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활속의 복음] 천주의 성모 마리아 대축일 - 우리가 찾는 사람이기를](//cpbc.co.kr/CMS/newspaper/2018/12/rc/742347_1.0_titleImage_1.jpg)
[생활속의 복음] 천주의 성모 마리아 대축일 - 우리가 찾는 사람이기를 성탄 축제의 여운이 채 가시기도 전에 새로운 한 해가 선물처럼 주어졌습니다. 새해를 여는 우리의 마음을 어떻게 다잡아야 할지 주저하는 우리에게, 오늘 복음은 그 실마리를 알려주려는 듯 우리를 다시금 성탄의 신비 속으로 인도합니다. “베들레헴으로 가서 주님께서 우리에게 알려 주신 그 일, 그곳에서 일어난 일을 봅시다.”(루카 2,15) 목자들은 천사가 일러준 대로 베들레헴으로 가서 인류의 구세주를 ‘찾아내야’ 했습니다. 그들은 찾았고, 발견했습니다. 구세주를 발견한 그들은 기쁨으로 가득 찼습니다. 하느님께서 이루신 놀라운 일을 목격했기 때문입니다. 이 이야기는 단순히 2000여 년 전 밤을 새워 양 떼를 지키던 목자들에게 일어난 일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해마다 성탄이 되면 교회는 이 복음을 묵상하며, 우리 각자의 삶을 찾아오신 하느님, ‘당신 종의 비천함을 굽어보시고 큰일을 하신 전능하신 분’(루카 1,48-49 참조)을 기억하도록 합니다. 깨어 기다리는 사람 오늘 복음 말씀은 우리가 목자들처럼 우리를 찾아오신 구세주를 발견하기 위해 깨어 기다리는 사람, 찾는 사람이 되라고 초대합니다. 성경에서 구세주를 발견한 이들은 ‘길 위의 사람들’이었습니다. 동방의 박사들(마태 2,1-12)과 목자들(루카 2,8-20), 그들은 안주하지 않고 찾는 사람, 깨어 기다리는 사람이었습니다. 2000년 전 그러하셨던 것처럼, 하느님께서는 우리 각자를 찾아오셨습니다. 우리의 삶 어딘가에 숨어 계십니다. 그분께서 모습을 드러내지 않으시는 이유는 우리와 진정한 자유 안에서 사랑의 관계를 맺기를 바라시며, 그러기 위해 우리가 그분을 찾아 떠나기를 바라시기 때문입니다. 그분을 찾아 떠난 사람만이 자유와 사랑을 경험할 수 있으며, 그분과 인격적 관계 안으로 들어설 수 있기 때문입니다. 신앙은 맹목적인 순종이 아닙니다. 하느님을 찾고 자기 자신을 찾는 여정입니다. 그 길 위에서 하느님의 얼굴과 자신의 얼굴을 발견해가는 것입니다. 그분을 인격적으로 만나 자유와 사랑을 경험하는 것이며, 관계 안에서 성장하는 것입니다. 거룩한 ‘신성’에 참여 성탄은 ‘하늘이 열림’을 기억하고 기념하는 축제입니다. 그 하늘은 우리의 일상 안에, 우리의 존재 안에 열렸습니다. 하느님께서 무한한 거리를 뛰어넘어 비천한 인간이 되어 오심으로, 인간의 모든 조건을 당신 것으로 하심으로, 우리가 그분을 찾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오늘 우리가 지내는 천주의 성모 마리아 대축일은 예수님의 ‘신성’ 곧 그분께서 참 하느님이심에 대한 교회의 고백을 새롭게 하는 날인 동시에, 우리가 신앙으로 하느님의 거룩하고 고귀한 자녀로 새로 태어나 그 거룩한 ‘신성’에 참여할 수 있게 되었음을 기념하는 날입니다. 새로 주어진 한 해가 ‘짐’이 아닌 ‘선물’일 수 있도록, 새해 첫날인 오늘이 모두에게 평화와 화해의 날일 수 있도록, 서로가 서로에게 ‘저주’가 아닌 ‘축복’일 수 있도록, 서로 축복을 기원하는 하루이기를 소망합니다.한민택 신부 한민택 신부 (수원가톨릭대 교수, 이성과신앙연구소 소장)cpbc2018.12.26
![[이창훈 위원의 사도행전 이야기] (22) 복음이 사마리아에 전파되다Ⅰ (8,4-25)](//cpbc.co.kr/CMS/newspaper/2019/06/rc/756205_1.0_titleImage_1.jpg)
[이창훈 위원의 사도행전 이야기] (22) 복음이 사마리아에 전파되다Ⅰ (8,4-25)멸시의 땅, 사마리아에 전해진 복음 예루살렘 교회에 불어닥친 박해는 오히려 유다인들이 멸시하던 사마리아에 복음이 전해지는 계기가 된다. 사마리아 사람들은 예수님에 관한 복음을 받아들이고 구원의 기쁨으로 넘쳐난다. 사진은 사마리아 도시 스켐의 전경. 스켐은 요한복음 4장에 나오는 시카르로 추정되는 곳으로 ‘야곱의 우물’이라고 불리는 유적이 있다. 박해를 피해 흩어진 사람들 가운데 필리포스가 사마리아에 복음을 전하고 예루살렘에 있던 사도들도 사마리아로 내려옵니다. 그 이야기를 살펴봅니다. 필리포스의 사마리아 복음 선포(8,4-8)박해로 흩어진 예루살렘 교회 신자들은 남모르게 몸을 숨긴 것이 아니라 여기저기 다니며 말씀을 전합니다.(8,4) 일곱 봉사자 가운데 한 명인 필리포스는 사마리아의 고을로 내려가 그리스도를 선포합니다.(8,5) 군중은 “모두 한마음으로 그가 하는 말에 귀를 기울였다”(8,6)고 사도행전 저자는 전합니다. 그 이유는 크게 두 가지입니다. 그의 말이 울림을 주었고 그가 일으키는 표징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군중이 모두 한마음이 되어 어떤 사람의 말에 귀를 기울인다면, 그것은 그 사람의 말이 진실하고 사람들의 마음을 잡아끌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뿐 아니라 그 사람이 일으키는 표징을 보고 그 사람의 말이 믿을 만하다고 여겼기 때문일 것입니다. 필리포스가 일으킨 표징은 무엇일까요. 사도행전 저자는 “많은 사람에게 붙어 있던 더러운 영들이 큰소리를 지르며 나갔고, 또 많은 중풍 병자와 불구자가 나았다”(8,7)고 기록합니다. 이런 표징들은 전형적으로 예수님께서 일으키신 표징들입니다. 그 표징들은 바로 메시아 시대가 도래했음을 알리는 표징들입니다. 예수님께서 일으키신 이 표징들은 또한 사도들 특히 베드로를 통해서 계속됩니다.(5,15-16). 그리고 그 표징들이 이제 일곱 봉사자 가운데 한 사람인 필리포스를 통해서까지 드러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그 고을에는 큰 기쁨이 넘쳤다”고 사도행전은 전합니다.(8,8) 이 기쁨은 메시아 시대의 기쁨이요, 구원이 왔다는 기쁨이라고 학자들은 풀이합니다. 마술사 시몬의 등장(8,9-13)그런데 그 고을에는 시몬이라는 마술사가 살고 있었습니다. 그는 마술로 사마리아 사람들을 놀라게 하면서 자기가 큰 인물이라고 떠들어대고 있었습니다. 그는 오랫동안 마술로 사람들을 놀라게 했기 때문에 사람들은 “이 사람이야말로 ‘위대한 힘’이라고 하는 하느님의 힘이다” 하며 그의 말에 귀를 기울였습니다.(8,9-11)고대 세계에서는 마술로 사람들을 놀라게 하는 마술사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사도행전에서도 마술사 시몬 외에 바르예수라고 하는 마술사가 나옵니다.(13,6-8) 마술을 부리는 마술사 또는 요술사의 존재는 구약 시대에서부터 존재했습니다. 구약성경에는 마술 혹은 마술사라는 단어가 17번이나 나옵니다. 요술 또는 요술사라는 단어를 포함하면 42회나 언급됩니다. 주목할 것은 마술사 시몬이 사는 고을이 사마리아라는 사실입니다. 사마리아는 이스라엘이 솔로몬 임금 사후에 남유다와 북이스라엘로 갈라지면서 북 왕국 이스라엘의 수도가 된 도시 이름이자 북이스라엘 왕국 전체를 가리키는 지명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사마리아는 아시리아를 시작으로 바빌로니아 페르시아 등 이민족의 침입을 받으면서 이민족들의 문화와 다신 숭배 사상이 유입돼 이스라엘의 하느님께 대한 신앙의 순수함을 잃어버렸습니다. 사마리아의 이런 역사적 배경을 바탕으로 볼 때 마술사 시몬의 등장을 더 쉽게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유다인들은 그래서 사마리아인들을 좋지 않게 여겼고, 사마리아인들과 접촉하지 않으려고 했습니다. 이는 사마리아인들도 마찬가지였지요. 이런 사마리아 고을에 필리포스는 복음을 전했고 그곳 사람들은 구원의 기쁨으로 가득 찹니다. 구원의 기쁨에 넘친 그 고을 사람들은 하느님 나라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에 관한 복음을 전하는 필리포스를 믿게 되면서 세례를 받습니다. 마술사 시몬도 믿고 세례를 받지요. 그러면서 그는 필리포스 곁을 떠나지 않으면서 여러 표징과 큰 기적이 일어나는 것을 보고 놀라워합니다. (8,12-13)사도들과 마술사 시몬의 대면(8,14-25)“예루살렘에 있는 사도들은 사마리아 사람들이 하느님 말씀을 받아들였다는 소식을 듣고 베드로와 요한을 그곳에 보냈다”고 사도행전은 전합니다.(8,14) 베드로는 사도들 가운데 으뜸이었고, 요한은 예수님께서 가장 사랑하신 제자였습니다. 그렇다면 베드로는 다른 사도들의 협조나 승인을 받지 않고 독자적으로 사마리아로 내려갈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사도행전의 저자는 베드로와 요한이 독자적으로 행동한 것이 아니라 사도들에 의해 파견됐음을 분명히 합니다. 베드로가 사도들의 으뜸이지만 다른 사도들에 의해 파견되는 이 구절은 사도단의 단체적인 성격을 드러낸다고 할 수 있습니다. 베드로와 요한은 내려가서 사마리아 사람들이 성령을 받도록 기도합니다. 그들이 주 예수님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았지만, 그들에게는 아직 성령께서 내리지 않으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도들이 안수하자 그들은 성령을 받습니다. 예루살렘 교회에 내린 성령이 이제 사도들을 통해 사마리아인들에게도 내리게 된 것입니다.(8,15-17) 그런데 사도들의 안수로 사람들에게 성령이 내리는 것을 본 시몬은 사도들에게 돈을 갖다 바치면서 “저에게도 그런 권한을 주시어 제가 안수하는 사람마다 성령을 받을 수 있게 해주십시오” 하고 청합니다.(8,18-19) 말하자면 돈으로 성령을 사겠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돈으로 성직이나 성물을 사고파는 행위를 ‘시모니아’(simonia, 영어 simony)라고 하는데, 이 단어의 어원이 바로 마술사 시몬이 시도한 행위에서 비롯합니다. 시몬의 요청에 베드로는 이렇게 대답하지요. “그대가 하느님의 선물을 돈으로 살 수 있다고 생각하였으니, 그대는 그 돈과 함께 망할 것이오. 하느님 앞에서 그대의 마음이 바르지 못하니, 이 일에 그대가 차지할 몫도 없소. 그러니 그대는 그 악을 버리고 회개하여 주님께 간구하시오. 내가 보기에 그대는 쓴 쓸개즙과 불의의 포승 속에 갇혀 있소.” 그러자 시몬이 그런 일이 자신에게 일어나지 않도록 주님께 간구해 달라고 청하지요.(8,18-24) 베드로와 요한은 사마리아의 고을에서 주님 말씀을 증언하고 전파한 뒤에 예루살렘으로 돌아가면서 사마리아의 많은 고을에 복음을 전합니다.(8,25)생각해봅시다1. 사마리아 사람들이 필리포스에 의해 복음을 받아들이고 사도들을 통해 성령까지 받습니다. 신앙의 순수성을 잃었다고 유다인들에게서 멸시를 받던 사마리아에 복음이 선포되고 구원의 기쁨이 넘쳐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예루살렘을 넘어 땅끝까지 전파되는 첫 자리가 유다인들에게 멸시받던 사마리아입니다. 이것이 우리에게 주는 의미는 무엇일까요? 2. 복음이 선포되는 곳에는 그 복음을 순수한 마음으로 받아들이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마술사 시몬이 바로 그런 사람을 대표합니다. 그는 필리포스가 선포하는 말씀을 듣고 또 그가 일으키는 표징들을 보고 믿습니다. 하지만 그 믿음은 순수한 믿음이 아니라 자신의 사욕을 채우고자 하는 욕심이 들어 있는 믿음이었습니다. 마술사 시몬 이야기는 우리 믿음이 어떠한지를 성찰하게 해줍니다. 평화신문2019.06.25
![[하느님과 트윗을] (7)왜 마리아를 이토록 공경하나요?](//cpbc.co.kr/CMS/newspaper/2017/06/rc/686014_1.0_titleImage_1.jpg)
[하느님과 트윗을] (7)왜 마리아를 이토록 공경하나요?성경 근거로 초세기부터 마리아 공경하며 기도 봉헌 책 「하느님과 트윗을」 표지. 문 : 마리아가 하느님이 아니라면, 왜 마리아를 이토록 공경하나요. 답 : 마리아는 하느님의 어머니로 불립니다. 우리는 마리아를 공경하고 극진히 대합니다. 하느님이 굉장히 특별한 역할을 맡기시려고 마리아를 선택하셨기 때문이지요. 마리아는 성자의 어머니입니다. 마리아는 예수님을 잉태했을 때, “이제부터 과연 모든 세대가 나를 행복하다 하리니”(루카 1,48)라고 말했습니다.마리아 공경은 성경을 근거로 합니다. 마리아께 드리는 기도는 성경 구절에 바탕을 두고 있습니다. 대천사 가브리엘은 마리아에게 “은총이 가득한 이여, 기뻐하여라. 주님께서 너와 함께 계시다”(루카 1,28)라고 말했습니다. 마리아의 친척이었던 엘리사벳 역시 마리아를 “내 주님의 어머니”(루카 1,43)라고 불렀습니다. 예수님은 하느님이시므로 마리아는 ‘하느님의 어머니’이십니다. 그렇다고 해서 이 사실이 마리아를 여신으로 만드는 것은 아닙니다. 마리아는 언제나 전적으로 인간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마리아를 공경할 뿐입니다. 교회는 처음부터 마리아를 극진히 대했고 마리아에게 기도를 간청했습니다. 2세기 이레네오 성인은 마리아를 “우리의 변호자”라고 불렀습니다. 그는 또 마리아를 “둘째 하와”라고도 했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죄에 떨어진 타락의 결과에서 인류를 해방시키기 위해 둘째 아담으로서(1코린 15,47 참조) 오셨기 때문입니다. “거룩하신 천주의 성모님, 저희를 지켜 주시고 어려울 때 저희가 드리는 간절한 기도를 물리치지 마소서. 또한 온갖 위험에서 언제나 저희를 지켜 주소서. 영화롭고 복되신 동정녀시여”(성모님께 보호를 청하는 기도)라는 3세기부터 알려진 마리아께 드리는 기도는 이미 그때부터 그리스도인들이 마리아에게 열렬히 기도했음을 보여 줍니다.문 : 마리아는 죄를 지을 기회가 전혀 없었나요.답 : 먼저 하와 또한 원죄 없이 세상에 왔지만 하와는 하느님에 대한 불순종을 선택했습니다. 반면 마리아는 하느님에 대한 순명을 선택했습니다. 특히 천사가 마리아에게 주님의 탄생을 예고했을 때, 마리아는 “말씀하신 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루카 1,38)라고 대답했습니다. 이렇게 말하며 마리아는 하느님의 계획을 따르기로 선택했습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마리아는 죄를 짓지 않기를 ‘선택’한 것입니다.문 : 마리아의 발현에 대해 어떻게 생각해야 하나요.답 : 어떤 사람이 예수님, 마리아 또는 성인 중에 한 사람이 자기에게 나타났다고 주장할 때, 교회는 이것이 참으로 하느님이 일으키신 초자연적 사건인지를 결정하기 위해서 조사합니다. 만약 사실이라면, 그 발현은 믿을 만한 것으로 공인됩니다. 이는 누구나 기도하기 위해 그 특별한 장소를 방문하는 것이 허용된다는 것을 뜻합니다. 발현 가운데에서도 마리아의 발현이 가장 유명하지요. 예를 들어, 마리아는 1858년 루르드라는 프랑스 마을에서 14살이던 베르나데트 수비루에게 나타나셨습니다. 교회는 이 발현을 인정했고, 루르드에서 계속 기적이 일어나면서 루르드는 성모 순례의 중요한 장소가 됐습니다. 베르나데트는 수녀가 됐고 나중에 성녀로 선포됐지요. 교회에서 인정한 마리아의 발현은 파티마, 과달루페, 파리, 라살레트, 위스콘신에서 일어난 발현입니다. 누구든지 성모 마리아의 발현을 믿거나 믿지 않을 자유가 있습니다. 발현은 성경에 있는 공적 계시와는 달리 사적 계시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장소로 성지순례를 다녀와서 신앙이 성장한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러니 한번 성지순례를 해 보세요! 정리=맹현균 기자 maeng@cpbc.co.kr 평화신문2017.06.21
![[이창훈 위원의 사도행전 이야기] (3) 기도 그리고 사도단의 완성 (사도 1,12-26)](//cpbc.co.kr/CMS/newspaper/2019/01/rc/744196_1.0_titleImage_1.jpg)
[이창훈 위원의 사도행전 이야기] (3) 기도 그리고 사도단의 완성 (사도 1,12-26)하느님께서 뜻하신 부활의 증인 선출하다사도들을 포함한 예루살렘의 형제들은 예수님을 배반한 유다의 자리를 대신할 사도로 마티아를 뽑는다. 사진은 유다가 최후를 맞았던 피밭 ‘하켈 드마’(점선 안). 현재 그리스 정교회 수녀원이 있는 하켈 드마는 십자군 전쟁 전까지 실제로 아무도 살지 않은 황폐한 땅이었다.가톨릭평화방송여행사 제공예수님 승천 후 사도들은 예루살렘으로 돌아가 기도에 전념합니다. 그리고 배반한 유다를 대신해 마티아를 사도로 뽑습니다. 기도하는 사도들(1,12-14) 사도들은 예수님께서 승천하신 올리브산을 떠나 예루살렘으로 돌아와 그들이 묵고 있던 위층 방으로 올라갑니다. 루카는 올리브산에서 예루살렘까지가 안식일에 걸어 다닐 수 있는 거리만큼 가까웠다고 전합니다. 유다인들은 안식일에는 규정에 따라 1000 걸음 이상 걷지 말아야 했습니다. 어른의 한 걸음이 1m가 조금 안 된다는 점을 고려한다면, 올리브산에서 예루살렘까지 1㎞가 안 되는 거리인 셈입니다. 사도들이 올라간 위층 방, 그들이 묵고 있었다는 위층 방이 어디인지는 확실하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마지막 만찬을 드신 그 이층 방이라고 여기는 것이 자연스러울 수도 있지만, 그리스말 원문의 표현이 다릅니다. 그래서 우리말로도 최후 만찬을 했던 방은 “이층 방”으로, 여기에서는 “위층 방”이라고 다른 표현을 쓰고 있습니다. 짐작할 수 있는 것은 그 방이 꽤 컸으리라는 것입니다. 그 방에는 열한 사도만이 아니라 다른 이들도 함께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 방에서 함께 지낸 사람들은 “여러 여자와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와 그분의 형제들”(1,14)입니다. 여러 여자는 갈릴래아에서부터 예수님을 따라다니며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을 목격한 그 여자들일 것입니다.(루카 23,49) 마리아 막달레나, 헤로데의 집사 쿠자스의 아내 요안나, 수산나, 야고보의 어머니 마리아(루카 8,3; 24,10), 살로메(마르 16,2), 제베대오의 아들들의 어머니(마태 27,56)가 그들입니다. “그분의 형제들”은 누구를 가리킬까요? 마르코복음과 마태오복음을 보면 야고보, 요세(요셉), 유다, 시몬입니다.(마르 6,3; 마태 13,55) 그렇다면 위층 방에는 사도들을 포함해서 대략 20명이 함께 있었다는 얘기가 됩니다. 루카는 이들 모두가 “함께 한마음으로 기도에 전념하였다”(1,14)고 기록합니다. 모두가 한마음으로 바친 기도는 어떤 기도일까요? 루카는 예수님께서 승천하시기 전에 사도들에게 “아버지께서 약속하신 분” 곧 성령을 입을 때까지 예루살렘에 머물러 있으라고 당부하셨다고 전합니다.(루카 24,49) 또 사도들이 크게 기뻐하며 예루살렘으로 돌아가 줄곧 성전에서 하느님을 찬미하며 지냈다고 기록합니다.(루카 24,52-53) 이로 미루어 위층 방에서 바친 기도는 성령이 내리기를 청원하고 하느님을 찬미하는 기도라고 짐작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루카는 복음서에서는 사도들이 줄곧 성전에서 하느님을 찬미하며 지냈다고 쓰고는, 사도행전에서는 위층 방에서 기도에 전념하였다고 전합니다. 뭔가 앞뒤가 맞지 않은 것 같습니다. 혹시 어떤 의도가 있는 것은 아닐까요? 무슨 의도가 있는 것일까요? 우선은 이런 물음을 던져놓고 봅니다. 마티아를 사도로 뽑다(1,15-26) 루카는 이제 예수님을 배반한 유다를 대신할 사도를 뽑는 이야기를 전합니다. 이 이야기는 크게 두 부분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베드로가 나서서 이야기하는 부분(1,15-22), 베드로의 말이 끝나고 제비를 뽑아 마티아를 사도로 뽑는 부분(1,23-26)입니다. 루카는 “베드로가 형제들 한가운데 서서 말하였다”(1,15)고 하는데 “형제”란 예수님께서 수난 하시기 전에 베드로에게 당신을 부인할 것을 예고하시면서 “네가 돌아오거든 네 형제들의 힘을 북돋아주어라”(루카 22,32) 하고 말씀하셨을 때의 그 형제와 같은 뜻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베드로를 비롯한 사도들처럼 예수님을 믿고 따르던 이들, 남녀를 불문하고 그리스도인들을 가리키는 표현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베드로가 “형제 여러분…”(1,16) 하고 이야기를 시작하는 대목도 마찬가지입니다. 그 자리에 모인 형제들이 120명가량 됐다고 하는데 12란 숫자는 이스라엘 백성 12지파를 상징한다고 학자들은 봅니다. 베드로가 한 말 또한 두 부분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첫 부분은 유다의 최후에 관한 부분입니다.(1,16-19) 베드로는 유다가 “부정한 삯으로 밭을 산 뒤 거꾸로 떨어져 배가 터지고 내장이 모조리 쏟아졌다”면서 이 일이 예루살렘의 모든 주민에게 알려져 그 밭이 그들 지방 말인 아람 말로 ‘하켈 드마’ 곧 ‘피밭’이라고 불리게 됐다고 이야기합니다.(1,18-19) 둘째 부분은 유다를 대신할 사도를 뽑는 기준에 관한 내용(1,21-22)입니다. 베드로가 제시하는 기준은 두 가지로 볼 수 있습니다. 첫째는 예수님의 세례 때부터 승천 때까지 사도들과 줄곧 함께 지내면서 동행한 사람이어야 하고, 둘째는 사도들과 함께 예수님 부활의 증인이 되어야 하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베드로는 유다의 비참한 최후에 관한 일과 유다의 직무를 대신할 사도를 뽑는 일이 모두 “성령께서 다윗의 입을 통하여 예언하신 성경 말씀이 이루어져야 했기”(1,16) 때문이라며 시편의 두 구절을 인용합니다.(1,20) 하나는 “그들이 사는 곳은 황폐해지고 그들의 천막에는 사는 이가 없게 하소서”라는 시편 69편 26절의 말씀이고, 다른 하나는 “그의 직책은 남이 넘겨받게 하소서”라는 시편 109편 8절의 말씀입니다. 여기서 성경 말씀이 이루어지게 하는 분이 바로 성령이심을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는 앞으로 사도들이 펼치게 될 활동이 성령에 의한 활동임을 시사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베드로의 말이 끝나자 그 자리에 있던 이들은 유다를 대신해 사도직을 수행할 후보자로 두 사람을 내세웁니다. 그리고 이 두 사람 가운데서 유다를 대신해 사도직을 맡을 사람을 가리켜 달라는 기도를 바친 후 두 사람에게 제비를 뽑게 합니다. 마티아가 뽑혀 열한 사도와 함께 사도가 됩니다.(1,23-26) 생각해봅시다유다를 대신할 사도로 마티아를 뽑는 이야기는 공동체에서 지도자 또는 일꾼을 뽑을 때 어떻게 해야 하는지에 대한 좋은 본보기가 됩니다. 우선 필요한 것은 공동체를 위해 요구되는 지도자 또는 일꾼의 선발 기준입니다. 그 기준은 누가 보더라도 합당한 기준이어야 합니다. 다음으로는 그 기준에 맞는 후보자를 복수로 내세우는 것입니다. 세 번째로는 기도하는 일입니다. 기도의 내용은 우리가 바라는 사람을 뽑게 해달라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이 뜻하시는 사람을 뽑게 해달라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는 당사자들에게 맡기는 것입니다. 제비뽑기는 공동체 안의 특정한 사람이나 계파가 영향력을 행사하도록 하는 것이 아닙니다. 당사자의 선택이 중요합니다. 그런데 이런 방식은 사람을 뽑는 데에만 적용하는 것으로 그치지 않습니다. 어떤 일을 하거나 중요한 결정을 내릴 때에도 마찬가지로 적용할 수 있습니다. 무엇보다 먼저, 그 일에 필요한 합당한 기준을 설정하거나 계획을 세워야 합니다. 두 번째로 그 기준이나 계획에 맞게 노력해야 합니다. 노력하지 않고 이룰 수 있다는 기대는 허황한 꿈일 것입니다. 할 수 있는 노력을 다하면서 하느님의 도움을 청해야 합니다. 그렇지만 내가 바라는 대로가 아니라 하느님께서 뜻하시는 대로 이루어지도록 청하는 것이 청원기도의 올바른 자세임을 위층 방 형제들의 기도는 보여주고 있습니다. 마지막으로는 사심 없이 결정을 내리거나 일을 집행하는 것입니다. 그러고는 결과에 승복하는 것입니다. cpbc2019.01.16
![[이창훈 위원의 사도행전 이야기] (24) 사울의 회심 (9,1-19ㄱ) <1>](//cpbc.co.kr/CMS/newspaper/2019/07/rc/757426_1.1_titleImage_1.jpg)
[이창훈 위원의 사도행전 이야기] (24) 사울의 회심 (9,1-19ㄱ) “주님, 주님은 누구십니까?” 다마스쿠스로 가는 길에 하늘에서 번쩍이는 빛을 받아 말에서 떨어지는 사울을 그린 카바라조(1573~1610) 작, 사울의 회심, 로마 산타 마리아 델 포폴로 성당 안 체라시 경당. 예루살렘에서 집집이 들어가 그리스도를 믿는 이들을 끌어다가 감옥에 넘기던 사울은 그것으로 부족했는지 다마스쿠스로 떠납니다. 그 과정에서 뜻밖의 일이 생기고 그 일은 사울의 회심으로 이어집니다. 사울의 회심 이야기를 두 번으로 나눠 살펴봅니다. 다마스쿠스로 가는 길에서(9,1-9)사울은 “주님의 제자들을 향하여 살기를 내뿜으며” 대사제에게 가서 다마스쿠스에 있는 회당들에 보내는 서한을 청합니다. “새로운 길을 따르는 이들을 찾아내기만 하면 남자든 여자든 결박하여 예루살렘으로 끌고 오겠다는 것”이었습니다.(9,1-2) 예수님을 주님으로 믿고 따르는 “주님의 제자들”을 향한 사울의 반감은 살기를 내뿜을 만큼 대단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예루살렘을 넘어서 다마스쿠스까지 박해의 손길을 뻗칩니다. 오늘날 시리아 수도인 다마스쿠스는 2000년 전에도 상업적으로 번창하던 도시였습니다. 당연히 유다인들도 많았습니다. 기록에 따르면, 기원후 66년 제1차 유다 전쟁이 시작되고 나서 다마스쿠스에서 희생된 유다인들만 1만 명이 넘었다고 하니 얼마나 많은 유다인들이 다마스쿠스에 살고 있었는지 짐작할 수 있습니다. 그렇게 많은 유다인들이 살고 있었다면 다마스쿠스에는 유다인 회당이 한두 곳이 아니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사울은 대사제에게 다마스쿠스 회당들에 보내는 서한을 요청합니다. 다마스쿠스의 회당들을 다니며 “새로운 길”을 따르는 이들을 찾아내 예루살렘으로 끌고 오기 위해서였습니다. 이로 미루어볼 때 새로운 길을 따르는 이들 곧 그리스도교 신자들은 아직은 유다교와 완전히 결별하지 않았음을 알 수 있습니다. 다마스쿠스에 어떻게 복음이 전해졌는지 사도행전 본문을 통해서는 확인할 수 없습니다. 다만 예루살렘 교회 신자들이 박해로 흩어지면서 다마스쿠스에까지 와서 복음을 전했을 것이라고 추정할 수 있습니다. 다마스쿠스에 많은 유다인이 살고 있다는 것을 감안하면 새로운 길을 따르는 신자들이 다마스쿠스에 와서 복음을 전하는 일은 그다지 어렵지 않았을 것입니다. 오늘날 예루살렘에서 다마스쿠스까지 찻길로 320㎞ 남짓한 거리입니다. 2000년 전이라면 걸어서도 열흘 정도면 충분히 갈 수 있는 거리지요. 사울이 길을 떠나 다마스쿠스에 가까이 이르렀을 때였습니다. 갑자기 하늘에서 빛이 번쩍이며 사울의 둘레를 비췄고 사울은 땅에 엎어지고 맙니다. 그때 “사울아, 사울아, 왜 나를 박해하느냐?” 하고 말하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사울이 “주님, 주님은 누구십니까?” 하고 묻자 이런 대답이 들려옵니다. “나는 네가 박해하는 예수다. 이제 일어나 성안으로 들어가거라. 네가 해야 할 일을 누가 일러줄 것이다.” 사울과 동행하던 사람들은 소리를 들었지만 아무도 볼 수가 없었고 그래서 멍하게 서 있었다고 사도행전 저자 루카는 전합니다.(9,3-7) 그런데 여기서 잠시 살펴볼 사항이 있습니다. 사도행전에는 사울의 회심에 관한 이야기가 모두 세 번에 걸쳐 나옵니다.(9,1-19; 22,4-21; 26,9-18) 9장의 이야기는 저자 루카가 관찰자의 관점에서 전하고 있고, 22장과 26장의 이야기는 모두 사울(바오로) 자신의 입으로 증언하는 것을 루카가 소개하는 형식입니다. 문제는 회심의 결정적 계기가 되는 이 사건에 대한 설명이 서로 다르다는 것입니다. 9장에서는 사울과 동행하던 사람들이 소리는 들었지만 아무도 볼 수 없었다고 전합니다. 볼 수 없었던 것은 아마 강한 빛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22장에서는 동행하던 사람들이 말씀하시는 분의 소리를 듣지 못했다고 바오로는 말합니다. 반면 26장에서는 동행하던 사람들이 소리를 들었는지에 대한 언급이 전혀 없습니다. 또 9장과 22장에서는 빛에 의해 엎어진 사람이 사울뿐인 것으로 나오는 반면에 26장에서는 사울과 일행 모두가 빛에 의해 엎어졌다고 나옵니다. 이렇게 사건에 대한 묘사가 서로 다르기 때문에 이 이야기는 혹시 루카가 지어낸 것이 아닌가 하는 의혹을 제기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자신이 쓴 사도행전에서 세 이야기가 이렇게 다른 것을 알면서도 그대로 놔두었다는 것은 오히려 루카가 자신이 전해 받은 자료에 충실했음을 보여주는 증거일 수 있습니다. 사울은 땅에서 일어나 눈을 떴으나 아무것도 볼 수가 없어서 사람들이 그의 손을 잡고 다마스쿠스로 데려갑니다. 그곳에서 그는 사흘 동안 앞을 보지 못했는데 그동안 먹지도 않고 마시지도 않았다고 사도행전 저자는 전합니다.(9.8-9)빛에 눈이 멀어서 사흘 동안 보지 못했다는 것은 사흘 동안 암흑 속에 지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뿐 아니라 그 기간에 사울은 먹지도 않고 마시지도 않습니다. 캄캄한 암흑 속에서 먹지도 않고 마시지도 않는다면 이는 마치 죽은 사람의 처지나 다를 바 없을 것입니다. 따라서 사울은 사흘 동안 죽음의 세계에 갇혀 있었다고 해도 지나치지 않을 것입니다.알아보기성경에서 빛이 번쩍이며 비추는 것은 하느님의 나타나심을 가리킵니다. 번개가 번쩍이고(탈출 19,16), 빛이 뿜어 나오고(시편 18,13), 광채가 사방으로 뻗는(에제 1,28) 모습 등은 모두 하느님의 영광이 드러남을 표현합니다. 예수님이 타볼산에 올라 기도하시는데 얼굴 모습이 달라지고 옷이 하얗게 변한 것이나(루카 9,29) 모세가 시나이산에서 하느님과 말씀을 나누고 내려왔을 때 얼굴 살갗이 빛난 것도(탈출 34,29)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사울아, 사울아” 하고 이름을 두 번이나 부르는 소리도 마찬가지입니다. 모세는 불타는 떨기를 보려고 가까이 가다가 “모세야, 모세야” 하는 소리를 들었고(탈출 3,4), 야곱도 브에르 세바에서 환시 중에 “야곱아, 야곱아” 하는 소리를 듣습니다.(창세 46,2) 또 사무엘도 “사무엘아, 사무엘아” 하고 주님이 부르시는 소리를 세 번이나 듣습니다.(1사무 3,1-10) 이렇게 본다면, 사울이 다마스쿠스로 가는 길에서 겪은 이 체험은 바로 하느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을 만나는 체험이었습니다. 그래서 사울(바오로)은 부활하신 그리스도께서 “칠삭둥이 같은 나에게도 나타나셨습니다” 하고 코린토 신자들에게 쓸 수 있었습니다.(1코린 15,8)생각해봅시다구약의 야곱, 모세, 사무엘이 하느님의 말씀을 들었을 때 한 대답과 사울이 예수님의 말씀을 들었을 때 한 대답은 아주 다릅니다. 야곱, 모세, 사무엘은 모두 “예, 여기 있습니다” 또는 “말씀하십시오, 당신 종이 듣고 있습니다”라고 응답합니다. 말하자면, 이들은 자기를 부르는 분이 바로 하느님이심을 인식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에 비해 사울은 “주님, 주님은 누구이십니까?” 하고 묻습니다. 사울은 빛 속에서 자기에게 말을 건네시는 분이 신적인 존재라는 것은 의식했겠지만, 그분이 예수님이시라는 사실은 전혀 몰랐을 것입니다. 그래서 “나는 네가 박해하는 예수다”라는 말을 들었을 때 그가 받은 충격은 뭐라고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엄청났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빛에 눈이 멀어 볼 수 없게 된 것이 어쩌면 사울에게는 축복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사울은 육체적인 눈으로는 아무것도 볼 수 없는 캄캄한 암흑 속에서 오히려 자신의 내면 가장 밑바닥으로 내려가 철저한 회심의 길을 시작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사흘 동안 그는 먹지도 마시지도 않았다”는 사도행전 저자의 표현은 사울이 겪은 회심의 길을 조금이나마 헤아릴 수 있게 해줍니다. cpbc2019.07.09
![[NIE-신문으로 크는 신앙] 낙태는 어째서 ‘죄’일까요](//cpbc.co.kr/CMS/newspaper/2019/03/rc/747759_1.0_titleImage_1.jpg)
[NIE-신문으로 크는 신앙] 낙태는 어째서 ‘죄’일까요헌법재판소가 4월 낙태죄 위헌 여부 결정을 앞두고 있습니다. 낙태죄 폐지를 둘러싼 논쟁도 뜨겁게 일고 있어요.인간 생명을 존중하는 가톨릭교회는 낙태를 ‘죄’라고 봅니다. 태아는 엄연한 ‘생명’이기 때문이지요. 가톨릭 신자들은 어떻게 태아의 생명을 지킬 수 있을까요. 낙태죄 폐지 논란을 세 가지 키워드로 연결지어 생각해 봐요.생명권 생명은 모든 인간에게 주어집니다. 생명보다 더 앞서는 가치는 없습니다. 생명권의 핵심은 ‘누구도 타인의 생명을 해쳐서는 안 된다’는 겁니다. 그렇다면 태아에게도 생명권이 있을까요? 태아는 5주가 되면 눈, 코, 입이 생겨납니다. 8주만 돼도 중요 장기가 형성되고, 16주가 되면 목소리를 들을 수 있습니다. 이런데도 태아를 생명이라고 보지 않고 세포나 혹이라고 여기면 문제가 달라지지만, 태아는 분명한 ‘인간 생명’입니다. 모자보건법 모자보건법은 ‘모성과 영유아의 생명과 건강을 보호하고, 건전한 출산과 양육을 도모하고자 제정된 법률’이에요. ‘모자보건법 제 14조’에는 낙태를 허용하는 기준도 명시돼 있어요. 그 기준은 ①본인이나 배우자가 유전학적 정신장애, 신체질환이 있을 때 ②본인이나 배우자가 전염성 질환이 있을 때 ③강간ㆍ준강간으로 임신했을 때 ④법적으로 결혼할 수 없는 혈족ㆍ인척간 임신했을 때 ⑤계속 임신하면 산모 건강을 심각하게 해칠 우려가 있을 때예요. 한국은 이 다섯 가지 조건에 해당할 때만 낙태가 가능하며, 임신 24주 이후에는 수술이 허용되지 않아요. 그러나 가톨릭교회는 이 또한 태아 생명권을 침해할 수 있는 독소 조항이어서 폐지해야 한다는 입장입니다. 자기결정권 자기결정권은 개인이 삶에서 스스로 결정할 수 있는 권리를 의미해요. 자기결정권을 뒷받침하는 근거로는 ‘헌법 제10조’를 예로 들 수 있어요. 이 조항에는 국민이 인간으로서의 행복을 추구할 수 있는 권리인 행복 추구권, 인간의 존엄과 가치, 기본적 인권 보장이 있어요. 그러나 자기결정권에는 조건이 있습니다. 타인의 생명과 권리를 침해하지 않는 선에서 권리를 주장할 수 있습니다. 낙태죄 폐지를 찬성하는 사람들은 자기결정권을 근거로 목소리를 높이고 있지만, 낙태가 타인의 생명을 침해하지 않는 행동인지는 깊게 고민해봐야 해요. 위 세 가지 키워드를 중심으로 낙태죄 폐지 논란을 들여다볼까요. 얼핏 보면 이 논쟁에선 ‘생명권’과 ‘자기결정권’이 충돌하는 듯 보이지만 이는 충돌할 수 없는 사안이에요. 태아는 존중받아야 할 권리가 있습니다. 산모와 ‘별개의 생명체’로서 보호받아야 하지요. 자기결정권은 어떻게 바라봐야 할까요? 자기결정권은 타인의 생명을 침해하지 않는다는 전제하에 주장할 수 있어요. 자기결정권이 태아를 해치는 낙태의 근거가 될 수 없는 이유입니다. 또한, 생명권이 그 어떤 권리보다 우선한다는 것을 생각해보면 태아의 의지와 무관하게 가해지는 낙태는 살인과 같습니다. 낙태를 결정하는 어른들의 일방적 의견만 반영되니 더 반인륜적이라고 할 수 있지요. 교회 가르침 교회는 낙태를 엄격히 금지하고 있습니다. 성경에 버금가는 권위를 지닌 가장 오래된 교부 문헌 「디다케」에도 낙태에 대한 가르침이 있어요. 이 문헌의 ‘생명의 길’에서는 “낙태로 아이를 살인하지 말라”(「디다케」 2, 2)는 가르침이 있으며, ‘죽음의 길’에서는 “하느님의 작품을 낙태하는 자들은 멸망한다”(「디다케」 5, 2)고 나옵니다. 「가톨릭 교회 교리서」 2261항은 낙태를 명백한 살인 행위라고 말하고 있어요. 낙태는 인간의 기본 생명권을 직접 침해하는 ‘최악의 선택’이라고 명시하고 있죠. 특히 무고한 태아를 일부러 살인하는 건 창조주이신 주님의 거룩함을 거스르는 행위입니다. 낙태는 임신의 축복과 양육의 행복을 위협할 뿐만 아니라 여성의 건강에도 좋지 않은 선택입니다. 태아의 생명권을 절대적으로 보호하는 건 산모의 건강을 위한 일임을 알아야 합니다. 생명 보호와 양육의 어려움을 ‘갓 태어날 아이’를 해치면서 해결해서는 안 됩니다. 여성뿐만 아니라 남성, 사회 구성원 모두가 생명 보호의 책임감을 느껴야 합니다. 낙태가 일어나지 않도록 사회 안전망을 마련하고, 임산 부모를 적극적으로 지원하는 제도를 마련해야 합니다. 더욱이 가톨릭 신자라면 이러한 사회적 문제에도 꾸준한 관심을 두고 생명운동에 참여해야 합니다. 기도에도 힘써야 하지요.점선 잇기 퍼즐숫자대로 점을 연결하면서 소중한 생명인 태아의 모습을 완성해봐요. 전은지 기자 eunz@cpbc.co.kr문채현2019.03.06
![[성당에 처음입니다만] (2) 신부님이 미사 중에 중얼거려요](//cpbc.co.kr/CMS/newspaper/2019/03/rc/747693_1.1_titleImage_1.jpg)
[성당에 처음입니다만] (2) 신부님이 미사 중에 중얼거려요사제 혼자 마음속으로 기도하는 때 빵과 포도주를 바치는 기도를 한 다음 사제는 허리를 굽히고 마음속으로 기도 드린다. 가톨릭평화신문 DB 미사 중에 신부님과 신자들이 기도하면서 어떤 때는 손을 벌렸다가 모았다가 하더군요. 또 마지막에는 신부님께서 두 팔을 뻗치시며 기도를 하더군요. 불교에서는 합장만 하고 기도하는데 가톨릭은 왜 이렇게 복잡하죠. 또 신부님께서 미사 중에 여러 번 혼잣말로 중얼중얼하시던데 혹 신자들의 미사 태도가 마음에 안 들어서 그러시는 건 아니겠죠.사제의 미사 동작미사를 드리는 것을 유심히 관찰하셨군요. 미사에 참여하는 모든 사람이 통일된 자세로 동작하는 것은 거룩한 전례에 모인 이들의 일치된 마음과 정성을 표현하는 것이라고 설명했습니다. 두 손을 모으는 것은 하느님께 대한 경건함의 표현입니다. 또 자기를 낮추고 봉헌하는 표시이기도 합니다. 아울러 두 팔을 벌려 하늘을 향해 올리는 것은 개방과 수용, 간청의 자세입니다. 두 팔을 높이 펴들고 기도하는 자세는 대부분 종교에서 볼 수 있는 가장 보편적인 기도 자세입니다. 성경에서도 이런 자세를 자주 봅니다.(탈출 17,9-14; 시편 134,2; 이사 1,15)그러나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 두 팔을 펴들고 기도하는 자세는 또 다른 깊은 의미가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채 팔을 펼치시고 수난을 당하심으로써 인간을 속죄하시고 구원하셨기 때문입니다. 사제가 신자들을 향해 두 손을 뻗는 것은 하느님의 영과 힘, 또 권한으로 축복하는 행위입니다. 미사 중에 간과해서는 안 되는 중요한 행동이 있습니다. 바로 ‘침묵’입니다. 이 거룩한 침묵은 미사 거행의 한 부분이므로 제때에 제대로 지켜야 합니다. 미사 중에 반드시 침묵해야 하는 부분은 참회 행위와 기도 초대 다음, 독서와 강론 다음, 영성체 후입니다. 참회와 기도 초대 때 하는 침묵은 자기 내면을 성찰하도록 도와주고, 독서와 강론 다음에 하는 침묵은 묵상을 이끌며, 영성체 후 침묵은 하느님께 찬미를 드리는 기도 시간입니다. 미사 중 사제가 혼자 기도하는 부분사제가 미사 중에 혼자 마음속으로 드리는 기도 부분이 몇 군데 있습니다. 먼저, 말씀의 전례 때 복음을 읽기 전에 제대를 향해 허리를 굽히고 기도합니다. 이때 사제는 구약의 이사야 예언자가 하였듯이(이사 6,6-7) 복음을 읽을 마음과 혀를 깨끗하게 해 달라고 하느님께 청하는 기도를 합니다. 사제는 “전능하신 하느님, 제 마음과 입술을 깨끗하게 하시어 합당하게 주님의 복음을 선포하게 하소서”라고 기도합니다. 신자들이 봉헌 성가를 부르며 줄지어 헌금할 때 사제는 예물로 빵과 포도주를 준비하며 혼자 기도를 바칩니다. 빵과 포도주는 하느님의 선물이고 인간이 노동으로 일군 결실을 상징합니다. ‘빵과 포도주를 바치는 기도’는 구약 때부터 이어온 음식 축복 기도을 받아들인 것으로 “온 누리의 주 하느님, 찬미 받으소서. 주님의 너그러우신 은혜로 저희가 땅을 일구어 얻은 이 빵을 주님께 바치오니 생명의 양식이 되게 하소서” 또 “온 누리의 주 하느님, 찬미 받으소서. 주님의 너그러우신 은혜로 저희가 포도를 가꾸어 얻은 이 술을 주님께 바치오니 구원의 음료가 되게 하소서”라며 기도합니다.빵과 포도주를 바치는 기도를 즉 예물 준비 기도를 한 다음 사제는 허리를 굽히고 속으로 “주 하느님, 진심으로 뉘우치는 저희를 굽어보시어 오늘 저희가 바치는 이 제사를 너그러이 받아들이소서”라고 기도합니다. 이어서 사제는 손을 씻으며 “주님, 제 허물을 말끔히 씻어 주시고 제 잘못을 깨끗이 없애 주소서”라며 몸과 영의 정화를 하느님께 청합니다.빵 나눔 예식 때에도 사제 혼자 기도를 합니다. 사제는 축성된 빵을 들어 쪼개어 작은 조각을 떼어 잔(성작) 안에 넣으면서 “여기 하나 되는 주 예수 그리스도의 몸과 피가 이를 받아 모시는 저희에게 영원한 생명이 되게 하소서”라고 기도합니다. 빵과 포도주를 따로 축성하는 것은 예수님의 죽음을 상징한다면 성작 안에 성체와 성혈을 합치는 것은 부활하신 주님을 드러냅니다.아울러 성체를 영하기 전에 사제는 손을 모으고 “살아계신 하느님의 아들 주 예수 그리스도님 주님께서는 성부의 뜻을 따라 성령의 힘으로 죽음을 통하여 세상에 생명을 주셨나이다. 그러므로 이 지극히 거룩한 몸과 피로 모든 죄와 온갖 악에서 저를 구하소서. 그리고 언제나 계명을 지키며 주님을 결코 떠나지 말게 하소서”라고 기도합니다. 또 성체 분배가 끝난 후 성체(빵)를 담은 그릇(성반, 성합)과 성혈(포도주)을 담은 잔(성작)을 깨끗이 닦는 동안 사제는 “주님 저희가 모신 성체를 깨끗한 마음으로 받들게 하시고 현세의 이 선물이 영원한 생명의 약이 되게 하소서”라고 감사의 기도를 바칩니다. 리길재 기자 teotokos@cpbc.co.kr cpbc2019.03.06
![[전영준 신부의 가톨릭 영성을 찾아서] (104) 21세기 ② - 영성생활에 대한 교황님들의 가르침](//cpbc.co.kr/CMS/newspaper/2018/12/rc/741176_1.0_titleImage_1.jpg)
[전영준 신부의 가톨릭 영성을 찾아서] (104) 21세기 ② - 영성생활에 대한 교황님들의 가르침세 교황, 21세기 영적 여정의 안내자 프란치스코(Franciscus PP., 재임 2013~현재) 교황은 2014년 8월 16일 광화문 앞 광장에서 한국 순교자 124위를 복자 반열에 올리는 시복 미사를 봉헌했습니다. 마침 프란치스코 교황은 한국 방문 얼마 전인 4월 27일에는 바티칸 베드로 광장에서 요한 바오로 2세(Ioannes Paulus PP. II, 재임 1978~2005) 교황을 성인 반열에 올리는 시성 미사를 봉헌했습니다. 그런데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은 1984년 5월 6일 여의도 광장에서 한국 순교 복자 103위를 성인의 반열에 올리는 시성 미사를 봉헌한 바 있었습니다. 이런 이유에서 한국 가톨릭교회는 교황님들의 가르침에 더 귀를 기울이게 됩니다.그리스도의 얼굴을 바라보던 요한 바오로 2세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은 재임 기간이 길었던 만큼 재임 동안 많은 문헌을 발표했습니다. 문헌 내용도 신학적이거나 윤리적인 주제뿐만 아니라 그때마다 새롭게 떠오르는 중요한 사회적 주제까지 다양했습니다. 이때 거의 모든 문헌에서 발견할 수 있는 공통점은 항상 영성적인 주제를 성찰하면서 더 나은 영성생활을 실천할 수 있도록 권고했다는 점입니다. 게다가 성모 마리아를 공경하는 신심도 자주 언급됐습니다.요한 바오로 2세 교황 문헌들 가운데 문헌 전체를 영성적인 관점에서 저술한 문헌이 있습니다. 2000년 대희년 폐막 즈음에 주교들과 성직자들 그리고 평신도들에게 보낸 문헌으로서 2001년 1월 6일 주님 공현 대축일에 반포한 교서 「새 천년기(Novo Millennio Ineunte)」는 새로운 천년기를 맞는 신앙인에게 각자 자신의 삶에 대한 영성적인 성찰을 제공하고 가톨릭교회에 사목적인 과제를 던져주었습니다.「새 천년기」에서는 그리스도인이 그리스도의 얼굴을 바라보면서 영적 여정을 걸어가는 방법을 소개했습니다. 즉, 참 하느님이시며 참사람이신 성자 그리스도의 신원을 제대로 깨달아야만 그리스도의 얼굴을 올바로 인식할 수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특히 말씀이 사람이 되시면서까지 자신을 비우신 강생의 신비의 의미를 깨달아야만 예수님께서 십자가 위에서 보이신 고통의 얼굴이 하느님께 버림받은 절망이 아니라 모든 사람을 구원하기 위한 기도라는 걸 알 수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따라서 그리스도의 얼굴을 바라보기 시작한 그리스도인은 기도의 실천, 성찬례의 참여, 화해의 성사인 고해성사로 회귀 등 보통의 방법으로 성덕의 훈련을 하며 영적 여정을 걷게 됩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인의 성성(聖性)의 완성은 하느님 말씀에 귀 기울이며 복음을 선포하는 데 있다고 강조했습니다.한편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은 2002년 10월부터 2003년 10월까지를 ‘묵주기도의 해’로 선포하고, 마리아의 묵주기도에 관하여 주교와 성직자와 신자들에게 보낸 문헌으로 2002년 10월 16일에 교서 「동정 마리아의 묵주기도(Rosarium Virginis Mariae)」를 반포해 묵주기도가 성모 마리아뿐 아니라 그리스도의 생애를 깊이 관상하는 훌륭한 기도 방법이라는 점을 강조했습니다. 특히 이 문헌에서는 기존에 바쳤던 묵주기도에서 세 가지 신비를 묵상했던 것과 달리 예수님의 공생활까지 묵상하는 ‘빛의 신비’를 추가하면서 신자들로 하여금 그리스도의 신비에 잘 동화될 수 있도록 초대했습니다.영적 여정의 마지막 단계에서 행동을 강조한 베네딕토 16세베네딕토 16세(Benedictus PP. XVI, 재임 2005~2013) 교황은 재임 기간이 짧은 만큼 주요 문헌을 많이 반포하시지 않았지만, 영성 사상을 엿볼 수 있는 문헌과 작품을 발표했습니다. 베네딕토 16세 교황은 이미 교황직에 오른 후이지만 2007년에 발간한 저서 「나자렛 예수 1(Jesus von Nazarreth I)」 서문에서 이 책이 교도권을 다룬 공식 문헌에 속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얼굴’을 찾는 개인적인 탐구라는 것을 밝히면서, 복음서에 나오는 예수님의 공생활을 묵상했습니다. 이때 교황님은 ‘역사 비평적 방법’으로 복음서에 다가간다면 예수님을 단순히 과거에 묶어둠으로써 예수님을 오늘날 살아 있는 주님으로 만나는 데에 한계가 있다고 강조했습니다. 따라서 복음서가 인간의 말에만 머물지 말고 한층 높은 차원에 속한 의미에 도달하기 위해서 성경 전체 내용에 대해 통일성을 가지고 살피는 ‘정경적(正經的) 성경 주석’이라는 연구 방법이 유익할 수 있다는 것이었습니다.베네딕토 16세 교황은 2010년 반포한 교황 권고 「주님의 말씀(Verbum Domini)」에서 어떻게 하느님 말씀에 다가가고, 하느님 말씀을 살아가며, 하느님 말씀을 전해야 하는지 언급하면서, 하느님 말씀을 살아가는 영적 여정에 유익한 방법을 제시했습니다. 즉, 카르투지오회 9대 원장이었던 귀고 2세(Guigo II, 재임 1174~1180)가 정리해서 소개했던 ‘거룩한 독서(Lectio Divina)’에서 실천하는 ‘독서-묵상-기도-관상’의 단계에 ‘행동’이라는 단계를 추가했습니다. “거룩한 독서의 역동은 행동(actio)에 이르기 전에는 아직 완결된 것이 아님을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행동은 신자들이 사랑으로 자신의 삶을 다른 이들을 위한 선물이 되게 하는 것입니다.”(87항) 행동으로 애덕을 실천할 때에야 비로소 영적 여정을 마치고 거룩함을 완성하여 하느님과 일치할 수 있다는 것이었습니다.그리스도인의 성덕의 소명을 상기시킨 프란치스코프란치스코 교황은 2018년 반포한 현대 세계에서 성덕의 소명에 관한 교황 권고 「기뻐하고 즐거워하여라(Gaudete et Exsultate)」에서 성덕이 성직자와 수도자에게만 해당하는 소명이 아니라 그리스도인 모두에게 해당되는 소명이라고 강조했습니다. 다만 각자 신분의 상태에 따른 성덕의 소명은 같은 모습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일상생활에서 각기 다른 모습으로 받아들이는 것이라고 권고했습니다. 따라서 평신도 그리스도인은 성덕의 소명에 두려워할 것이 아니라, 옆집의 평범한 이웃을 통해서 발견할 수 있는 모습에서 성덕의 소명을 발견하라고 격려했습니다.프란치스코 교황은 문헌에서 오늘날 그리스도인의 성덕을 교묘하게 교란시키는 이단 교리에 대해 경고했습니다. 즉, 하느님도 육신도 거부하면서 신비생활을 마음대로 조정하려는 현대의 영지주의와 자신의 힘만 앞세우고 정해진 규범에 과도하게 집착하면서 개인주의에 빠져 자신의 우월성만 강조하는 현대의 펠라기우스주의가 그것입니다. 따라서 교황님은 현대 세계에서 성덕의 징표가 되는 우리의 자세로 항구함과 인내와 온유함, 기쁨과 유머 감각, 담대함과 열정, 공동체성, 그리고 지속적인 기도를 제시했습니다. “저의 소박한 바람은 많은 위험과 도전과 기회를 안고 있는 우리 시대에 맞갖게 실천적 방식으로 성덕의 소명이 다시 한 번 울려 퍼지게 하려는 것입니다.”(2항)우리는 2000년 교회 역사 안에서 역대 교황님들이 그리스도인의 영적 유익을 위해 고민하시고, 심사숙고해 결단을 내리셨던 모습을 발견합니다. 오늘날 우리가 함께했고, 또 함께 하고 있는 교황님들에게서도 같은 모습을 발견합니다. 그러므로 교황님들이 발표하는 문헌들만 열심히 읽어도 그리스도인이 나가야 할 올바른 영적 여정을 깨닫고 실천할 수 있다는 점을 우리는 유념해야 할 것입니다. <가톨릭대 신학대학장> cpbc2018.12.11
![[호기심으로 읽는 성미술] (15) 주님 승천 (상) 고대 시대](//cpbc.co.kr/CMS/newspaper/2018/07/rc/728316_1.0_titleImage_1.jpg)
[호기심으로 읽는 성미술] (15) 주님 승천 (상) 고대 시대성모와 사도들 해와 달의 찬미 받으며 천상에 오르시는 예수님 성경은 세 분의 승천 이야기를 우리에게 들려줍니다. 에녹(창세 5,24)과 엘리야 예언자(2열왕 2,11), 그리고 주님(마르 16,19; 루카 24,51; 사도 1,6-11)입니다. 또 가톨릭교회는 성모 마리아께서 지상 생애를 마친 다음 육신과 영혼이 함께 천상 영광으로 들어 올려지셨다고 고백합니다. 하지만 주님의 승천은 근본이 다릅니다. 주님께서는 승천하신 다음 하느님의 오른편에 계시며 우리에게 약속하신 성령을 보내십니다.(사도 2,33; 에페 1,20) 또 주님께서는 승천하신 모습 그대로 다시 오시어 우리를 구원하실 것입니다.(사도 1,11) 이번 호부터는 ‘주님 승천’의 도상을 고대와 비잔틴 시대, 그리고 중세로 구분해 세 차례에 걸쳐 소개합니다. 초기 그리스도교 미술은 그리스와 로마의 도상(圖像)에서 많은 영향을 받았습니다. 고대 그리스와 로마 제국 사람들은 자신들이 숭배하던 신과 영웅들의 승천 장면을 마치 전쟁에서 승리한 황제가 개선하는 것처럼 병거를 타고 땅에서 하늘로 비스듬히 올라가는 모습으로 즐겨 그렸습니다. 초대 교회 신자들은 ‘주님 승천’ 장면을 그릴 때 이 도상을 빌려서 표현했습니다. 로마 아벤티노 언덕에 있는 성녀 사비나 대성전(Basilica Sanctae Sabinae)의 나무문 조각 ‘주님 승천’ 부조와 6세기 헬라어 필사본 「라불라(Rabula) 복음서」의 ‘주님 승천’ 삽화가 대표적입니다. 성녀 사비나 대성전의 승천 부조 작품. 승천하는 엘리야(왼쪽 사진의 파란 점선)는 병거를 타고 천사의 도움을 받고 있다. 주님의 승천은 엘리야와 다르다. 예수님(오른쪽 사진의 파란 점선)은 세 천사의 호위를 받으며 부조상에는 보이지 않지만 하느님의 오른쪽을 향해 승천하고 있다. 성녀 사비나 대성전 430년 봉헌한 성녀 사비나 대성전의 정면 나무문에는 ‘승천’을 주제로 한 두 장면이 돋을새김으로 조각돼 있습니다. 주님과 엘리야의 승천입니다. 엘리야 승천 부조는 문 오른쪽 아래에 장식돼 있습니다. 엘리야 예언자는 엘리사가 지켜보고 있는 가운데 두 마리 불 말이 이끄는 불 병거를 타고 비스듬히 하늘로 오르고 있습니다. 불 말과 불 병거는 ‘주님의 권능’을 상징합니다. 성경은 “엘리야가 회오리바람에 실려 하늘로 올라갔다”(2열왕 2,11)고 하지만 사비나 대성전의 부조는 천사가 지팡이 같은 걸로 엘리야를 들어 올려 하늘로 데려가고 있습니다. 엘리야가 자기 능력으로 승천한 것이 아니라 주님의 권능에 의해 하늘로 들어 올려졌음을 웅변하고 있습니다. ‘주님 승천’ 부조는 성당 문 오른편 가운데 자리하고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엘리야 예언자와 달리 당신 권능으로 스스로 하늘로 오르십니다. 여기서 눈여겨볼 것은 예수님의 승천 방향입니다. 부조를 바라보는 이의 시선에서 볼 때 주님은 하느님의 오른편으로 향해 승천하십니다. 주님을 맞이하는 세 천사는 주님께서 하느님의 오른편에 앉으시게 보필하고 있습니다. 이는 주님께서 하느님의 권능에 참여하고 계실 뿐 아니라 그 권능 안에 영원히 현존하고 계시다는 것을 보여줍니다.(사도 2,35; 에페1,20) 라불라 복음서「라불라 복음서」의 ‘주님 승천’ 삽화는 성녀 사비나 대성전의 성당문 부조와는 사뭇 다른 도상을 보여줍니다. 그리스ㆍ로마 풍과 함께 인성(人性)을 중시하면서 성경 내용을 있는 그대로 표현하려는 시리아풍의 영향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네 마리 동물이 이끄는 사륜 병거에 올라타시고 네 천사의 보필을 받으며 승천하십니다. 네 동물은 사자와 소, 독수리, 그리고 사람의 형상을 하고 있습니다. 요한 묵시록에 등장하는 이들은 네 복음사가 또는 네 복음서를 상징합니다. 사자는 마르코, 사람은 마태오, 소는 루카, 독수리는 요한을 가리킵니다.승천하시는 주님은 하느님의 영광에 둘러싸여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오른손을 들어 강복하시고, 왼손에는 구원의 상징인 ‘생명의 책’을 들고 계십니다. 해와 달이 하늘의 양 측면에서 주님을 찬미하고 있습니다. 땅에서는 성모님을 중심으로 사도들과 제자들이 주님의 승천 모습을 지켜보고 있습니다. 이들은 ‘교회’를 상징합니다. 성모님은 주님 승천 장면을 보면서 놀라워하는 이들과 달리 양팔을 하늘을 향해 뻗고 기도하는 ‘오란테’의 자세를 취하고 있습니다. 성모님이 ‘교회의 어머니’로서 그리스도의 지체들 안에서 특별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음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성모님의 양옆에서 흰옷을 입고 왕홀을 손에 쥔 두 천사는 주님의 승천을 지켜보고 있는 사도들에게 무언가를 일러주고 있습니다. “너희를 떠나 승천하신 저 예수님께서는, 너희가 보는 앞에서 하늘로 올라가신 모습 그대로 다시 오실 것이다”(사도 1,11)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천사의 이 말은 무슨 뜻일까요? 참하느님이시며 참인간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승천하신 이후에도 당신의 인성을 그대로 지니시며 재림 때 육신을 지닌 구세주로 우리에게 오신다는 말씀입니다. 가톨릭교회는 그리스도의 재림을 단순히 미래에 닥칠 사건으로 여기지 않습니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언제나 너희와 함께 있겠다”(마태 28,20)라고 승천하실 때 약속하신 주님의 말씀을 믿으며 성체성사 안에서 그리스도의 현존을 체험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도들과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는 “주님께서 지금 살아 계신 분이시고 우리 또한 살아 있게 해주시는 생명 자체이심을 증언하고 있습니다”(요한 14,19 참조. 베네딕토 16세 교황 「나자렛 예수」 2권 346~347쪽). 리길재 기자 teotokos@cpbc.co.kr cpbc2018.07.24

“내 집처럼 가꾼 기도의 집에서 신앙 키우세요”서울 성북구 위치한 가톨릭교리신학원 ‘기도의 집' 기도의 집에서 봉사하는 가톨릭교리신학원 졸업생들. 몸은 서울대교구 가톨릭교리신학원(원장 최승정 신부)을 떠난 졸업생들이지만 세상의 복음화에 이바지하고 싶은 작은 희망으로 가톨릭교리신학원이 운영하는 ‘기도의 집’(관장 김진태 신부)을 제집처럼 드나들며 봉사하는 이들이 있다.서울 성북구 성북로 기도의 집 마당. 가톨릭교리신학원 졸업생들이 빗자루로 낙엽을 쓸고, 쓰레기 분리수거를 한다. 사무실에서 피정 접수 및 문의 전화를 받고, 숙소의 침구류 정리도 한다. 성물방 지킴이도 있다. 최근 5~6년 사이에 가톨릭교리신학원을 졸업한 평신도 선교사 40명이 지난해 9월부터 기도의 집 봉사에 나서고 있다. 가톨릭교리신학원의 교육 이념인 기억ㆍ선포ㆍ봉사에 따라, 평신도 선교사들을 위한 재교육의 장을 마련하고 지역사회 복음화를 위한 밀알이 되기 위해서다.봉사는 궂은일부터 시작했다. 40명의 봉사자는 일주일에 한 번 정해진 요일에 4시간씩 봉사한다. 연령대는 대부분 50~60대 중장년층이다. 서울을 비롯해 멀리서는 용인, 춘천에서도 봉사를 다닌다. 기도의 집 누리방을 개설, 운영하기 위해 학원에 다닌 봉사자도 있다.기도의 집은 2010년 문을 열었다. 지하 1층 지상 4층 규모로, 기도와 묵상을 위한 경당과 피정을 위한 숙소, 세미나실, 휴게실 등을 갖추고 있다. 교리신학원의 재학생과 졸업생들의 친교 장소이자, 기도 공간 및 모임 장소다. 지난해까지 청소 및 관리인을 따로 고용해 운영해왔지만, 운영비를 아끼고 졸업생들이 자발적으로 봉사하자는 목소리가 나왔고 지금은 100% 자원봉사로 운영한다.기도의 집에는 성물방 ‘성북동 성모님’에서 성물 판매와 함께 작품도 전시하고 있다. 성물방 봉사자 서영희(클라라, 69)씨는 “성북동에서 유일한 성물방으로 성북동에 나들이를 온 가족들이 종종 이곳을 찾고 있어 지역주민에게도 선교의 장이 되어가고 있다”며 뿌듯해 했다.기도의 집 운영위원회 회장 이춘식(파우스티노, 69)씨는 “세상의 어두운 곳에 있는 이들에게 복음을 전하기 위해 졸업생들이 자발적 봉사를 시작했다”며 “교리신학원 졸업생들이 기도의 집을 재교육의 장으로서 활용하는 동시에 신자들에게는 신앙생활에 도움을 주는 곳이 됐으면 좋겠다”고 말했다.기도의 집 운영위원회는 직장인들을 위한 성경공부 및 기도 모임을 비롯해 비신자를 위한 다양한 프로그램 등을 기획하고 있다.피정 및 이용 문의 : 02-747-8507, 누리방 : www.ccikido.or.kr 이지혜 기자 bonaism@cpbc.co.kr cpbc2018.11.13

고통의 바다에서 표류한다면 ‘보라, 하느님의 어린양’조너선 모리스 신부, 고통을 풀어갈 수 있는 삶의 원칙과 실천 방법 제시 고통의 이유를 찾는 당신에게 들려주는 - 하느님의 약속 조너선 모리스 지음 / 이창훈 옮김 / 가톨릭출판사 / 1만 8000원 주님은 우리가 고통 중에도 ‘함께 계시는 분’이다. 우리는 이를 믿고, 일상에서 거룩해지는 노력을 해나가야 한다. 우리 고통에는 늘 하느님이 계신다. 사진은 브라질 코르코바도 언덕에 자리잡은 예수상. 선하신 하느님은 왜 고통을 만들었을까? 이 세상에 악인(惡人)은 왜 있는 것일까?뉴스는 연일 각종 사건 사고를 보도한다. 육체적 병고와 정신 질환, 죽음과 이별, 가난과 빈곤. 지구 곳곳에서 매일같이 일어나는 끔찍한 재해와 사고들. 고통은 인류의 숙제일까, 아니면 신이 어쩌지 못하는 악마의 농간일까. 그럴 때마다 ‘하느님은 계시긴 한 걸까?’ 하는 의구심을 떨치기 어렵다. 인간 이성은 ‘하느님 뜻’을 다 헤아리기 어렵다.미국 뉴욕대교구 사제인 저자 조너선 모리스 신부는 폭스 뉴스 해설자로 활동했다. 어느 날 쓰나미와 지진으로 아시아에서 37만여 명이 사망했다는 소식에 앵커가 갑자기 저자에게 질문을 던진다. “한꺼번에 발생한 죽음과 파괴 이면에 무엇이 있는지 사람들은 궁금해합니다. 신이 화가 났나요?” 그러나 사제인 그도 생중계되는 카메라 앞에서 선뜻 답하기 어려웠다. 이를 두고두고 고민한 저자가 이에 대한 답을 쓴 책이다. 여러 서적을 우리말로 옮겨온 가톨릭평화신문 편집국장을 지낸 이창훈(알폰소) 위원이 번역했다.저자는 다소 철학적일 수 있는 주제 ‘고통의 근거’를 쉽게 풀어냈다. 저자 주변인들의 다양한 고통 체험에 교회가 전하는 진리를 잘 접목해 고통을 새롭게 마주하고 풀어갈 수 있는 ‘삶의 원칙’과 ‘실천 방법’을 엮었다. 고통에는 세 가지 얼굴이 있다. 육체적ㆍ정서적ㆍ영적 고통. 우리는 각자 고통의 실체를 잘 살피지 못하거나, 하느님과 멀어지는 ‘영적 손상’을 입기도 한다.그래서 돌아볼 것이 있다. ‘나에게 하느님은 어떤 존재인가.’ 우린 우리가 원하는 것을 그때그때 들어주는 ‘자판기 하느님’으로 인식하고 있지는 않은가. 잘못된 일에 그저 분노하는 ‘심판자 하느님’으로 여기진 않는가.저자는 “주님은 철학이 아니며 도덕률도 아니다”라며 “그분은 우리가 인격적 관계를 맺을 수 있는 살아계신 분”이라고 일러준다. 하느님은 우리가 생각하는 ‘도덕의 기준’ 역할만 하는 게 아니라, 언제나 그 고통과 함께하는 분이란 것이다.성경을 좋은 영감을 주는 ‘낱장 달력’쯤으로 여기거나, 이성으로 납득이 될 때에만 ‘찬양’한다면 ‘섭리하시는 하느님’을 제대로 알고 신뢰할 수 없다. 무신론자나 비신자들이 갖는 ‘1단계적 하느님 인식’을 넘어야 한다. 저자는 성경에 대한 ‘학문적 이해’, ‘인간 이성’ 너머에 있는 ‘살아 계신 하느님’은 언제나 우리 곁에서 ‘고통 속에 함께해주시는 분’이라고 설명한다. 그 근거가 인간의 고통을 모두 짊어지고 하늘나라로 오른 아들 예수님이다. 하느님은 당신 아들을 통해 더 큰 선(善)을 가져다주셨다. 고통을 무조건 나쁜 것으로 여기고, ‘왜 하느님이 해결해주지 않느냐’고 조급해 하는 생각과는 차원이 다르다.해법은 ‘삶의 거룩화 작업’이다. 바오로 사도처럼 ‘그리스도와 일치된 삶’을 살고자 노력하는 것. 인간은 누구나 사랑에 대한 갈망이 있기에 ‘완전한 사랑이신 분’을 사랑하도록 영혼을 인도하는 자기 노력이 필요하다.저자는 각자가 지닌 ‘뿌리가 되는 죄’를 파악하고, 이와 반대되는 ‘선한 행위’들을 삶의 목표로 세워 실천하도록 이끈다. 하느님께서 ‘더 큰 선’을 주신다는 약속에 대한 믿음은 그리스도의 손과 발이 될 우리 행동의 뿌리 역할을 한다. 고통은 아프지만, 하느님과 함께할 수 있는 또 다른 계기다.이정훈 기자 sjunder@cpbc.co.kr 백영민2018.08.29

전례력 ‘나해’, 나를 위한 복음의 양식 세 권2018년은 전례력으로 ‘나해’에 해당한다. 새해를 맞아 사제들이 이에 따른 복음의 참뜻과 거룩한 독서방법을 전하는 해설집과 성경을 바탕으로 쓴 에세이 등 신간을 잇달아 내놨다. 말씀을 향한 신자들의 ‘복음 열정’을 더욱 드높여줄 사목자들의 책을 소개한다. 일어나 가자 - 뜻으로 듣는 복음(나해) 홍승모 몬시뇰 지음 /위즈앤비즈 / 1만 5000원 사람들은 요한 세례자를 ‘세례를 베푸는 사람’으로 여겼다. 죄에 대한 정화의 권능과 세례를 베푸는 행위를 보며 사람들은 그를 최고 예언자요, 지도자로 추앙하기까지 했다. 저자 홍승모(인천가톨릭의료원장) 몬시뇰은 요한복음서에 등장하는 요한 세례자를 ‘예수님을 증언하고 알리는 사람’이었다고 그 역할을 분명히 전한다. “물로 세례를 준다”는 요한 세례자의 말은 빛을 증언할 계기를 마련해주는 사람을 공고히해주는 메시지다. 이를 통해 요한 세례자는 ‘뒤에 오시는 분’을 드높일 ‘위대한 조연’이라고 저자는 칭한다. 요한의 궁극적인 사명은 빛을 증언하여 사람들로 하여금 그리스도를 믿도록 하는 것이었다. 구약성서신학 박사인 홍 몬시뇰은 지난해 ‘가해’ 복음 해설집 「신랑이 왔다」에 이어 ‘나해’ 복음 해설집을 내놨다. 성경이 보여주는 수많은 사건과 비유의 의미를 명쾌한 해설을 통해 알기 쉽게 엮었다. 연중 전례력에 맞춰 복음에 이어지는 깊은 의미를 분명히 반추하도록 이끌어주는 길잡이와 같다. 성모 마리아는 처음 가브리엘 천사의 예수 잉태의 메시지를 받았을 때 결코 인간의 잣대로 판단하지 않았다. 마리아는 묻고 또 물었다. “보십시오,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말씀하신 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루카 1,38) 저자는 “‘종입니다’라는 고백에 마리아의 모든 마음이 실려 있다”며 “이 대답은 이미 구원의 시작을 의미하는 것”이라고 설명한다. 책은 해설에만 그치지 않는다. 저자는 각 복음 해설에 앞서 ‘깨어 있음은 어떤 실제적 의미를 지닐까요?’, ‘동방박사들의 순례 여정과 선물들이 우리에게 주는 영성적 영감은 무엇인가?’ 하고 질문하고, 그 안에 스민 복음의 뜻을 짚어주는 길잡이 역할을 자처한다. 우리와 함께하시는 하느님 신교선 신부 지음 / 생활성서 / 2만 원 “성경은 하느님께서 우리 인간에게 건네시는 ‘사랑의 속삭임’, ‘사랑의 편지’입니다.” 때마다 성경 해설서 등 신앙 서적을 꾸준히 펴내온 신교선(인천교구 용현5동본당 주임) 신부가 구약성경 전반에 대한 이해를 돕는 신간을 내놨다. 저자는 하느님의 ‘사랑의 속삭임’과 가까울수록 우리는 참 행복을 누릴 수 있다는 진리를 전하고자 책을 펴냈다고 밝힌다. 저자는 △오경 △역사서 △시서와 지혜서 △예언서에 이르는 구약성경 전반에 대한 거룩한 독서 방법을 제시한다. 노아가 살았던 시기, 하느님이 대홍수를 일으킨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저자는 대홍수는 곧 성(聖)과 속(俗)의 뒤엉킴을 통해 인류의 타락을 고발하고 있다고 전한다. 탈출기에서 하느님이 파라오와 대결을 펼친 이유, 그 속에서 드러나는 하느님 구원의 의지를 비롯해 예언서를 넘어 하느님 구원의 보편성을 가르치는 교훈서로서 요나서를 들여다봐야 하는 이유까지. 저자는 구약을 바라보는 올바른 시각을 통해 성경을 읽는 근본 이유를 되새겨준다. 가톨릭평화방송 TV는 4일부터 매주 목요일 오전 8시 ‘신교선 신부의 알기 쉬운 구약 체험’ 방영을 시작했다. 신 신부의 TV강좌를 통해 책 속에 담긴 성경 이야기를 더욱 생생히 접할 수 있는 기회다. 말씀 흔적 박병규 신부 지음 / 성서와함께 / 1만 1000원 말씀을 바탕으로 쓴 성경 에세이. 성서신학 박사인 저자는 책 전반을 통해 성경을 터득하는 관점을 바로잡아준다. 많은 신자가 성경 공부에 매달리는 요즘. 성경은 여전히 철저히 공부하지 않고선 이해하고 실천하기 어려운 진리를 담고 있는 게 사실이다. ‘어떻게 하면 어려운 성경을 쉽게 설명할 수 있을까?’ 저자는 “철부지가 돼라”고 일러준다. 그저 계획 없이 흘러가는 대로 노니는 철부지가 아니라, 지금 이 순간에 철저히 투신할 줄 아는 ‘하느님의 철부지’ 말이다. ‘부활이 가장 중요한 신앙의 핵심이라면, 왜 예수님은 바로 돌아가시고 부활하시지 않으셨나?’ 성경을 읽다 보면 이런저런 의문이 생기기 마련. 저자는 “성경의 주제를 ‘이것이다’ 하고 규정하는 순간, 성경은 성경이 아니게 된다”고 이른다. 대신 ‘제발 저를 바꿔주십시오!’, ‘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까?’ 하고 질문과 요구를 적극적으로 던질 때 하느님은 우리 삶 속에 계실 것”이라고 일러준다. 하느님 나라를 사후 어딘가에 존재하는 일종의 국가 개념으로 보는 이들도 있다. 저자는 하느님 나라는 내가 원하는 형태와 방법으로 이뤄지는 게 아니며, 내일 혹은 미래를 염두에 둔 나라가 아니라고 바로잡는다. 하느님 나라가 아직 오지 않았다고 생각하며 사는 것 자체가 오늘의 평화, 사랑의 관점을 흩트리는 주범이 된다고 일러준다. 책은 △하느님 나라 △회개 △성령 △구원 △용서 △희망 △부활 등 성경 속 다양한 신앙 주제에 대한 저자의 새로운 시각을 전하고 있다. 이정훈 기자 sjunder@cpbc.co.kr 백영민2018.01.03
![[생활속의복음] 대림 제1주일 - 하느님의 시간](//cpbc.co.kr/CMS/newspaper/2018/11/rc/740004_1.0_titleImage_1.jpg)
[생활속의복음] 대림 제1주일 - 하느님의 시간구요비 주교(서울대교구 보좌) “오늘이 바로 마지막 날이네!”초등학교 6학년이던 1962년, 담임 선생님께서는 수업 중에 늘 일간 신문의 중요 내용을 읽어 주셨습니다. 그해 10월 소련이 미국 본토를 겨냥해 쿠바에 핵미사일 기지 설치를 비밀리에 추진했고, 이를 포착한 미국과 소련 사이에 일촉즉발의 위기가 고조되던 때였습니다. “지금 핵미사일을 실은 소련의 군함들이 쿠바로 향해 가고 있는데 해상 봉쇄령을 내린 미국 해군과 맞부딪혀서 오늘 밤에 제3차 세계대전이 일어날지 모른단다.”선생님의 말씀에 깜짝 놀라 방과 후에 십리 길이나 되는 집으로 한달음에 뛰어갔습니다.“엄마, 큰일 났어요! 오늘 밤에 핵전쟁이 일어나서 지구가 멸망할지 모른대요.” 선생님께 들은 얘기를 전하자 집안 분위기는 심각해졌고 결국 식구들은 저녁기도를 바치고 일찍 잠자리에 들었습니다. 그때 어머님의 혼잣말이 들렸습니다. “아니 오늘이 마지막 날이라고? 그래, 요비 말이 맞네! 오늘이 바로 마지막 날이야!”다음날 새벽, 눈을 뜨자마자 밖으로 뛰어 나갔습니다. 밤새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짙은 안개와 침묵이 흐르는 고향 마을 길을 홀로 걸으며 말로 형용할 수 없는 경이로움을 느꼈습니다. 인류 공멸의 위기 앞에서 미국과 소련이 극적으로 타협했다는 선생님의 설명을 듣고 안심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당시 어머님의 ‘오늘이 바로 마지막 날이네!’라는 말은 성경에서 계시되는 하느님의 시간(Kairos)을 관통하고 있음을 세월이 흐를수록 더욱더 절감하게 됩니다. 카이로스는 본래 ‘결정적인 것’, ‘본질적인 시점’을 뜻하는데 종말론적으로 마지막 때인 하느님에게 온전히 속한 ‘하느님의 시간’을 말합니다.그리스도인이 지녀야 할 ‘시간’의 신앙적인 의미를 아우구스티노 성인은 이렇게 말합니다. “임의 날은 나날이 아닌 다만 ‘오늘!’, 그 오늘은 내일로 옮지도 아니하고, 어제 뒤에 이어지지도 않은 날이다. 임의 오늘은 곧 ‘영원!’”이라고 갈파하였습니다.(「고백록」 11권, 13장) 그런 면에서 교회의 전례력, 전례의 시간은 이 덧없는 인간의 세월 안에 길들여지기 쉬운 우리네 인생에 하느님의 영원한 시간이 개입해 계심을 일깨워 주는 것입니다. 대림 제1주일인 오늘은 전례력으로 새해를 시작하는 날입니다. 오늘이라는 시간을 허락하신 주님의 은혜에 감사하며, 그리스도의 뜻에 더욱 맞갖은 삶을 살도록 다짐하는 기다림의 시기가 되기를 바랍니다. “우리 주 예수님께서 당신의 모든 성도들과 함께 재림하실 때, 여러분이 하느님 우리 아버지 앞에서 흠 없이 거룩한 사람으로 나설 수 있게 되기를 빕니다.”(1테살 3,13)------------------------------※대림 제1주일부터 매월 첫째 주 생활 속의 복음은 서울대교구 주보 ‘생명의 말씀’에 소개되는 서울대교구 주교단의 글이 실립니다. 또 매월 2ㆍ3ㆍ4주는 한민택(수원가톨릭대학교 교수) 신부가 연재합니다. cpbc2018.11.28

척박한 땅에서 일하며 기도하는 소박한 삶으로 초대합니다여주 ‘도전돌밭공동체’를 찾아서 문명은 한계를 드러냈다. 재앙에 직면한 우리 미래에 대한 희망은 생태적 삶으로의 회귀밖에 달리 길이 없음을 보여준다. 서강대 종교학과 교수직을 퇴임한 예수회 한국관구 서명원(본명 Bernard Senecal, 66) 신부도 새로운 문명을 꿈꾸며 공동체를 만들었다. 퇴직 이전부터 준비해 경기도 여주시 강천면 새향길(도전리), 태백산의 끝자락에 터를 잡은 ‘도전돌밭공동체’다. 도전은 공동체가 자리 잡은 마을 이름의 한자만 바꿔 ‘온전한 길’이라는 뜻의 도전(道全)으로 정했고, 돌밭은 이들이 일구는 땅이 돌밭이기에 거기서 이름을 땄다. 현실은 돌밭이지만, 예수 그리스도께서 걸어간 그 길, 곧 생명의 길, 부활의 길, 영생의 길을 따라 살고 싶다는 속내가 담겼다. 주님 부활 대축일을 앞두고 여주 도전돌밭공동체를 찾았다. 오세택 기자 sebastiano@cpbc.co.kr 중앙선 양동역에서 내리니 봄비가 흠뻑 내렸다. 봄 가뭄에 단비다. 논배미 건너 실개천 다리를 지나자마자 샛길로 접어들었다. 새로운 고향 같은 길이라고, 새향길이라고 이름 붙인 아늑한 분지가 한눈에 들어온다. 6ㆍ25 땐 휴전협정이 끝나고 나서야 전쟁이 일어났다는 걸 알게 됐을 정도로 ‘외진’ 마을이다. 봄비에 밭을 갈던 공동체 식구들은 마침 뒷동산에 십자가의 길 15처를 세운다. 부활을 알린 ‘눈부시게 차려입은 두 남자’(루카 24,4-7 참조)를 그린 15처를 포함했다. 공동체 식구인 고성진(요셉) 조각가가 봉헌했다. 7년간 투석만 하다가 1년 전 신장을 이식받아 되살아난 뒤 그림 타일을 가마에 구워 뒷동산에 십자가의 길을 조성했다. 십자가의 길을 만드는 여정에 함께한 김춘미(아녜스)씨는 “작가가 하루하루 죽음의 고통 속에서 기도하며 그려낸 십자가의 길이어선지 정말 느낌이 남다르다”며 “아주 질박한 십자가의 길이지만, 그 소박한 게 더 감동적”이라고 전한다. 그러고 나서 “특히 빈 무덤에 나타난 두 천사의 모습만 그린 15처가 무척 인상적”이라고 했다. 서명원 신부가 꿈꾸는 공동체는 기도 수행과 노동을 통한 ‘비움’의 공동체다. “마음을 비우면 비울수록 마음을 예수님으로 채울 수 있다”는 서 신부는 전통 관상수도원 방식으로 공동체 명상센터를 지었다. 평면 사각형으로 컨테이너를 맞물리고 정원에는 자갈을 깔았다. 지붕은 이중으로 만들어 ‘성령의 바람’이 지나는 듯한 이미지를 만들었고, 공동체 건물은 사각형이면서도 사방으로 문을 둬 사통팔달하는 공동체를 지향했다. “우리 공동체는 아집을 끊어버리고, 예수님의 현존이 거짓 자아를 대체하도록 수행하는 데 그 목적이 있습니다. 천국에 들어가는 데 뭐가 도움되겠습니까? 예수님이 참 나가 되는 것이 핵심입니다. 그래서 바오로 사도도 갈라티아 신자들에게 보낸 서간 2장 20절에서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사시는 것’이라고 말씀하셨지 않습니까? 이것이 우리 영성입니다.” 수행 방식은 이냐시오 관상기도를 토대로 한다. 이냐시오 성인이 받은 조명, 곧 삼위일체의 친교에서 창조, 성체를 통해 세상 안에 계시는 주님, 강생 신비, 깨달음으로 정점을 이룬다. 이를 위해 날마다 아침ㆍ저녁기도를 하고, 식사도 두 끼니로 최소화했다. 공부와 연구, 명상은 당연히 뒤따른다. 교회일치운동과 이웃 종교와의 대화도 시시때때로 이뤄진다. 공동체 활동에는 생태적 삶을 공동체 차원에서 구현하기 위한 유기농 농사가 끼어 있다. 흙을 만지는, 먹는 음식 일부만 생산하는 삶의 방식을 통해 최소한만 생산하려 한다. 소박한 생활방식으로 돌아가 지구와 새로운 관계를 맺기 위해서다. 농사에 시행착오가 없을 수 없다. 그래도 자연과 새로운 관계를 맺으며 밭에서 옥수수와 땅콩, 고구마, 감자, 당근, 야콘, 고추, 배추, 무, 토마토, 토란 등 20여 가지 작물을 재배 생산한다. 가장 많이 생산한 건 들깨로, 지난해 두 가마를 생산해 들기름을 수십 리터나 뽑아냈다. 공동체는 그러나 이제 시작이다. 등록한 식구는 50명을 채웠지만, 함께 사는 식구는 서넛에 그친다. 서 신부 또한 “공동체가 어떻게, 얼마나 될지는 아무도 모른다”며 “성령의 바람이 부는 대로 이뤄질 것”이라고 웃으며 말했다. 그래도 앞으로 공부와 연구를 위한 도서실과 성경 공부를 위한 공간도 만들고, 현재 8개 실에 그치는 숙소도 더 만들 계획으로 토지 형질 변경과 개발 허가를 받았다. 서명원 신부. 이 공동체의 탄생은 불교학자로 예수회원인 서 신부가 아니라면 어려웠을 터다. 1953년 캐나다 퀘벡에서 태어난 서 신부는 ‘3대 의사 집안’을 만들고 싶다는 부모 뜻에 따라 프랑스로 건너가 보르도 의대에 다니다가 ‘의미 있는 삶’을 찾아 1979년 예수회 프랑스관구에 입회, 한국으로 파견됐다. 파리 7대학에서 한국불교를 전공해 박사학위를 받은 뒤 14년간 서강대에서 종교학을 강의해왔다. 여전히 그는 서강대 종교연구소 국제학술 등재지인 「Journal of Korean Religions」(한국 종교 저널) 부편집장으로 있으면서 공부와 연구를 멈추지 않고 있다. 이런 배경이 기도 수행과 노동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수행자들의 공동체를 탄생할 수 있게 했다. 공동체 여기저기를 돌아다니다 보니 어느새 들녘에 어둠이 내려앉는다. 칠순을 향해 달려가는 나이에도 ‘의미 있는 삶’을 꿈꾸는 노 사제와 평신도들의 기도를 뒤로하고 서울로 올라오는 열차에서도 서 신부의 말이 귓전에 울린다. “깊은 산골의 가장자리, 농사를 짓기에도 너무 척박하고 힘든 이 땅에서 길이 완성됩니다. 길의 끝, 예수 그리스도께서 가신 길을 그 끝까지 따라가고 싶습니다.” cpbc2019.04.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