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교구 청년들, 신앙심 더 깊고 새롭게 다져교구 신앙축제 개최 인천교구 청소년사목국 청년부(담당 한덕훈 신부)·대학사목부(담당 정희채 신부)는 11월 25일 인천 보니파시오 대강당에서 ‘푸르른 그대가 희망입니다’를 주제로 ‘2018 인천교구 청년신앙축제’를 개최했다. 청년 500여 명은 세례 신앙 갱신식, 부스 체험, 찬양 페스티벌에 참여해 또래 청년들과 하느님께 기도를 청하고, 신앙 고민을 나눴다. 인천교구장 정신철 주교는 미사에서 “인천교구는 세례 신앙 갱신의 해를 보내면서 예수님은 우리 삶의 중심이시고, 하느님의 말씀은 내 삶에 가까이 있어야 한다는 걸 깊이 새겼다”며 “우리 청년들이 힘들 때면 가장 먼저 하느님께 기도드리고, 동료 신앙인들과 교류하며 신앙의 힘으로 어려움을 이겨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청년부 프로그램에 열심히 참여한 청년들을 위한 시상도 열렸다. 청년 34명은 청소년사목국 청년부가 주최한 ‘청년 신앙 특별 강좌’에 개근해 ‘푸를청상’을 받았다. 청년 신앙 특별 강좌는 「가톨릭교회 교리서」를 중심으로 성경, 신앙고백 등을 공부하는 강좌로 올해 4월부터 청년 150여 명이 참여했다. ‘2018년 청년 프로그램 우수 참여 본당’은 교구 부평1동 본당이 선정됐다. 내년 1월 열리는 파나마 세계청년대회(WYD)에 참가하는 인천교구 사제와 청년들을 위한 축복식도 열렸다.이찬영(요한 사도, 25, 인천 한국순교성인본당)씨는“축제에서 또래 청년들과 어울리고 찬양하며 늘 함께하시는 하느님 사랑을 뜨겁게 느꼈다”며 “오늘 축제에서 신앙인으로 마음가짐을 새롭게 한만큼 앞으로 깊은 신앙생활을 할 것”이라고 말했다.한편, 인천교구 청소년사목국 청년부·대학사목부는 내년부터 청년 나이를 만 19세에서 45세까지로 조정하고, 청년부(만 19~35세)와 청·장년부(만 30~45세)를 개편해 사목한다. 전은지 기자 eunz@cpbc.co.kr 평화신문2018.11.27
세계 유일의 통합 사목 행정망 갖춰서울대교구 전산정보실, 천주교 양업시스템 20주년 기념행사 서울대교구 전산정보실(실장 최양호 신부)은 11일 서울 명동 교구청 본관 1층 로비에서 천주교 양업시스템 20주년 기념행사를 열었다.최양호 신부는 교구장 염수정 추기경, 손태승 우리은행장, 교구 사제단, 협력업체 관계자들이 참석한 가운데 인사말을 통해 “천주교의 양업시스템은 한국 교회 전체를 통합 전산망으로 구축했다”면서 “이 시스템은 전 세계 가톨릭교회를 살펴봐도 유일무이하다”고 소개했다.서울대교구장 염수정 추기경은 축사에서 “교구와 본당, 신자 모두에게 유용한 사목 도구가 되기를 기대하면서 개발된 양업시스템의 20주년을 축하하고, 그동안 수고해주신 분들께 감사드린다”고 인사했다. 이어 손태승 우리은행장은 축사에서 “서울대교구가 세계 최초로 양업시스템을 구축하고 타 교구의 행정 전산화에도 도움을 줬다”며 “(20년간) 양업시스템이 천주교 사목 행정에 미친 영향은 대단했을 것으로 짐작한다”고 말했다.한국 교회의 두 번째 사제이자 땀의 순교자인 최양업 신부의 이름을 딴 양업시스템은 1997년 당시 교구 사무처장이었던 염수정 추기경이 사목행정 발전위원회를 꾸리면서 시작됐다. 1998년 교구는 우리은행(옛 상업은행)의 지원으로 정보화 작업에 착수, 양업시스템을 개통했다.2008년에는 한국 교회의 사목 행정을 하나의 전산망으로 잇는 통합 양업시스템을 개통했다. 이로써 전국 교구 본당의 행정 업무가 원활해졌으며, 교적 관리를 비롯해 인사, 회계 처리의 일관된 업무가 가능해졌고, 구역ㆍ반별 신자 현황 등 다양한 사목 정보도 받게 됐다. 통합된 하나의 사목 행정 전산망을 이용하고 있는 교회는 전 세계에서도 찾기 어렵다. 교구는 웹사이트로 사목 및 선교 정보 서비스를 제공하기 위해 1998년 ‘가톨릭굿뉴스’를 개통한 이후 가톨릭 포털사이트로 개편했다. 모바일 통신사와 복음화 협약을 맺은 2008년부터는 성경과 가톨릭 기도문, 매일 미사, 각 교구 주보 및 가톨릭 성인 등 신앙생활에 필요한 정보를 앱을 통해 제공하고 있다.이지혜 기자 bonaism@cpbc.co.kr 평화신문2018.12.19

“미사·봉사도 좋지만 생각하고 질문하는 신앙생활 필요해”신학 하는 즐거움/ 송용민 지음 / 바오로딸 / 1만 5000원 인생에 고통은 왜 있을까? 교회 없이 믿음을 가지면 안 되는 것일까? 성경 공부는 왜 하는 걸까?‘웬 엉뚱한 물음이냐’고? 그런데 조금만 따져보면 미사에 열심히 참여하고, 봉사활동 열심히 하는 것만이 신앙생활의 전부는 아니다. 인간은 생각하는 동물. 하느님의 숨결로 세상에 태어난 만큼 내가 이 세상에 왜 오게 됐으며, 어떤 부르심을 통해 하느님을 믿고 따르게 됐는지 돌아보는 ‘신앙적 사유’가 반드시 필요하다. 세상 속 ‘암호화된 성령의 활동’을 읽는 일, 바로 ‘신학’이다.기초신학 박사 송용민(주교회의 사무국장, 인천교구) 신부가 신학 하는 방법과 믿는 삶의 의미를 쉽게 풀어 안내한 「신학 하는 즐거움」을 펴냈다. 더 많은 신자가 ‘생각하는 신앙생활’을 통해 성숙된 기쁨의 삶을 살길 바라는 마음에서다. 2010년 가톨릭평화방송TV 강좌 프로그램을 통해 대중에게 신학의 의미를 전하고, 2005년부터 운영 중인 ‘신학 하는 즐거움’ 카페 활동을 통해 3700여 명의 신학생과 신자들에게 신학의 진면목을 전해온 노력의 또 다른 결실이기도 하다.3월 29일 만난 송 신부는 “신학은 쉽게 말해 ‘하느님에 관한 이야기’”라며 “‘나’라는 존재에서 시작해 하느님과 나와의 관계를 돌아보고, 내 믿음을 성찰하는 작업”이라고 설명했다.신학은 나, 하느님, 그리고 세상 만물에 관한 이야기를 모두 내포하는 사유의 산물이다. 그 뿌리와 과정은 철학, 인문학과도 연결되지만, 세상 만물을 있도록 한 거룩한 하느님의 뜻을 향하고, 알아간다는 점에서 다른 학문들과는 다르다.송 신부는 “올바른 신앙을 갖기 위해선 내 신앙에 대해 물음을 던지는 작업이 꼭 필요하다”며 “일상 속에서 믿음의 언어를 찾고, 마침내 나의 진정한 안식처가 어디인지 깊이 사색해 보는 것이 신앙의 시작이고, 신학의 출발점”이라고 전했다.나의 믿음이 이성을 만나 사유를 거치면, ‘아 그렇구나!’ 하고 무릎을 치게 하는 경탄이 일어난다. 이런 물음이 쌓여 진정한 믿음에 이르면, 희망으로 가득 찬 신비로운 하느님의 존재에 다가가는 은총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이다. 신학은 장막으로 가려진 믿음의 눈을 깨워주는 이성의 활동이라고도 볼 수 있다.송 신부는 책을 통해 막연하고 어렵게만 느껴지던 신학의 문턱을 한층 낮춰주고 있다. 하느님과의 관계를 고민하고, 나아가 세상 모든 일을 주님의 섭리를 통해 이해하고자 노력하는 일이 전문 신학자나 신학생들만 할 수 있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신학은 세상과도 긴밀한 학문. 당장 눈을 감고 묵상을 통해 짧은 사유를 해볼 수도 있고, 관련 서적을 찾아보거나 친한 교우들과 삶의 주제를 놓고 대화하는 것도 일상 속 신학이 될 수 있다.송 신부는 “제가 유학했던 독일의 신학대학은 신학생보다 신학자가 되려는 평신도가 훨씬 많고, 거기서 배출된 평신도 신학자들이 각 본당에 파견돼 평신도 사목 협력자로서 다양한 영적 프로그램 제공에 힘쓰고 있다”며 “한국 교회에도 가톨릭교리신학원과 다양한 신학 강좌가 생겨나고 있는 만큼 교회 미래를 위해 평신도 신학자가 많아지길 바란다”고 밝혔다.“신학 서적만 들여다보는 것이 신학은 아닙니다. 정치, 문화, 환경, 경제 등 모든 세상 움직임 속에 담긴 메시지를 읽고, 신앙과의 접점을 찾는 것도 신학의 즐거움이 될 수 있습니다. ‘그냥 믿기만 하면 된다’가 아니라, 내가 따르는 믿음이란 무엇인지 먼저 생각해보길 권합니다. 그러면 신학은 신앙이 될 것이고, 깊어지면 영성이 될 겁니다. 생각하면 하느님께로 더 나아갈 수 있습니다.” 이정훈 기자 sjunder@cpbc.co.kr cpbc2019.04.03

예수님 발자취를 따라 이스라엘 성지를 가다 (4·끝)‘인류 구원의 역사’는 지금도 흐른다 유다인들과 순례객들이 '통곡의 벽'에서 기도하고 있다. 성경을 낳고, 성경을 품은 중동의 작은 나라. 이스라엘은 ‘성경의 땅’이다.이스라엘 민족을 통해 인류사에 개입하신 하느님 섭리를 다룬 ‘하느님의 서사시’ 성경 말씀이 살아 숨 쉬는 곳이 이스라엘이다.이스라엘 남부 광활한 광야 지역에는 구약의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있고, 비옥한 평야와 갈릴래아 호수가 넘실대는 북부 지방에는 예수님 설교가 아직 귓전을 때리는 듯 잘 보존돼 있다. 이곳에서 ‘말씀’을 ‘현장’으로 만나는 순간, 누구나 가슴 뜨거운 전율을 느낄 수 있다. 많은 그리스도인이 이스라엘을 ‘성지 중의 성지’라 부르는 이유다.그러나 이스라엘 역사는 한시도 바람 잘 날 없는 침탈과 유배의 아픔을 간직하고 있다. 기원전 1000년 유다 민족의 12지파를 최초로 통일한 위대한 임금 다윗왕. 이어 가장 번성했던 솔로몬왕 통치로 찬란한 황금시대를 구가한 이스라엘 왕국은 그러나 통치 80여 년 만에 남북으로 분열된다. 유럽과 아프리카, 아시아를 연결하는 통로였던 이스라엘은 이후 3000년 가까이 페르시아, 그리스, 로마, 마케도니아, 십자군, 이슬람 민족, 터키, 대영 제국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이민족 국가들의 침탈과 유배의 아픔으로 얼룩지고 만다. 모세의 계약의 궤를 모셨던 ‘하느님의 지성소’ 예루살렘 성전은 붕괴와 재건을 반복한 끝에 이슬람 ‘황금 돔 사원’이 1500년째 자리하고 있다.예수님 시대 이후 2000년이 지난 오늘날. 도시 전체가 거대 박물관이 된 예루살렘은 ‘종교의 백화점’이다. 예루살렘 성전을 중심으로 길이 6㎞로 둘러쳐진 성곽 안 올드 시티(Old City)는 로마 가톨릭, 유다교, 무슬림이 각기 구역을 나눠 살아가는 ‘공존’과 ‘상생’의 터다. 2만 명의 사람들이 좁은 골목 안 3000여 개 크고 작은 상점과 주거지에 산다. 정오 기도 시간이면 이슬람 모스크 사원 스피커에서 울려 퍼지는 기도 소리와 성당 종소리가 혼재돼 묘한 분위기를 내기도 한다. 올드 시티 밖은 유럽 각지에서 ‘반유다주의’로 온갖 차별과 핍박을 받던 유다인들이 19세기 이후 정착해 뉴 시티(New City)를 형성하고 있다.‘신앙’은 기념과 기억이라고 했던가. 기원후 70년, 로마제국에 의해 멸망한 뒤 전 세계로 흩어졌던 유다인들이 1948년에 이르러 오늘의 이스라엘 국가를 다시 세우기까지, 특히 제2차 세계대전으로 전 세계 유다인의 3분의 2가 죽음으로 내몰리는 가운데서도 이들이 역사 속에서 결코 사라지지 않을 수 있었던 힘은 자신의 역사와 믿음을 지키는 ‘유다교 신앙’ 때문이었다. 이들은 철저한 율법의 가르침 아래 매주 토요일이면 온 가족이 ‘안식일’을 지킨다. 아무 일도 하지 않고, 전기도 쓰지 않고 오로지 메시아가 오길 기원하며 토라 경전을 외운다. 특히 오늘날에는 안식일에 가족 식사를 마치고 모세 오경 통독과 기도 후 저녁에 회당에 다시 모여 자정까지 남녀노소가 한데 모여 춤을 추는 방식으로 공동체 결속을 키우고 있다.순례 중 초대받은 예루살렘 시온산의 한 회당에서 ‘유다인의 신앙과 공동체성’을 확인할 수 있었다. 이들은 낮에는 회당 한편 강의실에서 ‘고시 공부’하듯 토라를 열심히 외우고 토론하느라 여념이 없었다. 그리고 저녁 늦은 시각. 다시 모인 이들은 회당 뜰에서 신 나는 리듬에 맞춰 연신 춤을 췄다. 하느님 아래에 사는 기쁨을 온몸으로 표현하는 시간이다. 어르신, 어린아이할 것 없이 다 같이 손잡고, 모였다가 흩어지길 반복하며 메시아 도래를 위해 찬양하는 모습이 생소하면서도 하나 된 마음이 한편으론 부럽게 다가오기도 했다.이스라엘은 전역이 ‘역사 현장’이요, ‘발굴터’다. 수십 미터 지하에서 신구약 속 역사가 언제 모습을 드러낼지 모르는 땅이다. 새 건물을 신축하다 이내 로마 시대, 혹은 그 이전의 유물과 요새가 대거 발견되곤 한다. 2009년 갈릴래아 막달라 지방에서 1세기 유다교 회당과 어업 공장터가 대규모로 발견된 데 이어, 2010년에는 나자렛에서 기원전 1000년 시대 주거지가 발굴됐다. 2015년에는 예루살렘 다윗 도시 바로 옆 주차장 부지 아래에서 ‘아크라(Acra)’라고 알려진 기원전 2세기 고대 그리스 요새 터가 발견됐다. 그리스왕 안티오코스 에피파네스가 기원전 168년 무력으로 예루살렘을 차지하고, 모든 유다교 활동을 금지하기 위해 예루살렘 성전을 통제하고자 지은 요새로, 고고학자들이 수세기에 걸쳐 찾던 곳이다. 고고학자들은 땡볕 아래에서 3년째 발굴터를 복원 중이다.유다인들은 아픈 과거를 절대 잊지 않는다. 오히려 유배와 학살, 핍박과 박해의 고통을 더 잘 보존하고자 애쓰고 있다. 유다인들은 밤낮으로 20m 높이 예루살렘 성전 ‘서쪽 벽’(통곡의 벽)에서 자신들의 본래 지성소였지만 현재는 이슬람 사원이 돼버린 ‘황금 돔 사원’ 성벽 밖에서 통곡하며 기도를 바친다. 그 옆에서 많은 순례객이 각자 자신의 소망을 종이에 적어 이곳 바위틈에 끼워 넣기도 한다.역사를 기리는 방법도 현대화되고 있다. 매일 밤마다 올드 시티 서쪽 요빠 성문(Jaffa Gate) 옆 야외에서 성벽을 스크린 삼아 수십 대의 빔프로젝터가 상영해주는 화려한 영상을 통해 이스라엘의 수천 년 역사를 감상할 수 있다. 전 세계 유다인의 모금으로 2005년 개장한 ‘야드 바쉠’ 홀로코스트 박물관에서는 유다인 학살의 아픈 역사를 관람할 수 있다.이스라엘 역사는 한 민족만의 발자취가 아니다. 모든 민족을 향한 ‘하느님의 구원 역사’가 드러난 것이 이스라엘의 역사 속에서다. 틀림없는 사실은 파괴와 복원을 반복한 예루살렘 성벽과 돌 바닥, 성당들은 여전히 하느님의 섭리, 예수님의 고뇌와 피땀을 온전히 품고 있다는 것이다. 오늘도 하늘엔 하느님이 창조한 태양이 뜨고, 땅 위엔 아들 예수님의 발자국이 짙게 남아있다. ‘하느님 역사’는 여전히 흐르고 있다.이스라엘=이정훈 기자 sjunder@cpbc.co.kr 평화신문2018.08.29
본당 사목 사례집 「사목의 기쁨」 출간주교회의 한국가톨릭사목연구소“곧 본당 설립 30주년인데 신자들과 함께할 수 있는 기념사업은 없을까?”, “교황님이 말씀하신 생태 보호를 다른 본당은 어떻게 실천하고 있을까?” 본당 사목의 고민을 해소하고 길잡이 역할을 해 줄 사례집이 나왔다. 주교회의 한국가톨릭사목연구소(소장 김희중 대주교)가 펴낸 「사목의 기쁨」은 전국 각 본당에서 실제로 기획, 실행하고 평가한 59개 프로그램을 담았다. 프로그램들을 사목 분야별, 대상별로 분류해 당면 과제와 관심 분야에 따라 비교 검토할 수 있게 한 것이 특징이다. 프로그램을 진행한 본당명, 기획 취지와 세부 활동 내역, 행사 일정표, 진행 과정에서 고려했던 사항, 긍정적 효과와 보완할 점들을 상세히 정리해 놓은 것도 눈에 띈다. 사목 분야별로는 ▲본당 전체 행사 ▲본당 사목 계획 ▲선교 ▲교리교육 ▲전례 ▲말씀(성경 읽기) ▲사회사목 프로그램을, 사목 대상별로는 ▲가정 ▲나이별 프로그램을 실었다. 사목 현장에서 호응을 얻어 교계 매체에 언급된 짧은 사례들은 ‘사목 아이디어 모음’으로 한데 묶었다. 본당에서 다양한 프로그램을 새로 구상할 수 있게 돕기 위한 취지에서다. 부록으로는 모임에서 활용할 수 있는 기도문 모음, 본당 사목 진단과 신자들의 의식 조사에 활용할 수 있는 설문지 모음을 실었다. 한국가톨릭사목연구소 당연직 소장인 주교회의 의장 김희중 대주교는 편찬사에서 “‘「사목의 기쁨」이 다양한 사목 현장에서 재해석됨으로써 사제와 신자들이 행복한 신앙생활을 하는 데 도움이 되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본당 사목 사례집 「사목의 기쁨」은 비매품으로 발행돼 전국 교구 주교들과 사목국, 홍보국에 배포됐다. 연구소 홈페이지(http://pastor.cbck.or.kr) ‘연구소 발간 자료’ 게시판에서 내려받을 수 있다. 윤재선 기자 leoyun@cpbc.co.kr cpbc2018.11.22
![[교부들의 사회교리] (11)어떤 부자가 구원받는가](//cpbc.co.kr/CMS/newspaper/2019/02/rc/747097_1.0_titleImage_1.jpg)
[교부들의 사회교리] (11)어떤 부자가 구원받는가‘돈 욕심’을 경계하라 “매우 부유하고 율법에 충실한 부자 청년은 이 말씀을 올바르게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같은 사람이 어떻게 가난한 동시에 부유할 수 있고, 부를 지닌 동시에 지니지 않을 수 있으며, 세상을 이용하는 동시에 이용하지 않을 수 있는지도 이해하지 못했습니다.(1코린 7,29-31) 그래서 그는 우울해 하며 풀이 죽어 떠났습니다. 그는 갈망했지만 얻을 수 없었던 생명의 신분을 포기했으며, 어려운 일을 스스로 불가능한 일로 만들었습니다. 눈에 보이는 값비싼 사치품들과 화려한 유혹들에 영혼이 사로잡히지 않고 현혹되지 않기란 어렵습니다. 그러나 사람이 자신의 감각적인 부에서 정신적인 부와 하느님께서 가르치신 부로 옮아가려 하고, 그 자체로 선하지도 악하지도 않은 부를 올바르게 적절히 사용하며 영원한 생명에 이르는 길에 접어드는 법을 배우려 한다면, 구원을 받는 것은 불가능하지 않습니다.”(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스, 「어떤 부자가 구원받는가」 20,1-2. 하성수 옮김)지성인 신앙 교육클레멘스는 150년경 그리스에서 태어났으나 알렉산드리아에서 주로 활동한 교부다. 알렉산드리아는 인구 100만 명을 헤아리는 대도시였고, 문화와 학문에서 로마 제국의 중심지였다. 당대의 유명한 선생들에게 훌륭한 인문 교육을 받은 그는 180년경 알렉산드리아의 그리스도교 철학 학교에 입학했고, 스승의 뒤를 이어 그 학교 교장이 되었다. 셉티미우스 세베루스 황제의 박해(202~203년) 시기에 카파도키아를 거쳐 예루살렘으로 옮겨가 교회에 봉사하며 저술 활동을 펼치다가 215년경 삶을 마감했다. 고전 문화와 복음을 조화시켜 지성인들을 교육하는 데 이바지했다.낙타와 바늘귀“부자가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낙타가 바늘귀를 빠져나가는 것이 더 쉽다”(마르 10,23)는 예수님의 이 말씀은 부자들을 늘 근심에 빠뜨린다. 클레멘스는 「어떤 부자가 구원받는가」라는 책에서 이 수수께끼 같은 말씀 풀이를 시도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돈이 많다고 구원받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돈 욕심에 빠진 인간이 스스로 하느님 나라에서 제외된다는 것이다. 성경의 문자적 의미에 소홀한 지나친 영적 해석이라는 비판을 받기도 한다. 클레멘스는 돈이란 그 자체로는 가치 중립적이라고 보았다. 선하게 사용하면 선하고, 악하게 사용하면 악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부자라 할지라도 재물을 적절하고 올바르게 사용하기만 하면 구원이 불가능하지 않다는 것이다. 훗날 아우구스티누스는 훨씬 더 강력하고 명쾌하게 설명한다. “재물을 가지고 있으면 구원받기 어렵고, 재물을 사랑한다면 구원은 불가능하다.”(「서간집」 203) 부를 독점한 부자는 이미 구원받기 어렵지만, 돈 욕심에 사로잡히면 부자, 가난한 이 가릴 것 없이 파멸로 치닫게 된다는 말이다. 재물이 우리 구원을 가로막지 않게 해 달라던 아우구스티누스의 기도는 언제나 유효하다. “오, 주님, 이 어려운 일을 저희에게 가르쳐 주십시오. 저희가 소유하고 있는 재화를 양심적으로 관리하게 해 주시고, 당신께서 저희에게 주시는 것 이상을 탐욕스레 열망하지 않게 해 주십시오.”(「서간집」 203)최원오(빈첸시오, 대구가톨릭대 유스티노자유대학원장) 최원오 교수 cpbc2019.02.26
춘천교구 설정 80주년 개막 ‘주님의 빛 속에 걸어가자!’ 주제 1년간 기쁨의 해 보내 춘천교구가 12월 1일 오후 2시 강원도 춘천 호반체육관에서 교구장 김운회 주교 주례로 교구 설정 80주년 개막 미사를 봉헌한다. ‘주님의 빛 속에 걸어가자!’(이사 2,5)를 주제로 봉헌되는 개막 미사는 춘천교구가 내년 11월 24일 그리스도 왕 대축일 때까지 다양한 방식으로 기쁨의 해를 보내기 위한 대장정의 시작이다. 교구는 이날 교구 내 62개 본당 신자들이 함께한 가운데 △쇄신 △공동체의 일치 △복음화를 통해 새롭게 성장하는 교구로 발돋움한다는 계획이다.춘천교구는 80주년을 기념해 지난 8월부터 두 달 동안 전 교구민 대상 신앙 설문조사를 했고, 개막 미사 이튿날인 12월 2일부터 1년 동안 ‘예수 성심상 본당 순례’를 한다. 80년간 예수 성심의 사랑이 교구와 함께한 데 대한 감사의 마음을 교구민 전체가 봉헌한다는 취지다. 또 교구 설정 80주년 기념일 당일인 내년 4월 25일에 기념 미사를 봉헌하고, 이를 전후로 사진전, 음악회, 미술전 등 다양한 기념행사를 펼칠 예정이다. 이 밖에도 교구는 평일 미사 참여, 매달 지향을 둔 단식, 성시간, 성체조배, 성경 통독 등을 장려키로 했다. 청소년을 위한 공동사목 정례화, 100주년 주역이 될 30~40대를 위한 프로그램 마련도 검토 중이며, 80주년 기념 기도문도 배포했다.춘천교구는 설정 80주년 기념 엠블럼도 제작해 발표했다. ‘주님의 빛 속에 걸어가자!’라는 80주년 주제 성구에 맞춰 숫자 ‘80’을 형상화했다. ‘8’이라는 숫자는 ‘빛이신 그리스도 십자가 구원’을 향해 걸어가는 춘천교구 공동체의 발걸음을 표현했으며, 숫자 ‘0’은 전례의 대표적 4가지 색상인 자색(참회와 보속), 황금색(백색·기쁨과 영광), 홍색(순교와 성령강림), 녹색(희망과 평화)이다. 차츰 옅어지는 색상은 구원에 가까워질수록 새로워지는 신자들의 모습을 상징한다.이정훈 기자 sjunder@cpbc.co.kr 평화신문2018.11.28
 부활하시다(루카 24,1-12)](//cpbc.co.kr/CMS/newspaper/2018/11/rc/740010_1.1_titleImage_1.jpg)
[이창훈 위원의 예수님 이야기](89) 부활하시다(루카 24,1-12)빈 무덤 보고도 부활을 믿지 못한 제자들 주간 첫날 여자들이 예수님이 모셔진 무덤을 찾았으나 무덤이 비어 있었다. 사진은 예루살렘 주님 무덤 성당 안 예수님의 빈 무덤 제대. 가톨릭평화방송여행사 제공 예수님께서는 공생활 중에 제자들에게 세 번이나 당신의 수난과 부활에 대해 말씀하셨지만, 제자들은 무슨 말씀인지 깨닫지 못했습니다. 이제 그 부활 사건이 일어납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부활하시는 현장을 목격한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주간 첫날”(24,1) 곧 안식일 다음 날이었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처형과 죽음 그리고 돌무덤에 안장되는 것까지 지켜보았던 여자들, 곧 “갈릴래아에서부터 예수님과 함께 온”(23,55) 그 여자들은 향료와 향유를 준비해 새벽 일찍 무덤으로 갔습니다. 그런데 무덤을 막아놓았던 돌이 굴려져 있었고 안으로 들어가 보니 “주 예수님”(24,3)의 시신이 없어졌습니다. “여자들이 그 일로 당황하고 있는데 “눈부시게 차려입은” 남자 둘이 나타납니다. 여자들은 두려워 얼굴을 땅으로 숙입니다.(24,1-5ㄱ)황당한 일이 벌어졌습니다. 예수님의 시신이 없어진 것입니다. 여자들은 안식일 전날 예수님이 돌무덤에 안장되시는 것을 분명히 보았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좀 더 정성껏 모시고자 향료와 향유를 준비해 새벽 일찍 무덤을 찾았습니다. 그런데 시신이 없으니 여자들은 대단히 당황했고 놀랐을 것입니다. 그때 “눈부시게 차려입은” 남자 둘이 그들 앞에 나타납니다. 눈부시게 차려입었다는 표현은 이들이 하느님에게서 온 천사들임을 나타냅니다. 구약성경에서 모세가 시나이 산에서 하느님을 뵙고 내려왔을 때 그의 얼굴이 빛났고, 백성들은 그에게 가까이 가기를 두려워했지요.(탈출 33,29-30) 그래서 그 남자들을 하느님의 천사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여자들의 당황과 놀라움은 이제 두려움으로 바뀝니다. 마치 모세가 하느님을 뵙기가 두려워 얼굴을 가렸듯이(탈출 3,6), 여인들은 하느님에게서 온 이들을 뵙기가 두려워 얼굴을 땅으로 숙입니다. 그러자 두 남자는 이렇게 말합니다. “어찌하여 살아 계신 분을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찾고 있느냐? 그분께서는 여기에 계시지 않는다. 되살아나셨다.” 그러면서 갈릴래아에서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 곧 ‘사람의 아들은 죄인들의 손에 넘겨져 십자가에 못 박히셨다가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야 한다’는 말씀을 상기시켜 줍니다.(24,5ㄴ-7)두 남자의 말은 예수님께서 ‘살아 계신’ 분이라는 것입니다. ‘살아 계신’이라는 표현은 구약성경에서는 하느님을 나타내는 표현이기도 합니다. (“살아 계신 하느님께서”: 여호 3,10 ; “살아 계신 주님을 두고”: 판관 8,19). 천사들의 말은 ‘예수님께서 부활하셔서 살아 계시니까 그분의 시신을 여기서 찾을 수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여자들은 처음에는 무슨 말인지 못 알아들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눈부신 차림의 그 남자들이 갈릴래아에서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을 상기시켜 주자 그제야 여자들은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을 기억해 냅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수난과 부활을 모두 세 차례에 걸쳐 예고하셨습니다. 두 번은 갈릴래아에서(루카 9,22; 9,44), 세 번째는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시는 길에서였습니다.(루카 18,32-33) 이 여자들은 갈릴래아에서부터 줄곧 예수님과 함께해 왔기에 세 차례에 걸친 예수님의 말씀을 모두 다 들었을 가능성이 큽니다. 하지만 제자들과 마찬가지로 그들은 그 말씀이 무슨 뜻인지를 알아듣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러다가 예수님의 시신이 없어진 현장에서 그 남자들의 말에 비로소 예수님의 말씀을 기억해낸 것입니다. 그래서 여자들은 무덤에서 돌아와 “열한 제자와 그 밖의 모든 이에게” 이 일을 알립니다.(24,9) 그 밖의 모든 이란 열한 제자와 함께 있던 다른 제자들을 가리킨다고 할 수 있습니다. 루카 복음사가는 여기서 무덤을 찾은 여자들의 이름을 밝힙니다. 마리아 막달레나, 요안나, 그리고 야고보의 어머니 마리아입니다.(24,10) 마리아 막달레나와 요안나, 곧 헤로데의 집사 쿠자스의 아내는 루카복음서에서 이미 나왔던 이름이지만(8,2-3), 야고보의 어머니 마리아는 처음 나옵니다. 이 마리아는 형제 야고보(마태 13,55)의 어머니로 예수님의 이모(요한 19,25 참조)라고 학자들은 추정합니다. (본지 2017년 8월 27일자 1429호를 참조하십시오.) 사도들은 여자들이 전하는 말을 헛소리라고 믿지 않았습니다. 그렇지만 베드로는 일어나 무덤으로 달려갑니다. 그리고 몸을 굽혀 들여다보니 예수님의 시신을 쌌던 아마포만 놓여 있었습니다. “베드로는 일어난 일을 속으로 놀라워하며 돌아갔다”고 루카 복음사가는 전합니다.(24,11-12) 여자들의 말을 듣고도 사도들은 믿지 못합니다. 베드로는 다른 사도들과 달리 일어나 무덤으로 달려가서 예수님의 시신이 없어진 것을 확인하지만, 그 역시 예수님이 살아나셨다는 것을 제대로 믿지 못합니다. 속으로 놀라워할 따름입니다. 그들은 아직도 예수님께서 생전에 세 번이나 당신의 수난과 부활을 이야기하신 것을 깨닫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알아보기루카 복음사가는 예수님이 부활하신 날이 “주간 첫날”(24,1)이라고 전합니다. 오늘날 주간 첫날이라고 하면 월요일이라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하지만 주간 첫날은 안식일 다음 날, 곧 토요일 다음 날로 일요일을 가리킵니다. 달력을 보면 제일 앞에 일요일이 나오는 것이 이를 말해 줍니다. 하지만 이 주간 첫날에 예수님께서 부활하셨기에 그리스도교 신자들은 이날을 주님의 날 곧 주일(主日)로 여겨 거룩하게 지냈습니다. 이것이 구약성경에서 이야기하는 안식일과 결부되어 그리스도교에서는 주간 첫날을 주님의 날이자 휴식을 취하는 날로 지내면서 일요일이 쉬는 날로 보편화됐습니다. 물론 유다교에서는 오늘날에도 토요일을 안식일로 지냅니다. 한 주간의 마지막이 아니라 첫날을 주일로, 주님의 날로 지낸다는 것은 우리 그리스도 신자들에게는 대단히 중요한 의미를 지닙니다. 우리 삶의 첫 자리에 주님을 모신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살아가려고 노력하는 이들이 그리스도 신자들입니다.생각해봅시다예수님의 부활은 그리스도교 신앙의 핵심입니다. 그런데 루카복음이 전하는 이 부활 사건에서 볼 수 있듯이 예수님의 부활을 목격한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여자들은 무덤만을 볼 수 있었고 베드로도 이를 확인했을 따름입니다. 루카복음서는 눈부신 차림을 한 두 남자, 달리 말하자면 하느님에게서 온 천사들이 여자들에게 예수님께서 되살아나셨음을 일깨워 주었다고 전합니다. 그런데 인간적으로만 보면 여자들에게 말했다는 그 남자들은 어쩌면 허깨비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천사들의 말에서 주목해야 할 부분이 있습니다. 그들은 단지 예수님께서 살아나셨다고만 말한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당신의 수난과 부활에 대해 이미 갈릴래아에서부터 예고하셨던 그 말씀을 여자들에게 일깨워주었고, 여자들은 그 말씀을 기억해냈다는 사실입니다. 그렇지만 사도들은 여자들이 전하는 말을 믿으려 하지 않았습니다. 베드로는 달려가서 무덤이 비었음을 확인했지만, 그 역시 예수님의 부활을 믿었다기보다는 “속으로 놀라워하며” 돌아갔을 뿐입니다. 이렇게 믿지 않던 사도들이 어떻게 예수님의 부활을 힘차게 선포할 수 있었을까요? 우선은 물음으로 남겨두고 이 물음에 대한 답변을 한 번쯤은 더 생각해 봅시다. cpbc2018.11.27
![[평화칼럼] 아름다운 나비가 되기 위하여](//cpbc.co.kr/CMS/newspaper/2018/10/rc/736272_1.0_titleImage_1.jpg)
[평화칼럼] 아름다운 나비가 되기 위하여윤재선 (레오, 보도총국장) 가을 숲길을 홀로 걷는다. 새들이 비쫑 비쫑 고운 소리로 반긴다. 풀벌레들은 뚜루 뚜루 소리 지르며 아침을 노래한다. 샘물은 조르르 조르르 흘러내리며 생명수로서의 존재를 과시한다. 한 걸음 한 걸음 걷다 보니 어느새 나무는 막 태어난 햇살을 품고 숨을 내쉰다. 이름 모를 들꽃들의 향연. 알근달근 감도는 꽃의 향기가 코끝을 자극한다. 세상을 향한 마음속 탐욕의 독소는 찬바람에 실려 어디론가 흩어져 버렸으면 좋으련만. 부질없는 소망일까. 사색의 그림자가 깨우침의 긴 여운으로 남는다. “바람은 불고 싶은 데로 분다. 너는 그 소리를 들어도 어디에서 와 어디로 가는지 모른다. 영에서 태어난 이도 다 이와 같다.”(요한 3,8) 내 뜻이 아닌 주님의 ‘영’이 이끄는 대로 따르는 삶이어야 하거늘. 그래야 비로소 새 생명의 숨을 받아 새로워지고 변화할 수 있을 터인데.그리 높지 않은 언덕길인데도 숨이 차오른다. 탐욕으로 얼룩진 욕망의 덩어리가 육신을 살찌운 탓은 아닐까. 바오로 사도의 외침이 폐부를 파고든다. “그 대신에 주 예수 그리스도를 입으십시오. 욕망을 채우려고 육신을 돌보는 일을 하지 마십시오.”(로마 13,14) 입버릇처럼 되뇌는 속죄의 절규가 터진다. “인간이 무엇이기에 이토록 기억해 주십니까?, 사람이 무엇이기에 이토록 돌보아 주십니까?”(시편 8,5) 언덕을 넘어서며 지나온 길을 돌아본다. 물끄러미 바라보는 그 자리. 꽃들의 미소는 여전히 해맑다. 베드로 파브르 성인의 말처럼 ‘시간은 하느님의 전령이다.’ 하느님이 주관하시는 시간 속에서 갈망하는 건 지금의 삶과는 다른 형태요 새로운 차원의 변화다. 걸음을 멈추고 침묵과 고요 속으로 잠겨든다. 또다른 삶으로의 변화를 갈망하는 나를 발견한다. 스스로를 단단히 옭아매고 있는 속박과 억압의 굴레를 벗고 싶다. 누군가로부터의 불편한 시선과 나쁜 기억, 아물지 않은 상처와 용서하지 못하는 옹졸한 마음, 탐욕의 노예근성을 떨쳐내고 싶다. 아니 그렇게 해야 한다. 시편 저자는 말한다. “사람은 영화 속에 오래가지 못하여 도살되는 짐승과 같다”고.(시편 49,13) 하느님을 탐욕을 채울 도구로, 거래의 대상으로 삼고 있지는 않은가. 그렇다면 이보다 더 큰 불행이 또 어디 있으랴. 한참이나 고개를 떨구다 눈을 들어 하늘을 본다. 야고보 사도는 반문한다. “‘하느님께서는 우리 안에 살게 하신 영을 열렬히 갈망하신다’는 성경 말씀이 빈말이라고 생각하십니까?”(야고 4,5)라고. 하느님 자비의 눈길과 사랑의 손길에 온전히 내맡긴 적이 있던가. 혹시라도 눈에 보이는 치유나 기적이 없다고 외면하고 있지는 않은가. 성경은 치유나 기적이 아닌 그 안에 깃들어 있는 ‘믿음’이, ‘믿음의 부자’(야고 2,5)가 되기 위한 열망과 실천이 우리를 구원의 길로 이끈다는 것을 일러주고 있음에도. 욕심일 것이다. 그래도 날마다 새로 태어날 수 있기를, 그리하여 진정한 자유와 기쁨의 삶을 살기를 간절히 소망한다. 애벌레가 나비가 되기 위해 제 몸을 벗어 버리듯이. 문득 가수 윤도현이 부르는 ‘나는 나비’란 노랫말이 마음을 들이친다. “… 내 모습이 보이지 않아/ 앞길도 보이지 않아/ 나는 아주 작은 애벌레/살이 터져 허물 벗어 한번 두번 다시/ 나는 상처 많은 번데기/…날개를 활짝 펴고 세상을 자유롭게 날거야/노래하며 춤추는 나는 아름다운 나비….” 이 가을, 나는 아름다운 나비가 되기를 꿈꾼다. 하느님의 사랑과 자비를 간구하며. 평화신문2018.10.17
 사형 선고 (루카 23,13-25)](//cpbc.co.kr/CMS/newspaper/2018/11/rc/738224_1.0_titleImage_1.jpg)
[이창훈 위원의 예수님 이야기](86) 사형 선고 (루카 23,13-25)군중의 압박, 진실에 고개 돌린 빌라도 빌라도는 예수님에게서 사형에 처할 아무런 죄목도 찾지 못했으나 수석사제들과 지도자들의 거듭된 요구에 굴복해 예수님을 사형에 처하라고 내주고 만다. 그림은 빌라도가 예수님에게 사형 선고를 내리는 장면을 묘사한 예루살렘 베드로 회개 기념 성당 내부의 모자이크화. 가톨릭평화신문 DB 헤로데에게 갔던 예수님은 다시 빌라도에게 돌아옵니다. 빌라도는 예수님에게서 아무런 죄목을 찾지 못했지만 수석사제들과 지도자들의 거듭된 사형 요구에 빌라도는 예수님을 사형에 처하라고 넘겨줍니다. 루카 복음사가는 “빌라도가 수석사제들과 지도자들과 백성을 불러모았다”(23,13)는 구절로 이 대목을 시작합니다. 이들이 바로 예수님을 고소한 당사자들이어서 예수님을 신문한 결과를 이들에게 알리기 위해서입니다. 이 구절에서 지도자들이란 백성의 지도자 또는 최고 의회(산헤드린) 의원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백성을 불러모았다는 표현은 어딘가 이상합니다. 적어도 루카복음서에서 일반 백성은 예수님께 대해 적대적이지 않다는 것이 성경학자들의 일치된 견해입니다. 루카 복음사가가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고 가실 때 “백성의 큰 무리가 따라갔다”(23,27)고, 또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실 때에 “백성이 서서 바라보고 있었다”(23,35)고 전하면서도, 이들이 예수님께 어떤 적대적인 행위나 표현을 했다는 언급은 전혀 하지 않고 있다는 점도 이를 뒷받침합니다. 그렇다면 여기서 ‘백성’이란 일반 백성이 아니라 ‘백성 가운데 일부’ 혹은 ‘백성의 지도자’를 지칭한다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빌라도가 수석사제들과 지도자들과 백성에게 전한 내용은 예수님을 신문해 보았지만 그들이 고소한 죄목을 하나도 찾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그뿐 아니라 빌라도는 갈릴래아 영주 헤로데조차도 예수님에게서 아무런 죄목을 찾지 못했다고 전하면서 “보다시피 이 사람은 사형을 받아 마땅한 짓을 하나도 저지르지 않았소”라고 단언합니다.(23,14-15) 그러면서 빌라도는 예수님을 매질이나 해서 풀어주겠다고 이야기합니다. 루카복음에 언급되는 ‘매질’은 마태오복음이나 마르코복음에서 이야기하는 채찍질(마태 27,26; 마르 15,15)과는 아주 다릅니다. 후자의 채찍질은 십자가형에 처하기 전에 죄수에게 고통을 주는 형벌입니다. 이 채찍질은 죄수를 탈진하게 해 십자가형에 처했을 때 빨리 죽도록 하려는 의도도 있다고 하지요. 그래서 채찍에 동물의 뼈나 납덩어리를 달아서 채찍질했습니다. 반면에 루카복음에서 이야기하는 매질은 사형과는 무관한 매질이었습니다.(<주석 성경> 참조) 굳이 표현하자면 소란을 야기한 데 따른 훈육 벌이라고나 할까요. 빌라도의 이 말에 그들은 “그자는 없애고 바라빠를 풀어주시오” 하며 일제히 소리를 지릅니다. 루카 복음사가는 바라빠에 대해서 “예루살렘에서 일어난 반란과 살인으로 감옥에 갇혀 있던 자”라고 전합니다.(23,19) 예루살렘에서 일어난 반란이란 바로 로마 제국에 대항에서 일어난 반란을, 살인은 로마인이나 그들의 앞잡이들을 죽인 것을 가리키는데, 이는 바라빠가 그만큼 위험한 인물임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학자들은 ‘압바의 아들’ 곧 ‘아버지의 아들’이라는 뜻을 지닌 바라빠가 열혈당원의 우두머리였을 것으로 추정합니다. 그렇다면, 빌라도로서는 당연히 바라빠가 아닌 예수를 풀어주고 싶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빌라도는 다시 한 번 이야기하지만, 그들은 “십자가에 못 박으시오! 십자가에 못 박으시오!” 하며 대놓고 십자가형에 처하라고 외칩니다. 빌라도가 세 번째로 다시 묻습니다. 이번에는 물음의 강도도 더욱 셉니다. “도대체 이 사람이 무슨 나쁜 짓을 하였다는 말이오. 나는 이 사람에게서 사형을 받아 마땅한 죄목을 하나도 찾지 못하였소. 그래서 이 사람에게 매질이나 하고 풀어주겠소.”(23,20-22) 성경에서 숫자 3은 완전함을 나타냅니다. 빌라도가 세 번이나 물어봤다는 것은 따라서 무죄한 예수님을 풀어주기 위해 자기로서는 할 만큼 다했다는 것을 의미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점점 더 거세게 예수님을 십자가형에 처하라고 요구합니다. 마침내 빌라도는 그들의 요구를 들어주기로 결정해 바라빠를 풀어주고 “예수님은 그들의 뜻대로 하라고 넘겨주었다”고 루카 복음사가는 기록합니다.(23,23-25)생각해 봅시다빌라도는 예수님에게 아무런 죄가 없음을 확인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수석사제들과 최고 의회에 속한 지도자들과 백성이 예수님을 사형에 처하라고 요구했을 때에 세 번이나 반대의 뜻을 표명했습니다. 그렇지만 군중의 요구가 점점 더 거세지자 예수님을 십자가형에 처하라고 내어주고 맙니다. 앞에서도 말씀드렸듯이 3이 완전함을 나타내는 수라고 할 때에 빌라도로서는 최선을 다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빌라도에게 아무런 탓이 없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 무죄하시다는 것을 확인했다면, 빌라도는 끝까지 밀고 나갔어야 했습니다. 더욱이 그는 총독이었습니다. 예수님에게 죄가 없음을 알면서도 예수님을 사형에 처하라는 요구에 굴복하고 만 것은 총독으로서 정의를 세워야 할 책임과 의무를 저버린 것입니다. 시위자들이 거세게 압박한다고 해서 진실과 정의를 외면하는 것은 명백한 잘못입니다. 그런데 이와 비슷한 일이 지금 우리 주변에서 일어나고 있지는 않는지요? 혹시 나는 이런 ‘빌라도’ 과에 속하지 않는지요? 내게 닥칠 손해나 위험 때문에 그릇된 일에 눈을 감아 모른 체하거나 굴복해 버리곤 하지는 않는지요?알아보기십자가형은 당시 로마제국에서 시행되던 사형 방법 가운데 하나로 불에 태워 죽이는 화형, 맹수에게 잡혀먹혀 죽게 하는 맹수형과 더불어 가장 참혹한 사형 방법으로 꼽혔습니다. 일반적으로 로마 시민들은 죽을죄를 지었어도 십자가형에 처하지는 않았습니다. 그러나 노예나 노예 신분에서 벗어난 자유민(외국인)들은 로마나 이탈리아 지역에서는 중죄를 지었을 때 십자가형에 처했다고 합니다. 반면에 로마제국의 식민지에서는 날강도들, 반란을 일으킨 반역자들을 십자가형에 처했습니다. 십자가형은 사형수의 양팔을 벌리게 하여 두 손목을 십자가의 가로대에 결박해 고정시키고, 두 발목은 세로대에 결박한 후 십자가를 세워 죽이는 형벌입니다. 두 손목과 발목은 줄로 결박하기도 하고 대못을 박아 고정시키고 합니다. 그러면 사형수는 호흡 곤란으로 질식사하거나 아니면 피를 많이 쏟아서 죽게 됩니다. 루카복음서에는 예수님을 채찍질했다는 내용이 없지만, 마태오ㆍ마르코ㆍ요한복음에서는 모두 예수님을 채찍질하게 했다는 표현이 있어(마태 27,26; 마르 15,15; 요한 19,1), 예수님께서도 모진 채찍질을 당하신 후에 십자가형을 받으셨음을 알 수 있습니다. 평화신문2018.11.07
[하느님과 트윗을](68) 천국에서 반려동물을 만날 수 있나요천국에서 모든 갈망 채워주실 주님 문 : 인간과 동물은 어떤 차이점이 있나요 답 : 인간과 동물은 근본적인 차이가 있습니다. 어떤 동물은 지능이 발달한 모습을 보여 주지만, 동물은 결코 사람처럼 사유하거나 이성적으로 논증할 수 없습니다. 동물은 자유 의지가 없으며 행동에도 책임이 없습니다. 동물은 본능을 따르지만, 사람은 이성을 따릅니다. 또한, 하느님께서는 인간을 동물의 관리자로 지정하셨습니다.(창세 2,19-20 참조) 그래서 교회는 아시시의 프란치스코 성인이 하셨듯이 동물들을 돌봐야 한다고 가르칩니다. 그러나 “동물을 사랑할 수는 있으나, 그렇다고 인간에게 쏟아야 할 애정을 동물에게 쏟아서는 안 될 것”이라고 제한하고 있습니다.문 : 동물을 어떻게 대해야 하나요답 :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모상대로 창조하신 인간을 부당하게 죽이는 살인을 금하셨습니다.(창세 9,5 참조; 탈출 20,13 참조) 물론 동물도 모든 피조물처럼 창조주의 흔적을 약간은 지니고 있지만, 하느님께서는 양식을 마련하기 위해서나(창세 9,3 참조; 사도 11,7 참조) 하느님께 제물을 바치기 위해서 동물을 죽일 수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레위 1,2 참조) 하지만 우리는 동물을 적절히 돌보아야 하고, 그들에게 불필요한 고통을 주어서는 안 됩니다.문 : 성경에서는 동물을 어떻게 보나요답 : 성경은 동물을 종(種)의 이름으로 언급하는 반면에, 하느님은 인간 한 사람 한 사람을 각자의 이름과 개인적인 관계로 부르십니다. “내가 너를 지명하며 불렀으니 너는 나의 것이다.”(이사 43,1 참조)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잉태되는 순간에 손수 우리에게 불멸의 영혼을 만들어 주셨습니다. 하느님이 이처럼 우리에게 정신과 의지를 주셨기 때문에 우리는 하느님을 알고 사랑할 수 있는 것입니다. 동물은 존재 자체로 하느님께 영광을 드립니다. 그들은 본능에 따라 행동함으로써 하느님을 섬깁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정신과 의지를 주셨으므로 우리는 동물 수준을 넘어서야 합니다. 하느님은 또한 당신을 섬기는 것 이상을 우리에게 요구하십니다. 문 : 동물도 불멸의 영혼이 있나요답 : 인간과 달리 동물은 이 세상의 삶을 넘어서는 목적이 없습니다. 동물은 하느님께 불멸의 영혼을 받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죽음은 그들에게 최종적입니다. 우리는 천국에서 천사들과 성인들과 함께 하느님의 현존 안에서 완전한 행복을 누릴 것입니다. 상상하기 어려울지 모르지만 우리는 모든 갈망을 채워 주실 하느님 외에는 아무것도 필요치 않을 것입니다. 그래서 천국에서 반려동물을 그리워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만약 반려동물이 죽어서 슬픔에 빠진 사람에게 어떤 위로를 전해야 할지 모른다면 다음 이야기를 떠올려 보세요.한 신자가 자신이 그토록 아꼈던 고양이가 천국에 가지 못했을 거라는 이야기를 들었다고 본당 신부에게 말했습니다. 본당 신부는 “하느님은 사랑으로 천국을 완전히 행복한 곳으로 만드셨다”고 했습니다. 그러면서 “당신이 완전하게 행복하기 위해서 당신의 고양이가 필요하다면 천국에서 고양이를 볼 수 있을 것입니다”라고 말했습니다. 정리=전은지 기자 eunz@cpbc.co.kr cpbc2018.09.18

구약과 신약 잇는 믿음의 이야기 구약 외경 1 / 송혜경 원문ㆍ번역ㆍ주해 / 한님성서연구소 / 3만 5000원구약 외경(外經)은 구약성경 46권에 포함되지 않은 책들이다. 교회가 공식 인정한 정경(正經)은 아니지만, 교회 가르침에 위배되지 않는 경전이다.가톨릭 표준 성경도 아닌데 구약 외경을 알아야 하는 이유는? 구약과 신약을 잇는 가교가 되는 ‘하느님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국내에서 찾아보기 힘든 구약 외경을 번역하는 작업에 한님성서연구소가 돌입, 첫 권 「구약 외경 1」을 내놨다. 당대 ‘믿음의 선조’들의 다양한 문체와 경험을 담은 문헌을 두루 알려 하느님 역사를 제대로 일깨우기 위해서다.구약 외경이 만들어진 시기는 두 번째 예루살렘 성전이 존속하던 ‘제2성전기 후반’이다. 기원전 515~516년부터 기원후 70년까지다. 바빌론 유배지에서 돌아온 유다인들이 예루살렘에 다시 성전을 지은 때부터, 로마인들이 성전을 파괴한 시기까지인 ‘600년의 기간’이다. 이때는 구약이 완결되고, 신약이 기록되던 중간 시기이기도 하다. 당시 정치적 독립성을 잃은 채 살았던 유다인들은 ‘외세의 지배’와 더불어 그리스 문화를 비롯한 동서양 전통이 유입되던 이 시기에도 활발한 저술활동을 통해 풍성한 ‘믿음의 이야기’들을 집필했다.구약 외경은 아담과 하와의 생애, 에녹서, 열두 족장의 유언, 모세의 승천기 등으로 구성돼 있다. 이들은 묵시ㆍ시편 문학, 설화와 전설 등의 범주에 속한다. 서사시와 비극, 철학적 논고, 성경 이야기를 확대한 방대한 작품을 쏟아내며 유다 지역이 문학적으로도 풍성함을 이루는 데 지대한 영향을 끼친다.구약 외경은 다양한 신학적 개념들을 내포하고 있다. 악의 기원 문제, 메시아에 대한 희망, 부활과 사후 세계에 대한 관심 등이다. ‘악마 개념’이 거의 발견되지 않는 구약성경에 비해 외경은 악의 개념을 활발히 다룬다. 구약 외경의 에녹 1서, 희년서, 아담과 하와의 생애 등은 악마의 기원을 다각도로 제시하며 그들이 세상에서 하는 역할을 드러낸다. 하느님은 선이고, 사탄은 악이라는 유다교 문학의 전제가 분명히 다뤄진 것이다.천사의 무리가 지상에 내려와 사람의 딸들을 탐한 사건, 잘못을 저지르고 하늘에서 쫓겨나 아담에게 경배하라는 미카엘 대천사의 명령에 불복종하는 천사들의 타락 등 다양한 악의 기원이 구약 외경을 통해 전해진다. 사탄에게 작용한 것은 공통적으로 ‘교만’이었다.구약성경에서 이어지는 ‘메시아 사상’과 ‘부활과 내세 사상’도 눈에 띈다. 구약 외경에서 메시아는 범죄를 일삼는 이방인들을 예루살렘에서 몰아내고 성전을 정화하며 ‘정의’를 실현하는 존재다. 유다교 전통 안에서 죽은 이의 부활이나 죽음 이후의 삶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은 유배 이후부터이며, 부활과 내세의 개념을 발전시킨 것은 헬레니즘 시대 이후부터다. 솔로몬 시편 13장 11절이 “의인들의 생명은 영원하다. 죄인들은 파멸로 사라지고 말리라!”라고 하는 구절부터 희년서와 마카베오기 4서 등에 죽음 이후에 대한 희망 이야기가 등장한다.「구약 외경 1」은 구약성경의 시편과 흡사한 「솔로몬의 시편」부터 구약성경의 신학개념을 상당 부분 전승해 이야기를 펼치고 있는 「에녹 1서」 등 묵시ㆍ시편 문학과, 설화와 전설 형식의 「요셉과 아세넨」, 「예언자들의 생애」, 「아리스테아스의 편지」 등을 원문과 함께 상세한 역사적 배경과 주석을 달아 제작했다.유배 이후 유다인들은 자신들의 믿음을 기록으로 활발히 남겼다. 그들이 지닌 역사적 경험과 교훈, 하느님과 인간을 두고 숙고한 통찰의 열정이 구약 외경에 고스란히 담겨있다. 이정훈 기자 sjunder@cpbc.co.kr 평화신문2018.04.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