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내 집처럼 가꾼 기도의 집에서 신앙 키우세요”서울 성북구 위치한 가톨릭교리신학원 ‘기도의 집' 기도의 집에서 봉사하는 가톨릭교리신학원 졸업생들. 몸은 서울대교구 가톨릭교리신학원(원장 최승정 신부)을 떠난 졸업생들이지만 세상의 복음화에 이바지하고 싶은 작은 희망으로 가톨릭교리신학원이 운영하는 ‘기도의 집’(관장 김진태 신부)을 제집처럼 드나들며 봉사하는 이들이 있다.서울 성북구 성북로 기도의 집 마당. 가톨릭교리신학원 졸업생들이 빗자루로 낙엽을 쓸고, 쓰레기 분리수거를 한다. 사무실에서 피정 접수 및 문의 전화를 받고, 숙소의 침구류 정리도 한다. 성물방 지킴이도 있다. 최근 5~6년 사이에 가톨릭교리신학원을 졸업한 평신도 선교사 40명이 지난해 9월부터 기도의 집 봉사에 나서고 있다. 가톨릭교리신학원의 교육 이념인 기억ㆍ선포ㆍ봉사에 따라, 평신도 선교사들을 위한 재교육의 장을 마련하고 지역사회 복음화를 위한 밀알이 되기 위해서다.봉사는 궂은일부터 시작했다. 40명의 봉사자는 일주일에 한 번 정해진 요일에 4시간씩 봉사한다. 연령대는 대부분 50~60대 중장년층이다. 서울을 비롯해 멀리서는 용인, 춘천에서도 봉사를 다닌다. 기도의 집 누리방을 개설, 운영하기 위해 학원에 다닌 봉사자도 있다.기도의 집은 2010년 문을 열었다. 지하 1층 지상 4층 규모로, 기도와 묵상을 위한 경당과 피정을 위한 숙소, 세미나실, 휴게실 등을 갖추고 있다. 교리신학원의 재학생과 졸업생들의 친교 장소이자, 기도 공간 및 모임 장소다. 지난해까지 청소 및 관리인을 따로 고용해 운영해왔지만, 운영비를 아끼고 졸업생들이 자발적으로 봉사하자는 목소리가 나왔고 지금은 100% 자원봉사로 운영한다.기도의 집에는 성물방 ‘성북동 성모님’에서 성물 판매와 함께 작품도 전시하고 있다. 성물방 봉사자 서영희(클라라, 69)씨는 “성북동에서 유일한 성물방으로 성북동에 나들이를 온 가족들이 종종 이곳을 찾고 있어 지역주민에게도 선교의 장이 되어가고 있다”며 뿌듯해 했다.기도의 집 운영위원회 회장 이춘식(파우스티노, 69)씨는 “세상의 어두운 곳에 있는 이들에게 복음을 전하기 위해 졸업생들이 자발적 봉사를 시작했다”며 “교리신학원 졸업생들이 기도의 집을 재교육의 장으로서 활용하는 동시에 신자들에게는 신앙생활에 도움을 주는 곳이 됐으면 좋겠다”고 말했다.기도의 집 운영위원회는 직장인들을 위한 성경공부 및 기도 모임을 비롯해 비신자를 위한 다양한 프로그램 등을 기획하고 있다.피정 및 이용 문의 : 02-747-8507, 누리방 : www.ccikido.or.kr 이지혜 기자 bonaism@cpbc.co.kr cpbc2018.11.13

고통의 바다에서 표류한다면 ‘보라, 하느님의 어린양’조너선 모리스 신부, 고통을 풀어갈 수 있는 삶의 원칙과 실천 방법 제시 고통의 이유를 찾는 당신에게 들려주는 - 하느님의 약속 조너선 모리스 지음 / 이창훈 옮김 / 가톨릭출판사 / 1만 8000원 주님은 우리가 고통 중에도 ‘함께 계시는 분’이다. 우리는 이를 믿고, 일상에서 거룩해지는 노력을 해나가야 한다. 우리 고통에는 늘 하느님이 계신다. 사진은 브라질 코르코바도 언덕에 자리잡은 예수상. 선하신 하느님은 왜 고통을 만들었을까? 이 세상에 악인(惡人)은 왜 있는 것일까?뉴스는 연일 각종 사건 사고를 보도한다. 육체적 병고와 정신 질환, 죽음과 이별, 가난과 빈곤. 지구 곳곳에서 매일같이 일어나는 끔찍한 재해와 사고들. 고통은 인류의 숙제일까, 아니면 신이 어쩌지 못하는 악마의 농간일까. 그럴 때마다 ‘하느님은 계시긴 한 걸까?’ 하는 의구심을 떨치기 어렵다. 인간 이성은 ‘하느님 뜻’을 다 헤아리기 어렵다.미국 뉴욕대교구 사제인 저자 조너선 모리스 신부는 폭스 뉴스 해설자로 활동했다. 어느 날 쓰나미와 지진으로 아시아에서 37만여 명이 사망했다는 소식에 앵커가 갑자기 저자에게 질문을 던진다. “한꺼번에 발생한 죽음과 파괴 이면에 무엇이 있는지 사람들은 궁금해합니다. 신이 화가 났나요?” 그러나 사제인 그도 생중계되는 카메라 앞에서 선뜻 답하기 어려웠다. 이를 두고두고 고민한 저자가 이에 대한 답을 쓴 책이다. 여러 서적을 우리말로 옮겨온 가톨릭평화신문 편집국장을 지낸 이창훈(알폰소) 위원이 번역했다.저자는 다소 철학적일 수 있는 주제 ‘고통의 근거’를 쉽게 풀어냈다. 저자 주변인들의 다양한 고통 체험에 교회가 전하는 진리를 잘 접목해 고통을 새롭게 마주하고 풀어갈 수 있는 ‘삶의 원칙’과 ‘실천 방법’을 엮었다. 고통에는 세 가지 얼굴이 있다. 육체적ㆍ정서적ㆍ영적 고통. 우리는 각자 고통의 실체를 잘 살피지 못하거나, 하느님과 멀어지는 ‘영적 손상’을 입기도 한다.그래서 돌아볼 것이 있다. ‘나에게 하느님은 어떤 존재인가.’ 우린 우리가 원하는 것을 그때그때 들어주는 ‘자판기 하느님’으로 인식하고 있지는 않은가. 잘못된 일에 그저 분노하는 ‘심판자 하느님’으로 여기진 않는가.저자는 “주님은 철학이 아니며 도덕률도 아니다”라며 “그분은 우리가 인격적 관계를 맺을 수 있는 살아계신 분”이라고 일러준다. 하느님은 우리가 생각하는 ‘도덕의 기준’ 역할만 하는 게 아니라, 언제나 그 고통과 함께하는 분이란 것이다.성경을 좋은 영감을 주는 ‘낱장 달력’쯤으로 여기거나, 이성으로 납득이 될 때에만 ‘찬양’한다면 ‘섭리하시는 하느님’을 제대로 알고 신뢰할 수 없다. 무신론자나 비신자들이 갖는 ‘1단계적 하느님 인식’을 넘어야 한다. 저자는 성경에 대한 ‘학문적 이해’, ‘인간 이성’ 너머에 있는 ‘살아 계신 하느님’은 언제나 우리 곁에서 ‘고통 속에 함께해주시는 분’이라고 설명한다. 그 근거가 인간의 고통을 모두 짊어지고 하늘나라로 오른 아들 예수님이다. 하느님은 당신 아들을 통해 더 큰 선(善)을 가져다주셨다. 고통을 무조건 나쁜 것으로 여기고, ‘왜 하느님이 해결해주지 않느냐’고 조급해 하는 생각과는 차원이 다르다.해법은 ‘삶의 거룩화 작업’이다. 바오로 사도처럼 ‘그리스도와 일치된 삶’을 살고자 노력하는 것. 인간은 누구나 사랑에 대한 갈망이 있기에 ‘완전한 사랑이신 분’을 사랑하도록 영혼을 인도하는 자기 노력이 필요하다.저자는 각자가 지닌 ‘뿌리가 되는 죄’를 파악하고, 이와 반대되는 ‘선한 행위’들을 삶의 목표로 세워 실천하도록 이끈다. 하느님께서 ‘더 큰 선’을 주신다는 약속에 대한 믿음은 그리스도의 손과 발이 될 우리 행동의 뿌리 역할을 한다. 고통은 아프지만, 하느님과 함께할 수 있는 또 다른 계기다.이정훈 기자 sjunder@cpbc.co.kr 백영민2018.08.29

전례력 ‘나해’, 나를 위한 복음의 양식 세 권2018년은 전례력으로 ‘나해’에 해당한다. 새해를 맞아 사제들이 이에 따른 복음의 참뜻과 거룩한 독서방법을 전하는 해설집과 성경을 바탕으로 쓴 에세이 등 신간을 잇달아 내놨다. 말씀을 향한 신자들의 ‘복음 열정’을 더욱 드높여줄 사목자들의 책을 소개한다. 일어나 가자 - 뜻으로 듣는 복음(나해) 홍승모 몬시뇰 지음 /위즈앤비즈 / 1만 5000원 사람들은 요한 세례자를 ‘세례를 베푸는 사람’으로 여겼다. 죄에 대한 정화의 권능과 세례를 베푸는 행위를 보며 사람들은 그를 최고 예언자요, 지도자로 추앙하기까지 했다. 저자 홍승모(인천가톨릭의료원장) 몬시뇰은 요한복음서에 등장하는 요한 세례자를 ‘예수님을 증언하고 알리는 사람’이었다고 그 역할을 분명히 전한다. “물로 세례를 준다”는 요한 세례자의 말은 빛을 증언할 계기를 마련해주는 사람을 공고히해주는 메시지다. 이를 통해 요한 세례자는 ‘뒤에 오시는 분’을 드높일 ‘위대한 조연’이라고 저자는 칭한다. 요한의 궁극적인 사명은 빛을 증언하여 사람들로 하여금 그리스도를 믿도록 하는 것이었다. 구약성서신학 박사인 홍 몬시뇰은 지난해 ‘가해’ 복음 해설집 「신랑이 왔다」에 이어 ‘나해’ 복음 해설집을 내놨다. 성경이 보여주는 수많은 사건과 비유의 의미를 명쾌한 해설을 통해 알기 쉽게 엮었다. 연중 전례력에 맞춰 복음에 이어지는 깊은 의미를 분명히 반추하도록 이끌어주는 길잡이와 같다. 성모 마리아는 처음 가브리엘 천사의 예수 잉태의 메시지를 받았을 때 결코 인간의 잣대로 판단하지 않았다. 마리아는 묻고 또 물었다. “보십시오,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말씀하신 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루카 1,38) 저자는 “‘종입니다’라는 고백에 마리아의 모든 마음이 실려 있다”며 “이 대답은 이미 구원의 시작을 의미하는 것”이라고 설명한다. 책은 해설에만 그치지 않는다. 저자는 각 복음 해설에 앞서 ‘깨어 있음은 어떤 실제적 의미를 지닐까요?’, ‘동방박사들의 순례 여정과 선물들이 우리에게 주는 영성적 영감은 무엇인가?’ 하고 질문하고, 그 안에 스민 복음의 뜻을 짚어주는 길잡이 역할을 자처한다. 우리와 함께하시는 하느님 신교선 신부 지음 / 생활성서 / 2만 원 “성경은 하느님께서 우리 인간에게 건네시는 ‘사랑의 속삭임’, ‘사랑의 편지’입니다.” 때마다 성경 해설서 등 신앙 서적을 꾸준히 펴내온 신교선(인천교구 용현5동본당 주임) 신부가 구약성경 전반에 대한 이해를 돕는 신간을 내놨다. 저자는 하느님의 ‘사랑의 속삭임’과 가까울수록 우리는 참 행복을 누릴 수 있다는 진리를 전하고자 책을 펴냈다고 밝힌다. 저자는 △오경 △역사서 △시서와 지혜서 △예언서에 이르는 구약성경 전반에 대한 거룩한 독서 방법을 제시한다. 노아가 살았던 시기, 하느님이 대홍수를 일으킨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저자는 대홍수는 곧 성(聖)과 속(俗)의 뒤엉킴을 통해 인류의 타락을 고발하고 있다고 전한다. 탈출기에서 하느님이 파라오와 대결을 펼친 이유, 그 속에서 드러나는 하느님 구원의 의지를 비롯해 예언서를 넘어 하느님 구원의 보편성을 가르치는 교훈서로서 요나서를 들여다봐야 하는 이유까지. 저자는 구약을 바라보는 올바른 시각을 통해 성경을 읽는 근본 이유를 되새겨준다. 가톨릭평화방송 TV는 4일부터 매주 목요일 오전 8시 ‘신교선 신부의 알기 쉬운 구약 체험’ 방영을 시작했다. 신 신부의 TV강좌를 통해 책 속에 담긴 성경 이야기를 더욱 생생히 접할 수 있는 기회다. 말씀 흔적 박병규 신부 지음 / 성서와함께 / 1만 1000원 말씀을 바탕으로 쓴 성경 에세이. 성서신학 박사인 저자는 책 전반을 통해 성경을 터득하는 관점을 바로잡아준다. 많은 신자가 성경 공부에 매달리는 요즘. 성경은 여전히 철저히 공부하지 않고선 이해하고 실천하기 어려운 진리를 담고 있는 게 사실이다. ‘어떻게 하면 어려운 성경을 쉽게 설명할 수 있을까?’ 저자는 “철부지가 돼라”고 일러준다. 그저 계획 없이 흘러가는 대로 노니는 철부지가 아니라, 지금 이 순간에 철저히 투신할 줄 아는 ‘하느님의 철부지’ 말이다. ‘부활이 가장 중요한 신앙의 핵심이라면, 왜 예수님은 바로 돌아가시고 부활하시지 않으셨나?’ 성경을 읽다 보면 이런저런 의문이 생기기 마련. 저자는 “성경의 주제를 ‘이것이다’ 하고 규정하는 순간, 성경은 성경이 아니게 된다”고 이른다. 대신 ‘제발 저를 바꿔주십시오!’, ‘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까?’ 하고 질문과 요구를 적극적으로 던질 때 하느님은 우리 삶 속에 계실 것”이라고 일러준다. 하느님 나라를 사후 어딘가에 존재하는 일종의 국가 개념으로 보는 이들도 있다. 저자는 하느님 나라는 내가 원하는 형태와 방법으로 이뤄지는 게 아니며, 내일 혹은 미래를 염두에 둔 나라가 아니라고 바로잡는다. 하느님 나라가 아직 오지 않았다고 생각하며 사는 것 자체가 오늘의 평화, 사랑의 관점을 흩트리는 주범이 된다고 일러준다. 책은 △하느님 나라 △회개 △성령 △구원 △용서 △희망 △부활 등 성경 속 다양한 신앙 주제에 대한 저자의 새로운 시각을 전하고 있다. 이정훈 기자 sjunder@cpbc.co.kr 백영민2018.01.03

척박한 땅에서 일하며 기도하는 소박한 삶으로 초대합니다여주 ‘도전돌밭공동체’를 찾아서 문명은 한계를 드러냈다. 재앙에 직면한 우리 미래에 대한 희망은 생태적 삶으로의 회귀밖에 달리 길이 없음을 보여준다. 서강대 종교학과 교수직을 퇴임한 예수회 한국관구 서명원(본명 Bernard Senecal, 66) 신부도 새로운 문명을 꿈꾸며 공동체를 만들었다. 퇴직 이전부터 준비해 경기도 여주시 강천면 새향길(도전리), 태백산의 끝자락에 터를 잡은 ‘도전돌밭공동체’다. 도전은 공동체가 자리 잡은 마을 이름의 한자만 바꿔 ‘온전한 길’이라는 뜻의 도전(道全)으로 정했고, 돌밭은 이들이 일구는 땅이 돌밭이기에 거기서 이름을 땄다. 현실은 돌밭이지만, 예수 그리스도께서 걸어간 그 길, 곧 생명의 길, 부활의 길, 영생의 길을 따라 살고 싶다는 속내가 담겼다. 주님 부활 대축일을 앞두고 여주 도전돌밭공동체를 찾았다. 오세택 기자 sebastiano@cpbc.co.kr 중앙선 양동역에서 내리니 봄비가 흠뻑 내렸다. 봄 가뭄에 단비다. 논배미 건너 실개천 다리를 지나자마자 샛길로 접어들었다. 새로운 고향 같은 길이라고, 새향길이라고 이름 붙인 아늑한 분지가 한눈에 들어온다. 6ㆍ25 땐 휴전협정이 끝나고 나서야 전쟁이 일어났다는 걸 알게 됐을 정도로 ‘외진’ 마을이다. 봄비에 밭을 갈던 공동체 식구들은 마침 뒷동산에 십자가의 길 15처를 세운다. 부활을 알린 ‘눈부시게 차려입은 두 남자’(루카 24,4-7 참조)를 그린 15처를 포함했다. 공동체 식구인 고성진(요셉) 조각가가 봉헌했다. 7년간 투석만 하다가 1년 전 신장을 이식받아 되살아난 뒤 그림 타일을 가마에 구워 뒷동산에 십자가의 길을 조성했다. 십자가의 길을 만드는 여정에 함께한 김춘미(아녜스)씨는 “작가가 하루하루 죽음의 고통 속에서 기도하며 그려낸 십자가의 길이어선지 정말 느낌이 남다르다”며 “아주 질박한 십자가의 길이지만, 그 소박한 게 더 감동적”이라고 전한다. 그러고 나서 “특히 빈 무덤에 나타난 두 천사의 모습만 그린 15처가 무척 인상적”이라고 했다. 서명원 신부가 꿈꾸는 공동체는 기도 수행과 노동을 통한 ‘비움’의 공동체다. “마음을 비우면 비울수록 마음을 예수님으로 채울 수 있다”는 서 신부는 전통 관상수도원 방식으로 공동체 명상센터를 지었다. 평면 사각형으로 컨테이너를 맞물리고 정원에는 자갈을 깔았다. 지붕은 이중으로 만들어 ‘성령의 바람’이 지나는 듯한 이미지를 만들었고, 공동체 건물은 사각형이면서도 사방으로 문을 둬 사통팔달하는 공동체를 지향했다. “우리 공동체는 아집을 끊어버리고, 예수님의 현존이 거짓 자아를 대체하도록 수행하는 데 그 목적이 있습니다. 천국에 들어가는 데 뭐가 도움되겠습니까? 예수님이 참 나가 되는 것이 핵심입니다. 그래서 바오로 사도도 갈라티아 신자들에게 보낸 서간 2장 20절에서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사시는 것’이라고 말씀하셨지 않습니까? 이것이 우리 영성입니다.” 수행 방식은 이냐시오 관상기도를 토대로 한다. 이냐시오 성인이 받은 조명, 곧 삼위일체의 친교에서 창조, 성체를 통해 세상 안에 계시는 주님, 강생 신비, 깨달음으로 정점을 이룬다. 이를 위해 날마다 아침ㆍ저녁기도를 하고, 식사도 두 끼니로 최소화했다. 공부와 연구, 명상은 당연히 뒤따른다. 교회일치운동과 이웃 종교와의 대화도 시시때때로 이뤄진다. 공동체 활동에는 생태적 삶을 공동체 차원에서 구현하기 위한 유기농 농사가 끼어 있다. 흙을 만지는, 먹는 음식 일부만 생산하는 삶의 방식을 통해 최소한만 생산하려 한다. 소박한 생활방식으로 돌아가 지구와 새로운 관계를 맺기 위해서다. 농사에 시행착오가 없을 수 없다. 그래도 자연과 새로운 관계를 맺으며 밭에서 옥수수와 땅콩, 고구마, 감자, 당근, 야콘, 고추, 배추, 무, 토마토, 토란 등 20여 가지 작물을 재배 생산한다. 가장 많이 생산한 건 들깨로, 지난해 두 가마를 생산해 들기름을 수십 리터나 뽑아냈다. 공동체는 그러나 이제 시작이다. 등록한 식구는 50명을 채웠지만, 함께 사는 식구는 서넛에 그친다. 서 신부 또한 “공동체가 어떻게, 얼마나 될지는 아무도 모른다”며 “성령의 바람이 부는 대로 이뤄질 것”이라고 웃으며 말했다. 그래도 앞으로 공부와 연구를 위한 도서실과 성경 공부를 위한 공간도 만들고, 현재 8개 실에 그치는 숙소도 더 만들 계획으로 토지 형질 변경과 개발 허가를 받았다. 서명원 신부. 이 공동체의 탄생은 불교학자로 예수회원인 서 신부가 아니라면 어려웠을 터다. 1953년 캐나다 퀘벡에서 태어난 서 신부는 ‘3대 의사 집안’을 만들고 싶다는 부모 뜻에 따라 프랑스로 건너가 보르도 의대에 다니다가 ‘의미 있는 삶’을 찾아 1979년 예수회 프랑스관구에 입회, 한국으로 파견됐다. 파리 7대학에서 한국불교를 전공해 박사학위를 받은 뒤 14년간 서강대에서 종교학을 강의해왔다. 여전히 그는 서강대 종교연구소 국제학술 등재지인 「Journal of Korean Religions」(한국 종교 저널) 부편집장으로 있으면서 공부와 연구를 멈추지 않고 있다. 이런 배경이 기도 수행과 노동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수행자들의 공동체를 탄생할 수 있게 했다. 공동체 여기저기를 돌아다니다 보니 어느새 들녘에 어둠이 내려앉는다. 칠순을 향해 달려가는 나이에도 ‘의미 있는 삶’을 꿈꾸는 노 사제와 평신도들의 기도를 뒤로하고 서울로 올라오는 열차에서도 서 신부의 말이 귓전에 울린다. “깊은 산골의 가장자리, 농사를 짓기에도 너무 척박하고 힘든 이 땅에서 길이 완성됩니다. 길의 끝, 예수 그리스도께서 가신 길을 그 끝까지 따라가고 싶습니다.” cpbc2019.04.17
![[생활속의복음] 대림 제1주일 - 하느님의 시간](//cpbc.co.kr/CMS/newspaper/2018/11/rc/740004_1.0_titleImage_1.jpg)
[생활속의복음] 대림 제1주일 - 하느님의 시간구요비 주교(서울대교구 보좌) “오늘이 바로 마지막 날이네!”초등학교 6학년이던 1962년, 담임 선생님께서는 수업 중에 늘 일간 신문의 중요 내용을 읽어 주셨습니다. 그해 10월 소련이 미국 본토를 겨냥해 쿠바에 핵미사일 기지 설치를 비밀리에 추진했고, 이를 포착한 미국과 소련 사이에 일촉즉발의 위기가 고조되던 때였습니다. “지금 핵미사일을 실은 소련의 군함들이 쿠바로 향해 가고 있는데 해상 봉쇄령을 내린 미국 해군과 맞부딪혀서 오늘 밤에 제3차 세계대전이 일어날지 모른단다.”선생님의 말씀에 깜짝 놀라 방과 후에 십리 길이나 되는 집으로 한달음에 뛰어갔습니다.“엄마, 큰일 났어요! 오늘 밤에 핵전쟁이 일어나서 지구가 멸망할지 모른대요.” 선생님께 들은 얘기를 전하자 집안 분위기는 심각해졌고 결국 식구들은 저녁기도를 바치고 일찍 잠자리에 들었습니다. 그때 어머님의 혼잣말이 들렸습니다. “아니 오늘이 마지막 날이라고? 그래, 요비 말이 맞네! 오늘이 바로 마지막 날이야!”다음날 새벽, 눈을 뜨자마자 밖으로 뛰어 나갔습니다. 밤새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짙은 안개와 침묵이 흐르는 고향 마을 길을 홀로 걸으며 말로 형용할 수 없는 경이로움을 느꼈습니다. 인류 공멸의 위기 앞에서 미국과 소련이 극적으로 타협했다는 선생님의 설명을 듣고 안심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당시 어머님의 ‘오늘이 바로 마지막 날이네!’라는 말은 성경에서 계시되는 하느님의 시간(Kairos)을 관통하고 있음을 세월이 흐를수록 더욱더 절감하게 됩니다. 카이로스는 본래 ‘결정적인 것’, ‘본질적인 시점’을 뜻하는데 종말론적으로 마지막 때인 하느님에게 온전히 속한 ‘하느님의 시간’을 말합니다.그리스도인이 지녀야 할 ‘시간’의 신앙적인 의미를 아우구스티노 성인은 이렇게 말합니다. “임의 날은 나날이 아닌 다만 ‘오늘!’, 그 오늘은 내일로 옮지도 아니하고, 어제 뒤에 이어지지도 않은 날이다. 임의 오늘은 곧 ‘영원!’”이라고 갈파하였습니다.(「고백록」 11권, 13장) 그런 면에서 교회의 전례력, 전례의 시간은 이 덧없는 인간의 세월 안에 길들여지기 쉬운 우리네 인생에 하느님의 영원한 시간이 개입해 계심을 일깨워 주는 것입니다. 대림 제1주일인 오늘은 전례력으로 새해를 시작하는 날입니다. 오늘이라는 시간을 허락하신 주님의 은혜에 감사하며, 그리스도의 뜻에 더욱 맞갖은 삶을 살도록 다짐하는 기다림의 시기가 되기를 바랍니다. “우리 주 예수님께서 당신의 모든 성도들과 함께 재림하실 때, 여러분이 하느님 우리 아버지 앞에서 흠 없이 거룩한 사람으로 나설 수 있게 되기를 빕니다.”(1테살 3,13)------------------------------※대림 제1주일부터 매월 첫째 주 생활 속의 복음은 서울대교구 주보 ‘생명의 말씀’에 소개되는 서울대교구 주교단의 글이 실립니다. 또 매월 2ㆍ3ㆍ4주는 한민택(수원가톨릭대학교 교수) 신부가 연재합니다. cpbc2018.11.28
“진심과 사랑으로 신자 대하는 ‘양 냄새 나는’ 사목자 원한다”춘천교구, 설정 80주년 1만 6000명 설문조사 결과 가톨릭 신자들은 사제의 어떤 모습을 보고 기쁨과 희망을 느낄까. 또 교회와 본당이 신자들에게 어떤 부분을 신경 써주길 바라고 있나.춘천교구가 최근 실시한 설문조사 결과 응답자들은 ‘진심과 사랑으로 신자들을 대하는 겸손한 사목자 모습’에서 신앙생활의 기쁨과 희망을 많이 느낀다고 대답했다. 가장 먼저 변화돼야 할 사제 모습으로는 ‘독단적으로 무언가를 결정하는 것’(38.7%)을 꼽은 사람이 가장 많았다. 춘천교구는 교구 설정 80주년(2019년)을 앞두고 최근 교구민 1만 6000명을 대상으로 ‘80주년 설문조사’를 실시해 분석한 1차 설문 결과를 내놨다. 8000여 명이 응답한 설문조사 결과에는 신자 다수의 ‘신앙생활 현주소’와 ‘희망 사항’ 등 다양한 의견이 담겨 있어 교회 전체가 참고해볼 만하다.신자들은 ‘기쁨과 희망을 주는 우리 신부님 모습’을 묻는 물음에 ‘신자들을 진심과 사랑으로 대하는 겸손한 모습’(38.5%)을 최고로 꼽았다. 경건한 미사 거행(27.8%)과 감동적인 강론(19.1%)보다 높은 수치로, 평소 ‘양 냄새 나는’ 따스한 사목자 모습이 더 큰 영향을 주는 것으로 나타났다.‘강론 준비에 더 노력해야 할 점’에 대해선 ‘신앙생활에 도움이 되는 내용이면 좋겠다’(36.3%)는 응답이 가장 높았다. 또 ‘독단적으로 무언가를 결정하는 모습’(38.7%)이 가장 변화돼야 할 사제의 모습으로 꼽혔다. 신자 돌봄에 더 관심을 바라는 목소리도 컸다.고해성사와 관련해서는 ‘고해성사 교육이 필요하다’(35.3%), ‘고해 사제가 먼저 부드럽게 말씀을 건네주면 좋겠다’(29.3%)는 바람이 많았다. 본당 공동체 내 갈등 이유로는 교우 간, 단체 간에 ‘끼리끼리 문화 때문’이라는 응답이 43.3%에 이르러 친한 사람, 자기 단체 중심 문화가 큰 걸림돌로 나타났다. 본당이 해야 할 우선적 사목으로는 ‘냉담교우 예방’(34.4%)이, ‘지역사회보다 성당 내 소외된 신자부터 먼저 챙겨야 한다’(39.4%)는 의견이 많았다.신자들의 이 같은 의견은 프란치스코 교황의 권고와도 일맥상통한다. 교황은 권고 「복음의 기쁨」에서 사제들에게 “고해소가 고문실이 아닌 주님의 자비를 만나는 장소가 돼야 한다”고 강조하고 있다. 강론에 대해서도 “동떨어진 사상으로 연설을 닮은 강론이 아닌, 긍정의 언어로 빛을 갈구하는 신자들의 경험과 연결시켜 복음을 전해야 한다”고 권고하고 있다. 그러면서 “모든 종교적 가르침은 복음 선포자의 생활방식에서 드러나야 한다”고 거듭 강조하고 있다. 공동체 안에서 일어나는 신자들 간의 시기, 질투에 대해서도 ‘형제애’를 강조하고 있다.이번 설문조사에서는 춘천교구민들의 신앙생활상도 드러났다. 신앙 성숙을 위해 ‘성경공부를 하고(40.8%), 매일 미사에 되도록 참여한다는 이(55.1%)가 많았다. ‘자녀에게 신앙을 유산처럼 교육해야 한다’는 의견(59.4%)이 높았지만, ‘스스로 선택해야 한다’는 의견도 25.5%나 됐다. 교구장 사목교서를 끝까지 읽거나 써봤다는 이는 24.9%였다.춘천교구 사목국장 김혜종 신부는 “교구는 통계 결과에 따른 지속적인 분석작업을 거쳐 신자들의 다양한 목소리를 반영한 사목과 프로그램들을 계속 논의할 것”이라고 밝혔다.이정훈 기자 sjunder@cpbc.co.kr 평화신문2018.12.12
신앙과 영성 교육 특강 ...예수회센터, 7월 2일부터 예수회센터는 7월 2일부터 6주 과정으로 센터(서울 마포구 서강대길 19)에서 그리스도인의 신앙과 영성 교육을 위한 특강을 마련한다. 강좌 프로그램으로는 △영적 성장- 우리의 마지막, 세상의 마지막(최현순 박사, 매주 월 오전 10시) △아픈 영혼을 철학으로 치유하기(박병준 신부, 홍경자 철학상담수련감독, 매주 화 오후 2시) △구약성경의 하느님과 나- 모세의 마음, 모세의 하느님(주원준 박사, 매주 화 저녁 7시 30분) △몸 신학-사랑의 신학적 이해(김혜숙 선교사, 매주 수 오전 10시) △겸손- 평범한 일상을 살아가는 영성과 그리스도교 영성의 못자리(손유배 신부, 매주 목 오전 10시) 등이다. 문의 및 접수 : 02-3276-7733, 예수회센터 리길재 기자 teotokos@cpbc.co.kr 평화신문2018.05.23
![[교부들의 사회교리] (4)주님께 쓸모없는 부자들](//cpbc.co.kr/CMS/newspaper/2018/12/rc/742359_1.0_titleImage_1.jpg)
[교부들의 사회교리] (4)주님께 쓸모없는 부자들 재산을 가난한 이들에게 나눠주어라최원오 교수 “부인, 탑을 세우는 데 알맞지 않고 희고 둥근 돌, 그들은 누구입니까?” 그녀가 나에게 대답하였습니다. “너는 언제까지 어리석고 판단력도 없느냐? 너는 모든 것을 물어보면서 아무것도 모르겠느냐? 그들은 주님을 믿고 있으나 이 세상의 부도 가지고 있다. 환난이 닥치면 그들은 부와 사업상의 일 때문에 주님을 부인한다.” 내가 그녀에게 “부인, 그러면 그들은 탑을 세우는 데 언제 쓸모가 있겠습니까?” 하고 묻자, 그녀가 대답하였습니다. “그들의 마음을 사로잡는 부를 잘라낼 때 그들은 하느님께 쓸모가 있을 것이다. 둥근 돌이 잘리지 않고 자체의 어떤 부분을 내버리지 않으면 네모나게 될 수 없듯이, 이 세상의 부자들도 부를 잘라내지 않으면 주님께 쓸모가 없다. 먼저 너 자신에게서 배워라. 네가 부유할 때 너는 쓸모가 없었다. 그러나 지금 너는 쓸모가 있고 생명을 위해 올바르게 살고 있다. 하느님께 쓸모 있는 사람이 되어라. … 서로 화목하게 지내라. 서로 돌보아 주고 도와주어라. 너희는 하느님께서 창조하신 것을 너희 자신만을 위하여 풍족하게 사용하지 말고 곤궁한 이들에게도 주어라. 어떤 사람들은 과식으로 몸에 병을 얻어 건강을 해친다. 이와 달리 먹을 것이 없는 사람들은 음식을 제대로 먹을 수 없어 건강이 나빠지고 그들의 육체는 죽어간다. 이렇게 공동체 정신이 부족하여 가진 것이 있어도 곤궁한 이들에게 나누어 주지 않는 것은 너희에게 해롭다. 임박한 심판을 주의하여라. 부자들이여, 너희는 탑이 아직 완성되지 않은 동안에 굶주린 이들을 찾아라. 탑이 완성된 뒤에는 너희가 선을 행하고 싶어도 더 이상 기회가 없기 때문이다.”(헤르마스, 「목자」 환시 3,6,5-7; 3,9,1. 하성수 옮김) 세례받은 뒤에 지은 죄를 용서받는 길 헤르마스의 「목자」는 130~140년경에 저술된 묵시록이다. 초기 그리스도교에서는 성경처럼 읽힌 권위 있는 교부 문헌이다. 헤르마스는 노예 신분에서 해방된 인물이었으며, 로마의 주교 피우스의 형제라고만 전해진다. 그는 고대 엄격주의 교회론과 참회 제도에 반기를 든 개혁가였다. ‘세례받은 뒤에 지은 죄는 용서받을 수 없다’는 완고한 교회 전통에 맞서 참회와 용서의 가능성을 최초로 열어젖힌 관용주의의 선구자라 하겠다. 교회를 상징하는 탑 여기서 ‘탑’은 교회를 상징한다. 탑인 교회는 네모 반듯한 돌들로 지어지고 있으며 종말에 완성될 것이다. 부와 재산으로 몸집을 부풀린 뚱뚱하고 희멀건 둥근 돌들은 그 교회 건축에 쓸모가 없다. 부자들은 부와 재산을 잘라내어 가난한 이들에게 나누어 줌으로써 군더더기 없이 네모 반듯한 모양을 갖출 때 비로소 교회의 구성원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묵시적 환시 형식으로 전해 준다. 하느님 앞에서 부자는 아무런 쓸모가 없으니, 쓸모 있는 인생을 살려거든 부를 축적하지 말고 서둘러 덜어내야 한다는 것이다. 진정한 참회는 돈 욕심과 가난한 이웃에 대한 무관심에서 벗어나, 공동의 재화를 궁핍한 이들에게 되돌려주는 것임을 일깨워주는 소중한 초기 교부 문헌이다. 최원오(빈첸시오, 대구가톨릭대유스티노자유대학원장) cpbc2018.12.26
![[김소일 위원의 일치 순례기 붓다의길 예수의길] (2)붓다의 성도지 부다가야](//cpbc.co.kr/CMS/newspaper/2019/04/rc/750308_1.0_titleImage_1.jpg)
[김소일 위원의 일치 순례기 붓다의길 예수의길] (2)붓다의 성도지 부다가야광야의 예수님처럼 악마의 유혹 뿌리친 붓다 그리고 깨달음 부다가야 마하보디 사원에 있는 불상. 깨달음의 현장 부다가야예수 그리스도의 공생애는 세례와 함께 시작된다. 서른 살 무렵 요르단 강에서 요한에게 세례를 받았다. 성경은 그 순간에 성령이 그분께 임했다고 전한다. “물에서 올라오신 예수님께서는 곧 하늘이 갈라지며 성령께서 비둘기처럼 당신께 내려오시는 것을 보셨다. 이어 하늘에서 소리가 들려왔다. ‘너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다.’”(마르 1,9-11) 그때부터 예수는 복음 선포의 여정에 나선다. 온 갈릴래아를 두루 다니며 가르치고 깨우쳤다. “회개하여라. 하늘나라가 가까이 왔다.”붓다는 출가 후 6년의 고행 끝에 보리수 아래서 궁극의 깨달음을 얻는다. 그 순간 고타마 싯다르타에서 붓다가 된다. 35세 되던 해 음력 12월 8일이었다. 불경은 “새벽의 밝은 별이 돋을 때”라 한다. 불교에서는 이날을 성도절(成道節)로 지낸다. 부다가야는 그 깨달음의 현장이다. 거대한 석조 건축물인 마하보디 사원과 무성한 가지를 드리운 보리수가 있다. 보리수 수명은 대체로 1000년 정도라고 한다. 그렇다면 붓다의 깨달음을 지켜본 그 보리수는 아닐 것이다. 조계종 총무원장 원행 스님은 “부처님 당시의 보리수는 스리랑카로 이어졌다가 다시 이곳으로 왔다”면서 “아마 3대쯤 되는 후손 나무일 것”이라고 짐작했다.생사를 넘나든 극단적 고행인도는 위대한 영성의 땅이다. 초월을 향한 저들의 의지는 다양한 종교와 갖가지 기이한 수행법을 낳았다. 일찍부터 수많은 종파와 유파가 꽃을 피웠다. 치열한 수행으로 경지에 오른 영적 스승들이 곳곳에서 독특한 가르침을 편다. 물질과 현실의 가치를 낮게 두고 정신과 수양을 추구한다. 선정과 해탈을 열망하고 영원과 진리를 갈구한다. 이토록 종교적이고 영적인 민족이 또 있을까.붓다 또한 출가 후 여러 스승을 찾아다니며 수행을 했다. 그러나 근본적이고 궁극적인 해답은 얻을 수 없었다. 결국은 고행림으로 불리는 숲 속에서 홀로 수행에 들어갔다. 6년 동안 이어진 이 수행은 그야말로 생사를 넘나드는 처절하고 극단적인 수행이었다. 붓다는 이렇게 말한다. “그때부터 나는 하루에 깨 한 알과 쌀 한 알씩을 먹었다. 그리하여 몸은 점점 쇠약해져 뼈와 뼈가 서로 맞붙고 정수리에는 부스럼이 생겼으며 가죽과 살이 저절로 떨어져 나갔다. 그것은 다 음식을 먹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또 낙타의 다리처럼 내 두 엉덩이도 그와 같았다. 만약 내가 손으로 배를 어루만지면, 그때 곧 등뼈가 손에 만져지고 또 등을 어루만지면 뱃가죽이 손에 만져졌다.”붓다는 또 이렇게도 말한다. “혹은 가시 위에 드러눕기도 하였고, 혹은 널판자나 쇠못 위에 눕기도 하였으며, 혹은 땅에서 멀리 떨어져 새처럼 매달려 있기도 하였고, 두 다리를 위로 올리고 머리를 땅에 두기도 하였으며, 혹은 다리를 꼬고 걸터앉기도 하였고, 혹은 수염과 머리를 길러 아예 깎지 않기도 하였으며, 혹은 햇볕에 노출하고 불로 굽기도 하였고, 혹은 한겨울에 얼음 위에 앉기도 하였고, 혹은 몸을 물속에 담그기도 하였으며, 혹은 잠자코 아무 말 하지 않기도 하였다.”(증일아함경 제23권)마침내 도달한 궁극의 깨달음이런 고행을 통해서 붓다는 “끝내 아무 이익이 없었고, 또 그 최상의 거룩한 법도 얻지 못했다”고 말한다. 붓다는 마침내 다른 길을 생각한다. “이렇게 하는 것은 도를 성취하는 근본이 아니다. 그러므로 마땅히 다른 길이 있을 것이다.” 결국, 고행을 중단하고 체력을 회복하기로 마음먹는다. 마을로 내려가 수자타라는 여인으로부터 유미죽을 공양받는다. 우유와 쌀가루를 끓인 죽이다. 강에 들어가 몸을 씻고 머리와 수염을 깎는다.그때부터 붓다는 고행림을 나와서 유명한 보리수 아래에 앉았다. 부드러운 길상초를 깔고 수행을 계속하다가 마침내 궁극의 깨달음을 얻었다. 그 깨달음의 의미는 무엇일까. 제행무상(諸行無常) 제법무아(諸法無我)일까. 중중무진(重重無盡) 법계연기(法界緣起)일까. 색즉시공(色卽示空) 공즉시색(空卽示色)일까. 불법의 경지는 높고 심오해서 선뜻 헤아리기 어렵다. 원행 스님은 간단히 요약했다. “모든 번뇌에서 벗어나 대자유를 얻고, 그러한 공덕으로 지혜와 복덕을 함께 갖추셨다는 의미입니다.”악마의 방해와 유혹세례를 받은 예수는 곧바로 광야로 가서 40일 동안 단식한다. 이때 악마가 다가와 세 가지 유혹을 던진다. “이 돌더러 빵이 되라고 해 보시오.” “모든 권세와 영광을 당신에게 주겠소.” “여기에서 밑으로 몸을 던져 보시오.” 세 가지 유혹은 아마도 인간을 타락으로 이끄는 재물과 권력과 교만을 상징할 것이다. 예수는 “사탄아, 물러가라.”는 일갈로 유혹을 물리친다. “그러자 악마는 그분을 떠나가고, 천사들이 다가와 그분의 시중을 들었다.”(마태 4,1-11; 루카 4,1-13)붓다 역시 깨달음을 앞두고 악마의 방해와 유혹을 받는다. 처음에는 미색을 동원했고, 다음에는 마귀 군대를 보냈다. 그래도 소용없자 천하를 지배할 전륜성왕을 약속했다. 붓다는 설법으로 모두 물리쳤다. 불경은 악마왕 마라를 욕계의 최고 지배자로 묘사한다.결국, 악마나 마귀는 우리 욕망의 분신일지 모른다. 우리가 욕망에 젖어 살 때 악마는 굳이 우리를 공격하지 않는다. 그러나 고행과 수양으로 드높은 정신세계에 접어들 때쯤 필연적으로 욕망의 저항을 받는다. 수행이 추구하는 신비적 합일이나 큰 깨달음은 언제나 그 너머에 있다. 인도=김소일 기자 sonos@cpbc.co.kr cpbc2019.04.09
[하느님과 트윗을](76) 수도생활은 어떻게 시작됐나요 주님과 홀로 있고자 떠난 은수자들 문 : 수도생활은 어떻게 시작됐나요답 : 교회가 시작했을 때부터 예수님을 가까이 따르고 싶어한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혼인하거나 재혼하는 대신에, 기도하고 단순하게 살며 교회와 가난한 이들을 도우면서 자신을 하느님께 온전히 바쳤습니다. 그들의 자발적인 증거의 삶은 예수님에 대한 그들의 온전한 헌신을 보여주었습니다.문 : 은수자는 어떤 사람들인가요답 : 그리스도교 초기 박해가 끝나면서, 그리스도인들은 순교자가 되지 않으면서도 예수님을 완벽하게 따르는 삶을 살기 위해 궁리했습니다. 그러면서 자신을 하느님께 완전히 내어드리는 방법들이 생겨났습니다. 3세기 하느님께만 집중하고자 외딴 사막으로 물러나서 살았던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이들을 ‘은수자’라고 하는데 초기의 유명한 은수자로 안토니오 성인이 있습니다. 그는 예수님이 부자 청년에게 “네가 완전한 사람이 되려거든, 가서 너의 재산을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주어라. 그러면 네가 하늘에서 보물을 차지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와서 나를 따라라”(마태 19,21)라고 하신 말씀에 응답했습니다. 안토니오 성인은 예수님과 홀로 있고자 이집트 사막으로 떠났습니다.문 : 공동체는 어떻게 만들어졌나요답 : 325년 이집트 사람인 파코미오 성인은 다른 은수자들과 함께 공동체를 이루고 살기 시작했습니다. 그들은 공동체 장상에게 복종하고 복음에 헌신할 것을 약속했습니다. 곧 다른 공동체들도 세워졌습니다. 그 가운데는 동방 수도생활의 아버지인 대 바실리오 성인이 세운 공동체도 있었습니다. 4세기에 히포의 주교였던 아우구스티노 성인은 자기 교구의 신부들과 함께 공동체 생활을 이끌었습니다. 그의 출발점은 초기 그리스도인들의 삶이었습니다. 초기 그리스도인들은 “한마음 한뜻이 되어, 아무도 자기 소유를 자기 것이라 하지 않고 모든 것을 공동으로 소유”(사도 4,32)했습니다.문 : 가난한 이들은 어떻게 돌보았나요답 : 그리스도인이 아닌 사람들도 자기 가족을 돌봤을 테고, 부자들도 때로는 매우 너그러웠겠지만, 고대 세계에는 많은 경우 조직적인 자선이 없었습니다. 이것이 그리스도교의 태동과 함께 바뀌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다음과 같은 성경 말씀을 따랐습니다. “누구든지 세상 재물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자기 형제가 궁핍한 것을 보고 그에게 마음을 닫아 버리면, 하느님 사랑이 어떻게 그 사람 안에 머무를 수 있겠습니까?”(1요한 3,17) 초기 교회는 일부 남성들을 부제로 뽑았고, 그들은 가난한 이들을 돌보는 데에 전념했습니다.(사도 6,2-3 참조) 수도자인 대 바실리오 성인은 4세기에 최초로 자선소를 세웠습니다. 서유럽의 수도원들은 자선뿐만 아니라 문화의 중심지가 됐습니다. 그곳의 수도자들은 의약, 기술, 건축, 예술, 농업 그리고 목축업에 숙달된 사람들이었습니다. 동시에 그들은 도서관과 필사실로 지적 문화를 촉진했습니다. 수도자들은 책을 필사하며 공부했습니다. 이것이 그리스도교 학교의 기원입니다. 후에 대학들은 도시의 수도원을 중심으로 생겨났습니다. 정리=전은지 기자 eunz@cpbc.co.kr cpbc2018.12.05

교회의 미래 ‘청년들’이 주인공 되는 사목이 필요하다청년들을 위한 세계주교시노드 폐막 후 … 주교회의 청소년사목위원회 전국 청년 대표자 모임 열려 지난 10월 한 달 동안 세계 교회의 눈과 귀는 바티칸을 향했다. 전 세계 주교들은 ‘젊은이, 신앙과 성소 식별’을 주제로 열린 세계주교대의원회의(이하 시노드)에 참석해 이 시대 청년들과 ‘함께 걷기’ 위한 지혜를 탐색했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10월 28일 시노드 폐막 미사 강론에서 “우리 사목자들이 행여나 젊은이들의 말에 귀 기울이지 않았다면, 또 우리 마음은 열지 않은 채 젊은이들 귀만 가득 채우려고 했다면 용서해 달라”고 청했다. 시노드 직후 한국 교회도 젊은이들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주교회의 청소년사목위원회(위원장 정순택 주교)는 3일 전국 청년 대표자 모임을 열고 교회를 향한 젊은이들의 목소리를 들었다. 청년사목위에서 평신도 청년들을 한자리에 모아 사목 방향을 논의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위원장 정순택 주교와 총무 김성훈 신부, 전국 14개 교구에서 참가한 청년 27명은 3시간 넘게 열띤 대화를 나눴다. 가톨릭학생회, 본당 청년회장, 교구 청년연합회, 청년성서모임 등에서 활동하는 청년들은 허심탄회하게 고민 보따리를 늘어놓았다. 그 가운데 높은 공감대를 얻은 발언들을 정리했다. ▲ 지쳐가는 봉사자, 우리는 교회 소모품인가요? “교회 활동을 해보면 봉사하는 청년은 거기서 거기예요. 본당 일 하는 사람이 교구에서, 또 다른 단체에서 일하다 보니 결국 부담이 쌓이고 지쳐서 냉담한 경우가 많아요.”(광주 신재덕 발렌티노) “교회가 봉사자들에게 너무 많은 것을 요구하고 의존하고 있어요. 전문 인력이 필요하다면 일정 부분 고용을 하고 청년들은 진짜 봉사만 할 수 있게 했으면 좋겠어요. 그러면 봉사자도 힘을 얻고 신앙을 더욱 깊이 체험할 수 있지 않을까요?” (전주 김경주 치릴로) ▲ 늘어나는 ‘나이 든 청년’, 몇 살까지 청년인가요? “오늘날 청년의 범주가 너무 다양해요. 결혼했지만 나이가 어린 경우, 미혼이지만 40대를 넘긴 경우, 청년과 장년의 경계에서 나이 때문에 봉사할 시간과 의지, 열정, 기회가 있는데도 스스로 위축되는 일이 많습니다.”(광주 이민영 로사) ▲ 청년 없는 청년 사목 “청년들이 진짜로 원하는 건 우리가 제일 잘 아는데 연수나 피정을 요청하면 지원과 협조보다는 어렵다는 대답을 들을 때가 많아 힘이 빠집니다”(대구 홍대식 대건 안드레아) “어릴 때부터 너희는 교회 미래의 주인공이다는 말을 들었어요. 초중고, 대학생을 지나 어른이 된 지금 저는 언제 주인공이 되나요?”(대전 허현 안젤로) ▲가톨릭 청년 겨냥한 유사종교의 마수 “대학교 안에 유사종교동아리가 많은데 학칙으로 제한을 두지 않아요. 그렇다 보니 가톨릭 학생들이 유사종교에 현혹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대학생들을 위한 신천지 대응과 교육이 시급합니다”(청주 신민경 유스티나) “가톨릭 청년들의 기본적인 교리교육이 부족한 것 같아요. 주위를 보면 성당에 수십 년을 다녔는데도 성경 공부를 제대로 한 적 없다는 청년들이 많아요. 신천지가 소규모 성경 공부로 청년들을 유혹한다는데 우리도 성서 모임을 더욱 다양하게 늘려야 합니다”(마산 구미정 미카엘라) ▲ 신앙생활=시간 뺏기는 일? “행사를 기획해보면 애걸복걸해서 끌어와야 할 정도로 청년들 참여가 저조합니다. 2박 3일 피정을 가려 해도 어느 회사가 금요일에 연차를 내주겠어요? 청년들 주거환경을 생각하면 출퇴근 시간도 길고 회사 눈치도 보이고…성당에 나오려면 현실의 장벽이 꽤 큽니다”(인천 정백현 안드레아) “학생은 시간은 있지만, 돈이 없고, 직장인은 돈은 있지만, 시간이 없어요. 사목 프로그램 아무리 좋아도 현실적으로 왜 청년들 왜 못 오는지 생각해봤으면 좋겠습니다”(마산 정성영 그레고리오)정순택 주교는 “오늘날 젊은이사목의 주인공은 바로 여러분”이라며 “교회는 가르치고, 청년들은 배우는 관계가 아니라 청년들이 삶을 찾아가는 과정에서 바른길을 찾아갈 수 있도록 교회는 동반하며 돕겠다”고 약속했다. 두 번째 모임은 2019년 5월 열릴 예정이며 각 교구의 청년 사목 프로그램을 공유하는 자리로 마련된다. 유은재 기자 you@cpbc.co.kr 세계주교시노드에 참석하고 돌아온 정순택 주교 미니 인터뷰“오늘날 청년들의 성소 식별을 가로막는 걸림돌은 ‘세속주의’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성소 식별은 ‘하느님이 바라는 모습을 찾아가는 여정’입니다. 세상적 가치에 맞춰 성공을 추구하며 살다 보니 성소 식별에 어려움이 생깁니다.”‘젊은이, 신앙과 성소 식별’을 주제로 열린 한 달간의 주교 시노드를 마치고 귀국한 정순택 주교는 “성소 식별을 위해 청년들이 ‘새로운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게 해야 하며 그것을 가능하게 해주는 것이 바로 신앙”이라고 강조했다.“신앙이란 바쁘게 살아가는 청년들에게 성당에 와라, 봉사하라, 단체에서 활동하라고 시키는 것이 아닙니다. 세상 밖에서 참된 가치가 무엇인지 제대로 판단하고, 하느님 앞에 보람있는 삶을 성취할 수 있도록 세상을 뚫고 나가는 힘을 길러내는 것이 신앙입니다. 오늘 청년 대표자 모임에서 많은 청년이 지적했듯 성당 ‘일’을 주기보단 가치관을 바로 세워나갈 수 있도록 사목하고 동반하는 것이 교회의 역할입니다.”정순택 주교는 시노드 참가 소감에 대해서는 “시노드는 구체적인 방법론을 제공하는 자리가 아니라 오늘날 청년들이 처한 상황을 진단하고 교회가 나아가야 할 큰 방향을 바라보는 자리였다”며 “각 지역 교회에서 구체적 현실 안에서 풀어야 할 숙제를 안고 왔다”고 말했다. 정 주교는 “청년을 주제로 시노드가 열렸는데도 정작 청년들은 시노드가 열렸는지조차 모르는 경우도 많다”며 “세계 교회의 문헌들이 우리 청년들에게 더 공유되고 직접적인 목소리가 울릴 수 있도록 사목자들의 노력이 더욱 절실하다”고 지적했다.청년 기간이 곧 성소 식별의 기간인 만큼 청년사목과 성소사목을 연결하는 방안도 제시했다. “일반적으로 성소 식별을 이야기할 때 사제, 수도자, 평신도 세 갈림길 중 하나를 선택하는 것을 생각하는데 정확히는 하느님 앞에서 그리스도인으로서 나는 어떻게 살 것인가를 찾아가는 과정”이라며 “우리 교회는 주로 ‘사제 성소 양성’에 초점을 맞추고 있었는데 더 큰 눈으로 성소 사목과 청년 사목을 연계할 것”이라고 밝혔다. 유은재 기자 cpbc2018.11.07
![[허규 신부와 떠나는 신약여행] (93) “지극히 거룩한 믿음을 바탕으로 성장해 나아가십시오”(유다 20)](//cpbc.co.kr/CMS/newspaper/2018/04/rc/716086_1.0_titleImage_1.jpg)
[허규 신부와 떠나는 신약여행] (93) “지극히 거룩한 믿음을 바탕으로 성장해 나아가십시오”(유다 20)불경하면 하느님 심판을 면치 못하리니 구약성경 민수기에 등장하는 발라암은 예언자임에도 하느님의 천사를 알아보지 못하는 거짓 예언자로 그려지고 있다. 유다 서간에는 이처럼 불경한 자들에 대한 경고가 담겨 있다. 그림은 율리우스 카롤스펠트 작 ‘발라암을 가로막은 천사’. 출처=「아름다운 성경」 유다 서간(이하 유다서)은 25절로 이루어진 짧은 편지입니다. 이 서간은 짧은 편지 형태의 서문(1-2절)과 결문을 대신하는 찬송(24-25절)과 함께 전해집니다. 그 형태로 보면 바오로 사도의 차명 서간과 비슷해 보입니다. 저자는 자신을 “야고보의 동생인 유다”라고 소개합니다.(유다 1) 여기서 야고보는 제베대오의 아들이 아닌 주님의 형제 야고보입니다.(마르 6,3; 마태 13,55 참조) 저자 역시 스스로 주님의 형제인 유다라고 표현합니다. 이 서간은 언어나 내용적인 면에서 주님의 형제 유다가 직접 쓴 편지이기보다 차명 서간일 것으로 생각합니다. 편지의 수신인들은 명확하게 표현되지 않습니다. “부르심을 받은 이들, 곧 하느님 아버지께서 사랑하시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지켜 주시는 이들”로, 넓은 의미의 신앙인들을 향한 것처럼 표현됩니다. 구체적으로 유다서가 생각한 이들을 추측하기 어렵지만, 현대의 많은 학자는 바오로 사도가 선교했던 지역의 사람들일 것으로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편지의 내용이 바오로 사도의 신학과 상당히 유사하고 일부 내용은 바오로 사도의 특정한 서간을, 예를 들어 코린토 1서를 생각하게 하기 때문입니다. 불경한 자들에 대한 경고유다서의 주된 내용은 “불경한 자들”(유다 4)에 대한 경고입니다. 이들은 “하느님의 은총을 방탕한 생활의 방편으로 악용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부인하는” 자들입니다. 구체적으로 그들은 “몸을 더럽히고 주님의 주권을 무시하며 영광스러운 존재들을 모독합니다.”(유다 8) 그들의 가장 큰 죄는 “불륜과 변태적인 육욕에 빠진” 것입니다. 또, 그들의 행실은 “카인의 길을 따라 걸었고 돈벌이 때문에 발라암의 오류에 빠졌으며 코라처럼 반항”하는 것으로 드러납니다.(유다 11)성경에서 ‘길을 걷는다’는 표현은 많은 경우에 윤리적인 처신이나 생활 방식을 말할 때 사용되는 비유입니다. 이들이 카인의 길과 비유되는 것은 카인에게 내려진 결과와 같은 심판을 받을 것이라고 말하는 것 같습니다.(창세 4,11-12) 발라암은 구약성경의 민수기에 등장하는 이방인 예언자입니다. 민수 22―24장에 기록된 발라암의 모습은 그렇게 부정적이지 않지만, 후대에 발라암은 발락의 사주를 받아 하느님의 백성을 우상숭배에 빠지게 한, 특히 윤리적인 부도덕을 이스라엘 백성에게 가져온 부정적인 인물로 소개됩니다.(민수 33,16 참조) 발라암은 유다교 안에서 이미 예언자임에도 불구하고 하느님의 천사를 알아보지 못한 자로 평가되고 하느님보다 자신을 드러낸 거짓 예언자로 이해됩니다. 자신뿐 아니라 이스라엘 백성에게 하느님을 배신하도록 만든 발라암은 성경에서 우상숭배를 조장한 대표적인 인물로 그려집니다.(묵시 2,14) 코라는 모세와 아론에게 대항해 반역을 일으켰던, 하느님을 업신여겼던 인물입니다.(민수 16장) 이들에 대해 유다서는 이렇게 평가합니다. “저들은 불평꾼이며 불만꾼으로 자기 욕망에 따라 살아가는 자들입니다. 잇속을 챙기려고 사람들에게 아첨하면서 입으로는 큰소리를 칩니다.”(유다 16) 신앙인들이여 자비를 베푸소서 유다서는 신앙인들에게 이런 불경한 자들의 가르침과 그들의 행실을 따르지 않도록, 그들이 받게 될 심판에서 벗어나도록 권고합니다. 권고의 내용은 크게 세 가지입니다. 우선 신앙인들에게 필요한 자세는 “성령 안에서 기도하는” 것입니다. 성령 안에서 기도하면서 “믿음을 바탕으로 성장해” 나아가도록 권고합니다. 둘째는 “하느님의 사랑 안에서 자신을 지키며” 자비를 청하는 것입니다. 이 권고에는 자신의 행실에 따라 모든 사람이 심판을 받게 될 것이라는 생각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유다서는 신앙인들 역시 자비를 베풀도록 권고합니다. 유다서는 이런 권고와 함께 하느님의 업적을, 하느님이 베풀어주신 자비와 구원, 그리고 불의한 자에 대한 심판을 기억하도록 초대합니다. “여러분이 넘어지지 않도록 지켜주시고, 당신의 영광 앞에 흠 없는 사람으로 기쁘게 나서도록 해주실 수 있는 분, 우리의 유일하신 구원자 하느님”을 찬송하는 편지의 마지막은 신앙인들을 위한 기도이기도 합니다. <가톨릭대 신학대학 성서학 교수> 평화신문2018.04.03
![[이창훈 위원의 사도행전 이야기] (17) 스테파노가 체포되다 (6,8-15)](//cpbc.co.kr/CMS/newspaper/2019/05/rc/753023_1.0_titleImage_1.jpg)
[이창훈 위원의 사도행전 이야기] (17) 스테파노가 체포되다 (6,8-15)어떤 적대자도 맞서지 못한 스테파노의 지혜와 성령 은총과 능력이 충만한 스테파노는 최고의회에 끌려가 거짓 증인들에 의해 고발을 당한다. 사진은 예루살렘 키드론 골짜기에 있는 성 스테파노 기념 성당. 정교회가 소유하고 있는 성당이다. 가톨릭평화방송여행사 제공 스테파노를 비롯한 일곱 봉사자를 뽑는 이야기에 이어 사도행전 저자는 즉시 스테파노를 부각시킵니다. 스테파노의 체포(6,8-15)를 시작으로 설교(7,1-53)와 순교(7,54-60)로 이어지는 스테파노 이야기는 사도행전 첫 부분의 대미를 장식하면서 또 다른 국면으로 이어지는 연결고리 역할을 합니다. 이번 호에는 체포 이야기를 살펴봅니다. 지혜와 능력 충만한 스테파노일곱 봉사자 선출과 관련한 앞 대목에서 스테파노를 “믿음과 성령이 충만한 사람”(6,5)으로 묘사한 루카는 스테파노의 체포 이야기에서도 “은총과 능력이 충만한 스테파노는…”(6,8)이라는 표현으로 시작합니다. 이 두 절을 합쳐서 보면, 스테파노는 믿음과 성령으로 충만했기에 성령께서 주시는 은총과 능력으로 충만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 스테파노는 “백성 가운데에서 큰 이적과 표징들을”(6,8) 일으킵니다. 사도행전에서 ‘이적과 표징’은 하느님께서 하시는 일로 이해됩니다.(2,19.22 참조) 이적과 표징은 또한 예수님께서 일으키시는 일이기도 합니다.(2,22; 4,30) 예수님께서는 사도들을 통해 많은 이적과 표징들을 일어나게 하십니다.(2,43; 5,12) 스테파노가 “백성 가운데에서 큰 이적과 표징들을 일으켰다”는 것은 단순히 식탁 봉사를 하는 차원을 넘어 이적과 표징들을 통해 사도들이 하는 일 곧 말씀 선포의 직무도 함께 행하고 있으며 적어도 행하는 일에서는 사도들과 같은 대열에 있음을 짐작하게 해줍니다. 백성 가운데서 큰 이적과 표징들을 일으킨다면 당연히 사람들이 주목하고 관심을 가질 것입니다. 유식하다고 하는 사람들은 반박도 할 것입니다. 바로 이런 일이 스테파노에게 벌어집니다. 몇몇 사람이 스테파노와 논쟁을 벌인 것입니다. 그들은 “해방민들과 키레네인들과 알렉산드리아인들과 킬리키아와 아시아 출신들의 회당에 속한 사람”(6,9)이었습니다. 이들은 어떤 사람들이기에 스테파노와 논쟁을 벌였을까요? 스테파노와 논쟁한 사람들해방민들이란 전쟁 등으로 노예가 돼 끌려갔다가 자유인이 돼 풀려난 사람 또는 그 후손을 가리킵니다. 실제로 로마 장수 폼페이우스는 기원전 63년에 많은 유다인들을 노예로 끌고 갔다고 하지요. 키레네인들은 북아프리카, 지금의 리비아에 있는 도시 키레네에서 살았던 유다인들을 가리킵니다. 당시 키레네에는 많은 유다인이 살았다고 합니다. 예수님께서 골고타로 십자가를 지고 가실 때에 병사들이 키레네 사람 시몬을 붙잡아 강제로 십자가를 지게 했는데(마르 14,21), 같은 지역을 가리킵니다. 알렉산드리아는 이집트에 있는 큰 항구도시로서 그리스 문화의 중심지였습니다. ‘70인역’인 그리스어 구약성경이 편찬된 곳이 바로 알렉산드리아입니다. 킬리키아는 오늘날 터키 남부 지역으로 그 지방의 수도는 바오로 사도의 출신지인 타르수스였습니다. 따라서 스테파노와 논쟁을 벌인 이들은, 말하자면 대부분이 외지에서 들어온 유다인로서 예루살렘에서 자기들을 위한 회당을 두고 있을 정도로 신심이 깊었고, 유다교의 가르침이나 율법에 대해서도 잘 알고 있다고 자부하는 이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들이 스테파노와 논쟁을 벌였지만 “스테파노의 말에서 드러나는 지혜와 성령을 당해낼 수가 없었다”고 루카는 기록합니다.(6,10) 이 표현은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재난이 시작되어 증언할 기회가 올 때에 “어떠한 적대자도 맞서거나 반박할 수 없는 언변과 지혜를 내가 너희에게 주겠다”(루카 21,15)고 하신 말씀을 떠올리게 합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하신 말씀이 스테파노에게서 그대로 실현되고 있는 것입니다. 스테파노를 당해낼 수 없게 되자 그들은 사람들을 선동해 “우리는 그가 모세와 하느님을 모독하는 말을 들었습니다” 하고 말하게 합니다.(6,11) 그뿐 아니라 백성과 원로들과 율법학자들까지 부추기고는 스테파노를 붙잡아 최고의회로 끌고 갑니다. 그리고 거짓 증인을 내세워 말하게 합니다. “이 사람은 끊임없이 이 거룩한 곳과 율법을 거슬러 말합니다. 사실 저희는 그 나자렛 사람 예수가 이곳을 허물고 또 모세가 우리에게 물려준 관습들을 뜯어고칠 것이라고, 이자가 말하는 것을 들었습니다.”(6,12-14) 거짓 고발스테파노와 논쟁을 벌이던 이들이 사람들을 선동하고 거짓 증인을 내세워 고발하게 하는 모습은 예수님의 재판 때 모습과 흡사합니다. “우리는 저자가, ‘나는 사람 손으로 지은 이 성전을 허물고, 손으로 짓지 않는 다른 성전을 사흘 안에 세우겠다’고 말하는 것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마르 14,58; 마태 26,61) “그러자 최고의회에 앉아 있던 사람들이 모두 스테파노를 유심히 바라보았는데, 그의 얼굴은 천사의 얼굴처럼 보였다”고 사도행전 저자는 기록합니다.(6,15) 유심히 바라본다는 것은 스테파노가 무슨 말을 할지 주시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고향 나자렛 회당에서 이사야 예언서의 말씀을 읽고 나서 자리에 앉으시자 회당에 있던 모든 사람의 눈이 예수님을 주시한 것과 비슷한 상황입니다.(루카 4,20) 스테파노의 얼굴이 천사 얼굴처럼 보였다는 것은 그의 모습이 거룩하게 변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예수님께서 타보르산에서 모습이 거룩하게 변하셨고(루카 9,29), 모세가 시나이 산에서 주님과 말씀을 나누고 내려왔을 때 얼굴이 빛난 데서 알 수 있듯이(탈출 34,29), 스테파노의 얼굴이 변했다는 것은 이제 중대한 일이 있으리라는 것을 예고합니다. 이에 대해서는 다음 호에서 살펴보겠습니다.생각해봅시다1. 스테파노와 논쟁을 벌인 사람들은 나름대로 잘 났다고 자부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이 함께 논쟁을 벌였지만, 스테파노를 당해낼 수 없었던 것은 스테파노에게 은총과 능력이 충만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스테파노가 은총과 능력이 충만할 수 있었던 것은 그에게 믿음과 성령이 충만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이것은 하느님의 일을 하는 데 무엇이 필요하고 무엇이 중요한지를 생각하게 해줍니다. 하느님의 일을 하는 사람은 하느님의 영 곧 성령으로 충만해야 합니다. 그러려면 무엇보다 믿음이 충만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이라도 있으면, 이 돌무화과나무더러 ‘뽑혀서 바다에 심겨라’ 하더라도, 그것이 너희에게 복종할 것이다.”(루카 17,6) 우리의 믿음은 어느 정도인지요? 우리는 어떤 믿음을 지니고 있는지요? 2. 스테파노와 논쟁을 벌인 사람들은 나름대로 확신에 차서 논쟁을 벌였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들은 논쟁에서 당해내지 못하자 사람들을 선동합니다. 그뿐 아니라 거짓 증인들을 내세워 고발하게 합니다. 우리 역시 살아가면서 논쟁을 벌일 때가 많습니다. 처음에는 선의에서 시작하지만, 논쟁이 격화하면 무슨 수를 써서라도 상대방을 짓누르려고 하기 쉽습니다. 바로 이 점을 우리는 경계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더욱 큰 악을 불러일으킬 수 있습니다. 평화신문2019.05.15
![[김소일 위원의 일치순례기 붓다의길 예수의길] (4·끝) 붓다의 입멸지 쿠시나가르](//cpbc.co.kr/CMS/newspaper/2019/04/rc/751405_1.0_titleImage_1.jpg)
[김소일 위원의 일치순례기 붓다의길 예수의길] (4·끝) 붓다의 입멸지 쿠시나가르예수와 붓다가 통하다 사랑과 자비 쿠시나가르 열반당에 있는 붓다의 열반상은 길이 6.1m의 금박 와불이다. 전 세계 불자들의 순례와 기도가 끊이지 않는 곳이다. 한국의 종교지도자들은 사원 측의 배려로 별도의 기도시간을 배정받고 종교간 화합과 한반도 평화를 기원했다. 길 위에서 마친 붓다의 삶붓다는 길 위에서 태어나 길 위를 떠돌다가 길 위에서 삶을 마쳤다. 당시 인도 북부에는 16개 작은 나라가 있었다. 붓다의 설법 여행은 주로 마가다국을 중심으로 국경을 넘나든다. 조계종 총무원장 원행 스님은 그 여정을 “동서 삼천 리, 남북 이천 리”로 표현했다.붓다의 마지막 여행은 마가다국 수도 왕사성에서 쿠시나가르로 가는 북행이었다. 북서쪽으로 300㎞쯤 되는 곳이다. 이미 여든에 이른 붓다에게는 힘겨운 길이었다. 머물고 설법하며 몇 달에 걸쳐 걸었을 것이다. 붓다는 이 길에서 곧 다가올 열반을 몇 차례 예고한다. 마지막 공양을 바친 사람은 대장장이 춘다였다. 일종의 버섯 요리였다고 전한다. 붓다는 쿠시나가르에 이르러 몸을 눕혔다. 머리를 북쪽으로 두고, 오른쪽 옆구리를 땅에 댔다. 제자들에게 마지막 설법을 하고 열반에 들었다. 사방에 두 그루씩 사라쌍수가 그 열반을 지켜보았다. 순례와 기도의 열기 넘치는 열반당쿠시나가르의 열반당에 들어서면 숙연한 마음을 감출 수 없다. 붓다는 길이 6.1m의 대형 금박 와불로 누워 있다. 불심 깊은 순례자들이 끊임없이 참배하고 꽃을 바친다. 준비해온 비단으로 불신을 덮고 나직한 소리로 경을 왼다. 그 신심과 기도의 열기가 공간을 채우고 흘러넘친다. 위대한 구도자의 가르침은 2500년의 세월을 넘어 수많은 사람의 가슴에 꿈틀거리며 살아 있다.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은 그리스 비극처럼 잘 짜인 서사적 구조로 흐른다. 슬프고 아름답고 장엄하다. 그분은 나귀를 타고 환호를 받으며 예루살렘에 입성한다. 군중은 길바닥에 겉옷을 깔고 종려나무 가지를 흔들며 외친다. “호산나! 주님의 이름으로 오시는 분은 복되시어라.” 그러나 그분은 다가올 수난을 알고 있다. 최후의 만찬을 준비하고 제자들의 발을 씻긴다. 한 제자의 배신을 예고하고 동산으로 물러나 홀로 기도한다. 군사들에게 붙잡혀 재판을 받을 때 군중은 소리친다. “십자가에 못 박으시오!” 그들은 바로 며칠 전 ‘호산나!’를 외쳤던 군중이었다.가장 큰 계명,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경전은 붓다의 마지막 가르침을 ‘자등명(自燈明) 법등명(法燈明) 자귀의(自歸依) 법귀의(法歸依)’로 전한다. 자신을 등불로 삼고, 법을 등불로 삼으며, 자신을 귀의처로 삼고, 법을 귀의처로 삼아 정진하라는 뜻이다. 팔리어 원전에는 등불이 아닌 섬이라고 한다. 진리를 바다 한가운데 떠 있는 섬처럼 여기고 오직 그에 귀의하라는 뜻일 터다.성경에도 비슷한 가르침이 있다. 역시 수난과 죽음을 앞둔 시기다. 율법 교사 한 사람이 물었다. “스승님, 율법에서 가장 큰 계명은 무엇입니까?” 그분이 답했다. “‘네 마음을 다하고 네 목숨을 다하고 네 정신을 다하여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 이것이 가장 크고 첫째가는 계명이다. 둘째도 이와 같다.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는 것이다. 온 율법과 예언서의 정신이 이 두 계명에 달려 있다.”(마태 22,35-40)과연 그렇다. 그리스도의 모든 가르침은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 두 가지로 요약된다. 붓다가 강조한 ‘법을 등불 삼고, 법에 귀의하라’는 가르침은 아마도 ‘하느님 사랑’과 통할 것이다. 다만 ‘자신을 등불 삼고, 자신에게 귀의하라’는 가르침은 ‘이웃 사랑’과 미묘하게 엇갈린다. 서로 방향이 다르다. 한쪽은 내면을 향하고, 다른 쪽은 바깥을 본다. 깨우침을 강조하는 불교와 사랑을 최고의 가치로 여기는 그리스도교의 특성이 드러난다.비슷하면서도 다른 수행문화가톨릭과 불교 사이에는 다름과 같음이 공존한다. 두 종교는 비슷하면서도 색다른 수행문화를 갖고 있다. 선불교에 참선 문화가 있다면, 가톨릭에는 사막의 은수자로부터 이어져 온 치열한 수도 문화가 있다. 기도와 노동으로 이뤄진 단순한 삶의 전통은 오늘날 남녀 수도원에 면면히 흐른다.물론 그 수행에는 본질적인 차이도 있다. 불교적 수행이 해탈과 성불을 목표로 한다면, 가톨릭은 신비적 합일과 구원의 은총을 갈구한다. 깨달음은 철저하게 고독한 수행을 요구한다. 가족도, 이웃도 버리고 무소의 뿔처럼 홀로 가야 한다. 가톨릭 수도 문화는 공동체적 사랑을 중시한다. 미운 이를 용서하고 괴로운 이에게도 순명한다. 저 천덕꾸러기 형제를 사랑하지 못하면 은총도, 구원도 얻지 못한다. 잘나고 못난 이웃을 사랑할 수 있어야 한다. 이웃 사랑이 부족하면 하느님도 사랑할 수 없다.대자대비와 사랑 붓다는 지혜와 더불어 대자대비의 상징이다. 자비는 지혜의 필연적인 귀결이다. 아마도 사랑의 다른 이름일 것이다. 출가와 수행이 개인의 해탈만을 목표로 한다면 그 가르침을 잘못 이해한 것일 수 있다. 대승불교는 이타행(利他行)을 강조한다. 상구보리(上求菩提) 하화중생(下化衆生)이 보살의 덕목이다. 위로는 깨달음을 구하고 아래로는 중생에게 다가가야 한다. 홀로 깨달아 성불하는 길은 외롭고 불확실하다. 매일의 삶 속에 실천하는 연민과 자비에도 성불의 길은 열려 있을 것이다.결국, 두 종교는 사랑과 자비로 서로 만난다. 관용과 존경으로 서로를 긍정한다. 쿠시나가르의 열반당을 물러나며 프란치스코 교황을 떠올렸다. “삶이라는 것은 길입니다. 혼자서는 갈 수 없는 길입니다. 우리는 형제들입니다. 서로를 인정하고 함께 걸어가도록 합시다.”감사한 마음으로 순례를 마쳤다. 짧지만 강렬한 체험이었다. 불교와 그리스도교를 함께 생각해보는 소중한 시간이었다. 순례의 끝이 어디 있을까. 인생이 곧 순례이니 삶이 다하는 그 순간까지 우리는 순례자다. 허락된 시간만큼 걸어가는 나그네일 뿐이다. 인도=김소일 기자 sonos@cpbc.co.kr cpbc2019.04.23
![[이창훈 위원의 예수님 이야기] (76) 무화과나무의 교훈과 깨어 있어라 (루카 21,29-38)](//cpbc.co.kr/CMS/newspaper/2018/08/rc/729698_1.0_titleImage_1.jpg)
[이창훈 위원의 예수님 이야기] (76) 무화과나무의 교훈과 깨어 있어라 (루카 21,29-38)깨어 기도하며 완성될 하느님 나라 기다려야 예수님께서는 낮에는 성전에서 가르치셨고 밤에는 올리브 산으로 가서 묵으셨다. 사진은 예루살렘 성전이 있던 자리인 황금 돔 사원(이슬람교 대사원) 쪽에서 본 올리브 산 전경. 원 안은 올리브 산 중턱 주님 눈물 성당 모습. 앞에서 살펴봤듯이 루카복음은 21장 5절부터 계속해서 종말에 관한 예수님 말씀을 전하고 있습니다. 그 말씀은 성전 파괴에 대한 예고(21,5-6), 재난의 시작(21,7-19), 예루살렘의 멸망 예고(21,20-24), 사람의 아들이 오시는 날에 관한 말씀(21,25-28)으로 이어집니다. 이번 호에는 그 마지막 부분으로 무화과나무가 주는 교훈에 관한 말씀과 깨어 기도하라는 말씀에 대해서 알아봅니다. 무화과나무의 교훈(21,29-33)무화과나무는 성경에서 50회 가까이 언급되는 대표적인 성경 속 식물 가운데 하나입니다. 예수님께서 무화과나무를 비유로 들어 말씀하시는 것은 이 나무에 대해 당시 이스라엘 사람들이 잘 알고 있음을 전제하고 있다고 하겠습니다. 비유와 관련된 예수님 말씀은 두 부분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첫째 부분은 “무화과나무와 다른 모든 나무를 보아라. 잎이 돋자마자 너희는 그것을 보고 여름이 이미 가까이 온 줄을 저절로 알게 된다. 이와 같이 너희도 이러한 일들이 일어나는 것을 보거든, 하느님의 나라가 가까이 온 줄 알아라”(21,29-31)까지입니다. 무화과나무를 비롯한 다른 나무들에 잎이 돋아나면 여름이 이미 가까이 왔음을 알게 되는 것처럼 예수님께서 지금까지 말씀하신 종말에 관한 표징들이 나타나는 것을 보면 하느님 나라가 가까이 온 줄 알라는 말씀입니다. 주목할 구절은 “하느님 나라가 가까이 온 줄 알아라”입니다. 같은 내용을 전하는 마르코복음이나 마태오복음에서는 ‘하느님 나라’가 아니라 ‘사람의 아들’로 표현하고 있습니다.(마태 24,33; 마르 13,29) 성경학자들은 루카 복음사가가 사람의 아들을 하느님의 나라로 바꿨다고 봅니다. 하느님 나라는 복음서들, 특히 마르코 마태오 루카 세 공관 복음서의 주요 내용이자 예수님의 말씀과 행동의 핵심입니다. 나아가 예수님께서는 “내가 하느님의 손가락으로(마태오복음에서는 ‘영으로’) 마귀들을 쫓아내는 것이면, 하느님의 나라가 이미 너희에게 와 있는 것이다”(루카 11,20; 마태 12,28) 하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과 함께 하느님 나라가 시작됐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무화과나무 잎이 돋아나는 것처럼, 종말의 표징들이 나타나면 종말에 오실 ‘사람의 아들’이 가까이 온 줄로 알아라”하고 표현한 마르코복음이나 마태오복음이 “하느님 나라가 가까이 온 줄 알아라” 하고 표현한 루카복음보다 훨씬 사리에 맞게 보입니다. 그런데 왜 루카 복음사가는 ‘사람의 아들’을 ‘하느님 나라’로 바꾸었을까요?이렇게 생각해 보면 어떨지요. 하느님 나라는 예수님이 오심으로써 이미 시작됐습니다. 예수님의 말씀과 치유 행위 그리고 기적적인 행동들은 하느님 나라가 와 있음을 알리는 표징들이었습니다. 예수님의 부활 후 제자들의 복음 선포 활동으로 많은 이들이 이를 받아들이고 믿음의 공동체에 들었습니다. 하지만 신자들은 박해를 받았고 시련을 겪었습니다. 그러면서 예수님께서 다시 오실 종말을 기다리게 됐습니다. 루카 복음사가는 사람의 아들이 다시 오시는 종말이 단지 심판이 아니라 이미 예수님과 함께 시작한, 그러나 아직 완전히 실현되지 않은 하느님 나라의 완성이라는 측면을 강조하고자 했습니다. 그래서 종말 심판자의 느낌을 주는 ‘사람의 아들’ 대신에 ‘하느님 나라’라는 표현을 사용했으리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하느님 나라가 가까이 온 줄 알아라”는 표현은 하느님 나라가 완전히 실현될 날이 가까웠다는 표현인 셈입니다.예수님 말씀의 두 번째 부분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이 세대가 지나기 전에 모든 일이 일어날 것이다. 하늘과 땅은 사라지더라도 내 말은 결코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21,32-33)는 종말의 표징들이 나타나면 하느님 나라가 완성되리라는 말씀이 결코 헛말이 아님을 단호하게 천명하고 확인해 주고 있다고 하겠습니다. 깨어 있어라(21,34-38)그래서 제자들에게 또 제자들의 공동체에게 요청되는 자세는 깨어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 말씀처럼 “스스로 조심하여 방탕과 만취와 일상의 근심으로 … 마음이 물러지는 일이 없게”(21,34) 하는 것입니다. 방탕과 만취와 일상의 근심에 젖어 지내는 것은 종말이 가까웠음을, 하느님 나라가 가까이 와 있음을 깨닫지 못하고 현실의 덫에 빠져 지내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 덫에 빠져 사람의 아들이 오시는 종말에 완전히 실현될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하는 일이 없도록 하려면 “깨어 기도하여야”(22,36) 합니다. 루카 복음사가는 종말에 관한 예수님 말씀을 이렇게 전하고 나서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서 하신 마지막 활동을 이렇게 요약합니다. “낮에는 성전에서 가르치시고 밤에는 올리브 산이라고 불리는 곳으로 묵곤 하셨다. 온 백성은 그분의 말씀을 들으려고 성전에 계신 그분께 이른 아침부터 모여들었다.”(21,37-38)생각해 봅시다예수님의 부활과 성령 강림부터 세상 종말이 오고 하느님 나라가 최종적으로 실현될 그 날까지를 교회의 시대라고 합니다. 예수님과 함께 시작된 하느님 나라의 기쁜 소식은 교회를 통해 온 세상에 퍼져나갈 것입니다. 그와 함께 마치 겨자씨가 자라 큰 나무가 되듯이 하느님 나라도 성장할 것입니다. 종말에 완성될 그 날까지. 우리는 지금 교회의 시대를 살고 있고, 루카 복음사가가 복음서를 썼을 때에 함께했던 그 신자 공동체는 그 교회 시대의 첫 세대였습니다. 그렇다면 루카 복음사가가 예수님의 말씀을 통해서 자기 신자 공동체에게 전하려고 했던 그 메시지는 오늘날 우리에게도 여전히 유효합니다. “너희는 스스로 조심하여 방탕과 만취와 일상의 근심으로 너희 마음이 물러지는 일이 없게 하여라. … 늘 깨어 기도하여라.”우리는 이미 시작된 하느님 나라의 백성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마음은 늘 기쁨에 차 있어야 합니다. 하지만 이미 시작된 하느님 나라는 아직 완성되지 않은 나라입니다. 밀과 가라지가 함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긴장 속에서 늘 깨어 기도해야 합니다. 다시는 방탕과 만취와 일상의 근심에 젖어 헤어나지 못하는 일이 없어야 하겠습니다. 평화신문2018.08.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