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영준 신부의 가톨릭 영성을 찾아서] (79) 17세기 ② - 얀센주의](//cpbc.co.kr/CMS/newspaper/2018/06/rc/723765_1.0_titleImage_1.jpg)
[전영준 신부의 가톨릭 영성을 찾아서] (79) 17세기 ② - 얀센주의인간 자유의지 비판하며 구원 예정설 강조 종교개혁주의자들에게 영향을 주었다고 평가받은 인문주의자들은 인간 구원 문제에서 인간의 자유의지가 하느님의 구원 은총에 협력할 필요가 있다고 주장했습니다. 하지만 정작 종교개혁주의자들은 인간의 어떠한 도움도 없이 하느님 은총만으로 구원받을 수 있다고 강조했습니다. 게다가 칼뱅(Jean Calvin, 1509~1564)은 하느님께서 창조 이전부터 일어날 일들을 정해 놓으시면서 은총으로 구원받을 사람을 미리 선택하셨고 죄 때문에 심판받을 사람을 내버려두셨다는 이중예정설을 주장했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주장은 가톨릭교회에 영향을 끼치면서 영성생활에 큰 혼란을 초래했습니다.은총론에 대해 오류를 범한 교의적 얀센주의와 얀센네덜란드 아쿠오이(Acquoy)의 겸손한 가톨릭 가정 출신이었던 코르넬리우스 얀센(Cornelius Jansen, 1585~1638)은 1602년 루뱅(Louvain)대학교에 입학했다가 이념 논쟁에 휘말려 고통을 당했습니다. 후기 스콜라신학을 주장하는 예수회원들과 벨기에 신학자 미쉘 드 베(Michel De Bay, 1513~1589) 추종자들 사이의 논쟁이었습니다. 바이아니즘(Baianism)은 16세기 스콜라신학을 반대하며 아우구스티누스 신학에 이단적인 요소를 첨가했던 이단 사상이었습니다. 결국 얀센은 스콜라신학보다 바이아니즘으로 기울었습니다. 학위 취득 후 얀센은 주로 파리에 머물면서 초대 교회 교부들 사상을 공부하면서 교회개혁 의지를 세웠습니다.1616년 루뱅으로 돌아온 얀센은 예수회원들과 자주 논쟁하며 경쟁했는데, 이러한 충돌을 이유로 종교개혁주의에 가깝게 다가가기보다는 오히려 가톨릭 신자들이 성경을 신비적이고 신심적인 관점에서 해석할 수 있다는 점을 연구했습니다. 1630년 루뱅대학교 교수로 임명된 얀센은 이러한 주제를 가르쳤습니다. 1636년 얀센은 이프르(Ypres)교구장 주교로 임명되었으나 2년 뒤에 갑자기 병사했습니다. 하지만 얀센은 루뱅에서 지내는 동안 내내 준비했으나, 결국 사망 후 1640년에야 출판된 저서 「아우구스티누스(Augustinus)」 때문에 논란의 중심에 놓여 이단으로 단죄되었습니다.아우구스티누스 사상에 매료되었던 얀센은 저서에서 펠라기우스주의와 원죄 및 신적 은총을 중요 주제로 다루면서 인간의 자유 의지를 강조한 몰리나주의(Molinism)와 인문주의를 비판했습니다. 하지만 얀센은 아우구스티누스의 원죄론과 은총론을 과장해서 연구함으로써 하느님 은총을 미리 받아 선택된 사람이어야 구원받을 수 있다고 주장했습니다. 결국 얀센의 주장은 칼뱅의 예정설을 가톨릭 신학과 신심에 무리하게 적용하면서 교의(敎義)적 얀센주의(Jansenism)를 탄생시켰습니다. 얀센주의는 첫째로 의인들에게 하느님의 어떤 계명을 실행할 은총이 없고, 둘째로 타락한 본성 상태에서 내적 은총에 저항할 수 없으며, 셋째로 그 상태에서 강요된 자유만으로 인간 공로를 얻을 수 있고, 넷째로 신앙을 위해 선행하는 내적 은총의 필요성을 거부하며, 다섯째로 그리스도께서 모든 인간을 위해 죽으신 것을 거부하는 오류를 범했습니다. 게다가 얀센주의자들은 성사생활마저도 참여하는 행위가 있다는 이유로 고해성사와 성체성사를 통해 오는 은총 작용을 거부했습니다.교황 우르바누스 8세(Urbanus PP. VIII, 재임 1623~1644)는 1643년 교황 칙서 「교회 추기경들에게(In Eminenti Ecclesiae)」에서 얀센의 저서를 금서에 올린다고 공표했으며, 교황 인노켄티우스 10세(Innocentius PP. X, 재임 1644~1655)는 1653년 교황 헌장 「좋은 기회에」에서 은총과 관련해 얀센이 언급한 다섯 가지 오류를 이단으로 단죄하며 얀센의 저서에 포함된 모든 견해를 승인하지 않겠다고 선고했습니다. 따라서 가톨릭교회는 교의적 얀센주의를 제거했다고 생각했으나, 교회 안에 얀센주의와 관련된 새로운 상황이 나타났습니다. 장 뒤베르지에 드 오란. 예정설을 접목한 윤리적 얀센주의와 뒤베르지에프랑스 남서부 바욘(Bayonne)의 귀족 가문 출신인 장 뒤베르지에 드 오란(Jean Duvergier de Hauranne, 1581~1643)은 루뱅대학교에서 신학을 공부하던 시절에 얀센과 친분을 맺었습니다. 1604년 파리에서 다시 얀센을 만난 뒤베르지에는 여러 해 동안 얀센의 후원자가 되었습니다. 1611~1614년 뒤베르지에는 얀센과 함께 고향을 돌아가서 은둔 생활을 하며 고대 교부들, 특히 아우구스티누스의 사상을 연구했습니다. 1620년 뒤베르지에는 프랑스 중부 생 미쉘 앙 브렌느(Saint-Michel-en-Brenne)에 생 시랑(Saint-Cyran) 수도원 원장이 돼 여생을 그곳에서 지냈습니다. 따라서 뒤베르지에는 이후에 생 시랑으로 불리기도 했습니다. 이때 뒤베르지에는 콩드랑(Charles de Condren, 1588~1641)을 알게 되었으며, 그를 통해 베륄(Pierre de Brulle, 1575~1629)과도 친교를 맺었습니다.뒤베르지에는 얀센이 그의 저서 「아우구스티누스」를 준비하는 중에 그와 논쟁을 벌이기도 했으며, 시토회 포르 루아얄 데 샹(Port-Royal-des-Champs) 수녀원 영성 지도 겸 고해 사제를 역임했습니다. 1633~1636년에 뒤베르지에의 지도 아래에 있었던 수도원들은 자연스럽게 얀센주의의 중심지가 되었습니다. 하지만 뒤베르지에는 당시 프랑스 수상이었던 아르망 장 뒤 플레시 드 리슐리외(Armand Jean du Plessis de Richelieu, 1585~1642) 추기경과 갈등을 겪게 되었고, 리슐리외 추기경에 의해 뱅센(Vincennes)에 투옥되었습니다. 1642년 석방된 뒤베르지에는 교황 우르바누스 8세가 얀센주의를 이단으로 단죄했다는 소식을 1년 내내 접하면서 살다가 1643년 사망했습니다.뒤베르지에는 윤리적 얀센주의를 새롭게 주장했습니다. 하느님 은총을 잘 보존하기 위해서 고신극기와 고행의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예정설에 따르면 어느 누구도 구원에 대한 확신을 가질 수 없기 때문에, 차라리 엄격한 고행의 삶을 실천하면서 하느님의 자비를 구한다면, 전지전능하신 하느님께서 뒤늦게라도 은총을 베풀어주시어 구원될 수도 있다는 지극히 인간적인 해법을 제시했던 것이었습니다. 결국 윤리적 얀센주의는 1653년 교의적 얀센주의가 최종적으로 단죄될 때에 함께 단죄되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고대부터 있었던 은총 논쟁을 다시 한 번 재현하면서 시작되었던 교의적 얀센주의는 프랑스에서 윤리적으로 엄격하게 생활하는 모습을 첨가시키면서 윤리적 얀센주의를 탄생시킴으로써 수덕생활과 관련된 오류를 만들었습니다. 하지만 수덕생활은 그리스도교 영성생활에서 늘 실천되던 모습이었기 때문에 얀센주의가 단죄된 이후에도 상당 기간 동안 교회에 영향을 끼쳤습니다. 따라서 이후 영성가들은 그리스도인 영성생활 안에 들어 있는 얀센주의의 흔적을 지우려고 부단히 노력했습니다.<가톨릭대 신학대학 영성신학 교수> 백영민2018.06.12

독자 여러분 감사합니다. 늘 행복하세요모야모야병 판정 받은 김신일씨, 재활치료로 운동 기능 회복하고 일자리도 찾아 지난 2016년 11월 취재 당시 아버지 김신일씨를 돌보던 딸 김광욱(왼쪽)씨. 가톨릭평화신문 DB 지난 2016년 11월 6일 자 가톨릭평화신문(1388호) ‘사랑이 피어나는 곳에’를 통해 소개돼 1275만여 원의 성금을 받은 김신일(니콜라오, 52)씨의 딸이 최근 본지에 감사의 마음이 가득 담긴 편지를 보내왔다. 혈관 질환의 일종인 모야모야병을 앓는 아버지를 극진히 간병해온 맏딸 김광욱(크리스티나, 21)씨는 “너무도 절망적인 상황에서 큰 도움을 받았는데, 이제야 그 감사한 마음을 늦게라도 전해드리게 됐다”며 “모야모야병 판정을 받으셨던 아버지는 경희의료원에서 국립재활원으로 옮겨 재활치료를 받고 나서 운동 기능을 거의 완벽히 회복하셨다”고 기쁜 소식을 전했다. 이어 “인지 기능에는 약간의 후유증이 남았지만, 지역 주민센터에서 연계해준 일자리를 찾아 조금씩 일을 하고 계시다”며 근황을 알렸다. 다음은 감사 편지 요약이다. 오세택 기자 sebastiano@cpbc.co.kr“찬미 예수님! 안녕하세요. 저는 2016년 12월 평화신문 독자 여러분의 사랑을 받았던 김광욱 크리스티나입니다. 우선 독자 여러분께 감사인사를 전해드리는 게 너무 늦어서 죄송하다는 말씀부터 드립니다. 2016년 10월 뇌출혈로 쓰러지셔서 불치병인 모야모야병 판정을 받았던 저희 아버지께서는 경희의료원에서 외과 치료를 마치신 뒤 서울 인수동 국립재활원으로 옮겨 3개월간 재활 치료에 전념한 결과, 운동 기능을 거의 완벽히 회복하셨습니다. 인지 기능에는 약간 후유증이 생기셔서 전처럼 장시간 동안 일을 하는 것은 어렵지만, 아버지는 지역 주민센터에서 연계해 준 일자리를 찾아서 조금씩 일을 시작하고 계십니다. 또한, 가족 모두는 서울대교구 수유1동성당을 다니며 열심히 신앙생활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저도 엠마우스 성가대에서, 제 동생도 예그리나 전례부에서 성실히 활동 중입니다. 얼마 전, 집에서 서랍을 정리하다가 제가 아버지께 쓰다가 마무리하지 못한 편지를 한 통 발견했습니다. 그 편지의 첫 문장은 마태오복음 5장 3절에서 5절까지의 말씀이었습니다. “행복하여라,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 하늘나라가 그들의 것이다. 행복하여라, 슬퍼하는 사람들. 그들은 위로받을 것이다. 행복하여라, 온유한 사람들. 그들은 땅을 차지할 것이다.” 아마도 그 편지를 쓸 때는 의식이 없으셨던 아버지를 한 번만 깨워달라고 처음 갔던 성체조배실에서 절실히 기도하고 있던 중이었던 듯합니다. 기도 중에 성체조배실에 놓여 있던 성경을 펼쳤는데 우연히 행복선언과 맞닥뜨렸습니다. 그런데 그 말씀이 이렇게 제게 힘이 될 줄은 몰랐습니다. 당시 저는, 지금도 그렇지만, 어렸고, 불안했고, 너무도 약했습니다. 그래서 저에겐 더욱더 아버지께서 괜찮아질 것이라는 ‘확신’이 필요했습니다. 하지만 의료진은 제가 원하는 확신을 주지 않았고, 그 때문에 집에서나, 학교에서나, 병원에서나 저는 절망적이었습니다. 이제 와서 돌아보니 불안에 떠는 제게 확신을 주시고 앞으로의 행복을 약속하셨던 분은 다름 아닌 주님이셨습니다. 그 말씀에서 저는 확신을 얻었고, 제 불안감을 잠재웠습니다. 편지의 시작이 행복선언이었던 것은 아마도 제가 그 확신을, 그 울림을 누워 계셨던 저희 아버지께도 전해드리기 위함이 아니었나 싶습니다. 그리고 실제로 주님께서는 그 약속을 지켜주셨습니다. 아버지께서는 얼마 뒤 기적처럼 의식 불명 상태에서 깨어나 지속해서 건강이 호전되셨습니다. 이후에도 우리 가족은 셀 수 없이 많은 분의 도움을 받았고, 도움을 받는 내내 저는 주님께서 항상 저와 함께하고 계심을 느꼈습니다. 그래서 이에 대한 보답으로 저는 앞으로도 더 열심히, 할 수 있는 한 성심껏 봉사하며 살아갈 생각입니다. 이 자리를 빌려서 다시 한 번 주님께, 가톨릭평화신문 독자 여러분께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고맙습니다. 제 슬픔은 확실히 그분께서 약속하신 행복으로 위로를 받았습니다. 그래서 저는 우리 가족의 행복에 대한 확신을 가지고 있습니다. 지금 이 글을 보고 계신 독자 여러분도 진정으로 행복하시길 기도드립니다. 오늘도, 내일도 행복하세요!” 백영민2018.03.21
![[성경 속 기도] (7) 솔로몬의 기도](//cpbc.co.kr/CMS/newspaper/2016/03/rc/625982_1.0_titleImage_1.jpg)
[성경 속 기도] (7) 솔로몬의 기도겸손한 마음으로 지혜를 청하다 솔로몬은 한 나라의 왕으로서 필요한 지혜와 능력을 청하는 기도를 항상 바쳤다. 율리우스 카롤스펠트 작, ‘솔로몬의 재판’. 출처=「아름다운 성경 솔로몬 하면 지혜의 왕으로 떠올린다. 그는 이스라엘 역사에서도 가장 화려하고 풍족한 삶을 살았던 인물이다. 솔로몬은 다윗과 밧 세바 사이에서 태어났다. “다윗은 자기 아내 밧 세바를 위로하고, 그에게 들어 잠자리를 같이하였다. 밧 세바가 아들을 낳자 다윗은 그의 이름을 솔로몬이라 하였다. 주님께서 그 아이를 사랑하셨다”(2사무 12,24). 다윗 왕에게는 왕위를 이어받으려던 나이 든 아들이 많이 있었다. 반면에 솔로몬은 많은 형제 가운데 아주 어린 동생이었기 때문에 왕위를 이어받을 것이라고는 생각조차 할 수 없었다. 더군다나 솔로몬의 어머니는 다윗이 불의하게 취한 여인인 밧 세바였다.그러나 어려움을 극복하고 다윗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른 솔로몬은 왕으로서 하느님을 사랑하는 일에 힘썼다. 솔로몬은 한마디로 ‘기도의 사람’이었다. 솔로몬의 기도는 지속적인 특징을 지니고 있다. 그의 기도 배경에는 바로 하느님께 대한 사랑이 있었다. “솔로몬은 주님을 사랑하여, 자기 아버지 다윗의 규정을 따라 살았다. 그러나 그도 여러 산당에서 제사를 드리고 향을 피웠다”(1열왕 3,3). 솔로몬은 하느님을 사랑하라는 첫째 계명을 잘 지켰고 아버지 다윗의 가르침에 순종했다. 한 나라의 왕으로서 하느님께서 주시는 지혜와 능력이 아니고서는 도무지 감당할 수 없는 자리임을 알고 하느님께 기도하기를 게을리하지 않았다. “임금은 제사를 드리러 기브온에 갔다. 그곳이 큰 산당이었기 때문이다. 솔로몬은 그 제단 위에서 번제물을 천 마리씩 바치곤 하였다”(1열왕 3,4). 솔로몬은 기브온에 있는 산당으로 기도하러 갔다. 기브온 산당은 이스라엘에서 가장 큰 산당이었다. 솔로몬이 기브온 산당에서 번제물을 천 마리씩 드렸다는 것은 하느님께 드리는 제사를 온 힘과 정성을 다해 드렸다는 의미이다.솔로몬은 하느님께 많은 백성을 잘 통치할 선과 악을 구별할 수 있는 지혜를 청하였다. 하느님께서도 솔로몬의 기도를 들으시고 응답해 주셨다. “‘그러니 당신 종에게 듣는 마음을 주시어 당신 백성을 통치하고 선과 악을 분별할 수 있게 해 주십시오. 어느 누가 이렇게 큰 당신 백성을 통치할 수 있겠습니까?’”(1열왕 3,9). “또한 하느님은 솔로몬이 구하지도 않은 부와 영광까지도 주시겠다고 약속하셨다. ‘또한 나는 네가 청하지 않은 것, 곧 부와 명예도 너에게 준다. 네 일생 동안 임금들 가운데 너 같은 사람이 없을 것이다’”(1열왕 3,13). 기도는 바로 이런 것임을 잘 보여주는 대목이다. 솔로몬의 기도에서 중요한 것은 그가 기도할 때 이미 주님의 응답을 믿었다는 것이다. 즉, 믿음으로 구하는 기도였기에 하느님께서 이루어 주실 줄을 믿었던 것이다. 그래서 솔로몬은 하느님께 먼저 감사를 드렸다. 이처럼 솔로몬의 기도 생활은 항상 겸손했다.기도는 겸손한 사람들의 몫이라 할 수 있다. 자신의 연약과 자신의 무지를 모르기 때문에 사람들은 기도의 필요성을 느끼지 않을 때가 많다. 자신이 부족하고 잘 알지 못하다고 생각하기에 하느님께 겸손한 마음으로 도움을 청하는 것이다. 자신의 부족함을 알고 자기 한계를 받아들이는 사람이야말로 하느님 보시기에 지혜로운 사람이 될 수 있다. 허영엽 신부(서울대교구 홍보국장) 평화신문2016.03.22
[김용은 수녀의 살다보면] (9) 기다림이 사라진 세상에서 “수녀님, 왜 전화 안 받아요?” 평소 가까이 지내던 동료 수녀가 신경질적으로 말했다. 순간 당황한 내가 “아~ 무음으로 해놓아서…” 하며 말끝을 흐리는데, “예의 없는 것 아닌가요?” 하며 불평한다. 순간 머리가 띵해지면서 ‘뭔 예의? 긴급 상황이었나? 이 수녀가 왜 이러지?’ 하는 생각에 내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알고 보니 그저 무언가 물어보려고 했을 뿐이었다. 그런데 ‘전화 안 받는 것이 그렇게 화날 일인가?’ 하는 생각에 은근히 괘씸하다는 마음마저 들었다. 게다가 ‘예의’까지 운운하면서 말이다. 그래서 뭐라도 한마디 하려고 하는데 그렇게 말한 자신도 놀랐는지 뭐라고 얼버무리며 잽싸게 도망치듯 나가버렸다.어이가 없기도 하고 황당하기도 했다. 나는 집중해서 일하거나 회의를 할 때 전화를 무음으로 해놓는다. 원하는 시간에 전화받는 자유마저 잃은 세상에 내가 살고 있다는 생각이 드니 허탈감이 밀려왔다. 어디 있든 언제든지 벨이 울리면 나는 무조건 응답해야 한다. 나도 모르는 사이에 나의 시간마저 ‘공동의 소유’가 되어버린 것이다.자신의 의지와 무관하게 아무 때나 아무 곳에서나 아무에게나 접속을 강요받고 있는 시대다. 전화를 받지 않거나 보낸 문자나 카톡에 답글이 즉시 돌아오지 않으면 조바심을 낸다. 기다릴 수가 없다. 기다리더라도 왜 기다려야 하는지 알아야 한다. ‘회의 중입니다’ ‘나중에 연락하겠습니다’ ‘조금 늦겠습니다’라는 댓글이라도 올라와야 한다. 즉각적인 댓글이 올라오지 않으면 ‘나를 무시했어’ 하면서 성급한 판단을 한다.이제 우리는 더는 기다릴 수 없고 기다리지 않는다. 우리는 너나 나나 할 것 없이 대부분 다 이런 현실에 익숙해지고 있다. 막연한 기다림이란 있을 수 없다. 막차가 끊겨서, 차를 잘 못 타서, 몸이 아파서 약속 장소에 가지 못한다 해도 즉시 손가락 몇 개만 움직이면 되니까. 전철이나 버스가 지연되어도 얼마나 늦는지 확인해야 한다. 우리는 그렇게 수십 번씩 확인하고 또 확인한다.언젠가 나는 버스정보시스템(BIS)이 고장 난 정거장에서 버스를 기다린 적이 있다. 그런데 어쩌면 시간이 그리 더디 가고 무료한지 갑갑할 지경이었다. 그런 나 자신이 참으로 한심하고 실망스러웠다. 사실 급한 일도 없는데 말이다. “앱 까세요. 실시간 버스 위치 정보 볼 수 있어요.” 누군가 나의 이런 느낌에 건넨 조언이다. 그런데 실시간 정보를 확인한다고 해서 기다리는 시간이 단축되지는 않는다. 그렇다고 마음이 더 즐겁고 편안한가? 안내판 대신 버스위치 정보만 조급한 마음으로 열심히 뚫어져라 볼 뿐이다.현대를 사는 우리 삶의 과정이 가속화되면서 조급증이 만연하다. 기다릴 줄 모르고 쉽게 화를 내고 요구가 많아진다. 산만해서 남의 이야기를 잘 듣지 못하고 성급하게 판단한다. 과정을 음미하지 못하고 성과로 이어지는 결과에 집착한다. 무엇보다 행복한 감정도 당장 느끼고 싶어 한다. 땀을 흘리고 애써서 얻는 만족감보다는 커피 한 잔, 담배 한 개비, 술 한 잔, 게임 한 판으로 즐거운 감정을 누리고 싶다. 그래서 쉽게 중독에 노출된다. 중독은 즉각적인 쾌감에 따른 유혹을 이기지 못해서이기도 하다. 지루하고 심심하고 우울하고 슬픈 이 부정적인 이 감정을 단번에 바꾸어주는 이 ‘인스턴트 재미’는 누구에게나 유혹이 된다.사실상 조급한 마음은 바빠서 생기는 것도 아니다. 지금 이 순간에 충분히 머물지 못하기 때문이다. 지금의 이 현실을 건너뛰고 싶다. 그래서 기도할 수도 없다. 기도는 ‘지금’에 충실해야 하기 때문이다. 깊은 침묵 속에서 기다리고 또 기다리면서 마음을 다스려야 한다. 주님 앞에 무릎을 꿇어야 하고, 두 손을 모으고 마음을 비우고 마냥 기다려야 한다. 그저 ‘지금’ 이 순간이 마지막인 것처럼.기다림은 누군가의 만남이나 원하는 결과를 위한 과정이 아니다. 기다리는 순간부터 나는 이미 만나고 있고 결과에 대한 기쁨은 희망으로 가득하다.“내 영혼아, 오직 하느님을 향해 말없이 기다려라, 그분에게서 나의 희망이 오느니!”(시편 62,6)성찰하기7 신호등 앞에서, 은행창구에서, 전철이나 버스정거장에서, 병원에서. 조급해지는 마음을 내려놓아요. 지금이 바로 ‘조급증’을 치유하는 소중한 순간임을 기억하면서.8 기다리는 지금 이 순간을 즐겨요. 즐기는 ‘나’에게 또 집중해요.9 평소에 직접 손이나 몸으로 하는 일을 해요. 일기 쓰기, 운동하기, 그림 그리기, 독서하기, 성경 필사 등으로 손과 몸의 속도와 친해져요. 결과보다는 ‘과정’을 찬찬히 음미하는 연습을 해요. 그러면 ‘지금’에 집중하는 힘이 생겨요, 바로 그 지점에서 하느님 체험이 시작되니까요. <살레시오교육영성센터장, 살레시오수녀회> 평화신문2018.04.03
![[나의 미사이야기] (18) 이광열(아우구스티노, 서울대교구 성산동본당)](//cpbc.co.kr/CMS/newspaper/2017/09/rc/696992_1.0_titleImage_1.jpg)
[나의 미사이야기] (18) 이광열(아우구스티노, 서울대교구 성산동본당)1만 번의 미사가 준 은총 매일 미사를 봉헌한 지 29년이 되었습니다. 1989년 6월 15일 세례 받기 보름 전에 매일 미사를 시작했습니다. 교리를 가르쳐 주시던 신부님께서 “이제 좀 알 것 같아요?” 하시는 말씀에 “아직 잘 모르겠습니다” 하였더니 실망하시는 기색이 역력하셨습니다. 그래서 다음 날부터 새벽 미사를 봉헌했습니다.‘내가 이해해야 세례를 받지. 그래, 해보는 거야’ 하는 생각으로 매일 새벽 미사에 나갔습니다. 다른 분들이 영성체할 때는 무릎을 꿇고 기도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미사가 끝나고 모두가 떠난 자리에 불은 꺼지고 컴컴한 성전에서 무릎 꿇고 기도 중에 성체등만이 빛으로 다가오는데 한없이 눈물이 나기 시작했습니다. 하염없이 쏟아지는 눈물을 훔치며 나의 삶을 돌아보았습니다.지적받는 것이 싫었습니다. 책잡히기 싫어서 철저했고 빈틈없이 행동했습니다. 자존심도 있었습니다. 나의 못난 점, 감추고 싶었던 나, 나를 알면 얼마나 실망할까? 불안하고 초초하고 두려웠습니다. 열등감이 깊었던 것이 떠올랐습니다.나를 돌아보았습니다. 그때 ‘너는 있는 그대로 사랑받고 인정받는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지적받지 않으려고 애쓰지 않아도, 이젠 있는 그대로 살라고 하신 소리가 들려왔습니다. 기쁨의 환희가 가슴을 뜨겁게 나의 두 눈을 적셨습니다. 미사는 그렇게 저에게 다가왔습니다. 집전 사제가 ‘신앙의 신비여’ 하실 때 ‘주님께서 오실 때까지 주님의 죽으심을 전하고’라고 외칠 때마다 ‘관계 속의 나’를 봅니다. 나에게 미사는 관계를 회복시켜 줍니다.배우자와 다퉜을 때입니다. 나의 가치를 인정받지 못해 기가 차고 속상하여 화가 날 때입니다. 내일 미사를 가야 하기에 자기 전에 화해해야 합니다. 마음을 가라앉히기 위해 성경을 읽었지만 내용이 들어오지 않습니다. 인내를 가지고 읽고, 또 읽으니 마음이 차분해짐을 느낍니다. 용기를 내 아내에게 미안하다고 사과합니다.본당 단체에서도 의견 차이로 답답하고 속상할 때도 미사 중에 우리를 위해 죽기까지 하셨다는 말씀이 떠올라 살아 있으면서 화해를 못할 게 무엇인가라는 생각으로 용기내 화해합니다. 신부님과 관계에서 속상할 때도 신부님이 집전하시는 미사에 참여해 평화의 인사 때 눈을 마주치고 미사 후 나올 때 인사를 드리면 반갑게 맞아주십니다. 미사는 공동체 안에서 서로를 이해하고 인정하며 함께하게 합니다.성찬 전례를 마음과 몸으로 인지하기 위해 말씀 전례를 이해하고 알기 위해 시작한 성경 읽기는, 열두 번 완독했습니다. 미사는 네 복음서의 명료화라고 생각합니다. 네 복음서를 집약하여 전례 안에서 미사를 통하여 이해하고 인지하게 합니다.네 복음서를 이해하고 인지하려면 서간을, 서간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이스라엘 역사와 문화를 알면 율법학자이며 바리사이인 바오로 사도께서 유다교 회당에서 그리스도교를 선교할 때 가졌던 회심을 이해하게 되고 오경을 이해하는 데 도움을 줍니다. 오경을 인지하면 율법의 중요함을 알게 되고 율법의 완성이 미사라고 저는 이해했습니다. 저는 이스라엘 역사 안에서 율법의 중요함을 이해하기 위해 미사가 주는 은총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미사는 하느님 나라 가는 길에, 징검다리를 하나씩 놓아줍니다. 미사는 하느님 나라 완성을 위해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해 만들어 주신 길잡이입니다. 미사는 지구의 자전으로 아침 햇살을 받으며 성체 성혈로 우리에게 옵니다. 미사는 저에게는 진리를 깨닫게 합니다. 미사는 공동체를 이루면서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필수입니다. 미사는 신약의 파스카입니다. 이제 30년 ME(매리지 엔카운터) 부부 봉사도 마치고, 20년 동안 함께하는 여정 교리 봉사도, 만 번의 미사 안에서 충만한 기쁨으로 성체를 영할 수 있도록 허락하신 주님께 찬미 영광 드립니다. 평화신문2017.09.27
![[예수회 성인들의 생애와 영성] 프란치스코 하비에르 (1)](//cpbc.co.kr/CMS/newspaper/2018/04/rc/718608_1.0_titleImage_1.jpg)
[예수회 성인들의 생애와 영성] 프란치스코 하비에르 (1)룸메이트로 만난 세 학생, 예수회 역사가 되다 프란치스코 하비에르 성 프란치스코 하비에르(Francisco de Gassu y Javier, 1506~1552)는 1506년 4월 7일 나바라 왕국(Reino de Navarra, 지금의 에스파냐 바스크 지방)의 수도 팜플로나(Pamplona)에서 동쪽으로 52㎞ 떨어진 하비에르성에서 태어났다. 성인이 태어날 때 이 성은 이미 지어진 지 600년이나 됐다. ‘하비에르’는 우리말로 ‘새집’이란 뜻이다. 그의 아버지 후안 데 하수(Juan de Jaso)는 당시 나바라 왕 장 달브레(Jean d’Albret)의 재무장관이었다. 어머니 마리아 데 아즈필쿠에타(Maria de Azpilcueta)는 나바라 귀족 가문의 유일한 유산 상속녀이자 하비에르성의 소유자였다. 하비에르가 5남매 중 막내로 태어났을 때 아버지는 이미 60세가 넘었다. 나바라 왕국은 유럽 대륙에서 이베리아반도로 들어가는 길목인 프랑스와 카스티야 연합왕국 사이에 있었다. 두 나라는 서로 나바라 왕국을 자신들의 영토로 만들고 싶어 했다. 하비에르가 여섯 살 되던 1512년 카스티야 연합왕국의 페르난도 2세(Fernando II)가 나바라를 침공해 강제 병합시켰다. 이후 나바라 땅을 빼앗기 위한 전쟁은 18년이나 지속되며 피를 뿌렸다. 하비에르는 전쟁 속에서 자랐다. 하비에르가 아홉 살이던 1515년 10월 16일 아버지가 세상을 떴다. 가문은 몰락했다. 그 해 하비에르는 미구엘(Miguel) 신부에게 프란치스코라는 이름으로 세례를 받았다. 몇 달 후 1516년 6월 23일 카스티야 연합왕국의 페르난도 2세가 죽었다. 에스파냐 초대 국왕 카를로스 1세(Carlos I)는 열여섯 살로 어렸다. 나바라는 독립을 시도했다. 나바라 왕은 프랑스 군대와 함께 나바라 왕국의 탈환을 위해 돌아왔다. 나바라 사람들도 독립을 위해 무기를 들었다. 하비에르의 두 형 미구엘과 후안, 사촌들도 이 독립투쟁에 가담했다. 그러나 전투에서 지고 나바라는 에스파냐의 손에 들어갔다. 독립 전투에 하비에르 가문이 가담한 사실이 에스파냐에 알려지자 에스파냐 어린 왕의 섭정이며 나바라 지역 총독이었던 시스네로스(Cisneros) 추기경은 하비에르 가문 소유의 토지를 빼앗고 하비에르성을 파괴할 것을 명했다. ‘새집’의 외벽, 성문, 두 탑이 무너져내렸다. 성채는 절반쯤 무너졌다. 하비에르의 두 형과 사촌들은 성을 떠나 무장투쟁을 계속했다.1521년 5월 프랑스 군대가 다시 나바라로 들어왔을 때 하비에르는 열다섯 살이었다. 나바라 사람들은 다시 독립을 희망했다. 프랑스의 지원을 받은 독립군이 초반에 승세를 보이며 팜플로나에 진격했다. 1521년 5월 20일 나바라 독립 무장군은 새로 쌓은 팜플로나의 성채에 대포를 퍼부었다. 그 성채에서 에스파냐군을 지휘하던 이냐시오 데 로욜라는 포환에 다리를 심하게 다쳤고 전투에서 패했다. 이니고는 서른 살이었다. 하비에르 가문과 이니고는 팜플로나 전투에서 적으로 만났다. 독립이 눈앞에 온 듯했다. 그러나 6월 30일 노아인(Noin) 전투에서 엄청난 수로 밀려오는 에스파냐군을 만난 나바라 독립군은 처참하게 패했다. 1년 후 1522년 에스파냐의 카를로스 1세가 나바라 독립군을 사면했다. 마침내 1524년 3월 23일 나바라 독립군들이 투항하고, 하비에르의 두 형과 사촌들도 집으로 돌아왔다. 무너진 성 안쪽 하비에르 가족이 살던 집은 남아 있었다. 하비에르가 열아홉 살이 되던 1525년 하비에르는 무너진 성 안에 나이 든 모친과 형제들을 남기고 파리로 떠났다. 9월부터 파리대학 안에서 가장 오래된 명문 성 바르브 학교(College de Sainte-Barbe)에 다녔다. 하비에르는 1529년부터 프랑스 사부아 출신의 피에르 파브르(Pierre Favre)와 방을 함께 썼다. 하비에르와 파브르는 스물셋 동갑이었다. 하비에르는 몰락한 귀족 가문 출신이고 파브르는 알프스 목동 출신이었다. 하비에르는 아홉 살부터 희랍어와 라틴어를 배웠고 파브르는 공부는 많이 못 했지만, 새벽 미사 때 들은 강론을 오후에 친구들에게 그대로 말할 수 있을 만큼 기억력이 출중했다. 둘은 금세 가까워졌다.1529년 10월에 새로 온 학생 이냐시오 데 로욜라가 그들과 같은 숙소를 사용하게 됐다. 하비에르는 이냐시오보다 열다섯 살이 어렸다. 하비에르와 이냐시오는 같은 바스크 지방 출신이었지만 8년 전 하비에르 가문은 프랑스 편에서, 이냐시오는 에스파냐 편에서 싸웠다. 파브르는 이냐시오에게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을 가르쳐주었고, 이냐시오는 파브르에게 영신 사정에 대해 가르쳐 주었다. 파브르는 오래지 않아 다른 영혼을 구하자는 이냐시오의 열정에 공감했다. “어서 사제가 되라”는 이냐시오의 조언도 확신에 차서 받아들였다. 하비에르는 파브르보다 활기차고 굳은 성격 탓에 이냐시오를 대수롭지 않게 여겼고, 그가 다른 학생들을 회심시키는 것에 냉소적이었다. 어느 날 파브르가 가족 방문을 위해 숙소를 떠났을 때 방에는 하비에르와 이냐시오만 남았다. 세속적인 야망을 추구하던 하비에르는 “이제까지 무엇을 추구하며 살아왔는지 돌아보라”는 이냐시오의 끈질긴 제안을 피할 수 없었다. 1533년 초 이냐시오가 “사람이 온 세상을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슨 소용이 있겠느냐?”(마태 16, 26; 마르 8,36)는 말씀을 인용하며 영적인 세계를 이야기했을 때 하비에르의 마음은 세속적 야망에서 그리스도를 향한 열정으로 방향을 바꾸었다. 하비에르는 자신의 회심을 이끌었던 이 성경 구절을 평생 가슴에 새기고 살았다. 나중에 그는 이 구절을 자주 편지에 인용하곤 했다. 평화신문2018.04.25
![[이창훈 위원의 예수님 이야기] (70) 예수님의 권한과 포도밭 소작인의 비유(루카 20,1-19)](//cpbc.co.kr/CMS/newspaper/2018/06/rc/725449_1.0_titleImage_1.jpg)
[이창훈 위원의 예수님 이야기] (70) 예수님의 권한과 포도밭 소작인의 비유(루카 20,1-19)책무를 망각한 소작인은 포도처럼 으깨진다 포도밭 소작인의 비유는 하느님 백성울 잘 보살피라는 부르심을 받은 지도자들이 어떤 자세를 지녀야 하는지를 일깨운다. 사진은 포도밭에서 포도를 수확하는 일꾼들 【CNS 자료사진】 수석 사제들과 율법학자들이 성전에서 가르치시는 예수님께 시비를 겁니다. 예수님께서는 지혜롭게 대응하시며 포도밭 소작인의 비유로 그들의 속셈을 들춰내십니다. 예수님의 권한을 문제 삼다(20,1-8)예수님께서 어느 날 성전에서 백성을 가르치며 복음을 전하실 때였습니다. 수석 사제들과 율법학자들이 원로들과 함께 다가와 질문을 던집니다. 질문 내용은 두 가지입니다. “당신이 무슨 권한으로 이런 일을 하는지” 또 “당신에게 그러한 권한을 준 이가 누구인지” 말하라는 것입니다.(20,1-2) 질문한 사람들의 지위로 본다면 예수님께 대한 질문은 정당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수석 사제들과 율법학자들이라면 자기들 눈에 자격을 갖추지 못했다고 판단되는 사람이 백성을 가르치는 것이 보이면 이런 질문을 할 권리가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적어도 루카복음의 맥락에서 보면 이들의 질문에는 예수님께 올가미를 씌우려는 의도가 들어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 성전을 정화하신 후 날마다 가르치셨을 때 그들, 곧 수석 사제들과 율법학자들과 백성의 지도자들은 예수님을 없앨 방도를 찾았지만 찾지 못했다고 루카 복음사가는 기록하고 있기 때문입니다.(19,47-48) 예수님께서는 그들이 제기한 질문에 즉답을 하시기보다는 거꾸로 질문하십니다. 그들의 질문 속에 들어 있는 덫을 간파하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반문은 “요한의 세례가 하늘에서 온 것이냐 사람에게서 온 것이냐?” 하는 것이었습니다. 이 질문은 참으로 묘했습니다. 만일 요한의 세례가 하늘에서 온 것이라고 대답한다면 왜 요한을 믿지 않았느냐는 책망을 받을 것이고, 사람에게서 왔다고 대답한다면 요한을 예언자로 여기는 백성들에게 자칫 돌을 맞을지도 모를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궁리 끝에 그들은 어디에서 왔는지 모르겠다고 대답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나도 무슨 권한으로 이런 일을 하는지 너희에게 말하지 않겠다”고 대답하심으로써 그들을 침묵하게 만드셨습니다. 포도밭 소작인의 비유(20,9-19)예수님께서는 당신께 올가미를 씌우려는 이들을 요한의 세례와 관련한 절묘한 질문으로 머쓱하게 만드는 데 그치지 않으시고 포도밭 소작인에 관한 비유를 말씀하십니다. 어떤 사람이 포도밭을 일궈 소작인들에 내주고 “오랫동안 멀리 떠나”(20,9) 있었습니다. 수확철이 되자 그는 소작인들에게 소출을 받으려고 종을 하나 보냈습니다. 그런데 소작인들은 그를 매질해서 빈손으로 돌려보냈습니다. 주인은 다른 종을 보냈는데, 그들은 그 종도 “매질하고 모욕하고 나서 빈손으로” 돌려보냅니다. 주인이 세 번째 종을 보내자 소작인들은 그에게도 상처를 입히고 내쫓아 버렸습니다. 주인은 마지막으로 “사랑하는 내 아들을 보내야겠다. 내 아들이야 존중해 주겠지” 하며 아들을 보냅니다. 그러나 소작인들은 아들을 보자 상속 재산을 차지하기 위해 “포도밭 밖으로 던져 죽여” 버립니다. 그러면 포도밭 주인이 돌아와 소작인들을 없애 버리고 포도밭을 다른 이들에게 줄 것이라는 말씀으로 예수님은 비유를 마치십니다.(20,9-16) 학자들은 이 비유에서 포도밭은 이스라엘을 상징하고 포도밭 주인은 하느님을 상징한다고 봅니다. 소작인들은 이스라엘의 지도자들을 가리킨다고 할 수 있겠지요. 그렇다면 이 비유는 하느님께서 당신 백성을 잘 보살피고 하느님과 약속한 것을 잘 이행하라고 당신의 사자들, 곧 종들을 보냈지만 지도자들은 오히려 박해하고 내쫓았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세 번씩이나 종을 보냈다는 것은 하느님께서 그만큼 인내하셨다는 것을 뜻합니다. 마지막으로 보낸 “사랑하는 내 아들”은 바로 예수님을 가리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의 지도자들은 예수님마저 죽여 버렸습니다. 하지만 말씀을 듣고 있던 사람들은 비유의 이런 뜻을 잘 알아듣지 못하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 “그런 일은 있을 수 없습니다” 하고 말씀드리지요.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구약성경 시편 118편 22절에 나오는 “집 짓는 이들이 내버린 돌 그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네”라는 말이 무슨 뜻이냐고 반문하십니다. 집 짓는 이들이 내버렸으나 모퉁이의 머릿돌이 된 그 돌은 바로 예수님 자신을 가리키는 표현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포도밭 소작인의 비유와 이 시편 말씀을 결부시킴으로써 소작인들이 죽여버린 그 아들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될 것이라고 말씀하시고 계시는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 말씀은 그것으로 그치지 않았습니다. “그 돌 위에 떨어지는 자는 누구나 부서지고, 그 돌에 맞는 자는 누구나 으스러질 것”이라는 말씀으로 마무리하십니다.(20,19ㄱ) 이 말씀은 예수님을 배척하는 자는 누구나 부서지고 으스러지는 심판을 받게 될 것이라는 엄한 경고의 말씀입니다. 이 말씀에 율법학자들과 수석 사제들은 예수님의 이 비유 말씀이 바로 자기들을 두고 하신 말씀인 것을 알아차립니다. 그래서 예수님께 당장 손을 대려고 하지만 하지 못합니다. 루카 복음사가는 “백성이 두려웠다”고 그 이유를 설명합니다.(20,19ㄴ) [생각해 봅시다]예수님께서 하느님의 도성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후 처음으로 하신 일이 예루살렘 성전을 정화하신 일이었습니다. 성전 마당에서 물건을 파는 이들을 쫓아내시며 ‘나의 집은 기도하는 집이 되어야 하는데 너희는 강도들의 소굴로 만들었다’고 혹독하게 지탄하십니다. 이는 지극히 당연한 일이지만 수석 사제들과 율법학자들과 백성의 지도자들은 앙심을 품고, 예수님을 없애 버리려고 합니다. 율법학자들 그리고 백성의 지도자 축에 속하는 바리사이들과 예수님의 갈등은 예수님께서 갈릴래아에서 활동하실 때부터 그리고 갈릴래아를 떠나 예루살렘으로 오시는 도중에서도 여러 차례 있었습니다.(5,27-32; 6,1-5.11; 11,37-54 참조) 하지만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과 성전 정화 사건 이후에 그 갈등이 더욱 깊어지면서 이제는 예수님을 없애려는 데까지 이르렀습니다.(19,48) 예수님의 권한을 문제 삼는 일화에 이은 포도밭 소작인의 비유는 예수님을 없애려는 수석 사제들과 율법학자들 그리고 원로들의 음모를 들추어내고 있습니다. 그럼으로써 예수님에 대한 이들의 반감은 “당장 예수님께 손을 대려고”(20,19) 할 정도로 깊어집니다. 다른 한 편으로, 포도밭 소작인의 비유는 또한 공동체나 사회의 지도자들이 어떤 자세를 지녀야 하는지를 일깨우고 있습니다. 지도자들은 자기가 맡은 공동체나 사회를 위해 성실하게 봉사해야 할 책무를 지고 있습니다. 이 책무를 소홀히 하고 사리사욕을 위해 자신의 권한이나 지위를 남용한다면 부서지고 으스러지는 엄중한 대가를 치를 것입니다. 백영민2018.06.27
![[고통받는 교회를 도웁시다] 중동 (5) ‘뿌리로의 귀환’ - 니네베 평원 재건 프로젝트](//cpbc.co.kr/CMS/newspaper/2017/11/rc/702370_1.0_titleImage_1.jpg)
[고통받는 교회를 도웁시다] 중동 (5) ‘뿌리로의 귀환’ - 니네베 평원 재건 프로젝트9만 그리스도인, 분노 뽑아내고 ‘올리브 나무(영원한 평화의 상징)’ 심고파 니네베 재건위원회(NRC) 로고는 니네베 땅에 뿌리내린 십자가입니다. 성경에도 등장하는 니네베 평원에 굳건히 서 있는 십자가는 어떤 바람과 도전에도 쓰러지지 않을 것입니다. 교황청 산하 재단 ‘고통받는 교회 돕기(ACN)’는 이라크 교회 지도자들과 함께 니네베 재건위원회를 발족했습니다. 니네베 재건위원회는 난민들과 한마음으로 협력하면서 모금 운동을 펼치고 있습니다. 2000년 전통을 지닌 그리스도교 공동체가 니네베 평원에 무사히 돌아가 다시 뿌리를 내리게 하는 것이 목표입니다. 이슬람 극단주의 테러 조직인 다에시(ISIS)가 드디어 모술에서 패퇴했습니다. 이라크 북부 아르빌로 피란을 간 그리스도교 가정 1만 2000가구(약 9만 명)는 이 순간만을 고대했습니다. ACN은 전쟁 초기부터 지역 교회와 손잡고 의식주를 비롯해 의료와 교육, 사목적 도움 등 필요한 지원을 하고 있습니다. 니네베 재건위원회(NRC) 법률 자문위원인 스티븐 라셰는 니네베 평원의 그리스도인들은 국가의 도움을 한 번도 받지 못했다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ACN이 나서지 않았다면 니네베 평원의 그리스도인은 뿔뿔이 흩어져버렸을 거예요. 아무도 이들의 상황을 몰랐을 겁니다.”이라크인이 고향 니네베로 돌아가도록 도와야 교황청 국무원장 피에트로 파롤린 추기경과 국제 ACN 총재 마우로 피아첸자 추기경이 주관한 ‘뿌리로의 귀환 : 니네베 평원의 그리스도인’이라는 국제회의가 지난 9월 로마에서 열렸습니다. 지역 교회 총대주교와 추기경, 주교와 교황 대사 등이 참석한 이 회의에서 라셰는 이라크 그리스도교 공동체에 닥친 상황을 간단하고 분명하게 말했습니다. “지금 이라크인이 고향으로 돌아가는 데 도움을 주지 않으면, 이들은 니네베 평원을 영원히 떠날 것입니다!” 하지만 정부와 외부 기관의 도움 없이 그리스도인이 고향으로 돌아가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피해가 너무나 커서 스스로는 도저히 복구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가옥 1만 3088채가 전소 또는 붕괴됐습니다. 그런데 이들이 빨리 돌아가지 않으면 다른 사람들이 이들 집을 차지할 것입니다. 라셰는 이렇게 강조했습니다. “시간이 별로 없습니다. 니네베에 그리스도인이 존속해야 한다고 생각하면, 지금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을 해야 합니다. 이들에게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다는 확신을 줘야 합니다.”파롤린 추기경은 연설에서 “교황님은 정든 도시와 마을을 떠나야 했던 수천 가정의 비극적 처지를 깊이 염려하고 계신다”고 말했습니다. 프란치스코 교황님은 2014년 반기문 유엔 사무총장에게 서한을 보내 “다에시의 잔인한 폭력을 피해 탈출한 그리스도인과 다른 소수 민족이 안전하게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도록 국제사회가 도웁시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스도인, 오랫동안 무슬림 내부 갈등 중재교황님은 또 중동의 그리스도인들에게 편지를 띄워 이들이 ‘평화와 화해와 발전을 만들어 낼’ 특별한 사명을 받았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중동의 그리스도인은 중동의 평화와 안정과 다양성을 높입니다. 수 세기 동안 그리스도인은 무슬림 내부의 갈등을 중재했고, 문화와 사회복지, 특히 교육 분야에 크게 이바지했습니다. 사실 온건한 무슬림들은 그리스도인이 사라지면 어떤 일이 벌어질지 깊이 염려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국제사회는 어떻습니까? 라셰는 “현실적이고 실현 가능한 일을 논의하자”고 강조했습니다. 사실 각국 정부는 미온적입니다. 그들은 비용과 이익만 따지고 있습니다. 국제 구호기금이 제대로 전달되지 않는 것도 큰 문제입니다. 현장 활동가들은 기금이 제대로 쓰이지 않는 것을 가장 힘들어합니다. 긴급 구호를 요청하면 관료들이 와서 현장 조사만 하고 돌아가고, 정작 필요한 지원은 하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때로는 더 부정적 일이 벌어지기도 합니다. 올해 5월부터 재건 사업 본격 시작 현장에 뛰어들어 직접 함께 일하는 것이 시급합니다. 현장에서 일하는 사람들은 무엇이 필요하고, 어떻게 일을 진행해야 하는지 잘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NRC는 당장 일을 착수하기 위해 기금과 힘을 모으고 있습니다. 이라크 그리스도인을 돕겠다는 관심과 의지가 필요합니다. NRC는 난민들이 고향으로 돌아가 삶을 시작하려면 대략 2억 5000만 달러가 필요할 것으로 예상합니다. 이미 2017년 5월 공식 재건 사업이 시작되었습니다. 바르텔라와 카렘레스, 카라코쉬 같은 그리스도인 밀집 지역부터 시작하고 있습니다. ACN 중동지역 사업 책임자인 안제이 할렘바 신부님은 ACN 설립자인 베렌프리트 판 슈트라텐 신부님 말씀을 인용했습니다. “우리가 이 만행을 끝내는 일을 돕지 않으면, 그에 대한 책임을 함께 져야 합니다.” 할렘바 신부님은 특히 강대국 대사들을 향해 이렇게 말했습니다. “여러분에게도 해당하는 말입니다. 우리가 이 사람들을 돕기 위해 최선을 다하지 않으면, 우리 살아생전에 성경에 나오는 고대 그리스도교 땅에 사는 그리스도인들은 다 사라질 겁니다. 이 사람들의 미래는 우리 손에도 달려 있습니다. 언젠가 주님께서는 우리에게도 책임을 물으실 겁니다. 우리는 그들을 돕기 위해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했습니까?”ACN은 고향으로 돌아가는 각 가정에 작은 선물을 드리고 있습니다. 할렘바 신부님은 이 선물의 의미를 이렇게 설명했습니다. “이들은 어린 올리브 나무를 받아 자신의 집에 심게 됩니다. 올리브는 영원한 평화의 상징입니다. 나무는 뿌리를 깊게 내려야 좋은 열매를 맺습니다. 땅을 깊이 파야 하고, 이웃에게 다가가 화해의 손길을 내밀어야 합니다. 물론 우리는 그들의 폭력 행위를 보며 눈물을 흘립니다. 하지만 우리 마음에서 분노를 뿌리째 뽑아내야 합니다.”피란민 중 24% 귀향, 나머지 76%를 위한 집 필요NRC 도움으로 10월 중순까지 벌써 4739 가정(24%)이 고향으로 돌아갔습니다. 피해 건물 1만 3088채 가운데 현재까지 13%(1738채)가 보수를 마쳤습니다. 현재 보수 중인 건물은 133채입니다. 아직 1만 712채가 남아 있습니다. 이 집을 함께 다시 지읍시다. 한 채씩, 한 채씩 말입니다! cpbc2017.11.21
![[초대 조선교구장 브뤼기에르] (29) 만리장성을 넘다](//cpbc.co.kr/CMS/newspaper/2017/11/rc/702348_1.0_titleImage_1.jpg)
[초대 조선교구장 브뤼기에르] (29) 만리장성을 넘다고조선 땅을 밟다 … 조선에 가까이 더 가까이 브뤼기에르 주교는 1834년 9월 22일 산서대목구청을 떠나 일주일 만인 9월 29일 만리장성의 외벽에 도착했다. 제2대 조선대목구장 앵베르 주교의 여행 일정과 딱 맞다. 앵베르 주교 역시 산서대목구청에서 태원까지 하루 반나절, 태원에서 만리장성 남쪽 성벽까지 닷새가 걸렸다. 만리장성 남쪽 성벽 입구가 바로 대주(代州)이다. 지금은 대현(代縣)이라 하는 이곳의 시내 주막에서 관문 관원에게 미리 통행증을 얻은 후 만리장성 남쪽 산기슭에 있는 안문관(雁門關)과 산 정상, 그리고 성벽 북쪽 산 밑에 있는 광무(廣武) 등 세 관문을 거쳐야만 대동부(大同府)로 갈 수 있다. “제법 높았지만, 사람들이 내게 겁을 준 위험들은 하나도 나타나지 않은 산을 하나 오른 다음에, 우리는 만리장성의 외벽을 만났다. 그것은 대형 중국 지도에서 볼 수 있는 지선들로 만리장성 남쪽에 표시된 구불구불한 선이다. 이곳은 밑에서부터 보았을 때 단지 큰 구릉에 지나지 않는다. 여러 곳이 구멍 나고 무너져 있지만, 예전에는 사방이 모두 벽돌로 덮여 있었다. 오늘날에는 이 벽돌들이 떨어져 나갔다. 이제 이곳 큰 구릉까지 닿아 있는 산들의 협곡에는 흙만 남아 있다. 여기에는 몇 개의 세관 초소가 있다. 이것은 밀수를 막기 위해서라기보다는 오히려 여행객들의 금품을 강탈하기 위해 세워졌다고들 말한다. 가벼운 언쟁이 있었다. 한쪽 사람들은 충분히 주지 않으려 하고, 다른 쪽 사람은 지나치게 요구했기 때문이다. 이내 우리는 타협점을 찾았고 여정을 계속했다.”(브뤼기에르 주교 「여행기」에서)만리장성 관문을 차례대로 브뤼기에르 주교가 첫 번째로 만난 만리장성 관문은 바로 안문관이었다. 기러기가 지나가는 길이라는 뜻의 안문관은 험한 산세를 자랑하는 해발 1700m의 깊은 산 속에 자리하고 있다. 중국 고대 춘추시대 때 북방 민족의 침략을 막기 위해 지어진 안문관은 “안문을 얻으면 천하를 얻고, 안문을 잃으면 중원을 잃는다”는 말이 있을 만큼 최후의 방위선으로 전략적 요충지였다. 중국인들은 만리장성 동쪽 끝인 산해관을 ‘천하제일관’(天下第一關)이라 했고, 고비 사막 한가운데에 있는 만리장성 서쪽 관문인 가욕관을 ‘천하웅관’(天下雄關)이라 부르며, 안문관을 ‘중화제일관’(中華第一關)이라 했다. 안문관은 또한 서역대상의 주요 교통로였다. 대상들의 무거운 짐수레가 바위를 닳게 해 바퀴 길을 낼 정도였다. 그래서 관문을 지키는 병사들은 짐수레의 크기와 수에 따라 상인들로부터 뇌물을 챙겼다. 관병들이 얼마나 뇌물 챙기기에 바빴으면 브뤼기에르 주교는 안문관 통과 때 “나라는 존재는 전혀 문제가 되지 않았다”고 했다.안문관을 무사히 통과한 브뤼기에르 주교 일행은 왜웨라는 하급 관리가 지키는 산꼭대기 관문을 지난 후 북쪽 마지막 관문인 광무로 향했다. 안문관에서 광무까지 만리장성은 토성이다. 지금도 끊어지고 무너진 토성의 흔적들이 여기저기 남아 있다. 광무 고성은 산서성 산양현 남쪽 40㎞ 지점에 있다. 이곳은 한나라 당시 흉노와 동이가 서로 땅을 차지하려고 치열하게 싸우던 지역이다. 고조선과 흉노가 서로 다투다가 한 무제가 이곳을 점령했고, 고구려가 강해지면서 고구려 땅이 되었다가 나중에 발해 요에 넘어갔다고 학자들은 설명한다. 광무 고성은 돌로 쌓은 입구 벽을 보면 마치 명나라 시대 옹성처럼 보이지만 ‘고구려성’이라고 한다. 고구려성의 특징인 ‘치’(雉)가 군데군데 확연하게 설치돼 있다. 치는 성벽 일부를 앞으로 나오게 쌓아 성벽에 접근한 적을 정면과 좌우 측면에서 쉽게 공격할 수 있도록 한 시설물을 말한다. 학자들은 또한 광무 고성이 고구려성인 증거로 휘어진 입구를 제시한다. 한족들은 성문을 일(一)자 형태로 만들지 절대로 휘어지게 하지 않기 때문이다. 현재 고성이 있는 마을은 개발로 폐가가 많았다. 젊은이들은 도시로 떠나고 나이 든 이들만 양과 염소를 방목하고 옥수수 농사를 지으며 생활하고 있었다. 산서성 정부에서 광무 고성을 관광지로 개발한다니 이 도심의 풍광도 조만간 흔적도 없이 사라질 것이다. 고조선 땅인지도 모르고 광무 현지에서 브뤼기에르 주교가 고조선 땅을 밟고 고구려성을 넘었다는 사실을 처음 알았다. 답사를 떠나기 전 이 지역이 고조선과 고구려, 발해의 땅이라는 건 알았지만, 현지에서 느끼는 감정은 그 이상이었다. 브뤼기에르 주교의 「여행기」를 보면 정작 그는 자신이 밟고 있는 땅이 그렇게 만나고 싶어 한 우리 민족의 삶 터였다는 사실을 전혀 모르고 있었다. 다만 만리장성에 감탄해 진나라 시황제를 비롯한 중국 연대기만 장황하게 적고 있다. “그들의 제국이 설립된 것은 약 4000년, 다시 말해서 70인역 성경의 연대기를 채택한다면 대홍수 훨씬 이전으로 그리고 히브리어 텍스트와 불가타 성경의 연대기를 따른다면 노아가 신아르 평야로 내려간 얼마 후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브뤼기에르 주교 「여행기」에서)브뤼기에르 주교는 광무를 빠져나가면서 관리들에게 대주에서 받았던 만리장성 통행증을 반환했다. 주교 일행은 성에서 약 8㎞ 떨어진 곳까지 더 가서 숙박했다. 광무에서 잠을 자는 것은 신분을 들킬 위험이 컸기 때문이다. 이후 브뤼기에르 주교 일행은 3일을 더 걸어 산서성의 마지막 관문인 대동에 도착했다. 글·사진=리길재 기자 teotokos@cpbc.co.kr cpbc2017.11.21

미사 때 향은 왜 피우나요?[교회상식 교리상식] 하느님께 바치는 공경과 기도의 표시문:지난 부활대축일 미사 때 분향하는 것을 봤는데 어떤 의미가 있나요? 답:"주님께 올리는 기도 분향 같게 하옵시고, 쳐든 손 저녁 제사같게 하시옵소서." 미사 봉헌 때 자주 부르는 가톨릭성가(510)의 첫 소절인데, 구약성경 시편(141,2)을 인용한 것입니다. 이 시편 구절은 분향의 의미를 잘 드러내고 있습니다. 향을 피우면 향기로운 연기가 무럭무럭 피어오르듯이 주님께서 우리 기도를 어여쁘게 받아주시기를 바라는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분향에 대해서 좀 더 알아봅니다. ▶역사적 배경 구약성경에 보면 이스라엘 백성은 하느님께 제물을 태워 봉헌할 때 향가루도 함께 태웠으며, 이와 별도로 분향 제단을 따로 만들어 아침마다 하느님께 향을 피워올리기도 했습니다. 또 분향 제단이 있는 곳은 지극히 거룩하신 하느님이 계시는 곳을 상징하는 지성소였습니다(탈출 30장 참조). 그래서 분향은 하느님께 바치는 기도와 희생, 공경의 표시이자 거룩함의 표시이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고대 세계에서는 이교도들이 제식(際式)을 바칠 때 향을 사용했습니다. 로마인들은 황제를 신처럼 여겨 황제에게 분향을 했지요. 그래서 초기 그리스도 교회에서는 분향을 우상숭배에 사용되는 예식으로 여겨 오히려 배격했습니다. 박해 시대에 박해자들은 이를 이용해서 그리스도교 신자들에게 황제에 대한 충성심을 시험하고자 황제 상 앞에서 분향을 강요했다고 합니다. 당시 신자들은 이 강요에 못이겨 분향한 이들을 배교자로 여겼습니다. 그리스도교에 대한 박해가 끝나고 신앙의 자유를 얻게 되면서 교회 전례에 분향이 도입되기 시작했습니다. 제일 먼저 장례식 때에 향이 사용됐고, 그 이후 미사 시작 때 제단에 분향하는 예절이 도입됐습니다. 또 교황에게도 분향을 했는데 이는 그리스도의 대리자인 교황이 세속 황제 이상 공경을 받아야 한다고 여긴 데서 비롯됐다고 합니다. 11세기 쯤에는 미사 봉헌 때도 분향하는 예절이 도입됐고, 이후에 성직자와 신자들 그리고 성당 봉헌식 등에로 분향이 확대됐습니다. ▶분향의 의미 분향은 부활대축일 같은 큰 축일뿐 아니라 어느 미사 때에나 할 수 있습니다. 또 성체강복 때와 성당 봉헌 때에 그리고 장례 예식 때에도 분향을 하는데 그 기본적 의미는 공경과 기도, 거룩함으로 요약됩니다. 성당 봉헌식에서 향을 피우는 것은 성당이 하느님께 봉헌된 거룩한 곳임을 뜻합니다. 장례 예식 때에 시신에 향을 피우는데 이는 세례성사로써 고인의 몸이 성령의 궁전으로 거룩하게 봉헌된 것에 대한 공경을 나타냅니다. 미사에서는 여러 때에 분향을 합니다. 우선 입당 행렬 때나 퇴장 때에도 분향을 할 수 있는데 이는 공동체 전체를 축복하고 거룩하게 한다는 표시입니다. 미사를 시작할 때 십자가와 제대에 향을 피우는 것은 그리스도를 상징하는 제대와 십자가에 대한 공경의 표시입니다. 복음을 선포할 때 복음서에 분향하는 것도 같은 의미입니다. 봉헌 때는 제대 위에 놓인 예물과 제대에 분향하는데, 이것은 앞에서 이야기한 "주님께 올리는 기도 분향같게 하옵시고"라는 시편 성가의 의미를 그대로 담고 있습니다. 또 이때에 사제와 신자들에게도 분향을 합니다. 이는 신자들이 하느님의 자녀로서 거룩하게 된 신분임을 일깨우는 것입니다. 사제가 빵과 포도주를 축성한 후 높이 들어올릴 때에 하는 분향은 말할 것도 없이 공경과 흠숭의 표현이지요. 이밖에 성체강복 때에 성체를 높이 들어 현시할 때에도 마찬가지로 성체로 현존하시는 그리스도께 대한 공경과 흠숭의 표시로 분향을 합니다. ▨한 가지 더 향이 탈 때는 향 연기가 피어오르면서 향긋한 냄새를 퍼뜨립니다. 이 향기는 사람들의 마음을 감미롭게 합니다. 제단에서 향을 피울 때 우리는 하느님을 공경하며 우리 자신을 바쳐 하느님께 봉헌할 뿐 아니라 우리 이웃에게도 사랑의 향기를 풍길 것을 다짐합시다. "우리는 하느님께 피어오르는 그리스도의 향기입니다"(2코린 2,15). 이창훈 기자 changhl@cpbc.co.kr김지항2017.09.29
![[허규 신부와 떠나는 신약 여행] (91) “우리가 그 생명을 보고 증언합니다”(1요한 1,2)](//cpbc.co.kr/CMS/newspaper/2018/03/rc/714847_1.0_titleImage_1.jpg)
[허규 신부와 떠나는 신약 여행] (91) “우리가 그 생명을 보고 증언합니다”(1요한 1,2)하느님의 사람으로서 사랑의 계명 지켜야 요한 서간은 하느님의 사랑과 그 증표로 계명을 지킬 것을 강조하고 있다. 그림은 십계명이 새겨진 돌판을 모세에게 주시는 하느님 모습을 담은 율리우스 카폴스펠트 작 ‘십계명’. 출처=「아름다운 성경」 요한계 문헌 요한 서간은 가톨릭 서간에 속하면서 전통적으로 요한계 문헌으로 구분되는 편지입니다. 세 편의 편지로 전해지는 요한 서간은 시간의 큰 차이 없이 2세기 초반에, 곧 100~110년 즈음에 기록되었을 것으로 생각합니다. 요한 서간은 요한 복음과 동일한 저자가 기록했다는 것에 큰 이견은 없습니다. 현대에 많이 표현하는 ‘요한 공동체’가 복음뿐 아니라 요한 서간의 저자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요한의 첫째 서간은 요한복음과 비슷하게 찬가의 형태로 된 증언과 함께 이 서간을 기록한 목적을 밝히는 것으로 시작합니다. 요한의 첫째 서간 1장 1-4절에서 증언하는 내용은 예수 그리스도의 ‘강생 신비’입니다. 하느님 아버지와 함께 있던 “생명의 말씀”이 우리에게 나타났고 “우리”는 그것을 감각적으로 체험할 수 있었다는 것을 강조하는 내용입니다. 여기서 ‘강생’이라는 표현을 사용하진 않지만, 사람으로 세상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표현합니다. 내용적으로 요한복음의 서문(요한 1,1-18)과 거의 동일합니다. 이와 함께, 예수 그리스도의 선포와 함께 요한 서간의 목적은 “친교”라고 표현됩니다. 이 편지를 읽는 이들 역시 서간을 기록한 “우리”와 그리스도 안에서 친교를 이루고 그것을 통해 기쁨이 충만해지도록 하는 것을 목표로 삼습니다. 계명과 하느님 사랑의 완성 “우리가 하느님의 계명을 지키면, 그것으로 우리가 그분을 알고 있음을 알게 됩니다.”(1요한 2,3) 하느님과의 관계 안에서 가장 먼저 강조하는 것은 “계명을 지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계명을 지키는 사람 안에서는 “하느님의 사랑이 완성”된다고 표현합니다. 요한 서간에서 사랑과 계명은 서로 떼어놓을 수 없는 것입니다.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은 바로 그분의 계명을 지키는 것입니다.”(1요한 5,3) 여기서 말하는 계명은 이미 예수님을 통해 우리에게 알려진 것처럼 ‘사랑의 계명’입니다. 그리고 이 사랑의 계명은 우리에게 의무로 주어진 것만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업적을 통해 하느님께서 먼저 보여주신 사랑입니다. “아버지께서 우리에게 얼마나 큰 사랑을 주시어 우리가 하느님의 자녀라고 불리게 되었는지 생각해 보십시오. 과연 우리는 그분의 자녀입니다.”(1요한 3,1) 또 이렇게 언급합니다. “그 사랑은 이렇습니다. 우리가 하느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라, 그분께서 우리를 사랑하시어 당신의 아드님을 우리 죄를 위한 속죄 제물로 보내 주신 것입니다.” 그렇기에 사랑하는 것은 믿음을 통해 가능한 것이고 하느님의 뜻을, 계명을 따르는 것입니다. 이처럼 요한 서간은 예수님을 통해 우리에게 주어진 구원을 하느님 사랑의 구체적인 표현으로 이해합니다. 요한 서간에서 하느님은 사랑 그 자체로 표현되기도 합니다. “하느님은 사랑이십니다. 사랑 안에 머무르는 사람은 하느님 안에 머무르고 하느님께서도 그 사람 안에 머무르십니다.”(1요한 4,16) 이 표현은 마치 사랑을 통해서만 하느님을 알게 되고, 사랑을 통해서만 믿음 안에 머물 수 있다는 것처럼 들립니다. 그리고 이것이 예수님을 통해 하느님과 맺게 되는 친교입니다. 이 친교 안에 머무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을 얻습니다. 하느님 향한 사랑과 세상에 대한 사랑이제 신앙인들은 하느님의 계명을 지키며, 사랑의 계명을 실천하며 살아가는 이들로 소개됩니다. 여기서 하느님을 향한 사랑과 반대되는 것은 세상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세상에 있는 모든 것, 곧 육의 욕망과 눈의 욕망과 살림살이에 대한 자만”은 하느님에게서 오는 것이 아니기에 이것들을 사랑하지 말라고 권고합니다. “여러분은 세상도 또 세상 안에 있는 것들도 사랑하지 마십시오. 누가 세상을 사랑하면, 그 사람 안에는 하느님의 사랑이 없습니다.”(1요한 2,15) 요한 서간은 이렇듯 하느님의 우선적인 사랑과 신앙인들의 하느님을 향한 사랑을 하나의 큰 주제로 삼습니다. 여기서 구체적인 사랑의 모습으로 표현되는 것은 계명을 지키는 것입니다. 이런 신앙인들은 자신의 믿음과 공동체 안에서 드러나는 실천의 모습이 같은, 거짓말쟁이가 아닌 사람들입니다. 요한 서간이 거짓말쟁이라는 표현을 사용하는 것에는 이유가 있습니다. 공동체 안에 거짓을 말하고 행하는, 하느님을 믿는다고 말하지만 사랑의 계명을 실천하지 않는 이들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가톨릭대 신학대학 성서학 교수> 평화신문2018.03.21
![[성경 속 기도] (5) 모세의 기도](//cpbc.co.kr/CMS/newspaper/2016/03/rc/623476_1.0_titleImage_1.jpg)
[성경 속 기도] (5) 모세의 기도하느님 심판에서 이스라엘을 살린 기도 베카푸미 작 ‘모세와 황금송아지’, 1536~37년, 피사 두오모 성당, 이탈리아. 출처=「명화로 만나는 성경 모세는 이스라엘 역사상 가장 위대한 종교 지도자이며 이집트에서 이스라엘 백성을 탈출시킨 민족의 영웅이다. 그는 신앙적으로도 이스라엘 백성들의 귀감이 된다. 모세는 기도 없이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고 문제가 발생하면 기도로써 하느님의 뜻을 물었다. 모세의 모습에서 기도하는 인간의 모습이 잘 드러난다. 태어난 지 석 달 만에 왕골 상자 안에 뉘어 강가 갈대 사이에 놓여 있던 모세는 구사일생으로 살아나 파라오 딸의 아들로 입양돼 살게 되었다(탈출 2,1-10). 모세가 자란 뒤 어느 날, 이집트 사람 하나가 자기 동포 히브리 사람을 폭행하는 것을 보고 격분한 그는 그만 이집트인을 때려죽인다. 그리고 모세는 광야로 도망을 치는데 이 우연한 사건이 모세의 일생을 뒤바꿔 버렸다. 패배감과 좌절감에 빠져 광야에서 무기력하게 살고 있는 모세를 하느님께서 부르셨다. 모세는 하느님의 부르심에 자신은 언변이 없다고 고사한다. 하느님께서 기적과 함께 언변이 뛰어난 형 아론을 보내겠다고 약속하셨다(탈출 4,1-17). 이때부터 모세는 하느님을 신뢰하기 시작했고 동시에 백성을 위해 기도하는 사람으로 변화한다.모세는 지도자로서 하느님과 이스라엘 백성을 중재하는 기도를 청한다. 모세의 삶에서 여러 번 백성을 위해 기도하는 장면이 나온다. 이스라엘과 아말렉의 전투에서 두 손을 들고 기도하는 모세의 모습은 무척 인상적이다(탈출 17,8-13). 이집트를 탈출해 광야로 나간 이스라엘 백성들이 모세와 아론에게 불평을 터뜨리고 다시 이집트로 돌아가겠다며 소란을 일으키며 하느님께 불충하자 모세는 여러 번 하느님께 이스라엘의 잘못에 대해 용서를 청하는 기도를 드린다. “그러니 주님, 당신께서 말씀하신 대로, 제발 당신의 힘을 크게 펼치시기 바랍니다. ‘주님은 분노에 더디고 자애가 충만하며 죄악과 악행을 용서한다. 그러나 벌하지 않은 채 내버려 두지 않고 조상들의 죄악을 아들을 거쳐 삼 대 사 대까지 까지 벌한다’ 하셨으니, 이집트에서 여기에 올 때까지 이 백성을 용서하셨듯이, 이제 당신의 그 크신 자애에 따라 이 백성의 죄악을 용서하여 주십시오”(민수 14,17-19). 그뿐만 아니라 모세가 십계명을 받기 위해 시나이 산에 올라가 오랫동안 소식이 없자 이스라엘 백성들은 아론을 부추겨 금송아지를 만들어 우상으로 섬겼다(탈출 32,3-4). 하느님께서는 이를 보시며 이스라엘을 완전히 멸망시키고 모세를 통해 새로운 민족을 만드시겠다고 하셨다. 그러나 모세는 생명을 걸고 하느님께 기도를 드렸다. “어찌하여 이집트인들이, ‘그가 이스라엘 자손들을 해치려고 이끌어 내서는, 산에서 죽여 땅에 하나도 남지 않게 해 버렸구나’ 하고 말하게 하시렵니까? 타오르는 진노를 푸시고 당신 백성에게 내리시려던 재앙을 거두어 주십시오”(탈출 32,12). 모세의 절실한 기도에 하느님께서는 늘 응답하셨다(탈출 33,13-14).모세의 기도를 통해 역사 안에서 하느님의 구원 행위가 이뤄짐을 볼 수 있다. 특히 이스라엘 백성은 모세의 삶을 기억함으로써 용서하시는 하느님의 사랑을 깨닫게 된다. 모세는 늘 이스라엘이 다시 하느님의 충실한 백성이 되기를 기도했다. 지도자는 모세처럼 하느님과 이스라엘 백성 사이를 이어주는 다리의 역할을 하는 존재이다. 모세는 백성들의 구원을 위해 늘 기도했다. 모세의 중재기도가 이스라엘 백성들을 하느님의 심판에서 살렸다. 지도자는 무엇보다 자신이 책임진 사람들을 위해 기도하는 것이 중요하다. 허영엽 신부(서울대교구 홍보국장) 평화신문2016.03.08

원칙 강조한 ‘세계 최고의 신학자’베네딕토 16세 교황의 저서 모음 그리스도 신앙 베네딕토 16세 전임 교황은 원칙을 강조하는 신학자로, 그에게는 ‘세계 최고의 신학자’, ‘정통 교리의 수호자’, ‘원칙주의자’라는 수식어가 늘 따라붙었다. 낙태ㆍ동성애ㆍ인간복제ㆍ이혼 등 사회문제부터 여성 사제 임명ㆍ사제 독신주의 철폐와 같은 기존 교회 윤리에 반하는 주장에는 단호했다. 그가 펴낸 저서들은 그리스도교 본질을 이루는 신학과 다양한 교회 입장을 두루 드러내고 있다.그가 독일 튀빙겐대학 교의신학 교수 시절인 1968년 펴낸 「그리스도 신앙 어제와 오늘」은 그리스도교 신앙 고백의 요체인 사도신경을 바탕으로 그리스도 신앙의 내용과 의미를 풀어낸 책이다. 현대에 들어 가톨릭 교회의 쇄신 노력에도 불구하고 그리스도교 신앙이 과거로 돌아가고 있다는 여론에 대응해 내놓은 이 책은 그리스도교 신앙의 본질을 명쾌하게 해석해 주고 있다.교황은 추기경 시절 「가톨릭 교회 교리서란 어떤 책인가」를 통해 「가톨릭 교회 교리서」에 대한 올바른 이해를 돕는다. 교부 시대 다양한 교리서와 신앙의 전승, 원천을 두루 고찰할 수 있다.「나자렛 예수」에서 교황은 예수의 참모습을 신학ㆍ역사적으로 재해석했다. 성경과 역사적 배경 속 예수의 실체를 찾고, 4대 복음서를 꼼꼼히 분석한 뒤 성경 구절을 인용해 ‘나자렛 예수는 누구인가?’, ‘예수에 대한 믿음은 무엇을 의미하는가?’에 대한 물음을 명확히 해준다.페터 제발트는 「이땅의 소금」과 「하느님과 세상」이라는 두 대담집을 통해 라칭거 추기경의 신학적 식견들을 전한다. 라칭거 추기경은 「이땅의 소금」은 교회를 비판하는 쟁점들, 무류성, 교의 등 교회 민감한 문제에 대한 해답을 제시했고, 「하느님과 세상」을 통해선 ‘기적의 의미’, ‘자선’, ‘묵주기도를 바치는 방법’ 등 다양한 신앙 궁금증을 해소해 준다. 이정훈 기자 sjunder@cpbc.co.kr무류성=가톨릭 교회가 하느님의 말씀을 가르칠 때 그르침이 없다는 말이다(마태 16,18 참조) 교황이 모든 그리스도인의 최고 목자이며 스승으로서 신앙과 도덕에 관한 교리를 선언할 때, 그리고 주교단이 교황과 더불어 최상 교도권을 특별히 세계 공의회에서 행사할 때 무류성을 갖는다.(「교회 헌장」 25항 참조) 김지항2017.06.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