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 속 기도] (10) 예레미야의 기도](//cpbc.co.kr/CMS/newspaper/2016/04/rc/629710_1.0_titleImage_1.jpg)
[성경 속 기도] (10) 예레미야의 기도부족한 사람이 참 예언자가 되기까지 미켈란젤로 작, 예언자 예레미야, 성 시스티나성당 천장화 일부. 예레미야는 벤야민 땅 아나톳에 살던 사제 힐키야의 아들이다. 그는 스무 살쯤 하느님의 부르심을 받아 유다의 마지막 왕 치드키야 때까지 약 40년간 예언자로 활동했다. 예레미야의 활동 기간은 이스라엘의 역사 중에서 가장 비참한 시기였다. 좋은 정치를 펼쳤던 치드키야 왕이 죽은 후 므나쎄 55년간의 폭정이 계속되고 요시아 왕의 개혁 정책도 뒤이은 왕들의 실정으로 실효를 거두지 못했다. 따라서 암흑과도 같은 시대가 지속되었고 특히 백성들의 생활은 몹시 피폐해졌다. 여기에 종교도 썩을 대로 썩어 일반 백성들의 고충은 말이 아니었다. 이런 상황에서 예레미야가 나서서 하느님 말씀을 전하였다.당시 시대상은 정치, 사회, 종교 등 모든 분야가 부패하고 썩은 상태였기에 멸망을 경고하는 예레미야의 소명은 어렵고 힘든 것이었다. 실제로 처음 부르심을 받았을 때 예레미야는 거부하고 도망치고 싶었다. 그도 우리와 똑같이 어려움 앞에 약해지는 인간이었다.예언자로서의 활동은 결코 순탄치 않았다. 고통과 수난의 연속이었다. 그는 가끔 하느님께 기도 중에 불평을 쏟아냈다. 그래서 그의 기도는 어쩌면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기도였다. “주님, 당신께서 저를 꾀시어 저는 그 꾐에 넘어갔습니다. 당신께서 저를 압도하시고 저보다 우세하시니 제가 날마다 놀림감이 되어 모든 이에게 조롱만 받습니다. 말할 때마다 저는 소리를 지르며 ‘폭력과 억압뿐이다!’ 하고 외칩니다. 주님의 말씀이 저에게 날마다 치욕과 비웃음거리만 되었습니다”(예레 20,7-8). 또 예레미야는 바빌론에게 항복하라고 예언하여 매국노라는 오해를 받고 백성들의 미움을 사게 되었다. 이때에도 너무 억울하고 백성들의 미래가 측은해 예레미야는 눈물을 흘렸다. 예언자의 직무를 수행하는 데도 완전히 하느님께 순명하지 못한 채 하느님의 부르심을 거부하고 도망치려는 마음이 많았을 것이다. ‘왜 하필 내가 해야 하나’ 하는 자괴감에 빠져 고통스러워하기도 했다. 나중에는 고향 친척조차 예레미야를 옥에 가두었다. 가장 가까운 사람들에게서 몰이해와 배척을 당할 때의 고통은 더 심하다. 예레미야는 이런 고통을 통해 참 예언자로서 완성되어 간 것이다. 그는 불완전하고 부족한 사람이었지만 하느님의 부르심에 대한 응답을 통해 완전함을 향해 나갈 수 있었다.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하느님께 붙잡혀 예언자가 된 예레미야였다. 하느님께서는 예레미야에게 전사의 임무를 원활히 수행할 수 있도록 기도를 통해 준비시키셨다. 예레미야는 주님의 뜻에 따라 그를 공격하는 적들 앞에서 완벽한 방비 태세를 갖춘 성읍과 같은 존재였다. “오늘 내가 너를 요새 성읍으로, 쇠기둥과 청동 벽으로 만들어 온 땅에 맞서게 하고, 유다의 임금들과 대신들과 사제들과 나라 백성에게 맞서게 하겠다”(예레 1,18).예레미야는 왕들과 사제들, 유다 전 지역에 살고 있는 사람 모두에게 공격을 당하는 사면초가의 절박한 상황에 처했지만, 어려움 속에서도 기도를 통해 주님께 힘을 얻었다. “그들이 너와 맞서 싸우겠지만 너를 당해 내지 못할 것이다. 내가 너를 구하려고 너와 함께 있기 때문이다. 주님의 말씀이다”(예레 1,19). 우리는 주님의 일을 할 때 쉽게 좌절하거나 인간적인 생각으로 판단하지 말아야 한다. 왜냐하면, 주님께서 먼저 우리를 택하시고 사명을 주셨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기도를 통해 주님이 우리의 힘이 되어 주심을 깨달아야 한다. 허영엽 신부(서울대교구 홍보국장) 평화신문2016.04.12
 11세기 ③ - 클뤼니 수도회의 부흥과 쇠퇴](//cpbc.co.kr/CMS/newspaper/2017/09/rc/696080_1.0_titleImage_1.jpg)
[전영준 신부의 가톨릭 영성을 찾아서](43) 11세기 ③ - 클뤼니 수도회의 부흥과 쇠퇴영적 발전 이끈 수도원, 정신노동에 시달린 수도자 그레고리오 개혁이 안정적으로 지속될 수 있었던 배경에 클뤼니 수도회가 있었습니다. 개혁 운동을 시작했던 교황 레오 9세(Leo PP. IX, 재임 1049~1054)와 같은 해에 클뤼니 수도회 아빠스(Abbas)로 선출되었던 클뤼니의 후고(Hugo Cluniacensis, 재임 1049~1109)는 60년간 원장을 역임하면서 개혁 교황들의 조력자가 되었습니다. 또 교황 우르바누스 2세(Urbanus PP. II, 재임 1088~1099)와 교황 파스칼리스 2세(Paschalis PP. II, 재임 1099~1118)는 클뤼니 수도회 출신 수도자였기 때문에, 클뤼니 수도회와 더욱 긴밀한 관계 속에서 개혁 운동을 이끌어 갈 수 있었습니다. 클뤼니 수도회에 입회자가 늘어나며 1088년 1000명 이상을 수용할 수 있는 세 번째 교회가 건립되기 시작했다. 그림은 3차 클뤼니 성당. 노란색으로 칠한 부분이 지금 남아 있는 부분이다. 덕망있는 아빠스들에 의한 영적 발전개혁 운동을 지지할 수 있었던 것은 클뤼니 수도회가 영적 발전을 이뤘기 때문이었습니다. 제5대 아빠스였던 클뤼니의 오딜로(Odilo Cluniacensis, 재임 994~1049)는 임기 중에 클뤼니 수도회 개혁을 지지하는 수도원 수를 많이 늘렸을 뿐 아니라, 그 수도원들을 통합하여 일치하도록 연합체 조직을 체계화함으로써 클뤼니 수도회를 서유럽에서 가장 중요한 수도회로 만들었습니다. 따라서 오딜로가 추진했던 수도 생활 개혁은 클뤼니 수도회에만 국한되지 않고, 다른 베네딕도회 수도원들에도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또한 오딜로는 강생의 신비에 기반을 두고 구세사의 관점에 초점을 맞춘 영성 생활을 언급했습니다. 특히 강생의 신비에서 성모님의 역할을 고찰하면서 평생 동정이신 마리아 신심을 강조했습니다.제6대 아빠스였던 클뤼니의 후고는 중세 수도회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지도자였습니다. 오랜 임기 때문에, 후고는 거의 모든 개혁 교황들의 자문 역할을 담당할 수 있었습니다. 후고도 임기 중에 클뤼니 수도회에 속한 개혁 수도원을 유럽 전역에서 2000여 개로 늘렸습니다. 또한 후고는 클뤼니 수도회 회칙 개정을 통하여 수도회 운영 방식을 발전시켰습니다. 기도에 열중했던 후고는 신중하고 후덕했기 때문에 많은 사람에게 신뢰를 얻었습니다.후고는 개인적으로 저서를 남기지 않았지만, 그의 임기 시절에 클뤼니 수도원 수도자였던 우달리쿠스(Udalricus Cluniacensis, 1029~1093)가 1087년 이전에 저술한 저서 「클뤼니 수도원의 오래된 관습들(Antiquiores Conseutudines Cluniacensis Monasterii)」에서 그 당시 클뤼니 수도회가 추구하던 수도 생활의 모습을 엿볼 수 있었습니다. 즉, 베네딕도 수도 규칙서 정신을 따라 시편을 중심으로 하는 기도 생활에 충실했으나, 기도 생활을 너무 강조함으로써 육체노동 시간을 줄이는 계기가 되었습니다.클뤼니 수도회의 전례 예식과 필사 작업클뤼니 수도회가 보여 준 여러 가지 모습들은 서방 교회 그리스도인들의 영성 생활에 긍정적인 영향을 주었지만, 정작 수도자들의 수도 생활에 부정적인 영향을 주었습니다. 먼저 클뤼니 수도회는 교회 전례 생활을 발전시켰습니다. 베네딕도의 수도 규칙서를 따라서, 수도자들은 시간경마다 기도를 바치면서 시편을 비롯하여 성경 전체를 봉독할 수 있도록 시간 전례를 구성했습니다. 또한 수도자들은 미사 전례를 장시간 장엄하고 화려하게 집전했습니다. 게다가 연중 주요 대축일에 수도자들은 십자가와 촛대, 성경과 성인 유해를 앞세워 성대한 행렬 예식을 거행했습니다.한편 중세 중기 유럽 사회가 복음화와 함께 안정적인 분위기에 들어가자 교회 서적을 찾는 수요가 늘었습니다. 따라서 클뤼니 수도회 수도자들은 성경을 비롯하여 신학, 전례, 영성과 관련된 서적들을 필사해 보급하는 일이 교회와 그리스도인을 위해 실천할 수 있는 좋은 일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아울러 수도자들은 도서관을 마련해 수많은 장서를 보관하며 그것을 바탕으로 신학 연구에 박차를 가했습니다.특히 수도자들의 필사 작업은 예술로 승화되었습니다. 수도자들은 필사 작업에서 필체를 화려하게 만들었고, 책의 여백을 화려한 그림으로 채워 넣었습니다. 이러한 작업을 위해 수도자들이 장시간 집중할 필요가 있었기 때문에, 수도회는 필사본실에서 작업하는 수도자들에게 시간 전례 등을 관면해 주었습니다. 게다가 필사 작업을 통해 그레고리오 성가 악보가 유통되면서 전례 성가 보급과 음악 발전에도 크게 기여했습니다.건축 분야에서도 큰 발전이 있었습니다. 클뤼니 수도회에 입회하려는 수도자가 날로 늘어나 1000년에는 클뤼니 수도회 두 번째 교회가, 1088년에는 1000명 이상 수용할 수 있는 세 번째 교회가 건립되기 시작했으며, 다른 많은 지역에서도 수도원 교회가 건립되었습니다. 특히 수도원 교회가 로마네스크 양식으로 건축되면서 교회 안팎에 성경 말씀과 교리 내용에 따른 조각들과 그림들로 장식되었습니다.기도 생활을 방해하는 과도한 정신노동클뤼니 수도회 덕분이었는지, 11세기엔 훌륭한 영성 작가가 나타났습니다. 프랑스 북부 노르망디, 페캉(Fcamp)에 베네딕도회 수도원 출신 페캉의 요한(Ioannes Fiscamnensis, ?~1079)은 이탈리아 라벤나(Ravenna)에서 태어났습니다. 요한은 수도원장이었던 삼촌의 초청으로 프랑스 디종(Dijon)에 성 베니뉴스(Benignus) 수도원을 방문했다가, 1017년 페캉의 수도원을 개혁할 사명을 받은 삼촌과 함께 그곳을 방문해 수도원장 비서 일을 잠시 맡았습니다. 1028년 요한은 페캉의 수도원 원장으로 임명되어 50여 년간 직무를 수행하면서 전통적인 베네딕도회 수도 신학을 구현했습니다.요한은 기도에 관한 첫 번째 저서인 「신학적 고백(Confessio Theologica)」에서 렉시오 디비나(거룩한 독서)를 실행한 후에 ‘주부적 관상’(infused contemplation)의 단계인 정감적인 침묵의 기도 상태에 들어가게 되는 것을 설명했습니다. 이외에도 요한의 저서인 「성부의 말씀과 글에 대한 소책자(Libellus de scripturis et verbis patrum)」와 「묵상(Meditationes)」은 중세 후기까지 서방 교회에서 널리 읽혔습니다.클뤼니 수도회의 다양한 노력들은 분명히 그리스도인의 영성 생활 발전에 기여했습니다. 하지만 정작 수도자들은 수도 생활에 방해를 받았습니다. 전통적인 육체노동을 대신한 필사 작업과 같은 높은 집중력을 필요로 하는 정신노동은 기도 생활을 힘들게 했을 뿐 아니라, 기도 시간을 단축시켰습니다. 긴 시간 거행된 장엄한 전례도 수도자들이 깊은 묵상을 통한 관상 기도에 들게 하는 데 장애물이었습니다. 따라서 클뤼니 수도회의 수도 생활이 변질되었다는 비판이 쇄도했습니다.클뤼니 수도회 제8대이자 마지막 아빠스였던 존자(尊者) 베드로(Petrus Venerabilis, 재임 1122~1157)는 교회의 비판을 의식하면서 새롭게 변한 수도 생활의 환경과 방법을 적극적으로 해명했습니다. 하지만 한 번 떠난 마음을 다시 잡을 수 없었으며, 클뤼니 수도회는 해체되어 흩어지고 클뤼니 수도원만 남았습니다. 그리고 빈자리를 대신하는 새로운 수도회가 출현하게 되었습니다. <가톨릭대 신학대학 영성신학 교수> 백영민2017.09.19
![[전영준 신부의 가톨릭 영성을 찾아서] (19) 4세기 ⑥ - 서방 교회 영성 생활](//cpbc.co.kr/CMS/newspaper/2017/04/rc/677475_1.0_titleImage_1.jpg)
[전영준 신부의 가톨릭 영성을 찾아서] (19) 4세기 ⑥ - 서방 교회 영성 생활금욕·애덕·윤리 토대로 그리스도인 영성 생활 강조고대 그리스도교는 언뜻 동방 교회 중심으로 활동한 것처럼 보였습니다. 박해 이전에는 서방에 로마 제국의 수도가 있어서 서방 교회 지역이 상대적으로 더 활동의 제약을 받았을 것이었고, 박해 이후에는 로마 제국의 수도가 동방으로 이전함으로써 동방 교회 지역이 제약 없이 더 활발할 수 있었습니다. 따라서 소수의 사도 및 호교 교부를 제외하고 대부분 동방 교회 교부들의 활약이 많았으며, 수도 생활도 동방 교회로부터 확산되었습니다. 게다가 서방 교회 수도 생활의 기원은 불분명합니다. 하지만 고대 말기부터 서방 교회 교부들도 서서히 활약을 펼치면서 그리스도인 영성 생활에도 많은 영향을 끼치게 되었습니다.암브로시우스 금욕 생활과 윤리 생활을 강조한 암브로시우스 훌륭한 설교가였던 밀라노의 암브로시우스(Ambrosius Mediolanensis, 339~397)는 주교로서 사목적인 배려로 그리스도인의 영성 생활을 돕고자 성직자, 수도자, 평신도를 위해 다방면에서 많은 작품을 저술했습니다. 로마 황제의 행정관이었다가 갑자기 밀라노교구장 주교로 선출된 암브로시우스는 성경 공부에 매진했습니다. 암브로시우스는 알렉산드리아 학파의 방법론으로 구약성경에 담긴 윤리적, 영적 의미를 탐구했습니다. 또 안티오키아 학파의 방법론으로 신약성경에 담긴 문자적 의미를 연구했습니다. 그는 구약성경과 신약성경에 대해서 우의적이고 예형론적인 해석을 시도함으로써 두 성경의 통일성을 강조했습니다. 결국 성경 말씀을 열심히 묵상했던 암브로시우스는 여러 성경 주석 작품들을 남길 수 있었으며, 감동을 주는 좋은 강론도 할 수 있었습니다. 암브로시우스는 저서 「사제 직무론(De Offi -ciis Ministrorum)」에서 그리스도인의 윤리 생활을 강조했습니다. 즉, 그리스도인에게는 하느님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처럼 완전해지기 위한 삶과 일반적으로 영생을 얻기 위해 요구되는 최소한의 삶이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이 작품은 일차적으로 성직자들을 위한 권고였으나, 폭넓게는 평신도를 향하면서 모든 그리스도인의 영성 생활 발전에 도움을 주었습니다. 또 암브로시우스는 여성 그리스도인들의 영성 생활에 도움을 주고자 많은 관심을 기울였습니다. 그는 저서 「과부(De Viduis)」와 「동정녀(De Virginibus)」에서 결혼을 거부하는 것은 아니지만, 동정을 지키는 것이 더 우수한 복음적 삶이라고 강조했습니다. 게다가 암브로시우스는 교회를 정결한 동정을 지닌 그리스도인의 어머니로 제시했습니다. 따라서 동정 상태에 있는 교회는 성령의 도움으로 그리스도인이라는 자녀를 출산한다는 것입니다. 암브로시우스는 저서 「동정론(De Virgin- itate)」에서 동정에 대한 주제를 금욕 생활로 확장시켰습니다. 하지만 암브로시우스의 금욕 생활은 현세 생활을 희생하면서 실천하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즉, 현세 생활에서 애덕을 실천하는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의 현존 체험에 도달하는데, 그 체험을 통해 영생에 참여하는 것이 바로 금욕 생활이라는 것입니다. 이 이외에도 다양한 주제들을 다룬 작품들을 통해 암브로시우스는 체계적인 윤리 생활을 바탕으로 하는 그리스도인의 영성 생활을 권고했습니다.금욕 생활과 수도 생활을 실천한 히에로니무스우리에게 예로니모라는 이름으로 더 잘 알려진 스트리돈의 히에로니무스(Hieronymus Stridonensis, 347/48~419/20)는 성경 번역자이자 주석가로 명성을 떨쳤지만, 이면에 수도 생활을 동경했습니다. 유복한 그리스도교 가정에서 태어난 히에로니무스는 로마에서 공부하는 동안에 잠시 쾌락에 빠지기도 했지만, 세례성사를 받고 진지한 신앙인으로 살고자 투신했습니다. 20대 중반 히에로니무스는 루피누스(Rufinus Aquileiensis, 345~410/11)와 함께 고향 근처 아퀼레이아에 위치한 수도 공동체에서 금욕 생활을 실천했습니다. 이후 예루살렘 순례를 마친 히에로니무스는 안티오키아에 머물면서 안티오키아 학파의 성경 주석 방법을 배웠습니다. 또 수도 생활에 더 많은 관심을 갖게 되면서 시리아 사막에서 본격적으로 수도 생활을 실천했습니다. 하지만 그곳 수도자들이 이단사상 문제로 서로 다투는 모습에 회의를 느껴 안티오키아로 나왔는데, 뜻하지 않게 그곳에서 사제품을 받았습니다. 히에로니무스는 다시 콘스탄티노플에서 나지안주스의 그레고리우스(Gregorius Nazianzenus, 326/30경~390경)를 만나 알렉산드리아 학파의 성서 주석 방법을 배우고 오리게네스(Origenes, 185~254)에게 관심을 갖기도 했습니다. 잠시 로마로 돌아와 다마수스 1세 교황(Da- masus PP. I, 재위 366~384)을 보필했던 히에로니무스는 로마 귀족에게 금욕 생활을 가르쳤습니다. 당시 로마에는 이미 동방 교회 수도 생활이 전래되었고, 많은 귀족들이 수도 생활에 관심을 가졌습니다. 심지어 세련된 예절을 보이는 성직자보다 금욕 생활을 실천하는 성직자를 더 존경하는 분위기가 귀부인들을 중심으로 형성되었습니다. 교황 선종 이후 히에로니무스는 자신을 도와주던 부인들과 함께 이집트 사막 은수자들을 방문하고 베들레헴으로 건너가 수도 공동체를 설립, 수도 생활을 시작했습니다. 히에로니무스는 이곳 수도원에서 성경 번역 작업을 마무리하면서 죽을 때가지 머물렀습니다. 히에로니무스는 암브로시우스보다 극단적인 금욕 생활을 주장했습니다. 즉, 결혼 생활을 반대하는 분위기에서 금욕 생활을 권장했던 것이었습니다. 히에로니무스의 금욕 생활이 과도하다고 느낀 로마의 그리스도인들은 히에로니무스를 강력하게 비난했습니다. 하지만 히에로니무스는 그런 비판을 무시하고 어린 소녀에게까지 정결에 대한 가르침을 아주 섬세하게 교육했습니다. 4세기 서방 교회 수도 생활은 동방 교회의 도움이 절대적이었습니다. 알렉산드리아의 총대주교 아타나시우스(Athanasius Alexandrinus, 295/300~373)는 아리우스 일파와의 갈등 때문에 로마 황제에 의해 339년 로마로 유배를 떠났을 때에 이집트 수도자들과 동행함으로써 동방 교회 수도 생활이 서방 교회에 알려지는 계기를 마련했습니다. 또한 이미 고향에서 히에로니무스와 수도 생활을 실천했으며 베들레헴에 여성 수도원을 설립하고 수도 생활에 대한 경험을 축적했던 루피누스는 오리게네스 사상을 변론하기 위해 로마를 방문하면서 동방 교회의 수도 생활을 전하는 기회를 가졌습니다. 그러므로 박해가 끝난 4세기부터 서방 교회에서도 서서히 수도 생활과 수도원 제도의 기틀이 마련되기 시작했습니다. <가톨릭대 신학대학 영성신학 교수> cpbc2017.04.06
![[생활 속의 복음] 부활 제3주일 (루카 24,35-48)](//cpbc.co.kr/CMS/newspaper/2018/04/rc/716856_1.0_titleImage_1.jpg)
[생활 속의 복음] 부활 제3주일 (루카 24,35-48)기적 만들기 제가 아는 부부는 오랫동안 아기를 가지려고 노력했지만 좀처럼 아기가 생기지 않아서 마음고생이 많았습니다. 하지만 열심히 기도해서 그런지 드디어 원하던 아기를 갖게 되었지요. 이 부부의 기쁨은 말로 표현하지 못할 정도로 컸습니다. 이 부부가 제게 이런 말을 해주더군요. “신부님, 이 세상에 생명이 태어난 것 그 자체가 기적이라는 것을 이제야 깨달았어요.”처음에는 결혼과 동시에 쉽게 아기를 가질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오랜 시간을 기울이고 또 많은 마음고생을 하고 나니 자기들 마음대로 얻을 수 있는 아기가 아님을, 커다란 기적이 이루어지지 않고서는 불가능하다는 것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우리 모두는 이렇게 기적의 손길을 통해서 이 땅에 태어났습니다. 그런데 당연하게 생각하면서 자기 자신을 별 볼 일 없는 존재로 생각하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을까요? 이런 식으로 주님의 손길이 미치지 않는 곳이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되면서 기적 아닌 것이 없음을 알게 됩니다. 따라서 어떠한 순간에서도 포기하거나 절망해서는 안 됩니다. 성경에서 가장 많이 나오는 단일 문장이 “두려워 마라”라고 하더군요. 이 문장을 누가 직접 세어 보았는지 모르겠지만, 어떤 책에서 보니 자그마치 365회가 나온다는 것입니다. 이는 곧 매일 매일 두려워하지 말라는 주님의 메시지가 아닐까 싶습니다. 하지만 주님의 손길이 없다고 생각하는 순간 두려움은 나의 것이 되며 쉽게 포기와 절망 속에서 빠져나오지 못하게 됩니다. 주님의 십자가 죽음 후 제자들은 다락방에 숨어 있었습니다. 자신들도 주님과 같은 끔찍한 죽음을 당할지도 모르겠다는 두려움일 것입니다. 바로 이제는 주님이 계시지 않는다는 생각에서 나온 그들의 초라한 모습이었습니다. 주님이 없는 상태에서 자신들만으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고 생각했겠지요. 이러한 두려움과 절망 속에 있을 때 부활하신 주님께서 제자들 앞에 나타나십니다. 그리고 하신 첫 마디는 제자들에게 가장 필요한 “평화가 너희와 함께”(루카 24,36)였습니다.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되살아나신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직접 나타나심으로 인해, 제자들은 죽음의 두려움에서 벗어날 수 있었습니다. 대신 부활이라는 커다란 희망 속에서 진정한 평화를 간직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주님께서는 이 평화를 가지고 죄의 용서를 위한 회개를 세상에 선포해야 함을 명령하십니다.(루카 24,47 참조) 우리 죄만이 아니라 온 세상의 죄를 위한 속죄 제물이 되신(1요한 2,2 참조) 주님께서 평화를 가지고 우리 곁에 계시기에 우리는 분명히 용기를 갖고 두려움 없이 세상에 기쁜 소식을 전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왜 우리의 삶 안에 주님을 초대하지 않을까요? 아니 우리 곁에 계신 주님을 보려고 하지 않을까요? 장 지오노의 소설로 매우 유명한 ‘나무를 심은 사람’에서, 주인공 엘제아르 부피에는 헌신적인 노력을 통해 자신이 거둔 ‘성공’을 보여줍니다. 이는 누구나 거룩해질 수 있다는 것을 가르쳐줍니다. 농부인 자기와 마찬가지로 스스로 보잘것없는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어떤 사람도 고결하고 거룩한 생각을 품고 굽힘 없이 목표를 추구해 나가면 기적 같은 일을 만들어낼 수 있다는 ‘희망’을 심어준 것이지요. 바로 이 모습을 주님께서 우리들의 마음속에 심어주셨습니다. 주님의 사랑 가득한 마음을 품고서 하느님 나라의 영광을 위해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에 최선을 다할 때, 스스로 보잘것없다고 생각했던 나 자신에게서 또 하나의 기적이 나올 수 있습니다. 기적을 바라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진정으로 기적을 원한다면 먼저 주님을 내 안에 모셔야 합니다. 그리고 그 주님을 바라보고, 주님께서 원하시는 모습으로 적극적인 삶을 살아야 합니다. 이를 위해 베드로 사도는 우리에게 이렇게 살 것을 말씀하십니다. “회개하고 하느님께 돌아와 여러분의 죄가 지워지게 하십시오.”(사도 3,19)바로 그때 진정한 평화 안에서 나를 도구로 사용하시는 주님의 기적을 체험하게 될 것입니다. 조명연 신부(인천교구 갑곶순교성지 전담) 평화신문2018.04.10
![[하느님과 트윗을] (2) 아담과 하와 이야기](//cpbc.co.kr/CMS/newspaper/2017/05/rc/682015_1.1_titleImage_1.jpg)
[하느님과 트윗을] (2) 아담과 하와 이야기하느님-인간, 인간-인간 관계 관한 가르침 전해문 : 아담과 하와의 이야기는 실제로 있었던 일인가요. 답 : 성경은 우리의 첫 조상인 아담과 하와의 창조를 이야기합니다. 창조 설화에는 한 이야기에 이어 다음 이야기가 뒤따르는데, 창조 설화가 두 가지라는 사실만 봐도 그것이 일어난 일을 그대로 묘사한 것이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그 이야기들은 터무니없지 않습니다. 중요한 것은 ‘어떻게’ 창조됐는지가 아니라 ‘왜’ 창조됐는지이기 때문입니다. 아담과 하와의 이야기는 하느님과 인간의 관계 그리고 인간과 인간의 관계에 관해 많은 것을 가르쳐 줍니다. 이 이야기는 하느님이 당신의 계획에 따라 우리를 창조하셨음을 알려줍니다. 동시에 우리가 타락한 인간의 본성을 지니고 있음을 알려줍니다. 아담과 하와의 이야기는 인류의 기원을 과학적으로 설명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조건에 대해 알려주는 이야기입니다. 세상을 창조하실 때 하느님은 인간을 창조하시는 일에 특별히 주의를 쏟으셨습니다. 하느님을 닮은 모습으로 우리가 만들어졌다는 말은 피조물 가운데 우리가 독특한 위치를 차지한다는 뜻입니다. 하느님은 우리 인간에게 특별히 세상에 대한 과업을 주셨습니다. 온갖 생물에게 이름을 붙이게 하신 것입니다. 하느님은 아담과 하와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자식을 많이 낳고 번성하여 땅을 가득 채우고 지배하여라. 그리고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땅을 기어 다니는 온갖 생물을 다스려라.”(창세 1,28) 이러한 책임에는 피조물에 대한 존중도 속합니다. 그러니 환경을 돌보는 일은 가톨릭 신자에게 당연한 일이지요! 문 : 창조 때 하느님은 홀로 계셨나요. 답 : 창세기는 “하느님의 영이 그 물 위를 감돌고 있었다”(창세 1,2)라고 전합니다. 그것이 바로 성령입니다. 더불어 요한복음은 “한처음에 말씀이 계셨다. 말씀은 하느님과 함께 계셨는데 말씀은 하느님이셨다”(요한 1,1)라고 전합니다. 하느님의 살아 계신 말씀이신 예수님은 한처음부터 하느님과 함께 계셨습니다. “하느님께서 말씀하시기를…”(창세 1,3)이라는 구절을 읽을 때마다, 성자도 함께하고 계셨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사실상 성자는 하느님의 말씀이셨습니다. 이것은 신약성경이 구약성경을 어떻게 명확하게 하는지 알 수 있는 좋은 예입니다. 하느님은 이처럼 언제나 삼위 안에 계십니다. 그러한 까닭에 바오로 사도는 만물이 그리스도를 통하여 또 그리스도를 향하여 창조되었다고 한 것입니다(콜로 1,16-17 참조). 문 : 세상을 6일 만에 창조하셨다고요. 답 : 창조 설화는 아름답고 시적인 이야기입니다.(창세 1-2장 참조) 그러나 과학자들이 말하는 지구의 기원과는 많이 다르지요. 아우구스티노 성인은 성경에 나오는 날은 실제 하루를 뜻하는 것이 아니라고 했는데, 이는 태양이 넷째 날에 가서야 만들어졌기 때문입니다. 문자 그대로 6일 만에, 즉 144시간 만에 만들어졌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그런데도 왜 우리는 여전히 창조 설화를 읽을까요? 그것은 창조 이야기가 하느님과 세상 그리고 인간에 관해 대단히 중요한 진리를 전해 주기 때문입니다. 창조 이야기는 단지 교훈을 담은 이야기가 아니라, 하느님이 계시하신 상징적인 역사를 담은 이야기입니다. 이를테면 창조 이야기는 오직 참 하느님 한 분만 계시다는 것을 알려줍니다. 또한 우리를 창조하신 하느님은 우리에게 특별히 주의를 기울이셨다는 것도 알려주지요. 정리=맹현균 기자 maeng@cpbc.co.kr「하느님과 트윗을」= 청년 사목에 힘써 온 리메리 신부가 청년들과 신앙을 주제로 나눈 이야기를 질문과 답 형식으로 엮은 책(가톨릭출판사)이다. 교회 기원과 역사에서부터 기도 방법, 전례와 성사, 성경, 신앙 문제 등을 폭넓게 다루고 있다. 리메리 신부는 누리집(www.tweetingwithgod.com)을 운영하며 소통의 장을 넓혀 나가고 있다. cpbc2017.05.17

수원가톨릭대, '수가대 신학총서' 첫 발간 저명한 구약 성경 주석가 롤랑 드 보 신부의 책 번역 출간 수원가톨릭대(총장 유희석 신부)는 ‘수가대 신학총서’의 첫걸음으로 「구약성경의 제도들 Ⅰ」<사진>을 펴내고, 9월 28일 경기 화성 수원가대 하상관에서 발간 기념 콘퍼런스를 열었다. 김건태(수원교구 안산대리구장) 신부가 번역한 「구약성경의 제도들 Ⅰ」은 교회 역사상 가장 위대한 구약성경 주석가이자 역사가, 고고학자로 일컬어지는 롤랑 드 보(1903~1971, 도미니코 수도회) 신부가 1957년 저술한 책이다. 구약성경 시대의 유목생활, 가족ㆍ시민ㆍ군대 사회 제도 등을 소개하고 혼인ㆍ장례식 풍습, 사회 구성원, 왕국의 행정, 법과 정의 등을 상세하게 설명한다. 김건태 신부는 콘퍼런스에서 “유학 중이던 1979년 이 책을 처음 읽고 ‘언젠가 번역해 한국에 소개하겠다’고 다짐했는데, 40여 년 만에 현실이 됐다”며 “이번 총서 발간을 시작으로 좋은 총서가 많이 나와 신학생과 신자들에게 도움이 되길 바란다”고 말했다. 수원가대는 2019년까지 「구약성경의 제도들 Ⅱ」,「선교란 무엇인가? 선교의 한국적 성찰」,「교리교육신학의 근본문제」,「가톨릭 실천신학 입문」,「해석학적 신학」 등 총서 10권을 발간할 예정이다. 수가대 총서위원장 곽진상(수원 가톨릭대) 신부는 “지나치게 전문적이거나 난해한 신학 서적이 아니라 신학생들과 수도자들, 신학에 관심 있는 평신도들이 꼭 읽어야 할 필독서를 발간할 것”이라며 “신학의 각 분야에서 다루는 기본적인 질문과 주제들을 제시하고, 그것이 오늘날 우리에게 어떤 도움을 주는지 숙고하도록 돕는 ‘신학의 기초-개론서’를 펴내겠다”고 밝혔다. 이날 콘퍼런스에서는 수원가대 출반부의 신간 「묵상기도와 관상기도」(티모시 갤러허),「영성상담의 실제」(엘피 힌터코프)도 소개됐다. 「묵상기도와 관상기도」는 이냐시오 기도의 두 가지 기본 방법인 묵상기도와 관상기도를 안내하고, 「영성상담의 실제」는 ‘포커싱’(내면 집중 방법)을 활용해 영성상담을 하는 방법을 설명한다. 두 권 모두 안기민(수원가톨릭대) 신부가 번역했다. 1984년 개교한 수원가대는 1990년 출판부를 설립, 26년 동안 신학서적, 연구서적 31권을 발간하며 신학 연구에 앞장서왔다. 구매 문의 : 031-290-8814 수원가대 출판부 임영선 기자 hellomrlim@pbc.co.krcpbc2016.09.30
![[성경 속 기도] (15·끝) 초대 교회의 기도](//cpbc.co.kr/CMS/newspaper/2016/05/rc/635684_1.0_titleImage_1.jpg)
[성경 속 기도] (15·끝) 초대 교회의 기도함께 모여 한마음으로 기도 바쳐 예수님께서 사도들과 함께 빵을 떼어 나눠 드셨듯이 초대 교회 신자들도 함께 모여 친교를 이루며 빵을 나눠 먹고 기도했다. 그림은 율리우스 카롤스펠트 작, ‘최후의 만찬’. 출처=「아름다운 성경」 초대 그리스도교는 성전뿐 아니라 신자들의 집에서도 모여 기도를 함께 바쳤다. 기도는 교회 공동체가 그리스도의 모습을 닮아가는 가장 중요한 수단이었다. 기도는 가장 기본적인 신앙의 표현이고, 하느님께 신뢰하는 삶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초대 교회 공동체의 삶은 기도하는 공동체라는 점을 잘 보여 주고 있다. “그들은 사도들의 가르침을 받고 친교를 이루며 빵을 떼어 나누고 기도하는 일에 전념하였다”(사도 2,42). 교회가 참다운 공동체로서 일치와 친교, 그리고 복음을 실현하는 힘의 원동력은 바로 기도에 있다. 기도하지 않는 공동체는 참다운 의미의 신앙 공동체라고 할 수 없다. 교회 공동체 안에서 발생할 수 있는 많은 문제도 이 기도 안에서 해소되고 해결될 수 있다. 기도는 교회의 친교를 나타내는 가장 중요한 표현이다. 또 기도를 통해 한마음 한몸의 공동체를 이룬다. “그들은 모두, 여러 여자와 예수님의 어머니와 그분의 형제들과 함께 한마음으로 기도에 전념하였다”(사도 1,14). 루카는 공동체가 모든 것을 공동으로 소유함으로써 ‘궁한 사람이 그들 가운데 없었다’고 전한다. 신앙인들 상호 간의 완전한 일치는 ‘한마음 한 정신’에서 기인한 것이다. 초대 교회의 사도행전에는 교회 공동체가 기도를 얼마나 중요시했는지를 잘 보여 주고 있다. 초기 그리스도교 신자들은 유다인 출신이 많았기에 이들도 성전에 모여 기도했다. “그들은 날마다 한마음으로 성전에 열심히 모이고 이 집 저 집에서 빵을 떼어 나누었으며, 즐겁고 순박한 마음으로 음식을 함께 먹고”(사도 2,46 ). 초대 교회의 신자들이 한마음으로 성전에 열심히 모이고 음식을 함께 드는 집에서도 기도를 바쳤다는 사실이 중요하다. 기도는 바로 스승이신 그리스도를 가장 잘 닮을 수 있는 방법이다. 실제로 주님께서도 늘 제자들에게 기도하는 모습을 보여 주셨다. 즉 교회가 인간적인 모임이 아니라 신앙 모임의 성격을 띠는 것은 함께 기도하는 데 있었다. 기도는 공동체 구성원들을 일치시키고 그리스도 모습을 닮아가는 행위이다. 그리스도교 공동체 신자들이 신명 나는 순박한 마음으로 빵을 나눌 수 있었던 원동력, 그리고 그리스도교 실존이 변질되지 않고 끝까지 살아남을 수 있게 하는 힘이 되었다. 바로 이 기도가 사도들의 가르침, 교회의 친교, 전례적인 빵의 나눔을 가능케 한 힘의 기본이 되었다. 따라서 교회가 교회다운 모습, 그리고 세속 안에서 힘 있게 빛과 소금의 역할을 충실히 하기 위해서는 기도하는 공동체의 모습을 지녀야 한다. 기도하지 않는 공동체는 그저 인간적인 모임으로 전락할 가능성이 많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의 가정도 예외는 아니다. 크고 작은 어느 공동체든 문제가 없을 순 없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그 문제의 해결 방법이 어떤 것이냐 하는 것이다. 교회의 구성원은 기도로써 사랑과 일치, 용서의 관점, 즉 그리스도의 관점에서 문제를 풀어나가야 한다. 인간이 해결할 수 없는 문제도 기도를 통해 쉽게 해결될 수도 있다. 초대 교회는 신자 숫자가 많지 않았지만 박해받는 교회였다. 그런데 사도행전을 보면 초대 교회는 세상에서 박해를 받았지만 동시에 칭송도 받았다. “하느님을 찬미하며 온 백성에게서 호감을 얻었다. 주님께서는 날마다 그들의 모임에 구원받을 이들을 보태어 주셨다”(사도 2,47). 초대 교회의 신자들은 모진 박해 속에서도 함께 모여 기도하고 서로 격려하면서 어려움을 극복할 수 있었다고 본다. 오늘날 우리도 초대 교회의 모습을 본받도록 꾸준히 노력해야 할 것이다. 허영엽 신부(서울대교구 홍보국장) ※그동안 ‘성경 속 기도’를 집필해 주신 허영엽 신부님과 애독자분들께 감사드립니다. 평화신문2016.05.17
![[성경 속 기도] (12) 바오로 사도의 기도](//cpbc.co.kr/CMS/newspaper/2016/04/rc/632355_1.0_titleImage_1.jpg)
[성경 속 기도] (12) 바오로 사도의 기도힘들고 어렵더라도 감사의 기도는 꼭! 카라바조 작, ‘성 바오로의 개종’, 1600~1601년, 산타 마리아 델 포폴로 성당, 로마 이탈리아. 바오로 사도는 좁은 팔레스티나를 벗어나 소아시아와 그리스 반도를 거쳐 로마제국까지 3차에 걸친 엄청난 선교 여행을 떠났다. 그는 하느님을 전하면서 그리스도교를 인류 전체를 향한 세계 종교로 변화시킨 이방인의 사도이다. 독실한 유다교 가정에서 태어나 철저한 바리사이파로 처신했던 사울(회개 이전의 이름)은 유다계 그리스도인들의 대표자였던 스테파노가 예루살렘에서 순교할 때 처형에 가담했다. 당시 그는 광신적 유다교인이었으며 반 그리스도교적 박해자였다. 시리아 지방의 다마스쿠스 교회를 박해하기 위해 원정을 갈 만큼 교회 박해에 앞장섰다.그런데 다마스쿠스 교회를 박해하러 가던 중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 회심하게 되고, 그 후 전 생애를 부활하신 예수를 주님으로 선포하는 데 바쳤다. 예수님 생애 동안 바오로가 그분을 직접 상봉했다는 역사적 흔적은 전혀 나타나지 않는다(갈라 1,13). 사울은 다마스쿠스로 가던 중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개인적으로 만나고 체험한 것이다. 그는 그 계기로 그리스도께 사로잡힌(필리 3,12) 사람이 되면서 전혀 다른 인생관, 신앙관을 갖게 되었다. 그의 인생처럼 바오로 사도의 기도는 온통 그리스도로 가득 차 있다. 그는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의 마음을 온전히 지배하도록 기도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또 예수님이 마음의 모든 영역, 생각의 모든 영역을 온전히 지배하는 주인이 되기를 원한다.“그래서 우리도 그 소식을 들은 날부터 여러분을 위하여 끊임없이 기도하며 간청하고 있습니다. 곧 여러분이 모든 영적 지혜와 깨달음 덕분에 하느님의 뜻을 아는 지식으로 충만해져, 주님께 합당하게 살아감으로써 모든 면에서 그분 마음에 들고 온갖 선행으로 열매를 맺으며 하느님을 아는 지식으로 자라기를 빕니다”(콜로 1,9-10). 그래서 그의 기도는 말할 수 없이 깊은 경배와 감사와 수고로 가득했다. 항상 모든 서간에서도 감사의 기도를 잊지 않았다. 비록 형편이 어렵고 힘들더라도 감사의 기도를 등한히 하지 않았다. “우리는 여러분을 위하여 기도할 때면 늘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느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그리스도 예수님에 대한 여러분의 믿음과 모든 성도를 향한 여러분의 사랑을 우리가 전해 들었기 때문입니다”(콜로 1,3-4). 바오로 사도에게는 기도가 자연스럽고 지속적인 것이었고 기도하던 사람들 속에서 수없이 많은 감사의 조건을 찾아냈다. 바오로 사도의 기도는 사목자로서 온전히 교회를 위한 기도였다. 그는 자신의 이익을 위해 이기적으로 기도하지 않았다. 그의 기도 대부분은 다른 사람들과 그들의 필요에 관한 것이었고 특히 자기가 복음을 전하고 세례를 준 신자들과 설립한 신생 교회들의 필요에 관한 것이 많았다. 교회가 발전하기 위해서는 필연적으로 어려움과 고통을 겪어야 했다. 그는 사목자로서 안타까운 마음을 가지고 그 교회들을 도와주기 위해 노력했고 기도했다.“그리고 기도할 때마다 늘 여러분 모두를 위하여 기쁜 마음으로 기도를 드립니다. 여러분이 첫날부터 지금까지 복음을 전하는 일에 동참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가운데에서 좋은 일을 시작하신 분께서 그리스도 예수님의 날까지 그 일을 완성하시리라고 나는 확신합니다”(필리 1,3-6). 허영엽 신부(서울대교구 홍보국장) 평화신문2016.04.27
![[전영준 신부의 가톨릭 영성을 찾아서] (81) 17세기 ④ - 프랑스 절대주의와 갈리아주의](//cpbc.co.kr/CMS/newspaper/2018/06/rc/725446_1.0_titleImage_1.jpg)
[전영준 신부의 가톨릭 영성을 찾아서] (81) 17세기 ④ - 프랑스 절대주의와 갈리아주의국가와 교회의 다툼으로 혼란에 빠진 영성생활 16세기 유럽 본토에서 종교개혁주의자들이 성경과 그리스도교 교리 해석의 차이를 내세우면서 개신교 설립의 기회를 제공했다면, 동시대에 영국 왕 헨리 8세(Henry VIII, 재위 1509~1547)는 이혼과 재혼을 위한 개인 가정사 때문에 가톨릭교회와의 단절도 마다치 않았습니다. 영국 의회는 1534년에 ‘수장령’을 통해 영국에서 국왕만이 영국 교회의 유일한 우두머리라고 선언하면서 영국 국교회의 길을 열었습니다. 17세기에 프랑스 왕은 강력한 군주주의를 내세우면서 또 다른 가톨릭교회 수장이 되려고 시도했습니다. 세속 군주들의 이러한 시도는 가톨릭교회 수호와 신앙 보존에 도움이 되기도 했지만, 그리스도교 영성생활에 걸림돌이 되기도 했습니다.프랑스 절대주의프랑스는 유럽에서 봉건제도를 가장 잘 완성시킨 나라였으며, 봉건제도에 따라서 신하 국가인 영국의 종주국이었습니다. 프랑스 왕 필리프 4세(Philippe VI, 재위 1328~1350)가 유럽 본토에 있는 영국령을 문제 삼아 몰수하려고 하자, 영국 왕 에드워드 3세(Edward III, 재위 1327~1377)는 프랑스 왕위계승권의 우위를 앞세워 자신을 프랑스 왕으로 선포하면서 양국 사이에 ‘백년 전쟁’(1337~1453년)이 발발했습니다. 이 전쟁의 결과로 양국에서 봉건 귀족들은 몰락했으며, 왕의 권력은 강화되어 중앙집권화의 토대를 마련했습니다. 백년 전쟁 이후에 영국은 자국 내 왕위계승 문제로 귀족 간에 ‘장미 전쟁’(1455~1485년)을 치르면서 봉건 귀족들이 한 번 더 몰락했고, 헨리 7세(Henry VII, 재위 1485~1509)가 왕으로 즉위하면서 왕권을 더욱 강화할 수 있었습니다. 프랑스에서는 백년 전쟁이 끝날 무렵의 왕이었던 샤를 7세(Charles VII, 재위 1422~1461)부터 17세기 초에 앙리 4세(Henri IV, 재위 1589~1610)까지 왕권 강화와 중앙집권화를 위한 노력이 성공을 거두었습니다.프랑스 왕권은 종교 영역에도 크게 관여했습니다. 16세기 종교개혁주의자들의 주장과 활동은 프랑스에도 영향을 끼쳤으며, 프랑스 개신교 신도들은 처음에 루터주의에 관심을 갖다가 점점 칼뱅주의로 관심을 옮겼습니다. 프랑스 칼뱅파 개신교 신도들은 위그노(Huguenot)라고 불렸는데, 프랑스 왕 프랑수아 1세(Franois I, 재위 1515~1547)는 위그노에게 관대했으나 프랑수아 2세(Franois II, 재위 1559~1560)는 위그노를 엄하게 규제했습니다. 한편 샤를 9세(Charles IX, 재위 1560~1574)를 섭정했던 이탈리아 피렌체 메디치 가문 출신의 가타리나(Caterina de’ Medici, 1519~1589)는 1562년 1월 위그노에게 제한적인 관용을 베푸는 내용을 담은 ‘생제르맹(Saint-Germain) 칙령’을 발표했습니다. 그런데 가톨릭교회를 대표하던 기즈(Franois de Guise, 1519~1563) 공작이 그 해 3월에 파리 근교 바시(Vassy)에서 예배를 보던 위그노 신도들을 학살했던 일이 계기가 되어 가톨릭교회와 위그노 사이에 종교 전쟁인 ‘위그노 전쟁’(1562~1598)이 발발했습니다. 게다가 1572년에 있었던 위그노 신도들에 대한 ‘성 바르톨로메오 축일 대학살’의 배후로 가타리나가 지목되자 가톨릭과 개신교 사이의 갈등은 더욱 고조되었습니다.앙리 3세(Henri III, 재위 1574~1589)가 죽자 위그노 신도였던 나바라의 앙리(Henri de Navarre, 1552~1610)가 앙리 4세(Henri IV, 재위 1589~1610)로 즉위했으나, 개신교 신도라는 이유로 파리 시민들은 그가 수도로 입성하는 것을 거부했습니다. 앙리 4세는 1593년 가톨릭 신자로 다시 개종하고 1594년 샤르트르(Chartres)에서 대관식을 치르고 나서야 파리로 입성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개신교에 애정이 있었던 앙리 4세는 1598년에 위그노의 종교 자유를 보장하는 ‘낭트(Nantes) 칙령’을 발표했습니다. 칙령은 위그노 신도들이 파리 이외의 지역에서 예배할 수 있도록 보장했으며, 그들의 안전 보장을 위한 요새를 만들고 비용도 지불한다고 선포했습니다. 이 칙령의 반포와 함께 36년간의 위그노 전쟁이 끝났습니다. 교황 클레멘스 8세(Clemens PP. VIII, 재임 1592~1605)는 앙리 4세가 개신교 신앙의 자유를 허용한 것에 대해서 강력하게 비난했으나 프랑스 왕의 결정을 바꿀 수는 없었습니다. 루이 14세. 갈리아주의한편 절대 왕권을 바랐던 루이 14세(Louis XIV, 재위 1643~1715)는 교황청의 지지를 얻어내고자 가톨릭 국가를 재건할 계획으로 1685년에 ‘퐁텐블로(Fontainebleau) 칙령’을 발표, 과거 낭트 칙령을 폐지하고 개신교를 전면 금지시켰습니다. 이로 인해 활동에 제한을 받게 된 많은 위그노 신도들은 해외로 이주했습니다. 가톨릭교회는 17세기 내내 프랑스에서 개신교 신앙의 자유가 허용되었던 상황을 바꾼 루이 14세에게 찬사를 보냈습니다.하지만 왕권 강화를 꿈꾸던 프랑스 왕과 가톨릭교회가 친분 관계를 지속할 수 없었습니다. 루이 14세와 교황 인노켄티우스 11세(Innocentius PP. XI, 재임 1676~1689)는 프랑스 내에 주교 임명권 문제로 자주 다투었습니다. 루이 14세는 1681년에 파리에서 프랑스 가톨릭교회 성직자 회의를 소집했으며, 모(Meaux)의 교구장 보쉬에(Jacques Bnigne Bossuet, 1627~1704)가 작성한 「네 가지 조항에 대한 선언문(Dclaration des Quatre Articles)」을 70명의 성직자들이 지지하면서 ‘갈리아주의’(Gallicanism)를 강조했습니다. 즉, 프랑스 왕은 세상사에 있어서 교황의 간섭을 받을 필요가 없고 교황보다 공의회가 우위에 있으며, 과거 프랑스 교회가 독립적으로 누리던 자유는 여전히 유효하고 교황의 결정은 바뀔 수 있다는 것이었습니다.결국 가톨릭교회는 강력하게 항의했으며, 교황 인노켄티우스 12세(Innocentius PP. XII, 재임 1691~1700)도 루이 14세를 설득해서 1693년에 갈리아주의 4개 조항의 폐지를 이끌어 냈습니다. 하지만 프랑스 왕과 성직자들이 합심해 프랑스 국내 문제에 대해 교황청의 간섭을 거부하려고 했던 시도는 프랑스 국교회가 탄생할 뻔한 사건이었으며, 프랑스 내에서 영향력이 오랫동안 지속되었습니다.17세기 프랑스에서 절대군주주의적인 국가관으로 시작되었던 갈리아주의(Gal- licanism)는 국수주의적인 교회관으로 발전하면서 18세기에 독일에서 주교단 지상주의(Episcopalism), 페브로니아주의(Febronianism), 요셉주의(Josephinism)로 확산되었으나 점점 이단적인 모습을 드러내면서 외면받게 되었으며, 19세기에 교황지상주의(Ultramontanism)가 그 자리를 대신했습니다. 하지만 교회와 국가가 주도권 다툼을 하고 있는 동안에 가톨릭교회 당국이 주도적으로 그리스도인 영성 생활을 살피지 못하자, 신자들은 스스로 대중 신심을 찾아서 발전시키거나 몇몇 영성작가들의 가르침을 통해 영성생활을 실천하려고 노력했습니다.<가톨릭대 신학대학 영성신학 교수> 백영민2018.06.27
![[1988-2018 복음의 기쁨으로] 4. 하느님의 부르심, 성소 증진으로 가는 길 (하)](//cpbc.co.kr/CMS/newspaper/2018/06/rc/725434_1.0_titleImage_1.jpg)
[1988-2018 복음의 기쁨으로] 4. 하느님의 부르심, 성소 증진으로 가는 길 (하)성소 증진… 가정 본당 교구의 ‘삼위일체적 관심’ 필요 한국 천주교회의 신앙 선조들은 신앙인의 발자취가 주위 이웃들은 물론 후손들에게도 이정표가 돼야 한다는 마음가짐으로 살았다. 예전엔 묵주기도를 ‘묵주신공(珠神功)’으로 부를 정도로 기도를 개인의 영적 수련시간으로 간주했다. 하느님과 만나는 유일한 방법인 ‘기도’를 매우 귀중하게 여겼다. 그래서 한국 교회가 짧은 시간 많은 순교자를 낸 강한 믿음을 지닌 교회로 성장할 수 있었다는 것이 교회 역사가들과 사목자들의 공통된 의견이다. 신앙 선조가 보여준 이러한 믿음과 행실은 자연스레 ‘성소 증진’이란 결실을 보았다. 서울대교구 성소국장 조재형 신부 인터뷰를 통해 성소 증진을 위한 교회의 노력과 반성을 살핀다. 또한, 꾸준히 사제를 배출해온 서울대교구 둔촌동본당(주임 이기헌 신부) 성소후원회를 탐방한다. 조재형 신부 “성소 증진을 위해서는 가정과 본당, 교구의 ‘삼위일체적 관심’이 필요합니다.”6월 14일 서울대교구 성소국장실에서 만난 조재형 신부는 “하느님께 맏배를 봉헌하는 마음으로 유능하고 신심 좋은 자녀를 하느님께 봉헌하는 가정이 많아져야 한다. 본당과 교구가 함께 노력할 때 성소 증대를 가져올 수 있다”며 이같이 말했다.지난 30년간 한국 천주교회의 사제와 수도자 수는 크게 늘었다. 1987년 말 기준 사제 수는 1452명에서 2017년 말 5360명으로 약 3.7배 늘었고, 수도자 수는 같은 기간 5154명에서 1만 1736명으로 2.27배 증가했다. 가톨릭대(서울)와 대구ㆍ광주가톨릭대 등 4개뿐이던 신학대학도 7개교로 늘었다.“예전엔 교우촌에서 성소자가 많이 났습니다. 서울대교구장 염수정 추기경님을 비롯해 최창무(전 광주대교구장) 대주교님, 손희송(서울대교구 총대리) 주교님도 교우촌 출신이시지요. 교우촌에서 기도 소리가 끊이지 않았던 것이 성소의 비결입니다. 저 역시 5대째 천주교를 믿는 가정에서 태어났습니다. 제 여동생도 수도자입니다.”조 신부는 “사제나 수도자가 되는 것은 하느님의 부르심에 응답하는 것”이라며 “부르심에 응답하기 위해선 성소자 개인의 인성과 지성, 영성을 골고루 키워야 한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성소 증대를 위해서는 제도와 열정이 요구된다고 강조했다.“30년 전에는 제도가 확립되지 않았습니다. 그렇지만 열정은 가득했지요. 지금은 제도가 정립됐지만, 열정은 예전만 못합니다. 정하상(바오로) 성인은 사제 영입을 위해 압록강을 건넜고, 파리외방전교회 사제들은 복음을 전하고자 순교를 각오하고 조선에 입국했지요. 교회는 제도와 열정이 함께해야 합니다. 조직화한 양성 이전에 학생들의 마음을 여는 관심과 사랑이 함께하는 양성이어야 합니다.”조 신부는 이어 “교황청에서 사제양성 지침을 새롭게 만들었고, 한국 교회도 한국 사제 양성 지침을 다시 만들고 있다”며 “변화된 양성의 핵심은 ‘그리스도와 동화되는 것’이다. 인성ㆍ지성ㆍ영성ㆍ사목이 조화를 이루는 틀을 구상하고 있다”고 설명했다.2013년 성소국장으로 부임한 조 신부는 부임 직후 성체성사가 성소의 중심이 되도록 하고자 예신(예비신학생) 모임 때 미사를 봉헌하도록 했다. 또한, 매체를 활용한 성소자 발굴에도 나섰다. 성경의 부르심에 대한 주제를 바탕으로 예신 모임 교재를 발간하는 한편, 2015년부터 2년간 가톨릭평화방송(cpbc) TV와 함께 ‘다큐멘터리 사제’를 제작하기도 했다.“예수님께선 씨뿌리는 이들의 비유를 말씀하셨지요. 본당이 ‘밭’입니다. 주임ㆍ보좌 신부님들이 성소자들을 잘 키우는 게 중요합니다. 교구는 사제가 되도록 돕지만, 사제 성소를 키우는 것은 본당과 가정입니다. 사제들은 ‘평신도가 바라는 사제상’을 다시금 기억하고 그러한 사제가 되도록 노력하길 희망합니다.”이힘 기자 lensman@cpbc.co.kr서울대교구 둔촌동본당, 단원 150여 명 적극적 활동으로 신학생 증가서울대교구 둔촌동본당의 신학생 수는 모두 11명.(6월 21일 현재) 서울대교구 소속 신학생이 8명, 나머지는 한국외방선교회 소속이다. 둔촌동본당은 서울대교구 230여 개 본당 중에서 신학생이 많은 본당 중 하나다. 교구 신학생 수로만 보면 양천본당(10명)에 이어 두 번째다. 더욱 놀라운 것은 신학생 수가 꾸준히 유지되고 있다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둔촌동본당은 뚝심 있게 성소자를 배출하는 ‘성소 못자리’임이 틀림없다.둔촌동본당 성소후원회는 2009년 대림시기에 재창단해 오늘에 이르고 있다. 본당 출신 사제 부모들이 “성소후원회는 꼭 있어야 한다”고 제안한 덕분이다. 성소후원회가 없었을 때는 본당 사목회가 성소후원회의 역할과 일을 대신했다. 둔촌동본당 성소후원회는 140명의 단원과 15명의 행동단원으로 구성돼 있다. 다른 성소후원회와 다른 점은 해외선교 사제 양성과 지원에 아주 적극적이라는 점이다.성소후원회 정의영(프란치스카 로마나) 회장은 “우리 본당 출신 양금주(토마스, 멕시코 선교) 신부님이 1994년 한국외방선교회 사제로 서품되면서부터 본당 신자들 사이에서 해외선교 사제 양성에 관심이 높아졌다”며 “지금도 한국외방선교회 신학생이 많은 것은 이러한 영향 덕분”이라고 말했다.회원들은 본당 성소 계발의 또 다른 비결로 사목자들의 ‘꾸준한 관심과 열정’을 꼽는다. 성소자 발굴과 지원에 대한 본당 주임과 보좌 신부들의 지속적인 관심과 열정은 청년회와 주일학교 교사부의 활성화를 가져왔고, 이는 젊은이들에게 영향을 끼쳐 성소에 대한 관심으로 이어졌다는 것이다. 최영희(체칠리아) 전 성소후원회장은 “본당에 신학생 숫자가 많다 보니 방학 때마다 열리는 캠프 등에서 보좌신부님과 학사님, 초ㆍ중ㆍ고 주일 학생들의 만남과 어울림이 자연스럽게 펼쳐진다”며 “이러한 만남 덕분에 청소년들도 자연스럽게 성소에 대해 생각하는 것 같다”고 말했다. 이힘 기자평신도가 바라는 사제상침묵 속에 그리스도의 향기가 나는 사제겸손한 사제성사를 성실하게 집전하는 사제강론 준비를 잘하는 사제말을 정중하게 하는 사제어른들을 공경하고 아이들을 사랑하는 사제 백영민2018.06.27

노동, 원죄로 말미암은 불행인가 하느님의 풍요로운 축복인가서울대교구 노동사목위원회ㆍ가톨릭평화신문 공동기획 교회와 노동 (1) 연재를 시작하며 정수용 신부 서울대교구 사회사목국 노동사목위원회 위원장 하루 일과 중 가장 많은 시간을 사용하는 것은 무엇일까? 개인마다 차이는 있겠지만, 잠자는 것과 일하는 것 이 두 가지가 우선순위를 다투지 않을까 생각한다. 부유한 이든 가난한 이든, 어른이든 어린이든, 우리는 모두 24시간이라는 공평한 시간을 사용한다. 그중 상당 부분을 일하며 보낸다. 나머지 시간은 일하기 위해 준비하거나 휴식을 취하는 시간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처럼 우리는 생의 대부분을 일과 함께 살아간다. 그런데 우리가 다녔던 어떤 학교에서도 ‘왜 일하는지’에 대해서 가르쳐 주지 않았다. 그저 더 일을 잘 하기 위한 지식과 기술을 연마했을 뿐, 정작 일을 하는 가치와 의미 등은 고민해 볼 기회조차 없었다. 인간은 왜 노동을 하는가? 눈치가 빠른 분이라면 갑자기 단어가 바뀌었음을 알아챘을 것이다. 분명 앞에서는 ‘일’이라 표현했지만, 갑자기 ‘노동’이라는 단어로 바뀌었다. 일과 노동은 의미상 큰 차이는 없지만 우리는 일상에서 노동이란 단어를 들으면 설명하기 어려운 거부감을 느끼기도 한다. 일이라 표현했을 때는 일상의 단어 같았지만, 노동이란 단어를 들으면 경직되고 불편하고 심지어 이념적인 이미지로 곧장 연상 작용을 일으키기도 한다. 그래서 노동이라는 단어를 사용해야 하는 순간에 우리는 ‘근로’라는 말을 대신 쓰기 시작했다. 근로자의 날, 근로기준법, 근로 시간 등 노동에 대한 거부감에서 노동은 점점 언급되지 않았고, 그 결과 노동의 풍요로운 가치는 소외되고 왜곡되었다. 하지만 앞서 살펴본 것처럼 인간에게 노동은 근본적인 실존의 문제다. 노동을 어떻게 인식하고 바라보느냐에 따라 내 삶을 대하는 태도가 달라진다. 기계나 노예처럼 살아가는 숙명으로서 노동을 보는 사람에게 인생은 고통의 연속이다. 하지만 노동의 의미를 축복으로 기억하는 사람은 힘들고 고단한 것을 넘어서는 인간 존재의 의미를 노동을 통해 알 수 있는 것이다. 세상 만물을 창조하신 하느님성경은 시작에서부터 한결같이 노동의 풍요로움을 선포한다. 창세기에서 우리가 믿는 하느님은 노동하신 하느님이시다. 하느님을 노동자로 표현한다면 너무나 어색한 것이 사실이지만, 우리 신앙에서 하느님을 창조주로 고백하는 것, 그러니까 첫날부터 엿새 날까지 세상 만물을 만드신 하느님은 분명 일하시는 하느님이셨다. 이는 “그분께서는 하시던 일을 모두 마치시고 이렛날에 쉬셨다”(창세 2,2)는 표현에서 더욱 장엄하게 선포된다. 그리고 이제 그 하느님의 사업이 하느님을 닮아 그분의 모상성을 간직한 인간을 통해, 세상을 더욱 이롭고 아름답게 해 나아가는 것으로 노동을 소개한다. 즉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땅을 기어 다니는 온갖 생물을 다스려라”(창세 1,28) 하신 하느님의 명령은 인간을 하느님 창조의 파트너로 세우신 것이며, 노동은 그렇게 하느님의 창조를 지속하게 하는 거룩한 행위로서 모든 피조물을 가꾸고 돌보는 의미를 간직한다. 노동, 과연 형벌인가하지만 오랜 시간 노동의 풍요로운 의미가 주목받지 못하고 원죄로 말미암은 형벌로 인식되었다. 바로 하느님의 계명을 어긴 인간에게 “너는 흙에서 나왔으니 흙으로 돌아갈 때까지 얼굴에 땀을 흘려야 양식을 먹을 수 있으리라”(창세 3,19)고 하신 말씀을 단순하게 해석했기 때문이다. 이는 인간의 불순종으로 노동에 노고(勞苦)가 따름을 표현한 것일 뿐, 노동 자체가 형벌이라는 의미는 결코 아니다. 노고는 노동과 구분해서 바라보아야 하는 인간의 실존적 모습일 뿐이다. 분명 인간은 하느님처럼 일하며, 하느님의 창조사업을 노동을 통해 지속하도록 거룩한 사명으로 초대된 존재인 것이다. 그러나 이렇게 거룩한 노동도 분명 강요된 노동, 강제된 노동일 때는 그 의미를 잃고 만다. 그리고 하느님께서는 왜곡된 노동으로 신음하고 고통당하는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한 계획도 세우신, 언제나 우리와 함께하시는 분이시다. 탈출기는 이를 분명히 보여 주는데 호렙산에서 모세에게 나타나신 하느님은 당신 자신을 계시하시며 “나는 이집트에 있는 내 백성이 겪는 고난을 똑똑히 보았고, 작업 감독들 때문에 울부짖는 그들의 소리를 들었다. 정녕 나는 그들의 고통을 알고 있다. 그래서 내가 그들을 이집트인들의 손에서 구하여… 데리고 올라가려고 내려왔다”(탈출 3,7-8)고 말씀하신다. 우리는 노동이 인간에게 강요되고 노동의 과정과 결과에서 인간이 소외될 때가 우리 삶에서 고통의 순간임을 알고 있다. 신약에서 전하는 노동의 가치신약성경은 구약보다 더욱 직접적으로 노동의 가치를 보여 준다. 바로 하느님의 아들 예수그리스도의 삶을 통해서다. 예수님은 평생을 목수로 사신 노동자였다. 그분의 제자들 역시 노동자들 가운데 뽑혔다. 또한, 예수님의 여러 비유에서도 노동은 하느님 나라를 가꾸는 일로 묘사된다. 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 진주 상인의 비유 등에서 우리의 노동은 하느님 나라를 발견하고 앞당기는 모습으로 소개된다. 이처럼 성경에서 가르치는 노동은 인간 실존을 정의하는 풍요로운 개념임에도, 우리는 잘못된 노동 현실 때문에 힘겨운 일상을 살아가기도 한다. 일자리를 구하지 못하는 청년들, 일해도 가난을 벗어날 수 없는 노동빈곤층, 장시간의 노동과 정당하게 보장받지 못하는 휴식권 등의 문제로 많은 이들이 아픔을 겪고 있는 것이다. 이는 분명 세상을 창조하신 “하느님께서 보시니 손수 만드신 모든 것이 참 좋았다”(창세 1,31)라고 말씀하신 것과 멀리 떨어진 우리 이웃의 아픔인 것이다. 앞으로 10번에 걸쳐 서울대교구 노동사목위원회와 가톨릭평화신문이 공동 기획한 특별 연재를 통해 우리 사회의 노동문제를 살펴보자 한다. 복음의 가르침과 사회교리 원칙에 따라 구조적 문제를 신앙의 눈으로 바라보고자 한다. 그리고 교회의 가르침을 기준으로 판단하는 시간을 통해, 구체적 실천의 길을 모색하고자 한다. 이 과정을 통해 왜곡된 노동에 대한 잘못된 시선을 거두고, 고통받는 이웃을 사랑하라 하신 주님의 가르침을 새길 수 있는 장이 되길 희망한다. 평화신문2017.10.11
![[성경 속 기도] (9) 이사야의 기도](//cpbc.co.kr/CMS/newspaper/2016/04/rc/628451_1.0_titleImage_1.jpg)
[성경 속 기도] (9) 이사야의 기도지도자의 혜안, 하느님께 의지했기에 율리우스 카롤스펠트 그림, ‘선지자 이사야’. 출처=「아름다운 성경」 이스라엘 민족이 고통과 고난의 위기를 맞게 되면 그때마다 하느님은 예언자를 보내 당신의 뜻을 알리셨다. 이스라엘의 많은 예언자 중에서도 이사야는 뛰어난 인물이다. 이사야는 이스라엘 역사의 번영기인 기원전 8세기에 태어나 민족의 멸망을 예견하고 경고한 예언자였다. 이사야는 특히 하느님의 위엄을 보았고, 인간 마음의 본질을 꿰뚫어보았다. 그는 이스라엘 종교가 궁극에는 파멸될 것을 내다보았지만 결국에는 메시아의 새 시대가 올 것을 예언하였다. “다윗의 왕좌와 그의 왕국 위에 놓인 그 왕권은 강대하고 그 평화는 끝이 없으리이다. 그는 이제부터 영원까지 공정과 정의로 그 왕국을 굳게 세우고 지켜 가리이다. 만군의 주님의 열정이 이를 이루시리이다”(이사 9,6).이사야는 하느님과 인간과 세계와 역사와 종말을 두루 통찰한 구약의 신학자이며 신약 종교의 초석을 놓은 구약 종교의 완성자, 개혁자라는 찬사를 받는 인물이다. 이사야는 유다왕 우찌야가 죽던 해(이사 6,1)인 기원전 739년쯤 예언을 시작했으며, 기원전 701년 아시리아의 산헤립이 예루살렘을 향해 진격해올 때까지 활동하였다. 이사야가 활동한 당시의 국제 정세는 아시리아와 이집트의 양대 세력이 각축을 벌이는 시대였다. 열강의 틈바구니에 낀 이스라엘은 어느 편이든 외국의 세력에 의존하려는 정책을 가지고 있었다. 이사야는 이러한 위정자들의 정치적 태도를 반대하고 하느님만을 믿을 것을 강조했다. 이사야는 기도 중에 하느님의 부르심을 받게 되고 그의 삶이 바뀌게 된다. 그는 하느님의 부르심의 결과로 소명을 느끼게 되었던 것이 분명하다. 그는 자신이 표현한 대로 “입술이 더러운 사람”이었지만 하느님의 부르심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길 고대한다. 그는 하느님의 뜻에 순종하는 기도를 통해 자신의 소명을 받아들인다(이사 6,2-11). 이처럼 하느님께서 먼저 소명을 준비하시고 부르신다. 그 부르심에 응답하는 자세를 가지는 것이 바로 믿음이다.하느님을 체험하게 되면서 자신의 부족함을 자연스레 깨닫게 된다. “나는 말하였다. ‘큰일났구나. 나는 이제 망했다. 나는 입술이 더러운 사람이다. 입술이 더러운 백성 가운데 살면서 임금이신 만군의 주님을 내 눈으로 뵙다니!’”(이사 6,5)이사야는 예언자 중에서도 넓고 멀리 보는 예언자였고 강한 외세의 침략에 시달리는 험한 시대에 활동했다. 당시 일반 백성도 쉽게 하느님을 배반하고 타락의 길로 빠져들었다. 그러나 이사야는 백성들에게 끊임없이 하느님을 배반하지 않는 길을 제시하고 가르쳤다.그는 비판할 때는 통렬했지만 격려할 때는 따뜻했다. 그는 특히 넓은 개방성을 지녔다. 개방성은 특히 지도자에게는 외곬으로 빠지지 않는 형평성을 유지하게 하는 힘이 되는데 그 힘의 비결은 이사야가 항상 하느님 말씀에 귀 기울이는 것 즉, 기도에 있었다고 본다. 그래서 이사야의 모든 삶을 주도하신 분은 하느님의 성령이란 사실을 잊어선 안 된다. 그런 의미에서 그는 늘 하느님과 함께하는 기도를 끈을 놓치지 않고 살아간 예언자였다. 이사야는 늘 하느님과 대화인 기도를 통해 힘을 얻었고 지혜와 용기를 얻고 자신의 삶을 변화시켜 나갔다. 때로는 하느님 구원 역사에 감사 기도를 드렸고 하느님 찬송과 찬미를 잊지 않았다. 오늘날의 지도자에게 많은 영감을 준다. 허영엽 신부(서울대교구 홍보국장) 평화신문2016.04.05

마지막 순간에도 죽음 선고한 여왕 위해 기도김학준 신부 고문대 위의 성 에드먼드 캠피언과 동료 순교자 출처=가톨릭 굿뉴스 캠피언은 가톨릭 신앙을 더 적극적으로 옹호하기 위해 「열 가지 이유(Ten Reasons)」라는 책자를 펴냈다. 그 내용은 이렇게 요약할 수 있다. ①모든 이단은 입맛에 따라 성경 말씀을 자의적으로 뽑아서 사용한다. ②어떤 경우에는 성경의 분명한 내용마저 왜곡해버린다. ③프로테스탄트들은 보이는 교회를 거부함으로써 어떠한 교회의 존재도 사실상 거부하고 있다. ④프로테스탄트들은 처음 네 차례의 공의회를 존중하는 듯 보이지만, 실제로는 공의회의 가르침을 거부하고 있다. ⑤ㆍ⑥ 프로테스탄트들은 교부들을 무시해버린다. ⑦교회의 역사는 계속 이어지고 있다. ⑧츠빙글리와 루터, 칼뱅의 글들은 상당히 모욕적인 언사로 가득 차 있다. ⑨프로테스탄트들은 논쟁할 때 의미 없는 속임수들을 많이 쓴다. ⑩다양하면서도 많은 수의 가톨릭 증거자들은 그 자체로 매우 인상적이다. 캠피언은 노퍽(Norfolk)으로 가는 도중에 지인이 사는 라이포드(Lyford)에도 꼭 들르고 싶어 하였다. 그는 그곳에서 아주 신중하고 조심스럽게 행동하면서 눈에 띄지 않으려 조심하였지만, 엘리엇과 젠킨스라는 사람들의 밀고로 1581년 7월 17일 결국 붙잡히고 말았다. 그가 잉글랜드에 들어온 지 불과 1년이 조금 지난 시점이었다. 체포된 그는 ‘선동적인 예수회원 캠피언’이라는 문구가 붙여진 모자를 쓴 채 런던 시내 곳곳으로 끌려다닌 후 런던탑에 갇혔다. 그는 레스터 하우스(Leicester House)로 잠시 끌려가 엘리자베스 1세 여왕 앞에서 심문을 받기도 하였다. 심문을 지켜보던 엘리자베스 여왕은 캠피언이 자신을 여왕으로 인정하는지 안 하는지를 직접 묻기도 하였다. 캠피언은 엘리자베스 여왕을 합법적인 통치자로 받아들일 뿐만 아니라, 세속적인 문제에 있어서는 자신 역시 여왕의 통치권 아래 순명하여야 한다는 것을 인정한다고 답변하였다. 여왕은 그렇다면 왜 교황이 자신을 파문한 것이냐고 재차 물었고, 캠피언은 이 문제가 신학자들 사이에서도 여전히 의견이 엇갈려 있다고 답하였다. 사실 심문자들 역시 한때 자신들의 동료였으며 뛰어난 인재인 캠피언을 잃고 싶지 않았고, 될 수 있는 대로 그가 가톨릭 신앙을 포기하고 자신들의 곁으로 와주기를 원하였다. 그러나 신앙에 대해서 별다른 열정이 없던 그들이 캠피언의 신앙심을 이해하기란 어려운 일이었다. 가톨릭 신앙에 대한 캠피언의 확고한 태도를 재확인하면서, 그들은 이 문제를 단순히 종교적인 영역의 문제로 국한하기보다는 정치적으로 다루고자 했고, 그에 대한 심문은 그를 반역죄로 몰아가는 분위기였다. 아무리 심문해도 별다른 소득이 없자, 캠피언을 사형시키는 쪽으로 의견이 모아졌다. 당시 잉글랜드 법에 따르면, 사제 직분을 수행하는 것 자체가 불법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한 가지 이유만으로 캠피언을 사형에 처한다면 나라 안팎에서 적지 않은 파장이 일 것으로 예상되었기에 쉽게 결정할 수 있는 문제는 아니었다. 그러던 중 법원에서 최종적으로 사형 판결이 내려지면서 그에 대한 오랜 심문은 마침내 종지부를 찍게 되었다. 캠피언의 마지막 변론은 이러하였다. “우리는 전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어차피 우리가 자신의 삶을 주관하는 존재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우리에게 사형을 선고하는 이유가 궁색하다는 것은 오히려 우리의 무죄를 말해줍니다. 그러나 우리가 가톨릭을 믿는 것이 반역을 행하는 것이라면, 어떤 비난도 감수하겠습니다. 그것을 제외하고는 우리는 누구 못지않게 여왕님께 충성스런 백성이었다고 생각합니다. 따라서 우리를 비난한다면 그것은 당신들의 모든 조상님, 곧 돌아가신 모든 사제와 주교들뿐만 아니라 선왕들을 비난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분들은 한때 잉글랜드의 영광이었지만 교황의 자녀이기도 했습니다. 당신들이 반역이라는 끔찍한 이름으로 매도해버린 우리의 가르침이 그분들의 가르침과 다른 것이 무엇입니까? 단지 이런 이유 때문에 타락한 후손들이 우리를 비난하는 것이라면, 우리는 오히려 이를 기쁨이자 영광으로 삼겠습니다.” 사형 판결을 받은 이후 사형이 집행되기 전까지 약 11일 동안 캠피언에겐 족쇄가 채워졌다. 여동생을 비롯한 몇몇 사람들이 그를 방문하러 오기도 하였고, 그를 고발했던 조지 엘리엇도 찾아왔다. 캠피언은 “일이 이렇게 될 줄 알았다면 애초에 고발하지도 않았을 것”이라며 자신의 잘못을 후회하는 엘리엇에게 “참회와 더불어 고해성사를 보라”고 권하기도 했다. 캠피언은 마지막 며칠 동안 온전히 죽음을 준비하였다. 감옥에서도 고행하고 단식하였으며, 이틀 동안 잠도 자지 않고 무릎을 꿇은 채 기도와 묵상에 전념하였다.1581년 12월 1일 사형 집행이 예정된 런던의 타이번(Tyburn)으로 많은 군중이 몰려들었고, 캠피언은 그들을 향해 “주님께서 여러분을 축복해주시고 좋은 가톨릭 신자로 만들어주시길 빕니다”라고 말하였다. 말 두 마리가 준비되었다. 한 말에는 캠피언이 다른 말에는 랄프 셔윈과 동료 예수회원 알렉산더 브라이언트가 묶인 채로 진흙과 빗속을 헤치며 천천히 끌려갔다. 교수대에 도착하자 캠피언은 그 밑에 세워진 수레에 올라섰고 진흙과 먼지로 범벅이 된 그의 목에 밧줄이 걸렸다. 그는 교수대 위에서 큰 소리로 배심원들을 용서하였고, 심문 중에 혹시 자신이 누설했을지도 모르는 사람들에게 용서를 청하였으며, 자신의 가방에서 나왔다고 하는 책을 절대 소유한 적이 없다고 밝혔다. 죽기 전에 여왕께 용서를 청해야 한다는 관리들의 요구에, 자신은 여왕을 모욕한 적이 없기에 결백하다고 하면서 오히려 여왕을 위해 기도하였다. 그가 기도를 마치자 사형 집행이 시작되었다. 그가 올라서 있던 수레가 치워지면서 목에 걸린 밧줄이 그의 목을 강하게 조였다. 그는 의식을 잃을 때까지 교수대에 매달려 있었고, 사형집행인은 그의 사지를 절단한 뒤 당시의 관례대로 처리하였다.가톨릭 신앙을 증거하며 목숨을 바친 에드먼드 캠피언은 1886년 12월 9일 레오 13세 교황에 의해 시복되었고, 1970년 10월 25일 바오로 6세 교황에 의해 잉글랜드와 웨일즈의 동료 순교자 39명과 함께 시성되었다. 그의 축일은 12월 1일이다. 예수회, 서강대 인성교육센터 교수 [예수회 성인들의 생애와 영성] 성 에드먼드 캠피언 (하) 평화신문2018.01.03
![[전영준 신부의 가톨릭 영성을 찾아서] (83) 17세기 ⑥ - 프랑스 수도자들의 영성](//cpbc.co.kr/CMS/newspaper/2018/07/rc/726963_1.0_titleImage_1.jpg)
[전영준 신부의 가톨릭 영성을 찾아서] (83) 17세기 ⑥ - 프랑스 수도자들의 영성이성과 체험의 조화로 이단 사상을 걷어내다 17세기에 예수회뿐만 아니라 다양한 수도회 수도자들은 그리스도인 영성생활을 돕기 위해 프랑스 전역에서 많은 활동을 했습니다. 이들의 활동 덕분에 근세에 서방 가톨릭교회는 올바른 영성생활을 탄탄하게 굳혀 나갈 수 있었습니다.신비신학에 관심을 가졌던 가르멜회 수도자프랑스 남서부, 보르도(Bordeaux) 출신인 셔롱(Jean Cheron, 1596~1673)은 1611년에 가르멜회에 입회했으며, 보르도 대학교에서 오랫동안 공부하고 박사학위를 받았습니다. 1629년 셔롱은 ‘투렌 개혁(Rforme de Touraine)’을 고향 지역에 소개했습니다. 투렌 개혁은 17세기 초 프랑스에서 반(反) 종교개혁의 맥락 안에서 가르멜회 수도자들이 시작했던 운동입니다. 또한, 셔롱은 신비체험에 대해 합리주의적인 비평을 시도했습니다.셔롱은 저서 「신비신학 성찰(Examen de la Thologie Mystique)」에서 신성한 것과 신비신학과의 차이를 고찰하면서 그 당시 신비체험에 대한 지나친 남용과 착각을 비난했습니다. 인간은 대죄의 상태에서도 신비스러운 일치를 체험할 수 있고 덕행 실천 없이 묵상을 통해 하느님 안에서 영적인 휴식을 취하는 것은 게으름이고 시간 낭비라고 생각했던 셔롱은 동시대에 언급되는 신비체험을 배척하고 싶어했습니다. 그래서 신비체험을 묘사하는 모호한 언어들을 비판하면서, 진실과 거짓 사이의 틈새를 메워 모순을 최소화하려고 최선을 다했습니다.프랑스 남부, 말로센느(Malaucne) 출신으로 세속명이 줄리앙(Esprit Julien)이었던 성삼의 필립(Philippe de la Trs Sainte Trinit, 1603~1671)은 1620년에 리옹에서 가르멜회에 입회해 이듬해에 수도자가 됐으며, 파리와 로마에서 공부했습니다. 필립은 1629년부터 한동안 아시아에서 선교 활동을 하던 중 인도, 고아(Goa)에서 철학과 신학을 가르쳤습니다. 필립은 1665년 이탈리아 주재 가르멜회 총장으로 선출돼 많은 관구를 순회하던 중 나폴리에서 사망했습니다.라틴계 언어에 능통했던 필립은 철학 및 신학에 관련된 작품을 많이 저술했으며, 신비체험에 관한 작품인 「신비신학 대전(Summa Theologiae Mysticae)」에서 완덕의 산에 오르는 길을 정화, 조명, 일치의 세 가지 길로 소개했습니다. 특히 필립은 초자연적인 관상에 다다르고자 하는 사람은 마음의 순결을 지니고 기도해야 한다고 강조했습니다. 즉, 마음의 순결은 “마음이 깨끗한 사람들”(마태 5,8)이 지닌 마음으로써 정신이 단순하고 겸손함을 의미한다는 것이었습니다.얀센주의 및 정적주의와 투쟁한 카르투지오회 수도자프랑스 북부, 누아용(Noyon) 출신인 인노상 르 마송(Innocent Le Masson, 1628~1703)은 1645년에 카르투지오회에 입회했으며, 1663년에 수도원 원장이 됐고 1675년에 카르투지오회 모(母)수도원 원장 및 수도회 총장에 선출됐습니다. 르 마송은 이듬해에 모원이 화재로 파괴되자 재건했으며, 수도원의 역사를 기록으로 남기면서 수도원을 운영했습니다.르 마송은 얀센주의의 위험으로부터 카르투지오회 영성을 지키려고 노력했습니다. 르 마송은 저서 「완덕과 종교생활 입문(Introduction la Vie Religieuse et Parfaite)」에서 프란치스코 드 살의 「신심생활입문」과 토마스 아 켐피스의 「그리스도를 따름」을 묵상하고 깨달은 교훈 53개를 소개했으며, 젊은 수도자 교육용 「수련 지침서(Directorium Novitiorum)」에서 적절한 예시를 들어가며 분명하며 간결하고 건전한 교리로 무장한 내용을 제시했습니다.또한, 르 마송은 귀용 부인의 저서 「짧고 쉬운 기도 방법(Le Moyen court et facile de faire oraison)」에 반대하면서 정적주의와도 투쟁했습니다. 특히 카르투지오회 수녀원에서 귀용 부인의 저서를 많이 읽자, 르 마송은 직접 수녀원을 찾아가 반대 의사를 밝히면서 예수 성심 신심을 활용해 정적주의의 영향을 물리쳤습니다.이성과 체험의 조화를 통해 정적주의를 반대한 도미니코회 수도자프랑스 북부, 클레르몽(Clermont) 출신인 샤르동(Louis Chardon, 1595~1651)은 파리에서 고등교육을 받던 중 수도회가 지성 활동을 통해 사도직을 실천하는 것에 마음이 끌려서 1618년에 도미니코회 수도자가 됐습니다. 샤르동은 1632년에 정규 설교가로서 툴루즈(Toulouse)로 파견된 적이 있었으나, 1645년에 파리로 돌아와 남은 생애 동안 저술가와 영적 지도자로 살았습니다. 샤르동은 자신의 대표작 「예수의 십자가(La Croix de Jsus)」에서 십자가를 통한 그리스도인의 영적 성장을 다루면서 그리스도교 고통 신학을 소개했습니다. 샤르동은 이 작품을 통해서 신학자의 지식과 신비가의 체험을 완벽하게 조화시켜 사색적이며 실천적인 영성을 제시했습니다. 샤르동은 성화 은총의 작용에 관심을 두는 토미즘의 영성에 기반을 두고 덕행과 은총의 삶의 발전을 말하는 신비적인 상태로서의 영성생활의 단일성을 설명했습니다. 또한 저서 「예수 그리스도의 수난 묵상(Mditations sur la Passion de Jsus-Christ)」에서 또 다른 묵상의 기술을 다뤘습니다.프랑스 남서부, 오빌라르(Auvillar) 출신인 콩탕송(Vincent Contenson, 1641~1674)은 예수회원의 지도 아래에서 공부했으나, 1655년에 툴루즈에서 도미니코회 수도자가 됐습니다. 콩탕송은 1664년부터 알비(Albi)에서 철학을 가르쳤고, 1666년부터 툴루즈에서 신학을 가르쳤으며, 훗날 프랑스 전역의 신학교에서 가르쳤습니다. 콩탕송은 박학한 설교 덕분에 대중적인 명성을 얻었습니다. 콩탕송은 지식과 사랑이 합쳐지기 전까지 완덕을 얻을 수 없다고 믿었습니다. 즉, 스콜라주의의 건조한 논증에서 벗어나서 교부들이 사용한 정신뿐만 아니라 마음에 호소하는 방법을 차용한 수덕-신비적인 숙고를 사색적인 설명에 첨가했습니다.프랑스 남부, 툴루즈 출신인 마술리에(Antoine Massouli, 1632~1706)는 1647년 도미니코회에 입회해서 툴루즈와 보르도에서 도미니코회가 운영하는 학교에서 공부했으며 툴루즈에서 박사학위를 취득했습니다. 마술리에는 주교직은 거부했으나 수도원에서 맡긴 직분은 수행했으며, 정적주위를 조사하는 교황 위원회의 고문직을 맡았는데, 페늘롱의 저서에 대한 심사를 요청받았습니다. 또한 마술리에는 「세 가지 삶에 대한 성 토마스의 묵상(Mditationes de S. Thomas sur les trois vies)」, 「진정한 기도에 대한 논단(Trait de la vritable oraison)」, 「하느님의 사랑에 대한 논단(Trait de l’amour de Dieu)」 등의 논문을 통해 정적주의를 거슬러 반대했습니다.프랑스 남동부, 알로(Allos) 출신인 피니(Alexander Piny)는 어린 시절에 도미니코회에 입회했으며, 설교를 잘하고 철학 및 신학을 잘 가르치자 1676년 신학 석사학위를 취득하고 도미니코회가 운영하는 파리의 한 학교에서 성경을 가르치는 교수로 임명됐습니다. 피니는 1680년부터 영성신학 작품을 저술했습니다. 때로는정적주의자 논쟁에서 토마스의 관점을 변호하고 표현 방식에서 페늘롱이나 반(半)정적주의자와 유사하게 보였으나, 결코 정통 신앙에서 벗어나지 않았습니다.17세기에 프랑스에서 출현한 얀센주의와 정적주의는 비록 단죄됐더라도 영향력이 쉽게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따라서 많은 프랑스 영성가들도 이런 이단들을 몰아내고 올바른 영성생활이 정착될 수 있도록 끊임없이 노력했습니다. 특히 그들은 그리스도인들이 신비생활을 잘 이해할 수 있도록 신비신학에 관한 저술 활동도 활발히 펼쳤습니다. <가톨릭대 신학대학 영성신학 교수> 백영민2018.07.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