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고해성사·소박한 차례상·기도가 있는 제례 준비명절엔 위령 미사 봉헌이 우선… 사목적 배려 차원서 제사 허용 이산가족들이 파주 통일전망대의 위령탑 앞에서 절을 올리고 있다.가톨릭평화신문 DB “제사의 근본 정신은 선조에게 효를 실천하고, 생명의 존엄성과 뿌리 의식을 깊이 인식하며 선조의 유지에 따라 진실된 삶을 살아가고 가족 공동체의 화목과 유대를 이루게 하는 데 있다.”(「한국 천주교 사목 지침서」)한가위(4일)가 다가왔다. 우리나라는 전통적으로 명절에는 차례를 지낸다. 과거 신앙 선조들은 제사를 지내지 않는다는 이유로 모진 박해를 당하기도 했다. 하느님을 섬기는 그리스도인들은 차례를 지내도 될까. 그리스도교적으로 재해석한 제례는 어떤 형식일까.주교회의는 신자들이 조상의 기일이나 명절에 가정이나 묘지에서 제례를 지낼 수 있도록 허용하고 있다. 가풍으로 제례를 지내던 가정과 종교가 서로 다른 가족이 있어 이들을 위한 사목적 배려 차원이다. 그런데 주교회의가 허락한 제례는 유교식 조상 제사를 그대로 답습하는 것은 아니다. 그리스도교적으로 재해석한 예식을 허락한다는 뜻이다. 여기서 기억해야 할 것은 제례의 의미를 조상 숭배의 개념으로 오해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그래서 제삿상에는 지방을 쓸 때 신위(神位)라고 쓰는 것은 허락되지 않는다. 무엇보다 그리스도인에게 우선되는 것은 위령 미사를 봉헌하는 것이다.제례를 드리기 전에는 마음과 몸의 준비를 먼저 해야 한다. 고해성사를 통해 마음을 깨끗이 하고, 단정한 옷을 입는 것이 좋다. 제례상은 음식을 차리지 않고 단순하게 추모 예절만을 위한 상을 차릴 수도 있다. 평소 가족들이 좋아하는 음식으로 소박하게 차리는 것을 권한다. 상차림 형식은 중요하지 않다. 상 위에는 십자가와 조상의 사진이나 이름을 올려 놓고, 촛불을 켜고 향을 피운다. 「성경」과 「가톨릭 성가」 「상장 예식(또는 위령 기도)」도 챙긴 후 ‘시작 예식’, ‘말씀 예절’, ‘추모 예절’, ‘마침 예식’으로 구성된 가정 제례를 지내보자.시작 예식제례 준비가 끝나면 가장은 “지금부터 명절을 맞이하여 한가위 차례를 거행하겠습니다”고 하며 제례의 시작을 알린다. 시작 성가는 「가톨릭 성가」 50번(주님은 나의 목자), 227번(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라), 436번(주 날개 밑) 중에 택하면 된다. 가장은 제례의 취지를 설명하고 가족의 마음을 모으는 기도를 바친다.말씀 예절성경을 봉독할 때는 마태오복음 5,1-12(참 행복), 요한복음 14,1-14(아버지께 가는 길), 로마 신자들에게 보낸 서간 12,1-21(그리스도인의 새로운 생활과 생활 규범), 코린토 신자들에게 보낸 첫째 서간 13,1-13(사랑) 등을 권한다. 성경 봉독 뒤에 가장은 조상을 회고하면서 가훈이나 가풍 등을 가족에게 설명한다. 그리고 성경 말씀을 바탕으로 가족들이 신앙 안에서 성실하게 살아가도록 권고한다.추모 예절가장은 대표로 향을 피우고 참석한 모든 사람이 함께 큰절을 두 번 한다. 이어 위령 기도를 바친다.마침 예식마침 성가는 「가톨릭 성가」 중에서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다. 예식이 끝나면 온 가족이 한자리에 앉아 음식을 나누고 사랑과 친교의 대화 시간을 갖는다. 맹현균 기자 maeng@cpbc.co.kr 김지항2017.09.27
![[전영준 신부의 가톨릭 영성을 찾아서] (77) 16세기 ⑥ - 종교개혁주의와 프란치스코 드 살](//cpbc.co.kr/CMS/newspaper/2018/05/rc/722415_1.0_titleImage_1.jpg)
[전영준 신부의 가톨릭 영성을 찾아서] (77) 16세기 ⑥ - 종교개혁주의와 프란치스코 드 살구원 예정설 맞서 “모든 그리스도인 은총 받을 수 있다” 강조 발렌틴 메칭거 작, ‘칼뱅교도와 논쟁하는 성 프란치스코 드 살(오른쪽)’. 16세기에 출현한 종교개혁주의자들의 주장이 인문주의자들의 주장과 유사하게 보이면서 서방 가톨릭교회는 그리스도교 인문주의를 좋게 평가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서방 가톨릭 교회는 1555년 아우크스부르크(Augsburg) 종교화의(宗敎和議)와 1545~1563년 트리엔트(Trient) 공의회를 경험하면서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려고 노력했습니다. 이후 프란치스코 드 살(Franciscus de Sales, 1567~1622)은 종교개혁주의자 세력과 맞서 싸우면서도 인간학적 관점에서 인간 자체에 관심을 두는 그리스도교 인문주의를 완성했습니다.과도한 은총 작용으로 예정설을 만든 급진적인 종교개혁주의아우구스티노 엄률 수도회의 마르틴 루터(Martin Luther, 1483~1546)는 도미니코 수도회의 테첼(Johann Tetzel, 1460~1519)이 대사(大赦)를 거래할 수 있는 듯한 인상을 주며 피상적으로 강론한다고 항의했습니다. 그리고 1517년 자신이 생각하는 대사의 본질과 사용에 대한 95개 논제를 공표했습니다. 교황청은 1518년부터 루터를 이단 심의했으며, 1521년 정식 파문했습니다. 마침 신성 로마 제국 황제 카를 5세(Karl V, 재위 1519~1556)는 자국에서 발생한 종교 문제를 해결하려고 시도했으나 저항에 부딪히자, 1552년 동생인 독일 왕 페르디난트 1세(Ferdinand I, 재위 1531~1564)에게 종교 문제 조정권을 넘겼습니다. 결국, 페르디난트 1세는 아우크스부르크 종교회의를 통해 독일 내에서 가톨릭교회와 루터교가 동등한 권리를 지니며 공존한다는 조약을 체결했습니다.그런데 루터를 비롯하여 츠빙글리(Ulrich Zwingli, 1484~1531)와 칼뱅(Jean Calvin, 1509~1564) 등의 종교개혁주의자들이 주장했던 ‘오직 성경(sola scriptura)’, ‘오직 믿음(sola fide)’, 그리고 ‘오직 은총(sola gratia)’이라는 기본 원리가 그리스도교 영성생활에 새로운 문제를 일으켰습니다. 특히 칼뱅은 은총 문제에서 아우구스티누스의 사상을 따른다고 주장했습니다. 즉, 타락한 인간 본성은 구원을 위해 아무것도 할 수 없고, 하느님만이 은총으로 인간을 구원하실 수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루터 역시 저서 「그리스도인의 자유(De Libertate Christiana)」와 「노예의지론(De Servo Arbitrio)」에서 인간이 자신의 구원을 위해 자유의지로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고 주장했습니다. 하지만 인문주의자 에라스무스(Desiderius Erasmus, 1466~1536)는 저서 「자유의지론(De Libero Arbitrio Diatribe sive Collatio)」과 「히페라스피스테스(Hyperaspistes)」에서 종교개혁주의자들이 은총만 강조하다가 만들어낸 예정론을 반대하며 인간이 은총의 도움으로 자유의지를 발휘해 선과 악을 선택할 수 있다고 주장했습니다. 하느님은 모든 것을 다 하실 수 있으시지만 그렇게 하시지 않고, 인간에게 책임 있게 행동할 기회도 주셨다는 것이었습니다.게다가 인문주의자들이 아우구스티누스가 주장했던 은총론을 약화해 인간의 자유의지가 은총에 협력할 필요가 있다고 주장하자, 은총 논쟁은 가톨릭교회 안에서도 나타났습니다. 스페인 도미니코회 바네즈(Dominic Baez, 1528~1604)는 아우구스티누스의 은총론을 지지하면서 인간이 자유의지를 지닌 것은 사실이지만 하느님 섭리 안에 포함된다고 주장했습니다. 즉, 인간의 자유의지보다 하느님의 은총이 우위에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스페인 예수회원 몰리나(Luis de Molina, 1535~1600)는 인간의 자유의지와 하느님의 은총이 함께 작용한다고 주장했습니다. 자유의지와 은총을 동등한 입장에서 고려했습니다. 이후 도미니코회 수도자들은 자유의지를 제한하는 견해를 밝혔고, 몰리나주의자들은 자유의지를 더 강조하는 태도를 보였습니다. 결국, 두 수도회는 스페인 종교 재판소에 상호 소송을 제기했으나, 교황 바오로 5세(Paulus PP. V, 재임 1605~1621)는 결론을 내리지 못했습니다. 이러한 유보적인 입장은 은총에 대한 이해의 부족으로 이단적인 영성생활이 출현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하느님의 사랑으로 예정설을 극복한 프란치스코 드 살프랑스 동부 사부아(Savoie) 출신 프란치스코 드 살은 7세에 라로쉬(LaRoche)에서 그리고 9세에 안시(Annecy)에서 프랑스어와 문학을 공부했으며, 1578년부터 10년간 파리 클레르몽 대학(College de Clermont)에서 인문학에 비중을 두고 부차적으로 철학과 신학을 공부했습니다. 또 프란치스코는 1588년 이탈리아 파도바(Padova)에서 교회법과 일반시민법을 공부하고 법학 박사학위를 취득했습니다. 이 시기에 프란치스코는 예수회 포세비노(Antonio Possevino, 1534~1611)에게 신학을 배우고 영적 지도를 받으며 「영신수련」에 따른 영적 성장을 할 수 있었습니다. 특히 이곳에서 프란치스코는 수덕신학자 스쿠폴리(Lorenzo Scupoli, 1530~1610)의 저서 「영적 투쟁(Combattimento Spirituale)」을 접하고 큰 감명을 받아 오랫동안 애독했습니다. 결국, 프란치스코는 인문학의 바탕에서 영성 훈련의 정신을 받아들여 실천적인 영성을 펼쳤습니다. 1602년 제네바(Geneva)교구장으로 임명된 프란치스코는 이미 개신교로 돌아선 많은 이들이 다시 가톨릭 신앙을 회복하는데 크게 이바지했습니다.프란치스코는 저서 「신심생활 입문(L’Introduction la Vie Dvote)」에서 평신도들이 자신의 삶의 자리에서 실천할 수 있는 영성생활을 강조했습니다. “귀족과 직공, 왕족과 노복, 과부와 주부, 소녀들의 차이에 따라 그들의 신심은 각각 달라야 한다. 또 한층 이것을 개인의 능력, 일, 직무에 맞추어야 한다.”(제1부 제3장)는 것입니다. 평신도 그리스도인은 하느님만 바라보며 관상생활을 하는수도자와 함께 획일적인 영성생활을 실천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처한 상황을 고려하며 삶의 자리를 포기하지 않는 영적 여정을 걸어야 합니다. 또 프란치스코는 「신심생활 입문」 제2부 기도와 성사 편에서 체계적인 묵상기도 방법을 소개했는데(제2부 제1장~제11장 참조), 이는 새 신심 운동을 지지했던 영성가들의 성경 묵상 방법과 유사한 체제와 모습을 지녔습니다. 특히 프란치스코는 하느님 사랑에 기초를 둔 참된 신심을 강조하면서 하느님 사랑을 받아야만 애덕을 쉽게 실천하고 완성할 수 있다고 강조했습니다.(제1부 제1장 참조) 결국 그리스도인은 애덕 실천을 통해 완덕에 도달할 수 있기 때문에, 애덕 실천은 모든 그리스도인의 소명일 뿐 아니라, 누구든지 자신의 자리에서 자신의 방법으로 실천할 수 있는 덕행이라는 것이었습니다.한때 파리에서 프란치스코는 예정설에 영향을 받고 괴로워한 적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프란치스코는 그리스도교 인문주의가 부정적인 감각의 원죄보다 긍정적인 감각의 구원을 중요하게 생각한다는 점을 깨닫고 모든 그리스도인이 은총을 받을 수 있다고 생각하면서 괴로움을 극복했습니다. 즉. 초자연 질서에 속한 하느님의 사랑과 은총은 자연 질서에 속한 인간 본성에 들어와도 인간 영혼을 파괴하지 않으며 인간 본성을 더 완성할 수 있도록 도와준다는 것이었습니다.프란치스코가 그리스도교 인문주의를 경건한 인문주의로 각인시킬 수 있었던 것은 긍정적인 인간 이해를 통해서 하느님께 나아갈 길을 제시하였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프란치스코는 인문주의를 경건하게 채색함으로써 에라스무스가 완성하지 못했던 그리스도교 인문주의를 긍정적인 시각으로 볼 수 있게 제시했습니다.<가톨릭대 신학대학 영성신학 교수> 백영민2018.05.30
![[제6회 신앙체험수기] 장려상/ 늦지 않았음을](//cpbc.co.kr/CMS/newspaper/2019/06/rc/756292_1.0_titleImage_1.jpg)
[제6회 신앙체험수기] 장려상/ 늦지 않았음을 김수경(로사,의정부교구 정발산본당) 오래전부터 어머니가 안 계신 집안의 장녀로 살아오면서 커지는 것은 책임감이었으며 필요한 것은 기댈 곳이었다. 열두 살 어린 나이였지만 한 가정의 빈자리를 맏딸로서, 언니로서, 누나로서 지켜온 나의 삶은 “내일 아침 눈을 안 떴으면….” 습관이 되어버린 이 한마디로 늘 하루를 마무리하곤 했었다. 눈을 감고 정신을 닫아 캄캄한 어둠 속에서 깨어나고 싶지 않았던 나의 일상은 꽤 오래전부터 외로웠고 숨이 턱에 찰 만큼 버거웠다. 어느 날은 이 작은 몸뚱어리에 이만큼 많은 눈물이 담겨 있었나 싶었을 정도로 소리 내 우는 날도 있곤 했었다. 그렇게 마흔 중반에 들어 31년을 모시던 아버지를 갑작스레 어머니처럼 떠나 보낸 후 강단 있다는 내가, 야무지다는 내가 결국 모든 것을 놓아버리고 말았다. 아버지가 수개월 전부터 사업상 경영의 어려움에 처했었고 여기저기서 끌어다 쓴 자금으로 결국은 파산에 이르게 된 것이다. 성인이 된 자녀가 셋이나 있었지만, 아버지는 혼자서 어떻게든 막아보려 고민하다가 스트레스였을까. ‘심장마비.’ 지금도 그 단어만 떠올리면 너무나 무섭고 겁이 난다. 심장마비로 한겨울 새벽, 동네 공원에서 쓰러지시고 그렇게 아무런 말씀 한마디 남기지 못하고 엄마 곁으로 떠나셨다. 엄마는 꽃 같은 나이에 우리 손을 놓으시더니 100세 시대라는 요즘 예순하고도 여덟 해 살고 가버리신 가엾은 아버지 때문에 난 너무도 가슴이 아리고 아렸다. 소문난 효녀였던 나는 분명 아버지께 잘해드린 것도 많았을 텐데 그런 기억은 깜깜하고 아버지 가슴을 후벼 파고 아프게 했던 못된 기억만이 나를 짓누르고 있었다.지병이 있으셨던 것도 아니고 혼자서 부도난 회사를 회생시키려고 애쓰고 고민만 하시다 그렇게 갑자기 떠나버린 가엾은 우리 아빠…. 삼우제를 모시고 돌아온 집에는 TV나 영화에서만 보던 빨간 딱지들이 여기저기 붙어 있었고 거실바닥은 구두 발자국으로 더럽혀져 있었다. 어린 나이에 책임감으로 무장했던 버거운 삶이었지만 아버지의 사업으로 부족함 없이 살아왔던 내 삶은 ‘상속 포기’라는 어쩔 수 없는 선택으로 50여 평의 아파트에서 달랑 옷가지 몇 벌만 챙겨 하루아침에 작은 원룸 신세가 되고 말았다. 부모 두 분이 안 계신 마흔셋의 나이도 고아라면 고아였다. 고아이기 때문에 눈물이 나고 서럽고 두려운 것임에도 주변 사람들은 내게 한마디씩 가볍게 던지곤 했다. “나이가 마흔이 넘었어. 언제까지 아버지 돌아가셨다고 그렇게 우울해 하고 있을래?” “동생들은 잘사는데 넌 왜 그래?’ ‘누구나 부모는 먼저 떠나 보내. 순서만 다른 거야.” 위로인지 질책인지 모를 소리만 늘어놓자 나는 결국 마음의 문을 닫아버리게 된다.이미 오래전부터 누나로 언니로 살았던 나는 삶의 회오리 속에서 눈을 감고 귀를 막고 입을 닫고 힘들어하는데 건사할 가족들이 있고 기댈 수 있는 가정이란 울타리가 있는 두 동생은 아버지를 여읜 슬픔에서 그런대로 잘 견디는 듯싶었다. 어찌 보면 다행일지도…. 하지만 수시로 찾아오는 억울함, 서러움은 그렇게나 강했던, 그래서 버틸 수 있었던 내 영혼을 너무나도 쉽게 무너뜨리고 말았다.엄마가 안 계신 집안의 안쓰러운 어린 두 동생을 위해, 젊은 시절 혼자 되신 가엾은 아버지를 위해 희생이라면 희생일 수 있고 맏딸로서 해야 할 도리라면 도리일 수 있었던 지난 긴 세월에 대한 허무함과 배신감, 억울함이 어떤 날에는 분노로까지 이어져 난 그렇게 내 마음에 단단한 자물쇠를 채우고 만다.“아버지가 돌아가셨는데 너흰 어쩌면 그렇게 말짱해?” “난 너희 때문에 이 나이가 되도록 결혼도 안 하고 아버지를 모시고 살았는데 너희는 내가 밥을 먹는지 죽을 먹는지 어쩜 그렇게도 관심이 없어!” “너희는 결혼할 때 너희 몫으로 챙겨 받았지만 난 지금 아무것도 쥐어진 게 없어, 이게 장녀로서 살아온 30년 내 인생이야! 보상은 하나도 없어.”분노였다. 억울함이었다. 울화였다. 난 그렇게 2009년 한해를 앓았다. 지금 내 머릿속에는 그 해에 있었던 기억들이 하얗게 지워지고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다. 그저 하루하루 울며 지내고 억울해 하고 분해했던 기억만이 남아 있다.아버지를 보내고 두어 달 만에 152cm의 작은 키에서 몸무게가 18kg이 빠지고 이가 부서져 빠지고 머리카락이 한 움큼씩 빠졌다. 혼자서 병이 들어가는 나를 보다 못한 남동생이 종합병원의 정신의학과에 데려가 상담을 받게 했다. 담당 의사는 내게 몇 마디 말을 걸고 정말 몇 마디 안 되는 대화를 나누더니 결국은 폐쇄병동이란 곳에 가두어버렸다. 내 의사와는 상관없이 그냥 난 그렇게 갇혔다. 그건 어쩜 내가 원했던 것이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난 내가 정상으로 보이는 게 싫어 의사의 질문에 한마디 대꾸도 하지 않았으니까. 어쩜 담당 의사의 소견은 당연한 건지도 모르겠다. 그 당시 수렁 속에 빠진 듯 혼란스러운 내게 필요했던 공간은 세상을 향해 절대 문이 열리지 않는 그런 공간이었을 테니 말이다.내가 입원한 병실에는 겉으로 보기엔 별 증상이 없는 사람들이 늘 길게 줄을 서서 약을 탔다. 아침이면 한 움큼씩 약을 먹고, 점심이면 또 그만큼의 약을 먹고, 저녁에는 더 많은 약을 먹고 약속이나 한 듯 똑같이 잠이 든다. 정상적인 사람들 속에서 정상인으로 멀쩡하게 살아야 했던 내가 그곳에서는 멀쩡하지 않아도 되어서였을까. 시간이 지날수록 난 그곳이 편해졌다. 2주의 시간이 지나고 난 다시 세상 안으로 돌아오게 되었다. 퇴원 역시 내 의사와는 상관없이 이루어졌다. 난 분명 정상이 아닌데 난 약을 먹어야 잘 수 있는데…. 길거리나 지하철에서 볼 수 있는 평범한 사람들처럼 살아야 한다는 게 갑자기 숨이 막혀오고 두려워졌다. 다시 제자리로 돌아와서도 줄곧 힘들어하는 내게 어느 날 친구가 찾아왔다. 친구가 싫은 게 아니라 사람이 싫었다. 몇 번을 이 핑계 저 핑계로 거절하던 어느 날, 그래도 아픈 나를 끔찍하게 챙겨주는 친구에게 내가 너무 심한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면서 이러다 정말 아무도 나를 찾지 않으면 어쩌나 하는 일종의 불안감까지 생겨 선뜻 내가 먼저 친구에게 문자를 보내게 된다. “미안해, 그동안 그냥 일이 많았어. 오랜만이다. 그래 보자.”반 년만인가. 오랜만에 마주한 친구는 늘 그랬던 것처럼 편안한 미소로 나를 반겨주었다. 친구들과의 자리에서도 좀처럼 종교 얘기를 늘어놓는다거나 성당 얘기를 잘 꺼내지 않던 친구가 “수경아, 너 성당 한번 나가봐라” 하며 툭 한마디 건넨다. “성당? 성모 마리아 믿는데?” “성모 마리아를 믿는 게 아니라 주님을 믿지. 성모님은 너의 기도를 같이 빌어주는 분이고.” 도대체 무슨 말인지…. 주님은 예수님을 말하는 것 같은데 성당 하면 성모 마리아 아닌가? “누굴 믿으라는 거야? 무슨 기도를 같이 빌어줘?” 아버지가 개신교 신자이셨기 때문에 교회는 몇 번 끌려가(?) 본 적이 있었으나 도저히 난 종교와는 맞지 않는다는 생각뿐, 평소에도 ‘무교’라고 떠들어댔던 나였기에 개신교도 천주교도 어렵기만 했다. “네가 싫으면 굳이 갈 필요는 없지만, 그냥 가톨릭 신자가 아닌 평범한 수경이로 미사 드리면서 사람들 틈에서 앉아만 있다 와도 네 마음이 편해질 것 같아서 그래. 여태껏 아버지랑 동생들 뒤치다꺼리만 했는데 너도 기댈 곳은 하나 있어야지.”뭐가 뭔지 혼란스러운 데다가 왜 사람들은 힘이 든다고 하면 교회를 가라, 성당을 가라 하는지 그 자리가 불편했다. 그런데 희한한 것은 이전의 다른 친구들처럼 “이번 주 주일에 데리러 갈게, 나랑 꼭 같이 교회 가자” 그런 말을 하지 않는 것이었다.“넌 왜 너랑 같이 가자고 안 해?”라고 묻자 친구는 마치 어린아이를 대하듯 “어이구, 그냥 네가 가고 싶을 때 너희 동네 성당 한번 가보라고. 성당이 어디에 있는지 한번 찾아봐”라며 가방에서 불교의 염주 같은 나무알맹이가 엮여 있는 기다란 무언가를 꺼내 내게 건넸다. “이건 묵주야. 지금은 그냥 네 손에 쥐고만 있어. 힘들 때마다 꺼내서 쥐어봐. 많은 의지가 될 거야.” “이게 뭔데? 목걸인가? 이걸로 뭘 어쩌라고?” 친구와 헤어지고 오는 길에 난 주머니에 넣은 ‘묵주’를 만지작거리며 그것이 무엇인지도 모른 채 친구의 말처럼 그냥 내게 힘이 되어주기만을 바라고 바랐다. 그 뒤로 한참 시간이 지난 어느 날, 외투 주머니에서 친구가 건넨 묵주를 발견했다. ‘힘들 때 의지가 된다고?’ 뭔가 소중한 물건임은 틀림이 없는 것 같아 조심스럽게 묵주를 손에 쥐어보다가 문득 친구가 했던 말이 생각났다. “우리 동네는 성당이 어디 있지? 한번 찾아볼까?” 그렇게 해서 난 집과는 거리가 좀 떨어져 있는 동네 성당을 알게 되었고 교리도 받지 않은 채 일요일 오전이면 사람들 틈에 섞여 미사에 참석했다. 앉으라면 앉고 일어서라면 일어나고…. 무겁고 경건한 분위기였지만 왜 그랬을까. 그 엄숙한 분위기가 전혀 싫지 않았다. 때론 알지도 못하는 성가를 따라 부르면서 눈물이 맺히기도 했다. 왜였을까…. 지금 생각해보면 그땐 말도 안 되는 엉터리 신자였지만 난 이미 나도 모르게 주님께 다가가고 성모님께 의지하고 있었던 게 아닌가 싶다. “주님! 제게 지금을 버틸 수 있는 힘을 주소서, 마리아님, 제 곁에 머물러주소서.” 내 믿음의 시작은 엉성하고 어설펐지만 난 그렇게 신앙과 가까워지고 있었다. 교리도 안 받고 세례명도 없이 성당을 기웃거리며 주일마다 챙겨 온 주보를 뜻도 모르면서 형광펜으로 줄까지 그어가며 꼼꼼히 읽어내려가면서 마음속으로 막연하게 ‘주님’과 ‘마리아’를 번갈아가며 불러대곤 했다. 이상한 것은 성경도 없이 성가집도 없이 오직 친구가 건네준 묵주 하나만을 갖고 성당을 가고 혼잣말로 기도하면서도 마음이 평온해짐을 느낀다는 거였다. 무엇이 그렇게 절실했던 걸까. 내게 필요했던 건 예전의 물질적인 풍요도, 의지하고 싶은 그 누구도 아닌 그분이었던 게 아닐까. 난 아마도 주님을 만나는 것에 많이 목말라 있었던 듯싶었다. 시간이 흐르고 난 더 이상 아파하기 싫고 동생들에게 끝까지 언니, 누나로서 친정이 되어주고 의지할 수 있는 누이가 되어주고 싶다는 생각에 이를 악물고 다시 일어서기로 했다. 죽을 거 아니면 살아야겠다는 생각뿐이었다. 솔직히 나 스스로 사는 것보다 죽는 게 더 무섭고 어렵다는 결론을 낸 것이다. 말 그대로 입을 거 안 입고 먹을 거 안 먹으며 주변에 민폐 안 끼치고 손 내밀지 않고 오로지 나 혼자의 힘으로 버티고 버텼다. 때론 무심한 동생들에게 서운함이 어찌 없으랴만…. “그래, 동생들한테 서운해 하지 말자. 너희라도 나한테 손 안 벌리고 살 만큼 사니 얼마나 다행이니. 내게 도와달라고 해도 내가 도와줄 수 없는 형편인데. 너희라도 잘 먹고 잘살아라, 그게 나를 도와주는 거다”라고 수없이 나 자신을 세뇌하며 난 그렇게 하늘 아래 땅 위에서 혼자 내 앞에 펼쳐진 인생의 무게를 짊어지고 견뎌갔다. 그렇게 맨바닥에서부터 다시 시작해 정말 안 자고 안 먹고 성실하게 일하면서 세 번의 이사를 거쳐 원룸 생활 7년 만에 작지만 이사 걱정없는 내 이름으로 된 지금의 오피스텔을 마련하게 됐다. 내가 이사 다니며 살았던 원룸 동네를 벗어나 차로 지나다 보면 깨끗하고 높은 건물의 이 오피스텔이 눈에 띄었는데 “나도 저런 데서 살고 싶다”는 생각으로 늘 몇 번씩 돌아보던 그 건물이었다. 그 꿈이 이루어진 것이다. 그날도 어김없이 일을 마친 어두운 저녁 내비게이션이 꺼진 탓에 길을 잘못 들어 일산 동네를 헤매게 되었다. “여기가 어디야? 와 본 것 같기도 하고….” 꽤 오래 살았던 지역이라 낮이면 웬만한 거리는 알 텐데 어두운 밤이라 구분이 쉽지 않았다. 시력이 워낙 나쁜 편인 데다가 이제 노안까지 겹쳐 군데군데 켜진 몇 개의 가로등만으로는 도로 식별이 어려웠는데 순간, 저편에서 노르스름하면서도 환한 불빛이 눈에 들어왔다. 형광등도 아니고 가로등도 아니고 수은등도 아니고 어릴 적 우리 가족 다섯 명이 도란도란 살던 파란 대문집의 거실 전등 같은, 아니 그 거실 전등의 노란색 불빛이 내 시야에 담기면서 그 빛은 내 가슴으로 파고들었다. 순간, 한쪽에는 빨래를 겨 캐고 계시는 엄마, 물끄러미 TV 뉴스를 보시는 아빠…. 성탄절에 산타클로스 할아버지가 주신 장난감으로 기차놀이를 하는 우리 3남매의 유년시절이 차창 밖으로 그려졌다. 너무 오랜만이다. 반갑구나. 내 어린 시절. 잊지 않고 있었구나, 소중하고 귀한 우리 가족의 일상…. 건물에 걸려 있는 현수막을 보고서야 그곳이 성당이었음을 알 수 있었다. 성당에서 흘러나온 유년시절 기억 속의 그 불빛. 잠깐의 신호대기 중에서 난 그렇게 내 어린 시절을, 내게도 행복했던 시절이 가슴 한쪽에 머물고 있었다는 걸 알았다. 내게 그 환한 빛을 안겨준 그 성당은 바로 ‘정발산 성모성탄성당’이었고 그곳은 정식으로 가톨릭 신자가 되고 싶어 몇 번이나 등록하려 마음만 먹었던 우리 구역의 성당이었다. 다음날 막연하게 성당으로 전화를 걸었다. “저, 성당 다니고 싶은데요. 교회랑은 다르다던데…. 어떻게 하면 되는 건가요?”라고 물었다. 물론 친절한 답변이 들려왔고 난 정식으로 신자가 되기로, 그리고 노란 불빛의 성당이 ‘우리 성당’이 될 것이란 믿음을 굳혔다. 몇 년 전 내게 성당 다니기를 권유했던 친구가 생각이 나 연락을 해 만나게 되었다. “이제 집도 생기고 건강도 되찾아서 네가 전에 말한 것처럼 이제 정식으로 나도 성당 다녀볼까 하고…. 나도 어디 하나 기댈 데는 있어야 할 것 같아 그래.” 예상했던 것과는 달리 친구는 조심스레 “교리가 6개월인데 그건 하느님과의 약속이고 성당과의 약속이야. 중간에 포기하지 않고 마칠 수 있으면 시작하는 게 어때 수경아?” “걱정 마, 뭐든지 때가 있다잖아, 나 지금이 그때인 거 같아. 너도 알잖아? 내가 절도 다녀보고 교회도 가보고 너 따라서 성당도 앉아있다 와 보고…. 그때는 하나도 내키지 않았어. 솔직히 인제 와서 말이지만 그땐 그 시간이 너무 지루하고 아무 생각 없었어. 그런데 지금은 달라. 나, 성당 다닐래.” 개신교 친구는 더러 있지만, 천주교를 믿는 친구는 내 주변에 흔치 않아 난 그 친구의 ‘아지아’라는 특이한 세례명을 기억하고 있었다. “네 세례명이 ‘아지아’ 맞지? 난 뭐로 지을까? 내가 찾아보니까 예쁜 이름 많더라. 비비안나, 율리아, 아녜스~ 참, 김태희 세례명은 뭐야? 나 그걸로 할까 봐.” 철없는 내 말을 듣고 친구는 한참을 웃으며 “교리부터 끝내고 세례받기 전에 그때 지어도 늦지 않아. 사실 내가 전부터 네 세례명으로 생각해놓은 게 있긴 해. ‘로사!’ 모르겠어, 널 보면서 왜 그 이름이 떠올랐는지는….” ‘로사’. 나 역시 ‘로사’라는 이름을 듣는 순간 낯설지 않고 마음이 편해지면서 나도 모르게 자꾸 되뇌게 되었다. “‘로사’ ‘로사’ ‘김 로사’….” “약속할게. 교리 열심히 받고 꼭 세례받아서 ‘로사’로 다시 태어날게. 이제 반 바퀴 돈 인생. 아직 반 바퀴 남았잖아.” 친구에게 한 약속이었지만 그것은 나 자신에게 하는 약속이며 다짐이기도 했다. 몇 해 전인가. 믿음이 어설펐던 그때 친구가 쥐여준 묵주가 무엇인지 그 의미도 모른 채 받아오긴 했지만 6개월간의 교리를 들으면서 그때 친구가 소중한 묵주를 왜 내게 건넸는지 알게 되었다. 시간은 흘러 단 한 번의 결석도 없이 교리를 끝내고 2017년 8월 13일, 세례명 ‘로사’로, 그리고 우리 성당의 가족으로, 하느님의 딸로, 지금은 레지오의 단원으로…. 그렇게 나는 새롭게 살아가고 있다. 비록 하느님의 자녀가 된 시간은 짧지만 내가 직접 성당의 문을 두드려 새로운 삶을 경험하고 가꾸게 된 것이 내겐 더할 나위 없는 ‘성령’ 그것이다. 아직 늦지 않았음을. 지금부터 시작인 것을 감사히 여기며…. 이제 2년 차에 접어든 아직도 새내기라면 새내기인 천주교 신자로 어설프게 신앙생활을 시작했지만, 난 아직도 내가 가톨릭에 대해 모르는 것이 많아 다른 사람들보다 공부할 게 더 많다는 사실이 기쁘고 아는 이 한 명 없던 동네에 대모님이 계시고 내 마음이 아닌 그런 마음 허한 날에도 찾아가 기도할 수 있는 ‘성당’이 있어 많은 의지가 된다. 불안하고 서럽고 눈물이 나는 날에는 조용히 묵주를 잡게 되며 묵주가 내 손에 쥐어져 있다는 그 사실 하나만으로도 나는 예전에는 경험할 수 없었던 마음의 평정을 찾게 된다. 흔히들 말하는 ‘성령’이나 ‘은혜’는 먼 곳에 있지 않았다. 내가 생각하기 나름이며 내가 여기기 나름이다. 그래서 난 오늘 하루도 성령 충만한 은혜로운 하루였다는 그 사실만으로도 감사하고 내 주변 모든 이들의 평화를 빌 수 있는 그런 행복한 내일을 맞을 것이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김수경(로사) cpbc2019.06.25
![[전영준 신부의 가톨릭 영성을 찾아서] (48) 12세기 ② - 영성 생활에 스콜라학이 끼친 영향](//cpbc.co.kr/CMS/newspaper/2017/11/rc/700272_1.0_titleImage_1.jpg)
[전영준 신부의 가톨릭 영성을 찾아서] (48) 12세기 ② - 영성 생활에 스콜라학이 끼친 영향이성에 쫓겨 수도원 담장 안에 갇힌 ‘영성 생활’ 중세 후기로 접어들면서 유럽 전역에서 일어나기 시작한 학문의 발전은 교회 안팎에 ‘신앙과 이성’ 사이의 조화와 갈등 문제를 일으켰습니다. 따라서 서방 교회는 그리스도교 신앙을 재조명하는 가운데 영성 생활을 축소시키는 결과를 낳았습니다. 이 당시 교회에서 일어난 새로운 학문의 흐름을 ‘스콜라학(Scholasticism)’이라고 불렀습니다.대학의 출현과 아리스토텔레스의 재발견12세기 전후로 유럽 사회에는 대학을 설립하고 학문을 연구하는 풍토가 급속도로 확산되었습니다. 1088년 이탈리아 북부 볼로냐(Bologna)에 중세 유럽 최초의 대학이 설립되었습니다. 당시 볼로냐 대학은 법학을 중심으로 운영한 대학으로서 교회법과 시민법을 가르쳤습니다. 1109년 파리(Paris)에 프랑스 최초의 대학이 설립되었습니다. 파리 대학은 인문학을 중심으로 운영한 대학으로서 철학과 신학의 주요 과목을 가르쳤기 때문에, 파리 대학이 중세 유럽 최초의 대학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실제로도 파리 대학은 유럽 전역에 많은 영향을 끼쳤으며, 중세 중기 이후에 서방 교회에서 활발하게 학문 활동을 했던 신학자들 대부분이 파리 대학에서 공부했습니다. 12세기 중반에 잉글랜드 남부 옥스퍼드(Oxford)에 또 하나의 중요한 대학이 설립되었습니다. 옥스퍼드 대학은 파리 대학에서 공부했던 사람들이 중심이 되어 설립한 대학으로서 늦게 설립된 만큼 신학, 법학, 의학, 교양 과목 등 다양한 학문을 가르쳤습니다. 이러한 대학들은 처음에 교회 밖에서 설립되어 세상 학문 발전에 기여했지만, 서방 교회도 차차 대학의 운영과 학위 수여에 교회의 권위를 부여함으로써 신학을 연구하는 교회 대학으로서 지위도 인정받았습니다.그리스도교는 이미 교부 시대부터 그리스 철학을 활용해 영성 생활을 조명했습니다. 교부들은 성경을 주해하면서 플라톤(Plato, 기원전 428/27~348/47) 사상으로 그리스도인의 영적 여정을 설명했습니다. 하지만 플라톤 철학은 그리스도교 교리가 수용할 수 없는 오류를 담고 있었기 때문에 그 활용이 제한적이었습니다. 그런데 12세기에 유럽 사람들은 마침 라틴어로 작품이 번역된 아리스토텔레스(Aristoteles, 기원전 384~322) 사상에 눈을 돌렸습니다.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은 이성과 경험 및 자연의 원리를 근거로 현상과 사태를 설명하기 때문에 신앙과 이성의 모호함을 명확하게 설명할 수 있었습니다. 중세에 이러한 철학 연구 경향을 ‘스콜라 철학’이라고 불렀습니다.그런데 중세 지성인들은 그리스도교 신앙을 맹목적이라고 생각하고 비판했습니다. 따라서 그리스도교는 선교를 위해서라도 신앙을 합리적으로 설명할 필요를 갖게 되었습니다. 특히 계시 진리에 기반을 둔 신앙을 맹목적으로 믿으라고 강요할 수 없었기 때문에, 중세 신학자들은 아리스토텔레스의 논리학과 형이상학을 활용해 이성과 조화를 이루면서 신앙을 설명하기 시작했습니다. 이렇게 계시 진리를 객관적인 진리로 설명하는 학문 경향을 ‘스콜라 신학’이라고 불렀습니다.이해를 추구하는 신앙과 문답을 통한 신학 교육아우구스티누스(Augustinus, 354~430) 사상에서도 ‘이해를 추구하는 신앙’이라는 주장이 있었습니다. ‘스콜라 철학의 아버지’라고 불린 켄터베리의 안셀무스(Anselmus Cantuariensis, 1033/34~1109)는 아우구스티누스의 가르침을 참고해 스콜라 철학을 발전시키면서 신앙을 이성으로 논증하는 신학을 발전시켰습니다. 안셀무스는 저서 「프로슬로기온(Proslogion)」에서 신앙인이 자신의 신앙을 이해하고 싶어 한다는 의미에서 ‘이해를 추구하는 신앙(fides quaerens intellectum)’이라는 주장을 하면서 ‘나는 이해하기 위해 믿는다(credo ut intelligam)’라는 공식(公式)을 언급했습니다. 또한 안셀무스는 저서 「모놀로기온(Monologion)」에서 삼위일체 교리 논증의 근거를 성경에서 찾지 않고, 오로지 이성을 통해서 찾으려고 시도했습니다. 결국 이러한 변화는 고대 교부 신학을 끝맺고 중세 교의 신학을 시작하는 변곡점이 되었습니다.안셀무스의 학문 방법을 보다 체계화한 사람은 한때 ‘스콜라 신학의 아버지’라 불린 페트루스 아벨라르두스(Petrus Abaelardus, 1079~1142)였습니다. 아벨라르두스는 철학의 ‘보편(普遍) 문제’를 정리했습니다. 아벨라르두스는 플라톤의 관념(觀念)을 아리스토텔레스의 실재(實在)에 적용시켜 온건한 실재론을 주장하면서 신앙의 가르침도 조직적으로 체계화시켰습니다. 그런데 보편이 개별적인 사물에 앞서지 않고, 개별적인 사물 속에 존재한다는 아벨라르두스의 주장은 신앙 문제에서 비판을 불러 일으켰습니다. 클레르보의 베르나르두스(Bernardus Claraevallensis, 1090~1153)는 아벨라르두스가 모든 것을 면전에서 직접 볼 수 있다고 함으로써 인간 이성으로 하느님을 완전히 이해할 수 있다는 교만한 주장을 한다고 강하게 비판했습니다. 결국 1141년 상스(Sens) 교회 회의에서 아벨라르두스는 단죄되었습니다.중세 스콜라 신학자 중에서 가장 큰 영향을 끼친 인물은 ‘명제의 대가’라고 불린 페트루스 롬바르두스(Petrus Lombardus, 1095~1160)였습니다. 처음에 롬바르두스는 성경 주석에 매진했습니다. 이후 롬바르두스는 신학을 교육하는 데 필요한 새로운 방법론 및 교재가 필요하다는 점을 느끼고 「명제집(Libri Sententiarum)」을 저술했습니다. 롬바르두스는 저서에서 삼위일체 하느님, 창조주 하느님과 피조물, 육화하신 예수 그리스도 및 성사에 대해 대부분 아우구스티누스의 작품들을 인용하며 설명했습니다. 수수하다 못해 지루하기까지 했던 이 작품의 출현으로 당분간 서방 교회는 성경 교육보다 신학 교육에 더 매달리는 현상이 나타났습니다.신앙이 이성 중심으로 조명받는 것을 못마땅하게 생각했던 베르나르두스는 저서 「아가 강론(Sermones super Cantica Canticorum)」에서 안셀무스의 주장을 빗대어 ‘말씀을 추구하는 영혼(anima quaerens Verbum)’이라고 언급하면서 인간 영혼은 인간의 언어로 표현할 수 없는 말씀을 향유할 뿐이라고 주장했습니다. 또한 카르투지오회 제9대 원장이었던 귀고 2세(Guigo II, ?~1188)는 저서 「수도자들의 사다리(Scala Claustralium)」에서 정감적인 묵상 중심으로 실천하는 ‘거룩한 독서(Lectio Divina)’라는 기도 방법을 소개했습니다. 하지만 이미 대부분 사람들은 사변적인 이성 중심의 신학 방법론을 추종했으며, 일부 수도원 담장 안의 수도자들만 성경 묵상 중심의 신학 방법론을 가까스로 유지할 뿐이었습니다. 결국 이성 중심의 신학 방법론은 지적인 호기심을 채우는 데 급급했을 뿐, 영성 생활을 홀대하는 결과를 낳았습니다. <가톨릭대 신학대학 영성신학 교수>백영민2017.11.01

기도와 고증으로 완성한 ‘뵌 적 없는 순교자’ 영정윤지충·권상연 복자화 제작한 서양화가 홍용선 화백 대전 진산성지 현양대회서 봉헌지난 5월 29일 진산성지에서 열린 순교자 현양대회 미사를 시작하며 윤지충 복자화(오른쪽)와 권상연 복자화를 그린 홍용선(왼쪽) 화백이 진산성당 신자들과 기념 촬영을 하고 있다. 서양화가이자 판화가인 홍용선(요셉, 71, 대전교구 주교좌 대흥동본당) 화백. 한국조폐공사 디자인실장으로 35년간 일하며 잔뼈가 굵었고 2005년 은퇴했다. 그러나 그는 지난 1년여 동안 하루 서너 시간밖에 잠을 자지 못했다. 대전교구 진산성지(전담 김용덕 신부) 의뢰를 받아 한국 교회 첫 순교자 윤지충(바오로, 1759~1791)과 권상연(야고보, 1751~1791) 영정을 제작해야 했기 때문이었다. “쉽게 생각하고 시작했습니다. 평생 지폐 제작을 해오며 인물 터치를 많이 해왔기 때문입니다. 초창기 1만 원권 세종대왕 이미지 보정 작업(리터치)뿐 아니라 수많은 화폐 인물 리터치를 해왔기에 그리 큰 어려움이 있을 거라고는 생각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손을 대고 보니, 또 순교 복자들의 삶을 읽고 보니, 특히 순교까지 이른 굳센 믿음을 접하고 보니 쉽게 그릴 수가 없었습니다.” 홍 화백은 일반 신자들과는 ‘다른 의미의 순례’를 시작했다. 순교자 후손들과의 만남이었다. 해남윤씨 후손들을 만나 사진을 찍고 윤지충 복자 얼굴을 고증해 나갔다. 윤지충 복자는 서른세 살에 순교했기에 해남 땅끝마을 고산(孤山) 윤선도 종택 녹우당까지 찾아가 후손들의 삼십 대 얼굴 사진을 수집했다. 윤지충의 증조부 공재(恭齋) 윤두서의 자화상(국보 제240호)은 큰 도움이 됐다. 이를 토대로 둥근 얼굴형에 굵은 쌍꺼풀, 두툼한 눈두덩과 코, 짙은 수염의 윤지충 복자 영정을 완성했다. 이어 안동 권씨 후손들을 만나 똑같은 과정을 거쳐 길쭉한 얼굴형에 눈이 움푹 들어가 있고 처진 눈매에 코고 높고 날카로운 41세 순교자 권상연 복자의 영정도 그렸다. 영정을 그리는 과정은 쉽지 않았다. 분석한 얼굴형에 개별 스케치한 이목구비(耳目口鼻)를 조합하고, 1차로 완성된 인물에 시대적 배경과 연령대 수염, 명암을 얹고, 한복을 섬세하게 묘사했다. 인물 스케치를 최종 완성한 뒤 윤지충 복자는 성경을 들고 있는 모습으로, 권상연 복자는 십자가를 든 모습으로 형상화했다. “다른 분들은 누가 그분들을 본 사람이 있느냐며, 대강 그리라고 해도, 제 마음에 들지 않는데 어떻게 마무리를 할 수 있었겠습니까? 보면 볼수록 다시 손대고 싶은 유혹에 빠졌지요. 고치고 또 고치는 힘든 여정이 계속됐습니다. 하지만 언젠가는 손을 떼야 하는데 그 시점이 참 힘들었어요. 일찍 떼면 어설프고 늦게 떼면 조잡해지잖아요. 순교 복자의 순교 영성을 그림에 담아내는 일은 정말 힘들었습니다.” 결국에는 두 순교 복자의 영정을 완성할 수 있었다. 물론 100% 만족스럽지는 않지만 고생한 기쁨은 있다. 새로 그린 복자화는 주교회의와 서울대교구 절두산순교성지에도 전해질 예정이어서 보람도 크다. 홍 화백은 두 순교 복자의 영정에 이어 윤지충 복자의 동생 윤지헌(프란치스코, 1764~1801) 복자 영정도 제작할 계획이다. 글·사진=오세택 기자 sebastiano@cpbc.co.kr문채현2018.06.07

주임 신부가 마련한 쪽집게 신앙 과외 서울 대치2동본당 차원석 신부, 신앙에 대한 다양한 궁금증 해소 해줘 서울 대치2동본당 주임 차원석 신부가 4월 29일 신자들과 신앙에 관한 대화를 허심탄회하게 나누고 있다. “우리 본당 공동체가 영적으로 성숙하길 바라는 마음에 이 자리에 섰습니다. 공동체를 위해 함께 어우러지는 신앙생활을 해나갑시다.”4월 29일 서울 대치2동성당 지하 1층 대강당. 주일 교중 미사가 끝났지만, 차원석 주임 신부는 신자들 앞에 다시 섰다. 신자들의 평소 신앙 갈증을 듣고 답해주기 위해서다. ‘주임 신부와의 대화’ 시간엔 신자 200여 명이 자리를 가득 메웠다. 과거 가톨릭대 교학부총장과 교수를 역임한 차 신부는 평소 강론 때에도 신앙과 철학에 관한 깊이 있는 이야기를 전해왔다. 본당 선교분과는 이에 더해 기도의 방법, 올바른 성모 신심, 말씀과 영성, 신앙생활에 관한 궁금증을 허심탄회하게 묻고 답하는 ‘연장된 강론 시간’을 기획했다. 사제와 신자들 간에 깊은 대화가 오가는 사이 신앙의 의미도 더해졌다. 차 신부는 ‘선하신 하느님은 어째서 세월호와 같은 참사로 어린아이들을 데려가고, 죄 없는 이들에게 고통을 주시느냐’는 질문에 “제게도 존경하는 동료 사제와 평신도가 있었는데, 어느 날 사고로 불현듯 데려가셔서 하느님을 원망한 일들이 있었다”며 “현재의 고통을 넘고 나면 하느님 섭리를 깨닫는 때가 오곤 한다”고 답했다.‘하느님 뜻을 이해하고자 아무리 기도해도 잘 안 된다’는 질문에는 “하느님은 자연, 예술 작품 그리고 이웃을 통해 당신 뜻을 보여주신다”며 “당장 하느님이 보이지 않아도 성체조배와 기도로 계속 나를 작은 존재로 봉헌하자”고 당부했다.차 신부는 또 ‘기도 중에 자주 분심이 들 땐 어떻게 해야 하느냐’는 물음에 “기도를 더 빨리 바쳐보는 것도 한 방법”이라며 “분심이 들더라도 요구와 원망을 하다 보면 이후 주님 말씀에 귀 기울이게 돼 있다”고 했다. 또 본당 봉사와 가정사를 두고 고민하는 이에게는 “가정에 큰 문제가 있다면 봉사보다 가정이 먼저다. 그런 경우엔 봉사를 잠시 내려둬도 좋다”고 했다.한 신자가 “레지오 마리애 활동을 하면 할수록 성모님 의존도가 높아져 예수님에 대한 갈구가 옅어지는 경향이 있다”고 하자, 차 신부는 “우리 신앙의 중심은 그리스도이시다. 성모 신심은 예수님에 대한 믿음을 공고히 해주는 도움의 믿음”이라며 “중심은 그리스도와 성경이며, 성모 신심은 우리 교회를 더욱 풍요로운 믿음, 큰 위로로 이끈다”고 말했다. 이후로도 천국과 지옥에 관한 질문, 묵주 기도문 의미, 진화론과 창조론 등 심오한 신앙 대화는 90분간 이어졌다. 글·사진=이정훈 기자 sjunder@cpbc.co.kr 평화신문2018.05.02

성령 강림 대축일 - 프란치스코 교황이 말하는 성령은 무엇인가교회 쇄신과 선교의 에너지원은 바로 성령 지난 2017년 성령 강림 대축일 미사를 집전하는 프란치스코 교황. 【CNS 자료 사진】 “성령의 경이로움 사이로 걸어온 여정이었다.”바티칸 뉴스는 지난 3월 프란치스코 교황이 숨 가쁘게 달려온 5년 여정을 돌아보면서 이렇게 단언했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성령의 교황’이라고 불러도 좋을 만큼 성령의 바람을 업고 앞으로 나간다. 강론과 메시지를 살펴보면, 교회 쇄신과 선교에 필요한 에너지를 성령으로부터 얻는 것이 분명하게 드러난다. 2014년 터키 이스탄불에서는 성령을 ‘뒤집어 엎으시는 분’이라고까지 격하게 정의한 바 있다. “안정되고 불변하는 위치에 몸을 맡기는 것이 훨씬 더 쉽고 확실합니다. 하지만 성령께서는 움직이시고, 앞으로 걷게 하시며, 교회를 앞으로 나아가도록 밀어내시기 때문에 ‘뒤집어 엎으시는 분’이십니다.” 성령은 집안에 틀어박혀 있는 백성이 되는 것을 허락하지 않으시는 바람(2017년 6월 1일 일반알현)이고, 안주하려는 교회에 ‘계속 전진!’을 외치며 등 떠미는 존재라는 것이다. 교황은 그리스도인들, 특히 이성으로만 신앙을 이해하려고 애쓰는 현대의 그리스도인들이 성령을 홀대(?)하는 경향을 익히 알고 있다.성령 강림 대축일을 앞둔 2년 전 5월 9일 “오늘날에도 예수님을 믿으면서도 성령이 누구신지 모르는 사람들이 있다”고 질타했다. 이날 인용한 성경 구절이 에페소의 몇몇 제자들이 “성령이 있다는 말조차 듣지 못하였습니다”(사도 19.2)라고 한 대목이다. “성령께서 교회를 움직이시고, 우리를 예수님 제자로 만드십니다. 많은 이들이 교리교육 시간에 성령은 삼위(三位) 중 한 분이라고 배우지만, 그 이후 성령에 대해 더는 알지 못합니다.”교황은 신앙인들이 성령을 마음 안에 꼼짝 못 하게 가둬두는 어리석음을 “마음에 ‘사치스러운 포로’를 모시고 있다”고 표현하곤 한다. 신앙적 완고함과 영적 태만도 성령을 거부하거나 가둬두는 데서 비롯된다고 본다. “우리가 성령을 모시는 장소는 바로 마음입니다. 교회는 성령을 ‘마음의 달콤한 손님’이라고 부릅니다. 그분께서 여기에 계시지만 닫힌 마음에는 들어가실 수가 없습니다. 그 마음을 여는 열쇠는 어디에서 사는 것이 아닙니다. 하느님이 선물로 거저 주십니다.”(2017년 5월 22일 강론) 성령께 저항하는 모든 세력에 ‘저항’하는 것도 그리스도인의 사명이라고 교황은 강조한다. “그 저항은 세상 끝날까지 있을 것입니다. 우리가 저항해야 할 것, 곧 악마에게서 오는 것, 우리에게서 자유를 박탈하는 것에 저항할 수 있도록 은총을 빌어야 합니다. 또한 새로운 것, 오로지 하느님으로부터 오는 것에 우리 자신을 개방할 수 있도록 청해야 합니다.”지난해 성령 강림 대축일을 앞두고 “성령을 온순히 받으라”고 한 호소도 이번 대축일에 되새겨볼 만하다. “스테파노는 ‘여러분은 줄곧 성령을 거역하고 있습니다’고 말했습니다. 우리 또한 성령을 거스르며 성령을 거역하고 있습니까? 아니면 성령을 받아들이고 있습니까? … 공손히 받아들이십시오. 거역은 온순함의 반대입니다. 이러한 은총을 청합시다.” 김원철 기자 wckim@cpbc.co.kr 평화신문2018.05.15
[하느님과 트윗을](58) 공의회와 교부란 무엇인가요신앙에 대한 질문, 공의회 거쳐 응답 문 : 공의회는 무엇인가요.답 : 공의회는 전체 교회를 위해 신앙과 윤리에 관한 질문에 대답하기 위해 소집되는 교황과 주교들의 회의입니다. 공의회는 종종 신학자와 전문가의 도움을 받기도 합니다. 사도들은 예루살렘에서 첫 번째 연속 회의를 했습니다.(사도 15,6 참조) 거기에서 사도들은 성경에서는 쉽게 찾아볼 수 없는, 신앙에 관련된 질문에 대답해 줘야 했습니다. 이후 공의회를 통한 응답들은 교회 성전(聖傳)의 일부가 됐습니다. 공의회는 이단에 대응하기 위해 소집되기도 했습니다. 이단이란 하느님에 대한 진리를 부인하거나 왜곡하는 것을 말합니다. 이단은 신앙에 대한 그릇된 이해의 결과이며, 신자들을 잘못된 길로 인도하기 때문에 심각한 문제를 일으키지요. 그래서 이단을 그릇된 교설이라고도 한답니다.문 : 보편 공의회는 무엇인가요.답 : 교회가 조직화하면서, 교회 지도자들의 모임인 시노드가 지역의 문제를 논의하는 새로운 형태가 되었지만, 지역 시노드로는 전체 교회를 이야기 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로마 황제는 325년 니케아에서 보편 공의회를 소집했습니다. 이를 ‘보편’이라고 부른 까닭은 전체 교회의 대표들이 모였기 때문입니다. 교황 사절들과 300명이 넘는 주교와 로마 황제가 예수님과 성령이 하느님과 같거나 동등하지 않다고 주장하는 아리우스의 주장에 대해 논의하기 위해 모였습니다. 교황과 주교가 함께 내린 결론은 예수님이 바로 하느님이시라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창조되지 않으셨으며, 삼위 중 두 번째 위격으로서 언제나 계셔온 분이었습니다. 이러한 하느님의 아드님이 강생하시어, 살을 취하고 사람이 되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또한 온전한 인간이었습니다. 예수님은 하느님이시며 동시에 사람이심을 니케아 공의회는 분명히 한 것입니다. 문 : 주요 공의회와 그 내용은 무엇인가요.답 : 초기 8차례의 공의회는 신앙에 대한 공격에 대응해 그리스도교 신앙의 핵심을 제시했습니다. 예를 들면 초기에 열린 두 공의회(니케아 공의회와 콘스탄티노폴리스 공의회)에서 우리가 오늘날까지도 바치는 신앙 고백인 신경이 확립됐습니다. 공의회 중에서 트리엔트 공의회는 아주 중요합니다. 이 공의회는 종교개혁으로 제기된 질문에 답을 한 공의회이기 때문입니다. 가장 최근에 있던 보편 공의회는 1962년부터 1965년까지 열린 제2차 바티칸 공의회입니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결정들은 아직도 교회의 일상생활과 전례에 큰 영향을 미칩니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교회에서 평신도의 역할, 사회 및 다른 종교들과의 대화, 그리고 복음 선포에 대한 관심을 새롭게 했습니다.문 : 교부란 무엇인가요.답 : 그리스도교 초기의 교부들은 그리스도와 교회의 신앙에 관해 깊게 생각하고 가르친 거룩한 스승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사도들에게 전해 주신 메시지를 모든 시대의 그리스도인이 더욱 잘 이해하도록 도와주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의 저술은 여전히 우리에게 귀중합니다. 로마의 성 베드로 대성전에 있는 베르니니의 조각품, ‘성베드로좌’는 이 베드로좌를 네 명의 교부들이 받치고 있는 모습으로 표현하는데, 이는 교회가 이 위대한 스승에게 진 빚을 보여줍니다. 그 네 명의 교부들은 동방의 아타나시오 성인과 요한 크리소스토모 성인, 서방의 암브로시오 성인과 아우구스티노 성인입니다. 사도 교부는 사도들 이후 시대를 산 위대한 그리스도교 스승입니다. 이들은 한 명이나 여러 명의 사도에게서 가르침을 받았거나 아니면 적어도 같은 시대에 살았습니다. 정리=서종빈 기자 binseo@cpbc.co.kr 평화신문2018.07.03

SNS에 뿌린 복음의 씨앗, 신앙의 날개 달고 세상속으로SNS로 복음 선포하는 성직·수도자 “어머니는 제가 이 방송 하시는 줄 모르십니다. 충격받으실까 봐. 하하하.”닭 울음소리 나는 인형을 흔들고, 트로트가 나오면 엉덩이를 들썩이며 춤을 춘다. 사제의 권위와는 한참 동떨어진 방송이다. 서울대교구 이영제(사목국 기획실) 신부가 유튜브에 개설한 ‘가톨릭 주유소’ 채널이다. ‘주’님을 ‘유’(You, 당신)에게 ‘소’개합니다의 줄임말이다. 가톨릭 신자들에게 성경과 교리를 쉽고 편안하게 알려주기 위해 기획했다. 구독자 수는 2900여 명, 지금까지 80여 편의 영상을 올렸다. 페이스북에서 ‘겸손기도’로 알려진 마진우(대구대교구 가정복음화국 차장) 신부는 볼리비아 선교 사제였다. 그는 볼리비아의 선교 현장에서 길어올린 단상과 사진을 페이스북(facebook.com/semitoon)에 올려 공유하기 시작했다. 마 신부는 한국에 돌아온 후 최근 영상 장비를 갖춰, ‘복음 풀이’ 강의 영상을 유튜브에 올리기 시작했다. 지금까지 올린 강의 영상만 1000편이 넘고, 구독자는 4100여 명이다. 영적으로 목마른 현대인들에게 따끔하고도 깊은 영성 강의로 복음을 전한다. 이용현(서울대교구 정릉동본당 주임) 신부는 자신의 페이스북(facebook.com/zippaman)에 복음 묵상 글과 직접 작사ㆍ작곡한 악보를 게시한다. 이 신부는 “미사에 나오지 못하는 신자들을 배려하고 스스로 묵상하는 차원에서 글을 올리고 있다”고 말했다. 이탈리아에서 유학하고 있는 진슬기(서울대교구) 신부는 2013년부터 페이스북을 통해 교황의 강론을 번역해 공유하고 있는데 반응이 좋다. 교황 강론을 모아 낸 서적만 벌써 세 권이다. 최영민(예수회) 신부는 ‘돌깨 TV’를 운영하며, 문화와 영성을 주제로 한 다양한 장르의 동영상을 올리고 있다. 인터넷방송 형태의 팟캐스트도 인기다. 팟캐스트는 라디오와 달리 아무 때나 들을 수 있는 새로운 개념의 맞춤형 개인 미디어다. 가톨릭 콘텐츠로는 김경희(성바오로딸수도회) 수녀와 황인수(성바오로수도회) 신부가 4년째 진행하고 있는 ‘수도원 책방’이 있다. ‘책 읽어주는 수녀, 책 읽어주는 수사’라고 소개하는 이들은 책을 중심으로 음악과 영화, 문화 이야기를 복음적 시각으로 나눈다. 청량감 넘치는 수녀의 목소리에 차분하면서도 정감있는 신부의 목소리가 더해져 세상의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눈다. ‘무엇을 아느냐’가 ‘어떻게 사느냐’로 직결되는 삶의 물음과 본질을 생각하게 한다.SNS를 활용한 복음 선포는 해외에서도 어색한 일이 아니다. 단순히 강론이나 묵상 말씀을 촬영해 올리는 수준이 아니다. 생산자와 소비자에 대한 경계가 없고, 제작이 어렵지 않아 다양한 가톨릭 콘텐츠가 생산되고 있다.호주의 로버트 갈리 신부는 자신이 작곡한 성가로 뮤직비디오를 만드는 신부로 유명하다. 미국 로스앤젤레스의 로버트 배론 주교(instagram.com/bishopbarron)는 유튜브와 인스타그램에 자신의 강연은 물론, 전 세계를 다니며 선교하는 영상을 담은 ‘CATHOLICISM’ 시리즈를 연재하며 인기를 끌고 있다. 구독자가 16만 명이 넘는다. 거리와 시간 제약 초월한 복음의 일꾼“세상 사람들은 진솔한 소통에 정말 목말라 있습니다. 교회도 위기이지만 제도 교회가 제대로 응답하지 못하고 있고, 세상 사람들도 깊은 어려움과 고통 속에 있습니다.” 팟캐스트 ‘수도원 책방’을 운영하는 황인수 신부는 “SNS의 패러다임이 ‘누가 말하느냐’에서 ‘무엇을 말하느냐’로 바뀌었다”고 말했다.황 신부는 “SNS를 통해 타인의 시선 속에서 자신을 바라보고, ‘이런 걸 먹었고, 이런 곳을 가봤고’ 하는 식으로 자신을 다른 사람에게 전시하는 이들이 많다”면서 내적으로 힘이 없어 공허한 현대인들의 마음 상태를 지적했다. 수도원 책방이 그 허기짐을 달래주는 셈이다. 영적으로 메마르고 바쁜 신자들은 출퇴근길, 손에 든 휴대 전화로 복음 말씀을 묵상할 수도 있다. 세상 누구든, 인터넷이라는 도구로 활성화된 SNS 세상에서 소통하는 것이 가능해진 지 오래다. 물질만능주의가 팽배한 사회에서 SNS가 과시와 소비를 부추기는 것도 엄연한 사실이지만 동시에 사목자들이 SNS를 복음선포의 도구로 사용할 기회도 열려 있다. ‘겸손기도’ 마진우 신부는 “복음을 전하려는 사람에게 유일한 제약은 거리와 시간이었다”며 “SNS를 유용하게 잘 쓰면 얼마든지 사람의 영혼을 파고드는 훌륭한 도구가 될 수 있다”고 설명했다. 마 신부는 “영적 혜택을 보는 사람이 내가 사목하는 성당에만 국한되어 있는 게 안타까워 영상을 올리기 시작했다”고 밝혔다. 이용현 신부는 “사제들은 오히려 SNS에서 새로운 도전을 해야 한다”면서 “인터넷 문화가 상업적으로만 흐르는 것을 교회가 복음적 콘텐츠로 정화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지혜 기자 bonaism@cpbc.co.kr 전은지 기자 eunz@cpbc.co.kr 유튜브·인스타그램으로 소통하는 로버트 갈리 신부“선교를 위해 소셜 미디어를 사용하는 이유는 그곳에 젊은 사람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교회) 바깥에 있고, 우리는 물이 깊은 곳에서 사람을 낚는 어부가 돼야 합니다. 저는 소셜 미디어를 사람들이 있는 곳으로 가는 수단, 그들이 교회에 올 때까지 기다리는 자리로 이용합니다.” 인터뷰를 요청받은 호주의 로버트 갈리 신부에게 육성파일이 포함된 이메일 답장이 왔다. 유튜브 검색창에 ‘Fr Rob Galea’를 검색하면, 신부가 부르는 성가에 뮤직비디오를 입힌 영상이 시선을 끈다. 갈리 신부가 직접 만든 영상이다. 그의 영상을 보러 오는 팔로워는 1만 9000명, 인스타그램 팔로워는 2만 7000명이 넘는다. 갈리 신부는 호주에서 청소년사목을 담당하고 있다.그는 사목에 SNS를 활용하는 것에 대해 “예수님은 사람들에게 다가가셨다”면서 “우리는 교회에 숨어 있을 수 없고, 소셜 미디어를 통해 많은 사람이 변화하고 영향받는 것을 봤다”고 털어놨다. 갈리 신부는 “소셜 미디어를 활용해 사목할 때는 굳이 거룩한 이미지를 꾸미거나, 어떤 교회 사건을 언급하지 않더라도 마음을 사로잡을 수 있다”고 강조했다. 그는 “사람들이 스스로 강점과 약점을 파악하고 ‘나는 누구인가’라는 답을 찾을 수 있도록 돕는 게 중요하다”며 “절벽에서 위태로움을 느끼는 사람들, 사회 주변부에 있는 사람들을 위로하려면 ‘인간성’을 발휘해 다가가야 한다”고도 강조했다.전은지 기자 문채현2018.10.17

친절한 천사, 알고 보니 ‘신천지’서울 사목국 예방교육 자료집, 신천지의 정체와 대처법 등 담아 서울대교구 사목국이 제작한 유사종교 예방교육 자료집 「낯선 사람들의 목소리 신천지를 주의합시다!」는 그리스도의 복음을 왜곡하려는 신천지가 무엇이며, 사람들을 어떻게 현혹하는지 안내하고 있다. 주요 내용을 요약 소개한다.신천지란공식 명칭은 ‘신천지 예수교 증거장막성전’으로 1980년 설립됐다. 교주는 이만희씨다. 이씨는 재림 예수의 영이 내려 천국의 비밀을 계시했다고 주장하며, 요한 묵시록 15장 증거의 장막이 바로 신천지 교회라 가르친다. 요한 묵시록을 자의적으로 해석한 시한부 종말론을 강조한다. 종말 날짜를 지정하지 않고 신도가 14만 4000명이 되면 신천지(새 하늘 새 땅)가 열리고, 14만 4000명의 순교자 영과 신인합일을 이뤄 죽지 않고 영생하는 몸으로 왕이 될 것이라 가르친다. 신도 수가 2014년 14만 4000명을 넘자 교리를 바꿔 전 세계 종교가 통합되는 것이 하느님 뜻이며, 그것을 이만희와 신천지가 이룬다고 주장하고 있다. 신천지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공격적인 포교를 펼치면서 청소년의 학업 중단을 비롯해 이혼, 가정 파괴 등 심각한 종교 사회적 문제를 일으키고 있다.신천지 접근법신천지는 여러 방법으로 확보한 개인 정보를 토대로 전도 대상자를 선별한다. 인간적인 신뢰를 형성하기 위해 자주 만나 차와 식사를 하자고 하며 영화를 보여 주거나 문화 행사에 초대하고 편지ㆍ선물ㆍ이벤트 등으로 감동을 준다. 부모님과의 관계, 자녀 문제, 가정 내 다양한 고민과 관심사에 귀를 기울여 주고 도움을 주려 한다. 또 기도ㆍ말씀 문자 메시지 발송 등으로 자신이 신앙적으로 우위에 있음을 드러내기도 한다. 상대가 거부하기 어려울 정도로 친해진 뒤엔 신천지 성경 공부의 첫 단계인 복음방 단계로 끌어들인다.복음방 단계인간관계를 토대로 성경 공부로 유인한다. 우연을 가장해 성경을 잘 안다는 선교사나 전도사(혹은 가짜 신부, 수녀, 수사) 등을 소개해 주고 집ㆍ카페ㆍ강의실ㆍ스터디룸 등에서 주 1~4회 1대 1 또는 소그룹으로 2~3주에서 몇 개월간 성경 공부를 하게 한다. 이때 전교 대상자는 신천지 교리에 맞춰 성경을 배우게 된다. 신학원(센터) 단계초ㆍ중ㆍ고등 3단계로 이뤄지며 주 4회 성경 공부를 한다. 복습과 쪽지 시험을 포함해 대략 3시간가량 수업한다. 철저한 입막음 교리로 각종 성구를 이용해 성경 공부를 한다는 사실을 외부에 발설하지 못하도록 하는 것이 신천지의 특징이다. 수강생으로 위장해 짝꿍 역할을 해 오던 신천지인은 바람잡이 역할을 하면서 성경공부를 의심하는 이들이 끝까지 수업을 듣도록 유도한다. 이후 수강생은 수시로 보강을 듣거나 신천지 예배를 봐야 한다. 거의 매일 센터를 방문해야 한다. 전 과정을 마치면 500문항의 주관식 수료 시험을 본 후 입교 자격을 준다. 이후 지문 인식 시스템을 통과해야 들어가는 신천지교회에서 예배를 보게 된다.신천지 대처법누군가 성경 공부를 제안하면 가톨릭 교회에서 공인된 프로그램인지 살펴야 한다. 성당이나 교회 기관 밖에서 하는 성경 공부나 세미나, 특강은 반드시 본당 사제나 수도자에게 문의한 뒤 참여한다. 교회 밖에서 실시하는 설문조사에 개인 정보를 절대 남기지 않도록 한다.서울대교구 기준 공인 성경 공부 프로그램은 △성서못자리 △성서백주간 △여정성서모임 △가톨릭성서모임 △가톨릭청년성서모임 △베네딕도 성서학교 △성바오로교육관 바오로성서모임 △성바오로딸수도회 시청각통신성서교육원이다. 가족이나 지인이 신천지에 빠졌을 때 보이는 행동들-무언가를 배운다며 주 4일을 꼬박 나가거나 밤 11시께 집에 들어오고, 전화 통화가 어려운 경우. -짜증을 잘 내며 “신부님이 성경도 잘 모르는 것 같다”는 식의 말과 기성 교회를 비판하는 말을 자주 할 때.-전과 달리 휴대폰 관리에 무척 신경을 쓰며 공개하기를 꺼리는 경우.-일찍 나가서 밤늦게 들어오며 항상 긴장과 강박관념에 사로잡혀 있는 경우.-가족이나 지인을 세미나나 문화 행사에 초대하고 그곳에서 우연히 만난 사람들과 연결해 성경 공부를 제안하는 경우.가족 중 신천지 사람을 발견했을 때신천지에 빠진 사람에게는 이성과 상식에 따른 설득과 애정이 어린 호소가 통하지 않는다. 성경을 잘못 배워 생긴 일이므로 반드시 전문 상담이 필요하다. 당황하지 말고 본당 사제나 수도자, 교회 내 관계 부서에 도움을 청해야 한다.당사자가 신천지 신자임을 밝혔을 때도 마찬가지다. 본당 사제 등 교회 내 관계 부서에 상황을 알려 도움을 청해야 한다. 신천지에 나가는 것을 강압적으로 막거나 다퉈선 안 된다. 핍박이라고 여겨 가출이나 이혼 등으로 이어져 상담 기회마저 얻기 어려워진다.신천지 위장 단체천지일보ㆍ(사)자원봉사단 만남ㆍHWPL(하늘문화세계평화광복)ㆍIWPG(세계여성평화그룹)ㆍIPYG(국제청년평화그룹) 등이 있다. 이외에도 다양한 개신교 카페와 블로그 등이 있으며 심지어 신천지 비방 카페를 위장해 운영하기도 한다. 이힘 기자 lensman@cpbc.co.kr cpbc2017.06.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