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시시의 프란치스코 (10) [꼰벤뚜알 프란치스코 수도회 성인들의 생애와 영성] 아시시의 프란치스코](//cpbc.co.kr/CMS/newspaper/2017/03/rc/675729_1.2_titleImage_1.jpg)
아시시의 프란치스코 (10) [꼰벤뚜알 프란치스코 수도회 성인들의 생애와 영성] 아시시의 프란치스코복음 말씀 듣더니 신 벗고 지팡이 던져 프란치스코에게 성경 말씀은 성체성사만큼이나 당신 모습을 세상에 뚜렷이 드러내는 그리스도의 현존 자체였다. 그림은 조토 디 본도네 작 ‘새들에게 설교하는 프란치스코’, 아시시 성 프란치스코 대성당. 기도 안에서 교회와 이웃에 봉사하며 겸손과 인내로 하느님의 뜻을 기다리던 프란치스코는, 어느 날 캄캄한 어둠을 비추는 한 줄기 빛과 같은 하느님의 부르심을 체험한다. 그 체험에 대해 그는 유언을 통해 다음과 같이 전한다. “아무도 내가 해야 할 것을 나에게 보여주지 않았지만, 지극히 높으신 분께서 친히 거룩한 복음의 양식에 따라 살아야 할 것을 나에게 계시하셨습니다.”일상의 전례 속에서 계시를 듣다프란치스코는 자신의 미래에 대한 모든 계획은 이 세상이 아니라 하느님에게서 온 계시였으며, 그것은 ‘거룩한 복음의 양식에 따라 살아야 하는 것’이었음을 이야기한다. 우리는 ‘계시’라고 하면 뭔가 신비스러운, 이 세상에서는 있을 법하지 않는 방식으로 일어나는 특별한 하느님의 메시지 전달 방식이라고 생각하기 쉽다. 그런데 프란치스코의 주요 전기들 속에는 이 유언의 내용을 뒷받침하는 하나의 사건을 기록하고 있으니, 그것은 그가 미사 중에 사제를 통해 선포되는 복음 말씀을 들은 사건이다. 보나벤투라의 「대전기」에 따르면 그는 ‘포르치운쿨라’라고 불리는 ‘천사들의 성 마리아 성당’을 수리하고 있던 어느 날, 한 사도의 축일 미사에 참여하였다. 그리고 미사 중에 사제의 입을 통해서 선포되는 복음 말씀 “전대에 금이나 은이나 동전을 넣어 가지고 다니지 말 것이며 식량 자루나 금이나 은이나 동전을 넣어 가지고 다니지 말 것이며 식량 자루나 여벌 옷이나 신이나 지팡이도 가지고 다니지 말아야 한다”(마태 10,9-10)는 말씀을 듣는 순간 그의 마음속에 가려져 있던 모든 장막이 걷히는 것을 느끼며 크게 기뻐했다. 그리고 “이것이야말로 내가 원하던 것이다. 이것은 내 진심으로 갈망하던 바이다”라고 외치며 그 자리에서 신을 벗고 지팡이를 던져버린다. 성경, 프란치스코 삶의 길잡이프란치스코에게 성경은 가장 구체적인 하느님의 목소리였다. 따라서 복음 속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은 단순히 도덕적인 차원이 아니라 그 자체로 삶의 법칙이자 길잡이였으며, 세상의 모든 관습이나 법 위에 있는 최고의 규범이었다. 그런 이유로 그는 회개 초기에 형제들이 찾아와 첫 공동체가 이뤄졌을 때, 공동생활의 유지를 위한 최소한의 생활 규칙 외에 다른 별도의 규정을 가지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바로 그 규정들이 복음을 통해서 자신과 형제들을 이끌어 주시는 성령의 생생함을 방해하리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는 목표가 예수 그리스도와의 완전한 일치였던 만큼 말씀과도 완전한 일치를 바랐고, 자기 자신과 공동체 역시 오로지 복음을 통해서 인도되기를 원했다. 그는 특히 전례를 통해서 선포되는 성경 말씀에 성사적인 의미를 부여한다. 지극히 높으신 분이 말씀 안에 현존하시고, 말씀을 통해서 우리에게 인격적으로 다가오신다는 것이다. 우리는 말씀을 통해서 그분과 만나고 대화한다. “우리가 죽음에서 생명으로 구원된 그분의 몸과 피와 이름과 말씀이 아니고서는 우리는 이 세상에서 지극히 높으신 분을 육체적으로 모실 수도 없고 볼 수도 없습니다.” “성직자들이 말하고 전하고 거행하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거룩하신 말씀과 피가 아니고서는 아무도 구원받을 수 없다는 사실을 우리는 모두 확신하고 있습니다.” 양피지 속 하느님성자께서 빵과 포도주의 형상 안에 당신 자신을 감추시듯, 그분의 말씀 또한 비인격적인 책이나 양피지 속에 자신을 감추고 우리에게 오신다. 때때로 그것은 인간의 부주의 때문에 소홀하게 취급되거나 부적절한 곳에 던져져 모욕을 당하기도 한다. 이 모든 부적절한 조건들을 지극한 가난과 겸손으로 수용하시면서 인간과의 친교를 위해서 당신 자신을 낮추시어 우리에게 다가오신다. 프란치스코는 이러한 말씀의 겸손 앞에 감탄하며 형제들에게 거기에 합당한 태도로 응답할 것을 권고한다.“그러므로 나의 모든 형제에게 훈계하며 그리스도 안에서 격려합니다. 어디서든지 기록된 하느님의 말씀을 발견하게 되면, 할 수 있는 최대의 경의를 표했으면 합니다. 그리고 그것들이 잘 정돈되어 있지 않거나 혹 불경스럽게 흩어져 있으면 주워 모아서 보관하여 그 말씀을 하신 주님의 말씀 안에서 공경하십시오. 사실 하느님의 말씀으로 많은 것들이 거룩하게 되며, 그리스도 말씀의 힘으로 제단의 성사가 이룩되기 때문입니다.” 제단의 성사는 말씀의 힘으로 이룩된다. 물론 미사 안에서 성체성사가 가지는 독보적 가치와 절대적인 중요성을 부정할 수는 없으나, 빵과 포도주를 주님의 몸과 피가 되게 하는 것은 바로 말씀이라는 사실 또한 잊어서는 안 된다. “우리가 먼저 말씀으로 축성되지 않으면 주님의 몸이 현존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결론적으로 프란치스코에게 있어서 성경 말씀은 성체성사만큼이나 당신의 모습을 세상에 뚜렷이 드러내는 그리스도의 현존 그 자체였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말씀이 사람이 되신 분이었기에 그분과의 일치는 곧 말씀과의 일치를 의미하였다. “당신이 기도할 때 당신은 그분께 말씀드리는 것이고, 당신이 읽을 때 그분께서 당신에게 말씀하시는 것입니다”라는 성 예로니모의 말처럼, 성경을 통해서 우리는 그분과 만나고 그분의 인도를 받아서 걸어갈 수 있다. 그리고 그 증거를 우리는 프란치스코의 모범에서 발견한다. cpbc2017.03.22
![[신앙단상] 말 말 말](//cpbc.co.kr/CMS/newspaper/2017/12/rc/703934_1.0_titleImage_1.jpg)
[신앙단상] 말 말 말고종희 (마리아, 한양여자대학교 산업디자인학과 교수, 미술사가) “밥 한번 먹읍시다.”사람들이 가장 많이 하는 빈말 중 하나일 것이다. 나 역시 이 말을 참 많이도 했다. 그러던 어느 날 “말을 많이 하지 말고, 해가 되는 말이라도 한 말은 꼭 지키라”는 어느 성인의 가르침을 보게 되었다. 그 후 나는 실제로 밥을 먹을 사람에게만 밥을 먹자고 한다. 은행에서 대출을 받으면 상환해야 하듯이, 말에도 빚이 있어서 말을 하면 지켜야 하고, 지키지 않으면 말빚을 지게 된다. 이번 주 모처럼 약속이 꽉 차 있다. 지난여름 이탈리아에서 만난 유학생 가족에게 한국에 오면 꼭 보자고 하여 오늘 저녁 만나기로 했고, 몇 달 전 식사 한번 하자고 한 동료들과 식사가 내일이며, 어느 소녀와의 저녁 약속도 잡혀 있다. 그중 마지막 약속은 어쩌면 그녀의 인생에서 중대한 갈림길이 될지도 모른다. 공부를 다시 시작해 새로운 인생에 도전해 보는 것이 어떻겠느냐는 내 제안을 얼굴도 보지 못한 그녀가 받아들여 내일 만나기로 한 것이다. 크고 작은 약속과 만남은 말로 시작되는 것이니 말이란 때로 의도가 좋으면 일단 뱉어 놓고 책임을 지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다. 말은 지키는 것 못지않게 듣는 것도 중요하다. 내가 지나가는 말로 툭 던진 말을 상대가 흘려듣지 않고 결과를 주면 감동한다. 반면 알았다고 해 놓고 함흥차사인 사람은 신뢰하지 않는다. 작은 것을 소홀히 하는 사람은 큰 것도 소홀히 하기 때문이다. 그러니 말은 신뢰의 척도다. 사람들이 모이면 피할 수 없는 것이 있는데 바로 달콤 씁쓰름한 뒷담화다. 프란치스코 교황님이 오죽하면 “뒷담화만 하지 않아도 성인이 된다”고 말씀하셨을까. 뒷담화는 적극적으로 가담하지 않아도 그 자리에 있었다는 사실만으로도 동조하는 모양새가 되는데 그런 날은 영 찜찜하다. 원수도 사랑하라고 하셨는데 나에게 별로 잘못한 일도 없는 사람을 마구 흉을 보다니 뒷담화는 죄질이 나쁘다. 요즘은 좋은 말보다는 나쁜 말을 더 많이 듣게 되는 것 같다. 할 말, 못할 말, 거짓말, 말 뒤집기, 쓸데없는 말, 잔소리, 욕설. TV를 보고 있노라면 정치에서 오락에 이르기까지 사람들의 무서운 말 잔치에 “저 말빚을 어찌 다 갚으려 저렇게 떠들어댈까?”라는 생각이 든다. 성녀 젬마는 수호천사를 직접 볼 수 있었고, 그와 대화도 나눴다고 한다. “누구든지 참으로 예수님을 사랑하는 이는 말이 적고 모든 것을 잘 견딘다. 예수님의 뜻을 받아 내가 네게 명하노니, 남이 묻기 전에 무심코 네 의견을 말하지 말라. 네 의견을 주장하지 말고 항상 침묵을 지켜라.” 수호천사가 젬마에게 한 말인데 바로 내가 새겨야 할 말이다. 사람들은 누군가에게 충고를 해 주는 것을 좋아하는 것 같다. 나도 그동안 얼마나 남을 가르치려 들었는지 창피할 정도다. 하느님의 참된 자녀가 되려면 젬마의 수호천사 말을 명심해야 할 것이다.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말해야 할까? 신약성경 속 예수님처럼 쉽게, 정직하게, 진실되게 말하면 될 것이다. 그리고 하느님을 찬양하는 일에 꾀를 부리지 않는 것이다. “주님께 겸손되이 간구하오니 / 우리 입 그 언제나 진실 전하며 / 진리의 달고 단맛 마음에 느껴 / 기쁨의 찬양 노래 읊게 하소서.” 이런 성무일도를 하느님께서 아침저녁으로 들으신다면 얼마나 기뻐하실까? 그런데 내가 또 이렇게 가르치려 들고 있다. 평화신문2017.12.06
![[이창훈 기자의 예수님 이야기] (13) 세례자 요한의 설교 ② (3,7-18)](//cpbc.co.kr/CMS/newspaper/2017/05/rc/681196_1.0_titleImage_1.jpg)
[이창훈 기자의 예수님 이야기] (13) 세례자 요한의 설교 ② (3,7-18)하느님 심판을 피하는 길… 회개와 자선 실천 유다 광야와 정교회의 수도원이다. 이 광야 오른쪽으로 요르단강 하류와 사해가 있다. 가톨릭평화방송여행사 제공 가) 요한이 요르단강 주변에서 죄의 용서를 위한 회개의 세례를 선포하자 군중은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러 옵니다. 그러자 요한은 “독사의 자식들아, 다가오는 진노를 피하라고 누가 너희에게 일러주더냐?”라고 질타하면서 “회개의 합당한 열매”를 맺으라고 촉구합니다. 여기서 “다가오는 진노”란 하느님의 심판을 뜻합니다. 요한은 “도끼가 이미 나무뿌리에 닿아 있다”며 회개의 시급성을 강조하지요. 또 “좋은 열매를 맺지 않는 나무는 모두 찍혀서 불 속에 던져진다”면서 행실로써 회개의 열매를 맺을 것을 거듭 촉구합니다. 나아가 아브라함의 자손이라는 신분이 하느님의 심판을 면할 구실이 되지 않는다고 지적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이 돌들로도 아브라함의 자녀들을 만드실 수 있다”는 것입니다.(3,7-9)요한은 이어 회개의 구체적 방법을 제시합니다. 군중에게는 나누라고 합니다. 옷을 두 벌 가진 이는 못 가진 이들과 나누고 먹을 것을 가진 이들도 그렇게 하라는 것입니다. 세리들에게는 정한 것 이상을 요구하지 말라고 합니다. 군인들에게는 봉급으로 만족하라고 합니다.(3,10-14) 이 대목은 좀 더 눈여겨볼 필요가 있습니다. 가진 것을 나눠야 하는 사람들, 곧 자선을 베풀어야 하는 사람은 특정 계층이 아니라 불특정 다수인 ‘군중’입니다. 누구나 자선을 실천해야 합니다. 예외가 있을 수 없습니다. 세리들은 탐욕과 부정직함으로 소문난 이들인 데다가 당시 권력층의 앞잡이 노릇을 하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당시에는 대표적인 ‘죄인’ 축에 들었습니다. 이런 죄인들도 행실을 바꾸면 다가올 하느님의 진노를 면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군인들은 힘으로, 무력으로 백성을 짓눌러 사욕을 채우려는 이들을 나타냅니다. 이 군인들은 유다인들이 아니라 헤로데 안티파스의 용병으로 이방인이었을 가능성이 큽니다. 무력을 일삼는 이런 이방인들에게도 아브라함의 자녀가 될 길, 구원의 길은 열려 있습니다.루카는 요한의 이 설교를 통해서 하느님의 심판을 피하는 길, 다시 말해 구원을 얻는 길이 누구에게나 열려 있음을 말합니다. 앞에서 이사야 예언서를 인용하면서 “모든 사람이 하느님의 구원을 보리라”고 한 것을 다시 한 번 구체적으로 언급하는 셈입니다. 그러나 전제가 있습니다.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어야’, 곧 행실을 고쳐야 합니다. 권력이나 직분을 남용하지 않고 정직하게 살아가는 것, 그리고 자선(나눔)을 실천하는 것입니다. 나) 요한의 가르침에 사람들은 그가 혹시 기다리던 메시아가 아닌가 생각합니다. 하지만 요한은 이를 단호히 부인합니다. 자신은 “그분의 신발 끈을 풀어드릴 자격조차 없다”는 것입니다. 또 자기는 물로 세례를 주지만 그분은 “성령과 불로 세례를 주실 것”이라고 합니다.(3,16) 여기서 불은 심판을 표상합니다. 따라서 메시아로 오실 그분은 심판자로 오실 것입니다. 그분은 “손에 키를 들고 타작마당을 깨끗이 치워 알곡은 곳간에 모아들이고 쭉정이는 꺼지지 않는 불에 태워 버리실 것”(3,17)이라는 요한의 마지막 말은 이를 분명히 보여줍니다. 그렇다면, 요한의 말로 미루어볼 때 메시아로 오실 그분, 성령과 불로 세례를 주실 그분은 심판자로 오실 것이 분명합니다. 그런데 루카는 요한의 설교를 전하는 기사를 “요한은 그 밖에도 여러 가지로 권고하면서 백성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였다”(3,18)는 말로 마무리합니다. 어투로 보면 요한의 선포는 가슴을 찌르는 소리이기는 하지만 기쁜 소식은 아닌 듯합니다. 그런데 루카는 요한이 전하는 이 소식을 “기쁜 소식”이라고 표현합니다. 왜 기쁜 소식일까요? 요한이 회개의 세례를 촉구하는 것은 단지 다가올 심판을 면하도록 하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오히려 이미 세상에 와 계신 구원자 주 그리스도(루카 2,11)를 기쁘게 맞이하도록 하기 위한 것입니다. 따라서 요한의 선포는 경고의 메시지를 담고 있지만 본질적으로 기쁜 소식입니다. 그러나 그 기쁜 소식의 내용 혹은 실체는 그리스도이신 그분께서 알려 주실 것입니다. 생각해봅시다‘광야의 외침’ 요한 세례자는 자신을 찾아오는 사람들에게 합당한 처방을 내려줍니다. 회개를 위해, 삶을 바꾸기 위해 오늘 나에게는, 우리에게는 어떤 처방이 필요할까요? 우리도 광야의 외침을 들을 필요가 있습니다. 그 외침은 여러 형태로 우리에게 옵니다. 책을 통해서, 대화를 통해서, 성찰을 통해서 때로는 잠깐 스쳐 지나가는 생각이나 풍경을 통해서도 올 수 있습니다. 우리가 보고 듣고 만나고 하는 순간순간이 어쩌면 광야의 외침일 수 있습니다. 그 외침을 놓치지 맙시다. 알아둡시다 - 메시아와 그리스도“백성들은 기대에 차 있었으므로, 모두 마음속으로 요한이 메시아가 아닐까 하고 생각하였다.”(3,15) 루카복음에서는 ‘메시아’라는 표현이 여기에서 처음 나옵니다. 하지만 이는 우리말 「성경」의 루카복음에서 그렇다는 것이고, 그리스말 성경 루카복음에서는 이미 2장 11절에 같은 표현이 나옵니다. “오늘 너희를 위하여 다윗 고을에서 구원자가 태어나셨으니 주 그리스도이시다”에 나오는 ‘그리스도(χριστοs)’가 그 단어입니다. 그리스말 성경에서는 같은 ‘그리스도’인데, 우리말 성경에서는 ‘그리스도’(2,11)와 ‘메시아’(3,15)로 구별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요? 메시아는 ‘기름부음받은이’를 뜻하는 히브리말 ‘마쉬아’의 아람어식 표기입니다. 이를 그리스말로는 ‘그리스도’라고 하지요. 구약 시대에 하느님께서 선택하신 왕이나 예언자 혹은 사제를 하느님께서 뽑으신 사람으로 성별(?)할 때에 그 사람에게 기름을 부었습니다. 그리고 그 사람을 마쉬아(히브리어, 아람어로는 메시아)라고 불렀습니다. 이를 그리스말로 번역하면서 ‘그리스도’라고 표기했지요. 그런데 기원전 6세기에 이스라엘은 이민족에 의해 예루살렘이 함락되고 많은 이스라엘인이 유배를 당한 비극을 겪었습니다. 이 사건 이후 이스라엘 백성은 야훼 신앙을 반성하면서 하느님께서 자신들을 해방시켜줄 기름부음받은이(메시아)를 보내 주실 것을 기다리는 메시아 대망(待望) 사상으로 발전합니다. 이 메시아 대망이 종말 사상과 합쳐지면서 종교적 신앙 외에 민족의식과 정치적 사상도 결부되기에 이릅니다. 요한 세례자가 활동하던 시기에, 따라서 예수님께서 활동하던 시기에도 이런 메시아 대망 사상이 유다인들 사이에 널리 퍼져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요한의 활동을 보고 혹시 구약에서 예고된 기름부음받은이(메시아)가 아닌가 하고 생각한 것입니다. 그리스도교 신앙은 구약에서 예언된 메시아가 바로 예수 그리스도시라고 고백합니다. 그러나 그분은 당시 유다인들이 생각하던 그런 유형의 메시아가 아니었습니다. 이에 대해서는 앞으로 계속해서 살펴보게 될 것입니다. 그리스말 성경에서는 똑같은 ‘기름부음받은이(그리스도)’로 표기돼 있지만, 유다인들이 생각하는 기름부음받은이와 구별하기 위해서 우리말 번역에서는 그리스도교의 새로운 의미가 담긴 본문에서는 ‘그리스도’로 표기하고 있는 것입니다. 백영민2017.05.10
![[이창훈 기자의 예수님 이야기] (45) 바리사이와 율법 교사(루카 11,37-53)](//cpbc.co.kr/CMS/newspaper/2017/12/rc/706171_1.0_titleImage_1.jpg)
[이창훈 기자의 예수님 이야기] (45) 바리사이와 율법 교사(루카 11,37-53)투명한 잔에 탐욕과 사악함을 채우는 어리석음 루카 복음사가는 예수님께서 바리사이의 집에 초대받으신 이야기를 예수님께서 바리사이들과 율법 교사들의 사악과 어리석음을 질타하시는 계기로 삼는다. 그림은 디르크 보우츠(1415~1475) 작, ‘시몬 집에서의 그리스도’. 출처=가톨릭 굿뉴스 제자들과 군중을 향한 예수님의 가르침이 이번에는 바리사이들과 율법 교사들을 향합니다. 이들에 대한 가르침은 꾸짖음입니다. 어떻게 보면 예수님께서는 이들을 호되게 질타하신다고 해도 과하지 않은 것 같습니다. 왜 그들을 꾸짖으실까요? 어떤 바리사이가 예수님을 자기 집에 초대했고 예수님께서는 초대에 응해 그 집으로 가셔서 자리에 앉으십니다.(11.37) 복음서들에서 바리사이들은 예수님과 적대적인 관계에 있는 이들로 많이 묘사됩니다. 그런데 루카복음서에서는 꼭 그렇지만은 않은 것 같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식사에 초대하는데(7,36; 14,1 참조) 식사 초대가 일반적으로 친교를 나누기 위한 것이라고 한다면, 바리사이 가운데는 예수님께 호의적인 이들이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문제가 생깁니다. 예수님께서 식사 전에 손을 씻지 않으신 것이 발단이 됐습니다. 예수님을 초대한 바리사이가 이를 보고 놀란 것입니다.(11,38) 식사 전에 손을 씻는 것은 유다인들에게는 일종의 정결례 예식으로서 대단히 중요한 행위였습니다. 예수님께서 이를 무시하시자, 초대한 바리사이는 놀랄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 바리사이에게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단순히 말씀하시는 것이 아니라 호되게 꾸짖으십니다. 꾸짖음의 대상도 그 바리사이 혼자가 아니라 다른 바리사이에게로 확대됩니다. “너희 바리사이들은 잔과 접시의 겉은 깨끗이 하지만 너희의 속은 탐욕과 사악으로 가득하다. 어리석은 자들아, 겉을 만드신 분께서 속도 만들지 않으셨느냐? 속에 담긴 것으로 자선을 베풀어라. 그러면 모든 것이 깨끗해질 것이다.”(11,39-41)예수님께서는 말하자면 바리사이들의 외적이고 형식적인 믿음을 꾸짖고 계신 것입니다. 겉을 만드신 분께서 속도 만드셨다면 겉만 깨끗이 할 것이 아니라 탐욕과 사악으로 가득한 속도 깨끗이 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속에 담긴 것으로 자선을 베풀어라. 그러면 모든 것이 깨끗해질 것이다’라는 마지막 말씀은 우리 속에 있는 탐욕과 사악함을 깨끗이 치우고 깨끗이 할 때에 사랑의 실천인 자선을 베풀 수 있고 이를 통해서 다른 모든 것 곧 겉까지도 깨끗이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 말씀이 끝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바리사이들을 질타하시는 말씀을 연이어서 하십니다. 그 말씀은 모두 “불행하여라”로 시작합니다. ‘불행 선언’이라고도 할 수 있는 이 질타의 말씀은 세 가지입니다. 첫째, 십일조를 바치는 외적 규정은 곧잘 지키면서도 “의로움과 하느님 사랑”은 아랑곳하지 않는다는 꾸짖음입니다. ‘십일조를 소홀히 해서는 안 되지만 바로 이러한 것들 곧 의로움과 하느님 사랑을 실천해야 한다’는 것입니다.(11,42) 여기서 의로움은 정의를, 하느님 사랑은 자비를 나타낸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이는 십일조를 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이 아니라 정의와 자비를 실천하는 일이 더욱 본질적이라는 말씀이라고 하겠습니다. 정의와 자비의 실천은 아랑곳하지 않고 십일조 지키는 일에만 신경을 쓴다면 우리 역시 ‘불행하여라’ 하는 선언을 당할 것입니다. 둘째, 인정받기를 좋아하는 태도에 대한 꾸짖음입니다. 회당에서는 윗자리에 앉기를 좋아하고 장터에서는 인사받기를 좋아한다는 것입니다.(11,43) 바리사이들의 가식적이고 위선적인 행태를 나무라시는 말씀이라고 하겠습니다. 셋째, ‘바리사이들이 드러나지 않은 무덤 같다는 꾸짖음입니다.(11,44) 예수님 시대에 팔레스티나 땅의 일반적인 무덤은 봉분이 아니라 땅속의 자연 동굴을 사용한 무덤이 많았습니다. 그래서 무덤에 아무 표시도 해놓지 않으면 그 위를 다니면서도 그곳이 무덤인 줄 알지 못했습니다. 유다인들의 율법에 따르면 시신을 만지거나 무덤과 접촉하면 일주일 동안 부정(不淨)하게 되는데 그래서 사람들이 자신도 모르게 부정하게 되는 일이 없도록 무덤에 회칠로 표시를 해두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바리사이들에게 회칠하지 않은 무덤 같아서 사람들로 하여금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부정하게 되도록 만든다고, 곧 죄를 짓게 한다고 꾸짖고 계시는 것입니다.바리사이들에 대한 예수님의 꾸짖음이 계속되자 율법 교사 한 사람이 항의합니다. “그렇게 말씀하시면 저희까지 모욕하시는 것입니다.”(11,45)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너희 율법 교사들도 불행하여라” 하고 선언하시면서 율법 교사들을 호되게 꾸짖으십니다. 이들에 대한 예수님의 불행 선언 역시 세 번에 걸쳐 이뤄집니다. 첫째, 사람들에게 힘겨운 짐을 지워놓고 손가락 하나 대려고 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11,46) 당시 이스라엘에는 백성이 지켜야 할 규정이 무려 613가지나 있었다고 합니다. 안식일법, 정결례법, 음식 규정 등이 대표적이지요. 율법 교사들은 율법의 전문가들로서 이 법 규정의 수호자들이었습니다. 따라서 예수님의 말씀은 백성들에게는 지키기 힘든 규정을 강요하면서 자기들은 지키지 않는 율법 교사들을 향한 꾸짖음입니다. 둘째, 조상들이 죽인 예언자들의 무덤을 만들고 있다는 것입니다. 무덤을 만든다는 것은 어떻게 보면 예언자들을 높이 기리는 일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지적은 정반대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율법학자들이 조상들이 죽인 예언자들의 무덤을 만들면서 오히려 ‘조상들이 저지른 소행을 동조하고 있다’고 비판하고 계시는 것입니다.(11,48) 예언자들을 죽인 조상들의 소행에 동조한 대가는 절대 적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세상 창조 이래 쏟아진 모든 예언자의 피에 대한 책임을 이 세대가 져야 할 것”이라시며 “아벨의 피부터 제단과 성소 사이에서 죽어간 즈카르야의 피에 이르기까지” 그에 대한 책임을 져야 한다고 구체적으로 적시하십니다. 아벨은 인류의 첫 조상 아담과 하와의 둘째 아들로서 형 카인에게 죽임을 당했습니다. 성경이 밝히는 인류의 첫 살인의 희생자입니다.(창세 4,8-10) 즈카르야는 유다 임금 요아스(재위 기원전 835~796)의 명령으로 돌에 맞아 죽은 사제입니다.(2역대 24,20-22) 유다교 구약성경 경전에는 역대기가 제일 마지막에 나온다는 점에서 즈카르야는 구약에서 마지막으로 희생된 예언자를 나타냅니다. 셋째, 율법 교사들은 “지식의 열쇠”를 치워버리고서는 자신들도 들어가지 않을 뿐 아니라 들어가려는 이들까지 막아버렸다는 것입니다.(11,52) 여기서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참된 지식을 의미한다지요. 말하자면 예수님 말씀은 율법 교사들이 지식을 가지고 있다고 뽐내지만 실은 참된 지식이 아닐뿐더러 사람들도 참된 지식을 얻어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려는 것까지 막아 버리고 있다고 비판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어쩌면 우리 역시 바리사이들처럼 내면을 깨끗하게 하기보다는 외적이고 형식적인 규정에 집착하는 신앙생활을 하는 것은 아닌지요? 외적인 규정을 지키는 것이 무익한 것만은 아닙니다. 하지만 내면을 깨끗이 하지 않고 겉모습에 집착할 때 “너희 바리사이들은 잔과 접시의 겉은 깨끗이 하지만, 너희의 속은 탐욕과 사악으로 가득하다”는 질타 말씀을 듣게 될 것입니다.[생각해 봅시다]“속에 담긴 것으로 자선을 베풀어라. 그러면 모든 것이 깨끗해질 것이다”라는 예수님 말씀을 되새겨보면, “사랑하라. 그리고 하고 싶은 것을 하라”고 한 아우구스티노 성인의 말이 떠오릅니다. 내면이 사랑으로 차 있는 사람이 참으로 자유로운 사람입니다.루카 복음사가는 “예수님께서 그 집을 나오시자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이 독한 앙심을 품고 많은 질문으로 그분을 몰아대기 시작했다”면서 “예수님의 입에서 나오는 말씀으로 예수님을 옭아매려고 노렸다”고 전합니다.(11,53) 예수님께 대한 바리사이와 율법 학자들의 반감의 골이 더욱 깊어지고 있음을 보여주지요. 백영민2017.12.26
![[허규 신부와 떠나는 신약 여행] (85) “우리에게는 하늘 위로 올라가신 위대한 대사제가 계십니다”(히브 4,14)](//cpbc.co.kr/CMS/newspaper/2018/01/rc/709857_1.0_titleImage_1.jpg)
[허규 신부와 떠나는 신약 여행] (85) “우리에게는 하늘 위로 올라가신 위대한 대사제가 계십니다”(히브 4,14)그리스도의 희생 제사, 우리 죄를 용서받게 하다 대사제의 가장 큰 역할은 백성 전체를 위한 속죄의 제사를 바치는 것이었다. 그림은 루랑드 라 이르 작, ‘이사악을 희생 제물로 바치는 아브라함’ 부분, 캔버스 유화, 1650년, 프랑스 파리. 오르세미술관. 출처=가톨릭굿뉴스 ‘말씀하시는 하느님’에 대한 강조와 함께 중요하게 드러나는 것은 ‘아들이신 예수님’입니다. 이 특별한 관계를 통해 우리에게 구원이 왔다는 것은 신약성경의 공통된 내용으로 다른 서간들에서도 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히브리인들에게 보낸 서간(이하 히브리서)에는 이 사실을 말하면서도 독창적인 내용을 전개해 나갑니다. 그것은 바로 ‘대사제이신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먼저 히브리서는 예수님을 ‘구원의 영도자’로 표현합니다. “만물은 하느님을 위하여 또 그분을 통하여 존재합니다. 이러한 하느님께서 많은 자녀들을 영광으로 이끌어들이시면서, 그들을 위한 구원의 영도자를 고난으로 완전하게 만드신 것은 당연한 일이었습니다.”(히브 2,10) 하느님 말씀에 대한 순명과 불신, 갈림길 여기서 표현되는 영도자, 지도자의 모습은 편지 안에서 모세와 비교됩니다. 모세의 가장 큰 업적은 이집트에서의 탈출입니다. 모세는 하느님의 말씀을 충실하게 따르는 종으로서 이스라엘 백성을 이집트의 종살이에서 이끌어냈지만, 이스라엘의 조상들은 그와 다르게 하느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않았습니다. 광야에서 보여준 하느님께 대한 불순종은 탈출기와 민수기에 잘 담겨 있습니다. 이렇듯 하느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않는 이들은 하느님의 안식처에 들지 못합니다.(시편 95,7-11) 하느님 말씀에 대한 순명과 불신은 안식처를 향한 갈림길로 표현됩니다. 히브리서는 모세와 이스라엘 백성의 광야에서의 역사를 말하면서 ‘대사제’에 대한 언급으로 넘어갑니다. 모세와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에서 하느님과 계약을 맺으면서 시작된 새로운 정체성은 ‘사제적인 백성’이 되는 것이었습니다. 그들은 이제 하느님과의 관계 안에서 경신 공동체로서 스스로를 이해하게 됩니다. 사제적인 백성으로 살아가면서 중요한 역할을 수행하는 것은 (대)사제입니다. 대사제의 가장 큰 역할은 백성 전체를 위한 속죄의 제사를 바치는 것이었습니다. ‘속죄의 날’로 표현되는 이 날에는 대사제가 모든 백성을 대신하여 하느님께 속죄 제물을 봉헌합니다. 이런 대사제의 역할은 하느님과 백성을 화해시키는 중요한 것이었습니다. 예전처럼 제사를 봉헌하지는 않지만, 지금도 여전히 유다인들은 이 속죄의 날을 지키고 있습니다. 대사제는 이처럼 백성을 위한 제물을 바치던 사람입니다. 히브리서는 이 관점에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예수님 역시 대사제이십니다. “지금 하는 말의 요점은 우리에게 이와 같은 대사제가 계시다는 것입니다. 곧 하늘에 계신 존엄하신 분의 어좌 오른쪽에 앉으시어, 사람이 아니라 주님께서 세우신 성소와 참성막에서 직무를 수행하시는 분이십니다.”(히브 8,1-2) 예수님 역시 대사제처럼 백성을 위해 제물을 바치는 분이시지만 그분이 바친 제물은 다른 대사제들과는 다릅니다. 대사제이신 예수님은 히브리서에서 중복된 의미로 표현됩니다. 제물을 바치는 대사제이자, 대사제에 의해 바쳐진 제물이기도 합니다. “그리스도께서는 많은 사람의 죄를 짊어지시려고 단 한 번 당신 자신을 바치셨습니다.”(히브 9,28) 대사제 중의 대사제, 예수님 대사제는 매해, 반복해서 속죄 제물을 바쳐야 했지만, 그리스도의 제사는 유일한, 반복되지 않는, 결정적인 희생 제사입니다. 예수님은 대사제처럼 우리를 위해 제사를 바친 분이십니다. 또 그분은 희생 제사의 다른 동물, 곧 황소나 염소의 피가 아닌, 당신의 피로 우리를 구원하신 분이십니다. 이렇게 우리는 죄를 씻고 용서받았습니다. 예전과는 완전히 다른 방식으로 우리는 대사제를 모시고 있습니다. 그렇기에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하느님과 맺어진 계약은 새로운 계약입니다. 그리고 이 새 계약은 옛 계약을 낡은 것으로 만듭니다. 구약에서 가장 중요한 사건인 탈출과 가나안 정착까지의 여정, 또 그 안에서 보여주었던 선조들의 불순종. 이 모든 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새롭게 되고 완전한 의미를 갖게 됩니다. 히브리서는 지난 것을 통해 새로운 것을 이끌어 냅니다. 낡은 것과의 대조를 통해 새것의 의미를 강조합니다. 예수님을 통해 우리는 새 계약을 맺은 사람들입니다. <가톨릭대 신학대학 성서학 교수> 평화신문2018.01.30

신자 눈높이 맞춰 풀어쓴 ‘교부들의 삶과 말씀’황인수 신부, 정통 신앙 토대 확립한 교부 10명 문헌 엮어 출간황인수 신부는 "우리 모두 교부가 될 수 있다"며 "지금도 살아 숨쉬는 교부들의 말씀에 심취해 보길 권한다"고 말했다. 이정훈 기자끝없는 길 언제나 새로운 길 황인수 신부 지음 / 1만 3000원 / 성바오로출판사 교부들의 문헌을 읽은 적이 있는지. ‘교회의 아버지’라 불리는 교부(敎父)는 그리스도교 진리를 널리 전파한 존경받는 위대한 사상가를 일컫는 칭호다. 그리스도교 초기부터 중세기까지 그리스도교 정통 신앙의 토대를 확립한 많은 교부들의 문헌은 여전히 ‘신자들이 접하기 어렵다’는 인식이 자리 잡고 있는 게 사실. 그러나 이 책을 보면 ‘교부들과의 친밀도’가 한껏 높아진다. 황인수(성바오로수도회 준관구장) 신부가 펴낸 「끝없는 길 언제나 새로운 길」(성바오로출판사/1만 3000원)은 사도 시대부터 수 세기에 걸쳐 정통 신앙을 수호한 교부 10명의 빛나는 문헌과 감동적인 삶을 독자 눈높이에 맞춰 엮었다. ‘기도’, ‘이웃 사랑’, ‘깨어 있음’, ‘말씀’ 등 가장 필요한 주제들을 다뤘다. 황 신부는 “교부들은 성경 말씀을 자기 삶으로 주석해낸 성인들”이라며 “교부들의 말은 당대 현실 문제와 직면해 있을 뿐만 아니라, 그 메시지는 오늘날에도 생명력을 지닌다”고 강조했다. 책 주인공은 대바실리오(329~379)부터 클레르보의 베르나르도(1090~1153)에 이른다. 교부들은 평생을 하나같이 그리스도의 진리를 깊이 깨닫는 데 매진했고, 말씀의 의미를 주해해 설교했다. 또 부패한 황실, 부유해진 권력과 잘못된 세태에 맞서 싸우기도 했다. 황 신부는 “오늘날 프란치스코 교황님께서 신앙적으로 현실을 짚고, 이웃사랑과 실천을 강조하시듯 교부들 또한 개인 영성에 국한하지 않고, 사회 정의와 평화를 위해 사회적 발언도 서슴지 않으며 목숨까지 내놓았다”고 했다. 실제 부패한 권력층을 향해 “소유물이 소유자의 것이 되어야지 소유자가 소유물에 사로잡혀서는 안 된다”고 외쳤던 암브로시오 성인은 결국 주교직을 박탈당하고 유배지에서 순교했다. ‘황금의 입’(金口)으로 불리는 요한 크리소스토모 성인 또한 폭군을 질타하다 쫓겨나 순교한다. 대바실리오도 추종을 강요한 황제에 당당히 맞섰다. 황 신부는 “교부들은 하느님 사랑을 깊이 체험했기에 이 같은 모범과 실천이 가능했던 것”이라며 “이분들의 모습에서 하느님의 모상인 사람을 제대로 알고, 그들을 사랑해야 한다는 진리를 꿰뚫었음을 알 수 있다”고 했다. 책은 교부들의 성경 주해서와 서간, 그리고 삶에 담긴 아름다운 신앙 메시지를 전하고 있다. “늘 깨어 있는 사람이 되라”고 강조한 대바실리오는 “지상에서 천사들의 합창대를 모방하는 것보다 더 복된 것이 무엇이 있겠느냐”고 시편을 찬양했다. ‘하느님의 종들의 종’이란 표현을 처음 쓴 대그레고리오 교황은 지병으로 목소리를 내기 힘든 상황에서도 교황직을 수행하면서 ‘개인 기도’와 ‘이웃 섬기기’의 균형을 강조했다. 하느님 신비를 깊이 꿰뚫어본 ‘은총의 박사’ 아우구스티노 주교와 예로니모 성인이 갈라티아서의 해석을 놓고 편지를 주고받으며 ‘겸손한 논쟁’을 펼친 일화도 흥미롭다. “모든 이를 돌보는 영혼의 의사이신 그분”(대바실리오), “아주 작은 일에 불의한 사람은… 영적인 재산을 분배하는 데도 불의할 것입니다”(예로니모), “그리스도를 마시십시오. 그분은 생명의 샘입니다”(암브로시오)와 같은 주옥같은 글귀도 읽을거리다. 로마 아우구스티니아눔에서 교부학을 전공한 황 신부는 “수원가톨릭대 신학생 시절, 스승의 날 신학생들이 교수님께 꽃을 달아드렸는데, 그분께서 글쎄 의자를 가져다 갑자기 칠판 위 예수님께 달아드리더라”며 “당시 교부학을 가르치셨던 이성효 주교님의 이 모습에서 ‘아, 이것이 참 신앙이구나!’를 느끼고 교부학에 매진하기로 결심했다”고 말했다. “사실 교부란 꼭 이처럼 대단한 분들만 지칭하는 게 아닙니다. 우리에게 생명의 신앙을 전해준 모든 이는 교부입니다. 제게 세례를 준 신부님, 몸도 제대로 가누지 못하는 병환 중에도 마지막까지 강론대 앞을 떠나지 않았던 요한 바오로 2세 교황님도 우리의 아버지이십니다. 교부는 가까이 있습니다. 신앙을 전수하는 우리도 모두 교부인 셈입니다.” 이정훈 기자 sjunder@cpbc.co.kr김지항2017.08.09

불을 밝혀 하느님께서 함께하시길 바라 [교회상식 교리상식] 왜 촛불을 켜나 성당에서는 미사 때 제대에 촛불을 켭니다. 또 집에서 기도할 때도 촛불을 켜곤 하는데 그 이유는 무엇인가요? 촛불을 밝히면 어둠이 사라지고 환해지지요. 초는 그래서 "나는 세상의 빛이다"(요한 8,12) 하신 그리스도를 상징합니다. 미사 때에 제대에 촛불을 켜는 것은 빛이신 그리스도께서 함께하심을 나타냅니다. 집에서 기도할 때 촛불을 켜는 것도 빛이신 그리스도를 우리 가운데 모신다는 의미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예로부터 성스러운 곳이나 또는 성스러운 예식을 거행하는 데는 빛이나 불이 있었습니다. 구약성경에서는 주님 성소에는 등잔 일곱개를 얹을 수 있는 등잔대를 만들어 불을 밝히라고 규정합니다(탈출 25,31-37). 이스라엘 백성이 이집트를 탈출할 때 하느님께서 밤에는 불기둥으로 그들을 비추셨다는 기록도 있지요(탈출 13,21). 신약성경에서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세상의 빛이라고 칭하셨을 뿐 아니라 제자들에게도 "세상의 빛"(마태 5,14)이 되라고 당부하셨습니다. 그런데 교회에서 전례 때에 등잔불이나 촛불을 처음 사용했을 때는 이런 상징적 의미를 받아들여서가 아니라 저녁에 모여 기도할 때 어둠을 밝힌다는 실용적 이유가 더 컸다고 합니다. 그러다가 영원한 생명과 희망의 상징, 천상 생명으로 새로 태어난 기쁨의 상징으로 장례식 때 또는 순교자들 무덤에서 촛불을 켜기 시작했습니다. 이것은 물론 당시 이교도들 사이에서 널리 행해지던 관습이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교회 지도부에서는 예식 때 촛불을 켜는 것을 오히려 못마땅해 했다고 합니다. 촛불을 밝히는 것이 이교도의 관습일 뿐 아니라 빛을 만드신 분이자 세상에 빛을 주시는 분께 예배를 드리면서 촛불을 켜 드리는 것은 사리에 맞지 않다는 이유에서였습니다. 그러나 4세기 이후부터는 교회에서도 기도 모임이나 예식 때에 촛불을 켜는 관습이 지켜지기 시작합니다. 촛불이 빛이신 그리스도께서 함께하심에 대한 기쁨을 상징한다고 본 것입니다. 그래서 성체성사 때는 물론이고 세례식과 장례식, 서품식에서도 촛불을 켰습니다. 촛불만 아니라 아로마 향 등을 첨가한 등잔불로 성당을 화려하게 수놓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등잔불을 사용하는 관습은 점차 사라지고 12세기 쯤에 와서는 초를 사용하는 것이 일종의 규범이 됐습니다. 촛불이 교회 예식에서 사용되면서 그 의미를 새롭게 이해하려는 시도들도 있었습니다. 예를 들면 촛불이 불꽃과 심지, 밀랍 세 부분으로 이뤄져 있는 것을 삼위일체에 비겼습니다. 또 밀랍을 그리스도의 육신에, 심지는 그리스도의 영혼에, 불꽃은 그리스도의 신성에 비기기도 했습니다. 그렇다면 초가 타는 것은 또한 그리스도의 십자가 희생에 비길 수 있겠지요. ◇정리합시다 촛불을 켜는 것은 첫째, 하느님께서 함께하심, 특별히 세상의 빛이신 그리스도께서 함께하심을 나타냅니다. 둘째, 하느님께서 함께하신다는 것에 대한 우리의 기쁨을 표시하기도 합니다. 셋째, 촛불이 자신을 태워 주위를 밝히듯이 우리도 자신을 하느님께 봉헌하고 이웃을 위해 태운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세례식 때, 첫영성체 때, 수도 서원이나 서품식 때에 후보자들이 촛불을 받아들거나 촛불을 들고 입장하는 것도 이런 이유에서지요. ◇알아둡시다 관찰력이 뛰어난 신자라면 미사 때에 제대 위에 켜는 초 개수가 때마다 조금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미사 때 제대 위에 켜는 초 개수는 그날 전례의 성격을 나타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평일이나 기념일에는 2개의 초를 켭니다. 그러나 주일이나 축일에는 4개의 초를 켜지요. 또 대축일에는 6개의 초를 켭니다. 그런데 제대에 초를 7개 켤 때가 있습니다. 주교가 미사를 드릴 때입니다. 대사제인 주교에 대한 존경의 표시로 하나를 더 켜는 것입니다. 이창훈 기자 changhl@cpbc.co.krcpbc2017.07.27
![[이창훈 기자의 예수님 이야기] (66) 예수님과 자캐오(루카 19,1-10)](//cpbc.co.kr/CMS/newspaper/2018/05/rc/722416_1.5_titleImage_1.jpg)
[이창훈 기자의 예수님 이야기] (66) 예수님과 자캐오(루카 19,1-10)지성이면 감천이라… 간절함으로 구원받은 자캐오 예리코에서 예수님께서 자캐오를 만나시는 이 일화는 루카복음서에 볼 수 있는 대표적인 회심 사건입니다. 그 과정이 어떻게 이뤄지고 있는지 살펴봅니다. 예리코에 있는 돌무화과나무. 자캐오가 올라간 나무라고 전해지지만 실제 나이는 700살 정도로 알려지고 있다. 예수님께서 예리코에 들어가 거리를 지나가고 계셨습니다. 마침 거기에 자캐오라는 돈 많은 세관장이 있었는데 예수님이 어떤 분인지 보려고 했지만, 키가 작은 탓에 군중에 가려 볼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앞질러 달려가서 돌무화과나무 위로 올라갑니다. 거기에서 그 아래를 지나가는 예수님을 보려는 것이었습니다.(19,1-4)우선 자캐오에 대해 알아봅시다. ‘자캐오’라는 이름은 히브리어 ‘자카이’를 그리스말로 발음한 대로 표기한 것이라고 합니다. 이 말은 ‘깨끗한, 결백한’이란 뜻입니다. 그는 국경 도시 예리코의 돈 많은 세관장입니다. 유다인들은 세리들을 싫어했습니다. 그들은 이스라엘을 식민지로 삼은 로마제국을 위해 세금을 거둬들일 뿐 아니라 그 과정에서 착복하고 횡령하는 일이 적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유다인들은 세리를 죄인처럼 여겼습니다. 그런데 자캐오는 유다인이면서도 세관장이었을 뿐 아니라 돈까지 많았습니다. 경건한 유다인들에게는 죄인으로서 배척의 대상이었음이 당연합니다.그런 자캐오가 예수님을 보려고 합니다. 아마 예수님에 관한 소문을 들었을 것입니다. 어쩌면 예수님이 “먹보요 술꾼이며 세리와 죄인들의 친구”(루카 7,34)라는 소리도 들었을지 모릅니다. 그렇지만 키가 작아 사람들에게 가려서 볼 수가 없자 앞질러 달려가서 돌무화과나무 위로 올라갑니다. 세관장이라면 그래도 기관장입니다. 기관장이 달려가서 나무 위로 오른다는 것은 보통 사람이라면 엄두를 내지 못할 일입니다. 그만큼 예수님을 보려는 열망이 컸다는 것을 말해 줍니다.예수님께서 나무 아래에 이르러 자캐오를 쳐다보시면서 “자캐오야, 얼른 내려오너라. 오늘은 내가 네 집에 머물러야 하겠다” 하고 말씀하십니다. 이름을 부른다는 것은 친근함의 표시입니다. 자캐오는 예수님 얼굴이라도 한번 보고 싶은 간절한 마음에서 나무 위로 올라갔습니다. 그런데 뜻밖에도 예수님께서는 자캐오의 이름을 부르면서 친근함을 표시하시고는 그의 집에서 하루를 묵겠다고 하십니다. 그것도 “오늘” 말입니다. 자캐오로서는 놀라움이자 더할 수 없는 영광이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얼른 내려와서 기쁘게 예수님을 집에 모십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이를 보고 “저이가 죄인의 집에 들어가 묵는구나” 하고 투덜거리지요.(19,5-7)여기서 놀라운 일이 벌어집니다. 자캐오가 일어나서 “주님! 제 재산의 반을 가난한 이들에게 주겠습니다. 그리고 제가 다른 사람 것을 횡령하였다면 네 곱절로 갚겠습니다”라고 말한 것입니다.(19,8) 자캐오는 부자였습니다. 하지만 아무리 부자라 하더라도 자기 재산의 절반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준다는 것은 절대 쉽지 않은 일입니다. 그러나 그것으로 그치지 않았습니다. 다른 사람의 것을 횡령했다면 네 곱절로 갚아주겠다고 선언합니다. 이스라엘 사회에서 네 곱절로 갚아주는 경우는 양을 도둑질했을 때입니다.(탈출 21,37) 남을 속여서 또는 착취해서 부당하게 이익을 챙겼을 때는 그 액수에다 그 액수의 5분의 1을 더한 액수로 되갚아 주어야 했습니다.(레위 5,21.24) 그렇다면 자캐오는 아주 파격적인 선언을 한 것입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오늘 이 집에 구원이 내렸다. 이 사람도 아브라함의 자손이기 때문이다.”(19,9) 경건한 유다인들이 볼 때 자캐오는 죄인임이 분명했지만, 예수님께서는 그가 구원받았다고 선포하십니다. “이 집에 구원이 내렸다”는 말씀은 단지 자캐오만이 아니라 자캐오의 가족 모두가 구원받았음을 알게 해줍니다. 말하자면 한 사람의 회심이 그 사람만이 아니라 그 집안 전체에 구원을 가져다준 것입니다. “사람의 아들은 잃은 이들을 찾아 구원하러 왔다”(19,10)는 마지막 말씀은 자캐오 이야기의 결론일 뿐 아니라 소외된 이, 가난한 이, 이방인, 죄인들에 대한 관심을 강조하는 루카복음서 전체를 관통하는 핵심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자캐오 이야기는 15장에 나오는 되찾은 양의 비유(15,3-7), 되찾은 은전의 비유(15,8-10), 되찾은 아들의 비유(15,11-32)를 뒷받침하는 실제 사례로서 역할을 합니다. [생각해봅시다]예수님과 자캐오의 이야기는 만남과 구원에 대해 좀더 생각할 여지를 남겨 줍니다. 구원은 주님이신 하느님과 인간과의 만남에서 시작됩니다. 그런데 만남이 이루어지려면 인간 편에서의 간절함이 있어야 합니다. 사실 하느님께서는 늘 우리를 만나러 오십니다. 그런데 우리가 마음의 귀를 닫고 영혼의 눈을 감고 있다면 우리에게 다가오시는 하느님을 볼 수가 없고 우리에게 말씀을 건네시는 주님의 목소리를 들을 수 없습니다. 자캐오에게는 단순한 호기심이 아니라 예수님을 보고자 하는 간절함이 있었습니다. 그 간절한 열망에서 자캐오는 창피를 무릅쓰고 앞질러 달려가서 나무에 올라갈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주님을 만날 수 있었고 주님의 말씀을 들을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변화되었습니다. 부자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기는 낙타가 바늘귀로 들어가기보다 어렵지만(루카 18,25), 부자인 데다 죄인으로 멸시받던 자캐오는 구원을 얻었습니다. 자캐오는 사람에게는 불가능한 것이 하느님께는 가능함을 보여주었습니다. 따라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눈을 뜨고 내면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것입니다. 단순한 호기심이 아니라 간절함을 담고서 말입니다. 그 간절함의 기도는 이런 기도일 것입니다. ‘주님, 저를 도와주십시오. 아니면 제가 바뀌도록 해주십시오.’ [알아보기]예리코 : ‘종려나무 도시’라는 뜻을 지닌 예리코는 기원전 9000년쯤 형성된 지구 상에서 가장 오래된 도시 가운데 하나입니다. 구약성경에서 70번이나 언급되는 예리코는 예루살렘에서 동쪽으로 36㎞ 떨어진 오아시스 도시이기도 합니다. 예리코는 예수님 시대 이전부터 갈릴래아에서 예루살렘에 이르는 길목이었습니다. 예루살렘은 해발 700m의 고지에 위치하지만 예리코는 해수면에서 250m나 낮아서 두 도시의 고도 차이가 거의 1000m에 이릅니다. ‘착한 사마리아 사람의 비유’에서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에서 예리코로 “내려가다가”(루카 10,30)라고 표현하시는데, 참으로 적절한 표현이라 하겠습니다. 예수님 시대에 예리코는 레위인들과 사제들이 주로 살고 있어서 사제들의 도시라고 불리기도 했습니다. 예수님께서 탄생하실 무렵 이스라엘 땅 전체를 다스린 헤로데 대왕은 이곳에 화려한 궁전을 짓고 겨울이면 예루살렘에서 이곳으로 내려와 지냈습니다. ‘겨울 궁전’이라고불렀는데 지금은 흔적만 남아 있지요. 예리코는 오늘날 이스라엘에 속하지 않고 팔레스타인 관할 지역입니다. 시내에는 자캐오가 올라갔다고 하는 돌무화과나무가 있습니다만, 이 나무의 실제 나이는 700살 정도라고 하지요. 예수님께서 자캐오를 만나시고 또 바르티매오라는 눈먼 이를 고쳐주신 곳이 예리코인 데다 근처에는 예수님께서 유혹을 받으신 유혹 산도 있어서 이스라엘을 찾는 순례객이 빠지지 않고 순례하는 도시이기도 하지요. 구약의 엘리사 예언자가 소금을 뿌려 물의 수질을 좋게 했다는 ‘엘리사의 샘’ 또한 볼 수 있습니다. cpbc2018.05.30
![[성경 속 기도] (2) 아브라함의 기도 (상)](//cpbc.co.kr/CMS/newspaper/2016/02/rc/617399_1.0_titleImage_1.jpg)
[성경 속 기도] (2) 아브라함의 기도 (상)모든 것 버리고 떠나라 “네” 아브라함은 하느님의 뜻에 따라 고향을 버리고 떠난다. 아브라함의 손님 환대 모습을 그린 세밀화. 출처=「성경 역사 지도」 “여러분은 살아오면서 어느 때 기도를 가장 열심히 하셨나요?” 신학교 입학 때 피정 지도 신부님께서 하셨던 질문이다. 그때 무엇이라 대답했는지 기억이 가물가물하다. 난 언제 열심히 기도했을까? 아무리 생각해도 가장 열심히 기도했던 때는 항상 시험 전날이었다. 창피한 일이지만 항상 같은 기도를 반복했다. “주님! 이번 시험만 꼭 잘 치르도록 해주세요. 그러면 다음에는 미리미리 준비하도록 하겠습니다.” 그러나 뻔뻔스럽게(?) 마지막 시험까지도 같은 기도를 바쳤다. 기도는 하느님과 인간의 인격적인 대화이다. 대개 일방적이거나 자기중심적인 이야기를 강요하는 것을 대화라고 하지는 않는다. 그런데도 그저 내 이기적인 내용만 주절주절 털어놓고 부탁을 드렸던 것 같다. 대화에서 중요한 것은 오히려 상대방의 이야기를 귀 기울여 듣는 것이다. 그러나 난 주님의 이야기를 들으려 하지 않고 나만 떠들고 만 셈이다. 안타깝게도 친구들 모임에서 다른 이의 이야기는 듣지 않고 저 잘났다고 혼자서 떠들어대는 사람은 기피대상이 되기 쉽다.아브라함은 신앙인의 전형이다. 아브라함의 기도는 신앙인에게 모델이 된다. 하느님께서 먼저 부르시고 우리 인간이 응답하는 것, 이것이 바로 신앙의 보통 공식이라 할 수 있다. 아브라함은 일생 철저히 시험에 들며 엎치락뒤치락하며 고된 삶을 살았다. 어느 날 아브라함은 주님의 부르심을 받는다. “주님께서 아브람에게 말씀하셨다. ‘네 고향과 친족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내가 너에게 보여 줄 땅으로 가거라. 나는 너를 큰 민족이 되게 하고, 너에게 복을 내리며, 너의 이름을 떨치게 하겠다. 그리하여 너는 복이 될 것이다’”(창세 12,1-2). 교회는 하느님을 향한 응답으로 항상 첫걸음을 내디뎌야 한다. 그 모범은 창세기 12장에 나오는 하느님 말씀에 대한 아브라함의 순명이다. “네 고향과 친족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내가 너에게 보여 줄 땅으로 가거라”(창세 12,1). 이 말씀에 대한 응답으로 우리는 하느님의 뜻을 찾아 식별하고 순종해 그분께서 가리키시는 곳을 향해 출발해야 한다. 당시 사람들에게 자신이 살던 고향을 떠나 이별한다는 것은 마치 죽음과도 같은 위험한 행위였다. 자신이 이룬 모든 것을 버리고 떠난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인간에게 죽음이 그토록 고통스러운 것은 영원한 이별을 하기 때문이 아닐까? 아브라함의 고향, 칼데아 우르는 당시에 문화가 발달해 마치 오늘날 파리나 뉴욕에 견줄 수 있는 곳이었다. 그런데 어느 날 갑자기 하느님은 아브라함에게 모든 것에서 이별하라고 하신다. 부르심을 받은 아브라함의 마음은 어땠을까? 그는 솔직히 두렵고 떠나고 싶은 마음이 없었을지도 모른다. 어쩌면 아브라함은 다른 사람처럼 평범하게 살고 싶었을 것이다. 아브라함은 수없이 “왜 하필 저입니까?”라고 말하고 싶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결국 하느님의 말씀 하나만을 굳게 믿고 하느님 명령대로 고향을 떠나 낯선 곳으로 향했다. 그의 기도는 철저히 순명의 기도이다. “그는 그곳에 주님을 위하여 제단을 쌓고, 주님의 이름을 받들어 불렀다”(창세 12,8). 순명은 하느님에 대한 사랑으로 자신을 희생하며, 자유 의지를 가지고 기쁨으로 명령에 따르는 덕을 뜻한다. 그래서 “우리의 이성으로는 이해가 다 되지 않지만, 당신을 믿으니 당신의 말씀대로 하겠습니다”라는 의미를 지닌다. 신앙이란 보이는 것에서 보이지 않는 것을 믿는 여정이라 했던가. 그런데 아브라함은 그 후 인생의 최고 시련을 맞이하게 된다. 허영엽 신부(서울대교구 홍보국장) 평화신문2016.02.02

“새 신부님, 양 냄새 나는 목자 되시길 기도할게요”대구대교구, 전주교구, 제주교구, 안동교구 사제서품식 강우일(앞줄 가운데) 주교와 송승진(강 주교 왼편) 새 신부를 비롯한 제주교구 사제단이 기념 촬영을 하고 있다. 제주교구 가톨릭사진가회 제공 전국 각 교구에서 사제서품식이 잇달아 열리고 있다. 교구민들과 선배 사제들은 새 사제 탄생을 한마음으로 축하하며 새 사제들이 ‘양 냄새 나는 목자’가 되기를 기도했다. 대구ㆍ전주ㆍ안동ㆍ제주교구에서 거행된 사제서품식 소식을 모았다.대구대교구 사제서품식이 16일 주교좌 범어대성당에서 교구장 조환길 대주교 주례로 거행됐다. 이날 사제서품식에서 전형천ㆍ한지환ㆍ이수환ㆍ유상완ㆍ박준환 부제가 사제품을 받았다. 서품식에는 사제단과 새 사제 가족, 출신 본당 신자 등 3500여 명이 참석해 새 사제 탄생을 축하했다. 조환길 대주교는 강론을 통해 새 사제들에게 “말과 모범으로 하느님의 교회를 건설해 달라”고 당부했다. 또 신자들에게 “예수님을 닮은 사제, 신자들로부터 존경받는 사제가 될 수 있도록 많이 기도해 달라”고 요청했다.이날 사제 서품식에는 300여 명의 선배 신부들이 ‘내 발을 씻기신 예수’를 축하 노래로 합창하며 새 사제의 출발을 격려했다. 전주교구는 18일 전주 중앙주교좌성당에서 교구장 김선태 주교 주례로 사제 서품 미사를 봉헌했다. 홍석진ㆍ채주원ㆍ이성용 부제가 사제품을 받아 교구 사제는 222명이 됐다. 서품식에는 교구 사제단과 수도자, 신자들과 수품자 가족, 친지 등 1200여 명이 참석해 ‘영광의 주인공’들에게 아낌없는 박수와 응원을 보냈다.김선태 주교는 훈시에서 ‘너희가 나를 뽑은 게 아니라 내가 너희를 뽑아 세웠다’(요한 15,16)는 성경 말씀을 인용하며 “성소는 하느님의 부르심에 응답하는 것으로 여러분의 능력이 아니라 주님의 능력으로 일해야 한다. 따라서 여러분은 하느님의 주도권을 소홀히 하거나 빼앗지 말고 인정해야 하며 언제나 하느님께 감사하고 온전히 순명하며 모든 것을 맡겨야 한다”고 강조했다. 새 사제들은 ‘사랑은 참고 기다립니다’(1코린 13,4)를 공통성구로 정하고 거룩한 교회의 직무를 수행할 것을 다짐했다. 이날 축하식에서 여혁구(교구 사제단 친목회장) 신부는 “‘관심은 친구를 만들고 무관심은 적을 만든다’는 말처럼 목자는 맡겨진 양들에게 관심과 애정을 가져야 한다”고 당부했다. 새 사제 홍석진 신부는 “부족한 저희를 뽑아 주시고 사제로 세워주신 하느님께 감사와 찬양을 드린다”며 “겸손하게 기도하고 사랑하며 살겠다”고 말했다.제주교구는 20일 제주 이시돌 삼위일체대성당에서 사제 서품식을 거행했다.서품식에 참석한 교구 사제단과 수도자, 신자 등 2000여 명은 교구 50번째 사제인 송승진 새 신부의 수품을 축하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참된 종이 되기를 기원했다. 교구장 강우일 주교는 강론을 통해 “출세하고 성공하기 위해 매진하는 이 시대에 자기 자신을 버리는 사제가 된다는 것은 미친 짓이나 다름없다”면서 “사제가 된다는 것은 자신의 욕구와 권리를 포기하고 이 세상이 아닌 예수 그리스도의 시각으로 살아가는 것”이라고 사제직의 의미를 일깨웠다. 강 주교는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한다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행동과 생각을 따르고 실천하는 것”이라며 파견받은 자로서 복음을 선포하기 위해 살아가는 목자가 될 것을 권고했다. 안동교구는 21일 주교좌 목성동성당에서 교구장 권혁주 주교 주례로 1200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사제 서품식을 거행했다.문경 모전동본당은 백동수ㆍ송정현 신부를 동시에 배출하는 영광을 누렸고, 영주 휴천동본당과 하망동본당은 각각 박철현ㆍ우석민 신부를 배출했다. 이로써 교구 사제 수는 주교 2명과 파리외방전교회 선교사제를 포함해 92명이 됐다.권혁주 주교는 훈시에서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당신과 함께 복음을 선포할 첫 제자들을 뽑으시는데 그 숫자가 넷”이라며 “특히 네 명의 제자가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님의 제자가 돼가는 모습에선 오늘 사제품을 받고 새 사제의 삶을 살아가게 될 네 명의 부제들을 위해 기도했다”고 말했다. 이어 “진정한 예수님의 참 제자가 되는 데 필요한 것은 회개의 삶이며, 회개란 예수님이 아닌 것을 돌아서서 다시 예수님께로 가는 것”이라며 “새 사제들이 끊임없는 회개로 진정하고 참다운 예수님 제자의 길을 멈추지 않기를 희망한다”고 당부했다.송정현 새 신부는 “부족한 제가 사제품을 받도록 허락해주신 하느님께 감사드린다”며 “앞으로 하느님의 포도밭 안에서 일하는 기쁨을 늘 기억하며 살아가겠다”고 다짐했다. 리길재 기자 teotokos@cpbc.co.kr신현숙·김승호·정장훈 명예기자 평화신문2018.01.23

‘성경과 교회의 가르침에 나타난 친교’(코이노니아)명동본당 사순특강 <3> 박준양 신부(가톨릭대 신학대 교수) 회심(메타노이아)을 통해 우리는 하느님과 화해하고 전적으로 새로운 관계를 맺으며 하느님의 자녀로 다시 태어난다. 하느님과의 화해로 새로운 사람이 된 우리는 이제 이 세상 안에서 화해의 도구로서 그 직분을 실천하게 됐다.회심은 새로운 관계 맺음, 즉 새로운 친교(코이노니아)를 가능케 한다. 친교에는 수직적 친교와 수평적 친교가 있다. 수직적 친교란 하느님의 영과 나의 영이 통교하는 상태를 말한다. ‘생명을 주시는 성령’의 인도로 나의 영이 하느님의 뜻을 향해 성장하고 발전해 나가는 상태이다. 성령론적 관점에서 본다면, 인간은 ‘휴먼 빙’(human being)이 아니라 ‘휴먼 비커밍’(human becoming)이라 할 수 있다. 인간은 고정된 존재가 아니라, 성령의 인도를 따라 성장해 나가는 ‘되어가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성령께서는 참으로 우리의 가능성과 잠재력을 발굴해 주시고 이를 현실적인 힘으로 바꿔 주신다. 그러므로 하느님과의 친교는 정체된 상태가 아니라, 성령 안에서의 역동적인 쇄신과 성장을 의미한다. 이처럼 성령께서는 삼위일체 하느님의 위대한 사랑과 구원 은총을 우리에게 전달해 주시는 친교와 일치의 원리이다. 내가 인간적인 힘으로 하느님께 도달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먼저 나에게 다가와 주시는 은총이 성령을 통해 이루어진다. 바로 이것이 미사경문 시작 부분에 채택된 성경 말씀의 의미이기도 하다. “사랑을 베푸시는 하느님 아버지와 은총을 내리시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와 일치를 이루시는 성령께서 여러분과 함께”(「미사 통상문」의 시작 예식 중에서).이러한 하느님과의 수직적 친교는 성령을 통해 수평적 친교로 전환된다. 하느님과의 새로운 관계 즉, 수직적 친교를 이룬 사람들의 수평적인 공동체가 교회이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를 통해, 그 이전의 교계제도 중심적 교회관을 새로이 보완하고 넘어서는 친교의 교회론이 강조되기 시작했다. 그리하여 「교회 헌장」을 통해, 내적으로는 영적 친교를 이루며 이 친교가 외적으로는 가시적 조직과 제도로 표출되는 성사적 교회관이 등장하게 됐다. 성령께서는 육화 사건을 통해 그리스도의 신성과 인성을 결합하는 원리로 작용하신 것처럼, 이제 교회의 내적인 차원과 외적인 차원, 비가시적인 영적 측면과 가시적인 인간적 측면을 결합하는 친교의 원리로 작용하신다.성령론적이고 또한 교회론적 관점에서, 영적인 측면과 인간적ㆍ제도적 측면의 결합을 바로 보여 주는 것은 바로 은사와 직무의 관계라 할 수 있다. 성령께서 주시는 은사(카리스마)는 개인을 위한 것이 아니라 교회의 공동선을 위해 봉사하기 위한 것이다. 성령께 받은 은사를 통해 우리는 교회에 봉사하는 구체적 직분을 얻게 된다. “은사는 여러 가지지만 성령은 같은 성령이십니다. 직분은 여러 가지지만 주님은 같은 주님이십니다. 활동은 여러 가지지만 모든 사람 안에서 모든 활동을 일으키시는 분은 같은 하느님이십니다. 하느님께서 각 사람에게 공동선을 위하여 성령을 드러내 보여주십니다”(1코린 12,4-7). 그래서 은사를 받는 이들은 참으로 겸손해야만 한다. 은사는 본질적으로 교회론적 친교를 지향하기 때문이다. 프란치스코 교황님은 「복음의 기쁨」에서 “은사는 바로 친교 안에서 참되고 신비로운 열매를 맺는다”(130항)고 말씀하신다.교회 안에서 직무를 받은 이가 스스로 능력이 부족하다고 느끼고 아직 은사를 받지 못했다 하더라도 너무 걱정할 필요는 없다. 성령께 간절히 기도하면 된다. 교회의 친교와 봉사를 위해서라면, 하느님께서는 반드시 필요한 은사와 능력을 우리에게 부어 주실 것이다. 그것이 친교와 일치의 원리이신 성령께서 이루시고 섭리하시는 신비로운 역사이다.정리=이힘 기자 lensman@pbc.co.kr 백영민2016.03.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