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신도영성 나는 평신도다] (16)한국 교회 평신도 사도직의 현주소 4 : 현대 사회 속에서의 평신도](//cpbc.co.kr/CMS/newspaper/2019/03/rc/749230_1.0_titleImage_1.jpg)
[평신도영성 나는 평신도다] (16)한국 교회 평신도 사도직의 현주소 4 : 현대 사회 속에서의 평신도돈·명예 아닌 기도·봉사·복음에 관심을 현대를 살아가는 많은 이들이 돈과 권력, 명예만을 추구하고 명품과 최신형 스마트폰 등 물적인 것에서 행복을 찾는다. 하지만 그리스도인들은 하느님의 일, 이웃을 위한 일, 즉 기도, 성경, 봉사, 공동체 생활, 복음 선포 등에 관심을 갖고 살아가야 한다. 가톨릭평화신문 DB 외로움, 쓸쓸함, 고독…. 이 말들은 현대인들에게 더는 낯선 용어가 아닙니다. 실제로 우리 주위에는 외로움과 고독을 느끼는 이들이 많습니다. 그 외로움의 극한적 폐해가 바로 우울증과 정신분열증입니다.이러한 외로움은 하느님과의 단절에서 옵니다. 하느님과의 통교가 끊길 때 외로움이 옵니다. 하느님과 단절된 삶을 살아가는 사람은 영이 아닌 육신과 정신으로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많은 이들이 지금도 돈과 권력, 명예만 추구하며 살아갑니다. 명품과 최신형 스마트폰에서 행복을 찾습니다. 이런 상태에서는 기도생활이나 독서, 묵상, 성경 말씀에 대해 성찰하는 것이 불가능해집니다. 이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나의 일, 하느님의 일 우리는 일반적으로 너무 바쁩니다. 바쁠 필요 없습니다. 그렇게 바빠서 우리가 과연 얻는 것이 무엇인가요. 돈? 지금 가지고 있는 지갑을 꺼내 보십시오. 거기에 돈이 조금 있을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그 돈이 내 돈인가요? 아니면 하느님의 돈인가요? 지갑에 있는 카드가 내 카드인가요, 아니면 하느님의 카드인가요? 지갑 자체는 내 지갑인가요, 하느님의 지갑인가요? 생각을 더 확장해 보겠습니다. 내가 지금 하고 있는 이 일은 내 일인가요, 하느님의 일인가요?모든 평신도는 하느님과 함께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하느님의 일을 하는 사람입니다. 모든 일이 하느님의 일이라고 생각해야 합니다. 그러면 나에게 일을 하도록 해 주신 하느님께 감사할 수밖에 없습니다. 손의 혈관이 잘 돌아가게 만들어 주시고, 늘 새로운 세포를 만들어서 내가 오늘 일할 수 있게 해 주신 하느님께 얼마나 감사합니까. 내가 지금 하고 있는 일은 하느님의 일, 이웃을 위한 일, 상황 변화를 위한 일, 또 다른 건너편 상황을 변화시키기 위해 주신 일입니다. 그러니 감사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내가 하는 모든 일과 만나는 모든 사람에게 언제나 내가 하느님이라면 이 사람에게 어떻게 말하고 행동할까, 하느님이 이 일을 하신다면 어떻게 하실까 하고 생각해야 합니다.지금도 많은 평신도는 즐거운 것에 너무 집착하는 삶을 살아갑니다. 육신 차원에서는 엔조이(enjoy, 즐기다), 정신 차원에서 새티스파이(satisfy, 만족시키다)에 매몰되어 있습니다. 정작 영적 차원에서는 신경 쓰지 않습니다. 하느님 안에서 중심을 잡고 매일 영적인 성장을 위해서 노력하는 이들을 거의 찾아보기 힘듭니다. 오직 자기만 기쁘고 행복하고 즐거우면 된다는 식으로만 생각합니다. 종교적 이기주의입니다. 평신도라면 다른 것에 더 많은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 기도, 성경, 봉사, 공동체 생활, 복음 선포 등이 그것입니다. 평신도는 그리스도인입니다. 그리스도인이라면 그리스도인으로서 해야 할 기본적인 의무나 실천 사항 등에 더 관심을 갖고 그것을 삶을 통해서 드러내야 합니다. 그뿐 아니라 내가 살아가는 모든 삶 즉, 일상생활과 인간관계 그리고 직업적인 일들 안에서도 하느님 뜻이 이루어지도록 기도하고 생활해야 합니다.예수 그리스도를 대리하는 사람들세상 사람들은 교회 건물을 보고 하느님을 믿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을 믿고 따르는 그리스도인들, 평신도들의 삶을 보고 하느님의 존재를 인식하고 하느님을 믿겠다고 인식합니다. 그러므로 평신도는 이 세상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대리하는 사람들입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느님을 알고 그분의 뜻을 알아들었듯이 세상의 사람들도 세상 안에서 함께 살아가는 우리 평신도들을 보면서 하느님을 알고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을 접하고 그분의 존재를 확인하고 믿게 되는 것입니다. 현대 사회에서 살아가는 평신도들이야말로 이 세상 사람들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사절이 될 수 있는 유일한 존재입니다.예수 그리스도의 사상은 이타주의입니다. 평신도가 이타주의를 실천하고 살아간다면 그러한 평신도들을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가 즉, 하느님께서 세상에 드러나시게 될 것입니다.정치우(안드레아, 새천년복음화학교 교장) 평화신문2019.03.26

발명가 꿈꾸던 공대생, 예수님 닮은 아흔의 사제가 되다신달자 시인, 주교 수품 50주년 맞은 정진석 추기경과의 대화 신달자 시인이 정진석 추기경과 마주 앉아 대화를 나눴다. 정 추기경과 삶과 신앙에 대해 나눈 신 시인은 “추기경님은 영혼의 밭을 갈며 말씀의 씨앗을 뿌리고 키우고 거두는 농부와 같다”고 말했다. 서울대교구 제공 정진석 추기경이 올해 주교 수품 50주년을 맞았다. 1970년 6월 25일 청주교구장에 임명되면서 주교가 됐고, 같은 해 10월 3일 청주교구장에 착좌했다. 신달자(엘리사벳) 시인이 7월 16일 주교 수품 금경축을 기념해 정 추기경을 찾았다. 모든 것이 불안하고 혼란스러운 이 시대에 무게 중심을 잡아 주는 어른을 뵙고 싶어서였다. 정 추기경을 만난 신달자 시인이 그날의 이야기를 보내왔다. 장대비 내린 뒤 몇 가닥 구름 사이로 보이는 파아란 하늘색을 닮은 추기경을 혜화동 주교관에서 만났다. 1931년생 아흔의 얼굴은 보이지 않았다. 정확하게 말하면 절반은 유년시절의 맑은 순수성을 그대로 지닌 건강한 얼굴, 예수님 닮아가는 얼굴이라고 하면 맞겠다. 안심이었다.누구나 요즘 모든 일이 불안하고 두려운 상태를 살고 있어 이럴 때 인생 지침의 어른을 뵙고 싶었는데 뜻이 이루어졌다. 허영엽(서울대교구 홍보위원회 부위원장) 신부의 전화를 받고 달려가듯 설레며 갔던 것이다. 추기경을 뵙는 순간 머리를 스쳐 지나가는 생각이 있다. 우리가 밥상이나 책상이 흔들거리면 종이를 접어 다리 밑에 깔고 수평을 잡지 않는가. 추기경은 그 흔들거리는 세상을 스스로 구겨진 종이가 되어 세상의 수평을 잡고 계신 분이었다. 그러나 모습은 맑은 하늘로 보이는 일이야말로 하느님의 뜻이 있으신 것이리라.“50년 전 생각이 나요. 제가 늦게 로마에 가서 석사 학위를 막 받고, 박사 학위 준비 겸 방학 동안에 서울교구 신부님들 미사 예물을 얻으러 미국에 갔어요. 교구 사정이 어려울 때였거든요. 그때 미국에 있는 교황청 대사관이 편지를 보내왔어요. 교황청의 편지였지요. ‘네가 서울교구장의 허락을 받고 미국에 왔느냐? 만약 허락을 받고 왔다면 그것이 네가 주교가 된다는 것에 승낙하는 것을 겸하겠다.’ 1970년 6월 25일, 바오로 6세 교황님께서 저를 제2대 청주교구장으로 임명하셨다는 소식을 듣게 된 거죠.”오래전 이야기를 어제 이야기처럼 차분히 하시는 것을 나는 마치 예수님의 지난날을 듣는 듯 귀를 세웠다. 그때가 김수환 추기경이 교구장이었던 시절이었으며 39세에 주교가 되신 것이다. 서울대학교 공대생이었던 정 추기경의 원래 꿈은 발명가였다. 그러나 인간이 발명한 것은 악용될 수 있다는 것, 인간이 만든 발명품은 마침내는 무기로 사용될 수 있어 악용되지 않는 도구가 되어야겠다 생각하셨다는 것이다. 그뿐인가. 한국전쟁 때다. 살벌한 인천 상륙 끝에 서울을 탈환하는 전날 밤 골방에서 육촌 동생 미카엘과 숨었는데 지붕이 폭탄에 맞아 미카엘이 추기경 앞에서 죽은 것이다. 만약 위치가 바뀌었다면 추기경이 그렇게 됐을 거라 생각하신 것이다. “왜 하느님이 나를 살리셨을까?” 이 물음은 추기경이 신학교로 가신 큰 동기가 되었다. 추기경님은 눈을 지그시 감으시면서 “사명을 주신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사명? 누구나 크고 작은 사명을 받고 태어나지만 많은 사람은 그 사명을 되돌리는 경우가 많다. 더 큰 계기가 있었다. 1ㆍ4 후퇴 때 국민방위군으로 소집돼서 마산까지 걸어갈 때였다. 덕소 근처에서 얼어있는 한강을 건너는데, 추기경이 지나간 다음에 얼음이 깨져서 뒤에 오던 사람들이 많이 죽었다. 추기경이 막 건너간 다음이다. 또 의성쯤 갔을 때는 추기경 바로 앞에 간 사람들이 지뢰를 밟아 죽었다. 낙동강 전투 때 뿌려놨던 지뢰였다.여러 번 살아난 것이다. 추기경은 그러므로 그때마다 “반성하고 또 반성했다”고 하셨다. 그 뼈저린 죽음을 너무 많이 경험하면서 하느님이 주신 사명은 추기경의 굳건한 영혼의 뼈로 굳어진 것이다. 그리스도와 함께 살 때 그것이 곧 생명 안에 사는 것을 알게 하신 뜻일 것이다. 마산에 도착해서는 육군 국민방위군 소위가 되었지만 한 달 만에 국민방위군 부정사건이 터져서 방위군 사령관이 처형당하고 국민방위군은 해체됐다. 그리고 대구에 있던 미8군 부대에서 통역관이 됐다. 미군 무기수송부대였는데 똑같은 부품이 트럭에도 있고, 탱크에도 있었다. 그래서 또 한 번 느낀 게 있었다. 평화의 무기가 곧장 살생 무기가 되는구나 하고. “그 무렵 영적 아버지인 김영식 신부님을 만나게 됐어요. 전쟁 중에 고아 100명을 기르고 계셨지요. 부산으로 피란 왔던 고아원이 부평 미군 보급부대 옆으로 이사했는데 통역관이 필요하셨던 거예요. 신부님을 따라다니면서 고아원 운영에 필요한 물품을 얻어오곤 했지요.” 그때까지는 신부도, 신학도도 아니었다. 미군 신부 방에서 「성녀 마리아 고레티」 「종군 신부 카폰」 「억만인의 신앙」 책을 빌려보게 된다. 그렇게 「성녀 마리아 고레티」 책을 번역하게 되는데, 마리아 고레티 성녀는 1950년 6월 시성됐다. 한국전쟁이 일어난 때에 성인이 되었으니 “이분은 한국의 성인”이라고 하면서 번역을 하셨다. 가슴으로 걸어오시는 성녀가 계셨던 것이다. 책은 추기경이 신학교 1학년 때 출판이 되었다.추기경에게 지금의 생은 한 네 번, 다섯 번째인 것 같다. 살려 주시는 분이 계셨고 해야 할 과제를 손에 쥐여주시는 분 또한 계셨다. “「억만인의 신앙」을 번역할 때는 우리나라 신자 수가 1%도 안 됐어요. 그래서 그게 가슴에 맺혀있었죠, 어떻게 하면 전교를 잘 할 수 있을까 하고요. 「억만인의 신앙」은 선교에 관한 책이에요. 신앙을 튼튼하게 하는 데 도움을 주는 책이지요.” 번역 60년, 최근에 다시 「참 신앙의 진리」라는 새로운 제목으로 탄생되었다. 하느님이 마련하신 것이라는 확신이 섰다. 참 진리의 선교에서 오늘에 이르신 것이다. 30대 청년 주교라니, 호기심이 생겼다. “39세면, 추기경님이 교구장으로 막 부임하셨을 때 굉장히 미남이셨을 거 같아요.”“미남인 건 모르겠고요.(웃음) 그때 청주교구에 미국 메리놀회 신부님이 19명, 한국 신부님이 6명이었어요. 한국 신부님들은 미국 신부님들보다 연배도 어리니까 작고 가난한 본당으로 갈 수밖에 없잖아요. 그러니까 생활비가 없었어요. 젊은 신부님들이 생활비 때문에 고민하고, 실망하고 그런 상황들이 벌어졌지요.”그때는 다 가난하고 충북에 포장도로도 거의 없을 때였다. 주교 서품식은 1970년 10월 3일 청주에서 있었다. 그 당시 청주 사람들은 주교 서품식을 처음 보았다. 교구 설정 12년 만에 처음으로 한국인 주교를 맞이하게 된 것이다. 착좌 후 일주일 동안 교구 내 22군데 성당을 다 방문했다. 간혹 신자들을 만나 본명을 물으면 “밀가루 이름요?” 하고 되물었다. 교리에는 관심 없이 외국 교회의 구호품을 받으려고 세례받는 사람들이 많았던 것이다. 이래서는 안 되겠다. 성심의 바닥에 하나씩 돌을 쌓기 시작하신 것이다. 나는 추기경의 탁월한 기억력에 감탄했다. 나는 문학도로서도 한 인간으로서도 ‘무엇으로 사는가?’라는 질문에 매번 머뭇거린다. 약하고 잘 비틀거리는 내가 물었다. “추기경님은요?” “사람은 하느님이 창조하신 것 중에 마지막 작품이에요. 그렇다면 뭔가 다른 피조물에게는 없는 것을 하느님께서 사람에게 주셨지요. 그게 지성이에요. 하느님이 만들어 주신 작품 중에서 사람만이 나를 존재케 해주시는 하느님을 의식할 수 있어요. 그것이 자유예요.” 자유! 뜻밖의 말씀이었다. “그 자유를 인간이 남용해서 불행을 자초하는 거예요. 하느님은 사람을 창조하시면서 ‘너는 행복하게 살아라’ 하면서 한 사람 한 사람 태어날 때 영혼을 넣어주셨어요. 각 사람의 영혼을 단독으로 창조하셔서 아기가 태어날 때마다 새로운 창조를 해주시는 거예요. 그러니까 신 선생이나 나나 모두 특별한 존재예요.” 무엇인가 남용했다는 말씀에선 심장이 툭 떨어져 내리는 기분이었다. 남용! 인간은 그 남용과 남발로 지금 무지한 고통에 시달리는 것, 추기경은 가차 없이 지적해 주셨다. 부와 건강, 자녀 이런 것들을 다 가진 내 지인들은 어쩌다가 단둘이 얘기를 하다 보면 다들 불행하다고 한다. 겉으로는 화려하지만, 안으로는 불행하다, 아프다, 외롭다고 말한다. 인간은 왜 그럴까? 행복은 어떤 것이기에 인간이 가지기 어려운지 모를 일이다. “요새 전염병 때문에 다 어려워하고 있잖아요. 전염병의 근거가, 인간이 지구의 자원을 남용했기 때문이라는 학설도 있잖아요, ‘이것으로 알아들어라’ 하는. 외로움 상처 고통 모두 같은 문제에요. 재앙의 원인은 끝없는 욕망에 있어요. 우주 질서를 순종하고 받아들이는 자세가 필요해요. 많이 가진다고 행복하지 않아요. 감사와 자유가 필요합니다. 특히 하느님에 대한 신뢰 부족이 원인이기도 해요. 말씀을 철저히 따르면 부족함이 없을 텐데, 조금씩 에누리를 해서 자기 멋대로 악용을 하잖아요.” 추기경이 내 안을 들여다보시는 것 같아 조금 자세를 고쳐앉았다. 어휴! 오래 앉아 있으면 안 되겠다고 스스로 서두르는 것을 느꼈다. 그러면서도 나는 다그쳤다. 왜 인간은 외로운가. 예수님이 계시는데도 말이다. 왜 부족하고 왜 상처를 받는가. 추기경도 사람인데 혹시 이런 순간은 없을까. “있죠. 그때마다 예수님을 생각합니다.” 인간의 감정을 누를 수 있는 더 강한 말씀이 있다는 것이다. 우리는 진정한 가르침을 진정하게 듣는가. 멋대로 악용하고 나름으로 해석하는 건 아닐까. 결국, 고통만 남는 것이리라. 그렇다. 예수님을 생각하시기에 일 년에 한 권씩 책을 쓸 수 있는 무한 힘을 받으시고 실행하셨는지 모른다. 그리스도 안에 완성을 이루는 삶을 사신 것이다. 추기경은 역경에 처했을 때보다 더 높은 뜻을 생각하고 그 생각을 기르는 분이시다. 추기경이 스스로를 ‘작은 별’이라고 지칭하실 때 추기경 앞에 꿇어앉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김수환 추기경은 여러 혼란 속에 고통을 헤쳐나가셨는데 후임자인 자신은 그런 용기가 없다고 생각하셨단다. 그러나 ‘작은 별’이라고 스스로 칭하셨지만 작은 별에도 분명 빛이 있다고. 그 믿음으로 오늘까지 예수님의 뜻을 받들고 오신 것이니 큰 별이 틀림없다고 나는 생각했다. 통째로 주님의 은혜라는 것을 추기경을 통해 깊게 느꼈다. 추기경과의 만남에서 나의 첫 질문은 ‘요즘 세상에 희망이 있을까?’였다. 추기경은 힘주어 말씀하셨다. “희망이 있죠. 하느님께 늘 희망을 청하면서 지냅니다.” 추기경은 그 희망을 구겨진 종이로 우리 사회를 받쳐 오신 것이다. 나는 동시대인으로 함께 추기경과 살아온 행운에 감사했다. 마지막 질문으로 트로트를 불러 보신 적이 있는지 물었다. 추기경은 고개를 흔드셨다. 옆에 앉은 허영엽 신부가 대신 대답해주셨다. “가요를 부르신 적이 있어요. 2004년 명동대성당 특강 때 최희준의 ‘하숙생’을 부르셨는데 음정 박자가 하나도 틀리지 않아서 많은 박수를 받으셨죠.” 우리는 함께 웃었다. ‘인생은 나그넷길 어디서 왔다가 어디로 가는가….’ 허 신부님이 그 노래의 첫 구절을 불러 나도 따라 불렀다. 주교 수품 50주년 인터뷰가 트로트로 끝이 났지만, 추기경은 90년 동안 영혼의 농부였다고 생각한다. 영혼을 밭갈이하며 말씀의 씨앗을 뿌리고 키우고 거두는 농부, 그 험난한 신앙의 박토를 일구신 농부. 아무리 험하고 가파르고 아픈 길이어도 오르고 또 오르는 순교이며 예수님의 말씀을 땅으로 삼으신 추기경의 주교 수품 50주년은 아름답고 향기가 너무 진했다. “인생이라는 먼 길을 가는 우리에게 그 최종 목적지와 주의사항을 알려주는 길잡이가 곧 성경”이라고 추기경은 말씀하셨지만, 추기경이 바로 우리에겐 그 길잡이라는 생각이 썰렁한 내 마음을 훈훈하게 했다. ‘추기경은 우리 모든 사람에게 등대지기셔요. 누가 쳐다보지 않아도 늘 불을 켜고, 바닷가에 외롭고 당당하게 서 있는 등대. 추기경이 계시니 주교 수품 50주년을 맞아 이 어지럽고 갈팡질팡한 대한민국에 등대지기로 저희가 바라보고 있습니다.’ 건강하시고 앞으로도 계속 책도 보여주시고, 얼굴도 보여주시고, 하숙생도 부르시고, 그렇게 등대지기가 길잡이가 계속되어 주시기를 바라며 혜화동을 밝게 걸어 나왔다. 며칠 굶어도 되겠다. 든든했다. cpbc2020.08.05
![[시사진단] 독서공동체의 회복(표정훈, 요한 사도, 출판평론가)](//cpbc.co.kr/CMS/newspaper/2019/04/rc/750273_1.0_titleImage_1.jpg)
[시사진단] 독서공동체의 회복(표정훈, 요한 사도, 출판평론가) “책 읽을 때 그의 목소리는 들리지 않고 혀도 움직이지 않았다. 우리는 종종 이런 식으로 침묵 속에서 독서에 빠진 그를 발견하곤 했다. 그는 절대로 큰 소리를 내어 글을 읽지 않았다.” 밀라노의 주교 성 암브로시오(340~397)가 책 읽는 모습을 성 아우구스티노는 이렇게 묘사했다. 왜 묘사했을까? 대략 10세기까지 서양에서 소리 내어 읽지 않는 묵독은 드문 일이었다. 독서는 기본적으로 소리 내어 읽는 낭독이었다. 성 암브로시오의 묵독이 꽤 특이해 보였던 것.서양뿐 아니라 동아시아도 마찬가지였다. 정인지(1396~1478)의 글 읽는 소리에 반한 옆집 처녀가 담을 넘어 방으로 뛰어들자, 정인지는 절차를 밟아 혼인하겠노라 달래어 처녀를 돌려보냈다. 이튿날 정인지는 이사 가버렸고 처녀는 상사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조광조, 심수경, 김안국, 상진 등도 젊은 선비의 글 읽는 소리에 반한 처녀가 담 넘은 전설의 주인공들이다.경전을 낭독하는 것은 세계의 주요 종교들의 공통점이다. 교회에서는 말씀 전례에서 성경을 읽어 전례 참여자들에게 하느님 말씀을 깨닫도록 하는 이를 독서자라고 한다. 고대 인도의 성전(聖典) 리그베다, 사마베다, 야주르베다 등은 낭송하는 음까지 자세하게 정해져 있었다. 이슬람의 ‘코란’은 혼례나 장례, 국경일, 각종 공식 모임 등에서 낭송되며 독경사(讀經士)를 초빙할 때도 있다.유다인들도 다양한 악센트와 리듬으로 각 지역 특유의 정서까지 반영시켜 성경을 낭독했으며, 역시 독경사들이 활동했다. 전통 사회에서 성립된 텍스트 대다수는 낭독을 전제로 한다. 18세기 유럽에서는 귀족의 개인 살롱에서 책을 낭독하고 감상하는 모임이 자주 열리곤 하였다. 조선에서는 전문적인 소설 낭독가인 전기수(傳奇)들이 활동했다. 독서의 역사에서 이렇게 낭독이 절반 이상을 차지한다. 눈과 머리로 읽는 묵독에 비해 낭독은 온몸으로 읽는다. 묵독은 사밀(私密)한 개인적 행위지만, 낭독은 공동체성을 바탕으로 한다. 독서란 본래 함께 읽는 행위였다. 책이란 많은 사람이 공유하는 물건이었다. 예전처럼 책을 낭독하지는 않더라도 책을 함께 읽고 의견을 나누는 독서공동체가 최근 늘고 있다 한다. 문화체육관광부가 지원하고 전국 도서관들이 진행하는 ‘도서관 길 위의 인문학’ 사업이 대표적이다.독서공동체는 그 이상적인 의미에서 ‘책과 독서를 매개로 소통으로서의 교양과 시민적 상식을 함양하며 책임 있는 친교를 나누는 자율적 시민 공동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독서공동체의 범위는 소규모 모임에만 그치지 않는다. 예컨대 교회 전체를 하느님의 말씀을 함께 읽는 하나의 독서공동체로 볼 수도 있다. 독서의 공동체성을 회복하는 일은 책이 공론(公論)을 형성하는 매체가 되고, 독서가 공론 형성의 바탕이 되는 가능성의 회복이다. cpbc2019.04.09

돈이 안 되더라도 교회에 꼭 필요한 서적은 만들어야30주년 맞은 출판사 ‘기쁜소식’ 전갑수 사장 기쁜소식 전갑수 사장은 1989년부터 30년 동안 출판사를 운영하며 신자들에게 책을 통해 선교해왔다. “이런 책 내면 밥 먹고 살아요?”기쁜소식 전갑수(베르나르도, 65) 사장이 종종 듣는 말이다. 출판사를 운영한 지 올해로 30년, 전 사장은 “문 닫지 않고 살아온 게 기적”이라고 했다.1989년 12월 8일, 성경을 통한 그리스도인 재복음화에 뜻을 두고 기쁜소식을 설립했다. 당시 프랑스 유학을 마치고 온 안병철 신부(서울대교구)를 만나 ‘성서못자리’ 교재를 펴낸 게 첫 출판물이었다. 그가 신자 재복음화에 관심을 가진 건 1984년 교황 요한 바오로 2세 방한과 한국 천주교회 200주년 기념대회 및 103위 시성식을 마치면서였다. 당시 가톨릭 신자는 폭발적으로 양적 팽창했지만 정작 교회에서는 신자 증가에 따른 예비자 교리반 운영 대책은 없었다. 출석 확인 도장만 받으면 세례와 견진성사를 받던 시절이었다. 당시 가톨릭출판사 직원이었던 전 사장은 한 노 사제가 신자 재교육의 필요성에 대해 절박하게 했던 말을 마음에 담았다. 신자 재복음화를 목표로 책을 통한 선교, 책을 통한 신자 재복음화를 목표로 기쁜소식은 항해를 시작했다. 첫 출판물 성서못자리 교재는 모두 23권으로, 완간하는 데 12년이 걸렸다. 지금까지 15만 부가 팔렸다. 거꾸로 말하면 15만 부를 파는 데 30년이 걸렸다. “15만 부, 많은 거 같죠? 15만 부를 30년으로 나누면, 1년에 5000권입니다. 한 달에 400권 판 거죠. 책값을 평균 8000원으로 치면, 한 달에 320만 원입니다. 원가를 뺀 수익 20%면 64만 원이 남죠. 직원이 9명인데….” 지금까지 밥 먹여 준 건 안 팔릴 줄 알았는데 팔린 책들 덕분이었다. 그가 기쁜소식의 역사를 기적이라고 하는 이유다. 2005년 기쁜소식은 십자가의 성 요한(1542~1591)의 저작 4권(어둔밤ㆍ가르멜의 산길ㆍ사랑의 산 불꽃ㆍ영가)을 선보였다. 스페인 유학 중 신비신학의 꽃으로 불리는 성 요한의 영성에 매료된 방효익(수원교구) 신부가 우리말로 옮겼다. 방 신부는 여러 곳의 교계 출판사에 출간 의뢰를 했지만 모두 책이 팔리지 않는다고 망설이는 것을 보고 좌절하던 차에 우연히 전 사장을 만났다. “영성 서적은 안 나간다는 게 고정 관념이었죠. 기절할 뻔했습니다. 책을 출간하자마자 6000질이 나갔어요. ‘십자가의 성 요한 책이 한국말로 나올 줄 꿈에도 몰랐다’면서 개신교 목사들이 1000질을 사갔어요. 미국에 있는 한국인 목사한테도 연락이 왔죠.”영성에 목마른 신자들 갈증 풀어줘 그는 한국 교회 신자들이 영성에 목말랐다는 걸 알았다. 영성에 대한 갈증을 풀어줄 다양한 영성을 소개하고 싶은 열정이 커졌다. “영성 서적을 낼 때마다 망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은 있습니다. 여태껏 해보니 ‘죽기 아니면 살기’로 달려드니 살더라고요.”2012년부터 펴내고 있는 가르멜 총서도 그의 역작이다. 가르멜 영성의 대가인 예수의 대 데레사 성녀, 아기 예수의 데레사 성녀, 십자가의 성 요한, 에디트슈타인 성녀, 삼위일체의 엘리사벳 성녀 저서를 중심으로 총 100편을 목표로 출간을 이어가고 있다. 한국 교회에서 가르멜 영성의 독보적인 영성신학자인 윤주현(가르멜수도회 한국관구장) 신부가 기획 번역하고 있는 이 총서 역시 큰 사랑을 받고 있다. 지금까지 기쁜소식이 출간한 교재와 단행본은 600여 종이 넘는다. 종별 발행 부수는 평균 2000부 이상이다. 달력을 비롯해 기도문, 축복장, 사목 계획서 등 본당 행정에 필요한 각종 문서도 제작한다. 주교회의가 편찬한 「한국 천주교 성지순례」도 기쁜소식 기획으로 나왔다.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이 책자를 들고 다니며 순례할 신자들을 위해 비닐 가방을 만든 것도 그의 아이디어였다.그는 “2000년대가 영성의 시대였다면 지금은 문화 복음화 시대로, 함께 어우러져 주고받는 시대”라며 “늘 책을 통한 선교를 고민하겠다”고 밝혔다.전 사장은 “기쁜소식을 사랑해주신 주교님과 신부님, 수녀님, 사무장과 사무원들과 어려운 여건에도 기쁜소식을 지켜온 가족들에게 머리 숙여 감사드린다”며 “언제나 기뻐하십시오, 끊임없이 기도하십시오, 모든 일에 감사하십시오”(1테살 5,16-18)라는 말씀을 가슴에 안고 새로운 30년을 향해 최선을 다해 뛰겠다”고 고마움을 표했다.30주년 행사는 없다. 직원들과 함께 소박한 감사 미사를 봉헌한다. 이지혜 기자 bonaism@cpbc.co.kr 평화신문2019.11.27
연재를 시작하며](//cpbc.co.kr/CMS/newspaper/2019/01/rc/742794_1.1_titleImage_1.jpg)
[이창훈 위원의 사도행전 이야기](1)연재를 시작하며땅 끝까지 복음 선포한 사도들의 여정왜 사도행전인가 성경을 펼쳐보면 사도행전은 신약성경 27권 가운데 네 복음서와 21권의 서한 사이에 있습니다. 차례만 놓고 본다면, 사도행전은 네 복음서와 서간들을 연결한다고 할 수 있겠지요. 실제로 사도행전은 복음서와 서간을 연결하는 역할을 합니다. 어떤 의미에서냐고요? 복음서들은 모두 예수님에게 집중합니다. 예수님의 가르침과 행적, 그분의 삶과 죽음과 부활에 초점을 맞추고 있지요. 복음서들은 예수님이 누구이신지를 제시하려는 것이 목적이기 때문입니다. 지난 2년 동안 루카복음의 예수님 이야기를 통해서 살펴보고자 한 것이 바로 이것이었습니다. 한마디로 예수님은 그리스도, 곧 인간을 구원하기 위해 사람이 되신 하느님의 아들이시라는 것입니다. 반면에 신약성경에서 21권에 이르는 서간들은 예수님을 그리스도라고 믿고 고백하며 예수님의 가르침을 따라 살아가는 신자 공동체나 개인에게 보내는 편지들입니다. 이 신자 공동체들을 교회라고 부르지요. 주목할 것은 편지의 수신인이 되는 신자 공동체들은 예수님께서 태어나시고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시면서 활동하시고 수난당하시고 죽으시고 부활하신 땅에 있는 공동체들이 아니었다는 사실입니다. 그 공동체들은 소아시아 곧 오늘날 터키 지역을 비롯해서 그리스와 로마까지 지중해 인근 지역 곳곳에 산재해 있었습니다. 이 교회들은 어떻게 해서 생겨났을까요? 바로 사도들의 복음 선포 활동을 통해서입니다. 사도들은 누구인가요? 예수님께서 하느님 나라의 기쁜 소식을 전하는(루카 5,43) 활동을 시작하시면서 당신을 따르는 제자들 가운데 친히 뽑으신 12명입니다. 이들은 집과 가족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라다니면서 사도, 곧 파견될 사람으로서 제자 교육을 받은 이들입니다. 이들은 서로 높은 자리를 차지하려 다투기도 했지만(루카 9,46; 22,24), 예수님 생전에 마귀를 쫓아내고 질병을 고치는 힘과 권한을 받아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는 활동을 했던 이들입니다.(루카 9,1-6) 하지만 공관복음서들에 따르면, 열두 사도는 결정적인 순간에 곧 예수님께서 붙잡혀 수난하시고 죽으실 때에 모두 예수님을 떠나고 말았습니다. 예수님께서 사도들 가운데 으뜸으로, 반석으로 세우신 시몬 베드로마저도 예수님을 세 번이나 모른다고 부인했지요. 그뿐 아니라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나타나셨을 때도 이들은 믿지 못했습니다. 루카 복음사가는 “너무 기쁜 나머지 아직도 믿지 못하고 놀라워하는데”라는 이상한(?) 표현으로 그들의 태도를 묘사했지요. (루카 24,41) 이런 사도들이 어떻게 복음을 선포하고 로마 제국의 곳곳에 교회를 세울 수 있었을까요? 그 이야기를 성경에서 유일하게 사도행전이 전하고 있습니다. 신약성경의 다른 부분들, 예컨대 바오로 사도의 서간들에서 관련된 이야기가 전혀 없는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사도행전만큼 사도들의 복음 선포 활동을 자세하게 또 박진감 넘치게 전하는 성경 본문은 다른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습니다. 사도행전은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기쁜 소식이 온 세상에 선포되는 과정을 다루는 유일하고 대표적인 책인 셈입니다. ‘예수님 이야기’에 이어 ‘사도행전 이야기’를 살펴보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예수님 이야기가 예수님이 누구이신지를 알고자 하는 데 초점이 있다면, 사도행전 이야기는 예수님이 맡기신 사명, 곧 복음 선포 활동이 어떻게 펼쳐지고 있는지에 초점을 두고 있기 때문입니다. 또 이런 점에서 ‘예수님 이야기’의 소재가 된 루카복음과 ‘사도행전 이야기’의 소재가 되는 사도행전은 일관성과 연속성을 지닌다고 하겠습니다. 이 일관성과 연속성은 루카복음을 쓴 저자와 사도행전을 쓴 저자가 동일한 사람이라는 점에서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성경학자들 사이에서는 루카복음의 저자와 사도행전의 저자가 동일인이라는 데에 반대하는 의견을 찾아보기 힘듭니다. ‘사도행전 이야기’에서는 사도행전의 저자를 루카복음의 저자와 동일 인물인 루카로 전제하면서 이야기를 풀어갑니다. ‘루카복음 이야기’와 마찬가지로 ‘사도행전 이야기’ 또한 사도행전 본문에 대한 주석이나 주해를 하려는 것이 아님을 분명히 말씀드립니다. 그럴 능력도 없습니다. 다만 본문을 통해서 사도들이 어떤 방식으로, 어떤 태도로 복음을 선포하고 있는지, 또 사도들의 복음 선포로 형성된 교회의 삶이 어떠한지를 주목하고자 합니다. 그리고 그것이 2000년이 지난 오늘의 우리에게 어떤 의미를 지니는지를 살펴보고자 합니다. 이를 통해 오늘날 교회 안에서, 또 신자들 안에서, 나아가 세상 안에서 활동하시는 성령께 어떻게 마음을 열고 귀를 기울일 수 있는지를 성찰하고자 합니다. 알아보기엘 그레코 작 ‘사도 베드로와 바오로’. 에르미타주 미술관. 사도행전이란=사도행전 본문에 들어가기에 앞서 사도행전의 구성과 집필 연도에 대해 간단히 알아봅니다. 전체 28장 31절로 이루어져 있는 사도행전은 학자마다 조금씩 차이가 있지만 크게 2부, 혹은 4부로 나눌 수 있습니다. 이런 구분은 사도행전 전체의 흐름을 좀 더 쉽게 파악할 수 있도록 해준다는 점에서 의미를 지닌다고 하겠습니다. 2부로 나눌 때 제1부는 예루살렘을 시작으로 팔레스티나(오늘의 이스라엘 땅과 팔레스타인 자치지구 일대)에서 펼쳐지는 사도들의 복음 선포 활동을 다룹니다(1,1―12,25). 여기서는 사도들, 그 가운데서도 특히 베드로의 활동이 중심이 됩니다. 제2부는 바오로 사도의 선교 활동 그리고 예루살렘에서 체포되어 로마로 압송되기까지입니다(13,1―28,31). 4부로 나누면 1부는 성령 강림과 갓 태어난 예루살렘 교회의 모습(1,1―5,42), 2부는 박해를 받으면서 성장하는 교회(6,1―12,25), 3부는 바오로 사도의 선교 활동(13,1―21,16), 마지막 4부는 바오로 사도의 체포와 로마 압송(21,17―28,31)으로 구분할 수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사도행전의 집필 연대와 관련, 학자들은 루카복음이 쓰인 이후에 사도행전이 쓰였다는 점에서 의견이 일치합니다. 이는 사도행전 첫머리에서 확실하게 유추할 수 있습니다. 학자마다 약간씩 차이가 있습니다만, 사도행전은 루카복음이 쓰인 직후인 기원후 80~90년 사이에 쓰였다는 것이 대체적인 견해입니다. 김현진2019.01.02

믿음과 순명으로 성가정 위해 헌신한 ‘교회의 아버지’복되신 동정 마리아의 배필 성 요셉 대축일 요셉 성인은 마리아와 함께 구세주의 강생 신비에 동참한 최초의 인물이다. 그는 성모 마리아와 예수 그리스도의 성가정을 침묵과 순명으로 보호한 성실한 아버지로 ‘구세주의 보호자’ ‘교회의 아버지’ ‘성직자와 수도자, 가난한 이, 노동자, 임종자의 수호성인’으로 공경받고 있다. 그림은 요셉 성인이 헤로데의 박해를 피해 성모 마리아와 아기 예수를 데리고 이집트로 피신하고 있는 장면을 묘사한 조토의 프레스코 작품으로 이탈리아 아시시 성 프란치스코 대성당에 설치돼 있다. 프란치스코 교황이 가장 사랑하고 공경하는 성인은 누구일까? 바로 성모 마리아와 그의 배필이신 요셉 성인이다. 성 요셉에 대한 프란치스코 교황의 사랑과 공경은 곳곳에 드러난다. 우선 교황 문장이 그 증거다. 프란치스코 교황의 문장 방패 중앙에는 예수회를 상징하는 ‘IHS’라는 라틴말이 크게 새겨져 있다. IHS는 ‘인류의 구원자 예수’(Iesus Hominum Salvator)를 뜻하는 라틴어의 머리글자다. 이 문장을 중심으로 왼편의 별은 ‘성모 마리아’를, 오른편 포도 모양의 ‘나르드 꽃’은 요셉 성인을 상징한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또 2013년 3월 19일 복되신 동정 마리아의 배필 성 요셉 대축일에 제266대 교황으로 즉위했다. 교황은 즉위 미사 강론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를 구세주이신 주님으로 고백하는 그리스도인뿐 아니라 모든 인류가 하느님께로부터 받은 소명, 즉 하느님의 모든 피조물을 보호하는 ‘수호자’로서의 임무를 수행할 것임을 밝혔다. 그러면서 프란치스코 교황은 이 모든 수호자로서의 소명을 성모 마리아와 예수 그리스도의 성가정을 침묵과 순명으로 보호한 요셉 성인의 삶에서 찾아 수행할 것임을 웅변했다. 복되신 동정 마리아의 배필 성 요셉 대축일을 맞아 ‘교회의 아버지’인 요셉 성인에 관해 알아본다. 구세주의 보호자 성 요셉요셉 성인의 행적은 마태오 복음서와 루카 복음서 1─2장에만 나온다. 그는 처녀의 몸으로 성령으로 아들을 잉태한 마리아를 아내로 맞아들임으로써 주님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강생에 동참해 구세주의 보호자가 된다. 복음서는 요셉 성인을 ‘의로운 사람’(마태 1,19), ‘하느님의 뜻을 따르려는 경건한 사람’(마태 1,20─2,15 참조), 또 ‘신심 깊은 사람’(루카 2,22-24 참조)으로 묘사한다. 요셉은 의로운 사람이다. 그는 마리아의 임신 소식을 세상에 드러내지 않고 남몰래 파혼하기로 작정할 만큼 신중하고 과묵한 사람이다. 그는 또 겸손한 하느님의 종이다. “두려워하지 말고 마리아를 아내로 맞아들여라”(마태 1,20) 하는 천사의 말을 들은 후 의심을 풀고 마리아와 혼인하고 예수님의 아버지가 된다. 요셉은 아울러 정결한 남편이다. 요셉은 “보아라, 동정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고 하리라”는 천사의 말을 듣고 “아내가 아들을 낳을 때까지 잠자리를 같이하지 않았다.”(마태 1,23-25) 이로써 요셉은 마리아와 함께 구세주의 강생 신비에 동참한 최초의 인물이 된다. 요셉은 또 성실한 아버지이다. 그는 법적인 아버지로서 아들에게 ‘예수’라는 이름을 지어주고(마태 1,21-25), 할례를 시키고(루카 2,21), 성전에 봉헌(루카 2,22)했다. 그리고 아내와 아들을 보호하기 위해 이집트 피난(마태 2,13-15)을 마다치 않았고, 나자렛으로 돌아와 성가정을 보살피며 가장으로서의 사명을 수행한다.(루카 2,51-52) 요셉 성인은 다윗 가문(마태 1,1; 루카 1,27) 사람으로 목수(마태 13,55) 일을 하였다. 고향은 베들레헴(루카 2,4 참조)이었으나 나자렛에서 생활(마태 2,13-15)했다. 그의 아버지는 ‘야곱’(마태 1,16) 또는 ‘엘리’(루카 3,23)이다. 마태오 복음에서는 예수님의 족보가 아브라함에서 다윗과 일련의 유다 왕을 거쳐 요셉까지 42명의 이름이 이어진다.(마태 1,1-17) 루카 복음은 예수님을 기점으로 조상을 거슬러 올라가며 열거해 다윗과 유다, 야곱, 이사악, 아브라함뿐 아니라 태고 시대 노아, 라멕, 에녹을 거쳐 아담까지 77명의 인물을 나열하고 있다.(루카 3, 23-38)이렇게 예수님의 족보가 차이 나는 것에 대해 성경학자들은 마태오 복음은 법률상 요셉의 족보를, 루카는 혈통상 마리아의 족보를 따랐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또 장남이 대를 잇지 못하고 죽었을 경우 형제 중 미혼인 한 사람이 형수와 결혼해 첫 아들을 낳아 죽은 형제의 이름을 이어받게 했던 이스라엘의 대를 잇는 전통 방식인 ‘레비라식 결혼법’(신명 25,5-10 ‘후손에 관한 규정’)에 따라 친부와 법적 아버지의 이름이 섞여 있기 때문이라고 주장한다. 요셉 성인에 대한 신심 초기 교회부터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성모 마리아는 신자들로부터 특별한 공경을 받아온 반면, 요셉 성인은 성령으로 잉태되신 예수님의 양부, 즉 법적 아버지라는 이유로 4세기경에 가서야 동방교회 신자들의 공경 대상이 된다. 서방교회에서는 이보다 훨씬 더 늦은 15세기에 가서야 성 요셉 축일을 전례력에 도입해 요셉 성인을 공경하기 시작했다. 요셉 성인은 1870년에 비오 9세 교황에 의해 가톨릭교회 수호성인으로, 이후 레오 13세와 비오 12세 교황을 비롯한 역대 교황들에 의해 ‘아기 예수의 수호자’ ‘마리아의 수호자’ ‘성가정, 성직자, 수도자, 가난한 이, 노동자, 임종자, 동정녀, 환자의 수호성인’으로 선포됐다. 성 요한 23세 교황은 요셉 성인을 제2차 바티칸공의회의 보호자로 선언했고, 성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은 1989년 사도적 권고 「구세주의 보호자」를 통해 “요셉 성인은 마리아와 동일한 사랑의 보호자였으며 인간의 노동을 속량의 신비에 더욱 근접시켰다”고 천명했다.교회의 성미술 작가들은 요셉 성인을 묘사할 때 검은 옷 또는 주홍색 옷을 입은 모습을 전통적으로 그려왔다. 검은색은 모든 색을 품고 있다. 한평생 예수님과 성모 마리아의 신비를 품고 살았던 요셉 성인에게 딱 어울리는 색이다. 성직자와 수도자들이 검은 옷을 입고 있듯 의로운 사람인 요셉 성인은 검은 옷을 입고 세상의 것을 모두 버리고 하느님의 구원사업에 협력한 것이다. 주홍색은 ‘순교’를 상징한다. 성모 마리아의 푸른색 망토는 성자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올 새로운 ‘희망’을 예고해 준다면, 요셉 성인의 주홍색 겉옷은 성가정의 보호자인 요셉의 충실한 순명을 드러낸다. 요셉 성인을 공경해야 하는 이유 아빌라의 대 데레사 성녀는 “성부 성자 성령께서 삼위일체를 이루듯 성자와 성모 마리아, 성 요셉께서는 나자렛 성가정 안에서 이타적인 삼위일체의 삶을 살았다. 따라서 이 세상에서 삼위일체적 삶을 살기 위해서는 요셉 성인을 공경하고 나자렛 성가정을 본받아야 한다”고 강조했다.요셉 성인의 삶은 ‘하느님께서 더하신다’ ‘하느님을 돕다’는 그의 이름의 뜻대로 돕는 이의 삶이었다. 마리아를 아내로 맞아들여 지켜주고, 예수에게 충실한 아버지가 되어준 것은 자기 희생과 봉헌이 없이는 불가능한 삶이었다. 이처럼 요셉 성인은 하느님께서 하고자 하시는 모든 일에 자신을 온전히 열어 놓은 사람이다. 그의 순명으로 하느님의 구원 계획은 이 시대에도 계속되고 있기 때문이다. 리길재 기자 teotokos@cpbc.co.kr cpbc2020.03.11
엠마오로 가는 길에서(루카 24,13-35)](//cpbc.co.kr/CMS/newspaper/2018/12/rc/741246_1.0_titleImage_1.jpg)
[이창훈 위원의 예수님 이야기](90)엠마오로 가는 길에서(루카 24,13-35)엠마오로 가는 제자들에게 나타나신 예수님 이야기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주님을 어디에서 만날 수 있는지를 일깨워준다. 말씀(성경)과 성찬례에서다. 그림은 렘브란트작, 엠마우스에서의 만찬 【CNS 자료사진】‘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에게 나타나신 예수님’ 이야기는 네 복음서 가운데서도 루카복음에만 나오는 대표적인 부활 발현 이야기입니다. “바로 그날”(25,13), 그러니까 여자들이 빈 무덤을 보고 제자들에게 돌아가 예수님의 시신이 없어졌다고 이야기하던 그날 제자들 가운데 두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예순 스타디온 떨어진 엠마오로 가고 있었습니다. 그때에 예수님께서 가까이 다가가 그들과 함께 걸으셨습니다만, 그들은 눈이 가리어 알아보지 못했습니다.(25,13-16) 한 스타디온은 약185m, 예순 스타디온은 약 11㎞의 거리에 해당합니다. 엠마오는 예루살렘에서 11㎞ 정도 떨어진 마을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무슨 얘기를 나누고 있느냐고 물으시자 클레오파스라는 제자가 “예루살렘에 머물렀으면서 이 며칠 동안 그곳에서 일어난 일을 혼자만 모른다는 말입니까?” 하고 반문합니다. 클레오파스의 반문은 예수님의 재판과 십자가 처형이 예루살렘에 모르는 사람이 없을 만큼 큰 사건이었음을 가리킵니다. 예수님께서 재차 물으시자 그들이 이야기를 꺼내는데 바로 ‘나자렛 사람 예수님’에 관한 이야기였습니다. 그 이야기는 두 부분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우선, 그분은 “하느님과 온 백성 앞에서 행동과 말씀에 힘이 있는 예언자”(24,19)로서 “이스라엘을 해방하실 분이라고 기대”되던 분이었는데 수석 사제들과 지도자들이 그분을 십자가형에 처하게 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일이 일어난 지 벌써 사흘째가 됐다는 것입니다.(24,19-21). 정리하면 ‘나자렛 사람 예수님은 말씀과 행동에 힘이 있는 예언자로서 이스라엘을 해방하실 분으로 기대했는데 그만 십자가형을 받아 죽고 말았다는 것입니다. 그 일이 사흘째가 됐다는 표현에는 그들이 바라던 기대가 물거품이 되고 말았다는 체념과 좌절감이 묻어난다고 할 수 있습니다. 두 번째 부분은 반전의 조짐에 관한 것입니다. 자기들과 함께 있었던 여자들이 새벽에 무덤에 갔다가 시신을 찾지 못하고 와서 하는 말이 천사들이 나타나서 그분이 살아 계시다고 말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동료 몇 사람이 무덤에 가서 보니 여자들이 말한 대로였다는 것입니다.(24,22-24) 두 제자의 말에는 예수님의 부활이 믿기지 않는다는 느낌이 풍겨납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이 어리석은 자들아! 예언자들이 말한 모든 것을 믿는 데에 마음이 어찌 이리 굼뜨냐? 그리스도는 그러한 고난을 겪고서 자기의 영광 속에 들어가야 하는 것이 아니냐?” 하고 질책에 가까운 탄식을 하십니다.(24,25-26) 예수님께서는 한 번은 갈릴래아에서(9,22), 또 한 번은 예루살렘을 향해 가시는 도중에(18,32-33), 자신이 고난을 겪은 후에 다시 살아날 것이라고 분명히 말씀하셨는데, 이를 제자들에게 다시 일깨우고 계시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어 “모세와 모든 예언자부터 시작하여 성경 전체에 걸쳐 당신에 관한 기록들을” 두 제자에게 설명해 주십니다.(24,27) 모세는 구약의 율법 즉 모세 5경(창세기ㆍ탈출기ㆍ레위기ㆍ민수기ㆍ신명기)을, 모든 예언자는 구약의 예언서 전체를 가리킵니다. 구약성경의 주요 부분인 율법서와 예언서뿐 아니라 시편까지도 포함하는 구약 성경 전체에 걸쳐 당신에 관한 기록을 설명해 주셨다는 것입니다. 그러는 가운데 어느덧 두 제자의 목적지 엠마오 마을에 이르렀습니다. 예수님께서 더 가시려는 듯이 보이자 그들은 예수님께 하룻밤을 함께 묵어 가시라고 청을 드렸고 예수님께서는 그 청을 받아들여 그들과 함께 집에 들어가십니다. 그들과 함께 식탁에 앉으시자 “빵을 들고 찬미를 드리신 다음 떼어서 두 제자에게 나누어주십니다. 그러자 그들은 “눈이 열려” 예수님을 알아봅니다.(24,28-31ㄱ) 두 제자는 길에서 예수님을 보고도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식탁에 앉아 빵을 떼어 감사를 드리고 두 제자에게 나눠주실 때에 비로소 눈이 열려 예수님을 알아보게 된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서 사라지십니다. 그들은 “길에서 우리에게 말씀하실 때나 성경을 풀이해 주실 때 속에서 우리 마음이 타오르지 않았던가!” 하고 서로 이야기합니다.(24,31ㄴ-32) 눈이 열려 예수님을 알아본 다음에야 그들은 오는 길에서 느꼈던 것을 좀더 분명히 깨달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들은 곧바로 예루살렘으로 돌아갑니다. 가서 보니 열한 제자와 동료들이 “주님께서 되살아나시어 시몬에게 나타나셨다” 하고 말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들도 길에서 겪은 일과 빵을 떼실 때에 예수님을 알아보게 된 일을 이야기해 주었다고 루카 복음사가는 전합니다.(24,33-35) 생각해 봅시다 엠마오 이야기는 그 내용 자체도 감동적이지만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 그리스도 신자들에게도 여러 가지를 깊이 성찰하게 해줍니다. 우선 두 제자는 예수님과 함께 길을 가며 대화를 나누면서도 그분이 누구이신지를 알아보지 못합니다. 다만 대화를 나누는 가운데 그들은 속에서 뭔가 뜨거운 것이 올라옴을 느꼈을 따름입니다. 그런데 식탁에서 빵을 나누는 순간에 그들은 예수님을 알아봅니다. 학자들은 예수님께서 두 제자와 함께 식탁에 앉아 빵을 떼어 감사를 드리신 후 제자들에게 나눠주시는 것이 바로 성찬의 식탁, 곧 성찬례를 나타낸다고 풀이합니다. 그 말씀은 성찬례 안에서 비로소 제자들은 그분이 예수님을 확인할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같은 맥락에서 학자들은 두 제자가 뒤늦게 “길에서 우리에게 말씀하실 때나 성경을 풀이해 주실 때에 속에서 우리 마음이 타오르지 않았던가” 하고 서로 얘기를 나누는 모습을 통해 말씀의 식탁 곧 말씀 전례를 이야기합니다. 우리는 살아 있는 하느님 말씀인 성경을 통해서 또한 주님을 만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말씀의 식탁(성경)과 성찬의 식탁(성찬례)은 우리 그리스도 신자들이 살아 계시는 주님을 만나뵙는 중요한 두 자리입니다. 우리 삶에서 주님이 계시지 않는다고 느낄 때, 주님께 대한 우리의 기대와 희망이 물거품이 된 것처럼 느껴질 때 우리가 의지해야 할 곳이 있습니다. 바로 성경과 성찬례입니다. 말씀 안에서, 성찬례 안에서 우리는 우리에게 다가오시고 우리의 마음을 뜨겁게 채워주시는 그분을 만나뵐 수 있고 새 희망과 용기를 얻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꼭 필요한 것이 있습니다. 주님과 함께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주님이 계시지 않은 것처럼 보일 때도, 나를 버리고 떠나시는 것처럼 보일 때에도 우리는 기도해야 합니다. 어떻게? “저희와 함께 묵으십시오.”cpbc2018.12.12

아기 예수를 하느님께 봉헌한 것 기리며 구원 역사 실현 선포‘주님 봉헌 축일’(2월 2일) 의미와 전례 주님 봉헌 축일은 성모 마리아의 정결례와 아기 예수를 하느님께 봉헌하고 속량하는 예식을 기념하는 세 가지 의미를 지닌다. 서미경 작 ‘주님의 입당’, 목판 템페라, 2004년, 서울 성 니콜라스 대성당. 교회는 구약의 정결례 규정에 따라 성모 마리아와 성 요셉이 아기 예수를 성전에 봉헌하고 비둘기 한 쌍을 번제물과 속죄물로 바친 것을 기념해 주님 성탄 대축일부터 40일째 되는 날인 2월 2일을 ‘주님 봉헌 축일’로 지낸다. 이날을 기념해 주님 봉헌의 의미와 전례를 살펴본다. 리길재 기자 teotokos@cpbc.co.kr 주님 봉헌 축일이란 루카 복음서는 성모 마리아와 성 요셉이 모세의 율법에 따라 정결례를 거행할 날이 되자 아기를 예루살렘 성전으로 데리고 올라가 주님께 봉헌했다(2,22)고 한다. 구약 이스라엘 백성의 정결례(레위 12,1-8)법은 사내아이를 낳은 산모는 40일간, 여자아이를 낳은 산모는 80일간 불결한 것으로 여겼다. 산모는 이날이 지난 다음 예루살렘 성전에 가서 번제물로 일 년 된 어린 양 한 마리와 속죄 제물로 비둘기 한 마리를 하느님께 바쳐야 다시 정결하게 되는 것으로 여겼다. 양 한 마리를 바칠 형편이 안 될 만큼 가난한 경우 비둘기 두 마리를 가져다가 한 마리는 번제물로, 한 마리는 속죄물로 바쳐야 했다. 이를 ‘가난한 이의 제물’이라 하는데 성모 마리아도 그렇게 했다. 눈여겨볼 대목은 성 요셉의 행동이다. 모세 율법에 따르면 출산으로 인해 남편이 부정하게 되지는 않는다. 따라서 성 요셉은 정결례를 치를 필요가 전혀 없는데도 성모 마리아와 함께 예루살렘으로 가서 그 예를 행했다. 요셉이 성모 마리아에게 얼마나 신실했는지 보여주는 대목이다. 아울러 그의 행동은 구약의 엘카나와 한나 부부가 실로에 있는 주님의 집에 어린 자식 사무엘을 바친 것(1사무 1,24-28)을 상기시킨다.또 “이스라엘 자손들 가운데에서 맏아들, 곧 태를 맨 먼저 열고 나온 첫아들은 모두 나에게 봉헌하여라. 사람뿐 아니라 짐승의 맏배도 나의 것이다”(탈출 13,1)라는 하느님의 명에 따라 유다인들은 외아들이든 장남이든 아들을 처음으로 얻으면 하느님의 차지로 여겼다. 그래서 하느님 차지인 첫아들을 부모가 사서 기른다는 뜻으로 유다인들은 첫아들을 낳으면 한 달 안에 성전 비용으로 5세켈(20데나리온)을 바쳤다. 이를 ‘속량법’이라고 한다. 속량법에 따르면 부모나 아이가 예루살렘 성전으로 갈 필요 없이 어디서든 사제에게 속량값으로 5세켈을 치르기만 하면 됐다. 그런데도 성모 마리아와 성 요셉은 아기 예수를 데리고 함께 예루살렘 성전으로 가서 외아들의 속량값을 치르고 예수를 하느님께 봉헌했다. 이날 성모 마리아와 성 요셉은 정결례와 더불어 아기 예수를 하느님께 봉헌하고 속량하는 세 가지 예식을 한 것이다. 성모 마리아는 정결례 예식을 마치기에 앞서 율법에 따라 아기가 태어난 지 여드레가 되는 날 할례를 베풀고 이름을 ‘예수’라고 지었다.(루카 2,21) 이 이름은 아기가 잉태되기 전에 천사가 일러 준 것으로 예수는 우리말로 ‘하느님이 구원하신다’는 뜻이다. 한편, 성전에서 아기 예수를 두 팔에 받아 안은 시메온은 이 아기가 ‘다른 민족들에게는 계시의 빛’이며 ‘당신 백성 이스라엘에게는 영광’이라고 찬미한다.(루카 2,34-25) 이는 하느님의 구원이 예수를 통해 유다인뿐 아니라 모든 민족에게 실현될 것임을 선포한 말이다. 시메온은 더불어 성모 마리아께 이 아이 때문에 당신 영혼이 칼에 꿰찔릴 것이라는 지극히 개인적인 예언(루카 2,34-35)을 한다. 베네딕토 16세 교황은 이 고통의 신탁이 “그리스도교 신앙의 깊은 정서의 원형”이라고 한다. “그리스도교 신앙은 인간과 함께 고통을 겪고 그러한 방식으로 우리를 연민으로 이끄시는 하느님을 선포”하기 때문이다.(「나자렛 예수-유년기」 121쪽 참고)주님 봉헌 축일 전례 교회는 일찍부터 주님 봉헌 축일을 지내왔다. 예루살렘 교회는 4세기 말부터 이 축일을 기념했다. 아기 예수께서 하느님 아버지의 성전에 처음으로 들어가고 그 안에서 시메온과 한나를 만난 사건을 기념해 ‘만남의 축일’이라 부르며 촛불 행렬을 했다. 예수께서 “계시의 빛”이라고 한 시메온의 찬미를 드러내기 위해 촛불을 밝힌 것이다. 이 예식이 5세기 중엽 로마 교회에도 알려지기 시작해 서방 교회에 전파됐다. 서방 교회에서는 동방 교회처럼 ‘만남의 축제일’ 또는 ‘성 시메온의 날’로 지냈다. 중세 후반에는 촛불 행렬 때문에 ‘성촉절(聖燭節)’이라 불리기도 했다. 이후 성모 신심과 성모 축일이 발달하면서 1969년까지 ‘성모 취결례(取潔禮)’로 지냈다. 오랫동안 주님 축일을 성모 축일로 지내온 것이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전례 개혁으로 이 축일의 본뜻을 되찾아 1970년부터 ‘주님 봉헌 축일’로 지내고 있다. 이날 행렬에 사용되는 초를 축복하던 전통은 한 해 동안 사용할 초를 축복하는 관습으로 정착됐다. 그래서 이날 교회와 가정에서 사용할 초를 축복한다. 초는 자신을 태워 어둠을 밝힌다. 교회는 일찍부터 ‘세상의 빛’(마태 5,14)이신 그리스도를 상징하는 표지로 초를 사용해왔다. 이날 교회에서 초를 봉헌하는 것은 주님께서 하느님께 봉헌되셨듯이 우리도 주님과 하나가 돼 나 자신을 봉헌하자는 뜻에서다. 이처럼 주님 봉헌 축일은 예수 성탄의 의미를 다시 한 번 일깨워준다. 축성 생활의 날성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은 1997년에 주님 봉헌 축일을 ‘축성 생활의 날’로 제정하고, 자신을 주님께 봉헌한 수도자들을 위한 날로 삼았다. 교황청 수도회성은 해마다 맞는 축성 생활의 날에 모든 신자가 특별히 수도 성소를 위해 기도하고, 축성 생활을 올바로 이해하기를 권고하고 있다. 봉헌의 성경 의미는 ‘따로 떼어 놓는 것’(탈출 12,13)이다. 인간이 제물을 따로 떼어서 하느님께 드리면 하느님께서는 봉헌된 제물과 이를 봉헌한 인간 모두를 거룩하게 축성하신다. 따라서 봉헌은 인간 중심으로 보면 내어 놓음이지만 하느님 중심으로 보면 ‘축성’이다. 그러기에 축성 생활은 교회에 생명과 성덕을 가져오는(「교회 헌장」 44항) 생활이기에 이날을 ‘축성 생활의 날’이라 한다. 평화신문2020.01.29

기도와 묵상은 하느님과 온전한 일치를 위한 준비[토머스 머튼의 영성 배우기] 21. 기도에 대한 새로운 이해 토마스 머튼은 기도를 이미 우리 안에 계신 그분과의 편안한 휴식으로써 안식과 같다고 보았다. 이는 기도의 목표인 관상의 상태에 도달함과 깊이 연결되어 있다. 머튼에게 있어서 기도와 묵상 (Meditation)은 “자신의 존재의 심오한 곳에 현존하시는 하느님을 찾고 신앙과 경이와 사랑으로 예수님의 이름을 부르며 그곳에서 하느님과 만나는 준비”였다. 다시 말해, 성독, 기도, 묵상은 관상의 은총을 받기 위한 도구요, 준비 작업으로서 최종 목표는 하느님과의 온전한 일치에 있다. 하느님께서 세상을 엿새 동안 창조하신 다음, 이렛날에는 쉬셨던 것처럼 기도를 포함한 우리의 모든 활동은 ‘하느님 안에서의 쉼’이 그 목표다. 아담과 하와가 죄를 범하기 전에 하느님과 함께 낙원에 머물며 아무런 부끄럼 없이 서로를 있는 그대로 바라보며 본래 인간의 모습으로 살았던 것처럼, 기도는 모든 ‘나의 것’을 멈추고, ‘이미’ 우리와 함께하시는 하느님의 신비 속에 들어가 그분을 발견하고 그분과 함께 낙원에서의 편안한 쉼을 얻을 때 완성되는 것이다. 따라서 기도는 하느님과 함께 쉬는 기쁨이요 평화로운 시간이며, 하늘의 시간속으로 들어가는 은총의 때이다. 의무감에서 혹은 무수한 자신의 바람을 아뢰며 기계적인 기도를 바치고 있는 우리에게 머튼은 기도에 대한 본래의 의미를 일깨워 주고 있다.그런데 토마스 머튼이 처음부터 기도에 대해 이렇게 이해를 하였을까? 그렇지 않다. 머튼 역시 우리와 같이 처음에는 기도는 무엇인가 필요한 것을 전능하신 하느님께 청하는 것이라고 여겼다. 그의 자서전적 저서 「칠층산」에서 머튼은 자신이 처음 기도한 때는 1933년 로마 성지 순례 중 예수 그리스도를 묘사한 비잔틴 모자이크를 바라보며 영적인 체험을 하였고, 이 체험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가 과연 누구인가 궁금해졌으며, 신약성경을 사서 읽었고, 돌아가신 아버지가 자신에게 나타나는 체험 후, 처음으로 기도하였다고 고백하고 있다. “돌이켜 보면 그때 나는 생전 처음으로 진정한 기도, 곧, 입술과 지성과 상상뿐이 아니고 생명과 존재의 밑바탕에서 우러나오는 기도, 어둠 속에 숨어 계신 하느님께서 오시어 나의 의지를 속박하고 있는 이 많은 무서운 것들에서 풀려나도록 도와주시기를 간청하는 기도를 바치기 시작하였다.”(「칠층산」 p247-248) 그러나 머튼이 이렇게 처음으로 기도를 바쳤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삶은 예전보다 더 방탕해졌고 더 타락했다. 아직 그에게 기도는 마음의 위안을 얻기 위한 도구에 불과했던 것이다. 젊은 시절 머튼의 기도에 대한 다른 에피소드는 우리에게 기도하는 모습이 믿지 않는 이들에게 귀감이 됨을 보여 준다. 그가 내면에서 “미사에 가라, 미사에 가라!”라는 음성을 듣고 처음으로 자발적인 마음으로 그리스도의 성체 성령 성당에 갔다. 그때 그의 눈에 띈 것은 열대여섯 살가량 된 소녀가 무릎을 꿇고 진시하고 조용하게 기도드리는 모습이었다. 그는 이때 처음으로 사람들이 성당에 가는 진정한 목적은 기도를 바치기 위함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고 아주 깊은 인상을 받았다고 고백하였다. 이러한 다른 이가 기도하는 모습을 통한 감동과 변화는 하바나(쿠바의 도시)의 성 프란치스코 성당에서도 일어났다. 미사 중 사도신경을 노래하는 쿠바 어린이들의 신앙고백을 듣고 그는 “내가 하느님의 현존을 목격하여 갑자기 그 눈 부신 빛 속에 서 있는 느낌이었으며, 마치 천국이 내 바로 앞에 있는 것 같았다”고 묘사하였다. 이는 우리가 조용하고 진지하게 기도하는 모습은 다른 이들을 기도로 초대할 수 있다는 것을 느끼게 해 준다. 그러나 이러한 기도와 미사를 봉헌하는 이들의 모습을 보고 천국을 느꼈다고 해서 그것이 머튼 자신의 기도 진보에는 영향을 미치지 못하였다. 그는 이렇게 고백한다. “하바나의 성 프란치스코 성당에서 미사 중에 내가 이 빛을 보았다고 해서 내가 그 사정을 분명하게 이해했거나 기도에 매우 진보했었다고 생각하지는 마라. 내 기도는 대체로 염경기도 상태에 머물러 있었다.”(「칠층산」 p585)다른 이가 기도하는 모습은 우리에게 감흥을 줄 수는 있지만 결국 자신이 기도하지 않으면 진정 기도의 깊은 영적 영역으로 들어가지 못하는 것이다. 평화신문2019.11.20
사제 발자취 따라 가는 세계 40개국 순례세계 일주 성지 순례 1·2/ 염봉덕 신부 지음/ 들숨날숨/ 각 1만 5000원 염봉덕(부산교구 원로사목자) 신부가 지난 40여 년간 다닌 세계 40개국 순례기를 엮었다.염 신부는 1982년 로마 연수를 시작으로, 미국 뉴욕 한인본당에서 교포사목 등을 하면서 세계 곳곳을 다닐 기회가 많았다. ‘성경의 땅’ 이스라엘은 물론이고, 세계의 모든 성모 성지와 남미 여행지까지. 수많은 명소에, 세계 성인들의 흔적이 고스란히 간직된 성지들을 다녀온 이야기가 책에 가득 담겼다. 그리고 여행 때마다 남겨진 신앙 단상과 사진 자료들을 책에 실었다. 책에는 바티칸부터 김대건 신부의 발자취를 따라 다녀온 중국의 북경과 상해, 바오로 사도의 선교지 그리스와 터키, 한반도의 자랑인 백두산과 금강산 등 수많은 성지와 여행지가 망라돼 있다. 염 신부는 여행지마다 다니며 겪었던 일화와 교회사, 신학적 내용과 기록들을 소개하고 있다. 책에는 또 사제로서 겪은 사목 경험과 지인들이 쓴 여행 기고문, 염 신부가 번역 출간했던 미국의 베스트셀러 「그리스토퍼의 하루에 3분 묵상」에서 엄선한 묵상 글 20여 편도 수록돼 읽는 재미를 더해준다.염 신부는 “사제가 되지 않았다면 세계 일주와 성지 순례가 불가능했을 것”이라며 “저 혼자 보고 경험한 세계 각지의 모습과 이야기를 많은 이와 나누고 싶었다”고 출간 동기를 밝혔다. 그러면서 “각기 처한 사정과 시간적 여유가 없는 탓에 세계 여행에 엄두를 내지 못하는 많은 이가 책을 통해 세계 일주를 하는 경험을 하면 좋겠다”고 말했다.염수정 추기경은 추천사에서 “사제의 순례기를 통해 교우들이 하느님과 더욱 가까워지고, 신앙생활에도 큰 도움이 되길 바란다”고 했고, 부산교구장 손삼석 주교도 “성지에 대한 정보뿐만 아니라, 염 신부님의 체험과 신학적 통찰을 곁들여 보여주고 있다”며 좋은 안내 책자가 되길 기원했다. 구입 문의 : 02-2279-9581, 들숨날숨 이정훈 기자 평화신문2019.06.12

청각장애인 신자들 위한 ‘에파타준본당’ 성전 건립서울대교구 첫 청각장애인 성당… 20년 이상 ‘셋방살이 신앙생활’ 해오다 25일 새 성전 봉헌 서울대교구 첫 청각장애인 성당인 ‘에파타준본당’ 새 성전 조감도. 서울대교구에 청각장애인을 위한 성당이 건립됐다.서울대교구 에파타준본당(주임 박민서 신부)은 25일 오전 11시 서울 성동구 마장동 781-3 현지에서 교구장 염수정 추기경 주례로 새 성전 봉헌식을 거행한다. 한국 교회에서 청각장애인을 위한 성당은 2011년 건립된 인천교구 청언본당에 이어 두 번째이다. 이로써 서울대교구는 청각장애인 사목에 새로운 전기를 맞게 됐다.대지면적 892㎡, 연면적 약 2600㎡에 지하 2층, 지상 6층 규모인 새 성전은 지하 2층 기계식 주차장(24대 수용), 지하 1층 다목적 홀, 1층 만남의 방과 카페, 2층 사제 집무실과 사무실 및 교리실, 3층 대성전(350석 규모)과 소성전, 성체조배실, 4층 성가대석과 작은 피정의 집, 5~6층 본당 사제관 및 손님 사제관 등을 갖췄다. 설계는 (주)무한종합건축사사무소가, 시공은 다산건설엔지니어링(주)가 맡았다.특히 대성전은 청각장애인 신자들이 사제와 수화 통역자가 잘 보이도록 좌석이 뒤로 갈수록 기울기가 높아지는 경사식 구조로 지어졌다. 아울러 제대 벽면 십자가 아래에도 대형 LED 전광판을 설치해 신자들이 전례의 모든 흐름을 자막과 방송으로 볼 수 있도록 편의를 더했다. 성당 내 작은 피정의 집은 해외와 전국에서 피정과 강의를 듣고자 찾아오는 신자들을 위해 특별히 만든 숙식 공간이다.성전 외벽은 예수님의 다섯 상처인 오상(五傷)을 표현한 스테인드글라스로 빛나며, 성전 입구에는 귀먹고 말 더듬던 이를 “에파타!”(열려라) 하고 치유하신 예수님의 부조가 신자들을 반긴다. 성전 입구 외벽에 주임 박민서 신부가 붓으로 직접 쓴 요한복음 6장 말씀 600자가 새겨진 것도 특징이다.새 성전 건립은 청각장애인 신자들의 오랜 바람이었다. 에파타준본당의 모체인 서울가톨릭농아선교회는 1957년 서울 돈암동에서 시작한 이후 20년 이상 수유동 툿찡 포교 베네딕도수녀회 서울수련원 건물에서 ‘셋방살이 신앙생활’을 해왔다. 신자들은 100여 명을 겨우 수용하는 작은 성당에서 미사에 참여하고, 성경공부, 단체활동, 다과모임을 제대로 할 수 있는 공간도 매우 부족했다.이에 2011년부터 두 팔 걷고 나선 박민서 신부는 꼬박 8년간 전국 150여 곳 성당을 다니며 성전 건립 기금 마련을 위해 힘썼다. 신자들도 자선 바자와 음악회 때마다 함께 도왔고, 성전 건립을 위해 매일 묵주기도를 바쳐왔다. 서울가톨릭농아선교회는 설립 60주년이던 2017년 준본당으로 승격, 이듬해 에파타준본당으로 명칭을 변경했다.일반 본당과 달리 속인주의(屬人主義) 공동체인 에파타준본당 신자 수는 500여 명. 청각장애인 신자들은 새 성전에서 더욱 기쁜 신앙생활을 이어갈 수 있게 됐다. 평화신문2019.08.16
![[평신도 영성 나는 평신도다] (32)평신도를 통한 한국 교회의 쇄신, 그 대안은 복음화 2 - 위기의 대안으로서의 평신도의 삶](//cpbc.co.kr/CMS/newspaper/2019/07/rc/757910_1.0_titleImage_1.jpg)
[평신도 영성 나는 평신도다] (32)평신도를 통한 한국 교회의 쇄신, 그 대안은 복음화 2 - 위기의 대안으로서의 평신도의 삶그리스도인은 두 배로 열심히 살아야 그리스도인은 가정생활과 사회생활에 충실해야 하지만 기본적인 신앙생활도 열심히 해야 하기에 남들보다 더 부지런히 생활해야 한다. 성경 읽기 모임을 하고 있는 신자들. 가톨릭평화신문 DB 최근 월간 가톨릭 비타꼰에서 대구대교구 김정우 신부의 저서 「포스트모던 시대의 그리스도교 윤리」를 인용한 글을 보았습니다. 책 내용을 정리해 보면 이렇습니다. “과거 유럽에서 생활할 때 당시 교회에 대한 세 가지 표현들을 들었다. 첫째는 ‘유럽 교회는 늙었고 한국 교회는 젊다’는 것이고, 둘째는 ‘하느님은 좋지만 교회는 싫다’는 것이고, 셋째는 ‘유럽 교회는 늙은 것이 아니라 지쳤다’는 것이다. 그런데 2000년이라는 오랜 시간이 지나 유럽 교회가 이런 말들을 듣게 되었다면, 문제는 이제 200년밖에 지나지 않은 한국 교회가 이런 말들을 듣게 될지 모른다는 징후가 여기저기 감지되고 있다는 것이다. 그 이유는 신영성(유사영성)의 피해가 늘어가는 것과 함께 냉담자 증가, 예비신자 감소, 주일 미사 참여자의 감소, 청소년들의 신앙생활 기피와 주일학교의 침체 등과 같은 난제들을 한국 교회가 겪고 있기 때문이다.” 김정우 신부님은 다른 저서 「새 복음화를 위한 윤리적 과제」에서도 “신앙적인 성향의 퇴조라는 서구에서 시작된 ‘그리스도교의 위기’가 한국 교회에도 나타나고 있다”고 지적하셨습니다.이 위기를 어떻게 타개해 나가야 할까요. 시작은 평신도 한 명 한 명에서부터 출발해야 합니다. 신앙은 관념이 아니고 생활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고 구원받았다면 구원받은 사람으로서의 삶의 모습이 드러나야 합니다. 절망에 빠졌던 사람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희망을 갖게 됐다면, 그것은 그 사람이 구원받았다는 증거입니다. 그리고 그 희망을 갖고 꾸준히 감사하며 살아갈 때 그 삶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할 수 있게 됩니다.복음 선포는 삶의 증거, 생활의 증거가 매우 중요합니다. 그리고 그것이 우선돼야 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이 세상 사람들에게 복음을 선포하려면 먼저 자신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구원받은 구체적 삶 즉, 새로운 생명을 얻어 새로운 삶을 살아가는 모습을 보여 줘야 합니다. 이것이 생활의 증거입니다.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단순히 선포만 하신 것에 그치지 않고 많은 이들에게 자비와 사랑을 베푸시는 기적을 행하셨습니다. 직접 모든 것을 보여 주시고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신 것입니다. 평신도 그리스도인들은 예수 그리스도와 같이 생활 안에서 실천해야 합니다.평신도에게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신앙행위와 더불어 그리스도적인 사상을 갖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가정과 직장에서 삶의 방법과 내용이 하느님께서 기뻐하실 만한지, 그렇지 못하다면 그 내용과 원인이 무엇인지 알아내고 끊임없이 새롭게 바꿔나갈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그러자면 자신의 삶에서 잘못된 점들을 솔직히 인정하고 그것을 과감히 바꾸겠다는 결심과 결단이 필요합니다. 자신을 바꾸는 결단은 누구에게나 힘든 일입니다. 그래서 용기가 필요합니다. 용기 있는 사람은 믿음이 있는 사람입니다. 자신의 믿음이 무엇을 위한 것인지 확신하는 사람이라면 자신의 잘못된 점을 과감히 바꾸기 위해 용기를 낼 수 있습니다. 용기를 갖고 결단을 내려 하느님께서 기뻐하시는 삶을 살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한다면 하느님 은총의 폭은 그만큼 넓어집니다.평신도 신앙생활은 확고한 믿음을 바탕으로 용기를 갖고 끊임없이 새로운 삶을 살아가는 회개의 삶입니다. 자신의 잘못을 알고 뉘우치는 것에 그치면 진정한 회개라 할 수 없습니다. 행동을 바꿔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 평신도들을 죄의 사슬에서 벗어나게 해 주셨습니다. 그럼에도 올바른 신앙생활을 방해하는 잘못된 인식, 환경, 습관 등이 많습니다. 그 장애를 스스로 발견하고 하나씩 제거해 나가는 것이 복음화를 위한 첩경입니다. 그와 함께 평신도 그리스도인들은 비그리스도인보다 부지런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평신도 그리스도인들은 비그리스도인들과 같은 세상 안에서 살면서 그들과 같은 현실의 삶에 충실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직장에 다니거나 아니면 돈을 벌기 위해 무엇이든 해야 합니다. 가정생활도 충실히 해야 합니다. 사회생활 안에서 좋은 인간관계도 맺어야 합니다. 그뿐만 아니라 삶을 유지하기 위하여 해야 할 일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인으로서 해야 할 기본적인 신앙행위도 해야 합니다. 기도해야 하고 성경도 읽어야 하고 공부도 해야 하고 공동체 생활도 해야 하고 성사생활과 전례에도 참여해야 합니다. 선교도 해야 하고 나눔을 실천하며 봉사도 해야 합니다. 이처럼 그리스도인으로서 해야 할 기본적인 신앙행위들이 많습니다. 이러한 것들을 제대로 잘하려면 남들보다 부지런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남들보다 잠도 덜 자야 하고 취미 생활이나 여가 활동도 줄이거나 하지 않아야 합니다. 본인에게는 고통이고 고행입니다. 귀찮거나 힘들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신앙행위를 잘해야만 본인이 복음화될 수 있는 것입니다. 평신도들의 복음적 삶은 우리 교회와 세상의 복음화와 직접적인 관계가 있습니다. 복음화는 평신도 그리스도인들의 신앙 생활화에서부터 시작되는 것입니다. 세상은 쉽게 변하지 않습니다.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므로 복음의 말씀으로 교회를 쇄신시키고 세상을 변화시키자면 평신도들의 자기 복음화가 선행되어야 합니다.정치우(안드레아, 새천년복음화학교 교장) 평화신문2019.07.16
![[평신도 영성 나는 평신도다] (24) 이 시대에 요구되는 평신도 영성 5 - 가난](//cpbc.co.kr/CMS/newspaper/2019/05/rc/753465_1.0_titleImage_1.jpg)
[평신도 영성 나는 평신도다] (24) 이 시대에 요구되는 평신도 영성 5 - 가난당신 행복의 첫 번째는 재물입니까? 그리스도인은 재물에 대한 탐욕을 갖기보다 늘 삶의 중심에 하느님을 두고 살아야 한다. 그림은 조토 디 본도네 작 ‘아버지의 재산을 포기하며 옷을 벗는 프란치스코’ 부분, 1297~1299년, 아시시 성 프란치스코 대성당, 이탈리아. 불교에서는 ‘무소유’를 말합니다. 세상 이치를 비롯해 모든 것이 ‘공’(空)이기에 어떤 것을 소유한다는 것 자체가 무의미한 일이라는 것입니다. 석가모니도 해탈 후 첫 설법에서 “모든 고통은 집착에서 온다”고 했습니다.그럼 그리스도교에선 소유를 어떤 관점으로 볼까요. 예수님은 재물에 탐닉하는 것이 얼마나 위험하고 헛된 것인지를 지속적으로 경고하고 있습니다. 어리석은 부자의 비유(루카 12,16-21), 부자와 라자로의 비유(루카 16,19-31) 등이 그 예입니다. 예수님은 더 나아가 지상 재물에 초연한, 자유로운 삶을 살아갈 것을 권고합니다.(루카 14,33; 12,33-34 참조)가난을 실천하여라 세상 안에서 살아가는 평신도가 듣기에는 참으로 난감한 말씀입니다. 세속에서 살아가는 평신도가 과연 가난을 실천할 수 있을까요? 더 나아가 가난 그 자체가 선(善)일까요? 물질적으로 가난한 사람은 오히려 부자보다 더 탐욕스러울 위험은 없을까요? 물질적 가난에 찌든 사람은 삶의 고단함 때문에 하느님 영광을 추구하는 것이 더 어렵지 않을까요? 실제로 예수님은 부자들을 당신 활동과 사업에서 제외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 주변에는 니코데모, 아리마태아의 요셉, 신심 깊은 여성들, 자캐오 등 ‘부자’들이 많았습니다. 어부였던 베드로도 자신의 배를 ‘소유’하고 있었고, 그 배로 고기를 잡았습니다.(마르 4,35-41 참조) 구약성경에서도 빈곤은 하나의 극복해야 할 악(惡)입니다.(신명 15,4 참조)성경은 우리에게 돈 벌지 말고, 궁핍하게 살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가장 부자이신 하느님이 우리에게 ‘너희는 궁핍하게 살아라’고 명령하실 리 없습니다. 그런데 이 세상 모든 것을 다 가진 최고의 부자이신 하느님은 정작 가장 가난한 분입니다. 하느님은 우리를 위해 모든 것을 다 내어주셨습니다. 평신도에게 가난의 영성이 필요한 것도 이 때문입니다. 모든 것을 내어주시는 하느님의 모범을 따라야 하기 때문입니다.적게 가지고 있건, 많이 가지고 있건 돈에 대한 염려는 하느님께 향하지 못하게 합니다. 물론 돈을 벌어 자신을 잘 돌보는 것 자체는 나쁜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나쁜 것이 아니라고 해서 가장 좋은 것은 또한 아닙니다. 나쁘지 않지만 첫 번째로 소중한 것은 아니라는 말입니다. 자신만 사랑하고, 자신만 돌보면 하느님을 사랑할 수 없게 됩니다. 재물에 아등바등하지 않는 사람은, 지금 좀 어려움도 있고 불편함이 있어도, 자신의 길 위에 하느님이 함께하고 계신다는 확신을 얻을 수 있습니다. 하느님과 함께 살아가면 그 무엇도 두렵지 않게 됩니다. 열심히 노력해서 어떤 것을 소유하는 것은 좋은 것입니다. 문제는 그 소유물들을 하느님의 뜻대로 사용하는가, 소유를 하느님의 영광으로 돌릴 수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물질적 소유가 행복의 전부 아냐 무엇보다도 진정한 행복은 물질적 소유에 의해 담보될 수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물론 물질적 소유는 삶을 풍요롭게 하고 몸을 편안하게 하는 데 도움을 줄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는 욕심 없는 사람에게 한정된 이야기입니다. 만약 욕심 있는 사람에게 물질적 소유가 주어진다면 그것은 유혹이고 마귀입니다.재산에 대한 애착을 가질 때 만약 폭풍이 닥치면 우리는 재산을 잃을까 안절부절 해합니다. 잃을 것이 없으면 도둑이 무섭지 않습니다. 만약 우리가 하느님만 생각한다면 재산이 없어져도 상관없습니다. 핵심은 하느님을 중심에 모시며 살아가느냐, 그렇지 않느냐에 있습니다.빈 그릇에 물이 담깁니다. 재물에 대한 욕심을 덜어낼 때 우리는 하느님께서 선물하시는 진정한 해방을 마음에 담을 수 있습니다. 박경리의 「토지」 마지막 부분에 이런 구절이 있습니다. “그 순간 서희는 자신을 휘감은 쇠사슬이 요란한 소리를 내며 땅에 떨어지는 것을 느낀다.” 재물에 대한 욕심을 덜어낼 때 우리는 몸을 휘감은 쇠사슬이 요란한 소리를 내며 땅에 떨어지는 모습을 볼 수 있을 것입니다.정치우(안드레아, 새천년복음화학교 교장) cpbc2019.05.21
‘복음의 기쁨’ 선포하는 교회 공동체 건설 전국 교구장, 2019년 사목교서 발표… 쇄신 통한 변화와 평화 실천도 권고 2019년 한국 천주교회의 사목 방향을 가늠할 전국 교구장 주교들의 사목교서가 전례력으로 새해가 시작되는 대림 제1주일을 맞아 일제히 발표됐다. 새해 한국 교회의 비전과 사목 과제, 교회 안팎 현안에 대한 교구 차원의 사목적 대응도 담겼지만, 보편 교회의 사목적, 선교적 흐름도 잊지 않았다. 가장 눈에 띄는 건 역시 ‘복음의 기쁨’과 ‘선교’였다. 서울대교구장 염수정 추기경은 “복음을 선포하지 않는 교회란 있을 수 없다”며 복음의 기쁨을 선포하는 교회 공동체를 건설하겠다는 사목 의중을 드러냈다. 광주대교구장 김희중 대주교도 “교회의 사명은 복음의 기쁨 속에서 감사하는 마음으로 살아가는 그리스도인 한 사람 한 사람을 통해서 시작된다”며 가정과 본당의 공동체성을 회복하고 강화해 달라고 당부했다. 춘천교구장 김운회 주교 또한 “사랑으로 하나 된 공동체를 위해 신앙의 기쁨을 나눌 것”을 권고했다. 그리스도인의 기본 덕인 믿음ㆍ희망ㆍ사랑의 ‘향주덕’ 실천 또한 놓치지 않았다. ‘믿음의 해’ ‘희망의 해’에 이어 ‘사랑의 해’로 선포한 원주교구장 조규만 주교는 “사랑은 하느님이 베풀어주시는 천국을 선물로 받을 수 있는 손”이라며 가족과 이웃에 대한 사랑 실천을 거듭 당부했다. ‘신망애를 통한 본당 공동체의 영적 쇄신2, 희망의 해’를 보내는 부산교구 교구장 서리 손삼석 주교도 “‘우리는 희망으로 구원 받았습니다’(로마 8,24)라는 말씀이 삶 안에 굳게 자리매김 되도록 노력해 주님의 선물인 희망을 배우고 실천해 나가자”고 권고했다. ‘성경’도 중요한 열쇳말이 됐다. 말씀하시는 하느님에 대한 전인적이며 올바른 응답이 신앙이기에 성경을 읽고 묵상할 것을 거듭 당부한다. 새해를 ‘성서의 해’로 선포한 인천교구장 정신철 주교는 성경을 매일 읽는 습관을 기르고 묵상하며, 성인전이나 교부들의 글을 읽기를 권했다. 전주교구장 김선태 주교도 “성경과 교회의 가르침, 성찬례, 기도, 사랑 실천은 내적 쇄신과 새로운 복음화를 위한 핵심 요소”라며 올해는 특히 성경 말씀에 역점을 두고 신앙생활을 하자고 당부했다. ‘쇄신’ 또한 중요한 주제어로 떠올랐다. 대구대교구장 조환길 대주교는 “우리 교구는 지난 교구 시노드의 결의사항을 다시 점검하고 평가하는 가운데 교구 쇄신위원회를 발족했다”며 “현재 활동 중인 두 소위원회의 활동에 큰 결실이 있기를 소망한다”고 기원했다. 교구 시노드를 진행 중인 대전교구 교구장 유흥식 주교는 “시노드에서 논의된 교구의 모든 상황이 ‘쇄신’을 통한 ‘변화’로 실행에 옮겨야 한다”고 주문했다. 설정 50주년을 맞는 안동교구 교구장 권혁주 주교도 “‘내가 모든 것을 새롭게 만든다’(묵시 21,5)는 말씀 아래 쇄신 운동을 펼쳐 새롭게 출발하고자 한다”면서 교구 쇄신에 방점을 찍었다. ‘평화’ 실천도 이어질 전망이다. 의정부교구장 이기헌 주교는 “주님께서는 2018년 우리 민족에게 평화와 기쁨을 선사하셨다”면서 민족화해 사목의 심화ㆍ발전을 당부했다. 마산교구장 배기현 주교도 “평화의 길을 끝까지 걸어갈 수 있는 원동력은 하느님의 사랑이며, 그 한 걸음 한 걸음의 구체적 내용은 우리가 서로 용서하는 것”이라며 사랑과 평화가 넘치는 삶을 살아가기를 호소했다. 오세택 기자 sebastiano@cpbc.co.kr 평화신문2018.11.28
‘복음의 기쁨’ 선포하는 교회 공동체 건설 전국 교구장, 2019년 사목교서 발표… 쇄신 통한 변화와 평화 실천도 권고 2019년 한국 천주교회의 사목 방향을 가늠할 전국 교구장 주교들의 사목교서가 전례력으로 새해가 시작되는 대림 제1주일을 맞아 일제히 발표됐다. 새해 한국 교회의 비전과 사목 과제, 교회 안팎 현안에 대한 교구 차원의 사목적 대응도 담겼지만, 보편 교회의 사목적, 선교적 흐름도 잊지 않았다. 가장 눈에 띄는 건 역시 ‘복음의 기쁨’과 ‘선교’였다. 서울대교구장 염수정 추기경은 “복음을 선포하지 않는 교회란 있을 수 없다”며 복음의 기쁨을 선포하는 교회 공동체를 건설하겠다는 사목 의중을 드러냈다. 광주대교구장 김희중 대주교도 “교회의 사명은 복음의 기쁨 속에서 감사하는 마음으로 살아가는 그리스도인 한 사람 한 사람을 통해서 시작된다”며 가정과 본당의 공동체성을 회복하고 강화해 달라고 당부했다. 춘천교구장 김운회 주교 또한 “사랑으로 하나 된 공동체를 위해 신앙의 기쁨을 나눌 것”을 권고했다. 그리스도인의 기본 덕인 믿음ㆍ희망ㆍ사랑의 ‘향주덕’ 실천 또한 놓치지 않았다. ‘믿음의 해’ ‘희망의 해’에 이어 ‘사랑의 해’로 선포한 원주교구장 조규만 주교는 “사랑은 하느님이 베풀어주시는 천국을 선물로 받을 수 있는 손”이라며 가족과 이웃에 대한 사랑 실천을 거듭 당부했다. ‘신망애를 통한 본당 공동체의 영적 쇄신2, 희망의 해’를 보내는 부산교구 교구장 서리 손삼석 주교도 “‘우리는 희망으로 구원 받았습니다’(로마 8,24)라는 말씀이 삶 안에 굳게 자리매김 되도록 노력해 주님의 선물인 희망을 배우고 실천해 나가자”고 권고했다. ‘성경’도 중요한 열쇳말이 됐다. 말씀하시는 하느님에 대한 전인적이며 올바른 응답이 신앙이기에 성경을 읽고 묵상할 것을 거듭 당부한다. 새해를 ‘성서의 해’로 선포한 인천교구장 정신철 주교는 성경을 매일 읽는 습관을 기르고 묵상하며, 성인전이나 교부들의 글을 읽기를 권했다. 전주교구장 김선태 주교도 “성경과 교회의 가르침, 성찬례, 기도, 사랑 실천은 내적 쇄신과 새로운 복음화를 위한 핵심 요소”라며 올해는 특히 성경 말씀에 역점을 두고 신앙생활을 하자고 당부했다. ‘쇄신’ 또한 중요한 주제어로 떠올랐다. 대구대교구장 조환길 대주교는 “우리 교구는 지난 교구 시노드의 결의사항을 다시 점검하고 평가하는 가운데 교구 쇄신위원회를 발족했다”며 “현재 활동 중인 두 소위원회의 활동에 큰 결실이 있기를 소망한다”고 기원했다. 교구 시노드를 진행 중인 대전교구 교구장 유흥식 주교는 “시노드에서 논의된 교구의 모든 상황이 ‘쇄신’을 통한 ‘변화’로 실행에 옮겨야 한다”고 주문했다. 설정 50주년을 맞는 안동교구 교구장 권혁주 주교도 “‘내가 모든 것을 새롭게 만든다’(묵시 21,5)는 말씀 아래 쇄신 운동을 펼쳐 새롭게 출발하고자 한다”면서 교구 쇄신에 방점을 찍었다. ‘평화’ 실천도 이어질 전망이다. 의정부교구장 이기헌 주교는 “주님께서는 2018년 우리 민족에게 평화와 기쁨을 선사하셨다”면서 민족화해 사목의 심화ㆍ발전을 당부했다. 마산교구장 배기현 주교도 “평화의 길을 끝까지 걸어갈 수 있는 원동력은 하느님의 사랑이며, 그 한 걸음 한 걸음의 구체적 내용은 우리가 서로 용서하는 것”이라며 사랑과 평화가 넘치는 삶을 살아가기를 호소했다. 오세택 기자 sebastiano@cpbc.co.kr 평화신문2018.11.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