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영준 신부의 가톨릭 영성을 찾아서] (28) 6세기 ③ - 교황 그레고리우스 1세의 영성](//cpbc.co.kr/CMS/newspaper/2017/06/rc/684394_1.0_titleImage_1.jpg)
[전영준 신부의 가톨릭 영성을 찾아서] (28) 6세기 ③ - 교황 그레고리우스 1세의 영성전례 개혁 이끈 최초의 수도원 출신 교황 그레고리우스 1세. 고대에서 중세로의 전환기에 영성 생활을 포함하여 다방면에서 서방 교회에 큰 영향을 끼친 인물은 교황 그레고리우스 1세(Gregorius PP. I, 540경~604)입니다. 역대 교황 중에서 교황 레오 1세(Leo PP. I, 4세기 말~461)와 교황 그레고리우스 두 분만이 대(大)교황으로 불립니다. 또한 교황 그레고리우스는 암브로시우스(Ambrosius, 339~397), 히에로니무스(Hieronymus, 347/48~419/20), 아우구스티누스(Augustinus, 354~430)와 함께 서방 교회 4대 교부로 꼽히는 서방 교회 마지막 교부였습니다. 젊은 시절에 수도 생활을 실천했던 교황 그레고리우스는 교황 재임 시에도 수도 생활에 대한 관심을 꾸준히 가졌으며, 수도자들을 북유럽 선교를 위한 선교사로 적극 활용했습니다.첫 번째 수도자 출신 교황부유한 로마 귀족 가문 출신이었던 그레고리우스는 유년 시절에 잠시 시칠리아 섬에서 지낸 덕분에 동고트 왕국 말엽에 이탈리아 본토에서 발생했던 전쟁을 경험하지 않았습니다. 동로마 제국이 다시 이탈리아 지역을 통치하게 되자 그레고리우스는 로마에서 고등교육을 받고 부친의 권유로 570년에 정계에 입문하고 573년경에 로마 지방 장관에 임명되었습니다. 575년쯤 그레고리우스는 세속 생활을 청산하고 로마 첼리오(Celio) 언덕에 있는 가문의 대저택을 수도원으로 개조하고 몇몇 지인들과 함께 평수사로서 수도 생활을 시작했습니다. 또한 그는 시칠리아 섬에도 6개의 수도원을 설립했습니다.그런데 568년에 이탈리아에 설립된 랑고바르드 왕국에서 2대 왕이 죽은 574년부터 3대 왕이 즉위하는 584년까지 10여 년간 랑고바르드족 군주들이 왕국의 권력을 서로 나누어 가짐으로써 이탈리아 반도는 혼돈과 폭력의 시기를 보냈습니다. 577년에 랑고바르드족이 몬테카시노 지역을 공격하자 베네딕투스회 몬테카시노 수도원이 파괴되고 수도자들은 그레고리우스의 수도원에서 불과 2㎞ 정도 떨어진 곳으로 피난 왔습니다. 이때 그레고리우스는 베네딕투스회 수도자들과 친분을 쌓았지만, 당장 베네딕투스 수도 규칙을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578년에 교황 베네딕투스 1세(Benedictus PP. I, 재임 575~579)는 그레고리우스에게 부제품을 주었고, 579년에 교황 펠라기우스 2세(Pelagius PP. II, 재임 579~590)는 그레고리우스를 교황 대사로 임명해 동로마 제국으로 파견했습니다. 교황 대사 시절 그레고리우스의 임무 중에 하나는 랑고바르드족의 침략으로부터 서방 교회를 보호할 군대 파견 요청이었습니다. 하지만 동로마 제국도 540년부터 페르시아 사산 왕조와 계속된 전투 때문에 여력이 없어서, 584년에 동로마 황제 마우리키우스(Mauricius, 539경~602)는 교황의 요청을 거절했습니다.그레고리우스는 콘스탄티노플에서도 수도 생활을 실천했으며, 586년에 로마로 귀환하자 바로 자신의 수도원으로 돌아가 수도원장 직분을 맡았습니다. 590년에 로마에서 전염병이 돌아 교황 펠라기우스 2세가 선종하자, 서방 교회는 그레고리우스를 차기 교황으로 추대하여 선출했습니다. 그레고리우스는 최초의 수도자 출신 교황이 되었습니다.활동 생활과 관상 생활교황 그레고리우스는 교황 즉위 전후에 했던 강의 및 강론 등을 591~594년 사이에 출간했습니다. 대표적으로 욥기 주해서인 「윤리서(Moralia Magna)」, 사목자의 자질을 다룬 「사목 규범(Liber Regulae Pastoralis)」, 미사 강론을 모은 「에제키엘서 강론집(Homilae in Hiezechielem)」 등이 있는데, 윤리적이고 사목적이며 영성적인 내용을 담았습니다. 또한 이탈리아 출신 성인들의 행적을 기록한 「대화록(Dialogorum Libri)」이 있는데, 제2권에서 누르시아의 베네딕투스의 생애를 다루었습니다.교황 그레고리우스는 교회 구성원들을 세 계층으로 구분했습니다. 첫 번째 계층은 ‘평신도’였습니다. 평신도 그리스도인은 ‘교회의 자녀’이기 때문에, 교황 그레고리우스는 그들에게 윤리적인 행동 규범을 강조했으며 성경 말씀의 의미와 관상 기도 실천을 가르쳤습니다. 두 번째 계층은 ‘성직자’였습니다. 교황 그레고리우스는 성직자들에게 신앙인들의 영혼을 잘 다스려 하느님께 이끌 수 있도록 사제다운 마음인 고행과 사랑과 겸손을 실천하는 자질을 갖춰야 한다고 가르쳤습니다. 세 번째 계층은 ‘수도자’였습니다. 그들은 세상에서 멀리 물러나서 고요함에 머무는 사람으로서 모든 육체적 욕구를 포기하고 일상에서 자유로워야 하기 때문에, 거룩한 독서와 육체 노동을 실천하며 관상 생활에 참여해야 했습니다.세 계층에 대한 성찰과 더불어 교황 그레고리우스는 영성 생활의 발전 여정을 제시했습니다. 그는 먼저 첫 여정에서 그리스도인이 악습을 끊도록 노력해야 한다고 강조했습니다. 이는 수덕 생활에서 나타나는 한 측면입니다. 다음 여정에서 교황은 수덕 생활의 또 다른 한 측면인 덕행을 발전시키기 위한 노력을 강조했습니다. 즉, 이 단계에서 초자연적 윤리덕을 성장시키고자 더욱 노력해야 한다고 강조했습니다. 마지막 여정에서 교황 그레고리우스는 성령의 활동과 성령의 은사를 통해 초자연적 신학덕을 완성하는 단계인 완덕의 삶을 강조했습니다.따라서 교황 그레고리우스는 윤리덕을 발전시키는 두 번째 영적 단계와 관련된 ‘활동 생활’과 신학덕을 발전시키는 세 번째 영적 단계와 관련된 ‘관상 생활’이라는 두 가지 형태의 삶을 제시했습니다. 활동 생활은 그리스도인이 관심을 가져야 하는 하느님께서 맡기신 사람들을 돌보는 모든 형태을 삶의 의미합니다. 관상 생활은 세상일에 마음을 두지 않고 오로지 하느님과 이웃에게만 마음을 두는 형태의 삶을 의미합니다. 다시 말해서, 활동 생활은 수고로움을 통해 이웃 사람들의 구원을 위하는 삶이고, 관상 생활은 기도 생활을 통해 자신의 구원을 위하는 삶인 것이었습니다. 물론 교황 그레고리우스는 두 가지 형태의 삶에서 관상 생활이 우위에 있다고 여겼지만, 활동 생활이 관상 기도를 지향해야 하듯이 관상 생활도 덕행 실천을 지향해야 한다고 강조했습니다.교황 그레고리우스는 서방 교회 전례 개혁에도 큰 영향을 끼쳤습니다. 그는 동방 교회와 차별화된 미사 경문과 성사 예식을 마련했습니다. 전승에 따르면, 11세기에 완성된 「그레고리오 성사 예식서(Sacramentarium Gregorianum)」를 처음 집필하기 시작한 인물이 교황 그레고리우스였으며, 9세기경 로마 성가와 갈리아 성가를 집대성해 만든 단성 무반주 성가도 교황 그레고리우스가 표준화 작업을 시작했다고 여겨 교황의 이름을 붙인 ‘그레고리오 성가(Cantus Gregorianus)’라고 명명했습니다. <가톨릭대 신학대학 영성신학 교수> 백영민2017.06.07
![[전영준 신부의 가톨릭 영성을 찾아서] (31) 7세기 ② - 고백자 막시무스의 영성](//cpbc.co.kr/CMS/newspaper/2017/06/rc/686854_1.2_titleImage_1.jpg)
[전영준 신부의 가톨릭 영성을 찾아서] (31) 7세기 ② - 고백자 막시무스의 영성혀와 손목 잘려도 신념 굽히지 않은 정통 교리의 수호자 7세기에 동방 교회에서 요한 클리마쿠스(Ioannes Climacus, 575쯤~650)와 동시대인으로 고백자 막시무스(Maximus Confessor, 580쯤~662)가 있었습니다. 물론 동시대라고는 하지만 시나이 산에서 거의 평생 은수 생활을 실천했던 요한 클리마쿠스와는 달리 막시무스는 수도 생활을 실천했으나 7세기에 발생했던 그리스도론 교의 논쟁에서 중심 역할을 담당했습니다.그리스도론 이단 논쟁에 뛰어든 수도자 막시무스막시무스에 대한 부정적인 사료에 의하면, 그는 사마리아인 상인 아버지와 페르시아인 노예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습니다. 열 살가량 됐을 때에 막시무스는 예루살렘 수도원에 입회해 오리게네스의 작품들을 연구했습니다. 막시무스는 614년쯤 페르시아 제국이 예루살렘을 정복하자 소아시아 서북부에 위치한 키지코스(Cyzikos)로 이주해 비잔틴 제국 황실과 인연을 맺게 되었습니다.하지만 그에 대한 긍정적인 사료에 의하면, 막시무스는 콘스탄티노플의 귀족 가문 출신이었습니다. 따라서 교육을 잘 받았던 막시무스는 비잔틴 제국의 헤라클리우스(Heraclius, 재위 610~641)가 황제로 즉위한 얼마 후에 그의 비서가 되었습니다. 614년쯤 막시무스는 관직을 포기하고 콘스탄티노플 근교 크리소폴리스(Chrisopolis)에 위치한 필리피코스(Philippikos) 수도원에 입회했으며, 얼마 후에 수도원장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625년 막시무스는 제자 아나스타시우스와 함께 키지코스로 이주했습니다.한편 611~617년 사이에 안티오키아, 팔레스티나, 이집트를 차례로 정복했던 페르시아 제국이 626년 소아시아를 침공하자 키지코스에 이주했던 막시무스는 또다시 키프로스 섬과 크레타 섬을 경유해 북아프리카로 이주했습니다. 그곳에서 막시무스는 451년 칼케톤 공의회에서 이단으로 단죄되었던, 그리스도의 신성과 인성이 하나로 결합돼 신성만 남았다는 단성설(單性說, Monophysitism)과 관련된 새로운 이단인 그리스도에게 신적 활동만 있다는 단활설(單活說, Monoenergism)과 그리스도에게 신적 의지만 있다는 단의설(單意說, Monotheletism)을 접했으며, 641년부터 이단 척결을 위한 논쟁에 뛰어들었습니다.극형을 마다치 않고 정통 교리를 수호한 고백자 막시무스649년 교황 마르티누스 1세(Martinus PP. I, 재임 649~653/55)는 라테라노 교회회의를 소집해 막시무스의 도움으로 단활설과 단의설을 단죄했습니다. 하지만 이단설을 지지했던 비잔틴 제국의 황제 콘스탄스 2세(Constans II, 재위 641~668)는 653년 교황 마르티누스와 막시무스를 체포해 대역죄 혐의로 재판을 했으며, 655년 막시무스를 트라키아(Thracia) 지역의 비지아(Byzya)로 추방했습니다.하지만 그곳에서도 막시무스가 자신의 주장을 계속 펼치자, 황제 콘스탄스 2세는 그를 콘스탄티노플로 소환해 다시 재판을 받게 하고 막시무스에게 혀와 오른손을 자르는 형을 가했습니다. 비잔틴 황제는 막시무스를 흑해 동쪽 연안 캅카스 산맥 아래 라지카(Lazica)로 추방했고, 662년 막시무스는 그곳에서 사망했습니다. 비록 직접적인 순교는 아니지만, 막시무스는 정통 교리를 수호하다가 극형을 받아 병사했기 때문에, 훗날 교회는 그를 목숨을 내놓고 신앙을 고백했다는 뜻에서 고백자로 불렀습니다.그의 굴곡진 경험 때문인지, 막시무스는 성경 주석, 교의 신학, 성사론, 전례, 금욕 생활과 신비 생활을 포함한 영성 생활 등 다양한 주제를 다룬 작품 90여 편을 남겼습니다. 막시무스의 영성 작품들 중에서 대표적인 몇 편은 18세기 후반에 거룩한 산의 니코데무스(Nicodemus the Hagiorite, 1749~1809)와 코린토의 마카리우스(Macarius of Corinth, 1731~1805)가 4~15세기 수도자들의 금언들을 수집해서 출판한 「필로칼리아(Philokalia)」 제2권에 수록돼 있습니다.고대 동방 신비신학에 정통했던 중세 동방 신비신학자 막시무스「필로칼리아」에 실린 글 중에 첫 번째는 626년 카지코스에서 저술된 「사랑에 대한 400편(400 Capita de Caritate)」입니다. 막시무스는 서문에서 과거 교부들의 저서 중에서 사랑에 대한 언급들을 모아 4복음서를 모방하여 100편씩 4권으로 묶었다고 언급했습니다. 인간 영혼이 선하게 되기 위해 인간은 세상일에 집착하지 말고 하느님을 알려고 노력해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하느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모든 사람을 동등하게 사랑할 수 있고, 그런 사람이 복되다는 것이었습니다. 또한 악습을 끊어야 하느님을 사랑할 수 있으므로, 몸으로 실천하는 덕행과 기도 속에 실천하는 덕행을 구분해 열심히 노력하라는 것이었습니다.두 번째는 630~634년 사이 북아프리카에서 저술했다고 추정되는 「신학과 섭리의 200편(200 Capita Theologica et Oeconomica)」입니다. 막시무스는 오리게네스, 에바그리우스, 위-디오니시우스의 영성적인 가르침을 섭렵해 종합하고, 역시 100편씩 2권으로 묶었습니다. 세 번째는 「신학과 특별한 경륜에 대한 500편(500 Diversa Capita ad Theologiam et Oeconomiam spectantia)」입니다. 다만 「필로칼리아」의 편집자는 500편을 막시무스의 다른 작품에서 발췌하거나, 다른 저자의 글에서 발췌해서 묶었습니다. 이 작품에서 편집자가 발췌한 막시무스의 다른 작품인 「탈라시우스에게 질문(Quaestiones ad Thalassium)」과 「암비구아(Ambiguorum liber)」는 나지안주스의 그레고리우스와 위-디오니시우스의 작품에 대한 해설과 비평으로 구성되었습니다. 네 번째로 628~630년 사이에 저술된 「주님의 기도에 대한 짧은 해설(Orationis Dominicae brevis expositio)」입니다.막시무스 영성 작품 중에 또 다른 중요한 작품은 노(老)수도자와 젊은이가 수도 생활 규칙에 관해 이야기를 나눈 대화체 글인 「수덕서(Liber asceticus)」입니다. 이 작품에서 젊은이는 구원과 계명에 대한 질문을 하고, 노수도자는 세속적인 것들을 포기하라고 강조했습니다. 계명의 요약은 사랑이기 때문에, 탐욕을 포기하면 원수까지도 사랑할 수 있을 것이라고 언급했습니다. 따라서 사랑으로 분노를 억제하고, 스스로 욕심을 이겨야 하며, 기도를 통해 모든 생각에서 자유롭게 되어 선행을 실천하면 구원받을 수 있다고 했습니다.막시무스는 또 「신비 안내서(Mystagogia)」에서 성찬의 전례를 신비적인 관점에서 주석하고 묵상했습니다. 전례의 신비적인 의미를 밝힌 이 작품은 훗날 여러 차례 인쇄되며 사람들에게 읽혔습니다. 막시무스의 일생막시무스는 고대 동방 교회 신비신학자들을 연구한 중세 동방 교회 신비신학자가 되었습니다. 수도자로서 금욕 생활과 수덕 생활도 가르치면서 사랑을 실천해야 하는 수도 생활도 강조했습니다. 9세기경 요한 스코투스 에리우게나가 막시무스의 작품을 서방 교회에 소개하면서, 그의 작품은 서방 교회 신비신학의 토대가 되었습니다.<가톨릭대 신학대학 영성신학 교수> cpbc2017.06.28
![[허규 신부와 떠나는 신약 여행] 45. “하느님을 찬미하며 온 백성에게서 호감을 얻었다.”(사도 2,47)](//cpbc.co.kr/CMS/newspaper/2017/04/rc/678980_1.0_titleImage_1.jpg)
[허규 신부와 떠나는 신약 여행] 45. “하느님을 찬미하며 온 백성에게서 호감을 얻었다.”(사도 2,47)사도행전의 ‘초기 교회 공동체’ 함께 기도하고 나누며 신앙 실천프라 안젤리코 작 '베드로 성인의 복음 전파', 1433년, 페널에 템페라, 산 마르코 미술관, 피렌체, 이탈리아예수님 행적·가르침 사람들에게 설교 새로운 파스카 거행, 유다교와 구분 기도 전념하는 삶 속에서 구원 동참 공동생활·공동소유 신자들에게 강조 성령 강림과 마티아 사도의 선출 이후 사도행전에서 전하는 특별한 내용 중 하나는 초기 교회 공동체의 모습입니다. “그들은 사도들의 가르침을 받고 친교를 이루며 빵을 떼어 나누고 기도하는 일에 전념하였다.”(사도 2,42) 간략하게 요약돼 있는 이 내용은 지금까지도 초기 공동체의 모습을 우리에게 잘 알려주는 소중한 내용입니다. “사도들의 가르침”은 목격 증인이라 할 수 있는 사도들에 의해 사람들에게 전해지는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모든 것을 의미합니다. 이것은 “예수님의 행적과 가르침”을 중심으로 합니다. 사도행전의 시작에서 전하는 것처럼 처음부터 승천에 이르기까지 예수 그리스도와 관련된 모든 일(사도 1,1-2)이 사도들이 전하는 가르침의 내용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들의 가르침은 사도행전의 여러 설교가 전하는 것처럼 설교의 형태로 사람들에게 전달되었을 것입니다. 두 번째로 언급되는 것은 “친교”입니다. ‘서로 하나가 되는 것’을 의미하는 친교는 주로 바오로 사도의 편지에서 찾을 수 있는 표현입니다(1코린 1,9; 10,16; 2코린 8,4; 9,13). 이 용어는 그리스도와 ‘함께 몫을 차지한다’ 또는 ‘동참’한다는 뜻으로 번역할 수도 있습니다. 이 용어는 기본적으로 관계를 나타냅니다. 그렇기에 예수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한 신앙 공동체의 친교는, 다른 이들과는 구분되는 그들의 고유한 생활 방식을 나타낼 수 있습니다. “빵을 떼어 나누는 것”은 지금 우리에게 익숙한 표현은 아니지만 성찬례를 나타내는 용어입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함께했던 마지막 만찬을 지칭하고, 예수님의 몸을 나타내는 빵을 떼는 것을 통해 예수님의 죽음을 표현합니다. 초기 교회 공동체는 지금과는 달리 실제로 만찬을 나누면서 이 예식을 거행했던 것으로 보입니다.(1코린 11,17-34) 지금도 미사의 가장 중요한 부분을 이루는 성찬례가 신앙생활의 가장 중요한 요소인 것처럼 당시에도 이 예식은 신앙인들의 정체성을 가장 잘 드러내는 특징이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이집트 탈출을 기념하는 구약성경의 파스카가 아닌,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을 기념하는 새로운 파스카를 거행합니다. 이제 유다교와 그리스도교는 예식에서 서로 구분되기 시작합니다. 지금도 가톨릭교회의 교리서에서 “기도”는 그리스도인들의 “가장 훌륭한 활동이자 신앙의 표현”으로 표현됩니다. 쉽게 말하자면 신앙인들은 기도하는 사람들입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통해 우리에게 남겨주신 기도는 ‘주님의 기도’입니다. 그리고 주님의 기도에서 가장 특징적인 것은, 예수님의 가르침에서도 표현되는 것처럼 하느님을 “아빠, 아버지”로 부른다는 사실입니다.(로마 8,15; 갈라 4,6) 루카복음은 예수님께서 중요한 일을 앞두고 기도하셨다는 내용을 전합니다. 이제 예수님의 모범을 따라 사도행전은 초기 공동체 역시 기도하는 일에 전념했다는 것을 강조합니다. 마지막으로 초기 공동체의 특징적인 생활 방식으로 꼽히는 것은 ‘공동생활과 공동소유’입니다. “신자들은 모두 함께 지내며 모든 것을 공동으로 소유하였다. 그리고 재산과 재물을 팔아 모든 사람에게 저마다 필요한 대로 나누어 주곤 하였다.”(사도 2,44-45) 이 내용은 사도행전 3장 32-35절에서 다시 언급됩니다. 그 후에 전하는 하나니아스와 사피라 부부의 이야기(사도 5,1-11)는 초기의 신앙인 공동체가 이것을 얼마나 강조했는지 보여주는 예이기도 합니다. 그들에게 공동소유는 예수님의 가르침을 가장 잘 실현할 수 있는 삶의 형태로 생각되었을 것입니다. 이것을 사도행전은 이렇게 표현합니다. “그들 가운데에는 궁핍한 사람이 하나도 없었다.” 이상적인 모습으로 표현되는 초기 교회 공동체의 모습은 예수님의 부활과 성령 강림을 통한 신앙인들의 체험을 실현해 나갔음을 보여줍니다. 그들의 믿음은 다른 사람들과는 구분되는 고유한 생활 방식을 통해 실천으로 옮겨집니다. 이제 삶을 통해 그들의 신앙을 드러내는 셈입니다. 그렇기에 사도행전이 전하는 모습은 지금 우리에게도 귀감(龜鑑)이 됩니다. 그들은 “하느님을 찬미하며 온 백성에게서 호감을 얻었다. 주님께서는 날마다 그들의 모임에 구원받을 이들을 보태어주셨다.” <가톨릭대 신학대학 성서학 교수>김지항2017.04.19
![[가톨릭, 리더를 만나다] (24) 최욱미(일루미나) 프니엘조형예술연구소 대표](//cpbc.co.kr/CMS/newspaper/2017/10/rc/698807_1.0_titleImage_1.jpg)
[가톨릭, 리더를 만나다] (24) 최욱미(일루미나) 프니엘조형예술연구소 대표‘보이지 않는 사랑’ 성 미술에 담는 말씀의 전달자 ‘예수, 부활하심’, 145.5112.1㎝, 캔버스에 유채. ‘보이지 않는 하느님’을 ‘보이는 작품’으로 표현하는 성화(聖)와 성물(聖物)은 어떻게 제작될까? 화가로서 필요한 기술과 능력만으로 하느님의 말씀과 뜻을 재현할 수 있을까? 궁금증과 의문을 안고 경기도 안성에서 붓을 들고 천상의 빛을 담아내는 화가이자 설치미술 작가의 연구소를 찾았다. 주인공은 프니엘조형예술연구소 대표인 최욱미(일루미나) 경기대 교수다. 연구소는 모든 미술 재료와 장르를 총망라해 하느님의 창조와 구원의 역사를 담아내는 ‘하느님의 아트센터’였다. 평면에서 입체 그리고 설치 미술까지…. 모든 작업은 구성원의 기도로 시작해 기도로 마무리된다. 평범한 미술학도였으나 삶과 신앙에 대한 물음과 고민을 계속했고, 하느님은 그를 당신의 전달 도구인 성화의 길로 인도했다. ‘부르심’에 응답하며 쉼 없이 달려왔지만 지금 그의 ‘하느님 앓이’는 또다시 시작됐다. 온 열정을 다해 그가 받들고 싶은 ‘소명(召命)’은 무엇일까? 서종빈 기자 binseo@cpbc.co.kr▶이곳이 직접 운영하고 있는 프니엘조형예술연구소인데요. 어떤 작업을 하시나요. 성(聖) 미술(美術) 등 성(聖) 예술(藝術)을 전체적으로 하고 있습니다. 평면에서부터 환조(丸彫) 즉 입체까지 설치 미술을 하는 장소이고요, 교육의 장소로 학교 역할도 하고 있습니다. 제가 유학하고 한국에 들어온 1995년부터 시작했고요. 프니엘(peniel)이라는 이름은 야곱이 하느님과 겨루다가 환도 뼈(엉덩이뼈)가 부러진 뒤 하느님께 순명하고 큰 은총을 체험한 장소로 저에겐 굉장히 인상이 깊어 빌리게 됐습니다.▶요즘은 어떤 작품을 하고 계세요.지난 9월 파티마 성모 발현 100주년을 맞아 전주교구 치명자산 성지에서 성모님 동상을 만들었어요. 교회 성당을 지으라는 성모님 말씀에 따라 모자이크로 성모님과 성전을 그대로 재현했습니다. 또 대전교구 최후의 만찬 모자이크 작업을 하고 있고요. 비종교적인 설치 미술도 준비하고 있습니다.▶성화(聖)나 성물(聖物)은 기도하지 않으면 만들 수 없을 것 같은데요. 어떻습니까.저에게는 특히 그렇습니다. 제가 부족하여서 늘 기도합니다. 연구소 구성원들이 모두 신자이지요. 각자의 탤런트가 조각, 스테인드글라스 설치 등 모두 달라서 하느님께서 안배를 잘해 주신 것 같고요. 저희는 작업할 때 가톨릭평화방송 TV를 24시간 켜놓고 있습니다. 신부님들의 강론과 피정, 인터뷰 등 각종 방송 콘텐츠를 통해 많은 것을 접하며 참고하고 있습니다.▶작업할 때 주로 어떤 기도를 바치세요.저는 전달자로서 ‘하느님의 도구’잖아요. 하느님의 뜻을 가시화해야 하는데, 십자가에 못을 박으며 예수님의 죽음을 표현할 때 굉장히 죄송한 마음이 듭니다. 그때마다 ‘일하는 곳에서 하느님을 찾아라(Finding god in all things)’는 말을 떠올리며 ‘그려야 산다’는 심정으로 기도합니다. 돌아보니 이스라엘 백성을 가나안 땅으로 인도하신 하느님의 역사가 바로 저인 것 같습니다. 모든 게 은총이었습니다. ▶그럼 하느님께서 늘 함께 하시나요.응답해 주십니다. 미술사를 공부하거나 작업을 할 때 느끼는 것은 시대와 지역에 따라 변화된 그리스도 상을 많이 보게 되는데요, 도움을 주시고 준비하시고 승리하시는 하느님의 모습을 보면 언제, 어느 곳에서든 하느님은 늘 역사하시는 것 같습니다. 작품 활동을 할 때 저는 정성과 노력만 기울이고 나머지는 하느님께서 준비해 주시기를 저 나름대로 기도합니다. 특히 ‘유리는 용서하지 않는다’는 말처럼 스테인드글라스 작업을 할 때 날카로운 유리에 사고가 나지 않도록 늘 기도하면서 작업에 임하고 있습니다. ▶유리공예와 다양한 미술사 공부를 하셨어요.제가 공부하던 시절에는 유리공예가 생소한 분야였고 이후 스테인드글라스를 보고 감동을 하여서 캔버스에서 글라스 페인팅으로 옮겨가다 보니 여러 가지 공부가 필요했습니다. 열정과 비교하면 늘 부족하니까, 하느님께서 저를 체계적으로 공부시킨 것 같습니다. 성(聖) 음악이나 건축도 그렇지만 중세 미술은 하느님께서 보여 주신 것을 나타내는 역사거든요. 인간의 감정보다는 신의 성스러움을 추구했던 시대 미술이죠. 지금도 당시의 성화나 성스러운 표현들을 보면 눈물이 나고 감회가 새롭습니다. 원시 미술은 고인이 되신 스승님께서 ‘예술은 머리가 아닌 가슴으로 해야 한다’면서 화가인 고갱이나 마티스가 내세관이나 어떤 염원을 단순화시킨 것을 한번 보라고 하셔서 공부하게 됐습니다.▶미술을 하시는 분으로서 드물게 철학박사 학위도 받으셨어요.기존에 제가 배운 미학(美學)을 성화에 담다 보니 좀 부자연스럽고 부질없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하느님의 사랑을 성스럽게 표현해야 하는데 잘되지 않아서 철학을 공부하게 됐습니다. 철학 안으로 들어가 보니까 하느님에 대한 무서움(Fear)이 아니라 경외심을 느낄 수 있는 부분이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철학을 하기 위한 철학이 아니라 하느님을 알기 위해 철학을 공부한 것입니다. 박사학위 논문이 ‘숭고미(崇高美)’에 관한 것인데 절대자인 하느님에 대한 경외심을 거룩하고 성스러운 아름다움 즉 숭고함으로 표현하자는 것입니다.▶성화에 담고자 하는 메시지가 바로 ‘숭고미’인가요.성화는 개인의 작품 전시가 아닙니다. 성스러운 것을 표현해야 해서 경외심이 있어야 하고 교회의 가르침에서 벗어나지 않아야 합니다. 또 묵상의 자료가 되어야 하고 하느님과의 영적인 연결고리 역할을 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불자를 보면 불상의 얼굴이 나와야 하듯이 성화에는 성모님과 같은 성스러운 마음이 반영되어야 신자들이 성모님을 닮아 갈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융합 미술을 통해 새로운 공간을 창출하는 화가로 유명하신데요.실험하고 폐기하면서 새로운 시도를 하는 것이 예술의 정신이고 핵심입니다. 광주 비엔날레 전시회가 끝나면 화두가 되는 것이 쓰레기 처리 문제입니다. 새로운 시도를 한 뒤 폐기하는 것은 작가의 예술적인 정신을 보여 주는 것이죠. 예술가는 다양한 시도를 통해 앞서가야 해서 몸부림하고 늘 고민하는데 그러다 보니 같은 시대를 사는 사람들과는 좀 다른 모습을 보이게 됩니다.▶성화만을 그리기 위해 하느님께 서원(誓願)까지 하셨어요, 어떤 ‘간절함’이 있으셨나요.미술대학 다닐 때는 성화를 생각해 보지 않았고 단지 유학하고 돌아와서 정년퇴직할 때 성화를 시작해 보려고 했는데 저도 모르게 성스러운 것을 자꾸 표현하고 싶었습니다. 그러면서 내가 누구이고 어떻게 살아왔고 앞으로 어떻게 살 것이냐는 물음을 계속 제기하면서 회개하는 과정을 겪다 보니 성화가 저의 ‘소명’이라는 것을 느끼게 됐습니다. 저는 열심히 한 신자도 아니었고 누가 이야기를 해 준 것도 아니었지만 묘한 확신이 들면서 저 스스로 ‘이것은 하느님의 부르심’이라는 생각을 하게 된 것이죠.▶신앙생활은 언제부터 하셨나요.부모님이 이북 출신 실향민이신데, 제가 다섯 살 때 신앙의 씨앗을 뿌려 주셨습니다. 성당 마룻바닥에 가족들이 모두 앉아 단체로 세례를 받은 것으로 기억합니다. 제 이름의 ‘욱(旭)’ 자가 ‘빛난다’는 뜻인데 세례명도 ‘빛’을 의미하는 ‘일루미나’이고 지금 제가 스테인드글라스 작업을 하고 있습니다. 이름과 세례명 그리고 하는 일이 모두 일맥상통합니다. 그래서 저는 묘한 하느님의 소명을 갖고 태어난 것 같습니다.▶가장 간절하게 하느님께 매달렸던 적은 언제였나요.9년 전인 2008년 5월 29일 25.5톤 트럭에 치어 제 차가 전복되는 대형 교통사고를 당했습니다. 의식을 잃었다가 평택의 모 병원에서 깨어났는데 신기하게도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유리조각 하나 박히지가 않았어요. 그러면서 계속 귓가에 ‘데오 그라시아스(Deo Gratias)’라는 말이 들리는 거예요. 궁금해서 나중에 신부님께 여쭤봤더니 ‘하느님을 찬미합니다. 감사합니다’는 뜻이라고 하더라고요. 영적 체험을 하고 다시 태어난 뒤 하느님께 간절히 매달리며 맹세했습니다. 과거의 제 이름을 버리고 ‘일루미나’로 다시 살겠다고요. 그러면서 회화뿐만이 아니라 모든 성스러운 예술 작품을 하는 공동체를 만들어서 자손 대대로 참여할 수 있도록 하겠다고 결심했죠.▶ 어떤 성경 구절을 가슴에 품고 사십니까.성모님께서 “저는 남자를 알지 못하는데, 어떻게 그런 일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루카 1,34) 하고 말하자 가브리엘 천사가 말씀하시잖아요. “하느님께서 하시는 일은 안되는 것이 없다.”(루카 1,37) 저는 이 말씀이 감동적으로 다가와서 기도할 때마다 늘 이 구절에 의탁하고 있습니다.▶앞으로 어떤 길을 가고 싶으세요.교통사고 이후 하느님을 체험하고 두 팔 벌려 하느님께 다시 맹세한 것을 실현하고 싶습니다. 연구소 간판의 ‘표지석’처럼 ‘하느님의 아트센터’를 만들어서 후손들이 이 공동체를 계속 이어갈 수 있도록 소망하고 있습니다. 특히 우리가 유학 가서 배워온 ‘유리공예’를 거꾸로 유럽인들이 한국으로 유학 와서 우리의 유리공예 기술과 신앙 열정을 배우는 산실이 됐으면 하고요. 그러기 위해서 열심히 기도하고 노력할 생각입니다.▶대학에서 후학들을 양성하고 계시는데, 요즘 순수미술을 하는 젊은이들이 많이 줄고 있죠.많은 보람을 느끼고 있는데 산업화하다 보니까 예술적인 장인 정신을 추구하는 젊은이들이 줄고 있어 매우 안타깝습니다. 또 제가 강의하는 미술사와 성 예술 분야는 생소한 분야로 많이 외면을 받고 있지만 그래도 혁신적이고 변화를 추구하는 젊은이들의 열정이 있어 희망을 품고 있습니다. 예술 안에서 부문별로 변화에 대해 뜨거운 열정이 있는 젊은이들을 격려하고 발전할 수 있도록 계속 돕고 싶습니다. 평화신문2017.10.18
한국 교회의 쇄신과 평신도 역할 모색한국 평신도사도직단체협의회, 병인순교 150주년 기념 심포지엄 한국천주교 평신도사도직단체협의회(회장 권길중)는 9~10일 인천교구 갑곶 순교성지에서 병인순교 150주년 기념 심포지엄을 열어, 한국 교회의 사목 현실을 진단하고 변화와 쇄신 방향과 평신도의 역할을 모색했다.곽승룡(대전가톨릭대학교 총장) 신부는 ‘오늘날 한국 교회의 현황과 문제의 진단’에 관한 발제에서 교회의 사목 활동이 성경 공부, 기도 모임, 성사생활, 교리 공부 등 다양한 형태로 이뤄지고 있지만, 그리스도교의 진리 본질에서 멀어지는 ‘파편화된 활동’이 되고 있는 것이 복음화에 심각한 장애라고 지적했다. 성경공부, 기도 모임, 성사생활, 교리 공부 등이 복음의 본질인 사랑과 자비를 실천하기 위한 것이라기보다 자기를 위한 혹은 이벤트성 활동과 공부가 되고 있으며, 친교와 일치도 ‘외적인 협력과 친목’으로 알아듣고 있다는 것이다. 곽 신부는 교회 문제 혹은 쇄신 과제로 △성직자의 권위주의와 성직 중심주의 △사목이 아니라 관리가 강조되는 교회 운영 △교회 안의 세속주의 △신앙과 삶의 유리△미성숙하고 개인주의적인 신앙 등을 꼽고, 그리스도교의 본질로 회심하려면 “성령에 이끌려 움직이는” 교회가 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논평자로 나선 송용민(인천가톨릭대 교수, 주교회의 사무국장) 신부는 성령에 이끌리는 교회로 쇄신하기 위한 방안으로 ‘신앙 감각’(sensus fidei)을 제시했다. 신앙 감각이란 복음의 진리와 관련해 신자들이 본능처럼 갖고 있는 능력을 가리킨다. 신앙 감각은 “가르치는 교회와 배우는 교회의 잘못된 이분법적 표상을 극복해 목자와 신자들의 공감을 일으키고 때에 따라서는 교도권이 신자들의 자문을 받아 믿음의 공동체가 합의를 이끌어내는 원리이기도 하다”고 설명한 송 신부는 신자들의 신앙감각이 지닌 통교와 친교의 원리를 토대로 교회 쇄신이 이뤄져야 할 것이라고 밝혔다. ‘향후 교회의 변화와 평신도의 역할’을 발제한 정희완(대구가톨릭대 신학대학 교수) 신부는 “제도로서의 교회는 현실 속에서 복음화와 선교를 지향하기보다 제도의 유지와 관리에 치중할 위험이 있다”고 지적하면서 교회 제도와 구조의 변화와 쇄신 방향을 제2차 바티칸 공의회에서 드러난 ‘단체성’과 ‘공동 합의성’ 개념에서 찾았다. 정 신부는 공의회가 단체성과 공동 합의성을 강조한 것은 “교회의 모든 제도와 구조가 대화와 협력의 방향으로 가야 한다는 것을 시사한다”면서 잠정적 대안으로 ‘성직자가 권력을 평신도들과 공유함으로써 평신도의 교회 참여를 적극적으로 유도하고 그들의 의견을 반영해 교회를 운영’하는 것을 제시했다. 또 “성직자의 리더십은 ‘지배를 의미하는 권력’이 아니라 복음화를 향한 봉사의 리더십”이라고 강조했다. 논평자 최혜영(가톨릭대학교 종교학과 교수) 수녀는 평신도 신학자들을 교회 안에서 좀더 많이 활용하고 의사 결정 과정에 평신도의 참여 폭을 넓혀야 할 것이라고 주문했고, 황경훈 우리신학연구소장은 교회 쇄신과 변화를 통한 진정한 인간 발전을 위해서는 평등한 대화 구조가 마련돼야 한다고 주장했다.인천교구 평협(회장 곽하형)이 주관한 이 심포지엄에는 오용호 인천평협 담당 신부와 군종교구 평협을 포함한 전국 16개 교구평협 회장단과 전국평협 임원 등 70여 명이 함께했다. 이창훈 기자 changhl@pbc.co.kr 백영민2016.09.21
![[이창훈 기자의 예수님 이야기] (24) 평지 설교 Ⅱ(루카 6,27-49)](//cpbc.co.kr/CMS/newspaper/2017/07/rc/689977_1.1_titleImage_1.jpg)
[이창훈 기자의 예수님 이야기] (24) 평지 설교 Ⅱ(루카 6,27-49)이번 호에서는 평지 설교의 두 번째로 원수 사랑과 남을 심판하는 문제, 나무와 열매, 그리고 말씀의 실천에 관한 예수님의 가르침을 살펴봅니다. 참행복과 불행 선언이 말 그대로 선언적 내용이라면, 이제부터 나오는 예수님의 가르침은 구체적인 실천을 요청하는 실천적 또는 윤리적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참행복과 원수 사랑 등에 대해 제자들을 가르치신 곳으로 추정되는 갈릴래아 호수 언덕. 호수 저편에 보이는 산이 아르벨 산으로 예수님께서 태어나시기 전에 수많은 유다인들이 로마 군대에 맞서 독립 투쟁을 하다가 저 산 절벽에서 최후를 맞았다. 원수 사랑(6,27-36) 원수를 사랑하라는 가르침은 사람들의 통념과 정반대입니다. 우리는 보통 나를 사랑하는 사람은 사랑하고 나를 미워하는 사람은 미워하게 됩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원수를 사랑하라고 하십니다. 어떤 식으로 사랑해야 하는지 방법까지도 알려 주십니다. 우리를 미워하는 사람에게 잘해 주고, 우리를 저주하는 사람에게는 축복하며, 우리를 학대하는 사람을 위해 기도하라는 것입니다. 그뿐 아닙니다. 뺨을 때리는 사람에게 다른 뺨을 내밀고, 겉옷을 가져가는 사람에게 속옷도 가져가게 놔두며, 달라는 사람에게는 누구에게나 주되 되찾으려 해서도 안 된다는 것입니다.(6,27-30) 원수 사랑의 이런 여러 방법을 종합하면 ‘남이 너에게 해주기를 바라는 그대로 너도 남에게 해주어라’(6,31)는 것입니다. 이를 ‘황금률’이라고 합니다. 황금률의 가르침은 유다교 사회에서뿐 아니라 다른 종교에도 있습니다. 그런데 차이가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황금률은 ‘네가 하기 싫은 것은 남에게도 하지 마라’는 형태입니다. 곧 부정적이고 소극적인 형태이지요. 그런데 예수님은 ‘남에게서 바라는 대로 해주라’며 적극적인 황금률을 제시하십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왜 이렇게 적극적으로 황금률을 실천해야 할까요? 이유는 분명합니다. 지극히 높으신 분, 곧 하느님의 자녀가 되기 위해서입니다. 하느님은 어떤 분이시기에 하느님의 자녀가 되려면 그렇게 해야 하나요? “그분은 은혜를 모른 자들과 악한 자들에게도 인자하시기 때문”(6,35)입니다. 자기를 사랑하는 사람만 사랑하고 자기에게 잘해 주는 사람에게만 잘해 주고 돌려받을 수 있기 때문에 꿔 주는 것은 죄인들도 할 줄 알기 때문입니다.(6,32-34). 원수 사랑에 대한 예수님의 가르침은 다음 말씀에서 정점에 이릅니다. “너희의 아버지께서 자비하신 것처럼 너희도 자비로운 사람이 되어라.”(6,36) 원수를 사랑하기는 정말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하느님 아버지께서 자비로우신 것처럼 우리가 자비로운 사람이 되려고 노력한다면 마침내 원수를 사랑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자비로운 사람이 될 수 있을까요? 이어 오는 예수님의 가르침에서 우리는 그 답을 찾을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비유를 곁들여 모두 다섯 가지 말씀을 하십니다. 루카 복음사가가 전하는 순서대로 살펴보면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습니다. 자비로운 사람이 되는 길(6,37-46) 첫째는 남을 심판하거나 단죄하지 않고, 오히려 용서하는 것입니다.(6,37). 성경학자들은 “…그러면 심판받지 않을 것이다.…단죄받지 않을 것이다.…용서받을 것이다”라는 예수님의 말씀에서 심판과 단죄와 용서의 주체는 하느님이라고 설명합니다. 중요한 것은 내가 심판하지 않으면 상대방에게 심판받지 않는다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한테 심판받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둘째는 인색하지 않고 주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느님께서는 누르고 흔들어서 넘치도록 후하게 되어 너희 품에 담아 주실 것”이라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6,38)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이웃에게 주는 것 이상으로 후하게 우리에게 주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줄 때 아까워서 “되질하듯이” 준다면 “되질하는 바로 그대로 너희도 되받을 것”이라고 단언하십니다. 셋째는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를 보기보다는 내 눈 속에 있는 들보를 깨닫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제 눈 속의 들보를 보지 못한 채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를 빼내겠다는 것은 어리석은 짓일 뿐 아니라 위선적이라고 질타하십니다. “위선자야, 먼저 네 눈 속에서 들보를 빼내어라. 그래야 네가 형제의 눈에 있는 티를 뚜렷이 보고 빼낼 수 있을 것이다.”(6,42) 이 말씀은 잘난 척하거나 교만하지 말고 겸손하게 자신의 잘못을 먼저 살피라는 가르침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넷째는 선한 마음을 지니도록 노력하는 것입니다.(6,43-45) 좋은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지 않고 나쁜 나무가 좋은 열매를 맺지 않듯이 선한 사람은 마음의 선한 곳간에서 선한 것을 내놓고 악한 자는 악한 곳간에서 악한 것을 내놓기 때문입니다. 나무는 그 열매를 보면 알듯이 사람의 입에서 나오는 말을 보면 그 사람의 마음에 무엇이 들어 있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마음에서 넘치는 것을 입으로 말하는 법”(6,45)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다섯째는 들은 말씀을 실천하는 것입니다.(6,46-49) 예수님께서는 ‘주님, 주님!’ 하고 조아리기만 하는 이를 질타하십니다. “너희는 어찌하여 나를 ‘주님, 주님!’ 하고 부르면서 내가 말하는 것은 실행하지 않느냐?”(6,48) 이어서 땅을 깊이 파 반석 위에 기초를 놓고 집을 짓는 사람과 기초도 없이 맨땅에 집을 짓는 사람의 비유를 통해 말씀을 듣고 실행하는 사람과 듣고도 실행하지 않는 사람의 차이를 말씀하십니다. 반석 위에 튼튼하게 집을 지으면 홍수가 나더라도 그 집이 흔들리지 않지만, 기초 없이 맨땅에 집을 지으면 완전히 허물어지고 만다는 것입니다.(6,49) 생각해 봅시다 참행복과 불행(선언)으로 시작한 예수님의 평지 설교는 원수 사랑을 통해 하느님 아버지처럼 자비로운 사람이 되라는 가르침으로 이어집니다. 그리고 이를 위해 ‘심판하지 말고 용서하라’ ‘인색하지 말고 주어라’ ‘잘난 척하지 말고 겸손하게 자신의 잘못을 살펴라’ ‘선한 마음을 지니도록 하라’ ‘말씀을 듣고 실행하라’는 다섯 가지 길을 제시하십니다. 참행복과 원수 사랑, 다섯 가지 길은 세상 사람들이 일반적으로 생각하고 행동하는 방식과는 정반대입니다. 그러기에 그리스도인이더라도 예수님 가르침을 따르는 것이 힘들고 때로는 포기하고 싶을 때도 있습니다. 하지만 “너희 아버지께서 자비하신 것처럼 너희도 자비로운 사람이 되어라”(6,36)는 예수님의 말씀을 단지 명령이나 분부가 아니라 용기와 희망을 주는 격려의 말씀으로 받아들일 수는 없을까요? “원수 사랑이 힘들지만, 너희는 자비로우신 아버지의 자녀들이다. 한없이 자비로우신 아버지의 ‘자비의 유전 인자’가 너희에게 있다. 그러니 주저하지 말고 용서하고 주고 자신을 돌아보고 아버지의 마음을 지니려고 노력하고 말씀을 실천하려고 노력해 보려무나.” 이런 의미에서 ‘내 말을 실행하여라’(6,46-49)는 평지 설교의 마지막 말씀은 더욱 깊이 되새겨볼 필요가 있습니다. 말씀을 듣고 실행하는 사람은 반석 위에 튼튼히 지어진 집처럼 유혹이 와도 흔들리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말씀을 듣기만 하고 실천하지 않은 사람은 맨땅에 지어진 집처럼 유혹이 닥치면 삽시간에 흔들리고 무너져 내리고 말 것입니다. 그러니 들은 말씀을 지금 당장 작게라도 실천해 보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백영민2017.07.26
본당 발자취 돌아보고 신앙 선조 기려 안동 상주 서문동본당 설립 80주년, 지역 복음화 다짐 안동교구장 권혁주(제대 가운데) 주교가 16일 서문동본당 80주년 감사 미사를 집전하고 있다. 서문동본당 제공 안동교구 상주 서문동본당(주임 조상래 신부)은 16일 교구장 권혁주 주교 주례로 ‘본당 설정 80주년 감사 미사’를 봉헌하고 공동체 100년을 향한 새 복음화 여정을 시작했다.교구 사제단과 미사를 공동 집전한 권 주교는 강론을 통해 “80주년을 계기로 다시금 본당 발자취를 새겨보는 귀중한 자리가 됐다”며 “한국 교회 초창기부터 이곳에는 상주 교회의 건립과 성장에 큰 매개체 역할을 해온 신앙 선조들이 많았다”고 강조했다.주임 조상래 신부는 인사말에서 “오늘날까지 본당 공동체가 자리매김하도록 애써주신 성직자ㆍ수도자ㆍ평신도 여러분께 감사드린다”며 “앞으로도 전 신자가 앞장서 상주지구 복음화에 더욱 적극적으로 나서주기를 희망한다”고 말했다.미사에 이은 축하식에서는 역대 사목자들의 축하 인사와 공로패 및 감사패 수여식, 100년을 향한 공동체의 발전을 기원하는 영상물 상영으로 열렸다.본당은 80주년을 준비하면서 성당 건물과 교육관, 만남의 집을 새로 색칠하는 한편, 마당 평탄화 공사와 성모상 보수, 제대보 교체, 3개 공소 보수공사 등을 펼쳤다. 성지순례와 역대 본당 사제 초청 미사, 피정, 성경 쓰기 및 냉담교우 모셔오기 운동, 어려운 이웃 돌보기 등을 통해 신심 강화와 지역사회 사랑 실천에도 노력했다. 또한, 이날 「서문동본당 80년사」도 출간했다.1936년 대구대교구 소속으로 출발한 서문동본당은 1969년 안동교구로 편입됐다. 1962년 화령본당을 시작으로 남성동ㆍ계림동본당을 분가시켰고, 1966년에는 파티마 의원을 개원하는 등 지역 복음화에 앞장서왔다. 신자 수는 1800여 명이다. 이힘 기자 lensman@pbc.co.kr 평화신문2016.10.19
![[평화칼럼] 우리를 일깨운 ‘역행보살’](//cpbc.co.kr/CMS/newspaper/2017/02/rc/670980_1.0_titleImage_1.jpg)
[평화칼럼] 우리를 일깨운 ‘역행보살’윤재선 레오(보도총국장) ‘역행보살(逆行菩薩)’은 불가에서 쓰는 용어다. 천주교인들에게는 낯설다. 우연히 페이스북에서 법륜스님의 강연 동영상을 보다가 알게 됐다. 사전적 의미는 ‘그릇된 짓의 나쁜 과보(果報)를 보여주기 위해 일부러 그릇된 짓을 하는 구도자(求道者)’이다. 비슷한 뜻의 사자성어로 ‘반면교사(反面敎師)’나 ‘타산지석(他山之石)’이 있다. 익히 알려진 것처럼 남의 잘못에서 교훈을 얻는다는 뜻인데 논어에 나오는 ‘삼인행 필유아사(三人行 必有我師)’도 마찬가지다. 세 사람이 길을 가면 반드시 나의 스승이 있을 터이니, 그 옳은 바를 택해 따르고 그른 바를 고쳐가야 한다는 의미다. 지난 몇 달 동안 우리는 수많은 ‘역행보살’을 만나왔다. 국정 농단의 주역과 조연들이 쏟아져나왔다. 일부러 그릇된 짓을 하고도 이를 덮어보려는 추악한 몸짓과 거짓말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어제의 일도 기억이 나지 않는다.” “이제 죽을 지경이다.” “강압적 수사에 자살을 생각했다.” 정신 분석학과 범죄행동 심리학의 이론은 이런 최순실의 심리를 명쾌히 설명해낸다. 모든 죄악과 거짓이 생생히 마음속에 기억이 나 미칠 지경이라고 말이다. 감출수록 드러나는 역설의 심리다.또 한 명의 빼놓을 수 없는 ‘역행보살’. 국회의 탄핵안 가결로 직무가 정지된 박근혜 대통령이다. “누군가 오래전부터 기획한 것이 아닌가 하는 느낌이다”, “최순실 사태는 거짓말로 쌓아 올린 거대한 산”이라고도 했다. 보수 논객이 진행하는 인터넷 방송과의 인터뷰에서다. 새해 첫날 기습 기자간담회에서 최순실 국정 농단 관련 혐의를 부인한 것도 모자라 음모론까지 더했다. “마음에 가득 찬 것을 입으로 말하는 법”(마태 12,34)이라고 했던가?성경에서는 또 이렇게 말하고 있지 않은가? “자기 잘못을 솔직히 고백하는 이는 수치를 면하리라”, “침묵을 지키면서 지혜로워 보이는 이가 있는가 하면 말이 너무 많아 미움을 받는 자도 있다”라고.(집회 20,3.5)‘역행보살’의 조연들은 차고 넘친다. 일일이 거론하기가 민망할 정도다. 조연들이라고 폄훼했다고 언짢아하지 마시라. 전직 대통령비서실장과 두 명의 전직 문화체육관광부 장관, 차관 정도면 주연급 조연 아니던가. 특검 수사를 흔들고 헌재의 탄핵 심리를 지연시키기 위해 갖은 애를 쓰고 있는 이들과 촛불민심을 종북, 좌익 기회주의 세력으로 서슴없이 매도해온 그들은 주연일까 조연일까? 그런데 주연이면 어떻고 조연이면 어떻겠는가. 현재를 사는 우리에게 ‘역행보살’은 이 정도면 족하지 않은가. 역설적이게도 이들은 참으로 고마운 존재들이다. 옳은 바를 택해 따르고 그른 바를 고쳐가도록 가르침을 주었으니 말이다. 당연하게 여겨온 민주주의의 가치와 주권재민, 민주공화국의 헌법 정신이 얼마나 소중한지, 유권자의 잘못된 선택이 어떤 재앙을 불러오는지 깨닫도록 해주었으니 말이다. 정의롭지 못한 재벌의 소유 구조와 불공정한 경쟁, 특혜와 비리, 반칙이 우리 삶을 얼마나 고달프게 하는지 뼈저리게 느끼게 해주었으니 말이다. 무엇보다 우리 사회의 병폐를 치유할 연대성의 문화를 일깨우지 않았던가. 우리 삶의 영향을 주는 모든 일과 다른 사람을 무감각하게 대하도록 만드는 무관심을 극복하는 것만이 사회 변화의 첫걸음임을. 참다운 신앙은 결코 안락하거나 완전히 개인적일 수 없기에. 평화신문2017.02.08

특별 기고 - 역자 후기 「새 계약의 봉사자」 「그리스도를 따르는 사제」기쁜소식 사제 영성 시리즈 1ㆍ2권 발간“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다. 그러나 소금이 제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다시 짜게 할 수 있겠느냐? 아무 쓸모가 없으니 밖에 버려져 사람들에게 짓밟힐 따름이다”(마태 5,13). 소금은 짜야 한다. 그런데 소금이 자신의 맛이 무엇인지도 알지 못하고 설탕 맛을 보고서 단맛을 내려고 한다면 어떻게 되겠는가? 짠맛을 내라고 넣은 소금이 단맛을 내고 있으면 그 음식은 어떻게 되겠는가? 이것이 바로 정체성의 문제다. 그리스도인이면서 그리스도인답게 살지 못하고 사제이면서 사제답게 살지 못하는 것은 근본적으로 자신이 내야 하는 맛이 무엇인지 모르는 데에서 나오는 결과다.사제 영성에 관한 안토니오 브라보 신부의 책들은 사제가 내야 하는 짠맛이 무엇인가에 대한 글들이다. 오랜 기간 프라도회 총장을 역임했고 한국에도 몇 차례 와서 교구 사제들의 피정을 지도했던 안토니오 브라보 신부는, 강의를 들은 이들의 요청에 따라 그의 강의들을 몇 권의 책으로 출판했다. 기쁜소식에서 5권으로 기획하고 있는 ‘사제 영성 시리즈’의 책들은 여러 각도에서 사제직을 조명하여 그 이해를 돕는다.본래 이 책들은 이론적인 교과서가 아니라 강의 자료들을 모은 것이기 때문에, 저자 자신이 머리말에서 밝히듯이 유사한 주제를 반복함으로써 독자에게 분명한 인상을 심어 주려 한다. 또한, 많은 성경 본문들을 직접 인용하여, 독자가 직접 성경 말씀으로부터 양식을 얻도록 한다.그러나 어렵지 않은 표현들 속에서도 이 책들은 탄탄한 신학적인 깊이와 균형을 바탕에 깔고 있다. 5권으로 기획된 이 시리즈에서 각 권은 사제직의 서로 다른 요소들을 다루면서도 기본적으로 모두 구약과 신약으로부터 출발하여 구원의 역사 전체 안에서 하느님과 인간의 관계를 정확히 규정하면서 그 안에서 사제직을 제시한다. 이들은 사제직이라는 주제를 고립시켜 바라보지 않고 하느님 백성의 역사 안에서, 그리고 전체 교회 공동체 안에서 사제직을 제시한다.이 시리즈 제1권으로 출간된 「새 계약의 봉사자」는 사제의 직무에 관한 책인데, 여기서는 먼저 구약과 신약 전체 안에서 ‘계약’ 개념을 고찰하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어진 새 계약의 공동체인 하느님 백성을 위하여 봉사하는 사제의 역할을 다룬다. 새 계약의 봉사자는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사제의 역할은 어디까지나 그러한 봉사자 예수 그리스도를 재현하는 데에 있다.아무도 감히 자신이 그러한 드높은 역할에 합당하다고 말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신부인 교회를 신랑이신 그리스도께 인도하는 것이 사제의 역할임을 분명하게 인식한다면 여기에 필요한 것은 인간적인 뛰어난 능력이 아니라 신랑의 친구로서 오직 그리스도를 드러내는 것이다. 사제의 정체성에 대한 이러한 정의는, 오늘날의 교회 안에서 사제가 찾아야 하는 자리를 짚어 준다.제2권 「그리스도를 따르는 사제」는 사제 성소에 관한 책이다. 현대에 이르러 사제 성소가 감소하는 현상에 대하여 저자는, 단순한 수적 감소의 문제가 아니라 삶을 하느님과의 관계 안에서 바라보는 시각을 잃어가고 있다는 데에서 원인을 찾는다. 사제뿐만 아니라 모든 인간의 삶이 하느님으로부터 부르심을 받은 삶임을 깨달을 때 인간은 자신의 부르심에 응답하는 것이 참으로 자기 자신을 실현하는 길임을 알게 될 것이고, 이와 같이 삶에 대한 이해가 변화될 때에야 사제 성소도 가능하게 될 것이다. 이 책의 마지막 장에서는 성소의 관점에서 본 사목에 대해서도 다룬다.이 책에서 다루는 것은 근본적으로 인간의 삶에 대한 이해다. 인간의 자유와 권리에 관한 주장이 그릇된 방향으로 발전하여 인간에 대한 이해에서 초월성이 배제되고 하느님 없는 자율성을 주장하게 될 때, 인간 삶의 의미와 가치를 오직 인간 자신을 기준으로 판단하게 될 때 인간은 실용적 가치로 판단되는 대상이 된다. 이러한 길은 인간의 존엄성을 드높이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하느님의 모상으로서 인간이 지니는 유일무이한 가치를 망각하게 한다. 하느님의 부르심에 응답하는 것은 인간이 자신이 창조된 목적에 합당한 삶을 살게 한다. 이 시리즈에 속한 책들 가운데 특히 이 책은 「그리스도를 따르는 사제」라는 제목과는 달리 모든 신자에게 자신의 삶의 의미에 대해 생각해 보게 하는 책이다.교회 안에서 평신도의 역할이 강조되고 또한 교육, 의료 등 과거에 교회에서 행하던 여러 활동이 사회에 의하여 이루어지고 있는 이 현대에, 사제들과 신자들 모두가 사제의 정체성에 대해 물음을 던진다. 사제가 해야 하는 고유한 몫은 무엇인가? 때로 그것은 미사를 집전하는 등 외적으로도 구별되는 요소들을 지니지만, 경우에 따라서는 사회의 다른 이들과 구별되지 않는 일들을 수행하게 되는 때도 있다. 그런 경우에는 또 무엇에서 사제의 정체성을 찾을 것인가? 계층 사회의 한 층으로서가 아니라, 하나의 직업으로서가 아니라 세상의 구석구석에 소금처럼 들어가 있는 사제에게서 그의 정체성을 알아보게 하는 짠맛은 무엇인가? 사제가 평생 추구하며 살아야 하는 것은 무엇인가? 이러한 근본적인 질문들을 고민하는 노력은 머릿속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사제의 구체적 삶 안에서, 그리고 교회의 삶 안에서 그 소금의 맛으로 확인될 것이다. ‘사제 영성 시리즈’의 책들은 그 고민을 좀더 깊이 있게 하도록 길을 가리켜 주는 표지판들이다. 백영민2016.12.07
![[성경 속 도시] <36> 길갈](//cpbc.co.kr/CMS/newspaper/2015/02/rc/554875_1.2_titleImage_1.jpg)
[성경 속 도시] 길갈드디어 약속의 땅 가나안에 들어가다 길갈에서 친교 제물을 바치는 사울. 사무엘은 그를 왕으로 세운 것을 후회한다. 열왕기의 세밀화, 콘스탄티노폴리스, 11세기, 바티칸 도서관, 로마. 출처=「성경 역사 지도」, 분도출판사 길갈은 요르단 강에서 약 10㎞ 정도 떨어진 지역이며, 예리코까지 약 3㎞ 정도 거리에 있는 지역으로 추정된다. 모세의 뒤를 이어 이스라엘 백성의 지도자가 된 여호수아는 약속의 땅인 가나안에 들어간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들은 첫 번째 난관에 부딪힌다. 이들을 가로막은 것은 요르단 강이었다. 여호수아는 계약의 궤를 멘 제사장들을 앞세웠다. “주 여러분의 하느님의 계약 궤와 그 궤를 멘 레위인 사제들을 보거든, 여러분이 있던 곳을 떠나 그 뒤를 따라가시오”(여호 3,3). 제사장들이 거침없이 요르단 강에 발을 디디자 기적과 같은 일이 일어났다. 요르단 강물의 흐름이 멈춰 서고, 제사장들이 강 한가운데 머무를 때는 강이 마른 땅으로 변했다. 이렇게 제사장들을 뒤따른 백성들은 요르단 강을 무사히 건너게 되었다. “주님의 계약 궤를 멘 사제들이 요르단 강 한복판 마른 땅에 움직이지 않고 서 있는 동안, 온 이스라엘이 마른 땅을 밟고 건너서, 마침내 온 겨레가 다 건너간 것이다”(여호 3,17). 여호수아와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느님의 약속을 믿으면 어떠한 난관도 은혜로 건널 수 있음을 체험했다. 이스라엘 백성은 하느님께서 하신 일을 기념하기 위해 열두 지파에서 가져온 열두 개의 돌로 기념비를 세웠다. 이들은 예리코 성 동쪽 경계 길갈이라는 곳에 진을 치고, 바로 그 길갈에 그 돌을 세웠다(여호 4,19-20). 이처럼 길갈은 가나안 정복을 위한 전초기지였고 승리의 장소가 되었다. 여호수아는 가나안 땅에 들어온 후, 첫 파스카 축제를 이곳에서 지냈고 오랫동안 광야 생활 동안 하지 못한 할례를 베풀었다(여호 5,2-12). 이스라엘 백성에게 할례는 하느님과의 언약 관계 회복과 순종의 의미를 지녔고 하느님께서 선택한 백성이란 증표였다. 요르단 강을 건넌 이들은 광야에서 40년간 떠돌이 생활을 할 때 태어난 이들이 대부분이었을 것이다. 그들은 아직 할례를 받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길갈’의 뜻은 ‘굴러간다’는 의미다. 하느님이 약속하신 땅에 들어왔고 이스라엘 젊은이들의 할례가 이뤄져 ‘이집트의 수치’는 굴러가 버렸다는 의미가 된다.가나안 정복 후에 길갈은 베냐민 지파의 성읍이었고, 가나안 정복 및 초기 시대에 정치, 군사, 종교의 중심지가 되었다. 왕정 초기에 이곳은 사무엘 예언자가 이스라엘을 순회하며 다스리던 도시 가운데 하나였다(1사무 7,16). 암몬과의 전쟁 직후 이스라엘의 첫 임금이 된 사울이 즉위식을 한 곳이 바로 길갈이다. 그만큼 큰 의미를 지닌 장소다. “온 백성은 길갈로 가 주님 앞에서 사울을 임금으로 세우고, 주님께 친교 제물을 바쳤다. 거기에서 사울과 이스라엘 사람들이 모두 크게 기뻐하였다”(1사무 11,15).그러나 왕국 분열 후 북이스라엘에서는 길갈에 우상을 세우고 숭배하여 선지자들로부터 자주 책망을 듣기도 하였다. “그들의 모든 악이 길갈에서 드러나 그곳에서 내가 그들을 미워하게 되었다. 그들의 악한 행실 때문에 나는 그들을 내 집에서 쫓아내리라. 나는 더 이상 그들을 사랑하지 않으리라. 그들의 대신들은 모두 반항이나 하는 것들”(호세 9,15). 허영엽 신부(서울대교구 홍보국장) 문채현2015.02.11
![[초대 조선교구장 브뤼기에르] (14) 방콕에서의 첫 번째 소임](//cpbc.co.kr/CMS/newspaper/2017/05/rc/682898_1.1_titleImage_1.jpg)
[초대 조선교구장 브뤼기에르] (14) 방콕에서의 첫 번째 소임아시아 복음화 위한 사제 양성에 열정 쏟다19세기 당시 중국에서 활동하던 파리외방전교회 선교사의 모습. 변발에 중국 복식이 이색적이다.브뤼기에르 신부는 방콕에 도착 후 곧바로 선교사로서 활동을 시작했다. 그의 첫 번째 소임은 신학교에서 본토인 사제를 양성하는 일이었다. 브뤼기에르 신부는 파리외방전교회에 입회하기 전 프랑스 카르카손교구에서 대신학교 교수로 오랜 기간 재직한 바 있었다. 그는 매일 신학 2시간, 라틴어 4시간, 매주 성경 2시간을 강의했다. 그는 또 연로한 교구장을 대신해 교구 행정 일을 도맡아 했다. 교황청과 파리외방전교회 본부로 보내는 보고서를 작성하고 교구의 주요 살림살이를 챙겨야 했다. 샴 언어를 익힌 후에는 본당 사목도 병행했다. 지금도 그렇지만 당시 상황에서 교구 행정과 신학교 운영, 본당 사목 등 세 가지 일을 도맡아 한다는 것은 선교사로서의 헌신적 사명감과 초인적인 정신력이 아니고서는 쉽게 할 수 없는 일이었다. 브뤼기에르 신부는 자신의 소임 중 가장 우선으로 사제 양성에 힘을 쏟았다. 본토인 사제를 양성한다는 파리외방전교회의 설립 정신을 따르는 것일 뿐 아니라 교구의 운명이 사제 양성에 달려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브뤼기에르 신부는 틈날 때마다 “아시아 복음화를 위해 선교사로 지원하라”는 내용의 편지를 조국에 보냈다. 이를 묵묵히 지켜보던 샴대목구장 플로랑 주교는 브뤼기에르 신부가 방콕에서 사목한 지 2년째 되던 해인 1829년 교황청에 한 통의 편지를 쓴다. 브뤼기에르 신부를 자신의 후임으로 샴대목구장 계승권을 가진 부대목구장 주교로 임명해 달라는 청원서였다. 이 무렵 교황청은 1824년(혹은 1825년) 조선 신자들이 교황에게 보낸 청원을 고려해 조선을 북경교구에서 분리해 대목구로 독립시킬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 교황청 포교성성 장관 바르톨로메오 알베르토 카펠라리(Bartolomeo Alberto Cappellari) 추기경은 1827년에 파리외방전교회 신학교장(본부장) 랑글루아 신부에게 조선 선교를 맡아달라는 편지를 보냈다. 교황청 포교성성은 조선 선교를 위해 이미 여러 차례 다양한 시도를 펼쳐왔다. 교황청은 1807년 북경교구장 구베아 주교로부터 조선에서 1801년(신유년) 박해가 일어나 교회가 초토화됐다는 내용의 보고서를 받은 후 처음으로 포르투갈 선교사들에게 조선 선교지를 맡기는 데 따르는 위험을 인식하게 된다. 그래서 포교성성은 북경교구장 구베아 주교에게 가능한 한 빨리 선교사 한 명을 조선에 보낼 수 있도록 특별히 신경 써달라고 요청하고 중국 신학교에서 조선인 사제를 양성하도록 권고했다. 또 서로 편하게 연락하도록 중국과 조선의 국경에 신자 공동체를 만들 것을 제안했다. 교황청의 이러한 권고는 구베아 주교가 1808년 7월 6일 선종하면서 성과 없이 흐지부지돼 버렸다. 교황청 포교성성은 1815년 12월 30일 구베아 주교 후임으로 북경교구장으로 임명된 요아킴 데 수자 사라이바 주교가 보내온 편지를 접수한다. 그 편지에는 프란치스코와 조선의 다른 신자들이 쓴 1811년 음력 10월 24일(양력 12월 9일) 자 교황께 보내는 서한이 들어 있었다. 조선 신자들이 교황께 보낸 서한에는 “성직자를 보내 줄 것”과 “선교사들이 어려움 없이 조선에 입국할 수 있는 최선책은 교황이나 포르투갈 왕이 파견한 사절단이 선교사와 함께 배를 타고 오는 것”이라는 내용이 적혀 있었다. 포교성성 관계자들은 이 편지 내용을 보고 경탄을 했다. 조선 신자들의 열정과 신앙심에 감복했다. 모두 조선 선교지에 시급하게 사제를 파견해야 한다는 데 동의하고 방안을 논의하기 시작했다. 포교성성은 선종한 북경교구장이 갖고 있던 조선 선교지 관할권을 누가 이어받을지, 선교사들을 직접 조선에 보낼지, 포르투갈 왕실 사절단을 요청하는 우회로를 이용할 것인지 등을 논의한 끝에 중국 현지 사정이 밝은 마카오의 포교성성 극동 대표부장 마르키니 신부에게 북경에서 추방된 이들 가운데 조선에 보낼 선교사 한 명을 선발하라고 지시했다. 당시 청나라 가경제는 1811년 천주교 금교령을 내리고 궁중 공직에 있는 서양 선교사를 제외하고 북경의 모든 서양 선교사를 추방하고 북경으로 들어오는 것을 금했다. 선교사가 체포되면 ‘간첩죄’와 ‘사교(邪敎)유포죄’ ‘풍속 문란죄’ 등을 적용해 극형에 처했다. 교황청 포교성성이 조선에 성직자를 파견하려고 다각적인 노력을 보이자 중국의 선교 보호권을 갖고 있던 포르투갈도 가만히 있지 않았다. 금교령으로 자신의 사목지에 들어가지 못하고 남경에 머물러 있던 북경교구장 사라이바 주교는 중국 남경 출신 신 플로리아노 벨로조(Xin Florien Vellozo, 43) 신부와 밤 요한(Vam Jean, 29) 신부를 조선에 파견하겠다고 교황청에 보고한다. 그러면서 사라이바 주교는 밤 신부를 조선 선교지 총대리로 임명한다. 북경교구장이 갖는 권한 안에서 모든 상시적 권한과 특별 권한(혼인 장애 관면, 이동 제대 축성 등)을 밤 신부에게 위임했다. 또 밤 신부가 부재시 신 신부가 똑같은 권한을 사용할 수 있도록 허가했다. 신 신부는 지방 장관이었던 아버지 덕분에 어릴 적부터 한문에 능통했다. 그는 상인이었으나 부인이 죽은 후 서른다섯 살이 넘어 신학교에 입학했다. 밤 신부는 신 신부보다 한문에는 능통하지 않으나 품행이 바른 사제였다. 이들의 첫 번째 임무는 조선인 신학생을 선발해 마카오 신학교에 보내는 것이었다. 이들 두 신부는 1817년 1월 4일 남경에서 배를 타고 조선으로 출항했지만, 입국에 성공하지 못했다. 신 벨로조 신부는 병에 걸려 조선 관문에서 숨을 거뒀고, 밤 신부도 남경으로 돌아온 후 사목을 하다 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리길재 기자 teotokos@cpbc.co.kr김지항2017.05.24
![[이상철 신부의 성가이야기] (47) 91. 구세주 빨리 오사](//cpbc.co.kr/CMS/newspaper/2017/01/rc/666590_1.0_titleImage_1.jpg)
[이상철 신부의 성가이야기] (47) 91. 구세주 빨리 오사 91번 구세주 빨리 오사 가사를 쓴 프랑스 시인이자 극작가 펠르그랭. 91번 성가는 대림시기가 지니는 두 가지 복합적 의미, 즉 성탄과 그리스도의 재림을 기다리는 내용을 가사에 담고 있는 성가라고 할 수 있다. 이 성가의 악보에 표기된 이름 카브리소(Cabrisseau)는 1913년 미국에서 출판된 「미국 가톨릭 성가집(American Catholic Hymnal)」에서 찾아볼 수 있는 인물. 그런데 이 사람은 작곡자가 아니라 이 선율을 합창 악보로 편곡한 사람이다. 본래 이 선율은 16세기부터 프랑스에서 전해 내려오는 전통 선율로 작곡자를 알 수 없다. 선율에 붙여 부르는 성탄 가사인 ‘거룩하신 구세주여, 오소서(Venez Divin Messie)’는 17세기에 만들어졌다. 노트르담수도회 마리아 수녀(Frances Mary Lescher, 1825~1904)가 번역한 것으로 알려진 ‘O Come, Divine Messiah’라는 영어 가사가 널리 전해진다. 당시 이런 캐럴이나 찬미가들은 흔히 입당이나 퇴장 때 행렬용으로 부르던 찬미가였다.성가의 원어 가사인 프랑스어 가사를 만든 이는 프랑스 시인이자 극작가였던 펠르그랭(Abb Simon-Joseph Pellegrin, 1663~1745)이다. 그는 프랑스 무스티에생마리에 있는 성모의 종 수도회 수련자로 있었으나, 길을 바꿔 배를 타고 회계원으로 일했다. 1703년 파리로 돌아온 뒤 시를 쓰기 시작한 그는 이듬해 당시 루이 14세 왕의 군사적 업적을 기리는 시를 썼고, 이것으로 ‘프랑스 아카데미상’을 수상했다.그는 교황의 사면장을 받아 클루니의 베네딕토 수도원으로 다시 돌아갈 수 있었지만, 거절했다. 그리고 루이 14세 왕의 두 번째 부인이었던 도비네(Franoise d‘Aubign)의 종용으로 그가 가난한 귀족 자녀들을 위해 세웠던 생시르 기숙학교에 머물면서 활동하게 된다. 여기서 그는 칸티클(canticle, ‘마리아의 노래’와 같이 성경에 수록된 노래들)과 시편들을 번역하고 많은 성가 가사를 썼다. 이에 못지않게 세속적인 극장음악과 오페라 작품에도 열정을 보였다.특히 작곡가 라모(Jean-Philippe Rameau, 1683~1764)의 오페라 ‘이폴리트와 아리시’의 대본을 쓰며 함께 작업하기도 했는데, 이 오페라는 그리스 비극을 다룬 것으로 교회의 눈으로는 지극히 세속적인 내용이었다. 이런 작업들로 그는 “아침에는 가톨릭 신자, 저녁에는 우상 숭배자이며, 제대에서 성찬례에 참여하고 극장에서 술잔을 기울였다”는 소리를 듣기도 했다. 한편 그는 자신이 쓴 많은 성가 가사를 오페라나 민요와 같은 세속 선율에 붙여 노래로 만들기도 했다. 91번 성가도 그중 하나다.원어 가사는 후렴을 포함해 4절로 구성된 대림 성가이기는 하지만, 직접적으로 성탄을 언급하지 않는다. 반면 우리 성가책에는 “동정 마리아에서 탄생하옵소서”라는 구절을 삽입해 직접 성탄을 언급하는 성가로 바꿔 놓았다. 김지항2017.01.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