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패션, 판화, 시 , 도예.... 예술적 탐험은 무한대장르 허무는 예술가 임경숙씨, 17일 시흥시 '더 소사' 개관행사에 도예 200여점 선보여 1985년 백남준(1932~2006)에 이어 한국인으로는 두 번째로 퐁피두센터에서 패션쇼와 행위예술 시연, 1986년 판화전 개최, 1988년 시집 「나는 생을 노래하네」 출간, 1991년 3개월 간 습작 끝에 시나리오 '겨울애마 봄' 집필, 1993년 유화 개인전, 1995~98년 매맞는 여성과 성폭력 및 가정폭력 피해자 방지법 제정을 위한 퍼포먼스 다수 공연, 2000년 재활용 예술인 정크 아트(Junk Art) 개인전, 2005년 천연염색아트전…. 이뿐만이 아니다. 17일엔 경기도 시흥시 대야동에 문을 연 아트 스페이스 '더 소사' 개관행사에 '다면체 인간'을 주제로 도예작품 200여 점을 선보였다. 도예에 입문한 지 1년 만에 갖는 7번째 개인전이었다. 1982년 프랑스로 건너가 플레리 드 라 퍽뜨에서 의상과 데생을 전공한 이후 임경숙(마리아, 서울대교구 우이본당, 사진)씨의 삶은 장르의 벽을 허무는 예술적 모색으로 점철돼 있다. '예술 박테리아'를 자처할 정도다. 장르 간 교류를 통한 소통과 통섭이 그의 작업관이다. 패션에서 출발, 판화와 유화, 정크 아트, 퍼포먼스, 시, 수필, 시나리오, 천연염색, 도자기로 이어지는 예술적 탐색은 '예술은 영혼의 작업이지 재료의 구분으로 한계를 짓는 대상이 아니다'는 철학에서 비롯됐다. 그야말로 인생을 시처럼, 예술처럼 살아왔다. 교회에서도 그는 유명인사다. 1990년대 후반 이후 최근까지 여러 수도회와 다양한 작업을 해왔다. 1998년 잠실역도체육관에서 살레시오수녀회 초청으로 아시아 살레시안들의 일치를 위한 퍼포먼스를 가졌고, 2000년 장충체육관에서 수도자들과 함께 2~3개월을 준비해 성경 주제인 '너는 복이 되리라'를 퍼포먼스로 보여줬다. 또 성가 소비녀회와는 종신서원을 주제로 한 퍼포먼스를 갖기도 했다. 최근에도 살레시오수녀회 청소년 영성의 집(원장 김영내 수녀)과 함께 무한 경쟁과 가족 해체 등 신자유주의 모순에 내몰린 청소년들의 육성을 듣고 풀어내는 퍼포먼스를 갖기도 했다. 최근에 특히 관심을 갖게 된 도예나 천연염색은 흙과 풀, 꽃을 재료로 한 원초적 생명과의 만남이기에 더 애착을 둔다. 지나치게 인위적이지 않은 원시의 손맛을 살리는 데 중점을 두고 거친 터치와 서투름의 미학으로 작품을 제작해 나간다고 그는 전했다. 재료의 경계를 허물고자 끊임없이 새로운 작업을 시도하는 작가는 "흙 안에는 하느님의 숨결과 생명이 있고, 온갖 형상들이 숨어 있기에 흙을 빚으면 행복하다"고 고백한다. 오세택 기자조은일2013.07.23
![[사목일기] 형제들이 오순도순 모여 사는 곳!](//cpbc.co.kr/CMS/newspaper/2010/12/rc/359973_1.1_titleImage_1.jpg)
[사목일기] 형제들이 오순도순 모여 사는 곳!김민호 신부(수원교구 가남본당 주임)"여보세요? 저 △△반장 ○○○인데요, 오늘 저희 반모임에 신부님을 모시고 싶어서요. 와 주실 수 있으시죠?" "예, 곧 가겠습니다." 어느 반장님께서 반모임에 초대하는 전화였다. 내가 사목하는 가남본당은 시골 본당이기 때문에 신부가 직접 소공동체 모임에 참석해 격려해주기를 원하는 반이 많다. 그래서 특별한 일이 없으면 반모임에 꼭 참석하려고 노력한다. 반장님께서 초대를 해주셨는데 아무 옷이나 입고 갈 수 없어 정장 차림을 하고 반모임이 열리는 곳으로 갔다. 모임 장소에 도착해보니 어르신 6~7분이 모여서 준비를 하고 계셨다. 허리가 구부정한 할머니, 귀가 어두워서 잘 들리지 않는 할아버지, 다리가 불편하셔서 걷기조차 힘드신 어르신들…. 내가 봐도 참 이분들 정성이 대단하다는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반모임을 하는데 그 깨알 같은 성경 구절을 한 소절이라도 읽으려고 애쓰시는 어느 할머니 모습이 짠하게 느껴지기도 했다. 또 한 분 한 분의 정성어린 자유기도를 들을 때마다 마치 하늘나라에 온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그동안 자신이 살아온 시간을 함께 나누는 시간, 어르신 중 한 분이 "내 나이 80에 이렇게 건강하게 걸어 다닐 수 있는 것이 바로 하느님 은총"이라며 앞으로 걸어 다닐 수 있을 때까지 남을 위해 봉사하겠다고 하셨다. 그 어르신의 소박한 고백에 참석한 모든 분께서 큰 박수로 격려를 해주셨다. 당신 몸을 추스르기도 어려우실 텐데 이웃을 생각하는 마음이 그렇게 아름다울 수가 없었다. 뒤이어 모든 사람이 삶을 나누고 다 함께 기도하면서 귀중한 시간을 마칠 수 있었다. 그리고 이어지는 다과 시간, 아마 어르신들께서 이 시간을 제일 기다리셨던 것 같다. 어디서 가져왔는지 한 상 가득 과일과 음료, 약간의 주류들이 곁들여져서 마치 성대한 잔치에 참여한 기분이었다. 음식을 함께 나누면서 자연스럽게 각 가정에 대한 이야기도 나오게 되고, 서로 어려움도 이야기하면서 나는 '사랑하는 우리 신자들이 이렇게 어려운 가운데에서도 열심히 살아가고 있는데, 사제인 나는 너무나 편안하게 지내고 있는 것은 아닌가?'하고 반성하게 됐다. 신자들이 진정으로 무엇을 원하는지, 어떤 부분에서 어려움을 하소연하고 있는지, 사목자로서 그들의 가려운 부분 또 힘든 부분을 도와줄 수 있는 진정한 목자가 될 것을 다시 한 번 다짐해본다.조은일2010.12.07
![[제13회 신앙체험수기] 장려상 - 그리스도인의 향기를 찾아서](https://img.cpbc.co.kr/newsimg/upload/2026/03/10/uC21773128300186.jpg)
[제13회 신앙체험수기] 장려상 - 그리스도인의 향기를 찾아서강남년(마리아, 마산교구 금산본당) 구글 제미나이 제작 6년 전 늦은 가을이었다. 당시 나는 항암과 수술 후유증으로 몸이 좋지 않아 산행을 하면서 체력을 회복하려고 했었다. 그날도 산에 올랐다가 갑자기 비가 오기 시작해서 서둘러 하산을 하는 중이었다. 우산도 비옷도 없이 서둘러 내려오는 길목에 동네 성당이 보였다. 늘 스쳐 지나가던 건물이었는데, 그날은 팔을 벌리고 누군가를 안아줄 것 같은 높은 벽 앞쪽에 있는 성상의 모습이 처음으로 눈에 들어왔다. 그 손짓 때문이었는지 비를 피하고 싶은 마음이었는지 처음으로 성당이라는 곳에 문을 열고 들어갔다. 미사가 한참 진행 중이던 성당 안 2단으로 나란히 정렬되어 있는 긴 의자의 맨 뒷자리에 조용히 앉아보았다. 맨 뒤에 앉으면 아무도 나를 눈치 채지 못할 것 같았다. 이렇게 눈에 띄는 등산복 차림이라도. 강론 중이던 신부님께서 이런 말씀을 하셨다. “하느님은 우리가 준비되었을 때가 아니라 가장 약해졌을 때 우리를 부르십니다.” 무슨 말씀일까? 나는 전혀 이해하지 못했다. 그렇지만 그 말씀이 마음속에 덜컥 떨어져 내려앉았다. ‘나를 두고 하신 말씀은 아니실 테지. 나는 성당 사람이 아닌데⋯ 나는 여기 안 보이는 구석에 앉아 있는데⋯.’ 신부님의 강론을 이해하지는 못했지만 소탈한 화법에 마음이 편했다. 산행 가는 길목에 있는 그 성당을 나는 매주 들렀다. 이유는 설명할 수 없지만 성당에 들어가면 마음이 조금 편해지는 것 같았다. 나는 미사에 참여한다기보다 그 맨 뒷자리에 앉아 있기 위해 성당에 갔다. 신부님의 강론이 시작되기 전까지 조용히 앉아 있기만 했다. 기도하는 방법도 몰랐고 성당 예식과 절차도 몰랐지만, 다른 사람들이 일어서면 따라서 일어서고 앉으면 따라 앉았다. 독서와 강론 시간에 다들 책을 보고 있기에 「매일미사」 책도 따라 사보았다. 앞사람의 등을 유심히 바라보며 “아멘”도 따라 말해보았다. 매번 뒷자리에 앉아 있으니 자릿세라도 내야 할 것 같아서 사람들을 따라서 봉헌금도 내보았다. 어느 날, 나는 여전히 그 긴 의자 맨 뒷자리에 앉아 있는데 한 어르신이 나에게 와서 말을 걸었다. “성사 보실 건가요?” 그때 처음으로 성사라는 말을 들은 것 같다. 그렇지만 성사가 뭔지 몰라서 나름 정중하게 대답했다. “어르신 먼저 하세요.” 어르신은 내 뒤에 있는 두 개의 문 중 하나를 열고 들어갔고 어르신이 들어가자 그곳의 불이 켜졌다. 너무나도 무지했던 나는 그곳을 화장실로 생각한 채 다시 고개를 돌려 앞을 봤다. 늘 앞만 보고 앉아 있었기 때문에 신부님이 그곳을 들어가는 것을 한 번도 보지 못한 터였다. 나중에야 안 사실이지만, 내가 늘 앉던 그 자리는 신부님께서 미사 전 고해소에 들어가기 전에 앉으시는 자리였고 암묵적으로 신자들이 양보하고 있던 자리였다. 그렇지만 그런 사실을 까마득히 몰랐던 나는 그곳이 화장실 앞이어서 사람들이 앉지 않는다고 멋대로 생각하고 있었다. 가끔 나에게 말을 걸어오는 분들도 있었지만, 이전 치료에서 한참 무균실 신세를 졌던 기억에 사람들을 조금 피하고 있었다. 선뜻 말을 걸어 주셨던 선한 신자분들에게 나는 벽을 치는 사람으로 보였을 것이다. 그럼에도 이상하게 성당을 떠나고 싶지는 않았다. 잘 알지 못하면서도 그 자리에 머물고 싶다는 마음이 더 컸다. 지금 생각해보면 하느님을 알지 못했던 때였지만 하느님께서 나를 보고 계신다는 느낌만은 어렴풋이 있었던 것 같다. 한편으로는 그렇게 매주 독서와 강론을 통해서 말씀을 조금씩 전해 들으면서 나는 처음으로 예수님이 곧 하느님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고 또 65년간 교회와 인연이 없던 사람이 가질 수 있는 여러 초보적인 궁금증도 생겨났다. ‘하느님은 정말 모든 것을 다 이루어주시는 분일까?’ 아직 스스로에게도 ‘성당을 다닌다’고 하지 않고 ‘성당에 앉아 있다가 온다’고 하고 있던 나는, 신자분들에게도 신부님께도 말을 걸기가 멋쩍었던 터라 이런 궁금증을 한가득 쌓아가며 성당에 ‘앉아 있으러’ 매번 가고 있었다. 그렇게 6개월이 지나자 본당 신부님께서 조심스럽게 말을 거시며 세례를 받지 않겠느냐고 물으셨다. “세례를 받기 전과 후가 차이가 있나요?” 나의 당돌한 질문에도 신부님께서는 웃으시며 성체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주셨다.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몸으로 오신다고 말씀하셨지만 그때의 나는 그 의미를 이해하지 못했다. 오히려 겁이 났다. 당시 나는 병으로 인해 음식 하나도 조심하던 때였고 밀가루 음식은 전혀 먹지 않고 있었다. 그래서 밀로 만든 성체는 받아 모실 수 없을 것 같다고, 부끄러움을 모르는 무엄한 말들이 내 입에서 마구 튀어나오고 있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얼마나 무지한 말이었는지 모른다. 거룩한 하느님의 몸을 앞에 두고 그것을 밀가루로만 생각했으니 말이다. 몰라서 한 말이었고, 몰라서 지은 죄였다. 그렇게 세례 이야기는 잠시 멀어졌지만 나는 여전히 성당에 나왔다. 잘 모르면서도 그 자리에 계속 앉아 있고 싶었다. 그러다 얼마쯤 지나 다시 세례를 권유받았다. 이번에는 확신이 있어서라기보다 더 이상 미루고 싶지 않다는 마음이 들었다. 그때는 몰랐지만, 비가 오던 날 처음 성당 안으로 나를 불렀던 성상의 하느님 손짓을 참 좋으신 신부님을 통해서 느꼈기 때문인 것이다. 그렇게 나는 세례를 받기로 했다. 강 마리아. 나는 예순여섯에 강 마리아로 다시 태어났다. 세례를 받고 났지만 모든 것이 단번에 달라지지는 않았다. 오히려 몇 개월이 지나고 코로나가 유행하기 시작하면서 성당에 나갈 수가 없게 되었다. 이제 겨우 조금씩 배워가고 있는데 성당을 나갈 수 없는 상황이, 하느님을 뵈러 가는 길이 막히는 상황이 너무 답답하여 신부님께 여쭤봤더니 성경을 읽으라고 권해주셨다. 성경이 곧 하느님이자 가르침과 말씀이라고 하셨다. 사전보다 두꺼운 책, 성경. 나는 왜 성경을 읽을 생각을 못 했던가? 성경을 읽으면 명확한 해답을 찾을 수 있을 것이라고 기대했지만 이 또한 쉽지 않았다. 문제는 내가 성경 말씀 하나하나를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내가 가진 세속적인 논리로는 이해되지 않는 것투성이었다. 성당에 다니는 지인에게 연락해가며 겨우겨우 1년 만에 1독을 끝낼 수 있었다. 2독으로는 신약을 중심으로 신약 복음서와 바오로 서간 등을 읽으면서 공부해보려고 했다. 그런데, 나는 아직도 성경 속의 가르침을 잘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고 오히려 궁금증만 쌓여가고 갈증이 생기기 시작했다. 세례를 받고 신자가 되었고 성경을 완독했는데도 나는 왜 아무것도 모르는가? 이 갈증이 나를 말씀으로 이끌었다. 유튜브를 찾다 보니 가톨릭평화방송을 비롯해 많은 신부님의 강론이 있었고 하루에 대여섯 시간씩 듣는 날도 많아졌다. 강론을 듣다 보면 자주 같은 말씀이 반복되었다. “성체조배를 해보십시오.” “미사보다 큰 기도는 없습니다.” 그 말이 처음에는 잘 와 닿지 않았는데, 또 한 번 고백하자면 성체조배가 무엇인지 정확히 알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래도 성당 안에 조용히 앉아 있는 시간이라면 할 수 있을 것 같아서 성체조배를 시작했다. 잘은 모르지만 감실 앞에 앉아 보기로 한 것이다. 시간은 잘 가지 않았고 머릿속에는 온갖 생각이 밀려들었다. 아픈 몸, 치료 일정, 가족 걱정, 세상 일들이 쉼 없이 떠올랐다. ‘기도가 이렇게 어려운 건가?’ ‘내가 뭘 하고 있는 거지?’ 이런 생각이 들 때마다 그냥 자리를 떠나고 싶어졌다. 그래도 일단 정한 시간만큼은 앉아 있기로 했다. 잘 집중하지 못해도, 아무 말도 하지 못해도, 감실 앞에 머무는 것 자체가 좋다고들 했기 때문이다. 그렇게 겨울 내내 하루에 30분씩 자리를 지켰다. 그러던 어느 날, 사람이 없는 시간에 가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새벽이면 더 조용하지 않을까, 아무도 없는 시간에 혼자 앉아 있으면 덜 산만하지 않을까 하는 마음이었다. 그날 이후로 나는 새벽에 성당을 가기 시작했다. 새벽 3시, 감실 앞에 앉으면 낮과는 전혀 다른 시간이 흘렀다. 신기하게도 그렇게 길게만 느껴지던 시간이 금세 지나갔다. 두 시간이 어떻게 지나갔는지도 모를 지경이었다. 그때도 나는 여전히 기도를 잘하지 못했다. 분심은 여전했고 아무 말도 하지 못한 날도 많았다. 그래도 그 자리에 앉아 있는 시간만은 기다려지기 시작했고, 내가 찾고 있던 것이 ‘잘하는 기도’가 아니라 하느님 앞에 머무는 시간이었음을 조금씩 알게 되었다. 그날 이후로 나는 새벽 3시면 성당으로 향했다. 누가 시킨 것도 아니었고 굳은 결심을 한 것도 아니었다. 2시 30분이면 눈이 떠졌고 몸이 먼저 움직였다. 비가 오는 날도 눈이 오는 날도 예외는 없었다. 아파서 서울 병원에 가야 하는 날에도 새벽 버스를 타기 전 먼저 성당에 들렀다. 치료 때문에 서울에서 하룻밤을 묵어야 할 때에도 병원 원목실이나 근처 성당을 찾아 성체 앞에 앉았다. 그 자리에 앉지 않으면 하루가 시작되지 않는 것 같았다. 기도를 잘하게 된 것은 아니었다. 지금도 분심이 많고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두 시간을 보내는 날도 있고 아직 예수님의 목소리를 들은 적도 없다. 그런데 내 삶에 조그만 변화들이 하나둘 스며들기 시작했다. 놀기만 하는 모임은 점점 마음이 가지 않았고, 그렇게 좋아하던 텔레비전도 어느 순간부터 켜지 않게 되었다. 천 원도 아끼던 내가 성당에 필요하다는 말이 들리면 계산하지 않고 내게 되었고, 도움이 필요한 이웃에게 옷을 사주고 누군가 아프다 하면 먼저 마음이 쓰였다. 내 안의 성격도 조금 달라진 것 같았다. 아프면 주위에 짜증부터 냈었는데, 십자가 위의 예수님을 떠올리며 참는 횟수가 많아지게 되었고 늘 부정적으로만 보이던 일들이 조금씩 다르게 보이기 시작했다. 누군가가 나를 설득한 것도 가르친 것도 아닌데, 성체 앞에 앉아 있는 시간이 내 마음의 방향을 바꾸고 있었다. 지난 추석, 가족들이 모여 앉아 모두가 보고 싶어 하던 임영웅 콘서트 방송을 보던 날이 있었다. 나도 보고 싶었지만 성경을 읽고 싶다는 마음이 더 커서 결국 울면서 방으로 들어가 성경을 펼쳤다. 그 일을 두고 아이들은 그렇게 울 정도면 같이 보지 그랬냐고 아직도 나를 놀린다. 하지만 그 시간은 나에게 ‘보는 시간’이 아니라 하느님을 만나는 시간이었기에 더욱 소중했다. 성당 안 자매들은 내가 많이 달라졌다고 말했고, 성당 밖 친구들은 내가 예수님께 미쳤다고 했다. 어느 쪽 말이든 상관없었다. 나는 내가 어디에 머물고 있는지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성체조배는 나를 특별하게 만들지 않았다. 다만 매일 같은 자리에서, 같은 시간에 하느님 앞에 나를 내려놓게 했다. 그 시간이 쌓여 어느덧 5년이 되었고 하루도 빠지지 않았다. 그것은 내가 할 수 있는 것이었고 내가 받은 은총에 대한 응답이었다. 구글 제미나이 제작 어느 날은 성체 앞에 앉아 있다가 복음이 더 이상 나 혼자만의 위로로 머물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이라도 하느님을 만나서 감사하고 행복한 마음이었지만, 항암을 받을 때, 수술을 받을 때, 응급실에서 사경을 헤맬 때에도 하느님을 알고 있었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는 마음이 뒤늦게 밀려왔다. 내 평생 가장 후회되는 일이 하느님을 너무 늦게 알았다는 것이다. “너희는 온 세상에 가서 모든 피조물에게 복음을 선포하여라”(마르 16,15) 하신 당부가 그때는 유난히 또렷하게 마음에 남았다. ‘땅끝까지 복음을 전하라’ 하셨는데 그 땅끝이 꼭 먼 곳일 필요는 없겠다는 생각도 함께 들었다. 나에게 주어진 가장 가까운 자리, 가족과 오랜 친구들, 신앙에서 멀어져 있던 이들부터가 내가 서 있는 땅끝일 수 있겠다는 생각이었다. 그래서 나는 누군가를 설득하기보다 먼저 그들 곁에서 살아내는 쪽을 택했다. 복음은 말보다 삶으로 먼저 건네질 수 있다는 것을, 그분께서 성체 앞에서 차분히 가르쳐 주고 계셨다. 남편은 평생 신앙에 관심이 없었다. 아니, 기독교 재단과 관련된 직장 생활을 하면서 오히려 안 좋은 기억이 있었는지 적대적이기까지 했다. 성당에 다니는 나를 이해하려고 노력은 했지만 함께 가겠다고 말한 적은 없었고 나 역시 먼저 권하지 않았다. 괜히 설득하려 들면 오히려 마음이 멀어질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그저 매일 새벽, 성체조배를 위해 성당에 다녀오는 일상을 그대로 살아갔고 남편은 그 모습을 묵묵히 지켜보았다. 어느 날, 남편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왜 그렇게까지 성당에 가? 새벽마다? 몸도 안 좋은 사람이⋯. 힘들지 않아?” 남편의 질문에는 비난도, 호기심도, 설득의 의도도 없었다. 그저 이해하고 싶다는 마음이 담겨 있었다. 나는 잠시 말을 고르다가 이렇게 대답했다. 성당이 좋아서 가는 게 아니라 그곳에서 만나는 예수님이 좋을 뿐이라고. 이 말은 설명이라기보다 고백에 가까웠다. 나 자신도 아직 그 마음을 온전히 말로 옮길 수 없다고 느꼈기 때문이다. 왜 좋은지, 무엇이 어떻게 달라졌는지를 말로 풀어낼 수는 없었다. 그분 앞에 앉아 있는 시간이 좋았고 그 시간 속에서 내가 다시 정돈된다는 사실만은 분명했다. 얼마 뒤 아무 예고도 없이 남편이 말했다. 한 번 같이 가보자고. 특별한 이유도 결정적인 계기도 없었다. 남편은 성당에 나오기 시작했고, 내가 그랬듯이 어느새 그 자리에 익숙해졌고 세례를 받았다. 그렇게 우리는 마리아와 요셉이 되었다. 신앙에 대해 길게 말한 적도 없고 성경 말씀을 들이민 적도 없었기에 그 시간을 떠올릴 때마다 나는 하느님께서 직접 부르셨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덕분에 요즘 우리는 함께 성경을 읽고 기도문을 낭송하고 미사를 간다. 물론 남편은 예전에 내가 그랬던 것처럼 성경 말씀 하나하나를 분석하고 따지고 들고 있다. 어이가 없기도 하고 웃음이 나는 이런 상황이 되면, 나는 남편의 손을 잡고 이렇게 말한다. “요셉 씨, 우리 그냥 성경 큰 소리로 읽읍시다. 그리고 말씀을 믿으면 돼요.” 딸도 마찬가지였다. 나를 닮아 고집이 센 딸은, 흔히 말하는 가방끈이 긴 딸은 엄마 말을 순순히 따르는 타입은 아니다. 성당을 다니는 엄마를 응원해줬지만, 본인이 하느님을 알아가고 싶어 하지는 않았다. 그런데 어느 봄날, 전화로 하느님은 어디 계시냐고, 왜 성당에 가느냐고 물었다. 나는 아는 만큼만 답했고 모르는 것은 모른다고 말했다. 그러다 딸도 동네 성당에서 입교하게 되었다고 연락이 왔다. 가족들이 하느님의 사랑과 말씀을 조금씩 배워갈 무렵 나는 레지오 마리애에 참여하며 곁에 머무르는 신앙을 실천하려고 했다. 누군가에게 무엇을 해야 한다는 의무감이라기보다는 이 은총을 혼자만 품고 있기에는 마음이 불편해지는 감각에 가까웠다. 그래서 나는 조금 더 먼저 말을 건네기 시작했다. 신앙 이야기를 꺼내기보다는 그 사람이 서 있는 자리를 묻는 쪽을 선택했다. 성당에 오기까지의 망설임, 다시 멀어지게 된 이유, 혹은 아직도 설명하기 어려운 거리감에 대해 묻고, 듣고, 판단하지 않으려 애썼다. 그 과정에서 내가 해줄 수 있는 것은 방향을 제시하는 일이 아니라 함께 앉아 있어 주는 일이었다. 방향은 언제나 하느님께서 제시해주심을 알기 때문이다. 이 마음은 자연스럽게 내가 사랑하는 친구들에게 이어졌다. 오랜 친구들 중 많은 이들은 나보다 훨씬 먼저 하느님을 알게 되었지만 냉담을 하고 있었다. 나는 동창 모임 식사자리에서 그들과 함께 앉아 큰소리로 성호경을 그었다. 그리고 그들의 이름을 세례명으로 불러주며 하느님 앞에서 그들이 받은 은총과 믿음을 기억했다. 머뭇거리던 친구들도 하나둘 소리 내며 성호경을 그었고, 그들은 그렇게 하나 둘 교회로 돌아오고 있었다. 성당 공동체 안에서도 비슷한 시간이 있었다. 작년 초, 세례를 받은 지 얼마 되지 않은 한 자매가 눈에 들어왔다. 늘 혼자 다니며 고개를 숙이고 있었고 성당 생활도 아직 익숙하지 않아 보였다. 먼저 다가가 말을 걸고 가벼운 이야기로 웃기도 하며 조금씩 가까워졌다. 미사와 성당 생활에 대해 물으면 아는 만큼 차분히 설명해 주었다. 어느 날 그 자매는 남편이 투병 중인데, 자신이 성당에 나오는 것을 달가워하지 않아 늘 불편한 마음으로 겨우 미사에 온다고 털어놓았다. 그래도 남편을 위해 할 수 있는 일이 이것뿐이어서 포기하지 않고 나오는 것이라고 했다. 나는 함께 기도하자고 했다. 그리고 나 역시 투병을 겪으며 하느님 앞에 서 있었던 시간과, 누구도 살 것이라 기대하지 않았던 내가 지금 이 자리에 있다는 사실을 나누었다. 사실 나는 그런 이야기를 다른 사람들에게 하는 것을 꺼렸었다. 그런데 나를 닮은 이 자매에겐 그 이야기들이 술술 나왔다. 이후 우리는 종종 함께 기도했고 결과를 앞당기기보다 하루하루를 하느님 뜻 안에서 살아내는 것이 중요하다는 이야기를 나누었다. 얼마 뒤 성당에 나오는 것을 말리던 그 자매의 남편도 성당에 나오기 시작했고, 시간이 지나 세례를 받았다. 또 한 번 누군가를 설득하기보다는 곁에 머물며 함께 기도하는 시간이 하느님께서 일하시는 자리가 될 수 있음을 느끼게 되었다. 돌아보면 성체조배는 나를 종교인이 아니라 신앙인으로 만들어 준 시간이었다. 매일 같은 자리에서 하느님 앞에 나를 내려놓게 했고, 말씀을 생각하며 내 말과 선택의 방향을 조금씩 바꾸어 놓았다.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먼저 알게 한 것이 아니라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천천히 배워가는 시간이었다. 하느님 앞에 머무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내 삶이 조금씩 가벼워지고, 더 많이 말하기보다 덜 판단하게 되었고, 앞서기보다 기다리는 쪽을 택하게 되었다. 신앙이란 결국 하느님을 설명하는 능력이 아니라 하느님 앞에서 살아가는 태도라는 것을 배워가고 있기 때문이다. 일흔둘, 나는 여전히 서툰 신자이고 나이 많은 아기이다. 하느님께서 내게 맡기신 복음을 통해 그리스도인의 향기를 조금씩 찾아가며 하느님 앞에 머무는 자리를 떠나지 않으려 애쓰는 사람으로 살아가고 있을 뿐이다. 요즘 나는 성경 10독 중인데, 오늘도 성경의 이 두 말씀을 마음에 새긴다.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신명 6,5)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레위 19,18) 이 말씀들은 외침이라기보다 하루를 시작하기 전에 나를 다시 바로 세우는 문장에 가깝다. 성당의 마당만 밟고 지나가는 신자가 아니라, 말로만 “주님, 주님”을 부르는 사람이 아니라, 삶으로 그분을 경외하는 신앙인으로 살아가고 싶다는 마음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오늘도 성체 앞에서, 그리고 일상의 자리에서 이 마음을 조용히 되새기며 하루를 연다. “주님, 주님.” 이 고백으로 이 글을 마무리한다. 강남년 마리아cpbc2026.03.11
![[생활속의 복음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https://img.cpbc.co.kr/newsimg/upload/2026/05/13/8tR1778639936660.jpg)
[생활속의 복음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주님 승천 대축일 마태 28,16-20 피에트로 페루지노 작 ‘그리스도의 승천’ ‘하늘’은 일반적으로 두 가지 의미를 함축한다. 하나는 천문학의 탐구 대상인 ‘천체 우주’이고, 다른 하나는 여러 종교에서 거론되는 상징 언어인 ‘천상 낙원’이다. 자연 현상에 일방적으로 종속됐던 인류는 생존의 필수 요소인 빛과 비를 제공하는 태양과 구름이 있는 하늘을 숭배하였다. 호의를 베푸시는 하느님과 풍요와 안정의 토대를 마련해 주는 하늘이 자연스럽게 연결되었다. 타 종교와 대조되는 그리스도교의 특징은 하늘에 대한 양면적 접근이다. 한편으로, “하늘”(창세 1,8)과 하늘에 펼쳐진 “빛물체들”(창세 1,14: 해·달·별)은 ‘하느님의 피조물’이다. 고대 종교의 하늘에 대한 신성화를 부정하려는 방편으로 하늘이 상대화되었다.(1열왕 8,27; 시편 148,1-3 참조) “천지의 창조주”(사도 신경) 고백을 통해 만물을 존재케 하는 바탕인 하늘조차도 하느님의 작품으로 간주한다. 다른 한편으로, 주님의 기도 첫 문구 “하늘에 계신”이 의도하는 바와 같이, 하늘은 ‘하느님의 거처’(신명 26,15 참조)다. 구약 성경은 ‘죽음을 겪지 않은’ 이의 하늘을 향한 공중 부양을 보도한다.(에녹: 창세 5,24 / 엘리야: 2열왕 2,11) 이 하늘은 하느님과의 일치를 이룬 지복직관에 도달한 이가 진입하는 ‘특정 공간’(천국)으로 이미지화되었다.(2코린 5,1 참조) 상하 개념과 연계하여 반대말로 추정되는 하늘과 땅은 ‘땅 위 하늘’과 ‘하늘 아래 땅’ 차원에서 ‘구분되지만 분리되지 않는’ 관계 언어다. 만물을 포괄하는 개념인 ‘천지’는 하느님의 피조물이며, “만물을 충만케 하시는 그리스도”(에페 1,23)의 ‘새로운 피조물’(새 하늘과 새 땅: 묵시 21,1)이다. 성경은 하늘과 땅 사이의 하강과 상승 구도를 통해 하느님의 구원 업적을 전개한다. ‘첫 번째 오심’(성탄)은 태초부터 아버지와 함께 있던 아들의 인류를 위한 ‘하늘에서 내려오심’(강생)이다.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하늘로 올라가심’(승천)은 ‘두 번째 오심’(재림)의 시작이다. “하늘로 올라가신 모습 그대로 다시 오실 것이다.”(사도 1,11) ‘죽음을 겪은’ 그리스도의 승천은 ‘하늘과 땅’(성과 속)의 분리를 전제로 땅에서 탈출하는 공중 부양이 아니라 “내가 세상 끝날까지 언제나 너희와 함께 있겠다”(마태 28,20)는 약속을 구현하는 ‘새로운 현존’에 대한 공지다. “어찌하여 살아 계신 분을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찾고 있느냐?”(루카 24,5)라는 빈 무덤에 등장한 눈부시게 차려입은 두 남자의 물음처럼, 승천을 시각화한 사도행전은 흰옷을 입은 두 사람을 통해 묻는다. “왜 하늘을 쳐다보며 서 있느냐?”(1,11) 그리스도가 승천한 하늘은 두 가지 관점으로 해석될 수 있다. 첫째, ‘올라가신’ 하늘은 미지의 특정 구역이 아니라 하늘과 맞닿은 ‘내려오신’ 땅을 암시한다. 부활은 ‘언제나’(죽음 후에도), 승천은 ‘어디나’(하늘 아래에도) 현존하고 활동하는 하느님을 입증한다. 둘째, ‘올라가신’ 하늘에 대한 막연한 동경이 ‘내려오신’ 땅에 대한 구체적 집중으로 교정된다. 하느님의 거처는 땅 위의 ‘저 하늘’이 아니라 하늘 아래의 ‘이 하늘’(땅)이다. ‘사랑이 있는 곳에 하느님이 계신다.’(1요한 4,12 참조) “하느님의 거처는 사람들 가운데에 있다.”(묵시 21,3) cpbc2026.05.13

시작 예식 (04)[월간 꿈 CUM] 전례 _ 미사 해설 (09) 파올로 베로네세, 카나의 혼인 잔치, 1563년, 캔버스에 유채, 666x990cm, 루브르 박물관, 파리, 프랑스 성수예식 (聖水 禮式) 성수예식(Asperges)이란 주일미사의 시작 예식에서 사제 자신은 물론 신자들과 봉사자들에게 성수를 뿌리는 예식이다. 때로는 정화와 하느님의 축복을 청할 목적으로 한 사람이나 많은 사람, 또는 물건과 건물 등에 성수를 뿌리는 예식을 뜻하기도 한다. 준성사(準聖事, Sacramentalia)인 이 예식은 축성이나 강복을 하는 예식 속에 포함되어 거행되고 있다. (1) 의미 성수예식은 전례에서 통상 사람이나 물건의 정화와 축복의 표지로 성수를 뿌리는 행위를 뜻한다. 그러므로 모든 성수예식은 기본적으로 정화와 축복이라는 이중적인 효과를 지닌다. 그러나 성수예식 가운데 가장 기본적으로 중요한 것은 세례이다. 부활성야 때 성수를 뿌리고, 병자성사나 장례예식 거행에서도 성수예식으로써 세례를 기억하게 한다. 그러므로 성수예식은 세례의 기억, 그리스도가 구원을 위하여 흘린 피의 기억, 모든 허물과 죄로부터의 정화 등의 의미를 갖는다. (2) 예식 거행 성수예식은 물 축복과 성수 뿌림 그리고 마침 기도로 구성된다. 물 축복 후 주례 사제는 자신과 봉사자들과 신자들에게 성수를 뿌린다. 사제가 성수를 뿌릴 때 신자들은 고개를 숙여 십자성호를 긋고, 예식에 맞는 성가 곧 세례의 기원과 효과를 암시하는 내용의 노래를 부른다. 이 예식은 참회를 대신하는 시작 예식의 한 부분이므로 참회 예식은 자동적으로 생략되며, 이어서 대영광송 또는 본기도로 미사는 계속된다. 자비송 (Kyrie) : 자비를 구하는 기도 (1) 의미 자비송은 우리 미사 안에 현존하시는 주님께 대한 고백이며 “두 사람이나 세 사람이라도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함께 있기 때문이다”(마태 18,20)라고 한 그리스도의 약속에 대한 공동체의 대답이다. 또한 자비송은 우리에게 자비를 베푸시는 그리스도께 향한 외침이다.(마르 10,46-52 참조) 결론적으로 자비송은 “예수 그리스도는 주님이시다”라는 고백이다. (2) 성경적 근거 ① “예수 그리스도는 주님이시다.”(필리 2,11) ② “다윗의 자손이시여,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마르 10,48) (3) 실천 자비송은 우리의 가련함을 불쌍히 여기시는 그리스도께 대한 찬미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깊은 수렁에 빠져있음을 느끼고 주님의 자비를 청해야 한다.(마르 10,46-52 참조) 제3양식으로 참회예식을 하였을 때에는 자비송을 바치지 않는다. 대영광송 (Glory to God) (1) 의미 대영광송은 사순시기와 대림시기 이외의 모든 주일, 대축일과 축일, 그리고 성대하게 지내는 특별한 거행 때(서품식, 서원식, 성당 봉헌식, 세례식 등) 부르는 하느님 찬미의 노래이다. ‘영광’이라는 말은 본래 하느님 자신을 뜻하는 말이었다. 따라서 그분이 드러나시는 것은 곧 그분의 영광이 드러나는 것이 된다. 하느님을 찬미하는 노래 또는 기도, 찬사를 ‘영광송’이라고 부르며 “영광이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로 시작하는 기도를 소영광송이라 하고 “하늘 높은 곳에는…”으로 시작하는 기도는 대영광송이라 한다. 대영광송은 교회가 성령과 함께 성부, 성자께 영광을 드리는 대표적 찬미가이다. 이는 하나의 신앙고백인 동시에 감사의 노래이기도 하다. (2) 구분 대영광송은 세 부분으로 나눌 수 있다. 첫째 부분은 천사의 노래이다.(루카 2,14) 둘째 부분은 “주 하느님…”으로부터 “주님 영광 크시오니 감사하나이다”까지로 성부께 대한 환호이다. 셋째 부분은 “주 하느님 성부의 아드님… 아멘”으로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찬양과 간청의 노래이다. (3) 성경적 근거 ① 루카 2,14 :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느님께 영광…. ② 1코린 2,8 : 영광의 주님 ③ 요한 1,14 : 말씀이 사람이 되시어 우리 가운데 사셨다. 우리는 그분의 영광을 보았다. ④ 요한 2,11 : 당신의 영광을 드러내셨다. (4) 실천 초대 교회 때부터 내려오는 가장 오래된 성가인 대영광송은 신앙에서 우러나오는 신앙의 외침이며 찬미의 기도이다. 대영광송은 우리의 기초를 다시금 상기시키는 의미도 들어있기 때문에 ‘확신’을 가지고 외쳐야 한다. 또, 주님을 주님으로 받들어 모실 때 그분에게 영광이 된다. 그러므로 하느님께 크게 영광을 드리는 대영광송은 하느님의 전지전능을 그대로 인정하고 높이 받든다는 뜻이다. 따리서 대영광송을 바치는 것은 미사 때에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일상생활에서도 나의 영광이 아니라 주님의 영광이 드러나도록 해야 한다. 본기도 (Opening Prayer) (1) 의미 미사 중 공동체의 대표인 사제가 공동체와 함께 바치는 공적인 기도로 첫 번째 것이자 시작예식을 마무리하는 기도이다. 사제는 “기도합시다”라는 말로 공동체를 기도에 초대한 후 잠시 침묵 중에 세례를 통하여 공동체 구성원 모두에게 부여된 보편 사제직의 수행을 충실하게 실천하고자 전체 공동체의 마음과 정신이 한데 모아질 수 있도록 시간을 가진다. 그리고 이어서 교회에서 공식으로 바쳐오던 내용대로 함께 기도한다. (2) 기도 내용 하느님의 신비에 대한 찬양과 공동체의 염원으로 되어 있다. (3) 팔을 벌린 자세 사제는 서서 두 팔을 펴고 옛 이스라엘인들이 취했던 자세로 본기도를 바친다. 옛날에는 기도할 때 항상 동쪽 방향을 향해서 이 기도를 바쳤다. 동쪽은 해가 뜨는 곳이다. 동쪽을 향해 기도를 바치는 것은 빛으로 이 세상에 오신 참 태양이신 그리스도를 향해 바치는 것이다. (4) 실천 본기도 끝에 “아멘”이라고 응답하는데, 이것은 사제가 드린 기도가 우리 모두의 것임을 인정한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기도 중에 우리가 하느님 앞에 서 있음을 의식하고 간절한 마음으로 참여하자. 이 본기도로 시작 예식이 끝나고 이제, 말씀 전례가 이어진다. 글 _ 박정배 신부 (베네딕토, 수원교구 용인본당 주임) 1992년 사제서품. 수원교구 성소부장과 수원가톨릭대학교 영성지도, 수리산성지 전담 신부 등을 역임했으며 양지본당, 광북본당, 샌프란시스코 한인본당, 신둔본당, 철산본당 주임을 지냈다. cpbc2026.09.16
![[가톨릭 문화산책]<1> 묵주기도와 함께하는 가톨릭미술(1)](//cpbc.co.kr/CMS/newspaper/2013/01/rc/438173_1.2_titleImage_1.jpg)
[가톨릭 문화산책] 묵주기도와 함께하는 가톨릭미술(1) 하느님의 부르심에 순종하는 마리아, 인류 구원의 길로 산업화와 정보화 시대를 지나 '문화와 영성의 시대'다. 교회는 따라서 인간 문화를 복음의 빛으로 조명하고 쇄신함으로써 참된 문화를 고양하고자 한다. 새해를 맞아 가톨릭 문화와 영성을 되돌아보는 '가톨릭문화산책'을 기획, 가톨릭 미술과 음악, 영화, 건축 등 네 분야별로 가톨릭 문화의 진수와 그 향기를 풀어놓는다. 작품 : '주님 탄생 예고', 12세기 초, 산 마르코 성당 모자이크 일부, 베네치아 ● 환희의 신비 1단 : 마리아께서 예수님을 잉태하심을 묵상합시다 ● 묵상 단어 : 기쁜 소식, 순종, 만남'주님 탄생 예고'는 가브리엘 천사가 마리아를 방문해 예수를 잉태했음을 알리는 대목을 그린다. 요한 세례자의 탄생을 예고한 지 반년이 되자 가브리엘 천사는 나자렛으로 가서 요셉의 약혼자 마리아에게 '지극히 높으신 분의 아드님'을 낳을 것이고, 그분의 나라는 끝이 없을 것이라고 예고한다. 천사는 마리아에게 아기는 성령이 내려와 잉태될 것이고, 아이를 못 낳는 여자라고 불리던 친척 엘리사벳도 이미 임신한 지 여섯 달이 됐음을 일러줬다. 이에 마리아는 "보십시오,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말씀하신 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루카 1,38)"하고 대답한다. 마찬가지로 천사는 요셉에게 가서 약혼자가 임신한 것을 알리고, 그에게 "다윗의 자손 요셉아, 두려워하지 말고 마리아를 아내로 맞아들여라. 그 몸에 잉태된 아기는 성령으로 말미암은 것이다. 마리아가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예수라고 하여라. 그분께서 당신 백성을 죄에서 구원하실 것이다"(마태 1,20-22)하고 알렸다. 루카 복음서는 갈릴래아 지방 나자렛이라는 고을의 마리아에게 가브리엘 대천사가 나타나 '기쁜 소식'을 알리는 이야기를 기록하고 있다. 일반적으로 '주님 탄생 예고' 도상에 나타나는 기본적 세 요소는 천사와 마리아, 마리아를 향해 하늘에서 내려오는 성령의 비둘기다. 그러나 황금색으로 배경을 가득 채운 이 모자이크 작품에서는 성령의 비둘기는 보이지 않고, 하늘의 천사와 우물 가까이에 있는 마리아만이 보인다. #축복을 주는 천사 작품 왼쪽 위에는 하느님의 천사 가브리엘이 표현돼 있다. 천사의 오른손은 전형적인 축복의 동작으로 마리아를 가리키고 있다. 천사는 "은총이 가득한 이여, 기뻐하여라. 주님께서 너와 함께 계시다"(루카 1,28)하고 말하며, 마리아를 '복된 여인'이라 지칭한다. 오래전부터 전해 내려오는 전승에 따르면, 마리아가 세 살이 돼 젖을 떼자 안나와 요아킴은 제물과 함께 딸 마리아를 성전으로 데리고 가서 다른 동정녀들과 함께 성전에 두고 집으로 돌아왔다고 한다. 마리아는 성전에서 거룩함 속에 착실하게 성장하는데, 천사들 보호 아래서 하느님의 환상을 즐기며 거룩하게 지냈다. 마리아는 동틀 무렵에서 오전 9시 전후까지 기도, 오전 9시부터 오후 2시 내지 3시까지 천 짜는 일, 그 이후부터는 천사가 나타나 음식을 가져다 줄 때까지 쉬지 않고 기도했다고 한다. 마리아는 성전에서 기도하고 말씀 안에서 일하며 살았으며, 이어 요셉의 신부로 혼인 약속을 한다. 이렇게 하느님의 말씀 안에서 성장한 마리아에게 성전에서의 생활은 실로 커다란 하느님 역사를 준비하라는 과정이었을 것임에 틀림없다. #놀란 동정녀 마리아 그림 중앙에는 작은 주전자를 들고 있는 마리아가 있다. 천사의 인사에 마리아는 놀란 표정이다. 처음에는 어디서 들려오는 소리인지 알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나 마리아는 뒤를 돌아보고서야 비로소 하늘에서 들려오는 천사의 목소리라는 것을 알고 소스라치게 놀란다. 많은 화가는 '주님 탄생 예고' 장면 중 마리아를 표현하는 데 있어, 마리아가 기도하고 있을 때 천사가 알렸다고 간주하고 책과 함께 마리아를 나타내곤 했다. 그래서 미술가들은 시편을 손에 든 마리아를 그렸다. 마리아의 자세는 주님 말씀을 들으며 주님과 교감을 나누는 동작으로 그려졌으며, 무릎 위에는 책이 올려진 것으로 묘사되고 있다. 하지만 성경 본문에는 단지 천사의 인사만이 언급돼 있을 뿐 마리아의 동작 상태에 대해서는 아무 말도 없다. 이 모자이크 작품은 '주님 탄생 예고' 내용을 기도 중인 모습이 아니라 물을 길어 우물로 향하는 모습으로 그려 비잔틴적인 특성을 보인다. 비잔틴 도상의 경우를 보면, 천사는 마리아에게 두 단계로 출현한다. 먼저 천사는 우물에서 물을 길어 올리는 마리아에게 나타나 말하고, 이어 마리아가 집에서 성전을 위해 자색 베일을 짜는 일에 열중하고 있을 때 나타난다. 첫 장면은 동방의 사막 지역에서 물이 갖는 중요성을 드러낸 것이고, 두 번째로 마리아가 자주색 실을 길게 잡고 있는 도상은 새로운 이브의 역할을 암시하는 표현으로, 원죄 후에 실을 짜는 것으로 죄 값을 치르는 운명을 뜻한다. 이 모자이크의 '주님 탄생 예고'는 비잔틴적 전통 도상을 토대로 우물가에서 생각지도 않은 인사와 함께 "두려워하지 마라"(루카 1,28-30)하고 말하는 천사의 목소리를 듣고 나서 놀라고 걱정스러워하는 마리아를 묘사한다. 하지만 마리아는 놀라움과 동시에 경배의 몸짓으로 무릎을 굽히고 있다. 이미 마리아의 머리 위에는 그리스어로 "하느님의 어머니"라고 새겨져 있는 것이 확인된다. #나자렛의 집 루카 복음사가는 '주님 탄생 예고' 이야기의 배경을 갈릴래아의 산들로 둘러싸인 아름다운 작은 고을 나자렛으로 설정한다. 성경 본문에서 "천사가 마리아의 집으로 들어가 말하였다"(루카 1,28)는 문장의 '들어가다'라는 표현은 천사의 움직임을 묘사한 것으로, 마리아가 집 안에 있었다는 사실을 추정하게 한다. 서양에서 '주님 탄생 예고' 도상은 일반적으로 왼쪽에 천사가 있고 오른쪽에 마리아가 있어 양쪽으로 분리되는 장면이 보편적이나, 때로는 마리아 집을 실내나 실외로 설정해 전체적 주제나 분위기를 변화시키는 때도 있다. 실외는 나자렛 고을이나 집 대문 아래를 배경으로 하는 반면에 실내를 배경으로 할 때에는 건축 구조를 두 공간으로 나누기도 했다. 여기서 한 공간은 천상 세계로 천사를 배치하고, 또 다른 공간은 지상 세계로 마리아를 배치하곤 했다. 이 모자이크는 '주님 탄생 예고' 장면을 조금 특별하게 묘사하고 있다. 장면은 실외로 나자렛을 배경으로 하고 있으나, 마을에서 약간 떨어진 곳으로 묘사한다. #작은 주전자 마리아는 손에 이미 물을 담은 듯 손잡이가 달린 작은 주전자를 쥐고 있다. 이 물 주전자는 아주 중요한 의미를 담고 있다. 둥근 형태의 주전자는 바로 어머니의 자궁을 연상시킨다. 주전자가 물을 담는데 사용되는 것처럼, 마리아도 천사가 전한 "하느님의 아들 예수를 잉태할 것이다"는 말에서 자신의 역할이 무엇인가를 깨닫는다. 마리아는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말씀하신 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루카 1,38)하고 말하며, 하느님 말씀에 겸손하게 "예"하고 순종으로 받아들인다. #우물과 녹색 나무 작품 오른쪽에 상당히 단순하게 표현된 우물이 있다. 마을과 좀 떨어져 있는 우물은 집이나 동물들에게 사용할 물을 그곳에서 퍼올리기 위해서 팠다. 따라서 우물은 마을 사람들이 만나는 장소가 되기도 하고, 지나던 길손이 목을 축이기 위해 머물고, 새로운 소식이나 정보를 교환하는 장소가 되기도 한다. 때문에 우물은 서로에 대해 알고 가족 간에 혼인을 성사시킬 수 있는 '만남의 장소'가 되기도 했다. 모세와 그의 아내, 야곱과 라헬, 이사악과 레베카가 혼인했을 때도 우물이라는 장소가 등장한다. 이 작품 역시 우물이라는 장소에서 이뤄지는 마리아와 천사의 만남을 통해 새로운 계약을 성사시키려 한다. 사실 마리아는 요셉과 혼인을 하게 되지만 마리아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느님 아들을 잉태한다. 또 '봉해진 우물'(아가 4,12), '정원의 샘 생수가 솟는 우물'(아가 4,15)이라고도 불리는 마리아는 풍요롭고 순결한 모성을 의미한다. 우물 옆에는 녹색 나무 한 그루가 단단하게 우뚝 솟아 있다. 시들지 않은 이 나무는 에덴동산의 생명나무를 연상케 하는 것으로, '영원한 생명'을 상징한다. 하와는 하느님께서 따먹지 말라는 생명나무 선악과를 따먹어 하느님 뜻을 거역했고, 마리아는 하느님 뜻을 전하는 천사의 말에 그대로 순종한다. 하와는 하느님 말씀을 거역해 인류에게 죽음을 초래했지만, 마리아는 순명해 인류를 구원한다. 하느님과 인간 사이에 '옛 계약'은 무너졌지만,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새로운 계약'으로 대체되는 것이다. 또 나무 뿌리를 자세히 살펴보면, 나무는 우물이 파진 땅에 깊이 뿌리를 내리고 있다. 성경에 "오히려 주님의 가르침을 좋아하고 그분의 가르침을 밤낮으로 되새기는 사람. 그는 시냇가에 심겨 제때에 열매를 내며 잎이 시들지 않는 나무와 같아 하는 일마다 잘되리라"(시편 1,2-3)는 구절처럼, 하느님을 믿는 사람은 나무처럼 전혀 물의 부족함이 없어 나뭇잎들은 항상 푸르고 전혀 시들지 않으며 언제나 풍성한 열매를 맺게 된다는 것이다. 바로 우리 모두의 어머니이신 성모 마리아의 삶이다. 윤인복 교수(아기 예수의 데레사, 인천가톨릭대 대학원 그리스도교 미술학과)조은일2013.01.15
![[생활속의 복음] 명사의 사랑, 동사의 사랑](https://img.cpbc.co.kr/newsimg/upload/2026/05/06/ZLW1778042453852.jpg)
[생활속의 복음] 명사의 사랑, 동사의 사랑부활 제6주일 요한 14,15-21 장 밥티스트 드 샹페뉴 작 '선한 목자' ‘정보의 홍수’ 시대에 부각하는 현안은 ‘노아의 방주’(창세 6,18 참조) 역할을 위한 정보의 진위 판별과 우선순위의 배열이다. 획일적 원칙을 제안할 수 없는 판별과 배열은 공통으로 ‘신뢰’를 기반으로 구축된다. 신뢰의 두 가지 근간은 명확한 ‘가치’ 설정과 이에 수반되는 ‘책임’ 이행이다. 조직·기관의 권위를 신뢰의 토대로 간주했던 과거와 달리, 현대 사회에선 신뢰와 권위가 분리되었다. 전통적 권위가 신뢰를 보증하지 않고, 검증된 신뢰가 권위를 창출한다. 정보의 홍수와 더불어 등장한 ‘표현의 홍수’ 현상 중 하나인 한국 사회의 사랑 표현은 과거와 달리 매우 개방적이다. 엄지와 검지를 교차하거나 양손과 양팔로 연출하는 ‘사랑의 상징 기호’(하트), 문자 메시지에 빈번히 입력하는 하트 이모티콘이 이를 대표한다. 사랑의 확산이라는 긍정적 진단 이면에, 이 양상이 간과하는 측면에 대한 숙고가 필요해 보인다. 사랑은 가벼운 유쾌함과 동시에 무거운 책임감을 동반한다. 언어와 기호로 굳이 표현되지 않더라도, 사랑은 책임 있는 실천을 통한 무언(無言)의 힘과 향으로 전파된다. “너희가 나를 사랑하면 내 계명을 지킬 것이다.”(요한 14,15) 사랑은 ‘명사’(고백 언어)이며 ‘동사’(수행 언어)다. 다양한 형태를 취하기에 한 문장으로 정의할 수 없는 ‘사랑’은 중압감 있는 인내와 희생을 요청하는 ‘사랑한다’로 증명된다. 동사의 사랑은 과거-현재-미래를 포괄하는 시간적 구성으로 전개된다. 과거의 행적을 종합한 신뢰의 축적으로부터 사랑이 시작된다. 상대에 대한 신뢰는 사랑의 요람이다. ‘신뢰할 만함’(과거)으로부터 귀결된 ‘사랑 고백’(현재)은 상대와 ‘함께 있고’, 상대 ‘안에 있는’ 국면으로 진입한다. 나아가, 사랑은 ‘책임 있는 미래’를 설계한다. 상대의 선(善)을 지향하는 사랑은 ‘너와 나’(우리)의 공동선을 기획한다. 미래적 사랑의 또 다른 표현이 ‘희망’이다. 이스라엘 역사에서 구현된 하느님의 사랑을 기술하는 성경은 ‘세상 창조’(시작)부터 약속에 성실했던 ‘신뢰할 만한’ 하느님을 소개한다. 이 약속은 ‘어디서나 우리 옆에 있는 하느님’(성자: 부활하신 그리스도), ‘언제나 우리 안에 있는 하느님’(성령: 진리의 영)을 통해 ‘여기서 지금’ 성취되고 있다. “너희가 내 안에 있으며 내가 너희 안에 있음을 깨닫게 될 것이다.”(요한 14,20) ‘세상 종말’(마침)까지 책임지는 시작이요 마침인 하느님은 ‘하느님 나라’를 향하는 우리를 인도한다. 그리스도인의 소명은 이 “희망에 관하여 누가 물어도 대답할 수 있도록 언제나 준비”(1베드 3,15)하는 태도를 갖추는 것이다. 하느님의 사랑에 대한 압축적 서사가 신앙이 선사된 근거인 “그리스도를 통하여”(로마 1,8)와 사랑으로 생명을 보장받은 상태인 “그리스도와 함께”(필리 1,23), “그리스도 안에서”(1코린 15,22)란 문구로 고백된다. 이 신앙과 사랑은 “그리스도를 향한”(2코린 11,3) 우리의 희망을 통해 궁극적으로 완성될 것이다. 성경의 형성 과정 중 후기에 집필된 요한계 문헌의 저자는 ‘하느님의 사랑’(동사)을 ‘하느님인 사랑’(명사)으로 제시한다. “하느님은 사랑이십니다.”(1요한 4,16) cpbc2026.05.06

붉은 말처럼 힘차게 영성의 초원 달리자병오년 새해 결의를 다지는 책교회 밖 달력으로 새해가 시작됐다. 병오년, ‘붉은 말의 해’라고 한다. 불의 기운과 말의 역동성이 더해져 어느 때보다 에너지 넘치는 한 해가 기대되는 2026년. 다방면에서 새로운 결의를 다질 수 있는 책들과 함께 달려보자. 평화가 모두와 함께 / 레오 14세 교황 / 가톨릭출판부 편집부 옮김 / 한영만 신부 감수 / 가톨릭출판사 레오 14세 교황 초기 연설과 강론 「평화가 모두와 함께」는 레오 14세 교황이 목자로서 새로운 여정을 시작한 이후 초기 연설과 강론을 엮은 책이다. 교황이 어떠한 세계관을 지니고 있으며 교회를 어떻게 이끌어 나가고자 하는지 명확한 방향성을 확인할 수 있다. 전 세계를 향한 당부는 물론 각국의 지도자에게 보내는 호소, 주교단과 추기경단을 향한 촉구, 새 사제들에 대한 권고, 청년들에게 건네는 격려 등 폭넓은 청중에게 전하는 메시지를 담고 있다. 모두에게 일관되게 강조하는 점은 바로 ‘평화·일치·사랑·경청’이다. 즉 인간 존엄의 회복, 평화를 위한 실질적인 행동, 공동체의 일치를 위한 경청, 그리고 가장 약한 이들과의 연대로, 오늘의 인류가 가장 시급하게 회복해야 할 가치들이다. 교황은 신앙의 테두리를 넘어 오늘을 살아가는 모든 이에게 우선순위를 다시 세우도록 요청한다. “루카 복음사가가 표현한 바와 같이(루카 2,19.51 참조) ‘신발레인(synballein, 마음속에 간직하다-편집자 주)’의 역량, 곧 생각의 조각들을 하나로 모으는 역량이 필요합니다. 피상적인 것을 경계하고, 삶의 조각들을 기도와 묵상 안에서 하나로 모으면서 스스로에게 이렇게 물어보십시오. 내가 지금 살아가는 이 삶이 나에게 무엇을 가르쳐 주는가? 내 여정에 대해 무엇을 말하고 있는가? 주님께서는 나를 어디로 이끌고 계시는가?”(190쪽) 한영만(라디오바티칸 담당) 신부가 감수했고, 글마다 한 신부의 해제를 더해 교황의 말씀을 보다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구성했다. 지구 수도원 / 크리스틴 발터스 페인트너 / 맹영선 옮김 / 생각비행 자연에서 하느님을 만나는 삶으로의 초대 “나무와 꽃들은 창조된 자기 모습 이외의 다른 존재가 되려고 노력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자신의 진정한 본성을 거부하지 않음으로써, 어떻게 성도로서 자신의 삶을 살아낼 수 있는지 우리에게 가르쳐 줍니다. 성도가 된다는 것은 본질적인 본성을 받아들이는 것을 의미하며, 이것이 우리의 소명을 실현하는 길입니다.”(107쪽) 「지구 수도원」은 빠른 속도와 소비주의, 산만함이 지배하는 삶에서 벗어나 자연과 친밀한 관계를 맺고 그 안에서 하느님을 만나는 삶으로 독자들을 초대하는 책이다. 가톨릭 신자이며 영성 신학 박사로 수도원 영성을 현대인의 삶과 연결하는 작업을 해온 저자는 이번 책에서 지구를 우리의 원초적인 수도원, 즉 최초의 성전으로 간주한다. 인류가 야기한 기후위기에 대한 가장 좋은 해결책으로 프란치스코 교황은 ‘관상’을 언급했다. 관상 수행의 열매 중 하나는 ‘전체성(wholeness)’을 기억하는 것이다. 모든 것이 하느님 사랑 안에서 존재하고 그 사랑으로 서로 연결되어 있음을 깨닫는 것이다. 「지구 수도원」은 창조세계를 마주하는 일상에서 관상을 수행하고, 자연과의 친밀함을 통해 경이와 감사를 수행할 수 있도록 안내한다. 품격 있는 황혼 / 브라이언 그로간 신부 / 김학준 신부 옮김 / 바오로딸 나이듦은 쇠퇴가 아니라 무르익음 만 나이가 통용되고 있지만, 해가 바뀌면 자연스레 한 살이 더해진다고 생각하는 이가 많다. 특히 어느덧 황혼에 접어들었다면 새로운 한 해가 더욱 남다를지 모르겠다. 「품격 있는 황혼」은 늙어가는 것을 받아들이되 수동적으로 끌려가지 않도록, 주체적으로 만들어나갈 것을 당부한다. 책은 나이 듦이 쇠퇴가 아니라, 지난 세월의 경험과 지혜를 바탕으로 더 무르익어야 하는 때라고 강조한다. 특히 하느님께서 그 여정에서 함께하신다는 위로와 희망을 전한다. 아일랜드의 더블린 밀타운 신학교 학장을 지냈고 현재 영성학 명예 부교수인 저자는 자신의 경험과 시·기도문·일화 등을 통해 나이 듦·죽음·죽음 이후의 영광까지, 하느님 나라로 옮겨가는 여정을 어떻게 준비하고 받아들일지 깊이 묵상하도록 이끌어 준다. “너는 늙어가지만 여전히 나의 사랑이다. 나는 너를 머리부터 발끝까지 사랑한다. 너의 주름진 손, 앙상한 다리, 하얗게 센 머리카락, 깜박깜박 잊어버리거나 기도에 집중하지 못하는 것조차 사랑한다. 무엇보다도 나는 너의 마음을 사랑한다. 산만함 속에서도 나를 향해있는 너의 마음을!”(60쪽) 영혼과 육신을 살리는 음식이야기 / 노봉수 / 한마음문화사 신앙의 식탁에 차려진 성경 속 음식 탐구 새해의 시작과 함께 가장 많이 하는 다짐은 건강관리, 좀더 구체적으로 얘기하자면 다이어트일 것이다. 식품에 대해 다양한 책을 집필해온 서울여대 식품공학과 노봉수(야고보) 명예교수가 「영혼과 육신을 살리는 음식이야기」를 펴냈다. ‘신앙의 식탁’이라는 부제에 걸맞게 그간의 책과는 달리 식품과학자의 시선으로 성경 속의 음식을 조명한다. 책은 크게 두 부분으로 나뉜다. ‘하늘의 양식 : 성경 속 음식이야기’에서는 성경에 등장하는 음식들의 의미를 탐구하고, ‘신앙과 음식의 만남’에서는 성경에는 나오지 않지만 우리 삶과 밀접한 토마토, MSG 등을 통해 신앙적인 메시지를 전한다. “빵은 성경에서 매우 일상적인 음식으로 등장하지만, 예수님은 이를 통해 깊은 영적인 메시지를 전달하신다. 빵은 고대 근동 지역에서 기본적인 주식으로, 생명을 유지하는 필수적인 음식이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이 일상적인 빵을 하느님의 은혜와 영원한 생명을 상징하는 매개체로 사용하셨다.”(62쪽) 저자는 “책을 집필하며 구약을 비롯한 성경 해석에 대한 미숙한 부분을 많이 느꼈다”며 “식품이라는 친숙한 소재를 통해 성경을 이해하는 색다른 접근법이 될 수 있기를 바란다”고 전했다. 윤하정 기자 monica@cpbc.co.kr윤하정2025.12.24

인천교구 갑곶순교성지 50주년 기념 영성센터 담당 지성용 신부순교 영성의 요람으로 자리잡아 인천교구 갑곶순교성지 50주년 기념 영성센터(담당 지성용 신부)가 순교 영성의 요람으로 자리를 잡아가고 있다. 인천 강화군 강화읍 갑곶리 1000 갑곶순교성지에 자리한 영성센터는 2011년 교구 설정 50주년을 맞아 신자들의 신앙 성숙을 돕고자 교구민 정성으로 짓기 시작해 지난해 11월 준공된 통합 교육관이다. 영성센터가 마련됨에 따라 교구는 피정센터 건립의 숙원을 풀고, 신자 재교육과 순교 영성 함양에 더욱 박차를 가할 수 있게 됐다.갑곶순교성지 50주년 기념 영성센터. 전체면적 4889㎡의 영성센터는 갑곶에서 순교한 순교자 3위의 이름을 딴 △박상손관 △우윤집관 △최순복관 3개 동으로 이뤄져 있다. 센터에는 야외 십자가길, 세미나실, 소강당, 성체조배실, 휴게실, 성당, 고해실 등이 갖춰졌다. 순백색을 띤 영성센터의 내부로 들어서면 현대적 분위기로 조성된 강당과 세미나실을 비롯해 나무 빛깔의 고즈넉한 성당이 순례객의 마음을 끈다. 전통과 현대의 적절한 조화 속에 공동체는 피정으로 하나 되고, 개인은 고요한 성당에서 내면을 성찰할 수 있다. 성지 전체에 흘러나오는 클래식 음악은 지나가는 이의 발걸음 붙잡는다. 기존에 조성돼 있던 센터 뒤편 십자가의 길ㆍ묵주기도 길을 음악을 들으며 걸으면 성지가 주는 따뜻함을 만끽할 수 있다. 한 번에 100여 명이 피정할 수 있으며, 전국에서 단체 예약이 끊이지 않고 들어오고 있다. 현재 주말에만 1500여 명이 다녀간다. 센터는 단순 피정과 강의 위주로 운영되는 기존 피정의 집 패러다임을 바꿔 신자들이 성령 충만한 신앙생활을 몸에 익히도록 도울 계획이다. 이를 위해 △몸 살림 △마음 살림 △영성 살림 △교회 살림 등 '살림'을 주제로 바이블 테라피ㆍ음악피정 등 성경과 음악을 통해 주님을 체험할 수 있도록 체계적인 영적 서비스를 제공할 예정이다. 현재 돌아가며 성지에 상주하는 40여 명 영성지도사는 상담을 통해 신자들이 잡념을 버리고 각자 내면을 주님으로 채우도록 돕고 있다. 조만간 교계 서점이 센터에 들어설 예정이어서 영적 독서 나눔도 활발해질 것으로 기대된다. 성지 및 센터 담당 지성용 신부는 "순교는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사랑의 삶을 살기 위한 것"이라며 "생명을 살리는 삶, 순교영성을 본받는 삶을 살기 위한 '살림' 교육이 교회 영성을 올바로 자리매김하도록 하는 데 큰 역할을 해줄 것으로 기대한다"고 말했다. 지 신부는 "준공 이후 기다렸다는 듯 많은 순례객이 다녀가고 있다"면서 "서울을 비롯해 수도권과 인접한 영성센터가 신자 영성을 함양하는 영성 서비스 기관이 되도록 노력하겠다"고 포부를 밝혔다. 이정훈 기자 sjunder@pbc.co.kr조은일2013.05.21
![[2013 신춘문예]심사평-시 (정호승, 이승하)](//cpbc.co.kr/CMS/newspaper/2013/01/rc/439541_1.2_titleImage_1.jpg)
[2013 신춘문예]심사평-시 (정호승, 이승하)사물에 대한 관찰력, 묘사 돋보여 시를 쓰는 데 있어 가장 중요한 것은 테크닉이 아니라 시심이다. 마음의 바탕이 사물의 본질을 추구하는 데 있지 않으면, 인생의 희로애락과 인간 생로병사의 비의를 탐색하는 데 있지 않으면, 그 시인은 시를 쓰는 기술자이지 시인이 아닌 것이다. 평화신문에 투고한다고 해서 반드시 신자일 필요는 없다. 또한 주제가 신앙심이나 영성이어야만 하지도 않고, 성경에서 모티브를 가져와야만 하지도 않다. 우선 좋은 시여야 한다. 그리고 그 시가 좋으려면 진실한 마음(흔히 '진정성'이라 한다)으로 써야 한다. 바로 그런 점에서 우리는 오정순의 '은빛 보행차'를 당선작으로 뽑기로 했다. 지팡이를 대신해 노인의 보행을 도와주는 유모차 비슷한 것이 있다. 이 시는 바로 그 보행차가 시의 초점이 된다. 몸이 불편한 노인에 대한 과도한 동정심이나 부자연스런 행동에 대한 과장된 표현 대신 사물에 대한 꼼꼼한 관찰과 세심한 기록이 이 시의 덕목이다. 그런데 사물에 대한 관찰기록 속에는 한 존재의 말년이 참으로 섬세하게 그려져 있다. 보행차는 은빛을 띠고 있고, 그 빛나는 사물이 바로 노인이다. '햇살 걸음'의 발견도 놀랍지만 '네 개의 바퀴와 굽은 허리 하나'가, '더 이상 수리할 곳 없는 오후의 한때'와 함께 은빛 바퀴를 굴리며 가고 있는 광경에 대한 치밀한 묘사는 미상불, 눈부시다. '피에타'(김형미)는 병실에서 늙어버린 어머니와의 나날을 눈물겹도록 아름답게 수놓은 작품인데 받쳐주는 시들이 약했다. '책의 장례'(김은호)는 전반부의 견고함을 끝까지 유지하지 못한 것이 못내 아쉬웠다. '다락방에서 본 풍경'(정순)은 추억담을 들려주는 입담이 여간 활달하지 않은데, 그 이야기를 하나의 주제의식으로 승화되지 못하고 있었다. '압록 매운탕'(조송이)은 참 좋은 소재인데 소품에 가까워 좀 더 의욕을 갖고 퇴고했으면 한다. "백부가 인절미 담긴 칠기를 던졌다 학이 날던 다완도 함께 날아갔다"로 시작되는 시와 "누군가 걷어내는 걸 잊어버린 물그림자"로 시작되는 시를 쓴 두 응모자는 기성시인임이 심사과정에서 밝혀졌다. 전자는 오랫동안 활동하지 않았다 하고, 후자는 유명하지 않은 출판사를 통해 등단한 뒤 시집을 2권 냈다고 했다. 이런 분이 구태여 신춘문예를 다시 두드릴 필요가 있을까? 공자가 시를 '사무사'(思無邪)라고 한 이유를 가슴에 새겼으면 한다. 조은일2013.01.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