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창훈 위원의 예수님 이야기] (78)파스카 만찬과 성찬례 제정 (루카 22,14-20)](//cpbc.co.kr/CMS/newspaper/2018/08/rc/731194_1.0_titleImage_1.jpg)
[이창훈 위원의 예수님 이야기] (78)파스카 만찬과 성찬례 제정 (루카 22,14-20)예수님 희생으로 실현될 새 계약의 성찬례 예루살렘 시온산 최후의 만찬 기념 성당 맞은편 꼰벤뚜알 프란치스코 수도원의 ‘최후 만찬 기념 성당’을 향한 성당. 예수님께서 분부하신 대로 베드로와 요한이 파스카 음식을 준비하자 예수님께서는 제자들과 함께 파스카 만찬을 드시면서 성찬례를 제정하십니다. 편의상 두 부분으로 나눠서 살펴봅니다. 파스카 만찬(22,14-16)“시간이 되자 예수님께서 사도들과 함께 자리에 앉으셨다.”(22,14) ‘시간이 됐다’는 것은 파스카 음식을 들 시간이 됐다는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 시간은 또한 하느님께서 뜻하신 시간, 혹은 예수님께서 하느님의 뜻을 행하실 시간이기도 합니다. 그 시간은 해가 진 후였습니다. 파스카 음식은 해가 진 후에 들어야 하기 때문입니다.(탈출 12,8 참조) 이렇게 시간이 되어 제자들과 함께 자리에 앉으셨는데 예수님께서는 뜻밖의 말씀을 하십니다. “내가 고난을 겪기 전에 너희와 함께 이 파스카 음식을 먹기를 간절히 바랐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파스카 축제가 하느님의 나라에서 다 이루어질 때까지 이 파스카 음식을 다시는 먹지 않겠다.”(22,15-16)예수님의 말씀에는 비장함이 서려 있습니다. 제자들에게는 예수님의 이 말씀이 뜻밖이고 충격적으로 보였을지도 모릅니다.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군중의 환호 속에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후에 성전에 가셔서 물건 파는 이들을 내쫓으시는 것을 보면서 자랑스럽고 뿌듯했을 것입니다. 또 날마다 백성이 성전에 모여들어 예수님의 말씀을 듣는 것을 보았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예루살렘에서 사람들에게 붙잡혀 고난을 받고 죽을 것이라고 말씀하셨지만 알아듣지 못했던 제자들이었기에 오히려 예루살렘에서 가르치시는 스승의 모습에 의기양양했을지 모릅니다. 게다가 파스카 음식을 준비하는 과정도 스승의 말씀대로 착착 진행됐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이 파스카 음식이 제자들과 나누는 마지막 식사일 뿐 아니라 “파스카 축제가 하느님의 나라에서 다 이루어질 때까지” 곧 하느님 나라가 최종적으로 완성될 때까지는 파스카 음식을 다시는 먹지 않겠다고 단언하시니 제자들로서는 어리둥절했을 것입니다. 그러면서 이 충격적인 말씀이 무슨 뜻일까 하고 곰곰 생각했을지 모릅니다. 그러는 가운데 잠시 시간이 흘렀습니다. 예수님께서 잔을 받아 감사를 드리신 후에 말씀하십니다. “이것을 받아 나누어 마셔라.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나는 이제부터 하느님 나라가 올 때까지 포도나무 열매로 빚은 것을 결코 마시지 않겠다.”(22,17-18) 예수님 말씀의 내용으로 볼 때 잔에 든 것은 포도주임이 분명합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포도주잔을 돌려가며 나누어 마시라고 말씀하시면서 당신은 하느님 나라가 올 때까지, 말하자면 하느님 나라가 완성될 때까지 절대로 마시지 않겠다고 말씀하십니다. 여기까지의 내용은 유다인들이 일반적으로 파스카 축제 음식을 드는 모습과 별 차이가 없는 것 같습니다. 다만 다시는 파스카 음식을 들지 않고 포도주도 마시지 않겠다고 비장하게 선포하시는 예수님 말씀이 두드러지고 있을 뿐입니다. 성찬례 제정(22,19-20)그런데 루카 복음사가는 비슷한 것 같으면서도 새로운 내용을 계속 소개합니다. 우선 본문을 살펴봅니다. “예수님께서는 또 빵을 들고 감사를 드리신 다음, 그것을 떼어 사도들에게 주시며 말씀하셨다. ‘이는 너희를 위하여 내어주는 내 몸이다. 너희는 나를 기억하여 이를 행하여라.’ 또 만찬을 드신 뒤에 같은 방식으로 잔을 들어 말씀하셨다. ‘이 잔은 너희를 위하여 흘리는 내 피로 맺는 새 계약이다.’”이 부분은 앞에서 본 22장 14-16절(파스카 만찬)과 상당히 겹치는 느낌을 줍니다. 그렇지만 두드러진 차이들도 있습니다. 앞부분 ‘파스카 만찬’에서는 이 만찬이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함께하는 마지막 만찬임이 강조되지만, 여기에서는 빵과 포도주가 “너희를 위한” 예수님의 “몸과 피”라는 것, 동시에 그 피는 ‘새 계약의 피’라는 것, 그리고 당신을 기억하여 이 예식을 행하라는 것이 강조됩니다. 이런 차이와 관련해 학자들은 신약성경에서 파스카 만찬 혹은 성찬례 제정에 대해 언급하는 본문들을 검토한 후에 루카 복음사가가 이 부분을 쓰면서 한편으로는 마르코복음에 나오는 성찬례 제정에 관한 내용(마르 14,22-25; 참고 마태 26,26-29)과 다른 한 편으로는 바오로 사도가 코린토 신자들에게 보낸 첫째 서간에 나오는 주님 만찬에 관한 내용(1코린 11,23-25)을 합쳐서 자기 나름으로 혼합형 성찬례 기사를 엮었다고 봅니다. 왜 루카 복음사가는 두 가지를 합쳤을까요? 루카 복음사가가 복음서를 집필할 때 많은 부분을 마르코복음, 또는 마르코 복음사가가 활용한 자료를 토대로 했습니다. 그런데 루카가 속해 있던 그리스도교 공동체에서는 이미 코린토 1서에서 언급하고 있는 방식으로 주님의 만찬을 거행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성찬례 제정에 관한 부분을 쓰면서 마르코복음의 내용과 코린토 1서의 내용을 혼합했다는 것이 성경학자들의 분석입니다. 평화신문2018.08.21
![[시사진단]혐오사회의 위험](//cpbc.co.kr/CMS/newspaper/2018/10/rc/735558_1.0_titleImage_1.jpg)
[시사진단]혐오사회의 위험표정훈 요한 사도
출판평론가 “한국 사람은 국적, 피부색으로 사람을 차별해요. 자신이 백인인 줄 알아요. 서양인인 줄 착각하는 거예요. OECD에 가입하고 경제가 발전했다는 우월감에 제1세계 사람인 줄로 아는 거죠.” 여성, 장애인, 이주노동자, 양심적 병역거부자, 성소수자 등 사회적 소수자에 대한 어떤 말과 행동들이 혐오인지 짚고, 혐오의 생산과 유통 배경을 밝히는 책 「그건 혐오예요」(홍재희, 행성B)에 나오는 주현숙 감독의 말이다. 이 책에서 김경순 감독은 타자(他者)가 되어 상처를 받아보는 경험이 중요하다고 말한다. 이를 통해 자기 자신이라고 믿었던 자아의 정체성에 균열이 생긴다. 그런 상처와 균열이야말로 타인을 진정으로 이해하는 길이다. “상처에 함몰되면 자기 삶이 무너지겠지만 그 상처를 통해 더 많이 배울 수 있는 세계가 밖에 있다는 걸 깨닫는 계기가 될 수 있다는 의미에서. 저는 자신을 타자화해 보는 거, 타자가 되어 보는 경험이 정말 소중하다고 봐요.”최근 몇 년 사이 혐오를 주제로 하는 책들이 많이 출간되고 있다. 대표적인 책으로 홍성수(숙명여대) 교수의 「말이 칼이 될 때 : 혐오 표현은 무엇이고 왜 문제인가?」(어크로스)를 들 수 있다. 홍 교수에 따르면 혐오 표현에는 “동남아시아 출신들은 게으르다”, “조선족들은 칼을 가지고 다니다가 시비 붙으면 휘두르는 게 일상화되어 있다” 등과 같이 특정 소수자 집단에 대한 부정적 이미지를 표현하는 말들이 있다. 또한 여성은 “조신해야 한다”, “나서지 마라”, “집에서 애나 봐라”와 같이 일정한 틀에 가둬놓고 한계를 지우는 유형도 있다. 홍 교수는 이런 말들이 별다른 제지 없이 발화된다면 어느 순간 사실로 굳어지게 된다고 지적한다. 허위가 사실로 둔갑해 또 다른 차별을 낳는다는 것.한 권만 더 살펴보자. 독일의 언론인이자 작가 카롤린 엠케의 「혐오사회」(정지인 옮김, 다산초당)다. 엠케는 이른바 표준에 부합하는 사람들은 자신이 다른 사람들을 어떻게 배제하거나 비하하는지 알아차리지 못한다. 자신이 용인되는 것을 당연한 일로 받아들이기 때문에 자신이 어떤 힘을 행사하는지조차 모른다. 자신이 어떤 집단을 혐오한다는 것을 깨닫지 못하기 쉽다.이렇게 혐오 관련 국내외 저자들의 책이 많이 나온다는 것은 우리 사회에 혐오가 점점 더 만연해가고 있다는 뜻일 수도 있다. 성경이 우리에게 말한다. “너희는 이방인을 억압하거나 학대해서는 안 된다. 너희도 이집트 땅에서 이방인이었다.”(탈출 22,20) 사실 예수님의 일생은 당시 사회에서 천대받고 소외되며 혐오의 대상이 되는 사람들을 보듬는 삶이었다.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 너희는 모두 나에게 오너라. 내가 너희에게 안식을 주겠다.”(마태 11,28)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지고 허덕이는 사람, 우리 시대 우리 사회에서 혐오의 대상이 되는 사회적 소수자의 다른 이름이다. 평화신문2018.10.10

노인 요양원, 죽음행 종착역 아닌 천국행 출발역사순 기획 - 전주교구 사회복지법인 ‘빈첸시오의 집’ 신경옥(율리아나) 원장 최근 건립을 마친 ‘빈첸시오의 집’ 요양 병동 전경. 가운데 정원을 중심으로 원형 모양으로 지어진 요양 병동에 50여 명의 어르신이 생활하고 있다. 노인장기요양기관하면 무기력한 어르신들의 모습이 떠오른다. 초점 없는 눈으로 누워 있는 어르신과 시설 특유의 냄새는 노인요양기관을 삶의 마지막 종착역인 ‘죽음의 역’으로 각인시키기 충분하다. 하지만 전북 완주군 비봉면에 있는 전주교구 사회복지법인 ‘빈첸시오의 집’은 달랐다. 깨끗한 시설 창가에 모여 햇살을 받으며 담소를 나누는 어르신들의 모습에서 노년의 소소한 행복을 엿볼 수 있었다. 빈첸시오의 집 신경옥(율리아나, 56) 원장의 삶과 신앙에서 사순과 부활의 의미를 되새겨본다. ▨고래 뱃속의 요나가 되어“성경 속 요나처럼 정말 도망치고 싶었어요.”신 원장은 “전임 원장이 갑자기 그만둬서 몇 달만 맡아 달라는 교구 부탁에 봉사한다는 생각으로 시설을 맡았다”며 “낮에는 어르신들을 돌보고 밤에는 6개월 정도 날을 새며 공부해야 했다”고 시설에 첫발을 디딘 2007년을 회상했다.교구 사회복지법인에서 일하던 그에게 원장 자리는 버거웠다. 어린 자녀들에게 미안한 마음도 컸다. 더욱이 열악한 빈첸시오의 집 환경은 그의 어깨를 더 무겁게 했다. 빈첸시오의 집은 전주교구 이재후(원로사목자) 신부가 오갈 곳 없는 무연고 어르신을 모시고자 사비를 털어 문을 열고 2005년 교구에 소유권을 이전한 시설이다. 하지만 정부 지원 없이 후원자와 어르신들의 수급비로 운영되던 비인가 조건부 시설이어서 운영이 쉽지 않았다. 몇몇 수녀회가 맡아서 운영해 보려고 이곳을 찾았지만 모두 고개를 흔들며 떠났다. 신 원장은 “하느님께서 도망친 요나를 고래 뱃속에서 꺼내 쓰신 것을 되새기며 마음을 굳게 먹기로 했다”고 말했다. 외부 일정으로 잠시 자리를 비우고 온 그에게 어르신들이 “어디 갔었어. 우리 버리고 간 줄 알고 걱정했잖아”라는 말에 그의 결심은 더 단단해졌다.▨사순 너머에는 부활의 희망이 있다결단을 내렸지만, 역경과 고난이 이어졌다. 겁이 많아 돌아가신 어르신의 몸을 닦아 드리는 것도 무서웠고 어르신들을 떠나 보내며 천국에서 다시 만나자고 통곡도 많이 했다. 시설 인가를 위한 서류 작업에 밤을 하얗게 새웠다. 담당 공무원에게 퇴짜를 맞을 때면 울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넋 놓고 앉아 있을 수는 없었다. 노인 요양원이 ‘죽음의 수용소’라는 편견을 깨고 싶었다.어렵사리 노인장기요양기관으로 인가받았지만 50년 된 폐교를 개조한 낡은 시설이 문제가 됐다. 2009년 고산 지역을 덮친 폭우에 요양원 지붕이 내려앉아 폭포처럼 빗물이 들이닥쳤다. 어르신들을 대피시키고 밤새 물을 퍼냈지만 새 보금자리가 절실히 필요한 상황. 신 원장과 직원들은 백방으로 뛰며 후원금을 모았다. 직원과 봉사자들이 깻잎과 마늘, 매실 등으로 장아찌를 담고 어르신들이 힘을 보태 청국장을 만들어 성당 등지로 꼬박 8년을 팔러 다녔다.어르신을 돌보고 후원금 모집에 행정 일을 처리하느라 시간이 늘 부족했다. 하루가 24시간인 게 안타까웠다. 기쁘고 감사한 마음으로 일했지만, 몸이 견디질 못했다. 망막에 이상이 생기는 황반변성이 찾아온 것이다. “후원 동영상을 만들고 밤을 새웠는데 아침에 눈이 안 보여 큰 병원을 찾아갔죠. 의사가 실명 확률이 높다고 하더군요.” 신 원장은 현실을 담담히 받아들였다. 그리고 ‘주님의 일을 하는 게 여기까지 인가보다’는 생각에 성모님께 간절한 기도를 드렸다. “눈이 안 보여 주님의 일을 그만두게 되더라도 마음의 창으로 주님을 만나게 해주세요.” 기도의 응답일까, 시력은 떨어져도 기적같이 실명 위기를 넘겼다. 얼마 지나 노력에 대한 결실을 보았다. 2017년 첫 삽을 뜬 빈첸시오의 집 요양병동 공사가 끝나고 새 보금자리에서의 생활이 시작된 것이다. 신 원장은 “언제나 든든한 울타리가 되어주고 하느님의 현존을 보여주신 이재후 신부님과 후원을 아끼지 않은 봉사자분들의 노력이 있기에 가능한 일”이라고 미소 지었다. 아직 창고 공사 등이 진행 중이지만 현재 치매 어르신 12명과 요양 어르신 37명이 병실과 소성당, 식당, 집중 치료실, 임종실, 찜질방, 물리치료실 등을 갖춘 곳에서 생활하고 있다. ▨부활 향한 마지막 환승역점심을 마친 어르신들이 햇볕 가득한 요양원 창가에 삼삼오오 모이기 시작했다. 신 원장과 담소를 나누는 어르신들의 밝은 표정만 봐도 빈첸시오의 집 직원들의 어르신을 향한 진심을 엿볼 수 있었다. 어르신들을 위한 먹을거리 하나 허투루 고르지 않았다. 고기나 채소, 참기름 등 국산 먹을거리로 장을 보고 아침이면 각종 약재를 넣어 달인 배즙을 챙겨 드렸다. 1년에 3번 어르신들과 나들이도 가고 어르신들을 위한 각종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신앙생활을 도왔다. 어르신들은 “천국이 따로 있겠냐. 편하게 여생을 보낼 수 있는 여기가 천국”이라고 입을 모은다. 이제는 요양원이 더 집처럼 느껴져 명절 때 집에 잘 안 가는 어르신도 많다는 게 시설 관계자의 설명이다.신 원장도 새로운 보금자리에서 행복한 나날을 보내는 어르신들을 보며 “하느님이 다 이루신 일이며 어르신들의 웃는 모습을 보면 매일 기적 속에 산다는 생각이 든다”고 말했다. 그리고 기적을 이어가기 위해 지금도 노력 중이다. 얼마 전부터 치매 어르신을 받기 시작한 것도 그 하나다. 치매가 현대 의학으로 고칠 수 없는 질병이지만 사랑이라는 묘약으로 다가가면 변화된다는 믿음이 있기 때문이다. 신 원장과 직원들은 요양원이 생을 기쁘게 마감할 수 있는 천국행 출발역이 되도록 한마음으로 가꾸어 나가고 있다. 노인장기요양원이 어르신들이 죽음을 기다리는 곳, 시설의 돈벌이 장소로 전락했다는 편견을 깨려고 오늘도 노력 중이다. “기쁜 마음으로 일하는 직원들을 보면 늘 고맙고 감사해요. 건강이 허락하는 한 하느님 뜻대로 어르신들을 돌보며 살고 싶어요.” 백영민 기자 heelen@cpbc.co.kr 평화신문2019.03.20

예수님 부활 가장 가까이서 목격한 여인 ... 스크린으로 찾아와 신약 인물이자 부인, 예수의 제자인 성녀 마리아 막달레나에 관한 영화가 개봉한다. 성주간 수요일인 오는 28일 개봉하는 ‘막달라 마리아 : 부활의 증인’(감독 가스 데이비스)이다.영화는 마리아 막달레나 성녀를 예수님을 섬긴 죄의 여인으로 그리면서, 성경에 기록되지 않은 이야기에 대해 상상력을 발휘했다. 황량한 어촌에서 구원만을 바라며 사는 성녀는 정혼을 거부했다는 이유로 가족들에게조차 외면당한다. 그러다 그의 마을을 방문한 예수님과 제자들을 만나 깨달음을 얻고 세례받은 뒤 예수님과 제자들의 여정에 동행한다.성경은 성녀가 예수님께서 십자가형을 받고 돌아가실 때 마지막까지 십자가 곁을 지켰으며(요한 19,25), 저녁때가 돼 아리마태아 출신의 부유한 요셉이란 자가 빌라도의 허락을 받아 예수님의 시신을 자기의 새 무덤에 모실 때에도 그 맞은편에 있었다(마태 27,61 참고)고 기록하고 있다. 또한, 안식일 다음 날 새벽에 몇몇 여인과 함께 무덤으로 달려가 그리스도의 시신이 없어졌다는 사실을 발견했으며(루카 24,3), 무덤 밖 동산에서 슬피 울고 있을 때 “마리아야!” 하고 부르시는 부활하신 예수님을 처음으로 만나 그리스도 부활의 기쁜 소식을 전할 사명을 받고 제자들에게 달려간 인물(요한 20,11-18 참고)로 묘사하고 있다.성경에는 예수님께 ‘용서받은 죄 많은 여자’(루카 7,36-50)와 마르타의 동생 마리아가 동일 인물인지 분명하게 나오지는 않으나, 교황 대 그레고리우스 1세(재위 590~604년) 이후 두 마리아를 성녀 마리아 막달레나와 같은 인물로 보고 있다. 그래서 서방 교회 전승에서는 성녀 마리아 막달레나를 예수님을 만나 자신의 죄를 용서받은 여인으로서 ‘통회’와 ‘관상’의 롤모델로 여겨왔다.영화는 그동안 남성 중심적인 시각에서 쓰이고 묘사됐던 예수님을 여성의 시선에서 바라보고 느끼는, 관점의 변화를 추구한다. 특히 모든 인간의 구원을 위해 인간을 대신해 고통받고 십자가 위에서 돌아가시고 묻히셨다가 사흗날에 부활하신 사건은 예수님의 일생에서 가장 중요한 사건이다. 이러한 장면들 속에서 막달레나 성녀의 삶을 통해 바라보는 예수님의 인간적인 면모는 신앙인과 비신앙인의 구분을 넘어 우리 모두에게 감동과 여운을 남기기 충분하다.영화는 할리우드 대표 연기파 배우로 꼽히는 루니 마라가 막달레나 역을, 호아킨 피닉스가 예수님 역을 맡았다. 루니 마라와 호아킨 피닉스는 2013년 인공지능 운영체제와 사랑에 빠지는 독특한 설정이 인상적이었던 로맨스 영화 ‘그녀’에서 각각 캐서린과 테오도르역으로 열연했던 적이 있다. 호아킨 피닉스는 이 영화로 제79회 칸영화제 남우주연상을 받았다.2000년 전 예수님 시대를 그대로 재연하기 위해 수많은 역사학자와 고고학자, 신학자들로부터 의견을 수렴했다. 이를 바탕으로 의상을 제작하고 현지 로케이션에 나섰다. 촬영은 예수님 당대와 똑같은 기후와 생태를 가진 장소를 찾아 남부 이탈리아의 고대도시 마테라를 비롯해 풀리아, 시칠리아 등지에서 진행했다.이힘 기자 lensman@cpbc.co.kr 평화신문2018.03.14
[하느님과 트윗을](55) 예수님은 우리를 위해 무엇을 하셨나요모든 사람의 죄를 떠맡으신 예수님 문 : 예수님은 ‘하느님의 아들’이신가요.답 : 예수님 시대 이전에 유다인은 이미 몇몇 특별한 인물을 ‘하느님의 아들’이라고 부른 적이 있습니다. 성경은 이스라엘을 하느님의 “맏아들”(탈출 4,22)이라고 부릅니다. 그러나 우리가 예수님을 ‘하느님의 아들’이라고 할 때, 이는 단지 명예로운 칭호로 부르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과 성부의 관계는 하느님과 우리의 유대와는 다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 자신이 또한 하느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자신을 ‘하느님의 아들’이라고 말씀하시자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심지어 예수님이 하느님을 모독했다고 여기며 돌을 던지려고 했습니다. 성경은 예수님이 참 하느님이시라는 것을 확인해 줍니다. 예수님을 ‘하느님의 아들’이라고 믿는 것은 그리스도인이 되기 위해 필수적입니다.문 : 예수님은 이름이 여러 개 있나요답 : ‘예수’라는 이름은 ‘하느님은 구원하신다’ 또는 ‘하느님은 도움이시다’라는 의미입니다. 예수님은 “백성을 죄에서 구원하실 것”(마태 1,21)이고, 몸값을 지불하고 그들을 되찾으실 것(마태 20,28 참조)이므로 그 이름이 주어졌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예수님을 우리의 구원자이며 구속자라고 합니다. 그리스어로 그리스도(히브리어로 메시아)는 ‘기름 부음 받은 이’라는 뜻입니다. 하느님이 “성령과 힘”(사도 10,38)으로 예수님에게 기름을 부어 주셨습니다. IHS는 예수를 뜻하는 그리스어의 첫 세 글자로 라틴어에서 I와 J는 같은 글자라서 이렇게 쓸 수 있습니다. “인간의 구원자 예수(Jesus Hominem Salvator)”나 “이 십자가의 표시(In Hoc Signo)”로 해석하기도 합니다.문 : 왜 예수님은 우리를 위해 돌아가셨나요.답 : 바오로 사도는 한 사람, 즉 아담을 통해 죄와 죽음이 세상에 들어왔다고 했습니다.(로마 5,12-13 참조) 아담의 죄는 원죄로서 그의 모든 자손을 짓누르고 그들로 하여금 죽음의 지배를 받게 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를 바꾸셨습니다. 그분은 ‘죄를 용서해 주시려고’(마태 26,28 참조) “많은 이들의 몸값으로”(마태 20,28) 자기 목숨을 바치셨습니다. 십자가 위에서, 예수님은 현재, 과거, 그리고 미래의 모든 사람의 죄를 떠맡으셨습니다. 우리의 죄까지도 말입니다. 그 결과, 세례를 받을 때 우리는 원죄와 우리가 그동안 지은 모든 죄로부터 깨끗해집니다. 문 : 예수님은 왜 그토록 참혹하게 돌아가셔야 했나요.답 : 예수님은 십자가 위 죽음을 앞두고 고뇌하셨습니다. 겟세마니 동산에서 “아버지, 아버지께서 원하시면 이 잔을 저에게서 거두어 주십시오”(루카 22,42)라고 기도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이러한 크나큰 고통을 견딜 수 있을 만큼 자신이 충분히 강인하지 않다고 생각하신 걸까요? 그랬을지도 모릅니다. 예수님은 “그러나 제 뜻이 아니라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지게 하십시오”(루카 22,42)라고 하시며 돌아가셨습니다. 예수님의 겟세마니 기도는 하느님의 능력에 한계가 있어서가 아니라, 하느님과 죄 많은 인간을 재결합시키기 위해 완전한 제물이 필요했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의 외아드님을 살해한 죄는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큽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렇게 한 사람들을 용서해 주심으로서 용서받지 못할 만큼 큰 죄가 없다는 것을 우리에게 가르쳐 주십니다. 정리=서종빈 기자 binseo@cpbc.co.kr 평화신문2018.06.12
 “나는 인장을 받은 이들의 수가 십사만 사천 명이라고 들었습니다”(묵시 7,4)](//cpbc.co.kr/CMS/newspaper/2018/05/rc/719257_1.0_titleImage_1.jpg)
[허규 신부와 떠나는 신약여행](97) “나는 인장을 받은 이들의 수가 십사만 사천 명이라고 들었습니다”(묵시 7,4)하느님을 믿는 모든 이가 구원될 것이다 요한 묵시록은 하느님이 내린 두루마리에 담긴 환시를 전하고 있다. 그림은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하는 어린양이 일곱개의 봉인이 있는 두루마리를 받는 모습. 율리우스 슈노어 폰 카롤스펠트 작 ‘네 개의 봉인’ 부분. 출처=「아름다운 성경」 하느님의 어좌에 관한 환시에 이어 소개되는 것은 ‘어린양’에 대한 환시입니다. 요한 묵시록에서 어린양은 “다윗의 뿌리”로 소개되며 “살해된 것처럼 보이는” 모습으로 묘사됩니다.(묵시 5,5-6) 이런 묘사와 함께 어린양은 요한 묵시록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나타내는 전형적인 상징으로 사용됩니다. 이 어린양은 어좌에 앉은 분으로부터 봉인된 두루마리를 건네받습니다. 이 봉인된 두루마리는 요한 묵시록에서 환시를 시작하고 종말을 향해가는 중요한 요소입니다. 이 두루마리를 펼 때에 비로소 그 안에 적힌 내용을 볼 수 있고 그 내용을 보는 것은 하느님의 계시를 알려주는 것입니다. 하느님으로부터 봉인된 두루마리를 받은 어린양은 두루마리에 적힌 모든 일들, 의미적으로는 종말에 일어날 모든 일에 대한 권한을 위임받습니다. 그리고 이런 내용은 어린양을 향해 외치는 네 생물과 스물네 원로의 노래에서도 드러납니다. “주님께서는 두루마리를 받아 봉인을 뜯기에 합당하십니다. 주님께서는 살해되시고 또 주님의 피로 모든 종족과 언어와 백성과 민족 가운데에서 사람들을 속량하시어 하느님께 바치셨기 때문입니다.”(묵시 5,9) 일곱가지 재앙 이제 어린양은 두루마리의 봉인을 떼고 본격적으로 재앙을 이야기하는 환시가 시작됩니다. 처음은 두루마리를 펴는 것으로 시작되는 일곱 봉인의 재앙입니다. 일곱 봉인과 함께 등장하는 재앙은 전통적으로 하느님의 재앙을 나타낼 때 사용됩니다. 일곱 봉인의 환시가 말하는 재앙을 순서대로 정리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전쟁의 예고, 전쟁, 기근, 전염병과 들짐승, 박해, 하늘의 표징입니다.(묵시 6,1-17) 이런 재앙은 구약성경과 복음서에서도 낯설지 않습니다. 구약성경도 칼이나 전쟁, 굶주림, 사나운 짐승, 흑사병을 통해 하느님의 재앙을 이야기합니다. 또 복음서는 종말과 함께 전쟁, 지진, 기근, 전염병, 박해, 하늘의 표징 등이 일어날 것이라고 말합니다.(루카 21,9-13; 마르 13,7-17) 이처럼 전통적인 재앙과 요한 묵시록에서 보여주는 재앙이 비슷하다는 것은 사람들로 하여금 이 재앙을 일으키는 분이 누구신지 알려주는 역할을 합니다. 봉인으로 인한 재앙의 마지막은 그다음에 올 일곱 나팔에 의한 재앙과 맞닿아 있습니다. 일곱째 봉인은 새로운 일곱 나팔의 재앙을 시작합니다. “그들에게 일곱 나팔이 주어졌습니다.”(묵시 8,2) 이 마지막 재앙 전에, 곧 여섯째 재앙과 일곱째 재앙의 사이에는 성격이 다른 환시가 하나 있습니다. 요한 묵시록 7장 전체를 통해 전하는 “선택받은 이들”에 대한 환시입니다. 요한 묵시록에서 이 환시는 여러 면에서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재앙을 가져오는 봉인의 환시와 선택받은 이들에 대한 환시는 서로 성격이 다릅니다. 쉽게 말한다면 선택받은 이들은 구원될 이들을 표현하는 환시이고 봉인의 환시는 세상에 재앙을 가져오는, 좀 더 정확히 말한다면 세상의 악의 세력에게 내리는 환시입니다. 그렇기에 선택받은 이들의 환시는 하느님의 재앙이 누구를 향하고 있는지를, 재앙의 대상이 누구인지를 알려주는 역할을 합니다. 요한 묵시록에서 말하는 재앙은 모든 사람을 향한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의 인장을 받은 이들선택받은 이들에 대한 환시는 하느님의 인장을 받은 14만 4000명에 대한 내용으로 시작합니다. 그들은 이스라엘의 모든 지파에서 온 것으로 표현됩니다. 우선 여기에 사용된 14만 4000이라는 숫자는 실제적인 의미가 아닌 상징적인 의미로 이해해야 합니다. 이 숫자는 두 번의 12와 1000으로(12×12×1000) 이뤄집니다. 본문에서도 암시하는 것처럼 이것은 하느님의 백성을 나타내는 숫자입니다. 열두 지파로 나타나는 구약의 하느님의 백성 그리고 열두 사도로 상징되는 예수님 시대의 믿는 이들을 모두 일컫는 숫자입니다. 결국 14만 4000은 구약시대에서부터 지금까지 하느님을 믿고 따르는 이들을 나타내는 상징입니다. 몇 명인지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인장을 지닌 이들, 곧 하느님을 믿는 모든 이들이 구원될 것이라고 말하는 환시입니다. <가톨릭대 신학대학 성서학 교수> 평화신문2018.05.02
![[이창훈 기자의 예수님 이야기] (58) 돈 좋아하는 바리사이들, 부자와 라자로(루카 16,14-31)](//cpbc.co.kr/CMS/newspaper/2018/04/rc/716342_1.0_titleImage_1.jpg)
[이창훈 기자의 예수님 이야기] (58) 돈 좋아하는 바리사이들, 부자와 라자로(루카 16,14-31)죽었다 살아난 이들의 말도 믿지 않을 사람들 부자와 라자로의 비유는 재물을 어떻게 사용해야 하는지를 생생하게 일깨워준다. 사진은 11세기의 그림 성경책에 나오는 부자와 라자로 이야기. 독일 뉘른베르크, 독일 국립박물관 소장. 루카복음 16장 전반부(16,1-13)가 하느님 나라에 들기 위해 재물을 어떻게 사용해야 하는지를 다룬다면, 후반부(16,14-31)는 재물을 올바로 사용하지 못했을 때에 어떤 결과를 보게 되는지에 대한 구체적인 사례를 제시합니다. 후반부는 돈을 좋아하는 바리사이들에게 하시는 예수님의 말씀으로 시작합니다. 돈을 좋아하는 바리사이들의 참모습(16,14-15)재물을 올바로 사용하고 하느님을 섬길 것인지 재물을 섬길 것인지 결단을 내려야 한다는 말씀에 “돈을 좋아하는 바리사이들이” 비웃습니다.(16,14) 구약에서는 재물을 하느님의 축복으로 보았습니다. 행복과 성공, 재물은 하느님의 계명을 지키는 이들에게 하느님께서 주시는 복이었습니다.(신명 28장 참조) 예수님 시대에 바리사이들도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습니다. 부와 성공이 하느님께 순종하는 이들에게 내리는 하느님의 복이라면, 반대로 가난과 질병은 하느님의 법을 지키지 않는 죄인에게 내리는 벌로 여겨졌습니다. 바리사이들은 스스로 계명을 잘 지킨다고 여겼고 그래서 재물을 많이 모으는 것은 하느님의 축복으로 여겼습니다. 그렇다면 이들이 예수님의 말씀에 비웃는 것은 당연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그런 바리사이들에게 “너희는 사람들 앞에서 스스로 의롭다고 하는 자들이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너희 마음을 아신다”고 하시면서 “사람들에게 높이 평가되는 것이 하느님 앞에서는 혐오스러운 것”이라고 지적하십니다.(16,15) 이미 예수님께서는 바리사이들과 율법 교사들을 호되게 질타하신 적이 있습니다.(루카 11,37-54) 하느님께서는 겉이 아니라 속을 보십니다.(1사무 16,7) 따라서 예수님의 이 말씀은 하느님께서 돈을 좋아하는 바리사이들의 속마음을 아시기에 그들이 사람들에게 높이 평가받을지 몰라도 오히려 혐오스럽게 보신다는 것입니다. 율법과 하느님의 나라, 아내를 버리지 마라(16,16-18)루카 복음사가는 이어서 앞 대목과는 문맥상 별 상관 없이 보이는 예수님의 말씀들을 전합니다. 우선 율법과 하느님 나라에 관한 것인데, 율법과 예언자들의 시대가 요한으로 끝이 나고, 이후에는 하느님 나라의 복음이 전해지고 있는데, 모두 이 나라에 들어가려고 힘을 쓴다는 것입니다.(16,16) ‘율법과 예언자들의 시대’는 바로 율법과 예언서를 가리키는 것으로 구약성경을 가리키는 데 자주 쓰이는 표현이라고 합니다. 그렇다면 이 말씀은 요한으로 구약 시대가 끝나고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시는 예수님과 함께 신약이 시작됐음을 의미합니다. 학자들은 “모두 이 나라에 들어가려고 힘을 쓴다”는 표현은 예수님의 부활 후 초대 교회에서 많은 이들이 교회 공동체에 들어오고 있음을 가리킨다고 풀합니다. 어쨌거나 이 말씀은 요한 세례자로 끝나는 구약의 시대와 예수님으로 시작하는 신약의 시대를 구분 짓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어오는 두 말씀을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하나는 “율법에서 한 획이 빠지는 것보다 하늘과 땅이 사라지는 것이 더 쉽다”(16,17)는 말씀을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 말씀은 율법과 예언서의 시대인 구약과 예수님의 시대인 신약을 구별하는 바로 앞 말씀과 달리 예수님 시대인 신약에서도 율법이 그대로 유효함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다른 하나는 “아내를 버리고 다른 여자와 혼인하는 자는 누구나 간음하는 것이다. 남편에게 버림받은 여자와 혼인하는 자도 간음하는 것이다”(16,18)라는 말씀입니다. 구약에서는 아내가 추해서 눈에 차지 않으면 이혼장을 써주고 버려도 된다고 했는데,(신명 24,1) 예수님의 말씀은 구약의 규정을 배격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여기서 우리는 “내가 율법이나 예언서들을 폐지하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마라. 폐지하러 온 것이 아니라 오히려 완성하러 왔다”(마태 5,17)는 말씀을 새롭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혼인과 관련되는 말씀은 구약의 폐기가 아니라 보완입니다. 아내를 버려서는 안 된다는 말씀은 예수님께서 일부일처제를 혼인 제도로 세우셨다는 것과 함께 여성의 품위를 그만큼 들어 높이셨음을 보여줍니다. 부자와 라자로의 비유(16,19-31)루카복음에만 나오는 이 이야기는 재물과 율법에 관한 예수님의 가르침을 비유로써 생생하게 표현하면서 핵심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비유에 나오는 라자로는 ‘하느님께서 도와주신다’라는 뜻이라고 합니다. 그렇다면 거지 라자로는 가난한 이들이 하느님 나라를 차지한다는 예수님의 가르침과 잘 맞는다고 하겠습니다. 날마다 호사스럽게 지내는 부자와 달리 라자로는 종기투성이의 몸으로 식탁에서 떨어지는 빵부스러기로 허기를 채우는데, 개들까지 와서 종기를 핥곤 합니다. 요즘과는 달리 당시 성경의 세계에서 개는 혐오스럽고 고약하고 부정한 짐승으로 여겨졌습니다. 그렇다면 라자로는 그 부정한 개보다도 못한 삶을 사는 셈입니다. 그러나 죽은 다음 곧 저승에서의 상황은 완전히 바뀝니다. 라자로는 아브라함 할아버지 품에서(하느님 나라에서) 위로를 받고 있지만, 부자는 불길 속에서(지옥에서) 고초를 겪습니다. 부자가 고통 속에서 손가락 끝에 물을 축여 혀를 식히게 해달라고 청원하지만, 부자와 라자로 사이에는 큰 구렁이 있어서 서로 오가지 못한다며 아브라함이 거절합니다. 부자는 다시 그러면 라자로를 자기 형제들에게 보내 형제들만이라도 이 고통스러운 곳에 오지 말도록 해달라고 청하지만 아브라함은 그들이 율법과 예언자들의 말을 들으면 된다며 거절하지요. 부자는 죽었던 라자로를 보내야 형제들이 말을 들을 것이라고 애원하지만, 아브라함은 율법과 예언자들의 말을 듣지 않는 사람은 죽었다가 살아난 이의 말도 듣지 않을 것이라고 거절합니다.[생각해 봅시다]예수님께서는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기 위해 영리하게 처신하고(약은 집사의 비유) 재물로라도 친구를 사귀라고, 가난한 이를 도와주라고(재물의 올바른 이용) 말씀하셨지만, 부자는 날마다 호화로운 생활을 하면서도 가난한 라자로에게 아무런 동정을 베풀지 않았습니다. 그 결과 부자는 죽어서 타오르는 불길 속에서 고통을 겪습니다. 반대로 라자로는 가난하고 병들고 부정한 개까지 와서 그의 종기를 핥는 버림받는 이를 대표합니다. 그는 죽어서 천국으로 상징되는 아브라함의 품에서 위로를 받습니다. 라자로는 ‘참 행복’ 선언(루카 6,20-21)에서 이야기하는 행복한 사람의 표본입니다. 부자와 라자로의 완전히 상반되는 운명은 우리에게 재물을 어떻게 사용해야 할 것인지를 다시 한 번 일깨워 줍니다. 가난한 이를 도우라는 것이지요. 다른 한편으로, 저승에서 부자가 고통을 겪고 있는 곳과 라자로가 위로를 받고 있는 곳 사이에 큰 구렁이 가로놓여 있어서 서로 오갈 수 없다는 것은 내세의 삶은 현세의 삶에서 결정되고 그 결정은 돌이킬 수 없다는 것을 시사합니다. 다시 말해서 단 한 번뿐인 현세의 삶을 어떻게 사느냐가 대단히 중요하다는 것이지요. 마지막으로, 아브라함은 부자에게 “율법과 예언자들의 말을 듣지 않으면,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누가 다시 살아나도 믿지 않을 것”(16,31)이라며 라자로를 형제들에게 보내달라는 부자의 청을 거절합니다. 율법과 예언자들의 말 곧 예언서는 구약성경을 가리킵니다. 반면에 라자로가 부자의 형제들에게 가는 것은 죽은 이가 살아나는 기적과 관련됩니다. 따라서 아브라함의 말은 성경 말씀을 듣지 않는 사람은 기적이 일어나도 믿지 않으리라는 것이고, 이는 반대로 기적을 찾기보다는 성경 말씀에 충실해야 한다는 가르침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어떤지요? 백영민2018.04.05
교황의 직무에 협력하는 주교, 추기경](//cpbc.co.kr/CMS/newspaper/2019/01/rc/742903_1.0_titleImage_1.jpg)
[성사풀이](28)교황의 직무에 협력하는 주교, 추기경추기경들은 최고 목자인 교황의 사목 직무를 보좌하는 역할을 가지고 있다. 【CNS 자료사진】 주교님과 추기경님은 어떻게 다른가요 주교는 주교품, 곧 충만한 성품성사를 받은 사제이다. (「가톨릭교회 교리서」 1557항) 반면에 추기경은 성품성사를 통해 수여되는 별도의 품계가 아니라, 교황이 자유롭게 선임하고 교황의 직무에 협력하는 주교를 일컫는 것이다. (교회법 351조 1항) 주교는 그리스도의 대리자이며 사도들의 후계자로서, 주교 축성으로 주교품을 받고 탁월한 봉사를 통해 자신에게 맡겨진 개별 교회(교구)의 사목을 책임집니다.(「가톨릭교회 교리서」 1560항) 추기경은 교황이 선발합니다. 추기경의 자격은 적어도 사제품을 받은 성직자로서 학식과 품행과 신심 그리고 업무 처리의 현명함이 특출한 남자입니다. 만일 주교품이 아니라 사제품을 받은 성직자라면 서임되기 전에 주교품을 받아야 합니다. 따라서 현재 모든 추기경은 주교품을 받은 성직자들입니다.(교회법 351조 1항) 추기경들은 최고 목자인 교황의 사목 직무를 보좌하는 역할을 가지고 있습니다. 곧 추기경들은 추기경단을 구성하고 합의체(단체)로 또는 개별적으로 교황을 보필합니다. 합의체적 역할은 중대한 문제에 대해 추기경 회의를 통해 교황에게 자문하는 것이고, 개별적 역할은 교황청 부서장, 교황 특사, 교구장으로서 직무를 수행하면서 교황을 보필하는 것입니다. 특별히 추기경단은 사도좌(교황)가 공석일 때 특별법에 따라 교황 선거(Conclave)를 준비하고 새로운 교황을 선출하는 권한을 가지고 있습니다.(교회법 349조) 교황님의 말씀은 신앙으로 모두 받아들여야 하나요 교황의 모든 말씀을 신앙으로 받아들여야 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교황이 신앙과 도덕에 관한 말씀을 확정적으로 선언할 때에는 믿음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왜냐하면, 이때 교황은 한 개인으로서 판단을 내리는 것이 아니라 성령의 도움을 받아 보편 교회의 최고 목자이며 최고 스승으로서 교리를 설명하고 옹호하기 때문이다.(「가톨릭교회 교리서」 891항) 예수님께서는 교회를 사도들 위에 세우시고, 복음 선포와 사명을 교회에 맡기셨습니다. 교회는 성령의 도움으로 베드로의 후계자인 교황과 사도들의 후계자인 주교단을 통해 사도들의 가르침과 고귀한 유산을 보존하고 전합니다. (「가톨릭교회 교리서」 857항) 예수님께서는 베드로 사도를 당신 교회의 반석으로 삼으셨고, 그에게 교회의 열쇠를 맡기셨으며, 그를 양 떼의 목자로 세우셨습니다.(마태 16,18-19; 요한 21,15-17) 교황은 베드로 사도의 후계자이며 로마 주교로서 그리스도의 대리자이며 온 교회의 목자입니다. 따라서 교황이 교회에 대해 완전한 보편 권한을 가지고 신앙과 도덕에 관한 교리를 확정적으로 선언할 때 무류성을 가집니다.(「가톨릭교회 교리서」 891항) 또한, 예수님께서 베드로 사도에게 주신 임무는 사도단에게도 맡겨졌고, 이 임무는 교황과 주교단을 통해 계속되고 있습니다. 주교단은 그 단장인 교황과 더불어 보편 교회에 대한 완전한 최고 권한의 주체입니다. 각각의 주교들이 무류성의 특권을 가지지는 않지만, 교황과 유대를 보존하면서 신앙과 도덕에 관한 의견을 확정적으로 합의할 때에는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오류 없이 선포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교회에 대한 권한의 행사는 보편(세계) 공의회를 통해 이루어집니다.(「가톨릭교회 교리서」 883, 884항) 따라서 교황 또는 교황과 더불어 주교단이 교회의 권한을 가지고 하느님에게서 계시되어 믿어야 할 것으로 제시하거나, 그리스도의 가르침으로 제시할 때에는 그러한 결정에 신앙의 순종으로 따라야 합니다.(「가톨릭교회 교리서」 891항) 이러한 가르침에는 1854년 비오 9세 교황의 ‘복되신 동정 마리아의 원죄 없으신 잉태 교리’, 1950년 비오 12세 교황이 선포한 ‘성모 승천 교리’가 있습니다. 이는 성경과 신경에는 없지만, 교황이 정식으로 사도좌에서 선포한 교리이므로 가톨릭 신자들은 믿을 교리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이 밖에 교황과 주교단이 비록 결정적 의사 표시 없이 일반 교도권의 행사를 통해 신앙과 도덕 문제에 관한 계시를 더 잘 이해하도록 가르침을 제시할 때에도 신자들은 ‘마음의 종교적 순종’(교회 헌장 25항)으로 이를 따라야 합니다. 이러한 가르침에는 프란치스코 교황께서 발표하신 교황 권고 「복음의 기쁨」과 회칙 「찬미받으소서」가 있습니다. 이것은 신앙의 동의와는 구별되지만, 신앙의 동의를 연장하는 것입니다.(「가톨릭교회 교리서」 892항) 정리=리길재 기자 teotokos@cpbc.co.kr cpbc2019.01.02
![[교부들의 사회교리] (1) 연재를 시작하며](//cpbc.co.kr/CMS/newspaper/2018/12/rc/740642_1.2_titleImage_1.jpg)
[교부들의 사회교리] (1) 연재를 시작하며사회문제에 대한 탁월한 가르침을 찾아서 최원오 교수 교회의 스승인 교부들은 성경과 맞닿은 언어와 문화로 주님의 삶과 가르침을 생생하게 느끼며 살았던 신앙의 오랜 증인들이다. 모진 박해와 세상 거짓에 맞서 기꺼이 자신을 불사르며 복음의 진리와 거룩한 삶의 가치를 지켜낸 성인들이며, 하느님 백성을 섬기고 돌보는 일을 천직으로 여겼던 목자들이다. 그래서 교부들의 많은 가르침은 단순하면서도 감동적이고, 힘이 있으면서도 따뜻하다. 특히 사회교리나 교회 생활에도 끊임없이 새로운 영감을 불어넣어 주는 마르지 않는 샘이다.(한국교부학연구회 「그리스도교 신앙 원천」 머리말)교부 시대에도 사회교리가 있었는가?우리에게 익숙한 가톨릭 사회교리(Catholic social teaching)는 현대 사회에서 벌어지는 심각한 문제들에 관하여 교황들 또는 국가나 대륙의 주교회의가 다양한 방식으로 응답한 것이다. 현대의 첫 사회 교서인 레오 13세 교황의 「새로운 사태」(1891년)에는 산업화 과정에서 발생하는 노동자들의 비참한 상황과 저개발 국가들의 비인간화에 관한 예리한 통찰과 따듯한 애정이 배어 있다.교황은 이러한 현대 상황을 라틴어로 ‘레룸 노바룸(새로운 사태)’이라고 불렀다. 노동의 거룩한 가치와 노동자의 권리를 구체적으로 일깨우는 레오 13세 교황의 이 탁월한 문헌은 ‘노동헌장’이라고도 불렸고, 사회교리에 관한 현대인의 새로운 관심을 불러일으켰다. 그러나 사회교리가 어느 날 갑자기 하늘에서 툭 떨어진 것은 아니다. 교부 시대에서 현대에 이르기까지 모든 상황이 새로운 사태가 아닌 적이 있었던가? 쉴 새 없이 밀어닥치는 인생의 거친 풍랑 속에서 가난한 이들과 수많은 노동자가 예나 지금이나 날마다 숨 가쁘게 파도를 넘고 있다. 미래의 인공지능 시대에 관한 엇갈린 예측들이 쏟아져 나오고 있지만, 정말 분명한 것은 가난한 사람들은 지금뿐 아니라 이 세상 끝날까지 언제나 우리 곁에 있을 것이고, 우리의 가난을 짊어지시고자 스스로 가난한 사람이 되어 오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세우신 교회의 사명은 앞으로도 결코 변치 않으리라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교부들이 남겨준 가난한 사람들에 대한 사랑의 본보기와 공생공락의 삶에 관한 빼어난 가르침은 오래고도 여전히 새로운 그리스도교 사회교리라고 할 수 있다. 이는 갈라진 형제들도 공유해야 하는 그리스도교 공동 유산이며, 우리가 끊임없이 거슬러 올라가야 하는 그리스도교 원천이기도 하다.사회교리를 남긴 대표적 교부들사회교리를 현대 교황들의 특정 회칙이나 교황청 문헌 등에만 한정하는 것은 2000년 그리스도교의 ‘거룩한 전통’(聖傳)을 한없이 초라하게 만드는 일이다. 비록 번듯한 짜임새는 없지만, 교부 문헌에는 교부들이 살았던 시대 상황 속에서 가난한 이들 안에 계시는 주님을 알아 뵙고, 그들과 연대하며 정의로운 사회를 일구기 위해 헌신했던 교부들의 치열한 성찰과 생생한 증언들이 담겨 있다. 동방 교회에서는 특히 대 바실리우스, 나지안주스의 그레고리우스, 요한 크리소스토무스가 놀라우리만큼 강력하고 감동적인 가르침을 남겼고, 서방 교회의 암브로시우스와 아우구스티누스, 대 그레고리우스도 이에 못지않다. 이 여섯 교부는 동방의 4대 교부 또는 서방의 4대 교부에 속한다. 2000년 그리스도교 역사에서 가장 위대하다는 평판을 얻은 이 교부들은 사회 문제와 가난한 이들에 대한 사랑에서도 가장 탁월한 가르침과 본보기를 남겼다. 그리고 이 거룩한 전통은 오늘날 프란치스코 교황의 강론과 교리교육, 연설과 문헌들뿐 아니라, 하느님 백성과 가난한 사람들에게 다가가는 몸짓과 표정에서도 고스란히 이어지고 있다. 이 모든 것이 가톨릭 사회교리라고 믿는다. 다음 주부터는 가장 오래된 교부 문헌 가운데 하나인 「디다케」에서 시작하여 아우구스티누스와 대 그레고리우스에 이르기까지 사회교리의 흔적과 증언들을 추적하여 본문을 소개하고 간략한 해설을 덧붙이고자 한다.최원오(빈첸시오, 대구가톨릭대 유스티노자유대학원장) 최원오 교수는 로마 아우구스티누스 대학에서 교부학 박사학위를 받았고, 부산가톨릭대학교 교수로 일했으며, 현재 대구가톨릭대학교 유스티노자유대학원장이다. 김현진2018.12.05
![[교부들의 사회교리] (3) 가장 보잘것없는 인간](//cpbc.co.kr/CMS/newspaper/2018/12/rc/741766_1.0_titleImage_1.jpg)
[교부들의 사회교리] (3) 가장 보잘것없는 인간태아도 하느님 닮은 존엄한 인간 “살인하지 마시오. 간음하지 마시오. 남색질하지 마시오. 음행하지 마시오. 도둑질하지 마시오. 마술을 하지 마시오. 요술을 하지 마시오. 낙태로 아이를 살인하지도 말고, 갓난아이를 죽이지도 마시오.”(정양모 옮김 「디다케」 2,2)“죽음의 길은 이렇다.… 선한 사람들을 박해하는 자들, 진리를 미워하는 자들, 거짓을 사랑하는 자들, 정의의 보수를 모르는 자들, 선과 옳은 심판에 가담하지 않는 자들, 선을 위해서가 아니라 악을 위해서 밤샘하는 자들, 온유와 인내에서 멀리 있는 자들, 부질없는 것들을 좋아하는 자들, 보수만을 좇는 자들, 가난한 이를 불쌍히 여기지 않는 자들, 짓눌린 이들을 위해 애쓰지 않는 자들, 자신들을 만드신 분을 모르는 자들, 유아 살해자들, 하느님의 작품을 낙태시키는 자들, 억눌린 이를 짓누르는 자들, 부자들을 옹호하는 자들, 빈자들을 불법으로 심판하는 자들, 온통 죄악에 물든 자들이다. 아들들아, 이 모든 자들을 멀리하여라.”(정양모 옮김 「디다케」 5, 1~2)가난한 이들을 외면하는 죽음의 길성경에 버금가는 권위를 지닌 가장 오래된 교부 문헌 가운데 하나인 「디다케」는 인생에 두 갈래 길이 있다고 한다. 생명의 길과 죽음의 길. 이 가운데 우리가 선택해야 할 길은 당연히 생명의 길이다. 「디다케」에서 제시하는 죽음의 길은 매우 구체적이다. 진리와 정의를 저버리고 덧없는 돈과 권력을 추구하는 자들, 가난하고 비참한 이들을 외면한 채 그들과 함께 울어줄 능력마저 잃어버린 자들, 억눌린 이들을 일으켜주고 가난한 이들의 빼앗긴 권리를 되찾아주기는커녕 탐욕스런 부자들의 앞잡이 노릇을 하는 자들은 이미 죽음의 길로 치닫고 있다는 것이다. 죽음의 길과 생명의 길을 가르는 결정적 잣대는 바로 힘없고 억눌린 가난한 이들과의 연대라고 가르친다.가장 보잘것없는 인간인 태아특히 「디다케」는 그리스도교 문헌 최초로 낙태를 살인이라고 규정하고 명시적으로 금지한다. 그리스도교에서는 처음부터 낙태를 살인이라 여기고 금지했음이 틀림없다. 인류 가운데 가장 보잘것없는 인간, 현대에 이르기까지 인간 취급조차 받지 못한 채 처참하게 죽어가는 미소한 태아도 하느님을 닮은 존엄한 인간이라는 가장 오래된 그리스도교 선언이다. 우리 교회가 그리스도교 기원부터 오늘날까지 지켜온 한결같은 진실은 태아도 인간이라는 사실이다. 수태된 순간부터 엄마의 것도 아빠의 것도 아닌 독립된 새로운 인간 생명이 시작될 뿐 아니라, 그 생명은 발달 단계와 상관없이 단 한 순간의 단절도 없는 존엄한 인간이라는 구체적인 해설은 없지만, 우리 교회가 우선으로 선택해야 하는 가장 가난한 사람들 가운데 태아가 거듭 거명되고 있다는 사실을 눈여겨보아야 한다. 바로 이 작은 아이 안에 예수님께서 현존하신다는 복음의 진실은 세상의 어떤 논리로도 부정될 수 없다.프란치스코 교황은 태아의 생명을 지키려는 교회의 노력이 이 시대의 수많은 사회적 약자들을 향한 사랑과 연대로 이어질 때 비로소 교회의 생명 수호 운동이 진정성을 지닐 수 있다고 강조한다. “우리는 명확하고 단호하며 열정적으로 무죄한 태아를 수호해야 합니다. 발달 단계와 무관하게 언제나 신성하고 모두가 사랑받아야 하는 인간 생명의 존엄이 위험에 놓여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미 태어난 가난한 사람들의 생명도 마찬가지로 신성합니다. 곧 극도로 가난한 이들, 버림받은 이들, 혜택받지 못한 이들, 은밀하게 안락사에 노출된 취약한 병자들과 노인들, 인신매매 희생자들, 신종 노예살이의 피해자들, 갖가지 형태로 거부당한 이들의 생명도 신성합니다.”(「기뻐하고 즐거워하여라」 101) 처절한 죽음에 내몰리고 있는 태아들을 지켜내는 일뿐 아니라, 죽음과도 같은 절박한 처지에 내몰린 그 여인들을 애끊는 자비의 가슴으로 품어 안는 일 또한 어머니 교회의 몫임을 기억해야 한다. 비난과 단죄는 어머니 교회의 몫이 아니다. “교회는 법정이 아니라 치유의 장소이기 때문이다.”(요한 크리소스토무스)최원오(빈첸시오, 대구가톨릭대 유스티노자유대학원장) cpbc2018.12.19
[사설] 새로운 시대의 평신도 사도직 한국 교회가 평신도 희년을 보내고 있는 가운데, 평신도들을 대표하는 전국 기구 ‘한국 천주교 평신도사도직단체협의회’가 창립 50주년을 맞았다. 한국 평신도 대표들은 50주년 기념행사가 열린 대전교구 주교좌대흥동성당에서 지난 반세기 평신도의 복음화 활동을 돌아보고, 참 신앙인으로 복음화의 길에 더 앞장설 것을 다짐했다. 한국 평협의 역사는 1968년 7월 23일로 거슬러 올라간다. 개방과 대화, 쇄신을 기치로 내건 제2차 바티칸 공의회(1962~1965)가 끝난 지 3년 만에 한국 평협이 창립됐다. 공의회 이후 교회가 평신도 사도직의 중요성을 새롭게 받아들인 계기가 된 것이다.평신도 사도직의 핵심은 교회 발전과 사회 복음화에 있다. 한국 평협은 신앙 선조들의 굳건한 믿음과 열정을 이어받아 한국 교회의 영적 성장을 위한 동력이 되어 왔다. 교회와 세상에 파견된 평신도들은 다양한 사도직을 수행함으로써 선교ㆍ가정ㆍ생명ㆍ문화ㆍ정치ㆍ교육ㆍ민족화해 등 교회의 모든 사목 분야의 동반자 역할을 해왔다. 주교회의 의장 김희중 대주교는 평신도 신원에 대해 “교회와 세상을 이어주는 사제이며, 세상에 복음을 전하는 예언자이며, 세상의 아픔을 직접 쓰다듬는 왕”이라고 표현한 적이 있다.한국 평신도 대표들은 50주년 기념행사에서 ‘세상과 함께하는 그리스도인 평신도’를 제목으로 선언문을 발표했다. 미사와 성사에 자주 참여하고, 성경을 자주 읽고 말씀을 실천하며, 소외된 이웃과 연대하고 사회 정의와 공동선을 추구하며, 생명을 존중하고 생태계 보전에 앞장서겠다고 다짐했다. 새로운 시대, 평신도 사도직의 영역은 경계와 구분이 없다. 교회의 주체로서 평신도 각자가 세상을 향한 사제이며, 예언자, 왕인 그리스도인의 신원을 재인식해야 한다. 지난 50년 전통을 바탕으로 식어가는 복음화의 빛을 새롭게 밝히는 한국 평협 공동체로 성장하길 바란다. 평화신문2018.07.24
춘천교구 교동본당 설립 50주년 감사 미사 신자들이 쓴 성경 필사본과 묵주기도 50만 단 등 봉헌 춘천교구 교동본당 설립 50주년 감사 미사에서 김운회 주교와 사제단이 미사를 공동 집전하고 있다. 춘천교구 문화홍보국 제공 춘천교구 교동본당(주임 김광근 신부)은 10일 속초시 성당에서 교구장 김운회 주교 주례로 본당 설립 50주년 감사 미사와 축하식을 거행했다. 이날 미사는 역대 주임사제와 출신 사제 등 20여 명이 공동집전했으며, 미사 중에는 본당 설립 50주년을 기념해 신자들이 쓴 성경 필사본과 묵주기도 50만 단, 50주년 감사 기도문 등이 봉헌됐다. 김운회 주교는 축사에서 “희년을 맞이한 교동본당 공동체가 이웃을 서로 용서하고 화해하는 삶, 늘 하느님께 감사하는 삶을 살기를 바란다”며 “반세기 주님사랑을 감사하고자 자리를 마련해준 신자들에게 격려와 감사의 마음을 전한다”고 말했다. 교동본당은 1967년 속초 동명동본당에서 분리, 설립됐다. 본당은 이듬해 학업을 제대로 하지 못하는 학생들을 위해 안토니오 학원을 설립해 지역 청소년을 도왔다. 1990년부터는 한국인 사제가 부임했으며 1991년에는 신자 가정 방문과 면담을 통해 교무금을 책정, 경제적 자립도 이뤄냈다. 1992년 설립 25주년을 기념해 성모상, 성모서원, 안당의 집 등을 마련했으며 안당의 집에서는 한글교실과 교리교실이 열리기도 했다. 1997년에는 지역 복음화를 위해 통일 전망대에서 영북지역 민족의 화해와 일치를 위한 합동미사에 참석해 최전방에 자리한 지역민의 통일 염원을 함께 기도했으며, 그해 본당 30년사 책자를 발간하기도 했다. 올해 50주년을 맞아 사진전, 기념 음악회, 특강, 축제 미사와 대잔치 등을 마련해 의미를 더욱 새겼다. 주임 김광근 신부 “오늘의 자리가 50년을 추억하고, 동시에 그간의 하느님 사랑에 감사드리며 앞으로 거듭나는 각오를 다지는 자리가 되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이정훈 기자 sjunder@cpbc.co.krcpbc2017.06.12
![[이창훈 위원의 사도행전 이야기] (14)사도들이 기적을 일으키다 (5,12-26)](//cpbc.co.kr/CMS/newspaper/2019/04/rc/750926_1.0_titleImage_1.jpg)
[이창훈 위원의 사도행전 이야기] (14)사도들이 기적을 일으키다 (5,12-26)사도들을 통해 드러난 하느님의 표징과 이적 사도행전에서 세 번째로 요약해서 전하는 초대 교회 모습에서는 베드로 사도의 역할이 두드러진다. 사진은 베드로 사도의 무덤 위에 세워진 바티칸 성 베드로 대성전 안. 【CNS 자료 사진】 루카는 사도들, 특히 베드로의 활동과 함께 다시 한 번 초대 교회 공동체 모습을 요약합니다.(5,12-16) 사도행전에서 첫 신자 공동체의 생활(2,42-47), 초대 교회 공동체 생활(4,32-37)에 이어 세 번째이자 마지막으로 전하는 공동체 생활 모습입니다. 초대 교회 공동체의 모습을 요약해서 전하는 세 번째 대목은 “사도들의 손을 통하여 백성 가운데에서 많은 표징과 이적이 일어났다”(5,12ㄱ)로 시작합니다. 신약성경에서 ‘표징과 이적’은 모두 16번 언급됩니다. 그 가운데 세 번은 부정적입니다. 즉 거짓 그리스도와 거짓 예언자들이 나타나 선택된 이들을 속이려고 표징과 이적들을 일으킨다는 것이지요.(마태 24,24; 마르 13,21; 2테살 2,9) 모두 종말에 앞서 거짓 표징과 이적으로 사람들을 현혹한다는 내용입니다. 하지만 표징과 이적이 믿음의 동기로 작용한다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대목도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카나에 가셨을 때 카파르나움에서 죽어가는 아들을 낫게 해달라는 왕실 관리의 청에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표징과 이적을 보지 않으면 믿지 않을 것이다.”(요한 4,48) 그러고는 “네 아들은 살아날 것이다”라는 말씀으로 왕실 관리의 아들을 낫게 해주십니다. 그 결과 그 왕실 관리와 온 집안이 믿었지요. 나머지 열두 번 언급되는 ‘표징과 이적’은 대부분 백성에게 믿음의 동기로 작용하는데, 사도행전에서 9번, 서간에서 3번 나옵니다. 초대 교회 모습을 세 번째로 요약하는 이 대목이 ‘사도들이 백성 가운데에서 많은 표징과 이적을 일으켰다’가 아니라 “사도들의 손을 통하여 백성 가운데에서 많은 표징과 이적이 일어났다”로 표현되고 있음을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런 표현은 공동체 모습을 요약해서 전하는 첫 번째 대목에서도 똑같이 나옵니다. “사도들을 통하여 많은 이적과 표징이 일어나므로….”(2,43) 많은 표징과 이적이 사도들을 ‘통하여’ 일어났다는 것은 표징과 이적을 일으키는 주체가 사도들이 아니라 바로 하느님이심을 나타냅니다. 이는 또한 예수님의 이름으로는 말하지도 가르치지도 말라는 최고의회 지도자들의 위협을 받고 풀려난 사도들이 “한마음으로 목소리를 높여” 간절하게 바친 기도를 하느님께서 들어주셨음을 드러냅니다. “이제 주님! 저들의 위협을 보시고, 주님의 종들이 주님의 말씀을 아주 담대히 전할 수 있게 해주십시오. 저희가 그렇게 할 때, 주님께서는 손을 뻗으시어 병자들을 고치시고, 주님의 거룩한 종 예수님의 이름으로 표징과 이적들이 일어나게 해 주십시오.”(4,30)루카는 “그들은 모두 한마음으로 솔로몬 주랑에 모이곤 하였다. 다른 사람들은 아무도 감히 그들 가운데에 끼어들지 못하였다”고 기록합니다.(5,12ㄴ-13ㄱ) 사도들이 솔로몬 주랑에 모인 것은 예수님께서 성전 솔로몬 주랑을 거닐곤 하셔서 예수님을 떠올리기 쉬운 곳이었기 때문일 것입니다.(요한 10,23; ‘사도행전 이야기’ 3월 17일자 1506호 참조) 다른 사람들이 감히 사도들 가운데 끼어들지 못한 것은 사도들을 통해 많은 이적과 표징이 일어나는 것을 보고 두려웠기 때문일 것입니다.(2,43 참조) 하지만 이 두려움은 단지 무서움이 아니라 사도들을 통해 표징과 이적을 일으키시는 주님께 대한 두려움 혹은 경외심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믿음을 불러일으키는 표징과 이적사도들을 통한 표징과 이적들은 한편으로는 두려움을 불러일으켰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사도들에 대한 존경심과 사도들이 전하는 하느님 말씀 곧 복음 말씀에 대한 믿음을 갖게 하는 동기도 되었습니다. 그래서 루카는 “백성은 그들을 존경하여, 주님을 믿는 남녀 신자들의 무리가 더욱더 늘어났다”(5,13ㄴ-14)고 합니다.루카가 세 번째로 요약해서 전하는 초대 교회 공동체 생활 모습에서는 첫 번째와 두 번째 요약 기사에서는 나오지 않는 내용이 나옵니다. 병자들의 치유에 관한 내용입니다. “사람들은 병자들을 한길까지 데려다가 침상이나 들것에 눕혀 놓고, 베드로가 지나갈 때에 그의 그림자만이라도 누구에겐가 드리워지기를 바랐다. 예루살렘 주변의 여러 고을에서도 많은 사람들이 병자들과 또 더러운 영에게 시달리는 이들을 데리고 몰려왔는데, 그들도 모두 병이 나았다.”(5,15-16)이 구절은 우선 예수님의 치유 활동과 관련된 복음서 대목들을 떠올리게 합니다. “사람들은 곧 예수님을 알아보고, 그 지방을 두루 뛰어다니며 병든 이들을 들것에 눕혀, 그분께서 계시는 곳마다 데려오기 시작하였다. 그리하여 마을이든 고을이든 촌락이든 예수님께서 들어가기만 하시면, 장터에 병자들을 데려다 놓고 그 옷자락 술에 그들이 손이라도 대게 해 주십사고 청하였다. 과연 그것에 손을 댄 사람마다 구원을 받았다.”(마르 6,55-56) “군중은 모두 예수님께 손을 대려고 애를 썼다. 그분에게서 힘이 나와 모든 사람을 고쳐 주었기 때문이다.”(루카 6,19)이 구절은 또 사도들 가운데서 베드로 사도의 위치가 어떠한지를 알게 해줍니다. 베드로 사도는 마치 예수님처럼 다른 사도들보다 더 권위를 지닌 사도로서 예루살렘 초대 교회 공동체의 중심인물로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루카복음서에서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에게 세 번이나 당신을 모른다고 할 것임을 예고하신 후 그러나 “네가 돌아오거든 네 형제의 힘을 북돋아 주어라”(루카 22,32)라고 하시는데, 사도행전의 이 대목은 베드로가 예수님의 이 말씀을 그대로 실행하고 있는 것처럼 나타납니다.생각해봅시다사도행전에서 세 번째로 요약해서 전하는 초대 교회 공동체 모습에는 첫 번째, 두 번째와 다른 특징이 보입니다. 하나는 병자들과 더러운 영에 시달리는 이들의 치유를 전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첫 번째와 두 번째 요약 기사에서는 음식을 함께 나누고 가진 것을 내놓고 공동으로 소유함으로써 공동체에는 궁핍한 이들이 없었다는 것이 강조됩니다. 이에 비해 세 번째 요약 기사에서는 병자들과 악령 들린 사람들의 치유가 부각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굶주림과 가난, 그리고 병고가 초대 교회 공동체의 주요 관심사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복음을 선포하고 하느님을 찬미하는 공동체에서는 적어도 궁핍한 이가 없어야 하고 질병으로 고통받는 이들이 우선으로 위안을 받아야 한다는 뜻으로 풀이할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2000년 전 예수님 시대나 초기 교회 공동체 시대와 마찬가지로 오늘날에도 가난하고 굶주리는 이들, 그리고 병고에 시달리는 이들이 사회로부터 가장 소외되고 외로운 사람들일 것입니다. 초대 교회 공동체의 모습은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이렇게 촉구하는 듯합니다. 적어도 교회 공동체 안에서만이라도 굶주리고 가진 것이 없다고 해서, 몸과 마음이 병들었다고 해서 소외되는 일은 없어야 한다고 말입니다. 평화신문2019.04.17

성경을 자의적으로 해석한다면 의심해야 대표적인 유사종교인 신천지가 최근 가톨릭 신자들을 집중 공략하고 있다. 사진은 신천지 피해 가족이 신천지 위장 교회로 의심되는 한 교회 앞에서 시위하는 모습. 가톨릭평화신문 DB 그리스도교 2000년 역사에 걸쳐서 온 이단에 대한 대응은 진리를 수호하기 위한 교회의 중요한 직무 가운데 하나였다. 이는 역설적으로 교회의 본질을 되돌아보고 교회를 좀 더 건강하게 만드는 도전과 기회가 되기도 했다.현재 우리나라에 있는 유사종교는 미국에서 들어온 것을 포함해 200개 정도이며, 신자 수는 200만 명이 넘는 것으로 추산된다. 한국에서 자생적으로 발생한 이단 가운데 큰 문제를 일으키는 것으로는 ‘신천지’(신천지 예수교 증거장막성전)와 ‘하나님의 교회’(안상홍 증인회), 정명석의 ‘JMS’(Jesus Morning Star, 예수님의 새벽별), 구원파(유병언) 등을 꼽을 수 있다.유사종교를 창시하는 사람은 다른 유사종교에서 신자로 활동하다가 직접 새 종교를 만드는 것이 일반적이다. 따라서 유사종교들이 주장하는 대부분의 교리가 서로 비슷하고, 같은 맥락의 계보를 형성하고 있는 경우가 많다. 유사종교의 문제점-성경을 자의적으로 해석한다. 자신의 교주를 ‘재림 예수’나 ‘구원자’로 내세운다.-구원관과 종말론의 내용을 바꾼다. 가톨릭이나 개신교에서 가르치는 구원관을 부정하고 자신의 교주가 가르치는 내용을 믿고 그 교회에 들어와 신앙생활을 해야 구원받는다고 주장한다. 또 곧 세상 종말이 올 것이라고 한다.-정통적인 신앙생활을 하는 곳은 모두 악의 무리가 점령하고 있으며, 참된 말씀이 아니라 거짓 말씀이 있는 곳이기에 구원이 없다고 세뇌한다. -현실의 삶을 충실하게 살도록 가르치기보다 종말의 관점에서 현실 부정적인 사고를 주입한다.-자신의 교회와 교주가 한국 사회에서 핍박받는 것은 2000년 전 구세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가 핍박받았던 것처럼 당연하다고 설명한다. -세계 평화와 전쟁 종식 등을 이슈로 만들고, 평화의 사자로 둔갑시킨 자신의 교주가 활동하는 사진과 영상을 보여주며 내부 결속을 다진다.-전통적인 포교 방법에서 벗어나 자신들의 논리와 교리를 알리는 도구로 인터넷과 SNS를 적극 활용한다. 또 대규모 행사나 국제 행사를 열어 대외 홍보로 활용한다.-기존 교회와 적대 관계를 형성하는 대신 국가나 기관, 단체 등을 통해 공신력을 인정받고자 한다. 사회 봉사활동에 적극적이며, 국가나 지방자치단체 등과 협력 관계를 맺는다.-청년과 청소년에 집중 투자함으로써 미래를 보장받으려고 한다.가톨릭교회의 대응책대표적인 유사종교인 신천지는 과거에는 주로 개신교인을 대상으로 전도했다. 그러나 개신교의 적극적 홍보와 예방 세미나로 전도가 어려워지자 지금은 가톨릭 신자들을 공략하고 있다. 이단에 대한 정보가 부족하고 성경 지식이 얕은 가톨릭 신자들을 주된 포섭 대상으로 삼고 있다. 가톨릭 신자들은 피해를 봤을 때 당사자와 가족 모두 도움받을 곳을 찾기가 쉽지 않다. 피해자들은 또 교회에 알려지는 것을 극히 꺼리는 성향을 보인다. 상담하는 본당 신부나 수녀도 대처법을 잘 몰라 낭패를 보고 개신교 상담소를 찾아가는 경우가 많다. 주교회의는 2011년 각 교구에 신천지 포교 활동에 대한 주의 공문을 보냈고, 교구는 다시 본당에 신천지에 주의를 요청하는 공문을 전달했다. 이후 교구별로 피해 사례를 접수했으며, 수원ㆍ인천ㆍ전주교구는 좀 더 적극적으로 연구 작업과 신자 교육을 실시해왔다. 그러나 이러한 공지는 대부분 단발성에 그치고, 연수나 교육은 예방 중심으로 시행되고 있는 실정이다. 도움을 절실히 필요로 하는 피해자와 가족들이 도움을 받을 수 있는 곳은 극히 드물 뿐 아니라 있는 곳조차 잘 알려지지 않아 많은 피해자가 무방비 상태에서 고통받고 있다. 신천지대책위원회가 결성된 교구는 전주교구가 유일하다.유사종교 문제의 심각성을 인식한 주교회의 총대리 회의와 교리주교위원회는 지난해 8월 주교회의에 한국 교회 차원의 현황 파악과 대책을 요청했다. 이에 관한 연구를 의뢰받은 주교회의 한국가톨릭사목연구소는 주교회의 2016년 추계 정기총회에 ‘유사 종교에 대한 한국 천주교회 대처 방안’을 제출했고, 지난해 12월 주교회의 상임위원회는 유사종교 문제에 적극적으로 대처할 것을 결정했다. 이후 한국가톨릭사목연구소는 전국 교구 사목국장 등 40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2월 9일 ‘유사종교 대응을 위한 네트워크 구성 및 세미나’를 열고 ‘한국 천주교 유사종교 대책위원회’(가칭)를 결성했다. 유사종교에 대한 대응이 본궤도에 오른 것이다. 남정률 기자 njyul@cpbc.co.kr 평화신문2017.02.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