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당에 처음입니다만] (32) 가톨릭 신자들은 왜 성당에 들어갈 때 물을 찍어바르나요](//cpbc.co.kr/CMS/newspaper/2019/10/rc/764978_1.1_titleImage_1.jpg)
[성당에 처음입니다만] (32) 가톨릭 신자들은 왜 성당에 들어갈 때 물을 찍어바르나요사제가 축성한 거룩한 물 ‘성수’ 성당에 들어갈 때 입구에 놓인 성수반에서 성수를 손끝에 찍어 이마와 가슴, 양어깨에 십자 성호를 그으며 하느님의 집에 들어가기에 앞서 세상의 모든 죄스러움을 쫓아내 달라고 기도한다. 나처음 : 가톨릭 신자들은 왜 성당에 들어갈 때 물을 얼굴에 바르나요. 또 어떤 사람은 큰 통에 그 물을 받아가던데 혹시 ‘약수’인가요. 조언해 : 약수가 아니라 ‘성수’(聖水)! 말 그대로 ‘거룩한 물’이야. 왜 영화에서 보면 사제가 악령을 퇴치할 때 성수를 뿌리잖아. 바로 그 성수야. 성당에 들어갈 때 입구에 놓인 성수반에서 성수를 손끝에 찍어 이마와 가슴, 양어깨에 십자 성호를 그으며 하느님의 집에 들어서기에 앞서 세상의 모든 죄스러움을 쫓아내 달라고 기도해. 그래서 모든 신자가 성당에 들어설 때 성수로 십자 성호를 긋는 거야. 라파엘 신부 : 언해가 성수에 관해 설명을 잘해 주었구나. ‘성수’라고 부르는 이유는 사제가 하느님의 축복을 청하며 종교적인 목적으로 사용하기 위해 축성해 거룩하게 된 물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라틴말로는 ‘아쿠아 베네딕타’(Aqua benedicta)라고 해. 성수는 죄의 씻음을 통해 죽음의 세력을 멀리하고 영원한 생명을 얻는 세례성사의 은총을 상징하고 있단다. 오늘은 성수에 관해 자세히 알아보자. 먼저, 성경과 교회의 거룩한 전통이 ‘물’을 어떠한 의미로 이해하고 있는지 설명해 주마. 성경에서 물은 생명과 풍요, 죽음, 정화를 상징하고 있단다. 물은 하느님께서 우주 만물을 창조하실 때 첫 창조물이었단다(창세 1,1-2). 물은 모든 생명을 유지하는 필수조건이지.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당신 자신을 영원히 목마르지 않게 하는 물, 영원한 생명을 주는 물이라고 가르치셨지.(요한 3,10-14) 물은 반대로 죽음을 불러오기도 하지. 창세기에 나오는 ‘노아의 홍수’(창세 7장)가 대표적인 예란다. 아울러 물은 정화(淨化)를 의미하지. 구약성경 시편에는 “우슬초로 제 죄를 없애 주소서, 제가 깨끗해지리이다”(51,9)라고 노래하는 대목이 있단다. 구약의 유다인들은 정화 의식으로 우슬초로 만든 채로 물을 뿌렸단다. 물에 관한 이러한 성경의 의미는 교회의 정통 가르침과 전례 안에 그대로 스며들었단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생명을 얻게 되었고, 그리스도와 함께 죽음으로써 그리스도와 함께 부활할 것이며, 그리스도를 통해 죄를 씻고 구원받아 영원한 하느님 나라에 들어간다는 신앙 고백이 모두 물을 통한 세례성사 안에 자리 잡고 있단다. 가톨릭교회에서 사용하는 성수는 ‘세례수’와 ‘일반 성수’가 있단다. 세례수는 세례식 때 세례성사를 받는 예비 신자들에게 사용하기 위해 축복한다는 점에서 일반 성수와 구분된단다. 세례수는 흔히 ‘부활 성야’라고 하는 ‘파스카 성야’ 예식 때 축복했다가 세례 때에 사용하지만, 세례성사 직전에 축복해 쓰기도 해. 반면, 일반 성수는 미사 중에 또는 별도의 축복 예식을 통해 축복해서 사용한단다. 물론 세례수 역시 성수이기에 일반 성수로도 사용해요.성수(세례수와 일반 성수)로 사용할 물은 자연 그대로의 깨끗한 물이어야 해. 생수, 수돗물, 샘물 등은 모두 성수로 사용할 수 있단다. 바닷물과 빗물, 눈 녹은 물도 가능해요. 단, 침이나 우유, 커피, 주스, 술 같은 것은 사용할 수 없단다. 정결함과 순수함의 의미를 드러낼 수 있어야 하기 때문이란다. 예전에는 성수로 사용할 물에 소금을 약간 넣어서 축복했단다. 상하지 않고 오래가도록 하기 위함이었지. 하지만 지금은 소금을 넣지 않은 채 축복해서 사용한단다. 일반 성수는 사람이나 사물을 축복할 때 사용해요. 미사 때 입당한 사제가 참회 예절 대신 신자들에게 성수를 뿌리는 성수 예식을 하기도 해. 주로 수도원에서 많이 볼 수 있지. 성수 뿌림 예식은 정화의 의미와 함께 신자들에게 죄에 죽고 그리스도의 생명으로 다시 태어났음을 일깨워주는 뜻도 포함돼 있단다. 또 집이나 사무실, 성물, 자동차 등을 축복할 때도 성수를 뿌려요. 이때는 정화와 축복의 의미를 지닌단다. 아울러 마귀를 쫓아내는 구마 예식 때도 성수를 사용한단다. 성당에 들어갈 때 성수를 찍어 십자 성호를 그으며 “주님, 이 성수로 저의 죄를 씻어 주시고 마귀를 몰아내시며 악의 유혹을 물리쳐 주소서. 아멘” 하고 기도하는 것도 정화의 의미를 담고 있단다. 리길재 기자 teotokos@cpbc.co.kr 평화신문2019.10.22

하느님 찬미하고 공동체 성화시키는 전례 음악[미사의 모든 것] (18)화답송과 복음 환호송 말씀 전례 제1독서와 제2독서 사이, 그리고 제2독서와 복음 사이에 부르는 노래를 화답송, 복음 환호송이라고 한다. 화답송은 말씀 전례 독서처럼 앉아서 노래하고 복음 환호송은 서서 부른다. 【CNS 자료 사진】 나처음: 말씀 전례 독서는 꼭 독서대에서 해야 하나요?라파엘 신부: 독서대는 하느님 말씀을 선포하는 장소란다. 그래서 말씀 전례 독서는 반드시 독서대에서 해야 해. 미사에서 하느님 말씀의 식탁과 그리스도 몸의 식탁(성찬 제대)이 똑같이 마련된다는 사실을 신자들에게 보여주기 위해서 독서대는 하느님 말씀의 존엄성에 어울리게 정성 들여 만들고 꾸며져야 해요. 이런 이유로 독서대는 말씀 전례 동안 신자들이 하느님 말씀을 주의 깊게 듣는 데 도움을 줄 수 있도록 성당 구조에 주의를 기울여 제대와 조화를 이루도록 만들어야 해. 특히 신자들이 독서자를 잘 바라볼 수 있고, 그들이 선포하는 말씀을 잘 들을 수 있는 곳에 독서대를 고정해 설치해야 해. 이동식 간이 독서대를 놓아서 안 돼요. 조언해: 미사 때 보면 독서대에 말씀 봉사자뿐 아니라 해설자나 선창자, 또 공지사항 때 성당에 도움을 청하러 온 손님들이 올라오던데 결코 전례에 바람직한 건 아니죠.라파엘 신부: 독서대가 하느님 말씀이 봉사자를 통해 선포되는 장소라는 본질적인 사실을 잊거나 무시해선 안 돼. 독서대에서는 오로지 독서들, 화답송, 복음 환호송(알렐루야나 복음 전 노래) 예식만 거행돼야 해. 그리고 강론과 보편 지향 기도도 독서대에서 할 수 있단다. 따라서 독서대의 품위에 비추어 말씀의 봉사자만 거기에 올라갈 수 있고 이들 외에 해설자나 선창자, 성가 지휘자, 일반인이 독서대에 오르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단다. 나처음: 화답송과 복음 환호송은 뭔가요?조언해: 말씀 전례 제1독서와 제2독서 사이, 그리고 제2독서와 복음 사이에 부르는 노래를 화답송, 복음 환호송이라고 해. 이들 노래는 하느님 말씀을 더욱 심화하고 강화하는 말씀 전례의 주요 요소들이야. 라파엘 신부: 언해가 잘 설명해 주었구나. 말씀 전례는 하느님께서 말씀하시고 신앙 공동체가 화답하는 대화 형식으로 진행된단다. 제1독서 말씀을 듣고 화답송으로, 제2독서 말씀을 듣고 복음 환호송으로, 복음과 강론을 듣고 신앙 고백으로 응답하는 순서로 거행되지. 그래서 화답송과 복음 환호성은 말씀 전례에서 빼놓을 수 없는 부분이며 전례로나 사목적으로도 매우 중요해. 교회는 그 자체로 하나의 예식이고 전례 행위라고 강조하고 있단다.조언해: 화답송으로 주로 시편을 노래하는 이유가 있나요.라파엘 신부: 언해 말대로 화답송 대부분은 시편으로 구성되어 있어요. 그래서 원래는 ‘화답 시편’이라고 하는데 이를 간단히 ‘화답송’이라고 부르고 있어. 과거에는 층계에서 부르는 노래라고 해서 ‘층계송’이라고도 했지. 화답송은 유다인들이 회당에서 모세오경이나 예언서를 봉독한 뒤 시편을 노래한 데서 유래됐단다.(에페 5,19; 콜로 3,16) 인쇄술이 발달하기 이전 과거에는 지금처럼 「매일미사」가 없었기에 선창자가 먼저 응답 구절을 노래하면 미사에 참여한 회중이 그것을 따라 불렀고, 그다음 선창자가 시편의 각 구절을 노래할 때마다 회중들은 그 뜻을 음미하고 응답 구절을 되풀이하였단다. 요한 크리소스토모 성인은 “시편을 기계적으로 노래하지 마십시오. 독서자가 낭독할 때 여러분은 무엇보다 주님을 사랑하며 그분보다 앞서는 것도 없고 그분만을 위한 사랑에 불타겠다는 믿음을 선포하는 뜻으로 노래하십시오”라며 화답송을 하는 회중의 자세에 관해 잘 설명해 주었지. 현행 미사에서도 화답송은 노래로 하는 것이 원칙이란다. 이때 시편 선창자는 독서대나 다른 적당한 자리에서 후렴과 시편 구절을 부르고, 회중은 앉아서 후렴으로 화답하며 화답송에 참여하지. 또 화답송을 노래로 하지 않을 때에는 하느님 말씀을 묵상하는 데 더욱 어울리는 방법으로 시편을 낭송할 수 있단다. 나처음: 화답송은 말씀 전례 독서처럼 앉아서 노래하고 복음 환호송은 서서 하는 이유가 뭐죠.라파엘 신부: 복음 바로 앞에 오는 독서가 끝나면 전례 시기에 따라 복음 환호송, 곧 ‘알렐루야’나 ‘복음 전 노래’를 부르지. 복음 환호송은 봉독된 말씀 전례 독서에 대한 묵상의 응답인 화답송과 달리 복음을 통해 현존하시는 그리스도를 향한 환호이기 때문에 미사에 참여한 모든 이들이 서서 불러요. 복음 환호송은 단순히 복음을 준비하는 노래라고 여겨질 수 있지만, 미사에 참여한 이들이 복음에서 자신들에게 말씀하실 주님을 환영하고 찬양하며 그분에 대한 믿음을 고백하는 하나의 예식이란다. 나처음: 알렐루야가 무슨 뜻인가요라파엘 신부: 알렐루야(Alleluia)는 히브리말로 ‘하느님을 찬미하라’는 뜻이란다. 힐렐(hillel, 찬미하다) 동사의 명령어 ‘할렐루(hallelu)’와 야훼 하느님의 약자 ‘야(Jah)’가 합해진 합성어이지. 라틴말에서는 첫 자리에 오는 ‘h’를 발음하지 않기에 알렐루야가 되었단다. 알렐루야는 ‘아멘’ ‘호산나’와 함께 구약 이스라엘 백성들이 회당이나 성전에서 예배 중에 하느님을 찬미할 때 즐겨 사용하던 환호로 시편에 자주 등장해. 하지만 신약 성경에는 요한 묵시록의 ‘천상 찬가’(19,1-6)에만 나온단다. 초대 교회에서 유다인의 예배 전통과 하늘에 있는 많은 무리가 ‘아멘’과 함께 하느님과 그리스도께 드리는 묵시록의 감사와 승리의 환호를 그대로 받아들여 교회 안에서도 하느님을 찬미하는 환호로 알렐루야를 사용한 것이지. 알렐루야가 미사에 도입된 것은 3세기께라고 해. 이 시기에 화답 시편이 독서 화답송으로 정착되었기 때문이야. 도입 초기에는 축제 환호로 주님 부활 대축일과 부활 시기에만 불리다가 차츰 주일과 축일에도 사용됐고, 성 그레고리오 1세 대교황(재위 590~604) 이후 평일 미사에서도 알렐루야를 노래했다고 해. 알렐루야는 사순 시기를 시작하는 재의 수요일부터 파스카 성야 전까지를 제외하고는 모든 시기에 불러요. 과거에는 장례 미사나 위령 미사 중에는 알렐루야를 부르지 않았으나 이제는 부를 수 있단다. 알렐루야가 주님 안에 죽은 이들이 부활한다는 믿음과 희망을 잘 드러내기 때문이지. 나처음: 그럼 복음 전 노래는 무언가요라파엘 신부: 사순 시기를 시작하는 재의 수요일부터 파스카 성야 전까지 알렐루야를 부르지 않는다고 했지. 이 시기에 알렐루야 대신 ‘복음 전 노래’를 해. 복음 전 노래도 알렐루야와 마찬가지로 모두 서서 노래하거나 낭송하지. 복음 전 노래는 알레루야와 같은 시기나 그보다 약간 늦게 미사에 도입되었다고 해. 처음에는 시편으로 구성됐으나, 현재는 그날 복음의 한 구절이나 하느님 말씀에 대한 자세, 믿음을 반영하는 내용으로 짜여 있단다. 조언해: 부속가에 대해서도 알려주세요.라파엘 신부: 부속가는 특별한 축일 미사 때 제2독서 후 알렐루야를 하기 전에 노래하거나 읽는 찬미가를 말해. 9세기 프랑스 교회에서 부르기 시작해 16세기에는 거의 모든 미사에 다 들어갈 정도로 그 수가 많았단다. 그러다가 성 비오 5세 교황(재위 1566~1572)이 트리엔트 공의회 정신에 따라 전례 개혁을 단행하면서 4개의 부속가만 허용했지. 현대 교회도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전례 헌장」 정신에 따라 주님 부활 대축일과 성령 강림 대축일, 지극히 거룩하신 그리스도의 성체 성혈 대축일, 고통의 성모 마리아 기념일(9월 15일) 부속가 4개만을 허용하고 있단다. 이중 주님 부활 대축일과 성령 강림 대축일 부속가는 의무적으로 해야 하고, 나머지 둘은 자유롭게 할 수 있단다. 리길재 기자 teotokos@cpbc.co.kr cpbc2020.11.17

생명 외쳐온 교회, 현장에선 생명 교육 부족… 사목자 관심 절실주교회의 생명윤리위원회 정기 학술세미나 ‘한국 천주교회와 생명 문화’ 주교회의 생명윤리위원회가 14일 서울 영등포구 여의대방로 한국살레시오회 교육관 대강당에서 ‘한국 천주교회와 생명 문화’를 주제로 정기 학술세미나를 개최하고 있다. 도재진 기자 djj1213@cpbc.co.kr 한국 교회에서 사제와 평신도, 청소년을 대상으로 한 생명윤리 교육이 거의 이뤄지지 않고 있으며, 그 원인은 ‘사목자의 관심 부족’이라는 지적이 나왔다. 주교회의 생명윤리위원회(위원장 이용훈 주교)는 14일 서울 영등포구 한국 살레시오회 교육관 대강당에서 정기 학술세미나를 개최했다. ‘한국 천주교회와 생명 문화’를 주제로 발표한 △한국 천주교회 생명윤리 교육의 현황과 방향에 관한 고찰(이준연 신부) △생명운동에 대한 성찰과 앞으로의 과제(신상현 수사) 발제문을 요약해 싣는다. 정리=이지혜 기자 bonappetit@cpbc.co.kr ▧생명윤리 교육의 현황과 방향에 관한 고찰 / 이준연 신부(청주 성모병원 관리부장)한국 천주교회 생명윤리 교육 현황 파악과 방향을 연구하기 위해 16개 교구청에 생명윤리 교육 관련 담당자를 대상으로 질문지를 배부했다. (사)한국가톨릭의료협회 주관으로 회원 병원들의 가톨릭 의료윤리 교육의 시행 여부와 관련된 교육의 필요성을 파악하기 위한 설문지로 수정 및 보완 작업을 거쳤다. 연구는 사제ㆍ성인ㆍ청년ㆍ중고등부ㆍ초등부를 대상으로 한 생명윤리 교육 현황을 파악했다. 먼저, 교구별 사제 대상 생명윤리 교육의 현황을 살펴보면 14개 교구가 1년에 평균 0.6회로, 1회 미만 교육한 것으로 나타났다. 특히 6개 교구는 3년 동안 사제들에게 생명윤리 교육을 전혀 시행하지 않은 것으로 나타났다. 교육 내용(중복 선택)으로는 △성 윤리와 관련된 문제(22.7%)가 가장 많았고 △혼인과 가정(13.6%)에 이어 △낙태, 배아줄기세포 등 생의 시작과 관련된 문제 △몸의 신학 등 순이었다. 사제를 대상으로 생명윤리 교육이 부족한 원인을 묻는 질문에는 △사목자의 관심 부족(38.7%)이 가장 많았으며 △교육 자료 부족(29%) △참여도 부족(22.6%) 등이라는 응답이 있었다. 사제 대상의 생명윤리 교육에서 가장 필요하다고 선택한 내용은 ‘가톨릭 생명윤리의 원리’였다. 이어 최근 3년간 성인을 대상으로 한 단체별 생명윤리 교육 특강은 △전 신자 특강(45.5%) △소공동체(22.7%) △여성연합회(17%) △레지오 마리애(14.8%)에서 가장 많이 이뤄지는 것으로 나타났으며, 교육 내용은 △인간의 존엄성(14.8%) △혼인과 가정(12.5%) △장기기증(11.4%) 순으로 집계됐다. 생명윤리 교육 자료로는 주보(66.7%)가 가장 많이 활용됐다. 또한, 성인 대상 생명윤리 교육이 부족한 원인으로도 사목자 관심 부족(41.1%)이 가장 높은 응답률을 보였다. 생명윤리 교육이 필요한 시기는 예비부부(40%)와 학부모 시기(40%)라는 응답이 가장 많았다. 이처럼 교회 안에서 생명윤리 교육이 거의 이뤄지지 않는 것으로 드러났다. 특히 사제를 대상으로 한 생명윤리 교육은 매우 부족하다. 부모를 대상으로 한 생명윤리 교육도 거의 이뤄지지 않고 있으며 청년 생명윤리 교육의 문제는 더욱 심각한 현실로 드러났다. 혼인강좌를 제외하면 교육이 거의 없다. 중고등부와 초등부 생명윤리 교육도 매우 부족하다. 4개 교구를 제외한 교구 대부분은 생명학교를 운영하지 않아 생명윤리를 제대로 배우고자 하는 부모와 청년의 욕구를 충족시키지 못하는 것으로 나타났고, 생명윤리 교육 내용 영역을 체계적으로 구분하지 못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생명윤리 교육을 위한 지도자와 봉사자 양성도 부족했다. 생명윤리 교육의 문제를 개선하고 교육 활성화를 위해 생명윤리 교육위원회를 구성하고 생명지원센터를 설치할 것을 제안한다. 효과적인 생명윤리 교육을 위한 연대와 부모 교육을 위한 생명학교 개설, 다양한 생명윤리 교재 제작, 생애 발달단계에 따른 생애주기별 생명윤리 교육이 필요하다. ▧생명운동에 대한 성찰과 앞으로의 과제 / 신상현 수사(예수의 꽃동네 형제회) 21세기는 물질문명, 첨단과학, 지식 정보화의 급속한 발달로 인간의 육적인 삶은 더 편해지고 많은 혜택을 누리게 된 반면, 정신문화는 퇴보하고, 영적인 삶은 빈약해져 가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그중 두드러진 현상이 죽음의 문화다. 죽음의 문화 현상에는 낙태, 자살, 안락사, 사형, 인종 학살, 테러와 전쟁 등이 있으며 피임과 이혼 등도 같은 배경에서 생기는 것이다. 죽음의 문화가 생기게 된 배경은 하느님 중심의 그리스ㅈ도적인 신앙관을 배척하고, 모든 것을 인간 중심으로 결정하고 행동하는 잘못된 사상이 주류를 이루고 있다. 문화는 문화로써 대응해야 한다. 교회는 생명의 문화를 건설하기 위해 기도운동ㆍ교육ㆍ홍보ㆍ참여 등 네 가지 운동을 펼쳐나가고 있다. 현재 정부와 국회에서 발의하려는 낙태법 개정안은 태아의 생존권이 상실되고, 여성의 자기결정권을 우선시하는 쪽으로 진행되고 있다. 지난 10월 6일 한국생명윤리정책원에서 주관하는 콜로키엄에서 이석배 교수는 낙태죄 헌법불합치 헌재 결정 자체에 문제가 있음을 지적했다. 태아의 발달 단계에 따라 보호 수단을 달리할 수 있다는 결정문으로 생명의 연속성을 부정하는 결과를 낳았고, 생명권과 자기결정권을 충돌이 아닌 기본권의 조화라고 해석한 것을 지적했다. 생명운동은 가톨릭교회만의 운동으로는 성공하기 어렵다. 그리스도교 일치 운동으로 전개해야 한다. 더 나아가 비그리스도인들과도 연대하고 범국민운동으로 발전시켜야 한다. 가정과 생명이라는 교회의 핵심 가치를 교육하고 홍보하여 왜곡된 성문화를 바로 잡을 수 있도록 교회가 선도해 나가야 한다. 교구와 수도 공동체의 적극적인 참여가 필수적이다. 성직자와 수도자들이 생명윤리를 선포하는 것으로 죄책감만 들게 해서는 안 되며, 낙태와 자살 등으로 내몰렸던 이들에게 따뜻한 사목적 돌봄을 통해 그들의 상처와 아픔을 치유해 주어야 한다. 인간적 방법을 따르지 말고, 교회 가르침과 성경에서 해답을 찾아야 한다.2019년 4월 11일 헌법재판소는 낙태죄에 대한 헌법불합치 결정을 내렸다. 가장 보호가 필요하고, 자기방어 능력이 없는 태아들을 나라법이 지켜주지 못하게 된 것이다. 그러나 실망하고 포기해서는 안 된다. 생명운동은 운동을 위한 운동이 되어서는 안 되며, 단죄하고 심판하는 감정적 대응 방식의 운동이 되어서는 안 된다. 그리스도께서는 세상을 심판하러 오시지 않았고, 오히려 심판을 받고 값을 치르고 우리를 구원하러 오셨기 때문이다. 교회 역사를 보면, 이단이 나타날 때마다 교회는 교리적으로 더 깊어지고, 오히려 가톨릭의 정체성을 확실하게 확보해 나가는 계기가 되었듯이 죽음의 문화는 우리에게 도전이 되고 있지만 이를 통해 우리의 신앙은 더욱 복음적으로 되고, 고통과 희생을 통한 십자가의 구원 영성이 더 확고히 되는 계기가 될 것이다. 세속적 판단과 결정을 따르지 않고 예수님 가르침대로 자기를 희생하는 사랑을 통해, 생명을 지켜낸 증거자들을 통해 세상에 복음이 선포된다. 온갖 유혹과 시련을 견디고 낙태의 위기를 이겨낸 하느님 백성들이 이웃과 세상을 사랑으로 복음화시키고 있다. 우리의 생명운동은 이제 시작이다. 성 요한 바오로 2세 교황님의 말씀으로 마무리하고자 한다. “죽음의 문화를 이기고, 이 땅에 사랑의 문화, 생명의 문화를 건설하기 위해서는 어떠한 방법보다 성령강림의 문화를 온 세상에 전파하여야 한다.” cpbc2020.11.17

교황청 내사원, 코로나19 관련 특별 전대사 허용교황청이 코로나19와 관련해 특별 전대사를 허용한다고 교령을 발표했다. 교령에 따르면 코로나19로 고통받는 신자, 보건 의료 종사자, 환자와 의료진 가족 등에게 전대사가 수여된다. 사진은 대구동산병원에서 방호복을 입고 나오는 의료진들 모습. 가톨릭평화신문 DB 코로나19와 관련해 전대사(全大赦)가 특별히 허용된다.교황청 내사원장 마우로 피아첸차 추기경은 19일 ‘전 세계적 질병 확산의 현 상황에서 신자들에게 특별 대사를 수여하는 교령’을 발표했다. 교령에 따르면 △코로나19로 고통받는 신자 △보건 의료 종사자 △환자와 의료진 가족 △기도를 포함해 어떠한 형태로든 환자를 돌보는 모든 이에게 전대사가 수여된다. 전대사를 받기 위해서는 다음과 같은 절차를 따라야 한다. 코로나19로 고통받는 신자들은 어떠한 죄도 짓지 않겠다는 마음으로 통신 매체를 통해 미사에 참여하고, 묵주기도를 바치며, 십자가의 길이나 다른 형태의 신심을 실천할 때 전대사를 받는다. 이마저도 힘들면 하느님을 믿고 형제자매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이 시련을 봉헌하며 최대한 이른 시일에 전대사의 일반 조건(고해성사, 영성체, 교황님 지향에 따른 기도)을 이행하겠다는 의지를 지니고 신경, 주님의 기도, 복되신 동정 마리아께 간구 기도를 바칠 때 전대사를 받는다. 병자를 돌보는 의료 종사자와 가족, 그 밖의 모든 이도 이와 같은 조건을 충족하면 전대사를 받을 수 있다. 코로나19 종식, 고통받는 이들을 위한 위로, 세상을 떠난 이들의 영원한 구원을 지향으로 성체조배나 30분 이상 성경 읽기, 묵주기도 또는 십자가의 길 기도, 하느님 자비를 구하는 기도를 바치는 신자들 역시 같은 조건을 채울 때 전대사를 받는다. 교황청 내사원은 병자성사를 받을 수 없는 위급한 상황에 있는 이들을 위해서도 전대사의 길을 열어뒀다. 임종의 순간에 놓인 신자들이 평소 습관적으로 어떠한 기도를 바치기만 했어도 전대사를 받을 수 있다고 명시했다. 대사(大赦)는 교회가 정한 조건을 채우면 ‘남아 있는 벌’(暫罰)을 면해주는 것이다. 고해성사를 통해 죄를 용서받았어도 죄에 따른 벌은 남아 있기 때문이다. 벌을 전부 없애주는 것을 전대사, 일부를 없애 주는 것을 부분대사라 한다. 박수정 기자 catherine@cpbc.co.kr cpbc2020.03.25

코로나19 위기 속 수험생들… 주님의 지혜와 은총으로 보살펴주소서수능 100일, 수험생에게 힘이 되는 기도와 돌봄
출처=「엄마의 기도」(김옥례 지음 / 심순화 그림) 2021년 대학수학능력시험(12월 3일)이 90여 일 앞으로 다가왔다. 매년 수험생과 부모들이 겪는 어려움은 크지만, 올해는 코로나 팬데믹으로 어려움이 가중됐다. 수능 날짜가 이미 한 번 연기됐고, 코로나 2차 대유행이 우려된다. 수능 일정 재조정도 배제할 수 없는 상황이다. 더욱이 성당과 성지에서 ‘수험생을 위한 100일 기도 모임’ 등도 자취를 감추며 수험생 부모들은 신앙적으로 기댈 곳마저 마땅치 않다. 수험생 부모의 마음가짐과 수험생을 위한 기도, 수험생에게 좋은 음식 등을 모아봤다.수험생에게 하지 말아야 할 말한동안 유행했던 “엄친아, 엄친딸”은 금지어 1순위다. 몇 년 전 한 아르바이트 구인구직 사이트에서 대학생들을 대상으로 ‘수험생 시절 가장 듣기 싫었던 말’을 조사한 적이 있다. 대학생들은 “○○은 수시로 대학 어디 갔다더라” 라는 말을 듣기 싫었던 말 1위로 꼽았다. 부모가 자녀에게 부담을 주기 위해서 하는 말을 아니겠지만, 누구와의 비교는 수험생의 사기를 꺾는다. 안셀름 그륀 신부는 “남들과 비교를 하면 자신이 무엇이 모자라서 그렇게 살지 못하는지 고민하게 된다”고 말한다. “그렇게 하다 보면 질투와 불만만 쌓이지요. 그럴 때일수록 제정신을 차리고, 자신의 존재와 자신이 소유하고 있는 것들을 감사히 받아들여야 합니다. 그렇게 했을 때 우리는 마음의 평화를 얻을 수 있으며, 무절제한 모습을 보이지 않게 됩니다.”(「딱! 알맞게 살아가는 법」 )비교가 나쁘다는 건 누구나 알겠지만 “이런 것도 물으면 안 되나” 하는 질문도 있다. △어느 대학 갈래 △힘내 △점수가 얼마나 나올 거 같아 △공부는 잘되고 있지 △시험 못 보면 재수하면 돼 등이다.그렇다고 부모로서 말문을 닫을 수 없는 노릇이다. 입시 전문가들은 학부모는 자녀를 믿고 유의 깊게 관찰하는 게 중요하다고 말한다. 주도적으로 나서서 이것저것 조언하다가 충돌로 이어져 역효과가 날 수 있기 때문이다. 기도로 마음을 다스리자자녀가 공부를 잘하든 못하든 학부모의 마음은 타들어 가고 조언까지 못 한다니 화가 쌓일 수밖에 없다. 그래도 신앙이 있고 기도할 수 있으니 다행히 아닐까. 성경 구절 하나 소개한다. “아무것도 걱정하지 마십시오. 어떠한 경우에든 감사하는 마음으로 기도하고 간구하며 여러분의 소원을 하느님께 아뢰십시오. 그러면 사람의 모든 이해를 뛰어넘는 하느님의 평화가 여러분의 마음과 생각을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지켜 줄 것입니다.”(필리 4,6-7)기도하고 간구하라지만 무조건 시험 잘 보게 해달라는 기도는 지양해야 한다. ‘○○대학에 갈 수 있게 해주세요, 점수를 올려 주세요, 친구보다 등수가 잘 나오게 해주세요’라는 식의 기도는 바람직하지 않다. 기도를 통해 수험생들에게 부모와 하느님의 사랑을 느끼며 힘든 과정에서 더 넓은 배움을 얻을 수 있도록 지혜를 청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수험생을 위한 기도 모임도 없고 수험생 자녀를 위해 기도할 방법을 몰라도 걱정할 필요 없다. 교회 출판사가 발행한 수험생을 위한 기도 노트와 기도서 등이 있다. 가톨릭출판사는 수능 100일을 앞두고 「수능 100일 기도 노트」를 발행했다. 수능 전 100일 동안 △오늘의 묵상 △수험생을 위한 응원 편지 △오늘의 기도 △기도 지향과 봉헌 △오늘의 실천 등을 하며 주님께 지혜와 은총을 청하는 시간을 가질 수 있다. 이 밖에도 「수험생을 위한 100일 기도」(생활성서사), 「수험생이 드리는 40일 기도」(바오로딸) 등도 있다. 책은 교회 서적을 파는 출판사나 인터넷을 통해 구할 수 있다.하나 더, 배우자가 갑자기 기도한다고 비꼬는 것 역시 곤란하다. “이 사람아, 양심 좀 있어 봐라. 이제까지 냉담하다가 자식 시험 잘 보게 해달라고 성사 보고, 성당에 나가냐?”(「수험생 엄마의 편지」 중) 마음을 열고 부부가 함께 기도한다면 하느님 보시기에 더 좋을 것이다.마음은 가볍게 손은 무겁게 귀성길이나 집들이 갈 때 “마음은 가볍게 손은 무겁게”라는 표현을 쓴다. 공부하는 자녀 방문을 두드릴 때도 크게 다르지 않다. “공부 잘하고 있지!” “조금 더 노력해서 힘내자” 등 자녀에게 부담을 줄 수 있는 말 대신 수험생 몸에 좋은 간식을 건네자. 견과류와 달걀, 블루베리는 집중력 향상에 도움이 된다. 견과류에는 항산화 비타민E가 풍부해 뇌신경세포 간 물질 교환을 도와 기억력을 높여준다. 호두에 있는 오메가3 불포화지방산은 뇌 기능 개선에 도움을 준다. 달걀 역시 오메가3 지방산과 DHA가 풍부해 기억력과 집중력 향상에 효과가 있다. 블루베리는 기억력과 인지능력 개선에 좋고 눈의 피로를 덜어준다.개인의 몸 상태에 따라 피해야 할 음식도 있다. 과민성대장증후군이 있다면 장 흡수가 어려운 포드맵(FODMAP)이 포함된 음식을 조심해야 한다. 콩, 양배추, 양파, 마늘, 사과, 배는 피해야 한다. 위가 나쁘다면 위산 과다 분비를 촉진할 수 있는 고구마와 우유를, 점막을 자극할 수 있는 귤도 조심해야 한다. 참고로 바나나와 대추, 검은콩은 수면에 도움이 되는 멜라토닌 등의 성분이 들어 있고 브로콜리는 식이섬유가 많고 토마토는 산성도가 강해 수면을 방해하는 식품이다. 백영민 기자 heelen@cpbc.co.kr 평화신문2020.08.26

약이 되게 할 것인가, 독이 되게 할 것인가[사유하는 커피] (9)섭리 깨는 행동이 ‘양식’을 ‘독’으로 만든다 박영순 커피비평가협회장 존재하는 것은 무엇이든 가치가 있다. 이 명제는 과연 옳은 것일까?“주님께서는 만물을 창조하셨고 주님의 뜻에 따라 만물이 생겨나고 창조되었습니다”(묵시 4,11)라는 성경 말씀에서 어렵지 않게 답을 얻을 수 있다. 창조론을 부정한 진화생물학자 스티븐 제이 굴드는 한 걸음 더 나아가 “존재하는 것은 무엇이든 옳다”고까지 역설했으니, 종교적으로나 과학적으로 이 말에 이의를 제기하긴 힘들겠다. 하지만 당장 코로나19를 끄집어내 “수십만 명의 목숨을 앗아간 것이 주님의 뜻인가?”라고 묻는다면, 상황이 달라진다. 코로나19를 생명체로 볼 수 있느냐에 대해서 이견이 있지만, 어쨌든 존재하는 모든 것에 좋은 의미를 부여할 순 없을 듯 보인다. 국내에서만 매년 25명가량이 산행 중 야생 독초를 채취해 먹고 목숨을 잃고 있다. 자연은 인류에게 선물이 아니란 말인가? 독성으로 치자면, 커피나무도 뒤지지 않는다. 식물의 독성분은 대부분 알칼로이드인데, 카페인(Caffeine)이 그중 하나다. 알칼로이드는 ‘~인(~ine)’으로 끝나는 물질들로 질소를 포함하고 있다. 모르핀, 니코틴, 퀴닌, 에메틴, 아코니틴 등 알칼로이드는 중추신경에 작용함으로써 일정 농도 이상이라면 포유동물에 치명적이다. 남아프리카에 자생하는 지프바르(gifblaar)는 잎사귀 2~3장만으로 양 1마리의 생명을 앗아간다. 소크라테스가 마신 독배는 독성분이 있는 당근을 달여 만든 즙이었다고 전해진다.알칼로이드는 동시에 인류에게 축복이기도 하다. 세계적으로 1억 2500만 명 이상이 커피에 의지해 생계를 이어가고 있다. 잠을 쫓고 피로를 잊기 위해 커피를 마시는 사람들까지 따지면 전 세계 성인 인구의 절반가량이 카페인을 요긴하게 활용하고 있다. 커피나무의 형제들을 보면 유독식물과 약용식물을 가르는 기준이 모호해진다. 진화론에 따르면, 커피나무는 1400만 년 전 카메룬의 치자나무에서 분화해 커피의 본성을 갖게 됐다. 치자나무의 껍질에 들어 있는 퀴닌 역시 독성이 강한데, 말라리아 특효약으로 개발되면서 인류의 생명을 구하는 약용식물로 대접받고 있다. 식품의약품안전처가 식용을 금지한 리우토근은 에메틴 성분 덕분에 아메바성 이질 치료제로 사용되면서 수많은 목숨을 구하고 있다. 커피의 성분들은 치매와 암 치료에 유용한 것으로 보고되고 있다. 이처럼 치자나무에서 갈라진 커피나무의 가족(科)들은 독이면서 약으로 존재한다. 하나의 나무가 환경에 따라 새로운 특성을 획득하거나 다양하게 분화하는 것을 진화의 방향이라고 진화론자들은 설명한다. 여러 시대를 거치면서 먹는 주체와 방식이 이 식물들을 진화시키는 동력이 됐을 수도 있다. 창조론의 견해는 이와 다르다. 모든 식물은 천지 창조 사흘째 날 생겼다. 창세기 때 식물의 모든 다양성은 완성됐으며, 인류의 요구와 쓰임에 따라 존재가 확인될 뿐이다. “구글에서 검색되지 않으면 있어도 있는 게 아니다”는 풍자와 맥락이 유사하다. 커피나무와 인류의 관계는 창세기 1장 29절 “이제 내가 온 땅 위에서 씨를 맺는 모든 풀과 씨 있는 모든 과일나무를 너희에게 준다. 이것이 너희의 양식이 될 것이다”는 말씀에 설정돼 있다. 그런데 왜 종종 ‘양식’이 ‘독’으로 작용할까?한 잔의 커피를 앞에 두고, “주님의 말씀을 어기고 선악과를 따 먹은 인류의 행동에서 답을 찾을 수 있다”는 생각을 한다. 코로나19 바이러스가 진화에 의해 생겨난 게 아니다. 박쥐들이 사는 자연의 세계를 깨뜨리면서 인류에게 옮겨졌고, 생존하기 위해 돌연변이를 통해 저항하고 있을 뿐이다. 섭리를 깨는 행동이 양식을 독으로 만든다. 하느님은 본디 악한 것을 창조하지 않으시므로, 존재하는 모든 것은 가치를 찾아야 한다.박영순(바오로, 커피비평가협회장, 단국대 커피학과 외래교수) 평화신문2020.06.30
![[생활속의복음] 연중 제30주일 - 하느님과 올바른 관계로 초대하시는 주님](//cpbc.co.kr/CMS/newspaper/2019/10/rc/765021_1.0_titleImage_1.jpg)
[생활속의복음] 연중 제30주일 - 하느님과 올바른 관계로 초대하시는 주님 한민택 신부 예수님을 따르는 ‘참 제자’ 됨의 길에서 넘어야 할 관문은 겸손의 문입니다. 겸손은 하느님과 올바른 관계를 맺도록 인도해주는 덕목입니다. 겸손함은 강자 앞에서 자신을 낮추고 굽신거리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 앞에서 자신이 얼마나 나약하고 부족한 죄인인지 인정하는 것이며, 그럼에도 나를 받아주시는 하느님 아버지의 사랑과 자비를 받아들이는 것입니다.창세기에서 요한 묵시록에 이르기까지 성경 곳곳에는 인간이 얼마나 나약하고 죄 많은 존재인지에 대한 깊은 통찰이 담겨 있습니다. 성경을 죄인의 이야기로 가득한 책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의 궁극적인 메시지는 인간의 죄악이 아니라, 그러한 인간을 받아주고 용서하시는 하느님 아버지의 자비와 사랑이 결국 승리하며, 인간과 세상을 구원한다는 ‘기쁜 소식’입니다.신앙은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것이며, 하느님과 새로운 관계로 들어서는 것입니다. 하느님을 ‘아빠’라고 부르며 하느님의 자녀, 고귀한 인격으로 자기 자신을 경험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과 만나며 그러한 경험을 한 사람은 자신이 자격이나 권리가 있어서가 아니라 오직 하느님의 은총으로 그렇게 된 것임을 고백합니다.참 제자가 되는 길에서 넘어야 할 유혹 중 하나는 마치 내가 계명을 지키고 선을 행하며 열심히 기도를 올려 하느님 앞에 설 자격이나 권리를 갖추었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의 바리사이와 같은 모습입니다. 그는 자신이 얼마나 나약한 죄인인지 알지 못하며, 율법만으로는 의로움에 이를 수 없다는 것도 알지 못합니다. ‘거룩한 삶’을 사는 그는 겉으로는 하느님과 올바른 관계를 맺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그가 하느님과 맺는 관계는 왜곡되어 있었고, 그로 인해 타인뿐 아니라 자기 자신과의 관계 또한 왜곡되어 있었습니다. 그것은 의로움이 오직 하느님의 은총으로 거저 주어지는 것이며, 공로나 자격으로 그분께 요구할 수 없는 것임을 망각했기 때문입니다. 하느님과의 올바른 관계는 자신이 부족한 죄인이며 쓸모없는 종임을 인정하는 것에서 시작됩니다. 그것이 우리를 자유롭게 하며, 하느님의 무한한 사랑을 경험하게 합니다.참 제자 됨의 길에서 빠지기 쉬운 또 다른 유혹은 시련과 실패, 두려움과 비참함 속에서 좌절하고 절망하는 것입니다. 살다 보면 종종 삶에 위기가 닥칩니다. 그때마다 그동안 쌓아온 신앙생활이 물거품이 되는 것처럼, 하느님께서 계시지 않는 것처럼 느끼기도 합니다. 그런데 주변을 돌아보면 그러한 시련이 모든 사람에게 생기는 것을 알게 됩니다. 시련이 자연스럽게 생겨난다는 것을 알고 시련 안에서 견디어내는 법을 배울 수 있다면, 시련은 우리에게 하느님과의 관계를 새롭게 맺도록 하는 계기가 되어줄 것입니다. 시련은 우리 자신의 나약함과 죄악을 인정하도록, 하느님의 은총만이 그리스도를 통해 나를 구하실 수 있다는 것을 인정하도록 겸손의 덕을 다져줍니다.나의 신앙이 타인에 대한 단죄나 하느님 은총의 장애물이 되지 않도록, 나의 나약함이 신앙을 포기하는 것이 아니라 더욱 성장하는 계기가 되도록, 나를 비우고 버리는 삶의 길로 주님은 우리를 초대하고 계십니다.한민택 신부(수원가톨릭대 교수, 이성과신앙연구소 소장) 평화신문2019.10.22

빛으로 오신 구세주 예수, 경배의 순례 행한 동방박사들‘주님 공현 대축일’ 유래와 의미 살펴보기
동방교회에서 시작된 주님 공현 대축일은 아기 예수가 동방 박사를 통해 자신이 메시아임을 세상에 드러낸 사건을 기념하는 날이다. 피터 폴 루벤스 ‘동방 박사의 경배’, 1617~18년경. 5일은 주님 공현 대축일이다. 공현(公顯)은 ‘나타내어 보여줌’이라는 뜻으로, 아기 예수께서 동방 박사들을 통해 당신 자신이 메시아임을 세상에 드러낸 사건을 기념하는 날이다. 동방 박사들이 아기 예수께로 이끄는 별을 따라 경배의 순례 여정을 시작했듯이, 그리스도인은 빛으로 오신 구세주를 닮기 위해 주님을 향해 나아가야 한다. 주님 공현 대축일의 유래와 의미를 알아본다. 주님 공현 대축일의 유래와 의미 주님 공현 대축일의 의미를 알려면 우선 성탄 시기 전례력이 어떻게 구성돼 있는지 살펴보는 것이 중요하다. 전례력에 있어 성탄 시기의 특징은 연속적으로 지정된 축일들이다. 이 축일 중 가장 중요한 축일이라 할 수 있는 것이 12월 25일 주님 성탄 대축일과 1월 6일 주님 공현 대축일이다. 선교 지역인 한국 교회는 사목상 편의에 따라 1월 2~8일 사이의 주일에 주님 공현 대축일을 지내고 있다. 아울러 주님 성탄 대축일 다음 주일은 예수, 마리아, 요셉의 성가정 축일, 1월 1일 천주의 성모 마리아 대축일, 주님 공현 대축일 다음 주일을 주님 세례 축일로 지내고 성탄 시기를 마무리한다. 주님 공현 대축일은 동방 교회에서 시작했다. 이집트에서 활동하던 영지주의자(주님의 인성을 부정한 이단)들이 1월 6일에 주님의 세례를 기념한 데서 유래했다. 로마와 갈리아를 중심으로 한 서방 교회에서는 제1차 니케아 공의회(325년) 이후 4세기부터 주님 공현 대축일을 기념했다. 주님 공현은 헬라어 ‘에피파네이아’(επιφανεια)에서 파생된 말로 ‘드러나게 나타나거나 밝혀지는 것’ ‘스스로를 드러내는 것’ ‘유명한 존재로 나타남’ 등을 의미한다. 초대 교회는 신이 개입된 기적같은 사건이나, 황제나 왕이 올 때 사용하던 이 용어를 받아들여 ‘인간의 모습으로 나타나심을 기리는 주님 성탄’을 드러내는 교회 용어로 사용했다. 이런 이유로 동방 교회에서는 지금도 1월 6일 주님 공현 대축일에 주님 성탄을 기념하고 있다. 하지만 서방 교회는 주님 성탄 대축일을 별도로 지내고, 주님 공현 대축일에는 동방 박사들이 탄생한 구세주를 경배하기 위해 베들레헴에 온 것과 이방 민족들 모두에게 당신 자신을 드러낸 주님을 기념하고 있다. 따라서 주님 공현 대축일 전례는 ‘그리스도께서 이방인의 빛으로 널리 계시되었다’는 사실에 집중되고 있다. 구약의 독서(이사 60,1-6)를 통해 하느님께서 이스라엘을 불러 당신의 백성으로 삼으셨지만, 신약(에페 3,2.3ㄴ.5-6)에 와서 유다인들에게 약속된 복음 선포가 이방인들에게도 전파된다는 것을 알려준다. 그래서 복음(마태 2,1-12)은 구세주의 탄생을 알리는 베들레헴의 별빛은 그리스도인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어둠 속에서 염원하는 모든 이를 위한 구원의 빛임을 선포한다. 동방 박사들은 누구“예수님께서는 헤로데 임금 때에 유다 베들레헴에서 태어나셨다. 그러자 동방에서 박사들이 예루살렘에 와서, ‘유다인들의 임금으로 태어나신 분이 어디 계십니까? 우리는 동방에서 그분의 별을 보고 그분께 경배하러 왔습니다’ 하고 말하였다. 이 말을 듣고 헤로데 임금을 비롯하여 온 예루살렘이 깜짝 놀랐다. … 그들은 임금의 말을 듣고 길을 떠났다. 그러자 동방에서 본 별이 그들을 앞서 가다가, 아기가 있는 곳 위에 이르러 멈추었다. 그들은 그 별을 보고 더없이 기뻐하였다. 그리고 그 집에 들어가 어머니 마리아와 함께 있는 아기를 보고 땅에 엎드려 경배하였다. 또 보물 상자를 열고 아기에게 황금과 유향과 몰약을 예물로 드렸다.”(마태 2,1-11)동방 박사의 경배는 네 복음서 중 마태오 복음서에만 나온다. 마태오 복음서를 보면, 동방 박사들은 별의 인도로 아기 예수를 경배하기 위해 베들레헴을 찾아왔다. 이들이 아기 예수를 찾아온 것은 모든 민족을 대표해 그리스도를 경배하고, 예물을 드리기 위해서였다. 예수는 다윗의 자손인 메시아로, 임마누엘로 세상에 왔지만 헤로데 왕과 이스라엘 백성들은 구세주가 오심을 알아보지 못했다. 성경에서 동방 박사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은 최초의 이방인으로 등장한다.삼왕이라 불리는 동방에서 온 이 세 사람을 공동 번역 성경에서는 ‘박사’, 200주년 기념 신약성경에서는 ‘점성가’라고 번역했다. 동방 박사라고 번역되어 사용되었던 그리스어 ‘마고이’의 단수, 마고스는 본래 ‘현자’, 또는 ‘해몽가’라는 뜻이다. 전승에 따르면 세 명의 박사는 멜키오르, 발타사르, 가스파르로 불린다. 마태오가 복음서에서 이들이 온 곳을 동방이라고 한 것은 당시 메소포타미아나 페르시아 등 팔레스티나 동쪽 지역에서 성행한 점성술을 염두에 뒀기 때문이라고 전해진다.동방 박사들은 예수님을 경배하고, 황금ㆍ유향ㆍ몰약을 선물로 바쳤다. 황금은 ‘왕권’, 유향은 ‘그리스도의 신성’, 몰약은 ‘인류를 위해 죽으실 그리스도의 희생’을 상징하는 예물이다. 신학자 칼 라너 신부는 “황금은 ‘우리의 사랑’, 유향은 ‘우리의 그리움’, 몰약은 ‘우리의 고통’”이라고 표현했다. 이들의 유해는 5세기 말경에 콘스탄티노플에서 밀라노의 성 에우스토르지오 성당으로 옮겨졌다고 전해진다. 1162년에 프리드리히 1세 황제에 의해 독일의 쾰른 주교좌성당에 옮겨졌다. 아기 예수의 탄생과 동방 박사들의 경배 장면은 많은 성미술 작품에 남아있다. 이지혜 기자 bonaism@cpbc.co.kr 평화신문2020.01.02

[수도 전통에 따른 렉시오 디비나) (2)렉시오 디비나의 다양한 시도오랜 수도 전통 안에서 이어온 영적 수행 허성준 신부 오늘날 렉시오 디비나에 대한 여러 개인적인 접근법들이 많이 소개되고 있다. 이것은 아마도 신자들의 영적인 갈증이 커졌고 성경에 대한 지적인 접근의 한계 때문인지도 모른다. 그래서 그 하나의 대안으로 렉시오 디비나에 대한 관심이 그 어느 때보다도 사람들에게 크게 호감을 주고 있는 것 같다. 이것은 매우 반갑고 고무적인 일이지만, 문제는 이러한 개인적인 접근법들이 너무 지적인 측면을 강조함으로 인해서 단순하게 말씀에로 나아가던 전통적인 방법을 간과할 위험이 있을 수도 있다는 사실이다. 사실 렉시오 디비나는 오늘날 몇몇 개인들에 의해서 반짝 일어난 접근이 아니라, 수도회의 오랜 역사 안에서 전해져온 중요한 영적인 수행으로서 그 뿌리가 매우 깊다. 고대에서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수도승 전통을 간직하고 있는 수도자들은 이러한 수행을 통해 영적인 보화를 말씀으로부터 직접 발견하고 체험하였다. 이것은 단순히 말씀에 대한 지적인 접근법이 아니라 오히려 마음으로 접근하는 단순한 방법이다. 이에 대해서 교회는 언제나 고대로부터 전해져 온 렉시오 디비나 수행의 중요성에 대해서 강조하였다. 성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은 1999년 1월, 「미국 교회에 보내는 사도적 권고」에서 교회의 오랜 전통 안에 있었던 기도를 동반한 독서인 렉시오 디비나에 대해서 강조하였다.(31항) 또한, 2001년 한국 주교단이 성 요한 바오로 2세 교황 알현(AD LIMINA, 사도좌 방문) 때, 교황은 특별히 렉시오 디비나의 고대의 전통(The ancient tradition of Lectio divina)에 대해서 언급하면서, 복음화의 가장 강력한 무기 중의 하나로 이것을 강조하였다. 베네딕도 16세 교황도 여러 곳에서 자주 렉시오 디비나의 고대의 수행(the ancient tradition of Lectio divina)에 대해서 강조하였다. 그리고 2008년 제15차 세계 주교 시노드에서도 하느님의 말씀에 대해서 강조하면서, 역시 교회의 오랜 전통 안에 있었던 렉시오 디비나에 대해서 다루었다. 교황청 그리스도인 일치촉진평의회 의장으로 재직했던 발터 카스퍼 추기경은 성경에 대한 무지는 바로 그리스도에 대한 무지임을 강조하면서, 교회의 오랜 전통인 기도로 충만한 독서인 렉시오 디비나에 대해서 강조하였다. 「계시헌장」에서도 모든 그리스도인은 성경을 읽을 때, 하느님과 인간의 대화가 이루어지도록 기도가 따라야 함을 강조하였다. 오랜 수도 전통 안에서 수도자들이 순수하고 단순한 마음으로 하느님의 말씀에로 다가가는 성경에 대한 접근이 바로 렉시오 디비나 수행이었다. 고대 수도 전통으로부터 전해져온 렉시오 디비나 수행은 현재 소개되고 있는 다양한 개인적인 렉시오 디비나 방법들과 차이가 있다. 그래서 본인은 고대 수도전통으로부터 전해진 렉시오 디비나 수행을 특별히 ‘성독’(聖讀)이라고 번역하여 사용하고 있다. 그것은 다음과 같은 네 가지 이유 때문이다. ①성독을 한자로 옮기면 聖讀이 되는데, 즉 한자 자체가 성스러운 독서라는 의미를 잘 드러내고 있다. ②성경 독서의 줄임말이 성독이다. ③성독(聲讀)은 소리 내어서 읽는 독서를 함축하고 있다. ④성독은 내가 하는 독서라기보다는 오히려 성령의 이끌림에 의해 하는 독서이다. 성독은 정확히 개인적인 성경에 대한 접근 방법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오랜 수도 전통 안에서 전해져온 영적인 보화인 렉시오 디비나를 의미한다. 허성준 신부(성 베네딕도회 왜관수도원) cpbc2019.08.13

옛것에서 새것을 꺼내다… 우리 시대에 맞게 현대화[토마스 머튼의 영성 배우기] 35. 관상에 관한 머튼의 공헌과 평가 <상>그림=하삼두 스테파노 지금까지 우리는 토마스 머튼이 이해한 기도와 관상에 대해 살펴보았다. 이번 호부터는 머튼의 관상에 대한 이해가 오늘날의 영성에 어떤 공헌을 하였는가에 대해 평가하고자 한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토마스 머튼은 지금까지의 관상한 개념을 ‘종합하고 이를 우리 시대에 맞게 현대화’한 인물이다. 그렇다고 머튼이 처음부터 관상에 대한 새로운 개념을 제시한 것은 아니었다. 그의 초기 작품은 토미즘에 바탕을 둔 관상에 대한 전통적인 이해를 지적인 면에서 다루었다. 그러나 자신의 관상 체험이 깊어질수록 전통적인 관상에 대한 묘사에 한계를 느끼기 시작했다. 그리고 사막 수도승의 관상에 대한 이해를 바탕으로 하여 동양의 사상의 영향 아래에서 관상적 체험을 종합하고 자신의 시대 언어로 발전시켜 나갔다. 이러한 머튼의 변화 과정에 대해 앞으로 3회에 걸쳐 머튼의 주요 저서를 중심으로 좀 더 구체적으로 살펴보고자 한다.초기에는 전통적인 그리스도교의 관점과 비슷머튼이 관상에 대한 종합적이고 현재적인 비전을 갖게 된 것은 지적(知的)인 전망으로부터 존재론적이고 경험적인 관점으로의 변화와 깊이 관련되어 있다. 이 변화는 관상의 영성에 대해 기록된 그의 초기 작품들과 후기 작품들을 비교할 때 분명해진다. 가령, 그의 초기 소책자 「관상이란 무엇인가?」(What is Contemplation?, 1950)에서 머튼은, 관상을 “초자연적인 사랑과 하느님의 지식에 대한 직관이 하느님에 의해 영혼의 정점 안으로 주입되는 것”으로 묘사하고 있으며, “대부분의 그리스도인은 지상에서 순수한 관상가들이 결코 될 수 없다”고 주장했다. 이러한 정의는 관상에 대한 전통적인 그리스도교의 관점과 매우 가깝다. 가령, 십자가의 성 요한은 관상을 “영혼을 깨어나게 하는 하느님의 주입된 사랑의 지식이며 동시에 한 단계 한 단계 상승하여 창조주 하느님께 도달할 때까지 사랑으로 불타오르게 되는 것”으로 정의하고 있다. 머튼은 이 소책자에서 관상의 본성에 대해 다루었으며, 성경과 성 토마스 아퀴나스 그리고 십자가의 성 요한의 기초 위에서 관상적 기도를 위한 실천적 지침을 제안하였다. 그는 ‘주입된’ 혹은 ‘순수한 관상’(infused, or pure contemplation)과 ‘획득된 관상’(acquired contemplation) 사이를 구분하였다. 그리고 오직 전자만이 참된 관상으로 간주될 수 있으며, 이것은 그리스도인 삶의 가장 높은 목표인 하느님과의 신비로운 일치와 상응하는 것이라고 여겼다. 머튼의 저서 「진리를 향한 상승」(The Ascent to Truth, 1951)은 전통적인 관상에 대한 그의 분명한 관심의 결과였다. 그의 의도는 성 토마스 아퀴나스의 스콜라 신학과 십자가의 성 요한의 신비주의적인 통찰과 교회, 성경, 전례와 계시의 지적인 유산에 기초하여 신비 신학의 교의적 본질을 연결시키는 것이었다. 교의적 전망에서 종교적 체험의 전망으로 변화머튼에게 있어 전통적인 그리스도교 신비주의는 이성적이고 지적인 것이었다. 1950년대 중반 이후의 그의 글들과 사상에서 머튼의 관상을 향한 조직신학적 접근은 변화를 맞이한다. 예를 들어, 「요나의 표징」(The Sign of Jonas, 1953)의 서문에서 그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저는 「진리를 향한 상승」을 쓸 때, 비록 그것이 신학자들에 의해 널리 알려진 보편적이고 확실하며 받아들일 만한 것이라 할지라도, 기술적인 전문용어들을 일반인들은 이해하지 못하고 있고, 종교적 체험에서 가장 개인적이고 가장 필수적인 것을 전하지 못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제가 「요나의 표징」에서 초점을 맞추고자 하는 것은 이러한 교의적인 것이 아니라, 구체적인 현실을 깨닫게 하는 영성 생활에 미치는 영향이기에 저 자신의 영혼의 상태에 관하여 제 방식대로 표현하는 것을 이해해 주시리라 믿습니다.”이러한 진술은 그가 교의적인 전망으로부터 개인적인 종교적 체험의 전망으로 변화되었음을 보여 주고 있다.또 다른 예는 그의 저서 「인간은 섬이 아니다」(No Man Is an Island, 1955)에서 발견할 수 있다. 이 책의 머리말에서 그는 관상적 삶에 대한 자신의 체험과 그 체험에 관한 숙고들을 나눔으로써 믿음의 문제들에 접근하고 있다고 체험의 중요성을 더 분명히 드러내고 있다. 그는 “관상은 신적인 것들의 체험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설명할 수는 없지만 체험할 수 있는 이 위대한 신비 속으로 들어갑니다”라고 언급했다. 그가 관상 안에서 체험의 가치를 깨달았다고 하여 전통적인 가톨릭 관상을 무시한 것은 아니다. 오히려 그는 이 전통의 가치를 재발견하고 발전시키고 있으며, 그 자신의 관상적 체험 안으로 그것을 종합하였다.머튼에 따르면, “전통은 살아 있고 활동적이다… 오래된 전통은 항상 매우 새롭기도 하다. 그것은 각 세대에 다시 태어나며, 새롭고 특별한 방식으로 살아 있고 적용되어 항상 활기를 되찾고 있기 때문이다.”(「인간은 섬이 아니다」 226)그러나 머튼은 ‘진정 살아 있는 전통적 내용이 텅 비워진’ 전통주의에 대해 저항하라고 경고를 했다. cpbc2020.03.04
[장현규 수녀의 사랑의 발걸음] 9. 하느님은 우리의 쉼, 우리 피난처프랑스 성요한사도수녀회 장현규(마리스텔라) 수녀 세상을 뒤흔들고 있는 코로나19 바이러스가 우리 수녀원도 비켜가지 않았다. 함께 사는 동료 수녀 10명 중 7명의 확진자가 나왔다. 모두의 기도와 걱정 속에 다행히 수녀님들은 완쾌됐다. 그간 프랑스는 계속 바깥출입이 제한됐다. 내가 줄곧 해오던 환자들을 만나는 것도 사실상 힘들다. 대신 산책 정도만 가능해 매일 거리를 나가 걷기 운동을 하고 있다. 걷기는 건강에 좋다.수녀원 옆 대성당을 향해 걷는 동안 성전에서 기도하고 싶어졌다. 코로나바이러스가 프랑스에 확산되기 시작할 때 수녀원이 운영하는 양로원 어르신들은 곧장 격리 상태에 들어갔다. 미사가 중단된 탓에 수녀원 성당도 굳게 잠겼다. 기도가 필요했다. 인근 대성당에 도착하니 마침 현시대의 성체가 나를 맞아주셨다. 그 앞에선 신자들이 기도하고 있다. 이런 위기 상황에서도 기도하는 이들의 모습이 어찌나 아름다워 보이는지.이럴 때 더욱 필요한 것은 기도다. 나도 기도하는 이들 안에 들어가 하느님 아버지의 자비로우신 도움을 간청했다. “이 아픔의 날들이 빨리 지나가게 해주세요.” 내가 만나온 수많은 환자도 떠올렸다. 고개를 돌려보니, 성당 안 조금 외진 구석에서 한 신부님이 신자들의 고백을 듣고 계셨다. 내 마음도 함께 숙연해졌다. 하느님께서도 우리의 고백을 들어주시겠지.특히 젊은이 몇몇이 ‘성체 현시대’ 앞에서 기도하다가 고해성사를 하기 위해 신부님께로 계속 가고 있었다. 작은 모습일 수 있지만, 나는 이 젊은이들의 경건한 믿음에 마음 깊이 감동을 하였다. 이 시련의 때가 하느님의 사랑과 자비 안에 더 깊이 들어가는 ‘회심의 시기’임을 다시금 느꼈다.지난 사순 시기는 특히 이탈리아의 코로나바이러스 확진자와 사망자 수가 급격히 높아질 때였다. 그때 잘 아는 형제님에게서 전화가 걸려왔다. 프랑스의 확진자 수도 연일 올라가고 있었던 터라 내 안부가 궁금하셨던 것이다. 동료 수녀님들의 확진과 완쾌 소식을 전하며 마음을 나눴다. 그럼에도 우리 수녀들은 긴장 상태에 있었다.수화기 넘어 형제님은 안타까운 소식을 전했다. 이탈리아에서는 사제 60명이 환자들을 돌보다가 감염되어 선종하셨다는 슬픈 소식을 처음으로 듣게 됐다. 동료 수녀님들께 이 고통스러운 소식을 전했을 때, 모두 아무 말 없이 침통해 했다. “나는 착한 목자다. 착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내놓는다.”(요한 10,11) 이탈리아 신부님들은 입원한 환자들에게 가까이 다가갔다고 한다. 위급한 중에도 환자를 찾아가 고해성사와 병자성사를 집전하고, 성체도 영해 주시다가 자신들도 감염된 것이다. 그들의 모습을 성경이 대변해주고 있다. “아버지께서는 내가 목숨을 내놓기 때문에 나를 사랑하신다. 그렇게 하여 나는 목숨을 다시 얻는다.”(요한 10,18)신부님들이 고통으로 신음하는 환자들을 위로했던 그 순간, 그들은 얼마나 큰 예수님의 사랑을 느꼈을까. 마지막까지 예수님 닮은 모습을 지켰던 신부님들이 천국에 가셨길 기도드린다. 60명의 신부님은 착한 목자, 아버지로서의 소명을 다 하시고 지금은 자신들의 생명까지 바치며 사랑하던 신자들과 부활의 크나큰 기쁨 안에 인자한 아버지 집에서 살고 계실 것이다.시편은 노래한다. “하느님께서 우리의 피신처와 힘이 되시어 어려울 때마다 늘 도우셨기에 우리는 두려워하지 않네, 땅이 뒤흔들린다 해도 산들이 바다 깊은 곳으로 빠져든다 해도 바닷물이 우짖으며 소용돌이치고 그 위력에 산들이 떤다 해도.”(시편 46,1-3)복음서는 이에 대한 믿음을 굳건히 해준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다. 나를 믿는 사람은 죽더라도 살고, 또 살아서 나를 믿는 모든 사람은 영원히 죽지 않을 것이다.”(요한 11,25-26) cpbc2020.06.24
[사도직현장에서] 기저귀를 빨면서도 감사한 나날들 박경옥(모니카, 서울 가톨릭 여성의 집 원장) 박경옥 원장 여성의 집에는 문제를 가진 여성들의 발길이 끊이질 않았다. 가출 부녀자는 심한 가정폭력을 피해 어린 자녀를 업고 찾아왔다. 손에는 조그만 지갑 외에 본인의 옷은 물론, 아기가 입고 먹을 것도 없었다. 막막했다. 교육을 받는 동안 이곳에 머물 수는 있었지만 계속 함께 살 수는 없었다. 파출 일을 해도 문제였다. 아기를 업고 일터로 가는 여성들을 볼 때마다 마음이 아팠다. 이런 이유로 돌보게 된 아이가 두 명이었다. 그 아이들을 돌보며 주님께 물었다. “젊은 여성들이 어떻게 해서라도 살아보겠다고 용기를 냈는데, 어떻게 도와줄 수 있을까요?” 그리고 아기들을 위해 보육할 곳을 만들었다. 성경에 ‘아가페’(사랑)란 말에서 이름을 따 ‘아가방 탁아원’(1982년 개원)이라고 지었다. 당시 한국에선 24시간 보육하는 곳은 그 어디에도 없었다. 언론에서도 관심을 보였다. 기사를 보고 무작정 상경하는 이들이 늘어났다. 이유는 다양하고도 비슷했다. 일부 여성은 돌려보냈지만 그럴 수 없는 이들도 많았다. 하지만 오랜 기간 머물게 해줄 공간도 없었다. 문제는 당장 의식주에 필요한 모든 도움을 줘야 한다는 것이었다. 식사는 물론, 잘 곳과 생활에 필요한 옷과 침구, 유아용품을 제공해야 했다.가장 먼저 아기 엄마를 교육한 후 침실이 제공되는 일자리를 찾아 소개했다. 일자리는 교회가 운영하는 수도원, 기도의 집, 병원과 신학교였다. 함께 데려온 아기는 아가방 탁아원에 일정 기간 맡아주며, 부모로서 책임감을 느끼게 하도록 대가를 지불하게 했다. 아가방 탁아원에 처음 들어온 5명의 아기에게 분유를 먹이고, 이유식을 만들어 먹였다. 천 기저귀도 빨아야 했다. 생각보다 많은 일손이 필요하게 됐고, 회원들과 가까운 대림동본당 신자들이 와서 빨래를 도왔다. 아기들이 깨끗한 기저귀를 사용할 수 있음에 감사한 나날이었다.박경옥 원장(모니카, 서울 가톨릭 여성의 집) 평화신문2020.03.04
![[인천교구 사목교서] 성서의 해 Ⅱ -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이들이 오히려 행복하다”(루카 11,28)](//cpbc.co.kr/CMS/newspaper/2019/11/rc/767591_1.3_titleImage_1.jpg)
[인천교구 사목교서] 성서의 해 Ⅱ -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이들이 오히려 행복하다”(루카 11,28) [인천교구 사목교서] 성서의 해 Ⅱ -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이들이 오히려 행복하다”(루카 11,28)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거룩하고 살아있는 말씀인 성서를 통해 하느님께서 주시는 지혜와 힘과 은총이 여러분 안에 가득하기를 기도합니다. 저는 올해, ‘두 번째 성서의 해’를 지내고자 합니다.성서를 가까이하지 않으면 주님의 말씀을 알 수 없고, 우리의 신앙도 성장할 수 없습니다. 신앙생활 안에서 성서를 읽고, 묵상하며, 삶 안에서 주님의 말씀을 실천하는 것은 무척 중요합니다. 우리가 성서를 읽는 이유는, 학식의 증대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와의 친밀함을 더하고, 기도하기 위해서입니다. 기도하는 마음으로 성서를 읽고, 자신이 묵상한 성서 본문의 내용으로 기도할 때, 우리는 하느님의 뜻을 점차 알아가게 될 것입니다. 즉 주님의 말씀을 읽고, 들으면서 우리는 주님의 말씀을 경청하게 되고, 주님 말씀에 대한 응답으로 주님께 말씀을 드리는 기도를 바치게 됩니다. 그렇게 우리가 성서를 읽는 순간이 하느님을 향한 거룩한 시간으로 변화하게 될 것입니다.또한, 우리는 주님의 말씀을 듣고 기도하면서, 성서를 통해 우리 자신이 어떤 삶을 살아야 하는지를 자연스럽게 생각하게 됩니다. 성서는 우리의 일상 안에서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를 선택할 수 있도록 우리를 초대합니다. 그리고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삶으로 우리를 이끌어 줍니다. 비록 인간적인 나약함과 부족함으로 이 초대에 응하지 않을 때도 있지만, 그럼에도 포기하지 않고 성서를 읽고 기도할 때에 하느님께서는 우리 안에 점차 “그리스도의 마음”(1코린 2,16)이 형성되도록 이끌어 주실 것입니다. 그러한 의미에서 여러분 모두가 다음의 세 가지를 실천하며 새로운 한 해를 보냈으면 합니다.첫 번째, 기도하는 마음으로 성경을 읽도록 합시다. 교회는 전통적으로 성경을 읽는 방법으로 ‘거룩한 독서 Lectio Divina’ 방법을 제시하였습니다. 독서와 묵상, 기도, 그리고 하느님과의 일치는 거룩한 독서의 근본 요소입니다.두 번째, 주님의 말씀을 실천하기 위해 노력합시다. 읽고 들었던 주님의 말씀에 머무는 것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생활의 변화’, ‘자신의 변화’를 이룰 수 있도록 말씀의 실천이 뒤따라야 합니다. 세 번째, 말씀을 선포하는 선교사가 되도록 노력합시다. 내 안에 살아계신 주님을, 주님의 말씀을 전할 수 있어야 합니다. 성서를 통해 듣고, 느끼고 체험한 나의 신앙을 이웃들에게 전하는 말씀의 선교사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하느님께서 주신 새로운 2020년 한 해, 교구의 모든 형제자매가 주님의 말씀 안에서, 주님의 말씀을 통해 세상을 살아갈 힘을 얻게 되시기를 기도합니다. 평화신문2019.11.27
![[생활속의복음] 연중 제2주일-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하느님의 어린양](//cpbc.co.kr/CMS/newspaper/2020/01/rc/771054_1.1_titleImage_1.jpg)
[생활속의복음] 연중 제2주일-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하느님의 어린양 임상만 신부 창세기 3장을 보면, 태초에 아담과 하와가 선과 악을 알려는 욕심으로 금지된 열매를 따 먹자 눈이 열려 자기들이 알몸인 것을 알고는 무화과나무 잎을 엮어서 두렁이를 만들어 입었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부끄러운 알몸을 가릴 수 없었기에 주 하느님 앞을 피하여 동산 나무 사이에 숨는다. 이 모습을 불쌍히 보신 하느님께서는 사람과 그의 아내에게 가죽옷을 만들어 입혀 주셨다는 이야기가 나온다. 인간이 죄를 지어 얻은 부끄러움을 하느님께서 친히 이들에게 옷을 입히심으로써 덮어주시고, 당신과의 관계가 완전히 끝나지 않았음을 상기시켜 주시는 내용이다.성경에 분명히 아담과 하와의 부끄러움을 나뭇잎으로는 가릴 수 없어 하느님께서 친히 가죽옷을 입히셨다는 내용이 나온다. 그런데 이 가죽은 동물의 희생이 아니면 얻을 수 없다. 다시 말하면 동물의 피 흘림으로 마련된 가죽옷으로만 비로소 인간이 지은 죄의 부끄러움을 가릴 수 있었다는 것이다. 이런 이유로 이스라엘 백성들은 매번 태어난 지 1년 정도의 어린 양을 제단에 희생 제물로 바치면서 하느님의 자비와 죄 사함을 구하는 제사를 드렸다. 그들 모두가 제단에서 흘린 ‘어린양의 피’가 아니면 도무지 용서받을 수 없는 죄인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때가 되면 죄인들을 위하여 하느님께서 친히 완전한 속죄와 죄 사함의 희생 제물을 마련하실 것이란 믿음으로 메시아, ‘하느님의 어린양’을 목매어 기다리고 있었다. 오늘 복음에 보면, 요한 세례자는 예수께서 다가오시자 “보라,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하느님의 어린양이시다”라고 증언한다. 구약에서 예언된 하느님의 자비가 예수를 통해 이미 이루어지고 있음을 선포한 것이다. 예수께서 인류의 모든 죄를 속죄하기 위해 하느님께서 마련하신 희생 제물, 흠 없는 어린 양으로 세상에 오셨고, 장차 십자가에 속죄의 제물로 희생하실 것에 대한 증언이다. 그러므로 요한은 어린양의 희생 제물로 주어진 죄 사함을 얻기 위해 먼저 죄를 떠나 회개해야 하고, 하느님께 돌아왔다는 표시로서 세례를 받으라고 요구한다. 그러나 당시의 세례는 큰 죄를 지은 유다인이 공동체에서 쫓겨났다가 다시 돌아오거나, 이방인들이 유다교로 개종할 때 받는 ‘죄인들을 위한 정결례’ 형식이었기에 일반 유다인들은 거의 세례를 받지 않았고 따라서 요한의 세례도 마땅치 않게 생각했다. 자신들은 죄로 인한 해당 사항이 없다는 이유였다. 요한은 유다인들에게 하느님 앞에 누구도 죄 없는 사람은 없으므로 그들도 이방인들과 똑같이 회개하고 그 표시로 세례를 받으라 요구한다. 그리고 곧 오시어 물과 성령으로 세례를 주실 예수를 증언하고 있다. 이에 바오로 사도는 “우리가 유다인으로서 나은 점이 있습니까? 전혀 없습니다. 사실 우리는 이미 앞에서 유다인들이나 그리스인들이나 다 같이 죄의 지배 아래 있다고 고발하였습니다. 이는 성경에 기록된 그대로입니다. ‘의로운 이가 없다. 하나도 없다’”(로마 3,9-10)고 하면서 누구나 할 것 없이 주님의 세례를 받는 것이 유일한 죄 사함의 길임을 강조하고 있다.예수께서 우리가 지은 죄의 부끄러움을 덮을 수 있도록 어린양으로 희생되셨다. 당신은 죄가 없으심에도 ‘죄인들을 위한 세례’를 스스로 받으심으로 우리도 세례를 통해 죄 사함의 은총을 얻을 수 있게 하셨다. 그러므로 우리가 살 수 있는 길은 오직 예수를 믿는 길밖에는 없다. 누구든지 자기 죄를 대신하여 예수께서 어린양으로 희생되셨음을 믿는 사람, 십자가에서 흘리신 피로 인해 죄 사함 얻음을 믿는 사람은 그리스도를 입게 되어 하느님과 올바른 관계를 회복하여 구원에 이르기 때문이다. 임상만 신부(서울대교구 상도동본당 주임) 평화신문2020.01.15

주님이시며 생명을 주시는 진리의 영성령 강림 대축일, 성령은 어떤 분이신가 베첼리오 티치아노의 ‘성령 강림’. 1570년 경 작품. 유화. 베네치아 구원의 성모성당. 31일은 주님 부활 대축일을 지낸 지 만 50일째 되는 날이다. 교회는 주님께서 부활하신 후 50일째 되는 이 날에 성령께서 사도들에게 강림하신 것(사도 2,1-13)을 기념해 ‘성령 강림 대축일’을 지낸다. 부활 제7주간이 끝나는 날인 이날은 주님께서 우리에게 성령을 부어 주심으로써 ‘그리스도의 파스카’를 완성하신다. 그래서 교회는 성령 강림 대축일로 ‘부활 시기’를 끝내고 다음 날부터 ‘연중 시기’로 들어간다. 삼위일체(三位一體)의 세 위격 가운데 성부(聖父) 하느님과 주님이신 성자(聖子) 예수 그리스도는 누구이신지 분명하다. 하지만 성령(聖靈)은 친숙하면서도 조금은 낯설다. 성령 강림 대축일을 맞아 모든 그리스도인이 주님 안에서 성령을 따르는 새로운 삶의 열매를 맺을 수 있길 희망하며, 성령께서 어떤 분이신지를 소개한다. 글은 「가톨릭교회 교리서」와 교황청 국제신학위원회 위원으로 활동하고 있는 박준양(가톨릭대학교 신학대학 교수) 신부의 「성령론」(가톨릭대학교출판부) 내용을 중심으로 정리했다. 성령 강림신약성경 사도행전 2장은 성령 강림 사건을 자세히 증언하고 있다. 성령 강림은 크게 네 가지 사건으로 전개된다. 때와 장소는 주님께서 부활하신 그해 오순절 날 예루살렘의 한 가옥 위층 방이다. 오순절은 유다인들이 이른 봄에 이집트 탈출을 기념하는 과월절 곧 파스카 축제를 지낸 뒤 50일째 되는 날로 봄보리와 밀 등 햇곡식을 거두어 하느님께 봉헌하는 감사제 날이다. 또 오순절은 이스라엘 백성이 시나이 산에서 하느님과 맺은 계약을 기념하는 날이기도 하다. 사도행전은 성령께서 강림한 장소를 명확히 밝히고 있지 않지만, 교회 전승은 시온 산에서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마지막 만찬을 했던 집의 위층 방이라고 전하고 있다. 주님의 어머니이신 마리아와 사도들은 주님 승천 사건 이후 자기들이 묵고 있던 이 집으로 돌아와 위층 방에서 한마음으로 기도에 전념하고 있었다. 그 방에는 120명가량이 성모님과 사도들과 함께 있었다. 이들은 유다 이스가리옷의 빈자리를 대신할 사도로 마티아를 제비뽑기로 선정했다. 성령께서는 오순절 날 이 방에 모인 모든 이에게 불혀 모양으로 강림하셨다. 성령으로 가득 찬 그들은 모두 성령께서 주시는 능력대로 각기 다른 언어들로 말하기 시작했다. 그때에 예루살렘에는 오순절 축제를 지내기 위해 세계 모든 나라에서 온 독실한 유다인들이 모여 있었다. 그들은 성령으로 가득 찬 주님의 제자들이 각기 자기 지방 말을 하는 것을 듣고는 놀라워했다.베드로 사도 역시 성령으로 가득 차 예루살렘의 유다인들에게 “여러분이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인 예수님께서 부활하셨고, 하느님께서 그를 주님과 메시아로 삼으셨습니다”라고 설교한 후, 예수 그리스도와 성령의 이름으로 3000여 명에게 세례를 주며 첫 신자 공동체를 설립했다. 사도행전은 이처럼 성령께서 강림한 오순절이 바로 교회 설립일이며, 주님의 복음을 모든 민족에게 선포하는 성령의 사명이 바로 교회 안에서 성취된다는 것을 상기시켜주고 있다. 그래서 교회는 오순절에 성모님과 사도들에게 강림하신 성령은 이제 교회 안에 머무시며 교회를 거룩하게 하시고, 종말까지 하느님 백성인 교회를 이끌어 아버지 하느님께 인도하신다고 고백한다. (「가톨릭교회 교리서」 제747항 참조). 성령은 어떤 분이신가 1. 성령은 생명을 주시는 하느님이시다.성령은 성부와 성자와 본질이 같으신 하느님이시다. 성령은 성부 하느님의 영이시며, 성자 그리스도의 영이시다. 성령의 현존과 활동은 삼위일체이신 하느님의 인간 구원 경륜 전체에서 이루어진다. 창조주이신 성부 하느님께서는 인간을 만드실 때 당신의 숨을 인간에게 불어넣으시어 생명을 주셨다. 그래서 욥은 “하느님의 영이 저를 만드시고 전능하신 분의 입김이 제게 생명을 주셨답니다”(욥 33,4)라고 고백한다. 또 시편 저자는 “당신께서 그들의 숨을 거두시면 그들은 죽어 먼지로 돌아갑니다. 당신의 숨을 내보내시면 그들은 창조되고 당신께서는 땅의 얼굴을 새롭게 하십니다”(시편 104,29-30)라고 찬미한다. 성령께서는 그리스도의 강생과 부활을 통해 인간에게 구원의 생명을 선물하신다. 예수님의 지상 삶에 동반했던 영과 부활하신 그리스도에 의해 주어진 영은 같은 성령이시기 때문이다. 그래서 구원은 성령을 통해 그리스도 안에서 실현된 하느님의 생명에 참여하는 것이다. 성령께서 인간에게 주시는 생명은 썩어 없어질 육적인 생명이 아니라 우리로 하여금 하느님의 자녀가 되게 하는 살아 있는 생명이다. 그 생명 안에 사는 이는 ‘사랑, 기쁨, 평화, 인내, 친절, 착함, 신용, 온유, 절제’(갈라 5,22-23)와 같은 성령의 열매를 얻을 수 있다. 그래서 교회는 “주님이시며 생명을 주시는 성령을 믿나이다. 성령께서는 성부와 성자에게서 발하시고, 성부와 성자와 더불어 영광을 흠숭을 받으신다”고 고백한다.(니케아-콘스탄니토폴리스 신경 참조)2. 성령은 진리의 영이시다. 성령께서는 ‘진리의 영’이시다. 예수님께서는 “내가 아버지께 청하면, 아버지께서는 다른 보호자를 너희에게 보내시어, 영원히 너희와 함께 있도록 하실 것이다. 그분은 진리의 영이시다”(요한 14,16)라고 알려주셨다. 우리말로 ‘진리의 영’으로 옮겨진 성경 본문의 헬라어는 ‘파라클레토스’(παρακλητοs)이다. 파라클레토스는 진리의 영이라는 뜻뿐 아니라 보호자, 협력자, 인도자, 중재가, 위로자 등의 의미를 포함하고 있다. 따라서 파라클레토스는 성령께서 하시는 다양한 역할을 잘 드러내 보여준다. “우리에게 생명의 힘을 주시는 파라클레토스 성령께서는 내가 불능의 상태에 빠져 있을 때에 ‘보호자’로서 나를 감싸 주시고 위험에서 보호하시며, 또한 내가 어려움에 빠져 도움이 필요한 순간에 나를 도와주시는 ‘협조자’이자 ‘협력자’이시다. 그분께서는 또한 내가 어디로 가야 할지 모를 때, 그 방향조차 보이지 않는 순간에 나를 올바른 방향으로 이끄시는 ‘인도자’이자 ‘안내자’이시다. 그리고 성령께서는 내가 억울한 일을 당해 위기의 순간 봉착했을 때 내가 모든 것을 고백해 말할 수 있는 ‘상담자’이시며, 또한 나를 위해 말씀해주시는 ‘변호자’이시다. 따라서 그분께서는 나를 격려하는 ‘지지자’이고 ‘옹호자’이며 ‘대변자’이신 것이다. 마지막으로 성령께서는 내가 슬픔과 두려움과 절망에 빠져 좌절해 있을 때 나를 위로해주시면서 나를 위해 탄식하고 대신 기도해주시는 ‘위로자’이시다.(박준양, 「성령론」 292쪽)3. 성령은 교회의 영혼이시다. 성령께서는 교회에 생명력을 불어넣어 주시고 인도하시는 ‘교회의 영혼’이시다.(성 요한 바오로 2세 교황 회칙 「생명을 주시는 주님」 참조)그리스도인이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받아들이고 그분의 인격과 업적을 체험하는 것은 성령의 이끄심이다. 성령께서는 인간의 쇄신을 통해 구원을 현실로 이루는 분이시다. 따라서 그리스도께 구원을 받고 성령 안에서 새사람이 된 인간이야말로 삼위일체이신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존재이다. 그래서 성령께서는 교회 안에서 활동하실 뿐 아니라 교회의 경계를 넘어온 우주 안에서 활동하시면서 예수 그리스도의 강생과 생애와 죽음과 부활에 함께하신다. 이처럼 성령은 우리 모두를 하느님과 인간 사랑에 대한 열정으로 이끌어주는 분이다. 성령이 동반하지 않는 신앙은 빈 껍데기나 마찬가지다. 성령과 함께하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거룩한 독서, 기도, 묵상, 성체조배, 미사와 같은 교회의 모든 신앙 행위를 통해 성령의 은총을 구해야 한다. 리길재 기자 teotokos@cpbc.co.kr cpbc2020.05.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