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창훈 소장의 사도행전 이야기] (39) 피시디아의 안티오키아 선교(13,13-52) <하>](//cpbc.co.kr/CMS/newspaper/2019/11/rc/766636_1.0_titleImage_1.jpg)
[이창훈 소장의 사도행전 이야기] (39) 피시디아의 안티오키아 선교(13,13-52) 유다인들의 박해에도 성령의 기쁨 가득 찬 주님의 일꾼들바오로와 바르나바는 피시디아의 안티오키아에서 유다인들에게 쫓겨나면서도 기쁨과 성령으로 가득 차 이코니온으로 간다. 사진은 피시디아의 안티오키아 유적.바오로가 피시디아의 안티오키아 회당에서 설교한 후 회중의 반응과 그 후속 상황에 대해 사도행전 저자가 전하는 내용을 살펴봅니다.(13,42-52) “그들(바오로 일행)이 회당에서 나올 때, 사람들은 다음 안식일에도 이러한 말씀을 해 달라고 청하였다.”(13,42) 이로 미루어 회중은 바오로의 설교에 상당히 호감을 갖고 있었다고 짐작할 수 있습니다. 실제로 회중이 흩어진 후에 많은 유다인과 유다교로 개종하여 하느님을 섬기는 이들이 바오로 일행을 따라왔고, 바오로와 바르나바는 그들에게 “하느님의 은총에 계속 충실하라”고 권하지요. 그다음 안식일에는 “주님의 말씀을 들으려고” 도시 사람들이 거의 다 모여듭니다. 그 군중을 보고 유다인들은 시기심으로 가득 차 “모독하는 말을 하며 바오로의 말을 반박”하지요.(13,44-45) 이 구절을 볼 때 유다인들 가운데 두 부류가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바오로의 설교에 호감을 갖고 주님 말씀을 들으려는 이들과 바오로 일행에게 반감을 갖고 있는 이들입니다. 반대자들은 왜 반감을 갖게 됐을까요? 우선 이들은 도시와 회당에서 기득권 세력이었는데 많은 사람이 자기들 대신 바오로에게 “주님의 말씀”을 들으려고 하자 시기심으로 가득 차 반대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또 이들은 자기들이 율법을 철저히 지킴으로써 구원을 받는다고 여겼고 그렇게 사람들을 가르쳤는데, 바오로는 부활하신 예수님, 곧 주님께 대한 믿음으로 구원을 얻게 된다고 함으로써 자기들의 가르침을 정면으로 거슬렀습니다. 결국, 한편으로는 시기심에서, 다른 한편으로는 엄격한 율법주의를 고수하는 자기들의 신념을 거스른 데 대한 분노에서 유다인들은 반감을 갖고 반박했을 것입니다. 그러자 바오로와 바르나바는 담대히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말씀을 먼저 여러분에게 전해야만 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이 그것을 배척하고 영원한 생명을 받기에 스스로 합당하지 못하다고 판단하니, 이제 우리는 다른 민족들에게 돌아섭니다.”(13,46) 하느님의 말씀을 유다인들에게 먼저 전해야만 했다는 말은 열두 사도를 파견하시면서 “이스라엘 집안의 길 잃은 양들에게 가라”(마태 10,6)고 하신, 그리고 마귀 들린 자기 딸에게서 마귀를 쫓아내 달라는 시리아 페니키아 여인에게 “먼저 자녀들을 배불리 먹여야 한다”(마르 7,27)고 하신 예수님 말씀을 떠올리게 합니다. 또 이 ‘사도행전 이야기’를 통해 지금까지 살펴본 과정에서 알 수 있듯이, 사도들은 먼저 유다인들에게 복음을 선포하지요. 그러다가 점차 이방인들에게도 복음을 선포하기 시작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사람을 차별하지 않으시고, 어떤 민족에서건 당신을 경외하며 의로운 일을 하는 사람은 다 받아주실” 뿐 아니라 말씀을 받아들이는 이방인들에게도 똑같이 “성령의 선물이 쏟아져 내린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이를 상징적으로 드러내는 일화가 베드로 사도가 본 환시(사도 10,9-16)와 코르넬리우스 집안사람들에게 성령이 내린 일(10,44-45)입니다. 바오로와 바르나바의 피시디아의 안티오키아 선교 활동은 이 과정을 그대로 따르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바오로 사도가 로마 신자들에게 보낸 서간에서 “복음은 먼저 유다인에게 그리고 그리스인에게까지, 믿는 사람이면 누구에게나 구원을 가져다주는 하느님 힘”(로마 1,16)이라고 말한 것도 같은 맥락입니다. 이어서 바오로와 바르나바는 이렇게 덧붙입니다. “사실 주님께서 우리에게 이렇게 명령하셨습니다. ‘땅끝까지 구원을 가져다주도록 내가 너를 다른 민족들의 빛으로 세웠다.’”(13,57) 이사야 예언서 49장 6절을 인용한 이 성경 말씀은 원래는 예수님께 적용되는 말씀이었습니다. 그런데 바오로와 바르나바는 이를 주님께서 파견하신 이들, 곧 자신들에게까지 적용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를 통해서 두 사람은 유다인을 넘어서서 이방인을 향한 선교를 다시 확인하고 있다고 하겠습니다. 더군다나 두 사람은 안티오키아 교회로부터 공적으로 파견을 받은 이들입니다. 두 사람이 하는 이런 말에 다른 민족 사람들은 기뻐하며 주님 말씀을 찬양합니다. 또 “영원한 생명을 얻도록 정해진” 사람들은 모두 믿게 되었고, 주님의 말씀이 그 지방에 두루 퍼집니다.(13,48-49) 영원한 생명을 얻도록 정해졌다는 표현을 두고 이른바 ‘예정설(豫定說)’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닌가 할 수 있지만, 학자들은 유다교에서 흔히 사용하는 일종의 문학적 표현일 따름이라고 풀이합니다. 그러나 유다인들은 “하느님을 섬기는” 귀부인들과 그 도시의 유지들을 선동하여 바오로와 바르나바를 박해하게 하고 그 지방에서 그들을 쫓아냅니다. 바오로 일행은 발의 먼지를 털어 버리고 나서 이코니온으로 갑니다. “제자들은 기쁨과 성령으로 가득 차 있었다”고 사도행전 저자는 기록합니다.(13,50-51) 생각해봅시다1. 피시디아의 안티오키아에 사는 유다인들이 시기심으로 가득 차 바오로 일행을 쫓아낸 것은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에게도 경고가 됩니다. 시기심은 눈을 가려 올바른 판단을 하지 못하게 만든다는 것입니다. 이런 시기심은 또한 기득권을 잃지 않으려는 집착에서 비롯합니다. 시기심과 집착에 사로잡히지 않으려면 자기를 비우고 진실에 귀를 기울이려고 끊임없이 노력해야 합니다. 나약함을 지닌 우리 인간의 힘만으로는 쉽지 않습니다. 우리에게는 성령의 도움이 필요합니다. 자신에게 갇혀 있지 말고 더 나은 선에 마음을 열 수 있도록 도와달라고 성령께 도움을 청합시다. 2. 바오로와 바르나바가 피시디아의 안티오키아에서 유다인들에게 쫓겨나면서도 “기쁨과 성령으로 가득 차 있었다”는 대목 또한 성찰할 필요가 있습니다. 계획했던 또는 추진했던 일이 순조롭게 진행되거나 풀릴 때 사람들은 만족스러워하고 기뻐합니다. 반면에 뜻대로 되지 않을 때나 반대에 부딪혀 일을 그르치게 될 때는 기뻐하기보다는 오히려 분노하거나 좌절합니다. ‘하느님의 일’을 한다고 노력했는데 엇나가게 될 경우 더욱 그렇습니다. 하지만 ‘하느님의 일꾼’들이라면 그럴 때도 기뻐할 수 있음을 바오로와 바르나바 두 사도는 보여주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산상설교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사람들이 나 때문에 너희를 모욕하고 박해하며, 너희를 거슬러 거짓으로 온갖 사악한 말을 하면, 너희는 행복하다. 기뻐하고 즐거워하여라.”(마태 5,11-12) “인간이 마음으로 앞길을 계획하여도 그의 발걸음을 이끄시는 분은 주님이시다”(잠언 16,9)라는 말씀을 따라, 해야 할 일을 다 하면서도 주님께서 이끄시는 대로 맡겨드린다는 자세를 지닌다면, 우리는 역경에서도 기쁨과 성령으로 가득 찰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 순교 선조들은 이미 그렇게 사신 분들입니다. 한국평협 평신도사도직연구소장 alfonso84@hanmail.necpbc2019.11.13

다시 시작하는 캄보디아 교회의 ‘작은 주춧돌’ 되어[선교지에서 온 편지] 캄보디아(하) 새로운 시작에 동참하며 - 윤대호 신부 성가 교육 받는 신자들과 함께한 필자. 1555년 캄보디아에 처음으로 복음이 전파되었습니다. 그러나 교회는 긴 시간 동안 뿌리를 내리지 못했고, 프랑스 식민통치 기간(1863~1953)을 거치면서 12만 명 정도의 교세로 성장하게 되었습니다. 킬링필드로 잘 알려진 크메르루주가 집권했던 민주 캄푸치아 시기(1975~1979)에 캄보디아 교회는 많은 것을 잃게 되었습니다. 최초이자 지금까지 마지막 캄보디아인 주교님이신 츠마 살라(Joseph Chhmar Salas) 주교님을 비롯한 수많은 성직자, 수도자, 평신도들이 순교하였습니다. 또 여러 선교사가 추방당하거나 교우들과 함께 베트남으로 탈출하였습니다. 교회 건축물은 대부분 파괴되거나 정부에 빼앗겼습니다. 11년 간의 내전 끝나고서야 미사 봉헌 가능 크메르루주가 축출되면서 이어진 만 11년 간의 내전 기간 동안 이 땅에서는 미사가 봉헌되지 못하였습니다. 내전이 끝나갈 무렵인 1990년 캄보디아 교회의 새로운 시작을 알리는 첫 미사가 봉헌되었습니다. 파리협정으로 1991년 내전이 공식적으로 종결되고, 정세 안정을 위한 유엔 잠정통치기구 (UNTAC)의 과도정부 시기(1992~1993)에 기존에 활동해오던 선교사들과 새로운 선교사들이 캄보디아로 입국하기 시작하면서 교회 재건이 시작되었습니다.다시 시작한 지 30여 년이 흘렸지만, 캄보디아 교회는 여전히 시작 단계에 머무르고 있습니다. 신자 수는 2만 명 정도로 전 국민의 0.14% 수준이며, 70여 명의 사제와 120여 명의 수도자 중 대부분은 선교사들입니다. 당장 필요한 것들인 「성경」이나 「미사 경본」 등은 이미 번역을 마쳤지만 여전히 검토해야 할 것이 많으며, 성사집과 준성사집은 계속해서 작업하고 있습니다. 선교사들은 대부분 어느 한 분야의 전문가가 아니지만 열심히 몸으로 뛰고 공부하면서 활동해 나가고 있습니다. 일례로 저와 친한 파리외방전교회의 한 프랑스인 신부는 제빵사 겸 바리스타였습니다. 지금은 캄보디아어 성사집 번역의 총책임자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그가 만들어낸 결과물들은 매우 훌륭합니다. 그는 자신이 맡은 두 개의 본당과 자신이 책임자로 있는 가톨릭대 학생기숙사를 잘 돌보고 있으며, 늦은 밤까지 공부와 번역을 하고 있습니다. 그렇게 그는 끊임없이 노력하면서 캄보디아 교회의 기반을 닦고 있습니다.캄보디아의 다른 지목구들이나 선교지들도 비슷하겠지만, 제가 알고 있는 한 프놈펜대목구에서 활동하는 선교 사제들의 삶은 끊임없는 노력의 연속입니다. 자신에게 주어진 사목적인 업무는 당연히 해내야 하고, 아직 교회가 갖추지 못한 것들을 누가 시키지 않아도 스스로 찾고, 공부하면서 만들어내는 것이 선교 사제의 삶입니다. 더욱더 넓은 시야를 가지고 계속해서 주위를 둘러보며 지금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앞으로 필요할 것이 무엇인지 찾고 준비해나가는 것, 선교사는 그런 분야의 전문가가 아닐까 싶습니다.새로운 성가 작곡하고 교회 음악도 가르쳐 저도 다시 시작하는 캄보디아 교회를 위해 저의 작은 힘을 보태고 있습니다. 새 번역에 따른 캄보디아어 미사곡을 작곡하여 보급하였고, 교황청 전교기구 한국지부와 여러 은인의 도움으로 교회음악 전용 녹음실을 만들었습니다. 지금도 새로운 성가를 작곡하고, 한국어 성가와 영어 성가를 캄보디아어로 번역해서 편곡하는 작업을 하고 있으며, 신학교에서 강사 자격으로 교회음악도 가르치고 있습니다. 본당의 일과를 마치고 난 뒤의 개인 시간을 이런 일들로 보내다 보니 피곤할 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 제게 주신 탤런트를 교회를 위해 쓸 좋은 기회라고 생각하며 감사하는 마음으로 기쁘게 일하고 있습니다.올해 하반기부터는 2년 가까이 준비한 유튜브 채널을 시작할 계획입니다. 음악을 좋아하는 캄보디아의 비신자 청년들을 대상으로 한 악기 정보 제공 및 교육 방송으로 신앙과 직접 관련된 내용은 다루지 않을 것입니다. 다만 제가 입는 사제복과 영상의 배경, 중간중간에 언급하는 단어들을 통해 가톨릭교회를 계속해서 노출해서, 아직 인지도가 낮은 가톨릭교회라는 이름이 젊은이들의 기억 속에 남게 하는 것이 목표입니다.한국에 계신 교우 여러분께서 함께 기도해주신다면 다시 새롭게 시작하고 있는 캄보디아 교회의 장래가 더욱더 밝아질 것이라고 믿습니다. 더 많은 이웃이 주님을 함께 찬양하고, 주님의 사랑 안에 함께 머무를 수 있도록 기도해 주시고, 여러 나라에서 모인 캄보디아의 선교사들도 함께 기억해 주시기 바랍니다. 감사합니다.윤대호 신부 한국 외방 선교회 캄보디아지부 프놈펜대목구 메콩강지구 cpbc2019.08.13

바이러스 확산… 사회적 거리 유지하되 극복 의지는 모아야[코로나19 특별대담] - 사회적 거리 두기 마음 거리 좁히기 사회적 거리두기 마음거리 좁히기를 주제로 한 특집 대담에서 패널들이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왼쪽부터 김정환 신부, 박혜진 아나운서, 시사평론가 최영일 대표, 홍성남 신부. 이탈리아를 비롯한 유럽과 미국에서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확진자가 속출하면서 코로나19에 따른 공포와 불안감이 더욱 커지고 있다. 세계보건기구는 코로나19를 ‘세계적 대유행’(pandemic)으로 선언하며 각 나라가 코로나19에 보다 적극적으로 대처할 것을 요청했다. 우리 정부는 모임과 외출을 자제하는 ‘사회적 거리 두기’ 캠페인을 벌이며 바이러스 감염을 막고 확산 속도를 늦추는 데 총력을 기울이고 있다. 가톨릭평화방송은 17일 ‘사회적 거리 두기, 마음 거리 좁히기’를 주제로 특집 대담을 마련하고 코로나19가 가져온 일상의 변화와 대응에 관해 전문가들의 이야기를 들었다. 박혜진(안젤라) 아나운서의 사회로 서울대교구 홍성남(가톨릭심리상담연구소장)ㆍ김정환(한마음한몸운동본부장) 신부, 공공소통전략연구소 대표 최영일(빈첸시오) 시사평론가가 패널로 참여했다. 특집 대담 내용을 요약 정리해 소개한다. 정리=박수정 기자 catherine@cpbc.co.kr 사진=백영민 기자 heelne@cpbc.co.k박혜진 아나운서(이하 사회) : 정부가 사회적 거리 두기 캠페인을 시작한 지 3주 정도 됐다. 코로나19가 가져온 현재 상황을 어떻게 보고 있나.최영일 시사평론가(이하 최 대표) : 바이러스는 사람을 타고 흘러간다. 이를 차단하려면 사람과 사람의 접촉을 일시적으로 끊는 수밖에 없다. 접촉의 밀도, 빈도, 강도에 따라서 바이러스 감염 가능성이 달라진다. 사회적 거리 두기를 통해 만남을 최대한 자제하는 게 핵심이다. 사회적 거리 두기 캠페인은 몸은 떨어져 있지만, 전화, 인터넷, SNS로 소통하며 마음은 가까이 두기를 당부하고 있다. 많은 국민이 잘 따라주고 있고, 확진자 수도 감소하고 있어 캠페인이 성과를 거두고 있다는 평가다.김정환 신부(이하 김 신부) : 가톨릭교회는 사회적 거리 두기 이전에 미사를 중단하며 솔선수범하는 모습을 보였다. 또 각 교구는 신앙생활 중단에 따른 혼란을 최소화하기 위해 기도 바치기, 가톨릭평화방송 미사 시청하기 등으로 명확한 지침을 줬다. 프란치스코 교황께서도 바티칸에서 인터넷 생중계로 신자들과 만나고 있다. 이번 성주간 전례와 주님 부활 대축일 미사도 모두 신자 없이 지내기로 결정하셨다. 사회 : 코로나19가 가져온 많은 문제 중 하나가 혐오 문제였다. 혐오를 부추기는 일이 굉장히 잦아졌다. 홍성남 신부(이하 홍 신부) : 코로나19는 처음 중국 우한에서 발생했다. 코로나19 발생 초기에 서울 명동 거리에 중국 사람들이 다니는데 나도 모르게 피하게 됐다. 중국말을 들으니 불쾌한 느낌까지 들었다. 내가 그럴 줄은 몰랐다. 병이 혐오를 만든다는 생각이다. 이런 일이 인종에 대한 혐오로 번지면 사회적 문제가 될 것이다.김 신부 : 특정 지역, 특정 국가에 대한 혐오는 편견에서 비롯한다. 우리 안에 내재해 있던 편견과 혐오가 이번 사태로 표출되는 듯하다. 나 역시도 반성하고 있다. 우리가 외국 사람들을 혐오한다면, 역으로 우리나라 사람들이 해외에 갔을 때 똑같이 당할 수 있다. 어려운 상황에서 서로를 보듬고 함께 한다는 자세가 필요하다. 최 대표 : 혐오를 지켜보면서 이해가 가는 부분도 있다. 불안감 때문에 그런 거다. 하지만 혐오는 불안을 더욱 조장할 뿐이다. 처음에 중국 우한에서 교민들이 국내로 온다고 했을 때 격리 시설로 선정된 지역 주민들 반대가 컸다. 그럼에도 교민들을 환영한다는 이들의 움직임이 결국 반대를 눌렀다. 사회 : 코로나19 환자를 바라보는 사람들의 시선이 곱지만은 않다. 최 대표 : 확진자들은 사회적 낙인이 찍히는 것을 두려워하고 있다. 낙인을 방지하는 일이 필요하다. 아픈 게 죄가 아니다. 죄처럼 여겨야 하는 사회적 편견이 작용하고 있다. 홍 신부 : 병에 걸리고 싶어서 걸리는 게 아니다. 확진자들은 죄책감을 가질 이유가 없다. 누구라도 병에 걸릴 수 있다는 걸 명심해야 한다. 확진자를 배척하고 혐오하면 안 된다. 사회 : 우리나라에선 코로나19 사태가 신천지 종교와 연관이 되면서 변곡점을 맞았다. 최 대표 : 신천지 신도들이 거짓말을 한 상황이 밝혀져 온 국민이 분노했다. 대구 서구 보건소 검역팀장은 확진되고 나서야 뒤늦게 신천지 신자임을 고백했다. 그 때문에 같이 있던 의료진 50명이 일선에서 배제됐다. 의료 인력이 절대적으로 부족한 상황이라 타격이 컸다. 그 와중에 의료진도 일부 확진 판정을 받았다. 신천지에선 정보를 제대로 안 줬는데 속 터지는 일이다.홍 신부 : 신천지는 종교가 아니다. 교주의 사적 이익을 위해 만들어진 조직체다. 교리 자체도 너무 허무맹랑하다. 종교라면 사회 건강을 위해 역할을 해야 한다. 신천지는 범죄 조직 같다는 생각이다.사회 : 그런데도 신천지 신자가 30만 명이 넘는다고 한다. 특히 청년들이 빠져들고 있다는데 왜 그런 것인가.홍 신부 : 신천지 신자들은 처음에는 자신이 신천지라는 것을 밝히지 않는다고 한다. 청년 한 명을 포섭하기 위해 열 명이 붙어 청년이 원하는 것을 다 해준다. 그런 다음 의문을 제기하지 않는 청년, 감사해 하는 청년들만 추려 본격적으로 교리교육을 한다. 교육을 통해 이만희 교주를 신처럼 보이게 만든다. 코로나19는 약이 개발되면 끝나지만, 이런 정신적 바이러스는 치료약도 없다. 이 사태로 백해무익한 사이비 종교가 드러나 다행이다.김 신부 : 공교육에서 종교에 대한 교육이 필요하다는 것을 절감했다. 종교를 올바로 바라보고 학습할 수 있는 교육이 공교육 체계 안에 있어야 한다. 이런 것이 없으니 종교가 아닌 집단도 종교처럼 대하게 돼 문제가 된다. 홍 신부 : 종교의 외피를 썼다고 해서 모두 종교라 할 수 없다. 사회에 무익하고 해가 되면 범죄 조직으로 봐야 한다. 종교의 자유를 내세우며 보호하는 것은 사람들을 범죄 조직에 넘기는 또 다른 범죄 행위다. 사회 : 코로나19 사태가 길어지면서 더 어려운 이웃을 위한 나눔과 배려가 늘어나고 있다. 김 신부 : 서울대교구 사회사목국 내에는 사회적으로 어렵고 가난하고 소외된 계층을 위해 사목하는 여러 위원회가 있다. 한마음한몸운동본부를 비롯해 여러 위원회에서 코로나19로 어려움을 겪는 이들을 돕고 있다. 무료 급식소가 문을 닫아 굶주리는 이웃들에게 도시락 배달을 하고, 대구ㆍ경북지역에 긴급 지원도 했다. 홍 신부 : 이런 활동이 외부로 많이 알려지면 좋겠다. 김 신부 : 가톨릭평화방송과 가톨릭평화신문은 물론 SNS와 유튜브를 통해서도 홍보하고 있다. 성금을 모금했는데 목표 모금액 5000만 원보다 훨씬 많은 성금이 모였다. 미담 사례가 너무 많다. 온라인 성경 이어쓰기로 상금을 받은 서울 중앙동본당 신자들은 상금 200만 원을 그대로 기부해주셨다. 장사가 안돼 어려운 소상공인들도 나눔에 동참하셨다. 홍 신부 : 어느 사회심리학자가 한 나라가 건강한 사회가 되려면 선한 사람들이 늘어나 악한 사람들이 발붙일 자리가 없게 될 때 가능하다고 했다. 우리 사회에 이렇게 선한 사람들이 많으면 정말 건강한 사회가 될 것이다.사회 : 서로 돕는 와중에 가짜 뉴스가 혼란을 주고 있다. 최 대표 : 코로나19는 세계적 대유행, 즉 팬데믹(pandemic)이다. 더 무서운 것은 인포데믹(Info-demic)이다. 정보 바이러스가 실제 생물학적 바이러스 못지 않게 돌아다닌다. 대표적인 사례가 은혜의 강 교회다. 분무기에 소금물을 넣어 예배 온 신자들 입에 뿌렸다. 소금물에 바이러스가 죽는다는 잘못된 정보를 들어서다. 가짜 뉴스는 희한하게 우리가 듣고 싶은 소식만 전한다. 홍 신부 : 가짜 뉴스를 퍼트리는 사람은 사이코에 가깝다. 행복과 쾌감을 건강하지 못한 방법으로 얻는 사람들이다. 또 가짜 뉴스를 믿는 사람은 자아가 약한 사람이다. 자아가 약하면 작은 이야기에도 잘 흔들린다. 자아가 약한 이들은 자기 마음의 힘을 키우는 데 집중하는 게 좋다. 사회 : 코로나19로 미사가 중단됐다. 가정 내에서 신앙생활을 더 깊이 이어갈 방법이 있다면.홍 신부 : 코로나19 사태가 사순 시기랑 맞물렸다. 사순 시기엔 평소보다 절제하며 성찰하는 가운데 기도한다. 코로나19로 미사를 못 하는 아쉬움이 있지만, 오히려 사순 시기다운 사순 시기가 됐다. 여러 신부가 유튜브와 SNS로 미사하는 모습과 강론을 올리며 신자들과 만나고 있다. 김 신부 : 미사가 중단돼 성체를 영하지는 못하지만, 성체성사 정신 자체가 사랑과 나눔 아닌가. 가족들이 이번 기회에 신앙을 돌아보며 작은 나눔을 실천하면 좋겠다. 또 부족한 부분을 보듬고 용서하고 인내하며 생활하면, 그게 결국 성체성사의 정신을 사는 것이다. 이렇게 부활을 간절하게 기다린 사순 시기가 있을까 싶다. 최 대표 : 저는 지난해 11월 세례를 받은 따끈따끈한 신자다. 그동안 한 주도 주일 미사에 빠지지 않았는데 아쉽다. 미사를 중단한 가톨릭교회의 용단을 높이 평가하지만, 신자로서 미사에 못 가는 허전함을 채울 길이 없다. 사회 : 코로나19가 잠잠해질 때까지 사회적 거리 두기는 더 시행될 것이다. 몸은 멀어졌지만, 마음의 거리는 좁히는 노력이 필요하겠다.김 신부 : 예수 그리스도는 자신의 삶을 통해 모범을 보여주셨다. 질병으로 고통받는 환자를 치유해 주셨고 사랑으로 보듬어 주셨다. 분열과 미움, 이기심을 퍼트리는 행위는 가감 없이 질책하셨다. 그분의 삶과 말씀 안에 답이 다 있다. 어려운 시기지만 다시 그분을 바라보는 시간이 됐으면 한다. 나 자신을 돌아보고 사랑과 나눔을 좀더 실천하는 시간을 보낸다면 위기를 슬기롭게 극복할 수 있을 것이다.홍 신부 : 병을 앓고 나면 항체가 생긴다. 역경을 겪고 나면 심리적 항체도 생긴다. 다음에 비슷한 상황이 오면 더 잘 견딜 수 있게 된다. 평소 우리는 일본을 부러워하는 면이 있었다. 재난이 닥치면 질서정연하게 움직이는 모습을 보여줬기 때문이다. 이번엔 우리가 그랬다. 일본보다 투명하고 정확하게 일을 해결해 가는 모습에 뿌듯했다. 이번 사태가 마무리되면 한국에 대한 세계 사람들의 평가가 높이 올라갈 것이다. 최 대표 : 미국과 유럽에선 한국을 본받자는 분위기다. 코로나19에 대처하는 모습이 다른 나라에 비해 압도적으로 우월하기 때문이다. 사회적 거리 두기도 시민들의 참여로 잘 유지되고 있다. 요즘 SNS를 보면 ‘역경아 와 봐라, 우리가 이겨줄게’라는 호연지기의 자세가 많이 보인다. 그런 모습을 새롭게 발견하면서 우리 스스로 내적으로 강해지는 듯하다.순천향대학교 부천병원 김호중 교수 전화 연결 인터뷰 이번 대담 중엔 생활치료센터인 충남 천안 우정공무원 교육원에서 대구지역 경증 확진자를 치료하고 있는 김호중(순천향대학교 부천병원 응급의학과) 교수를 전화 연결해 이야기를 들었다. 17일 기준으로 이곳에는 환자 200여 명이 격리돼 치료받는 중이었다. 김 교수는 “환자들 대부분 무증상 확진자라 보통 감기에 걸린 이들보다 상태가 좋다”면서 “살던 지역에서 벗어나 지낼 수 있는 점이 생활치료센터의 장점”이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확진자에게 ‘주홍글씨’처럼 낙인을 찍는 상황에 안타까움을 표했다.“요즘 사회 분위기가 확진자를 매장하는 듯해서 마음이 아픕니다. 환자분들은 이곳에 지내면서도 의료진에게 미안해합니다. 코로나19에 걸린 게 잘못은 아닌데 말이죠. 센터로 올 때도 새벽에 구급차를 타고 집에서 몰래 도망치듯 나왔다고 하십니다. 그래서 의료진들은 더 열심히 이분들을 돌보고 있습니다.”김 교수는 “코로나19 특징이 무증상 감염이 가능하기에 경증 확진자를 격리해 치료할 수 있는 시스템이 갖춰진 것은 매우 바람직하다”고 말했다. 생활치료센터는 준의료기관으로 지정돼 있다. 그렇기에 두통, 기침, 두드러기 등과 같은 간단한 증상에 대해선 약 처방과 치료가 가능하다. 김 교수는 “이곳에 와서 헌신하는 의료진과 자원봉사자들, 서로를 배려하는 환자분들 모습을 보며 느끼는 것도, 배우는 것도 많다”면서 “힘들지만 뿌듯하게 지내는 중이다”고 말했다. 정리=박수정 기자 catherine@cpbc.co.kr, 사진=백영민 기자 heelne@cpbc.co.kr cpbc2020.03.25
![[이창훈 소장의 사도행전 이야기] (38)피시디아의 안티오키아 선교 (13,13-52)<상>](//cpbc.co.kr/CMS/newspaper/2019/11/rc/766092_1.0_titleImage_1.jpg)
[이창훈 소장의 사도행전 이야기] (38)피시디아의 안티오키아 선교 (13,13-52)바오로, 이방인들에게 구원자 예수를 알리다피시디아의 안티오키아 유적.사도행전 저자는 이제부터 ‘사울’의 선교 활동을 ‘바오로’라는 이름으로 전합니다. 파포스에서 총독을 믿음으로 인도한 바오로는 소아시아 지역 피시디아의 안티오키아로 들어가 그곳 회당에서 복음을 전합니다. 이 이야기를 두 번으로 나눠 살펴봅니다. 바오로의 설교(13,13-41) 바오로 일행 곧 바오로와 바르나바는 파포스에서 배를 타고 팜필리아의 페르게로 갑니다. 그들이 조수로 데려갔던 요한은 그곳에서 일행과 헤어져 예루살렘으로 돌아가고 바오로 일행은 피시디아의 안티오키아에 이르러 안식일에 회당에 들어가 앉습니다.(13,13-14) 페르게는 터키의 남서쪽 지중해변 항구도시입니다. 그리스 로마 시대에는 아르테미스 여신을 숭배하는 도시로 유명했다고 하지요. 바오로 일행은 이곳에서 요한 마르코와 헤어져 곧장 북쪽으로 올라가 피시디아의 안티오키아에 이릅니다. 페르게에서 150㎞ 이상 떨어진 이 내륙 도시에는 셀레우코스 왕조(기원전 305~기원전 63) 때부터 많은 유다인이 살면서 큰 세력을 이루고 있었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당연히 유다인 회당도 있었겠지요. 바오로와 바르나바가 피시디아의 안티오키아를 목적지로 삼은 이유도 여기에 있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유다인 회당에서 먼저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지요. 회당에서 안식일 전례가 시작됐습니다. 율법과 예언서 봉독이 끝나자 회당장들이 바오로 일행에게 격려할 말씀이 있으면 해 달라고 청하고 바오로가 일어나 조용히 하라고 손짓한 다음에 “이스라엘인 여러분, 그리고 하느님을 경외하는 여러분, 내 말을 들어 보십시오” 하고 말하기 시작합니다.(13,15-16) ‘회당장’이 아니라 ‘회당장들’이라고 복수로 표현하는 것으로 보아 이 회당이 상당히 컸음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또 회당장들이 바오로 일행을 지목해 격려 말씀을 청한 것은 바오로 일행이 외지에서 온 낯선 사람들이지만 믿음 깊은 이들임을 알아보았기 때문일 것입니다. 회당에는 유다인들과 유다교로 개종한 이방인 뿐 아니라 개종하지는 않았지만 카이사리아의 백인대장 코르넬리우스처럼(10,2 참조) 유다교를 존중하고 유다교의 하느님을 경외하는 사람도 있었음이 분명합니다. 그래서 바오로는 “하느님을 경외하는 여러분”이라고 말한 것입니다. 여기서 1세기에 유다인 회당에서 이뤄지던 안식일 전례를 잠시 살펴보는 것도 좋겠습니다. 먼저 “셔마 이스라엘” 곧 “이스라엘아, 들어라!”로 시작하는 성경 구절(신명 6,4-9; 신명 11,13-21; 민수 15,37-41)을 봉독한 다음 기도를 바칩니다. 그러고는 율법 곧 모세 오경의 한 단락과 예언서의 한 단락을 봉독합니다. 이어 회당장은 합당하다고 여겨지는 사람에게 말씀, 곧 설교를 부탁합니다. 그런 다음에 축복(민수 6,24-26)으로 마무리한다지요. 이제 바오로의 설교 내용을 살펴봅시다. 설교는 세 부분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첫 부분에서는 이스라엘 역사를 설명하면서 다윗의 후손인 예수님이 하느님께서 약속한 구세주로서 세상에 오셨다고 설파합니다.(13,17-26) 둘째 부분에서 바오로는 예루살렘 주민들과 지도자들이 그분을 알아보지 못하고 오히려 단죄하고 죽였지만, 하느님께서는 그분을 다시 살리심으로써 다윗과 그 후손에게 약속하신 예언을 실현하셨다고 선포합니다.(13,27-37) 셋째 부분은 회당에 모인 청중을 향한 호소 또는 경고입니다.(13,38-41) 이 셋째 부분은 다시 셋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을 통해 죄의 용서가 선포된다는 것, 모세의 율법으로는 죄에서 벗어나 의롭게 될 수 없지만 믿는 사람은 누구나 그분 안에서 모든 죄를 벗어나 의롭게 된다는 것, 그리고 하바쿡 예언서를 인용한(하바 1,5) 경고입니다. 바오로의 설교는 첫 순교자 스테파노가 예루살렘 최고의회에서 설교한 내용(7,1-53)과 비슷하지만, 구약의 이스라엘 역사를 설명하는 부분은 스테파노의 설교에 비해 훨씬 짧습니다. 대신 예수님이 누구이시고 그분이 어떻게 해서 죽임을 당하고 다시 살아나시고 제자들에게 나타나셨는지에 대한 부분은 훨씬 깁니다. 두 사람의 설교가 왜 이렇게 차이가 날까요? 스테파노가 설교를 하는 대상인 예루살렘 최고의회 사람들과 예루살렘 주민들은 예수님의 죽음에 직접 연루된 당사자들입니다. 그래서 스테파노는 그들이 저지른 죗값을 묻기 위해 이스라엘 역사를 길게 설명하면서 오시리라고 예고된 그분, 의로우신 예수님을 배신하고 죽였다고 신랄하게 비판합니다. 반면에 바오로는 조상들의 역사보다는 예수님이 누구이신지를 알리는 데에 더욱 큰 관심이 있었습니다. 피시디아의 안티오키아에 사는 유다인들은 나자렛 예수님에 관한 소문은 들었을지 모르지만, 자세한 사정은 알지 못했을 것입니다. 이를 고려해서 바오로는 유다인들이 잘 아는 구약의 긴 역사는 대폭 줄이고 상당 부분을 예수님에 관해 할애했다고 하겠습니다. 또 한 가지 큰 차이는 율법으로는 의롭게 될 수 없지만 믿음으로는 의롭게 된다는 내용입니다. 이는 바오로 사도가 로마 신자들에게 보낸 서간에서 볼 수 있듯이(로마 3,21-31; 10,4.10-11 등) 바오로 특유의 신학적 사상이 담긴 표현이라고 학자들은 봅니다. 바오로는 “예언서들에서 말하는 것이 여러분에 미치지 않도록 조심하십시오”라고 경고하는 “보아라, 너희 비웃는 자들아! 놀라다 망해 버려라. 내가 너희 시대에 한 가지 일을 하리라. 누가 너희에게 일러 주어도 너희가 도무지 믿지 못할 그런 일이다”라는 하바쿡 예언서의 말씀(하바 1,5)을 인용하는 것으로 설교를 마칩니다.(13,40-41) 바오로의 설교에 청중은 어떻게 반응했을까요? 다음 호에서 계속 살펴봅니다. 생각해봅시다피시디아의 안티오키아 회당에서 바오로가 한 설교에는 눈여겨볼 대목이 있습니다. “모세의 율법으로는 여러분이 죄를 벗어나 의롭게 될 수 없었지만, 믿는 사람은 누구나 그분 안에서 모든 죄를 벗어나 의롭게 됩니다”(13,38ㄷ-39)라는 부분입니다. 유다인들은 율법을 충실히 지키면 구원을 받는다고 여겼지만, 바오로 사도는 이를 정면으로 부정하고 나선 것입니다. 여기에는 바오로 사도 자신의 체험이 깊이 작용했을 것이라고 생각해 봅니다. 그는 누구보다 충실히 율법을 지켰던 열렬한 바리사이파 젊은이였습니다. 하지만 다마스쿠스로 가는 길에서 예수님을 만나는 체험과 깊은 회심을 한 후 그는 바뀌었습니다. 율법을 지킴으로써가 아니라 주님을 믿음으로써 의롭게 된다는 것을, 곧 구원받는다는 것을 깨달은 것입니다. 하지만 그뿐이었을까요? 피시디아의 안티오키아는 유다인이 많이 살았지만, 이방인 도시였습니다. 바오로의 설교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회당에는 하느님을 경외하는 이방인들이 있었습니다. 이들은 유다인들처럼 엄격하게 율법을 지키지는 않았을지 모릅니다. 그렇지만 유다인들이 고백하는 하느님께 대한 믿음으로 선하게 살아가려고 노력하는 사람들이었을 것입니다. 이들에게는 철저한 율법 준수를 통한 구원보다는 하느님께서 죽음에서 다시 일으키신 예수님께 대한 믿음을 이야기하는 것이 훨씬 효과적이지 않았을까요? 그렇다면 피시디아의 안티오키아 회당에서 바오로가 한 설교는 이방인을 향한 복음 선포의 새로운 방법을 보여주었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한국평협 평신도사도직연구소장 alfonso84@hanmail.net cpbc2019.11.06

성모님 하늘로 불려 올라가셨네, 우리의 천상 행복도 알려주시네성모 승천 대축일(8월 15일) 기원과 의미 살펴보기 심순화 화가의 작품 ‘성모 승천’. 성모님께서 한복을 입고 승천하는 모습을 그렸다. 가톨릭평화신문 DB 8월 15일은 우리 민족이 해방을 맞이한 ‘광복절’이자 성모 마리아께서 하늘로 불려 올라가심을 기념하는 ‘성모 승천 대축일’이다. 교회는 성모 승천 대축일을 의무 축일로 규정해 성모 마리아를 공경하는 여러 축일 가운데 가장 중요한 날로 보내고 있다. 이는 성모 마리아의 승천이 신앙인들에게 부활에 대한 신앙을 더욱 확고하게 심어주는 표지이기 때문이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2015년 8월 15일 바티칸 성 베드로 광장에서 열린 성모 승천 대축일 삼종기도에서 “성모님께서 하늘로 올라가신 것은 우리 삶의 종착지가 하느님 집임을 보여준다”고 말했다. 그만큼 성모 승천 대축일이 신앙인들에게 주는 의미는 크다. 성모 승천 대축일을 맞아 이 축일의 기원과 의미를 정리했다. 성모 승천 대축일의 기원가톨릭교회는 성모 마리아의 신원을 △원죄 없이 잉태되신 분 △성령으로 인하여 구세주를 낳고 기른 ‘하느님의 어머니’ △평생 동정녀이신 분 △생을 마친 다음 영혼 육신이 하느님의 불림을 받아 승천하신 분 △예수 그리스도의 중재에 참여하고 하느님과 인간을 연결해주는 ‘인류의 중재자’로 고백한다. 성모 승천 대축일의 기원은 정확하게 알려진 것이 없다. 다만 4세기 무렵 안티오키아 교회에서 성모 마리아의 승천을 기념하는 축일이 시작됐다는 이야기만 전해진다. 현재와 같이 8월 15일이 대축일 날짜로 정해진 것은 5세기 초 무렵으로 추정된다. 이 시기 예루살렘에서는 8월 15일을 ‘하느님의 어머니의 날’로 제정해 기념했다. 이날에 맞춰 성모 승천 대축일 날짜가 정해졌다는 설이 유력하다.성모 마리아가 죽지 않고 ‘승천’했다는 믿음은 사도 시대 때부터 교회 안에서 전승됐다. 물론 성경 어디에도 성모 승천에 대한 내용을 찾을 수 없다. 초세기 사도들의 전승을 모아 전하고 있는 2세기쯤의 외경에서는 ‘동정녀의 승천’ 또는 ‘마리아의 잠드심’에 대해 기록하고 있는데, 예수님께서 십자가 위에서 돌아가시기 전에 어머니를 맡겼던(요한 19,26-27) 가장 사랑하던 제자인 요한 사도에게 직접 들은 것이라며 다음과 같이 전하고 있다.“마리아는 죽음이 가까워졌음을 계시를 통해 아셨는데, 모든 사도가 기적적으로 그녀의 주위로 모여왔고, 예수님도 그녀의 임종을 돕기 위해 발현하셨다. 예수님께서는 어머니의 육신을 묻으라고 제자들에게 명령하고 영혼을 거두어 가셨다. 제자들이 성모님을 매장하려고 할 때 예수님은 다시 발현하셨고, 사도들이 그녀를 부활시켜 달라고 청하였다. 그러자 한 천사가 무덤을 열었고, 마리아는 무덤에서 나와 하늘로 승천하였다.”(「성모님의 영면」 중에서)이처럼 초대 교회 시대부터 신자들에게 성모 마리아가 죽지 않고 승천했다는 믿음이 생기게 된 배경에는 성모 마리아에게 하느님의 어머니라는 특권이 있으며 거룩함과 충만한 은총을 지니고 있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성모 승천 의미성모 승천에 대한 믿음은 20세기에 들어서야 교회의 믿을 교리로 선포됐다. 비오 12세 교황은 1950년 회칙 「지극히 관대하신 하느님」을 통해 “원죄에 물들지 않고 평생 동정이셨던 하느님의 모친 마리아는 현세 생활을 마치신 후 육신과 영혼이 함께 하늘로 올라가 영광을 입었다”고 성모 승천 교리를 선포했다. 교회는 제2차 바티칸 공의회를 통해 “원죄의 온갖 더러움에 물들지 않으시어 티 없이 깨끗하신 동정녀께서는 지상 생활의 여정을 마치시고 육신과 영혼이 하늘의 영광으로 올림을 받으시고, 주님께 천지의 모후로 들어 높여지시어, 군주들의 주님이시며(묵시 19,16 참조) 죄와 죽음에 대한 승리자이신 당신 아드님과 더욱 완전히 동화되셨다”(「교회헌장」 59항)고 밝히고 있다. 다만 예수 그리스도의 승천과 성모 마리아의 승천은 엄밀하게 구분해야 한다. 우리말로는 둘 다 ‘승천’으로 표현하지만, 라틴어로 살펴보면 그 차이가 분명히 드러난다. 라틴어에서 그리스도의 승천을 표현할 때 ‘상승, 오름, 올라감’을 뜻하는 ‘Ascensio’를 사용한다. 반면 성모 마리아의 승천은 ‘올림을 받음’이란 뜻을 지닌 ‘Assumptio’을 사용한다. 즉 그리스도의 승천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부활 후 육신과 영혼을 지닌 채 스스로 하늘로 오르셨음을 의미한다. 그러나 성모 승천은 성모 마리아가 하느님의 부르심을 받아 하늘로 들어 올려졌다는 의미를 지닌다.교리상으로 ‘성모 승천’은 ‘우리도 성모님처럼 살면 하느님 나라로 갈 수 있다’는 희망을 보여주는 중요한 표지이다. 또한 ‘성모 승천’을 통해 신앙인들은 천상에서 하느님과 일치하며 영원한 행복을 누릴 수 있다는 믿음을 더욱 굳건히 할 수 있다. 장현민 기자 memo@cpbc.co.kr cpbc2019.08.07

25년간 봉사자 양성, 말씀 사목의 탄탄한 기둥수원 성경교육봉사자회 25돌
봉사자 사명 새롭게 되새겨 수원교구 성경봉사자회 설립 25주년 기념미사에서 이용훈 주교가 “자! 일어나~” 하고 외치자 봉사자들이 손을 들어 “가자!”하고 답하고 있다. 수원교구 성경교육봉사자회는 올해 설립 25주년을 맞아 13일 수원교구청에서 교구장 이용훈 주교 주례로 기념 미사를 봉헌하고, 그간 말씀의 여정 안에 살도록 이끌어 주신 주님께 감사했다.이날 봉사자회는 성경 교육 봉사자 200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미사에 앞서 문희종(수원교구 교구장대리) 주교의 강의를 들으며 봉사자 사명을 되새기고, 총회를 열어 내년 활동 계획을 수립했다. 미사 중에는 25년 발자취를 돌아보는 축하 영상을 감상한 뒤 25년 전 당시 사목국장으로서 봉사자회 설립을 함께 기획한 최덕기(전 수원교구장) 주교와 오랫동안 봉사해 온 이들에게 각각 감사패와 공로패를 증정했다.수원교구 성경교육봉사자회는 1992년 ‘기쁜 소식을 전하는 이들의 발이 얼마나 아름다운가!’(로마 10,15)를 중심 사명으로 내걸고 교구민 성경 교육을 위한 첫걸음을 내디뎠다. 교구민을 말씀 안에 살도록 이끌고자 교구 사목국 성서부 산하에 설립된 봉사자회는 교구 차원에서 처음으로 평신도를 위한 성경 교육을 시작했다.교구는 봉사자들이 영성과 말씀으로 새롭게 거듭나도록 예수의 까리따스 수녀회 수녀들이 교육을 지도하도록 했으며, 수녀들은 지금까지 성경 교육 봉사자들에게 ‘사명감’, ‘겸손’, ‘인내’의 소양을 꾸준히 교육해 오고 있다. 3년 과정의 교육을 통해 양성된 봉사자는 현재 200여 명. 이들은 교구 내 210여 개 본당에서 230개 강좌를 진행하고 있다.성경 교육 봉사자들은 교구가 말씀으로 하나 되는 공동체가 되는 데 가장 큰 일꾼이 돼 왔다. 봉사자들은 연중 각 대리구별 본당에서 일반 과정 「여정」과 어르신을 위한 「은빛 여정」을 교육하고 있으며, 학기마다 피정과 연수를 진행한다. 1993년 제1차 성서경시대회부터 시작해 교구민 수천 명이 한자리에 모여 경시, 암송 대회, 필사 전시 등을 펼치는 성경잔치가 올해 23회째를 맞을 수 있었던 것도 성경 교육 봉사자들의 헌신적 활동 덕분이다. 특히 교구와 봉사자들의 노력으로 2013년 개설한 사이버성경학교는 전국 신자들이 온라인을 통해 어디서나 성경 강좌를 수강하도록 도왔다.이용훈 주교는 이날 미사에서 “여러분은 교구가 하는 말씀 사목의 큰 기둥이자 굳건한 힘이 되는 훌륭한 자산이고 보물”이라며 “하느님 진리인 성경 말씀을 전하는 참 생명의 마중물이 돼 달라”고 당부했다. 글·사진=이정훈 기자 sjunder@cpbc.co.kr 평화신문2017.12.19
부득이하게 주일 미사 참여 못 했다면…](//cpbc.co.kr/CMS/newspaper/2018/10/rc/736824_1.0_titleImage_1.jpg)
[성사풀이](18)부득이하게 주일 미사 참여 못 했다면… 주일에 미사나 공소 예식에도 참여할 수 없는 부득이한 경우에는 묵주 기도, 성경 봉독, 선행 등으로 그 의무를 대신할 수 있다. 성경 봉독은 그 주일 미사의 독서와 복음 봉독을 의미한다. 가톨릭평화신문 DB 주일 미사에 참여하지 못할 때, 그 대신 다른 기도문으로 바치면 고해성사를 받지 않아도 되나요주일에 미사나 공소 예식에도 참여할 수 없는 부득이한 경우에는 묵주 기도, 성경 봉독, 선행 등으로 그 의무를 대신할 수 있으므로(「사목 지침서」 74조 4항) 고해성사를 받지 않아도 된다.여기서 ‘부득이한 경우’란 직업상 또는 신체적 환경적 이유로 주일 미사에 일시적이건 지속적이건 참여하지 못하는 경우를 말합니다. 예를 들면, 아파서 도저히 미사에 참여할 수 없는 경우, 병원에 입원해 미사에 참여할 수 없는 경우, 여행지와 가까운 곳에 성당이 없는 경우, 위독한 환자를 돌보느라 미사에 참여할 수 없는 경우, 직업상 주일에도 일해야 하는 경우로 아주 예외적인 상황입니다.주일 미사 참여 의무를 대신하는 ‘묵주기도’는 다섯 단을 바칩니다. ‘성경 봉독’은 그 주일 미사의 독서와 복음 봉독을 의미합니다. ‘선행’은 희생과 봉사 활동 등을 말합니다. 이 같은 방법으로 주일 미사 참여 의무를 대신할 경우 고해성사를 받지 않아도 됩니다.(「주일 미사와 고해성사에 대한 한국 천주교회 공동 사목 방안」 참조) 흔히 주일 미사 대신 주님의 기도를 33번 바치기도 하는데, 이것은 과거의 규정입니다.부활 또는 성탄 시기 때 판공성사를 못 보았습니다. 다른 때에 고해성사를 받아야 하나요부활 또는 성탄 시기 때 판공성사를 받지 못한 신자가 1년 중 어느 때라도 고해성사를 받았다면 판공성사를 받은 것으로 인정한다.(「주일 미사와 고해성사에 대한 한국 천주교회 공동 사목 방안」 참조)과거 한국 교회의 사제들은 신앙 성장에 도움을 주고자 신자들 간에 사순과 대림 시기의 고해성사 전에 일종의 시험을 치르게 했습니다. 주로 교리에 관한 질문인데, 이를 찰고(察考)라고 합니다. 찰고를 통과한 신자들은 성사표를 받아 고해성사를 볼 수 있었지만, 통과하지 못한 신자들은 다음 찰고 때 통과해야만 고해성사를 볼 수 있었습니다. 이렇게 해서 주님 부활 대축일과 주님 성탄 대축일을 앞두고 일년에 두 번 고해성사를 받는 관습이 생겼습니다. 이때 받는 성사를, 신앙 성장을 위해 얼마나 공로를 쌓았는지 판단한 다음에 받는 성사라고 하여 ‘판공성사’(判功聖事)라고 불렀습니다. 판공성사는 한국 교회에만 있는 특별한 제도로서, 교회는 이렇게 판공성사 제도를 통해 신자 개개인의 성사생활을 파악하고 독려하고 있습니다. 한국 천주교회 공동사목 방안에 따르면, 부활시기에 판공성사를 받지 못한 신자가 성탄 판공이나 1년 중 어느 때라도 고해성사를 하면 판공성사를 받은 것으로 인정하고 있습니다. 고해성사는 얼마나 자주 보아야 하나요교회는 고해성사의 빈도를 구체적으로 제시하지 않지만, 신자들이 정기적으로 고해성사를 통해 사소한 죄도 고백하고 용서받아 그리스도와 더욱 일치되기를 장려한다.(「가톨릭교회 교리서」 1458항)대죄를 지은 경우에는 영성체하기 전에 반드시 고해성사를 보아야 하며, 대죄를 짓지 않았더라도 가톨릭 신자라면 적어도 1년에 한 번, 특히 주님 부활 대축일을 앞두고 고해성사를 하도록 교회는 권고합니다.(「사목지침서」 90조)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경고합니다. “부당하게 주님의 빵을 먹거나 그분의 잔을 마시는 자는 주님의 몸과 피에 죄를 짓게 됩니다. 그러니 각 사람은 자신을 돌이켜보고 나서 이 빵을 먹고 이 잔을 마셔야 합니다. 주님의 몸을 분별없이 먹고 마시는 자는 자신에 대한 심판을 먹고 마시는 것입니다.”(1코린 11,27-29) 대죄를 짓고도 고해성사를 받지 않고 성체를 모시는 것은 성체를 모독하는 ‘모령성체’에 해당합니다. 죄에 대한 고백은 우리 그리스도인들을 자유롭게 합니다. 그러기에 대죄뿐만 아니라 소죄까지 고백함으로써 우리는 올바른 양심을 기르고, 나쁜 성향과 싸우며, 그리스도를 통해 치유받고, 성령의 도움 안에서 성장할 수 있습니다. 정기적 고해성사로 자비로우신 하느님 아버지의 은총을 자주 받게 되면, 우리는 하느님의 자비를 더욱 닮아 가게 될 것입니다.(「가톨릭교회 교리서」 1455, 1458항 참조) 정리=리길재 기자 teotokos@cpbc.co.kr 평화신문2018.10.23
![[성당에 처음입니다만] (19) 포도주에 물을 왜 섞나요](//cpbc.co.kr/CMS/newspaper/2019/07/rc/757418_1.0_titleImage_1.jpg)
[성당에 처음입니다만] (19) 포도주에 물을 왜 섞나요포도주와 물처럼 일치되는 신성과 인성 포도주에 물을 섞는 것은 성작 안의 포도주와 물은 분리될 수 없듯이 인간도 주님이신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떨어져 나갈 수 없다는 뜻을 지닌다. 나처음 : 신자들이 미사 중에 제물을 바치는 모습이 너무 아름다워요. 대다수 종교에서는 성직자나 제사장이 모든 예식을 주례하는데 가톨릭은 일반 신자들도 그 예식에 능동적으로 동참하고 있어 그 모습이 참 좋은 것 같아요. 그런데 신자들이 신부님께 바치는 황금색 그릇과 병에 담긴 제물이 무엇인지 궁금해요. 조언해 : 신부님, 저도 미사 때마다 궁금한 게 있는데요. 봉헌 예물로 받은 포도주와 물을 왜 섞는지 그 뜻을 모르겠어요. 알려주세요.라파엘 신부 : 먼저, 처음이가 궁금해하는 것부터 알려줄게. 황금색 그릇과 병에 담긴 제물은 ‘빵과 포도주’란다. 예수님께서 마지막 만찬 음식으로 빵과 포도주를 드셨기 때문에 그것을 기념하기 위해 빵과 포도주를 사용한단다. 미사 중 빵과 포도주를 바치는 예식을 ‘봉헌’이라고 해.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마지막 만찬 때 “많은 사람을 위하여” 그리고 “계약의 피”로서 당신의 생명을 바치실 것이라고 말씀하셨기에 봉헌이라고 표현한단다.그리고 “주님께서 오실 때까지, 여러분은 이 빵을 먹고 이 잔을 마실 적마다 주님의 죽음을 전하는 것입니다”(1코린 11,26)라는 바오로 사도 말씀처럼 신자들은 미사 중 영성체를 통해 주님의 봉헌에 동참하는 것이란다. 이처럼 ‘빵과 포도주’는 예수님을 표상하는 것이지. 그래서 미사의 제물은 ‘예수 그리스도’ 자신이시지. 신자 대표가 단순히 빵과 포도주를 제물로 바치는 게 아니라 빵과 포도주의 형상으로 오시는 예수님을 제물로 바치는 거란다. 이 얼마나 거룩한 봉헌이니. 가톨릭교회에서는 성찬례 제물로 쓰는 빵으로 누룩이나 다른 물질이 들어 있지 않은 순수하게 밀로 만든 신선한 빵을 사용해. 예수님께서 마지막 만찬 때에 누룩이 없는 순수 밀로 만든 빵을 사용하셨기 때문이야. 포도주 역시 다른 물질이 섞이지 않은 순수한 포도로 만든 천연 포도주를 사용해야 해. 백포도주이든 적포도주든 상관없고 순수 ‘포도로 빚은 것’(루카 22,18)이면 문제없어. 성찬례 제물로 쓰일 빵과 포도주는 항상 온전한 상태로 보존되도록 세심한 주의를 기울여야 해. 포도주가 시어지지 않도록 하고, 빵은 상하거나 쪼개기 어려울 정도로 굳어지지 않도록 각별히 신경 써야 해. 이제 언해가 궁금해 한 걸 풀이해 줄 차례구나. 사제는 성작에 포도주를 따른 다음 물 몇 방울을 섞는단다. 이렇게 하는 것은 유다인의 관습에서 비롯된 거야. 유다인들은 술에 취하지 않기 위해 물을 섞어 포도주의 농도를 희석해 즐겨 마셨단다. 따라서 유다인이신 예수님께서도 마지막 만찬 때 그렇게 마셨겠지. 이러한 유다인 풍습이 교회 전례 안에 그대로 들어온 것이지. 하지만 중세에 들어오면서 포도주에 물을 섞는 것에 여러 의미를 덧붙여 설명하기 시작했지. 먼저, “군사 하나가 창으로 그분의 옆구리를 찔렀다. 그러자 곧 피와 물이 흘러나왔다”(요한 19,34)는 성경 말씀을 인용해 포도주와 물을 섞는 것은 ‘교회와 성사’를 상징하는 것이라고 해석했단다. 또, 포도주와 물은 그리스도의 신성과 인성을 상징하는 것으로 그것을 섞는 것은 ‘하느님의 본성’(2베드 1,4)에 인간이 참여하는 것을 의미한다고 했지. 마지막으로 성작 안의 포도주와 물이 분리될 수 없듯이 인간도 주님이신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떨어져 나갈 수 없다는 뜻도 있단다. 오늘날 교회에서는 포도주에 물을 섞는 것은 그리스도와 교회의 일치, 그리고 사랑을 나타내는 것이라고 가르치고 있단다. 이는 그리스도의 몸과 피를 나누는 영성체의 의미와 똑같단다. 하나의 성체 안에 모두 하나가 되는 일치를 드러내고 하나의 성체를 나누어 먹는 형제들의 사랑이 표현되는 것이지. 리길재 기자 teotokos@cpbc.co.kr cpbc2019.07.09
![[성당에 처음입니다만] (21) 왜 십자가는 여러 형태인가요](//cpbc.co.kr/CMS/newspaper/2019/07/rc/758531_1.0_titleImage_1.jpg)
[성당에 처음입니다만] (21) 왜 십자가는 여러 형태인가요그리스도 사랑과 구원의 표징, 십자가 비잔틴 십자가. 라틴 십자가 위에 예수님의 죄명패가 부착돼 있다. 나처음 : 유럽의 여러 성당을 둘러보면서 특이한 걸 발견했어요. 성당마다 장식된 십자가의 형태가 다른 거예요. 예수님께서는 단 한 번 십자가에서 돌아가셨는데 왜 십자가는 여러 형태인가요. 조언해 : 그건 로마네스크, 고딕, 르네상스 등 시기마다 표현하는 화풍이 달라서 그런 게 아닐까요 신부님?라파엘 신부 : 처음이가 유럽 여행을 하면서 성당을 아주 꼼꼼하게 살펴보고 왔구나. 성당의 중심이 어딘지 궁금해하고 또 십자가 모양이 다른 걸 찾아내는 걸 보니 교회를 바라보는 눈과 생각하는 마음이 점차 넓어지고 깊어졌구나. 먼저, 십자가의 의미를 풀이하는 게 이해하기 쉬울 것 같구나. 십자가는 그리스도로 인해 그 의미가 완전히 달라졌단다. 십자가는 원래 잔혹한 사형 도구였단다. 기원전 6세기부터 서기 4세기까지 페르시아와 카르타고, 로마 제국에서 정치범과 사형수들을 십자가에 매달아 처형했지. 예수님도 티베리오 황제가 로마 제국을 통치할 때 예루살렘 총독 본시오 빌라도에 의해 ‘유다인의 왕’이라는 죄목으로 십자가형으로 처형되셨단다. 복음서와 로마 역사가 타치투스 「연대기」 등을 기초로 예수님께서 서기 30년 4월 7일에 처형되셨다고 해. 하지만 예수님의 부활로 ‘치욕’의 십자가는 ‘구원’의 상징이 되었단다. 성경은 그래서 십자가가 예수님을 통해 거룩하신 하느님과 죄에 빠져 허덕이는 인류 사이를 화해시키는 도구(에페 2,16; 콜로 1,20)라고 증언해. 또,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인간은 구원되어 새 창조물, 새로운 사람이 되어 하늘나라에서 그리스도의 한 형제로 하느님의 유산을 차지하게 됐다(갈라 6,15-16)고 설명하지. 아울러 십자가를 지는 것은 주님의 참 제자가 되며(루카 14,27), 그리스도를 따르는 사람(마르 8,34)이 된다고 가르치고 있단다. 이처럼 십자가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의 표징, 그리스도교의 표지가 되었단다.이제 왜 여러 형태의 십자가가 교회 안에 존재하는지 설명할게. 먼저 예수님께서 지신 십자가에 대해 알아보자꾸나. 당시 로마인들은 십자가를 두 가지 형태로 사용했단다. 사형장에 항상 세워져 있는 세로나무 위에 가로나무를 얹으면 ‘T’자 모양의 십자가가 되고, 세로나무 꼭대기 아랫부분에 가로나무를 붙들거나 못 박아 매달면 ‘†’형 십자가가 되는 것이지. 예수님께서 어떤 형태의 십자가에 못 박혔는지는 알 수 없단다. ‘T’자형 십자가는 헬라어 알파벳 ‘타우’(대문자 Τ, 소문자 τ)를 닮아 ‘타우 십자가’라고 불러. 아시시의 프란치스코 성인이 이 십자가를 특별히 사랑해 프란치스코회 수도자들이나 제3회 회원들이 타우 십자가를 많이 착용하고 다닌단다. ‘†’형 십자가는 서방 교회에서 많이 사용해 ‘라틴 십자가’라고 하고, 가로세로 길이가 같은 ‘+’ 형은 ‘그리스 십자가’ ‘비잔틴 십자가’ ‘정교회 십자가’라고 해. 라틴 십자가에 작은 가로나무가 윗부분에 붙여져 있는 것은 ‘유다인의 왕 나자렛 예수’라는 예수님의 죄명패가 붙어 있는 십자가이고, 이 십자가 아랫부분에 비스듬히 작은 발판을 덧붙여놓은 것은 ‘러시아 정교회 십자가’ 란다.초대 교회 신자들은 십자가 문양을 내놓고 사용하지 못했단다. 이 시기 사람들은 “어떻게 십자가형을 받고 처형된 자를 신으로 섬길 수 있느냐”라며 그리스도인들을 모욕하는 일이 흔했단다. 그래서 교회에서는 주님의 수난과 부활을 표현할 때 물고기나 어린양, 착한 목자 그림으로 대신했지. 십자가가 그리스도교의 상징으로 세상에 처음 공개된 것은 서기 312년 로마 테베레 강 밀비오 다리 전투 때였어. 콘스탄티누스 군대가 군기와 방패에 헬라어 ‘Χριστοs’(크리스토스)의 앞 두 글자를 붙인 형태의 십자가를 그리고 전쟁에 나가 막센티우스 군대를 물리치고 승리했지. 이후 이 십자가는 로마군의 표식이 되었단다. 이것이 그 유명한 ‘키로 십자가’란다. 참 ‘X’형 십자가도 있어. 안드레아 사도가 X자 모양의 십자가에서 순교하셨기에 ‘안드레아 십자가’라고 불러. 이처럼 십자가는 예수님께서 어떤 형태로 십자가에서 수난하셨는지를 자세히 표현하거나 사도들과 교회 단체의 표식을 알리는 방법에 따라 그 형태가 다르게 발전해 왔단다. 리길재 기자 teotokos@cpbc.co.kr cpbc2019.07.23
![[신앙단상] 배우자를 위한 기도(오수진, 아가타, KBS 기상캐스터)](//cpbc.co.kr/CMS/newspaper/2019/04/rc/750913_1.0_titleImage_1.jpg)
[신앙단상] 배우자를 위한 기도(오수진, 아가타, KBS 기상캐스터) “하느님, 그리하여 두 사람 모두 노력하며 하느님께서 주신 삶에 충실히 살아갈 수 있도록 도와주소서.”배우자를 위한 기도문 일부입니다. 제가 한동안 하루를 마치며 묵주기도와 함께 올렸던 기도이기도 합니다.맞는 인연을 만나기가 참 어렵다고 느꼈던 때가 있었습니다. 지금 돌이켜보면 방송인 오수진에 대한 관심이 부담스러워 사람을 만남에 있어서 스스로 벽을 만들게 되었던 것 같기도 합니다. 맞는 짝을 찾는 과정이 억지스럽다고 느껴졌을 때, 배우자의 기도를 시작했습니다. 이 아름다운 기도문은 어느 곳엔가 있을, 하느님께서 정해주신 그 사람을 지켜달라는 기도이며 나 역시도 그 상대에게 걸맞은 사람이 될 수 있도록 내 삶에 충실하고 또 서로를 사랑하는 마음을 가질 수 있도록 도와달라는 기도였습니다.어떤 특정한 조건의 사람, 짝을 찾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인도해주실 그 상대방을 위해 내가 먼저 노력하고 준비한다는 이 기도문이 제게는 큰 도움이 되었던 것 같습니다. 더 이상 안달하지 않고 하느님이 인도해주실 것이라 기도하며 지내던 어느 날, 지금 제 배우자가 된 베드로를 만났습니다. 하느님께서 맺어주신 덕에 순탄히 시간이 지나고 결혼을 약속했는데, 혼인성사를 2주 앞두고 제가 아파서 중환자실에서 생사를 다투게 되었습니다. 한 달 가까이 의식 없이 입원해 있는 동안 결혼 날짜도 지나가 버렸습니다.“자네, 떠나도 되네.” 당시 제 아버지께서 남편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고 합니다. 저라도 의식이 있었다면 그렇게 말했을지 모릅니다. 그런 아버지에게 베드로는 “제가 구하겠습니다”라고 대답했다고 했습니다. 나중에야 전해 들었던 이 대화는 아직도 마음이 아프고, 한편으로 감동적입니다. 제 배우자 베드로는 하느님이 구해주실 것이라는 믿음이 확고했다고 합니다. 또한, 그가 가장 좋아하는 성경 구절대로, 간절하게 바라고 기도하면 들어주실 것이라는 확신이 있었다고 했습니다.(마르 11,24 참조) 하느님이 어디까지 역사하셨는지, 저는 그 큰 뜻을 결코 알 수 없겠지만, 한 가지 확실한 것은 그의 믿음이 우리의 관계를 더욱 굳건하게 만들어 주었다는 점입니다. 고난과 어려움을 신앙의 관점에서 한 번 더 생각하고, 함께 하느님 안에서 극복할 수 있었다는 점입니다. 누구에게나 있을 수 있는 인생의 힘든 시간 동안, 신앙이 삶을 이해하는 공통의 바탕이 되며, 갈등을 풀어낼 수 있는 서로의 바탕이 되어줄 것이라고 저는 믿습니다. 여러분의 성가정에도 평화를 빕니다! cpbc2019.04.17
![[이창훈 위원의 사도행전 이야기] (7) 첫 신자 공동체의 생활(2,42-47)](//cpbc.co.kr/CMS/newspaper/2019/02/rc/747112_1.0_titleImage_1.jpg)
[이창훈 위원의 사도행전 이야기] (7) 첫 신자 공동체의 생활(2,42-47)첫 신자 공동체, 사귐과 나눔으로 하느님 섬기다 사도행전에서 전하는 첫 신자 공동체의 생활은 오늘날 소공동체 운동에서 추구하는 소공동체의 모델이다. 사진은 지난 2015년 대전교구 정하상교육회관에서 열린 본당 소공동체 활성화를 위한 사목 연수의 한 모습. 가톨릭평화신문 DB 베드로의 오순절 설교에 감화되어 회개하고 세례를 받은 3000명가량 되는 신자들은 오순절에 성령을 받은 120명가량 되는 첫 제자들과 함께 첫 신자 공동체를 이룹니다. 루카는 이제 이 공동체의 생활을 요약해서 전합니다. “그들은 사도들의 가르침을 받고 친교를 이루며 빵을 떼어 나누고 기도하는 일에 전념하였다.”(2,42) 루카는 여기에서 첫 신자 공동체의 생활이 네 가지 일로 이루어짐을 이야기합니다. 첫째, 사도들의 가르침을 받는 일입니다. 사도들은 신자들에게 무엇을 가르쳤을까요? 베드로가 첫 오순절 설교에서 설파한 것을 좀더 자세히 설명하는 내용일 것입니다. 곧 그들이 증인으로서 보고 듣고 깨달아 배운 예수님의 말씀과 행동을 전하고 성경 곧 구약성경을 예수님의 삶과 가르침에 비춰서 새롭게 풀어 설명하는 일이었을 것입니다. 말하자면 예수님의 삶과 죽음과 부활과 승천에 관한 내용이 구약성경에서 예언한 대로 실현됐음을 가르치는 것입니다. 이 가르침을 그리스어로 ‘디다케’(διδαχη)라고 하는데, 교리교육 혹은 신앙교육이라고 할 수 있겠지요. 둘째, 친교를 이루는 일입니다. 그리스어로 ‘코이노니아’(κοινωνια)라고 하는 친교는 원래 그리스-로마 문화권에서 우정을 가리키는 말이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여기에서 코이노니아는 단순히 우정의 친교는 아닌 것 같습니다. 사도들에게서 가르침을 받는 신자들 사이의 친교이고 빵을 떼어 나누고 기도하는 가운데 이뤄지는 친교라고 보는 것이 더욱 적절한 듯합니다. 그렇다면 믿음의 형제들 사이에서 이루어지는 신앙과 사랑의 친교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 친교는 빵을 떼어 나누는 데서 구체적으로 표현됩니다. 셋째, 빵을 떼어 나누는 일입니다. ‘빵을 떼어 나눈다’는 표현은 복음서에서는 딱 세 군데에 나옵니다. 오천 명을 먹이시는 기적(마태 14,19; 마르 6,41; 루카 9,16; 요한 6,11. 요한복음에는 ‘떼다’라는 표현은 나오지 않습니다), 최후 만찬(마태 26,26; 마르 14,22; 루카 22,19), 그리고 루카복음에만 나오는 엠마오 이야기(루카 24,28)입니다. 이 구절들은 모두 성찬례와 직간접으로 연결돼 있습니다. 그렇다면 사도행전의 이 대목에서 ‘빵을 떼어 나눈다’는 표현은 성찬례를 가리킨다고 해도 틀리지 않을 것입니다. 실제로 많은 학자가 이를 성찬례와 결부시킵니다. 다른 한편으로 빵을 떼어 나누는 일은 친교의 구체적인 표현이기도 하지요. 넷째, 기도하는 일입니다. 구체적으로 어떤 기도인지는 이 구절 자체만으로는 알 수 없습니다. 신자들의 공동체 생활을 부연 설명하는 그다음 구절(2,47ㄱ)을 통해 이때의 기도가 찬미의 기도임을 유추해 볼 수 있습니다. 루카는 계속해서 이 네 가지를 조금 반복하면서 좀더 구체적으로 소개합니다. 먼저 “사도들을 통하여 많은 이적과 표징이 일어나므로 사람들은 저마다 두려움에 사로잡혔다”(2,43)라고 기록합니다. 루카는 베드로 사도의 오순절 설교에서 “예수님은 하느님께서 여러 기적과 ‘이적과 표징’으로 여러분에게 확인해 주신 분”(2,22)이라고 표현했는데, 그 이적들과 표징들이 사도들을 통해서도 일어나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을 보고 사람들은 두려움에 사로잡히지요. 여기서 두려움은 단순한 공포가 아니라 하느님께서 사도들을 통해 하시는 놀라운 일들에 대한 경외심입니다. 이어 친교를 이루고 빵을 떼어 나누며 기도하는 생활도 더 구체적으로 설명합니다. “신자들은 모두 함께 지내며 모든 것을 공동으로 소유하였다. 그리고 재산과 재물을 팔아 모든 사람에게 저마다 필요한 대로 나누어주곤 하였다. 그들은 날마다 한마음으로 성전에 열심히 모이고 이 집 저 집에서 빵을 떼어 나누었으며, 즐겁고 순박한 마음으로 음식을 함께 먹고 하느님을 찬미하며….”(2,44-47ㄱ) 신자들은 말하자면 공동생활과 공동 소유를 통해 친교를 이룬 것입니다. 하지만 이 공동생활과 공동 소유는 강제가 아니라 자발적이었으며, 집단적이라기보다는 느슨한 형태의 공동생활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는 신자들이 이 집 저 집에서 빵을 나누었다는 사실에서, 그리고 나중에 살펴보겠지만 하나니아스와 사피라 이야기(5,1-11)에서도 간접적으로 확인할 수 있습니다. 신자들이 ‘날마다 한마음으로 성전에 열심히 모였다’는 표현은 첫 신자들에게 예루살렘 성전이 일정한 역할을 하고 있음을 알려주고 있습니다. 왜 성전에 모였을까요? 기도하고 사도들의 가르침을 듣기 위해서였을 것입니다.(3,1; 5,21 참조) 그러나 신자들은 성전에만 모인 것이 아니었습니다. 이 집 저 집에서 모였습니다. 집 모임에서 신자들은 △빵을 떼어 나누고 △즐겁고 순박한 마음으로 음식을 함께 먹고 △하느님을 찬미했습니다. 빵을 떼어 나눈다는 것은 성찬례를 거행했다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즐겁고 순박한 마음으로 음식을 함께 먹는다는 것은 성찬례가 친교의 잔치를 겸했음을 알게 해줍니다. 주목할 것은 예수님께서 마지막 만찬 때에 거행하라고 분부하신 성찬례가 첫 신자 공동체에서는 성전에서가 아니라 집에서 이루어진다는 사실입니다. 말하자면 예루살렘의 첫 그리스도인 공동체는 성전에서도 모였지만, 가정을 중심으로 형성되고 확산됐다고 할 수 있습니다. 성전이 기도하는 곳이자 사도들의 가르침을 받는 자리라고 한다면, 집은 성찬례와 친교의 음식 나눔이 이루어지고 찬미의 기도가 울려 퍼지는 자리였습니다. 루카는 첫 신자 공동체의 이런 생활이 “온 백성에게서 호감을 얻었다. 주님께서는 날마다 그들의 모임에 구원받을 이들을 보태어 주셨다”(2,47)고 전합니다.생각해봅시다“주님께서는 날마다 그들의 모임에 구원받을 이들을 보태어 주셨다”는 마지막 문장은 첫 신자 공동체의 성장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성장하도록 해주시는 주체는 ‘주님’이십니다. 이 말은 교회의 성장은 우리 인간의 힘으로 되는 것이 아님을 뜻한다고 이해할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 하시는 일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모든 것을 주님께만 맡기고 손을 놓고 있어야 하는지요? 아닙니다. 이 문장 바로 앞에 “온 백성에게 호감을 얻었다”는 표현을 눈여겨볼 필요가 있습니다. 무엇이 온 백성에게 호감을 주었을까요? 첫 신자들의 생활입니다. 가르침을 받고 가진 것을 팔아 저마다 필요한 대로 나누고 빵을 떼어 나누고 즐겁고 순박한 마음으로 음식을 함께 먹고 하느님을 찬미하는 삶이, 한마디로 나눔과 사귐으로 하느님을 섬기는 삶이 백성에게 호감을 주었고 그것을 본 사람들이 신자들의 무리에 합세한 것입니다. 사도들 또한 자기들의 능력이 아니라 성령의 능력으로 복음을 선포했다는 사실도 잊지 말아야겠지요.오늘날도 마찬가지입니다. 교회가 참으로 성장하려면 인간의 말재주가 아니라 성령의 능력으로 복음을 선포해야 하며, 나눔과 사귐과 섬김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 일은 멀리에서가 아니라 가까이에서, 가정에서, 이웃에서, 직장에서 이루어져야 합니다. 그러려면 성령께서 우리 안에서 활동하시도록 해야 합니다. 그렇게 하는 데 필요한 것은 무엇일까요? 평화신문2019.02.27

교회 원천과 지향 담긴 ‘마태오 복음서’ 해설이기우 신부, 복음서 해설서 펴내, 마르코 복음서 이어 두 번째 출간 교회는 누구인가 상ㆍ하 이기우 신부 글 / 함께 가는 길 / 각 1만 3000원예수님의 행적과 가르침을 엮은 ‘4복음서’를 읽다 보면 ‘어! 같은 내용이 반복되네’ 하고 가볍게 지나치는 경우가 종종 있다.그러나 4복음서는 절대 같지 않다. 복음서가 쓰인 시기와 저자가 다를 뿐 아니라, 각 복음사가가 겨냥한 집필 의도와 목적 또한 저마다 다르기 때문이다. 가톨릭교회가 예수님 이야기를 네 권이나 되는 복음서로 채택한 데에도 분명한 신학적 이유가 있다. 「교회는 누구인가 상ㆍ하」를 펴낸 이기우 신부는 “진정 ‘교회는 누구인가?’, ‘우리는 어떤 교회인가?’라는 물음이 마태오 복음서에 잘 나와 있다”며 “복음서와 함께 책을 통해 더 풍요로운 신앙생활을 하길 바란다”고 전했다. 이기우(영원한 도움의 성모 수도회 지도) 신부가 최근 펴낸 「교회는 누구인가 상ㆍ하」는 마태오 복음서를 알기 쉽고 재미있게 주해한 해설서 겸 묵상집이다. 2016년 마르코 복음서를 다룬 「예수는 누구인가」에 이은 두 번째 복음서 길잡이다. 예수님 시대의 역사적 상황과 복음서가 쓰인 시대적 배경을 교부들의 주해와 복음서 간 차이점을 곁들여 망라한 책이다. 무턱대고 성경 읽기에만 급급해 미처 몰랐던 신학적 의미들이 장마다 자세하게 정리돼 있다. 집필 때마다 2년이 걸릴 정도로 이 신부가 복음서 해설에 심혈을 기울이는 것은 신자들을 위해서다.이 신부는 14일 서울 성북구 정릉의 영원한 도움의 성모수도회 총원 사제관에서 만난 자리에서 “신자들을 위한 ‘지적 봉사자’가 되고 싶었다”고 밝혔다. 그간 본당, 빈민 사목을 하면서도 각종 성경 해설서와 주석서를 빠짐없이 찾아 읽으면서 성경 강의를 해온 이 신부가 이젠 책을 통해 ‘복음서 강의’를 하게 된 것이다.이 신부는 “신자들이 성경 내용을 잘 이해하기엔 성경의 무대가 지금과 시대적ㆍ문화적 편차가 크다”며 “교부들의 명쾌한 가르침과 함께 오늘날 우리 상황에 맞는 묵상을 담은 ‘사목자가 쓴 신학책’을 펴낸 것”이라고 했다.마르코 복음서가 ‘예수님은 누구인가’ 하는 ‘신원적 그리스도론’을 밝힌 성경이라면, 마태오 복음서는 하느님께로부터 오신 예수님이 교회 안에 함께하심을 깨닫도록 하는 ‘교회적 그리스도론’을 강조한 책이다. 책 제목도 마태오의 집필 의도에 따라 「교회는 누구인가」라고 했다.“마르코가 ‘행동하는 메시아’를 전하고자 했다면, 마태오는 예수님의 가르침을 다섯 설교로 묶어 편집함으로써 ‘가르치는 메시아’를 전하고자 했습니다. 산상설교ㆍ파견 설교ㆍ비유 설교ㆍ공동체 설교ㆍ종말 설교가 그것이죠. 이 설교들이 마태오 복음서의 백미입니다. 마태오는 이 설교들을 기록함으로써 그리스도인들이 교회 안에서 어떻게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만날 수 있는지 그 길을 제시하고자 했습니다.”마태오 복음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족보’로 시작한다. 그런데 ‘다윗’이 ‘아브라함’보다 앞서 언급되고, 족보 끝에는 세대 수를 십사 대로 나눠 재언급한다. 이는 마태오가 예수님께서 다윗의 자손으로서 혈통으로 제왕적 메시아의 지위를 갖고 태어나심을 드러낸 것이다. 십사 대는 각기 판관ㆍ임금ㆍ대사제의 지배를 받은 시점별로 정리한 것이다. 이는 후일 제2차 바티칸 공의회가 제시한 예언직ㆍ왕직ㆍ사제직의 근거가 된다. 족보에 이방인 여인들이 언급된 점, 이방인인 동방박사가 유다인들보다 먼저 예수님을 경배한 것은 모두 ‘구원의 보편성’을 알리려는 의도다.예수님이 공생활에 앞서 광야의 유혹을 받으신 이유, 마태오가 예수님 기적보다는 설교의 가르침에 더 집중한 이유 등 자세한 신학적 해설이 이어진다.“교회는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만나는 그리스도인들의 공동체입니다. 교회는 예수님께서 역사적으로 믿는 이들에게 남겨주신 유산이자, 그분이 세상 끝날까지 현존해 계시는 구원의 장입니다. 교회가 누구인지 아직 설명하기 어려우신가요? 마태오 복음서에 가톨릭교회의 원천과 지향이 다 나와 있습니다.” 이 신부는 루카ㆍ요한복음서 해설집도 이어 펴낼 계획이다.이정훈 기자 sjunder@cpbc.co.kr 백영민2018.08.22

“미혼모 진정으로 돕는 길, 생명교육에 있어요” 가톨릭대 생명대학원 송은경씨, 미혼모 주제로 석사학위 논문 발표 가톨릭대 생명대학원에서 미혼모를 주제로 다룬 첫 논문이 나왔다. 올해 2월 생명대학원을 졸업한 송은경(아가타, 40, 서울대교구 공덕동본당)씨의 생명윤리학 석사학위 논문이다. 그의 논문 주제는 ‘한국의 미혼모자 기본생활시설 내 가톨릭 생명윤리 교육의 필요성에 대한 고찰’이다. 십대 미혼모를 중심으로 자료를 찾고 공부했다.석사학위가 기삿감일까 싶지만, 딸을 둔 엄마로서 미혼모와 미혼모 자녀들을 돕고 싶은 마음으로 시작한 그의 열정은 ‘박사급’이다. 2016년 육아휴직 중이었던 그는 성경ㆍ기도 모임을 통해 미혼모를 돕고 싶은 마음이 생겼다. 미혼모를 잘 알고 돕기 위해 공부하고 싶었고 생명대학원에 입학했다. 몸이 아픈 양가 부모에게 아이를 번갈아 맡겨 공부에 매진했고, 복직 후에는 딸을 데리고 다니며 수업을 들었다. “10대 미혼모에게는 경제적 지원도 중요하지요. 하지만 예전 생활로 돌아가지 않으려면 가톨릭 생명윤리 교육이 꼭 필요합니다.”미혼모자 기본생활지원 시설에 머무는 십대 미혼모들은 대부분 2~3개월 머물기에, 내면의 상처에 대한 심리적 위안과 해결을 위한 충분한 시간을 갖기 어렵다. 학교를 벗어난 상태여서 제대로 된 성교육을 받을 기회조차 없어 재임신의 위험에도 노출돼 있다. 실제로 미혼모의 임신 경험 횟수로 보면 재임신의 경우가 30%로 적지 않다. 송씨는 십대 미혼모에 대한 특성과 현황을 짚고, 미혼모자 시설의 교육 프로그램을 분석했다. 그는 논문 연구를 통해 사회 전반에 퍼진 잘못된 성에 대한 인식을 바로잡고, 미혼모 문제에 대한 근원적인 해결책으로 가톨릭 생명윤리 교육의 필요성을 제안했다. 미혼모들이 생명윤리 교육을 받는다면 자존감 회복의 기회를 갖고, 재임신 방지를 위한 바른 성교육도 받을 수 있다. 국내 미혼모를 다룬 논문은 있었지만 대부분 미혼모에 대한 심리 혹은 사회복지정책을 다룬 논문이 많아 자료를 찾는 데에 어려움이 많았다. 7년 동안 건강검진센터에서 간호사로 근무한 송씨는 올해 초 직장을 그만뒀다. 생명대학원에 입학하면서 ‘당신의 도구로 써달라’고 기도했던 그는 미혼모와 청소년들을 위한 생명윤리 교육에 헌신하고 싶었다. 신앙인으로서 인생의 후반부를 잘 살고 싶어 직장을 관뒀다. 지난해부터 초등부 주일학교 교사로 봉사하며 5, 6학년 아이들에게 몸과 생명의 소중함을 가르쳐주고 있다. “요즘 애들이 변했다고 하는데 아이들은 순수합니다. 어른들이 잘못 만들어 놓은 성문화, 어른들이 바로 잡아야지요.” 송씨가 주변 사람들과 학부모들에게 생명윤리 교육의 중요성을 설명하면 사람들은 생명교육이 학업과 진로 결정에 도움이 되느냐고 되묻는다.“아이들에게 생명과 몸의 중요성을 알려주는 가치 교육은 중요합니다. 생명의 소중함을 알려주는 교육이 의미 없이 흩어지진 않을 겁니다. 먼 훗날, 스쳐 지나가기만 하더라도 살아가는 데 도움이 될 거라 생각해요.”그는 6월부터 미혼모자 시설에서 봉사할 계획이다. 장기적으로는 미혼모자 시설에서 생명윤리 교육을 하는 게 그의 목표다. 이지혜 기자 bonaism@cpbc.co.kr cpbc2019.05.21
 교회오빠 (A Job Who Is near Us, 2019)](//cpbc.co.kr/CMS/newspaper/2019/05/rc/752061_1.0_titleImage_1.jpg)
[영화의 향기 with CaFF](18) 교회오빠 (A Job Who Is near Us, 2019)시한부 부부의 아름다운 삶, 깊은 영성 교회 오빠! 성격 좋고, 인물 좋고, 신앙심마저 좋은 청년. IT 연구가인 이관희는 역시 성격 좋고, 예쁜 피아노 전공 음악교사 오은주와 결혼을 한다. 모두의 선망 속에….이 이야기는 ‘아빠, 엄마, 딸 세 식구 행복하게 살았대요’로 이어져야 하는데, 젊은 아빠가 병원을 찾은 후에는 이미 대장암 4기. 엄마 역시 혈액암 4기라고 진단받는다. 관희가 “말기가 아닌 4기에 발견해서 다행”이라고 말하지만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을까. 설상가상으로 이들을 돌보던 어머니는 우울감과 고통으로 무너진다.막막한 상황이지만 이 영화에서 눈을 뗄 수 없었던 이유는 부부의 모습이 아주 아름다워서다. 병이 아니라면 이들의 대화나 행동은 티격태격 잘 지내는 연인 한 쌍이다. 부인은 “무섭다”고, “살려달라”고 눈물을 뚝뚝 떨구는데 관희는 “이 상황을 두려워하지 말라”고 한다. 신앙으로 답을 찾는 남편에게 부인은 “정말 그러느냐” 묻고 또 물으며, “나는 아직 아니다”라고 하면서도 관희씨 말을 수긍한다. 부부는 어려운 상황에서 신앙만이 답이라 그걸 찾는 것이기도 하지만, 신앙이 결국 답이니 그걸 함께 찾는다. 영화 ‘교회오빠’ 포스터. 이 부부의 모습은 세상을 살아가는 우리네 삶이, 길든 짧든 시한부 인생이고, 길 떠난 나그네, 순례자임을 자각하게 한다. 소중하다고 꼭 쥘 수도 없고, 힘들다고 내려놓아서도 안 되는 삶이라는 지평 위를 걷고 있음을.아빠의 첫 번째 미션은 소연이의 돌잔치에 함께하는 것. 다행히 이 미션은 성공했다. 두 번째 미션은 소연이의 초등학교 입학식 때 엄마, 아빠가 함께하는 것.엄마, 아빠가 아기 소연이와 함께 노는 모습은 사랑스럽다. 평범한 한 가정의 소소한 일상이 이토록 아름다운 것은 젊은 엄마의 말처럼 언제 멈출지 모르는 삶이기 때문이리라. 누군가에게 평범한 일상이 누군가에게는 꼭 갖고, 지키고 싶은 하루라는 말처럼 오늘 하루, 바로 이 시간이 새삼스레 귀하다.이 영화는 욥의 생애로 첫 구절을 시작한다. 관희는 욥을 롤모델로 삼고 자신의 삶을 해석하고 희망한다. 시간이 흐르면서 관희의 모습은 점점 소진돼가지만, 그의 영성은 점점 깊어지고 숭고해진다. 모르핀을 맞지 않으면 견딜 수 없는 몸의 상태이지만, 이도 거부한다. 약을 먹으면 정신이 몽롱해져서 성경 말씀이 잘 들어오지 않는단다. 맑은 정신으로 말씀을 읽고 싶고, 듣고 싶고 설교 말씀을 듣고 싶단다. 결코, 병이 인간을 침몰할 수 없음을, 죽음이 인간의 끝일 수 없음을 보게 한다. 그의 미션은 이 영화로 다시 시작된다. “살아서 나를 믿는 모든 사람은 영원히 죽지 않을 것이다.”(요한 11,26) 머리에서 맑은 종이 울린다. cpbc2019.05.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