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부들의 사회교리] (11)어떤 부자가 구원받는가](//cpbc.co.kr/CMS/newspaper/2019/02/rc/747097_1.0_titleImage_1.jpg)
[교부들의 사회교리] (11)어떤 부자가 구원받는가‘돈 욕심’을 경계하라 “매우 부유하고 율법에 충실한 부자 청년은 이 말씀을 올바르게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같은 사람이 어떻게 가난한 동시에 부유할 수 있고, 부를 지닌 동시에 지니지 않을 수 있으며, 세상을 이용하는 동시에 이용하지 않을 수 있는지도 이해하지 못했습니다.(1코린 7,29-31) 그래서 그는 우울해 하며 풀이 죽어 떠났습니다. 그는 갈망했지만 얻을 수 없었던 생명의 신분을 포기했으며, 어려운 일을 스스로 불가능한 일로 만들었습니다. 눈에 보이는 값비싼 사치품들과 화려한 유혹들에 영혼이 사로잡히지 않고 현혹되지 않기란 어렵습니다. 그러나 사람이 자신의 감각적인 부에서 정신적인 부와 하느님께서 가르치신 부로 옮아가려 하고, 그 자체로 선하지도 악하지도 않은 부를 올바르게 적절히 사용하며 영원한 생명에 이르는 길에 접어드는 법을 배우려 한다면, 구원을 받는 것은 불가능하지 않습니다.”(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스, 「어떤 부자가 구원받는가」 20,1-2. 하성수 옮김)지성인 신앙 교육클레멘스는 150년경 그리스에서 태어났으나 알렉산드리아에서 주로 활동한 교부다. 알렉산드리아는 인구 100만 명을 헤아리는 대도시였고, 문화와 학문에서 로마 제국의 중심지였다. 당대의 유명한 선생들에게 훌륭한 인문 교육을 받은 그는 180년경 알렉산드리아의 그리스도교 철학 학교에 입학했고, 스승의 뒤를 이어 그 학교 교장이 되었다. 셉티미우스 세베루스 황제의 박해(202~203년) 시기에 카파도키아를 거쳐 예루살렘으로 옮겨가 교회에 봉사하며 저술 활동을 펼치다가 215년경 삶을 마감했다. 고전 문화와 복음을 조화시켜 지성인들을 교육하는 데 이바지했다.낙타와 바늘귀“부자가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낙타가 바늘귀를 빠져나가는 것이 더 쉽다”(마르 10,23)는 예수님의 이 말씀은 부자들을 늘 근심에 빠뜨린다. 클레멘스는 「어떤 부자가 구원받는가」라는 책에서 이 수수께끼 같은 말씀 풀이를 시도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돈이 많다고 구원받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돈 욕심에 빠진 인간이 스스로 하느님 나라에서 제외된다는 것이다. 성경의 문자적 의미에 소홀한 지나친 영적 해석이라는 비판을 받기도 한다. 클레멘스는 돈이란 그 자체로는 가치 중립적이라고 보았다. 선하게 사용하면 선하고, 악하게 사용하면 악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부자라 할지라도 재물을 적절하고 올바르게 사용하기만 하면 구원이 불가능하지 않다는 것이다. 훗날 아우구스티누스는 훨씬 더 강력하고 명쾌하게 설명한다. “재물을 가지고 있으면 구원받기 어렵고, 재물을 사랑한다면 구원은 불가능하다.”(「서간집」 203) 부를 독점한 부자는 이미 구원받기 어렵지만, 돈 욕심에 사로잡히면 부자, 가난한 이 가릴 것 없이 파멸로 치닫게 된다는 말이다. 재물이 우리 구원을 가로막지 않게 해 달라던 아우구스티누스의 기도는 언제나 유효하다. “오, 주님, 이 어려운 일을 저희에게 가르쳐 주십시오. 저희가 소유하고 있는 재화를 양심적으로 관리하게 해 주시고, 당신께서 저희에게 주시는 것 이상을 탐욕스레 열망하지 않게 해 주십시오.”(「서간집」 203)최원오(빈첸시오, 대구가톨릭대 유스티노자유대학원장) 최원오 교수 cpbc2019.02.26
춘천교구 설정 80주년 개막 ‘주님의 빛 속에 걸어가자!’ 주제 1년간 기쁨의 해 보내 춘천교구가 12월 1일 오후 2시 강원도 춘천 호반체육관에서 교구장 김운회 주교 주례로 교구 설정 80주년 개막 미사를 봉헌한다. ‘주님의 빛 속에 걸어가자!’(이사 2,5)를 주제로 봉헌되는 개막 미사는 춘천교구가 내년 11월 24일 그리스도 왕 대축일 때까지 다양한 방식으로 기쁨의 해를 보내기 위한 대장정의 시작이다. 교구는 이날 교구 내 62개 본당 신자들이 함께한 가운데 △쇄신 △공동체의 일치 △복음화를 통해 새롭게 성장하는 교구로 발돋움한다는 계획이다.춘천교구는 80주년을 기념해 지난 8월부터 두 달 동안 전 교구민 대상 신앙 설문조사를 했고, 개막 미사 이튿날인 12월 2일부터 1년 동안 ‘예수 성심상 본당 순례’를 한다. 80년간 예수 성심의 사랑이 교구와 함께한 데 대한 감사의 마음을 교구민 전체가 봉헌한다는 취지다. 또 교구 설정 80주년 기념일 당일인 내년 4월 25일에 기념 미사를 봉헌하고, 이를 전후로 사진전, 음악회, 미술전 등 다양한 기념행사를 펼칠 예정이다. 이 밖에도 교구는 평일 미사 참여, 매달 지향을 둔 단식, 성시간, 성체조배, 성경 통독 등을 장려키로 했다. 청소년을 위한 공동사목 정례화, 100주년 주역이 될 30~40대를 위한 프로그램 마련도 검토 중이며, 80주년 기념 기도문도 배포했다.춘천교구는 설정 80주년 기념 엠블럼도 제작해 발표했다. ‘주님의 빛 속에 걸어가자!’라는 80주년 주제 성구에 맞춰 숫자 ‘80’을 형상화했다. ‘8’이라는 숫자는 ‘빛이신 그리스도 십자가 구원’을 향해 걸어가는 춘천교구 공동체의 발걸음을 표현했으며, 숫자 ‘0’은 전례의 대표적 4가지 색상인 자색(참회와 보속), 황금색(백색·기쁨과 영광), 홍색(순교와 성령강림), 녹색(희망과 평화)이다. 차츰 옅어지는 색상은 구원에 가까워질수록 새로워지는 신자들의 모습을 상징한다.이정훈 기자 sjunder@cpbc.co.kr 평화신문2018.11.28
 부활하시다(루카 24,1-12)](//cpbc.co.kr/CMS/newspaper/2018/11/rc/740010_1.1_titleImage_1.jpg)
[이창훈 위원의 예수님 이야기](89) 부활하시다(루카 24,1-12)빈 무덤 보고도 부활을 믿지 못한 제자들 주간 첫날 여자들이 예수님이 모셔진 무덤을 찾았으나 무덤이 비어 있었다. 사진은 예루살렘 주님 무덤 성당 안 예수님의 빈 무덤 제대. 가톨릭평화방송여행사 제공 예수님께서는 공생활 중에 제자들에게 세 번이나 당신의 수난과 부활에 대해 말씀하셨지만, 제자들은 무슨 말씀인지 깨닫지 못했습니다. 이제 그 부활 사건이 일어납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부활하시는 현장을 목격한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주간 첫날”(24,1) 곧 안식일 다음 날이었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처형과 죽음 그리고 돌무덤에 안장되는 것까지 지켜보았던 여자들, 곧 “갈릴래아에서부터 예수님과 함께 온”(23,55) 그 여자들은 향료와 향유를 준비해 새벽 일찍 무덤으로 갔습니다. 그런데 무덤을 막아놓았던 돌이 굴려져 있었고 안으로 들어가 보니 “주 예수님”(24,3)의 시신이 없어졌습니다. “여자들이 그 일로 당황하고 있는데 “눈부시게 차려입은” 남자 둘이 나타납니다. 여자들은 두려워 얼굴을 땅으로 숙입니다.(24,1-5ㄱ)황당한 일이 벌어졌습니다. 예수님의 시신이 없어진 것입니다. 여자들은 안식일 전날 예수님이 돌무덤에 안장되시는 것을 분명히 보았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좀 더 정성껏 모시고자 향료와 향유를 준비해 새벽 일찍 무덤을 찾았습니다. 그런데 시신이 없으니 여자들은 대단히 당황했고 놀랐을 것입니다. 그때 “눈부시게 차려입은” 남자 둘이 그들 앞에 나타납니다. 눈부시게 차려입었다는 표현은 이들이 하느님에게서 온 천사들임을 나타냅니다. 구약성경에서 모세가 시나이 산에서 하느님을 뵙고 내려왔을 때 그의 얼굴이 빛났고, 백성들은 그에게 가까이 가기를 두려워했지요.(탈출 33,29-30) 그래서 그 남자들을 하느님의 천사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여자들의 당황과 놀라움은 이제 두려움으로 바뀝니다. 마치 모세가 하느님을 뵙기가 두려워 얼굴을 가렸듯이(탈출 3,6), 여인들은 하느님에게서 온 이들을 뵙기가 두려워 얼굴을 땅으로 숙입니다. 그러자 두 남자는 이렇게 말합니다. “어찌하여 살아 계신 분을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찾고 있느냐? 그분께서는 여기에 계시지 않는다. 되살아나셨다.” 그러면서 갈릴래아에서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 곧 ‘사람의 아들은 죄인들의 손에 넘겨져 십자가에 못 박히셨다가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야 한다’는 말씀을 상기시켜 줍니다.(24,5ㄴ-7)두 남자의 말은 예수님께서 ‘살아 계신’ 분이라는 것입니다. ‘살아 계신’이라는 표현은 구약성경에서는 하느님을 나타내는 표현이기도 합니다. (“살아 계신 하느님께서”: 여호 3,10 ; “살아 계신 주님을 두고”: 판관 8,19). 천사들의 말은 ‘예수님께서 부활하셔서 살아 계시니까 그분의 시신을 여기서 찾을 수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여자들은 처음에는 무슨 말인지 못 알아들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눈부신 차림의 그 남자들이 갈릴래아에서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을 상기시켜 주자 그제야 여자들은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을 기억해 냅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수난과 부활을 모두 세 차례에 걸쳐 예고하셨습니다. 두 번은 갈릴래아에서(루카 9,22; 9,44), 세 번째는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시는 길에서였습니다.(루카 18,32-33) 이 여자들은 갈릴래아에서부터 줄곧 예수님과 함께해 왔기에 세 차례에 걸친 예수님의 말씀을 모두 다 들었을 가능성이 큽니다. 하지만 제자들과 마찬가지로 그들은 그 말씀이 무슨 뜻인지를 알아듣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러다가 예수님의 시신이 없어진 현장에서 그 남자들의 말에 비로소 예수님의 말씀을 기억해낸 것입니다. 그래서 여자들은 무덤에서 돌아와 “열한 제자와 그 밖의 모든 이에게” 이 일을 알립니다.(24,9) 그 밖의 모든 이란 열한 제자와 함께 있던 다른 제자들을 가리킨다고 할 수 있습니다. 루카 복음사가는 여기서 무덤을 찾은 여자들의 이름을 밝힙니다. 마리아 막달레나, 요안나, 그리고 야고보의 어머니 마리아입니다.(24,10) 마리아 막달레나와 요안나, 곧 헤로데의 집사 쿠자스의 아내는 루카복음서에서 이미 나왔던 이름이지만(8,2-3), 야고보의 어머니 마리아는 처음 나옵니다. 이 마리아는 형제 야고보(마태 13,55)의 어머니로 예수님의 이모(요한 19,25 참조)라고 학자들은 추정합니다. (본지 2017년 8월 27일자 1429호를 참조하십시오.) 사도들은 여자들이 전하는 말을 헛소리라고 믿지 않았습니다. 그렇지만 베드로는 일어나 무덤으로 달려갑니다. 그리고 몸을 굽혀 들여다보니 예수님의 시신을 쌌던 아마포만 놓여 있었습니다. “베드로는 일어난 일을 속으로 놀라워하며 돌아갔다”고 루카 복음사가는 전합니다.(24,11-12) 여자들의 말을 듣고도 사도들은 믿지 못합니다. 베드로는 다른 사도들과 달리 일어나 무덤으로 달려가서 예수님의 시신이 없어진 것을 확인하지만, 그 역시 예수님이 살아나셨다는 것을 제대로 믿지 못합니다. 속으로 놀라워할 따름입니다. 그들은 아직도 예수님께서 생전에 세 번이나 당신의 수난과 부활을 이야기하신 것을 깨닫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알아보기루카 복음사가는 예수님이 부활하신 날이 “주간 첫날”(24,1)이라고 전합니다. 오늘날 주간 첫날이라고 하면 월요일이라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하지만 주간 첫날은 안식일 다음 날, 곧 토요일 다음 날로 일요일을 가리킵니다. 달력을 보면 제일 앞에 일요일이 나오는 것이 이를 말해 줍니다. 하지만 이 주간 첫날에 예수님께서 부활하셨기에 그리스도교 신자들은 이날을 주님의 날 곧 주일(主日)로 여겨 거룩하게 지냈습니다. 이것이 구약성경에서 이야기하는 안식일과 결부되어 그리스도교에서는 주간 첫날을 주님의 날이자 휴식을 취하는 날로 지내면서 일요일이 쉬는 날로 보편화됐습니다. 물론 유다교에서는 오늘날에도 토요일을 안식일로 지냅니다. 한 주간의 마지막이 아니라 첫날을 주일로, 주님의 날로 지낸다는 것은 우리 그리스도 신자들에게는 대단히 중요한 의미를 지닙니다. 우리 삶의 첫 자리에 주님을 모신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살아가려고 노력하는 이들이 그리스도 신자들입니다.생각해봅시다예수님의 부활은 그리스도교 신앙의 핵심입니다. 그런데 루카복음이 전하는 이 부활 사건에서 볼 수 있듯이 예수님의 부활을 목격한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여자들은 무덤만을 볼 수 있었고 베드로도 이를 확인했을 따름입니다. 루카복음서는 눈부신 차림을 한 두 남자, 달리 말하자면 하느님에게서 온 천사들이 여자들에게 예수님께서 되살아나셨음을 일깨워 주었다고 전합니다. 그런데 인간적으로만 보면 여자들에게 말했다는 그 남자들은 어쩌면 허깨비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천사들의 말에서 주목해야 할 부분이 있습니다. 그들은 단지 예수님께서 살아나셨다고만 말한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당신의 수난과 부활에 대해 이미 갈릴래아에서부터 예고하셨던 그 말씀을 여자들에게 일깨워주었고, 여자들은 그 말씀을 기억해냈다는 사실입니다. 그렇지만 사도들은 여자들이 전하는 말을 믿으려 하지 않았습니다. 베드로는 달려가서 무덤이 비었음을 확인했지만, 그 역시 예수님의 부활을 믿었다기보다는 “속으로 놀라워하며” 돌아갔을 뿐입니다. 이렇게 믿지 않던 사도들이 어떻게 예수님의 부활을 힘차게 선포할 수 있었을까요? 우선은 물음으로 남겨두고 이 물음에 대한 답변을 한 번쯤은 더 생각해 봅시다. cpbc2018.11.27
![[평화칼럼] 아름다운 나비가 되기 위하여](//cpbc.co.kr/CMS/newspaper/2018/10/rc/736272_1.0_titleImage_1.jpg)
[평화칼럼] 아름다운 나비가 되기 위하여윤재선 (레오, 보도총국장) 가을 숲길을 홀로 걷는다. 새들이 비쫑 비쫑 고운 소리로 반긴다. 풀벌레들은 뚜루 뚜루 소리 지르며 아침을 노래한다. 샘물은 조르르 조르르 흘러내리며 생명수로서의 존재를 과시한다. 한 걸음 한 걸음 걷다 보니 어느새 나무는 막 태어난 햇살을 품고 숨을 내쉰다. 이름 모를 들꽃들의 향연. 알근달근 감도는 꽃의 향기가 코끝을 자극한다. 세상을 향한 마음속 탐욕의 독소는 찬바람에 실려 어디론가 흩어져 버렸으면 좋으련만. 부질없는 소망일까. 사색의 그림자가 깨우침의 긴 여운으로 남는다. “바람은 불고 싶은 데로 분다. 너는 그 소리를 들어도 어디에서 와 어디로 가는지 모른다. 영에서 태어난 이도 다 이와 같다.”(요한 3,8) 내 뜻이 아닌 주님의 ‘영’이 이끄는 대로 따르는 삶이어야 하거늘. 그래야 비로소 새 생명의 숨을 받아 새로워지고 변화할 수 있을 터인데.그리 높지 않은 언덕길인데도 숨이 차오른다. 탐욕으로 얼룩진 욕망의 덩어리가 육신을 살찌운 탓은 아닐까. 바오로 사도의 외침이 폐부를 파고든다. “그 대신에 주 예수 그리스도를 입으십시오. 욕망을 채우려고 육신을 돌보는 일을 하지 마십시오.”(로마 13,14) 입버릇처럼 되뇌는 속죄의 절규가 터진다. “인간이 무엇이기에 이토록 기억해 주십니까?, 사람이 무엇이기에 이토록 돌보아 주십니까?”(시편 8,5) 언덕을 넘어서며 지나온 길을 돌아본다. 물끄러미 바라보는 그 자리. 꽃들의 미소는 여전히 해맑다. 베드로 파브르 성인의 말처럼 ‘시간은 하느님의 전령이다.’ 하느님이 주관하시는 시간 속에서 갈망하는 건 지금의 삶과는 다른 형태요 새로운 차원의 변화다. 걸음을 멈추고 침묵과 고요 속으로 잠겨든다. 또다른 삶으로의 변화를 갈망하는 나를 발견한다. 스스로를 단단히 옭아매고 있는 속박과 억압의 굴레를 벗고 싶다. 누군가로부터의 불편한 시선과 나쁜 기억, 아물지 않은 상처와 용서하지 못하는 옹졸한 마음, 탐욕의 노예근성을 떨쳐내고 싶다. 아니 그렇게 해야 한다. 시편 저자는 말한다. “사람은 영화 속에 오래가지 못하여 도살되는 짐승과 같다”고.(시편 49,13) 하느님을 탐욕을 채울 도구로, 거래의 대상으로 삼고 있지는 않은가. 그렇다면 이보다 더 큰 불행이 또 어디 있으랴. 한참이나 고개를 떨구다 눈을 들어 하늘을 본다. 야고보 사도는 반문한다. “‘하느님께서는 우리 안에 살게 하신 영을 열렬히 갈망하신다’는 성경 말씀이 빈말이라고 생각하십니까?”(야고 4,5)라고. 하느님 자비의 눈길과 사랑의 손길에 온전히 내맡긴 적이 있던가. 혹시라도 눈에 보이는 치유나 기적이 없다고 외면하고 있지는 않은가. 성경은 치유나 기적이 아닌 그 안에 깃들어 있는 ‘믿음’이, ‘믿음의 부자’(야고 2,5)가 되기 위한 열망과 실천이 우리를 구원의 길로 이끈다는 것을 일러주고 있음에도. 욕심일 것이다. 그래도 날마다 새로 태어날 수 있기를, 그리하여 진정한 자유와 기쁨의 삶을 살기를 간절히 소망한다. 애벌레가 나비가 되기 위해 제 몸을 벗어 버리듯이. 문득 가수 윤도현이 부르는 ‘나는 나비’란 노랫말이 마음을 들이친다. “… 내 모습이 보이지 않아/ 앞길도 보이지 않아/ 나는 아주 작은 애벌레/살이 터져 허물 벗어 한번 두번 다시/ 나는 상처 많은 번데기/…날개를 활짝 펴고 세상을 자유롭게 날거야/노래하며 춤추는 나는 아름다운 나비….” 이 가을, 나는 아름다운 나비가 되기를 꿈꾼다. 하느님의 사랑과 자비를 간구하며. 평화신문2018.10.17
 사형 선고 (루카 23,13-25)](//cpbc.co.kr/CMS/newspaper/2018/11/rc/738224_1.0_titleImage_1.jpg)
[이창훈 위원의 예수님 이야기](86) 사형 선고 (루카 23,13-25)군중의 압박, 진실에 고개 돌린 빌라도 빌라도는 예수님에게서 사형에 처할 아무런 죄목도 찾지 못했으나 수석사제들과 지도자들의 거듭된 요구에 굴복해 예수님을 사형에 처하라고 내주고 만다. 그림은 빌라도가 예수님에게 사형 선고를 내리는 장면을 묘사한 예루살렘 베드로 회개 기념 성당 내부의 모자이크화. 가톨릭평화신문 DB 헤로데에게 갔던 예수님은 다시 빌라도에게 돌아옵니다. 빌라도는 예수님에게서 아무런 죄목을 찾지 못했지만 수석사제들과 지도자들의 거듭된 사형 요구에 빌라도는 예수님을 사형에 처하라고 넘겨줍니다. 루카 복음사가는 “빌라도가 수석사제들과 지도자들과 백성을 불러모았다”(23,13)는 구절로 이 대목을 시작합니다. 이들이 바로 예수님을 고소한 당사자들이어서 예수님을 신문한 결과를 이들에게 알리기 위해서입니다. 이 구절에서 지도자들이란 백성의 지도자 또는 최고 의회(산헤드린) 의원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백성을 불러모았다는 표현은 어딘가 이상합니다. 적어도 루카복음서에서 일반 백성은 예수님께 대해 적대적이지 않다는 것이 성경학자들의 일치된 견해입니다. 루카 복음사가가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고 가실 때 “백성의 큰 무리가 따라갔다”(23,27)고, 또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실 때에 “백성이 서서 바라보고 있었다”(23,35)고 전하면서도, 이들이 예수님께 어떤 적대적인 행위나 표현을 했다는 언급은 전혀 하지 않고 있다는 점도 이를 뒷받침합니다. 그렇다면 여기서 ‘백성’이란 일반 백성이 아니라 ‘백성 가운데 일부’ 혹은 ‘백성의 지도자’를 지칭한다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빌라도가 수석사제들과 지도자들과 백성에게 전한 내용은 예수님을 신문해 보았지만 그들이 고소한 죄목을 하나도 찾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그뿐 아니라 빌라도는 갈릴래아 영주 헤로데조차도 예수님에게서 아무런 죄목을 찾지 못했다고 전하면서 “보다시피 이 사람은 사형을 받아 마땅한 짓을 하나도 저지르지 않았소”라고 단언합니다.(23,14-15) 그러면서 빌라도는 예수님을 매질이나 해서 풀어주겠다고 이야기합니다. 루카복음에 언급되는 ‘매질’은 마태오복음이나 마르코복음에서 이야기하는 채찍질(마태 27,26; 마르 15,15)과는 아주 다릅니다. 후자의 채찍질은 십자가형에 처하기 전에 죄수에게 고통을 주는 형벌입니다. 이 채찍질은 죄수를 탈진하게 해 십자가형에 처했을 때 빨리 죽도록 하려는 의도도 있다고 하지요. 그래서 채찍에 동물의 뼈나 납덩어리를 달아서 채찍질했습니다. 반면에 루카복음에서 이야기하는 매질은 사형과는 무관한 매질이었습니다.(<주석 성경> 참조) 굳이 표현하자면 소란을 야기한 데 따른 훈육 벌이라고나 할까요. 빌라도의 이 말에 그들은 “그자는 없애고 바라빠를 풀어주시오” 하며 일제히 소리를 지릅니다. 루카 복음사가는 바라빠에 대해서 “예루살렘에서 일어난 반란과 살인으로 감옥에 갇혀 있던 자”라고 전합니다.(23,19) 예루살렘에서 일어난 반란이란 바로 로마 제국에 대항에서 일어난 반란을, 살인은 로마인이나 그들의 앞잡이들을 죽인 것을 가리키는데, 이는 바라빠가 그만큼 위험한 인물임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학자들은 ‘압바의 아들’ 곧 ‘아버지의 아들’이라는 뜻을 지닌 바라빠가 열혈당원의 우두머리였을 것으로 추정합니다. 그렇다면, 빌라도로서는 당연히 바라빠가 아닌 예수를 풀어주고 싶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빌라도는 다시 한 번 이야기하지만, 그들은 “십자가에 못 박으시오! 십자가에 못 박으시오!” 하며 대놓고 십자가형에 처하라고 외칩니다. 빌라도가 세 번째로 다시 묻습니다. 이번에는 물음의 강도도 더욱 셉니다. “도대체 이 사람이 무슨 나쁜 짓을 하였다는 말이오. 나는 이 사람에게서 사형을 받아 마땅한 죄목을 하나도 찾지 못하였소. 그래서 이 사람에게 매질이나 하고 풀어주겠소.”(23,20-22) 성경에서 숫자 3은 완전함을 나타냅니다. 빌라도가 세 번이나 물어봤다는 것은 따라서 무죄한 예수님을 풀어주기 위해 자기로서는 할 만큼 다했다는 것을 의미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점점 더 거세게 예수님을 십자가형에 처하라고 요구합니다. 마침내 빌라도는 그들의 요구를 들어주기로 결정해 바라빠를 풀어주고 “예수님은 그들의 뜻대로 하라고 넘겨주었다”고 루카 복음사가는 기록합니다.(23,23-25)생각해 봅시다빌라도는 예수님에게 아무런 죄가 없음을 확인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수석사제들과 최고 의회에 속한 지도자들과 백성이 예수님을 사형에 처하라고 요구했을 때에 세 번이나 반대의 뜻을 표명했습니다. 그렇지만 군중의 요구가 점점 더 거세지자 예수님을 십자가형에 처하라고 내어주고 맙니다. 앞에서도 말씀드렸듯이 3이 완전함을 나타내는 수라고 할 때에 빌라도로서는 최선을 다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빌라도에게 아무런 탓이 없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 무죄하시다는 것을 확인했다면, 빌라도는 끝까지 밀고 나갔어야 했습니다. 더욱이 그는 총독이었습니다. 예수님에게 죄가 없음을 알면서도 예수님을 사형에 처하라는 요구에 굴복하고 만 것은 총독으로서 정의를 세워야 할 책임과 의무를 저버린 것입니다. 시위자들이 거세게 압박한다고 해서 진실과 정의를 외면하는 것은 명백한 잘못입니다. 그런데 이와 비슷한 일이 지금 우리 주변에서 일어나고 있지는 않는지요? 혹시 나는 이런 ‘빌라도’ 과에 속하지 않는지요? 내게 닥칠 손해나 위험 때문에 그릇된 일에 눈을 감아 모른 체하거나 굴복해 버리곤 하지는 않는지요?알아보기십자가형은 당시 로마제국에서 시행되던 사형 방법 가운데 하나로 불에 태워 죽이는 화형, 맹수에게 잡혀먹혀 죽게 하는 맹수형과 더불어 가장 참혹한 사형 방법으로 꼽혔습니다. 일반적으로 로마 시민들은 죽을죄를 지었어도 십자가형에 처하지는 않았습니다. 그러나 노예나 노예 신분에서 벗어난 자유민(외국인)들은 로마나 이탈리아 지역에서는 중죄를 지었을 때 십자가형에 처했다고 합니다. 반면에 로마제국의 식민지에서는 날강도들, 반란을 일으킨 반역자들을 십자가형에 처했습니다. 십자가형은 사형수의 양팔을 벌리게 하여 두 손목을 십자가의 가로대에 결박해 고정시키고, 두 발목은 세로대에 결박한 후 십자가를 세워 죽이는 형벌입니다. 두 손목과 발목은 줄로 결박하기도 하고 대못을 박아 고정시키고 합니다. 그러면 사형수는 호흡 곤란으로 질식사하거나 아니면 피를 많이 쏟아서 죽게 됩니다. 루카복음서에는 예수님을 채찍질했다는 내용이 없지만, 마태오ㆍ마르코ㆍ요한복음에서는 모두 예수님을 채찍질하게 했다는 표현이 있어(마태 27,26; 마르 15,15; 요한 19,1), 예수님께서도 모진 채찍질을 당하신 후에 십자가형을 받으셨음을 알 수 있습니다. 평화신문2018.11.07

구약과 신약 잇는 믿음의 이야기 구약 외경 1 / 송혜경 원문ㆍ번역ㆍ주해 / 한님성서연구소 / 3만 5000원구약 외경(外經)은 구약성경 46권에 포함되지 않은 책들이다. 교회가 공식 인정한 정경(正經)은 아니지만, 교회 가르침에 위배되지 않는 경전이다.가톨릭 표준 성경도 아닌데 구약 외경을 알아야 하는 이유는? 구약과 신약을 잇는 가교가 되는 ‘하느님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국내에서 찾아보기 힘든 구약 외경을 번역하는 작업에 한님성서연구소가 돌입, 첫 권 「구약 외경 1」을 내놨다. 당대 ‘믿음의 선조’들의 다양한 문체와 경험을 담은 문헌을 두루 알려 하느님 역사를 제대로 일깨우기 위해서다.구약 외경이 만들어진 시기는 두 번째 예루살렘 성전이 존속하던 ‘제2성전기 후반’이다. 기원전 515~516년부터 기원후 70년까지다. 바빌론 유배지에서 돌아온 유다인들이 예루살렘에 다시 성전을 지은 때부터, 로마인들이 성전을 파괴한 시기까지인 ‘600년의 기간’이다. 이때는 구약이 완결되고, 신약이 기록되던 중간 시기이기도 하다. 당시 정치적 독립성을 잃은 채 살았던 유다인들은 ‘외세의 지배’와 더불어 그리스 문화를 비롯한 동서양 전통이 유입되던 이 시기에도 활발한 저술활동을 통해 풍성한 ‘믿음의 이야기’들을 집필했다.구약 외경은 아담과 하와의 생애, 에녹서, 열두 족장의 유언, 모세의 승천기 등으로 구성돼 있다. 이들은 묵시ㆍ시편 문학, 설화와 전설 등의 범주에 속한다. 서사시와 비극, 철학적 논고, 성경 이야기를 확대한 방대한 작품을 쏟아내며 유다 지역이 문학적으로도 풍성함을 이루는 데 지대한 영향을 끼친다.구약 외경은 다양한 신학적 개념들을 내포하고 있다. 악의 기원 문제, 메시아에 대한 희망, 부활과 사후 세계에 대한 관심 등이다. ‘악마 개념’이 거의 발견되지 않는 구약성경에 비해 외경은 악의 개념을 활발히 다룬다. 구약 외경의 에녹 1서, 희년서, 아담과 하와의 생애 등은 악마의 기원을 다각도로 제시하며 그들이 세상에서 하는 역할을 드러낸다. 하느님은 선이고, 사탄은 악이라는 유다교 문학의 전제가 분명히 다뤄진 것이다.천사의 무리가 지상에 내려와 사람의 딸들을 탐한 사건, 잘못을 저지르고 하늘에서 쫓겨나 아담에게 경배하라는 미카엘 대천사의 명령에 불복종하는 천사들의 타락 등 다양한 악의 기원이 구약 외경을 통해 전해진다. 사탄에게 작용한 것은 공통적으로 ‘교만’이었다.구약성경에서 이어지는 ‘메시아 사상’과 ‘부활과 내세 사상’도 눈에 띈다. 구약 외경에서 메시아는 범죄를 일삼는 이방인들을 예루살렘에서 몰아내고 성전을 정화하며 ‘정의’를 실현하는 존재다. 유다교 전통 안에서 죽은 이의 부활이나 죽음 이후의 삶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은 유배 이후부터이며, 부활과 내세의 개념을 발전시킨 것은 헬레니즘 시대 이후부터다. 솔로몬 시편 13장 11절이 “의인들의 생명은 영원하다. 죄인들은 파멸로 사라지고 말리라!”라고 하는 구절부터 희년서와 마카베오기 4서 등에 죽음 이후에 대한 희망 이야기가 등장한다.「구약 외경 1」은 구약성경의 시편과 흡사한 「솔로몬의 시편」부터 구약성경의 신학개념을 상당 부분 전승해 이야기를 펼치고 있는 「에녹 1서」 등 묵시ㆍ시편 문학과, 설화와 전설 형식의 「요셉과 아세넨」, 「예언자들의 생애」, 「아리스테아스의 편지」 등을 원문과 함께 상세한 역사적 배경과 주석을 달아 제작했다.유배 이후 유다인들은 자신들의 믿음을 기록으로 활발히 남겼다. 그들이 지닌 역사적 경험과 교훈, 하느님과 인간을 두고 숙고한 통찰의 열정이 구약 외경에 고스란히 담겨있다. 이정훈 기자 sjunder@cpbc.co.kr 평화신문2018.04.19
[하느님과 트윗을](68) 천국에서 반려동물을 만날 수 있나요천국에서 모든 갈망 채워주실 주님 문 : 인간과 동물은 어떤 차이점이 있나요 답 : 인간과 동물은 근본적인 차이가 있습니다. 어떤 동물은 지능이 발달한 모습을 보여 주지만, 동물은 결코 사람처럼 사유하거나 이성적으로 논증할 수 없습니다. 동물은 자유 의지가 없으며 행동에도 책임이 없습니다. 동물은 본능을 따르지만, 사람은 이성을 따릅니다. 또한, 하느님께서는 인간을 동물의 관리자로 지정하셨습니다.(창세 2,19-20 참조) 그래서 교회는 아시시의 프란치스코 성인이 하셨듯이 동물들을 돌봐야 한다고 가르칩니다. 그러나 “동물을 사랑할 수는 있으나, 그렇다고 인간에게 쏟아야 할 애정을 동물에게 쏟아서는 안 될 것”이라고 제한하고 있습니다.문 : 동물을 어떻게 대해야 하나요답 :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모상대로 창조하신 인간을 부당하게 죽이는 살인을 금하셨습니다.(창세 9,5 참조; 탈출 20,13 참조) 물론 동물도 모든 피조물처럼 창조주의 흔적을 약간은 지니고 있지만, 하느님께서는 양식을 마련하기 위해서나(창세 9,3 참조; 사도 11,7 참조) 하느님께 제물을 바치기 위해서 동물을 죽일 수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레위 1,2 참조) 하지만 우리는 동물을 적절히 돌보아야 하고, 그들에게 불필요한 고통을 주어서는 안 됩니다.문 : 성경에서는 동물을 어떻게 보나요답 : 성경은 동물을 종(種)의 이름으로 언급하는 반면에, 하느님은 인간 한 사람 한 사람을 각자의 이름과 개인적인 관계로 부르십니다. “내가 너를 지명하며 불렀으니 너는 나의 것이다.”(이사 43,1 참조)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잉태되는 순간에 손수 우리에게 불멸의 영혼을 만들어 주셨습니다. 하느님이 이처럼 우리에게 정신과 의지를 주셨기 때문에 우리는 하느님을 알고 사랑할 수 있는 것입니다. 동물은 존재 자체로 하느님께 영광을 드립니다. 그들은 본능에 따라 행동함으로써 하느님을 섬깁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정신과 의지를 주셨으므로 우리는 동물 수준을 넘어서야 합니다. 하느님은 또한 당신을 섬기는 것 이상을 우리에게 요구하십니다. 문 : 동물도 불멸의 영혼이 있나요답 : 인간과 달리 동물은 이 세상의 삶을 넘어서는 목적이 없습니다. 동물은 하느님께 불멸의 영혼을 받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죽음은 그들에게 최종적입니다. 우리는 천국에서 천사들과 성인들과 함께 하느님의 현존 안에서 완전한 행복을 누릴 것입니다. 상상하기 어려울지 모르지만 우리는 모든 갈망을 채워 주실 하느님 외에는 아무것도 필요치 않을 것입니다. 그래서 천국에서 반려동물을 그리워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만약 반려동물이 죽어서 슬픔에 빠진 사람에게 어떤 위로를 전해야 할지 모른다면 다음 이야기를 떠올려 보세요.한 신자가 자신이 그토록 아꼈던 고양이가 천국에 가지 못했을 거라는 이야기를 들었다고 본당 신부에게 말했습니다. 본당 신부는 “하느님은 사랑으로 천국을 완전히 행복한 곳으로 만드셨다”고 했습니다. 그러면서 “당신이 완전하게 행복하기 위해서 당신의 고양이가 필요하다면 천국에서 고양이를 볼 수 있을 것입니다”라고 말했습니다. 정리=전은지 기자 eunz@cpbc.co.kr cpbc2018.09.18

허규 신부와 떠나는 신약 여행 (99) “그 사내아이는 쇠 지팡이로 모든 민족들을 다스릴 분입니다.”(묵시 12,5)심판의 시간이 오기 전에 회개하여라 요한 묵시록은 일곱 대접의 환시를 전하고 있다. 그림은 미카엘과 천사들이 용과 그의 부하들을 땅으로 떨어뜨리는 모습. 율리우스 슈노어 폰 카롤스펠트 작 ‘하늘의 전쟁’ 부분. 출처=「아름다운 성경」 일곱 나팔의 환시와 일곱 대접의 환시는 비슷한 점이 많습니다. 두 환시 모두 이집트에 내린 하느님의 재앙과 비교할 수 있습니다. 요한 묵시록의 저자가 본 환시가 탈출기에 나오는 재앙과 비교될 수 있다는 것은 서로 관련이 있는 재앙을 통해 하느님의 업적을 나타내는 방법입니다. 이집트에서의 탈출 때와 마찬가지로 지금 요한 묵시록이 전하는 재앙을 내리는 분은 바로 하느님입니다. 여인과 용의 환시일곱 나팔과 일곱 대접의 환시 사이에 요한 묵시록에서 아주 중요하게 생각되는 환시가 있습니다. ‘여인과 용’에 대한 환시입니다. “태양을 입고 발밑에 달을 두고 머리에 열두 개 별로 된 관을 쓴 여인”은 곧 해산할 모습으로 묘사됩니다.(묵시 12,1-2) 이 여인은 무엇을 나타내는 상징인지에 대해 많은 의견이 있습니다. 그중에서 먼저 생각해 볼 수 있는 것은, 지금 많은 신자가 생각하는 것처럼 성모 마리아에 대한 상징으로 이해하는 것입니다. 구약성경에서 메시아를 나타내는 상징으로 사용된 쇠 지팡이로 모든 민족들을 다스릴 사내아이는 예수님을 나타내고 이 사내아이를 해산하는 여인은 마리아로, 성모님으로 보는 것입니다.(묵시 12,5; 시편 2,9) 이런 해석은 성모 신심이 강한 가톨릭교회 안에서 폭넓게 받아들여집니다. 또 다른 해석은 이 여인을 하느님의 백성, 곧 ‘믿는 이들의 공동체’로 보는 것입니다. 구약성경에서 말하는 이스라엘과 열두 지파 그리고 신약성경에 상징적으로 표현되는 열두 사도를 통해 하느님에 대한 믿음을 간직한 공동체 전체를 지칭하는 것으로 이해합니다. 왜냐하면, 메시아는 구약성경에서 약속된 분으로 이스라엘 민족 안에서 태어나셨으며 신약성경에서 말하는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간직한 이들 안에서 죽음과 부활을 통해 구원을 이루었고 교회를 통해 지속되기 때문입니다. 이런 해석 역시 많은 이들에게 긍정적으로 수용됩니다. 이 여인의 해산을 막기 위해 등장하는 용은 악의 세력을 나타내는 상징으로 볼 수 있습니다. 용이 “크고 붉은” 색을 가졌다는 것은 박해를 통해 순교자들의 피를 흘리게 한 상징으로 이해합니다. 또한, 이 용은 세상에서 자신을 대신하는 권한을 가진 두 짐승을 통해 우상 숭배를 조장합니다. 묵시록 13장에서 표현되는 바다에서 올라오는 짐승과 땅에서 올라오는 짐승은 요한 묵시록의 배경을 설명하는 역할을 합니다. 바다에서 올라오는 첫째 짐승은 용의 모습과 비슷하게 “일곱 머리와 열 개의 뿔”을 지니고 있습니다. 이것은 세상에서 용을 대신하는 첫째 짐승의 역할을 나타냅니다. 이 첫째 짐승은 요한 묵시록 안에서 우상숭배의 직접적인 대상으로 생각되는, 황제 숭배 의식의 대상이 되는 죽은 황제를 나타냅니다. 이와 함께 땅에서 오는 둘째 짐승은 후에 거짓 예언자로 표현되는데(묵시 16,13; 19,20; 20,10) 사람들을 현혹해 첫째 짐승에게 경배하도록 합니다. 둘째 짐승이 나타내는 것은 죽은 황제를 숭배하도록 강요하고 박해하는 살아있는 황제입니다. 그의 역할은 죽은 첫째 짐승의 상을 세워 숭배하게 하는 것입니다.(묵시 13,14-15) 또 악의 세력에 동조해 우상숭배를 하게 하는 둘째 짐승은 사람들에게 표를 받게 하는데 그 짐승의 이름을 뜻하는 ‘666’입니다. 이 짐승의 표는 하느님의 인장과 반대되는 상징으로 사용됩니다. 그리고 이 숫자는 ‘네로 황제’를 나타내는 상징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요한 묵시록은 도미티아누스 황제의 시기를 배경으로 하지만 도미티아누스 황제는 네로 황제가 살아난 것으로 생각되었기 때문입니다. 일곱 대접에 의한 재앙이제 남은 것은 일곱 대접에 의한 재앙입니다. 연속되는 재앙들의 목적은 일곱 대접의 환시에서 잘 드러납니다. 여기서 지속적으로 표현되는 “자기들의 행실을 회개하지 않았다”는 표현은 우상을 숭배하는 이들에게 주어진 회개의 가능성을 표현합니다. 종말 이전에, 결정적인 심판의 시간이 오기 전에 잘못을 뉘우치고 회개하도록 하는 것이 지속적인 재앙이 가진 의미입니다. 하지만 그들은 마치 ‘탈출’ 때의 파라오처럼 회개하지 않았고 그들의 못된 행실을 지속할 뿐입니다. 일곱 대접에 의한 재앙을 끝으로 회개의 가능성은 남아 있지 않습니다. 이제 남은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과 심판입니다. <가톨릭대 신학대학 성서학 교수> cpbc2018.05.15

진리 수호하며 세상의 평화 이끈 ‘하느님 종들의 종’교황 주일 특집 / 세상과 소통한 베드로 사도의 후계자들 베드로 사도부터 프란치스코 교황까지 2000년 교회사에서 266명의 교황이 탄생했다. 고대 교황들은 가톨릭 전통 신앙을 고수하고 속권으로부터 교회의 권위를 지키는 데 헌신했다. 중세 교황들은 이슬람의 서구 진출에 맞서 십자군 전쟁과 스페인 국토 회복 운동에 힘쓰고, 이단에 맞서 성체와 성모 신심을 확산했다. 또 르네상스 시대 교황들은 종교 개혁에 맞서 교회 쇄신에 힘썼고, 근현대 교황들은 계몽시대와 산업혁명, 세계대전과 디지털 시대를 겪으면서 시대의 문화가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바탕으로 한 생명의 문화로 정착될 수 있도록 헌신했다. 교황 주일을 맞아 역대 교황 가운데 세상과 소통한 교황들을 소개한다. ▨ 성 실베스테르 1세(재위 314~335)성 실베스테르 1세는 콘스탄티누스 대제로부터 신앙의 자유를 인정받아 박해 시대 지하 교회를 지상으로 끌어 올린 교황이다. 그는 콘스탄티누스 대제의 도움으로 ‘세상 모든 교회의 어머니이며 으뜸’인 라테라노 대성전과 베드로와 바오로 사도의 무덤 위에 대성전을 지었다. 그는 또 콘스탄티누스 대제가 314년에 소집한 제1차 아를 공의회와 325년 니케아 공의회에 특사를 보내 그리스도의 신성을 부인한 아리우스를 이단으로 단죄하고, 천주 성부와 성자는 ‘한 본체’임을 선언했다.실베스테르 1세는 22년간 교황직을 수행하면서 정통 신앙을 고수하고 지상 교회 제도의 틀을 갖추는 데 헌신한 교황이다.▨ 성 레오 1세(재위 440~461) 성 레오 1세는 성 그레고리오 1세와 함께 ‘대교황’으로 불리고 있다. 그는 451년 칼체돈 공의회를 소집해 그리스도의 인성을 부인한 네스토리우스와 단성론자를 이단으로 단죄하고 ‘그리스도는 신성과 인성 두 본성 안에 있는 한 인격’’이라고 선포했다. 또 ‘베드로의 대리자’라는 칭호를 처음으로 사용하며 보편 교회 안에서의 교황 수위권을 강화했다.그는 또 452년 훈족의 아틸라 왕이 이탈리아 북부를 초토화하고 남부까지 쳐들어오자 로마 원로원 사절 자격으로 직접 중재를 성사시켜 훈족으로부터 로마를 구했다. 이후 로마 시민들은 레오 1세에게 절대적인 신뢰를 보여 ‘대교황’이라 불리게 됐다. 그는 교황으로서는 첫 번째로 성 베드로 대성전 지하 묘지에 안장됐다. ▨ 성 그레고리오 1세(재위 590~604)그레고리오 1세는 수도자 출신 첫 교황으로 ‘대교황’이라 불린다. 자신을 ‘하느님의 종들의 종’이라 부르며 가난한 사람들에게 각별한 관심을 기울였다. 또 그는 롬바르드 왕국의 침략에 맞서 로마를 구하고 부유한 가문들이 교회에 기부한 토지로 교황령의 기초를 놓았다. 그는 사제 독신제를 시행하고 주교 품행에 관한 규정을 세워 죄를 지은 고위 성직자를 면직시켰다. 또 성 베네딕도의 수도 규칙을 기반으로 한 수도원 제도를 널리 시행하고, 오늘날까지 사용되고 있는 로마 미사 전례서를 만들었다. 아울러 잉글랜드와 독일, 스페인 지역을 선교해 그리스도교화 했다. ▨ 레오 13세(재위 1878~1903)레오 13세는 제1차 바티칸 공의회에 자극을 받아 교회 쇄신과 세계와의 대화에 힘썼다. 그는 1891년 사회 회칙 「새로운 사태」를 반포하고 노동자와 사용자 사이의 중재자 역할을 수행했다. 특히 사유재산뿐 아니라 공정한 임금, 노동자의 권리, 노동조합을 지지하면서 사회주의를 단죄하고 사회 정의를 옹호했다. 이 때문에 ‘노동자들의 교황’이라 불린다. 또 사회주의, 공산주의, 허무주의에 관한 회칙을 반포, 교회와 사회 사이의 대화 장을 열었다. 아울러 신앙 때문에 갈라진 형제들과의 일치 문제에 대해 깊은 관심을 보였다. 레오 13세는 복되신 동정 마리아와 묵주 기도에 관한 회칙 11편과 그리스도의 구원 사업과 성체에 관한 회칙 2편을 발표하고, 1893년 성가정 축일을 도입하는 등 신자들의 영적 성장을 위해서도 헌신한 교황이다. 신학교 교육 과정을 현대화하고 토마스 아퀴나스를 신학과 철학 연구의 본보기로 삼을 것을 권고했다. 아울러 성경 연구의 필요성을 강조해 1902년 교황청 성서위원회를 설립했다.▨ 베네딕토 15세(재위 1914~1922)“세계 평화를 위해서는 우리의 생명마저도 기꺼이 희생시켜야 한다.” 베네딕토 15세가 마지막으로 남긴 말이다. 그는 정의와 평화를 실현하기 위해 헌신한 교황으로 평가받고 있다.그는 제1차 세계대전 동안 전쟁 포로에 대한 보호, 전쟁 부상자들의 교환, 생필품 준비 등을 통해 전쟁 참상을 완화하는 데 노력을 게을리하지 않았다. 특히 ‘아동 구호 기금’을 적극 후원했고, 소련의 기아 문제 해결에도 힘썼다. 베네딕토 15세는 또 1917년 새 교회법을 반포했고, 동방교회성과 동방대학을 교황청에 설립해 교회 일치에도 노력했다.▨ 성 요한 23세(재위 1958~1963)성 요한 23세는 뛰어난 직관력으로 교회의 미래상을 그렸고, 제2차 바티칸 공의회를 소집한 교황이다. 쇄신을 통해 현대 사회에 적응하기 위해 세상을 향해 교회를 개방하고 모국어로 미사를 봉헌하게 했다. 또 회칙 「어머니와 스승」을 반포, 부유한 국가들이 가난한 국가를 도우라고 요청했다. 아울러 회칙 「지상의 평화」를 통해 세계 평화가 인간의 권리와 의무임을 강조하고 서방 세계와 공산주의와의 평화 공존을 역설했다. ▨ 성 바오로 6세(재위 1963~1978)성 바오로 6세는 제2차 바티칸 공의회를 성공적으로 마무리한 교황이다. 그는 세계 여러 나라를 사목 방문한 첫 번째 교황으로 ‘순례자의 교황’이라 불린다. 그는 세계를 순방하면서 화해와 쇄신, 평화를 주창했고, 1965년 동방 교회 총대주교 아테나고라스 1세를 만나 1054년 동방 교회에 내린 파문을 철회하면서 교회 일치의 토대를 마련했다. 그는 회칙 「민족들의 발전」을 통해 사회정의 실현을 요구했고, 「인간 생명」을 반포, 인위적 산아제한을 단죄했다.▨ 성 요한 바오로 2세(재위 1978~2005) 성 요한 바오로 2세는 하드리아노 6세 이래 456년 만의 비 이탈리아인 교황이자 최초의 슬라브인 교황이다. 그는 첫 회칙 「인간의 구원자」를 통해 인간 존엄성과 사회정의를 촉구했다. 또 두 번째 회칙 「자비로우신 하느님」을 통해 갈수록 위협받는 세상에서 사람들에게 자비를 보이라고 당부했다. 아울러 세 번째 회칙 「노동하는 인간」에서 자본주의나 마르크스주의가 아닌 노동자들의 권리와 노동의 존엄성에 기초한 새로운 경제 질서를 요청했다. 이어 「사회적 관심」과 「백주년」을 통해 마르크스주의와 물질지상주의, 자본주의를 비난했다. 리길재 기자 teotokos@cpbc.co.kr 평화신문2019.06.26

가족 기도·성지순례 3년… 튼튼해진 가정 공동체서울 대방동본당 가정 신앙교육
3주년 결산, 49가정 시상 서울대교구 대방동본당 가정 신앙교육 3주년 결산 큰 잔치에서 주수욱 신부가 가정 신앙교육에 열심히 동참한 가정에 최우수수상과 우수상을 수여하고 있다. 안익장 회장 제공 서울대교구 대방동본당(주임 주수욱 신부)은 11월 25일 가정 신앙교육 3주년 결산 큰 잔치를 열고, 하느님 사랑을 실천하는 공동체로 거듭나기로 했다.본당 신자들은 ‘우리의 다짐 선언문’을 발표, △개인주의와 소외, 불안감을 가져오는 현대 사회에서 가정 공동체를 이뤄 나가고 △이웃에 복음을 전하고, 사랑을 실천하는 가정 공동체가 되도록 노력하며 △가정에서 신앙을 전달하고 △부모들은 자녀들에게 신앙의 모범이 될 것을 약속했다. 이날 잔치에서는 3년 동안 가정 신앙교육을 열심히 실천해온 49가정이 최우수상과 우수ㆍ장려상을 받았다.대방동본당은 2016년 ‘가정 안에서의 신앙교육’을 목표로 가정과 신앙교육위원회(위원장 이경우)를 설립해 3년 동안 가족기도를 생활화하도록 도왔다. 가족 성지순례를 비롯해 교리 경연대회, 성경 암송대회 등 신앙생활을 위한 다양한 행사도 기획했다.가정과 신앙교육위원회는 가정 신앙교육 매뉴얼을 작성하기 위해 전 신자를 대상으로, 가정 신앙교육 현실을 진단하는 설문조사를 벌였다. 총 719명을 대상으로 한 설문조사에서 61%의 신자들은 가정 내 신앙교육의 중요성을 알고는 있지만 어렵다고 응답했고, 위원회는 신자들이 쉽게 신앙교육을 실천할 수 있도록 매뉴얼을 작성해 배포했다. 가정 기도ㆍ미사 참여ㆍ성지순례 등 8가지 항목으로 된 ‘가정 신앙 실천 현황판’을 만들어 참여를 독려했다.본당 사목회장 안익장(바오로)씨는 “손자녀와 조부모, 부모 3대가 함께 가족기도를 하고 출장을 간 아빠와 영상 통화로 가족 기도를 바치는 사례도 있었다”면서 “많은 가정에서 가족 기도가 생활화된 것을 볼 수 있었다”고 말했다.본당은 3년간의 노력을 발판 삼아, 내년 서울대교구 사목 목표인 ‘선교의 기초이며 못자리인 가정 공동체’에 따라 복음을 전하는 가정 공동체가 늘어나도록 노력을 이어가기로 했다. 이지혜 기자 bonaism@cpbc.co.kr 평화신문2018.11.28
![[평신도영성 나는 평신도다] (19)한국 교회 평신도 사도직의 현주소 7 : 신앙을 통해 현실 안에서 세속적 가치 극복하기(하)](//cpbc.co.kr/CMS/newspaper/2019/04/rc/750803_1.0_titleImage_1.jpg)
[평신도영성 나는 평신도다] (19)한국 교회 평신도 사도직의 현주소 7 : 신앙을 통해 현실 안에서 세속적 가치 극복하기(하)귀에 못이 박이게 들어 무감각해진 건가 많은 이들이 주님보다는 현실에 사로잡혀 살고, 자기 안에 계신 주님을 잊고 산다. 하지만 침묵 속에 기도를 바치다 보면 주님의 길이 무엇인지 알게 된다. 【CNS 자료 사진】 “주님은 사랑이시다.” “주님은 거룩하시다.” “주님은 늘 우리에게 은총을 베풀고 계시다.” “주님은 항상 우리와 함께하신다.”많이 들어본 말일 것입니다. 신앙인이라면 예비신자 단계에서부터 귀에 못이 박이도록 들을 말일 것입니다. 이런 말을 교회에서 많이 하는 것은 그 말이 참으로 진리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좋은 말도 여러 번 들으면 무감각해지는 경향이 있습니다. 예수님 말씀은 2000년이 지나도 힘을 잃지 않습니다. 하지만 그 말씀을 듣는 인간이 나약합니다. 그러다 보니 좋은 말씀을 무감각하게 받아들이는 경향이 있습니다.평범하고 나약한 일상 속에서 미사도 마찬가지입니다. 레지오 마리애 회합도 늘 반복됩니다. 소공동체 모임도, 교리교육도, 강연도 반복됩니다. 이 모든 것들은 깊은 차원으로 우리를 초대합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깊은 차원으로 들어가지 못하고 평범하고 나약한 일상을 살아갑니다. 그러면 아무리 좋은 진리의 말씀이나 전례, 각종 회합이 의미가 없습니다.밥을 먹는 것으로 예를 들어 보겠습니다. 우리는 늘 밥을 먹습니다. 하지만 깊은 차원의 신앙에 머무는 사람에게 밥은 생명의 빵이 됩니다. 밥을 먹을 때마다 하느님 안에 머물며 감사를 체험합니다. 하지만 밥 속에 담긴 깊은 의미를 깨닫지 못한다면 그것은 자연적 차원, 본능적 차원의 삶을 사는 것에 불과합니다. 하느님은 사랑이시라는 말씀, 그리고 하느님은 늘 은총을 베풀고 우리와 함께 머무신다는 말씀이 너무 많이 들어서 식상하게 들리십니까. 그리고 의미 없게 스쳐 지나가는 말씀에 불과합니까. 그럼에도 이 말씀들은 참으로 힘이 있어서 우리가 조금만 깨어 있는다면 참 빛을 만날 수 있는 통로가 되어줄 것입니다. 이러한 거룩하고 신성한 표현들은 단순히 정보를 전달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이러한 표현들이 주는 새로운 의미로의 초대를 받아들여야 합니다.구두를 수선하는 사람은 구두를 수선하는 과정에서 성경의 의미를 세상에 드러내야 합니다. 꽃가게를 하는 사람은 꽃꽂이 하나를 통해 세상에 하느님을 증거해야 합니다. 이발소 주인도 마찬가지이고, 공무원도 마찬가지입니다. 남편, 부인, 자녀도 마찬가지입니다. 정치인, 기업인, 교수 등 사회의 책임을 지닌 이들은 더할 나위도 없습니다. 이같이 의미를 발견하기 위해선, 하느님을 갈망해야 합니다. 그런데 아직도 많은 평신도가 주님을 갈망하지 않습니다. 주님을 갈망하지 않고 자신보다 돈이 많은 사람, 권세가 높은 사람을 갈망합니다. 나 자신의 문제는 주님이 아니면 그 누구도 해결해 주지 못하십니다. 뉴스를 볼 때, 또 세상의 어떤 정보를 접할 때 그것이 주님보다 더 나를 강하게 사로잡으면 안 됩니다. 내 안에 주님이 확고하게 자리 잡고 있으면, 세상의 그 어떤 것이 들어와도 주님의 방법으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내 안에 온통 세상의 것이 지배하고 있으니까 삶에 대해 공포심을 가지는 것입니다. 주님이 나를 사로잡고 있으면 세상살이가 전혀 힘들지 않게 됩니다.주님의 현존이 더 중요 주님보다 현실의 사건이 나를 더 사로잡고 있습니다. 현실의 삶이 중요하지 않다는 말이 아닙니다. 현실이 중요하지만, 주님의 현존은 더 중요합니다. 주님 없는 가운데 벌어지는 황당무계한 사건들에 잡혀 있으니까 문제가 발생하는 것입니다. 삶이 힘들어지는 것입니다. 많은 평신도가 지금도 자신 안에 계시는 주님을 잊고 삽니다. 안타깝습니다. 세상에 어떤 사건이 일어나건 말건, 나는 내 삶을 결정짓는 주님과 함께 살면 됩니다.침묵 속에서 참기도를 한번 해 보십시오. “주님 당신은 길입니다.”“주님 당신은 평화이니다.”“주님 당신은 진리입니다.” 그러면 내가 어떤 길로 가야 할지, 어떤 평화로 가야 할지, 세상 뉴스와 사건들을 접할 때 무엇이 진리인지 알 수 있게 해 주실 것입니다. 주님의 현존을 살아갈 때, 우리 삶 안에 주님이 생생하게 살아 있을 때 우리는 진정으로 복음을 세상에 전할 수 있을 것입니다.“동이 틀 때 떠오르는 태양은 놀라운 도구가 되어 지극히 높으신 분의 위업을 선포한다.”(집회 43,2)정치우(안드레아, 새천년복음화학교 교장) 평화신문2019.04.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