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 속 기도] (4) 야곱의 기도](//cpbc.co.kr/CMS/newspaper/2016/03/rc/622283_1.0_titleImage_1.jpg)
[성경 속 기도] (4) 야곱의 기도간절히 청하라, 그리고 행동하라 야곱은 가족과 함께 야뽁강을 건넌다. ‘빈의 창세기’로 불리는 필사본의 세밀화. 6세기, 오스트리아 국립도서관. 출처=「성경 역사 지도 야뽁강에서 밤새 씨름을 한 야곱의 이야기는 성경에서 너무 잘 알려진 이야기다(창세 32,2-33). 사람들은 흔히 야곱의 기도를 하느님과 끈질기게 겨루어 자신이 원하는 것을 얻어내게 한 기도라고 믿는다. 이런 기도를 바로 응답받는 기도, 능력의 기도라고 생각한다. 마치 어린아이가 엄마에게 떼를 쓰면 자신이 원하는 것을 얻는다고 생각하는 것과 같다. 형과 아버지를 속이고 외삼촌 라반의 집으로 피신했던 야곱은 20년 만에 큰 부자가 돼 아버지 집으로 돌아오게 되었다. 하지만 고향으로 돌아가는 야곱에게 큰 걸림돌이 하나 있었다. 다름 아닌 형 에사오였다. 장자권을 빼앗기고 아버지의 축복마저 동생에게 빼앗긴 형 에사오. 20년이라는 세월이 흘렀다고 자연스레 해결될 문제가 아니었다. 야곱은 자신의 식솔들을 먼저 야뽁강을 건네게 했다. “야곱은 이렇게 그들을 이끌어 내를 건너 보낸 다음, 자기에게 딸린 모든 것도 건네 보냈다”(창세 32,24).이제 남은 것은 야곱, 오직 자신뿐이었다. 바로 그때 야곱은 아주 신비한 체험을 하게 된다. “그러나 야곱은 혼자 남아 있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이 나타나 동이 틀 때까지 야곱과 씨름을 하였다”(창세 32,25). 당시 씨름이란 양이나 염소를 치는 목동들이 자신의 힘을 키우고 과시하기 위해 했던 놀이다. 희한한 것은 야곱을 붙잡고 씨름한 이가 야곱을 이기지 못했다. 시간이 흘러 동이 트기 시작한다. 야곱은 사력을 다해 물고 늘어졌다. 그는 자신이 이길 것 같지 않자 야곱의 허벅지 관절을 쳐서 탈골시켰다. 그래도 야곱은 그를 붙잡고 놓아주지 않으며 그에게 축복해 달라고 요구했다. 그러자 그는 야곱의 이름을 묻고는 야곱의 이름을 이스라엘로 바꿔 불렀다. 하느님, 그리고 사람들과 겨루어 이겼기 때문이라는 것이었다.야곱은 하느님과 대면했지만 죽지 않았다고 고백하면서 그곳을 ‘프니엘’이라고 불렀다. 야곱은 필사적으로 밤새 하느님과 담판했고 마침내 하느님의 복을 받아낼 수 있었다. 그 뿌리에는 하느님에 대한 절대적인 믿음이 존재한다.야곱은 하느님께서 20년 전에 하셨던 약속을 상기하면서 기도의 힘을 얻는다. “주님께서 그 위에 서서 말씀하셨다. 나는 너의 아버지 아브라함의 하느님이며 이사악의 하느님인 주님이다. 나는 네가 누워 있는 이 땅을 너와 네 후손에게 주겠다. 네 후손은 땅의 먼지처럼 많아지고, 너는 서쪽과 동쪽 또 북쪽과 남쪽으로 퍼져 나갈 것이다. 땅의 모든 종족이 너와 네 후손을 통하여 복을 받을 것이다. 보라, 내가 너와 함께 있으면서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너를 지켜 주고, 너를 다시 이 땅으로 데려오겠다. 내가 너에게 약속한 것을 다 이루기까지 너를 떠나지 않겠다”(창세 28,13-15). 야곱은 에사오의 보복이 두렵다고 솔직하게 고백하면서 하느님의 보호를 간절히 구했다. 그리고 에사오에게 선물할 가축을 대거 선별해 종들의 손에 붙여 앞장세웠다. 에사오의 원한을 풀기 위해 기도하는 한편 동시에 스스로 인간적으로 할 수 있는 조치도 취했다. 야곱은 기도하면서 행동했다. 기도는 제 욕심을 채우는 요술이나 마술이 아니라 하느님의 자비 그리고 그 은혜를 구하는 것이다. 정말 해결할 수 없는 문제 앞에서 절망하고 낙심하는 우리에게 하느님이 찾아와 우리를 붙들고 씨름하신다. 그러면 야곱처럼 진심으로 하느님의 자비와 은총, 자비를 얻게 된다. 허영엽 신부(서울대교구 홍보국장) 평화신문2016.03.02
[전영준 신부의 가톨릭 영성을 찾아서] (41) 11세기 ① - 동서 교회 분열과 로마네스크 양식의 출현파문의 화살 날리며 갈라진 형제들 신성 로마 제국 황제직은 천 년간 지속되면서 서방 교회 수호자라면서도 서방 교회를 심하게 간섭하기도 했지만, 서방 교회가 비교적 안정적으로 자리매김할 수 있도록 정치, 외교적인 외풍을 막아주는 역할도 일정 부분 담당했습니다. 11세기에 들어서서 서방 교회는 서서히 내부에서 발생하는 문제를 해결하면서 영적인 발전을 도모해야 했습니다.성화상 논쟁과 신경 정식 논쟁11세기에 그리스도교는 동방과 서방 교회의 분열을 경험했습니다. 사실 정치, 문화, 역사, 정서가 많이 다른 두 교회는 이미 분열의 위기를 경험했습니다. 특히 8~9세기에 두 교회는 ‘성화상 논쟁’과 ‘신경 정식(定式) 논쟁’으로 갈등을 경험했습니다. 성화상 논쟁은 동방 교회 내부에서 일어난 사건이었지만, 성화상 파괴론자들의 요청에도 불구하고 서방 교회가 성화상 공경론자들을 지지함으로써 성화상 파괴론자들이 서방 교회를 심하게 비판했습니다. 물론 787년에 제2차 니케아 공의회와 843년에 콘스탄티노폴리스 교회 회의가 성화상 공경을 지지하면서 성화상 논쟁은 일단락되었지만, 성화상 파괴론자들은 서방 교회에 앙금이 남았습니다.9세기 중반에 두 교회는 또 대립했습니다. 동로마 비잔틴 황제 미카엘 3세(Michael III, 제위 842~867)를 섭정하던 바르다스(Bardas, ?~866)가 자신의 부도덕성을 비난한 콘스탄티노폴리스의 총대주교 이그나티우스(Ignatius Constantinopolitanus, 재임 847~858; 867~877)를 사퇴시키고 친구인 포티우스(Photius Con- stantinopolitanus, 재임 858~867; 877~886)를 콘스탄티노폴리스의 총대주교로 임명했습니다. 그런데 이그나티우스가 사퇴를 거부하자, 포티우스는 교황 니콜라우스 1세(Nicolaus PP. I, 재임 858~867)에게 자신을 지지해 줄 것을 요청했습니다. 하지만 동방 교회에까지 교황권을 강화하고 싶었던 교황 니콜라우스 1세는 863년에 로마 종교 회의를 열어 포티우스를 파문했습니다.그 당시 교황 니콜라우스 1세는 ‘니케아-콘스탄티노폴리스 신경’에 ‘Filioque’(성자로부터도)라는 문구를 첨가한 신경 정식을 동방 교회 지역에까지 확산시키고 있었습니다. 따라서 포티우스는 동방 교회가 이단 사상으로 생각한 내용을 유포하는 것을 빌미로 867년에 콘스탄티노폴리스 종교 회의를 개최하여 교황 니콜라우스 1세를 파문했습니다. 하지만 같은 해에 비잔틴 황제에 즉위한 바실리우스 1세(Basilius I, 재위 867~886)는 유럽에까지 권력을 행사할 목적으로 서방 교회와의 관계를 개선하고자 포티우스를 해임했으며, 869~870년에 개최된 제4차 콘스탄티노폴리스 공의회는 포티우스를 파문했습니다.877년에 이그나티우스 총대주교가 사망하자, 유배 시절에 황실과 친분을 쌓았던 포티우스는 다시 총대주교에 복직되었습니다. 특히 사라센인들의 침략으로 비잔틴 제국의 도움이 절실했던 교황 요한 8세(Ioannes PP. VIII, 재임 872~882)는 포티우스의 총대주교직을 승인했습니다. 포티우스는 879~880년에 콘스탄티노폴리스 종교 회의를 개최하여 제4차 콘스탄티노폴리스 공의회가 결의한 내용을 부인했습니다. 비잔틴 제국의 도움이 절실했던 서방 교회는 이러한 조처를 묵인했지만, 양 교회 사이에 감정의 골은 더 깊어졌습니다.동방과 서방 교회의 분열10~11세기에 노르만인은 비잔틴 제국의 영토였던 이탈리아 남부와 시칠리아 섬으로 이주했습니다. 비잔틴 황제 콘스탄티누스 9세(Constantinus IX, 재위 1042~1055)는 교황과 동맹을 맺고 이 지역을 탈환하려 했습니다. 이에 교황 레오 9세(Leo PP. IX, 재임 1049~1054)는 1053년에 직접 군대를 이끌고 전쟁에 참여했으나 대패했습니다.하지만 콘스탄티노폴리스 총대주교 미카엘 케룰라리우스(Michael Cerularius, 재임 1043~1058)는 이 동맹을 빌미로 교황권이 동방 교회에까지 확대될 것을 걱정하여 서방 교회와 대립하기 시작했습니다. 케룰라리우스 총대주교는 과거 성화상 논쟁과 ‘Filioque’ 논쟁뿐만 아니라, 사제 독신제와 누룩 없는 빵을 제병으로 사용하는 것, 부활절 전례력의 차이 등 다양한 서방 교회 관습을 열거하면서 서방 교회를 비판했고, 동방 교회 지역에서 서방 전례를 따르는 교회와 수도원을 폐쇄시켰습니다.이에 교황 레오 9세는 1054년에 훔베르투스(Humbertus, 1000/1015~1061) 추기경을 단장으로 해서 교황 사절단을 콘스탄티노폴리스로 파견했습니다. 양 교회의 화해를 위해 황제 콘스탄티누스 9세가 노력했으나, 훔베르투스 추기경이 시종일관 교황 수위권을 주장하자 케룰라리우스 총대주교는 교황 사절단을 내쳤습니다. 이에 격분한 훔베르투스 추기경은 1054년 7월 16일에 총대주교를 파문하는 교서를 성 소피아 성당 제단 위에 놓고 로마로 돌아갔으며, 이에 케룰라리우스 총대주교도 교황 사절단을 파문했습니다. 이로써 동서 교회는 갈라졌습니다.물론 상호 파문교서에 허점이 있습니다. 교황 레오 9세는 1054년 4월 19일에 사망했고, 후임 교황 빅토르 2세(Victor PP. II, 재임 1055~1057)는 1055년 4월 13일에 선출되었기 때문에, 1054년 7월에 교황좌는 공석이었습니다.성경 및 교리공부에 로마네스크 양식 활용동서 교회 분열은 그리스도교에 뼈아픈 역사가 되었지만, 오히려 이후 서방 교회에서 영성 생활 발전에 자유스러운 분위기를 조성했습니다. 특히 그리스도인 영성 생활 발전에 도움을 주는데 로마네스크(Romanesque) 양식의 출현이 한몫했습니다. 10세기 말엽부터 12세기까지 유럽에서 유행했던 로마네스크 양식은 고대 로마 양식과 비잔틴 양식이 조합되어 건축, 미술, 조각 등에서 나타나는 로마풍 양식을 말합니다.두꺼운 돌벽과 반원형 둥근 아치 형태로 지어진 로마네스크 성당은 어둡고 엄숙한 분위기를 연출했기에, 순례객들의 기도 장소로 순례 성지에 지어졌습니다. 로마네스크 조각은 성당 건축물의 일부가 되었는데, 특히 성당 외벽에 성상뿐만 아니라 성경의 내용을 조각함으로써 글을 모르는 신자들도 조각을 통해 성경 말씀에 다가갈 수 있었습니다. 성당 내부는 강한 색채로 그려진 로마네스크 회화로 채워져서, 역시 신자들의 교리공부에 활용되었습니다. 또한, 수도자들이 필사한 책에 삽화로 그려져 책의 내용을 이해하는 데 도움을 주었습니다. 이에 반해, 동방 교회는 평면적인 ‘이콘’ 성화만 활용할 뿐이었습니다.성화상 공경은 성화상 자체를 공경하는 것이 아니라, 그 성화상이 담고 있는 내용이나 대상을 떠올리며 공경하는 데 의미가 있습니다. 동방 교회는 이단에 물들지 않기 위해서 조심하려고 여전히 성화상 공경에 인색했습니다. 하지만 동방 교회에서 자유로워진 서방 교회는 성화상을 신심 생활에 적극 활용했습니다. 문맹률이 높았던 중세 유럽 사회에서 신앙인들의 교리교육과 영성 생활에 큰 도움이 된다고 판단했던 것이었습니다. <가톨릭대 신학대학 영성신학 교수> 백영민2017.09.06
![[1988-2018 복음의 기쁨으로] 2. 교회 미래를 위한 청소년 사목의 새로움을 찾아서 (상)](//cpbc.co.kr/CMS/newspaper/2018/05/rc/721470_1.1_titleImage_1.jpg)
[1988-2018 복음의 기쁨으로] 2. 교회 미래를 위한 청소년 사목의 새로움을 찾아서 (상)“하느님, 성당에 왜 가야 하는지 모르겠어요” “요즘 들어 ‘이제 우리 아이는 주일학교에 그만 보내야겠어요’ 라든가 ‘선생님, 교리가 재미없어요’, ‘현실에 어떻게 교리를 적용해야 할지 모르겠어요’ 등의 말을 부쩍 듣게 됩니다. … 학생들은 중등부에 진학하면서 반으로, 고등학교에 진학하면서 다시 반으로 줄어들어 갑니다. 고등부 자체 내 감소 현상은 더욱 두드러지는데 그 예로 고3은 아예 교리반이 형성되지 못한다든지 심지어는 고등학생을 위한 주일학교를 없애는 것에 관한 이야기도 대두하고 있습니다. 주일학교에 출석하는 학생은 대학에 떨어진다는 말이 들려오곤 합니다.”(「가톨릭 디다케」 1988년 5월호 기고문 중) 달리기 대회에 참가한 주일학교 초등부 어린이들 모습. 가톨릭평화신문 DB 가톨릭평화신문이 창간 30주년을 맞아 1988년으로 시간을 돌렸다. 청소년 사목이 마주한 도전과 쇄신 과제를 살펴보기 위해 당시 자료를 펼쳤다. 마치 오늘 쓴 글처럼 생생하다.1988년 발간된 또 다른 자료를 살펴봤다. 같은 잡지 속 ‘바람직한 청소년 사목을 위한 제언’이란 제목의 기고문이 눈에 띈다. 청소년 사목의 활력을 저해하는 요소들이 나열돼 있다. △성인 중심의 사목 △청소년 지도자와 교리교사 부족 △사목자와 본당, 교구 간 협조 부족 △재정 부족 △가정 내 신앙교육 무관심 △청소년들의 교회 교육 기피 등의 문제점이 꼽혔다. 최근 발표된 기고문이라고 해도 될 법하다. 1988년 그리고 2018년. 많은 것이 변했지만, 또 많은 것이 변하지 않았다. 교회는 지난 30년 동안 청소년 사목에 대해 비슷한 고민과 비슷한 대안을 반복적으로 이야기해왔다. 이 시점에서 또다시 유사한 이야기를 반복하는 대신 ‘그럼에도 불구하고’ 청소년들을 교회로 이끌어 온 힘을 찾아보았다. 이 시대 청소년 사목은 어떤 변화에 직면해 있으면 어떻게 새로운 희망을 보고 있을까. 학교에서, 성당에서 아이들이 사라지고 있다? 한 청소년 사목자는 “이 상태로라면 주일학교는 경착륙할 것인가 연착륙할 것인가의 문제”라고 말한다. 지금 형태를 유지한 채 최대한 끌고 갈 것인가, 아니면 빨리 끝낼 것인가 선택의 문제일 뿐 청소년 수가 줄어들고, 냉담자가 늘어나고, 학업의 중요성이 더욱 커지는 시대의 큰 흐름을 거스를 수 없으므로 주일학교의 끝은 예정된 순서라는 표현이다. 청소년 인구 감소는 청소년 사목이 마주한 최대 문제다. 2016년 서울대교구 기준 청소년 교적 수는 초등부 4만 2826명, 중고등부 4만 4771명을 기록하고 있다. 평균을 내 보면 각 본당에는 초등부 215명, 중고등부 232명이 등록돼있으며 이들 가운데 주일학교에 나오는 출석자 평균은 각각 66명, 27명에 불과하다. 평균 출석률은 초등학교 3학년까지 상승하다 4학년을 기점으로 하락, 고등학교 1학년부터 10% 아래로 떨어진다. 당장 2009년과 비교해봐도 성당 내 청소년들은 빠르게 사라지고 있다. 2009년에는 전체 교적 수 초등부 5만 2667명, 중고등부 6만 5056명이 있었다.교회 내 청소년 증발은 학령인구 감소라는 큰 흐름 속에서 진행되고 있다. 통계청이 발표한 ‘2018 청소년 통계’의 ‘장래인구 추계’를 보면 학령인구(6~21세)는 빠르게 감소해왔다. 1988년 학령인구는 1364만 6000명이었으나 2000년에는 1138만 3000명으로 떨어졌고 2010년에는 995만 명으로 자릿수가 바뀌었다. 2018년에는 824만 2000명을 기록했다. 30년 동안 학령인구 540만 명이 사라진 것을 생각하면 청소년 감소 현상은 교회 내 문제만은 아니다. 이러한 문제의식 속에서 교회는 답을 찾고 있다.청소년들은 왜 성당에 나오나? 왜 안 나오나?청소년들에게 ‘주일학교 활동을 할 때 가장 좋은 점’을 물었다.(‘2013년 서울대교구 청소년국 중고등부 매뉴얼’ 참조) 친구와 다른 사람과의 관계(30.5%), 신앙공동체를 체험할 수 있다(15.2%), 신앙심이 깊어진다(14%) 등을 답했다. 이 답에서 찾을 수 있는 것은 청소년들의 관계성, 공동체성, 소속감에 대한 욕구가 성당 활동을 지탱하는 큰 요소라는 점이다. 반면 ‘주일 미사 불참 이유’에 대해서는 별 의미를 느끼지 못해서(31%), 취미 활동을 하거나 놀러 가느라(20.8%), 학업에 방해(12%), 전례가 지루해서(10.5%)라고 답했다. ‘주일학교 불참 이유’를 묻자 획일적이고 지루한 교육 내용 때문(30.7%), 신앙에 별 도움이 안 돼서(18.7%), 학업에 방해돼서(14.7%)라고 말했다. 여기서 발견할 수 있는 것은 성당에 나오지 않는 주된 이유로 꼽히는 학업과 그로 인한 중압감이라는 통념은 직접적인 원인이 아니라는 점이다. 오히려 주일학교나 신앙이 자신 삶에 선택적 대안이 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라는 응답이 높았다.신앙은 인생에 도움이 안 된다는 오늘날 청소년, 교회는 무엇을 해줄 수 있을까?통계청과 여성가족부가 발표한 ‘2010 청소년 통계’를 보면 ‘종교의 중요도’에 대해 청소년들은 대체로 ‘중요하지 않다’(별로 중요하지 않다 34%, 전혀 중요하지 않다 30.5%)고 답했다. 그런 와중에 종교 활동을 하는 청소년들은 ‘종교를 가지는 이유’에 대해 ‘마음의 평안을 위해’(50%)라고 꼽았다.오늘날 청소년들은 성인 못지않은 스트레스에 시달리고 있다. ‘2018 청소년 통계’를 보면 2017년 청소년 4명 중 1명은 최근 1년 동안 2주 내내 일상생활을 중단할 정도로 슬프거나 절망감을 느낀 적이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또 10명 중 3명 이상이 분명한 인생 목표를 가지고 있지 못한 것으로 조사됐다.오늘날 종교는 청소년들에게 마음의 안정을 제공하고 더불어 삶의 지표를 제시하는 역할을 요구받고 있다. 문용린(요한 보스코) 전 교육부 장관은 가톨릭학생회(KYCS-Cell) 50주년 세미나에서 “종교는 긴장과 갈등을 치유하고 해소하며 감소시키는 역할을 하므로 가톨릭 신앙을 가진 학생, 신앙인에 둘러싸인 학생들의 경우 청소년기 위기를 더 잘 대처해 나갈 수 있다”며 “교회가 성경과 교리에 대한 일반론 교육에서 더 나아가 중고등학생들의 현실 생활을 안내해주고 해결 지침을 줄 필요가 있다”고 말한 바 있다.사회 전반과 청소년들의 변화 속에서 교회 역시 변화하고 있다. 변화의 속도와 방향에 대한 아쉬움의 목소리는 있지만 ‘잃어버린 양’을 찾아 나서는 새로운 시도는 계속되고 있다. 유은재 기자 you@cpbc.co.kr 김현진2018.05.22
![[신앙단상] 이름에 대한 단상](//cpbc.co.kr/CMS/newspaper/2018/01/rc/709883_1.0_titleImage_1.jpg)
[신앙단상] 이름에 대한 단상이윤식(후고., 서울대 명예교수) 나는 언제부터인가 야생화를 좋아하게 되었다. 다양한 색깔과 모습으로, 화려하지는 않지만 나름대로 독특함을 갖고 이 세상에 존재한다는 사실이 얼마나 신비로운지 모른다. 예전에도 내 주변에 많이 존재해 있었겠지만 그때는 그냥 스쳐 지나가는 하찮은 들꽃이었을 뿐이었다. 작년에 대관령 목장길을 걷다가 수많은 늦가을 들꽃들을 줄지어 만난 적이 있다. 이름을 아는 꽃을 만날 때는 그 이름을 부르며 반가워했고, 이름을 모를 때는 스마트폰을 대고 사진을 찍어 그 이름을 알아보려 했다. 투구꽃, 아기똥풀, 물봉선…. 이렇게 아는 이름들을 찾아 하나하나 불러주다 보면, 그 꽃들이 어느새 내게 예쁘고 친밀한 존재로 친근하게 다가온다. 사회에서 성당을 다니는 사람을 만나면 제일 먼저 물어보는 것이 세례명이다. 세례명을 일단 알고 나면 그 주보 성인을 떠올리게 되고 그들의 성격이나 삶을 그 성인의 삶에 비추어 짐작해 보기도 한다. 꽃과 마찬가지로 사람도 그 이름을 알고 기억하게 되면 그들이 내게 더 소중하게 다가온다. 성경에서는 이름이 바로 그 사람의 소명으로 나타나기도 한다. 하느님께서 아브람을 아브라함으로 부르시며 번성하여 하느님 백성을 이루라 하셨고, 예수님께서 시몬을 교회의 반석이 되라고 베드로라고 부르신 것처럼 말이다. 우리는 자신의 이름이 불릴 때 자신의 정체성을 인식하게 되고, 소명을 새롭게 깨닫게 되고, 이름을 부른 분의 현존을 인식하게도 된다. 주님께서 ‘사무엘아’ 하고 세 번이나 이름을 부르신 끝에 어린 사무엘이 ‘말씀하십시오, 당신 종이 듣고 있습니다’라고 대답하는 장면(1사무 3,10)이 있다. 사무엘의 이름을 부르신 주님께서는 스승 엘리에 대한 예언을 전하라는 사명을 주신다. 주님께서 만일 지금 내 이름을 부르신다면 나는 어떤 대답을 하게 될까 잠시 생각해본 적이 있다. ‘누구신데요? 저는 지금 바쁩니다. 나중에 부르세요’ 하며 귀찮아할지 모르겠다. 아니, 스마트폰에 빠져서 부르시는 음성도 못 듣고 그냥 지나칠지도 모른다. 각종 교통, 통신 수단이 발달한 덕분에 오히려 주님의 부르심에 귀 기울일 시간도 없이 시간에 더 쫓기는 삶을 살게 된 것이 현대 사회의 아이러니다.고등학교 시절 명동성당에서 세례를 받았는데, 내 세례명은 후고다. 내 생일과 비슷한 시기에 축일이 있는 성인으로 수녀님이 골라 주셨는데 프랑스 그레노블의 주교였다. 신심이 돈독했던 후고 성인의 어머니는 성인이 출생하기 전 베드로 사도가 후고 성인을 안고 하느님께 봉헌하는 계시를 받았다. 어려서부터 신학 공부를 열심히 했고, 교리와 교회법에 정통해서 주교님을 많이 도와주었는데, 주교님과 함께 아비뇽 시노드에 참석했다가 성직자보다 더 성직자 같은 생활을 하는 평신도인 후고에게 교황님께서 직접 주교품을 주셨다. 그후 그레노블 주교로서 교회 개혁에 앞장서고 교구 조직을 재정비하였다. 올해 우리는 평신도 희년을 맞이하고 있다. 이번 기회에 각자 주보 성인의 삶에 대해서 자세히 알아보면 어떨까? 하느님으로부터 어떤 부르심을 받고 있는가를 살펴보면 좋을 것 같다. 금욕과 청빈과 기도의 삶을 살아왔던 평신도 출신 주교 후고 성인의 이름을 지니고 있는 나는 성인과 같은 삶을 살려고 얼마나 노력하고 있는지 새삼 나 자신을 돌아보게 된다. 주보 성인을 모시고 있는 우리 평신도들이 각자의 소명을 새롭게 되새기며 기쁘게 살아가는 희년이 되기를 기도해 본다. 평화신문2018.01.30
![[시사진단] 1987과 ‘응답하라 1988’- 이성훈(경희대 겸임교수)](//cpbc.co.kr/CMS/newspaper/2018/01/rc/709886_1.0_titleImage_1.jpg)
[시사진단] 1987과 ‘응답하라 1988’- 이성훈(경희대 겸임교수)이성훈(안셀모, 경희대 공공정책대학원 겸임교수, 한국인권재단 상임이사) 영화 ‘1987’의 열기가 뜨겁다. 현재 관람자 집계가 600만 명을 넘어섰고, 1000만 명 동원 영화 대열에 합류할 수 있을지 관심이 높다. 언제부턴가 드라마와 영화 제목으로 연도가 종종 사용되고 있다. tvN의 인기 드라마였던 ‘응답하라’ 시리즈는 1997년에 시작해서 1994년, 1988년으로 이어졌다. 여러 가지 면에서 드라마 ‘응답하라 1988’과 영화 ‘1987’은 대조적이다. 1987년이 한국 민주화의 분수령이었다면, 1988년은 서울 올림픽이 성공적으로 열린 해다. 1987년이 매우 무거운 주제인 박종철 물고문 치사 사건과 6월 민주화 운동을 다뤘다면, 1988년은 서울 올림픽을 역사적 시간적 배경으로, 서울시 도봉구 쌍문동 봉황당 골목을 공간적 무대 배경으로 삼아 한 가족과 소꿉친구들의 사랑과 우정에 관한 소박한 이야기를 다뤘다. 공교롭게도 1987년과 1988년 모두 30년이 지난 오늘의 역사 속에서 다시 부활하고 있다. 1987은 2017년 탄핵과 촛불 시민혁명으로, 1988은 2018 평창 동계 올림픽으로 다시 등장했다. 1987년 6월 민주화 운동 당시 전두환 군사정권은 무력으로 시위대를 진압할 생각을 했지만, 유혈 사태가 가져올 파급과 국제사회의 관심이 고조된 올림픽 때문에 타협을 선택했다고 한다. 대통령 직선제와 개헌을 수용한 6ㆍ29 선언은 이 같은 배경에서 탄생했다. 그해 10월 국민투표를 통해 헌법이 개정됐고, 12월에는 대통령 직선제가 시행됐다. 김영삼과 김대중, 두 야당 후보의 분열을 어부지리 삼아 노태우 후보가 36.6%의 역대 최저 득표율로 선출됐다. 그리고 그다음 해 서울 올림픽이 예정대로 개최됐다. 공교롭게도 바로 다음 해인 1989년 11월 동서 냉전의 상징인 독일 베를린 장벽이 무너졌다. 1988년 서울 올림픽은 결과적으로 반세기 냉전의 대결 구조를 해체하는 촉매 역할을 한 셈이다. 서울 올림픽의 성공적 개최로 자신감을 얻은 당시 노태우 정부는 탈냉전이라는 국제 환경을 적극 활용해 ‘북방정책’을 적극 추진했고, 그 결과로 1990년 러시아와, 1992년 중국과 정식으로 외교 관계를 수립했다. 이로써 냉전시대의 적대적 갈등 관계를 청산하고, 평화적 공존으로의 관계로 전환했다. 그러나 이는 절반의 성공이었다. 북한은 미국이나 일본과는 아직 정식 외교관계를 수립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문재인 정부는 ‘신북방정책’을 추진하고 있다. 신북방정책의 요체는 ‘동북아 평화 협력 구상과 유라시아 협력 확대’로 알려져 있다. 북핵과 한반도 평화를 러시아, 중앙아시아 국가 등 유라시아 국가와의 경제 협력과 연계해 해결해보려는 시도다. 30년 전 북방정책이 정치적이었다면, 이번 북방정책은 정치와 경제적 측면에서 같이 추진하고 있다는 게 특징이다. 이번에도 올림픽이 이러한 정치적, 경제적 변화의 촉매 역할을 하고 있다. 1987∼1988년, 그리고 30년 뒤 2017~2018년의 역사적 사건과 과정은 ‘카이로스’(Kairos)의 의미를 되새기게 한다. 카이로스는 시간의 질적인 측면을 의미하는 그리스 말인데, 성경에서는 ‘때가 됐다’는 표현으로 등장한다. 그때는 하느님의 섭리에 따르는 시간표로서 시간의 양적 축적이 질적인 변화로 나타나는 때를 가리킨다. 평창 올림픽이 열리는 2018년 한반도 주변에 북핵을 둘러싼 새로운 냉전의 기운이 가득하다. 다행히 북한의 평창 올림픽 참가를 계기로 대화와 협력을 위한 작은 촛불이 하나 켜졌다. 그러나 여전히 평창 이후를 우려하는 시선이 적지 않다. 그러나 2017년의 촛불과 2018의 평창 올림픽은 분명 카이로스다. 둘을 관통하는 핵심 열쇳말은 평화다. 2017년 촛불에서 보여준 평화의 정신과 열기가 평창 올림픽을 계기로 한반도와 동북아에 드리워진 ‘차가운 전쟁의 열기’을 녹여내고 큰 평화의 질서를 만들기를 기대해 본다. 평화신문2018.01.30
[김용은 수녀의 살다 보면] (4) 나, 이런 사람입니다! 어느 날이었다. 세 살배기 채아는 수녀원 거실에서 사탕 하나를 흔들어대며 까르륵까르륵 웃고 있었다. 그런데 아이의 엄마는 “채아야! 엄마는 네가 그 사탕을 지금 먹지 않으면 좋겠는데”라며 부드럽게 말을 건넸다. 그러자 아이는 순간 움찔하더니 거의 절망에 가까운 표정으로 손에 든 사탕을 바라보았다. 잠시 침묵이 흘렀다. 드디어 아이는 무언가 결심한 듯하더니 엄마에게 팔을 뻗어 사탕을 내밀었다. “와우~.” 나도 모르게 환호성이 터져 나왔다. 그리고 우리는 아이에게 아낌없는 박수를 보내줬다. 그러자 아이는 마치 세상을 다 얻은 뿌듯한 표정으로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리고 이렇게 말하는 것 같았다. ‘나, 이런 사람이야!’ 아이는 달콤한 사탕의 유혹을 이겨내고 더 높은 차원의 성취감과 자존감을 얻어낸 것이다.우리는 ‘유혹 과잉의 시대’라고 할 만큼 절제하기 힘든 세상에서 살고 있다. 물론 나 자신을 돌아보면 엄청난 절제로 고통을 감수해야 하는 일들은 혼신을 다해 해내곤 한다. 하지만 일상의 자잘한 욕구들 앞에서는 여지없이 무너지는 경우가 많다. 특히 무의식으로 단련된 습관은 잠시의 망설임도 없이 즉각적으로 행동하게 한다. 그래서 때론 욕구가 시키는 대로 좋아하는 음식, 사람, 사물, 장소, 놀이 앞에서 쉽게 굴복하고 만다. 머릿속에 저장된 습관으로 평소 즐기고, 좋아하는 감정에 기울어져 움직일 뿐이다. 그래서 누군가의 필요를 돌아보거나 무엇이 좋은지를 식별하고 절제하기란 쉽지 않다.특히 문제가 잘 풀리지 않아 힘들 때, 일하기 싫어 도망가고 싶을 때, 심심하고 지루할 때, 마음이 공허하고 외로울 때, 화가 나고 짜증 날 때, 고통스럽거나 서러울 때는 부정적인 감정이 파도처럼 밀려온다. 그러면 나도 모르게 이 불편한 감정을 피해 즉각적인 쾌감을 주는 음식이나 음악, 그리고 인터넷이나 스마트폰으로 숨는다. 좋지 않은 행동 패턴을 반복하고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말이다.그러다 보면 나의 자제력은 점점 힘을 잃어간다. 좋은 기분만 찾다 보면 견디고 절제하는 능력은 떨어지기 마련이다. 어려운 임무나 힘든 사람 앞에서, 그리고 도망가고 싶은 상황 앞에서도 그냥 그 자리에 서서 버텨야 했다. 그리고 단순히 자신을 통제하는 차원을 넘어 무엇이 최선인지 무엇이 하느님이 기뻐하실 일인지 찾아 움직여야 한다.신앙인은 십자가를 지고 고통스러운 감정을 감내하신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들이다. 채찍질로 온몸이 찢기고 해진 예수님을 슬프게 바라보는 것만으로 충분하지 않다. 참고 견디면서 무언가 행동으로 옮겨야 한다. 그렇다고 당장 엄청난 일을 해야 한다는 것은 아니다. 살레시오 성인은 “사소한 유혹에 대한 승리가 더 귀중하고 유익하다”고 했다. 나에게는 살짝 위안이 되는 말이기도 하다.그렇다면 나에게 있어 사소한 유혹은 무엇일까? 무관심의 유혹, 접속의 유혹, 판단과 불평의 유혹, 귀찮음과 게으름의 유혹 등이 떠오른다. 이 유혹을 이길 수 있는 것은 ‘절제’다. 그리고 절제는 오로지 내 선택에 달려 있다. 사실 절제의 문제는 내가 원하는 만족을 지연시킬 수 없다는 데 있다. 당장 판단하고 불평하고 싶고, 먹고 싶고, 놀고 싶은 마음속 저항을 긴 호흡으로 멀리 바라보며 나 자신을 놓아버려야겠다. 이 사소한 유혹을 이기는 절제의 힘은 생각보다 커다란 만족감과 성취감을 안겨줄 것이다. 작은 유혹을 이겨낼 때마다 어깨에 힘을 넣고 눈을 크게 뜨고 하늘을 향해 자랑스럽게 외치자. ‘나, 이런 사람입니다!’Tip1. 나에게 사소한 유혹이 무엇인지 알아내요.2. 그리고 절제하기 어렵다면 그 원인을 알아차려요.3. 절제하기 어려울 때마다 성경 말씀을 기억해요. “모든 경기자는 모든 일에 절제합니다. 그들은 썩어 없어질 화관을 얻으려고 그렇게 하지만, 우리는 썩지 않는 화관을 얻으려고 하는 것입니다.”(1코린 9,25)4. 작은 유혹을 이겨내는 나 자신을 상상해요. 마음속으로만 연습해도 뇌는 반응하거든요.5. 절제의 힘이 승리했다면 주님께 감사하며 자랑해요. “저, 이런 사람입니다!”<살레시오사회교육문화원 원장, 살레시오 수녀회> 평화신문2018.02.28
![[허규 신부와 떠나는 신약 여행] (67) “그대는 그를 더 이상 종이 아니라 종 이상으로…”(필레 16)](//cpbc.co.kr/CMS/newspaper/2017/09/rc/696214_1.0_titleImage_1.jpg)
[허규 신부와 떠나는 신약 여행] (67) “그대는 그를 더 이상 종이 아니라 종 이상으로…”(필레 16)재산 취급받던 종과 감옥에서 형제가 되다 필리피에서 감옥에 갇혔다가 풀려난 바오로 사도와 실라스가 간수에게 복음을 전하고 있는 모습을 그린 로마 바오로 대성전 프레스코화. ‘필레 16’ 이건 무슨 의미일까요. 보통 성경의 이름과 함께 장과 절을 표시하는데 필레몬에게 보낸 서간에는 장을 표시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바오로 사도가 직접 쓴 것으로 보는 이 편지는 전체가 하나의 장으로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필레몬서는 신약성경에서 가장 짧은 편지입니다. 이 편지는 그리스어로 보면 1575개 낱말로 쓰였습니다. 그렇기에 필레몬서는 장의 구분 없이 절로만 표시합니다. 필레 16은 필레몬서 16절입니다. 사적으로 보낸 짧은 편지이 짧은 편지는 하나의 장으로 되어 있다는 특징도 있지만, 그 내용에서도 바오로 사도의 다른 편지와는 구분됩니다. 다른 바오로 서간이 그가 세운 공동체에 보내는, 교회 신자들에게 보내는 편지인 반면에 필레몬서는 한 개인에게 보내는 편지이기 때문입니다. 단지 개인에게 보내는 편지의 형식으로 가르침을 전달하는 것이 아니라 내용에 있어서도 사적인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우선 필레몬서는 바오로 사도가 에페소에 머물러 있던 마지막 시기에 쓴 것으로 생각합니다. 대략 55년쯤입니다. 이 편지 역시 바오로 사도가 감옥에 갇혀 있는 동안에 쓴 것으로 소개합니다. 그는 스스로 “예수님 때문에 수인이 된 나 바오로”라고 편지의 서두에서 인사합니다. 그리고 이 편지의 수신자는 본문에서도 표현되는 것처럼 “사랑하는 협력자 필레몬”입니다. 하지만 이 편지 외에 필레몬에 대해서 알려진 것은 거의 없습니다. 편지에서 보면 필레몬은 어느 도시인지는 밝혀지지 않지만, 가정 교회(그대의 집에 모이는 교회)를 이끌어 가던 공동체의 봉사자였습니다.(필레 2) 그는 공동체와 신자들을 향한 각별한 마음을 가지고 있었고 바오로 사도는 그의 이러한 점을 칭찬하면서 동시에 믿음 안에서 더욱 굳건해지도록 그에게 요청합니다.(필레 6) 필레몬서의 가장 주된 내용은 오네시모스로 불리는 한 명의 종에 관한 내용입니다. 오네시모스는 필레몬의 종이었습니다. 어떤 연유인지는 드러나지 않지만 필레몬은 자신의 종을 바오로 사도에게 보냈던 것 같습니다. 그리고 바오로 사도가 감옥에서 이 편지를 쓸 때에 오네시모스 역시 그의 곁에 있었습니다. 믿음 가진 종, 쓸모 있는 사람 되다“그를 내 곁에 두어, 복음 때문에 내가 감옥에 있는 동안 그대 대신에 나를 시중들게 할 생각도 있었지만…”(필레 13)이라고 말하는 바오로 사도의 글을 보면 필레몬은 자신의 종을 바오로 사도의 시중을 들도록 보냈을 것입니다. 바오로 사도와 감옥에 함께 있던 오네시모스는 그리스도를 믿게 됩니다. 오네시모스를 원래 주인이었던 필레몬에게 돌려보내면서 그를 더 이상 종이 아닌 형제로, 그리스도 안에서 한 형제로 받아주기를 부탁하는 것이 필레몬서의 주된 내용입니다. 오네시모스라는 이름은 ‘쓸모 있는 사람’이라는 의미입니다. 이름의 이런 의미와 함께 바오로 사도는 말합니다. “그가 전에는 그대에게 쓸모없는 사람이었지만, 이제는 그대에게도 나에게도 쓸모 있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나는 내 심장과 같은 그를 그대에게 돌려보냅니다.”(필레 11-12) 이와 함께 바오로 사도는 오네시모스가 이전에 잘못한 것이 있다면, 혹 빚을 진 것이 있다면 자신이 갚겠다고 덧붙입니다.(필레 18) 그리스도 안에서 모두 한 형제이처럼 개인적인 내용을 담고 있는 필레몬서는 ‘그리스도 안에서 모두 한 형제’라는 사실을 잘 드러냅니다.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간직한 사람은 그가 주인이건 종이건, 남자거나 여자를 떠나서 모두 한 형제라는 사실입니다. 노예가 합법이었고 노예는 주인의 재산에 불과했던 당시 사회에서 그리스도를 믿게 된 종을 더 이상 종이 아닌, 바오로 사도와 똑같은 형제로 받아들여 주기를 청하는 편지의 내용은 믿는 이들의 형제애가 단지 말로만 그치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 줍니다. 지금 우리에게 믿는 이들은 모두 하느님의 자녀이고, 그들은 주님 안에 형제라는 말은 낯설지 않습니다. 하지만 실제로 우리 안에서 형제로서의 실천이, 형제애의 실현이 이루어지고 있는지 바오로 사도는 필레몬서를 통해 우리에게 묻는 것 같습니다. <가톨릭대 신학대학 성서학 교수> 김지항2017.09.20

쓰러진 아내 일으킨 것은 오직 사랑 사랑 사랑부활에 만난 사람 - 뇌출혈로 쓰러졌다 남편의 지극 정성으로 새 삶 사는 부부 서규석·신향철씨 뇌출혈로 인한 의식불명으로 가장 나약한 환자가 된 아내 신향철씨를 지극 정성으로 간호해 새 삶을 얻도록 힘쓴 서규석씨가 카메라 앞에서 다정한 자세를 취하고 있다. 이정훈 기자 아내는 한시도 눈을 떼지 않고 남편을 바라봤다. 아내 손을 꼭 잡은 남편의 손에는 사랑의 기운이 가득 배어 있다. 남편은 여전히 아내의 고통을 걱정했고, 아내는 “괜찮다”며 오히려 남편의 마음을 헤아렸다. 그리고 부부는 주저 없이 서로에게 말했다. “여보, 사랑해요. 곁에 있어줘서 고마워요.” 생사를 오가는 고통도 부부의 사랑을 갈라놓을 순 없었다. 사랑의 기적으로 ‘부활의 삶’을 살고 있는 서규석(베드로, 76, 원주교구 구곡본당)ㆍ신향철(마리나, 61)씨 이야기다.2013년 아내가 쓰러졌다. 건강하던 아내에게 갑작스레 뇌출혈이 찾아왔다. 3일 동안 큰 수술이 이어졌다. 수술실을 나온 의사의 입에서 청천벽력같은 말이 흘러나왔다. “아내분이 깨어날 가능성은 20% 미만입니다. 평생 의식 없이 살아야 할지도 모릅니다.”일주일 후 남편 서씨의 하늘은 다시 한 번 무너졌다. 슈퍼박테리아 감염으로 아내에게 2차 뇌출혈이 발생했다. 늘 밝기만 했던 아내는 병상에서 입을 벌린 채 한마디 말이 없는 사람이 돼 있었다. 급기야 의사는 “장례를 준비해야 할 것 같다”고 했다.“하루하루를 눈물로 지새웠어요. 긴 수술 동안 저는 묵주기도로 함께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매우 위험했지만, 다시 수술하면 아내가 살아날 확률은 0.1%였습니다. 절대 아내를 잃을 순 없었어요. 고심 끝에 수술을 부탁했죠. 모든 일은 제가 책임지겠다고요.”남편은 희망을 버리지 않았다. 프랑스 기업의 한국대표를 지내고 2005년 은퇴한 남편 서씨는 이후 모든 일을 접고 아내를 지극정성으로 간호했다. 남편은 ‘내가 무너지면 아내도 희망을 잃게 될 것’이라 여겼고, 지친 내색 없이 아내에게 “오늘도 참 예쁘다” “사랑한다”는 말과 함께 일과를 빠짐없이 이야기해줬다. 프랑스에 있는 세 자녀와 손주들 이야기, 친척과 친구 소식부터 성경 말씀과 성탄 시기 예수 탄생의 기쁨까지도. 같은 시기에 남편도 심장 수술을 하는 고통을 감내해야 했다.믿음,그리고 사랑의 기적 하느님도 남편의 사랑에 감동한 것일까. 0.1%의 확률을 뚫고 아내는 깨어났다. 풀렸던 동공에 생기가 돌았다. 바람에 흔들리는 촛불 같았던 아내의 의식은 기적처럼 빠른 회복세를 보였다. 뜨거운 눈물로 남편의 말에 처음 반응하기까지 40일이 넘게 걸렸다. 아내는 이후 음식을 삼키고, 말하고 움직이는 법부터 삶을 새롭게 다시 시작했다. 40개월 동안 수술만 10차례. 이후 아내는 재활에 들어갔다. 출구가 없을 것 같았던 죽음의 길 끝에 생(生)으로 가는 문이 열렸다.“의식이 없더라도 살아 있는 동안 ‘가장 행복한 시간’을 만들어주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듣고 말할 수 없어도 수없이 사랑한다고 했고, 저의 진심과 소통이 의식을 깨우는 것이라 여겼습니다. 사랑만큼 환자에게 좋은 것은 없다고 여기고 평소처럼 대화했죠. 병원이 하는 의학적 치료 외에 저는 마음의 치유를 위해 아내에게 ‘사랑 주기 작업’을 끝까지 했습니다.”(남편)의식이 없는 중에도 ‘사랑의 소통’이 사람을 살릴 수 있음을 부부는 체험했다. 신씨의 치유는 의학적으로도 극히 드문 사례. 아내는 여전히 재활 중이지만 사랑과 신앙은 더 깊어졌다. 부부는 매일 미사에 참여하고, 산책도 다니고 운동도 하면서 ‘제2의 삶’을 살고 있다.아내 신씨는 “의식이 불분명한 중에도 인간의 가장 큰 고통은 외로움이라는 걸 느꼈다. 환자를 일으키는 것은 ‘사랑’임을 몸소 느꼈다”면서 “남편의 사랑이 아니었다면 지금 이렇게 아름다운 삶을 살지 못했을 것”이라고 했다.비슷한 사연의 프랑스 부부 책 번역 남편 서씨는 이후, 의식을 잃었다가 기적적으로 치유된 프랑스인 부부 이야기를 담은 「눈물 한 방울」(바오로딸)을 번역해 최근 펴냈다. 서씨가 희망을 잃지 않았던 것도 혼수상태에 있었던 책의 저자(앙젤 리에비)가 사랑과 감동을 느끼고 깨어난 경험을 담고 있었기 때문이다. 서씨 부부의 사연은 지난해 대한뇌졸중학회 수기에도 최우수작으로 실렸다.“제가 병환 중에 남편이 ‘하느님을 알아볼 지성만이라도 주십시오’하고 기도했대요. 이제 하느님만 바라보며 사는 부부가 되려고요.”(아내)“어쩌면 아내를 잃을 뻔했지만, 하느님이 주신 생명으로 새 삶을 살고 있습니다. 하느님이 저희를 통해 하시고자 하는 일에 충실하며 살려고요. 같은 병으로 고통 중에 있는 부부와 가족이 저희처럼 하느님이 주실 희망의 끈을 놓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남편)부부는 인터뷰가 끝나고 다시 서로를 바라봤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사랑한다. 고맙다”고 했다. 이정훈 기자 sjunder@cpbc.co.kr cpbc2018.04.03
![[전영준 신부의 가톨릭 영성을 찾아서] (10) 3세기 ①-알렉산드리아 학파와 안티오키아 학파](//cpbc.co.kr/CMS/newspaper/2017/02/rc/670001_1.0_titleImage_1.jpg)
[전영준 신부의 가톨릭 영성을 찾아서] (10) 3세기 ①-알렉산드리아 학파와 안티오키아 학파비판 속에도 조화 이루려는 노력 잊지 않아 에페소 공의회(Concilium Ephesinum)에서 만난 알렉산드리아 학파와 안티오키아 학파. 이들은 서로에 대한 날선 비판을 했지만 상대의 방법을 조금씩 받아 들이며 조화를 이루려는 노력도 잊지 않았다. 위키피디아 3세기 전후로 로마를 비롯하여 그리스도교가 전파된 대표적인 지역에서 교리교육 학교가 생겨났습니다. 그리스도교는 2세기에 횡횡했던 이단 사상에 단호하고도 효과적으로 대응하면서 그리스도인을 지키는 방법으로 올바른 신앙 교육을 생각했던 것입니다. 교리교육 학교는 지역마다 고유한 방법론으로 교육하면서 때로는 대립하기도 하고, 때로는 상호보완적으로 조화를 이루면서 발전했습니다. 하지만 교리교육 학교가 강조했던 교육 방법에 따라서 그리스도인 영성 생활은 사뭇 다른 결과를 만들었습니다. 이 당시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와 시리아의 안티오키아에서 설립된 교리교육 학교가 가장 예민하게 대립했습니다.우의적, 영적 의미 - 알렉산드리아 학파알렉산드리아에서 활동했던 철학자 판테누스(Pantaenus, ?~200?)는 그리스도교로 개종한 이후 그리스도교 철학학교를 설립해 그리스 철학 방법론으로 복음을 가르쳤습니다. 이 학교에서 강의를 듣고 그리스도교로 개종한 대표적인 인물은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스(Clemens Alexandrinus, 160?~215 이전)였습니다. 스승의 뒤를 이어 교장이 된 클레멘스는 202~203년에 로마 황제 셉티미우스 세베루스(Septimius Severus, 145~211)의 박해로 알렉산드리아를 떠나기 전까지 이 학교에서 그리스 고전 문학과 복음을 조화시켜 가르쳤습니다. 이때 클레멘스가 배출한 대표적인 인물이 알렉산드리아의 오리게네스(Origenes Alexandrinus, 185?~254)였습니다.그리스도교 가정에서 태어났고 고등교육을 받은 오리게네스는 로마 황제 박해로 아버지가 순교하자 집안을 돌보기 위하여 사설 문법학교를 설립했습니다. 그의 명성이 자자해지자 알렉산드리아의 총대주교 데메트리우스는(Demetrius Alexandrinus, 재임 188/89~231)는 그에게 교리교육 학교 운영을 맡겼습니다. 오리게네스는 이 학교에서 그리스 고전 연구를 바탕으로 성경과 신학을 체계적으로 가르치면서 큰 성공을 거두었습니다. 현대 학자들은 알렉산드리아에서 몇 명에 걸쳐 설립되고 발전했던 교리교육 학교와 학풍을 ‘알렉산드리아 학교’ 혹은 ‘알렉산드리아 학파’라고 불렀습니다.초월 세계에 관심을 둔 플라톤 사상의 영향을 받은 지역을 기반으로 했던 알렉산드리아 학파는 중기 플라톤 사상을 주장했던 초세기 유다인 철학자 알렉산드리아 필론의 성경 해석 방법론을 받아들였습니다. 필론은 성경 해석에 있어서 문자적 의미뿐 아니라, 우의적(寓意的, allegorical) 의미를 살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문자적 해석은 잠정적이며 부차적인 의미를 살피고, 우의적 해석이야말로 상징적이며 영적인 의미를 살피기 때문입니다. 특히 오리게네스는 필론식 성경 해석 방법을 발전시켰습니다. 오리게네스는 성경 해석에서 단순한 사람을 위한 문자적 의미와 배운 사람을 위한 윤리적 의미 및 그리스도와 일치를 바라는 사람을 위한 영적 의미를 파악해야 한다고 언급했습니다.또한 알렉산드리아 학파의 신학은 추상적이며 초월적인 특징을 지니면서 그리스도의 인성보다 신성에 더 많은 관심을 가졌습니다. 결국 알렉산드리아 학파는 그리스도의 신성에서 출발하여 연역적인 방법으로 ‘위로부터의 하강 그리스도론’을 전개했습니다. 이 특성은 그리스도인에게 형이상학적인 탐구를 장려함으로써 그리스도인으로 하여금 초자연적인 영역에 관심을 갖도록 만들면서 신비체험을 갈망하는 영성 생활에 집중하도록 했습니다.문자적, 역사적 의미 - 안티오키아 학파안티오키아에서 활동했던 순교자 루키아누스(Lucianus Antiochenus, 250?~312)는 엄격한 수덕 생활을 실천하면서 성경 연구에 전념했던 사제였습니다. 루키아누스는 알렉산드리아 학파의 성경 해석 방법에 반발하면서 다른 방향에서 접근하는 성경 해석 방법을 가르치는 교리교육 학교를 설립했습니다. 현대 학자들은 루키아누스가 설립한 학교와 학풍을 ‘안티오키아 학교’ 혹은 ‘안티오키아 학파’의 시초로 여겼습니다.그런데 루키아누스의 제자 중에서 대표적인 인물로 훗날 이단 사상인 아리아주의 창시자가 되었던 아리우스(Arius, 256?~336)가 있었습니다. 따라서 스승인 루키아누스마저 이단 사상가로 의심받았습니다. 이후 한동안 안티오키아 학파의 방법론을 계승한 뛰어난 학자들이 나타나지 못하다가, 4세기 후반에 가서야 타르수스의 디오도루스(Diodorus Tarsensis, 344 이전~394 이전), 콘스탄티노플로스의 총대주교 요한 크리소스토무스(Ioannes Chrysostomus, 349/50~407) 및 몹수에스티아의 테오도루스(Theodorus Mopsuestenus, 350?~428) 등이 나타났습니다.현실 세계에 관심을 두고 실천 철학을 다루었던 아리스토텔레스 사상의 영향을 받은 지역을 기반으로 했던 안티오키아 학파는 성경 안에 담긴 문자적, 문법적 및 역사적 의미를 살펴야 한다고 강조했습니다. 다만 안티오키아 학파는 구약 성경을 신약 성경의 그리스도론적인 관점에서 살펴보려던 알렉산드리아 학파의 예형론적(豫形論的, typological) 의미를 제한적으로 받아들였습니다.또한 안티오키아 학파의 신학은 예수의 역사성을 강조하면서 그리스도의 신성보다 인성에 더 깊은 관심을 가졌습니다. 결국 안티오키아 학파는 그리스도의 인성에서 출발하여 귀납적인 방법으로 ‘아래로부터의 상승 그리스도론’을 전개했습니다. 이 특성은 예수님의 공생활을 통해 그리스도인에게 책임 있게 행동하는 윤리적 가치를 심어줌으로써 그리스도인으로 하여금 예수님을 본받아 윤리 생활을 실천하도록 했습니다.영성 생활 및 윤리 생활두 학파의 상반된 견해는 많은 논쟁을 불러일으켰습니다. 알렉산드리아 학파의 우의적 해석은 성경의 역사성을 훼손하고 성경을 신화로 만들었다고 비판받았습니다. 안티오키아 학파의 문자적 해석은 성경의 껍데기만 살피는 육적인 해석으로 추락했다고 비판받았습니다. 하지만 두 학파는 상대를 비판하면서도 상대의 방법을 조금씩 받아들여 조화를 이루려는 노력도 잊지 않았습니다.결국 알렉산드리아 학파는 초월 세계를 추구하는 신비 생활을 실천하며 하느님과 합일하고자 하는 영성 생활 발전에 기여했습니다. 반면에, 안티오키아 학파는 현실 세계에 기반을 둔 경험을 바탕으로 사목적인 관점에서 윤리 생활을 강조했습니다.그러므로 우의적이며 영적 의미를 살핀 알렉산드리아 학파의 방법론은 오랫동안 지지를 받으면서 그리스도인의 영적 여정을 탐구했고 영성 신학의 기틀을 마련했습니다. 그리고 문자적이며 역사적 의미를 살핀 안티오키아 학파의 방법론은 한동안 관심을 받지 못하다가 근세 들어 역사비판적 성경 연구 방법론 형성에 큰 영향을 끼쳤습니다.<가톨릭대 신학대학 영성신학 교수> cpbc2017.02.01
![[성경 속 기도] (6) 한나의 기도](//cpbc.co.kr/CMS/newspaper/2016/03/rc/624664_1.0_titleImage_1.jpg)
[성경 속 기도] (6) 한나의 기도하느님 응답에 대한 굳은 믿음으로 율리우스 카롤스펠트 작 ‘기도하는 한나’. 출처=「아름다운 성경」 성경에서는 왜 한나와 같은 평범한 여인의 기도가 ‘위대한 다윗 왕조의 씨앗’이 되었다고 말하고 있을까? 그것은 우리와 같은 평범한 사람들의 기도도 하느님의 놀라운 역사를 이루는 축복의 씨앗이 된다는 것을 가르쳐 주기 위해서일 것이다. 삼손이 죽은 후 이스라엘에는 눈에 띄는 민족의 영웅이 나타나지 않았고 이스라엘은 여전히 주변 이방인 나라들과 언제 전쟁이 일어날지 모르는 위험한 상황에 있었을 때다. 마침내 모세와 비교될 큰 인물이 등장하는데 그가 사무엘 예언자였다. 예언자 사무엘의 어머니가 바로 한나이다. 한나와 그의 남편 엘카나는 에브라임 산악 지대에 살았는데 남편은 브닌나라는 또 다른 아내를 거느리고 있었다. 그런데 한나는 불행하게도 아이가 없었다. 아이가 있었던 브닌나는 한나를 몹시 괴롭혔다. 한나는 목이 메어 먹지도 못했을 정도로 고통에 시달렸다. 당시에는 아이를 낳지 못하는 것은 큰 수치와 하느님의 벌이며 미래가 없는 저주와도 같은 것이었다. 그래서 한나는 항상 하느님께 울며 애원하며 기도했다. 한나는 지독한 고통을 겪으면서도 자신의 상처를 기도로 극복하려 했다. 어쩌면 한나는 기도밖에 할 수 있는 것이 없었을 것이다. “한나는 마음이 쓰라려 흐느껴 울면서 주님께 기도하였다”(1사무 1,10). 한나는 자기 안에 있는 모든 것을 주님 앞에 토해 내며 통곡으로 주님 앞에 기도했고 때로는 마음속으로도 기도했다. “한나는 속으로 빌고 있었으므로, 입술만 움직일 뿐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그래서 엘리는 그를 술 취한 여자로 생각하고…”(1사무 1,13).한나는 마음에 쌓여 있는 모든 고통, 분노, 절망, 아픔들을 하느님 앞에 있는 모습 그대로 드러냈다. 우리의 경험을 봐도 기도로 치유되기 위해선 먼저 상처가 드러나야 한다. 한나에게 기도는 자신의 모든 것, 상처까지도 모두 드러낼 수 있는 신앙 행위였다. 한나는 자신의 기도를 들으시고 응답하시는 하느님이 계심을 굳게 믿었기 때문이다.또한 한나는 기도하면서 하느님께 서원했다. “그는 서원하며 이렇게 말하였다. ‘만군의 주님, 이 여종의 가련한 모습을 눈여겨보시고 저를 기억하신다면, 그리하여 당신 여종을 잊지 않으시고 당신 여종에게 아들 하나만 허락해 주신다면, 그 아이를 한평생 주님께 바치고 그 아이의 머리에 면도칼을 대지 않겠습니다’”(1사무 1,11). 한나는 하느님께 그저 아들을 보내 달라고만 하지 않았다. 자신의 욕심과 소망만을 채우는 기도가 아니었다. 자신의 기도가 하느님의 뜻과 연결되기를 소망했다.또 한나는 응답을 확신하는 기도를 했다. 성전의 사제가 “안심하고 돌아가시오. 이스라엘의 하느님께서 당신이 드린 청을 들어주실 것이오” 하고 위로하자 그 한마디에 힘을 얻은 한나는 일상으로 돌아왔다. 그녀는 용기를 얻고 마음의 평화를 느껴 얼굴에 생기를 가졌다. 결국 한나는 임신해 아들을 낳게 되었다. “한나는 ‘내가 주님께 청을 드려 얻었다’고 기뻐하면서, 아이의 이름을 사무엘이라 지었다”(1사무 1,17-20).우리가 기도할 때 어떤 기도든 하느님이 응답하심을 믿어야 한다. 비록 내가 기대한 쪽으로 응답되지 않아도 내게 선하게 역사하심을 믿어야 한다. 눈물로 애절하게 기도했던 한나를 통해 모든 고통과 수난을 감수하며 묵묵히 기도로 하느님께만 의지했던 우리들 어머니의 사랑을 다시 한 번 기억해 본다. 허영엽 신부(서울대교구 홍보국장) 평화신문2016.03.15

나의 미사 이야기 (26) 이유희 바오로 나의 주님 나의 하느님 “주님을 모시기에 합당치 않사오나 한 말씀만 하소서, 제 영혼이 곧 나으리이다.”성체 공경에 대하여 깊이 이해하고 싶은 충동이 일어났다. 성체의 신비를 의심해 본 적은 없지만 인간의 지성으로 이해할 수 없는, 그래서 믿기 어려운, 하느님이 사람이 되심과 예수님께서 성체가 되심을 더욱 알고 싶었다. 성체에 대한 성경 말씀을 찾아 묵상하고 관련된 서적들 「성체 현존」, 「성체 기적」, 「새 하늘 새 땅」, 「미사를 통한 치유」 등을 구입해 읽었다. 주님의 말씀은 새겨들을수록 깊은 맛이 났다. 주님께 대한 나의 사랑도 점점 뜨거워졌다.성체 신심은 확신에 차게 되었다. 기쁜 마음으로 미사에 참여하고 성체를 받아 모셨다. 그리고 포콜라레 운동을 시작한 끼아라 루빅 여사가 지은 「새 하늘 새 땅」을 읽으면서 성체를 받아먹는 우리가 성체가 된다는 말씀을 읽을 때 너무나 행복하고 감격스러웠다. 이 책은 성체에 대하여 깊고 넓은 이해의 말씀으로 가득했다.“내가 먹는 세상의 음식은 내 몸이 된다. 그러나 주님의 몸인 성체를 먹게 되면 성체가 내가 되는 것이 아니라 내가 거룩한 성체가 된다.”오, 놀라운 진리의 말씀이다! 이것은 오히려 내가 예수님께 영으로 먹힘과 같이 주님과 하나 된다는 놀라운 진리였다. 성체를 받아먹는 사람은 예수의 정신으로 동화되고, 그리스도의 신비체가 된다는 것으로 알아듣게 됐다. 또한 주님과 하나 됨으로써 죄로 흐르는 습성에서 벗어날 수 있게 된다는 것도 알게 됐다.유혹과 악습에서 벗어나려고 애태우던 마음은 정성껏 성체를 받아먹었다. 그리고 성체에 대한 공경심도 점점 깊어졌다. 어느 날, 미사 시간에 성체를 모시고 돌아설 때였다. 눈으로 볼 수는 없으나 부활하신 주님께서 나를 감싸 안으신다는 신비로운 영감을 받았다. 순간, 사랑받고 있다는 기쁨과 함께 가슴이 뜨거워지며 구슬 같은 눈물이 볼을 타고 주르르 흘러내렸다. 누가 볼까 얼른 고개를 숙였다. 이대로 주님 품에 영원히 잠겨 있고 싶었다.이제야 성체를 모시고 눈물 흘리는 이들의 마음을 알게 되었다. 나는 그분들이 죄가 많아서, 또는 서러워서 울고 있는 줄로만 생각했었다. 성체의 예수님은 성체성사를 통하여 사람들의 마음을 기쁨과 평화, 위로와 격려, 눈가의 촉촉함으로 어루만져 주신다는 것을 알게 됐다.성체를 모시러 나갈 때 경건함보다 춤을 추고 싶은 충동을 느낀다. 사정이 있어 성체를 모시지 못할 때도 신부님께서 허락하신다면 줄지어 나가 성체 앞에 고개 숙여 절하고 싶다.“그리스도의 몸!” “아멘!” 하얀 성체를 받아먹는다. 나는 주님과 하나가 된다. 주님! 저도 주님을 사랑합니다. ※‘나의 미사 이야기’에 실릴 원고를 기다립니다. 200자 원고지 8매 분량 글을 연락처, 얼굴 사진과 함께 pbc21@cpbc.co.kr로 보내 주시면 됩니다. 백영민2017.12.06
![[이창훈 기자의 예수님 이야기] (43) 예수님과 베엘제불 그리고 참행복(루카 11,14-28)](//cpbc.co.kr/CMS/newspaper/2017/12/rc/704744_1.1_titleImage_1.jpg)
[이창훈 기자의 예수님 이야기] (43) 예수님과 베엘제불 그리고 참행복(루카 11,14-28) 그리스도 이름으로 세례 받은 우리, 참된 신자 되려면 말씀 잘 듣고 실천해야 율리우스 슈노어 폰 파롤스펠트 작 ‘마귀 들린 자들과 마주친 예수 그리스도’ 출처=「아름다운 성경」 예수님께서 벙어리 마귀를 쫓아내신 것이 시빗거리가 되고 이는 하느님 나라와 참 행복에 관한 예수님의 가르침으로 이어집니다. 루카가 전하는 이 이야기와 가르침을 통해서 우리가 확인하고 배울 수 있는 것이 무엇인지 생각해 봅니다. 예수님과 베엘제불(11,14-22) 예수님께서 벙어리 마귀를 쫓아내시자 벙어리가 말을 합니다. 사람들의 반응은 다양합니다. 우선 예수님의 능력에 놀라워합니다. 그러면서 마귀 두목 베엘제불의 힘을 빌려 마귀를 쫓아낸다고 비난합니다. 예수님을 시험하려고 하늘에서 내려오는 표징을 요구하는 이들도 있습니다.(11,12-16)이에 대한 예수님의 말씀은 일차적으로 베엘제불의 힘을 빌려 마귀를 쫓아낸다고 하는 비난에 대한 답변으로 모아집니다. ‘어느 나라든지 서로 갈라지면 망하듯이, 사탄도 서로 갈라지면 그 나라를 지탱할 수 없게 된다. 그러니 너희들의 비난은 잘못된 것이다. 그뿐 아니라 내가 베엘제불의 힘을 빌려 마귀를 쫓아낸다고 한다면, 너희들은 누구의 힘을 빌려 마귀를 쫓아내느냐? 그러니 너희들의 비난은 터무니없는 것이다.’(11,18-19) 그런데 예수님의 말씀은 이것으로 그치지 않습니다. 당신은 “하느님의 손가락으로 마귀를 쫓아내는 것”(11,20)이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느님의 손가락’은 구약에서 모세가 일으키는 여러 기적이 하느님의 능력에서 나오는 것임을 파라오의 요술사들이 인정함을 나타내는 탈출기 8장 15절에 나오는 표현입니다. 루카 복음사가는 이 표현을 예수님께서 직접 하신 것으로 전함으로써 예수님이 하느님 능력으로 마귀들을 쫓아내실 뿐 아니라 ‘새로운 모세’이심을 드러내려고 한 것입니다.더 주목할 것은 그다음 예수님 말씀입니다. “내가 하느님의 손가락으로 마귀를 쫓아내는 것이면, 하느님의 나라가 이미 너희에게 와 있다.”(11,20) 예수님께서는 마귀를 쫓아내시는 당신의 활동이 하느님 나라가 이미 와 있음을 드러내는 표징이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말씀으로 하늘에서 내려오는 표징을 요구한 이들에게 답변을 하신 셈입니다. 그런데 계속해서 이어지는 예수님 말씀은 이해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힘센 자가 완전히 무장하고 자기 저택을 지키면 그의 재산은 안전하다. 그러나 더 힘센 자가 덤벼들어 그를 이기면, 그자는 그가 의지하던 무장을 빼앗고 저희끼리 전리품을 나눈다.”(11,21-22) 성경학자들은 이 구절에서 ‘힘센 자’를 사탄의 세력으로, ‘더 힘센 자’를 예수님으로 이해합니다. 그렇다면 이 말씀은 사탄의 지배에 예속돼 있던 이들을 예수님께서 사탄을 쫓아내고 자유롭게 해 당신의 사람이 되게 하시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마치 벙어리 마귀를 쫓아내어 말 못 하는 사람이 말을 할 수 있도록 해 주신 것처럼 말입니다. 이렇게 이해할 때 “내 편에 서지 않는 자는 나를 반대하는 자고, 나와 함께 모아들이지 않는 자는 흩어 버리는 자다”(11,23)라고 하신 예수님 말씀을 좀더 쉽게 알아들을 수 있습니다. 우리는 죄의 세력 곧 사탄의 세력에 사로잡혀 있다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죄에서 해방돼 그리스도의 사람이 된 그리스도 신자들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예수님 편에 서야 하고 예수님과 함께 모아들여야 합니다. 여기서 “모아들인다”는 표현은 목자가 양들을 모아들이는 행위, 또는 추수의 일꾼들이 수확하는 행위로 이해할 수 있다고 학자들은 풀이합니다. 우리는 착한 목자이신 예수님의 양 우리에 모이는 양이고, 예수님의 분부에 따라 수확하는 추수의 일꾼입니다. 그런데 만일 그리스도 신자가 된 우리가 예수님과 한 편에 서지 않고 예수님과 함께 모아들이지 않는다면 어떻게 될까요? 루카 복음사가가 전하는 예수님 말씀이 이 물음에 답변이 될 것입니다. 되돌아오는 악령(11,24-26)‘더러운 영 곧 악령이 사람에게서 나가 쉴 데를 찾아 물 없는 곳을 돌아다니다 찾지 못하면 다시 나온 집으로 돌아가야지 하고 생각하는데, 그 집이 깨끗하게 청소된 것을 보면 다시 나가서 자기보다 더 악한 영 일곱을 데리고 그 집에 들어가 자리를 잡고, 그러면 그 사람의 끝이 처음보다 더 나빠진다’는 것이 예수님 말씀입니다. 이 대목만 따로 떼어놓고 보면 무슨 말씀인지 알아듣기가 쉽지 않습니다. 하지만 바로 앞 대목과 연결시켜 봅시다. 우리는 죄의 세력, 곧 사탄의 세력에 사로잡혀 있다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죄의 지배에서 풀려나 그리스도의 사람이 됐습니다. 이렇게 되니 우리 안에서 우리를 지배했던 더러운 영이 쫓겨나 쉴 데를 찾아 돌아다닐 수밖에 없지요. 그러다가 예수님의 사람이 된 우리가 예수님과 한 편이 되지 않고 예수님과 함께 일하지 않는 것을 보게 됩니다. 달리 말해서 회심을 했지만 완전하게 옛 생활을 청산하지 못한 채 살아가는 모습이지요. 그러면 악령은 자기보다 더 악한 영 일곱을 데리고 그 사람에게 들어갑니다. ‘일곱’은 충만함을 나타내는 수입니다. 더 악한 영 일곱을 데리고 그 집에 들어가 자리를 잡는다는 것은 더욱 강력하게 그 사람을 죄의 세력에 사로잡히도록 한다는 것을 나타내지요. 그렇게 되면 그 사람의 처지는 당연히 처음보다 더 나빠질 수밖에 없습니다. 결국 ‘되돌아오는 악령’에 관한 예수님 말씀은 그리스도 신자가 된 우리가 깨어 있으면서 그리스도와 함께 있고 함께 살아가지 않을 때 더 나쁜 상태에 떨어질 수도 있음을 경고하는 말씀입니다. 참행복(11,27-28)예수님께서 이 말씀을 하고 계실 때 군중 속에서 한 여인이 목청을 높여 “선생님을 배었던 모태와 선생님께 젖을 먹인 가슴은 행복합니다”(11,28)고 말합니다. 이 말은 예수님을 낳고 기르신 어머니 마리아가 행복하다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또 달리 보면, 예수님을 모시는 이, 예수님과 함께하는 이는 행복하다는 말로도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이들이 오히려 행복하다”(11,28)고 말씀하십니다. 단지 예수님과 함께 있는 사람이 아니라, 말씀을 듣고 실천하는 사람이 참으로 행복하다는 것입니다. 세례를 받았다고, 그리스도 신자라고 내세우는 것이 능사가 아니라 세례를 받은 그리스도 신자답게 하느님 말씀을 듣고 새기며 실천해야 참된 그리스도 신자라는 의미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 신자로서 참으로 행복하려면 그저 신자임을 내세우기만 하지 말고 신자답게 살아야 합니다. 말씀을 듣기만 하지 말고, 잘 듣고 실천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벙어리 마귀를 쫓아내신 것이 시빗거리가 되고 이는 하느님 나라와 참 행복에 관한 예수님의 가르침으로 이어집니다. 루카가 전하는 이 이야기와 가르침을 통해서 우리가 확인하고 배울 수 있는 것이 무엇인지 생각해 봅니다. 문채현2017.12.13
![[허규 신부와 떠나는 신약 여행] (66) “나는 그리스도 때문에 모든 것을 잃었지만…”(필리 3,8)](//cpbc.co.kr/CMS/newspaper/2017/09/rc/695307_1.0_titleImage_1.jpg)
[허규 신부와 떠나는 신약 여행] (66) “나는 그리스도 때문에 모든 것을 잃었지만…”(필리 3,8)흠 없던 바리사이, 의로운 그리스도인으로 그리스 베로이아에 세워진 바오로 사도 설교 기념터의 모자이크 벽화. 바오로 사도가 베로이아에서 설교하는 모습을 그렸다. 가톨릭평화신문 DB 바오로 사도의 신학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을 찾으라면 그의 ‘의로움’에 대한 생각입니다. 사도 바오로의 ‘의화(義化)’ 또는 ‘의롭게 되는 것’은 바오로 사도의 논쟁에서 가장 중요한 주제입니다. 특별히 의로움에 대한 바오로 사도의 가르침은 그의 편지들 중에 비교적 후기에 쓰인 내용 안에서 잘 드러납니다. 율법 철저히 따르던 유다인“여드레 만에 할례를 받은 나는 이스라엘 민족으로 벤야민 지파 출신이고, 히브리 사람에게서 태어난 히브리 사람이며, 율법으로 말하면 바리사이입니다. 열성으로 말하면 교회를 박해하던 사람이었고, 율법에 따른 의로움으로 말하면 흠잡을 데 없는 사람이었습니다.”(필리 3,5-6) 바오로 사도의 이 표현은 그를 이해하는 데 도움을 줍니다. 사실 바오로 사도의 편지 외에 그의 인간적인 역사에 대해 알려진 것은 그리 많지 않습니다. 이미 살펴보았던 것처럼 사도행전과 일부 서간에서 찾을 수 있는 내용이 전부입니다. 필리피서에서 바오로 사도는 자신을 위와 같이 표현합니다. 그는 유다민족 출신으로 바리사이였습니다. 또 그의 말처럼 자신의 신앙에 대한 열정으로 교회를, 그리스도교를 박해하던 인물이었습니다. 그는 율법에 따라 아무 흠 없는 사람이라고 말합니다. 이 표현은 그가 얼마나 충실한 유다인이었는지, 그가 얼마나 율법을 철저하게 지키며 살았던 인물이었는지 알려줍니다. 구약성경의 배경에서 유다인들에게 ‘흠잡을 데 없는 사람’이란 표현은 가장 큰 칭찬이자 가장 모범적인 모습이기 때문입니다. 이렇듯 태생으로나 열성으로나 충실했던 바오로 사도에게 율법은 하느님의 뜻이 담긴 것으로 반드시 지켜야 하는 것이었습니다. 한 마디로 그는 철저하게 율법에 따른 삶을 살았던 인물이었습니다. 그렇기에 바오로 사도에게 유다교를 나타낼 수 있는 가장 큰 특징은 바로 율법이었습니다. 율법은 하느님의 계명에 충실하고자 했던, 계명에 따라 바른길을 걷고자 했던 유다인들의 역사를 담고 있습니다. 그들에게 율법은 그만큼 중요했습니다. 그렇지만 바오로 사도는 율법에 대해 필리피서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그러나 나에게 이롭던 것들을, 나는 그리스도 때문에 모두 해로운 것으로 여기게 되었습니다.”(필리 3,7) 그에게 율법은 더 이상 하느님께 이르는 유일한 길이 아닙니다. 더 나아가 율법은 오히려 그리스도를 통해 보여준 하느님의 구원을 알아보지 못하게 합니다. 율법을 충실하게 지키는 이들의 떳떳함은 오히려 예수 그리스도를 받아들이고 믿는 것에 해가 되었습니다. 하느님 앞에 ‘의로운 사람’ 인정받다이제 바오로 사도는 구약성경의 배경에서 ‘의로움’을 이야기합니다. 의로움은 하느님 앞에서 의로운 사람으로 인정받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미 이 말 안에는 스스로 의롭다고 생각하는 것이 아닌, 하느님으로부터 의롭다고 인정받는다는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율법에서 오는 나의 의로움이 아니라,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으로 말미암은 의로움, 곧 믿음을 바탕으로 하느님에게서 오는 의로움을 지니고 있으려는 것입니다.”(필리 3,9) 율법과 믿음에 대한 비교는 바오로 사도가 전하고자 하는 ‘의로움’의 가장 중요한 근거입니다. 이 주제는 앞으로 보게 될 바오로 사도의 다른 편지들 안에서도 지속적으로 드러납니다. 그만큼 의로움은 바오로 사도의 신앙과 그의 신학을 요약할 수 있는 주제입니다. 구원과 믿음, 소중한 신앙의 바탕어쩌면 바오로 사도는 누구보다 율법과 율법의 의미를 잘 알고 있는 사람이었기에 율법을 통해 얻을 수 있는 것이 무엇인지, 또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에서 율법이 어떤 역할을 하는지 우리에게 자세히 알려줍니다. 그에게 율법은 조상들이 전해준 유다교 신앙의 소중한 유산이었지만, 이제 그리스도를 통한 하느님의 구원과 믿음은 그보다 훨씬 더 소중한 신앙의 바탕으로 자리합니다. 이 믿음을 통해서 구원이 오고, 이것을 통해 하느님 앞에서 의롭게 될 수 있습니다. 그렇기에 바오로 사도에게 선물처럼 주어진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통해 얻게 될 의로움은 하느님을 향해 가는 유일한 길입니다.<가톨릭대 신학대학 성서학 교수>김지항2017.09.13
![[전영준 신부의 가톨릭 영성을 찾아서] (32) 8세기 ① - 로마 교회와의 일치 앞장선 잉글랜드 교회](//cpbc.co.kr/CMS/newspaper/2017/07/rc/687543_1.0_titleImage_1.jpg)
[전영준 신부의 가톨릭 영성을 찾아서] (32) 8세기 ① - 로마 교회와의 일치 앞장선 잉글랜드 교회 복음화된 앵글로색슨족, 보편 교회 수호자로 나서다 앵글로색슨족 역사가 존자 베다. 서방 교회는 3세기 초부터 아일랜드 켈트족 복음화를 위해 노력했습니다. 그러나 켈트족 종교 심성과 앵글로색슨족과의 적대감 때문에, 켈트족 그리스도교는 로마 교회와 일치하지 못하고 고립을 자초했습니다. 반면에, 서방 교회가 7세기 초에 앵글로색슨족 복음화를 위한 노력들은 8세기에 들어서서 잉글랜드 본토뿐 아니라, 유럽 대륙 게르만족 복음화에도 열매를 맺을 수 있었습니다.앵글로색슨족 그리스도인 영성 발전에 기여한 존자 베다앵글로색슨족 역사가였던 존자(尊子) 베다(Beda Venerabilis, 672/73~735)는 잉글랜드 교회가 서방 교회 전통과 일치하며 영성 생활을 실천할 수 있도록 기여했습니다. 잉글랜드 중부 타인(Tyne) 강 남쪽에 위치한 노섬브리아(Northumbria) 왕국 출신인 베다는 이미 7세에 웨어머스(Wearmouth)에 있는 성 베드로 수도원에 들어가 교육을 받았으며, 13세쯤에는 재로우(Jarrow)에 있는 성 바오로 수도원으로 옮겨 19세에 부제품을, 30세엔 사제품을 받고 베네딕도회 수도자로 평생을 살다가 그곳에서 사망했습니다.베다는 731년 저술한 「영국 교회사(Historia Ecclesiastica gentis Anglorum)」를 통해 훗날 ‘영국 역사의 아버지’로 불렸으며, 1899년에 교황 레오 13세(Leo PP, XIII, 1810~1903)에 의해 영국인으로서 유일하게 ‘교회 학자’로 선포되었습니다. 베다는 다른 시기에 부활절을 지내는 켈트족 그리스도인을 거슬러 서방 교회 전통에서 부활절 날짜를 계산하는 방식을 다룬 저서 「시대에 대하여(De Temporibus)」와 「시대의 계산에 대하여(De Temporum Ratione)」를 출간했습니다. 베다는 문학가로서 시집, 서한집, 강론집, 순교록, 전기 등 다양한 장르의 글을 남겼습니다. 뿐만 아니라 베다는 세속 학문 분야도 섭렵했는데, 문법, 작시법, 역사 기록학 및 연대기 등과 관련된 작품들도 남겼습니다.비록 베다는 고대 영어 지역에서 평생을 살았지만, 그는 라틴어를 익혀 라틴어 성경을 비롯해 서방 교회 전통과 사상을 섭렵했습니다. 먼저 베다는 성경을 주석하면서 문학적인 의미보다는 영성적인 의미를 찾으려고 노력했습니다. 베다가 살던 시기는 이미 성경 문학이 형성되던 시대와 큰 차이가 있었으므로, 베다는 동시대 그리스도인에게 죄에 대한 경계심과 합리적인 생활양식을 제공하기 위해서 영성적인 의미를 탐구하는 것이 더 가치가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따라서 베다는 방대한 성경 주석 작품을 남겼습니다.또한 베다는 그리스도인에게 더 많은 영성적인 가르침을 주기 위해서 서방 4대 교부들을 비롯하여 여러 교부들의 가르침을 인용했습니다. 특히 베다는 말년에 요한 복음서를 고대 영어로 번역함으로써, 라틴어를 모르는 평신도 그리스도인이 주님의 말씀을 쉽게 접할 수 있도록 도움을 주었습니다. 베네딕도회 수도자였던 베다는 기도하고 일하며 거룩한 독서를 실천하면서 잉글랜드 교회에 큰 귀감이 됨으로써, 사후에 바로 사람들에게 ‘존자’(尊者)로 불렸습니다.게르만족 복음화에 앞장선 보니파키우스한편 앵글로색슨족이면서 ‘게르만족의 사도’로 불린, 잉글랜드 남서부에 위치한 웨식스(Wessex) 왕국 귀족 가문 출신 보니파키우스(Bonifacius, 672/75~754)가 있었습니다. 그는 어린 시절에 엑세터(Exeter)에 있는 베네딕도회 수도원에서, 그리고 너슬링(Nursling)에 있는 베네딕도회 수도원으로 옮겨 교육을 받았습니다. 교육받는 동안 보니파키우스는 학문과 로마 교회와 선교 활동에 강한 애정을 보였습니다. 결국 보니파키우스는 그곳 수도원에 입회했으며, 30세에 사제품을 받고 수도원 학교 교장이 되었습니다.선교사의 꿈을 키웠던 보니파키우스는 716년 수도원장의 허락을 얻어 오늘날 네덜란드 지역인 북유럽 프리즐란트(Friesland)로 선교를 떠났으나, 그 지역 귀족의 방해로 선교는 실패했습니다. 다시 너슬링의 수도원으로 돌아온 보니파키우스는 717년 수도원장으로 선출되자 이를 수락하지 않고, 718년 로마로 떠났습니다. 결국 719년 보니파키우스는 교황 그레고리우스 2세(Gregorius PP. II, 재임 715~731)를 알현했고, 교황으로부터 라인 강 동쪽 게르마니아 지역에 사는 게르만족을 복음화시키라는 선교 사명을 받았습니다. 따라서 보니파키우스는 먼저 게르마니아 중부 튀링겐(Thringen)을 경유해 또 다시 프리즐란트로 가서 3년간 선교 활동을 펼쳤습니다.보니파키우스는 722년 거의 복음화 되지 않은 게르마니아 중서부 헤센(Hessen)으로 이주해 베네딕도회 수도원을 건설하고 선교한 결과 성공을 거두었습니다. 이 일을 계기로 교황 그레고리우스 2세는 보니파키우스에게 주교품을 주었습니다. 725년까지 헤센에서 선교했던 보니파키우스는 다시 튀링겐으로 이주해 수도원을 설립하고 잉글랜드 수도자들의 도움을 받아가며 10여 년간 그리스도교 정통 신앙과 교리를 전했습니다. 신임 교황 그레고리우스 3세(Gregorius PP. III, 재임 731~741)는 732년 보니파키우스를 대주교로 임명했으며, 737년 교황 특사로 임명해 게르마니아 교회 설립을 위임했습니다. 따라서 보니파키우스는 741년까지 게르마니아 남부 바이에른(Bayern)에 몇몇 교구들과 수도원을 설립했으며, 744년 헤센에 수도원을 설립하고 선교 중심지로 삼았습니다.프랑크족 그리스도인 개혁에 앞장선 보니파키우스보니파키우스는 742년 프랑크 왕국 북동부 지역 아우스트라시아(Austrasia) 궁재(宮宰)였던 카를로만(Carloman, 707쯤~754)과 함께 ‘게르만 민족 종교 회의’를 개최했으며, 744년 프랑크 왕국 북서부 지역 네우스트리아(Neustria) 궁재였던 페피누스 3세(Pepinus III, 714~768)의 도움으로 개최된 ‘전체 왕국을 위한 종교 회의’에 참석했다가 마인츠(Mainz) 교구장으로 임명되었습니다.745년 보니파키우스는 쾰른(Kln)에 대주교좌를 설립할 계획을 세우고 종교 회의와 교황의 승인까지 받았으나, 그의 개혁적인 성향을 싫어했던 프랑크 왕국 주교들의 반대로 무산되었습니다. 따라서 보니파키우스는 747년 개최된 종교 회의에서 신앙 고백과 충성 고백을 통해 프랑크 왕국의 주교들을 로마 교황과 묶어 주려고 시도했습니다.752년 마인츠 교구장직을 사임한 보니파키우스는 다시 프리즐란트 선교 계획을 세웠고, 1년간 성공하는 듯했습니다. 하지만 754년 프리즐란트 지역 이교도들은 보니파키우스와 동료 선교사들을 습격하고 살해했습니다. 결국 프리즐란트에서 시작되었던 보니파키우스의 선교는 프리즐란트에서 끝났습니다.프랑크 왕국이 유럽을 통일하고 로마 교회와 우호 관계를 직접 맺기 전까지 게르만족의 복음화와 프랑크족 그리스도인의 개혁은 역설적으로 잉글랜드 출신 앵글로색슨족이 담당했습니다. 그들은 북유럽 교회와 로마 교회를 일치시키려고 노력했으며, 여러 지역에 수도원을 설립하여 영성 생활 발전에 기여했습니다.<가톨릭대 신학대학 영성신학 교수> 백영민2017.07.05
![[전영준 신부의 가톨릭 영성을 찾아서] (13) 3세기 ④-안토니우스의 독거 은수 생활](//cpbc.co.kr/CMS/newspaper/2017/02/rc/672638_1.0_titleImage_1.jpg)
[전영준 신부의 가톨릭 영성을 찾아서] (13) 3세기 ④-안토니우스의 독거 은수 생활 3세기 ④-안토니우스의 독거 은수 생활그뤼네발트 작 ‘성 안토니우스의 유혹’. 출처=가톨릭 굿뉴스그리스도교 영성 생활은 이론을 바탕삼아 연역적으로 설명하는 경우도 있지만, 선구자적인 삶을 바탕삼아 귀납적으로 설명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3세기에 그리스도교 내에서 교부들이 플라톤 철학 계열의 사상들을 본격적으로 활용하여 영적 여정의 체계를 세웠다면, 3세기 후반부터 영성가들은 그리스도인에게 귀감이 되는 새로운 형태의 삶을 살기 시작했습니다. 로마 제국의 박해가 뜸해지자 하느님을 위해 온전히 살고자 했던 그리스도인은 순교의 길과는 다르지만 하느님께 나아가는 새로운 길을 찾아 나섰습니다. 그것은 바로 훗날 수도 생활의 원형이 되는 은수(隱修) 생활이었습니다. 은수 생활로의 부르심 은수 생활 혹은 수도 생활이 정확하게 언제부터 시작되었는지 확인할 수 없지만, 이집트 수도자들의 아버지로 불리는 안토니우스(Antonius, 251경~355/56)는 남아있는 문헌 자료로 확인 가능한 최초의 은수자였습니다. 알렉산드리아의 총대주교 아타나시우스(Athanasius Alexandrinus, 295/300~373)는 저서 「안토니우스의 생애」(Vita Antonii)에서 안토니우스에 대한 역사적인 사실과 저자의 재해석을 구분할 수 없을 정도로 섞어가며 안토니우스의 삶을 조명하여 다른 이들에게 모범이 되도록 기록했습니다. 이집트 출신 안토니우스는 부유한 그리스도인 가정에서 태어나 경제적인 어려움 없이 그리스도교 신앙 안에서 성장했습니다. 스무살가량에 부모를 여의고 여동생과 단둘이 살았던 안토니우스는 어느 날 가진 것을 다 버리고 예수님을 따랐던 사도들(루카 5,11 참조)을 묵상하며 성당에 들어갔습니다. 안토니우스는 성당에서 마침 낭독되던 부자 청년 비유 이야기(마태 19,21 참조)에 대한 복음말씀을 들으면서 하느님의 부르심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는 즉시 집으로 돌아와 상속받은 재산 대부분을 팔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었습니다. 얼마 후에 안토니우스는 다시 성당에서 내일을 걱정하지 말라(마태 6,34 참조)는 복음말씀을 듣자, 즉시 남은 모든 재산을 처분하여 나누어 주고 여동생도 동정녀 공동체에 맡기고 본격적으로 은수 생활을 시작했습니다. 독거 은수 생활의 네 시기 안토니우스는 먼저 마을 변두리로 물러나와 고독 속에서 엄격한 금욕 생활을 시작했습니다. 아울러 그는 생계를 위한 노동을 했는데, 그 수입마저도 필요한 이들과 함께 나누었습니다. 안토니우스는 성경말씀을 경청하며 부지런히 기도 생활을 실천했습니다. 또한 그는 주변 사람들에게서 그들의 장점을 배워 실천하면서 선(善)을 추구하는 일에 최선을 다했습니다. 15년가량의 이 시기가 안토니우스의 첫 번째 여정이었습니다. 이후 안토니우스의 금욕 생활을 시기한 악마는 그에게 분심을 일으키며 몹시 그를 괴롭혔습니다. 일차적으로 악마의 시험을 극복한 안토니우스는 금욕 생활을 강화하기 위하여 마을에서 멀리 떨어져 있는 공동묘지를 찾아갔으며, 한 무덤 속에 들어가 홀로 머물렀습니다. 이곳에서 악마의 방해는 더욱 강해졌고, 안토니우스는 육체적인 고통까지 느끼게 되었으나 기도를 통해 악마의 유혹을 물리쳤습니다. 이따금 안토니우스는 주님의 보살핌과 위로를 느끼기도 했습니다. 1년 남짓한 이 시기가 안토니우스의 두 번째 여정이었습니다. 안토니우스의 본격적인 은수 생활은 사막에서 시작되었습니다. 하느님을 더욱 열심히 섬기려는 열정에 불탄 안토니우스는 알렉산드리아 남쪽 나일 강 하류 근처에 있는 이집트 북부 사막으로 나갔습니다. 피스피르 산 위에 버려진 요새를 찾은 안토니우스는 요새 안에 홀로 머물면서 금욕 생활을 실천했습니다. 간혹 방문객들이 있었으나 안토니우스는 그들을 만나지 않았습니다. 요새에서 20년가량 머문 안토니우스는 하느님의 은총으로 은수자들의 영적 사부가 되어 요새를 나와서 은수 생활을 원하는 사람들에게 한동안 가르침을 주었습니다. 심지어 로마 제국의 마지막 박해가 발생하자 안토니우스는 오랜만에 알렉산드리아로 돌아가 그리스도인들을 위로하고 격려했으며, 박해가 끝나자 다시 사막으로 돌아왔습니다. 이 시기가 안토니우스의 세 번째 여정이었습니다. 또 다시 홀로 고독한 생활을 원했던 안토니우스는 하느님의 지시에 따라 나일 강에서 멀리 떨어진 깊은 사막으로 들어가 콜짐 산 속 동굴에 머물면서 독거(獨居) 은수 생활을 이어갔습니다. 하지만 여전히 사람들은 그에게 가르침을 청하고자 찾아왔으며, 안토니우스는 그들을 환대했습니다. 안토니우스는 하늘나라에 갈 때까지 그곳에 머물면서 모든 이의 영적 사부로 살았습니다. 40년 이상 지속된 이 마지막 시기가 안토니우스의 네 번째 여정이었습니다. 성경말씀 중심의 기도 생활 안토니우스가 실천한 은수 생활은 아주 엄격한 수덕 생활의 모습을 지녔습니다. 안토니우스는 은수 생활 이전부터 모든 것을 포기한 사도들과 초대 교회 신자들의 삶을 동경했고, 하느님의 부르심을 느끼자 본인도 망설임 없이 청빈 생활을 선택했습니다. 또한 안토니우스는 악마의 온갖 시험에도 불구하고 엄격하게 금욕 생활을 실천했습니다. 그리고 안토니우스는 이 모든 수덕 생활을 철저하게 홀로 머물면서 실천했습니다. 따라서 안토니우스의 삶은 독거 형태의 은수 생활이라고 이해되었습니다. 하지만 안토니우스가 실천한 은수 생활의 중심은 성경말씀과 함께하는 신비 생활에 있었습니다. 안토니우스는 은수 생활 이전부터 늘 성경말씀에 귀 기울였고, 사막에서 지낼 때에도 성경말씀을 암송하며 깊이 묵상했습니다. 또한 안토니우스는 성경말씀과 함께하는 기도 생활이어야 하느님께 나아가는 데에 도움이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다른 은수자들에게 가르침을 줄 때에도 성경말씀이면 충분하다고 하면서 늘 성경말씀을 인용하여 은수 생활에 대한 권고를 했습니다. 아나타시우스는 안토니우스의 기억이 성경책을 대신할 정도였다고 회고했습니다.(「안토니우스의 생애」 3,7 참조) 결국 안토니우스의 성경말씀에 대한 사랑은 자신의 은수 생활을 지탱해주는 원동력이 되었고, 훗날 수도자들이 성경말씀 중심으로 수도 생활을 실천하는 출발점이 되었습니다. 313년 밀라노에서 공표된 로마 황제의 칙령으로 그리스도인은 자유롭게 신앙을 가질 수 있게 되었으며, 더 이상 로마 제국의 박해로 인해 피 흘리는 순교를 당할 필요가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하느님과 일치하고자 하는 염원이 강했던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안토니우스가 보여준 은수 생활의 모범에 따라 자신을 극기하는 새로운 형태인 백색 순교의 길로 앞다퉈 들어섰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수도 생활은 오늘날까지 이어졌습니다.<가톨릭대 신학대학 영성신학 교수> cpbc2017.02.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