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판]슬픈 예수 - 예수님은 현재 교회 모습에 기뻐하실까?](//cpbc.co.kr/CMS/newspaper/2013/07/rc/465316_1.1_titleImage_1.jpg)
[출판]슬픈 예수 - 예수님은 현재 교회 모습에 기뻐하실까?평신도 신학자, 마르코복음 해설 통해 교회와 신자들 잘못된 의식 비판 슬픈 예수(김근수 지음/21세기 북스/1만 6000원) 독일에서 성서신학을, 남미에서 해방신학을 전공한 평신도 신학자 김근수(요셉)씨가 쓴 마르코복음 해설서다. 마르코는 예수 역사의 핵심 부분을 최초로 기록한 복음서다. 요한 세례자 이야기에서 시작해 예수 십자가 처형까지 예수의 역사를 생생하게 다루고 있다. 저자는 마르코복음을 '가난한 사람들의 집단 창작품'이라고 했다. 가난한 사람들 입으로 후대에 전해진 예수 이야기라는 것이다. 그렇기에 그의 해설은 '역사'의 예수와 '가난한 사람들'에 기초하고 있다. 그는 "가난한 사람들의 목소리가 반영되지 않는 신학은 아직 신학이 아니다. 가난한 사람들의 목소리가 담기지 않은 성경해설은 아직 성경해설이 아니다"라고 외치는 신학자다. 그가 보는 예수는 이웃 사랑을 외치다가 십자가에 처형 당한 게 아니라 사회 기득권 세력을 비판하다가 처형 당했다. 예수는 가난한 사람을 편들고 편애하신 분이다. 목숨 걸고 불의에 저항하며 세상 고통을 없애려 애쓰다가 겪는 고통을 기꺼이 감당한 분이다. 그래서 예수는 슬프다. 저자는 "마르코는 영광의 신학이 아니라 고난과 희생의 신학을 강조했다"며 "신학자는 먼저 '십자가에 매달린 가난한 사람들'을 보아야 한다"고 말한다. 그는 마르코복음 해설을 통해 현대 그리스도교가 보여주고 있는 잘못된 모습을 통렬히 비판한다. 예수는 결코 그렇게 살지 않았다는 것이다. 특히 자본주의와 안락주의에 물들어가는 교회와 성직자, 신자들의 의식에 일침을 가했다. "세례받는다는 것은 그 사상에 동조한다는 뜻이다. 오늘날의 그리스도교는 마치 자본주의에 세례받은 모양이다. 건물 짓네, 국외 선교하네, 사회복지 시설 운영하네 하며 돈 내시란다. 해도 해도 정말 너무하다. 돈 이야기 제일 많이 하는 곳이 그리스도교인 듯하다. 가난한 사람은 교회에서 그저 안절부절못한다. 이것이 예수 탓인가? 예수가 기막힐 노릇이다. 예수는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희생했는데 정작 교회는 가난한 사람들을 사실상 밀어내는 형국이다"(23쪽). 유난히도 '멋지고 번듯한' 성전 건립에 전 신자가 동원되는 세태도 꼬집었다. 예수는 사람들이 사는 곳을 직접 찾아가 애환을 나눴다. 종교건물을 따로 건축하지 않고 삶의 현장에서 살면서 가르쳤다. 그는 "한국의 교회나 성당 건물 재산의 10분의 1만이라도 팔아서 아픈 사람을 무료로 치료하면 사람들이 그리스도교를 다시 볼 것"이라고 했다. 저자는 병을 고치고 귀신을 쫓는 예수의 모습에서 사회 불의와 악에 저항하는 정의를 발견했다. 예수의 기적이 단순한 치유나 귀신 쫓음에 불과한 것이 아니라 사회적 갈등과 정치적 파문을 일으켰다는 사실을 상기시킨다. 귀신 이야기에 주목해야 할 의미는 악이 결코 스스로 사라지거나 소멸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귀신과의 투쟁에서 악과 싸우는 예수의 해방적인 투쟁을 볼 뿐 아니라 그 투쟁을 우리가 계승함을 깨달아야겠다. 귀신을 우리가 몰아내야겠다. 종교, 정치, 사회뿐 아니라 우리 마음속 깊이 자리 잡은 집주인 베엘제불(돈 귀신, 권력 귀신, 이기주의)이라는 귀신을 몰아내자는 말이다.… 그리스도교가 잘못을 저지를 때에도 그저 '아멘, 옳소' 해서는 안 된다"(77쪽). 그는 또 시대의 변화와 흐름에 따라 남성 중심적 교회 제도에 대해서도 다시금 생각해볼 것을 주문했다. 그는 "마르코는 세상을 정확하게, 교회를 날카롭게, 가난한 사람을 따스하게, 우리 자신을 침착하게 보라고 권고한다"고 했다. 또 교회 행태에 실망하거나 그리스도교 역사에 비판적인 사람들이 마르코복음을 통해 위로받기를 희망했다. 세상과 소통하는 신학자인 저자는 페이스북을 통해 연재한 글을 엮어 책으로 냈다. 그의 페이스북에서는 현재 슬픈 예수Ⅱ 마태오복음 해설이 연재 중이다. 박수정 기자 catherine@pbc.co.kr조은일2013.07.23
![[생활 속의 복음] 예수 성탄 대축일 -하느님이시며 참 빛이신 분](//cpbc.co.kr/CMS/newspaper/2011/12/rc/399515_1.1_titleImage_1.jpg)
[생활 속의 복음] 예수 성탄 대축일 -하느님이시며 참 빛이신 분서광석 신부(전주교구 신풍본당 주임)오늘 복음은 "처음 말씀이 계셨고 그 말씀은 하느님이시며 참 빛이신 분이다. 세상 모든 것이 참 빛이신 그분을 통하여 생겨났지만 세상은 그분을 알아보지 못하였다. 그러나 그분은 당신을 믿고 받아들이는 이들에게 하느님의 자녀가 되는 권한을 주셨다. "말씀이 사람이 되시어 우리 가운데 사셨다"는 내용이다. 원조들의 잘못으로 하느님에게서 분리된 우리를 하느님과 다시 일치시키시고, 또 우리를 이어주실 분이 우리를 위해 태어나셨다. 그 이름은 놀라운 경륜가, 용맹한 하느님, 영원한 아버지, 평화의 군왕(이사 9,5-6 참조)이신 임마누엘 예수 그리스도다. 하느님께서 구약의 오랜 세월 동안 인간에게 당신 사랑을 어떻게 보여주셨는가를 우리는 성경을 통해 잘 알 수 있다. 하느님 사랑에서 떨어져 나간 암울한 인간은 오직 육신의 안위만을 위해 세상에 재물과 명예를 쌓는 것에 목적을 둔 듯 살고 있었다. 이처럼 우매한 인간을 향해 하느님은 끊임없이 사랑이신 당신을 나타내 보이셨다. 역사 속에서 일정한 장소ㆍ사물ㆍ사람을 통해서다. 즉 하늘의 천둥 번개와 바람, 땅의 나무와 흙, 물과 불, 혹은 예언자 등 자연적이거나 초자연적 방법을 통해 간접적으로 드러내셨다. 구약 전체 내용이 '그 사물', '그 사람', '그 사건'을 통해 구체적이고 점진적으로 현세에 집착하는 인간에게로 다가오시는 구원 역사이다. 이 오랜 구약의 세월을 닫고 창조주께서 목덜미가 뻣뻣한 당신 백성(탈출 32,9)에게로 직접 오시기 위해 피조물 마리아에게 당신의 특별한 은총을 입게 하셨다. 이 여인 안에 스스로 작아지신 하느님, 곧 인간이 되신 것이다. 바오로 사도는 이 놀라움을 "당신 자신을 비우셨다"(필립 2,7)고 했으며, 교부들은 "하느님이 우리의 작음을 취하셨다"고 일컬었다. 성경은 평화의 왕, 아기 예수님 탄생으로 이제 그 분 왕국에서는 "늑대가 새끼 양과 함께 살고 표범이 새끼 염소와 함께 지내리라. 송아지가 새끼 사자와 더불어 살쪄 가고 어린아이가 그들을 몰고 다니리라. 나의 거룩한 산 어디에서도 사람들은 악하게도 패덕하게도 행동하지 않으리라"(이사 11,6-9)고 전하고 있다. 우리 인간은 늑대ㆍ양ㆍ표범ㆍ독사ㆍ살모사ㆍ소ㆍ곰 등 동물 속성을 자신들 안에 지니고 있다. 그래서 본능적으로 살면 서로가 서로에게 독사로, 양으로, 곰이나 사자 등으로 변할 수 있다. 그러니 신앙 안에서 아집과 이기심으로 가득 찬 자신을 벗고 이타적 사랑으로 전환된 새로운 그리스도인이 돼야 한다. 즉 예수님 삶과 일치할 때 본능적인 우리의 나쁜 속성들은 하느님 사랑 안에서 순화된다. 신앙으로 평화로운 생활이 가능한 것이다. 세상과 자신에게 고정된 시야는 하느님과 이웃에게로 향하게 되고, 아무리 보잘것없는 작은 사랑의 행위라도 그리스도 정신의 모든 것으로 승화된다. 그리고 그 사랑은 성령의 열매를 맺어 이웃을 구원으로 이끈다. 또 하느님 은총으로 인간은 위대하고, 존엄하며 인격적 존재로 바뀐다. 소설 「부활」의 저자인 톨스토이가 "신앙 없는 인간의 생활은 짐승의 생활이다"고 한 말은 인간의 참다운 가치를 깨닫게 한다. 이제 우리는 채워지지 않는 욕망을 좇으며 살다가 아무런 희망 없이 인생을 마감해야 하는 허무하고 비참한 존재가 아니다. 세상 어떤 부귀영화도 비교할 수 없고, 바꿀 수도 없는 사람이 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신앙하고 살다가 영원에 들어가게 됐다. 하느님 상속인이 된 것이다. 임마누엘 예수님이 "두 사람이나 세 사람이라도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함께 있기 때문이다"(마태 18,20)고 당신의 영적 현존을 약속하셨으니 우리 신앙생활은 그분과 함께해야 한다. 우리나라에는 아직도 하느님 사랑에로 초대 받아야 할 이들이 많다. 신학적, 철학적 학문 이론은 인간 이성에 만족을 줄 수 있지만 가장 효과적인 복음 선포, 즉 하느님 구원에로의 초대 방법은 서로 사랑하는 것이다.조은일2011.12.20
[조학균 신부 미사 이야기] 4- 말씀전례, 하느님과 대화하시는 시간 조학균 신부(예수회, 전례학 박사)말씀전례시작예식에서는 교우들이 능동적이고 자발적이며 겸손한 태도로 하느님의 자비를 청했다면, 말씀 전례는 하느님께서 말씀을 통한 대화 안에서 당신 의중을 드러내시며 삶의 규범을 제시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말씀 전례는 하느님 말씀을 듣는 순간이며, 동시에 하느님과 교우들의 대화 시간이다. 즉 교우들은 말씀을 통해 하느님의 사랑과 자비를 받아들여 삶 속에서 실현하는 것이다. 역사적으로 볼 때 초기 교회에서는 성찬례에 영세한 신자들만 참석했는데, 영세하지 않은 사람들이 성찬 예식 때 그리스도의 몸과 피를 받아먹고 마시라는 사제의 말을 잘못 이해할까봐 말씀 전례가 끝나면 돌려보내고 영세한 신자들로만 성찬례를 거행했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말씀 전례는 제2차 바티칸공의회 이전까지 예비 미사, 혹은 예비신자 미사라는 말로 미사 전례 안에 있었다. 말씀 전례의 중요성은 마틴 루터에 의해 시작된 종교개혁에서 강조됐고, 가톨릭교회에서는 제2차 바티칸공의회의 성서부흥과 전례부흥에 힘입어 말씀 전례의 중요성을 인식하게 됐으며, 나아가 미사의 본질적 요소로 자리 잡게 돼 성찬례와 더불어 미사의 골격을 이루게 되었다. 말씀 전례의 특성은 "하느님 말씀과 공동체의 화답"이며, 그 구조의 성서적 근거는 엠마오의 제자 사화(루카 24,13-35)와 사도 바오로의 트로아스 주님 만찬(사도 20,7-12)에서 찾아 볼 수 있다. 말씀 전례에서는 하느님 말씀을 생생히 듣는 것에 목적을 두고 있기에, 교우들이 성경을 눈으로 읽거나 혹은 함께 읽는 태도는 말씀 전례의 의도에 어긋나는 행동이다. 말씀 전례를 통해 하느님께서는 당신 백성들의 구원 신비를 알려 주시고, 모든 그리스도인들의 영적 양식인 당신 말씀을 독서자 음성을 통해 전해주신다. 특히 복음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당신 백성에게 하늘의 신비를 직접 말씀하고 계신다는 확신과 더불어 당신 생애를 통해 하느님 아버지의 영광을 잘 드러내고 있기에 말씀 전례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이 된다. 4.1 말씀 전례의 의미와 가치 성경은 성령의 영감을 받아 하느님 말씀을 받아 적은 것이다. 하느님 말씀은 단순히 일회성 사건으로 끝이 나는 것이 아니라 교회 안에서 지금도 영속적으로 반복 계시되고 있다. 하느님 말씀은 항상 현재라는 시간과 공간 안에서 교우들에게 구속과 구원의 신비를 열어 주시며, 영적 양식을 제공하기 때문이다. 말씀 전례에서 선포되는 하느님 말씀의 의미를 다음 5가지로 설명할 수 있다. 1) 현존하시는 하느님의 직접적 말씀. 2) 구원 능력을 지닌 하느님 말씀. 3) 하느님 구원 업적의 기념과 선포. 4) 믿음을 낳고 기르는 말씀. 5) 참 생명을 주는 영적 양식. 또한 제2차 바티칸공의회에서는 말씀 전례 안에서 하느님 자신이 인간에게 말씀하시는 진리에 대해 강조하고 있으며, 특히 교회는 하느님 말씀과 주님 성체와 함께 거룩한 전례 안에서 모든 교우들이 끊임없이 영적 양식을 얻을 수 있고, 양육되고 있다고 가르치고 있다. 하느님 말씀은 교회를 지탱하게 해주는 힘이 되고, 교회의 자녀들에게는 신앙의 힘, 말씀의 양식, 영신 생활의 깨끗하고 마르지 않는 샘이 되는 힘과 능력을 갖게 해주며, 신앙의 최고 규범으로 생각하게 해준다. 교회에서는 그리스도의 구원사업에 끊임없이 동참하기 위해 말씀 전례를 통해 주님의 전 생애를 기념하고자 교회력에 따라 봉독하고 있는데, 이는 듣는 이로 하여금 각자 마음에 새기도록 하고 말씀 안에 숨겨진 보물을 찾아 구원으로 인도하고 실현하고자 하는 것이다. 하지만 은총의 열매는 각자의 노력과 태도에 달려 있는데, 마르코 복음의 자라나는 씨의 비유(4,26-34)에서 보면, 말씀은 항상 우리와 함께 있지만 그 말씀을 받아들이는 각자의 자세에 따라 다르게 열매 맺는다. 하느님 나라는 말씀을 통해 우리와 함께 하고 있지만 아직 완성되지 않은 것과 같이, 말씀이 함께 한다는 것은 그리스도의 구원 사업이 시작됐으나 아직 완성되지 않았음을 말한다.조은일2009.06.09
[생활속 복음]사순 제2주일- 너희는 그의 말을 잘 들어라이기양 신부(서울대교구 10지구장 겸 오금동본당 주임)예수님께서는 베드로와 야고보, 요한만을 데리고 산으로 올라가셨습니다. 산 위에 오르시자 예수님 모습이 변해 해와 같이 빛나고 빛과 같이 눈부셨다고 합니다. 그리고 난데없이 구약의 율법을 대표하는 모세와 예언서를 대표하는 엘리야가 나타나 예수님과 이야기를 나눕니다. 그 때 하늘에서 소리가 들리지요. "이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이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라"(마르 9,7). 예수님 모습에 너무나도 놀란 베드로가 얼떨결에 말합니다. "저희가 초막 셋을 지어 하나는 스승님께, 하나는 모세께, 또 하나는 엘리야께 드리겠습니다"(마르 9,5). 경외감에 압도당한 제자들은 이 황홀한 광경이 지속되기를 바랍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저희가 여기에서 지내면 좋겠습니다"(마르 9,5)하며 충격과 감동에 취해 머무르기를 청하는 제자들을 데리고 산 아래로 내려오시며 함구령을 내리십니다. 사순 제2주일을 맞는 우리에게 일장춘몽과도 같은 이 놀라운 장면이 말하고자 하는 것은 무엇일까요? 첫째,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높은 산은 하느님을 만나는 장소이기에 예수님께서 산에 오르셨다는 것은 하느님을 만난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둘째, 예수님 얼굴이 변해 빛나고 그 옷이 눈부셨다는 대목은 부활 때 예수님 모습을 미리 보여주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 길을 겪으신 후에 받으시는 영광이 이렇게 대단하다는 것을 제자들에게 먼저 보여주신 것입니다. 셋째, 구약성경을 대표하는 모세와 엘리야가 나타나서 예수님과 함께 말씀을 나눴다는 것은 예수님이 구약성경에 예언된 메시아라는 가르침입니다. 넷째, 구름 속에서 '소리'가 들렸다는 대목이 있습니다. 구름은 하느님 현존 표시입니다. 예수님께서 하느님과 함께하시는 분이시라는 증언입니다. 오늘 복음은 예수님이 구약에 예언된 메시아로서 산 아래에서 예고한 대로 십자가상 죽임을 당하지만(마르 8,31) 부활하여 큰 영광을 받게 될 것이라는 가르침을 주고 있습니다. 우리 시대의 가장 무거운 십자가를 지고 사셨던 분이 선종하신 김수환 스테파노 추기경님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스테파노 추기경님은 불의가 세상을 뒤덮고 24시간 감시와 도청이 난무하는 상황에서 나라와 국민에 대한 걱정 때문에 불면의 밤을 지새며 평생을 무거운 십자가를 지고 사셨던 분이셨습니다. 그러나 그분 빈소가 마련됐던 명동성당은 그분을 추모하는 열기로 상가가 아니라 마치 피정 집 같았습니다. 거룩한 기운이 그곳을 뒤덮고 있었고 사람들은 그분 삶을 그리며 인생을 어떻게 살아야 할지 마음의 눈을 뜨게 됐습니다. 김 추기경님께서는 오직 하느님만을 의지하며 십자가를 지고 부활의 영광에 참여한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확실하게 보여 주셨습니다. 우리는 그분과 같은 시대를 살 수 있어서 행복했고, 그분을 통해 산 아래 현실을 살아갈 힘을 얻게 됐습니다. 우리는 제자들처럼 십자가 없이 영광만이 있는 산 위에 살고 싶은 유혹에 빠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독려해 산 아래 현실로 내려오셨듯이 우리가 살아야 할 곳은 경쟁과 낙오, 갈등과 싸움, 미움과 배척이 상존하는 산 아래 현실입니다. 사람마다 산 아래 현실은 어렵습니다. 장애인 자녀가 있을 수 있고, 직장을 잃고 방황하는 가장을 바라봐야 하는 가정이 내 가정일 수 있습니다. 또 부모 때문에 끝없이 참아야 하는 자녀들의 힘겨운 삶도 내 현실일 수 있습니다. 또 치매 시부모를 모셔야 하는 힘겨운 며느리 삶이 내 것일 수 있습니다. 언제 끝날지도 모르고 감내하기 버거운 십자가들도 있습니다. 이러한 산 아래 현실은 누구에게나 예외가 없습니다. 그러나 성실하게 십자가를 지고 가는 사람에게는 반드시 산위 놀라운 영광이 찾아온다는 희망을 전해주는 말씀이 오늘 복음입니다. 사순시기를 통해 영광의 부활에 동참하시기를 기원합니다. 조은일2009.03.03
[생활속의 복음] 연중제16주일- 우리가 밀과 같이 변화되기를 기다리시는 하느님이기양 신부(서울대교구 10지구장 겸 공동사목 오금동본당 주임)대형 지진과 해일로 수십만 명이 사는 도시가 하루아침에 폐허가 되고, 자신의 욕망을 채우기 위해 어린아이를 납치해 희생시키는 등의 극악한 사건들을 접할 때면 '세상에서 왜 이런 일들이 일어나는가?', '하느님은 정말 선하신 분이신가?'하는 의구심이 생길 때가 있습니다. 하느님을 믿는 사람으로서 이를 어떻게 받아들이고, 비신자들에게는 어떻게 설명해야 하는지 오늘 복음을 통해서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비유를 들어 군중에게 말씀하십니다. 어떤 사람이 밭에 밀을 심었는데 자는 사이에 원수가 와서 가라지를 뿌리고 갔습니다. 가라지가 밀과 함께 자라고 있었지만 주인은 한참 지나서야 알게 되지요. 밀이 자라서 이삭이 팼을 때 가라지가 드러나자 종들이 주인에게 와서 보고합니다. "주인님, 밭에 좋은 씨를 뿌리지 않았습니까? 그런데 가라지는 어디서 생겼습니까?"(마태 13,27) 주인은 짐작합니다. "원수가 그렇게 하였구나"(마태 13,28). 원래 하느님께서는 이 세상을 선하게 창조하셨습니다. 창세기 1-2장에는 하느님께서 세상을 창조하시는 모습이 그려지고 있는데 창조를 끝내실 때마다 하느님께서는 번번이 '보시니 좋다'하시며 만족해 하셨습니다. 하느님께서 이렇게 세상과 사람 모두를 선하게 창조하셨는데 왜 악이 존재할까요? 성경은 하느님과 같아지려는 인간의 교만한 마음이 하느님의 뜻을 거스르게 됐고, 그 결과 세상에 악이 들어오게 됐는데 이를 원죄라고 가르칩니다. 그렇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원수가 그렇게 하였구나"(마태 13,28) 한 주인의 탄식처럼 악인의 존재는 하느님의 의도가 아니라 인간이 저지른 죄의 결과라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우리는 밀과 가라지가 함께 자라고 있지만 주인은 밀이 다칠까 추수 때까지 인내를 가지고 기다리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죄를 지은 사람에게 회개할 기회를 주시고 기다리시는 하느님의 마음도 엿볼 수 있습니다. 물론 가라지가 어느 날 갑자기 밀로 변하지는 않지요. 그러나 가라지 같은 인생이 밀과 같은 인생으로 변하는 경우는 얼마든지 있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성경 속 인물, 마리아 막달레나가 그렇고 대표적인 성인 아우구스티노 성인이 그렇습니다. 방탕한 삶에서 하느님을 만나 완전히 변화된 모습을 보여주었지요. 한 남자가 언제 나올지 모르는 무기수가 돼 좁고 쾨쾨한 독방에 갇히게 됐는데, 하루는 교도소장에게 이런 청을 했습니다. "절대로 문제를 일으키지 않을 테니 교도소 한 귀퉁이 땅을 경작할 수 있게 해 주십시오." 허락을 받은 이 무기수는 처음에는 손이 많이 가지 않아도 잘 자라는 고추나 양파 같은 것을 심고 나름대로 결실을 얻어 보람을 느꼈지요. 그 다음 해에는 장미 묘목도 심어보고 다른 작물도 정성스럽게 가꾸고 심었습니다. 그러면서 비록 기약은 없지만 정원을 가꾸듯이 자기 자신을 가꿔야겠다고 결심했지요. 그는 심고 가꾸기를 무려 27년간이나 계속했습니다. 그 후 건강한 모습으로 감옥에서 나왔는데 이 남자가 바로 1993년 노벨 평화상을 수상한 남아공화국 최초의 흑인 대통령 넬슨 만델라입니다. 언제 나갈지도 모르는 그 비좁은 감방이 그에게는 얼마나 큰 시련이었겠으며, 부당하게 다가오는 부패한 권력의 힘 앞에서 어떻게 숨을 쉴 수가 있었겠습니까? 자신을 압도하는 그런 시련이 닥치면 사람들은 대부분 인격이 파괴되고 절망에 빠지고 말 것입니다. 그러나 넬슨 만델라는 오히려 그 시련을 성숙의 계기로 삼았고 악한 상황도 선을 만드는 계기가 될 수도 있다는 것을 보여주었지요. 그렇습니다. 우리는 세상을 살아가면서 어차피 원치 않은 시련을 만날 수밖에 없습니다. 이러한 시련을 단지 어쩔 수 없는 것으로 포기하고 마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통해 하느님께로 나아가고 더 성숙할 수 있는 계기를 만드는 것, 이것이 불완전한 세상을 사는 지혜로운 모습일 것입니다. 현재 여러분에게 닥친 어려움이 하느님을 만나고, 성숙할 수 있는 은총의 시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조은일2008.07.15
![[교회사 속 세계 공의회 2부] 11. 교회헌장(상)](//cpbc.co.kr/CMS/newspaper/2012/03/rc/408241_1.2_titleImage_1.jpg)
[교회사 속 세계 공의회 2부] 11. 교회헌장(상)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이며 하느님 백성'교회에 관한 교의 헌장' 「인류의 빛(Lumen Gentium)」(이하 교회헌장)은 '현대 세계의 교회에 관한 사목 헌장' 「기쁨과 희망(Gaudium et Spes)」과 함께 제2차 바티칸 공의회 문헌들 가운데 가장 중요한 문헌으로 꼽힙니다. 준비 단계부터 많은 논란을 일으켰던 교회헌장은 열띤 논쟁과 여러 차례 수정을 거쳐 제3회기 마지막 날인 1964년 11월 21일 압도적 지지(찬성 2151, 반대 5)로 통과돼 공포됐습니다. 헌장은 전체 8장 69항으로 이뤄져 있습니다. 제1장은 '교회의 신비'에 관해 이야기합니다(1~8항). 교회는 신비입니다. 교회는 인간들로 이뤄져 있지만 또한 신적 기원을 지니고 있고, 눈으로 볼 수 있는 가시적 조직이지만 또한 영적 공동체이기 때문입니다. 교회의 이런 신비를 잘 나타내는 것이 '그리스도의 성사' 또는 '그리스도 안의 성사'(1항)라는 표현입니다. 성사(聖事)란 한 마디로 '보이지 않는 하느님 은총을 전달해주는 볼 수 있는 표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교회를 '그리스도의 성사'라고 하는 이유는 하느님 은총이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충만히 드러났고,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 은총이 교회를 통해 드러나고 전달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그리스도의 성사인 교회는 그리스도께서 이루신 구원 사업을 세상 끝날까지 수행해야 할 사명을 지닙니다. 그것은 교회가 "하느님과 이루는 깊은 결합과 온 인류가 이루는 일치의 표징이요 도구"(1항)로서 역할을 하는 것입니다. 달리 표현하자면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세상에 오시어 시작하신 하느님 나라의 표징으로서 역할을 할 뿐 아니라 그 나라의 완성을 위해 계속 노력해 나갑니다(5항). 헌장은 교회의 신비를 설명하면서 교회를 구세사의 관점에서 이해합니다(2~4항). 교회는 세상 창조 때부터 예표됐으며, 구약 역사에서 오묘하게 준비됐습니다. 이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세상에 오시어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심으로써 볼 수 있는 공동체로 시작했습니다. 그리스도의 영이신 성령께서는 이 교회를 끊임없이 거룩하게 하시고 새롭게 하시며 그리스도와 일치를 이루도록 이끌어 주십니다. 이렇게 교회는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일치로 모인 백성"(4항)으로 나타납니다. 헌장은 이어 양 우리와 문, 양떼와 목자, 하느님의 밭, 포도나무와 가지, 그리스도의 신부, 천상 예루살렘 등 성경과 성전에 제시된 다양한 교회 표상들을 언급하면서(6항), 특별히 '그리스도의 몸'이라는 표상에 주목합니다. 사람 몸의 지체가 여럿이지만 모든 지체가 한 몸을 이루듯, 교회는 그리스도를 머리로 하고 신자들을 지체로 하는 그리스도의 몸입니다(7항). 그런 다음 헌장은 아주 의미심장한 선언을 합니다. 곧 "그리스도의 유일한 교회", "하나이고 거룩하고 보편되며 사도로부터 이어 오는 교회"가 "베드로의 후계자와 그와 친교를 이루는 주교들이 다스리고 있는 가톨릭교회 안에 존재한다"(8항)는 것입니다. 이 표현은 우리 가톨릭 신자들에게 가톨릭 신앙에 대한 정체성 혹은 자긍심을 갖도록 해줍니다. 그러나 이것이 갈라진 다른 그리스도 교회들을 배척하거나 열등하게 여기는 계기가 돼서는 안 될 것입니다. 헌장은 바로 이어 "가톨릭교회 조직 밖에서도 성화와 진리의 많은 요소가 발견되지만 그 요소들은 그리스도 교회의 고유한 선물로서 보편적 일치를 재촉하고 있다"(8항)고 밝힙니다. 말하자면 다른 그리스도 교회들에 있는 진리와 성화의 요소들을 인정하고 이를 바탕으로 그리스도 교회의 일치를 위해 노력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로써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갈라져 나간 그리스도 교회들에 대해 이전에 보였던 적대감에서 탈피해 개방성을 보이면서 교회 일치의 중요성을 간접적으로 역설하고 있는 것입니다. 헌장은 계속해서 교회가 자신의 사명을 수행하는 기본 자세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교회는 "현세의 영광을 추구하도록 세워진 것이 아니라 자신의 모범으로도 비움과 버림을 널리 전하도록 세워진 것이다"(8항). 나아가 "자기 품에 죄인들을 안고 있어 거룩하면서도 언제나 정화되어야 하는 교회는 끊임없이 참회와 쇄신을 추구한다"(8항). 제1장에서 교회의 신비에 대해 밝힌 교회헌장은 제2장에서 '하느님 백성'에 대해 이야기합니다(9~17항). '하느님 백성'이란 표현은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새로운 표현이 아닙니다. 이미 성경과 성전에 언급돼 있는 오래되고 귀중한 유산입니다. 하지만 특히 중세 이후 교계 중심의 제도교회가 강조되면서 '하느님 백성'이란 표현은 오랜 세월 실종돼 버렸습니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성경과 초대 교회 전통으로 되돌아가 '하느님 백성'이라는 표현을 되살려낸 것입니다. 물과 성령으로 새롭게 난 모든 이는 한 하느님 백성으로서 똑같은 품위와 존엄을 지닙니다. 이렇게 하느님 백성이 된 신자들은 똑같이 그리스도의 사제직을 수행합니다. 헌장은 이를 '보편 사제직'이라고 부릅니다. 신자들의 보편 사제직은 사제들의 직무 사제직과 "정도만이 아니라 본질에서 다르기는 하지만…그리스도의 유일한 사제직에 참여하고 있다"(10항)고 헌장은 밝힙니다. '본질에서 다르다'는 표현은 보편 사제직과 직무 사제직이 품위나 존엄함에서 다르다기보다는 수행하는 사제직의 성격에서 다르다는 것으로 이해해야 한다는 것이 학자들 견해입니다. 헌장은 또 사제만이 아니라 신자들도 예언자직에도 참여한다는 점을 강조합니다. 신자들은 "특히 믿음과 사랑의 생활로 그리스도께 대한 생생한 증거를 널리 전함"(12항)으로써 예언자직에 참여한다는 것입니다. 하느님 백성에 관한 2장에서 특별히 주목할 것은 "모든 이가 하느님 백성을 이루도록 불린다"(13항)는 사실입니다. 세례를 받은 가톨릭 신자는 말할 것도 없고 가톨릭 신자가 되고자 하는 예비신자와 비가톨릭 그리스도인까지도 하느님 백성인 교회에 결합돼 있다고 헌장은 천명합니다(14~15항). 나아가 그리스도인은 아니지만 같은 창조주 하느님을 고백하는 이들 곧 유다교인이나 무슬림들, 또 진실한 마음으로 하느님을 찾고 양심의 명령을 통하여 알게 된 하느님을 실천하고자 노력하는 사람들과 하느님을 분명하게 알지 못하지만 하느님 은총으로 바른 생활을 하려고 노력하는 사람들에게도 구원이 열려 있다고 헌장은 밝힙니다. "그들이 지닌 좋은 것, 참된 것은 무엇이든지 다 교회는 복음의 준비로 여기기" 때문입니다(16항). 요컨대 이 가르침으로 공의회는 '가톨릭교회 밖에서는 구원이 없다'는 이전 입장에서 벗어나 하느님 구원이 모든 사람에게 열려 있음을 천명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점은 이제 하느님 백성인 교회에게는 모든 사람에게 복음을 선포하고 하느님 자녀로 삼는 선교 활동을 더욱 촉진하는 자극이 됩니다. 이창훈 기자 changhl@pbc.co.kr조은일2012.03.13
[생활속의 복음] 연중 제21주일-신부님께서는 하느님을 만난 적이 있으신가요?이기양 신부(서울대교구 10지구장 겸 공동사목 오금동본당 주임)"신부님께서는 하느님을 만나신 적이 있으신가요?" "그래, 나는 하느님을 만난 적이 있고, 하느님이 계신다는 것을 확신하고 있단다. 너도 내가 만난 하느님을 알게 되기 바란다." 한 초등학생과 저와의 어느 날의 대화 한 토막입니다. 산을 넘으면 또 하나의 산이 가로막던 청년시절, 신부가 되고자 마음을 먹고 신학생으로 산 지가 7년이 지났는데도 성직자로서 평생을 하느님께 헌신하며 살 자신이 없었습니다. 그로부터 2년간 방황의 시간을 뒤로하고 대학원으로 복학을 했고, 얼마 지나지 않아 부제품을 위한 피정이 시작됐습니다. 성직의 길을 가든지 아니면 그 길을 포기하고 세상으로 나오든지 결정을 내려야 했던 30일간 침묵피정이었습니다.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그렇게까지 기도한 적은 없었던 것 같습니다. 밥 먹고 잠자는 기본 시간 외에 하루에 6~7시간씩 매일 무릎 꿇고 저의 길을 알려달라고 매달렸습니다. 그렇게 18일이 지나자 무릎에 이상이 생겨서 더 이상 피정을 할 수가 없었고 큰 수술을 앞두게 됐습니다. 그 정도 노력을 했으면 할 만큼 했다는 생각이 들면서 미래에 대한 결정에서 자유로워졌지만 끝까지 피정을 마쳐야 한다는 지도신부에게는 가시 돋친 말밖에는 안 나왔습니다. 이렇게 혼란 속에 반항하면서 피정이 거의 끝나갈 무렵이었습니다. 어느 날 성경을 읽는데 갑자기 눈앞이 확 트이는 것이었습니다. 성경 구절이 환히 비치면서 하느님의 현존이 순간 온 몸으로 느껴졌습니다. 그리고 필름이 한꺼번에 돌아가듯이 나의 지나온 인생이 처음부터 펼쳐지는데 눈물이 그치지 않고 쏟아졌습니다. 방황하고 다녔던 지난 모든 순간순간이 내가 결정하고 내가 선택하며 살았다고 생각했는데 아니었습니다. 그 어느 한 순간도 주님께서 함께 하지 않은 순간이 없었습니다. 하느님께서 항상 나와 함께 하셨다는 것을 깨닫는 순간 지나온 삶의 여정이 생생하게 눈앞에 펼쳐졌습니다. 하느님 앞에 내가 너무나 큰 죄인이라는 것이 절절히 느껴지면서 베풀어주신 하느님의 은혜에 하염없이 눈물이 쏟아져 내렸습니다. 그리고 저의 길은 명백해졌고, 과거의 불안과 어둠은 새로운 희망으로 바뀌었습니다. 저는 바오로 사도의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사시는 것입니다"(갈라 2,20)는 말씀을 늘 마음 깊이 새겨 넣었습니다. 바오로 사도가 고백했듯이 제 삶을 끌어가시는 분은 언제나 주님이십니다. 하느님을 체험한 그 순간 모든 것이 깨달아지며 퉁퉁 부어서 수술 날짜를 잡았던 무릎의 상처 또한 놀랍게도 자연 치료가 되어 지금까지도 수술 한 번 안 하고 잘 다니고 있습니다. 고통과 시련의 시간이 은총과 성숙의 시간이었음을 온몸으로 체험할 수가 있었습니다. 그 이후 주님은 저에게 모든 것이 되었습니다. 어렵고 힘들 때면 그때의 체험을 되새기면서 다시 정화의 길, 그리고 성숙의 계기로 삼곤 합니다. 바오로 사도처럼 저에게 있어서 예수님은 '주님'이십니다. 오늘 복음에서 베드로는 예수님을 깊이 만났습니다. "그러면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마태 16,15) "스승님은 살아 계신 하느님의 아드님 그리스도이십니다"(마태 16,16). 베드로가 대답합니다. 제자의 답변에 기뻐하시며 예수님께서 말씀하시지요. "시몬 바르요나야, 너는 행복하다! 살과 피가 아니라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그것을 너에게 알려 주셨기 때문이다"(마태 16,17). 이때부터 베드로에게 예수님에 대한 믿음이 굳게 자리 잡게 됩니다. 예수님께 충성도 하고 배반도 하며 회개와 순교의 삶을 이어간 베드로를 있게 한 힘은 바로 오늘의 체험이었습니다. 베드로 사도의 이 체험이 저에게 이어졌고 저 역시 여러분에게 주님은 살아계신 분이라고 증언하고 있는 것입니다. 자, 그러면 여러분에게 예수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저는 여러분이 베드로 사도가 체험했고 바오로 사도가 체험했으며 또 제가 체험했던 하느님을 알게 되기를 바랍니다. 하느님을 아는 순간 여러분이 있는 그 공간은 영원으로 열리며 바로 하늘나라로 바뀌게 될 것입니다. 조은일2008.08.19
[출판]선교, 그 축복의 길- 가장 좋은 선교는 예수님처럼 복음 전할 일꾼 선발 양성 파견이재을 신부, 소공동체 모임 사목체험과 단상 담아 선교, 그 축복의 길(이재을 지음/으뜸사람/9000원) '사랑방 소공동체'로 복음선포 일꾼을 양성하는 데 힘써 온 이재을(서울대교구 공덕동본당 주임)신부가 펴낸 책이다. 인터넷 카페 '사랑방천주교 사랑나눔! 행복배가!'(http://cafe.daum.net/H-caritas)에 올린 글을 한 권의 책으로 엮었다. 사랑방 소공동체는 이 신부가 만든 소공동체 모임이다. 이 신부는 26년간 여러 본당에서 소공동체 운동, 성경 생활화와 공부, 봉사자 양성 교육, 구역ㆍ반 조직, 청년 공동체 등 다양한 사목을 시도해왔다. 물론 모두 성공했던 것만은 아니다. 각 세대와 계층, 현대 문화와 환경을 적절하게 아우르고, 새로운 사목과 선교 방법을 마련하는 데 한계를 느끼기도 했다. 이 신부는 해법을 '예수님의 복음 선포 활동과 방법'에서 찾았다. 홀로 활동하지 않으시고 제자들을 사도로 삼아 그들과 함께 복음을 전하신 예수님 모습에서 교회의 미래 선교방법을 찾은 것이다. 이 신부는 책 머리말에서 "오늘날 사회 안에서의 교회의 복음 선포 또한 예수님이 하신 것처럼, 하느님 나라 복음을 선포할 수 있는 사람들을 선발하고 그들을 양성하고 파견함으로써 이뤄질 수 있을 것이다"고 했다. △주님을 따라 걷는 길 △예수님의 계산법 △까치의 '떠남' 그리고 △이불의 고마움, 그 겸손 등으로 구성된 책은 이 신부의 사목 체험과 단상을 담고 있다. 이 신부는 "의미 있는 복음의 삶을 살고자 하는 이들에게 작게나마 용기를 주고자 사목 현장에서 쓴 글"이라며 "복음 선포의 삶을 사는 이들이 많아져 복음의 기쁨이 널리 전해지기를 바라는 마음이다"고 했다. 박수정 기자 조은일2013.07.16
[평화화랑] 이춘복, 이승희 개인전 서양화가 이승희(61)씨와 한국화가 이춘복(마리아, 64, 서울 오류동본당)씨는 10~16일 서울 명동 평화화랑 제1ㆍ2전시실에서 개인전을 갖는다. ▨이춘복 5번째 '빛 중의 빛-하느님 아버지'전 요한묵시록 4장과 8장을 조형적으로 표현한 5번째 개인전이다. 알파이며 오메가인 주님을 빛으로 묘사, 천상의 모습을 형상화하는 데 주력했다. 성경을 읽고 깊이 묵상하는 가운데 삼위일체와 성모, 열두 사도, 대천사와 천사들, 천상 가족을 떠올렸고 성령의 도움과 기도로 붓을 들었다. 이씨는 당뇨합병증으로 눈 초점이 잘 맞지 않고 귀도 잘 들리지 않는 시련 속에서 몇 번이나 포기하려고 하다가 주님 은총으로 다시 붓을 움직였다. 시련 중에도 희망을 버리지 않고 기도하는 이들, 하느님 자비에 감사하는 이들을 통해 아버지 현존에 가까이 다가가 함께 공감하는 장으로 5년 만에 전시회를 마련했다. 출품작 38점은 '영적 상처 치유' '기도' '빛 중의 빛' 등 다섯개 소주제로 분류했다. 마침 하느님 자비주일(7일)을 지내는 시점이라 공감대가 더 클 것으로 기대된다. ▨이승희 10번째 '꽃' 주제전 이승희 작가는 '꽃'을 10번째 개인전 주제로 삼았다. 그만큼 꽃에 대한 애정이 깊다. 양귀비, 솔로몬, 카사블랑카… 낯선 꽃이름이 술술 흘러나오는 게 하루이틀 된 공부가 아니다. 그렇다고 이름 있는 꽃만 그리는 것도 아니다. 하룻밤만 피고 지는 달맞이꽃도 작가에겐 최고 소재다. "꽃만 그리는 게 얼마나 좋은지 지루할 틈이 없다"는 작가는 "내 그림이 조금이라도 쉬어갈 수 있는 일상의 쉼표가 됐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오세택 기자조은일2013.04.02
![[출판]이달의 교계잡지](//cpbc.co.kr/CMS/newspaper/2013/04/rc/446019_1.1_titleImage_1.jpg)
[출판]이달의 교계잡지▨가톨릭 디다케 '나를 불러주신 주님'을 특집 주제로 △나의 수도 성소 이야기 △'예신'을 아시나요? △각 교구 성소주일 행사 안내를 실었다. '끄덕이의 전례전례'에서는 미사 때 앉았다 일어났다 하는 이유를 알아봤다. '신앙의 뼈대 공의회 바로 맞추기'에서는 제1차 니케아 공의회를 다뤘다.(서울대교구 청소년국/3500원) ▨가톨릭 비타꼰 '감사합니다 잊지 않겠습니다'에서는 모지웅(스페인, 살레시오회) 신부를 인터뷰했고 '이승환 기자와 함께 떠나는 신앙여행'에선 수원교구 은이성지를 찾아갔다. 비타꼰 인터뷰에서는 나로호 발사체 체계사업단 선병찬(프란치스코) 박사를 만나 나로호 발사와 관련된 이야기를 들었다.(마리아의 아들수도회/4000원) ▨경향잡지 경향 돋보기에서는 '현대사회와 고독'을 주제로 △현대인은 왜 고독한가 △사람 사이에 있는 섬, 그곳을 왕래하자 △홀로 사는 이웃을 위한 교회의 역할을 게재했다. 21세기 새로운 칠죄종에서는 '마약거래와 복용'을 다뤘고, 그리스도교 철학자에서는 스콜라철학의 선구자 요하네스 스코투스 에리우게나를 소개했다.(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3300원) ▨교회와 역사 연재 중인 '사목서한으로 읽는 한국교회사'에서는 르 메르 신부 사목 보고서를 소개하며 1866년 대박해를 피해 신앙을 버리고 살다가, 하느님께 돌아온 탕아처럼 기적적으로 신앙을 되찾게 된 이들의 이야기를 실었다. 한국교회사연구소 고문 조광(이냐시오) 고려대 명예교수는 교구사 및 본당사 편찬자들께 드리는 제언을 기고했다.(한국교회사연구소/3000원) ▨그물 포콜라레운동 설립자 키아라 루빅의 선종 5주기를 특집으로 다루며 이해인 수녀의 추모시도 실었다. 포콜라레운동의 일치 정신을 실천하는 대중운동 '새인류 신호등'을 소개했고, 지난 겨울 이탈리아에서 열린 포콜라레운동 여자 청소년 모임에 참가한 이혜민(중3)양의 참가기 '형제, 또 다른 나'를 실었다.(마리아사업회/3000원) ▨레지오 마리애 레지오 영성으로 △어머니, 영신적인 모성애를 지니도록 도와주소서 △교회일치운동에 투신해야 △신천지가 가톨릭을 넘보고 있다 △교회 선교에 있어 사제와 평신도를 실었다. '걷고 기도하고 사랑하라!'에서는 당고개와 새남터 순교성지를 찾아갔다. 복음살이에서는 창조질서 회복을 위한 신앙인의 노력을 살펴봤다.(한국레지오마리애협의회/비매품) ▨말씀지기 아침뜨락에서는 남상근(서울대교구) 신부가 '기적은 멀지 않다'는 제목의 기고를 통해 일상 속에 숨겨진 하느님 섭리의 아름다움을 일깨웠다. 영성에세이에서는 △부활 신앙을 향한 마리아 막달레나의 여정 △부활 신앙을 향한 토마스의 여정을 다뤘다. 매일 묵상에서는 그날의 말씀과 해설을 영한대역으로 실었다.(가톨릭출판사/3000원) ▨사목정보 성소를 특집으로 △성소와 응답의 본질-현시대적 상황에서의 점검 △이 시대의 수도회 성소 △예비신학생 제도의 현황과 발전 방향 △신학교의 사제양성 시스템 △유럽교회의 성소자 감소, 한국교회는? 등을 게재했다. '문지방 위의 신앙'에서는 '냉담의 유혹, 쉬고 계십니까?'를 통해 냉담문제를 짚었다.(미래사목연구소/1만 원) ▨생활성서 특집으로 '실패학 개론'을 다루며 △나의 실패 이력서 △사울의 실패와 다윗의 성공 △실패에 대한 여덟 가지 지혜 △인간은 위대한 실패자를 실었다. 표지인물은 한준호(요한보스코) MBC 아나운서로 성가정을 꾸리며 살아가는 모습을 소개했다. 창간 30주년 특별기획 '유럽 성모발현 성지를 가다'에서는 루르드 성모성지를 찾아갔다.(생활성서사/3900원) ▨성서와함께 새로봄에서는 '함께 누리는 부활의 삶'을 주제로 서울 영등포 요셉의원에서 현관 봉사를 하는 안근수(안드레아)씨를 인터뷰했고, 정용진(청주교구) 신부에게 부활 신앙에 관해 이야기를 들었다. '창세기, 이게 궁금해요'에서는 하느님께서 아담과 하와를 왜 에덴동산에서 쫓아내셨는지를 살펴봤다.(성서와함께/3000원) ▨소년 '이런 일이 있었어요!'에서는 스스로 교황 자리에서 물러난 전임 교황 베네딕토 16세를 다뤘다. '성경 속 인물이야기'에서는 마음씨 따뜻한 효녀 룻(룻기 1-4장 참조)을 소개했고, '나의 첫 번째 성경'에서는 예수님 부활을 그림을 곁들여 설명했다. 창작동화로는 '두더지가 할아버지 농장에 오는 이유'(김향이)를 실었다.(가톨릭출판사/4000원) ▨야곱의 우물 표지 이야기 '공의회를 사는 사람들'에서는 경남 밀양에서 주민들과 함께 송전탑 건설 반대운동에 나서고 있는 최민자(아녜스)씨를 만나 밀양의 눈물을 껴안고 사는 이야기를 들었다. '교회와 사회'에서는 올해 UN이 정한 세계 물 협력의 해를 맞아 '물은 사유화할 수 없는 하느님의 선물'을 게재했다.(바오로딸/2800원) ▨참 소중한 당신 각계각층에서 보내온 창간 9주년 축하 및 격려 메시지를 실었다. 만우절로 시작하는 4월을 맞아 '만우절의 단상'을 특집으로 △보고 싶은 거짓말쟁이 어머니 △고맙다, 만우절! △양치기 아저씨 우리 아빠를 소개합니다 △제 야매(?) 선교를 고백합니다 등을 게재했다.(사단법인 미션3000/3500원) 박수정 기자조은일2013.04.02

예수 무덤 성당 지킴이 김상원 신부- 예수 무덤, 깨달음 있다면 무덤 아닌 '부활' 이스라엘 소임 자청, 광야 머물고파 2006녀부터 예루살렘 완덕의 길엔 파격이 없나 보다. 하느님의 거룩한 부르심과 자신을 찾아 이스라엘 땅 유다 광야 길을 걷고 있는 한 수도자가 있다. 그의 수행은 건너뜀도 한눈팔기도 없다. 오직 한 걸음 한 걸음 쉼없는 정진뿐이다. 고(故) 안선호 신부에 이어 한국인 두 번째 예수님 무덤 성당 지킴이로 있는 광야의 수도자 김상원(작은형제회, 예루살렘 성지관구) 신부를 만났다.예루살렘(이스라엘)=리길재기자 teotokos@pbc.co.kr브엘쉐바에서 단까지 이스라엘 전역을 도보 순례한 김상원 신부가 홀로 걸어온 광야를 배경으로 기념사진을 촬영하고 있다.▶이스라엘 성지 소임을 자청했다고 들었는데요. "1996년 작은형제회에 입회해 종신서원 피정때 이스라엘 성지에서 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광야에 머물고 싶다는 욕심이 컸습니다. 2005년 6월 사제품을 받고, 그해 10월 예루살렘 성지관구 파견을 허락받았습니다. 2006년 6월 이스라엘군이 레바논 베이루트 공항을 폭격하는 모습을 보면서 이곳에 와 지금껏 살고 있습니다." ▶광야는 어떤 곳입니까. "자신을 가장 잘 들여다 볼 수 있는 곳입니다. 광야는 기도처이며 안식처입니다. 자신을 인식하고 하느님을 느낄 수 있다면 수도자로서 가장 행복한 사람일 것입니다. 사부 프란치스코 성인은 회개 여정에서 이미 하느님을 체험하셨지만, 거기에 만족하지 않고 죽기 직전까지 자신에게 '나는 누구인가'를 질문했습니다. 남들이 가지 않지만 이전 누군가 걸었던 길 위에 서 있을 때, 사방을 둘러봐도 아무도 없고 누울 수 있는 땅 한 평을 마땅하게 찾을 수 없을 때 하느님과 제 자신의 현존을 처절히 느낍니다." ▶광야 도보 순례는 언제부터 했는지요. "성경은 단에서 브에르 세바까지를 이스라엘 땅이라고 경계합니다. 오늘날 헤르몬에서 에일랏까지이죠. 광야 도보 순례는 2007년 9월 시작해 지금까지 총 970km를 걸었습니다. 성지 관구에서는 5주간 소임 봉사를 하면 1주일 동안 쉬는데 이 시간을 이용해 걸었습니다. 일반적으로 44일 정도 소요되는 여정이지만 조금씩 나눠서 걸었기에 대략 13개월이 소요됐고, 일수로는 53일이 걸렸습니다. 덕분에 이스라엘 광야의 사계를 다 체험했죠. 하루 평균 23km 정도 걸었습니다." ▶광야 순례가 말처럼 쉽지 않을 텐데요. "이스라엘 광야는 야고보 사도의 산티아고 순례길과 달리 편의시설이 전혀 없습니다. 더 매력적이죠. 미사도구와 1인용 텐트, 1.5리터 생수 12팩, 약간의 식량을 꾸려 이틀을 걷습니다. 광야는 매우 위험한 곳입니다. 죽을 고비도 여러차례 넘겼습니다. 지진으로 갈라져 끝이 보이지 않는 협곡을 뛰어 넘기도 했고, 줄지어 선 늑대 무리가 탈 없이 지나가기를 숨죽여 엎드려 기도했습니다. 발을 헛디뎌 굴러서 정신을 잃을 때가 있었고, 물이 떨어져 절박감에 허덕이고, 발을 내디딜 수 없는 뜨거운 지열 때문에 이성을 놓을 때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광야는 경쟁적이지 않아 좋습니다. 어떤 난관도 걸으면서 다 극복할 수 있습니다. 해뜨기 전 일어나 아침미사를 봉헌하고 출발해 해넘이까지 걷다가 저녁기도하고 자는 것이 하루 일과이지만 결코 피곤하지 않은 것이 광야 생활입니다. 자연이 주는 위로가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 무덤 성당이 소임지인데…. "오늘의 예수님 무덤 성당은 어떤 의미에서 '카오스'입니다. 순례자보다 관광객이 더 많이 드나드는 장소가 됐습니다. 하지만 아귀다툼 속에서도 일치와 조화를 봅니다. 처음엔 이런 모습을 외면하려 했지만 결국 내 모습인 걸 하고 추스릅니다. 무덤 성당은 예수님 부활의 현장입니다. 혼돈 속에서 깨달음이 없으면 아직도 무덤이지만 깨달으면 곧 부활입니다." ▶이스라엘 성지 순례를 제대로 하려면 무엇을 준비해야 할까요. "성지에 대한 역사를 알면 매일 미사가 얼마나 고귀한지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지난 800여 년 동안 수많은 프란치스코회 수도자들이 이 성지를 지키기 위해 순교하고 노예살이를 했는지, 또 오늘날 성지관구 수도자들이 예수님께서 그랬던 것처럼 능욕을 당하며 이곳을 지키고 있는지 알면 이스라엘 성지 곳곳에서 거행하는 미사 전례가 얼마나 값지고 감동적인지 느끼게 될 것입니다. 지금도 이곳 수도자들은 일거수 일투족 감시와 통제를 받고 있습니다. 미사 중 무슬림들이 와서 침뱉고 발길질 해도 다 견디며 지켜내고 있는 성지입니다. 이스라엘 성지에서 미사를 봉헌한다는 것은 주권 선포와 같은 행위입니다. 그래서 순례를 오실 때 반드시 성지에 대한 주인의식을 무장해 오시길 당부드립니다. 또 성경이 최고 안내서입니다. 누구에게나 은총의 장소이지만 머물고 쉴 수 있는 여백을 갖고 순례할 것을 당부드립니다."조은일2013.03.27
 죄와 벌](//cpbc.co.kr/CMS/newspaper/2011/07/rc/383956_1.2_titleImage_1.jpg)
[재미있는 가톨릭 교리](8) 죄와 벌일곱 번 죄도 여덟 번 용서하시니우리는 성경에서 끊임없이 잘못을 저지르는 인간의 죄와 그런 인간을 변함없이 용서하시는 하느님 사랑을 만난다. 이는 우리 삶의 역사에서도 재현된다. 창세기 태고사를 중심으로 인간의 죄와 하느님 사랑에 대해 살펴보자. ▶창세기에 나타난 인간의 죄 창세기 3장에 최초의 사람과 그 아내가 저지른 첫 번째 범죄 이야기가 나온다. 사람과 그 아내는 뱀의 유혹에 넘어가 하느님께서 금하신, 선과 악을 알게 하는 나무 열매를 따먹어 결국 에덴동산에서 쫓겨나는 벌을 받는다. 하느님께서 선악과만은 따먹어서는 안 된다고 하신 것은 인간이 무엇이든 자유의지대로 다 할 수 있어도 하느님 명령만큼은 꼭 지켜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창세기 4장에 형 카인이 동생 아벨을 죽인 두 번째 범죄 이야기가 나온다. 형 카인은 하느님께서 양치기인 아벨의 제물을 더 굽어보시자 아벨을 시기하여 살해한다. 그래서 카인은 세상을 떠돌며 헤매는 삶을 벌로 받는다. 하느님은 카인에게 다른 이들의 살해에서 자신의 생명을 보호받을 표를 찍어 주신다. 이 표는 엄청난 죄를 지은 카인을 여전히 돌보시고 보호해 주시는 사랑과 자비, 용서의 표이다. 창세기 11장은 사람들이 "성읍을 세우고 꼭대기가 하늘까지 닿는" 바벨탑을 쌓았다고 이야기한다. 인간이 자신의 한계를 넘어 하느님처럼 되려는 교만한 자세를 가졌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는 인류 공동체 전체의 죄상(罪狀)을 말한다. 하느님은 세상에 사람을 만드신 것을 후회하시며 마음 아파하셨고, 홍수로 타락한 인류를 쓸어버리셨다. 또한 그들의 말을 뒤섞어 놓으셨다. 하지만 죄와 벌을 이야기하는 성경 말씀은 언제나 하느님의 자비와 용서를 통해 이뤄지는 구원과 함께 전개된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 창세기 태고사를 읽을 때 다음과 같은 사실에 유의해야 한다. 첫째, 사실을 있는 그대로 전하는 역사서가 아니라 이스라엘 백성들이 자신들의 죄를 성찰하기 위해 최초의 인간과 인간 공동체가 지은 죄를 설화양식을 빌어 기록했다. 둘째, 인간의 죄를 죄 자체로 이해할 것이 아니라 언제나 하느님 구원과의 상관관계에서 이해해야 한다. 셋째, 태고사 이야기를 잘못 이해하면 마치 인간 죄의 원인이 인간을 창조하신 하느님께 있는 것으로 오해할 수 있지만, 실상 인간 죄의 원인은 인간 자신에게 있다. 인간은 자유롭게 선택하고 실행할 수 있는 능력을 하느님께 부여받았으므로 자신이 저지른 죄에 전적으로 책임을 져야 한다. ▶죄에 대한 가르침 죄는 하느님과 자기 자신은 물론 이웃과 인간 공동체를 거스르는 삼중적 차원을 갖는다. 죄는 우선 원죄와 본죄로 구분한다. 원죄는 최초의 사람과 그 아내가 지은 죄가 인간 본성에 영향을 미쳐 모든 인류에게 전해진 죄라고 이해된다. 반면, 본죄는 자기 자신이 동의해 저지른 죄이다. 아울러 대죄는 인간이 완전한 인식과 자유의지의 동의로 하느님 뜻과 반대되는 중대한 행위를 하는 것이다. 소죄는 일반적으로 하느님 법에 대한 불완전한 인식이나 불완전한 동의로 불순종한 것이다. 이웃에게 돌이킬 수 없는 잘못을 저지르고, 하느님을 배반한 대죄를 범한 사람은 고해성사 때 자세히 고백해야 한다. 대죄를 용서받으려면 반드시 고해성사를 봐야 한다. 하지만 소죄는 하느님 은총을 잃지 않을 정도의 죄, 즉 용서받을 수 있는 가벼운 죄이므로 반드시 고백해야 하는 것은 아니다. 참회나 영성체로도 용서받을 수 있다. ▶인간의 회개와 하느님 은총 인간은 누구나 잘못을 저지르고 죄를 지으며 살아간다. 그러나 죽을죄를 범한 경우라도 '회개'한다면 다시금 하느님과 올바른 관계를 맺을 수 있다. 회개란 하느님과 그분 뜻에서 벗어나 살던 사람이 죄를 뉘우치고 하느님께 돌아가는 행위다. 인간 영육의 차원, 내외적 차원 모두를 포함하는 전인격적이고 전존재적 행위다. 그런데 인간이 회개하려면 먼저 하느님 은총이 필요하기에 용서를 청할 때 회개의 은총도 함께 청해야 한다. 회개는 하느님 선물이다. 이 선물은 하느님 은총을 받을 준비가 돼 있는, 그분 은총에 마음이 열려 있는 이들에게만 주어진다. 인간은 죄를 지었더라도 다시금 회개하는 삶을 통해 참생명의 삶을 누릴 수 있다. 제공=서울대교구 사목국 조은일2011.07.19
![[재미있는 가톨릭 교리 ] (7) 하느님의 창조](//cpbc.co.kr/CMS/newspaper/2011/07/rc/383176_1.1_titleImage_1.jpg)
[재미있는 가톨릭 교리 ] (7) 하느님의 창조손수 만드신 것이 참 좋았다. ▶창조 이야기의 형성과 기록 과정 한처음에 하느님께서 세상과 인간을 창조하셨다는 사실은 오랜 시간 입에서 입으로 전해졌다. 이스라엘 백성은 하느님의 창조 사건과 창조 전승을 당시 근동에서 회자되던 설화 내지 신화를 빌어 기록했다. 여기서 우리는 두 가지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첫째, 이스라엘 백성이 창조 이야기를 설화 양식을 빌려 기록했다고 해서 사실이 아닌 허구라고 말할 수 없다. 둘째, 설화가 객관적 사실에 기반을 두고 있지만 역사의 사실을 있는 그대로 쓴 것은 아니기에 창조 이야기에 표현된 그대로 하느님께서 우주 만물을 창조하셨다고 생각해서도 안 된다. 이스라엘 백성은 하느님께서 세상과 인간을 창조하신 이야기를 과학적으로 기술하지 않고, 창조주 하느님에 대한 그들의 인식과 체험을 기초로 기록했다. 이는 이스라엘 백성이 하느님의 창조 업적을 기리기 위해 쓴 찬미 노래이며, 그들의 믿음을 담은 신앙 고백이다. ▶창세기 1~2장에 나타난 하느님의 창조 1우주 만물의 창조주 하느님 "한처음에 하느님께서 하늘과 땅을 창조하셨다"(창세 1,1)고 선포하면서, 이스라엘의 하느님께서 바로 우주 만물을 지어내신 창조주 하느님이라고 고백한다. 2무(無)로부터 창조 "땅은 아직 꼴을 갖추지 못하고 비어 있었는데, 어둠이 심연을 덮고 하느님의 영이 그 물 위를 감돌고 있었다"(창세 1,2)는 말씀에서 드러나듯 하느님께서는 무(無)에서 세상과 인간을 창조하셨다. 3말씀으로 창조 하느님께서는 하늘과 땅을 말씀으로 창조하셨다. 이는 창조주 하느님의 주권을 여실히 드러낸다. 4사람을 하느님 모상(模像)으로 창조 창조 이야기가 기록될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은 임금만이 하느님을 닮은 모상이라 여겼기에, 모든 인간이 하느님을 닮은 모상이라는 성경 말씀은 놀랍기 그지없는 것이었다. 5강복과 사명 부여 하느님께서는 사람을 창조하신 다음 "그들에게 복을 내리며 말씀하셨다.'자식을 많이 낳고 번성하여 땅을 가득 채우고 지배하여라. 그리고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땅을 기어 다니는 온갖 생물을 다스려라'"(창세 1,28). 하느님은 사람에게 다른 모든 창조물을 다스릴 권한을 부여하셨다. 하지만 이는 우리 마음대로 자연을 파괴하거나 착취하라는 뜻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인간과 세상을 사랑으로 보살피듯 자연을 잘 가꾸고 돌보라는 말씀이다. 6하느님 보시기에 좋았던 세상 하느님께서는 세상과 사람을 창조하신 후 손수 만드신 모든 것을 보면서 참 좋게 여기셨다. 창조 이야기는 "하느님께서 보시니 손수 만드신 모든 것이 참 좋았다"(창세 1,31)는 사실을 강조한다. 7쉼으로 마무리 "하느님께서는 하시던 일을 이렛날에 다 이루셨다. 그분께서는 하시던 일을 모두 마치시고 이렛날에 쉬셨다"(창세 2,2). 일곱째 날은 하느님께서 세상과 인간의 창조를 완성하신 날이며 쉬신 날이다. 전례적으로는 이렛날인 주일이 하느님을 경배하고 흠숭하는 거룩한 날이어야 한다는 사실을 강조한다. ▶창조와 진화에 대한 올바른 이해 세상과 인간의 기원에 관한 논쟁은 흔히 창조론과 진화론 논쟁으로 대변된다. 하지만 우리는 창세기의 창조 이야기를 이해할 때 두 가지 사실을 염두에 둬야 한다. 첫째, 창조 이야기는 과학적 차원에서 기술한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우주 만물과 인간의 창조주라는 신앙의 진리를 전하려고 기록했다는 사실이다. 둘째, 이스라엘 백성들은 '한처음의 창조'라는 과거 사실 자체를 전하기보다 '이집트 탈출'을 통해 하느님의 구원을 체험하고 시나이 산에서 하느님과 계약을 맺은 백성으로서 살아가는 현재를 '창조'라는 과거 역사에 비춰 성찰하면서 현재 역사의 올바른 의미를 밝히기 위해 창조 이야기를 기록했다는 사실이다. ▶창조된 인간 하느님의 창조물 중 으뜸이 바로 사람이다. 사람은 하느님의 모상대로 창조됐고, 하느님, 자연, 동료 인간과 관계를 맺고 노동을 하면서 살아간다. 1)하느님 모상(模像, Imago Dei)으로 창조된 존재 인간은 하느님과 비슷한 모습, 곧 하느님의 모상으로 창조됐다. 이에 인간은 고유성, 유일성, 불가침의 인격성, 평등성을 갖는다. 2)하느님, 동료 인간, 자연과 관계 속에 살아가는 존재 성경은 하느님과 비슷한 모습으로, 남자와 여자로, 세상 만물을 다스리는 존재로 창조된 인간이 하느님, 자연, 동료 인간과 협력자 관계를 맺으며 살아간다고 말한다. 이처럼 인간은 공동체 안에서 태어나고 성장하며 완성되는 존재인 것이다. 3)노동하는 존재 하느님은 인간에게 에덴동산을 돌보는 노동 사명을 맡기셨다. 인간은 자기가 맡은 임무를 충실히 수행하는 노동을 통해 하느님의 창조 사업에 적극적으로 동참하고 협력한다. 제공=서울대교구 사목국조은일2011.07.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