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 속 도시] (45) 키레네](//cpbc.co.kr/CMS/newspaper/2015/05/rc/571797_1.0_titleImage_1.jpg)
[성경 속 도시] (45) 키레네예수님 십자가 대신 진 시몬의 고향 리비아의 키레네는 고대 그리스 도시로 신전, 주거 지역 등 유적이 많이 남아있다. 출처=heritage.unesco.or.kr 키레네는 리비아에 위치하고 키레나이카(Cyrenaica)로 불리는 중요한 고대 유적지 도시다. 현재 리비아에서 비교적 잘 보존된 고대 헬라(그리스) 도시로 신전, 무덤, 아고라, 원형경기장, 극장 등의 모습이 남아 있다. 가파른 절벽 아래의 지중해 바다와도 아주 잘 어울리는 풍광이다. 키레네는 본래 헬라인이 아프리카 북쪽 해안에 건설한 식민도시였다. 지금의 리비아 동부 지역에 해당한다. 이 키레네가 성경에서 등장하는 것은 예수님의 마지막 십자가의 길에서다. 사형 선고를 받고 십자가를 지고 가던 예수님은 너무 지쳐 있었다. 여러 번 십자가의 무게에 눌려 쓰러진 상태였다. 골고타를 향해 오르막이 시작되는 곳에서 로마 병사들은 한 사람을 불러 예수님의 십자가를 지게 했다. “그들은 지나가는 어떤 사람에게 강제로 예수님의 십자가를 지게 하였다. 그는 키레네 사람 시몬으로서 알렉산드로스와 루포스의 아버지였는데, 시골에서 올라오는 길이었다”(마르 15,21).바오로 사도는 로마 신자들에게 보낸 서간에서 끝인사와 권고 중 자신의 선교 활동에 도움을 준 이들을 하나하나 열거하고 있다. 그중에서 “주님 안에서 선택을 받은 루포스, 그리고 나에게도 어머니와 같은 그의 어머니에게 안부를 전해 주십시오”(로마16,13)라며 루포스와 그의 어머니에 대해 언급한다. 루포스의 어머니는 바로 예수님의 십자가를 대신 지었던 키레네 사람 시몬의 아내이다. 그들 가족은 바오로 사도의 감사인사를 받을 만큼 초대교회의 열심한 교우로 활동하고 있었다.키레네는 예루살렘에선 대단히 먼 곳이다. 그런데도 당시에 유다인이 많이 살았다고 전해진다. 키레네는 본래 헬라 신화에 등장하는 샘의 여신 이름이다. 키네레는 기원전 7세기에는 인구 20만이 넘을 정도로 발전했고 헬라 지역에 주로 곡물을 공급하던 곡창지대였다. 기원전 96년, 로마의 지배를 받게 된 후 북아프리카의 중심 도시로 자리 잡고 있었다. 로마 지배하의 2세기 동안은 번영을 누렸으나 서기 115년에 일어난 키레네 유다인의 반란 후 점차 쇠퇴하기 시작했다. 그러다 365년 대지진으로 폐허가 됐다. 마침내 642년 아랍인들이 정복하면서 키네레는 유목민이 머무는 잊힌 도시로 전락했다. 리비아에서는 드물게 대추야자와 같은 열대나무와 오렌지 및 올리브 과수원이 산재해 있고, 주변 지세도 리비아 사막과는 다르게 굴곡이 이어지는 해안의 모습을 지니고 있다. 현재 발굴된 유적지에는 헬라 로마 시대의 신전과 주거지역, 원형경기장을 비롯한 공공건물들이 많이 복원됐다. 유적지를 통해 당시의 화려한 모습을 어느 정도 짐작하게 한다. 도시 북쪽에는 알렉산드리아의 카이사레이온을 본뜬 바실리카(교회)와 광장의 모습이 남아있고, 훌륭한 모자이크로 장식된 2세기의 저택도 발굴됐다. 로마 시대 터의 중심지에는 기원전 6세기 후반에 세워진 거대한 도리아식 건물인 제우스 신전이 있었는데, 지금은 거대한 도리아식 기둥만이 남아 있다. 현재는 아무도 살고 있지 않는 곳이다. 하지만 한때는 화려한 영화를 누렸던 도시국가였던 이곳에서 과거의 영광을 드러내려는 듯 계속해서 화려한 유적들이 발굴되고 있다. 허영엽 신부(서울대교구 홍보국장) 평화신문2015.05.19

예수회 성인들의 생애와 영성 성 이냐시오 로욜라 (11)여덟 번의 이단 검열과 3주간의 옥살이 비록 예루살렘에 머무는 것이 불가능해졌다고 하더라도 영혼을 돕겠다는 이냐시오의 근본적인 열망은 지속됐다. 이냐시오는 영혼을 돕기 위해서 공부를 더 하기로 했다. 공부를 더 하는 것이 왜 영혼들을 돕는 길인지 자서전의 본문은 정확히 전해 주지 않지만 이렇게 추정할 수 있을 것이다. 카르도넬 강가에서 이냐시오는 영적 조명을 받았고 아직 완성본은 아니었지만 영신수련으로 사람들을 돕고 있었다. 이때까지만 해도 영신수련으로 사람들을 돕는 것은 개인적 차원에서 이루어졌다. 사람들을 더 돕기 위해서는 영신수련이 공적인 차원으로도 발전해야 했다. 그러기 위해서는 「영신수련」 책자를 교회에서 인준받아야 할 필요가 있었다. 인준 과정에서 교회는 성경과 성전을 바탕으로 「영신수련」을 심사할 것이다. 이냐시오가 공부하게 된 이유는 이러한 점을 염두에 두고 있었을 것이다. 이냐시오는 서른세 살에 라틴어 문법 기초를 배우기 위해 ‘어린아이’들과 함께 교실에 앉아 공부했다. 바르셀로나에서 1524년부터 1526년까지 2년간 문법을 배운 후 철학이 주요 과목이었던 알칼라대학에 입학했다. 그는 여기에서 공부뿐만 아니라 사도적 열정도 유지했다. 그래서 곧 네 명의 동료를 모았고 이들과 함께 살았다. 이냐시오는 여전히 영신수련을 지도했고 교리도 가르쳤다. 교회의 중개 거부하는 조명주의이 시기의 이냐시오의 생애와 관련해 특징적인 부분은 이냐시오가 조명주의자(Alumbrados)로 의심을 받은 것이다. 이 의심은 예수회 설립 초기까지도 계속됐다. 조명주의는 스페인에서 시작된 이단적 영적 현상이다. 조명주의자들에게는 몇 가지 특징이 있었다. 그들은 자신이 성령에 의해 조명받았다고 주장했다. 모든 것을 포기하라고 강조했다. 하느님께서 모든 것을 해주실 것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철저히 수동적이다. 이들은 정신 기도를 중요시했다. 정신 기도가 하느님과 직접적인 접촉을 가능하게 하고 이것이 하느님과 일치로 이끌 것이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하느님과의 관계에서 교회의 중개를 거부하고 심지어 교회가 필요하지 않다고 주장했다. 모든 종류의 종교적 예식, 성체 공경, 성인들을 통한 전구 등을 거부했다. 이러한 행위는 오히려 하느님께로부터 자신을 멀어지게 한다고 주장했다. 베아타(beata)라고 불린 그들의 리더는 바오로 사도보다도 그리스도교 사상에 더욱 조예가 깊은 인물로 간주됐다. 조명주의자들은 교회가 아닌 개인 집에서 모임을 가졌으며, 회원이 누구인지는 비밀로 했다. 교회는 이들을 의심의 눈초리로 쳐다보기 시작했고, 급기야는 1525년 알론소 만리케(Alonso Manrique)를 종교재판관으로 임명했다. 스페인의 종교재판소는 이들을 찾아내어 조사하고 처리하는 데에 커다란 힘을 기울였으며, 알칼라대학을 포함해서 톨레도교구 전역에서 매우 광범위한 조사가 이뤄졌다. 이냐시오가 조명주의자가 아닌 이유왜 이냐시오는 조명주의자로 오해받았을까? 이냐시오가 알칼라로 공부하러 갔던 바로 그다음 해인 1526년은 무엇보다도 매우 민감한 시기였다. 그런 시기에 조사관의 눈에 이냐시오는 매우 이상하게 보였다. 이냐시오는 알칼라에 도착한 후 맨발에 모자 달린 평범한 수단을 입고 십계명, 대죄, 성령의 힘 등을, 바오로 사도나 다른 성인들의 저술을 강론했다. 강론을 들은 사람 중 어떤 이들은 일상적이지 않은 영적 신체적 현상을 겪기도 했다. 이때 이냐시오 동료 중의 몇몇은 조명주의자로 고발당한 상태이기도 했다. 이러한 외적인 측면과 더불어 「영신수련」 15번에 나타나 있는 이냐시오의 근본적 신념, 즉 “창조주 하느님이 몸소 그 열심한 영혼과 통교하신다”는 부분은 조명주의자들이 주장하는 노선과 같은 선상에 있었던 것처럼 보였다. 이에 더해 관상과 활동을 결합하려는 열망, 하느님 사랑에 대한 감각적 경험, 삶의 일상적 결정 안에서 신적 섭리의 가능성에 대한 믿음 등은 이냐시오와 조명주의자들에게 공통된 부분이기도 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이것이 곧 이냐시오가 조명주의자라는 것을 말해 주지는 않는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첫째, 이냐시오가 조명주의자였다면 이 사실은 알칼라의 종교재판소에서 발견됐겠지만, 종교재판소는 이냐시오에게 아무런 혐의도 발견할 수 없었다. 둘째, 이냐시오는 조명주의와 아무런 관계를 가진 적이 없었다. 조명주의는 1529년 당시 매우 대중적이었는데, 그 해에 이냐시오는 이미 파리에 있었기 때문이다. 셋째, 이냐시오의 가르침이 조명주의의 가르침과 비슷할 수는 있으나 이것이 본질적인 면에서가 아니라 표면적으로 비슷해 보일 뿐이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이냐시오와 조명주의자들이 교회를 대하는 태도가 전적으로 달랐다. 이냐시오는 교회의 사람으로서 교회를 통해 하느님과의 일치를 추구했지만, 조명주의자들은 교회의 중개적 역할을 거부했다. 또 조명주의자들과는 다르게 이냐시오는 자신의 영적인 사정에 관한 생각을 절대 숨기지 않았다. 종교재판관들은 이냐시오를 여덟 번이나 검열했으나 결국 이냐시오는 조명주의자가 아니라고 결론내렸다. 알칼라에서 여러 일을 겪은 이냐시오는 살라망카로 갔다. 살라망카에서는 약 2개월 정도 머물렀는데, 그중에서 약 3주 동안은 감옥에 갇히는 등 힘든 일을 겪었다. 이냐시오가 조명주의와 관계됐다는 의심 때문이었다. 이런 모든 일은 이냐시오에게 영혼을 돕는 데 있어 교회로부터 공식적으로 인준된 방식의 중요성을 다시 한 번 깨닫게 된 계기가 됐다. 그러기 위해서는 공부에 더욱 매진해야 한다는 결심을 하게 됐다. 결국, 이냐시오는 파리로 가서 공부하기로 결심했다. 영혼을 돕겠다는 목적을 위해서 공부를 할 것이고, 자신과 목적이 같은 동지들을 모으겠다고 새롭게 결심했다. 백영민2017.09.19
![[전영준 신부의 가톨릭 영성을 찾아서] (18) 4세기 ⑤ - 니사의 그레고리우스의 신비 사상](//cpbc.co.kr/CMS/newspaper/2017/03/rc/676700_1.0_titleImage_1.jpg)
[전영준 신부의 가톨릭 영성을 찾아서] (18) 4세기 ⑤ - 니사의 그레고리우스의 신비 사상갈망과 열망으로 사랑한다면 신비체험도 가능카파도키아의 3대 교부 중 한 분이며 바실리우스의 친동생이었던 니사의 그레고리우스(Gregorius Nyssenus, 335/40~394 이후)는 수도 생활 신학뿐 아니라, 신비 생활 신학 정립에 탁월한 기여를 했습니다. 그레고리우스는 오리게네스의 제자로서 오리게네스 예찬자였지만 4세기 삼위일체 교리 형성 과정에서 신 플라톤 사상의 영향으로 불거진 이단 논쟁을 극복하는 가운데 오리게네스와 닮은 듯하면서도 닮지 않은 신비 신학을 구축했습니다. 오히려 그레고리우스는 삼위일체 교리 논쟁의 영향으로 필론 및 중기 플라톤 사상과 닮은 부정신학의 관점에서 신비 신학을 전개했습니다.니사의 그레고리우스.수도 생활에 대한 권고 친형님이었던 바실리우스는 평신도 그리스도인으로서 결혼 생활을 하는 친동생 그레고리우스에게 동정 생활을 주제로 한 작품 저술을 부탁했습니다. 따라서 그레고리우스는 저서 「동정론(De Virginitate)」에서 하느님께서 정욕 없이 당신의 모상을 닮은 인간을 창조하셨다는 창조 신학의 관점으로 동정의 가치를 조명했습니다. 특히 그레고리우스는 삼위일체 신비가 동정 생활의 기초 원리라고 강조했습니다. 이후 그레고리우스는 저서 「마크리나의 생애(Vita Macrinae)」에서 큰누이 마크리나를 완덕에 다다른 완벽한 수도자의 모델로 소개하면서 수도자가 완덕에 다다르기 위한 통합적인 영적 여정을 제시했습니다. 결국 수도 생활을 후원하던 바실리우스 사망 이후에 그레고리우스는 수도자를 돌보고 후원하는 일을 도맡게 되었습니다. 또한 그레고리우스는 저서 「히포티포시스(Hypotyposis)」에서 수도자의 영적 여정 및 수도 공동체의 올바른 생활을 언급했습니다. 특히 그레고리우스는 수도 공동체가 신비 생활로 나아갈 것을 격려했습니다. 상승의 여정으로서의 신비체험 325년 (제1차) 니케아 공의회는 그레고리우스가 오리게네스 신비 사상의 부족한 점을 극복하고 자신의 신비 사상을 펼치는 데 큰 영향을 끼쳤습니다. 먼저 니케아 공의회가 재확인한 무로부터의 창조 교리는 인간 영혼이 하느님과 본질이 같아서 합일할 수 있다고 주장한 오리게네스의 신비 사상을 정면으로 반박할 수 있었습니다. 즉, 인간 영혼도 피조물이기에 창조주와 피조물 사이에서는 저절로 일치할 수 있는 길이 없다는 것입니다. 오히려 창조주께서는 피조물 세상으로 건너오실 수 있으며, 강생의 신비가 신비체험의 열쇠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인간 영혼이 할 수 있는 일은 하느님을 열렬히 사랑하는 것뿐입니다. 한편 니케아 공의회와 381년 (제1차) 콘스탄티노플 공의회 사이에서 지속됐던 삼위일체 교리 논쟁은 그레고리우스가 자신의 신비 사상을 전개할 방향을 정립하는 데 영향을 주었습니다. 이 시기에 아리우스주의(Arianism)는 성부만 유일하게 신의 본질을 지녔고, 성자는 신과 동일한 본질을 지니지 못한 피조물이라고 주장했습니다. 또한 에우노미우스주의(Eunomianism)도 태어난 적이 없는 성부의 본질과 태어난 성자의 본질은 같을 수 없다고 주장하면서 아리우스주의에 동조했습니다. 그레고리우스는 저서 「에우노미우스 논박(Contra Eunomium)」에서 에우노미우스(Eunomius, 325?~394)가 성자와 성령의 존재를 거부하는 은유법을 사용할 뿐 아니라 성경과 공의회의 전통적인 용어를 포기했다고 주장했습니다. 결국 삼위일체 논쟁이 거듭될수록 그레고리우스는 삼위일체 신비는 적극적인 설명보다는 우회하는 설명이 더 적절하다고 느꼈습니다. 따라서 그레고리우스는 자신의 신비 사상에서 초월적 존재인 ‘하나’로 수렴하는 신 플라톤 사상의 영향으로 상승의 여정을 전개했으며, 삼위일체 신비를 통한 하느님 인식의 문제를 부정신학적 방법론으로 접근했습니다. 부정신학적 신비체험 그레고리우스는 저서 「모세의 생애(De vita Moysis)」와 「아가 강해(In Canticum canticorum homiliae)」에서 그리스도인의 완덕과 영혼의 영적 상승을 묘사하면서 자신의 신비 사상을 제시했습니다. 먼저 그레고리우스는 「아가 강해」에서 솔로몬의 지혜서로 불리는 세 권의 성경인 「잠언」, 「코헬렛」 및 「아가」를 인간의 성장 시기와 대조하여 유년기, 청년기, 성숙기에 적용하여 인간 영혼이 걷는 상승의 세 단계로 묘사했습니다. 그런데 그레고리우스에 따르면, 세 번째 단계는 최종 목적지인 관상의 상태가 아니라 이제야 본격적으로 하느님을 만나러 가는 신비체험의 시작점이라는 것입니다. 즉 끊임없이 나아가도 인간 영혼은 하느님을 만날 수 없지만, 하느님의 활동이 인간으로 하여금 하느님을 조금 알 수 있게 한다는 것입니다. 한편 그레고리우스는 「아가 강해」를 통해 하느님을 찾는 여정에서 인간 영혼이 빛, 구름, 및 어둠의 세 길을 걸어간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모세의 생애」에선 이 세 개의 길을 모세의 중요 생애와 비교, 설명했습니다. 첫 번째 빛의 단계는 불타는 떨기 속에서 모세에게 나타나신 하느님에 관한 일화를 통해 설명했습니다. 인간 영혼에게 비춰진 신비스러운 진리의 빛은 인간이 파악할 수 없는 하느님이시라는 것입니다. 두 번째 구름의 단계는 홍해를 건넌 모세가 시나이 산에서 하느님과 계약을 맺는 일화를 통해 설명합니다. 구름에 휩싸인 산을 오른다는 것은 하느님을 관상하기 시작한다는 것입니다. 세 번째 어둠의 단계는 하느님을 만나는 순간으로 설명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어둠 속에서 자신을 계시하시기에 인간 영혼은 가시적인 모든 것을 버려야만 어둠 속에 하느님을 뵐 수 있습니다. 물론 그레고리우스의 부정신학적 신비 사상은 처음부터 불가지성(不可知性, 지성으로는 알 수 없음)만을 강조하지 않았습니다. 그레고리우스는 하느님께서 알려주시는 빛에서 시작하여 모든 것을 포기하는 어둠으로 옮겨갔습니다. 또한 영혼의 거울, 영적 감각, 내재하시는 말씀의 세 가지 측면을 통한 체험을 언급하면서 가지성(可知性)의 경계를 넘나들기도 했습니다. 결국 인간의 지적 활동으로 인식할 수 없는 하느님이시라도 인간 영혼이 갈망과 열정으로 하느님을 사랑한다면 하느님과 일치하는 신비체험은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그레고리우스는 삼위일체 교리 논쟁에서 인간의 이성이 하느님을 온전히 파악하지 못하고 왜곡시킬 수 있다는 점을 목격했습니다. 그레고리우스는 인간이 안다는 것을 포기할 때 오히려 체험할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레고리우스는 부정신학적인 방법론으로 하느님께 다가가는 영적 여정을 주장하고 싶었습니다. 그러므로 그레고리우스의 부정신학적 신비 사상은 훗날 여러 세기를 걸쳐 많은 영성신학자들에게 영향을 끼침으로써 ‘부정-신비 신학’의 계보를 만들었습니다. <가톨릭대 신학대학 영성신학 교수> cpbc2017.03.30
![[성경 속 도시] (56) 키르 헤레스(하레셋)](//cpbc.co.kr/CMS/newspaper/2015/08/rc/585522_1.0_titleImage_1.jpg)
[성경 속 도시] (56) 키르 헤레스(하레셋)모압에 대한 애도의 눈물 흘러 모압 왕국의 수도였던 키르 헤레스에 있는 성곽. 리길재 기자 키르 헤레스(하레셋)는 현재의 케라크(Kerak)로 한때는 모압 왕국의 수도였다. 삼면이 깊은 계곡으로 둘러싸인 이곳은 주변의 언덕과 깊은 계곡들로 적의 공격이 쉽지 않은 천혜의 요새다. 키르 헤레스는 로마와 비잔틴 시대에는 도시가 발달해 중요한 그리스도교 지역이 되기도 했다. 또 이른바 ‘임금의 큰길’에 있어 여러 시대에 걸쳐 전략적으로 중요한 곳이었다. “이제 임금님의 땅을 지나가도록 허락해 주십시오. 밭이나 포도원을 지나가지 않고 우물물도 마시지 않겠습니다. ‘임금의 큰길’만 따라가겠습니다. 임금님의 영토를 다 지나갈 때까지 오른쪽으로도 왼쪽으로도 벗어나지 않겠습니다”(민수 20,17). ‘임금의 큰길’에 있어 ‘임금의 큰길’은 세계에서 가장 오래 지속적으로 사용되고 있는 통신로다. 그래서 이 ‘임금의 큰길’은 오래 전부터 북쪽의 고대 바산, 길르앗 및 암몬을 남쪽의 모압, 에돔, 바란 및 미디안과 연결하는 역할을 했다. 아브라함도 하느님 부르심을 받고 고향을 떠나 가나안을 향하는 여정에서 이 길을 이용했을 것이다. 이 길은 요르단에서 가장 뛰어난 경치를 자랑하는 곳들과 가장 중요한 고대 유적지들을 통과한다. 성경에서 키르 헤레스(하레셋)는 이스라엘에 반란을 일으킨 에돔과 북이스라엘, 유다의 연합군이 전쟁해 승리한 곳이다. “그들은 성읍들을 부수고 병사들마다 모든 옥토에 돌을 던져 그곳을 돌로 가득 채웠으며, 물이 솟는 샘을 모두 틀어막고 좋은 나무들을 모조리 쓰러뜨렸다. 그리하여 마침내 키르 하레셋에 돌담만 남게 되었는데, 그곳마저 투석병들이 포위하고 공격하였다”(2열왕 3,25). 모압 임금은 전투에서 밀리자 자기 뒤를 이어 임금이 될 맏아들을 데려다가, 성벽 위에서 번제물로 바쳤다. 그러자 무서운 분노가 이스라엘군에 내렸다. 이스라엘군은 그곳에서 철수해 본국으로 되돌아갔다(2열왕 3,4-27 참조).키르 헤레스는 이사야 예언서에도 두 번 언급된다. 이사야 예언에서는 당시의 키르 헤레스(하레셋)의 중요한 생산품이었을 ‘건포도 과자 생각에 더없이 상심하며 탄식한다’는 표현으로 모압에 대한 애도를 표현하고 있다(이사 16,7-11 참조). 예레미야 예언자도 키르 헤레스 사람들을 위해 슬피 울겠다고 예언한다. “그러므로 내가 모압을 두고 통곡하고, 모압 전체를 위해 울부짖으며, 키르 헤레스 사람들을 위해 슬피 울겠다”(예레 48,31).중세 성채가 남아현재 키르 헤레스에 남아 있는 성채는 중세 십자군 시대에 요르단 지역에 두 번째로 건축된 것이다. 십자군은 이 성에서 ‘임금의 큰길’을 통한 무역 길을 통제하고 예루살렘으로 연결되는 그리스도교 성지 순례자를 보호하는 목적으로 이용했다. 지금도 이중삼중으로 쌓인 성채 안에는 막사와 감옥이 잘 보존돼 있다. 1924년 유적 발굴을 통해 모압인과 로마 시대부터 중세 아랍시대 도기들이 발견되기도 했다. 성 안에는 작은 규모의 박물관이 마련돼 있어 키르 헤레스의 긴 역사의 흔적을 조금이나마 느낄 수 있다. 지금은 요르단 중부 지역의 도청 소재지이며 곡류, 채소, 과일 등 농산물 생산이 많은 지역이다. 허영엽 신부(서울대교구 홍보국장) 평화신문2015.08.04
![[낮은 곳에 주님 사랑을] (10) 한국중독연구재단 사무총장 김한석 신부](//cpbc.co.kr/CMS/newspaper/2017/04/rc/678968_1.0_titleImage_1.jpg)
[낮은 곳에 주님 사랑을] (10) 한국중독연구재단 사무총장 김한석 신부중독에 지친 이들 신앙과 사랑으로 감싸안다 한국중독연구재단(KARF)이 운영하는 카프성모병원이 환자들을 위해 운영하고 있는 집밥 프로그램. 카프성모병원 제공 ‘중독 사목’ 관점서 환자 도와 노래·요리 등 취미 통해 치유 격리하기보다 보듬는 데 매진사람들이 2층에서 자유롭게 탁구를 치고 있다. 한편에서 여성들은 노래 수업을 듣고, 어떤 이들은 강당에서 배드민턴을 치기도 한다. 다른 강의실에서는 성경 읽는 소리도 들린다. 1층 성당에서는 매일 미사가 봉헌되고, 때마다 세례식도 열린다. 여느 성당을 방불케 하는 이곳은 경기 일산동구 백석동에 있는 ‘카프성모병원’이다. 다양한 활동을 하는 이들은 알코올, 도박, 게임 등으로 고통을 겪다 입원한 환자들이다.14일 만난 한국중독연구재단(KARF) 사무총장 김한석 신부는 “저는 중독 환자들을 환자로 보지 않고 잠시 고통 중에 있는, 우리가 진정으로 돌봐야 할 형제ㆍ자매로 여긴다”며 “치료를 넘어 치유와 영성, 사랑으로 이들이 사회 일원으로 새 삶을 살도록 이끌고 있다”고 했다.2000년 한국주류산업협회가 처음 설립한 한국중독연구재단은 산하에 카프병원(현 카프성모병원)을 두고, 중독 치료 사업을 전개해왔다. 그러나 운영상 문제로 협회가 손을 뗀 이후 경영 주체를 찾다 2015년 서울대교구가 인수함에 따라 ‘중독 사목’의 관점에서 환자들을 그리스도의 향기로 보듬고 있다. 2년 새 카프성모병원은 중독자들을 치료하는 데 그치지 않고 ‘취미 활동’과 ‘신앙생활’을 하도록 이끌어 왔다. 궁극적으로는 환자들의 ‘사회 복귀’가 가능하도록 큰 역할을 하고 있어 학계에서도 주목받고 있다.한국중독연구재단은 △카프성모병원 △카프이용센터 △남녀 중독자 거주 시설 등을 운영 중이다. 150병상 규모 병원에는 현재 120여 명의 남녀 환자가 치료를 받고 있다. 기본 12주 단중독 프로그램을 비롯해 △가족 상담 △맞춤형 치료 서비스 △중독 방지 홍보 및 연구 사업을 진행 중이다. 실제 병원에선 동호회를 비롯해 노래, 미술 치료 교실이 운영 중이다. 최근에는 지하 한편에 번듯한 주방을 꾸며 ‘집밥 만들기’, ‘바리스타 교육’ 프로그램도 개설했다. 환자들의 만족도도 높을 수밖에 없다. 이뿐만 아니라 재단 산하 사회적 기업인 ‘청미래’ 사업단에서 운영하는 매점에서는 회복 환자가 직접 물건을 팔고, 병원 내 재활용품 매장인 ‘옹달샘’에서도 회복 여성이 매장 관리에 참여하고 있다. 최근에는 세차사업을 시작해 회복자의 자립을 돕고 있다. 김 신부는 “우리나라 알코올 고위험군에 속하는 성인이 474만 명에 이를 정도”라며 “중독을 개인이 아닌 사회 문제로 인식하고, 격리하기보다 그들을 보듬는 데 꾸준히 매진할 것”이라고 말했다.“환자들이 회복에 실패하더라도 우린 이 자리에서 언제든 이웃처럼 반갑게 맞을 겁니다. 꾸준히 안아주면 그분들은 진짜 시작을 하거든요. ”재단은 28~29일 병원 현지에서 중독 재활기금 마련을 위한 ‘제1회 카프 나눔 바자회’를 연다. 28일 오후 4시에는 서울가톨릭연극협회의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 연극을 통해 중독 인식 개선 사업을 펼친다. 상담 및 문의 : 031-810-9200, 카프성모병원 이정훈 기자 sjunder@cpbc.co.kr 평화신문2017.04.19
[미사 전례 풀이] (21) 흰색 제의, 영광과 기쁨 상징 ▨미사를 집전하는 사제의 제의 색깔이 때에 따라 달라지는 이유는 무엇인가?사제는 미사를 비롯한 전례를 집전할 때 여러 색깔의 제의를 입는다. 이는 교회가 전례 시기와 축일에 맞춰 다양한 색깔의 제의를 입도록 하고, 이를 위해 전례복의 색깔에 대한 규정을 정한 데 따른 것이다. 제의의 색은 보통 6가지이고, 제의의 색이 상징하는 의미와 입는 시기는 다음과 같다.▲흰색은 영광, 결백, 기쁨을 상징합니다. 흰색 제의는 성탄 시기와 부활 시기, 예수님의 축일들(수난 관련 축일은 제외)과 성모님의 축일들, 천사들의 축일, 순교자가 아닌 성인들의 축일에 입습니다. ▲빨간색은 성령과 피(순교)를 의미합니다. 빨간색 제의는 주님 수난 성지 주일, 성금요일, 주님 수난 전례, 성령 강림 대축일, 성 십자가 현양 축일, 사도들(단, 요한 사도는 흰색)과 복음사가들의 천상 탄생 축일, 순교 성인들의 축일에 입습니다. ▲초록색은 생명의 희열, 희망, 영원한 생명을 의미합니다. 초록색 제의는 연중 시기에 입습니다.▲보라색은 참회와 보속을 의미합니다. 보라색 제의는 대림 시기와 사순 시기에 입습니다.▲검은색은 죽음을 의미합니다. 검은색 제의는 위령 미사와 장례 미사 때 입습니다. 오늘날에는 죽음이 새로운 생명의 부활을 의미하기 때문에 검은색 대신 흰색 제의를 주로 입습니다. 또한 보라색 제의를 입을 수도 있습니다.▲장미색은 기쁨을 의미합니다. 장미색 제의는 대림 제3주일(기뻐하여라 주일)과 사순 제4주일(즐거워하여라 주일)에 입는데, 성탄과 부활을 준비하는 도중의 휴식과 기쁨을 의미합니다. 장엄한 전례 예식 때는 황금색 전례복을 입을 수 있습니다. 특정한 시기와 축일에 맞는 색깔의 제의를 갖추지 못한 경우에는 흰색 제의를 입을 수 있습니다.▨미사 때 향을 피우는 것은 어떤 의미인가?분향, 곧 향을 피우는 것은 성경에서 뜻하는 대로 공경과 기도를 표현한다.분향 예식은 구약 시대부터 사용됐는데, 그 의미는 여러 가지입니다. 거룩하신 하느님 앞에 나아갈 수 있도록 정화하는 행위이며, 하느님께 희생 제물을 바치는 행위입니다. 또한 하느님의 현존을 드러내는 의미이기도 하고, 하늘을 향해 올리는 기도를 뜻하기도 합니다. 성당 봉헌식 때 향을 피우는 것은 성당이 하느님께 봉헌된 거룩한 곳임을 뜻하고, 미사 때 그리스도를 상징하는 십자가와 제대, 복음서에 분향하는 것은 공경(로마 황제에게 분향하던 예식에서 따옴)의 표시입니다. 예물에 분향하는 것은 피어오르는 연기처럼 하느님께 오르기를 기원하는 것이며, 사제와 신자들에게 분향하는 것은 축복하고 거룩하게 한다는 의미입니다. 빵과 포도주 축성 때 분향하는 것은 공경과 기도의 표현입니다. 장례 예식 때 시신에 향을 드리는 것은 존경을 드러냅니다.이렇게 우리는 미사 때 상징적인 의미를 지닌 여러 가지 동작들뿐만 아니라 물건들을 이용해 하느님의 은총을 전해주고 또한 하느님에 대한 우리의 정성을 표현합니다. 따라서 전례 때 사용하는 물건들과 상징적인 행위들은 하느님과 인간을 서로 소통하게 해주는 대화의 도구이기도 합니다. 백영민2017.04.19

한국 ME 40주년 릴레이 인터뷰 (1) 윤갑구·김부희 부부퇴근, 행복한 부부생활 위한 또 다른 출근 ‘가정이 화목해야 모든 일이 잘 이뤄진다’(家和萬事成)는 고사성어는 만고불변의 진리다. 가정 복음화의 기수, 한국 매리지 엔카운터(ME) 40주년을 맞아 부부와 가정의 의미를 일깨우는 ME 부부들을 차례로 만나본다. ME 40주년 행사는 5월 21일 서울 잠실 실내체육관에서 ‘그대가 받은 하느님의 은사를 다시 불태우십시오’(2티모 1,6)를 주제로 열린다. 1984∼1986년 한국 ME 8ㆍ9대 대표를 지낸 윤갑구(바오로, 74, 에이스기술단 대표)ㆍ김부희(루치아, 74)씨 부부는 매일 아침 인터넷 가톨릭 굿뉴스(www.catholic.or.kr)의 ‘소리 매일미사’를 듣는 것으로 하루를 시작한다. 10여 분간 듣는 그 날의 복음은 부부가 일용할 대화의 소재다. 윤씨는 “성경 내용이 희한하게도 2000년 전이 아닌 오늘날의 이야기로 들린다”면서 “복음을 주제로 아내와 20여 분간 나누는 대화가 하루를 살아가는 힘이 된다”고 웃음을 지었다. 배우자 존경하는 마음 얻어부부가 ME와 인연을 맺은 것은 한국 ME 초창기인 1980년 1월 지인의 권유로 ME 주말에 참가하면서다. 부부는 ME 주말에서 새로운 세상을 경험했다. 윤씨는 무엇보다 자기 자신을 스스럼없이 드러낼 수 있는 자유를 느꼈고, 김씨는 자신과 세상을 긍정적으로 바라볼 수 있는 마음의 힘을 얻었다. “하느님은 있는 그대로의 저희를 사랑하신다는 것을 느꼈습니다. ME 주말을 다녀온 이후 배우자가 가장 존경하는 이가 됐습니다. 다시 결혼한다고 해도 이 사람과 하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서로가 편안해졌습니다.”(부부)혼인의 가치 전하는 부부의 날 제정이후 부부는 열렬한 ME 전도사로, 또 ME 봉사자로 한국 ME 발전에 큰 몫을 해왔다. 부부가 가장 많은 정성을 쏟은 것은 바로 ‘부부의 날’ 제정이다. 1995년 당시 서울 ME 대표를 맡고 있던 부부는 미국에서 기념하던 세계 결혼기념일을 우리 문화와 친숙한 ‘부부의 날’로 이름을 바꿔 지낼 것을 교회에 건의하고, 이듬해에는 6000여 명이 참석하는 성대한 ‘부부의 날’ 행사를 이끌었다. 부부의 날(5월 21일)은 2007년 국가 공식 기념일로 지정됐다.“혼인과 출산은 줄어들고, 이혼과 가정해체는 급속히 늘어나고 있습니다. 우리 사회가 풀어야 할 심각한 현안이 아닐 수 없습니다. 혼인의 가치를 교회를 넘어 세상에 전파하는 것이 ME의 사명입니다. 부부의 날은 종교와 상관없이 ME의 정신을 전할 수 있는 좋은 기회입니다. 교회는 물론 정부도 부부의 날에 관심을 갖고 지원하는 데 좀 더 적극적으로 나서면 좋겠습니다. 혼인과 출산이 장려되는 건강한 가정 문화가 필요합니다.”부부는 매일매일을 ‘부부의 날’로 지내고 있다. 윤씨에게 퇴근은 행복한 부부 생활을 위한 또 다른 출근이다. 같은 마음으로 남편을 맞는 것은 아내 또한 마찬가지다. ME가 부부를 그렇게 만들어줬다. 부부는 모든 부부가 꼭 ME 주말에 한번 참가해 보면 좋겠다는 바람을 전했다. 무엇이 그렇게 좋은지는 “가 보면 안다”면서.글ㆍ사진=남정률 기자 njyul@cpbc.co.kr 백영민2017.04.19

새 주교 중심으로 전주교구가 더 성장해 나가길제7대 전주교구장 이병호 주교 이임 감사 미사 봉헌, 수도회 담당 사제로 지낼 예정 4월 29일 전주 중앙주교좌성당 대강당에서 열린 이병호 주교 이임 사은식에서 김선태 주교, 이문희 대주교, 이병호 주교, 최덕기 주교(왼쪽부터)가 케이크를 자르고 있다. 27년 동안 전주교구를 이끌어온 제7대 교구장 이병호 주교가 교구장직을 떠났다.전주교구는 4월 29일 중앙 주교좌 성당에서 이병호 주교 이임 감사 미사를 봉헌하고 사랑과 열정으로 교구와 함께 한 이 주교를 위해 기도했다. 미사에는 전(前) 대구대교구장 이문희 대주교와 전 수원교구장 최덕기 주교, 제8대 전주교구장 김선태 주교를 비롯해 교구 사제단 120여 명과 신자 1500여 명이 참석해 대성전과 앞마당을 가득 메웠다. 슬픔 속에도 기쁨과 희망 있었다이병호 주교는 강론에서 “되돌아보면 모든 슬픔과 고뇌 속에도 기쁨과 희망의 씨앗이 들어있었다”며 긴 여정을 함께하며 자신의 부족함을 채워준 사제들과 한결같이 기도해 준 수도자들, 순교자 후예다운 신앙을 보여준 교구민들 모두에게 감사 인사를 전했다. 이 주교는 “교구장 직분을 마치며 가장 감사한 것은 하느님이 훌륭한 후임자를 보내주신 것”이라며 “새 주교님을 중심으로 모두가 각자 몫을 다할 수 있게 해 달라”고 기도했다. 미사 끝에는 사제단과 신자들의 감사 인사가 이어졌다. 총대리 김영수 신부는 사제단과 교구민을 대표해 이병호 주교의 글을 엮은 책 「목자의 지팡이」를 헌정했다. 「목자의 지팡이」는 교구 사목 계간지 ‘쌍백합’에 실린 이병호 주교의 신앙 사색을 담은 책으로 이 주교의 퇴임을 기념해 출간했다. 사제단 대표 이영우 신부는 “하느님 말씀을 읽고 쓰고 외우기를 실천하며 매일 이른 새벽 미사를 봉헌하고 치명자산을 걸으며 성경 구절을 묵상하는 이병호 주교님의 모습을 통해 아름다운 신앙인의 모습을 배울 수 있었다”며 존경과 감사를 표했고 모든 사제단은 자리에서 일어나 박수를 치며 인사했다. 이어 평신도사도직단체협의회 한귀석(바오로) 회장의 선창에 따라 모든 신자가 “주교님 수고하셨습니다, 주교님 감사합니다, 주교님 사랑합니다”를 외치며 두 팔로 하트 모양을 그렸다.이문희 대주교와 최덕기 주교는 “27년 동안 교구를 이끄느라 수고한 이병호 주교가 이제는 자유로운 시간 속에 주님과 함께 생활할 수 있길 바란다”고 격려했다.사은식 열려 미사에 이어 대강당에서는 송하진 전북도지사, 김승수 전주시장, 김승환 전북도교육감, 김혜봉 원불교전북교구장 등이 참석한 가운데 사은식이 열렸다. 이병호 주교 가족과 사제단, 수도자들은 식사를 함께 나누며 축하의 시간을 가졌다.이병호 주교는 1941년 전북 완주 출생으로 서울 성신고등학교와 서울 가톨릭대학교에서 공부하고 1969년 사제 서품을 받았다. 전주교구 중앙본당 보좌와 정읍본당 주임, 광주 대건신학대학 전임 강사 등을 거쳐 파리 가톨릭대학에서 신학 석ㆍ박사 학위를 받고 광주 가톨릭대학원장을 지냈다. 1990년 2월 8일 전주교구장에 임명돼 같은 해 4월 3일 주교품을 받고 전주교구장에 착좌했으며 27년 만인 올해 4월 29일을 끝으로 교구장에서 은퇴했다. 이병호 주교는 앞으로 교구 인보성체수도회 담당 사제로 지낼 예정이다.한편 전주교구는 제8대 교구장 김선태 주교 서품식과 교구장 착좌식을 13일 오후 2시 전북 군산 월명체육관에서 거행한다. 유은재 기자 you@cpbc.co.kr 평화신문2017.05.02
![[미사전례풀이] 2. 대죄, 고해성사 후 성체 모셔야](//cpbc.co.kr/CMS/newspaper/2016/11/rc/662458_1.1_titleImage_1.jpg)
[미사전례풀이] 2. 대죄, 고해성사 후 성체 모셔야 소죄는 미사 참여 중 자신의 죄를 뉘우치며 하느님 뜻에 따라 살겠다고 다짐하면 용서받지만 대죄의 경우 영성체 전 반드시 고해성사를 받아야 한다. ▨미사는 어떤 순서로 진행되나?미사는 처음부터 끝까지 하나의 예절이지만 크게 말씀 전례와 성찬 전례 두 부분으로 나뉜다. 말씀 전례는 독서와 강론, 보편 지향 기도로 이뤄지고, 성찬 전례는 빵과 포도주의 봉헌, 축성의 감사 기도, 영성체로 이뤄졌다. 말씀 전례는 하느님의 말씀을 듣는 시간으로 미사에서 중요한 부분입니다. 구약 시대부터 신앙 공동체가 안식일에 거룩히 지내던 예배의 형태가 미사 안에 남아 있는 것입니다. 초대 교회도 주일에 복음 말씀을 들었고, 이것이 전통으로 내려오고 있습니다. 주일에 성전에 모이는 이유 가운데 하나는 하느님의 말씀을 듣기 위한 것입니다. 그래서 미사 시간에 성경을 봉독하며 사제나 부제는 복음을 선포합니다. 신자들은 주일마다 하느님의 말씀을 들음으로써 성경과 친숙해지고 신앙의 깊이를 더해가게 됩니다.말씀 전례에 이어서 성찬 전례가 계속됩니다. 성찬 전례는 예수님께서 최후의 만찬 때 행하셨던 파스카 예식을 새롭게 재현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너희는 나를 기억하여 이를 행하여라”(루카 22,19)고 명하신 그 뜻을 그대로 기억하고 기념하는 것입니다. 구약의 파스카에서는 어린양을 잡아 희생 제물로 바쳤는데, 최후의 만찬에서는 예수님께서 직접 희생 제물이 되시어 자신을 바침으로써 우리를 위한 속죄의 제물이 되셨습니다. 미사는 참회 예식과 말씀 전례, 우리 죄를 용서하시고자 당신 자신을 희생 제물로 바친 것에 대한 감사 기도, 영성체로 이어지고, 강복과 함께 각자 삶의 자리로 파견하는 마침 예식으로 끝을 맺습니다.▨미사 때 참회 예식을 통해 ‘고백 기도’를 하면 죄를 용서받을 수 있는가?미사의 시작 예식에서 사제와 신자들은 죄를 반성하는 고백 기도를 바치며 참회한다. 이때 소죄(小罪)의 경우 참회 예식을 통해 자신의 죄를 뉘우치며 용서를 청하고, 독서와 복음을 들으면서 하느님 뜻에 따라 살겠다고 다짐하면 죄를 용서받는다. 그러나 대죄(大罪)의 경우는 성체를 모시기 전에 반드시 고해성사를 받아야 한다.공동으로 죄를 참회하는 고백 기도는 사적인 참회 기도에서 발전한 것으로, 본래 사제의 사죄경(赦罪經)과 함께 고해성사 예식에 들어 있었습니다. 오늘날에도 교회는 신자들이 고해성사를 받기 전에 고백을 준비하면서 이 기도를 바칠 것을 권장하고 있습니다.미사 때 드리는 기도문 가운데에는 선택이 가능한 부분이 있는데, 참회 예식이 그렇습니다. 미사 경본에 참회 예식은 세 가지 형태로 제시되어 있습니다. 참회 예식의 모든 양식 끝에는 사제가 공동체를 위해 죄의 용서를 간청하는 간략한 기도가 있습니다. 주례 사제가 “전능하신 하느님, 저희에게 자비를 베푸시어 죄를 용서하시고 영원한 생명으로 이끌어 주소서”라고 할 때 “아멘” 하고 응답함으로써 개별적으로 용서의 은총을 누릴 수 있습니다.그런가 하면, 죄인이 회개하고 하느님께 용서를 청하더라도 하느님의 뜻에 맞는 예배를 드리려면 형제와도 화해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그러므로 네가 제단에 예물을 바치려고 하다가, 거기에서 형제가 너에게 원망을 품고 있는 것이 생각나거든, 예물을 거기 제단 앞에 놓아두고 물러가 먼저 그 형제와 화해하여라. 그런 다음에 돌아와서 예물을 바쳐라”(마태 5,23-24). 김현진2016.11.30
 카르멜산](//cpbc.co.kr/CMS/newspaper/2015/05/rc/572853_1.0_titleImage_1.jpg)
[성경 속 도시](46) 카르멜산엘리야 예언자가 우상 숭배 물리쳐 아합 왕을 꾸짖는 엘리야. 콘스탄티노플 귀족 레오의 성경에 있는 세밀화, 940년경, 바티칸 도서관. 출처=「성경 역사 지도」, 분도출판사 카르멜산은 여호수아가 약속의 땅 가나안을 정복하고 나서 할당한 유다 지파의 마을이다(여호 15,55). 카르멜산은 지중해 쪽으로 돌출해 있는 가장 큰 봉우리 중 하나로 교통을 가로막는 천연 장애물이었다. 카르멜산은 고대 이스라엘은 물론 근대에도 중요한 전략적 위치에 있다. 카르멜산은 이스라엘의 3대 도시 가운데 하나인 하이파 시가 있는 지중해 하이파 만으로부터 시작돼 지중해 연안을 끼고 카이사리아까지 길게 뻗은 25㎞가량의 산맥이다. 카르멜산에 올라보면 동쪽으로 이즈르엘 평원이, 서남쪽으로 샤론 평야가 드넓게 펼쳐져 있다. 카르멜 산은 팔레스티나의 다른 지역과는 다르게 푸른 숲으로 우거져 있는 것이 특징이다. 그리고 지금도 언덕 곳곳에는 동굴들이 많이 발견되는데 예로부터 은신처로 많이 이용됐다.“그들이 카르멜 꼭대기에 몸을 숨겨도 내가 거기에서 찾아내어 붙잡아 오고 그들이 내 눈을 피해 바다 밑바닥에 숨더라도 내가 바다 뱀에게 명령하여 거기에서 그들을 물게 하리라”(아모 9,3). 카르멜산은 고대로부터 종교적 의미를 많이 가지고 있었던 산이다. 그런데 카르멜산이 성경에서 중요한 장소로 언급되는 것은 엘리야 예언자 때문이다. 기원전 860년 오므리의 아들로 왕위에 오른 아합 왕이 이방국 시돈 왕의 딸 이제벨과 정략 결혼을 통해 국력을 크게 하려고 했다. 이제벨 공주는 결혼하면서 시돈의 신인 ‘바알과 아세라’ 신앙을 들여와 북이스라엘에 퍼뜨렸다. 부인 이제벨의 영향으로 아합 왕 역시 바알을 섬기며 우상 숭배에 빠진다. 왕궁 안에 바알과 아세라 상을 들일 정도로 타락했다. 그러던 어느 날 엘리야 예언자가 나타난다. 엘리야는 아합 왕을 만나 우상 숭배에 대해 경고하고 가뭄을 예언한다. “길앗의 티스베에 사는 티스베 사람 엘리야가 아합에게 말하였다. ‘내가 섬기는, 살아 계신 주 이스라엘의 하느님을 두고 맹세합니다. 내 말이 있기 전에는 앞으로 몇 해 동안 이슬도 비도 내리지 않을 것입니다’”(1열왕 17,1).그 후 3년이 흘러 기근이 절정에 달하자 엘리야는 여전히 바알을 섬기던 아합 왕에게 이스라엘 모든 사람을 카르멜산으로 모으고, 바알과 아세라 예언자도 함께 모아달라고 청한다(1열왕 18,19). 우상 숭배의 중심지였던 카르멜산에서, 엘리야 예언자는 바알의 거짓 예언자 450명ㆍ아세라 예언자 400명과 대결을 벌였다. 이 대결에서 승리함으로써 엘리야는 새로운 종교 질서를 세웠으며, 종교적 위기로부터 이스라엘을 구출하였다(1열왕 18,20-40). 사울 왕은 아말렉 족속을 물리치고 카르멜에 기념비를 세웠다. “이튿날 사무엘이 아침 일찍 일어나 사울을 만나러 나서는데, 어떤 사람이 이렇게 전하였다. ‘사울 임금님이 카르멜로 가시다가 자신의 기념비를 세워 놓으시고, 그곳을 지나 길갈로 내려가셨습니다’”(1사무 15,12). 지금도 카르멜산에 가면 1868년 세워진 가르멜 수도회 무흐라카(불의 제단) 수도원을 들르게 된다. 초대 교회 때부터 이곳에 은수자들이 들어와 수도 생활을 하기 시작했는데 이것이 가르멜 수도원의 기원이 됐다. 엘리야 예언자를 존경하는 무슬림들도 이곳을 찾아와 경의를 표했다고 한다. 이 성당은 전쟁으로 19세기 초반 남자 가르멜 수도원이 들어와 지금까지 성지를 보존하고 있다. 허영엽 신부(서울대교구 홍보국장) 평화신문2015.05.26
![[전영준 신부의 가톨릭 영성을 찾아서] (7) 2세기 ② - 호교 교부 시대 영성 생활](//cpbc.co.kr/CMS/newspaper/2017/01/rc/666673_1.0_titleImage_1.jpg)
[전영준 신부의 가톨릭 영성을 찾아서] (7) 2세기 ② - 호교 교부 시대 영성 생활 그리스도교 방패 되어 이교도에 맞선 호교 교부사도 시대와 사도 교부 시대에 그리스도인은 전 세계를 향하여 거침없이 선교 활동을 펼쳤습니다. 하지만 백 년이 채 지나기도 전에 그리스도교는 여러 가지 형태의 걸림돌을 만났습니다. 즉, 그리스도인은 유다교뿐 아니라 이방 종교의 위협에도 시달려야 했고, 로마 제국 공권력의 박해에 직면했으며, 그리스도교 교리에 대한 당대 지성인들의 몰이해를 극복해야만 했습니다. 유스티누스는 같은 신앙을 고백하며 세례를 받고 그리스도를 따르는 사람이라야 성찬례에 참여할 수 있고, 성체와 성혈은 그리스도의 기도로 축성된 육화하신 예수님의 살과 피가 분명하다고 강조했다. 그림은 디에리 붓츠 작 ‘최후의 만찬’. 외부 박해와 편견을 극복하기 위하여그리스도교를 적극적으로 알리던 사도 교부 시대와 달리 이제는 반대자들에게서 교회를 지키기 위해 방어 논리를 펼쳐야 하는 시대가 왔기에 이 당시 교부들은 교회를 지킨다는 의미에서 호교 교부로 불렸습니다. 호교 교부는 교회를 향한 외부 박해와 편견을 극복하여 교회를 지키고자 적극적으로 저술 활동을 펼쳤습니다.먼저 호교 교부는 유다교뿐 아니라 여러 신을 믿는 이방 종교와 비교하여 우월하다는 것을 증명하려고 여러 가지 논거를 제시했습니다. 계시 종교이며 유일신 신앙인 그리스도교는 구약 시대를 포함하는 오래된 종교로서 예수님을 메시아로 믿는다는 점을 알리려 했습니다. 다음으로 그리스도교를 향한 이방인들의 원색적인 비방과 비난에 귀 기울인 로마 제국 공권력이 제대로 된 재판도 없이 그리스도인을 박해했기에, 호교 교부는 그들의 주장을 반박하며 로마 제국에게 그리스도교의 무해성을 주장하려 했습니다. 또한 호교 교부는 그리스도교 신앙과 교리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면서 그리스도교를 원시적이며 비논리적이라고 폄하하는 당대 지성인들에게 그들이 수긍할 수 있는 철학적인 논리와 학문 방법론으로 그들의 오해를 바로잡으려 했습니다.대표적인 호교 교부로서 평신도 신학자였던 유스티누스(Iustinus, 100?~165)는 2세기 중반경에 몇몇 작품을 저술했습니다. 또한 익명의 저자가 2세기 중반이나 후반에 저술한 「디오그네투스에게(Ad Diognetum)」도 대표적인 호교 작품으로 꼽습니다. 그 외에, 생애에 대해서 거의 알려지지 않은 아테네의 아테나고라스(Athenagoras Athaeneus, ?~180경)와 생의 말엽에 로마 교회가 파문한 타티아누스(Tatianus, 120?~172?) 등이 호교 교부로 작품을 남겼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불행히도 대부분 작품이 유실되었고 몇몇 작품만 지금까지 전해지는 소수의 호교 작품을 통해 그리스도교가 당시 위험하고 급박했던 상황을 어떻게 극복했는지 살펴보면서 호교 교부 시대에 그리스도인 영성 생활을 가늠해 보고자 합니다.기도 생활과 성사 생활을 기반으로유스티누스는 저서 「제1호교론」에서 기도 생활과 성사 생활을 기반으로 영적 발전을 도모하는 수덕 생활을 설명했습니다. 먼저 세례를 준비하는 사람은 기존 신자들이 가르치는 내용을 진리로 받아들이고 투신할 각오를 해야 합니다. 그리고 하느님께 죄를 용서받기 위하여 단식하며 기도해야 합니다. 특이 사항은 예비신자를 돕는 기존 신자도 함께 단식하고 기도한다는 것입니다. 세례성사를 통해 새로운 생명으로 이끌기 위해서는 영성 생활을 함께 실천하는 것이 중요했습니다.(유스티누스, 「제1호교론」 61,2~3 참조)다음으로 「제1호교론」에서 초대 교회 미사 전례의 발전 단계를 살펴볼 수 있습니다. 신영세자가 참석하는 성찬례에서 신자들은 먼저 공동으로 신자들의 기도를 드립니다. 이후 성찬례를 거행하고 예식에 참여하지 못한 신자에게 봉성체도 실시했습니다. 또한 주일 성찬례에는 전반부 말씀 전례에서 성경 말씀과 강론을 듣는 것이 포함되었습니다. 이후 예식은 똑같습니다. 유스티누스는 같은 신앙을 고백하고 세례를 받았으며 그리스도를 따르는 삶을 사는 사람이라야 성찬례에 참여할 수 있고, 성체와 성혈은 그리스도의 기도로 축성된, 육화하신 예수님의 살과 피가 분명하다고 강조했습니다. 그리스도교 영성 생활에서 말씀의 묵상과 기도 생활이 비중 있게 다뤄졌습니다.(유스티누스,「제1호교론」 65~67장 참조)또한 유스티누스는 태초 이전에 로고스이셨던 육화하신 예수님이야말로 구세주 그리스도이시고 하느님의 아드님이시라는 사실이 이미 모세가 쓴 글 안에 명백히 나타난다고 강조했습니다. 즉, 구약성경은 유다교에만 속한 것이 아니라, 예형론(豫型論, Typology)의 관점에서 신약의 그리스도론을 이해하기 위한 그리스도교 신앙의 유산이라는 것입니다.(유스티누스,「제1호교론」 63,6~11 참조) 그리스도인은 신구약의 통일성 안에서 성경 말씀을 묵상해야 올바른 영성 생활로 나간다는 것입니다.수덕 생활에서 신비 생활로익명 저자의 작품 「디오그네투스에게」는 영성 생활이 상당히 발전하여 수덕 생활에서 신비 생활로 넘어가는 상태를 설명했습니다. 계시 종교인 그리스도교는 천상 기원이기에 다시 천상을 향하는 초월적인 영적 여정을 걸어야 합니다. 즉, 그리스도인은 타향을 고향처럼 생각해야 하며, 고향을 타향과 같이 여겨야 한다는 것입니다.(「디오그네투스에게」 V,5 참조) 그리고 불사불멸의 존재인 인간 영혼은 죽을 운명을 지닌 인간 육신 안에 살고 있듯이, 그리스도인도 유한한 세상 안에 살면서 하늘나라에서 누릴 영원한 생명을 희망해야 한다는 것입니다.(「디오그네투스에게」 VI, 8 참조) 플라톤의 이원론적 세계관에 기반을 둔 한계는 있지만, 썩어 없어질 세상에 마음을 두지 않고, 영생을 누릴 수 있는 하늘나라를 바라보는 초월적인 영성 생활을 언급했습니다.또한 「디오그네투스에게」에서 저자는 우리가 신비 생활을 위하여 하느님을 본받는 것을 하느님께서 바라신다고 강조했습니다. 즉, 하느님을 본받기 위해서 인간은 하느님을 사랑해야만 하는데, 하느님을 사랑하는 구체적인 실천은 이웃 사랑을 통해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인간을 사랑하셔서 인간이 곤경에 처했을 때에 돌보아주실 것이고, 이러한 하느님의 역할을 따라 사는 것이 하느님을 본받는 것이기 때문입니다.(「디오그네투스에게」 X,4~6 참조)게다가 「디오그네투스에게」에서 저자는 그리스도인이 순교와 같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불신으로 인한 헛된 죽음과 형벌을 두려워한다면, 아직 지상에서 살고 있다고 하더라도 신비체험을 시작할 수 있다고 강조했습니다.(「디오그네투스에게」 X,7 참조)호교 교부는 한시적인 시기에 제한적인 목적으로 활동하면서 작품마저 많이 남기지 못했기에 오늘날 우리가 호교 교부 시대에 관해 많은 것을 알 수 없습니다. 하지만 영적 여정의 발전에 따라서 수덕 생활에서 신비 생활로 넘어가는 단계를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의 영성 생활은 하느님과 하늘나라를 향하는 초월적인 영성이어야 합니다.<가톨릭대 신학대학 영성신학 교수> 백영민2017.01.04
![[전영준 신부의 가톨릭 영성을 찾아서] (16) 4세기 ③ - 로마 제국의 흥망이 영성 생활에 끼친 영향](//cpbc.co.kr/CMS/newspaper/2017/03/rc/675063_1.0_titleImage_1.jpg)
[전영준 신부의 가톨릭 영성을 찾아서] (16) 4세기 ③ - 로마 제국의 흥망이 영성 생활에 끼친 영향 종교의 자유 얻지만 분열의 아픔 겪어성 실베스테르 1세 교황과 콘스탄티누스 황제. 4세기에 그리스도교는 역사상 가장 파란만장하고도 극적인 대조를 이루던 시기를 보냈습니다. 로마 제국은 4세기 초반에 그리스도교에 커다란 박해를 가했지만, 중반에 그리스도교와 화해의 길로 들어섰으며 후반에 그리스도교를 로마 제국 안에서 유일한 종교로까지 인정했습니다. 한편 종교 자유 이후 교회 안에서 격한 신학 논쟁들이 벌어지면서 동시에 정통 교리를 수호하는 빼어난 신학자들이 등장했습니다. 이 시기에 교회는 더욱 조직화되고 체계화되면서 외형적으로는 확장되어 갔지만, 내면적으로는 분열의 아픔을 겪기 시작했습니다.그리스도교 자유와 국교화네로(Nero, 재위 54~68) 황제는 64년 로마에서 발생한 대화재를 빌미로 로마 교회를 박해하기 시작했습니다. 이후 로마 제국을 동서로 분할해 통치한 디오클레티아누스(Diocletianus, 재위 284~305) 황제가 퇴위하기 직전인 303년 시작한 최후의 대(大)박해 때까지 그리스도교는 오랜 기간 박해의 시기를 보냈습니다. 그 후 서방 황제로 추대된 리키니우스(Licinius, 재위 308~324)는 임종 직전이었던 동방의 후임 황제 갈레리우스(Galerius, 재위 305~311)를 설득해 311년 그리스도인 관용 칙령에 서명하게 하고, 자신을 서방 황제로 선포한 콘스탄티누스(Constantinus, 재위 306~337)와 함께 313년 그리스도인 관용 포고인 ‘밀라노 칙령’을 발표하면서, 드디어 그리스도교는 종교의 자유를 얻었습니다.콘스탄티누스 황제는 324년 로마 제국을 재통일하고 단독 황제가 되어, 330년 로마 제국의 수도를 동방 콘스탄티노플로 옮겼으며, 337년 죽기 직전에 세례를 받았습니다. 한편 테오도시우스(Theodosius, 재위 379~395) 황제는 392년 황제 칙령으로 이교예식 참여 금지를 명함으로써 그리스도교는 로마 제국의 국교가 되었습니다. 하지만 테오도시우스는 395년 두 아들에게 로마 제국을 다시 둘로 나눠 물려주고 사망해 로마 제국은 또다시 동서로 나뉘었습니다.동서로 분열된 로마 제국은 5세기 들어 ‘하나이며 거룩한 교회’를 송두리째 흔들어 놓았습니다. 그리스 신학자들과 라틴 신학자들은 서로 다른 두 문화 환경에서 살면서 동서방의 고유한 사상에 따라 신학을 연구했습니다. 즉, 그리스어는 더 이상 일치의 결속력을 발휘하지 못했으며 서방은 이미 라틴어화 되었습니다. 동방 교회는 1453년 멸망할 때까지 동로마 제국의 안정적인 지지와 카파도키아 교부들의 신학적인 공헌으로 말미암아 풍부한 사상을 바탕으로 독자적인 지위와 특성을 형성해 나갈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서방 교회는 476년 서로마 제국이 멸망하자 세속 권력의 안정적 지지를 확보하는 것 자체가 시급한 일로 다가왔습니다.올바른 영적 여정을 위한 공의회의 가르침4세기에 로마 제국의 황제들은 교회 내부 문제에도 깊이 관여하며 교회의 수호자로 자처했습니다. 먼저 콘스탄티누스 황제는 북아프리카 교회에 나타난 이단 사상인 도나투스파(Donatism)를 척결하는 데 앞장섰습니다.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314년 소집한 아를(Arles) 교회회의에 모인 서방 교회 주교들은 극단적인 엄격주의, 완벽주의 및 분리주의인 도나투스파를 단죄했습니다.또한 콘스탄티누스 황제는 325년 니케아 공의회를 소집했습니다. 공의회에서 교부들은 아리우스(Arius, 256경~336)가 주창한 그리스도의 신성을 거부하고 그리스도도 창조되었다고 주장한 아리우스사상(Arianism)을 단죄했습니다. 즉, 육화하신 말씀은 성부와 ‘본질이 같으신 분’이라고 선언했습니다. 특히 니케아 공의회에서 삼위일체 교리를 확립하는 데에 활약한 아타나시우스(Athanasius, 295/300~373)는 중기 플라톤 사상에 따라 로고스를 피조물로 간주한 아리우스 사상을 반박하며 로고스가 신적 존재라고 주장함으로써 ‘무로부터의 창조(ex nihilo)’ 교리를 재확인했습니다. 훗날 카파도키아의 교부들은 이 점을 받아들이면서 오리게네스의 신비신학 안에 들어있는 오류를 넘어서는 새로운 신비신학을 펼칠 수 있었습니다.한편 테오도시우스 황제는 381년 콘스탄티노플 공의회를 소집했습니다. 공의회에서 교부들은 아리우스사상뿐 아니라 아폴리나리우스(Apollinarius, 315경~392 이전)가 주창했던 그리스도의 인성을 거부한 아폴리나리우스사상(Apollinarianism)도 단죄했습니다. 그런데 콘스탄티노플 공의회에서 콘스탄티노플 교회를 로마 교회와 동등한 명예와 수위권을 가진다고 천명하며 두 번째 서열을 선언함으로써 훗날 알렉산드리아 교회와 치열한 경쟁 구도를 형성했습니다. 사실 앞선 니케아 공의회에서 그리스도교는 로마, 알렉산드리아 및 안티오키아에 이어 예루살렘 교회에 네 번째 서열을 부여하며 명예와 수위권을 인정한 바 있었는데, 330년 로마 제국의 천도로 인하여 콘스탄티노플이 동로마 제국의 수도가 되자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콘스탄티노플 교회의 지위를 주장했던 것이었습니다.또 다른 백색 순교인 순례 신심이 시기에 콘스탄티누스 황제의 어머니인 황후 헬레나(Helena, 248/49~330)는 그리스도교와 그리스도인 신심 생활에 크게 이바지했습니다. 전승에 따르면, 헬레나가 뒤에서 많은 노력을 기울인 덕분에 아들인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밀라노 칙령을 발표할 수 있었으며 감옥에 갇혔던 많은 그리스도인도 석방될 수 있었습니다. 특히 헬레나는 326년경 예루살렘으로 순례를 떠났으며 그곳에 오랫동안 머물면서 골고타 언덕에 주님 무덤 성당을 세웠습니다.이러한 일들이 계기가 되었던지 그리스도인들 사이에서 예수님의 자취와 흔적이 남아 있는 성지(聖地)를 순례하는 신심이 널리 퍼졌습니다. 순례 신심은 예수님 성지에만 국한되지 않았습니다. 박해 시대에 순교한 이들을 기억하고 그들의 유해를 모시는 전통이 생기면서 순교한 장소나 순교자의 유해를 모신 곳에 기념 성당을 세우고 순례하기 시작했습니다.순례 신심은 적색 순교 이후에 수도 생활이나 동정 생활의 백색 순교를 실천하기 힘들어하는 그리스도인이 더 수월하게 실천할 수 있는 또 다른 형태의 백색 순교로 여겨지면서 널리 퍼졌습니다. 그리고 순례 신심과 맞물려 전례 예식도 발전하면서 전례 참여를 통한 신심 생활도 발전했습니다.그러므로 4세기에 그리스도교는 갑자기 모여드는 예비신자를 위한 세례 교육을 마련해야 했습니다. 게다가 이미 라틴어화 되었던 서방 교회는 성경 교육을 위해 라틴어 성경이 필요했습니다. 몇몇 교부들은 신비 교육을 강조하면서 그리스도인 영성 생활 발전에 기여하고자 했습니다. <가톨릭대 신학대학 영성신학 교수> cpbc2017.03.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