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창훈 기자의 예수님 이야기] (38) 일흔두 제자의 파견과 회개하지 않는 고을(루카 10,1-16)](//cpbc.co.kr/CMS/newspaper/2017/11/rc/701068_1.1_titleImage_1.jpg)
[이창훈 기자의 예수님 이야기] (38) 일흔두 제자의 파견과 회개하지 않는 고을(루카 10,1-16) 빈 손으로 하느님 나라 선포하러 떠난 일흔두 제자 예수님께서는 일흔두 제자를 파견하며 파견지에서 해야 할 일을 알려 주십니다.(루카 10,1-12) 이렇게 제자들을 파견한 후에는 회개하지 않는 고을들을 꾸짖으십니다.(10,13-16) 차례로 살펴봅니다. 일흔두 제자의 파견(10,1-12) 루카는 예수님께서 일흔두 제자를 지명해 파견하시는 이야기를 “그 뒤에”라는 말로 시작합니다. 여기서 ‘그 뒤에’란 바로 앞에 나오는 내용, 곧 ‘예수님께서 당신을 따르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와 관련해서 말씀하신 뒤에’를 가리킵니다. 따라서 지난 호에 살펴본 내용을 간단히 다시 정리할 필요가 있습니다. 요약하면 예수님을 따르려면 “머리 기댈 곳조차 없는” 처지를 감내해야 하고, “나를 따라라”는 부름을 받은 즉시 지체없이 따라야 하며, 예수님을 따르겠다고 결단을 내렸으면 자꾸만 옆길로 새거나 지난 일을 돌아봐서는 안 된다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은 말하자면,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들의 기본자세입니다. 이렇게 제자들이 지녀야 할 기본자세를 먼저 제시한 후에 루카는 파견되는 제자들의 구체적인 처신에 관한 예수님의 당부 말씀을 전합니다. 우선 파견되는 제자는 일흔두 명입니다. ‘일흔둘’이라는 숫자는 전 세계 모든 민족을 상징적으로 나타내는 표현이라고 해석하기도 합니다. 즉 예수님께서 일흔두 제자를 뽑으셨다는 것은 전 세계 곳곳에 복음이 선포 되도록 하는 것의 예형(豫形)이라는 것입니다.(「주석 성경」)복음 선포의 사명을 받고 파견되는 제자들은 어떻게 해야 하는가? 먼저 기도하는 것, 곧 ‘수확할 것은 많은데 일꾼이 적으니 수확할 밭의 주인께 추수의 일꾼들을 보내 주십사고 청하는 것’(10,2)입니다. 그다음에는 돈주머니도 여행 보따리도 신발도 지니지 말고 길에서 아무에게도 인사하지 않은 것입니다.(10,3) 돈주머니와 여행 보따리와 신발은 여행하는 사람의 필수 지참물인데도 지니지 말라고 하시는 까닭은 제자들의 목적이 여행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라 복음 선포에 있으며 복음 선포가 그만큼 시급하다는 것을 나타냅니다. “수확할 것은 많은데 일꾼은 적다”는 말씀과 맥을 같이한다고 할 수 있겠지요. 길에서 인사하지 말라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근동에서는 인사가 대단히 길었기 때문에 시간을 지체하지 말라는 것이지요. 예수님의 이런 말씀은 “가거라. 나는 이제 양들을 이리 떼 가운데로 보내는 것처럼 너희를 보낸다”(10,3)는 말씀과 결부시켜 해석하면 의미가 훨씬 확장됩니다. 제자들이 파견되는 곳은 바로 예수님께서 몸소 가시려는 고장과 마을들입니다. 예루살렘으로 향하는 동안 예수님은 이미 사람들에게 냉대를 받으셨고(9,53), 머리 기댈 곳조차 없는(9,58) 처량한 신세입니다. 주님이요 스승이신 예수님의 사정이 이러할진대 그 제자들이야 오죽하겠습니까? 그러니 제자들을 보내는 예수님 마음은 양들을 이리 떼 가운데로 보내는 것과 같은 마음일 것입니다. 이렇게 파견되는 제자들은 어느 집에 들어가든지 먼저 평화를 빌어 주고, 이집 저집으로 옮겨 다니지 말고 한 집에 머물러 있어야 합니다.(10,6-7) 이집 저집으로 옮겨다는 것은 더 나은 접대를 받으려고 찾아다니지 말고 사명 수행에만 전념하라는 말씀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주석 성경」) 제자들은 또 어느 고을에 들어가든지 자신들을 받아들여 주면 차려 주는 음식을 먹고 병자들을 고쳐 주며 하느님 나라가 가까이 왔다고 선포해야 합니다. 그러나 받아들여 주지 않으면 한길에 나가 “여러분의 고을에서 우리 발에 묻은 먼지까지 여러분에게 털어 버리고 갑니다. 그러나 이것만은 알아 두십시오. 하느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습니다”라고 말해야 합니다.(10,8-11) 발에 묻은 먼지를 털어 버린다는 것은 절연한다는 표시입니다. 그런 고을은 하느님 나라가 다가오는 그 날이 되면 유황불에 멸망하고만 소돔보다 더 못한 처지가 될 것이라고 예수님은 경고하십니다.(10,12) 그렇다면 하느님 나라는 그 나라를 받아들이는 사람에게는 구원의 기쁨이 되겠지만 거부하는 이들에게는 파멸의 근원이 될 것입니다. 회개하지 않는 고을들(10,13-16)이렇게 제자들을 파견하신 예수님께서는 이제 회개하지 않는 고을들을 두고 탄식하십니다.(10,13-15) 그 고을들은 코라진, 벳사이다, 그리고 카파르나움입니다. 세 고을은 모두 갈릴래아 호수 북쪽에 있습니다. 벳사이다는 사도들인 베드로와 그의 동생 안드레아 그리고 필립보의 고향이고 예수님께서 활동하신 곳입니다. 카파르나움은 시몬의 장모 집이 있던 곳이자 후대에 예수님의 도시라고 불릴 정도로 예수님의 활동 중심지였습니다. 하지만 코라진은 신구약 성경 전체를 통틀어 딱 두 군데, 루카복음의 이 대목과 이에 상응하는 마태오복음 11장 21절에만 나옵니다. 그런데 “너희에게 일어난 기적들이 티로와 시돈에서 일어났더라면 그들은 벌써 자루옷을 입고 재를 뒤집어쓰고 앉아 회개하였을 것이다”(10,13)는 예수님의 말씀으로 보아 예수님께서는 벳사이다에서뿐 아니라 코라진에서도 하느님 나라가 왔음을 보여 주는 여러 기적을 행하셨음이 분명합니다. 티로와 시돈은 갈릴래아의 북서쪽으로 지중해를 끼고 있는 이방인 지역 시리아 페니키아에 있는 해안 도시들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코라진과 벳사이다에 대해서는 “불행하여라!” 하고 탄식하시지만(15,13), 카파르나움에 대해서는 탄식을 넘어 저주하는 것처럼 심하게 나무라십니다. “네가 하늘까지 오를 성싶으냐? 저승까지 떨어질 것이다.”(10,15)세 고을에 대한 탄식 혹은 심한 나무람에 이어 예수님께서는 바로 제자들에게 말씀하십니다. “너희 말을 듣는 이는 내 말을 듣는 사람이고 너희를 물리치는 자는 나를 물리치는 사람이며, 나를 물리치는 자는 나를 보내신 분을 물리치는 사람이다.”(10,16) 이 말씀이 뜻하는 의미는 무엇일까요? 예수님에 앞서 파견되는 제자들이 수행하는 사명은 단순히 예수님을 준비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하시는 사명을 그대로 이행하는 사람이라는 것이 아닐까요? 그렇다면 이 말씀은 예수님 시대에만 적용되는 것이 아니라 오늘에도 마찬가지로 적용되는 말씀이라고 여길 수 있을 것입니다. 곧 예수님께서 선포하신 하느님 나라의 복음을 선포하는 이들은 바로 예수님의 일을 하는 것이며, 그래서 그들을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은 예수님을 받아들이지 않은 것이고 따라서 예수님을 보내신 분 곧 하느님을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그런 이들은 예수님께서 탄식하시며 몹시 나무라신 세 고을과 같은 운명에 처할 것입니다. 문채현2017.11.09
![[가톨릭, 리더를 만나다] (23) 배우리(프란치스코) ‘이름사랑’ 대표](//cpbc.co.kr/CMS/newspaper/2017/10/rc/697954_1.0_titleImage_1.jpg)
[가톨릭, 리더를 만나다] (23) 배우리(프란치스코) ‘이름사랑’ 대표우리말의 아름다움 담는 작명의 연금술사 한글날을 맞아 우리말에 아름다움을 담고 있는 국어학자를 만났다. 여든의 나이에도 스스로 최고라는 자신감이 인터뷰를 관통했다. 하느님을 섬기듯 우리말을 섬기는 그의 공부와 연구는 지금도 치열하고 치밀했다. 작명 전문업체 ‘이름사랑’ 대표인 한국땅이름학회 배우리(프란치스코) 명예회장이다. 하느님께서 아드님의 이름을 ‘예수’라고 지어 주셨듯이 신앙인으로 그는 한글 이름에 부모의 사랑과 소망을 담는다. 우리 땅 이름을 찾기 위해 전국의 산하를 누비다 간첩으로 오인되기도 했다. ‘거기에 머물러 네가 할 일을 하라’는 하느님의 소명을 받들기 위해 좌절과 아픔에도 자신을 스스로 단련시키며 오직 한글 연구의 한 길을 걸었다. 사라진 ‘한글 이름 찾기’를 통해 그는 어떻게 하느님의 사랑을 실현하고 잃어버린 역사를 찾아 바로 세울까? 죽는 날까지 마음과 목숨과 정성을 다하고 싶다는 그의 마지막 꿈과 소망을 들여다본다. 서종빈 기자 binseo@cpbc.co.kr▶‘이름사랑’을 운영하신 지 오래되셨죠. 45년 정도 됐습니다. 이런 말을 하면 좀 민망합니다만 하도 오래 하다 보니 많이 알려졌고 인기도 조금 있는 것 같습니다. 이름에 관한 한 저는 자신 있습니다. 자신이 없으면 지금 같은 경쟁시대에 살아남을 수도 없습니다. 살아남기 위해 지금도 연구하고 있는데요, 우리 말 자체를 전부 찾으려고 하는 것은 아닙니다. 말 자체는 그냥 재료입니다. 한 가지 재료를 가지고 여러 가지 음식을 만들 듯 낱말 하나를 가지고 여러 가지 이름으로 분화시켜 만들어 낼 수 있습니다. 오로지 단어만 가지고는 이름을 만들지 못합니다.▶기억에 남는 이름이나 일화 있으면 소개해 주세요.쌍둥이를 설이, 솔이, 슬이 이렇게 시옷(ㅅ) 발음으로 간 것도 있고요. 성체 분배하러 갔더니 복사하는 아이가 신부님께 “제 이름이 ‘다예’인 것 아시죠” 하면서 “배우리 선생님이 지으셨어요”라고 하는 얘기를 들었습니다. 그때 같이 있던 성체 분배자가 “네 옆에 있는 분이 바로 배우리 선생님이야” 하니까 아이가 깜짝 놀라더라고요. 제가 어디 가다가 ‘배우리’라고 하면 운전기사분들도 놀라시고 사인해 달라는 요청도 많이 받았습니다. 1981년 1월 본당 사목위원들과 서울대교구장 김수환 추기경을 예방한 배우리 대표(오른쪽 하단 두번째). ▶시대에 따라 선호하는 이름이 다르지 않나요.옛날에는 순이, 경이, 영이 즉 ‘순ㆍ경ㆍ영’이 많았잖아요. 심지어 어머니들 이름 보면 막례, 막순 이런 이름도 있었고요. 그런데 요즘 이름은 소리에 중심을 둡니다. 민, 빈 등 ‘니은(ㄴ) ‘이 많이 들어가고 부모들은 ‘리을(ㄹ)’로 끝나는 지율, 서율, 은율 등을 좋아합니다. 또 개음절이라고 해서 굴러가는 소리가 나니까 슬, 설 등 ‘끝 음’에 신경을 많이 쓰는 경향을 보입니다.▶세계화에 따라 한글 이름에 한자를 붙이거나 영어 이름까지 짓는 경우가 많은데요.세례명에 맞춰 이름을 짓는 경우도 많습니다. 세례명인 ‘리나’는 한글 이름으로도 예쁘잖아요. 제가 지은 이름 중에 ‘바로’라는 아이가 있는데 세례명이 ‘바오로’입니다. 연상이 되잖아요. 우리 이름과 천주교 세례명과의 연관성을 생각해 이름을 짓는 경우도 많습니다. ▶태명(胎名) 열풍이 불고 있는데요, 어떻게 하면 좋은 태명을 지을 수 있을까요.태중에 있을 때 짓는 일시적인 이름이니까 아기가 잘되기를 바라는 기원과 기도를 담는 거예요. 그래서 태명 중에 가장 많이 나오는 이름이 ‘사랑’이라고 하는데 그럴 수밖에 없죠. 별자리로 짓는 태명을 생각해 봐도 좋고요. 부부가 좋아하는 단어를 쭉 써 보면 한 백여 개가 나올 수 있는데 하나씩 지워 가다 보면 마지막에 남은 것을 태명으로 정하면 됩니다. 단번에 생각해서 이름을 정하는 것은 의미가 없습니다.▶회장님과 사모님 존함(尊銜)도 모두 한글이시죠.제 이름은 한글학회 사람들과 의논해서 지었습니다. 성과 맞춰보니까 ‘배운다’는 뜻이거든요. ‘끊임없이 평생 배우리….’ 그래서 제가 지금도 공부하고 있지 않습니까. ‘배우리’라는 이름을 지은 뒤부터 더 많이 배우게 됐어요. 제 아내의 이름은 ‘이솔마을’인데요. 저와 함께 개명 신청을 한 것입니다. 저도 본래 이름은 한자 이름인 ‘배상철’이었거든요. ▶요즘 한글 이름 짓는 분들이 많이 줄어든 것 같은데요.한글 이름이 유행이었을 때 많은 분이 생각을 조금 잘못한 부분이 있습니다. 그냥 낱말을 붙이는 게 한글 이름이 아니거든요. 사전에서 그냥 뽑아서 붙이는 것은 이름을 짓는 게 아녜요. 한글 이름은 낱말과 낱말을 조합해서 다듬는 것입니다. 이름을 어디에서 뽑는다고 생각하니까 한글 이름이 너무 흔해진 거예요. 그런 것은 한글 이름으로서의 의미가 좀 적습니다. 만들고 다듬고 하는 것이 진짜 이름이죠. 이름이라는 것은 하나의 좌우명으로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부모님이 지어준 이름에는 부모님 뜻과 정성이 담겨 있습니다. ▶ 전국의 성지나 성당 이름도 한글 이름이 많습니다.그래서 참 좋아요. 모래내성당, 가재울성당, 새남터성당, 학여울성당 모두 우리말이고 우리 땅 이름이에요. 성당에 옛날 토박이 이름을 붙여 주면 오래가는데 행정구역을 따라가다 보니까, 행정구역이 바뀌면 성당 이름도 바뀔 수가 있어요. 일례로 전통의 거리로 외국 사람들이 많이 찾는 ‘인사동’도 일본인들이 관인방의 ‘인’ 자와 대사당의 ‘사’ 자를 한 자씩 따서 붙인 거예요. 원래 조선 시대 이름은 ‘절골’ 즉 ‘사동’입니다. 옛 이름을 찾아야 그 속에 담긴 잃어버린 전통과 역사를 찾을 수 있습니다. ▶어떤 계기로 한글 이름을 짓기 시작하셨나요.방송과 관계가 있습니다. 50년 전에 방송에 처음 나갔는데 우리말을 주제로 한글날만 되면 번쩍번쩍 나타나는 국어학자였습니다. 매번 방송에 나가게 되니 이야깃거리가 제한되는 거예요. 그래서 우리말 이름 이야기를 시작했습니다. 사람 이름을 시작으로 옷 이름, 꽃 이름, 나비 이름, 바위 이름 등으로 넓히고 땅 이름, 골짜기 이름, 시내 이름, 바위 이름까지 짓게 됐습니다. 들으면 알 만한 몇몇 큰 기업체와 은행, 상품 이름도 제가 한글로 지었습니다.▶회장님이 지으신 이름이 곳곳에 있으니 보람이 많으시겠어요.고마운 일이죠. 하느님께서 내가 너의 능력을 다 쏟아서 먹고 살 만하게 해줄 테니 하라고 명령해 주신 것 같아요. 저는 엄청난 고생을 하면서 여기까지 왔습니다. 어린이 신문의 편집장도 했고 학원에서 국어 강의도 했습니다. 땅 이름을 연구하기 위해 전국을 돌아다녔는데, 군부대나 기지 근처에 들어가서 사진 찍고 외딴곳에서 땅과 산 이름을 물어 보다가 간첩으로 오해받아서 끌려간 적도 한두 번이 아니었습니다. 눈물이 날 정도로 고생했는데 글을 쓰고 방송에 나가면서 경찰들도 알아보게 됐죠. 모두 하느님께서 계획하시고 인도해 주신 거예요. 저를 단련시키지 않고 그런 인도가 없었다면 저는 이 길로 올 수가 없었고 지금의 저는 없었겠죠. ▶어떤 계기로 신앙을 갖게 되셨습니까.아내는 모태 신앙인데 제가 신자가 아니어서 관면 혼인을 하고 일반 예식장에서도 결혼식을 했습니다. 결혼을 두 번 한 셈이죠. 세례는 1966년에 받았습니다. 결혼 전에 아내가 천주교 신자인 게 마음에 들어 제가 청혼을 했지요. 기도하는 아내의 모습이 참 예뻤습니다. 아내가 저를 성당으로 인도했고 지금도 아내와 저녁 기도만큼은 꼭 하고 잡니다.▶신자로서 ‘사주’와 연관 지어 이름을 짓는 전통적인 관례에 비춰 갈등을 겪은 적은 없으신가요.이름을 주술적인 측면과 연결하면 안 됩니다. 다만 전통적인 흐름만 조금 따라 주면 되는 것이죠. 그 이상을 침범하면 안 된다고 봅니다. 신부님 이름도 제가 바꿔줬습니다. 제가 이름 짓기를 하는 영역을 아는 것이죠. 종교적으로도 인정해 주시는 것 같고요. 제가 하는 일이 잘못된 것은 아니라고 저는 알고 있습니다. ▶아직도 해야 할 일이 많으시죠.나이가 있으니까 많은 일은 못 하겠지만 죽는 날까지 움직여야죠. 하느님께 가기 전에 꼭 하고 싶은 일은 사라져 가는 마을과 옛 땅 이름을 오롯이 살리는 것입니다. 마을 이름을 찾아서 표석을 세우고 싶습니다. 더불어 우리 한국 사람들 이름이 모두 한국적이었으면 좋겠습니다. 이름에서부터 우리의 국력을 되찾았으면 하는 바람이고요. 역사 바로 세우기 차원에서라도 옛 이름 찾기 운동을 대대적으로 해볼 생각입니다.▶힘들고 어려울 때 주로 어떤 기도를 바치세요. ‘네 마음을 다하고 네 목숨을 다하고 네 정신을 다 하여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마태 22,37)는 성경 말씀을 늘 기억합니다. 그다음 구절을 보면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고 나오는데 얼마나 좋은 말씀입니까. 그런데 사실 그렇게 하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죠. 그렇게 하려고 하는 노력 자체만으로도 의미가 있다고 봅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성경책의 이름도 ‘성경’이 아닌 ‘사랑’으로 바꿨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해봤습니다. 성경 전체의 줄거리를 보면 그것은 ‘사랑’입니다. 성경의 부제목으로 ‘사랑’을 붙였으면 좋겠어요. ▶지나온 삶을 돌아보시면 특별히 하느님께 감사한 점은 무엇인가요.제가 이사하지 않고 이곳 용산에서만 사는 게 참 행복하다고 생각했는데 하느님께서 주신 은총이라고 봅니다. 이사를 많이 다녔다면, 재산은 불렸을지 모르지만 행복을 불리지는 못했을 것 같은 생각이 듭니다. 재산만 불리면 뭐합니까, 행복을 불려야죠. 행복은 마음에서 찾는 것인데 그 행복을 주신 분이 바로 하느님이시죠. ‘거기에 머물러서 네가 할 일을 해라.’ 이런 소명을 저에게 주신 것 같아요. 저는 죽은 날까지 하느님 말씀을 따르고 싶습니다. 백영민2017.10.11
![[성경 속 기도] (11) 시편의 기도](//cpbc.co.kr/CMS/newspaper/2016/04/rc/630899_1.0_titleImage_1.jpg)
[성경 속 기도] (11) 시편의 기도하느님께 바치는 찬미·감사 기도 150편 시편은 ‘찬미의 글’이라는 뜻이다. 시편은 길이, 형식, 내용이 다른 150편의 시가 수록된 이스라엘 백성의 기도서다. 시편은 반대로 사람이 하느님께 드리는 말씀, 즉 기도로 기록돼 있다. 따라서 살아 계신 하느님을 찾는 인간의 체험을 시편만큼 잘 보여 주는 것은 없다고 할 수 있다. 시편에는 신앙의 영역에서부터 미움과 사랑, 슬픔과 기쁨 등 인간 심리가 솔직하게 드러나 있다. 시편은 시대와 민족을 초월해 영원을 추구하는 모든 사람의 마음속에 용기와 위안을 주는 기도라고 할 수 있다. 이스라엘 공동체의 작품시편도 여러 시대, 여러 사람에 의해 전승된 이스라엘 공동체의 작품이다. 이스라엘 역사 전반에 걸쳐서 편성된 시편에는 구세사와 계시 전체가 담겨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우선 시편에는 찬양 기도가 많이 수록돼 있다. 하느님 찬미가 중심이 된 시로, 이스라엘이 전례나 축제, 행사 때 공동체 안에서 읊던 기도이다. 이스라엘은 그들의 역사를 숙고하면서 유일하신 절대자 하느님, 그들과 맺은 계약에 충실하신 하느님을 찬미했다. 이 자체가 기도라 할 수 있다. 찬양시 기도의 공통점은 미래를 향한 기대, 하느님과 함께 사는 생활, 하느님의 완전한 통치에 대한 소망 등이 담겨 있다. 또 찬양시에는 공동체성이 강하게 강조되고 있다. 시편에는 탄원이나 신뢰, 감사의 기도가 많다. 찬미와 탄원은 가장 많은 종류의 기도로 시편 어디서나 볼 수 있다. 애원시는 국가가 위기에 처해 드리는 집단 기도와 죽음, 질병, 박해, 죄 등의 구원을 비는 개인적인 기도로 구분된다. 이 시편은 원래 곤경과 고통이라는 공통된 상황에 그 뿌리를 두고 있다. 어떤 이가 설사 홀로 기도한다 해도, 그는 혼자가 아니다. 예를 들어 사제나 임금과 같이 공직에 있는 사람이 집단의 이름으로 말하는 경우에도 시편 기도의 ‘나’는 때로 공동체를 뜻하기도 한다. 또 백성을 가르치려는 의도가 뚜렷한 교훈시는 다른 시편과는 달리 다분히 교육적이다. 교훈시의 소재는 율법. 지혜, 윤리 생활 등 지혜 문학서가 취급하는 문제들이다. 교훈시에서 시편 저자는 이스라엘의 구원 역사를 회고하며 전례, 축제, 행사를 노래한다. 또 신명기에 바탕을 두고 계약의 의미와 그 중요성을 강조하기도 한다. 시편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생활 중심이었다. 그들은 매년 순례의 길을 떠날 때, 성전에서 제사를 바칠 때, 매주 안식일마다 회당에 모여 공적 기도를 드릴 때나 개인적으로 기도할 때 시편으로 찬미를 드렸다. 예수님께서도 십자가 위에서 시편을 외우면서 숨을 거두실 정도였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큰소리로 외치셨다. ‘아버지, 제 영을 아버지 손에 맡깁니다.’ 이 말씀을 하시고 숨을 거두셨다”(루카 23,46). 공동 전례에도 사용 시편을 낭송하고 노래하는 관습은 초기 그리스도교인에게서도 볼 수 있다(1코린 14,26 참조). 시편 기도는 일찍부터 개인 신심 행위와 공동 전례에도 퍼지게 된다. 초대 교회 박해 시대에 지하 비밀 예배소에서 울려 퍼지던 노래도 바로 이 시편이었다. 오늘날까지 시편은 미사 전례, 성직자·수도자들이 매일 드리는 시간 전례의 중요 부분이 되어 있다. 시편 기도는 비록 혼자서 바칠 때라도 하느님 백성의 기도와 합하여 드리는 공동체의 기도가 된다는 특징을 지닌다.허영엽 신부(서울대교구 홍보국장) 율리우스 카롤스펠트 그림, ‘다윗의 노래’. 출처=아름다운 성경 평화신문2016.04.19
![[성경 속 기도] (13) 성모 마리아의 기도](//cpbc.co.kr/CMS/newspaper/2016/05/rc/633487_1.0_titleImage_1.jpg)
[성경 속 기도] (13) 성모 마리아의 기도“당신 말씀대로 이루어지소서” 프라 안젤리코 작 ‘주님 탄생 예고’, 프레스코화, 15세기, 산 마르코 수도원, 이탈리아 피렌체. 가톨릭 교회는 성모 마리아를 교회의 어머니, 신앙의 어머니로 공경하고 있다. 특히 성모 마리아는 기도 생활에서 모범을 보여 준다. 동정녀 마리아가 천사로부터 예수님의 잉태를 예고받고 주님을 잉태한 몸으로 엘리사벳을 방문해 부른 노래. 마리아가 구세주 하느님을 찬양하면서 이스라엘에 베푸신 하느님의 계획이 자신을 통하여 이뤄졌음을 기도하는 ‘마니피캇’(Magnificat, 루카 1,46-55)은 성모 마리아의 대표적인 기도문이다. 주님께서 약속하신 말씀이 꼭 이루어지리라 믿었던 마리아의 믿음이 그녀를 교회의 어머니로 존경받게 하는 것이다. “행복하십니다, 주님께서 하신 말씀이 이루어지리라고 믿으신 분!”(루카 1,45) 신앙이란 한마디로 인간의 생각과 판단으로 잘 받아들일 수 없지만 하느님의 역사(役事)를 믿고 받아들이는 것이다. 그래서 인간적으로 이해 불가능하고 받아들일 수 없는 일을 주님의 뜻으로 믿고 받아들인 성모 마리아의 믿음이 우리에게 귀감이 된다.하느님께서는 가브리엘 천사를 갈릴래아 지방 나자렛이라는 고을로 보내시어, 다윗 집안의 요셉이라는 사람과 약혼한 처녀를 찾아가게 하셨다. 그 처녀의 이름이 마리아였다. 천사가 마리아의 집으로 들어가 다짜고짜 인사와 함께 “두려워하지 마라, 마리아야. 너는 하느님의 총애를 받았다. 보라, 이제 네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터이니 그 이름을 예수라 하여라”라는 메시지를 전한다. 마리아가 천사에게, “저는 남자를 알지 못하는데, 어떻게 그런 일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 하고 말하자, 천사는 “성령께서 너에게 내려오시고 지극히 높으신 분의 힘이 너를 덮을 것이다. 그러므로 태어날 아기는 거룩하신 분, 하느님의 아드님이라고 불릴 것이다”라고 말한다. 이때 마리아의 심정이 어땠을까 하는 것은 미뤄 짐작할 수 있다. 처녀가 아기를 잉태한다는 건 인간적으로 고통과 수난의 삶을 예고하는 것이기도 했다. 마리아는 왜 하필 이런 일을 겪어야 하는지 원망스럽기도 했지만 처녀 마리아는 결국 하느님 뜻에 순명한다. “마리아가 말하였다. ‘보십시오,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말씀하신 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루카 1,38). 이처럼 성모 마리아의 일생은 온전히 하느님의 부르심에 응답하는 삶이었다. 참으로 성모 마리아는 겸손한 분이었다. 즉 하느님 앞에서 자신은 작고 보잘것없다는 것을 솔직하게 인정하고, 하느님께서 당신에게 베푸신 은총과 권능에 의지했다. 성모님이 교회의 가장 으뜸 성인으로 존경받고 있는 이유는 무엇보다 그분의 신앙 때문이다. 마리아라는 이름은 (히브리말로 미리암) 그 당시에 아주 흔하던 이름이었다. 성모 마리아는 스스로를 비천한 여종이라고 표현했다(루카 1,48). 이처럼 마리아는 우리처럼 평범한 사람이었다. 우리가 흔히 볼 수 있는 동네 처녀, 우리들 어머니의 모습을 가지신 분이었다. 그런데 하느님은 평범한 처녀 마리아를 선택하셔서 당신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어머니로 삼으셨다. 이것은 오로지 하느님의 뜻이었다. 성서에 보면 곳곳에서 이렇게 하느님은 평범하고 별로 내세울 것이 없는 인간을 부르시고 선택하여 당신의 일꾼으로 삼으신다. 예수님의 제자들도 마찬가지였다.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말씀하신 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루가 1,38)라는 위대한 신앙고백은 이제 우리의 기도가 되어야 한다. 허영엽 신부(서울대교구 홍보국장) 평화신문2016.05.03
![[전영준 신부의 가톨릭 영성을 찾아서] (34) 8세기 ③ - 샤를마뉴 황제와 카롤링거 르네상스](//cpbc.co.kr/CMS/newspaper/2017/07/rc/689242_1.0_titleImage_1.jpg)
[전영준 신부의 가톨릭 영성을 찾아서] (34) 8세기 ③ - 샤를마뉴 황제와 카롤링거 르네상스문맹자 황제, 문화 부흥과 영성 생활 발전을 견인하다동방 교회가 성화상 논쟁으로 홍역을 치르고 있을 때, 서방 교회는 새로운 정치 세력과의 연대를 도모했습니다. 카롤링거 왕조의 프랑크 왕국 출현은 유럽 사회에 전환점을 가져왔을 뿐만 아니라, 서방 교회에도 변곡점을 만드는 계기가 되었습니다.사를마뉴는 하드리아누스 1세 교황에게 교황령 보호를 요청받자 전쟁을 시작해 랑고바르드 왕국의 나머지 영토를 회복했다. 사률마뉴(왼쪽)를 맞이하는 하드리아누스 1세 교황.교회의 수호자로서의 신성 로마 제국 황제 샤를마뉴 메로빙거 왕조 프랑크 왕국은 다고베르투스 1세(Dagobertus I, 608쯤~638/39) 국왕 사후에 북서부 지역의 네우스트리아(Neustria), 북동부 지역의 아우스트라시아(Austrasia), 남동부 지역의 부르고뉴(Bourgogne)로 나뉘었습니다. 679년 아우스트라시아의 궁재(宮宰)가 되었던 페피누스 2세(Pepinus II, 635~714)는 687년 프랑크 왕국 나머지 실권마저 장악했으나, 그의 사후에 적자 권력 승계에 반발한 서자 샤를 마르텔(Charles Martel, 686쯤~741)이 718년 다시 프랑크 왕국의 전권을 차지했습니다. 샤를 마르텔은 732년 유럽을 정복하고자 피레네산맥을 넘은 이슬람 세력을 물리치면서 서방 교회와 돈독한 관계를 형성했습니다. 741년 샤를 마르텔이 사망하자, 아들 페피누스 3세(Pepinus III, 714~768)는 먼저 네우스트리아의 궁재가 되었고, 748년 형 카를로만(Carloman, 707경~754) 궁재를 몰아내고 아우스트라시아의 궁재까지 됐습니다. 이어 751년 메로빙거 왕조 마지막 왕이었던 킬데리쿠스 3세(Childericus III, 717경~754)를 폐위시키고 카롤링거 왕조 프랑크 왕국의 첫 번째 국왕으로 즉위했습니다. 교황 자카리아스(Zacharias PP, 재위 741~752)는 페피누스 3세 즉위를 승인했고, 754년 교황 스테파누스 2세(Stephanus PP. II, 재임 752~757)도 서방 교회에 대한 군사적 보호를 요청하고자 랭스(Reims) 대성당에서 페피누스 3세에게 도유 예식을 거행하면서 그가 프랑크 왕국의 합법적인 국왕이라고 선언했습니다. 페피누스 3세는 그 보답으로 756년 랑고바르드 왕국의 일부 영토를 정복해 교황 스테파누스 2세에게 기증했습니다. 이로써 프랑크 왕국과 서방 교회는 더욱 긴밀한 관계를 형성했습니다. 768년 페피누스 3세가 사망하자, 아들 샤를마뉴(Charlemagne, 재위 768~814)와 카를로만 1세(Carloman I, 재위 768~771)에게 왕국과 왕위가 분할 상속되었습니다. 771년 동생 카를로만 1세가 갑자기 사망하자, 샤를마뉴는 프랑크 왕국의 유일한 왕으로 즉위했습니다. 샤를마뉴는 772년 교황 하드리아누스 1세(Hadrianus PP. I, 재임 772~795)에게 랑고바르드 왕국의 침공에 대한 교황령 보호를 요청받자 전쟁을 시작했습니다. 774년에는 랑고바르드 왕국의 나머지 영토를 정복하고 스스로 랑고바르드 왕국의 왕이라고 지칭했습니다. 다만 774년 샤를마뉴도 로마를 방문해 부왕 페피누스 3세를 이어 교황령을 보장해 주었지만, 많은 영토를 기증하지 않았습니다. 샤를마뉴는 교황 레오 3세(Leo PP. III, 재임 795~816)가 교황에 선출되자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했고, 799년 교황의 반대자들이 교황을 공격하자 교황을 보호해 주었습니다. 결국 800년 교황 레오 3세는 샤를마뉴에게 신성 로마 제국 황제의 관을 씌어주고 서로마 제국 황제를 계승하게 함으로써 교회의 수호자로 임명했습니다. 서방 교회에 활기를 불어넣은 카롤링거 르네상스 문맹자로 알려졌던 샤를마뉴가 백성을 비롯해 교구 성직자들의 문맹률을 낮추기 위해 라틴어 교육을 권장하며 시작했던 운동은 ‘카롤링거 르네상스’(Carolingian Renaissance)로 발전하면서 서방 교회에 활력을 가져왔습니다. 뿐만 아니라 교구 성직자와 평신도의 영성 생활 발전에도 크게 기여했습니다. 샤를마뉴는 유럽 각지에서 활동하는 학자들을 궁정으로 불러들였습니다. 그리고 학자들이 인문학, 수사학, 예술, 건축뿐 아니라, 교회법, 전례 개혁, 성경 연구 등에 매진할 수 있도록 전폭적으로 지원했습니다. 샤를마뉴의 스승이었던 잉글랜드 출신 수도자 알쿠이누스(Alcuinus, 730쯤~804)는 782년 왕국의 수도 아헨(Aachen)에 샤를마뉴 궁정학교 교장이 되었습니다. 원래 이 학교는 귀족 자녀들을 교육하기 위해 선대에 설립되었던 학교였으나, 샤를마뉴는 인문학과 종교 연구를 교육과정에 포함시켰습니다. 알쿠이누스는 790년까지 샤를마뉴와 그의 아들들에게도 인문학 등을 가르쳤습니다. 잠시 잉글랜드로 돌아갔었던 알쿠이누스는 793년 샤를마뉴의 요청으로 그리스도 양자설(Adoptionism) 이단과 맞서기 위해 다시 궁정학교로 돌아왔습니다. 796년 알쿠이누스는 투르(Tours)에 ‘성 마르티누스 수도원’ 원장으로 부임해 말년을 보냈습니다. 카롤링거 르네상스 학자로서 문법 학자였던 피사의 페트루스(Petrus Pisanus, 744~799)는 776~790년 사이에 샤를마뉴에게 라틴어를 가르쳤습니다. 라틴어와 관련된 그의 작품들은 유럽 사회에서 라틴어가 교회 언어이자 공용어로 쓰이게 되는데 큰 기여를 했습니다. 특히 지역 언어로 잘못 번역된 성경을 읽던 교구 성직자들과 신자들이 라틴어 성경을 비롯해 라틴어 주석서와 교부들의 문헌들을 읽게 되면서 올바른 신앙으로 돌아올 수 있었습니다. 신학자였던 아퀼레이아의 파울리누스(Paulinus Aquiliensis, 750 이전~802)는 776~787년 샤를마뉴 궁정 학자로 참여했으며, 샤를마뉴는 787년 그를 아퀼레이아의 총대주교로 임명했습니다. 파울리누스 역시 그리스도 양자설 이단을 거슬러 여러 시노드에서 활약했습니다. 랑고바르드 귀족 가문 출신으로 역사학자이자 베네딕도회 수도자였던 부제 파울루스(Paulus Diaconus, 720/26경~800 이전)는 782~787년 사이에 카롤링거 르네상스에 큰 기여를 했으며, 787년 샤를마뉴는 그를 ‘몬테카시노 수도원’ 원장으로 임명했습니다. 히스페니아 서고트족 후손이며 시인이자 문필가였던 오를레앙의 테오둘푸스(Theodulfus Aurelianensis, 760쯤~821)는 782~797년 사이에 카롤링거 르네상스의 핵심 인물로서 궁정에서 봉사했으며, 797년 샤를마뉴는 그를 오를레앙의 주교로 임명했습니다. 특히 테오둘푸스는 샤를마뉴와 함께 교회 개혁을 위해 많은 역할을 담당했습니다. 또한 테오둘푸스는 교회 관련 지역 밖에서도 공공 학교가 설립될 수 있도록 많은 노력을 했습니다. 교황 그레고리우스 1세가 유럽 선교를 위해 각지로 파견했던 수도자들은 중세 초기에 그 지역의 중심 역할을 담당했습니다. 수도자들은 선교를 위해 성경과 신학을 열심히 공부했고, 열정적인 평신도들은 이런 그들의 모습을 본받으려 했습니다. 이런 와중에 카롤링거 르네상스는 교구 성직자와 평신도에게도 공교육을 통해 라틴어를 가르치면서 성경과 신학 공부를 할 수 있는 계기를 제공했습니다. 그로 인해 서유럽 전체 문맹률이 낮아지면서, 그리스도인들은 올바른 신앙과 성숙한 영성 생활로 한 걸음 다가가는 기회를 얻었습니다. <가톨릭대 신학대학 영성신학 교수>백영민2017.07.19
![[성경 속 기도] (10) 예레미야의 기도](//cpbc.co.kr/CMS/newspaper/2016/04/rc/629710_1.0_titleImage_1.jpg)
[성경 속 기도] (10) 예레미야의 기도부족한 사람이 참 예언자가 되기까지 미켈란젤로 작, 예언자 예레미야, 성 시스티나성당 천장화 일부. 예레미야는 벤야민 땅 아나톳에 살던 사제 힐키야의 아들이다. 그는 스무 살쯤 하느님의 부르심을 받아 유다의 마지막 왕 치드키야 때까지 약 40년간 예언자로 활동했다. 예레미야의 활동 기간은 이스라엘의 역사 중에서 가장 비참한 시기였다. 좋은 정치를 펼쳤던 치드키야 왕이 죽은 후 므나쎄 55년간의 폭정이 계속되고 요시아 왕의 개혁 정책도 뒤이은 왕들의 실정으로 실효를 거두지 못했다. 따라서 암흑과도 같은 시대가 지속되었고 특히 백성들의 생활은 몹시 피폐해졌다. 여기에 종교도 썩을 대로 썩어 일반 백성들의 고충은 말이 아니었다. 이런 상황에서 예레미야가 나서서 하느님 말씀을 전하였다.당시 시대상은 정치, 사회, 종교 등 모든 분야가 부패하고 썩은 상태였기에 멸망을 경고하는 예레미야의 소명은 어렵고 힘든 것이었다. 실제로 처음 부르심을 받았을 때 예레미야는 거부하고 도망치고 싶었다. 그도 우리와 똑같이 어려움 앞에 약해지는 인간이었다.예언자로서의 활동은 결코 순탄치 않았다. 고통과 수난의 연속이었다. 그는 가끔 하느님께 기도 중에 불평을 쏟아냈다. 그래서 그의 기도는 어쩌면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기도였다. “주님, 당신께서 저를 꾀시어 저는 그 꾐에 넘어갔습니다. 당신께서 저를 압도하시고 저보다 우세하시니 제가 날마다 놀림감이 되어 모든 이에게 조롱만 받습니다. 말할 때마다 저는 소리를 지르며 ‘폭력과 억압뿐이다!’ 하고 외칩니다. 주님의 말씀이 저에게 날마다 치욕과 비웃음거리만 되었습니다”(예레 20,7-8). 또 예레미야는 바빌론에게 항복하라고 예언하여 매국노라는 오해를 받고 백성들의 미움을 사게 되었다. 이때에도 너무 억울하고 백성들의 미래가 측은해 예레미야는 눈물을 흘렸다. 예언자의 직무를 수행하는 데도 완전히 하느님께 순명하지 못한 채 하느님의 부르심을 거부하고 도망치려는 마음이 많았을 것이다. ‘왜 하필 내가 해야 하나’ 하는 자괴감에 빠져 고통스러워하기도 했다. 나중에는 고향 친척조차 예레미야를 옥에 가두었다. 가장 가까운 사람들에게서 몰이해와 배척을 당할 때의 고통은 더 심하다. 예레미야는 이런 고통을 통해 참 예언자로서 완성되어 간 것이다. 그는 불완전하고 부족한 사람이었지만 하느님의 부르심에 대한 응답을 통해 완전함을 향해 나갈 수 있었다.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하느님께 붙잡혀 예언자가 된 예레미야였다. 하느님께서는 예레미야에게 전사의 임무를 원활히 수행할 수 있도록 기도를 통해 준비시키셨다. 예레미야는 주님의 뜻에 따라 그를 공격하는 적들 앞에서 완벽한 방비 태세를 갖춘 성읍과 같은 존재였다. “오늘 내가 너를 요새 성읍으로, 쇠기둥과 청동 벽으로 만들어 온 땅에 맞서게 하고, 유다의 임금들과 대신들과 사제들과 나라 백성에게 맞서게 하겠다”(예레 1,18).예레미야는 왕들과 사제들, 유다 전 지역에 살고 있는 사람 모두에게 공격을 당하는 사면초가의 절박한 상황에 처했지만, 어려움 속에서도 기도를 통해 주님께 힘을 얻었다. “그들이 너와 맞서 싸우겠지만 너를 당해 내지 못할 것이다. 내가 너를 구하려고 너와 함께 있기 때문이다. 주님의 말씀이다”(예레 1,19). 우리는 주님의 일을 할 때 쉽게 좌절하거나 인간적인 생각으로 판단하지 말아야 한다. 왜냐하면, 주님께서 먼저 우리를 택하시고 사명을 주셨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기도를 통해 주님이 우리의 힘이 되어 주심을 깨달아야 한다. 허영엽 신부(서울대교구 홍보국장) 평화신문2016.04.12
![[생활 속의 복음] 부활 제3주일 (루카 24,35-48)](//cpbc.co.kr/CMS/newspaper/2018/04/rc/716856_1.0_titleImage_1.jpg)
[생활 속의 복음] 부활 제3주일 (루카 24,35-48)기적 만들기 제가 아는 부부는 오랫동안 아기를 가지려고 노력했지만 좀처럼 아기가 생기지 않아서 마음고생이 많았습니다. 하지만 열심히 기도해서 그런지 드디어 원하던 아기를 갖게 되었지요. 이 부부의 기쁨은 말로 표현하지 못할 정도로 컸습니다. 이 부부가 제게 이런 말을 해주더군요. “신부님, 이 세상에 생명이 태어난 것 그 자체가 기적이라는 것을 이제야 깨달았어요.”처음에는 결혼과 동시에 쉽게 아기를 가질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오랜 시간을 기울이고 또 많은 마음고생을 하고 나니 자기들 마음대로 얻을 수 있는 아기가 아님을, 커다란 기적이 이루어지지 않고서는 불가능하다는 것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우리 모두는 이렇게 기적의 손길을 통해서 이 땅에 태어났습니다. 그런데 당연하게 생각하면서 자기 자신을 별 볼 일 없는 존재로 생각하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을까요? 이런 식으로 주님의 손길이 미치지 않는 곳이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되면서 기적 아닌 것이 없음을 알게 됩니다. 따라서 어떠한 순간에서도 포기하거나 절망해서는 안 됩니다. 성경에서 가장 많이 나오는 단일 문장이 “두려워 마라”라고 하더군요. 이 문장을 누가 직접 세어 보았는지 모르겠지만, 어떤 책에서 보니 자그마치 365회가 나온다는 것입니다. 이는 곧 매일 매일 두려워하지 말라는 주님의 메시지가 아닐까 싶습니다. 하지만 주님의 손길이 없다고 생각하는 순간 두려움은 나의 것이 되며 쉽게 포기와 절망 속에서 빠져나오지 못하게 됩니다. 주님의 십자가 죽음 후 제자들은 다락방에 숨어 있었습니다. 자신들도 주님과 같은 끔찍한 죽음을 당할지도 모르겠다는 두려움일 것입니다. 바로 이제는 주님이 계시지 않는다는 생각에서 나온 그들의 초라한 모습이었습니다. 주님이 없는 상태에서 자신들만으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고 생각했겠지요. 이러한 두려움과 절망 속에 있을 때 부활하신 주님께서 제자들 앞에 나타나십니다. 그리고 하신 첫 마디는 제자들에게 가장 필요한 “평화가 너희와 함께”(루카 24,36)였습니다.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되살아나신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직접 나타나심으로 인해, 제자들은 죽음의 두려움에서 벗어날 수 있었습니다. 대신 부활이라는 커다란 희망 속에서 진정한 평화를 간직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주님께서는 이 평화를 가지고 죄의 용서를 위한 회개를 세상에 선포해야 함을 명령하십니다.(루카 24,47 참조) 우리 죄만이 아니라 온 세상의 죄를 위한 속죄 제물이 되신(1요한 2,2 참조) 주님께서 평화를 가지고 우리 곁에 계시기에 우리는 분명히 용기를 갖고 두려움 없이 세상에 기쁜 소식을 전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왜 우리의 삶 안에 주님을 초대하지 않을까요? 아니 우리 곁에 계신 주님을 보려고 하지 않을까요? 장 지오노의 소설로 매우 유명한 ‘나무를 심은 사람’에서, 주인공 엘제아르 부피에는 헌신적인 노력을 통해 자신이 거둔 ‘성공’을 보여줍니다. 이는 누구나 거룩해질 수 있다는 것을 가르쳐줍니다. 농부인 자기와 마찬가지로 스스로 보잘것없는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어떤 사람도 고결하고 거룩한 생각을 품고 굽힘 없이 목표를 추구해 나가면 기적 같은 일을 만들어낼 수 있다는 ‘희망’을 심어준 것이지요. 바로 이 모습을 주님께서 우리들의 마음속에 심어주셨습니다. 주님의 사랑 가득한 마음을 품고서 하느님 나라의 영광을 위해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에 최선을 다할 때, 스스로 보잘것없다고 생각했던 나 자신에게서 또 하나의 기적이 나올 수 있습니다. 기적을 바라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진정으로 기적을 원한다면 먼저 주님을 내 안에 모셔야 합니다. 그리고 그 주님을 바라보고, 주님께서 원하시는 모습으로 적극적인 삶을 살아야 합니다. 이를 위해 베드로 사도는 우리에게 이렇게 살 것을 말씀하십니다. “회개하고 하느님께 돌아와 여러분의 죄가 지워지게 하십시오.”(사도 3,19)바로 그때 진정한 평화 안에서 나를 도구로 사용하시는 주님의 기적을 체험하게 될 것입니다. 조명연 신부(인천교구 갑곶순교성지 전담) 평화신문2018.04.10
 11세기 ③ - 클뤼니 수도회의 부흥과 쇠퇴](//cpbc.co.kr/CMS/newspaper/2017/09/rc/696080_1.0_titleImage_1.jpg)
[전영준 신부의 가톨릭 영성을 찾아서](43) 11세기 ③ - 클뤼니 수도회의 부흥과 쇠퇴영적 발전 이끈 수도원, 정신노동에 시달린 수도자 그레고리오 개혁이 안정적으로 지속될 수 있었던 배경에 클뤼니 수도회가 있었습니다. 개혁 운동을 시작했던 교황 레오 9세(Leo PP. IX, 재임 1049~1054)와 같은 해에 클뤼니 수도회 아빠스(Abbas)로 선출되었던 클뤼니의 후고(Hugo Cluniacensis, 재임 1049~1109)는 60년간 원장을 역임하면서 개혁 교황들의 조력자가 되었습니다. 또 교황 우르바누스 2세(Urbanus PP. II, 재임 1088~1099)와 교황 파스칼리스 2세(Paschalis PP. II, 재임 1099~1118)는 클뤼니 수도회 출신 수도자였기 때문에, 클뤼니 수도회와 더욱 긴밀한 관계 속에서 개혁 운동을 이끌어 갈 수 있었습니다. 클뤼니 수도회에 입회자가 늘어나며 1088년 1000명 이상을 수용할 수 있는 세 번째 교회가 건립되기 시작했다. 그림은 3차 클뤼니 성당. 노란색으로 칠한 부분이 지금 남아 있는 부분이다. 덕망있는 아빠스들에 의한 영적 발전개혁 운동을 지지할 수 있었던 것은 클뤼니 수도회가 영적 발전을 이뤘기 때문이었습니다. 제5대 아빠스였던 클뤼니의 오딜로(Odilo Cluniacensis, 재임 994~1049)는 임기 중에 클뤼니 수도회 개혁을 지지하는 수도원 수를 많이 늘렸을 뿐 아니라, 그 수도원들을 통합하여 일치하도록 연합체 조직을 체계화함으로써 클뤼니 수도회를 서유럽에서 가장 중요한 수도회로 만들었습니다. 따라서 오딜로가 추진했던 수도 생활 개혁은 클뤼니 수도회에만 국한되지 않고, 다른 베네딕도회 수도원들에도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또한 오딜로는 강생의 신비에 기반을 두고 구세사의 관점에 초점을 맞춘 영성 생활을 언급했습니다. 특히 강생의 신비에서 성모님의 역할을 고찰하면서 평생 동정이신 마리아 신심을 강조했습니다.제6대 아빠스였던 클뤼니의 후고는 중세 수도회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지도자였습니다. 오랜 임기 때문에, 후고는 거의 모든 개혁 교황들의 자문 역할을 담당할 수 있었습니다. 후고도 임기 중에 클뤼니 수도회에 속한 개혁 수도원을 유럽 전역에서 2000여 개로 늘렸습니다. 또한 후고는 클뤼니 수도회 회칙 개정을 통하여 수도회 운영 방식을 발전시켰습니다. 기도에 열중했던 후고는 신중하고 후덕했기 때문에 많은 사람에게 신뢰를 얻었습니다.후고는 개인적으로 저서를 남기지 않았지만, 그의 임기 시절에 클뤼니 수도원 수도자였던 우달리쿠스(Udalricus Cluniacensis, 1029~1093)가 1087년 이전에 저술한 저서 「클뤼니 수도원의 오래된 관습들(Antiquiores Conseutudines Cluniacensis Monasterii)」에서 그 당시 클뤼니 수도회가 추구하던 수도 생활의 모습을 엿볼 수 있었습니다. 즉, 베네딕도 수도 규칙서 정신을 따라 시편을 중심으로 하는 기도 생활에 충실했으나, 기도 생활을 너무 강조함으로써 육체노동 시간을 줄이는 계기가 되었습니다.클뤼니 수도회의 전례 예식과 필사 작업클뤼니 수도회가 보여 준 여러 가지 모습들은 서방 교회 그리스도인들의 영성 생활에 긍정적인 영향을 주었지만, 정작 수도자들의 수도 생활에 부정적인 영향을 주었습니다. 먼저 클뤼니 수도회는 교회 전례 생활을 발전시켰습니다. 베네딕도의 수도 규칙서를 따라서, 수도자들은 시간경마다 기도를 바치면서 시편을 비롯하여 성경 전체를 봉독할 수 있도록 시간 전례를 구성했습니다. 또한 수도자들은 미사 전례를 장시간 장엄하고 화려하게 집전했습니다. 게다가 연중 주요 대축일에 수도자들은 십자가와 촛대, 성경과 성인 유해를 앞세워 성대한 행렬 예식을 거행했습니다.한편 중세 중기 유럽 사회가 복음화와 함께 안정적인 분위기에 들어가자 교회 서적을 찾는 수요가 늘었습니다. 따라서 클뤼니 수도회 수도자들은 성경을 비롯하여 신학, 전례, 영성과 관련된 서적들을 필사해 보급하는 일이 교회와 그리스도인을 위해 실천할 수 있는 좋은 일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아울러 수도자들은 도서관을 마련해 수많은 장서를 보관하며 그것을 바탕으로 신학 연구에 박차를 가했습니다.특히 수도자들의 필사 작업은 예술로 승화되었습니다. 수도자들은 필사 작업에서 필체를 화려하게 만들었고, 책의 여백을 화려한 그림으로 채워 넣었습니다. 이러한 작업을 위해 수도자들이 장시간 집중할 필요가 있었기 때문에, 수도회는 필사본실에서 작업하는 수도자들에게 시간 전례 등을 관면해 주었습니다. 게다가 필사 작업을 통해 그레고리오 성가 악보가 유통되면서 전례 성가 보급과 음악 발전에도 크게 기여했습니다.건축 분야에서도 큰 발전이 있었습니다. 클뤼니 수도회에 입회하려는 수도자가 날로 늘어나 1000년에는 클뤼니 수도회 두 번째 교회가, 1088년에는 1000명 이상 수용할 수 있는 세 번째 교회가 건립되기 시작했으며, 다른 많은 지역에서도 수도원 교회가 건립되었습니다. 특히 수도원 교회가 로마네스크 양식으로 건축되면서 교회 안팎에 성경 말씀과 교리 내용에 따른 조각들과 그림들로 장식되었습니다.기도 생활을 방해하는 과도한 정신노동클뤼니 수도회 덕분이었는지, 11세기엔 훌륭한 영성 작가가 나타났습니다. 프랑스 북부 노르망디, 페캉(Fcamp)에 베네딕도회 수도원 출신 페캉의 요한(Ioannes Fiscamnensis, ?~1079)은 이탈리아 라벤나(Ravenna)에서 태어났습니다. 요한은 수도원장이었던 삼촌의 초청으로 프랑스 디종(Dijon)에 성 베니뉴스(Benignus) 수도원을 방문했다가, 1017년 페캉의 수도원을 개혁할 사명을 받은 삼촌과 함께 그곳을 방문해 수도원장 비서 일을 잠시 맡았습니다. 1028년 요한은 페캉의 수도원 원장으로 임명되어 50여 년간 직무를 수행하면서 전통적인 베네딕도회 수도 신학을 구현했습니다.요한은 기도에 관한 첫 번째 저서인 「신학적 고백(Confessio Theologica)」에서 렉시오 디비나(거룩한 독서)를 실행한 후에 ‘주부적 관상’(infused contemplation)의 단계인 정감적인 침묵의 기도 상태에 들어가게 되는 것을 설명했습니다. 이외에도 요한의 저서인 「성부의 말씀과 글에 대한 소책자(Libellus de scripturis et verbis patrum)」와 「묵상(Meditationes)」은 중세 후기까지 서방 교회에서 널리 읽혔습니다.클뤼니 수도회의 다양한 노력들은 분명히 그리스도인의 영성 생활 발전에 기여했습니다. 하지만 정작 수도자들은 수도 생활에 방해를 받았습니다. 전통적인 육체노동을 대신한 필사 작업과 같은 높은 집중력을 필요로 하는 정신노동은 기도 생활을 힘들게 했을 뿐 아니라, 기도 시간을 단축시켰습니다. 긴 시간 거행된 장엄한 전례도 수도자들이 깊은 묵상을 통한 관상 기도에 들게 하는 데 장애물이었습니다. 따라서 클뤼니 수도회의 수도 생활이 변질되었다는 비판이 쇄도했습니다.클뤼니 수도회 제8대이자 마지막 아빠스였던 존자(尊者) 베드로(Petrus Venerabilis, 재임 1122~1157)는 교회의 비판을 의식하면서 새롭게 변한 수도 생활의 환경과 방법을 적극적으로 해명했습니다. 하지만 한 번 떠난 마음을 다시 잡을 수 없었으며, 클뤼니 수도회는 해체되어 흩어지고 클뤼니 수도원만 남았습니다. 그리고 빈자리를 대신하는 새로운 수도회가 출현하게 되었습니다. <가톨릭대 신학대학 영성신학 교수> 백영민2017.09.19
![[전영준 신부의 가톨릭 영성을 찾아서] (19) 4세기 ⑥ - 서방 교회 영성 생활](//cpbc.co.kr/CMS/newspaper/2017/04/rc/677475_1.0_titleImage_1.jpg)
[전영준 신부의 가톨릭 영성을 찾아서] (19) 4세기 ⑥ - 서방 교회 영성 생활금욕·애덕·윤리 토대로 그리스도인 영성 생활 강조고대 그리스도교는 언뜻 동방 교회 중심으로 활동한 것처럼 보였습니다. 박해 이전에는 서방에 로마 제국의 수도가 있어서 서방 교회 지역이 상대적으로 더 활동의 제약을 받았을 것이었고, 박해 이후에는 로마 제국의 수도가 동방으로 이전함으로써 동방 교회 지역이 제약 없이 더 활발할 수 있었습니다. 따라서 소수의 사도 및 호교 교부를 제외하고 대부분 동방 교회 교부들의 활약이 많았으며, 수도 생활도 동방 교회로부터 확산되었습니다. 게다가 서방 교회 수도 생활의 기원은 불분명합니다. 하지만 고대 말기부터 서방 교회 교부들도 서서히 활약을 펼치면서 그리스도인 영성 생활에도 많은 영향을 끼치게 되었습니다.암브로시우스 금욕 생활과 윤리 생활을 강조한 암브로시우스 훌륭한 설교가였던 밀라노의 암브로시우스(Ambrosius Mediolanensis, 339~397)는 주교로서 사목적인 배려로 그리스도인의 영성 생활을 돕고자 성직자, 수도자, 평신도를 위해 다방면에서 많은 작품을 저술했습니다. 로마 황제의 행정관이었다가 갑자기 밀라노교구장 주교로 선출된 암브로시우스는 성경 공부에 매진했습니다. 암브로시우스는 알렉산드리아 학파의 방법론으로 구약성경에 담긴 윤리적, 영적 의미를 탐구했습니다. 또 안티오키아 학파의 방법론으로 신약성경에 담긴 문자적 의미를 연구했습니다. 그는 구약성경과 신약성경에 대해서 우의적이고 예형론적인 해석을 시도함으로써 두 성경의 통일성을 강조했습니다. 결국 성경 말씀을 열심히 묵상했던 암브로시우스는 여러 성경 주석 작품들을 남길 수 있었으며, 감동을 주는 좋은 강론도 할 수 있었습니다. 암브로시우스는 저서 「사제 직무론(De Offi -ciis Ministrorum)」에서 그리스도인의 윤리 생활을 강조했습니다. 즉, 그리스도인에게는 하느님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처럼 완전해지기 위한 삶과 일반적으로 영생을 얻기 위해 요구되는 최소한의 삶이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이 작품은 일차적으로 성직자들을 위한 권고였으나, 폭넓게는 평신도를 향하면서 모든 그리스도인의 영성 생활 발전에 도움을 주었습니다. 또 암브로시우스는 여성 그리스도인들의 영성 생활에 도움을 주고자 많은 관심을 기울였습니다. 그는 저서 「과부(De Viduis)」와 「동정녀(De Virginibus)」에서 결혼을 거부하는 것은 아니지만, 동정을 지키는 것이 더 우수한 복음적 삶이라고 강조했습니다. 게다가 암브로시우스는 교회를 정결한 동정을 지닌 그리스도인의 어머니로 제시했습니다. 따라서 동정 상태에 있는 교회는 성령의 도움으로 그리스도인이라는 자녀를 출산한다는 것입니다. 암브로시우스는 저서 「동정론(De Virgin- itate)」에서 동정에 대한 주제를 금욕 생활로 확장시켰습니다. 하지만 암브로시우스의 금욕 생활은 현세 생활을 희생하면서 실천하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즉, 현세 생활에서 애덕을 실천하는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의 현존 체험에 도달하는데, 그 체험을 통해 영생에 참여하는 것이 바로 금욕 생활이라는 것입니다. 이 이외에도 다양한 주제들을 다룬 작품들을 통해 암브로시우스는 체계적인 윤리 생활을 바탕으로 하는 그리스도인의 영성 생활을 권고했습니다.금욕 생활과 수도 생활을 실천한 히에로니무스우리에게 예로니모라는 이름으로 더 잘 알려진 스트리돈의 히에로니무스(Hieronymus Stridonensis, 347/48~419/20)는 성경 번역자이자 주석가로 명성을 떨쳤지만, 이면에 수도 생활을 동경했습니다. 유복한 그리스도교 가정에서 태어난 히에로니무스는 로마에서 공부하는 동안에 잠시 쾌락에 빠지기도 했지만, 세례성사를 받고 진지한 신앙인으로 살고자 투신했습니다. 20대 중반 히에로니무스는 루피누스(Rufinus Aquileiensis, 345~410/11)와 함께 고향 근처 아퀼레이아에 위치한 수도 공동체에서 금욕 생활을 실천했습니다. 이후 예루살렘 순례를 마친 히에로니무스는 안티오키아에 머물면서 안티오키아 학파의 성경 주석 방법을 배웠습니다. 또 수도 생활에 더 많은 관심을 갖게 되면서 시리아 사막에서 본격적으로 수도 생활을 실천했습니다. 하지만 그곳 수도자들이 이단사상 문제로 서로 다투는 모습에 회의를 느껴 안티오키아로 나왔는데, 뜻하지 않게 그곳에서 사제품을 받았습니다. 히에로니무스는 다시 콘스탄티노플에서 나지안주스의 그레고리우스(Gregorius Nazianzenus, 326/30경~390경)를 만나 알렉산드리아 학파의 성서 주석 방법을 배우고 오리게네스(Origenes, 185~254)에게 관심을 갖기도 했습니다. 잠시 로마로 돌아와 다마수스 1세 교황(Da- masus PP. I, 재위 366~384)을 보필했던 히에로니무스는 로마 귀족에게 금욕 생활을 가르쳤습니다. 당시 로마에는 이미 동방 교회 수도 생활이 전래되었고, 많은 귀족들이 수도 생활에 관심을 가졌습니다. 심지어 세련된 예절을 보이는 성직자보다 금욕 생활을 실천하는 성직자를 더 존경하는 분위기가 귀부인들을 중심으로 형성되었습니다. 교황 선종 이후 히에로니무스는 자신을 도와주던 부인들과 함께 이집트 사막 은수자들을 방문하고 베들레헴으로 건너가 수도 공동체를 설립, 수도 생활을 시작했습니다. 히에로니무스는 이곳 수도원에서 성경 번역 작업을 마무리하면서 죽을 때가지 머물렀습니다. 히에로니무스는 암브로시우스보다 극단적인 금욕 생활을 주장했습니다. 즉, 결혼 생활을 반대하는 분위기에서 금욕 생활을 권장했던 것이었습니다. 히에로니무스의 금욕 생활이 과도하다고 느낀 로마의 그리스도인들은 히에로니무스를 강력하게 비난했습니다. 하지만 히에로니무스는 그런 비판을 무시하고 어린 소녀에게까지 정결에 대한 가르침을 아주 섬세하게 교육했습니다. 4세기 서방 교회 수도 생활은 동방 교회의 도움이 절대적이었습니다. 알렉산드리아의 총대주교 아타나시우스(Athanasius Alexandrinus, 295/300~373)는 아리우스 일파와의 갈등 때문에 로마 황제에 의해 339년 로마로 유배를 떠났을 때에 이집트 수도자들과 동행함으로써 동방 교회 수도 생활이 서방 교회에 알려지는 계기를 마련했습니다. 또한 이미 고향에서 히에로니무스와 수도 생활을 실천했으며 베들레헴에 여성 수도원을 설립하고 수도 생활에 대한 경험을 축적했던 루피누스는 오리게네스 사상을 변론하기 위해 로마를 방문하면서 동방 교회의 수도 생활을 전하는 기회를 가졌습니다. 그러므로 박해가 끝난 4세기부터 서방 교회에서도 서서히 수도 생활과 수도원 제도의 기틀이 마련되기 시작했습니다. <가톨릭대 신학대학 영성신학 교수> cpbc2017.04.06
![[하느님과 트윗을] (2) 아담과 하와 이야기](//cpbc.co.kr/CMS/newspaper/2017/05/rc/682015_1.1_titleImage_1.jpg)
[하느님과 트윗을] (2) 아담과 하와 이야기하느님-인간, 인간-인간 관계 관한 가르침 전해문 : 아담과 하와의 이야기는 실제로 있었던 일인가요. 답 : 성경은 우리의 첫 조상인 아담과 하와의 창조를 이야기합니다. 창조 설화에는 한 이야기에 이어 다음 이야기가 뒤따르는데, 창조 설화가 두 가지라는 사실만 봐도 그것이 일어난 일을 그대로 묘사한 것이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그 이야기들은 터무니없지 않습니다. 중요한 것은 ‘어떻게’ 창조됐는지가 아니라 ‘왜’ 창조됐는지이기 때문입니다. 아담과 하와의 이야기는 하느님과 인간의 관계 그리고 인간과 인간의 관계에 관해 많은 것을 가르쳐 줍니다. 이 이야기는 하느님이 당신의 계획에 따라 우리를 창조하셨음을 알려줍니다. 동시에 우리가 타락한 인간의 본성을 지니고 있음을 알려줍니다. 아담과 하와의 이야기는 인류의 기원을 과학적으로 설명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조건에 대해 알려주는 이야기입니다. 세상을 창조하실 때 하느님은 인간을 창조하시는 일에 특별히 주의를 쏟으셨습니다. 하느님을 닮은 모습으로 우리가 만들어졌다는 말은 피조물 가운데 우리가 독특한 위치를 차지한다는 뜻입니다. 하느님은 우리 인간에게 특별히 세상에 대한 과업을 주셨습니다. 온갖 생물에게 이름을 붙이게 하신 것입니다. 하느님은 아담과 하와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자식을 많이 낳고 번성하여 땅을 가득 채우고 지배하여라. 그리고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땅을 기어 다니는 온갖 생물을 다스려라.”(창세 1,28) 이러한 책임에는 피조물에 대한 존중도 속합니다. 그러니 환경을 돌보는 일은 가톨릭 신자에게 당연한 일이지요! 문 : 창조 때 하느님은 홀로 계셨나요. 답 : 창세기는 “하느님의 영이 그 물 위를 감돌고 있었다”(창세 1,2)라고 전합니다. 그것이 바로 성령입니다. 더불어 요한복음은 “한처음에 말씀이 계셨다. 말씀은 하느님과 함께 계셨는데 말씀은 하느님이셨다”(요한 1,1)라고 전합니다. 하느님의 살아 계신 말씀이신 예수님은 한처음부터 하느님과 함께 계셨습니다. “하느님께서 말씀하시기를…”(창세 1,3)이라는 구절을 읽을 때마다, 성자도 함께하고 계셨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사실상 성자는 하느님의 말씀이셨습니다. 이것은 신약성경이 구약성경을 어떻게 명확하게 하는지 알 수 있는 좋은 예입니다. 하느님은 이처럼 언제나 삼위 안에 계십니다. 그러한 까닭에 바오로 사도는 만물이 그리스도를 통하여 또 그리스도를 향하여 창조되었다고 한 것입니다(콜로 1,16-17 참조). 문 : 세상을 6일 만에 창조하셨다고요. 답 : 창조 설화는 아름답고 시적인 이야기입니다.(창세 1-2장 참조) 그러나 과학자들이 말하는 지구의 기원과는 많이 다르지요. 아우구스티노 성인은 성경에 나오는 날은 실제 하루를 뜻하는 것이 아니라고 했는데, 이는 태양이 넷째 날에 가서야 만들어졌기 때문입니다. 문자 그대로 6일 만에, 즉 144시간 만에 만들어졌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그런데도 왜 우리는 여전히 창조 설화를 읽을까요? 그것은 창조 이야기가 하느님과 세상 그리고 인간에 관해 대단히 중요한 진리를 전해 주기 때문입니다. 창조 이야기는 단지 교훈을 담은 이야기가 아니라, 하느님이 계시하신 상징적인 역사를 담은 이야기입니다. 이를테면 창조 이야기는 오직 참 하느님 한 분만 계시다는 것을 알려줍니다. 또한 우리를 창조하신 하느님은 우리에게 특별히 주의를 기울이셨다는 것도 알려주지요. 정리=맹현균 기자 maeng@cpbc.co.kr「하느님과 트윗을」= 청년 사목에 힘써 온 리메리 신부가 청년들과 신앙을 주제로 나눈 이야기를 질문과 답 형식으로 엮은 책(가톨릭출판사)이다. 교회 기원과 역사에서부터 기도 방법, 전례와 성사, 성경, 신앙 문제 등을 폭넓게 다루고 있다. 리메리 신부는 누리집(www.tweetingwithgod.com)을 운영하며 소통의 장을 넓혀 나가고 있다. cpbc2017.05.17
![[성경 속 기도] (15·끝) 초대 교회의 기도](//cpbc.co.kr/CMS/newspaper/2016/05/rc/635684_1.0_titleImage_1.jpg)
[성경 속 기도] (15·끝) 초대 교회의 기도함께 모여 한마음으로 기도 바쳐 예수님께서 사도들과 함께 빵을 떼어 나눠 드셨듯이 초대 교회 신자들도 함께 모여 친교를 이루며 빵을 나눠 먹고 기도했다. 그림은 율리우스 카롤스펠트 작, ‘최후의 만찬’. 출처=「아름다운 성경」 초대 그리스도교는 성전뿐 아니라 신자들의 집에서도 모여 기도를 함께 바쳤다. 기도는 교회 공동체가 그리스도의 모습을 닮아가는 가장 중요한 수단이었다. 기도는 가장 기본적인 신앙의 표현이고, 하느님께 신뢰하는 삶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초대 교회 공동체의 삶은 기도하는 공동체라는 점을 잘 보여 주고 있다. “그들은 사도들의 가르침을 받고 친교를 이루며 빵을 떼어 나누고 기도하는 일에 전념하였다”(사도 2,42). 교회가 참다운 공동체로서 일치와 친교, 그리고 복음을 실현하는 힘의 원동력은 바로 기도에 있다. 기도하지 않는 공동체는 참다운 의미의 신앙 공동체라고 할 수 없다. 교회 공동체 안에서 발생할 수 있는 많은 문제도 이 기도 안에서 해소되고 해결될 수 있다. 기도는 교회의 친교를 나타내는 가장 중요한 표현이다. 또 기도를 통해 한마음 한몸의 공동체를 이룬다. “그들은 모두, 여러 여자와 예수님의 어머니와 그분의 형제들과 함께 한마음으로 기도에 전념하였다”(사도 1,14). 루카는 공동체가 모든 것을 공동으로 소유함으로써 ‘궁한 사람이 그들 가운데 없었다’고 전한다. 신앙인들 상호 간의 완전한 일치는 ‘한마음 한 정신’에서 기인한 것이다. 초대 교회의 사도행전에는 교회 공동체가 기도를 얼마나 중요시했는지를 잘 보여 주고 있다. 초기 그리스도교 신자들은 유다인 출신이 많았기에 이들도 성전에 모여 기도했다. “그들은 날마다 한마음으로 성전에 열심히 모이고 이 집 저 집에서 빵을 떼어 나누었으며, 즐겁고 순박한 마음으로 음식을 함께 먹고”(사도 2,46 ). 초대 교회의 신자들이 한마음으로 성전에 열심히 모이고 음식을 함께 드는 집에서도 기도를 바쳤다는 사실이 중요하다. 기도는 바로 스승이신 그리스도를 가장 잘 닮을 수 있는 방법이다. 실제로 주님께서도 늘 제자들에게 기도하는 모습을 보여 주셨다. 즉 교회가 인간적인 모임이 아니라 신앙 모임의 성격을 띠는 것은 함께 기도하는 데 있었다. 기도는 공동체 구성원들을 일치시키고 그리스도 모습을 닮아가는 행위이다. 그리스도교 공동체 신자들이 신명 나는 순박한 마음으로 빵을 나눌 수 있었던 원동력, 그리고 그리스도교 실존이 변질되지 않고 끝까지 살아남을 수 있게 하는 힘이 되었다. 바로 이 기도가 사도들의 가르침, 교회의 친교, 전례적인 빵의 나눔을 가능케 한 힘의 기본이 되었다. 따라서 교회가 교회다운 모습, 그리고 세속 안에서 힘 있게 빛과 소금의 역할을 충실히 하기 위해서는 기도하는 공동체의 모습을 지녀야 한다. 기도하지 않는 공동체는 그저 인간적인 모임으로 전락할 가능성이 많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의 가정도 예외는 아니다. 크고 작은 어느 공동체든 문제가 없을 순 없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그 문제의 해결 방법이 어떤 것이냐 하는 것이다. 교회의 구성원은 기도로써 사랑과 일치, 용서의 관점, 즉 그리스도의 관점에서 문제를 풀어나가야 한다. 인간이 해결할 수 없는 문제도 기도를 통해 쉽게 해결될 수도 있다. 초대 교회는 신자 숫자가 많지 않았지만 박해받는 교회였다. 그런데 사도행전을 보면 초대 교회는 세상에서 박해를 받았지만 동시에 칭송도 받았다. “하느님을 찬미하며 온 백성에게서 호감을 얻었다. 주님께서는 날마다 그들의 모임에 구원받을 이들을 보태어 주셨다”(사도 2,47). 초대 교회의 신자들은 모진 박해 속에서도 함께 모여 기도하고 서로 격려하면서 어려움을 극복할 수 있었다고 본다. 오늘날 우리도 초대 교회의 모습을 본받도록 꾸준히 노력해야 할 것이다. 허영엽 신부(서울대교구 홍보국장) ※그동안 ‘성경 속 기도’를 집필해 주신 허영엽 신부님과 애독자분들께 감사드립니다. 평화신문2016.05.17

수원가톨릭대, '수가대 신학총서' 첫 발간 저명한 구약 성경 주석가 롤랑 드 보 신부의 책 번역 출간 수원가톨릭대(총장 유희석 신부)는 ‘수가대 신학총서’의 첫걸음으로 「구약성경의 제도들 Ⅰ」<사진>을 펴내고, 9월 28일 경기 화성 수원가대 하상관에서 발간 기념 콘퍼런스를 열었다. 김건태(수원교구 안산대리구장) 신부가 번역한 「구약성경의 제도들 Ⅰ」은 교회 역사상 가장 위대한 구약성경 주석가이자 역사가, 고고학자로 일컬어지는 롤랑 드 보(1903~1971, 도미니코 수도회) 신부가 1957년 저술한 책이다. 구약성경 시대의 유목생활, 가족ㆍ시민ㆍ군대 사회 제도 등을 소개하고 혼인ㆍ장례식 풍습, 사회 구성원, 왕국의 행정, 법과 정의 등을 상세하게 설명한다. 김건태 신부는 콘퍼런스에서 “유학 중이던 1979년 이 책을 처음 읽고 ‘언젠가 번역해 한국에 소개하겠다’고 다짐했는데, 40여 년 만에 현실이 됐다”며 “이번 총서 발간을 시작으로 좋은 총서가 많이 나와 신학생과 신자들에게 도움이 되길 바란다”고 말했다. 수원가대는 2019년까지 「구약성경의 제도들 Ⅱ」,「선교란 무엇인가? 선교의 한국적 성찰」,「교리교육신학의 근본문제」,「가톨릭 실천신학 입문」,「해석학적 신학」 등 총서 10권을 발간할 예정이다. 수가대 총서위원장 곽진상(수원 가톨릭대) 신부는 “지나치게 전문적이거나 난해한 신학 서적이 아니라 신학생들과 수도자들, 신학에 관심 있는 평신도들이 꼭 읽어야 할 필독서를 발간할 것”이라며 “신학의 각 분야에서 다루는 기본적인 질문과 주제들을 제시하고, 그것이 오늘날 우리에게 어떤 도움을 주는지 숙고하도록 돕는 ‘신학의 기초-개론서’를 펴내겠다”고 밝혔다. 이날 콘퍼런스에서는 수원가대 출반부의 신간 「묵상기도와 관상기도」(티모시 갤러허),「영성상담의 실제」(엘피 힌터코프)도 소개됐다. 「묵상기도와 관상기도」는 이냐시오 기도의 두 가지 기본 방법인 묵상기도와 관상기도를 안내하고, 「영성상담의 실제」는 ‘포커싱’(내면 집중 방법)을 활용해 영성상담을 하는 방법을 설명한다. 두 권 모두 안기민(수원가톨릭대) 신부가 번역했다. 1984년 개교한 수원가대는 1990년 출판부를 설립, 26년 동안 신학서적, 연구서적 31권을 발간하며 신학 연구에 앞장서왔다. 구매 문의 : 031-290-8814 수원가대 출판부 임영선 기자 hellomrlim@pbc.co.krcpbc2016.09.30
![[성경 속 기도] (12) 바오로 사도의 기도](//cpbc.co.kr/CMS/newspaper/2016/04/rc/632355_1.0_titleImage_1.jpg)
[성경 속 기도] (12) 바오로 사도의 기도힘들고 어렵더라도 감사의 기도는 꼭! 카라바조 작, ‘성 바오로의 개종’, 1600~1601년, 산타 마리아 델 포폴로 성당, 로마 이탈리아. 바오로 사도는 좁은 팔레스티나를 벗어나 소아시아와 그리스 반도를 거쳐 로마제국까지 3차에 걸친 엄청난 선교 여행을 떠났다. 그는 하느님을 전하면서 그리스도교를 인류 전체를 향한 세계 종교로 변화시킨 이방인의 사도이다. 독실한 유다교 가정에서 태어나 철저한 바리사이파로 처신했던 사울(회개 이전의 이름)은 유다계 그리스도인들의 대표자였던 스테파노가 예루살렘에서 순교할 때 처형에 가담했다. 당시 그는 광신적 유다교인이었으며 반 그리스도교적 박해자였다. 시리아 지방의 다마스쿠스 교회를 박해하기 위해 원정을 갈 만큼 교회 박해에 앞장섰다.그런데 다마스쿠스 교회를 박해하러 가던 중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 회심하게 되고, 그 후 전 생애를 부활하신 예수를 주님으로 선포하는 데 바쳤다. 예수님 생애 동안 바오로가 그분을 직접 상봉했다는 역사적 흔적은 전혀 나타나지 않는다(갈라 1,13). 사울은 다마스쿠스로 가던 중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개인적으로 만나고 체험한 것이다. 그는 그 계기로 그리스도께 사로잡힌(필리 3,12) 사람이 되면서 전혀 다른 인생관, 신앙관을 갖게 되었다. 그의 인생처럼 바오로 사도의 기도는 온통 그리스도로 가득 차 있다. 그는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의 마음을 온전히 지배하도록 기도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또 예수님이 마음의 모든 영역, 생각의 모든 영역을 온전히 지배하는 주인이 되기를 원한다.“그래서 우리도 그 소식을 들은 날부터 여러분을 위하여 끊임없이 기도하며 간청하고 있습니다. 곧 여러분이 모든 영적 지혜와 깨달음 덕분에 하느님의 뜻을 아는 지식으로 충만해져, 주님께 합당하게 살아감으로써 모든 면에서 그분 마음에 들고 온갖 선행으로 열매를 맺으며 하느님을 아는 지식으로 자라기를 빕니다”(콜로 1,9-10). 그래서 그의 기도는 말할 수 없이 깊은 경배와 감사와 수고로 가득했다. 항상 모든 서간에서도 감사의 기도를 잊지 않았다. 비록 형편이 어렵고 힘들더라도 감사의 기도를 등한히 하지 않았다. “우리는 여러분을 위하여 기도할 때면 늘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느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그리스도 예수님에 대한 여러분의 믿음과 모든 성도를 향한 여러분의 사랑을 우리가 전해 들었기 때문입니다”(콜로 1,3-4). 바오로 사도에게는 기도가 자연스럽고 지속적인 것이었고 기도하던 사람들 속에서 수없이 많은 감사의 조건을 찾아냈다. 바오로 사도의 기도는 사목자로서 온전히 교회를 위한 기도였다. 그는 자신의 이익을 위해 이기적으로 기도하지 않았다. 그의 기도 대부분은 다른 사람들과 그들의 필요에 관한 것이었고 특히 자기가 복음을 전하고 세례를 준 신자들과 설립한 신생 교회들의 필요에 관한 것이 많았다. 교회가 발전하기 위해서는 필연적으로 어려움과 고통을 겪어야 했다. 그는 사목자로서 안타까운 마음을 가지고 그 교회들을 도와주기 위해 노력했고 기도했다.“그리고 기도할 때마다 늘 여러분 모두를 위하여 기쁜 마음으로 기도를 드립니다. 여러분이 첫날부터 지금까지 복음을 전하는 일에 동참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가운데에서 좋은 일을 시작하신 분께서 그리스도 예수님의 날까지 그 일을 완성하시리라고 나는 확신합니다”(필리 1,3-6). 허영엽 신부(서울대교구 홍보국장) 평화신문2016.04.27
![[전영준 신부의 가톨릭 영성을 찾아서] (81) 17세기 ④ - 프랑스 절대주의와 갈리아주의](//cpbc.co.kr/CMS/newspaper/2018/06/rc/725446_1.0_titleImage_1.jpg)
[전영준 신부의 가톨릭 영성을 찾아서] (81) 17세기 ④ - 프랑스 절대주의와 갈리아주의국가와 교회의 다툼으로 혼란에 빠진 영성생활 16세기 유럽 본토에서 종교개혁주의자들이 성경과 그리스도교 교리 해석의 차이를 내세우면서 개신교 설립의 기회를 제공했다면, 동시대에 영국 왕 헨리 8세(Henry VIII, 재위 1509~1547)는 이혼과 재혼을 위한 개인 가정사 때문에 가톨릭교회와의 단절도 마다치 않았습니다. 영국 의회는 1534년에 ‘수장령’을 통해 영국에서 국왕만이 영국 교회의 유일한 우두머리라고 선언하면서 영국 국교회의 길을 열었습니다. 17세기에 프랑스 왕은 강력한 군주주의를 내세우면서 또 다른 가톨릭교회 수장이 되려고 시도했습니다. 세속 군주들의 이러한 시도는 가톨릭교회 수호와 신앙 보존에 도움이 되기도 했지만, 그리스도교 영성생활에 걸림돌이 되기도 했습니다.프랑스 절대주의프랑스는 유럽에서 봉건제도를 가장 잘 완성시킨 나라였으며, 봉건제도에 따라서 신하 국가인 영국의 종주국이었습니다. 프랑스 왕 필리프 4세(Philippe VI, 재위 1328~1350)가 유럽 본토에 있는 영국령을 문제 삼아 몰수하려고 하자, 영국 왕 에드워드 3세(Edward III, 재위 1327~1377)는 프랑스 왕위계승권의 우위를 앞세워 자신을 프랑스 왕으로 선포하면서 양국 사이에 ‘백년 전쟁’(1337~1453년)이 발발했습니다. 이 전쟁의 결과로 양국에서 봉건 귀족들은 몰락했으며, 왕의 권력은 강화되어 중앙집권화의 토대를 마련했습니다. 백년 전쟁 이후에 영국은 자국 내 왕위계승 문제로 귀족 간에 ‘장미 전쟁’(1455~1485년)을 치르면서 봉건 귀족들이 한 번 더 몰락했고, 헨리 7세(Henry VII, 재위 1485~1509)가 왕으로 즉위하면서 왕권을 더욱 강화할 수 있었습니다. 프랑스에서는 백년 전쟁이 끝날 무렵의 왕이었던 샤를 7세(Charles VII, 재위 1422~1461)부터 17세기 초에 앙리 4세(Henri IV, 재위 1589~1610)까지 왕권 강화와 중앙집권화를 위한 노력이 성공을 거두었습니다.프랑스 왕권은 종교 영역에도 크게 관여했습니다. 16세기 종교개혁주의자들의 주장과 활동은 프랑스에도 영향을 끼쳤으며, 프랑스 개신교 신도들은 처음에 루터주의에 관심을 갖다가 점점 칼뱅주의로 관심을 옮겼습니다. 프랑스 칼뱅파 개신교 신도들은 위그노(Huguenot)라고 불렸는데, 프랑스 왕 프랑수아 1세(Franois I, 재위 1515~1547)는 위그노에게 관대했으나 프랑수아 2세(Franois II, 재위 1559~1560)는 위그노를 엄하게 규제했습니다. 한편 샤를 9세(Charles IX, 재위 1560~1574)를 섭정했던 이탈리아 피렌체 메디치 가문 출신의 가타리나(Caterina de’ Medici, 1519~1589)는 1562년 1월 위그노에게 제한적인 관용을 베푸는 내용을 담은 ‘생제르맹(Saint-Germain) 칙령’을 발표했습니다. 그런데 가톨릭교회를 대표하던 기즈(Franois de Guise, 1519~1563) 공작이 그 해 3월에 파리 근교 바시(Vassy)에서 예배를 보던 위그노 신도들을 학살했던 일이 계기가 되어 가톨릭교회와 위그노 사이에 종교 전쟁인 ‘위그노 전쟁’(1562~1598)이 발발했습니다. 게다가 1572년에 있었던 위그노 신도들에 대한 ‘성 바르톨로메오 축일 대학살’의 배후로 가타리나가 지목되자 가톨릭과 개신교 사이의 갈등은 더욱 고조되었습니다.앙리 3세(Henri III, 재위 1574~1589)가 죽자 위그노 신도였던 나바라의 앙리(Henri de Navarre, 1552~1610)가 앙리 4세(Henri IV, 재위 1589~1610)로 즉위했으나, 개신교 신도라는 이유로 파리 시민들은 그가 수도로 입성하는 것을 거부했습니다. 앙리 4세는 1593년 가톨릭 신자로 다시 개종하고 1594년 샤르트르(Chartres)에서 대관식을 치르고 나서야 파리로 입성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개신교에 애정이 있었던 앙리 4세는 1598년에 위그노의 종교 자유를 보장하는 ‘낭트(Nantes) 칙령’을 발표했습니다. 칙령은 위그노 신도들이 파리 이외의 지역에서 예배할 수 있도록 보장했으며, 그들의 안전 보장을 위한 요새를 만들고 비용도 지불한다고 선포했습니다. 이 칙령의 반포와 함께 36년간의 위그노 전쟁이 끝났습니다. 교황 클레멘스 8세(Clemens PP. VIII, 재임 1592~1605)는 앙리 4세가 개신교 신앙의 자유를 허용한 것에 대해서 강력하게 비난했으나 프랑스 왕의 결정을 바꿀 수는 없었습니다. 루이 14세. 갈리아주의한편 절대 왕권을 바랐던 루이 14세(Louis XIV, 재위 1643~1715)는 교황청의 지지를 얻어내고자 가톨릭 국가를 재건할 계획으로 1685년에 ‘퐁텐블로(Fontainebleau) 칙령’을 발표, 과거 낭트 칙령을 폐지하고 개신교를 전면 금지시켰습니다. 이로 인해 활동에 제한을 받게 된 많은 위그노 신도들은 해외로 이주했습니다. 가톨릭교회는 17세기 내내 프랑스에서 개신교 신앙의 자유가 허용되었던 상황을 바꾼 루이 14세에게 찬사를 보냈습니다.하지만 왕권 강화를 꿈꾸던 프랑스 왕과 가톨릭교회가 친분 관계를 지속할 수 없었습니다. 루이 14세와 교황 인노켄티우스 11세(Innocentius PP. XI, 재임 1676~1689)는 프랑스 내에 주교 임명권 문제로 자주 다투었습니다. 루이 14세는 1681년에 파리에서 프랑스 가톨릭교회 성직자 회의를 소집했으며, 모(Meaux)의 교구장 보쉬에(Jacques Bnigne Bossuet, 1627~1704)가 작성한 「네 가지 조항에 대한 선언문(Dclaration des Quatre Articles)」을 70명의 성직자들이 지지하면서 ‘갈리아주의’(Gallicanism)를 강조했습니다. 즉, 프랑스 왕은 세상사에 있어서 교황의 간섭을 받을 필요가 없고 교황보다 공의회가 우위에 있으며, 과거 프랑스 교회가 독립적으로 누리던 자유는 여전히 유효하고 교황의 결정은 바뀔 수 있다는 것이었습니다.결국 가톨릭교회는 강력하게 항의했으며, 교황 인노켄티우스 12세(Innocentius PP. XII, 재임 1691~1700)도 루이 14세를 설득해서 1693년에 갈리아주의 4개 조항의 폐지를 이끌어 냈습니다. 하지만 프랑스 왕과 성직자들이 합심해 프랑스 국내 문제에 대해 교황청의 간섭을 거부하려고 했던 시도는 프랑스 국교회가 탄생할 뻔한 사건이었으며, 프랑스 내에서 영향력이 오랫동안 지속되었습니다.17세기 프랑스에서 절대군주주의적인 국가관으로 시작되었던 갈리아주의(Gal- licanism)는 국수주의적인 교회관으로 발전하면서 18세기에 독일에서 주교단 지상주의(Episcopalism), 페브로니아주의(Febronianism), 요셉주의(Josephinism)로 확산되었으나 점점 이단적인 모습을 드러내면서 외면받게 되었으며, 19세기에 교황지상주의(Ultramontanism)가 그 자리를 대신했습니다. 하지만 교회와 국가가 주도권 다툼을 하고 있는 동안에 가톨릭교회 당국이 주도적으로 그리스도인 영성 생활을 살피지 못하자, 신자들은 스스로 대중 신심을 찾아서 발전시키거나 몇몇 영성작가들의 가르침을 통해 영성생활을 실천하려고 노력했습니다.<가톨릭대 신학대학 영성신학 교수> 백영민2018.06.27
![[1988-2018 복음의 기쁨으로] 4. 하느님의 부르심, 성소 증진으로 가는 길 (하)](//cpbc.co.kr/CMS/newspaper/2018/06/rc/725434_1.0_titleImage_1.jpg)
[1988-2018 복음의 기쁨으로] 4. 하느님의 부르심, 성소 증진으로 가는 길 (하)성소 증진… 가정 본당 교구의 ‘삼위일체적 관심’ 필요 한국 천주교회의 신앙 선조들은 신앙인의 발자취가 주위 이웃들은 물론 후손들에게도 이정표가 돼야 한다는 마음가짐으로 살았다. 예전엔 묵주기도를 ‘묵주신공(珠神功)’으로 부를 정도로 기도를 개인의 영적 수련시간으로 간주했다. 하느님과 만나는 유일한 방법인 ‘기도’를 매우 귀중하게 여겼다. 그래서 한국 교회가 짧은 시간 많은 순교자를 낸 강한 믿음을 지닌 교회로 성장할 수 있었다는 것이 교회 역사가들과 사목자들의 공통된 의견이다. 신앙 선조가 보여준 이러한 믿음과 행실은 자연스레 ‘성소 증진’이란 결실을 보았다. 서울대교구 성소국장 조재형 신부 인터뷰를 통해 성소 증진을 위한 교회의 노력과 반성을 살핀다. 또한, 꾸준히 사제를 배출해온 서울대교구 둔촌동본당(주임 이기헌 신부) 성소후원회를 탐방한다. 조재형 신부 “성소 증진을 위해서는 가정과 본당, 교구의 ‘삼위일체적 관심’이 필요합니다.”6월 14일 서울대교구 성소국장실에서 만난 조재형 신부는 “하느님께 맏배를 봉헌하는 마음으로 유능하고 신심 좋은 자녀를 하느님께 봉헌하는 가정이 많아져야 한다. 본당과 교구가 함께 노력할 때 성소 증대를 가져올 수 있다”며 이같이 말했다.지난 30년간 한국 천주교회의 사제와 수도자 수는 크게 늘었다. 1987년 말 기준 사제 수는 1452명에서 2017년 말 5360명으로 약 3.7배 늘었고, 수도자 수는 같은 기간 5154명에서 1만 1736명으로 2.27배 증가했다. 가톨릭대(서울)와 대구ㆍ광주가톨릭대 등 4개뿐이던 신학대학도 7개교로 늘었다.“예전엔 교우촌에서 성소자가 많이 났습니다. 서울대교구장 염수정 추기경님을 비롯해 최창무(전 광주대교구장) 대주교님, 손희송(서울대교구 총대리) 주교님도 교우촌 출신이시지요. 교우촌에서 기도 소리가 끊이지 않았던 것이 성소의 비결입니다. 저 역시 5대째 천주교를 믿는 가정에서 태어났습니다. 제 여동생도 수도자입니다.”조 신부는 “사제나 수도자가 되는 것은 하느님의 부르심에 응답하는 것”이라며 “부르심에 응답하기 위해선 성소자 개인의 인성과 지성, 영성을 골고루 키워야 한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성소 증대를 위해서는 제도와 열정이 요구된다고 강조했다.“30년 전에는 제도가 확립되지 않았습니다. 그렇지만 열정은 가득했지요. 지금은 제도가 정립됐지만, 열정은 예전만 못합니다. 정하상(바오로) 성인은 사제 영입을 위해 압록강을 건넜고, 파리외방전교회 사제들은 복음을 전하고자 순교를 각오하고 조선에 입국했지요. 교회는 제도와 열정이 함께해야 합니다. 조직화한 양성 이전에 학생들의 마음을 여는 관심과 사랑이 함께하는 양성이어야 합니다.”조 신부는 이어 “교황청에서 사제양성 지침을 새롭게 만들었고, 한국 교회도 한국 사제 양성 지침을 다시 만들고 있다”며 “변화된 양성의 핵심은 ‘그리스도와 동화되는 것’이다. 인성ㆍ지성ㆍ영성ㆍ사목이 조화를 이루는 틀을 구상하고 있다”고 설명했다.2013년 성소국장으로 부임한 조 신부는 부임 직후 성체성사가 성소의 중심이 되도록 하고자 예신(예비신학생) 모임 때 미사를 봉헌하도록 했다. 또한, 매체를 활용한 성소자 발굴에도 나섰다. 성경의 부르심에 대한 주제를 바탕으로 예신 모임 교재를 발간하는 한편, 2015년부터 2년간 가톨릭평화방송(cpbc) TV와 함께 ‘다큐멘터리 사제’를 제작하기도 했다.“예수님께선 씨뿌리는 이들의 비유를 말씀하셨지요. 본당이 ‘밭’입니다. 주임ㆍ보좌 신부님들이 성소자들을 잘 키우는 게 중요합니다. 교구는 사제가 되도록 돕지만, 사제 성소를 키우는 것은 본당과 가정입니다. 사제들은 ‘평신도가 바라는 사제상’을 다시금 기억하고 그러한 사제가 되도록 노력하길 희망합니다.”이힘 기자 lensman@cpbc.co.kr서울대교구 둔촌동본당, 단원 150여 명 적극적 활동으로 신학생 증가서울대교구 둔촌동본당의 신학생 수는 모두 11명.(6월 21일 현재) 서울대교구 소속 신학생이 8명, 나머지는 한국외방선교회 소속이다. 둔촌동본당은 서울대교구 230여 개 본당 중에서 신학생이 많은 본당 중 하나다. 교구 신학생 수로만 보면 양천본당(10명)에 이어 두 번째다. 더욱 놀라운 것은 신학생 수가 꾸준히 유지되고 있다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둔촌동본당은 뚝심 있게 성소자를 배출하는 ‘성소 못자리’임이 틀림없다.둔촌동본당 성소후원회는 2009년 대림시기에 재창단해 오늘에 이르고 있다. 본당 출신 사제 부모들이 “성소후원회는 꼭 있어야 한다”고 제안한 덕분이다. 성소후원회가 없었을 때는 본당 사목회가 성소후원회의 역할과 일을 대신했다. 둔촌동본당 성소후원회는 140명의 단원과 15명의 행동단원으로 구성돼 있다. 다른 성소후원회와 다른 점은 해외선교 사제 양성과 지원에 아주 적극적이라는 점이다.성소후원회 정의영(프란치스카 로마나) 회장은 “우리 본당 출신 양금주(토마스, 멕시코 선교) 신부님이 1994년 한국외방선교회 사제로 서품되면서부터 본당 신자들 사이에서 해외선교 사제 양성에 관심이 높아졌다”며 “지금도 한국외방선교회 신학생이 많은 것은 이러한 영향 덕분”이라고 말했다.회원들은 본당 성소 계발의 또 다른 비결로 사목자들의 ‘꾸준한 관심과 열정’을 꼽는다. 성소자 발굴과 지원에 대한 본당 주임과 보좌 신부들의 지속적인 관심과 열정은 청년회와 주일학교 교사부의 활성화를 가져왔고, 이는 젊은이들에게 영향을 끼쳐 성소에 대한 관심으로 이어졌다는 것이다. 최영희(체칠리아) 전 성소후원회장은 “본당에 신학생 숫자가 많다 보니 방학 때마다 열리는 캠프 등에서 보좌신부님과 학사님, 초ㆍ중ㆍ고 주일 학생들의 만남과 어울림이 자연스럽게 펼쳐진다”며 “이러한 만남 덕분에 청소년들도 자연스럽게 성소에 대해 생각하는 것 같다”고 말했다. 이힘 기자평신도가 바라는 사제상침묵 속에 그리스도의 향기가 나는 사제겸손한 사제성사를 성실하게 집전하는 사제강론 준비를 잘하는 사제말을 정중하게 하는 사제어른들을 공경하고 아이들을 사랑하는 사제 백영민2018.06.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