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황 주일 특집] 성 베드로와 프란치스코 교황의 눈물](//cpbc.co.kr/CMS/newspaper/2018/06/rc/725312_1.0_titleImage_1.jpg)
[교황 주일 특집] 성 베드로와 프란치스코 교황의 눈물회개의 눈물 흘린 베드로, 연민의 눈물 흘리는 교황 교황이 2014년 공산 치하에서 숱한 고난을 겪은 알바니아의 노사제를 품에 안은 채 함께 울고 있다. 【CNS 자료 사진】 소설가 최인호는 자신의 수호성인 베드로가 어떻게 으뜸 제자가 되어 교회 반석이 됐는지 모르겠다며 성인에 대한 흉을 잔뜩 늘어놓은 적이 있다.“유식하지도 않았으며 가난한 어부에, 이미 결혼하여 아내가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성격은 덤벙대며 변덕이 심하고 무엇보다 주님의 인정을 받으려고 무던히도 애를 쓰던 사람이었습니다. 주님을 모른다고 세 번이나 잡아떼던 겁쟁이인 데다….”(묵상집 「하늘에서 내려온 빵」)그의 말마따나 사도 베드로는 흠결이 많았다. 그럼에도 주님에게서 “내 양들을 돌보아라”(요한 21,16)라는 명령과 함께 하늘나라의 열쇠를 받았다. 소설가는 묵상 중에 두 가지 답을 찾았다. 하나는 다른 제자들보다 뜨거운 열정이다. 다른 하나는 주님께 불충했던 잘못을 뉘우치며 흘린 눈물이다. 베드로의 인간적 나약함은 성경 여러 군데서 드러난다. 주님의 ‘오른팔’이었음에도 스승의 지상 마지막 사명을 이해하지 못했다. 그 바람에 “너는 하느님의 일은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 생각하는구나”(마르 9,22)라는 꾸짖음을 들었다. 또 “주님과 함께라면 죽을 준비도 돼 있다”고 큰소리쳤지만, 막상 결정적 순간에는 다른 제자들처럼 줄행랑을 치고 몸을 숨겼다. 반전은 예수가 끌려가 신문을 받은 가야파 관저에서 일어났다. 베드로는 예수를 모른다고 부인한 죄를 통절히 뉘우치고 슬프게 울었다. “닭이 두 번 울기 전에 너는 세 번이나 나를 모른다고 할 것이다 하신 주님 말씀이 생각나서 울기 시작했다.”(마르 14,72) 베드로가 남달랐던 점은 두려움 속에서도, 또 죄의식에 시달리면서도 주님 곁에 끝까지 머문 것이다. 이로써 눈물의 회개가 가능했다. 이어 오순절 성령강림 사건 뒤 사도들을 중심으로 이뤄진 교회에서 지도자로 우뚝 섰다. 사도단의 으뜸 베드로의 권위와 책임을 이어받은 이가 로마의 주교 교황이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82살 고령이 믿기지 않을 만큼 열정적으로 ‘베드로의 후계자’ 직무를 수행한다. 쇄신과 개혁을 기치로 교회 체질을 바꿔가고 있다. 또 세상을 향해 교회 문을 더 활짝 열었다. 재임 5년 동안 30개국을 누비면서 교회와 세상 간에 만남의 다리를 놓았다. 특히 교회로 하여금 가난하고 소외된 이들을 한층 깊은 자비의 눈으로 바라보게 했다. “야전병원 같은 교회”, “양 냄새 나는 목자”, “자기 안위만을 신경 쓰는 폐쇄적 교회보다는 시달리고, 상처받고, 더럽혀지는 위험을 무릅쓰는 교회”, “변방으로 가라” 같은 혁신적 구호에 그러한 정신이 담겨 있다. 타 종교인들도 교황 특유의 열린 마음과 권위를 내려놓은 겸손한 태도에 환호한다. 하지만 교황도 베드로처럼 나약한 모습을 보일 때가 있다. 육체적, 영적인 약함을 굳이 숨기려 하지 않는다. 그것을 부끄러워하지도 않는다. 2년 전 폴란드 사목방문 때 야나스나고라 성모성지에서 넘어진 적이 있다. 수많은 사람이 지켜보는 가운데 향로를 들고 제단으로 가다 발을 헛디뎠다. 교황은 부축을 받고 일어나 다시 향로를 들었다. 다리에 힘이 좀 있었더라면 넘어지지 않았을 것이다. 사목방문을 마치고 돌아가는 기내에서 한 수행 기자가 그날 넘어진 것 괜찮으냐고 묻자 “성모님을 바라보면서 가다가 계단이 있는 걸 깜빡했다. 그럴 때는 차라리 고꾸라지는 게 낫다. 넘어지지 않으려고 힘을 주면 더 다친다”며 대수롭지 않게 웃어넘겼다.눈물을 보일 때도 더러 있다. 물론 베드로가 흘린 뉘우침의 눈물과는 성격이 다르다. 하느님께 죄를 짓는 예루살렘 백성 때문에 그리스도가 흘린 눈물에 가깝다. 대부분은 “우는 이들과 함께 우는”(로마 12,15) 연민의 눈물이다. 그리스 레스보스 섬에 날아가 짐짝처럼 수용된 난민들을 만났을 때 울었다. 교황은 “(레스보스 섬에서) 하느님이 내가 많이 울도록 도와주셨다”고 말했다. 알바니아 공산 치하에서 28년간 옥고를 치른 84살 신부의 신앙 고백을 들을 때도 울었다. 안경을 벗어 손에 쥔 채 노사제를 껴안고 말없이 우는 모습은 많은 이의 심금을 울렸다. 거리를 떠돌다 구조된 필리핀 소녀가 “하느님은 왜 이런 불행을 허락하셨는지 모르겠다”며 울면서 그 이유를 물었을 때도 눈물을 글썽였다. 교황은 “인간의 드라마틱한 상황을 접하면 슬플 때가 많다”며 희소병을 앓는 어린이와 재소자를 만날 때가 그런 상황이라고 말했다. 최근에는 사제 성범죄 피해자들과 만나 여러 번 울었다. 그들과의 만남은 비공개로 이뤄진다. 그 만남에 대해 부득이 언급해야 할 상황이면 늘 “함께 울었다”고만 말한다.교황은 베드로처럼 주님께 ‘저항’하고, 곧바로 후회할 때가 있다고 솔직히 털어놓기도 했다. “(하루를 마치면) 비록 저의 저항에도 불구하고, 저를 감싸는 물결처럼 저를 이끄시는 힘이 있었음을 깨달을 때 위로를 느낍니다. … 저의 저항이 승리하는 순간마다 슬픔 속에서 용서를 청합니다.”(2016년 예수회 총회 참석자들과의 대화 중)교황도 우리와 똑같이 근심이 많다. 스트레스도 받는다. 신자 수 13억에 달하는 지구 상의 최대 단일 조직 가톨릭교회를 이끄는 지도자에게 근심이 없다면 거짓말이다. 더구나 교황청 개혁과 교회 정신의 근본적 변화를 강력하게 추진하는 터라 난관은 더 많을 수밖에 없다. 지난해 연말 “로마에서 개혁하는 것은 이집트 스핑크스를 칫솔로 청소하는 것과 같다”고 한 어느 대주교의 말을 인용해 개혁 피로감을 드러낸 바 있다. 그만큼 인내와 헌신, 정교한 작업이 필요하다는 말일 게다. 개혁에 진통이 따르는 건 당연하지만, 뜻을 달리하는 내부 목소리가 버젓이 매스컴을 타고 회자될 때는 이따금 불편한 속내를 드러내기도 한다. 하지만 교황에게는 걱정이 태산 같아도 숙면을 취하는 비법(?)이 있다. 고민거리를 적은 쪽지를 침대 옆 탁자에 있는 ‘잠자는 요셉 상’ 밑에 밀어 넣고 “이 문제들을 꿈속에서 해결해 주십시오” 청하고 잠든다고 한다. 문제를 맡겨 드리는 이 기도 방법은 성경에 근거한다. “요셉이 그렇게 (잉태한 마리아와 파혼)하기로 생각을 굳혔을 때, 꿈에 주님의 천사가 나타나 말하였다 … 잠에서 깨어난 요셉은 주님의 천사가 명령한 대로 아내를 맞아들였다.”(마태 1,20-24) 그럼에도 교황은 우리에게 매번 기도를 요청한다. 주일 정오 삼종기도 훈화의 마지막 말은 항상 “저를 위해 기도해주는 것 잊지 마세요”라는 부탁이다. 김원철 기자 wckim@cpbc.co.kr 교황 주일(Papal Sunday)예수 그리스도를 대리해 하느님 백성에게 봉사하는 교황을 위해 기도하고, 교회와 교황에 대한 신자들의 일치를 다짐하기 위해 특별히 제정된 날이다. 한국 교회는 1930년경부터 성 베드로와 성 바오로 사도 대축일(6월 29일) 다음에 오는 주일을 교황 주일로 정해 기념하고 있다. 이날 미사 때 특별헌금을 한다. 이 헌금은 교황청에 보내져 세계 각지의 어려운 형제들과 교회를 돕는 자선금으로 쓰인다. 평화신문2018.06.26
![[전영준 신부의 가톨릭 영성을 찾아서] (76) 16세기 ⑤ - 이탈리아 신비체험가들](//cpbc.co.kr/CMS/newspaper/2018/05/rc/721485_1.0_titleImage_1.jpg)
[전영준 신부의 가톨릭 영성을 찾아서] (76) 16세기 ⑤ - 이탈리아 신비체험가들그리스도 수난 묵상하며 교회 쇄신 위해 노력 16세기에 스페인 영성이 온 세상으로 알려지면서 유명세를 탔던 것에 비교한다면 보잘것없지만, 동시대에 이탈리아에서도 지역 그리스도인들에게 많은 영향을 주었던 영성가들이 피렌체(Firenze)에서 나타났습니다.오라토리오회 설립자 필립보 네리이탈리아 피렌체 출신인 필립보 네리(Filippo Neri, 1515~1595)는 피렌체의 도미니코회 산 마르코(San Marco) 수도원에서 수도자들에게 교육을 받았습니다. 18세에 산 제르마노(San Germano)의 부유한 상인인 삼촌의 사업을 도우러 갔지만 베네딕도회 몬테카시노(Monte Cassino) 수도원을 방문해 가난한 수도생활을 목격하고 ‘부자 청년’ 비유 이야기를 묵상하면서 회심을 결심했습니다. 그리고 1533년 그곳을 떠나 로마로 갔습니다.로마에서 아우구스티노 수도회의 지도를 받으며 3년간 신학을 공부한 필립보는 가난한 사람과 아픈 사람, 도시의 매춘부를 돌보는 일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필립보는 1538년 본격적인 선교 활동에 나서며 로마 시내 곳곳에서 사람들과 대화했습니다. 사람들이 자신 앞에 놓인 문제를 직시하고 고민할 수 있게 이끌었습니다. 결국 필립보는 ‘로마의 사도’로 불리게 됐습니다. 특히 필립보는 1548년 자신의 고해 신부였던 페르시아노 로사(Persiano Rossa)와 함께 ‘삼위일체 형제회(Santissima Trinit de’ Pellegrini e de’ Convalescenti)’를 설립해 ‘성년(Jubilee)’에 로마를 방문하는 순례자들과 회복기에 있는 환자를 돌보는 일을 했습니다. 형제회 회원들은 산 살바토레(San Salvatore) 성당에 모여 기도했는데, 로마에서 처음으로 성체 현시 중에 ‘40시간 기도(Quarantore)’ 신심을 실천했습니다.1551년 사제품을 받은 필립보는 동료들과 함께 산 지롤라모 델라 카리타(San Girolamo della Carit) 병원에 자리를 잡고 고해 사제로 명성을 높였습니다. 이즈음 필립보는 신자들과 함께 소성당(oratorio)에 모여 기도하며 성가를 불렀고, 성경과 교부들의 가르침, 순교록을 읽고 토론했습니다. 이 모임은 1564년 사제들의 공동체인 오라토리오회(Confederazione dell’Oratorio)로 발전했고 1575년 교황 그레고리우스 8세(Gregorius PP. XIII, 재임 1572~1585)가 공식 승인했습니다. 이 공동체는 수도 서약을 하지 않지만 사랑의 유대로 함께 모여서 사람들을 하느님께 인도하려는 지향으로 기도하고 강론하며 고해성사를 베풀었습니다. 특히 전례 거행을 강조한 오라토리오회는 음악을 통해 전례에 봉사했습니다. 필립보는 신비체험을 경험했으며, 기적과 치유의 은사도 받았습니다. 필립보는 사제가 쇄신되면 교회가 쇄신될 수 있다는 신념으로 활동함으로써 로마를 쇄신시킬 수 있었습니다.그리스도의 수난 묵상하고 성흔 얻은 신비체험가, 가타리나역시 이탈리아, 피렌체 출신인 리치의 가타리나(Caterina de’ Ricci, 1522~1590)는 6~7세쯤 숙모가 원장으로 있던 몬티첼리(Monticelli) 베네딕토회 수녀원 학교에서 공부했는데, 어린 나이에도 불구하고 기도를 열심히 했습니다. 그때부터 카타리나는 그리스도의 수난에 대한 신심에 평생 봉헌할 마음을 키워나갔습니다. 이후 가타리나는 프라토(Prato)의 도미니코회 제3회 봉쇄 공동체인 성 빈첸조(St. Vincenzo) 수녀원에 입회해 14세 때 수도복을 입었습니다.수련기 시절에 가타리나는 일상생활에서 황홀경을 경험했는데, 동료들은 처음에 그의 행동을 이해하지 못하다가 차츰 그의 신비체험을 알게 되었습니다. 20세가 되던 해 성주간에 가타리나는 또다시 탈혼 상태에 빠졌습니다. 이후 12년 동안 성주간에 같은 신비체험을 반복하면서 그리스도의 수난을 느꼈습니다. 또 가타리나는 기적적으로 아기 옷에 쌓인 아기 예수를 감싸 안기도 하고, 성인 예수와 신비적인 결혼을 하는 환시를 체험했습니다. 과도한 금욕 생활을 이어가는 것은 물론 그리스도의 수난을 너무 진지하게 묵상한 나머지 몸에서 채찍 자국이나 피나 나타나기도 했으며, 성흔도 받았습니다.30세에 수녀원 원장이 된 가타리나는 행정가이자 관리자로서의 능력도 한껏 발휘하면서, 교회 안팎의 지도자들에게 다양한 주제에 대해 조언을 했습니다. 가타리나는 교회 쇄신을 위해서도 열정적으로 기여했으며, 성경을 토대로 그리스도 수난 찬미가를 작곡해 전례에서 사용하기도 했습니다. 파지의 마리아 막달레나. 성령의 은사를 받은 신비체험가, 막달레나마찬가지로 이탈리아 피렌체 출신인 파지의 마리아 막달레나(Maria Maddalena de’ Pazzi, 1566~1607)는 어려서부터 기도와 참회에 매료되었습니다. 막달레나는 9세에 그리스도 수난을 어떻게 묵상해야 하는지를 설명한 책을 보며 가족 담당 신부에게 묵상하는 법을 배웠습니다. 막달레나는 10세에 특별 사면을 받고 첫영성체를 했으며, 얼마 후에 동정 서약을 했습니다. 막달레나는 12세에 처음으로 황홀경을 체험한 후에 계속해서 다양한 형태의 신비체험을 했습니다. 막달레나는 14세에 말타 수도회의 수녀원 학교에서 수학했고, 얼마 후 피렌체 가르멜회 천사들의 성모 마리아 수녀원에 입회했습니다.1583년 수련자가 돼 수도복을 착의한 후에 중병을 앓은 막달레나는 예수를 위해 고난을 받고자 하는 열망으로 가득 찼습니다. 막달레나가 죽어 간다고 판단한 장상은 그에게 개인적으로 수도 서약을 하는 예식을 허락했는데, 이때에 막달레나는 약 2시간 동안 황홀경을 체험했습니다. 이후에도 막달레나는 40일 동안 매번 영성체 후에 신비체험을 했습니다. 또한 하느님을 향해 나아가는 여정에서 경험하는 무미건조한 사막 체험도 겪었습니다. 따라서 막달레나의 고해 사제는 그에게 동료들을 위해 자신의 신비체험을 책으로 집필하라고 권고했습니다.한편 막달레나는 예언의 은사와 치유의 은사를 받았습니다. 탈혼 상태에서 무기력증을 경험하기도 했지만 일상생활 업무를 지장 없이 수행하기도 했습니다. 막달레나는 수련장과 부원장을 역임했고, 교회의 쇄신과 세상의 회개를 강렬하게 염원했습니다.16세기에 서방 가톨릭교회는 종교개혁가들의 출현을 목격하며 그들의 도전에 직면해야 했습니다. 이러한 이유 때문이었는지, 교회를 걱정하는 영성가들은 교회가 쇄신되어 올바른 길을 걸어가기를 간절히 바랐습니다. 그리고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이 이를 극복하기 위해서 그리스도의 수난을 묵상하는 것이 좋은 방법이라고 생각했습니다.<가톨릭대 신학대학 영성신학 교수> 백영민2018.05.22
![[1988-2018 복음의 기쁨으로] 5. 한국 교회의 속병, 냉담 교우(하)](//cpbc.co.kr/CMS/newspaper/2018/07/rc/726958_1.0_titleImage_1.jpg)
[1988-2018 복음의 기쁨으로] 5. 한국 교회의 속병, 냉담 교우(하)30년 냉담 부부 마음 녹인 소통과 배려의 힘 최근 냉담 교우 사목에 일대 변화가 일고 있다.많은 본당이 냉담 교우 회두에 골몰하는 사이, 일부 본당이 냉담 교우 사목의 패러다임을 발 빠르게 전환해 시행 중이다. ‘서울대교구 대방동본당’과 ‘청주교구 음성본당’은 ‘지속적인 관리’와 ‘베푸는 사목’으로 방향을 바꿔 굳게 닫힌 냉담 교우들의 마음의 문을 열고 있다.1990년대 이후 한국 교회가 늘어나는 냉담 교우를 대상으로 벌여온 사목은 주로 ‘냉담 교우 회두 운동’, ‘가두 선교 및 권면’ 등이었다. 냉담 교우 손을 잡고 무작정 고해소로 데려가거나, 성사생활을 하지 않은 죄의식을 은연중에 덧씌우기도 했다. 이 같은 회두 운동의 일차적 목적은 판공성사 참여율, 주일미사 참여율을 높이기 위한 경우가 많았다.그러나 패러다임의 전환을 꾀한 두 본당의 목적은 신자 각자의 삶 속 어려움에 먼저 다가가 ‘들어주는 것’이다. 왜 냉담할 수밖에 없었는지, 어떤 어려움이 있는지를 일일이 묻고 기록한 뒤 관계의 끈을 놓지 않고 돕는 ‘소통하는 사목’을 적용한 것이다. 필요하다면 교리교육 시간, 신자석까지 과감히 바꿔가며 ‘맞춤형 사목’도 펼친다. 냉담 교우 사목이 ‘일회성 운동’에서 ‘쌍방향 소통과 배려’의 형태로 진일보하고 있다. 서울대교구 대방동본당 ‘안셀모회’ 박영실 회장(왼쪽)과 김진하 부회장. 안셀모회 회원들은 새 신자와 냉담 교우들에게 연락해 ‘맞춤형 도움과 배려 활동’을 하며 교회 공동체 안에서 지내도록 물심양면 돕고 있다. 서울대교구 대방동본당 ‘안셀모회’“냉담 교우들에게 무조건 ‘성당 나오세요’ 하지 않습니다. 그들이 처한 어려움을 들어주고 해결해주는 방식으로 ‘하느님은 사랑이심’을 전해 마음의 변화를 일으키고 있습니다.”서울대교구 대방동본당(주임 주수욱 신부) ‘안셀모회’는 냉담 중이거나 신앙생활에 어려움을 겪는 이들에게 ‘맞춤형 도움’을 주는 단체다. 안셀모회 박영실(신디케스) 회장은 “주말 부부, 주말 귀농 가정, 생업에 바쁜 사람 등 신자들이 다양한 형태로 신앙생활을 하고 있더라”면서 “끈질긴 사랑으로 그들이 신앙을 잇도록 돕고 있다”고 말했다.안셀모회는 2015년 단체가 생기자마자 본당 교적 신자들의 신앙생활 실태를 조사했다. 속사정은 다양했다. 성사생활과 단체 활동 모두를 열심히 하는 ‘핵심 신자’ 외에 주일 미사에만 나오는 사람, 전출입 미신고자, 영세하고 곧장 냉담한 이들 등 각양각색이었다. 안셀모회는 이들을 핵심, 냉담 위기, 냉담, 전출입자, 새 신자 등 7가지 유형으로 나눠 접근했다.특히 역점을 둔 대상은 냉담 위기에 있거나 냉담 중인 신자들. 회원 10여 명은 관리 기록부를 두고 계속 연락을 취했다. 무조건적인 ‘회두’나 ‘선교’보다 ‘도움’과 ‘배려’를 지향했다.“성당에 못 나오는 어르신을 찾았더니 인천의 한 병원에서 혼수상태로 입원해 계셨어요. 위로의 말씀을 전하고, 구역장이 찾아가도록 했습니다. 주기적으로 안부를 여쭙고 만일을 대비해 연령회에도 연락해놨죠. 다행히 쾌유하신 어르신은 무척 고마워하셨고, 비신자인 남동생은 성당에 다녀보겠다고 하더라고요.”고3 학생에게도 연락했다. 전화를 받지 않아 성경 구절과 함께 “공부하느라 수고가 많다”며 응원 문자를 계속 보냈다. 수능 시험을 앞두고 떡도 선물했다. 시험이 끝나고 연락이 왔다. “그동안 주신 문자가 무척 힘이 됐습니다. 이제 성당에 잘 나가겠습니다. 감사합니다.”생업 때문에 고해성사를 못 보는 신자에게 직접 찾아가 인근 성지로 안내해 고해를 바치도록 돕고, 어린 자녀들 때문에 미사 참여가 힘들다는 젊은 엄마를 위해선 성당 맨 앞자리를 유아석으로 만들어줬다. 바쁜 신자를 위해 견진 교리 시간을 조정해주기도 했다. 전출 신고 없이 이사가 버린 신자의 관할 본당에 연락해 교적을 옮겨주고 해당 구역장에게 연락까지 취하는 등 세심한 ‘신자 맞춤형 활동’을 펼쳤다. 이 같은 활동 덕에 냉담 신자들도 ‘우리 성당이 나를 무척 생각해주는구나’ 하는 감동을 하고 있다. 주수욱 주임 신부는 매달 회의를 통해 다양한 사정을 듣고, 필요한 조처를 해주고 있다.주 신부는 “신자들과 협력해 각자의 어려움을 세심하게 돌아보고, 공동체 안에서 잘 살아가도록 돕다 보니 본당 전체가 신자들의 생활을 파악하고 한 걸음 더 다가가게 됐다”며 “‘진짜 소통’, ‘배려의 사목’으로 본당이 더욱 힘을 얻고 있다”고 말했다.한국 천주교 평신도사도직단체협의회 손병선(아우구스티노) 회장은 “오늘날 여러 이유로 세상 속에 꼭꼭 숨어버린 냉담 교우, 형식적인 인사와 소개에 그치고 이내 관계가 끊어지는 새 신자나 전입 신자들을 위해 특히 세심한 ‘신앙 돌봄’을 해야 한다”고 말했다.손 회장은 “본당에 ‘신앙생활 도우미’, ‘일대일 신앙 상담사’를 두고, 그들이 성당을 찾는 이들을 언제든 환대하고, 그들의 재능이나 신앙생활의 어려움을 파악해 돕는 ‘신자 돌봄 활동’을 한다면 많은 이가 냉담보다는 친교와 관심 속에 신앙을 유지할 수 있을 것”이라고 전했다.청주교구 음성본당 ‘1ㆍ1운동위원회’“할머니, 저희 본당 모든 교우가 어르신을 위해 기도해드리고 있습니다.”“누가 나를 기억해주겠습니까. 수녀님, 정말 고맙습니다.”청주교구 음성본당(주임 최문석 신부)의 김 가브리엘라 수녀가 냉담 중인 한 어르신을 두 번째 방문했을 때였다. 가족 모두 다른 종교를 믿는 바람에 평생 성당을 제대로 못 다녔다는 할머니는 현재 혼자 살면서도 성경과 기도서를 장롱 속에 숨겨둔 채 냉담 중이었다. 김 수녀는 할머니와 같이 기도했고, 할머니는 고마운 마음에 끝내 눈물을 흘렸다.음성본당에는 ‘1ㆍ1운동위원회’가 있다. ‘1인 1단체 가입’을 목표로 꾸려진 위원회 산하에는 △새벗팀(새 신자 관리) △일더하기팀(일반 신자 동반) △한빛팀(냉담자 및 병자 관리) △홍보팀을 갖추고 있다. 2016년 본당이 실시한 ‘신자 전수조사 및 신앙생활 실태 파악’을 통해 신자 유형별로 필요한 사목을 하고자 올해 꾸린 ‘본당 복음화 기구’다. 본당은 전수조사를 통해 신앙생활을 잘하는 순으로 △핵심 △주변 △냉담 위기로 신자들을 분류했고, 위원 20여 명이 각 팀에서 맞춤형 활동을 펼치고 있다.김 수녀가 속한 ‘한빛팀’은 냉담자ㆍ병자 관리 및 방문을 담당하고 있다. 한빛팀이 냉담자ㆍ병자를 ‘감화’ 및 ‘회두’시킨 사례는 이미 셀 수 없이 많다. 부친 제사 문제로 남편이 2년 전부터 냉담 중인 가정을 방문한 한빛팀은 차근히 ‘천주교식 제사법’을 일러줬고, 이후 남편은 성당에 다시 나오기 시작했다.한빛팀이 방문해도 본체만체하며 차갑게 대하던 한 어르신은 병환 중에 있었다. “신부님이 와도 말하기 싫다”던 어르신은 신기하게도 첫 방문 일주일 뒤 본당에 병자 영성체를 부탁해왔다. 그때 어버이날 카네이션과 함께 선물했던 ‘기도벗 배지’, 그리고 대화가 오랜 기간 굳었던 마음을 풀었던 것이다. 한 달 뒤 갑자기 위독해진 어르신은 병자성사를 받고, 가족이 지켜보는 가운데 하느님 곁으로 갔다. “집에 찾아오지 마세요” 하던 30년 냉담 부부도 한빛팀 위원들의 방문과 기도를 듣고 냉담을 풀기로 약속했다. 한빛팀은 빨강ㆍ노랑ㆍ초록의 ‘신호등’ 불빛으로 냉담 정도를 분류해 수시로 변동사항을 기록하고 있으며, 본당은 매 미사 전 냉담 교우, 새 신자를 위해 묵주기도 5단을 바치고 있다.최문석 주임 신부는 “신자라고 해서 다 같은 모습으로 신앙생활을 하지 않는다. 전수조사를 하고 나니 공동체 문제점, 신자 개개인의 현실을 알게 됐다”며 “복음화는 하느님 사랑과 기쁨을 느끼는 정도이지, 숫자 싸움이 아니다”라고 말했다.숫자보다 신자들 마음을 먼저 생각하자 음성본당 미사 참여율은 상승세로 반전됐다. 반면 본당 냉담률은 꾸준히 감소 중이다.이정훈 기자 sjunder@cpbc.co.kr 백영민2018.07.11
![[한글과 천주교의 만남] (하) 한글 통한 선교, 열매 맺다](//cpbc.co.kr/CMS/newspaper/2018/10/rc/736326_1.0_titleImage_1.jpg)
[한글과 천주교의 만남] (하) 한글 통한 선교, 열매 맺다 박해받던 천주교와 한글의 만남은 섭리였네 한글본 「성교감략」. 원본은 중국 북경 교구장인 들라플라스 주교가 성경을 역술한 한문본으로 돼 있다. 교회 역사학자들은 1801년 조선에 전해진 천주교 한문 서적 120종 177권 가운데 3분의 2가량인 83종 111권이 한글로 번역됐다고 보고 있다. 한마디로 천주교와 한글은 ‘상부상조’, ‘상생 관계’였다고 볼 수 있다. 조선시대 천주교회가 빠른 속도로 성장할 수 있었던 비결은 ‘한글’이다. 한글 역시 ‘천주교’ 덕분에 널리 전파될 수 있었다. 앞서 언급한 ‘장주교윤시제우서’(1857년) 말고도 조선 천주교회 안에서 ‘한글을 이용한 선교’에 관한 내용을 더 발견할 수 있다. 아울러 한글 발전을 위해 노력해온 한글운동가 김종구(베르나르도)씨가 한국 교회에 전하는 제안도 함께 싣는다.최양업 신부와 다블뤼 주교의 편지조선시대 천주교회가 당시 백성들에게 한글로 선교했다는 기록은 한국 교회 두 번째 사제 최양업(토마스, 1821~1861) 신부의 편지에서도 발견된다. 1849년 사제품을 받은 최 신부가 2년 뒤인 1851년 스승인 르그레즈와 신부에게 보낸 여덟 번째 편지에는 한글에 대한 자랑이 담겨 있었다.“교리 공부하는 데 한글이 많은 도움이 됩니다. 조선의 알파벳은 10개의 모음과 14개의 자음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배우기가 아주 쉬워서 열 살 이전이라도 글을 읽을 줄 압니다. 한글은 천주교 전파에 큰 도움이 되어 신부님의 강론과 가르침을 대신해서 산골의 순박한 자들도 빨리 천주교 도리를 배울 수 있습니다. 1851년 10월 15일 절골에서 최양업 토마스 올림.”최 신부에 앞서 부모님께 한글(조선어)에 대한 편지를 쓴 프랑스 출신 선교사도 있다. 편지의 주인공은 한국 103위 순교성인이기도 한 제5대 조선대목구장 안토니오 다블뤼(1818~1866, 안돈이) 주교다.“사랑하는 부모님께. 저는 여전히 조선에 있습니다. 저는 아버지를 기쁘게 해드리기 위해 조선어에 관해 몇 가지 메모해 두었던 것을 여기에 덧붙입니다. 제가 여러 책에서 읽은 바로는 조선어는 중국어와 다르지만 같은 문자로 표기한다고 했는데, 이는 사실이 아닙니다. 조선인은 그만의 독특한 문자를 가지고 있습니다. 조선의 문자는 중국 문자와 달리 완전한 자모를 갖추고 있습니다. 저의 회장이 적어준 그 자모와 기초발음을 여기에 첨부합니다. 모두 이것으로 언어 공부를 시작합니다. 그 부분의 발음을 익히게 되면 거의 단어 대부분을 발음할 수 있기 때문에 저는 그것을 수차례 반복해 익히고 있습니다. 1845년 10월, 아미앵 생 뢰로 로(路), 다블뤼 귀하.”일부 역사학자들의 반론에 대한 반론한글이 천주교 전파에 큰 역할을 했다는 사실은 부정할 수 없다. 하지만 일부 역사학자들은 반론을 펴기도 한다. 당시에는 인구대비 천주교 신자 비율(복음화율)이 지금(2017년 12월 말 기준 11%)보다 현저히 낮았는데, 천주교가 한글 전파에 공헌했다고 볼 수 있는가 하는 것이다.이에 대해 교회 역사학자 윤민구(수원교구 원로사목자) 신부는 “그 시대엔 한글을 보급하거나 적극적으로 권장하지 않았다. 오히려 천시하고 무시했다”면서 “그런 상황이었기에 천주교만이라도 한글을 적극적으로 사용하면서 한글 전파에 앞장서온 가치에 더 주목해야 한다. 숫자(%)로 따질 일은 아니다”라고 반박했다.교우촌으로 널리 알려진 대전교구 합덕본당의 주임 김성태 신부도 “어느 종교도, 종교를 떠나 한글에 대해 우리 천주교처럼 관심을 뒀던 부류를 찾을 수 없다. 오히려 한글을 만들었다는 사대부 학자조차 한글을 쓰지 않았다”며 “그럼에도 천주교가 아주 조직적이고 정치적으로 이 일을 했다는 것은 굉장한 의미가 있다”고 주장했다.전 호남교회사연구소장 김진소(전주교구 원로사목자) 신부 역시 “한국 천주교회가 한글을 통해 신앙을 보급하지 않았다면 그렇게 기층민에게까지 천주교가 깊이 심어질 길은 없었을 것”이라며 “천주교회가 비록 선교를 목적으로 했지만, 한글 보급에 큰 역할을 했다는 사실을 신자들의 삶을 통해 입증할 수 있다”고 말했다. 이힘 기자 lensman@cpbc.co.kr 한글운동가 김종구씨, 문맹률 높던 시절 많은 순교자 배출의 힘은 한글한글 주일, 천주교 한글 박물관, 한글탑….’ 한글운동가 김종구(베르나르도, 73, 수원교구 동수원본당)씨는 생소한 단어들을 꺼냈다. 김씨가 이야기한 것들은 현재 우리나라에 없는 것들이다.2008년 서울 온수초등학교 교장으로 정년퇴임을 한 김씨는 2007년 교장 재직시절, 전국의 초등학교 중에서 최초로 학교 축제를 ‘한글 축제’란 이름으로 개최했다. 그는 이 공로로 그해 12월 한글학회에서 ‘한글 지킴이’로 위촉됐다. 은퇴 이후 김씨는 서울대교구 노인사목부 산하 ‘서울 가톨릭 영시니어 아카데미’ 강사로 봉사하면서 강의를 통해 ‘한글 사랑 운동’을 펼치고 있다.김씨는 “문맹률이 높았던 조선 시대에 모진 박해 속에서도 많은 순교자를 낼 수 있는 원동력은 한글 덕분이었다”며 “공기처럼 당연하게 여길 수 있는 한글에 대해 한국 천주교회와 신자들이 좀 더 관심을 쏟아야 한다”고 힘주어 말했다. 한국 교회 안에서 한글날 특별 미사를 봉헌한다든가 한글 주일을 제정함으로써 한글과 천주교가 떼려야 뗄 수 없는 밀접한 관계라는 것을 더 많은 국민에게 알려야 한다는 것이다.“더 나아가 대한민국 대표 축제를 한글축제로 지내는 것은 어떨까요. 우리나라 적당한 장소에 에펠탑처럼 높은 한글탑을 만든다면 그곳이 한국을 대표하는 세계적인 관광지가 될 수 있을 것이라 기대합니다. 천주교 신자들부터 한글 사랑에 앞장서 주시길 희망합니다.” 이힘 기자 백영민2018.10.17
![[신앙단상]행복하여라,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cpbc.co.kr/CMS/newspaper/2018/07/rc/727542_1.0_titleImage_1.jpg)
[신앙단상]행복하여라,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현익재 (라파엘, (주)지엠케이정보통신 대표) 청빈ㆍ정결ㆍ순명 서원하고 하느님께 봉헌하는 삶을 살아가는 성직자, 수도자의 도움으로 평신도는 방황하지 않고 하느님을 바라보며 믿음의 생활을 할 수 있다. 작은형제회에는 제1회 성직자, 제2회 수도자, 제3회 재속회(평신도)가 있다. 제3회 회원은 평신도로서 다음과 같은 삶을 살기로 서약한다. △아시시의 성 프란치스코의 말씀과 표양에 영감을 준 복음적 생활 △재속 프란치스코의 고유한 봉사정신 실천 △교회 재건에 노력하고 모든 사람을 위한 선교 사명에 참여.재속 프란치스코 맛세오 형제회에 지원해 매월 둘째 주일 정동 프란치스코 교육회관에서 프란치스코 사부의 가르침과 클라라 성녀의 삶을 배웠다. 온전히 하느님께 봉헌하는 프란치스칸 영성을 배운 것이다. 신부님의 영성 강의로 조금씩 영적으로 성장해가고 피정과 봉사를 통해 소외된 형제자매를 만나면서 내 삶을 되돌아보며 하느님께 감사드렸다.프란치스코 성인이 남겨주신 회칙과 회헌을 읽고 쓰며 그분의 가르침을 조금씩 알게 됐다. 성인의 회칙에는 ‘회원은 형제들 가운데서 성경과 교회 안에서, 그리고 전례 행위 안에서 살아계시고 활동하시는 그리스도를 발견해야 한다’(제5조)는 구절이 있다. 성인께선 재속회원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회칙으로 알려주신다는 것을 알게 됐다. ‘최소한 이것만은 지키며 나를 따르라’고 하시는 것 같았다. ‘종신서약 참 가난의 기쁨’ 피정 강의를 통해 행복은 만족의 상태며, 만족은 안정되고 편안한 상태임을 배웠다. 우리는 불안정하고 불편한 상태에 있는 것을 불행하다고 느끼는 경우가 많다는 말씀을 듣고는 다시금 나를 돌아보게 됐다. 무언가를 소유하려는 욕구, 욕심에서 벗어나 구속당하지 않는 삶, 집착하지 않는 삶을 살아가야겠다고 마음먹었다. “행복하여라,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 하늘나라가 그들의 것이다.”(마태 5,3)프란치스코 사부는 영성을 통해 세상 속에서 내가 해야 할 일과 가야 할 길을 알려주신다. 형제회 형제자매들의 사랑과 봉사로 ‘형제적 사랑’을 배웠다. 하느님께서 나에게 사랑을 체험하게 하고 축복해주심을 마음으로 느꼈다.성인께선 제자들이 여행을 떠날 때 지팡이 외에는 아무것도, 빵도 여행 보따리도 전대에 돈도 가져가지 말라고 말씀하셨다. 신발은 신되, 옷도 두 벌은 껴입지 말라고 이르셨다. 불편과 불안정을 통해 하느님께 다가가시려 했다는 말씀을 통해 요즘처럼 나를 중심으로 아는 세상에서 우리를 일깨워 주신다.내가 행복해야 가정이, 사회가, 주변 사람들이 행복하게 된다. 여러 교육에 참여하면서 순명하라는 이야기를 많이 듣게 됐다. 처음엔 무슨 말인가 했다. 순명은 ‘듣는 것’이라는 뜻도 있다. 신앙생활을 하면서 하기 싫은 일이 많지만, 하느님께서 주시는 일이라 생각하고 참여하곤 했다. 시작할 땐 알지 못했던 것을 알아가면서 순명하고 참여하며 행복해지면서 절로 감사하게 된다. ‘주어지는 대로 최선을 다해 살자’, ‘주님께서 이끄시는 대로 편안하게 마음을 비우고 여유를 갖고 살자’, ‘용기를 내어 힘들어하는 형제들에게 위로의 한마디를 전할 수 있는 삶을 살자’고 결심하고 노력 중이다.하느님께서 나에게 주신 소명은 무엇일까? 각자 다르게 주어지는 소명에 따라 최선을 다해 사는 것이 하느님 사랑에 보답하는 것이며 세상을 평화롭게 만드는 길임을 깨닫는다. 부족하지만, 주님께서 이끄시는 대로 하나씩 해보고자 한다. 평화신문2018.07.17
![[시사진단]슬픈 아라비아, 예멘](//cpbc.co.kr/CMS/newspaper/2018/07/rc/727539_1.0_titleImage_1.jpg)
[시사진단]슬픈 아라비아, 예멘박현도 (스테파노, 명지대 중동문제연구소 인문한국 연구교수) 구약성경 열왕기 상권 10장과 역대기 하권 9장에는 솔로몬의 명성을 들은 스바 왕국의 여왕이 많은 수행원을 거느리고 향료와 금, 은, 보화를 낙타에 실은 채 예루살렘을 방문했다는 기록이 나온다. 스바는 흔히 시바라는 이름으로 우리에게 더 알려진 왕국이다. 정확한 위치는 여전히 오리무중이지만, 요즘 난민 문제로 우리 국민의 관심이 쏠린 예멘이라는 설이 있다. 예멘은 스바의 여왕과 더불어 로마와 향료무역을 한 곳으로도 유명하다. 그래서 붙은 별명이 ‘아라비아 펠릭스(Arabia Felix)’다. 풍요로운 아라비아, 행복한 아라비아라는 뜻이다.아라비아 반도 남서쪽에 자리 잡은 예멘은 북쪽으로는 사우디아라비아와 동쪽으로는 오만과 국경을 맞댄 아랍국가다. 이슬람교를 따르고 수니파와 시아파의 비율이 약 60% 대 40%다. 국가 면적은 우리나라보다 5배나 크지만, 인구는 우리보다 적은 약 2700만 명이고, 국민 평균 연령은 19.5세로 무척 젊은 나라다. 25세 이하 인구가 전 국민의 60%를 차지한다. 젊은이가 압도적으로 많기에 발전 가능성이 크지만, 대다수 중동 국가들이 그렇듯 독재정치와 권력층의 부패로 경제가 부실해 아랍국가 중에서 가장 가난한 나라에 속한다. 국민소득은 1인당 1500달러에 불과하다.7세기에 이슬람화가 된 예멘은 1990년까지 완전한 통일국가를 이루지 못하였다. 산악지역과 사막 등 험한 지형 때문에 단합된 정치공동체를 만드는 것이 쉽지 않았다. 북쪽은 오스만제국, 남쪽은 영국이 지배했다. 제1차 세계대전에서 오스만제국이 패배한 후 북예멘은 자이디파 시아 왕정이 자리를 잡았다가 1962년 아랍민족주의에 바탕을 둔 공화정 혁명으로 무너진 뒤 내전을 거쳐 1968년 예멘아랍공화국이 들어섰다. 남예멘은 반영투쟁 끝에 1967년 사회주의를 채택한 예멘인민민주공화국이 들어섰다. 그러나 소련이 붕괴하면서 어려움에 부닥친 남예멘이 북예멘과 손을 잡아 1990년 통일 예멘공화국을 이루었다. 그러나 통일 예멘의 앞길은 순탄치 않았다. 북예멘의 살레 대통령이 통일대통령이 됐지만, 국민통합도, 민주정치에도 실패했다. 더욱이 북부 사으다 지역에 집중거주하고 있는 자이디파 시아의 후시반군이 강경보수 수니파의 공세에 불안감을 느끼면서 2004년부터 정부와 대치를 시작했다. 이처럼 종파분쟁까지 곁들인 정국이 이어지다가 2011년 튀니지에서 시작한 ‘아랍의 봄’ 민주화 시위가 예멘에서도 일어나 1978년 북예멘 대통령으로 시작해 통일 예멘의 유일한 대통령이 된 살레의 34년 독재정권이 무너졌다. 그러나 후시반군이 새로운 정부의 조치에 만족하지 못하고 2014년 9월 수도 사나를 이듬해 1월 대통령궁을 점령하자 연금 상태에 있던 하디 대통령이 수도를 탈출해 사우디아라비아에 도움을 요청하였고, 이에 사우디아라비아가 3월 19일 후시반군 공격을 시작하면서 예멘 전쟁의 막이 올랐다. 후시반군이 이란의 후원을 받는다고 믿고 있는 사우디아라비아는 이라크, 시리아, 레바논에 이어 예멘까지 이란이 영향력을 미치는 것을 받아들일 수 없기에 현재까지 예멘을 봉쇄하고 후시반군 지역에 공습을 가하고 있다. 지난달 제주도로 들어온 예멘 난민은 현재 조사가 진행 중이긴 하지만, 대부분 징집과 신변 위협을 피해 후시반군이 장악한 지역에서 도망쳐 나온 사람들로 알려졌다. 말레이시아로 피했다가 무비자와 에어아시아 제주 직항을 이용하여 우리나라로 들어온 것이다. 번성한 향료무역으로 ‘아라비아 펠릭스’로 불렸던 예멘이 이제는 폭탄과 목숨을 거래하는 ‘아라비아 미세라(Arabia Misera)’가 되었다. 슬픈 아라비아! 종전과 평화를 기원한다. 평화신문2018.07.17
![[교리상식] 예수님을 가르키는 이름과 상징](//cpbc.co.kr/CMS/newspaper/2017/12/rc/704977_1.0_titleImage_1.jpg)
[교리상식] 예수님을 가르키는 이름과 상징예수님을 가리키는 이름에는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예수님을 표시하는 상징들에 대해서도 알아보겠습니다. 먼저 예수님 이름이 지니는 뜻부터 알아봅시다. '예수'라는 이름은 '주님(야훼)은 구원이시다'라는 뜻을 지닌 히브리 말 '여호슈아'에서 나왔다고 합니다. 여호슈아가 줄어서 '예슈아'가 됐는데, 이 말이 그리스말인 '예수스'로 번역되면서 '예수'가 된 것입니다. 마태오 복음의 예수님 탄생 이야기(마태 1,18-25)에서는 천사가 꿈에 요셉에게 나타나 약혼녀 "마리아가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예수라고 하여라"고 말하고는 "그분께서 당신 백성을 죄에서 구원하실 것이다"라고 아기 이름을 예수로 지으라는 이유를 설명하지요. 이어서 구약성경 예언을 빌어 예수님 이름을 '임마누엘'이라고 부르고는 그 뜻을 "하느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다"라고 풀이합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의 탄생은 '구원이신 하느님께서 이제 우리와 함께, 우리 가운데 계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느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다니, 예수님 탄생은 실로 천지가 우주가 개벽하는 엄청난 사건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제 예수님과 관련된 중요한 호칭들과 그 의미에 대해 하나씩 살펴봅니다. ◇그리스도, 메시아: '예수'라는 이름에 항상 붙어 다니는 명칭이 '그리스도'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예수님의 고유한 이름으로 이해합니다. 엄밀하게 따지자면 '예수 그리스도'는 '예수는 그리스도이시다'라는 신앙 고백문입니다. '그리스도'라는 말은 히브리 말(또는 아람 말) '메시아'를 그리스 말로 번역한 것인데, '기름 부음을 받은 이'를 뜻합니다. 구약 시대에는 왕이나 예언자, 사제 등 백성의 지도자가 취임할 때 그 사람에게 기름을 부어 성별(聖別)하는 예식을 거행했습니다. 일종의 취임식이라고 할 수 있지요.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이 다른 민족의 압제에 시달리면서 '기름 부음을 받은 이' 곧 메시아가 오시면 자기들을 억압의 사슬에서 풀어 구원(해방)해 주실 것이라고 고대했습니다. 이런 사상이 발전해서 메시아를 '세상을 구원하실 구세주'로 받아들이게 된 것입니다. 앞에서 예수님 이름과 관련해서 알아보았듯이 예수님이 바로 그 구세주, 메시아이십니다. ◇주님: '주님'은 하느님의 주권(주권) 또는 하느님이 주인이심을 나타내는 말입니다. 예수님을 주님이라고 부르는 것은 바로 예수님이 하느님의 아들이며, 하느님과 같은 신성을 지니신 분이심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어린양: 미사 영성체 예식 부분에서 신자들은 "하느님의 어린양,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주님, 자비를 베푸소서"하고 기도하는데 하느님의 어린양은 바로 예수님을 가리킵니다. 구약의 이스라엘 백성이 이집트 노예생활에서 해방될 때 어린양을 잡아 제물로 바쳤지만, 예수님께서는 당신 자신을 인류 구원을 위한 희생 제물로 바치심으로써 하느님의 어린양이 되셨습니다. ◇하느님의 종: 신약성경에서는 예수님을 '하느님의 종'이라고 부르기도 하는데 이는 예수님이 구약성경에 나오는 '야훼의 종'(이사 52,13-53,12)과 닮았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의 아들: 예수님은 하느님을 아빠, 아버지라고 부르심으로써 당신이 하느님의 아들이심을 드러내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천주(天主) 성자(聖子)'라고 부르지요. ◇사람의 아들(人子): 복음서에서 예수님은 당신을 '사람의 아들'이라고 하십니다. 사람의 아들은 구약성경(다니엘서)에 나오는데, 종말에 나타나 세상을 심판하고 이스라엘을 구원하실 분을 뜻합니다. ◇사람이 되신 말씀(로고스): 삼종 기도에는 "이에 말씀이 사람이 되시어…"라는 대목이 있는데 바로 예수님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로고스'란 '말' '말씀'이란 뜻의 그리스 말입니다. 요한 복음에서는 '한처음에 말씀이 하느님과 함께 계셨고, 그 말씀이 바로 하느님이셨다'고 하는데, 사람이 되신 하느님 말씀이 바로 예수님이십니다. 그 말씀은 진리의 말씀, 생명의 말씀입니다. 이창훈 기자 changhl@pbc.co.kr <<알아둡시다>> 예수님을 가리키는 호칭 외에도 예수님과 관련한 상징들도 있습니다. 가장 대표적인 것이 십자가입니다. 그밖에 중요한 몇 가지 상징 또는 표시들을 알아봅니다. * ΑΩ : Α는 그리스말 첫 글자이고 Ω는 그리스말 마지막 글자입니다. 그래서 Α와 Ω는 일반적으로 처음과 마지막, 시작과 끝을 나타내지요. 예수 그리스도를 Α요 Ω라고 하는 것은 그리스도께서는 세상 창조 때부터 세상 마지막까지 우주 만물을 다스리시는 분임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 I.N.R.I. : 십자고상을 보면 윗부분 명패에 'I.N.R.I.'라고 표기돼 있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것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으라고 내준 로마 총독이 써 붙인 죄목으로, '유다인들의 임금, 나자렛 사람 예수'(IESUS NAZARENUS REX IUDAEORUM)라는 라틴말의 약자입니다. 복음서는 이 죄목이 라틴말과 그리스말 히브리말로 쓰여 있었다고 전합니다(요한 19,19-20). * 물고기 : 로마 제국이 그리스도 신자들을 박해하던 때에 신자들이 서로 신원을 확인하고자 사용하던 암호인데, 물고기를 암호로 표시한 것은 물고기를 뜻하는 그리스말 익튀스(ΙΧΘΥΣ)가 '예수 그리스도 하느님의 아들 구세주'(Ιησυs Χριστοs Θεου Υιοs Σωτηρ)라는 그리스말의 첫 글자를 합친 것과 같기 때문입니다. * 키로: 그리스말 그리스도(ΧΡΙΣΤΟΣ)처음 두 글자 키(Χ)와 로(Ρ)를 붙여서 만든 표시입니다. 요즘에도 천주교 신자 집임을 알리는 명패에 이 표시를 하지요. * 구리뱀 : 모세에게 불평하다 불뱀에 물려 죽게 된 구약 이스라엘 백성이 모세가 기둥에 달아놓은 구리뱀을 쳐다보고 살아난 것처럼 예수님은 인류 구원을 위해 십자가에 달리셨습니다(민수 21,4-9 ; 요한 3,14 참조). 그래서 구리뱀은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상징합니다. cpbc2017.12.14

춤추고 노래하다 보면 신앙이 쑥쑥노래로 배우는 어린이 교리 DVD, 애니메이션으로 눈높이 교리 전해 애니메이션 ‘궁금해요, 프란치스코 수사님!’ 미사 편의 한 장면. 노래로 배우는 어린이 교리 애니메이션 DVD ‘궁금해요, 프란치스코 수사님!’ 시리즈 3탄 ‘생명의 빵’과 ‘미사’, ‘묵주기도’ 편이 출시됐다.성바오로딸 미디어의 ‘…프란치스코 수사님!’ 시리즈는 주인공 프란치스코 수사가 성경 말씀을 통해 어린이들에게 교리를 설명하고 어린이들이 노래를 따라 부르며 교리를 배울 수 있는 동영상 교리 교재다. 노래와 흥미로운 이야깃거리를 곁들인 뮤지컬 형식으로 제작해 유치부부터 첫 영성체 교리반 어린이들이 집중력을 잃지 않고 쉽고 재미있게 교리를 배우도록 했다. 동영상 길이도 편당 30분 정도다. 신앙의 지식적인 측면은 물론 일상의 삶에서 어떻게 교리를 적용해야 하는지를 이끌어 준다. 본당 주일학교 교재나 어르신 교리 교재로도 활용할 수 있는 것이 장점이다.‘생명의 빵’ 편은 성체성사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예수님께서 성체성사를 세우신 최후의 만찬을 비롯해 수호성인 이야기를 배우고, 가장 귀한 선물인 ‘생명의 빵’(성체)에 대한 노래를 율동과 함께 감상할 수 있다. 부모와 자녀가 함께 보면서 놀이하듯 교리를 배울 수 있게 구성했다.‘미사-아주 특별한 잔치’ 편은 하느님의 선물인 미사를 봉헌할 때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 하느님께 드리는 감사의 기도는 무엇인지, 세리와 죄인들의 비유를 통해 배우는 겸손과 용서에 대한 예수님의 가르침을 담고 있다. ‘묵주기도-아주 특별한 기도법’ 편에서는 묵주기도를 바칠 때 꼭 알아야 하는 기도문인 사도신경과 주님의 기도를 노래를 통해 가르쳐 주고, 성모 마리아께서 얼마나 기쁜 마음으로 하느님 뜻을 따르셨는지를 알려준다. 어린이들에게 하느님과 언제 어디서나 이야기를 나누도록 격려해주는 노래 ‘기도가 좋아’도 볼거리다. 원 제작은 미국의 헤럴드 엔터테인먼트사에서 했다. 영어 및 우리말 녹음이며, 영어ㆍ한글 자막도 선택할 수 있다.DVD를 활용한 교리 교안은 바오로딸 인터넷서점(www.pauline.or.kr)에서 무료로 내려받을 수 있다. 편당 1만 2000원, 3종 세트 3만 6000원. 30일까지 DVD 출시 기념 20% 할인 행사를 한다. 문의: 02-944-0945, 바오로딸 미디어이힘 기자 lensman@cpbc.co.kr. 백영민2018.04.11
![[이창훈 기자의 예수님 이야기] (49) 예수님의 사명과 시대의 징표(루카 12,49-59)](//cpbc.co.kr/CMS/newspaper/2018/01/rc/709111_1.0_titleImage_1.jpg)
[이창훈 기자의 예수님 이야기] (49) 예수님의 사명과 시대의 징표(루카 12,49-59)불길이 번지기 전에 회개하고 주님을 따르라 불을 지르러 오신 예수님께 우리는 무엇을 청해야 할 것인가. 사진은 재의 수요일을 앞두고 성지가지에 불을 지피는 모습. 가톨릭평화신문 DB 이번 호에는 서로 별개의 말씀인 것 같지만 자연스럽게 연결되는 예수님의 말씀들에 대해 살펴봅니다. 불을 지르러 왔고(12,49-50) 분열을 일으키러 왔다(12,51-53)는 말씀, 그리고 시대의 표징을 알아보고(12,54-56) 늦기 전에 화해하라(12,57-59)는 말씀입니다. 불을 지르러 왔다(12,49-50)이 대목은 “나는 세상에 불을 지르러 왔다. 그 불이 이미 타올랐으면 얼마나 좋으랴?”(12,49)와 “내가 받아야 할 세례가 있다. 이 일이 다 이루어질 때까지 내가 얼마나 더 짓눌릴 것인가?”(12,50) 두 구절로 이뤄져 있습니다. 우선 “세상에 불을 지르러 왔다”는 말씀부터 생각해 봅니다. 불은 성경에서 두 가지 의미로 사용됩니다. 하나는 심판의 표상인데, 구약성경에 주로 나옵니다.(유딧 16,17; 이사 66,15-16; 에제 38,22; 39, 6; 말라 3,19) 신약성경에서는 요한 세례자가 회개를 촉구하면서 “도끼가 이미 나무뿌리에 닿아 있다. 좋은 열매를 맺지 않는 나무는 모두 찍혀서 불 속에 던져진다”고 말합니다. 요한은 또 예수님께서 오시면 “타작마당을 깨끗이 하시어 알곡은 곳간에 모아들이고 쭉정이는 꺼지지 않는 불에 태워버리실 것”이라고 예고하지요.(마태 3,10.12; 루카 3,17 참조) 예수님의 두 제자 야고보와 요한은 사마리아의 한 마을이 예수님을 받아들이지 않자 ‘하늘에서 불을 내려 불살라버리면 어떻겠느냐’고 말씀드립니다.(루카 9,53-54)다른 한편으로 불은 성령을 나타냅니다. 요한 세례자는 예수님께서 오시면 불과 성령으로 세례를 주실 것이라고 하지요.(루카 3,16 참조) 사도들은 오순절에 불꽃 모양의 혀로 내려오는 성령을 받았습니다.(사도 2,3)그렇다면 예수님께서 지르러 오신 불은 심판의 불과 성령의 불을 다 의미한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이 대목에서 심판의 불은 최종 심판, 곧 종말의 심판이 아니라 오히려 정화의 심판이라고 보는 것이 적절한 듯합니다. 정화의 심판으로 더러움을 지워버리고 성령의 불로 새로워지도록 하는 것, 이것이 예수님께서 세상에 불을 지르러 오신 이유일 것입니다. 그 불이 아직 타오르지 않았다는 투로 말씀하시는 까닭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예수님께서 받아야 할 세례를 다 받지 못하셨다는 말씀과 관련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받아야 할 세례란 무엇이겠습니까? 성경학자들은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서 이루실 일, 곧 당신의 수난과 죽음과 부활을 가리킨다고 풀이합니다. 이미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당신의 수난과 죽음과 부활을 두 차례나 예고하셨습니다.(루카 9,22. 44 참조) 하지만 사람들에게 배척을 받고 죽임을 당하는 것은 인간적으로 견딜 수 없는 괴로움일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이 일이 다 이루어질 때까지 내가 얼마나 짓눌릴 것인가?” 하고 탄식하시는 것은 아닐까요? 분열을 일으키러 왔다(9,51-53)불을 지르러 왔다는 말씀에 이어 예수님께서는 더 이상한 말씀을 하십니다. 평화가 아니라 분열을 일으키러 왔다는 것입니다. 집안의 다섯 식구가 서로 갈라져 두 사람이 세 사람에게 맞서고, 아버지와 아들이 딸과 어머니가 며느리와 시어머니가 서로 맞서 갈라지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 말씀을 자세히 보면 분열을 일으키는 불씨는 바로 예수님 자신입니다. 예수님 때문에 집안 식구가 서로 갈라진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고 받아들이는 이들과 거부하고 배척하는 이들이 서로 갈라집니다. 분열을 일으키러 왔다는 예수님 말씀은 마리아와 요셉이 아기 예수를 성전에 봉헌했을 때 “이 아기는 이스라엘서 많은 사람을 쓰러지게도 하고 일어나게도 하며, 또 반대를 받는 표징이 되도록 정해졌습니다”라고 한 시므온의 예언을 떠올리게 합니다.(루카 2,34 참조)시대를 알아보아라(12,54-56)이스라엘 사람들은 ‘구름이 서쪽에서 올라오는 것을 보면 비가 오고 남풍이 불면 더워진다’는 것을 알았습니다.(12,54-55 참조) 이는 비구름이 서쪽인 지중해 연안에서 오기 때문이고, 사막이 남쪽에 있어서 남풍이 불면 더워진다는 것을 생활의 지혜로 터득했기 때문입니다. 이는 우리 조상들이 아침노을이 지거나 달무리가 비치거나 제비가 낮게 날거나 하면 비가 오는 징조로 여긴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군중을 향해 “위선자”라고 부르면서 “너희는 땅과 하늘의 징조는 풀이할 줄 알면서 이 시대는 어찌하여 풀이할 줄 모르느냐?”고 질타하십니다.(12,56) 이 질타는 바로 예수님께서 오셔서 활동하고 계시는 것을 보면서도 그것이 무슨 의미인 줄 모르는 군중들에 대한 질타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활동과 그 의미에 대한 좋은 사례는 요한 세례자의 제자들과 예수님과의 대화에서 볼 수 있습니다. 요한 세례자가 제자들을 예수님께 보내어 질문했을 때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눈먼 이들이 보고, 다리 저는 이들이 제대로 걸으며 나병 환자들이 깨끗해지고, 귀먹은 이들이 들으며, 죽은 이들이 되살아나고, 가난한 이들이 복음을 듣는다.”(루카 7,22-23) 예수님의 이 말씀은 바로 메시아 시대의 특징을 나타냅니다. 말하자면 예수님 자신이 바로 메시아이심을 에둘러 표현한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군중들에 대한 예수님의 질타는 예수님의 이런 활동을 보면서도 메시아 시대가 도래했음을, 예수님이 바로 메시아이심을 알아보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시대를 알아보지 못한다는 예수님의 이 질타는 곧바로 화해의 촉구로 이어집니다. 늦기 전에 화해하여라(12,57-59)자기를 고소한 사람과 재판관에게 가야 한다면 도중에 화해하라는 이 대목의 예수님 말씀은 늦기 전에 결단을 내려 회개하고 예수님의 말씀을 믿고 받아들이라고 촉구하는 말씀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미적거리다가 때를 놓치게 되면 감옥에 갇히게 되고 “마지막 한 닢까지 갚기 전에는 결코 거기에서 나오지 못할 것”입니다.(12,59)여기서 ‘한 닢’은 그리스말 ‘렙톤’을 번역한 것인데, 한 렙톤은 노동자의 하루 노임인 한 데나리온의 28분의 1이라고 합니다. 시간당 최저임금을 1만 원으로 쳐 노동자의 하루 노임을 8만 원으로 계산한다면 한 렙톤은 3000원도 채 되지 않은 금액입니다. 가진 것을 다 털어서 빚을 갚기 전까지는 감옥에서 나올 수 없다는 것인데 그만큼 엄중한 심판을 받으리라는 것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예수님의 이 말씀은 재판관에게 가서 재판을 받기 전에, 마지막에 하느님의 심판을 받기 전에 하느님을 믿고 그분의 가르침을 따르라고 촉구하는 말씀이라고 하겠습니다. [생각해 봅시다]‘불을 지르러 왔다’ ‘분열을 일으키러 왔다'는 말씀이 예수님의 활동 또는 일을 가리키는 것이라면 ‘시대를 알아보아라’ ‘늦기 전에 화해하여라’는 말씀은 예수님을 대하는 태도와 관련됩니다. 그런데 ‘불을 지르러 왔다’ ‘분열을 일으키러 왔다’는 예수님 말씀은 예수님을 주님으로 고백하며 따르는 오늘의 우리에게도 유효한 말씀일 뿐 아니라 우리 또한 따라서 해야 할 말씀이기도 하다고 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떤 불을 질러야 하겠습니까? 이 시대에 필요한 불은 무엇일까요? 또 평화를 바라는 우리가 분열을 일으켜야 한다면 그 이유는 무엇일까요? 평화신문2018.01.23
![[이창훈 위원의 예수님 이야기] (69) 예루살렘 멸망 예고와 성전 정화(루카 19,41-48)](//cpbc.co.kr/CMS/newspaper/2018/06/rc/724755_1.0_titleImage_1.jpg)
[이창훈 위원의 예수님 이야기] (69) 예루살렘 멸망 예고와 성전 정화(루카 19,41-48)강도들의 소굴이 돼버린 하느님의 집, 예수님이 정화하시다예수님 시대에 예루살렘 성전 모형. 출처 「사진과 그림으로 보는 성서」. 올리브산 동쪽 벳파게에서 어린 나귀를 타고 내려오시던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 도성이 보이는 곳에 이르자 우시며 예루살렘의 멸망을 예고하십니다. 그런 다음 예루살렘 성전에 들어가 성전을 정화하십니다. 예루살렘 멸망을 예고하시며 우심(19,41-44) 예수님께서 예루살렘 도성을 보고 우시며 예루살렘 멸망을 예고하시는 말씀을 편의상 세 부분으로 나눠서 살펴봅니다. ①“오늘 너도 평화를 가져다주는 것이 무엇인지 알았더라면…! 그러나 지금 네 눈에는 그것이 감추어져 있다.”(19,42) ②“그때가 너에게 닥쳐올 것이다. 그러면 너의 원수들이 네 둘레에 공격 축대를 쌓은 다음 너를 에워싸고 사방에서 조여들 것이다. 그리하여 너와 네 안에 있는 자녀들을 땅바닥에 내동댕이치고 네 안에 돌 하나도 다른 돌 위에 남아 있지 않게 만들어 버릴 것이다.”(19,43-44ㄱ) ③“하느님께서 너를 찾아오신 때를 네가 알지 못하였기 때문이다.”(19,44ㄴ) 예수님의 이 말씀에서 ‘너’는 바로 예루살렘 도성을 가리키는 표현입니다. 하지만 말씀 ①은 그 자체로만 보면 무슨 뜻인지 잘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②는 예루살렘 도성이 어떻게 멸망할지를 표현하고 있음을 짐작하게 해줍니다. 또 예루살렘이 멸망하게 된 것은 예루살렘에 평화를 가져다주는 것이 무엇인지 몰랐기 때문임을 추측할 수 있습니다. ③은 예루살렘 멸망의 이유를 구체적으로 나타냅니다. ③은 또 ①의 의미를 좀더 명확하게 해줍니다. 예루살렘이 평화를 가져다주는 것이 무엇인지 몰랐다는 것은 하느님께서 예루살렘을 찾아오신 때를 예루살렘이 알지 못하였다는 것과 맥락을 같이합니다. 결국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에 평화를 가져다주는 것이 무엇인지 알지 못했고 하느님께서 예루살렘을 찾아오신 때를 알지 못했기 때문에 예루살렘은 멸망할 것이라고 슬퍼하시며 예고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을 두고 탄식하며 멸망을 예고하신 것은 루카복음에서 이번이 처음이 아닙니다. 갈릴래아를 떠나 예루살렘을 향하던 길에서 헤로데가 죽이려 하니 몸을 피하라는 바리사이들의 말에 ‘예언자는 예루살렘이 아닌 다른 곳에서 죽을 수 없다’고 말씀하실 때였습니다.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예언자들을 죽이고 자기에게 파견된 이들에게 돌을 던져 죽이기까지 하는 너! 암탉이 제 병아리들을 날개 밑으로 모으듯, 내가 몇 번이나 너의 자녀들을 모으려고 하였던가? 그러나 너희는 마다하였다. 보라, 너희 집은 버려질 것이다.”(13,34-35ㄱ) 이 말씀에 비춰보면 예수님께서 우시며 예루살렘의 멸망을 예고하신 말씀의 뜻을 좀 더 분명하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예언자이십니다. 예루살렘에 평화를 가져다주시러 오신 하느님의 아들이십니다. 이를 깨닫지 못한 채 당신을 배척하는 예루살렘을 두고 슬퍼하시며 예루살렘의 멸망을 예고하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이 말씀, 특히 ②부분은 기원후 70년 로마 군인이 예루살렘을 공격했을 때 모습을 그리고 있다고 성경학자들은 설명합니다. 성전 정화(19,45-48)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예수님께서는 바로 성전에 들어가셔서 물건을 파는 이들을 내쫓기 시작하시며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나의 집은 기도의 집이 될 것이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그런데 너희는 이곳을 ‘강도들의 소굴’로 만들어 버렸다.”(19,46) 예수님의 이 말씀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면 예수님께서 성전에서 장사치들을 내쫓으신 것은 단지 성전에서 물건을 팔았기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장사치들이 성전을 ‘강도들의 소굴’로 만들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강도 행각은 물건을 사고파는 상행위와 다릅니다. 폭력이나 협박으로 물건을 강탈하는 사람을 강도라고 부릅니다. 위해를 가하지는 않더라도 심하게 폭리를 취할 경우 ‘날강도’라고 표현하기도 합니다. 더 큰 문제는 그렇게 나쁜 짓을 하고도 성전을 그들의 안전한 소굴로 버젓이 이용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또 한 가지 주목할 것은 ‘나의 집은 기도의 집이 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구약성경 이사야서 56장 7절을 인용한 이 말씀에는 하느님의 집인 예루살렘 성전을 예수님 자신의 집과 동일시하고 있음이 드러난다는 것입니다. 이 말씀은 그래서 예수님의 유년 시절에 있었던 일을 떠올리게 합니다. 예루살렘 순례 길에 아들을 잃어버린 마리아와 요셉은 사흘이나 헤매던 끝에 예루살렘 성전에서 율법 교사들과 함께 있는 아들 예수를 찾아냅니다. 왜 이렇게 애타게 하느냐는 마리아의 말에 소년 예수는 “저는 제 아버지의 집에 있어야 하는 줄을 모르셨습니까?” 하고 말하지요.(루카 2,41-50 참조) 이렇게 예루살렘 성전을 정화하신 예수님께서는 날마다 성전에서 가르치십니다. 루카 복음사가는 “수석 사제들과 율법학자들과 백성의 지도자들은 예수님을 없앨 방법을 찾았다. 그러나 어떻게 해야 하는지 그 방도를 찾지 못하였다. 온 백성이 그분의 말씀을 듣느라고 곁을 떠나지 않았기 때문이다”라고 기록합니다.(19,47-48) 이 대목은 “하느님께서 너를 찾아오신 때를 네가 알지 못하였기 때문이다”(19,44ㄴ) 하고 예루살렘을 두고 우시며 예언하시는 예수님 말씀을 상기시킵니다. 예수님께서 당신 아버지의 집인 성전을 정화하시고 날마다 성전에서 가르치셨지만 백성의 지도자들은 이를 알지 못하고 오히려 그분을 죽일 방도를 찾고 있었던 것입니다.생각해 봅시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 성전을 정화하신 일은 오늘 우리 그리스도 신자들에게도 깊은 성찰을 촉구합니다. 혹시 우리 또한 주님의 거처이자 기도하는 집인 성전을 우리의 사사로운 욕심을 차리기 위한 공간으로 활용하고 있지는 않은지요? 그리하여 찬미와 감사, 용서와 청원을 바치는 하느님의 집을 더럽히고 있지는 않은지요? 우리 몸 또한 하느님의 성령이 거처하시는 성전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우리 몸을 성령의 열매를 맺게 하기보다는 오히려 죄의 노예로 만들고 있지는 않은지요? 시기와 중상, 탐욕과 거짓, 사치와 교만으로 말입니다. 그렇게 되면 우리는 우리를 찾아오시는 그분을 알아뵙지 못할 것입니다. 알아보기예수님 시대에 예루살렘 성전은 기원전 20년에 헤로데 대왕이 증축 공사를 시작해 기원후 64년에 완공됐습니다. 사방이 두꺼운 벽으로 돼 있고 벽 안쪽에는 주랑이 들어서 있었습니다. 주랑으로 둘러싸인 성전 마당은 480mⓕ300m에 이르는 엄청난 규모였다고 합니다. 이 마당을 ‘이방인의 뜰’이라고 불렀는데, 비둘기 등 성전에 바치는 봉헌물을 파는 장사치들과 성전세를 내러 오는 이들에게 환전해 주는 환전상들이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물건을 파는 이들을 내쫓으신 곳이 이곳이었습니다. 또 주랑에서는 율법 학자들이 사람들을 가르치곤 했지요. 예수님께서 성전에서 가르치신 곳도 이 주랑이었을 것입니다. 마당 한가운데에 성전이 있었습니다. 여인들도 들어갈 수 있는 여인들의 뜰에, 남자들만 들어갈 수 있는 남자들의 뜰, 사제들만 들어갈 수 있는 사제들의 뜰에 이어 성소와 지성소로 이루어져 있었습니다. 예루살렘 성전은 완공 6년 후인 70년 로마군에 의해 파괴됐고 현재는 통곡의 벽이라고 불리는 서쪽 벽 일부만 남아 있습니다. 문채현2018.06.20

손주에게 ‘신앙 대물림’ 노력은 하지만 쉽지 않아서울 평협 김효철 위원, 신자 435명 설문 김효철 위원 최근 조부모가 손자녀를 돌보는 가정이 많아짐에 따라 가정 신앙 교육에 조부모 역할이 커지고 있다. 이에 서울 평신도사도직단체협의회 산하 복음화위원회 김효철(그레고리오) 위원은 서울대교구 사목국 주관 아래 ‘조부모의 신앙 전수와 손자녀를 위한 신앙 교육’을 주제로 1년간 설문 조사를 실시하고 9월 20일 주교회의 평신도사도직위원회 정기회의에서 결과를 발표했다. 설문은 서울대교구 19개 지구좌본당 소속 신자 435명을 대상으로 이뤄졌다. 설문 결과에 따르면 손자녀에게 신앙 교육을 하는 조부모는 326명(74.9%)으로 상당수가 신앙 교육을 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신앙 교육 내용은 기도(278명, 중복 응답 포함), 미사(191명), 교리(66명), 성경(61명) 순이었다. 신앙 교육을 시키지 않는 이들은 “스스로 신앙을 선택하도록 하겠다”(43명)와 “부모의 몫이라 여겨서”(39명)로 답했다.‘앞으로 신앙 교육을 한다면 어떻게 하겠느냐’는 질문에 대해선 ‘함께 기도하기’(335명), ‘미사 참례’(300명), ‘기도하는 모습 보여 주기’(247명), ‘성경 이야기 들려 주기’(174명) 순이었다. 교회에서 발간된 유아용 자료를 구매한 경험이 있느냐는 질문에는 ‘그렇다’는 답변이 243명에 이르렀지만, ‘없다’고 답한 이들도 176명이나 됐다. 신앙 교육을 위한 도구로는 동화, 만화, 영상물 등 놀이를 이용한 자료가 적합할 것이라고 답했다. 조부모들은 신앙 전수의 어려움으로 △눈높이 교육 △교리 지식 부족 △부모의 무관심과 비협조 등 다양한 의견을 내놨다.서울 평협과 인천교구에서 30년 넘게 활동해온 김 위원은 “그간 교회에서 조부모의 신앙 대물림 역할에 대한 중요성은 누차 언급됐지만, 이렇다 할 지표가 없어 조사하게 됐다”며 “불교와 개신교 측에도 자문했지만, 이웃 종교들도 이 문제에 대한 조사를 한 일은 없었다”고 했다.김 위원은 사목적 제언도 내놨다. 김 위원은 “손자녀를 세례명으로 부르기, 자녀를 위한 성구 만들기, 성경 말씀을 가훈으로 정하기 등 신앙을 전해 줄 다양한 방법이 있다”며 “신앙이 조부모를 통해 자연스럽게 전해질 수 있다는 인식이 자리 잡길 바란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이번 설문 조사가 조부모 신앙 전수자 역할에 대한 인식을 높이는 마중물 역할을 했으면 좋겠다”면서 “교구와 단체가 이를 위한 기구와 협의체를 만들어 자료를 구축해 나가는 계기가 되길 바란다”고 말했다. 이정훈 기자 sjunder@cpbc.co.kr 김지항2017.10.18
[허규 신부와 떠나는 신약 여행] (80) “여러분이 받은 부르심에 합당하게 살아가십시오”(에페 4,1)예수 그리스도의 모범을 따르고 실천하라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에 대한, 에페소 신자들에게 보낸 서간(이하 에페소서)의 성찰은 교회 안의 삶으로, 신앙인들의 실천적인 모습으로 옮겨갑니다. 에페소서에서 전하는 생활에 관한 권고는 상당히 구체적입니다. 가장 먼저 강조하는 것은 새로운 생활입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을 따라 살아가는 것이 신앙인의 새로운 삶이고 이것은 하느님의 새로운 창조로 표현됩니다. “여러분의 영과 마음이 새로워져, 진리의 의로움과 거룩함 속에서 하느님의 모습에 따라 창조된 새 인간을 입어야 한다는 것입니다.”(에페 4,23-24; 콜로 3,10 참조) 여기서 생각해볼 수 있는 것은 창세기에서 표현하는 인간의 창조입니다. 인간은 ‘하느님의 모습으로’ 창조되었지만(창세 1,26-27) 죄와 그릇된 생활방식으로 창조 때의 모습을 잃어갔습니다. 하느님은 이제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창조를 이루십니다. 잃었던 ‘하느님의 모습’을 회복하고 누릴 수 있도록 해주는 것입니다. 너그럽고 자비롭게 이런 새로운 창조 안에서의 삶으로 제시되는 것은 자비와 용서입니다. “서로 너그럽고 자비롭게 대하고, 하느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여러분을 용서하신 것처럼 여러분도 서로 용서하십시오.”(에페 4,32) 신약성경의 서간들에서 강조되는 것은 바로 ‘자비와 용서’입니다. 그리고 이것을 위한 바탕은 그리스도의 모범입니다. 십자가 희생을 통해 우리 죄를 없애신 그리스도의 업적은 하느님 자비의 궁극적인 표현입니다. 초대 교회에서 이런 그리스도의 모범을 따르는 것은 신앙인들에게 가장 중요한 덕목으로 표현됩니다. 에페소서는 이렇게 권고합니다. “여러분은 한때 어둠이었지만 지금은 주님 안에 있는 빛입니다. 빛의 자녀답게 살아가십시오. 빛의 열매는 모든 선과 의로움과 진실입니다. 무엇이 주님 마음에 드는 것인지 가려내십시오.”(에페 5,8-10) 하느님을 빛으로 표현하는 것은 신약성경에서 낯설지 않습니다.(1요한 1,5; 2,8) 빛의 반대 표현인 어둠은 하느님을 알지 못하는 상태를 나타내기도 하고(에페 4,18) 하느님의 가르침을 따르지 않는 생활을 나타내기도 합니다.(로마 13,12) 이제 신앙인들은 빛의 자녀로 다시 태어난 이들이고 그들은 빛을 따라 살아가는 이들입니다. 그것이 초대 교회 안에서 신앙인들에게 요청했던 가장 중요한 실천적인 모습입니다. 에페소서는 윤리적인 차원에서 실천해야 할 신앙인들의 자세에 대해 설명하면서 악의 세력에 대항하여 영적인 투쟁을 준비하도록 권고합니다. “악마의 간계에 맞설 수 있도록 하느님의 무기로 완전히 무장하십시오.”(에페 6,11) 이 표현의 구체적인 의미는 악마의 간계에 맞서 굳게 서 있도록 준비하라는 것입니다. 주님 안에 굳건히 서 있다는 것은 성경에서 말하는 흔들림 없는 믿음을 나타냅니다. 에페소서는 비유적으로 ‘믿음이라는 방패’와 ‘성령의 칼’을 말합니다. 성령의 칼은 “하느님의 말씀입니다.” 악의 세력에 맞서 믿음과 하느님의 말씀으로 영적인 투쟁을 이어가도록 권고하는 에페소서는 그 근거를 그리스도에게서 찾습니다. 복음서에서 예수님은 마귀를 쫓아내고 병든 이들을 치유하는 것을 통해 이미 악의 세력을 물리쳤음을 보여줍니다. 또한, 악의 세력을 없애는 하느님의 힘은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을 통해 드러났습니다. 결국, 이 세상에서 살아가면서 영적으로도 악마의 유혹에 맞서 투쟁하는 것 역시 그리스도의 모범에 충실한 모습입니다. 그리스도도 믿음도 하나초대 교회의 실천적인 내용은 모두 예수 그리스도를 본받는 것을 바탕에 둡니다. 교회의 삶은 철저하게 예수님의 모범을 따르는 것이고 실천을 통해 그 열매를 맺는 것입니다. 이런 교회의 삶에서 강조되는 것은 일치입니다. “성령께서 평화의 끈으로 이루어주신 일치를 보존하도록 애쓰십시오. 하느님께서 여러분을 부르실 때에 하나의 희망을 주신 것처럼, 그리스도의 몸도 하나이고 성령도 한 분이십니다. 주님도 한 분이시고 믿음도 하나이며 세례도 하나이고, 만물의 아버지이신 하느님도 한 분이십니다.”(에페 4,3-6) 하나의 세례를 받고 하나의 몸을 이루며 성령을 따르는 삶을 살아가는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모범을 따르는 실천적인 공동체입니다. 내적으로는 그리스도와 하나가 되는 일치를, 그리고 외적으로는 예수님을 통해 체험한 자비와 용서를 살아가는 것이 교회의 모습입니다. <가톨릭대 신학대학 성서학 교수> 평화신문2017.12.27
![[허규 신부와 떠나는 신약 여행] (88)“말씀을 실행하는 사람이 되십시오”(야고 1,22)](//cpbc.co.kr/CMS/newspaper/2018/03/rc/712971_1.0_titleImage_1.jpg)
[허규 신부와 떠나는 신약 여행] (88)“말씀을 실행하는 사람이 되십시오”(야고 1,22)진리의 말씀을 실천함으로 믿음을 완성하라야고보서는 하느님께 아들 이사악을 바치려 한 아브라함의 예를 통해 믿음의 실천을 강조한다. 그림은 율리우스 카롤스펠트 작 ‘아들을 제물로 바치는 아브라함’. 출처=「아름다운 성경」 신약성경의 마지막 서간들, 곧 야고보ㆍ 베드로ㆍ 요한ㆍ 유다 서간은 ‘가톨릭 서간’으로 구분됩니다. 이 서간들은 바오로 사도의 편지처럼 수신인이 구체적이지 않고 사목 서간처럼 교회 공동체의 지도자들에게 필요한 덕목을 전하지 않고 교회 구성원 모두를 향한, 광범위한 독자들을 대상으로 보내진 편지로 보기 때문입니다. 교회의 신앙의 삶에 대해 전하는 가톨릭 서간의 내용은 보편적인 가치를 전하고 있습니다. 그중에 첫 번째로 만나게 되는 것은 야고보 서간(이하 야고보서)입니다. 야고보서는 시작에서도 볼 수 있는 것처럼 “야고보”가 “세상에 흩어져 사는 열두 지파”에게 보내는 형식으로 되어 있습니다.(야고 1,1) 여기 표현된 야고보는 열두 사도 중의 한 명인 제베대오의 아들 야고보(마르 1,19)가 아닌 주님의 형제 야고보로 생각합니다.(마르 6,3) 야고보 사도는 일찍 순교하였고(사도 12,2) 이미 주님의 형제 야고보는 예루살렘 공동체에서 ‘기둥’으로 불리며 지도자의 위치에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갈라 1,19; 2,9) 이런 맥락에서 여기에 표현된 야고보는 주님의 형제일 가능성이 높아 보입니다. 하지만 많은 사람은 이 편지가 야고보에 의해 직접 쓰인 것이기보다 후대에 그의 이름을 빌려서 쓴 차명 서간일 것으로 생각합니다. 야고보서가 기록된 시기는 일반적으로 1세기 후반일 것으로 봅니다. 편지 안에서 찾을 수 있는 일부 표현은 복음서에서 언급하지 않는 교회의 직무와 관련된 후대의 것이기 때문입니다.(야고 5,14) 야고보서와 바오로 서간의 가르침 야고보서는 자주 바오로 사도의 편지에서 전하는 가르침과 반대되는 내용을 담고 있는 책으로 오해받기도 합니다. 마치 바오로 사도의 중심 사상인 믿음을 통한 의로움에 반대되는 내용을 전하며 신학적으로 깊이가 없다는 푸대접을 받기도 합니다. 이런 비판의 가장 큰 이유는 야고보서 2장 14-26절 때문입니다. 믿음보다 실천, 곧 행업을 강조하는 것처럼 보이는 야고보서의 내용이 이런 부정적인 시각을 가져오게 합니다. 하지만 현대 학자들은 이 두 내용이 상반된 것이 아니라 보완하는 것이라는 사실을 주시합니다. 야고보서가 전하는 가장 중요한 초점은 ‘말씀’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진리의 말씀”을 통해 우리를 낳으셨고, 이렇게 우리를 첫 열매가 되게 하셨을 뿐만 아니라(야고 1,18) 지속적으로 말씀을 통해 우리를 구원으로 이끌어가시는 분으로 소개됩니다. “모든 더러움과 그 넘치는 악을 다 벗어버리고 여러분 안에 심어진 말씀을 공손히 받아들이십시오. 그 말씀에는 여러분의 영혼을 구원할 힘이 있습니다.”(야고 1,21) 야고보서에서 가자 중요한 것은 삶의 차원에서 말씀을 실천에 옮기는 것입니다. 야고보서의 중심에 놓여 있는 실천을 강조하는 신학은 특별히 마태오 복음서의 산상 설교가 전하는 가르침과 매우 유사합니다.(마태 5―7장)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실행하는 것을 강조하는 마태오 복음서처럼 야고보서 역시 신앙인들을 훈계하면서 삶의 실천 안에서 말씀을 살아가도록 가르칩니다. 야고보서에서 믿음은 말씀을 실행하는 데서 드러납니다. 믿음 안에서 말씀 실천 강조 바오로 사도는 믿음이 없는 율법의 수행에 대해 반대합니다. 하지만 야고보서는 믿음 안에서 말씀을 실천하는 것을 강조합니다. 말씀을 듣고 그것을 받아들이는 것만이 아니라 실행하는 것이 믿음의 참모습으로 표현됩니다. 바오로 서간과 마찬가지로 야고보서 역시 아브라함의 예를 통해 믿음의 실천을 설명합니다. 그가 이사악을 하느님께 바칠 때에 그를 의롭게 한 것은 믿음의 실천, 곧 하느님의 말씀을 실행에 옮긴 것입니다. “믿음이 그의 실천과 함께 작용하였고, 실천으로 그의 믿음이 완전하게 된 것입니다.”(야고 2,22) 이렇듯 야고보서는 실천으로 드러나는 믿음, 삶에서 실행으로 옮겨지는 말씀에 초점을 맞춥니다. 믿음이 없는 행동을 강조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말씀을 실행하는 것이 믿음이라는 점을 강조합니다. 그리고 이것은 예수님의 가르침처럼(마태 5,38) “모든 면에서 모자람 없이 완전하고 온전한 사람”을 지향하라는 신앙인들을 향한 권고입니다. <가톨릭대 신학대학 성서학 교수> cpbc2018.03.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