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새 목자 맞은 부산교구, 화합과 희망의 공동체로 나아가다제5대 부산교구장 손삼석 주교 착좌 손삼석 주교가 4일 부산교구장 착좌 미사 후 축하식에서 신자들의 축하를 받고 있다. 백영민 기자 heelen@cpbc.co.kr 손삼석 주교가 4일 제5대 부산교구장좌에 착좌했다. 착좌식이 거행된 남천주교좌성당을 가득 메운 사제와 수도자, 신자 5000여 명은 오랜 기다림 끝에 새 교구장이 탄생하는 순간을 지켜보며 기쁘고 들뜬 표정을 머금고 박수를 아끼지 않았다. 마침 올해 ‘희망의 해’를 지내고 있는 부산교구에 그야말로 새 ‘희망의 빛’이 밝은 것이다. 손 주교는 착좌식에서 “이 길은 저 혼자 가는 길이 아니라, 교구의 형제 사제와 교구민 모든 분과 함께 가는 것이라 여긴다”며 “모두의 기도 힘으로 저는 계속해서 열심히 일하고 기도하면서 주님만 바라고 앞으로 나아갈 것”이라고 새 교구장으로서 첫 포부를 밝혔다. 이로써 부산교구는 교구 설정 62주년에 새로운 복음화 여정의 닻을 올렸다. 이정훈 기자 sjunder@cpbc.co.kr교구민 결속 다지며 ○…‘산고(産苦)의 시간’이 다소 길었다. 지난해 8월 전임 교구장 황철수 주교 퇴임 후 사실상 10개월 만에 교구장에 공식 착좌했다. 교구장은 공석이었지만, 손 주교는 교구장 서리로서 특유의 친화력으로 사제와 교구민 결속에 더욱 신경을 써오던 터였다.손 주교는 오랫동안 기다려준 교구민들에게 감사와 축복을 전하는 의미를 담아 착좌식에 앞서 성당을 메운 이들에게 성수 예식을 거행했다. 손 주교가 뿌리는 성수가 기다림의 목마름을 해소해주는 단비처럼 신자들 머리에 내려앉았다.곧이어 거행된 착좌식에서 주한 교황대사 알프레드 슈에레브 대주교는 프란치스코 교황 임명장을 들어 보였고, 교령이 낭독된 후 슈에레브 대주교의 인도로 손 주교가 교구장좌에 착석하자 박수가 터져 나왔다.소탈하고 격의 없는 사목자 ○…손 주교는 평소 소탈하며 격의 없는 사목 스타일을 이어온 것으로 잘 알려져 있다. 적지 않은 사제와 신자가 “친근한 이웃집 아저씨 같다”고 얘기할 정도로 손 주교는 친근한 소통을 좋아한다. 그래서인지 착좌식에 참석한 신자들은 “주교님이 참 좋다”고 했다. 이들은 이미 기도로 손 주교를 위하고 있었다.박정윤(아녜스, 온천본당)씨는 “매일 주교님을 위한 기도를 바쳐왔다”며 “어제 묵주기도와 주교님 영육간 건강을 위한 기도를 바치며 성체조배실에서 밤을 새우고 착좌식에 왔다”고 했다.이양희(레지나, 남천주교좌본당)씨는 “참 자상하고 온화한 주교님을 오래전부터 봬왔고, 주교님 성경 강의를 꾸준히 들어왔다”며 “오늘 착좌식에 일명 ‘주교님을 사랑하는 모임’ 신자들과 함께 일찍 도착해 가장 좋은 자리에서 주교님 탄생을 지켜보게 돼 영광”이라고 말했다.맨 앞자리에선 손 주교의 가족과 친지들이 벅찬 표정으로 착좌식을 지켜보고 있었다. 손 주교의 큰형 손명석(마태오)씨는 “주교님의 착좌식에 참여하니 사제 한 사람을 만들기 위해 손에서 묵주를 절대 놓지 않으셨던 모친이 떠오른다”며 “우리 가족은 항시 주교님과 교구를 위해 열심히 기도드리고 있다”고 했다. 그러면서 “어릴 때부터 어머니 말씀을 잘 듣고 사제의 삶을 동경하며 따랐던 주교님이 부산교구를 더욱 화목한 공동체로 만들어주시길 기원한다”고 전했다.특히 청소년사목에 관심을○…손 주교는 이날 착좌 후 교구 사제단과 수도자, 평신도 대표들의 순명 서약을 받고, 축하 꽃다발과 영적 예물도 선물 받았다. 영적 예물 내용이 빼곡히 적힌 족자에는 미사 31만 3845회, 성체조배 30만 8417회 등 전 교구민의 지지가 가득 담겨 있었다.착좌식에 함께한 주교들도 손 주교와 축하 인사를 나눴다. 미얀마 교황대사 장인남 대주교와 부산교구의 자매결연 교구인 일본 히로시마교구 시라하마 미츠루 주교 등 해외 내빈들도 참석했다.염수정 추기경은 축사를 통해 “손 주교님께서 교구장 직분을 잘 수행하시도록 우리 모두 열심히 기도드리자”며 “깊은 영성과 주님을 향한 마음이 크신 손 주교님과 함께라면 우리 자신과 공동체가 안전하게 주님께로 나아갈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주한 교황대사 알프레드 슈에레브 대주교도 프란치스코 교황의 축복을 전하면서 “부산 교회 공동체는 오늘 새로운 역사의 페이지를 열었다”며 “주교님께서 모든 이의 행복을 위해 끊임없는 봉사로 교회를 보존해 주실 것”이라고 했다.주교회의 의장 김희중 대주교는 “희망은 어둠 속에서 잠들지 않는 꿈이요, 삶의 빛이다. 희망의 해를 보내는 교구민이 성실과 온유의 삶으로 살아오신 손 주교님을 따라 하느님 사랑과 자비의 능력을 희망하길 바란다”고 말했다.부산교구 평신도사도직협의회 도용희(토마스 아퀴나스) 회장은 “희망의 해 문을 활짝 열고 다정한 미소를 지으신 주교님께서 우리 앞에 계심을 느낀다”며 “지금까지 주교님께서 쌓아온 풍부한 사목 경륜과 지혜로운 영도로 교구 공동체를 새 복음화의 장으로 이끄시리라 믿는다”고 했다.손 주교는 “9년 전 주교 임명 통보를 받았을 때엔 고통의 신비를 바쳤는데, 이번에 교구장 임명 통보를 받았을 때엔 마침 사순절이어서 십자가의 길을 바쳤다. 주교의 길은 역시 커다란 십자가의 길이라 느낀다”며 “지금까지 역대 교구장 주교님들께서 열심히 사목해주신 덕에 우리 교구는 큰 어려움 없이 성장하고 발전해왔다. 선배 교구장 주교님들이 이뤄놓으신 모든 것을 더 열심히 가꾸고 성장시키겠다”고 밝혔다.손 주교는 또 “본당과 주일학교 활성화뿐만 아니라, 청소년사목에 대한 관심과 배려를 위해 전 교구민이 힘을 합쳐야 한다”며 “교회를 둘러싼 여러 환경과 조건이 만만치 않지만, 주님의 인도 아래 사제단과 교구민들에게 더 다가가고, 고민하며 지혜를 모으겠다”고 거듭 전했다.이어진 축하연 자리에서 손 주교는 모든 테이블을 다니며 주교단, 수도자, 신자들과 축하를 나눴다. 사진 촬영에 일일이 응하고 안부를 묻는 손 주교의 소탈한 모습이 ‘친근한 이웃집 아저씨’를 떠오르게 했다. 평화신문2019.06.11

감사일기 적다보면 ‘일상의 보물’이 차곡차곡 10여 년 감사일기 써온 장종수(살레시오 수녀회)·정말지(마리아 수녀회) 수녀 정말지 수녀 “하루에 1만 번 감사하면 못 고칠 병이 없어요. 거짓말 같죠?”(장종수 수녀) “감사는 그 어떤 뛰어난 조건을 갖춘 사람보다 지혜롭고 따뜻한 삶을 살 수 있게 합니다.”(정말지 수녀) ‘감사 예찬론자’들을 만났다. 장종수(마리나, 살레시오 수녀회) 수녀는 서울 도림동본당 돈보스꼬유치원 원장으로, 교사와 학부모 사이에서 ‘감사 수녀’로 불린다. 중남미 영성 지원 담당으로 멕시코에서 지내고 있는 정말지(마르티나, 마리아 수녀회) 수녀는 10년 넘게 감사일기를 써왔다.아침에 눈뜨면 성경과 감사노트부터 “30년 가까이 유치원 소임을 해오면서 원장으로서 좋은 영향을 줄 수 있는 것은 부모 교육이었습니다. 부모 교육을 할 때마다 ‘감사 나눔’으로 시작했는데 감동적이었어요. 그러다 11년 전, 긍정심리학 세미나에서 사람이 행복하게 사는 데 도움이 되는 것은 ‘감사’라는 것을 확신했지요.”(장종수 수녀)장 수녀는 아침에 눈을 뜨면 성경과 감사 노트를 먼저 잡는다. 하루를 시작할 때, 잠자리에 들기 전 감사거리 5~10가지를 적는다. 주일이 되면, 한 주 동안 적은 감사일기를 다시 손으로 쓰며 정리한다. 매달 마지막 날에는 한 달 동안의 감사 거리를, 연말에는 1년 치의 감사일기를 정리한다. 그의 감사는 매일, 매주, 매월, 매년 반복된다. 장 수녀는 지난 한 해 동안 10여 차례 감사를 주제로 특강을 했다.“감사는 일상 안에 숨은 보물을 줍는 것입니다. 적으면서 일상이 보물로 다가오지요. 감사일기를 정리하면, 지난 시간이 풍성하게 느껴져요.”장 수녀는 유치원 아이들과 학부모를 위해 100일 감사 노트, 감사 통장을 만들었다. 감사 노트는 아이들이 적어온 감사일기를 담아 편집했다. 모기 한마리에도 감사한 마음을 중남미 멕시코에는 감사일기로 행복한 수녀가 또 있다. 10년 넘게 감사일기를 쓰고 있는 정 수녀는 꿈에서도 감사기도를 바친다. 그는 감사일기를 매일 쓰지 않는다. 개인기도 시간에 분심이 들거나, 의욕이 떨어질 때 자유롭게 펜을 든다. ‘지금 여기 감사할 일 10가지’라고 소제목을 쓰고 번호를 매기면서 감사 거리를 찾는다.“우선 마음 상태를 지켜보고 고마움을 느끼는 부분을 쓰고, 몸 상태에 대해 씁니다. 나를 둘러싼 환경, 날씨, 만남, 관계, 일, 기회 등에 대해 쓰지요. 가끔은 양치질을 하고 손을 씻으며 물의 고마움, 치약이 떨어지지 않음이 고마울 때도 있습니다. 9가지 잘 쓰다가 10번째에 막히면 ‘아무도 시키지 않았는데 감사하는 마음을 지니려고 하는 나의 태도가 감사합니다’라고 쓰곤 웃지요.”정 수녀는 “고 임언기 신부님은 하루에 300번 이상 감사하는 사람에게는 기적이 일어난다고 하셨다”며 “감사일기를 쓰면서 더 느긋해졌고, 혼자서도 잘 웃게 되고, 감사 거리를 찾다 보니 좋은 방향으로 생각을 모으게 됐다”고 말했다.두 수녀의 감사일기를 펼쳐보면, 일상에서 감사하지 않을 게 없다. 정 수녀의 일기에는 눈앞에서 윙윙거리던 모기 한 마리가 멀리 날아감에도 감사한 마음을 적었다. “감사를 만나고 나서, 내가 가진 아주 작은 소지품에도 누군가의 기여가 있었다는 걸 깨달았습니다. 심지어 내 몸까지도 내 것이 아니죠. 누군가가 주셨다는 것이…. 실질적으로 감사하면 기쁘고 행복해지고, 삶이 그냥 행복한 거예요.”(장종수 수녀) 이지혜 기자 bonaism@cpbc.co.kr 평화신문2018.09.05
![[호기심으로 읽는 성미술] (17) 주님 승천 <하> 중세 시대](//cpbc.co.kr/CMS/newspaper/2018/08/rc/730446_1.0_titleImage_1.jpg)
[호기심으로 읽는 성미술] (17) 주님 승천 중세 시대사도와 천사들이 우러러보고, 예언자들이 환호하다 ‘주님 승천’을 주제로 한 성미술 작품을 고대와 비잔틴 시대로 나눠 두 회에 걸쳐 살펴보았습니다. 이번 호에는 중세 시대 서방 교회의 ‘주님 승천’ 성미술 작품을 소개합니다. 10세기 말에 시작해 12세기에 꽃을 피웠던 로마네스크 성당의 조각상과 12세기 말부터 15세기까지 번성했던 고딕 성당의 프레스코입니다. 프랑스 생 세르냉 대성전 주님 승천 로마네스크 시대를 연 사람은 성 베네딕도회 수도자들입니다. 910년 프랑스 남부 클뤼니(Cluny)에 세워진 성 베네딕도회 수도원의 수도자들이 그 주인공입니다. 이들은 교회와 전례 쇄신에 앞장섰을 뿐 아니라 “아름다움은 하느님 나라를 예감케 한다”는 표어 아래 성미술 발전에 이바지합니다. 특히, 고대 로마 시대 바실리카 건축 양식에 기초해 웅장한 성당을 짓고, ‘우상숭배’로 여겨졌던 조각을 되살려 성당 안팎을 치장했습니다. 이를 19세기 프랑스 고고학자 아르시스 드 코몽(Arcisse de Caumont, 1802~1873)이 ‘로마 예술’이라 하여 ‘로마네스크’라 이름 붙인 것이 지금까지 사용되고 있습니다. 클뤼니 수도원에서 시작한 로마네스크 성당은 12세기 초에 1450여 개에 이를 만큼 유럽 전역에 퍼져갔습니다. 눈여겨볼 것은 로마네스크 성당이 프랑스 남부에서 스페인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로 이어지는 야고보 사도 순례길에 집중돼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로마네스크 성당은 야고보 사도 무덤까지 가는 순례길에 순례자들을 위해 마을이 형성되고, 그 마을에서 수도자들이 순례자들을 돌보기 위해 지은 성당들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수도자들은 로마네스크 성당 입구를 ‘최후의 심판’ 조각상으로 즐겨 장식했습니다. 때때로 ‘주님 승천’의 조각상으로도 성당 입구를 꾸몄습니다. 주님 승천과 재림은 “예수님께서는 너희가 보는 앞에서 하늘로 올라가신 모습 그대로 다시 오실 것이다”(사도 1, 11)라는 천사의 말대로 연결된 사건이기 때문입니다. 이 시기 수도자들이 최후의 심판 장면을 보여주는 주님 승천과 재림 조각상을 성당 입구에 장식한 이유가 있습니다. 이들은 앞서 9세기 말부터 100여 년 동안 종말을 경험했습니다. 노르만족과 마자르족, 무슬림의 사라센족들이 유럽 전역으로 쳐들어와 살육과 약탈을 일삼았기 때문입니다. 성 베네딕도회 수도자들은 이민족의 침입으로 절망한 유럽인들에게 그리스도께서 주실 구원의 희망을 심어주기 위해 야고보 사도의 순례길을 조성하고, 그 길 위에 하느님 나라를 감각적으로나마 경험할 수 있는 성당을 짓고 주님 승천과 재림의 조각을 장식한 것입니다.‘주님 승천’ 상을 입구에 처음으로 장식한 곳은 프랑스 툴루즈의 생 세르냉 대성전(L’eglise St. Sernin) 입니다. 생 세르냉 대성전 남쪽 ‘미겔빌레의 문’(Porte des Miegeville) 위 반원형 팀파눔(성당 정문 상부의 삼각형 또는 반원형 공간 장식)에 돋을새김으로 주님 승천 도상이 새겨져 있습니다. 이 도상은 승천하시는 주님과 그 아래에서 이를 지켜보고 있는 제자들의 모습으로 나뉘어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양팔을 펼치고 기도하는 모습으로 승천하십니다. 주님의 두 발은 구름 위에 떠 있습니다. 승천 후 주님께서는 성부 오른쪽에 앉으십니다. 그래서 조각가는 거울 효과(좌우가 뒤바뀜)를 줘 성당에 들어오는 이들이 주님께서 하늘 오른편으로 올라가는 것처럼 보이도록 몸을 살짝 틀어놓았습니다. 성부 오른편에 앉으시는 것은 천주성의 영광과 영예를 입으신 분이 하느님 나라와 당신에게 주어진 모든 민족과 나라를 영원히 통치하심을 드러내는 것입니다.하느님 나라와 지상 세계는 포도 덩굴로 구분됩니다. 지상의 사도들은 구름 위로 올라가신 주님을 놓치지 않기 위해 하늘을 쳐다보고 있습니다. 이 도상에는 사도들만 등장합니다. 고대와 비잔틴 시대 도상과 달리 성모 마리아는 빠져 있습니다. 사도 수도 열둘입니다. 사도 무리 중 맨 가운데 자리는 천국의 열쇠를 쥐고 있는 베드로 사도가 있습니다. 오른편은 아마도 바오로 사도인 듯합니다. 얼굴에 더부룩하게 수염이 나 있고 성경을 들고 있기 때문입니다. 전통적으로 요한 사도는 수염이 없는 젊은이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사도들 양쪽 끝단에는 두 천사가 두루마리를 펼쳐 보이며 “승천하신 저 예수님께서는 너희가 보는 앞에서 하늘로 올라가신 모습 그대로 다시 오실 것”(사도 1,11)이라고 알려주고 있습니다. 주님 승천 조각을 입구에 장식한 대표적인 로마네스크 성당은 생 세르냉 대성전 외에도 스페인 레온의 산 이시도르 성당, 프랑스 앙굴렘 대성당 등이 있습니다. 조토가 그린 주님 승천 프레스코. 성경 원문에 가장 충실한 작품이라는 평을 받고 있다. 조토의 주님 승천조토(Giotto di Bon done, 1266~1337)는 인간의 감정을 무시하는 중세의 전통 회화 요소들을 과감하게 떨쳐버리고 대상을 사실적으로 표현했습니다. 그래서 미술사학자들은 조토를 르네상스의 문을 연 ‘서양 회화의 아버지’라고 평합니다. 조토는 엔리코 스크로베니(Enrico Scrovegni)가 이탈리아 파도바에 있는 자신의 저택 옆에 지은 ‘산타 마리아 델라 카리타’(Santa Maria della Carita) 경당에 예수 그리스도와 성모님의 생애를 주제로 1304~1306년 프레스코 작품을 남깁니다. 이 경당은 단테의 「신곡」에도 등장할 만큼 악명 높았던 고리대금업자인 부친 레지날도 스크로베니의 죄를 보속하기 위해 지은 경당이었기에 원래 이름보다 ‘스크로베니 경당’ ‘아레나 경당’으로 더 많이 알려졌습니다. 이 경당에 조토가 그린 ‘주님 승천’ 프레스코는 성경 원문에 가장 충실한 작품이라고 합니다. 이 프레스코 역시 주님 승천과 그 승천을 목격하고 있는 성모 마리아와 제자들의 모습으로 나뉩니다. 구름을 딛고 하늘 오른편으로 승천하시는 주님의 모습은 생생하리만큼 역동적이고 사실적입니다. 주님뿐 아니라 성모님과 사도들, 천사들의 표정과 옷 주름, 바람의 묘사는 조토 이전에는 볼 수 없었던 것입니다.주님의 두 손은 벽화 프레임을 뚫고 보이지 않습니다. 주님의 흰 옷자락은 바람에 일렁입니다. 천사들과 구약의 성조와 왕들, 예언자들이 승천하시는 주님의 양옆에 늘어서서 환호하고 있습니다. 지상에서는 흰옷을 입은 두 천사 양편으로 성모님과 사도들이 무릎을 꿇고 고개를 들어 승천하시는 주님을 보면서 기도하고 있습니다. 눈여겨볼 것은 사도들의 수가 예수님을 배신한 유다 이스카리옷을 제외한 11명이라는 점입니다. 마티아가 유다의 빈자리를 채우기 이전, 또 이방인의 사도인 바오로가 주님께 부름을 받기 이전에 주님 승천이 있었다는 성경의 시점을 조토는 분명하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리길재 기자 teotokos@cpbc.co.kr cpbc2018.08.14
![[이창훈 위원의 사도행전 이야기] (4) 성령 강림 (2,1-13)](//cpbc.co.kr/CMS/newspaper/2019/01/rc/744686_1.0_titleImage_1.jpg)
[이창훈 위원의 사도행전 이야기] (4) 성령 강림 (2,1-13)성령으로 일치돼 예수님 위업 전한 제자들 오순절의 첫 성령 강림 사건은 예수님의 제자들이 함께 모여 있는 집에서 일어난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모인 곳에 예수 그리스도의 영이자 하느님의 영인 성령께서 함께하신다는 것을 보여주는 사건이다. 사진은 파리 루브르 박물관에 있는 장 레스투(1692~1768)의 ‘성령 강림’ 그림. 사도행전은 성령 강림 사건이 유다를 대신해 마티아를 사도로 뽑은 다음에 일어났다고 전합니다. 저자 루카는 첫 성령 강림이 일어났을 때의 상황을 마치 현장을 중계하듯이 소개합니다. 성령 강림은 “오순절이 되었을 때”에 일어납니다.(2,1) 오순절은 과월절, 초막절과 함께 유다인들의 3대 명절에 속합니다. 오순절은 과월절, 곧 파스카 축제가 지나고 50일째 되는 날입니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후 40일 동안 제자들에게 여러 번 나타나셨음을 고려한다면(사도 1,3), 오순절은 예수님께서 승천하신 후 10일째 되는 날인 셈입니다. 사도행전의 저자는 성령 강림이 일어났을 때에 “그들이 모두 한자리에 있었다”(2,1)고 전합니다. 그들은 누구였을까요? 마티아 사도를 뽑았을 때 함께 있던 이들, 사도들을 포함해 120명가량 되는 형제들이었을 것입니다. 그들 가운데는 사도들과 한마음으로 기도에 전념하던 이들, 곧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와 형제들, 그리고 예루살렘에서부터 예수님을 따랐던 여자들도 있었겠지요. 한자리에 모여 있었다는 그곳은 어디일까요? 확실한 것은 예루살렘 성전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그들이 묵고 있던 위층 방(사도 1,13)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루카는 이어 성령 강림의 모습을 아주 사실적으로 표현합니다. “갑자기 하늘에서 세찬 바람이 부는 듯한 소리가 나더니 온 집 안을 가득 채웠다. 그리고 불꽃 모양의 혀들이 나타나 갈라지면서 각 사람 위에 내려앉았다.”(2,2-3) 구약성경에서 바람이나 불은 하느님의 힘이 작용한다는, 하느님 현존의 표시이기도 하지요. 주목할 점은 성령이 사도들에게만 아니라 “각 사람 위에” 곧 거기에 있는 모든 사람에게 내려앉았다는 사실입니다. 그런데 사도행전 본문에는 아직까지 성령을 직접적으로 언급하지는 않습니다. 루카는 불꽃 모양의 혀가 각 사람 위에 내려앉은 다음에야 비로소 성령을 이야기합니다. “그러자 그들은 모두 성령으로 가득 차, 성령께서 표현의 능력을 주시는 대로 다른 언어들로 말하기 시작하였다.”(2,4) 120명이나 되는 사람이 모두 성령으로 가득 차 서로 다른 언어로 말한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요? 성령 세미나에서 이상한 언어로 말을 하는 장면을 연상하면 쉽게 이해할 수 있겠지요. 대단히 시끄러웠을 것입니다. 그 소리에 사람들이 무리를 지어 달려옵니다. 그들은 “세계 모든 나라에서 온 독실한 유다인들”(2,6)이었습니다. 독실한 유다인이란 유다교의 율법과 전통에 충실한 또는 적어도 충실하려고 노력하는 이들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들은 ‘디아스포라’라고 하는 세계 각지에 흩어져 있는 유다인 공동체에 있던 사람들로서 예루살렘에 잠시 다니러 온 사람들이거나 예루살렘에 한동안 눌러살고 있는 이들이었을 것입니다. 오순절을 맞아 순례하러 온 사람들도 있었을 터입니다. 그런데 이들은 와서 보고는 놀라고 신기해하면서 이렇게 말합니다. “지금 말하고 있는 자들은 모두 갈릴래아 사람들이 아닌가? 그런데 우리가 저마다 자기가 태어난 지방 말로 듣고 있으니 어찌 된 일인가? 파르티아 사람, 메디아 사람, 엘람 사람, 또 메소포타미아와 유다와 카파도키아와 폰토스와 아시아 주민, 프리기아와 팜플리아와 이집트 주민, 키레네 부근 리비아의 여러 지방 주민, 여기에 머무르는 로마인, 그리고 크레타 사람과 아라비아 사람인 우리가 저들이 하느님의 위업을 말하는 것을 저마다 자기 언어로 듣고 있지 않는가?”(2,7-11)여기서 언급하고 있는 지방들이 오늘날 어디인지 잠시 알아봅니다. 파르티아와 메디아와 엘람은 오늘날의 이란 지역입니다. 메소포타미아는 지금의 이라크, 카파도키아는 터키 동부 지방, 폰토스는 터키 북부의 흑해 연안, 아시아는 터키 서부 에게해 연안, 프리기아와 팜필리아는 터키 중남부 지방을 가리킵니다. 오늘날로 보면 지중해 일대와 북아프리카, 중동 근동 지역인데, 당시에는 ‘땅끝에 이르는 모든 민족’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루카는 복음서에서 “예루살렘에서부터 시작하여 죄의 용서를 위한 회개가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모든 민족에게 되어야 한다. 너희는 이 일의 증인이다”라고 하시는 예수님 말씀을 전하고 있는데(루카 24,48), 사도행전의 이 대목은 이 말씀이 이제 성령을 받은 사도들을 통해 실현되기 시작하고 있음을 암시한다고 하겠습니다. 이 대목에서 특별히 두 가지를 더 주목하고자 합니다. 우선, 지방마다 서로 다른 말을 쓰는 사람들이 제자들이 하는 말을 모두 자기 지방 말로 듣고 있다는 것입니다. 구약성경은 사람들이 쓰는 말이 서로 갈라진 것은 바벨탑 때문이라고 전합니다.(창세 11,1-9) 이름을 드날리고자 하는 사람들의 교만과 야욕이 바벨탑을 쌓았고 그 결과로 말이 갈라지는 혼란을 낳은 것입니다. 그런데 성령으로 가득 찬 사람들이 서로 다른 말을 하는데도 듣는 사람들이 모두 자기 지방 말로 알아들었다는 것은 성령으로 말미암아 이제 혼란이 극복되고 일치가 시작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교만은 분열과 혼란을 초래하지만, 성령께서는 일치와 이해를 가져다주십니다. 둘째, 말소리를 듣고 달려온 사람들은 제자들이 하는 말을 단지 자기네 말로 들은 것으로 그치지 않고 그 내용이 무엇인지를 알아들을 수 있었습니다. 제자들이 “하느님의 위업”을 이야기하고 있는 것을 알아들은 것입니다. 제자들이 하느님 위업을 말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듣게 된 것은 단지 말이 통해서가 아닐 것입니다. 그 말을 듣는 사람들은 태어난 곳은 서로 다르고 쓰는 말이 다르지만 “독실한 유다인들”이라는 점에서 공통됩니다. 하느님을 믿는 유다인들이었기에 제자들이 이야기하는 ‘하느님의 위업’을 알아들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물론 모든 사람이 다 놀라워하고 신기해하지는 않았습니다. 그래서 루카는 “더러는 ‘새 포도주에 취했군’ 하며 비웃었다”(2,13) 하고 전합니다. ‘새’ 포도주에 취했다고 말한 이유는 오순절이 첫 수확을 끝내고 하느님께 맏물을 바치는 추수감사절이어서 새 포도주를 마실 수 있기 때문이었습니다.생각해봅시다예루살렘 성전은 하느님께서 거처하시는 곳입니다. 그런데 하느님의 영인 성령이 이제는 제자들이 모여 기도하는 이층방에 내립니다. 이 사실은 대단히 중요합니다. 성전은 여전히 하느님의 집이고 하느님의 영인 성령이 거처하시는 궁전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이름으로 제자들이 모인 곳에 첫 번째 성령 강림이 일어난 이후 사정은 달라집니다. 성령께서는 예수님의 이름으로 모인 곳에 함께하신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이름으로 모입니까. 그런 우리 모임에 성령께서 함께하심을 느끼십니까? 성령께서 함께하심을 느끼지 못한다면 그 이유는 무엇이라고 보십니까? 사도행전 이야기를 해나가면서 이런 물음을 계속 던지며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평화신문2019.01.22

허규신부와 떠나는 신약 여행(98) “나는 두 증인을 내세워 천이백육십일 동안 자루옷을 걸치고 예언하게 할 것이다”(묵시 11,3)두 증인이 하느님을 세상에 드러낼 것이다 요한 묵시록은 하느님의 두 증인이 사람들의 회개를 선포하고 하느님의 힘을 세상에 드러내는 내용을 전하고 있다. 그림은 네 명의 천사가 미카엘 대천사를 둘러싸고 세상 종말을 알리는 나팔을 불고 있는 모습. 로지에 반 데르 바이덴 작 ‘최후의 심판’. 출처=가톨릭 굿뉴스 일곱 봉인의 환시 후에 전하는 일곱 나팔의 환시는 마찬가지로 재앙을 이야기합니다. 요한 묵시록에서 말하는 지속되는 재앙은 점점 강해지고 확장되는 모습으로 그려집니다. 일곱 봉인이 구약 성경과 복음서에 나오는 재앙들과 비슷한 것처럼 일곱 나팔에 의한 재앙 역시 그렇습니다. 특히 이 재앙들은 탈출기에서 찾을 수 있는, 이집트에 내린 열 가지의 재앙을 생각하게 합니다. 일곱가지 재앙첫째 재앙은 우박과 불을 내리는 것인데 이것은 이집트에 내린 일곱째 재앙과 상응합니다.(탈출 9,23-26) 불타는 큰 산과 같은 것이 바다에 던져져 바다가 피처럼 변한다는 둘째 재앙은 탈출기의 첫째 재앙을 생각하게 합니다.(탈출 7,20-25) 셋째 재앙은 강과 샘의 물을 마실 수 없게 되었다는 것인데, 이것과 비슷한 재앙을 탈출기에서 찾기는 어렵습니다. 넷째 재앙은 해와 달과 별에 내린 것으로 어둠을 가져오는 재앙입니다. 이 재앙은 이집트에 내린 아홉째 재앙과 비슷합니다.(탈출 10,21-23) 다섯째 재앙은 이집트에 내린 여덟째 재앙과 비교할 수 있습니다.(탈출 10,12-20) 메뚜기를 소재로 삼는 이 재앙은 특별히 중요한 의미를 갖습니다. 왜냐하면, 명시적으로 지금 세상에 내린 하느님의 재앙이 누구를 목표로 하는 것인지 알려주기 때문입니다. “그것들은 땅의 풀과 푸성귀와 나무는 하나도 해치지 말고, 이마에 하느님의 인장이 찍히지 않은 사람들만 해치라는 명령을 받았습니다.”(묵시 9,4) 하느님의 인장을 받은 사람들은 이미 보았던 것처럼 믿음을 가진 모든 이들을 의미합니다. 현대적인 의미에서 세례나 견진성사를 통해 우리는 하느님의 인장을 받습니다. 이 재앙들은 믿지 않는 이들, 더 나아가 하느님을 거부하고 악의 세력에 동조하는 이들에게 내리는 재앙입니다. 이런 내용은 여섯째 나팔에 의한 재앙에서도 드러납니다. 동쪽에서 다른 민족이 쳐들어와 로마와 맞서 싸울 것이고 악의 세력이 패배할 것을 보여주는 여섯째 재앙에서 역시 구체적으로 그 대상이 표현됩니다. “이 재앙으로 죽임을 당하지 않은 나머지 사람들도 저희 손으로 만든 작품들을 단념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마귀들을 숭배하고, 또 보지도 듣지도 걸어 다니지도 못하는, 금이나 은이나 구리나 돌이나 나무로 만든 우상들을 숭배하기를 그치지 않았습니다.”(묵시 9,20) 일곱 봉인의 환시와 마찬가지로 일곱 나팔의 환시에서도 성격이 전혀 다른 환시 하나를 찾을 수 있습니다. 그것은 하느님의 두 증인에 대한 환시입니다. 묵시 10―11장에 나오는 환시는 재앙의 대상이 되는 악의 세력을 향한 것이 아닌 믿는 이들을 향한 환시입니다. 하느님 뜻을 전하는 두 증인두 증인은 구약성경에 나오는 예언자의 모습과 닮았습니다. 불이 나와 원수들을 삼켜버리고 비가 내리지 않게 하는 것은 엘리야 예언자를, 물을 피로 변하게 하고 온갖 재앙으로 땅을 치는 권한을 가진 것은 모세를 연상케 합니다. 모세와 엘리야는 구약 성경에서 하느님께서 보낼 종말론적인 예언자로 표현됩니다. 모세에게 한 하느님의 약속은 종말 때에 일으켜 줄 예언자의 모습을 표현합니다.(신명 18,18) 또한 엘리야는 죽음을 맞지 않고 하늘로 불려간 예언자로(2열왕 2,11), 사람들은 언제인가 다시 엘리야 예언자가 올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물론 요한 묵시록에서 말하는 두 증인이 모세와 엘리야 예언자를 의미하는 것은 아닙니다. 구약 성경의 가장 뛰어난 두 예언자의 특징을 통해 두 증인의 역할을 소개하는 것입니다. 마치 구약성경에서 당신 백성의 구원을 위해 모세와 엘리야 예언자를 파견하신 것처럼, 하느님은 종말에 앞서 하느님의 뜻을 전하고 예언할 두 증인을 보내실 것입니다. 이 두 증인은 1261일 동안, 상징적으로 영원하지 않은 일시적인 시간 동안 사람들의 회개를 선포하고 하느님의 힘을 세상에 드러낼 것입니다. <가톨릭대 신학대학 성서학 교수> 평화신문2018.05.08
종교담당 기자, 예수의 발자취를 쫓다 예수를 만나다 예수를 만나다 백성호 글ㆍ사진 / 아르테 / 2만 2000원“만약 이런 식의 기도라면 어떨까. 여기에는 ‘머무름’이 보이지 않는다. 오히려 ‘내려놓음’이 보인다. 머물지 않는 기도는 항구를 떠난다. 바다를 향해, 신의 속성을 향해 나아간다.”중앙일보 종교담당 백성호 기자가 성경 속 예수의 자취를 따라가는 ‘구도의 기행문’을 펴냈다. 평소 종교의 진리에 관해 ‘취재’에만 그치지 않고, 수도자의 시각으로 심취한 결과물이기도 하다.우리가 집착을 안고 기도하더라도, 비록 투덜대더라도 예수는 말한다. “청하여라, 너희에게 주실 것이다. 찾아라, 너희가 얻을 것이다”(마태 7,7)하고 말이다. 기자는 예수님 말씀을 따라 이스라엘로 떠났다. 오늘의 이스라엘에서 2000년 전 예수에게 질문을 던진다. 갈릴래아 호숫가를 거닐다 출렁이는 물살을 보고 우리 삶을 파도에 비유하기도 하고, 마르코복음에 등장하는 하혈하는 여인을 자신의 삶에 투영해보기도 한다.저자는 하혈하는 여인이 출혈을 멈춘 것은 단순히 옷자락을 만져서가 아니라, 예수 안에 깃든 신의 속성이 닿은 것이라 말한다. 하혈하는 여인이 지녔던 상처의 뿌리가 치유된 것처럼 우리도 ‘빛의 힘’을 믿어야 참 치유를 이룬다는 것이다.예수는 왜 “내가 세상에 평화를 주러 왔다고 생각하지 마라. 평화가 아니라 칼을 주러 왔다”(마태 10,34)고 했을까. 당나라 임제 선사가 ‘집착’을 죽이라고 했듯이, 이는 예수님도 집착하는 평화, 가짜 평화에 집착하는 행위를 끊어버리라고 요청한 것이다. 죽음과 부활의 의미까지 기자의 눈으로 풀어낸 성경 지식이 꽤 진중하고 이채롭다.이정훈 기자 sjunder@cpbc.co.kr 백영민2018.06.07

“교황 성하의 축복으로 평화의 길을 열었습니다”문재인(티모테오) 대통령, 교황청 기관지 ‘로세르바토레 로마노’(17일 자) 특별 기고문 문재인 대통령과 김정은 위원장이 9월 19일 평양에서 열린 남북 정상회담에서 공동선언문을 발표하고 악수하고 있다. 평양사진공동취재단 한-교황청 수교 55주년을 맞아 교황청을 방문하게 된 것을 매우 뜻깊게 생각합니다. 그동안 교황청이 한반도의 평화를 강력하게 지지해주신 것에 대해 대한민국 국민들을 대신하여 깊이 감사드립니다.예수님의 삶에서 민주주의는 시작되었습니다. 예수님은 높은 곳을 버리고 지극히 낮은 곳으로 오셨습니다. 가난한 이들, 힘없고 아프고 소외된 이들과 함께하셨습니다. 예수님 곁에서는 지위 고하, 빈부와 남녀의 차이를 불문하고 사람으로서 똑같이 존엄했습니다. 가톨릭은 하느님 앞에 모든 사람이 평등하다는 교리를 가지고 한국에 왔습니다. 사람은 하느님의 형상을 따라 창조되었으므로 모두가 똑같이 존엄하다는 가톨릭의 인간관이 신분사회에 속해 있던 한국을 깨어나게 했습니다. 이러한 신념을 지키기 위해 많은 한국인들이 순교했습니다.성경 통해 민주주의 익히고 불의에 맞서 한국은 가톨릭 국가가 아니지만 ‘성경’을 통해 민주주의를 익히고 불의와 맞서는 용기를 얻었습니다. 군사독재 시절 한국의 ‘성당’은 민주주의의 성지였고, 피난처였습니다. 많은 사제들이 ‘가톨릭 사회교리’에 따라 민주화 운동에 함께했습니다. 평신도들도 “세상 가운데 있는 교회의 사람이요, 교회 안에 사는 세상의 사람”으로서 예수님의 삶처럼 정의와 평화, 사랑의 구현에 충실하고자 노력했습니다. 그것이 한국에서 가톨릭이 존경받는 이유입니다.한국 가톨릭은 불의한 국가폭력에 맞섰지만 끝까지 평화를 옹호했습니다. 민주주의는 궁극적으로 인간의 존엄을 회복하는 길이며, 그 길은 평화적이어야 한다는 점을 끊임없이 일깨워주었습니다. 2017년 추운 겨울의 그 아름답고 평화로웠던 촛불혁명의 정신에 그 가르침이 있었습니다.2018년 한반도 평화를 위한 우리 국민의 여정에서 교황 성하의 기도와 축복은 큰 격려와 희망이 되었습니다. 나는 한반도의 평화와 번영의 새 시대를 열기 위한 전인미답의 길을 걸어가는 동안 화해와 평화를 위한 “만남의 외교”를 강조하신 교황 성하의 메시지를 항상 기억했습니다. 나와 북한의 김정은 위원장은 지난달 평양에서 역사적인 ‘9월 평양공동선언’을 채택했습니다. 남·북한은 군사적 대결을 끝내기로 결정했습니다. 미국과 북한도 70년의 적대를 끝내고 마주 앉았습니다. 북한은 핵실험과 미사일 도발을 더 이상 하지 않게 되었고 한미 양국도 대규모 연합훈련을 중단했습니다. 만남과 대화가 이룬 결과입니다. 예수님은 증오를 없애고 화해를 낳기 위해 희생하셨습니다. 그리고 평화로 부활하셨습니다. 부활 후 제자들에게 “평화가 함께하길”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동안 남북이 만나고, 북미가 대화하기까지 많은 희생이 있었습니다. 이제 우리는 분단과 대결을 평화를 통해 번영으로 부활시킬 것입니다.교황청과 북한 교류도 더 활성화되길지난 9월의 평양 방문 때 한국 가톨릭을 대표하여 김희중 대주교께서 함께 가셨습니다. 남·북한 가톨릭 간의 교류를 위해서입니다. 교황청에서도 각별한 관심과 지원을 기울여 주시기를 바랍니다. 나아가 교황청과 북한의 교류도 더욱 활성화되기를 기대합니다.남북의 진정한 화해와 협력, 항구적 평화는 정치와 제도가 만들어낸 변화 이상이 필요합니다. 단지 경제적 이익을 나누는 것만이 아니라 서로가 형제처럼 아끼는 마음이 필요합니다. 나는 지난 9월 ‘사람 중심’의 국정철학을 기반으로 ‘포용국가’를 선언했습니다. 프란치스코 교황 성하의 “공동선과 진보와 발전을 단순히 경제적 개념으로서가 아니라, 궁극적으로는 사람을 중심으로 이해해야 한다”라는 말씀에 깊이 공감하고 있습니다. 가톨릭, 한반도의 든든한 동반자 돼 주길가톨릭은 폭력과 혐오, 차별과 착취, 무관심과 무관용, 불평등과 소외를 극복하기 위해 노력해왔습니다. 물질문명과 무한경쟁사회의 한 줄기 빛으로, 시대의 아픔을 포용하는 힘과 지혜를 가지고 있습니다. 가톨릭은 예수님이 이루시고자 했던 사회가 무엇인가를 고민하고 실천하고 있습니다. 포용을 추구하는 한반도의 든든한 동반자가 되어줄 것이라 믿습니다. 나와 우리 국민은 “모든 갈등에 있어 대화만이 유일한 해결책”이라는 교황 성하의 말씀을 마음에 깊이 새깁니다. 민주주의와 한반도의 항구적 평화, 포용국가를 향해 굳건히 나아갈 것입니다. 그 길에 교황 성하의 축복과 교황청의 기도가 언제나 함께하기를 바랍니다. cpbc2018.10.17
![[군종교구 사목교서] 모든 이를 섬기는 삶](//cpbc.co.kr/CMS/newspaper/2018/12/rc/741888_1.0_titleImage_1.jpg)
[군종교구 사목교서] 모든 이를 섬기는 삶군종교구 “내가 너희의 발을 씻었으면, 너희도 서로 발을 씻어 주어야 한다.”(요한 13,14)저는 금년의 사목표어를 “모든 이를 섬기는 삶”으로 정했습니다. 지난 2년간 우리는 ‘군의 복음화에 대한 열정’을 묵상하고 실천에 옮기려 노력해왔습니다. 그런데 ‘복음화’는 세상에 복음을 전해 사람들을 회개로 이끌어 하느님의 자녀로 만드는 일과 함께, 하느님의 자녀가 된 그리스도인들의 삶이 변화되어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그리스도를 닮아감에 있어 중심이 되는 것이 바로 ‘사랑에 기초한 섬김’의 삶입니다. 이 ‘섬김의 삶’은 나이, 직위, 학력, 재산, 성격, 출생지, 민족, 피부색 등 모든 차이를 초월하게 해줍니다. 친절하고 겸손하고 배려심 깊은 ‘섬김의 삶’을 모든 이에게 실천하도록 합시다. 그리고 이 어려운 삶을 기꺼이 실천할 힘을 성령님께 청하도록 합시다. 저는 금년의 사목표어인 “모든 이를 섬기는 삶”과 관련하여 군종사목에 직접 임하는 군종 사제들과 군종교구의 모든 교우에게 몇 가지를 요청하고 싶습니다. 군종사목의 목자이신 군종 사제들은 ‘사랑에 기초한 섬김’의 모범을 보이면서, 모든 군 가족들을 ‘돌보고 위해주는’ 삶을, 특히 영적으로 돌보아주는 삶을 더욱 충실히 해주시길 겸손히 요청합니다. 영적인 돌봄에서는 무엇보다 군 신자들에 대한 ‘계속 교육’에 관심을 가져주시기 바랍니다. 이 교육의 방법으로 기도생활로 인도하기, 성경공부 촉진하기, 성체성사를 더 가까이하는 삶으로 인도하기, 본당 공동체 안에서의 형제적 친교 촉진하기에 노력해주시기 바랍니다. 장병들에게 우선적 관심을 두면서, 그들의 아버지요, 형님이요, 친구요, 상담자로서 친절히 그리고 가까이 대하시고, 특히 오지나 어려운 환경에서 근무하는 장병들을 더욱 자주 찾아주시어 위로와 격려를 해주시길 요청합니다. 이것이 ‘현장을 중심으로 하고, 장병들에게 보다 가까이 가라’는 군 당국의 요청에도 응답하는 길이 됩니다. 이와 함께 하느님에 대해 또 영적인 데에 관심을 두는 장병들을 교리반으로 친절히 인도하여 주시길 요청합니다. 정성을 쏟는 만큼 그리고 힘을 쏟는 만큼 결실은 더 많고 더 크게 됩니다. 군종 사제들은 군 장교로서 모든 군인을 계급과 종교와 출신을 초월하여, 존경하고 예를 갖추어 주고 도움을 주어 ‘섬김의 자세’를 보여주시기 바랍니다. 신자들 편에서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모범과 말씀으로 가르치신 ‘사랑에 기초한 섬김의 삶’을 성실히 추구하시기 바랍니다. 이 세상 누구에게든 ‘상호 사랑’ 곧 형제애가 지닌 친절과 겸손과 배려의 자세를 늘 실천에 옮겨주시기 바랍니다. 이 섬김의 삶이 여러분을 ‘세상의 빛과 소금’으로 만들어줄 것입니다. 저는 우리 군 신자들이 군에서만이 아니고 사회와 국가 차원에서도 빛과 소금의 역할을 해주심에 대해 하느님께 감사드립니다. 평화신문2018.12.19
![[평신도 영성 나는 평신도다] (15)한국 교회 평신도 사도직의 현주소 3 : 쉬는 신자](//cpbc.co.kr/CMS/newspaper/2019/03/rc/748731_1.0_titleImage_1.jpg)
[평신도 영성 나는 평신도다] (15)한국 교회 평신도 사도직의 현주소 3 : 쉬는 신자신자들에게 영적 충만함 주고 있는가 신자들이 냉담하지 않게 하기 위해선 삶이 신앙으로 충만할 수 있도록 영적인 일을 우선해야 한다. 그것이 참 교리이고 참 소공동체이다. 강우일 주교가 서울 대방동본당 소공동체 모임을 체험하고 있다. 가톨릭평화신문 DB 요즘 쉬는 신자 문제가 교회의 중요한 화두로 떠오르고 있습니다. 현재 대다수 본당에서는 이 문제가 먼 산의 불이 아니라 발등의 불이 된 지 오래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 냉담 문제를 어떻게 풀어나가야 할까요. 우선 냉담의 원인이 무엇인지에 대해 파악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원인을 알아야 해법을 알 수 있으니까요.우선 현행 교리 방식의 문제를 살펴볼 수 있겠습니다. 냉담은 머리로만 배우는 교리교육 방식, 혹은 구체적으로 종교에 대해 배우지 못하고 가족과 이웃의 권유로 자신도 모르게 대충 종교를 가지게 되어서 일어나는 현상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주입식 교리교육 정답일까현재 교리교육은 주입식 교육에서 아직 탈피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성경과 교리를 공부로 가르칩니다. 이렇게 공부한 것이 얼마나 머리에 오래 남아 있겠습니까. 과거 농경사회에서는 한번 공부를 하면, 그것이 평생 머리에 남아있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배우는 것이 극히 한정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지금은 농경사회가 아닙니다. 매일 수없이 많은 정보가 계속 쏟아져 나오고 있으며, 우리의 머리는 그 정보들을 매일 흡수하느라 피로도가 심합니다. 그러다 보니 어떤 것이 머리에 들어와도 다른 것으로 이내 대체가 됩니다.또 한 가지 말하고 싶은 것은 끼리끼리 문화입니다. 대부분의 예비신자들은 가까운 이웃이나 친지의 권유로 성당에 나오게 됩니다. 그런데 세례를 받은 후에도 그 권유자를 중심으로 모임을 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물론 성당에 인도해 주신 분만큼 감사한 분이 또 있겠습니까. 하지만 평신도 신앙의 중심은 삼위일체이신 하느님이어야 합니다. 성당이 친목 모임 비슷하게 흐르다 보니 그 친목의 끈이 끊어지면 갈 곳이 없어집니다. 성당의 모든 친목은 하느님과의 친목을 위한 것입니다. 이러한 친목은 뜨겁습니다. 이 뜨거움을 가지고 있지 않기에 금방 차가워지는 것입니다. 쿨(cool)해지는 것입니다. 예비신자 분들이 영적으로 차가운 겨울을 보내지 않도록 우리는 뜨거운 옷을 만들어 드려야 합니다. 그 두툼한 옷을 만들어 드리는 작업이 바로 참 교리입니다. 참 소공동체입니다.또 세례받은 직후에 바로 과다한 봉사활동에 뛰어들어 자신의 기력을 소진시키는 이들이 있습니다. 이것도 문제입니다. 봉사는 영적으로 어느 정도 성장한 이후에 해야 합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닮으려고 신앙생활을 하는 것이지, 일하려고 신앙을 선택한 것이 아닙니다. 일은 종교가 없는 사람도 잘합니다. 우리는 영적인 일을 해야 합니다. 일이 중요하지 않다는 말이 아니라, 일이 우선이 아니라 영이 우선이라는 말입니다.종교의 불완전함에서 오는 불만냉담의 또 다른 원인은 종교적 삶에 대한 불만입니다. 특히 일부 종교 지도자들의 나약한 모습을 통해 불만과 불평이 쌓이고 이를 통해 종교적 냉담이 생겨날 수 있습니다. 실제로 기성 종교의 소소한 생활에 대한 제한, 기성 종교의 불완전함 등에서 오는 불만들은 무의식적으로 종교적 불만으로 바뀔 수 있습니다. 이처럼 종교적 냉담 중 상당 부분은 종교에 대한 불만 속에서 나타납니다.이렇게 되면 평온함을 찾기 힘들어집니다. 성당에 가도 추운 느낌을 받습니다. 뜨거워야 하는데 그렇지 않습니다. 이렇게 냉담에 빠지게 되면 일상에서 종교적 충만함을 경험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기도, 미사 참여와 같은 종교적 활동이 고통스럽고 지루한 시간이 되고 맙니다. 복음화는 불가능해지죠. 그리고 온통 죄의식에만 사로잡혀서 평화를 누리기 힘듭니다.죄의식 또한 쉬는 신자들이 성당에 나오지 않는 이유 중 하나입니다. 나쁜 짓만 하며 살려고 하는 사람이 과연 얼마나 되겠습니까. 1년 내내 죄를 짓겠다고 다짐하며 사는 사람이 얼마나 있겠습니까. 죄의식에 너무 사로잡히면 안 됩니다. 물론 우리 각자에게는 부족한 점이 있지만, 대부분 평신도는 열심히 잘 살아보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그렇게 80~90% 열심히 살려고 한 것을 감사하고 다짐하면 되는데 고작 10% 정도 잘못한 것에 매여서 살아가는 것이 우리입니다.이제 하느님에게서 떨어진 삶이 아닌, 하느님과 함께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평신도는 세상에 외롭게 던져진 존재가 아닙니다. 하느님에 의해 축성된 하느님의 자녀, 하느님의 백성입니다. 이제, 평신도들이 세상 안에서 어떤 삶을 살아야 하는지에 대해 좀 더 구체적으로 살펴보겠습니다.정치우(안드레아, 새천년복음화학교 교장) cpbc2019.03.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