하느님 말씀을 루카에게 전하고, 주 예수 그리스도에 관해 가르치는 모습 그리고 천인대장과의 갈등을 함축된 내용으로 알기 쉽게 보여준다. 영화 ‘바울’의 대사와 나래이션 대부분은 자체가 하느님의 말씀이다. 일반적으로 역사적 인물을 그리는 대서사극은 주인공의 영웅적 면모를 표현하기 위해 대결 구도를 설정하고, 스펙타클한 이미지와 화려한 액션으로 볼거리를 제공한다. 하지만 이 영화에는 그러한 요소가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에게 극적이고 감동적으로 다가오는 것은, 신성모독을 이유로 나자렛 예수를 “메시아”라고 하는 이들을 박해하는 데 앞장섰던 사울이, 하느님의 부르심을 한 번에 깨닫고 예수의 사도가 되어 조금의 흔들림도 없이 복음을 전하는 신념과 구원이 무엇인지를 알게 해 주었기 때문이다. “진리에 대한 확신이 있고, 내가 믿는 그분을 안다”는 바오로 사도. 그는 본인이 로마에서 죽을 것을 알지만 본인이 가야 할 곳 즉, 하느님의 나라에 대한 확신이 있기에 죽음조차 두려워하지 않는다. 죽음을 앞둔 시점에서도 “당신의 은혜는 충분합니다”라는 하느님에게 감사를 드리는 바오로 사도의 모습에 머리가 숙여진다. 하느님의 구원을 제대로 받아들인 바오로 사도는 그 누구보다도 행복한 사람이다. 믿음을 지키고 말씀을 전하는 데 끝까지 사명을 다 한 그의 굳은 신념이 그를 행복하게 한 것이다. 바오로 사도의 헌신으로 하느님의 말씀을 전해 듣게 된 우리도 참 행복하다. 2019년 신년을 맞아, 성경 읽기 계획을 세워 바오로 사도가 전해주는 말씀을 만나는 것도 의미가 있겠다.문채현2019.01.02

한국 천주교 역사 담긴 유물, 알릴수록 빛난다서울 명동대성당 유물 담당 정웅모 신부... 수장고 유물 목록화·사진 촬영·해설 작업, 7월 유물 이야기 담은 책 발간 정웅모 신부가 유물 수장고에 보관된 성합을 살펴보고 있다. “교회 안의 유물을 보면서 자신의 신앙을 돌이켜볼 수도 있고 자신의 부족한 신앙을 성숙시키는 계기로 삼을 수도 있죠.”서울대교구 주교좌 명동대성당 유물 담당 정웅모 신부는 “역사와 신앙의 흔적이 담긴 유물들이 신앙 재교육과 교회의 역사·문화 이해 차원에서 신자나 일반인 관람객들을 만나야 한다”고 말했다. 정 신부가 유물 담당 사제가 된 것은 2016년 8월 30일. 지금까지 3년 가까이 명동대성당에 있는 유물 수장고에서 유물들에 대한 이야기를 풀어내는 일을 하고 있다. 수장고에 보관돼 있는 유물들에 대한 목록화와 사진 촬영, 해설 작업을 하는 것이다. SNS를 통해서도 유물들에 대해 알리고 있고 7월에는 교회 유물 이야기를 담은 책도 발간할 예정이다.명동대성당에 최초로 유물전시실이 생긴 것은 1989년 8월 15일이다. 당시 유물실은 꼬스트홀 1층에 있었다. 하지만 꼬스트홀이 혼인 관련 공간으로 자주 이용되면서 유물실은 문을 닫게 됐다. 그리고 그때부터 유물들은 창고에 보관됐다. 이를 안타깝게 여긴 고찬근 신부(전 명동대성당 주임)는 “신앙 선조들과 영성, 명동의 역사가 담긴 유물이 창고에 있어서는 안 된다”며 유물 보관실을 마련했고 그것이 지금의 유물 수장고가 됐다. 그래서 2018년 2월부터 유물들이 유물 수장고에 보관되고 있다.유물 수장고에 보관된 유물은 모두 366점이다. 명동대성당에서 사용하던 전례 용품과 사제복, 미사와 관련된 제구 등이 보존돼 있다. 유물 수장고는 아직 현재 일반에 공개하지 않고 있다. 유물 수장고 한편에는 전례복들이, 다른 한쪽에는 전례 기물과 교회 물품, 전례 예식서, 성경, 기도집, 미술품들이 보관돼 있다. 정 신부는 “모든 유물이 저마다의 이야기를 담고 있어서 가치를 따지기는 쉽지 않지만 성작이나 성반, 성합 등 특별히 성체성사와 관련된 유물들을 소중하게 다루고 있다”고 설명했다.유물 수장고는 최종 목적지가 아니다. 유물 전시실과 가톨릭 미술관, 교회 박물관으로 가기 위한 전 단계일 뿐이다. 또 지금 진행되고 있는 유물 목록화와 사진 촬영, 해설 작업은 교회의 많은 유물 가운데 명동대성당에 있는 유물에 국한돼 있지만, 앞으로는 서울대교구, 그리고 지방 교구로 확대하고 나아가 한국 가톨릭 교회 전체로 확대할 계획이다.정 신부는 “세상 안에서 복음을 전하는 도구 가운데 하나가 문화이고 문화를 통하지 않고 복음을 전하긴 어려운 시대가 됐다”며 “유물들을 잘 보존하고 관리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역사와 신앙의 흔적이 담긴 유물들은 신앙 재교육을 위해서만이 아니라 교회의 역사와 문화를 이해하고 알리는 차원에서도 신자와 일반인 관람객들을 만나야 한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경험과 지식을 토대로 교회의 문화와 예술, 미술 등 유물만이 아니라 문화와 예술, 건축에 대한 교회 용어도 정립하는 토대를 만들고 싶다”고 덧붙였다. 도재진 기자 djj1213@cpbc.co.kr cpbc2019.06.25

국적·피부색 상관없이 인술 펼치는 ‘착한 사마리아인들’인권 주일 - 춘천교구 예리코클리닉 춘천교구 가산성당에 자리한 예리코클리닉. ‘병 키우지 말고 빨리 병원에 가.’아플 때 가족이나 지인들에게 흔히 듣는 말이다. 아플 때 의료 혜택을 받는다는 건 ‘인권’이라는 단어를 빌리지 않아도 일상이 된 지 오래다. 하지만 가난한 외국인노동자에게 병원의 문턱은 여전히 높다. 의료사각지대에 놓인 불법 체류 이주노동자들의 사정은 더 딱하다.인권 주일을 맞아 이주노동자들에게 사랑의 인술을 펼치는 춘천교구 예리코클리닉(경기도 포천시 가산면 소재)을 찾아갔다. 백영민 기자 heelen@cpbc.co.kr 아픈 외국인노동자들의 벗주일 오후 1시 반, 예리코클리닉을 찾은 자원봉사자들이 이주노동자 진료 준비에 한창이다. 오늘은 내과, 외과, 안과, 산부인과, 한방과, 치과 치료가 있는 날이다. 진료 시작 30분 전이지만, 대기실에는 10여 명의 외국인노동자가 삼삼오오 모여 담소를 나누고 있다. 필리핀 이주노동자가 대부분이지만 파키스탄, 스리랑카, 몽골, 이란에서 온 이들도 있다.예리코클리닉 담당 오세호(춘천교구 사회사목국장) 신부는 “환자의 국적과 종교, 비자 유무를 떠나 치료한다”며 “교회가 마땅히 해야 할 ‘가난한 이들의 우선적 선택’을 실천하는 것”이라고 했다.병원의 이름인 ‘예리코’는 착한 사마리아인들의 일화에 등장하는 도시 이름에서 따왔다. 예리코클리닉은 성경 속 예리코처럼 눈먼 이를 고치신 주님이 살아계신 곳이며, 도움이 필요한 이들을 외면하지 않은 착한 사마리아인들의 의지가 모인 곳이다. 예리코클리닉은 2003년 춘천교구 가톨릭의사회에서 무료진료를 시작할 때만 해도 가산성당 마당에 천막을 친 야전병원에 불과했다. 이후 가건물을 거쳐 지난 8월에 2층짜리 건물을 신축하고 교구장 김운회 주교 주례로 축복식을 가졌다. 지금은 치과의사, 한의사, 약사, 간호사, 치위생사, 임상병리, 통역, 환자관리 등 수 많은 분야의 자원봉사자가 매월 첫째, 셋째 주일 외국인노동자들에게 도움의 손길을 건네고 있다. 그래도 무료진료소가 있어서예리코클리닉 설립부터 봉사를 이어온 윤미현(마르셀라, 49) 간호사가 분주히 움직인다. 윤씨는 “진료 접수부터 혈압과 체온, 체중 등 환자의 신체 등을 측정하고 어떤 과에 가야 할지 분류한다”며 “하루를 온전히 내어줘야 하는 일이지만 치료받는 외국인노동자들을 생각하면 큰 보람을 느낀다”고 했다. 접수를 마친 이주노동자들은 각 진료과를 찾아 치료를 받는다. 이주노동자들이 의료진과 대화 나누는 모습을 보니 우리가 병원을 찾는 것과 다르지 않았다. 감기, 혈압, 당뇨, 충치, 근육통 등 생활 속 질환에 대해 상담하고 처방을 받는다. 1층 치과에서 치료를 받은 필리핀인 그레이스 모레스(55, 가명)씨는 “친구에게 무료 병원이 있다고 듣고 강원도 철원에서 왔다”며 “병원을 갈 수 없어 아파도 참았는데 치료를 받고 좋아졌다”며 예리코클리닉에 고마움을 표했다. 2층 한편에 자리한 한의과에서는 침대에 엎드려 침을 맞고 부황을 뜨는 외국인 이주노동자가 이웃집 아저씨 같다. 처음에는 침을 놓고 피를 뽑는 것에 놀라던 노동자들이 이제는 치료를 받으며 잠들기도 한다. 이곳을 찾는 이주노동자들은 인천과 평택 등 먼 지역에서 오는 경우가 많다. 자신이 속한 지역에서 치료를 받을 만한 곳이 없기 때문이다. 치료 비용도 문제지만 비자 문제가 얽힌 이들이 적지 않기에 병원을 찾을 엄두도 못 내는 게 현실이다.도움 필요한 사람을 서류로 분류해야 하나“여기서 진료하기 어려워서 큰 병원 가서 진료받을 수 있냐고 하면 10명 중 1, 2명 정도만 병원에 갈 수 있다고 하죠.”엄규동(대건 안드레아, 72) 예리코클리닉 회장은 “이곳을 찾는 다수의 이주노동자는 의료보험 혜택을 받을 수 없는 불법 체류자일 가능성이 높다”며 “보건복지부 등을 통해 받을 수 있는 의료 서비스는 정상적인 비자가 있는 사람에게만 해당한다”고 설명했다.엄 회장은 “3년 전 가슴에 종양이 있는 이주노동자에게 큰 병원을 가야 한다고 했지만, 의료보험 카드가 없다며 한숨을 쉬었다”며 “대형병원에 계시는 수녀님께 환자를 연결해 줬지만 그 후 어떻게 됐는지 알 수 없었다”고 안타까워했다.그는 법을 바꿔서라도 이주노동자들에게 의료혜택이 돌아갔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불법 체류자들이 많이 있는 나라의 대사관 같은 곳에서도 힘을 써서 의료 사각지대에 있는 분들을 도와주길 바란다는 말도 꺼냈다. 아픈 이들의 고통에 함께 울어주는 노(老) 의사의 말에 “착한 사마리아인은 자신이 돕는 사람이 누군지 가리고 도운 게 아니다”라는 말이 떠오른다.몇몇 이주노동자들이 처방받은 약 봉투를 들고 밝은 표정으로 예리코클리닉을 나선다. 그들이 받은 치료와 손에 쥔 약은 단순한 의료 혜택이 아닐 것이다. 약 봉투 안에는 피부색은 달라도 같은 주님의 자녀, 사랑받을 권리와 봉사자들의 헌신, 이국땅에서 고난을 이기고 고향으로 건강히 돌아갈 희망이 담겨 있다.후원 문의 : 033-264-3547, 예리코클리닉후원 계좌 : 신한 100-032-914833 (재)춘천교구천주교회 #오세호 신부 인터뷰(예리코클리닉 담당)“예리코클리닉을 신축할 때 이주노동자들이 필리핀 공동체를 중심으로 자발적 모금을 해 370여만 원을 전달했어요. 그들에게 적은 돈이 아닌데 고마움을 표현한 거죠.”오세호 신부는 “교구의 지원과 여러 사람의 정성으로 진료소를 신축하고 서울과 의정부에서도 봉사자들이 오기 시작했다”며 “교회를 중심으로 신자와 비신자가 외국인노동자 진료를 위해 힘을 모으고 있다”고 설명했다. 포천 일대는 물론 인접한 강원도 지역에도 외국인노동자가 증가하는 추세지만 경기 지역에서 외국인노동자를 진료하는 민간시설은 예리코클리닉이 유일하다.오 신부는 “계속 노동자가 유입되니 불법 체류 노동자도 상당수 있을 것이고 병원에 가기도 쉽지 않을 것”이라며 “예리코클리닉은 일반 병원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우수한 의료진과 장비를 갖추고 있다”고 설명했다.예리코클리닉은 최근 포천 지역 8인 이상 사업장 1800여 곳에 이곳의 의료활동을 알리는 홍보문을 발송했다. 의료 사각지대에 놓인 더 많은 외국인노동자에게 의료 서비스를 제공하기 위함이다. 늘 수고를 아끼지 않는 든든한 봉사자와 후원자들이 있기에 가능한 일이다.오 신부는 “봉사자들은 자신이 가진 탈렌트로 열악한 환경에서 고통받는 외국인노동자들을 돕겠다는 순수한 마음으로 모였다”며 “하느님 사업이 17년이라는 세월 동안 점점 나아지고 많은 이주노동자들이 혜택을 받을 수 있으니 감사한 일”이라고 했다.이어 “월 2회 진료에서 매주 진료로 확대하려고 계획 중”이라며 “봉사를 함께할 분들과 영적 물적 후원으로 뜻을 함께해줄 은인들이 많이 오기를 기도하는 마음으로 기다린다”고 말했다. 백영민 기자 cpbc2019.12.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