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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pbc news12/16(수) - <3> 지도로 보는 성 김대건 신부 생애 (1) 신학생 선발된 이유는?12/16(수) - 지도로 보는 성 김대건 신부 생애 (1) 신학생 선발된 이유는?[앵커] 성 김대건 신부 탄생 200주년 희년, 잘 보내고 계신가요.보다 뜻깊게 희년을 보내기 위해 가톨릭뉴스는 세 번에 걸쳐 김대건 신부의 생애를 들여다보는 기획을 마련했습니다.`성장 과정과 신학생 선발`, `마카오에서의 유학 생활`, `사제수품과 순교`로 나누어 볼 수 있는데요.김대건 신부의 발걸음이 미쳤던 장소를 중심으로 살펴보겠습니다.[기자] 첫 번째 장소 충남 당진 `솔뫼성지`입니다. 성 김대건 신부는 1821년 8월 21일 지금의 충남 당진시 우강면 송산리에서 태어났습니다.김대건 신부는 어려서부터 신앙과 함께 성장했습니다.김대건 신부 가문에서 처음 가톨릭 신앙을 받아들인 사람은 김 신부의 증조할아버지 김운조 비오입니다.이후 박해와 증조부의 순교로 김대건 신부 가족은 1827년 고향 솔뫼를 떠납니다.서울 청파동을 거쳐 경기 용인 한덕골에 정착했고, 다시 교우촌인 골배마실로 이주했습니다. 그리고 김대건 신부는 1836년 4월 골배마실 인근 은이공소에서 모방 신부에게 세례를 받았고, 신학생 후보로 선발됐습니다.김 신부의 아버지 복자 김제준 이냐시오의 증언에 따르면, 모방 신부는 김 신부의 집을 방문해 7월경 서울로 데려갔습니다. 따라서 김 신부가 우연하게 선발된 것이 아니라 이미 신학생 후보로 검토됐기 때문에 모방 신부가 데려간 것이라고 보는 시각도 있습니다.모방 신부의 서한을 보면 당시 기록이 남아 있는데, 모방 신부는 김대건, 최양업, 최방제의 부모를 조선에서 가장 뛰어난 교우들이라고 적었습니다.가족 관계까지 면밀하게 조사했다는 점을 알 수 있는 대목입니다.소년 김대건과 최양업, 최방제는 모방 신부의 집에서 외국어 공부를 했습니다.신학 수업에 가장 중요한 언어인 라틴어를 배웠을 것으로 추정됩니다.서울을 떠나기 전 세 소년은 신학교 교장에게 순명할 것과 조선교구 사제가 돼 봉사할 것을 성경에 손을 얹고 십자가 앞에서 서약했습니다.그리고 세 소년은 1836년 12월 서울을 떠나 마카오로 향합니다.두 번째 장소는 `마카오`입니다.세 소년은 중국 대륙을 가로질러 무려 일곱 달 만인 1837년 6월 7일 마카오에 도착했습니다.당시 신학교 교장 칼르리 신부의 서한을 보면 세 소년의 성품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칼르리 신부는 "신심, 겸손, 면학심, 스승에 대한 존경 등 모든 면에서 완전하다"고 표현했습니다.또 세 소년의 목소리에 대한 언급도 서한에 있는데, 칼르리 신부는 "조선 소년들의 목소리가 매우 쉰 목소리이고, 완전히 음정이 맞지 않았다"고 적었습니다.그러면서 성가를 이용해 발성법을 가르쳤다고 기록했습니다.그러던 중 김대건 신부는 동기 신학생을 잃는 아픔을 겪게 됩니다.1837년 11월 최방제가 김대건, 최양업 두 동료가 지켜보는 가운데 칼르리 신부에게 성사를 받았고 결국 숨을 거뒀습니다.시련은 계속됐습니다. 마카오에서는 아편 거래 문제로 소요사태가 발생했고, 김대건 신부와 최양업 신부는 1839년 필리핀 마닐라로 피난을 떠났습니다.비교적 건강했던 최양업 신부와 달리 김대건 신부는 허리 통증과 두통, 복통 등을 앓았던 것으로 전해집니다.김대건 신부와 최양업 신부는 약 여섯 달 만에 다시 마카오로 돌아와 공부를 이어갔습니다.고향을 떠나 이역만리 타지에서 수많은 일을 겪은 김대건 신부의 나이는 지금의 중·고등학생 정도입니다.동료를 잃은 슬픔은 조선 복음화의 책임감으로 달랬으며, 육체적 고통과 향수는 기도로서 이겨냈을 것입니다.그리고 이러한 사건들은 김대건 신부를 내적으로 더욱 단단하게 만드는 계기가 됐을 것으로 보입니다.지금까지 앵커 리포트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