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창훈 위원의 예수님 이야기] (73) 율법학자와 가난한 과부(루카 20,45─21,4)](//cpbc.co.kr/CMS/newspaper/2018/07/rc/727639_1.1_titleImage_1.jpg)
[이창훈 위원의 예수님 이야기] (73) 율법학자와 가난한 과부(루카 20,45─21,4)교회에 드리워진 세속화 그림자 경계해야율법학자를 조심하라는 예수님 말씀(20,45-47)과 가난한 과부의 헌금에 관한 일화(21,1-4)는 율법학자와 과부, 부자와 가난한 과부가 대조를 이루며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 그리고 지도자의 처신이 어떠해야 하는지를 성찰하게 해줍니다. 율법학자들을 경계하라는 말씀과 가난한 과부의 헌금에 관한 이야기는 지도자의 처신과 하느님 섬김의 자세가 어떠해야 하는지를 일깨운다. 사진은 예루살렘 성전 자리에 있는 이슬람 사원 황금 돔과 예수님 시대의 예루살렘 성전 모형(왼쪽 상단). 【CNS 자료 사진】율법학자들을 조심하여라(20,45-47) 루카 복음사가는 이제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가르치시는 말씀을 전합니다. 그런데 루카 복음사가는 예수님께서 “모든 백성이 듣고 있는 가운데 제자들에게 이르셨다”(20,45)고 전합니다. 그것은 예수님의 가르침이 제자들을 향한 것이지만 제자가 아닌 사람들도 알아야 한다는 뜻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이르신 말씀의 핵심은 “율법학자들을 경계하여라”는 것입니다. 율법교사라고도 하는 율법학자들은 율법에 정통한 이들입니다. 이들은 기록된 또는 구전으로 전해 내려오는 율법을 풀이하고 가르치며 율법에 따라 재판을 담당하기도 했다고 합니다. 성전에서 제사를 드리는 사제 또는 성전에서 봉사하는 레위인들 가운데서도 율법학자가 있었지만 상인이나 장인 가운데서도 전문 교육을 받아 율법학자가 될 수 있었다고 합니다. 율법을 가르치고 풀이하고 적용하는 권위를 지니고 있어서 유다인들 사이에서는 지도자 위치에 있었습니다. 그런 율법학자들을 예수님께서는 “경계하여라”고 말씀하십니다. 여기서 경계하라는 것은 단지 율법학자들과 마찰을 일으키거나 율법학자들의 미움을 사거나 혹은 그와 비슷한 일을 당하지 않도록 주의하라는 뜻이 아니라 율법학자들처럼 되지 않도록 조심하라는 뜻으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이는 경계해야 하는 이유에 대한 예수님의 말씀에서 분명하게 드러납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둘로 나눠서 살펴보는 것이 좋겠습니다. 첫째 말씀은 “그들(율법학자들)은 긴 겉옷을 입고 나다니기를 즐기고, 장터에서 인사받기를 좋아하며, 회당에서는 높은 자리를, 잔치 때에는 윗자리를 좋아한다”(20, 46)는 것입니다. 율법학자들의 긴 겉옷은 마치 법관의 법복처럼 율법을 풀이하거나 가르칠 때 입는 옷으로, 율법학자라는 신분과 권위를 나타내는 복장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런 옷을 입고 나다니기를 좋아한다는 것은 율법학자 신분을 과시하고 싶어한다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장터에서 인사받기를 좋아하고 회당에서 높은 자리를, 잔치 때에는 윗자리를 좋아한다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정말로 사람들과 친교를 나누고 잔치를 축하하려는 것이 아니라 순전히 자신을 드러내고 자랑하고 대우를 받고 싶어한다는 것입니다. 둘째 말씀은 “그들은 과부들의 가산을 등쳐 먹으면서 남에게 보이려고 기도는 길게 한다”(20,47)는 것입니다. 성경학자들에 따르면 율법학자들은 여러 방법으로 과부들의 가산을 등쳐 먹었습니다. 과부들의 남편이 남긴 유산의 관리인 역할을 하면서 재산을 착복했고 법정에 나갈 수 없는 과부들을 대신에서 법정에 나간 대가로 과부들의 돈을 착취했고 과부들을 위해 길게 기도해 준 대가로 재산을 가로챘고, 때로는 과부들의 후한 대접을 이용해 재산을 착복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과부와 고아를 억눌러서는 안 된다는 것은 구약 시대부터 내려온 중요한 율법이었습니다. “너희는 어떤 과부나 고아도 억눌러서는 안 된다.”(탈출 22,21) 율법 전문가들인 율법학자들이 의도적으로 또는 교묘하게 율법을 거스르며 과부들을 등쳐 먹는 것을 예수님께서는 지적하신 것입니다. 그러면서 “이러한 자들은 더욱 엄중히 단죄를 받을 것”(20,47)이라고 그들의 기만과 위선을 질타하십니다. 가난한 과부의 헌금(21,1-4) 예수님께서 눈을 들어 헌금함에 예물을 넣고 있는 부자들을 보고 계시다가 어떤 빈곤한 과부가 렙톤 두 닢을 거기에 넣는 것을 보셨습니다.(21,1-2) 예루살렘 성전에는 주랑으로 둘러싸인 이방인의 뜰 안에 헤로데 시대에 다시 지은 헤로데 성전이 있었습니다. 이 성전은 이스라엘의 여인들이 들어갈 수 있는 여인들의 뜰에 이어 이스라엘의 남자들이 들어갈 수 있는 남자들의 뜰, 그리고 사제들만 들어갈 수 있는 사제들의 뜰에 이어 성전 성소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여인들의 뜰에는 헌금을 모으는 나팔 모양의 헌금함 13개가 있었다고 합니다. 위의 성경 말씀대로라면 예수님께서는 아마도 여인들의 뜰이 있는 곳에서 사람들이 헌금함에 예물을 넣고 있는 것을 보고 계셨을 것입니다. 그러다가 가난한 과부가 렙톤 두 닢을 넣는 것을 보셨는데, 렙톤은 당시에 통용되던 화폐 가운데 가치가 가장 낮은 그리스 동전이었습니다. 노동자의 하루 품삯(로마 은화 1데나리온, 그리스 은화 1드라크마)의 144분의 1의 가치를 지닌다고 하니 오늘날 우리 돈으로 치면 몇백 원에 불과한 금액일 것입니다. 그런데 가난한 과부가 렙톤 두 닢을 넣는 것을 보신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참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저 가난한 과부가 다른 모든 사람보다 더 많이 넣었다.”(21,3) 이어서 그 이유를 설명하십니다. “저들은 모두 풍족한 데에서 얼마씩을 예물로 넣었지만, 저 과부는 궁핍한 가운데에서 가지고 있던 생활비를 다 넣었기 때문이다.”(21,4)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율법학자들을 경계하라고 하신 말씀을 통해 과시하고 자랑하며 기만하고 위선을 부리는 율법학자들과 과부를 대비시키셨다면, 가난한 과부의 헌금에 관한 이 말씀을 통해서는 부자들과 가난한 과부를 대비시키십니다. 부자들은 풍족한 가운데서 얼마씩을 예물로 바쳤지만, 과부는 궁핍하면서도 가진 모든 것, 즉 생활비 전체를 봉헌합니다. 궁핍한 과부의 이런 태도는 “네 마음을 다하고 네 목숨을 하다고 네 힘을 다하고 네 정신을 다하여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하라”고 대답한 율법교사의 말을(루카 10,27) 그대로 실천하는 모습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반면에 율법학자들은 영원한 생명을 얻으려면 이렇게 하느님을 사랑해야 할 뿐 아니라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자신을 드러내고 싶어 하고 돌보아야 할 과부의 가산을 등쳐서 자신을 배불리는 탐욕과 위선에 눈이 멀어 있습니다. 그러기에 그들은 예수님 말씀처럼 더욱 엄중히 단죄받을 것입니다. 생각해 봅시다루카 복음사가는 율법학자들을 조심하라는 말씀과 가난한 과부의 헌금에 관한 일화를 통해 이제 갓 태어난 그리스도교 공동체가 어떻게 처신해야 하는지를 일깨우고 있다고 성경학자들은 풀이합니다. 공동체의 지도자들은 율법학자들처럼 처신하지 말아야 하며, 공동체의 모든 구성원은 가난한 과부가 가진 것 전부를 헌금함에 바쳤듯이 그런 마음으로 하느님을 섬겨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는 오늘날도 마찬가지입니다. 정말 교회를 생각하는 이들은 오늘날 교회 공동체에서 벌어지고 있는 현상들에 대해 크게 우려하고 있습니다. 교회의 세속화와 권위주의입니다. 부와 명예와 권력을 추구하는 세속 사회에서는 높은 자리, 윗자리를 차지하려고 하고 사람들에게 인사받기를 좋아하며 사람들을 속여 등쳐먹으면서도 겉으로는 그렇지 않은 척합니다. 세속의 이런 그릇된 행태들이 교회 공동체 안에서도 똑같이 이루어지고 있음을 가슴 아파하는 이들이 적지 않습니다. 혹시 우리 자신은, 우리가 몸담고 있는 공동체는 그렇지 않은지 성찰해 봅니다. 우리는 지금 평신도 희년을 지내고 있습니다. 희년을 산다는 것은 이런 그릇된 모습을 청산하고 가진 렙톤 두 닢을 다 넣은 가난한 과부의 마음으로 하느님을 섬기고, “이 죄인을 불쌍히 여겨 주십시오” 하며 가슴을 치는 세리의 자세로 기도를 바치며(루카 18, 13), 착한 사마리아 사람처럼 도움이 필요한 이들에게 이웃이 되어 주는 것(루카 10,29-37)이 아닐까요? 문채현2018.07.18
![[이창훈 위원의 사도행전 이야기] (9) 베드로의 솔로몬 주랑 설교 (사도 3,11-26)](//cpbc.co.kr/CMS/newspaper/2019/03/rc/748137_1.0_titleImage_1.jpg)
[이창훈 위원의 사도행전 이야기] (9) 베드로의 솔로몬 주랑 설교 (사도 3,11-26)“회개하고 하느님께 돌아와 죄를 용서받아라” 예루살렘 성전 모형도. 정면 앞쪽이 솔로몬 주랑이 있는 곳이다. 가톨릭평화방송여행사 제공 베드로가 성전 아름다운 문 곁에서 구걸하던 불구자를 고쳐주자 사람들은 “경탄하고 경악하였다”(4,10)고 사도행전 저자 루카는 기록합니다. 단지 경탄하고 하느님을 찬미했다는 것이 아니라 “경악했다”고 표현함으로써 뭔가 다른 일이 벌어질 것임을 암시한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 살펴봅니다. 우선, 베드로의 솔로몬 주랑 설교입니다. 베드로와 요한이 치유된 그 사람과 함께 예루살렘 성전 솔로몬 주랑에 있었는데, “온 백성”이 그리로 달려갑니다.(3,11) 온 백성이란 아름다운 문 곁에 앉아 자선을 청하던 불구자가 온전히 성하게 되어 하느님을 찬미하는 모습을 본 모든 사람을 가리킵니다. 솔로몬 주랑은 예루살렘 성전 광장 동쪽 벽 쪽에 있었던 주랑이었습니다. 베드로가 솔로몬 주랑에서 설교했고, 또 신자들이 한마음으로 솔로몬 주랑에 모이곤 한 것으로 보아(사도 5,12), 솔로몬 주랑은 예루살렘 그리스도인들의 모임 장소였다고 할 수 있습니다. 요한복음에는 예수님께서 성전 봉헌 축제 기간에 솔로몬 주랑을 거닐고 계셨다는 이야기가 나옵니다.(요한 10,22-23) 그렇다면 사도들을 비롯한 예루살렘의 첫 그리스도인들은 예수님께서 솔로몬 주랑을 거니시던 일을 추억하며 그곳을 모임 장소로 사용했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베드로의 오순절 설교 이후 신자들이 늘어나면서 첫 제자들이 함께 지냈던 그 집은 좁아서 모임 장소로 사용하기 어렵게 되자 솔로몬 주랑을 모임 장소로 대체했다고 볼 수도 있겠지요. 베드로는 달려온 백성을 보고 “이스라엘인 여러분” 하면서 설교를 시작합니다. 베드로의 설교가 동족인 이스라엘 백성을 대상으로 하고 있음을 알려주고 있습니다. 베드로의 설교는 크게 두 부분으로 이뤄져 있습니다. 첫 부분은 불구자가 어떻게 치유됐는지를 설명합니다.(3,12-16) ‘불구자를 걷게 한 것은 우리(베드로와 요한)의 힘이나 신심이 아니다. 예수님에 대한 믿음이다. 여러분은 예수님을 배척해 죽였지만, 우리 조상들이자 여러분의 조상들의 하느님이신 아브라함과 이사악과 야곱의 하느님께서는 당신 종 예수님을 죽인 이들 가운데서 다시 일으키시어 영광스럽게 하셨다. 우리는 그 증인이다. 이 예수님의 이름에 대한 믿음 때문에, 그분의 이름이 이 사람을 튼튼하게 한 것이다.’ 첫 부분에서 몇 가지 눈여겨볼 점이 있습니다. 오순절 첫 설교에서 베드로는 자기들이 술에 취한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약속하신 성령을 받았다고 말했는데, 여기서는 불구자가 완전히 나은 것이 예수님의 이름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이름은 그 사람의 인격 자체를 의미한다고 할 때 예수님의 이름에 대한 믿음이 낫게 했다는 것은 곧 예수님께 대한 믿음이 낫게 했다는 것을 말하지요. 베드로는 이 설교에서 또 예수님을 “하느님 당신의 종”(3,13), “거룩하고 의로우신 분”(3,14), “생명의 영도자”(3,15)라고 부릅니다. 생명의 ‘영도자’는 생명의 ‘창시자’ 또는 ‘지배자’라고 옮길 수도 있다고 학자들은 말합니다. 하느님의 종은 구약성경 이사야 예언서(42─53장)에 나오는 표현이고, ‘의로우신 분’ 역시 이사야 예언서(53,11 참조)에 나오는 표현으로, 베드로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예수님을 구약에서 예언한 바로 그분으로 제시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용어들은 메시아(그리스도)라는 표현과 함께 초기 그리스도교 공동체에서 예수님을 지칭하는 중요한 표현들이라고 하겠습니다. 둘째 부분은 이스라엘 백성의 회개를 촉구하는 내용입니다.(3,17-26) 설교의 둘째 부분은 다시 전반부와 후반부로 나눌 수 있습니다. 우선 전반부입니다.(3,17-21) ‘백성이 예수님을 배척한 것은 지도자들과 마찬가지로 무지의 탓이다. 그러나 이는 하느님께서 예언자들을 통해 예고하신 바이기도 하다. 그러니 회개하고 하느님께 돌아와 죄를 용서받아라. 그러면 생기를 찾을 때가 올 것이고, 주님께서는 여러분을 위해 메시아 예수님을 보내주실 것이다. 물론 예수님은 만물이 복원될 때까지 하늘에 계셔야 한다.’ 이 부분만 보면 이스라엘 백성이 회개하고 하느님께 돌아오면 죄를 용서받을 뿐 아니라 생기를 찾겠지만, 생기를 찾게 될 그때가 언제일지 확실하지 않은 듯합니다. 생기를 찾게 되는 그 시대가 한편으로는 만물이 복원되어 예수님께서 재림하시는 때 곧 역사가 최종적으로 완성되는 시대를 의미할 수도 있고, 다른 한편으로는 죄를 용서받고 하느님께 돌아오면 생기를 찾을 것이라고도 이해할 수 있습니다.설교 둘째 부분의 후반부를 정리합니다.(3,22-26) ‘모세는 하느님께서 자기와 같은 예언자를 일으켜주실 것인데 그의 말을 듣지 않으면 이스라엘에서 잘려나갈 것이라고 말했다. 또 모세의 뒤를 이어 모든 예언자가 하느님께서 그 예언자를 일으켜주실 때를 예고했다. 하느님께서는 그 예언자를 여러분에게 보내시어 여러분이 악으로 돌아서게 하여 복을 내리게 하셨다.’ 이 후반부의 핵심은 두 가지입니다. ①예수님의 말을 듣지 않으면 이스라엘에서 잘려나갈 것이다. ② 예수님은 이미 오시어 당신을 받아들이는 이들에게 복을 내리셨다. 따라서 베드로 설교의 둘째 부분은 이렇게 요약할 수 있을 것입니다. ‘메시아이신 예수님이 이스라엘 백성에게 오셨는데 여러분은 무지해서 그분을 배척했다. 그러나 지금이라도 회개해 우리가 전하는 그분의 말을 듣고 하느님께 돌아오면 죄를 용서받고 복을 얻을 것이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다시 오실 때에는 만물이 복원될 것이고, 완전히 생기를 찾을 것이다.’ 그렇다면 생기를 찾게 되는 시기는 언제일까요? 회개하고 돌아와 죄를 용서받으면 생기를 찾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완전히 생기를 찾는 것은 만물이 복원되어 예수님께서 재림하실 때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세상에 오시면서 시작된 하느님 나라, 그러나 종말에 가서야 완성될 하느님 나라’의 개념이 이 설교에 반영돼 있다고 한다면 지나친 해석일까요?생각해봅시다“이스라엘인 여러분…우리의 힘이나 신심으로 이 사람을 걷게 한 것처럼, 왜 우리를 유심히 바라봅니까?…그분에게서 오는 믿음이 여러분 모두 앞에서 이 사람을 완전히 낫게 해주었습니다.”(3,12-16) 베드로 사도는 이 설교에서 불구자 치유가 자신의 힘이나 신심으로 인한 것이 아님을 분명히 합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의 이름으로 그 사람을 낫게 합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낫게 할 수 있었다는 것은 예수님께 대한 믿음이 있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베드로는 그 믿음조차도 베드로 자신에게서 오는 것이 아니라 “그분에게서” 곧 예수님에게서 온다고 이야기합니다. 베드로는 믿음조차도 은총임을 이야기하고 있는 것입니다. 베드로의 이런 태도는 하느님의 이름으로, 예수님의 이름으로 일을 해놓고도 마치 자신의 업적인 양 은연중에 치켜세우곤 하는 사람들의 태도와는 크게 대비됩니다. 성령을 받아 예수님의 증인이 된 베드로는 부르심을 받아 파견된 사도가 어떤 자세로 복음을 선포해야 하는지를 되새기게 해줍니다. 오늘날 하느님의 이름으로 일하는 이들에게 더욱 절실히 요청되는 자세입니다. 평화신문2019.03.12
![[2018 군종교구 사목교서] “군 복음화, 변함없는 열정으로”](//cpbc.co.kr/CMS/newspaper/2017/12/rc/705444_1.0_titleImage_1.jpg)
[2018 군종교구 사목교서] “군 복음화, 변함없는 열정으로”하느님 모르는 군인과 군 가족에게 복음을 군종교구장 유수일 주교 저는 금년의 사목표어를 지난해의 사목표어 “군 복음화, 새 열정으로”에 이어서 “군 복음화, 변함없는 열정으로”로 정했습니다. 지난해의 사목표어 둘째 마디인 “새 열정으로”의 “열정”을 지속시키기 위함입니다. 달리 말하면 군 복음화의 열정을 지속시킬 필요성과 중요성 때문입니다. 군 복음화를 위한 우리 각자의 열정을 변함없이 지속시키는 노력을 다 함께 하여 복음화의 결실이 꾸준히 맺히기를 기원하는 의미로 이 표어를 만들게 되었습니다. 저는 작년에 제시한 구체적인 실천 사항들을 대부분 다시 언급하면서 몇 가지를 수정하고 보충하고자 합니다. 1. 복음화는 두 가지 차원을 지닙니다. 하나는 하느님을 모르는 군인들과 군 가족들에게 구원의 복음을 전해 삼위일체 하느님을 믿고 회개하여 세례를 받게 하는 일입니다. 다른 하나는 군종 사제들과 군종 사목에 임하는 수녀들이 중심이 되어 기존 신자들을 영적으로 돌보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더욱더 닮아가게 하는 일입니다. 2. 하느님을 모르는 이들을 하느님께로 인도하는 노력은 군종 사제, 수녀, 평신도들이 함께하기를 바랍니다. 전교에 있어 저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보여 주신 몇 가지 방법 곧 사랑 넘치는 삶의 표양을 보여 주는 것, 필요할 때 그리고 적절할 때 주님의 말씀(특히 사도신경이 담고 있는 신앙의 내용들)을 직접 전하는 일 그리고 세상의 모든 이들이 하느님을 알고 믿어 구원의 은혜를 입도록 꾸준히 기도하는 일을 실천에 옮기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회개”와 “하느님 나라”와 “복음”, 이 세 요소를 늘 염두에 두도록 합시다. 그리고 이 세 요소를 전할 때, 꼭 기억해야 할 것은 복음의 중심 내용이 바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자신이라는 점입니다. 3. 현재의 우리 교구에서 복음 전파 활동은 대부분 군종 사제들과 군종 교구에서 소임을 수행하는 수녀들과 소수의 평신도 선교사들(약 30명)에 의해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군종 사제들이 자신이 담당하는 군부대 지역이 광범하고 거기에다 평신도 선교사를 모시기 어려운 형편일 때에는, 그 근처의 남자 수도회나 여자 수도회 회원들을 찾아내어 도움을 청하라고 권하고 싶습니다. 4. 본당 단독으로 혹은 주변 군 본당들과 합동으로 사순, 대림절 피정을 실시하고, 이 두 전례 시기의 피정만이 아니라 별도의 피정 계획도 가졌으면 합니다. 여기에 더하여 본당별로 가능하면 일 년에 한 번 성지순례를 갖기를 권장하고 싶습니다. 5. 군에서는 군인과 그 가족들만이 아니고 군종 사제도 이동이 잦은 편이기에 장기간의 재교육 혹은 영속 교육 프로그램을 실시하기가 어렵습니다. 그래서 가장 중요한 영속 교육인 ‘성경 공부’를 권장합니다. 그리고 가장 좋은 성경 공부라 할 수 있는 ‘성경 읽기’와 ‘성경 쓰기’를 적극 권장하고 싶습니다. 본당 신부는 어린이들에 대한 별도의 신앙 교육 프로그램을 만들어 일 년에 몇 차례 실시해 주길 요청합니다. 백영민2017.12.19
![[이런 가정 어때요]지친 몸과 마음, 산에서 하느님 손길 느끼며 치유해요](//cpbc.co.kr/CMS/newspaper/2019/01/rc/743482_1.0_titleImage_1.jpg)
[이런 가정 어때요]지친 몸과 마음, 산에서 하느님 손길 느끼며 치유해요산림휴양농원 ‘노아의 숲’ 운영하는 박주원·진영숙씨 부부 30년 직장 생활을 마치고 산 속으로 들어온 박주원·진영숙씨 부부. 부부는 바쁘고 지친 이들에게 ‘노아의 숲’이 쉬어 가는 공간이 되었으면 좋겠다고 했다. “숲에 식구가 많습니다. 제가 150만 가지 미생물을 고용했는데요. 어마어마한 일꾼들입니다. 지렁이, 버섯, 이끼도 훌륭하지요. 가장 자랑하고 싶은 일꾼은 나무뿌리에 흡착해 나무가 흡수할 수 없는 영양을 흡수해주는 ‘균근’이에요. 숲 속을 들여다보면 치열하게 경쟁도 하지만 서로 돕고 삽니다. 우리 인간들도 이렇게 살아야 하는데….” 강원도 횡성군 갑천면 외갑천로 694번길. 횡성호수길 3코스인 ‘치유길’이 지나는 산속에 전세를 내고 사는 부부가 있다. 산림휴양농원 ‘노아의 숲’을 운영하는 박주원(베드로, 66, 원주교구 청일본당)ㆍ진영숙(오틸리아, 64)씨 부부다. 산이 좋아 산에 산 지 올해로 5년 차가 됐다. 부부가 산으로 이사를 온 건 2015년 7월. 남편 박주원씨가 30년 넘게 해온 직장 생활에 마침표를 찍고 이곳으로 옮겼다. 신한은행 부행장, 신한은행 계열사 사장 등 고위 임원으로 업무 스트레스가 잦았던 그에게 산은 늘 고향처럼 따뜻한 품이었다. 또 직장 생활을 하며 찾아온 폐암을 통해 몸에 휴식이 필요한 시간이라는 깨달음도 왔다. “농사 생각도 해보았지만, 평소에 늘 생각하던 곳은 산이었습니다. 어린 나이에 부모님께 야단맞았을 때 산에 오르면 다 잊어버리고 다시 시작할 수 있었거든요.”(박주원 대표) 부부는 바쁘고 지친 현대인들이 잠시 쉬어 가는 치유의 숲을 체험하게 해주자는 꿈이 생겼다. 이름은 박 대표가 가장 좋아하는 성경 속 인물 ‘노아’를 따서 만들었다. 노아가 방주를 지은 것처럼 노아의 우직한 마음으로 숲에 정성을 들였다. 노아가 히브리어로 ‘심신을 쉬다’는 뜻인 것도 마음에 들었다. 부부는 삶의 거처를 도시에서 산으로 옮기기 위해 준비를 철저히 했다. 박 대표는 한국산림아카데미에서 CEO 과정을 수강하고, 산림치유지도사 자격증을 땄다. 주말마다 살기에 적당한 곳을 찾기 위해 전국의 산을 누볐다. 아내 진영숙 원장은 효소와 약초를 이용한 차와 발효액을 만드는 법도 배웠다. 이 산의 건물주는 하느님이다. 약 21만 4876㎡(6만 5000평) 규모의 산에는 30여 종이 넘는 약초와 산나물, 야생화가 봄맞이를 하고 있다. 텃밭에는 오이와 상추, 고추 등 온갖 채소들을 심었다. 봄이 되면 곰취, 두릅, 명이나물, 고사리 등 산나물들의 녹색 향연이 펼쳐진다. 약초와 산나물, 온갖 채소를 심은 사람은 부부지만 거두는 것은 하느님이다. 부부는 산에 들어와 하느님의 손길을 더 가까이 느꼈다. 바람 한 자락, 햇볕 한 줌, 쏟아지는 장대비…. 모든 것이 하늘에 달렸다는 것을 안다. 산 정상에 오르면 내려다보이는 평화로운 횡성호와 밤하늘을 가득 메우는 별들은 거저 주어지는 선물이다. 부부는 호수와 강원도 일대의 산을 내려다볼 수 있도록 전망대를 만들었다. 약초를 심은 산 위에 비료를 싣고 올라가려고 모노레일을 설치했는데 모노레일을 타고 올라가는 산길이 절경이다. 모노레일은 산을 훼손하지 않는 선에서 최소한으로 설치했다. 박 대표는 노아의 숲에 오는 손님들을 모노레일에 태우고 횡성호수가 주는 절경을 선물한다. 산 곳곳에서 자라고 있는 나무와 산나물, 야생화를 가까이에서 보고 느낄 수 있다. 아이들이 오면 ‘숲 해설가 할아버지’가 되어 아이들 눈높이에 맞춰 숲 이야기를 풀어놓는다. 상처를 내고 떨어진 자작나무 가지를 가리키며, “인생에는 상처와 어려움이 있는데 그것이 성장에 도움을 준다”는 이야기도 해준다. 자연의 질서와 이치에 삶의 연륜이 더해져 깊은 교훈을 건넨다. 부부는 숲을 벗 삼아 숲의 생태를 공부하면서 생명의 신비에 눈을 떴다. 도시에서는 느끼지 못한 생명의 소중함이다. “물소리, 바람 소리, 새소리, 나뭇잎 흔들리는 소리가 사람을 치유합니다. 나무가 곤충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내뿜는 피톤치드가 유독 사람에게만 좋습니다. 공부하면 할수록 ‘어떻게 하느님을 믿고 의지하지 않을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어요.” 부부는 환경운동가가 됐다. 개똥과 과일 껍질, 쌀겨와 톱밥을 섞어 비료를 만들고, EM(유용 미생물)으로 친환경 세제를 직접 만들어 쓴다. 모든 동식물과 미세한 곤충들이 활동을 멈추고 쉬는 밤에는 불 하나 켜는 것도 조심한다. 지렁이만 봐도 기겁을 하고, 주말마다 남편을 따라 억지로 산에 올랐다는 진영숙 원장도 몸이 약했는데 많이 건강해졌다. “물 좋고 공기가 좋아 편리한 도시 생활이 그립지는 않다”고 했다. 또 “숲 치유 프로그램을 통해 오솔길을 걷고, 밤하늘의 별도 보면서 치유하고 가셨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노아의 숲에는 한꺼번에 최대 30명이 머물 수 있고, 피정도 할 수 있다. 박 대표는 “늘 바쁘게 살았다”면서 “사회에서 잘살아온 만큼 이제 그것을 나누고 돌려주고 싶다”고 밝혔다. 또 “우리처럼 귀산촌을 희망하는 이들이 잘 정착할 수 있도록 도움을 주고 싶다”고 했다. “이곳에 와서 계시는 동안은 잠시 주변의 모든 것들을 내려놓으시기 바랍니다. 어디까지, 몇 시 몇 분까지 가야 하는 목표나 시간을 내려놓습니다. 그냥 멍하니 맑고 푸른 하늘과 청아한 숲 속을 응시하시면서 터덜터덜 걷다, 좋은 기운과 향기가 묻어나는 방에서 게으름을 피우면서 뒹굴뒹굴해 보시기를 바랍니다.” 박 대표가 노아의 숲 홈페이지(www.noaforest.com)에 올린 초대 글이다. 이지혜 기자 bonaism@cpbc.co.krcpbc2019.01.09

불안하고 두려운 당신에게 ‘슈퍼 처방전’불안에 대한 신학·심리학 처방, 확고한 믿음이 불안 극복 열쇠 하느님, 도와주세요! 불안해서 죽겠어요 그레고리 K. 팝케 지음 / 문종원 옮김 / 가톨릭출판사 / 1만 3000원걱정, 두려움, 공포, 스트레스…. 우리 삶에 늘 행복만 있는 것은 아니다. 인간은 어쩌면 엄마의 뱃속에서 나올 때부터 불안과 외로움을 운명적으로 안고 태어나는지도 모른다.책은 인간의 ‘불안’에 관한 이야기다. 성경에서 아담과 하와는 선악과를 따먹기 전까지는 ‘알몸’ 상태에서도 수치심이나 불안을 겪지 않았다. 하느님께 온전히 의존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원죄를 저지른 이후 그들은 하느님으로부터 몸을 숨겼다. 자신들이 행한 ‘자유의지’를 통해 미약한 존재임을 깨닫고 세상이 두려워졌기 때문이다. 상실감과 외로움에서 비롯된 불안. 저자 그레고리 K. 팝케는 다양한 영적 도구와 하느님과의 친밀한 관계를 통해 신앙적으로 불안을 치유받을 수 있는 방법을 제시한다. 사진은 아일랜드 교회 신자들이 어둠 속에 십자가 주변에 모여있는 모습. 【CNS 자료 사진】 “깊이 들여다보면 불안의 이유는 결국 상실에 대한 두려움 때문입니다.” 저자는 불안의 근본 이유를 ‘상실’, ‘외로움’에 둔다. ‘자유를 빼앗기면 어쩌지?’, ‘지위나 신분을 잃어버리면?’, ‘죽게 된다면?’ 하고 온갖 두려움에 휩싸인다. ‘하느님은 왜 내게 이런 고통만 주실까?’ 하고 여길 때도 많다. 불안 심리와 공존하는 게 인간 삶이다.책은 미국을 대표하는 신앙 상담가인 저자가 내놓은 ‘불안’에 대한 신학ㆍ심리학 처방전이다. 우리가 불안할 때 하는 대처는 그냥 ‘불안해하는 것’이다. 우리는 그저 고통과 함께 사는 게 익숙해진 ‘만성환자’인지도 모른다. 그런데 이 지점이 우리 삶의 향방을 결정짓는다. 그냥 불안해하기보다 걱정과 두려움을 타개할 대안을 생각해 나가는 것이다. 후자를 선택할수록 불안에 사로잡히지 않을 수 있다.그 힘은 ‘확신’에서 나온다. 특히 그리스도교 신자에겐 하느님에 대한 확고한 믿음이 불안하지 않을 힘이 된다. 저자가 제시하는 불안 퇴치법은 신앙과 맞닿아 있다. “모든 결과에는 하느님의 손길이 닿아 있다”, “무슨 일을 하든지 그 결과는 선(善)이 된다는 것을 기억하라”, “절망 대신 희망을 택하지 않으면 하느님의 뜻과 우리의 기쁨은 불안으로 가려진다”는 것이다.평소 행동을 ‘참’과 ‘거짓’으로 구분하는 객관적 기준을 두는 것도 도움이 된다. 상대에게 화가 났을 때 무작정 ‘정말 멍청한 인간이군’ 하고 욕하고 분노하는 것은 ‘거짓’이다. 그저 짜증과 화만 날 뿐 문제 해결이 되지 않는다. 반면 ‘정말 당황스럽네. 무슨 일이 있었는지 물어보고, 그 일을 해줄 수 있는지 알아봐야겠다’ 하는 생각은 ‘참’이다. 문제 해결을 넘어 상대방과의 관계도 손상하지 않기 때문이다. 내가 겪는 불안한 마음, 과민한 반응을 자신에게 쓰는 편지 형식으로 옮겨 적는 것도 방법이다. 이는 감정적 상처에서 흘러나오는 정신적 고름을 짜내는 작업이다.불안과 죄에 둘러싸인 인간. 그래서 우리에겐 영성이 필요하다. 그리스도인은 ‘성사’라는 은총의 도구를 통해 하느님이 직접 선사하는 ‘보살핌’을 얻을 수 있다. 실제로 저자도 내담자를 치유할 때 고해성사 의무를 결합하자 회복 속도가 빨랐다고 한다.책은 뒤로 갈수록 참된 자아를 발견하는 방법, 주변 사람들에게 기쁨의 존재가 될 수 있는 지표들을 일러준다. 여전히 덫에 걸려 세상의 벽이 나를 포위하고 있다는 생각이 드는가. 저자는 “이런 생각은 진실, 희망, 풍요로운 삶에 도전하지 않았기 때문에 드는 생각”이라고 지적한다. 불안의 삶에서 나와 변화하려면 용기가 필요하다. 예수님은 2000년 동안 “두려워하지 말라”고 얘기해 주신다.이정훈 기자 sjunder@cpbc.co.kr 백영민2018.10.10
![[제6회 신앙체험수기] 대상/ 소명을 찾아준 아이청년](//cpbc.co.kr/CMS/newspaper/2019/06/rc/754617_1.0_titleImage_1.jpg)
[제6회 신앙체험수기] 대상/ 소명을 찾아준 아이청년 하정화 비비안나(서울대교구 양천본당) “형아가 말을 할 수 없어요? 어디가 아파요? 선생님 힘들겠어요.” 장애 이해 교육 수업 중에 유치원생이 이렇게 질문하는데 뭐라고 답해야 할지 울컥했다. 그 아이가 강의를 마친 나를 안아주었다. 이십사 년 동안 애지중지 키워도 아들에게 한 번도 들어보지 못한 말이다. 6살 아이의 한마디가 24살짜리 토마스보다 훨씬 났구나. 아들은 이십 년이 넘도록 치료 교육을 하고 있는데 유치원 아이만 못한 것인가? 토마스에게 한 번도 들어보지 못한 위로를 받으니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24시간 수고하며 돌봐도 적당한 표현으로 공감해 주지 않았다. 나 : 하느님! 저 비비안나예요.주님: 응, 그래 비비안나야. 오랜만에 수도원에 왔구나. 어떻게 왔니?나 : 인생 2막의 부르심을 찾으러 왔어요.주님: 그래, 기특하구나. 어떤 소명을 생각해 보았니?나 : 저희집에 장애인이 두 명이 되었어요.주님: 알고 있지. 그동안 어떻게 지냈니?나 : 조금 힘들고 많이 아팠어요. 그렇지만 하느님 덕분에 기쁠 때도 있었어요.주님: 그랬구나. 너도 남들처럼 토마스랑 많은 대화를 나누고 싶었지?나 : 토마스랑 얘기도 하고 싶고, 아들이 아플 땐 어디가 아픈지 궁금했어요.주님: 그렇구나. 토마스 속마음은 어떨 것 같니? 나 : 아들이 무슨 말을 해도 사람들은 듣지 않고 가 버려 답답하고, 누가 이유 없이 때릴 땐 많이 힘들었을 것 같아요.주님: 사람들이 너희 가족에게 어떻게 했는지 말해 줄 수 있겠니?나 : 예전엔 비난하며 ‘장애자’라고 놀리고 무시하기 일쑤였어요. 저희도 같은 하느님의 자녀인데 사람들은 외면했어요.주님: 속상했겠구나. 이제부터 너희를 어떻게 대해 주면 좋겠니?나 : 장애인 가족도 동등한 인격체니 그저 편견 없이 그대로 봐 주면 좋겠어요.주님: 그렇구나. 그럼 장애인의 부모로서 앞으로 기약 없는 십자가를 어떻게 지고 갈 거니?나 : 네, 어렵지만 주님과 함께 떳떳하게 지고 갈 거예요. 작은 예수님이라 여기며 돌봐주고 끊임없이 대화를 시도할 거예요.주님: 좋은 생각을 했구나. 내가 너희를 끝까지 지켜줄게. 아무 걱정하지 마라.나 : 하느님, 고맙습니다. 저도 이제부터 마음 아픈 사람이나 장애인 가족을 도와주며 기쁘게 살게요.수도원 피정에 가서 하느님과 나눈 대화이다. 제대 앞에 나와서 낭독하는데 참으려 해도 눈물이 나서 제대로 읽어 내려갈 수 없었다. 신부님은 오래전 발달장애가 있는 토마스를 키우며 죽고 싶을 만큼 힘들 때 ‘마음 아픈 이들을 위한 피정’을 열어 주었다. ‘하느님의 이끄심’이라 생각했다. 남편에게 휴가를 내 아들을 돌봐 달라 부탁하고, 결혼 후 처음 집을 떠나 피정을 했다. 토마스도 어리고 예측할 수 없는 일상으로 우울 불안이 심하던 때였고, 아들과 함께 매일 치료실을 다녀도 발전이 없길래 이렇게 살면 뭐하나 싶은 생각이 들었다. 남편 월급의 반을 특수교육비로 쓸 때여서 큰애와 남편이라도 편히 살게, 둘이 차도로 뛰어들어 버릴까 하는 끔찍한 생각이 여러 번 들었다. 때마침 수도원에 가서 하느님의 위안을 받고 아들을 돌볼 작은 용기를 얻어왔다. 나를 살게 해 준 피정이었다.그러고서 아들 교육에 몰입해 살다 오랜만에 수도원 피정에 참여했다. 신부님께서 하느님께 하고 싶은 말을 적어 보라 하셔서 적은 게 앞부분의 대화이다. 주님의 집에서 ‘하느님의 부르심’을 생각하며 앞으로 어떻게 살아갈지에 대해 묵상했다. 아들이 세상에서는 아직 인정을 못 받고 있지만 하느님 창조의 뜻을 이루게 해 달라고 기도했다. 마음은 아이고 몸은 청년인 아들을 떼어 놓고 가슴 벅찬 한때를 보냈다.일상으로 돌아와 콩자반을 하려고 서리태를 불려놓고 진간장을 찾았다. 그런데 양념 칸을 찾아봐도 진간장이 없다. 도대체 어디로 사라진 걸까? 혹시나 하고 아들을 불렀다. “아들! 진간장 어디 있어요? 엄마가 콩자반을 해야 하는데 없어졌어” 하니 아들은 기어들어 가는 소리로 “모르겠어요. 없어졌어” 그런다. “빨리 가서 찾아와! 도대체 어떻게 된 거니?” 혹시나 하고 재활용 쓰레기통에 가 보니 역시나 거기에 진간장 통이 있다. 자주 일어나는 우리 집의 엉뚱한 풍경이다.하느님의 선물인 아들은 이십 대 중반의 발달장애인이다. 눈 맞춤이 잘되지 않고 말이 늦어 두 돌부터 안고 언어치료실을 다녔다. 그간의 세월 동안 음악치료, 미술치료, 짐보리, 운동 등 작은 집 한 채의 비용을 쏟아 부었다. 중학교 땐 이유 없이 반 애들한테 해코지를 당하기도 하며, 어렵사리 일반 중 고교 학습도움실(특수학급)을 졸업했다. 요즘은 복지관을 다니는데 재활용품 분리수거에 빠져 있다. 처음에 복지관 선생님과 내가 가르쳐 주어 분리수거를 곧잘 했다. 오랜 세월 성당을 다니며 성실히 살아온 아들이 좀 성장했나 싶어 기쁘고 듬직했다. 그것도 잠시 재활용품 분리수거에 집착하는 것이다. 오가는 길목에 음료수 캔이 있으면 주워서 쓰레기통이 있는 곳까지 들고 가 버렸다. 심지어 집에서도 양념 칸에 양념이 남아 있는데 버려서 가족을 깜짝 놀라게 한다. 예전엔 생수나 우유도 재활용 쓰레기를 만들기 위해 버렸다. 목욕 용품도 많이 남았는데 버리기 일쑤였다. 처음엔 분리수거라는 좋은 습관으로 잘 가르쳤는데, 어찌 이리 부작용이 생기는지 24시간 눈을 떼지 않고 보살펴야 했다. 식구들이 계속 관리하니 줄어들긴 해도 장애 특성상 고착된 행동을 수정하기 어려웠다. “주님! 도대체 어떻게 하면 토마스의 생각과 행동을 바꿀 수 있을까요? 제발 살펴주시옵소서.” 하루에도 수십 번 십자성호를 그으며 마음을 다스렸다. 아들에게 안수하듯이 기도를 하고 반성문을 쓰게 해도 재활용품 집착을 끊기가 어려웠다. 식구를 긴장시키고 가족의 자유를 빼앗아 가는 아들은 장기간 언어치료를 해도 아직 대화가 원활하지 않다.한 번은 마구 울면서 전화가 왔다. “토마스, 무슨 일이야? 아빠 잃어버렸니?” “아니에요.” “아빠 바꿔 봐.” 그날따라 남편도 전화를 받지 않았다. 또 무슨 일인가 싶어 심장이 벌렁벌렁했다. 그날은 몹시 아파 시름하는 나를 쉬게 하려고 부자가 큰마음 먹고 온천에 다녀오기로 한 날이었다. 기차 시간이 어중간해 신도림에서 돈가스를 먹고 지하철을 타고 룰루랄라 소풍 가듯이 떠난 날이었다. 그런데 한참을 내달려 기차가 수원쯤 갔을 때 아들이 갑자기 ‘핸드폰 없어요. 핸드폰 없어졌어’라고 얘기를 했다. 계속 지하철에서 핸드폰 찾아야 한다고 울먹였다.남편은 고민 끝에 수원에서 내려 혹시나 하고 신도림의 식당으로 되돌아갔다. 그런데 푸드 코트에 가서 찾아도 없던 핸드폰이 기적같이 어느 손님이 맡겨놓았다며 다른 식당에 있었다. 간신히 찾았으나 이미 시간은 해 질 녘이었다. 핸드폰을 찾아 집으로 가자 하니, 아들이 그제서야 “온천에 가야 해요” 하며 다시 온천에 가자고 소리를 질렀다. 다음 날 출근해야 하는데 도무지 이해시키기 어려웠고 다음 주에 가자고 해도 막무가내였다. 온천을 가지 못해 슬퍼서 지하철을 타고 오는 내내 울었다. 키가 185cm나 되는 아들이 자꾸 우니까 시선이 집중되고 남편은 곤욕을 치른 모양이었다. 아픈 나를 쉬게 하려고 부자간에 온천 다녀오려다 핸드폰 사건이 생겨 혼이 나간 하루였다. 다시는 생각하고 싶지 않은 사건이었단다. 이렇게 우리 가족은 날마다 새로운 드라마를 찍으며 산다.그럼에도 기적을 주시어 삐뚤빼뚤 쓰지만 매일 성경과 일기 쓰기도 하고 문서 작성까지 하는 주님의 자녀이다. 야무진 선생님의 가르침으로 컴퓨터 ITQ 한글 자격증도 취득했다. 하느님의 은혜로 초등학교 때부터 피아노도 배워 조금씩 치고 있다. 나보다 피아노를 잘 치니 그저 감사할 따름이다. 아들이 쳐 주는 ‘피노키오’, ‘사랑의 인사’, ‘백조’, ‘사랑의 신비’ 등의 연주가 지친 심신을 위로해 준다.우리 집 화장대 위에 여러 가지를 붙여놓았다. 바삐 살다 보니 기도할 곳이 화장대 앞과 싱크대 앞이다. 화장대 위에는 프란치스코 교황님과 고 김수환 추기경님의 사진이 있다. 우리를 살게 하는 ‘자녀를 위한 기도’, ‘평온함을 청하는 기도’, ‘성가정에 드리는 기도’도 붙여놓고 자주 드린다. 싱크대 앞유리에는 토마스가 쳐 준 평화를 구하는 기도, 구마경, 아침 저녁기도, 일을 시작하고 마칠 때 바치는 기도, 시편 91편, 128편이 붙여져 있다. 매일 반찬을 하거나 설거지할 때마다 기도를 드린다. 장애아들을 쓰임 받는 존재로 이끌려고 이십 년 넘게 애쓰는 가운데, 몇 년 전 큰 우환이 생겼다. 신심이 좋고 봉사활동도 많이 하던 시어른 안나님이 끔찍한 사고를 당했다. 그때부터 또 다른 고행이 시작되었다. 어떻게든 안나님을 살려보려고 기도는 물론이거니와 코 석션, 입안을 거즈로 닦기, 욕창이 안 생기게 좌우 번갈아 누이기, 기저귀 갈기, 목욕시키기, 손발톱 깎아 드리기며 간병도 꾸준히 했다. 안나님을 일으켜달라고 기도하며 정성껏 간병을 하니 처음엔 좋아지는 느낌이었다. 그러나 뇌를 많이 다친 탓에 몇 달 뒤부터 재활 훈련을 해도 점점 나빠지기 시작했다. 우리는 이틀이 멀다 하고 간병 하느라 병원에서 살았고, 아기가 된 안나님을 좋아지게 하려고 아들에게 언어치료 하듯이 말도 가르쳤다. 그녀의 식사를 코 튜브로 시간 맞춰 챙겨야 했으므로 정작 내 식사는 놓치기 일쑤였다. 한번은 아들을 데리러 복지관에 가야 했는데, 안나님 병원에 있다가 시간을 놓쳐 토마스를 ○○역 벤치에서 만나자고 했다. 그런데 아들이 잘못 들었는지 역으로 갔는데, 아무리 둘러봐도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 기다려도 엄마가 오지 않자 혼자서 방과 후 활동을 하러 가 버렸을까, 아니면 누가 데려갔을까 전화를 해도 받지 않고 또다시 숨 막히는 시간이었다. 경찰서에 신고하려던 찰나에 복지관 선생님이 왔다고 연락을 주었다. ‘주님, 감사합니다. 토마스를 제자리로 보내주셔서 정말 고맙습니다.’ 연신 기도를 하며 부랴부랴 택시를 타고 아들에게 달려갔다. 이렇게 갑자기 예고 없이 건강하던 안나님이 큰 사고로 와상 환자가 되어 몇 년째 병원 순례를 하자, 우리 가족 4명의 삶이 바뀌어 살림도 제대로 할 수 없었다. 엄마가 저를 집에 두고 자꾸 할머니 병원에 다녀오니 토마스도 없던 불안이 생겼다. 이러다 내가 쓰러질 것 같다는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몸이 좋지 않아 가끔 하혈을 하기도 했고 불규칙한 식사와 과로, 스트레스로 점점 야위어 갔다. 남편이 거듭 재촉해 건강검진차 병원에 갔다가 뜻밖의 얘기를 들었다. 위, 대장 내시경까지 했는데 심상치 않다며 재검을 하라는 것이다. 시간을 예약해 검사했더니 큰 수술을 해야 한단다. 세상에! ○○암이란다. 장애아들에 안나님까지 돌보는 것도 만만치 않은데 어찌 이런 시련을 주시는지 앞이 캄캄했다. 양쪽을 신경 쓰다 보니 정작 내 건강에 신경을 못 썼다. 그 길로 무언가에 홀린 듯이 성체조배실로 달려갔다. “주님, 이건 아니잖아요? 어찌 기약 없는 십자가를 두 명을 주시나이까? 그간에 토마스를 키우며 애간장이 탔지만, 주님 덕분에 수없이 오뚝이처럼 일어섰어요. 이제 저를 쓰러뜨리면 토마스는 누가 돌보고 안나님은 어떻게 챙겨요? 늘 희생만 하는 큰애는요?” 대성통곡을 하며 주저리주저리 한참을 목 놓아 울었나 보다. 한동안 말없이 감실을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하느님, 제발 뭐라고 말씀 좀 해보세요. 이제 저는 어찌해야 하나요? 부디 저에게 복을 내리시어 제 영토를 넓혀 주시고, 당신의 손길이 저와 함께 있어 제가 고통을 받지 않도록 재앙을 막아 주십시오.’ 역대기 상권 4장 10절 말씀이 떠올랐다. 한참 뒤 하느님의 음성인지 뭔지 모를 울림이 있었다. ‘비비안나야. 괜찮다. 걱정하지 마라. 잘하고 있다’라고 했다. ‘어! 이건 뭐지’ 생각하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아무도 없었다. 그 음성이 무엇이었는지 지금도 알 길 없다. 얼마 뒤 대학병원에서 수술했다. 남편이 휴가를 내서 챙겨주고, 토마스는 이번에도 큰애가 학교도 못 가고 며칠을 돌봐주었다. 차가운 수술실에서 벌벌 떨며 기도했다. ‘하느님, 제발 신발을 신고 집에 갈 수 있도록 집도의의 손을 이끌어 주소서. 말 못 하는 토마스를 두고 죽을 순 없어요. 아들이 말을 좀 할 때까지만이라도 살게 해 주세요. 동생 덕분에 고초를 겪는 딸도 너무 가여워요.’ 끊임없이 기도를 했는데 마취로 인해 이후의 과정은 기억나지 않는다. 한참 뒤 깨어보니 얼마나 긴장을 했던지 몸 곳곳이 뻐근하고 아팠다. 지금까지 몇 개월에 한 번씩 온갖 검사를 하며 병원에 다니고 있지만, 기적같이 살려 주시니 고맙기 짝이 없다. 앞으로 몇 년은 더 남았다. 토마스와 안나님을 돌보라고 살려주신 것 같았다. “주님, 부족한 저를 어여삐 보시고 살려주셔서 고맙습니다. 다시 태어났으니 앞으로 선한 영향을 주는 사람으로 살겠습니다.” 이제 하느님의 부르심을 행하며 살아야 했다. 큰 수술을 하고 살아나니 하루하루가 소중했다. 그러나 마음과 달리 몸이 예전 같지 않았다. 면역력이 떨어져 여기저기 아팠다. 시어른 기저귀를 갈아서 그런지 어쩐지 팔이 올라가지 않아 병원에 가 보니 오십견이란다. 예전에 오른쪽이 그랬는데 이번엔 왼쪽이 안 올라가고, 잠을 못 이룰 만큼 통증이 온 마음을 짓눌렀다. 원치 않던 불면증도 따라왔다. 아들과 장애인이 된 안나님도 돌봐야 했고 내 건강도 살펴야 했다. 삼중고였다. 사는 게 고해라더니 혼자 힘으로 감당하기 어려웠다. 몸이 아프니 마음마저 나약해지고 갱년기 불안이 찾아왔다. 심정이 무너져 오직 신앙으로 극복해야 했는데 아무리 기도를 해도 마음이 나아지지 않았다. 아니 기도가 되지 않았다. 퇴원하며 먹은 굳은 마음이 순식간에 무너지기 시작했다. 어떤 일이 있어도 토마스는 계속 돌봐야 했는데, 애들한테 짜증을 내었고 아들도 불안한지 재활용품에 집착했다. 딸마저 지쳤는지 “또 할머니 병원에 가세요?” 그랬다. 왜냐면 내가 병원에 가면 본인이 동생을 돌봐야 했기에 힘들었던 것이다. 사는 게 부질없고 악순환이 반복되었다. “하느님 이게 뭐예요? 제가 무엇을 그리 잘못했기에 이리도 큰 형벌을 주시나이까?” 점점 수렁으로 빠져드는 것 같았다. ‘이달만 지내보자. 아니 이번 주만, 아니 하루씩 살아보자’ 해도 캄캄한 터널의 끝이 보이지 않았다. 아무리 애써도 나아지지 않고 내가 어찌 될 것만 같았다. 그동안 생활의 고리를 끊고 새로운 삶의 지평을 열어야 했다. 이러다 거룩한 성가정이 깨질 것 같은 두려움이 엄습했다. 지쳐서 주님을 외면하고 살았나 싶은 생각이 번쩍 들었다. 정신을 차려서 매일 미사와 가정기도를 시작했다. 불안이 가슴에 차올라 오랫동안 기도하며 짬짬이 기록해 두었던 묵상 노트를 펼쳤다. ‘언제나 기뻐하십시오. 끊임없이 기도하십시오. 모든 일에 감사하십시오.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살아가는 여러분에게 바라시는 하느님의 뜻입니다.’ 테살로니카 1서 5장 16-18절이었다. 이렇게 주님께서는 말없이 나타나 우리를 살리시고 지혜와 자비를 주셨다. 그때부터 ‘감사 한줄 노트’를 쓰기 시작했다. 하루를 반추하며 일기도 가끔 쓰지만 바쁠 때는 감사했던 것을 억지로라도 찾아 쓰기로 했다. 처음엔 세상천지에 나만 힘든 것 같아 감사한 것도 없고 쓸 것도 생각나지 않았다. 그러나 자꾸 쓰다 보니 소소한 게 감사로 바뀌기 시작했다. 큰애도 감사 노트에 ‘나를 낳아주고 키워 주는 부모님께 감사하다. 가족을 위해 맛있는 밥을 차려주는 엄마께 감사하다’ 등 조금씩 쓰기 시작했다. 2014년 하반기부터 쓰기 시작했는데 그 노트를 보면 우리 집의 근황을 알 수 있다. 집에 쓰나미가 밀려올 땐 감사 노트 한 줄도 쓸 수 없기 때문이다. 안나님도 그대로 병원에 누워 있고 상황은 바뀌지 않았으나 생각을 긍정적으로 전환하니 원망마저 감사로 변하기 시작했다. 누군가 인생은 기대하지 않는 곳에서 풀린다 했던가. 올해 들어 감사 노트에는 이런 게 쓰여 있다. ‘이탈리아에 계신 신부님께서 진심 어린 조언을 해 주시어 감사하다. 현관 센서등을 갈아 끼워 준 남편에게 감사하다. 욕실 샤워기 헤드를 갈아준 딸에게 감사하다. 설거지를 해 준 토마스에게 감사하다. 학부모 연수 강의 잘하라고 격려해 주신 아버지께 감사하다 등 그간에 씨 뿌렸던 수많은 감사가 꽃을 피우기 시작했다. 언젠가부터 아들이 복지관에 가 있는 시간을 쪼개 도서관에 가서 책을 보고 일기처럼 글도 쓰기 시작했다. 마음이 조금씩 편안해졌다. 누군가에게 감동과 재미를 주는 글을 써서 희망을 주고 싶은 바람이 생겼다. 사람들에게 초록 신호에 건널 때도 끝까지 횡단보도 안으로 지나가야 한다는 것도 계속 알렸다. 더이상 안나님 같은 피해자가 생기지 않길 바라는 마음에서. 아들 키운 얘기도 써 보았더니 마음이 조금씩 치유되는 느낌이었다. 앞으로 건강이 허락하는 한 세상을 밝히는 글을 써서 지친 분들을 위로하고 싶다. 작년부터 하느님의 부르심으로 몇 달간 연수를 받고 ‘장애 이해 교육 강사’ 자격을 취득하여 강의 봉사도 하고 있다. 토마스와 안나님 덕분에 살아있는 수업을 할 수 있어 고맙다. 컴맹에 가까운 내가 PPT를 만들어 사람들에게 강의하는 것이 소명이었다. 새로운 것을 배울 수 있음이 감사하고, 그렇게 배운 것으로 봉사며 수업을 할 수 있어 고마울 따름이다. 무엇인가를 할 수 있다는 그 자체가 좋은 것이다. “치유자이신 주님, 저를 보살펴 주시어 여러분 앞에 서게 해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오늘도 저의 생각과 말과 행위를 주님의 평화로 이끌어 주소서. 아멘.” 매일 미사를 드려야 하는데 시간이 여의치 않아 못 드리면 평화방송 미사를 드린다. 힘들 때마다 평화방송 앱으로 위로를 받는데 ‘가톨릭 뉴스’와 ‘기도를 부탁해’ 프란치스코 교황님 관련 소식 등이 쓰러질 때마다 많은 위로와 용기를 준다. 우리만 알기 아까운 보배로운 성구나 감동적인 강론이 많아 선교차 지인들께 띄워 드리고 있다. 동생을 챙기며 애쓰는 딸에게 마땅한 자리를 마련해 줄 것이다. 주님께서 토마스에게 수호천사를 붙여주시어 대화를 잘하게 도울 것이라 믿는다. 세수하고 얼굴을 닦으며 “사랑의 주님, 오늘도 살려주시고 지켜주소서. 아멘” 하며 습관처럼 중얼거린다. 몇 가지 일정을 하고 집에 오면 성가정상을 끌어안고 “사랑의 주님, 집으로 인도해 주시어 감사드리고 쓰러지지 않게 지켜주셔서 고맙습니다. 저희가 주님 보시기에 합당한 거룩한 성가정이 되게 이끌어 주시옵소서. 아멘” 하고 기도를 드린다. 아무리 외롭고 힘든 날도 주님께서 돌봐주시어 여기까지 걸어왔고 어떻게 살아왔는지 꿈같은 나날이다. 기도가 이루어져 작년부터 ‘성서 백주간’을 하고 있다. 그전엔 집회서 말씀을 먹고 살았는데 신명기나 시편의 말씀도 은혜롭고 우리를 살게 하는 힘을 준다. 성경 묵상과 나눔을 하니 삶이 더 간절하고 애틋하다. “치유자이신 주님, 오늘도 주님의 집에 초대해 주시어 감사드립니다. 그간 성가정을 꾸려 살며 여러분의 기도와 도움이 있었기에 이 자리에 와 있습니다. 은총의 나날을 살게 도와주신 분들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이제는 조금이나마 은혜를 갚을 수 있도록 저희에게 건강과 지혜, 용기와 평화를 주소서.” 지난번 묵상 때의 기도이다. 이렇게 기쁘게 살아도 되나 싶다. 살아있음이 그저 감사하다. 필리피서 4장 13절 “나에게 힘을 주시는 분 안에서 나는 모든 것을 할 수 있습니다”는 우리 가족을 살게 하는 말씀이다. 방에서 글을 쓰고 있는 이 순간도 아들이 거실에서 무엇을 하는지 불안하다. 어쩌면 앞으로도 지겨워 포기하다, 말씀 붙들고 일어나 다시금 용기를 낼 것이다. 힘겨워도 내게 보내준 십자가들은 은총의 선물이고 ‘하느님의 부르심’을 찾게 해 준 원동력이다. 하느님께서 기적의 은혜를 베풀어 주시리라 믿으며 모든 것을 주님과 성모님께 의탁하리라. 고 김수환 추기경님께서 “장마에도 끝이 있듯이 고생길에도 끝이 있단다” 하셨으니 반드시 그리되리라 믿으며 묵주를 돌린다. 이제 주님과 함께 인생 2막의 소명을 실천하러 가야겠다. 글도 쓰고 장애 인식 강의도 하면서. 엊그제는 5학년 수업을 했다. 아이들에게 선생님도 장애가 있는 큰형이 있는데 좋은 선생님과 친구들 덕분에 피아노도 잘 치고 컴퓨터도 잘한다고 했더니 “정말요?” 하면서 눈이 동그래졌다. ‘내 소명을 찾게 하려고 토마스를 주셨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네가 없었더라면 어떻게 엄마가 글을 쓰고 장애 이해 교육 강사가 될 수 있겠니!’ 아들에게서 벗어나고 싶었는데 오히려 아들로 인해 삶의 힘을 얻는다. 소명을 찾아 준 토마스가 오늘따라 보고 싶다. “하 선생님! 두 시간 강의료 2만 원 입금했습니다.” 아직 강의료는 봉사 수준이지만 주님께서 허락하는 한 PPT를 멋지게 만들어 세상을 조금씩 바꾸고 싶다. cpbc2019.06.04
![([이창훈 기자의 예수님 이야기] (61) 사람의 아들의 날(루카 17,22-37)](//cpbc.co.kr/CMS/newspaper/2018/04/rc/718492_1.0_titleImage_1.jpg)
([이창훈 기자의 예수님 이야기] (61) 사람의 아들의 날(루카 17,22-37)피할 수 없는 심판의 날이 다가오고 있다 예수님께서는 ‘사람의 아들의 날’에 관한 이야기를 마치면서 “시체가 있는 곳에 독수리들도 모여든다”고 말씀하신다. 회개하지 않는 죄인은 징벌의 심판을 피할 길이 없으리라는 뜻으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사진은 구약성경의 심판 이야기에 자주 등장하는 독수리. 가톨릭평화신문 바리사이들이 하느님의 나라가 언제 오느냐고 예수님께 물었을 때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나라는 너희 가운데에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17,20-21) 루카 복음사가는 이 말씀에 바로 이어서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사람의 아들의 날’에 관해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을 자세히 살펴봅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너희가 사람의 아들의 날을 하루라도 보려고 갈망할 때가 오겠지만 보지 못할 것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17,22) 이 구절에서 세 가지를 주목하고자 합니다. 첫째, 예수님께서는 사람의 아들의 날에 관한 말씀을 다른 사람이 아닌 제자들에게 하고 계신다는 점입니다. 둘째, 사람의 아들이 누구인가 하는 것입니다. 이미 루카복음을 살펴보면서 예수님께서 당신 자신을 가리켜 ‘사람의 아들’이라고 한 적이 여러 번 있음을 확인한 바 있습니다. 셋째, ‘사람의 아들의 날’이 무엇인가 하는 것입니다. 사람의 아들이 예수님이라면 사람의 아들의 날은 예수님의 날이고,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너희는 나의 날이 오는 것을 하루라도 보려고 갈망할 것’이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지금 제자들과 함께 계시는데 또 ‘나의 날이 오는 것을 하루라도 보려고 갈망할 것’이라고 말씀하시는 것은 또 무엇일까요? 이 대목 전체 맥락에서 보면 ‘사람의 아들의 날’은 바로 종말을 가리키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 종말의 날이 적어도 제자들에게는 나쁜 날이 아닌 것이 확실합니다. 그렇지 않다면,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그 날을 “하루라도 보려고 갈망할 때” 올 것이라고 말씀하시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이런 사전 이해를 바탕으로 본문을 계속 살펴봅니다. 편의상 예수님 말씀을 세 부분으로 나눠봅니다. 첫 부분은 사람의 아들의 날에 사람의 아들이 언제 어떤 식으로 오는가 하는 것입니다.(17,22-25) 예수님께서는 사람의 아들이 ‘여기에 계시다’ ‘저기에 계시다’는 식으로 오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마치 번개가 치면 하늘 이쪽 끝에서 저쪽 끝까지 비추는 것처럼 사람의 아들도 그렇게 온다고 말씀하십니다. 분명한 것은 그날이 지금 당장 오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날이 오기 전에 사람의 아들이 “먼저 많은 고난을 받고 배척을 받아야 한다”(17,22)는 예수님 말씀이 이를 확인해 줍니다. 둘째 부분은 그 날에 어떤 일이 벌어질까 하는 것입니다.(17,26-30) 예수님께서는 구약의 두 사건, 노아의 홍수 때 그리고 아브라함의 조카 롯이 살았던 소돔의 멸망 때와 같은 일이 벌어질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노아 때에 의인인 노아와 그 가족들을 제외한 나머지 사람들은 먹고 마시고 장가들고 시집가고 하다가 홍수로 모두 멸망해 버렸습니다. 또 소돔 사람들도 그렇게 지내다가 하늘에서 불과 유황이 쏟아져 멸망했습니다. “사람의 아들이 나타나는 날에도 그와 똑같을 것”(17,30)이라고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셋째 부분은 그날을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가에 관한 것입니다.(17,31-37) 예수님께서는 “그날 옥상이 있는 이는 세간이 집 안에 있더라도 그것을 꺼내러 내려가지 말고, 마찬가지로 들에 있는 이도 뒤로 돌아서지 마라”고 하시면서 “롯의 아내를 기억하여라”고 말씀하십니다.(17,31-32) 이 말씀은 세간을 꺼내려 내려가도 소용없다는 말씀입니다. 들에 있는 사람이 뒤를 돌아보다가는 롯의 아내처럼 되고 만다는 것입니다. 롯의 아내는 소돔을 탈출해 도망가다가 하느님이 유황과 불을 소돔과 고모라에 퍼붓기 시작하시자 뒤를 돌아보다가 그만 소금기둥이 되고 말았습니다.(창세 19,24-26) “그날 밤에 두 사람이 한 침상에 있으면 하나는 데려가고 하나는 버려둘 것”이라거나 “두 여자가 함께 맷돌질하면 하나는 데려가고 하나는 버려둘 것”이라는 말씀(17,34-35)도 마찬가지로 종말의 때에 닥쳐오는 심판을 피하려고 하는 것은 아무 소용이 없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하라는 것인가요? 옥상에 있는 사람은 내려오지 말고, 들에 있는 이는 뒤를 돌아보지 말라는 말씀은 그냥 평소처럼 그대로 있으라는 말씀인가요? 그런 말씀은 아닌 것 같습니다. 종말의 때는 누구에게나 똑같이 닥칠 것이기 때문에 뒤늦게 살겠다고 허둥거려봐야 소용이 없고, 평소에 종말의 때를 대비하라는 말씀으로 받아들여야 할 것입니다. 평소에 어떻게 종말을 대비해야 할까요? “제 목숨을 보존하려고 애쓰는 사람은 목숨을 잃고 목숨을 잃는 사람은 목숨을 살릴 것이다”라는 말씀(17,33)은 이 물음에 대한 답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학자들은 “제 목숨을 보존하려고 애쓰는 사람”은 노아 시대 때 노아가 방주에 들어가는 날까지 먹고 마시고 장가들고 시집가고 하는 사람들, 또 롯이 살던 때에 먹고 마시고 사고팔고 심고 짓고 하던 사람들을 가리킨다고 풀이합니다. 이들은 한 마디로 회개하지 않는 사람들입니다. 반대로 “목숨을 잃는 사람”은 회개하는 사람들입니다. 이들은 “목숨을 살릴 것”인데 여기서 ‘살리다’로 번역된 그리스 말은 성경 밖에서는 우선적으로 ‘탄생시키다’를 뜻합니다. 그렇다면 목숨을 잃는 사람은 새로운 생명으로 탄생한다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주석 성경」 참조)두 사람이 한 침상에 있으면 한 사람만 데려가고 두 여자가 맷돌을 갈고 있으면 한 여자만 데려갈 것이라는 예수님 말씀이 끝나자 제자들이 “주님, 어디에서 말입니까?” 하고 묻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이르십니다. “시체가 있는 곳에 독수리들도 모여든다.”(17,37) 좀 황당하고 선문답 같은 이 말씀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독수리 같은 맹금은 구약성경에서 심판 장면에 자주 나온다고 합니다. 시체가 있는 곳에 독수리가 모여드는 것은 당연합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의 이 말씀은 종말의 심판 날은 틀림없이 온다는 것으로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그런데 또 한 가지 물음이 생깁니다. 시체란 무엇을 나타내나요? 의인은 의로움의 향기를 내고 죄인은 죄의 악취를 풍긴다는 말이 있습니다. 이에 비춰본다면 시체는 죄인을 가리키는 표현으로 볼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시체가 있는 곳에 독수리들도 모여든다”는 말씀은 죄인들이 유황불과 홍수의 심판을 면할 길이 없다는 말씀으로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제자들은 “어디?”라고 장소를 물었지만 그 심판은 장소를 가리지 않습니다. [생각해 봅시다]이제 ‘사람의 아들의 날’에 관한 예수님 말씀을 정리하며 생각해 봅시다. 예수님께서는 사람의 아들의 날 곧 사람의 아들인 당신이 다시 오실 종말이 어느 누구도 피해갈 수 없는 심판의 날임을 분명히 말씀하고 계시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한 가지 절대로 놓치지 말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회개하지 않는 죄인들에게는 종말이 노아 때 홍수로 멸망한 사람들처럼, 또 롯 시대에 불과 유황으로 멸망한 소돔과 고모라 주민들처럼 파멸의 때가 되고, 독수리들이 시체가 있는 곳에 모여드는 것처럼 피할 수 없는 심판의 날이 될 것입니다. 그러나 제자들에게는 그 종말이 “하루라도 보려고 갈망할 때” 곧 구원의 때가 될 것입니다. 하지만 그날이 언제 어떻게 올 지 모릅니다. 중요한 것은 그날이 올까 두려워하는 것이 아니라 지금 현재의 자리에서 회개의 삶을 충실히 사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가르쳐 주신 그 삶을 살도록 노력하는 것입니다. 재물의 노예가 되지 말고, 재물로 가난한 이를 돕고, 남을 죄짓게 하지 말고, 형제를 용서하고, 올바른 믿음을 갖고, 겸손하게 섬기고, 받은 은혜에 감사하며 사는 것입니다.(16─17장 참조) 백영민2018.04.25
×[하느님과 트윗을] (48) 성부와 성자와 성령 중 어느 분에게 기도하나요기도의 종착지는 하느님 문 : 전구(轉求)란 무엇인가요.답 : 우리가 누군가를 위해서 기도하면 우리는 하느님의 중개자 역할을 하는 것입니다. 이를 전구(轉求)라고 합니다. 병자들, 모든 희생자들, 그리고 우리의 기도를 필요로 하는 다른 사람들을 위해서 기도하는 것은 중요합니다. 특히 우리는 죽은 이들이 빨리 천국에 갈 수 있도록 기도합니다. 다른 사람들보다 특별히 어떤 사람을 위해 기도를 더 많이 해주는 것은 불공평해 보일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감사하게도, 천국과 이 세상에는 모든 이들을 위해 기도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렇게 함으로써 자신을 위해 기도해 줄 사랑하는 사람이 없는 사람들에게도 전구자가 생깁니다. 그러니 여러분은 이런 사실을 기도가 필요한 모든 사람들을 위해 기도하라는 초대로 받아들이기 바랍니다.문 : 성부, 성자, 성령 중 어느 분께 기도하나요. 답 : 우리는 성부, 성자, 성령인 성삼위의 세 위격 중 어떤 분에게든 기도할 수 있습니다. 그분들은 세 위격 중 어떤 위격에게 기도를 드려도 한 분이신 하느님께 기도를 드리는 것과 같습니다. 동시에 세 위격은 서로 구별되는 위격을 가지고 계시며, 성경에 묘사된 대로 서로를 향한 사랑과 우리를 향한 사랑이 가득하십니다. 예수님은 성자이신 하느님이시며, 우리를 성부이신 하느님께 이끄십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이 어떻게 기도하는지 예수님께 여쭈었을 때, 그분은 ‘주님의 기도’를 가르쳐 주셨습니다. 눈먼 이들과 병자들이 예수님께 치유해 달라고 청했을 때와 같이 우리도 예수님께 직접 기도드려도 됩니다. 지혜, 강인함, 그리고 다른 은총을 얻기 위해 성령께 의탁할 수 있다고 예수님은 말씀하셨는데, 성령은 성부와 성자로부터 나시고 교회를 이끄시며 지키시는 분입니다. 문 :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는 것은 어떤 의미가 있나요.답 : 전례 안에서, 우리는 성부이신 하느님께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를 드립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우리는 성부께 끊임없이 기도하시는 예수님과 함께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그분의 이름으로(요한 15,16 참조) 청하는 모든 것을 하느님이 주실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을 통해 우리는 성부께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에페 2,18 참조) 그래서 우리는 흔히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라는 말로 기도를 끝냅니다. 성령은 성부와 성자 간의 사랑이기 때문에, 때때로 우리는 “성부와 성령과 함께 천주로서 영원히 살아 계시며 다스리시는 성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라고 기도를 끝맺기도 합니다.문 : 마리아와 성인들에게도 기도하나요.답 : 마리아와 그 밖의 성인들과 천사들은 천국에서 끊임없이 기도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들에게 우리를 위해 기도해 달라고 청합니다. 어디서부터 시작할지 모른다면 수호성인에게 나를 위해 기도해 달라고 청할 수 있습니다. 성경에서 우리는 다른 사람을 위해 예수님께 어떤 것을 청하러 가는 사람들을 종종 봅니다. 예수님은 그들의 전구를 들어주셨습니다. 마찬가지로 예수님은 우리의 기도와 성인들의 기도를 들어주실 것입니다. 우리는 성인들에게 흠숭이 아닌 공경을 드립니다. 우리는 우리의 기도에 응답하실 권능을 가지신 하느님만을 흠숭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인들에게 기도하는 것이 아니라 성인들과 함께 하느님께 기도하는 것입니다. 물론 우리는 언제나 직접 하느님께 기도할 수 있습니다. 정리=서종빈 기자 binseo@cpbc.co.kr 평화신문2018.04.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