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마지막 순간에도 죽음 선고한 여왕 위해 기도김학준 신부 고문대 위의 성 에드먼드 캠피언과 동료 순교자 출처=가톨릭 굿뉴스 캠피언은 가톨릭 신앙을 더 적극적으로 옹호하기 위해 「열 가지 이유(Ten Reasons)」라는 책자를 펴냈다. 그 내용은 이렇게 요약할 수 있다. ①모든 이단은 입맛에 따라 성경 말씀을 자의적으로 뽑아서 사용한다. ②어떤 경우에는 성경의 분명한 내용마저 왜곡해버린다. ③프로테스탄트들은 보이는 교회를 거부함으로써 어떠한 교회의 존재도 사실상 거부하고 있다. ④프로테스탄트들은 처음 네 차례의 공의회를 존중하는 듯 보이지만, 실제로는 공의회의 가르침을 거부하고 있다. ⑤ㆍ⑥ 프로테스탄트들은 교부들을 무시해버린다. ⑦교회의 역사는 계속 이어지고 있다. ⑧츠빙글리와 루터, 칼뱅의 글들은 상당히 모욕적인 언사로 가득 차 있다. ⑨프로테스탄트들은 논쟁할 때 의미 없는 속임수들을 많이 쓴다. ⑩다양하면서도 많은 수의 가톨릭 증거자들은 그 자체로 매우 인상적이다. 캠피언은 노퍽(Norfolk)으로 가는 도중에 지인이 사는 라이포드(Lyford)에도 꼭 들르고 싶어 하였다. 그는 그곳에서 아주 신중하고 조심스럽게 행동하면서 눈에 띄지 않으려 조심하였지만, 엘리엇과 젠킨스라는 사람들의 밀고로 1581년 7월 17일 결국 붙잡히고 말았다. 그가 잉글랜드에 들어온 지 불과 1년이 조금 지난 시점이었다. 체포된 그는 ‘선동적인 예수회원 캠피언’이라는 문구가 붙여진 모자를 쓴 채 런던 시내 곳곳으로 끌려다닌 후 런던탑에 갇혔다. 그는 레스터 하우스(Leicester House)로 잠시 끌려가 엘리자베스 1세 여왕 앞에서 심문을 받기도 하였다. 심문을 지켜보던 엘리자베스 여왕은 캠피언이 자신을 여왕으로 인정하는지 안 하는지를 직접 묻기도 하였다. 캠피언은 엘리자베스 여왕을 합법적인 통치자로 받아들일 뿐만 아니라, 세속적인 문제에 있어서는 자신 역시 여왕의 통치권 아래 순명하여야 한다는 것을 인정한다고 답변하였다. 여왕은 그렇다면 왜 교황이 자신을 파문한 것이냐고 재차 물었고, 캠피언은 이 문제가 신학자들 사이에서도 여전히 의견이 엇갈려 있다고 답하였다. 사실 심문자들 역시 한때 자신들의 동료였으며 뛰어난 인재인 캠피언을 잃고 싶지 않았고, 될 수 있는 대로 그가 가톨릭 신앙을 포기하고 자신들의 곁으로 와주기를 원하였다. 그러나 신앙에 대해서 별다른 열정이 없던 그들이 캠피언의 신앙심을 이해하기란 어려운 일이었다. 가톨릭 신앙에 대한 캠피언의 확고한 태도를 재확인하면서, 그들은 이 문제를 단순히 종교적인 영역의 문제로 국한하기보다는 정치적으로 다루고자 했고, 그에 대한 심문은 그를 반역죄로 몰아가는 분위기였다. 아무리 심문해도 별다른 소득이 없자, 캠피언을 사형시키는 쪽으로 의견이 모아졌다. 당시 잉글랜드 법에 따르면, 사제 직분을 수행하는 것 자체가 불법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한 가지 이유만으로 캠피언을 사형에 처한다면 나라 안팎에서 적지 않은 파장이 일 것으로 예상되었기에 쉽게 결정할 수 있는 문제는 아니었다. 그러던 중 법원에서 최종적으로 사형 판결이 내려지면서 그에 대한 오랜 심문은 마침내 종지부를 찍게 되었다. 캠피언의 마지막 변론은 이러하였다. “우리는 전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어차피 우리가 자신의 삶을 주관하는 존재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우리에게 사형을 선고하는 이유가 궁색하다는 것은 오히려 우리의 무죄를 말해줍니다. 그러나 우리가 가톨릭을 믿는 것이 반역을 행하는 것이라면, 어떤 비난도 감수하겠습니다. 그것을 제외하고는 우리는 누구 못지않게 여왕님께 충성스런 백성이었다고 생각합니다. 따라서 우리를 비난한다면 그것은 당신들의 모든 조상님, 곧 돌아가신 모든 사제와 주교들뿐만 아니라 선왕들을 비난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분들은 한때 잉글랜드의 영광이었지만 교황의 자녀이기도 했습니다. 당신들이 반역이라는 끔찍한 이름으로 매도해버린 우리의 가르침이 그분들의 가르침과 다른 것이 무엇입니까? 단지 이런 이유 때문에 타락한 후손들이 우리를 비난하는 것이라면, 우리는 오히려 이를 기쁨이자 영광으로 삼겠습니다.” 사형 판결을 받은 이후 사형이 집행되기 전까지 약 11일 동안 캠피언에겐 족쇄가 채워졌다. 여동생을 비롯한 몇몇 사람들이 그를 방문하러 오기도 하였고, 그를 고발했던 조지 엘리엇도 찾아왔다. 캠피언은 “일이 이렇게 될 줄 알았다면 애초에 고발하지도 않았을 것”이라며 자신의 잘못을 후회하는 엘리엇에게 “참회와 더불어 고해성사를 보라”고 권하기도 했다. 캠피언은 마지막 며칠 동안 온전히 죽음을 준비하였다. 감옥에서도 고행하고 단식하였으며, 이틀 동안 잠도 자지 않고 무릎을 꿇은 채 기도와 묵상에 전념하였다.1581년 12월 1일 사형 집행이 예정된 런던의 타이번(Tyburn)으로 많은 군중이 몰려들었고, 캠피언은 그들을 향해 “주님께서 여러분을 축복해주시고 좋은 가톨릭 신자로 만들어주시길 빕니다”라고 말하였다. 말 두 마리가 준비되었다. 한 말에는 캠피언이 다른 말에는 랄프 셔윈과 동료 예수회원 알렉산더 브라이언트가 묶인 채로 진흙과 빗속을 헤치며 천천히 끌려갔다. 교수대에 도착하자 캠피언은 그 밑에 세워진 수레에 올라섰고 진흙과 먼지로 범벅이 된 그의 목에 밧줄이 걸렸다. 그는 교수대 위에서 큰 소리로 배심원들을 용서하였고, 심문 중에 혹시 자신이 누설했을지도 모르는 사람들에게 용서를 청하였으며, 자신의 가방에서 나왔다고 하는 책을 절대 소유한 적이 없다고 밝혔다. 죽기 전에 여왕께 용서를 청해야 한다는 관리들의 요구에, 자신은 여왕을 모욕한 적이 없기에 결백하다고 하면서 오히려 여왕을 위해 기도하였다. 그가 기도를 마치자 사형 집행이 시작되었다. 그가 올라서 있던 수레가 치워지면서 목에 걸린 밧줄이 그의 목을 강하게 조였다. 그는 의식을 잃을 때까지 교수대에 매달려 있었고, 사형집행인은 그의 사지를 절단한 뒤 당시의 관례대로 처리하였다.가톨릭 신앙을 증거하며 목숨을 바친 에드먼드 캠피언은 1886년 12월 9일 레오 13세 교황에 의해 시복되었고, 1970년 10월 25일 바오로 6세 교황에 의해 잉글랜드와 웨일즈의 동료 순교자 39명과 함께 시성되었다. 그의 축일은 12월 1일이다. 예수회, 서강대 인성교육센터 교수 [예수회 성인들의 생애와 영성] 성 에드먼드 캠피언 (하) 평화신문2018.01.03
![[전영준 신부의 가톨릭 영성을 찾아서] (83) 17세기 ⑥ - 프랑스 수도자들의 영성](//cpbc.co.kr/CMS/newspaper/2018/07/rc/726963_1.0_titleImage_1.jpg)
[전영준 신부의 가톨릭 영성을 찾아서] (83) 17세기 ⑥ - 프랑스 수도자들의 영성이성과 체험의 조화로 이단 사상을 걷어내다 17세기에 예수회뿐만 아니라 다양한 수도회 수도자들은 그리스도인 영성생활을 돕기 위해 프랑스 전역에서 많은 활동을 했습니다. 이들의 활동 덕분에 근세에 서방 가톨릭교회는 올바른 영성생활을 탄탄하게 굳혀 나갈 수 있었습니다.신비신학에 관심을 가졌던 가르멜회 수도자프랑스 남서부, 보르도(Bordeaux) 출신인 셔롱(Jean Cheron, 1596~1673)은 1611년에 가르멜회에 입회했으며, 보르도 대학교에서 오랫동안 공부하고 박사학위를 받았습니다. 1629년 셔롱은 ‘투렌 개혁(Rforme de Touraine)’을 고향 지역에 소개했습니다. 투렌 개혁은 17세기 초 프랑스에서 반(反) 종교개혁의 맥락 안에서 가르멜회 수도자들이 시작했던 운동입니다. 또한, 셔롱은 신비체험에 대해 합리주의적인 비평을 시도했습니다.셔롱은 저서 「신비신학 성찰(Examen de la Thologie Mystique)」에서 신성한 것과 신비신학과의 차이를 고찰하면서 그 당시 신비체험에 대한 지나친 남용과 착각을 비난했습니다. 인간은 대죄의 상태에서도 신비스러운 일치를 체험할 수 있고 덕행 실천 없이 묵상을 통해 하느님 안에서 영적인 휴식을 취하는 것은 게으름이고 시간 낭비라고 생각했던 셔롱은 동시대에 언급되는 신비체험을 배척하고 싶어했습니다. 그래서 신비체험을 묘사하는 모호한 언어들을 비판하면서, 진실과 거짓 사이의 틈새를 메워 모순을 최소화하려고 최선을 다했습니다.프랑스 남부, 말로센느(Malaucne) 출신으로 세속명이 줄리앙(Esprit Julien)이었던 성삼의 필립(Philippe de la Trs Sainte Trinit, 1603~1671)은 1620년에 리옹에서 가르멜회에 입회해 이듬해에 수도자가 됐으며, 파리와 로마에서 공부했습니다. 필립은 1629년부터 한동안 아시아에서 선교 활동을 하던 중 인도, 고아(Goa)에서 철학과 신학을 가르쳤습니다. 필립은 1665년 이탈리아 주재 가르멜회 총장으로 선출돼 많은 관구를 순회하던 중 나폴리에서 사망했습니다.라틴계 언어에 능통했던 필립은 철학 및 신학에 관련된 작품을 많이 저술했으며, 신비체험에 관한 작품인 「신비신학 대전(Summa Theologiae Mysticae)」에서 완덕의 산에 오르는 길을 정화, 조명, 일치의 세 가지 길로 소개했습니다. 특히 필립은 초자연적인 관상에 다다르고자 하는 사람은 마음의 순결을 지니고 기도해야 한다고 강조했습니다. 즉, 마음의 순결은 “마음이 깨끗한 사람들”(마태 5,8)이 지닌 마음으로써 정신이 단순하고 겸손함을 의미한다는 것이었습니다.얀센주의 및 정적주의와 투쟁한 카르투지오회 수도자프랑스 북부, 누아용(Noyon) 출신인 인노상 르 마송(Innocent Le Masson, 1628~1703)은 1645년에 카르투지오회에 입회했으며, 1663년에 수도원 원장이 됐고 1675년에 카르투지오회 모(母)수도원 원장 및 수도회 총장에 선출됐습니다. 르 마송은 이듬해에 모원이 화재로 파괴되자 재건했으며, 수도원의 역사를 기록으로 남기면서 수도원을 운영했습니다.르 마송은 얀센주의의 위험으로부터 카르투지오회 영성을 지키려고 노력했습니다. 르 마송은 저서 「완덕과 종교생활 입문(Introduction la Vie Religieuse et Parfaite)」에서 프란치스코 드 살의 「신심생활입문」과 토마스 아 켐피스의 「그리스도를 따름」을 묵상하고 깨달은 교훈 53개를 소개했으며, 젊은 수도자 교육용 「수련 지침서(Directorium Novitiorum)」에서 적절한 예시를 들어가며 분명하며 간결하고 건전한 교리로 무장한 내용을 제시했습니다.또한, 르 마송은 귀용 부인의 저서 「짧고 쉬운 기도 방법(Le Moyen court et facile de faire oraison)」에 반대하면서 정적주의와도 투쟁했습니다. 특히 카르투지오회 수녀원에서 귀용 부인의 저서를 많이 읽자, 르 마송은 직접 수녀원을 찾아가 반대 의사를 밝히면서 예수 성심 신심을 활용해 정적주의의 영향을 물리쳤습니다.이성과 체험의 조화를 통해 정적주의를 반대한 도미니코회 수도자프랑스 북부, 클레르몽(Clermont) 출신인 샤르동(Louis Chardon, 1595~1651)은 파리에서 고등교육을 받던 중 수도회가 지성 활동을 통해 사도직을 실천하는 것에 마음이 끌려서 1618년에 도미니코회 수도자가 됐습니다. 샤르동은 1632년에 정규 설교가로서 툴루즈(Toulouse)로 파견된 적이 있었으나, 1645년에 파리로 돌아와 남은 생애 동안 저술가와 영적 지도자로 살았습니다. 샤르동은 자신의 대표작 「예수의 십자가(La Croix de Jsus)」에서 십자가를 통한 그리스도인의 영적 성장을 다루면서 그리스도교 고통 신학을 소개했습니다. 샤르동은 이 작품을 통해서 신학자의 지식과 신비가의 체험을 완벽하게 조화시켜 사색적이며 실천적인 영성을 제시했습니다. 샤르동은 성화 은총의 작용에 관심을 두는 토미즘의 영성에 기반을 두고 덕행과 은총의 삶의 발전을 말하는 신비적인 상태로서의 영성생활의 단일성을 설명했습니다. 또한 저서 「예수 그리스도의 수난 묵상(Mditations sur la Passion de Jsus-Christ)」에서 또 다른 묵상의 기술을 다뤘습니다.프랑스 남서부, 오빌라르(Auvillar) 출신인 콩탕송(Vincent Contenson, 1641~1674)은 예수회원의 지도 아래에서 공부했으나, 1655년에 툴루즈에서 도미니코회 수도자가 됐습니다. 콩탕송은 1664년부터 알비(Albi)에서 철학을 가르쳤고, 1666년부터 툴루즈에서 신학을 가르쳤으며, 훗날 프랑스 전역의 신학교에서 가르쳤습니다. 콩탕송은 박학한 설교 덕분에 대중적인 명성을 얻었습니다. 콩탕송은 지식과 사랑이 합쳐지기 전까지 완덕을 얻을 수 없다고 믿었습니다. 즉, 스콜라주의의 건조한 논증에서 벗어나서 교부들이 사용한 정신뿐만 아니라 마음에 호소하는 방법을 차용한 수덕-신비적인 숙고를 사색적인 설명에 첨가했습니다.프랑스 남부, 툴루즈 출신인 마술리에(Antoine Massouli, 1632~1706)는 1647년 도미니코회에 입회해서 툴루즈와 보르도에서 도미니코회가 운영하는 학교에서 공부했으며 툴루즈에서 박사학위를 취득했습니다. 마술리에는 주교직은 거부했으나 수도원에서 맡긴 직분은 수행했으며, 정적주위를 조사하는 교황 위원회의 고문직을 맡았는데, 페늘롱의 저서에 대한 심사를 요청받았습니다. 또한 마술리에는 「세 가지 삶에 대한 성 토마스의 묵상(Mditationes de S. Thomas sur les trois vies)」, 「진정한 기도에 대한 논단(Trait de la vritable oraison)」, 「하느님의 사랑에 대한 논단(Trait de l’amour de Dieu)」 등의 논문을 통해 정적주의를 거슬러 반대했습니다.프랑스 남동부, 알로(Allos) 출신인 피니(Alexander Piny)는 어린 시절에 도미니코회에 입회했으며, 설교를 잘하고 철학 및 신학을 잘 가르치자 1676년 신학 석사학위를 취득하고 도미니코회가 운영하는 파리의 한 학교에서 성경을 가르치는 교수로 임명됐습니다. 피니는 1680년부터 영성신학 작품을 저술했습니다. 때로는정적주의자 논쟁에서 토마스의 관점을 변호하고 표현 방식에서 페늘롱이나 반(半)정적주의자와 유사하게 보였으나, 결코 정통 신앙에서 벗어나지 않았습니다.17세기에 프랑스에서 출현한 얀센주의와 정적주의는 비록 단죄됐더라도 영향력이 쉽게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따라서 많은 프랑스 영성가들도 이런 이단들을 몰아내고 올바른 영성생활이 정착될 수 있도록 끊임없이 노력했습니다. 특히 그들은 그리스도인들이 신비생활을 잘 이해할 수 있도록 신비신학에 관한 저술 활동도 활발히 펼쳤습니다. <가톨릭대 신학대학 영성신학 교수> 백영민2018.07.11

지옥은 없다고 교황이 말했다고?이탈리아 은퇴 언론인 말에 바티칸이 반박 … 교황, 지옥을 ‘하느님과의 단절’이라 수차례 말해 이탈리아 르네상스 시대의 화가 산드로 보티첼리(1445~1510)가 단테의 「신곡」 지옥편을 읽고 그린 깔대기 모양의 ‘지옥도’. “교황이 지옥은 없다고 말했다.”이탈리아의 은퇴 언론인 에우제니오 스칼파리(93)가 프란치스코 교황을 만나고 나와 교황이 지옥의 존재를 부인했다고 말하자 로마의 호사가들이 바빠졌다. 주님 부활 대축일 무렵 주요 외신과 소셜 미디어를 타고 그 소식이 빠르게 퍼져나가자, 바티칸은 “그 얘기는 스칼파리 자신이 (대화를) 재구성한 것”이라고 반박 성명까지 냈다.그는 이탈리아 일간지 ‘라 레푸블리카’의 공동 창립자다. 몇 년 전에도 교황 발언을 자기 입맛에 맞게 재구성해 옮겨 문제가 된 적이 있다. 이번에는 “사악한 영혼은 죽으면 어디로 가고, 어떤 벌을 받느냐”고 물었더니 교황이 “참회하지 않는 사람은 용서받을 수 없고 소멸한다. 지옥은 존재하지 않는다. 죄를 지은 영혼은 그저 소멸될 뿐”이라고 했다는 것이다.과연 사실일까. 지옥의 존재를 인정하는 교황의 발언은 차고 넘친다. 교황은 범죄 집단 마피아 조직원들의 회개를 촉구하면서 지옥 얘기를 꺼낸 적이 있다. “당신들에게 지옥을 면할 시간이 남아 있다. (회개하지 않고) 계속 그 길로 가면 거기에서 기다리고 있는 것은 지옥뿐이다.”(2014년)3년 전 한 스카우트 소녀 대원이 “하느님은 모든 이를 용서하시는데, 지옥은 왜 있는 건가요”라고 교황에게 물었다. 교황은 “훌륭하고 까다로운 질문”이라면서 소녀의 눈높이를 맞춰 대답했다. “하느님을 질투하는 교만한 천사가 있었어요. 하느님의 자리를 원했죠. 그럼에도 하느님은 그 천사를 용서해 주시려고 했는데, 천사가 ‘됐어요. 용서 같은 건 필요 없어요’라고 말했어요. 그게 지옥입니다. 하느님이 지옥에 보내는 게 아니라 인간이 스스로 걸어 들어가는 겁니다.”2016년 강론에서는 “지옥은 ‘고문실’이 아니다”며 “우리를 지극히 사랑하시는 하느님으로부터 영원히 분리, 단절되는 끔찍한 상태가 지옥”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교황의 이런 설명은 현대 신학이 정의하는 지옥의 개념과 일치한다. “지옥은 하느님과 또 하느님 나라에 들어간 복된 이들과 이루는 친교를 결정적으로 스스로 거부한 상태다. 죽을죄를 뉘우치지 않고, 하느님의 자비로운 사랑을 받아들이지 않은 채 죽음으로써 영원히 하느님과 헤어져 있겠다고 자유로이 선택한 것이다.”(「가톨릭대사전」 ‘지옥’ 편)지옥은 인간이 스스로 선택하는 것(상태)이라는 교황 설명은 「가톨릭교회 교리서」에도 나와 있다. “하느님께서는 아무도 지옥에 가도록 예정하지 않으신다. 자유의사로 하느님께 반항하고(죽을죄를 짓고) 끝까지 그것을 고집함으로써 지옥에 가게 되는 것이다. 미사 전례와 일상 기도를 통해 교회는 ‘아무도 멸망하지 않고 모두 회개하게 되기를’(2베드 3,9) 바라시는 하느님의 자비를 빈다.”(1037항)과거와 달리 현대 신학은 우주 공간 어디엔가 있을지 모를 물리적 공간으로서의 지옥에 대해 말하지 않는다. 단테의 「신곡」 지옥 편 또는 국내에서 인기를 끈 판타지 영화 ‘신과 함께’에 나오는 ‘고문실’ 같은 지옥을 언급하는 신학자는 없다.하지만 구약은 물론 신약에도 형벌을 받는 공간적 표상으로서의 지옥이 등장한다. 부자와 라자로의 비유(루카 16,19-31) 편에서 탐욕스러운 부자가 저승에서 고초를 겪는 장면이 대표적이다. “쭉정이는 꺼지지 않는 불에 태워 버리실 것”(마태 3,12), “지옥에서는 그들을 파먹는 구더기도 죽지 않고 불도 꺼지지 않는다”(마르 9,48) 등의 구절에서도 그런 표상을 찾아볼 수 있다. 이런 표현은 구약시대부터 이어진 당대의 언어 습관에서 나온 것이라는 게 신학자들의 해석이다. 올바른 행위를 촉구하는 보다 강력한 충동으로 이해해야 한다는 것이다. 고대 종교들은 악에 대한 근본 문제의 해답을 저승 세계(지옥)에서 찾으려고 노력했다. 지옥에 대한 성경과 교회의 일관된 가르침은 ‘하느님과 영원히 단절된 상태’라는 것이다. 따라서 구원의 문은 회개하고 하느님께 나가는 사람에게 열려 있다. 이를 이해하면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는 그리스도의 외침이 더 크게 들려온다. “너희는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멸망으로 이끄는 문은 넓고 길도 널찍하여 그리로 들어가는 자들이 많다. 생명으로 이끄는 문은 얼마나 좁고 또 그 길은 얼마나 비좁은지, 그리로 찾아드는 이들이 적다.”(마태 7,13-14) 김원철 기자 wckim@cpbc.co.kr cpbc2018.04.11
![[성경 속 기도] (8) 다윗의 기도](//cpbc.co.kr/CMS/newspaper/2016/03/rc/627251_1.0_titleImage_1.jpg)
[성경 속 기도] (8) 다윗의 기도겸손하게 죄 고백하고 통회의 기도를 렘브란트 작 ‘다윗과 요나탄’, 1642년, 상트페테르부르크 예르미타시 미술관. 출처=「명화로 만나는 성경」 다윗은 흩어져 있는 이스라엘 전체를 하나의 왕국으로 통일하고 예루살렘을 수도로 삼았던 위대한 인물이다(2사무 5,3-4). 그는 이스라엘 역사상 강대한 왕조를 세운 이상적인 왕으로, 그와 그의 통치에 관련해 이스라엘 민족의 메시아 대망이 생겨났다. 구약 시대에 예언자, 사제, 왕들은 즉위할 때 머리에 기름을 붓는 의식을 행했다. 그리스도는 예언자, 대사제, 왕 중 왕으로서 하느님으로부터 기름 부음을 받았고, 인류 구원을 위해 이 세상에 태어나신 ‘구세주’이시다. ‘메시아’라는 말은 구세주를 의미한다. 그런데 이스라엘은 왕조 시대에 다윗 왕 이후에는 신망 있는 왕을 갖지 못했다. 이스라엘인들은 다윗 왕의 이미지와 결합된 이상적인 왕이 다시 올 것이라는 ‘메시아 대망’의 경향을 갖게 됐다. 다윗은 이스라엘의 초대 왕 사울과 달랐다. 사울 왕은 어렵고 문제가 생길 때마다 하느님께 의지하고 기도하는 것이 아니라 점쟁이를 찾고 무당을 찾았다. 그런데 다윗은 어려울 때마다 하느님 앞에 기도했다. 어린 나이의 다윗은 필리스티아인들과 전쟁에서 골리앗을 이김으로써 이스라엘 국민들의 인기를 얻었고 그 인기는 상상을 초월했다(1사무 17장). 다윗을 질투한 사울은 그를 죽이려는 음모를 꾸몄으나 좌절되고, 다윗은 우여곡절 끝에 사울의 후계자가 됐다. 처음에는 유다 지파의 왕이었으나, 사울과 그의 후계자가 죽은 후 이스라엘 전체의 왕이 됐다.다윗에게 특별한 점은 많은 고통과 어려움을 겪고 고난이 닥칠 때 기도에 전념했다는 것이다. 그는 모든 것이 하느님 소유이며 그분 섭리로 세상이 이뤄진다는 것을 굳게 믿는 성실한 신앙인이었다. 사실 사람은 갑자기 엄청난 고난이나 어려움이 닥치면 막상 기도하기 쉽지 않다. 우선 인간적인 능력으로 해결하려 하기 때문이다.오래전 후배 신부의 오래된 차를 타고 독일 고속도로를 이용해 다른 도시를 방문한 적이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세찬 비와 돌풍을 동반한 태풍이 몰려와 고속도로는 아수라장이 됐다. 시야는 불과 몇 미터밖에 안 보이는 상황에서 죽음의 공포가 우리를 덮쳤다. 그러자 후배 신부는 묵주기도를 하자며 먼저 기도를 시작했다. 나도 주머니에서 묵주를 꺼내 함께 큰 소리로 한 시간 이상 묵주기도를 바쳤다. 밖의 환경은 여전했지만 기도를 하면서 점차 용기가 생겼고 마음도 차분해졌다. 그 당시 우리도 다윗처럼 위기의 순간에 기도를 통해 하느님 도우심의 손길을 체험한 것이었다. 다윗의 기도가 빛난 순간은 전투에서였다. 다윗에게 기도는 승리를 위한 노력이었다. 여호수아가 아말렉족과 싸움 중 다윗이 산에서 두 손을 들고 기도하는 장면은 무척 인상적이다(탈출 16,8-16). 한편, 다윗은 자신의 역사에서 가장 큰 죄를 짓게 된다. 욕정에 눈에 어두워져 부하 우리야를 죽이고 그의 아내인 밧 세바를 취한 것이다. 이때 나탄 예언자가 밧 세바 사건으로 다윗을 꾸짖었다(2사무 12,1-15). 다윗은 그때 바로 하느님께 자신의 죄를 고백하고 통회했다. “그때 다윗이 나탄에게 ‘내가 주님께 죄를 지었소’ 하고 고백하였다. 그러자 나탄이 다윗에게 말하였다. ‘주님께서 임금님의 죄를 용서하셨으니 임금님께서 돌아가시지는 않을 것입니다’”(2사무 12,13). 최고의 권력자이면서도 자신의 죄를 지적하는 예언자의 말에 겸손하게 통회하는 다윗은 역시 인간적인 매력과 함께 이스라엘 사람들의 존경을 한몸에 받을만하다.허영엽 신부(서울대교구 홍보국장) 평화신문2016.03.29
![[평화칼럼]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습니다](//cpbc.co.kr/CMS/newspaper/2018/02/rc/712544_1.0_titleImage_1.jpg)
[평화칼럼]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습니다이창훈 (알폰소)
금요일 퇴근길에 벗이 준 책을 잠시 펼쳐들었다. 사순과 부활시기 음악 묵상집이었다. 첫 장은 ‘미세레레(Miserere)’, 곧 불쌍히 여기소서를 주제로 한 음악과 관련한 내용이었다. 다윗 왕이 지었다는 시편 51편에 대한 저자의 묵상을 읽었다. 다윗은 우리야의 아내 밧세바를 범하고 그 남편을 죽게 한 후 예언자 나탄의 질타를 받자 “내가 주님께 죄를 지었소” 하고 잘못을 고백한다.(2사무 11─12장 참조) 그 잘못을 통회하면서 지은 시편이 “하느님, 자비하시니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애련함이 크오시니 내 죄를 없이 하소서”로 시작하는 51편(최민순 역 50편)이다. 다윗은 우리야와 그 아내 밧세바에게 죄를 지었지만 주님께 죄를 지었다고만 고백한다. 시편도 마찬가지다. 인간의 연약함을 고백하며 주님의 자비(불쌍히 여기심)를 청하고 마지막에는 주님을 찬미하는 내용으로 이뤄져 있다. 이에 대한 저자의 풀이 혹은 묵상에 나름 공감이 갔다. 다윗은 자신의 잘못을 깨닫고 우리야에게 용서를 빌고 싶었지만 그는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니었다. 아무리 용서를 청하고 싶어도 반향이 없는 현실에서 다윗이 할 수 있는 일은 하느님께 엎어지는 일뿐이었으리라는 것이다. 그 글을 제대로 이해했다면 말이다. 그날 밤 현직 사제가 해외선교 봉사 현장에서 여성 신자에게 성폭행을 시도했다는 뉴스가 보도됐다. 토요일과 주일 내내 몸은 다른 일을 하고 있었지만, 이 뉴스와 금요일 퇴근길에 읽었던 시편 51편의 묵상 글이 겹쳐지면서 마음은 쉽사리 갈피를 잡을 수가 없었다. 다윗은 이스라엘의 성왕(聖王)이었다. 그러나 밧세바를 아내로 삼기까지 그가 보인 행태는 모리배의 그것과 다를 바 없었다. 나탄에게서 따끔한 질책을 받은 후에야 그는 자신의 잘못을 고백했고 참회의 시편을 지어 바쳤다. 잘못에 합당한 죗값도 치렀다. 밧세바가 낳아준 아들을 잃은 것이다. 하지만 다윗이 죽은 우리야에게나 아내로 맞아들인 밧세바에게 잘못을 고백하며 용서를 청했다는 구절은 성경 어디에도 나오지 않는다. 여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또 다른 상념이 떠올랐다. 묵상집을 쓴 저자는 다윗이 용서를 청할 상대가 이미 죽고 없기에 하느님 앞에 엎어질 수밖에 없었다고 풀이했지만, 혹시 우리는 어쩌면 잘못을 저지르고 나서 그로 인해 상처를 입은 사람보다 하느님께 먼저 사죄하는 것에 익숙해져 있지는 않을까. 보이지 않는 하느님께는 쉽게 잘못을 고백하지만, 내가 잘못해 상처를 입힌 그 사람에게 진정으로 잘못을 고백하는 데에는 부족한 게 아닐까. 당시 아픔을 겪었고 지금도 겪고 있을 피해자의 아픔을 생각하며 참으로 속죄하고 용서를 청하는 데 미진한 것은 아닐까. 그러면서 복음서의 말씀 두 대목이 생각났다. 한 대목은 ‘제단에 예물을 바치려 할 때 너에게 원망 품은 형제가 생각나면 먼저 가서 화해하고 예물을 바치라’(마태 5,23-24)는 말씀이다. 한쪽이 사과하고 화해했다고 생각하더라도 상대방이 사과로 여기지 않는다면 화해가 이루어지지 않은 것이다. 다른 한 대목은 ‘되찾은 아들의 비유’에서 둘째 아들이 돌아와 “아버지, 제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습니다’(루카 15,21)라고 고백하는 대목이다. 둘째 아들은 ‘하늘에 죄를 지었다’고 고백하는 것으로 그치지 않았다. 자신으로 인해 상심했을 아버지께 잘못했다고, 아들이라고 불릴 자격이 없다고 자백한 것이다. 회개의 때, 은총의 때인 사순시기에 우리에게 우선적으로 필요한 것은 바로 이러한 고백일 것이다. 상처를 입은 당사자에게 잘못을 고백하는 일이 거듭나고 새로나는 첫걸음이다. 평화신문2018.02.27
![[이창훈 기자의 예수님 이야기] (50) 회개하지 않으면…(루카 13,1-9)](//cpbc.co.kr/CMS/newspaper/2018/01/rc/710083_1.0_titleImage_1.jpg)
[이창훈 기자의 예수님 이야기] (50) 회개하지 않으면…(루카 13,1-9)비유에 담긴 살벌한 경고 ‘늦기 전에 회개하라’ 실로암 못 탑의 붕괴 이야기와 열매를 맺지 못하는 무화과 나무에 관한 말씀은 더 늦기 전에 회개하라는 것을 강조하고 있다. 사진은 예루살렘에 있는 실로암 못. 출처=가톨릭굿뉴스 ‘불을 지르러 왔다.’ ‘분열을 일으키러 왔다.’ ‘왜 시대를 알아보지 못하느냐?’ ‘늦기 전에 화해하라.’ 제자들과 군중들에게 회개와 결단을 촉구하신(12,49-59) 예수님께서는 또 다른 방식으로 회개의 필요성을 거듭 강조하십니다. 빌라도의 만행과 실로암 탑의 붕괴 이야기(13,1-5) 그리고 열매 맺지 못하는 무화과나무에 관한 비유 말씀(13,6-9)을 통해서입니다. 회개하지 않으면 멸망한다(13,1-5)두 가지 사건이 거론됩니다. 빌라도가 갈릴래아 사람들을 죽여 그들이 바치려던 제물을 피로 물들게 한 일(13,1)과 실로암에 있던 탑이 무너져 열여덟 사람이 깔려 죽은 일(13,4)입니다. 우선 루카 복음사가는 빌라도가 갈릴래아 사람들을 죽여 그들이 바치려던 제물을 피로 물들게 한 일을 사람들이 예수님께 와서 알린 것으로 전합니다. 빌라도는 유다 총독 재임(A.D.26~36) 초기인 26년 예루살렘에 티베리우스 황제의 초상을 전시했는데, 이를 치워 달라며 카이사리아에 있던 자신을 찾아온 예루살렘 주민들을 처형했다고 합니다. 또 임기 말년인 36년에는 그리짐산으로 가려는 사마리아 사람들을 산기슭에서 살해했다고 합니다. 그리짐산은 사마리아인들이 하느님께 제사를 바치는 산이지요. 그런데 루카복음 본문에 나오는 것처럼 그가 제물을 바치려던 갈릴래야 사람들을 죽인 일이 실제로 있었는지는 분명하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이 이야기를 무조건 거짓이라고 배격할 이유는 없을 것 같습니다. 당시 갈릴래아 사람들은 유다 사람들에 비해 로마에 대한 적개심이 컸고 실제로 저항도 많이 했다는 것을 고려하면 더욱 그렇습니다. 실제로 빌라도는 총독 재임 시절 여러 차례 예루살렘에 군사적으로 개입해 유다인들이 피를 흘리게 했다고 합니다. 중요한 것은 이런 일이 실제로 있었느냐에 대한 것이 아니라 그 일에 대한 해석 혹은 평가를 어떻게 하느냐 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전하는 말을 들으신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이렇게 이르십니다. “너희는 그 갈릴래아 사람들이 그러한 변을 당하였다고 해서 다른 모든 갈릴래아 사람보다 더 큰 죄인이라고 생각하느냐? 아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도 회개하지 않으면 모두 그처럼 멸망할 것이다.”(13,2-3)예수님의 이 말씀에는 사람들은 그 갈릴래아 사람들이 다른 갈릴래아 사람보다 더 죄가 많기 때문으로 여긴다는 뉘앙스가 들어 있습니다. 실제로 욥기 등을 보면(욥 4,7; 8,4.20; 22,5; 탈출 20,5 참조) 범죄와 벌이 상관관계가 있는 것처럼 나옵니다. 하지만 예수님 말씀의 본뜻은 죽은 그 사람들이 아니라 지금 말씀을 듣고 있는 사람들의 회개에 초점이 맞춰져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말씀으로 그치지 않고 당신이 직접 또 사례를 더 드십니다. 실로암에 있던 탑이 무너져 열여덟 명이 깔려 죽은 사건입니다.실로암은 예루살렘 시내 동남부에 있는 못입니다. 다윗 왕이 이스라엘의 도읍으로 삼은 예루살렘에는 원래 동쪽 성 밖에 기혼샘이라는 못 하나가 있었습니다. 히즈키아가 유다 왕으로 있었을 때(기원전 717~687?) 앗시리아가 예루살렘을 침공하려 하자 기혼샘에서 물을 끌어 수로를 만들어 성벽 안으로 흐르게 해 못을 만들었는데, 이 못이 실로암입니다. 실로암은 말하자면 외세의 침공에 대비해 만든 물 저장고인 셈입니다. 요한복음에는 예수님께서 태어날 때부터 눈먼 사람을 고쳐주신 곳으로 나오지요.(요한 9,1-12 참조) 실로암 부근에는 감시용 또는 방어용의 탑이 있었다고 하는데 그 탑이 무너져 열여덟 명이나 깔려 죽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실로암탑의 붕괴 사건을 말씀하신 이유는 분명합니다. 회개하라는 것입니다. 탑이 무너져 열여덟 명이나 되는 사람이 깔려 죽었듯이 “너희도 회개하지 않으면 모두 그렇게 멸망할 것”(13,5)이라는 것입니다. 열매 맺지 못하는 무화과나무(13,6-9)비유 말씀 자체는 어렵지 않습니다. ‘어떤 사람이 자기 포도밭에 무화과나무 한 그루를 심어놓았는데 해마다 찾아가도 나무가 열매를 맺지 않았다. 그래서 포도 재배인에게 3년째 와서 봐도 열매를 맺지 못했으니 잘라버리라고 지시한다. 그러자 포도 재배인이 이렇게 간청한다. “주인님, 이 나무를 올해만 그냥 두시지요. 그동안 제가 그 둘레를 파서 거름을 주겠습니다. 그러면 내년에는 열매를 맺겠지요. 그러지 않으면 잘라버리십시오.”’이 비유 말씀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 몇 가지 핵심 단어를 뽑아 볼 필요가 있습니다. 포도밭 주인, 열매 맺지 못하는 무화과나무, 포도 재배인, 숫자 3, 잘라버리기 등입니다. 성경학자들의 해석을 참고로 하여 이런 단어들이 무엇을 뜻하는지를 보면, 포도밭 주인은 하느님을, 포도 재배인은 예수님을 가리킵니다. 열매 맺지 못하는 무화과나무는 회개하지 않은 세대를 가리킵니다. 3은 성경에서 충만함, 완전함을 나타내는 수이지요. 이제 이 비유의 뜻이 더욱 분명하게 드러납니다. 하느님께서는 무화과나무가 열매를 맺도록, 말하자면 사람들이 회개하도록 3년이라는 시간을, 다시 말해 기다릴 만큼 충분히 기다리셨습니다. 그래도 열매를 맺지 못하니까, 회개하지 못하니까 잘라버리라고, 곧 심판하겠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청하십니다. ‘한 번 더 기회를 주십시오. 그래도 회개하지 않으면 그때에 잘라 버리십시오.’따라서 예수님의 이 비유 말씀은 지금이 바로 회개의 때라는 것, 이제 마지막이라는 것, 이때를 놓치면 바로 멸망의 구렁텅이에 던져질 것이라고 경고하시는 것입니다. 더 늦기 전에, 마지막 기회를 놓치지 말고 회개하라는 거듭된 호소이자 경고입니다. [생각해 봅시다]1. 우리는 누군가에게 좋지 않은 일이 생기면 뭔가 그럴 만한 이유가 있을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래서 ‘응분의 대가를 치른 거야’라는 식으로 해석합니다. 갈릴래아 사람들이 빌라도에게 학살당한 사건이나 실로암의 탑이 무너져 열여덟 명이나 죽은 사건에 대한 당시 사람들의 해석이 그랬듯이 말입니다. 하지만 이렇게 나와 상관없다는 식의 해석은 마땅히 경계해야 합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그런 사건을 우리 자신을 성찰하는 계기로, 우리 삶을 똑바로 하는 회개의 계기로 삼는 자세입니다. “너희도 회개하지 않으면 모두 그렇게 멸망할 것”(13,5)이라는 말씀을 새깁시다. 2. 열매 맺지 못하는 무화과나무에 관한 비유 말씀은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있던 군중들에게만이 아니라 오늘의 우리에게도 마찬가지로 적용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세례를 받아 하느님의 자녀가 된 우리는 포도밭의 무화과나무입니다. 우리를 당신의 자녀로 받아들여주신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자녀로서 맞갖은 열매를 맺기를 바라십니다. 하지만 아무리 기다려도 우리가 그 열매를 맺지 못한다면, 우리는 잘려 버려지고 말 것입니다. 지금이 바로 그 열매를 맺을 때입니다. 우리를 아끼고 염려하는 많은 이들이 우리를 위해 노력하고 있습니다. 합당한 열매를 맺도록 둘레를 파고 거름을 주고 있지요. 이를 끝내 외면하시겠습니까. 평화신문2018.01.31
![[2018 전주교구 사목교서] “여러분 자신이 변화되게 하십시오”(로마 12, 2)... - 교구 설정 100주년을 향한 새로운 복음화 -](//cpbc.co.kr/CMS/newspaper/2017/12/rc/705441_1.0_titleImage_1.jpg)
[2018 전주교구 사목교서] “여러분 자신이 변화되게 하십시오”(로마 12, 2)... - 교구 설정 100주년을 향한 새로운 복음화 -새로운 복음화를 위해 새로운 길을 내자 전주교구장 김선태 주교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지난해 교구 설정 80주년을 맞이해 새 직무로 부름을 받은 저는 제8대 교구장 직무를 시작하며 하느님께 의탁하고 교구 신부님과 수도자, 평신도의 기도와 협조로 충실히 수행하고자 합니다.저는 최근 40여 년 동안 보편 교회 안에서 꾸준히 강조된 흐름에 따라 ‘새로운 복음화’에 초점을 맞추어 교구장 직무를 수행하고자 합니다. 새로운 복음화는 선교나 복음화 혹은 재복음화와 구분됩니다. ‘선교’는 일반적으로 그리스도를 알지 못하는 사람에게 복음을 전하는 것, ‘복음화’는 복음이 일상의 구체적인 생활과 연관되고 영향을 주어 신앙과 생활이 분리되지 않는 것을 의미하며, ‘재복음화’는 이미 복음화가 이루어진 상황에서 반복하여 복음화를 시도하는 것을 뜻합니다. ‘새로운 복음화’는 ‘새로운 상황과 환경 변화에 직면하여 용감하게 새로운 길을 내는 것’을 뜻합니다.오늘날 우리 사회는 물질적인 풍요로움과 안락함을 누리고 있지만, 한편으로는 정신적 빈곤을 겪고 있습니다. 신자들 역시 경제적 성공을 우선시하는 가치관에 따라 사회적 성공과 물질적 축복을 바라는 기복 신앙에 머물거나 신앙인의 사명을 외면하고 쉽게 신앙을 저버리기도 합니다. 새로운 복음화를 실현하기 위해 저는 2018년을 ‘신앙 쇄신의 해’로 정하고 교구의 내적 복음화를 추진하고자 합니다. 우리의 구체적 실천 내용을 제안합니다.첫째, 하느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입시다. 한 해 동안 하느님의 말씀인 성경을 더 자주 읽고 묵상하며 필사함으로써 우리의 신앙이 새롭게 되고 활성화되도록 노력합시다. 둘째, 교회의 가르침을 적극적으로 배웁시다. 참된 신앙생활을 방해하는 여러 가치관과 주장들이 난무하는 가운데 우리는 「제2차 바티칸 공의회 문헌」, 「가톨릭 교회 교리서」, 「복음의 기쁨」 등을 통해 배우고 익혀야 합니다. 셋째, 미사성제를 더욱 정성껏 봉헌합시다. 미사성제에 자주 참여하고 미사 전에 성실히 준비하는 시간을 내도록 합시다. 넷째, 기도에 더욱 마음을 모으고 시간을 냅시다. 기도는 하느님과의 대화로만 끝나는 것이 아니라 삶의 방향을 전환해 이웃에게로 완전히 돌아서도록 이끕니다. 아침ㆍ저녁ㆍ삼종기도를 충실히 합시다. 다섯째, 믿음을 행동으로 실천합시다. 초대 교회가 온 백성에게서 호감을 얻었던 까닭은 말씀을 듣고 실천했기 때문입니다. 사랑의 실천으로 우리의 믿음을 증거해야 하겠습니다.우리 교구의 자랑스러운 순교자들은 자신을 제물로 봉헌하며 새로운 복음화의 탁월한 모범을 보여주었습니다. 모든 본당과 신심 단체는 연 1회 교구 내의 순교 성지들을 순례하며 선조들의 삶을 배우고 실천하도록 합시다. 신앙의 기쁨, 평화, 행복을 가득 누리시기를 빕니다. 백영민2017.12.19
![[2018년 서울대교구 사목교서] 새로운 시대, 새로운 복음화 - 사랑은 새로운 복음화의 열매](//cpbc.co.kr/CMS/newspaper/2017/11/rc/703298_1.0_titleImage_1.jpg)
[2018년 서울대교구 사목교서] 새로운 시대, 새로운 복음화 - 사랑은 새로운 복음화의 열매우리가 체험한 하느님 사랑 전할 때 믿음 완성 염수정 추기경 서울대교구장I 하느님은 “당신의 넘치는 사랑으로 마치 친구를 대하시듯 인간에게 말씀하시고 인간과 사귀시며 당신과 친교를 이루도록” 우리를 부르십니다. 그리스도교 신앙은 이런 하느님의 부르심에 합당하게 응답하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초대에 합당하게 응답하려면 사랑 자체이신 하느님 안에 머물면서 그분 사랑을 닮아가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은 하느님께서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다는 것’(1요한 4,19 참조)을 깨닫고 체험하면서 하느님의 사랑을 세상에 전하는 사람입니다.예수 그리스도는 일생을 온전히 하느님 아버지와의 일치 안에서 사랑을 전하며 사셨습니다. 이러한 예수님의 삶을 본받아 바오로 사도는 “사랑으로 행동하는 믿음”(갈라 5,6)이 중요하다고, 야고보 사도는 “믿음에 실천이 없으면 그러한 믿음은 죽은 것”(야고 2,17)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이처럼 그리스도인은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에 따라 사랑으로 드러나는 믿음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그리스도 신자답게 살기 위해 매일의 삶 속에서 하느님의 초대에 응답하려고 노력합시다. 그러려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보여 주신 하느님의 사랑을 배우고, 묵상하며, 체험하는 시간이 반드시 필요합니다. 우리가 사랑의 삶을 살아가려면 “삶에 새로운 시야와 결정적인 방향을 제시하는 한 사건, 한 사람을 만나는 것”, 곧 예수님과의 친밀한 만남이 필요하기 때문입니다.성경 말씀과 기도, 성사를 통해 그리스도를 진정으로 만나는 사람은 그분을 더욱 사랑하게 되고, 그 사랑으로 변화돼 이웃을 사랑하게 됩니다. 하느님께 대한 사랑과 이웃에 대한 사랑의 계명은 나뉠 수 없는 하나의 계명을 이루며 서로 성숙을 불러일으킵니다. 하느님께 대한 사랑은 이웃 사랑으로 드러나며, 이웃 사랑은 우리를 하느님께 대한 더 깊은 사랑으로 이끌기 때문입니다.당신 사랑 안으로 우리를 초대하시는 하느님은 우리가 당신의 사랑을 이웃에게 전하기를 바라십니다. 우리가 체험한 하느님의 사랑을 전하는 것이야말로 믿음의 완성입니다. 각 본당과 기관에서는 자신의 삶에서 하느님 사랑을 전할 수 있도록 구체적인 방법들을 숙고하고 실천해 주시기 바랍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더 깊이 묵상하고, 기도로 그분의 뜻을 더 헤아리며, 교회 가르침 안에서 그분의 삶을 더 배우고, 미사 전례 안에서 그분의 사랑을 더 깨닫고 체험하도록 합시다. 그 하느님의 사랑으로 ‘사랑의 열매를 맺는 신앙’을 살아가도록 합시다. 평화신문2017.11.29

“청소년에게 본당 사제는 첫 번째 교리교사”서울 염 추기경 ‘교구 청(소)년 사목 위한 실천적 지침’ 발표 서울대교구장 염수정<사진> 추기경은 11월 21일 ‘교구 청(소)년 사목을 위한 실천적 지침’을 발표했다.염 추기경은 청소년ㆍ청년 사목을 위한 10가지 지침을 통해 청소년ㆍ청년 사목의 출발점은 본당 사제들이 청소년과 청년을 직접 만나는 것임을 강조했다. 또 주일학교 교육의 가장 기본은 전례, 교리, 성경, 신앙생활에 관한 신앙 교육이지 ‘사회적 체험 학습’이 우선돼서는 안 된다는 점도 분명히 했다. 청소년ㆍ청년 사목 활성화 방안으로 가정 사목과 연계한 ‘통합 사목’을 제안하고 청소년ㆍ청년 사목 예산은 본당 전체 예산의 6% 내외로 정해 달라는 기준도 제시했다.이번 지침은 2018년 8월 열릴 한국청년대회와 2019년 1월 파나마에서 개최될 세계청년대회 등 굵직한 행사를 앞두고 청(소)년 사목이 일회성 이벤트에 그치지 않고 본당과 연계돼 꾸준하게 활성화 방안을 모색해야 한다는 취지에서 발표됐다. 특별히 본당 사제들의 역할을 강조한 점도 이와 같은 이유에서다. 염 추기경은 지침에서 “사제와 청(소)년의 직접 만남보다 더 효과적인 사목은 없다”면서 사제들에게 청(소)년 일상을 직접 들어주고 공감하며 신앙을 함께 나누기를 요청했다. 또 본당 사제가 ‘첫 번째 교리교사’임을 일깨우며 “전례와 강론, 교리교육을 통해 청(소)년에게 하느님 말씀을 직접 전하고 가르치는 시간을 더 자주 갖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고해성사는 청(소)년이 하느님의 위로와 용기, 희망을 만나는 중요한 창구이기에 청(소)년에게 고해성사 기회를 많이 주기를 당부했다. 대림 제1주일(12월 3일)부터 새 「로마 미사 경본」을 사용함에 따라, 어린이 미사에서도 어른 미사와 마찬가지로 새 「로마 미사 경본」에 따른 새로운 미사 통상문을 사용하도록 권고했다. 이와 함께 청년 나이는 만 19~39세를 청년으로 정한다고 했다. 그러나 본당 실정에 맞게 청년 나이 기준을 조정해 사목할 수 있도록 배려했다. 이 밖에도 염 추기경은 본당 사제에게 “본당 관할의 어린이집, 유치원, 초등학교, 중고등학교, 대학교 또한 본당 사목의 대상임을 기억해 주길 바란다”면서 ‘찾아가는 사목’에도 깊은 관심과 열의를 기울여 주기를 요청했다. 유은재 기자 you@cpbc.co.kr 평화신문2017.11.29
![[전영준 신부의 가톨릭 영성을 찾아서] (14) 4세기 ① -파코미우스의 공주(公住) 수도 생활](//cpbc.co.kr/CMS/newspaper/2017/03/rc/673484_1.1_titleImage_1.jpg)
[전영준 신부의 가톨릭 영성을 찾아서] (14) 4세기 ① -파코미우스의 공주(公住) 수도 생활가난과 순명의 수도 생활을 창시하다 이집트 시나이산에서 내려 본 광야. 가톨릭평화신문 DB 4세기에 이집트 사막에서 생활하는 은수자들은 황금기를 맞이했습니다. 많은 사람이 안토니우스를 따라서 은수 생활을 실천했지만, 안토니우스가 실천했던 독거 은수 생활과 다른 새로운 형태의 수도 생활도 나타났습니다. 한동안 독거 은수 생활을 실천했던 파코미우스(Pachomius, 290/92?~346/47?)는 같은 뜻을 갖고 있는 은수자들과 함께 모여 수도 생활을 실천하는 새로운 길을 제시했습니다. 결국 공주(公住) 수도 생활은 훗날 수도원 제도가 확립되는 데 기여했습니다. 따라서 파코미우스는 회(會) 수도자의 아버지로 불렸습니다.이집트 출신인 파코미우스는 유복한 이교도인 집안에서 태어났습니다. 스무 살가량 되었을 때에, 파코미우스는 로마 제국의 군인으로 징집당해 알렉산드리아에서 복무했습니다. 이 시기에 파코미우스는 그리스도인의 도움을 받고 나서 이웃 사랑 실천을 가르치는 그리스도교에 좋은 인상을 받았습니다. 1년여의 군 복무 기간을 끝내고 자유로워진 파코미우스는 고향으로 돌아가지 않고, 나일 강 상류에 위치한 세네셋에 살면서 세례를 받고 하느님을 섬기는 생활을 시작했습니다.코이노니아로 불리는 공동 소유의 공동체먼저 파코미우스는 마을 근처에서 은수 생활을 실천하고 있는 팔라몬(Palamon)을 스승으로 모시고 지도를 받으며, 안토니우스가 실천했던 금욕 생활을 시작했습니다. 몇 년 후에 파코미우스는 스승의 곁을 떠나 타벤네로 이주해 은수 생활을 이어갔습니다. 이때 그의 형도 은수 생활에 합류했습니다. 이즈음에 파코미우스는 환시를 체험하고 새로운 형태의 수도 생활을 꿈꾸기 시작했습니다. 결국 그는 형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파코미우스는 공동체를 만들었습니다.파코미우스가 만든 공동체엔 단기간에 많은 사람이 모여들었습니다. 파코미우스는 이웃 사랑의 계명에 따라 그들을 섬기면서 수도 생활을 가르쳤습니다. 파코미우스의 품성에 감명받은 선한 수도자들은 정성스럽게 수도 생활을 실천했으나, 때로는 괴팍한 수도자들도 있었습니다. 이 때문에 파코미우스는 절망을 경험하기도 했습니다.수도자 수가 늘어나자 파코미우스는 공동체를 유지하기 위해 경제적인 문제 해결이 시급하다는 것을 느꼈습니다. 따라서 파코미우스는 수도자들에게 각자 일신을 위해 자급자족할 것을 가르쳤고, 공동체가 필요로 하는 일정한 분량의 양식을 봉헌할 것을 권유했습니다. 파코미우스는 이러한 방법이 성공적이지 않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초대 교회 때와 같이 공동으로 소유하고 공동으로 분배하는 제도를 도입하기로 결심했습니다. 파코미우스 공동체는 ‘코이노니아’(koinonia)라고 불렸습니다.파코미우스가 설립한 공동체는 나일 강 상류에 인접한 프보우와 트무손에도 설립되었습니다. 그 당시 이집트 사막에서 1만 명가량의 사람들이 같은 목적을 가지고 같은 곳에 모여 사는 것은 대단한 일이었습니다. 이러한 성공에도 파코미우스 공동체는 한 세기를 버티지 못했습니다. 파코미우스가 50대 중반에 전염병으로 사망하자, 수도자들은 청년 그룹과 장년 그룹으로 나뉘었습니다. 결국 그 그룹들은 성공을 이루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하느님의 계획은 다른 곳에 있었습니다. 파코미우스가 제시했던, 함께 모여 살며 가진 것을 포기하고 공동 소유하는 생활 방식은 오늘날 수도 생활의 전형이 되었습니다.성경 말씀 중심의 공동체 수도 생활우리는 파코미우스의 가르침이 담긴 「계명집」(praecepta)을 통해 파코미우스가 추구했던 영성 생활을 짐작해볼 수 있습니다. 파코미우스의 영성 생활 역시 안토니우스와 마찬가지로 하느님 말씀이 중심이었습니다. 즉, 초보자부터 원숙한 경지에 오른 자까지 모든 수도자는 성경 말씀을 가까이하며 가르침을 되새겨야 한다는 것입니다.만약 문맹자가 파코미우스 공동체에 들어오려고 한다면, 먼저 기본적인 성경 말씀을 암송해야만 입회가 허락됐습니다. “수도원에 처음으로 입원하려는 사람에게 (…) 시편 스무 개나 (바오로) 사도의 서간 두 개나 나머지 성경의 한 부분을 그에게 주어 (외우게 할 것이다).”(「계명집」 139항) 또한 문맹자는 공동체 입회 이후에도 글을 배우면서 계속 성경 말씀을 암송해야만 한다고 파코미우스는 강조했습니다. “수도원 안에서 글자를 배우지 못하거나, 성경의 어떤 것, 적어도 신약성경과 시편들을 암기하지 못하는 사람이 절대로 있어서는 안 된다.”(「계명집」 140항)파코미우스 공동체는 일상이 성경 말씀과 함께하는 생활이었습니다. 수도자들은 자기 방을 나와 집회 장소에 갈 때나, 집회를 끝내고 다시 돌아올 때도 성경 말씀을 묵상해야 했습니다. 심지어 식사하러 식당에 갈 때도 성경 말씀 중에 한 구절을 묵상했습니다.(「계명집」 3항; 28항) 또 식당에서 과자를 나누어주는 사람도, 빵을 만드는 사람도 자기 일을 하면서 성경 말씀을 노래했습니다.(「계명집」 37항; 116항) 게다가 걸어가는 동안에도 모든 수도자는 각자 성경 말씀을 묵상했습니다.(「계명집」 59항)파코미우스는 수도자들이 성경에 나오는 가르침도 잘 알아듣기를 바랐습니다. 수도자들은 장상이 가르치는 성경 강의 내용을 몇몇이 모여서 되새겼습니다. 또한 수도자들은 평소 들은 강론도 올바로 알아들었는지 그 내용을 동료들과 서로 나누었습니다.(「계명집」 122항; 138항) 파코미우스는 수도자들이 성경 말씀을 멋대로 해석하지 못하도록 직접 가르치고 그 의미를 해석해 주기도 했습니다.(「파코미우스의 생애」 86항)다만 파코미우스는 그리스도교 가정에서 성장한 것도 아니고, 성인이 돼 세례를 받고 몇 년 되지 않아서 수도 생활을 시작했기 때문에 체계적으로 신학을 배우고 다질 기회가 적었습니다. 이런 점이 파코미우스 공동체에 영적 자양분을 더 충분히 제공하지 못하는 결과로 나타났던 것은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안토니우스의 독거 은수 생활과 파코미우스의 공주 수도 생활은 여러 면에서 비교됩니다. 안토니우스의 은수 생활은 금욕 생활이 중심이었습니다. 금욕 생활을 실천하기 위하여 정든 고향도 가진 재산도 포기했던 것입니다. 이에 반해 파코미우스의 수도 생활은 가난과 순명이 중심이었습니다. 파코미우스의 수도 생활은 자신의 뜻과 판단을 포기하는 차원에서 가난을 선택했으며, 함께 모여 살기 때문에 순명도 필요했던 것입니다. 이러한 두 가지 형태의 생활은 어느 쪽이 더 우월하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결국 두 형태는 적절하게 조화를 이루면서 훗날 서방 교회 수도 생활 발전에 큰 영향을 끼쳤습니다. <가톨릭대 신학대학 영성신학 교수>cpbc2017.03.02
![[예수회 회원들의 생애와 영성] 프란치스코 하비에르 (4)](//cpbc.co.kr/CMS/newspaper/2018/05/rc/721713_1.2_titleImage_1.jpg)
[예수회 회원들의 생애와 영성] 프란치스코 하비에르 (4)동쪽 끝 일본으로 선교의 나침반 향하다 믈라카 성 바오로 성당 앞에 서 있는 프란치스코 하비에르 성인상 프란치스코 하비에르는 1545년 1월 인도 고아에서 남쪽으로 1000㎞ 떨어진 코치로 내려왔다. 코치는 1505년부터 1530년까지 포르투갈령 인도 제국의 수도였다. 왕명으로 인도에 파견된 포르투갈 관리들의 폐해가 도를 넘은 상황이었다. 그들은 “너도 훔치니 나도 훔친다”는 식으로 주민들을 착취했다. 참다못한 하비에르는 “그들은 생명의 책에서 이름을 지워야 하고 정의로 대해서는 안 된다”고 말할 정도였다.하비에르는 코치에서 배를 타고 코모린 곶을 돌아 인도 동쪽으로 갔다. 나가파티남에서 북쪽으로 300㎞ 더 올라가 밀라포레(현재 첸나이 남부)로 이동했다. 그는 이곳에서 성 토마스 사도의 무덤을 방문했다. 그는 거기서 동쪽 바다를 바라보았다. ‘믈라카’로 가는 것이 하느님의 뜻이라고 생각했다. 가서 그들에게 하느님의 말씀을 선포하고, 교리와 십계명의 해설서를 그들 말로 펴내고자 했다. 그해 9월에 동서양 무역의 중심지였던 포르투갈령의 믈라카(현재 말레이시아)로 이동했다. 항해는 위험했다. 폭풍을 만났고 수마트라 근처에서는 해적을 만나기도 했다.1546년 1월 하비에르는 믈라카에서 배를 타고 말루쿠 제도(현 인도네시아, 티모르섬 북쪽)로 향했다. 말루쿠 제도에는 포르투갈인 정착지가 몇 군데 있었다. 말루쿠 제도에는 육두구, 정향 등 특산 향료들이 많이 자생해 ‘향료 제도’라고도 불렸다. 하비에르는 2월 14일 말루쿠제도 내의 암본섬에 상륙했다. 암본섬은 포르투갈인들이 1512년부터 정착해 살았던 곳이었다. 석 달을 머물렀다. 그는 포르투갈 군인들을 사목했고 7개 촌락을 신자 마을로 만들었다. 이후 그는 암본섬 북쪽 1300㎞ 떨어진 모로섬을 찾아갔다. 신자들은 있었지만 얼마 전 주민들이 사제를 죽였다. 모로섬의 여러 부족 중 타바리족은 사람 죽이길 즐겼다. 더 죽일 사람들이 없으면 처자식을 죽이기도 했다. 주민들은 농사를 지을 줄 몰라 식량 사정이 좋지 않았다. 물도 부족했다. 돼지 몇 마리를 제외하곤 가축도 없었다. 지진과 화산 폭발이 잦았고, 비바람이 치면 화산재가 바다로 흘러들어 물고기가 떼죽음을 당했다. 하비에르는 7월 초에 트르나테섬으로 건너갔다. 1512년 프란치스코 세랑이 이끄는 포르투갈 함대가 트르나테섬에서 가까운 히투섬 근처에서 난파됐는데 주민들의 도움으로 뭍에 올랐다. 트르나테의 무슬림 지도자 술탄 아부 라이스는 소문으로 듣던 포르투갈 군대가 도움될까 싶어 트르나테로 데려왔고 그들에게 요새를 짓고 정착하도록 허락했다. 처음부터 포르투갈 사람들은 주민들과 사이가 좋지 않았다. 포르투갈인들은 주민들에게 식량과 물자를 받고도 대가를 내지 않았다. 주민들이 항의하자 폭력으로 대응했다.하비에르는 트르나테의 포르투갈 요새에 머무는 동안 「사도신경 해설」을 포르투갈어로 썼다. 하비에르는 이 글을 12장으로 나누어 장마다 사도신경 구절 하나하나에 관련 성경 구절을 설명하고 마지막에는 그 구절을 신앙인의 삶에 적용했다. 말루쿠 제도를 떠나기 전에 암본 섬에서 고아에 편지를 썼다. “인도에 새로 온 예수회원 몇 명을 믈라카 제도로 보내라”는 내용이었다. 하비에르는 1547년 7월 믈라카로 다시 돌아왔다. 하비에르는 여기서 야지로를 만났다. 야지로는 일본 사쓰마국 출신 사무라이로 사람을 죽이고 도망치는 중이었다. 일본을 탈출하려던 그는 고향 항구에서 포르투갈 무역선 선장 알바로 바스를 만났고, 야지로의 사정을 들은 바스 선장은 그에게 포르투갈 배에 일자리를 마련해줬다. 하지만 야지로는 배를 잘못 타 버리고 말았다. 그가 탄 배의 선장은 하비에르의 친구였던 조르즈 알바리스였다. 알바리스는 야지로를 하비에르에게 소개하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알바리스의 배가 믈라카에 도착했을 때 하비에르는 이미 몰루카로 떠난 뒤였다. 실망한 야지로는 일본으로 돌아가는 배를 탔다. 돌아가는 도중 풍랑을 만나 중국 연안에 기착하던 중 다른 포르투갈 선장을 만나 하비에르가 믈라카로 다시 돌아갔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 선장이 야지로를 믈라카로 다시 데려다 줬고, 1547년 12월 마침내 야지로는 하비에르를 만났다.야지로는 간단한 포르투갈말을 금세 배워 하비에르와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다. 하비에르는 하느님에 관해 이야기를, 야지로는 일본에 관해 이야기했다. 하비에르는 야지로에게 “자신이 일본에 가면 일본 사람들이 가톨릭으로 개종할 듯하냐”고 물었다. 야지로는 “일본 사람들이 당장 세례를 받지는 않겠지만, 이것저것 많이 물어보고 답을 들은 후 무엇보다 하비에르 자신이 어떻게 사는지를 보고 나서 결정할 것”이라고 대답했다. 덧붙여 “반 년이 지나지 않아 왕과, 귀족, 그리고 상류 계급 사람들이 그리스도교를 믿을 것”이라고 말했다. 하비에르는 야지로의 말뿐 아니라 일본에 다녀온 포르투갈 상인들을 통해 그들이 여러 날 일본에 머물면서 보고 들은 정보를 수집했다. 상인들 모두 “하비에르가 일본에 가면 인도에서보다 훨씬 더 하느님을 위한 봉사에 결실을 볼 것”이라고 말했다. “일본인들이 인도인들보다 책임감 있는 사람들”이라고 했다. 하비에르는 야지로와 포르투갈 상인들의 말에 동쪽으로 가고자 하는 열망을 일본 선교로 구체화했다. 특히 하층민 선교에 치중했던 인도에서의 선교와 반대로 위에서 아래로의 선교를 구상했다. 하비에르는 일본에 대해 수집한 정보와 그의 선교 구상을 로마에 편지로 알렸다. 12월에 다시 인도로 출항했다. 문채현2018.05.24
![[신앙단상] 사랑하기 훈련](//cpbc.co.kr/CMS/newspaper/2018/02/rc/710595_1.0_titleImage_1.jpg)
[신앙단상] 사랑하기 훈련이윤식(후고, 서울대 명예교수) 컴퓨터에는 켜는 동시에 실행되는 프로그램들이 입력되어 있어서 컴퓨터를 켜기만 하면 ‘자동실행’을 한다. 컴퓨터와 마찬가지로 사람에게는 특별한 생각이나 의식이 없어도 ‘자동적으로’ 하는 몸에 밴 행동들이 있다. 처음 운전을 배울 때는 시동 걸고, 기어 바꾸고, 백미러 보고, 차선 바꾸고, 브레이크 밟고 등등 기억해야 할 조작 방법이 많아 식은땀이 날 정도다. 그러나 복잡한 조작 방법도 일단 몸에 배면 그리 신경 쓰지 않아도 손과 발을 거의 무의식적으로 사용하면서 운전하게 된다. 심지어 음악을 듣거나 전화 통화도 하면서 운전한다. 다만 이처럼 몸에 밴 행동을 할 때까지 우리는 많은 노력을 해야 한다. 나는 고등학교 때 세례를 받았다. 올해는 내가 세례받은 지 50년이 되는 해다. 50년이 된 신자니까 신앙의 모든 것이 몸에 배야 하는데, 아직도 기도를 머리로만 하게 된다. 우리 부부는 작년에 혼인성사 40주년을 보냈다. 40년 동안이나 혼인성사를 살아왔음에도 아직도 배우자를 머리로만 사랑하려 하고, 몸으로 사랑하는 데는 걸림돌이 많다. 30년 가까이 ME(매리지 엔카운터) 운동에 참여했다. 그러나 처음에는 어색했던 ‘사랑한다’는 말을 지금은 배우자에게 자연스럽게 할 정도일 뿐, 몸에 밴 행동으로 실천하는 데까지 이르지는 못했다. 일례로 음식물 쓰레기 하나 치우는 것도 기꺼이 할 때도 있지만 마지못해 떠밀려 하기도 한다. 기도와 사랑하기가 몸에 익숙해질 때까지 도대체 나는 얼마나 더 많은 훈련을 해야 할까.“사람의 아들아, 이 사람들은 자기 우상들을 마음에 품고, 자기들을 죄에 빠뜨리는 걸림돌을 제 앞에 모셔 놓은 자들이다”(에제 14,3)라는 성경 구절을 묵상한 적이 있다. 바이러스에 감염되면 컴퓨터를 켤 때 바이러스가 먼저 작동한다고 한다. 이처럼 배우자를 사랑해야 할 때 먼저 작동하는 마음속 우상, 즉 걸림돌들을 생각해 보았다. 이기심과 안락함 추구, 별것도 아닌 자존심, 채워지지 않은 정서적 욕구들…. 이런 바이러스들이 내 마음속에 자리 잡고 있는 한 몸에 밴 행동으로 배우자를 사랑하는 것을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언제가 “너희는 서로 사랑하여라”는 계명에서 예수님이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이라는 말로 사랑의 속성을 구체적으로 제시하셨다는 것을 새롭게 발견한 적이 있다. 나는 ‘누구든지 제 십자가를 짊어지고 내 뒤를 따라오지 않는 사람은 내 제자가 될 수 없다’는 예수님의 말씀을 아직도 머리로만 이해하려고 한다. 무의식 뇌세포 속에 ‘십자가를 짊어지기 싫고, 생각하기조차 싫다’는 바이러스가 자리 잡고 있어서 나의 체세포는 예수님처럼 사랑하려는 것을 방해한다. 이것이 과연 예수님께서 바라시는 사랑일까.“너희 가운데 누가 탑을 세우려고 하면, 공사를 마칠 만한 경비가 있는지 먼저 앉아서 계산해 보지 않느냐?”(루카 14,28) 예수님께서는 몸에 밴 사랑을 하기 위해 내 체세포 안에 사랑의 근육이 얼마나 꽉 차 있는지 계산해 보라고 요구하신다. 노력과 희생 없이, 그저 사랑받기만을 좋아하는 나에게 오늘도 주님은 단호한 결심을 요구하신다. ‘사랑의 묘약’은 따로 없다. 매일같이 사랑하기 훈련을 해야 한다. 몸에 밴 사랑을 자유롭게 할 수 있도록. 평화신문2018.02.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