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규만 주교의 하느님 이야기](23)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 이후 성령 체험: 성령 하느님항상 성령이 함께 하셨음을!예수님께서 승천하신 후 제자들은 성령 체험을 했다. 깊은 성령 체험을 했던 초대교회 사도들 이야기는 사도행전을 통해 엿볼 수 있다. 우리는 해마다 성령강림대축일을 맞아 그 사건을 되새기고 있다. **성령은 어떤 분이신가 성부는 아버지의 모습, 성자는 아들의 모습으로 그려볼 수 있는데, 성령은 어떤 모습으로 그려야 할지 막막하다. 성경에서 성령은 비둘기 모습으로 그려지고 있다. 비둘기는 매우 상징적 표현이다. 도대체 성령은 어떤 분이실까. 제자들은 어떤 분으로 체험했을까. 구약성경에서 살펴보면 성령은 바람, 숨, 생명, 영 등으로 번역될 수 있다. 창세기를 통해 성령 활동을 이해할 수 있다. "어둠이 심연을 덮고 하느님의 영이 그 위를 감돌고 있었다"(창세 1,2)고 서술하고 있다. 마치 위대한 작가가 대작을 구상할 때 떠오르는 영감과도 같은 느낌이다. 가끔 우리에게도 그런 경우가 있다. 지금 돌이켜보면 쉽지 않았는데 어떻게 그 어려움을 이겨내고 오늘의 내가 될 수 있었을까 의아할 때가 있다. 그런 경우 우리는 하느님 은총을 회상하게 된다. 번뜩이는 아이디어의 경우도 그렇다. 내가 그걸 어떻게 생각해냈을까. 문득 예수님 말씀이 생각난다. "사람들이 너희를 넘길 때, 어떻게 말할까, 무엇을 말할까 걱정하지 마라. 너희가 무엇을 말해야 할지, 그 때에 너희에게 일러 주실 것이다. 사실 말하는 이는 너희가 아니라 너희 안에서 말씀하시는 아버지의 영이시다"(마태 10,19-20). **사도들의 성령 체험을 통한 성령 이해 성령을 받은 사도들은 이제 더 이상 주님을 배반하는 겁쟁이가 아니었다. 겁쟁이에서 용감한 사도로 변신하게 된 것을 성경은 성령의 힘이라고 말한다. 예수를 그리스도로 믿는 신자들을 체포하던 사울은 예수님을 만난 다음 바오로 사도로 변신한다. 초대교회 사람들은 성령 체험을 바탕으로 그리스도인들이 세례를 통해 성령을 받는다고 가르친다. 또 견진성사를 통해 성령의 7가지 은혜를 받는다고 가르친다. 하느님의 성령은 우리에게 이미 선사된 것이지만 완성된 소유물일 수 없다. 하느님의 성령은 우리의 자연적 삶과 비슷하다. 우리의 자연적 삶도 한번에 영구히 주어진 것이 사실이지만 그것은 매순간 새로워지고, 새롭게 선사됨으로써 비로소 우리 삶이 되는 것과 마찬가지다. 바오로 사도는 분명히 성령의 은총의 선물은 여러 가지라고 말씀하신다. 또 바오로는 자신의 삶이 바로 성령의 은총이라 고백하며,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믿게 된 것도,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 모든 위험과 박해, 어려움을 다 견뎌낼 수 있었던 것도 성령의 은총이었다고 말한다. 가장 중요한 것은 성령의 은총이 자신의 영광을 위해서가 아니라 하느님과 이웃 인간, 공동체의 이익을 위한 것이어야 한다는 점을 강조한다. **용서의 능력 주시는 성령 예수님 말씀에 따르면 성령은 무엇보다 죄를 용서받고, 용서하는 능력을 선사하는 분이시다. 죄를 용서받는다면 우리는 성령의 가장 큰 은사를 받은 사람들이다. 우리는 고해성사만 보면 죄를 용서받는다고 배웠기 때문에 죄의 용서를 아주 쉽고 흔한 일로 여길 수 있다. 그러나 사실 죄는 고백 때문에, 보속 때문에 사해지는 게 아니다. 하느님은 우리의 회개하는 마음을 보고 용서하신다. 고백은 뉘우치는 마음의 한가지 표현일 뿐이다. 사실 죄가 용서된다는 것은 엄청난 사건이다. 죄 때문에 아파본 사람은 그것을 이해할 수 있다. 불교에서는 죄가 용서되지 않는다. 이 세상에서 지은 업보는 반드시 갚아야 한다. 다음 생에도 갚지 못하면 다시 또 태어나 갚아야 한다. 용서받을 수 있다면 우리는 하느님의 성령을 받은 사람들이다. 우리가 우리에게 잘못한 사람을 용서할 수 있다면, 우리 역시 하느님의 성령을 받은 사람들이다. 용서할 수 없어 자신을 힘들게 하는 사람을 우리는 수없이 보고 있다. '원수를 사랑하라'는 주님의 명령은 원수를 위한 것이 아니라 미움에서 벗어나 자유롭게 살도록 하기 위한 은총의 명령이다. **하느님과 친교를 나누게 하시는 성령 성령의 은사로 이상한 언어를 말하는 능력이 언급되곤 한다. 가장 중요한 언어는 하느님과 친교를 나눌 수 있는 마음의 언어다. 하느님 말씀을 마음으로 들을 수 있으면 하느님이 원하시는 것을 알아들 을 수 있다. 사실 우리는 많은 것을 하느님 은총으로 받고 있다. 우리가 지닌 모든 것, 나의 얼굴, 피부, 재산, 부모, 형제, 친구, 능력, 건강…. 어떤 것이 내 것인가. 내 마음은 과연 내 것인가. 어느 개미와 코끼리가 흔들다리를 건넜다. 다리를 다 지난 다음 개미가 동료들에게 자랑스럽게 이야기 했다. "야! 내가 다리를 지나가니까 다리가 막 흔들리더라구." 우리는 그 개미처럼 마치 자기 힘으로 모든 것을 한 것처럼 잘난 체할 때가 종종 있다. 우리의 어려웠던 순간들을 기억해보자. 내가 그 어려움을 어떻게 이겨냈는지, 어쩌면 보이지 않는 코끼리가 우리와 함께 건넜기에 다리가 흔들렸던 것은 아닌지…. 어려울 때마다 코끼리보다 더 큰 하느님 은총이 함께하셔서 오늘의 내가 됐다는 것을 깨달을 수 있다면, 하느님의 성령을 인정할 수 있지 않을까. 어쩌면 이런 깨달음조차 성령의 선물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정리=박정연 기자 cecil@pbc.co.kr조은일2011.11.15
![[출판] 신앙이 영재를 키운다 - 신앙을 맨 앞에 세우니 인성,학업은 저절로](//cpbc.co.kr/CMS/newspaper/2013/02/rc/442033_1.1_titleImage_1.jpg)
[출판] 신앙이 영재를 키운다 - 신앙을 맨 앞에 세우니 인성,학업은 저절로 여섯 자녀 모두 '영재'로 키워낸 최창섭, 허현순씨 부부가 전하는 교육 비법은 신앙이 영재를 키운다허현순 지음/평화방송 평화신문/ 1만 2000원 주일미사와 자녀의 학원 특강시간이 겹친다면 어느 곳에 보내야 할까. 이 질문에 적지 않은 학부모들은 "기도는 엄마가 할 테니, 너는 가서 공부해라"고 말한다. 그러나 최창섭(아우구스티노, 60)ㆍ허현순(마리아 프란체스카, 58)씨 부부는 "아무리 중요한 공부라도 신앙을 앞설 수는 없다"며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허씨는 최근 저서 「신앙이 영재를 키운다」를 통해 신앙으로 자녀교육에 성공한 비법(?)을 공개했다. 부부는 아이를 6명이나 낳았다. 아이들이 어릴 때는 '다둥이 가족'으로 매스컴에 여러 차례 소개됐다. 하지만 이 부부의 진면목은 17년 터울의 여섯 자녀를 '영재' 소리를 들으며 키워낸 점이다. 그것도 돈이 많아 고액과외를 시키거나 유학을 보내서가 아니라 아예 미국으로 이민을 가서 신앙으로 자녀를 키웠다. 자녀들은 SAT 만점, 6개 국어 능통, 전액 장학금으로 미국 명문대 진학, 각종 수학ㆍ과학 경시대회 우승 등 면면이 화려하다. 그러나 부부가 가장 자랑스러워 하는 것은 아이들이 한 번도 주일미사에 빠진 적이 없다는 것이다. 부부는 자녀들에게 "신앙 먼저, 공부 나중"이라고 강조해왔다. 신혼 때부터 매일 기도를 바쳐온 부부는 자녀들을 갓난아기 때부터 기도에 참여시켰다. 성당에 가도 유아방 대신 일반 신자석에서 가족이 함께 기도했다. 아이들은 엄숙한 분위기에 이미 익숙해져서인지 다른 신자들이 "어쩜 이리 안 우냐"며 장남 삼아 꼬집어도 얌전했다. 이런 신앙 조기교육 덕분에 아이들은 엄마, 아빠보다 '아멘'이라는 말을 먼저 했다. 3~4살이 되면 묵주알을 굴리며 기도문을 줄줄 외웠고, 쉬는시간에는 '미사 놀이'를 하며 자랐다. 아이들이 글자와 숫자를 익힌 것도 신앙생활 안에서였다. 허씨는 "아이들을 성바오로서원에 우르르 데리고 가서 읽고 싶어하는 책을 한보따리씩 사갖고 왔다"며 "성경이나 성가에 은총과 사랑, 믿음 등 비슷한 단어가 반복되다 보니 아이들이 이를 찾으며 재미를 붙였다"고 말했다. 또 "성경 속 비유와 의미를 고민하는 동안 자연스레 생각하는 힘도 자라난 것 같다"고 말했다.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자란 아이들은 신앙의 맛을 깨달았다. 허씨는 "학교 가기 전 매일 새벽미사에 참례하는 것은 힘드니 그만하는 것은 어떠냐고 물었다가 오히려 타박을 들었다"며 "내심 뿌듯했다"고 말했다. 부부는 신앙이 우선된 공부가 중요한 이유로 '하느님 CCTV 이론'을 들었다. "하느님이 계신다는 것을 믿는 아이들은 하느님이 언제 어디서나 자신들을 지켜보고 계신다는 생각 때문에 유혹에 빠지기 쉽지 않고, 혹시 잘못 들어갔다 하더라도 주님의 사랑을 깨닫는 순간 빨리 돌아올 수 있다"는 것이다. 허씨는 "우리 부부가 아이들 교육에 특별히 신경 쓴 것은 사실"이라며 "공부도 안 시키고 성당만 다녔다고 하면, 주님께서 주신 축복을 욕되게 할 것 같았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부부는 "부모가 신앙생활에서 모범을 보이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교육 주체는 부모지만 삶의 주체는 아이라는 말이 있지 않습니까? 아이들의 행복한 삶을 위해서 신앙을 가장 중요한 재산으로 물려줘야 합니다." 허씨는 2월 20일 서울 양천본당, 28일 서울 일원동본당 신앙의 해 사순특강에 이어 12일 오후 8시 서울 둔촌동본당, 14일 오후 8시 서울 방배4동본당 사순특강에서 신앙으로 영재를 키운 자녀교육 비결을 들려준다. 김은아 기자 euna@pbc.co.kr조은일2013.02.26
 평신도, 창의적으로 선교하라!](//cpbc.co.kr/CMS/newspaper/2010/08/rc/347154_1.1_titleImage_1.jpg)
[선교, 할 수 있을까?](32) 평신도, 창의적으로 선교하라!양해룡 신부(서울대교구 사목국 선교, 전례사목부 담당)필자가 로마 유학 중일 때다. 박사 학위 논문 초고를 주임 지도교수에게 제출한 뒤 평가를 기다리는 동안 '뭐 특별한 지적은 없겠지'하면서도 긴장을 늦추지 못했다. 마침내 교수가 불러 찾아갔는데, 이게 웬 말인가. 교수는 내가 3년 동안 작업한 논문을 다시 쓰라고 했다. 순간 아찔했다. 3년이라는 세월을 허송세월한 것만 같았다. 교수는 나에게 한 달 동안 아무것도 하지 말고, 논문 주제를 깊게 생각하라고 말했다. 그 한 달 동안 필자는 죽을 맛으로 생각을 짜냈다. 일주일 동안 그 생각의 단초를 잡고 나서 다시 교수를 만났다. 그때 교수는 매우 흡족해 하면서 내 견해를 확장하라고 했다. 필자는 안도의 숨을 내쉬고 논문을 다시 정리했다. 결국 1년 늦어졌지만 이렇게 논문을 작성하면서 교수가 나에게 가르치려 했던 것은 내 생각을 전개해 나가는 훈련이었음을 알게 됐다. 다른 사람의 것을 인용해 논문을 전개해 나가는 것이 아니라, 바로 필자의 생각을 논문에 쓰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고 가르친 것이다. '창의력', 이것은 우리가 가장 어려워하는 것 중 하나이다. 그래서 어떤 이는 놀면서 일할 때 그 창의력을 발휘할 수 있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남이 시켜서 하는 일이 아니라 자신이 일의 주인이 돼 놀면서 일할 때 창의성이 제대로 발휘된다는 것이다. 그런데 본당에서 평신도들은 과연 사목과 선교를 자신의 일로 생각하면서 일을 하는 것일까? 교회 구조 특성상 교계제도 아래, 평신도 역할이 제한적이라는 것에 동의한다. 하지만, 그렇다고 사제나 수도자가 시키는 일만 하면, 그 또한 문제가 있다. 그래서 평신도가 자율적으로 자신의 일을 찾아서 재미있게 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깨닫는다. 예를 들어보자. 어느 본당 총구역장이 아이디어를 내어 유에스비(USB) 메모리 칩에 성경을 입력해 주임신부 허락을 받고, 남성 신자들에게 나눠 줬다. 그는 회사에서나 집에서나 성경말씀을 쉽게 접하고 찾을 수 있게 신자들을 도와 준 것이다. 이런 아이디어는 분명 누가 시켜서 한 것은 아니다. 이렇게 평신도는 선교의 첨병이기에 항상 자신에 맞는 창의력을 발휘하여 믿지 않는 이들에게 접근하고, 그리고 복음화에 매진할 수가 있다. 이러한 창의력을 가지려면, 신앙생활이 즐거워야 한다. 그리고 언제나 자율적 마음을 갖도록 해야 한다. 또 문화를 즐길 수 있는 시간을 많이 갖고, 독서를 통해 다른 사람들 아이디어를 배울 수 있어야 한다. 이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언제나 생각의 지평을 열 수 있도록 혼자 기도하는 시간을 가져야 하겠다. 아울러 각자 생각해 낸 창의성을 다른 사람들과 나누는 것이다. 나눔은 내 생각을 발전시키고, 풍요롭게 하며 성장시킨다. 그래서 그룹이나 단체에서 자신의 '창의적 생각'을 쉽게 나눌 수 있는 인격적 성숙이 중요하다. 여기에서 성직자에게 요구되는 것은 신자들의 선교와 사목의 창의적 아이디어에 기를 북돋아주는 것이다. 이렇게 평신도들이 재미있고 참여적인 '노는 분위기'에서 나온 가치 있는 아이디어가 분명 우리 교회의 미래를 결정할 수도 있을 것이다. 평신도들이 선교사로서 존재하고 활동하는 범위는 아주 광범하다. 그들의 고유한 분야는 지역적, 국가적, 국제적, 정치, 사회, 경제 등 아주 광범하고 복잡한 세계이다. 교회 안에서는 여러 가지 직무와 의무와 기능과 그리스도교 생활을 활성화하는 방법 등이 있다. (「교회 선교 사명」 72) 조은일2010.08.17
[유학따라 떠나는 신앙여행]31-칠극(七克) 이야기(6)가난을 즐기고 부를 베풀라최기섭 신부(가톨릭대 신학대 학장, 동양철학)셋째주제: 탐욕을 풀다칠극(七克)을 읽다보면 같은 주제를 반복하다보니 사실 지루한 느낌이 들기도 한다. 그러나 찬찬히 따라가다 보면 한 주제를 이렇게 다양하고 꼼꼼하게 설명할 수도 있구나 하고 감탄하게 된다. 탐욕의 의미, 그 해로움, 다양한 실상, 풍부한 예화, 끊임없이 쏟아내는 성인과 현자들의 명언들 그리고 성경과 그리스도교의 가르침들…. 무엇보다도 해탐(解貪)이라는 단어가 깊이 와 닿는다. 나는 앞의 글들에서 유학의 수양론이 보편적이고 공정한 하늘의 뜻(天理之公)을 어떻게 잘 보존하는가 그리고 사사로운 인간의 욕심(人慾之私)을 어떻게 막는가 하는 두 방면으로 전개됨을 설명한 적이 있다. 여기에서 유학은 '인간의 사사로운 욕심'에 대해 전쟁을 치르듯이 막아야 한다고 말하지만, 빤또하는 그 욕심에서 벗어나 자유로워져야 한다고 강조하는 것이다. 즉 세상과 재물을 자기 쪽으로 끌어당기면 욕심이 되지만, 그것을 놓거나 밖을 향해 풀어헤치면 그것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이야기다. 결국 문제와 답은 어떤 태도를 취하느냐에 따라 달라진다. 어느 종교가 탐욕을 탐탁하게 여기겠는가? 불교에서도 수도(修道)에 가장 큰 걸림돌(三毒)은 욕심(貪), 성냄(瞋), 어리석음(痴)이라고 말한다. 도가(道家)에서도 수도(修道)의 핵심으로 덜어냄(損)이나 비움(虛)을 제시하는 것을 보면 더욱 그러하다. 그 점은 유학도 마찬가지다. 맹자도 일찍이 "수양하는데 욕망을 적게 하는 것보다 더 좋은 것은 없다"(養心 莫善於寡欲, 「孟子」 '盡心 下')고 했는데, 송대의 주렴계 선생은 더 나아가 "聖人은 배워서 이를 수 있는데, 그 핵심은 하나이고, 그것은 바로 무욕이다"(聖可學乎 曰可 有要乎 曰有 請問焉 曰一爲要 一者 無慾也. 「通書」)고 말한다. 칠극을 원문으로 읽거나, 원문과 대조하며 읽노라면 이 글들이 과연 서학서(西學書)가 맞는가 하는 생각이 들 때가 있다. 성경이나 교부들의 말씀을 번역하면서 선택한 용어들이 거의 유학의 용어들이요, 어떤 때는 그 내용까지 흡사하기 때문이다. 빤또하가 탐욕을 설명하면서 인용한 글들 중에, 유교의 가르침과 핵심적으로 맞닿아 있는 것들을 소개하자면 다음과 같다. 하나는 재물을 취할 때 그것이 의(義)에 합당한지 살펴야한다는 것이다. "성 그레고리우스는 어떤 부자에게 가르침을 주며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당신은 재물을 손에 넣을 기회를 만나면, '이것이 의로운 재물인가 아니면 의롭지 않은 재물인가'를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의롭지 않은 재물은 그것을 하나라도 손에 넣으면 하느님(상제)에게 죄를 받기 때문입니다."(聖厄勒臥略 勸一富者曰 爾値取財之勢 宜思非義之財 一取卽得罪於上帝也. 「七克」, '解貪') 또 하나는 안빈낙도(安貧樂道)의 정신이다. 빤또하는 말한다. "편안한 마음으로 가난을 받아들이는 것은 참아낼 수 있는 일이다. 그러나 가난을 즐기는 것은 매우 지혜로운 일이다. 왜냐하면 가난과 궁핍을 즐기는 것은 바로 하늘로 올라가는 날개이기 때문이다."(平心受貧 忍也. 樂貧 大智也. 貧廬之樂 昇天之翼. 「七克」, '解貪') 그러나 빤또하는 탐욕의 문제 역시 하느님과의 관계 안에서 해석하고 있다. "하느님(天主)이 너희를 가난하게 하였다면 이는 너희가 가난을 참고 견디는 공으로써 보답을 받기를 바란 것이고, 너희를 부유하게 해 주었다면 이는 너희가 가난한 이를 도와주는 공으로써 보답을 받기를 바란 것이다."(원문생략. 「七克」, '解貪')조은일2008.09.23
[유학따라 떠나는 신앙여행]28- 칠극(七克) 이야기(3)고개 숙일수록 주님과는 가까워져최기섭 신부(가톨릭대 신학대 학장, 동양철학)칠극(七克)은 교만에 관한 이야기로 시작된다. 그것은 판토하가 성경을 인용해 말하고 있듯이, 교만이 모든 죄의 시작(집회 10,13)이며, 모든 악덕의 뿌리이기 때문이다. 더 나아가 교만은 하느님과의 관계에서 비롯된 죄악이기도 하다. 그래서 판토하는 교만의 실마리를 네 가지로 분류한다. "그 첫째는 선(善)이 자기로부터 나온다고 생각하여 그것을 하느님(天主)께 돌리지 않는 것이고, 둘째는 선이 하느님으로부터 나오는 것을 알고 있으면서도 자신의 공적으로 돌리는 것이고, 셋째는 가지고 있지 않는 것을 자랑하는 것이고, 넷째는 남을 경멸하며 자신을 뭇사람들과 다르다고 생각하는 것이다"(원문생략. 「七克」, 1권). 유학에서도 교만은 결정적인 악덕(惡德)으로 간주된다. 그래서 공자는 「論語」에서 이렇게 말한다. "만일 주공과 같은 아름다운 재능을 갖고 있어도 교만하고 인색하다면 그 나머지는 볼 것이 없다"(子曰 如有周公之才之美 使驕且吝 其餘 不足觀也已. '태백편' 11). 공자는 늘 주(周)나라의 문물제도를 예찬하고, 그것을 이룩한 주공(周公)을 흠모해 이상적 인간으로 생각하며, 꿈에서라도 그를 만나고자 했다. 그런데 이러한 주공이 훌륭한 능력을 지녔다하더라도 교만하고 인색하다면 인간으로서 더 볼 것이 없다는 말이다. 놀랍다. 「大學」에서도 "군자에게는 큰 道가 있으니, 반드시 忠과 信으로써 얻고, 교만함과 방자함으로써 잃는다"(君子有大道 必忠信以得之 驕泰以失之. 10장)고 경고한다. 판토하가 겸손을 이야기하면서 인용한 또 하나의 중요한 성경구절은 "훌륭하게 되면 될수록 더욱 더 겸손하여라. 주님의 은총을 받으리라"(집회 3,18)는 말씀이다. 이것은 그가 높은 지위를 얻으려고 마음 쓰지 말도록 권고하기도 하지만, 이미 높은 지위를 얻었다면 더 겸손하라는 충고이기도 하다. 그래서 그가 제시하는 많은 예화들은 대부분 서양의 임금들에 관한 이야기이며, 더 나아가 성덕(聖德)에 출중한 서양의 현인들이 오히려 얼마나 겸손에 힘썼는지를 역설적으로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유학에서도 '크고 넉넉한 모습을 지니고 있으면서도 교만하지 않는' 사람을 君子라고 말한다(子曰 君子 泰而不驕. 「論語」, 자로편). 이러한 사상은 주역(周易)의 흐름 안에서도 나타난다. 즉 정자(程子)는 주역의 겸괘(謙卦)를 설명하면서 이렇게 말하고 있다. "겸(謙)은 「서괘전」(序卦傳)에 '크게 소유한 자는 가득차게 할 수 없기 때문에, 겸괘로써 받았다'고 했다. 그 소유한 것이 이미 크면 가득차는 데까지 이르게 할 수 없고, 반드시 겸손하고 덜어내야 하기에, '대유괘'(大有卦) 뒤에 '겸괘'로 받은 것이다"(謙 序卦 有大者 不可以盈 故受之以謙. 其有旣大 不可至於盈滿 必在謙損 故大有之後 受之以謙也. 「周易傳」, 謙卦). 다시 말하면 주역의 64괘의 순서는 아무렇게나 결정된 것이 아니라 자연의 질서와 성덕(成德)의 과정을 일러주는 것인데, '겸괘'가 '대유괘' 다음에 온 이유는 이미 충분히 가진 자는 반드시 겸손하고 덜어내야 하는 과정을 거치는 것이 순리(順理)이며, 이상적 경지를 향해 가는 올바른 과정이라는 것을 나타내기 위함이다. 교만의 시작은 하느님을 무시하는 것(시편10,4;예레 13,5)이며, 모든 것이 하느님에게서 온 것임을 깨닫지 못하는 데 기인한다. 그리고 더욱 높아지려는 욕심과 그것을 통해 주어지는 것이 자기의 것으로 착각함으로 교만은 더욱 커지는 것이다. 자, 어떻게 해야 할까? 조은일2008.08.19

2000년 전 교부들이 묻는다 “당신의 마음은 어디 있습니까”교부 문헌 주제별로 선집한「교부들의 가르침」 네 번째 책 교부들의 가르침 Ⅳ / 하성수(시몬)·이지영(루치아) 엮음 / 분도출판사 교부 문헌을 주제별로 선집한 「교부들의 가르침」 네 번째 책이 나왔다. 분도출판사와 한국교부학연구회는 지난 2008~2022년 교부들이 창세기부터 요한 묵시록까지 성경 각 구절을 풀이한 내용을 골라 「교부들의 성경 주해」 총 29권을 출간했다. 그 책에서 주요 개념을 가나다순 250여 개 항목으로 분류한 선집이 「교부들의 가르침」이다. 이번에 공개된 4권에서는 ‘마음’부터 ‘부활(인간의)’까지 다룬다. 마음의 의미와 이해·말·무신론·믿음·박해·벌·보상·복음·본성·부자 등에 관한 성경 구절과 해설을 담았다. “예수님께서는 타락한 삶의 모습은 타락한 본성에서 말미암는 것이라고 가르치셨습니다. 그리고 악한 곳간에서는 악한 것만 꺼낼 수 있다고 가르치셨습니다. 사람들은 자기가 지껄인 근거 없고 부주의하고 쓸데없는 말을 해명해야만 합니다. 우리는 우리가 하는 말에 의해 단죄받거나 의롭다고 인정받게 되어 있습니다.”(푸아티에의 힐라리우스 「마태오 복음 주해」 12,19.) “우리가 성경에서 읽듯이, 아브라함은 인간에게 보상받고자 하지 않았기 때문에 하느님께 보상을 받았습니다. ⋯ 주님은 상을 주시는 데 더디지 않으십니다. 나약한 영혼이 눈에 보이는 것들을 경멸한 것을 후회하는 일이 없도록, 주님은 얼른 약속하고 싶어 하시며 큰 상을 주십니다. 자신에게 제공된 이 세상의 것들에 유혹당하지 않은 이에게 큰 상으로 보상하심으로써, 말하자면, 높은 이자로 되갚아 주십니다.”(암브로시우스 「아브라함」 1,3,18.) 한국교부학연구회 하성수(시몬) 선임연구원은 “신약 성경과 가장 가까운 시대에 살았던 교부들이 남긴 대부분의 문헌은 그들이 성경을 읽고 묵상하면서 쓴 풀이기에 「교부들의 가르침」은 성경을 더 깊이 이해하는 데 큰 도움이 될 것”이라며 “교회 일치와 쇄신, 그리스도인의 삶과 영성, 성직자들의 사목과 설교, 평신도의 영적 성숙에 도움이 될 중요한 그리스도교 문헌을 제공하는 데 초점을 맞췄다”고 설명했다. 「교부들의 가르침」은 해마다 한 권씩 총 열 권으로 출간될 예정이다. 윤하정 기자 monica@cpbc.co.kr윤하정2026.01.21

전 세계 젊은이들이 부를 ‘서울 WYD 공식 주제가’ 공개 대회 1년 앞두고 공식 유튜브 채널 통해 ‘Confidite, Ego Vici Mundum’ 선보여 2027 서울 세계청년대회(WYD) 공식 유튜브 채널 영상 화면 캡처. “동쪽에 떠오른 빛을 따라온 너와 나~♩, 잠들던 마음을 깨워 걸어가기 시작하네~♬” 2027 서울 세계청년대회(World Youth Day) 공식 주제가가 3일 첫 공개됐다. 한국인 음악가 김지윤(프란치스코, 39, 수원교구 호계동본당)씨가 작곡한 ‘Confidite, Ego Vici Mundum’으로, 대회 주제성구인 “용기를 내어라. 내가 세상을 이겼다”(요한 16,33)를 뜻하는 라틴어 성경 문구다. 내년 지구촌 젊은이들이 한목소리로 부를 주제가가 본대회 개막을 꼭 1년 앞둔 이날 선보였다. 2027 서울 세계청년대회 조직위원회(위원장 정순택 대주교)는 이날 오후 8시(로마 시각 오후 1시) 대회 공식 유튜브 채널을 통해 합창 중심의 전례 버전과 팝(대중음악) 버전 주제가를 차례로 공개했다. 전례 버전 제작에는 100명이 넘는 WYD 합창단·합주단이 참여했으며, 우리 전통악기의 선율도 가미됐다. 노랫말은 한국어를 비롯해 영어·이탈리아어·스페인어·프랑스어·포르투갈어 등 서울 WYD 6개 공식 언어가 함께 쓰였다. 뮤직비디오에는 국내외 청년들과 함께 주교좌 명동대성당을 비롯한 서울대교구 주요 성지의 아름다운 모습이 담겼다. 공식 유튜브 채널 실시간 대화창에선 전 세계 젊은이들이 자국 국기 이모티콘과 함께 저마다의 언어로 뜨거운 반응을 보이며 서울 WYD에 대한 기대감을 한껏 드러냈다. 주제가 선정은 지난해 7월 시작된 공모에 접수된 국내 140곡과 해외 294곡 가운데 조직위와 교황청 평신도가정생명부(DLFL) 심사를 순차적으로 거쳐 이뤄졌다. 대회 주제성구와 영성을 담아낸 이 곡은 대회 기간 전 세계 청년들이 함께 부르고 기억할 2027 서울 WYD의 대표 상징 가운데 하나가 될 것으로 기대된다. 작곡자인 김씨는 현재 국내 게임 개발사 ‘펄어비스’에서 작곡가 겸 음악 프로듀서로 재직 중이며, 수원교구 호계동본당 반주자와 용인기흥지구 청년연합회 지휘자로도 봉사하고 있다. 그는 본지와의 전화 인터뷰에서 “이제 곡은 제 손을 떠났고, 듣는 사람들의 시간이 됐다. 지금은 좋은 의미의 ‘빈 마음’이 드는데, 이 마음을 간직하고 싶다”며 “나름대로 제게 구도(求道)의 길이 아니었을까 생각한다”고 밝혔다. 김씨에게 곡의 출발점은 도입부에 등장하는 ‘동쪽에 떠오른 빛’이라는 이미지였다. 한국과 서울이 극동에 있다는 점과 동방 박사들이 별을 따라 예수님을 찾아간 성경 이야기를 함께 떠올린 것이다. 그는 “한국적인 선율의 인상에서 출발하되, 한국 문화의 우수성을 내세우는 것이 아니라 서로의 문화를 존중하는 보편성을 표현하고자 했다”고 설명했다. 아울러 김씨는 기성 음악의 형식 위에 단순히 복음적 가사를 얹기보다, 복음 체험과 영성을 충분히 담아낸 음악을 만들고자 했다. 수많은 청년이 한자리에서 함께 부르며 나눌 호흡과 벅참·환희를 상상하면서 곡의 규모와 분위기를 구상했다. 그는 “2023 리스본에서 처음 WYD를 경험했는데, 개인주의가 내면화된 청년들이 경계를 넘어 다른 이에게 관심을 기울이고 환대하는 모습이 인상 깊었다”고 회상했다. 그러면서 서울 WYD에서 청년들이 주제가를 하나의 정답처럼 재현하기보다, 각자에게 와 닿는 방식으로 자유롭게 즐기기를 바랐다. 김씨는 “주제가는 WYD의 목적 그 자체라기보다 서로 다른 문화와 성향의 청년들이 서로를 환대하도록 돕는 수단”이라며 “훗날 이 노래가 서울에서 경험한 만남과 환대의 기억을 다시 불러오는 ‘타임머신’이 되면 좋겠다”고 희망했다. 공식 주제가 뮤직 비디오 보기 이학주 기자 goldenmouth@cpbc.co.kr이학주2026.08.05
![[교회사 속 세계공의회 2부] (4) 제4회가와 공의회 폐막](//cpbc.co.kr/CMS/newspaper/2012/01/rc/402497_1.1_titleImage_1.jpg)
[교회사 속 세계공의회 2부] (4) 제4회가와 공의회 폐막16개 문헌 결실과 함께 새로운 시작 교황 바오로 6세는 1965년 1월 4일 제4회기 개회일을 9월 14일로 정했습니다. 공의회 준비 단계에서 12개 준비위원회가 담당 분야별로 초안을 마련했지만 제3회기까지 진행되는 과정에서 조정돼 의안은 모두 16개로 늘어났습니다. 이 중 제2회기에서 2개 문헌(전례헌장, 사회매체교령)이, 제3회기에서 3개 문헌(교회헌장, 일치교령, 동방교회교령)이 공포됐습니다. 공의회에서 다뤄야 할 의안은 아직 11개나 있었습니다. 1965년 3월 7일 교황 바오로 6세는 로마 시내의 한 본당을 방문, 공의회의 첫 결실인 전례헌장 정신에 따라 미사를 집전했습니다. 신자들을 등지고 드리던 미사에서 신자들을 향해 미사를 드렸고 전례 언어도 상당 부분 모국어인 이탈리아어를 사용했습니다. 교황은 함께한 사제들에게 전례 개혁 이행에 협력할 것을 당부했습니다. 교황은 6월 24일 교황청 기구 개편 및 교회법전 개정에 착수했습니다. ▨제4회기 제4회기 개회 연설에서 바오로 6세는 주교대의원회의(주교시노드)를 공식 기구로 설치하고 유엔 총회에 참석하겠다고 밝혀, 교부들을 놀라게 했습니다. 주교대의원회의는 교회헌장에 들어 있는 주교단 단체성을 가시적으로 드러내는 기구였습니다. 교황의 유엔 총회 참석은 처음 있는 일일 뿐더러 교회와 세상의 대화, 특히 평화에 대한 교회의 확고한 의지를 보여주는 대단히 상징적인 일이었습니다. 교부들은 9월 15일부터 종교 자유에 관한 의안을 시작으로 계시에 관한 수정안, 평신도 사도직에 관한 안, 현대사회에서의 교회에 관한 안들에 대한 심의에 들어갔습니다. 종교 자유에 관한 안은 스페인과 이탈리아 같은 가톨릭국가 주교들의 반대가 심했습니다만, 공산 치하에서 박해를 받은 주교들의 체험적 고백이 설득력을 지니면서 반대 목소리가 잦아들었습니다. 현대 사회에서의 교회에 관한 의안에서는 가정 문제, 평화 문제가 주요 관심사가 됐습니다. 교부들은 또 사회교리에 대한 성찰이 필요하다는 의견을 내기 시작했습니다. 10월 초 교부들은 '주교들의 사목 임무에 관한 교령' 「주님이신 그리스도」(이하 주교교령)를 통과시켰습니다(찬성 2319/반대 1/기권 1). 교령은 교회헌장 제3장 주교직에서 제시하는 원칙에 따라 주교들의 실제 사목 임무를 다루고 있습니다. 개별 교회인 교구도 하나이고 거룩하고 보편되고 사도로부터 이어오는 참다운 그리스도 교회임을 강조했고, 고령이나 기타 이유로 주교직을 수행할 수 없을 때 자발적 은퇴를 권고했습니다. 이전까지 주교직은 사실상 종신직이어서 그에 따른 문제가 적지 않았던 것입니다. 이어 '사제 양성에 관한 교령' 「온 교회의 열망」(이하 사제양성교령. 찬성 2318/반대 3) '수도 생활의 쇄신에 관한 교령' 「완전한 사랑」(이하 수도생활교령, 찬성 2325/반대4), '그리스도인 교육에 관한 선언' 「교육의 중대성」(이하 그리스도인교육선언, 찬성 2290/반대 35), '비그리스도교와 교회의 관계에 관한 선언' 「우리 시대」(이하 비그리스도교선언, 찬성 2221/반대 88/기권 1)이 통과됐습니다. 비그리스도교선언은 "타 종교에서 발견되는 옳고 거룩한 것은 아무것도 배척하지 않는다"고 타 종교에 대해 전향적 태도를 보인 것과 특히 유다인을 하느님의 선택된 백성으로 보면서 유다인 차별과 박해를 배격한 점이 주목할 만합니다. 불과 한 세기 전인 1870년 교황령(교황에게 속한 교회 영토)이 없어지기 전까지 유다인들을 게토(집단 주거지)로 몰아넣어 격리시켰을 정도로 배타적 입장을 보였던 태도와는 180도 달라진 것이었습니다. 교황 바오로 6세는 1965년 10월 28일 제7차 장엄 공개회의에서 교부들이 통과시킨 3개 교령과 2개 선언 곧 주교교령과 사제양성교령, 수도생활교령 등 3개 교령과 그리스도인교육선언 및 비그리스도교선언 등 2개 선언을 공식 반포했습니다. 공의회는 약 20일 후인 11월 18일 제8차 장엄 공개회의에서 교부들이 통과시킨 '하느님 계시에 관한 교의 헌장' 「하느님의 말씀」(이하 계시헌장, 찬성 2344/반대 6)과 '평신도 사도직에 관한 교령' 「사도직 활동」(이하 평신도교령, 찬성 2340/반대2) 두 문헌을 공포했습니다. 계시헌장은 16세기 트리엔트 공의회가 "오직 성경만!"을 주장한 프로테스탄트 개혁에 맞서면서 그동안 다소 등한시했던 성경의 중요성을 재인식, 성경과 성전을 똑같은 애정으로 공경할 것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평신도교령은 교회헌장의 평신도 신원을 바탕으로 평신도 사도직의 고유한 측면이 현세 질서의 쇄신에 있음을 강조했습니다. 이제 공의회는 막바지로 치달았습니다. 남은 4개 의안에 대한 위원회들의 마지막 수정 작업과 투표를 거쳐 12월 7일 제9차 장엄 공개회의에서 '종교 자유에 관한 선언' 「인간 존엄성」(이하 종교자유선언, 찬성 2308/반대 70/기권 6), '교회의 선교 활동에 관한 교령' 「만민에게」(이하 선교교령, 찬성 2394/반대 5), '사제 생활과 교역에 관한 교령' 「사제품」(이하 사제생활교령, 찬성2390/반대 4), '현대 세계의 교회에 관한 사목 헌장' 「기쁨과 희망」(이하 사목헌장, 찬성 2309/반대 75/기권 7)이 공포됐습니다. 종교자유선언은 그리스도 신앙의 자유의 토대와 근거를 밝히는 가운데 타 종교들도 고유한 권리가 있음을 확인하고 있으며, 선교교령은 선교가 교회의 본성임을 강조하면서 선교 활동의 쇄신을 위한 원칙과 기준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사목헌장은 제2차 바티칸 공의회에서 가장 뜸을 많이 들인 문헌이었습니다. 교부들 사이에서 그만큼 뜨거운 관심과 논란을 불러일으켰고 수정과 보완을 거친 것입니다. 문헌은 세상과 대화를 강조한 공의회의 '백미'라고 해도 지나치지 않을 것입니다. 16개 문헌 반포를 마무리한 1965년 12월 7일 공의회는 또 하나의 역사적 선언을 합니다. 동ㆍ서 교회 결별의 결정적 원인이 됐던 1054년의 상호 파문을 철회하는 공동선언을 바티칸과 이스탄불(옛 콘스탄티노플)에서 동시에 발표한 것입니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가 역점을 둔 '교회 일치'를 위한 뜻 깊은 선언이었습니다. ▨페막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이튿날인 12월 8일 교황 바오로 6세가 주례한 성대하고 장엄미사로 폐막했습니다. 교황은 폐막 미사 후 공의회에 참가한 교부들 이름으로 국가지도자들을 비롯해 사상가와 학자, 예술가, 여성, 노동자, 가난한 이와 병자와 고통받는 모든 이, 젊은이 등 전 세계 모든 사람들에게 보내는 메시지를 발표합니다. 이로써 제2차 공의회는 막을 내렸습니다. 그렇지만 그 막은 새로운 시작을 위한 신호였습니다. 이창훈 기자 changhl@pbc.co.kr조은일2012.01.17
![[출판]슬픈 예수 - 예수님은 현재 교회 모습에 기뻐하실까?](//cpbc.co.kr/CMS/newspaper/2013/07/rc/465316_1.1_titleImage_1.jpg)
[출판]슬픈 예수 - 예수님은 현재 교회 모습에 기뻐하실까?평신도 신학자, 마르코복음 해설 통해 교회와 신자들 잘못된 의식 비판 슬픈 예수(김근수 지음/21세기 북스/1만 6000원) 독일에서 성서신학을, 남미에서 해방신학을 전공한 평신도 신학자 김근수(요셉)씨가 쓴 마르코복음 해설서다. 마르코는 예수 역사의 핵심 부분을 최초로 기록한 복음서다. 요한 세례자 이야기에서 시작해 예수 십자가 처형까지 예수의 역사를 생생하게 다루고 있다. 저자는 마르코복음을 '가난한 사람들의 집단 창작품'이라고 했다. 가난한 사람들 입으로 후대에 전해진 예수 이야기라는 것이다. 그렇기에 그의 해설은 '역사'의 예수와 '가난한 사람들'에 기초하고 있다. 그는 "가난한 사람들의 목소리가 반영되지 않는 신학은 아직 신학이 아니다. 가난한 사람들의 목소리가 담기지 않은 성경해설은 아직 성경해설이 아니다"라고 외치는 신학자다. 그가 보는 예수는 이웃 사랑을 외치다가 십자가에 처형 당한 게 아니라 사회 기득권 세력을 비판하다가 처형 당했다. 예수는 가난한 사람을 편들고 편애하신 분이다. 목숨 걸고 불의에 저항하며 세상 고통을 없애려 애쓰다가 겪는 고통을 기꺼이 감당한 분이다. 그래서 예수는 슬프다. 저자는 "마르코는 영광의 신학이 아니라 고난과 희생의 신학을 강조했다"며 "신학자는 먼저 '십자가에 매달린 가난한 사람들'을 보아야 한다"고 말한다. 그는 마르코복음 해설을 통해 현대 그리스도교가 보여주고 있는 잘못된 모습을 통렬히 비판한다. 예수는 결코 그렇게 살지 않았다는 것이다. 특히 자본주의와 안락주의에 물들어가는 교회와 성직자, 신자들의 의식에 일침을 가했다. "세례받는다는 것은 그 사상에 동조한다는 뜻이다. 오늘날의 그리스도교는 마치 자본주의에 세례받은 모양이다. 건물 짓네, 국외 선교하네, 사회복지 시설 운영하네 하며 돈 내시란다. 해도 해도 정말 너무하다. 돈 이야기 제일 많이 하는 곳이 그리스도교인 듯하다. 가난한 사람은 교회에서 그저 안절부절못한다. 이것이 예수 탓인가? 예수가 기막힐 노릇이다. 예수는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희생했는데 정작 교회는 가난한 사람들을 사실상 밀어내는 형국이다"(23쪽). 유난히도 '멋지고 번듯한' 성전 건립에 전 신자가 동원되는 세태도 꼬집었다. 예수는 사람들이 사는 곳을 직접 찾아가 애환을 나눴다. 종교건물을 따로 건축하지 않고 삶의 현장에서 살면서 가르쳤다. 그는 "한국의 교회나 성당 건물 재산의 10분의 1만이라도 팔아서 아픈 사람을 무료로 치료하면 사람들이 그리스도교를 다시 볼 것"이라고 했다. 저자는 병을 고치고 귀신을 쫓는 예수의 모습에서 사회 불의와 악에 저항하는 정의를 발견했다. 예수의 기적이 단순한 치유나 귀신 쫓음에 불과한 것이 아니라 사회적 갈등과 정치적 파문을 일으켰다는 사실을 상기시킨다. 귀신 이야기에 주목해야 할 의미는 악이 결코 스스로 사라지거나 소멸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귀신과의 투쟁에서 악과 싸우는 예수의 해방적인 투쟁을 볼 뿐 아니라 그 투쟁을 우리가 계승함을 깨달아야겠다. 귀신을 우리가 몰아내야겠다. 종교, 정치, 사회뿐 아니라 우리 마음속 깊이 자리 잡은 집주인 베엘제불(돈 귀신, 권력 귀신, 이기주의)이라는 귀신을 몰아내자는 말이다.… 그리스도교가 잘못을 저지를 때에도 그저 '아멘, 옳소' 해서는 안 된다"(77쪽). 그는 또 시대의 변화와 흐름에 따라 남성 중심적 교회 제도에 대해서도 다시금 생각해볼 것을 주문했다. 그는 "마르코는 세상을 정확하게, 교회를 날카롭게, 가난한 사람을 따스하게, 우리 자신을 침착하게 보라고 권고한다"고 했다. 또 교회 행태에 실망하거나 그리스도교 역사에 비판적인 사람들이 마르코복음을 통해 위로받기를 희망했다. 세상과 소통하는 신학자인 저자는 페이스북을 통해 연재한 글을 엮어 책으로 냈다. 그의 페이스북에서는 현재 슬픈 예수Ⅱ 마태오복음 해설이 연재 중이다. 박수정 기자 catherine@pbc.co.kr조은일2013.07.23
![[생활 속의 복음] 예수 성탄 대축일 -하느님이시며 참 빛이신 분](//cpbc.co.kr/CMS/newspaper/2011/12/rc/399515_1.1_titleImage_1.jpg)
[생활 속의 복음] 예수 성탄 대축일 -하느님이시며 참 빛이신 분서광석 신부(전주교구 신풍본당 주임)오늘 복음은 "처음 말씀이 계셨고 그 말씀은 하느님이시며 참 빛이신 분이다. 세상 모든 것이 참 빛이신 그분을 통하여 생겨났지만 세상은 그분을 알아보지 못하였다. 그러나 그분은 당신을 믿고 받아들이는 이들에게 하느님의 자녀가 되는 권한을 주셨다. "말씀이 사람이 되시어 우리 가운데 사셨다"는 내용이다. 원조들의 잘못으로 하느님에게서 분리된 우리를 하느님과 다시 일치시키시고, 또 우리를 이어주실 분이 우리를 위해 태어나셨다. 그 이름은 놀라운 경륜가, 용맹한 하느님, 영원한 아버지, 평화의 군왕(이사 9,5-6 참조)이신 임마누엘 예수 그리스도다. 하느님께서 구약의 오랜 세월 동안 인간에게 당신 사랑을 어떻게 보여주셨는가를 우리는 성경을 통해 잘 알 수 있다. 하느님 사랑에서 떨어져 나간 암울한 인간은 오직 육신의 안위만을 위해 세상에 재물과 명예를 쌓는 것에 목적을 둔 듯 살고 있었다. 이처럼 우매한 인간을 향해 하느님은 끊임없이 사랑이신 당신을 나타내 보이셨다. 역사 속에서 일정한 장소ㆍ사물ㆍ사람을 통해서다. 즉 하늘의 천둥 번개와 바람, 땅의 나무와 흙, 물과 불, 혹은 예언자 등 자연적이거나 초자연적 방법을 통해 간접적으로 드러내셨다. 구약 전체 내용이 '그 사물', '그 사람', '그 사건'을 통해 구체적이고 점진적으로 현세에 집착하는 인간에게로 다가오시는 구원 역사이다. 이 오랜 구약의 세월을 닫고 창조주께서 목덜미가 뻣뻣한 당신 백성(탈출 32,9)에게로 직접 오시기 위해 피조물 마리아에게 당신의 특별한 은총을 입게 하셨다. 이 여인 안에 스스로 작아지신 하느님, 곧 인간이 되신 것이다. 바오로 사도는 이 놀라움을 "당신 자신을 비우셨다"(필립 2,7)고 했으며, 교부들은 "하느님이 우리의 작음을 취하셨다"고 일컬었다. 성경은 평화의 왕, 아기 예수님 탄생으로 이제 그 분 왕국에서는 "늑대가 새끼 양과 함께 살고 표범이 새끼 염소와 함께 지내리라. 송아지가 새끼 사자와 더불어 살쪄 가고 어린아이가 그들을 몰고 다니리라. 나의 거룩한 산 어디에서도 사람들은 악하게도 패덕하게도 행동하지 않으리라"(이사 11,6-9)고 전하고 있다. 우리 인간은 늑대ㆍ양ㆍ표범ㆍ독사ㆍ살모사ㆍ소ㆍ곰 등 동물 속성을 자신들 안에 지니고 있다. 그래서 본능적으로 살면 서로가 서로에게 독사로, 양으로, 곰이나 사자 등으로 변할 수 있다. 그러니 신앙 안에서 아집과 이기심으로 가득 찬 자신을 벗고 이타적 사랑으로 전환된 새로운 그리스도인이 돼야 한다. 즉 예수님 삶과 일치할 때 본능적인 우리의 나쁜 속성들은 하느님 사랑 안에서 순화된다. 신앙으로 평화로운 생활이 가능한 것이다. 세상과 자신에게 고정된 시야는 하느님과 이웃에게로 향하게 되고, 아무리 보잘것없는 작은 사랑의 행위라도 그리스도 정신의 모든 것으로 승화된다. 그리고 그 사랑은 성령의 열매를 맺어 이웃을 구원으로 이끈다. 또 하느님 은총으로 인간은 위대하고, 존엄하며 인격적 존재로 바뀐다. 소설 「부활」의 저자인 톨스토이가 "신앙 없는 인간의 생활은 짐승의 생활이다"고 한 말은 인간의 참다운 가치를 깨닫게 한다. 이제 우리는 채워지지 않는 욕망을 좇으며 살다가 아무런 희망 없이 인생을 마감해야 하는 허무하고 비참한 존재가 아니다. 세상 어떤 부귀영화도 비교할 수 없고, 바꿀 수도 없는 사람이 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신앙하고 살다가 영원에 들어가게 됐다. 하느님 상속인이 된 것이다. 임마누엘 예수님이 "두 사람이나 세 사람이라도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함께 있기 때문이다"(마태 18,20)고 당신의 영적 현존을 약속하셨으니 우리 신앙생활은 그분과 함께해야 한다. 우리나라에는 아직도 하느님 사랑에로 초대 받아야 할 이들이 많다. 신학적, 철학적 학문 이론은 인간 이성에 만족을 줄 수 있지만 가장 효과적인 복음 선포, 즉 하느님 구원에로의 초대 방법은 서로 사랑하는 것이다.조은일2011.12.20
[조학균 신부 미사 이야기] 4- 말씀전례, 하느님과 대화하시는 시간 조학균 신부(예수회, 전례학 박사)말씀전례시작예식에서는 교우들이 능동적이고 자발적이며 겸손한 태도로 하느님의 자비를 청했다면, 말씀 전례는 하느님께서 말씀을 통한 대화 안에서 당신 의중을 드러내시며 삶의 규범을 제시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말씀 전례는 하느님 말씀을 듣는 순간이며, 동시에 하느님과 교우들의 대화 시간이다. 즉 교우들은 말씀을 통해 하느님의 사랑과 자비를 받아들여 삶 속에서 실현하는 것이다. 역사적으로 볼 때 초기 교회에서는 성찬례에 영세한 신자들만 참석했는데, 영세하지 않은 사람들이 성찬 예식 때 그리스도의 몸과 피를 받아먹고 마시라는 사제의 말을 잘못 이해할까봐 말씀 전례가 끝나면 돌려보내고 영세한 신자들로만 성찬례를 거행했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말씀 전례는 제2차 바티칸공의회 이전까지 예비 미사, 혹은 예비신자 미사라는 말로 미사 전례 안에 있었다. 말씀 전례의 중요성은 마틴 루터에 의해 시작된 종교개혁에서 강조됐고, 가톨릭교회에서는 제2차 바티칸공의회의 성서부흥과 전례부흥에 힘입어 말씀 전례의 중요성을 인식하게 됐으며, 나아가 미사의 본질적 요소로 자리 잡게 돼 성찬례와 더불어 미사의 골격을 이루게 되었다. 말씀 전례의 특성은 "하느님 말씀과 공동체의 화답"이며, 그 구조의 성서적 근거는 엠마오의 제자 사화(루카 24,13-35)와 사도 바오로의 트로아스 주님 만찬(사도 20,7-12)에서 찾아 볼 수 있다. 말씀 전례에서는 하느님 말씀을 생생히 듣는 것에 목적을 두고 있기에, 교우들이 성경을 눈으로 읽거나 혹은 함께 읽는 태도는 말씀 전례의 의도에 어긋나는 행동이다. 말씀 전례를 통해 하느님께서는 당신 백성들의 구원 신비를 알려 주시고, 모든 그리스도인들의 영적 양식인 당신 말씀을 독서자 음성을 통해 전해주신다. 특히 복음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당신 백성에게 하늘의 신비를 직접 말씀하고 계신다는 확신과 더불어 당신 생애를 통해 하느님 아버지의 영광을 잘 드러내고 있기에 말씀 전례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이 된다. 4.1 말씀 전례의 의미와 가치 성경은 성령의 영감을 받아 하느님 말씀을 받아 적은 것이다. 하느님 말씀은 단순히 일회성 사건으로 끝이 나는 것이 아니라 교회 안에서 지금도 영속적으로 반복 계시되고 있다. 하느님 말씀은 항상 현재라는 시간과 공간 안에서 교우들에게 구속과 구원의 신비를 열어 주시며, 영적 양식을 제공하기 때문이다. 말씀 전례에서 선포되는 하느님 말씀의 의미를 다음 5가지로 설명할 수 있다. 1) 현존하시는 하느님의 직접적 말씀. 2) 구원 능력을 지닌 하느님 말씀. 3) 하느님 구원 업적의 기념과 선포. 4) 믿음을 낳고 기르는 말씀. 5) 참 생명을 주는 영적 양식. 또한 제2차 바티칸공의회에서는 말씀 전례 안에서 하느님 자신이 인간에게 말씀하시는 진리에 대해 강조하고 있으며, 특히 교회는 하느님 말씀과 주님 성체와 함께 거룩한 전례 안에서 모든 교우들이 끊임없이 영적 양식을 얻을 수 있고, 양육되고 있다고 가르치고 있다. 하느님 말씀은 교회를 지탱하게 해주는 힘이 되고, 교회의 자녀들에게는 신앙의 힘, 말씀의 양식, 영신 생활의 깨끗하고 마르지 않는 샘이 되는 힘과 능력을 갖게 해주며, 신앙의 최고 규범으로 생각하게 해준다. 교회에서는 그리스도의 구원사업에 끊임없이 동참하기 위해 말씀 전례를 통해 주님의 전 생애를 기념하고자 교회력에 따라 봉독하고 있는데, 이는 듣는 이로 하여금 각자 마음에 새기도록 하고 말씀 안에 숨겨진 보물을 찾아 구원으로 인도하고 실현하고자 하는 것이다. 하지만 은총의 열매는 각자의 노력과 태도에 달려 있는데, 마르코 복음의 자라나는 씨의 비유(4,26-34)에서 보면, 말씀은 항상 우리와 함께 있지만 그 말씀을 받아들이는 각자의 자세에 따라 다르게 열매 맺는다. 하느님 나라는 말씀을 통해 우리와 함께 하고 있지만 아직 완성되지 않은 것과 같이, 말씀이 함께 한다는 것은 그리스도의 구원 사업이 시작됐으나 아직 완성되지 않았음을 말한다.조은일2009.06.09
[생활속 복음]사순 제2주일- 너희는 그의 말을 잘 들어라이기양 신부(서울대교구 10지구장 겸 오금동본당 주임)예수님께서는 베드로와 야고보, 요한만을 데리고 산으로 올라가셨습니다. 산 위에 오르시자 예수님 모습이 변해 해와 같이 빛나고 빛과 같이 눈부셨다고 합니다. 그리고 난데없이 구약의 율법을 대표하는 모세와 예언서를 대표하는 엘리야가 나타나 예수님과 이야기를 나눕니다. 그 때 하늘에서 소리가 들리지요. "이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이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라"(마르 9,7). 예수님 모습에 너무나도 놀란 베드로가 얼떨결에 말합니다. "저희가 초막 셋을 지어 하나는 스승님께, 하나는 모세께, 또 하나는 엘리야께 드리겠습니다"(마르 9,5). 경외감에 압도당한 제자들은 이 황홀한 광경이 지속되기를 바랍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저희가 여기에서 지내면 좋겠습니다"(마르 9,5)하며 충격과 감동에 취해 머무르기를 청하는 제자들을 데리고 산 아래로 내려오시며 함구령을 내리십니다. 사순 제2주일을 맞는 우리에게 일장춘몽과도 같은 이 놀라운 장면이 말하고자 하는 것은 무엇일까요? 첫째,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높은 산은 하느님을 만나는 장소이기에 예수님께서 산에 오르셨다는 것은 하느님을 만난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둘째, 예수님 얼굴이 변해 빛나고 그 옷이 눈부셨다는 대목은 부활 때 예수님 모습을 미리 보여주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 길을 겪으신 후에 받으시는 영광이 이렇게 대단하다는 것을 제자들에게 먼저 보여주신 것입니다. 셋째, 구약성경을 대표하는 모세와 엘리야가 나타나서 예수님과 함께 말씀을 나눴다는 것은 예수님이 구약성경에 예언된 메시아라는 가르침입니다. 넷째, 구름 속에서 '소리'가 들렸다는 대목이 있습니다. 구름은 하느님 현존 표시입니다. 예수님께서 하느님과 함께하시는 분이시라는 증언입니다. 오늘 복음은 예수님이 구약에 예언된 메시아로서 산 아래에서 예고한 대로 십자가상 죽임을 당하지만(마르 8,31) 부활하여 큰 영광을 받게 될 것이라는 가르침을 주고 있습니다. 우리 시대의 가장 무거운 십자가를 지고 사셨던 분이 선종하신 김수환 스테파노 추기경님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스테파노 추기경님은 불의가 세상을 뒤덮고 24시간 감시와 도청이 난무하는 상황에서 나라와 국민에 대한 걱정 때문에 불면의 밤을 지새며 평생을 무거운 십자가를 지고 사셨던 분이셨습니다. 그러나 그분 빈소가 마련됐던 명동성당은 그분을 추모하는 열기로 상가가 아니라 마치 피정 집 같았습니다. 거룩한 기운이 그곳을 뒤덮고 있었고 사람들은 그분 삶을 그리며 인생을 어떻게 살아야 할지 마음의 눈을 뜨게 됐습니다. 김 추기경님께서는 오직 하느님만을 의지하며 십자가를 지고 부활의 영광에 참여한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확실하게 보여 주셨습니다. 우리는 그분과 같은 시대를 살 수 있어서 행복했고, 그분을 통해 산 아래 현실을 살아갈 힘을 얻게 됐습니다. 우리는 제자들처럼 십자가 없이 영광만이 있는 산 위에 살고 싶은 유혹에 빠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독려해 산 아래 현실로 내려오셨듯이 우리가 살아야 할 곳은 경쟁과 낙오, 갈등과 싸움, 미움과 배척이 상존하는 산 아래 현실입니다. 사람마다 산 아래 현실은 어렵습니다. 장애인 자녀가 있을 수 있고, 직장을 잃고 방황하는 가장을 바라봐야 하는 가정이 내 가정일 수 있습니다. 또 부모 때문에 끝없이 참아야 하는 자녀들의 힘겨운 삶도 내 현실일 수 있습니다. 또 치매 시부모를 모셔야 하는 힘겨운 며느리 삶이 내 것일 수 있습니다. 언제 끝날지도 모르고 감내하기 버거운 십자가들도 있습니다. 이러한 산 아래 현실은 누구에게나 예외가 없습니다. 그러나 성실하게 십자가를 지고 가는 사람에게는 반드시 산위 놀라운 영광이 찾아온다는 희망을 전해주는 말씀이 오늘 복음입니다. 사순시기를 통해 영광의 부활에 동참하시기를 기원합니다. 조은일2009.03.03
[생활속의 복음] 연중제16주일- 우리가 밀과 같이 변화되기를 기다리시는 하느님이기양 신부(서울대교구 10지구장 겸 공동사목 오금동본당 주임)대형 지진과 해일로 수십만 명이 사는 도시가 하루아침에 폐허가 되고, 자신의 욕망을 채우기 위해 어린아이를 납치해 희생시키는 등의 극악한 사건들을 접할 때면 '세상에서 왜 이런 일들이 일어나는가?', '하느님은 정말 선하신 분이신가?'하는 의구심이 생길 때가 있습니다. 하느님을 믿는 사람으로서 이를 어떻게 받아들이고, 비신자들에게는 어떻게 설명해야 하는지 오늘 복음을 통해서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비유를 들어 군중에게 말씀하십니다. 어떤 사람이 밭에 밀을 심었는데 자는 사이에 원수가 와서 가라지를 뿌리고 갔습니다. 가라지가 밀과 함께 자라고 있었지만 주인은 한참 지나서야 알게 되지요. 밀이 자라서 이삭이 팼을 때 가라지가 드러나자 종들이 주인에게 와서 보고합니다. "주인님, 밭에 좋은 씨를 뿌리지 않았습니까? 그런데 가라지는 어디서 생겼습니까?"(마태 13,27) 주인은 짐작합니다. "원수가 그렇게 하였구나"(마태 13,28). 원래 하느님께서는 이 세상을 선하게 창조하셨습니다. 창세기 1-2장에는 하느님께서 세상을 창조하시는 모습이 그려지고 있는데 창조를 끝내실 때마다 하느님께서는 번번이 '보시니 좋다'하시며 만족해 하셨습니다. 하느님께서 이렇게 세상과 사람 모두를 선하게 창조하셨는데 왜 악이 존재할까요? 성경은 하느님과 같아지려는 인간의 교만한 마음이 하느님의 뜻을 거스르게 됐고, 그 결과 세상에 악이 들어오게 됐는데 이를 원죄라고 가르칩니다. 그렇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원수가 그렇게 하였구나"(마태 13,28) 한 주인의 탄식처럼 악인의 존재는 하느님의 의도가 아니라 인간이 저지른 죄의 결과라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우리는 밀과 가라지가 함께 자라고 있지만 주인은 밀이 다칠까 추수 때까지 인내를 가지고 기다리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죄를 지은 사람에게 회개할 기회를 주시고 기다리시는 하느님의 마음도 엿볼 수 있습니다. 물론 가라지가 어느 날 갑자기 밀로 변하지는 않지요. 그러나 가라지 같은 인생이 밀과 같은 인생으로 변하는 경우는 얼마든지 있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성경 속 인물, 마리아 막달레나가 그렇고 대표적인 성인 아우구스티노 성인이 그렇습니다. 방탕한 삶에서 하느님을 만나 완전히 변화된 모습을 보여주었지요. 한 남자가 언제 나올지 모르는 무기수가 돼 좁고 쾨쾨한 독방에 갇히게 됐는데, 하루는 교도소장에게 이런 청을 했습니다. "절대로 문제를 일으키지 않을 테니 교도소 한 귀퉁이 땅을 경작할 수 있게 해 주십시오." 허락을 받은 이 무기수는 처음에는 손이 많이 가지 않아도 잘 자라는 고추나 양파 같은 것을 심고 나름대로 결실을 얻어 보람을 느꼈지요. 그 다음 해에는 장미 묘목도 심어보고 다른 작물도 정성스럽게 가꾸고 심었습니다. 그러면서 비록 기약은 없지만 정원을 가꾸듯이 자기 자신을 가꿔야겠다고 결심했지요. 그는 심고 가꾸기를 무려 27년간이나 계속했습니다. 그 후 건강한 모습으로 감옥에서 나왔는데 이 남자가 바로 1993년 노벨 평화상을 수상한 남아공화국 최초의 흑인 대통령 넬슨 만델라입니다. 언제 나갈지도 모르는 그 비좁은 감방이 그에게는 얼마나 큰 시련이었겠으며, 부당하게 다가오는 부패한 권력의 힘 앞에서 어떻게 숨을 쉴 수가 있었겠습니까? 자신을 압도하는 그런 시련이 닥치면 사람들은 대부분 인격이 파괴되고 절망에 빠지고 말 것입니다. 그러나 넬슨 만델라는 오히려 그 시련을 성숙의 계기로 삼았고 악한 상황도 선을 만드는 계기가 될 수도 있다는 것을 보여주었지요. 그렇습니다. 우리는 세상을 살아가면서 어차피 원치 않은 시련을 만날 수밖에 없습니다. 이러한 시련을 단지 어쩔 수 없는 것으로 포기하고 마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통해 하느님께로 나아가고 더 성숙할 수 있는 계기를 만드는 것, 이것이 불완전한 세상을 사는 지혜로운 모습일 것입니다. 현재 여러분에게 닥친 어려움이 하느님을 만나고, 성숙할 수 있는 은총의 시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조은일2008.07.15
참된 인간됨을 알려주는 성경[한민택 신부의 금쪽같은 내신앙] (96) 성경의 매력 얼마 전 한 일반 출판사로부터 책을 출간하자는 제의를 받았다. 교회 출판사가 아닌 일반 출판사였기에 적잖이 당황했다. 주로 신자를 대상으로 글을 써왔기에, 일반 독자를 상대로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망설여졌다. 그런데 잠시 생각해보니 일반 신문에도 칼럼을 써왔기에 못할 것도 없을 법했다. 출판사의 제안은 성경을 통해 믿는 사람뿐 아니라 믿지 않는 이에게 위로와 희망이 될 내용을 풀어서 설명해달라는 것이었다. 잠시 생각해본다. 과연 성경은 믿지 않는 사람에게도 위로와 희망을 줄 수 있을까? 그리고 ‘그렇다’고 답한다. 성경은 모든 이에게 자비와 위로를 주시는 하느님 아버지를 선포하기 때문이다. 예수님의 복음은 당신을 따르던 제자들만이 아닌 세상 모든 사람을 향한 기쁜 소식이기 때문이다. 하느님 말씀과 예수님의 복음은 모든 이에게 알려져야 한다. 성경은 하느님만이 아니라 인간이 어떤 존재인지에 대해서도 이야기하며, ‘하느님과 함께하는 삶’이 얼마나 매력적인지 다양한 방식으로 보여준다. 성경의 매력은 살아계신 하느님, 사랑의 하느님, 다양한 감정으로 인간과 대화하시는 하느님에 관해 이야기하는 것에 있다. 성경이 전하는 하느님은 질투하는 분, 때로는 화가 나 분노하시는 분, 그러나 쉽게 마음을 돌려먹고 다시 인간을 용서하시는 분, 아름다운 세상을 보고 좋아하시는 분, 기뻐하는 인간을 보고 기뻐하는 분이시다. 성경은 그야말로 하느님의 ‘천의 얼굴’을 담고 있다. 성경의 또 다른 매력은 인간 삶의 현실을 외면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성경은 신화적이거나 유토피아적인 구원을 말하지 않는다. 하느님께서 활동하시는 곳은 저 먼 하늘 위가 아닌, 혹은 내세에서의 삶만이 아닌, 죄와 악, 불의와 폭력이 난무하는 인간 삶의 적나라한 현실이다. 성경은 완벽한 신앙의 길보다는 인간 삶의 다양한 측면이 얽혀 있는 현실과 그 안에서 가능한 신앙의 길을 이야기한다. 시련과 좌절, 절망에도 계속해서 일어나 걷기를 재촉한다. 나아가 성경은 참된 인간됨의 길을 말해준다. 그것은 두드리고 모색하며 찾아가는 삶에 있다. 성경은 답이 아닌 물음으로 가득 찬 책이다. 답을 찾고 만족하는 것이 아닌, 계속해서 물음을 던지는 인간이게 한다. 성경은 참된 인간됨의 길이 자비하신 하느님처럼 자비로운 사람이 되는 것에 있다고 한다.(루카 6,36 참조) 하느님처럼 미소하고 가난한 이들을 외면하지 않고 그들에게 다가가 친구가 되어주며 그들 편에 서서 그들과 하나 되어 살아가는 것에 있다고 말한다. 가난하고 헐벗고 굶주린 이들, 울며 슬퍼하는 이들, 박해받는 이들, 버림받은 이들을 향해 눈을 돌리며 그들과 이웃이 되어가는 것이 하느님처럼 자비로운 사람이 되는 것이며, 진정 인간미 넘치는 인간이 되는 것이다. 성경은 하느님께서 바로 그러한 미소한 이들, 마음이 부서진 이들을 외면하지 않고, 그들 편에서 그들과 함께 계심을 말한다. 심지어는 가장 작은 이에게 해준 것이 바로 당신께 해준 것이라고 말하며, 그것이 최후 심판의 판단 기준이라고 말한다.(마태 25,40 참조) 성경은 그 자체로 하나의 학습서이며, 하느님의 교육 방법을 담고 있다. 성경을 벗 삼아 걷다 보면 어느덧 하느님께서 이끄시는 대로 변화되고 있는 나 자신을 발견한다. 내 안에 갇혀 있던 내가 나에게서 조금씩 벗어나 이웃 형제들을 위해 삶을 내어놓는 존재로 변화되어 있음을 발견하는 것이다. 성경은 분명 모든 이에게 매력적인 책임에 틀림 없다. 이정훈2025.04.23

역사의 수작(酬酌)[월간 꿈 CUM] 철학의 길 _ 동양 고전의 지혜와 성경 (11) 한국 사람들은 참 술을 좋아합니다. 아니 술 자체라기보다 술을 나누는 것을 좋아하는 것 같습니다. 회식 자리에서 혼자 ‘자작’(自酌)을 하고 있다는 것은 그 자리에서 만들어지는 친교에 동참하고 있지 못하다는 뜻이 되기도 합니다. 자작 문화에 익숙한 외국인들의 시선에 남의 술잔까지 신경 써야 하는 한국인의 술 문화가 불편하고, 고루한 관습처럼 보일 수 있지만, 몸에 밴 문화의 깊이를 이해하면 한국인들은 우주의 원리를 몸으로 구현하며 살고 있다는 사실에 경이로워해야 할 것입니다. 술을 주고받는 것을 한자로 ‘酬酌’(수작)이라고 합니다. 우리는 보통 ‘수작 부리지 마!’라는 부정적 어감으로 사용하지만, 주인이 손님에게 술잔을 권하는 것을 수(酬)라 하고, 다시 손님이 주인에게 술잔을 권하는 것을 작(酌)이라고 합니다. 수작은 이렇게 가거니 오거니 술을 주고 받는 것을 말합니다. 상호적이며 상관적 관계를 보여주는 미덕이라 할 수 있습니다. 고대 「역」을 해설한 「계사전」은 이 ‘수작’을 우주론적 의미에서 서술하고 있습니다. 顯道 神德行 是故 可與酬酌 可與祐神矣 子曰 知變化之道者 其知神之所爲乎 도와 덕행의 신묘함을 드러낸다. 그러므로 서로 수작(상호 동조)할 수 있고, 서로 도울 수 있다. 공자가 말하길 변화의 도를 아는 자는 그 신이 행하는 바를 알 수 있다.(「계사전 상」 9) 위 구절은 역을 설명하고 있는 내용입니다. 역은 우주 자연의 변화이며, 생명의 원리입니다. 생명은 끊임없는 변화를 통해 유지되고, 그 변화는 상호적이며 상관적으로 주고받아 움직여집니다. 그 가운데 도와 덕이 있습니다. 위 구절은 우주의 상호작용을 ‘수작’이란 단어로 명시하고 있습니다. 우리들의 술 문화에는 이런 생명의 원리가 몸속 깊이 흐르고 있는 것이며 우리는 그것을 몸으로 구현하며 살아왔습니다. 그렇다면 왜 ‘수작 부리지 마!’라는 부정적 의미가 나오게 되는 것일까요? 과거 주막에서 한 남정네가 여염집 아가씨를 붙들고 ‘수작’을 하려 하자 그 아가씨가 이렇게 대답합니다. “수작 부리지 마! 어디서 개수작이야!” 우리 말에는 참과 다른 거짓 혹은 올바르지 못한 것을 표현할 때 ‘개’자를 붙입니다. 그래서 수작인 척하는 가짜 수작을 부리지 말라는 것이죠. 이처럼 상황에 맞지 않으면 아무리 좋은 의미라 할지라도 욕을 먹어야 하는 가짜가 됩니다. 위정자들은 특히나 수작의 정신이 필요합니다. 그들의 말과 행동은 백성들의 삶을 담고 있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삶이 겹겹이 쌓인 역사를 담아야 한다는 것이기도 합니다. 과거와 현재가 주고받을 때 현재와 미래 역시 주고받는 생명의 상호작용이 일어납니다. 역사 앞에 사과와 용서가 오간다는 것은 바로 과거와 현재가 수작하는 것이며, 그 현재가 다시 미래와 수작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역사 앞에 사람만 왕래하고 술잔만 주고받는다면 그것은 상황에 맞지 않는 것이 됩니다. 위정자들은 수작이라 하지만 백성은 참이 아닌 ‘개’자를 붙여 부르게 됩니다. 하느님의 부르심과 인간의 응답, 하느님의 축복과 인간의 찬양, 하느님의 사랑과 인간의 회개는 모두 수작의 원리입니다. 술과 관련된 말 중에 ‘짐작’(斟酌)이라는 단어가 있습니다. 짐(斟)은 ‘헤아리다’, ‘머뭇거리다’라는 뜻인데, 술잔에 술이 얼마 남아있는지 그리고 어느 정도 따라야 하는지 헤아리는 것입니다. 옛날에는 술잔과 술병이 투명하지 않았습니다. 따라서 상대의 술잔과 술병에 술이 어느 정도 남았는지 한눈에 알기는 어려웠습니다. 그래서 모자라지도 넘치지도 않게 수작을 위해 헤아려야만 했습니다. 다소 불편하지만 이런 작은 배려를 통해 수작이 이루어졌습니다. 상처받은 백성과 역사가 투명하지 않은 잔과 병에 담겨 있다면 그 앞에서 ‘짐작’(斟酌)이라도 해야 미래의 생명이 멈추지 않을 것입니다. 미래는 현재가 과거와 상호작용하는 가운데 살아 숨 쉬며 다가올 것입니다. 글 _ 손은석 신부 (마르코, 대전교구 안식년) 2006년 사제수품. 대전교구 이주사목부 전담사제, 산성동본당 주임을 지냈으며 서강대학교 대학원 철학과(동양철학전공)에서 박사과정을 수료했다. 소소하게 살다 소리 없이 죽고 싶은 사람 중 하나. 그러나 소리 없는 성령은 꼭 알아주시길 바라는 욕심쟁이다. cpbc2025.06.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