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창훈 위원의 사도행전 이야기] (4) 성령 강림 (2,1-13)](//cpbc.co.kr/CMS/newspaper/2019/01/rc/744686_1.0_titleImage_1.jpg)
[이창훈 위원의 사도행전 이야기] (4) 성령 강림 (2,1-13)성령으로 일치돼 예수님 위업 전한 제자들 오순절의 첫 성령 강림 사건은 예수님의 제자들이 함께 모여 있는 집에서 일어난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모인 곳에 예수 그리스도의 영이자 하느님의 영인 성령께서 함께하신다는 것을 보여주는 사건이다. 사진은 파리 루브르 박물관에 있는 장 레스투(1692~1768)의 ‘성령 강림’ 그림. 사도행전은 성령 강림 사건이 유다를 대신해 마티아를 사도로 뽑은 다음에 일어났다고 전합니다. 저자 루카는 첫 성령 강림이 일어났을 때의 상황을 마치 현장을 중계하듯이 소개합니다. 성령 강림은 “오순절이 되었을 때”에 일어납니다.(2,1) 오순절은 과월절, 초막절과 함께 유다인들의 3대 명절에 속합니다. 오순절은 과월절, 곧 파스카 축제가 지나고 50일째 되는 날입니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후 40일 동안 제자들에게 여러 번 나타나셨음을 고려한다면(사도 1,3), 오순절은 예수님께서 승천하신 후 10일째 되는 날인 셈입니다. 사도행전의 저자는 성령 강림이 일어났을 때에 “그들이 모두 한자리에 있었다”(2,1)고 전합니다. 그들은 누구였을까요? 마티아 사도를 뽑았을 때 함께 있던 이들, 사도들을 포함해 120명가량 되는 형제들이었을 것입니다. 그들 가운데는 사도들과 한마음으로 기도에 전념하던 이들, 곧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와 형제들, 그리고 예루살렘에서부터 예수님을 따랐던 여자들도 있었겠지요. 한자리에 모여 있었다는 그곳은 어디일까요? 확실한 것은 예루살렘 성전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그들이 묵고 있던 위층 방(사도 1,13)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루카는 이어 성령 강림의 모습을 아주 사실적으로 표현합니다. “갑자기 하늘에서 세찬 바람이 부는 듯한 소리가 나더니 온 집 안을 가득 채웠다. 그리고 불꽃 모양의 혀들이 나타나 갈라지면서 각 사람 위에 내려앉았다.”(2,2-3) 구약성경에서 바람이나 불은 하느님의 힘이 작용한다는, 하느님 현존의 표시이기도 하지요. 주목할 점은 성령이 사도들에게만 아니라 “각 사람 위에” 곧 거기에 있는 모든 사람에게 내려앉았다는 사실입니다. 그런데 사도행전 본문에는 아직까지 성령을 직접적으로 언급하지는 않습니다. 루카는 불꽃 모양의 혀가 각 사람 위에 내려앉은 다음에야 비로소 성령을 이야기합니다. “그러자 그들은 모두 성령으로 가득 차, 성령께서 표현의 능력을 주시는 대로 다른 언어들로 말하기 시작하였다.”(2,4) 120명이나 되는 사람이 모두 성령으로 가득 차 서로 다른 언어로 말한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요? 성령 세미나에서 이상한 언어로 말을 하는 장면을 연상하면 쉽게 이해할 수 있겠지요. 대단히 시끄러웠을 것입니다. 그 소리에 사람들이 무리를 지어 달려옵니다. 그들은 “세계 모든 나라에서 온 독실한 유다인들”(2,6)이었습니다. 독실한 유다인이란 유다교의 율법과 전통에 충실한 또는 적어도 충실하려고 노력하는 이들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들은 ‘디아스포라’라고 하는 세계 각지에 흩어져 있는 유다인 공동체에 있던 사람들로서 예루살렘에 잠시 다니러 온 사람들이거나 예루살렘에 한동안 눌러살고 있는 이들이었을 것입니다. 오순절을 맞아 순례하러 온 사람들도 있었을 터입니다. 그런데 이들은 와서 보고는 놀라고 신기해하면서 이렇게 말합니다. “지금 말하고 있는 자들은 모두 갈릴래아 사람들이 아닌가? 그런데 우리가 저마다 자기가 태어난 지방 말로 듣고 있으니 어찌 된 일인가? 파르티아 사람, 메디아 사람, 엘람 사람, 또 메소포타미아와 유다와 카파도키아와 폰토스와 아시아 주민, 프리기아와 팜플리아와 이집트 주민, 키레네 부근 리비아의 여러 지방 주민, 여기에 머무르는 로마인, 그리고 크레타 사람과 아라비아 사람인 우리가 저들이 하느님의 위업을 말하는 것을 저마다 자기 언어로 듣고 있지 않는가?”(2,7-11)여기서 언급하고 있는 지방들이 오늘날 어디인지 잠시 알아봅니다. 파르티아와 메디아와 엘람은 오늘날의 이란 지역입니다. 메소포타미아는 지금의 이라크, 카파도키아는 터키 동부 지방, 폰토스는 터키 북부의 흑해 연안, 아시아는 터키 서부 에게해 연안, 프리기아와 팜필리아는 터키 중남부 지방을 가리킵니다. 오늘날로 보면 지중해 일대와 북아프리카, 중동 근동 지역인데, 당시에는 ‘땅끝에 이르는 모든 민족’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루카는 복음서에서 “예루살렘에서부터 시작하여 죄의 용서를 위한 회개가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모든 민족에게 되어야 한다. 너희는 이 일의 증인이다”라고 하시는 예수님 말씀을 전하고 있는데(루카 24,48), 사도행전의 이 대목은 이 말씀이 이제 성령을 받은 사도들을 통해 실현되기 시작하고 있음을 암시한다고 하겠습니다. 이 대목에서 특별히 두 가지를 더 주목하고자 합니다. 우선, 지방마다 서로 다른 말을 쓰는 사람들이 제자들이 하는 말을 모두 자기 지방 말로 듣고 있다는 것입니다. 구약성경은 사람들이 쓰는 말이 서로 갈라진 것은 바벨탑 때문이라고 전합니다.(창세 11,1-9) 이름을 드날리고자 하는 사람들의 교만과 야욕이 바벨탑을 쌓았고 그 결과로 말이 갈라지는 혼란을 낳은 것입니다. 그런데 성령으로 가득 찬 사람들이 서로 다른 말을 하는데도 듣는 사람들이 모두 자기 지방 말로 알아들었다는 것은 성령으로 말미암아 이제 혼란이 극복되고 일치가 시작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교만은 분열과 혼란을 초래하지만, 성령께서는 일치와 이해를 가져다주십니다. 둘째, 말소리를 듣고 달려온 사람들은 제자들이 하는 말을 단지 자기네 말로 들은 것으로 그치지 않고 그 내용이 무엇인지를 알아들을 수 있었습니다. 제자들이 “하느님의 위업”을 이야기하고 있는 것을 알아들은 것입니다. 제자들이 하느님 위업을 말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듣게 된 것은 단지 말이 통해서가 아닐 것입니다. 그 말을 듣는 사람들은 태어난 곳은 서로 다르고 쓰는 말이 다르지만 “독실한 유다인들”이라는 점에서 공통됩니다. 하느님을 믿는 유다인들이었기에 제자들이 이야기하는 ‘하느님의 위업’을 알아들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물론 모든 사람이 다 놀라워하고 신기해하지는 않았습니다. 그래서 루카는 “더러는 ‘새 포도주에 취했군’ 하며 비웃었다”(2,13) 하고 전합니다. ‘새’ 포도주에 취했다고 말한 이유는 오순절이 첫 수확을 끝내고 하느님께 맏물을 바치는 추수감사절이어서 새 포도주를 마실 수 있기 때문이었습니다.생각해봅시다예루살렘 성전은 하느님께서 거처하시는 곳입니다. 그런데 하느님의 영인 성령이 이제는 제자들이 모여 기도하는 이층방에 내립니다. 이 사실은 대단히 중요합니다. 성전은 여전히 하느님의 집이고 하느님의 영인 성령이 거처하시는 궁전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이름으로 제자들이 모인 곳에 첫 번째 성령 강림이 일어난 이후 사정은 달라집니다. 성령께서는 예수님의 이름으로 모인 곳에 함께하신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이름으로 모입니까. 그런 우리 모임에 성령께서 함께하심을 느끼십니까? 성령께서 함께하심을 느끼지 못한다면 그 이유는 무엇이라고 보십니까? 사도행전 이야기를 해나가면서 이런 물음을 계속 던지며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평화신문2019.01.22

허규신부와 떠나는 신약 여행(98) “나는 두 증인을 내세워 천이백육십일 동안 자루옷을 걸치고 예언하게 할 것이다”(묵시 11,3)두 증인이 하느님을 세상에 드러낼 것이다 요한 묵시록은 하느님의 두 증인이 사람들의 회개를 선포하고 하느님의 힘을 세상에 드러내는 내용을 전하고 있다. 그림은 네 명의 천사가 미카엘 대천사를 둘러싸고 세상 종말을 알리는 나팔을 불고 있는 모습. 로지에 반 데르 바이덴 작 ‘최후의 심판’. 출처=가톨릭 굿뉴스 일곱 봉인의 환시 후에 전하는 일곱 나팔의 환시는 마찬가지로 재앙을 이야기합니다. 요한 묵시록에서 말하는 지속되는 재앙은 점점 강해지고 확장되는 모습으로 그려집니다. 일곱 봉인이 구약 성경과 복음서에 나오는 재앙들과 비슷한 것처럼 일곱 나팔에 의한 재앙 역시 그렇습니다. 특히 이 재앙들은 탈출기에서 찾을 수 있는, 이집트에 내린 열 가지의 재앙을 생각하게 합니다. 일곱가지 재앙첫째 재앙은 우박과 불을 내리는 것인데 이것은 이집트에 내린 일곱째 재앙과 상응합니다.(탈출 9,23-26) 불타는 큰 산과 같은 것이 바다에 던져져 바다가 피처럼 변한다는 둘째 재앙은 탈출기의 첫째 재앙을 생각하게 합니다.(탈출 7,20-25) 셋째 재앙은 강과 샘의 물을 마실 수 없게 되었다는 것인데, 이것과 비슷한 재앙을 탈출기에서 찾기는 어렵습니다. 넷째 재앙은 해와 달과 별에 내린 것으로 어둠을 가져오는 재앙입니다. 이 재앙은 이집트에 내린 아홉째 재앙과 비슷합니다.(탈출 10,21-23) 다섯째 재앙은 이집트에 내린 여덟째 재앙과 비교할 수 있습니다.(탈출 10,12-20) 메뚜기를 소재로 삼는 이 재앙은 특별히 중요한 의미를 갖습니다. 왜냐하면, 명시적으로 지금 세상에 내린 하느님의 재앙이 누구를 목표로 하는 것인지 알려주기 때문입니다. “그것들은 땅의 풀과 푸성귀와 나무는 하나도 해치지 말고, 이마에 하느님의 인장이 찍히지 않은 사람들만 해치라는 명령을 받았습니다.”(묵시 9,4) 하느님의 인장을 받은 사람들은 이미 보았던 것처럼 믿음을 가진 모든 이들을 의미합니다. 현대적인 의미에서 세례나 견진성사를 통해 우리는 하느님의 인장을 받습니다. 이 재앙들은 믿지 않는 이들, 더 나아가 하느님을 거부하고 악의 세력에 동조하는 이들에게 내리는 재앙입니다. 이런 내용은 여섯째 나팔에 의한 재앙에서도 드러납니다. 동쪽에서 다른 민족이 쳐들어와 로마와 맞서 싸울 것이고 악의 세력이 패배할 것을 보여주는 여섯째 재앙에서 역시 구체적으로 그 대상이 표현됩니다. “이 재앙으로 죽임을 당하지 않은 나머지 사람들도 저희 손으로 만든 작품들을 단념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마귀들을 숭배하고, 또 보지도 듣지도 걸어 다니지도 못하는, 금이나 은이나 구리나 돌이나 나무로 만든 우상들을 숭배하기를 그치지 않았습니다.”(묵시 9,20) 일곱 봉인의 환시와 마찬가지로 일곱 나팔의 환시에서도 성격이 전혀 다른 환시 하나를 찾을 수 있습니다. 그것은 하느님의 두 증인에 대한 환시입니다. 묵시 10―11장에 나오는 환시는 재앙의 대상이 되는 악의 세력을 향한 것이 아닌 믿는 이들을 향한 환시입니다. 하느님 뜻을 전하는 두 증인두 증인은 구약성경에 나오는 예언자의 모습과 닮았습니다. 불이 나와 원수들을 삼켜버리고 비가 내리지 않게 하는 것은 엘리야 예언자를, 물을 피로 변하게 하고 온갖 재앙으로 땅을 치는 권한을 가진 것은 모세를 연상케 합니다. 모세와 엘리야는 구약 성경에서 하느님께서 보낼 종말론적인 예언자로 표현됩니다. 모세에게 한 하느님의 약속은 종말 때에 일으켜 줄 예언자의 모습을 표현합니다.(신명 18,18) 또한 엘리야는 죽음을 맞지 않고 하늘로 불려간 예언자로(2열왕 2,11), 사람들은 언제인가 다시 엘리야 예언자가 올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물론 요한 묵시록에서 말하는 두 증인이 모세와 엘리야 예언자를 의미하는 것은 아닙니다. 구약 성경의 가장 뛰어난 두 예언자의 특징을 통해 두 증인의 역할을 소개하는 것입니다. 마치 구약성경에서 당신 백성의 구원을 위해 모세와 엘리야 예언자를 파견하신 것처럼, 하느님은 종말에 앞서 하느님의 뜻을 전하고 예언할 두 증인을 보내실 것입니다. 이 두 증인은 1261일 동안, 상징적으로 영원하지 않은 일시적인 시간 동안 사람들의 회개를 선포하고 하느님의 힘을 세상에 드러낼 것입니다. <가톨릭대 신학대학 성서학 교수> 평화신문2018.05.08
종교담당 기자, 예수의 발자취를 쫓다 예수를 만나다 예수를 만나다 백성호 글ㆍ사진 / 아르테 / 2만 2000원“만약 이런 식의 기도라면 어떨까. 여기에는 ‘머무름’이 보이지 않는다. 오히려 ‘내려놓음’이 보인다. 머물지 않는 기도는 항구를 떠난다. 바다를 향해, 신의 속성을 향해 나아간다.”중앙일보 종교담당 백성호 기자가 성경 속 예수의 자취를 따라가는 ‘구도의 기행문’을 펴냈다. 평소 종교의 진리에 관해 ‘취재’에만 그치지 않고, 수도자의 시각으로 심취한 결과물이기도 하다.우리가 집착을 안고 기도하더라도, 비록 투덜대더라도 예수는 말한다. “청하여라, 너희에게 주실 것이다. 찾아라, 너희가 얻을 것이다”(마태 7,7)하고 말이다. 기자는 예수님 말씀을 따라 이스라엘로 떠났다. 오늘의 이스라엘에서 2000년 전 예수에게 질문을 던진다. 갈릴래아 호숫가를 거닐다 출렁이는 물살을 보고 우리 삶을 파도에 비유하기도 하고, 마르코복음에 등장하는 하혈하는 여인을 자신의 삶에 투영해보기도 한다.저자는 하혈하는 여인이 출혈을 멈춘 것은 단순히 옷자락을 만져서가 아니라, 예수 안에 깃든 신의 속성이 닿은 것이라 말한다. 하혈하는 여인이 지녔던 상처의 뿌리가 치유된 것처럼 우리도 ‘빛의 힘’을 믿어야 참 치유를 이룬다는 것이다.예수는 왜 “내가 세상에 평화를 주러 왔다고 생각하지 마라. 평화가 아니라 칼을 주러 왔다”(마태 10,34)고 했을까. 당나라 임제 선사가 ‘집착’을 죽이라고 했듯이, 이는 예수님도 집착하는 평화, 가짜 평화에 집착하는 행위를 끊어버리라고 요청한 것이다. 죽음과 부활의 의미까지 기자의 눈으로 풀어낸 성경 지식이 꽤 진중하고 이채롭다.이정훈 기자 sjunder@cpbc.co.kr 백영민2018.06.07

“교황 성하의 축복으로 평화의 길을 열었습니다”문재인(티모테오) 대통령, 교황청 기관지 ‘로세르바토레 로마노’(17일 자) 특별 기고문 문재인 대통령과 김정은 위원장이 9월 19일 평양에서 열린 남북 정상회담에서 공동선언문을 발표하고 악수하고 있다. 평양사진공동취재단 한-교황청 수교 55주년을 맞아 교황청을 방문하게 된 것을 매우 뜻깊게 생각합니다. 그동안 교황청이 한반도의 평화를 강력하게 지지해주신 것에 대해 대한민국 국민들을 대신하여 깊이 감사드립니다.예수님의 삶에서 민주주의는 시작되었습니다. 예수님은 높은 곳을 버리고 지극히 낮은 곳으로 오셨습니다. 가난한 이들, 힘없고 아프고 소외된 이들과 함께하셨습니다. 예수님 곁에서는 지위 고하, 빈부와 남녀의 차이를 불문하고 사람으로서 똑같이 존엄했습니다. 가톨릭은 하느님 앞에 모든 사람이 평등하다는 교리를 가지고 한국에 왔습니다. 사람은 하느님의 형상을 따라 창조되었으므로 모두가 똑같이 존엄하다는 가톨릭의 인간관이 신분사회에 속해 있던 한국을 깨어나게 했습니다. 이러한 신념을 지키기 위해 많은 한국인들이 순교했습니다.성경 통해 민주주의 익히고 불의에 맞서 한국은 가톨릭 국가가 아니지만 ‘성경’을 통해 민주주의를 익히고 불의와 맞서는 용기를 얻었습니다. 군사독재 시절 한국의 ‘성당’은 민주주의의 성지였고, 피난처였습니다. 많은 사제들이 ‘가톨릭 사회교리’에 따라 민주화 운동에 함께했습니다. 평신도들도 “세상 가운데 있는 교회의 사람이요, 교회 안에 사는 세상의 사람”으로서 예수님의 삶처럼 정의와 평화, 사랑의 구현에 충실하고자 노력했습니다. 그것이 한국에서 가톨릭이 존경받는 이유입니다.한국 가톨릭은 불의한 국가폭력에 맞섰지만 끝까지 평화를 옹호했습니다. 민주주의는 궁극적으로 인간의 존엄을 회복하는 길이며, 그 길은 평화적이어야 한다는 점을 끊임없이 일깨워주었습니다. 2017년 추운 겨울의 그 아름답고 평화로웠던 촛불혁명의 정신에 그 가르침이 있었습니다.2018년 한반도 평화를 위한 우리 국민의 여정에서 교황 성하의 기도와 축복은 큰 격려와 희망이 되었습니다. 나는 한반도의 평화와 번영의 새 시대를 열기 위한 전인미답의 길을 걸어가는 동안 화해와 평화를 위한 “만남의 외교”를 강조하신 교황 성하의 메시지를 항상 기억했습니다. 나와 북한의 김정은 위원장은 지난달 평양에서 역사적인 ‘9월 평양공동선언’을 채택했습니다. 남·북한은 군사적 대결을 끝내기로 결정했습니다. 미국과 북한도 70년의 적대를 끝내고 마주 앉았습니다. 북한은 핵실험과 미사일 도발을 더 이상 하지 않게 되었고 한미 양국도 대규모 연합훈련을 중단했습니다. 만남과 대화가 이룬 결과입니다. 예수님은 증오를 없애고 화해를 낳기 위해 희생하셨습니다. 그리고 평화로 부활하셨습니다. 부활 후 제자들에게 “평화가 함께하길”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동안 남북이 만나고, 북미가 대화하기까지 많은 희생이 있었습니다. 이제 우리는 분단과 대결을 평화를 통해 번영으로 부활시킬 것입니다.교황청과 북한 교류도 더 활성화되길지난 9월의 평양 방문 때 한국 가톨릭을 대표하여 김희중 대주교께서 함께 가셨습니다. 남·북한 가톨릭 간의 교류를 위해서입니다. 교황청에서도 각별한 관심과 지원을 기울여 주시기를 바랍니다. 나아가 교황청과 북한의 교류도 더욱 활성화되기를 기대합니다.남북의 진정한 화해와 협력, 항구적 평화는 정치와 제도가 만들어낸 변화 이상이 필요합니다. 단지 경제적 이익을 나누는 것만이 아니라 서로가 형제처럼 아끼는 마음이 필요합니다. 나는 지난 9월 ‘사람 중심’의 국정철학을 기반으로 ‘포용국가’를 선언했습니다. 프란치스코 교황 성하의 “공동선과 진보와 발전을 단순히 경제적 개념으로서가 아니라, 궁극적으로는 사람을 중심으로 이해해야 한다”라는 말씀에 깊이 공감하고 있습니다. 가톨릭, 한반도의 든든한 동반자 돼 주길가톨릭은 폭력과 혐오, 차별과 착취, 무관심과 무관용, 불평등과 소외를 극복하기 위해 노력해왔습니다. 물질문명과 무한경쟁사회의 한 줄기 빛으로, 시대의 아픔을 포용하는 힘과 지혜를 가지고 있습니다. 가톨릭은 예수님이 이루시고자 했던 사회가 무엇인가를 고민하고 실천하고 있습니다. 포용을 추구하는 한반도의 든든한 동반자가 되어줄 것이라 믿습니다. 나와 우리 국민은 “모든 갈등에 있어 대화만이 유일한 해결책”이라는 교황 성하의 말씀을 마음에 깊이 새깁니다. 민주주의와 한반도의 항구적 평화, 포용국가를 향해 굳건히 나아갈 것입니다. 그 길에 교황 성하의 축복과 교황청의 기도가 언제나 함께하기를 바랍니다. cpbc2018.10.17
![[군종교구 사목교서] 모든 이를 섬기는 삶](//cpbc.co.kr/CMS/newspaper/2018/12/rc/741888_1.0_titleImage_1.jpg)
[군종교구 사목교서] 모든 이를 섬기는 삶군종교구 “내가 너희의 발을 씻었으면, 너희도 서로 발을 씻어 주어야 한다.”(요한 13,14)저는 금년의 사목표어를 “모든 이를 섬기는 삶”으로 정했습니다. 지난 2년간 우리는 ‘군의 복음화에 대한 열정’을 묵상하고 실천에 옮기려 노력해왔습니다. 그런데 ‘복음화’는 세상에 복음을 전해 사람들을 회개로 이끌어 하느님의 자녀로 만드는 일과 함께, 하느님의 자녀가 된 그리스도인들의 삶이 변화되어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그리스도를 닮아감에 있어 중심이 되는 것이 바로 ‘사랑에 기초한 섬김’의 삶입니다. 이 ‘섬김의 삶’은 나이, 직위, 학력, 재산, 성격, 출생지, 민족, 피부색 등 모든 차이를 초월하게 해줍니다. 친절하고 겸손하고 배려심 깊은 ‘섬김의 삶’을 모든 이에게 실천하도록 합시다. 그리고 이 어려운 삶을 기꺼이 실천할 힘을 성령님께 청하도록 합시다. 저는 금년의 사목표어인 “모든 이를 섬기는 삶”과 관련하여 군종사목에 직접 임하는 군종 사제들과 군종교구의 모든 교우에게 몇 가지를 요청하고 싶습니다. 군종사목의 목자이신 군종 사제들은 ‘사랑에 기초한 섬김’의 모범을 보이면서, 모든 군 가족들을 ‘돌보고 위해주는’ 삶을, 특히 영적으로 돌보아주는 삶을 더욱 충실히 해주시길 겸손히 요청합니다. 영적인 돌봄에서는 무엇보다 군 신자들에 대한 ‘계속 교육’에 관심을 가져주시기 바랍니다. 이 교육의 방법으로 기도생활로 인도하기, 성경공부 촉진하기, 성체성사를 더 가까이하는 삶으로 인도하기, 본당 공동체 안에서의 형제적 친교 촉진하기에 노력해주시기 바랍니다. 장병들에게 우선적 관심을 두면서, 그들의 아버지요, 형님이요, 친구요, 상담자로서 친절히 그리고 가까이 대하시고, 특히 오지나 어려운 환경에서 근무하는 장병들을 더욱 자주 찾아주시어 위로와 격려를 해주시길 요청합니다. 이것이 ‘현장을 중심으로 하고, 장병들에게 보다 가까이 가라’는 군 당국의 요청에도 응답하는 길이 됩니다. 이와 함께 하느님에 대해 또 영적인 데에 관심을 두는 장병들을 교리반으로 친절히 인도하여 주시길 요청합니다. 정성을 쏟는 만큼 그리고 힘을 쏟는 만큼 결실은 더 많고 더 크게 됩니다. 군종 사제들은 군 장교로서 모든 군인을 계급과 종교와 출신을 초월하여, 존경하고 예를 갖추어 주고 도움을 주어 ‘섬김의 자세’를 보여주시기 바랍니다. 신자들 편에서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모범과 말씀으로 가르치신 ‘사랑에 기초한 섬김의 삶’을 성실히 추구하시기 바랍니다. 이 세상 누구에게든 ‘상호 사랑’ 곧 형제애가 지닌 친절과 겸손과 배려의 자세를 늘 실천에 옮겨주시기 바랍니다. 이 섬김의 삶이 여러분을 ‘세상의 빛과 소금’으로 만들어줄 것입니다. 저는 우리 군 신자들이 군에서만이 아니고 사회와 국가 차원에서도 빛과 소금의 역할을 해주심에 대해 하느님께 감사드립니다. 평화신문2018.12.19
![[평신도 영성 나는 평신도다] (15)한국 교회 평신도 사도직의 현주소 3 : 쉬는 신자](//cpbc.co.kr/CMS/newspaper/2019/03/rc/748731_1.0_titleImage_1.jpg)
[평신도 영성 나는 평신도다] (15)한국 교회 평신도 사도직의 현주소 3 : 쉬는 신자신자들에게 영적 충만함 주고 있는가 신자들이 냉담하지 않게 하기 위해선 삶이 신앙으로 충만할 수 있도록 영적인 일을 우선해야 한다. 그것이 참 교리이고 참 소공동체이다. 강우일 주교가 서울 대방동본당 소공동체 모임을 체험하고 있다. 가톨릭평화신문 DB 요즘 쉬는 신자 문제가 교회의 중요한 화두로 떠오르고 있습니다. 현재 대다수 본당에서는 이 문제가 먼 산의 불이 아니라 발등의 불이 된 지 오래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 냉담 문제를 어떻게 풀어나가야 할까요. 우선 냉담의 원인이 무엇인지에 대해 파악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원인을 알아야 해법을 알 수 있으니까요.우선 현행 교리 방식의 문제를 살펴볼 수 있겠습니다. 냉담은 머리로만 배우는 교리교육 방식, 혹은 구체적으로 종교에 대해 배우지 못하고 가족과 이웃의 권유로 자신도 모르게 대충 종교를 가지게 되어서 일어나는 현상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주입식 교리교육 정답일까현재 교리교육은 주입식 교육에서 아직 탈피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성경과 교리를 공부로 가르칩니다. 이렇게 공부한 것이 얼마나 머리에 오래 남아 있겠습니까. 과거 농경사회에서는 한번 공부를 하면, 그것이 평생 머리에 남아있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배우는 것이 극히 한정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지금은 농경사회가 아닙니다. 매일 수없이 많은 정보가 계속 쏟아져 나오고 있으며, 우리의 머리는 그 정보들을 매일 흡수하느라 피로도가 심합니다. 그러다 보니 어떤 것이 머리에 들어와도 다른 것으로 이내 대체가 됩니다.또 한 가지 말하고 싶은 것은 끼리끼리 문화입니다. 대부분의 예비신자들은 가까운 이웃이나 친지의 권유로 성당에 나오게 됩니다. 그런데 세례를 받은 후에도 그 권유자를 중심으로 모임을 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물론 성당에 인도해 주신 분만큼 감사한 분이 또 있겠습니까. 하지만 평신도 신앙의 중심은 삼위일체이신 하느님이어야 합니다. 성당이 친목 모임 비슷하게 흐르다 보니 그 친목의 끈이 끊어지면 갈 곳이 없어집니다. 성당의 모든 친목은 하느님과의 친목을 위한 것입니다. 이러한 친목은 뜨겁습니다. 이 뜨거움을 가지고 있지 않기에 금방 차가워지는 것입니다. 쿨(cool)해지는 것입니다. 예비신자 분들이 영적으로 차가운 겨울을 보내지 않도록 우리는 뜨거운 옷을 만들어 드려야 합니다. 그 두툼한 옷을 만들어 드리는 작업이 바로 참 교리입니다. 참 소공동체입니다.또 세례받은 직후에 바로 과다한 봉사활동에 뛰어들어 자신의 기력을 소진시키는 이들이 있습니다. 이것도 문제입니다. 봉사는 영적으로 어느 정도 성장한 이후에 해야 합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닮으려고 신앙생활을 하는 것이지, 일하려고 신앙을 선택한 것이 아닙니다. 일은 종교가 없는 사람도 잘합니다. 우리는 영적인 일을 해야 합니다. 일이 중요하지 않다는 말이 아니라, 일이 우선이 아니라 영이 우선이라는 말입니다.종교의 불완전함에서 오는 불만냉담의 또 다른 원인은 종교적 삶에 대한 불만입니다. 특히 일부 종교 지도자들의 나약한 모습을 통해 불만과 불평이 쌓이고 이를 통해 종교적 냉담이 생겨날 수 있습니다. 실제로 기성 종교의 소소한 생활에 대한 제한, 기성 종교의 불완전함 등에서 오는 불만들은 무의식적으로 종교적 불만으로 바뀔 수 있습니다. 이처럼 종교적 냉담 중 상당 부분은 종교에 대한 불만 속에서 나타납니다.이렇게 되면 평온함을 찾기 힘들어집니다. 성당에 가도 추운 느낌을 받습니다. 뜨거워야 하는데 그렇지 않습니다. 이렇게 냉담에 빠지게 되면 일상에서 종교적 충만함을 경험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기도, 미사 참여와 같은 종교적 활동이 고통스럽고 지루한 시간이 되고 맙니다. 복음화는 불가능해지죠. 그리고 온통 죄의식에만 사로잡혀서 평화를 누리기 힘듭니다.죄의식 또한 쉬는 신자들이 성당에 나오지 않는 이유 중 하나입니다. 나쁜 짓만 하며 살려고 하는 사람이 과연 얼마나 되겠습니까. 1년 내내 죄를 짓겠다고 다짐하며 사는 사람이 얼마나 있겠습니까. 죄의식에 너무 사로잡히면 안 됩니다. 물론 우리 각자에게는 부족한 점이 있지만, 대부분 평신도는 열심히 잘 살아보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그렇게 80~90% 열심히 살려고 한 것을 감사하고 다짐하면 되는데 고작 10% 정도 잘못한 것에 매여서 살아가는 것이 우리입니다.이제 하느님에게서 떨어진 삶이 아닌, 하느님과 함께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평신도는 세상에 외롭게 던져진 존재가 아닙니다. 하느님에 의해 축성된 하느님의 자녀, 하느님의 백성입니다. 이제, 평신도들이 세상 안에서 어떤 삶을 살아야 하는지에 대해 좀 더 구체적으로 살펴보겠습니다.정치우(안드레아, 새천년복음화학교 교장) cpbc2019.03.20

‘이동 약자를 위한 대동여지도’ 나왔다무장애 여행지도 만드는 ‘위에이블’ 대표 송덕진씨 송덕진 ‘위에이블(Weable)’ 대표가 직접 만든 무장애 여행지도를 펼쳐보이고 있다.장애인을 위해 ‘지도’를 만드는 청년이 있다. 비영리 스타트업 ‘위에이블(Weable)’을 운영하는 송덕진(가브리엘, 28, 인천교구 효성동본당)씨다.송씨가 만드는 지도는 ‘무장애 여행지도’. 장애인이나 이동 약자가 접근하기 쉬운 상점과 문화공간을 표시한 지도다. 상점 입구에 휠체어가 진입 가능한 경사로가 설치돼 있는지, 장애인 화장실이 있는지, 출입문은 어떻게 열리고 닫히는지 등을 조사한 후 이용이 편리한 장소를 선별했다. 그야말로 ‘이동 약자를 위한 대동여지도’다. 송씨는 외할머니가 돌아가신 일을 계기로 무장애 여행지도를 만들기 시작했다. 늘 외할머니와 여행을 가고 싶었지만, 거동이 불편한 외할머니를 모시고 갈 여행지가 막상 떠오르지 않았다. 하루 이틀 미루던 꿈은 외할머니가 돌아가시면서 결국 이뤄지지 못했다. 송씨는 깊이 후회했다.송씨는 휠체어가 갈 수 있는 여행지도를 만들기로 하고 무작정 제주도로 떠났다. 무장애 여행지도 프로젝트의 시작이었다. 팀원 네 명과 휠체어를 밀며 한 달간 제주도를 누볐다. “SNS에서 추천하는 제주도 맛집과 관광지를 방문하고 세세히 살폈어요. 사업주들과 대화하면서 장애인을 위한 서비스가 갖춰져 있는지도 알아봤지요. 평소엔 신경 쓰지 않았던 문턱 높이나 입구 넓이 등을 보면서 장애인들의 일상에 얼마나 장애가 많은지 알겠더라고요.”이후 송씨는 본격적으로 서울 지역을 조사하기 시작했다. 본가인 인천에서 서울까지 혼자 휠체어로 이동하며 불편한 점을 메모했다. 대학교 장애인권동아리 학생들과 만나 그들의 고민도 들었다. 그렇게 탄생한 지도가 ‘무장애 여행지도 성수편’. 여기서 그치지 않고 송씨는 성동구자원봉사센터, 기업체와 협업해 최대 15cm 높이의 삼각형 경사로를 만들어 상점에 설치했다. 주문 제작부터 설치까지 송씨의 손을 거친 경사로는 성동구에 10개, 서대문구에도 9개가 있다.난관도 많았다. 상점 입구에 경사로를 무료로 설치해 주겠다고 해도 거절당하는 경우가 많았다. “처음에는 흔쾌히 허락해주셨던 분들도, 막상 설치하려고 하면 거절하시는 경우가 허다했어요. 환경을 바꾸는 것도 중요하지만, 장애인에 대한 인식을 개선하는 게 먼저라는 생각이 들더라고요.”송씨는 좌절할 때마다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마태 19,19)는 복음 말씀을 떠올렸다. 송씨에게 성경은 가치관과 인성을 만들어준 존재. 오래도록 성당에서 봉사하신 부모님을 보며 남을 돕는 일을 직업으로 삼고 싶다는 꿈도 생겼다. 그는 앞으로 서울 모든 지역의 무장애 여행지도를 만들 생각이다. 더 나아가 ‘유니버설 디자인(universal design, 성별, 인종, 국적, 장애 유무를 초월한 디자인)’인 점자 메뉴판이나 점자 엘리베이터 버튼 등을 상점에 제안하는 게 목표다.송씨는 자신이 하는 일이 장애인만이 아닌 모든 이를 위한 일이라고 강조했다. “인간은 누구나 신체 기능이 떨어지기 마련이에요. 장애인이나 이동 약자를 안타까운 시선으로 바라봐서는 안 되는 이유죠. ‘장애가 내 앞길을 막을 수 없다’고 생각하는 많은 이를 위해 저는 도전을 멈추지 않을 거예요.”전은지 기자 eunz@cpbc.co.kr cpbc2019.01.18
머리말과 예수님 승천(사도 1, 1-11)](//cpbc.co.kr/CMS/newspaper/2019/01/rc/743473_1.0_titleImage_1.jpg)
[이창훈 위원의 사도행전 이야기](2)머리말과 예수님 승천(사도 1, 1-11)"갈릴래아 사람들아, 왜 하늘을 보며 서 있느냐"머리말과 주님 승천 이야기로 시작하는 사도행전은 '성령의 복음'이라고 부를 정도로 성령에 힘입은 사도들의 복음 선포 활동을 다룬다. 그림은 조토(1266~1337)작 '주님 승천' 프레스코화.머리말(1,1-5) 사도행전은 루카복음과 마찬가지로 머리말로 시작합니다. 머리말이 보고서 형태를 띠는 것도 루카복음과 동일합니다. 보고서의 수신인이 ‘하느님을 사랑하는 사람’ 또는 ‘하느님을 사랑하려는 사람’이라는 뜻을 지닌 ‘테오필로스’라는 사실도 루카복음과 똑같습니다. 사도행전의 저자가 루카복음의 저자와 같다고 보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저자는 머리말을 시작하면서 “첫 번째 책에서 저는 예수님의 행적과 가르침을 처음부터 다 다루었다”(1,1)라고 씁니다. 첫 번째 책이란 바로 루카복음을 말하지요. 이어서 처음부터 다 다루었다는 그 내용을 이렇게 소개합니다. “예수님께서 당신이 뽑으신 사도들에게 성령을 통하여 분부를 내리시고 나서 승천하신 날까지의 일을 다 다루었습니다.”(1,2) 루카복음에서 다룬 내용을 한 문장으로 압축하고 있는 것입니다. 저자 루카는 계속해서 예수님께서 다시 살아나신 후의 행적과 가르침을 전하는데, 세 가지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 1) 당신이 살아 계심을 여러 증거로 사도들에게 드러내셨다. 2) 40일 동안 사도들에게 여러 번 나타나시어 하느님 나라에 관한 말씀을 해주셨다. 3) 예수님께서는 사도들에게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나에게서 들은 대로 아버지께서 약속하신 분을 기다려라”고 지시하시면서 “요한은 물로 세례를 주었지만, 너희는 며칠 뒤에 성령으로 세례를 받을 것”이라고 말씀하셨다.(1,3-5) 이 서론 부문에서 특별히 눈여겨봐야 할 부분이 있습니다. 성령에 대한 언급입니다. 루카는 이미 자신이 쓴 복음서의 첫 부분에서부터 성령을 이야기합니다. 세례자 요한의 탄생과 예수님의 탄생이 모두 성령과 관련됩니다. 그런데 차이가 있습니다. 세례자 요한은 “어머니 태중에서부터 성령으로 가득 찰 것”(루카 1,15)이지만 잉태 자체가 성령에 의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반면에 예수님의 경우는 잉태 자체가 성령의 힘에 의한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지극히 높으신 분 곧 하느님의 아들이라고 불리게 됩니다.(루카 1,35) 나아가 예수님께서 요한에게서 세례를 받으시고는 성령으로 가득 차 돌아오셨고 성령에 이끌려 광야로 가셨습니다.(루카 3,22; 4,1) 광야에서 유혹을 물리치신 후에 성령의 힘을 가득히 받고 돌아오시어 공생활을 시작하십니다.(루카 4,14) 이렇게 예수님은 성령과 떼려야 뗄 수 없는 분이십니다. 그런데 루카는 사도행전에서 예수님께서 사도들에게 분부하실 때 “성령을 통해서 분부를 내리셨다”(사도 1,2)고 기록합니다. 복음서에는 성령을 통해서 사도들에게 분부를 내리셨다는 표현을 쓴 적이 없었는데 사도행전을 시작하는 머리말에 이 표현을 쓰고 있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요? 이 표현을 통해서 루카는 예수님 생전에 사도들을 파견하신 예수님의 분부가 사실은 성령을 통해서임을 드러내면서 사도행전에서 사도들이 펼치게 될 활동 또한 성령을 통한, 성령의 능력에 힘입은 활동임을 제시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성경학자들이 사도행전을 ‘성령의 복음’이라고 부르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이에 대해서는 앞으로도 계속 살펴보게 될 것입니다. 40일이라는 숫자 또한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성경에서 40은 충만함, 완성의 뜻을 지닙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에서 40년 동안 헤맨 것이 그렇고, 엘리야가 밤낮으로 40일을 걸어 하느님의 산 호렙에 도달한 것도 그렇고, 예수님께서 40일 동안 광야에서 유혹을 받으신 것도 그렇습니다. 따라서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40일 동안 사도들에게 여러 번 나타나시어 하느님 나라에 관한 말씀을 해주셨다는 것은 사도들이 앞으로 선포해야 할 하느님 나라에 관해 충분히 말씀해 주셨다는 의미로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사도들에게 아직 부족한 것이 있었습니다. 사도들은 앞으로 자신들이 선포하고 증언해야 할 하느님 나라에 관해서는 충분히 배워 알았지만 이를 실행할 동력이, 힘과 권한이 없었습니다. 예수님에게서 파견됐을 때는 예수님에게서 힘과 권한을 받았지만, 예수님께서 떠나가시면 그 힘과 권한을 받을 곳이 없어지게 됩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며칠 뒤에 ‘성령으로’ 세례를 받을” 때까지 기다리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의 승천(1,6-11) 루카는 예수님의 승천을 전하기에 앞서 사도들과 예수님이 주고받은 질문과 답변을 전합니다.(1,6-8) 사도들은 “주님, 지금이 주님께서 이스라엘에 다시 나라를 일으키실 때입니까?”하고 묻습니다.(1,6) 이스라엘 백성은 메시아가 오면 이스라엘에 튼튼한 나라를 다시 일으키실 것이라고 여겼습니다. 사도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예수님을 메시아로 여긴 사도들은 그 나라에서 높은 자리를 차지하려고 다투기까지 했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으로 이런 기대는 물거품이 됐지만, 다시 살아나신 주님께서 자기들과 함께 계시니 지금이야 바로 그때가 아닌가 하고 여쭐 만한 셈이지요. 하지만 예수님의 답변은 달랐습니다. 우선, “그때와 시기는 아버지께서 당신의 권한으로 정하셨으니 너희가 알 바 아니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에 사도들은 다소 실망했을지 모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계속해서 “성령께서 너희에게 내리시면 너희는 힘을 받아 예루살렘과 온 유다와 사마리아, 그리고 땅끝에 이르기까지 나의 증인이 될 것이다”(1,7-8)라고 덧붙이십니다. 사도들은 이 말씀에 또 한 번 힘을 잃었을지 모르겠습니다. 사도들은 전에 예수님을 따라다녔을 때에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라고 예수님한테서 파견된 적이 있었습니다. 그때는 이 마을 저 마을로 돌아다녔습니다.(루카 9,1-6; 10,1-12) 그런데 이제는 유다와 사마리아는 물론 땅끝까지 다니며 예수님의 증인이 돼야 할 운명이 된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이 말씀을 끝으로 하늘에 오르십니다. 구름에 감싸여 사도들의 시야에서 사라지고 맙니다.(1,9) 사도들이 하늘을 유심히 바라보고 있는데 흰옷을 입은 두 사람이 그들 곁에 서서 “갈릴래아 사람들아, 왜 하늘을 쳐다보고 서 있느냐?…저 예수님께서는 …하늘에 올라가신 모습 그대로 다시 오실 것이다”라고 말합니다.(1,9-11)생각해 봅시다주님의 나라를 이스라엘에 다시 일으켜 세워 주실 것이라고 믿었던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하늘에 오르시어 구름 속으로 사라지시는 모습을 바라보는 사도들의 마음은 어떠했을까요? 주님을 따라 같이 하늘로 올라가고픈 심정이었을까요? 아니면 다 이루었다고 생각했던 그들의 꿈이 물거품이 되는 것을 허망하게 바라보는 심정이었을까요? 그런 사도들에게 “갈릴래아 사람들아, 왜 하늘을 쳐다보고 서 있느냐?…”는 말은 어떤 의미를 지닐까요? 혹시 우리 삶에서 이와 비슷한 일을 겪는다면 우리는 어떻게 할 것인지요? 우리 또한 유심히 하늘을 쳐다보고만 있을 것인지요? cpbc2019.01.09
대부모, 신앙의 모범 전하는 영적 부모](//cpbc.co.kr/CMS/newspaper/2018/07/rc/727521_1.0_titleImage_1.jpg)
[성사풀이](7)대부모, 신앙의 모범 전하는 영적 부모 신앙 안에서 새로 태어난 신자는 신앙심이 깊은 신자에게 도움과 보살핌을 받을 필요가 있다. 사진은 세례식에서 대부모가 대자녀에게 세례초를 건네고 있는 모습. 가톨릭평화신문 DB 보례와 세례받을 때 받는 인호보례(補禮)란 대세(임종 세례)를 받은 사람이 건강을 회복한 경우, 집전자가 물 붓는 예식을 제외한 나머지 예식 부분을 거행하는 것이다. 인호(印號)는 그리스도께 속해 있음을 드러내는 지워지지 않는 영적 표지다. 위급한 상황에서 물로 씻는 예식만 받은 대세자는 ‘세례 보충 예식’(보례)을 통해 신자로서 완전한 권리와 의무를 지니게 됩니다. 따라서 죽을 위험 중에 세례를 받은 이가 건강이 회복됐다면, 신자들은 그가 ‘세례 보충 예식’을 받도록 도와줘야 합니다. 또 세례 집전자는 물로 씻는 부분을 제외한 기타 예식을 성실히 거행해 줘야 합니다. 대세자는 ‘세례 보충 예식’을 받기 전에 적절한 교리 교육을 받아야 합니다.(「어른 입교 예식」 282항)그리스도인은 세례성사를 통해 성사의 은총을 받을 뿐만 아니라 성사의 인호, 곧 소멸하지 않는 영적 표지도 받습니다. 이 인호로 그리스도인은 각기 다른 신분과 역할에 따라 그리스도를 머리로 하는 지체를 이루게 됩니다.인호에 대한 교리는 취소될 수 없는 하느님의 선택과 부르심에 바탕을 두고 있습니다. 성경에서는 하느님께서 인간의 불성실에도 끝까지 성실하시며, 인간에 대한 당신의 선택과 부르심을 결코 취소하지 않는 분이심을 선포합니다.구약 성경에서 하느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과 맺으신 계약을 그들의 죄와 잘못에도 결코 취소하지 않으셨고, 신약 성경에서는 비록 인간이 그리스도를 거부하였지만, 십자가와 부활을 통해 다시 자비를 베푸셨습니다. 그러므로 세례 때 우리가 받은 인호는 우리를 끝까지 지켜 주시고 보호하시겠다는 하느님 사랑의 표지입니다.이 인호는 세례성사, 견진성사, 성품성사 안에서 주어지고 결코 소멸하지 않습니다. 이 표지는 그 어떠한 죄로도 지워지지 않으며, 한 번 받은 세례, 견진, 성품 성사는 다시 받을 수 없습니다.(「가톨릭교회 교리서」 1121, 1272항)세례성사의 효과와 은총세례성사를 통해 우리는 모든 죄를 용서받으며, 하느님의 자녀로 태어나 성령 안에서 새사람이 되어 살아갈 수 있는 은총을 받고, 그리스도와 또 그분의 몸인 교회와 하나가 된다. 은총은 하느님께서 우리가 당신의 자녀가 되어 구원받을 수 있도록 베푸시는 호의와 도움을 말합니다. 세례성사를 받은 이들은 원죄와 본죄, 모든 죄벌까지도 용서받아, 죄의 중대한 결과인 하느님과의 단절이 말끔히 해소됩니다. 그래서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을 가로막을 아무런 장애도 남아 있지 않게 됩니다.세례는 새 신자를 하느님의 자녀가 되게 해 그리스도의 지체로 새롭게 태어나게 합니다. 또 세례는 성화 은총을 줍니다. 성화 은총은 하느님을 믿고 바라며 사랑하는 ‘향주덕’을 키워 성령의 이끄심에 따라 살아가고 행동할 수 있게 해 줍니다.아울러 세례는 그리스도와 또 그분의 몸인 교회와 하나가 됨으로써 다른 성사들을 받을 수 있는 자격을 갖게 하고, 그리스도와 함께 하느님 은총을 누릴 수 있게 합니다.그래서 하느님 백성인 교회 공동체의 일원이 된 그리스도인들은 교회가 그리스도께 받은 세 가지 직무, 곧 사제직, 예언자직, 왕직에 참여할 수 있게 됩니다.(「가톨릭교회 교리서」 1262~1274항)성화 은총(聖化恩寵)은 성화 활동의 샘이 되는 은총으로, 세례로써 받은 그리스도의 은총을 말합니다.이외에도 상존 은총과 조력 은총으로 나누어집니다. 상존 은총(常存恩寵)은 인간에게 하느님의 생명을 주어 새로운 상태에 항상 있게 한다는 뜻입니다.조력 은총(助力恩寵)은 회개의 시작이나 성화 활동의 과정에서 하느님의 개입으로 새롭게 주어지는 은총을 말합니다. 이는 선을 행하고 악을 피하도록 돕는 은총으로 ‘도움의 은총’이라고도 부릅니다.대부모의 조건과 역할대부모의 자격은 다음과 같다. △대부모의 임무를 수행할 적성과 의향을 가진 사람 △만 14세 이상으로 견진성사를 받은 사람 △신앙생활을 올바르게 하고 맡은 임무에 맞갖은 생활을 하는 사람 △합법적으로 부과되거나 선언된 교회법적 형벌로 제재받지 않은 사람 △세례자의 부모가 아닌 사람 △소속 장상의 허가를 받은 성직자나 수도자.대부모는 마치 교회의 후견인으로서 역할을 합니다. 곧 대자녀가 세례를 받는 데 도움을 주고, 신앙 교육과 신앙생활을 도와주며, 실생활에서도 그리스도인으로서 모범을 보여주는 등 영적 부모로서 역할을 수행하는 것입니다.세례를 받는 사람은 대부와 대모 가운데 한 사람으로 충분하지만, 대부모를 모두 정할 수도 있습니다. 한국 교회에서는 일반적으로 남자일 경우는 대부만을, 여자일 경우는 대모만을 정하고 있습니다. 정리=리길재 기자 teotokos@cpbc.co.kr cpbc2018.07.17
![[교부들의 사회교리] (7)성체성사의 사회적 특성](//cpbc.co.kr/CMS/newspaper/2019/01/rc/744089_1.0_titleImage_1.jpg)
[교부들의 사회교리] (7)성체성사의 사회적 특성 가난한 이들에게 베푸는 사랑의 양식 최원오 교수 “태양에 따라 이름을 붙인 날(일요일)에 도시들이나 바깥 여러 지역에 사는 사람들이 모두 모여 공동체 모임을 가집니다. 우선, 시간이 허락하는 대로 사도들의 회고록들과 예언자들의 책들을 읽습니다. 독서가 끝나면 장상은 말로 훈계하고 이러한 훌륭한 행위들을 본받을 것을 권합니다. 그러고서 우리는 모두 함께 일어서서 우리의 기도를 바칩니다. 기도가 끝나면, 위에서 이미 말한 바와 같이 빵과 포도주와 물이 봉헌되며 장상은 정성을 다하여 기도와 감사를 드리고 백성은 아멘 하면서 동의를 표합니다. 성찬의 음식은 모든 사람에게 나누어지고 부제들은 그것을 참석하지 않은 사람들에게 날라다 줍니다. 부유한 사람들과 원하는 사람들은 각자 원하는 대로 그들이 내놓고 싶은 그들 자신의 소유물을 바치고, 장상은 모여진 것을 맡아 고아들, 과부들, 병 또는 다른 이유로 가난한 사람들, 묶인 이들과 다른 지방 출신의 나그네들을 도와줍니다. 한마디로 그는 궁핍한 사람들을 모두 보살펴줍니다.”(유스티누스, 「첫째 호교론」 67,3-6. 유충희 옮김) 가장 오래된 성찬 교부 문헌 평신도 교부 성 유스티누스는 150년경 로마 교회의 성찬에 관한 매우 소중한 기록을 「첫째 호교론」에 꼼꼼하게 남겼다. 네 복음서가 전해주는 최후의 만찬에 관한 기록과 사도 바오로의 코린토 1서 한 대목을 제외하면 성찬에 관한 상세한 증언이 보존된 가장 오래된 교부 문헌이다. 유스티누스의 이 진술은 오늘날 가톨릭교회가 드리는 미사의 핵심 요소들과 거의 일치한다. 주님의 부활을 기념하여 주일마다 함께 모여 미사를 드렸는데, 성경 봉독이 끝나면 장상이 강론했다. 보편 지향 기도를 바치고 나면 빵과 포도주와 물의 봉헌이 이어졌고, 장상이 정성을 다해 감사 기도를 드리면 신자들은 아멘이라고 응답했다. 모든 이가 성찬의 식탁에서 축성된 음식을 나누었으며, 참석하지 못한 사람들에게는 부제가 일일이 날라주었다고 한다. 성찬과 가난한 사람들 특히, 미사 때마다 힘닿는 대로 가진 것을 내어놓고 모아서 고아와 과부, 병자들과 가난한 이들, 갇힌 이들과 떠돌이들에게 나누어주었다. 보잘것없는 이들과 먹고 마시기를 즐기시던 주님의 성찬에서 가난한 사람들을 우선적으로 배려하던 성체적 삶에 관한 빛나는 증언이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성체성사의 사회적 특성을 강조하면서 ‘모령성체’(冒領聖體)를 경고하기까지 했다. “우리는 성체성사의 신비가 사회적 특성을 지니고 있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가난한 이들과 고통받는 이들에게 무관심하거나 다양한 형태의 분열과 증오와 불평등에 동의하는 이들은 모령성체를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올바른 마음가짐으로 성체를 정기적으로 모시는 가정은 형제애, 사회적 양심, 어려움에 처한 이들을 위한 헌신에 대한 열망을 강화합니다.”(「사랑의 기쁨」 186) 성체성사는 의롭고 완전한 인간들에게 내리시는 상급이나 보상이 아니라 가난하고 나약한 이들에게 거저 베풀어주시는 사랑의 영약이며 양식이다.(「복음의 기쁨」 47) 이 사랑의 식탁에서 주님께서 기쁘게 맞으시는 주빈은 가난하고 헐벗고 억눌린 사람들임을 교부들은 잊지 않았다.최원오(빈첸시오, 대구가톨릭대 유스티노자유대학원장) cpbc2019.01.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