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나는 인장을 받은 이들의 수가 십사만 사천 명이라고 들었습니다”(묵시 7,4)](//cpbc.co.kr/CMS/newspaper/2018/05/rc/719257_1.0_titleImage_1.jpg)
[허규 신부와 떠나는 신약여행](97) “나는 인장을 받은 이들의 수가 십사만 사천 명이라고 들었습니다”(묵시 7,4)하느님을 믿는 모든 이가 구원될 것이다 요한 묵시록은 하느님이 내린 두루마리에 담긴 환시를 전하고 있다. 그림은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하는 어린양이 일곱개의 봉인이 있는 두루마리를 받는 모습. 율리우스 슈노어 폰 카롤스펠트 작 ‘네 개의 봉인’ 부분. 출처=「아름다운 성경」 하느님의 어좌에 관한 환시에 이어 소개되는 것은 ‘어린양’에 대한 환시입니다. 요한 묵시록에서 어린양은 “다윗의 뿌리”로 소개되며 “살해된 것처럼 보이는” 모습으로 묘사됩니다.(묵시 5,5-6) 이런 묘사와 함께 어린양은 요한 묵시록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나타내는 전형적인 상징으로 사용됩니다. 이 어린양은 어좌에 앉은 분으로부터 봉인된 두루마리를 건네받습니다. 이 봉인된 두루마리는 요한 묵시록에서 환시를 시작하고 종말을 향해가는 중요한 요소입니다. 이 두루마리를 펼 때에 비로소 그 안에 적힌 내용을 볼 수 있고 그 내용을 보는 것은 하느님의 계시를 알려주는 것입니다. 하느님으로부터 봉인된 두루마리를 받은 어린양은 두루마리에 적힌 모든 일들, 의미적으로는 종말에 일어날 모든 일에 대한 권한을 위임받습니다. 그리고 이런 내용은 어린양을 향해 외치는 네 생물과 스물네 원로의 노래에서도 드러납니다. “주님께서는 두루마리를 받아 봉인을 뜯기에 합당하십니다. 주님께서는 살해되시고 또 주님의 피로 모든 종족과 언어와 백성과 민족 가운데에서 사람들을 속량하시어 하느님께 바치셨기 때문입니다.”(묵시 5,9) 일곱가지 재앙 이제 어린양은 두루마리의 봉인을 떼고 본격적으로 재앙을 이야기하는 환시가 시작됩니다. 처음은 두루마리를 펴는 것으로 시작되는 일곱 봉인의 재앙입니다. 일곱 봉인과 함께 등장하는 재앙은 전통적으로 하느님의 재앙을 나타낼 때 사용됩니다. 일곱 봉인의 환시가 말하는 재앙을 순서대로 정리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전쟁의 예고, 전쟁, 기근, 전염병과 들짐승, 박해, 하늘의 표징입니다.(묵시 6,1-17) 이런 재앙은 구약성경과 복음서에서도 낯설지 않습니다. 구약성경도 칼이나 전쟁, 굶주림, 사나운 짐승, 흑사병을 통해 하느님의 재앙을 이야기합니다. 또 복음서는 종말과 함께 전쟁, 지진, 기근, 전염병, 박해, 하늘의 표징 등이 일어날 것이라고 말합니다.(루카 21,9-13; 마르 13,7-17) 이처럼 전통적인 재앙과 요한 묵시록에서 보여주는 재앙이 비슷하다는 것은 사람들로 하여금 이 재앙을 일으키는 분이 누구신지 알려주는 역할을 합니다. 봉인으로 인한 재앙의 마지막은 그다음에 올 일곱 나팔에 의한 재앙과 맞닿아 있습니다. 일곱째 봉인은 새로운 일곱 나팔의 재앙을 시작합니다. “그들에게 일곱 나팔이 주어졌습니다.”(묵시 8,2) 이 마지막 재앙 전에, 곧 여섯째 재앙과 일곱째 재앙의 사이에는 성격이 다른 환시가 하나 있습니다. 요한 묵시록 7장 전체를 통해 전하는 “선택받은 이들”에 대한 환시입니다. 요한 묵시록에서 이 환시는 여러 면에서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재앙을 가져오는 봉인의 환시와 선택받은 이들에 대한 환시는 서로 성격이 다릅니다. 쉽게 말한다면 선택받은 이들은 구원될 이들을 표현하는 환시이고 봉인의 환시는 세상에 재앙을 가져오는, 좀 더 정확히 말한다면 세상의 악의 세력에게 내리는 환시입니다. 그렇기에 선택받은 이들의 환시는 하느님의 재앙이 누구를 향하고 있는지를, 재앙의 대상이 누구인지를 알려주는 역할을 합니다. 요한 묵시록에서 말하는 재앙은 모든 사람을 향한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의 인장을 받은 이들선택받은 이들에 대한 환시는 하느님의 인장을 받은 14만 4000명에 대한 내용으로 시작합니다. 그들은 이스라엘의 모든 지파에서 온 것으로 표현됩니다. 우선 여기에 사용된 14만 4000이라는 숫자는 실제적인 의미가 아닌 상징적인 의미로 이해해야 합니다. 이 숫자는 두 번의 12와 1000으로(12×12×1000) 이뤄집니다. 본문에서도 암시하는 것처럼 이것은 하느님의 백성을 나타내는 숫자입니다. 열두 지파로 나타나는 구약의 하느님의 백성 그리고 열두 사도로 상징되는 예수님 시대의 믿는 이들을 모두 일컫는 숫자입니다. 결국 14만 4000은 구약시대에서부터 지금까지 하느님을 믿고 따르는 이들을 나타내는 상징입니다. 몇 명인지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인장을 지닌 이들, 곧 하느님을 믿는 모든 이들이 구원될 것이라고 말하는 환시입니다. <가톨릭대 신학대학 성서학 교수> 평화신문2018.05.02
![[이창훈 기자의 예수님 이야기] (58) 돈 좋아하는 바리사이들, 부자와 라자로(루카 16,14-31)](//cpbc.co.kr/CMS/newspaper/2018/04/rc/716342_1.0_titleImage_1.jpg)
[이창훈 기자의 예수님 이야기] (58) 돈 좋아하는 바리사이들, 부자와 라자로(루카 16,14-31)죽었다 살아난 이들의 말도 믿지 않을 사람들 부자와 라자로의 비유는 재물을 어떻게 사용해야 하는지를 생생하게 일깨워준다. 사진은 11세기의 그림 성경책에 나오는 부자와 라자로 이야기. 독일 뉘른베르크, 독일 국립박물관 소장. 루카복음 16장 전반부(16,1-13)가 하느님 나라에 들기 위해 재물을 어떻게 사용해야 하는지를 다룬다면, 후반부(16,14-31)는 재물을 올바로 사용하지 못했을 때에 어떤 결과를 보게 되는지에 대한 구체적인 사례를 제시합니다. 후반부는 돈을 좋아하는 바리사이들에게 하시는 예수님의 말씀으로 시작합니다. 돈을 좋아하는 바리사이들의 참모습(16,14-15)재물을 올바로 사용하고 하느님을 섬길 것인지 재물을 섬길 것인지 결단을 내려야 한다는 말씀에 “돈을 좋아하는 바리사이들이” 비웃습니다.(16,14) 구약에서는 재물을 하느님의 축복으로 보았습니다. 행복과 성공, 재물은 하느님의 계명을 지키는 이들에게 하느님께서 주시는 복이었습니다.(신명 28장 참조) 예수님 시대에 바리사이들도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습니다. 부와 성공이 하느님께 순종하는 이들에게 내리는 하느님의 복이라면, 반대로 가난과 질병은 하느님의 법을 지키지 않는 죄인에게 내리는 벌로 여겨졌습니다. 바리사이들은 스스로 계명을 잘 지킨다고 여겼고 그래서 재물을 많이 모으는 것은 하느님의 축복으로 여겼습니다. 그렇다면 이들이 예수님의 말씀에 비웃는 것은 당연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그런 바리사이들에게 “너희는 사람들 앞에서 스스로 의롭다고 하는 자들이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너희 마음을 아신다”고 하시면서 “사람들에게 높이 평가되는 것이 하느님 앞에서는 혐오스러운 것”이라고 지적하십니다.(16,15) 이미 예수님께서는 바리사이들과 율법 교사들을 호되게 질타하신 적이 있습니다.(루카 11,37-54) 하느님께서는 겉이 아니라 속을 보십니다.(1사무 16,7) 따라서 예수님의 이 말씀은 하느님께서 돈을 좋아하는 바리사이들의 속마음을 아시기에 그들이 사람들에게 높이 평가받을지 몰라도 오히려 혐오스럽게 보신다는 것입니다. 율법과 하느님의 나라, 아내를 버리지 마라(16,16-18)루카 복음사가는 이어서 앞 대목과는 문맥상 별 상관 없이 보이는 예수님의 말씀들을 전합니다. 우선 율법과 하느님 나라에 관한 것인데, 율법과 예언자들의 시대가 요한으로 끝이 나고, 이후에는 하느님 나라의 복음이 전해지고 있는데, 모두 이 나라에 들어가려고 힘을 쓴다는 것입니다.(16,16) ‘율법과 예언자들의 시대’는 바로 율법과 예언서를 가리키는 것으로 구약성경을 가리키는 데 자주 쓰이는 표현이라고 합니다. 그렇다면 이 말씀은 요한으로 구약 시대가 끝나고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시는 예수님과 함께 신약이 시작됐음을 의미합니다. 학자들은 “모두 이 나라에 들어가려고 힘을 쓴다”는 표현은 예수님의 부활 후 초대 교회에서 많은 이들이 교회 공동체에 들어오고 있음을 가리킨다고 풀합니다. 어쨌거나 이 말씀은 요한 세례자로 끝나는 구약의 시대와 예수님으로 시작하는 신약의 시대를 구분 짓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어오는 두 말씀을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하나는 “율법에서 한 획이 빠지는 것보다 하늘과 땅이 사라지는 것이 더 쉽다”(16,17)는 말씀을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 말씀은 율법과 예언서의 시대인 구약과 예수님의 시대인 신약을 구별하는 바로 앞 말씀과 달리 예수님 시대인 신약에서도 율법이 그대로 유효함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다른 하나는 “아내를 버리고 다른 여자와 혼인하는 자는 누구나 간음하는 것이다. 남편에게 버림받은 여자와 혼인하는 자도 간음하는 것이다”(16,18)라는 말씀입니다. 구약에서는 아내가 추해서 눈에 차지 않으면 이혼장을 써주고 버려도 된다고 했는데,(신명 24,1) 예수님의 말씀은 구약의 규정을 배격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여기서 우리는 “내가 율법이나 예언서들을 폐지하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마라. 폐지하러 온 것이 아니라 오히려 완성하러 왔다”(마태 5,17)는 말씀을 새롭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혼인과 관련되는 말씀은 구약의 폐기가 아니라 보완입니다. 아내를 버려서는 안 된다는 말씀은 예수님께서 일부일처제를 혼인 제도로 세우셨다는 것과 함께 여성의 품위를 그만큼 들어 높이셨음을 보여줍니다. 부자와 라자로의 비유(16,19-31)루카복음에만 나오는 이 이야기는 재물과 율법에 관한 예수님의 가르침을 비유로써 생생하게 표현하면서 핵심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비유에 나오는 라자로는 ‘하느님께서 도와주신다’라는 뜻이라고 합니다. 그렇다면 거지 라자로는 가난한 이들이 하느님 나라를 차지한다는 예수님의 가르침과 잘 맞는다고 하겠습니다. 날마다 호사스럽게 지내는 부자와 달리 라자로는 종기투성이의 몸으로 식탁에서 떨어지는 빵부스러기로 허기를 채우는데, 개들까지 와서 종기를 핥곤 합니다. 요즘과는 달리 당시 성경의 세계에서 개는 혐오스럽고 고약하고 부정한 짐승으로 여겨졌습니다. 그렇다면 라자로는 그 부정한 개보다도 못한 삶을 사는 셈입니다. 그러나 죽은 다음 곧 저승에서의 상황은 완전히 바뀝니다. 라자로는 아브라함 할아버지 품에서(하느님 나라에서) 위로를 받고 있지만, 부자는 불길 속에서(지옥에서) 고초를 겪습니다. 부자가 고통 속에서 손가락 끝에 물을 축여 혀를 식히게 해달라고 청원하지만, 부자와 라자로 사이에는 큰 구렁이 있어서 서로 오가지 못한다며 아브라함이 거절합니다. 부자는 다시 그러면 라자로를 자기 형제들에게 보내 형제들만이라도 이 고통스러운 곳에 오지 말도록 해달라고 청하지만 아브라함은 그들이 율법과 예언자들의 말을 들으면 된다며 거절하지요. 부자는 죽었던 라자로를 보내야 형제들이 말을 들을 것이라고 애원하지만, 아브라함은 율법과 예언자들의 말을 듣지 않는 사람은 죽었다가 살아난 이의 말도 듣지 않을 것이라고 거절합니다.[생각해 봅시다]예수님께서는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기 위해 영리하게 처신하고(약은 집사의 비유) 재물로라도 친구를 사귀라고, 가난한 이를 도와주라고(재물의 올바른 이용) 말씀하셨지만, 부자는 날마다 호화로운 생활을 하면서도 가난한 라자로에게 아무런 동정을 베풀지 않았습니다. 그 결과 부자는 죽어서 타오르는 불길 속에서 고통을 겪습니다. 반대로 라자로는 가난하고 병들고 부정한 개까지 와서 그의 종기를 핥는 버림받는 이를 대표합니다. 그는 죽어서 천국으로 상징되는 아브라함의 품에서 위로를 받습니다. 라자로는 ‘참 행복’ 선언(루카 6,20-21)에서 이야기하는 행복한 사람의 표본입니다. 부자와 라자로의 완전히 상반되는 운명은 우리에게 재물을 어떻게 사용해야 할 것인지를 다시 한 번 일깨워 줍니다. 가난한 이를 도우라는 것이지요. 다른 한편으로, 저승에서 부자가 고통을 겪고 있는 곳과 라자로가 위로를 받고 있는 곳 사이에 큰 구렁이 가로놓여 있어서 서로 오갈 수 없다는 것은 내세의 삶은 현세의 삶에서 결정되고 그 결정은 돌이킬 수 없다는 것을 시사합니다. 다시 말해서 단 한 번뿐인 현세의 삶을 어떻게 사느냐가 대단히 중요하다는 것이지요. 마지막으로, 아브라함은 부자에게 “율법과 예언자들의 말을 듣지 않으면,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누가 다시 살아나도 믿지 않을 것”(16,31)이라며 라자로를 형제들에게 보내달라는 부자의 청을 거절합니다. 율법과 예언자들의 말 곧 예언서는 구약성경을 가리킵니다. 반면에 라자로가 부자의 형제들에게 가는 것은 죽은 이가 살아나는 기적과 관련됩니다. 따라서 아브라함의 말은 성경 말씀을 듣지 않는 사람은 기적이 일어나도 믿지 않으리라는 것이고, 이는 반대로 기적을 찾기보다는 성경 말씀에 충실해야 한다는 가르침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어떤지요? 백영민2018.04.05
교황의 직무에 협력하는 주교, 추기경](//cpbc.co.kr/CMS/newspaper/2019/01/rc/742903_1.0_titleImage_1.jpg)
[성사풀이](28)교황의 직무에 협력하는 주교, 추기경추기경들은 최고 목자인 교황의 사목 직무를 보좌하는 역할을 가지고 있다. 【CNS 자료사진】 주교님과 추기경님은 어떻게 다른가요 주교는 주교품, 곧 충만한 성품성사를 받은 사제이다. (「가톨릭교회 교리서」 1557항) 반면에 추기경은 성품성사를 통해 수여되는 별도의 품계가 아니라, 교황이 자유롭게 선임하고 교황의 직무에 협력하는 주교를 일컫는 것이다. (교회법 351조 1항) 주교는 그리스도의 대리자이며 사도들의 후계자로서, 주교 축성으로 주교품을 받고 탁월한 봉사를 통해 자신에게 맡겨진 개별 교회(교구)의 사목을 책임집니다.(「가톨릭교회 교리서」 1560항) 추기경은 교황이 선발합니다. 추기경의 자격은 적어도 사제품을 받은 성직자로서 학식과 품행과 신심 그리고 업무 처리의 현명함이 특출한 남자입니다. 만일 주교품이 아니라 사제품을 받은 성직자라면 서임되기 전에 주교품을 받아야 합니다. 따라서 현재 모든 추기경은 주교품을 받은 성직자들입니다.(교회법 351조 1항) 추기경들은 최고 목자인 교황의 사목 직무를 보좌하는 역할을 가지고 있습니다. 곧 추기경들은 추기경단을 구성하고 합의체(단체)로 또는 개별적으로 교황을 보필합니다. 합의체적 역할은 중대한 문제에 대해 추기경 회의를 통해 교황에게 자문하는 것이고, 개별적 역할은 교황청 부서장, 교황 특사, 교구장으로서 직무를 수행하면서 교황을 보필하는 것입니다. 특별히 추기경단은 사도좌(교황)가 공석일 때 특별법에 따라 교황 선거(Conclave)를 준비하고 새로운 교황을 선출하는 권한을 가지고 있습니다.(교회법 349조) 교황님의 말씀은 신앙으로 모두 받아들여야 하나요 교황의 모든 말씀을 신앙으로 받아들여야 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교황이 신앙과 도덕에 관한 말씀을 확정적으로 선언할 때에는 믿음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왜냐하면, 이때 교황은 한 개인으로서 판단을 내리는 것이 아니라 성령의 도움을 받아 보편 교회의 최고 목자이며 최고 스승으로서 교리를 설명하고 옹호하기 때문이다.(「가톨릭교회 교리서」 891항) 예수님께서는 교회를 사도들 위에 세우시고, 복음 선포와 사명을 교회에 맡기셨습니다. 교회는 성령의 도움으로 베드로의 후계자인 교황과 사도들의 후계자인 주교단을 통해 사도들의 가르침과 고귀한 유산을 보존하고 전합니다. (「가톨릭교회 교리서」 857항) 예수님께서는 베드로 사도를 당신 교회의 반석으로 삼으셨고, 그에게 교회의 열쇠를 맡기셨으며, 그를 양 떼의 목자로 세우셨습니다.(마태 16,18-19; 요한 21,15-17) 교황은 베드로 사도의 후계자이며 로마 주교로서 그리스도의 대리자이며 온 교회의 목자입니다. 따라서 교황이 교회에 대해 완전한 보편 권한을 가지고 신앙과 도덕에 관한 교리를 확정적으로 선언할 때 무류성을 가집니다.(「가톨릭교회 교리서」 891항) 또한, 예수님께서 베드로 사도에게 주신 임무는 사도단에게도 맡겨졌고, 이 임무는 교황과 주교단을 통해 계속되고 있습니다. 주교단은 그 단장인 교황과 더불어 보편 교회에 대한 완전한 최고 권한의 주체입니다. 각각의 주교들이 무류성의 특권을 가지지는 않지만, 교황과 유대를 보존하면서 신앙과 도덕에 관한 의견을 확정적으로 합의할 때에는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오류 없이 선포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교회에 대한 권한의 행사는 보편(세계) 공의회를 통해 이루어집니다.(「가톨릭교회 교리서」 883, 884항) 따라서 교황 또는 교황과 더불어 주교단이 교회의 권한을 가지고 하느님에게서 계시되어 믿어야 할 것으로 제시하거나, 그리스도의 가르침으로 제시할 때에는 그러한 결정에 신앙의 순종으로 따라야 합니다.(「가톨릭교회 교리서」 891항) 이러한 가르침에는 1854년 비오 9세 교황의 ‘복되신 동정 마리아의 원죄 없으신 잉태 교리’, 1950년 비오 12세 교황이 선포한 ‘성모 승천 교리’가 있습니다. 이는 성경과 신경에는 없지만, 교황이 정식으로 사도좌에서 선포한 교리이므로 가톨릭 신자들은 믿을 교리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이 밖에 교황과 주교단이 비록 결정적 의사 표시 없이 일반 교도권의 행사를 통해 신앙과 도덕 문제에 관한 계시를 더 잘 이해하도록 가르침을 제시할 때에도 신자들은 ‘마음의 종교적 순종’(교회 헌장 25항)으로 이를 따라야 합니다. 이러한 가르침에는 프란치스코 교황께서 발표하신 교황 권고 「복음의 기쁨」과 회칙 「찬미받으소서」가 있습니다. 이것은 신앙의 동의와는 구별되지만, 신앙의 동의를 연장하는 것입니다.(「가톨릭교회 교리서」 892항) 정리=리길재 기자 teotokos@cpbc.co.kr cpbc2019.01.02
![[교부들의 사회교리] (1) 연재를 시작하며](//cpbc.co.kr/CMS/newspaper/2018/12/rc/740642_1.2_titleImage_1.jpg)
[교부들의 사회교리] (1) 연재를 시작하며사회문제에 대한 탁월한 가르침을 찾아서 최원오 교수 교회의 스승인 교부들은 성경과 맞닿은 언어와 문화로 주님의 삶과 가르침을 생생하게 느끼며 살았던 신앙의 오랜 증인들이다. 모진 박해와 세상 거짓에 맞서 기꺼이 자신을 불사르며 복음의 진리와 거룩한 삶의 가치를 지켜낸 성인들이며, 하느님 백성을 섬기고 돌보는 일을 천직으로 여겼던 목자들이다. 그래서 교부들의 많은 가르침은 단순하면서도 감동적이고, 힘이 있으면서도 따뜻하다. 특히 사회교리나 교회 생활에도 끊임없이 새로운 영감을 불어넣어 주는 마르지 않는 샘이다.(한국교부학연구회 「그리스도교 신앙 원천」 머리말)교부 시대에도 사회교리가 있었는가?우리에게 익숙한 가톨릭 사회교리(Catholic social teaching)는 현대 사회에서 벌어지는 심각한 문제들에 관하여 교황들 또는 국가나 대륙의 주교회의가 다양한 방식으로 응답한 것이다. 현대의 첫 사회 교서인 레오 13세 교황의 「새로운 사태」(1891년)에는 산업화 과정에서 발생하는 노동자들의 비참한 상황과 저개발 국가들의 비인간화에 관한 예리한 통찰과 따듯한 애정이 배어 있다.교황은 이러한 현대 상황을 라틴어로 ‘레룸 노바룸(새로운 사태)’이라고 불렀다. 노동의 거룩한 가치와 노동자의 권리를 구체적으로 일깨우는 레오 13세 교황의 이 탁월한 문헌은 ‘노동헌장’이라고도 불렸고, 사회교리에 관한 현대인의 새로운 관심을 불러일으켰다. 그러나 사회교리가 어느 날 갑자기 하늘에서 툭 떨어진 것은 아니다. 교부 시대에서 현대에 이르기까지 모든 상황이 새로운 사태가 아닌 적이 있었던가? 쉴 새 없이 밀어닥치는 인생의 거친 풍랑 속에서 가난한 이들과 수많은 노동자가 예나 지금이나 날마다 숨 가쁘게 파도를 넘고 있다. 미래의 인공지능 시대에 관한 엇갈린 예측들이 쏟아져 나오고 있지만, 정말 분명한 것은 가난한 사람들은 지금뿐 아니라 이 세상 끝날까지 언제나 우리 곁에 있을 것이고, 우리의 가난을 짊어지시고자 스스로 가난한 사람이 되어 오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세우신 교회의 사명은 앞으로도 결코 변치 않으리라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교부들이 남겨준 가난한 사람들에 대한 사랑의 본보기와 공생공락의 삶에 관한 빼어난 가르침은 오래고도 여전히 새로운 그리스도교 사회교리라고 할 수 있다. 이는 갈라진 형제들도 공유해야 하는 그리스도교 공동 유산이며, 우리가 끊임없이 거슬러 올라가야 하는 그리스도교 원천이기도 하다.사회교리를 남긴 대표적 교부들사회교리를 현대 교황들의 특정 회칙이나 교황청 문헌 등에만 한정하는 것은 2000년 그리스도교의 ‘거룩한 전통’(聖傳)을 한없이 초라하게 만드는 일이다. 비록 번듯한 짜임새는 없지만, 교부 문헌에는 교부들이 살았던 시대 상황 속에서 가난한 이들 안에 계시는 주님을 알아 뵙고, 그들과 연대하며 정의로운 사회를 일구기 위해 헌신했던 교부들의 치열한 성찰과 생생한 증언들이 담겨 있다. 동방 교회에서는 특히 대 바실리우스, 나지안주스의 그레고리우스, 요한 크리소스토무스가 놀라우리만큼 강력하고 감동적인 가르침을 남겼고, 서방 교회의 암브로시우스와 아우구스티누스, 대 그레고리우스도 이에 못지않다. 이 여섯 교부는 동방의 4대 교부 또는 서방의 4대 교부에 속한다. 2000년 그리스도교 역사에서 가장 위대하다는 평판을 얻은 이 교부들은 사회 문제와 가난한 이들에 대한 사랑에서도 가장 탁월한 가르침과 본보기를 남겼다. 그리고 이 거룩한 전통은 오늘날 프란치스코 교황의 강론과 교리교육, 연설과 문헌들뿐 아니라, 하느님 백성과 가난한 사람들에게 다가가는 몸짓과 표정에서도 고스란히 이어지고 있다. 이 모든 것이 가톨릭 사회교리라고 믿는다. 다음 주부터는 가장 오래된 교부 문헌 가운데 하나인 「디다케」에서 시작하여 아우구스티누스와 대 그레고리우스에 이르기까지 사회교리의 흔적과 증언들을 추적하여 본문을 소개하고 간략한 해설을 덧붙이고자 한다.최원오(빈첸시오, 대구가톨릭대 유스티노자유대학원장) 최원오 교수는 로마 아우구스티누스 대학에서 교부학 박사학위를 받았고, 부산가톨릭대학교 교수로 일했으며, 현재 대구가톨릭대학교 유스티노자유대학원장이다. 김현진2018.12.05
![[교부들의 사회교리] (3) 가장 보잘것없는 인간](//cpbc.co.kr/CMS/newspaper/2018/12/rc/741766_1.0_titleImage_1.jpg)
[교부들의 사회교리] (3) 가장 보잘것없는 인간태아도 하느님 닮은 존엄한 인간 “살인하지 마시오. 간음하지 마시오. 남색질하지 마시오. 음행하지 마시오. 도둑질하지 마시오. 마술을 하지 마시오. 요술을 하지 마시오. 낙태로 아이를 살인하지도 말고, 갓난아이를 죽이지도 마시오.”(정양모 옮김 「디다케」 2,2)“죽음의 길은 이렇다.… 선한 사람들을 박해하는 자들, 진리를 미워하는 자들, 거짓을 사랑하는 자들, 정의의 보수를 모르는 자들, 선과 옳은 심판에 가담하지 않는 자들, 선을 위해서가 아니라 악을 위해서 밤샘하는 자들, 온유와 인내에서 멀리 있는 자들, 부질없는 것들을 좋아하는 자들, 보수만을 좇는 자들, 가난한 이를 불쌍히 여기지 않는 자들, 짓눌린 이들을 위해 애쓰지 않는 자들, 자신들을 만드신 분을 모르는 자들, 유아 살해자들, 하느님의 작품을 낙태시키는 자들, 억눌린 이를 짓누르는 자들, 부자들을 옹호하는 자들, 빈자들을 불법으로 심판하는 자들, 온통 죄악에 물든 자들이다. 아들들아, 이 모든 자들을 멀리하여라.”(정양모 옮김 「디다케」 5, 1~2)가난한 이들을 외면하는 죽음의 길성경에 버금가는 권위를 지닌 가장 오래된 교부 문헌 가운데 하나인 「디다케」는 인생에 두 갈래 길이 있다고 한다. 생명의 길과 죽음의 길. 이 가운데 우리가 선택해야 할 길은 당연히 생명의 길이다. 「디다케」에서 제시하는 죽음의 길은 매우 구체적이다. 진리와 정의를 저버리고 덧없는 돈과 권력을 추구하는 자들, 가난하고 비참한 이들을 외면한 채 그들과 함께 울어줄 능력마저 잃어버린 자들, 억눌린 이들을 일으켜주고 가난한 이들의 빼앗긴 권리를 되찾아주기는커녕 탐욕스런 부자들의 앞잡이 노릇을 하는 자들은 이미 죽음의 길로 치닫고 있다는 것이다. 죽음의 길과 생명의 길을 가르는 결정적 잣대는 바로 힘없고 억눌린 가난한 이들과의 연대라고 가르친다.가장 보잘것없는 인간인 태아특히 「디다케」는 그리스도교 문헌 최초로 낙태를 살인이라고 규정하고 명시적으로 금지한다. 그리스도교에서는 처음부터 낙태를 살인이라 여기고 금지했음이 틀림없다. 인류 가운데 가장 보잘것없는 인간, 현대에 이르기까지 인간 취급조차 받지 못한 채 처참하게 죽어가는 미소한 태아도 하느님을 닮은 존엄한 인간이라는 가장 오래된 그리스도교 선언이다. 우리 교회가 그리스도교 기원부터 오늘날까지 지켜온 한결같은 진실은 태아도 인간이라는 사실이다. 수태된 순간부터 엄마의 것도 아빠의 것도 아닌 독립된 새로운 인간 생명이 시작될 뿐 아니라, 그 생명은 발달 단계와 상관없이 단 한 순간의 단절도 없는 존엄한 인간이라는 구체적인 해설은 없지만, 우리 교회가 우선으로 선택해야 하는 가장 가난한 사람들 가운데 태아가 거듭 거명되고 있다는 사실을 눈여겨보아야 한다. 바로 이 작은 아이 안에 예수님께서 현존하신다는 복음의 진실은 세상의 어떤 논리로도 부정될 수 없다.프란치스코 교황은 태아의 생명을 지키려는 교회의 노력이 이 시대의 수많은 사회적 약자들을 향한 사랑과 연대로 이어질 때 비로소 교회의 생명 수호 운동이 진정성을 지닐 수 있다고 강조한다. “우리는 명확하고 단호하며 열정적으로 무죄한 태아를 수호해야 합니다. 발달 단계와 무관하게 언제나 신성하고 모두가 사랑받아야 하는 인간 생명의 존엄이 위험에 놓여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미 태어난 가난한 사람들의 생명도 마찬가지로 신성합니다. 곧 극도로 가난한 이들, 버림받은 이들, 혜택받지 못한 이들, 은밀하게 안락사에 노출된 취약한 병자들과 노인들, 인신매매 희생자들, 신종 노예살이의 피해자들, 갖가지 형태로 거부당한 이들의 생명도 신성합니다.”(「기뻐하고 즐거워하여라」 101) 처절한 죽음에 내몰리고 있는 태아들을 지켜내는 일뿐 아니라, 죽음과도 같은 절박한 처지에 내몰린 그 여인들을 애끊는 자비의 가슴으로 품어 안는 일 또한 어머니 교회의 몫임을 기억해야 한다. 비난과 단죄는 어머니 교회의 몫이 아니다. “교회는 법정이 아니라 치유의 장소이기 때문이다.”(요한 크리소스토무스)최원오(빈첸시오, 대구가톨릭대 유스티노자유대학원장) cpbc2018.12.19
춘천교구 교동본당 설립 50주년 감사 미사 신자들이 쓴 성경 필사본과 묵주기도 50만 단 등 봉헌 춘천교구 교동본당 설립 50주년 감사 미사에서 김운회 주교와 사제단이 미사를 공동 집전하고 있다. 춘천교구 문화홍보국 제공 춘천교구 교동본당(주임 김광근 신부)은 10일 속초시 성당에서 교구장 김운회 주교 주례로 본당 설립 50주년 감사 미사와 축하식을 거행했다. 이날 미사는 역대 주임사제와 출신 사제 등 20여 명이 공동집전했으며, 미사 중에는 본당 설립 50주년을 기념해 신자들이 쓴 성경 필사본과 묵주기도 50만 단, 50주년 감사 기도문 등이 봉헌됐다. 김운회 주교는 축사에서 “희년을 맞이한 교동본당 공동체가 이웃을 서로 용서하고 화해하는 삶, 늘 하느님께 감사하는 삶을 살기를 바란다”며 “반세기 주님사랑을 감사하고자 자리를 마련해준 신자들에게 격려와 감사의 마음을 전한다”고 말했다. 교동본당은 1967년 속초 동명동본당에서 분리, 설립됐다. 본당은 이듬해 학업을 제대로 하지 못하는 학생들을 위해 안토니오 학원을 설립해 지역 청소년을 도왔다. 1990년부터는 한국인 사제가 부임했으며 1991년에는 신자 가정 방문과 면담을 통해 교무금을 책정, 경제적 자립도 이뤄냈다. 1992년 설립 25주년을 기념해 성모상, 성모서원, 안당의 집 등을 마련했으며 안당의 집에서는 한글교실과 교리교실이 열리기도 했다. 1997년에는 지역 복음화를 위해 통일 전망대에서 영북지역 민족의 화해와 일치를 위한 합동미사에 참석해 최전방에 자리한 지역민의 통일 염원을 함께 기도했으며, 그해 본당 30년사 책자를 발간하기도 했다. 올해 50주년을 맞아 사진전, 기념 음악회, 특강, 축제 미사와 대잔치 등을 마련해 의미를 더욱 새겼다. 주임 김광근 신부 “오늘의 자리가 50년을 추억하고, 동시에 그간의 하느님 사랑에 감사드리며 앞으로 거듭나는 각오를 다지는 자리가 되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이정훈 기자 sjunder@cpbc.co.krcpbc2017.06.12
[사설] 새로운 시대의 평신도 사도직 한국 교회가 평신도 희년을 보내고 있는 가운데, 평신도들을 대표하는 전국 기구 ‘한국 천주교 평신도사도직단체협의회’가 창립 50주년을 맞았다. 한국 평신도 대표들은 50주년 기념행사가 열린 대전교구 주교좌대흥동성당에서 지난 반세기 평신도의 복음화 활동을 돌아보고, 참 신앙인으로 복음화의 길에 더 앞장설 것을 다짐했다. 한국 평협의 역사는 1968년 7월 23일로 거슬러 올라간다. 개방과 대화, 쇄신을 기치로 내건 제2차 바티칸 공의회(1962~1965)가 끝난 지 3년 만에 한국 평협이 창립됐다. 공의회 이후 교회가 평신도 사도직의 중요성을 새롭게 받아들인 계기가 된 것이다.평신도 사도직의 핵심은 교회 발전과 사회 복음화에 있다. 한국 평협은 신앙 선조들의 굳건한 믿음과 열정을 이어받아 한국 교회의 영적 성장을 위한 동력이 되어 왔다. 교회와 세상에 파견된 평신도들은 다양한 사도직을 수행함으로써 선교ㆍ가정ㆍ생명ㆍ문화ㆍ정치ㆍ교육ㆍ민족화해 등 교회의 모든 사목 분야의 동반자 역할을 해왔다. 주교회의 의장 김희중 대주교는 평신도 신원에 대해 “교회와 세상을 이어주는 사제이며, 세상에 복음을 전하는 예언자이며, 세상의 아픔을 직접 쓰다듬는 왕”이라고 표현한 적이 있다.한국 평신도 대표들은 50주년 기념행사에서 ‘세상과 함께하는 그리스도인 평신도’를 제목으로 선언문을 발표했다. 미사와 성사에 자주 참여하고, 성경을 자주 읽고 말씀을 실천하며, 소외된 이웃과 연대하고 사회 정의와 공동선을 추구하며, 생명을 존중하고 생태계 보전에 앞장서겠다고 다짐했다. 새로운 시대, 평신도 사도직의 영역은 경계와 구분이 없다. 교회의 주체로서 평신도 각자가 세상을 향한 사제이며, 예언자, 왕인 그리스도인의 신원을 재인식해야 한다. 지난 50년 전통을 바탕으로 식어가는 복음화의 빛을 새롭게 밝히는 한국 평협 공동체로 성장하길 바란다. 평화신문2018.07.24
![[이창훈 위원의 사도행전 이야기] (14)사도들이 기적을 일으키다 (5,12-26)](//cpbc.co.kr/CMS/newspaper/2019/04/rc/750926_1.0_titleImage_1.jpg)
[이창훈 위원의 사도행전 이야기] (14)사도들이 기적을 일으키다 (5,12-26)사도들을 통해 드러난 하느님의 표징과 이적 사도행전에서 세 번째로 요약해서 전하는 초대 교회 모습에서는 베드로 사도의 역할이 두드러진다. 사진은 베드로 사도의 무덤 위에 세워진 바티칸 성 베드로 대성전 안. 【CNS 자료 사진】 루카는 사도들, 특히 베드로의 활동과 함께 다시 한 번 초대 교회 공동체 모습을 요약합니다.(5,12-16) 사도행전에서 첫 신자 공동체의 생활(2,42-47), 초대 교회 공동체 생활(4,32-37)에 이어 세 번째이자 마지막으로 전하는 공동체 생활 모습입니다. 초대 교회 공동체의 모습을 요약해서 전하는 세 번째 대목은 “사도들의 손을 통하여 백성 가운데에서 많은 표징과 이적이 일어났다”(5,12ㄱ)로 시작합니다. 신약성경에서 ‘표징과 이적’은 모두 16번 언급됩니다. 그 가운데 세 번은 부정적입니다. 즉 거짓 그리스도와 거짓 예언자들이 나타나 선택된 이들을 속이려고 표징과 이적들을 일으킨다는 것이지요.(마태 24,24; 마르 13,21; 2테살 2,9) 모두 종말에 앞서 거짓 표징과 이적으로 사람들을 현혹한다는 내용입니다. 하지만 표징과 이적이 믿음의 동기로 작용한다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대목도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카나에 가셨을 때 카파르나움에서 죽어가는 아들을 낫게 해달라는 왕실 관리의 청에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표징과 이적을 보지 않으면 믿지 않을 것이다.”(요한 4,48) 그러고는 “네 아들은 살아날 것이다”라는 말씀으로 왕실 관리의 아들을 낫게 해주십니다. 그 결과 그 왕실 관리와 온 집안이 믿었지요. 나머지 열두 번 언급되는 ‘표징과 이적’은 대부분 백성에게 믿음의 동기로 작용하는데, 사도행전에서 9번, 서간에서 3번 나옵니다. 초대 교회 모습을 세 번째로 요약하는 이 대목이 ‘사도들이 백성 가운데에서 많은 표징과 이적을 일으켰다’가 아니라 “사도들의 손을 통하여 백성 가운데에서 많은 표징과 이적이 일어났다”로 표현되고 있음을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런 표현은 공동체 모습을 요약해서 전하는 첫 번째 대목에서도 똑같이 나옵니다. “사도들을 통하여 많은 이적과 표징이 일어나므로….”(2,43) 많은 표징과 이적이 사도들을 ‘통하여’ 일어났다는 것은 표징과 이적을 일으키는 주체가 사도들이 아니라 바로 하느님이심을 나타냅니다. 이는 또한 예수님의 이름으로는 말하지도 가르치지도 말라는 최고의회 지도자들의 위협을 받고 풀려난 사도들이 “한마음으로 목소리를 높여” 간절하게 바친 기도를 하느님께서 들어주셨음을 드러냅니다. “이제 주님! 저들의 위협을 보시고, 주님의 종들이 주님의 말씀을 아주 담대히 전할 수 있게 해주십시오. 저희가 그렇게 할 때, 주님께서는 손을 뻗으시어 병자들을 고치시고, 주님의 거룩한 종 예수님의 이름으로 표징과 이적들이 일어나게 해 주십시오.”(4,30)루카는 “그들은 모두 한마음으로 솔로몬 주랑에 모이곤 하였다. 다른 사람들은 아무도 감히 그들 가운데에 끼어들지 못하였다”고 기록합니다.(5,12ㄴ-13ㄱ) 사도들이 솔로몬 주랑에 모인 것은 예수님께서 성전 솔로몬 주랑을 거닐곤 하셔서 예수님을 떠올리기 쉬운 곳이었기 때문일 것입니다.(요한 10,23; ‘사도행전 이야기’ 3월 17일자 1506호 참조) 다른 사람들이 감히 사도들 가운데 끼어들지 못한 것은 사도들을 통해 많은 이적과 표징이 일어나는 것을 보고 두려웠기 때문일 것입니다.(2,43 참조) 하지만 이 두려움은 단지 무서움이 아니라 사도들을 통해 표징과 이적을 일으키시는 주님께 대한 두려움 혹은 경외심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믿음을 불러일으키는 표징과 이적사도들을 통한 표징과 이적들은 한편으로는 두려움을 불러일으켰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사도들에 대한 존경심과 사도들이 전하는 하느님 말씀 곧 복음 말씀에 대한 믿음을 갖게 하는 동기도 되었습니다. 그래서 루카는 “백성은 그들을 존경하여, 주님을 믿는 남녀 신자들의 무리가 더욱더 늘어났다”(5,13ㄴ-14)고 합니다.루카가 세 번째로 요약해서 전하는 초대 교회 공동체 생활 모습에서는 첫 번째와 두 번째 요약 기사에서는 나오지 않는 내용이 나옵니다. 병자들의 치유에 관한 내용입니다. “사람들은 병자들을 한길까지 데려다가 침상이나 들것에 눕혀 놓고, 베드로가 지나갈 때에 그의 그림자만이라도 누구에겐가 드리워지기를 바랐다. 예루살렘 주변의 여러 고을에서도 많은 사람들이 병자들과 또 더러운 영에게 시달리는 이들을 데리고 몰려왔는데, 그들도 모두 병이 나았다.”(5,15-16)이 구절은 우선 예수님의 치유 활동과 관련된 복음서 대목들을 떠올리게 합니다. “사람들은 곧 예수님을 알아보고, 그 지방을 두루 뛰어다니며 병든 이들을 들것에 눕혀, 그분께서 계시는 곳마다 데려오기 시작하였다. 그리하여 마을이든 고을이든 촌락이든 예수님께서 들어가기만 하시면, 장터에 병자들을 데려다 놓고 그 옷자락 술에 그들이 손이라도 대게 해 주십사고 청하였다. 과연 그것에 손을 댄 사람마다 구원을 받았다.”(마르 6,55-56) “군중은 모두 예수님께 손을 대려고 애를 썼다. 그분에게서 힘이 나와 모든 사람을 고쳐 주었기 때문이다.”(루카 6,19)이 구절은 또 사도들 가운데서 베드로 사도의 위치가 어떠한지를 알게 해줍니다. 베드로 사도는 마치 예수님처럼 다른 사도들보다 더 권위를 지닌 사도로서 예루살렘 초대 교회 공동체의 중심인물로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루카복음서에서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에게 세 번이나 당신을 모른다고 할 것임을 예고하신 후 그러나 “네가 돌아오거든 네 형제의 힘을 북돋아 주어라”(루카 22,32)라고 하시는데, 사도행전의 이 대목은 베드로가 예수님의 이 말씀을 그대로 실행하고 있는 것처럼 나타납니다.생각해봅시다사도행전에서 세 번째로 요약해서 전하는 초대 교회 공동체 모습에는 첫 번째, 두 번째와 다른 특징이 보입니다. 하나는 병자들과 더러운 영에 시달리는 이들의 치유를 전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첫 번째와 두 번째 요약 기사에서는 음식을 함께 나누고 가진 것을 내놓고 공동으로 소유함으로써 공동체에는 궁핍한 이들이 없었다는 것이 강조됩니다. 이에 비해 세 번째 요약 기사에서는 병자들과 악령 들린 사람들의 치유가 부각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굶주림과 가난, 그리고 병고가 초대 교회 공동체의 주요 관심사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복음을 선포하고 하느님을 찬미하는 공동체에서는 적어도 궁핍한 이가 없어야 하고 질병으로 고통받는 이들이 우선으로 위안을 받아야 한다는 뜻으로 풀이할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2000년 전 예수님 시대나 초기 교회 공동체 시대와 마찬가지로 오늘날에도 가난하고 굶주리는 이들, 그리고 병고에 시달리는 이들이 사회로부터 가장 소외되고 외로운 사람들일 것입니다. 초대 교회 공동체의 모습은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이렇게 촉구하는 듯합니다. 적어도 교회 공동체 안에서만이라도 굶주리고 가진 것이 없다고 해서, 몸과 마음이 병들었다고 해서 소외되는 일은 없어야 한다고 말입니다. 평화신문2019.04.17

성경을 자의적으로 해석한다면 의심해야 대표적인 유사종교인 신천지가 최근 가톨릭 신자들을 집중 공략하고 있다. 사진은 신천지 피해 가족이 신천지 위장 교회로 의심되는 한 교회 앞에서 시위하는 모습. 가톨릭평화신문 DB 그리스도교 2000년 역사에 걸쳐서 온 이단에 대한 대응은 진리를 수호하기 위한 교회의 중요한 직무 가운데 하나였다. 이는 역설적으로 교회의 본질을 되돌아보고 교회를 좀 더 건강하게 만드는 도전과 기회가 되기도 했다.현재 우리나라에 있는 유사종교는 미국에서 들어온 것을 포함해 200개 정도이며, 신자 수는 200만 명이 넘는 것으로 추산된다. 한국에서 자생적으로 발생한 이단 가운데 큰 문제를 일으키는 것으로는 ‘신천지’(신천지 예수교 증거장막성전)와 ‘하나님의 교회’(안상홍 증인회), 정명석의 ‘JMS’(Jesus Morning Star, 예수님의 새벽별), 구원파(유병언) 등을 꼽을 수 있다.유사종교를 창시하는 사람은 다른 유사종교에서 신자로 활동하다가 직접 새 종교를 만드는 것이 일반적이다. 따라서 유사종교들이 주장하는 대부분의 교리가 서로 비슷하고, 같은 맥락의 계보를 형성하고 있는 경우가 많다. 유사종교의 문제점-성경을 자의적으로 해석한다. 자신의 교주를 ‘재림 예수’나 ‘구원자’로 내세운다.-구원관과 종말론의 내용을 바꾼다. 가톨릭이나 개신교에서 가르치는 구원관을 부정하고 자신의 교주가 가르치는 내용을 믿고 그 교회에 들어와 신앙생활을 해야 구원받는다고 주장한다. 또 곧 세상 종말이 올 것이라고 한다.-정통적인 신앙생활을 하는 곳은 모두 악의 무리가 점령하고 있으며, 참된 말씀이 아니라 거짓 말씀이 있는 곳이기에 구원이 없다고 세뇌한다. -현실의 삶을 충실하게 살도록 가르치기보다 종말의 관점에서 현실 부정적인 사고를 주입한다.-자신의 교회와 교주가 한국 사회에서 핍박받는 것은 2000년 전 구세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가 핍박받았던 것처럼 당연하다고 설명한다. -세계 평화와 전쟁 종식 등을 이슈로 만들고, 평화의 사자로 둔갑시킨 자신의 교주가 활동하는 사진과 영상을 보여주며 내부 결속을 다진다.-전통적인 포교 방법에서 벗어나 자신들의 논리와 교리를 알리는 도구로 인터넷과 SNS를 적극 활용한다. 또 대규모 행사나 국제 행사를 열어 대외 홍보로 활용한다.-기존 교회와 적대 관계를 형성하는 대신 국가나 기관, 단체 등을 통해 공신력을 인정받고자 한다. 사회 봉사활동에 적극적이며, 국가나 지방자치단체 등과 협력 관계를 맺는다.-청년과 청소년에 집중 투자함으로써 미래를 보장받으려고 한다.가톨릭교회의 대응책대표적인 유사종교인 신천지는 과거에는 주로 개신교인을 대상으로 전도했다. 그러나 개신교의 적극적 홍보와 예방 세미나로 전도가 어려워지자 지금은 가톨릭 신자들을 공략하고 있다. 이단에 대한 정보가 부족하고 성경 지식이 얕은 가톨릭 신자들을 주된 포섭 대상으로 삼고 있다. 가톨릭 신자들은 피해를 봤을 때 당사자와 가족 모두 도움받을 곳을 찾기가 쉽지 않다. 피해자들은 또 교회에 알려지는 것을 극히 꺼리는 성향을 보인다. 상담하는 본당 신부나 수녀도 대처법을 잘 몰라 낭패를 보고 개신교 상담소를 찾아가는 경우가 많다. 주교회의는 2011년 각 교구에 신천지 포교 활동에 대한 주의 공문을 보냈고, 교구는 다시 본당에 신천지에 주의를 요청하는 공문을 전달했다. 이후 교구별로 피해 사례를 접수했으며, 수원ㆍ인천ㆍ전주교구는 좀 더 적극적으로 연구 작업과 신자 교육을 실시해왔다. 그러나 이러한 공지는 대부분 단발성에 그치고, 연수나 교육은 예방 중심으로 시행되고 있는 실정이다. 도움을 절실히 필요로 하는 피해자와 가족들이 도움을 받을 수 있는 곳은 극히 드물 뿐 아니라 있는 곳조차 잘 알려지지 않아 많은 피해자가 무방비 상태에서 고통받고 있다. 신천지대책위원회가 결성된 교구는 전주교구가 유일하다.유사종교 문제의 심각성을 인식한 주교회의 총대리 회의와 교리주교위원회는 지난해 8월 주교회의에 한국 교회 차원의 현황 파악과 대책을 요청했다. 이에 관한 연구를 의뢰받은 주교회의 한국가톨릭사목연구소는 주교회의 2016년 추계 정기총회에 ‘유사 종교에 대한 한국 천주교회 대처 방안’을 제출했고, 지난해 12월 주교회의 상임위원회는 유사종교 문제에 적극적으로 대처할 것을 결정했다. 이후 한국가톨릭사목연구소는 전국 교구 사목국장 등 40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2월 9일 ‘유사종교 대응을 위한 네트워크 구성 및 세미나’를 열고 ‘한국 천주교 유사종교 대책위원회’(가칭)를 결성했다. 유사종교에 대한 대응이 본궤도에 오른 것이다. 남정률 기자 njyul@cpbc.co.kr 평화신문2017.02.28
![[이창훈 위원의 사도행전 이야기] (11) 최고의회 결정과 사도들의 반박 (4,13-22)](//cpbc.co.kr/CMS/newspaper/2019/03/rc/749245_1.0_titleImage_1.jpg)
[이창훈 위원의 사도행전 이야기] (11) 최고의회 결정과 사도들의 반박 (4,13-22)“어느 것이 하느님 앞에 옳은지 판단하라” 베드로와 요한은 예수님의 이름으로 말하지 말라는 예루살렘 최고의회의 지시에 “우리로서는 보고 들은 것을 말하지 않을 수 없다”며 담대히 증언한다. 사진은 로마 요한 라테라노 대성전 벽면의 베드로 사도 조각상. 【CNS 자료 사진】 태생 불구자를 고치고 백성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설교했다는 이유로 붙잡힌 베드로와 요한은 최고의회에서도 마찬가지로 복음을 증언합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하느님께서 나자렛 사람 예수 그리스도를 죽음에서 살리셨다는 것으로 그치지 않고 예수님만이 유일한 구원자시라고 선포합니다. “그분 말고는 다른 누구에게도 구원이 없습니다. 우리가 구원받는 데에 필요한 이름은 하늘 아래 이 이름밖에 없습니다.”(4,12) 이번 호에서는 이런 증언에 대한 최고의회의 결정과 이 결정에 사도들이 어떻게 대응했는지를 알아봅니다. 최고의회의 압력과 권고최고의회 사람들은 베드로와 요한의 증언을 듣고는 놀랍니다. 놀라는 이유는 두 가지입니다. 먼저 두 사도의 담대함, 곧 최고의회 앞에서도 전혀 기죽지 않고 용기 있게 증언하는 그 태도에 놀랍니다. 또 두 사도가 무식하고 평범한 사람인데도 성경을 인용하면서까지 조리 있게 예수님을 증언하는 모습에 놀랍니다. 그러면서 두 사람이 예수님과 함께 다니던 사람들이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4,13) 예수님은 누구입니까? 백성의 지도자들이라는 최고의회 사람들이 앞장서서 죽게 한 그 나자렛 사람 아닙니까. 그런데 그 나자렛 사람을 따라다니던 무식한 갈릴래아 사람들이 그 사람의 이름으로 태어날 때부터 40년 넘게 불구인 사람을 멀쩡하게 만들었을 뿐 아니라 그 예수가 다시 살아났다면서 오직 예수만이 구원자라고, 그것도 감히 유다인들의 최고 통치기구인 산헤드린, 곧 최고의회에서 설파하고 있는 것입니다.최고의회 의원들은 당장 헛소리라고 반박하고 싶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불구였던 사람이 멀쩡하게 되어 사도들과 함께 있으니 헛소리라고 반박할 수도 없었습니다. 그들은 사도들을 최고의회에서 내보낸 다음 이렇게 의논합니다. “저들을 통하여 명백한 표징이 일어났다는 사실이 예루살렘의 모든 주민에게 알려진 터이고 우리도 그것을 부인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니 이 일이 더 이상 백성 가운데로 퍼져 나가지 않도록, 다시는 아무에게도 그 이름으로 말하지 말라고 엄중히 경고만 합시다.” 그러고는 사도들을 불러 예수님의 이름으로는 절대로 말하지도 말고 가르치지도 말라고 지시합니다.(4,14-18)최고의회가 내린 결정과 같은 그런 일은 살아가면서 어렵지 않게 경험하는 일이기도 합니다. 실제로 권세가들은 자기들에게 불리한 일이 생기면 상대방에게 “다시는 그런 일을 입 밖에도 꺼내지 마라”고 압력을 넣고 경고하곤 하지요. 그러면 사람들은 그들의 위세에 눌려 그만 입을 닫고 맙니다. 베드로와 요한은 어떻게 대응했을까요? 굴복하지 않은 베드로와 요한두 사도는 “하느님의 말씀을 듣는 것보다 여러분의 말을 듣는 것이 하느님 앞에 옳은지 여러분 스스로 판단하십시오. 우리로서는 보고 들은 것을 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4,19-20) 하고 대답합니다. 베드로와 요한의 이 말은 최고의회의 압력에 굴복하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자기들이 보고 들은 것이 바로 하느님에게서 온 것이라는 굳은 믿음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사도들이 보고 들은 것은 무엇일까요? 사도들은 3년 동안 예수님과 함께 지내면서 예수님에게서 직접 보고 들었습니다. 또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신 예수님을 만났고 부활의 증인이 되라는 사명을 받았습니다. 사도들은 자기들이 보고 들은 이 모든 것이 바로 하느님에게서 온 것이라는 굳은 믿음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두 사도는 “우리로서는 보고 들은 것을 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라고 증언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여기서 놓치지 말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사도행전의 저자는 베드로가 최고의회에서 증언했을 때 “성령으로 가득 차 그들에게 말하였다”(4,8)고 전합니다. 베드로와 요한이 보고 들은 것을 말하지 않을 수 없다고 용기 있게 증언할 수 있었던 것도 굳은 믿음과 함께 바로 성령의 능력에 힘입어서입니다. “성령에 힘입지 않고서는 아무도 ‘예수님은 주님이십니다’ 할 수 없습니다.”(1코린 12,3) 두 사도의 이런 답변을 들은 최고의회 사람들은 사도들을 처벌하고 싶었지만, 백성이 두려워서 처벌할 방도를 찾지 못하고 거듭 위협만 하고는 풀어줍니다. 40년 이상이나 불구로 지냈던 사람이 멀쩡하게 치유된 것을 보고 백성이 모두 하느님을 찬양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4,21-22)생각해봅시다“하느님의 말씀을 듣는 것보다 여러분의 말을 듣는 것이 하느님 앞에 옳은지 여러분 스스로 판단하십시오. 우리로서는 보고 들은 것을 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베드로와 요한의 이 대답은 우리에게도 시사하는 바가 큽니다. 무슨 일을 결정하거나 실행해야 할 때에 어떻게 해야 하는 것이 좋은지를 제시하기 때문입니다. ①먼저 내가 실행하거나 결정하려는 일이 하느님의 뜻인지 아니면 개인의 욕심이나 감정에 의한 것인지를 잘 판단해야 합니다. ②그러려면 결정을 내리기에 앞서 성령의 도움을 청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마음을 비우고 성령의 은사, 특별히 지혜와 통찰의 은사를 청하고 결정을 내리는 자세가 요청됩니다. ③하고자 하는 일이 하느님의 뜻에 맞다는 판단이 들면 슬기롭고 용기 있게 결정하고 수행해 나가야 합니다. 그 일이 성령께서 하시는 일이라면 사랑ㆍ기쁨ㆍ평화ㆍ인내ㆍ친절ㆍ선의ㆍ성실ㆍ온유ㆍ절제 같은 열매를 맺을 것입니다.알아보기최고의회: 최고의회는 예수님 시대에 예루살렘에 있었던 유다인들의 최고 통치기구로, 아람어로 산헤드린(Sanhedrin)이라고 합니다. 당시 이스라엘 땅(팔레스티나)은 로마 제국이 통치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로마는 예루살렘 최고의회에 상당한 자치권을 주었습니다. 그래서 최고의회는 종교적인 문제뿐 아니라 법적이고 행정적인 문제들에 대해 재량권을 가지고 처리할 수 있었습니다. 다만 사형같은 중형은 로마 당국에 넘기거나 승인을 얻어야 했다고 합니다. 빌라도 총독이 예수님께 사형을 내리고 로마 군인들이 집행한 것이 이런 이유에서입니다.예루살렘 최고의회는 대사제와 수석 사제들, 귀족 계급의 원로들, 그리고 율법학자 등 모두 71명으로 구성됐다고 하지요. 수석 사제 등 사제들 가운데는 사두가이가 많았고 율법학자들은 대부분이 바리사이였습니다.예루살렘에는 최고의회가 있었지만, 지방에는 의회가 있었습니다.(마태 10,17) 지방 의회는 23명의 유다인들로 구성돼 있었고, 예루살렘 최고의회에서 다루지 않는 사항들과 관련한 법정 역할을 했습니다. 의회는 회당에서 법정을 열었고 채찍질 같은 형벌도 함께 내렸다고 합니다. 평화신문2019.03.26
![[평신도 영성 나는 평신도다] (2) 아직도 저 멀리 있는 제2차 바티칸 공의회](//cpbc.co.kr/CMS/newspaper/2018/12/rc/741179_1.0_titleImage_1.jpg)
[평신도 영성 나는 평신도다] (2) 아직도 저 멀리 있는 제2차 바티칸 공의회공의회의 결실 ‘평신도 사도직’ 제2차 바티칸 공의회를 통해 평신도에게 사도직이 있다는 사실이 분명해졌다. 사진은 제2차 바티칸 공의회 회기 중 모습. 가톨릭평화신문 DB 완벽한 의미의 인천 상륙작전은 아직 이뤄지지 않은 듯 보입니다. 맥아더 장군의 상륙작전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아직도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배가 한국 땅에 상륙하지 못하고 인천 앞바다에 둥둥 떠 있습니다. 진정한 의미의 평신도 사도직이 한국 천주교회에 제대로 상륙하지 못한 듯 보입니다.갑자기 제2차 바티칸 공의회를 언급한 이유는, 그 신앙의 방주에 평신도 사도직의 진정한 의미가 잔뜩 실려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평신도 사도직을 이야기하기 위해선 먼저 제2차 바티칸 공의회를 언급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1962~1965년에 열린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20세기의 위대한 예언자이신 성 요한 23세 교황께서 소집하셨습니다. 당시 많은 사람은 요한 23세 교황은 연세가 많으셔서(거의 80세가 되어 교황이 되셨습니다) 그냥 스쳐 지나가시는 분이시라고 생각하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가톨릭교회 역사 안에서 가장 중요한 업적을 남기십니다. 안타깝게도 요한 23세 교황님은 공의회를 소집하셨지만, 공의회 도중에 돌아가셨고, 성 바오로 6세 교황께서 공의회를 마무리하십니다.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가톨릭교회가 과거의 제도와 틀을 현대적인 모습으로 바꾸게 된 획기적인 사건입니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교회가 현대 사회에 맞는 새로운 교회의 모습으로 탈바꿈하지 않으면 살아남을 수 없다는 것을 인식했습니다. 공의회 이후 많은 것이 바뀌었습니다. 그중에서 가장 눈에 띄는 것은 전례의 변화입니다. 공의회 전에는 제대가 벽에 붙어 있었습니다. 사제들은 벽에 있는 십자가를 바라보고 미사를 주례했습니다. 제사의 성격이 강했습니다. 미사 언어는 전 세계 공통으로 라틴어였습니다. 과거에는 신자들이 무슨 말인지도 모르면서 라틴어 미사에 참여했습니다. 그런데 공의회 이후 제대가 앞으로 나왔고 사제도 신자들을 바라보며 미사를 주례했습니다. 미사 언어도 그 나라 고유 언어를 사용했습니다. 이제 미사는 만찬의 성격으로 거듭납니다. 그리고 과거에는 모든 중심이 성찬의 전례에 있었지만, 공의회 이후에는 말씀의 전례와 성찬의 전례가 똑같은 비중을 차지하게 됩니다. 말씀이 그만큼 중요하다는 것을 새롭게 인식한 것입니다.왜 이렇게 변화되었을까요. 그 바탕에 바로 평신도 사도직이 있습니다. 공의회는 가톨릭교회 2000년 역사에서 처음으로 평신도 신원을 분명히 했습니다. 공의회를 통해 평신도에게도 사도직이 있다는 사실이 이제 명확해졌습니다. 그래서 이때부터 평신도 신학이 생겨나고 발전하기 시작했습니다.사실 공의회 이전까지 교회 구조는 피라미드 형태였다고 볼 수 있습니다. 교황님을 정점으로 사제와 수도자가 그 아래, 그리고 평신도들은 제일 아래에 위치해 있었습니다. 이는 가톨릭교회가 중세 이전부터 정치와 종교가 하나였기에 자연스러운 현상이었습니다. 고위성직자들이 성주나 높은 직위를 겸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공의회 이후 놀랄만한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평신도가 피지배 계급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한 공동체 안에서 서로 직무적으로 다른 역할을 할 뿐, 유기적인 협력을 통해 이뤄간다는 정의였습니다. 이후 평신도 신원은 갈수록 중요해졌습니다.공의회가 끝난 후 모든 내용이 정리돼 제2차 바티칸 공의회 문헌이 발표됩니다. 이 문헌은 ‘현대의 복음서’로 불리고 있습니다. 꼭 한 권씩 구입해서 읽어보시길 권합니다. 성경과 공의회 문헌을 놓고 함께 읽어보시면 좋겠습니다. 이 문헌에는 교회와 전례, 평신도가 누구인지, 또 교회의 모든 기본 교리, 비전 등이 담겨 있습니다.그래서 우리는 공의회에서 말하는 평신도 사도직의 의미에 대해 알아야 합니다. 하지만 그 사도직의 의미에 앞서서 먼저 알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평신도가 속한 교회에 대한 문제입니다. 교회가 무엇인지 알아야 평신도의 의미에 대해서도 명확해집니다. 자! 이제 교회가 무엇인지에 대해 먼저 알아보겠습니다. 정치우(안드레아, 새천년복음화학교 교장) cpbc2018.12.11

예수님과 함께 떠나는 사순 여정… 이 책 챙기셨나요?사순시기 위한 신앙 안내서 세 권 사순시기는 ‘봄’이다. 사순의 계절이 봄이기도 하지만, 모든 것이 새로워지는 이 시기엔 각자의 신앙 또한 ‘새 희망’을 향해 재탄생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절제와 인내가 뒤따르는 ‘사순살이’는 결코 쉽지 않다. 새 희망을 향한 사순살이를 도와주고 이끌어줄 신간을 소개한다.내면의 샘 안셀름 그륀 지음 / 김선태 주교 옮김 / 바오로딸 / 6000원유다교는 속죄의 날이면 모든 사람이 의무적으로 하루 동안 단식했다. 단식은 ‘경건함의 표지’였다. 바리사이들은 일주일에 두 번씩 단식을 지킬 정도였다. 특별한 갈망과 도움을 요청할 때에도 이들은 수시로 단식에 돌입했다.고대 수도승들도 마찬가지였다. 이들은 평일엔 단식하고, 주말에 음식을 먹었다. 고기와 치즈, 포도주도 피했다. 초대 교회는 이 같은 ‘단식 관행’을 점차 받아들였으며, 단식을 결코 슬픔의 표현이 아닌 구원과 기쁨을 기다리는 ‘영육의 수련’, ‘내적 조명’으로 보았다.지역과 종교를 넘어 수많은 독자에게 깊은 울림을 선사해오고 있는 ‘세계적 영성가’ 안셀름 그륀 신부가 사순 길잡이 「내면의 샘」을 펴냈다. 단식의 의미를 전하고, 사순시기 하루하루를 영성적으로 보내는 방법을 제시한 책이다.저자는 “교회는 개인에게만 단식하라고 권고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리스도교 공동체 전체에 영향을 주는 ‘포기의 문화’를 만들고자 하는 것”이라고 일깨운다. 풍요로운 현대 소비문화에 맞서는 단식, 금주, 금욕 등 ‘포기 행위’들은 사회 전체에 ‘치유’를 선사한다는 것이다.저자는 사순 제1~5주간을 단식→정화→수련→언어→기도와 연민의 흐름으로 지낼 것을 제안한다. 2주간 ‘영혼의 정화’에 이르기 위한 각자의 생각과 느낌 관찰하기, 영혼의 밑바닥 깊이 묵상하기 등 구체적인 수행법도 일러준다. 이 같은 일련의 수행은 가족과 함께하면 더 큰 효과를 볼 수 있다. 저자는 각자 실천 계획서를 종이에 기록해 한자리에 모여 자신의 ‘포기의 계획’과 ‘실천사항’을 약속해볼 것을 권한다. 가족, 공동체와 함께하는 기도와 자비의 활동은 사순을 예수님과 함께하는 완벽한 여정으로 만들어줄 것이라고 저자는 확신한다.거룩한 독서 쉽게 따라하기 김인호 신부 지음 / 생활성서 / 1만 3000원거룩한 독서, 즉 렉시오 디비나는 침묵→성령 청원→독서→묵상→기도→관상의 6단계 과정을 수반하는 전통적인 묵상법이다. 그러나 성경 전체를 통독하기도 벅찬데, 기도와 묵상, 관상의 과정까지 거치려니 막상 엄두가 나지 않는 것도 사실.20년 넘게 거룩한 독서법을 신자들에게 전하고 있는 김인호(대전가톨릭대 교수) 신부가 더욱 쉬운 방법으로 ‘거룩한 독서’를 하는 법을 소개했다.성 요한 크리소스토모는 “하느님의 말씀은 나에게 들려주는 하느님의 편지다”라고 했다. 하느님의 편지인 성경을 더욱 제대로 이해하려면 일련의 과정이 필요하다. 성경의 배경 지식을 알고, 말씀을 자세히 읽어야 하며, 그 안에 담긴 예수님 모습을 찾는 것이다. 간단해 보이지만, 우선 복음서가 누구를 대상으로 쓰였고, 어떠한 사상을 담고 있는지 알아야 한다. 복음서끼리 어떤 성격을 지녔는지도 알아야 한다. 저자는 성경의 내용을 육하원칙에 맞춰 살펴보고, 읽은 본문을 요약해 써볼 것도 권한다. 그 뒤에 예수님이 어떠한 뜻으로 제자들에게 비유를 들고, 메시지를 전하는지 나의 삶에 적용할 수 있다.책은 ‘나해’ 주일 복음 전체에 대한 거룩한 독서법을 담고 있다. 거룩한 독서는 혼자 또는 공동체가 함께할 수 있다. 저자는 △침묵 △기도 △독서 △나눔의 반복적인 과정을 통해 매 주일 복음 말씀을 갖고 ‘예수님 찾기’를 효과적으로 수행할 방법을 자세히 안내하고 있다. ‘복음 곱씹기’의 노력은 삶을 거룩하게 만들어줄 것이다.오늘 기도 노트 가톨릭출판사 / 7000원목적이 있는 기도만 해오진 않았는지. 기도의 양과 질을 깊이 돌아본 적 있는지. 신앙인이라면 매일 기도를 바치고 묵상하며 쇄신해야 한다는 것을 머리로 알고 있지만, 이를 체계적인 ‘성실한 기도생활’로 실천하기란 쉽지 않다.이 책은 노트 형식의 ‘기도 일기장’이다. 일상의 잡다한 일을 겪고 푸념하고 지나치기보다 학창시절 일기 쓰듯 나의 일상을 기도와 연관 지어 기록하는 습관을 길들여줄 일기 노트다. 날마다 기도 지향을 적고, 자신의 하루하루의 삶과 기도를 하느님과 대화하듯 자유롭게 쓸 수 있도록 엮었다. 장마다 기도에 관한 위대한 이들의 짧은 어록과 성경 말씀도 적혀 있다. 적어도 100일 동안 이 노트를 이용해보면 삶과 기도가 하나 되는 작은 기적을 맛볼 수 있지 않을까. 이정훈 기자 sjunder@cpbc.co.kr 백영민2018.02.07
![[이창훈 위원의 사도행전 이야기] (13) 초대 교회의 모습 (4,32─5,11)](//cpbc.co.kr/CMS/newspaper/2019/04/rc/750262_1.0_titleImage_1.jpg)
[이창훈 위원의 사도행전 이야기] (13) 초대 교회의 모습 (4,32─5,11)“성령을 모독하는 자는 용서받지 못할 것이다” 하나니아스와 사피라의 이야기는 성령을 모독하고 거슬러서는 안 된다는 교훈을 준다. 그림은 퀴스타보 드레의 성경 판화 ‘하나니아스의 죽음’. 사도행전의 이 대목에서 두 가지를 확인할 수 있습니다. 하나는 한마음 한뜻이 되어 모든 것을 공동으로 소유하는 초대 교회 공동체의 모습입니다.(4,32-37) 다른 하나는 모두가 예외 없이 그렇게 살지는 않았음을 알게 해주는 구체적인 사례로 하나니아스와 사피라 이야기입니다.(5,1-11)초대 교회의 공동체 생활(4,32-37)루카는 2장 42-47절에서 베드로의 오순절 설교를 듣고 개종한 첫 신자들의 공동체 생활을 요약해서 전한 데 이어 여기서도 다시 한 번 신자들의 공동체 생활을 압축해서 소개합니다. “신자들의 공동체는 한마음 한뜻이 되어, 아무도 자기 소유를 자기 것이라고 하지 않고 모든 것을 공동으로 소유하였다.”(4,32) 이렇게 한마음 한뜻이 되어 모든 것을 공동으로 소유하자 “그들 가운데는 궁핍한 사람이 하나도 없었다”(4,34ㄱ)고 하는 놀라운 일이 벌어집니다. 그런데 초대 교회 공동체에는 재산의 공동 소유보다 더욱 중요한 일이 있었습니다. 예수님 부활의 증인이 되고 또 하느님의 은총에 힘입어 살아가는 삶이 그것입니다. 그래서 “사도들은 큰 능력으로 주 예수님의 부활을 증언하였고, 모두 큰 은총을 누렸다”(4,33)고 루카는 전합니다. 그렇다면 모두 한마음 한뜻이 되어 가진 것을 공동으로 소유하고 궁핍한 사람이 하나도 없었다는 초대 교회 공동체의 모습은 사도들의 증언과 가르침을 믿고 따름으로써 신자들이 모두 하느님의 큰 은총 속에 살아가는 결과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루카는 초대 교회 공동체에서 가진 것을 공동 소유로 하는 구체적인 방식을 설명합니다. “땅이나 집을 소유한 사람은 그것을 팔아서 받은 돈을 가져다가 사도들의 발 앞에 놓고, 저마다 필요한 만큼 나누어 받곤 하였다.”(4,34ㄴ-35) 사도들의 발 앞에 두었다는 것은 사도들의 처분에 맡겼다는 뜻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공동체의 재산 관리에 사도들이 최고 권한을 행사했다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겠지요. 루카는 “키프로스 태생의 레위인으로 ‘위로의 아들’이라는 뜻의 바르나바라는 별명을 얻은 요셉도 자기가 소유한 밭을 팔아 그 돈을 가져다가 사도들의 발 앞에 놓았다”(4,36-37)고 전합니다. 키프로스 태생의 이 레위인은 사도행전 9장 이후에 바오로와 함께 자주 등장하는 중요한 인물인데, 요셉이라는 이름보다는 바르나바라는 별명으로 불립니다. 바르나바가 이렇게 자기 밭을 팔아 사심 없이 그 돈을 사도들에게 갖다 준 것은 “착한 사람이며 성령과 믿음이 충만한 사람”(11,24)이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초대 교회 공동체 신자들이 모두 바르나바처럼 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이에 대한 구체적 사례가 하나니아스와 사피라 부부입니다. 하나니아스와 사피라(5,1-11)우선 줄거리를 살펴봅시다. 하나니아스와 사피라 부부는 함께 재산을 팝니다. 그런데 하나니아스는 아내의 동의 아래 판 값의 일부를 떼어 놓고 사도들 앞에 갖다 놓습니다. 베드로는 하나니아스에게 왜 “성령을 속이고” 땅값 일부를 떼어놓았냐고 추궁하면서 “그대는 사람을 속인 것이 아니라 하느님을 속인 것이오”라고 질책합니다. 이 말을 들은 하나니아스는 그 자리에서 쓰러져 숨지고 맙니다. 이 소문을 들은 사람들은 큰 두려움에 사로잡히고, 젊은이들이 그 시체를 메고 나가 묻습니다.(5,1-6) 세 시간 후에 아내 사피라가 들어옵니다. 그 여자는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지 못합니다. 베드로가 그 여자에게 땅을 판 값 전부냐고 묻자 그 여자는 그렇다고 대답합니다. 베드로는 이렇게 말하지요. “어쩌자고 그대들은 서로 공모하여 주님의 영을 시험하는 것이오? 보시오. 그대 남편을 묻은 이들이 바로 문 앞에 이르렀소. 그들이 당신도 메고 나갈 것이오.” 그러자 그 여자도 바로 베드로의 발 앞에 쓰러져 죽고 맙니다. 그 여자는 남편 곁에 묻히고 “온 교회와 그 소문을 들은 사람들은 모두 큰 두려움에 사로잡혔다”고 루카는 기록합니다.(5,7-11)이야기를 요약하면 부부가 땅을 판 값 가운데 일부를 떼어놓고 나머지를 갖고는 그것이 전부인 것처럼 사도들 앞에 바쳤고, 그 결과로 죽음을 맞았다는 것입니다. 재산 일부를 빼놓고 바쳤다고 해서 죽음까지 당하는 것은 심하다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베드로의 지적에서도 볼 수 있듯이 단지 재산을 빼돌리고 거짓말을 했다는 것이 핵심이 아닙니다. 핵심은 성령을 속이고 시험했다는 데에 있습니다.생각해봅시다하나니아스와 사피라는 재산을 판 값을 사도들 앞에 갖다 놓으면서 일부를 떼어 놓았습니다. 사실 그 돈은 자기들 마음대로 할 수 있는 돈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거짓말을 했습니다. 속였습니다. 속이고 거짓말을 하는 행위가 잘못인 것은 분명하지만, 사람들이 살아가는 사회에서 그런 일은 어렵지 않게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니아스와 사피라가 비록 사도들을 속이는 잘못을 했지만, 그것이 죽음을 초래할 정도로 심한 잘못인가. 베드로가 너무 심하지 않나’ 하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이렇게 생각해 봅시다. 베드로는 하나니아스와 사피라 부부에게 단순히 거짓말을 했다고 질책하는 것이 아니라 성령을 속였다고, 하느님의 영을 시험했다고 질책합니다. 말하자면 이 부부는 성령을 속이고 시험하려 함으로써 성령을 모독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람의 아들을 거슬러 말하는 자는 모두 용서받을 것이다. 그러나 성령을 모독하는 말을 하는 자는 용서받지 못할 것이다”(루카 12,10)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부부의 죽음은 성령을 모독한 결과입니다.성령을 속이고 하느님의 영을 시험했다는 베드로의 말에 들어 있는 의미를 더 생각해 봅시다. 오순절 성령 강림과 함께 시작하고 사도들의 복음 선포로 커가는 이 공동체는 단지 여느 인간들의 공동체가 아닙니다. 그 공동체는 성령이 함께하시는 공동체입니다. 그래서 이 공동체를 대표하는 사도들 앞에서 속이고 거짓을 말하는 행위는 바로 그 공동체에 함께하시는 성령을 속이는 행위와 다를 바 없는 것입니다. 다른 한편으로 하나니아스와 사피라의 이야기는 하느님의 은총 속에 살아가는 삶, 곧 성령 안에서 살아가는 삶이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얼마나 중요한지를 생각하게 해줍니다. 신자들의 공동체가 한마음 한뜻이 되어 가진 것을 내놓고 공동으로 소유할 수 있었던 것은 은총을 누리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반면에 하나니아스와 사피라는 성령의 은총보다는 자신들의 사심에 마음이 쏠렸기에 가진 것을 다 내어놓을 수가 없었습니다. 한마음 한뜻이 되어 살아가는 것은 인간적인 노력만으로는 불가능합니다. 성령의 은총이 있어야 합니다. 성령께서 도와주시지 않으면 우리는 그리스도인으로서 제대로 살 수 없습니다. 그래서 성령께 마음을 열어드리도록 늘 노력해야 합니다. 평화신문2019.04.09

전국 167곳 성지, 두 발로 걸으며 마음으로 순교 선조 만나 순교 영성 새기며 ‘순례 삼매경’'성지순례 이렇게 한다’ 완주자들이 전하는 성지순례 방법과 추천 성지전국 성지를 순례하는 신자 수가 꾸준히 늘고 있는 가운데, 저마다의 성지순례 방법으로 여러 차례 완주에 성공한 신자들도 많아지고 있다. 사진은 최양업 신부를 비롯한 많은 신자가 은둔하며 신앙을 지켰던 울산 울주군의 죽림굴이다. 리길재 기자 한국 천주교회엔 167곳의 거룩한 땅, ‘성지’가 있다. 성지는 신앙 선조들이 남긴 믿음의 흔적이다. 크나큰 하느님 사랑을 처음 접한 이들의 신심이 어찌 이리 강건했던 걸까. 가족과 떨어지는 이산의 아픔을 겪고 삶의 터전까지 버리고 산속에 숨어들어 가는 한이 있어도…. 급기야는 짐승 취급당하며 포승줄에 묶인 채 주리가 틀리고, 목이 잘려도… “나는 주님을 섬깁니다”라고 고백한, 목숨보다 소중히 여긴 그들의 믿음은 어디서 비롯된 것일까. 한국의 성지는 167권의 ‘작은 성경’이다. 그런 순교자들의 큰 믿음과 주님 사랑의 마음을 따르고자 전국 성지 순례를 완주한 이들에게서 신앙 선조들을 만나는 순례 방법과 마음가짐을 들어봤다. 이들은 나름대로 추천할 만한 성지를 꼽아주기도 했다. 평신도 신앙 선조들이 일군 한국 교회 영성의 토대 위에서 오늘의 평신도들이 순교 영성과 신심을 새롭게 일구고 있다. 이지혜 기자 bonaism@cpbc.co.kr 이정훈 기자 sjunder@cpbc.co.kr 강민주(요안나, 64, 대전교구 태안본당) 성지순례요? 안 간 사람은 있어도 한 번만 간 사람은 없을걸요. 혼자서도, 둘이나 셋이 가도 좋은 게 성지순례입니다. 저는 구교우 집안에서 태어났고 부모님이 옹기그릇 장사를 하셔서, 어릴 때부터 순교자 이야기를 듣고 자랐어요. 111곳 성지를 한번 완주하는 데 2년 걸렸네요. 매주 수요일이면 남편에게 가게를 맡기고 무조건 순례길에 올랐거든요. 최근 167곳으로 재지정된 성지를 순례하기 시작했습니다. 저는 성지로 향할 때마다 예수님께서 동행하시는 걸 느낍니다. 머나먼 한국 땅에서 순교하신 선교사들이 신자들을 사목하던 그 시절을 생각하면 저는 사치스럽게 사는 건 아닐까 반성도 하게 됩니다. 제게 성지순례는 죽어야 끝난다고 할까요? 그만큼 성지순례는 신앙생활의 큰 부분이 됐어요. 성지에 오가는 길에 핀 꽃도 주님께서 마련해주신 아름다움이라 여기면 순례를 향하는 길도 기도가 되지요. 강민주씨 추천 성지 ①춘천교구 행정공소(강릉 연곡면) - 은퇴하신 신부님이 상주하고 계셔서 미사를 봉헌할 수 있답니다. 공소에서 민박도 할 수 있어 묵을 곳을 따로 찾지 않아도 되죠. 아담하고 쉬어갈 수 있는 ‘작은 친정’ 같은 곳입니다. ②수원교구 은이성지(용인시 처인구 양지면) - 김대건 신부님이 사제품을 받은 중국 상해의 김가항성당이 없어져 아쉬웠는데, 이곳에 가면 복원된 김가항성당을 볼 수 있습니다. 신부님이 사용하던 유물도 있어 교회사 교육에도 딱입니다. ③솔뫼성지(충남 당진시 우강면) - 김대건 신부님이 태어난 곳이어서 그분의 영성이 더 가슴에 와 닿는 곳이죠. 이름대로 소나무가 우거진 풍경을 함께 만끽하며 순례할 수 있어요. 배웅(야고보, 76, 수원교구 안산본당) 제가 성지순례를 세 번 완주한 이유는 따로 있습니다. 어릴 때 부모님이 돌아가셔서 할머니와 살았죠. 한동네에 살던 아주머니들이 치마폭에서 감자와 고구마를 꺼내준 기억을 잊지 못합니다. 열심히 돈 벌어 그분들께 밥 한 끼라도 사드리고 싶었는데 모두 돌아가셨습니다. ‘기도보다 더 큰 보은이 있을까?’ 싶어 전국 성지를 순례하며 기도드렸습니다. 제가 가톨릭에 입교한 지 50년째 되던 2012년이 성지순례 첫발을 내디딘 해입니다. 제 승용차 운전석 옆자리를 아예 침상으로 개조해 다녔고, 밥도 차에서 해먹었습니다. ‘노숙 순례’를 자처한 거지요. 성지에서 바칠 기도문을 A4용지 6장에 옮겨 적어 코팅해서 갖고 다녔습니다. 맨 처음 순례를 시작할 때만 해도 도로 사정이 안 좋은 곳이 많았는데, 요즘은 잘 되어 있어 이동하기가 좋아졌습니다. 하나 더 이야기하자면, 성지에 가면 복장이 호화스럽거나 러닝셔츠 차림으로 다니는 분들이 더러 있습니다. 그런 복장은 좀 자제해 주시면 좋겠습니다. 저는 가족에 대한 사랑과 그리움을 성지에서 달래곤 합니다. 그래선지 순교자 가족 묘소가 있는 성지를 특히 좋아합니다. 나만의 성지, 내 지향과 맞는 성지를 마음속에 간직하는 것도 좋겠네요. 성지에서 혼자 울기도 많이 울었으니, 성지는 위로의 공간이자, 성당과는 또 다른 영성의 공간입니다. 저는 죽을 때까지 12번 완주가 목푭니다. 배웅씨 추천 성지 ①황경한 묘(제주시 추자면) - 황사영과 정난주 사이에 태어난 황경한의 묘소입니다. 황경한은 신유박해 때 아버지가 순교한 후 어머니 정난주가 제주도로 유배되면서 하추자도에 남겨졌습니다. 어린 마음에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이 얼마나 컸겠습니까? 어부의 손에 거두어졌는데, 황경한의 후손이 추자도에 아직 살고 있답니다. 바닷가의 무척 아름답고도 슬픈 곳입니다. ②치명자산성지(전주시 완산구 바람쐬는길) - 가족 순교자 묘가 있는 곳입니다. 신유박해 때 순교한 유항검과 그의 가족 6위가 합장된 묘가 있지요. 저는 가족에 애착심이 강합니다. ③죽림굴(울산시 울주군 상북면) - 하룻밤 자고 오고 싶었던 곳입니다. 금세라도 호랑이가 튀어나올 것 같은 굴에서 신부와 신자들이 박해를 피해 생활했다는 게 놀라울 따름이지요.김달철(베드로, 66, 서울대교구 수서동본당, 시각장애 6급) 시각장애인도 전국 성지를 완주할 수 있어요. 비용은 좀 더 들었을지 모르겠네요. 장애인 복지 콜택시로 전국을 다녔기 때문이죠. 기사님이 신자였던 덕에 같은 순례 멤버가 돼주셨어요. 그렇게 시각장애인 교우 두 분과 2년 동안 성지를 두 번 완주했습니다. 저는 어느 정도 앞을 볼 수 있기에 두 분을 양팔에 팔짱을 끼고 안내했어요. 성지는 끈끈한 형제애도 깨닫게 해줍니다. 저희가 시각장애인이다 보니 가는 곳마다 신부님, 수녀님, 신자분들께서 더 챙겨주신 거죠. 불편함을 전혀 못 느꼈습니다. 순교자 이야기는 성지 해설사님이나 단체 순례 오신 분들 속에 섞여서 들었어요. 청주교구 연풍성지에선 신자분들이 음식까지 대접해주셨어요. 무척 감사했죠. 마음씨 좋은 교우분들 도움이 성지 완주의 큰 힘이었습니다. 성지순례는 우리 가슴을 다시금 떨리게 하는 신앙활동입니다. 박해 때 이 땅의 순교자들의 믿음과 당시 상황을 전해 듣고 떠올릴 때마다 후손으로서 더욱 굳건한 믿음으로 살아야 함을 확인했습니다. 성지는 ‘순교자 신앙학교’입니다. 순례 때 성지 미사 시간을 맞출 수 있다면 꼭 참여하시고, 성지 사제와 해설사를 통해 신앙 선조의 이야기를 꼭 듣고 도장 받길 권합니다. 김달철씨 추천 성지 ①김범우 순교자 성지(경남 밀양시 사기점길) - 김범우는 이승훈 베드로에게 세례를 받고 천주학 모임을 하다 유배를 당했습니다. 원래 김범우 유배지는 충북 단양으로 알려졌었는데, 1989년 밀양에 묘소를 모시게 됐습니다. 초행이라면 가는 길이 쉽진 않습니다. 이곳에 성모 동굴 성당이 있어 여름철 시원한 느낌을 받으며 미사를 봉헌할 수 있어 좋습니다. ②조씨 형제 순교자 묘(부산 강서구 생곡길) - 끝까지 믿음을 지키다 순교한 조석빈ㆍ석증 형제가 묻힌 곳이라 더 와 닿는 곳입니다. 기골이 장대한 형님에 비해 왜소했던 동생이었지만, 형제 모두 똑똑하고 믿음이 무척 굳건했다고 해요. ③황경한 묘(제주시 추자면) - 백서 사건으로 신유박해 때 순교한 아버지 황사영, 어머니 정난주와 떨어져 끝내 홀로 유배지 추자도에서 죽음을 맞이했던 가슴 아픈 가족사를 간직한 곳이죠. 류지훈(베드로, 75, 부산교구 수정마을본당)·홍수자(베로니카, 68)씨 부부 성지순례는 ‘순교자들을 만나는 여정’입니다. 성인부터 무명 순교자까지 한분 한분을 알아가는 길입니다. 아무 준비 없이 순례길에 오르면 그냥 여행이 돼버리니까 사전에 인터넷과 신앙 서적을 뒤져서라도 순교자들을 이해하고 가면 좋아요. 저희는 성지 순례하면서 인근 관광지는 아예 가질 않았습니다. 순례와 순교자 영성에 집중하기 위해서죠. 공경하는 집안 어른을 뵈러 가는데, 이 정도 정성은 들여야겠죠? 또 부부라면 꼭 같이 순례하길 권합니다. 20년 넘게 냉담한 남편과 순례를 다녔는데, 글쎄 먼저 “미안하다”는 말을 못하던 남편이 순례 후에 배려하는 남자로 180도 변했어요. 제가 성당 일 바쁠 때면 밥과 청소도 척척 해주기도 하고요. 결혼 생활 오래 했지만, 성지순례가 부부 사이를 변화시켜줄지 누가 알았겠습니까. 부부가 함께 순례하면 얻을 수 있는 은총입니다. 순례하다 보면 서로 토닥거릴 일도 생겨요. 그런데 성지에서 함께 기도하고 챙기다 보면 어느새 신앙 안에 가까워지는 ‘기적’도 체험할 수 있어요. 저는 청양다락골성지의 무명 순교자들의 줄무덤에서 묘비 하나하나를 기도하며 닦아드렸어요. 성지순례는 이처럼 ‘순교자와 만남’을 체험하는 일입니다. 류지훈ㆍ홍수자씨 부부 추천 성지 ①치명자산성지(전주시 완산구 바람쐬는길) - 이순이 루갈다·유중철 요한 동정부부의 지극한 덕행과 효심을 들으면 눈물이 절로 나는 성지예요. 가족은 물론, 사돈과 친척까지 따뜻이 챙긴 이순이의 영성이 가득한 곳입니다. ②미리내성지(경기 안성시 양성면 미리내성지로) - 김대건 신부님과 페레올 주교님 등 목숨 걸고 그토록 신자들을 위했던 초대 사제들의 마음을 본받고 감사의 기도를 드릴 수 있는 곳이에요. ③갈매못 순교성지(충남 보령시 오천면 오천해안로) - 병인박해 때 다섯 성인의 순교 처형장이었다고 해요. 성지 주변에 조성된 순례길 따라 바닷가를 거닐다 보면 성인들의 순교 피가 모래사장 아래에 면면히 흐르고 있음을 느낄 수 있어요.김광식(요셉, 63, 인천교구 가좌동본당)·최복순(안나, 62)씨 부부와 큰아들 김병선(베드로, 41) 우리 가족은 그야말로 순교자들에게 미쳤어요. 7년 동안 일곱 번 성지순례를 완주했습니다. 왜냐고요? 그분들께 너무 감사해서요. 오늘 이렇게 우리가 하느님을 알고, 신앙생활을 하면서 사랑과 기쁨을 알도록 맨 처음 믿음을 남겨주신 분들이잖아요. 성지를 매년 완주하다 보니 집에 쉴 때엔 뭔가 마음이 가라앉아요. 그럼 또 떠나는 거예요. 순교자들 앞에 가서 그간 잘 계셨는지 문안 인사드리는 마음으로요. 성지는 순교자들의 정신과 얼을 채우는 ‘신앙 충전소’입니다. 뇌병변장애가 있는 큰아들과 함께하는 장거리 순례가 쉽진 않아도, 아들 덕분에 우리 가족이 매년 주님 부르심에 손잡고 응답할 수 있다고 여깁니다. 간혹 ‘도장만 받는 게 성지순례야?’ 하고 우려하는 분도 계시지만, 어찌 됐든 도장 순례자들도 성지를 향한 거잖아요. 하느님은 마음을 보시는 분! 어떤 형식이 됐든 성지라는 거룩한 땅을 찾는다는 것 자체가 중요한 신앙 활동이라고 봐요. 성지 안내판이나 표지가 잘 돼 있지 않은 곳에선 애를 먹을 수 있지만, 그 또한 순례의 한 부분이죠. 하느님을 처음부터 잘 알지 못하듯 처음엔 좀 버벅거려도 지향 한 가지씩만 잘 간직하고 떠나면 됩니다. 성지순례는 안일했던 나의 삶을 다시금 일깨우는 ‘믿음의 목욕재계’에 비할 수 있겠네요. 순례는 고통과 부활의 은총을 모두 체험하는 길입니다. 순례의 끝은 ‘숨 쉬는 것 모두 주님을 찬양하여라. 할렐루야!’(시편 150,6)란 말씀으로 늘 귀결됩니다. 저희는 성지를 따로 추천하지 않겠습니다. 모든 성지가 다 소중하고 아름다운 주님의 땅이잖아요.cpbc2019.07.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