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앙단상] 어머니(임두빈, 안드레아, 생활성가 가수)](//cpbc.co.kr/CMS/newspaper/2019/06/rc/756207_1.0_titleImage_1.jpg)
[신앙단상] 어머니(임두빈, 안드레아, 생활성가 가수) 사는 동안 행복했던 시간은 짧게 느껴지고, 시련의 시간은 왠지 길게 느껴집니다. 또한, 나이가 들수록 갑작스러운 주변인의 부고 소식은 조금은 나태했던 일상과 신앙에 잔잔한 겸손을 불러옵니다. 그때부터 잊고 있던 지인들의 안부와 가족의 건강에 마음이 쓰이고, 천년만년 사실 것 같은 부모님께 다하지 못한 마음을 반성하게 됩니다.다행히 저는 부모님 두 분 모두 살아 계십니다. 부모님께서 저에게 주셨던 무한한 신뢰와 사랑을 알면서도 전화가 오면 바쁘다는 핑계로 퉁명스럽게 전화를 받고, 휴무 날엔 집에서 지친 몸을 마음껏 뒹굴 거리고 싶지만 무엇을 자꾸만 해달라고 하시는 어머니와 세상 전반에 관한 토론으로 자꾸만 말을 걸어오시는 아버지가 마냥 귀찮아 후회할 투정을 했던 기억에 눈시울이 붉어집니다. 좋은 곳에 가면 “모시고 가야지!” 맛있는 음식을 먹을 때면 목이 메어 울컥한 마음에 “잘해야지! 진짜 잘해야지! 살아 계시는 동안에 효도해야지!” 하면서도 말처럼 쉽게 되지 않습니다. 어디 감히 저의 부족한 마음을 부모님의 마음에 견줄 수 있을까요? 저는 루카복음 15장의 말씀, 돌아온 탕자처럼 부모님께 근심만 안겨드린 아들이었습니다. 그렇지만 저의 어머니는 성모님같은 분이셨습니다. 어머니께서는 4살 때 6ㆍ25를 겪으셨습니다. 전쟁통에 피란을 다니시고, 먹을 것이 없던 시절 굶지 않기 위해 꽃다운 12살에 남의 집 더부살이로 들어가 부엌일과 그 집의 6남매를 업어 키우셨습니다. 챙기고 남은 누룽지를 먹으며, 눈물이 마를 날 없는 고통스러운 나날을 보내시다가 구교우 집안의 아버지를 만나 입교하시고, 신앙의 힘으로 지금까지 살아오셨습니다. 글을 배운 적 없는 어머니께서는 성경 말씀이 너무나 읽고 싶으셔서 늦은 나이에 눈물을 흘리시며 악착같이 홀로 글을 깨우치셨습니다. 제가 어릴 적 화장실이 매우 좁았는데, 화장실 변기에 앉으면 코앞 벽에 삐뚤빼뚤한 글씨와 알 수 없는 맞춤법으로 빼곡하게 써진 성경 말씀이 매일 같이 붙어 있었습니다. 저는 매일 “이게 뭐냐”고 투덜거렸지만, 지금 생각하면 뭉클한 마음이 듭니다. 글씨체와 맞춤법의 발전과 함께 신앙인으로 성장했던 저의 시간은 그냥 얻어진 것이 아니라 좋은 것이 있다면, 하나라도 더 먹여 주시고자 했던 어머니의 믿음과 사랑의 결과였습니다. 늘 가장 낮은 곳에서 보이지 않게 궂은 일을 도맡아 봉사하셨던 어머니를 통해 하느님의 사랑을 배우고 느꼈습니다. 이제 저도 어머니의 거울이 되어 하느님의 착실한 도구가 되기를 바라며, 부모님께 효도하는 착한 아들이 되기를 희망합니다. “하느님께서 도와주시면 어떤 담이라도 뛰어넘을 수 있고 나의 하느님께서 힘이 되어주시면 못 넘을 담이 없사옵니다.”(공동번역성서 시편 18,29) cpbc2019.06.25
물리학·신학·철학자 모여 ‘창조’ 논의한다신학과사상학회, 27~28일 ‘무로부터의 창조’ 주제 국제 학술심포지엄 신학자, 과학자, 철학자들이 한자리에 모여 ‘창조’에 관해 논의한다.신학과사상학회(학회장 백운철 신부)는 27~28일 서울 혜화동 가톨릭대 신학대학 대강당에서 ‘무로부터의 창조- 물리학적, 신학적, 철학적 새 전망’을 주제로 제7차 국제 학술심포지엄을 개최한다. 한국가톨릭철학회(학회장 박승찬 교수)와 공동 주최하는 심포지엄에는 이탈리아, 미국, 프랑스, 독일, 인도에서 온 각 분야 전문가들이 참석한다.심포지엄은 이틀에 걸쳐 3부로 나뉘어 열린다. ‘물리학적 전망’을 주제로 다룬 제1부는 27일 오후 1시 30분에 시작한다. 바티칸 천문대 소속 천문학자 가브리엘 지온티(이탈리아, 예수회) 신부, 물리학자이자 신학자인 로버트 존 러셀(미국, 연합신학대학원) 교수, 물리학자인 이형주(미국 유니온 신학교 교수) 박사, 김도현(서강대 교수, 예수회) 신부, 띠에리 마냥(프랑스 리옹 가톨릭대 총장) 신부 등이 발표한다. ‘신학적 전망’을 다룬 제2부는 28일 오전 9시부터 시작하며 「신경, 신앙과 도덕에 관한 규정ㆍ선언 편람」(일명 덴칭거) 편집에 참여한 독일 신학자 헬무트 호핑(독일 프라이부르크대, 종신부제) 교수, 학회장 백운철(가톨릭대 신학대 교수) 신부, 물리학자이자 신학자인 프랑스와 바리캉(프랑스, 파리외방전교회) 신부, 쿠르빌라 판디카투(인도 푸네대 교수, 예수회) 신부 등이 발표자로 나선다. ‘철학적 전망’을 다룬 제3부는 같은 날 오후 1시 30분에 열린다. 박승찬(가톨릭대)ㆍ이향만(가톨릭대) 교수, 토마스 쉐틀 트렌델(독일 레겐스부르크대) 교수, 폴 클레비에르(프랑스 로렌대) 교수, 필립 클레이튼(미국 클레어몬트대 신학대 학장) 교수 등이 발표를 맡는다. 서울대교구장 염수정 추기경은 27일 심포지엄에 참석해 축사를 할 예정이다. 신학과사상학회장 백운철 신부는 “빅뱅 우주론과 다중 우주론, 세상의 영원성에 대한 중세의 논쟁, 성경과 현대 신학 등 다양한 관점에서 무로부터의 창조를 새롭게 이해하는 자리가 될 것으로 기대한다”고 말했다. 심포지엄은 동시통역으로 진행되며 신학과 철학, 물리학에 관심 있는 이들은 누구나 참석할 수 있다. 문의 : 02-740-9731, 신학과사상학회박수정 기자 catherine@cpbc.co.kr 평화신문2019.09.18
물리학·신학·철학자 모여 ‘창조’ 논의한다신학과사상학회, 27~28일 ‘무로부터의 창조’ 주제 국제 학술심포지엄 신학자, 과학자, 철학자들이 한자리에 모여 ‘창조’에 관해 논의한다.신학과사상학회(학회장 백운철 신부)는 27~28일 서울 혜화동 가톨릭대 신학대학 대강당에서 ‘무로부터의 창조- 물리학적, 신학적, 철학적 새 전망’을 주제로 제7차 국제 학술심포지엄을 개최한다. 한국가톨릭철학회(학회장 박승찬 교수)와 공동 주최하는 심포지엄에는 이탈리아, 미국, 프랑스, 독일, 인도에서 온 각 분야 전문가들이 참석한다.심포지엄은 이틀에 걸쳐 3부로 나뉘어 열린다. ‘물리학적 전망’을 주제로 다룬 제1부는 27일 오후 1시 30분에 시작한다. 바티칸 천문대 소속 천문학자 가브리엘 지온티(이탈리아, 예수회) 신부, 물리학자이자 신학자인 로버트 존 러셀(미국, 연합신학대학원) 교수, 물리학자인 이형주(미국 유니온 신학교 교수) 박사, 김도현(서강대 교수, 예수회) 신부, 띠에리 마냥(프랑스 리옹 가톨릭대 총장) 신부 등이 발표한다. ‘신학적 전망’을 다룬 제2부는 28일 오전 9시부터 시작하며 「신경, 신앙과 도덕에 관한 규정ㆍ선언 편람」(일명 덴칭거) 편집에 참여한 독일 신학자 헬무트 호핑(독일 프라이부르크대, 종신부제) 교수, 학회장 백운철(가톨릭대 신학대 교수) 신부, 물리학자이자 신학자인 프랑스와 바리캉(프랑스, 파리외방전교회) 신부, 쿠르빌라 판디카투(인도 푸네대 교수, 예수회) 신부 등이 발표자로 나선다. ‘철학적 전망’을 다룬 제3부는 같은 날 오후 1시 30분에 열린다. 박승찬(가톨릭대)ㆍ이향만(가톨릭대) 교수, 토마스 쉐틀 트렌델(독일 레겐스부르크대) 교수, 폴 클레비에르(프랑스 로렌대) 교수, 필립 클레이튼(미국 클레어몬트대 신학대 학장) 교수 등이 발표를 맡는다. 서울대교구장 염수정 추기경은 27일 심포지엄에 참석해 축사를 할 예정이다. 신학과사상학회장 백운철 신부는 “빅뱅 우주론과 다중 우주론, 세상의 영원성에 대한 중세의 논쟁, 성경과 현대 신학 등 다양한 관점에서 무로부터의 창조를 새롭게 이해하는 자리가 될 것으로 기대한다”고 말했다. 심포지엄은 동시통역으로 진행되며 신학과 철학, 물리학에 관심 있는 이들은 누구나 참석할 수 있다. 문의 : 02-740-9731, 신학과사상학회박수정 기자 catherine@cpbc.co.kr 평화신문2019.09.18
![[명작으로 보는 교회사 한 장면] (6) 자코포 주키의 ‘눈의 기적’](//cpbc.co.kr/CMS/newspaper/2020/06/rc/781560_1.0_titleImage_1.jpg)
[명작으로 보는 교회사 한 장면] (6) 자코포 주키의 ‘눈의 기적’한여름에 눈 내린 기적의 언덕에 성모 마리아 대성전을 짓다 자코포 주키, ‘눈의 기적’, 1580년경, 피나코테크, 바티칸박물관, 로마. 로마에는 4대 대성전이 있다. 바티칸의 성 베드로 대성전, 성 밖의 성 바오로 대성전, 라테란의 성 요한 대성전과 성모 마리아 대성전이다. 이 가운데 성모 마리아 대성전은 서방 교회에서 처음으로 성모님께 봉헌된 대성전이다. 예수회 출신인 프란치스코 교황은 해외 사목 방문의 시작과 마무리를 이 대성전을 찾아서 한다. 성모 마리아 대성전 바로 이 대성전을 짓게 된 동기가 오늘 소개하려는 작품에 담겨있다. 로마인들은 성모 마리아 대성전 건축과 관련한 역사, 기적, 전설 등에서 가장 많이 하는 이야기가 8월 한여름에 눈이 왔다는 것이다. 8월 4일과 5일 사이 밤에 눈이 내렸는데, 그것도 도시 전체가 아니라 대성전이 세워진 에스퀼리노 언덕 꼭대기에만 소복이 왔었다고 한다. 이야기인즉, 4세기 말 로마에 요한이라는 한 귀족이 있었는데, 나이가 들도록 자식이 없자 재산을 물려줄 곳이 없어 부인과 상의 끝에 성모 마리아께 성당을 하나 지어 봉헌하고자 했다.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 차에 꿈에 성모 마리아가 나타나 구체적인 장소를 말해 주었다는 것이다. 다음 날 아침, 부부는 꿈이 이상해서, 평소 친분이 있던 리베리우스 교황을 찾아가 꿈 이야기를 했다. 말을 듣던 교황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며, 자기도 같은 꿈을 꾸었다는 것이다. 다 함께 마리아가 꿈에서 알려 준 장소로 가보니, 눈이 하얗게 덮여 있더라는 것이다. 그곳이 바로 에스퀼리노 언덕, 지금의 대성전이 있는 자리다. 교황은 즉시 자신의 목장(牧杖)으로 눈이 내린 곳에 선을 그었다. 소개하는 작품은 바로 그 순간을 그린 것이다. 그것을 라틴어로 ‘ad Nives’(앗 니베스)라고 한다. ‘눈’이라는 뜻이다. 이 기적 이야기는 매년 8월 5일, 대성전 광장에서 하얀 꽃잎을 뿌리는 행사로 기념한다. 로마인들은 대성전을 ‘리베리우스의 성모 마리아’라고도 하고, ‘앗 니베스(눈)’라고도 한다.첫 공사는 352년, 귀족 요한의 봉헌으로 시작되었다. 그러나 오늘날 보는 것과 같은 대성전의 모습은 431년 에페소 공의회를 기점으로 개축된 결과다. 교회사에서 에페소 공의회는 성모 마리아와 관련하여 매우 중요한 결정을 한 공의회다. 신성과 인성을 갖춘 그리스도의 어머니, 곧 ‘하느님의 어머니’ 교리를 선포한 공의회다. 로마에서 성모 마리아께 봉헌된 이 대성전은 에페소 공의회를 기점으로 432~440년, 성 식스토 3세 교황의 뜻에 따라 증ㆍ개축되어 ‘성모 마리아 대성당(Basilica di Santa Maria Maggiore)’이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자코포 주키그림을 그린 자코포 주키(Jacopo Zucchi, 1541~1590)는 후기 르네상스 시대 피렌체 출신의 화가다. 그는 피렌체와 로마를 오가며 활동했고, 매너리즘적인 화풍과 함께 과거의 고전적인 화풍을 추구하며 다양한 스타일을 보여준 화가였다. 조르조 바사리의 제자로 더 많이 알려진 화가다.그는 바사리 밑에서 그림을 배우기 시작했고, 바사리가 피렌체의 베키오 궁 내 프란체스코 1세 스투디올로와 500인실의 벽화를 그릴 때 참여하기도 했다. 1570년 12월 바사리를 따라 로마로 와서 성 비오 5세 교황의 요청으로 바티칸 궁전 안에 있는 여러 소성당(성 미카엘, 성 베드로 순교자, 성 스테파노)들을 장식하는 데 참여했다. 잠시 피렌체로 돌아가 500인실의 벽화를 마무리하고, 1572년부터 로마에 정착해 페르디난도 1세 데 메디치 추기경의 궁과 별장을 장식했다. 물론 로마 귀족들의 궁과 성당, 수도원에서도 많은 일을 했다. 그가 남긴 자취는 현재 로마시 곳곳에서 볼 수 있다. 1590년대 초에 그린 마지막 작품은 코르소가에 있는 루첼라이 궁(지금의 루스폴리) 갤러리에 있다. 그는 1596년 초에 사망한 것으로 추정된다. 하느님의 어머니작품과 관련한 교회사적인 측면은 ‘하느님의 어머니’ 교리가 선포된 에페소 공의회지만, 이것은 이전부터 고개를 들기 시작한 ‘이단 논쟁’과의 긴 싸움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하다. 콘스탄티누스와 테오도시우스 황제를 거치면서 로마 제국 안에서 그리스도교가 자리 잡는 과정은 쉽지만은 않았다. 두 황제 이후, 제국은 점차 몰락의 길로 접어들고 있었고, 신앙은 다양한 문화들 사이에서 혼선을 겪고 있었다. 교회 안에서 이단 문제는 이미 박해 시대에도 등장한 바 있었다. 영지주의, 말시온주의, 몬타누스주의 등이 나왔지만, 박해의 상황이었기 때문에 교회를 위협한 것은 안의 문제보다는 밖의 문제가 더 컸다. 그러나 콘스탄티누스와 테오도시우스 이후 그 방향이 달라졌다. 그 대표적인 이단이 “성자는 성부와 똑같은 하느님이 아니라 성부에 의해 양자로 입양된 종속된 하느님”이라고 주장한 아리우스와 그 뒤를 이은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입장 논쟁이었다. 오늘 우리의 주제와 관련된 것은 후자다. 그리고 그 중심에는 알렉산드리아의 총대주교 치릴로와 콘스탄티노플의 대주교 네스토리우스가 있었다. 거기에 알렉산드리아 학파와 안티오키아 학파의 오랜 갈등도 있었다. 쟁점이 된 것은 예수의 어머니 마리아를 ‘테오토코스(Η Θεοτοκοs, 하느님의 어머니)’라고 부를 수 있느냐 없느냐에 관한 것이었다. 이 문제를 풀려면 먼저 그분의 아들 예수님에 관한 신분부터 확실히 해야 했다. 네스토리우스는 그리스도의 위격은 하나가 아니라 둘이고, 그 둘은 신격과 인격으로 독립되어 있다(이성설, 二性說)고 주장했다. 그는 성경을 통해 예수님의 신성은 만나지만, 인성은 육신을 통해 만나는데, 그것도 그분이 죽음으로써 사라진다는 것이다. 따라서 마리아는 인간 예수의 어머니는 맞지만, 하느님의 어머니는 아니라고 했다. 예수의 죽음으로 인성은 끝났기 때문이다. 인성이 끝나면서 마리아와의 관계도 끝났다고 본 것이다. 마리아는 예수님의 신성과 인성 두 위격 중 인간적 위격만 낳았다는 것(크리스토토코스, Χριστοτκο, 그리스도의 어머니)이다. 이 주장은 큰 파문을 일으켰고, 알렉산드리아의 대주교 치릴로는 즉시 반대 이론을 폈다. 그리스도의 본성은 신성과 인성으로 구별되지만, 하나의 위격으로 단일하다고 반박했다.상황이 심각하게 돌아가자, 동로마의 황제 테오도시우스 2세는 431년 에페소에서 공의회를 소집했다. 공의회는 예수님은 신성과 인성이 하나의 위격으로 존재하고, “마리아는 하느님의 어머니이시다”고 선언했다. 안티오키아 주교들은 에페소 공의회를 따라 네스토리우스에 대한 단죄를 받아들이고, 마리아는 하느님의 어머니이며 그리스도는 단일한 위격 안에서 신성과 인성을 모두 갖추고 있다는 공의회 결정을 수용했다. 그러므로 에페소 공의회는 마리아를 ‘하느님의 어머니’로 부르느냐 마느냐는 문제에서 시작하여 교리 면에서 큰 진전을 이룬 공의회였다. 공의회는 성자의 신성을 확인한 제1차 니케아 공의회를 재확인했고, 성령의 신성을 명시한 제1차 콘스탄티노폴리스 공의회에 이어 신성과 인성의 두 본성이 그리스도 안에 하나로 합쳐졌다는 교의를 확립했기 때문이다. 작품 속으로그림이 소장된 바티칸박물관 피나코테크에는 자코포 주키가 그린 같은 제목의 그림이 두 점 있다. 두 작품은 예외적인 서술과 활기를 주는 색상 표현으로, 기존의 매너리즘에서 보는 형광색에만 머무르려고 하지 않는 것 같은 인상을 준다. 흰색 하나만으로도 위치와 명도로 다양한 분위기를 드러내고, 음영은 이 역사적인 순간을 극대화한다. 눈에 띄는 것은 원근법과 공중에서 내려다보는 것 같은 관점이다. 원근법의 소실점은 저 멀리 대기 속으로 사라지는 듯하다가 위로 향한다. 마리아의 신분이 크리스토토코스에서 테오토코스로 승화되는 것을 표현한 것처럼. 김혜경(세레나, 동아시아복음화연구원 상임연구원, 이탈리아 피렌체 거주) cpbc2020.06.17

순례길 못 걷는 요즘… 하느님 안에서 ‘영적 순례’ 떠나야산티아고에서 온 편지 - 멈춰있는 까미노 인적 끊긴 까미노. 코로나19로 사라진 순례자들모두 멈춰있다. 산티아고 순례길은 지금 가는 길을 멈추고 그 자리에 서 있다. 완전히 정지되어 있다. 코로나바이러스 때문에 모두 숨을 죽이고 있다. 깊은 침묵 가운데로 정적만이 흐른다. 이런 일은 처음이다. 정말 낯설다. 사람의 발길이 끊어지니 모든 것이 낯설다. 3월 14일에는 갈리시아 지방이, 15일에는 이곳 카스티아-레온 지방을 비롯한 전체 스페인이 멈췄다. 기나긴 겨울이 지나고 생명이 꽃피는 봄이 왔건만, 만물이 움직이는 역동적인 계절이 왔건만, 까미노 위에는 아직도 멈춤의 침묵만이 흐르고 있다. 순례자들의 발걸음 소리가 침묵 속으로 사라졌다. 한겨울만 빼놓고 내내 분주했던 라바날 델 까미노 우리 마을도 조용하다. 거의 3개월 만인 6월 2일, 아침 미사 때 처음으로 여성 순례자가 성당에 찾아왔다. 정말 얼마 만인가! 너무나 반가웠다. 우리는 정말로 순례자를 환영했다. 순례자가 선물인 사실을 오늘 처음으로 절실히 깨달았다. 코로나바이러스 때문에 일정한 간격으로 떨어져서 인사만 하고 이야기를 나눴다. 나는 지금까지 여기 살고 있으면서, 순례자들을 자신 있게 초대했다. “가던 길을 멈추세요. 여기에는 용기가 필요합니다. 멈추세요. 멈춰야 보입니다. 그러면 놀라운 선물을 발견할 것이에요.” 그리고 약속한다. “아무리 시간이 없더라도 걱정하지 마세요. 날아갈 겁니다. 산티아고까지 날아갈 겁니다.” 그런데 지금 나 자신이 멈춤을 실제로 살고 있다. 나 자신이 이렇게 진짜 멈추게 될지는 몰랐다. 함께 사는 수도 형제가 말했다. “어떻게 보면 주님이 우리에게 베푼 안식년”이라고. 멋진 생각의 전환이다. 멈춤은 ‘침묵’과 같은 말이다. 공허한 부동의 침묵이 아니라 꽉 찬 멈춤의 침묵이다. 삶이 순해지고 겸허해지는 깊은 멈춤의 침묵 속에서, 우리의 근원을 생각하고 내적으로 그곳에 되돌아가는 때다. 적극적인 능동적인 멈춤이 바로 침묵이다. 수도 형제들도 내내 달려왔던 분주함을 떠나 각자 침묵과 고요함 속에서 삶의 뿌리를 향해 내적인 길을 걷고 있다. 멈춤의 침묵 가운데 나를 비롯한 모든 것이 근원으로, 만물의 뿌리로, 원천으로 돌아간다. 멈췄을 때만 우리는 걸어온 우리 길을 되돌아볼 수 있다. 앞으로만 갈 때는 보지 못한다. 아니, 볼 시간도 되돌아봐야 할 생각도 없다. 왜냐하면, 가는 데만 정신이 팔려 있었기 때문이다. 한 순례자가 이렇게 말했다. “내가 멈춰서, 지나온 길을 뒤돌아보니 곳곳에 물구덩이들이 많았다. 아~ 이 물웅덩이들이 지난날 내가 무수히 흘렸던 눈물이구나! 물웅덩이가 아니라 내가 흘린 눈물의 웅덩이구나.” 얼마나 많은 밤이 홀로 지새운 긴 밤이었나. 왜 한숨이 나는 걸까. 웃고 있어도 눈물이 난다. 실패와 고난의 굴곡을 지나왔다. 잊고 지냈던 지친 마음을 만난다. 정말 먼 길을 걸어왔구나. 한편 나 자신이 참 대견하기도 하다. 나를 위로한다.공동선 위해 돌아보고 기도해야 멈춤은 우리가 사는 사회와 세계를 깊이 보게 된다. 선진국이라는 미국이나 유럽 여러 나라가 굉장한 하드 파워와 소프트 파워를 가지고 있다고 생각을 했는데 막상 여러 가지 위기 앞에 부딪히니까 휘청거리고 있다. ‘인간 안보’라는 굉장히 중요한 화두가 던져졌다. 안보라고 하는 것을 ‘군사적 우위’에서만 생각했었다. 이제는 인류를 지켜내는 일, 인간의 생명을 지키는 일이 최우선적이며, 어떤 사회든지 그걸 지켜내기 위해서 의료와 보건 등 공공체제, 공공성의 체제가 작동을 해야 한다. 특히 공동선을 위한 정치 지도자와 정부의 헌신과 노력이 절실히 필요하다.우리는 멈췄을 때 기도하기 위해 두 손을 모을 수 있다. 우선 기도 안에서 나 자신을 위로할 수 있다. 나를 만드신 주님께서 기도 안에서 나를 위로하신다. 그리고 나를 넘어 다른 이를 위한 기도를 한다. 기도의 연대 안에서 우리는 하나가 될 수 있다. 코로나바이러스로 인해 매일 죽음의 소식을 듣는다. 그 죽음 안에서 나의 죽음도 미리 체험한다. 기도할 수밖에 없다. 나약한 인간이라는 사실을 다시금 자각하게 된다. 결국 ‘나’라는 존재는 빈손으로 이 세상에 왔다가 다시 빈손으로 이 세상을 떠날 것이다. 우리보다 먼저 앞서 근원으로 돌아가는 영혼을 위해 기도한다. 사랑하는 이를 떠나보낸 가족들의 아픔과도 함께한다. 묵주를 손에 들고 오늘도 멈춰서 투병 중인 모든 이들과 그들을 돌보는 모든 이들을 위해 기도한다. 영적 멈춤으로 다시 하느님께 걸어가라결국, 멈춤의 침묵 가운데 더 강렬하게 확신하는 것은 우리 모두 ‘순례자’라는 사실이다. 우리는 늘 우리를 기다리고 계시는 어떤 분을 만나러 가고 있다. 길이 누구인지 알고 그 길의 목적지가 어디인지를 알게 된다. 길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이분이 우리가 걸어가는 길이며 우리를 목적지인 하느님 아버지께 인도하신다. 엠마오 가는 길에서 두 제자는 이렇게 청을 한다. “저희와 함께 묵으십시오. 저녁때가 되어 가고 날도 이미 저물었습니다.”(루카 24,29) 예수님을 알아본 후 두 제자는 이렇게 서로 이야기한다. “길에서 우리에게 말씀하실 때나 성경을 풀이해 주실 때 속에서 우리 마음이 타오르지 않았던가!”(루카 24,32) 가장 암울했을 때 가장 고통스러웠을 때 가장 힘들었을 때 그리스도께서 내 옆에서 함께 걸어주셨다는 것을 깨닫는다. 순례자이신 그리스도께서 말씀하신다. “나는 아버지에게서 나와 세상에 왔다가 다시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 간다.”(요한 16,28) 우리도 하느님에게서 와서 하느님께 다시 돌아가는 순례자다. 우리 존재의 근원은 사랑이신 하느님이시다. 까미노, 곧 길은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멈춤은 우리 베네딕도회의 정주(Stability, 定住) 서원과 매우 비슷한 것 같다. 끊임없이 움직이는 ‘순례’와 한 곳에 머무는 ‘정주’가 만난다. 정주는 구체적인 한 수도원에 온전히, 그것도 죽을 때까지 머무는 것이다. 한마디로 말해서, 구체적인 공동체에 완전히 뿌리내리는 것이다. 어떤 환상이나 생각이 아니라 인내와 정성으로 구체적인 현실에 굳게 서 있는 것이다. 수도원을 방문하는 순례자들은 순례 안에서 정주를 만나고 정주 안에서 순례를 발견한다. 참으로 놀라운 경험이다. 순례란 길이신 그리스도를 통하여 근원이신 하느님 안에 내가 더욱 깊이 서 있는 정주하는 것임을, 동시에 정주는 길이신 그리스도를 통하여 근원이신 하느님을 향해 걸어가는 영적 순례임을 발견한다. 영적 멈춤은 우리 인생에서 무엇이 가장 중요한가를 알게 한다. 하느님 안에 내가 굳건히 멈춰 있을 때만 나는 모든 것을 소유한 것이다. 다시 앞을 향해 순례 여정을 걸어갈 수 있다. 하느님 앞에 겸손해진다. 하느님 안에서만이 우리는 움직이고 숨 쉬고 살 수 있다. 하느님 안에서만 우리의 생명도 죽음도 다 있다. 아빌라의 대 데레사 성녀의 기도를 우리 기도로 모신다.아무것도 너를 어지럽히지 않게 Nada te turbe아무것도 너를 놀라게 하지 마라 nada te espante 모든 것이 다 지나가지만 Todo se pasa하느님은 변치 않으시는 분 Dios no se muda인내가 la paciencia모든 것을 얻게 하리니 todo lo alcanza하느님을 소유한 사람은 quien a Dios tiene부족한 것이 아무것도 없으니 nada le falta오직 하느님으로 넉넉하도다 solo Dios basta cpbc2020.06.17

잃어버린 영혼 되찾아야 인간도 피조물도 산다[특별기고] 코로나19 사태에 돌아보는 질병의 의미 / 문종원 신부 신종 코로나바이러스로 많은 사람이 고통을 겪고 있다. 매일 늘어나는 사망자 숫자를 보면서 그것이 내 문제일 것 같아 불안하고 두렵다. 갈수록 더 큰 두려움이 매일 자라고 있다. 정부와 국민은 전에 겪어 보지 못한, 엄청난 파괴력을 지닌 이 신종 바이러스와 싸우고 있다.질병이 우리에게 주는 메시지는 무엇인가사실 인류 출현 후 지금까지 인간은 이렇게 낯선 것들과 격렬하게 싸워왔다. 이처럼 질병과 질병으로부터 오는 고통은 어느 한정된 사람만의 문제가 아니다. 우리는 모두 병에 걸리고, 심지어 어떤 사람은 매일 병에 시달린다. 그리고 결국에는 대부분 병으로 죽게 된다. 이러한 현실에 직면해 인간은 의미를 찾으려고 애쓴다. 우리 또한 코로나19 사태와 관련해 다음과 같은 거대한 질문 앞에 서보면 어떨까.질병은 무슨 의미가 있으며, 그것이 우리에게 주는 메시지는 무엇인가? 아니면 질병은 우리 삶에 전혀 의미가 없는 것인가? 그것은 어쩌다 운 없이 생긴, 의미나 목적이 없는 불행한 것인가? 질병에 대해 어떻게 생각해야 회복에 도움이 되는가? 영적으로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는가? 또한, 그리스도인들은 다음과 같은 질문으로 씨름한다. 하느님 권능이 세상에 드러난다고 할 때, 이 권능과 질병은 어떤 관계가 있는가? 우리가 병에 걸릴 때 하느님께서는 관심을 두고 보시는가?살아 있는 모든 것은 계속해서 공격을 받고 있다. 그러나 우리의 면역 체계가 계속해서 아주 빠르게, 그리고 효과적으로 바이러스, 박테리아, 암세포를 퇴치하기 때문에 우리는 몸에서 벌어지고 있는 생화학적 전투를 인식하지 못한다. 우리 몸에 방어력이 없으면 AIDS 같은 면역 결핍증에 걸리듯, 이러한 공격자들은 재빠르게 우리 몸에 침투한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건강한 사람이라도 한두 가지 병을 갖고 있다는 것이다. 건강과 병은 아주 가까운 이웃처럼 벽 하나를 사이에 두고 마주하고 있다.현대 문화 안에서 우리는 건강을 지향하고, 질병에 대해 몹시 두려워하며 할 수 있는 한 피하면서, 건강한 삶을 살려고 한다. 그러나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때때로 병은 완전함으로 나아가는 길에서 특별한 역할을 한다는 것이다. 여기서 영혼의 문제가 대두한다. 치유는 몸과 정신의 건강을 회복하는 것뿐만 아니라 타락하지 않은 건강한 영혼을 드러내는 것이다. 이러한 치유가 궁극적 치유라는 것이 신약성경의 믿음이다.물질 만능주의가 불러온 바이러스 감염병그러나 현대 사회는 영혼을 그렇게 중요시하지 않는다. 보이는 것이 전부라고 생각한다. 보이지 않는 것은 아무 가치가 없는 것으로 취급한다. 물질 만능주의, 경제 중심 사회에서 인간은 경제적 유익을 위해서 자연에 속한 피조물을 파괴하고 있다. 이러한 파괴가 결국에는 인간 파괴로 돌아온다. 현대 사회에서 유행하는 바이러스 감염병은 인간이 자연을 파괴하고 자연 영역 안으로 들어가 동물 안에 서식하는 바이러스들을 만남으로써 생긴다. 그러다 결국 인간의 탐욕이 인간 서로를 살해하는 지경까지 이르렀다.우리가 사는 이 시대는 지금까지 지구에서 일어난 것 가운데 가장 급진적인 변화를 겪고 있다. 지난 200년에 걸쳐 산업 문명은 공기, 토양, 바다, 화학 작용, 물의 순환, 그리고 열 균형에 이르는 모든 영역을 가차 없이 훼손시켜 왔다. 지구의 중요한 생명 체계를 파괴하고 있다. 생태 위기는 경제적, 인종 간의, 계층 간의 갈등 그리고 세계 곳곳에서 일어나는 전쟁과 결합하여 날로 심각해지고 있다. 서로 뒤얽혀 있어 얼핏 보아선 알 수 없는 이러한 재앙은 개개인의 발달을 크게 망가뜨리고 있다. 서구화된 사회에서 정신적으로 성숙한 성인은 거의 볼 수 없게 되었고, 그래서 지혜로운 노인도 거의 존재하지 않게 되었다. 따라서 인류 초기의 자연과의 친밀감이나 개개인의 독특한 특성, 곧 혼(soul)과 멀어진 채 우리 삶은 멀리 표류하고 있다. 생태적, 정치적, 경제적인 것에서부터 교육적이고 영적인 것에 이르기까지 전 세계적으로 지구에서 행해지는 인간 활동이 문제를 일으키고 있다.인간은 고통 겪으며 자신이 어떤 존재인지 깨달아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잃어버린 영혼을 되찾아야 한다. 그래야 인간도 살고 다른 피조물들과 어울려 살 수 있다. 몸이 치유되는 것과 똑같이, 우리가 영혼이라고 부르는 내면의 존재를 돌보는 것이 중요하다. 인류의 지혜로운 선조들은 영혼과 내면의 삶에 주의를 기울였고, 영혼을 돌보거나 배려해 왔다. 영혼을 돌보라고 말한 첫 번째 사람은 소크라테스였다. 그는 부와 명예와 명성을 얻으려고 하지 말고, 지혜와 진리를 찾고 영혼의 완성을 위해 끊임없이 노력해야 한다고 역설했다. 소크라테스의 믿음은 영혼에 대해 강조한 예수님 말씀이 떠오르게 한다. “사람이 온 세상을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슨 소용이 있겠느냐? 사람이 제 목숨을 무엇과 바꿀 수 있겠느냐?”(마태 16,26) 잘 가꿔진 정원에서 나무가 왕성하게 자라는 것처럼 영혼도 잘 돌봐야 건강을 유지할 수 있다. 그래야 영혼의 믿음이 성장하고 치유의 근원인 내면의 중심을 향하게 된다. 인간은 고통을 겪으면서 자신이 어떤 존재인지, 지구 상에서 어떻게 존재해야 할지를 깨달아 왔다. 심리적 통찰력과 영적 깨달음은 고통 없이는 거의 실현될 수 없기 때문이다. 이러한 사실은 바오로 사도가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기 때문에 삶이 온전히 변화되었다(갈라 2,19 참조)고 말한 부분에서 잘 볼 수 있다. 모든 고통이 영적, 심리적 성장으로 이끌지는 않지만, 많은 경우에 깨달음은 고통을 통해서 온다. 절망 속에서 느낀 고통도 하느님의 놀라운 은총에 의해 지혜로 변모된다. 문종원 신부(서울대교구) cpbc2020.04.01

붉은 색 도포 입은 예수 그리스도… 성화의 토착화 추구[붓을 통한 신앙 전파] 2. 성 베네딕도회 앙드레 부통 신부 부통 신부는 프랑스 야수주의를 연상시키는 강렬한 색채를 자유롭게 사용했다. 그림은 부통 신부가 안동교구 청송성당 제대 벽에 그린 ‘그리스도 왕’ 벽화. 1960년대 중반에 시작된 앙드레 부통(Andr Bouton OSB, 1914~1980) 신부의 한국 체류는 우연한 계기로 이루어졌다. 당시 예루살렘에서 벽화 작업을 하던 그는 독일 상트 오틸리엔 수도원 올라프 그라프 신부와 만나면서 한국에서의 예술 선교를 결심하게 되었다. 주로 아시아 국가의 선교를 담당했던 올라프 신부는 예루살렘 성모승천대수도원 지하성당에 전시되어 있던 부통 신부의 그림과 동판화 작업을 보고 그림을 통한 선교를 펼쳐 달라고 부탁하며 그를 한국으로 초대했다. 이를 계기로 부통 신부는 성 베네딕도회 왜관수도원에 머물며 10여 년간 전국의 성당, 수도원, 학교, 병원 등에 벽화를 제작했다.그림값 받지 않고 춤추듯 빠르게 그려 부통 신부가 한국에 온 1960년대는 한국에 진출해 있던 성 베네딕도 수도회가 1952년 왜관으로 이전하여 새로이 수도원을 건립하고 국내 교회 건축 및 교회 미술 분야에서 활약했던 시기였다. 따라서 그의 벽화 작업은 같은 시기 왜관수도원의 알빈 슈미트 신부에 의해 활발하게 진행되었던 교회 건축과 더불어 적극적으로 실행될 수 있었다. 그는 해마다 10여 점의 작품을 제작했다.부통 신부의 벽화 제작 과정을 본 주민들의 증언에 따르면 그는 본당 신부의 요청이 있을 때에 식사와 믹스커피만 대접받고 그림을 그렸으며 별도의 그림값은 받지 않았다고 한다. 부통 신부의 벽화 제작을 지켜봤던 이들은 그가 ‘마치 춤을 추듯이 빠르게 그림을 그렸다’고 증언하고 있다. 그래서 그는 힘을 들이지 않고 너무 쉽게 그림을 그린다는 평가를 받기도 했다. 부통 신부가 한국에 남긴 대표적인 벽화 작품으로는 대전 대흥동주교좌성당의 벽화 10점(현재 두 점만 남아 있음)과 청송성당의 벽화(현재 소실), 서울 프란치스코회 경당의 벽화(현재 소실) 등이 있다. 그의 작품 중 다수가 지워지거나 성당 신축으로 소멸됐고, 왜관ㆍ상주ㆍ성주 지역 약 20여 곳의 성당과 공소에 작품이 남아 있다. 다행히 프랑스 위스크수도원에 보관된 그의 유품 중에는 한국에서 제작한 벽화의 제작 과정과 완성작이 담긴 사진과 컬러 슬라이드 필름이 간단한 메모와 함께 보관되어 있어 현재 소실된 벽화의 이미지를 부분적으로나마 확인할 수 있다.앙드레 부통 신부는 성화의 토착화를 추구했다. 그는 벽화를 제작할 때 각 나라의 풍광과 현지인들의 모습을 그려 넣어 보다 적극적인 소통을 유도하고자 노력했다. 현재 남아 있는 그의 벽화에는 예수 그리스도와 성모 마리아, 성인의 모습이 모두 그의 해석에 따른 한국인 모습으로 그려졌다. 아울러 그는 교복 입은 학생들, 짧은 단발머리에 한복 차림을 한 어린 소녀들을 배경에 함께 등장시키거나 인근의 풍경을 작게 그려 넣어 성화에 현장감을 더하고자 했다. 현재 소실되었지만, 청송성당의 예수상과 가톨릭대학교 병원 성주분원 진료실의 ‘한복을 입은 아폴린 성녀상’ 등 앙드레 부통 신부가 남긴 벽화 곳곳에서 한국적인 표현으로 완성된 그의 화풍을 엿볼 수 있다. 생동감 있고 강렬한 색채 주로 사용부통 신부는 1966년 6월 7일에 축성된 청송성당 제대 벽과 창쪽 벽에 벽화를 그렸다. 성당 신축으로 소실됐지만 남아 있는 사진 자료를 통해 제대 쪽 벽에 한복을 입고 옥좌에 앉은 왕의 모습으로 표현된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재현한 벽화를 확인할 수 있다. 벽화 정중앙에 자리 잡은 예수 그리스도는 검은 머리카락에 한국인의 이목구비를 하고 붉은색 도포와 전통 신발을 신고 오색의 산을 밟고 있다. 도포 흉배(胸背)에는 한자로 王中王(왕중왕)이 세로로 쓰여 있다. 예수 그리스도의 한 손에 펼쳐 든 성경에는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라”라는 말씀을 한글로 적어 넣었다. 한글과 한자를 이용한 성경 메시지는 벽화 양옆과 하단의 가장자리에도 적혀 있다. 제대를 향하고 선 방향에서 왼쪽에는 한자로 정의(正義), 자비(慈悲), 진리(眞理), 평화(平和)가 위에서 아래로 한 단어씩 쓰여 있고, 오른쪽에는 天主의從(천주의 종), 主의羔羊(주의고양), 豫言者(예언자), 王中王(왕중왕)이 역시 같은 방식으로 나열되어 있다. 부통 신부의 벽화에는 프랑스의 야수주의를 연상시키는 생동감 있고 강렬한 색채가 주로 등장한다. 그는 고유색에 얽매이지 않고 자신의 감각에 따라 과감하게 색을 사용했다. 강렬한 원색을 거침없이 사용할 뿐만 아니라 보색대비를 이용해 명암을 처리하는 등 파격적인 색채를 구사했다. 모든 성화가들과 마찬가지로 부통 신부 역시 성경에 기초해 작품 주제를 결정했다. 그는 예수님의 어린 시절과 성모님의 일생, 성가정 그리고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신비를 주요 주제로 다루었다. 예수 부활상 주제로 한 벽화 주로 그려또한, 그는 그리스도교에 비해 압도적으로 교세가 강한 불교에 대해 깊은 관심을 가지고 이를 자신의 벽화에 융합시키고자 노력했다. 따라서 부통 신부의 벽화에 등장하는 원색 중심의 강렬한 색채에서 사찰 건축의 단청이나 탱화, 한복의 대범한 색 조합, 민속신앙에서 사용되는 색채 등과의 영향 관계를 생각해볼 수 있겠다. 부통 신부는 당시 한국인의 87%가 비그리스도교인이며 그중 다수가 불교 신자임을 고려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에서 부처의 이미지를 떠올릴 수 있도록 표현하고자 했다. 그는 불교의 덕목이기도 한 선행과 자비 그리고 영생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수 있도록, 대부분의 그리스도교 신자들이 십자고상을 선호했음에도 불구하고 예수 부활상을 주제로 한 벽화를 주로 제작했다. 그는 자신의 성화가 하느님과 인간이 서로 만나게 하는 매개체인 동시에 그리스도교의 교리를 시각적으로 설명하는 역할을 할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즉 자신의 벽화를 통해서 언어만으로는 전달하기 어려운 그리스도교의 진리와 신비를 감각적으로 체험할 수 있는 전례 공간을 이루어내고자 했다. 평화신문2019.08.07
![[명작으로 보는 교회사 한 장면] (8)엘 그레코의 ‘성 마르티노와 걸인’](//cpbc.co.kr/CMS/newspaper/2020/07/rc/782392_1.0_titleImage_1.jpg)
[명작으로 보는 교회사 한 장면] (8)엘 그레코의 ‘성 마르티노와 걸인’입고 있던 망토 잘라 헐벗은 걸인에게 주는 자선의 손길 엘 그레코(El Greco), ‘성 마르티노와 걸인’, 1597/1599, 미국 워싱턴 주 National Gallery of Art 소장. 성체성사와 나눔 실천그리스도교 신앙의 중심은 ‘성체성사’다. 성체성사가 주는 가장 큰 메시지는 ‘나눔’이다. 로마 제국에 의한 박해 시기에도 그리스도인들은 소위 ‘도무스 에클레시에’(Domus Ecclesiae, 가정 교회)에 모여, 프라치오 파니스(Fractio Panis, 빵 나눔)로 그리스도교의 생명을 이어갔다. 한 마디로 그리스도교는 태생부터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의 다락방에서 제정하신 ‘성체성사(마지막 만찬)’에 깊이 내재된 ‘나눔’을 실천함으로써 세상에서의 생명력을 드러내는 동시에 존재 이유를 상기해 왔다. 성체성사를 제정하시던 날, 주님께서는 만찬을 먼저 하지 않으셨다. 먼저 하신 것은 제자들의 발을 닦아주신 일이다. 순위를 알려주신 것이다. 이에 초대 교회 그리스도교 공동체는 ‘자선’을 공동체의 존재 이유와 동일시했다. 그리스도교 공동체는 세상 속에서 고립된 어떤 집단이 아니라, 모든 사람을 향해 열려 있는 보편적인 신앙 집단으로, 수는 적어도 온 인류 안에 흩어져 살고 있고, 그 안에서 빛과 소금으로 존재한다고 인식했다. 그리스도인은 하느님이 자신을 사랑하신 그 사랑으로 이웃을 사랑하며, 그것을 통해 하느님과 하나 되는 신앙인의 성소를 완성한다고 믿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에게 이웃 사랑은 윤리적인 덕목을 넘어 하느님의 자녀로서 그분의 생명을 사는 실존적인 의미를 지닌 것으로 간주하였다. 그리고 그것을 실천하며 가르친 탁월한 주교들이 교회가 뿌리를 내리기 시작할 때부터 있었다. 바로 같은 시대에 밀라노의 성 암브로시우스와 투르의 성 마르티노다. 엘 그레코이 작품은 엘 그레코(El Greco, 1541~1614)의 ‘성 마르티노와 걸인’이다. 1597~1599년 엘 그레코가 스페인 톨레도에 머물 때 그린 것으로 추정된다. 엘 그레코는 그리스 크레타 섬에서 태어났다. 원래 이름은 도미니코스 테오토코풀로스(Δομνικο Θεοτοκπουλο)로 스페인에서 40여 년 넘게 활동한 화가며 조각가다. ‘엘 그레코’라는 이름은 ‘그리스 사람’이라는 이탈리아식 표현이다. 그는 비잔틴 회화를 배우다가, 20세 무렵, 포스트 르네상스 미술의 중심지였던 이탈리아로 건너가 베네치아에서 티치아노, 틴토레토, 조르조네 등 베네치아 학파의 색채의 풍성함을 배우고, 코레조를 통해 명암에 의한 서정적인 분위기를 배웠다. 로마로 가서는 원색적인 느낌의 선명한 색채, 명암에 의한 극적인 대조, 특정 부위를 강조하는 듯한 인체 등 이탈리아 매너리즘 화풍을 배웠는데, 대표적으로 미켈란젤로의 작품을 접하며 신체를 조각처럼 묘사하는 법을 배웠다. 베네치아 학파와 미켈란젤로의 특징은 그의 작품에 지속적으로 영향을 미쳤다. 그는 1577년 스페인 궁정에서 유능한 화가를 구한다는 소식을 듣고 톨레도로 돌아왔지만, 펠리페 2세의 마음을 얻지는 못하고 톨레도와 마드리드를 중심으로 활동하며 종교적인 주제의 독창적인 작품을 선보이기 시작했다. 엘 그레코는 종교개혁으로 힘든 시기에 스페인 가톨릭교회의 옹호자임을 자처하며 반종교개혁의 이념이 반영된 작품을 그렸다. 그것이 ‘자선’ 혹은 ‘선행’을 주제로 한 것들이다. ‘다섯 솔라(sola, ‘오직’이라는 뜻)’로 알려진 ‘오직 성경(Sola Scriptura)’, ‘오직 그리스도(Solus Christus)’, ‘오직 은혜(Sola Gratia)’, ‘오직 믿음(Sola Fide)’, ‘오직 하나님의 영광(Soli Deo Gloria)’이라는 종교개혁의 정신에 맞서, ‘세례의 물은 지옥의 불을 끄고, 자선은 연옥의 불을 끈다’는 가톨릭교회의 오랜 가르침을 그림으로 표현했다. ‘오르가스 백작의 매장’(1586/1588)과 ‘성 마르티노와 걸인’(1597/1599)은 가톨릭교회에서 중요하게 생각하는 ‘사랑과 자선’을 실천한 사람에 대한 하느님의 관심과 그에 대한 기적을 담은 내용이다. 성 마르티노엘 그레코가 소개하는 성 마르티노(Martinus Turonensis, 316~397)는 프랑스를 대표하는 성인이다. 콘스탄티누스 황제 시절에 태어나 테오도시우스 황제 시절에 활동했던 인물이다. 투르의 주교를 지냈기 때문에 흔히 ‘투르의 성 마르티노’로 알려져 있다. 그는 헝가리 솜버트헤이에서 태어났다. 아버지가 로마군 소속 기마 부대 보조군의 고위 장교로 이탈리아 북부 티치눔(오늘날의 파비아)에 주둔하는 바람에 마르티노는 어린 시절을 파비아에서 살았고, 성년이 된 후에는 프랑스에서 살았다. 마르티노의 생애에 대해서는 같은 시대에 살았던 술피키우스 세베루스(Sulpicius Severus, 363?~420)가 기록하여 후대에 전했다. 그가 남긴 대표적인 작품이 「성 마르티노의 생애」다. 그리고 후에 세 통의 친필 편지를 포함하여 자료들을 더 보충하여 「대화 (Dialogi)」(404)로 다시 한 번 성인을 세상에 알렸다. 성 마르티노의 제자이기도 한 만큼, 그가 소개하는 성인에 관한 미담은 많은 사람의 입으로 회자되었다. 가족들 가운데 가장 먼저 세례를 받은 이야기, 오랜 군인 생활에도 불구하고 사람을 죽일 수가 없다며 무장하지 않고 전쟁의 선봉에 서기를 자처한 최초의 양심적 병역 거부자였다는 이야기, 성소를 깨닫고 프랑스 투르 지방으로 가서 삼위일체 그리스도교 신앙의 지지자였던 힐라리오를 만나 그의 제자가 되고 아리우스파 이단을 극복하도록 한 이야기, 힐라리오가 투르의 주교로 있는 동안 그가 세운 수도원을 통해 지역 복음화에 일조한(361년) 이야기 등이 있다. 그중 가장 많이 알려진 일화가 여기에 소개하는 엘 그레코 그림의 내용이다. 마르티노가 로마 군인으로 갈리아에서 복무하던 시절, 어느 추운 겨울날 아미앵의 성문에 이르렀을 때 추위에 떨고 있는 한 걸인을 만났다. 측은한 마음이 들어 그 자리에서 걸치고 있던 외투의 절반을 뚝 잘라 걸인에게 주었다. 그날 밤, 마르티노는 꿈속에서 자기가 준 외투를 걸친 예수님을 만났다. 예수님이 옆에 있는 천사에게 “마르티노는 아직 예비신자에 불과한데, 나에게 이 옷을 입혀주었다”고 말씀하시는 것이다. 그리고 꿈에서 깨어나 보니 잘라졌던 외투가 원래 모양대로 온전한 상태로 되돌아와 있는 것을 보았다. ‘성 마르티노의 기적의 망토’(cappa Sancti Martini)는 중요한 유물로 간주돼 그것을 관리하는 사제를 별도로 둘 정도였다. 그리고 이 ‘망토 지킴이’ 사제를 일컬어 작은 외투를 의미하는 단어 카펠라(capella)에서 파생된 ‘카펠라누(cappellanu)’라고 불렀다. 오늘날 경당 혹은 소성당을 말하는 영어 단어 채플(chapel)은 여기서 유래한 말이다.마르티노는 세례를 받고 은수자, 설교자로 활동하다가 371년에 투르의 주교로 임명되어 죽을 때까지 봉사했다. 주교가 된 후, 그는 여전히 남아 있는 로마제국의 신전과 제단, 우상 신상들을 제거하고, 자신의 선행과 자선과 겸손함으로 그리스도교가 뿌리내리도록 하는데 크게 기여했다. 교구 내에 수도 공동체를 세우는 일도 게을리하지 않았다. 또 죄수와 이단자들에 대한 국가와 교회의 강력한 처벌에도 반대했다. 그는 죄는 미워하되 사람을 미워해서는 안 된다는 가르침을 가장 먼저 실천한 주교였다. 작품 속으로이 작품은 성 마르티노가 망토를 잘라서 걸인에게 주는 순간을 묘사했다. 길쭉하게 왜곡된 것 같은 인물의 형태, 독특한 공간 배치, 극적이고 불안정한 색채와 강한 명암 대비로 인해 마치 조각처럼 보이는 가운데 강한 영성을 품어내는 듯한 이미지다. 매너리즘과 회화에서 조각 같은 이미지를 지향했던 미켈란젤로의 영향을 엿볼 수 있다. 공간 표현에서 원근법을 크게 강조하지 않고 추상적인 느낌이 들도록 배치한 것도 매너리즘의 특징 중 하나지만, 비잔틴 회화의 영향도 간과할 수 없을 것이다.2019년 가을, 나는 산티아고 순례길을 걸었다. 대 야고보 사도의 유해를 찾아가는 성묘길 거의 모든 도시에서 성 마르티노를 만난 것 같다. 순례자가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로 가는 여정에 투르(tours)가 있어 성 마르티노를 만나고 떠나는 것만이 아니라는 것이다. 순례의 여정 안에서 계속해서 그를 만나게 되고, 기억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리스도교는 태생부터 순교 영성, 순례 영성, 자선이 별개가 아니라는 것처럼.엘 그레코는 대부분 화가가 ‘사랑’을 의미하는 붉은색 계열을 사용하는 것과 달리, 초록색 톤으로 쓰고 있다. 초록은 ‘희망’이다. 그는 그리스도인의 ‘자선’이야말로 일그러진 우리 시대의 유일한 ‘희망’이라고 말하고 싶었던 것 같다. 엘 그레코(El Greco), ‘성 마르티노와 걸인’, 1597/1599, 미국 워싱턴 주 National Gallery of Art 소장.김혜경 (세레나, 동아시아복음화연구원 상임연구원, 피렌체 거주) cpbc2020.06.30
![[교부들의 사회교리] (30)난민에 대한 사랑](//cpbc.co.kr/CMS/newspaper/2019/07/rc/757969_1.0_titleImage_1.jpg)
[교부들의 사회교리] (30)난민에 대한 사랑 최원오 신부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에는 헐벗고 집 없는 사람들이 넘쳐납니다. 수많은 전쟁 포로들이 우리 집 문을 두드리고 있습니다. 외국인들과 추방당한 이들도 적지 않으니, 그 울부짖음을 어디서든 들을 수 있습니다. 그들은 하늘 아래 허공을 집으로 삼고, 처마 아래와 골목길과 외딴 공터를 거처로 삼습니다. 그들은 부엉이나 올빼미처럼 폐허 속에 웅크립니다. 옷이라고는 구멍 난 누더기이며, 할 일이라곤 자비로운 이들의 선의를 바라는 것뿐입니다. 식사라고는 먼저 온 사람들이 떨어뜨리는 부스러기요, 음료는 동물들과 뒤섞여 마시는 샘물입니다. 잔은 그들의 손 움큼이요, 창고는 주머니도 없이 주워담아야 하는 그들의 옷자락이고, 식탁은 웅크린 무르팍입니다. 침대는 맨땅이요, 목욕탕은 하느님께서 모두에게 주신 아무런 가림막도 없는 강이나 웅덩이입니다. 이 야만적인 떠돌이 생활은 처음부터 시작된 것이 아니라, 그들의 불행과 가난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단식하는 그대, 이 사람들을 도와주십시오. 그대의 불행한 형제들에게 자비를 베푸십시오. 그대의 배에서 덜어낸 것을 가난한 이들에게 주십시오. 하느님에 대한 두려움이 공정한 정의가 되게 하십시오. 그대의 탐식과 그대 형제들의 굶주림, 이 두 가지 상반되는 악을 그대의 지혜로운 절제로 치유하십시오.” (니사의 그레고리우스, 「사랑해야 하는 가난한 이들」 1,5-6)이 세상의 떠돌이들가난과 폭력에서 벗어나기 위해 고향과 조국을 떠난 이들이 세상 곳곳에서 고달픈 피난살이를 이어가고 있다. 셔츠 한 자락으로 어린 자녀를 품어 안고 가로지르기에는 이 세상의 물살과 장벽이 너무 거칠고 가파르다. 대한민국은 난민에게 가장 야박한 국가 가운데 하나다. ‘글로벌 대한민국’을 내세우면서도 난민들의 비극은 언제까지 딴 세상 남의 일이어야 하는가? 니사의 그레고리우스(335~394) 교부는 이 문제에 대한 분명한 해답을 준다. 인간다운 권리를 누리지 못하는 난민들을 맞아들이고 도움을 베풀되 우리 힘으로 해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의 단식으로 그들의 배고픔을 덜어주고, 우리의 검소함으로 그들의 궁핍을 채워주며, 우리 배와 마음에 가득한 것들을 덜어내어 가난한 이들을 구제하자는 것이다. 이 자비의 실천은 남에게 떠넘길 수 없을뿐더러, 반드시 우리의 단식과 절제, 우리의 희생과 연대를 요구한다.우리가 맞서야 하는 대상은 난민이 아니라 탐욕우리 신앙의 두 기둥은 성경과 성전(聖傳)이다. 외로운 떠돌이의 벗이 되어 주시고 가난한 나그네와 당신을 동일시하시는 주님의 성경 전통과, 가난과 전쟁에 떠밀린 난민과 외국인들을 주님처럼 맞아들이고 환대하는 교부 전통에 맞서서 난민 반대를 외치며 노골적으로 거부하는 일은 그리스도인이라는 이름을 달고는 할 수 없는, 그리스도에 맞서는 행위이다. 난민들은 더 이상 외국인도 아니고 이방인도 아니다. 성도들과 함께 한 시민이며 하느님의 한가족이기 때문이다.(에페 2,19) 이주민들은 국내에 침투한 적이 아니라, 더불어 살아가야 하는 새로운 가족, 새로운 백성이다. 정말 우리가 맞서 싸워야 할 대상은 가냘픈 희망을 움켜쥐고서 낯선 세상에 뿌리내리려 몸부림치는 이주민들이 아니라 우리 안에 이글거리는 불의와 탐욕, 부정과 부패임을 그레고리우스는 일깨워준다.최원오(빈첸시오, 대구가톨릭대 유스티노자유대학원장) 평화신문2019.07.16

참된 평화·통일 기도하며 구현한 대희년 정신[한국전쟁 70년, 갈등을 넘어 화해로] (18)2000년 새날 새삶을 여는 미사 2000년 대희년을 맞아 강원도 철원군 월정리역 광장에서 춘천교구 주최로 열린 민족의 화해와 일치를 위한 기도의 날 전국대회는 과거사를 공동 참회하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이 땅에 참된 평화와 통일이 이뤄지길 기도하는 자리였다. 가톨릭평화신문 DB 한국 교회가 2000년 대희년을 앞두고 던진 화두는 ‘대희년의 정신을 어떻게 구현해 새로운 모습으로 거듭날 수 있을까’였다. 여기에는 민족의 화해와 용서도 포함돼 있었다.한국 주교회의는 1998년 10월 가을 정기총회에서 희년 정신을 구현하기 위해 ‘새날 새삶’ 운동을 전개하기로 했다. 이 운동의 네 가지 기본 틀은 △개인 차원의 ‘나부터 새롭게’ △가정 차원의 ‘참된 가정 이루기’ △사회 차원의 ‘좋은 이웃 되어주기’ △민족과 국가 차원의 ‘함께 가요 우리’였다. 특히, 민족의 화해를 이루고 함께 가겠다는 한국 교회의 노력과 의지는 2000년 6월 25일 강원도 철원군 월정리역 광장에서 봉헌된 민족의 화해와 일치를 위한 기도의 날 전국대회를 기점으로 들불처럼 번져갔다. 새날 새삶을 여는 미사이날 미사가 시작되기 전 50년 전 전쟁이 발발했던 시각(새벽 4시)에 맞춰 평화의 종이 울려 퍼졌다. 평화의 종이 50차례 울릴 때마다 미사 참여를 위해 자정부터 월정리역 광장에 모인 7000여 신자들은 프란치스코 성인의 ‘평화의 기도’로 응답했다. 한반도에 진정한 평화가 깃들기를 바라는 마음은 제대를 비롯한 곳곳에 스며 있었다. 전국 각지에서 퍼온 흙 250부대로 쌓은 ‘평화의 제대’에서 미사가 봉헌됐다. 제단에는 산불로 타버린 남한의 소나무와 북한산 주목을 엮어 만든 5m 크기의 대형 십자가가 우뚝 서 남북이 하나가 됨을 상징적으로 드러냈다. 평화의 종 또한 ‘칼을 쳐서 보습을 만들고, 창을 쳐서 낫을 만드는’(이사 2,4) 성경 말씀에 따라 한국전쟁 때 사용한 포탄과 탄피를 녹여 만들었다.미사는 공동 참회 예식으로 시작했다. 주교단과 사제단, 신자들은 한국 교회가 200년 역사 속에서 저지른 과오를 고백했다. 한국 교회가 분단과 냉전, 독재정권 하에서 교회의 안위만을 우선한 처신, 가족 이기주의와 무관심, 약자에 대한 냉대, 참 신앙인답게 살지 못한 점 등을 공개적으로 참회하고 하느님께 용서를 청했다. 춘천교구장 장익 주교는 미사 강론을 통해 “우리가 예수님을 닮은 참된 인간애로 살아갈 때 남북이 서로의 담을 헐어버리고 하나의 새로운 민족으로 다시 태어날 것”이라며 “우리가 먼저 나를 내어주는 사랑의 삶으로 바꿔나가자”고 호소했다. 김수환 추기경은 “통일의 길은 우리 마음에서부터 열려야 한다”며 “평화 통일을 위해 그리스도를 닮은 자기 희생과 헌신적인 사명감을 갖자”고 당부했다.김수환 추기경을 비롯한 14명의 주교와 신자들은 미사 끝 무렵 동이 트는 북녘 하늘과 땅을 향해 십자가를 그으며 하느님의 이름으로 북녘 동포들을 축복했다. 이날 미사는 남북한이 서로 화해하고 용서하며 이 땅에 희년 정신을 구현하는 첫걸음을 뗀 역사적인 순간이었다. 감격에 겨워 눈물을 흘리는 이들도 적지 않았다. 우리 민족이 지난 50년간 가슴 속에 품었던 원한을 털어내고 화해와 평화의 새날 새삶을 여는 미사는 많은 이들에게 큰 감동을 줬다. 한반도 평화를 한마음으로 기도한 보편 교회민족 화해와 일치를 위한 기도의 날 전국대회가 열리기 전부터 한반도에는 평화의 훈풍이 불어오고 있었다. 같은 해 6월 13일 평양에서 김대중(토마스 모어) 대통령과 김정은 국방위원장의 역사적인 만남이 이뤄져 6ㆍ15 공동 선언이 발표됐다. 종교계와 시민사회도 대결과 반목으로 일관해온 50여 년의 분단 역사를 허물고 화해와 협력을 향한 첫걸음을 시작했다는 점에서 일제히 환영의 뜻을 표명했다. 한국의 주교들도 정상회담이 민족의 참다운 화해와 통일의 물꼬를 트는 계기가 되기를 기원했다. 남북 정상회담을 앞두고 서울대교구장 정진석 대주교는 북한 방문에 대한 희망을 피력하기도 했다. 정 대주교는 2000년 5월 23일 서울대교구 주교좌 명동대성당에서 봉헌된 주님 부활 대축일 미사에서 “평양교구장 서리의 직분을 갖고 있으면서도 서울에서만 대축일 미사를 봉헌해 아쉽다”며 가까운 시일 내에 평양에서 미사를 봉헌하는 것이 성사되도록 하느님께 기도하고 있다”고 밝혔다. 성 요한 바오로 2세 교황도 역사적인 남북 정상회담의 성공을 기원하는 특별 담화를 발표했다. 성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은 그해 6월 11일 바티칸에서 주일 낮 삼종기도를 마치고 발표한 특별 담화를 통해 “남북한 간의 대화를 지지하는 모든 사람과 함께 회담 성공을 기원한다”며 “남북한 간 대화와 교류가 양측 주민들의 화해와 반세기 이상 헤어져 있던 이산가족들의 재회, 한반도 전체의 안정과 번영을 촉진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한다”고 말했다. 교황이 특정 국가의 정상회담과 관련해 특별 담화를 발표하는 것은 극히 이례적인 일로, 이는 한반도의 평화와 통일에 대한 교황의 각별한 관심을 반영하는 것이었다. 성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은 1984년 103위 시성식과 1989년 세계성체대회 때 방한해 분단의 현장을 직접 목격하고 한반도의 평화를 기원한 바 있다.멀고도 가까운 한반도 평화민족 화해와 일치에 대한 열기는 쉽사리 사그라지지 않았다. 이날 전국대회를 통해 한국 교회는 민족의 화해와 일치를 위해 북녘 동포를 돕는 사랑을 구호가 아닌 구체적 실천으로 표현해 나갈 것을 다짐했다. 미사 헌금은 북한 동포 돕기를 위해 사용됐으며, 이날 행사에서 한국 교회는 북녘 땅 3개 시·9개 도와 결연을 맺고 대북지원사업을 다채롭게 펼치는 계기를 마련했다. 또한, 행사를 기점으로 주교회의 민족화해위원회 위원들이 북한을 직접 방문하고, 대북지원 사업 창구 단일화 방안을 모색하는 등 한국 주교회의 차원에서 대북지원 사업을 활발히 펼치기 시작했다. 그 성과로 각종 씨앗과 의료물품 보내기, 옥수수 2000t 지원 등 적극적이고 폭넓게 사업을 전개했다. 민족화해센터 설립도 대희년 다음 해인 2001년에 결정됐다.행사를 주최한 춘천교구는 후속 사업으로 교구 모든 본당에 ‘남북 한 식구 한 삶 위원회’를 조직, 매달 25일에 민족 화해와 일치를 위한 미사를 봉헌하고 있다. 또 ‘한솥밥 한식구’운동 등 북녘 동포 돕기 사업을 지금껏 이어오고 있다. 하지만 한반도 평화의 기류는 오래가지 못했다. 2002년 6월 29일 북한의 북방 한계선 침범과 기습 공격으로 교전이 발생해 대한민국 해군 6명이 전사하고 18명이 부상하는 제2연평해전이 일어났다. 이어 2006년 10월 9일 북한의 첫 핵실험, 2008년 금강산 관광객 박왕자씨 피살사건, 2010년 연평도 포격 등으로 남북 관계는 급격히 경색됐다. 남북 교류는 줄어들고 북한에 대한 인도적 식량 지원마저 단절될 위기에 놓였다. 하지만 한국 교회는 대북 지원과 민족의 화해와 일치를 위한 기도 운동을 계속하며 평화에 대한 희망의 끈을 놓지 않았다. 백영민 기자 heelen@cpbc.co.kr cpbc2020.05.27
![[수도 전통에 따른 렉시오 디비나] (18)귀고의 영적 사다리](//cpbc.co.kr/CMS/newspaper/2019/12/rc/768712_1.2_titleImage_1.jpg)
[수도 전통에 따른 렉시오 디비나] (18)귀고의 영적 사다리독서·묵상·기도·관상 순으로 하는 성독 허성준 신부 렉시오 디비나(Lectio Divina)는 수도승들에게 중요한 영적 수행 가운데 하나였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우리는 초기 수도승들이 어떻게 구체적으로 그러한 수행을 했는지 알 수 없다. 왜냐하면, 렉시오 디비나 수행에 대해 많은 수도 교부가 강조했지만, 그것을 구체적으로 언급한 문헌들을 찾아볼 수 없기 때문이다. 아마도 그 당시 수도승들은 누구든지 렉시오 디비나 수행에 대해서 너무나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따로 그것을 구체적으로 설명하는 자료들을 남기지 않았던 것 같다. 그러나 다행스럽게 중세를 거치면서 성독에 대한 중요한 자료 하나를 발견하게 되었다. 12세기 카르투시오회의 제9대 원장이었던 귀고 2세(?~1188)는 그의 저서 「수도승의 사다리」(The Ladder of Monks)에서 매우 체계적이고 일목요연하게 렉시오 디비나를 설명하였다. 그러므로 렉시오 디비나를 언급할 때 귀고의 문헌은 매우 중요하며, 렉시오 디비나에 대한 많은 글은 거의 귀고의 개념을 직ㆍ간접으로 인용하고 있다. 귀고는 렉시오 디비나를 지상에서 천상으로 올라가는 ‘영적 사다리’에 비유하면서 다음과 같이 네 개의 단계, 즉 △독서(Lectio) △묵상(Meditatio) △기도(Oratio) △관상(Contemplatio)의 단계로 설명하였다. 이러한 과정은 수도승들을 지상에서 천국으로 오르게 하는 하나의 영적 사다리를 만들어 준다고 보았다. 영적 사다리의 첫 번째 단계인 ‘독서’는 복된 삶의 감미로움을 추구하는 단계이다. 두 번째 단계인 ‘묵상’은 그것을 깨닫는 단계이며, 세 번째 단계인 ‘기도’는 그것을 청하는 단계이고, 마지막 네 번째 단계인 ‘관상’은 그것을 맛보는 단계를 말한다. 귀고는 이것을 쉽게 음식의 비유로 설명하였다. 독서는 음식 자체를 입에 넣는 단계이고, 묵상은 그것을 씹어 분해하는 단계이다. 그리고 기도는 그것의 맛을 느끼는 단계이고, 관상은 그것으로 인해 기쁘고 새롭게 되는 감미로움 그 자체를 말한다. 귀고 2세는 이러한 단계들이 서로 긴밀히 연결되어 있음을 지적하였다. 묵상 없는 독서는 쉽게 메마름에 떨어질 수 있고, 독서가 없는 묵상은 쉽게 오류에 빠질 수 있다. 그리고 묵상 없는 기도는 냉담해질 수 있고, 기도 없는 묵상은 참된 영적인 열매를 맺을 수가 없다. 기도가 열정적일 때 관상에 이르는 것이지, 기도 없이 관상에 이르는 경우는 거의 희박하고 그것은 기적에 가깝다고 보았다. 귀고는 독서의 단계를 하느님의 말씀을 듣는 단계로 보았고, 묵상과 기도 그리고 관상의 단계는 하느님 말씀에 대한 응답의 단계로 보았다. 이것은 기도의 리듬인 들음과 응답의 관계를 잘 함축하고 있다. 비록 그가 렉시오 디비나에 대한 점진적인 발전의 단계와 그리고 각 단계의 긴밀성을 언급했지만 이러한 단계가 영성생활에서 반드시 필연적으로 어떤 연속적인 단계로 적용되지는 않는다는 것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모든 사람이 반드시 독서의 단계에서 묵상의 단계로 그리고 기도와 관상의 단계로 나아갈 수 없음을 귀고도 인정하였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이러한 단계들이 렉시오 디비나 수행을 하는 수도자로 하여금 성경 안에 현존하시는 하느님과의 깊은 만남을 가능케 하였다는 사실이다. 이러한 면을 직시할 때, 우리는 수도자들이 성독 수행 안에서 하느님과의 깊은 만남을 통해 어떻게 자신들의 삶을 풍요롭게 하였는가를 조금이나마 알 수 있다. 허성준 신부 (성 베네딕도회 왜관수도원) 평화신문2019.12.11
![[명작으로 보는 교회사 한 장면] (1) 루카 조르다노의 ‘세네카의 죽음’](//cpbc.co.kr/CMS/newspaper/2020/05/rc/778675_1.1_titleImage_1.jpg)
[명작으로 보는 교회사 한 장면] (1) 루카 조르다노의 ‘세네카의 죽음’ 폭군 네로에 맞선 거장 철학자, 죽음 앞에서도 당당 루카 조르다노, ‘세네카의 죽음’(1684년), 캔버스에 유화(155×188cm), 루브르박물관, 파리. ‘명작으로 보는 교회사의 한 장면’이라는 주제로 교회 역사에서 의미 있는 순간이 되었던 한 장면에 머물러 이야기를 나누어 보려고 한다. 가능한 연대기 순으로 하겠지만 때로는 현재 우리에게 필요한 것과 맞추어 과거의 그 순간을 꺼내 보기도 하겠다. 역사는 흐르는 것이라, 흘러온 만큼 또 흘러갈 것이기 때문이다. 코로나19는 발전을 향해 무한 질주하던 현 인류에게 ‘공동의 집’ 지구가 힘들다고, 그만 달리라고 제동을 건 사건이라는 생각을 해본다. 불편해진 여러 가지 상황이 그대로 생활이 될 공산이 커지고 있다. 날마다 늘어나는 코로나19에 감염된 확진자와 사망자에 대한 정보를 이름이 아닌, 숫자로 확인하는 일상에서 생사의 경계에 선 우리가 오늘 무엇을 해야 할지 이정표가 되어주는 그림이 있어 소개한다. 이것은 또 네로 황제의 그리스도교 박해의 정점에서 일어난 한 사건에 주목하고 있어 그 의미가 더욱 크다고 하겠다. 화가 루카 조르다노 프랑스 파리 루브르박물관에 소장된 루카 조르다노(Luca Giordano, 1634~1705)의 ‘세네카의 죽음’이다. 철인의 죽음을 받아들이는 초연함과 그의 주변에서 한 마디도 놓치지 않으려는 듯한 제자들의 움직임이 큰 울림을 주는 작품이다. 그림을 그린 루카 조르다노는 바로크 시대 나폴리학파의 대표 화가다. 알려진바, 르네상스의 중심지는 피렌체이고 포스트-르네상스의 중심지가 로마라면 1600년대 바로크의 중심지는 나폴리였다. 카라바조, 존 로렌조 베르니니는 당시 나폴리의 분위기를 대변하는 인물이다. 그는 “Luca Fapresto”(루카 파프레스토), 즉 ‘루카는 빨리하는 사람’이라는 별명을 가졌다. 아무리 큰 제단화라도 하루 이틀을 넘기지 않을 만큼 신속하게 잘 그렸다고 한다. 라파엘로, 티치아노, 베로네세, 피에트로 다 코르토나는 물론 카라바조까지 훌륭한 선배들의 영향을 여러모로 받아 화사하면서도 묵직한 자신만의 화풍을 만들었다. 주제도 성경과 신화, 역사적인 사건 등 가리지 않고 화폭에 담았다. 그는 3000점이 넘는 작품을 남겼고 나폴리, 로마, 피렌체, 마드리드, 파리 등 곳곳에 있다. 루브르에만도 ‘세네카의 죽음’ 외에 ‘동정녀의 결혼식’(1688), ‘목동들의 경배’(1688), ‘막달레나에게 나타나신 그리스도’ 등 9점이 있다. 스토아학파의 철인(哲人) 작품 속에 등장하는 세네카(Lucius Annaeus Seneca, B.C.4~A.D.65)는 키케로(Cicero, B.C.106~43)와 함께 로마 철학을 대표하는 인물이다. 1세기 중엽 대표적인 스토아학파 철인(哲人)으로 폭군 네로의 스승이기도 하다. 그는 스페인 코르도바에서 태어나 일찌감치 로마의 정계로 진출하여 제국의 말단 공무원부터 원로원의 의원이 될 때까지 관직을 두루 거쳤다. 그 과정에서 다섯 명의 황제를 경험하였다. 아우구스투스, 티베리오, 칼리굴라, 클라우디우스, 그리고 네로다. 그는 연설을 잘했고, 훌륭한 연설로 사람을 움직이는 자를 황제들은 싫어했다. 폭군 칼리굴라는 그의 목숨을 노렸고, 황제가 먼저 살해당했다. 클라우디우스는 조카딸과 간통했다는 혐의로 그를 코르시카로 추방했다. 하지만 그는 거칠고 힘든 환경 속에서 자연과학과 철학에 더욱 정진했다. 8년 만에 네로의 어머니 아그리피나에 의해 복권되어, 54년, 네로가 16살에 황제가 되자, 그는 황제의 스승이며 로마의 최고 지성인으로 제국의 실질적인 통치자로 부상하였다. 세네카가 네로에게 영향력을 발휘하던 때, 로마 제국은 근래 없는 평화의 시기를 맞았다. 그 시기에 국가 재정과 법률 개혁을 단행했고, 문화적으로도 라틴 문학이 꽃을 피웠다. 네로는 스승의 가르침대로 선정을 베풀어 주인이 노예들을 함부로 다루지 못하게 했다. 그 시기 네로도 시와 음악에 자질을 보이던 밝은 소년이었다. 나름대로 시도 잘 썼다고 한다. 훗날 로마를 불태운 것이 시상이 떠오르지 않았기 때문이라는 이야기가 나올 정도였다. 그런 네로를 변하게 한 것은 어머니가 정치적인 맞수가 되면서부터였다. 59년, 21살이 된 네로는 존속살해라는 비극을 시작으로 폭군이 되어갔다. 스승의 충고는 거슬렸다. 세네카는 ‘관용’이 로마 황제의 자질이라는 편지를 남기고 정계를 떠났다. 하지만 네로의 광기(狂氣)는 64년의 로마 방화와 그리스도인 박해로 이어졌고, 세네카는 황제 암살 모의에 동조했다. 네로 역시 가까이 있는 세네카보다 멀리 있는 세네카가 더 두려웠던 참이다. 연설의 힘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황제 암살 모의가 발각되고, 세네카는 황제로부터 자결 명령을 받아야 했다. 그때 세네카의 나이 69세였다. 세네카는 철학에서 흔한 주제인 존재론이나 인식론 등에는 관심이 없었다. 스토아 철학은 금욕적인 삶과 이성을 발휘하여 자연과 세계의 법칙에 따르는 것이 특징이다. 더욱이 살아온 시대가 힘겨웠던 만큼 세네카는 주어져 버린 인간의 삶과 도덕에 천착했다. “인생살이처럼 어려운 것도 없다. 그래서 우리는 사는 법을 배울 수밖에 없다”고 말하며, 많은 실용서를 내놓았다. 「서간집」, 「대화」 등의 저서와 「분노에 대하여」, 「행복한 삶에 대하여」, 「인생의 짧음에 대하여」 등의 논술서 등이다. 그의 저서들은 훗날 단테와 ‘제2의 세네카’로 불린 몽테뉴를 비롯하여 루소, 흄 등에 이르기까지 두루 영향을 미쳤다. 화를 다스리는 법과 덕에 관한 것, 죽음에 관한 내용은 그리스도교의 가르침과 크게 다르지 않다. 그의 종교관과 도덕철학은 네로 이후 계속되는 제국의 박해 속에서 많은 호교론자들에게도 영향을 미쳤다. 최후의 순간에도 시대의 진리 전해 이제 작품으로 들어가 보자. 빛은 현자를 비추고 있다. 그가 중심이다. 그는 광풍이 몰아치는 시대에 치열하게 살았고 그 속에서 사색했다. 그렇기에 평소 가르치던 대로 “죽음을 당당하게 받아들이는” 모습이다. 원로원으로부터 ‘로마의 적’이라는 선언을 받고 비 오는 새벽에 신하의 집으로 도망갔다가 죽은, 전혀 황제답지 못했던 네로의 죽음과는 대조적이다. 배경은 시대를 반영하듯 사방이 어둡다. 어둠 속에서 제자들은 서둘러 현자에게 집중하고 있다. 스승의 허름한 몸은 영적인 힘으로 지탱되고, 그의 가르침은 계속된다. 그래서 이 작품의 부제가 ‘철인의 작별’이다. 배경 속 기둥은 스토아철학의 흔들리지 않는 자세를 의미한다. 왼쪽 끝, 붉은 옷을 입고 공책에 뭔가 열심히 받아 적고 있는 사람 뒤, 어둠 속에 있는 사람은 황제의 자결 명령서를 들고 온 사람으로 보인다. 그의 담담한 표정이 앞에서 벌어지고 있는 상황과 대조를 이룬다. 노쇠한 철인의 죽음 앞에서도 시대의 어둠을 걷어내려는 듯 젊은 학도들의 열기가 발목 동맥을 자르고 밴드를 쥔 의사의 손에 들어간 힘과 복받치는 슬픔을 압도한다. 루카 조르다노, ‘세네카의 죽음’(1684년), 캔버스에 유화(155×188cm), 루브르박물관, 파리. 김혜경(세레나, 동아시아복음화연구원 상임연구원, 피렌체 거주) cpbc2020.05.06

손목 수술 후 마주한 십자가 고통… 깊어진 주님 사랑을 화폭에손목 골절로 붓을 놓았던 심순화 화백의 부활 심순화 작 ‘라뿌니’, 2018년. 심 화백이 손목 수술을 받고 시련을 이겨낸 후 그린 작품으로 마리아 막달레나가 주님의 빈 무덤 앞에서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만나는 장면을 담고 있다. 새들은 바람이 강하게 부는 날 집을 짓는다고 한다. 그래야 무너지지 않기 때문이다. 이처럼 시련으로 담금질한 삶은 비록 질그릇같이 투박하지만 아름답다. 순탄한 인생은 쉬이 고비에 좌절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교회에도 ‘고통 없이 영광 없고, 죽음 없이 부활 없다’는 말이 전해온다.20년째 한국화풍의 성화를 그려온 심순화(가타리나) 화백에게도 뜻하지 않은 시련이 닥쳤다. 4년 전, 오른 손목뼈와 관절이 부러져 붓을 놓아야만 했다. 재활과정에서 고통의 영성을 깨달은 그는 다치기 전보다 더 왕성한 작품 활동을 하고 있다. 어두운 밤 같은 고통에서 벗어난 심씨를 만났다. 이학주 기자 goldenmouth@cpbc.co.kr서울 용산에 있는 당고개순교성지 하늘정원은 어머니의 품처럼 평화롭고 아늑했다. 넓게 깔린 푸른 잔디와 고풍스러운 한옥이 영혼의 샘터같이 평온하다. 심 화백은 한옥 툇마루에 앉아 고요를 즐기고 있었다. 그는 해마다 주님 부활 대축일 성화를 담은 도록을 부활 선물로 건넸다. 그의 그림은 친근했다. 갓 쓰고 흰 두루마기를 입은 주님과 고운 한복 차림인 성모 마리아 등. 성경 속 인물들이 한국 전래 동화에 주인공으로 나올법한 모습으로 그려졌다. “저는 어린이들을 무척 좋아해요. 성화 작업도 어린이들이 신앙을 더 친숙하게 받아들이게 하려고 시작했죠. 그래서 우리와 같은 모습으로 그렸어요. 성모님을 보세요. 따뜻하고 선한 우리 어머니들을 닮았죠.” 그의 그림 배경색은 대부분 밝고 환한 노란빛이다. 하느님의 빛, 희망의 색이다. 단아하고 따스한 그의 성화는 국내뿐 아니라 해외에서도 높은 평가를 받는다. 베네딕토 16세 교황과 프란치스코 교황이 그의 작품을 소장하고 있다. 그림을 인연으로 두 교황을 알현한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성미술 화가로 사는 삶이 순탄하지만은 않았다. 2016년 4월 겪은 사고로 전환점을 맞았다. 의정부교구의 한 성지에서 야외 작업을 하던 때다. 오랜 시간 의자에 올라 담벼락에 문양을 그리다 지친 터였다. 의자에서 내려오다 그만 발을 헛디디고 말았다. 떨어지며 손으로 땅을 짚는 순간, 손목뼈와 관절이 으스러졌다. 태어나서 처음 느끼는 강렬한 고통이 팔을 휘감았다. 하필 다친 손목이 오른쪽이었다. 고통에 신음하며 병원에 실려가던 중 불안과 절망이 엄습했다. ‘다시는 그림을 못 그리게 되는 걸까?’ 불현듯 그해 1월에 성 베네딕도회 왜관수도원이 의뢰한 성모화가 떠올랐다. 독일 뮌스터슈바르작수도원 설립 1200주년 기념 선물이었다. 죄송함과 자책감에 가슴이 아려왔다. 수술 후 손목에는 뼈를 고정하기 위한 나사못 5개가 박혔다. 못 자국을 보니 문득 십자가에 매달린 예수님이 떠올랐다. 손목에서 시작된 통증은 팔을 타고 몸 전체로 퍼졌다. 그는 고통에 몸부림치며 자비의 기도를 간절히 바쳤다. 그러던 중 비로소 깨달았다. 지금 나도 이렇게 아픈데, 십자가에 못 박힌 주님의 고통은 감히 상상조차 못 하겠구나. 그토록 그분이 우리 인간을 사랑하셨구나.“사실 다치기 전에는 예수님께서 고통스러워하거나 피 흘리는 모습을 별로 그리고 싶지 않았어요. 사실 그릴 수가 없었다는 게 맞을 것 같아요. 내가 느껴보지 못했으니, 그 고통을 그릴 자신이 없었던 거죠.” 사고로 성화에 대한 그의 열망은 시커멓게 퉁퉁 부은 손목 앞에 차갑게 식었다. 몸 일부가 아니라 멋대로 갖다 붙여놓은 막대기인 듯, 팔은 감각이 없었다. 제구실을 못 하는 오른손이 야속하기만 했다. 붓을 잡을 엄두가 나지 않았다. 그러나 독일 수도원에 보낼 성모화 생각이 머리에서 떠나지 않았다. 약속을 지키고 싶다. 그런데 이 손으로 과연 해낼 수 있을까. 난생처음 왼손으로 선 긋는 연습을 시작했지만 녹록지 않았다. 완치까지 5개월은 더 남은 시점. 다시 오른손에 기대를 걸어보기로 했다. 그리고 성모 마리아께 청했다. 제 손은 몽당연필이 됐으니 성모님이 손을 잡고 함께 그려달라고. 움직이지 않는 손가락 위에 살짝 걸친 붓은 힘없이 떨어지기 일쑤였다. 붓질한 지 5분 만에 기진해 쓰러질 때도 잦았다. 그때마다 찢어질 듯한 통증에 온몸이 떨렸다. 속에서는 울음이 올라왔다. 과연 이 고통의 끝이 올까. 매일 밤 엎드려 주님과 성모님께 기도하며 마음을 다잡았다. “여기서 못 해내면 더는 그림을 그릴 수 없다는 생각으로 힘을 짜내 그렸습니다. 그리하니 평소 속도대로라면 두세 달 걸렸을 작업을 다친 손으로 한 달여 만에 완성할 수 있었어요. 가로 130cm, 세로 160cm가 넘는 작품을 말이죠.”이렇게 완성된 ‘자비의 모후화’는 심 화백에게 다시 그림을 그릴 수 있다는 희망을 심어줬다. 기적이자 부활이었다. 기쁨에 찬 심 화백은 가장 먼저 죽음을 이겨낸 주님 부활을 화폭에 담았다. 마리아수도회가 의뢰한 ‘성모님의 생애’ 연작 중 하나다. 제목은 ‘라뿌니’. 마리아 막달레나가 주님의 빈 무덤 앞에서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만나는 장면이다. 손바닥 상처를 내보이며 인자하게 웃는 주님 얼굴은 “네 고통을 나도 안다”라고 말하는 듯하다. 성녀는 그에 화답하듯 미소를 지으며 스승을 그윽이 바라본다. 그 모습에 심 화백이 겹쳐 보이는 것은 우연일까. “피 흘리는 그 모습이 이제 무섭기는커녕 친근감 있게 다가왔어요. 비로소 예수님의 상처를 제대로 바라볼 수 있게, 그분에게 더 가까이 다가갈 수 있게 된 거죠.” 다시 붓을 든 그는 더 기쁘고 편하게 성화를 그려냈다. 고통을 겪는, 고통을 이겨낸 주님을 그릴 때가 특히 좋았다. 그분과 가장 가깝게 느껴지는 순간이었다. 고통을 이겨낸 그의 작품에 담긴 맛과 향은 더 진해졌다. 완치된 2017년 ‘고통이 빛이 되어’를 주제로 성화전을 열어 큰 호응을 얻었다. 올해 들어 수원교구 주보에 연재하는 성화도 인기가 많다. 따로 작품을 사고 싶다는 요청도 온다. “지금은 그림을 그리는 것 자체만으로 행복해요. 다치고 나선 잘 그려야 한다는 욕심을 버렸거든요. 그래서 부담감 없이 그냥 자유롭게, 그리고 싶은 대로 그려요. 돌이켜보니 예수님이 당신을 보라고, 조금 더 가깝게 느끼라고 잠시나마 고통을 주신 것 같습니다.” cpbc2020.05.06
![[명작으로 보는 교회사 한 장면] (5) 반 다이크의 ‘테오도시우스의 성당 출입을 막는 암브로시우스’](//cpbc.co.kr/CMS/newspaper/2020/06/rc/781122_1.0_titleImage_1.jpg)
[명작으로 보는 교회사 한 장면] (5) 반 다이크의 ‘테오도시우스의 성당 출입을 막는 암브로시우스’학살 자행한 황제는 성당에 “못 들어갑니다” 반 다이크, ‘테오도시우스의 출입을 막는 암브로시우스’, 내셔널 갤러리, 런던 392년, 테오도시우스(Flavius Theodosius, 347~395) 황제는 그리스도교를 국교로 선포했다. 그의 치세가 379년부터 사망하는 395년까지라는 점을 고려하면, 거의 치세 말기에 시행한 정책이라고 할 수 있다. 정치적으로, 테오도시우스의 죽음과 함께 로마 제국은 다시 동ㆍ서로 분리되고 영원히 이별하고 만다. 하지만 그가 추진한 강력한 그리스도교 부흥 정책은 이후 중세기를 예고하는 중대한 변곡점이 되었다. 이렇게 그리스도교를 옹호하고 부흥시킨 테오도시우스 황제가 대성당 출입을 금지당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오늘 소개하는 작품은 바로 그 사건을 다룬 것이다. 루벤스 이후 가장 뛰어난 플랑드르 화가로 알려진 안톤 반 다이크(Antoon van Dyck, 1599~1641)가 그린 ‘테오도시우스의 성당 출입을 막는 암브로시우스’다. 안톤 반 다이크작품은 1824년 런던의 내셔널 갤러리 측이 개인 수집가로부터 구입하였다. 저자 반 다이크는 오늘날 벨기에의 안트베르펜에서 태어나, 일찌감치 개인 공방을 운영할 만큼 패기 넘기는 화가였다. 그러다 루벤스(Peter Paul Rubens)를 만나면서 공방을 접고 그의 밑으로 들어가 공부했다. 루벤스가 “내 제자 중 최고”라고 할 정도로 뛰어났다. 그는 스승의 그림을 따라 그리며, 점차 스승을 넘어서는 감정 표현을 보여주었다. 스승이 격정적이고 화려하다면, 반 다이크는 서정적이고 섬세하고, 세련되며 우아하다는 평을 받았다. 그는 후에 이탈리아로 건너가 티치아노, 베로네세 등 베네치아 화풍을 연마하며 데생에 구애받지 않은 파스텔톤의 부드러운 구도와 선미한 색채로 성경, 신화, 역사적 사건 등을 넘나들며 스승을 능가하는 재능을 보였다. 1620년 10월, 반 다이크는 21살에 영국으로 건너갔다. 이후 영국과 유럽 대륙을 오가며 초상화 작가로 활동하다가, 1632년 영국으로 건너가 찰스 1세의 궁정 화가가 되었다. 초상화 분야에서 그는 과거 티치아노에 버금가는 명성을 떨쳤다. 그 결과 영국 화단은 물론, 17세기 유럽 바로크 미술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대표적인 화가 중 한 사람이 되었다. 반 다이크가 ‘테오도시우스의 성당 출입을 막는 암브로시우스’(1619~1620년)라는 그림을 그리게 된 계기는 같은 제목의 그림을 몇 해 전(1617~1618년)에 스승이 그리는 것을 보며 도와준 적이 있었다. 당시 스무 살의 반 다이크는 루벤스의 작품들을 모방하는 것으로 공부하고 있었고, 거기서 특징적인 디테일에 주목한 바 있었다. 두 작품은 너무도 비슷해서 디테일을 보지 않으면 똑같은 것으로 착각하기에 십상이다. 테오도시우스와 암브로시오 작품 속에 등장하는 테오도시우스 황제는 콘스탄티누스 다음으로 공경받는 인물이다. 디오클레티아누스 치세 때인 286년부터 약 1세기가 넘는 402년까지 제국의 수도는 밀라노였다. 그러니까 테오도시우스와 암브로시우스 시절의 밀라노는 제국의 힘이 집중되어 있던 곳이었다. 거기에서 그리스도교는 두 파로 나뉘어 부딪히고 있었다. 325년 니케아 공의회를 통해 한 차례 정리했음에도 불구하고, 아리우스파는 계속해서 교회를 흔들고 있었다. 그런 혼돈의 시대에 세례도 안 받고, 성직자 신분도 아닌 암브로시오가 집정관으로 양 진영의 중재자로 나섰다가 양쪽의 만장일치로 주교가 되었다. 주교가 된 후, 그는 아리우스파를 설득하여 정통 그리스도교로 전향하도록 하는 한편 전례와 성직을 공고히 하고, 교회의 사회봉사에 힘썼다. 전쟁 중에 발생한 환자들을 돌보는 데 교회를 적극 개방하여 민중의 지지를 크게 얻었다. 테오도시우스 황제도 그리스도교가 뿌리를 내리는 데 크게 기여했다. 380년, 황제는 니케아 공의회 결정을 옹호하며, 자신이 병환 중에 바치던 니케아 신경을 모든 신자가 바치도록 칙령으로 발표하기까지 했다. 칙령에서 황제는 성부, 성자, 성령의 삼위일체 교리를 믿는 사람들을 ‘보편적 그리스도인’이라며, ‘가톨릭’이라는 말을 했다. ‘가톨릭’이라는 명칭이 정식으로 처음 문서에 등장한 것이다. 그리고 이듬해인 381년, 황제는 제1차 콘스탄티노폴리스 공의회를 소집하여 아리우스파를 이단으로 단죄하고, 그들의 집회를 금했다. 그리고 모두 정통 가톨릭교회로 개종하라는 명을 내렸다. 그는 동물을 제물로 바치는 제사를 엄격히 금하고, 동ㆍ서로마에서 비그리스도교 의식을 모두 금하는 것은 물론, 제국의 전역에서 공적이든 사적이든 모든 형태의 이교 숭배를 불법으로 규정했다. 테살로니카 학살그런 테오도시우스 황제가 암브로시우스 주교와 부딪히는 사건이 발생한 것이다. 사건은 390년 그리스의 테살로니카에서 있었다. 주민 폭동이 일어났는데, 진압하던 로마군 수비대장 하나가 다툼 끝에 살해당하고, 분노한 주민들은 황제와 황후의 초상화까지 내려 흙탕물에 집어 던지며 모욕을 가했다. 밀라노에 있던 테오도시우스는 이 소식을 듣고 격분하여 군대를 보내 무차별적인 대량 학살을 자행했다. 암브로시우스는 주민들의 말을 들어봐야 한다며 황제를 만류했지만, 황제는 이를 무시하고 테살로니카 주민 7000여 명을 모두 죽였다. 암브로시우스는 분개하며, 즉시 황제에게 서한을 보내 테살로니카 학살에 대한 책임을 물어 공식적으로 참회할 것과 당분간 성당 출입을 금했다. 그러나 황제는 여전히 주교의 말을 무시하고 부활절에 측근들을 대동하여 대성당으로 향했다. 이 소식을 들은 암브로시우스는 성당 문 앞까지 나와 들어가려는 황제를 막았다. 단호한 주교의 태도에 황제는 하는 수 없이 발길을 돌려야 했다. 그해 성탄절, 테오도시우스는 다시 성당을 찾았고, 주교는 이번에도 입구에서 황제를 막았다. 진정한 회개와 통회, 보속을 하지 않았다는 이유에서였다. 결국, 황제는 자신의 명령이 잘못되었음을 시인하고 머리에 베옷을 두르고 땅에 엎드려 용서를 청했다. 이에 암브로시우스는 가벼운 보속을 주고, 성당 출입을 허락했다. 황제는 부활절에서 성탄절 전까지 성당 출입을 하지 못하다 성탄절이 되어서야 비로소 주교의 용서를 받고 성체성사에 참여할 수 있었다. 이 사건은 그리스도교가 공인된 지 불과 70여 년 만에 이루어진 것인데, 벌써 인권을 말할 수 있다는 것에 놀라지 않을 수 없다. 역사가들은 주교의 권위가 황제를 누를 만큼 성장했다며 교권과 속권이 부딪힌 첫 번째 사례로 도래할 종교와 권력의 관계를 암시한다고도 하고, 멀리 ‘카노사의 굴욕’을 예견한다고도 평했다. 하지만 이 사건 자체만 놓고 봤을 때, 이런 예단보다는 더 중요한 ‘교회가 국가 폭력에 침묵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처음부터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지를 보여준 사례라고 할 수 있다. 암브로시우스 주교는 주민들의 권리, 그들의 주장에 먼저 귀를 기울여야지 강자의 힘으로 찍어 눌러서는 안 된다고 목소리를 낸 것이다. 테살로니카 주민들의 인권과 생명권을 옹호하고 나선 최초의 행동하는 성직자였다. 이후 교회의 권위가 황제의 권위보다 우위에 설 수 있었던 동력은 바로 여기에 있었다. 비록 더 먼 훗날, 교황이 권력의 중심이 되면서 퇴색한 부분이 없잖아 있었어도, 그 출발은 인간을 우선적으로 선택한 것에 있었다. 작품 속으로 “못 들어갑니다.” 암브로시우스의 서슬 퍼런 목소리가 들릴 것만 같다. 반다이크는 포르치아나 대성당의 현관에서 맞닥트린 두 사람의 긴장감 도는 순간을 포착했다. 암브로시오 교부는 문 앞에서 손으로 황제를 저지하고 있다. 금색의 세련된 장식이 들어간 전례복을 입은 주교가 대성당으로 들어오는 황제를 막아선 것이다. 형태와 구성이 자유롭고 붓질이 넓으며, 톤이 약간 어둡다. 주교의 심리를 묘사하는 듯하다. 인물의 구성과 자세, 귀티 나는 의상의 질감 표현과 대조적으로 시선 처리는 매우 극적이다. 황제는 간절하고 주교는 단호하다. 두 사람의 미묘한 감정 표현이 탁월하다. 반다이크(Van Dyck), “테오도시우스의 출입을 막는 암브로시우스”, 내셔널 갤러리, 런던김혜경(세레나, 동아시아복음화연구원 상임연구원, 피렌체 거주) cpbc2020.06.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