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허규 신부와 떠나는 신약 여행 (99) “그 사내아이는 쇠 지팡이로 모든 민족들을 다스릴 분입니다.”(묵시 12,5)심판의 시간이 오기 전에 회개하여라 요한 묵시록은 일곱 대접의 환시를 전하고 있다. 그림은 미카엘과 천사들이 용과 그의 부하들을 땅으로 떨어뜨리는 모습. 율리우스 슈노어 폰 카롤스펠트 작 ‘하늘의 전쟁’ 부분. 출처=「아름다운 성경」 일곱 나팔의 환시와 일곱 대접의 환시는 비슷한 점이 많습니다. 두 환시 모두 이집트에 내린 하느님의 재앙과 비교할 수 있습니다. 요한 묵시록의 저자가 본 환시가 탈출기에 나오는 재앙과 비교될 수 있다는 것은 서로 관련이 있는 재앙을 통해 하느님의 업적을 나타내는 방법입니다. 이집트에서의 탈출 때와 마찬가지로 지금 요한 묵시록이 전하는 재앙을 내리는 분은 바로 하느님입니다. 여인과 용의 환시일곱 나팔과 일곱 대접의 환시 사이에 요한 묵시록에서 아주 중요하게 생각되는 환시가 있습니다. ‘여인과 용’에 대한 환시입니다. “태양을 입고 발밑에 달을 두고 머리에 열두 개 별로 된 관을 쓴 여인”은 곧 해산할 모습으로 묘사됩니다.(묵시 12,1-2) 이 여인은 무엇을 나타내는 상징인지에 대해 많은 의견이 있습니다. 그중에서 먼저 생각해 볼 수 있는 것은, 지금 많은 신자가 생각하는 것처럼 성모 마리아에 대한 상징으로 이해하는 것입니다. 구약성경에서 메시아를 나타내는 상징으로 사용된 쇠 지팡이로 모든 민족들을 다스릴 사내아이는 예수님을 나타내고 이 사내아이를 해산하는 여인은 마리아로, 성모님으로 보는 것입니다.(묵시 12,5; 시편 2,9) 이런 해석은 성모 신심이 강한 가톨릭교회 안에서 폭넓게 받아들여집니다. 또 다른 해석은 이 여인을 하느님의 백성, 곧 ‘믿는 이들의 공동체’로 보는 것입니다. 구약성경에서 말하는 이스라엘과 열두 지파 그리고 신약성경에 상징적으로 표현되는 열두 사도를 통해 하느님에 대한 믿음을 간직한 공동체 전체를 지칭하는 것으로 이해합니다. 왜냐하면, 메시아는 구약성경에서 약속된 분으로 이스라엘 민족 안에서 태어나셨으며 신약성경에서 말하는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간직한 이들 안에서 죽음과 부활을 통해 구원을 이루었고 교회를 통해 지속되기 때문입니다. 이런 해석 역시 많은 이들에게 긍정적으로 수용됩니다. 이 여인의 해산을 막기 위해 등장하는 용은 악의 세력을 나타내는 상징으로 볼 수 있습니다. 용이 “크고 붉은” 색을 가졌다는 것은 박해를 통해 순교자들의 피를 흘리게 한 상징으로 이해합니다. 또한, 이 용은 세상에서 자신을 대신하는 권한을 가진 두 짐승을 통해 우상 숭배를 조장합니다. 묵시록 13장에서 표현되는 바다에서 올라오는 짐승과 땅에서 올라오는 짐승은 요한 묵시록의 배경을 설명하는 역할을 합니다. 바다에서 올라오는 첫째 짐승은 용의 모습과 비슷하게 “일곱 머리와 열 개의 뿔”을 지니고 있습니다. 이것은 세상에서 용을 대신하는 첫째 짐승의 역할을 나타냅니다. 이 첫째 짐승은 요한 묵시록 안에서 우상숭배의 직접적인 대상으로 생각되는, 황제 숭배 의식의 대상이 되는 죽은 황제를 나타냅니다. 이와 함께 땅에서 오는 둘째 짐승은 후에 거짓 예언자로 표현되는데(묵시 16,13; 19,20; 20,10) 사람들을 현혹해 첫째 짐승에게 경배하도록 합니다. 둘째 짐승이 나타내는 것은 죽은 황제를 숭배하도록 강요하고 박해하는 살아있는 황제입니다. 그의 역할은 죽은 첫째 짐승의 상을 세워 숭배하게 하는 것입니다.(묵시 13,14-15) 또 악의 세력에 동조해 우상숭배를 하게 하는 둘째 짐승은 사람들에게 표를 받게 하는데 그 짐승의 이름을 뜻하는 ‘666’입니다. 이 짐승의 표는 하느님의 인장과 반대되는 상징으로 사용됩니다. 그리고 이 숫자는 ‘네로 황제’를 나타내는 상징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요한 묵시록은 도미티아누스 황제의 시기를 배경으로 하지만 도미티아누스 황제는 네로 황제가 살아난 것으로 생각되었기 때문입니다. 일곱 대접에 의한 재앙이제 남은 것은 일곱 대접에 의한 재앙입니다. 연속되는 재앙들의 목적은 일곱 대접의 환시에서 잘 드러납니다. 여기서 지속적으로 표현되는 “자기들의 행실을 회개하지 않았다”는 표현은 우상을 숭배하는 이들에게 주어진 회개의 가능성을 표현합니다. 종말 이전에, 결정적인 심판의 시간이 오기 전에 잘못을 뉘우치고 회개하도록 하는 것이 지속적인 재앙이 가진 의미입니다. 하지만 그들은 마치 ‘탈출’ 때의 파라오처럼 회개하지 않았고 그들의 못된 행실을 지속할 뿐입니다. 일곱 대접에 의한 재앙을 끝으로 회개의 가능성은 남아 있지 않습니다. 이제 남은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과 심판입니다. <가톨릭대 신학대학 성서학 교수> cpbc2018.05.15

진리 수호하며 세상의 평화 이끈 ‘하느님 종들의 종’교황 주일 특집 / 세상과 소통한 베드로 사도의 후계자들 베드로 사도부터 프란치스코 교황까지 2000년 교회사에서 266명의 교황이 탄생했다. 고대 교황들은 가톨릭 전통 신앙을 고수하고 속권으로부터 교회의 권위를 지키는 데 헌신했다. 중세 교황들은 이슬람의 서구 진출에 맞서 십자군 전쟁과 스페인 국토 회복 운동에 힘쓰고, 이단에 맞서 성체와 성모 신심을 확산했다. 또 르네상스 시대 교황들은 종교 개혁에 맞서 교회 쇄신에 힘썼고, 근현대 교황들은 계몽시대와 산업혁명, 세계대전과 디지털 시대를 겪으면서 시대의 문화가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바탕으로 한 생명의 문화로 정착될 수 있도록 헌신했다. 교황 주일을 맞아 역대 교황 가운데 세상과 소통한 교황들을 소개한다. ▨ 성 실베스테르 1세(재위 314~335)성 실베스테르 1세는 콘스탄티누스 대제로부터 신앙의 자유를 인정받아 박해 시대 지하 교회를 지상으로 끌어 올린 교황이다. 그는 콘스탄티누스 대제의 도움으로 ‘세상 모든 교회의 어머니이며 으뜸’인 라테라노 대성전과 베드로와 바오로 사도의 무덤 위에 대성전을 지었다. 그는 또 콘스탄티누스 대제가 314년에 소집한 제1차 아를 공의회와 325년 니케아 공의회에 특사를 보내 그리스도의 신성을 부인한 아리우스를 이단으로 단죄하고, 천주 성부와 성자는 ‘한 본체’임을 선언했다.실베스테르 1세는 22년간 교황직을 수행하면서 정통 신앙을 고수하고 지상 교회 제도의 틀을 갖추는 데 헌신한 교황이다.▨ 성 레오 1세(재위 440~461) 성 레오 1세는 성 그레고리오 1세와 함께 ‘대교황’으로 불리고 있다. 그는 451년 칼체돈 공의회를 소집해 그리스도의 인성을 부인한 네스토리우스와 단성론자를 이단으로 단죄하고 ‘그리스도는 신성과 인성 두 본성 안에 있는 한 인격’’이라고 선포했다. 또 ‘베드로의 대리자’라는 칭호를 처음으로 사용하며 보편 교회 안에서의 교황 수위권을 강화했다.그는 또 452년 훈족의 아틸라 왕이 이탈리아 북부를 초토화하고 남부까지 쳐들어오자 로마 원로원 사절 자격으로 직접 중재를 성사시켜 훈족으로부터 로마를 구했다. 이후 로마 시민들은 레오 1세에게 절대적인 신뢰를 보여 ‘대교황’이라 불리게 됐다. 그는 교황으로서는 첫 번째로 성 베드로 대성전 지하 묘지에 안장됐다. ▨ 성 그레고리오 1세(재위 590~604)그레고리오 1세는 수도자 출신 첫 교황으로 ‘대교황’이라 불린다. 자신을 ‘하느님의 종들의 종’이라 부르며 가난한 사람들에게 각별한 관심을 기울였다. 또 그는 롬바르드 왕국의 침략에 맞서 로마를 구하고 부유한 가문들이 교회에 기부한 토지로 교황령의 기초를 놓았다. 그는 사제 독신제를 시행하고 주교 품행에 관한 규정을 세워 죄를 지은 고위 성직자를 면직시켰다. 또 성 베네딕도의 수도 규칙을 기반으로 한 수도원 제도를 널리 시행하고, 오늘날까지 사용되고 있는 로마 미사 전례서를 만들었다. 아울러 잉글랜드와 독일, 스페인 지역을 선교해 그리스도교화 했다. ▨ 레오 13세(재위 1878~1903)레오 13세는 제1차 바티칸 공의회에 자극을 받아 교회 쇄신과 세계와의 대화에 힘썼다. 그는 1891년 사회 회칙 「새로운 사태」를 반포하고 노동자와 사용자 사이의 중재자 역할을 수행했다. 특히 사유재산뿐 아니라 공정한 임금, 노동자의 권리, 노동조합을 지지하면서 사회주의를 단죄하고 사회 정의를 옹호했다. 이 때문에 ‘노동자들의 교황’이라 불린다. 또 사회주의, 공산주의, 허무주의에 관한 회칙을 반포, 교회와 사회 사이의 대화 장을 열었다. 아울러 신앙 때문에 갈라진 형제들과의 일치 문제에 대해 깊은 관심을 보였다. 레오 13세는 복되신 동정 마리아와 묵주 기도에 관한 회칙 11편과 그리스도의 구원 사업과 성체에 관한 회칙 2편을 발표하고, 1893년 성가정 축일을 도입하는 등 신자들의 영적 성장을 위해서도 헌신한 교황이다. 신학교 교육 과정을 현대화하고 토마스 아퀴나스를 신학과 철학 연구의 본보기로 삼을 것을 권고했다. 아울러 성경 연구의 필요성을 강조해 1902년 교황청 성서위원회를 설립했다.▨ 베네딕토 15세(재위 1914~1922)“세계 평화를 위해서는 우리의 생명마저도 기꺼이 희생시켜야 한다.” 베네딕토 15세가 마지막으로 남긴 말이다. 그는 정의와 평화를 실현하기 위해 헌신한 교황으로 평가받고 있다.그는 제1차 세계대전 동안 전쟁 포로에 대한 보호, 전쟁 부상자들의 교환, 생필품 준비 등을 통해 전쟁 참상을 완화하는 데 노력을 게을리하지 않았다. 특히 ‘아동 구호 기금’을 적극 후원했고, 소련의 기아 문제 해결에도 힘썼다. 베네딕토 15세는 또 1917년 새 교회법을 반포했고, 동방교회성과 동방대학을 교황청에 설립해 교회 일치에도 노력했다.▨ 성 요한 23세(재위 1958~1963)성 요한 23세는 뛰어난 직관력으로 교회의 미래상을 그렸고, 제2차 바티칸 공의회를 소집한 교황이다. 쇄신을 통해 현대 사회에 적응하기 위해 세상을 향해 교회를 개방하고 모국어로 미사를 봉헌하게 했다. 또 회칙 「어머니와 스승」을 반포, 부유한 국가들이 가난한 국가를 도우라고 요청했다. 아울러 회칙 「지상의 평화」를 통해 세계 평화가 인간의 권리와 의무임을 강조하고 서방 세계와 공산주의와의 평화 공존을 역설했다. ▨ 성 바오로 6세(재위 1963~1978)성 바오로 6세는 제2차 바티칸 공의회를 성공적으로 마무리한 교황이다. 그는 세계 여러 나라를 사목 방문한 첫 번째 교황으로 ‘순례자의 교황’이라 불린다. 그는 세계를 순방하면서 화해와 쇄신, 평화를 주창했고, 1965년 동방 교회 총대주교 아테나고라스 1세를 만나 1054년 동방 교회에 내린 파문을 철회하면서 교회 일치의 토대를 마련했다. 그는 회칙 「민족들의 발전」을 통해 사회정의 실현을 요구했고, 「인간 생명」을 반포, 인위적 산아제한을 단죄했다.▨ 성 요한 바오로 2세(재위 1978~2005) 성 요한 바오로 2세는 하드리아노 6세 이래 456년 만의 비 이탈리아인 교황이자 최초의 슬라브인 교황이다. 그는 첫 회칙 「인간의 구원자」를 통해 인간 존엄성과 사회정의를 촉구했다. 또 두 번째 회칙 「자비로우신 하느님」을 통해 갈수록 위협받는 세상에서 사람들에게 자비를 보이라고 당부했다. 아울러 세 번째 회칙 「노동하는 인간」에서 자본주의나 마르크스주의가 아닌 노동자들의 권리와 노동의 존엄성에 기초한 새로운 경제 질서를 요청했다. 이어 「사회적 관심」과 「백주년」을 통해 마르크스주의와 물질지상주의, 자본주의를 비난했다. 리길재 기자 teotokos@cpbc.co.kr 평화신문2019.06.26

가족 기도·성지순례 3년… 튼튼해진 가정 공동체서울 대방동본당 가정 신앙교육
3주년 결산, 49가정 시상 서울대교구 대방동본당 가정 신앙교육 3주년 결산 큰 잔치에서 주수욱 신부가 가정 신앙교육에 열심히 동참한 가정에 최우수수상과 우수상을 수여하고 있다. 안익장 회장 제공 서울대교구 대방동본당(주임 주수욱 신부)은 11월 25일 가정 신앙교육 3주년 결산 큰 잔치를 열고, 하느님 사랑을 실천하는 공동체로 거듭나기로 했다.본당 신자들은 ‘우리의 다짐 선언문’을 발표, △개인주의와 소외, 불안감을 가져오는 현대 사회에서 가정 공동체를 이뤄 나가고 △이웃에 복음을 전하고, 사랑을 실천하는 가정 공동체가 되도록 노력하며 △가정에서 신앙을 전달하고 △부모들은 자녀들에게 신앙의 모범이 될 것을 약속했다. 이날 잔치에서는 3년 동안 가정 신앙교육을 열심히 실천해온 49가정이 최우수상과 우수ㆍ장려상을 받았다.대방동본당은 2016년 ‘가정 안에서의 신앙교육’을 목표로 가정과 신앙교육위원회(위원장 이경우)를 설립해 3년 동안 가족기도를 생활화하도록 도왔다. 가족 성지순례를 비롯해 교리 경연대회, 성경 암송대회 등 신앙생활을 위한 다양한 행사도 기획했다.가정과 신앙교육위원회는 가정 신앙교육 매뉴얼을 작성하기 위해 전 신자를 대상으로, 가정 신앙교육 현실을 진단하는 설문조사를 벌였다. 총 719명을 대상으로 한 설문조사에서 61%의 신자들은 가정 내 신앙교육의 중요성을 알고는 있지만 어렵다고 응답했고, 위원회는 신자들이 쉽게 신앙교육을 실천할 수 있도록 매뉴얼을 작성해 배포했다. 가정 기도ㆍ미사 참여ㆍ성지순례 등 8가지 항목으로 된 ‘가정 신앙 실천 현황판’을 만들어 참여를 독려했다.본당 사목회장 안익장(바오로)씨는 “손자녀와 조부모, 부모 3대가 함께 가족기도를 하고 출장을 간 아빠와 영상 통화로 가족 기도를 바치는 사례도 있었다”면서 “많은 가정에서 가족 기도가 생활화된 것을 볼 수 있었다”고 말했다.본당은 3년간의 노력을 발판 삼아, 내년 서울대교구 사목 목표인 ‘선교의 기초이며 못자리인 가정 공동체’에 따라 복음을 전하는 가정 공동체가 늘어나도록 노력을 이어가기로 했다. 이지혜 기자 bonaism@cpbc.co.kr 평화신문2018.11.28
![[평신도영성 나는 평신도다] (19)한국 교회 평신도 사도직의 현주소 7 : 신앙을 통해 현실 안에서 세속적 가치 극복하기(하)](//cpbc.co.kr/CMS/newspaper/2019/04/rc/750803_1.0_titleImage_1.jpg)
[평신도영성 나는 평신도다] (19)한국 교회 평신도 사도직의 현주소 7 : 신앙을 통해 현실 안에서 세속적 가치 극복하기(하)귀에 못이 박이게 들어 무감각해진 건가 많은 이들이 주님보다는 현실에 사로잡혀 살고, 자기 안에 계신 주님을 잊고 산다. 하지만 침묵 속에 기도를 바치다 보면 주님의 길이 무엇인지 알게 된다. 【CNS 자료 사진】 “주님은 사랑이시다.” “주님은 거룩하시다.” “주님은 늘 우리에게 은총을 베풀고 계시다.” “주님은 항상 우리와 함께하신다.”많이 들어본 말일 것입니다. 신앙인이라면 예비신자 단계에서부터 귀에 못이 박이도록 들을 말일 것입니다. 이런 말을 교회에서 많이 하는 것은 그 말이 참으로 진리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좋은 말도 여러 번 들으면 무감각해지는 경향이 있습니다. 예수님 말씀은 2000년이 지나도 힘을 잃지 않습니다. 하지만 그 말씀을 듣는 인간이 나약합니다. 그러다 보니 좋은 말씀을 무감각하게 받아들이는 경향이 있습니다.평범하고 나약한 일상 속에서 미사도 마찬가지입니다. 레지오 마리애 회합도 늘 반복됩니다. 소공동체 모임도, 교리교육도, 강연도 반복됩니다. 이 모든 것들은 깊은 차원으로 우리를 초대합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깊은 차원으로 들어가지 못하고 평범하고 나약한 일상을 살아갑니다. 그러면 아무리 좋은 진리의 말씀이나 전례, 각종 회합이 의미가 없습니다.밥을 먹는 것으로 예를 들어 보겠습니다. 우리는 늘 밥을 먹습니다. 하지만 깊은 차원의 신앙에 머무는 사람에게 밥은 생명의 빵이 됩니다. 밥을 먹을 때마다 하느님 안에 머물며 감사를 체험합니다. 하지만 밥 속에 담긴 깊은 의미를 깨닫지 못한다면 그것은 자연적 차원, 본능적 차원의 삶을 사는 것에 불과합니다. 하느님은 사랑이시라는 말씀, 그리고 하느님은 늘 은총을 베풀고 우리와 함께 머무신다는 말씀이 너무 많이 들어서 식상하게 들리십니까. 그리고 의미 없게 스쳐 지나가는 말씀에 불과합니까. 그럼에도 이 말씀들은 참으로 힘이 있어서 우리가 조금만 깨어 있는다면 참 빛을 만날 수 있는 통로가 되어줄 것입니다. 이러한 거룩하고 신성한 표현들은 단순히 정보를 전달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이러한 표현들이 주는 새로운 의미로의 초대를 받아들여야 합니다.구두를 수선하는 사람은 구두를 수선하는 과정에서 성경의 의미를 세상에 드러내야 합니다. 꽃가게를 하는 사람은 꽃꽂이 하나를 통해 세상에 하느님을 증거해야 합니다. 이발소 주인도 마찬가지이고, 공무원도 마찬가지입니다. 남편, 부인, 자녀도 마찬가지입니다. 정치인, 기업인, 교수 등 사회의 책임을 지닌 이들은 더할 나위도 없습니다. 이같이 의미를 발견하기 위해선, 하느님을 갈망해야 합니다. 그런데 아직도 많은 평신도가 주님을 갈망하지 않습니다. 주님을 갈망하지 않고 자신보다 돈이 많은 사람, 권세가 높은 사람을 갈망합니다. 나 자신의 문제는 주님이 아니면 그 누구도 해결해 주지 못하십니다. 뉴스를 볼 때, 또 세상의 어떤 정보를 접할 때 그것이 주님보다 더 나를 강하게 사로잡으면 안 됩니다. 내 안에 주님이 확고하게 자리 잡고 있으면, 세상의 그 어떤 것이 들어와도 주님의 방법으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내 안에 온통 세상의 것이 지배하고 있으니까 삶에 대해 공포심을 가지는 것입니다. 주님이 나를 사로잡고 있으면 세상살이가 전혀 힘들지 않게 됩니다.주님의 현존이 더 중요 주님보다 현실의 사건이 나를 더 사로잡고 있습니다. 현실의 삶이 중요하지 않다는 말이 아닙니다. 현실이 중요하지만, 주님의 현존은 더 중요합니다. 주님 없는 가운데 벌어지는 황당무계한 사건들에 잡혀 있으니까 문제가 발생하는 것입니다. 삶이 힘들어지는 것입니다. 많은 평신도가 지금도 자신 안에 계시는 주님을 잊고 삽니다. 안타깝습니다. 세상에 어떤 사건이 일어나건 말건, 나는 내 삶을 결정짓는 주님과 함께 살면 됩니다.침묵 속에서 참기도를 한번 해 보십시오. “주님 당신은 길입니다.”“주님 당신은 평화이니다.”“주님 당신은 진리입니다.” 그러면 내가 어떤 길로 가야 할지, 어떤 평화로 가야 할지, 세상 뉴스와 사건들을 접할 때 무엇이 진리인지 알 수 있게 해 주실 것입니다. 주님의 현존을 살아갈 때, 우리 삶 안에 주님이 생생하게 살아 있을 때 우리는 진정으로 복음을 세상에 전할 수 있을 것입니다.“동이 틀 때 떠오르는 태양은 놀라운 도구가 되어 지극히 높으신 분의 위업을 선포한다.”(집회 43,2)정치우(안드레아, 새천년복음화학교 교장) 평화신문2019.04.16
![[전영준 신부의 가톨릭 영성을 찾아서] (69) 15세기 ④ - 새 신심 운동](//cpbc.co.kr/CMS/newspaper/2018/04/rc/716335_1.0_titleImage_1.jpg)
[전영준 신부의 가톨릭 영성을 찾아서] (69) 15세기 ④ - 새 신심 운동그리스도의 일생 묵상하며 하느님 향해 나아가다 중세 스콜라신학의 출현은 그리스도인 영성생활을 축소해 수도원 담 안에 가두거나 지나치게 사변적으로 이론화하면서 대중들에게서 영성생활에 대한 관심이 떠나가도록 만들었습니다. 중세 말엽에 추상적이고 사변적인 영성신학에 문제점을 직감했던 신학자들은 지성보다 의지 중심으로 실천하는 영성생활을 제시하고자 노력했습니다. 때마침 문예부흥과 인문주의의 출현으로 인간 자체와 인간의 존엄성에 대한 관심이 시작된 근세에, 그리스도교는 예수의 공생활을 통해 그리스도의 인성을 묵상하며 예수의 성덕을 본받고자 덕행을 훈련하는 실천적인 분위기의 영성생활을 조성하면서 ‘새 신심 운동’(Devotio Moderna)을 전개했습니다. 토마스 아 켐피스 그리스도를 따르자고 제안한 토마스새 신심 운동의 전초는 중세 말엽에 저지대 국가들인 ‘로우랜드(Lowland)’에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지나치게 사변적인 신비신학을 전개했던 마이스터 에크하르트(Meister Eckhart, 1260~1328)를 극복하려 했던 얀 반 뤼스브룩(Jan van Ruusbroec, 1293~1381)은 하데위치(Hadewijch, 13세기 중반)로부터 받은 영향 등을 통해 지성보다 의지 중심의 영성생활을 추구했으며, 헤이르트 흐로테(Geert Groote, 1340~1384)와 함께 ‘공동생활 형제회’(Fratres Vitae Communis)’ 설립을 계획했습니다. 이 계획의 일환으로 흐로테의 제자였던 플로랑스 라드벵스(Florens Radewijns, 1350~1400)도 ‘빈데스하임 수도회(Congregatie van Windesheim)’를 설립했는데, 이 수도회는 근세 영적 쇄신 운동의 중심지가 되었습니다.빈데스하임 수도회는 새 신심 운동의 대표 영성 작가였던 토마스 아 켐피스(Thomas Kempis, 1380~1471)에게 많은 영향을 주었습니다. ‘라인랜드(Rheinland)’ 인근 켐펜(Kempen) 출신이었던 토마스 아 켐피스는 청소년 시기에 네덜란드 데벤테르(Deventer)에서 수학했으며, 의전 수도회인 빈데스하임 수도회 공동체 중의 하나였던 즈볼러(Zwolle) 근처 ‘성 아녜스 산 수도원’에 1406년 입회해 거의 평생을 그곳에서 살면서 저술 활동을 했습니다.토마스는 자신의 대표작 「준주성범(遵主聖範, De Imitatione Christi)」에서 수도자들에게 그리스도를 따르는 방법으로 성경을 체계적으로 묵상하라고 권고했습니다. 특히 토마스는 머리로 따지며 묵상하는 것이 아니라 마음으로 성경을 읽고 묵상하라고 강조했습니다. “성경에서는 진리를 찾을 것이요, 문체를 따질 것은 아니다. 성경은 성경을 쓴 그 정신을 읽어야 할 것이다. 성경에서는 말의 정묘함보다도 유익한 점을 찾아야 할 것이다. … 우리는 호기심을 가지고 성경을 읽으므로 자주 해를 받는다. 그대로 읽어 나가도 좋을 것을, 알아들으려고 하고 해석하려 하기 때문이다. 성경을 보아 유익을 얻으려면 겸손되이 읽고 순직하게 읽고 또한 성실하게 읽어라.”(「준주성범」 제1권 제5장) 따라서 토마스는 “그러므로 우리가 가장 힘쓸 바는 예수 그리스도의 일생을 묵상함이다”(「준주성범」 제1권 제1장)라고 하면서 그리스도를 본받는 가장 좋은 방법은 그리스도의 인성을 묵상하는 것이라고 제시했습니다.또 토마스는 수도자들이 내적인 삶을 추구할 때에 훈련을 통해야만 다다를 수 있다고 언급했습니다. 하느님과 일치하고자 하는 갈망은 영성생활의 근본인데 그리스도를 통하여 도달한 참된 영성생활에는 영성 훈련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결국 토마스는 하느님과의 일치를 플라톤사상에 따라서 초자연적인 관상을 통한 영혼의 상승으로 설명하려는 과거의 시도를 거부했습니다. 오히려 하느님을 강렬하게 사랑하는 인간 영혼은 세상이 덧없다는 점을 깨닫고 예수의 삶을 본받으려고 노력할 때에 하느님과 일치할 수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한편 토마스는 「준주성범」 제4권에서 성체성사를 강조하면서 영성체의 유익함을 비롯하여 성체 신심을 가르쳐주었습니다.성경을 체계적으로 묵상하라고 제안한 간스포트토마스 아 켐피스의 지인이었던 네덜란드, 흐로닝언(Groningen) 출신의 베슬 간스포트(Wessel Gansfort, 1419~1489)는 청소년 시기에 공동생활 형제회에서 지도받으며 수학했고, 1432~1449년 즈볼러에서 교사 생활을 하는 동안 새 신심 운동에 대한 깊은 영향을 받았습니다. 간스포트는 1449년 쾰른에서 그리스어와 히브리어 및 철학과 신학을 공부하면서 아우구스티누스(Augustinus Hipponensis, 354~430)와 클레르보의 베르나르두스(Bernardus Claraevallensis, 1090~1153) 작품에 정통한 학자로 꼽혔습니다. 그러나 1458년쯤 파리에 머물면서 유명론자(唯名論者, nominalist) 논란에 연루되면서 가톨릭교회 전통 교리에 의문을 품기 시작해 종교개혁의 선구자로 불렸습니다.하지만 간스포트는 생애 말엽에 위트레흐트(Utrecht)의 주교의 보호를 받으며 연구와 저술에 매진했습니다. 특히 수덕생활에 관한 작품을 저술하면서 묵상생활에 어려움을 느끼는 수도자들에게 체계적으로 묵상하는 방법을 제시한 최초의 영성 작가가 되었으며, 새 신심 운동을 전개하던 교사들 가운데에서 독보적인 위치를 차지했습니다.간스포트는 저서 「묵상의 사다리(Scala Meditatoria)」에서 단계적인 묵상 방법을 묘사했습니다. 두 개로 세분되는 첫 번째 준비 단계에서 묵상자는 묵상 주제와 관련 없는 생각들을 제거하여 묵상에 가장 적합한 상황을 조성합니다. 다음으로 열여섯 개로 세분되는 두 번째 상승 단계에서 묵상자는 자신의 지성과 판단 및 의지를 순차적으로 훈련하면서 실질적인 묵상을 합니다. 마지막으로 세 개로 세분되는 세 번째 최종 단계에서 묵상자는 전체 묵상 과정 안에서 자신의 열정적인 염원을 하느님께 맡김으로써 묵상의 전 과정을 총정리합니다.특히 첫째로 묵상을 준비하는 단계에서는 분심을 버리고 묵상 자료를 잘 선정해야 하고, 둘째로 묵상을 실천하는 단계에서는 정신과 판단력 그리고 의지를 활용하여 실제로 묵상기도를 해야 하며, 셋째로 묵상을 마무리하는 단계에서는 묵상기도를 통해 고무된 영혼의 열망을 온전히 하느님께로 향할 수 있게 해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결국, 수도자들은 성경을 체계적으로 묵상함으로써 자신의 수도생활을 쇄신하는 데 큰 도움을 받았으며 동시에 새 신심 운동의 영향력이 유럽 전체로 확산되었습니다.새 신심 운동은 그리스도인이 성경을 읽고 그 안에 담긴 예수의 공생활을 묵상하면서 그리스도 인성에 집중하는 신심을 키우고 예수의 성덕을 본받아 발전시키는 데 기여했습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인은 더 이상 하느님만 바라보지 않고, 하느님께 나아가는 자신을 성찰하면서 하느님을 찾는 여정 안에서 굳은 의지로 사랑을 실천했습니다. 따라서 새 신심 운동은 짧은 안목으로는 영성 훈련이라는 새로운 개념을 제시했으며, 긴 안목으로는 문예부흥과 인문주의 및 종교개혁으로 발생한 이단적인 상황을 잘 극복하도록 그리스도인을 미리 준비시키는 효과가 있었습니다.<가톨릭대 신학대학 영성신학 교수> 백영민2018.04.05
[하느님과 트윗을](67) 천국에 정말 천사들이 있나요자유의지로 하느님 섬기는 소식의 전달자 문: 천사는 어떤 존재인가요답: 천사는 우리와 마찬가지로 인격을 지닌 존재입니다. 그들은 지능과 자유 의지가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와 달리 천사는 육신이 없습니다. 천사들은 천국에서 하느님과 함께 머물며 하느님을 섬기기로 확고한 선택을 했습니다. 그리스어로 천사를 뜻하는 말인 ‘앙겔로스’는 ‘소식의 전달자’라는 의미이기도 합니다. 성경에서 천사는 종종 사람들에게 하느님의 메시지를 전달합니다. 문: 천사는 어디에 있나요답: 우리는 천사를 성경 어디에서나 볼 수 있습니다. 낙원의 입구에도 천사가 있습니다.(창세 3,24 참조) 또한 하늘에서 하느님의 옥좌를 둘러싸고 있습니다.(이사 6,2 참조) 천사는 예수님의 삶에서도 한몫을 합니다. 가브리엘 천사는 예수님의 탄생을 알렸으며(루카 1,26 참조) 예수님이 탄생하시던 날 밤에 천사들이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느님께 영광 땅에서는 그분 마음에 드는 사람들에게 평화!”(루카 2,14)라며 노래를 불렀습니다. 또한, 천사는 예수님이 죽음의 공포에 싸여 겟세마니 동산에서 기도하며 밤을 지새우실 때, 기운을 북돋아 드렸습니다.(루카 22,43 참조) 여자들이 예수님의 무덤에 기도하러 갔을 때 예수님의 부활을 알려준 것도 천사입니다.(마태 28,2-6 참조) 그리고 예수님이 두 번째 오실 때 예수님이 다시 오심을 천사들이 알려줄 것입니다.(1테살 4,16 참조)문: 대천사 미카엘, 가브리엘, 라파엘은 어떤 천사인가요답: 미카엘 대천사는 악마에 대항하는 천국 군대의 사령관입니다.(묵시 12,7 참조) 그의 이름은 “누가 하느님과 같은가?”라는 뜻입니다. 악에 맞서 싸울 때 미카엘 대천사에게 기도하고 도움을 청하는 것은 좋은 방법입니다. 미카엘 대천사는 프랑스의 몽 생 미셸이나 이탈리아의 사크라 디 산 미켈레와 같은 세계 각지의 성지에서 공경받고 있습니다. 베네딕토 16세 교황은 미카엘 대천사가 하느님 백성의 수호자라는 것을 우리에게 상기시키기도 했습니다. 가브리엘 대천사는 예수님의 탄생을 알려주었습니다. 그의 이름은 ‘하느님은 나의 힘이십니다’라는 뜻입니다. 라파엘 대천사는 눈먼 이를 고쳐주었습니다.(토빗 3,17 참조) 그의 이름은 ‘하느님께서 치유하십니다’라는 뜻입니다.문: 수호천사는 우리를 지켜주나요답: 하느님은 “분명 천사들을 보살펴주시는 것이 아니라, 아브라함의 후손들을 보살펴”(히브 2,16) 주십니다. 하지만 천사에게 매우 중요한 임무를 맡기시지요. 우리는 생명이 시작될 때부터 천사들의 보호를 받습니다. 모든 사람은 자기를 지켜보는 천사가 있습니다. 바로 자기의 수호천사입니다.(마태 18,10 참조; 사도 12,15 참조) 이 수호천사는 사람을 돌보도록 하느님의 명령을 받았습니다. “그분께서 당신 천사들에게 명령하시어 네 모든 길에서 너를 지키게 하시리라.”(시편 91,11) 그들은 하느님의 옥좌를 둘러싸고 있기에 우리는 언제나 그들에게 우리를 위해 전구해 달라고 청할 수 있습니다. 천사의 보호를 받고자 기도하는 것, 특히 우리 자신의 수호천사에게 기도하는 것은 아주 좋은 생각입니다. 정리=전은지 기자 eunz@cpbc.co.kr 평화신문2018.09.04

사제·신자들 열정으로 지은 은총의 ‘공소 오형제’44번 국도길의 5개 공소와 춘천교구 성산본당 사람들 지난 3월 5개 공소를 일제히 신축한 뒤 기쁨의 부활 시기를 보내고 있는 춘천교구 성산본당 고봉연 주임 신부와 신자들이 송정공소에 모여 기념 촬영을 하고 있다. 200켤레가 넘는 신발이 성당 신발장에 한가득이다. 성당 안에서는 우렁찬 성가 소리가 퍼져 나왔다. 놀라지 마시라. 평균 연령 70대에 이르는 어르신들의 깊은 신심에서 우러나오는 성가이니 말이다.작은 성당 안에서는 고운 미사보를 쓰고 가슴에 카네이션을 단 어르신들이 한데 어우러져 미사에 참여하고 있었다. 강원 홍천 지역의 가장 오랜 역사를 간직한 춘천교구 성산본당(주임 고봉연 신부)의 주일 풍경이다.어린이가 거의 없는 탓에 5일 어린이날을 어버이날로 기념해 봉헌한 뜻깊은 교중 미사였다. 이날 칠순, 팔순, 구순을 맞은 어르신 10여 명은 성물을 선물로 받았다. 오랜 세월 본당과 공소를 지켜준 데 대한 감사의 선물이었다. 어느 때보다 기쁜 부활 시기를 보내고 있는 홍천 지역 신앙의 뿌리, 성산본당을 찾았다.5개 공소 일제히 신축한 성산본당강원도 홍천강을 따라 길게 뻗은 44번 국도. ‘춘천교구 성산성당’을 지도에 검색하면 흥미롭게도 국도를 따라 6곳 성당 표시가 나란히 뜬다. 최근 새로 신축한 5개 공소가 성산 성당과 함께 별자리처럼 빛나고 있다.지난 3월 성산본당이 관할하는 송정ㆍ두촌ㆍ내촌ㆍ철정ㆍ역내공소가 일제히 교구장 김운회 주교 주례로 축복 미사를 봉헌한 날, 신자들은 마치 ‘내 집’을 새로 마주하듯 얼씨구나 기뻐했다. 공소 신축은 신자들에게 오랜 염원이었다. 1923년 설립된 송정공소를 비롯해 모든 공소가 반세기 넘는 세월을 견뎌온 터였다. 공소 건물들은 모두 천장이 벗겨지고 낡아 곰팡이가 가득했고, 비도 들이쳤다. 겨울철엔 영하 15℃가 넘는 추위 속에 사제와 신자들 모두 덜덜 떨며 미사를 드렸다. 2014년에 본당 주임으로 부임한 고봉연 신부는 이래서는 안 되겠다고 생각했다. 신자들과 합심했다. 이듬해부터 신자들과 함께 재배한 옥수수와 배추, 무를 한 아름 들고 전국 본당을 찾았다. 그리고 3년 만에 18억 공소 신축 기금을 마련한 본당은 5개 공소를 재탄생시키며 ‘대규모 주님 사업’을 성공리에 마쳤다.신심 깊은 신자들의 사랑으로 일궈온 본당 공동체춘천에 곰실공소(죽림동주교좌본당 전신)가 있다면, 홍천에는 송정공소(성산본당 관할)가 있다. 두 곳 모두 100년 넘는 전통을 간직한 신앙 못자리들이다. 박해를 피해 1890년을 전후해서 홍천 지역에 이주해온 신앙 선조들은 산 좋고 물 좋은 이곳에 터를 잡았다. 옹기업을 했던 김교화(프란치스코) 회장이 땅 3700여 평을 봉헌하는 등 신자들의 헌신이 컸다. 1923년부터 13년간 본당 사목구이기도 했던 송정공소는 주일이면 미사 참여자들의 행렬이 길게 대로변에 이어질 정도였다. 6ㆍ25 전쟁 직후 모두가 어렵던 시절, 공소들은 옥수수와 생필품 등 구호물자를 나눠주는 ‘나눔의 공간’이기도 했다. 마을 신자들이 혼인성사도 하고, 주님을 찬양하는 신앙의 뿌리이자 사랑방인 셈이다.1976년 성산공소가 본당으로 승격해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다. 신자들은 1956년 지어진 흙벽돌 건물을 확장한 공간을 성당으로 사용하고 있다. 현재 교적 신자 수는 750여 명. 주일 미사 참여 신자 250여 명 가운데 70대 이상 어르신만 120여 명에 이르는 춘천교구 최고령 본당이기도 하다.다섯 공소의 새 출발새 공소가 다섯 쌍둥이처럼 동시에 탄생한 지난 3월 2~3일. 춘천교구장 김운회 주교는 1박 2일간 공소를 다 다니며 축복 미사를 5번 거행했다. 이후 미사 성가와 기도 소리는 마을에 더욱 크게 울려 퍼지고 있다. 새 공소 건물들이 친교 공간도 갖춘 덕에 신자들은 미사 때는 물론, 평일에도 삼삼오오 모여 셀기도와 성경통독, 소공동체 모임을 하고 있다.내촌공소 김태진(펠릭스) 회장은 “‘내 공소를 살리자’ 하는 신부님과 공소 신자들의 열정이 주님께 닿아 멋진 성전을 짓게 됐다”며 “캄캄한 밤에 실내등을 다 켜놓으면 스테인드글라스에서 새어나오는 불빛이 그렇게 예쁠 수가 없다”고 했다.새 공소 신축 후 내촌공소에는 예비신자 2명이 교리교육을 받고 있으며, 두촌공소에는 최근 냉담했던 신자 2명이 다시 공소에 나오기 시작했다.31년간 송정공소 회장을 역임한 이현주(시몬, 85) 어르신은 “오랜 역사와 전통이 밴 본당과 공소에는 주님 사랑이 100년 넘게 은총의 강물처럼 흐르고 있다”며 “공소 신축으로 우리 본당에 새 역사가 이뤄졌다”고 했다.최종수(토마스) 본당 사목회장은 “신부님의 신자 사랑과 신자들의 주님 사랑이 어우러진 성산본당 공동체에 도시 신자들도 많이 방문하면 좋겠다”고 전했다. 이정훈 기자 sjunder@cpbc.co.kr cpbc2019.05.07
![[전영준 신부의 가톨릭 영성을 찾아서] (84) 18세기 ① - 바로크 예술과 계몽주의 시대 영성](//cpbc.co.kr/CMS/newspaper/2018/07/rc/727726_1.0_titleImage_1.jpg)
[전영준 신부의 가톨릭 영성을 찾아서] (84) 18세기 ① - 바로크 예술과 계몽주의 시대 영성영성생활에 걸림돌 된 극적 감동과 이성적 시각 화려한 바로크 시대 예술은 성경과 교리를 사실적으료 묘사해 극적 감동을 선사했지만, 지나치게 화려하게 장식된 성전과 요란한 예식 등은 신자들에게 불편함을 주기도 했다. 카라바조 작 ‘그리스도의 매장’, . 16세기 가톨릭교회는 종교 개혁주의자들뿐만 아니라, 세속 학문의 발전으로 신앙과 신조가 도전받는 가운데 영성생활이 나아가야 할 방향을 모색해야 했습니다. 코페르니쿠스(Nicolaus Copernicus, 1473~1543)와 갈릴레오(Galileo Galilei, 1564~1642)의 지동설(地動說) 및 케플러(Johannes Kepler, 1571~1630)의 행성운동법칙(行星運動法則)은, 영국에서 데카르트(Ren Descartes, 1596~1650)의 합리론과 대치되는 베이컨(Francis Bacon, 1561~1621)의 경험론을 촉발했습니다. 17세기에 나타난 새로운 사조들은 전통적인 그리스도교 철학 사상과 대립했습니다.신앙 교육에 활용된 바로크 예술과 과장되고 감성적인 영성트리엔트 공의회(1545~1563)는 가톨릭 신앙과 신조에 대한 종교 개혁주의자들의 도전을 극복하기 위해 믿을 교리를 재천명했으며, 신자들에게 신앙의 강화를 위한 교리 교육 수단으로 성예술(聖藝術) 활용을 권고했습니다. “그러므로 주교들은 그림이나 그 밖의 초상 안에 표현된 우리 구원의 신비 역사를 통하여 백성이 신앙 조문을 기억하고 그것을 항구하게 상기하도록 교육받고 굳건해지도록 주의 깊게 가르쳐야 한다. 그렇게 한다면… 모든 성화상들로부터 엄청난 이익을 얻게 될 것이다. 그렇게 함으로써 신자들이 이에 대해 하느님께 감사드리고, 성인들의 모범에 따라 자신들의 생활과 습관을 바로잡으며, 하느님을 흠숭하고 사랑하며, 신심을 기르는 데에 고무될 것이다.”(「신경 편람」 1824)17~18세기는 화려한 바로크(baroque) 시대였습니다. 바로크 예술은 허세를 부리는 듯 지나치게 과장되거나 웅장한 규모의 작품을 통해 격정적이고 감성적이며 극적인 양식을 추구했습니다. 특히, 17세기에 바로크 예술을 가장 먼저 시작한 이탈리아에서 가톨릭교회는 종교개혁을 극복하려는 자신감을 드러내고자 사치스러운 건축물과 예술 작품을 제작했으며, 그 작품들을 통해 신자들에게 신앙에 대한 자긍심을 심어주려고 노력했습니다. 여전히 가톨릭 신앙이 굳건했던 북유럽 플랑드르에서도 바로크 예술은 화려한 종교 예술로 나타났습니다. 하지만 17~18세기 프랑스로 건너간 바로크 예술은 프랑스 절대주의 영향 속에서 왕실 중심으로 비종교적인 주제를 다루는 예술로 발전했습니다. 프랑스에서는 18세기 사치스럽고 우아하며 섬세한 장식을 강조한 비실용적인 로코코(Rococo) 예술이 등장했습니다.성경 속에 이야기를 다룬 카라바조(Michel angelo Merisi da Caravaggio, 1571~1610)의 그림은 오히려 신자들에게 불쾌감을 줄 정도로 독창적이었으며, 성경 속 인물들과 교회의 성인들을 주제로 한 베르니니(Giovanni Lorenzo Bernini, 1598~1680)의 조각들은 성 베드로 대성당을 비롯해 많은 성당 안팎을 장식했고, 역동적인 보로미니(Francesco Borromini, 1599~1667)의 건축물들이 이탈리아 곳곳에 세워졌습니다. 성경 속 이야기를 다룬 벨기에의 루벤스(Peter Paul Rubens, 1577~1640)나 네덜란드의 렘브란트(Rembrandt Harmenszoon van Rijn, 1606~1669)가 남긴 종교화는 오늘날까지 사람들에게 많은 감동을 선사하며 유명세를 떨쳤습니다.바로크 예술이 성경과 교리를 사실적으로 묘사함으로써 신자들에게 극적인 감동을 주고, 그들의 이해를 돕는 데 큰 도움이 됐던 것은 사실입니다. 하지만 지나치게 화려하게 장식했던 성당이나 요란하게 거행했던 예식과 신심 운동은 경건한 기도생활과 성사생활에 참여하려던 신자들에게 오히려 불편함을 주면서 큰 호응을 얻지 못했습니다.형식과 개인 중심의 초라했던 계몽주의 시대 영성17~18세기 유럽에서는 ‘계몽주의(En-lightenment)’가 출현했습니다. ‘계몽(啓蒙)’은 무지몽매(無知蒙昧)한 사람을 가르쳐 지성을 깨우쳐 참된 지혜와 지식의 광명에 들어가게 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계몽주의는 전통적인 관습, 의례, 도덕에 따라 당연하다고 여겼던 것들을 비판하고 인간의 이성으로 인간 중심적인 문화와 문명을 발전시키려던 시대정신이었습니다. 즉, 계몽주의는 선험(先驗)적인 형이상학보다 경험적인 과학을 선호했고, 절대 권위주의보다 인간 개인의 존엄성과 자유를 존중했으며, 특권 의식보다 평등하게 누리는 인간 권리 및 교육 기회를 추구했습니다.따라서 계몽주의는 종교, 특히 계시 종교(啓示宗敎)였던 그리스도교를 비판의 대상으로 삼으면서 적대 관계로 만들었습니다. 계몽주의에 따르면, 계시 종교는 인간의 자율성을 억압하고 계시를 받기 전 인간을 미성숙하게 여기기에, 이를 이성으로 극복해야 할 대상으로 봅니다. 계몽주의 비판을 받았던 계시 종교는 그 비판을 정면으로 마주하면서 오히려 자기 성찰로 자신을 올바로 이해하는 전화위복의 기회로 삼았습니다. 계몽주의도 계시 종교를 비판하면서 인간의 이성이 굳어지면 이성주의라는 새로운 권위를 만들어 낼 수 있으므로 스스로 끊임없이 계몽돼야 한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계몽주의의 또 다른 도전 중 하나는 프랑스에서 ‘백과사전학파(Encyclopdistes)’가 출현한 것이었습니다. 프랑스 출판업자 브르통(Andr le Breton, 1708~1779)은 영국 저술가 체임버스(Ephraim Chambers, 1680~1740)가 1728년 영국에서 두 권으로 출판했던 「백과사전, 혹은 과학과 예술에 관한 일반 사전(Cyclopædia, or an Universal Dictionary of Arts and Sciences)」을 프랑스 계몽주의 철학자 디드로(Denis Diderot, 1713~1784)에게 프랑스어로 번역할 것을 제안했습니다. 이에 디드로는 단순한 번역을 넘어서서 세상의 모든 새로운 개념을 다루기 위한 계획을 세우고, 프랑스 철학자이자 물리학자 및 수학자인 달랑베르(Jean-Baptiste Le Rond d’Alembert, 1717~1783)와 함께 편집자가 돼 1751~1772년 28권으로 구성된 「백과사전, 혹은 과학, 예술, 기술에 관한 체계적인 사전(Encyclopdie, ou dictionnaire raisonn des sciences, des arts et des mtiers)」을 출판했습니다. 이때 7만 항목이 넘는 내용을 집필했던 지식인 그룹이 백과사전학파라고 불렸습니다. 프랑스 가톨릭교회와 프랑스 왕정은 개혁적인 성향을 지닌 그들을 탄압했습니다.이러한 유물론적 사상의 분위기 속에서 18세기 그리스도교 영성 사조는 초라하게 축소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17세기에 출현한, 신비생활에 대한 이단인 정적주의로 말미암아 비이성적으로 비친 신비신학은 기피 대상이 됐습니다. 게다가 같은 시기에 출현한 수덕 생활에 대한 이단인 얀센주의는 이성으로 헤아리기 어렵지 않은 실천적인 측면 때문에 18세기에도 한동안 올바른 영성 생활로 이해돼 받아들여졌습니다. 결국, 18세기에 그리스도교 대중 영성생활은 형식적인 측면이 강조된 예식 중심의 영성을 추구했으며, 개인 신심 운동 위주로 나타났습니다.비록 계몽주의가 추구했던 사상적인 측면이 그리스도교 신앙과 대립 관계를 형성했지만, 사용했던 이성주의적인 방법론은 향후 그리스도교 영성생활을 이론화하고 체계화하는 데에 크게 이바지했습니다. 또한, 세상의 모든 지식을 다 모으려고 했던 프랑스 백과사전학파의 방법론은 가톨릭교회가 근현대 영성신학의 기틀을 마련하는 데에도 큰 영향을 끼치면서 자칫 감성에 휘둘릴 수 있었던 개인적인 대중 영성을 이성적으로 보완할 수 있었습니다. <가톨릭대 신학대학 영성신학 교수> 백영민2018.07.18
![[숨은 성미술 보물을 찾아서] (15) 박세원 토마스의 ‘봉성체’, ‘산촌의 성당’(1954)](//cpbc.co.kr/CMS/newspaper/2019/04/rc/750432_1.0_titleImage_1.jpg)
[숨은 성미술 보물을 찾아서] (15) 박세원 토마스의 ‘봉성체’, ‘산촌의 성당’(1954)첩첩산중 성당, 박해시기 신앙 선조 삶과 영성 상징 박세원 화백의 ‘봉성체’는 생략적으로 표현된 배경에 거동이 불편해 젊은 여인의 부축을 받고 있는 노인과 그에게 성체를 영하여 주는 신부의 모습을 담고 있다. 1954년 성미술 전람회에 한국화 중 인물화 외에 총 3점의 산수 풍경화가 출품되었다. 성미술 전람회에 출품된 박세원, 노수현, 배렴 화백의 산수화는 종교적 주제와 연관된 몇 안 되는 산수화의 드문 사례일 것이다. 이번 글에서 소개하는 박세원(朴世元, 1922~1999) 화백은 인물 중심의 한국화 작품 ‘봉성체’(奉聖體)와 산수화 ‘산촌의 성당’ 총 두 점을 출품했다. 독실한 가톨릭 신자였던 박세원 화백은 2001년 제6회 가톨릭 미술상 특별상을 받은 바 있으며 세례명은 토마스이다.박세원은 평안남도에서 출생해 1950년 서울대학교 미술대학 회화과를 졸업하고 1953년 서울대학교 대학원에서 석사학위를 취득한 후 동 대학 교수로 임용됐다. 1958년 벨기에 브뤼셀 국제전에 초대되어 출품한 것을 시작으로 활발한 활동을 펼쳤으며 주요 작품으로는 ‘설악만추’, ‘설악청하’ 등이 있다. 박 화백의 여러 작품에 공통으로 나타나는 세필 묘사와 정서적으로 정제되고 섬세한 색채감각의 도입은 산수화의 복고적인 취향을 드러내는 동시에 작가만의 현대적 감성을 기초로 하고 있다고 평가된다. 오늘 소개하는 성미술 전람회 출품작 ‘산촌의 성당’은 이와 같은 작가의 화풍을 잘 보여준다. 산수화에 표현된 자연의 숭고미 묵상‘산촌의 성당’은 1954년 성미술 전람회 출품작에 맞게 종교 주제의 작품으로 제시하고자 했지만, 그에 맞춰 새롭게 제작한 작품이기보다는 박 화백의 화풍을 담은 산수화에 성당의 종탑을 하나 그려 넣은 작품이라고 생각하게 한다. 사실 이 성당의 종탑을 찾기 위해서는 작품 이미지를 크게 확대해 아주 꼼꼼하게 들여다봐야 했다.작품 속에 능선을 따라 빼곡히 들어선 나무들은 원경, 중경, 근경에 세밀하게 묘사되었는데, 중경의 나무 숲 사이로 뾰족하게 솟은 성당 종탑 십자가가 이 작품에 종교적 성격을 부여해주는 유일한 모티프이다. 사실 아주 유심히 보지 않으면 찾아내기 힘들 만큼 산수에 파묻힌 모습으로 표현되었다. 이렇게 숨은그림찾기를 하듯 첩첩산중의 성당을 찾다 보니 문득 박해시대 우리 신앙인들의 삶을 떠올리게 된다. 요즘 연구를 위해 배론성지를 주기적으로 방문하고 있어 그런지도 모르겠다. ‘산촌의 성당’은 그저 산속에 있는 성당의 풍경을 그린 것이 아니라 광활한 자연 앞에 겸허해지는 마음 그리고 우리 초기 신앙인들의 삶과 영성을 상징적으로 표현하고자 한 것은 아닐까? 이렇게 박 화백의 ‘산촌의 성당’은 산수화에 표현된 자연의 숭고미를 종교적 차원에서 묵상하게 하는 작품으로 다가오기도 한다.이목구비·안면 표정 등 세필로 섬세하게 묘사박세원의 또 다른 출품작 ‘봉성체’는 ‘산촌의 성당’과 비교해보았을 때 그리스도교의 주제가 더욱 강조된 인물화이다. 흑백 이미지로 정확한 채색 상태를 확인하기 어렵지만, 세필로 이루어진 인물의 이목구비와 안면 표정의 묘사, 옷감의 질감, 영대의 표현 등에서 박 화백의 섬세한 화풍을 잘 보여주는 작품이다. 봉성체는 병자이거나 미사에 참여하여 성체를 영할 수 없는 처지의 신자에게 사제가 성체를 모셔가 영하여 주는 것을 뜻한다. ‘봉성체’는 생략적으로 표현된 배경에 거동이 불편해 젊은 여인의 부축을 받고 있는 노인과 그에게 성체를 영하여 주는 신부의 모습을 담고 있다. 작품 오른편에는 검은 수단과 중백의 차림에 영대를 한 백발의 노신부가 성합에서 성체를 꺼내 맞은편 노인에게 건네고 있다. 기력이 없는지 바닥에 주저앉은 노인은 두 손을 꼭 모아 쥐고 고개를 들어 입을 벌려 성체를 받아 모시려 하고 있다. 얼굴에 가득한 주름과 헐벗은 발이 이 여인의 녹록지 않은 삶을 대변해주고 있는 듯하다. 노인을 부축하여 성체를 모실 수 있도록 돕고 있는 댕기 머리의 젊은 처녀는 표정과 자태가 온화하고 자애롭다. 바닥에 놓인 성경과 묵주는 하느님 말씀과 기도를 상징하며 이 작품의 주제를 더 명확히 해주고 있다. 이렇게 박세원 화백의 ‘산촌의 성당’과 ‘봉성체’를 꼼꼼히 들여다보고 있자니 그와 함께 여행을 떠난 기분이다. 문득 작품 속에서 성당을 찾아 산길을 헤매고 있는 나, 그리고 오래전 교우들과 그들의 신앙을 마주하고 있는 나의 모습을 보게 된다. 평화신문2019.04.11
![[호기심으로 읽는 성미술] (23)원죄 없으신 성모님](//cpbc.co.kr/CMS/newspaper/2019/01/rc/744099_1.0_titleImage_1.jpg)
[호기심으로 읽는 성미술] (23)원죄 없으신 성모님 요한 세례자와 안나 성녀 등장시켜 성모님의 ‘원죄 없으심’ 표현중세에는 ‘원죄 없으신 성모님’께 대한 신심이 대중화되었습니다. ‘성모 마리아는 원죄에 물들지 않고 잉태되셨다’는 이 대중 신심에 관해 당대 신학자들 사이에서 찬반 논란이 심했습니다. 가장 큰 이유는 근거를 성경에서 찾을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이런 이유로 베르나르도, 토마스 아퀴나스, 보나벤투라 등과 같은 저명한 신학자들도 성모 마리아의 원죄 없으신 잉태를 반대하였습니다. 하지만 14세기 프란치스코회 신학자인 둔스 스코투스는 “마리아는 아담의 후손으로 원죄에 물들어야 하지만 하느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 공로를 미리 앞당겨서 마리아를 원죄로부터 보호해 주셨다”고 주장하였습니다. 그러면서 “마리아의 원죄 없으신 잉태로 인해 그리스도의 구원 중재 능력이 더 완전해진다”고 강조했습니다. 이러한 신학 논쟁에도 불구하고 중세 교회는 11세기부터 12월 8일에 ‘원죄 없이 잉태되신 복되신 동정 마리아’ 축일을 지냈습니다. 원죄 없으신 성모께서 죄에 물든 자신들을 구원받을 수 있도록 하느님께 전구해 주실 것이라 믿었기 때문입니다. 그 염원의 간절함이 성미술 도상에 그대로 녹아 있습니다. 아직 믿을 교리로 선포되지 않은 ‘원죄 없으신 성모님’을 표현하기에 이른 것이죠. 중세 말기와 르네상스 시대 화가들은 성모자 곁에 성모님의 어머니이신 안나 성녀와 요한 세례자를 등장시켜 성모님의 원죄 없으신 잉태를 표현하였답니다. 이번 호에는 레오나르도 다 빈치가 ‘원죄 없으신 성모’를 표현한 작품을 소개하려 합니다. 바로 ‘암굴의 성모’와 ‘안나 성녀와 성모자’ 입니다. 암굴의 성모 레오나르도 다 빈치는 ‘암굴의 성모’를 제목으로 두 작품을 남깁니다. 1483~1486년께와 1495~1507년께 그린 것들입니다. 아기 예수님이 성모 마리아와 가브리엘 천사의 인도로 어린 요한 세례자를 만나시는 장면입니다. 레오나르도는 두 작품 모두를 원근법과 인체 비례법, 빛의 농담, 황금 비율로 그렸을 뿐 아니라 자신이 개발한 ‘스푸마토’ 화법을 적용해 완벽한 작품으로 남깁니다. 스푸마토(Sfumato)는 ‘연기’라는 뜻으로 그림의 윤곽선을 마치 안개처럼 부드러운 음영으로 처리하는 화법입니다. 레오나르도는 이 스푸마토 화법을 1482~1500년 사이에 밀라노에서 본격적으로 사용하였는데 이 시기 작품으로 유일하게 남아있는 게 바로 ‘암굴의 성모’입니다. 레오나르도 다 빈치, ‘암굴의 성모’, 패널유화, 1483~1486년께, 파리 루브르박물관, 프랑스. 신비한 황혼녘의 바위굴을 배경으로 4명이 등장합니다. 성모 마리아와 아기 예수, 요한 세례자와 가브리엘 천사입니다. 성모님을 중심으로 그림 왼편에 어린 요한 세례자, 오른편에 아기 예수와 가브리엘 천사가 삼각 구도를 이루고 있습니다. 레오나르도가 ‘안나 성녀와 성모자’, ‘동방박사의 경배’ 등 여러 작품에 즐겨 쓰던 구도입니다. 성모님과 요한 세례자, 그리고 예수님과 가브리엘 천사가 서로 한 무리가 되어 마주하고 있습니다. 성모님과 요한 세례자는 인성을 지닌 존재이며 아기 예수와 천사는 신성을 지닌 존재입니다. 그래서 성모님은 푸른 망토를, 가브리엘 천사는 붉은 망토를 걸치고 있습니다. 또 아기 예수께 쏟아져내리는 빛이 그분이 참 하느님이시며 참 인간이신 그리스도이심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성모님은 왼손을 들어 요한 세례자에게 아기 예수를 소개합니다. 이에 성모님의 오른팔에 감싸 안긴 어린 요한은 아기 예수께 두 손을 모으고 경배합니다. 예수님은 오른손을 들어 요한을 축복하며 답하십니다. 가브리엘 천사는 이 그림을 감상하는 우리를 바라보며 오른 손가락으로 요한 세례자를 가리키며 그가 어떻게 태어났는지를 묻고 있습니다. 바로 이 장면이 성모님의 원죄 없으신 잉태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구세주의 선구자인 요한 세례자가 하느님의 은총으로 태어났듯이 구세주의 어머니는 하느님의 은총으로 원죄에 물들지 않고 태어나실 수밖에 없다고 고백하고 있는 것입니다. 자세히 보면 성모님의 얼굴은 1495~1497년께 그린 ‘최후의 만찬’ 작품의 요한 사도 얼굴과 흡사합니다. 또 가브리엘 천사는 눈물을 머금고 있습니다. 십자가 수난을 당하실 아기 예수의 미래를 알고 있기 때문이죠. 레오나르도의 두 번째 ‘암굴의 성모’는 이전 작품보다 더 종교적입니다. 성모 마리아와 아기 예수, 요한 세례자의 머리에 후광이 그려져 있고, 어린 요한은 십자가를 지니고 있습니다. 또 가브리엘 천사는 더는 눈물을 보이지도 않고 요한을 가리키지도 않으며 담당한 모습으로 그 자리를 지키고 있습니다. 안나 성녀와 성모자 레오나르도 다 빈치는 1510년 ‘안나 성녀와 성모자’ 작품을 피렌체에서 그렸습니다. 또 이 그림의 밑그림으로 보고 있는 소묘를 1501~1507년께 남깁니다. ‘안나 성녀와 요한 세례자와 함께 있는 성모자’라고도 불리는 소묘는 목탄과 흑백 분필로 그려졌습니다. 제목처럼 어린 요한 세례자가 등장해 미술사학자들 사이에서 1510년 ‘안나 성녀와 성모자’의 밑그림이 아니라 별개 작품이라는 논란도 있습니다. 두 작품 모두 성모 마리아는 아기 예수를 안고 어머니인 안나 성녀의 무릎 위에 앉아 계십니다. 3대가 한 핏줄로, 한 뿌리로 이어졌음을 보여줍니다. 이는 하느님의 은총으로 안나 성녀가 원죄 없으신 성모 마리아를 잉태하셨고, 원죄에 물들지 않은 마리아께서 평생 동정의 몸으로 구세주를 낳으셨음을 표현한 것입니다. 이처럼 안나 성녀와 함께 있는 성모자 도상은 ‘원죄 없으신 성모’를 표현하는 것으로 이해하면 됩니다. 아기 예수께서는 요한 세례자에게 축복하고 있으며 안나 성녀는 왼손을 들어 하늘을 가리키며 이 축복이 하늘에서 내려온 것임을 알려주고 있습니다. 1510년께 그려진 작품에서 안나 성녀와 성모님께서 머금은 미소는 마치 모나리자의 미소를 보는 듯합니다. 배경도 비슷합니다. 성모 마리아의 청순한 얼굴과 우아한 미소는 평생 동정녀이시며 하느님의 어머니이신 당신의 품위와 존엄을 드러냅니다. 그리고 아기 예수를 감싸 안고 있는 두 손은 성모님의 자애로운 모성을 표현합니다. 아기 예수는 새끼 양과 장난을 치고 있습니다. 하지만 결코 평화로운 장면이 아닙니다. 성경에서 양은 ‘속죄의 희생 제물’을 상징합니다. 바로 그리스도의 수난을 암시하고 있죠. 그래서 성모님께서는 본능으로 아들에게 닥칠 운명을 직감하고 이를 막아내려고 허리를 숙여 아기 예수를 감싸 안고 양에서 떼어내려 하고 있습니다. 슬픔과 체념 가득한 성모님 눈빛이 이를 짐작하게 합니다. 그러나 안나 성녀는 딸의 이러한 행동에 어떤 반응도 보이지 않습니다. 딸과 외손자에게 닥칠 수난을 전혀 모르고 있는 듯합니다. 레오나르도 다 빈치는 이처럼 3대의 성가족의 단란함을 보여주면서 이 평화로움 속에 내재된 주님의 수난과 죽음, 부활과 구원을 상징적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작품처럼 15세기 후반 르네상스 화가들은 원죄 없이 잉태되신 성모 마리아에 대한 신심을 어린 요한 세례자와 안나 성녀를 표징으로 고백하였습니다. 리길재 기자 teotokos@cpbc.co.kr cpbc2019.01.16
 15세기 ⑥ - 그리스도교 인문주의](//cpbc.co.kr/CMS/newspaper/2018/04/rc/717954_1.0_titleImage_1.jpg)
[전영준 신부의 가톨릭 영성을 찾아서](71) 15세기 ⑥ - 그리스도교 인문주의비판적 문헌 연구로 올바른 가르침 끌어내 에라스무스 ‘영성 훈련’은 지성을 강조하던 사변적인 영성신학에서 의지를 강조하는 실천적인 영성신학으로 전환하는 데에 기여했습니다. 그런데 근세 르네상스 인문주의(人文主義, Humanism)도 주의주의(主意主義)를 강조했습니다. 인간 중심적이고 이교적인 인문주의는 그리스도교에 반대하는 인상을 주었는데, 특히 비판적이고 개혁적인 성향은 훗날 종교개혁의 기폭제로 비쳤습니다. 하지만 실생활에서 윤리 도덕적인 문제에 관심을 기울였던 인문주의는 ‘그리스도교 인문주의’가 출현하는 길을 열어주었습니다. 그리스도교 인문주의자들은 그리스도교 영성생활에 관심을 가졌습니다.성경 본문을 비교 분석해 비판적으로 연구한 발라이탈리아 로마 출신이었던 로렌조 발라(Loren zo Valla, 1407~1457)는 이탈리아 1세대 인문주의자들의 뒤를 잇는 2세대 인문주의자로 그리스도교 인문주의자들 중에 탁월한 사람으로 여겨졌습니다. 로마에서 공부를 마친 발라는 수사학자이자 문법학자로서 1429~1433년 이탈리아 파비아(Pavia) 대학교에서 웅변법을 가르쳤으며, 1431년 사제품을 받았습니다. 또한, 발라는 1437년 아라곤(Aragn)의 왕 알폰소 5세(Alfonso V, 재위 1416~1458)의 비서가 되었으며, 1448년 교황 니콜라우스 5세(Nicolaus PP. V, 재임 1447~1455)의 비서로 임명되었습니다.발라는 고전의 원문을 대조하고 비평하며 문학적으로 분석하는 방법론을 계발해 언어학이라는 학문을 시작했으며, 인문주의를 신학의 범주 안으로 들여오는 공헌을 했습니다. 하지만 발라는 1440년 논문 「콘스탄티누스의 위조된 증여문서에 대한 선언(De Falso Credita et Ementita Constantini Donatione Declamatio)」에서 로마 황제 콘스탄티누스(Constantinus, 재위 306~337)가 그리스도교에 정치적 권위를 부여하기 위해 교황 실베스테르 1세(Sylvester I, 재임 314~335)에게 작성해 준 증여문서가 8세기경 프랑크 왕국에서 조작된 거짓 문서라고 주장함으로써 교황 에우게니우스 4세(Eugenius IV, 재임 1431~1447)와 대립하는 모양새가 되기도 했습니다.발라는 언어학자로서 1444년 저서 「라틴어의 우아함(Elegantiarum Latinae Linguae)」을 통해 로마 전성기 시대에 사용했던 라틴어의 문체와 용례 및 문법을 연구, 소개했습니다. 발라의 견해에 따르면, 언어도 인간이 만들었기 때문에 시간이 흘러가는 가운데 변화하고 발전하는 역사성을 지닌다는 것이었습니다. 따라서 동시대에 쓰인 여러 작품을 비교 연구하는 것을 원칙으로 삼아야 한다고 했습니다. 한편 발라는 저서 「신약성경 주석(Ad Notationes in Novum Testamentum)」에서 라틴어 역본 불가타 성경에서 이해하기 어려운 내용을 그리스어 원본 성경과 비교해 이해하기 쉽게 설명했습니다. 특히 발라는 그리스어 원본과 비교해 라틴어 역본에 심각한 오역이 많다는 것을 발견하고 수정 작업을 시도했습니다. 문헌연구라는 관점에서 성경 본문을 비판하는 방법론을 사용함으로써 발라는 인문주의자로 유명해질 수 있었습니다.교황 니콜라우스 5세는 이러한 발라를 등용해 인문주의 연구를 전폭적으로 후원했습니다. 교황의 도움 속에서 발라가 그리스도교 인문주의와 이교 인문주의를 가리지 않고 연구함으로써, 그리스도교에 피해를 입히던 인문주의는 차차 그리스도교의 학문 수준을 한 차원 높이는 데 큰 기여를 했습니다.기도와 지식으로 훈련하는 그리스도교 내적 생활을 제시한 에라스무스네덜란드 로테르담(Rotterdam) 출신이었던 데시데리우스 에라스무스(Desiderius Erasmus, 1466~1536)는 그리스도교 인문주의자들 중에서 그리스도교 영성 생활에 크게 이바지한 인물로 손꼽혔습니다. 에라스무스는 1475년부터 데벤테르(Deventer)에서 ‘공동생활 형제회’가 운영했던 문법학교를 다니며 라틴어와 라틴문학을 통해 인문학을 접했습니다. 특히 이 시기 에라스무스는 독일 지역에서 유명했던 인문주의자들을 만나면서 고전 연구에 대한 열정을 키울 수 있었습니다. 1487년 스테인(Steyn)에 아우구스티누스 의전 수도회에 입회했던 에라스무스는 수도원 도서관에서 원하는 만큼 그리스도교와 이교 고전을 읽고 연구하면서 비판적인 관점에서 「세상의 경멸에 대하여(De Contemptu Mundi)」와 「야만인들에 대하여(Antibarbari)」를 저술했습니다.1492년 캉브레(Cambrai) 교구장에 의해 사제로 서품되고 1495년부터 파리에서 신학을 공부할 수 있었던 에라스무스는 프랑스 및 이탈리아 인문주의자들과 교류하면서 라틴 고전 세속 문학에 대한 이해를 넓혔으며, 인문학적 지식을 담은 「격언집(Adagio)」을 저술했습니다. 또 1499년부터 영국을 방문해 영국 인문주의자들과 교류하며 그리스어에 관심을 가졌던 에라스무스는 1509년 사회와 교회를 비판적으로 풍자한 「우신예찬(Encomium Moriae)」을 저술했습니다. 그런데 1517년 루터(Martin Luther, 1483~1546)의 95개 조항을 지지했던 에라스무스는 1520년엔 루터의 저서를 반박하고자 「자유 의지론(De Libero Arbitrio)」을 저술하기도 했습니다.한편 1504년 루뱅 근처 도서관에서 발라의 저서 「신약성경 주석」를 접하고 문헌비평 방법론을 연구했던 에라스무스는 1516년 직접 불가타 역본을 보완하고 주석한 「신약성경(Novum Testamentum)」을 출간해 교황 레오 10세(Leo PP. X, 재임 1513~1521)에게 헌정했습니다. 또한, 1517~1524년 네 복음서와 사도행전 및 바오로의 몇몇 서간들을 해설한 「의역(Paraphrase)」을 출간했습니다. 에라스무스는 1501년 남편의 영성생활 발전에 도움을 달라는 어떤 군인의 아내가 한 부탁을 받고 저서 「그리스도교 군인 교본(Enchiridion Militis Christiani)」을 썼습니다. 이 책에서 그는 기도와 지식의 두 무기를 가지고 세상 욕망을 어떻게 거슬러 싸워야 하는지 인간의 의지를 강조하며 설명했습니다.에라스무스는 먼저 인간의 삶은 끊임없는 훈련의 연속이라고 언급하면서 무지한 상태에서 기도하는 것보다 지식을 가지고 기도하는 편이 훨씬 좋으므로 문자적인 의미뿐 아니라 이면에 담긴 의미도 찾으면서 성경을 연구해야 한다고 강조했습니다. 또한, 자신 안에 있는 악습을 알아야 개선할 수 있으므로 참 지혜를 통해 자신을 성찰하고 깨닫는 것이 중요하다고 강조했습니다. 특히 무분별, 정욕, 약함 등의 악습을 없애는 내적 쇄신이 중요하므로 그리스도의 모범을 따라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이러한 에라스무스의 가르침은 새 신심 운동에서 언급했던 영성생활과 매우 유사했습니다.르네상스 인문주의자들의 문헌 연구는 비판적이기 때문에 언뜻 보면 교회에 해를 입힐 것 같았습니다. 하지만 그리스도교 인문주의자들은 성경을 비롯한 그리스도교 고전 문헌을 비판적으로 연구해서 오히려 올바른 가르침을 끌어냈습니다. 그리스도교 인문주의자들은 그리스도인들이 교회의 가르침을 올바로 깨달아야 내적 생활에 실패하지 않고, 맹목적으로 훈련하지 않을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결국 그리스도교 인문주의자들은 영성 훈련에서 너무 의지만 강조하지 말고 지성으로 균형을 갖추어야 한다는 점을 지적했습니다.<가톨릭대 신학대학 영성신학 교수> 백영민2018.04.19
![[허규 신부와 떠나는 신약여행] (95) “네가 보는 것을 기록하여 일곱 교회에 보내라”(묵시 1,11)](//cpbc.co.kr/CMS/newspaper/2018/04/rc/717810_1.0_titleImage_1.jpg)
[허규 신부와 떠나는 신약여행] (95) “네가 보는 것을 기록하여 일곱 교회에 보내라”(묵시 1,11)박해에도 믿음 지킨 이들에 대한 주님의 약속 요한 묵시록 저자에게 내린 소명은 환시를 기록해 소아시아에 있는 일곱 교회에 써 보내라는 것입니다. 이런 명령은 ‘사람의 아들 같은 분’으로부터 옵니다. 다니엘서에서 소개하는 ‘사람의 아들 같은 분’과 비슷하게 묘사된 이 분은(다니 7,9; 10,6) 자신을 “나는 살아 있는 자다. 나는 죽었었지만, 보라, 영원무궁토록 살아 있다”고 소개합니다.(묵시 1,18) 이런 표현은 사람의 아들이 우리가 알고 있는 예수 그리스도라는 사실을 암시합니다. 소아시아 전체에 보낸 계시 요한 묵시록은 이 명령에 따라 환시를 기록한 책입니다. 우선 소아시아의 일곱 교회는 에페소, 스미르나, 페르가몬, 티아티라, 사르디스, 필라델피아, 라오디케이아로 표현됩니다. 하지만 많은 사람은 요한 묵시록이 책에 명명된 이 일곱 도시에 보내진 계시가 아니라 소아시아 지방 전체에 있는 교회에, 곧 신앙인들에게 써 보낸 것으로 생각합니다. 가장 큰 이유는 숫자 7이 가진 상징성 때문입니다. 7은 성경에서 하느님의 세상 창조에 필요했던 시간으로 그 이후 완전함을 나타내는 상징적인 숫자로 사용됩니다. 그렇기에 소아시아의 일곱 교회는 소아시아에 있는 전체 교회를 의미하고 넓은 의미에서 소아시아에 있는 모든 신앙인을 나타낼 수 있습니다. 일곱 교회에 보낸 편지는 짧은 형태이지만 편지의 양식을 지니고 있습니다.(묵시 23장) 그리고 각 교회에 보낸 내용은 시대 배경이었던 그리스도인들의 박해를 이야기하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믿음을 지킬 수 있도록 권고하는 것입니다. 일곱 교회에 보낸 편지에서 공통된 내용을 찾을 수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니콜라오스파’로 소개된 어떤 집단입니다.(묵시 2,6) 니콜라오스파의 기원이나 신원이 명시적으로 표현되지 않지만, 당시 소아시아에 많은 영향을 주었던 것 같습니다. 편지에 등장하는 “사도가 아니면서 사도라고 자칭하는 자들”(묵시 2,2), “사탄의 무리”(묵시 2,9)나 “발라암의 가르침을 고수하는 자들”(묵시 2,14) 그리고 “이제벨이라는 여자”(묵시 2,20), “사탄의 깊은 비밀”(묵시 2,24)은 모두 니콜라오스파와 관련된 것으로 생각합니다. 본문에 나온 내용들을 보면 이들은 우상숭배를 조장하고 불륜을 저지르게 하는 것으로 묘사됩니다. 사람들은 이들을 황제 숭배 의식을 받아들이는 종교 혼합주의적인 성격을 띤 집단으로 이해하고 그들의 특징을 구약성경에 나오는 우상숭배와 관련된 발라암이나(민수 2224장) 이제벨(1열왕 16,31-34; 2열왕 9,30-34)을 통해 상징적으로 나타내는 것으로 생각합니다.일곱 교회에 보낸 편지는 공통으로 사람의 아들을 나타내는 표현으로 시작합니다. 이미 소명 환시에서 표현된 내용을 통해 계시를 전하는 분이 누구인지를 알려주는 역할을 합니다. 또 편지는 공통으로 승리하는 사람에게, 믿음을 끝까지 지킨 이들에게 주어지는 약속으로 끝맺습니다. 이 약속들은 요한 묵시록의 마지막 부분에 묘사되는 종말 이후의 환시에서 다시 표현됩니다. 마치 일곱 교회에 약속했던 말씀이 종말과 함께 실현되는 것으로 드러나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하느님의 약속은 반드시 이루어진다는 것을 강조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하느님 구원 약속의 실현요한 묵시록은 약속이 실현된다는 것을 환시를 통해 알려줍니다. 이것은 단지 일곱 교회에 보낸 편지에 약속된 것만이 아니라 구약성경에서부터 주어진 하느님의 구원을 위한 약속이 실현되는 것이기도 합니다. 이것을 나타내기 위해 요한 묵시록 저자는 자신의 환시를 이미 사용된 구약성경의 표현들을 통해 설명하거나 묘사합니다. 개별적인 표현들은 대부분 구약성경에서, 특히 종말과 관련된 예언서의 본문에서 찾을 수 있고 그 개별적인 표현들이 모여 새로운 환시를 우리에게 전하는 것이 특징입니다. 우리가 알아볼 수 있는 익숙한 표현들을 통해 종말에 대한 새로운 환시를 전하는 셈입니다. 학자들은 이런 특징을 ‘모자이크식 환시’나 ‘콜라주 방식의 환시’라고 부릅니다. 이런 특징에서 보면 요한 묵시록은 성경의 마지막 책으로 손색이 없어 보입니다. <가톨릭대 신학대학 성서학 교수> 평화신문2018.04.18
![[이창훈 위원의 예수님 이야기] (80) 고별 담화 2 (루카 22,31-38)](//cpbc.co.kr/CMS/newspaper/2018/09/rc/733260_1.0_titleImage_1.jpg)
[이창훈 위원의 예수님 이야기] (80) 고별 담화 2 (루카 22,31-38)시련 겪을 제자에게 힘을 불어넣은 스승 예수님께서는 시몬 베드로에게 당신을 부인할 것이라고 예고하십니다. 그리고 제자들에게 때가 되었음을 말씀하시면서 준비를 단단히 할 것을 당부하십니다. 베드로의 부인 예고(22,31-34)베드로가 당신을 부인할 것이라고 예고하시는 예수님의 말씀은 “시몬아, 시몬아! 보라, 사탄이 너희를 밀처럼 체질하겠다고 나섰다”(22,31)로 시작합니다. “시몬아, 시몬아!” 하고 이름을 두 번이나 부른다는 것은 상황이 심상찮음을 나타냅니다. 그런데 그다음 말씀에서 예수님께서는 “사탄이 너를…”이라고 하시지 않고 “너희를”이라고 하십니다. 말하자면 사탄의 체질 곧 사탄의 심한 유혹을 받을 사람이 시몬만이 아님을 말씀하신다고 하겠습니다.하지만 이어지는 말씀은 다시 시몬에게만 해당합니다. “그러나 나는 너의 믿음이 꺼지지 않도록 너를 위하여 기도하였다. 그러니 네가 돌아오거든 네 형제들의 힘을 북돋아 주어라.”(22,32)예수님의 이 말씀을 통해 사탄이 시몬을 비롯한 제자들에게 체질하듯이 시련을 안겨주는 내용이 무엇인지를 헤아릴 수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예수님께 대한 믿음을 뒤흔들어놓는 것과 관련됩니다.시몬에게 하시는 예수님 말씀이 ‘시몬(너)’에서 ‘너희(제자들)’로, 그리고 다시 ‘너’로 바뀐 것을 두고 성경학자들은 초세기 그리스도 신자들이 박해받는 상황을 염두에 두고 루카 복음사가가 ‘너희’라는 표현을 넣었다고 보기도 합니다. 하지만 꼭 그렇게 보지 않아도 될 것 같습니다. 이미 유다가 당신을 배반할 것임을 알고 계신 예수님이시기에 ‘시몬아’ 하고 부르셨지만 시몬만이 아니라 다른 제자들도 사탄의 유혹에 빠지지 않도록 하라고 경계하시는 말씀으로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다만 ‘돌아오면 형제들에게 힘이 되라’고 하신 말씀에는 시몬 베드로에 대한 예수님의 각별함이 묻어남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이 말씀에 시몬 베드로는 으뜸 제자답게 “저는 주님과 함께라면 감옥에 갈 준비도 되어 있고 죽을 준비도 되어 있습니다” 하고 부인합니다.(22,33) 하지만 베드로의 강력한 부인에도 예수님께서는 단호하게 말씀하십니다. “오늘 닭이 울기 전에 너는 세 번이나 나를 모른다고 할 것이다.”(22,34) 예수님께서는 베드로가 당신을 부인할 것을 아시면서도 형제들에게 힘이 되어주라고 말씀하신다. 사진은 예루살렘 시온산의 베드로회개성당 전경. 결정의 시간이 다가왔다(22,35-38)예수님께서는 이제 제자들 전체를 향해 물으십니다. “내가 너희를 돈주머니도 여행보따리도 신발도 없이 보냈을 때, 너희에게 부족한 것이 있었느냐?”(22,35) 예수님의 이 물음은 예수님께서 갈릴래아에서 예루살렘으로 가실 때에 당신이 가시려는 고을과 고장에 일흔두 제자를 둘씩 먼저 파견하셨을 때 제자들에게 하신 말씀과 관련됩니다.(루카 10,1-12 참조) 제자들이 그 당시에 부족한 것이 아무것도 없었다고 대답하자,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이르십니다. “이제는 돈주머니가 있는 사람은 그것을 챙기고 여행보따리도 그렇게 하여라. 그리고 칼이 없는 이는 겉옷을 팔아서 칼을 사라.”(22,36) 일흔두 제자를 파견하셨을 때는 아무것도 가지고 가지 말라고 하셨는데 이제는 겉옷을 팔아서라도 칼을 사라고 당부하십니다. 겉옷은 사막, 광야 지역에서는 필수품입니다. 낮에는 덥지만 밤에는 겉옷을 두르지 않으면 잘 수가 없을 정도로 기온이 내려가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런 겉옷마저 팔아서 칼을 준비하라는 것은 칼로써 결전에 대비하지 않으면 안 될 정도로 상황이 위중하다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그런데 그다음 예수님 말씀이 이런 해석을 빗나가게 합니다. ‘그는 무법자들 가운데 하나로 헤아려졌다’는 성경 말씀이 이루어져야 하기 때문에 ‘칼을 준비하라’고 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러고는 이렇게 덧붙이십니다. “과연 나에게 관하여 기록된 일이 이루어지려고 한다.”(22,37)‘그는 무법자 가운데 하나로 헤아려졌다’는 구약성경 이사야 예언서 53장 12절에 나오는 말씀입니다. 이사야서에 나오는 ‘주님의 고통받는 종’은 도살장에 끌려가는 어린양처럼 닥쳐오는 고난을 잠자코 받아들였습니다. 그는 죽음에 이르기까지 자신을 버리고 많은 이들의 죄를 지고 갔을 뿐 아니라 무법자들을 위해 빌기까지 했습니다.(이사 53장 참조) 따라서 칼을 준비하라는 것은 진짜 칼을 가지고 결전에 대비하라는 말씀은 아닌 것이 분명합니다. 이는 예수님 그다음 말씀에서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제자들이 칼 두 자루가 있다고 하자 예수님께서는 “그것이면 넉넉하다” 하고 말씀하신 것입니다.(22,38) 무력을 상징하는 ‘칼’에 대해서 더는 언급하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그렇다면 겉옷을 팔아서라도 준비해야 하는 칼은 무엇을 의미할까요? [생각해 봅시다]루카 복음사가가 복음서를 썼을 때 그리스도 신자들은 이미 네로 황제(재위 54~68)의 박해를 겪은 후였고, 간헐적으로 박해가 잇따르는 힘든 시기를 살고 있었습니다. 1. 이렇게 영적으로 힘든 투쟁을 해야 하는 시기를 살아가던 그리스도인들에게 예수님의 다음 말씀은 위로와 힘이 됐을 것입니다. ‘사탄이 너희를 체질하려고 나섰다. 그러나 너를 위해 기도하였으니 돌아오면 형제들에게 힘이 되어 다오.’ 우리에게 힘이 되어 주는 예수님 말씀은 어떤 말씀인지요?2. 싸움에서 이기기 위해 칼이 필요하듯이 영적인 싸움에서 이기려면 강력한 무기가 필요합니다. 칼은 영적인 무기, 그 무엇보다 큰 힘을 발휘할 수 있는 무기를 뜻한다고 해도 틀리지 않을 것입니다. 오늘의 우리에게 그 무기는 무엇일까요? 백영민2018.09.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