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장 돋보기] 5개 공소의 기적이정훈 필리보 네리(신문취재부 기자) 올해 일제히 5개 공소를 새로 건립한 춘천교구 성산본당 공소들을 방문했을 때 세 번 놀랐다. ‘시골 공소는 허름해야 한다’는 편견이 사라졌고, 신자들은 공소를 그저 미사 드리는 곳으로만 여기지 않았으며, 나이 많은 어르신들도 성당과 공소를 내 집처럼 직접 수리하고 가꾸고 있었다는 것이다.오랜 전통과 역사는 역시 남다른 깊이를 간직하기 마련이다. 바쁜 농사일 중에도 이들은 공소에 모여 기도하고, 미사에 참여하는 것을 큰 기쁨으로 여기고 살고 있다. 다 떨어져 가는 천정과 곰팡내 나는 허름한 공소에서 큰 불평 없이 신앙생활을 해온 것도 놀라운데, 5곳을 한꺼번에 신축해낸 것은 매우 이례적인 일이다. 신자들은 사제와 함께 본당 곳곳을 다니며 기금을 모았고, 직접 재배한 옥수수와 배추를 감사의 선물로 일일이 나눠줬다. 60대의 비교적 젊은 신자들이 모금하러 다닐 때, 70~90대 어르신들은 성경 필사와 기도로 힘을 보탰다.누군가는 공소를 매일 찾아 냉담 교우를 위해 기도를 바치고 있으며, 고봉연 주임 신부는 신자 1명만 참여해도 공소 미사를 집전하고 있다. 본당 최고령 97세 어르신은 3㎞ 거리를 매일 걸어서 매일 미사에 참여한다. ‘5개 공소의 기적’은 깊은 신심과 주님에 대한 사랑이 빚어낸 작품이었다.공소는 작지만, 오랜 신앙 전통을 간직해온 역사의 현장이다. 깊은 믿음은 신자들 생활과 마음에 고스란히 흐르고 있다. 성산본당은 새로 지은 5개 공소를 누구나 와서 머물 수 있는 피정 및 기도공간으로 활용할 계획이다. 숙박도 할 수 있고, 소규모 단체가 와서 작은 피정도 하고 갈 수 있다. 새 공소가 공소 신자들의 것이기도 하지만, 도시와 다른 지역 신자들의 공간도 되는 것이다. 새 공소 지붕에 계신 예수 성심상이 두 팔 벌려 온 마을을 축복해주듯 내려다보는 모습이 온화하기만 하다. 평화신문2019.05.08

아마존 약자들과 생태 살리기, 구원적 복음 선포와 연대 절실[특별기고] 주교대의원회의 범 아마존 특별회의 후속 교황 권고 「사랑하는 아마존(Querida Amazonia)」 살펴보기 프란치스코 교황이 지난 10월 바티칸에서 개최된 아마존 시노드 회기에 참석해 토론을 듣고 있다. 【CNS 자료 사진】 프란치스코 교황은 2018년 12월 아침 미사 강론을 통해 묵묵히 사명을 실천하는 성경의 인물 요셉 성인을 언급하며 이렇게 말했다. “꿈은 진리를 찾기 위한 특별한 자리입니다. 하느님도 여러 차례 꿈을 통해 말씀하시는 방식을 택하셨습니다.” ‘꿈’은 프란치스코 교황이 즐겨 사용하는 주제어 가운데 하나다. 교황은 젊은이들뿐 아니라 노인들도 꿈이 필요하다고 여러 번 말했다. 눈앞에 주어진 일을 함에 있어 영감을 얻고 용기를 내서 앞으로 나아갈 원동력이 되기 때문이다. 교황은 꿈을 통해 아기 예수의 양부이며 성모의 배필이 되는 소명과 용기를 얻은 요셉 성인처럼 우리가 위대한 일, 아름다운 것을 꿈꾼다면 하느님의 꿈에 결합할 수 있다는 관점을 후속 권고의 이정표로 제시하고 있다.권고의 서론은 도입부(1항), 후속 권고의 의미(2~4항), 아마존을 위한 꿈(5~7항)을 다룬다. 본론은 네 개의 꿈, 곧 사회적 꿈(8~27항), 문화적 꿈(28~40항), 생태적 꿈(41~60항), 교회의 꿈(61~110항)을 각각 다룬다. 결론은 아마존을 위해 성모께 드리는 기도(111항)로 끝맺는다. 먼저 이 권고는 아마존 지역 자연의 아름다움과 신비로움을 드러내고 있다.(1항) 교황은 아마존 시노드의 최종 문서가 제시한 ‘아마존 교회와 완전한 생태를 위한 새로운 여정’에 공감하면서도 권고에서 최종 문서를 인용하지 않고 이를 대체하거나 반복하지 않는다는 점을 분명하게 밝힌다. 그러나 교황은 아마존 교회가 최종 문서를 ‘전체적으로’ 읽고 적용하도록 함으로써 아마존이 지구에 살고 있는 모든 이의 것 곧 ‘우리의 것’이기도 함을 분명하게 강조한다. 이어 교황은 아마존을 위한 꿈(5~7항)을 네 가지로 전개한다. 아마존은 △가난한 이들, 토착 민족, 가장 보잘것없는 이들의 권리를 위해 투쟁하고 △독특한 문화적 풍요로움을 보존하고 △압도적인 자연의 아름다움과 생명을 잘 보존하며 △그리스도교 공동체가 아마존 지역에 실현되어 교회에 아마존의 특성을 지닌 새로운 얼굴을 보여 줘야 한다. 제1장에서 교황은 사회적 꿈(8항)을 다루면서 아마존의 환경 파괴를 불의와 범죄(9~14항)로 규정하고, 수많은 불의 앞에서 분개하고 용서를 청할 것(15~19항)을 요구한다. 주변의 자연도 포함하는 인간관계의 공동체적인 의미(20~22항)를 강조하며 부패한 기관(23~25항)을 고발한다. 그러면서 아마존이 서로 다른 토착 민족들, 소외되는 이들과 사회적 대화(26~27항)를 이루는 공간이 되기를 기원한다. 교황은 아마존 토착 민족들이 소수 권력층과 자본에 의해 노예화되고 있음을 지적하고 파괴와 살인, 부패를 양산하는 경제활동을 불의와 범죄라고 정의한다.(14항) 경제 논리에 따라 환경 파괴와 폭력이 빈번하게 일어나고 있는 아마존에서 주로 희생되고 있는 토착 민족들, 가장 가난한 이들과 가장 보잘것없는 이들의 권리를 위해 그리고 그들의 존엄을 증진하고 싶은 교황의 마음이 간절하게 드러난다. 이런 현실에서 교회는 예언적 사명을 투명성 있게 실천하도록(19항) 부름을 받고 있고 정의로운 사회를 만드는 사회적 양심이 무너지지 않도록 형제애와 연대의 정신을 길러야 한다.제2장에서 교황은 문화적인 꿈(28항)을 다루면서 “아마존 지역의 발전을 도모하는 것은 문화적으로 식민지로 만드는 것이 아니라 그 지역이 지닌 최상의 것이 드러나도록 돕는 것”임을 강조한다. 110개가 넘는 토착 민족들이 공존하는 아마존의 다양성(29~32항)을 떠올리면서 뿌리를 보호하는 일(33~35항)이 시급하다고 말한다. 또 교황은 문화 간 만남(36~38항)을 통해 서로의 다름을 경계가 아니라 연결해주는 다리로 받아들여야 한다고 했다. 매스컴을 수단으로 하는 식민지화에 위협받는 문화와 위험에 처한 민족(39~40항)의 대안적 형태를 증진하도록 요청한다. 교황은 아마존의 자연과 공존하며 살아온 토착 민족들의 문화가 바로 아마존을 보호하고 유지할 수 있는 가장 효과적인 수단이라고 역설한다. 문화적 식민지화는 아마존의 고유한 문화가 상실되고 선진국들의 문화가 강제로 주입되는 현상으로, 전 세계적으로는 문화의 다양성과 민족들의 정체성이 상실되는 결과를 낳는다. 제3장에서 교황은 회칙 「찬미받으소서」를 바탕으로 생태론적 꿈(41항)을 다룬다. 사람과 생태계를 돌보는 일이 서로 분리될 수 없는 밀접한 관계(42항)임을 강조한다. 또 생명에 영향을 주는 아마존 강의 아름다움과 힘을 노래한 파블로 네루다와 다른 시인들의 시를 인용하며 물로 만들어진 꿈(43~46항)을 이야기하면서도 아마존의 울부짖음(47~52항)에 귀를 기울이는 것이 시급하다고 강조한다. 지구의 평형은 아마존의 안녕에 달려 있고, 이 때문에 각국 정부의 책임이 더욱더 증진돼야 함을 촉구한다. 제4장에서 교황은 교회의 꿈(61항)을 다루면서 복음을 실현하려면 선교사의 위대한 선포가 늘 새롭게 다시 울려 퍼져야 한다고 강조한다. 아마존에서의 필수불가결한 선포(62~65항)란 교리 규정이나 도덕적인 명령이 아니라 구원의 위대한 선포를 듣게 하는 것이다. 곧 아마존 민족들은 “복음 선포를 들을 권리”가 있는데 이런 열정적인 복음 선포가 없다면 모든 교회 체계는 비정부 기구에 불과하다. 교황은 「복음의 기쁨」을 인용하면서 그것을 받아들이는 사람의 문화를 전제로 하는 토착화(66~69항)를 언급하고, 환경 파괴와 폭력을 배제하고 문화의 회복을 돕는 아마존에서 토착화의 길(70~74항)이 사회적이고 영적으로 동시적이면서 통합적으로 이루어지는 사회적 영적 토착화(75~76항)를 제시한다. 아마존의 성덕을 위한 출발점(77~80항)은 아마존 민족들의 모습과 특색을 잘 드러내는 것이어야 한다고 강조한다. 후속 권고의 또 다른 특이한 점은 전례의 토착화(81~84항)에서 성사를 다루면서 “가난한 이들이 가까이 다가올 수 있어야 한다”고 권고하는 부분이다. 넓고 광활한 아마존 지역이라는 특수 상황에서 수행하는 직무의 토착화(85~90항)에 관해 교회의 구체적이고 담대한 응답은 성찬례를 더욱 자주 거행해야 한다는 점이다. 이 때문에 교황은 모든 주교, 특히 라틴 아메리카 주교들이 선교 성소를 보이는 이들에게 아마존 지역을 선택할 수 있도록 독려하고 사제들의 초기 양성뿐만 아니라 지속 양성에 대해서도 재검토하라(90항)고 초대한다. 교황은 생명이 넘쳐흐르는 공동체(91~98항)를 이루기 위해서는 종신 부제, 축성 생활을 하는 수도자들, 평신도의 다양한 참여와 활동이 우선적으로 촉진돼야 한다고 강조한다. 또 교황은 여성의 힘과 선물(99~103항)에 관해 별도로 설명하며, 아마존 지역에서 강인하고 관대한 여성들 덕분에 신앙을 보전해 온 공동체가 있었음을 인정하면서 교회를 순전히 기능 구조로 축소시키지 않아야 한다고 경고한다. 나아가 교황은 성모 마리아의 힘과 역할을 본받아 안정적이고 공적으로 인정받으며 주교의 위임을 받는 새로운 여성 봉사직이 나타나기를 기대한다. 교황은 투쟁을 넘어 지평을 넓히고 한정된 시각을 뛰어넘으라는 도전 과제를 제시하면서(104~105항) 교회 일치와 종교 간 더불어 사는 삶(106~110항)으로 공동선과 가장 가난한 이들의 증진을 위하여 함께 대화하고 행동할 수 있는 자리를 모색하자고 초대한다. 끝으로 교황은 우리 모두에게 자연을 돌보고 사람을 돌보는 일에 함께 싸우고 함께 기도하고 협력하자(110항)고 촉구한다.권고는 아마존 지역을 다루기 전에 복음화의 토양이 되는 사회적 여건, 문화적 특성, 생태 환경 그리고 교회 상황 등 모든 분야에 걸쳐 충분한 숙고와 성찰을 제시했다는 점이 주된 특징이다. 특히 교황은 회칙 「찬미받으소서」에서 제시한 주제들을 아마존 지역이라는 구체적인 지역에 초점을 맞추면서, 우리가 마주하고 있는 모든 상황에서 참된 「복음의 기쁨」이 무엇인지 깊이 성찰하고, 사회적 영적인 대화의 필요성을 제기하며 올바른 식별을 하도록 초대한다. 가장 가난한 이들과 가장 보잘것없는 이들, 소외받는 인간의 권리를 보호하고, 환경 파괴에 맞서 자연과 더불어 사는 공동의 집을 보존하는 데 모든 이가 동참할 것을 호소하고 있다. 이번 기회에 다시 한 번 「찬미받으소서」와 「복음의 기쁨」을 정독하면 어떨까 싶다.안봉환 신부(한국천주교주교회의 홍보국장) 평화신문2020.02.19
![[숨은 성미술 보물을 찾아서] (8) 박득순의 노주교상](//cpbc.co.kr/CMS/newspaper/2019/01/rc/745338_1.0_titleImage_1.jpg)
[숨은 성미술 보물을 찾아서] (8) 박득순의 노주교상첫 한국인 주교의 근엄과 고뇌 묻어나절두산순교성지 한국천주교순교자박물관에 있는 박득순의 ‘노대주교’. 성미술 전람회에 출품된 ‘노주교상’과 거의 동일하다. 하지만 1965년이라는 제작연도와 서명이 추가됐다.노기남 대주교 모델로 한 작품 다양한 장르의 작품을 선보인 1954년 성미술 전람회에는 성직자와 수도자를 모델로 한 초상화가 두 점 출품됐다. 박득순의 ‘노주교상’과 김흥수의 ‘수녀좌상’이 바로 그것이다. 그중 이번에 소개할 박득순(요셉, 1910~1990)의 ‘노주교상’은 전람회가 열릴 당시 서울대목구장이었던 노기남 주교를 모델로 해 작가 특유의 사실주의 화풍으로 완성한 작품이다. 이 작품은 현재 절두산순교성지 내 한국천주교순교자박물관에 소장된 ‘노대주교’와 동일한 것으로 추정되고 있어 현존하는 성미술 전람회 출품작에 포함될 가능성을 열어주고 있다. 박득순은 1910년 함경남도 문천에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그림에 재능을 보인 그는 서울 배재보통고등학교 재학시절 일본 동경미술학교에서 서양화를 전공하고 부임한 강필상(1903~?)에게 유화를 배웠다. 미술가의 꿈을 키우던 박득순은 집안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홀로 일본으로 건너가 1934년 일본 동경의 다이헤이요 미술학교에 입학해 유화를 전공했다. 1938년 미술학교를 졸업한 후에는 고향에 머무르다가 이듬해 상경하여 경성부 도시계획과의 그림 담당으로 있으면서 당시 도시계획 대상지였던 영등포와 신촌, 돈암동 등지를 미래의 발전적 전망의 풍경화로 그리는 작업을 맡아 진행하기도 했다. 1940년 제20회 조선미술 전람회 서양화부에 처음 출품한 박득순은 유화 작품 ‘만도린과 소녀’로 입선했다. 이후에도 주로 인물화를 출품해 1944년까지 특선과 입선을 거듭하며 화단의 주목을 받았다. 해방 후에는 서울 용산중학교 미술교사를 지냈고, 6ㆍ25 전쟁이 발발하자 종군화가로 전쟁기록화를 제작했다. 그는 1955~1961년 서울대학교 미술대학 교수로 재직했고 이후 수도여자사범대학교, 영남대학교 교수를 역임하며 작품 활동과 함께 후학 양성에 힘을 기울였다. 가톨릭 미술에서도 꾸준히 활약한 그는 1998년 제3회 가톨릭 미술상 특별상을 받았다. 박득순은 인물화를 회화의 기본으로 삼았던 작가다. 그는 “인물화를 제대로 그릴 줄 알아야 풍경화, 정물화도 옳게 그릴 수 있다”고 주장하면서 인체를 다각적으로 데생하고 객관적으로 묘사하는 훈련의 중요성을 강조하였다. 1954년 성미술 전람회 출품작 ‘노주교상’은 이와 같은 박득순의 회화에 대한 신념과 화풍을 잘 보여주고 있는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성경과 십자고상으로 신앙심 드러내 ‘노주교상’은 1942년 한국인 최초로 주교품을 받은 노기남 대주교(1902~1984)를 모델로 한 초상화다. 화면 중앙에 놓인 의자에 앉은 노 주교를 중심으로 한 서재의 풍경을 담고 있다. 작품의 구도에서 인물의 머리 위로 과감하게 지나가는 출입문의 직선이 인상적이다. 의자에 기댄 채 상체를 약간 젖혀 비스듬히 앉은 자세에서 약간의 권위감이 느껴지기도 하지만 당당함이 묻어난다. 굳게 다문 입술과 초점이 뚜렷하지 않은 관조하는 듯한 시선 그리고 두툼한 책(제목은 쓰여 있지 않지만, 성경으로 추정된다)을 손에 쥔 모습에서 잠시 글 읽기를 멈추고 사색에 잠긴 인물의 내면을 마주하게 된다. 인물과 배경의 사실적인 묘사에 더해진 빛의 표현은 작품 속 인물의 영적인 측면을 대변해주고 있는 듯하다. 실내 풍경에서 유독 눈에 띄는 것은 노 주교의 어깨선과 나란히 놓인 책상 위의 십자고상이다. 왼손에 쥔 성경과 대각선 구도를 이룬다. 노 주교의 오른편과 왼편에서 각각 강조되어 표현되고 있는 성경과 십자고상은 그가 성직자로서 하느님의 말씀과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과 사랑을 따르고자 함을 상징적으로 나타내고 있다. 현재 절두산순교성지 한국천주교순교자박물관에 구성과 표현이 동일한 ‘노대주교’가 소장돼 있다. 이를 통해 1954년에 출품됐던 작품의 색감과 세부 표현 등을 파악할 수 있다. 두 작품을 놓고 틀린 그림 찾기를 하듯 꼼꼼하게 구석구석 뜯어보아도 다른 점을 찾기 어려워 동일 작품일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그러나 절두산순교성지 소장 작품에는 원작에는 없는 서명이 있고 제작연도가 1965년으로 명기돼 있다. 따라서 성미술 전람회 출품작이라고 단언하기는 어려운 상황이다. 제목에서도 차이를 보인다. 1954년 성미술 전람회 출품작 제목은 ‘노주교상’인 반면, 노 주교가 대주교로 임명(1962년)된 이후인 1965년으로 서명된 절두산순교성지 소장 작품은 ‘노대주교’라고 돼 있다. 작품 제작연도만 고려한다면 같은 작품을 똑같이 두 번 그렸다는 뜻인데 어떤 연유에서 약 10여 년의 시차를 두고 ‘노주교상’과 ‘노대주교’를 그렸는지 명확한 이유를 찾기는 어렵다. 그리고 1954년 출품작에는 서명이 남아 있지 않다는 점도 이 두 작품이 동일한 작품이라고 해석할 수 있는 실마리가 돼주고 있다. 성미술 전람회 출품작에는 작가의 서명이 들어간 경우도 있지만, 서명이 생략된 작품들도 여럿 있었다. 남용우의 ‘성모칠고’와 권영우의 ‘성모자’, 김흥수의 ‘수녀좌상’과 ‘간구’, 김정환의 ‘성모영보’와 ‘삼왕’ 등 여러 작품에 서명이 생략돼 있다. 각각의 작품과 작가를 맞춰볼 수 있는 것은 작품 캡션까지 함께 찍힌 성낙인의 기록 사진과 경향잡지에 실린 작품 목록을 통해서 가능한 것이다. 따라서 박득순의 ‘노주교상’과 ‘노대주교’는 서명이 생략되어 있던 기존 작품에 서명이 덧붙여지면서 만들어진 이명동작(異名同作)일 가능성도 배제하기 어렵다. 그리고 작품제작 연도로 기재된 1965년은 서명을 추가했던 연도일지도 모른다. 작품제목 역시 서명이 이루어진 1965년 상황에 맞춰 ‘노대주교’로 정정된 것일지도 모르겠다. 그 정도로 1954년 출품작 ‘노주교상’과 절두산순교성지 소장 ‘노대주교’는 똑같이 닮아 있다.문채현2019.01.30

경시대회부터 필사 전시까지 성경대잔치수원교구 제23차 성경잔치
교구민 2000여 명 함께해
말씀으로 하나 되는 장 제23차 수원교구 성경잔치에서 신자 2000여 명이 말씀 안에 친교를 이루는 복음화의 장을 이룬 가운데, 암송대회에 출전한 신자들이 구절을 외워 발표하고 있다. “이사이의 그루터기에서 햇순이 돋아나고, 그 뿌리에서 새싹이 움트리라!”22일 경기도 평택 효명중학교 강당. 본당을 대표해 무대에 오른 신자들이 성경 구절을 술술 암송했다. 구약의 예언자들처럼 한껏 분장한 신자들부터 작은 도구와 춤을 곁들여 독창적으로 성경을 암송한 어린이들까지. 1년간 갈고닦은 실력으로 저마다 성경을 익힌 수원교구 신자들이 말씀으로 친교를 이뤘다.수원교구 복음화국(국장 이근덕 신부)은 ‘제23차 수원교구 성경잔치’를 열고, 교구민 2000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말씀으로 하나 된 복음의 장’을 마련했다. 성경잔치는 △성경 경시대회 △암송 대회 △그림 그리기 △글쓰기 대회 △성경 필사 및 작품 전시 △다 함께 한마당 등 다양한 형식으로 펼쳐졌다. 경시대회장인 각 교실에서는 오전부터 ‘성경 좀 안다’ 하는 각 본당 응시자들이 구약의 예언서에서 출제된 문제를 풀었다. 대회장은 마치 수능 시험장을 방불케 했다.암송대회에 출전한 이들은 예선을 거쳐 본선 무대에서 자유 암송을 선보였다. 참가자들이 성경 구절을 암송하며 ‘선의의 경쟁’을 하는 동안 객석에선 열띤 응원전이 펼쳐졌다. 학교 곳곳에 전시된 수많은 성경 필사 노트와 공예ㆍ서예로 만든 작품도 눈길을 끌었다. 그야말로 성경으로 잔치를 치른 하루였다.이날 1200여 명이 응시한 경시대회에서는 김영철(미카엘, 인덕원본당)씨와 이재숙(젬마, 성복동성마리아요셉본당)씨, 이다홍(체칠리아, 수리동본당)양이 각각 어르신, 일반, 청소년 부문 최우수상을 받았고 동백성마리아본당은 최우수본당상을 차지했다. 150개 본당에서 640여 명이 제출한 개인 성경 필사 부문에서는 신구약 11회를 완필한 박종득(요셉, 철산본당)씨와 점자로 신구약을 완필한 시각장애인 김헌수(요셉, 동수원본당)씨 등 10여 명이 교구장 이용훈 주교 축복장을 받았다.문희종(교구장대리) 주교는 기념 미사 강론에서 “누구나 하느님 말씀을 가까이하면 생활이 변화되고, 적어도 마음의 기쁨이 찾아오며, 우리 귀에 하느님의 말씀이 들려오기 시작할 것”이라며 “말씀을 읽고, 쓰고, 체험했다면 이제는 복음을 전하는 아름다운 사람이 되자”고 당부했다. 글·사진=이정훈 기자 sjunder@cpbc.co.kr 평화신문2017.10.25
신앙인에게 건네는 위로와 희망의 가르침 묵시록에 담긴 메시지 꼼꼼히 풀어내 요한 묵시록 바르게 읽기 요한 묵시록 바르게 읽기 허규 신부 지음 / 성서와함께 / 1만 5000원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를 묘사한 성경의 마지막 책, 요한 묵시록.그러나 안타깝게도 요한 묵시록은 많은 이들에게 ‘읽기 난해한 성경’으로 오해받고 있다. 어떻길래?요한 묵시록은 저자가 환시 중에 본 계시를 다양한 상징 언어로 표현했다. 하늘, 별, 천둥, 번개 등 천체와 관련된 상징부터 어린양, 사자, 뱀 등 각종 짐승이 저마다 의미를 지닌다. 신약에선 유일하게 용(龍)까지 등장한다. 이 밖에도 인간의 육체, 색깔, 숫자 등 다양한 표징이 각기 다르면서도 같은 의미로 혼용돼 나온다. 어떤 상징은 구약에도 등장하는 것과 같지만, 어떤 표현은 다른 성경에서 찾기 어렵다. 이 때문에 요한 묵시록 환시를 두고 ‘모자이크식 환시’라고 부르기도 한다.허규(가톨릭대 신학대학 교수) 신부의 「요한 묵시록 바르게 읽기」는 요한 묵시록의 배경과 본문 해석, 풀이를 망라한 길잡이다. 문학 유형 상 ‘묵시문학’에 속하는 요한 묵시록은 환시를 이용해 초월적 세상과 현실을 구분한다. 종말과 심판이나 전쟁의 이미지를 많이 쓴다. 저자는 요한 묵시록이 예언서냐 아니냐를 두고 가질 수 있는 의문, 종말과 심판이란 강력한 주제를 잘못 받아들여 왜곡해 해석하는 경우, 저술 시기 등과 관련해 꼼꼼히 풀이해 답해준다. 요한 묵시록이 악에 대한 심판과 벌을 강조하다 보니 더러는 요한 묵시록을 두고 미래를 예견하거나 종말의 시기를 점치고자 쓰인 책으로 오해하기도 한다. 그러나 요한 묵시록은 그보다 신앙을 간직한 이들에게 주어지는 상을 더 강조한다. 어떤 상황에서도 희망을 잃지 않고 신앙을 지킨다면 하느님의 약속이 반드시 이뤄지리라는 위로와 희망의 가르침이 요한 묵시록의 가르침이다. 이정훈 기자 문채현2018.10.17
![[동유럽 신앙 역사를 순례하다] <3> 1000년 수도원 품은 오스트리아](//cpbc.co.kr/CMS/newspaper/2019/10/rc/765005_1.1_titleImage_1.jpg)
[동유럽 신앙 역사를 순례하다] <3> 1000년 수도원 품은 오스트리아중세의 화려함과 수도원 영성 공존… 종교 문화의 요람되다 10만여 권의 장서를 소장하고 있는 멜크수도원 도서관 모습. 다양한 분야 서적과 1200년된 필사본 등 방대한 서적이 있으며, 열람도 가능하다. 초가을 기운이 감돌던 9월 25일 아름다운 예술의 도시 오스트리아 빈. 국립오페라극장에서 흘러나오는 연주 소리에 귀 기울이는 사람들 사이로 관광객을 태운 마차들의 말발굽 소리가 중세에 온 듯한 착각을 불러올 때쯤. 북적북적한 빈 도심에서 높이 140m 첨탑의 위용을 드러낸 오스트리아 교회의 중심 빈대교구 슈테판대성당 앞에 다다르자 고개가 절로 꺾인다.그리스도교 초기부터 신앙이 전파돼 오늘에 이르는 오스트리아 교회는 현재 세계적인 신학자요, 저술가로도 유명한 빈대교구장 크리스토프 쇤보른 추기경과 2012년 전 세계에 보급된 청년 교리서 「유캣(YOUCAT)」(오스트리아 주교회의 발간)으로도 잘 알려진 나라다.문화와 예술, 믿음으로 보편교회에 기여하며 현대 신앙의 위기에 맞서 해법을 제시하고 있는 오스트리아 교회는 1000년 역사의 수도원들을 품고 있는 곳이기도 하다. 수 세기 동안 나라의 흥망성쇠를 함께하고, 오늘날 새로운 방식으로 영성을 전하고 있는 ‘성 베네딕도회 멜크수도원’과 ‘성 아우구스티노회 노이부르크수도원’이다.영성과 학문의 천 년 전당, 멜크수도원도나우 강을 따라 서쪽으로 약 80㎞ 떨어진 작은 마을 멜크. 2000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된 자연경관 사이로 커다란 요새와 같은 웅장함을 자랑하는 멜크수도원이 순례객들을 빨아들이고 있었다.수도원 입구부터 반대편까지 거리가 300m가 넘고, 일곱 개의 중앙 정원을 갖춘 멜크수도원은 궁전으로 착각할 만큼 화려하다. 그도 그럴 것이 멜크수도원은 본래 성(城)이었다. 오스트리아를 세운 바벤베르크 왕가의 레오폴드 2세가 1089년 자신의 성을 베네딕도회에 기증하면서 설립됐다.‘Absit glorirari nisi in crvce’(나는 십자가 외에는 아무것도 자랑하고 싶지 않습니다). 수도원 꼭대기 금빛 십자가 아래 라틴어로 적힌 바오로 사도의 말씀이 이곳이 수도원임을 잘 알려주고 있다.멜크수도원은 오스트리아 신학 발전과 영성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신성로마제국 시절, 마리아 테레지아 여왕의 아낌없는 재정 지원으로 전성기를 누렸고, 15세기에는 독일어권 수도자들의 수도생활 회복 운동의 중심지였다.‘기도하고 일하라’는 베네딕도회 영성 아래 수도자들은 거대한 수도원을 신앙과 문화의 요람으로 발전시켰다. 신성로마제국의 황제들을 배출한 합스부르크 왕가의 거대한 초상화가 걸린 긴 복도를 지나면 멜크 마을이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발코니에 다다른다. 바로 옆 출입문 뒤로 10만여 권의 서적과 고문서를 소장하고 있는 도서관이 모습을 드러낸다. 법률ㆍ의학ㆍ철학ㆍ신학 서적과 1200년 된 필사본 등 방대한 장서가 꽂힌 서가를 관람할 수 있다.1000년 전 나라를 지킨 성이었던 이곳은 오늘날 ‘그리스도교 영성의 요새’가 됐다. 신자ㆍ비신자 영신수련 피정 프로그램, 본당 사목, 끊이지 않는 문화 예술 공연과 순례로 연간 500만 명의 사람들을 불러모으고 있다. 수도원이 운영하는 명문 사립 중고등학교에는 학생 900여 명이 수학 중이며, 입학 희망자들은 늘 정원을 초과한다. 수도원은 루마니아, 코소보, 아프리카 부르키나파소에 학교와 유치원도 운영 중이다. 사제는 30명 정도지만, 학교와 박물관 등에서 일하는 이들이 350명에 이른다.시대와 발맞춰 나아가는 노이부르크수도원빈 도심 인근에 자리한 ‘성 아우구스티노회 노이부르크수도원’은 오스트리아의 수호성인 레오폴드 3세가 1114년 아내 아녜스와 함께 설립했다. 레오폴드 3세는 당시 이곳을 거대한 왕실 궁전으로 쓰려 했지만, 계획이 변경돼 1133년 아우구스티노회에 기증했다. 그 탓에 본래 계획의 4분의 1 크기로 지어졌다. 합스부르크 왕가를 상징하는 왕관 돔을 쓴 수도원은 왕족이 쓰려던 화려한 공간과 소박한 수도원 공간을 함께 갖추고 있다.아우구스티노회는 하느님 탐구와 설교 분야 발전에 크게 기여한 수도회다. 이곳 노이부르크수도원 또한 대중 전례 운동과 성서사도직 단체를 조직해 운영하며 중세 때부터 과학과 신학연구소 역할을 했다. 1900년대 내내 수도원은 피우스 파르쉬 수사가 펼친 전례 개혁 운동으로 교회 발전에 기여한다. 파르쉬 수사는 ‘노이부르크 수도원 성서사도직’을 설립해 보급형 성경과 입문서를 출판해 실용적인 전례 자료를 전파하는 데 공헌했다.수도원은 중세 시대 제작된 금세공으로는 가장 오래된 보물인 ‘베르둔 제단’을 비롯해 오스트리아 ‘대공의 관’, 성 레오폴드 3세의 유물을 비롯해 장서 3만여 권을 소장한 도서관 등 1000년 역사를 품고 있다.오늘날 수도원은 ‘믿음, 와인, 문화’라는 기치 아래 영성 전파에 힘쓰고 있다. 수도원은 세계 지역 교회 26개 본당 사목을 맡고 있다. 오스트리아에서 가장 오래되고 규모가 큰 900년 된 와인 양조장과 포도밭 운영으로 세계적인 와인도 생산하고 있다. 종교 문화와 예술 발전을 위해 수도원은 각종 예술품을 수집 및 전시 중이며, 이에 수도원의 큰 공간을 박물관으로 조성해놨다. 성미술 작품 4만여 점을 소장하고 있으며, 젊은 예술가들의 작품을 대상으로 매년 ‘성 레오폴드 평화상’을 공모해 시상하는 등 1000년 수도원은 시대에 발맞춘 변화와 노력으로 영성 전파에 노력하고 있다. 이정훈 기자 sjunder@cpbc.co.kr 평화신문2019.10.22
서울대교구, 가톨릭 문화아카데미 설립문화·예술 통해 하느님과 더 친숙해지는 계기 마련서울대교구 문화홍보국(국장 유환민 신부)이 ‘가톨릭 문화아카데미(원장 유환민 신부)’를 설립했다. 전례, 문화, 영성, 인문학 등 다양한 형태로 문화와 신앙을 나누는 장이다. 3월 개강한 가톨릭 문화아카데미는 △명사 특강 △문화 영성 프로그램 △청년문화학교 △가톨릭미술 아카데미 △청년문화학교 문화강좌로 구성돼 있다. 아카데미 설립을 기념해 마련한 명사 특강은 3월 20일부터 5월 29일까지(10주) 매주 수요일 오후 2시 서울 명동 가톨릭회관 1층, 교구청 501호에서 열린다. 강사로는 한비야(비아) 월드비전 세계시민학교장, 정호승(프란치스코) 시인, 방송인 이인혜(데레사)씨, 허영엽(교구 홍보위원회 부위원장) 신부, 양영은(아녜스) 기자가 참여한다. 신청은 온라인(http://naver.me/xItM05BF)을 통해 받고, 선착순 무료다. 문화 영성 프로그램은 헬로우 기도, 가톨릭 영성서적 그룹지도자 양성, 영화와 영성, 청년 성경통독으로 이뤄져 있다. 청년 대상인 인문학강좌 ‘청년문화학교’는 8기 수강생을 모집하고 있으며 3월 21일부터 6월 20일까지(12주) 매주 목요일 저녁 7시 30분 교구청 501호에서 열린다. 신청은 온라인(http://naver.me/xaFRY2gX)으로 하면 된다. 직접 만들고 체험하는 청년문화학교 문화강좌도 마련돼 있다. 초충도(草蟲圖) 실기를 비롯해 스테인드글라스 부활 촛대 만들기, 해금으로 드리는 기도, 도자기 성물 만들기 수업이 준비돼 있다. 가톨릭 문화아카데미는 프랑스 베르나딘 대학교의 교회학교 프로그램을 벤치마킹한 것. 가톨릭 문화아카데미 원장 유환민 신부는 “문화와 예술을 배우고 익히고 감상하며 하느님께 닿을 길을 찾는 즐겁고 유쾌하지만 동시에 진지한 신앙학교”라고 소개했다. 프로그램 문의 및 신청은 문화홍보국 홈페이지(http://cc.catholic.or.kr)를 통해 하면 된다. 이지혜 기자bonaism@cpbc.co.krcpbc2019.03.27

다양한 소재의 대담하고 실험적인 작품에 그리스도교적 메시지 녹여내[한국 가톨릭 미술 여성 작가들]나희균 크리스티나 화백 빛, 자연, 물성의 탐구. 나희균(크리스티나, 1932~) 화백의 작품을 대하면서 떠올리게 되는 단어들이다. 그의 작품은 평면 작업에서 네온, 금속을 이용한 입체 작품까지 다양하고도 혁신적이다. 이번 글은 주교회의 문화예술위원회 주관, 한국 가톨릭 미술가 동영상 기록 사업으로 진행했던 나희균 화백과의 인터뷰 내용을 중심으로 다루고자 한다.나희균 화백은 경기여고 재학시절 미술반 활동을 계기로 1950년 서울대 미대 회화과에 입학했다. 입학하고 얼마 되지 않아 6ㆍ25전쟁이 발발하면서 피란 생활과 집안이 몰락하는 어려움을 겪었다. 하지만 그는 대학 재학 중이던 1953년 제2회 국전에서 작품 ‘가족’으로 입선해 재능을 인정받았고, 1954년 졸업 후 형부의 도움으로 프랑스 유학길에 올라 파리 에콜데 보자르에서 3년간 수학하고 귀국했다. 나 화백이 파리에 체류하던 시기에는 파블로 피카소, 앙리 마티스, 조르주 루오, 조르주 브라크, 페르낭 레제와 같은 현대 미술의 거장들이 활동했던 시기였고, 많은 회고전이 열리고 있었다. 당시 20대 중반이던 그는 여러 거장의 작품을 직접 감상하면서 견문을 넓힐 수 있었다. 나 화백은 인터뷰에서 “당시 조르주 브라크의 장인적인 마티에르와 시적인 표현을 많이 좋아했다”고 회고했다. 그는 또한 파리 유학 시기에 가톨릭에 입교해 1958년 세례를 받았다. 나 화백은 1959년 서울대 회화과 동기인 안상철 화백과 혼인해 서양화가와 동양화가로서 예술적 동반자의 길을 함께 걸었다. 우리나라 최초의 서양화가인 고희동이 이들의 혼인 주례를 선 일화는 유명하다. 우리나라 최초의 여성 서양화가인 나혜석의 조카이기도 한 나희균 화백은 대담하고 실험 정신이 돋보이는 작품들을 꾸준히 선보였다.그의 여러 작품 중에서도 특히 1970~80년대의 네온 작품들이 눈길을 끈다. 나 화백이 네온을 사용하게 된 것은 그리스 태생의 미국 여성 작가 바르다 크리사(Varda Chryssa) 작품을 접하면서였다. 그는 “상업용으로만 쓰일 수 있다고 믿었던 네온이 예술적으로도 쓰일 수 있음을 깨닫고 충격을 받아 자신도 한번 표현해보고 싶다는 생각으로 작업을 시작했다”고 한다. 나 화백은 ‘빛이 어둠을 밝히고 사람에게 참으로 어떤 희망을 줄 수 있다’는 점이 매력이 있어서 네온을 다루게 되었지만, 깨지기도 쉽고 오래 보관하기도 힘들어 매사에 조심해야 하는 네온 작업을 위해서는 많은 어려움을 감내해야 했다. 그는 어둠 속에서 켜진 네온의 환하고 밝은 불빛은 사람들을 희망의 길로 인도해주는 상징과 같다고 하며 네온 작업으로 완성된 ‘성체등’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성당에 가면 감실에 빨간 등이 켜져 있죠. 그래서 네온을 사용할 수 있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네온의 색은 몇 가지로 한정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빨간색과 주황색으로 성체와 성작, 물고기 모양을 만들어 보았습니다. 사람이 길을 잃으면 어둠 속에서 헤매게 되죠. 그런데 빛이 보이면 희망을 얻는다는 의미를 가질 수 있는 것 같습니다. 크고 작은 네온들을 사용하면서, 의도한 것은 아니지만 큰 사람들이 작은 사람들을 지탱해주는 세상의 모습을 그려보게 됩니다. 물론 작품을 할 때는 그런 생각은 전혀 하지 않았고 선과 파이프의 조화만을 생각하며 작업했죠.” 1988년 작품인 ‘무명 순교자들을 위하여’ 역시 그리스도교 주제를 다룬 그의 대표작이다. 나 화백은 평신도에 의한 신앙의 전파와 박해에도 불구하고 신앙을 지켜낸 우리나라 순교자들과 교회 역사, 그중에서도 이름조차 알려지지 않은 무명의 순교자들이 보여준 깊은 신앙에 경의를 표하며 이를 작품으로 표현하고자 했다. 그리고 작가는 당시 쉽게 접할 수 있었던 건축자재, 파이프, 철판, 동선 등을 이용해 그림을 떠나서 보다 자유로운 표현을 추구할 수 있었다.“이 작품을 만들 때 정말 고생스러웠지요. 종이에 실제 크기대로 본을 그려서 종로상가 철공소에서 철판을 사와 집에서 모양대로 잘라서 구멍을 뚫어 붙이고 파이프를 끼우고 하면서 리드미컬하게 표현했죠. 어떤 사람은 악기냐고 묻기도 하는데… 내가 음악을 좋아해서 리드미컬한 작품이 나오지 않았을까 생각합니다.” 나희균 화백의 작품은 그리스도교 주제에 국한되어 있지 않다. 그는 빛, 자연, 물질에 대한 탐구를 화두로 다양한 실험적인 작품을 선보였다. 하지만 나 화백의 작업방식 안에는 그리스도교의 메시지가 담긴 작품들이 공존하고 있다. 나희균 화백은 ‘아브라함의 하느님’(1997)으로 1998년 제3회 가톨릭 미술상 회화 부문 본상을 받았다. 작가는 ‘아브라함과 이사악, 야곱의 하느님’이라는 말에 강렬한 인상을 받아 이를 그림으로 완성했다. 한지에 동양화 물감으로 그린 이 작품에서 아브라함은 3개의 천막, 이사악은 번제의 장작, 야곱은 우물로 각각의 상징을 나타내고 있다.나 화백이 성당에 남긴 첫 작품은 그가 70대에 들어서 작업한 춘천교구 운천성당 십자가의 길 14처이다. 구상적 표현의 회화로 완성된 이 작품에 대해 그는 “당시 많이 서툴고 제대로 그리는 것이 어려웠다”고 회고했다. 그는 “글씨나 그림은 그 사람 자체이다. 신앙의 메시지는 자연스럽게 우러나는 것이지 십자가를 그렸다고 존경받는 것은 아니다”라며 성미술에 있어서 신앙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한때 신앙생활에 어려움도 있었다”는 나 화백은 “로마노 과르디니의 저술을 통해 기도에 대해 묵상하고 신앙생활을 지탱할 수 있다”고 고백했다. 그는 “신앙도 화초와 같아서 물을 주고 키워야 자랄 수 있고 내버려 두면 시들게 된다”며 “성경과 교회사에 대해 꾸준히 공부할 것”을 권했다. 그리고 “자신의 신앙이 우러나와서 작업할 수 있게 되었을 때 진정한 성미술이 완성될 수 있다”는 메시지를 그의 작품을 통해 전해주고 있다.나 화백은 2017년 첫 부부전인 ‘오브제의 재발견, 안상철ㆍ나희균의 입체 작품전’과 2018년 환기재단 선정 작가전 ‘빛의 공간, 그리고 자연’전에 이어 2019년 4월에 14번째 개인전을 열어 왕성한 작품 활동을 펼치고 있다. 정수경 교수(인천가톨릭대 대학원 그리스도교미술학과) 평화신문2019.12.04

성경의 장과 절, 언제 만들어졌을까?유다인들 끊어 읽기 쉽게 구분하기 시작두루마리 화선지에 붓으로 신약성서를 필사한 모습. 가톨릭평화신문 DB문: 성경의 장 절 구분은 처음부터 있었던 것인가요, 아니면 나중에 추가된 것인가요. 답: 우리가 지금 보는 성경은 각 권마다 장과 절로 나뉘어 있어서 찾아보기가 편리합니다. 그러나 장 절 표기는 성경이 씌어질 때 함께 이뤄진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성경을 찾아보기 쉽도록 나중에 붙여진 것입니다. 성경의 장 절 구분 역사에 대해서 알아봅니다. 성경의 장 절 표기 구분 역사는 신약성경과 구약성경이 조금 차이가 납니다. 먼저 신약성경의 경우 2~3세기부터 성경 연구자들이 복음서를 중심으로 구분하기 시작해 5~6세기에 이르면서 복음서들은 318 부분으로, 서간서들은 254 부분으로 구분되기도 했다고 합니다. 이에 앞서 4세기에 필사된 바티칸 사본에서는 마태오 복음을 68장, 마르코 복음은 48장 등으로 구분돼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런 구분은 완전하지 못했고 그래서 실제로 이용하는 데 불편한 점이 무척 많았습니다. 오늘날 우리가 볼 수 있는 것과 같은 신약성경의 장 구분은 1205년 스티브 랑톤(1150~1228)이 창안했다고 합니다. 파리 대학 교수 출신으로 나중에 영국 캔터베리 대주교가 된 랑톤의 장 구분은, 불가타역 성경에 채택됐습니다. 불가타역은 성 예로니모(347~420)가 신구약 성경 전체를 당시 라틴어로 번역한 성경으로, 16세기 트렌토공의회에서 가톨릭 교회의 공식 성경으로 채택한 성경이지요. 그런데 신약성경에서 오늘날 우리가 보는 것과 같은 절이 구분된 것은 훨씬 후대인 1500년대 중반의 일입니다. 인쇄업자인 로베르 에티엔(1503~1559)이 파리에서 그리스어와 라틴어로 된 신약성경을 출판하면서 기존에 구분된 장에 다시 절을 구분했습니다. 전해지는 말로는 당시 에티엔은 말을 타고 리옹에서 파리로 여행하면서 절을 구분했다고 합니다. 구약성경의 경우에 유다인들은 이미 오래 전부터 회당에서 읽기 쉽게 주제별로 문단을 나누거나 한 줄을 띄우거나 해서 구분했습니다. 이런 흔적은 1947년 사해 동굴에서 발견된 꿈란 사본에서 볼 수 있는데 이 사본들이 기원전 1세기에서 기원후 1세기 사이에 사용되던 것이라는 점에서 그만큼 그 구분이 오래됐다고 할 수 있습니다. 유다인들은 회당에서 회중 앞에서 히브리어 성경을 낭독할 때에 통역자가 아람어로 번역할 수 있도록 일정하게 끊어서 낭독했는데 이것이 나중에 절을 구분하는 것으로 발전하게 됐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후 6세기에 와서는 구약성경의 절 구분에 해당하는 표시들이 히브리어 성경 본문에 첨가됐습니다. 그러나 구약성경에서 오늘날과 같은 장 구분은 히브리 성경이 아니라 라틴어 불가타역 성경을 통해서 이뤄졌고, 그 주역은 위에서 언급한 스티븐 랑톤 대주교입니다. 랑톤 대주교는 신약성경을 장으로 구분했을 뿐 아니라 구약성경도 숫자 형태로 장을 구분했습니다. 이 구분은 1330년에는 필사본 히브리어 성경에, 1516년에는 인쇄본 히브리어 성경에도 적용됐습니다. 그리고 앞에서 이야기한 인쇄업자 로베르 에티엔은 랑톤 대주교의 장 구분을 바탕으로 신약성경의 절을 구분하면서 구약 성경의 경우 전해져오던 절 구분 표시들을 받아들였습니다. 이런 과정을 거쳐서 1571년에는 인쇄된 히브리어 구약성경에서 처음으로 절이 구분돼 출판됐습니다. 따라서 성경의 장 절 구분과 관련해서 랑톤 대주교와 로베르 에티엔 두 사람의 이름을 기억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들 덕분에 우리는 편리하게 성경의 해당 본문을 찾아 읽을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알아 둡시다 성경의 장 절을 표시하는 방법은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그러나 한국 천주교회에서는 새 번역 「성경」을 편찬하면서 성경 구절 표기 원칙을 다음과 같이 정했습니다. 예컨대 창세기 5장을 줄여서 표기할 때는 '창세 5'로, 창세기 3장 15절을 줄여서 표기할 때는 '창세 3,15'로 각각 표기합니다. 또 창세기 3장 5절부터 10절까지로 절이 이어질 때는 붙임표를 써서 '창세 3,5-10'으로, 창세기 4장부터 6장까지로 장이 이어질 때는 줄표를 써서 '창세 4─6'으로 표기합니다. 이에 관한 자세한 내용은 「성경」 '일러 두기' 10항에 나와 있습니다. 성경 장 절을 표기할 때 이 원칙을 잘 새겨두었다가 틀리지 않게 표기하면 좋겠습니다. 이창훈 기자 changhl@cpbc.co.kr김지항2017.11.23
[한상숙 수녀의 중독 치유 일기] (34·끝)“청하여라, 너희에게 주실 것이다. 찾아라, 너희가 얻을 것이다. 문을 두드려라, 너희에게 열릴 것이다”(루카 11,9)한 잔의 유혹 이기는 힘, 주님께 구하자 성경 말씀이 머리에서 가슴으로 내려오게 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회복을 돕는 교과서인 ‘12단계 12전통’의 전 단계에서 강조하는 것은 “나의 무기력함을 높으신 분께 전적으로 맡기고 그분만이 중독에서 벗어날 수 있게 하신다는 것을 믿고 맡기기로 결정했는가?” 하는 질문의 연속이다. 각자가 믿는 높으신 분의 힘으로 ‘중독이라는 늪’에서 벗어날 수 있음을 믿는 것이다. 수많은 다짐과 결심을 해도 스스로 중독자임을 인정하지 않고 자신의 약함과 한계를 믿지 않기 때문에 재발이 반복되는 것이다. 상담하면 대부분 술을 잠시 멈추면 스스로 조절할 수 있을 것이라고 기대하고 있다. 중독에 대해 잘 이해하지 못하면 가족들도 “일주일에 한 번만 조금 마시라”고 권유하는 경우가 매우 흔하다. 모든 중독은 뇌에 영향을 주었기 때문에 ‘조금’이라도 허용하면 곧바로 재발한다. 멈추거나 조절하는 기능을 완전히 잃었다는 인간적인 무기력함을 인정하고 한 잔도 입에 대지 말아야 중독이라는 늪에서 빠져나올 수 있다. 그러나 한 잔의 유혹을 견딜 힘이 쉽게 생기지 않기 때문에 어려운 시간을 견디어야 한다. 하느님께 신뢰를 두고 그분께서 계획한 삶에 목적을 두는 삶으로 완전히 바뀌어야 한다.1986년 부천성모병원에서 중독자 가족모임을 시작하면서 대학병원에서 중독이라는 병을 치료로 접근했던 것도 놀라운 하느님의 계획이었고 그분의 손길이었다. 다른 질병과 다르게 이 병에는 완전한 치료제가 없기 때문이다. 선배 수녀님들은 이들과 함께 고통의 길을 걷다 보면 하느님께서 회복의 기쁨으로 바꿔주신다는 것을 믿고 함께 엠마오의 길을 가는 것이 전부였다. 동반하는 여정에서 어떤 분은 놀라운 감동으로 새 힘을 얻기도 하여 더 먼 길을 걸어가고, 어떤 분은 실망하여 중간에 돌아간다. 개인의 중독이 가정을 병들게 하고 물질의 풍요로움이 인간을 더 고독하고 외롭게 만들기에, 수도회는 수많은 종류의 중독이 늘어날 것을 예상하여 오랜 기간 투신해왔다. 20여 년이 지난 지금 국가는 중독이라는 문제를 이슈화하기 시작했고 중독전문병원들이 늘어나면서 낮 병동 프로그램을 진행하는 센터들, 다양한 중독자모임이 급증했다.우리나라에도 다양한 중독의 원인과 고리를 끊을 수 있는 방법과 연구들이 진행되고 있음은 참으로 반가운 일이다. 그동안 우리의 수고와 모험을 놀랍게도 하느님은 기뻐하셨고 높은 회복률을 유지하는 기관으로 잘 성장시켜주셨다. 사도들에게 더 깊은 곳에 그물을 치기를 바라셨듯이 소비녀들에게도 가난한 이들에게 끊임없이 내리기를 바라시고 계신다. 홍수처럼 쏟아지는 정보, 순간의 만족과 편리함을 추구하는 다양한 욕구들은 더욱더 인간을 외롭게 하고 불안감과 무기력함을 가중시키는 세상을 살고 있다. 우리를 유혹하는 물질과 행위에서 스스로 조절할 수 있다는 착각에서 벗어나 매 순간 짧은 시간이라도 하느님께 청하여 찾고, 문을 두드리면 예수님께서 기꺼이 문을 열어 주실 것이다. 부천성모병원 알코올의존치료센터 상담 : 032-340-7215~6 ※‘한상숙 수녀의 중독 치유 일기’는 이번 호로 마칩니다. 집필해 주신 수녀님과 애독해 주신 독자 여러분께 감사드립니다. 평화신문2019.07.23

‘토닥토닥’ 낙태 여성들 영성·심리적 치유 도와 ‘라헬의 포도원’ 치유 피정 진행하는 로렌스 케틀 신부(카푸친 작은 형제회 한국관구장) 아일랜드 더블린 출신의 로렌스 케틀(59) 신부. 카푸친 작은 형제회 한국관구장인 그에겐 낙태의 아픔을 경험한 친구가 있다. 같은 아일랜드 출신인 베르나데트 굴딩 여사다. 로렌스 신부는 굴딩 여사와의 인연으로 낙태 후 고통받는 여성들에게 관심을 두게 됐다. 낙태로 인한 죄책감에 벗어나지 못해 스스로 벌 받을 방법을 끊임없이 찾았던 굴딩 여사는 신앙으로 낙태의 상처를 극복했다. 현재 아일랜드에서 ‘라헬의 포도원’이라는 피정 프로그램을 통해 낙태로 상처받은 여성들의 치유를 돕고 있다. 2001년 한국에 선교사로 온 로렌스 신부는 굴딩 여사의 도움으로 2011년 10월, 한국에서 첫 라헬의 포도원 피정을 시작했다. 강화도 외딴곳에 있는 한 수도원을 통째로 빌렸다. 낙태 경험이 있는 여성들은 2박 3일간 절망과 상처, 긴장으로 겹겹이 쌓인 낙태의 고통을 털어놨다. 하느님과 아이, 자기 자신과 화해하는 시간이다. “낙태한 여성은 자신이 생명을 없앴다는 죄책감으로 괴로워합니다. 낙태 후 자존감이 낮아지고 우울증이 찾아오지요. 남편, 새 자녀와의 관계가 원활하지 못하고 직장생활에 어려움을 겪습니다.”낙태한 여성들은 고해성사를 하지만 심리ㆍ영적으로도 치유가 잘 안 된다. 이 고통에 대한 비난과 판단없이 편안하게 털어놓을 사람과 공간이 없다. 로렌스 신부는 “자책하는 것을 멈추고, 자신을 용서할 수 있어야 본격적인 치유가 일어난다”고 설명했다. “낙태는 태어나지 않은 순수한 생명을 죽이는 분명한 죄입니다. 그러나 천편일률적인 기준으로 죄인이라고 판단할 수는 없습니다. 자유의지로 선택한 낙태보다 강요된 낙태가 많습니다. 사회적 이유, 가족의 강요 등 여러 환경으로 낙태를 강제로 당한 경우가 많습니다.”로렌스 신부는 “치유 과정을 겪으면 남편과 다른 인간관계에서 긍정적인 결과를 얻을 수 있다”고 말했다. “죽은 아이와의 관계가 풀렸기에 살아 있는 사람과의 관계가 새롭게 형성된다”고 설명했다.외국인 사제로서 한국 여성의 낙태로 인한 고통에 귀 기울여온 그는 “한국 여성의 고통이 더 이해하기 어렵거나 특별히 다르지 않다”고 말한다. “한국이든, 아일랜드든 낙태로 인해 슬퍼하는 마음은 같습니다. 같은 여성이고 엄마이지요. 슬픔과 좌절, 상처도 같아서 여성의 분노와 상처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슬픔에 대한 치유의 필요성도 국적에 따라 다르지 않지요.”로렌스 신부는 “위기 상황에 임신한 어머니의 감정과 두려움에 더 관심을 기울이면 더 많은 아기를 구할 수 있다”고 강조했다. 그는 “낙태에 대한 잘못된 진실, 낙태한 여성들이 고백하는 고통을 통해 낙태가 가져오는 결과를 알 수 있다”고도 덧붙였다. 또 “낙태를 예방하기 위해 교육은 필수적인 열쇠 중 하나”라면서 “젊은이들에게 인간은 수정되는 순간부터 존엄하며, 생명에 대한 책임을 가르쳐야 한다”고 강조했다. 오는 10월 20회째를 맞는 라헬의 포도원 피정에 참가 신청한 여성들은 30대부터 70대까지 다양하다. 평신도 생명운동가 강인숙(프리스카)씨와 나효숙(클레멘시아)씨가 봉사자로 피정을 함께 돕는다. 라헬의 포도원(Rachel’s Vineyard)1986년 미국의 심리치료사인 데레사 버크 박사가 낙태 경험이 있는 여성들의 치유를 위해 시작한 가톨릭 피정 프로그램이다. 미국을 비롯해 프랑스, 이탈리아, 러시아, 호주 등 전 세계 40여 개국에서 진행되고 있다. 라헬의 포도원은 자식을 잃고 울부짖는 구약성경의 여인 ‘라헬’(예레 31,15)에서 이름을 따왔다. 한국에서는 1년에 세 차례 비공개로 진행된다. 이지혜 기자 bonaism@cpbc.co.kr 평화신문2019.08.07

행복한 부모 되는 법 알려드려요서울대교구 사목국, ‘태교 교실’ 운영… 9월부터 하반기 교육 태교 교실 참가자들이 감통분만 실습을 하고 있다. 서울대교구 사목국 제공 지난 4월 11일 모두 12쌍의 부부가 상기된 표정으로 서울 명동 가톨릭회관 대강당에 모였다. 서울대교구 사목국이 가정 공동체의 성장을 돕기 위해 준비한 ‘태교 교실’에 참가한 부부들이었다. 태교 교실은 태교가 왜 필요하고 어떻게 하면 되는지, 좋은 부모란 어떤 부모인지, 행복한 부부가 되기 위해서는 어떤 노력을 해야 하는지, 그리고 어떻게 하면 힘들지 않게 출산을 하는지를 배우는 자리다. 그동안 태교 교실에서는 사랑의 시튼 수녀회에서 개발한 워크북 「행복한 아이, 행복한 부부, 행복한 부모, 행복한 출산」을 토대로 교육을 진행했다. 지난 석 달 동안 한 달에 2번씩 모두 6차례 교실이 열렸고 이제 7월에 열릴 교육 2번만 남아 있다. 첫 시작은 행복한 아이를 만드는 일이었다. 한국과 동양, 서양의 태교는 무엇이 다른지 알려주고 엄마가 먹고 생각하는 것, 엄마의 감정에 영향을 주는 아빠의 태도도 다 태교에 해당한다는 점을 강조했다. 그다음은 행복한 부부와 행복한 부모가 되는 길이다. 행복한 부부는 아이가 열 달 동안 엄마 배 속에 있는 동안 부부 사이에 무슨 대화를 해야 하는지, 상호 의사소통의 방법, 임신기간 성생활은 어떻게 하는지를 알려주는 시간이다. 행복한 부모는 부부 공동 육아의 중요성과 더불어 2살 이전에 아이를 돌보는 게 얼마나 아이에게 큰 영향을 주는지 확인하는 자리다. 행복한 출산은 진통을 줄여 출산하는 방법을 배우는 시간이다. 평소 남편이 아로마 기름으로 임신한 아내를 마사지하는 방법과 진통이 왔을 때 아로마 기름 마사지로 통증을 감소시켜주는 방법을 실습으로 구체적으로 배우게 된다. 그동안 태교 교실에 참가한 12쌍의 부부는 태아와 대화하고 태어날 아이에게 편지를 썼고 아이가 태어났을 때 설치할 모빌을 만들었다. 그리고 태교 강의를 듣고 워크북에 나온 대로 행복한 아이를 위해 같이 성경을 읽고 묵상하고 기도했다. 이 중 4쌍은 7월 출산을 앞두고 있다. 강의가 진행될수록 이들에게 큰 변화가 왔다. 교육을 주관한 서울대교구 사목국 김경순(아녜스) 수녀는 “태교 교실은 부모들이 태아에게 편지를 쓰고 아이에게 줄 모빌을 만드는 등 구체적인 의사소통과 체험, 학습하는 과정”이라며 “묵상, 기도가 정말 아이를 위해서 큰 도움이 됐다는 게 참석자들의 공통된 반응”이라고 소개했다. 태교 교실은 상반기에 이어 하반기 교육을 준비하고 있다. 하반기 교육은 4개월간 진행하던 프로그램을 1개월 2회 교육으로 단축해 9~12월 서울대교구청 별관과 영성센터에서 진행된다. 일정은 짧아졌지만, 행복한 아이, 행복한 부부, 행복한 부모, 행복한 출산 등 4개 워크북 강의와 실습은 그대로 진행된다. 김경순 수녀는 “젊은 부부들이 넉 달이라는 기간 때문에 참여를 꺼리는 점을 감안해 더 많은 사람이 참여할 수 있도록 기간을 단축했다”며 “압축적으로 강의를 진행할 계획인 만큼 많은 사람이 참여하길 바란다”고 밝혔다. 문의: 02-727-2085, 서울대교구 사목국 행정지원팀 이상도 기자 평화신문2019.07.03

‘사제의 꿈’ 위해 월남… 전쟁의 고통 속에 옮겨 다닌 피란지 신학교[한국전쟁 70년, 갈등을 넘어 화해로] (3)1926년생 박정일 주교가 기억하는 한국전쟁 컴퓨터에 정리해 놓은 자료 사진을 보여 주며 한국전쟁 당시 상황을 설명하고 있는 박정일 주교. 한국전쟁 중에도 가톨릭교회의 사제 양성은 계속됐다. 북한의 덕원신학교는 폐쇄됐지만, 남한의 서울신학교는 전쟁 발발 후 6개월간 휴교한 뒤 1951년 1월 제주로, 같은 해 5월 부산으로 옮겨가며 ‘피란지 신학교’를 열었다. 그 와중에 새 사제도 탄생했다. 1950년 10월 28일에는 대구에서 4명, 11월 21일에는 서울에서 8명이 사제품을 받았다. 1953년 7월 27일 휴전 협정이 체결되기까지 모두 41명이 하느님 부르심에 응답했다. 1952년 4월과 8월 두 차례에 걸쳐 신학생 7명을 프랑스(4명)와 이탈리아(3명)로 유학을 보냈다. 교회가 사제 양성을 얼마나 중요하게 여겼는지를 엿볼 수 있다.전쟁 당시 신학생이었던 박정일(전 마산교구장) 주교는 1926년 평안남도 평원에서 태어났다. 뒤늦게 성소를 발견한 그는 초등학교 교사를 그만두고 1948년 9월 덕원신학교에 입학했다. 북한 공산 정권의 탄압으로 이듬해 덕원신학교는 폐쇄됐다. 박 주교는 사제가 돼야겠다는 일념 하나로 홀로 월남했다. 그리고 신학교를 따라 대구로, 제주로, 부산으로 옮겨 다녔고 유학생으로 선발돼 1952년 8월 14일 로마행 비행기에 올라탔다. 그가 기억하는 70년 전 이야기를 듣기 위해 인터뷰를 청했다. 박 주교는 구순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로 건강했다. 목소리는 단단했고, 거동에도 불편함이 없었다. 한국전쟁 당시 일어난 사건의 연도와 날짜도 정확히 기억했다. -올해 아흔다섯이시죠. 한국전쟁 당시엔 스물다섯 청년이셨습니다.“그렇게 되나요. 이제 어디 가서 나이 자랑을 해도 되지 않을까 싶네요. 그 당시 이야기…. 할 이야기가 아주 많아요. 아이고 그 시절 참 고생 많았죠.”-한국전쟁 전, 덕원신학교에 다니셨지요.“우리 부모님은 신자가 아니셨어요. 신학교에 간다니까 어머니 반대가 특히 심했어요. 3년간 엄청나게 싸웠습니다. 가출도 했었어요. (웃음) 그러다 제가 병이 났는데 어머니는 ‘저 녀석이 신학교 못 가게 하니까 앓아눕는구나!’ 하면서 신학교 입학을 허락하셨죠. 학기 시작 피정 때 평양교구장 홍용호 주교님이 오셔서 30분간 강론을 하셨는데, 말씀을 너무 잘하셔서 놀랐던 기억이 생생합니다.”-신학교에 가겠다는 결심은 언제 하셨는지요.“평양에서 숭인상업학교 다니면서요. 세례도 그때 받았고요. 백민관 신부를 상업학교에서 만났죠. 백 신부는 이미 천주교 신자였어요. 토요일마다 백 신부랑 기림리성당에 가서 놀았는데 홍도근 신부님이 계셨습니다. 전기 박사로 불리던 분이라 재주가 많으시고 재밌으셨어요. 그분을 보며 신부가 돼야겠다 생각했어요.”-덕원신학교 생활은 1년도 채 못하셨죠.“1949년 5월 7일이었어요. 아침에 일어났는데 분위기가 이상했어요. 밤사이 경찰들이 신학교 옆 베네딕도 수도원에 들이닥쳐 아빠스님과 독일 신부님, 수사님, 교수 신부님들을 모두 잡아갔다는 거예요. 창밖을 보니 경찰이 두세 명씩 짝지어서 신학교 주변을 감시하고 있었습니다. 무서웠죠. 5일간 숙소에 갇혀 지냈습니다.”-언제 풀려나셨습니까.“5월 13일에 경찰이 학교를 폐쇄하니 모두 집으로 가라고 했습니다. 짐을 챙기는데 묵주나, 성상, 성경은 가져가면 안 된다고 했어요. 학교에 있던 성작이나 성광 같은 성물은 부제와 상급생들이 주방에 근무하는 분들을 통해서 몰래 밖으로 옮겨 놨다고 하더라고요. 신학생들은 짐을 싸서 다음날 평양 주교관으로 갔지요.”-홍용호 주교님도 납치당하고 당시 평양도 어수선하지 않았습니까.“김필현 신부님께서 홍 주교님 대신 교구 책임을 맡고 계셨습니다. 신학생들을 보고는 안타까운 표정을 지으셨어요. 여기선 학업을 계속할 수 없으니 가능하면 월남해서 공부를 계속 하라고 말씀해주셨습니다.”사제의 꿈을 버릴 수 없던 박 주교는 고향으로 돌아와 남몰래 월남 계획을 짰다. 수소문 끝에 평양에서 월남을 돕는 신자를 소개받았다. 1950년 2월 말이었다. 첫 시도는 무참히 실패했다. 평양에서 해주까지 갔지만, 정치보위부원에 발각돼 두 달 넘게 유치장에 갇혔다. 심문과 폭행, 굶주림을 견디고 나니 겨우 풀려났다. 그때가 5월 초 봄이었다. 6월엔 전쟁이 났다. 그는 청년들을 강제 징집하는 북한군에 끌려갔지만, 용케 도망쳤다. 한동안 산에서 숨어 지내다가 신학교 소식이 궁금해 무작정 평양으로 향했다. -그때 평양에서 서울로 오신 거군요.“중공군이 몰려오던 때라 평양도 피란민들로 가득했습니다. 고향으로 다시 돌아갈 상황이 아니었죠. 관후리성당에선 캐롤 몬시뇰이 신자들에게 확인서를 써줬습니다. ‘이 사람은 그리스도 신자인데 편의를 봐주면 고맙겠다’는 내용이었어요. 저도 그 쪽지 도움을 받았습니다. 지나가던 미군에게 쪽지를 보여주고 차량을 얻어 타 대동강을 건넜습니다. 그 뒤론 하염없이 걸었죠. 어딜 가든 도로와 주변 논밭엔 시체들이 있었습니다.”-서울까지 얼마나 걸리신 겁니까.“12월 초 평양을 떠났는데 12월 23일 서울에 도착했어요. 이틀 뒤 명동성당에서 성탄 미사를 봉헌했습니다. 믿기지 않았죠. 그날 성당에서 덕원신학교 신학생이던 황춘홍 신부를 만났어요. 황 신부가 혜화동에 신학교가 있고 신학생도 있다고 알려줬어요. 곧장 달려갔지요. 혜화동에서 정의채 몬시뇰과 김진하 신부도 만났습니다. 그제야 살았다는 느낌이 들었습니다.”-서울신학교 학생이 되신 건가요. “정규만 신부님이 학장이셨는데, 저를 반갑게 받아주셨습니다. 남아있는 신학생들과 함께 영등포역에서 피란 열차를 타고 대구로 갔습니다. 대구에 가니 신학생 30명이 주교관 옆 부속 건물에 모여있었습니다. 1951년 새해를 대구에서 맞았어요.”신학교는 신학생들의 안전을 위해 제주로 피란하기를 결정했다. 그러나 막상 제주도 안전하지 못했다. 무장 공비들이 시도때도없이 출몰해 약탈과 납치, 살인을 일삼았다. 신학생들도 죽을 고비를 몇 번이나 넘겼다. 신학교는 다시 부산 영도로 옮겼다. 박 주교는 “그제야 생활이 좀 안정됐다”고 회고했다. 그리고 이듬해 박 주교는 로마 우르바노대학교로 유학을 떠났다.-부모님은 영영 못 만나신 겁니까.“1951년 여름에 인천에서 만났어요. 아버지와 어머니, 여동생 셋만 월남했더라고요. 형들과 형수님 그리고 조카들까지 이동하긴 어려웠던 거죠. 아버지께서 해주에서 밀선을 구해 인천으로 오셨습니다. 남쪽에 오자마자 저를 찾으셨는데 ‘이놈이 살아있다면 분명 신학교에 있을 거다’라고 생각하셨답니다. 답동성당에 가서 우리 아들이 신학생인데 확인 좀 해달라고 하셨고, 부산 신학교에 있던 제게 연락이 닿은 겁니다. 그 길로 인천으로 가서 부모님을 뵈었죠.”-다시 만난 부모님을 두고 유학을 떠나기 쉽지 않으셨을 것 같습니다.“꼭 사제가 돼야 한다고 고집을 부렸어요. 예수님께서 나를 따르려면 모든 걸 버리라고 하셨으니까요. 그래도 철이 없었던 것 같아요. 겨우 만난 아들을 다시 떠나 보내야 하는 부모님 마음을 헤아리지 못했죠. 그래도 제가 로마로 떠나고 2년 뒤 부모님께선 부산에서 세례를 받으셨어요. 감사한 일이지요.”그는 “신학생이었기에 전쟁 중에 부모님도 만날 수 있었고, 신자들에게 도움도 많이 받았다”고 했다. 이어 “전쟁의 비참함이야 말하지 않아도 다 알지 않느냐”면서 “살아있는 우리가 할 일은 평화를 위해 끊임없이 기도하는 일뿐이다”고 강조했다. “전쟁은 없어야 합니다. 절대로 일어나선 안 됩니다. 평화를 위해선 더 많은 기도가 필요합니다.” 한국전쟁 70년을 기억하는 구순의 주교는 조용히 두 손을 모았다. 박수정 기자 catherine@cpbc.co.kr cpbc2020.01.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