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하느님의 자비 주일’ 그리스도인은 왜 자비로워야 하나하느님께 받은 용서, 이웃 사랑 실천으로 이어져야 서울대교구장이며 ACN 한국지부 이사장인 염수정 추기경이 미얀마 카레이교구 캄팟지역 교리교사 가정을 방문해 그 가족들을 축복하고 있다. 가톨릭평화신문 DB “너희 아버지께서 자비하신 것처럼 너희도 자비로운 사람이 되어라.”(루카 6,36)그리스도인이 왜 자비로워야 하는지 주님께서 일깨워주신 말씀이다. 성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를 구원해 주신 하느님의 크신 자비를 특별히 기억하라며 부활 제2주일을 ‘하느님의 자비 주일’로 제정했다. 새천년기를 시작한 2000년부터 해마다 맞고 있는 하느님의 자비 주일에 ‘그리스도인은 왜 자비로워야 하는지’를 성경과 역대 교황 문헌을 통해 정리했다. 자비로우신 하느님하느님께서는 당신을 “자비하고 너그러우며, 분노에 더디고 자애와 진실이 충만한 야훼”(탈출 34,6 참조)라고 모세에게 밝히셨다. ‘자비’는 하느님께서 인간에게 스스로 밝히신 것처럼 당신 본성이다. 바로 이 자비 안에서 하느님의 전능이 드러난다. 하느님께서는 아담과 하와가 죄를 지은 뒤에 인류를 죄악에 얽매인 채로 버려두지 않으시고 역사 안에서 여러 가지 방법으로 당신의 자비로우신 본성을 끊임없이 보여주셨다. 하느님께서는 인간을 역사 안에서만이 아니라 영원토록 당신의 자비 아래에 두시기 위해 인류의 역사를 구원의 역사로 변화시켜 주셨다. 이는 하느님께서 아브라함을 믿음의 조상으로 삼아 이스라엘 민족을 선택하셨을 때 “나는 너를 영원한 사랑으로 사랑하였다. 그리하여 너에게 한결같이 자애를 베풀었다”(예레 31,3)고 하신 말씀으로 증명됐다. 하느님께서는 ‘때가 차자’ 외아드님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시고 주님의 십자가 희생과 부활을 통해 당신의 완전한 자비와 사랑을 드러내시고 구원 계획을 완성하셨다. 따라서 하느님의 자비는 인간 구원의 시작이며 원천이다. 하느님 자비의 완성이신 예수 그리스도참하느님이시며 참인간이신 예수 그리스도는 당신의 말씀과 행동, 그리고 온 인격으로 하느님의 자비를 드러내신다. 예수께서 죄인이나 가난한 이들, 버림받은 이들, 병자들, 고통받는 이들에게 행하신 모든 기적은 하느님의 자비를 보여준다. 그리고 예수께서는 십자가 상의 죽음과 부활을 통해 하느님의 자비를 완성하신다. 예수께서는 당신의 부활을 통해 죽음보다 더 강한 아버지의 사랑을 체득하셨다. 그리고 당신 자신이 자비의 원천이심을 계시하셨다. 그래서 성 요한 바오로 2세는 “파스카의 그리스도야말로 자비의 완결된 강생이시며 자비의 살아 있는 표지”라고 찬양했다.(「자비로우신 하느님」 8항) 또 “십자가를 통한 자비의 계시에서야말로 인간의 존엄성이 더욱 높이 존중되고 고상해질 수 있었다. 인간은 거기에서 자비를 받음으로써 동시에 ‘자비를 베푸는’ 사람이 되는 까닭”이라고 강조했다.(같은 항 참조)하느님 자비의 관리자요 선포자인 교회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는 세상에 하느님 아버지의 자비를 생생하게 보여줘야 할 책임이 있다. 자비는 교회 생활의 토대이다. 교회의 모든 사목 활동은 온유함으로 이루어져야 하며, 그 온유함을 신자들과 세상에 보여주고 증언해야 한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교회에 대한 신뢰도는 자비와 연민이 가득 찬 사랑에 달려 있다”(「자비의 얼굴」 10항)고 강조했다.또 성 요한 바오로 2세는 “교회는 자비를 고백하고 선포할 때에 본연의 삶을 사는 것이다. 자비가 창조주와 구세주의 가장 놀라운 속성이기 때문이다. 교회는 사람들을 구세주의 자비의 샘에 가까이 가게 만들 때에 본연의 삶을 사는 것이다. 교회는 그 자비의 관리자요 분배자이기 때문”이라고 했다.(「자비로우신 하느님」 13항)왜 그리스도인은 자비로워야 하나예수께서는 하느님 아버지의 말씀을 빌려 “내가 바라는 것은 희생 제물이 아니라 자비다”라고 하셨다.(마태 9,13) 그러면서 “너희 아버지께서 자비하신 것처럼 너희도 자비로운 사람이 되어라”(루카 6,27)고 당부하셨다. 이 말씀은 “행복하여라, 자비로운 사람들! 그들은 자비를 입을 것이다”(마태 5,7)라는 말씀의 또 다른 표현이다. 이 말씀에 따라 그리스도인은 하느님의 자비를 관상하며 자비를 생활 방식으로 받아들인다. 이 당부는 그리스도인인 우리가 결코 소홀히 할 수 없는 계명이다. 자비가 참된 하느님의 식별 기준이라는 게 이 말씀의 뜻이기 때문이다. 자비는 ‘용서’하고 자신을 ‘내어주는’ 삶에서 드러난다. 따라서 인간이 스스로 영위할 수 있는 생활과는 다른 차원의 삶의 방식이다. 용서와 내어줌은 마음을 여는 것이다. 잘못을 용서하는 것이 자비로운 사랑의 명확한 표현이다. 그래서 예수께서도 몸소 죄인들과 함께 식사하시며 당신 제자들에게 이제부터는 그 무엇보다도 자비가 삶의 원칙이 되어야 한다고 가르치셨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이에 “우리가 먼저 하느님의 용서를 받았기에, 용서의 도구가 되고,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한없는 자비를 베푸셨음을 깨달아 우리도 남에게 관대하게 대하자”고 권고한다.(「자비의 얼굴」 14항) 어떻게 자비를 실천할 수 있나자비를 실천하려면 먼저 하느님의 말씀에 귀 기울여야 한다. 하느님 말씀을 묵상하고, 그 말씀 안에서 하느님의 자비를 발견해 하느님께로 돌아가는 ‘회개’가 선행돼야 자비로운 삶을 살 수 있다. 이를 교회에서는 ‘복음적 가난’이라고 표현한다.자비의 본질은 구체적 삶이다. 일상 행동에서 자비는 생각과 태도와 실천으로 드러나야 한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예수님의 가르침에 따라 자비를 육체적ㆍ영적 활동으로 구분한다. 자비의 육체적 활동으로는 배고픈 이들에게 먹을 것을 주고, 목마른 이들에게 마실 것을 주며, 헐벗은 이들에게 입을 것을 주고, 나그네들을 따뜻이 맞아주며, 병든 이들을 돌보아 주고, 감옥에 있는 이들을 찾아가 주며, 죽은 이들을 묻어 주는 것이라고 했다. 자비의 영적 활동으로는 의심하는 이들에게 조언하고, 모르는 이들에게 가르쳐 주며, 죄인들을 꾸짖고, 상처받은 이들을 위로하며, 모욕한 자들을 용서해 주고, 괴롭히는 자들을 인내로이 견디며, 산 이와 죽은 이들을 위해 하느님께 기도하는 것이라고 했다. 그러면서 교황은 “자비를 베푸는 사람이면 말과 행동으로 가난한 이들을 위로하고, 현대 사회의 새로운 노예살이에 얽매인 이들에게 해방을 선포하며, 자신 안에 갇혀 있어 제대로 보지 못하는 이들이 다시 볼 수 있도록 하고, 존엄성을 빼앗긴 모든 이가 다시 그 존엄을 찾도록 하는 것을 기쁜 마음으로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자비의 얼굴」 16항) 리길재 기자 teotokos@cpbc.co.kr cpbc2019.04.24
 “나는 또 새 하늘과 새 땅을 보았습니다.”(묵시 21,1)](//cpbc.co.kr/CMS/newspaper/2018/05/rc/721705_1.0_titleImage_1.jpg)
[허규 신부와 떠나는 신약 여행](100·끝) “나는 또 새 하늘과 새 땅을 보았습니다.”(묵시 21,1)종말 속 피어난 희망으로 구원을 계시하다 요한 묵시록은 재앙 이후에 그리스도의 재림과 심판에 관한 환시를 전하고 있다. 그림은 새로운 창조를 알리는 예루살렘의 환시 모습. 율리우스 슈노어 폰 카롤스펠트 작 ‘천국의 예루살렘’ 부분. 출처=「아름다운 성경」 모든 재앙 이후에 등장하는 환시는 그리스도의 재림과 심판에 관한 것입니다. “나는 또 하늘이 열려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묵시 19,11) 이 표현과 함께 요한 묵시록은 종말을 묘사합니다. 보통 ‘하느님의 기사’라고 불리는 이 환시는 그리스도의 재림을 나타내는 상징입니다. 열린 하늘에서 흰말을 타고 오시는 분은 “성실하고 참된 분”(묵시 19,11), “하느님의 말씀”(묵시 19,13), “임금들의 임금, 주님들의 주님”(묵시 19,16)이라고 불립니다. 또 이분은 입에서 나오는 날카로운 칼로 민족들을 치는, 곧 말씀으로 심판하는 분으로 묘사됩니다. 이 표현은 이미 사람의 아들을 묘사할 때 사용되었습니다.(묵시 1,16) 결국, 요한 묵시록의 모든 환시를 기록하여 보내라고 명령하신 그분은 종말 때에 다시 올 그리스도인 셈입니다. 요한 묵시록은 종말의 모습을 악의 세력과의 전쟁으로 표현합니다. 대신 그 과정에 대한 언급 없이 처참한 최후를 맞은 악의 세력을 묘사할 뿐입니다. 모든 새가 전쟁에서 패한 악의 세력에 동조하던 이들로 배를 불린다는 잔인한 표현은 성경에서 가장 처참한 죽음을 나타내며, 그들의 행실에 대한 심판으로 표현됩니다.(에제 39,17-20) 요한 묵시록에서 표현되는 독특한 것 중 하나는 그리스도의 재림과 마지막 심판 사이에 ‘천 년 통치’라는 중간 시간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아마도 이 시간은 구약성경에서 기원을 찾게 되는 평화로운 시대에 관한 내용으로 보입니다.(이사 11,1-9) 또 그리스도와 함께 다스리게 될 것이라는 기대가 실현되었다는 것을 나타내는 환시이기도 합니다.(마태 19,28) 이 통치의 시간 이후에 마지막 심판이 이루어집니다. 천 년 통치가 종말에 살아남은 믿음을 간직한 이들이 함께하는 시간이라면 마지막 심판은 죽은 이들이 심판받는 사건입니다. 요한 묵시록의 종말에 관한 환시는 마치 우리가 알고 있는 최후 심판의 모습을 둘로 나누어서 묘사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리스도의 재림과 천 년 통치 그리고 마지막 심판 이후에 등장하는 것은 새로운 창조입니다. “나는 또 새 하늘과 새 땅을 보았습니다. 첫 번째 땅은 사라지고 바다도 더 이상 없습니다.”(묵시 21,1) 종말은 세상의 마지막이 아니라 새로운 세상의 시작입니다. 새로운 창조에서 가장 중심에 있는 환시는 새 예루살렘의 환시입니다. 상당히 구체적으로 묘사되고 있는 이 환시는 새로운 전망을 제시합니다. 이 도성은 하느님의 영광으로 빛나고 있고 크고 높은 성벽으로 둘러싸여 있습니다. 성벽의 크기를 묘사하는 데 사용된 구체적인 치수들은 이 도성의 실제적인 크기를 나타내기보다는 상징적인 의미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1만 2000 스타디온, 지금으로 말하면 2000㎞가 넘는 정육면체로 된 도성의 모습은 상상하기 어려울 만큼 크면서도 완전함을 나타내는 상징입니다. 또 144 페키스로 소개되는 성벽의 두께는 지금의 70m에 가깝습니다. 이것 역시 실제적인 묘사이기보다는 하느님의 보호가 완전하다는 것을 나타내는 상징으로 이해하는 것이 좋습니다. 도성의 크기에 대한 묘사 이후에는 도성의 아름다움을 다양한 재료들을 통해 나타냅니다. 온갖 보석들로 꾸며진 새 예루살렘은 이 세상의 어떤 화려함도 갖추지 못한 아름다움을 가진 것으로 묘사됩니다. 이런 외형적인 모습보다 더 중요한 것은 그 도성 안에 더 이상 성전이 없고 하느님과 어린양이 그것을 대신한다는 내용입니다.(묵시 21,22) 또한 도성 안을 흐르는 생명수에 대한 묘사는 상징적으로 하느님과 어린양으로부터 흘러나오는 생명을, 영원한 생명을 표현합니다. 이것을 통해 요한 묵시록의 환시는 정점에 이릅니다. 요한 묵시록은 우리에게 재앙을 소개하고 종말에 대한 두려움을 표현하지 않습니다. 믿음을 간직한 이들이 우상숭배에 대한 강요와 박해에서도 신앙을 간직할 수 있도록 종말의 희망을 통해 위로하는 것이 요한 묵시록이 기록된 목적입니다. 이런 책의 목적에 부합하도록 개별적인 내용과 상징을 이해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지금도 요한 묵시록은 우리에게 희망과 위로를 통해 하느님의 구원을 계시하는 책입니다. 그동안 신약 여행에 함께해 주신 모든 분께 감사드립니다. <가톨릭대 신학대학 성서학 교수>※ 그동안 ‘허규 신부와 떠나는 신약 여행’을 연재해 주신 신부님과 애독해 주신 독자분들께 감사를 전합니다. cpbc2018.05.24
[하느님과 트윗을](56) 예수님은 누구이신가요신성과 인성 모두 지니신 위격 문 : 예수님은 왜 하느님이신가요.답 : 어떤 사람들은 예수님이 돌아가시고 수 세기가 지나고 나서야 교회가 예수님이 하느님이시라고 확정했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신약성경은 초대 그리스도인들이 이미 예수님이 하느님이시라는 것을 믿었다고 전합니다. 예수님은 “아버지와 나는 하나다”(요한 10,30)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안티오키아의 이냐시오 성인은 서기 108년쯤 예수님은 하느님이시며 인간에게서뿐만 아니라 하느님의 영에서 나셨다고 했습니다.(루카 1,35 참조) 로마의 역사학자 플리니우스는 초기 기록에서 그리스도인들이 그들의 지도자를 “신으로” 섬긴다고 트라야누스 황제에게 썼습니다.문 : 예수님은 왜 말씀이신가요.답 : 요한 복음사가는 예수님을 ‘말씀’이시라고 전합니다. “한 처음에 말씀이 계셨다. 말씀은 하느님과 함께 계셨는데 말씀은 하느님이셨다.”(요한 1,1) 예수님은 세상을 창조하실 때 하느님이 하신 말씀이십니다. 고대 그리스도인들은 이 ‘말씀(로고스)’이라는 용어를 하느님과 물질적 세상을 연결하는 다리를 뜻하는 것으로 이해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하느님과 인간 사이의 다리이며 중재자일 뿐만 아니라 또한 하느님이십니다.문 : 예수님은 왜 사람이신가요.답 : 예수님은 마리아에게서 나셨고(루카 2,7 참조) 평범한 어린이로 자라셨습니다. 예수님은 배고픔과 목마름을 경험하셨고, 지치셨으며, 고뇌하셨고, 마침내 돌아가셨습니다. 죽었다가 사흗날에 다시 살아나셨을 때도, 영광을 받으시긴 했지만, 사람의 몸을 가지고 계셨습니다. 사람으로서, 예수님은 죄 이외의 모든 면에서 우리와 똑같으셨습니다. 결국, 예수님은 하느님이시며 동시에 사람이십니다! 예수님은 두 본성, 즉 신성과 인성을 둘 다 가지신 위격이십니다. 이런 점에서 예수님은 유일무이하십니다. 문 : 예수님께 형제와 누이가 있었나요.답 : 성경에서 우리는 ‘형제’라는 낱말이 동기지간이 아닌 다른 친척을 의미하는 경우를 많이 봅니다. 이 낱말은 때로 카인과 아벨처럼 부모가 같은 사람들(창세 4,2 참조)을 말하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도 많습니다. 예를 들면 토빗은 라파엘 천사를 “형제여”(토빗 5,11)라고 불렀습니다. 당시 토빗은 그가 천사라는 것은 몰랐어도, 부모님이 같지 않다는 것은 분명히 알고 있었지요. 복음서에서 예수님의 형제 누이에 관해 이야기할 때는 요셉과 마리아의 자녀를 뜻하는 게 아니라 사촌, 조카, 삼촌, 이모 등 다른 친척들을 의미합니다. 예수님은 요셉과 마리아의 유일한 자녀였습니다. 예수님의 어머니와 형제들이 예수님을 보려고 했을 때 예수님은 “누가 내 어머니고 누가 내 형제들이냐?”(마태 12,48) 하고 질문하셨습니다. 이 질문에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사람이 내 형제요 누이요 어머니다”(마태 12,50) 하고 예수님이 직접 대답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친히 우리 모두를 “형제, 누이, 어머니”라고 부르십니다. 그렇게 하심으로써 혈육 관계는 예수님을 따르는 것만큼 중요하지 않다는 것을 알려 주십니다. 이는 세례성사에서 분명하게 드러납니다. 이 성사로 우리는 함께 하느님의 자녀라는 큰 가족을 형성합니다. 따라서 우리는 예수님의 형제, 누이입니다. 그렇기에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는 우리 모두의 어머니입니다. 서종빈 기자 binseo@cpbc.co.kr 평화신문2018.06.19
![[이창훈 위원의 사도행전 이야기] (16) 일곱 봉사자를 뽑다 (6,1-7)](//cpbc.co.kr/CMS/newspaper/2019/05/rc/751995_1.0_titleImage_1.jpg)
[이창훈 위원의 사도행전 이야기] (16) 일곱 봉사자를 뽑다 (6,1-7)봉사자는 평판 좋고 성령과 지혜 충만해야 예루살렘의 신자 공동체 안에서 식량 배급 문제로 불화가 생기자 베드로를 비롯한 사도들의 제안으로 공동체는 스테파노를 비롯한 일곱 명의 봉사자를 뽑는다. 이들이 가톨릭교회 부제 제도의 시작이다. 서울대교구의 부제 서품식에서 주교들이 수품자들에게 안수하고 있다. 가톨릭평화신문 DB 사도들은 박해를 받으면서도 기뻐하며 끊임없이 가르치고 복음을 선포합니다. 제자들의 공동체는 점점 늘어납니다. 그러면서 공동체 내부에서 문제가 발생합니다. 문제는 무엇이고 공동체는 이를 어떻게 해결하는지 살펴봅니다.예루살렘에서 제자들, 곧 그리스도를 믿는 이들이 점점 늘어나면서 그리스계 유다인들이 히브리계 유다인들에게 불평을 터뜨립니다. 그리스계 유다인들의 과부들이 매일 배급을 받을 때 홀대를 받았다는 것입니다.(6,1) 당시 예루살렘 공동체는 크게 그리스계 유다인들과 히브리계 유다인들로 이뤄져 있었습니다. 히브리계 유다인들은 예루살렘에 살던 유다인들로서 사도들이 선포하는 복음을 받아들여 신자가 된 유다인들입니다. 이들은 모국어인 히브리어를 사용하거나 아니면 당시 팔레스티나에서 상용어였던 아람어를 사용했을 것입니다. 이에 비해 그리스계 유다인들은 팔레스티나가 아닌 다른 지역 곧 이집트나 키프로스, 소아시아 등지에서 태어나 살다가 예루살렘에 정착한 유다인들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들은 아마도 히브리어나 아람어보다는 당시에 지중해 연안에 통용되던 그리스어에 더 익숙했을 것입니다. 홀대당하는 그리스계 과부들그리스계든 히브리계든 이들은 유다교 신앙과 신심에 젖어 있다가 사도들이 선포하는 복음을 받아들여 제자 공동체를 이룬 이들입니다. 이 공동체는 아직 그리스도교 공동체 또는 그리스도인 공동체라는 이름으로 불리지는 않았습니다. 하지만 믿음으로써 신자가 된 이들 유다인들은 가진 것을 다 내어놓고 저마다 필요한 만큼 나누어 받아 쓰면서 한마음 한뜻이 돼서 지냈습니다.(2,42-47; 4,32-37; 5,12-16 참조)그런데 신자가 늘어나면서 문제가 생깁니다. 그리스계 과부들이 매일 배급을 받을 때에 홀대당한 것입니다. 식량을 배급하는 책임자는 물론 사도들이었습니다.(4,35.37 참조) 하지만 신자들이 늘어나면서 사도들만으로는 식량 배급을 관장하기 힘들었을 것입니다. 더구나 사도들에게는 절대로 소홀히 할 수 없는 가르치는 일과 말씀을 선포해야 하는 일이 있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문제가 생기게 된 것입니다. 힘없는 과부들, 그것도 그리스계 과부들이 상대적으로 홀대당하는 것을 보다 못한 그리스계 유다인들이 결국 불평을 터뜨리고 맙니다. 사정이 이렇게 되자 열두 사도가 나섭니다. 그들은 신자 공동체를 불러 모아 “우리가 하느님의 말씀을 제쳐놓고 식탁 봉사를 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면서 “여러분 가운데에서 평판이 좋고 성령과 지혜가 충만한 사람 일곱”을 찾아내면 그들에게 식탁 봉사의 직무를 맡기고 사도들 자신들은 “기도와 말씀 봉사에만 전념하겠다”고 제안합니다.(6,2-4) 여기서 식탁 봉사란 단지 음식 시중을 드는 것이 아니라 신자들에게 매일 식량을 나눠주는 일을 말합니다. 사도들이 “하느님의 말씀을 제쳐놓고 식탁 봉사를 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고 말한 것은 식탁 봉사가 중요하지 않아서가 아니었습니다. 사도들은 말씀 봉사, 곧 복음을 선포하고 가르치는 일을 우선적인 사명으로 받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자기들을 대신해서 식탁 봉사를 할 사람들을 추천해 달라고 제안합니다. 그들이 식탁 봉사를 하면 사도들은 기도와 말씀 봉사에 전념하겠다는 것입니다. 봉사자의 기준사도들이 제시하는 기준은 주목할 만합니다. 우선 평판이 좋은 사람이어야 합니다. 평판이 좋지 않으면 오히려 추문을 불러일으키고 일을 더 그르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평판만 좋아서는 안 됩니다. 성령과 지혜가 충만해야 합니다. 성령이 충만하다는 것은 그만큼 확고한 믿음이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뿐 아니라 지혜로워야 합니다. 지혜로운 사람이어야 일을 제대로 처리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단지 인간적으로 지혜롭기만 해서는 안 됩니다. 하느님의 지혜, 곧 성령께서 주시는 지혜가 있어야 합니다. 성령이 충만한 사람이어야 그런 지혜를 지닐 수 있습니다. 사도들의 이런 제안에 공동체는 모두 동의하고 일곱 사람을 뽑습니다. 성경에서 일곱이라는 숫자는 완전함을 나타내지요. 따라서 일곱 사람을 뽑았다는 것은 이 일곱 사람을 통해서 식탁 봉사 또는 식량 배급 문제를 완전히 해결했다는 상징적인 의미를 지닌다고 하겠습니다. 그 일곱 사람은 “믿음과 성령이 충만한” 스테파노를 비롯해 필리포스, 프로코로스, 니카노르, 티몬, 파르메나스, 그리고 “유다교로 개종한 안티오키아 출신” 니콜라오스입니다.(6,5) 학자들은 이 일곱 사람의 이름이 모두 그리스말 이름임을 주목합니다. 그리스계 과부들이 홀대를 당했기에 그리스계 신자들을 배려하는 차원이라고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공동체가 이 일곱 사람을 뽑아 사도들 앞에 세우자 사도들은 기도하고 그들에게 안수합니다.(6,7) 교회에서 공동체의 직무를 맡길 때 기도하고 안수하는 전통은 바로 여기에서 시작됐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사도행전에서는 또한 세례에 이어 성령을 베풀 때나(8,17; 19,6 ), 병자를 치유할 때(9,12.17; 28,8) 그리고 사명 수행을 위해 파견할 때도(13,3) 안수를 합니다. 이 관습은 오늘날에도 이어져 교회의 고유한 전통이 되고 있습니다. 어쨌거나 공동체 내부의 불화를 낳은 식량 배급 문제를 일곱 봉사자를 뽑아 해결하게 되면서 “하느님의 말씀은 더욱 자라나 예루살렘 제자들의 수가 크게 늘어나고, 사제들의 큰 무리도 믿음을 받아들였다”고 루카는 마무리합니다.(6,7) 알아보기일곱 사람 가운데 특별히 세 사람에 대해서 좀 더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사도행전을 쓴 루카는 스테파노에 대해서만 “성령과 믿음이 충만한 사람”이라고 언급합니다. 루카가 스테파노에 대해 특별한 의도를 갖고 있음을 짐작하게 해줍니다. 실제로 루카는 이어 오는 대목에서 스테파노에 대한 아주 긴 내용을 소개합니다.(6,8─8,1) 그래서 일곱 봉사자를 뽑는 이 대목(6,1-7)이 스테파노의 이야기를 도입하는 역할을 한다고 보는 학자들이 많습니다. 스테파노에 대해서는 계속 볼 기회가 있을 것입니다. 필피포스 역시 앞으로 보게 되겠지만, 에티오피아의 내시가 복음을 받아들이고 세례를 받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합니다.(8,26-40) 니콜라오스에 대해 루카는 “유다교로 개종한 안티오키아 출신”이라고 소개합니다. 이 구절이 뜻하는 바는 니콜라오스는 유다인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 초기 신자 공동체에 들어온 사람들 가운데는 유다인이 아닌 사람들도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들은 예루살렘에 살고 있던 이방인들이었을 것입니다. 이들 일곱 사람이 해야 할 일은 식탁 봉사였습니다. 그런데 사도행전 어디에서도 이들이 식탁 봉사를 했다는 이야기가 나오지 않습니다. 반면에 스테파노와 필리포스의 이야기에서 알 수 있듯이 이들은 말씀을 선포하는 역할을 합니다. 그렇다면 일곱 사람은 식탁 봉사만이 아니라 말씀 봉사의 직무도 수행했다고 하는 것이 자연스러울 것입니다. 이 일곱 봉사자가 했던 일을 오늘날 교회 안에서는 부제들이 담당하고 있습니다. 스테파노를 비롯한 일곱 봉사자는 교회의 첫 부제들인 셈입니다. 평화신문2019.05.01
[예수회 회원들의 생애와 영성] 칼 라너 (5)교회 정통과는 조금 다른 시선으로 바라보다 시련칼 라너는 새로운 시대 정신을 통해 교회를 이해하고자 했다. 라너에게 교회는 분명 거룩하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구원 행위를 바탕으로 설립됐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해서 교회가 인간의 죄로부터 자유롭지는 않다. 교회는 아울러 죄스러운 인간의 공동체이기도 하다. 라너는 ‘성직 파시즘’(Klericofaschismus)이라는 교회에 대한 전형적인 비판을 받아들였다. 그에게 중요한 것은 전쟁 후에 새로이 쇄신된 교회를 만드는 것이었다. 그는 교회의 죄성을 신학적으로 숙고했다. 1947년 「죄인의 교회(Kirche der Snder)」, 1954년 「현대 세계에서 그리스도교인의 위치에 대한 신학적 의미(Theologische Bedeutung der Position des Christen in der modernen Welt)」, 「성령을 끄지 마시오!(Lscht den Geist nicht aus!)」를 발표했다. 주교들은 이에 거세게 반응했다. 1950년 성모 승천 교리가 반포됐다. 칼 라너는 이에 대한 반대 논문을 쓰려 했다. 이 교리는 교양 있는 가톨릭 신앙인들에게 당연한 것으로 수용되기 어려웠기 때문이었다. 이 교리를 이해시키려면 교의 발전의 정당성과 원칙을 따라야 한다. 그리고 성경의 근거가 매우 중요하다. 성모 승천에 관한 교리는 라너가 보기에 성경의 근거가 없는 것이었다. 그렇다고 라너가 마리아론을 거부하는 것은 아니었다. 그는 마리아론을 인간학적으로 접했다. 그는 먼저 공심판 이전의 인간 부활을 성경적으로 탐구했다. 예수의 십자가상 위로 어둠이 덮친 것은 종말론적인 상징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예수의 죽음과 동시에 지진이 일어났다.(마르 13,8.24) 이는 예수의 죽음으로 죄와 죽음의 옛 세상이 함께 몰락했음을 뜻하는 것이다. 그와 동시에 죽은 자들의 부활이 시작된다. 무덤이 열리면서 잠들었던 많은 옛 성인들이 다시 살아났다고 성경은 증언한다.(마태 27,52) 이는 예수의 죽음은 곧 종말의 시작을 뜻하는 것이고 예수의 죽음과 함께 이미 인간 영육의 완성이 이뤄짐을 의미하는 것이다. 모든 이는 죽음과 동시에 하느님에 의해 완성되고 받아들여진다. 마리아도 예외는 아니다. 마리아의 승천은 인간학ㆍ그리스도론ㆍ종말론의 관점에서 볼 때 다른 인간들의 종말론적 구원과 다를 것이 없다는 것이 라너의 견해였다. 그러한 의미에서 그는 성모 승천 교리 선포는 그렇게 중요하지 않다고 보았다. 교황청의 시각에서 볼 때 라너의 마리아론은 마리아의 독특한 구원적 위치를 없애버리는 것이었다. “죽는 순간에 인간의 부활이 이루어진다”는 라너의 인간학ㆍ종말론적 숙고는 마리아뿐만이 아니라 모든 인간의 완성을 뜻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마리아만의 완성의 독특성은 사라지고 만다. 라너는 이러한 문제를 논문으로 출판하려고 했다. 393쪽에 이르는 그 논문 제목은 「오늘날 마리아론의 문제들(Probleme heutiger Marioligie)」인데 1951년 당시 관구장이 출판을 허락하지 않았다. 교회 서적을 출판할 때는 출판 검열관의 심사를 거쳐야 한다. 관구장이 위촉한 교황청립 그레고리오 대학교의 기초신학자 다니스(E. Dhanis)가 라너의 논문에 부정적으로 판결을 내렸기에 그의 논문은 결국 출판될 수 없었다.라너는 마리아의 동정성에도 숙고했다. 그는 성령에 의한 마리아의 잉태에 대해서 이의를 제기한 것은 아니라 동정 출산에 대한 의미를 고찰하고자 했다. 동정 출산이란 예수의 삶의 시작과 동반하는 개념으로 예수라는 인물은 단지 성령에 의해 예언자로 불린 존재에 머물지 않는 것을 말하고자 했다. 즉, 동정 출산을 통한 예수의 삶의 시작은 자신을 통해서 더 능가할 수 없는 방식으로 이 세상과 역사 안에서 하느님을 현재화(Vergegenwrtigung)한다. 그래서 하느님 자신이 예수의 아버지인 것이다. 교회는 이에 대해서 단지 출산 이전의 동정성(Virginitas ante partum), 출산 중의 동정성(Virginitas in partu)을 가르치고 있는데 출산 중의 동정성은 사실 성경의 근거가 있지는 않다. 이에 대해서는 2세기에 출현한 「야고보 복음」(당시에는 영향력이 있었던 외경)이 언급하는데 출산 중 마리아의 처녀막은 훼손되지 않았다고 증언하고 있다. 교부들은 마리아를 새로운 하와로 이해했다. 새로운 하와는 죄의 상태에 떨어지지 않았기 때문에 하와와는 반대로 출산의 고통(창세 3,16)이 없었다고 교부들은 이해했다. 라너는 마리아의 동정성에 대해 원죄의 관점보다는 구원의 관점에서 바라봤다. 그는 마리아의 출산을 하느님 언약에 대한 전적인 수용 행위라고 본다.(루카 1,38) 그렇기에 마리아의 출산은 일반적인 고통 중의 출산과는 전혀 다른 차원에 놓여 있다. 성경이 증언하는 산고는 비구원적 상황의 표현이다. 고통은 근본적으로 아담의 죄로 말미암아 하느님으로부터 단절됨으로부터 온다. 성경이 말하는 고통은 단지 육체적 고통을 말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비구원적 고통을 말하는 것이다. 마리아의 출산은 이러한 비구원적 상황에 빠진 세상에서 은총이 가득함(루카 1,28)을 보여주는 행위이다. 마리아는 하느님의 언약을 전적으로 수용했고 하느님의 구원 사업에 전적으로 투신했다. 마리아는 하느님의 구원 행위를 전적으로 긍정했기에 하느님으로부터 단절된 경험이 없는 것이다. 즉, 마리아의 출산은 하느님과 마리아의 구원 공동체를 이루는 행위인 것이다. 그러므로 마리아의 출산 중 동정성이란 육체적 차원에서 바라봐야 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학ㆍ구원론의 관점, 즉 하느님의 구원 행위에 대한 전적인 긍정에서 바라보아야 한다. 마리아의 동정성에 대한 생물학적 질문에 성서가 대답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기에 이에 대해서는 개방된 태도를 지녀야 한다.교황청은 이에 의혹의 눈길을 보냈다. 그러나 율리우스 되프너(Julius Dpfner) 추기경이 탄원해 라너는 정직을 당하지는 않았다. 오히려 요한 23세 교황은 그를 성사에 대한 공의회 신학 준비위원회 자문으로 위촉하기까지 했다. 이규성 신부(서강대 신학대학원 교수, 예수회) cpbc2018.02.21
![[허규 신부와 떠나는 신약여행] (86) “믿음은 우리가 바라는 것들의 보증이며 보이지 않는 실체들의 확증입니다”(히브 11,1)](//cpbc.co.kr/CMS/newspaper/2018/02/rc/710584_1.0_titleImage_1.jpg)
[허규 신부와 떠나는 신약여행] (86) “믿음은 우리가 바라는 것들의 보증이며 보이지 않는 실체들의 확증입니다”(히브 11,1)구약을 통해 전해지는 믿음의 역사 믿음의 힘 히브리서 11장은 구약성경을 통해 전해지는 믿음의 내용을 요약하고 있다. 에녹이 하늘로 들어올려진 것, 노아가 의로움으로 방주를 통해 구원 받은 것 등이 담겨 있다. 그림은 율리우스 카롤스펠트 작 ‘방주에서 나오다’ 부분. 출처=「아름다운 성경」 히브리인들에게 보낸 서간(이하 히브리서)은 말씀하시는 하느님과 대사제이신 예수 그리스도에 관해 우리에게 알려줍니다. 하느님과 예수님에 대한 표현 자체로 히브리서가 구약성경의 내용들과 깊은 관련이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또 구약성경에서 드러나는 계약을 넘어 새로운 계약을 통한 믿음을 강조한다는 것 역시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습니다. 새 계약은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 제사를 통해 우리에게 전해집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죄를 없애시려고 한 번 제물을 바치시고 나서, 영구히 하느님의 오른쪽에 앉으셨습니다. 한 번의 예물로, 거룩해지는 이들을 영구히 완전하게 해 주신 것입니다.”(히브 10,12.14) 죄의 용서를 위한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은 우리를 거룩하게 만들고 완전하게 하는 행위로 묘사됩니다. 히브리서는 신앙인들을 “하늘의 부르심을 받은 거룩한 형제”(히브 3,1)로 표현하고 예수님은 “사람들을 거룩하게 해주시는 분”으로 소개합니다.(히브 2,11) 예수님의 구원은 “첫째 계약 아래에서 저지른 범죄로부터 사람들을 속량하시려고 그분께서 돌아가시어, 부르심을 받은 이들이 약속된 영원한 상속 재산을 받게 해”주신 것입니다. 예수님의 업적을 통해 이제 부르심을 받은 이들은 하느님께 나아갈 수 있습니다. 하느님 말씀과 약속에 대한 믿음 히브리서에서 믿음과 희망은 동의어처럼 보입니다. 하느님의 말씀과 약속에 대한 믿음은 하느님께서 주시는 안식에 들어가리라는 희망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고백하는 희망을 굳게 간직합시다. 약속해 주신 분은 성실하신 분이십니다.”(히브 10,23) 신앙인들의 믿음은 바로 하느님의 성실하심에 바탕을 두고 있습니다. 이미 구약성경에서부터 강조되는 것처럼 하느님은 당신의 말씀과 약속에 성실하신 분이십니다. 하느님의 성실하심과 상응하는 것은 사람들의 믿음입니다. 성실함과 믿음은 같은 말에서 온 표현입니다. 아무런 근거 없이 그저 하느님을 믿는 것이 아니라 창조 때부터 전해지는 하느님의 말씀과 약속은 반드시 이루어진다는 것에 믿음을 두는 것입니다.(신명 7,9; 이사 49,7; 1코린 1,2) 이런 의미에서 히브리서 11장은 과거에 드러났던, 구약성경을 통해 전해지는 믿음의 내용을 요약하는 부분입니다. 마치 믿음의 역사를 전하는 서사시와도 같습니다. 이 장대한 내용은 하느님의 창조부터 시작합니다. “믿음으로써, 우리는 세상이 하느님의 말씀으로 마련되었음을, 따라서 보이는 것이 보이지 않는 것에서 나왔음을 깨닫습니다.”(히브 11,3) 아벨의 제물이 받아들여지고 의인으로 인정받은 것, 에녹이 하늘로 들어 올려진 것, 노아가 의로움으로 방주를 통해 구원받은 것, 아브라함이 하느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알려준 땅으로 길을 떠나 약속의 상속자가 된 것, 사라가 아이를 가질 수 없는 나이에도 이사악을 낳아 그를 통해 하느님의 축복이 실현된 것, 아브라함이 이사악을 하느님께 바치고 다시 돌려받은 것, 야곱과 요셉을 통해 하느님의 구원 업적이 이어진 것, 모세가 태어나고 히브리인임에도 죽음을 면한 것, 그가 하느님의 백성의 인도자가 되고 이집트에서 이끌어내 바다를 건너 탈출에 성공한 것, 긴 광야 생활을 마치고 예리코 성을 점령하여 정착한 것에 이르기까지 이 모든 것들이 “믿음으로써” 믿음을 통해서 이루어진 것임을 강조합니다. ‘오늘’의 믿음 히브리서는 믿음을 이야기하면서 현재적 차원을 강조합니다. 그것은 바로 ‘오늘’입니다. 오늘은 항상 현재의 시간입니다. 구원의 완성된 모습으로 제시되는 것은 ‘하느님의 안식처’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것이 장소적인 의미만은 아닙니다. 하느님의 안식에 드는 것은 영원한 생명을 얻는 것과 다르지 않습니다. “아, 오늘 너희가 그분의 소리에 귀를 기울인다면! 너희는 마음을 완고하게 갖지 마라.”(시편 95,7-8) 히브리서가 말하는 신앙인은 하느님의 안식에 들기를 희망하며 ‘오늘’ 하느님의 말씀을 충실하게 듣고 따르는, 믿음을 갖고 살아가는 이들입니다. <가톨릭대 신학대학 성서학 교수> 평화신문2018.02.06
교황 권고 ?사랑하는 아마존?(Querida Amazonia) 개요주교대의원회의 범 아마존 특별 회의 후속 권고 ?사랑하는 아마존?(Querida Amazonia) 개요 1. 사랑하는 아마존 지역은 그 모든 장관과 역사와 신비를 지니고 세상 앞에서 그 모습을 드러냅니다. 2. 저는 이 권고를 통하여 이 대화와 식별의 여정으로 저를 이끈 여러 울림들을 표명하고자 합니다. 3. 저는 이 권고에서 주교대의원회의 최종 문서를 인용하려 하지 않았습니다. 모든 사람이 최종 문서를 전체적으로 읽어 보도록 권장하기 때문입니다. 4. 하느님의 뜻에 따라, 온 교회가 이러한 노고를 통하여 풍요로워지고 의문을 제기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아마존의 사목자와 축성 생활자와 평신도가 그 적용을 위하여 노력해 줄 것을 바랍니다. 5. 저는 이 권고를 온 세상에 전합니다. 그래서 ‘우리의 것’이기도 한 이 땅에 대하여 애정과 관심을 불러일으키는 데 도움이 되기를 바랍니다. 6. 교회가 제시하는 모든 것은 세계 각지에서 독창적인 방식으로 실현되어야 합니다. 7. 가난한 이들과 토착 민족들과 가장 보잘것없는 형제자매의 권리를 위하여 투쟁하고 그들의 목소리를 듣고 그들의 존엄을 증진할 수 있는 아마존을 꿈꿉니다. 인간의 아름다움이 다양한 방식으로 빛나는 그 탁월한 문화적 풍요로움을 지켜나가는 아마존을 꿈꿉니다. 자연의 놀라운 아름다움과 강과 숲을 가득 메우는 풍요로운 생명을 열렬히 지켜나가는 아마존을 꿈꿉니다. 교회가 아마존의 특성을 띤 새로운 얼굴을 지닐 수 있도록 아마존 지역에 구체적으로 헌신할 수 있는 그리스도인 공동체를 꿈꿉니다. 제1장 사회적 꿈 8. 우리는 모든 주민이 하나로 어우러지고 발전하여 ‘행복한 삶’을 영위할 수 있는 아마존지역을 꿈꿉니다. 9. 식민지화를 통하여 이득을 취하려는 목적에서 합법이든 불법이든 목재와 광산 산업이 지속적으로 확장되어왔고 …… 이에 저항하는 울부짖음이 하늘까지 울려 퍼지고 있습니다. 10. 아마존 지역의 울부짖음은 깊은 숲속뿐만이 아니라 도시 거리에서도 울려 퍼져 나옵니다. 11. 많은 목소리들 가운데에 적어도 다음과 같은 한 목소리에 귀 기울입시다. “우리는 목재상과 목장 주인과 다른 제삼자들 때문에 피해를 입고 있습니다. …… 우리 지역은 빼앗긴 땅입니다.” 12. 저는 이러한 많은 비극적 상황들이 거짓된 ‘아마존의 신비’와 관련이 있음을 덧붙이고자 합니다. …… 아마존 지역은 채워야 할 거대한 빈 공간, 개발해야 할 천연자원의 원천으로 제시되었습니다. 13. 토착 민족들은 종종 자연환경의 파괴를 속절없이 바라만 보아야 했습니다. 자연환경 덕분에 그들은 …… 그들에게 정체성과 의미를 부여한 문화 안에서 삶의 방식을 지켜나갈 수 있었습니다. 14. 아마존에 해를 입히고 영토에 대한 토착 민족들의 권리를 존중하지 않는 국내외 사업은 그 자체로 불의이고 범죄입니다. 15. 악에 익숙해지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우리 지역 전체에 파괴와 심지어 죽음을 가져오고 …… 수많은 사람들의 생명과 특히 농부와 토착 민족들의 보금자리를 위협하는 착취” 앞에서 우리의 사회적 양심이 무뎌지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16. 식민지화는 끝나지 않았습니다. 식민지화는 지속적으로 가난한 이들의 삶과 취약한 환경을 경시하면서 …… 많은 지역에서 변형된 모습으로 존재해 왔습니다. 17. 우리는 다양한 식민지적 사고방식을 뛰어넘어 연대와 발전의 네트워크 구축이 가능하다는 것을 기억합니다. 18. 많은 선교사들이 복음을 전하기 위하여 고국을 떠나 가장 힘없는 사람들 곁에서 궁핍하고 힘겨운 삶을 감내했다는 사실을 …… 기억하는 것은 우리에게 용기를 줍니다. 19. 오늘날 교회는 …… 아마존 민족들의 탄원에 귀 기울이고 “교회의 예언자적 사명을 투명한 방식으로 실천하도록” 부름받고 있습니다. 20. 정의로운 사회를 만들려는 노력은 형제애, 곧 인간의 친교 정신을 필요로 합니다. …… 분명히 아마존 지역의 토착 민족들은 강한 공동체 의식을 지니고 있습니다. 21. 이와 같은 상황을 고려할 때, 우리는 이러한 공동체의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가치와 생활양식을 지키기 위하여 기울이는 모든 노력을 소중히 여기고 이에 협력하여야 합니다. 22. 복음은 하느님 사랑을 전하고 있습니다. 이 하느님 사랑은 그리스도 마음 안에서 샘솟아 나오며 바로 형제애와 연대의 노래인 정의를 추구합니다. 23. 저는 회칙 ?찬미받으소서?(Laudato Si’)에서 “모든 것이 서로 관계를 맺고 있다면, 사회제도의 건전함도 환경과 인간 삶의 질에 영향을 미친다.”고 밝혔습니다. 24. 아마존 지역의 시민 사회 단체들은 어떠한 상태에 있습니까? 이번 주교대의원회의 특별 회의 의안집(Instrumentum Laboris)은 “모든 사회 계층에 스며들어 국가와 그 기관들을 병들게 하는 문화 …… 도덕적 타락의 진실에 대하여 말하고 있다.”고 전합니다. 25. 이번 주교대의원회의 특별 회의에서 “교회 기관이나 그리스도인 개인의 투자뿐만 아니라 …… 기부금의 출처에도 특별히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는 제안이 있었습니다. 26. 아마존 지역은 특히 다양한 토착 민족들 사이에서 이루어지는 사회적 대화의 장소도 되어야 합니다. …… 그들의 말과 희망과 두려움은 아마존 지역에 대한 모든 대화의 장에서 가장 강력한 목소리가 되어야 합니다. 27. 대화에서 가난하고 소외되고 배척당한 사람들에 대한 우선적 선택을 중시해야 할 뿐만 아니라 그들을 주역으로 여겨야 합니다. 제2장 문화적 꿈 28. 중요한 것은 아마존 지역의 발전입니다. 그러나 이는 그 지역을 문화적 식민지로 만드는 것이 아니라 그 지역이 지닌 최상의 것이 드러나도록 돕는 것입니다. 29. 아마존 지역에는 많은 민족들과 국가들과 자발적 고립상태에 있는 110개가 넘는 토착 민족들이 살고 있습니다. …… 그들을 ‘미개한’ 야만인으로 여겨서는 안 됩니다. 그들은 그저 다양한 문화를 상속받았을 뿐입니다. 30. 오늘날, 더욱더 심각해지고 있는 사막화는 또다시 많은 사람들을 도시의 변두리나 길거리로 때때로 극심한 가난으로 내몰고 있습니다. 31. 아마존 지역에서 살아남은 각 민족들은 다문화 세계에서 그들만의 고유한 문화적 정체성과 유일무이한 부요를 지니고 있습니다. 32. 외부에서 이들을 바라보고 있는 우리는 우리 자신만의 사고방식과 경험을 바탕으로 부당한 일반화나 단순화된 주장과 결론을 피하여야 합니다. 33. 저는 아마존 지역의 젊은이 특히 토착 민족들에게 촉구합니다. “여러분의 뿌리를 돌보십시오. 그 뿌리에서 여러분을 성장시키는 힘이 나오기 때문입니다.” 34. “노인들이 자신의 긴 이야기를 들려주도록 하는 것”과 젊은이들이 잠시 멈추어 이 샘에서 물을 마시는 것은 중요합니다. 35. 자신의 뿌리에서 멀어졌던 사람들이 자신의 상처입은 기억을 복구하려고 노력하는 모습을 저는 기쁘게 바라봅니다. 36. 이 민족들은 자연과의 상호 작용 안에서 강한 공동체 의식을 특징으로 하는 문화적 보화를 발전시켰습니다. 그들은, 이른바 진보의 한가운데 파묻혀 우리가 미쳐 깨닫지 못한 어두운 면들을 기꺼이 알려 줍니다. 37. 우리의 뿌리에서 시작하여, 함께 나누는 희망과 대화의 자리인 공동의 식탁에 함께 앉읍시다. 이러한 방식으로 현수막이나 벽과 같이 여겨졌던 우리의 다양함이 가교가 될 수 있습니다. 38. 아마존 지역의 다양한 토착 민족들 사이에서도 “다양성이 위협으로 제시되지 않는 다문화 관계”가 증진될 수 있습니다. 39. “매스컴을 수단으로 식민지화하려는 침략에 맞서,” 토착 민족들을 위하여 “그들의 고유한 언어와 문화를 바탕으로 커뮤니케이션의 대안적 형태”를 증진할 필요가 있습니다. 40. 토착 민족들 조상의 문화는 자연환경과의 친밀한 교류에서 시작되고 발전되었습니다. 따라서 그들은 환경 훼손으로 타격받지 않을 수 없습니다. 제3장 생태적 꿈 41. 가장 먼저 우리를 돌보시는 주님께서는 우리 형제자매와 우리에게 날마다 선사해 주시는 환경을 돌보라고 가르치십니다. 이 가르침이 바로 우리에게 필요한 첫 번째 생태학입니다. 42. 사람을 돌보는 일과 생태계를 돌보는 일은 분리될 수 없습니다. 이러한 사실은 “숲이 착취되어야 할 자원이 아니라 우리와 관계를 맺고 있는 다양한 존재”로 여겨지는 곳에서 특히 중요합니다. 43. 아마존 지역에서, 물은 여왕과 같습니다. 강과 개울은 핏줄과 같으며 모든 형태의 생명은 물에서 생겨납니다. 44. 거대한 아마존강의 반짝이는 물은 그 주위의 모든 것을 모아들이고 그들에게 생명을 줍니다. 45. 실제로 이 땅에는 많은 ‘아마존 지역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 주축은 많은 강줄기가 모여 이루는 이 위대한 강입니다. 46. 그 강의 엄청난 아름다움에 매료된 유명한 시인들은 그것이 불러일으키는 감정들과 그 강이 선사하는 생명력을 표현하고자 하였습니다. …… 그러나 한편 시인들은 그 강을 위협하는 위험들을 보며 애통해 합니다. 47. 현 상태로는 아마존을 다루는 이러한 방식으로는 그토록 많은 생명과 위대한 아름다움이 종식되리라는 것은 피할 수 없는 진실입니다. 아무 일도 일어나고 있지 않다고 사람들이 계속 생각하고 싶어 할지라도 그러합니다. 48. 지구의 균형은 아마존의 안녕에 달려 있습니다. …… 소수의 막강한 기업들의 이익을 아마존 지역과 온 인류의 선익보다 중요시해서는 안 됩니다. 49. 아마존 지역에 흐르는 풍부한 수자원은 인류의 생존을 위한 핵심 자원입니다. 그러나 오염 요인들도 계속하여 늘어나고 있습니다. 50. 실제로, 지역 사업가들과 정치인들의 경제적 이득만이 아니라 ‘막대한 세계적 경제 이익’도 존재합니다. 이에 대한 대응책은 아마존 지역의 “세계화”가 아닌 각국 정부들의 책임감 증대에 있습니다. 51. 아마존 지역의 보호를 위해서는 선인들의 지혜와 현대의 기술 지식을 결합하는 것이 바람직합니다. 언제나 지속 가능한 토지 이용의 방법을 찾고 그 안에 사는 현지인들의 생활양식과 가치 체계도 보존해야 합니다. 52. 우리가 보기에, “창조주께 가 닿는 아마존 지역의 울부짖음은 이집트에서 울려 퍼진 그분 백성의 울부짖음과 비슷합니다(탈출 3,7 참조). 이는 종살이하는 버려진 이들의 울부짖음, 해방을 탄원하는 울부짖음입니다.” 53. 우리는 양심을 무뎌진 채로 내버려 두는 일이 종종 있습니다. “방해 공작으로 세계가 실제로 얼마나 유한하고 덧없는지를 의식하지 못하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54. 그 밖에도 저는 다양한 생물종들이 그 자체로 소중하다는 사실을 상기시키려 합니다. 55. 우리는 토착 민족들에게서 배우며 아마존 지역에 대하여 관상할 수 있습니다. 이는 단순히 분석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하여 우리는 놀라운 이 소중한 신비를 재인식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아마존을 이용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사랑할 수 있습니다. 이 사랑은 근본적이고 참된 이익을 불러일으킵니다. 56. 하느님께서 우리 안에 심어 주신 심미적 관상적 감각을 일깨웁시다. 종종 우리는 이 감각을 무뎌지게 만들곤 합니다. …… 이러한 내적 회개를 통하여 우리는 아마존을 위하여 눈물 흘릴 수 있습니다. 그리하여 아마존과 함께 주님께 울부짖을 수 있습니다. 57. 무한한 사랑으로 우주의 모든 존재를 창조하신 하느님 아버지께서 우리를 부르십니다. 아마존의 울부짖음을 들을 수 있도록 당신의 도구가 되라고 부르십니다. …… 우리 믿는 이들은 아마존 지역에서 하느님을 아는 자리를 발견합니다. 이는 하느님께서 몸소 자신을 드러내시어 당신 자녀를 부르시는 하느님의 자리입니다. 58. 최선의 생태론은 언제나 교육적 측면을 포함하는 생태론입니다. …… 사람들이 먼저 바뀌지 않는다면, 탐욕을 줄이고 더욱 온유하며, 더욱 존중하고 덜 걱정하며, 더욱 형제적인 또 다른 삶의 양식을 받아들이라는 재촉이 없다면, 무엇인가를 바꿀 수 있는 건강하고 지속 가능한 생태론이 있을 수 없을 것입니다. 59. “우리는 엄청난 기상 이변이나 커다란 자연재해의 위협에만 관심을 기울일 것이 아니라, 사회 위기에서 비롯되는 참사에 대해서도 생각해야만 합니다.” 60. 교회가 오랜 세월 쌓아온 영적 체험, 피조물의 가치에 대한 새로운 인식, 정의 추구에 대한 염려로 …… 아마존 지역을 보호하고 성장시키는 데에 기여하기를 바랍니다. 제4장 교회의 꿈 61. 교회는 아마존 민족들과 함께 걸어가라고 부름받습니다. …… 그러나 이러한 교회의 구현, 복음의 실현이 가능하게 하려면, 선교사의 위대한 선포가 늘 새롭게 다시 울려 퍼져야 합니다. 62.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복음으로부터 받은 신앙의 요청을 저버릴 수 없습니다. 우리는 모든 이와 함께 한 걸음 한 걸음 앞으로 나아가기를 바라고 있기에, 예수 그리스도를 부끄러워해서는 안 됩니다. 63. 가난한 이들, 버려진 이들을 위한 참다운 선택은 …… 그들의 존엄을 드높여 주실 주님과 맺는 우정으로 그들을 초대한다는 뜻입니다. 그들이 우리에게서 교리 규정이나 도덕적 명령만을 전해 받을 뿐 구원의 위대한 선포를 듣지 못한다면 참으로 슬픈 일입니다. 64. 그들은 복음 선포를 들을 권리가 있습니다. 무엇보다도 첫 선포 곧 케리그마(Kerygma)를 들을 권리가 있습니다. …… 다양한 방식으로 이루어지는 이 선포가 아마존 지역에서 끊임없이 되울려 퍼져야 합니다. 이와 같은 열정적 선포 없이는 모든 교회 체계는 고작 또 하나의 비정부 기구가 될 것입니다. 65. 그리스도인의 삶의 성숙을 위한 모든 제안의 중심에는 언제나 이러한 선포가 있어야 합니다. …… 그런데 케리그마와 형제애는, 모든 이가 아마존 지역에 끊임없이 전해야 하는 복음 내용 전체를 간추리는 위대한 요약입니다. 토리비오 데 모그로베호(Toribio de Mogrovejo) 성인이나 호세 데 안키에타(José de Anchieta) 성인과 같은 라틴 아메리카의 위대한 복음 선교사들이 바로 이를 실천했습니다. 66. 늘 새롭게 케리그마를 선포하는 교회는 아마존 지역에서도 성장해야 합니다. 이를 위하여 교회는 끊임없이 이 땅의 사람들과 현실과 역사에 귀 기울이고 대화하면서 그 고유한 정체성을 재형성해야 합니다. 67. 요한 바오로 2세 교황께서는 다음과 같이 가르치셨습니다. 복음 메시지를 전할 때에 “교회는 문화의 자율성을 부정하려 해서는 안 됩니다.” …… 아메리카 대륙의 현지인들을 향해서는 다음 사실을 상기시키셨습니다. “문화가 되지 않는 신앙은, 이를 온전히 듣고 온전히 성찰하며 충실히 실천하지 않는 신앙입니다.” 68. 제가 권고 ?복음의 기쁨?(Evangelii Gaudium)에서 “은총은 문화를 전제로 하고 이 하느님의 선물은 그것을 받아들이는 사람의 문화 안에서 구체화된다.”는 확신에 기초하여 말씀드린 토착화에 대한 내용을 여기서 다시 살펴볼 수 있습니다. 69. 선교지에 도착한 복음 선교사들이 복음을 전할 뿐 아니라 그들이 자라난 문화를 전해야 한다는 믿음을 가지는 데에 위험이 도사리고 있습니다. 그들은 “특정 문화의 형태를 도입하는” 것이 중요하지 않다는 사실을 망각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마르지 않는 보화를 통하여 늘 새로운 것을 창조하실 수 있는 성령의 새로움을 용기 있게 받아들여야 합니다. 70. 교회가 아마존 지역에서 복음의 새로운 토착화를 이루려면 선인들의 지혜에 귀 기울일 필요가 있습니다. 71. 토착 민족들은 기쁨 어린 절제가 무엇인지 발견하도록 우리를 도울 수 있습니다. 이러한 의미에서 그들은 “우리에게 많은 것을 가르쳐 줍니다.” 토착 민족들은 적은 것으로 만족하는 법을 알고 많은 것을 축적하지 않고도 하느님께서 주신 작은 선물들에 기뻐합니다. 불필요한 파괴를 일삼지 않으며 생태계를 보호합니다. …… 복음화는 이 모든 것을 소중히 여기고 고려해야 합니다. 72. 도시민들은 만족할 줄 모르는 소비주의와 도시의 고독에 대항하여 이러한 지혜에 대한 인식과 ‘재교육’이 필요합니다. 교회 자체도 복음 선포에 이를 효과적으로 통합함으로써 이와 같은 문화적 회복을 돕는 매개체가 될 수 있습니다. 73. 모든 피조물이 상호연결되고 상호의존한다고 여기는 토착 의식은 분명 존중받아야 합니다. …… 그러나 이처럼 온 우주에 현존하시는 하느님과 맺는 관계가, 그 고유한 실재를 지켜 주시고 의미를 부여하고자 하시는 ‘하느님 당신’과의 더욱 인격적인 관계가 되도록 노력하는 것도 중요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알고 사랑하시는 분이십니다. 74. 마찬가지로, 참하느님이시며 참인간, 해방자이시며 구원자이신 예수님과 이루는 관계도 토착 민족들이 지닌 특징인 이 독특한 우주적 세계관과 상치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분께서는 만물 안에 스며들어 계시는, 부활하신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75. 많은 아마존 주민들이 처한 가난과 방임의 상황을 감안하여, 이러한 토착화에는 반드시 강력한 사회적 노력이 따라야 할 것입니다. …… 이러한 목적을 위하여 교회의 사회 교리에 대하여 사목자들을 적절히 양성하는 것이 그 무엇보다 중요합니다. 76. 동시에, 아마존 지역의 복음의 토착화는 영적 차원과 사회적 차원을 더욱 잘 통합해야 합니다. 그리하여 가장 가난한 사람들이 교회 밖에서 초월적 차원을 향한 그들의 갈망에 응답해 줄 영성을 찾아 나설 필요가 없게 하여야 합니다. 77. 이는 다른 곳에서 전파된 모델들을 답습하는 것이 아니라 아마존의 얼굴을 지닌 성덕에 대한 증언을 낳을 것입니다. …… 보편 교회에 질문을 던지라고 부름받은 아마존 사람들의 특징을 띠는 성덕을 상상해 봅시다. 78. 토착화 과정은 개인뿐만 아니라 공동체의 과정을 포함하는 것입니다. 토착화 과정은 민족들에 대한 완전한 이해와 존중 어린 사랑을 요구합니다. …… 이 민족들의 삶에서 자생적으로 흘러나오는 몇 가지 종교적 표현들을 섣불리 미신이나 이교(異敎)라고 예단할 필요가 없습니다. 79. 반드시 우상 숭배라고 생각하지 않고도 토착적 상징을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영적 의미를 띠는 신화는 잘 활용될 수도 있습니다. 이를 언제나 이교적 오류로 여겨서는 안 됩니다. 특정 종교 축제들도 거룩한 의미를 지니고 있기에, 점진적인 정화와 성숙의 과정은 필요하지만 화합과 형제애를 기르는 자리가 됩니다. 80. 가장 큰 위험은 기쁨을 만끽하지 못하게 하는 적으로 그리스도를 바라보며 이러한 자리들과 그리스도의 만남을 방해하는 것입니다. 81. 그리스도교 영성을 토착 민족들의 문화 안에 토착화하는 일은 성사들 안에서 그 각별한 가치를 지닌 길을 찾을 수 있습니다. 신적인 것과 우주적인 것 그리고 은총과 피조물의 일치가 성사들 안에서 이루어지기 때문입니다. 82.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이미 토착 민족들 안에서 전례의 토착화를 위한 이러한 노력을 하라고 요청하였습니다. 50여 년이 넘어 버렸지만 여전히 토착화를 향한 발전은 거의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83. 주일마다 “그리스도교 영성은 안식의 가치와 축제의 가치를 결합시킵니다. ……” 토착 민족들은 이러한 무상성과 건강한 관상적인 안식을 알고 있습니다. 우리의 거행은 토착 민족들이 이와 같은 가치를 주일 전례 안에서 체험하여, 우리의 구체적인 삶을 비추는 하느님 말씀과 성체성사의 빛을 만날 수 있도록 도와주어야 합니다. 84. 성사들은 하느님께서 곁에 계심을 보여주고 전달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자비로이 당신 자녀들을 치유하고 북돋아 주러 오시는 분이십니다. 그러므로 성사들은 그 누구보다도 가난한 이들이 가까이 다가올 수 있는 자리가 되어야 합니다. 금전적인 이유로 성사들을 거부해서는 안 됩니다. 가난하고 잊혀진 아마존 사람들 앞에서, 배척하고 거리를 두는 규율은 설 자리가 없습니다. 그렇게 한다면 가난한 이들은 세관처럼 변해버린 교회로부터 결국 버려지고 맙니다. 85. 교회가 아마존 지역에서 사목을 펼쳐가기는 순조롭지 않습니다. 접근하기 어려운 지역이 많은 드넓은 영토 때문이기도 하고 문화적 다양성 때문이기도 합니다. 심각한 사회 문제는 물론 스스로 고립된 삶을 원하는 일부 민족들의 선택 때문이기도 합니다. 이에 우리는 무관심해질 수 없습니다. 교회의 구체적이고 담대한 응답이 필요합니다. 86. 가장 멀고 외진 지역에서도 더욱 자주 성찬례 거행이 이루어지도록 봉사하는 방식으로 교역의 모습이 갖추어지도록 노력할 필요가 합니다. 아파레시다 문헌은 수많은 아마존 공동체들의 탄식에 귀 기울이라고 초대합니다. 87. 사제에게 가장 고유한 것, 아무도 대리할 수 없는 그것이 무엇인지 명확히 밝히는 것이 중요합니다. 답은 사제이신 그리스도께 그를 일치시켜 주는 성품성사에 있습니다. 우선 결론은, 성품성사를 통하여 배타적으로 주어지는 그 인호로 사제만이 성체성사를 집전할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이것이 사제의 으뜸가며 대신할 수 없는 고유한 본분입니다. 88. 사제는 머리이신 주님의 표징입니다. 주님께서는 특히 모든 그리스도교 생활의 원천이요 정점인 성찬례 거행 안에서 은총을 가득히 베풀어 주십니다. 이것이 성품성사를 통해서만 부여받는 사제의 커다란 권한입니다. 89. 아마존 지역이라는 특수 상황에서, 특히 우림 지역과 외딴 지역에서, 이 사제 직무를 보장하는 새로운 방식을 찾을 필요가 있습니다. 평신도들은 …… 성체성사 거행을 필요로 합니다. 성체성사는 “교회를 이루기” 때문입니다. …… 우리가 참으로 그렇게 믿는다면, 아마존 지역의 민족들이 새 생명의 양식과 용서의 성사를 빼앗기지 않도록 보장하는 것이 시급합니다. 90. 이 시급한 요구에 따라, 저는 모든 주교, 특히 라틴 아메리카 주교들이 선교 성소가 보이는 이들에게 아마존 지역을 선택할 수 있도록 더 큰 아량으로 독려해 주시기를 권고합니다. …… 또한, 사제들의 초기 양성뿐만 아니라 지속 양성에 대해서도 그 구조와 내용을 깊이 있게 검토해 보는 것이 바람직합니다. 91. 성체성사는 교회의 일치를 드러내고 실현하는 위대한 성사입니다. …… 성체성사의 집전자는 친교를 북돋워야 합니다. 이 친교는 그저 그런 일치가 아니라, 성령께서 공동체에 부어 주시는 매우 풍성한 은총과 은사를 거두어들이는 것입니다. 92. 사제들이 필요합니다. 그렇다고 해서, ― 아마존 지역에서는 사제보다 훨씬 더 많은 ― 종신 부제, 수도자, 평신도가 통상적으로 공동체 성장을 위한 중요한 책무를 맡을 수 없다는 의미는 아닙니다. 93. 말씀과 만나고 성덕을 기르기 위하여 다양한 평신도 활동을 촉진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를 위해서는 성경, 교리, 영성, 실천의 측면에서 이루어지는 교육 과정과 다양한 지속 양성 과정이 필요합니다. 94. 아마존의 얼굴을 지닌 교회는, 권한을 부여받은 성숙한 평신도 책임자들의 안정적인 현존을 요구합니다. …… 아마존 지역의 도전은 교회의 특별한 노력을 요구합니다. 교회는 모든 차원에 면면히 현존하고자 노력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는 열정적이고 폭넓게 활동하는 평신도들의 참여를 통해서만 가능한 일입니다. 95. 축성 생활은 …… 교회가 아마존 지역에 다채롭고도 조화롭게 동화해 나가는 이 여정에서 특별한 자리를 차지합니다. 그러나 새로운 토착화 노력이 필요합니다. 그리하여 축성 생활은 창의성, 담대한 선교 활동, 공동체 생활만의 전형적인 힘과 감각을 조화시켜 나가야 합니다. 96. 사회적 권리 옹호를 선교와 영성과 통합시킬 수 있을 때, 기초 공동체들은 아마존 교회의 복음화 여정에서 진정한 공동 합의성(sinodalitas)을 체험하는 장이 됩니다. 97. 범 아마존 교회 네트워크나 다른 연합회들을 통하여 이루어지는 공동 노력들이 더욱 증진되어 나가기를 독려합니다. 98. 기존의 안정적인 공동체들과 함께하는 계획들을 구상하는 것이 늘 가능하지만은 않다는 사실을 기억해 주기를 바랍니다. 아마존에서는 내부적으로 대규모 이동이 이루어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 따라서 순회 선교 단체를 생각할 필요가 있습니다. 99. 아마존 지역에는, 다른 지역에서 파견되어 온 사제가 없었는데도 오랫동안, 심지어 수십 년 동안 신앙을 보전해 온 공동체들이 있습니다. 이는 강인하고 관대한 여성들 덕분에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 이번 주교대의원회의에서 이루어진 바로 이 여성들의 증언은 우리 모두를 감동시켰습니다. 100. 이에 따라, 우리가 교회를 순전히 기능 조직으로 축소시켜 이해하지 않으려면 우리의 시야를 넓힐 필요가 있습니다. 이러한 환원주의는, 오직 여성이 성품에 받아들여질 때에야 비로소 교회 안에서 더 큰 위상과 참여가 허용되리라고 생각하게끔 만들 수 있습니다. 그런데 사실 이러한 접근은 우리의 시각을 더욱 좁혀 버리고 여성을 성직자로 만들자는 방향으로만 몰아갈 수 있습니다. 101. 여성은 성모 마리아의 온유한 힘을 드러내면서 고유한 방식으로 교회에 이바지하고 있습니다. 그리하여 우리는 교회에 오로지 기능적으로만 접근하지 않고 교회의 가장 내밀한 구조 안으로 들어갈 수 있는 것입니다. 이로써 우리는 왜 여성이 없으면 교회가 무너지게 되는지 근본적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102. 현 상황이 요구하는 대로, 우리는 이 역사적 순간에 아마존 민족들의 구체적인 필요에 부응하는 여성의 다양한 직무와 은사가 생겨나도록 장려할 필요가 있습니다. 103. 함께 걸어가는 교회 안에서 여성들은 …… 여성 고유의 위상을 더욱 잘 표명할 수 있고 성품을 요구하지 않는 교회 직무나 역할에 받아들여질 수 있어야 합니다. 여기에서 그러한 직무는 안정적이고 공적으로 인정받으며 주교의 위임을 받아야 한다는 점을 유의해야 합니다. 104. 모든 단체가 언제나 자신에 대한 충실함을 잃지 않고 새로운 현실 속에서 다른 이들과 함께 대처할 때, 갈등은 더 높은 수준에서 극복됩니다. 모든 것이 “귀중한 양립 가능성을 보존하는 더 높은 차원”에서 해결되는 것입니다. 105. 이 역사적 순간에, 아마존 지역은 우리에게 한정된 시각을 뛰어넘으라는 도전 과제를 제시합니다. 곧, 우리는 중대한 문제들의 일부 측면들에만 얽매는 실용주의적 해결책을 뛰어넘어, 더 폭넓고 용기 있는 복음화의 길을 찾아 나서야 합니다. 106. 다종교 지역인 아마존에서, 믿는 이들은 공동선과 더 가난한 이들의 증진을 위하여 함께 대화하고 행동할 수 있는 자리를 모색할 필요가 있습니다. …… 성령께서 우리와 다른 이들 안에서 활동하실 수 있다는 사실을 믿는 사람이라면 이에 비추어 스스로 더욱 풍요로워질 수 있는 길로 나아가고자 노력할 것입니다. 107. 우리는 예수님께서 세상의 유일한 구원자이심을 굳게 믿으면서, 그분 어머니를 향한 깊은 신심을 키우고 있습니다. 이 점에서 모든 그리스도교파가 우리와 같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지만, 우리는 우리가 받은 그 따스한 모성애의 보화를 아마존 지역과 함께 나누는 것이 우리의 의무라고 느끼고 있습니다. 108. 이 모든 일 때문에 우리가 서로 원수 사이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대화를 나누고자 하는 진심 어린 마음이 있다면, 다른 이가 말하고 행동하는 것의 의미를 이해할 수 있는 역량이 길러집니다. 그렇게 할 때, 우리의 믿음에 대하여 열린 마음으로 진솔하게 끊임없이 대화하며 공통점을 찾아가고 특히 아마존 지역의 선익을 위하여 함께 일하고 헌신할 수 있습니다. 109. 우리 그리스도인을 하나 되게 해 주는 것은 바로, 우리에게 생명을 주시고 우리를 극진히 사랑하시는 하느님 아버지에 대한 신앙입니다. …… 이 삶 안에서 모든 것이 끝나버리는 것이 아니라 하늘나라의 잔치로 초대받았다는 확신이 우리를 하나 되게 해 줍니다. 그곳에서 하느님께서는 모든 눈물을 닦아 주시고 고통받는 이들에게 우리가 한 일 그대로를 거두어들이실 것입니다. 110. 이 모든 것이 우리를 하나 되게 해 줍니다. 그런데 어떻게 우리가 함께 싸워나가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주님의 거룩한 얼굴을 보여 주고 그분의 창조 활동을 보호하는 데에서, 어떻게 우리가 함께 기도하고 협력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결론 아마존의 어머니 111.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주신 성모님께서는 모든 이의 유일한 어머니이시면서도 아마존 지역에서 다양한 방식으로 당신 자신을 드러내 보여 주십니다. …… 이번 주교대의원회의를 준비하고 거행하면서 우리는 아마존 지역의 놀라운 아름다움을 더 충만히 발견하였습니다. 아마존의 아름다움 앞에서, 저는 우리가 다 함께 성모님께 기도드리며 이 권고를 마치는 것이 가장 좋다고 생각합니다. 생명의 어머니, 존재하는 만물의 주님이신 예수님께서는 당신 모태에서 사람이 되시고 부활하시어 주님 빛으로 당신을 변모시켜 주시어 모든 피조물의 모후가 되게 해 주셨나이다. 오 마리아, 당신께 비오니 아마존 지역의 뛰는 심장 안에서 만물을 다스리소서. 꽃과 강물 아마존을 가로지르는 큰 강 아마존 숲속에서 약동하는 모든 생명, 이 모든 것이 지닌 아름다움 안에서 모든 피조물의 어머니로서 당신 자신을 드러내시어 이 찬란한 아름다움을 당신 사랑으로 보호하소서. 예수님께서 아마존 주민들에게 넘치는 사랑을 베풀어 주시어 그들이 아마존을 아끼고 돌볼 수 있도록 예수님께 간구해 주소서. 당신 아드님께서 아마존 사람들의 마음속에 현존하시면서 말씀의 빛과 사랑의 위로와 형제애와 정의에 대한 메시지로 아마존 지역과 민족과 문화를 밝혀 주시도록 빌어 주소서. 성찬례 거행 때마다 이 모든 놀라운 일이 아버지의 영광을 위하여 드높여지게 하소서. 어머니, 아마존의 가난한 이들을 굽어보소서. 사소한 이익 때문에 그들의 보금자리가 파괴되고 있나이다. 생명이 흘러넘치는 이 복된 땅에 얼마나 많은 아픔과 비참, 얼마나 많은 방치와 남용이 있는지 살피소서! 힘 있는 자들의 마음을 움직이소서. 이미 늦었다고 체념하고 있는 저희를 일깨우시어 아직 살아 있는 생명을 구하게 하소서. 어머니, 핍박받는 당신 자녀들과 상처 입은 자연 속에서 꿰찔린 마음으로 직접 아파하는 분이시니, 아마존에서 당신 아드님과 함께 다스리소서. 그 누구도 하느님께서 손수 빚으신 작품에 대하여 주인으로 자처하지 못하게 하소서. 생명의 어머니, 이 칠흑같은 어둠 속에서 어머니를 믿고 의지하는 저희를 저버리지 마소서. 아멘. <한국천주교주교회의, 교황청에서 각국 주교회의에 보낸 요약문 번역> cpbc2020.02.19
![[이창훈 위원의 예수님 이야기] (78)파스카 만찬과 성찬례 제정 (루카 22,14-20)](//cpbc.co.kr/CMS/newspaper/2018/08/rc/731194_1.0_titleImage_1.jpg)
[이창훈 위원의 예수님 이야기] (78)파스카 만찬과 성찬례 제정 (루카 22,14-20)예수님 희생으로 실현될 새 계약의 성찬례 예루살렘 시온산 최후의 만찬 기념 성당 맞은편 꼰벤뚜알 프란치스코 수도원의 ‘최후 만찬 기념 성당’을 향한 성당. 예수님께서 분부하신 대로 베드로와 요한이 파스카 음식을 준비하자 예수님께서는 제자들과 함께 파스카 만찬을 드시면서 성찬례를 제정하십니다. 편의상 두 부분으로 나눠서 살펴봅니다. 파스카 만찬(22,14-16)“시간이 되자 예수님께서 사도들과 함께 자리에 앉으셨다.”(22,14) ‘시간이 됐다’는 것은 파스카 음식을 들 시간이 됐다는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 시간은 또한 하느님께서 뜻하신 시간, 혹은 예수님께서 하느님의 뜻을 행하실 시간이기도 합니다. 그 시간은 해가 진 후였습니다. 파스카 음식은 해가 진 후에 들어야 하기 때문입니다.(탈출 12,8 참조) 이렇게 시간이 되어 제자들과 함께 자리에 앉으셨는데 예수님께서는 뜻밖의 말씀을 하십니다. “내가 고난을 겪기 전에 너희와 함께 이 파스카 음식을 먹기를 간절히 바랐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파스카 축제가 하느님의 나라에서 다 이루어질 때까지 이 파스카 음식을 다시는 먹지 않겠다.”(22,15-16)예수님의 말씀에는 비장함이 서려 있습니다. 제자들에게는 예수님의 이 말씀이 뜻밖이고 충격적으로 보였을지도 모릅니다.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군중의 환호 속에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후에 성전에 가셔서 물건 파는 이들을 내쫓으시는 것을 보면서 자랑스럽고 뿌듯했을 것입니다. 또 날마다 백성이 성전에 모여들어 예수님의 말씀을 듣는 것을 보았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예루살렘에서 사람들에게 붙잡혀 고난을 받고 죽을 것이라고 말씀하셨지만 알아듣지 못했던 제자들이었기에 오히려 예루살렘에서 가르치시는 스승의 모습에 의기양양했을지 모릅니다. 게다가 파스카 음식을 준비하는 과정도 스승의 말씀대로 착착 진행됐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이 파스카 음식이 제자들과 나누는 마지막 식사일 뿐 아니라 “파스카 축제가 하느님의 나라에서 다 이루어질 때까지” 곧 하느님 나라가 최종적으로 완성될 때까지는 파스카 음식을 다시는 먹지 않겠다고 단언하시니 제자들로서는 어리둥절했을 것입니다. 그러면서 이 충격적인 말씀이 무슨 뜻일까 하고 곰곰 생각했을지 모릅니다. 그러는 가운데 잠시 시간이 흘렀습니다. 예수님께서 잔을 받아 감사를 드리신 후에 말씀하십니다. “이것을 받아 나누어 마셔라.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나는 이제부터 하느님 나라가 올 때까지 포도나무 열매로 빚은 것을 결코 마시지 않겠다.”(22,17-18) 예수님 말씀의 내용으로 볼 때 잔에 든 것은 포도주임이 분명합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포도주잔을 돌려가며 나누어 마시라고 말씀하시면서 당신은 하느님 나라가 올 때까지, 말하자면 하느님 나라가 완성될 때까지 절대로 마시지 않겠다고 말씀하십니다. 여기까지의 내용은 유다인들이 일반적으로 파스카 축제 음식을 드는 모습과 별 차이가 없는 것 같습니다. 다만 다시는 파스카 음식을 들지 않고 포도주도 마시지 않겠다고 비장하게 선포하시는 예수님 말씀이 두드러지고 있을 뿐입니다. 성찬례 제정(22,19-20)그런데 루카 복음사가는 비슷한 것 같으면서도 새로운 내용을 계속 소개합니다. 우선 본문을 살펴봅니다. “예수님께서는 또 빵을 들고 감사를 드리신 다음, 그것을 떼어 사도들에게 주시며 말씀하셨다. ‘이는 너희를 위하여 내어주는 내 몸이다. 너희는 나를 기억하여 이를 행하여라.’ 또 만찬을 드신 뒤에 같은 방식으로 잔을 들어 말씀하셨다. ‘이 잔은 너희를 위하여 흘리는 내 피로 맺는 새 계약이다.’”이 부분은 앞에서 본 22장 14-16절(파스카 만찬)과 상당히 겹치는 느낌을 줍니다. 그렇지만 두드러진 차이들도 있습니다. 앞부분 ‘파스카 만찬’에서는 이 만찬이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함께하는 마지막 만찬임이 강조되지만, 여기에서는 빵과 포도주가 “너희를 위한” 예수님의 “몸과 피”라는 것, 동시에 그 피는 ‘새 계약의 피’라는 것, 그리고 당신을 기억하여 이 예식을 행하라는 것이 강조됩니다. 이런 차이와 관련해 학자들은 신약성경에서 파스카 만찬 혹은 성찬례 제정에 대해 언급하는 본문들을 검토한 후에 루카 복음사가가 이 부분을 쓰면서 한편으로는 마르코복음에 나오는 성찬례 제정에 관한 내용(마르 14,22-25; 참고 마태 26,26-29)과 다른 한 편으로는 바오로 사도가 코린토 신자들에게 보낸 첫째 서간에 나오는 주님 만찬에 관한 내용(1코린 11,23-25)을 합쳐서 자기 나름으로 혼합형 성찬례 기사를 엮었다고 봅니다. 왜 루카 복음사가는 두 가지를 합쳤을까요? 루카 복음사가가 복음서를 집필할 때 많은 부분을 마르코복음, 또는 마르코 복음사가가 활용한 자료를 토대로 했습니다. 그런데 루카가 속해 있던 그리스도교 공동체에서는 이미 코린토 1서에서 언급하고 있는 방식으로 주님의 만찬을 거행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성찬례 제정에 관한 부분을 쓰면서 마르코복음의 내용과 코린토 1서의 내용을 혼합했다는 것이 성경학자들의 분석입니다. 평화신문2018.08.21
![[시사진단]혐오사회의 위험](//cpbc.co.kr/CMS/newspaper/2018/10/rc/735558_1.0_titleImage_1.jpg)
[시사진단]혐오사회의 위험표정훈 요한 사도
출판평론가 “한국 사람은 국적, 피부색으로 사람을 차별해요. 자신이 백인인 줄 알아요. 서양인인 줄 착각하는 거예요. OECD에 가입하고 경제가 발전했다는 우월감에 제1세계 사람인 줄로 아는 거죠.” 여성, 장애인, 이주노동자, 양심적 병역거부자, 성소수자 등 사회적 소수자에 대한 어떤 말과 행동들이 혐오인지 짚고, 혐오의 생산과 유통 배경을 밝히는 책 「그건 혐오예요」(홍재희, 행성B)에 나오는 주현숙 감독의 말이다. 이 책에서 김경순 감독은 타자(他者)가 되어 상처를 받아보는 경험이 중요하다고 말한다. 이를 통해 자기 자신이라고 믿었던 자아의 정체성에 균열이 생긴다. 그런 상처와 균열이야말로 타인을 진정으로 이해하는 길이다. “상처에 함몰되면 자기 삶이 무너지겠지만 그 상처를 통해 더 많이 배울 수 있는 세계가 밖에 있다는 걸 깨닫는 계기가 될 수 있다는 의미에서. 저는 자신을 타자화해 보는 거, 타자가 되어 보는 경험이 정말 소중하다고 봐요.”최근 몇 년 사이 혐오를 주제로 하는 책들이 많이 출간되고 있다. 대표적인 책으로 홍성수(숙명여대) 교수의 「말이 칼이 될 때 : 혐오 표현은 무엇이고 왜 문제인가?」(어크로스)를 들 수 있다. 홍 교수에 따르면 혐오 표현에는 “동남아시아 출신들은 게으르다”, “조선족들은 칼을 가지고 다니다가 시비 붙으면 휘두르는 게 일상화되어 있다” 등과 같이 특정 소수자 집단에 대한 부정적 이미지를 표현하는 말들이 있다. 또한 여성은 “조신해야 한다”, “나서지 마라”, “집에서 애나 봐라”와 같이 일정한 틀에 가둬놓고 한계를 지우는 유형도 있다. 홍 교수는 이런 말들이 별다른 제지 없이 발화된다면 어느 순간 사실로 굳어지게 된다고 지적한다. 허위가 사실로 둔갑해 또 다른 차별을 낳는다는 것.한 권만 더 살펴보자. 독일의 언론인이자 작가 카롤린 엠케의 「혐오사회」(정지인 옮김, 다산초당)다. 엠케는 이른바 표준에 부합하는 사람들은 자신이 다른 사람들을 어떻게 배제하거나 비하하는지 알아차리지 못한다. 자신이 용인되는 것을 당연한 일로 받아들이기 때문에 자신이 어떤 힘을 행사하는지조차 모른다. 자신이 어떤 집단을 혐오한다는 것을 깨닫지 못하기 쉽다.이렇게 혐오 관련 국내외 저자들의 책이 많이 나온다는 것은 우리 사회에 혐오가 점점 더 만연해가고 있다는 뜻일 수도 있다. 성경이 우리에게 말한다. “너희는 이방인을 억압하거나 학대해서는 안 된다. 너희도 이집트 땅에서 이방인이었다.”(탈출 22,20) 사실 예수님의 일생은 당시 사회에서 천대받고 소외되며 혐오의 대상이 되는 사람들을 보듬는 삶이었다.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 너희는 모두 나에게 오너라. 내가 너희에게 안식을 주겠다.”(마태 11,28)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지고 허덕이는 사람, 우리 시대 우리 사회에서 혐오의 대상이 되는 사회적 소수자의 다른 이름이다. 평화신문2018.10.10

노인 요양원, 죽음행 종착역 아닌 천국행 출발역사순 기획 - 전주교구 사회복지법인 ‘빈첸시오의 집’ 신경옥(율리아나) 원장 최근 건립을 마친 ‘빈첸시오의 집’ 요양 병동 전경. 가운데 정원을 중심으로 원형 모양으로 지어진 요양 병동에 50여 명의 어르신이 생활하고 있다. 노인장기요양기관하면 무기력한 어르신들의 모습이 떠오른다. 초점 없는 눈으로 누워 있는 어르신과 시설 특유의 냄새는 노인요양기관을 삶의 마지막 종착역인 ‘죽음의 역’으로 각인시키기 충분하다. 하지만 전북 완주군 비봉면에 있는 전주교구 사회복지법인 ‘빈첸시오의 집’은 달랐다. 깨끗한 시설 창가에 모여 햇살을 받으며 담소를 나누는 어르신들의 모습에서 노년의 소소한 행복을 엿볼 수 있었다. 빈첸시오의 집 신경옥(율리아나, 56) 원장의 삶과 신앙에서 사순과 부활의 의미를 되새겨본다. ▨고래 뱃속의 요나가 되어“성경 속 요나처럼 정말 도망치고 싶었어요.”신 원장은 “전임 원장이 갑자기 그만둬서 몇 달만 맡아 달라는 교구 부탁에 봉사한다는 생각으로 시설을 맡았다”며 “낮에는 어르신들을 돌보고 밤에는 6개월 정도 날을 새며 공부해야 했다”고 시설에 첫발을 디딘 2007년을 회상했다.교구 사회복지법인에서 일하던 그에게 원장 자리는 버거웠다. 어린 자녀들에게 미안한 마음도 컸다. 더욱이 열악한 빈첸시오의 집 환경은 그의 어깨를 더 무겁게 했다. 빈첸시오의 집은 전주교구 이재후(원로사목자) 신부가 오갈 곳 없는 무연고 어르신을 모시고자 사비를 털어 문을 열고 2005년 교구에 소유권을 이전한 시설이다. 하지만 정부 지원 없이 후원자와 어르신들의 수급비로 운영되던 비인가 조건부 시설이어서 운영이 쉽지 않았다. 몇몇 수녀회가 맡아서 운영해 보려고 이곳을 찾았지만 모두 고개를 흔들며 떠났다. 신 원장은 “하느님께서 도망친 요나를 고래 뱃속에서 꺼내 쓰신 것을 되새기며 마음을 굳게 먹기로 했다”고 말했다. 외부 일정으로 잠시 자리를 비우고 온 그에게 어르신들이 “어디 갔었어. 우리 버리고 간 줄 알고 걱정했잖아”라는 말에 그의 결심은 더 단단해졌다.▨사순 너머에는 부활의 희망이 있다결단을 내렸지만, 역경과 고난이 이어졌다. 겁이 많아 돌아가신 어르신의 몸을 닦아 드리는 것도 무서웠고 어르신들을 떠나 보내며 천국에서 다시 만나자고 통곡도 많이 했다. 시설 인가를 위한 서류 작업에 밤을 하얗게 새웠다. 담당 공무원에게 퇴짜를 맞을 때면 울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넋 놓고 앉아 있을 수는 없었다. 노인 요양원이 ‘죽음의 수용소’라는 편견을 깨고 싶었다.어렵사리 노인장기요양기관으로 인가받았지만 50년 된 폐교를 개조한 낡은 시설이 문제가 됐다. 2009년 고산 지역을 덮친 폭우에 요양원 지붕이 내려앉아 폭포처럼 빗물이 들이닥쳤다. 어르신들을 대피시키고 밤새 물을 퍼냈지만 새 보금자리가 절실히 필요한 상황. 신 원장과 직원들은 백방으로 뛰며 후원금을 모았다. 직원과 봉사자들이 깻잎과 마늘, 매실 등으로 장아찌를 담고 어르신들이 힘을 보태 청국장을 만들어 성당 등지로 꼬박 8년을 팔러 다녔다.어르신을 돌보고 후원금 모집에 행정 일을 처리하느라 시간이 늘 부족했다. 하루가 24시간인 게 안타까웠다. 기쁘고 감사한 마음으로 일했지만, 몸이 견디질 못했다. 망막에 이상이 생기는 황반변성이 찾아온 것이다. “후원 동영상을 만들고 밤을 새웠는데 아침에 눈이 안 보여 큰 병원을 찾아갔죠. 의사가 실명 확률이 높다고 하더군요.” 신 원장은 현실을 담담히 받아들였다. 그리고 ‘주님의 일을 하는 게 여기까지 인가보다’는 생각에 성모님께 간절한 기도를 드렸다. “눈이 안 보여 주님의 일을 그만두게 되더라도 마음의 창으로 주님을 만나게 해주세요.” 기도의 응답일까, 시력은 떨어져도 기적같이 실명 위기를 넘겼다. 얼마 지나 노력에 대한 결실을 보았다. 2017년 첫 삽을 뜬 빈첸시오의 집 요양병동 공사가 끝나고 새 보금자리에서의 생활이 시작된 것이다. 신 원장은 “언제나 든든한 울타리가 되어주고 하느님의 현존을 보여주신 이재후 신부님과 후원을 아끼지 않은 봉사자분들의 노력이 있기에 가능한 일”이라고 미소 지었다. 아직 창고 공사 등이 진행 중이지만 현재 치매 어르신 12명과 요양 어르신 37명이 병실과 소성당, 식당, 집중 치료실, 임종실, 찜질방, 물리치료실 등을 갖춘 곳에서 생활하고 있다. ▨부활 향한 마지막 환승역점심을 마친 어르신들이 햇볕 가득한 요양원 창가에 삼삼오오 모이기 시작했다. 신 원장과 담소를 나누는 어르신들의 밝은 표정만 봐도 빈첸시오의 집 직원들의 어르신을 향한 진심을 엿볼 수 있었다. 어르신들을 위한 먹을거리 하나 허투루 고르지 않았다. 고기나 채소, 참기름 등 국산 먹을거리로 장을 보고 아침이면 각종 약재를 넣어 달인 배즙을 챙겨 드렸다. 1년에 3번 어르신들과 나들이도 가고 어르신들을 위한 각종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신앙생활을 도왔다. 어르신들은 “천국이 따로 있겠냐. 편하게 여생을 보낼 수 있는 여기가 천국”이라고 입을 모은다. 이제는 요양원이 더 집처럼 느껴져 명절 때 집에 잘 안 가는 어르신도 많다는 게 시설 관계자의 설명이다.신 원장도 새로운 보금자리에서 행복한 나날을 보내는 어르신들을 보며 “하느님이 다 이루신 일이며 어르신들의 웃는 모습을 보면 매일 기적 속에 산다는 생각이 든다”고 말했다. 그리고 기적을 이어가기 위해 지금도 노력 중이다. 얼마 전부터 치매 어르신을 받기 시작한 것도 그 하나다. 치매가 현대 의학으로 고칠 수 없는 질병이지만 사랑이라는 묘약으로 다가가면 변화된다는 믿음이 있기 때문이다. 신 원장과 직원들은 요양원이 생을 기쁘게 마감할 수 있는 천국행 출발역이 되도록 한마음으로 가꾸어 나가고 있다. 노인장기요양원이 어르신들이 죽음을 기다리는 곳, 시설의 돈벌이 장소로 전락했다는 편견을 깨려고 오늘도 노력 중이다. “기쁜 마음으로 일하는 직원들을 보면 늘 고맙고 감사해요. 건강이 허락하는 한 하느님 뜻대로 어르신들을 돌보며 살고 싶어요.” 백영민 기자 heelen@cpbc.co.kr 평화신문2019.03.20

예수님 부활 가장 가까이서 목격한 여인 ... 스크린으로 찾아와 신약 인물이자 부인, 예수의 제자인 성녀 마리아 막달레나에 관한 영화가 개봉한다. 성주간 수요일인 오는 28일 개봉하는 ‘막달라 마리아 : 부활의 증인’(감독 가스 데이비스)이다.영화는 마리아 막달레나 성녀를 예수님을 섬긴 죄의 여인으로 그리면서, 성경에 기록되지 않은 이야기에 대해 상상력을 발휘했다. 황량한 어촌에서 구원만을 바라며 사는 성녀는 정혼을 거부했다는 이유로 가족들에게조차 외면당한다. 그러다 그의 마을을 방문한 예수님과 제자들을 만나 깨달음을 얻고 세례받은 뒤 예수님과 제자들의 여정에 동행한다.성경은 성녀가 예수님께서 십자가형을 받고 돌아가실 때 마지막까지 십자가 곁을 지켰으며(요한 19,25), 저녁때가 돼 아리마태아 출신의 부유한 요셉이란 자가 빌라도의 허락을 받아 예수님의 시신을 자기의 새 무덤에 모실 때에도 그 맞은편에 있었다(마태 27,61 참고)고 기록하고 있다. 또한, 안식일 다음 날 새벽에 몇몇 여인과 함께 무덤으로 달려가 그리스도의 시신이 없어졌다는 사실을 발견했으며(루카 24,3), 무덤 밖 동산에서 슬피 울고 있을 때 “마리아야!” 하고 부르시는 부활하신 예수님을 처음으로 만나 그리스도 부활의 기쁜 소식을 전할 사명을 받고 제자들에게 달려간 인물(요한 20,11-18 참고)로 묘사하고 있다.성경에는 예수님께 ‘용서받은 죄 많은 여자’(루카 7,36-50)와 마르타의 동생 마리아가 동일 인물인지 분명하게 나오지는 않으나, 교황 대 그레고리우스 1세(재위 590~604년) 이후 두 마리아를 성녀 마리아 막달레나와 같은 인물로 보고 있다. 그래서 서방 교회 전승에서는 성녀 마리아 막달레나를 예수님을 만나 자신의 죄를 용서받은 여인으로서 ‘통회’와 ‘관상’의 롤모델로 여겨왔다.영화는 그동안 남성 중심적인 시각에서 쓰이고 묘사됐던 예수님을 여성의 시선에서 바라보고 느끼는, 관점의 변화를 추구한다. 특히 모든 인간의 구원을 위해 인간을 대신해 고통받고 십자가 위에서 돌아가시고 묻히셨다가 사흗날에 부활하신 사건은 예수님의 일생에서 가장 중요한 사건이다. 이러한 장면들 속에서 막달레나 성녀의 삶을 통해 바라보는 예수님의 인간적인 면모는 신앙인과 비신앙인의 구분을 넘어 우리 모두에게 감동과 여운을 남기기 충분하다.영화는 할리우드 대표 연기파 배우로 꼽히는 루니 마라가 막달레나 역을, 호아킨 피닉스가 예수님 역을 맡았다. 루니 마라와 호아킨 피닉스는 2013년 인공지능 운영체제와 사랑에 빠지는 독특한 설정이 인상적이었던 로맨스 영화 ‘그녀’에서 각각 캐서린과 테오도르역으로 열연했던 적이 있다. 호아킨 피닉스는 이 영화로 제79회 칸영화제 남우주연상을 받았다.2000년 전 예수님 시대를 그대로 재연하기 위해 수많은 역사학자와 고고학자, 신학자들로부터 의견을 수렴했다. 이를 바탕으로 의상을 제작하고 현지 로케이션에 나섰다. 촬영은 예수님 당대와 똑같은 기후와 생태를 가진 장소를 찾아 남부 이탈리아의 고대도시 마테라를 비롯해 풀리아, 시칠리아 등지에서 진행했다.이힘 기자 lensman@cpbc.co.kr 평화신문2018.03.14
[하느님과 트윗을](55) 예수님은 우리를 위해 무엇을 하셨나요모든 사람의 죄를 떠맡으신 예수님 문 : 예수님은 ‘하느님의 아들’이신가요.답 : 예수님 시대 이전에 유다인은 이미 몇몇 특별한 인물을 ‘하느님의 아들’이라고 부른 적이 있습니다. 성경은 이스라엘을 하느님의 “맏아들”(탈출 4,22)이라고 부릅니다. 그러나 우리가 예수님을 ‘하느님의 아들’이라고 할 때, 이는 단지 명예로운 칭호로 부르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과 성부의 관계는 하느님과 우리의 유대와는 다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 자신이 또한 하느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자신을 ‘하느님의 아들’이라고 말씀하시자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심지어 예수님이 하느님을 모독했다고 여기며 돌을 던지려고 했습니다. 성경은 예수님이 참 하느님이시라는 것을 확인해 줍니다. 예수님을 ‘하느님의 아들’이라고 믿는 것은 그리스도인이 되기 위해 필수적입니다.문 : 예수님은 이름이 여러 개 있나요답 : ‘예수’라는 이름은 ‘하느님은 구원하신다’ 또는 ‘하느님은 도움이시다’라는 의미입니다. 예수님은 “백성을 죄에서 구원하실 것”(마태 1,21)이고, 몸값을 지불하고 그들을 되찾으실 것(마태 20,28 참조)이므로 그 이름이 주어졌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예수님을 우리의 구원자이며 구속자라고 합니다. 그리스어로 그리스도(히브리어로 메시아)는 ‘기름 부음 받은 이’라는 뜻입니다. 하느님이 “성령과 힘”(사도 10,38)으로 예수님에게 기름을 부어 주셨습니다. IHS는 예수를 뜻하는 그리스어의 첫 세 글자로 라틴어에서 I와 J는 같은 글자라서 이렇게 쓸 수 있습니다. “인간의 구원자 예수(Jesus Hominem Salvator)”나 “이 십자가의 표시(In Hoc Signo)”로 해석하기도 합니다.문 : 왜 예수님은 우리를 위해 돌아가셨나요.답 : 바오로 사도는 한 사람, 즉 아담을 통해 죄와 죽음이 세상에 들어왔다고 했습니다.(로마 5,12-13 참조) 아담의 죄는 원죄로서 그의 모든 자손을 짓누르고 그들로 하여금 죽음의 지배를 받게 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를 바꾸셨습니다. 그분은 ‘죄를 용서해 주시려고’(마태 26,28 참조) “많은 이들의 몸값으로”(마태 20,28) 자기 목숨을 바치셨습니다. 십자가 위에서, 예수님은 현재, 과거, 그리고 미래의 모든 사람의 죄를 떠맡으셨습니다. 우리의 죄까지도 말입니다. 그 결과, 세례를 받을 때 우리는 원죄와 우리가 그동안 지은 모든 죄로부터 깨끗해집니다. 문 : 예수님은 왜 그토록 참혹하게 돌아가셔야 했나요.답 : 예수님은 십자가 위 죽음을 앞두고 고뇌하셨습니다. 겟세마니 동산에서 “아버지, 아버지께서 원하시면 이 잔을 저에게서 거두어 주십시오”(루카 22,42)라고 기도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이러한 크나큰 고통을 견딜 수 있을 만큼 자신이 충분히 강인하지 않다고 생각하신 걸까요? 그랬을지도 모릅니다. 예수님은 “그러나 제 뜻이 아니라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지게 하십시오”(루카 22,42)라고 하시며 돌아가셨습니다. 예수님의 겟세마니 기도는 하느님의 능력에 한계가 있어서가 아니라, 하느님과 죄 많은 인간을 재결합시키기 위해 완전한 제물이 필요했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의 외아드님을 살해한 죄는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큽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렇게 한 사람들을 용서해 주심으로서 용서받지 못할 만큼 큰 죄가 없다는 것을 우리에게 가르쳐 주십니다. 정리=서종빈 기자 binseo@cpbc.co.kr 평화신문2018.06.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