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가톨릭교회의 맏딸 프랑스를 순례하다 - ⑤ 파레 르 모니알소박하고 정겨운 시골 마을서 ‘성심의 예수’ 발현프랑스 관광청(kr.france.fr), 에어프랑스(airfrance.co.kr) 공동 기획예수 성심(聖心) 옛날이야기 한 조각. 1673년 어느 겨울날 프랑스 중동부 부르고뉴 시골 마을 ‘파레 르 모니알’에서 일어난 일이다. 이곳 성모방문동정회에 입회한 지 3년째를 맞은 알라코크 수녀(1647~1690)는 기도에 몰두하던 중 환시를 보게 된다. 수녀 눈앞에 나타난 예수 그리스도는 자기 심장을 꺼내 보인다. 심장은 뜨겁게 불타오르고 있었고 안이 훤히 비칠 만큼 투명했다. 가시로 둘러싸인 상처 입은 심장 위에는 십자가가 놓여 있었는데 무겁게 느껴졌다. 그로부터 2년 동안 알라코크 수녀는 수차례 환시를 보았다. 주변 사람들은 이를 악마의 활동이라 수군거렸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였다. 예수 성심은 알라코크 수녀를 통해 △예수 성심(聖心)은 하느님의 무한한 사랑의 상징임을 알릴 것 △특별히 예수 수난을 묵상하는 성 시간을 갖고 상처 입은 성심을 위로할 것 △예수 성심을 기리는 특별한 축일을 지낼 것 등 세 차례 큰 계시를 전했다. ‘예수 심장’의 도시, 파레 르 모니알에 도착했다. 발을 딛는 순간 심장 박동수가 절로 평안해질 만큼 도시 공기가 차분하고 고요하다. 9000명이 살고 있다는 이곳에는 무엇하나 바쁘거나 붐빌 일이 없다. 잔잔하게 흐르는 운하를 끼고 아담하게 자리 잡은 시내는 느린 걸음으로 아주 천천히 한 바퀴를 돌아도 30분이면 제자리로 돌아온다. 성당과 성당 사이 작은 빵집, 약국, 음식점 몇 개가 전부인 아주 작은 도시다.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 예수 성심 만나는 일 운하 옆에 유일하게 우뚝 솟은 ‘성심 대성당’에서 순례를 시작했다. 900년대 말 클뤼니 수도원 소속 교회로 시작된 이곳은 알라코크 수녀가 예수 성심 발현을 목격한 후 수많은 순례객이 몰려들자 1875년 예수 성심 대성당으로 봉헌됐다. 프랑스 파리의 랜드마크인 몽마르트르 언덕 위 예수 성심 대성당과 같은 이름이다. 원래는 파레 르 모니알에 예수 성심을 위해 더 크고 웅장한 새 성당을 지으려 했지만 도시가 너무 작아 파리에 봉헌한 것이 바로 몽마르트르의 성심 대성당이기 때문이다. 파레 르 모니알을 둘러보는 일정은 길지 않다. 대성당에 붙어 있는 수도원의 중세 스타일 정원의 아치형 갤러리를 지나 몇 걸음을 옮기면 탑 하나가 우뚝 선 작은 광장에 이르게 된다. 옛 교회 건물의 일부로 감옥, 주택 등으로 쓰이다 최근엔 지역 예술가들을 위한 전시실이 된 ‘성 니콜라스 탑’은 조용히 도시를 지키고 있다. 여기서 몇 걸음 더 걸으면 알라코크 성녀가 예수 성심 발현을 본 수녀원이 있다. 이곳이 바로 ‘발현 성당’이다. 작은 성당의 문을 열면 무릎을 꿇고 빛나는 심장을 마주하는 성녀 성화가 순례객을 맞이한다. 성녀의 밀랍상이 잠들어 있는 성당은 조용한 도시에서 유일하게 사람들이 ‘조금’ 붐비는 곳이다. 성녀를 만났다면 다음은 그의 영적 동반자인 콜롱비에르 신부를 만나러 갈 차례다. 느린 걸음으로 1~2분 걷다보면 모자이크 벽화가 돋보이는 ‘콜롱비에르 성당’(La Colombiere Chapel)을 만날 수 있다. 바로 맞은 편에 있는 ‘이에론 박물관’(Hieron museum)까지 함께 둘러보면 프랑스 국보를 비롯해 예수 성심 관련 각종 예술작품을 볼 수 있다. 동네 사람 얼굴, 이름, 직업을 웬만하면 다 안다는 작디작은 동네에서 순례객의 볼거리는 크게 많지 않다. 그래서 이곳은 ‘기도하며 쉬어가는 도시’로 오히려 더 사랑받고 있다. 걸음걸음마다 멈춰 서면 기도처가 있다. 매일 저녁 고해성사를 할 수 있고 곳곳의 성당은 24시간 불을 밝힌다. 성지 담당 크리스토프 신부는 “이곳에서 할 일은 그저 예수의 성심 위에서 쉬고, 기도하며, 평화를 느끼고, 옆에 있는 이를 사랑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그것이 바로 예수 성심을 만나는 일이기 때문이다. 두려움 없이 편안하게 마음을 내려놓고 기도하는 곳, 파레 르 모니알이다.예수 성심이란 예수님의 마음을 깨닫고 일치하려는 믿음의 노력이 예수 성심 신심이다. 예수 성심에서 말하는 심장은 단순히 육체적인 심장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가장 중요한 부분, 생명과 활력의 원천이자 사랑을 뜻한다. “목마른 사람은 다 나에게 와서 마셔라. 나를 믿는 사람은 성경 말씀대로 그 속에서부터 생수의 강들이 흘러나올 것이다”(요한 7,38-39), “군사 하나가 창으로 그분의 옆구리를 찔렀다. 그러자 곧 피와 물이 흘러나왔다”(요한 19,34)는 성경 말씀처럼 예수 성심은 모든 은총의 근원이 된다. 예수 성심 공경은 중세기까지는 주로 개인적이고 주관적 신심 차원으로 머물렀다가 알라코크 수녀의 계시가 인정되면서 전 세계로 퍼져나갔다. 예수 성심 대축일이 있는 6월을 예수성심성월로 지내는 관습도 생겨났다. 교회는 예수성심성월을 보내면서 미사 전후에 예수성심성월 기도를 바치고, 성 시간과 성체강복 등 예수 성심을 특별히 공경하는 신심 행사를 한다. 알라코크 수녀(1647~1690)와 콜롱비에르 신부(1641~1682) 마르가리타 마리아 알라코크 수녀가 ‘예수 성심’에 대한 사적 계시를 세상에 알릴 수 있었던 것은 성녀의 고해 사제이며 영적 동반자인 콜롱비에르 신부의 도움이 컸다. 알라코크 수녀는 당시로선 마귀에 들렸다고 손가락질받을 만큼 환시로 힘들어하고 있었는데 어느 날 예수 성심으로부터 ‘당신의 충직한 종이자 완벽한 친구’를 보내 주겠다는 약속을 듣게 된다. 알라코크 수녀는 그 후 파레 르 모니알의 예수회 공동체 원장으로 오게 된 콜롱비에르 신부를 만나게 됐고 자신의 이야기를 털어놓는다. 신부는 바로 환시의 진실성을 신뢰했고 알라코크 수녀에게 이를 글로 남기도록 했다. 예수 성심의 사랑을 널리 알린 알라코크 수녀와 콜롱비에르 신부는 각각 1920년, 1992년 성인품에 올랐다. 글·사진=유은재 기자 you@cpbc.co.kr문채현2018.06.05

우리 순교 성인들이 현대 선교에 던지는 메시지 고민‘아시아의 순교자들’ 국제 세미나 참석한 김정환 신부(대전교구 내포교회사연구소장) “개인적으로는 아시아 순교사에 대한 비교의 장이 됐습니다. 하지만 원래 세미나 취지는 순교사를 나누는 데서 그치기보다는 그 역사를 현대 선교에 어떻게 적용 발전시켜 나갈지에 뒀습니다.” 아시아 선교 과정에서 탄생한 순교자들에 관해 토론하는 특별한 학술 나눔의 장이 마련됐다. 6월 8∼13일 바티칸 우르바노대학에서 열린 ‘아시아의 순교자들’(The Martyrs in Asia) 주제 세미나다. 인류복음화성 산하 기구인 세계선교교육국(CIAM) 주관으로 열린 이 비공개 세미나에 대전교구 내포교회사연구소장 김정환<사진> 신부가 참석했다. 이 학술회의에는 또 베트남과 태국, 라오스, 캄보디아, 중앙아시아, 일본 사제들과 선교사들도 참석했다. 다만 중국 사제는 비자 문제로 세미나에 참석하지 못하고 원고만 제출하는 것으로 대신했다. 김 신부는 “이번 세미나에 참가하면서 과거에는 순교 교회였지만 지금은 크게 발전하는 아시아와 아시아 교회를 교황청이 주목하고 있다는 걸 느꼈다”며 “그래서 ‘아시아 청년들’ 세미나가 지난해 이뤄져 올 초에 책으로 나왔고, 이번에는 ‘아시아 순교자들’ 세미나가 이뤄져 내년 3월에 책으로 나오게 되는 것 같다”고 세미나 개최 배경을 설명했다. 김 신부는 이어 “이번 세미나에서 저는 한국 순교자들이 오늘에 던지는 메시지에 집중, 한문서학서의 본보기, 곧 선교사 없이 교회가 시작될 수 있었던 핵심이 한문 서학서였듯이 현대 선교의 핵심적 도구가 무엇이 될 것인지, 그 안에 어떻게 신앙의 내용을 담을지를 중점적으로 제시했다”고 밝혔다. 김 신부는 또한 1742년에 금지됐다가 1932년 신사참배 문제가 불거지면서 갑작스럽게 1937년에 허용된 제사 논쟁과 성경의 율법논쟁, 효와 충의 가르침을 낳은 부모와 임금인 부모, 하느님이신 부모로 나눠 삼부(三父)신앙으로 발전시켜 박해의 근거를 오히려 신앙의 근거로 승화시켰던 선조들의 신앙적 통찰도 현대 교회에 주는 메시지가 많다고 시사했다. 이어 분단의 와중에 순교자들은 정치적 박해로 피를 흘렸고 배교를 강요당한 것도 아니었지만, 그들은 신앙으로 순교했고 그 의미와 파장은 현대의 불확실성 속에서 어떻게 신앙을 지켜나갈지를 잘 보여주고 있다고도 했다. 김 신부는 이어 “이번 세미나에서 가장 인상 깊었던 부분은 우리와 역사적 경험이나 유교 문화가 비슷하고 파리 외방 전교회가 선교한 베트남 순교역사였다”면서 “다른 나라는 선교사들이다 보니 현대 교회에 대해서는 잘 알지만, 해당 국가의 교회사나 순교 역사는 잘 모르는 불균형이 생겨 순교의 현대적 적용 문제를 심도 있게 다루지 못했다”고 아쉬움을 전했다. 그렇지만 “첫술에 배부를 수는 없으니 점차 연구가 이뤄지면 순교가 오늘 우리 교회에 던지는 메시지가 정리될 것”으로 내다봤다. 6월 5일 출국, 세미나에 참석한 김 신부는 파리 외방 전교회에서 뮈텔 주교 관련 문서를 확보한 뒤 6월 18일 귀국했다. 오세택 기자 평화신문2018.07.03
![[허규신부와 떠나는 신약 여행] (94) “그 때가 다가왔기 때문입니다”(묵시 1,3)](//cpbc.co.kr/CMS/newspaper/2018/04/rc/716852_1.0_titleImage_1.jpg)
[허규신부와 떠나는 신약 여행] (94) “그 때가 다가왔기 때문입니다”(묵시 1,3)묵시록의 상징과 비유 전체적 맥락에서 이해해야 요한 묵시록은 신약성경의 마지막 책이면서 종말에 드러날 계시를 전하고 있다. 사진은 미켈란젤로 작 ‘최후의 심판’, 바티칸 시스티나성당. 【CNS 자료사진】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는 요한 묵시록을 시작하는 첫 표현이자 이 책의 제목이기도 하고 책의 주제이기도 합니다. 요한 묵시록은 신약성경의 마지막 책이면서 종말에 드러날 계시를 전합니다. 그리고 그것을 이렇게 설명합니다. “하느님께서 머지않아 반드시 일어날 일들을 당신 종들에게 보여주시려고 그리스도께 알리셨고, 그리스도께서 당신 천사들을 보내시어 당신 종 요한에게 알려주신 계시입니다.”(묵시 1,1) 책의 시작에서 저자는 자신을 ‘요한’으로 소개합니다. 그리고 이런 언급은 반복해서 등장합니다.(묵시 1,4.9) 전통적으로 교부들은 요한 묵시록의 저자를 요한 복음서와 요한 서간의 저자와 동일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이런 생각에서 요한의 복음서와 서간들 그리고 묵시록을 ‘요한계 문헌’이라고 부릅니다. 하지만 현대의 학자들은 이런 전통적인 견해를 모두 인정하지 않습니다. 복음과 서간은 동일한 저자에 의해, 한 명이 아닌 요한의 가르침을 살아가던 공동체(요한 공동체)에 의해 기록된 것으로 생각하지만 요한 묵시록은 전혀 다른 저자에 의해 기록되었다고 생각합니다. 자신을 요한으로 소개하는 익명의 저자는 당시 소아시아 지방에서 하느님의 말씀을 전하는 예언자와 같은 사명을 가진 인물로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요한 묵시록 안에서 저자 자신이 받은 계시의 내용을 예언으로 이해하기 때문입니다. 그는 책 전체를 통해 자신의 사명이 ‘예언의 말씀’을 전하는 것이라고 표현합니다.(묵시 1,3; 22,18-19) 당시 박해 상황 잘 묘사해 요한 묵시록의 배경에는 박해가 자리하고 있습니다. 저자의 소명을 밝히는 내용 안에서 박해의 상황이 잘 묘사됩니다. “예수님 안에서 여러분과 더불어 환난을 겪고 그분의 나라에 같이 참여하며 함께 인내하는 나 요한은, 하느님의 말씀과 예수님에 대한 증언 때문에 파트모스라는 섬에서 지내고 있었습니다.”(묵시 1,9) 실제로 당시에 파트모스는 소아시아 지방의 이름난 유배지였습니다. 저자 역시 하느님의 말씀과 예수님에 대한 증언 때문에, 곧 신앙 때문에 박해 당하고 있다고 표현합니다. 또 요한 묵시록은 페르가몬의 안티파스라는 첫 순교자를 언급하면서 박해가 점점 강해지고 있음을 암시합니다.(묵시 2,13) 1세기 즈음 소아시아 지방은 로마의 통치 아래 있었고 그리스도인들은 크고 작은 박해를 경험했습니다. 역사의 기록에도 이런 사실들이 전해집니다. 박해의 가장 큰 요인은 로마의 정책이었던 ‘황제 숭배 의식’입니다. 로마 제국을 시작하면서부터 로마의 황제를 숭배하는 정책이 로마의 지배 아래 있는 모든 지역에 시행되었습니다. 로마의 황제는 모두 이런 숭배 의식을 펼쳤지만 그중에 다른 황제보다 더욱 강하게 이 정책을 시행했던 이들로 칼리굴라(37~41년)나 네로(54~64), 또는 도미티아누스(81~96) 황제가 꼽힙니다. 이 중에서 요한 묵시록이 기록된 시기는 도미티아누스 황제 때로 생각합니다. 본문이 전해주는 여러 내용 중에 이 시기와 관련된 암시들을 찾을 수 있고 도미티아누스 황제는 이전보다 더 강하게 황제 숭배 의식을 강요하고 소아시아 지방의 경제와 정치에 심하게 간섭했던 인물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모든 점을 감안해서 요한 묵시록은 도미티아누스 황제의 말기인 95년을 즈음해서 기록된 것으로 생각합니다. 환시 통한 계시의 내용 전달 요한 묵시록은 환시를 통해 계시의 내용을 전하는 책입니다. 물론 우리가 보는 것은 글로 기록된 것이지만 그것이 전하는 것은 저자가 보았던 환시입니다. 눈으로 본 환시를, 그것도 비교할 대상이 없는 환시를 글로 전할 때에는 어쩔 수 없이 상징적이고 비유로 된 표현들을 사용하게 됩니다. 그렇기에 요한 묵시록은 많은 상징과 비유가 담겨 있습니다. 하지만 상징과 비유는 시대나 지역이나 문화의 영향을 받습니다. 이런 이유로 요한 묵시록이 사용하는 상징이나 비유를 지금 우리가 이해하기에 쉽지만은 않은 것이 사실입니다. 이런 어려움은 요한 묵시록이 전하는 내용을 잘못 해석할 수 있는 여지를 줍니다. 개별적인 상징이나 비유는 요한 묵시록이 기록된 목적을 염두에 두고 전체적인 문맥에 맞게 해석될 때 그 의미를 올바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가톨릭대 신학대학 성서학 교수> 평화신문2018.04.10
![[이창훈 위원의 예수님 이야기] (74) 성전 파괴 예고와 재난의 시작 (루카 21,5-19)](//cpbc.co.kr/CMS/newspaper/2018/07/rc/728234_1.0_titleImage_1.jpg)
[이창훈 위원의 예수님 이야기] (74) 성전 파괴 예고와 재난의 시작 (루카 21,5-19)“너희는 인내로써 생명을 얻어라” 루카 21,19 소아시아(터키) 밀레토스 유적지. 성경학자들은 루카복음 21장 5절에서 36절(또는 38절)까지를 ‘종말론적 담화’라고 부릅니다. 세상 종말에 대한 예수님의 말씀이라는 것입니다. 이번 호에서는 성전 파괴 예고와 재난의 시작에 관한 대목을 살펴봅니다.성전 파괴 예고(21,5-6)몇몇 사람이 성전을 두고 “아름다운 돌과 자원 예물로 꾸며졌다”고 이야기하자 예수님께서는 “너희가 보고 있는 저것들이 돌 하나도 다른 돌 위에 남아 있지 않고 다 허물어질 때가 올 것이다” 하고 예루살렘 성전 파괴를 예고하십니다.(21,5-6)이스라엘 역사에서 예루살렘 성전이 파괴된 것은 모두 두 차례입니다. 첫 번째는 기원전 587년(또는 586년) 바빌로니아 제국이 예루살렘을 점령했을 때였습니다. 솔로몬 임금이 지은 예루살렘 성전이 불타버렸고 성전 기물들을 모두 노략질당했습니다. 기원전 538년(또는 537년) 바빌로니아로 유배됐던 이스라엘 사람들이 돌아오고 나서 유다 총독 즈루빠벨이 기원전 515년 파괴된 옛 성전 터에 새 성전을 지었습니다. 이를 제2성전이라고 부릅니다. 이 제2성전을 증ㆍ개축한 사람이 예수님께서 태어나실 당시 유다 지방을 비롯한 이스라엘 전 지역을 다스린 헤로데 대왕(재위 기원전 37~기원전 4)이었습니다. 에돔(이두메아) 출신인 헤로데 대왕은 유다인들의 환심을 사기 위해 기원전 20~19년에 제2성전의 증ㆍ개축 사업을 시작했습니다. 성전 구역만 기존의 두 배가 되는 대대적인 사업이었습니다. 이 성전은 기원후 64년에야 완공됐다고 하니,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서 성전을 정화하시며 사람들을 가르치실 때에도 부분적으로 공사가 진행되고 있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사람들이 예수님께 성전이 46년 걸려 지어졌다고 말한 것(요한 2,20)을 고려하면, 예수님 당시에 헤로데 성전은 이미 웅장한 모습을 드러냈을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이 성전이 완전히 허물어질 때가 올 것이라고 예고하십니다. 실제로 예루살렘 성전은 완공된 지 6년 후인 기원후 70년 티투스 장군이 이끄는 로마 군대에 의해 파괴되고 불에 타 일부 벽만 남습니다. 그 후 당시 로마 황제 베스파시아누스(재위 69~79)의 명령으로 벽마저도 허물어버렸는데 서쪽 벽 일부만 오늘날까지 남아 있습니다. 이를 ‘통곡의 벽’이라고 부르지요. 예수님 당시에는 예루살렘 성전 파괴란 미래의 일이었습니다만, 루카가 복음서를 집필했을 때는 이미 예루살렘 성전 파괴가 역사적 현실이 되고 난 다음이었습니다. 학자들은 루카복음이 집필 연도를 기원후 80년쯤으로 잡고 있으니 말입니다. 이를 고려하면서 그다음 부분을 살펴봅시다. 재난의 시작(21,7-19) 예루살렘 성전이 파괴될 것임을 예고하시는 예수님 말씀에 사람들은 “스승님, 그러면 그런 일이 언제 일어나겠습니까? 또 그 일이 벌어지려고 할 때에 어떤 표징이 나타나겠습니까?” 하고 묻습니다.(21,7) 이 질문은 예루살렘 성전 파괴가 언제 일어날 것이며 또 그때 어떤 표징이 나타날 것인가 하는 질문입니다. 하지만 예루살렘 성전이 지니는 의미를 생각할 때 예루살렘 성전 파괴는 유다인들에게는 파국, 곧 종말이나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따라서 이 물음은 종말의 때가 언제 올 것이냐 하는 질문으로 볼 수 있습니다. 이 질문에 예수님께서는 먼저 “너희는 속는 일이 없도록 조심하여라”고 말씀하시면서 “많은 사람이 내 이름으로 와서 ‘내가 그리스도다’ 또 ‘때가 가까웠다’ 하고 말할 것이지만 그들 뒤를 따라가지 마라”고 당부하십니다. 자신을 그리스도 곧 메시아라고 칭하는 거짓 예언자들이 나타나 종말이 가까웠다고 현혹하겠지만 속아 넘어가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또 “전쟁과 반란이 일어났다는 소문을 듣더라도 무서워하지 마라”고 하십니다.(21,8-9) 전쟁과 반란이 사회 혼란을 가져다주지만 그 자체가 종말의 표징은 아닌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어서 말씀하십니다. “민족과 민족이 맞서 일어나고 나라와 나라가 맞서 일어나며 큰 지진이 발생하고 곳곳에 기근과 전염병이 생길 것이다. 그리고 하늘에서는 무서운 일들과 큰 표징들이 일어날 것이다.”(21,10-11) 민족 간 또는 나라 간 전쟁, 큰 지진과 기근, 전염병, 하늘의 표징들은 묵시문학에서 종말과 관련해 사용하는 표현들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종말을 알리는 이런 일들이 일어나기에 앞서 “사람들이 너희에게 손을 대어 박해할 것”이라면서 그때에 제자들이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말씀하십니다. 박해는 제자들에게 예수님과 복음을 “증언할 기회”가 될 것입니다. 그렇지만 제자들은 변론할 말을 미리부터 준비해서는 안 됩니다. “어떠한 적대자도 맞서거나 반박할 수 없는 언변과 지혜를 내가 너희에게 주겠다”고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21,12-15) 제자들은 또 부모와 형제와 친척과 친구들에 의해 넘겨져 더러는 죽기까지 할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 때문에 모든 사람에게 미움을 받을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너희는 머리카락 하나도 잃지 않을 것”이라시면서 “너희는 인내로써 생명을 얻어라” 하고 당부하십니다.(21,16-19)[생각해 봅시다]예루살렘 성전 파괴 예고와 재난의 시작에 관한 예수님 말씀을 정리하면서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 성전 파괴와 함께 그리스도를 자처하는 거짓 메시아들이 나타나 종말이 왔다고 사람들을 현혹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실제로 기원후 1세기에는 이스라엘 땅에서 그런 이들이 있었습니다. 사도행전에서도 그런 인물을 우리는 셋이나 확인할 수 있습니다. 테우다스와 유다 그리고 자객 4000명을 이끌고 광야로 나간 이집트인이 그들입니다.(사도 5,26-37; 21,38)또 전쟁과 반란이 일어났다는 소문도 들리겠지만, 그 소문을 두려워해서는 안 된다고 말씀하십니다. 전쟁과 반란은 나라를 분열시키고 혼란에 빠뜨립니다. 역사 안에서는 늘 전쟁과 반란이 있었고 그로 인한 정치 사회적 혼란이 따랐습니다. 종말이 오기 전에 겪어야 할 일이지만 그것이 종말이 왔다는 표징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한 가지 더 주목해야 할 것은 종말이 오기 전에 그리스도의 제자들이 먼저 박해를 받으리라는 것입니다. 그때에 부모와 형제 친척과 친구에게서도 버림을 받고 더러는 죽기까지 할 것입니다. 하지만 제자들에게 박해는 또한 그리스도를 증언하는 기회가 될 것입니다. 그렇지만 자기 힘으로 어떻게 하려고 미리 나서지 말아야 합니다. 주님께서 “어떤 적대자도 맞서거나 반박할 수 없는 언변과 지혜를 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박해를 당할 때에, 심지어 죽임을 당할 때라도 그리스도의 제자들에게 요구되는 것은 ‘인내’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생명’을 얻을 것입니다.루카 복음사가가 복음서를 썼을 때는 이미 예루살렘 성전이 파괴된 후였고, 로마 제국 곳곳에서 그리스도인들에 대한 박해가 있었습니다. 이 시기에 루카는 비 유다계 그리스도인들로 이뤄진 자기 공동체 신자들에게 사회적 혼란과 박해의 어려움을 어떻게 극복해야 하는지를 예수님 말씀을 통해 제시하려고 했다는 것이 성경학자들의 일치된 해석입니다. 백영민2018.07.24
![[호기심으로 읽는 성미술] (19) 기도하는 ‘하느님의 어머니’](//cpbc.co.kr/CMS/newspaper/2018/11/rc/739090_1.1_titleImage_1.jpg)
[호기심으로 읽는 성미술] (19) 기도하는 ‘하느님의 어머니’주님 교회와 인류 전체 대표하는 ‘하느님의 어머니’ 교회는 참 하느님이시며 참 인간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신원을 분명하게 드러내기 위해 431년 에페소 공의회에서 성모 마리아를 ‘하느님의 어머니’로 선포합니다. 하지만 그리스도인들은 이 믿을 교리가 선포되기 훨씬 이전인 2~3세기부터 성모 마리아의 품위를 드러내는 도상((圖像)을 표현하였습니다. 주님 강생과 연결된 성모님 도상 하느님의 어머니이신 성모님을 드러내는 이 도상은 크게 세 가지 형태로 발전하였습니다. 옥좌에 아기 예수와 함께 앉아 있는 하늘의 모후이신 성모 마리아와 아기 예수를 팔에 안고 있는 온전히 거룩하신 성모 마리아, 그리고 기도하시는 하늘보다 더 넓으신 성모 마리아의 모습입니다. 이 세 가지 도상 모두는 주님 강생과 연결돼 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동정 마리아를 택하시어 당신 아들의 어머니로 삼으셨습니다. 마리아께서는 자유롭게 순종해 동정녀의 몸으로 당신 아드님을 성령으로 잉태하고, 낳고, 길렀으며, ‘주님의 종’으로서 평생 동정으로 사셨습니다. 그래서 마리아는 사람이 되신 하느님의 어머니가 되셨고, 교회와 인류 전체를 대표하는 어머니가 되셨습니다. 이처럼 성모님의 신원은 참 하느님이시며 참 인간이신 예수 그리스도와 떼려야 뗄 수 없습니다. 313년 콘스탄티누스 대제의 밀라노 칙령으로 신앙의 자유를 얻은 이후 그리스도교 성미술은 급속히 발달합니다. 이때부터 교회는 도상마다 적합한 이름을 지어 부르기 시작했습니다. 헬라어로 아기 예수를 안고 있는 성모상을 ‘브레포크라투사’(Η βρεφοκρατουσα), 한 손에 두루마리를 들고 다른 손으로 강복하시는 아기 예수를 안고 주님을 가리키고 있는 성모님의 도상을 ‘인도자이신 성모’(Η Οδηγητρια-호데게트리아)라 불렀습니다. 또 아기 예수를 가운데 두시고 두 팔을 펼친 채 기도하는 모습을 한 성모님을 ‘하늘보다 더 넓으신 분’(Η Πλατυτερα των Ουρανων-플라티테라)라 했습니다. 브레포크라투사와 호데게트리아는 하느님의 어머니로서 성모님의 신원과 품위를 드러내지만 실은 예수 그리스도의 신원을 확연히 드러내는 도상입니다. 플라티테라 역시 주님과 성모님의 신원을 드러내지만, 무엇보다 하느님께 순명하는 성모님의 믿음을 고백하는 도상입니다.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말씀하신 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라다”(루카 1,38)는 성모 마리아의 동의로 말미암아 인류 구원의 길이 열렸습니다. 그래서 이레네오 성인은 성모님의 빛나는 성덕을 기려 “하와를 통해 죽음이 왔고, 마리아를 통해 생명이 왔다”고 고백했습니다. 성경엔 성모 마리아께서 기도하는 모습이 두 차례 나옵니다. 하느님의 아들이 강생하기 전에, 즉 그리스도의 잉태를 위한 주님 탄생 예고 때, 그리고 성령께서 강림하시기 전에, 즉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를 형성하기 위한 성령 강림 때에 성모께서 기도하는 모습이 나옵니다. 성모님의 기도에는 “하느님의 뜻이 그대로 이루어지기를” 바라는 간청이 담겨 있습니다. 성모님의 이 기도는 교회가 드리는 기도의 전형입니다. 기도하시는 성모님의 도상은 두 가지 유형으로 크게 나뉩니다. 초대 교회 때부터 이어온 전통적인 도상은 ‘플라티테라’입니다. 이후 도상이 발전하면서 ‘기도하는 동정녀’의 도상이 등장합니다. 이 도상은 성모님 혼자서만 두 팔을 위로 벌려 올리시고 기도하는 모습으로 라틴말로 ‘오란스’(Orans)라 합니다. 플라티테라와 오란스 도상의 공통점은 성모님께서 정면을 향해 기도하는 자세를 취하고 계시다는 것이고, 차이는 아기 예수와 함께 있느냐는 점입니다. 무라노 성당 오란스. 비잔틴 미술의 백미로 6세기 이후 등장하지만 11세기부터 유행하던 화풍을 보여주고 있다.베네치아 무라노 섬의 성모 마리아 이번 호에는 오란스 두 작품을 간략히 소개합니다. 먼저 이탈리아 베네치아 무라노 섬의 성모 마리아와 성 도나토 대성전(Basilica di Santa Maria e Donato)의 12세기 모자이크 오란스 작품입니다. 이 작품은 비잔틴 성미술의 백미를 보여줍니다. 베네치아 산 마르코 대성전 모자이크 기술자들이 제작한 이 도상은 독창성이 두드러진 작품입니다. 성모님의 옷차림과 기도하는 팔의 자세가 전통 양식에서 크게 벗어나 있습니다. 성모님은 머리부터 발끝까지 내려오는 짙은 청색의 긴 옷을 입고 있습니다. 옷의 끝단에는 하늘의 모후이신 존엄한 분이심을 드러내는 황금색 띠와 금실 솔이 장식돼 있습니다. 또 머리와 양쪽 어깨에는 십자가 모양의 별이 새겨져 있습니다. 이 별은 삼위일체이신 하느님의 현존을 드러냅니다. 또 붉은색 후광으로 성모님의 존엄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붉고 푸른 옷색깔이 붉은색 후광과 푸른 옷으로 발전한 것입니다. 이러한 화풍은 6세기 이후부터 등장하나 11세기부터 크게 유행하였습니다. 성모님 양옆의 ‘ΜΡ’와 ‘ΘΥ’는 Μητηρ Θεου의 약자로 ‘하느님의 어머니’라는 뜻입니다. 13~14세기 오란스 작품 그리스 아테네 비잔틴미술관이 소장하고 있는 13~14세기 오란스 작품입니다. 템페라 기법의 이 작품에서 성모 마리아는 짙은 자색의 겉옷을 머리까지 두르고 있으며 그 안에 발목까지 오는 짙은 청색의 긴 옷을 입고 있습니다. 청색과 자색의 두 옷감은 인성과 신성을 상징합니다. 그래서 성모 마리아께서 본성은 인간이지만 참 하느님을 잉태하심으로써 하느님의 어머니가 되셨음을 드러냅니다. 성모님의 커다랗고 온화한 두 눈은 영적인 세계로 이끕니다. 두 팔을 하늘 위로 벌리고 기도하는 모습은 하느님의 뜻이 그대로 이루어질 뿐 아니라 모든 인류가 당신 아드님과 완전히 하나 되어 구원될 수 있도록 간구하는 어머니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리길재 기자 teotokos@cpbc.co.kr문채현2018.11.16

새해 달력, 다이어리 준비하세요 대림 시기와 함께 교회에도 새해가 도래했다. 2018년 새해도 한 달여 앞으로 다가왔다. 새해를 앞두고 교계 출판사들이 내놓은 다채로운 모양의 달력과 다이어리를 소개한다. 가톨릭출판사가 제작한 다양한 달력 달력가톨릭출판사는 △하느님의 종들의 종 우리 시대 일곱 교황의 기도 △이콘연구소 이콘 작가들이 그린 ‘은총이 가득하신 성모 마리아’ △캘리그라피 작품이 돋보이는 ‘사랑으로 열매 맺는 신앙’ △전 세계의 아름다운 성당 모습을 담은 ‘믿음의 빛, 세계의 아름다운 성당들’ 등 4종의 대형 벽걸이 달력을 선보였다. 특히 프란치스코 교황을 비롯해 근현대 시기 활약했던 역대 교황들의 사진을 담은 교황 달력은 교황들이 재임 중 했던 말씀과 기도문을 함께 수록해 놓고 있다. 벽걸이형 달력들 외에도 삼단 숫자 달력, 탁상 달력 등 다채롭다. 단체 주문 시 할인된다. 구입 문의 : 02-6365-1800, 가톨릭출판사분도출판사는 프랑스의 도시, 자연 풍경과 오랜 교회 모습을 담은 ‘프랑스 여행’과 작가가 전국의 성당을 아기자기하게 그려낸 ‘김이슬의 아름다운 성당을 찾아서’를 와이드 벽걸이형으로 제작했다. ‘친구, 프란치스코’는 독일의 유명 만평작가 게르하르트 메스터가 프란치스코 교황을 만화로 그린 달력. 유쾌한 모습의 교황과 함께 시기 때마다 강조한 강론 말씀이 가슴에 와 닿는다. 김옥순(성바오로딸수도회) 수녀가 깊은 묵상 끝에 그려낸 성화 달력 ‘하느님, 나의 하느님’도 눈에 띈다. 구입 문의 : 054-970-2400, 분도출판사 인쇄 사업부기쁜소식은 △하느님의 집 △주님의 제대 2종의 달력을 내놨다. ‘하느님의 집’ 달력은 유럽 각지의 성당, 수도원을 맑은 하늘과 함께 담아낸 화보와 같다. ‘주님의 제대’는 이스라엘, 이탈리아, 독일 등지에 있는 고귀한 형상의 제대 모습을 담고 있다. 화려하기도 하면서 소박한 아름다움을 고루 갖춘 제대 형상을 매달 만나볼 수 있다. 구입 문의 : 02-762-1194, 기쁜소식바오로딸출판사는 매일 말씀을 묵상할 수 있는 탁상용 달력 ‘주님과 함께’를 제작했다. 아름다운 일러스트 그림과 더불어 365일 말씀으로 하루하루를 지낼 수 있다. 구입 문의 : 02-944-0807, 바오로딸다이어리생활성서가 내놓은 ‘‘Bible & Life 2018 소금 다이어리’는 고급형과 일반형 두 가지가 있다. 마음의 소금과 같은 성경 말씀이 다이어리 페이지마다 자리하고 있어 일상을 주님과 함께하도록 돕는다. 주일 복음과 더불어 말씀 덧쓰기, 성경 읽기표, 기도문 등을 싣고 있다. 넉넉한 메모 공간도 활용도가 높다. 300부 이상 주문 시 25% 할인된다. 구입 문의 : 02-945-5985, 생활성서바오로딸출판사는 휴대가 간편한 ‘2018 말씀과 함께’ 다이어리를 내놨다. 주간ㆍ월간ㆍ연간 계획표가 일목요연하게 수록돼 있고, 성경통독 계획표, 메모, 주소란 등을 갖추고 있다. 일곱 가지 다양한 색상이 구비돼 있다. 구입 문의 : 02-944-0807, 바오로딸 이정훈 기자 sjunder@cpbc.co.kr 백영민2017.11.29

손희송 주교가 전하는 하느님의 7가지 사랑 처방전 칠성사 의미와 성사의 기원 등 성사에 대한 모든 것 쉽게 풀어 성사(聖事)는 ‘보이지 않는 은총’을 ‘보이는 표지’로 담아 전해주는 하느님 은총의 표징이다. 사진은 신자가 성체성사에 참여하는 모습. 가톨릭평화신문 DB 칠성사 믿음의 문을 열다 손희송 주교 지음 / 생활성서사 / 1만 3000원하느님은 모든 그리스도인의 삶에 은총을 부어주신다. 하지만 하느님 은총은 사실 잘 보이지 않아 미처 깨닫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성사(聖事)는 ‘보이지 않는 은총’을 ‘보이는 표지’로 담아 전해주는 하느님 은총의 표징이다. 세례ㆍ견진ㆍ성체ㆍ고해ㆍ병자ㆍ성품ㆍ혼인성사까지. 그리스도인 전 생애에 걸쳐 전해주시는 ‘하느님의 7가지 사랑 처방전’. 가톨릭 교회의 칠성사다.손희송(서울대교구 총대리) 주교가 최근 칠성사의 의미를 알기 쉬운 문답 형식으로 정리한 책 「칠성사 믿음의 문을 열다」를 펴냈다. 가톨릭대 신학대 교수 시절 20여 년간 ‘성사론’을 가르쳤고, 성사의 의미를 일깨우는 다양한 저서를 집필해온 손 주교가 1997년 출간한 이후 신자들의 꾸준한 인기를 얻어오고 있는 「열려라 7성사」를 새롭게 보완해 낸 책이다. 칠성사의 기본 의미와 성사의 기원, 변천 과정을 비롯해 관련된 성경 구절, 궁금증 등 ‘성사에 관한 모든 것’이 담겼다.칠성사 중 첫째가는 세례성사는 우리가 하느님을 처음 비로소 “아빠! 아버지”라고 부르도록 해주는 은총이다. 세례를 통해 하느님의 자녀이자 교회 일원이 되고, 예수 그리스도와 하나가 된다. 우리는 세례로 ‘그리스도의 몸의 지체’가 된다.견진성사는 세례 때의 은혜를 더욱 굳건히 해준다. 우리는 견진성사를 통해 슬기, 의견, 통달, 굳셈, 지식, 효경, 두려움 등 ‘성령의 7가지 은혜’를 얻게 된다. 자신의 사명과 은사를 새롭게 부여받는다. 간혹 “견진성사를 꼭 받아야 하느냐”는 이들이 있다. 그러나 자기 믿음을 새로 굳건히 하고, 다시 한 번 하느님께 대한 믿음과 충실을 약속하기 싫어하는 이는 없을 것이다.성체성사는 신앙생활의 핵심이다. 성부께 드리는 감사와 찬미의 예식이자, 몸과 피로 자신의 모든 것을 내어준 예수 그리스도의 헌신과 희생을 기억하는, 그분과의 일치의 성사다. 예수님이 하신 이웃 사랑, 가장 작은 이에게 베푸신 그분의 행위를 따르겠다는 우리 다짐도 성체성사 중에 이뤄진다.많은 신자가 고해성사하기를 주저하곤 한다. 자신의 죄를 고백하기가 쉽지 않은 탓이다. 그러나 손 주교는 고해성사가 우리 영혼의 건강을 회복시켜주는 성사라고 일러준다. 생각해보자. 고해소에 들어가 사제를 통해 하느님께 나의 죄를 고백한다고 해서 대역 죄인으로 몰린 일이 있는가. 너그러운 하느님은 언제나 우릴 용서할 준비가 돼 있으시다. 대죄를 지었을 경우에는 죄의 종류와 횟수까지 고백하는 것이 좋다. 초세기 교회 시절엔 중대한 죄를 저지른 이에게 기나긴 보속의 기간이 내려졌다. 참회자는 보속 기간 중 성당 안에도 들어가지 못하거나, 미사에 참여하더라도 영성체를 못 했다. 기간이 다 되어서야 공개적으로 교회 공동체에 다시금 받아들여졌다.그리스도인의 삶은 세례 이후 성사생활에 기초를 둔다. 그러나 많은 이가 성사의 깊은 의미를 미처 제대로 깨닫지 못한 채 살아간다. 그래서 미사 전례의 의미, 성체를 모시는 기쁨, 고해성사가 주는 회개의 뜨거움을 제대로 맛보지 못하는 것이다. 하느님이 주시는 은총 작업의 과정과 의미를 조금만 더 새긴다면 딱딱하고 두렵게만 여겨지던 성사생활이 ‘하느님과의 만남’으로 전환될 것이다.이정훈 기자 sjunder@cpbc.co.kr 백영민2018.08.14
 부활 논쟁과 주님이신 예수 그리스도(루카 20,27-44)](//cpbc.co.kr/CMS/newspaper/2018/07/rc/727788_1.0_titleImage_1.jpg)
[이창훈 위원의 예수님 이야기](72) 부활 논쟁과 주님이신 예수 그리스도(루카 20,27-44)부활 신앙과 주 예수 그리스도 향한 믿음사두가이들이 부활 문제를 가지고 예수님께 시비를 겁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들의 시비에 대해 명쾌한 답변을 하신 후에 메시아에 관한 질문을 던지십니다. 차례로 살펴봅니다. 예수님께서는 부활이 없다고 주장하는 사두가이들의 질문에 하느님은 산 이들의 하느님이시라면서 부활을 강력히 논증하신다. 사진은 르네상스 시대의 거장 핀토리키오가 1493년에 완성한 ‘부활’ 프레스코화. 【CNS 자료 사진】부활 논쟁(20,27-40) 이번에는 사두가이들이 등장합니다. 루카복음에서 사두가이가 등장하는 곳은 여기가 처음이자 마지막입니다. 사두가이들은 사제 가문과 연결돼 있었고 부유한 명문 가문과 귀족 계급에 속하는 사회 지도층이었습니다. 사두가이들은 율법학자나 바리사이들과 달리 부활을 믿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기록된 모세 오경(토라, Torah)만 경전으로 받아들이고 ‘조상들의 전통’이라고 하는 구전으로 전해오는 율법이나 사회 윤리적 규범(할라카, Halakah)은 배척했다고 합니다. 그들은 현실주의자들이었고 현상 유지에 집착하는 보수적인 이들이었습니다. 이런 사두가이들이 예수님께 질문을 던집니다. 어떤 사람이 자식 없이 죽으면 그 형제가 죽은 사람의 아내와 혼인하여 후사를 일으켜 주어야 한다는 모세 율법을 근거로 부활과 관련한 질문을 예수님께 던진 것입니다. 이들이 질문의 근거로 내세운 모세 율법은 신명기 25장 5-10절에 나오는 내용으로, 아내가 죽은 남편의 형제와 혼인한다고 해서 역연혼(逆緣婚), 또는 형수나 제수와 혼인한다고 해서 수혼법(嫂婚法)이라고도 부릅니다. 질문 내용은 일곱 형제가 있었는데 첫째가 결혼했으나 후사가 없이 죽어 둘째가 형수와 살았고 그런 식으로 일곱째까지 모두 형수와 살았지만 후사가 없이 죽었고 그 여인도 죽었는데 부활 때에 그 여자는 누구의 아내가 돼야 하느냐는 것이었습니다. 이 질문에 대한 예수님의 답변을 둘로 나눠서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우선 예수님께서는 “이 세상 사람들은 장가도 들고 시집도 간다. 그러나 저 세상에 참여하고 또 죽은 이들의 부활에 참여할 자격이 있다고 판단받는 이들은 더 이상 장가드는 일도 시집가는 일도 없을 것이다. 천사들과 같아져서 더 이상 죽는 일도 없다. 그들은 또한 부활에 동참하여 하느님의 자녀가 된다”라고 말씀하십니다.(20,34-36) 말하자면, 시집가고 장가드는 일은 현세의 일이고 저세상에서는 그런 일이 없으리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죽은 이들의 부활에 참여할 자격이 있다고 판단받는 이들은”이라는 표현은 죽은 다음에 부활하지 못하는 이들도 있다는 느낌을 줍니다. 이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요? 같은 내용을 전하는 마태오복음이나 마르코복음에서는 예수님께서 “죽은 이들의 부활에 참여할 자격이 있다고 판단받는 이들은”이라고 말씀하시지 않고 “부활 때에는 장가드는 일도 시집가는 일도 없이 하늘에 있는 천사들과 같아진다”고 말씀하신 것으로 나옵니다.(마태 22,30; 마르 12,25 참조) 이를 두고 일부에서는 루카 복음사가가 죽은 이들이 모두 부활하는 것이 아니라 “부활할 자격이 있다고 판단되는 이들” 곧 의인들만 부활한다고 믿고 있다고 해석하기도 합니다. 또 루카 복음사가는 “의인들이 부활할 때”(루카 14,14)라는 표현을 쓰기도 합니다. 하지만 루카 복음사가가 쓴 사도행전에서는 “의로운 이들이나 불의한 자들이나 모두 부활하리라는 것”(사도 24,15)이라는 표현이 나옵니다. 따라서 “죽은 이들의 부활에 참여할 자격이 있다고 판단받는 이들은” 또 “의인들이 부활할 때”라는 표현은 의인들만 부활한다는 뜻이 아니라 의인들은 하느님의 참 생명에 참여한다는 뜻으로 이해해야 한다는 것이 성경학자들의 전반적인 풀이입니다. “그들은 또한 부활에 동참하여 하느님의 자녀가 된다”(20,36)는 예수님의 말씀이 이를 뒷받침합니다. 모든 사람의 부활은 이어오는 예수님 말씀에서 더 분명하게 드러납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시지요. “그리고 죽은 이들이 되살아난다는 사실은, 모세도 떨기나무 대목에서 ‘주님은 아브라함의 하느님, 이사악의 하느님, 야곱의 하느님’이라는 말로 이미 밝혀 주었다. 그분은 죽은 이들의 하느님이 아니라 산 이들의 하느님이시다. 사실 하느님께는 모든 사람이 살아 있는 것이다.”(20,37-38) 이스라엘 백성을 이집트에서 탈출시킬 지도자로 모세를 선택하시면서 하느님께서는 당신을 “아브라함의 하느님, 이사악의 하느님, 야곱의 하느님”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탈출 3,6) 아브라함과 이사악과 야곱은 이미 수백 년 전에 죽은 이스라엘의 성조들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께서 모세에게 하신 이 말씀을 인용하시면서 “하느님은 죽은 이들의 하느님이 아니라 산 이들의 하느님”이라고 밝히십니다. 아브라함과 이사악과 모세가 이미 죽었지만 부활한 삶을 살고 있음을 암시하신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 다음에 바로 “사실 하느님께는 모든 사람이 살아 있는 것이다”라고 말씀하심으로써 죽은 이들의 부활이 없다고 하는 사두가이들의 질문에 결정적인 답을 하신 것입니다. 주님이신 예수 그리스도(20,41-44) 이번에는 예수님께서 질문하십니다. “어찌하여 사람들이 메시아가 다윗의 자손이라고 말하느냐?”는 것입니다.(20,41) 사실 구약의 예언자들은 다윗의 자손 가운데 메시아가 오실 것이라고 예언했습니다.(이사 11,1-2; 예레 23,5-8; 미카 5,1)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주님께서 내 주님께 말씀하셨다. ‘내 오른쪽에 앉아라, 내가 너의 원수들을 네 발판으로 삼을 때까지’”라는 다윗의 시편(시편 110,1)을 인용하시면서 “다윗이 메시아를 주님이라고 부르는데, 어떻게 메시아가 다윗의 자손이 되느냐?” 하고 물으신 것입니다.(20,42-44) 예수님의 이 질문은 메시아가 다윗의 자손이기는 하지만 실은 다윗이 ‘주님’이라고 부른, 다윗보다 훨씬 위대한 분임을 드러내고 있다고 하겠습니다. 다른 한편으로 루카 복음사가는 이 기사를 통해 예리코의 소경이 예수님을 “다윗의 자손”이라고, 또 “주님”이라고 부른 것과 연관지어(루카 18,35-43) 메시아로 오신 다윗의 자손 예수님이 다윗보다 훨씬 위대한 ‘주님’이심을 부각하려고 했다고 성경학자들은 풀이합니다. 생각해 봅시다 죽은 이들의 부활, 그리고 메시아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주권. 이 두 가지는 초기 그리스도교 공동체에서, 따라서 루카 복음사가가 속해 있던 공동체에서도 대단히 중요한 주제였습니다. 사실 죽은 이들의 부활은 그때나 지금이나 그리스도교 신앙의 핵심입니다. 또 그리스도 곧 구세주로 번역되는 메시아이신 예수님은 단지 다윗의 후손이 아니라 다윗이 ‘주님’이라고 부른 분, 곧 지극히 높으신 하느님의 아들이시라는 믿음 또한 그리스도교 신앙의 밑바탕입니다. 그렇다면 이렇게 생각하면 어떨까요? 루카 복음사가는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 이후 예수님과 적대자들 사이에 갈등과 충돌이 고조돼 가는 시점에 그리스도 신앙의 핵심이 되는 두 주제, 부활 신앙과 주님이신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믿음을 다시 한 번 명확히 함으로써 그의 공동체에 신앙의 기초를 더욱 다지려고 했다고 말입니다. 이제 그리스도 신자라고 자처하는 우리 자신에게 물어볼 차례입니다. 우리는 부활을 믿습니까? 우리는 나자렛의 예수님을 주님이요 그리스도로 믿습니까? 그 믿음을 우리는 무엇으로 드러내 보일 수 있을까요? 문채현2018.07.19

성경, 하느님께서 내쉬시고 제자들에게 불어넣으신 말씀제32회 성서 주간 - 성경 궁금증 풀이 사복음서의 세밀화 ‘라자로의 부활’, 1179~1180년, 프랑스 국립 도서관, 파리. 제32회 성서 주간을 맞아 독자들이 문의한 궁금증 가운데 가장 많은 질문을 모아 풀이한다. 성경은 어떻게 구성돼 있나성경은 73권으로 된 한 질의 책이다. 성경은 인간을 구원하기 위한 하느님의 역사를 다루고 있다. 성경은 이 과정에서 하느님 아버지께서 성자 예수 그리스도와 성령을 통해 무한한 사랑과 자비를 인간에게 베풀고 있다는 것을 알려주고 있다. 그래서 가톨릭 교회는 성경을 계시된 교의와 신앙의 원천이라고 고백한다. 교회의 거룩한 전통에 따라 정경(正經, CANON)으로 결정된 성경은 유다교 경전인 ‘구약’과 그리스도교 경전인 ‘신약’으로 구분된다. 구약 성경은 오경(창세기~신명기), 역사서(여호수아기~마카베오기), 시서와 지혜서(욥기~집회서), 예언서(이사야서~말라키서)로 나뉜 46권으로 구성돼 있으며 주로 히브리어로 쓰였다. 신약 성경은 복음서(마태오~요한), 사도행전, 서간(로마서~유다서), 요한 묵시록 등 27권으로 헬라어로 쓰였다. ‘성경은 하느님의 영감을 받은 말씀’이라는 데 무슨 뜻인가바오로 사도는 “성경은 전부 하느님의 영감으로 쓰인 것으로, 가르치고 꾸짖고 바로잡고 의롭게 살도록 교육하는 데에 유익합니다. 그리하여 하느님의 사람이 온갖 선행을 할 능력을 갖춘 유능한 사람이 되게 해 줍니다”(2티모 3,16-17)라고 고백한다. 영감(靈感, Inspiration)은 말 그대로 ‘하느님의 숨결로’라는 뜻으로 성경은 하느님께서 내쉬시고, 제자들에게 불어넣어 주신 말씀이다. 즉 성경 저자들이 기록하고자 하는 글이 정확하게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내용이 될 수 있도록 성령께서 그들을 인도하셨다. 그래서 성경은 다른 모든 책과 구분되며 하느님의 말씀으로서 모든 세대의 모든 이에게 적용되고 있다. 성경의 핵심 내용은 무엇인가성경의 가장 중심이 되는 인물은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성경을 한 문장으로 표현하면 ‘예수는 그리스도이시다’라는 고백이다. 신약 성경은 나자렛 사람 예수가 곧 그리스도이시며 그 증거는 십자가의 죽음에서 부활하심이라고 선포한다. 구약 성경은 하느님께서 인간을 죄와 죽음으로부터 구원할 ‘메시아’를 세상에 보내줄 것이라는 희망을 전한다. 이 메시아는 ‘기름 부음 받은 이’ 곧 ‘그리스도이시다’라는 게 구약 성경의 핵심 내용이다.구약 성경 마지막 책인 말라키서와 신약 성경 첫 번째 책인 마태오 복음서 사이에 400년 이상의 간격이 있는데 어떻게 된 것인가성경학자들은 이 시기를 ‘신ㆍ구약 성경의 중간 역사’라고 표현한다. 성경은 이 시기에 대해 침묵하고 있지만, 하느님께서는 예언자를 통해 예수님을 세상에 보내려 꾸준히 준비하고 계셨다. 기원전 3세기부터 초세기까지 이어지는 이 시대는 알렉산더 대왕 죽음 이후 그리스 왕국이 프톨레마이오스와 셀레우코스 왕국으로 분열되고 이 왕조가 멸망해 로마의 지배를 받게 되는 시기다. 구약과 신약으로 이어지는 이 시기에 제2경전으로 알려진 토빗기, 유딧기, 지혜서, 집회서, 바룩서, 마카베오기 상ㆍ하권 7권이 쓰였다. 또 헬라어가 국제어로 자리 잡게 되면서 이집트 알렉산드리아에서 히브리어 구약 성경을 헬라어로 번역해 선보였다. 70명이 학자들이 참여해 번역했다고 해서 이 헬라어 구약 성경을 「70인역」이라 부르고 있다.성경의 장(章)과 절(節)은 어떻게 표기하나탈무드 시대 이전부터 유다인들은 율법과 예언서를 읽기 쉽도록 절을 구분해 사용했다. 가톨릭 교회의 대중 라틴말 성경에 장(章)을 표기한 이는 12세기 캔터베리의 랭턴 대주교다. 성경에 절(節)을 표기하기 시작한 것은 1558년부터다.한국 가톨릭 교회에서도 성경 말씀을 장과 절로, 또 줄여서 표기하고 있다. ‘마태 5’는 마르코 복음 5장을, ‘마태 5,1’은 마태오 복음 5장 1절을 가리킨다. 절을 다시 세분할 경우 ㄱ,ㄴ 등으로 표기한다. ‘창세 5,2ㄱ’은 창세기 5장 2절 전반부(운문에서는 첫째 줄)를 뜻한다. 루카 복음 6장 1절부터 5절까지와 같이 절이 이어질 때는 붙임표를 사용해 ‘루카 6,1-5’라고 표기한다. 아울러 창세기 4장부터 6장까지와 같이 장이 이어질 때는 줄표를 써서 ‘창세 4―6’으로 적는다. 둘 이상의 구절이 나올 때에는 ‘쌍반점(;)’으로 연결한다. 예를 들어 잠언 ‘1,28; 아가 5,6’은 잠언 1장 28절과 아가 5장 6절이라는 말이다. 그리고 한 책의 여러 구절을 계속 나열할 경우 책 이름은 앞에 한 번만 기록한다. 예 욥 14,18; 18,4같은 책의 같은 장에서 두 구절 이상이 나올 때에는 절을 ‘온점(.)’으로 연결한다. 예 시편 22,3.15.24.성경은 ‘자비’를 어떻게 이야기하고 있나성경은 ‘자비’를 모든 피조물을 향한 하느님의 사랑이라고 표현한다. 하느님의 사랑과 자비에서 창조 행위가 생겨났고, 이를 바탕으로 하느님께서 세상을 통치하신다고 시편은 노래한다(103; 136; 145; 147편).바오로 사도는 예수 그리스도를 ‘자비의 하느님의 신비를 드러내는 계시자’(2코린 1,3 참조)로 고백하며 예수님은 자비의 원천이며 우리에게 관대하게 자비를 베푸시는 분이라고 한다. 또 바오로 사도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진정 “자비가 풍성하신”(에페 2,4) 하느님 아버지의 살아 있는 형상임을 밝힌다. 신약 성경은 또한 하느님께서 자비하신 것처럼 우리도 자비로운 사람이 되라고 가르친다. 예수님께서는 “내가 바라는 것은 희생 제물이 아니라 자비다”(마태 9,13)라고 하셨다. 또 “너희 아버지께서 자비하신 것처럼 너희도 자비로운 사람이 되어라”(루카 6,36)고 가르치신다. 리길재 기자 teotokos@pbc.co.kr 백영민2016.11.16

복음적 여성 지도자, 변화의 선구자 될 수 있어 한국 여자수도회장상연과 여성신학회, 마리아 막달레나 축일 기념 ‘제가 주님을…’ 공개 강연회 열어 한국천주교여자수도회장상연합회와 한국가톨릭여성신학회가 주최한 마리아 막달레나 공개 강연에서 김영선 수녀가 주제 발표를 하고 있다. 마리아 막달레나는 예수께서 뽑으신 사도는 아니지만 넓은 의미로 교회 안에서 ‘사도 중의 사도’ ‘사도들에게 파견된 사도’라 불린다. 그가 예수와 함께 지냈고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첫 목격 증인이며 사도들 앞에서 주님 부활을 처음으로 증언했기 때문이다. 이에 가톨릭교회는 해마다 7월 22일을 마리아 막달레나 성녀의 의무 기념일로 지내오다 2017년부터 ‘축일’로 지정했다. 교회가 주님 부활의 첫 증인이며 첫 선포자인 마리아 막달레나에 대해 새롭게 이해할 필요가 있다고 판단해서다.한국천주교여자수도회장상연합회와 한국가톨릭여성신학회는 두 번째 맞는 마리아 막달레나 축일을 기념해 ‘제가 주님을 뵈었습니다’(요한 20,18)를 주제로 21일 서울 명동 가톨릭회관에서 공개 강연을 열고 미사를 봉헌했다. 공개 강연은 마리아 막달레나의 사도성을 성경의 관점에서 새로이 조명해 오늘날 교회와 사회 안에서 여성 신자들의 역할을 어떻게 증진해 나갈 것인가를 논의하는 자리였다. 광주가톨릭대학교 성서학 교수인 김영선(루치아, 마리아의 전교자 프란치스코회) 수녀는 “마리아 막달레나처럼 복음의 가치를 내면화한 여성 지도자들이 교회와 사회 변화를 일으키는 주역이 될 수 있다”고 강조했다.‘마리아 막달레나, 21세기 한국가톨릭교회에 말을 건네다’를 주제로 강의한 김 수녀는 오늘날 한국 교회가 직면한 도전 과제로 △가난한 이들과의 연대 △통일 사목 준비 △해외선교에 대한 관심과 지원 △사이버 공간에서의 선교 △생태 환경 보존 △영성 심화 등을 꼽았다.김 수녀는 한국 교회가 이러한 도전을 극복하기 위해선 무엇보다 세상을 향해 어느 방향으로 나아가야 하는지를 분명하게 제시할 종말론적 비전을 가져야 한다고 주장했다. “하느님께 대한 불순종과 자기만족, 무신론적 태도로 살아가는 21세기의 인류가 참으로 해방되는 길은 그릇된 권위에서 벗어나 참된 권위의 주인이신 하느님을 알고, 그분의 권위에 순종하며 사는 것임을 선포해야 한다. 이것이 교회가 선포해야 할 기쁜 소식이며 교회는 이 복음을 자신의 삶으로 보여줘야 한다.” 김 수녀는 이를 위해 교회 안에서 이루어지는 권위의 행사가 복음적이어야 한다고 했다. 이 복음적인 새로운 리더십의 모델이 마리아 막달레나다. 복음적 리더십은 마리아 막달레나가 주님의 명에 따라 사도들에게 전한 복음의 내용에 잘 드러난다. 그 말씀은 “나는 내 아버지이시며 너희의 아버지신 분, 내 하느님이시며 너희의 하느님이신 분께 올라간다”(요한 20,17)이다.주님의 이 말씀은 모두가 하느님의 자녀임을 일깨워준다. 수평의 관계이다. 성직자와 평신도의 차이는 직분의 높고 낮음이 아니라 평등하지만, 각자가 맡은 역할과 기능이 다를 뿐이다. 교회는 인종과 계급, 성(性) 등 모든 종류의 차별을 극복함으로써 종말적인 구원 현실을 앞당겨 살면서 하느님 나라를 이 땅에 실현해야 한다. 김 수녀는 교회가 전하는 복음이 진실되려면 먼저 교회 안에서 이 복음을 살아야 하고, 복음의 빛이 환히 빛나게 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처럼 한국 교회가 당면한 여러 과제에 있어서 마리아 막달레나가 전해 준 복음은 교회의 선포와 선택의 참됨을 가려내는 기준이 될 것이라고 결론지었다. 리길재 기자 teotokos@cpbc.co.kr 평화신문2018.07.24

위령성월에 만난 사람 ...이도행·윤성규 신부“죽음, 두려워만 하기보다 조금 더 사랑하는 삶 사세요” 뇌경색으로 언어를 잃어버렸던 이도행 신부(오른쪽)와 혈액암을 극복하고 사제 생활을 하고 있는 윤성규 신부. 이힘 기자 죽음 너머의 삶을 묵상하는 위령성월이다. 이미 누군가는 떠났고, 곧 누군가가 떠난다. 죽음을 마주하는 것은 진리다. 평범한 일상, 뇌경색과 혈액암이라는 병마가 찾아와 죽음의 문턱을 오갔던 두 사제를 만났다. ‘일상’이라는 고귀한 선물을 다시 돌려받은 이들의 삶은 예전과 같지 않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사제가 제대에 올라 가장 먼저 바치는 성호경. 평소와 같이 두 입술이 부딪히며 성대를 통해 자연스럽게 흘러나왔어야 했다. 고개를 갸우뚱하며 몇 번이나 성호를 다시 그어봤지만 소용이 없었다. 한 단어도 입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9년 전, 서울 대치2동성당. 새벽 미사를 집전하기 위해 제대에 오른 이도행(서울대교구 홍보위원회 사무부국장) 신부는 뇌경색 진단을 받고, 언어 중추가 손상돼 말과 언어를 통째로 잃어버렸다. 의식은 있었지만 말을 할 수 없었기에 미사 봉헌도 누군가와 대화를 나누는 일도 불가능했다. 위로의 문자가 오면 ‘감사합니다’라는 답장을 보내고 싶었지만, 엉뚱한 자판만 두드렸다. 언어 중추가 망가진 이 신부에게 하느님에 대한 원망, 사제직을 그만둬야 할지 모른다는 깊은 두려움이 엄습해왔다. 윤성규(안동교구 성소 담당) 신부는 2000년 혈액암 4기 진단을 받았다. 일반대학 전자공학과를 졸업한 후 엔지니어로 일하고 있었다. 짝사랑하던 사람도 있었다. 엔지니어로 성공하는 삶을 꿈꿨다. 척추에 퍼지고 있던 암세포로 통증은 심해졌고, 의사는 길어야 6개월이라고 했다. 걷지 못해 누워 지냈다. 어머니가 늙은 몸으로 아들의 대소변을 받아냈다.서울성모병원 암 병동에 입원한 그는 자연스럽게 방송으로 흘러나오는 기도, 병상에 찾아와 기도해주는 사제와 수녀, 자원봉사자들을 만났다. 어려운 가정형편으로 치료가 어려워지자 원목 담당 신부와 수녀는 윤 신부의 부모가 운영하는 과수원에서 수확한 사과를 병원에서 팔아줬다.“따뜻한 사랑을 베풀어주는 그들 삶이 크게 다가왔습니다. 내 생명이 어떻게 될지 모르지만, 그동안 나 자신의 성공을 위해 살았다면 이제는 타인을 위해 살고 싶었습니다.”윤 신부는 조혈모세포이식을 받기 전 대세를 받고, 이듬해인 2001년 보례를 받고 퇴원했다. 사제 성소의 부르심을 받은 그는 2006년 안동교구 소속으로 대구가톨릭대 신학대에 입학했다. 2013년 사제품을 받은 그는 서울성모병원에서 환우들과 뜨거운 첫 미사를 봉헌했다.2018년 11월 1일, 낙엽이 수북이 쌓인 명동대성당 들머리를 거닐며 두 사제가 마주 보며 웃는다. 6개월이라는 시간 동안 가나다부터 다시 한글을 배운 이도행 신부의 말은 느려졌고, 발음은 또렷해졌다. 매일 봉헌하는 미사는 항상 긴장감 넘치고 새롭다.“이 미사가 항상 마지막일 수도 있다고 생각해요. 다음 미사 때 말을 못할 수도 있는 거예요. 아침에 일어나면 ‘아아’ 해봅니다. 목소리가 나오는지. 소리가 나오면 오늘 하루도 감사한 선물을 받았다고 생각합니다.”이 신부는 낙엽을 밟으며 지난 사제의 삶을 회고했다.“아프기 전에는 어깨에 날개를 달고, 신나게 퍼덕거리며 살았죠. 투병생활 전에는 세상에 무서울 게 없을 정도로 실행력이 강했습니다. 15분에 하나씩 뭔가를 계획하고, 확인하고…. 성과를 내야만 훌륭한 사제라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아프고 나서, 일보다는 사람, 사람보다는 사랑함에 집중해야 한다는 걸 깨달았어요.” 이 신부는 “아프면서 제일 하고 싶었던 것은 미사와 강론, 성사를 집행하고 성경을 가르치고 예비신자들을 만나는 일이었다”며 “사제로 살면서 성과보다는 존재 의미가 중요하다는 것을 알았다”고 털어놨다.성소 담당 사제로 젊은이들을 만나고 있는 윤성규 신부의 마음에는 자원봉사자의 말이 아직도 남아있다. “자신의 차량으로 병원에서 경북 영주 집까지 데려다 준 봉사자께 은혜를 어떻게 갚아야 하겠느냐고 물었는데, 그분은 ‘나에게 갚지 말고, 예수님께 감사드리고 앞으로 만나는 사람에게 그 사랑을 전해주면 된다’고 하셨습니다.”죽음의 문턱을 빠져나온 두 신부는 공통된 말을 꺼냈다. 죽음을 마주하는 것은 진리이며, 언젠가는 우리 모두 죽어서 하느님께 돌아간다는 것이다. 그러나 하느님 나라는 갑자기 오지 않으며, 현세에서 하느님의 사랑을 깊이 받아들이고 삶에서 만나는 사람을 조금 더 사랑한다면 죽음을 잘 준비할 수 있다고 했다. 윤 신부는 “사람들과의 만남 안에서 하느님 사랑을 전해주는 사람을 만났고, 그 삶을 따라 살고 싶었기에 지금은 그 어느 때보다 행복하다”고 털어놨다. 이 신부는 “이 삶에서 중요한 세 가지는 내가 여기에 있다는 것과 내가 언젠가는 죽는다는 것, 죽어서 하느님께로 돌아가는 것”이라며 “신자이든 아니든 지금 내가 사는 삶이 죽음을 너머 영원의 삶과 연결된다”고 강조했다. 알아보기보례=세례성사나 혼인성사 등을 거행했을 때, 부족했던 부분을 보충하는 예식을 의미한다. 예를 들어 죽을 위험이 있는 자가 죽음에 임박했거나 사제가 없을 때 대세(代洗)를 받았을 경우, 병자가 죽지 않고 다시 살아났다면 신앙생활을 잘하기 위해서는 제대로 갖추지 못한 예식을 보충하는 예식을 한다. 이를 통해 정식 성사와 같은 효과를 얻는다. 이지혜 기자 bonaism@cpbc.co.kr cpbc2018.11.07

할머니 말씀, ‘잘 보아라 내일이면 부활하실거야!’ 주님 부활 찬미하는 프란치스코 교황 어록 죽음을 이기고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를 가두고 있는 돌(장벽)을 치우고 싶어하신다고 프란치스교 교황은 말한다. 사진은 미국 뉴욕의 성 알레이시오 성당에 있는 ‘부활하신 그리스도’ 유리화 작품. 【CNS 자료사진】 “우리의 죄 때문에 돌아가시고 묻히셨으며, 성경 말씀대로 사흗날에 되살아나시어…”(1코린 15,3-4) 프란치스코 교황은 주님께서 ‘다시 살아나셨다’는 기쁜 소식이 그리스도교 신앙의 핵심이라고 강조한다. 우리의 신앙은 여기에서부터 시작된다는 것이다. 만일 그리스도의 삶이 죽음으로 끝났다면, 성경은 어느 헌신적인 인물의 영웅담에 그쳤을 것이라고 한다. 교황은 주님 부활 대축일 즈음이면 “베드로는 일어나 무덤으로 달려가서”(루카 24,12)라는 구절을 즐겨 인용한다. 우리 자신의 부활은 죽음 뒤에 일어나는 현상이 아니라 베드로처럼 어둠 속에서 ‘일어나’ 그분을 만나러 ‘달려가는’ 것이라고 말한다. 교황 어록에서 주님 부활을 찬미하는 노래를 옮긴다. 할머니가 가르쳐 준 부활 “어릴 때 주님 수난 성금요일이 되면 할머니와 함께 그 예식에 참례하곤 했습니다. 성당에서 대리석으로 만든 십자가에 누워 계신 그리스도를 모시고 촛불 행렬을 했지요. 십자가 앞에 도달하면 할머니는 우리에게 무릎을 꿇으라고 하셨어요. 할머니는 ‘잘 보아라. 내일이면 부활하실 거야!’라고 말씀하셨지요. 그 당시는 전례 개혁 이전이어서 주일이 아니라 성토요일 아침에 부활 예식을 거행했습니다. 그래서 할머니는 성토요일 아침 부활 종소리가 들리면 그리스도의 영광을 보게 하시려고 물로 우리의 눈을 씻게 하셨습니다. 여러분의 자녀들에게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영광을 바라보도록 가르치십시오.”(3월 21일 아침 미사 강론) 우리 무덤을 주님께 열어야 “그 여인들처럼 두려워서 얼굴을 숙이고 있으면(루카 24,5 참조) 생명을 찾을 수 없습니다. 닫혀있는 우리 무덤을 주님께 열어야 합니다. 원한의 돌덩어리, 과거의 무거움, 나약함과 실수 때문에 생긴 무거운 짐을 그분께 갖고 갑시다. 오늘 밤에 굴려버려야 할 첫째 바윗덩어리는 우리를 스스로 가두어 버리는 희망의 부재입니다. 그리스도교의 희망은 하느님께서 주시는 선물입니다. 우리 자신 밖으로 나가서 그분께 우리를 열어드릴 때 주어집니다. 이 희망은 실망시키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우리 마음속에 성령께서 내려오셨기 때문입니다.”(2016년 주님 부활 대축일 파스카 성야 미사 강론) 부활하신 그분의 심장 “부활하신 그분의 심장이 새롭게 뛰기 시작합니다. 이는 선물로, 은총으로, 희망으로 우리에게 주어지는 것입니다. 또한 사람들과 나누라고 주어진 것입니다. 주님은 무덤의 돌을 치우고 나오셨습니다. 주님은 또한 생산성 없는 비관, 삶과 동떨어진 관념적 사고방식, 안전만을 추구하는 강박 관념에 우리를 가둬두는 돌(장벽)을 치워버리고 싶어 하십니다. 다른 사람의 존엄성을 흥정하려 드는 끝없는 야망 안에 가둬두는 돌도 부수고자 하십니다.”(2017년주님 부활 대축일 파스카 성야 미사 강론) 부활하신 주님은 어디에 “도대체 (부활하신) 주님은 어디에 계십니까? … 예수님 부활은 환상이 아닙니다. 꽃들로 장식된 축제가 아닙니다. 더 큰 의미가 있습니다. (집 짓는 이들이) 내버린 돌이 우리 존재의 기초가 된다는 버림받은 돌의 신비입니다. 쓸모없게 된 것이 버려지는 이런 버림의 문화에서, 예수님이신 그 돌은 버림받았지만, 생명의 원천이 됩니다. 우리 또한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가진, 고통과 비극의 땅에 버려진 작은 돌들입니다.” (2017년 주님 부활 대축일 강론) 내면에서 주님 뵙기를 “새롭고 영원한 생명을 얻기 위해 목숨을 잃는 부활의 법칙을 우리 것으로 삼아야 합니다. 목숨을 잃는다는 게 무엇을 의미합니까? 다시 말해 밀알 하나가 되는 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개인적인 이익을 덜 생각하고, 우리 이웃, 특히 끝자리에 있는 이들이 필요로 하는 것을 보고 도와주러 갈 줄 아는 것을 의미합니다.…저는 예수님을 뵙기 원하지만, 내면에서 뵙기를 원합니다. 그분의 상처 안으로 들어가십시오. 당신을 위해, 나를 위해, 우리 모두를 위해 그분 마음의 그 사랑을 관상하십시오.” (3월 18일 삼종기도 메시지) 정리=김원철 기자 wckim@cpbc.co.krcpbc2018.03.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