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 속 도시] (75) 라빠](//cpbc.co.kr/CMS/newspaper/2016/01/rc/612621_1.0_titleImage_1.jpg)
[성경 속 도시] (75) 라빠무고한 우리야 죽인 다윗의 죄 물든 곳 다윗은 우리야의 아내를 탐해 라빠성 전투에서 우리야를 죽게 한다. 하프를 연주하며 춤추는 다윗왕(가운데), 세밀화, 860년경, 프랑스 국립박물관. 출처=「성경 역사 지도」 라빠는 고대 암몬의 수도로 오늘날 고원 지대에 자리한 요르단 수도인 암만이다. 라빠는 10㎞만 나가도 사막이어서 주거 환경이 썩 좋지 않았다. 또 사막에 사는 유목민의 침입을 자주 받는 불리한 지형적 위치에 있었다. 그래서 암몬족은 물이 풍부하고 비옥한 영토를 확장하고자 주변국들을 자주 침입하였다. 암몬 왕국은 이렇게 열악한 환경 탓에 요르단 동편 지역의 국가 중 가장 힘이 약한 나라였다. 이스라엘에 대항했던 암몬 왕국은 기원전 8세기 말, 아시리아 제국에게 정복당해 400년 이상 암몬과 수도 라빠는 역사의 무대에서 사라지게 된다. 하지만 교통 요충지인 라빠는 기원전 63년 로마제국의 통치 밑으로 들어간 후 다시 크게 발전하게 된다. 또 서기 4세기에서 7세기에 이르는 ‘비잔틴’ 시대에는 라빠에 그리스도교가 전파되어 교회들이 건설되면서 황금기를 누렸다. 그러나 630년대 이슬람교를 신봉하는 아랍인이 이 지역을 정복한 후 그때부터 이 도시의 이름도 ‘암만’으로 바뀌게 돼 오늘에 이르고 있다. 성경에서 라빠는 암몬 자손들이 사는 장소로 등장한다. “바산 임금 옥은 라파인들 가운데에서 홀로 살아남았다. 쇠로 만든 그의 침대가 지금도 암몬 자손들이 사는 라빠에 있지 않은가? 그것은 보통 암마로 길이가 아홉 암마, 너비가 네 암마나 된다”(신명 3,11). 특별히 라빠는 다윗과 우리야의 이야기로 유명한 지명이다. 다윗은 히타이트 사람 우리야의 아내, 밧 세바를 범해서 아이를 갖게 한 자신의 죄를 숨기려 한다. 그래서 밧 세바의 남편이자 자신에게 충직했던 부하인 우리야를 라빠성 전투의 최선봉에 서게 하고 결국 죽게 한다. 다윗이 미리 계략을 꾸며 우리야를 적군 가운데 남기고 다른 병사들을 후퇴시켰기 때문이다. “다윗은 편지에 이렇게 썼다. ‘우리야를 전투가 가장 심한 곳 정면에 배치했다가, 그만 남겨 두고 후퇴하여 그가 칼에 맞아 죽게 하여라’. 그리하여 요압은 성읍을 포위하고 있다가, 자기가 보기에 강력한 적군이 있는 곳으로 우리야를 보냈다. 그러자 그 성읍 사람들이 나와 요압과 싸웠다. 군사들 가운데 다윗의 부하 몇 명이 쓰러지고, 히타이트 사람 우리야도 죽었다”(2사무 11,15-17).라빠는 예로부터 ‘물의 성’이라 불렸다. “요압은 다윗에게 전령들을 보내어 이렇게 말하였다. 제가 라빠를 공격하여 그 ‘물의 성’을 점령하였습니다”(2사무 12,27). 요압은 이곳을 점령하고 그들을 노예처럼 데려다 일을 시켰다. “그는 또 그곳의 백성을 데려다가 톱과 날카로운 쇠 연장과 쇠도끼 다루는 일을 맡기고, 그들에게 벽돌 만드는 일을 시켰다. 그는 암몬 자손들의 성읍마다 이렇게 하였다. 그러고 나서 다윗과 모든 군사는 예루살렘으로 돌아왔다”(2사무 12,31). 다윗의 장군이었던 요압에 의해 정복당한 라빠가 폐허가 될 것이라는 예언이 예레미아서, 에제키엘서, 아모스서에 등장한다(예레 49,2-3). 북이스라엘이 멸망한 후 라빠는 아시리아 아수르의 지배를 받았고 이어서 바빌론과 페르시아의 지배를 받았다. 현재 고대 라빠성은 돌로 쌓은 웅장한 성벽의 모습과 함께 로마 시대와 비잔틴 시대의 유물들의 흔적이 남아 있어 라빠의 긴 역사를 말해주고 있다. 허영엽 신부(서울대교구 홍보국장) 평화신문2016.01.05
![[신앙단상] 사랑 사랑 사랑](//cpbc.co.kr/CMS/newspaper/2018/01/rc/707674_1.0_titleImage_1.jpg)
[신앙단상] 사랑 사랑 사랑고종희(마리아, 한양여자대학교 산업디자인학과 교수 , 미술사가) “사랑 없으니 지옥, 사랑 하나 있으니 낙원.”평생 함께 살아온 부부지만 하루에도 몇 번씩 천국과 지옥을 오갈 때가 있는데 그 차이가 사랑 하나에 달려있음을 깨닫고 쓴 문장이다. 사랑이란 말로 하는 것이 아니라 실천해야 하는데 부부간, 고부간, 그리고 형제간의 사랑처럼 가까운 관계일수록 주고받기가 더 어려운 것 같다. 가화만사성(家和萬事成)이라는 고사성어도 그래서 나왔고, 가족을 사랑할 수 있는 사람은 모든 이를 사랑할 수 있을 것이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요구하신 것은 크게 두 가지라고 생각한다. 첫째는 하느님을 경외하는 일이요, 둘째는 서로 사랑하라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으로서 갖추어야 할 나머지 덕목들은 대부분 이 둘 안에 포함시킬 수 있을 것 같다. 내가 마음을 써 드리는 분 중에 홀로 사시는 자매님이 한 분 계시다. 어느 날 그분 댁을 방문했는데 추운 겨울에 난방을 하지 않고, 바닥에 이불을 깔고 지내시는 것이 아닌가. 놀라서 사연을 물으니 당신의 고통을 하느님께 봉헌하기 위해서라고 했다. 한 달 생활비가 얼마나 되는지 여쭈니 나라에서 지급하는 이런저런 돈 합하여도 얼마 되지 않았다. 난방을 하고 싶어도 할 수 있는 처지가 못 됐던 것이다. 그 후 나는 그분께 약간의 도움을 드리고 있다. 그런데 올겨울 초 그 자매님 댁을 방문했는데 여전히 난방을 안 하고 바닥에 이불이 깔려 있었다. 아직 춥지 않아서 난방을 안 했고 그간 편안하게 지낸 것에 대한 보속을 하고 싶어서 난방비를 탈북자를 돕는 신부님께 봉헌하셨다고 했다. 성경 속 가난한 과부의 자선이 바로 이러했을 것이다. 그날 나는 봉투에 약간의 돈을 준비해 갔는데 그 자매님이 봉헌한 금액과 일치함에 놀랐다. 바쁘다는 이유로 차일피일 미루었던 그분을 내 발로 찾아간 것은 하느님의 이끄심 때문이었던 것 같다. 어느 날 그 자매님께서 나의 아버님의 건강 상태를 물으시기에 극도로 고통받고 계시는 상황을 설명해 드렸더니 “그래도 아버님은 따님이 계시잖아요”라며 부러운 듯이 말씀하시는 것이 아닌가. 나는 그 자리에서 말씀드렸다. “형님, 앞으로 무슨 일이 생기시면 저에게 연락하세요. 제가 곁에 있어 드릴게요.” 이 말이 무슨 의미인지 알고 있었으나 그분이 나의 이 말을 들으면 얼마나 안심하실 것인지도 알고 있었기에 말씀드리지 않을 수 없었다.사랑이란 상대에게 사소한 작은 일에 마음을 써 주는 것이고 누군가에게 기댈 언덕이 돼 주는 일인 것 같다. 우리가 나라를 구할 수는 없다. 아프리카에 사는 가난한 이들에게 소정의 기부를 할 수는 있으나 그들에게 직접적인 영향을 미칠 수도 없다. 하지만 내가 만나는 사람들에게 내 작은 관심과 사랑을 전할 수는 있다. 나는 친정 조카들에게 일 년에 한 번 운동화를 사준다. 별거 아닌 일이지만 몇 해째 계속하다 보니 이런저런 갈등이 있었던 가족 구성원들 간의 관계가 좋아지고 있음을 느낀다. 나는 학생들을 가르치는 교육자인데 요즘 학생들은 대부분 지식을 인터넷을 통해 습득하기 때문에 학생들에게 강의가 별로 먹히지 않고 있다. 앞으로는 인공지능 로봇이 인간보다 강의도 훨씬 더 잘할 것이라고 하며 교수라는 직업 역시 미래에는 사라질 직업군에 속한다는 이야기도 있다. 나는 가르치는 교육에서 사랑을 전달하는 교육으로 방식을 바꿔보았다. 그렇게 하려니 권위를 버려야 했고, 인내도 더 필요했으나 학생들과 더 가까워진 것 같다. 교수와 학생이 사랑의 공동체가 된다면 이보다 더 이상적인 교육도 없을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평화신문2018.01.09
![[허규 신부와 떠나는 신약 여행]40. “그분께서는 되살아나셨다. 그래서 여기에 계시지 않는다.”(마르 16,6)](//cpbc.co.kr/CMS/newspaper/2017/03/rc/675084_1.0_titleImage_1.jpg)
[허규 신부와 떠나는 신약 여행]40. “그분께서는 되살아나셨다. 그래서 여기에 계시지 않는다.”(마르 16,6) 라파엘로 델 가르보(Raffaellin del Garbo) 작 ‘예수님의 부활’, 1510년, 이탈리아 피렌체. 복음서에서 전하는 ‘사흗날’하느님의 사랑 나타내는 시간십자가 죽음부터 발현, 부활신앙의 핵심이자 중요한 체험안식일이 지났습니다. 예수님을 따르던 많은 이들에게 이날은 특별한 날이었을 것입니다. “주간 첫날 이른 아침”, 예수님의 죽음 이후 새로운 시간이 시작되는 때입니다. 신약성경에서 부활의 시간을 나타내는 표현은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사흗날’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으로부터 셀 수 있는 이 표현은 예수님의 부활을 나타내는 교회의 전통적인 표현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자신의 편지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나도 전해 받았고 여러분에게 무엇보다 먼저 전해 준 복음은 이렇습니다. 곧 그리스도께서는 성경 말씀대로 우리의 죄 때문에 돌아가시고 묻히셨으며, 성경 말씀대로 사흗날에 되살아나시어, 케파에게, 또 이어서 열두 사도에게 나타나셨습니다.”(1코린 12,3-6) ‘사흘’은 복음서에서 예수님께서 수난과 부활을 예고할 때에도 사용한 표현입니다.(마르 8,31 참조) 또한, 사흘은 이미 구약성경에서도 상징적인 의미로 사용되었습니다. 한마디로 정의하기는 쉽지 않지만, 성경에서 사흘은 ‘하느님의 시간’을 나타낸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탈출 5,3; 19,16; 호세 6,2)이와 함께 주로 복음서에서 부활을 나타내는 시간은 예수님의 빈 무덤 사건을 전하는 ‘주간 첫날’입니다. 지금의 주일에 해당하는 이날은 분명 그리스도인들에게 예수님의 부활을 기억하고 기념하는 날입니다. 이날 복음서가 전하는 부활의 첫 목격자는 조금 차이가 있습니다. 공관 복음은 주로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을 지켜보았던 여인들을 이야기하고 요한복음은 마리아 막달레나라고 말합니다. 그중에서 모든 복음서에서 언급하는 여인은 바로 마리아 막달레나입니다. 어쨌거나 복음서에서 찾을 수 있는 공통점은 여인들만 언급된다는 것입니다. 부활의 첫 증인들이 무덤에서 발견하게 되는 것은 비어있다는 사실입니다. 이것을 ‘빈 무덤’ 사건이라고 부릅니다. 무덤이 비어있었다는 비교적 단순한 사실이지만 복음서에서 이 사건은 부활을 나타내는 증거처럼 표현됩니다. 무덤이 비어있었다는 사실, 곧 그곳에 묻힌 이가 없었다는 것은 초대 교회에서 부활을 입증하는 사실이었습니다. 그렇기에 복음서들은 이 사건을 전하면서 다양한 방식으로 예수님께서 부활하셨다는 것을 이야기합니다. “그분께서는 되살아나셨다. 그래서 여기에 계시지 않는다.”(마르 16,6) 유일하게 마태오복음은 당시의 분위기를 전해줍니다. 유다교의 지도자들은 빌라도에게 무덤을 지킬 경비병을 청합니다. “나리, 저 사기꾼이 살아 있을 때, ‘나는 사흘 만에 되살아날 것이다’ 하고 말한 것을 저희는 기억합니다. 그러니 셋째 날까지 무덤을 지키도록 명령하십시오. 그의 제자들이 와서 시체를 훔쳐내고서는, ‘그분은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되살아나셨다’ 하고 말할지도 모릅니다.”(마태 27,63-64) 여기서 우리는 예수님의 빈 무덤 사건을 바라보는 전혀 다른 시각을 발견하게 됩니다. 실제로 예수님의 부활을 이렇게 생각한 이들이 있었다는 것을 보여주는 대목이기도 합니다.(마태 28,11-15)부활은 이해하기 어려운 사건이었을 것입니다. 과학적이고 합리적인 생각으로 부활을 설명하고 이해하는 것은 현재에도 어려운 일임이 분명합니다. 복음서들이 전하는 빈 무덤 사건은 완벽하지 않을 수도 있지만, 부활의 증거입니다. 이와 함께 복음서는 예수님의 발현을 이야기합니다. 빈 무덤 사건과 마찬가지로 복음서들은 마리아와 다른 제자들에게 나타나셨다는 사실을 통해 부활을 이야기합니다. 복음서가 말하는 빈 무덤과 발현은 이해하기 힘든 부활을 설명하고자 고심했던 초대 교회의 성찰을 잘 보여줍니다. 부활은 모든 것을 새롭게 만드는 사건입니다. 이 부활을 중심으로 그리스도교가 시작됩니다. 십자가에 못 박힌 청년 예수가 곧 부활한 그리스도라는 것을 고백하는 이들이 그리스도인들입니다. 빈 무덤과 발현, 그리고 그것을 통해 표현되는 예수님의 부활은 신앙의 핵심이자 모든 신앙인에게 가장 중요한 체험입니다. <가톨릭대 신학대학 성서학 교수> 평화신문2017.03.16

‘21세기를 살아가는 그리스도인은 누구인가’ ‘그리스도인 - 그 정체성과 죽음과 희망 서공석 신부 지음 / 분도출판사 / 1만 5000원그리스도인은 어떤 사람인가.’2000년 전 쓰인 성경이 하느님 말씀과 예수 행적으로 신앙의 참 의미를 알려준다면, 현대인 맞춤형 서적인 이 책은 ‘신앙인의 사고 체계’를 직접 건드려 정리한 신학적이고 철학적인 책이다. 신앙 안팎을 방대하게 사유한 저자의 깊은 통찰이 눈에 띈다.저자에 따르면 그리스도인들은 ‘하느님’이라는 삶의 큰 축을 지닌 존재다. 여느 사람들처럼 온갖 장애와 어려움을 겪고 살지만, 방향을 잃고 헤매진 않는다. 하느님으로 말미암은 희망과 함께 과거 신앙 선조들이 열어준 지평이 있으며, 그 안에서 성공하도록 부름 받았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인은 ‘미래를 향해 있는 사람들’이다.그리스도 신앙인이라고 해서 역사와 무관하게 살아가는 사람이 아니다. 신앙인도 시간과 공간 안에서 살아가는 역사적 존재이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은 ‘신앙’이라는 동력을 하나 더 갖고 산다. 그래서 그리스도인은 세상과 삶을 다른 이들과 조금 달리 본다. 그리스도인에게는 운명적인 것도 없고, 해결되지 않는 일도 없다. 그런 확신이 신앙이다. 확신을 가진 이들과 꿋꿋하게 유대하며 지내야 한다.그리스도인은 ‘하느님의 질서’를 사는 이들이다. 다다익선을 ‘가난한 사람이 행복하다’란 질서로, 입신양명의 신분 질서를 ‘섬김의 질서’로 사는 이들이 그리스도인이다. 그래서 우리는 굳이 하느님을 앞세워 투사로 만들 필요가 없다. 소외된 이들을 위한 우선적 사랑만 선행되면 될 일이다.저자는 “하느님이 우리 안에 계시다는 사실은 사람을 갑작스럽거나 극적인 회두로 유도하지 않으며, 어떤 영웅적 비상함을 발생시키지도, 감동을 일으키는 사실도 아니다”고 일축한다. “하느님은 우리 일상 안에 계시기 때문”이다. 저자는 고해성사, 혼배 조당과 같은 규범에 얽매이는 것보다 중요한 것은 ‘사람을 살리는 일’이라고 관념을 깨뜨려준다.교회는 무엇인가. 그리스도인 공동체이자 인간이 만든 집단이다. 저자는 “교회는 하나의 수단이나 방법도 아니고, 사회와 대립하는 폐쇄 집단도 아니다”라고 바로잡는다. “복음적 실천의 결과인 교회 안에서 우리는 전통을 사랑해야지, 조직 체계나 책임을 진 이들을 우러러보는 곳으로 여겨선 안 된다”고 지적한다.저자의 사유는 2부 죽음과 부활에 대한 주제로 옮아간다. 저자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죽음에 틈이 생겼다”며 “신앙인은 그리스도 부활에 대한 체험에서 죽음이라는 생명의 불연속성을 극복한 연속성, 죽음을 극복한 생명, 무(無)를 극복한 존재가 있다는 사실을 알고, 보장받는다”고 알려준다. 우리는 시간적ㆍ공간적ㆍ존재론적으로 갇혀 사는 ‘감금된 존재’이지만, 동시에 ‘희망의 원리’를 지닌 존재다.저자는 “하느님 나라는 하나의 감춰진 현실”이라고 말한다. 세상 한가운데를 몰래 뚫고 일상에 자리한 하느님 신비를 우리는 늘 간청해야 한다. 하느님의 질서 속에서.이정훈 기자 sjunder@cpbc.co.kr 백영민2017.11.22
![[밭에 숨겨진 보물] 쉽고 간결히 쓴 성모 마리아의 모든 것](//cpbc.co.kr/CMS/newspaper/2017/05/rc/681913_1.0_titleImage_1.jpg)
[밭에 숨겨진 보물] 쉽고 간결히 쓴 성모 마리아의 모든 것 마리아, 은총의 어머니 - 마리아 교의와 공경의 역사 조규만 주교 지음 / 가톨릭대학교출판부/ 1만 2000원 교의신학 박사인 원주교구장 조규만 주교가 저술한 책으로 ‘마리아론의 교과서’로 불린다. 초판본은 1998년 10월에 출간됐는데 지금까지도 국내에서 성모 마리아를 다룬 책 중 최고의 저서라고 평가받고 있다. 성모 마리아에 대한 믿을 교리와 신심, 성모 발현과 전례의 의미 등 마리아론을 종합적이면서도 쉽고 간결하게 풀이해 놓았기 때문이다. 조 주교는 올바른 성모 신심과 공경을 알려주기 위해 이 책을 썼다고 했다. 저자는 “성모 마리아 공경이 결코 하느님 흠숭을 방해하지 않고 오히려 하느님 흠숭을 위해 도움이 된다는 사실을 이해할 수 있다. 그분은 우리 신앙인의 본보기요 희망이기 때문”이라고 밝힌다. 그러면서 조 주교는 성모 공경을 겉치레 행사로만 그쳐서는 안 되며 그보다는 하느님 말씀에 대한 순종,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사랑, 법에 대한 성실한 준수, 겸손, 고통을 묵묵히 감수하는 인내, 기도의 자세 등 그분의 삶을 본받는 일을 우선하라고 권한다. 그리스도 중심의 마리아론 다뤄 책은 ‘그리스도 중심의 마리아론’을 일관되게 다루고 있다. 제1부는 마리아의 교의와 신심의 발전 과정을 소개하고 있다. 특히 마리아 공경을 반대하는 자들에 대해 구약성경에 나오는 마리아의 예형과 상징들, 신약성경이 증언하는 마리아의 구세사적 역할을 밝히며 마리아가 주님의 어머니요 믿는 자들의 어머니이며 교회의 어머니임을 분명히 한다. 또 초대 교회부터 제2차 바티칸 공의회까지 발전해온 성모 마리아에 관한 교의와 신심을 폭넓게 다루면서 성모 공경이 2000년 교회 역사와 함께함을 증언한다. 제2부는 마리아론의 기본 교의와 마리아의 중재성 문제를 깊이 있게 다루고 있다. 마리아의 동정성과 신적 모성, 원죄 없으신 잉태, 승천 교리에 관한 의미와 신학적 성찰을 서술하고 있다. 또 교회의 어머니인 마리아는 그의 보편적 모성애를 통해 구원의 유일한 중재자인 예수 그리스도의 중재에 참여한다고 고백한다. 성모 발현에 관한 궁금증도 풀어 부록에서는 마리아 공경의 전례와 성모 발현을 다룬다. 특히 성모 발현과 사적 계시의 진실 여부의 판단 책임은 소속 교구장에게 있음을 분명히 하고 발현 목격자가 마리아보다 두드러질 수 없고 그 메시지가 공적 계시의 진리와 교회 가르침에 어긋난다면 올바른 발현으로 받아들일 수 없다고 단정한다. 리길재 기자 백영민2017.05.16

레지오 60돌, 대전교구 ‘평화의 모후’ 레지아 새로운 실천 다짐들 채택, 장기 근속상·축복장 등 수여 대전교구 레지오 마리애 단원들이 60주년을 준비하며 바친 영적 예물을 기록한 족자를 유흥식(오른쪽) 주교와 해미성지 전담 김경식 신부가 들어보이고 있다. 오세택 기자 대전교구 평화의 모후 레지아(단장 이진우)는 6일 해미성지 성당에서 교구 레지오 마리애 도입 60주년 기념행사를 열고, 믿음으로 새롭게 복음화되는 성모님의 군사가 될 것을 다짐했다. 800여 명의 교구 레지오 마리애 단원들은 기념행사에서 △신자의 의무를 충실히 지키고 △매주 주 회합에 참석하며 △매일 까떼나(Catena)와 묵주기도를 바치고 △매주 실질적이며 적극적으로 활동을 수행하며 △교회와 레지오에 순명하고 △성모님을 본받아 가정생활을 충실히 하고 △매일 성경을 읽고 묵상하며 △본당 사목 방침을 충실히 실천하겠다는 다짐을 채택했다. 김민희(교구 사목기획국장 겸 교구 레지오 마리애 담당) 신부는 대회사를 통해 “교구 레지오 마리애 도입 60주년의 올 한 해 여정이 지나온 레지오 사도직의 여정을 복음의 시선으로 되돌아보고 영적으로 다시 태어나는 해가 되기를 바란다”고 당부했다. ‘무엇이든지 그가 시키는 대로 하여라’(요한 2,5)를 주제로 열린 행사는 1부 기념식과 체험사례 발표, 2부 기념 미사와 시상식 차례로 거행됐다. 1부는 이진우(시몬) 교구 레지아 단장의 개회 선언을 시작으로 벡실리움(레지오 마리애 단기)과 성모상, 꾸리아 단기 입장, 묵주기도, 교구 레지아 연혁 소개, 영상 상영, 정순영(데레사, 온양 용화동본당)씨와 이금언(엘리사벳, 대전 전민동본당)씨의 체험 사례 발표, 금산본당 마중물성극단의 순교 성극 공연 등으로 꾸며졌다. 교구 레지아는 교구장 유흥식 주교 주례와 20여 명의 교구 사제단 공동 집전으로 봉헌된 60주년 기념 미사에서 묵주기도 7528만 6429단, 성경읽기ㆍ쓰기 1382만 7683장, 새 가족 찾기 2215명, 사랑의 증언 활동 20만 937회 등을 기록한 족자를 봉헌했다. 시상식에서 55년간 활동한 합덕본당 ‘상지의 좌’ 쁘레시디움 김기산(루도비코)씨 등 21명이 40년 이상 장기 근속상을 받았다. 또 축복장(1명), 모범평의회 꼬미시움(2단체), 모범평의회 꾸리아(4단체), 모범평의회 쁘레시디움(8단체), 개인 선교상(6명), 개인 봉사상(43명), 개인 확장상(15명), 개인 교육상(2명) 등이 수여됐다.유 주교는 “그동안 레지오가 교본의 문자 중심으로, 활동 중심으로, 보이는 것 중심으로 움직여 왔다면, 이제는 한 단계 성숙한 모습으로 나가야 할 때가 됐다”며 “레지오 조직을 위한 레지오가 아니라 본래의 예수님과 성모님 모습을 닮은 성숙한 신앙인이 되기 위해 예수님과 성모님께 다시 눈을 돌려야 할 것”이라고 당부했다. 1957년 3월 논산 부창동본당 ‘천지의 모후’ 쁘레시디움으로 시작한 대전교구 레지오 마리애는 1987년 레지아로 승격했으며, 현재 14개 꼬미시움과 173개 꾸리아, 1906개 쁘레시디움을 두고 있다. 행동단원은 1만 5231명, 청년 단원은 194명, 소년ㆍ소녀단원은 601명, 협조단원은 1만 3291명이다. 오세택 기자 평화신문2017.06.13

주교좌명동본당 사순 특강 (3) ‘미사, 성체성사를 살다’ 윤종국 신부(서울대교구 홍은2동본당 주임) 윤종국 신부 미사는 거룩한 제사다. 믿음의 성사, 변화의 성사인 성체성사에 참여하고 그 성사로 힘을 얻어 세상에 복음을 전해야 한다. 미사 전 실천해야 할 것은 미사 준비다. 미사를 알면 미사가 흥미로울 것이다. 미사는 예식에 불과한 것이 아니라, 영적인 생활의 자양분이다. 예수님 말씀을 담고 있는 성경은 쉬운 언어로 쓰여 있다. 성경이 어렵게 느껴진다면 성경이 담고 있는 내용과 배경을 잘 몰라서일 것이다. 성경 말씀이 무슨 뜻일지 호기심을 갖는다면 강론에 더 귀를 기울일 수 있을 것이다. 또한 말씀을 읽고 깨달아야 생활의 변화를 가져올 수 있다. 성찬 전례의 준비는 고해성사다. 교회는 일 년에 두 번 고해성사를 하도록 권고하고 있다. 고해성사에 더 적극적으로 임하면 영적인 결실을 얻을 것이다. 고해성사는 이미 지은 죄를 용서하고 치유하는 개념도 있지만 예방하는 개념도 있다. 질병이 육신의 무질서라면, 죄는 영혼의 무질서다.미사는 집에서 나오는 것부터 시작된다. 성당에 들어와 앉아 마음으로 준비하는 것으로 이미 미사가 시작된 것이다. 미사 시간은 사제와 함께 기도하는 시간이다. 간절히 기도하는 마음으로 미사를 드려야 한다.기도를 했는데, 하느님께서 기도를 들어주시지 않는 것은 우리가 잘못된 청을 했기 때문이다. 부모가 자녀에게 해로운 것을 금지하는 것처럼 하느님께서도 우리를 해로운 것으로부터 막아주기 위해서 노력하신다. 우리는 주님의 기도를 통해 우리를 속박하는 여러 가지 억압이나 고통에서 해방시켜 달라고 청한다. 습관적으로 바치지 말고, 절박하게 바쳐야 한다.성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은 교서 「주님의 날」에서 주일의 의미를 네 가지로 설명한다. 첫째, 주일은 창조의 날이다. 하느님의 창조가 시작되는 날이다. 둘째, 부활하신 날이다. 새로운 창조의 의미다. 셋째, 주일은 교회의 날이다. 마지막으로 주일은 기쁨과 휴식과 형제의 날이기에 인간의 날이다. 또한 주일은 증거의 날이다. 신자에게 주일은 주님의 날로 축하하고 부활을 경축하는 날이 돼야 한다. 내가 신자임을 확인하고, 신자가 아닌 사람에게 자신이 가톨릭 신자임을 드러내는 중요한 순간이다.한편, 신앙인은 더욱 완성된 자신을 위해 신앙을 지킨다. 구체적인 사랑의 실천으로 나아가지 않는 성찬례는 불안한 신앙이다. 예수님은 아무 대가를 바라지 않으시고 몸과 피를 내어 주셨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9가지의 성령의 열매를 공적으로 진화시키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공동선이다. 공동선은 아주 폭넓은 개념이면서도 동시에 실천해야 할 절대적 가치다. 누구라도 남을 위해서 할 수 있는 일이 있다.전례란 교회 활동이 지향하는 정점이며, 동시에 교회의 모든 힘이 흘러나오는 원천이다. 이 말을 미사로 바꾸어도 말이 된다. 미사는 교회 활동이 지향하는 정점이며, 동시에 교회의 모든 힘이 흘러나오는 원천이다. 즉, 신자 생활의 목표와 힘의 원천이다. 시작이면서 끝이다.미사는 우물과 같다. 물만 길어오면 물이 생기고, 수도꼭지만 열면 물이 흘러나온다. 다만 물을 긷는 노력이 필요하다. 그만큼 실천해야 한다. 성체성사에 참여하며, 실천 의지가 없다면 성체성사의 어마어마한 능력을 숨겨두고 있는 것이나 다름없다. 미사의 은혜가 아무리 크다 하더라도 직접 체험하고 영적 은혜를 길어 올리지 않는다면 묻혀 있는 보물과 같다.정리=맹현균 기자 maeng@cpbc.co.kr 백영민2017.03.28
![아시시의 프란치스코 (10) [꼰벤뚜알 프란치스코 수도회 성인들의 생애와 영성] 아시시의 프란치스코](//cpbc.co.kr/CMS/newspaper/2017/03/rc/675729_1.2_titleImage_1.jpg)
아시시의 프란치스코 (10) [꼰벤뚜알 프란치스코 수도회 성인들의 생애와 영성] 아시시의 프란치스코복음 말씀 듣더니 신 벗고 지팡이 던져 프란치스코에게 성경 말씀은 성체성사만큼이나 당신 모습을 세상에 뚜렷이 드러내는 그리스도의 현존 자체였다. 그림은 조토 디 본도네 작 ‘새들에게 설교하는 프란치스코’, 아시시 성 프란치스코 대성당. 기도 안에서 교회와 이웃에 봉사하며 겸손과 인내로 하느님의 뜻을 기다리던 프란치스코는, 어느 날 캄캄한 어둠을 비추는 한 줄기 빛과 같은 하느님의 부르심을 체험한다. 그 체험에 대해 그는 유언을 통해 다음과 같이 전한다. “아무도 내가 해야 할 것을 나에게 보여주지 않았지만, 지극히 높으신 분께서 친히 거룩한 복음의 양식에 따라 살아야 할 것을 나에게 계시하셨습니다.”일상의 전례 속에서 계시를 듣다프란치스코는 자신의 미래에 대한 모든 계획은 이 세상이 아니라 하느님에게서 온 계시였으며, 그것은 ‘거룩한 복음의 양식에 따라 살아야 하는 것’이었음을 이야기한다. 우리는 ‘계시’라고 하면 뭔가 신비스러운, 이 세상에서는 있을 법하지 않는 방식으로 일어나는 특별한 하느님의 메시지 전달 방식이라고 생각하기 쉽다. 그런데 프란치스코의 주요 전기들 속에는 이 유언의 내용을 뒷받침하는 하나의 사건을 기록하고 있으니, 그것은 그가 미사 중에 사제를 통해 선포되는 복음 말씀을 들은 사건이다. 보나벤투라의 「대전기」에 따르면 그는 ‘포르치운쿨라’라고 불리는 ‘천사들의 성 마리아 성당’을 수리하고 있던 어느 날, 한 사도의 축일 미사에 참여하였다. 그리고 미사 중에 사제의 입을 통해서 선포되는 복음 말씀 “전대에 금이나 은이나 동전을 넣어 가지고 다니지 말 것이며 식량 자루나 금이나 은이나 동전을 넣어 가지고 다니지 말 것이며 식량 자루나 여벌 옷이나 신이나 지팡이도 가지고 다니지 말아야 한다”(마태 10,9-10)는 말씀을 듣는 순간 그의 마음속에 가려져 있던 모든 장막이 걷히는 것을 느끼며 크게 기뻐했다. 그리고 “이것이야말로 내가 원하던 것이다. 이것은 내 진심으로 갈망하던 바이다”라고 외치며 그 자리에서 신을 벗고 지팡이를 던져버린다. 성경, 프란치스코 삶의 길잡이프란치스코에게 성경은 가장 구체적인 하느님의 목소리였다. 따라서 복음 속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은 단순히 도덕적인 차원이 아니라 그 자체로 삶의 법칙이자 길잡이였으며, 세상의 모든 관습이나 법 위에 있는 최고의 규범이었다. 그런 이유로 그는 회개 초기에 형제들이 찾아와 첫 공동체가 이뤄졌을 때, 공동생활의 유지를 위한 최소한의 생활 규칙 외에 다른 별도의 규정을 가지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바로 그 규정들이 복음을 통해서 자신과 형제들을 이끌어 주시는 성령의 생생함을 방해하리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는 목표가 예수 그리스도와의 완전한 일치였던 만큼 말씀과도 완전한 일치를 바랐고, 자기 자신과 공동체 역시 오로지 복음을 통해서 인도되기를 원했다. 그는 특히 전례를 통해서 선포되는 성경 말씀에 성사적인 의미를 부여한다. 지극히 높으신 분이 말씀 안에 현존하시고, 말씀을 통해서 우리에게 인격적으로 다가오신다는 것이다. 우리는 말씀을 통해서 그분과 만나고 대화한다. “우리가 죽음에서 생명으로 구원된 그분의 몸과 피와 이름과 말씀이 아니고서는 우리는 이 세상에서 지극히 높으신 분을 육체적으로 모실 수도 없고 볼 수도 없습니다.” “성직자들이 말하고 전하고 거행하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거룩하신 말씀과 피가 아니고서는 아무도 구원받을 수 없다는 사실을 우리는 모두 확신하고 있습니다.” 양피지 속 하느님성자께서 빵과 포도주의 형상 안에 당신 자신을 감추시듯, 그분의 말씀 또한 비인격적인 책이나 양피지 속에 자신을 감추고 우리에게 오신다. 때때로 그것은 인간의 부주의 때문에 소홀하게 취급되거나 부적절한 곳에 던져져 모욕을 당하기도 한다. 이 모든 부적절한 조건들을 지극한 가난과 겸손으로 수용하시면서 인간과의 친교를 위해서 당신 자신을 낮추시어 우리에게 다가오신다. 프란치스코는 이러한 말씀의 겸손 앞에 감탄하며 형제들에게 거기에 합당한 태도로 응답할 것을 권고한다.“그러므로 나의 모든 형제에게 훈계하며 그리스도 안에서 격려합니다. 어디서든지 기록된 하느님의 말씀을 발견하게 되면, 할 수 있는 최대의 경의를 표했으면 합니다. 그리고 그것들이 잘 정돈되어 있지 않거나 혹 불경스럽게 흩어져 있으면 주워 모아서 보관하여 그 말씀을 하신 주님의 말씀 안에서 공경하십시오. 사실 하느님의 말씀으로 많은 것들이 거룩하게 되며, 그리스도 말씀의 힘으로 제단의 성사가 이룩되기 때문입니다.” 제단의 성사는 말씀의 힘으로 이룩된다. 물론 미사 안에서 성체성사가 가지는 독보적 가치와 절대적인 중요성을 부정할 수는 없으나, 빵과 포도주를 주님의 몸과 피가 되게 하는 것은 바로 말씀이라는 사실 또한 잊어서는 안 된다. “우리가 먼저 말씀으로 축성되지 않으면 주님의 몸이 현존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결론적으로 프란치스코에게 있어서 성경 말씀은 성체성사만큼이나 당신의 모습을 세상에 뚜렷이 드러내는 그리스도의 현존 그 자체였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말씀이 사람이 되신 분이었기에 그분과의 일치는 곧 말씀과의 일치를 의미하였다. “당신이 기도할 때 당신은 그분께 말씀드리는 것이고, 당신이 읽을 때 그분께서 당신에게 말씀하시는 것입니다”라는 성 예로니모의 말처럼, 성경을 통해서 우리는 그분과 만나고 그분의 인도를 받아서 걸어갈 수 있다. 그리고 그 증거를 우리는 프란치스코의 모범에서 발견한다. cpbc2017.03.22
![[이창훈 기자의 예수님 이야기] (13) 세례자 요한의 설교 ② (3,7-18)](//cpbc.co.kr/CMS/newspaper/2017/05/rc/681196_1.0_titleImage_1.jpg)
[이창훈 기자의 예수님 이야기] (13) 세례자 요한의 설교 ② (3,7-18)하느님 심판을 피하는 길… 회개와 자선 실천 유다 광야와 정교회의 수도원이다. 이 광야 오른쪽으로 요르단강 하류와 사해가 있다. 가톨릭평화방송여행사 제공 가) 요한이 요르단강 주변에서 죄의 용서를 위한 회개의 세례를 선포하자 군중은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러 옵니다. 그러자 요한은 “독사의 자식들아, 다가오는 진노를 피하라고 누가 너희에게 일러주더냐?”라고 질타하면서 “회개의 합당한 열매”를 맺으라고 촉구합니다. 여기서 “다가오는 진노”란 하느님의 심판을 뜻합니다. 요한은 “도끼가 이미 나무뿌리에 닿아 있다”며 회개의 시급성을 강조하지요. 또 “좋은 열매를 맺지 않는 나무는 모두 찍혀서 불 속에 던져진다”면서 행실로써 회개의 열매를 맺을 것을 거듭 촉구합니다. 나아가 아브라함의 자손이라는 신분이 하느님의 심판을 면할 구실이 되지 않는다고 지적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이 돌들로도 아브라함의 자녀들을 만드실 수 있다”는 것입니다.(3,7-9)요한은 이어 회개의 구체적 방법을 제시합니다. 군중에게는 나누라고 합니다. 옷을 두 벌 가진 이는 못 가진 이들과 나누고 먹을 것을 가진 이들도 그렇게 하라는 것입니다. 세리들에게는 정한 것 이상을 요구하지 말라고 합니다. 군인들에게는 봉급으로 만족하라고 합니다.(3,10-14) 이 대목은 좀 더 눈여겨볼 필요가 있습니다. 가진 것을 나눠야 하는 사람들, 곧 자선을 베풀어야 하는 사람은 특정 계층이 아니라 불특정 다수인 ‘군중’입니다. 누구나 자선을 실천해야 합니다. 예외가 있을 수 없습니다. 세리들은 탐욕과 부정직함으로 소문난 이들인 데다가 당시 권력층의 앞잡이 노릇을 하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당시에는 대표적인 ‘죄인’ 축에 들었습니다. 이런 죄인들도 행실을 바꾸면 다가올 하느님의 진노를 면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군인들은 힘으로, 무력으로 백성을 짓눌러 사욕을 채우려는 이들을 나타냅니다. 이 군인들은 유다인들이 아니라 헤로데 안티파스의 용병으로 이방인이었을 가능성이 큽니다. 무력을 일삼는 이런 이방인들에게도 아브라함의 자녀가 될 길, 구원의 길은 열려 있습니다.루카는 요한의 이 설교를 통해서 하느님의 심판을 피하는 길, 다시 말해 구원을 얻는 길이 누구에게나 열려 있음을 말합니다. 앞에서 이사야 예언서를 인용하면서 “모든 사람이 하느님의 구원을 보리라”고 한 것을 다시 한 번 구체적으로 언급하는 셈입니다. 그러나 전제가 있습니다.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어야’, 곧 행실을 고쳐야 합니다. 권력이나 직분을 남용하지 않고 정직하게 살아가는 것, 그리고 자선(나눔)을 실천하는 것입니다. 나) 요한의 가르침에 사람들은 그가 혹시 기다리던 메시아가 아닌가 생각합니다. 하지만 요한은 이를 단호히 부인합니다. 자신은 “그분의 신발 끈을 풀어드릴 자격조차 없다”는 것입니다. 또 자기는 물로 세례를 주지만 그분은 “성령과 불로 세례를 주실 것”이라고 합니다.(3,16) 여기서 불은 심판을 표상합니다. 따라서 메시아로 오실 그분은 심판자로 오실 것입니다. 그분은 “손에 키를 들고 타작마당을 깨끗이 치워 알곡은 곳간에 모아들이고 쭉정이는 꺼지지 않는 불에 태워 버리실 것”(3,17)이라는 요한의 마지막 말은 이를 분명히 보여줍니다. 그렇다면, 요한의 말로 미루어볼 때 메시아로 오실 그분, 성령과 불로 세례를 주실 그분은 심판자로 오실 것이 분명합니다. 그런데 루카는 요한의 설교를 전하는 기사를 “요한은 그 밖에도 여러 가지로 권고하면서 백성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였다”(3,18)는 말로 마무리합니다. 어투로 보면 요한의 선포는 가슴을 찌르는 소리이기는 하지만 기쁜 소식은 아닌 듯합니다. 그런데 루카는 요한이 전하는 이 소식을 “기쁜 소식”이라고 표현합니다. 왜 기쁜 소식일까요? 요한이 회개의 세례를 촉구하는 것은 단지 다가올 심판을 면하도록 하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오히려 이미 세상에 와 계신 구원자 주 그리스도(루카 2,11)를 기쁘게 맞이하도록 하기 위한 것입니다. 따라서 요한의 선포는 경고의 메시지를 담고 있지만 본질적으로 기쁜 소식입니다. 그러나 그 기쁜 소식의 내용 혹은 실체는 그리스도이신 그분께서 알려 주실 것입니다. 생각해봅시다‘광야의 외침’ 요한 세례자는 자신을 찾아오는 사람들에게 합당한 처방을 내려줍니다. 회개를 위해, 삶을 바꾸기 위해 오늘 나에게는, 우리에게는 어떤 처방이 필요할까요? 우리도 광야의 외침을 들을 필요가 있습니다. 그 외침은 여러 형태로 우리에게 옵니다. 책을 통해서, 대화를 통해서, 성찰을 통해서 때로는 잠깐 스쳐 지나가는 생각이나 풍경을 통해서도 올 수 있습니다. 우리가 보고 듣고 만나고 하는 순간순간이 어쩌면 광야의 외침일 수 있습니다. 그 외침을 놓치지 맙시다. 알아둡시다 - 메시아와 그리스도“백성들은 기대에 차 있었으므로, 모두 마음속으로 요한이 메시아가 아닐까 하고 생각하였다.”(3,15) 루카복음에서는 ‘메시아’라는 표현이 여기에서 처음 나옵니다. 하지만 이는 우리말 「성경」의 루카복음에서 그렇다는 것이고, 그리스말 성경 루카복음에서는 이미 2장 11절에 같은 표현이 나옵니다. “오늘 너희를 위하여 다윗 고을에서 구원자가 태어나셨으니 주 그리스도이시다”에 나오는 ‘그리스도(χριστοs)’가 그 단어입니다. 그리스말 성경에서는 같은 ‘그리스도’인데, 우리말 성경에서는 ‘그리스도’(2,11)와 ‘메시아’(3,15)로 구별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요? 메시아는 ‘기름부음받은이’를 뜻하는 히브리말 ‘마쉬아’의 아람어식 표기입니다. 이를 그리스말로는 ‘그리스도’라고 하지요. 구약 시대에 하느님께서 선택하신 왕이나 예언자 혹은 사제를 하느님께서 뽑으신 사람으로 성별(?)할 때에 그 사람에게 기름을 부었습니다. 그리고 그 사람을 마쉬아(히브리어, 아람어로는 메시아)라고 불렀습니다. 이를 그리스말로 번역하면서 ‘그리스도’라고 표기했지요. 그런데 기원전 6세기에 이스라엘은 이민족에 의해 예루살렘이 함락되고 많은 이스라엘인이 유배를 당한 비극을 겪었습니다. 이 사건 이후 이스라엘 백성은 야훼 신앙을 반성하면서 하느님께서 자신들을 해방시켜줄 기름부음받은이(메시아)를 보내 주실 것을 기다리는 메시아 대망(待望) 사상으로 발전합니다. 이 메시아 대망이 종말 사상과 합쳐지면서 종교적 신앙 외에 민족의식과 정치적 사상도 결부되기에 이릅니다. 요한 세례자가 활동하던 시기에, 따라서 예수님께서 활동하던 시기에도 이런 메시아 대망 사상이 유다인들 사이에 널리 퍼져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요한의 활동을 보고 혹시 구약에서 예고된 기름부음받은이(메시아)가 아닌가 하고 생각한 것입니다. 그리스도교 신앙은 구약에서 예언된 메시아가 바로 예수 그리스도시라고 고백합니다. 그러나 그분은 당시 유다인들이 생각하던 그런 유형의 메시아가 아니었습니다. 이에 대해서는 앞으로 계속해서 살펴보게 될 것입니다. 그리스말 성경에서는 똑같은 ‘기름부음받은이(그리스도)’로 표기돼 있지만, 유다인들이 생각하는 기름부음받은이와 구별하기 위해서 우리말 번역에서는 그리스도교의 새로운 의미가 담긴 본문에서는 ‘그리스도’로 표기하고 있는 것입니다. 백영민2017.05.10
![[신앙단상] 말 말 말](//cpbc.co.kr/CMS/newspaper/2017/12/rc/703934_1.0_titleImage_1.jpg)
[신앙단상] 말 말 말고종희 (마리아, 한양여자대학교 산업디자인학과 교수, 미술사가) “밥 한번 먹읍시다.”사람들이 가장 많이 하는 빈말 중 하나일 것이다. 나 역시 이 말을 참 많이도 했다. 그러던 어느 날 “말을 많이 하지 말고, 해가 되는 말이라도 한 말은 꼭 지키라”는 어느 성인의 가르침을 보게 되었다. 그 후 나는 실제로 밥을 먹을 사람에게만 밥을 먹자고 한다. 은행에서 대출을 받으면 상환해야 하듯이, 말에도 빚이 있어서 말을 하면 지켜야 하고, 지키지 않으면 말빚을 지게 된다. 이번 주 모처럼 약속이 꽉 차 있다. 지난여름 이탈리아에서 만난 유학생 가족에게 한국에 오면 꼭 보자고 하여 오늘 저녁 만나기로 했고, 몇 달 전 식사 한번 하자고 한 동료들과 식사가 내일이며, 어느 소녀와의 저녁 약속도 잡혀 있다. 그중 마지막 약속은 어쩌면 그녀의 인생에서 중대한 갈림길이 될지도 모른다. 공부를 다시 시작해 새로운 인생에 도전해 보는 것이 어떻겠느냐는 내 제안을 얼굴도 보지 못한 그녀가 받아들여 내일 만나기로 한 것이다. 크고 작은 약속과 만남은 말로 시작되는 것이니 말이란 때로 의도가 좋으면 일단 뱉어 놓고 책임을 지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다. 말은 지키는 것 못지않게 듣는 것도 중요하다. 내가 지나가는 말로 툭 던진 말을 상대가 흘려듣지 않고 결과를 주면 감동한다. 반면 알았다고 해 놓고 함흥차사인 사람은 신뢰하지 않는다. 작은 것을 소홀히 하는 사람은 큰 것도 소홀히 하기 때문이다. 그러니 말은 신뢰의 척도다. 사람들이 모이면 피할 수 없는 것이 있는데 바로 달콤 씁쓰름한 뒷담화다. 프란치스코 교황님이 오죽하면 “뒷담화만 하지 않아도 성인이 된다”고 말씀하셨을까. 뒷담화는 적극적으로 가담하지 않아도 그 자리에 있었다는 사실만으로도 동조하는 모양새가 되는데 그런 날은 영 찜찜하다. 원수도 사랑하라고 하셨는데 나에게 별로 잘못한 일도 없는 사람을 마구 흉을 보다니 뒷담화는 죄질이 나쁘다. 요즘은 좋은 말보다는 나쁜 말을 더 많이 듣게 되는 것 같다. 할 말, 못할 말, 거짓말, 말 뒤집기, 쓸데없는 말, 잔소리, 욕설. TV를 보고 있노라면 정치에서 오락에 이르기까지 사람들의 무서운 말 잔치에 “저 말빚을 어찌 다 갚으려 저렇게 떠들어댈까?”라는 생각이 든다. 성녀 젬마는 수호천사를 직접 볼 수 있었고, 그와 대화도 나눴다고 한다. “누구든지 참으로 예수님을 사랑하는 이는 말이 적고 모든 것을 잘 견딘다. 예수님의 뜻을 받아 내가 네게 명하노니, 남이 묻기 전에 무심코 네 의견을 말하지 말라. 네 의견을 주장하지 말고 항상 침묵을 지켜라.” 수호천사가 젬마에게 한 말인데 바로 내가 새겨야 할 말이다. 사람들은 누군가에게 충고를 해 주는 것을 좋아하는 것 같다. 나도 그동안 얼마나 남을 가르치려 들었는지 창피할 정도다. 하느님의 참된 자녀가 되려면 젬마의 수호천사 말을 명심해야 할 것이다.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말해야 할까? 신약성경 속 예수님처럼 쉽게, 정직하게, 진실되게 말하면 될 것이다. 그리고 하느님을 찬양하는 일에 꾀를 부리지 않는 것이다. “주님께 겸손되이 간구하오니 / 우리 입 그 언제나 진실 전하며 / 진리의 달고 단맛 마음에 느껴 / 기쁨의 찬양 노래 읊게 하소서.” 이런 성무일도를 하느님께서 아침저녁으로 들으신다면 얼마나 기뻐하실까? 그런데 내가 또 이렇게 가르치려 들고 있다. 평화신문2017.12.06
![[이창훈 기자의 예수님 이야기] (45) 바리사이와 율법 교사(루카 11,37-53)](//cpbc.co.kr/CMS/newspaper/2017/12/rc/706171_1.0_titleImage_1.jpg)
[이창훈 기자의 예수님 이야기] (45) 바리사이와 율법 교사(루카 11,37-53)투명한 잔에 탐욕과 사악함을 채우는 어리석음 루카 복음사가는 예수님께서 바리사이의 집에 초대받으신 이야기를 예수님께서 바리사이들과 율법 교사들의 사악과 어리석음을 질타하시는 계기로 삼는다. 그림은 디르크 보우츠(1415~1475) 작, ‘시몬 집에서의 그리스도’. 출처=가톨릭 굿뉴스 제자들과 군중을 향한 예수님의 가르침이 이번에는 바리사이들과 율법 교사들을 향합니다. 이들에 대한 가르침은 꾸짖음입니다. 어떻게 보면 예수님께서는 이들을 호되게 질타하신다고 해도 과하지 않은 것 같습니다. 왜 그들을 꾸짖으실까요? 어떤 바리사이가 예수님을 자기 집에 초대했고 예수님께서는 초대에 응해 그 집으로 가셔서 자리에 앉으십니다.(11.37) 복음서들에서 바리사이들은 예수님과 적대적인 관계에 있는 이들로 많이 묘사됩니다. 그런데 루카복음서에서는 꼭 그렇지만은 않은 것 같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식사에 초대하는데(7,36; 14,1 참조) 식사 초대가 일반적으로 친교를 나누기 위한 것이라고 한다면, 바리사이 가운데는 예수님께 호의적인 이들이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문제가 생깁니다. 예수님께서 식사 전에 손을 씻지 않으신 것이 발단이 됐습니다. 예수님을 초대한 바리사이가 이를 보고 놀란 것입니다.(11,38) 식사 전에 손을 씻는 것은 유다인들에게는 일종의 정결례 예식으로서 대단히 중요한 행위였습니다. 예수님께서 이를 무시하시자, 초대한 바리사이는 놀랄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 바리사이에게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단순히 말씀하시는 것이 아니라 호되게 꾸짖으십니다. 꾸짖음의 대상도 그 바리사이 혼자가 아니라 다른 바리사이에게로 확대됩니다. “너희 바리사이들은 잔과 접시의 겉은 깨끗이 하지만 너희의 속은 탐욕과 사악으로 가득하다. 어리석은 자들아, 겉을 만드신 분께서 속도 만들지 않으셨느냐? 속에 담긴 것으로 자선을 베풀어라. 그러면 모든 것이 깨끗해질 것이다.”(11,39-41)예수님께서는 말하자면 바리사이들의 외적이고 형식적인 믿음을 꾸짖고 계신 것입니다. 겉을 만드신 분께서 속도 만드셨다면 겉만 깨끗이 할 것이 아니라 탐욕과 사악으로 가득한 속도 깨끗이 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속에 담긴 것으로 자선을 베풀어라. 그러면 모든 것이 깨끗해질 것이다’라는 마지막 말씀은 우리 속에 있는 탐욕과 사악함을 깨끗이 치우고 깨끗이 할 때에 사랑의 실천인 자선을 베풀 수 있고 이를 통해서 다른 모든 것 곧 겉까지도 깨끗이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 말씀이 끝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바리사이들을 질타하시는 말씀을 연이어서 하십니다. 그 말씀은 모두 “불행하여라”로 시작합니다. ‘불행 선언’이라고도 할 수 있는 이 질타의 말씀은 세 가지입니다. 첫째, 십일조를 바치는 외적 규정은 곧잘 지키면서도 “의로움과 하느님 사랑”은 아랑곳하지 않는다는 꾸짖음입니다. ‘십일조를 소홀히 해서는 안 되지만 바로 이러한 것들 곧 의로움과 하느님 사랑을 실천해야 한다’는 것입니다.(11,42) 여기서 의로움은 정의를, 하느님 사랑은 자비를 나타낸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이는 십일조를 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이 아니라 정의와 자비를 실천하는 일이 더욱 본질적이라는 말씀이라고 하겠습니다. 정의와 자비의 실천은 아랑곳하지 않고 십일조 지키는 일에만 신경을 쓴다면 우리 역시 ‘불행하여라’ 하는 선언을 당할 것입니다. 둘째, 인정받기를 좋아하는 태도에 대한 꾸짖음입니다. 회당에서는 윗자리에 앉기를 좋아하고 장터에서는 인사받기를 좋아한다는 것입니다.(11,43) 바리사이들의 가식적이고 위선적인 행태를 나무라시는 말씀이라고 하겠습니다. 셋째, ‘바리사이들이 드러나지 않은 무덤 같다는 꾸짖음입니다.(11,44) 예수님 시대에 팔레스티나 땅의 일반적인 무덤은 봉분이 아니라 땅속의 자연 동굴을 사용한 무덤이 많았습니다. 그래서 무덤에 아무 표시도 해놓지 않으면 그 위를 다니면서도 그곳이 무덤인 줄 알지 못했습니다. 유다인들의 율법에 따르면 시신을 만지거나 무덤과 접촉하면 일주일 동안 부정(不淨)하게 되는데 그래서 사람들이 자신도 모르게 부정하게 되는 일이 없도록 무덤에 회칠로 표시를 해두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바리사이들에게 회칠하지 않은 무덤 같아서 사람들로 하여금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부정하게 되도록 만든다고, 곧 죄를 짓게 한다고 꾸짖고 계시는 것입니다.바리사이들에 대한 예수님의 꾸짖음이 계속되자 율법 교사 한 사람이 항의합니다. “그렇게 말씀하시면 저희까지 모욕하시는 것입니다.”(11,45)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너희 율법 교사들도 불행하여라” 하고 선언하시면서 율법 교사들을 호되게 꾸짖으십니다. 이들에 대한 예수님의 불행 선언 역시 세 번에 걸쳐 이뤄집니다. 첫째, 사람들에게 힘겨운 짐을 지워놓고 손가락 하나 대려고 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11,46) 당시 이스라엘에는 백성이 지켜야 할 규정이 무려 613가지나 있었다고 합니다. 안식일법, 정결례법, 음식 규정 등이 대표적이지요. 율법 교사들은 율법의 전문가들로서 이 법 규정의 수호자들이었습니다. 따라서 예수님의 말씀은 백성들에게는 지키기 힘든 규정을 강요하면서 자기들은 지키지 않는 율법 교사들을 향한 꾸짖음입니다. 둘째, 조상들이 죽인 예언자들의 무덤을 만들고 있다는 것입니다. 무덤을 만든다는 것은 어떻게 보면 예언자들을 높이 기리는 일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지적은 정반대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율법학자들이 조상들이 죽인 예언자들의 무덤을 만들면서 오히려 ‘조상들이 저지른 소행을 동조하고 있다’고 비판하고 계시는 것입니다.(11,48) 예언자들을 죽인 조상들의 소행에 동조한 대가는 절대 적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세상 창조 이래 쏟아진 모든 예언자의 피에 대한 책임을 이 세대가 져야 할 것”이라시며 “아벨의 피부터 제단과 성소 사이에서 죽어간 즈카르야의 피에 이르기까지” 그에 대한 책임을 져야 한다고 구체적으로 적시하십니다. 아벨은 인류의 첫 조상 아담과 하와의 둘째 아들로서 형 카인에게 죽임을 당했습니다. 성경이 밝히는 인류의 첫 살인의 희생자입니다.(창세 4,8-10) 즈카르야는 유다 임금 요아스(재위 기원전 835~796)의 명령으로 돌에 맞아 죽은 사제입니다.(2역대 24,20-22) 유다교 구약성경 경전에는 역대기가 제일 마지막에 나온다는 점에서 즈카르야는 구약에서 마지막으로 희생된 예언자를 나타냅니다. 셋째, 율법 교사들은 “지식의 열쇠”를 치워버리고서는 자신들도 들어가지 않을 뿐 아니라 들어가려는 이들까지 막아버렸다는 것입니다.(11,52) 여기서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참된 지식을 의미한다지요. 말하자면 예수님 말씀은 율법 교사들이 지식을 가지고 있다고 뽐내지만 실은 참된 지식이 아닐뿐더러 사람들도 참된 지식을 얻어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려는 것까지 막아 버리고 있다고 비판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어쩌면 우리 역시 바리사이들처럼 내면을 깨끗하게 하기보다는 외적이고 형식적인 규정에 집착하는 신앙생활을 하는 것은 아닌지요? 외적인 규정을 지키는 것이 무익한 것만은 아닙니다. 하지만 내면을 깨끗이 하지 않고 겉모습에 집착할 때 “너희 바리사이들은 잔과 접시의 겉은 깨끗이 하지만, 너희의 속은 탐욕과 사악으로 가득하다”는 질타 말씀을 듣게 될 것입니다.[생각해 봅시다]“속에 담긴 것으로 자선을 베풀어라. 그러면 모든 것이 깨끗해질 것이다”라는 예수님 말씀을 되새겨보면, “사랑하라. 그리고 하고 싶은 것을 하라”고 한 아우구스티노 성인의 말이 떠오릅니다. 내면이 사랑으로 차 있는 사람이 참으로 자유로운 사람입니다.루카 복음사가는 “예수님께서 그 집을 나오시자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이 독한 앙심을 품고 많은 질문으로 그분을 몰아대기 시작했다”면서 “예수님의 입에서 나오는 말씀으로 예수님을 옭아매려고 노렸다”고 전합니다.(11,53) 예수님께 대한 바리사이와 율법 학자들의 반감의 골이 더욱 깊어지고 있음을 보여주지요. 백영민2017.12.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