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창훈 기자의 예수님 이야기] (28) 여자들이 예수님의 활동을 돕다 (루카 8,1-3)](//cpbc.co.kr/CMS/newspaper/2017/08/rc/692853_1.0_titleImage_1.jpg)
[이창훈 기자의 예수님 이야기] (28) 여자들이 예수님의 활동을 돕다 (루카 8,1-3)끝까지 예수님 곁을 지킨 갈릴래아 여인들 예수님께서 하느님 나라를 전하고 복음을 선포하실 때 열두 제자와 함께 여인들도 함께 따라다녔다. 특히 여인들 중 마리아 막달레나는 부활하신 예수님을 목격한다. 그림은 엠마누엘 람파르도스 작 ‘마리아 막달레나에게 나타난 그리스도’, 1610년, 그리스 크레타 이콘, 예루살렘, 이스라엘. 출처=굿뉴스 가톨릭갤러리 루카는 예수님께서 고을과 마을을 두루 다니시며 하느님 나라를 전하고 복음을 선포하실 때에 열두 제자가 예수님을 따라다녔을 뿐 아니라 여인들도 제자들과 함께 예수님을 따랐다고 전합니다. 그 여인들은 자신들의 재산으로 예수님 일행에게 시중을 들었다면서 그중 몇몇 여인의 이름을 밝히기도 합니다.(8,1-3) 이번 호에서는 예수님을 도운 여인들이 누구인지 살펴봅니다. 세 여인들, 마리아 요안나 수산나 루카는 우선 세 여인의 이름을 구체적으로 듭니다. 막달레나라는 마리아와 헤로데의 집사 쿠자스의 아내 요안나, 수산나입니다. 이들에게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악령과 병에 시달리다 낫게 된”(8,2) 전력입니다. 다시 말해 이들은 악령과 병에 시달리다가 예수님께 치유를 받은 여인들이었습니다. 그중 가장 대표적인 여인이 “일곱 마귀가 떨어져 나간 막달레나라고 하는 마리아”(8,3)였습니다. 일곱 마귀가 떨어져 나갔다는 것은 여인이 이전에 일곱 마귀가 들렸다는 것을 말합니다. 성경의 숫자에서 일곱은 완전함, 충만함을 뜻한다고 할 때 마귀의 세력에 철저하게 지배당했던 여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 여인이 예수님께 고침을 받았다는 것은 예수님의 권능이 훨씬 압도적이라는 것을 말해 줍니다. 마리아에게 ‘막달레나’라는 이름이 붙습니다. 막달레나는 마리아의 출신지를 나타냅니다. 우리나라에서 결혼한 여자들에게 출신지를 붙여서 ‘금촌댁’ ‘안성댁’ ‘목포댁’ 하고 불렀던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막달레나는 ‘막달라’ 여자를 가리키는데, 막달라는 갈릴래아 호수 서쪽의 ‘미그달’이라는 동네를 일컫습니다. 갈릴래아 호수 서안의 대표적 도시 티베리아스에서 호수를 끼고 북쪽으로 4㎞ 정도 떨어진 곳에 있습니다. 예수님 활동 당시에는 꽤 부유한 어촌이었지만 폐허가 됐습니다. 그러나 최근 발굴이 본격화됐고, 기념 성당이 들어서 순례객들을 맞고 있습니다. 일부 학자들은 마리아 막달레나가 지난 호에 살펴본 ‘용서받은 죄 많은 여인’(7,36-50)과 동일인이라고 주장하기도 합니다만 확실하지 않습니다. 요한복음을 따르면, 예수님 발을 닦아드리고 향유를 발라드린 여인은 예수님께서 살리신 라자로의 여동생 마리아와 동일인입니다.(요한 11,2) 루카는 헤로데의 집사 쿠자스의 아내 요안나와 수산나라는 두 여인의 이름도 밝힙니다.(8,3) 요안나는 ‘주님께서는 너그러우시다’ ‘주님께서 은혜를 베푸신다’는 뜻을 지닌 요한의 여성형입니다. 헤로데는 갈릴래아와 페래아 지방을 다스리던 헤로데 안티파스를 말합니다. 영주의 집사라면 상당한 권세와 재력이 있었을 것입니다. 수산나는 ‘백합’이라는 뜻인데, 이름 이외에는 알려진 것이 없습니다. 루카의 기록대로라면, 막달레나라는 마리아 혹은 마리아 막달레나를 비롯해 요안나와 수산나 모두 악령 또는 질병에 걸렸다가 치유된 여인들인데, 요안나와 수산나가 어떤 질병 혹은 악령에 사로잡혔다가 나았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루카는 이들 세 여인 외에 “다른 여자들도 많이 있었다”면서 “그들은 자기들의 재산으로 예수님의 일행에게 시중을 들고 있었다”(8,3)고 전합니다. “자기들의 재산으로 예수님과 일행에게 시중을 들” 정도로 예수님을 따른 “다른 여자들”은 누구일까요? 네 복음서를 통해 좀 더 살펴보겠습니다. “다른 여자들” 루카는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에 관한 기사에서 예수님이 무덤에 묻히실 때에 “갈릴래아에서부터 예수님과 함께 온 여자들”(23,55)을 언급하면서 그 여인들이 안식일 다음 날 새벽 일찍 무덤을 찾아갔다고 이야기합니다.(24,1) 그리고 그 이름을 “마리아 막달레나, 요안나, 그리고 야고보의 어머니 마리아”라고 밝힙니다. 또 그들과 함께 다른 여인들도 있었다고 전하지요.(24,10)마태오는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돌아가실 때 갈릴래아에서부터 예수님을 따르며 시중들던 여인들이 지켜보고 있었고 그 가운데에 “마리아 막달레나, 야고보와 요셉의 어머니 마리아, 제베대오의 아들들의 어머니”도 있었다고 전합니다.(마태 27, 55-56) 그리고 마리아 막달레나와 ‘다른 마리아’가 예수님께서 묻히시는 것을 지켜보았다고 기록합니다.(마태 27,61) 두 여인은 예수님의 부활을 알리는 천사의 발현을 보았다(마태 28,1-7)는 맥락으로 볼 때 ‘야고보와 요셉의 어머니 마리아’와 ‘다른 마리아’는 동일인이 분명해 보입니다. 마르코는 예수님의 죽음을 지켜본 갈릴래아의 여인들로 “마리아 막달레나, 작은 야고보와 요세의 어머니 마리아, 그리고 살로메”를 거명합니다.(마르 15,40-41) 그리고 “마리아 막달레나와 야고보의 어머니 마리아와 살로메”가 안식일 다음날 예수님의 무덤을 찾았다고 기록합니다.(마르 16,1-2) 요한은 예수님의 십자가 곁에 “그분의 어머니와 이모, 클로파스 아내 마리아와 마리아 막달레나가 서 있었다”(요한 19,25)고 전하면서 예수님의 부활 때에 빈 무덤을 본 여인으로 마리아 막달레나만 언급합니다.(요한 20,1)언급되는 인물 중 루카복음의 “야고보의 어머니 마리아”와 마태오복음의 “야고보와 요셉의 어머니 마리아” 그리고 마르코복음의 “작은 야고보와 요세의 어머니 마리아”는 동일 인물이 분명합니다. 여기의 야고보 혹은 작은 야고보는 예수님의 형제인 야고보(마르 6,6; 갈라 1,19)를 가리킵니다. ‘작은 야고보’라고 표현한 것은 제베대오의 아들 중 하나이자 열두 제자 가운데 한 사람인 야고보(‘큰 야고보’)와 구별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렇다면 마리아 막달레나는 네 복음서에 모두 나오고, 야고보와 요셉의 어머니 마리아는 요한복음을 제외한 세 복음(공관 복음)에서 모두 나옵니다. 야고보와 요셉이 예수님의 사촌으로 예수님과 항렬이 같다면, 야고보와 요셉(혹은 요세)의 어머니 마리아는 요한복음에만 등장하는 예수님의 이모와 같은 항렬입니다. 사촌, 육촌에 관계없이 같은 항렬을 형제자매라고 표현하는 당시의 언어(아람어) 관습대로라면 이모, 고모, 숙모 또한 별 차이 없이 혼용하고 있다고 여겨도 좋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세 공관복음에서 나란히 나오는 야고보와 요셉의 어머니 마리아와 요한복음의 예수님 이모가 같은 인물이라고 추정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마태오복음에 나오는 ‘제베대오의 아들들의 어머니’가 마르코복음에는 없고, 살로메가 나옵니다. 그렇다면 제베대오의 아들들의 어머니가 살로메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실제로 교회는 전통적으로 제베대오의 아들들의 어머니를 성녀 살로메로 공경해 왔습니다. 살로메 성녀의 축일은 10월 22일입니다. 그러나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이 시성되면서 교회 공식 전례력에서는 10월 22일을 살로메 대신 요한 바오로 2세 교황 축일로 지내고 있습니다. 루카복음에는 살로메도, 제베대오의 아들들의 어머니도 언급되지 않고 요안나가 언급됩니다만, 요안나는 헤로데의 집사의 아내로 신원이 확실하기에 살로메나 제베대오의 아들들의 어머니와 혼동할 필요가 없을 것입니다. 요한복음에만 나오는 클로파스의 아내 마리아는 누구를 가리킬까요? 클로파스가 예수님의 양부인 요셉의 동기라는 설이 있습니다. 그렇다면 클로파스의 아내 마리아는 예수님께 숙모가 되는 셈이지요. 요한복음에는 마리아 막달레나를 비롯해 예수님의 어머니와 이모와 숙모까지 나오는 셈입니다. 아람어의 언어 습관 때문에 이모나 숙모가 같은 사람을 가리키는 것이라면, 클로파스의 아내 마리아는 또한 예수님의 형제들인 야고보와 요셉의 어머니 마리아와 동일인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이는 모두 가설일 따름입니다. 여인들 중 ‘확실한’ 네 사람 결론적으로 갈릴래아에서부터 예수님을 따르며 시중을 들고 예수님의 죽음까지 지켜본 여인들 가운데 확실하거나 신빙성이 높은 이름을 들자면 ①일곱 마귀가 들렸던 마리아 막달레나 ②예수님의 형제들인 야고보와 요셉의 어머니 마리아(예수님의 이모 또는 클로파스의 아내 마리아와 동일인일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음) ③제베대오의 아들들의 어머니 살로메 ④헤로데의 집사 쿠자스의 아내 요안나를 들 수 있습니다. 생각해 봅시다 -예수님 시대에 여자는 인격적 대우를 받지 못했습니다. 남자의 부속물, 재물로 여겨졌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자기들의 재산을 털어가며 예수님의 활동을 돕는 여인들이 있었다는 것은 이례적이고 충격적이었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예수님과의 만남 때문이 아니었을까요? 그렇다면 우리는 예수님을 어떻게 만나고 있는지요? -게다가 이 여인들은 잠시 돕다가 그만 두지 않았습니다. 예수님께서 처형당해 무덤에 묻힐 때까지 자기들의 일을 멈추지 않았습니다. 열두 사도마저 예수님을 버리고 도망쳤지만 이 여인들은 충실하게 자리를 지켰고 마침내 예수님 부활의 목격 증인이 될 수 있었습니다. 우리는 예수님께 얼마나 충실하려고 노력하는지요? 평화신문2017.08.23
“피곤한 일요일, 성당에 가면 밥 먹여주나요?”‘가톨릭 청년 보고서’ 살펴보기 사교뭉치는 청년들에게 ‘교회 내 활동에 관한 질문’, ‘청년 개인의 삶에 관한 질문’, ‘청년이 교회에 전하는 질문’, ‘청년에게 전하는 사제, 수도자의 질문’ 등 30여 가지의 질문을 던졌다. 질문과 답변을 일부 발췌, 정리했다.▶당신의 일상은 어떤가. - 대학원을 다니면서 주말까지 아르바이트를 4개 하고 있다. 나에게 일상은 일과 일 사이의 이동시간만 존재한다. - 솔직히 말해 일상에서는 하느님이 없고 주일에만 만난다. 평일에는 일하고 잠자는 일이 반복되는 일상이라 피곤하다.▶지금 당신의 감정과 가장 가까운 단어는. 그 이유는 무엇인가.- 걱정과 분노. 일이 불안정하니까 늘 화가 나고 죄짓는 거 같아 고해성사도 못 한다. 성체 못 모신 지도 벌써 석 달째다.- 갑갑함. 진로를 생각하면 자신이 뭘 바라는지 모르겠다. - 조울증. 스펙도 없고 이력서에 쓸 내용도 없다. - 싱숭생숭, 무기력- 간절함. 너무나 하고 싶지만, 현실적으로 당장 할 수 없어 시기를 놓친 게 많다. - 죄책감. 정의를 실현하고 올바른 길만 갈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유혹에 쉽게 넘어간다.▶신앙과 현실 생활 간에 괴리감을 느끼나.- 평일에는 신자가 아닌 거 같다. 동료에 대해 뒷말하고 욕하고…. 베풀고 살아야겠다 생각하는데 어렵다.- 성당에서는 ‘용서하라, 사랑하라’ 좋은 얘기만 하는데 실천하지 못하니까 ‘내가 나쁜 사람인가’ 하는 심적 부담을 느낀다. - 몸도 마음도 힘든데, 성전에는 착한 사람만 있어야 할 것 같고 십자기 앞에서 죄송하단 것밖에 할 말이 없고 내가 위선자가 된 것 같다.- 사회구조 자체가 미래가 없는 것 같다. ‘정의롭게 사는 게 과연 옳은가’ 의문이 들면 힘들다.▶ 사회생활과 성당 활동을 함께 이어가는 것에 어떤 어려움이 있나.- 신부님은 성당 일을 최우선적으로 하라고 한다. 성당 일에 온힘을 쏟아도 밥 먹여주는 거 아닌데 말이다.- (본당 활동) 예산안, 회의록, 계획안 만드느라 퇴근 후 시간을 내야 하다 보니 올 한 해는 성당에 모든 시간을 갖다 바치는 느낌이다.- 상황을 고려해주지 않고 행사에 무조건 참석하라는 분위기가 힘들다.- 청년 미사 해설, 독서할 사람이 부족하다 보니 미사가 축제가 아니라 업무의 연장 같은 느낌이 든다.- 일을 구할 때 일요일에 하는 일은 꺼리게 된다.▶청년회 활동을 그만둔 사람들은 어떤 이유 때문인가.- 제일 큰 건 신자들 간의 관계 문제와 신부님, 수녀님과의 의견 마찰 때문이다.- 생계를 위해 타지로 떠난다든지, 도저히 시간적 여유가 없다든지, 주말에도 일을 나갈 수밖에 없는 상황에 놓여서다.- 신앙심 부족.▶왜 교회에 청년들이 줄어든다고 생각하나.- 세상에 더 재밌는 게 많은데 청년들이 성당에 올 땐 뭔가 다른 걸 찾고 싶어 한다. 그러나 성당에는 그걸 충족할 프로그램은 없고 청년회 단체만 덩그러니 있다.- 신앙심만으로 성당에 오기엔 다른 활동과 비교해 얻을 게 없다는 생각이 든다.- 종교가 사회적으로 문제가 되는 일들에 연루된 경우도 있어 종교 자체에 회의감도 팽배하다.▶신앙이 나의 현실과 삶에 희망을 주고 있나.- 구원될 거란 믿음이 있으니까 어려운 상황에서도 힘이 난다.- 신앙은 좋게 말하면 안식처인데 나쁘게 말하면 현실 도피처이기도 하다.▶교회가 청년들에게 무엇을 해주길 바라나.- 교리를 배울 기회가 있었으면 좋겠다.- 청년회 운영의 기본 교육과정이 명확하게 있었으면 좋겠다.- 주임신부와 본당 차원의 꾸준한 지원이 있었으면 좋겠다.- 피정, 선택 주말, 성경연수 등 청년 프로그램을 상세히 알려줬으면 좋겠다.- 종교철학이나 인문학 특강 등을 통해 뭔가 얻어갈 수 있으면 좋겠다. - 청년회 활동 나이 35세를 넘긴 사람들은 갈 곳을 마련해 줬으면 좋겠다. 유은재 기자 you@cpbc.co.kr김지항2017.03.08
![[가톨릭, 리더를 만나다] (21) 오창익(루카) 인권연대 사무국장](//cpbc.co.kr/CMS/newspaper/2017/09/rc/694514_1.0_titleImage_1.jpg)
[가톨릭, 리더를 만나다] (21) 오창익(루카) 인권연대 사무국장 “왜 인권운동 하느냐고요? 주일학교 다녀서 그렇습니다” 서울 동작경찰서 인권교육 강사로 나선 오창익 사무국장. 모두가 행복해지는 세상을 위해 작은 돌멩이 하나라도 치우고 조그만 겨자 씨앗을 묵묵히 뿌리는 사람이 있다. 인권유린 현장을 세상에 알리고 인권보호에 앞장서온 대표적인 가톨릭 인권운동가를 만났다. 인권연대 오창익(루카) 사무국장이다. 18년 전 자신이 설립한 ‘인권연대’이지만 대표도 회칙도 없고 정부와 기업의 돈은 일절 받지 않는다. 모두가 원하는 희망과 긍정의 기쁨을 위해 아픔과 슬픔, 부정과 일탈을 뚫어지게 감시하며 기꺼이 ‘고통’과 연대한다. 신앙은 인권운동의 처음이자 원천적인 힘이라고 말한다. 억울하고 하소연하는 사람을 만나라는 예수님의 재촉에 응답하며 끊임없이 예수님께 길을 묻는다. 보장된 권리 위에 잠자지 말고 마음과 뜻을 모아 지금 당장, 자신의 권리를 보호하자고 역설한다. 우리 모두의 ‘행복’을 어떻게 실천하고 연대해야 할까? 서종빈 기자 binseo@cpbc.co.kr▶ ‘인권연대’는 무슨 일을 하는 곳인가요.18년 전에 인권연대를 만들었습니다. 국가 공공기관(경찰ㆍ검찰ㆍ국가정보원ㆍ교도소ㆍ군대)에서의 인권을 감시하고 피해자들을 돕고 있고요. 정책 대안도 내놓고 있습니다. 아울러 인권교육도 열심히 하고 있습니다. 국가보훈처장이 되신 피우진 예비역 중령을 도와드린 사례가 있는데요. 30년 경력의 직업군인이 유방암 절제 수술 후 강제로 전역을 당했는데, 군 인사법 시행규칙에 신체 일부가 훼손되면 강제로 전역시키는 면역 조항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결국, 이 조항은 개정됐죠.▶ 국가의 법과 제도가 인간의 기본권과 맞지 않는 부분이 많죠.새 정부에 기대를 좀 하고 있습니다. 제가 인권운동을 하면서 가장 가슴 아프게 만났던 사람들은 소년원 친구들입니다. 소년 범죄는 미성년자이기 때문에 처벌이 아니라 보호 처분으로 소년원에 보내지는데요. 소년원과 집을 가르는 기준은 죄질이 아니라 집안 형편인 경우가 많습니다. 가난 때문에 감옥이나 소년원에 간다면 정말 우리 사회가 부끄럽게 생각해야 할 일이 아닌가 싶습니다. ▶ 요즘 가장 뜨거운 ‘인권 문제’는 무엇인가요.국민들의 90% 이상이 검찰개혁을 원합니다. 검찰이 제 역할을 했다면 대통령 탄핵이라는 비극적인 사건을 막을 수 있었다고 봅니다. 수사권, 공소권, 형 집행 등 형사 사법과 관련한 모든 권한이 검찰에 집중돼 있기 때문에 무소불위의 권한을 휘둘렀고 그 때문에 생기는 문제들이 많았습니다. 권력이 집중되면 부패하기 마련입니다. 검찰권을 좀 나눠서 검찰이 제대로 된 법 집행기관으로 거듭나는 것이 중요한 과제입니다. ▶ 수사 과정에서 발생하는 ‘인권 유린’에 대해선 어떻게 보세요.‘공판중심주의’라고는 하지만 인권 침해 요소가 많습니다. 검찰에서 작성한 피의자 신문조서가 증거능력이 있으니까, 윽박지르든 잠을 안 재우든 진술서만 받아내면 유죄의 증거로 쓰이거든요. 이는 검찰의 힘과 무관하지 않습니다. 시민이 주권자라는 인권 의식이 매우 중요합니다. 독일의 법 철학자 ‘루돌푸 폰 예링’의 유명한 말이 있잖아요. ‘보장된 권리 위에서 잠자는 자의 권리는 누구도 보호하지 않는다’고요.▶ 가톨릭 교회의 관심 사항 중 하나가 ‘사형제도 폐지’인데요.우리나라는 1997년 이후 지금까지 20년 동안 사형 집행을 하지 않는 사실상 사형 폐지국가인데, 이는 가톨릭 교회 덕분입니다. 1997년 12월 30일, 마지막 사형 집행하던 날, 폭력적인 국가에 화가 나서 저도 명동대성당 앞에서 시위했는데요. 장기 기증도 규정에 없다고 받아주지 않았어요. 선종하신 김수환 추기경께서도 사형하지 말아 달라고 호소하셨거든요. 문재인 대통령의 공약대로 구시대의 잔재인 사형제도가 이번에는 완전히 폐지되기를 기대합니다.▶ 신학교 출신이시죠. 졸업은 안 했고 짧게 다니다가 말았습니다. 그 판단이 너무 짧아서 경솔했는지는 모르겠으나 사제나 수도 성소처럼 인권운동 성소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신학교에 간 것은 너무도 자연스러웠죠. 태어날 때부터 신자였고요. 부모님과 조부모님 모두 만주에서부터 신자 집안이었습니다. 어렸을 때 복사 하고 중학교 때부터 ‘레지오 마리애’ 활동을 하고 성당에서 살았죠. ‘왜 인권운동을 하느냐’고 물으면 주일학교를 다녀서 인권운동을 한다고 대답합니다. 주일학교에서 인간적인 가치 교육을 받았습니다. 잘 산다는 것, 인간답게 산다는 것, 공동체에 대한 고민 등을 주일학교에서 배웠죠. 신앙은 인권운동을 시작하게 한 동기이고 지속할 수 있는 원천적인 힘입니다. ▶ 공권력과 개인의 인권이 충돌하는 경우가 많습니다.공권력은 시민을 위해 봉사하는 권력이니까 시민 위주로 생각해야죠. ‘열 명의 도둑을 놓치더라도 한 명의 억울한 사람을 만들면 안 된다’는 게 기본적 원칙이거든요. 공권력 자체가 국민의 인권 보장을 위한 하나의 수단이고 도구잖아요. 일자리도 인권입니다. 헌법 32조를 보면 모든 국민은 근로의 권리를 가진다고 돼 있습니다. 일할 권리와 적정 임금 보장은 헌법 규정입니다. 일자리를 만드는 것은 당연히 국가가 해야 할 기본적인 책무이고 의무죠.▶ 인권연대의 아름다운 활동 가운데 하나가 ‘장발장 은행’인데요.형벌 중의 하나인 벌금을 내지 못해 교도소에 가는 사람이 1년에 5만 명이 넘습니다. 교도소에 가는 게 빈부에 따라 결정됩니다. 비참하죠. 벌금도 한 달 안에 현찰로 내야 하고 카드도 안 받아줍니다. 집행 유예도 없고 분할 납부, 납부 연기도 안 됩니다. ‘국가의 횡포’ 아닌가요? 그냥 넘길 수가 없어서 재작년에 장발장 은행을 만들었는데 다행히 많은 분이 참여해 주셔서 지금껏 운영하고 있습니다. 현재 대출 신청자가 3000명이 넘었는데요. 무담보, 무이자 은행이에요. 상환능력을 보는 게 아니라 얼마나 돈이 필요한지를 봅니다. 한 부모 가정의 엄마ㆍ아빠, 어르신을 모시는 분들, 스무 살 남짓 젊은이들, 이런 분들은 돈이 없어서 감옥에 가면 안 됩니다. 염수정 추기경님과 여러 신부님도 많이 도와주셨습니다. ▶ 장발장 은행으로 벌금형에 대한 법적 개선이 이루어졌죠.법을 고치려고 추기경님 모시고 국회에 가서 행사했는데요. 그 결과 올 12월부터는 벌금도 카드로 낼 수 있고 집행유예가 생겼고 분납도 법적으로 가능해졌습니다. 이제 남은 숙제는 소득과 재산에 따라 벌금을 다르게 부과하는 것입니다. 국민연금이나 건강보험은 그렇게 하고 있잖아요. 똑같은 벌금을 매기니까 가난한 사람들은 차별을 받는 것이거든요. 인권 운동은 ‘고통과의 연대’라고 생각합니다. 벌금 100만 원을 내지 못해 감옥에 간 스무 살 청년은 고개를 못 듭니다. 창피하고 비참해서요. 100만 원이라는 돈이 지금은 없지만, 나중엔 있을 수도 있잖아요. 장발장 은행에 돈을 갚는 것보다 아기 분윳값이 더 중요하죠. 장발장 은행의 유일한 목표는 ‘폐업’입니다. ▶ 인권 교육을 많이 하고 계시는데요. ‘인권 교육’은 왜 필요한지요.청소년과 청년, 교사 인권학교 등 정규 과정을 운영하고 있는데요, 저는 청소년 시기에 받은 사회 교리나 주일학교 교육을 통해 성장할 수 있었습니다. 왜 공부하는가를 알고 공부하는 게 중요하잖아요. 사회교리와 비슷한 인권 교육도 어린이나 청소년들에게 큰 효과가 있다고 봅니다. 인권교육을 받지 못하도록 하거나 내버려두는 것은 인권 침해입니다. 자신의 권리에 대해 알고 있을 때 자신의 인권도 지킬 수 있습니다.▶ ‘5월 걸상’ 사업도 하고 계시는데요. 어떤 활동인가요.대한민국의 민주주의와 인권은 광주의 5월에 많은 신세를 졌습니다. 가톨릭 교회도 1980년 5월 이전과 이후가 다를 정도로 많이 변모했어요. 조그만 걸상에 걸터앉아 5ㆍ18을 잊지 말고 기억하고 나누자는 것입니다. 광주대교구 김희중 대주교님을 모시고 ‘5월 걸상’ 사업을 진행하고 있는데요, 한국의 인권운동은 80% 정도가 가톨릭 교회에서 온 것입니다. 많은 운동가를 배출했고요. 든든한 지원군으로 함께 했습니다. ▶ 인권운동 하시면서 마음에 품고 있는 성경 말씀은 무엇인가요?산상설교 말씀인데요. “남이 너희에게 해 주기를 바라는 그대로 너희도 남에게 해 주어라. 이것이 율법과 예언서의 정신이다.”(마태 7, 12)예수님의 이 말씀은 가장 확실한 인권선언입니다. 1948년 유엔의 세계인권선언도 가톨릭 교회의 영향을 받았습니다. 인간이 왜 존엄한 존재인지, 가톨릭 신앙인에겐 지극히 자연스럽죠.▶ 이 시대 ‘리더’의 덕목은 무엇이라고 보세요.거울을 자주 보면 됩니다. 자신이 남들에게 어떤 모습으로 비칠지, 또 예수님께서 어떻게 보실지, 하루에 두세 번씩이라도 거울을 보면 좋겠습니다. 리더의 가장 중요한 덕목은 ‘자기 성찰’이라고 봅니다. 피해자들 만나는 게 정신적으로 좋은 일은 아닌데요. 억울하고 하소연하는 사람을 만나라고 예수님께서 재촉하십니다. ‘리더’ 역할을 맡은 분들은 끊임없이 구성원들에게 또는 예수님께 자꾸 물어야 합니다.▶ 인권운동 하면서 ‘어떤 희망’을 보십니까.얼마 전에 광역버스 운전기사가 졸음운전을 하다가 사고를 내서 2명이 숨지는 사고가 있었죠. 그런데 예전과 다른 목소리가 나오기 시작했습니다. 버스 회사에서 운전기사들을 너무 무리하게 장시간 노동에 시달리게 했다는 것이었습니다. 누구나 잠이 부족하면 졸기 마련이죠. 이건 우리 사회가 무척 상식적인 방향으로 가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좋은 증거입니다. 저는 이런 인식의 변화에서 희망을 느낍니다. 희망은 언덕 너머 저편에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직접 만드는 것입니다. 함께 마음을 모으고 뜻을 모으면 됩니다. 백영민2017.09.06
[사설] 청소년 사목, 이미 답 알고 있는데 가정이나 청소년 문제처럼, ‘머리 따로, 가슴 따로’ 노는 문제가 또 있을까 싶다. 가슴으로는 늘 행복한 가정이 되기를, 따뜻한 아이로 자라나길 기대하면서도, 머리로는 공부 잘하는 아이가 되고 돈 많이 벌고 성공하기를 바라는 게 부모들 바람이다. 신앙이, 참삶이, 행복이 공부에서 비롯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으면서도 입에 늘 공부하라는 말을 달고 산다. 아이들은 또 얼마나 힘겨울까. 대부분 시간을 학교나 학원에서 ‘공부 기계’처럼 살아가야 한다. 쉴 틈도 없고, 여유로운 삶은 꿈도 꿀 수 없다. 무한경쟁에 내몰려 허덕이고 ‘끌려갈’ 뿐이다. 최근 살레시오회 돈보스코 청소년영성사목연구소가 분석 발표한 ‘가정과 청소년 사목을 위한 설문조사’ 결과는 우리가 이미 ‘가슴으로 알고 있던’ 사실을 되새김질하게 한다. 부모의 신앙생활 정도가 자녀에게 영향을 미치고, 일반 미사보다 청소년 미사에 대한 호응도가 높고, 아이들 또한 신앙이나 신념, 봉사보다는 돈이나 성공에 더 가치를 두고 있다는 내용 등이다. 우리가 이미 다들 알고 있던 내용이다. 가정이나 청소년 사목의 돌파구는 이미 나와 있다. 부모가 먼저 의식을 바꾸고 가족 구성원 모두가 행복한 세상을 어떻게 만들어 가야 할지 고민해야 한다. 이를 통해 자녀들과 사랑의 관계를 형성하고 삶의 방향을 하느님 안에서 끌어나가면 된다. 교회는 가정이 제대로 서고, 청소년들이 신앙 여정을 잘 이어나가도록 도와주면 된다. 이번 설문조사가 모든 가정과 청소년이 희망이신 그리스도를 가슴에 안고 기도와 성경 읽기, 가난한 이웃을 사랑하는 삶을 살아가도록 돕기 위한 사목적 방안을 찾고 다 함께 실천하는 계기가 되기를 바라마지 않는다. 평화신문2016.10.12
마산교구 50돌, 기쁨 나누고 복음화 다지고 30일 감사미사 비롯해 11월까지 칸타타 공연·특강 등 다채로운 행사 마련 마산교구합창단이 교구 설정 50주년을 기념해 순교자 현양 칸타타를 공연하고 있다. 마산교구합창단 제공 마산교구는 30일 오전 10시 30분 진주 실내체육관에서 교구장 배기현 주교 주례로 교구 설정 50주년 기념 감사 미사를 봉헌한다. 마산교구 50주년 준비위원회(위원장 임상엽 신부)는 이날 전 교구민이 모여 봉헌하는 미사가 희년의 기쁨을 나누고 교구 복음화의 새 도약을 다짐하는 자리가 될 것으로 기대했다. 교구는 2014년부터 교구장 사목교서 ‘교구 설정 50주년 - 기쁨과 은총의 해를 맞이하며’를 통해 교구민의 영적 쇄신과 기념사업을 펼쳐왔다. 지난 3년간 영적 쇄신을 위해 성경 필사, 읽기, 공부하기, 가정기도 바치기, 공동체 정신 회복, 사랑의 사회적 질서 확산을 위한 사회교리 공부하기를 추진해 왔다. 또 50주년 기념사업으로 생명 운동과 사랑 나눔 운동, 순교자 묘지 정비 및 순례, 교구 규정집 재정비 사업 등을 펼쳤다. 이와 함께 10월 한 달간 교구 설정 50년을 축하하는 다양한 행사를 마련하고 있다. 8일 창원 성산아트홀 대극장에서는 ‘한국 천주교 순교자 현양 칸타타’가 무대에 올랐다. 마산교구합창단(단장 김홍규)이 주관한 칸타타에는 마산, 거제, 진주 지구 150여 명의 합창단원이 출연, 순교자들의 순교 정신을 현양했다. 마산교구 평신도사도직협의회(총회장 안상덕)는 10월 22일부터 11월 12일까지 매주 진주ㆍ거제ㆍ창원ㆍ마산 지구를 순회하며 ‘순교자의 딸 유섬이’을 주제로 강희근(경상대) 교수의 특강을 실시했다. 아울러 교구 전례꽃꽃이회는 14일부터 3일간 창원 경남장애인종합복지관에서 작품전을, 가톨릭미술인회는 11월 9일부터 창원 성산아트홀에서 교구 설정 50주년 기념 작품전을 연다. 리길재 기자 teotokos@pbc.co.kr 평화신문2016.10.12
![[시사진단] 경제 불황과 우리의 기도](//cpbc.co.kr/CMS/newspaper/2016/05/rc/634857_1.0_titleImage_1.jpg)
[시사진단] 경제 불황과 우리의 기도이태하 토마스(세종대 교양학부 교수) 한참 말 많던 선거가 끝이 나자 정치권은 그동안 끊임없이 제기되던 부실기업과 산업체에 대한 구조조정을 논의하기 시작했다. 특히 작년부터 불기 시작한 조선업계의 불황으로 올해 조선업 종사자 수만 명이 실직할 위기에 처해 있다. 그뿐 아니라 경제 불황의 골이 깊어지자 대기업들이 앞다투어 정기 공채 인원을 줄이고 나섰다. 청년 실업률이 사상 최대인 12.5%를 기록하고 있으며 금년도 경제성장률 전망치도 IMF, 한국금융연구원, 한국은행이 잇따라 하향 조정하고 있다. 경제 전문가들에 따르면 우리나라 경제가 고실업 저성장이란 일본식 장기불황에 들어서고 있다고 한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가뜩이나 취업이 어려워 3포, 5포를 넘어 이제는 꿈과 희망까지 접은 7포 세대의 우리 청년들을 곁에서 지켜보기가 안쓰러울 뿐이다. 경제가 이처럼 어렵고 삶이 팍팍할 때 서민들이 바라는 소망은 무엇일까? 두말할 것도 없이 기성세대에게는 자신의 직장을 지키는 것이고, 사회 초년생들에게는 안정된 일자리를 얻는 것이다. 그런데 이게 좀처럼 쉽지가 않다. 그래서 서민들의 시름은 깊어만 가고 있다. 우리는 일찍이 IMF 시절을 겪으며 경제 불황이 어떻게 가족을 해체하고 개개인을 파멸로 몰아가는지 혹독하게 경험한 바 있다. 그런데 사람들은 우스개로 IMF 시절에 기업이나 자영업자들은 불황이었지만 종교계는 활황이었다고 말한다. “청하여라, 너희에게 주실 것이다. 찾아라, 너희가 얻을 것이다. 문을 두드려라, 너희에게 열릴 것이다”(마태 7,7)라는 성경 말씀처럼 세상에서 버림받은 것처럼 느낀 사람들이 마지막으로 찾은 것은 하느님이었다. 그러나 성경의 이 말씀은 하느님께서 아라비안나이트에 나오는 램프의 요정처럼 램프를 문지르며 주문을 하는 사람에게는 무엇이든 구하는 것을 다 들어주시겠다는 그런 말씀이 아니었다. 이는 동일한 내용의 루카 복음(11,13)을 보면 알 수 있다. 여기서 하느님께서 약속하신 것은 무엇이나 우리가 구하는 것을 주시겠다는 것이 아니었다. 하느님께서는 그보다 더 좋은 것 즉 성령을 약속하신 것이다. 이야기가 성령에 이르면 당장 삼시 세끼를 걱정해야 하고, 아이들 등록금을 걱정해야 하고, 공과금과 생활비를 걱정해야 하는 사람들은 고개를 돌릴 것이다. 성령이 사람들을 배부르게 할 수도 없고, 성령이 돈이 될 수도 없을 것이다. 그런데 어떻게 해서 그 성령이 우리에게 더 좋은 것이란 말일까? 성경을 보면 오병이어의 기적이 나온다. 수천 명의 무리를 예수님께서 5개의 빵 덩어리와 작은 물고기 2마리로 모두 먹이셨다는 것이다. 많은 사람은 이 기적을 성경에 기록된 대로 액면 그대로 믿어 하느님이 많은 사람을 먹이기 위해 흡사 돌덩이를 빵 덩어리로 만드는 것과 같은 기적을 행하셨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하느님께서 매번 끼니때마다 우리를 이처럼 먹이신다면 과연 우리가 더할 나위 없이 행복할까? 왜 매일 이렇게 맛없는 보리 떡만 주느냐고 투정을 부리지는 않았을까? 분명 우리는 왜 떡만 주고 고기는 안 주느냐고 불평을 했을 것이고, 왜 먹을 것만 주고 옷은 안 주느냐고 보챘을 것이다. 인간의 욕망은 이처럼 끝이 없기에 하느님께서 인간의 필요를 채워주신다고 해서 그로 인해 인간이 구원을 얻지는 못했을 것이다. 그러기에 성경에 기록된 바에 따르면 빵을 주신 것은 단지 두 번뿐이었고 대신에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빵이 아닌 성령을 주시고자 했던 것이다. 사람들의 마음에 성령이 들어오자 놀라운 기적이 일어났다. 사람들은 서로 가진 것들을 나누기 시작한 것이다. 그러자 모두가 배불리 먹고 남은 것이 무려 일곱 광주리나 되었다. 내가 기억하는 한 늘 경제는 어려웠고, 세상은 늘 살기 힘든 곳이었다. 앞으로도 변함없이 힘든 세상일 것이다. 5월은 가정의 달이다. 우리가 소중히 여기는 가정을 지키기 위해서는 하느님께 우리가 구하는 것보다 더 좋은 것 즉 성령을 달라고 기도해야 할 것 같다. “구하라 그러면 얻을 것이다.” 평화신문2016.05.11
![[허규 신부와 떠나는 신약 여행] (10) 행복하여라, 가난한 사람들!(루카 6,20)](//cpbc.co.kr/CMS/newspaper/2016/08/rc/647255_1.0_titleImage_1.jpg)
[허규 신부와 떠나는 신약 여행] (10) 행복하여라, 가난한 사람들!(루카 6,20)예수의 활동에서 실현되고 있는 ‘참행복’ 예수께서 산상설교를 하신 곳은 오늘날 이스라엘 사람들이 ‘쉐이크 알리’라 부르는 갈릴래아 호숫가 구릉이다. 이곳에 지어진 ‘참행복 선언 기념 성당’은 여덞 가지 참행복을 상징해 팔각 모양으로 아담하게 지어져 있다. 평화신문 자료 사진 갈릴래아 호수가 내려다 보이는 언덕에 참행복 선언 기념 성당이 있습니다. 마태오 복음서의 참행복에 관한 가르침을 기념하는 곳입니다. 예전에는 마태오 복음 5장 3-10절에 기록된 예수님의 가르침을 ‘진복팔단’이라고 부르기도 했습니다. 새로운 가르침 전하는 예수“행복하여라!” 는 선언으로 시작되는 이 내용은 마태오 복음 5─7장에서 전해지는 ‘새로운 가르침’의 첫 부분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군중을 보시고 산으로 오르셨다”(마태 5,1). 이 구절은 구약의 탈출기에 나오는 모세의 이야기, 곧 모세가 하느님으로부터 계명을 받는 장면을 생각나게 합니다. 또한, 산에서 이루어진 가르침이라는 점에서 이 부분을 ‘산상 설교’라고 부릅니다. 모세가 시나이 산에서 하느님의 계명을 백성들에게 선포하고 가르치는 모습과 예수님께서 산에 오르시어 군중들에게 새로운 가르침을 전하는 모습은 상당히 비슷합니다. 마태오 복음은 예수님을 새로운 가르침을 전하는, 구약의 율법을 완성하는 ‘권위를 가진 율법 학자로 소개합니다’(마태 7,29 참조). 이런 마태오 복음의 특징이 가장 잘 드러나는 부분이 바로 산상 설교입니다. “행복하여라”로 시작하는 마태오 복음의 참행복 선언은 모두 여덟 개입니다. 그리고 처음과 마지막, 마음이 가난한 이들과 박해를 받는 사람들에게 약속되는 것은 ‘하늘 나라’로 대구를 이루고 있습니다. 참행복 선언의 내용은 구약 성경에서 찾을 수 있는 요소들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여기서도 역시 예수님은 이전에는 없던 새로운 것을 사람들에게 선언하는 것이 아니라 구약의 가르침을 정리하고 새롭게 해석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참행복에 관한 가르침에서 강조되는 것은 박해에 관한 내용입니다. “의로움 때문에 박해를 받는 이들”에 대해서는 “나 때문에 너희를 모욕하고 박해하며, 너희를 거슬러 온갖 사악한 말을 하면, 너희는 행복하다!”고 반복해서 표현합니다. 이것은 당시의 마태오 공동체가 처한 상황을 암시해 주는 대목이기도 합니다. 초기 교회의 가장 큰 문제이기도 했지만, 마태오 공동체에도 마찬가지로 박해는 당시의 가장 큰 어려움이었던 것처럼 보입니다. 행복과 불행이 정확히 대구 이뤄 마태오 복음의 내용과 비교할 만한 것은 루카가 전하는 참행복과 불행 선언입니다. 루카 복음은 마태오 복음보다 조금 간략하게 이 내용을 소개합니다. 가난한 사람들과 부유한 사람들, 지금 굶주리는 이들과 지금 배부른 사람들, 지금 우는 사람들과 지금 웃는 사람들로 비교되는 행복과 불행 선언은 정확하게 대구를 이룹니다. 루카 복음에서 눈에 띄는 것은 ‘지금’입니다. 지금 굶주리고, 지금 우는 이들에게 주어지는 약속이 머지않아 실현될 것임을 강조하는 표현입니다. 마태오와 루카의 공통점은 박해에 관한 내용으로 행복 선언을 마무리한다는 점입니다. 그만큼 1세기 후반의 그리스도교 공동체에 가장 큰 어려움은 박해였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신앙인들에게 가장 절박했던 것은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시어 이 모든 것들을 끝내실 것이라는 기대였습니다. 신약 성경의 꽤 많은 부분에서 이런 모습을 찾을 수 있습니다. 행복 선언의 시작은 가난한 이들에 대한 언급입니다. 복음서에서 말하는 가난한 이들은 경제적인 차원에서 언급되는 것만은 아닙니다. 이것보다는 더 넓은 의미로 여러 면에서 소외된, 도움이 필요한 이들을 말합니다. 이런 까닭에 마태오 복음은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이라고 표현합니다. 원래 표현은 ‘영으로’, ‘영 안에서’이지만 성경은 이것을 마음으로 옮겼습니다. 이 표현은 물질적인 가난을 제외하는 것이 아니라 더 넓은 의미의 가난을 이야기하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처럼 마태오와 루카 모두 행복 선언의 첫 자리에 가난한 이들을 둡니다. 하늘 나라, 하느님 나라는 우선적으로 이들을 향해 있습니다. 복음서는 행복 선언의 내용을 예수님의 활동을 통해 보여줍니다. 가난한 이들과 함께하고 지치고 슬퍼하는 이들을 위로하며, 자비를 베푸는 예수님의 모습은 이미 행복 선언이 그의 활동 안에서 실현되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가톨릭대 성신교정 성서학 교수> 평화신문2016.08.03
![[생활 속의 복음] 연중 제7주일 (마태 5,38-48)](//cpbc.co.kr/CMS/newspaper/2017/02/rc/671650_1.0_titleImage_1.jpg)
[생활 속의 복음] 연중 제7주일 (마태 5,38-48)정연정 신부
서울대교구 화곡본동본당 주임 오늘은 연중 제7주일입니다. 오늘 전례를 통하여 주님께서는 우리들에게 “하느님 아버지처럼 거룩하고 완전하게 되어, 참된 하느님의 성전인 교회”가 되라고 초대하십니다. 사실 이 초대는 감격스러우면서도 버거운(?) 것입니다. 그러나 절대로 걱정하지 맙시다. 왜냐하면 “우리는 하느님의 것”(1코린 3,23 참조)이기 때문입니다.1. 너희는 거룩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레위 19,17)얼마 전 인터넷 기사에 따르면, 소위 N포세대-모든 것을 포기할 수밖에 없는 세대-의 도서 구입 패턴이 ‘자기계발서’ 쪽에서 ‘내면(內面)을 다스리는 대처법’에 대한 관심으로 변했다고 합니다. 이를 두고 출판평론가들은 “자기계발서가 마약처럼 일시적 마비 효과를 줄 수야 있겠지만, 요즘 같이 취업도 불가능한 상황에서 자신의 내면을 다스리는 쪽에 더 관심을 두기 때문”이라는 참으로 공감할 만한 분석을 내놓았습니다.오늘 제1독서를 통하여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거룩한 사람’이 되라고 말씀하시면서,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레위 19,18)고 덧붙여주십니다. 이처럼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온갖 어려움 속에서 오로지 자신만을 지켜내기 위하여 안간힘을 쓰기보다는 오히려 자기 자신의 모습을 성찰하고, 더 나아가서는 이웃(타인)과 함께할 수 있는 성화(聖化)의 길로 향하라고 깨우쳐주십니다.2. 너희는 하느님의 성전이다(1코린 3,16)최근에 다시 많은 이들의 관심을 끈 ‘걱정 말아요 그대’라는 대중가요의 가사 중 일부입니다. “그대여 아무 걱정하지 말아요 / 지나간 것은 지나간 대로 / 그런 의미가 있죠 / 그대는 너무 힘든 일이 많았죠 / 새로움을 잃어버렸죠 / 그대 슬픈 얘기들 모두 그대여 / 그대 탓으로 훌훌 털어버리고 / 새로운 꿈을 꾸겠다 말해요.”오늘 제2독서에서 사도 바오로께서는 “아무도 인간을 두고 자랑해서는 안 됩니다”(1코린 3,21)라고 권고하시면서, 아울러 자기 나름대로의 이해방식으로 하느님의 뜻을 헤아리려는 잘못에 빠지지 말라고 새겨주십니다. 그래야만 우리는 세상의 허황된 어리석음에 휩쓸리지 않고, 하느님의 영(靈) 안에서 날로 새롭게 되는 그분의 성전(聖殿)이 될 수 있습니다.3. 너희는 완전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마태 5,48)독일의 수사신부였던 토마스 아 켐피스는 「준주성범(遵主聖範)」에서 “사랑은 위대한 것이며 가장 값진 보배다. 사랑만 있으면 모든 짐이 가벼워진다. 사랑은 위로 오르려 하기 때문에 세상 그 무엇에도 사로잡히지 않는다. 이는 사랑이 하느님께로부터 온 것이며, 모든 피조물 위에 계시는 하느님 외에는 사랑이 머물 곳이 없기 때문”이라고 가르쳐줍니다.오늘 복음에서 주님께서는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여라. 그래야만 하느님 아버지처럼 완전한 사람이 된다”(마태 5,44-48 참조)고 강조하셨습니다. 저는 이 말씀을 들으면서 제 마음이 뜨거워짐을 느낍니다. 그 이유는 저도 역시 원수를 사랑하는 것이 결코 쉽진 않지만, 아직은 하느님 아버지처럼 완전하게 되고 싶은 열망을 지니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의 사랑이 우리의 힘입니다.4. 너희 하느님의 말씀을 잘 들어라(신명 28,2 참조)구약성경의 「시편」 저자는 “그분의 거룩하신 이름을 자랑하여라. 주님을 찾는 이들의 마음을 기뻐하여라. 주님과 그 권능을 구하여라. 언제나 그 얼굴을 찾아라”(시편 105,3-4)고 깨우쳐줍니다.교형자매 여러분, 주님께서 우리를 초대하시는 길이 그다지 쉽지 않습니다. 하지만 베네딕토 16세 교황님의 말씀처럼 “하느님의 의지가 더 이상 낯설지 않은 내 자신의 의지가 되도록”(「하느님은 사랑이십니다」 17항 참조) 우리의 마음을 연다면, 아무런 걱정할 필요가 없습니다. 분명 우리의 모든 것이 다 잘 될 것입니다. 아멘. 평화신문2017.02.15
[위대한 신앙의 신비, 기도] (14) 교회 시대의 기도(「가톨릭 교회 교리서」 2623~2649항)다섯 가지 기도 중 찬미와 흠숭 개관(2623~2625항)우리가 잘 알고 있듯이, 오순절에 제자들이 모여 기도하고 있을 때 예수님께서 보내 주시겠다고 약속한 성령께서 제자들 위에 내려오십니다. 성령께서는 교회를 가르치시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모든 것을 되새기게 하십니다. 성령께서는 또한 교회가 기도 생활로 성장하게 하십니다. 이는 예루살렘의 첫 그리스도교 공동체의 모습에서 볼 수 있습니다. 사도행전은 이렇게 전합니다. “그들은 사도들의 가르침을 받고 친교를 이루며 빵을 떼어 나누고 기도하는 일에 전념하였다”(사도 2,42). 교리서는 이것이 “교회가 드리는 기도의 전형적인 모습”(2624항)이라고 설명합니다. 곧 교회의 기도는 △사도들의 신앙에 근거를 두고(사도들의 가르침을 받고) △사랑으로써 그 진실성이 입증되고(친교를 이루며) △성체성사로써(빵을 떼어 나눔으로써) 양육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신자들은 이와 함께 성경에 나오는 기도들, 특별히 시편의 기도들이 그리스도 안에서 실현된 것을 근거로 해, 이 시편들을 현재 상황에 따라 새롭게 이해하고 자기 것으로 삼아 바칩니다. 구약의 시편 기도에서 살펴봤듯이, 시편은 “신분이나 시대를 초월하여 누구든지 바칠 수 있는 진실한 기도”(2588항)이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교회를 온전한 진리로 인도하시는 성령께서는 또 “교회 생활과 성사와 교회의 사명에 적용하는 그리스도의 헤아릴 수 없는 신비를 표현하게 될 새로운 기도문들이 생겨나게 하십니다”(2625항). 기도문들은 전례의 영적 전통 안에서 발전해 나가는데 신약성경을 포함해 정경(正經)에 들어 있는 기도문들은 그리스도 기도의 규범이 됩니다. 교리서는 이 기도들을 크게 다섯 가지로 구분해 설명합니다. 찬미와 흠숭, 청원, 전구, 감사, 찬양 기도가 그것입니다. 차례로 살펴봅니다. Ⅰ. 찬미와 흠숭(2626~2628항)찬미는 사랑으로 인간을 창조하신 하느님과 사랑이신 하느님을 향하는 인간의 만남입니다. 이 찬미 기도는 “그리스도인 기도의 기본 움직임을 드러낸다”(2626항)고 교리서는 설명합니다. “찬미 안에서 선물을 주시는 하느님과 이 선물을 받아들이는 인간이 서로 대화하며 결합하기”(2626항) 때문입니다. 그래서 찬미 기도는 “하느님의 선물에 대한 인간의 응답”입니다. “하느님께서 강복해 주시기 때문에, 인간의 마음은 그에 대한 보답으로 모든 축복의 근원이신 하느님께 찬미를 드릴 수 있는 것”입니다(2626항). 찬미 기도가 기도의 기본 움직임을 드러낸다고 했는데, 이 움직임은 두 가지 형태로 나타납니다. 하나는 “성령 안에서 그리스도를 통해 성부께 올라가는 움직임”입니다. 이것이 찬미입니다. 다른 하나는 그리스도를 통하여 성부에게서 내려오시는 성령의 은혜”입니다(2627항). 이는 강복입니다. 말하자면 성부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강복하셨기에 우리는 성부를 찬미하는 것입니다. 흠숭은 “창조주 앞에서 피조물임을 깨달은 인간이 취하는 기본 자세”로 “우리를 지어내신 주님의 위대함”과 “우리를 악에서 구해 내시는 구세주의 전능”을 드높이는 것입니다(2628항). 흠숭은 하느님 앞에서 인간이 마음을 쏟아 꿇어 엎드리는 것이며, 존경 어린 침묵을 지키는 것입니다. 교리서는 이렇게 설명합니다. “지극히 거룩하시며 최고의 사랑을 받으셔야 할 하느님께 대한 흠숭은 우리를 겸손하게 하고 우리의 간청에 대한 확신을 심어 준다”(2628항). 이창훈 기자 changhl@pbc.co.kr 평화신문2016.08.31