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목일기] 제 미래를 볼 수 있으신가요?](//cpbc.co.kr/CMS/newspaper/2010/06/rc/340088_1.1_titleImage_1.jpg)
[사목일기] 제 미래를 볼 수 있으신가요?홍석정 신부(의정부교구 청소년사목 7,8지구 전담)어느 날 미사가 끝나고 사제관으로 들어가려는데 고3 남학생이 조용히 다가오더니 눈을 아래로 깔며 나직히 말했다. "신부님, 드릴 말씀이 있는데요…." '이 녀석이 무슨 비밀이 있는 게로구나'하고 생각하며 센스있게 조용한 곳으로 데리고 갔다. "그래, 무슨 일이니?" 그 친구는 잠시 머뭇거리다 "성경에 보니 예언자들은 미래도 예언하고 그러던데 신부님도 제 미래를 볼 수 있으신가요?" '응? 이걸 어떻게 대답해야 하나?'하고 고민하며 그 친구 눈빛을 보니 상당히 불안했다.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들어보니 대략 다음과 같은 내용이었다. 얼마 전에 치른 중간고사를 망친 탓에 맞벌이하는 부모님을 볼 면목이 없고,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부모님 몰래 사귀던 여자친구와도 헤어지게 됐다는 것. 게다가 여자친구의 일방적 이별 통보 이유인즉슨, 어떤 대학생과 사귀게 됐기 때문이라는 것. 그래서 정말 살고 싶지도 않다는 고민이었다. 어느 것에 초점을 맞춰 상담을 해줘야 할지 고민이 됐다. 부모님 기대에 부응하지 못한 채 시험을 망친 것? 부모님 몰래 여자친구를 만난 것에 대한 죄책감? 여자친구에게 버림받은 배신감과 허전함? 어른 시각으로는 찬물에 세수 한 번하고 다시 열심히 공부하면 해결될 수 있을 정도의 가벼운 사안일지 모르지만 청소년에게는 전혀 다른 문제다. 청소년은 그만큼 나약하고, 여차하면 바람직하지 못한 방향으로 진로가 바뀔 가능성도 크다. 나는 "너 지금 많이 힘들지?"하고 물었다. 녀석은 다시 고개를 떨어뜨리더니 "신부님… 저, 정말… 죽고 싶어요. 저 같은 건 태어나지 말았어야 했어요"하며 꺼이꺼이 울었다. 그 친구는 1시간 이상 속마음을 털어놓다 마음이 좀 풀렸는지 또 물어봤다. "신부님, 전 앞으로 어떻게 될까요?" 허참… 이 녀석, 내가 무슨 도사님쯤으로 보이나. 하지만 한 마디 정도는 해주는 게 좋을 것 같았다. "다른 사람에게 관찰당하지 말고, 세상을 바라보는 사람이 돼봐. 이 세상도 그리고 미래도 다 네 것이라는 생각을 가지고 말이야." 그리고 문득 어느 소설에서 읽은 구절이 생각났다. "네가 곧 만나게 될 미래의 세계에서 불어오는 바람이 느껴지지 않니?" 이 감수성 예민한 녀석은 뭔가 새로운 희망을 찾았는지 "다음에 힘들 때도 또 신부님 찾아와도 돼요?"하고 묻는다. 난 물론 그러라고 했고, 그 이후로 그 친구는 다시 날 따로 찾지는 않았지만 가끔 성당에서 마주치면 환하게 웃는 모습 정도는 보여줬다. 조은일2010.06.15
[사목일기] 하느님이신 농부임용환 신부(서울 삼양동선교본당 주임)나의 아버지는 농부이시다"(요한 15,1). 농부이신 하느님은 우리들을 어떻게 키우실까? '빈민사목 청소년 농촌 봉사단'이란 이름으로 지난해에 이어 올해는 솔뫼농장을 찾았다. 주제는 '하느님은 농부이시다'이다. 솔뫼농장은 충북 괴산군 청천면과 경북 상주시 화북면 일대에서 유기농업으로 농사를 짓는 농부들 모임이다. 아이들이 할 일은 옥수수 밭에 있는 비닐을 수거하고 옥수수를 잘라 내는 일이다. 이런 일을 해 본 적이 없는 아이들이라 처음에는 의욕을 갖고 덤비지만 이내 지친다. 그래도 생각보다는 열심히 한다. 재미있어 하는 아이도 있고, 얼마 못가 밭에 주저앉아 쉬는 아이, 목마르다고 물 뜨러 가는 아이, 금세 익숙해져 낫질을 하는 아이, 옆에서 잘한다고 응원하는 아이도 보인다. 쉬고 있는 아이들에게 "야! 힘들게 일하고 있는 아이들 안보여 빨리 일어나!"라고 할 것인가, 아니면 "힘들지 좀 쉬었다 해"라고 할 것인가. 전자의 말을 들은 아이들은 마지못해 억지로 일하지만, 후자의 말을 들은 아이들은 잠시 쉬었다 즐겁게 일한다. 시간이 좀 지나자 역할이 자연스럽게 나눠진다. 비닐을 걷는 아이, 그 비닐을 모으는 아이, 모아진 비닐을 한군데에 쌓아 놓는 아이, 옥수수를 자르는 아이, 옥수수를 따는 아이. 모두에게 같은 일을, 같은 강도로, 같은 시간을 똑같이 시킬 수는 없다. 아이들은 다 다르다. 저녁에는 용산참사에 관한 동영상을 보여줬다. 염려한 것과는 달리 그때와 지금 상황을 이야기해 줄 때 다들 집중해서 듣는다. 동영상을 보면서 눈물을 흘리는 아이도 있다. 아이들을 올바르게 성장시키는 것은 어느 한쪽만을 보여주거나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다른 한쪽도, 즉 거짓 없이 진실을 알려주는 것이라고 믿는다. 설거지와 청소는 공평하게 나눠서 한다. 아이들이 제일 좋아하는 시간은 자유시간이다. 공을 차는 아이들, 잠자는 아이들, 게임을 하거나 수다를 떠는 아이들, 손톱에 봉숭아물을 들인다고 열심히 꽃을 따는 아이들. "보시니 참 좋았다"(창세 1,31)는 성경 말씀대로 아이들이 제일 힘 있고 생기 있고 예뻐 보이는 시간이다. 자기가 하고 싶은 것을 하고 있어서다. 그렇게 아이들을 살 게 해 줄 수는 없을까? 하느님이신 농부는 우리들을 모두 똑같이 키우시지는 않을 것이다. 우리들은 다 다르기 때문이다. 각 농작물마다 심는 시기와 키우는 방법이 다르듯, 우리들 하나하나도 각각 다른 방법으로, 한 사람 한 사람에게 맞는 방법으로 키우실 것이다.조은일2009.09.15
[사목일기] 행복하여라,가난한 사람들임용환 신부(서울 삼양동선교본당 주임)"행복하여라, 가난한 사람들! 하느님의 나라가 너희 것이다"(루카 6, 20). 1988년 9월, 사병 제대를 그야말로 무사히 마치고, 성소국장 신부님께 제대 신고(?)를 하고, 신부님의 소개로 찾아간 곳이 빈민사목위원회였다. 그렇게 빈민사목과의 인연은 시작됐고, 빈민사목을 하시는 신부님과 함께 금호동 전세방에서 살았다. 연탄불이 꺼지지 않게 잘 살피고, 가끔 밥도 하면서, 신부님과 함께 만났던 사람들이 천주교도시빈민회 회원들이었다. 거의 날마다 와서 신부님과 밤새 이야기했던 모습들이 기억난다. '세상에 이렇게 사는 사람들도 있구나!' 가난한 지역에 들어와서 최소한의 생활비로 살아가면서 아기방, 공부방, 야학, 노동 등을 통해 빈민운동을 하는 사람들, 그러나 늘 웃음 짓는 얼굴로 지역사람들을 만나는 모습이 감동적이었다. 시간이 지나면서 그들과 가까워지고 그들이 하는 모임에 같이 참여하면서 그들과 함께 계시는 하느님을 느낄 수 있었다. 내 생애에 잊지 못할, 그리고 지금의 나를 있게 한 시간이었다. 그렇게 3개월을 보내고 복학하여 빈민사목에 관심 있는 동지(?)들을 모아 모임을 만든 뒤 신부님과 또 천주교도시빈민회원들과의 인연을 이어갔다. 그 후 사제품을 받고 군종사목을 거쳐 정식으로 빈민사목에 발을 들여놓은 것이 1999년이었다. 벌써 10년 세월이 흘렀다. 그 세월 동안 늘 내 머리를 맴돌았던 성경구절이 있다. 바로 위의 루카 복음 6장 20절이다. 가난한 사람들이 어떻게 행복할 수 있을까? 하느님 나라를 차지하기 때문이라면 어떻게 물질문명의 이 세상에서 하느님 나라의 삶을 살 수 있을까? 물질적 측면에서만 가난을 이야기할 수는 없겠지만 그렇다고 그것을 빼놓고 가난을 이야기할 수도 없다. 가난하면 떠오르는 성 프란치스코는 주님을 사랑하고, 주님께 가까이 다가가는 가장 확실한 길이 가난의 길이라고 했다. 지금 내가 있는 곳은 삼양동, 33㎡가 채 안되는 공간에서 7명이 사는 가족, 음침하고 습한 지하 단칸방에서 혼자 사시는 할아버지, 한부모 가정, 그들은 내 삶을 부끄럽게 만든다. 가난하게 산다는 것이 무엇인가를 늘 고민하게 한다. 이제 '이것이다'라고 정확하게 설명할 수는 없지만 조금은 알 것 같다. 왜 가난한 사람들이 행복한지를. 부족하고 없는 만큼 하느님께서는 채워주신다. 돈으로는 결코 살 수 없는 그 무엇을. 그리고 그 무엇이 얼마나 값진 것인지를. 난 비록 가난하진 않지만 만일 내가 이곳이 아닌 다른 곳에 있었다면, 지금보다 하느님과 더 가까울 수는 없었을 것이다.조은일2009.08.11
![[덕원의 순교자들] <1>총론 '덕원의 순교자들' 기획에 들어가며](//cpbc.co.kr/CMS/newspaper/2013/05/rc/454194_1.2_titleImage_1.jpg)
[덕원의 순교자들] 총론 '덕원의 순교자들' 기획에 들어가며복녘에 복음 전파하고 주님 증거하다 스러진 20세기 순교자들 2009년 12월 28일 성 베네딕도회 왜관 수도원 성당에선 한국천주교회사에 기록될 의미 있는 시복재판이 열렸다. '하느님의 종 신상원 보니파시오 사우어 주교 아빠스와 김치호 베네딕도 신부와 동료 순교자들' 38위의 시복시성을 위해 구성된 이 예비심사 법정은 20세기 한국 천주교회 순교자들에 대한 첫 시복재판이란 점에서 교회 안팎으로 주목받았다. 시복 예비심사는 순조롭게 진행돼 16차례 회기를 마친 다음 그 기록을 정리해 이탈리아어로 번역, 교황청 시성성에 제출했고 얼마 되지 않아 시성성으로부터 시복 재판에 '장애 없음' 판정을 받았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이 재판에 대한 교회 구성원과 세간의 관심은 점차 사그라졌다. 지난해 시성성을 방문한 이형우 아빠스를 비롯한 시복재판 관계자들은 시성성 장관 안젤로 아마토 추기경에게서 충격적인 말을 들었다. "한국과 독일 교회 신자들이 이분들을 얼마나 알고 있으며 현양하고 있습니까? 이분들이 하루 빨리 성인반열에 오르기를 바란다면 신자들에게 이들을 알리고 기도하게 하십시오"라는 강력한 권고를 받았다. 시성성 장관의 우려처럼 솔직히 한국 교회 신자들은 이분들에 대해 아는 게 별로 없다. 이에 성 베네딕도회 왜관 수도원과 평화신문은 시성성 장관의 바람대로 '하느님의 종 신상원 보니파시오 사우어 주교 아빠스와 김치호 베네딕도 신부와 동료 순교자들' 38위를 널리 알리고 이들의 현양 운동을 교회 안에 확산하기 위해 특별 기획 '덕원 순교자들'을 연재하기로 했다. "작업은 갈수록 혹독해졌고 처우는 갈수록 잔인해졌으며 굶주림은 갈수록 고통스러워졌습니다. 우리는 침묵하고 참고 기도하고 하늘에 부르짖었습니다. 용기가 꺾였습니다. 정신력도 붕괴되고 들판의 돌무덤 위에 아무 데나 앉아 어린애처럼 울었습니다. 공산주의자들에게 총살당한다면 오히려 복일 것입니다. 1951년 9월1일 에우세비오 수사가 영양실조로 선종했습니다. 우리는 감시병들이 그를 마지막까지 들볶고 게으름뱅이라 욕하는 것을 지켜보았습니다. 그들은 에우세비오 수사의 죽음까지 비웃었습니다" (옥사덕 수용소 증언록 중에서)성 베네딕도회 덕원수도원 전경. 덕원수도원은 카예타노 피어하우스 신부와 레오폴드 다베르나스 신부가 설계했다. 로마네스크 양식으로 지어진 수도원은 길이 57m, 너비 19m, 종탑 높이 34m였다. ▨덕원의 순교자들 덕원의 순교자들은 일제 강점기와 해방 후 정치 사회적 혼란, 그리고 한국전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그리스도인 특히 성직자와 수도자란 이유 하나만으로 무신론자인 공산당원들에 의해 무참히 순교한 이들이다. 북녘땅에서 복음을 전파하고 주님을 증거하던 사제와 수도자들이 6ㆍ25 전쟁을 전후해(1949~1952) 공산주의자들 손에 적잖이 희생됐다. 이 가운데는 성 베네딕도회 덕원수도원ㆍ연길수도원ㆍ원산수녀원 소속 수도자들과 함흥대목구ㆍ연길대목구 소속 사제 38명도 포함돼 있다. 덕원의 순교자 중 이번에 선정된 '하느님의 종 신상원 보니파시오 사우어 주교 아빠스와 김치호 베네딕도와 동료 순교자들' 38위 가운데는 한국인 사제와 수도자, 평신도가 13명이고, 독일인 사제와 수도자가 25명이다. 교계 직분으로 좀 더 세분하면 주교 1명, 성직수사 13명, 덕원ㆍ함흥교구 사제 4명, 평수사 13명, 수녀 3명, 평신도 1명으로 구성돼 있고 연길교구 사제 2명도 포함돼 있다. 이 가운데 25명은 독일 7개 교구 출신 수도자들이다. 또 이들 38위 순교자 중 23명은 평양인민교화소와 자강도 만포 관문리수용소 등지에서 총살 등으로 살해됐고, 13명은 옥사덕 수용소에서 영양실조 등으로 굶어 죽었다. 그리고 한윤승(필립보)ㆍ신윤철(베드로)신부는 해주인민재판장에서 사형선고를 받고 근처 바닷가에서 생매장됐다. 주요 인물로는 초대 원산교구장이며 덕원 수도원장이었던 신상원 보니파시오 사우어 주교 아빠스와 덕원 수도원 출신 첫 한국인 사제인 김치호 베네딕도 신부, 그리고 고 구상 시인의 형인 구대준 가브리엘 신부 등이 있다. 또 루치우스 로트 덕원수도원장 신부는 교황 비오 12세가 독일 주재 교황대사로 있을 때 대사 비서로 일했고, 아르눌프 슐라이허 신부는 한국어 신약성경을 번역 출간해 성경 보급에 앞장섰다. 백작 가문의 카누트 다베르나스 신부는 '두메 본당 신부'로 희생적 삶을 산 수도자였다. 또 김종수(베르나르도) 신부는 한국인 첫 수련장 수사였고, 성 남종삼(요한)의 후손인 부산 출신 김동철(마르코) 신부는 월남해 목숨을 구할 수 있었는데도 불구하고 마지막까지 자기 본당을 버리지 않고 신자들과 함께 있다가 체포돼 순교했다.<표 참조> ▨ 순교 자료들 덕원의 순교자들 삶과 수난사는 처음부터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독일인 수도자들이 교화소에 갇혔을 때 수도원에서 쫓겨난 몇몇 한국인 수도자는 담장 안의 형제와 비밀 쪽지를 주고받았다. 이들 한국인 수도자들의 담대한 용기가 없었던들 많은 순교 행적이 영영 땅속에 묻힐 뻔했다. 또한 옥사덕수용소에서 함께 수감생활을 하다 기적적으로 생환한 수도자들의 증언도 그들의 순교 사실을 알리는 결정적 증거가 됐다. ▨ 시복 청원 배경 성 베네딕도회 상트 오틸리아 연합회 한국 진출 100주년을 두 해 앞둔 2007년 5월 10일, 성 베네딕도회 왜관수도원은 '덕원의 순교자들' 38위에 대한 시복시성 추진 교령을 반포했다. 여기에는 2007년 2월에 열린 오틸리아 연합회 평의회 권고와 같은 해 봄에 열린 한국 천주교 주교회의 총회의 격려가 큰 힘이 됐다. 더 거슬러 올라가면,"우리 시대 최근 연도까지 신앙에 대한 배척 때문에 피 흘린 모든 이를 미래에도 기억하자"고 호소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의 뜻을 구체적으로 실천하는 일이기도 했다. ▨ 시복 청원 의미 20세기 순교자로서 '덕원의 순교자들'이 지니는 각별한 의미는 이들이 우리 역사의 한복판에서 우리 민족과 운명을 함께 나누었다는 데 있다. '덕원의 순교자들'은 일제 강점기와 해방 후의 정치·사회적 혼란, 그리고 한국전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민족의 절망과 아픔을 고스란히 몸으로 겪은 분들이다. 따라서 이들의 삶과 죽음은 그 자체로 이미 한국 현대사의 일부이며, 그들의 순교 사건은 한민족의 비극과 별개가 아니다. '덕원의 순교자들'이 우리 현대사에 끼친 영향력을 생각할 때, 이들의 순교 행적은 교회 안에서뿐 아니라 이 땅의 모든 이가 가슴에 품고 공경할 만하다. 리길재기자 teotokos@pbc.co.kr조은일2013.05.21
[조규만 주교의 하느님 이야기](10) 다윗이 체험한 하느님 하느님께 대한 다윗의 믿음판관시대가 끝나고 사울이 왕이 되면서 이스라엘에 왕정시대가 시작됐다. 사울에 이어 왕이 된 다윗은 왕정시대 토대를 갖추는 데 혁혁한 공을 세웠다. 교황청립 그레고리오대 학장을 지낸 이탈리아 카를로 마리아 마르티니 추기경은 저서 「예루살렘의 밤의 대화-추기경, 청춘의 물음에 답하다」에서 마음이 불안할 때면 다윗왕을 생각한다고 말했다. 마르티니 추기경이 다윗왕에게 끌리는 이유는 그가 성공한 훌륭한 왕이어서가 아니라 온갖 시련과 비방을 겪으면서도 용기를 잃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했다. 성경에 나온 다윗왕 이야기 중에서 △왕자 요나탄과 우정 △좋은 아버지와 못된 아들 △하느님께 대한 신뢰 △저주를 받아들이고 용서하는 다윗 △하느님을 생각하는 마음에 대해 살펴보겠다. 첫째, 왕자 요나탄과 다윗 이야기는 우리가 잘 아는 '거지와 왕자' 이야기를 떠올리게 한다. 왕자 요나탄은 다윗이 왕궁에 입궐하자 다윗을 자기 목숨처럼 사랑하게 됐다. "요나탄은 다윗을 자기 목숨처럼 사랑하여 그와 계약을 맺었다. 요나탄은 자기가 입고 있던 겉옷을 벗어 다윗에게 주고, 군복과 심지어 칼과 활과 허리띠까지도 주었다. 다윗은 사울이 보내는 곳마다 출전하여 승리하였다. 그래서 사울은 그에게 군인들을 통솔하는 직책을 맡겼다. 그 일이 온 백성은 물론 사울의 신하들이 보기에도 좋았다"(1사무 18,3-5). 요나탄은 다윗을 좋게 보았지만 사울은 다윗을 시기, 질투하며 심지어 다윗을 죽이려고까지 했다. 그때마다 요나탄은 다윗을 구해줬다. 훗날 사울과 요나탄이 전쟁터에서 전사하자 다윗은 임금이 됐다. 다윗은 요나탄의 아들 므비보셋을 끝까지 보살펴주며 사울이 남긴 모든 땅과 종을 므비보셋에게 되돌려줬다. 둘째, 성경에는 좋은 아버지와 못난 아들 이야기가 나오는데, 가장 친숙한 이야기는 탕자의 비유다. 구약에서도 이와 비슷한 예가 바로 다윗과 그의 아들 압살롬이다. 예수께서 말한 탕자의 비유는 사실 비유가 아니라 다윗과 압살롬처럼 실재하는 이야기다. 다윗의 아들 압살롬은 반란을 일으켜 아버지 다윗을 죽이고 왕권을 차지하려고 한다(2사무 15). 때문에 아버지의 군대와 아들의 군대가 서로 칼을 겨누며 전쟁을 해야 했다. 다윗은 자신을 배반한 아들을 끝까지 사랑했다. 전투에 나선 부대장들에게 "나를 보아서 저 어린 압살롬을 너그럽게 다루어 주시오"하고 부탁할 정도였다. 하지만 결국 압살롬은 전투에서 죽고, 이 소식을 들은 다윗은 전쟁의 승리보다 아들을 잃은 슬픔에 통곡했다. "임금은 부르르 떨며 성문 위 누각으로 올라가 울었다. 그는 올라가면서 '내 아들 압살롬아, 내 아들아, 내 아들 압살롬아, 너 대신 차라리 내가 죽을 것을. 압살롬아, 내 아들아, 내 아들아!' 하였다"(2사무 19,1). 다윗은 탕자를 아무 탓 없이 맞이한 아버지처럼 아들을 사랑한 좋은 아버지였다. 셋째, 하느님께 대한 다윗의 철저한 믿음이다. 돌멩이 다섯 개를 든 다윗과 철갑옷과 칼로 무장한 골리앗 이야기는 상대가 되지 않는 싸움을 말할 때 많이 인용된다. 이런 싸움에서 다윗은 하느님께 대한 믿음으로 조금도 두려움이 없이 골리앗과 맞붙었다. 다윗은 또 자신을 죽이려 했던 사울왕을 여러 번 살려줬다. 그는 사울왕이 하느님께 기름부음을 받은 사람이기에 자신의 손으로 처단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하느님께서 세운 왕에 대한 존중이다. 다윗은 또 하느님께 죄를 지었을 때 삼년 동안 기근이 들게 하는 벌, 전쟁이 나서 적들의 칼을 피해 도망다니는 벌, 온 나라에 흑사병이 퍼져 백성을 파멸시키는 벌 중에서 한 가지를 선택해야 했다. 이 때 다윗은 "괴롭기 그지없구려. 그러나 주님의 자비는 크시니, 사람 손에 당하는 것보다 주님 손에 당하는 것이 낫겠소"(2사무 24,14)하며 흑사병을 택했다. 계약의 궤를 옮기는 과정에서 다윗은 흥에 겨워 벌거벗고 춤을 췄다. 이를 보고 사울의 딸 미칼은 다윗을 비웃었다. 하지만 다윗은 미칼에게 자신은 하느님 앞에서 체신을 따지지 않으며 이보다도 더 천하게 자신을 낮출 수 있다고 잘라 말했다. 하느님 앞에서 얼마든지 자신을 낮추고 망가질 수 있던 다윗이었다. 하느님께 대한 다윗의 믿음은 자기 부하 아내를 범하고 나탄 예언자 앞에서 죄를 고백하는 부분에서도 엿볼 수 있다. 한 나라 왕으로서 최고 권력을 가진 그는 자기 죄를 은폐할 수 있었지만 용기를 내 하느님께 고백했다. 왕이 자기 죄를 인정하고 고백하는 일은 정말 대단한 일이다. 넷째, 다윗은 자신을 저주하는 친척 시므이를 넓은 마음으로 다 받아들였다. 그리고 나중에 용서를 청하는 시므이에게 해치지 않겠다고 약속했다. 다섯째, 다윗은 하느님의 계약의 궤가 시온산 천막에 머무르고 있는 사실을 늘 안타까워하며 하느님께 송구스러워했다. 그리고 예언자 나탄에게 하느님 성전을 지어야 한다고 제안했다. 하느님을 생각하는 다윗의 마음을 보면 우리는 과연 하느님을 위해 무엇을, 얼마나 생각하고 있는지 돌아보게 된다. 하느님은 다윗의 갸륵한 마음에 "내가 나의 백성 이스라엘에게 판관을 임명하던 때부터 해온 것처럼 너에게 한 집안을 일으켜 주리라고 선언한다. 너의 날수가 다 차서 조상들과 함께 잠들게 될 때, 네 몸에서 나와 네 뒤를 이을 후손을 내가 일으켜 세우고 그의 나라를 튼튼하게 하겠다. …너의 집안과 나라가 네 앞에서 영원히 굳건해지고 네 왕좌가 영원히 튼튼하게 될 것이다"(2사무 7,11-16)하고 약속하셨다. 정리=박수정 기자 catherine@pbc.co.kr ※'조규만 주교의 하느님 이야기'는 평화방송 라디오(FM 105.3㎒)에서 매 주일 오후 6시 5분에 방송되며, 평화방송TV에서는 매주 화요일 오전 8시(본방송), 수요일 새벽 4시와 저녁 9시, 금요일 오후 4시, 주일 오후 6시에 재방송된다. 인터넷 다시 보기 www.pbc.co. kr조은일2011.08.09
![[전문] 대전교구장 김종수 주교 부활 담화](https://img.cpbc.co.kr/newsimg/upload/2026/04/01/blC1775029666406.jpg)
[전문] 대전교구장 김종수 주교 부활 담화 ‘그리스도는 우리의 평화이십니다.’(에페 2,14) + 찬미 예수님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십자가상 죽음으로 우리를 하느님 아버지와 다시 화해시켜 주신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님께서 부활하셨습니다. 주님을 찬미합시다. 알렐루야! 유다 지도자들의 모함으로 예수님께서 로마 병사들에게 붙들려 가실 때 제자들은 모두 도망갔습니다. 베드로 사도만이 예수님 뒤를 따라갔지만, 밤새 세 차례나 예수님을 모른다고 부인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부활하셨다는 증언을 듣고 제자들은 다시 예루살렘에 모였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고 또 유다인들이 두려워 문을 걸어 잠그고 있었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찾아오셔서 처음 건네신 말씀이 평화의 인사입니다. 요한복음 20장에서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평화가 너희와 함께!”라고 세 차례 축복의 말씀을 하십니다. 그리고 바오로 사도는 “그리스도는 우리의 평화이십니다. 그분께서는 당신의 몸으로 유다인과 이민족을 하나로 만드시고 이 둘을 가르는 장벽인 적개심을 허무셨습니다.”(에페 2,14)라고 선언합니다. 성경은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로 이루어진 구원을 평화라고 말합니다. 왜 그럴까요? 성경이 가르치는 평화는 태초에 하느님께서 창조하신 만물이 ‘하느님 보시기에 좋았다.’고 한 상태를 잘 보존하는 것을 말합니다. 인간은 다른 동물들과는 달리 하느님의 숨을 받아 하느님을 닮게 창조되었습니다. 그래서 인간은 하느님처럼 살아야 하는 것이 하느님의 뜻입니다. 죄와 연루되지 않고, 하느님을 아버지로 하는 한 형제로 서로 사랑하며 살면서 하느님께서 맡겨주신 세상을 잘 돌보는 것이 평화입니다. 이 모든 것은 우리가 하느님 안에서 하느님 말씀에 순종하며 살아갈 때 가능한 것입니다. 그런데 아담과 하와는 뱀의 유혹에 넘어가 스스로 하느님이 되고 싶었습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따른다는 마음을 빼앗긴 것입니다. 이것이 모든 죄의 뿌리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하느님을 떠난 인간에게 죽음이 들어왔습니다. 하느님께서 아브라함을 불러 시작하신 구원경륜은 죽음이 지배하는 죄의 역사를 다시 하느님 품 안으로 회복시키는 역사입니다. 그런데 구약성경의 긴 역사는 인간의 힘으로 인간을 구원할 수 없다는 것을 증명하였습니다. 그래서 하느님께서는 구원의 메시아를 약속하셨고, 이스라엘 백성은 메시아와 그분이 맺어주실 새 계약을 기다렸습니다. 때가 차자 하느님의 아들이 이 세상에 우리와 같은 인간의 모습으로 오셨습니다. 그분이 우리와 똑같은 인간으로 오시어, 이제 그분이 가시는 길은 우리도 갈 수 있게 보여주시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아버지의 뜻에 따라 우리의 죄를 당신 몸에 지시고, 우리를 대신하여 십자가 위에서 죄값을 치르셨습니다. 그리하여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우리에게 죄의 용서와 영원한 생명의 구원이 주어졌습니다. 우리는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느님께서 태초에 원하셨던 하느님 닮은 인간의 모습을 회복한 것입니다. 이것이 성경이 말하는 ‘평화’입니다. 그래서 바오로 사도는 ‘그리스도는 우리의 평화이십니다.’라고 선언한 것입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이 일은 예수님이 오시기 수백 년 전 이사야 예언자가 이미 알려준 소식입니다. “그는 우리의 병고를 메고 갔으며 우리의 고통을 짊어졌다. 그런데 우리는 그를 벌 받은 자, 하느님께 매 맞은 자, 천대받은 자로 여겼다. 그러나 그가 찔린 것은 우리의 악행 때문이고 그가 으스러진 것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다. 우리의 평화를 위하여 그가 징벌을 받았고 그의 상처로 우리는 나았다. 우리는 모두 양 떼처럼 길을 잃고 저마다 제 길을 따라갔지만, 주님께서는 우리 모두의 죄악이 그에게 떨어지게 하셨다.”(이사 53,4-6)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죽음을 이기고 부활하신 예수님은 평화에 이르셨고, 그 평화를 사도들에게 주셨습니다. 우리 모두 사도들을 통하여 주님의 평화를 받았습니다. 우리를 위해 죽으시고 부활하신 예수님을 찬미하며, 예수님 안에서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평화의 은총을 받으신 여러분 모두에게 축하의 인사를 드립니다. 이제 우리는 평화의 사도입니다. 평화는 하느님과의 화해이며, 이웃 형제자매들과의 화해는 물론 모든 피조물과의 화해를 의미합니다. 바오로 사도는 말합니다. “그분 십자가의 피를 통하여 평화를 이룩하시어 땅에 있는 것이든 하늘에 있는 것이든 그분을 통하여 그분을 향하여 만물을 기꺼이 화해시키셨습니다.”(콜로 1,20)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하느님의 자비를 믿으십시오. 하느님께서는 당신 아들을 희생하여 우리와 화해하셨습니다. 우리 모두는 하느님 한 아버지의 자녀들입니다. 시기와 질투 그리고 싸움과 전쟁은 화해와 반대되는 것들입니다. 그런 것들은 하느님의 사랑을 받는 이들의 삶이 아닙니다. 기뻐하는 이와 함께 기뻐해 주시고, 슬퍼하는 이웃과 함께 울어 주십시오. 지금도 국제사회의 패권을 장악하기 위하여 혹은 권력자가 자신의 자리를 유지하고 확장하기 위하여 무모한 전쟁을 일으켜 평범한 시민 특히 어린아이들까지 희생시키면서도 아무런 반성의 태도를 보이지 않습니다. 이번 춘계주교회의에서도 이런 상황에 아픈 마음으로 동참하면서, 신자 여러분에게 단식과 기도로 세상의 평화를 위해 함께 해주실 것을 호소하였습니다. 지구 생태계 역시 우리 인간과 화해를 기다리며 신음하고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세상을 창조하시며, 당신을 닮은 우리에게 모든 피조물을 맡기셨습니다. 생태계 파괴의 주된 원인은, 보다 편리한 삶에 대한 욕망과 그에 상응하는 돈벌이입니다. 우리는 조금 천천히 조금 불편하게 살아갈 필요가 있습니다. 그것이 우리의 정신적이고 영적인 삶을 위해서도 유익합니다. 창조주 하느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셨듯이, 우리는 우리에게 맡겨진 피조물을 돌보아 하느님께서 보시니 좋았다고 하신 모습을 보존해야 합니다.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우리는 하느님의 지극한 자비로 구원받은 부활의 증인이며 평화의 사도입니다. 가난한 이웃에게 사랑을 베풀며 부활의 기쁨을 전하고 진정한 형제애로 평화를 이루십시오. 지구 생태계도 하느님 자녀들의 자비로운 손길을 고대하고 있습니다. 주님 부활을 온 마음으로 축하드립니다. 알렐루야! 알렐루야! 2026년 4월 5일 주님 부활 대축일에 천주교 대전교구장 주교 김종수 아우구스티노 이준태 2026.04.02

고개 숙인 키 작은 보라색 꽃, 성모의 겸손 닮았네[‘성서와함께’ 가꾸는 기도의 정원] 13. 제비꽃 성서와함께 제공 지난 글에서 성모 승천 대축일을 앞두고 성모님을 상징하는 백합에 관해 이야기했다. 주님 탄생 예고를 그린 회화 작품에 마리아의 순결을 나타내는 흰 백합이 종종 등장한다고 언급했는데, 그 자리에 다른 꽃도 있었던 모양이다. 전해지는 이야기에 따르면, 가브리엘 천사가 하느님의 계획을 전한 다음 기쁜 마음으로 하늘로 돌아가려는 순간, 마리아의 방 창문 앞에 보라색 제비꽃이 피어있는 것을 보았다. ‘마리아가 정말 좋아하는 꽃인가 보구나.’ 천사는 잠시 걸음을 멈추고 제비꽃을 축복한 다음 그 꽃에 마리아의 겸손한 마음을 닮은 은은한 향기를 불어넣었다. 높이가 10㎝ 내외에 불과한 자그마한 제비꽃은 키 큰 식물들 사이에서 존재감이 묻히기 쉽고 외형도 그다지 화려하지 않지만, 오히려 이 같은 특성 때문에 오랫동안 겸손의 상징으로 여겨져 왔다. 성경에 직접적으로 언급된 구절은 없으나, 그리스도인들은 작지만 당찬 제비꽃의 모습에서 마리아의 수수한 아름다움과 겸손을 떠올리고, 하느님의 계획에 평생 순종한 성모님의 믿음과 인내를 묵상했다. 또 다른 전설에 의하면, 예수님께서 못 박히신 십자가가 땅에 그림자를 드리우자 그 자리에 보라색 제비꽃이 피었는데, 꽃이 큰 슬픔에 잠겨 고개를 떨구었다고 한다. 실제로 제비꽃은 꽃줄기 끝 부분이 아래를 향해 휘어지면서 꽃이 옆을 향해 피어 마치 고개를 숙이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제비꽃은 흰색·노란색 등 다양하지만, 보라색이 가장 대표적이다. 푸른 기운이 강하게 도는 진한 보라색을 ‘바이올렛’이라고 하는데, 제비꽃속이라는 뜻의 라틴어 비올라(Viola)에서 유래한 단어다. 보라색은 빨간색의 집중력과 에너지, 파란색의 차분함과 명료함을 모두 담고 있는 오묘한 색으로, 가톨릭교회에서는 참회·슬픔·애도를 상징한다. 한편 흰색 제비꽃은 이탈리아 산 지미냐노의 성녀 세라피나의 꽃으로 알려져 있다. 세라피나는 늘 어려운 이들을 위해 봉사하고, 몸이 아파 병상에 누워 지내면서도 자기보다는 다른 이들을 먼저 생각하며 기도했다고 한다. 겨우 열다섯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는데, 그녀가 누워있던 나무판에서 시신을 들어 올리자 그곳에 흰 제비꽃이 피어 있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화려한 장미 같은 사람도 아름답지만, 하느님께서 정말 예뻐하시는 이는 겸손한 마음으로 하느님을 섬기고 타인의 시선에 흔들림 없이 묵묵하게 일하는 제비꽃 같은 사람이 아닐까. 신지현cpbc2026.08.12

온유[월간 꿈 CUM] 테마로 읽는 성경 (1) 신학생 시절 들은 학장 신부님의 말씀이 생각납니다. 종종 함께 탁구 게임을 하는 성격이 아주 온유한 신부님이 계시는데, 급한 성격의 학장 신부님께서 그 성격대로 아무리 매서운 공격을 퍼부어도 공격은 하지 않으면서 공을 슬슬 받아넘기기만 하는 신부님을 한 번도 이기지 못한다는 말씀이었습니다. 계속 공격하다가 결국 힘이 빠져 헛손질해서 지고 만다는 것이었죠. 온유는 나약함이 아닙니다. 오히려 온유는 강한 내적 힘이 외부로 드러나는 것입니다. 온유는 단지 불편한 말을 하지 않고 찡그린 얼굴을 보이지 않음으로써 다른 사람과의 갈등을 피하려 택하는 손쉬운 태도가 아닙니다. 하느님은 온유한 분입니다. 비록 하느님의 온유한 속성이 명시적으로 언급되는 구절은 얼마 되지 않고, 성경의 많은 부분은 오히려 그와 반대되는 하느님의 모습을 드러내는 듯하지만 말입니다. 하느님의 온유함은 성경의 첫 장에서부터 발견됩니다. 창세기에는 두 개의 창조 이야기가 담겨 있는데, 이 가운데 두 번째 이야기는 인간에 대한 하느님의 염려와 배려로 가득 차 있습니다. “그때에 주 하느님께서 흙의 먼지로 사람을 빚으시고.”(창세 2,7) 우리말 성경이 흙먼지로 번역한 히브리 단어 ‘아다마’는 찰흙으로 옮길 수도 있습니다. 찰흙을 빚어본 사람은 알겠지만, 이 작업은 섬세함과 부드러움이 요구되는 일입니다. 찰흙을 거칠고 투박하게 다루었다간 원하는 형상을 만들지 못하고 낭패 보기 십상이죠. 이렇게 인간 창조는 하느님의 놀라운 권능이 아니라 부드러운 손길의 결과물입니다. 그러니 우리 인간 존재 자체가 하느님 온유의 결정적 증거입니다. 이탈리아 카프리 섬, 산 미켈레 성당 바닥의 마졸리카(도자기 타일화) ‘에덴동산’ “주 하느님께서는 사람을 데려다 에덴 동산에 두시어, 그곳을 일구고 돌보게 하셨다.”(창세 2,15) 이 말씀은 하느님께서 소작농에게 땅을 배당하는 지주와 같다고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말 성경에 ‘데려다’로 번역된 단어는 직역하면 ‘잡다’가 되는데, 어머니가 갓 태어난 아기를 손으로 조심스럽게 잡는 것과 같은 몸짓을 가리킵니다. “그리고 주 하느님께서는 사람에게 이렇게 명령하셨다. ‘너는 동산에 있는 모든 나무에서 열매를 따 먹어도 된다. 그러나 선과 악을 알게 하는 나무에서는 따 먹으면 안 된다. 그 열매를 따 먹는 날, 너는 반드시 죽을 것이다.’”(창세 2,16-17) 우리말 성경에 ‘명령’으로 번역된 단어는 ‘처방’으로 옮길 수도 있습니다. 명령과 처방은 다릅니다. 주차 금지구역에서 차를 빼라는 경찰의 명령과 잃어버린 건강을 되찾게 해주려는 의사의 처방은 명확히 다르죠. 명령은 무뚝뚝하지만, 처방에는 온유함이 있습니다. 흔히 이 말씀을 엄격한 금지 명령으로만 생각하지만, 하느님의 말씀은 선악과의 금지가 아니라 인간이 살기 위해서 먹어야 하는 대부분 열매의 허용이 우선한다는 점에 주목해야 합니다. 그리고 이어지는 저주처럼 보이는 금지 명령도 단어 자체보다 그 어조에 유의해야 합니다. 이 말씀은 마치 어머니가 어린아이에게 아직은 소화할 능력이 없어서 크게 탈이 날 수 있는 음식을 주의하라고 강하게 경고하는 것과 같이 이해될 수 있습니다. 선과 악에 대한 엄청난 지식을 주는 열매는 그것을 감당할 수 있는 튼튼한 위장을 갖기 전까진 먹어선 안 됩니다. 아직 어린 인간에게는 이 열매를 먹는 것이 금지되었지만, 인간이 성장하게 되면 그 열매를 맛볼 수 있는 것입니다. 원죄 이야기에서 어떤 이들은 당신의 명을 거스르는 죄를 지은 인간을 저주하시는 하느님의 무서운 모습만을 기억할지도 모릅니다. 인간이 죄를 지어 하느님께서 인간에 대한 태도를 온유에서 분노로 바꾸신 것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그 저주 밑에는 인간을 향한 하느님의 온유가 여전히 자리하고 있습니다. 먼저 생각해야 할 것은 저주 이후에도 하느님과 인간의 관계가 끊어지지 않았다는 점입니다. 즉, 저주는 하느님께서 인간을 포기하시거나 버리시기 위해 내리신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이것은 오히려 원죄로 손상된 하느님과 인간 사이의 관계를 온전히 회복하려는 훈육을 위한 조치였습니다. 회초리가 사랑의 매가 될 수 있는 것처럼 말이죠. 이렇게 하느님의 온유는 단순히 온화하고 부드러운 성격을 가리키지 않습니다. 하느님의 분노조차도 그분의 온유를 드러내는 방법입니다. 누군가는 하느님께서 선악과를 에덴동산에 두시고는 인간이 먹는 것을 금지하신 것은 덫을 놓으신 것이 아닌가 생각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만일 그렇다면, 덫을 놓고 인간이 걸려들기를 기다리며 사악한 웃음을 짓는 하느님의 모습에서 온유함을 찾을 수는 없겠죠. 하지만 이 또한 하느님의 온유를 드러냅니다. 여기서 드러나는 것은 아버지의 온유함입니다. 언젠가는 결국 자신의 모든 재산을 자녀에게 물려주겠지만, 단계별로 자녀가 감당할 수 있는 만큼씩 선물하는 아버지의 온유함 말입니다. 어린아이에게 단번에 차 열쇠를 선물하는 아버지는 없습니다. 인간이 성장하면 하느님은 언젠가는 선악과를 그에게 허락했을 것입니다. 글 _ 함원식 신부(이사야, 안동교구 갈전마티아본당 주임, 성서신학 박사) 1999년 사제서품 후 성경에 대한 전문적인 연구를 위해 프랑스로 유학, 파리 가톨릭대학교(Catholique de Paris)에서 2007년 ‘요나서 해석에서의 시와 설화의 상호의존성’을 주제로 석사학위를, 2017년 ‘욥기 내 다양한 문학 장르들 사이의 대화적 관계’를 주제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cpbc2025.01.24
![[구요비 주교의 생활속의 복음] 네 형제가 너에게 죄를 짓거든⋯](https://img.cpbc.co.kr/newsimg/upload/2026/09/02/YBD1788316106258.jpg)
[구요비 주교의 생활속의 복음] 네 형제가 너에게 죄를 짓거든⋯ 카스파르 다비드 프리드리히 작 ‘해 질 무렵의 형제들’. 저는 신학생 시절 윤리신학을 공부하며, 성경을 통하여 계시된 여러 계명이 하느님의 영원한 법을 이루고 있음은 자명한데, 자연법(自然法)도 신법(神法)에 속한다는 사실에 매우 놀랐던 적이 있습니다. 자연법은 “바로 하느님께서 우리 안에 부여하신 지성의 빛입니다. 이 빛을 받아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하고 무엇을 하지 말아야 하는지를 알게 됩니다. 하느님께서는 창조 때에 인간에게 이 빛과 법을 주셨습니다.”(토마스 아퀴나스) 이는 하느님의 모습대로 창조된 인간은 그분의 창조 질서와 구원 계획을 올바로 깨닫고 이에 참여함으로써, 그 뜻이 세상과 역사 안에서 이루어지도록 협력하는 존재임을 잘 보여줍니다. 이 세상과 우주 만물 안에 하느님의 법과 질서가 아로새겨져 있고 인간은 이성의 빛으로 그 안에서 하느님의 현존과 손길을 감지할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 역사 속 예언자의 사명과 역할이 이 지점에서 이루어졌습니다.(에제 3,17 참조) 예언자의 말씀은 단지 인간의 죄와 과오에 대한 하느님의 징벌과 질책을 전달하는 것만이 아닙니다. 하느님과 인간 사이에 ‘나와 너’의 친밀한 관계를 회복하고, 인간의 회심과 개과천선을 바라시는 애정 어린 하느님의 호소입니다. 이렇듯이 하느님은 단지 당신의 피조물에 불과한 인간을 당신의 파트너로 격상시켜 동등한 존재로 대해 주시는 사랑의 하느님이십니다.(1요한 4,17 참조) 그러므로 하느님의 사랑에 응답하는 구체적 규범인 율법도 사랑이어야 하며 사랑은 율법의 완성입니다.(로마 13,10 참조)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외아들로서 하느님의 사랑을 살아가는 방식을 구체적으로 오늘 복음에서 설명해 주십니다. “네 형제가 너에게 죄를 짓거든, 가서 단둘이 만나 그를 타일러라. (⋯) 그가 네 말을 듣지 않거든 한 사람이나 두 사람을 더 데리고 가거라. (⋯) 그가 그들의 말을 들으려고 하지 않거든 교회에 알려라.”(마태 18,15–17) 죄란 ‘인간이 하느님으로부터 멀어져 피조물에게로 향하는 것’이라고 할진대 나와 관계를 맺고 있는 이웃이 나에게 죄를 지은 경우란 구체적으로 어떤 것일까요? 무엇보다도 예수님은 그 죄가 어떠한 것이든 나에게 해를 입힌 사람들의 불의와 잘못을 나의 주관적이고 세상적인 규범으로 판단하고 단죄하고 처벌하려 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이는 하느님의 자녀로서 나 자신이 먼저 하느님의 생각과 마음을 깊이 헤아리고 그분 사랑의 본성 안으로 들어가 머무름으로써 그분을 대신하여 그분의 심정으로 나에게 죄지은 사람을 대하라는 사랑의 초대입니다. 이 하느님의 사랑은 인간의 본성 안에 새겨져 있기에 자녀들인 우리는 이 내면의 사랑을 계속 키우고 활짝 꽃피워야 하겠습니다. 이를 위하여 예수님은 공동체적인 기도의 위력을 우리에게 일깨워 주십니다.(마태 18,19–20 참조) cpbc2026.09.02

식목일/ 나무와 숲이 갖는 의미와 중요성숲, 우리 생명의 보호막 5일은 식목일이다. 식목일은 1949년 국가공휴일로 지정된 뒤 공휴일과 비공휴일을 오가다 2006년 비공휴일이 됐다. 하지만 지구 온난화 등으로 지구촌 환경문제에 관한 관심이 높아진 요즘, 나무와 숲에 대한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는다. 유엔사막화방지협약 자료에 의하면 관개와 산림벌채, 환경오염 등으로 지구상에서 매년 600만㏊(여의도의 7185배)의 숲과 토지가 사막화되고 있다. 환경 전문가들은 "숲이 사라지면 지표 반사율이 증가하고, 냉각화돼 강우량이 줄어 사막화는 더 빠른 속도로 진행된다"며 "점차 산소가 부족해져 야생동물이 멸종 위기에 이르고 물 부족현상으로 작물재배가 불가능해 극심한 식량난에 빠진다"고 우려한다. 산불도 숲을 사라지게 하는 원인 가운데 하나다. 담배꽁초나 불장난 등으로 산에 불을 내는 행위는 단 몇 분 만에 몇십 년 자란 나무를 잿더미로 만들어 버린다. 황창연(성 필립보 생태마을 관장) 신부는 환경에세이 「북극곰 어디 가야 하나」에서 "산불이 일어나면 나무와 산에 사는 동물이 죽을 뿐 아니라 사람 병을 고치는 약초까지도 없애버린다. 산림 파괴는 인간 삶의 파괴로 이어지는 연결 고리"라고 말했다. 숲이 주는 혜택은 어마어마하다. 숲 1㏊(3025평)는 300명에게 산소를 공급할 수 있다. 우리나라 산림 면적이 630만㏊이므로, 19억 명이 마실 수 있는 산소를 내뿜는 셈이다. 숲은 또한 경제발전의 원동력이다. 홍수ㆍ가뭄을 조절하고 풍년을 안겨준다. 우리나라 국민이 1년에 쓰는 물의 양이 320억 톤인데, 우리나라 산에 저장된 물의 양이 180억 톤이다. 따라서 숲이 없으면 물을 구하기 어려워지고, 물이 없으면 풍요로운 삶을 기대할 수 없다. 성경에 따르면, 사막의 땅 중동 레바논도 2000년 전 솔로몬 시대에는 숲이 울창한 지역이었다. "또 레바논에서 나는 향백나무와 방백나무와 자단나무도 보내 주십시오. 나는 임금님의 종들이 레바논에서 나무를 잘 벤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2역대 2,7). "…임금은 이 방패들을 '레바논 수풀 궁'에 두었다"(2역대 9,16). 울창한 숲도 자연환경이 변하고 관리를 소홀히 하면 언제든지 사막으로 변할 수 있다는 얘기다. 필리핀 주교회의는 1988년 사목교서를 통해 "원래 30만㏊였던 원시림이 겨우 1만㏊만 남아 있다. 이 숲에 살던 몇몇 아름다운 동물들은 어디로 갔는가?"하고 우려한 바 있다. 교황 베네딕토 16세는 2010년 세계 평화의 날 담화에서 "평화를 이루려면 피조물을 보호하십시오. 모든 사람이 하느님과 인간과 피조물 전체의 불가분의 관계를 깨달으면 선의의 사람들이 추구하는 평화는 더욱 쉽게 이뤄질 것입니다"라고 강조했다. 나무를 아끼고 사랑하는 것은 결국 하느님 창조질서 보전을 위한 길이다. 이힘 기자 lensman@pbc.co.kr조은일2013.04.02
![[출판]뒤통수가 멋진 사람 - 겸손 사랑 일치 따라가면 그 끝엔 주님 평화가](//cpbc.co.kr/CMS/newspaper/2013/03/rc/444989_1.1_titleImage_1.jpg)
[출판]뒤통수가 멋진 사람 - 겸손 사랑 일치 따라가면 그 끝엔 주님 평화가대전 가톨릭대 총장 곽승룡 신부, 소통 치유에 이르는 여섯 가지 원리 제시 뒤통수가 멋진 사람 곽승룡 지음 /마음나무/1만 2000원우리 시대 화두인 '소통'과 '힐링'으로 가는 길을 그리스도의 마음과 행동, 생각에서 찾아냈다. 저자 곽승룡(대전가톨릭대 총장) 신부는 그리스도 마음인 '겸손과 섬김', 그리스도 행동인 '헌신과 사랑', 그리스도 생각인 '균형과 일치'를 힐링과 소통으로 가기 위한 여섯 가지 원리로 제시한다. 성경 속 인물들과 사건, 성인들 이야기 등 풍부한 예화로 여섯 가지 원리를 이해하기 쉽고 재미있게 풀어냈다. 겸손과 섬김은 소통의 열쇠가 되는 공감을 형성하게 해준다. 곽 신부는 "사람을 움직이는 겸손은 마음속 문고리와 같아서 진심을 느낄 때, 마음의 문은 안쪽에서 스스로 열려 소통을 넘어 힐링으로 나간다"고 했다. 이와 함께 섬기는 리더십의 모범으로 예수님을 꼽으며 예수님과 참 만남을 통해 섬김의 삶을 살 것을 당부했다. 헌신과 사랑은 '뒤통수가 멋진 사람'이 되는 지름길이다. 몰로카이섬에서 한센인들을 돌본 성 다미안 신부와 아프리카 수단에서 하느님을 전한 이태석 신부, 백혈병에 걸려 시한부 인생을 살면서도 원폭 피해자 구호활동에 앞장서고 여러 권의 책을 통해 평화를 외쳤던 일본인 의사 나가이 타카시 박사 등이 '뒤통수가 멋진 사람'으로 소개됐다. 예수님 삶을 온몸을 다해 살아간 분들이기 때문이다. 곽 신부는 "고독과 절망이 지배하는 오늘, 세상은 하느님의 마음을 아는 사람을 필요로 한다"면서 "용서하고 치유하고 돌보려는 애틋한 마음을 가진 사람, 의심하지 않고, 앙갚음하지 않고, 분노하지 않고, 증오하지 않는 마음을 가진 사람, 오직 사랑을 주고 사랑을 받고자 하는 마음을 가진 사람을 필요로 한다"고 했다. 겸손과 섬김, 헌신과 사랑은 영적 균형과 일치를 이루게 해준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돌아가시기 직전 아버지께 드린 마지막 기도는 일치의 청원기도였다. "그들이 모두 하나가 되게 해 주십시오. 아버지께서 제 안에 계시고 제가 아버지 안에 있듯이, 그들도 우리 안에 있게 해 주십시오"(요한 17,21). 곽 신부는 "일치는 신앙인 삶의 목표이자 중심"이라면서 일치의 원리는 '내 뜻'이 아닌 '아버지의 뜻'에 있음을 강조했다. 소통과 힐링의 길 끝엔 하느님의 평화가 있다. 곽 신부는 "주님처럼 하느님과 일치하고자 하는 사람은 스스로 어려움을 짊어지고 이겨 낼 수 있으며, 더 나아가 사람을 끌어당기는 생각과 마음, 그리고 행동을 지니게 된다"면서 "그 생각과 마음, 행동이 도착해야 하는 곳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평화"라고 했다. 그러면서 요한복음 14장 27절 말씀을 일깨웠다. "나는 너희에게 평화를 남기고 간다. 내 평화를 너희에게 준다"(요한 14,27). 박수정 기자 catherine@pbc.co.kr조은일2013.03.27
![[전국 교구장 새해 사목교서] 원주교구- 우리에게 희망을 주시는 하느님-청소년의 해](//cpbc.co.kr/CMS/newspaper/2012/12/rc/436625_1.1_titleImage_1.jpg)
[전국 교구장 새해 사목교서] 원주교구- 우리에게 희망을 주시는 하느님-청소년의 해 원주교구장 김지석 주교 우리 교구는 올해 전 세계 가톨릭교회가 지내는 신앙의 해라는 바탕 위에서 '희망의 해'로 맞이하고자 하며, 이어서 내년에는 '사랑의 해'를 계획하고 있습니다. 성경에서 믿음과 희망, 사랑은 서로 긴밀히 연결되어 나타나기에, 교구 설정 50주년이 되는 2015년을 준비하는 3년을 믿음, 희망, 사랑의 해로 보내고자 하는 것입니다. 구원의 역사 안에서 하느님 백성이 어려움에 처한 시기마다 희망의 메시지는 끊임없이 나타납니다. 그리고 그 희망의 근거는 믿음입니다. 희망은 긍정적 힘입니다. 어려운 현실은 우리를 좌절시키고, 반복되는 좌절은 우리를 절망으로 인도합니다. 그러나 희망을 품은 이는 결코 절망하지 않습니다. 믿음을 상실했을 때 이스라엘 백성은 절망에 처했지만, 그럴 때마다 하느님께서는 다가가시어 희망을 건네주십니다. 주님께서는 절망의 총체인 죽음으로부터 부활하셨고, 절망의 상징인 닫힌 무덤을 열고 나오시어 희망의 상징이 되셨습니다. 희망은 절망조차도 덮지 못하는 그런 긍정적 힘입니다. 희망은 잘못된 나와 우리를 바로 세우는 힘입니다. 희망은 실현을 위한 노력을 품고 있어야 참다운 희망이 됩니다. 희망은 미래에 존재하지만, 현실에 끊임없이 역동적으로 관계해야 합니다. 거울을 통해 내 자신을 들여다보며 마음에 들지 않는 부분을 고쳐나가는 것처럼, 희망은 현재의 부족한 부분을 깨닫고 고쳐나가도록 나를, 우리를 채찍질하고 격려해 나가게 해줍니다. 희망은 현실에 안주하지 않습니다. 희망은 '이미'와 '아직'의 긴장 사이에 존재합니다. 이미 시작되었지만 아직 완성되지 않은 그 사이에 희망이 존재합니다. 그리스도인의 희망은 하느님 나라입니다. 그러나 하느님 나라는 '가는 곳'이 아니라 '오는 것'입니다. 하느님 나라가 가는 곳이라면 나 혼자만 잘 살아 그곳에 가면 되겠지만, 하느님 나라는 오는 것이기에 지금 이곳에 하느님 나라가 실현되도록 함께 노력해야 합니다. 희망을 이야기할 때, 빠질 수 없는 주제가 청소년입니다. '우리에게 희망을 주시는 하느님'이라는 주제로 '청소년의 해'를 보내면서 청소년에 대한 교회의 배려와 관심에서 놓치고 있는 것이 없는지 돌아봐야 합니다. 사회에서도 교회에서도 청소년에게 많은 관심을 기울이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사랑과 관심을 받지 못하고 자라는 결손가정의 청소년이 주변에 수없이 존재합니다. 올바른 가치관을 갖지 못하고 자라난 청소년은 어른을 공경하지 않습니다. 청소년 폭력과 자살하는 학생들 이야기가 뉴스의 주요 소재가 되었습니다. 청소년에 대한 고민과 배려는 바로 오늘 시작해야 합니다. 청소년은 교회의 '미래'가 아니라 '오늘'이어야 합니다. 모든 사람이 어려움을 이야기합니다. 경기불황으로 서민경제는 시름에 잠겨있고, 가정 붕괴와 생명경시풍조는 날로 확산되어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신앙인은 그 어려움을 절망으로 맞이하지 않습니다. 희망을 주시는 하느님이 계시기 때문입니다.조은일2012.12.3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