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참 평화는 기도로 청해야만 얻을 수 있는 하느님 선물”[신년 대담] 서울대교구장 염수정 추기경에게 듣는다2019년 기해년(己亥年)이 밝았다. 한반도의 평화가 증진되리라는 희망이 그 어느 때보다 밝은 새해다. 아울러 우리 민족의 화해뿐 아니라 우리 사회의 불평등과 갈등을 해소하고 그리스도의 평화가 실현될 수 있길 소망하는 해이기도 하다. 기해년 새해를 시작하면서 서울대교구장이며 평양교구장 서리인 염수정 추기경을 통해 한국 교회와 사회가 나아갈 방향을 들었다. 염 추기경과의 신년 대담은 서면으로 진행됐다. ▲새해가 밝았습니다. 새 시작과 새 희망을 다짐하는 시기입니다. 하지만 교회 안팎에는 함께 풀어야 할 여러 어려움이 많이 있습니다. 2019년을 맞는 국민들에게 새해 덕담을 부탁합니다. “지난 한 해 하느님께서 베풀어주신 은총에 감사드리며 2019년 새해에도 여러분과 각 가정에 하느님께서 평화와 사랑과 축복을 가득히 내려주시기를 기원합니다. 또한, 북녘에 있는 분들에게도 하느님의 은총이 함께하기를 기도합니다. 새해에 여러분이 바라는 꿈과 소망이 하느님의 뜻 안에서 좋은 열매로 맺어지기를 기도합니다. 고통과 시련은 끝이 있고 결국에 지나가는 법입니다. 따라서 지난 고통과 시련은 잊고 하느님의 사랑을 믿고 의지하며 2019년을 맞이하시길 바랍니다.” ▲지난해에 이어 새해에도 한반도 평화와 우리 민족의 화해와 일치를 위한 노력이 지속될 전망입니다. 프란치스코 교황께서는 교황청 국무원장 파롤린 추기경 명의로 추기경께 보낸 서한에서 “한반도의 항구한 평화를 위해 항상 기도하고 있다”고 밝히셨습니다. 추기경께서도 아시아 교회 지도자들을 초대해 평화를 위한 연대를 호소하고 희생을 아끼지 않고 계십니다. 모든 이가 한반도 평화의 마중물이 될 교황 방북을 고대하고 있는 이때 가톨릭 교회가 어떤 역할을 해야 한다고 보시는지요. “성탄 메시지에서도 언급했듯이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인간의 삶은 평화와 행복입니다. 반세기 전 성 요한 23세 교황님은 힘과 힘의 불안한 균형으로 전쟁만 피하면 그것이 바로 평화라고는 할 수 없다고 했습니다. 평화는 하느님이 원하는 질서, 보다 완전한 정의를 인간 사이에 꽃피게 하는 질서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지상의 평화는 하느님께서 설정하신 질서 안에서 비로소 회복될 수 있고 견고해진다’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개인들 사이의 상호 관계, 시민들과 정치 공동체 간의 관계, 세계 공동체 간의 관계들을 바르게 건설하자고 촉구하셨습니다. 교황님께서는 ‘평화로운 세계 질서는 진리와 정의로 건설되고 사랑과 연대로 완성되며 자유가 보장할 때만 실현된다’고 하셨습니다.(성 요한 23세 교황의 회칙 「지상의 평화」 참조) 이 모든 가치를 전제로 서로 믿음과 신뢰 안에서 진정한 대화가 이루어져야 좋은 열매가 맺어집니다. 우리 신앙인들은 이 세상 안에서 세상의 평화 건설을 위해 가장 먼저 그리고 모범적으로 실천하도록 소명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그리스도의 성탄의 진정한 의미도 여기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세상의 평화는 인간의 노력과 실천을 필요로 하지만 인간의 힘만으로는 불가능합니다. 그리고 우리가 잊어서는 안 될 것은 프란치스코 교황님께서 자주 말씀하시는 대로 끝없는 용서와 조건 없는 나눔을 지닌 자비의 마음입니다. 또한, 이 모든 것의 구체적인 실천은 기도에서부터 시작해야 합니다. 진정한 평화는 무엇보다도 우리의 기도로써 청해야만 확실히 얻을 수 있는 하느님의 선물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한반도의 평화를 위해서 끊임없이 기도해야 할 것입니다. 우리 신앙인들은 평화로 가는 길이 멀고 험난하더라도 자신의 처지에서 최선을 다하며 인내심을 갖고 기도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하느님 마음에 드는 사람들이 되어 약속하신 그리스도의 평화를 누리게 될 것입니다.” ▲추기경께서는 2019년 사목교서를 통해 가정 공동체의 복음화를 당부하셨습니다. 가정이 사랑을 배우고 키우는 학교로 성장하고, 신앙을 이어주는 못자리가 되며, 세상에 복음의 기쁨을 전하는 도구가 되기 위해 교회와 평신도들이 우선으로 할 일은 무엇일까요. “교회는 ‘너희는 온 세상에 가서 모든 피조물에 복음을 선포하라’고 하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명령을 수행하여야 합니다. 그동안 사도들을 시작으로 수많은 그리스도인이 성령의 도우심 아래 온갖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복음의 기쁨을 전하며 살아왔습니다. 그러므로 세례를 통하여 그리스도의 지체가 된 우리 역시 복음 선포의 사명을 충실히 수행하는 참다운 교회 공동체를 이루어야겠습니다. 복음을 선포하지 않는 교회란 있을 수 없습니다.평신도는 가정생활 안에서 체험한 하느님의 자비로운 사랑을 기억하며 학교, 직장, 각종 모임 등 자신의 삶의 자리에서 복음의 기쁨을 증거하는 삶을 살아갑시다. 이것이 죽음으로 신앙을 증거한 순교자들의 후예인 우리가 가정과 교회, 그리고 세상 안에서 ‘그리스도인답게’ 살아가는 모습입니다.” ▲오늘날 젊은 세대들이 가장 고민하는 것은 출산과 양육 문제입니다. 힘들게 출산을 해도 아이들을 안심하고 키울 수 있는 환경이 절대 부족합니다. 요즘 어린이집과 유치원 교육에 관한 부모들의 고민이 깊습니다. 교회가 한국 가정이 안고 있는 이러한 어려움을 지원해 줄 수 있는 방안은 무엇이 있을까요. “오늘날 결혼과 출산을 미루는 청년들이 늘어남에 따라 청년들의 문제는 심각한 사회적 문제로 심화됐습니다. ‘가정은 한 남자와 한 여자의 혼인 위에 세워진 생명과 사랑의 친밀한 친교에서 태어난다’(「사목헌장」 48항)는 교회의 가르침을 마음에 새겨야 합니다. 이렇듯 교회는 청년들의 혼인 성소에도 관심을 가지고 양성해야 합니다. 교회가 청년들의 결혼, 출산, 양육을 지원하고 사목적으로 도움을 줘야 합니다.가톨릭교회는 혼인과 출산, 양육에 대해 하느님의 창조 질서에 따른 중대한 의무이자 기본적인 권리라고 가르칩니다. 하지만 가톨릭 신앙인들도 교회 가르침보다 사회 분위기에 더 큰 영향을 받고 있는 현실입니다. ‘본당, 운동 단체, 학교, 교회의 여러 기관은 다양한 방식으로 가정을 지원하고 가정에 힘을 보태어줄 수 있습니다’(「사랑의 기쁨」 229항)라는 교황님 말씀처럼 교회 전체가 가정과 적극 동반해야 합니다. 교회는 출산과 양육처럼 현실적인 문제에 부딪힌 사람들의 어려운 삶을 돌봐주고 그 안에서 하느님의 계획을 온전히 완수하도록 함께 그 길을 걸어야 합니다. 또 가정에서 조부모의 역할도 매우 중요합니다. 맞벌이 부부가 많아지면서 조부모가 육아를 전담하는 몫이 커지고 있습니다. 프란치스코 교황님은 지난 8월 아일랜드 더블린에서 열린 세계가정대회에서 “조부모와 부모는 자녀들에게 ‘믿음의 사투리’로 신앙을 전수하라”고 촉구하셨습니다. 일상생활에서 조부모와 부모가 신앙의 기쁨을 사는 것은 그들이 줄 수 있는 아름다운 신앙 유산입니다.” ▲지난해 보편교회는 ‘젊은이, 신앙과 성소 식별’을 주제로 세계주교대의원회의를 열고 이 시대 청년들과 함께 걷기 위한 지혜를 탐색했습니다. 올해부터는 시노드 교령을 통해 지역 교회에서 젊은이들을 동반하는 사목이 구체적으로 이뤄질 것으로 기대됩니다. 하지만 현실은 많은 그리스도인 젊은이들이 신앙의 열정을 잃고 유사종교에 빠지고 있습니다. 젊은이들이 다시 교회를 찾게 하려면 어떤 노력을 해야 할까요. “현재 청년들의 주일미사 참여율은 교적대비 5% 미만입니다. 95%의 청년들이 교회를 찾지 않는 것입니다. ‘하느님 체험’이 없는 여러 교육과 행사, 현실의 문제에 대해 위로와 답을 주지 못하는 교회는 청년들을 유사종교로 빠지기 쉽게 만듭니다. 교회는 ‘미사와 성사생활을 통한 은총 체험의 장’이 되어야 합니다. 일회성 이벤트 중심의 사목에서 탈피하고 미사와 성사생활의 은총을 체험할 수 있게 양질의 교리교육과 성경공부, 기도와 묵상 모임을 통해 청년들을 교육해야 합니다. 또 교회는 ‘하느님과 세상의 연결고리로서의 소통의 장’이 되어야 합니다. 신앙과 현실에 대해 깊은 갈등을 느끼고 있는 청년들에게 교회의 일방적 교리전달이나 훈계와 지시가 아닌 대화와 소통, 영적 친교를 통해 청년들과 소통해야 합니다. 이러한 소통의 장을 교회 공동체가 나서 만들어야 합니다. 세계 주교시노드의 최종문서에서는 ‘청년들 말에 귀를 기울이라’고 강조합니다. 사목자들이 젊은이들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며 그들과 동반할 태세를 갖추어야 함을 말합니다. 유사 종교에 빠지는 청년들은 자신의 이야기를 들어 줄 사람이 필요합니다. 사목자는 더 이상 청년들을 그 자리에서 기다리지만 말고 직접 찾아가야 합니다.” ▲추기경께서는 가난한 이들에 대한 관심을 촉구하시며 이들을 위한 나눔을 몸소 실천하고 계십니다. 경제 불황이 지속되고 고용이 불안한 현실에서 사실 가난한 이들을 위한 나눔을 실천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또 일각에서는 교회가 너무 부유하고 가진 자들 편에 기울어져 있다고도 비판합니다. 가난한 교회, 가난한 이들과 함께하는 교회가 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프란치스코 교황님은 소외된 사람들과의 연대와 사랑 실천을 촉구하시며 지난해 세계 가난한 이의 날을 제정하셨습니다. 이에 따라 교회는 연중 제33주일을 세계 가난한 이의 날로 지내고 있습니다. 지난 11월, 제2차 세계 가난한 이의 날 기념 미사에서 ‘예수님이 우리에게 해주신 것처럼 우리도 가난한 사람들에게 손을 뻗어야 한다’고 강조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네가 잔치를 베풀 때에는 오히려 가난한 이들, 장애인들, 다리 저는 이들, 눈먼 이들을 초대하여라 말씀하셨습니다(루카 14,13). 교회는 가장 작은 이들을 내 형제자매로 여기고 그들과 함께해야 합니다. 우리 신앙인들이 가난한 이웃을 위해 더 많은 관심과 정성을 쏟아야 합니다. 또 우리 자신도 물질적인 가난함뿐만 아니라 사랑의 가난함, 희생의 가난함, 정의의 가난함을 극복하는 주님 보시기에 참 좋은 신앙인이 되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하느님 백성’ 개념을 통해 평신도와 성직자의 동등한 존엄성과 품위를 강조했으나, 오늘날 평신도는 ‘지시를 받는 이’로, 성직자들은 ‘통치자’와 ‘지도자’의 모습으로 살아갑니다. 오늘날 사제들이 어떤 모습을 살아야 할까요. “제2차 바티칸공의회 이전까지 평신도는 교회 내에서 수동적인 존재에 불과했습니다. 성직자가 중심에 있다는 교회관이 절대적이었기 때문입니다. 평신도 사도직 역할과 사명이 공식화된 공의회 이후 평신도 역할과 위상은 완전히 달라졌고 성직자 중심 교회관은 일대 변혁기를 맞았습니다.지난 8월, 프란치스코 교황님은 ‘하느님 백성에게 보내는 서한’을 통해 보편교회에 일부 성직자들의 성직주의 성향을 강하게 경고하셨습니다. 평신도와 성직자는 결코 대립적이거나 종속적인 관계가 아닙니다. 교회는 성직자와 평신도가 함께 이끌어 가야 합니다. 성직자들은 평신도들이 제대로 양성되면서 자율적으로 책임지고 활동할 수 있도록 토대를 만들어 줘야 합니다. 평신도를 세례받은 교회의 한 일원으로서 교회의 사명에 함께 참여할 수 있도록 도와야 합니다. 평신도도 성직자와 마찬가지로 하느님의 백성이기 때문입니다.교황님은 사목자들에게 ‘문을 열고, 이들과 함께 일하고 꿈꾸며, 이들의 삶을 성찰하고 평신도와 함께 기도하라’고 당부하십니다. 우리 성직자들은 이 말씀을 마음에 새겨야 합니다.” ▲추기경께서 보시는 한국 교회만이 지닌 보화(강점)와 반드시 쇄신해야 할 것은 무엇인지요. “한국 천주교회는 자생적으로 천주교의 싹을 틔우고 신앙 공동체를 형성했습니다. 이는 세계 교회에서 유례를 찾을 수 없습니다. 또 우리 교회는 신앙을 위해 목숨을 버린 순교자의 피로 성장해 왔습니다. 프란치스코 교황님이 2014년 방한하셨을 때, 이러한 우리나라의 순교 역사에 깊이 감동하셨고 ‘한국 교회의 역동성에 감명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한국 천주교회가 자생적으로 뿌리를 내린 만큼 우리는 교회의 가장 기초가 되는 공동체인 가정을 가장 먼저 복음화해야 합니다. 교황님은 「사랑의 기쁨」에서 현대 사회의 가정이 직면한 위기들을 말씀하시면서 ‘복음의 메시지가 가정 안에서, 그리고 가정들 사이에서 언제나 울려 퍼져야 한다’고 권고하십니다. 가정은 그리스도의 사랑을 배우고, 키우며, 전하는 못자리가 되어야 합니다. 가정이 복음의 기쁜 소식을 전해야 우리 사회에도 희망이 있습니다. 자기 가정의 안위와 행복을 추구하는 것에 그치지 말고 자신의 가정을 넘어 이웃과 세상을 향하여 복음의 기쁨을 선포하면서 그들을 복음화하는 가정 공동체가 되어야 합니다.” 정리=리길재 기자 teotokos@cpbc.co.kr cpbc2018.12.27
![[고통받는 교회를 도웁시다] 중동(2) 신앙의 요람에서 지난 100년간 무슨 일이 있었나](//cpbc.co.kr/CMS/newspaper/2017/10/rc/700125_1.0_titleImage_1.jpg)
[고통받는 교회를 도웁시다] 중동(2) 신앙의 요람에서 지난 100년간 무슨 일이 있었나주인 잃어버린 믿음의 땅 한 남성이 지난해 11월 이라크 모술에서 IS가 패퇴하자, 시내 근처 알-쿠브라 성당에 들어가 그들이 남긴 상처를 살펴보고 있다. 【CNS 자료사진】 개신교 선교사들이 1860년대 어느 날, 오랜 사막 여행 끝에 이집트 중부 아슈트에 도착했다. 그들은 원대한 선교 열망을 품고 그 지역 지도자라는 사람들을 만났다. “우리는 콥트인들이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사는 길을 알려 주기 위해 여기까지 찾아왔소.”지도자들은 어리둥절했다. “예수 그리스도? 우리는 여기서 1800년째 그분과 살고 있는데…. 그러는 당신네는 언제부터 그분을 알았소?”콥트인은 이집트 그리스도인을 가리키는 명칭이다. 그 지역 지도자들은 콥트 교회 주교들이었다. 성경의 무대, 중동 서구 사회에서 중동 교회의 뿌리를 얘기할 때 자주 인용하는 일화다. 주교들 말대로 그들은 1800년 동안, 즉 그리스도교 태동기부터 사막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살고 있었다.그리스도교 초세기에 지중해 주변에 이른바 ‘4개 기둥’이 있었다. 알렉산드리아ㆍ안티오키아ㆍ콘스탄티노플ㆍ로마가 당시 그리스도교 세계의 중심이었는데, 로마를 제외한 3개가 중동에 있다. 사실 중동이라는 용어는 유럽인들 관점에서 나온 것이다. 그들은 유럽에서 가까운 동쪽 지역을 근동(近東), 중간 지역을 중동(中東), 한국과 일본처럼 맨 끝에 있는 지역을 극동(極東)이라고 불렀다. 고대 중동은 대하드라마 같은 신구약 성경의 역사가 펼쳐진 무대다. 아브람이 칼데아의 우르를 떠나 하란을 거쳐 가나안 땅에 들어간 경로는 지금의 이라크, 시리아, 터키, 레바논을 거쳐 이스라엘에 가서 닿는다. 성경에 기록된 많은 도시가 이스라엘과 국경을 접하고 있는 시리아와 레바논, 요르단에 퍼져 있다. 하느님의 외아들이 강생해 구원의 기쁜 소식을 선포하고, 십자가에 못 박히신 곳도 중동 땅이다. 바오로 사도의 선교 무대도 마찬가지다. 베네딕토 16세 전임 교황은 중동 교회가 “그리스도 신앙의 여명기부터 줄곧 은혜로운 이 땅의 나그네였다”고 말했다. 전쟁과 학살, 시리아 신자 100만 명 피란 하지만 은혜로운 땅의 나그네들은 지금 고통받고 있다. IS(이슬람국가)를 비롯한 극단주의 무장 세력이 이라크 북서부와 시리아 일부 지역에서 활개치는 동안 그 지역 그리스도교 공동체는 초토화됐다. 대표적인 곳이 그리스도인들이 밀집해 살던 이라크 북부 니네베 평원과 시리아 중서부 홈스(Homs)다. IS는 2014년 니네베 평원으로 진격한 뒤 그리스도인들을 무참히 살해하고 교회를 불태웠다. 며칠 만에 약 10만 명이 피란 행렬에 올라 뿔뿔이 흩어졌다. 미 국무부까지 나서 그들의 만행을 ‘집단 학살’(genocide)이라고 비난했다.시리아의 경우 그리스도인 200만 명 가운데 절반가량이 그들의 광란을 피해 피란길에 올랐다. 아시리아 제국의 후손인 그들은 조상 대대로 그 땅에서 6000년, 그리스도인으로 1600년 이상을 살았다. 예수 그리스도 시대의 언어인 아람어 전례를 지금까지 지켜 온 이들이다. 정확한 숫자는 파악할 길이 없다. 이라크 그리스도인은 150만 명에서 30만 명, 시리아는 7%에서 2%로 줄었다는 추산만 있을 뿐이다. 이 정도면 그리스도인 없는 그리스도교 요람을 걱정해야 할 판이다.시리아 라타키아 교구(마로니트 가톨릭)의 안토니에 쉬베르 주교가 ‘고통받는 교회를 도웁시다’ 취재진을 만나기 위해 국경을 넘어 레바논으로 건너왔다. 라타키아는 다마스쿠스와 알레포 등 시리아 각지에서 난민들이 모여든 도시다. 이라크는 한국인 여행 금지 국가로 묶여 있어 부득이 쉬베르 주교를 불러낼 수밖에 없었다.그는 “국경 부근에서 검문소를 여러 번 통과한 것 외에 큰 어려움은 없었다”며 “교구 내 홈스에서도 많은 그리스도인이 목숨을 잃었는데, 전역에서 난민들이 모여들어 교구 상황이 말이 아니다”고 말했다. 또 “전쟁의 고통은 그리스도인과 무슬림 똑같이 겪고 있지만, 너무나 많은 그리스도인이 고향을 떠났다”고 통탄했다. 그렇다고 중동의 그리스도인 감소를 IS 같은 무장 세력의 박해 탓만으로 돌릴 수는 없다. 그리스도인들은 IS가 창궐하기 훨씬 이전부터 차별과 박해에 못 이겨 고향을 등지기 시작했다. 중동 교회는 4, 5세기에 분열을 겪었다. 이후 이슬람 장벽에 막혀 사실상 고립된 채 살아왔다. 그리스도인이건 유다인이건 중동에서 소수 종교인은 늘 ‘2등 시민’ 취급을 받았다. 그들은 ‘딤미(Dhimmi)’라고 불렸다. 비무슬림을 가리키는 차별적 용어다. 그래도 보호비 명목의 특별 세금(jizya)을 내면서 ‘보호’받고 살던 때가 나았을지 모른다. 제1차 세계대전으로 오스만 제국이 붕괴되고, 이후 유럽 열강의 입맛대로 중동이 개별 국가로 재편되면서 도래한 독재 통치 시기에도 어느 정도 보호를 받을 수 있었다. 하지만 미국의 이라크 침공(2003년)으로 사담 후세인 정권이 붕괴되고, 이어 ‘아랍의 봄’이라 불리는 민주주의 열망이 중동을 뒤덮자 중앙 권력에 균열과 공백이 생겼다. 이 틈을 노리고 등장한 집단이 극단주의 무장 조직들이다. 그들의 꿈은 서구 열강이 그어놓은 국경선을 지워버리고, 오스만 제국처럼 거대한 이슬람 제국을 건설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들의 꿈은 망상으로 끝나가고 있다. 다시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을까 이제 남은 중요한 문제는 그들의 광기를 피해 신앙의 요람을 떠났던 그리스도인들이 다시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느냐 하는 것이다. 레바논에서 만난 난민들 의견은 반반으로 갈렸다. “우리가 돌아가지 않으면 고향 땅에서 그리스도교가 사라질지 모른다”는 난민이 있는가 하면, 어떤 이는 “다 버리고 나와 여기서(피란지) 살려고 5년째 발버둥 치고 있는데, 모든 것이 파괴된 고향에 가서 무엇을 하란 말이냐”며 고개를 저었다. 시리아 홈스에서 난민 구호 활동을 벌이다 잠깐 레바논 베이루트로 나온 마지드 알자 홈(27)씨가 그나마 희망적인 얘기를 들려줬다. “중동의 그리스도인 박해는 일상적인 일입니다. 박해로 인해 우리의 신앙은 점점 강해지고 있습니다. 목숨을 내놓고 남아서 고향과 교회를 지키는 그리스도인이 얼마나 많은지 아십니까. 그들은 집과 교회를 다시 지을 것입니다. 중동의 그리스도인들을 도와주시길 바랍니다.”교황청은 이미 고통받는 교회 돕기(ACN) 등과 함께 ‘니네베 재건 사업’에 착수했다. 김원철 기자 wckim@cpbc.co.kr 고통받는 교회 돕기(Aid to the Church in Need)는 차별과 박해, 가난으로 어려움을 겪는 가톨릭 교회를 지원하는 교황청 산하 단체로, 한국 교회도 1960, 70년대에 많은 도움을 받았다. 2015년 아시아 최초로 한국 지부(이사장 염수정 추기경)가 개설됐다. 문의 : 02-796-6440 성금 계좌 : 우리은행 1005-303-232450 (예금주 사단법인 에이드투더처치인니드)cpbc2017.10.31

대도시 신자들에 최적화된 소공동체로 개선해 나가야서울대교구 소공동체 25주년 기념 설문조사 보고서 「‘새로운 복음화’를 위한 소공동체 평가와 전망」 - 해설(하) 서울대교구 소공동체 25주년 기념 기초 자료 수집 설문조사 보고서 「‘새로운 복음화’를 위한 소공동체 평가와 전망」(이하 보고서)에 의하면, 소공동체 임원으로 봉사하고 있거나 임원 경험을 가진 이들은 임원 경험이 없는 이들보다 복음화 지수에서 전반적으로 높은 점수를 보였다. 이번 호에서는 임원 경험 여부에 따른 신앙실태와 함께 소공동체 참여 형태에 따른 본당 그룹별 신앙생활 실태를 살펴본다. 도입 25주년을 맞은 소공동체의 변화와 발전을 위한 제언도 싣는다. 이힘 기자 lensman@cpbc.co.kr소공동체 임원 여부에 따른 신앙실태소공동체 임원 경험 여부에 따라서도 복음화 정도에 차이가 나는 것으로 나타났다. 총구역장ㆍ구역장ㆍ반장ㆍ말씀지기 등 소공동체 임원이거나 임원으로 봉사한 경험이 있는 이들은 소공동체에 참여시 임원 경험이 없는 신자들보다 전체적으로 높은 점수를 보인다.‘복음선포’ 항목의 ‘나는 하느님께서 성경을 통해 나에게 말씀하고 계심을 믿는다’는 질문에서 임원 경험자는 88.0점으로, 임원 경험이 없는 신자(85.3점)에 비해 2.7점 높았다. ‘전례주년(대림ㆍ성탄ㆍ연중ㆍ사순ㆍ부활)의 의미’에 대한 이해도에서는 유경험자가 80.5점, 무경험자는 75.3점으로 5.2점 차이가 났다. ‘미사의 은총으로 살아갈 힘을 얻는가’하는 질문에서는 유경험자가 84.5점, 무경험자가 81.8점으로 2.7점 높았다.‘친교와 봉사’ 항목에서도 차이는 두드러진다. ‘본당 공동체 안에 어려운 일이 있을 때 함께한다’는 질문에서는 소공동체 임원 유경험자가 75.5점을 기록했지만, 무경험자는 68.8점에 그쳐 6.7점 차이를 보였다. ‘본당 공동체의 활동에 참여하는 것을 중요하게 여긴다’는 질문에는 소공동체 임원 유경험자가 82.5점이지만, 무경험자는 76.8점으로 5.7점 낮았다. ‘교회 공동체(교구ㆍ본당)의 사목 목표와 방향을 아는가’는 질문에서는 유경험자가 72.0점, 무경험자는 4.2점 낮은 것으로 나타났다.다만, ‘가난한 이들에 대한 관심’을 묻는 항목에선 각각 87.0점과 86.0점 1.0점, ‘타 종교에 대한 이해도’에서는 0.7점, 우리 사회의 각종 불평등에 대한 관심도에서는 0.5점으로 상대적으로 차이가 적 었다. ‘복음선포’와 ‘전례’ 항목에 비해 ‘친교’와 ‘봉사’ 항목의 질문에서 점수 차가 줄어드는 것으로 나타난 것은 앞으로 소공동체 참여자들이 봉사와 친교에 좀 더 적극적인 자세로 임해야 한다는 의미로 풀이된다. 현재 ‘성경 말씀과 나눔 중심’으로 진행하는 소공동체 모임이 도입 당시와는 크게 달라진 시대적 상황에 발맞춰 보완돼야 한다는 의미로 해석된다. 소공동체 참여 본당 그룹별 신앙생활 실태조사 대상 9개 본당을 세 그룹으로 나눠 살펴본 결과, 매주 모임을 하는 소공동체 ‘집중 본당’(4곳)의 소공동체 참여 신자들이 전체 60개 문항으로 이뤄진 질문 가운데 33개 질문에서 최고점을 획득했다. 매주에서 매월로 소공동체를 전환한 ‘정체기 본당’(2곳)은 17개 문항, 매월 모임을 하는 ‘일반 본당’(3곳)은 16개 문항에서 최고점을 받는데 그쳤다. ‘죽음 이후에 부활하여 영원히 살 것을 믿는다’는 질문에 소공동체 집중 본당 신자들은 83.0점, 일반 본당 신자들은 82.3점, 정체기 본당 신자들은 81.5점을 기록했다. 특히 미사 참여 이외에 성경을 얼마나 자주 읽느냐는 질문에서는 집중 본당 신자들이 62.4점으로, 정체기 본당(58.6점)과 일반 본당(52.2점)을 크게 앞선 것으로 집계됐다. 결론적으로 소공동체에 집중하는 본당일수록 신자들의 복음화 지표가 높아진다는 것을 알 수 있다.한편, 전체 응답자 8764명 가운데 절반에 가까운 45.1%가 소공동체 이외의 사도직 단체 활동에 참여하고 있다고 응답했다. 레지오 마리애(17.0%)가 가장 많았고, 성경공부(10.1%)ㆍ성가대(5.3%)ㆍ전례단(4.4%)ㆍ성소후원회(4.1%)ㆍ군종후원회(3.8%) 순이었다. 소공동체와 사도직 단체 활동 참여 여부에 따른 복음화 지표를 비교한 결과, 소공동체와 사도직 단체에 모두 참여하는 신자들이 그렇지 않은 신자들에 비해 거의 대부분 항목에서 높은 점수를 기록했다. 이는 소공동체와 사도직 단체가 복음화 실천을 위한 도구로써 협력해야 할 동반자 관계라는 것을 의미한다. ▨(인터뷰)서울대교구 사목국장 조성풍 신부“소공동체의 정신은 복음을 중심으로 ‘복음을 전하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도입 25주년을 맞은 소공동체가 서울이라는 대도시에 사는 그리스도인들에게 복음을 잘 살도록 돕기 위해서는 앞으로 연구와 보완이 이뤄져야 할 것으로 보입니다.”사목 방향 설정의 기초 자료로 활용 보고서의 기획 연구 책임자인 서울대교구 사목국장 조성풍 신부는 “본당이 복음화의 도구로서 역할에 충실하려면 소공동체들과 사도직 단체들로 이뤄진 ‘공동체들의 공동체’로 자리해야 한다”며 이같이 말했다. 조 신부는 “이번 보고서를 통해 서울대교구의 앞으로 사목정책 방향을 설정하고 실천하는 데 중요한 기초자료를 확보하게 됐다”고 설명했다.서울대교구는 세상의 세속주의와 물질주의, 개인주의 등의 영향으로 공동화돼 가는 교회 현실을 성찰하고 이를 극복하고자 1992년 소공동체 모델을 도입, 운영해왔다. 이번 보고서는 1995년 첫 보고서 발표 이후 다섯 번째다. 소공동체 참여 신자들과 참여하지 않는 신자들의 복음화 지표를 직접 비교 분석한 보고서는 이번이 처음이다. 서울대교구 사목국은 이 보고서를 통해 소공동체뿐만 아니라 전체 응답자들의 신앙실태도 파악했다. 서울대교구 신자들은 점차 고령화하고 있고, 직장인과 은퇴자들의 비율이 증가하는 반면, 청년 이하 세대는 감소하는 것으로 집계됐다. 높은 비율의 고학력자와 성인 영세자를 교회 활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도록 이끄는 것이 과제로 남았다.교육 프로그램 연구에 힘쓸 것조 신부는 “반ㆍ구역장 등 소공동체 봉사자들의 복음화 지수가 높게 나타난 것은 이들이 그렇지 않은 신자들에 비해 교육의 기회가 많았기 때문으로 분석됐다”며 “사목국은 모든 신자를 대상으로 하는 교육 프로그램 개발과 연구에 힘쓸 계획”이라고 밝혔다. 이힘 기자 cpbc2017.09.06
![[신앙단상] 성경 속에 나타난 한센병](//cpbc.co.kr/CMS/newspaper/2016/06/rc/638412_1.0_titleImage_1.jpg)
[신앙단상] 성경 속에 나타난 한센병채규태 알비노(가톨릭대 의대 교수, 한센병연구소장) 프란치스코 교황께서 2015년 12월 8일 선포하신 자비의 희년을 지내고 있는 올해 40년간의 교직을 무사히 마치고 은퇴할 수 있는 것은 전적으로 성령의 보살핌 덕분임을 고백합니다. 1976년 의과대학 졸업 후 불모지나 다름없던 한센병(나병) 연구와 진료에 바친 외길이었지만, 함께하는 선배와 동료들이 있어서 외롭지 않았습니다. 일생일로(一生一路), 일생일업(一生一業)의 삶을 살다 보니 자연 고집스러워지고 남의 말을 잘 듣지 않는 습관이 생기고, 제 하고 싶은 대로 살아온 세월, 본의 아니게 주위 사람들에게 말과 행동으로 많은 잘못을 저질렀습니다. 마음 상하신 분들께는 공자가 말하는 화이부동(和而不同)의 정신으로 용서를 청합니다. 저도 그분들을 위해 화해와 치유의 마음으로 기도를 드리겠습니다. 제가 지난 40년간 한센병을 연구하고 환자를 진료하면서 겪은 가장 난처한 일 중 하나가 ‘나병이 성경에 기록되어 있다. 그 병은 하느님이 내린 벌이다’라는 말을 듣는 것이었습니다. 환자 본인이나 이웃 사람 그리고 성직자, 수도자가 그런 말을 할 때 안타까운 적이 많았습니다. 성경에는 나병 관련 단어가 83회 등장한다고 합니다. 구약 탈출기부터 치유 기적에 관한 신약의 공관 복음에 이르기까지 많은 곳에 나타납니다. 나병이 처음으로 등장하는 장면은 모세가 하느님과 만날 때입니다. 하느님은 모세에게 이스라엘 민족을 이끌고 이집트를 탈출하라는 임무를 줄 때 모세의 의구심을 해소하기 위해 나병 같은 불치의 병도 고칠 수 있는 초능력을 보여주십니다. 영어 성경을 보면 레위기 13장에 나병(leprosy)이라는 표현이 나오지만, 우리말 성경에서는 ‘악성 피부병’이라고 언급합니다. 레위기 14장은 전체가 악성 피부병의 정결례에 대해 설명을 하고 있습니다. 성경에서 나병은 정결례의 대상이었지만 현대, 특히 1943년 이후 한센병 치료 약제가 개발되어 나병은 더 이상 불치의 병이 아닙니다. 1∼2년 다제요법으로 완치되고, 새 환자 역시 1년에 10명 미만 발생하는, 피부와 신경에 주 증상이 나타나는 보통 감염병일 뿐입니다.의사였던 루카가 기록한 루카 복음(5,12-16)을 보면 예수님께서 온몸에 나병이 걸린 사람을 고치신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 환자는 “주님께서 하고자 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습니다”라고 신앙고백을 합니다. 예수님께서 그 믿음을 보시고 ‘내가 하고자 하니 깨끗하게 되어라’ 하고 치유한 다음 사제에게 가서 모세가 정한 정결례를 행하게 합니다. 나병이 깨끗하지 못한 것, 거룩하지 못한 것이라는 구약의 내용과 상통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당신 아들 예수를 희생 제물로 삼아 우리를 용서해 주신 하느님께서 예수님을 부활시키신 이후 죄와 벌의 대상이었던 나병은 더 이상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우리 죄를 대신하여 돌아가시고, 당신의 피로써 백성을 거룩하게 하시려고(히브 13,12), 피를 흘리심으로써 우리가 깨끗해졌고, 하느님과 가까워졌기 때문입니다(에페 2,13). 죄인인 나는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고, 이제는 내가 사는 게 아니라 그리스도가 내 안에 사시는 것입니다(갈라 3,19-20). 따라서 구약 시대에 죄나 벌이라고 표현했던 나병도 예수 부활 이후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구약의 시대로부터 벗어나 신약의 시대, 예수 부활 이후의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나병을 이야기할 때 더 이상 죄나 벌과 같은 말을 사용하지 않으면 좋겠습니다. 평화신문2016.06.01

단식과 시편 묵상으로 사순을 보내다 4천 년의 기도, 단식 아델레 스카르네라 지음 / 노성기ㆍ안봉환 신부 옮김 / 가톨릭출판사 / 1만 5000원음식은 육체를 살찌우지만, 단식은 영혼을 살찌운다.고대 사람들은 이성을 약하게 하는 만취와 식탐을 멀리하고, 올바른 정신을 회복하도록 돕는 덕행인 단식을 추구했다. ‘믿음이 있는 곳에는 곧 단식이 있다’는 일념으로 신앙을 따르고자 한 이들은 배부른 돼지가 되기보다 강한 종교적 신념 아래 참회 수행인 단식을 단행했다.에덴동산의 아담과 하와가 금지된 열매를 따 먹고 탐욕과 타락의 시작을 알렸듯이 하느님의 명령에 따르지 못하는 물질의 힘을 금기시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월요일과 목요일에 정기적으로 단식했고, 율법에 따라 하느님의 선택을 받았다고 믿는 이들은 죄와 세상의 굴레로부터 마음을 정화하고자 단식했다. 자연 재앙을 피하기 위해서도 단식에 돌입할 정도였다.신약에서는 단식이 예수의 메시아성과 연결된다는 사실이 분명히 드러난다. 예수는 용서의 기다림과 하느님 나라의 도래에 대한 희망을 강조하기 위해, 그리고 세상 제약으로부터의 해방을 드러내고자 단식했다. 단식은 세상의 굴레로부터 마음을 정화하는 도구이며, 하느님 찬미가인 시편은 간청과 염원을 넘어 감사와 신뢰를 전하는 도구로 사용되어 왔다. 사진은 가시관으로 만든 십자가. 단식은 고통이 아니라 평화다. 고대 수도자들에게 단식은 일상이었다. 영혼을 물질의 노예 상태에서 구하기 위함이었다. 수도자들은 평소에도 절제된 양으로 식사했고, 공주(共住) 수도원의 경우, 고기와 생선, 치즈와 달걀, 포도주는 절대 먹지 않았다.책은 4000년 단식의 역사를 망라하고 있다. 구약과 신약의 단식, 수도원 단식, 교부들이 말하는 단식의 의미 등 영혼을 살찌우기 위한 노력이 뜻하는 바를 알기 쉽게 풀어내고 있다.믿음이 깊어지는 매일 시편 묵상 앤서니 치카르디 몬시뇰 지음 / 강대인 옮김 가톨릭출판사 / 1만 원전례에 널리 쓰이는 시편은 구약성경 가운데서도 많은 사랑을 받는 하느님 찬미가다. 간청과 염원을 넘어 감사와 신뢰를 전할 때 많은 이가 시편을 찾는다.책은 1년 전례력에 맞춘 시편들을 문장별로 쪼개 묵상하도록 엮은 기도서다. 거기에 저자는 묵상 거리를 첨가했다. 저자는 “저희가 날마다 하느님을 찬양하고 당신 이름 길이 찬송하리이다”(시편 44,9)란 구절을 던져준다. 하느님은 성공보다 더 큰 것을 갖고 계심을 일러준다.“주님, 당신이 죄악을 헤아리신다면, 주님, 감당할 자 누구이리까? 그러나 주님께는 용서가 있나이다.”(시편 130,3-4) 저자는 “우리 삶은 운동 경기가 아니기에 하느님은 그 결과를 득점판에 기록하시지 않는다”며 “하느님의 죄 사함으로 말미암아 그 죄는 더는 하느님과 우리 사이를 가로막지 못한다”고 깨우친다.말하고서 후회되는 일이 많을 경우, “내 입은 지혜를 말하리라. 내 마음속 생각은 슬기롭다”(시편 49,4)를, 사회적 약자를 위해 우리가 지닌 책임을 다해야 할 이유를 찾는다면 “힘없는 이와 고아의 권리를 찾아 주고, 가난한 이, 불쌍한 이에게 정의를 베풀어라”(시편 82,3)를 되새겨볼 수 있겠다. 매일 쌓인 시편 구절들이 모인다면 어느새 하느님을 닮아가려 노력하는 자신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이정훈 기자 sjunder@cpbc.co.kr cpbc2018.03.07
![[이창훈 기자의 예수님 이야기] (15) 광야의 유혹(4,1-13)](//cpbc.co.kr/CMS/newspaper/2017/05/rc/682843_1.0_titleImage_1.jpg)
[이창훈 기자의 예수님 이야기] (15) 광야의 유혹(4,1-13)달콤한 ‘악마의 유혹’ 말씀으로 물리쳐 예리코 북서쪽 유혹산 전경과 유혹산 중턱의 정교회 수도원 모습(오른쪽). 예수님의 족보를 소개한 후 루카는 바로 예수님께서 광야에서 유혹을 받으신 이야기를 전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성령으로 가득 차 요르단강에서 돌아오셨다. 그리고 성령에 이끌려 광야로 가시어….”(4,1) 예수님은 이미 성령으로 잉태되신 분이셨습니다.(1,35) 게다가 요르단강에서 세례를 받으시면서 성령을 받으셨습니다.(3,22) 이렇게 성령으로 가득 차신 분이 이제는 성령에 이끌려 광야로 가십니다. 이 표현은 따라서 예수님께서 앞으로 하시는 활동이 성령에 힘입은 활동임을 암시한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성령에 이끌려 광야로 가신 것은 유혹을 받으러 가신 것이 아닙니다. 사람들이 큰일을 앞두고는 마음의 준비를 단단히 하듯이, 예수님께서도 앞으로 하실 일을 두고 하느님께 기도하시면서 마음의 준비를 하시기 위함이었을 것입니다. 아무것도 없는 광야는 모든 것을 비우고 하느님을 찾기에 더 없이 좋은 곳이니까요(가톨릭평화신문 5월 7일자, 제 413호 참조). 하지만 광야는 또한 유혹과 시험을 받기 쉬운 곳이기도 합니다. ‘혼자 있는 것을 삼가라’(愼獨)는 옛말도 있지 않습니까. 예수님께서는 광야에서 40일 동안 지내시면서 아무것도 먹지 않아 시장하셨습니다. 그 틈을 타서 악마가 유혹을 걸어옵니다.(4,2-3) 유혹자인 악마는 공격할 때 빈틈을 노립니다. 아마 40일 동안 줄기차게 공격하려 했지만 성령으로 가득 차신 예수님에게서 빈틈을 찾을 수 없었을 모릅니다. 그러다가 예수님께서 육체적인 시장기를 느끼시자 악마는 ‘이때다’ 하고 수작을 걸었을 것입니다. 악마가 예수님을 유혹한 미끼는 세 가지입니다. 어쩌면 이 세 가지는 인간이 빠질 수 있는 유혹을 대표하는 것일 수 있습니다. 첫 번째 유혹은 돌을 빵으로 만들라는 것입니다. 단식하는 사람이 가장 빠지기 쉬운 유혹이 먹을거리입니다. 이런 점을 악마는 놓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악마의 유혹이 아주 교묘합니다. “당신이 하느님의 아들이라면, 이 돌더러 빵이 되라고 해보시오”라고 유혹합니다. ‘돌을 빵으로 만들지 못한다면 당신은 하느님의 아들이 아니다’라는 뜻입니다. 자존심을 건드려 가면서 하는 유혹입니다. 이에 대해 예수님께서는 성경 말씀으로 답변하십니다. “사람은 빵만으로 살지 않는다.”(4,4) 이 말씀은 구약성경 신명기 8장 3절에 나오는 말씀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이집트를 탈출한 후 광야에서 먹을 것이 없어 불평하자 하느님께서 만나를 내려 먹게 해주셨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사람이 빵만으로 살지 않고 주님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산다는 것을 너희가 알게 하시려는 것”(신명 8,3)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바로 이 말씀으로 악마의 유혹을 물리치십니다. 두 번째 유혹은 자기를 경배하면 세상의 “모든 권세와 영광”을 주겠다는 것입니다.(4,5-7) 세상의 부귀와 영화와 권세로 예수님을 하느님으로부터 멀어지게 하려는 유혹입니다. 예수님께 세상의 권력자가 되라는, 현세의 메시아가 되라는 유혹이기도 합니다. 이에 대해 예수님께서는 “주 너의 하느님께 경배하고 그분만을 섬겨라”는 성경 말씀으로 유혹을 물리치십니다.(4,8) 이 말씀은 “너희는 주 너희 하느님을 경외하고 그분을 섬기며, 그분의 이름으로만 맹세해야 한다”는 구약성경 신명기 6장 13절의 말씀을 인용한 것입니다. 이집트 땅에서 종살이하던 이스라엘 백성을 이끌어내신 분이 주 하느님이심을 잊지 말라는 당부입니다. 예수님은 이 말씀으로 당신이 하실 일을 분명히 하시면서 악마의 유혹을 물리치십니다. 현세의 권력과 부귀에 눈이 어두워 악마의 종이 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종으로서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는 것이 예수님의 일입니다. 세 번째 유혹은 성전 꼭대기에서 이뤄집니다. 악마는 예수님에게 하느님의 아들이라면 밑으로 몸을 던져 보라고 유혹합니다. 그러면 하느님께서 천사들을 시켜 구해주시리라는 것입니다.(4,9-11) 그런데 악마의 유혹이 더욱 교묘해집니다. 첫 두 번의 유혹에 대해 예수님께서 성경 말씀으로 물리치시자, 세 번째 유혹에서는 “성경에 이렇게 기록되어 있지 않소?”(4,10) 하며 성경 말씀을 인용해 유혹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에 대해 예수님께서는 “‘주 너의 하느님을 시험하지 마라’ 하신 말씀도 성경에 있다” 하시며 유혹을 물리치십니다.(4,12) 예수님의 이 답변은 역시 신명기 6장 16절에 있는 말씀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에서 지낼 때 마실 물이 없자 모세에게 불평을 합니다. 그러자 모세가 주님께 부르짖었고 주님께서는 바위에서 물이 터져 나오게 하지요.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이 주님을 시험하였다고 해서 그곳 이름을 마싸와 므리바라고 지었습니다.(탈출 17,1-7 참조) 신명기의 해당 구절은 바로 이 사건을 언급하면서 하느님을 시험해서는 안 된다고 하는 것이었는데, 예수님께서는 그 말씀으로 악마에게 ‘하느님을 시험하지 말라’고 답변하신 것입니다. 루카는 악마가 세 번씩이나 예수님을 유혹했지만 다 실패하자 “모든 유혹을 끝내고 다음 기회를 노리며 그분에게서 물러갔다”(4,13)는 것으로 유혹 이야기를 마무리합니다. 악마가 유혹에 실패하고 물러갔다는 것은 성령으로 가득 찬 예수님의 활동이 어떻게 펼쳐질 것인지를 가늠하게 해줍니다. 앞으로 살펴보겠지만 마귀의 세력이 힘을 쓰지 못할 것입니다. 생각해 봅시다1) 루카는 예수님의 족보를 기록하면서 “아담은 하느님의 아들이다”(3,38)라는 문장으로 마무리한 후 이어서 예수님의 유혹에 관해 기술합니다. 이 예수님은 잉태 예고 때나 탄생 때 그리고 세례 때에 드러났듯이 하느님의 아들이신 분입니다. 인류의 첫 조상이자 하느님의 아들인 아담은 낙원에서 뱀의 유혹에 떨어져 하느님의 뜻을 거스르고 말았습니다.(창세 3장) 이에 비해 하느님의 아들이자 아담의 후손인 예수님은 마귀의 갖은 유혹을 물리치십니다. 예수님은 첫 아담과 대비되는 새로운 아담이십니다. 2) 이 유혹 기사를 들여다보면 악마의 유혹 강도가 갈수록 세어진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첫째 유혹이 기본적인 의식주를 나타내는 빵이었다면, 둘째 유혹은 기본적인 의식주를 넘어서 세상의 온갖 부귀와 영화와 권세를 가리킵니다. 마지막 세 번째 유혹에서는 성경 말씀까지 인용합니다. 예수님께서 유혹을 받으신 것처럼, 세례로 성령을 받고 하느님의 자녀가 된 우리도 살아가면서 수시로 유혹을 받습니다. 그 유혹은 살아가는 데 기본이 되는 의식주에 관한 유혹에서부터 더 많은 부귀와 명예와 권력에 대한 유혹, 심지어는 하느님의 말씀으로 포장한 유혹에 이르기까지 다양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하느님 말씀으로 유혹을 물리치셨듯이, 우리 또한 말씀으로 굳게 무장한다면 마귀의 유혹을 뿌리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려면 성령으로 가득 차신 예수님처럼 우리 안에서 활동하시는 성령의 불을 끄지 않고 말씀에 귀 기울이려는 노력이 요청됩니다. 알아둡시다 - 유혹산사해 근처에 있는 성경의 도시 예리코에서 북서쪽으로 3㎞쯤 떨어진 곳에 유혹산이 있다. 유다 광야의 한쪽 끝자락에 있는 유혹산은 해발 350m로, 마태오복음에 따르면 예수님께서 세 번째로 유혹을 받으신 높은 산을 가리킨다. 하지만 루카복음에서는 ‘산’이라는 표현 없이 그냥 “높은 곳”(4,5)이라고만 표현한다. 루카복음에는 예수님께서 두 번째로 유혹을 받으신 곳으로 나온다. 산중턱 동굴에는 정교회 수도원이 있는데, 이 동굴은 예수님께서 40일 동안 단식하신 곳이라는 전승이 전해온다. 백영민2017.05.24
![[성경 속 기도] (14) 예수님의 기도](//cpbc.co.kr/CMS/newspaper/2016/05/rc/634586_1.0_titleImage_1.jpg)
[성경 속 기도] (14) 예수님의 기도기도, 믿음의 씨앗이자 열매 만테냐 작, 겟세마니 언덕의 고뇌, 1460년, 런던 내셔널 갤러리. 우리는 흔히 기도라고 하면 하느님께 소원을 빌어서 부족함을 채우고 행복을 찾는 기원 행위로만 생각하기 쉽다. 하지만 기도를 바르게 이해하기 위해서 ‘기도는 하느님과 인간의 인격적 대화’라는 개념에서부터 출발해야 한다. 대화는 인격체가 서로 상대하여 이야기하는 것이므로, 그 의미와 목적은 서로의 뜻을 알고 이해하는 데 있다. 따라서 인간은 기도를 통해 하느님의 뜻을 알아듣고 이해하도록 노력해야 한다. 교회는 전통적으로 ‘기도는 인간이 몸과 마음을 다해 하느님을 향해서 흠숭과 감사, 속죄와 청원을 발하는 신앙 행위’라고 가르쳐 왔다. 예수님께서는 삶을 통해 부단히 기도하셨고 제자들에게 항상 끊임없이 기도하라고 가르치셨다(루카 18,1). 또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너희는 기도할 때 이렇게 하여라”(루카 11,2) 하시면서 기도의 필요성보다는 기도하는 방법에 대해 주로 말씀하셨다. 기도에 관한 예수님 가르침에서 핵심이 되는 것은 무엇보다 주의 기도이다(마태 6,9-13; 루카 11,2-4). 예수님은 주의 기도를 가르치면서 하느님을 인격적인 존재인 ‘아버지’라고 부르심으로 하느님과 인간과의 친밀성을 더 깊이 있게 심화시키셨다. 예수님 기도에서 나타나는 그분의 최대 관심사는 한마디로 “하느님 나라의 오심”이다. 예수님은 하느님 뜻이 이 땅에서 이루어지기를 항상 기도하셨다. 하느님의 나라는 온전히 하느님 활동으로 이루어진다. 즉, 하느님 나라는 창조주이며 생명의 주인이신 하느님만이 주실 수 있다. 그 새로운 시작은 그분이 인간의 역사 안에 직접 참여하심으로써 가능하다. 결국, 하느님 나라는 하느님이 인간에게 주시는 은총인데, 이 나라를 받아들인다는 것은 하느님께로 돌아서는 ‘회개’와 자신을 전적으로 그분께 의탁하는 ‘신앙’을 의미한다. 요한 복음에서는 기도에 관해 한층 더 깊은 가르침을 주고 있다. 즉 기도는 단순히 인간적 욕구를 승화시키고 하느님의 선물을 바라는 데 그치지 않고 하느님 자신을 바라는 마음으로 승화돼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인간은 순수한 인간적 원의에서 하느님을 원하게 되고(요한 4,10 참조) 지상 양식을 통해 ‘영원한 생명을 주는 양식’(요한 6,27)을 얻게 된다는 것이다. 따라서 기도는 믿음의 조건일 뿐 아니라 동시에 얻어지는 결과이기도 하다. 예수님은 자주 기도하셨고 때로는 산 위에서 혼자서(마태 14,23), 때로는 사람들이 찾고 있을 때에 외딴곳(루카 9,18)에서 기도하셨다. 이처럼 예수님께서 기도하신 것은 무엇보다 자신의 사명을 완수하기 위함이었고 제자들의 교육을 위해서였다.우리는 기도할 때 그리스도의 마음을 닮으려고 노력해야 한다(필리 2,5). 그리스도의 마음을 닮는다는 것은 낡은 인간을 벗어버리고 그리스도를 새로 입어, 그리스도의 고난을 함께 나누고 그리스도와 같이 죽는 것을 의미한다(필리 3,10). 우리는 자신을 하느님의 뜻에 예속시키고 예수님의 이름으로 구하는 것이면 모두 다 절대적으로 얻게 되리라는 굳은 믿음을 가지고 생활해야 한다. 예수님께서는 어떤 형식에 얽매이지 않고 자신의 고통적 상황 속에서도 깊이 탄식하시며 기도하셨다. 우리 자신도 어떠한 극한 상황이라 하더라도 하느님께 마지막 희망을 두고 자신의 전 존재를 의탁하는 기도를 바칠 수 있는 신앙인이 되어야 한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가르쳐주신 하느님 아버지는 만사를 선하게 이끄시고 완성하시는 세상의 주님, 우리의 아버지시기 때문이다. 허영엽 신부(서울대교구 홍보국장) 평화신문2016.05.10
![[NIE-신문으로 크는 신앙] 대영광송 바치지 않고 분위기도 엄숙해졌어요! 왜 그럴까요?](//cpbc.co.kr/CMS/newspaper/2018/02/rc/710795_1.0_titleImage_1.jpg)
[NIE-신문으로 크는 신앙] 대영광송 바치지 않고 분위기도 엄숙해졌어요! 왜 그럴까요?다가오는 수요일(14일)은 조금 특별한 수요일이에요. ‘재의 수요일’이라고 들어보셨나요? 바로 사순시기가 시작되는 첫날을 말합니다. 우리는 40일 동안 사순시기를 보내면서 예수님의 고통을 묵상하고 회개하는 특별한 시간을 보내게 돼요. 이제 곧 시작되는 사순시기가 어떤 의미를 가지는지,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어떤 자세를 가지면 좋을지 함께 알아볼까요?사순시기란 무엇인가요? 우리는 재의 수요일(2월 14일)부터 성 주간 목요일(3월 29일) 주님 만찬 미사 전까지 사순시기를 보내요. 사순시기는 그리스도의 수난과 죽음에 참여하며 부활을 준비하는 시간으로 자신을 돌아보며 마음을 새롭게 하는 때예요. 교회는 이 기간에 기도, 단식, 희생 등을 통해 참회의 생활을 하도록 권장해요. 전통적으로 교회는 재의 수요일부터 성주간 성토요일까지를 사순시기로 지냈는데 이 기간에서 주일을 뺀 날 수가 정확히 40일이어서 사순이라고 했어요. 그러나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이후 성 주간 성목요일 주님 만찬 미사부터 주님 부활 대축일까지 파스카 성삼일로 장엄하게 지내도록 하면서 사순시기는 파스카 축제를 준비하는 시간으로 성격이 강조되었어요. 40일의 의미는 무엇인가요? 사순(四旬, Quadragesima)이란 말은 ‘40일’을 뜻해요. 성경에서 40은 중대한 사건을 앞두고 준비하는 기간, 정화와 속죄의 시간을 가리키는 숫자예요. △이스라엘 백성이 이집트에서 탈출해서 사막에서 방랑한 기간이 40년이고 △모세가 십계명을 받기 전 준비의 기간이 40일이고 △엘리야가 호렙산으로 가는 시간 또한 40일이며 △신약성경에서 예수님이 사막에서 보낸 시간도 40일이랍니다. 이 시기 동안 우리는 예수님의 수난과 돌아가심을 묵상하고 부활을 맞이하기 위해 마음을 준비하면서 그동안의 잘못을 뉘우치고 고해성사를 봐요. 사순의 시작, ‘재의 수요일’은 어떤 날인가요? ‘재의 수요일’은 사순시기가 시작되는 사순 제1주일 전 수요일로 올해는 설 연휴를 앞둔 14일이에요. 재의 수요일(Ash Wednesday)은 그 이름처럼 미사 중에 참회의 상징으로 재를 축복하고 이를 머리에 얹는 예식을 행하는 데서 유래됐어요. 예전에 큰 잘못을 지은 이들은 교회 공동체에서 쫓겨나 천으로 된 참회복을 입고 재를 뒤집어쓴 채 자기 죄를 뉘우쳤다고 해요. 죄인들은 사순시기 동안 교회에 들어갈 수 없었고 보속을 위해 수도원으로 보내지기도 했답니다. 이러한 공적인 참회 제도는 10세기 말에 중단됐지만, 그 예식이 후대에도 전해져 오늘날엔 모든 신자에게 확대돼 이어져 내려오고 있어요. 교회는 재의 수요일에 단식과 금육을 해요. 바오로 6세 교황(재위 1963~1978)은 재의 수요일에 모든 교회가 단식과 금육을 지킬 것을 권고했어요. 성금요일에도 단식과 금육을 하지요. 재의 예식 재의 수요일 미사에서 복음 봉독과 강론을 한 뒤에 재 축복이 이뤄져요. 사제는 사순시기의 의미를 담은 기도문을 외운 후 지난해 성지 주일에 축복한 나뭇가지를 태워 만든 재에 성수를 뿌리며 축복한 다음 신자들 머리에 재를 얹어줍니다. 사제는 재를 얹으며 ‘사람아, 흙에서 왔으니 흙으로 다시 돌아갈 것을 생각하여라’ 혹은 ‘회개하고 복음을 믿어라’라고 말해요. 사제가 재를 얹을 때 신자들은 노래와 화답송을 부르며 예식이 끝나면 보편 지향 기도를 바칩니다. 사순시기만의 특별한 전례는 어떤 것이 있나요? 사순시기 동안 사제의 제의 색깔이 자주색으로 바뀌어요. 자주색은 참회와 속죄를 상징하기 때문에 전례 시기를 깊이 묵상하는 데 도움이 돼요. 그리고 이 시기 동안 미사 때 알렐루야와 대영광송을 바치지 않아요. 알렐루야는 히브리어로 ‘하느님을 찬미하라’는 뜻을 담고 있고 대영광송 역시 기쁨을 표시하는 노래이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의 고통을 묵상하는 시기에는 어울리지 않기 때문이에요. 사순시기에는 화려하고 웅장한 미사 성가와 악기 연주를 자제하고 참회와 화해를 주제로 한 단순하고 차분한 노래를 부르지요. 신자들의 생활에도 변화가 있는데 신자들은 그 어느 때보다 열심히 기도하며 특히 십자가의 길 기도를 많이 바치고 꼭 고해성사를 봐야 해요. 고해성사는 새로이 세례성사를 받는 것처럼 하느님과 화해하며 교회 공동체와 그리스도의 신비체에 다시 결합한다는 의미를 담고 있어요. 한국 교회는 1년에 2번 이상 의무적으로 고해성사를 보도록 하는데 이를 판공성사라고 부릅니다. 고해성사의 5단계 성찰 : 고해성사를 보기 전에 자신이 잘못한 것이 무엇인가 ???살펴 알아내는 것 통회 : 성찰로 알아낸 죄를 뉘우침 정개 : 다시 죄를 짓지 않겠다는 결심 고백 : 알아낸 잘못을 겸손한 마음으로 고해 사제 앞에 밝힘 보속 : 고해 사제가 죄의 고백을 들은 다음 정해주는 기도나 ???선행을 받아들여 고해소 밖에서 실천하는 것 십자가의 길 십자가의 길은 축성된 십자가를 들고 14처를 하나하나 지나가며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을 묵상하며 바치는 기도입니다. 각 처는 예수님께서 사형선고를 받으신 후 십자가를 지고 갈바리아산에 이르기까지 일어났던 14가지 중요한 사건을 성화 또는 조각으로 표현해 설치한 곳이에요. 이 기도는 초대 교회 때 예루살렘을 순례하던 이들이 예수님의 여정을 따라 빌라도 관저에서 골고타 산까지 직접 걸어가며 기도했던 것에서 유래해요. 신자들은 각 처를 지나며 주님의 기도, 성모송, 영광송 등을 함께 바쳐요. 사순시기 동안 우리는 무엇을 할 수 있을까요? 교회는 사순시기 참회가 ‘오로지 내적이고 개인적인 것만이 아니라 또한 외적이고 사회적인 참회가 되어야 한다’(「전례헌장」 110항)고 가르쳐요. 따라서 우리는 개인의 심신을 성화하기 위해 기도하는 것은 물론 공동체의 참회에 동참하며 소외되고 힘없는 이들과 함께해요. ▲금식과 금육 ▲자신이 좋아하는 것 가운데 끊기 어려운 한 가지를 골라 ‘절제’해보기(휴대전화 내려놓기, 게임 시간 줄이기, 용돈 줄이기) ▲매주 금요일 십자가의 길 하기 ▲ 고해성사 보기 등을 자신만의 사순시기 약속을 정해보아요. 유은재 기자 you@cpbc.co.kr [다른 그림 찾기]5세기 네덜란드 화가 한스 멤링이 예수 그리스도의 수난에서 부활에 이르기까지의 사건을 한 폭의 그림에 담았다. 그림은 예수님이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에 들어가는 장면에서부터 시작해 성전에서 상인들을 쫓아내는 모습, 최후의 만찬을 하는 모습, 체포되어 빌라도 앞에서 심문받는 모습, 가시관을 쓴 모습, 십자가를 지고 언덕을 오르는 모습, 처형에 이르는 모습 등으로 이어진다. 십자가의 길을 걸으며 그리스도의 수난과 죽음을 묵상하는 것처럼 그림 곳곳에 숨어 있는 이야기들을 따라가 볼 수 있다. 유은재 기자다른 그림 찾기 정답 문채현2018.02.07
![[성경 속 기도] (11) 시편의 기도](//cpbc.co.kr/CMS/newspaper/2016/04/rc/630899_1.0_titleImage_1.jpg)
[성경 속 기도] (11) 시편의 기도하느님께 바치는 찬미·감사 기도 150편 시편은 ‘찬미의 글’이라는 뜻이다. 시편은 길이, 형식, 내용이 다른 150편의 시가 수록된 이스라엘 백성의 기도서다. 시편은 반대로 사람이 하느님께 드리는 말씀, 즉 기도로 기록돼 있다. 따라서 살아 계신 하느님을 찾는 인간의 체험을 시편만큼 잘 보여 주는 것은 없다고 할 수 있다. 시편에는 신앙의 영역에서부터 미움과 사랑, 슬픔과 기쁨 등 인간 심리가 솔직하게 드러나 있다. 시편은 시대와 민족을 초월해 영원을 추구하는 모든 사람의 마음속에 용기와 위안을 주는 기도라고 할 수 있다. 이스라엘 공동체의 작품시편도 여러 시대, 여러 사람에 의해 전승된 이스라엘 공동체의 작품이다. 이스라엘 역사 전반에 걸쳐서 편성된 시편에는 구세사와 계시 전체가 담겨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우선 시편에는 찬양 기도가 많이 수록돼 있다. 하느님 찬미가 중심이 된 시로, 이스라엘이 전례나 축제, 행사 때 공동체 안에서 읊던 기도이다. 이스라엘은 그들의 역사를 숙고하면서 유일하신 절대자 하느님, 그들과 맺은 계약에 충실하신 하느님을 찬미했다. 이 자체가 기도라 할 수 있다. 찬양시 기도의 공통점은 미래를 향한 기대, 하느님과 함께 사는 생활, 하느님의 완전한 통치에 대한 소망 등이 담겨 있다. 또 찬양시에는 공동체성이 강하게 강조되고 있다. 시편에는 탄원이나 신뢰, 감사의 기도가 많다. 찬미와 탄원은 가장 많은 종류의 기도로 시편 어디서나 볼 수 있다. 애원시는 국가가 위기에 처해 드리는 집단 기도와 죽음, 질병, 박해, 죄 등의 구원을 비는 개인적인 기도로 구분된다. 이 시편은 원래 곤경과 고통이라는 공통된 상황에 그 뿌리를 두고 있다. 어떤 이가 설사 홀로 기도한다 해도, 그는 혼자가 아니다. 예를 들어 사제나 임금과 같이 공직에 있는 사람이 집단의 이름으로 말하는 경우에도 시편 기도의 ‘나’는 때로 공동체를 뜻하기도 한다. 또 백성을 가르치려는 의도가 뚜렷한 교훈시는 다른 시편과는 달리 다분히 교육적이다. 교훈시의 소재는 율법. 지혜, 윤리 생활 등 지혜 문학서가 취급하는 문제들이다. 교훈시에서 시편 저자는 이스라엘의 구원 역사를 회고하며 전례, 축제, 행사를 노래한다. 또 신명기에 바탕을 두고 계약의 의미와 그 중요성을 강조하기도 한다. 시편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생활 중심이었다. 그들은 매년 순례의 길을 떠날 때, 성전에서 제사를 바칠 때, 매주 안식일마다 회당에 모여 공적 기도를 드릴 때나 개인적으로 기도할 때 시편으로 찬미를 드렸다. 예수님께서도 십자가 위에서 시편을 외우면서 숨을 거두실 정도였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큰소리로 외치셨다. ‘아버지, 제 영을 아버지 손에 맡깁니다.’ 이 말씀을 하시고 숨을 거두셨다”(루카 23,46). 공동 전례에도 사용 시편을 낭송하고 노래하는 관습은 초기 그리스도교인에게서도 볼 수 있다(1코린 14,26 참조). 시편 기도는 일찍부터 개인 신심 행위와 공동 전례에도 퍼지게 된다. 초대 교회 박해 시대에 지하 비밀 예배소에서 울려 퍼지던 노래도 바로 이 시편이었다. 오늘날까지 시편은 미사 전례, 성직자·수도자들이 매일 드리는 시간 전례의 중요 부분이 되어 있다. 시편 기도는 비록 혼자서 바칠 때라도 하느님 백성의 기도와 합하여 드리는 공동체의 기도가 된다는 특징을 지닌다.허영엽 신부(서울대교구 홍보국장) 율리우스 카롤스펠트 그림, ‘다윗의 노래’. 출처=아름다운 성경 평화신문2016.04.19
![[이창훈 기자의 예수님 이야기] (38) 일흔두 제자의 파견과 회개하지 않는 고을(루카 10,1-16)](//cpbc.co.kr/CMS/newspaper/2017/11/rc/701068_1.1_titleImage_1.jpg)
[이창훈 기자의 예수님 이야기] (38) 일흔두 제자의 파견과 회개하지 않는 고을(루카 10,1-16) 빈 손으로 하느님 나라 선포하러 떠난 일흔두 제자 예수님께서는 일흔두 제자를 파견하며 파견지에서 해야 할 일을 알려 주십니다.(루카 10,1-12) 이렇게 제자들을 파견한 후에는 회개하지 않는 고을들을 꾸짖으십니다.(10,13-16) 차례로 살펴봅니다. 일흔두 제자의 파견(10,1-12) 루카는 예수님께서 일흔두 제자를 지명해 파견하시는 이야기를 “그 뒤에”라는 말로 시작합니다. 여기서 ‘그 뒤에’란 바로 앞에 나오는 내용, 곧 ‘예수님께서 당신을 따르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와 관련해서 말씀하신 뒤에’를 가리킵니다. 따라서 지난 호에 살펴본 내용을 간단히 다시 정리할 필요가 있습니다. 요약하면 예수님을 따르려면 “머리 기댈 곳조차 없는” 처지를 감내해야 하고, “나를 따라라”는 부름을 받은 즉시 지체없이 따라야 하며, 예수님을 따르겠다고 결단을 내렸으면 자꾸만 옆길로 새거나 지난 일을 돌아봐서는 안 된다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은 말하자면,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들의 기본자세입니다. 이렇게 제자들이 지녀야 할 기본자세를 먼저 제시한 후에 루카는 파견되는 제자들의 구체적인 처신에 관한 예수님의 당부 말씀을 전합니다. 우선 파견되는 제자는 일흔두 명입니다. ‘일흔둘’이라는 숫자는 전 세계 모든 민족을 상징적으로 나타내는 표현이라고 해석하기도 합니다. 즉 예수님께서 일흔두 제자를 뽑으셨다는 것은 전 세계 곳곳에 복음이 선포 되도록 하는 것의 예형(豫形)이라는 것입니다.(「주석 성경」)복음 선포의 사명을 받고 파견되는 제자들은 어떻게 해야 하는가? 먼저 기도하는 것, 곧 ‘수확할 것은 많은데 일꾼이 적으니 수확할 밭의 주인께 추수의 일꾼들을 보내 주십사고 청하는 것’(10,2)입니다. 그다음에는 돈주머니도 여행 보따리도 신발도 지니지 말고 길에서 아무에게도 인사하지 않은 것입니다.(10,3) 돈주머니와 여행 보따리와 신발은 여행하는 사람의 필수 지참물인데도 지니지 말라고 하시는 까닭은 제자들의 목적이 여행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라 복음 선포에 있으며 복음 선포가 그만큼 시급하다는 것을 나타냅니다. “수확할 것은 많은데 일꾼은 적다”는 말씀과 맥을 같이한다고 할 수 있겠지요. 길에서 인사하지 말라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근동에서는 인사가 대단히 길었기 때문에 시간을 지체하지 말라는 것이지요. 예수님의 이런 말씀은 “가거라. 나는 이제 양들을 이리 떼 가운데로 보내는 것처럼 너희를 보낸다”(10,3)는 말씀과 결부시켜 해석하면 의미가 훨씬 확장됩니다. 제자들이 파견되는 곳은 바로 예수님께서 몸소 가시려는 고장과 마을들입니다. 예루살렘으로 향하는 동안 예수님은 이미 사람들에게 냉대를 받으셨고(9,53), 머리 기댈 곳조차 없는(9,58) 처량한 신세입니다. 주님이요 스승이신 예수님의 사정이 이러할진대 그 제자들이야 오죽하겠습니까? 그러니 제자들을 보내는 예수님 마음은 양들을 이리 떼 가운데로 보내는 것과 같은 마음일 것입니다. 이렇게 파견되는 제자들은 어느 집에 들어가든지 먼저 평화를 빌어 주고, 이집 저집으로 옮겨 다니지 말고 한 집에 머물러 있어야 합니다.(10,6-7) 이집 저집으로 옮겨다는 것은 더 나은 접대를 받으려고 찾아다니지 말고 사명 수행에만 전념하라는 말씀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주석 성경」) 제자들은 또 어느 고을에 들어가든지 자신들을 받아들여 주면 차려 주는 음식을 먹고 병자들을 고쳐 주며 하느님 나라가 가까이 왔다고 선포해야 합니다. 그러나 받아들여 주지 않으면 한길에 나가 “여러분의 고을에서 우리 발에 묻은 먼지까지 여러분에게 털어 버리고 갑니다. 그러나 이것만은 알아 두십시오. 하느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습니다”라고 말해야 합니다.(10,8-11) 발에 묻은 먼지를 털어 버린다는 것은 절연한다는 표시입니다. 그런 고을은 하느님 나라가 다가오는 그 날이 되면 유황불에 멸망하고만 소돔보다 더 못한 처지가 될 것이라고 예수님은 경고하십니다.(10,12) 그렇다면 하느님 나라는 그 나라를 받아들이는 사람에게는 구원의 기쁨이 되겠지만 거부하는 이들에게는 파멸의 근원이 될 것입니다. 회개하지 않는 고을들(10,13-16)이렇게 제자들을 파견하신 예수님께서는 이제 회개하지 않는 고을들을 두고 탄식하십니다.(10,13-15) 그 고을들은 코라진, 벳사이다, 그리고 카파르나움입니다. 세 고을은 모두 갈릴래아 호수 북쪽에 있습니다. 벳사이다는 사도들인 베드로와 그의 동생 안드레아 그리고 필립보의 고향이고 예수님께서 활동하신 곳입니다. 카파르나움은 시몬의 장모 집이 있던 곳이자 후대에 예수님의 도시라고 불릴 정도로 예수님의 활동 중심지였습니다. 하지만 코라진은 신구약 성경 전체를 통틀어 딱 두 군데, 루카복음의 이 대목과 이에 상응하는 마태오복음 11장 21절에만 나옵니다. 그런데 “너희에게 일어난 기적들이 티로와 시돈에서 일어났더라면 그들은 벌써 자루옷을 입고 재를 뒤집어쓰고 앉아 회개하였을 것이다”(10,13)는 예수님의 말씀으로 보아 예수님께서는 벳사이다에서뿐 아니라 코라진에서도 하느님 나라가 왔음을 보여 주는 여러 기적을 행하셨음이 분명합니다. 티로와 시돈은 갈릴래아의 북서쪽으로 지중해를 끼고 있는 이방인 지역 시리아 페니키아에 있는 해안 도시들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코라진과 벳사이다에 대해서는 “불행하여라!” 하고 탄식하시지만(15,13), 카파르나움에 대해서는 탄식을 넘어 저주하는 것처럼 심하게 나무라십니다. “네가 하늘까지 오를 성싶으냐? 저승까지 떨어질 것이다.”(10,15)세 고을에 대한 탄식 혹은 심한 나무람에 이어 예수님께서는 바로 제자들에게 말씀하십니다. “너희 말을 듣는 이는 내 말을 듣는 사람이고 너희를 물리치는 자는 나를 물리치는 사람이며, 나를 물리치는 자는 나를 보내신 분을 물리치는 사람이다.”(10,16) 이 말씀이 뜻하는 의미는 무엇일까요? 예수님에 앞서 파견되는 제자들이 수행하는 사명은 단순히 예수님을 준비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하시는 사명을 그대로 이행하는 사람이라는 것이 아닐까요? 그렇다면 이 말씀은 예수님 시대에만 적용되는 것이 아니라 오늘에도 마찬가지로 적용되는 말씀이라고 여길 수 있을 것입니다. 곧 예수님께서 선포하신 하느님 나라의 복음을 선포하는 이들은 바로 예수님의 일을 하는 것이며, 그래서 그들을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은 예수님을 받아들이지 않은 것이고 따라서 예수님을 보내신 분 곧 하느님을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그런 이들은 예수님께서 탄식하시며 몹시 나무라신 세 고을과 같은 운명에 처할 것입니다. 문채현2017.11.09
![[가톨릭, 리더를 만나다] (23) 배우리(프란치스코) ‘이름사랑’ 대표](//cpbc.co.kr/CMS/newspaper/2017/10/rc/697954_1.0_titleImage_1.jpg)
[가톨릭, 리더를 만나다] (23) 배우리(프란치스코) ‘이름사랑’ 대표우리말의 아름다움 담는 작명의 연금술사 한글날을 맞아 우리말에 아름다움을 담고 있는 국어학자를 만났다. 여든의 나이에도 스스로 최고라는 자신감이 인터뷰를 관통했다. 하느님을 섬기듯 우리말을 섬기는 그의 공부와 연구는 지금도 치열하고 치밀했다. 작명 전문업체 ‘이름사랑’ 대표인 한국땅이름학회 배우리(프란치스코) 명예회장이다. 하느님께서 아드님의 이름을 ‘예수’라고 지어 주셨듯이 신앙인으로 그는 한글 이름에 부모의 사랑과 소망을 담는다. 우리 땅 이름을 찾기 위해 전국의 산하를 누비다 간첩으로 오인되기도 했다. ‘거기에 머물러 네가 할 일을 하라’는 하느님의 소명을 받들기 위해 좌절과 아픔에도 자신을 스스로 단련시키며 오직 한글 연구의 한 길을 걸었다. 사라진 ‘한글 이름 찾기’를 통해 그는 어떻게 하느님의 사랑을 실현하고 잃어버린 역사를 찾아 바로 세울까? 죽는 날까지 마음과 목숨과 정성을 다하고 싶다는 그의 마지막 꿈과 소망을 들여다본다. 서종빈 기자 binseo@cpbc.co.kr▶‘이름사랑’을 운영하신 지 오래되셨죠. 45년 정도 됐습니다. 이런 말을 하면 좀 민망합니다만 하도 오래 하다 보니 많이 알려졌고 인기도 조금 있는 것 같습니다. 이름에 관한 한 저는 자신 있습니다. 자신이 없으면 지금 같은 경쟁시대에 살아남을 수도 없습니다. 살아남기 위해 지금도 연구하고 있는데요, 우리 말 자체를 전부 찾으려고 하는 것은 아닙니다. 말 자체는 그냥 재료입니다. 한 가지 재료를 가지고 여러 가지 음식을 만들 듯 낱말 하나를 가지고 여러 가지 이름으로 분화시켜 만들어 낼 수 있습니다. 오로지 단어만 가지고는 이름을 만들지 못합니다.▶기억에 남는 이름이나 일화 있으면 소개해 주세요.쌍둥이를 설이, 솔이, 슬이 이렇게 시옷(ㅅ) 발음으로 간 것도 있고요. 성체 분배하러 갔더니 복사하는 아이가 신부님께 “제 이름이 ‘다예’인 것 아시죠” 하면서 “배우리 선생님이 지으셨어요”라고 하는 얘기를 들었습니다. 그때 같이 있던 성체 분배자가 “네 옆에 있는 분이 바로 배우리 선생님이야” 하니까 아이가 깜짝 놀라더라고요. 제가 어디 가다가 ‘배우리’라고 하면 운전기사분들도 놀라시고 사인해 달라는 요청도 많이 받았습니다. 1981년 1월 본당 사목위원들과 서울대교구장 김수환 추기경을 예방한 배우리 대표(오른쪽 하단 두번째). ▶시대에 따라 선호하는 이름이 다르지 않나요.옛날에는 순이, 경이, 영이 즉 ‘순ㆍ경ㆍ영’이 많았잖아요. 심지어 어머니들 이름 보면 막례, 막순 이런 이름도 있었고요. 그런데 요즘 이름은 소리에 중심을 둡니다. 민, 빈 등 ‘니은(ㄴ) ‘이 많이 들어가고 부모들은 ‘리을(ㄹ)’로 끝나는 지율, 서율, 은율 등을 좋아합니다. 또 개음절이라고 해서 굴러가는 소리가 나니까 슬, 설 등 ‘끝 음’에 신경을 많이 쓰는 경향을 보입니다.▶세계화에 따라 한글 이름에 한자를 붙이거나 영어 이름까지 짓는 경우가 많은데요.세례명에 맞춰 이름을 짓는 경우도 많습니다. 세례명인 ‘리나’는 한글 이름으로도 예쁘잖아요. 제가 지은 이름 중에 ‘바로’라는 아이가 있는데 세례명이 ‘바오로’입니다. 연상이 되잖아요. 우리 이름과 천주교 세례명과의 연관성을 생각해 이름을 짓는 경우도 많습니다. ▶태명(胎名) 열풍이 불고 있는데요, 어떻게 하면 좋은 태명을 지을 수 있을까요.태중에 있을 때 짓는 일시적인 이름이니까 아기가 잘되기를 바라는 기원과 기도를 담는 거예요. 그래서 태명 중에 가장 많이 나오는 이름이 ‘사랑’이라고 하는데 그럴 수밖에 없죠. 별자리로 짓는 태명을 생각해 봐도 좋고요. 부부가 좋아하는 단어를 쭉 써 보면 한 백여 개가 나올 수 있는데 하나씩 지워 가다 보면 마지막에 남은 것을 태명으로 정하면 됩니다. 단번에 생각해서 이름을 정하는 것은 의미가 없습니다.▶회장님과 사모님 존함(尊銜)도 모두 한글이시죠.제 이름은 한글학회 사람들과 의논해서 지었습니다. 성과 맞춰보니까 ‘배운다’는 뜻이거든요. ‘끊임없이 평생 배우리….’ 그래서 제가 지금도 공부하고 있지 않습니까. ‘배우리’라는 이름을 지은 뒤부터 더 많이 배우게 됐어요. 제 아내의 이름은 ‘이솔마을’인데요. 저와 함께 개명 신청을 한 것입니다. 저도 본래 이름은 한자 이름인 ‘배상철’이었거든요. ▶요즘 한글 이름 짓는 분들이 많이 줄어든 것 같은데요.한글 이름이 유행이었을 때 많은 분이 생각을 조금 잘못한 부분이 있습니다. 그냥 낱말을 붙이는 게 한글 이름이 아니거든요. 사전에서 그냥 뽑아서 붙이는 것은 이름을 짓는 게 아녜요. 한글 이름은 낱말과 낱말을 조합해서 다듬는 것입니다. 이름을 어디에서 뽑는다고 생각하니까 한글 이름이 너무 흔해진 거예요. 그런 것은 한글 이름으로서의 의미가 좀 적습니다. 만들고 다듬고 하는 것이 진짜 이름이죠. 이름이라는 것은 하나의 좌우명으로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부모님이 지어준 이름에는 부모님 뜻과 정성이 담겨 있습니다. ▶ 전국의 성지나 성당 이름도 한글 이름이 많습니다.그래서 참 좋아요. 모래내성당, 가재울성당, 새남터성당, 학여울성당 모두 우리말이고 우리 땅 이름이에요. 성당에 옛날 토박이 이름을 붙여 주면 오래가는데 행정구역을 따라가다 보니까, 행정구역이 바뀌면 성당 이름도 바뀔 수가 있어요. 일례로 전통의 거리로 외국 사람들이 많이 찾는 ‘인사동’도 일본인들이 관인방의 ‘인’ 자와 대사당의 ‘사’ 자를 한 자씩 따서 붙인 거예요. 원래 조선 시대 이름은 ‘절골’ 즉 ‘사동’입니다. 옛 이름을 찾아야 그 속에 담긴 잃어버린 전통과 역사를 찾을 수 있습니다. ▶어떤 계기로 한글 이름을 짓기 시작하셨나요.방송과 관계가 있습니다. 50년 전에 방송에 처음 나갔는데 우리말을 주제로 한글날만 되면 번쩍번쩍 나타나는 국어학자였습니다. 매번 방송에 나가게 되니 이야깃거리가 제한되는 거예요. 그래서 우리말 이름 이야기를 시작했습니다. 사람 이름을 시작으로 옷 이름, 꽃 이름, 나비 이름, 바위 이름 등으로 넓히고 땅 이름, 골짜기 이름, 시내 이름, 바위 이름까지 짓게 됐습니다. 들으면 알 만한 몇몇 큰 기업체와 은행, 상품 이름도 제가 한글로 지었습니다.▶회장님이 지으신 이름이 곳곳에 있으니 보람이 많으시겠어요.고마운 일이죠. 하느님께서 내가 너의 능력을 다 쏟아서 먹고 살 만하게 해줄 테니 하라고 명령해 주신 것 같아요. 저는 엄청난 고생을 하면서 여기까지 왔습니다. 어린이 신문의 편집장도 했고 학원에서 국어 강의도 했습니다. 땅 이름을 연구하기 위해 전국을 돌아다녔는데, 군부대나 기지 근처에 들어가서 사진 찍고 외딴곳에서 땅과 산 이름을 물어 보다가 간첩으로 오해받아서 끌려간 적도 한두 번이 아니었습니다. 눈물이 날 정도로 고생했는데 글을 쓰고 방송에 나가면서 경찰들도 알아보게 됐죠. 모두 하느님께서 계획하시고 인도해 주신 거예요. 저를 단련시키지 않고 그런 인도가 없었다면 저는 이 길로 올 수가 없었고 지금의 저는 없었겠죠. ▶어떤 계기로 신앙을 갖게 되셨습니까.아내는 모태 신앙인데 제가 신자가 아니어서 관면 혼인을 하고 일반 예식장에서도 결혼식을 했습니다. 결혼을 두 번 한 셈이죠. 세례는 1966년에 받았습니다. 결혼 전에 아내가 천주교 신자인 게 마음에 들어 제가 청혼을 했지요. 기도하는 아내의 모습이 참 예뻤습니다. 아내가 저를 성당으로 인도했고 지금도 아내와 저녁 기도만큼은 꼭 하고 잡니다.▶신자로서 ‘사주’와 연관 지어 이름을 짓는 전통적인 관례에 비춰 갈등을 겪은 적은 없으신가요.이름을 주술적인 측면과 연결하면 안 됩니다. 다만 전통적인 흐름만 조금 따라 주면 되는 것이죠. 그 이상을 침범하면 안 된다고 봅니다. 신부님 이름도 제가 바꿔줬습니다. 제가 이름 짓기를 하는 영역을 아는 것이죠. 종교적으로도 인정해 주시는 것 같고요. 제가 하는 일이 잘못된 것은 아니라고 저는 알고 있습니다. ▶아직도 해야 할 일이 많으시죠.나이가 있으니까 많은 일은 못 하겠지만 죽는 날까지 움직여야죠. 하느님께 가기 전에 꼭 하고 싶은 일은 사라져 가는 마을과 옛 땅 이름을 오롯이 살리는 것입니다. 마을 이름을 찾아서 표석을 세우고 싶습니다. 더불어 우리 한국 사람들 이름이 모두 한국적이었으면 좋겠습니다. 이름에서부터 우리의 국력을 되찾았으면 하는 바람이고요. 역사 바로 세우기 차원에서라도 옛 이름 찾기 운동을 대대적으로 해볼 생각입니다.▶힘들고 어려울 때 주로 어떤 기도를 바치세요. ‘네 마음을 다하고 네 목숨을 다하고 네 정신을 다 하여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마태 22,37)는 성경 말씀을 늘 기억합니다. 그다음 구절을 보면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고 나오는데 얼마나 좋은 말씀입니까. 그런데 사실 그렇게 하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죠. 그렇게 하려고 하는 노력 자체만으로도 의미가 있다고 봅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성경책의 이름도 ‘성경’이 아닌 ‘사랑’으로 바꿨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해봤습니다. 성경 전체의 줄거리를 보면 그것은 ‘사랑’입니다. 성경의 부제목으로 ‘사랑’을 붙였으면 좋겠어요. ▶지나온 삶을 돌아보시면 특별히 하느님께 감사한 점은 무엇인가요.제가 이사하지 않고 이곳 용산에서만 사는 게 참 행복하다고 생각했는데 하느님께서 주신 은총이라고 봅니다. 이사를 많이 다녔다면, 재산은 불렸을지 모르지만 행복을 불리지는 못했을 것 같은 생각이 듭니다. 재산만 불리면 뭐합니까, 행복을 불려야죠. 행복은 마음에서 찾는 것인데 그 행복을 주신 분이 바로 하느님이시죠. ‘거기에 머물러서 네가 할 일을 해라.’ 이런 소명을 저에게 주신 것 같아요. 저는 죽은 날까지 하느님 말씀을 따르고 싶습니다. 백영민2017.10.11
![[성경 속 기도] (13) 성모 마리아의 기도](//cpbc.co.kr/CMS/newspaper/2016/05/rc/633487_1.0_titleImage_1.jpg)
[성경 속 기도] (13) 성모 마리아의 기도“당신 말씀대로 이루어지소서” 프라 안젤리코 작 ‘주님 탄생 예고’, 프레스코화, 15세기, 산 마르코 수도원, 이탈리아 피렌체. 가톨릭 교회는 성모 마리아를 교회의 어머니, 신앙의 어머니로 공경하고 있다. 특히 성모 마리아는 기도 생활에서 모범을 보여 준다. 동정녀 마리아가 천사로부터 예수님의 잉태를 예고받고 주님을 잉태한 몸으로 엘리사벳을 방문해 부른 노래. 마리아가 구세주 하느님을 찬양하면서 이스라엘에 베푸신 하느님의 계획이 자신을 통하여 이뤄졌음을 기도하는 ‘마니피캇’(Magnificat, 루카 1,46-55)은 성모 마리아의 대표적인 기도문이다. 주님께서 약속하신 말씀이 꼭 이루어지리라 믿었던 마리아의 믿음이 그녀를 교회의 어머니로 존경받게 하는 것이다. “행복하십니다, 주님께서 하신 말씀이 이루어지리라고 믿으신 분!”(루카 1,45) 신앙이란 한마디로 인간의 생각과 판단으로 잘 받아들일 수 없지만 하느님의 역사(役事)를 믿고 받아들이는 것이다. 그래서 인간적으로 이해 불가능하고 받아들일 수 없는 일을 주님의 뜻으로 믿고 받아들인 성모 마리아의 믿음이 우리에게 귀감이 된다.하느님께서는 가브리엘 천사를 갈릴래아 지방 나자렛이라는 고을로 보내시어, 다윗 집안의 요셉이라는 사람과 약혼한 처녀를 찾아가게 하셨다. 그 처녀의 이름이 마리아였다. 천사가 마리아의 집으로 들어가 다짜고짜 인사와 함께 “두려워하지 마라, 마리아야. 너는 하느님의 총애를 받았다. 보라, 이제 네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터이니 그 이름을 예수라 하여라”라는 메시지를 전한다. 마리아가 천사에게, “저는 남자를 알지 못하는데, 어떻게 그런 일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 하고 말하자, 천사는 “성령께서 너에게 내려오시고 지극히 높으신 분의 힘이 너를 덮을 것이다. 그러므로 태어날 아기는 거룩하신 분, 하느님의 아드님이라고 불릴 것이다”라고 말한다. 이때 마리아의 심정이 어땠을까 하는 것은 미뤄 짐작할 수 있다. 처녀가 아기를 잉태한다는 건 인간적으로 고통과 수난의 삶을 예고하는 것이기도 했다. 마리아는 왜 하필 이런 일을 겪어야 하는지 원망스럽기도 했지만 처녀 마리아는 결국 하느님 뜻에 순명한다. “마리아가 말하였다. ‘보십시오,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말씀하신 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루카 1,38). 이처럼 성모 마리아의 일생은 온전히 하느님의 부르심에 응답하는 삶이었다. 참으로 성모 마리아는 겸손한 분이었다. 즉 하느님 앞에서 자신은 작고 보잘것없다는 것을 솔직하게 인정하고, 하느님께서 당신에게 베푸신 은총과 권능에 의지했다. 성모님이 교회의 가장 으뜸 성인으로 존경받고 있는 이유는 무엇보다 그분의 신앙 때문이다. 마리아라는 이름은 (히브리말로 미리암) 그 당시에 아주 흔하던 이름이었다. 성모 마리아는 스스로를 비천한 여종이라고 표현했다(루카 1,48). 이처럼 마리아는 우리처럼 평범한 사람이었다. 우리가 흔히 볼 수 있는 동네 처녀, 우리들 어머니의 모습을 가지신 분이었다. 그런데 하느님은 평범한 처녀 마리아를 선택하셔서 당신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어머니로 삼으셨다. 이것은 오로지 하느님의 뜻이었다. 성서에 보면 곳곳에서 이렇게 하느님은 평범하고 별로 내세울 것이 없는 인간을 부르시고 선택하여 당신의 일꾼으로 삼으신다. 예수님의 제자들도 마찬가지였다.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말씀하신 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루가 1,38)라는 위대한 신앙고백은 이제 우리의 기도가 되어야 한다. 허영엽 신부(서울대교구 홍보국장) 평화신문2016.05.03
![[전영준 신부의 가톨릭 영성을 찾아서] (34) 8세기 ③ - 샤를마뉴 황제와 카롤링거 르네상스](//cpbc.co.kr/CMS/newspaper/2017/07/rc/689242_1.0_titleImage_1.jpg)
[전영준 신부의 가톨릭 영성을 찾아서] (34) 8세기 ③ - 샤를마뉴 황제와 카롤링거 르네상스문맹자 황제, 문화 부흥과 영성 생활 발전을 견인하다동방 교회가 성화상 논쟁으로 홍역을 치르고 있을 때, 서방 교회는 새로운 정치 세력과의 연대를 도모했습니다. 카롤링거 왕조의 프랑크 왕국 출현은 유럽 사회에 전환점을 가져왔을 뿐만 아니라, 서방 교회에도 변곡점을 만드는 계기가 되었습니다.사를마뉴는 하드리아누스 1세 교황에게 교황령 보호를 요청받자 전쟁을 시작해 랑고바르드 왕국의 나머지 영토를 회복했다. 사률마뉴(왼쪽)를 맞이하는 하드리아누스 1세 교황.교회의 수호자로서의 신성 로마 제국 황제 샤를마뉴 메로빙거 왕조 프랑크 왕국은 다고베르투스 1세(Dagobertus I, 608쯤~638/39) 국왕 사후에 북서부 지역의 네우스트리아(Neustria), 북동부 지역의 아우스트라시아(Austrasia), 남동부 지역의 부르고뉴(Bourgogne)로 나뉘었습니다. 679년 아우스트라시아의 궁재(宮宰)가 되었던 페피누스 2세(Pepinus II, 635~714)는 687년 프랑크 왕국 나머지 실권마저 장악했으나, 그의 사후에 적자 권력 승계에 반발한 서자 샤를 마르텔(Charles Martel, 686쯤~741)이 718년 다시 프랑크 왕국의 전권을 차지했습니다. 샤를 마르텔은 732년 유럽을 정복하고자 피레네산맥을 넘은 이슬람 세력을 물리치면서 서방 교회와 돈독한 관계를 형성했습니다. 741년 샤를 마르텔이 사망하자, 아들 페피누스 3세(Pepinus III, 714~768)는 먼저 네우스트리아의 궁재가 되었고, 748년 형 카를로만(Carloman, 707경~754) 궁재를 몰아내고 아우스트라시아의 궁재까지 됐습니다. 이어 751년 메로빙거 왕조 마지막 왕이었던 킬데리쿠스 3세(Childericus III, 717경~754)를 폐위시키고 카롤링거 왕조 프랑크 왕국의 첫 번째 국왕으로 즉위했습니다. 교황 자카리아스(Zacharias PP, 재위 741~752)는 페피누스 3세 즉위를 승인했고, 754년 교황 스테파누스 2세(Stephanus PP. II, 재임 752~757)도 서방 교회에 대한 군사적 보호를 요청하고자 랭스(Reims) 대성당에서 페피누스 3세에게 도유 예식을 거행하면서 그가 프랑크 왕국의 합법적인 국왕이라고 선언했습니다. 페피누스 3세는 그 보답으로 756년 랑고바르드 왕국의 일부 영토를 정복해 교황 스테파누스 2세에게 기증했습니다. 이로써 프랑크 왕국과 서방 교회는 더욱 긴밀한 관계를 형성했습니다. 768년 페피누스 3세가 사망하자, 아들 샤를마뉴(Charlemagne, 재위 768~814)와 카를로만 1세(Carloman I, 재위 768~771)에게 왕국과 왕위가 분할 상속되었습니다. 771년 동생 카를로만 1세가 갑자기 사망하자, 샤를마뉴는 프랑크 왕국의 유일한 왕으로 즉위했습니다. 샤를마뉴는 772년 교황 하드리아누스 1세(Hadrianus PP. I, 재임 772~795)에게 랑고바르드 왕국의 침공에 대한 교황령 보호를 요청받자 전쟁을 시작했습니다. 774년에는 랑고바르드 왕국의 나머지 영토를 정복하고 스스로 랑고바르드 왕국의 왕이라고 지칭했습니다. 다만 774년 샤를마뉴도 로마를 방문해 부왕 페피누스 3세를 이어 교황령을 보장해 주었지만, 많은 영토를 기증하지 않았습니다. 샤를마뉴는 교황 레오 3세(Leo PP. III, 재임 795~816)가 교황에 선출되자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했고, 799년 교황의 반대자들이 교황을 공격하자 교황을 보호해 주었습니다. 결국 800년 교황 레오 3세는 샤를마뉴에게 신성 로마 제국 황제의 관을 씌어주고 서로마 제국 황제를 계승하게 함으로써 교회의 수호자로 임명했습니다. 서방 교회에 활기를 불어넣은 카롤링거 르네상스 문맹자로 알려졌던 샤를마뉴가 백성을 비롯해 교구 성직자들의 문맹률을 낮추기 위해 라틴어 교육을 권장하며 시작했던 운동은 ‘카롤링거 르네상스’(Carolingian Renaissance)로 발전하면서 서방 교회에 활력을 가져왔습니다. 뿐만 아니라 교구 성직자와 평신도의 영성 생활 발전에도 크게 기여했습니다. 샤를마뉴는 유럽 각지에서 활동하는 학자들을 궁정으로 불러들였습니다. 그리고 학자들이 인문학, 수사학, 예술, 건축뿐 아니라, 교회법, 전례 개혁, 성경 연구 등에 매진할 수 있도록 전폭적으로 지원했습니다. 샤를마뉴의 스승이었던 잉글랜드 출신 수도자 알쿠이누스(Alcuinus, 730쯤~804)는 782년 왕국의 수도 아헨(Aachen)에 샤를마뉴 궁정학교 교장이 되었습니다. 원래 이 학교는 귀족 자녀들을 교육하기 위해 선대에 설립되었던 학교였으나, 샤를마뉴는 인문학과 종교 연구를 교육과정에 포함시켰습니다. 알쿠이누스는 790년까지 샤를마뉴와 그의 아들들에게도 인문학 등을 가르쳤습니다. 잠시 잉글랜드로 돌아갔었던 알쿠이누스는 793년 샤를마뉴의 요청으로 그리스도 양자설(Adoptionism) 이단과 맞서기 위해 다시 궁정학교로 돌아왔습니다. 796년 알쿠이누스는 투르(Tours)에 ‘성 마르티누스 수도원’ 원장으로 부임해 말년을 보냈습니다. 카롤링거 르네상스 학자로서 문법 학자였던 피사의 페트루스(Petrus Pisanus, 744~799)는 776~790년 사이에 샤를마뉴에게 라틴어를 가르쳤습니다. 라틴어와 관련된 그의 작품들은 유럽 사회에서 라틴어가 교회 언어이자 공용어로 쓰이게 되는데 큰 기여를 했습니다. 특히 지역 언어로 잘못 번역된 성경을 읽던 교구 성직자들과 신자들이 라틴어 성경을 비롯해 라틴어 주석서와 교부들의 문헌들을 읽게 되면서 올바른 신앙으로 돌아올 수 있었습니다. 신학자였던 아퀼레이아의 파울리누스(Paulinus Aquiliensis, 750 이전~802)는 776~787년 샤를마뉴 궁정 학자로 참여했으며, 샤를마뉴는 787년 그를 아퀼레이아의 총대주교로 임명했습니다. 파울리누스 역시 그리스도 양자설 이단을 거슬러 여러 시노드에서 활약했습니다. 랑고바르드 귀족 가문 출신으로 역사학자이자 베네딕도회 수도자였던 부제 파울루스(Paulus Diaconus, 720/26경~800 이전)는 782~787년 사이에 카롤링거 르네상스에 큰 기여를 했으며, 787년 샤를마뉴는 그를 ‘몬테카시노 수도원’ 원장으로 임명했습니다. 히스페니아 서고트족 후손이며 시인이자 문필가였던 오를레앙의 테오둘푸스(Theodulfus Aurelianensis, 760쯤~821)는 782~797년 사이에 카롤링거 르네상스의 핵심 인물로서 궁정에서 봉사했으며, 797년 샤를마뉴는 그를 오를레앙의 주교로 임명했습니다. 특히 테오둘푸스는 샤를마뉴와 함께 교회 개혁을 위해 많은 역할을 담당했습니다. 또한 테오둘푸스는 교회 관련 지역 밖에서도 공공 학교가 설립될 수 있도록 많은 노력을 했습니다. 교황 그레고리우스 1세가 유럽 선교를 위해 각지로 파견했던 수도자들은 중세 초기에 그 지역의 중심 역할을 담당했습니다. 수도자들은 선교를 위해 성경과 신학을 열심히 공부했고, 열정적인 평신도들은 이런 그들의 모습을 본받으려 했습니다. 이런 와중에 카롤링거 르네상스는 교구 성직자와 평신도에게도 공교육을 통해 라틴어를 가르치면서 성경과 신학 공부를 할 수 있는 계기를 제공했습니다. 그로 인해 서유럽 전체 문맹률이 낮아지면서, 그리스도인들은 올바른 신앙과 성숙한 영성 생활로 한 걸음 다가가는 기회를 얻었습니다. <가톨릭대 신학대학 영성신학 교수>백영민2017.07.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